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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왕손 김교각 일대기 영화화/중국작가 시나리오 완성

    ◎한자 8만자 분량 대작… 각종문헌 참고 신라왕손으로 당나라에서 성불,중국·일본및 동남아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지장보살(지장왕)김교각의 일대기를 영화화하기 위한 시나리오가 최근 중국 저명극작가의 손으로 탈고돼 이곳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특히 중국·일본및 동남아불자들로부터 중생구도를 위한 환생불로 추앙받고 있는 지장보살 김교각(신라속명 김중경)의 일대기가 영화화될 경우 우리 역사에서 소실된 그에 대한 재평가작업이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성승 김지장」이라는 제목으로 한자 8만자분량의 방대한 거작을 쓴 중국 극작가는 장천민씨(60). 시인이며 소설가이자 극작가로 「창업」 「개국대전」 「절대녀황」등 20여편의 역사대하물 대본을 쓴 바 있는 장씨는 중국영화극학연구회장·중국영화문학학회 상무부회장·중국중앙희극학원과 북경영화학원 고급편극반교수 등을 맡고 있는 중국문단의 원로로 알려져 있다. 4개월간에 걸친 힘겨운 작업끝에 시나리오원고를 마무리한 장씨는 『김교각에 관한 기록들을 섭렵하면서 그가 환생한 지장보살로 중국불교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불교성자임을 확신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김지장은 신라의 왕손으로 24세때인 서기 719년 삽살개 한마리와 볍씨를 갖고 당나라로 건너와 중국내 4대 불교성지중의 하나인 지금의 안휘성 청양현 구화산에서 성불했으며 법랍 75년만인 794년7월30일 세수 99세로 입적했다는 기록이 중국내 각종 문헌에 나와 있다는 것.장씨는 그러나 『이 시나리오를 쓰면서 한국내 참고문헌을 찾아보았으나 이렇다할 기록을 찾지 못해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장씨는 『나로서는 혼신의 노력을 다한 마지막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면서 『아무쪼록 이 시나리오가 한­중합작으로 하루빨리 영화화돼 한국역사에서 김교각에 대한 자리매김이 달라지고 양국간 문화교류 확대에도 도움이 되기를 바랄뿐』이라고 덧붙였다.
  • 새로운 감각 「국악가요」 선풍

    ◎「국악의 해」계기 가수 김수철등이 국악­가요 접목시도/가야금곡을 기타로 편곡해서 연주/전래동요·향가·단군신화도 노래화/콘서트·대도시 순회공연통해 대중화 촉진 가요계에 국악바람이 불고있다.「국악의 해」를 맞아 가요와 국악의 접목을 시도한 새로운 형식의 국악가요들이 잇따라 선보이고 있는것.현재 국악가요 보급을 위해 두드러진 활동을 보이고 있는 음악인으로는 가수 김수철·주병선,그리고 국악인 채치성씨등이 우선 꼽힌다.또 20대초반의 신예그룹 「DMZ」와 「한국사람」도 최근 이색국악가요를 발표해 좋은 반응을 얻고있다. 특히 「우리소리」의 세계화·현대화와 관련해 가장 주목을 끄는 인물은 김수철.가야금곡을 기타로 편곡해 연주하는등 국악대중화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온 그는 지난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영화「서편제」의 배경음악을 더블앨범으로 재편집,올 상반기중에 발표한다.또 대전엑스포 행사를 위해 작곡했던 「엑스포음악」도 국악가요 형태로 새로 편곡,세계시장에 내놓을 계획이다.김수철은 또 김덕수사물놀이패와공동으로 우리 장단을 현대화한 국악가요를 본격적으로 만든다는 방침이다. 국악풍 가요「칠갑산」으로 인기를 모았던 주병선은 「검정 고무신」「빈손」「님찾아 아리랑」등의 국악가요를 2월중 발표하고 활동을 재개한다.그는 오는 4월 KBS 국악관현악단과 콘서트를 가진뒤 전국 대도시순회공연을 통해 국악가요붐을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지난 87년 민속학자 심우성씨가 채록한 전래동요에 새롭게 곡을 붙인 「꽃분네야」를 발표,93대한민국작곡상을 수상한 채치성씨도 올해 빼놓을 수 없는 음악인.KBS­FM 국악전문 PD인 그는 단군신화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우리 역사를 서사시형태로 엮은 국악가요「한민족 서사시」(가제)를 올 상반기중에 발표한다.곡의 대중성을 높이기 위해 국악기외에 기타등 서양악기도 비중있게 사용한다는 생각이다. 신인듀엣「DMZ」와 「한국사람」도 기대되는 그룹.「DMZ」는 최근 레게음악에 국악의 리듬을 가미한 데뷔곡 「단심가」를 발표했으며,「한국사람」도 국악과 랩을 접목한 동명가요를 부르는등 국악가요붐 조성에 한몫하고 있다.이와함께 국악가요 전문연주단인 「슬기둥」과 「어울림」도 국악가요 보급에 발벗고 나섰다.지난 연말 국악캐럴집을 발표해 호평을 받은 「슬기둥」은 신시사이저와 국악기를 사용한 연주곡「들춤」「신풀이」등을 3월중 콘서트를 통해 선보인다.「어울림」도 국악가요앨범 5집을 준비중이다.서원대 이병욱교수의 작품으로 발표될 새 국악가요는 「어부사시사」「제망매가」「찬기파랑가」「처용가」등으로 주로 신라향가를 비롯한 우리고전을 국악가요로 꾸민다. 이밖에 이미 나와있는 국악가요 앨범으로 꾸준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는 작곡가 김영동씨의 「삼포가는 길」「선」「단군신화」「먼길」,도신의 국악가요,이선희의 8집앨범등이 있다.이 가운데 특히 김영동씨의 작품집은 우리 악기와 가락에 담긴 깊은 맛을 전해주고 있다는 평. 한편 이같은 국악가요붐은 서양음계에 익숙해 있는 젊은층에게 우리 소리를 쉽게 접하게 해 국악의 대중화를 촉진시킨다는 점에서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된다.그러나 일각에선 국악고유의 소리를 온전히 보존시켜야 한다는 비판론과 함께 국악가요가 양악이라는 전체적 내용위에 국악악기 음만을 곁들인 정도일뿐 진정한 의미의 「접목음악」으로 보기엔 미흡하다는 지적도 만만찮다.
  • 분명한 백제악기들(백제를 다시 본다:3)

