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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시장 언덕길 따라 3층 같은 7층 건물… 속 깊은 요셉처럼 약현 성당 보호했나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시장 언덕길 따라 3층 같은 7층 건물… 속 깊은 요셉처럼 약현 성당 보호했나

    성 요셉 아파트. 뭔가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름이다. 가톨릭 성자의 이름이 붙은 아파트라니? 게다가 한국 최초의 서양식 성당으로 일컬어지는 약현 성당이 바로 옆에 있다니? 약현 성당은 명동 성당보다 6년 앞선 1892년에 세워졌다. 설계자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코스트 신부로 명동 성당과 같다. 명동 성당은 사대문 안, 약현 성당은 사대문 밖과 그 너머의 경기도와 황해도 일부까지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관할하는 등 역할의 분담이 있었다. 명동 성당의 주보성인이 성모 마리아였기 때문에 그 준비 과정에 해당하는 약현 성당은 마리아의 남편인 성 요셉을 주보성인으로 모셨다고 한다(*이상 약현 성당 홈페이지 참조). 그런데 그 중요한 주보성인의 이름이 바로 성당 옆 아파트에 붙여진 것이다. 대중적인 지명도는 낮지만 아파트 연구가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건물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이 두 건물 사이에는 매우 긴밀한 관계가 있을 것만 같다. 종교적 이유에서 이 아파트가 세워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사회 복지 사업의 일환으로 공동 주거를 마련했다거나, 혹은 신앙 공동체를 위한 시설이었다거나 하는 등의 시나리오다. 그러나 현장에서 들은 이야기와 여러 자료를 종합해 보면 성 요셉 아파트는 약현 성당의 수익 사업으로 진행된 프로젝트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종교 단체가 건물을 지어 수익 사업을 하는 것은 물론 종종 있는 일이다. 예를 들어 이 연재에서 다룰 예정인 신문로의 피어선 아파트 또한 같은 맥락에서 지어진 건물이다. 다만 개신교인 장로교 교단과 관련됐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공통적으로 주상복합 아파트를 지었다는 점은 자못 흥미롭다. 이 두 건물은 지어진 연대도 비슷하다. 성 요셉 아파트는 1971년 6월 20일에, 피어선 아파트는 같은 해 11월 10일에 각각 사용 승인을 받았다. # 답사의 시작은 서소문 공원부터 성 요셉 아파트의 답사는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인근의 서소문 공원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약현 성당 자체가 한국 가톨릭의 순교지인 이 서소문 처형장 터를 내려다보는 장소에 지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인 최초로 영세를 받은 이승훈의 집 또한 이 근처였다고 전한다. 약현(藥峴)이라는 이름은 ‘약초밭이 있던 고개’를 의미하며 지금의 중림로가 바로 약현이다. 이처럼 고개 옆 언덕 위에 지어진 약현 성당에서는 그 주변 일대가 잘 내려다보였을 것이다. 사실 이 서소문 처형장은 지난번 서소문 아파트 편에서 이야기한 욱천, 즉 만초천의 모래사장이었다. 지금은 복개됐으나 유난히 모래가 곱고 아름다웠다고 하는 바로 그 하천이다. 모래라서 처형된 사람의 피가 금방 스며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만초천 위에 지어진 서소문 아파트도 여기서 경의중앙선 철길 하나만 건너면 바로 지척이다. 청파로로 들어서서 브라운스톤 북서쪽 코너에서 보면 주변의 고층 빌딩 사이로 뾰족탑, 그리고 그 앞에 길게 누워 있는 누런색의 건물이 보인다. 약현 성당과 성 요셉 아파트다. 약현 성당이 능선 위에 있다면 성 요셉 아파트는 그 바로 아래에 낮게 깔려 있다. 하지만 이 정도 높이의 건물로도 성당 북쪽으로의 경관은 거의 다 막힌다. 그 방향으로 서소문 공원도 일부 있기 때문에 애초에 이 자리에 성당을 지은 취지에 위배되는 배치다. 지금이야 워낙 고층 건물이 많아서 경관이 거의 다 막혀있지만 성 요셉 아파트가 건립된 1970년대 초만 해도 이 일대에 높은 건물은 거의 없었다. 당시 성 요셉 아파트의 건립은 약현 성당으로서는 매우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성 요셉 아파트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언덕을 올라본다. 청파로를 향해 우뚝 선 한림학사가 이 아파트의 일부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두 건물은 서로 떨어져 있다. 이 일대는 시장 지역이다. 한때 칠패(七牌)시장으로 불렸고, 지금의 이름은 중림시장이다. 마포에서 만리재를 넘어온 어물과 곡물을 파는 시장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조선 시대에는 종루, 즉 종로의 시전을 능가하는 큰 규모였으나 상권이 많이 축소된 지금도 아침이면 어물 시장이 열린다. 그 시장의 일부가 좁은 언덕길을 따라 오르는데 그것이 성 요셉 아파트의 저층부를 이룬다. 통인시장과 한 몸을 이룬 효자 아파트나 인왕시장에 인접한 원일 아파트를 연상케 한다. 그 시장의 소음과 혼잡으로부터 성당을 보호하기 위해 이 아파트를 지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 아파트 지어 인접한 시장의 소음·혼잡 차단 성당으로 들어가는 길과 성 요셉 아파트로 들어가는 길은 완전히 분리돼 있다. 아파트 옆 언덕길 어딘가에 성당으로 들어가는 부출입구가 있지 않을까 궁금해 직접 찾아도 보고 주민들에게도 물었는데 찾지 못했다. 약현 성당의 부출입구는 완전히 반대쪽인 중림로 쪽으로 나 있다. 즉 적어도 현재 상황으로 보면 약현 성당과 성 요셉 아파트는 인접해 있을 뿐 별다른 물리적 연결 고리 없이 분리돼 있다. 모르고 보면 경관이나 접근 등의 측면에서 성당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이 들어선 건물 같은데, 막상 건립 주체가 성당이었다니 좀 의아하다. 두 건물 사이의 긴장된 관계는 성 요셉 아파트 안에 들어가 보면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성 요셉 아파트의 복도는 약현 성당 쪽으로 나 있다. 이쪽이 남쪽이므로 결국 이 아파트는 북향이다. 즉 주거 가구는 약현 성당으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리고 있다. 남향 선호가 워낙 강해 마주 보는 중정형 아파트에서도 이에 대한 고민이 심각하다는 것을 이 연재에서 여러 번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런데 이 아파트에서는 그런 고뇌가 아예 읽히지 않는다. 아파트를 짓기는 짓되 시선은 성당 밖으로 돌리려는 의지가 있었던 것 같다. 복도에 창이 나 있지만 상당히 높아서 성당 쪽을 잘 볼 수 없게 해 놓은 것도 유사한 맥락으로 읽힌다. 하지만 그런 덕분에 사적 252호로 지정된 이 유서 깊은 장소가 갖는 안온하고 경건한 분위기가 잘 유지되고 있음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약현 성당 마당 한구석에 앉아 늦은 오후의 햇살이 성당 벽면에 드리우는 것을 보고 있으면 서울 시내 한 복판에 이런 장소가 있다는 것이 기적 같은 일로 느껴진다. 건축은 수많은 대립과 모순의 관계 속에서 내리는 괴로운 결정의 과정이다. 다만 이 경우는 너무 ‘모 아니면 도’의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한다. 성 요셉 아파트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제3의 좋은 대안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찾는 것이 건축가의 역할이기도 하다. 약현 성당이 세운 건물치고는 성당과의 관계가 좀 뜻밖이라 그렇지 사실 성 요셉 아파트는 지금의 관점으로 봐도 배울 것이 많은 건물이다. 일단 지형의 흐름에 철저하게 순응하고 있는 건물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고갯길을 따라 지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지형과 건물, 그리고 길 사이에 서로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관계가 만들어졌다. 툭하면 대지를 평탄화해서 경사지를 계단으로 만들어 버리는 요즘의 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국토 대부분이 경사지인 한국에서 경사지를 최대로 이용하는 건물의 유형이 발달하지 않았음은 상당히 부끄러운 일이다. 이 오래된 아파트가 이 문제에 대해 상당히 선도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내부의 공간 구성 방식이다. 경사지를 따라 아래에서 올라가다 보면 건물이 한 층씩 한 층씩 줄어들게 된다. 그러다 보면 조형적으로나 동선적으로 혼란이 생길 수도 있는데 성 요셉 아파트는 이 문제를 비교적 간단하게 해결하고 있다. 즉 건물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고 그 중간과 양 끝에 계단실을 두어 편복도로 연결한 것이다. 건축물 관리대장에도 이 두 부분이 명확하게 나뉘어 있다. 그래서 개념적으로나 물리적으로 건물의 전체적인 윤곽이 단순하다. 다만 이런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 저층부의 각 부분에서 레벨을 미세하게 조절한 흔적들이 많이 보인다. 전체적으로 보면 가장 낮은 층을 기준으로 볼 때 가장 높은 층은 7층에 해당한다. 실제로 건물 안을 다녀보면 처음에는 미로 같지만 금방 구성의 논리를 알게 된다. 주어진 문제를 매우 간결하고 상식적으로 해결하고자 한 설계자의 생각이 읽히는 부분이다. # 선형식 서소문 아파트와 닮은 듯 다른 매력 성 요셉 아파트 최대의 특징은 역시 가장 대표적인 선형식 아파트라는 점이다. 특히 이 유형에서 최대의 라이벌이라고나 할 서소문 아파트가 또한 지척이다. 이 두 아파트는 여러 모로 비교 대상이다. 일단 지어진 시기도 비슷하다. 서소문 아파트는 1971년 1월 23일에, 성 요셉 아파트는 1971년 6월 20일에 사용 승인을 받았으니 이 둘은 동갑이다. 게다가 마치 자로 잰 것처럼 두 건물의 길이도 115m 내외로 비슷하다. 공통점은 또 있다. 둘 다 곡선형 건물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중간에 두 군데가 꺾인 직선의 조합이다. 만약 완전히 곡선으로 지었으면 개념이나 조형면에서는 근사했겠지만 가구 배치, 콘크리트 타설 등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당시 기술로서는 이것이 최선이자 유일한 해결책이었을 것이다. 두 아파트의 차이점도 많다. 서소문 아파트가 만초천이라는 물길 위에 자리 잡은 것처럼 성 요셉 아파트도 물길 위에 지어진 것이라는 자료가 여기저기에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오류다. 물길에 대해 매우 자세한 조선 시대나 일제강점기의 지도 어디를 봐도 이 자리에 물길은 없었다. 성 요셉 아파트는 그냥 자연 지형 위에 지어진 건물일 뿐이다. 토지대장에도 종교용지로서 면적이 1790.8㎡에 달한다는 기록이 엄연히 나와 있다. 물길 위에 지은 건물이면 다르게 기술됐을 것이다. 또한 서소문 아파트가 계단실형인 데 반해서 성 요셉 아파트는 편복도식이다. 서소문 아파트는 거의 평지에 면하고 있지만 성 요셉 아파트는 경사지에 지어졌다. 한국의 대표적인 두 선형식 아파트가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 서로 저마다 다른 이야기와 건축적 가치를 보여 주고 있음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꼭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화려하고 눈에 띄는 건물만이 우리에게 감동과 의미를 주는 것은 아니다. 이 두 아파트는 설계자가 누구인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익명의 존재가 계획하고 구상한 건물들인 것이다. 다만 지어진 지 45년에 불과한 두 건물이 너무 낡은 상태로 있는 것은 안타깝다. 약현 성당이 1892년에 지어져 무려 124년이나 나이를 먹었고, 그 사이에 한국전쟁, 심지어 1998년에 취객의 방화로 인한 화마까지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안팎 모두 멀쩡하게 잘 남아 있는 것에 비하면 더욱 그렇다. 모쪼록 중년을 맞은 이 두 아파트가 앞으로도 그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의 삶을 담는 그릇으로 건강하게 잘 남아 있기를 바랄 뿐이다.
  • 벗길수록 감추고, 가릴수록 드러난다… 부르카 속 ‘치안과 자유’

