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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국남성들 인도처녀 “신부감 1위”

    ◎“순수하며 순종적” 배필 찾아 인도방문 줄이어/“지참금 부담 없다” 인도여성도 국제결혼 선호 인도여성들이 인생의 영원한 반려자를 찾는 극동,구미 등지의 외국남성들에게 최고의 신부감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이들 신랑감이 자기 나라의 문화적·도덕적 타락현상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순수하면서도 순종적인 인도여성들에게 커다란 매력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인도남성들의 경우 세습적 계급제도인 카스트를 비롯,피부색·종교·가족배경·궁합 등을 따지는데 반해 이들 외국남성들이 이런 것들을 전혀 문제삼지 않고 주로 상대의 심성을 보려하는 점도 인도여성들의 국제적 인기를 높이는 요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수도 뉴델리에만 5백여개를 포함,전국적으로 수천개에 달하는 인도의 결혼상담소들은 이제 외국 남성과 인도 처녀의 인연을 맺어주는 일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는 현상마저 생겨났다. 다케시 도시히코란 일본청년도 작년에 인도인 색시감을 찾기위해 뉴델리를 방문,인도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결혼상담소로 직행했다. 도쿄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는 올해 25세의 다케시는 뉴델리시 서부의 레가르푸라에 있는 이 결혼상담소의 소장 다람 찬드 아로라(65)씨와 면담한뒤 신랑감 명단에 자기 이름을 올렸고 한달만에 마음에 드는 인도여성을 찾아 일본으로 돌아갔다. 아로라씨는 인도 전역의 건물벽에 시커먼 페인트로 광고를 써놓아 가장 많이 알려진 자신의 사무실에만 지금까지 다케시와 같은 목적을 가진 외국인이 수백명이나 찾아들었다고 자랑했다. 벨기에의 이혼남인 비즈니스맨 조젭 귀스타프 다니엘(38)씨도 『서방에서 이혼율이 놀라울 정도로 치솟고 있지만 인도에서는 전통문화상 결혼이 평생의 약속으로 간주되고 있어 전반적으로 이혼율이 낮다』며 인도여성들이 썩 좋은 신부감임을 강조했다. 인도여성들의 입장에서는 많은 인도남성들이 요구하고 있는 엄청난 지참금 부담 없이 결혼할 수 있는데다 결국 가족들로 하여금 인도를 떠나게해줄 수도 있기 때문에 국제결혼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다. 한편 인도 여권신장운동가들은 외국인들의 마음속에 새겨진 진부한 인도여성상에 대해 분노하면서 이런 국제중매의 배후에 모종의 동기가 깔려있지 않나하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김규환 기자〉
  • 「시집가는 날」 3만관객에 폭소 선물/연극 공연 이모저모

    ◎휴일 가족들로 초만원… 해학·풍자에 매료/“전통문화 발전 큰 몫”… 남원춘향제 백로 서울신문사와 LG전자가 전통문화 계승·발전을 위해 마련한 국립극단 연극 「시집가는 날」 초청공연이 24일 하오 8시 전북 남원시 광한루원 완월정 특설무대에서 열려 3만여 관객으로부터 아낌없는 박수를 받았다. 「시집가는 날」은 옛날 양반계층의 위선과 횡포를 신랄하게 풍자한 작품으로 국립극단원의 수준높은 연기력이 돋보여 춘향제의 여러 행사 가운데 압권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관객은 특히 풍자와 해학이 주류를 이루는 내용 가운데 돈을 들여 겨우 양반이 된 맹진사가 자신의 딸 혼사를 앞두고 드러내는 이중적인 태도에 한숨을 짓거나 폭소를 터뜨리며 열광했다. 이날 공연에는 이종률 국회사무총장,이정규 남원시장,조찬형 국회국민회의당선자(남원),장덕상 서울신문사 감사 등 각계 많은 인사가 참석,공연을 관람했다. ○…공연이 열린 완월정 특설무대 앞에는 연극이 시작되기 1시간 전부터 60∼70대 할아버지·할머니가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연극이시작되기를 기다렸다.때마침 「부처님 오신 날」과 겹친 휴일이어서 부모의 손을 잡고 따라온 어린이로 초만원을 이뤘다. ○…연극은 건너마을 양반댁 아들과 혼인을 성사시켰다며 한껏 거드름을 피는 맹진사가 등장함으로써 막이 올랐다. 그러나 며칠 후 사위될 사람이 다리를 쓰지 못하는 장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맹진사가 자신의 딸 대신 몸종인 이쁜이를 시집보내기로 계략을 세우자 관객은 못내 안타까운 듯 여기저기서 한숨을 지으며 분노를 터뜨렸다. ○…그러나 결혼식 당일 인물이 훤칠한 신랑이 두 다리가 멀쩡한 채로 등장하는 것을 이상히 여긴 맹진사가 신랑을 그자리에서 걸어보게 하고 팔다리 여기저기를 만져보다가 결국 기절하는 장면에 이르자 관객은 일제히 폭소를 터뜨리며 환호성을 올렸다. ○…한편 이날 맹진사의 부인으로 출연한 원로여성연극인 백성희씨(71)는 『그동안 수많은 무대에 올라봤지만 이번 공연처럼 관객의 호응과 분위기가 좋은 무대는 없었다』며 활짝 웃었다. ○…윤기호 춘향제전위원장은 『서울신문사가 지난 90년부터 남원춘향제에 변사또행렬·전라감사행렬·방자놀이·뮤지컬성춘향 등 많은 문화행사를 지원함으로써 춘향제가 세계속의 제전으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됐다』고 주최측에 고마움을 표시했다.〈남원=조승진 기자〉
  • 남원서 「시집가는 날」 공연/서울신문·LG전자 국립극단 초청

    ◎24일 춘향제 행사 특설무대 올려 국악의 고장 남원으로 국립극단의 현대희극 「시집가는 날」을 보러오세요. 오는 24일 하오 8시 제66회 남원춘향제가 열리는 전북 남원 광한루원내 완월정 특설무대에 국립극단의 「시집가는 날」이 오를 예정이어서 지역주민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이번 무대는 서울신문과 LG전자가 지방의 전통축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초청한 것으로 춘향문화선양회가 주관하고 축제이벤트가 기획을 맡았다. 「시집가는 날」은 우리나라 현대희극의 백미로,우리의 전통적인 정서와 향기가 듬뿍 배어있는 작품.주인공 맹진사가 돈으로 양반벼슬을 산 후 지체있는 집안과의 혼인으로 신분상승과 권력획득을 노려 딸의 혼사를 추진하다가 사위가 절름발이라는 소문에 딸대신 몸종 이쁜이를 신부로 교체하나 혼례날 멀쩡한 신랑이 등장하면서 맹진사가 절망한다는 해학적인 내용이다. 김상열씨가 연출을 맡았고 정상철(맹진사) 백성희(한씨) 장민호(문중어른) 한희정(이쁜이) 이소향(갑분)씨 등 국립극단 단원 30여명이 무대에 올라 남원춘향제의잔치 분위기를 한껏 돋운다는 각오다.
  • 승주군 선암사·민속마을 낙안읍성/고즈넉한 고찰…고향의 정취 물씬

    ◎승주군 선암사/선녀가 하늘나는 모양 승선교/화사한 봄꽃 속세를 잊게하고 국내서 가장 큰 「측간」도 볼거리/민속마을 낙안읍성/정겨운 초가·나지막한 돌담등 6백년전 그때 그모습 그대로/주말 전통혼례식… 관광객 붐벼 남녘은 요즘 꽃밭이다.길목마다 온갖 봄꽃이 저마다 자태를 뽐내며 길손의 눈길을 끈다. 화사한 꽃과 어우러진 문화유산을 찾아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즐겨봄직한 때다. 전남 승주군의 선암사와 낙안읍성은 남녘의 아름다움을 모두 간직한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 군청에서 8㎞쯤 떨어진 조계산(887m)에는 규모는 크지 않지만 정감이 넘치는 절,선암사가 자리하고 있다.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촬영장소이기도 한 때묻지 않고 고요한 사찰이다. 선암사에 오르는 길목은 녹음이 짙게 드리워져 터널을 연상케 하고 주변의 물소리와 새소리가 적막함마저 느끼게 한다. 일주문(해탈문)을 지나 경내에 이르면 온갖 봄꽃이 우선 반겨 맞는다.목련·벚꽃·동백꽃·개나리 등이 절정의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이 절은 태고종의 총림.신라말도선국사가 창건했다 한다.정유재란 때 대부분 불타버렸고 순조 25년(1825)에 중건됐는데 대웅전·원통전·팔상전 등 20여개 동이 남아 있다. 특히 선녀가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모양의 승선교(보물 400호)는 절에 오르기 전 이 다리를 건너야 속세의 오염을 깨끗이 씻을 수 있다고 전해진다.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된 「측간」 또한 볼거리다.『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며 찾는 이에게 들려주는 지허 주지스님의 설법이 감명을 더해준다. 스님의 설법으로 흐트러진 마음을 추스린 뒤 승용차로 불과 10여분 거리에 사적 제302호인 「낙안읍성 민속마을」이 있다.요즘 관광객으로 붐빈다. 낙안읍성은 타임머신을 타고 600여년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가면 볼 수 있는 그때 그 모습을 고이 담고 있다.정겨운 초가,한옥과 마당,대나무로 엮은 사립짝,낮은 돌담 등…. 조선 태조 6년(1397) 왜구침입 때 이 고장 김빈길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았으며 인조 때(1626) 임경업 장군이 군수재직중 석성으로 중수했다 한다.1.4㎞의 성곽으로 둘러싸인 성내(4만1천평)에는 현재에도 원형을 그대로 유지,민속보존자료로 지정된 초가 9채 등 1백8가구가 실제 생활하고 있으며 민가와 동헌·주막 등이 당시의 마을형태를 잘 보여준다. 이곳에는 임장군의 영혼이 마을을 수호한다는 전설이 있어 매년 정월 보름에는 면민대제를 지낸다.특히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전통혼례식이 열린다.신랑이 말 타고 신부가 가마를 타는 혼례식이야말로 이곳의 풍경과 맞아떨어지는 볼거리다.〈승주(전남)=김민수 기자〉
  • 동성동본 15년 동거부부/패러글라이더 타고 혼례(조약돌)

