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벗어난 충무로 시선 돌려 그곳으로
한국 영화가 ‘지역’을 껴안는다. 서울이 아닌 곳, 돈도 사람도 모두 등지는 곳, 하지만 추억 한 토막 남아 있어 마음 한구석에 맺힌 애잔함을 쉬 떨쳐내기 어려운 곳, 그곳이 바로 지역, 혹은 고향이다.
그간 문화적 서울 중심주의에 발목 잡혀 있던 영화계가 시선을 지역으로 돌리고 있다. 최근 ‘경주’, ‘왓니껴’, ‘순천’ 등이 잇따라 소개되며 영화의 공간과 정서, 주제가 더이상 중앙에 머물지 않음을 보여 주고 있다. 단순히 지역적 공간을 차용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지역의 정서와 전통을 전면에 내세운다. 자본과 중앙에 일방적인 구애를 보내지 않음은 물론 아예 거부하는 모양새까지 띤다. 특히 영화 제작 이후 가장 먼저 외부에 선보이는 언론시사회를 그 지역에서 먼저 여는 등 이례적인 행보가 오히려 당당하다.
지난 21일 개봉한 ‘왓니껴’를 보자. 그곳에는 잘 익은 가을이 있다. 푹 삭은 고향이 있다. 경상북도 안동을 고스란히 씨줄과 날줄 삼았다. 안동 지역말로 ‘왔습니까’라는 뜻이다. 안동은 ‘양반의 마을’로 박제화된, 쇠락한 곳이다. 생명이 움트고 새롭게 시작하는 기운과는 거리가 있는 공간이다. 실제 소멸과 이별, 늙음의 기운이 영화를 감돈다. 다만 거기서 멈추지만은 않는다. 새롭게 시작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시킨다.
고향이 지겨워 등진 혜숙(심혜진)과 종갓집 종손으로서 숙명처럼 고향을 지키는 택규(권재원), 쫓기듯 삶의 마지막 공간으로 돌아온 기주(전노민)는 초등학교 동창이다. 이들이 고향 안동을 애증의 배경이자 씨줄로 삼고, 삶의 고단함과 희미한 옛추억을 날줄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 간다. 세상 어떤 지친 것, 못난 것도 모두 품어 주는 고향의 넉넉함 속에서 그들이 결국 다다른 곳은 ‘새로운 출발’이다. 끄트머리에 몰렸다고 생각한 그곳이 바로 출발점이었다. 자극적인 드라마와 갈등 구조는 없지만 배우들의 원숙한 연기와 편안한 서사, 그보다 더 편안한 장면이 애잔하다. 제1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비전익스프레스 초청작으로 출품됐다.
장편 다큐멘터리 ‘순천’은 몬트리올국제영화제에 한국 다큐멘터리 작품 중 처음으로 공식 초청됐다. 29일 순천에서 시사회를 연다.
넉넉하게 휘어 감는 순천만의 풍경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순천 별량면 화포마을에서 고기 잡는 칠순의 늙은 여자 어부 윤우숙씨의 삶으로 곧장 들어간다. 윤씨가 아내에게는 무심하고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남편 차일선(78)씨와 부대껴 가며 사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무심한 듯한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평생에 걸쳐 거친 바다와 갯벌에서 고기 잡으며 억척스럽게 살아온 윤씨의 50년은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 그 자체다. ‘순천’(順天) 이름이 품은 뜻이 그러하듯 운명인 듯, 숙명인 듯 오로지 자식 걱정, 남편 뒷바라지뿐인 신산한 삶이다. 세상 모든 어미 또는 아내의 삶에 헌정하는 작품이다. 지난 3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포큐스코레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다음달 4일 순천에서 가장 먼저 개봉한다.
지난 6월 개봉했던 영화 ‘경주’는 6만 3000여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데 그쳤지만, 흥행 정도가 작품의 가치 평가에 개입 또는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경주’는 한창 진행중인 제67회 로카르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공식 초청돼 현지의 극찬을 얻었다. 7년 전 본 찻집 벽에 그려진 춘화 한 장의 기억을 더듬어 경주를 찾은 최현(박해일)과 경주에서 신산한 삶을 살아온 공윤희(신민아)가 펼쳐내는 일상 속 경이로움과 삶의 비루함, 그리고 애틋하듯 지나가는 사랑의 양가적 감정이 잔잔히 담겨 있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