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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술관에서 벌이는 춤판

    미술관에서 벌이는 춤판

    미술관에서 춤판이 벌어진다. 융·복합의 대세를 타고 무용가들이 미술관으로 진입한 것. 9월 16일까지 서울 관악로 서울대미술관에서 열리는 ‘나우 댄스’(Now Dance)전이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는 관객을 맞이하는 작품은 김봉태 작가의 ‘댄싱 박스’(Dancing Box) 연작들이다. 종이박스를 무용 동작처럼 펼친 뒤 알록달록 색깔을 입혀 놓은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도 한층 가벼워진다. 그다음에 눈길을 끄는 작품은 현대무용가 안은미의 ‘백남준 광시곡’. 백남준은 기괴한 퍼포먼스로도 유명했는데 그걸 안은미가 현대적으로 다시 재현해 낸 것이다. 베토벤 광시곡 연주에 맞춰 흰 넥타이를 잘라서 나눠주고 관객의 머리카락을 자르는가 하면 피아노를 공중에서 박살내는 모습을 보여 준다. 슬슬 체온이 달아올랐다면 이제 본격 감상의 시간이 왔다. 모두 6개의 영상 작품이 걸려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독일 최고의 현대무용수로 평가받는 자샤 발츠의 ‘다이얼로그 09’(Dialogue 09)다. 독일 베를린에 들어선 노이에뮤지엄에서 무용수 70여명을 동원해 거대한 퍼포먼스를 수행했는데 박물관 곳곳의 공간을 이용해 갖가지 공연 모습을 선보였다. 전쟁의 상흔이 느껴지는 곳에서는 엄숙한 몸동작이, 과거의 화려함을 모아둔 곳에서는 격정적인 춤이 공간을 휩쓸고 다닌다. 지난해 말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칸디다 회퍼의 사진전을 봤던 관람객들이라면 더 크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역사적 건물의 복원인 만큼 극도로 절제하는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복원을 맡았고 회퍼가 사진 찍은 그곳에서, 발츠는 춤을 춘 것이다. 회퍼가 텅 빈 박물관을 찍어서 역사의 발걸음 소리가 울리게 했다면, 발츠의 무용은 박물관을 휘감고 지나가는 역사의 거친 숨결처럼 느껴진다. 다른 하나는 스페인 무용가 나초 두아토의 ‘다중성, 침묵과 공간의 형식들’(Multiplicity, Forms of Silence and Emptiness)이다. 작품 앞에 섰을 때 은은하게 깔리는 음악들은 모두 바흐의 곡이다. 무용수들은 바흐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이런저런 곡의 특성에 맞춰 춤도 바뀌는데 그 가운데 무반주 첼로 조곡을 배경으로 한 춤이 눈길을 끈다. 남자 무용수가 연주자가 되고 여자 무용수가 첼로 역을 맡는데 환상적인 동작과 절묘한 호흡으로 인간의 몸 그 자체가 하나의 음표로 떠오르는 수준에까지 이른다. 바흐는 기독교 신앙에 충실한 음악가로 알려졌다. 그래서 엄숙하고 경건했을 것만 같은데, 두아토의 작품을 보고 나면 왠지 배 터지게 소시지 먹고 맥주 거품 입에 잔뜩 묻힌 채 자기 흥에 취해서 적당히 주접도 떨어가며 즐겁게 작곡을 했을 것만 같다. 김행지 선임학예연구사는 “백남준이 첼리스트 샬롯 무어만과 함께 인간의 몸으로 첼로를 연주하는 퍼포먼스를 한 적이 있는데 두아토의 작품은 그것을 연상하게 한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현대 무용의 흐름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는 독일의 피나 바우슈, 가장 격렬하고 극적이면서도 관능적 안무를 선보인다는 벨기에의 빔 반데케이버스 작품 등도 만날 수 있다. 거명된 이름에서도 이미 짐작할 수 있듯, 이번 전시는 무용이되 연극적인 요소가 굉장히 강렬하고 영상 연출도 눈여겨볼 만하다. 미술관이지만 연극과 무용 같은 무대 예술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도 챙겨볼 만한 전시다. 3000원. (02)880-9509.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1)조선 천주교 개척 이벽&황사영

    [선택! 역사를 갈랐다] (21)조선 천주교 개척 이벽&황사영

    1779년(정조 3) 겨울. 남인의 젊은 학자들이 천진암에서 강학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벽(李蘗)은 눈발이 날리고 호랑이가 출몰하는 100여리의 밤길을 내달려 강학회에 참여했다. 이벽의 등장으로 유학을 강마하던 모임은 대번에 서학과 천주교에 대한 토론장이 되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784년. 이벽의 권유를 받은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하자 조선에서 본격적으로 천주교(가톨릭)가 싹텄다. 천주교는 지식인을 비롯한 중인, 평민과 천민, 여성 등 각양각색 인물들에게 퍼져갔다. 정조가 승하하고 반 년 정도가 지난 1801년 1월.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정약용의 조카사위 황사영(黃嗣永)은 서울을 빠져나와 충청도 제천의 산골짜기 배론(舟論)에 숨어들었다. 배론의 토굴에 숨어지내며 그는 장문의 편지를 썼다. 편지는 북경 교구장 구베아(Gouvea) 주교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편지 말미에서 황사영은 조선 교회의 재건을 위해 전대미문의 요청을 했다. 편지는 그가 잡히면서 공개되었고 조선 조정은 뒤집어졌다. 이른바 ‘황사영 백서(帛書) 사건’이었다. 한국 천주교는 진리를 찾던 이들이 자발적으로 택했지만 그 선택은 박해가 예고된 고난의 여정이었다. 가시밭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들은 진정 하늘에 오르는 사다리를 발견했던 것일까. ●18세기 중국 통해 서학·천주교 유입 17세기 초 조선 사람들은 ‘유럽’이란 또 하나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 18세기에 접어들자 서양의 천문, 역법, 수리, 의학에 관한 서적과 기물에 더욱 익숙해졌고, 북경에 간 사신들은 으레 선교사가 거주하는 천주당을 방문하였다. 그 결과 저들도 나름의 진리가 있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당시 서양과 그들의 학문에 대해 가장 해박했던 인물은 이익(李瀷)이었다. 그로 인해 서학(西學)이 일세에 풍미하게 되었고, 그의 문하에서 이른바 ‘친서파’(親西派)로 일컬어지는 이가환, 권철신, 정약전·정약용 형제, 이승훈 등이 배출되었다. 이익 문하의 학자들은 여전히 ‘서학 수용’에 머물러 있었다. 서학은 새로운 지식일 따름이지, 유교의 가르침에 상응하는 새 가르침이 아니었다. 그런데 홀연 학문에서 신앙, 신념으로 건너뛴 인물이 나왔다. 이벽이었다. 이벽은 어려서부터 ‘하늘의 도리’에 뜻을 두었다. 20세쯤 서학서에 충격받았고, 25세 전후에 서학 서적을 망라해 읽고는 드디어 마음을 바꾸고 천주교를 신봉하였다. 이 시기 전후에 그는 조선 최초의 호교서로 평가받는 ‘성교요지’(聖敎要旨)를 집필한다. 그것은 천지를 주관하는 천주(天主)에 대한 선언이었다. 그의 선언은 성리학의 근본 원리인 천리(天理)에 대한 도전이었다. 성리학에서 하늘은 천리이다. 천리는 우주 질서의 원리, 사물의 물리, 사회의 윤리이다. 천리는, 우리가 ‘하늘’을 들을 때 떠올리는 ‘하느님’, ‘푸른 하늘’ 같은 인격성과 자연성이 약하고, ‘질서·조화·바름’과 같은 추상성과 윤리성이 강한 개념이다. 천리는 유교 왕국 조선에서는 모든 질서의 원천이자 가치의 근원이었다. 이벽은 ‘천리는 현실에서 공허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천리에 비해 천주는 인격적 존재로 현실감이 있고 내세관마저 채워주는 존재였다. 그는 양 개념이 대립적이라고 여기지 않고 서로 보완되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대다수 조선인들은 천주 선언을 유교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으로 보았다. ●관대하던 정조 사후, 1801년 대대적 박해 시작 천주교를 찬성하건 반대하건, 지식인들은 ‘천리’와 ‘천주’의 대결이 가져올 파장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서로 대결한다면 그것은 문명 사이의 가치관 전쟁이자, 그에 동반한 사유와 많은 개념들을 재조정하는 일이 될 터였다. 16세기 천주교를 동양에 전파했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이 점을 알고 있었고, 두 문명 사이의 대화와 상호 이해를 도모하였다. 선교사들은 ‘Deus’(God의 라틴어)를 유교 경전에 등장한 상제(上帝)와 유사한 천주로 번역했고, 또 천주를 천지의 대부(大父)·대군(大君)이라고 소개하였다. 천주교 설명에 유교의 텍스트와 개념을 빌린 것이다. 이 같은 설명 방식은 중국에서보다 조선에서 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유교적 이상 사회를 가장 진지하게 고민했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천주교에서 유학과 일치하거나 때론 유학을 뛰어넘는 가능성을 보았다. 예컨대 한때 천주교 신자였던 정약용은 인격적 상제관에 기초한 새로운 유학 틀을 구상하였다. 정약용에게 영향을 미쳤던 이벽 또한 천주교를 축으로 유학의 미비점을 보완하려 하였다. 그러나 사회, 윤리 측면에서 문제는 매우 복잡하였다. 천주교인들은 천주 공경이 대효(大孝), 대충(大忠)이므로 유교 윤리는 천주교에서 완성되고, 유학자들이 오히려 천지의 군주와 부모를 모른 체한다고 역공했다. 물론 그 논리는 유교 윤리의 소멸로도 해석될 수 있었다. 더 위험한 것은 천주 앞에서 군(君)·신(臣), 부(父)·자(子)의 수직적 위계가 사라지는 일이었다. 천주교인들이 자신들은 충성과 효도를 어긴 적 없다고 아무리 강변해도, 대다수 지배층은 ‘천주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논리 속에 잠재한 현실적 파괴력을 알고 있었다. 백성 하나하나가 박해를 감내하면서 자신이 신앙을 결단했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유교적 명분 질서가 사라진 무부, 무군의 미래였다. ●“서양군 통해 유교 압박”… 황사영 백서 큰 파장 1785년(정조 9) 형조의 적발로 최초의 천주교 모임이 발각되었다. 신부도 없이, 지식인들이 서로 성직을 맡아 진행한 모임이었는데, 정조의 관대한 처분으로 그럭저럭 무마되었다. 모임의 주동자였던 이벽은 사건 이후 얼마 안 되어 30대 초반의 나이로 요절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도 전해진다. 본격적 박해를 경험하지 않은 이벽은 차라리 행복했다. 1801년에 터진 대대적 박해는 일부 신자들을 극단적 선택으로 몰고 있었다. 그 와중에 황사영의 백서 사건이 터졌다. 백서의 내용 대부분은 순교자들의 전기이다. 당대는 물론 지금까지 논란을 부르는 부분은 후반부이다. 황사영은 교회 재건을 위해 몇 가지 방책을 제시했는데, 그중 ‘조선을 청에 내복(內服)시킴, 서양 군함과 병사를 통해 압박함’이 들어 있었다. 그 방책은 반국가, 반민족적 구상이라고 줄곧 비판받았다. 교회 재건이라는 동기와 박해라는 정황을 인정하더라도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 비판의 골자였다. 백서의 청원은 너무나 대담하고 몽상적이어서 교인들 사이에도 논란이 있었고, 당시 북경 교회가 그대로 감행하기도 어려웠다. 황사영 역시 실제 그렇게 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정부를 압박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그 방책들을 제시하였다. 그가 반정부, 반국가 의지가 강했다면 가장 쉬운 길은 교인들의 무력 봉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반란에는 분명히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해 보자. 황사영은 왜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종교의 보편 진리를 꿈꾼 그는 서양의 도리를 신뢰했던 듯하다. 예수회가 전한 서양은 안정된 생활, 인정이 넘치는 풍속, 약한 자에 대한 배려와 형제애가 실현된 ‘이상적 사회’였다. 현실의 고통이 강할수록 이상적인 바깥 세계에 대한 동경과 기대는 증폭되기 마련이다. 기독교적 형제애에 대한 갈망이 커질수록 전통적인 유교 윤리, 혈통 의식, 국제 관계 등은 무력하거나 부정적으로 보였을 법하다. 선교사가 청 황제, 기독교 국가의 군대를 움직일 수 있다고 믿고 싶었던 지나친 기대감은 그의 판단력을 가려버렸다. ●지금도 유교문화 속 기독교 신자 수 동아시아 1위 천주교와 유교의 보완을 꿈꾸었던 이벽의 노력은 정약종, 정하상 등으로 맥을 이어갔다. 일부 교인들은 동서양의 이상적 인간상을 투영하여 그를 되살렸다. 19세기 후반 천주교 공동체의 염원이 담긴 예언서 ‘니벽전’에서 그는 학문에 능통한 선비, 득도한 신선, 승천하는 예언자로 그려졌다. 황사영은 대역부도죄로 체포되어 능지처사되었다. 비극은 그의 개인과 가족, 당대 교인들에게만 끝나지 않았다. 지배층과 일반 백성은 백서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인들을 정말로 무부무군의 무리, 나라를 팔아먹는 무리로 여기게 되었다. 두 사람의 선택은 현재의 우리에겐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국은 유교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으면서도 기독교(가톨릭과 개신교) 신자 수가 1위인 동아시아의 특이한 국가이다. 전근대의 보편 가치와 근대의 보편 가치를 상징하는 두 종교 사이에 현재의 우리가 놓여 있다. 예수회 이벽의 선택은 ‘내 안의 가치’와 ‘타인 안의 가치’를 동등하게 존중하고 서로 대화하는 자세와 통한다. 그리고 종교, 문명,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 사이의 조화에 힘쓰는 이들을 통해 계승되고 있다. 그러나 인정과 대화는 아슬아슬한 줄타기이다. 서로의 부족함을 고백하는 겸손에서 대화는 출발하지만, 나·우리 혹은 타자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고정해 버리면 성찰과 다양한 해석이 설 자리는 사라져 버린다. 그 점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 황사영은, 박해라는 정황을 감안하더라도, 외재(外在)하는 기준을 절대화해 버렸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다원을 긍정하고 독선에 빠지지 않는 자세야말로 언제나 곰곰이 생각해 볼 덕목이었다. 세계화, 다문화, 정보화가 가속하는 지금에서는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이경구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 “부처의 나눔 정신으로 다가오는 100년 공동체 삶 고민할 것”

