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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얼굴마담’ 보다 전문가 발탁

    주총시즌이 다가오면서 대기업 사외이사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예전에는 이른바 ‘얼굴마담’격의 명망가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올 들어서는 전문분야에서 오랜 경험을 쌓은 인물들이 많이 눈에 띈다. ●전문성이 ‘제1 잣대’ SK㈜는 올해 사외이사 후보 5명을 추천하면서 독립성과 전문성,성실성을 살폈다.지분관계 유무,에너지기업 종사자로서의 전문능력을 따졌다. 후보 인물 가운데 남대우 전 가스공사 비상임이사와 서윤석 이화여대 경영대학장,김태유 전 청와대 정보과학기술보좌관이 눈길을 끈다. 남씨는 에너지분야의 전문가로 소버린측에 의해서도 사외이사로 추천됐다.풀무원 감사로도 활동하고 있다.포스코의 사외이사로도 중복 추천된 서씨는 미국 공인회계사 출신.일리노이대 교수와 한국회계학회 부회장을 지낸 회계전문가로서 재무경쟁력 향상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김씨는 자원경제학 박사 출신으로 서울대 자원공학과 교수와 에너지관리공단위원을 역임한 경력을 인정받았다. 포스코에서는 제프리 존스 주한미국상공회의소 명예회장과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이 주목받는다.박 회장은 탁월한 경영 능력과 자원개발 분야의 경험이 발탁 배경이 됐다.전경련 부회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존스 명예회장은 한국과 미국,일본에서 변호사 경력을 갖고 있다.한국기업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지배구조 선진화와 투명경영 제고에 도움이 될 것이란 평가다. ●법조계·공무원 출신 영입 움직임 활발 법률과 조세,공정거래,환경 분야의 규제가 강화되면서 법조계와 공무원 출신의 영입 움직임도 활발하다. LG전자는 새 사외이사에 진념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의 영입을 추진 중이다.진 전 부총리도 긍정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SDI는 윤영대 전 공정위 부위원장,제일기획은 서승일 전 공정위 상임위원을 각각 사외이사로 영입하기로 했다.삼성중공업은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지낸 고중석 변호사를 선임할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기는 강병호 전 금감원 부원장,에스원은 김영섭 전 관세청장을 사외이사로 영입할 계획이다.호텔신라는 홍종철 전 국세청 이사관을 상근감사로 선임할 예정이다. CJ푸드시스템은 김영만 전 서울지방식약청장을,LG산전은 조원제 전 대전지방국세청장을 각각 사외이사로 선임하기로 했다. ●대우는 얼마나 받나? 사외이사에 대한 대우는 기업에 따라 천차만별이다.이사회나 주총 때 거마비 명목으로 ‘봉투’를 주는 곳이 있는가 하면,억대 연봉을 지급하는 기업도 있다. 포스코는 사외이사에게 연봉 4000만여원에 스톡옵션 2500주가량을 지급한다.KT는 업무추진비로 월 300만원과 이사회 참석비로 50만원(이사회 개최는 연 10회 정도)을 준다.연봉으로 따지면 대략 4000만원선.1인당 5200주(행사가격은 5만 7000원)의 스톡옵션을 준다. SK㈜는 연간 3000만원을 지급하지만 스톡옵션 혜택은 없다.지난해 삼성전자의 사외이사(7명) 보수한도는 1인당 평균 3억 8600만원이었다. 박건승 김경두기자 chani@˝
  • 얼짱 女강도 “죄인 팬클럽 기막혀”

    “어이가 없어요.나쁜 짓을 저질렀는데도 얼굴이 예쁘다고 사회가 왜 이렇게 열광하는지 모르겠어요.이제 담담하게 죄 값을 치르고 싶어요.” 네티즌들 사이에 ‘강도 얼짱(강짱)’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면서 공개수배 1년여 만인 지난 23일 검거된 이모(21·여·무직·경북 경주시 안강읍)씨는 ‘강짱’ 신드롬에 대해 다소 짜증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이씨는 네티즌들 사이에 ‘강짱’으로 불리기 전만 해도 애인 김모(31·경주시 안강읍)씨와 속초·춘천 등지에서 각각 분식점과 횟집에서 일을 하며 도피행각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찰의 수배전단에 붙은 이씨의 17세때 사진이 인터넷에 떠돌면서 이들의 고생길(?)이 시작됐다. 각종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 1순위로 떠올랐고,크고 작은 팬클럽까지 생겼다.한 때는 회원수만도 2만여명이 넘어섰다. 특히 이씨는 고교 재학 때 경주시에서 주관한 신라문화제 행사인 ‘화랑ㆍ원화 선발대회’에 출전,예선을 무난히 통과해 ‘얼짱’을 인정받았다. 인터넷에 뜨기 시작하자 이씨는 일을 못하고 원룸에서 혼자 지냈으며,김씨는 막노동을 해 왔다.또 이씨는 머리모양을 자주 바꾸고 주로 모자와 안경을 쓰고 생활해 주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왔다. 그러나 이씨 등은 김씨의 아버지가 수차례에 걸쳐 송금해 준 생활비를 강원도 일대에서 출금하다 꼬리를 잡혔다.급기야 지난 23일 이씨는 해변에서 어머니를 만나려다 이를 알고 뒤쫓아 온 형사들에 검거돼 1년여간의 도피생활을 마감하게 됐다. 한편 이들은 지난해 1월 경주시 성동동 시외버스 승강장 부근에서 김모(32·여)씨를 납치,현금 277만원과 신용카드 3장을 빼앗는 등 3차례에 걸친 강도와 12차례에 걸친 절도혐의를 받고 있다.경찰은 이들이 동거 자금 마련을 위해 범행을 한 것으로 보고 이날 중으로 구속영장을 신청하는 한편 여죄를 추궁하고 있다.경찰관계자는 “이들이 초범이지만 특수강도혐의가 포함돼 있어 5년 이상의 징역형이 선고될 것”이라면서 “범행횟수가 12차례나 돼 집행유예는 어렵고,감형되더라도 최소 2년 6개월의 수형생활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포항 김상화기자 shkim@˝
  • 기업 이미지 새단장 열풍

    올들어 기업들의 이미지 새 단장이 한창이다.이름이나 로고를 바꾸는 등 새 CI(기업이미지 통합)를 도입하는 사례가 부쩍 늘어나고 있다. 이 가운데에는 수십년 동안 사용해온 이름을 과감히 버리는 업체도 적지 않다. 지난해 세아그룹에 인수된 기아특수강은 사명과 CI를 교체하기로 했다.기아특수강은 최근 소비자 조사결과 ‘세아특수강’과 ‘세아베스틸’‘세아S&A’ 등의 호감도가 높아 이중에 하나를 고를 예정이다. 사명이 확정되면 대대적인 기업 이미지 쇄신작업에 나설 계획이다.관계자는 “세아그룹과 일체감 및 시너지 효과를 감안해 사명을 바꾸기로 했다.”면서 “다음달 12일 주주총회에서 최종 승인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금호아시아나그룹도 올들어 이름을 바꿨다.지난해까지는 금호라는 명칭을 써왔지만 국내외에서 주력계열사 가운데 하나인 아시아나항공과 별개 기업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통합 결과 외부에서 그룹의 이미지가 미래지향적으로 바뀌고 외형도 확대돼 보인다는 평을 받고 흡족해하고 있다. 기업 이름 변경을 검토중인 곳은 훨씬 더 많다.올해 창립 31주년을 맞은 삼성전기도 사명 변경을 추진 중이다.당초 3∼4개의 이름을 놓고 고민해 왔으나 이번 주총에는 안건을 상정하지 못하게 됐다.여기에는 수백억원에 달하는 홍보비용도 작용했다.그러나 개명작업을 포기한 것은 아니라는 분석이다. 제일기획·제일모직 등 ‘제일’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기업과 호텔신라 등도 사명변경을 검토중인 기업에 속한다.제일기획의 경우 삼성커뮤니케이션즈 등이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지만 결정하지 못한 채 검토과제로 남겨 뒀다. 또 호텔신라는 삼성 냄새가 나는 이름으로 바꾸고 싶어하지만 국제 비즈니스계에서 워낙 ‘신라’라는 이름이 깊이 각인돼 있어 고민 중이다. 올해로 창립 63주년을 맞는 한국타이어는 올해를 ‘글로벌 빅메이커’로 가는 원년으로 삼아 새 비전을 담은 새 CI를 제작,조만간 발표하기로 했다.기존의 보수적이고 전통적 기업 이미지에서 벗어나 젊고 진취적 기업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것이다. 창립 35주년을 맞은 대한항공도 조만간 새 CI를 도입할 것으로 알려졌다.항공기내 승무원의 제복을 변경하는 방안도 고려 중이다. 지난해 골든에셋플래닝에 인수된 쌍용그룹 계열의 남광토건도 오는 7월부터는 아파트 이름에서 ‘쌍용’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쌍용건설과의 계약에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 가급적이면 빨리 이름을 변경할 방침이다. 남광 관계자는 “7월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오는 4월 대강의 윤곽이 드러나면 브랜드도 빨리 바꿔 새롭게 CI에 나설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성곤 류길상 김경두기자 sunggone@˝
  • 성산산성서 신라 ‘책갈피 목간’