    ◎5인 소악상은 「일본후기」 기록과 일치/네줄 현악기 거문고원형 분명/3줄의 원함은 밴조와 꼭 닮아/고구려·신라보다 빈약한 음악사 한계 극복 충남 부여읍 능산리에서 발굴된 백제시대 김동용봉봉래산향로의 상단부에 조각된 5명의 주락상은 백제음락사연구에 결정적인 사료라고 할수 있다. ○보름달 같은 모습 5명의 주락인이 연주한 악기는 비파와 피리 북 현금 소로 발표되었다.이 가운데 비파로 본 현악기는 원함이 분명하다.비파와 완함의 가장 뚜렷한 차이점은 몸통과 목부분에서 발견된다.비파는 물방울 모양의 몸통과 짧은 목을 지녔지만 완함은 보름달처럼 둥근 몸통과 긴 목을 가지고 있다.이런 모양의 완함은 조선조에 씌어진 「낙학궤범」에서는 월금으로 소개되고 있다. 완함의 연주모습을 보여주는 고고학자료는 안악3호분 벽화(357년)를 시작으로 통구 삼실총(4∼5세기) 및 강서대묘(7세기경)등 주로 고구려벽화에서 나타난다.삼실총의 완함은 4줄짜리지만 나머지는 줄이 몇개인지 불분명하다.완벽한 실물이 전하는 일본 정창원의 완함 역시 4줄이다.그러나 금동향로의 백제 완함은 3줄짜리라는 점에서 독특하다.서양의 밴조와는 쌍둥이라 해도 좋을만큼 닮았다.둥근 몸통을 가슴부분에 밀착시킨 가운데 왼손으로 목부분을 잡고 오른손으로 줄을 퉁겨 소리를 낸다는 공통점을 지녔기 때문이다.그리고 발표 당시 소개된 현악기는 세가지 관점에서 거문고의 원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그 이유는 악기를 연주자의 무릎위에 얹어 놓았다는 것과 왼손을 줄위에 얹고 오른 손으로 줄을 퉁기는 모습에서 찾아진다.또 줄이 네가닥이라는 점도 거문고의 원형에 접근한다. 악기를 무릎위에 올려놓고 양손을 줄위에 얹은 거문고의 전형적인 연주모습은 안악3호분과 대성리1호분(4세기경),통구의 무용총(4∼5세기),장천1호분(5세기경),집안17호분(6세기경)의 벽화에서 발견된다.거문고가 본래 4줄이라는 사실은 무용총에서만 확인될 뿐이고 나머지는 불분명하다.백제향로의 거문고가 4줄이라는 점은 고구려의 거문고와 역사적으로 관련이 되었다고 보아야 할 단서의 하나이다. 다만 백제 향로에서 석연치 않은 것은 거문고를 한쪽 무릎이 아닌 양쪽 무릎에 얹어놓았다는 사실이다.이점은 충남 연기군 비암사의 「계유명아미타불삼존석상」(673년)에 나타난 거문고의 연주모습과 흡사하다.「일본서기」에 군후라는 이름으로 소개된 백제의 거문고가 금동향로에 나타나는 거문고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몸통이 굵고 길어 피리로 소개된 관악기는 피리처럼 세로로 부는 종적의 일종이기는 하지만 피리로 보기는 어렵다.피리는 입술에 문 두겹의 떨림판으로 소리를 내는 악기인데 반해 향로에 나타난 악기는 연주자의 입술에서 떨어져 있다.또 피리는 몸통이 매우 가늘고 길이도 아주 짧으나 향로의 그것은 아주 굵고 길다.그것을 피리로 보기 어렵다면 단소의 일종으로 「악학궤범」에 나오는 동소와 비슷한 장소로 보아야 할 것이다.단소보다 긴 장소의 전형적인 연주모습은 안악3호분과 장천1호분,그리고 비암사의 「계유명아미타불삼존석상」에서 발견된다. ○삼국서 함께 사용 삼국시대 음악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된 대표적인 타악기의 하나가 바로 북이다.북은 어떻게 놓고 치느냐에 따라 여러가지 이름이 붙는다.둘이서 메고 치면 담고,앉아서 치면 좌고등이 그 실례이다.고구려의 고고학 자료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북은 현재의 장고처럼 허리가 잘록한 요고이다. 그러나 백제향로의 북은 요고와는 전혀 다른 특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마치 물동이위에 손을 얹은듯한 연주자의 자세는 다른 고고학자료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굳이 예를 찾으려면 멀리 인도의 대표적인 타악기 가운데 하나인 타블라의 연주자세와 아주 비슷한 것이다. 처음 소로 소개된 관악기는 작은 관을 나란히 묶어서 만든 배소의 일종이라고 할수 있다.서양의 팬파이프처럼 생긴 배소는 역시 비암사의 「계유명아미타불삼존석상」에서도 발견된다. 중국의 「북사」와 「수서」의 기록에 나타난 백제악기는 북(고)과 각,공후,쟁,우,지,적등 일곱개이다.이 가운데 공후,쟁,우,지,적등 다섯가지는 중국의 청상락에서 쓰인 악기이다.백제가 중국의 북조가 아닌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결과로 볼수 있다.또 「일본후기」권17에 의하면 횡적 군후 막목등 3종의백제악기가 일본궁중에 소개되었다.이 악기들이 「북사」나 「수서」에 전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보면 전형적인 백제악기로 추정할 수 있다. ○백제제조품 확실 횡적은 비암사의 삼존석불에서도 발견됨으로써 백제악기임이 더욱 분명해진다.또 백제향로에 나타난 거문고는 군후이고 막목은 장적의 일종일지도 모른다.만약 군후와 막목을 그렇게 해석할수 있다면 백제향로의 주악상에 나타난 악기들은 「북사」나 「수서」의 백제악기보다는 「일본후기」의 백제악기와 밀접하게 관련됐다고 보는 것이 무방할 듯싶다.이는 특히 이 향로가 전래품이 아니라 백제에서 만들었다는 사실을 음악사적으로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백제음악사는 그동안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빈약할 수밖에 없었다.그것은 음악사료의 절대적인 부족 때문이었다.백제향로에 나타난 주악상은 백제음악사연구에 큰 획을 그을 자료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더 나아가 백제와 고구려,백제와 일본의 악기 혹은 음악의 연관성을 연구하는데 필수적인 음악사료가 될 것이다. 이 향로는 우리음악사의 해명에 큰 진전을 가져오는 역할을 하겠지만 해결해야 할 과제를 더 많이 남겼다.주악상이 연주한 음악은 과연 어떤 종류였을까,그 음악문화는 백제 멸망후 어떻게 계승됐을까,통일신라가 백제악기나 음악을 수용했을까 등의 의문이 그것이다. ◎백제의 음악/6세기 들어 큰 발전… 일에 전파/악공교육기관 정부에 있었던듯 백제는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의 체제를 갖춘 4세기경까지는 상고사회에서 행해졌던 음악문화를 거의 그대로 유지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농업사회의 굿판에서 벌어진 노래와 춤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이다.그러나 왕권의 확립과 함께 국가의 체제가 갖추어지고 이웃나라와 음악교류가 시작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귀족계층의 문화수준도 높아져 민요 정도의 단순한 노래에서 악기의 반주나 기악독주곡의 형태가 요구됐다. 음악사학자들은 고구려음악이 서역계의 음악적 요소를 지닌 중국 북조의 음악과 관련을 맺었다면 백제는 남조의 음악문화와 가까운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고 있다.4세기 이후 고와 각등 타악기와 관악기 위주였던 백제음악이 남조음악의 유입으로 6세기 즈음에는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해갔다.이렇게 형성된 백제악은 일본의 흠명천황 5년에 해당하는 554년 음악인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삼국중 일본의 음악문화발전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후 백제악의 양상은 「구당서」에 단편적으로 나타난다.이 책에 소개된 백제악은 당의 중종(684∼710)에 이은 개원(713∼741)때에 묘사된 것이다.그래서 백제 멸망 이후의 상황으로 보고 있다.이 기록으로 미루어볼때 당시 백제악은 고구려와는 또다른 독특한 음악문화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이를테면 전문연주가인 악공이나 무용수의 교육을 관장했던 음악기관이 백제의 중앙관제에 있었다는 결론이다. 백제의 민속악 또한 당시의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다만 「고려사」낙지에 「백제속락」으로 전하는 선운산등의 노래이름이 당시 일반 백성들의 희로애락을 담은 민속악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 가야기원 2세기로 앞당겨/김해양동리 유물 1천점 출토 의미

    ◎청동삼발이솥에 명문… 한과 교류 입증/유구 53기 발굴… 묘제연구에 중요자료 동의대 박물관조사단(단장 임효택박물관장)이 경남 김해시 양동리 고분군에서 발굴한 1천30여점의 유물들은 가야의 역사를 서기2세기쯤으로까지 끌어올릴 가능성이 있는 결정적인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왜냐하면 기원전100∼서기100년 사이 황하의 중·하류지역에서 유행한 다리가 짧고 양쪽 귀가 굽은 한대의 청동삼발이솥이 흙구덩덧널무덤(토광목곽묘)에서 이번에 출토되었기 때문이다.이 청동삼발이솥은 새김 글씨가 들어있는 유명 동정(글씨내용 1면 참조)이라는 점에서 귀중한 유물로 부각된다. 우리나라에서 청동삼발이솥이 출토된 예는 신라고분인 천마총,황오동 4호분,노서동 138호분이 있다.그리고 고구려 강역이었던 만주 집안현 칠성산 96호분과 우산 68호분에서도 나왔지만 새김글씨가 발견되기는 이번에 발굴한 양동리 고분이 처음이다. 청동삼발이는 본래 고기를 삶는 그릇이었으나 진한시대에 이르면 제기로 변한다.그 이후에는 향로로 이용되었다. 그렇다면 청동삼발이솥은 당시 귀중한 유물이고 이를 소지할 수 있는 계층은 상당한 지위의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양동리 고분군에서 이번에 햇볕을 본 삼국시대 최대의 고리발(환두대도·길이 1백25㎝)등의 공격용 무기와 갑옷과 투구(갑주)등의 방어용 무구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여기 묻힌 계층은 바로 무력과 권력과 부를 함께 거머쥔 지배자로 귀결된다. 따라서 2∼3세기의 가야는 통일국가는 이루지 못했으나 국력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김해 양동리 고분군 피장자의 신분과 관련하여 출토품인 치레걸이에도 관심이 집중된다.322호 흙구덩덧널무덤에서 출토된 수정목걸이는 가야뿐 아니라 지금까지 알려진 삼국시대 옥목걸이 가운데 가장 뛰어난 아름다움을 지닌 걸작품이다.이 목걸이는 수정제 굽은 옥,수정제 다면옥,마노제 둥근옥으로 구성되었다. 통형동기의 경우는 우리나라에서 발견되지않고 일본에서만 출토된 유물이다.이런 이유로 일본계 유물로 보았으나 김해 대성동고분에 이어 이번에 양동리 고분군에서 또 출토됨으로써 일본 출토품의 원류를 가야에서 찾게되었다.그리고 일본에서는 통형동기를 칼자루나 장대끝쇠로 본 것과는 달리 방울소리가 나는 의기라는 사실도 이번에 밝혀냈다. 양동리 321호 고분은 가야시대 굴식돌덧널무덤(수혈식석곽묘)의 원류로 보고 있다.발굴단은 이 굴식돌덧널무덤의 형식을 빌려 가야의 묘제는 흙구덩 무덤(토광묘)→흙구덩널무덤(토광목관묘)→흙구덩덧널무덤→굴식돌덧널무덤 순으로 발전했다는 결론을 얻어냈다. 문화체육부 문화재전문위원인 김기웅박사는 『이번 발굴조사로 그동안 공백상태에 있던 가야사와 일본 고분문화를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를 얻었을뿐 아니라 3∼4세기로 추정되어온 가야집단의 형성시기를 2세기이전으로 끌어올릴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 거북선 인양(외언내언)