    벗길수록 감추고, 가릴수록 드러난다… 부르카 속 ‘치안과 자유’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48년 집필한 ‘공산당 선언’의 도입부에서 당시 유럽의 정세를 다음과 같이 간결히 정리했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구유럽의 모든 세력들, 교황과 차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 급진파와 독일의 경찰은 이 유령을 몰아내려고 신성 동맹을 맺었다.” 이 문장에서 ‘공산주의’를 ‘부르카’로 바꾸면 현재 유럽의 상황에 적용된다. 무슬림 여성의 눈과 얼굴을 비롯해 전신을 가리는 의상인 부르카의 착용 문제를 두고 유럽 전역이 논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 각국 정부들은 무슬림 여성의 사회 통합과 치안 강화를 명분으로 부르카 착용을 규제하려 하는 반면 부르카 규제가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고 무슬림 여성을 소외시킬 수 있다며 반발하는 목소리도 높다. ●獨, 反이슬람 정서에 부르카 부분 금지 추진 논쟁 점화 독일 정부는 최근 부르카 착용을 부분적으로 금지하는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밝히면서 독일 내 부르카 논쟁에 불을 지폈다. 독일에는 400만명의 무슬림이 거주하고 있지만 대부분 세속주의 성향이 강한 터키 출신이라 독일 거리에서 부르카를 입은 여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에 독일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부르카 착용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으나, 지난해 시리아 등 중동 난민이 대거 유입되고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한 테러가 잇따라 발생하면서 부르카를 규제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토마스 데메지에르 독일 내무장관은 지난 19일(현지시간) 학교, 대학, 법정, 등기소에서 부르카와 같이 얼굴을 가리는 베일의 착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법안은 운전 중이나 출입국 심사를 받을 때도 부르카 착용을 금지하며 교사나 공무원이 직장에서 부르카를 입을 수 없도록 규정했다. 데메지에르 장관은 “독일 사회의 통합을 위해 필요한 장소에서 얼굴을 보여 주도록 법적 규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앞서 데메지에르 장관과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부르카 착용을 개인적으로 거부하지만 법적으로는 금지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독일 내 반(反)이슬람 정서가 강화되고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득세하자 집권 여당인 기독민주당과 기독사회당 내에서는 부르카를 전면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졌다. 이에 메르켈 총리와 데메지에르 장관이 다음달 일부 지역 지방선거를 앞두고 당내 강경론자들을 달래고 극우 정당을 견제하기 위해 한발 물러섰다는 분석이 나온다. 다음달 선거가 실시되는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와 베를린시의 기독민주당 대표는 이날 데메지에르 장관의 기자회견장에 참석해 부르카 착용 금지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佛, 부르키니女 벌금·경찰이 베일 벗게 한 사진 논란 공공장소에서 부르카를 비롯해 얼굴을 가리는 베일의 착용을 이미 금지한 프랑스는 부르카에 이어 ‘부르키니’ 규제에 나섰다. 부르키니는 부르카와 비키니의 합성어로 무슬림 여성이 이슬람 전통을 지키면서도 물놀이를 할 수 있도록 고안된 전신을 가리는 수영복이다. 이달 들어 남부 휴양지인 니스와 칸을 비롯해 프랑스 지방자치단체 30여곳이 공공질서에 대한 위협, 수상 안전, 위생 등의 이유로 부르키니를 금지하고 단속에 나섰다. 시암이라는 이름의 무슬림 여성은 칸 해변에서 부르키니를 입고 있다가 단속 나온 경찰에게 11유로(약 1만 3000원)의 벌금을 내야만 했다고 AFP가 지난 23일 보도했다. 프랑스 인권단체인 인권연맹(LDH)은 니스행정법원에 “부르키니 규제는 위법”이라고 주장하며 30여곳의 지방정부 중 빌뇌브루브시를 제소했으나 법원은 지난 22일 “공공 질서 유지를 위해 필수적이고 적절하며 비례의 원칙에 부합하는 규제”라며 지방정부의 손을 들어 줬다. 니스에서는 지난달 14일 이슬람 극단주의자가 대혁명 기념일 불꽃놀이를 즐기던 시민과 관광객들을 향해 트럭을 몰고 돌진해 85명이 숨지고 300여명이 다친 바 있다. 부르키니 공방이 계속되던 중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이 23일 보도한 한 사진이 프랑스 전역을 뒤흔들었다. 사진에는 니스 해변에서 한 여성이 남성 경찰 3명에게 둘러싸여 상반신을 가리는 베일을 벗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니스시 당국은 이 여성이 베일 안에 부르키니를 입고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무슬림계와 여성단체들은 “여성이 강압에 의해 옷을 벗게 됐다”며 분노했다. LDH는 니스법원의 판결에 불복해 최고 행정재판소인 국사원에 상소했고, 국사원은 26일 니스지법의 판결을 뒤집고 빌뇌브루브시의 부르키니 규제는 위법이라고 판결했다. 이에 부르키니 규제를 도입한 다른 지방정부도 규제를 폐지하거나 유예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마뉘엘 발스 프랑스 총리는 전날 “부르키니는 여성의 노예화를 상징한다”며 부르키니 금지 입장을 고수했고, 2017년 대선 출마를 선언한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은 전국적으로 부르키니 규제를 도입하겠다고 공약해 한동안 여진은 계속될 전망이다. 정교 분리 원칙과 세속주의를 고수하는 프랑스는 2010년 치안 유지를 이유로 공공장소에서 얼굴 전체를 덮는 니캅과 부르카의 착용을 금지하고 이를 어길 시 150유로(약 18만 8000원)의 벌금을 물리는 법을 채택했다. 2015년까지 부르카 착용으로 벌금형이 선고된 사례는 1500여건에 이르며 대부분 상습범이라고 워싱턴포스트는 전했다. 앞서 2004년에는 학교 교실에 부르카를 비롯해 유대교의 키파(테두리 없는 베레모), 기독교의 십자가 등 종교적 상징물을 반입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한 바 있다. ●“여성성 덮어·치안 유지” vs “신앙 자유·소외 부추겨” 유럽에서는 프랑스를 필두로 벨기에, 네덜란드, 불가리아가 전국적으로 부르카 착용을 금지했으며 이탈리아, 스페인, 스위스, 러시아에서는 지역별로 부르카 착용 금지 여부가 다르다. 부르카 부분 금지를 추진 중인 독일에서는 최대 일간지 빌트가 지난 12일자 1면에 “부르카의 금지를 요구한다”고 공식화하며 여론 조성에 나섰다. 빌트는 “부르카는 여성의 정체성과 개성을 없애고 시각적으로 인간다움을 잃게 한다”며 “자유로운 생활양식에 반하는 자명한 불관용”이라고 강조했다. 부르카 규제에 찬성하는 측은 니캅이나 부르카가 얼굴을 가려 신원 확인을 어렵게 해 치안 유지 활동을 방해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부르카가 무슬림 여성의 의사소통과 대외 활동을 제약해 사회 통합을 저해한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부르카 규제가 오히려 무슬림을 자극해 치안이 불안정해질 수 있다는 반론도 있다. 안젤리노 알파노 이탈리아 내무장관은 지난 17일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프랑스의 부르키니 규제에 대해 “무슬림을 더 자극할 가능성이 있다”며 “테러 공격을 유발할 수 있는 이런 자극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알파노 장관은 “이탈리아 헌법은 모든 사람에게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면서 “이탈리아에는 150만명의 무슬림이 거주하고 있지만 이들 모두를 테러리스트나 테러 동조자로 간주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부르카 착용을 금지함으로써 오히려 무슬림 여성들이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해 유럽 사회에서 더욱 소외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부르키니는 젊은 무슬림 여성에게 해변의 자유 선물” 유럽 내 부르카 논쟁은 여성 인권, 종교의 자유, 치안 등 여러 문제가 얽히면서 복잡해지는 양상이지만 일각에서는 부르카 착용 여부는 결국 여성 개인의 선택 문제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프랑스 툴루즈대학의 종교 전문가이자 프랑스에서 나고 자란 무슬림 여성인 림사라 알루안은 AP에 “반부르키니 정책은 이슬람에 대한 낡은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며 “여성의 권리에는 몸을 가릴 권리도 포함된다”고 말했다. 파리 도심의 부르키니 매장에서 일하는 젊은 무슬림 여성 2명은 NYT에 “2004년 부르키니가 처음 출시되기 전에는 해변에서 발을 물에 잠깐 담그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며 “하지만 지금은 제트스키도 즐긴다”고 말했다. 그들은 “부르키니는 젊은 무슬림 여성들에게 한낮에 해변에서 놀 수 있는 기회를 줬다. 부엌에 갇혀 있던 우리 어머니 세대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라며 “정부는 부르키니를 입고 세상 밖으로 나가는 무슬림 여성을 환영해야지 벌금을 물려 집으로 되돌려 보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20년 이상 ‘핵심’ 맡았던 李 부회장

    검찰 소환을 앞두고 26일 자살한 이인원(69) 롯데그룹 부회장은 롯데의 2인자다. 신격호 총괄회장의 ‘복심’(腹心)에 이어 신동빈 회장의 최측근으로 평가되는 등 2대에 걸쳐 신임을 받은 43년 롯데맨이다. 롯데그룹의 ‘산 역사’로도 불린다. 소진세 그룹 정책본부 대외협력단장(총괄사장), 황각규 정책본부 운영실장(사장)과 함께 신 회장의 ‘최측근 3인방’으로 꼽힌다. 황 실장과 소 단장은 이미 검찰 조사를 받았다. ●계열사 정책·인사 관여하는 정책본부장 맡아 롯데그룹의 정책본부는 대외협력실, 운영실, 개선실, 인사실, 지원실, 비서실, 비전전략실 등 7개 실무 부서로 구성된다. 이들 부서가 계열사 정책과 인사 등 주요 부문에 관여한다. 정책본부의 중심이 정책본부장인 이 부회장이다. 이 부회장은 따라서 그룹 경영과 관련된 핵심 기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관측됐다. 검찰도 이 부회장을 핵심 수사 대상으로 삼고 그간 행적을 추적해 왔다. 이 부회장은 지난 6월 검찰의 수사 착수와 동시에 출국 금지 조치됐다. 이날 오전 이 부회장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및 횡령 등 혐의의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출석할 예정이었다. 검찰 관계자는 “소환이 확정된 것은 어제(25일) 오전 9시쯤이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이 부회장의 개인 비리를 검찰이 확인했고 이 때문에 이 부회장이 극단적 선택을 했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검찰 관계자는 “이 부회장의 개인 비리는 수사한 바도 없고, 드러난 바도 없다”면서 “이 부회장이 극단적 선택으로 다른 사람을 보호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배임·횡령 등 혐의 檢 조사 앞둬 경북 경산에서 태어난 이 부회장은 경북사대부고와 한국외국어대 일본어학과를 졸업하고 1973년 롯데호텔에 입사했으며 1987년 롯데쇼핑으로 옮겼다. 수십년간 롯데쇼핑에서 신 총괄회장을 도와 사세를 확장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모태 신앙으로 기독교를 믿으며 술은 입에 대지 않는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경영권 분쟁에서 신 회장 편에 서서 조직을 추슬렀다. 이 부회장은 지난해 10월 사내 인트라넷에 올린 ‘임직원에게 전하는 글’에서 “최근 경영권 분쟁은 롯데그룹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진통”이라며 신 회장에 대해 “글로벌 마인드로 무장한 유능하고 검증된 사람”이라고 밝혔다. 이 부회장은 앞서 신 총괄회장이 지난해 7월 작성한 한국 롯데그룹 최고위 임원 해임을 지시하는 인사명령서인 이른바 ‘살생부’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전경하 기자 lark3@seoul.co.kr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 [함혜리 기자의 미술관 기행]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 온몸에 전율 흐르네