    경남 함안 성산산성에서 출토된 목간(木簡)에서 6세기 중후반 신라의 사회상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먹글자가 대량으로 확인됐다.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는 성산산성에서 나온 목간 112점을 적외선으로 촬영한 결과 400여개의 먹글자(墨書)를 찾아냈다고 24일 밝혔다.먹글자는 93개의 목간에서 확인됐는데 300여자는 판독이 가능하지만,100여자는 판독이 어렵거나 전문가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고 덧붙였다. 땅이름은 추문(鄒文)·巴珍兮城(파진혜성)·巴珍兮村(파진혜촌)·阿卜智村(아복지촌)·양촌(陽村) 등 17개가 새로 확인됐다.사람이름도 阿那休智(아나휴지)·阿那舌只(아나설지)·內恩支(내은지)·居助支(거조지)·仇禮支(구례지) 등 23개가 추가로 밝혀졌다.이 가운데 19개가 지(智·知·只·支)로 끝나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一伐(일벌)이나 一尺(일척) 등 관등과 稗(피)와 麥(맥·보리) 등 곡식이름,그리고 奴人(노인)과 村主(촌주) 등 신분 명칭도 확인됐다.한편 두루마리 문서에 꽂는 나무조각으로 오늘날 책갈피와 같은 용도로 쓰여진 목간도 새로 발견됐다.일본에서 제첨축(題籤軸·다이센지쿠)이라고 부르는 것으로,넓적한 머리 부분에 제목을 써서 종이나 비단으로 만든 두루말이의 해당 부분에 꽂았다.성산산성 것은 마을 이름으로 보이는 ‘利豆村(이두촌)’이라고 씌어 있다. 이성시(李成市) 일본 와세다대 교수는 “이 무렵 신라의 문서행정이 고도로 발달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면서 “이런 목간이 일본에서는 1세기 가량 늦은 7세기 후반에 나오기 시작한다.”고 설명했다. 서동철기자 dcsuh@˝
  • 미륵사탑서 고려 사리장엄 나올까

    전북 익산의 국보 제11호 미륵사터 석탑을 해체하면서 발견한 납석제(蠟石製) 작은항아리(소호·小壺) 조각에는 ‘大伯士(대백사)’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신라사 연구자들은 곧바로 이 문구가 절을 짓는 장인(匠人)을 뜻하는 표현으로 통일신라부터 고려 초까지 폭넓게 쓰였음을 확인했다. 항아리 조각의 존재는 ‘조선불교총서’에 실린 ‘혜거국사비문(惠居國師碑文)’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비문에는 고려 태조 5년에 해당하는 922년 후백제 견훤치세에 미륵사탑을 개탑(改塔)했다는 글이 실려 있다.따라서 백제 무왕(600∼641)때 세워진 이 탑에서 무왕 때의 사리장엄(舍利莊嚴)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는 하기 어렵게 됐다.명문(銘文) 항아리 조각이 탑의 2층 지붕받침돌에서 나왔으므로 당시에 거의 완전히 해체복원됐을 가능성이 크다.사리는 부처님 신체의 일부분이거나,가르침을 형상화한 경전으로,사리장엄은 이 종교적 경배의 대상을 아름답게 꾸민 것이다. 그러나 혜거국사비문이 언급한 시기,즉 고려 태조 때에 만들어진 사리장엄의 존재는 여전히 기대할 수 있다.미륵사탑에서 멀지 않은 왕궁면에는 왕궁리 5층석탑이 있다.학자에 따라서 건립시기를 백제부터 통일신라·고려까지 다양하게 보지만,5층석탑에서 나온 19장의 금판에 새긴 금강경(金製金剛經板) 등 불교미술의 극치를 이루는 사리장엄이 고려시대 것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미륵사 석탑도 고려 초 개탑됐다면 그 때 새로운 사리장엄을 넣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번에 나온 명문 항아리 조각은 사리용기처럼 보이기도 한다.납석제 사리항아리는 통일신라에서 고려 초에 걸쳐 유행했다.구획을 지은 칸에 글자를 새겨넣은 방식도 대구 동화사 비로암의 보물 741호 민애대왕석탑 사리항아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그러나 ‘대백사’의 내용이 밝혀짐에 따라 발원문이었을 가능성이 커졌다.하지만 후대의 보수 과정에서 우연히 들어갔을 가능성은 남는다.미륵사탑은 석재의 중간을 점토로 채워놓았기 때문이다. 함께 나온 ‘延祐 四年(연우 4년)’이라고 새겨진 기와조각과 상평통보도 해석이 필요하다.연우 4년은 고려 충숙왕 4년(1317)이고,‘크기가 줄어든’ 상평통보는 조선 정조 2년(1778년) 이후 만들어진 것이다. ‘미륵사석탑은 동방석탑 중 최고…100년전 벼락으로 절반이 훼손됐다.’는 조선 영조(1724∼1776 재위)때 ‘와유록(臥遊錄)’의 기록이 참고가 될 것이다.1600년대 중반에 이미 절반이 허물어져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장호수 문화재 전문위원의 미륵사 석탑의 실측조사 결과는 또 다른 가능성을 남겨놓았다.4층 이상이 붕괴되면서 어느 시기 다시 세워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4층 이상은 엄밀한 연구 없이 무너진 부재를 임의로 골라 쌓은 듯한 흔적이 보인다는 것이다.그 ‘어느 시기’는 ‘와유록’이 말하는 시기 이전일 수도,이후일 수도 있다. 윤근일 문화재연구소 미술공예실장은 “기와와 동전이 개건 당시 봉안된 것인지,개보수 과정에 휩쓸려 들어간 것인지는 좀 더 검토해 보아야 한다.”면서 “남은 1층 이하에서 더 많은 유물이 나와 성격을 명확히 규명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결국 백제 혹은 고려 시대 사리장엄이 들어있을지,아니면 아무 것도 없을지는 기단부까지 완전히 해체되는 연말쯤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서동철기자 dcsuh@˝
  • 또 ‘M&A 바람’

    23일 한미은행 인수를 공식 발표한 씨티그룹이 한국을 아시아지역의 허브(중심축)로 집중 육성하겠다고 밝힘에 따라 국내 금융업계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세계 최대의 금융자본답게 인수합병에서도 최고의 식욕을 자랑하는 씨티그룹이 국내 다른 금융기관으로도 손을 뻗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반응이다.이에따라 국내 금융권에 추가 인수합병의 회오리가 거세게 몰아칠 전망이다.당장 외환·제일 등 소규모 은행들에 대한 대형 은행들의 인수추진 행보가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국내 최대 외국인 투자 씨티그룹은 이날 서울 신라호텔에서 칼라일컨소시엄이 갖고 있는 한미은행 지분 36.6%를 주당 1만 5500원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씨티그룹은 나머지 지분도 최대한 많이 확보해 한미은행 지분율을 최소 80%,최대 100%로 늘려나갈 계획이다.씨티그룹이 한미은행 지분을 100% 인수하는 데에는 27억 3000만달러(총 3조 1800억원)가 들어간다.국내 외국인 투자사상 최대액수다.그러나 씨티그룹이 80% 이상의 지분 확보에 실패할 경우,칼라일 지분 36.6%의 매입까지 무산된다는 내용이 계약조건에 포함돼 있어 이 부분이 최종 매각성사의 관건이 될 전망이다.씨티그룹측은 80% 이상 확보를 자신하고 있다. ●은행업계 전반의 지각변동 씨티그룹은 “씨티그룹의 한국 내 조직을 미국 이외 지역에서 가장 큰 조직 중 하나로 키워나갈 것”이라고 밝혔다.현재 8개 시중은행 중 총자산 규모(지난해 말 55조 7782억원) 7위인 한미은행과 12조 2544억원(2002년 말)의 씨티은행이 합쳐지면 외환은행을 제치고 총자산 70조원에 육박하는 국내 5위 은행그룹이 된다. 업계에서는 씨티그룹이 국내 카드사나 자산운용사의 인수에 적극 나설 것으로 보고 있다.카드영업에 탁월한 노하우를 갖고 있는 데다 한국의 부자고객을 상대로 영업을 확대하려면 자산운용을 도맡아 할 자회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지금까지 씨티은행의 영업기반은 트래블러스그룹,살로먼스미스바니 등 대형 금융사의 합병을 통해 확장돼 왔다. 조나단 라슨 씨티그룹 아시아·태평양 소매금융 담당 부사장은 “글로벌 프랜차이즈의 핵심인 카드부문에서 추가 인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LG경제연구원 조영무 선임연구원은 “은행·보험·증권을 모두 거느린 씨티그룹의 국내 진입은 금융권의 업종간 장벽을 허무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따라 금융기관 추가인수를 추진중인 국민·우리·하나 등 다른 은행들의 행보도 빨라지게 됐다.우리은행 이덕훈 행장은 이날 헤럴드경제와 인터뷰에서 “씨티그룹의 한미은행 인수를 계기로 외국 금융자본과 맞서기 위한 세력 불리기에 본격 착수할 방침”이라며 “만일 제일·외환은행 등이 매물로 나온다면 이를 인수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국민은행 김정태 행장과 하나은행 김승유 행장도 최근 추가 인수합병의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특히 이번 씨티그룹의 한국내 세력 확장은 HSBC(영국)나 스탠다드차타드은행(〃) 등 다른 외국계 은행도 자극할 것으로 보인다. ●“씨티+한미 시너지효과 2조원 이상” 삼성증권은 한미은행 합병으로 씨티그룹이 한국에서 최대 2조 2000억원의 시너지효과를 낼 것으로 추정했다.합병을 통한 ▲영업수익 2% 개선 ▲판매관리비 5% 절감 ▲예금금리 0.5%포인트 인하 등이 근거다. ‘한미은행’이라는 브랜드를 계속 쓸지에 대해서는 결정되지 않았다.업계에서는 두 가지 가능성에 주목한다.지금처럼 부자고객에 집중한다면 ‘씨티은행’으로 한미은행 225개 지점을 통합할 가능성이 높지만 서민들로 영업대상을 확대한다면 외국계 이미지를 약화시키기 위해 기존 이름을 그대로 쓸 수도 있기 때문이다.씨티그룹은 2001년 멕시코 최대은행인 바나멕스를 인수했을 때에는 브랜드를 유지했다. 한편 씨티은행의 한국 내 연착륙에 주요 변수가 될 한미은행 노조는 이날 명확한 반대입장을 나타냈다.노조 관계자는 “한미은행과 씨티은행의 조직 중복이 많고 씨티은행 인원만도 비정규직을 포함해 1000명이 넘어 구조조정이 불가피한 데다 씨티은행이 그동안 반노동자적인 행태를 보여왔다.”고 말했다.하영구 한미은행장은 “점포와 인력을 효율적으로 운영해 왔기 때문에 구조조정은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씨티그룹이 인수합병 후 구조조정에 워낙 노회해 경영권을 잡은 뒤에는 대규모 조직·인력 감축에 나설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김태균 김유영기자 windsea@˝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15) 한국의 마음으로 빚은 사발(상)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15) 한국의 마음으로 빚은 사발(상)