    「언론고고학」이란 말이 있다.신문이나 방송이 문화재 관련 보도에 지나치게 흥분하여 사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할 경우를 일컫는 용어.기사의 상품성을 추구하는 언론뿐 아니라 학문적 업적을 쌓으려는 학자들의 과욕이 언론고고학을 거들기도 한다. 이 언론고고학에 의하면 땅속에 묻혔다 발굴된 유물은 국보나 보물이 되기 십상이다.심지어는 시중에 판매되는 우산꽂이가 세종대왕이 만든 측우기로 둔갑하고 「삼국사기」에도 기록돼 있고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신라 문무왕의 수중릉 대왕암이 새삼스레 「발견」되기도 한다. 거북선에 장착돼 사용됐던 것으로 「추정」되는 「승자총통」이 또 발견됐다.거북선은 언론고고학의 가장 매혹적인 소재.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임진왜란 당시 맹활약,우리민족의 자부심이 되고 있지만 아직 그 실체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펄에 묻힌 폐어선을 거북선으로 둔갑시킨 재미교포의 수중음향탐사 소동을 비롯,거북선 찾기 작업은 지난 60년대부터 이미 시작된 일.그럼에도 거북선 찾기는 우리의 시선을계속 잡아당긴다.행여 언론고고학이 될지라도 거북선에서 사용됐음직한 총통의 계속적인 발굴은 거북선의 발굴 가능성을 높여준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다. 물론 그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도 많다.해군을 중심으로 지난 89년 「충무공해전유물 발굴단」이 구성돼 첨단장비를 동원,거북선 발견가능지역(2백86㎦)의 본격 탐사에 나섰으나 63% 지역의 탐사를 끝낸 지금까지 아직 거북선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거북선에는 침몰할 정도의 하중이 주어지지 않아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을 가능성이 없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거북선보다 약3백년 앞서 만들어진 중국의 무역선이 신안 앞바다에서 이미 건져진바 있고 1천여년전의 바이킹선도 인양된바 있다.『한강에서 바늘찾기보다 어렵다』지만 우리의 거북선도 언젠가 모습을 드러낼지 모를 일이다.
  • “국제화는 행정제도 개혁부터”/외교안보연 주최 토론회 중계

    ◎외교망 재정비… 교역뒷받침 실질외교를/사립이공대에도 정부서 재정지원해야 국제화시대를 맞아 우리사회 각 분야의 좌표를 짚어보는 「국제화 대토론회」가 25일 외교안보연구원에서 열렸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한승주외무부장관의 기조연설에 이어 박수길외교안보연구원장,이홍구민주평통수석부의장,강경식민자당의원,정명식포항제철회장,김호길포항공대학장,송복연세대교수,홍순영외무부차관등이 정치·행정,경제·통상,교육,사회·문화,외교분야의 국제화 방안에 대한 주제발표를 했으며 이에 대한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주제발표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승주외무부장관 기조연설=국제화를 통해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국가경쟁력을 강화해 국민생활을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하자는 것이다.의식면에서 국제화는 우리가 외국에 대한 피해의식을 극복해 외국인과 외국문화에 대해서 개방적이고 동등한 자세를 갖는 것이다.정책면에서는 국경을 초월하는 생산과 자본의 세계화 흐름속에서 우리의 경쟁력을 증대시킬 수 있는 정치 외교 경제 사회정책을 펴는 것이다.능력면에서 국제화는 우리 개개인의 역량과 지적 수준을 국제 최고수준으로 끌어올리자는 것이다. ▲국제화의 도전과 과제(이홍구)=오늘날 논의되는 국제화는 주로 경제적 차원에서의 경쟁으로 이해되고 있다.그러나 국제화,세계화의 문제를 적절히 처리하려면 경제적 차원을 넘어선 보다 광범위하고 총체적인 목적의식과 상황판단이 필요하다. 국제화에 대한 입장과 전략을 기획하는데 비정부단체와 세력의 역할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외국인이 본 한국의 국제화(라겐딕 주한네덜란드대사)=유럽인의 관점에서 볼때 한국에는 여전히 경제활동과 관련해 중요한 장애요인들이 남아있다.한국정부는 국제화,자유화,시장의 개방과 양립불가능한 각종 행정규제들을 대폭적으로 완화해야 한다.서비스분야의 개방,투융자에 대한 규제완화,외국인회사의 토지획득에 대한 엄격한 규정의 개정,지적재산권 보호의 엄격한 시행 등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정치·행정분야­국제화를 위한 정치및 행정개혁(강경식)=국제화의 핵심은 제도개혁이다.제도개혁은 경제와 관련되는 국가운영의 틀을 다시 짜는 것이어야 한다.제도개혁의 기본방향은 국가보다 그 구성원 각자가 변화에 가장 잘 대응할 수 있도록 활동의 자유를 최대한 넓혀주는 것이어야 한다.행정개혁은 정치개혁과 함께 가지 않고는 이루어지기 어렵다.국회의원 개개인이 독자적 판단에 따라 입법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법안에 대한 찬반이 결정될 수 있어야 한다. ▲경제·통상분야­국제경쟁력강화를 위한 국제화전략(정명식)=새로운 경쟁력의 원천인 정보기술및 지식을 활용해 기존 사업영역을 한단계 뛰어넘는 신사업분야를 적극 발굴해야 한다.고객위주의 서비스마인드,철저한 합리성을 바탕으로 한 업무수행,상호 호혜·평등을 바탕으로 한 경쟁상의 페어플레이 정신이 절실히 요구된다. ▲교육분야­국제화와 대학교육(김호길)=인적자원의 개발기능을 맡는 교육분야의 경쟁력없이 국제경쟁력은 불가능하다.대학의 국제경쟁력을 위해서는 대학운영이 공개되고 평가를 받는 가운데 특성을 살리는 쪽으로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교육비가많이 드는 이공계대학은 공사립을 막론하고 정부가 재정지원을 해야 한다. ▲사회문화분야­국제화와 의식개혁(송복)=국제화는 보편성과 고유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보편성 추구에 관한한 우리는 특이한 자질을 가진 민족이라 할 만큼 놀라운 성과를 거두어왔다.신라 고려의 불교,조선조의 유교,오늘날의 기독교,그리고 60년대 이래 발전해온 자본주의적 성공에서 이것을 알 수 있다.그러나 고유성의 창달과 개발에 관한한 우리는 늘 미흡하고 부진했다.고유성과 고유문화의 확대와 개발을 외면한 보편성의 추구는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 ▲국제화를 위한 한국외교의 진로(홍순영)=형식보다 실질에 중점을 두는 비즈니스 외교가 추진돼야 한다.이를 위해 외교망의 재정비와 외교인력의 전문화가 필요하다.외교를 외무부가 전권을 갖고 수행할 수 있도록 외무장관의 지위격상도 검토돼야 한다.북한의 개방과 민주화를 유도하는데 대북정책의 기본동기를 두고 북한의 국제사회 참여를 유도해야 한다.
  • 일본에 감춰둔 한국문화재 많다

