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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양군 오산리 테라코타 토제상(한국인의 얼굴:4)

    ◎신석기인이 빚은 풍요기원 신상/진흙으로 둥그런 얼굴 만들고/눈­입 손가락으로 눌러 표현 우리나라 해안선이 지금과 같은 모양으로 그어지기 시작한 것은 약 1만여년전 신석기시대 부터다.빙하시대가 물러나고 지구를 뒤덮었던 빙하가 녹아내려 바닷물이 넘치는 통에 해안선이 다시 구획된 것이다.구석기시대에는 우리 서해안쪽은 중국 산동반도와,또 동남해안쪽은 일본과 연결된 연육상태를 이루고 있었다.그래서 신석기시대 이전에는 인류와 동물이 여러 지역의 뭍을 비교적 자유롭게 왕래했다. 그 해안선이 오늘과 비슷하게 형성된 이후 맨 먼저 이 땅에 자리잡은 신석기인은 오산리 사람들이 아닌가 한다.이들의 생활상이 엿보이는 유적은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다 보면 활처럼 휘어진 부분에 해당하는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에 있다.산등성이 너머로 동해를 업고 넓은 호수를 품에 안은 언덕유적.오랜 세월을 두고 분 바람이 언덕을 모래로 가득 메웠다. 그래서 오산리사람들이 살던 본래의 땅바닥은 약 4.5m의 모래톱 밑에 묻혀 있었다. 서울대 임효재 교수팀이 지난 1981∼85년까지 실시한 발굴에서 16채의 둥근 움집터(수혈주거지)와 토기 등의 귀중한 유물을 찾아냈다.이 유적은 방사성탄소연대측정과 나이테보정법(수륜보정법)을 응용한 과학적 분석방법에 의해 지금으로부터 8천년전까지 올라가는 우리나라 최고의 신석기유적으로 가려졌다.신석기인들은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토기를 만들었다.그런데 오산리사람들은 제작기술상 이른 단계의 납작밑(평저)토기와 덧무늬(융기선문)토기를 구워냈다. 오산리사람들은 토기제작기술 이외의 다른 손재주를 부렸다.사람얼굴을 진흙으로 빚어 토기와 함께 예술품을 구워낸 것이다.우리나라 최초의 테라코타인물상으로 보아도 좋은 이 소조예술품(소조예술품)은 요샛말로 비구상미술이라 할 수 있다.진흙덩어리를 두께 1.5㎝,길이 5.7㎝,너비 4.4㎝ 크기로 납작하게 얼굴모양을 만든 다음 두 눈과 입은 손가락으로 깊게 눌러 표현했다.볼은 의도적으로 더 깊게 눌러 코를 강조시켰다. 학계는 이를 신상으로 해석하면서 풍요를 기원하는 뜻이 담긴 예술품으로 보고 있다.오산리사람들이 기원하는 풍요는 고기가 많이 잡히는 것이고,먹거리 식물열매를 풍족히 거두는 일이었을 것이다.이들이 고기잡이에 일가견을 가졌다는 사실은 결합식낚시를 만들었다는 데 나타난다.혈암이라는 야무진돌을 가공,뼈바늘을 끼워 고기를 낚는 데 사용한 결합식낚시가 자그마치 72점이나 출토되었다. 그리고 움집자리에서 도토리가 무더기로 나왔다.도토리를 그냥 먹지 않고 가루를 내어 가공한 음식을 먹은 것으로 보인다.유적에서 나온 갈돌과 갈판은 이를 입증한다.오산리유적에서는 곡식을 심어 먹었다는 농사흔적은 없는데,이는 도토리와 같은 활엽수 열매들이 풍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둥근 움막집자리 한가운데에서는 화덕자리(노지)도 발견되었다.학자들 계산에 의하면 한 움집에 살 수 있는 가족은 부부와 아이들 둘,또 다른 한 사람을 포함해 다섯 식구정도.이들은 움집안 화덕에 둘러앉아 물고기나 멧돼지 바비큐를 즐겼을 것이다. 오산리유적에서는 흑요석 날돌(양기)과 럭비볼 절반만한 흑요석덩어리가 나왔다.일본 교토대 원자력연구소가 분석한 결과 이 흑요석의 원산지는 백두산으로 밝혀졌다.그리고 오산리사람들이 만든 것과 똑같은 덧무늬토기가 일본 쓰시마섬(대마도)의 고시다카(월고)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이로 미루어보면 오산리사람들은 행동반경이 넓은 마당발이었다.
  • 북의 「승리산 사람」과 「만달 사람」(한국인의 얼굴:3)

    ◎넓은턱에 높은 머리의 후기 구석기인/평남 덕천­평양서 발굴… 얼굴 복원/「만달 사람」은 석기­골기 함께 출토 그 까마득한 옛날을 살았던 구석기인들이 자신들의 몸골을 뼈로나마 남기게된 까닭을 알아보면 지질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가 지금 구석기인들의 뼈를 찾아낸 장소는 모두가 석회암동굴이다.이 때문에 오랜 세월동안 뼈가 보존되었다.동굴 천장에서 조금씩 흘러내린 알칼리성 석회수가 무수한 시간을 두고 뼈를 화석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석회암동굴 중에는 선사문화를 가늠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유적들이 더러 끼어있다.북한 학자들이 오늘날 한국인의 얼굴 특징을 지녔다고 주장해온 이른바 「승리산 사람」의 뼈가 나온 유적도 석회암동굴이다.지질학적으로 상원계 석회암지대에 속하는 이 유적은 평남 덕천시 승리산에 자리했다.지난 1972년 발굴당시 사람 아래턱뼈가 나왔다.3만5천년전에 시작해서 1만년전에 끝난 후기구석기시대 사람의 뼈로 보고있다. 북한 학계는 이 아래턱뼈를 기본자료로 활용,당시 후기구석기인의 얼굴을 복원했다.학자들 손에 의해 다시 태어난 얼굴의 주인공이 후기구석기시대를 살았던 승리산사람인 것이다.승리산사람의 아래턱뼈 길이는 현대인과 비슷하지만,넓이는 비교적 넓은 편인 것으로 알려졌다.이러한 특징은 얼굴의 하관이 넓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보탬이 되고있다.그리고 머리가 높았다는 의견도 제시되었다. 승리산사람은 그동안 북한학계가 현대인의 조상뻘로 여기면서 그 지혜를 슬기슬기사람(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으로 주장한 인류다.이같은 주장은 승리산사람 얼굴 특징에 나타난 높은 머리와 넓은 하관부가 오늘날 한국인 특징의 일부로 남아있다는 데서 나왔다.머리 생김새는 어떤 민족의 체질인류학적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형태요소라 할 수 있다.이는 대개 생체관찰과 머리뼈관찰로 나누어 특징을 가린다.선사인의 경우는 머리뼈관찰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북한에서는 승리산사람 말고도 또다른 후기구석기시대 사람뼈가 발견되었다.평양시 승호구역 만달리에서 나온 사람 뼈화석은 「만달사람」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1979∼80년 사이에 출토된 뼈화석에는 얼굴을 되살려낼 수 있는 머리뼈와 아래턱뼈가 포함되었다.앞머리뼈에는 현생 인류에게서만 찾아지는 화살융기도 들어있었다.그리고 턱구멍이 현대인처럼 낮은 위치에 자리잡았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 만달인은 석기와 골기를 사용했다.가공한 흔적이 뚜렷한 석기 13점과 함께 뼈나 뿔로 만든 골기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이러한 연모를 만든 수법을 통해 만달인은 후기구석기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체질인류학적 검증을 통해 만달인이 숨질 무렵의 나이를 30살 정도로 가려낸 북한학계는 만달인을 건장한 용모의 청년으로 복원시켜 놓은 바 있다. 그러나 승리산사람이나 만달사람과 같은 후기구석기인류를 오늘날 우리 민족의 직계로 단정짓기에는 무리가 뒤따른다.구석기인들은 자연환경변화나 사냥거리에 따라 빈번히 이동했다.비록 후기구석기인들이 전·중기구석기인들 보다는 좀더 붙박이 정착생활 쪽을 택했을지라도 어디까지나 선주민에 지나지 않았다.우리는 여기서 신석기시대를 거쳐 청동기시대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민족이 형성되었다는 학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한이 승리산사람이나 만달사람을 현생신류 즉,오늘의 민족과 연결시키는 이유중에는 정치성이 내재되었다.민족의 뿌리가 평양을 중심으로 뻗어나갔다는 것을 애써 강조하면서 남북대비,역사우위론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그리고 실제 평양근처에 잘 발달한 상원계 석회암지대 동굴만을 집중 발굴해왔다.지난해 평양근교에서 발굴했다는 단군유골과 올해 서둘러 축조한 단군릉의 경우도 이같은 선상의 역사오도 사건이라 할 수 있다.
  • 한국 상고사연구 방법론 논쟁

