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신채호
    2026-08-16
    검색기록 지우기
  • 9000억원
    2026-08-16
    검색기록 지우기
  • 김혁
    2026-08-16
    검색기록 지우기
  • 오페라
    2026-08-16
    검색기록 지우기
  • 청년 출산
    2026-08-16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447
  • 中의 속살 ‘후통’서 건져 올린 망각의 역사

    中의 속살 ‘후통’서 건져 올린 망각의 역사

    자금성을 중심으로 3000여개가 실핏줄처럼 뻗어 있는 중국 베이징의 전통 뒷골목 후통(胡同). 1980년대부터 추진된 개혁개방 정책으로 재개발되면서 옛 모습을 대부분 잃었지만 원(元)대 이후 800년간 이어져 온 중국 역사의 수장고이자 삶의 터전이다. 자금성이며 만리장성, 천안문 같은 걸출한 명소에 가려져 건성건성 보고 지나치는 관광지쯤으로 여겨지는 곳. ‘베이징 후통의 중국사’는 그 먼지에 뒤덮인 수장고를 열어젖혀 역사 속에 숨었던 공간과 인물들을 생생하게 복원해 놓은 노작(勞作)이다. 저자는 2015년부터 3년 6개월간 베이징 특파원을 지냈던 현 서울신문 사회부장 이창구씨. ‘유서 깊은 후통에서 중국의 다른 면을 보게 될 것’이라는 지인의 권유로 매주 토요일 자전거를 타고 후통 곳곳을 누볐다. 그 발굴 작업(?)을 통해 건져 올린 망각과 방치의 역사며 인물들의 면면이 방대하고 흥미롭다. 맨 앞에 배치한 ‘독립운동가의 거리’에선 우리 독립운동사의 숨은 명장면이 숱하다. 이육사 선생이 순국한 둥창 후통 28호, 김원봉의 의열단이 암약했던 와이자오부제 후통, 신채호 선생의 활동상이 혁혁한 난뤄구샹과 진스팡제…. 특히 허우구러우위안 후통의 이회영 선생 집이 독립투사의 아지트였음이 밝혀져 놀랍다. 매일 적게는 10명, 많게는 40명이 찾아왔다는 증언을 보면 이회영의 집은 독립운동가들의 집합처이자 망명객들의 사랑방, 독립운동 본부였음에 틀림없다. 발굴 작업은 다양한 문화와 종교가 깃든 이색적인 거리로 이어진다. 전통 담뱃대 가게며 골동품 가게, 고서점, 표구방이 즐비한 옌다이셰제, 공묘와 국자감이 있는 궈쯔젠제…. 역시 가장 눈길을 끄는 후통은 중국 근현대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들의 공간이다. 타 후통에선 늘 근엄하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는 루쉰의 연민과 동심 가득한 얼굴을 찾아내고, 화 후통에서는 청을 멸망시킨 장군 차이어가 위안스카이에 의해 가택 연금당했던 고통을 읽는다. 신문기자답게 순례의 자전거 페달은 베이징의 진보 신문 징바오를 창간해 ‘중국 기자정신의 상징’으로 추앙받는 사오피아오핑(邵萍)의 혼이 깃든 웨이란 후통 30호에서 멈춘다. 5·4운동의 발기인이었던 사오피아오핑은 결국 총살당했다고 한다. 흉물스럽게 방치된 징바오의 옛 건물 앞에서 저자는 이런 말을 남겼다. “언론의 감시를 받지 않는 권력은 내부 모순과 부패에 스스로 쓰러질 가능성이 크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단재의 희생 정신 깃든 모과나무, 영등포에 뿌리내린다

    단재의 희생 정신 깃든 모과나무, 영등포에 뿌리내린다

    서울 영등포구가 의열단 창립 100주년을 맞아 광복회로부터 단재 신채호 선생의 모과나무 묘목을 최초로 기증받고 지난 11일 당산공원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 모과나무 식수 행사’를 개최했다고 14일 밝혔다. 이날 심은 모과나무 묘목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9살 때 중국의 역사서인 자치통감을 해독해 선생의 할아버지가 책거리 기념으로 1888년에 심은 나무의 씨앗을 싹 틔워 키운 묘목이다. 행사에는 채현일 영등포구청장을 비롯해 김원웅 광복회장, 정동웅 광복회 영등포구지회장과 독립유공자 유족 등 20여명이 참석해 의미를 더했다. 참석자들은 모과나무의 의미를 담은 표지석을 낭독하고 함께 묘목을 심으며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선조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는 시간을 가졌다.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이자, 일제에 항거해 독립투쟁을 펼친 의열단 창단 100주년이 되는 해다. 광복회는 올해 초부터 이런 뜻깊은 해를 기리기 위해 의열단의 선언문을 작성한 신채호 선생의 모과나무 씨앗을 받아 묘목으로 키우고 기증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이번 행사로 영등포구가 첫 기증의 영광을 안게 됐다. 채 구청장은 “역사를 되돌아보고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면서 “단재 선생의 큰 뜻과 정신이 오늘 심은 모과처럼 구민 마음에도 깊이 뿌리내리길 바란다”고 말했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LG하우시스, 단재신채호기념관 새단장 마쳐

    LG하우시스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개보수한 ‘단재신채호기념관’이 1일 재개관했다. 이날 충북 청주의 기념관에서 열린 재개관식에는 유인태 단재신채호기념사업회 상임대표, 이남일 대전지방 보훈청장, 김항섭 청주 부시장, 민경집 LG하우시스 대표이사 등이 참석했다. 이 기념관은 신채호 선생의 생애 기록과 사진, 저서,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는 곳으로 지난 2003년 개관했다. LG하우시스는 출입구, 전시실 등에 LG하우시스의 시스템창호, 바닥재, 인테리어필름 등을 적용해 개보수 공사를 진행하고, 전시내용 보완 및 시설물 개선 공사를 진행했다. 민 대표이사는 “민족의식 고취에 힘쓰셨던 신채호 선생의 숭고한 정신이 깃들어있는 기념관 개보수에 기여하게 돼 영광”이라면서 “앞으로도 애국 사회공헌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강신 기자 xin@seoul.co.kr
  • 정의가 넘쳐나는 시대… 조선의 풍문정치 ‘기축옥사’ 닮았다