    ◎국제교류재단,「일본소장 한국문화재 1」 도록펴내 실상 밝혀/도쿄 등 세 박물관에만 3천6백점 소장/재일 한국유물목록서 1천점이상 빠져 일본에 건너간 우리나라 문화재 상당량이 아직도 공개되지않은채 박물관 수장고 속에 깊숙이 비장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이는 지난 91년과 지난해등 2차례에 걸쳐 일본지역 3개 박물관을 대상으로 한국유물 소장실태 조사에 나섰던 한국국제교류재단(이사장 손주환)이 24일 그 일부로 문화재도록을 펴냄으로써 밝혀지기 시작했다. 국제교류재단이 조사대상으로 삼았던 박물관은 도쿄국립박물관을 비롯,일본민예관·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등 3개소다.예용해문화위원을 단장으로 김광언교수(인하대·민속학) 윤용이교수(원광대·도자미술사) 유홍준교수(영남대·미술사)등 문화재 전문가 4명이 조사에 참여했다.이들의 조사에 따르면 도쿄국립박물관에는 2천여점,민예관에 1천5백여점,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에 1백여점 등 모두 3천6백여점의 우리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특히 오사카동양도자박물관에소장된 1백여점의 도자기는 거의 국내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명물중의 명물들이다.거의가 국보급에 해당하는 이들 유물은 일본이 자랑하는 한국문화재들이다.지난92년11월 고려청자를 비롯,조선분청과 사기등을 포함한 일부 유물을 보여주는 명품전을 개최,세계 도자기 애호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은바 있다. 또 도쿄국립박물관에는 일제시대 대구를 중심으로 한국문화재를 전문으로 수집했던 오쿠라(소창무지조)의 컬렉션 1천여점이 들어있다.이 가운데는 가야와 신라의 고분유물과 금동제장신구·무구류·토기등이 포함되어있다.이밖에 고려청자·조선 분청사기와 백자등의 도자명물도 컬렉션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도쿄국립박물관측은 오쿠라컬렉션 1천점 말고 나머지 한국유물 1천점에 대한 공개는 꺼린 것으로 전해졌다.그러나 조사단은 다른 경로를 통해 소장품리스트를 입수,도쿄박물관 소장 한국 문화재의 실상을 벗기게 됐다는 것이다.여기에 포함된 유물은 한·일회담 당시 일본이 제시한 한국문화재목록에도 들어있지 않아 외교적인 쟁점이 될 소지도 안고 있다. 한국국제교류재단은 이들 문화재 가운데 일본 민예관 소장품으로 구체적인 사진자료가 입수된 3백16점의 사진을 모아 「일본소장 한국 문화재1­일본 민예관편」을 발간했다. 이 도록에는 야나기 무네요시(유종열·1889∼1961년)가 19 36년에 개관한 일본민예관 소장 우리 문화재 가운데 회화 53점,도자기 1백40점,목공예 56점,주전자·맷방석·비 등 기타 67점의 사진과 일본민예관 소장 한국문화재 1천5백점의 목록이 수록돼 있다. 우리 문화재를 직접 대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안고 그림으로나마 다시 우리의 것을 보게 되었다.
  • “청동항아리 1억불에 경매”/성승 김교각일생 영화화 자금마련목적

    ◎가야화랑 김희용씨 중국과 일본 불교계에서 환생한 지장보살로 크게 숭상받고 있는 당나라 고승 김교각이 신라 왕손이었다는 사실이 최근 각종 문헌에서 입증된데 이어 한 국내 화랑대표가 그의 일대기를 영화화하겠다며 소장중인 중국 고대 휘귀 골동품 1점을 최저가 1억달러(한화 8백10억원)에 공개경매하겠다고 나서 화제. 서울 인사동 가야화랑 대표 김희용씨(47)는 24일 김스님의 해탈에 이르는 파란만장한 구도의 과정을 한·중합작으로 영화화하는데 필요한 비용조달을 위해 중국 춘추전국시대(BC 770∼403년)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제 황동상감 고대인류활동문 쌍고리 귀면 사각항아리」를 경매에 부치겠다고 밝힌것. 진위여부를 떠나 이 작품을 놓고 김씨가 제시한 최저 낙찰가 1억달러는 단일품목으로는 세계 미술품 거래사상 최고가격이다. 89년부터 사재를 털어가며 지장왕 유적답사와 구화산 성역화에 몰두해온 김씨는 『한민족이 낳은 성승 김교각이 아직도 잊혀진 역사속의 위인으로 남아있는 것이 안타까워 그의 삶을 영화로 제작키로 했다』고. 「성승 지장왕」이란 제목아래 한·중합작으로 제작될 이 영화는 김씨와 중국극작가협회 주석 장천민이 공동으로 시나리오를 쓸 예정이며 김씨는 작년 5월 완성한 자신의 시나리오를 장씨에게 보내 최종 탈고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 김 대통령 올 첫 정상외교 왜 중국 택했나

    ◎정경실리·임정상징성 함께 살린 선택/북핵 해결이후 새 남북관계 협조 요청/자동차공장 건설등 경협 가속화 타진 『국익을 위해서는 세계 어느 곳이든 달려가겠다』고 한 김영삼대통령이 올해 첫 정상외교의 나라로 중국을 선택했다. 올 첫나들이로 중국방문을 결정한 것은 국내·외 정치·안보·경제적 측면에서 볼때 매우 적절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특히 취임직후 이웃부터 먼저 다져놓고 세계 여러나라들에 눈을 돌리겠다는 스스로의 약속을 몸소 실천하는 셈이 된다. ○“이웃나라부터” 실천 우선 국내정치적인 측면에서 볼때 방중이 주는 상징적 의미가 지대할 것 같다는게 준비를 맡고있는 관계자들의 얘기다.김대통령은 문민정부의 법통을 상해임시정부에서 찾고 있다.그 현장인 중국을 방문하는 것은 당연하다.방중을 통해 상해임정의 현장을 둘러보는 김대통령의 모습은 국민에게 외교적 성과 이상의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이다. 외교적인 측면에서의 방중은 한·중의 관계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또 이번에는 중국이 방한할 차례인데도 직접 찾아나섬으로써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외교를 펼치게 된다.이는 신외교의 본질이 실용외교임을 보여주는 것이다.더구나 강택민주석이 방중을 요청하는 친서를 전달함으로써 일부의 우려를 말끔히 씻어내 김대통령의 발걸음을 더욱 가볍게 했다. ○「일석이조」의 효과 우리의 안보와 직결되어 있는 북한의 핵문제에 있어 중국의 영향력은 실로 크다.북한과 접촉을 벌이고 있는 미국이 중국을 통해 북한에 입김을 불어넣을 정도다.핵문제에 대한 미국과 북한의 직접대화도 중국의 요청으로 이뤄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김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할 3월말 쯤에는 북한의 예측불가능한 태도 때문에 확언할수는 없지만 북한핵의 「철저하고도 광범위한 해결방안」을 논의할 미­북고위급회담이 재개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수용하고 남북대화도 병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김대통령은 먼저 새로운 남북관계를 여는데 중국의 협조를 구할 것으로 관측된다.또 한반도및 동북아 안보의 최대 위협요소가 되고있는 북한핵문제 해결방안을 심도있게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나아가 핵문제 해결이후 예상되는 북한의 대일,대미수교에 대한 우리정부의 입장을 분명히 전달할 것이라고 관계자들은 전하고 있다. ○양국관계도 격상 여기에다 중국방문에서는 우리정부가 추진중인 북한을 포함하는 동북아다자안보대화의 구성문제가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될 것 같다.북핵의 위협이 어느 정도 사라진 시점에서 동북아의 평화구축은 경제의 재도약에 직결된다는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분석이다.김대통령도 바로 이점을 보고 있는 것 같다. 강주석등 중국지도자들이 각별히 관심을 갖고있는 한·중 경제협력도 가속화 시킬수 있을 것이다.현재 중국과 논의중인 대형 프로젝트는 전전자교환기(TDX)사업과 자동차부품공장의 건설이다.이는 중국의 강주석이나 이붕총리도 우리정부 지도자들을 만날 때마다 지대한 관심을 표시하고 있다. ○동북아안보 구체화 그러나 중국의 지도자들은 전전자교환기가 모형이 맞지않는다는 우려를 갖고있다.자동차도 한국기업이 부품공장에 이어 직접 생신라인을 가설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싸여있다.지난해말 20억달러에 이른 무역 적자가 더욱 커질수도 있다는 생각을 품고있는 것이다.김대통령의 방중은 이를 해소함으로써 한·중 두나라의 무역및 경제교류,문화협력을 한층 증대시킬 것이다.
  • 궁남지 발굴 중단 위기/올예산 전혀 책정안돼 백제사 구명차질 우려