    [함혜리 기자의 미술관 기행]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 온몸에 전율 흐르네

    예수 탄생의 일화에서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를 예고하는 ‘수태고지’(受胎告知·Annunciation)의 순간은 그리스도교가 정착한 5세기 이래 서구 미술의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졌다. 날개 달린 천사가 한 여인에게 무언가 말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 있다면 그 그림의 제목은 열이면 열, ‘수태고지’라고 보면 된다. 15세기 르네상스 미술에서는 특히 산드로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걸출한 화가들이 ‘수태고지’를 주제로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개인적 취향의 차이는 있겠으나 지금까지 본 모든 수태고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꼽으라면 서슴지 않고 피렌체의 산마르코 수도원에 있는 프라 안젤리코(1387~1455)의 ‘수태고지’라고 답하겠다. ●기독교 교리의 본질을 숭고한 아름다움으로 표현 프라(Fra)는 수도사들의 이름 앞에 붙이는 호칭으로 ‘형제’라는 뜻이고, 안젤리코는 ‘천사 같은’이라는 뜻이다. 본명이 구이도 디 피에트로인 그는 청년기에 채색 삽화가로 도제 수업을 받고 화가로 활동하다가 23세에 도미니크회 수도원에 들어갔다. 깊은 신앙심을 지닌 그는 기도의 행위로서 그림을 그렸다. 채색 필사본과 제단화로 이름을 알리던 중 도미니크회가 1436년 인수한 피렌체의 산마르코 수도원의 장식화를 맡게 됐다. 산마르코 수도원은 본래 실바네스트리 수도회 소유였던 것을 코시모 데 메디치의 후원으로 재건축이 이뤄졌다. 메디치궁을 지은 건축가 미켈레초가 1437년부터 재건축 공사를 시작해 16년 만인 1452년 지금의 수도원 건물이 완성됐다. 프라 안젤리코는 1436년부터 1445년까지 이곳에 머물며 벽화와 회랑의 프레스코화, 수도사들의 독방 프레스코화를 완성했다. 현재는 산마르코 국립박물관으로 불리지만 프라 안젤리코 미술관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피렌체의 두오모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수도원은 광장 쪽으로 1층에 성당이 있고 그 왼쪽으로 들어가면 큰 정원과 아치가 이어지는 성안토니오 회랑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회랑을 따라 걷다가 2층으로 올라가면 첼라(Cella)라고 하는 수사들의 독방이 42개가 있다. 프라 안젤리코는 원근법과 같은 당대의 기술과 수도사로서의 경건함과 신실함, 신학적 지식을 담아 수도원을 아름다운 프레스코화로 장식했다. 2층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면 맞은편 벽면에 ‘수태고지’가 그려져 있다. 생각보다 꽤 크고,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매혹적이고 섬세한 작품을 보는 순간 온몸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이다.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는 ‘반문하고’ ‘순종하는’ 단계를 담고 있다. 조심스럽게 사실을 알리는 가브리엘의 자상한 표정과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저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습니다”라며 반문하다가 말씀을 따르겠다고 받아들이는 마리아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황금빛이 은은하게 공간을 비치는 가운데 천사와 마리아 모두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있다. 고요하고 명상적인 분위기의 이 그림 속에 프라 안젤리코는 원죄없이 잉태가 이뤄지는 기독교 교리의 본질을 숭고한 아름다움으로 표현했다. 프라 안젤리코는 2층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수도사들의 방에 각기 다른 성서의 이야기를 프레스코화로 남겼다. 각 방에는 번호가 적혀 있지만 프레스코화에 담긴 그림은 성서의 순서대로 그려져 있지는 않다. 1번 방에는 부활한 예수를 처음 발견한 마리아가 손을 잡으려 하자 예수가 “나를 잡지 마라”라고 말하는 장면, 2번 방에는 죽은 예수의 시신을 가운데 두고 슬퍼하는 장면을 그린 ‘애도’, 3번 방에는 또 다른 ‘수태고지’가 그려져 있다. ●중세 명작·유물 가득…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프라 안젤리코의 프레스코화 외에도 산마르코 수도원에는 유명한 그림과 중세 수도원의 유물들이 많다. 수도원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코시모 데 메디치를 위해 북쪽 회랑 끝에 마련한 특별 기도실(39번방)에는 베노초 고촐리의 ‘동방박사의 경배’가 있다. 동방박사는 피렌체에서 선택받은 가문, 존경받는 가문, 선지자적인 가문이고 싶었던 메디치 가문의 수호 성인이었다. 피렌체의 인문학 아카데미에 참여하는 지식인들이 자주 모였던 아래층 수도사들의 식당(레페르토리오)에는 미켈란젤로의 스승으로 유명한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최후의 만찬’이 있다. 산마르코 수도원장으로 ‘허영심의 화형식’을 거행하고, 결국 자신도 화형당한 지롤라노 사보나롤라의 유품도 볼 수 있다. 수도원 2층 복도에는 아름다운 도서관도 있다. 아름답기만 할 뿐 아니라 세계 최초의 공공도서관이라는 명예까지 안고 있는 이곳에는 수도사들이 직접 쓰고 그린 수백년 된 필사본들이 진열장을 채우고 있다. 산마르코 수도원은 198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lotus@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1100년 전에도 불교는 ‘깨달음의 신앙’이었다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1100년 전에도 불교는 ‘깨달음의 신앙’이었다

    철원 도피안사(到彼岸寺)의 철조비로자나불이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은 조촐한 몸집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연꽃 대좌 위 부처의 앉은키는 91㎝ 정도다. 오늘날 한국 남성의 평균 체구보다 조금 작다. 하지만 천 년도 훨씬 더 넘은 옛날 철원 사람들의 몸집은 그런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이른바 등신불(等身佛)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을 것이다. ●앉은키 91㎝ ‘아담한’ 철조비로자나불 대적광전(大寂光殿)의 비로자나불은 신라 경문왕 5년(865)에 조성됐다. 부처님의 말씀 그 자체를 형상화한 법신불(法身佛)이다. ‘유점사 본말사지’에는 도선대사가 비로자나불을 조성해 안양사에 모시려 했으나 이운(移運) 도중 사라져 찾아보니 지금 자리에 좌정하고 있었다는 일종의 창건 설화가 남아 있다. 안양(安養)이라면 극락의 다른 이름이다. 설화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세력이 사후 정토세계를 추구하는 세력과 경쟁해 승리를 거두었음을 시사한다. 도피안사 비로자나불이 중요한 것은 불상 자체의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거니와 등에 돋을새김되어 있는 139자의 명문(銘文) 때문이기도 하다. 미술사학계는 신라 하대의 철조비로자나불을 호족의 발호와 연결시키곤 한다. 하지만 도피안사 철불이 여느 철불과 다른 것은 호족이 아니라 민중이 깨어 가는 모습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명문에 따르면 비로자나불은 1500명 남짓한 지역민이 ‘쇠붙이와 바위덩어리(石)처럼 굳은 마음으로 인연을 맺어’ 조성했다. 무엇보다 ‘비천한 사람들이 창과 방망이를 스스로 내리쳐 긴 어둠에서 깨쳐 갈 것이며, 게으르고 추한 뜻을 바꾸어 진리의 근원에 부합하기를 바란다’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민중의 신앙이 복을 비는 데로만 흐르지 않고, 참다운 이치를 갈구하는 단계로 발전했음을 보여 준다. 창건 설화에 대한 해석과도 부합한다. 여기서 하버드대학 출신이라는 미국인 스님 현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얼마 전 한국 불교의 기복(祈福) 신앙화에 문제를 제기해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도피안사 철불을 조성한 사람들은 벌써 9세기에 아무런 외부의 자극 없이 불교를 기복 아닌 깨달음의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으니 놀라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도피안사 철불의 가치를 미술사 측면에서만 평가하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복을 비는 데서 그치지 않고 ‘참다운 이치’ 갈구 이런 도피안사와 비로자나불이 20세기에 겪은 불행한 역사는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6·25전쟁 당시 절집은 불타 버리고 불상은 땅속에 묻혔다. 휴전 이후 군(軍)이 대적광전을 다시 짓고 나서야 불상을 모실 수 있었다는 줄거리다. 전쟁 뒤끝에 대적광전 불사(佛事)가 여법(如法)하게 될 리 없었다는 설명이 뒤따랐던 것 같다. 도피안사와 비로자나불은 21세기 들어 다시 적지 않은 변화에 맞딱뜨린다. 2007년 표면의 금박을 벗겨내어 철불의 순수한 질감을 되찾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2012년 시작된 대적광전 중창불사에도 같은 표현을 하기는 어렵다. 대적광전 자리에 큼지막한 절집을 새로 짓고, 기존의 절집은 옆으로 옮기고 극락보전(極寶殿)이라 편액했다. 새 절집이 크고 당당할수록 비로자나불은 작고 초라하게만 느껴진다. 새 절집에는 비로자나불이 앉는 바닥 구조물이 통째로 지하로 내려가는 일종의 비상용 엘리베이터도 만들었다. 전쟁의 참화가 다시 일어나도 비로자나불은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새로운 대적광전을 비로자나불과 비례도 맞지 않게 지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옛 대적광전을 극락보전으로 만든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창건 설화에 나타난 도피안사와 비로자나불의 의미를 스스로 훼손한 것은 아니었는지…. 절의 성격은 크게 모호해지고 말았다. 한국 불교의 정신적 전통이 흔들리는 증거의 하나가 아닌가 싶어 착잡하다. dcsuh@seoul.co.kr
  • 자살한 이인원 부회장, 43년 롯데맨으로 롯데의 2인자

    자살한 이인원 부회장, 43년 롯데맨으로 롯데의 2인자

     검찰 소환을 앞두고 자살한 이인원(69) 롯데그룹 이인원 부회장은 롯데의 2인자다. 신격호 총괄회장의 ‘복심’에 이어 신동빈 회장의 최측근으로 평가받는 등 2대에 걸쳐 신임을 받은 43년 롯데맨이다. 롯데 그룹의 ‘산 역사’로도 불린다. 소진세 정책본부 대외협력단장(총괄사장), 황각규 정책본부 운영실장(사장)과 함께 신동빈 회장의 ‘최측근 3인방’으로 꼽힌다. 황 실장과 소 단장은 이미 검찰조사를 받았다.  정책본부는 대외협력실, 운영실, 개선실, 인사실, 지원실, 비서실, 비전전략실의 7개 실무 부서로 구성된다. 이들 부서가 계열사 정책과 인사 등 주요 부문에 관여한다. 정책본부의 중심이 정책본부장인 이 부회장이다. 이 부회장은 지난해 10월 사내 인트라넷에 올린 ‘임직원에게 전하는 글’에서 “최근 경영권 분쟁은 롯데그룹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진통”이라면서 신 회장에 대해 “글로벌 마인드로 무장한 유능하고 검증된 사람”이라고 밝혔다.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조직을 추스르고 신 회장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다. 경북 경산에서 태어난 이 부회장은 경북사대부고와 한국외대 일본어학과를 졸업하고 1973년 롯데호텔에 입사했다. 1987년 롯데쇼핑으로 옮겼고 1997년 롯데쇼핑 대표이사를 맡아 지금도 대표이사다. 국내 500대 기업 중 최장수 최고경영자(CEO)이기도 하다. 2011년에는 롯데그룹에서 오너 일가가 아닌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부회장이 됐다.  수십년간 롯데쇼핑에서 신격호 총괄회장을 도와 롯데쇼핑의 사세를 확장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신 총괄회장의 입과 귀 노릇을 해 눈빛만 봐도 신 총괄회장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복심으로 꼽혔다. 경영권 분쟁에서 신 회장 편에 서자 신 총괄회장이 지난해 7월 한국 롯데그룹 최고위 임원 해임을 지시하는 인사명령서, 이른바 ‘살생부’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모태 신앙으로 기독교를 믿으며 술을 입에 대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꼼꼼한 성격으로 평가받았다. 전경하 기자 lark3@seoul.co.kr
  • 피렌체 산마르코 국립미술관: 프라 안젤리코의 프로스코화가 가득