    “부처의 나눔 정신으로 다가오는 100년 공동체 삶 고민할 것”

    “자체적으로 생겨나 자체적으로 운영해 온 대표적 불교단체인 만큼 이제 시대에 걸맞은 역할을 찾아 목소리를 제대로 내야 할 것입니다.” 내년 창립 50주년을 앞두고 지난 14일 기념사업회 발기인대회를 마친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대불련)의 최경환(25) 회장. ‘50주년 기념사업회’ 공동추진위원장에 선출된 최 회장은 17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대불련이야말로 한국 현대사와 한국불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단체”라고 힘주어 말했다. 대불련은 1963년 각 대학 불교학생회가 모여 창립한 불교 학생단체. 창립 이후 줄곧 ‘진리의 빛’ ‘진리의 얼’ ‘진리의 벗’ 등 3대 강령에 맞는 어젠다를 설정해 활동하면서, 불교계에선 드물게 일찍부터 사회참여의 목소리를 내온 단체로 평가받는다. “대불련은 무엇보다 부처님의 정신을 바탕으로 스스로가 구도자의 마음가짐으로 생명 가치 구현에 앞장서 복지사회를 건설하자는 실천의 정신을 중시합니다.” 그의 말마따나 대불련은 1960년대 만연해 있던 기복신앙을 떠나 부처님 말씀을 시대에 맞게 전하려는 운동에 앞장섰고 1970∼1980년대엔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1990년∼2000년대엔 비교적 사회적 차원의 문제점에 착안해 대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자아찾기’에 치중한 흐름을 보여준다. “대불련이 반세기를 맞는 내년은 지난 50년을 겸허하게 평가하고 다가오는 100년을 어떻게 맞을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중요한 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21세기에 붓다가 있었다면 무슨 말씀을 하실 것인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지요. 아마 가장 중요한 어젠다는 역시 ‘같이 살아간다.’는 공동체의 삶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내년 기념사업의 테마는 일단 ‘감사와 사은’으로 정했단다. “대불련이 50년간 활동할 수 있었던 데는 밖에서의 지원이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그분들에 대한 감사와 사은을 토대로 새 역할을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그 감사와 사은의 마음은 ‘대불련 50년사’ 발간을 비롯해 역사자료 전시회와 대불련에 힘이 되어준 사람들에 대한 조사와 정리작업, 후원금 모집 행사로 결집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신도단체에 조계종 명칭을 써야 하고 포교원장이 단체장의 임명권을 갖도록 한 조계종 포교원의 ‘신도단체 재등록 사업’은 대불련 입장에서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고 한다. 그래서 지난 16일 조계종 화쟁위원회에 그와 관련한 조정 신청을 내기도 했다. “모든 불교 종파가 함께 참여해 온 대불련은 늘상 나눔의 공동체를 지향해 왔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같이 살아야 할 공동체라면 분란과 갈등의 요인을 먼저 경계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종교플러스]

    경봉 스님 열반 30주기 특별전 통도사 성보박물관은 경봉 스님 열반 30주기를 맞아 13일부터 9월 23일까지 ‘삼소굴’(三笑窟) 특별전을 개최한다. 전시는 ▲삶과 흔적 ▲일상 ▲교유(交遊) ▲법향(法香)과 사자후 ▲망중한 속 묵향(墨香)으로 구성돼 경봉 스님의 친필 유묵과 달마도를 비롯해 스님의 삶을 살필 수 있는 유품들을 보여 준다. 50년간 남긴 일기며 선지식과의 문답을 담은 편지와 게송 등 미공개 친필원고와 유품 350여점이 나온다. 경봉 스님 열반 30주기 추모다례는 16일 오전 10시 통도사 설법전에서 봉행된다. 신약성경신학·신학방법 발간 가톨릭출판사는 ‘가톨릭문화총서’ 제31권(신약성경신학)·32권(신학방법)을 발간했다. ‘신약성경신학’은 신약성경 연구자 칼 헤르만 쉘클레가 오랜 기간 정성을 기울여 낸 신약성경신학 시리즈 두 번째. ‘하느님은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라는 제목 아래 ‘계시’, ‘해방과 구원’, ‘하느님의 거룩하신 영’, ‘하느님 신앙과 신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학방법’은 20세기 가장 뛰어난 신학자 중 한 사람인 버나드 로너간 신부의 저서. 신학뿐 아니라 현대 과학과 철학, 종교학을 총체적으로 아울러 가톨릭교회 신학 발전사에 혁신적 전기를 마련한 책으로 평가받는다. 목회자 멘토링 후속행사 개최 지난 6월 4∼7일 있었던 개신교계의 ‘제1회 목회자 멘토링 콘퍼런스’ 후속 행사가 마련된다. 이 프로그램 멘토인 이찬수(분당우리교회)·박은조(은혜샘물교회)·이재철(100주년기념교회) 목사의 사역 현장을 방문, 교제하고 대화하는 자리. 분당우리교회는 19일, 은혜샘물교회는 23일, 100주년기념교회는 24일 각각 행사를 진행한다.
  • “교회 이젠 성장 포기하고 공동체 회복 실천 신앙을”

    “교회 이젠 성장 포기하고 공동체 회복 실천 신앙을”

    “은퇴하거나 별세한 1세대 목회자들을 이어 2세대 목회자들이 한국 교회를 이끌고 있지만 카리스마의 공백현상이 심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그로 인해 엄청난 위기에 직면해 있지요.” 오는 16일부터 3일간 경기 가평군 필그림하우스에서 ‘오늘의 교회가 직면한 도전’이란 주제로 국제실천신학심포지엄을 개최하는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은준관 총장. 은 총장은 10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교회와 목회자들이 문화사역에 치중하고 대형 건축물을 짓는 등 몸부림치지만 다가오는 시대를 제대로 맞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많은 교회, 목회자들이 프로그램 개발과 조직관리에만 혈안이 돼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한국 교회는 그보다는 초기교회의 공동체를 되찾기 위한 신학적 고민을 치열하게 해야 합니다.” 이번 심포지엄은 바로 그 실천신학의 측면에서 한국교회를 진단하고 미래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자리. 은 총장과 하워드 스나이더(캐나다 틴데일신학교) 교수, 이동원(지구촌교회 원로) 목사가 강연에 나선다. “지금 교회는 역사 속 교회의 존재 이유와 함께 교회 공동체가 어떤 모습으로 현존하는지, 그리고 역사의 아픔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매개로 제대로 작용하는지 따져 봐야 합니다.” 은 총장은 특히 교회가 어떻게 다시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목회자가 교인들을 하나님 앞에 서게 만들 것인지를 가장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현대인들은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스스로 영적인 삶을 사는 세속적 영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지금 한국의 대형 교회들이 추구하는 프로그램과 조직관리로는 다가오는 탈세속 이후의 시대에 제대로 대비할 수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교회는 결코 과시하고 정복하기 위한 종교성의 상징이 될 수 없다는 은 총장은 그래서 대형 교회든 작은 교회든 갈 길이 멀다고 했다. “이제 교회는 성장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게 가장 먼저 할 일입니다. 작은 교회도 더 이상 큰 교회를 모방하는 서바이벌 게임에 매여선 안 됩니다. 교회와 교단의 확장 대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일구는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예배와 선교 등 모든 형태의 실천적 신앙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초기교회처럼 함께 나누는 공동체를 위한 신학적 고민과 그를 통한 치유의 공동체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은 총장은 공동체 회복의 차원에서 심포지엄 첫날 저녁, 떼제 공동체예배와 성만찬을 겸한 독특한 예배 워크숍을 시도한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베네딕도 벗들 캠프’ 새달 10일 개최

    ‘베네딕도 벗들 캠프’ 새달 10일 개최

    천주교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원장 이형우 아빠스)이 ‘수도생활 체험학교’ 운영 10주년을 맞아 특별 행사를 마련한다. 오는 26∼29일 만 32세 미만 미혼 남녀 대상의 ‘제34차 수도생활 체험학교’를 여는 데 이어 8월 10∼12일 역대 참가자 및 가족을 초청해 ‘베네딕도의 벗들 캠프’ 행사를 갖는다. 왜관수도원 ‘수도생활 체험학교’는 국내 가톨릭교회 수도회 중 처음으로 2002년 마련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수도원 체험행사. 침묵과 기도, 엄격한 규율과 봉쇄쯤으로 인식됐던 수도자의 삶을 일반인이 직접 경험하는 색다른 기회를 처음 제공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기본적인 생활과 왜관수도원 소개를 중심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게 특징. 학교에 참가하는 이들은 수도자들과 함께 매일 다섯 번씩 성당에서 기도와 미사를 봉헌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아침·저녁 명상 시간 말고도 오전·저녁에 수도생활과 관련된 특별 강의도 듣는다.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는 베네딕도 성인의 가르침 그대로 작업장에서 노동체험을 하고, 조별 공동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거룩한 독서)에도 참여한다. 매년 여름과 겨울 한 차례씩 열린 이 체험학교는 천주교에서 특히 젊은 신앙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행사로 평가받는다. 지난 10년간 체험학교를 다녀간 참가자만도 2600여명에 달한다고 왜관수도회 측은 집계했다. 수도생활 체험학교는 고등학생 이상 만 32세 이하의 미혼 남녀를 대상으로 하며 매회 선착순 50명에 한해 신청받는다. 체험학교에 참가했던 일반인을 중심으로 매월 한 차례 1박 2일간 열어온 ‘베네딕도의 벗들 기도모임’은 영적 체험을 일상에서 이어가는 연결행사. 다음 달 ‘베네딕도의 벗들 캠프’는 지난 10년간의 학교와 기도모임을 돌아보고 기념하는 자리. 왜관수도원 박진형(비오) 수사 신부는 “젊은 신앙인들의 성소 회복과 영적 체험 차원에서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며 “이번 행사는 종전과 조금 다르게 화해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캠프 형식의 기념행사로 진행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바다의 모든 것’ 부산에 떴다