    ◎“안압지 능가할 백제유물 보고” 평가/고고학적 가치 커 지속적 탐색작업 필요 금동용봉봉래산향로의 출토로 백제사 전반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활발해지고 있으나 백제사 규명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할 부여 궁남지(사적 제135호) 발굴작업이 예산이 없어 중단될 처지에 놓였다. 궁남지 발굴작업을 벌여온 국립부여박물관(관장 신광섭)에 따르면 지난 90년 1차 발굴 이후 지난해 3차 까지 충청남도의 용역사업비로 발굴작업을 벌여 왔으나 올해는 전혀 예산이 편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궁남지는 지난해 말 3차 부분발굴에서 삼국시대 최초의 논이 확인된 것을 비롯,수레바퀴와 새(조)모양목기등 귀중한 유물을 쏟아냈었다. 궁남지는 「삼국사기」백제본기 무왕35년조(634년)에 기록이 남아있는 유적.지난 67년 현재의 모습으로 아무런 고증없이 정화 돼 있기때문에 원래의 규모보다 훨씬 작아졌다.게다가 현재 궁남지가 「삼국사기」에 기록된 그 연못인지 조차 불분명했던 것.따라서 3차에 걸친 부여박물관의 발굴조사도 현재의 궁남지가 백제시대의 바로 그연못인지를 규명하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지난 90년의 1차조사에서는 남동쪽 호안 및 물이 흘러들어가는 시설의 일부를 파악했고 91∼92년의 2차조사에서는 북동쪽 호안의 일부를 확인했다.이번 3차에서는 남동쪽 호안의 일부가 파악된데다 「삼국사기」에 나타난 정황을 충족시켜주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됨으로써 일단 「현재의 연못이 백제의 궁남지」라는 결론을 내릴수 있었다. 부여박물관에 따르면 이제 궁남지의 고고학적 가치가 증명된 만큼 당장 전면발굴은 어렵더라도 축조될 당시 궁남지의 전체 호안을 확인하는 부분적인 탐색발굴은 절대적으로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고학자들에게 물에 잠긴 유적은 유물을 가장 원형에 가깝게 보전해 주는 보물창고처럼 인식된다.공기중에 노출된 유물이 빨리 부식되는데 비해 물속에 잠겨있으면 금속은 물론 목재까지도 원형을 오래 유지하기 때문이다.또 도굴등 후대의 훼손 위험도 크게 줄여준다.능산리 백제향로도 수맥이 지나가는 곳에 묻혀있어 손상을 거의 입지않았고 궁남지의 새모양목기나 수레바퀴도지하수에 둘러싸여 있어 거의 제모습대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물에 잠겨있는 유적의 중요성은 신라의 고도 경주의 안압지에서 더욱 극명하게 증명된다.지난 76년말 전면발굴이 끝난 안압지는 신라생활상 연구를 진일보케한 1만7천여점의 유물을 남겨 경주박물관의 제2별관을 안압지 전용으로 꾸미게 했으며 안압지 자체는 80년말 복원되어 현재 경주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고 있다. 역사·고고학자들이 궁남지 발굴을 역설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궁남지는 분명 안압지를 능가할 마지막 백제 유물의 보고라는 것이다.또 안압지는 궁남지를 본 떠 만들어졌다는 것이 정설.안압지가 14년전 복원까지 이루어진 상황에서 궁남지는 현재 전체 규모 조차 파악되지 못한채 발굴작업이 중단될 위기에 있다는 것은 국민화합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 미등과 국제공조 통해 북핵해결/외무부 올해 업무보고 요지

    ◎WTO출범 대비,통상외교 강화/안보리 비상임국 진출기반 조성 ◇국제정세 전망=세계적으로 국지분쟁및 군비확산의 위험이 존재하고 아·태안보,특히 동북아 지역의 4강 구조에 변화 가능성이 높다.경제·통상 분야에서도 세계무역기구(WTO)의 출범과 환경문제의 대두로 새로운 세계질서가 형성되고 있으며 세계경제의 축이 아·태지역으로 서서히 이동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핵문제의 해결과 평화정착의 모색=한·미 공동보조를 근간으로 국제공조체제를 통해 핵문제를 해결한다.4강과의 정책협조 위에 한반도 정세의 변화가 남북한의 공존과 협력으로 이어지도록 주도한다.한·미 동맹관계의 강화발전및 평화정착을 통한 통일촉진 노력을 지속한다. ◇새로운 경제환경에 능동적 대처=WTO 출범에 대비한 통상외교를 강화하면서 환경·노동·경쟁등 신라운드에 대비하고 개발문제에 능동적으로 대처한다.선진국 진입을 위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준비및 G-7과의 실질협력을 강화한다. ◇아·태협력 심화=아·태경제협력체(APEC)를 통한 포괄적 아·태협력을 증진하고 역내 국가와의 관계를 강화한다.아세안 확대외무장관회담(APEC-PMC)과 아세안 안보대화포럼(ARF)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동북아다자안보를 추진한다. ◇유엔등 국제기구를 통한 우리의 세계적 역할 수행=유엔평화유지활동 참여,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 기반 조성,핵 비확산,인권·여성·빈곤·마약등 범세계적인 문제 해결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 ◇문화외교의 내실화와 재외한인 지원=경제력,문화적 저력을 바탕으로 세계속의 한국상을 홍보 한다.중국 중경 임시정부청사 복원및 정통성 계승과 재외 문화재 환수 노력을 계속한다.문민시대와 국제화 시대에 상응한 교민정책을 시행한다. ◇국제화 지원과 외교의 국제경쟁력 강화=국제화 정보의 신속 입수및 활용을 위해 외무본부와 재외공관을 국제화지원에 역점을 두고 운용한다.공무원에 대한 국제화 교육실시등 의식의 국제화를 지원한다.경제·통상·환경 업무기능의 강화를 위해 현정원 내에서 조직을 정비한다.연중 24시간 가동 가능한 외무부 독립청사 건립을 추진한다.
  • 천년 고찰 봉은사/고층빌딩에 짓눌린다

    ◎6m 떨어진곳에 19층건물 착공… “본래분위기 상실”/봉은사측 공사중단 요구… 관청 중재만 기대/광평대군묘 인근에도 7층건물 신축허가 역사성을 지닌 전통공간들이 고층건물신축에 밀려 본래의 분위기와 고유기능상실이 우려되고 있다.이에 해당하는 전통공간은 서울 강남구 삼성동 73 봉은사와 강남구 수서동 산10 광평대군묘역. 사찰측과 묘역관리 주체인 전주리씨광평대군파 종중은 현재 건축주들과 마찰을 빚는 가운데 공사중단을 요구하고 나섰다. 불교 조계종 직할사찰인 봉은사의 경우 사찰 경계선에서 6m 떨어진 삼성동 73에 지하6층 지상19층의 고층건물을 착공한 운봉산업과 맞서고 있다.고층건물이 들어서면 우선 전통사찰의 경관을 해치는 것은 물론 문화재보존 측면에도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 봉은사측은 수도도량 수호에도 지장을 주게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봉은사는 AD794년 신라시대에 창건된 1천년 고찰.임란때 승병을 이끌었던 서산,사명대사는 바로 봉은사 승과 출신으로 모두 주지를 역임했다.이들이 등과한 선불당과 추사 김정희의 편액 판전,화엄경소초 80권등은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받는등 많은 문화재가 있다.그래서 도심 속의 문화재박물관 구실을 해왔다.특히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64호 선불당과 신축 고층건물과의 거리는 불과 53m밖에 안된다. 그리고 강남지역에서 유일하게 넓은 녹지공간을 확보했기 때문에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었다.또 전통놀이와 전통혼례등의 행사가 수시로 열려 국제문화관광지 구실도 해왔다.바로 이웃에 무역회관과 관광호텔이 산재되어 외국관광객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 봉은사는 청소년들의 산 교육장과 시민들의 휴식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건축법상으로는 고층건물신축에 아무런 하자가 없다.정부가 경기활성화와 사유재산 규제완화를 위해 지방문화재에 한해 보호구역을 해제,신축건물의 고도제한 규정을 풀었기 때문이다.건축주인 운봉산업 이선식씨(76·서울 종로구 평창동 563)는 『건물신축 계획단계때 봉은사와 협의했더라도 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공사규모가 워낙 커서 시공업자와 계약을 파기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편 광평대군묘역 이웃에는 7층건물이 허가되었다.이 묘역 역시 서울시 유형문화재(제48호)로,전주리씨광평대군파 종중이 관리하고 있다.종중에서는 서울시문화재전문위원회의 자문을 거쳐 서울시문화재심의위원회에 묘역보호 당위성을 설명하는등 다각도의 대책을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봉은사와 전주이씨 광평대군파 종중은 관계요로에 탄원서를 내놓고 있는 상태.건물신축이 건축법상 전혀 저촉을 받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허가기관인 서울 강남구청의 중재만을 기대하고 있다.
  • 민간 경비행기추락 조종사 등 2명사망

    【대구=남윤호기자】 14일 하오3시25분쯤 대구시 달서구 월배5동 구마고속도로옆 비상활주로에서 시험비행중이던 신라섬유 소속 레저용 민간경비행기가 추락,조종사 김경환씨(33·서울 양천구 신정동 207의11)와 함께 타고 있던 신라섬유 상무 박재범씨(30·대구시 동구 각산동 291의1)가 숨졌다.
  • 「국악의 해 실무지원위」 구성/문화체육부/다양한 사업 벌이기로

    정부는 「국악의 해」를 맞아 문화체육부에 지원기구를 만드는등 정부차원의 지원사업을 벌이기로 했다. 이민섭문화체육부장관은 13일 상오 「국악의 해」지원사업계획을 발표하는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이같이 밝히고 『이를 위해 정문교예술진흥국장을 위원장으로 문화체육부본부와 국립중앙극장,국립국악원의 실무책임자로 구성된 「국악의 해 실무지원위원회」를 구성했다』고 말했다.이장관은 또 『국악의 해를 성공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정부기관은 물론 지방자치단체와 공공기관 및 주요기업체등 민간단체와 협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장관이 이날 밝힌 「국악의 해」지원사업은 ▲신라문화제등 전국 시·도 종합예술제행사 개최 지원 ▲기업체 순회 연주회 ▲청소년을 위한 국악행사 ▲국악관련 용어 순화사업 ▲문화예술 행사에 국악 사용▲종교와 국악과의 만남 축제 ▲체육행사에 국악 공연 ▲전통가락과 생활체육 프로그램 개발 ▲학교체육 프로그램에 국악 접목등이다.
  • 도읍 공주서 부여로(백제를 다시본다:1)