    피렌체 산마르코 국립미술관: 프라 안젤리코의 프로스코화가 가득

     갈릴리 북쪽 산악지대에 있는 나사렛 마을에서 사는 마리아는 같은 지역에서 목수로 일하는 요셉과 곧 결혼하기로 돼 있었다. 어느 날 마리아가 조용히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을 때 낯선 빛이 무릎 위에 내려 앉았다. 깜짝 놀라 올려다 보니 하나님의 사자인 대천사 가브리엘이 서 있었다.  가브리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 마리아, 하나님이 그대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너를 크게 축복하셨으니 두려워 마라. 너는 이제 아들을 낳게 될 것이다. 그는 오래 기다려 온 왕이고, 다윗 왕의 후손이며, 그의 나라는 영원하리라.”  신약성서에 기록된 예수 탄생의 일화에서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를 예고하는 부분이다. ‘알리다’는 뜻의 라틴어 동사 ‘아눈티아레(annuntiare)’에서 유래한 고유명사 ‘수태고지(受胎告知,Annunciation)’의 순간은 그리스도교가 정착한 5세기 이래 서구 미술의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 졌다. 날개달린 천사가 한 여인에게 무언가 말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 있다면 그 그림의 제목은 열이면 열, ‘수태고지’라고 보면 된다. 15세기 르네상스 미술에서는 특히 산드로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걸출한 화가들이 ‘수태고지’를 주제로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개인적 취향의 차이는 있겠으나 지금까지 본 모든 수태고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꼽으라면 서슴치 않고 피렌체의 산마르코 수도원에 있는 프라 안젤리코(1387~1455)의 ‘수태고지’라고 답하겠다.  프라(Fra)는 수도사들의 이름 앞에 붙이는 호칭으로 ‘형제’라는 뜻이고, 안젤리코는 ‘천사같은’이라는 뜻이다. 본명이 구이도 디 피에트로인 그는 청년기에 채색 삽화가로 도제수업을 받고 화가로 활동하다가 23세에 도미니크회 수도원에 들어갔다. 깊은 신앙심을 지닌 그는 기도의 행위로서 그림을 그렸다. 채색 필사본과 제단화로 이름을 알리던 중 도미니크회가 1436년 인수한 피렌체의 산마르코 수도원의 장식화를 맡게 됐다.  산마르코 수도원은 본래 실바네스트리 수도회 소유였던 것을 코시모 데 메디치의 후원으로 재건축한 것이다. 메디치 궁을 지은 건축가 미켈레초가 1437년부터 재건축 공사를 시작해 16년만인 1452년 지금의 수도원 건물이 완성됐다. 프라 안젤리코는 1436년부터 1445년까지 이 곳에 머물며 벽화와 회랑의 프레스코화, 수도사들의 독방 프레스코화를 완성했다. 현재는 산마르코 국립박물관으로 불리지만 프라 안젤리코 미술관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피렌체의 두오모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수도원은 광장 쪽으로 1층에 성당이 있고 그 왼쪽으로 들어가면 큰 정원과 아치가 이어지는 성안토니오 회랑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회랑을 따라 걷다가 2층으로 올라가면 첼라(Cella)라고 하는 수사들의 독방이 42개가 있다. 프라 안젤리코는 원근법과 같은 당대의 기술과 수도사로서의 경건함과 신실함, 신학적 지식을 담아 수도원을 아름다운 프레스코화로 장식했다.  2층으로 가기위해 계단을 오르면 맞은 편 벽면에 ‘수태고지’가 그려져 있다. 생각보다 꽤 크고, 기대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매혹적이고 섬세한 작품을 보는 순간 온 몸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이다.  회화의 주제로서 수태고지 장면에서 마리아의 모습은 시간적 순서에 따라 5가지 미덕의 상태로 표현된다. 천사의 출현으로 경이로워 하는 당혹한 상태, 천사의 말씀을 듣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심사숙고의 상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를 묻는 질문의 상태, 말씀을 받아들이는 순종의 상태, 마지막으로 예수를 잉태하게 되는 공로의 상태다.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는 ‘반문하고’ ‘순종하는’ 단계를 담고 있다. 조심스럽게 사실을 알리는 가브리엘의 자상한 표정과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저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습니다”라며 반문하다가 말씀을 따르겠다고 받아들이는 마리아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황금 빛이 은은하게 공간을 비치는 가운데 천사와 마리아 모두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있다. 고요하고 명상적인 분위기의 이 그림 속에 프라 안젤리코는 원죄없이 잉태가 이뤄지는 기독교 교리의 본질을 숭고한 아름다움으로 표현했다.  그리스도교에서 수태고지는 예수가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동시에 지닌 존재임을 나타내는 중요한 기록이었다. 또한 ‘신을 탄생하게 한 여자’로서의 마리아를 예고하는 중요한 순간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를 그림에 쓰거나 백합, 흰 수건 등으로 그려 넣어 마리아의 순결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지만 프라 안젤리코는 그런 직접적인 상징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화면에서 가브리엘과 마리아가 있는 장소로 수도원의 로지아를 그렸다. 로지아의 아치는 마리아를 상징하는 ‘M’자형이다. 프라 안젤리코는 이런 기적이 수도원에서 일어났을 것이라 상상하며 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프라 안젤리코는 2층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수도사들의 방에 각기 다른 성서의 이야기를 프레스코화로 남겼다. 각 방에는 번호가 적혀있지만 프레스코화에 담긴 그림은 성서의 순서대로 그려져 있지는 않다. 1번 방에는 부활한 예수를 처음 발견한 마리아가 손을 잡으려 하자 예수가 “나를 잡지 마라”고 말하는 장면, 2번 방에는 죽은 예수의 시신을 가운데 두고 슬퍼하는 장면을 그린 ‘애도’, 3번 방에는 또 다른 ‘수태고지’가 그려져 있다.  어두운 복도의 양쪽으로 무거운 문이 있고 그 문을 열면 창문 하나가 외부 세계와 소통하는 유일한 창구인 두 평 남짓한 독방이다. 이곳에서 수도사들은 성서에 나타난 수많은 기적들과 도미니크회 순교자들의 모습을 그린 프라 안젤리코의 프레스코화를 보면서 고요하게 신을 생각하고 묵상의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방마다 다른 일화를 표현한 프레스코화가 있는 2층은 수도원이 폐쇄된 19세기가 되어서야 대중에게 공개됐다.  프라 안젤리코의 프레스코화 외에도 산마르코 수도원에는 유명한 그림들과 중세 수도원의 유물들이 많다. 수도원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코시모 데 메디치를 위해 북쪽 회랑 끝에 마련한 특별 기도실(39번방)에는 베노초 고촐리의 ‘동방박사의 경배’가 있다. 동방박사는 피렌체에서 선택받은 가문, 존경받는 가문, 선지자적인 가문이고 싶었던 메디치 가문의 수호성인이었다. ‘동방박사의 경배’ 속에는 피렌체의 아버지로 불리는 코시모 데 메디치와 그의 아들 피에로, 손주 로렌초 데 메디치가 그림에 등장한다. 피렌체의 인문학 아카데미에 참여하는 지식인들이 자주 모였던 아래층 수도사들의 식당(레페르토리오)에는 미켈란젤로의 스승으로 유명한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최후의 만찬’이 있다.  수도원장이었던 지롤라노 사보나롤라의 유품도 볼 수 있다. 사보나롤라는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 역사에 반드시 등장하는 인물이다. 15세기 후반은 르네상스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다. 도시는 부유했고 정치적으로도 안정되면서 사람들은 사치와 향락에 빠졌고 예술과 종교도 세속적으로 흘러갔다. 이때 산마르코 수도원장이 되어 피렌체에 입성한 사보나롤라는 광기어린 설교로 “지금 당장 청빈한 삶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죗값을 치를 것”이라고 사람들을 선동했다.  놀랍게도 로렌초 데 메디치가 사망하던 해에 프랑스의 샤를 8세가 피렌체를 침공했고 1494년 로렌초의 아들 피에로 데 메디치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 도시에서 추방됐다. 사보나롤라의 추종자들은 피렌체를 장악하고 신의 이름으로 독재정치를 펼쳤고 사보나롤라는 온갖 사치스러운 것들을 시뇨리아 광장에 모아놓고 ‘허영심의 화형식’을 거행하고 성직자들의 타락을 비난하며 교황청의 개혁을 요구한다. 과격함이 극에 달하자 결국 교황청은 1497년 그를 파문하기에 이르렀다. 사보나롤라는 허영심의 화형식이 있었던 시뇨리아 광장에서 1498년 공개화형된다. 산마르코 수도원에는 사보나롤라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프라 바르톨로메오가 1508년에 그린 사보나롤라의 초상화 2점이 남아있다. 아직 사보나롤라의 이름을 올리는 것이 죄악시되던 때라 바르톨로메오는 그림에 ‘순교자 베드로’라는 제목을 붙였다.  수도원 2층 복도에는 아름다운 도서관도 있다. 아름답기만 할 뿐 아니라 세계최초의 공공도서관이라는 명예까지 안고 있는 이곳에는 수도사들이 직접 쓰고 그린 수백년 된 필사본들이 진열장을 채우고 있다. 산마르코 수도원은 198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현장 블로그] 고맙습니다, 고된 살림에 힘이 된 ‘수녀님 도시락’

    최근 본지 독자 투고 담당자 앞으로 편지 하나가 왔습니다. 부산 남구에 사는 이동만(82)씨가 보낸 손편지였습니다. 오랜 시간을 머금은 듯 노르께한 편지지에 정성스럽게 꾹꾹 눌러쓴 글씨로 사연을 풀어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지난 6월 10일부터 수영구 광안1동에 있는 사랑의성모 수녀회에서 ‘무지개 도시락’을 배달받는데, 진수성찬을 대접받으니 ‘벼락부자’가 된 것 같다는 겁니다. 첫날부터 시래깃국과 멸치볶음, 나물무침으로 포식했는데, 시래깃국은 옛날 어머니가 해 주시던 맛과 똑같다고 했습니다. 이후 카레라이스와 소고깃국, 추어탕, 북어를 넣은 계란국 등 한결같이 맛있고 푸진 도시락이었다고 합니다. 1년에 한 번 먹을까 말까 한 삼계탕도 수녀님 덕에 세 번이나 드셨답니다. 이씨는 7년 전 콩팥 수술을 받은 아내를 수발하며 살림하느라 매일 반찬 걱정을 했는데 도시락 덕에 한시름 덜었다고 합니다. 식비도 줄었습니다. 매달 기초수급자 지원금으로 62만원을 받는데, 이 중 식비가 30만원 정도였답니다. 이씨는 “나라님도 마음대로 인상 못 해 주는 생계비를 수녀님이 대폭 인상해 주셨다”며 희망이 생겼다고 합니다.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어 수녀회에 연락했습니다. 그러나 수녀님들은 한사코 취재를 마다했습니다. 수녀회는 ‘사조직’이라 언론에 공개되는 게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입니다. 얘기를 들려줄 사람을 수소문해 이 수녀회에서 7년간 봉사 활동을 했다는 한 의류업체 직원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2008년 수녀회가 설립된 이후부터 줄곧 수녀님 4분과 자원봉사자들이 음식을 손수 만들어 소외된 이웃에게 도시락을 배달하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 독거노인 등 80여 가구를 지원하고, 알코올중독자들을 위한 치유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자기 홍보’의 시대라고 합니다. 자신의 장점을 적극 알려야 남들이 알아준다는 것이죠. 그러나 선행을 알리든 알리지 않든, 선행의 의미 자체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받는 이에겐 행복을 주고, 다른 이들에겐 깊은 울림을 주는 것도 분명합니다. 신앙이나 종교의 힘을 초월해서 말이죠.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 [알쏭달쏭+] 성인물, ‘행복한 결혼생활’에 도움 될까?

    [알쏭달쏭+] 성인물, ‘행복한 결혼생활’에 도움 될까?