    정의가 넘쳐나는 시대… 조선의 풍문정치 ‘기축옥사’ 닮았다

    거리에 정의가 넘쳐난다. ‘사회정의’를 앞세운 정치인, 대학교수, 대학생, 족벌언론, 법조인들이 거리마다 물결친다. 정의와는 담쌓은 자들이 그러하니 이 나라에 정의가 실현되는 걸까? 하지만 먼저 떠오르는 건 전두환이 방방곡곡 경로당에까지 걸었던 ‘정의사회구현’ 구호다. 각종 ‘사회정의를 바라는…’ 집단이나 모임은 ‘초록이 동색’ 같다. 조선 중기 사림은 3사(홍문관, 사헌부, 사간원)를 장악하고 지금의 국회의원, 교수, 대학생, 법조인 따위의 역할을 했다. 네 차례 사화로 철퇴를 맞기도 했지만, 중기에 이르러 정치와 사회를 주도했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하자 사림은 오로지 고담준론으로 혹세무민했다. 연암 박지원이 ‘양반전’과 ‘호질’에서 비판했던 바로 그 위선 덩어리였다. 선조 즉위년(1567년) 민생은 파탄 나고 국고는 거덜 났다. 중종 대만 해도 삼창(사창·의창·상평창)의 200만 석이 넘던 비축미는 전임 명종을 거치면서 바닥이 났다. 군자곡(군량미)은 연산군 초기만 해도 100만 섬에 이르렀지만, 중종 25년 50만 섬, 명종 6년엔 10만 섬으로 줄었다. 사섬시의 면포는 연산군 초기 20만여 동이었지만, 명종 6년엔 6만 동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세원이 줄고 세수가 줄었기 때문이었다. 세원 감소는 납세자인 양민이 공납 등을 이기지 못해 자경을 포기하고 제 발로 권세가의 머슴이 되었기(투탁) 때문이었다. 세금 내지 않은 권세가의 토지는 크게 늘었고 양민의 경작지는 급감했다. 양민이 권세가에게 투탁하거나 향리에서 도망가면 그 부담은 이웃에게 전가됐으니, 자경 포기자와 함께 세원과 세수는 기하급수로 줄었다. 영의정 이준경은 선조 2년 1월 구폐책을 제안했다. 세원인 공전을 확대하고 납세자인 양민을 늘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구폐책은 사장됐다. 이른바 ‘개혁’을 입에 달고 다니던 ‘신진 사림’의 반대가 주효했다. 당시 신진 사림을 이끌던 기대승은 선조에게 이렇게 말했다. “변혁하는 것 역시 아름다운 일이나 상의 학문이 높아지고 경력이 오래 쌓인 연후 해야 하는 일들이 견고해질 것”이며 “누적된 폐단이 너무나 많아 지금은 인심을 복종시킬 수 없는데 갑자기 그 폐단을 구제하려고 한다면 다른 병통이 발생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준경은 선조 3년 공납의 폐단이라도 줄이려 했다. 조선은 양민들에게 경지 면적에 따라 지방의 토산물과 특산물을 현물로 경지 면적에 따라 내도록 했다. 공납의 수량은 갈수록 늘었다. 게다가 심사관들은 농민들의 공물에 일쑤 퇴짜를 놓았다(방납). 퇴짜 맞은 농민들은 업자들에게 고가로 사서 바쳐야 했고, 이를 위해 양반 대지주들의 고리채를 써야 했다. 철면피라도 방납 혁파의 명분마저 거부할 수는 없었다. 이준경의 제안대로 정공도감을 설치했다. 그러나 문서로만 존재하는 기구로 만들어버렸다. “임금은 전례를 따르기만 하도록 하고, 대신들은 혁신을 싫어해 단지 문서로만 감정하고 늘리고 줄여, 결국 아무 이익도 없었다”(선조수정실록 3년 11월 1일치). 좌의정 권철은 이렇게 딴지를 걸었다. “그와 같은 큰 정책은 명세지재(命世之才)가 아니고는 해낼 수가 없다.”당시 신진 사림은 기대승과 이이가 이끌고 정철, 윤두수 등이 그 뒤를 따랐다. 모두 향촌 출신이었다. 이들은 사화로 철퇴를 맞기도 했지만, 훈신과 척신에 대한 견제의 필요성 때문에 왕실은 이들의 성장을 꾸준히 후원했다. 조광조의 개혁으로 훈척의 향촌에 대한 침탈이 억제되고, 향약의 보급과 사마소의 확대로 지방의 자율성이 높아지면서 이들은 향촌의 기득권세력이 되었다. 이준경의 개혁은 이들의 이해와 충돌했다. 말로는 조광조의 도학과 대의를 내세우며, 뒤로는 잇속만 차리는 이들에 대해 일찍이 남명 조식은 이렇게 비판했다. “당나귀 가죽에 기린 형상을 뒤집어쓴 것 같은 고질이 있다.” 선조에게 이런 상소도 올렸다. “나라의 폐단이 극에 달해 불에 타고 물에 빠진 것 같지만 조정에선 한갓 허명만 일삼고 논란만 하고 있다.” 이준경은 명종 말까지 사림 정치의 기틀을 놓았다. 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영의정에 올라, 백성의 등골을 파먹던 왕실 재산 관리기구 내수사를 개혁하고,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던 외척 윤원형을 숙청했으며, 선조 즉위년엔 인순왕후의 외척 심통원을 2선으로 물러나게 했다. 공신 책봉을 저지했으며, 소격서를 혁파하고 궁내 불당을 없애는 등 사림의 주도권을 확고히 했다. 그러나 주도권을 잡은 기대승·이이·정철 등 신진 사림은 이준경·노수신·백인걸·김난상·유희춘·김개 등 원로들을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윤원형 시절 고위직에 있던 자들은 모두 윤원형의 앞잡이’라고도 매도했다. 이들은 인순왕후의 외척 청송 심문과도 손을 잡았다. 외척 심의겸은 신진 사림을 적극 후원했고, 아예 사림으로 신분을 세탁했다. 정철은 선조 2년 이이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먼저 (원로 대신들을) 쳐버리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이이의 ‘석담일기’) 다음은 선조수정실록 선조 2년 6월 1일치 기사. “신진 선비들이 떼 지어 서로 교유하며, 학문을 강론하면서 그들 스스로 한 무리가 되었고,… 이때부터 당파의 경색이 뚜렷이 갈라졌으므로 여염에서는 노(老)당, 소(少)당으로 지목하여 부르게 되었다.” 결국 청백리로 존경을 받던 김개가 쫓겨나고, 을사사화로 20여 년간 유배를 당했던 대사헌 백인걸, 대사간 김난상도 물러났다. 김난상은 심의겸이 사간원 정원에 앉히려던 박점에 대해 비리를 문제 삼아 거부했다가 오히려 탄핵을 당했다. 조정은 신진 사림의 천하가 되었다. 선조 5년 이준경은 마지막 상소를 올렸다. 네 가지 당부 가운데 마지막이 ‘붕당의 사론을 없애라’는 것이었다. “지금 사람들은 잘못한 바가 없고 법에 어긋난 일이 없더라도 자기와 한마디만 맞지 않으면 서로 배척하여 용납하지 않고,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거나 힘써 공부하지도 않으면서 고담대언으로 당파를 짓는 자를 훌륭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런 폐단을 제거하지 못하면 나라의 근심이 될 것입니다.” 신진 사림의 영수 이이가 발끈했다. “사림의 분열을 언급하여 훈구의 공격에 빌미를 줬다.” “원래 사람은 죽음에 이르면 그 말이 선해지는 법인데 이준경은 그 말이 악하다.” 그를 이렇게 평가하기도 했다. “거만하여 혼자 똑똑하다 하고, 선비들에게 굽히지 않으니, 끝내는 나라를 그르칠 말로 임금을 망쳐놓아 명예를 잃었다.” 서애 유성룡은 ‘운암잡록’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선조 초에 등용된 사람들은 대개 말과 행동이 서로 맞지 않은 이가 많으며, 공도를 버리고 당파를 위해서 죽는 폐습이 이루어졌다. 상공 이준경이 고치고자 하였는데, 사류라고 이름하는 자들이 떼를 지어 일어나 공격했다. 이때부터 조정은 둘로 나뉘어 당의 화가 비로소 일어나더니 이이, 정철 등이 일어남에 이르러 더욱 분열하게 되었다,” 말년의 이이는 후회했다. “동고(이준경의 호)가 옳았다.” 이렇게 한탄하기도 했다. “들뜬 논의의 위력은 태산보다 무겁고 칼날보다 예리해 그 칼날에 저촉되면 공명도 잃게 되고, 뛰어난 인재들도 그 명성을 잃게 된다. 그런데도 끝내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이상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이는 이준경의 뒤를 따라 공납의 폐단 등을 없애기 위해 대공수미법 실시를 주장했다. 그의 개혁안은 후배 사림에 의해 좌절됐다. 이런 일도 있었다. 사간원 관리들의 탄핵으로 용궁 현감이 처벌당했다. 따져보니 의혹은 거짓이었다. 선조는 무고한 자를 처벌하라고 했다. 좌승지 기대승이 막았다. “풍문을 포악한 방법으로 쓰면 허위가 되고 공정하게 쓰면 정당한 것이 됩니다. … 만약 부실했다 하여 말한 자를 죄 주면 누가 감히 탄핵하겠습니까. 들은 것이 있으면 다 말을 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후 툭하면 온갖 풍문, 억측을 동원해 무고하고 모함하고, 숙청하는 일이 벌어졌다. 신채호가 ‘조선 5백년 제1사건’이라고 개탄했던 기축옥사(1589년)는 그 절정이었다. 정철 등이 기획하고 조작한 이 옥사는 임진왜란 전야 조선 조정과 지식인 사회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요즘 위선자들의 ‘풍문 정치’가 그와 다르지 않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논설고문 kbc@seoul.co.kr
  • ‘남편을 스승처럼’… 빈곤과 싸우며 독립운동 헌신한 사대부 집 여인