    ◎세종대 최정필고고학교수 「신진화론…」 논문 발표후 표면화/최 교수/족장사회는 국가형성 직전의 사회형태/사학계/고인돌사회→족장사회→고대국가로 변천 한국 상고사 연구의 방법론을 놓고 고고학계와 사학계가 일대 논쟁을 벌일 조짐을 보이고 있다.이는 세종대 최정필교수(고고학)의 논문 「신진화론과 한국 상고사 해설비판에 대한 재검토」가 발표되면서 표면화 했다.한국 상고사 분야가 고고인류학이론에 의해 장식되는 것을 경계해온 사학계의 학문연구태도를 꼬집은 최교수는 신진화론이 보편적 가설로 검증된 이론인 만큼 수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는 먼저 신진화론에 의해 한국 상고사에 적용될 수 있는 족장사회를 밝혀냈다.족장사회를 국가사회가 형성되기 직전의 사회형태로 본 그는 호남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한 1만2천8백여기(전남 1만1천·전북 1천8백여기)의 청동기시대 고인돌에서 그 증거를 찾아냈다. 전남 승주군 송광면 우산리 고인돌에서 나온 긴돌칼 17점,비파형동검 2점,옥제장신구 10점과 여천군 적량동 고인돌 출토품인돌칼 3점,비파형동검 7점,대롱옥 1점은 고인돌사회를 족장사회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특히 청동제품과 옥제장신구는 일반인들이 사영할 수 없는 상류계급의 전유물인 동시에 교역을 통해 지배층이 소유한 귀중품이라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그리고 고인돌사회는 직업의 전문화와 노동력동원에 따른 행정적 통제력이 요구된 사회라는 견해도 내놓았다.3∼4t에서 수십t에 이르는 돌을 운반,고인돌을 축조하자면 이같은 요구가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는 최교수는 전남 해안지역과 보성강유역을 족장사회의 행정 근거지로 어림했다.왜냐하면 이 지역 고인돌에서 지배계급을 상징하는 유물이 많이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학계는 가족수준의 집단사회→지방 집단사회→족장사회→국가사회로 이행되는 신진화론의 도식을 배제해왔다.고고인류학계는 족장사회를 청동기시대 또는 고인돌사회로 보는데 반해 사학계는 청동기시대이후 신라육촌과 삼한사회를 족장사회로 본다.또다른 사학계 한쪽에서는 신라 육촌의 경우도 족장사회가 아니고,고인돌사회(청동기시대)→소국→성읍국가→고대국가로 이어지는 국가형성단계 가운데 족장사회는 바로 성읍국가라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어떻든 고인돌사회가 족장사회였다는 설이 제기되자 사학계는 한국 상고사를 서양의 도식화한 틀에 끼워 넣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족장사회를 성읍국가 이전 단계인 청동기사회로 올려잡는다면 족장사회의 상한은 신석기시대까지 끌어올릴 수도 있는 사태가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학계는 이번에 문제가 된 최교수의 논문을 실은 「한국상고사학보」다음호(제17호)를 통해 반론을 펼 것으로 알려졌다.
  • 직경 8m 신석기움집터 발굴/양양서/야외화덕·돌칼 등 유물 수습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소장 장경호)는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가평리에서 신석기시대의 대형움집터와 초기철기시대 움집터 각 1기,야외화덕 2기,토기편,갈돌과 갈판,타제 뚜르게,어망추,돌칼,관옥등의 유물을 수습했다고 6일 발표했다. 이번에 발굴된 신석기시대의 움집터는 동해안지역에서는 처음 발견된 것으로 직경이 8∼8.5m에 이르는 대형으로 밝혀졌다. 모래를 50㎝쯤 파내고 두께 10㎝의 진흙을 깔아 바닥을 다진뒤 벽주위에 나무기둥을 세우고 출입구도 마련한 이 움집터는 당시 가옥구조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재료로 평가되고 있다.
  • 우리문화재 377점 돌아왔다/일인이 기증/선사∼조선 보물급 상당수

    일본인이 소장하고 있던 우리나라 문화재 3백77점이 돌아왔다. 이민섭 문화체육부 장관은 22일 『지난 19일 70대 기업가인 익명의 일본인 독지가로부터 보물급인 백제 귀고리 한쌍을 비롯,고려시대 옥제 장신구,은제 팔찌 등 3백77점의 우리 문화재를 기증받았다』고 밝혔다. 이들 문화재는 기증자의 부친이 1920∼30년대에 우리나라의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일본 국내에서 수집한 것으로 신석기시대부터 신라 백제 고려 조선시대 유물들이다. 정양모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특히 백제시대 김제 귀고리 한쌍은 현존하는 백제귀고리가 11점에 불과한데다 중간식과 수하식의 특이한 모양을 갖추고 있어 보물급으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또 고려시대 옥제 장신구,안쪽에 부적을 넣은 고려 은제 팔찌 등도 이번에 처음 발견되는 것으로 문화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밝혔다. 종류별로는 ▲귀걸이,목걸이,단추형 장신구,동곳 등 장신구 ▲자물쇠,관식,족집게 등 생활용구 ▲금동제 사리병을 비롯한 불교용품 등이다.
  • 진보사관 배제… 객관성에 역점/국사교과서 개편시안의 내용과 특징

    ◎「쇄국정책」→「통상거부」·「창씨개명」→「일본식성명 강요」로/」5·16」·「10·26」·「12·12」는 평가 유보 교육부의 국사교과서 개편시안은 각계의 비판을 수렴,진보적이기 보다는 보수적·안정적인 역사의 객관적 서술에 중점을 두고있다. 이는 학계의 시비가 가려지지 않거나 평가가 덜 끝난 사건·용어를 신중하게 선택,학생들의 가치관·역사관의 혼란을 줄이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더도 덜도 아닌 있는대로」기술하는 교과서 특성을 여실히 보여준 셈이다. 이번 시안은 학계연구팀의 3월과 7월 두차례에 걸친 보고서와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실팀의 심사자료를 바탕으로 교육부가 위촉한 최병헌서울대교수(국사학)등 7명의 전문가가 마련했다. 이와관련,준거안 2차 보고서를 내며 이존희교수는 『지난 3월 준거안을 발표한 것은 개인의 주관성을 최대한 배제하고 학계·교육계의 폭넓은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것이었다』며 『이때 보여준 각계의 폭발적인 관심에 책임감을 느껴 보다 객관적이고 국민적 정서에 맞는 보고서를 작성하게 됐다』고 밝혔다. 한명희 교육부 편수국장도 『국사교과서의 개편내용이 현행과 큰 차이없이 심의절차를 거쳐 시안대로 확정될 것』이라며 쟁점사안의 논쟁을 매듭지었다.개편시안의 특징으로는 크게 네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는 자칫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뒤흔드는 과격하거나 진보적인 개념규정을 피한 점이다. 당초 준거안 발표시 거센 비난을 산 제주도 4·3항쟁과 대구항쟁을 현행대로 사건·폭동으로 기술하고 주체사상을 삽입하지 않기로 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두 사건의 역사적 평가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진보학설을 그대로 수용할 경우 국가의 정체성에 미치는 악영향과 학생들의 혼란을 막기 위한 것이다.김일성사상은 현행 유일사상으로도 설명이 가능해 주체사상을 빼기로 했으며 김의 사망과 후계체제 구축은 도덕·국민윤리 과목에 반영하기로 했다. 이같은 방향은 최근 사상논쟁의 방향과 일맥상통한 것이어서 주목된다.그러나 주민전체에 굴레를 씌운 여수·순천반란사건은 사건으로 표시하고 그 주체를 「주둔군 내부의 일부 좌익세력과 이 지역의 공산주의자들이 주동이 되어」라는 식으로 명확히 서술키로 했다. 둘째는 고대사 부문에서 학계의 정설을 존중하되 학문적 성과를 반영,이론이 있는 내용은 따로 설명을 붙였다.우리나라의 벼농사 시점이 청동기시대이나 최근 발견된 양양·김포등지의 쌀유적지를 감안,신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음을 주로 설명한 게 예. 국가의 형성과정도 이론이 있으나 군장국가­연맹왕국­고대국가로 통일시켰다.양인 주장이 있는 고려시대 천민계층인 향·소·부곡민이 특정역을 부담했다는 점에서 그대로 천민계층으로,근세의 태동시기를 18세기가 아닌 17세기로 서술하기로 한 점등이다. 셋째는 지나치게 왜곡된 역사개념을 중립적 시각에서 바로잡고 선조들의 투쟁을 주체적 입장에서 바로잡은 것. 이제껏 대원군의 대외정책을 국수적인 관점에서 몰아붙여 쇄국정책으로 기술한 것을 외세침탈에 대한 항거라는 점을 감안,잘잘못을 가려 통상거부로 표기한다.식민사관의 잔재인 창씨개명을 주체적 입장에서 일본식 성명강요로 바로잡는다. 또 일제하인 37년30만 동포가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사실을 새로 기술하고 만주지역이 과거 우리땅이란 점을 감안,49년 이후는 중국 동북지역으로 표기한다.6·25전쟁을 한국전쟁이 아닌 그대로 표기한 것도 주체적 사관을 반영한 흔적이다.광복후 반민특위 활동과 마산의거를 새롭게 평가한 점도 국가의 정통성 유지측면과 밀접히 관련돼 있다. 마지막으로 현대사에 있어 주역들이 생존해 있거나 재판계류중인 미묘한 사건등에 대해서는 평가를 유보했다. 5·16,10·26,12·12등을 쿠데타가 국민들의 언어정서에 맞지않아 이 개념을 포괄하는 정변등으로 표현한 것이 대표적이며 이는 2000년이후 7차 교과서개편시 후세사가들의 몫으로 남게됐다.
  • 국내최고 신석기초기 유물 발굴/제주대조사단,고산리유적서