    성인 영상물을 자주 접하는 부부일수록 이혼할 확률이 높다는 흥미로운 연구결과가 나왔다. 미국 오클라호마주립대학교 연구진에 따르면 성인 영화나 음란 사진 등을 즐기는 부부의 경우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서 이혼의 위기가 높아졌으며, 특히 이러한 현상은 남편보다 아내에게서 더욱 두드러졌다. 연구진은 2006~2014년 5000명의 성인을 대상으로 한 종합사회조사(GSS, General Social Survey, 미국 시카고대가 1972년부터 주관해 온 조사)결과를 분석했다. 종합사회조사는 2006년과 2010년, 2014년 총 3회에 걸쳐 실시됐으며 연구진은 3회의 조사 결과를 비교·분석하는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그 결과, 조사 시작(2010년) 당시에는 성인 영상물을 보지 않았지만 점차 이를 보게 됐다고 답한 사람은 전체의 7%, 3번의 조사기간 내내 단 한 번도 성인 영상물을 보지 않았다고 답한 사람은 71%, 조사기간 내내 성인 영상물을 봤다고 답한 사람은 전체의 15%로 나타났다. 또 처음엔 보지 않았지만 조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성인 영상을 즐기게 된 사람들의 경우, 이혼 가능성이 6%에서 11%로 약 2배 증가했다. 여성의 경우 성인물을 보기 시작한 이후, 이전과 비교했을 때 이혼 가능성이 6%에서 16%로 3배 가까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성인 영상물 시청과 이혼의 가능성은 젊은 층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독특한 것은 만약 교회를 열심히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는 부부라면 함께 성인 영상과 사진을 즐긴다 해도 이혼 위험이 높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연구진은 이와 관련해 “설사 부부가 성인 영상물을 함께 즐긴다 해도, 이혼은 사회적 낙인과도 마찬가지라는 종교적 관점이 결혼을 보호하는 효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반면 2010년 첫 조사 당시에는 성인 영상물을 본다고 밝혔다가 마지막 조사에서는 더 이상 보지 않는다고 밝힌 사람들에게서는 이혼 가능성이 줄어든 것을 확인했다. 이와 관련해 데이비드 레이 영국 심리학자는 “이러한 결과는 성인 영상물을 보는 여성 혹은 남성이 배우자와 배우자의 관계에 만족하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이러한 현상이 지속될 경우 이혼의 위험을 높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연구를 이끈 오클라호마대학교의 사무엘 페리 교수는 “우리는 성인 영상물 시청을 완전히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특정한 상황에서는 성인 영상물이 결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것 뿐”이라고 전했다. 이번 연구결과는 11회 미국사회학회(American Sociological Association) 연례회의에서 발표됐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고분벽화서 찾은 고구려 흥망성쇠

    고분벽화서 찾은 고구려 흥망성쇠

    고구려 벽화고분/전호태 지음/돌베개/448쪽/3만 5000원 쌍영총, 안악3호분, 덕흥리고분, 장천1호분, 개마총…. 많은 이들이 역사책에서 만났을 고구려 벽화고분들이다. 그런데 이 고분들에 대한 일반 인식은 이름과 존재의 알음 수준에 머물러 있고 학계의 연구 진전도 그 일천함을 크게 넘지 못한다. 이 책에선 30년 넘게 고구려 벽화고분에 천착한 울산대 교수가 절박함을 토로해 눈에 띈다. ‘고분벽화는 종교·신앙의 세계를 담은 동시에 무덤 주인이 살던 세계의 모습을 그대로 옮긴 그림’ 그 정의대로 저자는 고구려 고분벽화를 고구려인의 생활상과 세계관, 내세관까지 고스란히 담아낸 타임캡슐로 본다. 그리고 그 타임캡슐을 미술영역에 가두지 않고 있다. 대표적인 벽화고분 10기의 양식 발전에 얹어 당대의 정세며 역학관계를 세밀하게 들춰 흥미롭다. 가장 도드라진 점은 대표 벽화고분들을 시기별, 지역별로 명쾌하게 구분 지은 것이다. 안악3호분과 덕흥리벽화분으로 대표되는 4세기~5세기 초 무렵 생활풍속 중심의 초기 벽화들을 보자.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일상생활을 묘사한 듯한 화풍이 특징이다. 무덤 주인이 현재와 큰 차이 없는 세계에서 내세 삶을 꾸린다고 믿었던 경향과 관련이 깊어 보인다. 실제로 현세보다 내세에서 더 나은 생활을 하기 바랐던 때문인지 인물이 다소 과장되게 표현되기도 한다. 고구려 전성기랄 수 있는 5세기 중엽~후반기 수십 기가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벽화고분은 불교와 전통신앙의 공존을 강하게 드러낸다. 안악2호분, 수산리벽화분, 쌍영총, 삼실총, 장천1호분이 그것들이다. 그 무덤들에선 불교의 여래(如來·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자유로운 존재)가 주관하는 정토를 그린 그림과 함께 음양오행론에 바탕을 둔 사신도(四神圖)가 두드러진다. 당시 동아시아를 관류하던 보편적 문화요소와 고구려적 개성이 함께 묶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멸망 무렵인 7세기 전후의 후기 무덤 속 벽화들은 사신도 일색이다. ‘사신도 무덤’으로 불리는 개마총, 진파리1호분, 통구사신총이 그것들이다. 그런데 이 사신도들은 화려하지만 일관성과 방향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장수왕 서거 후 피지배층의 불만과 불안이 곳곳에서 피어났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상징처럼 느껴진다. 현미경 들이대듯 구조, 양식의 변화상을 세밀하게 풀어 놓는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고분들에 스며 있는 개연성에 자연스럽게 눈뜨게 된다. 북에서 1949년·1957년 발굴한 안악3호분과 1976년 수습한 덕흥리벽화분은 대표적 사례이다. 무덤 주인공에 따라 고구려가 지금의 베이징, 서쪽으로 시안까지 이어지는 유주지역의 지배 여부를 가릴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안악3호분 한문 묵서명 속 ‘동수’라는 인물이 당시 전연의 왕위계승 다툼에서 밀려나 고구려로 망명한 장군 동수와 같은 인물인지, 고구려 미천왕이나 고국원왕인지를 따지는 논쟁이 진행 중이다. 덕흥리벽화분 묵서명 속의 유주자사 진이라는 무덤 주인공이 고구려로 망명한 북중국 왕조 관료였는지 고구려 출신 대귀족이었는지도 결론짓지 못한 상태이다. 그 결정에 따라 고구려 영역이 크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 벽화고분은 고구려가 멸망한 뒤 1000년 넘게 잊혔던 문화유산이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될 무렵 벽화 속 그림이 알려져 뒤늦게 관심을 끌게 됐고 특히 중국의 동북공정과 2004년 북한·중국 소재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로 화제가 됐다. 하지만 고구려 벽화고분을 중심 연구과제로 삼은 연구자는 국내외를 통틀어 몇 손가락에 꼽힐 정도라고 한다. “고대의 특정시기 세계를 가시적으로 보여 주는 뛰어난 미술이자 건축물이 광범위한 지역에 이토록 많이 다채롭게 남은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는 저자는 이렇게 안타까움을 털어놓는다. “여전히 기초 조사와 발굴보고 정리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유물들은 급속도로 훼손되어 가고 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위기의 불교…기복보다 수행이 답

    위기의 불교…기복보다 수행이 답

    현각 스님 일갈 계기 자성 목소리 “신행 혁신만이 위기 극복 대안” 사찰 간 프로그램 공유 소통도 ‘신행 혁신으로 전법의 새 지평을 열겠다.’ 한국 불교 맏형 격인 조계종이 포교 전략을 대대적으로 수정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3월 취임한 조계종 포교원장 지홍 스님(불광사 회주)은 지난 17일 저녁 취임 후 처음으로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기자들과 만나 “한국 불교계의 위기감이 극한상황으로 치닫고 있다”며 “부처님 가르침대로 신행 풍토를 다시 세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거듭 다짐했다. 조계종 집행부의 핵심인 3원장(총무원장, 교육원장, 포교원장) 중 대중 담당 최고 수뇌가 자청해 기자들을 만난 건 이례적이다. “잘 알려졌듯이 출가자가 급감하고 있어요. 10년 전에 비해 3분의1 수준입니다. 중소 사찰의 경우 운영이 힘들 정도이지요. 출가자 감소 같은 외형적인 위축 말고도 신도들이 40~50대 이후의 고령화로 치닫는 내용적인 문제가 더 심각합니다.” 대면 처음부터 한국 불교의 위기를 입에 올린 지홍 스님은 그 위기의 원인을 사회적 요구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한 탓으로 콕 짚었다. 그리고 신도들이 기복보다 수행을 통해 자기 삶을 바꿀 수 있는 방편들을 취임 후 줄곧 고민해 왔다고 귀띔했다. “지금 상황이 지속된다면 10년 안에 한국 불교가 존립할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지홍 스님은 부처님이 가르쳤던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으뜸 교훈인 ‘보살행’의 올바른 실천이야말로 위기의 한국 불교를 다시 세울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자성의 목소리를 높였다. “앞으로 대중을 위하지 못하는 종교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자리를 함께한 포교원 연구실장 원철 스님도 지홍 스님을 거들었다. “종교가 이념과 말로만 살 수 없는 세상입니다. 특정 종교가 신앙과 삶을 독점할 수 없게 됐지요. 시대의 요구가 바뀐 것입니다. 세상의 변화 속도가 화살처럼 빠른데도 종교는 관성을 유지하고 있지요.” 그 위기의 타개를 위해 포교원 스님들은 구체적인 대안들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우선 신행 혁신운동이다. 신도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나와 가족 중심에서 이웃과 사회, 나라로 돌려 보자는 것이다. 새로운 신자상을 정립해 행동지침을 곧 발표하겠단다. 그동안 중앙종무기관이 좌우했던 포교 정책도 확 바꾸겠다고 했다. 개별 사찰과 신자들이 갖고 있는 좋은 프로그램이며 자료, 노하우를 공유하는 쌍방향 소통에의 천착이다. 총무원을 비롯한 중앙종무기관과 본말사·스님·신도들의 평등한 관계 수립에 적극 나설 뜻도 비쳤다. 소모임과 공동체를 적극 만들어 사회적 요구를 외면하지 않는 신행 문화를 단계적으로 정착시키겠단다. 이날 모임에서 가장 많은 말이 오간 것은 역시 기복이었다. 사찰 속에 깊숙이 파고든 자본주의의 패악과 맞물려 우선 철폐해야 할 대상은 나와 내 가족에 치우친 기도와 기원이라고 스님들은 입을 모았다. “지금 한국 불교에 흔한 기복은 무속적 기복의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대중들은 종교의 신앙 행태가 시대에 뒤진 그런 파행적 기복에 머물러선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지홍 스님) “한국 불교에서 생활과 종교의 일치는 바로 삶과 올바른 불교적 가르침의 올곧은 연결에서 찾을 수 있다.”(원철 스님) 이와 관련해 지홍 스님은 모임 말미에 최근 ‘돈 밝히는 기복 불교’ 운운으로 관심을 모았던 현각 스님의 발언에 대한 조계종단의 입장을 에둘러 전했다. “더 적극적이고 책임감 있는 발언이었어야 했다. 원칙적으로 종단 내에서도 개혁을 바라고 있는 많은 스님들은 현각 스님의 일갈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와 신행까지 모두 포함할 수 있는 조언과 질타가 있었으면 좋겠다.” 글 사진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현각 스님 ‘일침’에 조계종 반격 “책임있게 해야”

    현각 스님 ‘일침’에 조계종 반격 “책임있게 해야”