    ○…동성동본으로 혼인신고도 못한 채 15년을 살아온 40대 부부가 지난달 31일 패러글라이더를 타고,창공에서 결혼식을 올려 화제. 충남 보령시에 살고 있는 김봉수씨(42·대천고교 교사)와 김현옥씨(41)는 동성동본으로 혼인신고도 하지 못한 채 81년부터 함께 살다 올해 특별법이 제정되자 지난 2월초 신고를 마쳤다. 미라(15),선미(14) 두 딸까지 둔 김씨부부는 이날 낮 12시 해발 6백m 높이의 성주산 정상 패러글라이더 이륙장에서 2백여명의 하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꿈에도 그리던 결혼식을 올린 것. 이날 결혼식은 대천항공클럽 회원 20여명이 먼저 형형색색의 연막을 뿜으며 축하비행을 한뒤 신랑신부가 패러글라이딩으로 내려오면서 절정을 이뤘다.〈보령=이천렬 기자〉
  • 부끄러운 결혼문화/오석홍 서울대교수·행정학(서울광장)

    인간사회에는 문화가 있다.문화는 인간생활의 원활한 운행을 가능하게 한다.결혼식은 문화의 일부이다.그런데 우리의 결혼식문화는 우리네 삶을 원활하게 하고 보람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피곤하게 한다.결혼절차는 혼돈과 문화 지체에 빠져있어 그것을 문화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하다. 우리 결혼풍속은 전래적인 미풍양속도 아니고 새시대에 적합한 문화적 행사도 아니다.헌 것도 아니고 새 것도 아니며,우리것도 아니고 남의 것도 아니다.그런 가운데 모두가 불편을 겪고 있다.결혼을 한다는 것은 사람이 탄생하고 죽는 일과 함께 인생에 있어 3대 중요 사건인데 그에 관한 문화를 이맛살이 찌푸러지게 방치해 둔 우리의 처지가 한심하다. 눈에 거슬리는 결혼식 풍경의 사례로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물론 일부의 문제다.그러나 그 일부의 문제가 결혼식문화를 타락시키는 주범이며 광범한 파급효과와 전시효과를 지닌다. 이끗과 권력을 주고받는 정략결혼까지는 아니더라도 남녀의 애정은 간데 없고 이른바 조건만을 따지는 혼사에서는 혼수문제가 시끄럽게될 수밖에 없다.혼수의 분량을 놓고 벌이는 아귀다툼에서부터 우리의 부끄러운 결혼문화는 시작된다.혼수가 적다고 아내를 때려 골병을 들이는 자들까지 있다니 말세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결혼식을 앞두고 벌어지는 통과의례는 「함팔기」이다.사주단자 보내는 일이 돈 뜯어내는 깡패들의 행패처럼 변질되어 경사스러운 행사를 멍들게 한다.함지기가 돈을 밟고 걷는 야만적 행태는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함값 시비 때문에 신부가 투신자살했다는 보도까지 나오기에 이르렀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뿌려대는 결혼식 청첩장은 공해다.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혼주로부터 청첩장을 받은 일이 적지 않다.권문세가의 혼사에 구름처럼 모여든 하객군중과 그로 인한 교통마비를 보면 역겹다. 결혼식날 예식장 풍경도 어색하고 낭비적이다.예식장의 바가지상혼은 이미 전설적이다.예식장 주변의 씀씀이가 날이 갈수록 낭비적으로 되어간다.아주 식탁을 차려 하객들을 앉히고 그 앞에서 결혼식을 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돈많은 사람들이 흔히 그렇게 한다.의식의 정중함,경건함은 찾을 길이 없다. 의식을 진행하는 주례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다.종교적 의식에서 성직자들의 집전으로 강복을 받는 것은 문제될 수 없다.그러나 일반예식장에서 사회자 말고 주례가 따로 있어야 하고 그의 연설을 들어야 하는지 반성해볼 일이다. 주례 세우기에 얽힌 이야기들도 쓴웃음을 자아낸다.혼주의 신분과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높은 분」을 주례로 모시는 경쟁을 벌인다.다른 한편으로 야박해진 인심은 주례를 노동자로 취급하는 경향을 낳고 있다.예전의 주례 모시기와는 영 다른 것이다.결혼식에 의미를 부여하는 상징적 역할담당자가 아니라 잠시 품을 파는 노동자처럼 거마비 봉투나 쥐어 보내는 홀대가 흔하다.그러하니 주례 해주겠다는 사람들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주례를 구하지 못해 허둥대는 젊은이들을 보면 안쓰럽고 불쌍하다. 결혼식 후 피로연은 더욱 가관이다.신랑 신부에게 온갖 해괴한 짓을 다 시켜 행사를 동물화한다.정말 망측한 일은 신부로 하여금 남자 손님들에게 술을 따르게 하고 술상머리에서 노래까지 부르게 하는 것이다.술상머리에서 술 따르고 노래하는 여자의 직업을 우리는 무엇이라 부르는가.정실부인과 술집작부를 분간하지 못하는 한심한 작태를 어찌 설명할지 난감하다. 결혼식을 인간화하는 문화 개조가 있어야겠다.기존의 피곤한 결혼식문화에 식상한 모든 국민이 개조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의례준칙과 같은 관권동원은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읍·면·동의 호적담당 공무원을 결혼주재관으로 지정하여 당사자의 결혼선서·서명·신고를 받아 결혼을 성립시키는 제도를 만들어 권장하는 일은 해볼 만하다.그런 절차 다음에 신랑 신부는 각자의 형편에 맞는 피로연을 열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함값 이라니」(외언내언)

    「함값」이라는 것이 신혼여행중인 신부를 투신사시키고 말았다.이미 살림을 하던,임신 6개월이나 된 「신부」가 너무 성급하게 군 것같아 그 행동 자체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죽했으면 그랬겠는가.남편의 당찮은 추궁에 억장이 무너져 충동적으로 몸을 던졌을지도 모르겠다.어렵사리 결혼식을 올린 가난한 신부에게 50만원이요 60만원이요 하는 「함값」은 강도를 만난 것만큼 어처구니없고 암담한 일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함값」풍속이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하는 일이다.본디 함이란 신랑의 사주단자를 색시집에 보내면서 청홍상의 치마 한감씩을 신부를 위해 상자안에 함께 넣어 보내던 것이었다.그 함을 지고가는 사람은 대개 신랑집 「아랫것」이거나 그에 준하는 사람이다.심부름꾼이기는 하지만 새로 맞는 시댁서 오는 사절의 하나이므로 신부집에서는 그 함진아비에게 노자를 조금 찔러준다. 이런 인심을 더 자극하기 위해 함진아비들은 티를 낸다.얼굴에 환칠을 하고 한둘이 어울려 『함사려!』를 외치며 실랑이를 벌이는 척하면어려운 사돈집 아랫사람에게 인심을 잃지않기 위해 좀 후하게 대접한다.그것이 전부였다.신분제도가 없어진 오늘에 이르러서는 신랑친구들이 그걸 대신하게 됐다. 그런 전통 풍속이므로 지나친 돈을 요구하거나 우려먹는 짓 따위는 도무지 말이 안된다.「함값」만이 아니라 요즈음에는 신부 친구들은 「부케값」이라는 것을 뜯어내 먹고 즐긴다고 한다.그 밖에도 동서고금이 엉터리로 배합된 해괴한 것들이 결혼식에 얽혀있다.미풍양속과는 전혀 무관한 별별 이상한 짓들이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대개는 상혼이 개입된 매우 음험한 음모의 결과이게 마련이다.현명한 젊은이들만이 이것을 고칠수 있다.국적도 없고 풍습도 아닌 넌센스코미디 같은 이런 일에서 빨리 벗어나지 않으면 언제 누구의 신부가 죽어나갈지 알수 없는 일이다.정떨어진다.
  • 고대 임희섭 교수가 본 「2천20년 사회상」

    ◎남북인구 7천만… GNP 4만달러로/2천년이후 남녀성비 급격히 붕괴/외국신부 “수입”·부부역할 뒤바뀔듯 남북한 인구 7천9백52만2천명,1인당 국민소득(GNP) 4만달러,국민의 90%가 중산층.고려대 사회학과 임희섭 교수가 내다본 2020년의 우리 사회지표이다. 삼성생명이 「사회정신건강연구소」 설립을 기념해 29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연 심포지엄에서 임교수는 각종 사회문화 지표의 변동 추세와 오늘날 선진국의 현실 등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의 미래상을 이같이 제시했다. 2020년 우리나라는 세계 인구의 0.98%를 차지,20위권의 인구 대국이 된다.65세 이상의 노령 인구가 10%를 웃돈다.때문에 외국인 노동자가 늘어나고 범죄는 줄며 정치·문화의 보수화 현상이 뚜렷해진다. 결혼적령기에 이른 남녀의 비율은 여자 1백명에 남자 1백19.4명(2000년),1백28.6명(2010년) 등으로 급격히 조화를 잃는다.많은 신랑들이 신부를 해외에서 찾게 되고 부부의 역할과 권력구조도 바뀐다. 앞으로 태어나는 아기들의 남녀 비율을 인위적으로 왜곡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경고한다. 결혼 연령은 남자 30세 이상,여자 25세 이상으로 늦어지며 이혼율은 인구 1천명에 2.5∼3.5명으로 높아진다.오늘날의 서구와 비슷한 수준이다. 현재 3.7명인 평균 가족구성원도 3명 이하로 줄어,자녀 없는 가족이나 양자 입양이 늘어난다.반면 3대 이상이 모여 사는 「복고현상」도 나타나는 등 가족의 형태가 다양해진다. 1차산업 종사자는 인구의 2∼3%,2차산업 종사자는 10% 안팎으로 줄며 대부분이 정보·지식·문화산업 등에 종사한다.육체노동을 뺀 여성 취업자의 비율이 절반에 근접한다. 1인당 국민소득은 스위스보다 많은 4만달러에 이르며 국민의 90%가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느낀다.
  • “21일 독도에서 첫 전통혼례”/황재봉­박금실씨(조약돌)