    양산 통도사 안 용화전(龍華殿) 앞 마당에는 돌로 만든 큼직한 그릇이 있다.봉발대(奉鉢臺)라 부르는 매우 귀한 그릇이다. 매표소를 지나 절 안으로 들어서면 아름드리 솔숲 사이로 두 갈래 길이 나온다.오른쪽 길은 걸어서 절에 오르도록 한 옛길이고,왼쪽 길은 자동차가 다니도록 새로 낸 길이다. 옛길을 따라 걸어서 일주문을 향한다.길 왼편 계곡으로 돌돌 맑은 물 흐르는 소리가 한낮의 고요를 씻고 있다.물 위엔 소나무 푸른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흰구름 몇 조각이 소나무 그림자 위로 지난다.소나무는 미동도 않는다.마른 낙엽 하나가 떠내려 오다가 파문을 일으키자 잠시 소나무 그림자도 흰구름도 함께 흔들린다.잠시 뒤 소나무는 고요한 그림자로 다시 돌아와 나그네를 달랜다. 용화전까지 왔다.용화전 안에 모셔져 있는 불상은 흰 빛깔이다.황금색의 다른 불상들과는 퍽 대조적이다.희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석가모니가 미륵에게 남긴 발우 형상화 그 불상은 미륵불이다.그리고 용화전이라는 그 전각의 용화(龍華)라는 말은 미륵신앙에서 예언하고 있는 신성한 장소를 뜻한다.미륵은 인간의 미래와 인연된 구원불이다.용화전 앞 마당에 있는 봉발대도 이 미륵불과 직접 관련된 종교적 상징물이다.미륵신앙,즉 석가모니불에 의하여 구원되지 못한 사람은 석가모니불 다음의 부처로 인간세계에 강림할 미륵불에 의하여 구원될 것이라는 오랜 역사를 먹고 자라온 신앙이다. 용화는 용화수(龍華樹)를 말한다.미래에 미륵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인간들에게 세 차례에 걸쳐 구원의 법문을 하게 될 자리를 뜻한다. 옛 한국인들은 현재의 불행과 고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미래의 예언자를 상정해 놓고 기다리는 신앙을 전통으로 간직해 왔다.그 구원자는 지금 도솔천에 머무르고 있는데,그 분을 미륵이라 여겼다.옛 사람들은 미륵이 장차 인간세상에 강림하면 어떤 방법으로 인간을 구원해야 할 것인지를 명상하는 모습을 만들어 놓고 미륵신앙을 키워왔는데,미륵이 미래 일을 생각하는 모습을 미륵반가사유상이라 불렀다. 이렇듯 미륵신앙은 한국인이 대를 물리면서 기다리고 있는 구세주다.삼국시대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니 서양인들,특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들의 구원신앙과 매우 유사한 신앙체계라 말할 수 있다. 옛 한국인들은 미륵을 기다리는 세 가지 의식을 신앙으로 표현해 왔다. 첫째는 미륵삼부경,증일아함경 같은 경전을 중심으로 기도하면서 신앙을 키우는 것이다. 둘째는 향목(香木)을 땅에다 묻어 놓고 미륵이 오면 선물하리라 여기며 기다렸다. 셋째는 경전에 기록된 바에 따라 석가모니가 사용하던 발우(鉢盂)가 미륵에게 전해짐으로써 인간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석가모니가 미륵에게 전해주기 위하여 남긴 발우를 형상화하여 모시고 있는 것이 통도사 봉발대다. 이같은 미륵신앙은 삼국통일의 혼란기인 후고구려,후백제 때 크게 일어났고,신라와 고려의 교체기와 고려 조선의 교체기에 민중들의 불안과 고통을 달래기 위해 크게 번창했다는 특징이 있으며,조선 말엽의 개항기와 일제시대에도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구원사상으로 자리잡아왔다. 현대사회에 와서도 핵의 위기와 불안,생태계의 교란과 생명사상의 혼돈,에너지와 식량부족의 두려움,치유가 힘든 각종 질병으로부터의 고통과 공포,기후변화의 심각성,전통을 생각하는 이들이 더러 있는 것 같다. 통도사 봉발대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형태의 조형물이다.유일함만큼이나 그 생김새와 그곳에 안치된 역사적 배경 또한 예사롭지 않다. 보물 제471호인 봉발대는 봉발(奉鉢),바리,바릿대를 모시고 있다는 뜻이므로,봉발대는 발우를 보셔둔 자리라고 할 수 있겠다.어떤 특별한 목적에 따라서 돌로 발우를 만들어서 모셔두고 경배하면서 미륵이 강림하시기를 기다려 온 종교적 상징물인 것이다.특별한 목적이란 미륵불에 의하여 구원됨으로써 영원히 살 수 있는 하늘나라에서 태어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다. ●봉발대는 1000년간 민중의 소망 응축한 걸작품 발우(鉢盂)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래된 승려들의 식기(食器)이면서 신성한 법물(法物)의 하나인데,산스크리트 파트라(patra)를 음역하여 발(鉢)이라는 새로운 글자를 만들었다.그런 다음 중국문화에서 그릇을 말하는 중국 고유의 글자인 그릇 우(盂)자를 덧붙여서 ‘발우’라는 말을 만들어 썼는데,이는 중국 문화가 외래 문화를 받아들여 중국화시키는 무서운 중화(中華)사상의 한 증거이기도 하다. 아무튼 통도사의 봉발대만큼 한국인의 역사와 정서,특히 민중들의 집단적인 소망과 시대의 표정을 한꺼번에 형상화시켜낸 조형물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고려 선종(宣宗,재위 1083∼1094)의 문화적 업적으로 평가되는 이 봉발대는 1000여년이라는 역사와 함께 이 땅의 주인이자 머슴으로 살아온 민중들의 간절한 소망인 농사의 풍년,자손의 번성과 건강,그리고 죄를 용서받고 하늘나라에 가서 영원한 삶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 응축되어 승화된 우리나라 민족 미술의 최고 걸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봉발대가 사찰 경내에 있다하여 불교라는 특정 종교의 상징물로만 국한하는 견해는 이 조형물이 지닌 역사성과 예술성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통도사는 이른바 미륵도량이 아닌데도 한국 유일의 이 석조물이 통도사에 모셔진 것은 통도사가 만법을 통달하여 일체 중생을 구원한다는 뜻을 지녔을 만큼 높은 격조를 지닌 사찰이어서 당대에 크게 풍미했던 미륵신앙을 국가 차원에서 끌어안은 것으로 보인다. ●남해안 사발 1450년 전후 日로 전래 봉발대의 봉발,즉 돌로 만들어진 이 발우는 뚜껑을 포함하여 높이가 1m,지름은 90cm가량인데,발우의 굽에는 별다른 장식도 없지만 빼어난 균형감을 보이고 있으며 매우 아름다운 곡선을 지녔다. 뚜껑을 제외하면 실제 발우 높이는 90cm인데,굽의 높이가 발우 전체 높이의 3분의1에 가깝다.그만큼 굽의 형태가 강조되고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돌 발우의 형태가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미륵신앙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니라 일본 다도(茶道) 역사에서 ‘미(美)의 종교’로까지 추앙받는 조선의 사발(砂鉢)인 ‘이도차완(井戶茶碗)’과의 관계 때문이다. 이도차완의 조형적 기원이 이 돌 발우와 어떤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새로운 문제가 제기되면서부터다. 문제의 이도차완이라는 사발은 14~15세기 조선시대에 경남 남해안에 인접한 어느 가마에서 그 지역 흙으로 만들어졌는데,1450년을 전후한 시기로부터 일본으로 흘러나간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정확한 이름이 없었으나 일본에 가서 ‘이도(井戶)’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정확하게 1587년부터 ‘이도’라는 이름으로 사용된 이 사발은 일본 중세사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일본의 최고 권력자들과 지배계층으로부터 열광적인 사랑을 받아 전설적인 미술품이 되었으며,그 중 하나인‘기자에몬이도’는 일본의 국보로까지 지정되어 특별한 보호를 받고 있다. 일본 역사에서 차문화를 종교적 차원으로까지 승화시킨 다도는 곧 일본의 정신사이기도 하다.특히 13~15세기의 가마쿠라막부,무로마치막부 시대의 정치사회적 위기를 극복하는 데 영향을 끼친 조선시대 서민들의 가옥 구조와 청빈한 승려들의 생활문화에 뒤이어,15~16세기의 일본 통일에 기여한 초암차(草庵茶)의 상징적 도구인 이도차완은 그 후 일본 다도역사에서 불멸의 아름다움을 지닌 찻사발로 칭송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차문화 전통이 결정한 10점의 국보 찻사발은 한국의 이도차완 한 점,중국의 천목차완 6점,일본의 라쿠차완 3점인데,아름다움으로는 첫째 이도차완,둘째 천목차완,셋째 라쿠차완 순으로 꼽고 있을 만큼 이도차완의 명성은 놀랍다. 약 200여점이 남아 있는 이 신비의 사발 이도차완과 양산 통도사 봉발은 과연 어떤 연관이 있을까?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15) 한국의 마음으로 빚은 사발(상)