    최근 미국 하버드대 출신의 ‘푸른 눈의 수행자’ 현각 스님이 한국불교의 기복신앙화 문제를 비판한 데 대해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장 지홍 스님은 “원칙적으로는 현각 스님의 비판을 수용한다”고 밝혔다. 지홍 스님은 17일 저녁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어 사견을 전제로 이같이 밝혔다. 스님은 이어 “하지만 (현각 스님이) 더 적극적으로 책임 있게 이야기해야 한다”며 “페이스북이 아닌 보다 공식적인 입장에서 이야기해야 하고, 불교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한국사회 종교의 신행 형태를 함께 이야기해야 울림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 현각 스님은 지난달 페이스북을 통해 한국불교의 기복신앙화 문제 등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더불 지홍 스님은 이날 간담회에서 △신행혁신운동 전개 △플랫폼 방식의 전법 허브 구축 △사찰 및 포교 신도단체들과의 수평적 네트워크 구축 △유대와 공존의 다양한 공동체 만들기 △나눔과 베풂의 선행문화 창출 등 5대 종책 기조를 발표했다. 포교원은 5대 정책 기조를 실현하기 위한 9가지 과제도 제시했다. 이들 과제에는 △신행혁신 운동과 새 불자상 확립 △플랫폼 방식의 포교자원·콘텐츠 발굴 △신도교육 내실화와 교재 개편 △포교·신도단체 자립·자율성 강화 △전법 중심 도량 확대개편 △미래세대를 위한 전법 대안 마련 △도심 및 농어촌 지역 사찰 공동체 모델 개발 △포교 지도(데이터베이스) 구축 △신행혁신을 위한 포교제도 및 종법령 재정비 등이 담겼다. 지홍 스님은 “불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가 기복적 차원에 머물러 있다”며 “불교의 경우 부처님께서 계시던 시절 ‘보살행’의 불교 수행 방식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 [新국토기행] 익산의 노을은 백제와 더불어 살아간다

    [新국토기행] 익산의 노을은 백제와 더불어 살아간다

    전북 익산시는 백제 왕도를 품은 역사·문화·관광도시다.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관광객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호남선과 전라선이 분기하는 교통·물류·유통 중심 도시로 볼거리와 먹거리가 풍부하다. 전북의 서북부 지역으로 금강을 사이에 두고 충남과 마주 본다. 29개 읍·면·동으로 이뤄졌다. 도내 14개 시·군 가운데 전주시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31만명)가 많다. 국내 유일의 국가식품클러스터를 기반으로 세계적인 식품도시로 발돋움한다는 청사진을 가지고 있다. [볼거리] ●미륵사지·왕궁리… 백제 왕도와 만날 시간 익산시에는 백제와 마한의 역사유적이 산재해 있다. 어딜 가나 흔하게 과거가 현재에 오버랩된다. 국보 3개, 보물 8개, 다수의 사적이 분포한다. 이 가운데 지난해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이 가장 유명하다. 미륵사지는 백제 최대 가람으로 미륵신앙의 구심점이다. 당시 백제의 건축·공예 등 각종 문화 수준이 최고로 발휘됐다. 신라의 황룡사가 1탑 3금당식인 것과 달리 미륵사는 3탑 3금당식 가람 배치다. 대중까지 용화세상으로 인도하겠다는 미륵신앙이 바탕을 이뤘다. 사적 제150호인 미륵사지에는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 석탑과 보물 제236호인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왕궁리 유적은 1998년 9월 사적 제408호로 지정됐다. 면적은 21만 6862㎡에 이른다. 미륵사지와 함께 백제 최대 규모 유적으로 꼽힌다. 백제의 왕도였다는 왕도설과 백제 후기 익산 천도설 등 역사적 가설이 뒷받침되는 유적이다. 이곳에는 국보 제289호인 왕궁리 5층 석탑이 남아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국보 제153호인 사리장엄구 등을 전시하는 유적전시관이 2008년 개관했다. ●국내 유일 보석박물관… 눈 호강할 시간 왕궁면 호반로에 자리잡은 국내 유일의 보석박물관이다. 부지 14만 1990㎡,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1만 2403㎡ 규모다. 진귀한 보석 11만 8000점이 있다. 일상생활에서 볼 수 없는 보석 꽃, 탄생석, 오봉산일월도 등 진귀한 보석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2010년 9월 개관한 주얼팰리스에는 65개 매장이 들어서 시중보다 싼 값에 보석을 판매한다. 일본, 중국 등 해외 업체도 입점해 다양한 보석을 선보인다. 2011년 이후 매년 보석대축제를 개최한다. 보석박물관 옆에는 화석전시관과 공룡테마공원이 조성돼 가족단위 휴식공간으로도 인기를 끈다. ●이병기 생가… 고풍스러운 선비의 삶 엿볼 시간 여산면 가람1길 64-8에 자리잡은 전북 기념물 제6호다. 생가의 탱자나무는 전북 기념물 제112호다. 이병기 선생은 한국을 대표하는 근대문학의 선구자다. 현대시조 중흥을 이룩한 시조시인이다. 별, 난초, 냉이꽃 등 문학적 가치가 높은 작품을 다수 남겼다. 우리말과 얼을 지키기 위해 힘썼던 선생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전북대 교수를 역임하며 후진을 양성해다. 생가는 조선 후기 양반집 배치를 따랐다. 안채와 사랑채, 고방채, 모정 등이 남아 있다. 모정 앞쪽에는 작은 연못 2개를 파 놓았다. 초가지붕이고 건물 자체는 큰 특징이 없지만 사랑채에서 고풍스러움이 묻어난다. 모정과 연못이 선비 집안의 조촐한 느낌을 준다. ●4대 종교 성지… 신과 대화할 시간 익산은 불교, 천주교, 기독교, 원불교를 상징하는 4대 종교 성지를 간직하고 있다. 숭림사(웅포면 백제로 495-57)는 신라 경덕왕 때 진표율사에 의해 창건됐다. 보광전은 보물 825호다. 청동은입문향로는 도 유형문화재 67호, 목조석가모니불좌상은 도 유형문화재 188호다. 나바위성당(①·망성면 나바위1길 146)은 국가사적 제318호다. 한국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금강하구인 황산 나루터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됐다. 1897년 본당을 설립한 베르모렐 신부가 1906년 신축공사를 시작해 1907년 완공했다. 프랑스의 프아넬 신부가 설계하고 중국 노동자가 건축했다. 붉은 벽돌의 서구식 건축양식에 한국식 기와지붕을 얹은 독특한 양식이다. 두동교회 구본당(성당면 두동길 17-1)은 전북 문화재 제179호다. 1923년 한옥 형태로 지은 교회다. 오른편에 예배를 알리는 데 쓰는 종탑이 있다. 기독교와 한국의 전통을 잘 살린 건축물이란 평가다. 건물 내부 한쪽은 남자석, 다른 한쪽은 여자석으로 구분하고 중앙에 휘장이 처져 남녀가 서로 볼 수 없게 했다. 원불교 중앙총부(익산대로 501)는 1924년 9월 최초로 총부가 건립된 이후 개축과 개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등록문화재 제179호다. 소태산 박중빈이 원불교를 선포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곳이다. 원불교의 역대 지도자들 유해를 봉안한 곳으로 원불교의 상징적 공간이다. 본원실, 공회당, 대각전 등 목조 건축물 8동과 소태산 대종사 탑, 비석 석조물 등이 있다. ●웅포관광지… 강 위 일몰에 반할 시간 웅포(②)는 바다가 아닌 강 위로 일몰을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곳이다. 서해 낙조 5선 중 하나인 웅포 곰개나루에는 캠핑장이 있다. 금빛으로 물들이는 금강을 곁에 끼고 지는 해를 바라보며 낭만을 즐길 수 있다. 캠핑장은 일반캠핑장 58면, 오토캠핑장 6면을 갖췄다. 시원한 풍광을 좋아하는 캠퍼들이 즐겨 찾는다. 캠핑장 옆 수상레저클럽에서는 수상스키 등을 즐길 수 있다. 그 옆으로 난 자전거길을 달리며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기도 좋다. 입점리 고분전시관, 숭림사, 함라산 둘레길 등 인근에 볼거리가 풍성하다. 캠핑장 옆 덕양정에서는 낙조를 감상할 수 있다. 곰개나루는 포구의 지형이 마치 곰이 금강물을 마시는 형상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이곳은 고려말 최무선 장군이 왜구를 물리쳤던 진포대첩의 현장이기도 하다. 매년 12월 31일에는 해넘이 축제가 열린다. 익산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먹거리] ●고구마… 날씬이로 만들어줘요 고구마는 익산을 대표하는 농특산물이다. 익산의 고구마 재배는 1834년 전라관찰사였던 서유구가 전파한 것으로 알려졌다. 1950년대 ‘황등고구마’로 명성을 날렸다. 색깔이 붉고 목이 막힐 정도로 포근포근한 밤고구마로 유명하다. 2000년대 다이어트 붐을 타고 ‘날씬이고구마’로 소비자들의 인기를 끌었다. 2010년 익산의 농산물 대표 브랜드 ‘탑마루고구마’로 이름 붙여졌다. 삼기면, 황등면, 왕궁면, 팔봉동 등이 주생산지다. 2600여 농가가 750㏊에서 1만 965t의 고구마를 생산해 160억원의 소득을 올린다. 익산 고구마는 오염되지 않고 비옥한 황토밭에서 재배된다. 구릉지대로 토질, 기후, 강수량 등이 고구마 재배에 천혜의 조건을 갖췄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고구마는 당도가 높고 칼륨과 인, 비타민C가 풍부하다. 익산시가 기후와 토질에 맞는 우수 품종을 개발하고 무병묘, 유기질 비료, 땅 뒤집기 지원을 한다. 재배 단계별로 엄격한 품질관리를 하고 하품은 출하를 금지한다. 최근에는 밤고구마와 물고구마의 장점만 가진 신품종을 재배해 인기가 더욱 높아졌다. ●마약밥… 마의 모든 맛을 보여드려요 신동 마요리 전문점 ‘본향’은 ‘마’를 이용해 각종 음식(③)을 선보이는 한정식집이다. 200여가지의 창작요리를 선보인다. 문화체육관광부 지정 ‘전국 100대 음식점’에 선정된 전국구 맛집이다. ‘2006 대한민국 우리 농산물 요리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2007년 국제음식박람회 향토요리경연대회’에서는 농림부장관상 금상을 받았다. 마 전문 음식점이란 타이틀에 걸맞게 모든 음식에 마가 들어간다. 익산지역에서 생산되는 마를 주재료로 한다. 마는 한방에서 위장장애, 소화불량, 당뇨예방에 좋은 약재로 쓰인다. 마즙, 마죽, 마샐러드, 마녹차전, 마튀김, 마조림, 마떡갈비 등은 기본이다. 잘게 채를 썬 마를 고명으로 얹은 오징어 먹물 잡채, 유부 안에 마와 두부를 다져 넣어 만든 마누라가 유명하다. 마와 연어, 다시마를 곁들여 먹는 마삼함, 마식혜, 각종 약재와 마를 담아 쪄낸 약밥이 절로 구미를 당기게 한다. 여름에는 보양식으로 오방색 삼계탕이 인기다. ●고려당… 50년 전통의 만두 맛이 끝내줘요 중앙동 익산역 앞 골목길에 있는 50년 역사의 분식집이다. 대표 메뉴는 만두와 찐빵, 메밀국수다. ‘백종원의 3대 천왕’에 나온 이후 손님들의 발길이 줄을 잇는다. 만두는 어른 주먹 크기의 옛날식 만두다. 피가 거칠고 두껍지만 자연 발효시켜 식감이 쫄깃하면서 부드럽다. 만두소는 말린 무가 주재료로 소화가 잘된다. 당면과 돼지고기가 듬뿍 들어 있다. 꼬들꼬들한 식감과 담백한 뒷맛이 일품이다. 8개 1인분에 6000원으로 가격도 착하다. 찐빵은 인공발효제나 감미료를 사용하지 않는다. 팥 앙금이 가득한 옛날 찐빵의 풍미를 그대로 간직한다. 메밀국수는 무즙 대신 땅콩가루를 뿌려 먹는다. 시원하면서 정갈한 맛을 자랑한다. ●황등비빔밥… 토렴할까요, 그냥 낼까요 황등면에는 유명한 비빔밥 식당 3곳이 있다. 2곳은 밥 위에 더운 선짓국물을 여러 번 부었다가 따라내는 토렴을 거치는 육회비빔밥집이고 1곳은 토렴을 하지 않는 식당이다. 토렴을 하면 밥이 질척해지면서 찰기가 생기고 양념이 스며들어 구수하면서 깊은맛을 낸다. 진미식당은 토렴을 거친 비빔밥 위에 황포묵과 파채, 김, 시금치 등 고명을 얹어 낸다. 간이 세지 않아 심심한 맛이나 질리지 않고 은근한 풍미를 자랑한다. 풍물시장 안에 있는 시장국밥은 밥과 콩나물을 함께 토렴한 뒤 시금치를 넣고 참기름 양념장과 비벼 먹는다. 특별한 고명은 없지만 파채와 함께 무쳐진 특유의 육회 맛과 돼지비계에서 나오는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한일식당은 토렴을 하지 않은 비빔밥 위에 메밀묵과 당근, 호박, 콩나물 등 각종 계절 나물 고명을 얹는다. 알싸한 고추장 소스가 식감이 풍부한 나물과 어우러져 깔끔한 맛을 낸다. ●탑마루쌀… 전국 최고의 쌀로 밥 지어보세요 익산시 공동브랜드 탑마루쌀(골드라이스)은 전국 최고의 쌀로 유명하다. 2013년 전국 고품질 브랜드 쌀 평가에서 금상을 받는 등 수상 경력이 화려하다. 쌀의 품위, 품종 순도, 식미 등 25개 항목 평가에서 모두 상위 평가를 받는다. 태릉선수촌에 납품돼 국가대표 쌀로 통한다. 농가들이 영농조합법인을 만들어 생산, 수집, 가공, 포장 등 각종 과정을 철저히 관리해 고품질을 유지한다. 익산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태릉 목사님은 지금 8번째 올림픽 ‘직관’중