    ◎융기문토기 등 6천5백점/BC 5천년∼3천년 추정 북제주군 한경면 고산리 선사유적지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기원전 5천년에서 3천년까지의 시기로 추정되는 신석기초기 토기와 소형석기가 발굴됐다. 문화재관리국은 지난 6월16일부터 8월18일까지 이 지역 선사유적지를 발굴하고 있는 제주대학교 박물관 조사단(단장 이청규)이 융기문토기 1개체편,50여점의 원시무문토기편과 석촉 2백6점,돌날 22점,뚜르게(송곳) 19점,박편 6천1백14점등 총6천5백여점의 유물을 발굴했다고 25일 발표했다. 이번에 발굴된 유물은 강원도 오산리유적(BC5000∼3000),부산 동삼동유적(BC4000∼3000),일본 쓰시마해안지역의 유적지에서 출토된 융기문토기와 후기구석기시대 제작된 각종 석기가 출토된 점으로 보아 당시 해상과 육로를 통한 문화교류의 일단면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고산리유적은 제주도와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초기 유적으로 대략 BC5000∼3000년 시기의 유적지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문화재관리국과 제주도및 제주대학에서는 고산리 선사유적지의 유적보존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있다.
  • 신석기시대 돌삽 등 출토/양양군 남대천변서

    【양양=조성호기자】 강원도 양양군 남대천변에서 신석기시대의 돌삽과 서해안 뽀족토기와는 다른 납작문토기가 출토돼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서울대 임효재박사(고고학)발굴팀은 25일 양양군 손양면 남양리 98 남대천변 묵밭에서 길이 26㎝,폭 22㎝,두께 1.2㎝로 손잡이를 끼울 수 있도록 돼 있는 돌삽을 발굴했다고 밝혔다.곱돌을 깍아만든 이 돌삽은 형태가 원시적이면서도 흙을 다루는데 편리하게 만들어져 있다. 임박사는 『곱돌 원석을 이용한 돌삽은 원시 연모이지만 함경도 출토품 보다 후기때 것으로 세련돼 마제석기에서 철기시대로 넘어가는 시대의 농경생활을 엿보게 하는 사료이며 만주에서 동해안을 거쳐 일본으로 전파된 신석기 문화의 맥을 짚는데 필요한 유물』이라고 말했다.
  • 한국 신석기고고학연구회 새회장 임효재씨(인터뷰)

    ◎“학술정보지 말들어 신석기시대 관심 높일터” 임효재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교수가 최근 충남대에서 열린 한국신석기고고학연구회 총회에서 새 회장으로 뽑혔다. 임교수는 『그동안 신석기시대는 삼국시대의 화려한 유물과 구석기시대의 「연대」에 가려 서자취급을 받아왔다』면서 『연구를 본궤도 올려놓는 것과 함께 이 시대에 대한 일반의 관심을 높이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소감을 밝혔다. 『신석기시대는 구석기시대에 떠돌아다니던 인류가 비로소 정착생활을 시작한 시기입니다.민족이 형성되기 시작한 때지요.그런만큼 이 시대에 대한 연구는 곧 우리민족의 기원을 밝히는 작업이라고 할수 있어요』 임교수는 『신석기시대 연구는 발굴작업을 해도 토기조각밖에는 안나오는등 화려한 분야가 아니어선지 학문발전이 안된 것이 사실』이라면서 『그만큼 우리 연구회가 지고 있는 짐도 크다』고 말했다. 한국신석기고고학연구회는 지난 91년9월 신석기시대 연구의 조직화를 갈망하던 활동적인 고고학자 40여명이 구성한 단체.소수정예에 의한 전문화의 추구라는 점에서 우리 고고학 발전에 계기를 마련할 것이라는 기대를 모으고 있다. 『국내 유적에 대한 발굴과 자문에 더욱 힘써야겠지요.또 한민족의 발자취를 따라 일본과 중국 만주 시베리아 중앙아시아등과 교류를 해나갈 계획입니다.이 시대는 국경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만큼 각국학자간에 이견도 적어 성과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임교수는 이와함께 조그만 학술정보지를 만들어 국내는 물론 해외의 연구동향을 신속히 학계에 제공하고 일반인들의 신석기시대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 암사동선사유적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마련해 관계기관과 협의해 나가겠다고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 바람직한 역사의 방향/변태섭(일요일 아침에)

    요새 신문이나 방송들은 모두가 새로운 국사교과서 개편안에 대한 논란으로 떠들썩하다.특히 현대부분 용어에 대하여는 학계 뿐 아니라 정치계까지도 비판의 소리가 요란하다. 이 개편안을 작성한 「국사교육 내용전개준거안 연구위원회」는 사방으로부터 공박을 받아 몹시 난처한 모양이다.몇년전 이와 유사한 작업을 맡아 곤혹을 치른 바 있는 나로서는 남의 일같지 않은 동정이 간다. 86년 문교부의 「국사교육심의회」의 책임을 맡아 새 국사교과서의 집필방향을 제정하였을 때도 역시 각계로부터 혹독한 공박을 받았다.이번의 문제점이 주로 현대부분이고 진보주의사관에 비판이 가해진데 반하여 당시의 문제점은 고대부분이고 재야사학자들의 국수주의사관으로부터 비난을 받은 점이 대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때 재야사학자들은 끈기있게 자기들의 학설을 교과서에 반영하 것을 요구해 왔다.단군을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든가,고조선의 영역이 만주 뿐 아니라 황하 또는 산동반도까지 이르렀다는 주장등이 대표적인 예였다. 이러한 국수주의적인 역사인식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다는 느낌이 든다.오히려 근래에는 재야사학자 뿐 아니라 문인이나 의사 등 역사학과는 무관한 사람들까지도 가세하고 있는 형편이다.이들 비력사학자들의 역사서술은 오늘의 정통사학을 위협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역사연구가 역사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님은 물론이다.오히려 역사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국민들이 역사에 관심을 갖고 그 나름대로 연구를 한다는 것은 역사학계로 볼때 고무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그들의 역사서술이 한국사를 왜곡하고 국민들을 오도한다면 이는 결코 방치할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역사연구의 주역은 아무래도 대학 사학과에서 역사학연구에 대한 엄격한 교육을 받고 과학적인 역사연구의 경험을 가진 전공학자라야 함은 상식적인 일이다.문헌을 고증하는 방법이나 역사인식의 방법론 같은 역사연구의 기초지식을 쌓은 후에 역사서술에 손을 대야 비로소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런 역사학의 기초지식도 없는 사람은 정통사학에서 볼 때 문외한일수 밖에 없다.좋게 표한하여 「아마추어 사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이들의 만용에 가까운 무책임한 역사서술은 역사전공자의 눈에는 지극히 위험하게 비치는 것이다. 그들은 대개 한국사를 미화하려는 경향이 있다.공자가 우리민족의 조상이고 한자가 우리 고유의 문자라고 우긴다.고대일본이 우리 조상들에 의하여 나라가 세워지고 그들의 고대문화는 전적으로 우리의 전수에 의한 것이라 주장한다.일반국민으로 볼 때는 기분 좋은 학설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결코 과학적인 한국사는 아닌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북한학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얼마전의 뉴스에 의하면 평양에서 단군의 유골이 발굴되었는데 전자측정 결과 5천년 전의 것으로 판명되어 단군이 실존인물임이 증명되었다는 것이다.5천년 전이라면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에 해당하는데 어떻게 청동왕관을 지닌 단군의 실존이 가능하였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국수주의사관과 더불어 이번 국사교과서 개편안에서 문제가 된 진보주의사관에 대하여도 우리들은 한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있을 것 같다.이번 개편안은 각계의 비판과 건의가 받아들여져서 별 문제없이 처리되는 듯 하지만 국사학계 일각에 일고 있는 진보사관에 대하여는 우리 스스로의 반성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역시 역사학은 엄격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실증과 그 사실에 대한 객관적인 의미부여가 생명이라 생각된다.어떤 고정된 이념을 미리 설정하고 그에 맞추어 역사를 해석한다면 그것은 허구적이 될 우려가 있다.역사학의 이데올로기화는 역사학의 본질을 퇴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역사학계는 냉정한 자기 성찰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이제 한국사학계의 새로운 방향은 국수주의적 역사인식과 함께 진보주의적 역사인식에서도 자기를 보호하는데 있다고 생각된다.
  • 백제인의 도기문화(백제를 다시본다:7)