    양산 통도사 안 용화전(龍華殿) 앞 마당에는 돌로 만든 큼직한 그릇이 있다.봉발대(奉鉢臺)라 부르는 매우 귀한 그릇이다. 매표소를 지나 절 안으로 들어서면 아름드리 솔숲 사이로 두 갈래 길이 나온다.오른쪽 길은 걸어서 절에 오르도록 한 옛길이고,왼쪽 길은 자동차가 다니도록 새로 낸 길이다. 옛길을 따라 걸어서 일주문을 향한다.길 왼편 계곡으로 돌돌 맑은 물 흐르는 소리가 한낮의 고요를 씻고 있다.물 위엔 소나무 푸른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흰구름 몇 조각이 소나무 그림자 위로 지난다.소나무는 미동도 않는다.마른 낙엽 하나가 떠내려 오다가 파문을 일으키자 잠시 소나무 그림자도 흰구름도 함께 흔들린다.잠시 뒤 소나무는 고요한 그림자로 다시 돌아와 나그네를 달랜다. 용화전까지 왔다.용화전 안에 모셔져 있는 불상은 흰 빛깔이다.황금색의 다른 불상들과는 퍽 대조적이다.희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석가모니가 미륵에게 남긴 발우 형상화 그 불상은 미륵불이다.그리고 용화전이라는 그 전각의 용화(龍華)라는 말은 미륵신앙에서 예언하고 있는 신성한 장소를 뜻한다.미륵은 인간의 미래와 인연된 구원불이다.용화전 앞 마당에 있는 봉발대도 이 미륵불과 직접 관련된 종교적 상징물이다.미륵신앙,즉 석가모니불에 의하여 구원되지 못한 사람은 석가모니불 다음의 부처로 인간세계에 강림할 미륵불에 의하여 구원될 것이라는 오랜 역사를 먹고 자라온 신앙이다. 용화는 용화수(龍華樹)를 말한다.미래에 미륵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인간들에게 세 차례에 걸쳐 구원의 법문을 하게 될 자리를 뜻한다. 옛 한국인들은 현재의 불행과 고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미래의 예언자를 상정해 놓고 기다리는 신앙을 전통으로 간직해 왔다.그 구원자는 지금 도솔천에 머무르고 있는데,그 분을 미륵이라 여겼다.옛 사람들은 미륵이 장차 인간세상에 강림하면 어떤 방법으로 인간을 구원해야 할 것인지를 명상하는 모습을 만들어 놓고 미륵신앙을 키워왔는데,미륵이 미래 일을 생각하는 모습을 미륵반가사유상이라 불렀다. 이렇듯 미륵신앙은 한국인이 대를 물리면서 기다리고 있는 구세주다.삼국시대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니 서양인들,특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들의 구원신앙과 매우 유사한 신앙체계라 말할 수 있다. 옛 한국인들은 미륵을 기다리는 세 가지 의식을 신앙으로 표현해 왔다. 첫째는 미륵삼부경,증일아함경 같은 경전을 중심으로 기도하면서 신앙을 키우는 것이다. 둘째는 향목(香木)을 땅에다 묻어 놓고 미륵이 오면 선물하리라 여기며 기다렸다. 셋째는 경전에 기록된 바에 따라 석가모니가 사용하던 발우(鉢盂)가 미륵에게 전해짐으로써 인간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석가모니가 미륵에게 전해주기 위하여 남긴 발우를 형상화하여 모시고 있는 것이 통도사 봉발대다. 이같은 미륵신앙은 삼국통일의 혼란기인 후고구려,후백제 때 크게 일어났고,신라와 고려의 교체기와 고려 조선의 교체기에 민중들의 불안과 고통을 달래기 위해 크게 번창했다는 특징이 있으며,조선 말엽의 개항기와 일제시대에도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구원사상으로 자리잡아왔다. 현대사회에 와서도 핵의 위기와 불안,생태계의 교란과 생명사상의 혼돈,에너지와 식량부족의 두려움,치유가 힘든 각종 질병으로부터의 고통과 공포,기후변화의 심각성,전통을 생각하는 이들이 더러 있는 것 같다. 통도사 봉발대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형태의 조형물이다.유일함만큼이나 그 생김새와 그곳에 안치된 역사적 배경 또한 예사롭지 않다. 보물 제471호인 봉발대는 봉발(奉鉢),바리,바릿대를 모시고 있다는 뜻이므로,봉발대는 발우를 보셔둔 자리라고 할 수 있겠다.어떤 특별한 목적에 따라서 돌로 발우를 만들어서 모셔두고 경배하면서 미륵이 강림하시기를 기다려 온 종교적 상징물인 것이다.특별한 목적이란 미륵불에 의하여 구원됨으로써 영원히 살 수 있는 하늘나라에서 태어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다. ●봉발대는 1000년간 민중의 소망 응축한 걸작품 발우(鉢盂)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래된 승려들의 식기(食器)이면서 신성한 법물(法物)의 하나인데,산스크리트 파트라(patra)를 음역하여 발(鉢)이라는 새로운 글자를 만들었다.그런 다음 중국문화에서 그릇을 말하는 중국 고유의 글자인 그릇 우(盂)자를 덧붙여서 ‘발우’라는 말을 만들어 썼는데,이는 중국 문화가 외래 문화를 받아들여 중국화시키는 무서운 중화(中華)사상의 한 증거이기도 하다. 아무튼 통도사의 봉발대만큼 한국인의 역사와 정서,특히 민중들의 집단적인 소망과 시대의 표정을 한꺼번에 형상화시켜낸 조형물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고려 선종(宣宗,재위 1083∼1094)의 문화적 업적으로 평가되는 이 봉발대는 1000여년이라는 역사와 함께 이 땅의 주인이자 머슴으로 살아온 민중들의 간절한 소망인 농사의 풍년,자손의 번성과 건강,그리고 죄를 용서받고 하늘나라에 가서 영원한 삶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 응축되어 승화된 우리나라 민족 미술의 최고 걸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봉발대가 사찰 경내에 있다하여 불교라는 특정 종교의 상징물로만 국한하는 견해는 이 조형물이 지닌 역사성과 예술성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통도사는 이른바 미륵도량이 아닌데도 한국 유일의 이 석조물이 통도사에 모셔진 것은 통도사가 만법을 통달하여 일체 중생을 구원한다는 뜻을 지녔을 만큼 높은 격조를 지닌 사찰이어서 당대에 크게 풍미했던 미륵신앙을 국가 차원에서 끌어안은 것으로 보인다. ●남해안 사발 1450년 전후 日로 전래 봉발대의 봉발,즉 돌로 만들어진 이 발우는 뚜껑을 포함하여 높이가 1m,지름은 90cm가량인데,발우의 굽에는 별다른 장식도 없지만 빼어난 균형감을 보이고 있으며 매우 아름다운 곡선을 지녔다. 뚜껑을 제외하면 실제 발우 높이는 90cm인데,굽의 높이가 발우 전체 높이의 3분의1에 가깝다.그만큼 굽의 형태가 강조되고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돌 발우의 형태가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미륵신앙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니라 일본 다도(茶道) 역사에서 ‘미(美)의 종교’로까지 추앙받는 조선의 사발(砂鉢)인 ‘이도차완(井戶茶碗)’과의 관계 때문이다. 이도차완의 조형적 기원이 이 돌 발우와 어떤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새로운 문제가 제기되면서부터다. 문제의 이도차완이라는 사발은 14~15세기 조선시대에 경남 남해안에 인접한 어느 가마에서 그 지역 흙으로 만들어졌는데,1450년을 전후한 시기로부터 일본으로 흘러나간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정확한 이름이 없었으나 일본에 가서 ‘이도(井戶)’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정확하게 1587년부터 ‘이도’라는 이름으로 사용된 이 사발은 일본 중세사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일본의 최고 권력자들과 지배계층으로부터 열광적인 사랑을 받아 전설적인 미술품이 되었으며,그 중 하나인‘기자에몬이도’는 일본의 국보로까지 지정되어 특별한 보호를 받고 있다. 일본 역사에서 차문화를 종교적 차원으로까지 승화시킨 다도는 곧 일본의 정신사이기도 하다.특히 13~15세기의 가마쿠라막부,무로마치막부 시대의 정치사회적 위기를 극복하는 데 영향을 끼친 조선시대 서민들의 가옥 구조와 청빈한 승려들의 생활문화에 뒤이어,15~16세기의 일본 통일에 기여한 초암차(草庵茶)의 상징적 도구인 이도차완은 그 후 일본 다도역사에서 불멸의 아름다움을 지닌 찻사발로 칭송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차문화 전통이 결정한 10점의 국보 찻사발은 한국의 이도차완 한 점,중국의 천목차완 6점,일본의 라쿠차완 3점인데,아름다움으로는 첫째 이도차완,둘째 천목차완,셋째 라쿠차완 순으로 꼽고 있을 만큼 이도차완의 명성은 놀랍다. 약 200여점이 남아 있는 이 신비의 사발 이도차완과 양산 통도사 봉발은 과연 어떤 연관이 있을까?˝
  • 김훈 세번째 장편 ‘현의 노래’