    ◎부여 금동용봉향로가 말하는 사비시대/풍요로운 곡창서 「사비문화」 무르익다 백제는 곧잘 잃어버린 왕국으로 간주되어왔다.그 까닭은 정사성격의 사료부족과 또 승자에 의한 문화유산파괴에서도 찾아진다.이러한 상황속에서 지난 연말 발굴된 부여 능산리 출토유물 김동용봉봉래산향로는 백제사 연구의 한줄기 빛으로 떠올랐다.서울신문은 이를 계기로 전문학자들이 백제사를 새롭게 해석하는 장기기획물 「백제를 다시본다」를 주1회씩 연재키로 했다.금동향로가 제시하는 자료를 근거로 백제사 복원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이 시리즈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한다. ◎넓은평야 끼고 있어 “3국중 가장 자족”/도성체제 완벽… 5부 구획에 2중 방어/국방 한창 뻗어나갈때 나·당 연합군 침공으로 비명에 저버려 일찍이 조선후기의 대실학자인 정채산은 국가의 운명이 수도의 입지조건에 의해서 크게 좌우된다고 보았다.그런만큼 반드시 요충지대를 점거하여 위압의 형세를 이루어야만 일단 위기가 닥치더라도 능히 이를 극복하여 오래 버틸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의하면 백제의 첫 도읍지이던 오늘날의 서울은 문자 그대로 김성탕지와 같은 곳이라서 건국이래 4백93년간이나 국세를 유지했으나,한번 웅진(공주)으로 옮겼다가 다시 사비(부여)로 옮긴 뒤에는 1백85년만에 망했다고 한다.사비시대는 웅진시대 63년을 제외하면 겨우 1백22년에 지나지 않는다. ○각부는 또 5권으로 큰 들녘의 한복판에 위치한 사비도성은 확실히 한성(서울)과 같은 천연적인 요새는 아니다.그렇다고 백제의 지배층이 도성의 방어체제를 게을리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지난 십수년간 백제문화권개발사업이 지속적으로 추진된 결과 우리들은 사비시대의 도성계획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사비도성은 기본적으로 부소산성을 배후에 두고 외곽의 요해지에 부분적으로 나성을 쌓아 방어체제를 이중으로 견고하게 다졌다. 그런 다음 왕궁은 부소산성밖 남쪽에 세웠다.이는 웅진시대 왕궁이 공산성 내의 광장에 구축된 것과는 크게 다른 점이다.옛 문헌에 의하면 사비도성의 시가지는 크게 5부로 구획되고 또한 각부는 5권으로 나누어지는등 실로정연한 체제를 갖추었다고 한다.한마디로 사비도성은 백제의 역사에서 볼 때 가장 잘 디자인된 수도였다.한국고대의 도성제 발달사상 거의 완성된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백제가 공주에서 서남쪽으로 30㎞쯤 떨어진 부여로 천도한 것은 일세의 영주인 성왕 16년(서기538년)봄의 일이었다.실로 국가재흥을 목적으로 한 웅대한 경륜에서 나온 결단이었다.백제는 이보다 앞서 서기 475년 서울로부터 공주로 천도했는데,이는 고구려 군대에 의해서 수도가 함락되고 개로왕이 피살되는 등 급박한 국가위기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그러나 부여천도는 이와는 전혀 사정이 다르다. 공주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방어에는 유리한 점이 있으나 그자체는 고립된 곳이고 수도가 들어시기에는 너무나 협소했다.이 야영도시를 벗어나 평야지대로 진출하여 본격적인 수도를 건설하는 것이 공주시대 역대 군주들의 꿈이었다.마치 고구려가 압록강가의 산악지대인 집안으로부터 평양으로 천도하려 한 것과 같은 취지였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동성왕때부터 부여의 중요성에 주목한 백제의 최고지배층은 이곳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할 요량으로 사냥을 겸하여 자주 이곳에 들러 지세를 살피는등 전반적인 입지조건을 예의검토해왔다.금강가에 위치하면서 산으로 둘러싸인 부여지방은 방어에도 적합했을 뿐 아니라 더욱이 넓은 평야를 끼고 있어 경제적으로도 풍요한 곳으로 비쳤다. 그리고 지리상 호남평야의 경영이나 가야지방으로의 진출에도 유리한 측면이 있었다.백제조정은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유역의 땅을 이 기름진 곡창지대를 적극개발함으로써 보상하려고 했다.요컨대 부여천도는 장기간에 걸친 준비작업 끝에 마침내 단행된 것이었다. ○결실못본 화평세계 이처럼 사비시대는 개막되었다.당시는 삼국간의 항쟁이 극심한 전란기였다.영토확장을 목표로 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삼국간의 국경선은 수시로 뒤바뀌었다.이같은 살벌한 시대풍조 속에서도 백제는 삼국중 가장 자족함을 알며 인을 실현코자 노력했다.한성시대인 근소고왕때 장군 막고해가 승승장구 고구려군대를 추격하던중 수곡성(황해도 신천)북쪽에 이르렀을 때 스스로회군을 결행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그런데 사비시대 법왕은 서기 599년 즉위하자마자 살생을 금하는 칙령을 내린다.이에따라 민가에서 기르던 매를 놓아주도록 했으며 사냥도구와 그물마저 태워버리게 했다.이는 같은 시대 신라와는 크게 대조되는 현상이다.즉 신라왕의 최고고문이었던 원광법사는 바로 이때 「살생유택」의 덕목이 들어 있는 세속5계를 제정하여 비록 조건을 달았지만 살생을 인정했던 것이다. 백제가 신라에 패망한 궁극적인 원인중의 하나가 바로 이같은 데에 있었는지도 모른다.어쨌든 백제의 지배층이 국가의 위기상황 아래서도 인을 구현하려는 열의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은 주목되는 사실이다. 사비시대 화평의 세계를 실현하려던 백제인의 웅지는 끝내 결실을 하지 못했다.무왕의 야심에 찬 팽창정책과 그 아들 의자왕의 거듭된 실정은 신라를 자극했다.그래서 신라로하여금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아예 지도상에서 말살하려는 비밀외교에 열중하게 만들었다.신라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당과의 군사동맹이 체결되었고 양국 연합군은사전계획에 따라 서기 660년 전격적으로 백제에 대한 침공을 개시하였다.마침내 사비도성은 함락되고 백제는 그 찬란한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수도의 지세를 중요시하는 정다산은 백제의 멸망원인이 사비도성의 집중성 결여에 있는 것인 양 설명하고 있다.그러나 앞에서 본 것처럼 그 방위체제는 결코 허술한 것이 아니었다. ○우아·격조 높은 문화 한 시대의 문화는 정치를 비추는 거울이다.흔히 이야기되고 있듯이 사비시대야말로 백제문화가 그 절정에 도달한 황금기였다.얼마전에 별세한 삼불 김원용선생은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는 고구려의 미술은 민족이나 국가가 무기력해질 때 생기는 퇴폐나 타락의 양식을 거치지 않고 갑자기 소멸되어버렸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것은 백제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다.사비시대의 백제문화 역시 쇠퇴·타락의 징후는커녕 완숙의 아름다움이 물씬 풍기고 있다.결국 백제는 쇠퇴기에 접어든 끝에 멸망된 것이 아니라 한창 국력이 뻗어나갈 즈음 칼에 등을 찔려 비명에 간 것임을 알 수 있다. 해방 직후일제가 이른바 부여신궁을 지을 목적으로 거두어들인 석재더미 속에서 백제말기 대좌평이었던 사택지적의 당탑 건립기념비석이 일부 파괴된 채로 발견된 일이 있다. 이로써 사비시대 백제문화의 우아하고도 격조높은 기품을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요 백제말기 정치사를 해명하는 데 유력한 단서를 얻게 되었다. 지난해 연말 부여 능산리 벽화고분 근처의 한 건물지에서 새로운 유물들이 출토되었다.여기서 나온 금동제 향로를 비롯한 사비시대 후기의 유물들을 통해서 우리들은 완숙기에 접어든 백제문물의 찬란함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되었다.또 덧붙여 말하거니와 신비스러운 빛깔로 떠오른 새로운 문물 금동용봉봉래산향로를 대하면서 백제를 뒤돌아보고 재음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비시대의 문화상/출토유물 통해 「선진문화」 확인/능산리·궁남지유적발굴로 실체 드러나 사비시대 백제(AD538∼660년)의 문화상은 고분과 절터·성곽유적 등에서 출토된 매장문화재를 통해 드러난다.신라와의 각축에서 패망의 길을 걸은 백제는 외형의 문화유산을 철저히 파괴당했기 때문에 땅속에 묻힌 유물만이 겨우 백제의 잔영을 남기는 비운의 역사를 겪었다. 이 시대의 백제고분은 충남 부여군전역에 분포되어 있다.마지막 도읍지 부여를 중심으로 능산리등 13개 고분군이 대표유적으로 꼽힌다.거의가 돌방무덤(석실분)인 고분유적은 껴묻거리(부장품)라는 유물이 많이 매장되었다는 점에서 고고학이나 역사연구에서 큰 몫을 차지한다.사비시대 고분 가운데 고고학적으로 처음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15년 능산리 고분군 발굴이후부터다.1917년까지 모두 6기가 발굴되었다. 능산리 고분에서 사신도벽화가 있는 1호분이 특히 유명하다.널길(선도)이 달린 굴식돌널무덤(횡혈식석실분)이 주류를 이루는 능산리 고분군에서는 금동투조식금구 등이 발굴되었다.그리고 일찍부터 왕릉으로 전해왔다.이번에 햇빛을 본 금동용봉봉래산향로도 바로 능산리 고분군 이웃에서 출토되었고,마주보고 있는 나성의 일부도 발굴되어 사비도성 방어요새가 밝혀진바 있다. 최근에는 금동향로가 출토된 능산리지역 말고도 궁남지유적 3차발굴사업이 진행되어 벼농사유적인 논유구와 함께 목각의 새와 수레바퀴 등을 출토하는 수확을 거두었다.이밖에 정림사터를 비롯,부소산성 도성내의 도시계획 유구 등이 발굴되어 사비시대 백제의 선진문화상을 속속 보여주었다.특히 사비시대 백제문화권을 전북 익산지역으로까지 확대,백제 최대의 가람 미륵사터를 발굴함으로써 불교문화의 실상을 가늠하게 되었다. 그리고 웅진시대(AD475∼538년) 유적으로는 세기적 발굴이라 할 수 있는 무령왕릉을 비롯,공산성과 임류각 발굴도 고고학 성과로 치부된다.이와 더불어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발굴된 한성시대(AD18∼475년)의 도성으로 추정되는 서울 몽촌토성과 백제 초기의 건국집단의 무덤으로 보이는 서울 석촌동 돌무지무덤(적석총)도 백제연구 고고학자료가 되고 있다.
  • 개띠해의 희망/이종철 국립민속박물관장(굄돌)