    ‘바다의 모든 것’ 부산에 떴다

    국립해양박물관이 9일 개관식을 갖고 운영에 들어갔다. 해양박물관은 부산 영도구 동삼동 혁신도시 내 4만 5000㎡에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건립됐다. 2009년 12월 착공, 지난 5월 준공됐으며 총 1142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됐다. 해양박물관은 ‘나의 바다, 우리의 미래’라는 콘셉트로 해양문화, 해양역사·인물, 항해선박, 해양생물, 해양체험 등 해양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는 세계 최초의 종합해양박물관을 표방한다. 전시관은 상설전시관 8개, 기획전시관 1개, 어린이 박물관, 해양도서관, 수족관, 대강당, 4D영상관으로 구성됐다. 전시용 유물은 1만여점에 달한다. 상설전시관에는 해양 역사와 과학·산업 등 다양한 유물 등이, 해양역사인물관과 해양문화관에는 조상들의 바다에 대한 인식과 삶, 신앙과 관련된 유물과 자료 등이 전시됐다. 상설전시관에서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함경도해안실경지도첩’, ‘죽도제찰’과 아시아 최초로 공개되는 ‘세계 최초의 해도첩’ 등의 희귀 유물도 만나볼 수 있다. 항해선박 영역에서는 우리나라 한선(韓船)의 변천 과정과 국내 최대 크기로 복원(실물 2분의1)한 ‘조선통신사선’이 전시된다. 조선통신사선은 조선시대에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보낸 외교사절단이 타고 갔던 선박으로, 국산 소나무를 사용해 전통 기법으로 복원됐다. 해양생물관에는 해양생물의 배양 및 성장과정을 보여 주는 미니 수조와 해양생물을 직접 만져볼 수 있는 터치풀, 직경 11m, 수심 4.8m 총 377t 규모의 수족관에서는 국내 연근해 상어·가오리 등의 해양생물을 선보인다. 특히 해양체험관에서는 원격조종 보트, 요트레이서 체험을 통한 해양스포츠를 간접 체험할 수 있다. 해양과학관은 심해 잠수정을 활용한 심해저 광구개발, 양광 시스템 및 심해 탐사와 남극 생태계 연구, 얼음바다 속 생물자원 연구 등을 소개한다. 극지 코너에서는 격주 토요일마다 남극 세종기지와의 화상 통화를 제공한다. 관람 시간은 오전 9시~오후 6시이며, 토·일요일은 각각 3시간, 1시간 연장한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한다. 입장료는 모두 무료이며 4D영상관만 유료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외교론 부족… 韓·中 민간소통 필요”

    “정부 간 외교는 자국의 외교정책을 알리는 데 주력합니다. 하지만 이런 전통적인 전달 방식으로는 그 나라의 사회·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죠. 이때 국가 간 사회·문화적인 간극을 좁혀 상호 간 이해의 폭을 넓혀 주는 게 바로 ‘공공외교’의 역할입니다.” ‘중국 공공외교의 대부’ 자오치정(趙啓正·72) 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상무위원 겸 외사위원회 주임(장관급)은 5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한국국제교류재단(KF) 주최 포럼에서 “인터넷 등으로 세계 뉴스가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글로벌 시대에는 정부 간 외교 못지않게 다른 나라와의 소통을 도와주는 공공외교가 중요하다.”며 이같이 밝혔다. 중국과학기술대에서 핵물리학을 전공한 자오 주임은 1990년대 푸둥(浦東)관리위원회 주임으로 상하이(上海)시 개발을 지휘했고 상하이시 부시장, 국무원 신문판공실 주임(공보장관) 등을 지냈다. 특히 국가의 대내외 언론 및 홍보를 관장하는 국무원 신문판공실 주임을 맡은 이후 중국 공공외교 발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세계인들은 문화적 차이에 따라 가치관·신앙·사유방식·생활방식이 다른 만큼 서로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죠. 그렇다 보니 어떤 사안을 놓고 자국의 사정과 입장에 따라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고, 심지어는 충돌까지 빚게 됩니다.” 자오 주임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외교와는 다른 채널인 경제·사회·문화·과학·언론·체육·예술·종교 등 다양한 분야 민간단체들 간의 교류를 통해 서로 친밀감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중 수교 20주년을 맞아 두 나라 외교관계는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언어·문화적 차이로 인해 양국 국민들 사이에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등 소통이 충분하지 못하다.”면서 “한·중 양국은 우선적으로 자국의 실정에 맞는 공공외교 방안을 개발해 추진함으로써 상호 간 신뢰감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열린세상] 종교 없는 사회가 가장 도덕적이라니/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학과 교수

    [열린세상] 종교 없는 사회가 가장 도덕적이라니/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학과 교수

    미국의 대통령 선거전이 종교 문제로 달아오르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동성 결혼’ 지지 선언을 하자, 공화당 대선 후보로 사실상 확정된 밋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가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히며 오바마와 각을 세웠다. 보수 기독교계와 보수 성향 시민·사회단체들도 ‘오바마 규탄’을 외치며 행동에 나섰다. 그동안 모르몬교도라는 이유로 롬니에 거부감을 보이던 보수 기독교계는 ‘동성 결혼’을 계기로 롬니를 중심으로 결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보수 기독교계에서는 진작부터 오바마의 종교를 의심하고 검증하려 했다. 얼마 전에는 오바마 대통령의 전 교회 담임이자 멘토로 유명한 라이트 목사가 “오바마 부부는 교회 사람들이 아니다.”라고 밝힌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증폭되었다. 최근 갤럽이 실시한 설문조사를 보면, 미국 성인남녀 1004명 중 44%는 오바마의 종교가 무엇인지 몰랐고, 대통령을 이슬람교도로 알고 있는 사람도 11%나 됐다고 한다. 오바마가 언론 인터뷰 등에서 자신을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적극적으로 소개한 것을 감안하면 의외의 결과다. 오바마의 타종교에 대한 개방적 태도가 빌미를 준 셈이다. 종교 문제가 정치적 쟁점으로 떠오르는 미국 사회를 보노라면, 같은 서양 문명권이면서도 종교성이 지극히 약한 덴마크와 스웨덴을 떠올리게 된다. 미국의 사회학자 필 주커먼은 2005년 5월부터 14개월 동안 덴마크에서 살았다. 아내와 두 딸이 함께했고, 그곳에서 아이가 하나 더 태어났다. 아이들은 덴마크 학교에 보내 교육시켰다. 그는 수백명의 덴마크인·스웨덴인과 인터뷰를 진행해 두 나라의 종교 실태를 조사했다. 그 결과물이 ‘신 없는 사회’(마음산책)다. 주커먼에 의하면, 정치인과 공무원의 청렴도에서 덴마크는 세계 4위, 스웨덴은 6위며, 상위 20개국 중 대다수가 비교적 종교성이 약한 나라다. 지니계수를 바탕으로 한 경제적 평등 면에서 덴마크는 세계 2위, 스웨덴은 4위다. 소득 평등이 가장 잘 이루어진 상위 20개국 중 대다수는 종교의 영향력이 약한 곳이다. 세계 경제포럼에 따르면 스웨덴의 국가경쟁력은 세계 3위, 덴마크는 4위다. 20위권 국가 중 종교의 세력이 강한 곳은 미국(6위)뿐, 다른 나라들은 모두 종교성이 약한 곳이다. 가난한 나라를 위한 자선 행위를 살펴보면 덴마크는 2위, 스웨덴은 3위고, 세계 최빈국들에 가장 많은 원조를 하는 20개국 중 많은 나라가 확연히 비종교적이다. 독일의 싱크탱크인 한스-뵈클러 재단은 사회적 정의의 확립에 얼마나 성공했는지를 기준으로 각국의 순위를 매겼는데, 세계에서 가장 비종교적인 나라인 덴마크·스웨덴이 공동 1위를 차지했다. 주커먼은, 만약 이 세상에 가장 ‘안전하고 견실한’ 사회가 있다면 덴마크가 바로 그런 곳이라고 단언한다. 흔히 기독교는 ‘빛과 소금’으로 자처한다. 그런데 종교성이 가장 약한 덴마크·스웨덴이 공무원의 청렴도, 경제적 평등, 사회적 정의, 최빈국 원조 등 모든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것은 대단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뿐인가? 2011년 1인당 국민소득 순위를 보면 덴마크와 스웨덴은 각각 7위와 8위였고, 미국은 15위였다(한국은 31위). 두 나라는 세계 최고 수준의 부자 나라이기도 한 것이다. 이에 비해 미국은 후기산업사회 중에서도 가장 불평등한 나라에 속하며, 부자 나라임에도 경제적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예수는 “나무는 그 열매를 보고 안다.”고 했다. “말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도 했다. ‘열매’와 ‘실천’을 놓고 보면 미국보다 덴마크·스웨덴이 예수의 기준에 훨씬 더 부합하는 모범국가인 셈이다. 기독교의 굴욕이다. 매사에 미국을 준거로 삼는 우리에겐 충격이다. 미국 기독교는 동성 결혼이나 오바마 신앙 검증 같은 지엽적 문제로 바람몰이를 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 정의와 경제적 평등 같은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목표에 매진해야 하는 것 아닐까? 미국 기독교를 빼닮은 한국 기독교 또한 빈약한 ‘도덕적 열매’에 대한 책임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 학자들의 신앙이 된 숫자 ‘임팩트 팩터(IF)’ 논란