    장편 ‘칼의 노래’로 2001년 동인문학상,단편 ‘화장’으로 올해 이상문학상을 받으며 눈부신 발걸음을 계속하고 있는 작가 김훈(56)이 세번째 장편 ‘현의 노래’(생각의나무 펴냄)를 냈다. ‘칼’에서 ‘현’으로 나아간 작가가 섬세한 문학적 촉수를 뻗은 곳은 가야금의 예인 우륵.삼국사기와 구전설화를 바탕으로 치밀하게 사료를 훑은 작가는 한 역사적 인물에 특유의 상상력으로 호흡을 불어넣고 있다. 소설은 ‘소리’를 이루려는 일념 하나로 가야에서 신라로 나라까지 바꾸는 우륵의 삶을 큰 얼개로 삼아,소리를 통해 득도(得道)에 이르는 과정을 부각시키며 풀어진다.물론 우륵의 제자이자 ‘소리 벗’인 니문,가야의 무기 제조장 야로,진흥황 가야왕의 시녀 아라 등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을 불러들여 이야기 그물을 촘촘히 엮는다.그 속에서 작가는 세상사의 모든 것이 담긴 ‘소리’(우륵,니문)라는 원초적 감각과,그것의 울림판인 ‘쇠’(야로 父子)의 비유를 통해 삶의 의미와 현실을 투영한다. “소리는 제가끔의 길이 있다.늘 새로움으로 덧없는 것이고,덧없음으로 늘 새롭다.”(285쪽).죽음을 앞에 둔 우륵의 말에 기대어 자신의 생각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대목이다. 스타일리스트라 불리는 작가 특유의 문체는 ‘현의 노래’에서 빛을 발한다.골자만으로 이어지는 대사,빠른 사건 전개,묘사와 배치를 섞어 완급을 조절하는 수사로 읽는 이들을 강하게 빨아들인다.‘칼’에서 ‘현’으로 나아간 작가는 “악기가 통과해온 살육과 유혈의 시대를 생각하는 일은 참담했다.악기가 홀로 아름다울 수 없고,악기는 그 시대의 고난과 더불어 비로소 아름다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악기가 아름답고 무기가 추악한 것은 아니다.무기가 강력하고 악기가 허약한 것도 아니며,그 반대도 아닐 것이다.이 작품은 그 악기들 내면의 맹렬한 적막에 대해 쓴 것”이라고 말한다. 이종수기자˝
  • 미륵사지석탑서 통일신라 유물

    국보 제11호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복원하고 있는 국립문화재연구소는 탑의 2층 지붕받침돌에서 명문(銘文)이 새겨진 납석제 작은항아리(소호·小壺) 조각 2개 등을 발견했다고 18일 밝혔다. 항아리 조각은 가로·세로 5㎝ 정도로 항아리의 아가리(구연·口緣)부분으로 추정된다.명문은 ‘大伯士奉聖(대백사봉성)…’으로 읽을 수 있다.‘대백사’는 관직이나 인물·지명으로 보인다. 문화재연구소는 이 항아리에 씌어진 글씨가 당나라 서체가 수용된 이후의 필법인 것으로 보고 있다.항아리가 통일신라 시대에 사리항아리(사리소호·舍利小壺)나 뼈항아리(골호·骨壺)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한다.탑이나 건물 밑에 묻어 액을 막는 구실을 한 진단구(鎭壇具)로 쓰여졌을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점치고 있다.문화재연구소는 미륵사지 석탑이 백제 무왕(600∼641) 때 만들어진 만큼 납석제 사리항아리가 유행한 9세기에 개·보수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추가 연구를 해나가기로 했다. 한편 탑 내부에서는 고려 충숙왕 4년(1317)에 해당하는 ‘延祐四年(연우사년)’명문이 있는 기와조각과 정조 2년(1778) 이후 만들어진 조선시대 상평통보도 나왔다. 서동철기자 dcsuh@
  • [고시휴게실] 삼국시대 ‘공무원’ 이렇게 뽑았다

    ‘삼국시대’에는 관료사회를 귀족 등 특수계층이 차지하는 전형적인 계급사회였다.당시에는 지금과 비교하면 원시적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나름대로 선발의 원칙은 존재했다.‘천거제’와 ‘독서삼품과’가 대표적인 제도다. 삼국시대 전반기의 관료 채용방식은 ‘천거제’였다.신라,고구려가 이 제도를 시행했으며,왕은 외침 등의 국난을 맞으면 신하들에게 ‘현량(賢良)과 현자(賢子)를 천거하라.’고 명을 내리곤 했던 것으로 각종 문헌은 기록하고 있다. 중앙인사위원회 관계자는 “계급제를 바탕으로 유능한 인재를 발굴해 쓴 제도”라면서 추천방식은 참여 정부가 운영하는 ‘삼고초려제’와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고구려의 재상 을파소(乙巴素),달가(達賈),고노자(高奴子) 등이 천거제로 등용된 것으로 고구려 본기는 전한다. 이들은 단계적인 승진절차를 밟지 않고 일약 고위직에 올랐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신라의 경우도 삼국통일 과정,지배체제가 국왕 중심으로 바뀌면서 유교주의 통치이념을 갖춘 관료가 필요했다.그래서 생겨난 관료등용 제도가 화랑도와 국학이다. 이곳에서 골품제를 바탕으로 유능한 인재를 추천하는 ‘천거제’가 시행됐다.통일 전에는 주로 화랑도,통일 후에는 국학에서 유학을 배운 귀족들의 진출이 두드러졌다.무관보다 문관이 더 필요했다는 얘기다. 국학에는 진골과 6두품 자제들이 입학해서 9년 동안의 수학과정을 거쳤다.논어와 효경은 필수이고 예기,문선,춘추좌씨전 등을 배운 뒤 실력에 따라 ‘상품’‘중품’‘하품’으로 나눠져서 관직에 들어갔다. 이른바 ‘독서삼품과’라는 공무원 채용시험이다.실력이 압도적으로 뛰어나면 ‘초탁(超擢)’으로 등용됐다고 한다. 이런 과거제도는 중국에서 본떠 온 것이지만,신라의 독서삼품과는 중앙집권화가 되면서 신라 자체의 시대적 요구에 따라 생겨났다. 이들은 보통 17관등 가운데 10∼11관등에 채용됐다.진골 출신은 늘고 관직은 제한됐기 때문에 진골들도 선호했다.당시에는 관직을 받을 때 가문 등 출신 배경이 가장 기본적인 배경으로 작용했고,학업성적은 그 다음이었다. 신라 말기에 접어 들어 귀족들이 늘어나면서 등용도 한계에 부딪혔다.6두품 귀족계층에서 최치원 등 당나라 유학파가 늘었고,이후 중국을 유학한 귀족이 105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조덕현기자 hyoun@˝
  • 명품삼베 ‘안동포’ 인기