    태릉 목사님은 지금 8번째 올림픽 ‘직관’중

    1988년 이후 직접 경기장 방문 학생 때 선수생활… 부상에 포기 “김재범, 장미란, 이원희, 함상명, 김잔디, 정보경….” 8일(현지시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파크.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한 할머니가 스포츠 스타들의 이름을 줄줄줄 뀄다. 심지어 올림픽을 ‘직관’(직접관람)하는 것도 이번이 8번째라고 한다. 외모와 달리 범상치 않은 할머니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1990년부터 서울 노원구 태릉선수촌 내에서 예배당을 운영해 온 윤덕신(66·여의도순복음교회 체육교구) 목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날 만난 윤 목사는 지구 반대편인 브라질까지 오느라 여독이 덜 풀렸을 텐데도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응원을 해 보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국내에서 열린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바르셀로나(1992년)·애틀랜타(1996년)·시드니(2000년)·아테네(2004년)·베이징(2008년)·런던(2012년)올림픽 그리고 이번 리우대회까지 모두 직접 경기장을 찾아다녔다”며 “목이 터져라 응원한 것이 통해서 선수들에게 좋은 일들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렇게 내 돈을 들여가며 열심히 쫓아다니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윤 목사는 타고난 운동신경이 좋아 초등학교 시절에는 육상선수로 뛰었고, 중학교 때는 농구선수로 활동했었다. 하지만 운동 도중 갈비뼈 쪽에 강하게 공을 맞아 늑막을 다치면서 1년여간 치료를 받았다. 이때 몸이 많이 상해 운동선수의 길을 포기했다. 성인이 돼서는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됐지만 운동에 대한 미련을 좀처럼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1990년 태릉선수촌 내에 예배당인 ‘샬롬회’를 만들어 개신교를 믿는 대표팀 선수들의 신앙생활을 도왔다. 윤 목사는 “시합장에서의 응원소리를 통해 선수들이 마음의 안정을 찾고 경기에서 승리하다면 그것이 가장 큰 보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글 사진 리우데자네이루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페르시아 종교서 찾은 미륵신앙 흔적

    페르시아 종교서 찾은 미륵신앙 흔적

    지도에서 사라진 종교들/도현신 지음/서해문집/304쪽/1만 3900원 역사 속에 등장한 수많은 종교들 중 사라졌거나 남아 있더라도 교세가 미약한 종교들을 다뤘다. 사라진 혹은 사라져가고 있는 신앙과 종교가 세계사에 미친 영향을 살피고, 사라져간 종교들의 흔적이 오늘날 종교와 우리 삶에 어떻게 남아 있는지 고찰했다. 수메르와 바빌론 등 메소포타미아 신앙부터 짚었다. 메소포타미아 신앙은 그리스 신화에 비하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대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유대교는 오늘날 전 세계 38억명이 믿고 있는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뿌리다. 저자는 “메소포타미아 신앙을 알면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와 여기서 파생된 미트라교, 마니교도 자세히 조명했다. 특히 한국, 중국 등 동아시아 민중 봉기에 적잖은 영향을 준 미륵 신앙을 비중 있게 다뤘다. 저자는 “미륵은 고대 페르시아에서 숭배하던 태양신 미트라에서 유래한 말”이라며 “미트라교는 로마를 거쳐 동서무역로를 통해 동양으로 전파돼 미륵 신앙의 원형이 됐다”고 설명했다. 저자는 2013년 출간한 ‘지도에서 사라진 사람들’을 집필할 때 이 책을 구상했다. 훈족, 거란족, 에트루리아인 등 역사 속으로 사라지거나 근근이 명맥만 유지하는 민족들의 유산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종교도 집단이나 민족 운명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겪은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는 “역사라는 기본적 틀 속에 종교, 문화, 신화, 지리, 인류학 등이 담긴 종합인문 교양서”라며 “종교와 신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심리와 문화, 세계 역사에 대해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신라 최초의 사찰 ‘흥륜사’ 실제 위치는 아직도 미스터리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신라 최초의 사찰 ‘흥륜사’ 실제 위치는 아직도 미스터리

    국립경주박물관은 2009년 경주공업고등학교 마당에서 나온 유물을 세척하다가 ‘흥’(興) 자가 새겨진 신라시대 수키와 조각을 확인한다. 경주공고가 배수로 공사를 하겠다며 문화재 조사도 없이 파헤친 400상자 분량의 흙더미에서 나온 것이다. ‘사’(寺) 자만 남은 기와 조각도 출토됐다. 신라 최초의 사찰 흥륜사(興輪寺)터일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2009년 경주공고 출토 기와에 ‘대왕흥륜사’ 추정 글자 ‘삼국유사’에는 진흥왕이 ‘이 절에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라는 이름을 내렸다’는 대목이 보인다. 발견된 기와의 아래로 내려쓴 ‘흥’(興) 자 위의 글자는 ‘ㅗ’ 모양만 남았지만 경주박물관은 ‘王’(왕) 자로 추정할 수 있다고 봤다. 흥 자도 오늘날 쓰는 글자와는 조금 다르지만 부여 왕흥사터 기와의 ‘興’ 자와 거의 같은 모습이다. 삼국시대에 쓰던 한자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 ‘대왕흥륜사’라고 새긴 기와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흥륜사는 법흥왕이 즉위 22년(535) 천경림(天鏡林)의 나무를 베기 시작해 진흥왕이 즉위년(544) 완성했다. 신라 왕실이 중앙집권적 국가를 완성하고자 불교를 국교화하는 과정에서 귀족 세력과 갈등을 빚은 끝에 이차돈의 순교라는 혼란이 빚어진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 중심에 신라 귀족이 신봉하던 토착 신앙의 성지(聖地) 천경림이 있고, 그곳에 세운 대찰(大刹) 흥륜사가 있다. 신라는 불교를 공인하면서 ‘왕이 곧 부처’라는 개념을 체계화한다. 최초의 사찰을 ‘대왕흥륜사’라고 명명한 것부터가 그렇다. ‘흥륜’에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치세를 일으켜 세운다는 뜻이 담겨 있다. 전륜성왕은 부처의 법으로 세상을 이상적으로 다스리는 존재를 말한다. 이후 불교로 일사불란해진 신라의 의식 체계는 삼국통일의 기반이 되었으니 흥륜사가 갖는 역사적 의의는 그만큼 크다고 할 수 있다. ●1963년에 이미 사적으로 지정된 ‘경주 흥륜사터’ 경주공고와 흥륜사터의 관계에 다소 혼란스러운 독자도 없지 않을 것이다. ‘경주 흥륜사터’는 이미 1963년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보호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적으로 지정된 흥륜사터는 경주공고에서 남동쪽으로 700~800m 떨어진 곳에 있다. 1980년대 흥륜사라는 이름의 새 절이 들어섰다. 아직도 규모 있는 절의 모습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원본이 경주박물관에 있는 이차돈의 순교비를 마당에 복원해 놓았다. 흥륜사의 법등(法燈)을 잇고 있는 것으로 자처하고 있다는 뜻이다. ●1976년 ‘영묘사’ 이름 새겨진 기와 출토… 미궁으로 1910년대 일본인들은 경주지역 절터를 조사하면서 지금의 사적지를 흥륜사터로 추정했다. 당시에도 경주 사람들은 일대를 ‘흥륜원’이나 ‘흥륜들’로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1976년 영묘사(令妙寺)라는 절 이름이 새겨진 기와조각 5점이 출토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선덕여왕이 창건했다는 영묘사는 흥륜사와 더불어 전불시대(前佛時代) 칠처가람(七處伽藍)의 하나다. 철처가람은 신라가 불국토(佛國土)가 될 수밖에 없음을 상징하는 일곱 절을 뜻한다. 영묘사터 발견은 반가운 성과였지만 흥륜사터의 실제 위치는 미궁에 빠졌다. 학계는 이후 경주공고 자리를 유력한 흥륜사터로 보기 시작했다. 우선 ‘미추왕릉 서쪽이자 금교의 동쪽’이라는 ‘삼국유사’의 내용과 부합한다. 금교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경주공고 서쪽으로 형산강이 흐르니 다리가 있었을 가능성은 높다. 고려 충렬왕 33년(1307) 간행된 ‘호산록’의 ‘흥륜사대종명병서’(興輪寺大鐘銘幷序)에는 ‘1244년 이전 불타버린 절터에 다시 불전을 세우고 범종을 주조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경주공고에서는 신라시대 절터의 흔적과 함께 고려시대 유구도 노출됐다. ●‘칠처가람’의 하나인 영흥사터일 가능성도 여전 신라시대 지금의 형산강으로 가로막힌 서라벌의 서쪽지역은 수풀이 빽빽하게 들어찬 저습지였을 것이다. 천경림은 영묘사터와 경주공고를 모두 포괄할 만큼 범위가 넓었을 가능성이 크다. 경주박물관이 확인한 경주공고 출토 유물 가운데는 ‘寺’(사) 자 바로 앞 글자가 ‘興’(흥)일 가능성이 있는 암키와도 있었다. 경주공고 자리가 흥륜사일 수도 있지만, 역시 칠처가람의 하나인 영흥사(永興寺)터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뜻이다. 발굴 조사는 잊힌 역사를 재구성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일대에 대한 발굴 조사는 빠를수록 좋을 것이다. dcsuh@seoul.co.kr
  • ‘순교’ 주기철 목사 77년 만에 명예 찾았다