    ◎7세기초 유약 입힌 녹유기 첫 등장/능산리출토 기대,뛰어난 제조술 입증/통일 신라에 이어 고려청자에도 영향/불상대좌·벼류등 많은 융제품 남겨… 동아시아 문화대국으로 우뚝 백제역사에서 사비시대(AD538∼660년)는 문화의 황금기다.부소산 남쪽에 왕궁이 건조되고 외곽에는 나성을 쌓아 왕도의 모습을 갖추었다.부여에는 정림사,익산에는 미륵사가 세워졌으며 부여릉산리에 고분이 영조된 것도 이 시기다. ○선진적 생산기법 사비시대 문화 가운데 간과할 수 없는 분야가 있다면 도기문화도 그 하나로 꼽힐 것이다.인간은 태초를 약간 비켜난 신석기시대부터 진흙을 이겨 그릇을 구워냈다.그러나 도기문화,다시 말하면 질그릇문화는 그릇의 생김새에서 찾아지는 감각적 예술성,얼마나 강한 그릇을 구워낼 수 있는가에 대한 기술성에 따라 가늠되었다.사비시대 백제인들은 뛰어난 감각과 기술을 가지고 도기문화를 발전시켰다. 사비시대 백제도기에서 주목할 그릇은 녹유기다.강도가 높은 질그릇에 녹갈색의 유약을 입힌 이 그릇은 7세기 초기에 나타난다.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녹유그릇받침(기대)이 바로 그것이다.이 그릇은 조각으로 출토되었으나,복원작업을 거친 결과 나팔모양을 한 녹유그릇받침으로 판명되었다.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질그릇에 유약을 입히는 기법의 도기라 할 수 있다. 이 선구적 질그릇인 녹유기는 통일신라로 이어져 널리 사용되기에 이른다.위에 톱니바퀴 모양의 장식이 있고 세로로 붙은 와선무늬 장식의 띠 사이사이에 구멍이 뚫린 그릇받침은 사비시대 백제 녹유기에 그 뿌리를 두고있다.질그릇에 유약을 입혀 녹유기를 구워내는 백제 도공들의 생산기술은 가히 선진적이었다.그릇에 유약을 입히는 시유술은 뒷날 고려청자와 같은 본격적 도자기를 생산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익산 미륵사 절터에서도 7세기 전반쯤의 도기들과 기와편들이 많이 출토되었는데,모두 표면에 녹갈색의 녹유를 입혔다.녹갈색의 산화연을 저화도에서 입히는 방식으로 녹유를 시유했다.녹유가 시유된 기와에서 백제는 7세기 전반쯤에는 그곳 말고도 기와와 같은 도제품에 녹유를 보편화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그 녹유가 결국은 통일신라에 널리 전파되는 것이다. 백제도기나 도제품의 우수성은 생산기반시설과 견주어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7세기 전반에 과학적인 질그릇 가마를 만들었다.지난 86년 사비성 고토에서 그리 멀지 않은 청양 본의리 한 구릉에서 발견한 반지하의 계단식 등요가 그 시기의 가마다.바닥은 계단식이고 가마벽은 돌을 쌓아 만들었다.가마의 길이는 7.4m,폭 1.4m내외,천장은 가장 높은데가 1.5m에 이르고 있다. 이 가마에서는 놀라운 유물들이 출토되었다.도제의 불상대좌 조각들이 대량으로 발견된 것이다.이들 조각을 꿰맞추어 복원해 낸 대좌를 보노라면 절로 감탄할 수밖에 없다.옷자락을 펼치고 앉은 모양(상현좌)을 한 대좌는 예술품이다.옷자락이 늘어지고,또 주름이 더러 잡혀있는 이 대좌는 흙을 구워만든 딱딱한 도제품이 아니라 포근하고 부드러운 비단의 질감을 안겨주고 있다. ○높이 1m의 대작 대좌는 높이 1백㎝,너비 2백80㎝나 되는 장대한 것이어서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제작,조립하는 수법을 썼다.이 제작기법에서도 백제인들의 지혜가 엿보인다.대좌가 이렇듯 아름다울진대,대좌 위에 안치되었을 부처님은 어떤 형상이었을까.결가부좌하고 앉아 계실 백제 특유의 자비로운 부처님모습이 떠오른다. 청양 본의리 출토품 불상대좌와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는 도제유물들은 더 있다.지난 80년대 부여 정림사 절터에서 나온 도용들은 매우 주목되는 도제품으로,특히 인물상들이 이채롭다.농관,물결이 치는듯한 머리카락,깊은 눈과 높은 코 등이 서역적인 풍모를 보여준다.이들 테라코타는 사비로 도읍을 옮긴 직후인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중국 북위에서 유행한 이들 유물로 미루어 백제는 활짝 열린 서해라는 해상루트를 통해 남조와는 물론 북조와도 활발한 문화교류를 해온 것으로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 사비시대 백제의 도기와 도제품을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와류다.국립부여박물관이 최근 발굴조사한 부여 정암리 기와가마터(와요지)가 기와류를 만들어 낸 대표적 유적으로 부여 시가지 남쪽 백마강 언덕에자리하고 있다.언덕의 석비레층을 파고 들어가 터널식으로 구축한 굴가마들이다.길이 4.5∼6.5m 크기의 평요 2기와 등요 2기 이외에 작업장까지 발견되었다. 이들 가마군에서는 주로 연꽃무늬 수막새를 비롯해 망새편,암수키와 등의 기와류가 주로 나왔다.그리고 상자형 전돌과 자배기,벼루 등도 출토되어 도와전류는 물론 도기류까지 생산한 중요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오늘날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대할 수 있는 도제유물의 얼마쯤은 정암리 가마에서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문화가 발전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사비시대가 백제문화의 황금기라면 도기나 도제품의 수요가 왕성했을 것이다.이는 백제의 도기제조술을 발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흔히 호자로 불리는 부여 군수리 출토도기인 소변기로부터 뼈항아리 골호에 이르기까지,또 일상용기와 종교적 성물인 불상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그리고 궁궐과 사찰 건축에 따른 거대한 망새(시미)나 기와류,산경산수문전처럼 아름다운 벽돌이 있다.때로는 도기와 도제품은 껴묻거리(부장품)의기로 수요되기도 했다. ○와전토 존재한듯 백제 도기항아리는 어깨가 넓어 광견호라는 이름의 항아리.발이 셋 달린 삼발이항아리,손잡이가 달린 항아리 등 여러 기형이 있다.목이 긴 병을 비롯해 자라병이 있는가 하면 바가지모양의 도기,등잔,잔,삼발이잔,주전자,동물모양의 그릇 등 백제도기는 실로 다양한 형태를 이룬다.납작한 원형판에 마치 동물의 다리를 연상시키는 다리가 다닥다닥 이어진 사비시대의 도제품 벼루는 뒷날 통일신라와 일본에 전파된다. 이들 명품은 고대사서가 기록하고 있는 백제 기술집단의 하나인 와박사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켜준다.백제의 기술집단은 사비시대 사회가 요구하는 보다 많은 문물을 창출함으로써 백제를 동아시아의 문화대국으로 우뚝 세웠다.특히 당시 도기제조술이 이룩해 낸 백제 최초의 녹유기가 나온 능산리에서 김동용봉봉래산향로가 출토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도기 제조솔/질그릇 가마 과학적으로 축조/경사지 반지하식 등요… 고화도 유지 백제의 도기제조술은 아주 뛰어났다.특히 사비시대의 백제는 도기표면에 녹유를 입히는 선진기술을 습득함으로써 다른 주변국가를 압도했다. 사비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에 도기나 도제품을 제작한 가마터(요지)는 현재 충남 청양 본의리(7세기 전반),부여 정암리(7세기),전북 고창 운곡리와 익산 신용리(6세기 중반),전남 영암 구림리(6∼7세기)등에 남아있다.이들 가마터는 모두 80년대와 90년대 접어들어 발견되었다.사비시대 가마들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상당히 과학적으로 축조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사비시대 가마들은 거의가 경사진 언덕을 따라올라가 축조한 반지하식 등요로 이루어졌다.이는 고화도를 효율적으로 유지,보다 견고한 도기를 만들기 위한 과학적 방법이라 할 수 있다.청양 본의리 등요는 오늘날에도 사용하고 있는 재래식 사기가마처럼 계단식등요로 밝혀졌다.사비시대 이전의 가마 거의가 평요이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익산 신용리 가마는 반지하식 등요로 천장평면은 독사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이와 같은 형식은 일본의 스에무라(도읍)가마군으로 연결되었다.영암 구림리에서 발굴된 가마 역시 반지하식이고 평면은 독사머리를 했다.다만 영암 구림리 가마는 고화도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창불구멍을 낸 것으로 조사되어 기능상 한단계 더 발전한 가마로 여겨진다. 사비시대 이전의 가마터도 더러 남아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전남 승주 대곡리(3∼4세기),충북 진천 산수리(4세기)등이 이시대의 가마다.이러한 최근의 발굴자료들은 3세기에서 7세기에 이르는 동안 백제 도기가마의 변천및 발전상을 보여주고 있다.
  • 「무구정광 다라니경」 이동전시/김홍도 등의 전통회화 20여점도