    윤달(양력 3월21일∼4월18일)을 앞두고 국산 삼베 안동포의 인기가 치솟고 있다. 17일 안동포를 판매하는 경북 안동시 임하농협에 따르면 ‘윤달에 수의(壽衣)를 마련하면 무병장수한다.’는 속설로 평소 하루 1∼2벌에 그치던 안동포 주문량이 최근 들어 10벌 정도로 늘었다.가격 등을 문의하는 전화도 하루 10여건에 이른다.이 때문에 임하면 금소리 안동포마을 주민들은 주문량을 제때 공급하기 위해 늦은 밤까지 작업하고 있다.이 마을에서는 100여가구가 전통적인 방법으로 삼베를 짜고 있다. 금소리 임휘종(57)이장은 “요즘 마을은 삼베 실을 뽑는 실틀 돌아가는 소리로 활기를 띠고 있다.”며 “모든 과정을 손으로 하다 보니 한 사람이 한 달에 한 필을 만들기도 힘들어 윤달을 앞두고 몰려드는 주문 물량을 대지 못하는 실정이다.”고 말했다.많이 찾는 안동포 일곱세는 1필(40자)에 72만원을 호가하고 고급품인 여덟세는 85만원,열세 이상은 200만원을 넘는다. 임하농협 직원 강효숙(38·여)씨는 “안동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열린 전국 베짜기 대회에서 안동사람이 1등을 차지한 뒤,그 명성을 이어 왔다.”며 “그동안 저가 삼베에 밀려 어려움을 겪는 안동포 생산농가들이 윤달 대목을 앞두고 모처럼 얼굴에 생기가 돌고 있다.”고 말했다. 안동 한찬규기자 cghan@˝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14)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법(하)

    혜소 스님은 금산사의 진표,화엄사의 연기 스님처럼 옛 백제 땅이 고향이다. 전주에서 최씨(崔氏) 가문의 자식으로 태어났는데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출가하였다.진표나 연기 스님 같이 백제 유민들의 뿌리 깊은 슬픔과 분노의 그림자를 밟으며 성장했기 때문에 그의 중생 구원 소망은 목숨을 건 구도행위로 실천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통의 바다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쳐 본 자만이 그곳을 건너는 법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혜소 스님의 짚신삼기는 곧 그의 독특한 수행법이 되었다.저녁만 되면 염불을 외우면서 짚신을 삼았다.한밤중이 되면 앉은 채로 잠깐 눈을 붙이고 새벽부터 다시 일을 계속 했다.밤을 새워 삼은 짚신을 짊어지고 길거리로 나간다.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한 삼거리나 장터 들머리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을 살폈다. 맨발이거나 짚신이 닳아서 너덜거리는 사람을 불러 세우고는 새 짚신을 신겨주었다.뜻밖에 짚신을 얻어 신게 된 사람들은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혜소 스님은 도리어 자신에게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도록 깨우쳐 주어서 고맙다며 절을 했다.짚신을 삼아 맨발로 다니는 사람에게 신겨주는 수행이 계속되자 이를 헐뜯는 사람도 생겼지만 격려하며 고마워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함께 짚신을 삼아서 길거리로 나와 신발 보시를 하는 이들도 있었고,다른 일로 스님을 도와주는 승려도 있었다. ●“수행 깨우쳐 줘 고맙다.” 되레 행인에 인사 큰 비가 오거나 눈보라 때문에 행인이 없는 날을 빼고는 거의 쉬는 날 없이 항상 그 자리에 앉아서 짚신을 신겨주는 스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평상심의 기쁨과 힘을 보다 선명하게 깨달아 갔다.평상심이 민중의 마음이며 부처의 마음임을 알아갔다. 기껏해야 짚신 몇 짝 삼아서 발 벗은 이에게 신겨주었다는 것이 아니라 발 벗고 사는 민중이 출가 승려를 가르치고 일깨워주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꾸밈없는 평상심이야말로 부처가 되는 길이며 민중은 평상심의 바다라는 것을 덤으로 얻었으니 수지맞은 것은 민중이 아니라 자신이라고 믿었다.참으로 신통한 수행법이 세상 가장 낮은 곳에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혜소 스님은 840년에 지금의 쌍계사 터에다 옥천사(玉泉寺)를 짓고 그만의 특유한 수행법을 다시 시작했다.그곳은 이미 의상의 제자인 삼법(三法)이 당나라에서 선종 불교를 이끌었던 혜능의 머리뼈를 가져다 묻은 터였다. 옥천사는 뒤에 정강왕이 쌍계사라고 바꿔 부르도록 했다.아무튼 혜소 스님의 수행처는 항상 민중들이 많이 모여서 사는 곳이었다.이는 마치 원효가 절이라는 곳에서 세속 한가운데로 수행처를 옮긴 것과도 유사했다. 소박하고 조촐한 성품이어서 언제나 대중 속에서 수행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았는데,이것 또한 원효가 근엄하고 조용한 절에서 지내는 것보다는 생로병사가 길거리에서 벌어지는 세속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글자를 모르는 이들에게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간단한 염불을 가르쳐 함께 소리치며 노래했던 모습을 닮아 있었다. 혜소는 쌍계사를 처소로 삼은 뒤부터 새로운 수행법으로 민중들을 만나기 시작했다.그가 새로 개발한 것은 범패라는 음악을 통하여 민중들의 고통을 덜어주자는 것이었다. 범패(梵唄)는 불교의 의식 음악이다.범음(梵音),어산(魚山),인도소리라고도 한다. 절에서 주로 재(齋)를 올릴 때 부르는 소리인데,가곡,판소리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3대 성악곡의 하나로 꼽힌다. 범패는 신라풍인 향풍(鄕風),중국의 당풍(唐風),당나라 이전 신라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고풍(古風:일본풍) 세 종류가 있는데,불교의식에 수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설 내용을 표현하지 않는다.심산유곡에서 들려오는 종소리 같아서 은은한 파도소리를 그리듯이 들린다.의젓하고 그윽한 맛이 있는가 하면 유장하고 심오한 맛도 느껴지는 소리다.사설이나 가사 내용보다는 몸 안에서 울려나오는 소리 그 자체를 더 중시하기 때문에,소리하는 사람의 심정이나 환경에 따라 다양하고 특이한 맛을 내게 된다.혜소는 가사 내용이 전혀 없는 범패를 흥얼거리면서 저잣거리를 거닐었다. 대개의 민중들은 가난의 고통에 빠져 신음했다. 한 번 가난에 빠지면 평생토록 좀체 그 늪을 빠져나오기 어려웠다.혜소는 그 민중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야만 진정한 수행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저자를 돌아다니면서 보고,듣고,느끼는 것 대부분이 민중들의 빈곤한 삶에서 찢겨나오는 고통에 짓눌린 신음소리와 세상을 향한 울분과 불평,원망과 저주가 서린 악담,신세타령,자학으로 뒤엉킨 비탄이었다. ●“욕설·원망대신 소리질러라.” 범패소리 전파 혜소는 그 신음소리가 사라지도록 발원했다.민중들의 깊고 무거운 가난과 차별의 슬픔과 병고의 두려움을 덜어주기 위한 방법을 찾았다. 토지를 넉넉히 장만해 주어서 가난을 벗어나도록 해줄 수도 없었다.집을 지어 주고,약을 짓고 치료를 도와 병마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도 없었다. 불안과 불만,원한과 저주에 찬 가슴 가슴들을 모두 씻어내기도 불가능한 일이었다.가난은 나라도 구제할 수 없는 인간 그 자체의 문제였다. 혜소는 범패 소리를 이용하여 마음의 번뇌를 가라앉히고,맑고 큰 우주 기운을 받아들여 정신세계를 비우는 불교 수행 방법을 세속인들에게 응용해보기로 했다.범패가 사설이나 가사 내용을 표현하는 노래가 아니라는 데 착안한 것이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온갖 움직임과 감정을 호흡으로 내뿜고 빨아들이는 운동을 통하여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임을 이용해보자는 것이었다. 혜소는 민중들에게 범패를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었다.범패 형식을 빌려서 마음 속의 온갖 감정들을 쏟아내고,녹여내고,태워서 자신의 감정에 짓눌리고 억압되어 고통받지 않게 해주자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우선 마음껏 큰소리를 외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민중들은 슬퍼도 큰소리로 울지 못했고,기쁜 일이 있어서 큰소리내어 웃기도 쉽지 않았다. 세상이 온통 억압 구조로 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농사짓는 민중의 입에서는 곧잘 세상을 향한 저주와 신세타령이 터져 나온다.농사일을 하다가 허리를 펴면서도 세상을 원망하고 저주했다.논이며 밭이랑에서는 물론 땔감을 장만하거나 길을 걸으면서도 입에서는 욕설과 원망이 떨어지지 않는다.길쌈하는 자리거나 빨래터 아낙들도 다르지 않았다. 혜소는 그런 민중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욕설과 원망 대신 크게 소리를 지르도록 가르쳤다.큰소리,작은 소리 가리지 말고 내키는 대로 소리를 질러보라고 시켰다.내 소중한 육신 수고롭게 움직여서 먹이 장만하고,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인데 왜 남을 욕하고 원망하며 저주하느냐고 타일렀다. 욕설과 원망과 저주는 결국 나 자신의 정신을 병들게 하고,업장이 되며,삶을 추악하게 만드는 어리석음일 뿐이라며 쓸어 안고 울며 함께 소리를 질렀다.욕하는 대신 염불하고,노동의 고통 때문에 신음소리를 내기보다는 그냥 아무렇게나 소리를 내지르면 고통이 훨씬 가벼워지고 정신이 맑아진다는 것을 느껴보도록 이끌었다.농민들은 혜소의 말이 맞다는 것을 금방 느꼈다.실제로 욕설을 지껄이거나 신음소리로 끙끙 앓기보다는 큰소리 몇 번 내지르고 나니까 훨씬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을 느꼈다.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제 몸뚱아리 수고롭게 움직여서 일하는 것도 억울한데,남 원망하고 저주하여 마음에 병 만들어 시달리면 나 자신만 손해라는 지극히 단순한 논리처럼 보이는 이 새로운 존재방식이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 것이다. 그때부터 농민들의 입에서는 욕설과 원망 대신 듣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다소 기이하고 높고 낮은 소리,길고 짧은 소리들이 울려나오기 시작했다. 한 사람 입에서 시작된 그 소리는 한 집을 즐겁게 하고,한 집안의 소리는 이웃과 동네의 기쁨으로 커져갔다. ●쌍계사서 찻잎으로 약 만드는 법도 가르쳐 참으로 끝없는 사랑이었다.아무런 가사나 내용도 없이 앉고,일어서고,허리를 굽히고 펼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터져나오는 기이한 소리,노래도 아니고 울음도 아니면서 듣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움직이는 신이한 소리였다. 그런 다음 혜소는 쌍계사 주위에다 차나무를 심어 가꾸면서 찻잎으로 차약(茶藥)을 만들어 먹는 법을 가르쳤다.병들어도 약 한 첩 먹을 수 없는 민중들에게 차나무를 심어 그 잎으로 약을 만들어 먹는 법을 가르친 것이다.그래서 하동 쌍계사가 우리나라 차문화의 고향이 된 것이다. 이렇듯 민중에게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법을 가르치던 혜소스님은 850년 76세로 입적했다.헌강왕이 진감(眞鑑)이라 시호를 내리고,그 뒤를 이은 진성여왕이 대공탑을 준공하였다.아,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법은 고통받는 이와 함께 사는 것임을 온몸으로 실천해 보인 혜소 진감선사여.˝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14)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법(하)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14)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법(하)