    ◎예식후 하객과 일 망언 규탄 ○…최근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으로 한·일간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예비부부가 독도에서 전통 혼례를 올리기로 해 눈길. 경남 양산에 사는 동갑나기 예비부부인 황재봉씨(27)와 박금심양이 오는 21일 상오 11시 독도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15일 결정한 것. 이는 부산 동구 초량 3동 (주)뉴스 이벤트(대표 예상천·27)가 독도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부부에 대해 결혼식 비용은 물론,교통과 숙박비 등을 면제해 준다는 이색 제안을 내놓자 예비신랑 황씨가 신부측과 의논해 곧바로 신청하면서 이루어졌다. 또 결혼식이 끝나면 하객 등 50여명과 함께 일본의 망언을 규탄하는 궐기대회도 가질 계획이다.
  • 보드카(시베리아 대탐방:63)

    ◎6백년 역사 자랑… 러시아인의 생활자체/마가단 공장 하루 5백㎖용 2만병 생산/망명 러인이 전수… 고급품 대부분 외산/감기·배아플때 고춧가루·소금 타 마시기도 보드카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술인 동시에 철학이요 생활 그 자체다.특히 추운 극동·시베리아지방의 겨울나기에는 보드카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음료수와 과자 등을 파는 가두판매점인 키오스크의 진열대도 절반은 보드카로 채워져 있다. 마가단시내 마가단식료품공장.한쪽에서는 소시지 등 식료품을 만들면서 한쪽에서는 보드카를 만든다.상표는 「보드카 루스카야」.말하자면 러시안 보드카로서 서민이 즐기는 값싼 보통보드카다.여러 공장이 같은 상표를 공동사용한다.다만 뚜껑에 마가단식료품공장이라고 산지를 표시해줄 뿐이다.스피릿(알코올)에 물을 타서 여과장치를 통과시켜 만든다.불순물이나 좋지 않은 냄새를 없애고 독특한 풍미를 더하기 위해서다. 이 공장에서는 여과장치에 모래필터와 활성탄필터를 사용한다.이 공장 1층에서 알코올과 물을 섞어 올려보내면 3층의 필터를 지나내려가면서 병에 담긴다. ○96도 알코올에 물 타 57년부터 이 공장에서 일해온 생산사장 라리사 고루보트스카야(여·51)는 『맛을 결정하는 핵심은 스피릿과 물·필터』라면서 『러시아 보드카는 물이 깨끗하기 때문에 외국 보드카보다 맛이 월등하다』고 강조한다. 옐레나 벨리첸코연구원(여·28)은 『알코올은 이곳에서 직접 생산하지 않고 남쪽에서 전량 가져다 쓴다』면서 『밀·보리·호밀·옥수수 등 곡류나 감자에서 96도짜리 알코올을 뽑아내는데 밀에서 뽑는 알코올이 제일 좋다』고 말한다. 레본 다다미얀 영업사장은 『하루 2만8천ℓ 생산용량을 갖추고 있으나 남쪽에서 수송해오는 알코올이 부족해 요즘은 5백㎖들이 2만병정도인 1만ℓ 생산에 그치고 있다』면서 『없어서 못팔 정도』라고 희색이 만면하다. 다다미얀 사장은 『시장경제체제로 전환되면서 먹고 살기가 더 힘들어진 사람은 홧술을 더 마시는 경향이 있는 반면 자유시장경제체제를 맞아 경쟁력 있는 사람은 과도한 음주를 자제하는 분위기도 생겨나고 있다』고 설명한다.양극화현상이벌어지는 셈이다. 그루지야식당에 갔더니 마침 10여명이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보드카도 빠지지 않았다.한국기자로서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높은 분들이 참석해 있어서 곤란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다음날 다른 식당에서 생일파티가 벌어져 사진촬영을 요청하자 흔쾌히 응했다.남녀 구분할 것 없이 신나게 흔들어대며 보드카를 잘도 마셔댔다. ○축배 따라 예절달라 40도가 넘는 무색투명한 술 보드카가 러시아에서 만들어지기는 14세기말부터다.6백년 역사를 자랑하는 셈이다.보드카의 제조·판매는 국가의 엄격한 규제를 받았고 보드카에 부과하는 세금이 중요한 국고수입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요즘 고급보드카는 대부분 외제다.키오스크 판매가격이 5백㎖정도를 기준으로 스웨덴제 압솔룻이 6만루블(약10만원)로 가장 비싸고 미국제 스미르노프와 화이트 이글이 각각 4만루블,1만8천∼2만3천루블,러시아의 보드카 루스카야 1만4천∼2만8천루블 등이다.1917년 러시아혁명후 해외로 망명한 러시아인에 의해 제조법이 전해져 미국·독일·스웨덴을 비롯한세계 각국에서 보드카를 제조하면서 기술을 발전시킨 반면 러시아에서는 제자리걸음을 했기 때문이다.스미르노프는 망명한 러시아의 보드카제조업자 이름을 딴 술이다.독일제인 고르바초프와 라스푸틴,핀란드의 핀란디아 등 외제 유명상표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러시아의 고급보드카중에는 크렘료프스카야가 있다.크렘린에 있는 힘깨나 쓰는 사람만 마셨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세계적으로 9대 1정도로 외국제가 많고 러시아국내에서도 6대4정도로 외제 보드카 점유율이 높다. 러시아에서 사업을 하려면 보드카를 마시는 일부터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보드카로 건배를 하지 않으면 외교협상마저 풀리는 법이 없다.취할 때까지 무섭게 마시는 경우가 많다.맨정신에서는 서먹서먹하던 관계도 술이 들어가면 털어놓고 진실을 말하게 된다는 것이다.보드카를 권하는데 사양하면 관계진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1인평균 14ℓ 소비 보드카 건배에도 예절이 있다.생일집에서는 첫건배가 생일을 맞은 사람을 위해서고,둘째건배는 그 부모를 위해서다.결혼식에서도 첫잔은 신랑신부,둘째잔은 그 부모를 위해 건배한다.하객중 한 사람이 『너무 쓰다.달콤하게 해라』고 외치면 일제히 『쓰다』고 합창을 하게 되고 신랑신부는 긴 키스를 해야 합창이 멈춰진다.키스할 동안 신부엄마까지 다 함께 큰 소리로 숫자를 센다.길수록 박수소리가 커진다.친구끼리 하는 첫 건배구호는 「부젬 즈도로비」(우리의 건강을 위하여)다.한참 건배를 하다가 더 할 게 없으면 그냥 「부즈ㅣ」라고 한다.우리의 「위하여」 식이다.초상집에서 첫 건배는 망자를 위한 것이지만 절대로 잔을 부딪쳐서는 안된다. 스탈린 철권통치시절에는 어린이 생일잔치 때도 첫잔은 으레 「스탈린을 위하여」「성공적인 과업완수를 위하여」 등이었으니 세월이 많이 변했다. 러시아사람은 감기에 걸리면 보드카에 고춧가루를 타서 마신다.아예 페르초프카(고추술)란 약한 술도 있다.배가 아프면 소금과 함께 보드카를 마시기도 한다. 러시아인은 술을 즐기기로 정평이 나 있다.회교가 아닌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유가 회교는 술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1인당 보드카소비량은 84년 6ℓ,87년 10.7회ℓ,92년 14ℓ로 꾸준히 늘어왔다.거리에서 술에 취해 쓰러져 있거나 얼어죽는 사람을 심심치 않게 발견한다.흉악범죄의 85%는 알코올이 원인이라고 한다.남성 평균수명이 87년 65세에서 94년 58세로 줄어든 것도 술소비 증가와 무관치 않다. 지난 85년 고르바초프 당시 공산당서기장이 취임하자마자 엄격한 절주법을 실시했으나 술을 사기 위한 행렬이 길어지고 암거래만 늘어나는 등 효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구소련 붕괴와 동시에 흐지부지돼버렸다. 큰 인형속에 조그만 인형이 여러 개 들어 있는 마트료시카란 목각인형은 러시아 민족혼의 상징처럼 알려져 있다.그러나 사실은 일본에서 19세기말에 건너와 러시아인이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에 출품한 뒤부터 유명해진 것이다. 러시아에서 시작된 보드카시장은 외제가 장악하고,밖에서 들어온 마트료시카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민예품으로 정착된 것을 보면 세상은 돌고 도는가 보다.
  • 북 해외공관 4중고 직면/국제전략연구소가 분석한 최근의 실태