    학자들의 신앙이 된 숫자 ‘임팩트 팩터(IF)’ 논란

    언제부턴가 학자들이 신앙처럼 떠받들게 된 숫자가 있다. 미국에서 만들어졌지만 유독 한국에서 더 그렇다. 조금이라도 오르면 환호하고, 혹여 떨어지면 자신이 갖고 있는 주식이 떨어진 것보다 더 슬퍼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느새 ‘절대적인 신앙’이 돼 버린 숫자. 학자들의 연구에 대한 가치를 매기는 점수. 인용지수 또는 임팩트 팩터(IF)로 불리는 지표다. ●의학저널 대거 상위권 포진 톰슨 로이터는 전 세계에서 발행되는 SCI 저널의 인용 통계 보고서(Journal Citation Reports 2011)를 최근 발표했다. 톰슨 로이터는 세계 규모의 출판사이자 사설 평가기관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저널의 가치 평가는 SCI 등재 여부와 인용지수로 평가된다. 특히 한국의 경우 교수 임용이나 석박사 학위, 연구실적 평가 등에 ‘SCI급 논문’을 가장 중요한 지표로 삼고 있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연구자와 연구 결과의 수준을 따지는데 현재까지 SCI만큼의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는 잣대가 없기 때문이다. 톰슨 로이터의 보고서에 이름을 올린 SCI저널은 8200여개가 넘는다. 이 때문에 이 안에서도 어느 저널이 더 유력 저널인지를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하다. 바로 임팩트 팩터(IF)다. IF는 해당 저널에 실린 논문이 지난 한해 동안 다른 연구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중요한 연구 결과일수록 후속 연구를 하려는 사람들이 몰리게 마련이고, 그들의 논문에는 참조한 논문이 인용된다. 이를 수치로 나타낸 것이 IF인 셈이다. 학문 영역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IF가 높은 저널은 곧 영향력 있고 뛰어난 저널로 봐도 무방하다. 일반적으로 생물학의 경우 IF가 10 이상이면 유력저널로 평가된다. 지난해 기준으로 IF가 가장 높은 저널은 ‘임상의학의를 위한 암 저널’(A Cancer Journal for Clinicians)로 IF가 101.78에 이른다. 2위인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신’의 53.298과 비교해도 두배에 이른다. 의학저널의 IF가 유독 높은 것은 논문을 접한 의사들이 임상실험 등을 통해 검증하거나 적용하기 위해 애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 의학은 가장 많은 연구비가 투입되는 분야이기도 하다. 랜싯(Lancet) 등 IF 상위권에 의학저널들이 대거 자리잡은 가운데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네이처는 36.28, 셀은 32.403, 사이언스는 31.201을 기록했다. 최근 강수경 서울대 교수의 논문조작 의혹으로 주목받은 ‘산화환원신호전달’(ARS)은 8.456이었다. 반면 한국에서 발행되는 SCI급 저널들은 모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SCI에 등재된 75편 중 IF가 가장 높은 저널은 대한생화학분자생물학회지로 2.481에 불과하다. 세계적 저널을 만들겠다고 정부가 지난 수년간 쏟아부은 지원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수치다. 특히 40여개 저널은 0점대에 머무르고 있다. 저널에 실린 논문이 1년간 한번도 채 인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IF의 부작용 목소리도 높아 IF가 학문간 우월성을 좌우하는 잣대는 아니다. 금종해 고등과학원 부원장은 “수학자가 1편의 논문을 쓰면 물리학자는 3~4편, 화학자는 5~6편, 생물학이나 의학자는 8~10편을 쓴다.”면서 “실험을 통해 논문이 많이 나올 수 있는 학문이 있고, 그렇지 않은 학문이 있는 만큼 IF를 비교하더라도 학문간 구분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IF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특히 수학의 경우에는 최상위 저널이라고 해도 IF가 1을 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학문 특성상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없기 때문이다. 물리학 역시 거대장비를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아 후속연구가 쉽지 않아 IF가 낮은 경우가 많다. IF로 학문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현재 국내에서는 연구자의 논문편수와 논문이 게재된 저널의 IF를 이용해 연구를 평가한다. 그러나 이로 인한 부작용이 만만찮다. IF를 높이기 위해 조직적으로 같은 학술지의 논문을 재인용하는 경우가 적발돼 2005년 국제적인 망신살이 뻗치기도 했다. 당시 톰슨 로이터 측은 급작스럽게 한국 학회지들의 IF가 높아지자 조사에 착수, 자기인용을 수치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대부분 학회의 대표학술지 IF가 다음해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 2009년에는 김동욱 연세대 의대교수, 정형민 차바이오앤디오스텍 사장 등이 편집이사를 맡는 등 의학·줄기세포 학계의 유력자들이 대거 참여한 조직공학·재생의학회에서 발행한 저널 ‘조직공학과 재생의학’에서 무더기 논문표절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이 학회지는 SCI등재후보지였으며 논문수와 IF를 높이기 위해 이 같은 일을 조직적으로 벌였지만, 사건이 불거지자 폐간 절차를 밟았다. 학계의 한 관계자는 “SCI와 IF가 처음 도입됐을 때는 객관적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효과가 많았지만, 이제는 정량화된 방식에 대한 회의론이 나오고 있다.”면서 “연구자 개개인의 역량을 믿는 방향으로 평가기준 등이 바뀌어야 할 시점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고 밝혔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이 여인들의 눈물, 외면할 수 있습니까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을 다룬 ‘학살, 그 이후’(권헌익 지음, 유강은 옮김, 휴머니스트 아카이브 펴냄)는 제사상에 올리는 한 잔의 술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인 저자는 한국인 인류학자다. 인류학자로서 1994년부터 틈나는 대로 베트남을 드나들며 현지조사를 수행했다. 한국인으로서 베트남전 특수로 인해 “내가 살던 가난한 동네에서도 물질적 상황조건이 개선”됐다는, 나중에 깨달은 “도덕적 궁지” 때문이다. 한국인 인류학자로서 저자는 이 책을 “공물(供物)로 내놓는다.”고 해뒀다. 학문적 땀방울 못지않게 인간적 눈물방울이 읽히는 이유다. 저자가 처음 꺼내 놓은 얘기는 1968년 2월 25일 한국군 해병대가 민간인 135명을 학살한 뒤 살아남은 몇몇 주민들이 시체들을 가매장해 둔 것까지 불도저로 모조리 밀어버렸다는 ‘하미 학살’이다. 한달이 채 지나지 않은 3월 16일, 미군도 똑같은 짓을 저질렀다. 이는 ‘미라이 학살’로 널리 알려졌다. 한국군의 행위가 그에 못지않게 잔혹했고, 노엄 촘스키가 “43건의 미라이 학살들”이라는 복수형 표현을 쓸 정도로 빈번했음에도 왜 미라이 학살만 알려졌을까. “하위 행위자는 폭력적인 마을 평정 작전에서 지배적 행위자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행동하고도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일 뿐이다. 쉽게 말해 이름을 떨친 종군기자나 연구자들은 미군만 쫓아다녔지, 한국군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국가 정체성 운운하며 흥분할 필요는 없다. 저자는 베트남전 참전군인들을 대놓고 비난하지 않는다. 그들 역시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실제 저자가 만난 학살 생존자들은 시계추처럼 오간 군인들의 극단적 이중성에 곤혹스러워했다. 어제 주민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고 집 짓는 걸 도와주던 이들이 오늘은 주민들을 모아놓고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총을 난사했다는 것이다. 이 극단적 이중성이 어찌 그들 탓이랴. “전쟁이라는 냉혹한 태엽장치에서 시계추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고 “시계추에는 자체의 동학이 있지만 자신의 운동을 통제할 수 없”었을 뿐이다. 저자는 “전후의 삶을 통해 이런 잔인한 동요의 기억과 싸웠다고 믿는다.”는 수준에서 매듭짓는다. 저자가 힘을 모으는 지점은 학살된 이들을 베트남 사람들이 추모하고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과정이다. 이는 저자가 에밀 뒤르켐의 수제자 로베르 에르츠의 ‘상징적 양손잡이’ 개념을 주된 화두로 붙잡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아노미 개념에서 보듯 뒤르켐은 사회적 유대감에 관심을 가졌다. 에르츠는 그다음 단계, 그러니까 사회적 유대가 격렬하게 깨졌을 경우 어떤 양상이 벌어지고 이를 어떻게 봉합할 것인가를 연구했다. 이를 위해 제안한 것이 양손잡이 개념이다. 오른손에게 바른 손이라는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왼손도 함께 바라봐 온전한 양손잡이가 되자는 것이다. 영웅적 군인이 오른손이라면, 학살 피해자는 왼손이다. 저자는 실제 현지조사를 통해 학살 피해자들이 베트남 내부에서도 왼손 취급당했음을 드러낸다. 전쟁 이후 베트남도 대대적인 기념사업을 수행했다. 전선에서 피 흘리며 죽어간 젊은이들에게 국가는 전쟁영웅이란 칭호를 부여했고 기념비와 묘지를 바쳤다. 그러나 균열도 드러난다. 북베트남 전사들은 전쟁을 위해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전장에 투입됐다. 해서 시체를 고향으로 되돌려 보내 웅대한 기념비 옆에 묻으면 된다. 접경지대격인 베트남 중부의 학살 피해자는 다르다. “영웅적 전사자라는 도식 안에서 보면, (학살 피해자들의) 집단 무덤은 재생의 가치가 결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편의 유해와 상대편의 유해가 뒤죽박죽 엉켜 있는 모호한 대상”이다. 그래서 “혁명 열사들의 유해를 모아 마을의 중심부로 가져왔을 때 평범한 마을 사람들의 유골은 논으로 바꿀 예정인 곳에서 외곽의 모래투성이 황무지로 옮겨졌다.” 비극적 죽음에 눈물 흘릴 공간을 잃어버린 주민들은 해원을 위해 사당을 짓고 무당을 불렀다. 조선시대 성리학이 교조화되면서 의지할 곳을 잃은 부녀자들이 절과 무당집에 몰려갔듯, 베트남 주민들도 민간전통신앙에 의지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들었다. 문제는 국가적 공식 기억에 맞지 않고 과학적 사회주의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베트남 정부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점이다. 이는 딜레마를 낳는다. 전쟁 당시 베트남 인민들이 가장 분노한 것은 외국 군인들이 조상을 모신 사당을 부수고 사람을 함부로 죽였을 뿐 아니라, 장사조차 못 지내게 시체를 마구 훼손하고 뒤섞어 버린 만행이었다. “전쟁 동원 체제에 가장 뚜렷한 기여를 한 조상 사당들이 전쟁이 끝난 뒤에 정치적 불순성과 문화적 후진성의 상징으로 꼽힌 것은 아이러니다.” 이 갈등은 1990년대부터 수면 위로 치솟는다. 여러 가지 형태의 이장운동이 벌어지는 것이다. 국가가 조성한 공식 무덤에서 개인 사당으로 유골을 빼내오거나, 버려졌던 유골을 국가의 공식 무덤에 안치하는 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베트남전은 이데올로기나 박정희 평가 문제, 유력 차기 대권주자인 박근혜 의원의 반발(2001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베트남전 참전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자 “6·25전쟁에 참전한 16개국도 북한에 사과해야 하느냐.”고 공격했다.) 등이 있어서 한국에서도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빙빙 에둘러 왔지만, 사실 책의 백미는 이 부분이다. 하나만 꼽자면, 하미 전쟁열사묘지에는 ‘전쟁범죄 희생자 35인의 공동무덤’이 있다. 1986년 9월 하미에서는 하미 근처 하지 마을에서 한국군에 의해 35명이 학살당한 사건을 놓고 논쟁이 벌어진다. 주민들은 이들 역시 열사라 보고 공식묘지에 묻어 달라고 요구하지만, 정부는 이를 거부한다. “열사란 직접 적과 맞서 싸운 이들”이라서다. 주민들 압력으로 결국 무덤은 조성되지만, 정부는 이들 묘를 파내려고 한다. 그때 주민들은 “낫이나 작대기를 무기 삼아 들었다.” “오늘부터 너희가 우리 적”이라면서. 저자는 무차별적인 학살 때문에 그 수많은 뼈와 해골 가운데 어느 것이 누구의 유골인지 모를 지경이지만, 그럼에도 한 구 한 구 파내 정성스럽게 쓰다듬고 정리하고 가지런히 다시 묻는 이장의 과정 자체가 후손들에게는 정신적으로 커다란 치유가 된다는 증언들을 곳곳에서 강조한다. 저자가 끊임없이 길어올리는 것은 ‘농민인지 전사인지 구분 안 되는 악독한 빨갱이 베트콩’ 대신 ‘조상 모시면서 제 땅을 제가 파먹고 살길 원하는, 농경사회라면 흔히 발견되는, 한국에서도 흔히 찾을 수 있는 농민의 얼굴’이다. “농민 전사들이 군복을 입은 정규군 병사들과 악수를 하고, 정치 장교들이 장황하게 늘어놓는 연설을 참고 들으며, 달 없는 밤을 틈타 재빨리 집으로 달려왔을 때, 그들이 여전히 군인이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니까 “체제가 공간의 균질성과 정체성의 불변을 고집한 반면, 삶으로 직접 겪는 냉전의 현실은 모순적 공간이나 변증법적 공간이었고, 이러한 현실 속의 정체성은 변하지 않는 동일자가 아니라 쉽게 변화하는 존재였으며, 이런 변형성이야말로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을 제공했다.” 모두가 베트콩이었으되, 그 어느 누구도 베트콩이 아닌 이런 상황을 저자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부른다. 저자는 이 책으로 2007년 미국 인류학회가 수여하는 클리퍼드 기어츠상을, 후속작 ‘베트남전쟁의 혼령들’로 2009년 미국 아시아연구협회가 주는 조지 카힌상을 받았다. 해서 책 앞에는 드루 파우스트 하버드대 총장의 서문이 붙어 있다. 한 구절 따온다면 이렇다. “전쟁을 수행하는 나라들은 정치적 목적과 이데올로기를 위해 죽은 이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가족들에게서 그들을 앗아가 깊은 상처를 남기고 사자(死者)들을 역사의 행위자가 아니라 도구로 뒤바꾼다.” 한국전쟁과 그 이후 지금까지도 격렬한 이념전쟁을 치르고 있는 한국에서도 이런 연구가 수행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저자는 한국전쟁 연구 권위자인 박명림 연세대 교수와 손잡고 ‘한국전쟁을 넘어서’라는 국제연구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기다려지는 부분이다. 1만 5000원.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조환익 바깥세상] 진정한 ‘미얀마의 봄’은 어떻게 오나