    국립중앙박물관은 23일 문화소외지역과 사회시설,벽지학교등을 직접 찾아가 우리 문화유산을 소개하고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마련한 「움직이는 박물관」의 올해 사업계획을 확정,발표했다. 올해사업은 「인쇄문화발달사」를 주제로 세계 최초의 목판인쇄본인 무구정광대다니경등 우리나라 고인쇄문화의 대표적 영인본과 목활자,금속활자 등 10여종의 활자와 설명패널 20여종과 함께 구석기·신석기문화와 불상,금속공예 등 시대별 문화를 설명하는 대형컬러 만화패널 31점,조선시대의 대표적 화가인 겸제 정선과 단원 김홍도 등의 전통회화 20여점 등을 이동전시하는것으로 되어있다. 지난 90년 부터 지역문화 행사장,복지공단 등을 찾아가 이동전시하는 이 사업의 올해 전시지역은 오는 28일 서울 강동구 고덕동에 있는 서울시립양로원과 서울장애인 종합복지관을 시작으로 ▲3월 구로공단 및 안양소년원 ▲4월 경남지역 ▲5월 제주지역 문화행사 ▲6월 인천지역 산업체 ▲7∼8월 해변지역 ▲9월 전남지역 ▲10월 요청이 있는 지방문화행사장등 20여곳이다.
  • 개띠해의 희망/이종철 국립민속박물관장(굄돌)

    1994년은 12간지의 11번째 동물인 개의해로 이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한지 6백년이 되는 갑술년이 된다.개는 후기 구석기 시대 덴마크 해안 유적에서 발굴되었고 8천년전 신석기 시대부터 사육하기 시작한 동물로 사람과 친하기로 개를 따를 동물이 없다. 1세기전에 경산 임당동 고분,고구려 무용총,각저총,안악3호분의 벽화,김유신묘 12지 호석,조선조의 대표적 화가 이암 김두량 신윤복 김득신 김홍도의 그림에서 개가 중요한 소재가 된다.신라때부터 인간의 사랑을 받아 나라끼리 외교선물로 교환하고 고려의 음악중에 개무덤 곡조까지 있을 지경이다. 봉사와 근면,의리와 충성,용맹의 상징으로서 전북 오수의 누렁이 마냥 주인대신 죽은 살신성인,경북 선산 낙산리 개무덤에서 보듯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견마지로의 특성을 가졌다.오늘날도 장님의 길안내,마약 경찰견,사냥견으로 취각·청각의 예민성을 따를 동물이 없으며 19 24년 미국 포피견은 3천3백㎞를 6개월간 걸어서 인디애나에서 오리건의 주인집까지 찾아간 명견으로 유명하다. 일본 중국에까지 널리알려진 한국의 유명한 진돗개,풍산개,삽사리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충의명견의 대명사이다.대문앞,마루밑,뒤뜰,굴뚝옆,부엌에 기거하며 「하루 두끼 밥 찌꺼기 얻어 먹으며 온갖 충성을 다하는 동물은 개말고 있는가,대가없는 충성때문에 도리어 천시받는 동물」이라고 삼불 김원용교수는 그의 수필 「김덕구」에서 얘기한다. 제발 새해에는 「국민을 하늘처럼 무서워 할 줄 모르는 개」에 관련된 속언에 합당한,개××,개×,개만도 못한×등 말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현직에서 사라지고 우리 모두가 새로워 졌으면 한다. 개도 닷새가 되면 주인을 안다.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가뜩이나 어려운 북한 핵개발,시장개방에 따른 국가 위기에서 창조적 지혜자들은 의견, 명견, 충견을 본받아 국민에게 견마지로의 보답과 살신성인의 지혜를 보여줄 때이다.
  • 단군릉/축조형태 고구려 양식