    ‘남편을 스승처럼’… 빈곤과 싸우며 독립운동 헌신한 사대부 집 여인

    1920년대 초 심산(心山) 김창숙이 중국 베이징 우당(友堂) 이회영 집에 찾아갔더니 그의 얼굴이 매우 초췌해 보였다. 심산이 “공원에 나가서 바람이나 쐬자”고 했더니 우당은 거절했다. 우당의 아들 규학이 말했다. “이틀 동안 밥을 짓지 못하였고 의복도 모두 전당포에 잡혔습니다. 아버지께서 문밖에 나서지 않으려는 것은 입고 나갈 옷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 가치로 600억원대의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우당은 죽는 날까지 빈곤과 싸우며 고통 속에 살았다. 그런 우당을 평생 뒷바라지한 사람이 부인 이은숙 여사다.이은숙은 1889년 8월 8일 충남 공주에서 고려 말 충신 이색의 후손인 한산 이씨 진규공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달성 서씨와 사별한 우당과 1908년 10월 상동예배당에서 혼례를 치렀다. 백사(白沙) 이항복의 10대손인 우당은 노비를 풀어주고 과부가 된 여동생들을 개가시키며 마흔 넘은 나이의 결혼식도 신식으로 치를 만큼 열린 사고의 소유자였다. “우리 형제가 당당한 호족의 명문으로서 차라리 대의가 있는 곳에 죽을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차하게 도모한다면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이관직, ‘우당 이회영 실기’)우당 6형제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그해 1910년 12월 30일 모든 재산을 처분해 압록강을 건넜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선택한 고행의 시작이었다. 이은숙과 출가한 딸까지 일족이 마차 10여 대를 타고 만주 벌판을 달려 도착한 곳은 유하현 추지가였다. 우당 형제들은 먼저 동포들의 정착과 농업을 지도하기 위한 경학사를 조직했다. 1911년 5월에는 광복군 양성의 본산인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몇 해 만에 그 많은 재산도 바닥이 드러났고 곤궁한 생활이 시작됐다. “농사는 강냉이와 좁쌀, 두태(콩팥)고 쌀은 2,3백 리나 나가 사오는데 제사에나 진미를 짓는다. 어찌 쌀이 귀한지 아이들이 이름 짓기를 ‘좋다밥’이라고 하더라.”(이은숙, ‘서간도 시종기’)독립운동의 터전을 다져 놓은 다음 우당은 1913년 조선으로 잠입했다. 자금 마련 말고도 우당은 고종 망명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만주에 남은 식구는 열셋이나 되었는데 양식은 강냉이밖에 없었다. “강냉이를 따서 3주가 되면 그걸 연자에 갈면 겨 나가고 쌀이 두 말도 못 되니 며칠이나 먹으리오.” 설상가상 마적 떼의 습격을 받았다. 이은숙도 왼쪽 어깨에 총탄을 맞았지만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겨우 살아남았다. 우당이 조선에서 체포된 소식이 전해졌다. 이은숙은 전전긍긍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면서 혼자 몸으로 대식구의 생계를 보살피는 고난의 세월을 이어갔다. 와중에 홍역으로 우당의 형 이석영의 큰아들이 사망하고 이은숙까지 같은 병으로 죽을 고생을 하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지는 이중고, 삼중고를 당했다. 우당이 돌아오지 않자 1917년 이은숙은 아들, 딸을 데리고 국내로 들어왔다. 그것도 잠시, 고종이 승하하자 우당은 중국 베이징으로 두 번째 망명길에 올랐다. 이은숙도 곧이어 아이들을 데리고 따라갔다. 고난의 베이징 생활이 시작됐다. 우당의 집은 독립운동 본부이자 사랑방이었다. 우국 지사들이 수시로 드나들고 좁은 집에 함께 지냈다. 어려운 살림의 책임은 이은숙에게 있었다. 적게는 10명 많게는 40여 명이 우당 집에서 먹고 자고 했으니 감당하기 어려웠다. 집세가 싼 집을 찾아 이사한 것도 1년에 수십 번이었다. 그러면서도 독립운동가 남편을 스승처럼 극진히 섬겼다. 1~2년은 동지들이 보내주는 돈으로 그럭저럭 견뎠지만, 그 후 지원이 끊겨 먹을 양식이 없었다. 신분을 숨기고 지내야 하는 처지였기에 돈을 벌 수도 없었다. “하루 잘해야 일중식(日中食)이나 하고 그렇지 않으면 절화(絶火·밥을 짓지 못함)하기를 한 달이면 반이 넘으니 생불여사로다.” 만석꾼이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기아를 겪게 된 것이다. 이은숙은 굶주리는 남편을 보고는 창자가 끊어지는 듯 마음이 아팠다.우당은 그즈음 아나키즘(무정부주의)에 심취해 이을규 형제, 백정기, 정화암 등과 먹으며 굶으며 함께 생활했다. 단재 신채호 등 독립운동가들도 여전히 드나들었다. “짜도미라는 쌀은 사람이 먹는 곡식을 모두 한데 섞어 파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가장 하층민이나 사다 먹는 것으로…그도 없으면 강냉이를 사다가 죽을 멀겋게 쑤어 그것으로 연명하니…” 사정을 잘 아는 정화암 등은 약간의 돈을 주면서 “선생님 진지는 쌀을 사다 해 드리고 우리는 짜도미 밥도 좋으니 그것을 먹겠소”라고 말했다. 그러던 중에 김달하 사건이 터졌다. 김달하는 겉으로는 애국지사인 양 행동했지만, 사실은 밀정이었다. 그런데 김창숙이 우당을 김달하와 한패인 것으로 잘못 알고 절교 편지를 보냈다. 이은숙은 칼을 품고 찾아가 사실이 아니라고 항의했다. 남편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버리겠다는 결기였다. 오해는 풀렸고 김달하는 항일 테러단체 다물단이 처단했다. 우당의 딸 규숙도 처단에 연루돼 근 1년 동안 중국 공안국에 구금당했다. 와중에 아들 규학의 딸 둘과 우당의 아들이 성홍열로 사망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언제나 굶는 극한의 빈곤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우당과 아들, 딸을 베이징에 남겨두고 이은숙은 궁여지책으로 돈을 마련하고자 귀국했다. 1925년 여름이었고 임신한 몸이었다. 그 길이 우당과 영영 이별하는 길이 될 줄은 몰랐다. 이은숙은 귀국하자마자 다소간의 돈을 변통해 우당에게 보내주었다. 출산한 작은아들 규동을 품에 안고 친척집을 떠돌며 베이징 가족의 생계부터 먼저 생각했다.우당은 만주에 재만조선민주주의자연맹을 결성했다. 또 톈진으로 가 아나키스트들과 파괴공작을 도모했다. 1926년 나석주 의사의 폭탄 투척 사건으로 일제의 추적이 심해지자 우당은 돈 한 푼 없이 걸어서 상하이로 갔다. 환갑이 지난 나이였다. 두 딸은 빈민구제원으로 보냈다. 그러나 도적을 만나 행장을 다 잃는 변을 당해 다시 톈진으로 돌아왔다. 우당은 딸 규숙의 옷까지 팔아 연명했지만, 끼니를 거르기는 다반사였다. 국내에 있던 이은숙도 사정을 모를 리 없었다. 고무공장에 취직해 다니고 삯바느질과, 심지어 사대부 집안 딸의 몸으로 유곽집 삯 빨래를 하며 자기 입에도 풀칠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돈을 버는 대로 우당에게 보냈다. 굶으면서도 우당은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상하이로 가 남화한인연맹을 결성하고 남화통신을 발행하는 한편, 흑색공포단을 조직했다. 이어서 만주로 다시 가서 지하공작망을 조직하고자 했다. 여러 사람이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다롄에서 배를 타고 가려다 해상에서 일경에게 붙잡혔다.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우당은 심한 고문을 받은 끝에 사망했다. 65세 노인의 몸이었다. 일제는 자살이라고 했지만 12일간의 혹독한 심문을 받은 끝의 명백한 고문사였다. 딸 규숙이 우당의 신체를 봤는데 눈을 뜨고 있었고 안면에 선혈이 낭자했으며 중국식 의복에도 피가 많이 묻어 있었다고 한다. “일생의 몸을 광복운동에 바치시고 사람이 닿지 못하는 만고풍상을 무릅쓰고 다만 일편단심으로 ‘우리 조국, 우리 민족’ 하시고 지내시다가 반도 강산의 무궁화꽃 속에서 새 나라를 건설치 못하시고 중도에서 원통 억색히 운명이 되시니 슬프도다.” 비통한 심정을 이은숙은 축문에서 이렇게 썼다. 이은숙은 남편이 그토록 바라던 광복을 보고 1979년 12월 11일 90세에 서울에서 작고했다. 정부는 우당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이은숙에게 지난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김혜련 서울시의회 보건복지위원장, ‘독립유공자 정부포상 전수식’ 참석

    김혜련 서울시의회 보건복지위원장, ‘독립유공자 정부포상 전수식’ 참석

    서울시의회 보건복지위원장 김혜련(더불어민주당·서초1)은 지난 28일에 열렸던 ‘독립유공자 정부포상 전수식 ’에 참석했다. 전수식 축사에서 김혜련 위원장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단채 신채호 선생님의 말씀으로 시작하며, “올해는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자, 광복 74주년 되는 해로서 100년 전 선열들께서는 한마음으로 맨손에 태극기를 흔들며 일제의 총칼 앞에 맞서 독립을 이루어 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 발전이 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의 헌신과 희생을 기리며 독립유공자들의 정신을 후대에 전수하기 위해 서울시와 함께 독립유공자의 공헌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매년 보훈관련 예산을 지속적으로 확대 편성하고 있으며, 부족하나마 독립유공자 및 후손에 대한 생계지원 및 예우 강화를 위하여 예산지원을 지속적 확대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김혜련 위원장이 개정한 「서울특별시 독립유공자 예우 및 지원에 관한 조례」는 지난 3월 본회의를 통과해 금년부터 생존애국지사의 보훈명예수당을 월 20만원으로 인상돼 지급되고 있으며, 그동안 독립유공자 및 직계후손 중 선순위자 1명에 지급하던 위문금의 지급 대상이 직계후손이 선순위자가 된 경우 그 사촌의 형제·자매까지 확대해 지원되고 있다. 금번 제289회 임시회에 김 위원장은 「서울특별시 수도 조례 일부개정안」및 「서울특별시 하수도 사용조례 일부개정안」을 발의했다. 김혜련 위원장이 발의한 「서울특별시 수도 조례 일부개정조례안」과 「서울특별시 하수도 사용조례」이 통과되면 그동안 독립유공자와 유족에 대한 감면규정이 없어 지원되지 못했던 독립유공자와 유족에 대하여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른 독립유공자 또는 그 유족 중 선순위자 1명에 대해 수도 및 하수도사용 요금 감면 지원 근거를 마련하게 되어 감면대상이 확대 되어 지원될 예정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충북 女독립운동가 11명 흉상 11월부터 전시