    [조환익 바깥세상] 진정한 ‘미얀마의 봄’은 어떻게 오나

    지난주 미얀마를 방문하였다. 미국 등 서양세계의 경제 제재가 한창이었던 2005년 산업자원부 차관 자격으로 방문한 뒤 7년 만이다. 당시 이 나라 경제는 중국이나 인도 등의 경제적 지원에 의해 산소호흡기를 끼고 간신히 연명하던 상태였고 외교적으로도 대부분의 국가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는 실정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대우가 벵골만 심해 속에서 천연가스를 발굴하여 미얀마에 희망을 주었듯이, 한국은 미얀마에 희망과 행운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나라로 생각한다며 많은 투자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저 도와만 달라는 이야기였다. 장관도, 차관도, 대사도 모두 군인이었다.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이 나라가 어느 날 수도 이전을 발표하고 막대한 재정을 쏟아부었다. 총리가 권력다툼에서 밀려나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민주주의와 합리의 눈으로 보면 이해가 안 되고 국민이 참 착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런 가운데에도 ‘가을동화’가 방영되는 시간에는 거리가 한산하고 절대권력의 최고지도자도 그 시간만큼은 부인에게 말도 못 건다고 하였다. 물론 아웅산 수치 여사는 철통 같은 경비 속에 가택 연금되어 식물처럼 살고 있었다. 그러던 미얀마가 달라졌다. 무엇보다도 민주화의 봄이 찾아왔다. 군사정부가 한발 물러섰다. 20년 철권 군부권력이 민간정부로 넘어왔다. 군 출신 현 대통령을 처음에는 군사정부가 뒤에서 조종하는 ‘허수아비’로 의심하는 국민들이 많았지만 예상보다 소신을 갖고 민생을 챙기고 개혁조치를 밀고 나가 국민들 사이에 인기가 올라가고 있다고 한다. 거리에 경찰보다 더 많이 눈에 띄던 군인들을 보기 힘들고 국민들도 주위를 안 돌아보고 정부 비판을 한다고 한다. 순수 민간 전문가들이 각료로 임명되기 시작하였다. 제일 큰 의미는 아웅산 수치 여사가 자유로워졌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양곤에 있는 동안 그는 영국의회에서 연설하고 있었다. 유창한 영국 악센트 영어로 유머를 편하게 섞어가며 청중을 사로잡았다. 현재 세계의 개도국 정치지도자 중 가장 영향력과 호소력이 있는 인물이 아닐까 싶다. 거리에 차가 7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고, 양곤 시내에 스카이라인도 제법 생겼다. 한류는 이제 드라마 단계를 지나서 K팝이 미얀마의 젊은이들을 흔들어 놓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미얀마의 경제와 국민 생활이 달라진 것이 무엇인가? 많은 외국기업들이 드나들면서 투자 여건을 탐문하지만 투자 약속이 구체적으로 실천된 것은 별로 없다. 전반적인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미얀마의 불확실성이 더 큰 원인일 수 있다.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자.’는 열망과 기백이 7년 만에 양곤을 찾은 필자에게 절실히 느껴지지가 않았다. 미얀마 국민들을 10년간 먹일 수 있다는 금을 붙여놓은 ‘셰다곤’ 사탑을 그때나 지금이나 미얀마 사람들은 탑돌이하며 현세의 행운과 내세의 안녕을 빌고 있었다. 국민적 신앙이 깊은 것은 좋은 일이겠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최빈국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국민들이 결집하여 개혁의 의지를 갖고 모든 관행과 제도를 하나하나 개선하여 외국인들의 눈에 매력적인 미얀마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지금도 현지의 우리 기업들은 종업원을 위한 기숙사도 만들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사람들이 모이는 것 자체를 정부가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물경제는 달아오르지 않았는데도 부동산가격이 급등하여 2년 전보다 주요 아파트 월세가 4배 이상 뛰었고, 그나마도 구하기가 어렵다. 통신시설 등 사회간접자본도, 제조업 기반도 거의 없고 가장 큰 수입원인 천연가스도 액화시설이 없어 그냥 파이프로 중국에 저렴하게 수출할 뿐이다. 미얀마의 민주화와 경제적 성공을 모두 달성시키는 것은 참으로 먼 길이다. 민주화와 경제적 성공은 외국의 도움이나 정치 지도자의 지도력만으로는 안 된다. 국민의 힘이 만들어 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 국민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다.
  • 神도 논리의 창조물 vs 진화, 神이 허락한 것

    神도 논리의 창조물 vs 진화, 神이 허락한 것

    진화론을 둘러싼 과학교과서 논란이 뜨겁습니다. 안 그래도 더운 날, 뜨겁다 하려니 죄송하군요. ‘과학교과서에서 사라지는 진화론’<서울신문 5월 17일자 10면>이 처음 보도되더니, 세계적 학술지 네이처에서 이를 우려한다는 보도(‘네이처 “한국, 창조론 요구에 항복”…우려표시’·서울신문 6월 7일자 9면)가 나왔습니다. 반격(‘교진추, 화학진화론도 생명기원과 무관’·서울신문 6월 15일자 11면)도 수위를 높였습니다. 이 와중에 ‘진화심리학’(데이비드 버스 지음, 이충호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이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진화론을, 생물학 너머 심리학에까지 적용시킨 겁니다. 진화론의 최전선쯤될까요. 진화심리학에는 두가지 비아냥이 따라다닙니다. 하나는 “헤겔 철학하냐.”는 겁니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이성적이다.”라는 식의, “그럴 수 밖에 없으니까 그런다.”는 식의 사후합리화 혹은 중언부언 아니냐는 겁니다. 이는 진화론이 단순한 유전자결정론처럼 오해받아 생기는 난점인데, 저자가 책 전반에 걸쳐 여러 재밌는 사례를 통해 나름대로 반박하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대체 문화는 어떻게 설명할래?”입니다. 진화심리학이란 짝짓기, 호전적 행위처럼 신석기 시대 이후 쭉 내려온 인류 공통 분모만 설명해줄 뿐, 인간이 창출해낸 개성적인 문화를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겁니다. 간단하게 말해 진화심리학이 가르쳐주는 것이라곤 기껏 “(인류가) 아직도 그대로네!”라는 겁니다. 책을 집어들었을 때 사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나 논증을 기대했는데, 책 끝부분 13장 ‘통합심리학을 향해’에서 문화 현상에도 “신선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고만 해둡니다. 기대 섞인 전망 수준입니다. 아쉽습니다. 여하간 이처럼 진화론자들은 생물학을 넘어 심리학으로 진군하고 있는데, 왜 아직도 창조론과 씨름을 벌일까요. 번쩍 떠오르는 인물이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2006년 ‘만들어진 신’(이한음 옮김, 김영사 펴냄)을 낸 리처드 도킨스입니다. 솔직히 의아했습니다. 뻔한 내용일 텐데 왜 600쪽에 육박하는 책을 썼을까 싶었습니다. 도킨스는 이미 ‘눈먼 시계공’(이용철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으로 창조론을 비판한 바 있었습니다. 그것도 1986년에 말입니다. 복잡하고 정교한 시계에는 시계공이 있듯, 더 복잡한 우주 만물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창조주가 있다는 게 시계공 논리입니다. 창조론을 옹호하는 대표적 논리로 꼽히지만, 정작 종교계는 그리 탐탁지 않게 여깁니다.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설명되어버린다면 그걸 신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신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이성, 논리, 과학을 뛰어넘는 어떤 도약이 아닐까요. 그래서 신을 시계공에다 비유하는 것은 결국 신의 자리를 이성에게 양보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옵니다. 알랭 드 보통의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박중서 옮김, 청미래 펴냄)가 대표적입니다. 보통은 이성을 신으로 모시자고 제안합니다. 무신론자의 성전을 만들자는 거지요. 영국 런던에다 짓겠다 해서 화제가 된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책을 읽을 때 이성의 신에만 주목하지 말고, 이래서 종교계가 시계공 논리를 싫어하겠구나 하면서 읽으면 좋을 듯합니다. 어쨌든, 도킨스의 반박은 멋진 구석이 있습니다. 시계공 앞에다가 ‘눈 먼’(Blind)이라는 수식어 하나 붙이는 걸로 끝내 버렸으니까요. 그래 너희 말대로 이 우주에 시계공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아마 눈이 멀었을 것이다, 라고 응수한 거지요. 그런데 왜 20년 뒤 ‘만들어진 신’을 또 내야 했을까요. 그것도 멋진 응수가 아니라 직설적으로 - 원제가 ‘The God Delusion’입니다. 단순히 만들어졌다가 아니라 ‘망상’이라는 거죠. - 비판해야만 했을까요. 그래서 ‘만들어진 신’에서 흥미롭게 읽히는 대목은 도킨스의 ‘논증’보다 ‘연민’입니다. 여러 얘기가 있지만 한가지만 꼽자면, 세계적 학자 밑에서 지질학과 고생물학 두 개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전도유망한 젊은 과학자가 지구 나이는 1만년에 불과하다는 근본주의 기독교의 창조론 때문에 학업을 포기했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요. 진화론 없는 교과서로 공부한 학생들이 나중에 자연과학자가 되었을 때 “신앙과 배치되는 연구를 할 수 없다.”며 연구실을 박차고 나가는 사건이 벌어질까요. ‘눈먼 시계공’ 이후 ‘만들어진 신’을 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세를 크게 불린 기독교 원리주의에 대한 과학자로서의 위기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당시가 기독교 원리주의 부시 정권 집권기였다는 점도 감안해야 할 듯합니다. 이쯤에서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려봅시다. 테리 이글턴의 ‘신을 옹호하다’(강주헌 옮김, 모멘토 펴냄)입니다. 맞습니다. 이 사람, 종교를 아편 취급하는 마르크스주의자입니다. 그런데 스스로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입니다. 도킨스, 그리고 좌파 무신론자 크리스토퍼 히친스를 ‘도친스’라 합쳐부르면서 강하게 비판합니다. 타깃은 주로 히친스 쪽입니다만. 그 맥락을 자세히 얘기하기엔 그렇고, 이 사람 한국에 왔을 때 한마디 남깁니다. “이미 오래전 토마스 아퀴나스는 창조론을 틀렸다고 했다. 과학이 뭐라 하건 말건, 신학 입장에서 우주의 기원 따윈 없다는 것이다.” 놀랍지 않습니까. 중세 신학의 거장 아퀴나스가 이미 창조론 따윈 틀렸다 말했다니! 진화론과 무관하게 원래 신학의 창조론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방식의 창조론이 아니라는 겁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무신론도 일종의 신념체계라는 점에서 종교적이라 지적하면서, 종교 문제를 회피한 채 공리주의로 퇴각해버린 무신론보다 차라리 제대로 된 유신론이 훨씬 낫다는 입장에 섭니다. 이 주장은 한국에서 거의 연예인급 대접을 받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이창신 옮김, 김영사 펴냄)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0강 ‘정의와 공동선’ 가운데 ‘중립을 지키려는 열망’ 부분입니다. 한번 비교해서 음미해볼 만합니다.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한 권이 있습니다. 800쪽이 넘어갈 정도니 좀 두껍긴 한데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김용규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입니다. 고백하자면, 서양문명 통사쯤으로 생각하고 집었습니다. 신학 논쟁만 빼곡하더군요. 그래서 처음엔 돈 아까워서 꾸역꾸역 읽었는데, 책을 덮은 뒤에는 저의 착각이 무척 고마워졌던 책입니다. 3부에서 창조론과 진화론의 양립주의, 그러니까 둘은 모순되지 않는다고 논증합니다. “열렬한 유신론자이면서 진화론자일 수 있다.”는 다윈의 말과 “신의 섭리가 효력을 지속시키더라도 많은 것은 우연적이다.”라는 아퀴나스의 말에 주목합니다. 저자는 이 두 부분을 정교하게 결합시키는데 너무 길어지니까 여기선 짧게 일부만 인용하지요. “아퀴나스와 다윈이 600년이라는 세월을 건너뛰어 만나 이구동성으로 ‘만물은 우연에 의해 자발적으로 진화하지요.’라고 말한다 해도, 하나는 ‘피조물에 자유를 허락한 신의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환경에 적응해나가는 진화의 맹목적성’에 대해 말하는 겁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언어 놀이’를 하고 있다는 얘기에요.” 고상하게 말하자면 신과 인간 사이에는 심대한 질적 차이가 있다는 것이고, 수준 낮게 말해서 과학과 신학은 노는 물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이러고 보니 창조론과 진화론 싸움은 어째 허깨비 싸움 같아지는군요.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민족문화·인류의 뿌리 지켜야 증산도 세계화에 적극 나설 것”