    ◎본사,북의 단군릉 발굴관련 보고문·논문 긴급입수… 최무장교수 분석/“김일성이 단군 실체인물로 찾아줬다” 주장/고고학자료까지 정치에 이용,주민을 기만 북한 사회과학원은 『단군의 무덤을 발굴했다』고 지난 10월2일 공표한데 이어 이와 관련한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학술발표회』를 같은달 12∼13일에 평양인민학습당에서 가졌다.서울신문은 그동안 단편적으로만 소개되었던 북한 사회과학원의 『단군릉 발굴 보고문』과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학술논문』을 긴급입수,생생한 사진과 함께 건국대 최무장교수(고고학)의 해제 및 북한의 단군릉 주장에 대한 고고학적 견해를 싣는다. 발굴 보고문에 따르면 이른바 단군릉은 평양시 강동군 강동읍에서 서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대박산의 기슭에 위치한다.릉은 돌로 쌓은 고구려 양식의 돌칸흙무덤(봉토석실묘)으로 반 지하에 축조한 주검칸(묘실)의 크기는 동서 2백73㎝,남북 2백76㎝,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는 1백60㎝이다.벽체는 돌로 쌓은뒤 뚜껑을 덮었고 입구도 돌로 막았다.출토물은 남녀2인의 사람뼈로 모두 86개이며 이 가운데 단군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키는 1백70㎝정도이다.이 뼈는 전자성공명법으로 측정 한 결과 지금부터 5011년 전이라는 수치가 나왔다.사람뼈 이외에는 금동왕관편 2점 및 토기편,관못 6개가 나왔고 무덤앞에는 단군릉이라 새긴 표식비와 화강암제의 상돌,무덤좌우에 돌사자가 각각 하나씩 있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단군의 무덤이 고구려 무덤 양식으로 되어있는 것은 그 시기에 개축했기 때문』이라며 『고구려 사람들은 시조인 동명성왕과 함께 단군도 숭배했다』고 쓰고 있다.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학술발표회』에는 모두 15명의 학자가 나섰다.먼저 전영률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위대한 수령님이 단군을 실체한 인물로 믿아주시었다…』는 식.이어 고고학연구소의 박진욱과 장우진 김고경이 차례로 나서 『장지연의 「위암문고」권7에 평안도 강동군의 서쪽에 단군묘가 있다고 분명히 기록되』면서 『이번에 나온 단군의 뼈는 북한에서 나온 신석기시대 이후 인골 가운데 가장 크며 이뼈를 사회과학원의 전자상자성공명연대측정장치로 누적선량을 각각 30번과 24번 측정한 결과 50 11년이 산출됐다』는 주장을 폈다. 다음은 고조선이 뛰어난 문화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 중심지는 평양이었다는 주장이 주류를 이룬다.김일성종합대학의 현명오는 『첫 문명국가인 고조선의 도읍지는 바로 평양』이라며 『건국연대는 절대연대로 5011년,즉 기원전 3천년대 초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이번 발표와 연관시키고 있다.또 고고학연구소의 석광준과 언어연구소의 유열은 『평양은 고대문화의 중심지로 단군조선 시기부터 「심지글자」라는 민족글자를 가졌었다』고 주장했다. 이 학술발표회는 역사연구소의 조대일과 손영정이 나서 『평양의 단군사당과 강화도 마니산 첨성단등지의 단군숭배와 관련된 의례는 오랜 풍습이었다』면서 『조선은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이후 반만년동안 하나의 핏줄로 이어왔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종합하면 보고문에 이어 무려 15명에 이르는 학자들의 발표내용은 한결같이 너무 정치적이고 유치하다.위에 인용한 내용은 발표의 핵심적인 내용을 거의 담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독자들의 냉정한 판단을 바란다. 필자는 북한학자들이 주장하는 「단군릉」을 고구려무덤으로 본다. 북한학자 자신들도 무덤자체는 고구려 양식의 돌칸흙무덤으로 개축되었고 벽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그러면서 그 안의 사자는 지금부터 50 11년전 묻혔고,바로 단군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무덤의 축조형태는 완전히 고구려 양식이다.출토유물중 금동관편과 관못6개는 무엇을 말하는가.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금속을 사용한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문명이 기원전 3천5백년,인도의 인더스문명이 기원전 2천5백년,중국의 황하유역의 상문명이 기원전 1천5백년이라는 사실은 세계가 주지하는 바이다. 고고학은 역사의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고 없는 부분을 보충하며,더 나아가 인류의 기원을 찾는 학문이다.북한은 그러나 「단군릉」에서 보듯 아직도 고고학적 자료를 정치에 이용하여 북한주민을 기만하고 「위대한 수령」을 찬양하는데 열중하고 있다.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이른바「단군릉」도 그 자체로 고구려의 유적으로는 대단히 큰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믿어진다.필자는 북한학계가 이러한 왜곡이나 과장에서 벗어나 정도를 걷는다면 이제부터라도 민족사의 빛나는 성과를 거둘수 있게 될것으로 확신한다.
  • 고속버스 전용차선/이종철 국립민속박물관장(굄돌)

    신석기 사람들은 물론 21세기 컴퓨터 시대까지,조상대대로 전해져온 아름다운 산과 강 넓은 들에서 정착생활을 하면서 한곳에 살아온 민족은 세계에도 그 유래가 드물다.한곳에서 300년을 살아온 해남의 연동마을이나 안동의 하회마을의 가계전승은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아름다운 자연속의 평화로운 삶,조상대대로의 선영과 역사가 숨쉬고 어린 시절의 꿈이 서린 농촌의 고향은 언제나 잊 을수 없는 추억이요,향수이다.어떻게 고향을 꿈속에서라도 잊는단 말인가. 1950년대 농촌과 도시의 인구비는 70:30이었고 농촌은 도시를 먹여 살리는 젖줄이요,모태였다.서울의 극소수 토박이를 제외하고 누구도 소박한 농촌의 토양속에 살았다.뱀장어가 산란기가 되면 자기가 태어난 강상류에 되돌아와 알을 낳듯이 우리들의 역사적,인륜적 귀소본능 또한 한국인의 보편적 민족성을 이루고 있다.그러다보니 명절이나 연휴때만 되면 기차도 사람에 실려가고 고속도로 역시 자가용에 짓밟혀서 움직이지를 못하고 있다.3∼6시간 거리를 12∼24시간 걸려서 도착하게 하는 주범은 이웃을 생각하지않는 자가용 남용 귀성행태이다. 민속규범이 숨쉬는 농촌의 공동체생활은 나보다 이웃,이웃보다 마을을 생각하는 상호인보정신이 그 기초였다.기름 한방울없이 값비싼 외화를 낭비하는 악순환을 떨쳐버리고 버스승객이 편히 갈 수 있도록 고속버스 전용차선을 연말연시라도 채택했으면 좋겠다.흙을 가꾸는 농민의 후손으로서 우루과이라운드에 속터지는 농어민을 위해서도 외화를 아껴야 한다. 주말과 연초에는 고속버스를 타고 농촌에 가 위로의 말이라도 전했으면 좋겠다.땀과 시름의 결실인 농촌쌀도,종묘값조차 건지기 어려운 시름의 배추도 한가마니씩,한묶음씩 버스 짐칸에 싣고 오자.그래서 도시와 우리를 키워온 농촌을 살리고 아픔에 동참했다는 마음의 여유도 가지자.그리고 고향에 갈때는 순박한 농민이 되어 얌체처럼 갓길을 달리는 무뢰한이나,고속도를 쓰레기장화하는 환경의 파괴범이 되지 말자.제발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교통소통 행정이 이번 연말연시에는 환골탈태하는지 우리 모두 지켜보자.이를 위해 고속버스 전용차선을 93년 세밑에 시험해보자.
  • 대상에 창녕 3·1 민속문화회/7일 시상식