    혜소 스님은 금산사의 진표,화엄사의 연기 스님처럼 옛 백제 땅이 고향이다. 전주에서 최씨(崔氏) 가문의 자식으로 태어났는데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출가하였다.진표나 연기 스님 같이 백제 유민들의 뿌리 깊은 슬픔과 분노의 그림자를 밟으며 성장했기 때문에 그의 중생 구원 소망은 목숨을 건 구도행위로 실천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통의 바다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쳐 본 자만이 그곳을 건너는 법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혜소 스님의 짚신삼기는 곧 그의 독특한 수행법이 되었다.저녁만 되면 염불을 외우면서 짚신을 삼았다.한밤중이 되면 앉은 채로 잠깐 눈을 붙이고 새벽부터 다시 일을 계속 했다.밤을 새워 삼은 짚신을 짊어지고 길거리로 나간다.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한 삼거리나 장터 들머리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을 살폈다. 맨발이거나 짚신이 닳아서 너덜거리는 사람을 불러 세우고는 새 짚신을 신겨주었다.뜻밖에 짚신을 얻어 신게 된 사람들은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혜소 스님은 도리어 자신에게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도록 깨우쳐 주어서 고맙다며 절을 했다.짚신을 삼아 맨발로 다니는 사람에게 신겨주는 수행이 계속되자 이를 헐뜯는 사람도 생겼지만 격려하며 고마워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함께 짚신을 삼아서 길거리로 나와 신발 보시를 하는 이들도 있었고,다른 일로 스님을 도와주는 승려도 있었다. ●“수행 깨우쳐 줘 고맙다.” 되레 행인에 인사 큰 비가 오거나 눈보라 때문에 행인이 없는 날을 빼고는 거의 쉬는 날 없이 항상 그 자리에 앉아서 짚신을 신겨주는 스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평상심의 기쁨과 힘을 보다 선명하게 깨달아 갔다.평상심이 민중의 마음이며 부처의 마음임을 알아갔다. 기껏해야 짚신 몇 짝 삼아서 발 벗은 이에게 신겨주었다는 것이 아니라 발 벗고 사는 민중이 출가 승려를 가르치고 일깨워주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꾸밈없는 평상심이야말로 부처가 되는 길이며 민중은 평상심의 바다라는 것을 덤으로 얻었으니 수지맞은 것은 민중이 아니라 자신이라고 믿었다.참으로 신통한 수행법이 세상 가장 낮은 곳에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혜소 스님은 840년에 지금의 쌍계사 터에다 옥천사(玉泉寺)를 짓고 그만의 특유한 수행법을 다시 시작했다.그곳은 이미 의상의 제자인 삼법(三法)이 당나라에서 선종 불교를 이끌었던 혜능의 머리뼈를 가져다 묻은 터였다. 옥천사는 뒤에 정강왕이 쌍계사라고 바꿔 부르도록 했다.아무튼 혜소 스님의 수행처는 항상 민중들이 많이 모여서 사는 곳이었다.이는 마치 원효가 절이라는 곳에서 세속 한가운데로 수행처를 옮긴 것과도 유사했다. 소박하고 조촐한 성품이어서 언제나 대중 속에서 수행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았는데,이것 또한 원효가 근엄하고 조용한 절에서 지내는 것보다는 생로병사가 길거리에서 벌어지는 세속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글자를 모르는 이들에게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간단한 염불을 가르쳐 함께 소리치며 노래했던 모습을 닮아 있었다. 혜소는 쌍계사를 처소로 삼은 뒤부터 새로운 수행법으로 민중들을 만나기 시작했다.그가 새로 개발한 것은 범패라는 음악을 통하여 민중들의 고통을 덜어주자는 것이었다. 범패(梵唄)는 불교의 의식 음악이다.범음(梵音),어산(魚山),인도소리라고도 한다. 절에서 주로 재(齋)를 올릴 때 부르는 소리인데,가곡,판소리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3대 성악곡의 하나로 꼽힌다. 범패는 신라풍인 향풍(鄕風),중국의 당풍(唐風),당나라 이전 신라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고풍(古風:일본풍) 세 종류가 있는데,불교의식에 수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설 내용을 표현하지 않는다.심산유곡에서 들려오는 종소리 같아서 은은한 파도소리를 그리듯이 들린다.의젓하고 그윽한 맛이 있는가 하면 유장하고 심오한 맛도 느껴지는 소리다.사설이나 가사 내용보다는 몸 안에서 울려나오는 소리 그 자체를 더 중시하기 때문에,소리하는 사람의 심정이나 환경에 따라 다양하고 특이한 맛을 내게 된다.혜소는 가사 내용이 전혀 없는 범패를 흥얼거리면서 저잣거리를 거닐었다. 대개의 민중들은 가난의 고통에 빠져 신음했다. 한 번 가난에 빠지면 평생토록 좀체 그 늪을 빠져나오기 어려웠다.혜소는 그 민중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야만 진정한 수행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저자를 돌아다니면서 보고,듣고,느끼는 것 대부분이 민중들의 빈곤한 삶에서 찢겨나오는 고통에 짓눌린 신음소리와 세상을 향한 울분과 불평,원망과 저주가 서린 악담,신세타령,자학으로 뒤엉킨 비탄이었다. ●“욕설·원망대신 소리질러라.” 범패소리 전파 혜소는 그 신음소리가 사라지도록 발원했다.민중들의 깊고 무거운 가난과 차별의 슬픔과 병고의 두려움을 덜어주기 위한 방법을 찾았다. 토지를 넉넉히 장만해 주어서 가난을 벗어나도록 해줄 수도 없었다.집을 지어 주고,약을 짓고 치료를 도와 병마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도 없었다. 불안과 불만,원한과 저주에 찬 가슴 가슴들을 모두 씻어내기도 불가능한 일이었다.가난은 나라도 구제할 수 없는 인간 그 자체의 문제였다. 혜소는 범패 소리를 이용하여 마음의 번뇌를 가라앉히고,맑고 큰 우주 기운을 받아들여 정신세계를 비우는 불교 수행 방법을 세속인들에게 응용해보기로 했다.범패가 사설이나 가사 내용을 표현하는 노래가 아니라는 데 착안한 것이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온갖 움직임과 감정을 호흡으로 내뿜고 빨아들이는 운동을 통하여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임을 이용해보자는 것이었다. 혜소는 민중들에게 범패를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었다.범패 형식을 빌려서 마음 속의 온갖 감정들을 쏟아내고,녹여내고,태워서 자신의 감정에 짓눌리고 억압되어 고통받지 않게 해주자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우선 마음껏 큰소리를 외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민중들은 슬퍼도 큰소리로 울지 못했고,기쁜 일이 있어서 큰소리내어 웃기도 쉽지 않았다. 세상이 온통 억압 구조로 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농사짓는 민중의 입에서는 곧잘 세상을 향한 저주와 신세타령이 터져 나온다.농사일을 하다가 허리를 펴면서도 세상을 원망하고 저주했다.논이며 밭이랑에서는 물론 땔감을 장만하거나 길을 걸으면서도 입에서는 욕설과 원망이 떨어지지 않는다.길쌈하는 자리거나 빨래터 아낙들도 다르지 않았다. 혜소는 그런 민중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욕설과 원망 대신 크게 소리를 지르도록 가르쳤다.큰소리,작은 소리 가리지 말고 내키는 대로 소리를 질러보라고 시켰다.내 소중한 육신 수고롭게 움직여서 먹이 장만하고,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인데 왜 남을 욕하고 원망하며 저주하느냐고 타일렀다. 욕설과 원망과 저주는 결국 나 자신의 정신을 병들게 하고,업장이 되며,삶을 추악하게 만드는 어리석음일 뿐이라며 쓸어 안고 울며 함께 소리를 질렀다.욕하는 대신 염불하고,노동의 고통 때문에 신음소리를 내기보다는 그냥 아무렇게나 소리를 내지르면 고통이 훨씬 가벼워지고 정신이 맑아진다는 것을 느껴보도록 이끌었다.농민들은 혜소의 말이 맞다는 것을 금방 느꼈다.실제로 욕설을 지껄이거나 신음소리로 끙끙 앓기보다는 큰소리 몇 번 내지르고 나니까 훨씬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을 느꼈다.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제 몸뚱아리 수고롭게 움직여서 일하는 것도 억울한데,남 원망하고 저주하여 마음에 병 만들어 시달리면 나 자신만 손해라는 지극히 단순한 논리처럼 보이는 이 새로운 존재방식이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 것이다. 그때부터 농민들의 입에서는 욕설과 원망 대신 듣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다소 기이하고 높고 낮은 소리,길고 짧은 소리들이 울려나오기 시작했다. 한 사람 입에서 시작된 그 소리는 한 집을 즐겁게 하고,한 집안의 소리는 이웃과 동네의 기쁨으로 커져갔다. ●쌍계사서 찻잎으로 약 만드는 법도 가르쳐 참으로 끝없는 사랑이었다.아무런 가사나 내용도 없이 앉고,일어서고,허리를 굽히고 펼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터져나오는 기이한 소리,노래도 아니고 울음도 아니면서 듣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움직이는 신이한 소리였다. 그런 다음 혜소는 쌍계사 주위에다 차나무를 심어 가꾸면서 찻잎으로 차약(茶藥)을 만들어 먹는 법을 가르쳤다.병들어도 약 한 첩 먹을 수 없는 민중들에게 차나무를 심어 그 잎으로 약을 만들어 먹는 법을 가르친 것이다.그래서 하동 쌍계사가 우리나라 차문화의 고향이 된 것이다. 이렇듯 민중에게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법을 가르치던 혜소스님은 850년 76세로 입적했다.헌강왕이 진감(眞鑑)이라 시호를 내리고,그 뒤를 이은 진성여왕이 대공탑을 준공하였다.아,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법은 고통받는 이와 함께 사는 것임을 온몸으로 실천해 보인 혜소 진감선사여.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13)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법(상)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13)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법(상)