    “민족문화·인류의 뿌리 지켜야 증산도 세계화에 적극 나설 것”

    “물질적으로 아무리 풍요롭고 번창해도 근본과 뿌리를 외면한다면 사상누각이요,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성과에 불과합니다. 지금이야말로 뿌리찾기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지난 3일 민족종교 증산도의 새 수장으로 취임한 안경전(58) 종도사. 취임 후 처음으로 18일 대전 증산도 교육문화회관에서 기자들과 만난 안 종도사는 이날 때맞춰 출간된 ‘환단고기 역주본’을 자랑스럽게 내놓았다. ●“한민족 후천개벽 중심에 설 것” “중국의 만리장성 길이 부풀리기를 비롯한 동북아 역사왜곡이며 남북 간 긴장상태, 그리고 가속화되는 환경 파괴를 보면 우주와 세계가 격변하고 있음을 실감케 됩니다. 이럴 때일수록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고 민족문화의 원형을 지켜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환단고기는 그런 차원에서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소중한 자료입니다.” ‘환단고기 역주본’은 안 종도사가 1982년부터 무려 30여년간 줄곧 매달려 번역하고 해제를 붙여 펴낸 방대한 책. 증산도의 ‘후천개벽’과 맞닿은 때문인지 안 종도사는 기자들에게 인터뷰의 오랜 시간을 애써 ‘환단고기’ 설명에 할애했다. 1911년 운초 계연수가 처음 펴낸 ‘환단고기’는 신성을 지닌 환인과 환웅이 직접 다스린 환국과 배달국, 단군조선으로 이어지는 시대를 우리 상고사의 실체로 본다. “환단고기는 한민족이 앞으로 다가올 후천개벽의 중심에 설 것임을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중국·일본·서양의 그릇된 역사관에 매몰된 강단 사학자들이 굳이 조작된 위서(僞書)로 몰아 외면하고 있지요.” ●“뿌리 잘 받들고 은혜에 보답을” 안 종도사는 춘하추동의 사계가 있듯이 우주도 순환의 체계를 갖는다고 한다. 상극의 선천시대에서 평화와 상생의 후천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지금 ‘뿌리를 잘 받들고 뿌리의 은혜에 보답하라.’는 원시반본(原始返本)과 보은(報恩)의 교훈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제 무한경쟁과 상극의 험한 세상을 넘어서서 상생의 새로운 질서를 향해 가야 하고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나 작은 은혜를 입었다면 꼭 갚는다는 마음과 실천의 의지를 다져야 합니다. 남이 잘돼야 나도 잘되는 법입니다. 남이 잘되도록 돕는 게 참다운 인간으로 성숙해 가는 지름길이 아닐까요.” 안 종도사는 지난 2월 선화(仙化·별세)한 아버지 안운산 종도사를 1974년부터 보필해 증산도를 개창하고 부흥을 이끌었던 수장. 그동안 도전과 증산도 사상서 정리·편찬에 힘써 왔다면 이제부터 보편 종교로서의 증산도 세계화에 적극 나서겠다고 다짐했다. “보편적인 철학과 사상체계를 갖춘 증산도를 굳이 한반도에 국한해 예언을 앞세우는 협소한 민족종교로 보지 않았으면 합니다.” 물론 한국과 중국, 일본이 복잡하게 얽힌 동북아 국제관계 속에 왜곡·조작된 채 잊혀 버린 한민족과 인류의 뿌리며 원형문화 찾기는 빼놓을 수 없는 중대 과제다. ●증산도 역사 담은 책도 곧 출간 환단고기에 대한 위서 논란을 종식하기 위한 노력도 그중 하나라고 한다. “오는 9월 초순이면 증산도의 사상체계와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도전’이 주요 7개국 언어로 완전히 번역 출간됩니다. 지금 3000명 정도인 성직자 숫자를 1만 2000명까지 늘려 나갈 계획입니다. 외국의 어려운 젊은이들을 한국으로 초청하는 장학사업을 통해 해외 포교에도 적극 나설 것입니다.” 증산도는 도조인 강증산(1871~1909) 상제를 인간의 몸으로 온 하나님으로 여겨 우주의 계절(우주년)이 순환한다는 신앙을 따르고 있으며, 현재 국내 220개를 비롯해 해외 20여개국에 도장을 갖추고 있다. 글 사진 대전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깔깔깔]

    ●성경 읽기 추운 겨울날, 교회 부흥회를 인도하러 목사가 왔다. 목사 숙소에 할머니 한 분이 오더니, 정성껏 목사의 시중을 들었다. 목사가 찬 것을 마시면 감기가 든다며 콜라까지 끓여다 줄 정도였다. 할머니는 쉬는 시간 틈틈이 성경을 보는 신앙심이 대단한 분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경을 다 읽지도 않고 사람 이름만 읽고 있는 게 아닌가. 이에 목사가 궁금하여 물었다. “할머니! 왜 사람 이름만 읽고 계신가요?” 그러자 할머니가 대답했다. “아이고 목사님~! 곧 하나님 앞에 갈 텐데 성경은 다 읽어서 무엇합니까? 이 사람들은 다 천국에 있을 텐데…. 그래도 이름은 외워 가야 아는 척이라도 하지요~”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5) 서울 성동구 ‘마조로’·‘살곶이길’

    [길을 품은 우리 동네] (5) 서울 성동구 ‘마조로’·‘살곶이길’

    1462년(세조 8년) 9월 27일, 도성에서 가장 가까운 조선시대 군사훈련장이자, 군사력을 좌우하는 군마(軍馬)를 기르던 목장인 살곶이벌(箭串坪). 전라·경상·황해도에서 징집돼 온 군사가 기병 7800여명, 보병 2400여명이었다. 여기에 중앙군 기병 2400여명, 보병 3600여명이 더해졌다. 임금이 직접 이들의 군사훈련을 참관했다.(조선왕조실록 영인본 7책 551면) 지금 성동·광진·중랑구 등 한강에 맞닿아 있는 서울 동쪽 평야지대는 조선시대 군사 요충지였다. 지금으로 따지면 수도방위사령부나 육·해·공군 통합기지인 계룡대에 해당한다. 당시 군사력의 핵심이던 말을 키우고 군인들이 승마술과 기병 전술을 연마하던 곳이었다. 또 해마다 임금이 직접 열병식과 군사훈련을 참관해 포상하기도 했던 곳이다. 이 때문에 살곶이 목장을 관리하는 문제는 임금이 대신들과 논하던 중요한 국사 중 하나였다. 이 일대에서 비교적 높은 지대인 행당산에는 마조(馬祖)·선목(先牧)·마사(馬社)·마보(馬步)단 등 제단이 있었다. 말 조상신인 방성, 말을 처음 길렀다는 선목, 승마술을 처음 시작했다는 마사, 말에게 재앙을 준다는 마보에게 각각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하지만 이들 제단이 단순히 의식을 위한 곳은 아니었다. 최래옥 한양대 명예교수(성동구 도로명위원)는 “(이 네 제단은)단순히 제사만 지내던 곳이 아니라 국토방위의 의지를 나타내던 곳이었다.”면서 “이와 동시에 말을 기르고, 승마술을 연구하고, 말의 질병을 치료·예방하는 시설과 전문인력이 있었던 곳”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전곶(箭串·살곶이)교, 마장(馬場)동, 면목(面牧)동 등 남아 있는 지명으로만 이런 흔적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지난해 새 도로명 주소 사업으로 살곶이길, 마조로 등 길 이름이 다시 생겨난 덕에 옛 흔적이 조금이나마 더 복원된 셈이다. 행정안전부, 성동구 등에 따르면 현재 청계천 고산자교~한양대정문 사거리 3.6㎞ 구간 살곶이길에만 2142가구가, 한양대정문 사거리~마장역삼거리 850m 구간 마조로에는 629가구가 살고 있다. 과거 지번주소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화살꽂이길’, ‘말조상길’ 같은 소중한 우리 지명이 도로명 주소 사업으로 명맥을 잇게 됐다. 살곶이는 한양으로 들어오는 교통의 요지였다. 조선시대 가장 큰 교량인 살곶이다리(전곶교)가 들어선 이유다. 이곳은 또 조선 초 매사냥으로 유명했다. 임금이 여흥을 즐기고자 신하들과 군사를 시켜 매를 풀어 사냥하도록 했다. 이곳을 군마를 육성하는 목장으로 바꾼 것은 태종때다. 태종 13년(1413)에 살곶이목장을 설치했는데, 그 크기가 민전 500여결(民田 凡五百餘結)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잦은 왜적·오랑캐의 침입으로 조선시대 임금들이 살곶이 평야를 중시했다. 개간을 허락하지 않았고, 말에게 먹이가 제때 공급되지 않을 때는 큰 벌을 내리기도 했다. 실록을 보면 1453년(단종 1년) 한 신하가 임금에게 “태종때부터 살곶이에 목장을 둔 것은 말을 방목하여 긴급한 용도에 대비하려는 까닭”이라면서 “목장 안의 비록 자그마한 땅이라도 개간하여 경작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1461년(세조 7년)에는 간경도감·사복시 등 관리들 간의 이권다툼으로 말을 먹일 생꼴이 끊기게 되자 임금이 “간경도감이 내 말을 위태롭고 해롭게 하는구나.”라고 화를 내며, 해당 관리들을 벌(국문)하도록 했다. 심지어 인근 숲에서 땔감을 구하는 일도 금지했다. 1482년(성종 13년)에 임금은 양주목사에게 “일찍이 흉년으로 백성들에게 땔나무를 하도록 허락하였으나, 아차산만은 살곶이목장 곁일 뿐만 아니라 한양과 가까우니 백성들이 땔나무 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라.”고 했다. 살곶이 목장의 성쇠는 조선의 국방력과 직결됐다. 실록에 따르면 임진왜란이 발발한 16세기 살곶이 목장은 물난리·탐관오리 등으로 우여곡절을 겪었다. 1504년(연산군 10년)에는 살곶이 목장이 폐지되고 목장을 지금의 의정부에 있는 녹양평으로 옮겼다. 신하들이 “녹양평에는 수초가 많고, 도봉산·수락산 호랑이도 자주 출몰해 말을 기르기 적당하지 않다.”고 했지만, 연산군은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다.”면서 “목장을 옮기고 살곶이는 사냥용으로 바꾸라.”고 우겼다. 이런 결정은 곧바로 조선의 군사력 약화로 이어졌다. 1507년 살곶이에서 중종이 직접 군사훈련을 참관했지만, ‘군사의 숫자가 매우 적었다.’고 기록됐다. 목장 관리능력도 한계를 드러냈다. 1546년(명종 1년)에는 ‘열흘동안 내린 큰 비로 (살곶이 목장의)많은 말이 익사’하기도 했다. 1566년(명종 21년)에는 ‘살곶이 목장의 목책이 허술해 말들이 많이 도망치고, 이를 군사를 풀어 쫓아잡는데, 10개 읍이 시끄럽다. 생꼴값을 너무 많이 징수해 관리들이 자기 배를 채운다.’는 한 관리의 진술이 남아 있다. 마조단은 이러한 살곶이 목장의 병참기지와 같은 곳으로 추정된다. 평생 서울 지명을 연구해 온 최 교수는 “마조단은 말에 딸린 여러 가지 일을 총괄하는 기능을 했던 곳으로 말 전문가들이 있던 곳이었다.”면서 “기병이 훈련하던 ‘마장’과 말을 기르던 ‘살곶이 목장’을 기술·신앙적으로 뒷받침하던 곳”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1908년 순종때 마조단은 폐지됐다. 겉으로 ‘미신타파’를 내세웠지만,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3년 뒤 벌어진 일이라 조선의 자주국방 의지를 꺾으려는 일본의 의도로 분석된다. 결국 2년 뒤 일본은 우리 국권을 강탈했다. 지금의 한양대 중앙도서관 한쪽 귀퉁이에 세워져 있는 마조단터라는 이름의 표석이 유일하게 이곳에 마조단이 있었던 자리임을 알려준다. 하지만 어떤 모양으로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50~60년대 한양대 확장 과정에서 마조단 비석이 발견됐다. 그러나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독재까지 용납됐던 시대에 비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다만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을 종합했을 때 최교수는 그 위치를 지금 표석 위치에서 살곶이 다리 쪽으로 내려온 지금의 한양대 교육대학원 자리일 것으로 추정했다. 실록(영인본 5책 176면)에는 마조단의 크기는 가로·세로가 6m 30㎝(2장 1척), 높이가 75㎝(2척 5촌)였다는 기록만이 남아 있다. 최 교수는 “역사에서 마조단이나 살곶이 목장이 운영된 것을 보면 과거 어른들이 국방을 얼마나 상징적으로 또 실질적으로 중시했는지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성동구는 이달 말까지 마조단의 안내시설물을 설치할 계획이다. 김양진기자 ky0295@seoul.co.kr ●6회는 울산 동구 ‘전하로’를 소개합니다.
  • [서울신문 보도 그후] 네이처 “한국, 창조론 요구에 항복”… 우려 표시