    1994년은 12간지의 11번째 동물인 개의해로 이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한지 6백년이 되는 갑술년이 된다.개는 후기 구석기 시대 덴마크 해안 유적에서 발굴되었고 8천년전 신석기 시대부터 사육하기 시작한 동물로 사람과 친하기로 개를 따를 동물이 없다. 1세기전에 경산 임당동 고분,고구려 무용총,각저총,안악3호분의 벽화,김유신묘 12지 호석,조선조의 대표적 화가 이암 김두량 신윤복 김득신 김홍도의 그림에서 개가 중요한 소재가 된다.신라때부터 인간의 사랑을 받아 나라끼리 외교선물로 교환하고 고려의 음악중에 개무덤 곡조까지 있을 지경이다. 봉사와 근면,의리와 충성,용맹의 상징으로서 전북 오수의 누렁이 마냥 주인대신 죽은 살신성인,경북 선산 낙산리 개무덤에서 보듯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견마지로의 특성을 가졌다.오늘날도 장님의 길안내,마약 경찰견,사냥견으로 취각·청각의 예민성을 따를 동물이 없으며 19 24년 미국 포피견은 3천3백㎞를 6개월간 걸어서 인디애나에서 오리건의 주인집까지 찾아간 명견으로 유명하다. 일본 중국에까지 널리알려진 한국의 유명한 진돗개,풍산개,삽사리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충의명견의 대명사이다.대문앞,마루밑,뒤뜰,굴뚝옆,부엌에 기거하며 「하루 두끼 밥 찌꺼기 얻어 먹으며 온갖 충성을 다하는 동물은 개말고 있는가,대가없는 충성때문에 도리어 천시받는 동물」이라고 삼불 김원용교수는 그의 수필 「김덕구」에서 얘기한다. 제발 새해에는 「국민을 하늘처럼 무서워 할 줄 모르는 개」에 관련된 속언에 합당한,개××,개×,개만도 못한×등 말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현직에서 사라지고 우리 모두가 새로워 졌으면 한다. 개도 닷새가 되면 주인을 안다.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가뜩이나 어려운 북한 핵개발,시장개방에 따른 국가 위기에서 창조적 지혜자들은 의견, 명견, 충견을 본받아 국민에게 견마지로의 보답과 살신성인의 지혜를 보여줄 때이다.
  • 한국고대사 2천점 그림으로 엮어/김산호저 「대쥬신제국사」 화제

    ◎“배달민족이 6천여년전 동아시아 지배”/민족사흐름 신·불·말쥬신계로 세갈래 분석/3개어로 번역… 도쿄세계도서전시회 출품 한국고대사를 2천여점의 동양화·유화등으로 그려서 만화처럼 엮어낸 책이 나왔다.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초까지 공상과학만화 「라이파이」로 큰 인기를 끈 김산호씨(54)가 최근 펴낸 「대쥬신제국사(대조선제국사)」는 내용과 형식면에서 아주 독특한 작품이다(동아출판사 간). 우선 이 책에 서술된 우리민족의 고대사는 그동안 배워온 것과는 달리 중국·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전지역을 지배한 위대한 역사로 표현됐다. 지은이 김씨는 우리 배달민족이 지금으로부터 6천여년전 중국의 산동반도이북과 만주·한반도를 포함한 넓은 영토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동이주이라고 불리던 우리민족은 큰활(대궁)을 쓰는 기마민족으로 대단군을 천자로 모셔 종교·정치적으로 통일됐다. 따라서 기동력과 단합된 힘으로 농경민족인 중국인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고 풀이한다. 김씨는 우리민족사의 흐름을 세갈래로 본다. 신쥬신(진조선)계는 숙신∼말갈∼대진국(발해)∼여진∼김나라로 이어져내려왔으며 불쥬신(변조선)계는 동호∼거란∼요나라로 계승돼 북중국을 지배했다. 또 말쥬신(마조선)계는 가우리(고구려)∼후금(주신)∼대청제국을 잇따라 건국했으며 그 일부가 한반도에서 백제·신라를,다른 일부는 일본열도로 건너가 일본을 각각 건설했다는 것. 김씨는「쥬신」이란 우리민족을 일컫는 순수한 우리말이며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조선」 「숙신」 「주신」등이라고 보고 있다. 이같은 파격적인 고대사해석 말고도 이 책은 그 형태에 있어서 전례가 없는 방식을 택했다. 만화나 극화처럼 그림으로 줄거리를 이어가되 장면장면을 만화적인 선이 아닌 유화·동양화등 정통회화로 구성했다. 따라서 장면 하나하나가 기록화라고 할 수 있을만큼 웅장하고 화려한 맛을 준다. 「대쥬신제국사」는 모두 3권으로 구성됐으며 책의 특성을 살리느라 가로 30.5㎝,세로 25㎝의 큰 판형에 종이도 아트지를 사용했다. 김씨와 출판사측은 현재 사용되고 있는 출판용어로는 이처럼 새로운 형태의 책을 부를만한 게 없어 고심 끝에 「회화극본」이라는 새이름을 붙였다고 밝혔다. 이 책은 오는 27일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제2회 「도쿄세계도서전시회」에 초청받아 출품될 예정이며 현재 영어·일어·중국어등 3개 국어로 번역되고 있다. □저자 김산호씨(인터뷰) ◎“소수민족 설움 맛본뒤 고대사 관심”/작품구상한 후 7년만에 완성 김산호씨는 18세 때인 지난 58년 국내 최초의 공상과학만화인 「라이파이」를 발표해 선풍적인 인기를 끈 만화가다.67년 미국으로 건너가 「샤이언 키드」 「유령이야기」 「여자흡혈귀」시리즈등 3백여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재미 만화가로서 한국고대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미국생활을 하면서 소수민족으로서 많은 설움을 당했다.지난 82년 일시 귀국했다가 김성호씨의 논저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을 우연히 읽어보고는 큰 감동을 받았다. 이후 신채호선생의 「조선상고사」,일본역사책인 「일본서기」등 한국·중국·일본의 역사서 80여권을 공부했다.만주지방도 여러차례 답사했다. ­작품을 내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렸나. ▲작품을 구상한 뒤 작업을 하는 데만 7년이 걸렸다.다행히 대학에서 동양화·서양화를 모두 배워 장면의 성격에 따라 유화·동양화·일본화등의 기법을 두루 사용할 수 있었다. ­앞으로의 계획은. ▲이 책이 영어·일어·중국어로 번역돼 각국에 있는 우리 교포들이 이 책을 읽고 우리의 역사에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기를 바란다.
  • 「신라의 달밤」 가수 현인씨 음주운전으로 면허정지(조약돌)