    ‘순교’ 주기철 목사 77년 만에 명예 찾았다

    신사 참배 거부해 면직… 끝내 옥사 “일사각오 정신으로 복음 지킨 증인” “주기철 목사의 복권 복적을 선언합니다.” 일제 치하 신사 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면직된 소양 주기철(1897~1944) 목사가 77년 만에 완전히 복권 복직됐다. 4일 주기철목사기념사업회에 따르면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합동 총회는 지난달 31일 서울 서초구 산정현교회에서 주기철 목사의 복권과 복적을 선언하고 이를 감사하는 예배를 드렸다. 주기철 목사가 소속됐던 조선예수교장로회 평양노회에 뿌리를 둔 7개 노회 노회장들은 선언문을 통해 “평양노회가 신사 참배를 강요하는 총회 결의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산정현교회 주기철 목사를 면직 결의한 것은 성경과 신앙의 근본 원리에 어긋난 잘못된 결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주 목사의 성명을 노회원 명부에 원상태로 복적, 목사직을 복권할 것을 선언했다. 선언에는 경평노회와 남평양노회, 동평양노회, 서평양노회, 평양노회, 평양제일노회, (가칭)북평양노회 등이 참여했다. 경남 창원 출생인 주기철 목사는 평안북도 오산중학교와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마산, 평양에서 목사로 활동했지만 1939년 12월 19일 조선예수교장로회 평양노회 임시노회에서 목사 면직과 함께 노회원 명부에서 이름이 삭제되는 불운을 겪었다. 끝내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 일본 경찰에 검거돼 옥사한 한국 개신교계의 대표적 ‘순교 신앙’으로 꼽힌다. 주 목사는 특히 조선의 민족주의와 일본제국주의가 지향했던 민족주의를 모두 거부한 채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분명한 자기 결단에 따른 순교를 택했다는 측면에서 ‘외로운 단독자’이자 ‘진정한 순교자’로 불린다. 그의 신앙을 그린 영화 ‘일사각오’가 제작, 개봉됐는가 하면 경남 창원시는 주 목사 기념관과 손양원 목사 기념관을 잇는 주기철 목사 성지순례길 탐방 코스를 개발하기도 했다. 주기철 목사의 복권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지난해 열린 예장합동 제100회 총회 때였다. 일부 노회들이 주기철 목사의 복권 복적을 안건으로 총회에 상정해 만장일치와 기립박수로 복권, 복적이 결정됐었다. 예장합동 총회는 이후 복권 복적 상설역사위원회를 설치했으며 올해 초부터 평양노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노회들이 노회 차원에서 주 목사의 복권 복적을 선언하며 총회 결의를 실행에 옮겨 왔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 평양노회가 2006년 주기철 목사 복권 예배를 드린 바 있지만 조선예수교장로회 평양노회에 뿌리를 둔 노회가 모두 동참해 선언한 만큼 주 목사의 완전 복권 복적이 이뤄진 셈이다. 박무용 예장합동 총회장은 이와 관련, “주 목사는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십자가의 복음을 지켜낸 앞서 가신 증인”이라며 “현재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세상의 염려와 욕심을 벗고, 고통 속에도 인내하며, 우리의 푯대인 예수님을 바라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유족 대표로 참가한 주 목사의 손자 주승중 목사(주안장로교회)는 “늦은 감이 있지만 다음 세대에 바른 신앙의 유산을 물려줘야 한다는 점에서 (주 목사의 복권 복적이) 꼭 필요한 행사”라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1600년 금녀 깨나… 교황, 여성 부제 검토위 설립

    프란치스코 교황이 1600년간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가톨릭 성직 중 부제직을 여성에게 허용하는 문제를 다룰 위원회를 설립했다. 교황청은 2일(현지시간) “프란치스코 교황이 치열한 기도와 충분한 숙고 끝에 여성 부제직 검토 위원회를 발족시키기로 했다”고 밝혔다고 AFP 등이 보도했다. 교황은 남성 성직자 7명, 수녀 2명, 여성 신학 교수 4명 등 총 13명을 위원으로 임명했으며 그중 바티칸 신앙교리성 장관인 루이스 프란치스코 라다리아 페레르 대주교를 위원장으로 선임했다. 다만 위원회의 첫 회의 소집일과 활동 기간은 정해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주교, 사제에 이어 가톨릭 성직 중 가장 낮은 품계인 부제는 미사와 고해성사를 집전할 수 없지만 세례·혼인·장례 예식의 주례, 강론, 교구·교회 행정 보조 등의 역할을 수행한다. 검토위 위원으로 들어간 필리스 자가노 미국 호프스트라대학 교수는 “가톨릭에서 여성은 성직자가 될 수 없기에 교회 내 주요 직책에서 배제된다”며 “여성에게 부제를 서품해 성직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교황이 여성 부제를 허용한다면 전 세계를 뒤바꿀 만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가톨릭 교회 초기인 기원후 5세기쯤까지만 해도 여성 부제의 존재가 기록에 등장하지만 이후 여성의 부제 서품은 금지됐다. 독일의 발터 카스퍼 추기경은 과거 여성에게 부제를 허용하려는 시도가 모두 좌절된 사실을 언급하며 “이 문제로 교회가 양분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제임스 브레츠케 보스턴대 교수는 “여성 부제가 허용된다면 여성이 사제에 절대 서품될 수 없다는 주장은 약화될 것”이라며 여성 부제 허용 논의가 사제직으로 확대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취임 이후 가톨릭교의 오래된 금기를 깨는 파격 행보를 보여 왔다. 교황은 교회에서 여성이 더욱 많은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강조하며 올해 부활절 직전 성목요일에 열린 세족식에 관행을 깨고 여성을 참여시킨 바 있다. 지난 9월에는 가톨릭에서 죄인으로 간주되는 낙태한 여성을 사면하는 권한을 한시적으로 사제에게 허용했으며 이혼자와 성소수자를 교회가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여고생과의 부적절한 성관계가 “실수였다”는 이동현 목사

    여고생과의 부적절한 성관계가 “실수였다”는 이동현 목사

    한국 교계의 대표적인 청소년 사역 단체 대표가 목사의 신분으로 신앙심을 내세워 과거 여자 고교생과 부적절한 성관계를 맺은 것으로 드러났다. 3일 <뉴스앤조이>에 따르면 국내 교계 청소년 사역 단체인 ‘라이즈업무브먼트’의 대표 이동현(49) 목사는 그가 37살 때인 2004년 당시 고3이었던 A씨와 부적절한 성관계를 맺었다. 당시 이 목사는 기성 교회를 비판하면서 “청소년만이 썩어빠진 한국 교회를 개혁할 수 있다”고 설파해 교회를 다니는 청소년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됐다는 것이 A씨의 증언이다. 이 목사는 호의를 베풀며 A씨에게 접근했다. 따로 불러내 밥을 사주거나 자신의 자동차에 태우고 교외로 드라이브를 시켜주기도 했다. A씨는 점점 이 목사가 하는 말과 행동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 목사는 2004년 A씨가 고3인 시절부터 A씨에게 본격적으로 성관계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A씨가 완강히 거부했지만 이 목사는 “이미 늦었다”면서 성관계를 맺었다. A씨는 “첫 성관계 후에 계속 울자 이 목사가 ‘그 어떤 여자애들도 자기가 이런 식으로 감정을 표현하며 들이대면 자신을 좋아하게 되고 결국 관계를 맺게 됐을 것이다’라면서 ‘그러니까 너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말로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라면서 “어른이 된 지금 생각하면 자신의 위치가 (사역) 단체 내 여자 고등학생, 대학생에게 다가가 잘해주면 넘어올 것이라는 지위상의 이점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한 번 시작된 성관계는 그 뒤로도 꾸준히 이어졌다. 이 목사는 A씨의 집 앞에서 교복을 입은 A씨를 차에 태워 교외 모텔로 향하기도 했다. A씨는 이 목사로부터 벗어나려고 거처를 수차례 옮기기도 했지만 이 목사는 어떻게든 A씨를 찾아냈다. A씨가 만남을 거부하자 이 목사는 “사탄이 사역을 흔들고 있다”면서 자신의 행위가 사역의 일종이라고 합리화했다. 협박성 발언도 일삼았다. A씨는 “이 목사는 어떻게든 나와 연락하고 또 설득해서 다시 성관계를 맺었다. 이런 관계가 쳇바퀴 돌듯 반복됐다”면서 “이 목사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은 ‘한국 사회에서 여자가 이런 식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 네 인생은 망한다’랄지, ‘너 나랑 이래 놓고 이제 시집 어떻게 갈래’라는 말도 많이 했다”고 토로했다. A씨는 “(당시)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 목사는 또 A씨가 계속 성관계를 거부하자 “네가 입을 뻥긋하면 사탄이 그 말을 이용해서 우리 사역을 망친다. 그러니 고통스러운 걸 참아라. 너 한 명만 참고 견디면 성령을 훼방하지 않게 된다”는 말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부적절한 성관계가 사역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은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를 알게 된 A씨 어머니는 이 목사에게 전화해 ‘더 이상 딸을 만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받았다. 하지만 이 목사는 그 후로도 A씨에게 거듭 연락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A씨를 향한 이 목사의 집착은 심해졌다. A씨는 “대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불면증과 우울증이 겹쳐 눈을 뜨면 오후인 경우도 다반사였다”고 말했다. A씨는 결국 대학교 1학년도 마치지 못하고 우울증 등에 시달려 학교를 그만뒀다. A씨는 이 목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유학이라고 생각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이 목사는 A씨가 유학을 가기 전 배낭여행을 다녀오자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여행을 다녀오면 놓아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 목사는 또 한 번 A씨와 함께 해외 여행을 다녀온 뒤에야 A씨와의 연락을 끊었다. 하지만 A씨는 그 이후로도 계속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며 한 때 극단적인 선택을 할 뻔했다고 말했다. A씨는 “고3 때부터 나를 괴롭혀 온 우울증 때문에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면서 “자살할 때 쓰는 밧줄이 눈앞을 떠다닐 정도였다”고 털어놨다. 논란이 일자 이 목사는 이날 교계 언론에 대표직을 사퇴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사역 초기 젊은 시절 실수한 것이 맞다”면서 “모든 것을 깨끗하게 인정한다. 제가 범한 과오가 맞다”고 밝혔다. 결국 이 목사는 고교생을 상대로 한 부적절한 행동을 단순히 ‘실수’라고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씨줄날줄] 현각과 한국 불교/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현각과 한국 불교/서동철 논설위원

    ‘푸른 눈의 수행자’로 널리 알려진 현각 스님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한국 불교를 비판하며 한국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는 소식이다. 그가 벗어나고 싶은 주체는 사실 한국 불교라기보다 한국불교조계종이라는 특정 종단이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조계종 소속으로 25년째 수행하고 있는 그가 이렇게 결심한 이유로는 기복신앙화를 들었다고 한다. 현각은 1999년 ‘만행(卍行)-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를 펴내면서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그는 미국 뉴저지가 고향으로 예일대에서 서양철학을 전공하고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비교종교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게다가 ‘만행…’에서 밝혔듯 그는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가톨릭 신자였다. 이런 그의 문화적·종교적 배경은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사실 기독교 문화에 갇혀 있던 사람이라면 ‘삶과 죽음의 문제’ 이상의 것을 이야기하는 선불교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현각이 머리를 깎은 것은 숭산 스님의 설법을 들은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한다. 숭산은 선불교의 요체를 매우 쉬운 영어로 전해 서양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현각은 ‘한국 불교’라기보다는 ‘한국의 선불교’에 귀의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현각이 선불교를 수행 수단으로 삼으면 됐지 굳이 승려가 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은 책을 읽을 당시에도 들었다. 어쨌든 한국 불교는 지원군을 얻었다. 하지만 한국 불교는 다양한 성격의 신앙 혹은 수도 방법의 집합체여서 ‘한국 불교는 이것’이라고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실 적지 않은 한국 사람들에게 현각이 깊이 공감한 선불교는 오히려 미지의 세계가 아닐까 싶다. 현각에게는 선불교가 한국 불교의 본질로 보였겠지만, 한국의 보통 사람들에게는 아들딸 공부 잘하고 좋은 데 취직시켜 달라는 할머니의 간절한 기도가 더욱 불교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조계종이란 선불교의 실질적인 창시자인 육조 혜능(638~713)이 수도한 중국 조계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누구나 스스로 마음을 닦으면 성불(成佛)할 수 있다’는 선종의 가르침은 중국은 물론 우리 역사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한국불교조계종이 선만 오로지 추구하는 종단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성철 스님은 극락 정토 신앙은 경전이나 선 수행으로 불교의 본질에 접근하기 어려운 이들을 위한 방편가설(方便假說)이라고 했다. 그러니 기도로 발복(發福)한다는 것은 더 큰 가설이다. 그럼에도 한국 불교의 다양성을 구성하는 요소인 것은 명확하다. 다만 다양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현각이 탄식한 대로 ‘돈만 밝히는 중’만 넘쳐나는 것이 문제다. 오염된 한국 불교를 현각이 구해 내야 할 이유는 당연히 없다. 그는 한국 불교를 택했던 것과 같은 이유로 떠나기로 했을 뿐이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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