    ◎망명 신드롬·운영 자금난·주재국 마찰·요원간갈등/외교관 등 망명 잇따르자 “비상”… 특단조치 강구/공관 운영경비도 크게 모자라 5년새 27곳 폐쇄/요원들간 폭력·폭언 난무… 상호감시 등으로 불신 고조 잠비아 주재 외교관 부부와 공직원 망명으로 북한 외교부에 바상이 걸렷을 게 분명하다. 현성일씨의 망명에 대해 북한은 아직 침묵을 지키고 있으나 북한 외교부는 해외공관 운영과 관련, 특단의 조치를 강구하고 있을 것으로 북한문제전문가들은 관측하고 있다. 외교관망명으로 지난 91년 콩고주재 외교관 고명환씨에 이어 이번이 두번째인데다 현씨외에 현씨 부인 및 공작원의 집단탈출은 북한 해외공관이 안고 있는 구조적이고 복합적인 문제에서 야기된 것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현재해외에 주재하는 북한 공관은 이들의 망명사태로 큰 충격을 받은 가운데 연쇄 망명신드롬, 공관 운영에 필요한 외화난, 밀수 등으로 악화되고 있는 주재국과의 마찰, 공관내 요원들의 불협화음 등 4중고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때문에 북한외교부 수뇌가 문책당할 가능성이 많으며 외교부 진용도 바뀔 공산이 큰 것으로 북한문제전문가들은 점치고 있다. ▷망명 신드롬◁ 북한 당국은 현씨일행 망명이전에도 상호감시는 물론 근무자들이 공관밖으로 나갈 때 단체행동을 하게 하는등 집안단속을 해왔으나 이번 망명사태를 계기로 감시와 단속을 대폭 강화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언제 어디서 제3,제4의 망명자가 나타날 지 모르기 때문이다.우리 외무부가 외교관을 포함한 북한 특권층의 연쇄 망명에 대비,모종의 대책을 마련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현재 북한의 해외공관은 이러한 망명신드롬에 휩싸여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왜냐하면 아무리 폐쇄적인 북한 외교관 사회라 하더라도 현씨 일행의 망명은 물론 지난 94년의 강성산총리 사위 강명도씨의 탈북,지난해 12월 대성총국 유럽지사장인 최세웅 부부의 탈출등 특권층의 잇따른 망명사실을 속속들이 알고 있을 것이고 이 영향으로 망명이 잇따를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외교관을 포함한 북한 특권층의 망명과귀순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북한 상층부가 체제에 대한 불안및 회의·경제난등의 이유로 심하게 동요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체제의 통제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북한문제전문가들의 지배적인 시각이다. ▷운영 외화난◁ 북한이 어느정도 심각한 외화난에 처해 있는 지는 북한의 해외공관 운영 실태에서 그대로 드러난다.북한은 공관을 운영할 외화가 크게 부족해 지난 91년부터 해외공관을 잇따라 폐쇄했다.91년 노르웨이와 몰타주재 공관등 9곳의 문을 닫은 데 이어 92년 3곳,93년 2곳,94년 1곳을 폐쇄했으며 지난해에는 무려 12곳을 없앴다.이처럼 공관이 줄줄이 폐쇄되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외화부족에 따른 공관운영경비의 조달에 어려움이 많기 때문이다.현재 1백34개국과 수교하고 있는 북한의 상주대사관·영사관·대표부등 해외공관수는 64개소로 지난 5년동안 무려 27곳이 줄었다.올해도 아프리카와 동구권등 실익이 비교적 적은 지역을 대상으로 6∼8곳의 공관이 문을 닫을 예정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우리의 수교국이 1백82개국가,상주 공관이 1백41개소에 이르고 있는 것과는 좋은 대조가 된다. 북한의 해외공관 예산은 형편없이 적다.그래서 북한 정부는 공관운영비를 자체조달하도록 채근하고 있으며 공관은 운영비가 턱없이 모자라 만찬등 일상적인 의전행사마저 거의 중단한 상태이다.현씨가 주재했던 잠비아의 경우 공관운영자금 지원이 6개월째 중단된 것으로 알려졌다. 대사등 근무요원들의 월급도 보잘 것 없다.대사 4백달러,참사관 3백달러,1등서기관 2백80달러,3등서기관은 2백50달러 수준에 불과하다.그나마도 제대로 쓰지 못한다고 한다.해외근무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본국의 요원들에게 선물상납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그래서 공관원들은 먹고 입는 것 해결에 허덕이고 있는 실정이다.또 본국정부의 공관운영비 자체조달 지침에 따라 외교활동은 뒷전에 밀어놓고 밀수등으로 돈벌이에 나서야 하기 때문에 이들의 불만은 대단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주재국 마찰◁ 캄보디아등 일부 친북성향의 국가들을 제외하고 북한과 주재국과의 관계는 대부분 좋지 않은 편이다.북한이 외화벌이를위해 밀수를 하거나 마약을 대량으로 유입하는가 하면 달러를 위조하다가 적발당한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지난 94년 10월 이집트의 카이로공항당국은 북한 대사관에서 외교파우치를 이용,밀반입하려던 비디오세트·비디오카메라·무선전화기등을 압수했다.이집트 외무부는 북한 대사관에 대해 강한 경고를 했으며 이로 인해 양국관계가 매우 불편해진 상태다.또 93년엔 네팔에서 북한 대사관 직원이 은괴등을 밀수하다 발각됐으며 지난해 요르단 세관은 북한이 외교관 차량을 이용,담배를 몰래 들여오는 것을 적발한 일도 있다.잠비아에서는 코뿔소뿔과 상아를 밀매하다 걸리기도 했다.이뿐 아니다.필로폰등 마약류도 대사관을 통해 밀반입하기 때문에 북한 대사관이 있는 나라에서는 북한 외교관들의 짐이나 외교파우치에 대해서는 감시와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특히 몇년전 마카오에서는 달러를 위조하다 적발돼 큰 물의를 일으킨 적도 있다.이런 불법적이고 불미스러운 일들로 주재국과 잦은 마찰이 빚어지고 있다. ▷요원간 갈등◁ 다른 나라의 공관과 달리 북한공관원들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데다 내부적으로 많은 갈등을 겪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공관원들 상호간에 폭력과 폭언이 난무하고 상호감시·소환 및 강제송환등으로 불신과 갈등이 갈수록 높아가고 있다는 것.지난달 16일 귀순한 현씨의 부인 최수봉여인의 직접적인 망명동기가 대사인 김응상의 폭력 때문이었고 공작원이었던 차성근씨의 경우는 강제송환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귀순 고영환씨가 말하는 공관 생활/“사상적동요 원천봉쇄” TV는 봉인/외부활동땐 2∼3명 단체행동 필수 『북한에서 외교관은 1등 신랑감으로 꼽힙니다.그래서 「평양처녀들은 외교관이라면 애꾸눈이나 절름발이라도 좋아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입니다』 평양 아가씨들이 외교관을 선호하는 이유는 세가지.출신성분이나 가정환경,자라온 성장과정 등이 깨끗하여 출세가 보장돼 있고,엄격한 신체검사를 거치므로 건강도 안심할 수 있으며,달러를 만질 수 있는데다 아파트배정 우선권이 주어지기 때문이라는 것. 『평균 50대 1의좁은 문을 뚫고 외교관이 되기도 어렵지만 외국에 나가기도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또 외국에 나간다해도 생활이 편해지거나 살림에 여유가 생기는 것도 아니구요.명색이 외교관인데 탈출을 막기 위해 여권을 단체로 보관하질 않나 사상적 동요를 막는다는 구실로 대사용외 TV는 모조리 봉인,주재국 TV시청도 맘대로 못합니다』 지난 91년 망명전까지 콩고주재 북한대사관 1등서기관으로 근무했던 고씨가 전하는 외교관에 대한 단속은 그에 그치지 않는다.외출할 때마다 외출기록부에 등록,대사의 결재를 받아야 하고 외부활동때도 2∼3명이 단체행동을 해야 하며 심지어는 외교관 및 외교관 가족이 부를 노래,불러서는 안될 노래까지 지정된다는 것.『바깥 세상을 구경할 수 있다는 점 외에 빠져나가기 힘든 새장에 갇혀 사는 신세는 외교관이라 해서 다를게 없다』는게 고씨의 말이다.
  • 위장결혼(외언내언)

    고대의 결혼풍습에 약탈혼이라는 게 있다.신부가 모자라던 시절 신랑이 친구와 작당하여 이웃마을 처녀를 납치해오는 방법이다.우리나라에서도 옛날에 양가댁 과수를 홑이불에 싸서 둘러메고 달아나던 보쌈풍습이 있었다.개가가 여의치 않던 시절,「과부 업어가기」는 수절의 인습을 허무는 인간다움이 깔려 있는 것이다. 요즘엔 어떤 목적을 위해 가짜로 결혼식을 올리는 위장결혼이라는 게 생겨났다.합법적 입국이나 취업을 위해 엉뚱하게 악용된 위장결혼은 60∼70년대 미국이민이나 일본취업용으로 성행했었다.미국 영주권을 갖고 있는 교포와 서류상 부부가 돼 출국한 뒤 현지에서 이혼절차를 밟는다.돈벌이를 위해 일본인과 위장결혼,일본에 입국했다가 이혼을 안해주고 매달 돈만 울거내는 사기꾼에게 시달리는 여성도 많았다. 농촌 총각이 신부기근으로 장가를 못들어 심각한 사회문제로 제기되었을 때 중국 교포처녀와 우리 농촌 총각의 짝짓기가 성행했었다.외국산 신부를 수입하기보다는 같은 동포 사이의 짝짓기가 훨씬 자연스러운 결합이 아닌가.몇년전까지만 해도 현지 교민회와 농협등 국내단체의 주선으로 「맞선여행」이 성황을 이루었고 그렇게 맺어진 부부가 우리 농촌을 지키며 잘 살고들 있다. 그이후 교포처녀의 사기결혼이 속출하기 시작했다.93년 무렵부터 결혼해 국적을 취득한 뒤 패물등을 챙겨 잠적하거나 3∼4개월만에 일자리를 찾아 가출하는 신부가 늘었다.심지어는 유부녀가 처녀를 가장,시집오는 경우까지 생겼다.가엾은 농촌 총각을 울리던 사기극이었다. 이제는 중국 교포여성에게 위장결혼을 알선,거액을 챙기는 회사까지 등장했다.이들은 내국인 독신자를 모집해 중국으로 데리고 가 결혼식을 올리고 귀국해 초청장을 보내주는 수법을 썼다.그 대가로 1인당 5백만∼7백만원을 받았다니 교포여성의 출혈이 얼마나 컸을 것인가. 전에는 위장결혼을 미국·일본에 수출했는데 이젠 중국에서 수입하는 꼴이 돼버렸다.이것도 세태의 변화인가.
  • 노씨,일부대목선 큰 소리로 부인/비자금 2차공판 이모저모