    ◎제9회 향토문화대상 7명 선정/서울신문사 제정·금성 협찬 서울신문사가 전통문화계승과 지역문화의 창달에 힘써온 숨은 일꾼을 찾기위해 제정한 제9회 향토문화대상수상자가 1일 결정됐다. 전통문화부문과 현대문화부문으로 나눠 전국 시·군의 문화공보실과 문화원,예총등 관련단체에서 추천한 단체및 개인을 대상으로 심사한 결과 영예의 대상에는 경남 창녕의 3·1민속문화향상회(회장 전병우)가 선정됐다. 또 본상중 전통문화부문에서는 ▲김기복씨(64·안성남사당보존회 상쇠) ▲안동문화연구회(회장 권오기) ▲고경재씨(60·양양문화원장)▲양인식씨(51·논산문화원 사무국장)등 4명이 뽑혔다.현대문화부문에서는 ▲정용채씨(67·해남문화원부설 문화학교교장) ▲이종찬씨(71·천안문화원장)등 2명에게 돌아갔다.대상에는 상금 3백만원,본상수상단체및 개인에게는 각각 2백만원씩의 상금이 주어진다. 올해 심사는 구상(시인)·여석기(고려대 명예교수·영문학)·임동권(중앙대 명예교수·민속학)·정영호(한국교원대 교수·역사학)·이중한씨(서울신문사사사편찬위원장)등 5명이 맡았다. 서울신문사 주최,금성 협찬,문화체육부 후원으로 열린 이번 향토문화대상의 시상식은 오는7일 하오3시 한국프레스센터20층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열린다. ◎대상 「3·1 민속문화회」/경남 창녕·전병우 회장/매년 문화제 열어 민속놀이 재현/영남지역 만세발상지… 61년에 발족/쇠머리대기등 행사통해 전통 계승 『이번 수상을 계기로 3·1민속문화향상회는 더욱 훌륭한 향토문화를 계승하는 구심점이 될 것입니다』 대상 수상단체로 선정된 경남 창녕군 「3·1민속문화향상회」 전병우회장(49)은 수상의 영광을 모든 창녕군민들에게 돌리며 앞으로 향토문화 계승발전에 향도가 되겠다고 말했다. 창녕군 영산지역은 1919년 당시 서울의 3·1독립만세소식이 전해지면서 구중회,장진수,김추은,남경명 등으로 조직된 22인의 결사대를 중심으로 3월13일 영남지역에서는 최초로 만세의 함성이 울렸던 곳이다. 3·1민속문화향상회는 이같이 영남지역 최초의 독립운동 발상지인 창녕군 영산지역의 역사적 의미를 기리고 선조들의 전통민속놀이를 계승하자는 온 군민들의 뜻이 한데 모아지면서 군민 전체를 회원으로 삼아 지난 61년 발족됐다.이같은 취지에 따라 발족된 3·1민속문화향상회는 61년 발족때부터 지금까지 해마다 3월1일을 전후해 창녕군의 문화행사인 3·1민속문화제를 주최하면서 향토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해 오고있다. 향토문화 전승의 장으로 해마다 개최되는 이 3·1민속문화제의 각종 행사가운데 특히 중요행사로 매년 열리는 무형문화재 제25호 쇠머리대기와 무형문화재 제26호 줄다리기는 창녕 지역의 향토색이 짙게 담긴 고유의 민속놀이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이를 통해 길러진 단결력과 정의감·용감성은 과거 임진왜란의 항쟁을 비롯해 3·1독립항쟁등 조국수호를 위한 희생정신의 밑거름이 되면서 오늘날까지 그 정신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영산쇠머리대기는 영산지방의 마주보고있는 두 산을 힘센 황소로 형상화해 생소나무와 짚줄로 나무소를 만들고 동·서 양군으로 나누어진 수백여명의 장정들이 그쇠머리위에 각각 장군을 태워 메고 함성을 지르면서 부딪치거나 밀치는 가운데 상대편 쇠머리를 땅에 꽂아 승부를 가리는 것으로 이보다 앞서 깃발과 서낭대를 들고 펼치는 진잡이 놀이및 서낭대싸움과 함께 부상자가 생길만큼 박진감 넘치고 실전을 방불케 한다. 벼농사의 풍요를 비는 의례에서 기원된 줄다리기도 남녀노소가 한데 어울려 해마다 계속 이어가고있는 창녕지역 고유의 대규모 민속놀이다.이밖에 논매기와 관련해 노래와 춤과 농악을 엮은 괭이말타기 놀이나,수호신을 숭상하는 뜻의 토속민속놀이 행사인 호장굿,골목줄다리기등도 창녕지역에서만 볼 수있는 향토민속놀이다. 전통문화를 발굴해 계승하고자하는 군민들의 뜻이 모인 3·1민속문화향상회는 이러한 여러가지 지역 특유의 향토민속놀이를 전승해 해마다 재연함으로써 주민들에게 참여와 화합의 정을 다지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청소년향토사교실 운영/안동문화연구회 권오기회장 지난84년 창립된 이래 매월 문화강좌및 문화유적현지답사를 계속해 왔으며 86년 이후 매년 「안동문화연구」를 발간하는등 안동지역의 향토문화발전을위해 기여했다. 이밖에도 월례회원발표를 통해 수준높은 연구업적을 보였다.88년부터는 중학교3년∼고등학교2년까지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청소년향토사교실을 운영해 오면서 교재로 쓰이는 「안동문화의 이해」를 발간하기도 했다. 또 안동지역에 산재해 있는 각종 현판 1백10여점을 탁본,내년 2월에 전시회를 가질 계획이며 올 9월에는 「향토사연구의 이론과 실제」를 주제로 전국향토사연구회세미나를 안동문화회관에서 가지는등 지역문화단체로는 보기 드문 활동상을 보여온 점을 높이 샀다. ◎현산문화제 정착에 힘써/고경재씨 양양문화원장 양양문화원 설립의 산파역을 맡았다.설립후 초창기부터 16년동안의 사무국장을 거쳐 문화원장으로 재직하면서 향토문화사업을 천직으로 삼고 일하며 지역문화의 파수꾼노릇을 해냈다. 양양군의 유일한 향토축제인 「현산문화제」를 주관,범군민적인 행사로 정착시켰으며 고유의 민속놀이인 패다리놓기,귀애파기놀이,탁장사뽑기등을 발굴했다.또 현산문화제의 인기종목인 양주방어사행차와 신석기인가장행렬등을 발굴·고증·연출하는등 1인3역을 담당한 재주꾼이기도 하다. 향토사연구회,청소년윤리교실,노인회,노인학교등을 조직하거나 구성토록 주선해 문화의 지방활성화를 위해 노력해 왔으며 1천회이상의 각종 행사에 초청강사로 나가 지역문화홍보에도 이바지했다. ◎해남문화유산 발굴 40년/정용채씨 해남문화원 문화학교장 46년 옥천국교 교사에서 시작,지난해 화산국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할때까지 40여년동안 교직에 몸담고 있으면서 해남지역의 문화유산을 발굴,계승하였다. 충무공 이순신의 명랑대첩을 조사해 「울돌목」을 펴냈으며 임진왜란때의 충신 정운장군의 전기인 「구국의 횃불」,해남군 금호도의 자연환경과 미풍양속을 수집한 「금호도」,「내고장 해남」「고산 윤선도」를 발간하는등 해남지방의 묻혀 있던 향토사발견에 앞장섰다. 지난해 3월부터는 해남문화원 지역문화학교 교장으로 부임,국민학생 43명에게 매주 글짓기지도를 해오는등 퇴직이후에도 후진양성에 힘을 쏟았다. ◎안성남사당 재건에 큰공/김기복씨 안성남사당보존회 17살때 6·25이후 맥이끊길 위기에 처해 있던 이원보남사당패에 들어가 기예를 익힌뒤 82년 남사당의 발상지이자 경기농악의 대명사격인 안성남사당을 재건하는등 남사당의 계승·보존에 기여했다. 86년에는 철도부지였던 안성읍 석정리에 전수장을 건립,88년부터 전승학교로 지정된 서운중학교 학생들에게 남사당풍물놀이를 전수하는등 후진양성에도 정열을 쏟았다. 89년 경남 마산에서 열린 제30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는 영예의 대통령상및 개인연기상을 수상하는등 각종 경연대회에서 안성남사당의 명성을 드높인 공을 인정받았다. ◎구전 「천안삼거리」 소설화/이종찬씨 천안문화원장 천안로터리클럽회장,한국반공연맹천안시·군지부장,선거관리위원,도·시정자문위원,의료보험조합이사장,도체육회부회장등 천안지역의 사회일꾼으로 일해온 인물. 특히 85년부터 천안문화원장을 맡아 39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천안문화원이 22만 천안시민의 문화사랑방으로 자리잡도록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천안삼거리」로 구전돼 오던 천안의 전설을 책으로 엮어내는 한편 연극으로도만들어 「천안삼거리 능소전」을 국내외에 알렸다. 지난해에는 총25억원의 경비를 들여 2천여평의 부지위에 초현대식 음향시설과 완벽한 공연장·이동벽면·조명이 설치된 전시공간등을 갖춘 전국최대규모의 문화원을 건립하는데 헌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예산향토사 체계적 발간/양인식씨 논산문화원 사무국장 지난84년부터 논산문화원사무국장으로 재직하면서 논산문화의 발굴과 계승 및 발전에 헌신해온 공로.부족한 예산속에서 원고료한푼없이 「놀뫼의 문화­사적지편」등 11권에 달하는 각종 논산문화향토지를 혼자서 자료수집·정리·집필해 발간한 것을 비롯,「내고장소식」「향토연구회지」를 각각 통권43호와 6집까지 펴내는 저력을 보였다.각 1백40페이지짜리 9개읍의 읍면지발간도 그의 작품. 이같은 공로로 지난해에는 전국문화원발간물품평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올해에는 영국 옥스퍼드대학 중앙도서관으로부터 「논산의 민속」「논산지역의 독립운동사」등 2권을 기증해 달라는 의뢰를 받는등 논산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 문화의달/전국 국립박물관 기획전 다채