    세계적인 과학저널 네이처가 한국 과학 교과서의 진화론 논란과 관련, ‘한국이 창조론의 요구에 항복했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학문적 차원의 우려를 표명했다. 네이처는 5일(현지시간) 발간된 최신 호에 실린 서울발 기사에서 “미국의 일부 주에서 진화론을 제한적으로 가르치는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한국에서는 진화론 반대자들이 주류 과학계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다.”고 전했다. 또 “최근 한국의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위원회(교진추)라는 단체가 고교 과학 교과서에서 진화론의 증거로 사용돼 온 시조새를 삭제하도록 청원해 관철시켰다.”면서 “교진추는 인간의 진화, 핀치새가 서식지에 따라 부리 모양이 달라지는 것 등 유명한 진화론의 근거들에 대해서도 추가로 청원을 제기하겠다는 입장”이라고 소개했다. 교진추는 지난해 12월 ‘시조새는 파충류와 조류의 중간종이 아니다.’라는 청원을 제출해 6개 교과서 출판사가 관련 부분을 수정하거나 삭제하기로 했다. 또 3월에는 ‘말의 진화 계열은 상상의 산물’이라는 청원을 내 3개 출판사로부터 삭제 약속을 받아냈다. 네이처는 다양한 사례를 들며 한국 과학계 및 국민들의 진화론에 대한 인식을 거론했다. 특히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학내에 창조과학을 연구하는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한국을 이끄는 과학기술 대학에서조차 진화론을 부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2009년 조사를 인용해 “한국민의 3분의1은 진화론을 믿지 않으며 41%는 진화론이 과학적으로 불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서 “39%는 자신의 종교적 믿음과 진화론이 배치된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특히 이 같은 진화론에 대한 반감의 원인으로 ‘기독교 신앙의 번영’을 꼽았다. 장대익 서울대 교양학부 교수는 네이처에서 “현재까지 창조론의 공격에 대해 생물학계가 무대응으로 일관했지만 이제 더 이상 침묵은 답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보령 삽시도, 날물과 들물이 빚어낸 세 가지 보물