    ◎재판장­변호인 노씨 호칭싸고 신경전/이건희회장 가훈 내세우며 뇌물 부인 15일 열린 노태우전대통령의 비자금사건 관련피고인 15명에 대한 2차 공판은 노씨측 변호인이 반대신문을 포기함에 따라 느슨한 분위기속에 진행될 것으로 예상됐으나 반대신문에 이은 검찰측 보충신문 과정에서 노씨가 신문내용에 이의를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활기를 띠기도 했다. 법무부 지침에 따라 올해부터 재소자들에게 새로 지급된 청회색 상하의 수의 차림으로 법정에 나온 노씨는 지난달 18일 1차 공판 때처럼 비교적 건강해 보였다. 이날 공판은 1차 공판 때 검찰의 직접신문 내용에 대한 재판부의 확인절차에 이어 변호인측 반대신문,검찰측 보충신문의 순으로 하오 7시30분까지 계속됐다. ○…이날 상오 10시 재판장이 「피고인 노태우」를 호명하자 노씨가 피고인출입구를 통해 나타난 데 이어 나머지 피고인 14명이 1차 공판때와 같은 순서로 입정. 이날 공판의 하이라이트로 주목받았던 노씨에 대한 반대신문은 변호인인 김유후변호사가 「반대신문을 하지 않는 사유」라는 유인물을 낭독하는 것으로 대체,취재진과 방청객들의 「기대」를 빗나가게 했다. 그러나 재벌총수측은 국가경제에 차지하는 기업의 위치와 역할,기업의 이미지 실추와 해외공사수주 등에서의 불이익,3공 때부터 내려온 상납관행 등을 내세우면서 적극적으로 자기변호에 나섰다. 이건희삼성회장은 가훈까지 소개하며 특혜를 위해 뇌물을 상납하지 않았다고 강변한 뒤 상용차진출과 차세대전투기 기종변경 때문에 재산상의 피해만 입었다고 검찰의 공소사실을 강력 부인. 김우중대우그룹회장은 『어려운 기업여건을 해외시장개척을 통해 이겨낸 불굴의 경영정신』을,최원석동아그룹회장은 리비아대수로공사 등 해외대형공사수주에 이 사건 기소가 끼친 악영향을 거론하며 변론을 전개. ○…이날 공판에서는 노씨의 호칭을 둘러싸고 재판장과 변호인이 한때 날카로운 신경전. 재판장인 김영일부장판사가 이날 공판에 앞서 피고인을 부를 때 별도의 호칭을 삼가도록 주의를 주었음에도 불구,노씨및 이현우전경호실장의 변호를 맡은 김유후변호사가이피고인에 대한 반대신문에서 「노태우대통령」이라는 호칭을 빈번히 사용한 것. 김부장판사는 이에 『호칭도 재판진행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면서 『1차공판 때부터 여러차례 지적한 주의사항을 계속 어기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질책. 잠시 주춤하는 듯하던 김변호사는 그러나 「노대통령께서」 「노대통령께」 등의 표현을 다시 사용해 두번째 지적을 받았다. 김변호사가 태도를 바꾸지 않고 「노태우대통령」으로 호칭하며 이피고인에 대한 변론이라기보다는 노씨의 치적을 내세우는 듯한 신문을 계속하자 재판장은 이피고인에 대한 신문을 제일 마지막으로 돌리고 다음 차례인 금진호피고인을 호명. 그러나 김변호사는 이태진전경호실경리과장에 대한 반대신문 도중 『대통령으로 직접 곁에서 모셨던 분에게 피고인이라는 호칭을 쓰기 어려운 점을 이해해 달라』고 다시 도전장을 던졌다. 이에 김부장판사가 『이곳은 법정이니 원칙을 따르라』고 충고하자 김변호사는 직접 노씨의 의향을 타진하기에 이르렀으나 노씨는 『그렇게(피고인이라고) 불러주세요』라고 대답,법정이 웃음바다로 변하는 해프닝을 연출. 이후 김변호사는 꼬박꼬박 「노태우피고인」이라는 호칭을 사용. ○…노씨는 이날 하오 검찰의 보충신문이 진행되는 동안 일부 대목에서는 큰 소리로 혐의사실을 부인하고 때로는 흥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해 고개를 숙이고 낮은 목소리로 일관하던 1차공판때와는 크게 대조. 노씨는 특히 홍만표검사가 동아그룹 최원석회장에 대한 보충신문에서 대통령의 공사수주 내락을 받은 업체는 속칭 「신랑」으로 불리고 나머지는 「들러리」로 불리는 관행 등을 묻자 갑자기 왼손을 번쩍 치켜들어 진술을 자청. 김영일부장판사가 검찰신문을 그대로 진행시키자 조바심이 난 듯 세번씩이나 계속 손을 치켜들어 반론기회를 얻은 노씨는 『대통령 혼자서 모든 것을 다 결정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사람인 이상 관심은 가질 수 있지만 전적인 결정은 발주처에서 하는 것』이라고 흥분한 목소리로 반박.
  • 노씨 2차공판 검찰 보충신문

    ◎검찰 “반대신문 포기 수뢰인정인가”/“91년 정호영씨 청와대로 불러 1백억 받아”­노태우/“수서사업때 청와대에 「베팅」 검찰이 만든 말”­정태수 15일 서울지법 형사합의30부(재판장 김영일부장판사) 심리로 417호 대법정에서 열린 노태우전대통령 비자금사건 2차 공판은 변호인측 반대신문에 이어 검찰측 보충신문의 순으로 진행됐다.이날 공판에서 노피고인측은 변호인 반대신문을 포기했다.변호인 반대신문과 검찰의 보충신문 내용을 간추려본다. 문영호검사=노태우피고인,오늘 변호인 반대신문 기회를 포기한 것은 기업인들로부터 받은 돈이 모두 뇌물이라는 공소사실을 인정한다는 취지입니까. 노피고인=이 재판은 사실과 진실을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정확한 판정은 법정에서 이뤄지리라 생각합니다. 문검사=통치자금이라는 것입니까. 노피고인=추호도 뇌물성의 돈을 받을 생각이 없었고 이권에 관여한 적도 없었으며 성금으로 받았을 뿐이라고 이미 여러차례 얘기했습니다.검찰조사에서는 돈을 준 사람이 뇌물로 준 것이라고 말했다기에 그대로받아들였을 뿐입니다. 문검사=대통령 취임당시 「국민은 정직한 정부를 갈망하고 있으며 높은 도덕성으로 신뢰받는 정부를 만들겠다」고 역설한 사실이 있지요. 노피고인=그런 것으로 기억납니다. 문검사=당시 말한 정직과 진실이라는 것이 뇌물을 통치자금으로 강변하기만 하면 깨끗한 돈이 된다는 뜻이었습니까. 노피고인=강변할 뜻은 없습니다. 문검사=정주영현대그룹명예회장이 검찰에서 「청와대에 들어오라는 통보는 돈을 가져오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고 진술했고 90년에는 20억∼50억원씩 내다가 액수가 적다는 눈치가 있어 91년에는 1백억원을 건넸다는데 사실입니까. 노피고인=당시는 대선이라는 정치적 상황이었습니다. 문검사=이건희피고인이 검찰에서 「우리 경제의 시급한 문제는 간접자본의 확충이라고 역설했으나 노피고인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고 말했는데 성금을 받는데 급급했기 때문 아닙니까. 노피고인=직접 조사해보세요.간접자본에 가장 많이 투자한 시기는 내 정권때라고 생각합니다. 문검사=미원그룹 임창욱회장이 검찰에서「20억원을 안주머니에 넣고 상춘재에서 기다리려니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고 진술했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노피고인=평가할 생각이 없습니다. 문검사=한보그룹 정태수총회장이 검찰에서 「돈이 남아돌아 준 것이 아니다.독대한 사실이 소문나면 행정부처에서 알아모시고 혜택을 줄 것같아서다」고 진술했는데 정부부처에 편의를 봐주라는 지시를 한 적이 있습니까. 노피고인=행정부처가 원활히 돌아갈 수 있도록 지시한 사실은 수없이 많습니다. 문검사=동아그룹 최원석회장은 「노피고인이 87년 대선당시 기업에서 돈을 받지 않겠다고 공언,안심하다가 인사를 오라는 연락이 와 크게 실망했다」고 진술했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노피고인=그분이 사실은 정반대로 생각한다고 확신합니다. 문검사=노피고인이 기업회장과 비공식면담을 가진 이후 그 기업현황에 대해 검토하도록 이현우피고인에게 지시한 사실이 있습니까. 노피고인=기업의 경영상황에 대한 검토는 경제수석에게 지시했을 것입니다. 문검사=이피고인이 군출신이라는 이유로 군발주공사에 대해서는 특정업체의 수주가능성을 검토하라고 지시하지 않았습니까. 노피고인=그런 기억은 없습니다만 대구 동화사 대불공사건은 지시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검사=88 올림픽 이후 이피고인에게 경기단체장을 맡아 고생한 기업인들에게 어떤 방법으로든 도와주라고 한 사실이 있습니까. 노피고인=이피고인뿐 아니라 여러사람을 통해 도와주라고 많이 지시했습니다. 김진태검사=검찰에서는 이종기사장과 상의해서 청와대에 돈을 갖다줬다고 진술했다가 오늘 법정에서는 연말에 보고만 받았다고 말했는데 어느 말이 진실입니까. 이건희피고인=오늘 한 말이 진실입니다. 김검사=검찰에서는 왜 거짓말을 했습니까. 이피고인=사건 자체가 별 것 아니라는 선입견이 있어 재판까지 넘어올 줄 모르고 검사가 원하는 대로 따라갔던 것입니다. 김검사=김종인피고인은 삼성그룹의 상용차사업 진출과 관련,90년 7월 노피고인으로부터 허용여부에 대해 검토하라는 지시를 받고 업종전문화 정책에 위배돼 불가 건의를 했다고 진술했는데 이후 93년 3월 김피고인이 경제수석에서 물러난 뒤 신고서가 수리된 것은 삼성측의 로비가 있었기 때문 아닙니까. 이피고인=로비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노피고인에게 건의하지도 않았습니다. 김검사=진해 잠수함기지공사 입찰때 대우가 예정가의 99.78%인 9백96억8천2백만원에 응찰한데 비해 나머지 4개기업은 모두 예정가보다 높은 가격을 써냈는데 이를 정상적인 경쟁입찰으로 볼 수 있습니까. 김우중피고인=당시 노피고인에게 수의계약으로 다른 기업에 넘기지 말고 경쟁입찰할 수 있도록만 건의했을 뿐입니다. 김검사=노피고인에게 50억원을 주었는데도 성금액수를 부족해하는 것으로 느껴졌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는데 그렇게 느낀 이유는 무엇입니까. 김피고인=제 생각에 그랬다는 말입니다. 홍만표검사=국책공사 입찰에서 대통령의 내락을 받은 업체는 「신랑」으로,나머지 업체는 「들러리」로 부른다고 진술했었는데 맞습니까. 최원석피고인=그런 관행이 많았습니다. 홍검사=내락을 받으면 어떤 절차를 거쳐 수주하게 되나요. 최피고인=실무팀이 아는 일입니다. 김진태검사=검찰조사및1차공판 때와는 달리 오늘은 노피고인에게 지방공단과 관련한 부탁을 한마디도 한 적이 없다고 진술했는데 정말입니까. 장진호피고인=그렇습니다. 김검사=기업회장들은 모두 말을 두마디씩 합니까.정태수피고인도 검찰에서의 진술내용과 달리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정태수피고인=제가 수서사업을 위해 청와대에 「배팅」을 해보겠다고 말했다는 검찰조사 내용은 검찰이 만들어낸 것입니다.저는 그 말이 영어인지 뭔지도 모릅니다. 김검사=이현우피고인에 대한 변호인 반대신문은 이피고인이 경험하지 않은 사실이나 가치판단을 묻는 내용이 많아 다음 기회에 보충신문을 하겠습니다. 김영일재판장=이피고인에 대한 반대신문은 노피고인에 대한 변호인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질문이 많아 제재할 사유가 되나 이피고인이 노피고인의 범행에 대한 방조범으로도 기소된 만큼 정상참작과 관련된 것으로 판단,신문한 내용을 인정합니다. 노태우피고인=(검찰측 보충신문 도중 여러차례 손을 들어 할 말이 있다는 뜻을 보이자 신문이 끝난뒤 재판장이 발언을 허락함)만장한 여러분 앞에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갖고 앉아 있어 굳이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꼭 짚고 넘어갈 말이 있습니다. 검찰의 신문내용을 보면 국책공사 하나하나를 대통령이 결정하는 것같은 인상을 받게 됩니다.물론 관심은 가질 수 있지만 수주업체를 결정하는 것은 대통령이 아니라 발주처입니다.참고해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재판장=여러가지 어려운 점에도 불구하고 법정이 제 구실을 하도록 협조해 주셔야 합니다.재판장이 수차례 협조를 요구했는데도 고집을 부리고 고치지 않는 태도는 앞으로 용납할 수 없습니다.생각을 정리해주시기 바랍니다. ◎반대 신문은 하지 않는 사유 전문 노태우대통령께서는 1995년 10월27일 대국민사과성명,검찰에서의 진술 그리고 1995년 12월18일 당법정에서 검찰의 직접신문에 대한 답변을 통하여 이미 여러번 이번 사건에 관하여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말씀하신 요지는. 첫째,13대 대통령으로 재임중 국정의 최고책임자로서,또 집권당의 총재로서 그 당시의 정치적 관행에 따라 어떠한 이권이나 대가와 관계없이 기업인들의 성금으로 알고 통치자금을 마련하여 국정을 원활하게 수행하고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는데 유용하게 사용하였고, 둘째,퇴임시 예상외의 돈이 남아 이 또한 나라와 사회를 위하여 큰 일을 할때 쓸 계획이었으나, 셋째,이와같은 통치자금이 오늘에 와서 부정축재로 간주되어 우리나라와 국민여러분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긴 것에 대하여,그 모든 책임을 전적으로 대통령자신이 지고,어떠한 처벌도 감수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노대통령께서는 본 변호인들에게 자신 이외의 어느 누구도 상처받는 일만은 없기를 바라면서,변명을 하거나,처벌을 완화하는 일체의 변호나 반대신문은 원하지도,응하지도 아니하겠다고 하십니다. 형사재판의 목적이 실체진실의 발견에 있고,다른 관련 피고인이 있으며,우리 국민들도 자신이 직접 선택하였던 대통령이 정말 축재를 목적으로 뇌물을 받은 것인지,아니면 그 당시의 관례와 풍토에 따라 통치자금을 조성하여 사용한 것인지 그 진상을 알 필요가 있으므로,본 변호인들도 본인의 의사만을 따를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이번 기일에는 우선 그 의사에 따라 반대신문을 하지 아니 하겠습니다. 1996년 1월15일 피고인 노태우 위피고인의 변호인 변호사 한영석 변호사 김유후
  • 총장으로 마지막 휴일… 이 총리 내정자