    ◎중앙박물관,선·원사시대 토기 비교 전시/광주 무등산전… 청주 이인문 산수화전 문화의 달 10월을 맞아 서울의 중앙박물관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국립박물관에서는 다채로운 성격의 특별전시회가 열린다. 전시회 주제는 ▲한국의 선·원사 토기특별전 ▲국립경주박물관 80년전 ▲무등산전 ▲조선시대 고문서특별전 ▲이인문 산수화특별전등으로,대부분 그 지역 주민들에게는 처음 소개되는 것이어서 각별한 관심을 가질 만하다. 박물관별 전시회 내용을 알아본다. ▷중앙박물관◁ 25일부터 한달동안 제1 기획전시실에서 「한국의 선·원사 토기특별전」을 연다.신석기시대와 원삼국시대(삼국시대 초기)의 토기를 비교·전시함으로써 토기의 발전과정과 지역적 특성을 보여준다. 중앙박물관이 토기를 주제로 특별전을 갖기는 이번이 처음이어서 국내외 학자및 일반인들이 토기를 한자리에서 관람하고 연구할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로 꼽히고 있다. 서울대박물관등 30개 기관에서 출품한 신석기시대의 덧무늬토기·빗살무늬토기·청동기및 초기 철기시대의 민무늬(무문)토기,원삼국시대의 경질 민무늬토기·타살문토기등 2백여점이 선보인다. ▷경주박물관◁ 올해로 개관 80주년을 맞아 박물관의 역사자료,문화유적 사진등을 모아 26일부터 11월21일까지 본관 중앙홀에서 「국립경주박물관 80년전」을 연다. 박물관의 주요 문서와 행사사진·자료·보고서·도록·포스터등을 비롯해 굴불사 사면석불과 불국사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등을 진열,고도 경주의 역사를 재조명한다. ▷광주박물관◁ 전국체전에 맞춰 12일부터 「무등산전」을 1층 특별전시실에서 시작했다. 11월14일까지 열릴 예정인 이 전시회는 ▲무등산 충효동에서 발굴된 고인돌·분청·백자등의 선사및 도자기 유물 ▲원효사에서 발견된 청동불두등 불교유물 ▲「송강집」등 가사문학과 관련된 문집 ▲허백련·오지호등 근대화가의 무등산그림 ▲무등산의 옛모습을 찍은 사진등 2백60여점을 집중 소개한다. ▷전주박물관◁ 「조선시대 고문서특별전」을 12일에 시작해 11월29일까지 기획전시실에서 연다. 국보 제1백31호인 「조선태조호적원본」등 1개50여점이 전시돼 활자문화를 일찌감치 발전시켰던 조상들의 지혜를 보여준다. ▷청주박물관◁ 지난 7일부터 한달 예정으로 「이인문 산수화전」을 기획전시실에서 열고 있다. 조선조 후기에 독창적인 화풍을 이룩했던 이인문의 대표작인 「강산무진도」「누각아집도」등 18점이 전시됐다.
  • “「5천년전 단군유골 발굴」 황당무계”

    ◎북한 발표에 대한 국내학계의 시각과 반응/연대측정 방법에 무리… 기존학설과 달라/학문적성과 아닌 북정통성 강조 목적인듯 개천절을 앞두고 북한이 「단군릉에서 단군유골을 발굴했다」고 발표한 내용은 국민에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단군이 실재했었나에 대해서마저 아직 입장이 정리되지 못한 국내 학계에서는 「단군이 실제로 유골을 남겼고 북한측이 이를 발굴했다」는 보도 자체가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다. 북한측이 주장한「단군릉 발굴」기사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국내에서 사학·고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들이 발표한 내용을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보아 연대측정에서 어긋나는 데다가 역사학적인 면에서도 기존의 학설과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더욱이 북한측이 그동안 주장했던 스스로의 연구성과하고도 차이가 커 국내 학자들은 그들의 주장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해 하고 있다. 그들이 발표한 내용이 아직 국내 학자들에게 정확하게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우선「전자상자성 공명법에 따른 유물 평가방식」「금동관 출토·석실봉토분등 유물에 대한 해석」등 기초적인 주장에 대해 국내 사학·고고학계를 대표하는 학자들로 부터 평가를 들어본다. 역사학의 입장에서는 최근 「고조선사 연구」를 발간해 고조선사에 대한 학설을 국내 최초로 정리했다고 평가받는 이종욱 서강대교수가,고고학의 입장에서는 최몽용 서울대교수(한국상고사학회 회장)가 도움말을 주었다. ▲이종욱 서강대교수=북한 학계는 최근 발굴한 단군의 유골이 5011년전의 것이라고 발표했다.또 청동판에 금을 도금한 왕관이 함께 출토됐다고 주장했다. 5011년전이라면 기원전(BC)3018년에 해당한다.이 시기는 한국·중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에서 왕을 중심으로 한 국가 권력이 출현하지 못한 때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왕권을 이룬 국가는 중국의 은나라이며 은나라는 기원전 2천년 무렵에 처음 고대국가를 형성한 것으로 보고 있다.이보다 1천여년 앞서 평양을 중심으로 해 강력한 고대국가가 형성돼 있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북한 학계에서도 그동안 기원전 12 00년 무렵에 고조선이 태동한 것으로 보아 왔다.왜 그들이 단군조선의 출현을 갑자기,훨씬 앞당겨 잡는지 궁금하다. ▲최몽용교수=북한 학자들이 유골의 연대측정에 사용한「전자상자성 공명법」은 최소한 5만년이상된 유물에 사용하는 방법이다.그같은 방법으로 유골의 연대를 측정하고 단군의 뼈라고 발표한 것은 무리가 있다. 더구나 그 무덤이 BC 3천여년전에 지어진 것이라는 주장은 더욱 이해가 안된다.그 시대라면 고고학의 편년상 신석기시대의 말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그럼에도 그들은 청동기시대에나 나올 수 있는 왕관이 발견됐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청동왕관의 발굴 ▲고구려 양식의 돌칸흙무덤(석실 봉토분)형태는 빨라야 기원전 200∼300년에야 가능한 것이다. 북한의 고고학계는 그동안 매년 한두번씩「새로운」이론을 발표해 왔다.그러나 그 목적은 학문적인 성과를 알리는데 있다기 보다 북한의 정통성을 강조하려는데 있는 것으로 보는게 국내학계의 평가이다.
  • 고려­조선시대 등 유물/개성지방서 다수 발굴

    【내외】 북한은 최근 개성지방에서 원시시대 돌도끼·돌화살촉 등 원시·신석기·고려·조선시대 문화유물 수십점을 새로 발굴했다고 중앙방송이 22일 보도했다. 북한은 김일성의 지시(92년5월5일 개성시 현지지도)로 그동안 이 지방에 대한 유물발굴사업에 주력한 결과 원시·신석기시대의 각종 유물을 비롯해 고려시대의 공예품,이조시대 자기제품등 고려사연구에 큰 가치가 있는 「개성 왕씨족보」등 수십점을 발굴했다는 것이다. 특히 개풍군 혜선리 태조왕릉에서 발굴된 금동띠고리,국화무늬박이 푸른사기잔,청동거울,개성왕씨족보 등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고 이 방송은 전했다.
  • 「새로 보는 대전역사」출간 언론인 송형섭씨(인터뷰)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 대전모습 기술” 『대전은 뿌리깊은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고장입니다.알려진 것처럼 일제시대에 철도가 지나가며 세워진 신흥도시가 아니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새로 보는 대전 역사」(나루간)를 펴낸 언론인 송형섭씨는 『여기저기서 「대전 엑스포 대전 엑스포」하지만 엑스포만 강조되고 막상 엑스포가 열리는 대전은 묻혀있는 것이 안타까웠다』고 출판의도를 밝혔다. 이 책은 「구석기에서 93엑스포까지」라는 부제가 일러주는 것처럼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 대전의 역사를 문화재와 자연환경,주요사건 중심으로 기술한 향토사이다. 『대전이 「한밭」의 한자 이름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으면서도 일제의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지었다는 속설이 전해져 왔지요.그런데 「동국여지승람」에만 해도 「대전천은 유성현에 있다」는 기록이 있어요.대전이라는 이름이 적어도 조선 숙종 이전부터 쓰였다는 증거지요』 송씨는 현재 대전에서 발행되는 중도일보의 편집부국장.「새로 보는 대전역사」는송씨가 지난 90년3월부터 91년7월까지 50여회에 걸쳐 이 신문에 연재한 기사를 묶은 것이다. 『엑스포 대회장을 지나가는 갑천은 공주와 대전을 잇는 물길이었어요.요즘으로 따지면 고속도로같은 산업의 동맥인 셈이었지요.또 엑스포 대회장 주변에는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유적지가 널려있습니다.대전엑스포는 첨단산업박람회지만 대회장 주변의 이런 역사를 적절히 이용했더라면 관람객들에게 더 많은 볼거리를 제공할 수 있지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송씨는 현재 대전에 과학기술단지와 3군본부가 들어선데 이어 제3정부종합청사가 착공되고 엑스포가 열리는 등 글자 그대로 「중도」로 자리잡고 있는 만큼 엑스포를 관람하는 기간만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도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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