    충북도가 지역 출신 등 충북과 인연이 있는 여성독립운동가 11명의 흉상을 만들어 전시한다.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여성들의 가치와 정신을 알리기 위해서다. 도는 이 흉상들을 순국선열의날인 오는 11월 17일부터 청주시 상당구 목련로 미래여성플라자 1층에 상시 전시한다고 22일 밝혔다. 흉상으로 제작되는 신순호·오건해·이국영(청주)·윤희순·어윤희(충주)·박재복(영동)·임수명(진천)·연미당(증평) 선생은 충북 출신으로 중국과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하거나 광복군으로 활동한 독립투사들이다. 박자혜·신정숙·이화숙 선생은 충북 출신 독립운동가인 신채호·장현근·정양필 선생의 부인들로 직접 항일운동에 참여하거나 남편의 광복운동을 적극 지원한 인물이다. 총사업비는 3억원이다. 도는 정부의 3·1절 100주년 기념사업에 이 사업을 신청해 국비 1억 5000만원을 지원받았다. 흉상은 작가 7명이 만들고 있다. 김은영 여성정책팀장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이 그동안 주목받지 못해 사업을 추진하게 됐다”며 “건국훈장 애족장 이상 받은 분들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현재 보훈처에 등록된 독립유공자 1만 5689명 가운데 2.8%인 444명이 여성이다. 청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태극기 휘날리는 당산로에서 애국지사들을 만나볼까

    태극기 휘날리는 당산로에서 애국지사들을 만나볼까

    서울 영등포구가 제74주년 광복절을 맞아 다양한 행사와 볼거리를 마련했다고 13일 밝혔다.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의 뜻을 기리고 애국정신을 계승 및 발전시키기 위해서다. 우선 구는 오는 16일까지 당산로 가로변 92곳에 태극기와 독립지사 배너를 게양한다. 거리에 놓인 김구, 윤봉길, 안창호 등 독립지사의 사진을 통해 주민들이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15일 광복절 당일 오후 2시에는 태극기가 일렁이는 역사적 장면을 재현한다. 주민 126명이 CGV 영등포점에서 영화 ‘봉오동전투’를 함께 관람하며 독립군의 희생과 존경을 되새긴다. 영화 상영 전에는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퍼포먼스를 펼친다. 구는 16일까지 구청사 본관과 별관 입구에 단재 신채호 선생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을 게시한다. 구청·동주민센터에 대형 태극기도 설치한다. 각 동에 ‘1동 1곳 중점 게양 시범지역’을 정해 가구수가 많은 공동주택이나 유동인구가 많은 장소 등에도 태극기를 설치한다. 14일에는 광복절 기념 ‘젊음의 거리 음악회’가 영등포 타임스퀘어에서 열린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 폐막을 장식한 비보이 그룹 ‘엠비크루’,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주최 ‘스포츠 앤 싱잉 콘테스트’에서 세계 1위를 수상한 아카펠라 그룹 ‘보이쳐’가 공연한다. 같은 날 채현일 영등포구청장은 여의도 광복회관을 방문해 광복회장과 함께 역사를 되새기는 자리를 가진다. 채 구청장은 “이번 광복절 행사가 순국선열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독립운동가 33인’ 이야기 다룬 웹툰 8일부터 연재

    제72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경기도 성남시는 오는 8일부터 웹툰 플랫폼인 다음웹툰에 독립운동가 33인의 이야기를 다룬 웹툰을 연재한다고 4일 밝혔다. 재단은 지난해 12월부터 ‘3.1운동·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독립운동가 웹툰 프로젝트’를 진행, 역사학자 자문을 거쳐 김구·신채호·김원봉 등 33명의 독립운동가를 선정했다. 웹툰은 성남 출신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인 남상목·이명하·한백봉 등을 포함했다. 역사 고증과 콘텐츠·스토리 자문을 거쳐 만화가와 스토리작가 40여명을 확정했다. ‘타짜’· ‘식객’의 허영만, ‘바람의 나라’ 김진, 위안부 피해자를 소재로 한 ‘풀’의 김금숙, 용산 참사 등 사회적 문제를 만화로 그려 온 김성희 등이 작가진으로 참여했다. 재단은 작가진들과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유적지를 방문하는 등 작품 완성도를 높이는 데 애를 썼다고 설명했다. 다음웹툰에는 독립운동가 1인당 모두 24화 분량으로 연재한다. 8일 16인, 다음 달 5일 17인의 이야기를 3화 분량씩 선보이고 이후 매주 1화 분량을 싣는다. 은수미 시장은 ‘100년전 독립운동은 못했지만 독립운동가 33인의 이야기는 반드시 기억하겠다’는 제목의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은 시장은 “겨레의 가슴에 독립 정신을 일깨워준 33인의 애국이야기에 부디 관심을 가지고 봐달라”고 부탁했다. 남상인 기자 sanginn@seoul.co.kr
  • [사설] 서울신문 115주년, 독립언론의 길 꿋꿋이 걷겠다

    언론이 제4부로 불리는 이유는 입법·행정·사법부와 함께 한 사회의 민주주의를 성숙시키며 공익적 가치를 추구하는 공공재이기 때문이다. 특히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은 유권자들이 자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전문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막중한 역할자다. 이는 흔히 정치권력을 감시·견제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최근에는 자본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 또한 중요한 과제가 됐다.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의 저자들이 언론이 충성할 대상은 언론사주나 특정 정치세력 등이 아니라 독자뿐이라고 강조한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 전통 제조업 등이 경기부진을 겪는 중에 건설사업으로 세력을 확장한 자본들이 지역신문이나 방송 등을 인수합병하는 일들이 잦다. 서울신문도 호반건설의 기습적 인수합병 시도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소셜미디어가 정보 유통의 채널로 전환되고 전통적인 언론의 기능이 약화하는 가운데 자본력을 내세운 인수합병은 해당 언론이 공공재로서 저널리즘의 가치를 제대로 구현할지 의문스럽게 한다. 혹여나 개발사업에 뛰어드는 사기업의 이익을 옹호하는 등 방패막이로 악용되는 것이 아닐까 우려한다. 실제로 광역자치단체로부터 인허가권을 따내기 위해 공공재인 지역방송을 통해 단체장을 수십 차례 공격한 사례도 없지 않다. 언론사 사주의 이익을 옹호하려고 기자들을 로비스트로 활용하고, 전파와 지면을 사적으로 유용한 사례는 부지기수다. 어제로 창간 115년을 맞은 서울신문은 일본 침탈기인 1904년 영국인 베델과 양기탁이 함께 창간하고 독립운동가 박은식과 신채호 등이 활동한 대한매일신보의 후신으로서 드높은 자부심을 간직하고 있다. ‘국채보상 운동’을 주도하며 국난을 타개하고 극일로 민족보존의 대명제를 실현했던 대한매일신보의 정신을 살려 21세기 대한민국의 나아갈 길을 밝히는 독립언론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고자 한다. 아울러 서울신문 임직원들은 2001년 우리사주조합을 출범시켜 1대 주주로 새출발함으로써 독립언론의 기틀을 스스로 공고히 다졌다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은 적 없다. 정부 지분이 있는 서울신문, KBS, 연합뉴스 등의 거버넌스 개선은 수년간 언론개혁의 주요 과제였다. 이 언론사의 지배구조 개편은 민주주의 필수 요소인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불가피하다. 그 차원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서울신문의 독립성을 보장할 방안을 마련한다”는 굳은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지만, 이는 건강한 저널리즘의 확대와 강화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 “유관순부터 이한열까지…그 희생은 청년정신이 밑바탕”

    “유관순부터 이한열까지…그 희생은 청년정신이 밑바탕”