    ◎서울대 수위장 아들 주례 서고…/세인관심 아랑곳 않고 평상활동/“학교발전위해 모두 협력” 당부도 국무총리 취임을 하루 앞둔 17일 하오1시 서울대 이수성 총장은 교내 교수회관 대강당에 있은 30년 지기 김성염씨(59·본부수위장)아들 대영씨(30·세계물산직원)의 주례를 서는 것으로 총장으로서의 마지막 날을 보냈다. 18일 국회본회의에서 임명동의를 받게될 국무총리내정자로 주례에 나선 이총장은 세인의 관심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나 다름없이 법학자의 꼿꼿함을 지닌채 일상심을 잃지 않았다.새출발하는 「젊은 한쌍」의 앞날을 축복하는 덕담으로 시작해 신랑·신부를 위한 결혼생활의 조언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는 등 총리내정자로서의 모습은 어디 한곳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날 이총장의 주례는 지난 67년 법대교수로 부임했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김씨의 차남 대영씨가 교수회관에서 결혼식을 가진다는 것을 알고 김씨에게 자청해 주례를 서게 된 것.이총장은 평소 김씨를 만날 때마다 건강·집안형편·자녀문제등에 관해 소탈하게 얘기를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신랑·신부측의 하객과 교수·학생등 4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30여분동안 진행된 이날 결혼식에서 이총장은 『30년이상 이 학교에서 성실히 일해온 아버지의 모범됨을 항상 기억속에 넣고 있다』며 『젊은 패기와 부지런함으로 부친과 같이 올바르게 이 세상을 살아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새출발하는 신랑·신부는 힘든 세상에서 항상 포용력을 가지고 남을 이해하는 마음으로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한뒤 『모든 것을 작게 보고 생각하는 소인이 되지 말고 넓고 크게 생각하는 대인이 됐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그는 끝으로 『학교는 교수와 학생만이 있어서 되는 것은 아니며 교수·학생·교직원 등 모든 구성원이 함께 학교를 만들어가야 한다』며 총장으로서의 마지막 당부를 하기도 했다. 신의와 도덕성을 중시하는 소신있는 법학자로 한평생을 살아온 이총장.학문적 업적뿐만 아니라 보직교수시절 학생들과의 만남에 얽힌 숱한 일화는 그가살아온 인생철학을 대변하고 있다고 주변에서는 말한다.그런 이총장을 두고 한 하객은 이날 주례에서 새 출발하는 신랑·신부에게 부탁한 『포용력을 가지고 넓게 생각하라』는 조언은 어찌 보면 이들 부부처럼 자신이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험난한 「형극의 길」을 준비하며 마음속 깊숙이 각인시킨 또다른 독백처럼 들렸다고 말했다.
  • “창간 50돌…” 장기 애독자 2인의 감회

    ◎서울신문이 세상보는 눈 키워 줬지요 서울신문이 22일 창간 50돌을 맞았다.그 동안 숱한 어려움을 겪었지만 한국언론을 앞장서서 이끈다는 자부심을 지켜왔다.21세기 초일류 신문으로 다시 태어나는 서울신문의 발돋움은 한국 언론에 새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다.오늘의 발전을 이루기까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울신문을 아껴준 독자들의 성원이 절대적이 힘이 됐다.서울신문과 희로애락을 같이 한 독자들의 「서울신문 찬가」를 들어봤다. ◎“28년 독자” 부산 대동 신금회장 이재헌씨/가장 정확한 기사·긍정적 논평에 매료 『서울신문이 변화를 꾀할 때 저도 탈바꿈을 시도했고,도약할 때 함께 비상의 나래를 폈습니다』 28년 동안 서울신문을 애독해온 부산의 대동상호신용금고 이재헌(70·부산 서구 동대신동 2가) 회장.이미 미운 정,고운 정이 듬뿍 들어 삶의 마디마디가 서울신문의 성장과 맞물려 있다고 말한다. 『서울신문 기사가 가장 정확하고 빠르다』며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담담하게 전해주는 점도 마음에 꼭 든다고한다. 서울신문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68년.이웃에 살며 친형제처럼 믿고 지내던 서구 보급소 이종수 소장의 권유로 처음 구독했고,읽자마자 빠져들었다.『매사를 긍정적으로 다루는 서울신문의 제작 태도가 다른 신문들과는 확실하게 다릅니다』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경희대학의 전신인 신흥대학 법대를 57년에 졸업하고 경찰간부로 10여년간 일하다 61년 운수 사업가로 변신했다.숱한 어려움을 겪으며 거의 절망하던 무렵 서울신문과 만났다. 『새벽마다 문간에 떨어지는 서울신문을 읽으며 하루의 계획을 세웠습니다.서울신문을 구독한 이후부터 사업도 이상하리만큼 잘 풀렸습니다』 77년에는 부산시의 버스운송사업 조합장으로 뽑혀 11년간 조합장을 맡았다.30여년간 키운 굴지의 5개 시내버스 회사는 장남에게 물려주고 요즘은 81년에 세운 대동상호신용금고만 직접 경영한다. 88년에는 조합원 버스회사에 5백여부의 구독을 권유,구독료의 일부를 할애받아 버스회사 직원 자녀들의 장학기금도 만들었다. 『서울신문 창간 50주년이 내 일처럼 기쁘다』는 이 회장은 『앞으로도 국가를 생각하고 밝은 미래를 제시하는 역할을 맡아달라』고 당부한다. ◎“34년 독자” 강릉 교2동 김진영씨/공직생활 25년의 귀중한 생활 동반자 『정말 축하합니다.벌써 창간 50년이라니….오랫동안 서울신문을 구독했지만 세월이 이렇게 흘렀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습니다』 34년째 서울신문을 구독하는 김진영(55·강원도 강릉시 교2동)씨는 서울신문과 함께 살아온 세월을 회상하듯 지긋이 눈을 감는다. 『그 사이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변화가 많았지요.차분히 옛날 신문들을 뒤적일 때는 그런 생각이 더 합니다』 서울신문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62년 5월.군에서 제대한 뒤 강릉시 담산동에서 부친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할 때였다. 어느 날 다른 동네로 시집갔던 처녀가 신랑과 함께 친정을 찾아왔는데,신랑이 바로 서울신문 강릉지국장이었다.그의 권유로 서울신문 독자가 됐다. 하지만 지국이 있던 금학동에서 김씨의 담산동까지는 시오리나 돼,우편으로 하루나 이틀 뒤에야 받아봤다.당시만 해도 「깡촌」이라 마을에 신문을 보는 사람이 거의 없어,그 구문마저도 커다란 뉴스였다.반회가 열릴 때마다 사람들에게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전해주는 즐거움도 컸다. 『그때부터 나름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생겼습니다.서울신문을 통해서 깬 것이죠』 64년 지방행정 사무관 5급 시험(현 9급)에 합격,강원도 명주군청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고 71년 강릉시로 이사했다.지국과 가까워져 비로소 「신문」을 받아보게 됐다. 불행하게도 지난 85년 출장을 다녀오다 교통사고로 하반신을 못 쓰게 돼 89년 명예퇴직했다.『집에서 혼자 지내다 보니 신문 보는 재미와 서울신문에 대한 애착이 더 커졌습니다』 그동안 지국의 총무가 10여차례나 바뀌고 지국장도 네명이나 거쳐갔지만 서울신문 사람들은 그를 언제나 어른으로 모신다.
  • “일 국보 상당수 한국인 작품”