    ○…서울 송파경찰서는 7일 「신라의 달밤」으로 유명한 원로가수 현인씨(76·본명 현동주·서울 송파구 방이동 169의12)를 음주운전혐의로 불구속 입건. 현인씨는 7일 하오11시40분쯤 동료 원로가수들과 함께 술을 마신뒤 승용차를 몰고 집으로 가다 송파구 석촌동 남서울병원 앞에서 단속경찰관에 혈중알코올농도 0.06%로 적발돼 면허정지 1백일의 처분을 받았다고.
  • 남북국시대(온가족이 함께 읽는 우리역사:26·끝)

    ◎발해는 만주지배한 「한민족국가」/「고구려계승」 주변국인 신라·일본서도 인정/무덤의 양식·숱한 유물 등 고고학서도 입증 신라는 676년 3국을 통일한 뒤 935년 신흥국가인 고려에 항복했다.또 발해는 698년 건국돼 926년 거란에게 망했다. 「남북국시대」는 통일신라와 발해가 공존한 기간즉 698∼926년의 2백28년 동안을 뜻한다. 우리역사를 파악하는데 있어 이 시기를 「남북국시대」로 규정한 것은 최근 몇년사이의 일이다.이는 발해가 한민족의 국가로 받아들여진 결과이다. 그렇다면 발해가 최근에야 한민족의 국가로 받아들여진 까닭은 무엇인가. 발해가 건국 초부터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자처했으며 신라·일본등 주변국들도 그 사실을 인정했음은 분명하다. 일본의 역사서인「속일본기」759년 기사에는『고려국왕 대흠무가 국서를 보냈다』는 부분이 나온다.이 때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918년)하기 전으로 고려국왕은 고구려왕을 의미한다. 또 대흠무는 발해의 제3대 문왕(737∼793년)의 이름이다.따라서「속일본기」의 기사는 발해의 문왕이 고구려(고려)의 왕을 자처해 일본에 국서를 보냈고 일본측도 이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 일본 조정이 발해사신을 고구려사신이라고 불렀다든지 발해의 음악을「고려락」으로 표현하는등 일본이 발해를 고구려의 후계자로 본 사실은 여러 사서에서 인정된다. 한편 고고학적으로 보아도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그 대표적인 예가 1949년 길림성 돈화현 육정산고분군에서 발굴된 정혜공주(문왕의 둘째딸)의 무덤이다. 정혜공주묘는 돌방무덤(석실묘)인데다 무덤의 천장이 말각천장의 구조로 돼 있는등 전형적인 고구려 무덤양식을 그대로 실현했다.이밖에도 현재 발굴된 숱한 발해의 유물들이 문화면에서 고구려를 뒤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발해가 고구려를 뒤이은 한민족의 국가임이 확실한데도 이를 인정받지 못한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통일신라이후 고려·조선등 역대 왕조가 스스로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3국의 항쟁­신라에 의한 통일­고려의 계승­조선의 역성혁명」을 한국사의 주요흐름으로 강조해 온 점을 들 수 있다.이같은 입장에서는 신라와 같은 시기에 존재했던 발해가 한국사의 곁가지로 치부되거나 아예 무시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함께 발해 멸망후 그 본거지인 만주의 동북부일대가 민족의 주활동무대에서 벗어난 점도 발해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줄인 요인이다. 신라가 3국을 통일해 민족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한 것은 틀림없다.이와함께 당의 야욕을 무력으로 물리쳤다는 사실은 인*정받을만 하다. 그러나 외세를 끌여들여 통일을 추구했다든가 그 결과 국토통일이 대동강이남에 국한됐다는 점에서 그 한계성도 분명하다. 만주는 발해가 멸망한 뒤로 지금까지의 1천여년동안 한민족의 역사무대에서 사라졌다.그러나 고조선에서 고구려를 거쳐 발해에 이르기까지 그곳은 수천년간 우리의 땅이었다. 발해의 역사를 되찾는 것은 잃어버린 민주사의 일부를 회복하는 작업이랄 수 있다.
  • 내 욕심만을 위해 산 날들/지명관(시론)

    ◎이땅서 서로 아끼고 돕는 심성 키울때 요즘 나는 10대나 20대에 읽었던 우리나라 문학작품을 때때로 펼치곤 한다.우리 선인들의 심성이나 사상을 찾아보고 싶어서이다.얼마전에는 이광수의 「유정」을 다시 읽었다. 조금 읽어나가다 주인공인 최석이 하얼빈에서 망명 조선인 R라는 소비에트장교와 만나는 대목에 부딪쳤다.R는 고국이 그립지 않느냐는 최석의 물음에 전혀 뜻밖의 대답을 한다.「그 빈대 끓는 오막살이가 그립단 말인가,나무 한개 없는 산이 그립단 말인가,그 무기력하고 가난한 시기 많고 싸우고 하는 그 백성을 그리워한단 말인가…」하고 R는 흥분까지 했다는 것이다.최석은 이에 대해서 「나는 R를 괘씸하게 생각하기 전에 내가 버린다는 조국을 위해서 가슴이 아팠소」라고 편지에 적고있다.우리는 이러한 글속에서 「유정」을 쓰던 1930년대 초에 이광수가 우리나라 우리땅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 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일제지배하의 조국에 대해서 그가 그처럼 어둡게 느낀데 우리도 공감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여기서 나는 「유정」을조국탈출기 또는 유민문학의 하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우리나라 우리땅에 대한 이처럼 어두운,말하자면 부정적인 이미지란 물론 이광수 개인에게만 한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어떤 의미에서는 일제하의 거의 모든 지식인의 심성에 깃들어 있던 「조선」의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그후 우연히도 조선실학의 한 선구자 이중환(1690∼1752(?))의「택리지」를 읽게 되었다.이 「택리지」는 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의하면 뛰어난 인문지리서로서 조선조말까지 양반계층 사이에서 아주 높이 평가되고 널리 애독되었다고 한다.그런데 오늘에 있어서도 매우 흥미있는 것은 이 「택리지」의 결론이다.한번 사대부가 되면 이땅에서는「거의 그 몸을 용납할 곳이 없다」(태무소용기신)는 것이다.몸담고 살아갈만한 고장이 없다는 말이다. 여기에도 이나라 이땅에 대해 대단한 부정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거야 18세기에 이르면 조선조가 크게 피폐해져 몰락했으며 이중환도 유배를 당해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한 까닭이라고 말할 수 있다.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이중환이 「사군자가 뜻을 가지고 거처할 땅」을 찾고 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말하자면 그는 유교적인 의미에서 이상향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이상향을 찾는 맑고 아름다운 이상주의를 누가 나무랄 수 있겠는가.그런 이상향을 가졌기 때문에 보다 나은 것을 찾아서 전진하고 진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그러나 또한편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 대해서 긍정하고 만족하기 보다는 불만을 품게되는 것이 아닐까.자족할줄 모르는 사회에 안정이란 없다. 그러한 이상이 실현된 땅으로 우리는 흔히 우리보다 앞섰다는 나라들을 주목해온 것같다.그것이 옛날에는 중국이었고 근대에는 지배를 받으면서 저항한 일본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전후에는 미국이었다.그러니까 특히 지식인들은 앞서있는 다른나라와 비교해 우리의 현실을 비판해온 것이라고 보인다.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신라시대의 도당 유학생이래의 전통일는지 모른다.그 나라들은 가치를 지니고 있고 우리에게는 그러한 가치가 결여돼 있다고 여겨온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우리들의 가정을 그려본다.우리는 여기에서도 남의 가정은 이런데 우리집은 왜 이러냐고 떼를 쓸 것인가.남은 큰 집에서 여유있게 사는데 우리는 오막살이에서 된장찌개만 먹는다고 투정을 할 것인가.사실은 모두가 오순도순 주어진 능력과 환경과 기회속에서 서로 아끼고 나름대로 힘을 다하면서 가족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고 거기를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 따뜻한 심성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것이 마을살림이나 나라살림의 이상이 아닐까 하고 나자신도 되돌아다보고 싶어진다. 새날 새아침에 나는 지난해말 어느 소극장 콘서트에서 들은 젊은이들의 노래를 되새기고 있다.『지난날에는 나만 자유스러워지려고 했다.내 욕심으로 살아왔다.그러나 그것은 슬픈 날들이었지 않는가.이제는 그것들은 뒤로 돌리고 앞으로 찾아오는 날들에 있어서는 서로 의지하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리』라고 열창하는 것이었다.어떤 뜨거운 감격같은 것이 조그만 극장에 물결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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