    “유관순, 김상옥, 조명하, 이봉창, 윤봉길, 조소앙, 신채호, 장준하, 박종철, 이한열 등 헤아릴 수 없는 보통 사람의 희생은 그 시대의 청년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독립운동가 조소앙 선생의 손자 조인래씨는 지난 14일 중국 항저우에서 외교부가 개최한 ‘한중 우호 카라반’ 역사문화콘서트에서 중국 내 독립운동 유적지를 돌아보는 한국 청년들에게 이같이 말했다. 조씨는 “지난 100년의 역사는 동아시아 전체 민족독립운동 역사이기도 하고 민주화 역사이기도 하다”며 “그 역사의 주역은 청년이었다. 청년 시대의 역사이기도 하다”고 했다. 조씨는 조소앙 선생이 제창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헌장과 건국강령의 기초가 된 ‘삼균주의’를 설명하며 “세계 피식민지 독립운동사에서 우리 임시정부처럼 이념과 정책을 제시하면서 광복 운동을 전개한 사례는 전무하다”고 평가했다. 이어 “독립운동가가 꿈꾼 건 모두가 균등하게 잘사는 나라였다”며 “여러분이 꿈꾸는 것은 주권이 바로 서는 대한민국일 것이다. 그 중심은 여러분 청년들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조씨는 “지난 100년의 역사가 준 교훈을 새기며 그 시대의 청년정신을 또 다른 청년정신으로 만들어 후대에 유산으로 남겨 달라”고 당부했다. 통일이 되기 전에는 진정한 독립이 이뤄진 게 아니라는 조씨는 “얼마 전 김구 선생 70주기였는데 71주기 때는 통일이 와서 기분 좋게 술 한 잔 부어 드리겠다고 다짐했었다”며 “여러분이 그 꿈을 이뤄 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한편 장하성 주중 대사는 지난 16일 상하이에서 ‘한중 우호 카라반’ 만찬 행사에 참석한 독립유공자 후손을 만나 “독립운동을 해 주신 선열의 후손이 너무 오랫동안 국가로부터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쉽고 죄송하다”며 “지금부터라도 정부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장 대사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계시기 때문에 독립운동 유적지를 보존하는 데도 큰 힘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100년 전부터 시작된 독립운동의 정신이 살아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며 감사를 표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외교부 공동취재단
  • ‘서울스럽지 않은’ 경계의 땅에 내려앉은 한옥… 항일 숨결 속으로

    ‘서울스럽지 않은’ 경계의 땅에 내려앉은 한옥… 항일 숨결 속으로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9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2회 불광동과 은평한옥마을’ 편이 지난 13일 은평구 불광동과 진관동 일대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더위를 피해 불광역 구내에 집결한 참가자 40여명은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된 불광대장간과 천주교 불광동성당을 찬찬히 둘러봤다. 참가자들이 독일제 쌍둥이 칼보다 한 수 위라는 ‘불광’ 부엌칼을 사려고 줄을 서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됐다. 김수근이 설계한 붉은 벽돌 성당은 “왜 굳이 유럽까지 성당 순례를 가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마음을 사로잡았다. 일행은 701번 시내버스를 잡아타고 진관사와 은평한옥마을까지 한걸음에 내달렸다. 답사 축지법(縮地法)이다.북촌 한옥마을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이층짜리 한옥마을길을 요리조리 걷는 기분이 삼삼했다. 대리석을 깎아 만든 수려한 조선 성종의 후궁 숙용 심씨 묘표는 압권이었다. 대리석 비석의 자태가 눈을 홀렸다. 걸레스님이자 화가 중광과 ‘소풍’의 시인 천상병, 소설가 이외수 등 ‘도적놈 셋이서’라는 제목의 시집을 낸 3명의 기인이사(奇人異士)를 모은 ‘셋이서 문학관’이 흥미진진했다. 백초월 스님의 얼을 느끼게 하는 진관사 태극기 비석을 거쳐 은평역사한옥박물관 옥상 전망대 정자에서 일정을 마무리했다. 초복 바로 다음날의 폭염도 북한산 바람 숲 아래에선 기를 펴지 못했다. 맵시 있는 개량 한복 차림으로 참가자들을 이끈 베테랑 정순희 해설사는 은평구의 중심 불광동과 문화예술촌으로 거듭나는 진관동에 서린 역사 실타래를 한 올 한 올 풀어냈다. 은평구는 ‘서울스럽지 않은’ 옛 풍광을 가장 오랫동안 간직했던 서울의 서북쪽 가장자리 고을이다. 서울의 25개 자치구 중 가장 늦게 편입된 막내 자치구이기도 하다. 아파트의 물결로 뒤덮이기 전까지 5000기가 넘는 무덤이 산재한 땅이었다. 신라의 문장가 최치원이 언급한 대사찰 청담사의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나오고 서울에서 처음 통일신라시대 기와 가마터가 발견된 곳이다. 무덤과 유물은 조선시대 장례문화와 매장 풍습을 밝혀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됐다. 해발고도 132m의 나지막한 진관동 이말산 기슭에는 역관과 내시, 궁녀의 무덤이 수두룩했다. 중국으로 가는 의주로(통일로)의 길목에 위치했기 때문이리라. 의주로는 서울 서대문에서 의주까지 1080리 길에 이르는 조선의 제1대로였다. 중국과의 조공무역에서는 역관의 역할이 컸다. 지금은 전문직인 동시통역사이지만 조선시대 역관은 중인 신분의 대물림 직업이었다. 인동 장씨, 연주 현씨, 남양 홍씨, 우봉 김씨가 역관가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역관은 단순 통역관이 아니라 외교전문가였고, 무역상이었으며, 외국어 교육가였다. 때론 스파이 노릇도 마다치 않았다. 천주교와 실학이 이들의 손과 입을 통해 국내에 전파됐다. ‘실학파의 아버지’ 유대치, 오경석도 역관 출신이었다. 이말산은 역관을 93명이나 배출한 우봉 김씨의 선산이기도 했다. 조선 말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국제인’ 김득련의 묘가 남아 있다.내시와 궁녀의 무덤이 대거 발굴돼 이목을 끌었다. 진관내동 중골마을 백화사 옆에 이사문(李似文)을 시조로 모시는 이사문공파의 내시 분묘 45기가 실재했다. 국내 최대의 내시묘역으로 ‘내시들의 정원’이라고 불릴 만한 곳이다. 광해군 13년(1621)에 세워진 정2품 자헌대부 김충영의 묘가 가장 오래됐다. 왕과 왕비의 명령을 전하는 최고의 요직 대전 승전색을 지냈다. 비석이나 상석에 관직이 기록된 14기 중에는 종1품 숭록대부 2기, 종2품 상선의 묘 5기를 비롯해 정경부인에 오른 내시부부 합장묘도 7기가 있었다. 2003년 내시묘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뒤 4억 8000만원에 조경업자 손에 넘어가 파헤쳐졌다. 석물도 사라지고 상선 노윤천의 묘 등이 봉분도 없이 남았다. 현종의 유모였던 상궁 옥구 임씨, 임실 이씨의 묘도 마찬가지다. 사후 고향에 갈 수 없었던 내시와 궁녀가 묻히기에 딱 좋은 땅이었다. 이말산은 한양 사대문을 둘러싼 그린벨트지역인 사산금표(四山禁표)를 막 벗어난 지역이다. 궁에서 가까운 거리였다. 살아서 권력이 있던 자가 죽으면 묻힐 수 있는 공간이었다. 북한산 둘레길 내시묘역길에는 아쉽게도 내시묘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은평은 경계의 땅이다. 개성에서 서울로 들어서는 경계이자 서울과 고양, 양주 세 지방이 만나는 접경이다. 옛 조선 한성부 북부의 상평방, 연은방, 연희방이 도성의 서북경계였는데 이 중 연은방(홍제원계, 양철리계, 불광산계, 신사동계 등)과 연희방(수색리계, 증산리계, 성산리계, 망원정계 등)의 일부가 오늘의 은평구에 속한다. 18세기작 ‘해동지도’나 19세기작 ‘광여도’ 등을 보면 진관내동과 진관외동은 서울의 서북 외곽인 은평구의 가장 끝에 북쪽을 향해 돌아앉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수봉에서 비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내려가다가 서오릉이 안겨 있는 효경봉에서 북으로 한 갈래가 갈라져 나가 창릉천을 맞는다. 이 줄기가 진관내동과 진관외동의 경계를 이룬다. 비봉에서 나지막한 산줄기 하나가 서북으로 길게 뻗어나가 한복판에 낮은 봉우리를 만들었는데 이게 이말산이다. 북쪽 창릉천의 낮은 지대가 진관내동이고 남쪽의 비봉에서 박석고개로 이어지는 큰 산자락 쪽이 진관외동이다. 1949년 고양군 일부가 서울시에 편입됐으나 고양군 신도면 구파발리, 진관내리, 진관외리는 1973년까지 이어졌다. 서대문구 은평출장소를 거쳐 1979년에야 은평구로 승격됐다. 신라의 청담사, 고려의 신혈사·삼천사와 조선의 진관사는 천년고찰이다. 진관사는 1011년 고려 현종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진관대사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신혈사 터에 큰 절을 세우고 대사의 이름을 따 세웠다. 태조 이성계도 물과 육지에 떠도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에게 제사 지내는 수륙재(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26호)를 진관사에서 봉행토록 했다. 진관사의 신미대사가 첫 한글서적 중 하나인 ‘석보상절’을 펴낸 점과 세종이 성삼문·신숙주·박팽년·이개 등 집현전 학사들이 머물면서 훈민정음을 연구토록 경내에 독서당을 세워줬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진관사가 한글창제 비밀 작업 공간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민족대표 33인에 서명한 만해 한용운, 대각사의 백용성 스님과 함께 조선 불교계의 독립운동 선봉 백초월 스님의 본거지였다. 백초월 스님은 진관사와 진관사의 포교원인 마포 극락암을 상하이 임시정부의 국내 비밀조직인 연통부의 불교계 연락본부로 사용했다고 한다. 2009년 진관사 칠성각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진관사 태극기와 인쇄물은 백초월 스님과 관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태극기 보자기는 인쇄물을 싸고 있었는데 일장기 위에 먹물로 태극과 4괘를 그려 만든 것으로 파악됐다. 삼일운동 당시 사용된 태극기 대부분이 일장기에 덧칠한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가 제정한 국기양식과 동일한 점 등이 인정돼 등록문화재 제458호로 지정됐다. 인쇄물은 삼일운동 직후 국내외 독립운동 현장에서 발간된 상하이판 독립신문, 신대한, 경고문, 조선독립신문, 자유신종보 등 6종 16점이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발간한 신대한 2호와 3호는 유일본이다. 학계에서는 진관사의 태극기와 자료는 백초월 스님을 빼고는 설명하기 어렵다고 본다. 백초월이 일본에서 체포돼 압송된 1920년 3월 이전 급히 숨겼다는 것이다. 1944년 청주형무소에서 순국하기 전까지 24년 세월은 체포와 옥고로 점철됐다. 진관사 태극기가 90년 만에 빛을 본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진관사 진입로는 ‘백초월길’이라고 명명됐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다음 일정:제13회 부암동 능금나무길 ■일시 및 집결장소:7월 20일(토) 오전 10시 윤동주문학관 앞(창의문) ■신청(무료):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독립운동단체들 “김원봉 서훈, 서명운동할 것”