    ◎일 전수대 객원연구원 홍윤기씨 「한국인이 만든 일본 국보」서 주장/4∼6세기 백제·신랑니이 문화형성 기여/법륭사 백제관음상·옥충주자가 대표적 일본이 일제강점기는 물론 임진왜란 등 우리나라를 침략한 때마다 숱한 문화재를 약탈해 간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그러나 그것말고도 일본이 현재 국보로서 떠받드는 많은 문화재가 우리 문화유산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일본이 이를 철저히 은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국보 중에서 그 옛날 우리 선조가 남긴 것들을 찾아낸 책 「한국인이 만든 일본 국보」가 최근 출간됐다(문학세계사 펴냄). 일본 문헌에 드문드문 나오는 기록을 추적,이같은 사실을 밝혀내 처음 집대성한 사람은 시인이자 일본문화연구자인 홍윤기씨.한국문인상·월탄문학상들을 탄 바 있는 이 중견시인은 지금 일본전수대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있으면서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강의한다. 그가 이 책에서 공개한 「한국계 일본국보」는 주로 나라(나양)지방에 집중돼 있다.먼저 고구려 승려 담징의 「금당벽화」로 유명한 법륭사)에는 「백제관음상」「구세관음상」「석가여래삼존상」 등 불상들과,공예품 「옥충주자(비단벌레 불상궤)」가 있다.이 가운데 백제관음은 녹나무를 깎아 만든 입상으로 일본이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예술품. 「옥충주자」는 높이 2m30㎝의 칠공예품으로,비단벌레 2천5백63마리 분의 날개를 붙여 부처 설화를 표현했다.둘 다 백제인의 작품이다. 또 중궁사에는 백제·고구려 여인이 만든 자수 수예품 「천수국 만다라 수장」이,정창원에는 신라화가가 그린 「불상」이 각각 국보로 남아 있다.지난 72년 발굴돼 한일 양국을 떠들썩하게 한 다카마쓰총 고분도 나라에 있다. 국보 1호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있는 교토(경도) 「광륭사(광륭사)」에는 나무로 조각한 「상투 미륵상」이 안치돼 있다.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신라작품임을 일본측도 인정하는 것처럼,상투미륵상 역시 신라가 7세기 초 일본에 보내준 것이다. 이처럼 많은 우리 문화재가 일본국보로서 남게 된 까닭은 백제·신라·고구려 등 한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고대 일본문화 형성에 결정적인작용을 했기 때문이다.지은이 홍씨는 『문화 선진국인 백제가 4세기쯤 문자가 없는 왜의 나라지방에 학자를 보내 유학을 편 것이 일본문화 발생의 바탕』이라고 해석했다.이어 6세기쯤 3국이 불교를 본격적으로 전해주면서 일본문화가 비로소 형성됐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 중고교 역사교과서에 화려하게 소개한 대표적인 국보들이 대부분 한국에서 보내준 것과,한국인이 일본에 건너가 만든 것들』이라면서 그런데도 유래를 알 수 없다거나,막연하게 중국 것인양 표현해 이를 바로잡으려고 연구에 나섰다고 밝혔다.
  • 달라진 통혼풍속(압록강 2천리:9)

    ◎다른 민족과 혼례 예사… 한지붕 「5족」도/오랫동안 지키던 순수혈통 보존은 옛말/3세대들에 유행… 신·구세대 갈등속 성행/부모 반대땐 집 뛰쳐나와 신접살림 차려 압록강유역 조선족사회에서는 다른 민족과의 통혼이 예사로운 관행이 되었다.두마강유역의 조선족이 다른 민족을 사위나 며느리로 맞으면 아직도 말밥에 오르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결혼 당사자도 막상 혼례를 치르고 나서는 부부동반을 꺼리는 것이 두만강유역 조선족이다.그런데 압록강유역의 조선족 부모는 자녀가 다른 민족과 결혼을 해도 그저 운명으로 여기거니와 당사자는 더욱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 길림성 양수조선족향에서는 최근 12명의 조선족 젊은이가 한족 처녀와 짝을 지었다.한족에게 시집을 간 조선족 처녀도 6명이나 된다.이 향의 통천촌에 사는 방씨 일가는 남매 넷을 두었는데 두 사위와 며느리가 한족이다.장백진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는 조선족 여인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제 시집은 민족끼리 어울려 대단결을 했수다.저야 조선족이지만 남편은 몽골족이 아이겠수.시어머니는 한족인데 시누이 둘은 만족과 회족한테 시집을 갔지비.다섯 민족이 안팎으로 일가를 이루어 화목하게 살고 있수다』 ○최근에도 18쌍 통혼 조선족은 오랫동안 단일민족의 순수혈통을 지켜왔다.소수민족들이 한족 틈에 끼어 살아온 잡거지구의 생활이라 할지라도 다른 민족과의 통혼을 금기시했다.사랑은 국경이 없다고 했던가.그런 사랑이 요즘처럼 유행하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뒤따랐다.요녕성 단동시에 사는 한국 인천 태생의 김천순(74)할머니는 자식이 한족 처녀를 사랑한 비련을 털어놓느라면 지금도 목이 메인다. 그 사연은 한족 처녀와 눈이 맞아 돌아간 맏아들 이야기인데,부모가 아무리 타일러도 기어이 한족 처녀와 살겠다고 우겨댔다.그러나 영감이 매를 대자 훌쩍 조선으로 건너갔다는 것이다.1960년의 일이다.한족 처녀는 아들이 없는 집에 들려 아버지 어머니 하면서 살갑게 돌았고,처녀집에서도 정식청혼을 해왔다.그래도 영감이 무서워 조선에 가 있는 아들 주소를 대주지 못했다는 것이다.처녀는 3년을 기다리다 마음에 없는시집을 가버렸다. 조선으로 건너간 아들이 어느덧 삼남매의 아버지가 되어 올해 영감 환갑에 돌아왔다.그런데 반백이 다된 아들의 옛 애인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그녀는 이혼을 하고 아들과 살겠다면서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압록강에 투신하겠다고 을러댔다.그녀도 삼남매를 둔 어머니여서 두 노인 양주가 나서 타일렀다.사람이 사람 갈 길을 가야 한다고….할머니는 비록 한족 처녀였으나 짝을 맺어주지 못한 것이 인간적으로 가여웠다고 했다. 조선족 이주민 1,2세대에게 다른 민족과의 통혼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어려운 시절을 살았기 때문에 국경을 초월한 사랑 따위란 사치품으로 치부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3세대는 개화나 동화가 되어서인지는 몰라도 민족을 초월한 사랑으로 결혼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한다.그것은 신구세대간의 갈등의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장백현의 한족 전장림(40)도 신구세대의 갈등 속에서 어렵사리 조선족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본보기의 하나다. 그는 미남인데다 만능체육선수여서 총각시절 처녀들의 우상이었다.그런데 도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내려온 조선족 전씨 처녀를 만나 서로 사랑했다.전씨 처녀는 조선족 약혼자가 따로 있었던 터라 한족 총각과의 사이를 눈치챈 부모가 부랴부랴 결혼식을 올려주었다.부부 오누이라고 둘이 다 미남미녀로 천생배필이었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종말을 고하고 말았던 것이다. ○개방바람 타고 확산 문제는 조선족 전씨 처녀가 결혼을 하고 나서 불거졌다.시집을 간 새댁이 혼례 사흘만에 일방적으로 이혼을 알리고 시집을 뛰쳐나왔다.친정으로 돌아와 혼전에 사귀던 총각과 결혼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부모는 길길이 뛰면서 딸 하나 없는 셈치고 집에서 내쫓았다.총각집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그래서 두 남녀는 집을 나와 동거 열달만에 남이 버린 빈집에서 딸 아이를 낳았다.세월이 약이라 양가에서도 두 사람의 결혼을 추인했다는 것이다.딸 이름은 고진감래의 뜻을 담아 달 「첨」이라는 외자로 지었다. 민족간의 통혼은 문화대혁명이라는 극한의 정치상황도 가로막지 못했다.민족간의 통혼이 막 시작되던 60∼70년대의 문화대혁명 열풍은 사랑을 자산계급의 사치품으로 비판했다.그속에서도 사랑이 꽃피었는데 장백진의 한족여인 엄영군(46)은 조선족 이상률(46)과 끝내 보금자리를 꾸며 지금은 다정한 부부로 살고 있다.엄여인은 당시 성도 장춘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모의 친척이 대만에 있다는 이유로 하향(중학 졸업 이상자를 시골로 내려보낸 정부의 조치)했다. ○문혁때도 막지 못해 그녀는 장백현에서 농사를 지어야만 했다.거기서 타고 난 예술적 재능을 인정받아 현가무단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다.그 이후 가무단에서 피아노 연주자 이씨를 만나 무대위의 사랑을 불태웠다.그들의 밀회는 곧 다른 단원의 눈에 띄어 가무단 당조직에 밀고되었다.당은 그들의 사랑을 낡고 썩어빠진 자본주의사상으로 비판하면서 둘 사이의 관계를 청산하라고 다그쳤다. 그리고 남자의 예비당원자격과 여자의 적극분자(입당을 신청하고 입당을 노력하는 사람)자격을 박탈해버렸다. 한족을 신랑으로 맞은 조선족 여인은 팔자가 늘어졌다는 말을 잘 듣는다.왠가 하면 한족 신랑은그들의 습관대로 집에 돌아오면 음식도 만들고 빨래를 하는 등 집안살림을 알아서 챙기기 때문이다.그러다가도 조선족 손님이 오면 아닌 보살하고 아내가 차려오는 음식상을 천연덕스럽게 기다린다고 했다.그 까닭은 조선족 풍습대로라면 아내가 욕을 먹을 것 같아서라는 것이다. 장백현 문화관의 한족 사건작가인 정덕리(35)와 조선족여인 홍영애(32)도 그런 부부다.그래서 금슬도 좋아 딸 이름을 부부의 성을 하나씩 따서 정홍으로 지었다.이 부부의 선대는 거의 같은 시기에 장백현으로 들어왔는데 본디 고향은 남편 쪽이 산동성이고 아내 쪽은 함경북도 남양이다.
  • “윤달 피해 결혼하자” 예식장 북새통/어제 평소의 2배