    보령 삽시도, 날물과 들물이 빚어낸 세 가지 보물

    충남 보령 앞바다에 떠 있는 삽시도엔 세 가지 보물이 있다고 했습니다. 날물 때 삽시도와 연결되는 면삽지와 갯벌 가운데서 맑은 물이 솟는 물망터, 솔방울을 맺지 못하는 외로운 소나무 황금곰솔 등이 그것입니다. 여기에 날물 때만 자태를 드러내는 풀등을 보탭니다. 바닷물이 빠지면서 섬 주변의 갯벌 너머로 노란 모래 언덕을 토해내는데 그 덕에 섬은 한층 빼어난 풍경으로 채색됩니다. 돌아오는 길에 고대도에 들러도 좋겠습니다. 한국 개신교가 시작된 곳이지요. 외지인에게 불퉁스러운 게 꼭 고추냉이처럼 알싸한 느낌을 주는 섬입니다. ●날물이 남기고 가는 3색 해수욕장 삽시도(揷矢島)는 하늘에서 바라보면 화살(矢)을 꽂은(揷) 활처럼 생겼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대천항에서 13㎞쯤 떨어져 있다. 충남의 섬 가운데 안면도, 원산도 다음으로 넓다. 그런데도 면적은 3.78㎢에 불과하다. 한나절만 자분자분 걸으면 섬 구석구석을 죄다 들여다볼 수 있다. 섬은 작아도 해수욕을 즐길 만한 해변은 세 군데나 된다. 거멀너머해변과 진너머해변, 그리고 밤섬해변 등이다. 웃말의 술뚱선착장에서 야트막한 언덕을 하나 넘으면 거멀너머해변이다. 선착장과 관공서 등이 밀집한 동쪽 해안과는 사뭇 다른 적요한 해변이다. 사람 없는 백사장 위로 갈매기만 오락가락하고 그 흔한 고깃배도 쉬 눈에 띄지 않는다. 해변의 모래는 곱다. 과장 좀 보태면 여인네들이 쓰는 분가루와 닮았다. 백사장의 경사도 완만해 날물 때는 한참을 걸어야 바다에 닿는다. 거멀너머해변에서 한 굽이 돌면 진너머해변이다. 거멀너머해변과 쌍둥이처럼 닮았다. 백사장 길이가 100m쯤 짧고 뒤편에 높은 언덕이 있다는 게 다를 뿐이다. 진너머해변엔 해당화가 많다. 보는 이 없어도 제멋에 취한 꽃이 붉은 꽃술을 활짝 열고 갯바람을 맞고 있다. 해당화가 품을 연 바다 너머엔 호도와 녹도 등의 섬들이 점처럼 흩뿌려져 있다. 해 질 녘이면 노을이 그 섬들의 하늘과 바다를 붉게 채색한다. 밤섬해변은 선착장과 나란히 펼쳐져 있다. 수리의 꼬리에 해당된다고 해서 수루미해변이라고도 불린다. 면적은 섬에서 가장 넓지만 찾는 이는 많지 않다. 절정의 피서철에도 오붓하게 물놀이를 즐길 수 있다. 갯벌을 호미로 뒤적이면 어린아이 주먹만 한 조개가 튀어나오기도 한다. 풀등은 밤섬 끝자락의 딴동모니와 복쟁이끝 사이에 펼쳐진다. 물이 빠지면 자연스레 오갈 수 있다. 섬 사람들에게야 그저 일상적인 장면이겠으나 객들에겐 사막의 오아시스와 마주한 듯한 풍경이다. ●둘레길 세가지 보물… 면삽지·물망터·황금곰솔 삽시도의 세 가지 보물을 하나로 꿴 것이 삽시도 둘레길이다. 진너머해변에서 밤섬해변까지 2㎞ 구간을 연결하고 있다. 원래 나 있던 길을 두고 산 옆자락으로 새 길을 뚫은 탓에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했다. 이에 대해 현지 주민들은 면삽지로 가는 옛길 아래 해송숲으로 탐방객들이 좀 더 쉽고 안전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들머리는 붕긋땡이다. 봉긋 솟은 봉우리 두 개가 여인네의 젖가슴을 떠올린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예서부터 산자락을 따라 걷는다. 오르막 내리막은 있으나 가파르지 않고 유순하다. 이른 아침 산새 소리 들으며 산길을 걷는 맛이 각별하다. 숲에 가려 바다는 보이지 않지만 차르륵 대며 몽돌을 어루만지는 소리 덕에 바다의 존재감만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첫 번째 전망대가 조성된 곳은 예당너머다. 전망대에 서면 면삽지와 서해가 한눈에 잡힌다. 아침 안개가 면삽지를 어루만지며 흐르고 초록빛 바다는 쉼 없이 무인도와 희롱하고 있다. 신비로운 풍경이다. 눈치 빠른 이는 단박에 느꼈을 터다. 삽시도에 당집 등 섬 특유의 무속신앙 관련 건물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어느 섬에든 처녀, 총각 혹은 아내와 남편이 등장하는 전설은 한두 편 있기 마련이다. 섬을 벗어나지 못한 이 혹은 뱃일 중 목숨을 잃은 이들과 관련된 애달픈 이야기들 말이다. 당연히 그들을 위무하고 섬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집도 있어야 할 터. 하지만 삽시도엔 없다. 김영도 이장은 “원래 세 곳에 당제를 올리는 당집이 있었으나 개신교가 상륙하면서 모두 사라졌다.”고 했다. 예당너머는 바로 그 당집이 있었던 자리다. 면삽지는 삽시도에서 첫손으로 꼽히는 명소다. 진너머해변 끝자락과 맞닿은 무인도다. 들물 때는 뚝 떨어져 혼자 있다가 날물 때 모래톱을 통해 삽시도와 연결된다. 조금 때는 들물이 들어도 오갈 수 있다. 면삽지의 깎아지른 절벽 아래에는 작은 해식동굴이 있는데 그 안에 맑고 시원한 약수가 솟는 샘터가 있다. 면삽지에서 해송숲을 몇 굽이 지나면 물망터다. 들물 때는 바닷속에 잠겼다가 날물 때 맑은 샘물을 뿜어내는 곳이다. 섬에 기근이 들어도 물망터엔 물이 마를 날이 없다고 한다. 음력 칠월칠석날에 여자들이 물망터 샘물을 마시면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삽시도의 마지막 보물인 황금곰솔은 곰솔(해송)의 돌연변이다. 사철 푸르러야 할 솔잎이 누런 빛을 띠고 있다. 여느 곰솔에 견줘 크기도 작은 편. 솔방울을 맺지 못하는 탓에 결국 자신에서 세대를 끝내야 하는 비운의 소나무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는 세 그루만 자생하는 희귀한 소나무라고 한다. 황금곰솔 찾기는 간단치 않다. 섬 주민의 안내를 받거나 정확한 길을 확인한 뒤 길을 나서야 헤매지 않는다. ●한국 기독교의 태동지 ‘고대도’ 내 나라 안에 덜 알려진 섬이 어디 한둘일까마는 고대도는 유별나다. 원산도, 삽시도 등 유명 섬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외려 그 탓에 더 홀대받는 섬이다. 한 주민은 “대천항에서 300명이 (여)객선을 타고 출발한다 치면 230여명은 삽시도에서, 60여명은 장고도에서 내린다.”며 “고대도에 내리는 인원은 많아야 6~7명”이라고 했다. 그마저 섬 주민 혹은 업무차 섬을 찾은 이를 제외하면 관광객은 사실상 없는 셈이다. 당연히 뭍과의 교류도 드물었을 터. 외지인에 불친절하지도 않지만 딱히 친절한 구석도 없다. 그러다 최근 젊은 이장이 마을 행정을 맡으면서 조금씩 뭍과의 간극을 줄이려고 한다는 게 주민들 얘기다. 고대도는 안면도와 가깝다. 3㎞쯤 떨어져 있다. 한데 행정구역은 4.5㎞ 떨어진 삽시도리에 속해 있다. 면적은 0.9㎢, 섬 둘레라야 4㎞쯤 되는 작은 섬이다. 고대도는 한자로 ‘古代島’라 쓴다. 이름 그대로 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지 1000년이 넘는다고 한다. 고대도의 자랑은 한국 기독교의 시발점이란 것이다. 1832년 동인도 회사의 상선 로드 암허스트호를 타고 고대도를 방문한 네덜란드의 선교사 귀츨라프(1803~1851)가 20일 정도 섬에 머물며 선교 활동을 벌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의 선교 사역을 기리는 기념관이 고대도 교회 2층에 마련돼 있다. 글 사진 보령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41) →가는 길:대천여객선터미널에서 삽시도, 고대도로 가는 신한해운(934-8772)의 카페리가 평일 하루 3회(07:30, 13:00, 16:00), 주말과 휴일에는 하루 4회(10:40 추가) 운항한다. 피서철에는 증편된다. 대천에서 삽시도까지는 약 40분 걸린다. 삽시도에서는 물때에 따라 윗말, 밤섬선착장을 번갈아 이용하기 때문에 어느 선착장으로 배가 닿는지 미리 확인해야 한다. 삽시도 9900원, 고대도 10250원. 섬 내에 택시나 노선버스는 없다. 자동차를 배에 싣고 가거나 걸어 다녀야 한다. 민박집에 연락하면 배 시간에 맞춰 차를 갖고 나오기도 한다. →잘 곳:삽시도엔 동백하우스(932-3738), 펜션나라(931-5007), 해돋는펜션(935-1617) 등 펜션과 민박집이 많다. 고대도는 펜션하우스(934-3297)가 비교적 깨끗하다. →맛집:요즘 서해안엔 간자미가 제철이다. 동백하우스 등 식당과 펜션을 동시에 운영하는 집에서 맛볼 수 있다. 고대도엔 식당이 없다. 민박집에서 직접 해 먹어야 한다.
  • [김문이 만난사람] 아리랑 연구 30년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김문이 만난사람] 아리랑 연구 30년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누구나 부른다. 남녀노소 할 것 없다. 우리의 역사요 한이다. 영혼의 울림이다. 언제 어디서나 방방곡곡 퍼져나가는 마음의 메아리로 늘 존재한다. 남과 북은 물론 해외에 사는 모든 동포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 바로 ‘아리랑’이다. 새달 2일 경기 수원 월드컵경기장에서 4만 5000명이 아리랑 대합창을 부른다. 생각만 해도 감동적이다. 이 광경은 전 세계에 알려진다. 한국 홍보전문가 서경덕 성신여대 객원교수는 이 장면을 모아 미국 뉴욕의 번화가 타임스스퀘어에 아리랑 광고를 할 예정이다. 따지고 보면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여기서 잠깐, 중국은 지난해 5월 국무원 국가급 비물질문화유산(무형문화재)으로 지린성 옌볜 자치주의 아리랑(阿里郞)을 등재했다. 왜? 동북공정의 일환이라는 정치적 의도가 당연히 깔려 있다. 2004년 고구려의 고분벽화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킨 사실을 되돌아볼 때 아리랑 역시 중국의 세계문화유산으로 공식화할 수순을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문화체육관광부는 새달 10일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할 예정이다. 아울러 8월쯤 실사과정을 거쳐 올 연말 등재여부가 판가름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때보다 신경을 곤두세우는 사람이 있다. 30여년간 아리랑만을 연구해 온 김연갑(58)씨. 그의 공식 직함은 사단법인 한겨레아리랑연합회(이사장 이윤구) 상임이사이지만 ‘아리랑 박사’, ‘아리랑 연구가’로 통한다. 지난 25일 서울 종로구 계동에 있는 연합회 자료실에서 그를 만났다. 들어서자마자 ‘네가 아리랑을 아느냐’라는 붓글씨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속으로 ‘어떻게 답을 하면 되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 글씨는 아리랑을 사랑하는 한 지인이 지난해 써줬단다. 아울러 자료실 안에는 온통 아리랑 관련 책자와 음반, 그리고 각국에서 수집한 자료들로 꽉 채워져 있었다. 몇 권 정도 되는지 묻자 “2만권 정도 되는데 이만 한 넓이의 아리랑 자료실이 정선과 서울 등 세 곳에 있다.”고 했다. 30여년 동안 정성껏 모아 온 자료들이란다. ●‘아리랑 기행단’이 연합회 모태 아리랑연합회는 1979년 김씨가 중심이 된 ‘아리랑 기행단’에서 출발했다. 이후 허규, 박재삼, 고은 선생 등과 함께 ‘모임 아리랑’(1983), ‘전국아리랑보존연합회’(1989)에 이어 1994년 사단법인으로 재창립된 이후 지금까지 국내외에 흩어져 있는 각종 문헌 연구, 자료 수집 등을 하면서 아리랑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일에 매진해 왔다. 나운규 감독의 영화 ‘아리랑’이 개봉된 10월 1일을 ‘아리랑의 날’로 제정하고 남북 아리랑 모음 음반 출반 등 아리랑에 관련된 갖가지 기념사업을 꾸준히 벌이고 있다. 아리랑의 세계화와 국가 브랜드 사업을 연동시키는 일도 하고 있다. 연합회는 전국 14개 지부와 해외 지부를 두고 활동 중이다. “노래로서의 아리랑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세계화는 아리랑의 3대 정신(저항·대동·상생)을 보편가치로서 강조하는 데 있지요. 아리랑은 단순한 민요가 아닙니다. 음악적인 것 이상으로 우리 민족의 신앙이 담겨 있죠. 아주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해 온 이 노래는 남과 북은 물론 전 세계 145개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동포사회 구성원 누구나 함께 부를 수 있는 아리랑입니다. 어느 민족도, 어느 국가도 이처럼 불려지는 노래는 아리랑 외에는 없습니다.” 하여 아리랑은 어떤 노래도 갖지 못한 ‘민족의 노래’, ‘조국 정서의 어머니’라는 위상을 갖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중국이 지난해 아리랑을 자국의 무형문화재로 등록했다는 것은 참으로 개탄할 일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가 먼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신청을 하게 됐다는 것. 그는 이에 대해 “판소리, 전통가곡 등에 이어 아리랑도 등재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전망했다. 왜냐 하면 2009년 정선아리랑을 단독으로 신청했으나 정선 외에 진도, 밀양 등 여러 아리랑이 있다는 등의 이유로 계류상태에 있다가 이번에 문화부가 보완 신청하는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등재를 장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중국이 저러고 있는 마당에 어차피 국민정서상 반드시 등재돼야 할 일”이라고 부연했다. 이번에는 남한과 북한 그리고 해외동포들에게 불려지는 아리랑으로 범위를 넓히는 선언적 의미도 함께 담겨 있어 뜻이 깊다고 말했다. ●전세계 145개국 동포가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 “다시 말하지만 아리랑의 3대 정신은 저항, 대동, 상생입니다. 이 정신에 따라 광복 직후에는 좌·우익이 ‘아리랑’으로 애국가를 대신했고, 1961년 ‘국토통일학생총동맹’에서 아리랑을 민족의 노래로 규정했습니다. 1953년 휴전회담 조인식 직후 북한과 유엔군이 동시에 아리랑을 연주했습니다. 아울러 1989년 3월 판문점에서 남북이 아리랑을 단일팀 단가로 하기로 합의했으며 2002년 아리랑 축전과 월드컵대회를 통해 상생의 노래가 됐지요.” 따라서 아리랑을 통해 남북문제는 물론 해외동포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동시에 아리랑 정신을 세계적 보편정신으로 확산시켜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그런데 중국이 조선족 문화를 보존한다는 명분 아래 자국 무형문화재로 등재, ‘아리랑 사태’를 야기시켰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는 인접 국가 간 문화전쟁의 서막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중국은 지난해 북한과 함께 합작 영화 ‘아리랑’을 만들었습니다. 중국 청년이 북한의 아리랑 축전을 보러 왔다가 북한 처녀를 만나 사랑을 하면서 항일운동 등 과거의 혁명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줄거리입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동북3성과 김일성의 빨치산 활동 무대로 알려진 지역 등을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지요. 고구려 고분군을 북·중 공동으로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리랑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때 북한과 해외동포를 포괄한다는 선언적 문구를 반드시 삽입해야 하며 ‘아리랑상’을 복원하는 등 동일한 권위의 상을 제정, 운영할 필요가 있고 더 나아가 중국이 부러워하는 문화국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우리가 ‘아리랑’을 얘기할 때는 본조아리랑(~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을 가리킨다. 더 구체적으로는 지역별 아리랑을 쓸 때 지명 접두어(밀양, 정선, 진도 등)를 사용한다.”면서 본조아리랑은 아리랑 전승의 역사, 광범위한 문화적 파장, 대중적 호응력, 현대문화와 문학에 끼친 영향력까지 엄청난 콘텐츠를 가진 작품이라고 역설한다. 아리랑은 같으면서도 다르고,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지역적이면서도 국제적이고, 구비적이면서 기록적이고, 전통적이면서 최첨단적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아리랑은 언제부터 불려졌을까.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본조아리랑은 오래전에 백두대간 강원·경상지역 메나리조 아라리가 문경아리랑으로 불려지다 대원군이 경복궁 중수 공사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시름을 달래기 위해 전국의 소리꾼들을 불러들여 위로의 노래를 들려 주는 과정에서 아리랑이 나옵니다. 이후 노동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간 뒤 밀양, 진도 등 지역 아리랑으로 정착하게 됩니다. 역사책에 보면 1894년 매천야록에 아리랑 관련 내용도 나오구요.” ●광복 직후에는 아리랑이 애국가 대신 김씨와 아리랑과의 인연은 군복무 때 시작됐다. 1975년 강원도 철원 북방 6사단 철책근무를 할 때 북한에서 보내는 대남방송을 자주 들었다. ‘저기 저 산이 백두산이라지/해 뜨고 달 뜨고 별도 뜨네~’ 남쪽에서 듣지 못한 아리랑 노래를 들으면서 귀가 솔깃했다. 제대하자마자 양주동·이병도 박사의 아리랑 관련 논문을 단숨에 읽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아리랑 고장을 순회·기행했다. 특히 당시 사북사태 때 노동자들이 아리랑을 불렀다는 사실에 ‘찐한’ 감동을 받았다. 이후 시위가 있는 곳마다 도시락을 싸들고 찾아갔다. 시위 끝무렵에는 항상 아리랑이 나왔고 이 장면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 진도아리랑은 여성성이 강하고, 밀양아리랑은 남성적이며, 정선아리랑은 삶을 노래했고, 해외동포의 아리랑은 눈물이며 조국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저의 꿈은 비무장지대(DMZ) 안에 남북 공동의 ‘아리랑 박물관’을 만드는 일입니다. 지난 30여년 동안 모아 온 모든 자료들을 평화롭게 활용하도록 하는 것이지요. 아울러 아리랑 공동체를 통해 세계 보편화정신을 널리 펴는 것입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 삼국시대 ‘배 모양 토기’ 출토

    삼국시대 ‘배 모양 토기’ 출토

    경남 김해 진영 2지구 택지개발사업 부지에서 삼국시대에 제작된 ‘배 모양 토기’(舟形土器:주형토기) 1점이 출토됐다고 문화재청이 23일 밝혔다. 출토 상태가 양호하고 완형에 가깝다. 이 토기는 말 형상(馬形:마형)과 오리 형상(鴨形:압형) 토기 등과 함께 고분에 부장되는,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특이한 모양의 이형토기(異形土器)로 죽은 사람의 영혼을 저승으로 운반하는 신앙의 표현물이다. 또한 무덤 속에 부장했던 의식용 명기(明器:장사 지낼 때 죽은 사람과 함께 묻는 기물)의 하나로 이해되고 있다. 한국문화재보호재단 문화재조사연구단은 “출토된 주형토기는 가야 지역 고분에서 확인된 예가 없는 중요한 유물로 고분 조성 시기인 5세기경 가야의 선박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평가했다. 현재 출토지가 확인된 주형토기는 금령총에서 출토된 2점과 달성 평촌리 유적에서 출토된 1점 등이 있다. 이 외에 명확한 출토지는 알 수 없으나 보물 제555호 도기 배 모양 명기가 잘 알려져 있다. 앞서 김해 진영 2지구에서는 청동기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유구 250여 기와 15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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