    독립운동단체들 “김원봉 서훈, 서명운동할 것”

    조선의열단 창단 100주년 기념사업 일환…“역사가 재평가”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약산 김원봉의 독립운동 ‘공적’을 거론하면서 ‘서훈 논란’이 재점화된 가운데 주요 독립운동 관련 단체들이 조만간 대대적인‘김원봉 서훈 서명운동’에 들어간다. 8일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등에 따르면, 이 단체를 포함해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와 단재 신채호 기념사업회 등 국내 7개 독립운동 관련 단체들은 올해 조선의열단 창단 100주년(11월 9∼10일)을 맞아 이달부터 연말까지 다양한 기념사업을추진한다. 조선의열단은 약산 김원봉이 단장(의백·義伯)으로 활동한 대표적인 항일독립운동 단체다. 1919년 11월 중국 만주 길림성에서 결성된 의열단은 1920년대 일제 요인 암살과 식민통치기관 파괴 등 각종 의거를 이끈 주요 비밀결사다.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김지섭의 동경 니주바시 폭탄투척 의거,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 및 조선식산은행 폭탄투척 의거 등은 익히 알려진 의열단의 활동들이다. 중국 시인 궈모뤄(郭沫若)는 ‘항일투쟁의 가장 용감한 전사’라고 평하기도 했다.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중심이 돼 조직됐던 이 독립무장단체의 단장이 바로 ‘서훈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김원봉으로, 이번 기념사업은 김원봉과 함께 역사에서 잊혔던 많은 조선의열단원들의 활약상을 재조명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들 단체는 특히 오는 8월부터 11월까지 광주·대구·대전·부산을 순회하며 ‘약산 김원봉 서훈 대국민 서명운동’을 전개한다. 국내 학술대회와 한중 학자들이 참여하는 국제학술대회도 계획하고 있다. 민성진 ㈔운암김성숙기념사업회장은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당시 김원봉 선생이 왜 월북할 수밖에 없었는지 등도 다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해방 후 미군정체제의 남한으로 귀국한 김원봉은 임시정부 김구 주석과 함께 좌우합작을 추진했다.그러나 그 과정에서 역시 남북 좌우합작을 위해 활동한 여운형의 암살을 목격하고, 친일경찰의 상징이었던 노덕술에게 검거돼 모욕을 당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민 기념사업회장은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기도 하지만 조선의열단 창단 100주년이기도 하다. 조선의열단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굉장히 중요한데도, 이념 대립 문제 때문에 묻혀왔다”고 말했다. 이번 기념사업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식 및 국민참여 문화행사’는 11월 9∼10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릴 예정이다.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최근 신임 광복회장에 취임한 김원웅 전 의원은 “조선의열단에 몸담은 사람들은 약산(김원봉)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신채호, 이육사, 정율성, 윤세주 등 여기 몸담았던 사람들은 정말 눈부신 활동을 전개했다”며 “이제 역사가 재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신채호 후손 “옛 삼청동 집터 돌려달라”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인 단재 신채호 선생의 후손들이 단재의 옛 삼청동 집터 소유권을 돌려달라며 법원에 소송을 냈다. 5일 법조계에 따르면 단재의 며느리인 이덕남 여사와 자녀 2명은 삼청동 집터의 현 소유자인 불교재단 선학원과 국가를 상대로 전날 서울중앙지법에 소유권 이전 등기 소송을 제기했다. 후손들이 주장하는 집터의 주소지는 서울 종로구 삼청동 2-1과 2-2로, 단재가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으로 추정된다. 단재는 망명 직전인 1910년 4월 19일 대한매일신보에 “본인 소유 초가 6칸의 문권(집문서)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 분실했기에 광고하니 휴지로 처리하시오”라는 내용과 함께 ‘경 북서(京 北暑) 삼청동 2통 4호, 신채호 백’이라고 주소를 적은 기사를 실었다. 후손들은 이 기사와 관련 문헌, 인근 거주민 증언 등을 근거로 제출했다. 이 주소는 1912년 국유지로 기록됐다가 단재가 순국한 지 2년 뒤인 1939년 한 일본인 앞으로 소유권 보존 등기가 이뤄졌고, 몇 차례 소유권이 바뀌어 현재 선학원이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후손들은 1939년 당시 일본인이 유효하게 국가로부터 소유권을 얻었다고 보기 어려워 현재의 등기도 말소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소유권을 돌려받기 어려우면 국가로부터 손해를 배상받아야 한다는 주장도 소장에 담았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이몽’ 김립-박에스더 이어 이태준까지 “독립운동가 본격 재조명”

    ‘이몽’ 김립-박에스더 이어 이태준까지 “독립운동가 본격 재조명”

    MBC ‘이몽’이 박에스더-김립에 이어 이태준까지 조선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독립운동가들을 브라운관으로 되살리며 안방극장에 뭉클함을 선사하고 있다. MBC 특별기획 ‘이몽’(연출 윤상호/ 극본 조규원)은 일제 강점기 조선을 배경으로 일본인 손에 자란 조선인 의사 이영진과 무장한 비밀결사 의열단장 김원봉이 펼치는 첩보 액션 드라마. 특히 ‘이몽’은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을 본격적으로 다룬 첫 드라마로 매회 현존했던 독립운동가들을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언급되어지며 보는 이들의 심장을 뜨거워지게 만들고 있다. 우선 1-2화에서는 조선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를 모티브로 탄생한 에스더(윤지혜 분)가 등장해 관심을 집중시켰다. 실제 박에스더는 헌신적인 사명감을 가지고 매년 평균 5천명이 넘는 환자들을 진료하며 일생을 조국에 받친 독립운동가. ‘이몽’에서 재탄생된 에스더는 조선인 여의사로 제암리 학살 사건을 일으킨 일본 육군 소장 나구모(임철형 분)에게 복수를 시도하지만 안타깝게 실패하며 이영진(이요원 분)에게 충격을 선사한바 있다. 강렬한 첫 회 엔딩을 장식했던 에스더의 죽음은 남녀노소 일제에 항거하며 목숨을 걸었던 독립운동가들의 절박함을 되새기게 만들었다. 그런가 하면 독립운동가 ‘김립’을 언급해 이목을 끌었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김립은 실제 러시아로부터 받은 독립운동 자금을 운반했던 인물이다. ‘이몽’은 김립의 사망과 독립운동 자금 행방불명 사건으로 시작된다. 극중 임시정부와 의열단이 대립하게 된 계기가 된 본 사건 이후 자금책으로 추정되는 유태준(김태우 분)을 찾기 위해 이영진과 김원봉(유지태 분)이 만주로 향하고 그곳에서 만주 대전투까지 이어지며 처절한 독립투쟁의 장엄한 서막을 열었다. 무엇보다 지난 18일 방송에서는 죽음 앞에서도 독립에 대한 열망을 굽히지 않았던 몽골의 슈바이처 ‘이태준’ 열사의 삶이 재조명 돼 시청자들을 울컥케 했다. 이태준 열사는 당시 몽골인들에게 근대적인 의술을 펼쳐 오늘날 한국-몽골 친선의 상징이 된 인물로, 코민테른 자금 운송에 깊숙이 관여하며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독립운동가. 이에 ‘이몽’은 이태준 열사를 유태준으로 등장시켜 관심을 높였다. 특히 극중 유태준은 코민테른 자금을 뺏으려는 관동군(만주에 주둔했던 일본 육군부대)이 자신에게 총구를 들이댄 순간에도 독립을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으로 강렬하고 묵직한 전율을 선사한 바. 독립을 위해 장렬한 죽음을 택했던 이태준 열사의 실제 삶에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처럼 ‘이몽’은 박에스더-김립-이태준 뿐만 아니라 김원봉, 김남옥(조복래 분)으로 등장한 김상옥, 지청천, 신채호, 지복영, 김구, 이동휘, 오광심(옥자연 분), 이상룡, 이준형(손병호 분) 등 목숨을 건 독립운동을 펼쳤던 독립운동가들을 극 속으로 되살리며 시청자들을 먹먹하게 만들고 있다. 이에 각종 SNS와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찾아보게 된다”,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어 좋다”, “보면서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낀다”, “마지막에 독립크레딧 띄워주는 거 너무 좋아요”, “역사에 대해 다시 되새기게 되는 드라마. 볼 때마다 울컥하네요” 등 다양한 반응을 쏟아냈다. 한편, 지난 9-12화에서는 유태준의 죽음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이영진과 김원봉(유지태 분)의 모습이 그려져 시선을 사로잡았다. 특히 경성으로 돌아온 이영진은 김원봉의 아지트에 입성했고, 그 곳에 있던 김남옥-김승진(김주영 분)-차정임(박하나 분)-마자르의 만남이 그려져 독립을 위해 한 뜻으로 뭉친 이들이 앞으로 어떤 활약을 보여줄지 기대감이 고조되고 있다. MBC 특별기획 ‘이몽’은 이요원-유지태-임주환-남규리-허성태-조복래 등 탄탄한 연기력의 배우진, ‘사임당 빛의 일기’ ‘태왕사신기’ 등을 연출한 윤상호 감독, ‘아이리스’ 시리즈를 집필한 조규원 작가가 의기투합한 작품으로 안방극장에 선보이자마자 높은 화제를 모으고 있다. 매주 토요일 밤 9시 5분 방송된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독립운동가 웹툰 캐릭터로 다시 태어나다” 독립운동가 웹툰 캐릭터전