    ◎교통혼잡 극심… 공항도 북적 20년만의 윤8월을 하루 앞둔 24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 대도시의 도심 곳곳은 「상서롭지 못한」 윤달을 피해 결혼식을 치르는 신랑·신부와 하객들로 하루종일 붐볐다. 목화·황제·이화예식장 등 유명예식장이 있는 서울 강남구와 송파구일대는 물론 동대문,신촌 등 예식장이 몰려있는 지역에서는 시간마다 진행되는 결혼식에 참석하는 하객들의 차량으로 극심한 교통혼잡을 빚었다. 또한 덕수궁과 경복궁 등 도심의 고궁도 결혼식에 앞서 야외촬영을 하는 예비부부들로 가득 찼으며 김포공항도 신혼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 이날 하오 늦게까지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볐다. 목화예식장에서는 지난 토요일에 17건,이날에는 18건의 결혼식이 치러져 올들어 가장 많은 결혼식이 열렸으며 황제예식장도 이틀동안 31건,경남예식장이 34건 등 예식장마다 보통 주말보다 두배 가까이 많은 결혼식이 치러졌다. 이같은 현상은 음력 윤달에 결혼 또는 출산을 하면 좋지 않다는 속설 때문으로 역술가들은 이런 속설이 이론적 근거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 광복 이전 경제·사회상/통계청 1910∼44년 분석

    ◎평균수명 45세… 취학률 32%­40∼42년/화전민 1백52만… 15∼19세 여성 63% 결혼/병원 1백81개… 전염병 감염자 연2만명/전당포 대금업 호황… 월금리 11% 솟기도 일제 때엔 조혼이 유행했고 생활고로 자살하는 이도 한해 2천명이나 됐다.나라잃은 설움을 견디다 못해 만주로 떠나거나 산으로 들어간 사람(화전민)도 일제강점 기간 중 2백만여명에 달했다.30년대엔 골드러시가 일어 한해 무려 4천∼5천건씩의 금광출원이 있었고 전당포와 고리대금업이 성행,사채금리가 월 11%까지 치솟았다.공장근로자 월급은 쌀 한섬 값,소·돼지도 2가구당 한마리꼴로 그렇게 많질 않았다.통계청이 21일 조선총독부통계연감 등을 활용해 펴낸 「광복이전의 경제·사회상」을 살펴본다. ▷인구◁ 1910년 한반도 인구는 1천3백30만명.여자 1백명당 남자 1백12명 꼴이었다.일본인은 17만2천명.43년 말에는 인구가 2천6백66만명으로 늘고 일본인 유입도 늘면서 일본인 거주자도 전체 2.8%인 75만9천명으로 최고수준에 이른다.일본인의 3분의 1이 경기도(서울 포함)에 살았다. 15∼19세 여자인구(35년 기준) 중 63.3%가 결혼했고,10∼14세 여자 중 결혼한 인구도 4%나 됐다.23년에는 20∼24세의 신부가 연하의 신랑(20세 미만)과 결혼한 비율이 26.9%나 됐다. 1919년부터 20여년간 35만7천명이 굶주림과 압제를 견디다 못해 고향을 등지고 압록강·두만강을 넘어 만주 등지로 이주했다.생활고로 산으로 들어간 화전민도 36년 28만2천가구,1백52만명이나 됐다.평균 수명은 42년 44.9세(남자 42.8세,여자 47.1세).44년엔 인구가 전년보다 69만4천명 감소한다.조선인징병제·학병제·정신대 등의 탓이다. ▷토지·농촌◁ 43년 서울의 논 3백평 값은 4천5백원,밭은 7천5백원.당시 논은 소 16마리,밭은 27마리 값에 해당한다.택지가격(1백평 기준)은 평양이 13만5천원으로 가장 비쌌고 함흥(2만9백원),부산(1만5천원)순이었다.35년 소 사육두수는 1백68만마리,돼지는 1백62만마리로 각각 농가 2가구당 1마리꼴이다.닭은 7백12만마리로 2마리꼴. ▷광공업◁ 30년대 중반을 전후 일본인 주도아래 「노다지바람」이 불었다.34년부터 6년간 출원된 2만4천5백22건의 금은광업 중 5천3백69건이 허가가 났다.43년 남자 공장노동자의 월급은 53원10전,여자는 25원.남자는 쌀 1.2섬,여자는 쌀 0.5섬 값이었다. ▷상업·금융◁ 시장에서 가장 많이 팔린 품목은 가축·가금·고기류 등 축산물.연간 총 매상고의 34.3%를 차지했다.43년에 전국에 27개의 공익 전당포가 있었고 급료생활자(41.6%),소상인(14.5%),노동자(14.1%)가 전당포를 많이 찾았다.잡히는 물건은 83.9%가 의류였다.30년대 말에서 40년대 초까지 대금업자의 최고금리가 월 1할9리나 됐다. ▷철도·운수◁ 1910년 철도이용객은 하루 5천7백명.43년엔 35만1천명으로 는다.35년 총독부예산(2억9천만원)중 철도수입이 31%였다.38년 자동차는 8천8백대.당시 일본은 11만7천대,미국은 2천9백70만대였다.44년 전차는 2백52대,운행가능한 전차는 2백34대로 하루 53만4천명이 이용했다.전차요금은 한번에 6전. ▷전매◁ 43년 전매수입은 2억6천만원으로 총독부 세입예산의 14%.연초전매수입이 전체 87.5%였으나 아편모르핀매각액도 4백만원이나 됐다.담배는 43년에 1백27억2천9백만개비가 제조됐고 이 중 필터담배가 1.2%였다.담배판매액은 인구 1명당 8원20전꼴로 당시 쌀 2말값. ▷무역◁ 1910년 상품수출은 1천9백만원,44년엔 9억1천9백만원으로 46배가 증가했다.이 기간동안 일본수출이 대종(전체 84%)을 이뤘다.반면 수입은 같은 기간 3천9백만원에서 9억5천5백만원으로 24배 늘었다.일본으로부터의 수입이 75%로 그때도 지금처럼 수입의존도가 높았다.일제 36년간 생산된 금은 40만㎏,이중 25만㎏이 일본으로 반출됐다.1911∼38년까지 연평균 경제성장은 약 3.7%.이 기간 중 총독부의 세입예산도 1백11배나 늘어 세부담도 가구당 쌀 3말에서 3섬으로 높아졌다.43년 당시 한국인 공직자의 평균 월급은 쌀 1섬 가격인 46원으로 일본인의 45∼52%에 불과했다. ▷임금·교육◁ 36년 당시 짐꾼의 하루 일당은 쌀 2되값이었다.30년 당시 한국 학생수는 57만8천명으로 한국인 인구의 3%,일본 학생수는 9만명으로 일본인 인구의 18%였다. 40년의 국민학교 취학률은 32%,국민학교 학급당 학생은 71명이었다.한국아동의 유치원 취학률은 0.7%,일본아동은 6.5%였고 서당은 35년 6천2백9개에서 43년 2천6백79개로 줄었다. ▷의료·보건◁ 43년 병원수는 1백81개,병원당 인구수는 14만7천명.의사는 3천8백13명.33년 당시 소화기계통 질환에 따른 사망자는 전체 20%,신경계통이 19%였다.34∼43년엔 장티푸스 등 급성 전염병의 감염자는 한해 평균 2만명에 달했다.10세 미만 영유아 전염병 치사율이 1백명당 23명꼴이었고 24년 당시 17세 남학생의 신장은 1백55㎝,체중은 44㎏였다.25년 기준으로 소학교와 보통학교,중등학교 학생들 64%가 기생충에 감염됐고 회충보유자는 52%나 됐다. ▷사회·문화◁ 경찰관서는 41년 3천2백12개소로 1910년보다 6.7배 늘었고 한국인 전화가입자는 6천4백48명으로 1천3백57명당 1명꼴,한국인 라디오 청취인구는 1천명당 5명꼴이었다.43년 당시 활동사진 관람인원은 2천6백50만명으로 인구 1인당 연간 1회꼴이었고 연극 관람인원은 4백21만8천명으로 6.3명당 1명이었다.병고와 생활고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도 늘어 1910년 4백74명에서 37년엔 2천8백16명,43년엔 2천27명으로 늘어났다.곰·호랑이 등에 의한 사상자도 34년 41명,41년 61명,43년 37명이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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