    잊혀가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이 웹툰 속 인물로 다시 태어났다.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독립운동가들의 웹툰 캐릭터 전시가 한국만화박물관에서 열린다. 한국만화박물관은 18일부터 9월 1일까지 카툰갤리리에서 독립운동가 웹툰 캐릭터전 ’위대한 시민의 역사‘ 전시를 개최한다고 19일 밝혔다. 이번 전시는 독립운동가 웹툰 프로젝트의 웹툰 공개 전 독립운동가 발자취를 소개하는 웹툰 캐릭터 전시다. 역사 속에서 잊혀졌던 독립운동사를 소개하고자 마련됐다. 지난 3월 성남시청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으로 소개된 바 있다. 이번 전시에는 청소년 대상 역사교육 체험프로그램이 추가로 진행될 예정이다. 현재 제작 중인 독립운동가 웹툰은 ‘식객’, ‘타짜’의 허영만, ‘바람의 나라’의 김진, 위안부 피해자를 소재로 한 ‘풀’의 김금숙, 용산 참사 등 사회적 문제를 만화로 그려 온 김성희 등 33명의 만화가가 참여했다. 김구와 김원봉·신채호·홍범도 등 독립운동가 삶을 생생하게 되살려낼 예정이다. 웹툰은 하반기 제작돼 국내 주요 플랫폼을 통해 독자들을 만날 예정이다. 독립운동가 33인의 웹툰 캐릭터·배경과 독립운동가 사진·소개 글 등으로 이뤄졌다. 흐릿한 실제 사진 속 독립운동가들이 각기 다른 웹툰 작가들의 스타일로 만화 캐릭터가 된 과정을 볼 수 있다. 또 청소년 대상 활동지를 통해 독립운동사와 독립운동가 교육 프로그램이 여름방학 기간 운영된다. 서정임 한국만화박물관 박물관운영팀장은 “잊혀가는 항일 독립운동사를 아이들에게 친숙한 웹툰으로 소개하려고 했다”며 “부모들이 자녀와 함께 와서 독립운동가 웹툰 캐릭터 전시회를 보면 살아있는 역사교육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김용근 민족교육상에 김삼웅 前관장

    김용근 민족교육상에 김삼웅 前관장

    ‘김용근 선생 기념사업회’는 제25회 김용근 민족 교육상 수상자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을 선정했다고 14일 밝혔다. 김 전 관장은 근현대사 학술작업에 매진하고 저술 등을 통해 올바른 역사 인식을 세우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위원, 단재 신채호 기념사업회 부위원장, 친일파 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서울신문 주필 등을 지냈다. 시상식은 스승의 날인 15일 오전 11시 30분 광주 학생교육문화관 김용근 선생 흉상 앞에서 열린다. 시상식에 앞서 기념사업회는 김용근 선생의 뜻을 기리는 사단법인 창립총회도 연다. 김용근(1917~1985) 선생은 전남 강진에서 태어나 해방 후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전주고, 광주고, 광주일고, 전남고 등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은퇴한 뒤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5·18과 관련돼 찾아온 제자를 숨겨줬다는 이유로 투옥됐다. 일제강점기 총독암살단 조직 혐의 등으로 2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드라마 ‘이몽’ 김구부터 박에스더까지 “가슴 뭉클” 엔딩 크레딧

    드라마 ‘이몽’ 김구부터 박에스더까지 “가슴 뭉클” 엔딩 크레딧

    드라마 ‘이몽’이 김구부터 박에스더까지, 독립투사들의 일대기가 담긴 특별한 엔딩 크레딧으로 뜨거운 화제를 모으고 있다. MBC 특별기획 드라마 ‘이몽’(연출 윤상호, 극본 조규원)은 일제 강점기 조선을 배경으로 일본인 손에 자란 조선인 의사 이영진과 무장한 비밀결사 의열단장 김원봉이 펼치는 첩보 액션 드라마. 영화 같은 연출, 숨 쉴 틈 없는 전개, 배우들의 뜨거운 연기까지 완벽한 앙상블로 첫 방송부터 호평을 자아내고 있다. 이 가운데 지난 4일 첫 방송의 엔딩 크레딧에 독립투사 박에스더-지청천-신채호-지복영-김구의 일대기가 등장해 시청자들을 뭉클하게 했다. ‘이몽’은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드라마라는 점에서 방송 전부터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특히 실존했던 독립투사의 이름을 따온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점이 하나의 관전포인트가 되기도. 이에 지난 4일 베일을 벗은 ‘이몽’에는 이태준 열사는 유태준(김태우 분), 김상옥 열사는 김남옥(조복래 분)으로 등장해 시청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무엇보다 방송이 끝난 후 엔딩 크레딧에는 박에스더-지청천-신채호-지복영-김구의 일대기가 장엄하게 펼쳐져 시선을 사로잡았다. 뜻 깊은 엔딩 크레딧에 네티즌들은 ‘마지막 독립운동가 이름 나오는 장면은 참 뭉클하네요’, ‘독립가 소개하는 엔딩 맘에 든다’, ‘독립운동가 이름 보여주는 거 봐 소름’ 등 호평을 쏟아내고 있다. 이에 ‘이몽’ 측은 “첫 방송에 많은 관심 주셔서 감사 드린다“고 밝힌 뒤 “’독립군 크레딧’을 보시고 그 이름을 검색, 독립운동가의 삶에 대해 한번쯤 찾아보시고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많은 기대 부탁드린다”고 전했다. 지난 1-4회에서는 조선인 일본 의사 이영진(이요원 분)과 의열단장 김원봉(유지태 분)의 운명적인 만남이 스펙타클하게 그려졌다. 특히 4회 말미 이영진이 김원봉이 찾던 임시정부 김구(유하복 분)의 밀정 ‘파랑새’라는 반전이 드러나 충격을 선사했다. 이에 상해로 향한 이영진이 어떤 활약을 보여줄지, 독립이라는 같은 꿈을 향해 다른 길을 걸어가는(이도일몽) 이영진-김원봉이 함께 그려 나갈 가슴 뜨거운 이야기에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임진왜란 영웅 충무공 후손, 항일투쟁으로 가문의 명예 잇다

    임진왜란 영웅 충무공 후손, 항일투쟁으로 가문의 명예 잇다

    28일은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 탄신 474주년이다. 임진왜란(1592~1598) 당시 백척간두에 놓인 조선을 구해 낸 할아버지의 명예를 지키고자 일제에 뺏긴 나라를 되찾으려고 노력한 후손들의 이야기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은 올해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충무공과 마찬가지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내던진 독립운동 명문가의 사연을 들여다봤다.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충무공 후손(덕수 이씨) 가운데 항일투쟁 활동을 인정받아 국가유공자 서훈을 받은 이는 모두 11명이다. 이들이 받은 훈·포장은 14개다. 이규갑(1888~1970)과 이애라(1894~1922), 이세영(1869~1938), 이필희(1857~1900), 이민화(1898~1923), 이붕해(1896~1950) 등 6명에게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이 추서됐다.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 2개와 건국훈장 애족장(5등급) 2개, 건국포장 3개, 대통령표창 1개도 충무공 가문에 수여됐다. 신채호(1880~1936)와 신규식(1880~1922) 등 13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산동 신씨 가문과 쌍벽을 이룬다. ●독립군 양성 신흥무관학교 이끈 이세영 이 가운데 국민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충무공의 12대손인 이세영이다. 1889년 공립학교인 육영공원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웠다. 1895년 8월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을 습격해 명성황후(1851~1895)를 시해하자 같은 해 10월 전국 각지에서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켰는데, 이때 그도 봉기에 참가했다. 1919년 중국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참모차장에 취임했고 이듬해 5월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의 교장도 맡았다. 이후 중국 만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하다 1938년 쓰촨성에서 숨을 거뒀다. 이민화(11대손)와 이붕해(12대손)는 1920년 10월 만주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파한 청산리 전투에 참가해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민화는 1907년 만주로 건너가 김좌진(1889~1930)이 이끌던 북로군정서에서 중대장을 맡았다. 이붕해는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곧바로 만주로 탈출해 청산리 전투에서 이민화처럼 중대장으로 활약했다. 이후 지린성에서 만들어진 고려혁명군에서 꾸준히 항일투쟁을 이어 갔다. 이규갑과 이애라는 부부였다. 충무공의 10대손인 이규갑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한때 전도사로 활동했다. 이애라는 이화학당을 나와 충남 공주의 영명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둘은 1913년 혼인하고 평양에 살다가 3·1운동에 참가했다. 이규갑이 일본 경찰에 쫓기면서도 서울에 한성임시정부를 세우고 곧바로 상하이임시정부와의 통합 작업에 나서자 이애라는 남편을 돕고자 모금 활동에 나섰다. 안타깝게도 부부의 연은 짧았다. 1922년 이애라가 2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두 가지 설이 있다. 보훈처 공적조서에는 그가 만주에서 독립운동 관련 밀서를 숨겨 조선에 들어오다가 일본 헌병에 붙잡혀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함경도 웅기에서 경찰에 체포돼 고문을 당한 뒤 그 후유증으로 1921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숨졌다는 주장도 있다.●일제에 맞서 함께 싸운 이규갑·이애라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민족문제연구소는 2014년 충무공 직계 종손 이종옥(1887~1941·13대손)과 그의 아들 이응렬(1914~1993)의 독립운동 사료를 새로 발굴해 학계에 알렸다. 충무공 종가는 2016년 보훈처에 이들에 대한 서훈을 신청했다. 이응렬은 1941년 7월 회사 동료에게 일제의 내선일체론(일본과 조선이 하나라는 주장)을 비판하다가 경찰에 붙잡혀 1년 가까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징역 2년(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2016년 보훈처는 그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이종옥은 1914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독립운동 시국사건에 휘말려 고초를 겪었다. 민족종교인 증산교 계열 태을교에 가담했다가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태형 70대를 맞기도 했다. 다만 이종옥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충무공 종가에서 두 차례 더 포상을 신청했지만 떨어졌다. ●아들 이응렬은 서훈, 부친 이종옥은 탈락 보훈처는 “이종옥에 대한 구체적 활동과 수형 내용이 불분명하다”고 설명했다. 역사학계에서는 이응렬보다도 이종옥의 서훈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봤기에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충무공 종가의 종부(宗婦) 최순선씨는 “할아버님(이종옥)에 대한 새로운 독립운동 자료를 찾아내 내심 기대가 컸는데 연이어 탈락해 아쉬움이 크다”면서 “앞으로도 광복회 등의 도움을 받아 꾸준히 독립유공자 포상을 추진할 것”이라고 전했다. 아산 오경진 기자 oh3@seoul.co.kr 서울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임진왜란 영웅 충무공의 후손들, 항일투쟁으로 명예 지키다.

    임진왜란 영웅 충무공의 후손들, 항일투쟁으로 명예 지키다.

    28일은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 탄신 474주년이다. 임진왜란(1592~1598) 당시 백척간두에 놓인 조선을 구한 할아버지의 명예를 지키고자 일제에 뺏긴 나라를 되찾으려고 노력한 후손들의 이야기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은 올해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충무공과 마찬가지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내던진 독립운동 명문가의 사연을 들여다봤다. ●국가유공자만 11명인 충무공 후손…산동 신씨 가문과 쌍벽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충무공 후손(덕수 이씨) 가운데 항일투쟁 활동을 인정받아 국가유공자 서훈을 받은 이는 모두 11명이다. 이들이 받은 훈·포장은 14개다. 이규갑(1888~1970)과 이애라(1894~1922), 이세영(1869~1938), 이필희(1857~1900), 이민화(1898~1923), 이붕해(1896~1950) 등 6명에게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이 추서됐다.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 2개와 건국훈장 애족장(5등급) 2개, 건국포장 3개, 대통령표창 1개도 충무공 가문에 수여됐다. 신채호(1880~1936)와 신규식(1880~1922) 등 13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산동 신씨 가문과 쌍벽을 이룬다. 이 가운데 국민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충무공의 12대손인 이세영이다. 1889년 공립학교인 육영공원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웠다. 1895년 8월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을 습격해 명성황후(1851~1895)를 시해하자 같은 해 10월 전국 각지에서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켰는데, 이때 그도 봉기에 참가했다. 1919년 중국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참모차장에 취임했고 이듬해 5월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의 교장도 맡았다. 이후 중국 만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하다 1938년 쓰촨성에서 숨을 거뒀다. 이민화(11대손)와 이붕해(12대손)는 1920년 10월 만주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파한 청산리 전투에 참가해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민화는 1907년 만주로 건너가 김좌진(1889~1930)이 이끌던 북로군정서에서 중대장을 맡았다. 이붕해는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곧바로 만주로 탈출해 청산리 전투에서 이민화처럼 중대장으로 활약했다. 이후 지린성에서 만들어진 고려혁명군에서 꾸준히 항일투쟁을 이어 갔다. ●부부가 함께 독립운동한 이규갑·이애라 이규갑과 이애라는 부부였다. 충무공의 10대손인 이규갑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한때 전도사로 활동했다. 이애라는 이화학당을 나와 충남 공주의 영명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둘은 1913년 혼인하고 평양에 살다가 3·1운동에 참가했다. 이규갑이 일본 경찰에 쫓기면서도 서울에 한성임시정부를 세우고 곧바로 상하이임시정부와의 통합 작업에 나서자 이애라는 남편을 돕고자 모금 활동에 나섰다. 안타깝게도 부부의 연은 짧았다. 1922년 이애라가 2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두 가지 설이 있다. 보훈처 공적조서에는 그가 만주에서 독립운동 관련 밀서를 숨겨 조선에 들어오다가 일본 헌병에 붙잡혀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함경도 웅기에서 경찰에 체포돼 고문을 당한 뒤 그 후유증으로 1921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숨졌다는 주장도 있다.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민족문제연구소는 2014년 충무공 직계 종손 이종옥(1887~1941·13대손)과 그의 아들 이응렬(1914~1993)의 독립운동 사료를 새로 발굴해 학계에 알렸다. 충무공 종가는 2016년 보훈처에 이들에 대한 서훈을 신청했다. 이응렬은 1941년 7월 회사 동료에게 일제의 내선일체론(일본과 조선이 하나라는 주장)을 비판하다가 경찰에 붙잡혀 1년 가까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징역 2년(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2016년 보훈처는 그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했다.●아들 이응렬은 서훈, 부친 이종옥은 탈락…종손 “이종옥 포상 계속 추진” 이종옥은 1914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독립운동 시국사건에 휘말려 고초를 겪었다. 민족종교인 증산교 계열 태을교에 가담했다가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태형 70대를 맞기도 했다. 다만 이종옥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충무공 종가에서 두 차례 더 포상을 신청했지만 떨어졌다. 보훈처는 “이종옥에 대한 구체적 활동과 수형 내용이 불분명하다”고 설명했다. 역사학계에서는 이응렬보다도 이종옥의 서훈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봤기에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충무공 종가의 종부(宗婦) 최순선씨는 “할아버님(이종옥)에 대한 새로운 독립운동 자료를 찾아내 내심 기대가 컸는데 연이어 탈락해 아쉬움이 크다”면서 “앞으로도 광복회 등의 도움을 받아 꾸준히 독립유공자 포상을 추진할 것”이라고 전했다. 천안·아산 오경진 기자 oh3@seoul.co.kr 서울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