    누군들 고통속에 머무르고 싶은 이가 있겠는가. 지금 이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나 고요한 평온을 누리고 싶지 않은 이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게 쉽지 않느니,아주 드물게는 이대로 영원했으면 싶을 때도 있었지만, 오,그때는 순간으로 짧은 것. 비록 짧게였지만 깊게 느껴졌던 그 순간을 맛본 사람은 자주 꿈을 꾸느니.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것에 대하여 꿈 꾸느니. 오늘은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법을 배우러 또 길을 떠난다.길은 경남 하동 섬진강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푸른 전설과 향기짙은 신화의 몸 위로 흘러간다.언제 걸어도 새로운 길이다.길에서 만난 바람에게 묻는다.하동의 옛 일과 옛 사람을 묻는다.옛 사람 가운데서 노랫말 없는 노래를 소리로 부르면서 근심걱정 많은 세상 사람들에게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법을 가르쳤던 쌍계사 혜소(慧昭,774∼850) 스님 소식을 묻는다. 그 스님이 말했던가,노래했던가.노래한다는 것은 뭍 새들 우는 소리,뭍 벌레들 우는 소리,바람소리 물소리 천둥소리 빗소리,아 서리내리는 소리 속으로,숨어 흐느껴 우는 외로운 사람 울음소리 속으로,입으로 소리내지 않고 마음으로 우는 사람 마음속으로 들어가 한몸이 되는 것이라고.가서 자연이 되는 것이라고.그리하여 모든 것과 함께 가는 것이라고.그것이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법이라고.그 스님은 쌍계사에 계실거라고 바람이 말했다.어쩌면 보고도 못 알아 볼지 모른다는 야릇한 말을 나그네 뒤에다 던지고는 숲으로 들어가버렸다. 하동 옛일이 아름답지만은 않았다고 송림(松林) 바람이 전해준다. ●자연에 동화돼야 고통 사라져 하동은 신라와 백제가 서로 뺏고 빼앗기는 두 나라의 변방이면서도 서울 못지않은 전략거점이었다.진주도 한동안 백제 땅이었다.신라에 진주를 내주고 하동으로 물러선 백제는 더 후퇴할 수가 없었다. 신라는 하동을 넘고 섬진강을 건너야 호남평야를 얻고 중국 가는 편리한 뱃길을 잡을 수 있었다.두 나라의 전투는 하동 땅 산과 들에서 자연 오래 끌고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젊은 사내들의 목숨이 서로 겨눈 창 끝에서,화살 끝에서,칼날 위에서 이슬같이 스러져 갔다.그 젊은 영혼들의 산화(散花)가 다시 이승으로 돌아와 지리산 철쭉꽃으로,차꽃으로 피고 졌다. 산화란 비록 꽃은 피었어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꽃이라는 식물학적 정의도 있으려니와 절집의 재식(齋式)에서 범패(梵唄)를 부르며 꽃을 뿌리는 일을 두고서도 일컫는 말이니,쌍계사에 살았던 저 혜소 스님이 범패를 세속으로 모셔 내려와서 민중으로 하여금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한가지 지혜로 응용하셨으니,하동의 옛일이야말로 이 땅의 향기 짙은 신화가 아니겠는가. 두 나라 전쟁의 참화가 오래 절규했던 하동 땅이었으므로 이 모진 아픔을 치유해 사람이 이웃하여 살게 하기 위해서는 비범한 사랑의 힘이 필요했을 것이다.그 사랑으로 두루 평온을 숨쉬는 공존의 미학이 생겨나도록 하동 사람들이 빌었을 것이다. ●영·호남이 하나된 공존의 미학 `花開洞天’ 기원은 마침내 이루어졌다.하동 말씨에 전라도 사투리의 억양이 자리잡았고,하동의 음식 맛에 전라도의 간과 향기가 배어 있음이 그것이다.둘이면서 하나가 된 공존의 미학을 완성시킨 전형적인 문화가 탄생한 것이다. 또한 그 문화는 전라도와 경상도 경계를 이루며 흐르는 섬진강 강물을 나눠 먹고 사는 사람들의 생활로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한 어머니 젖을 나눠먹고 자란 형제들인 것이다. 이같은 하동의 옛일은 이미 화엄사상이 만개할 토양이 되었고,화엄이 꽃 피는 화개동천(花開洞天)을 만들었다. 나그네는 송림을 지나 키낮은 차나무들의 높은 푸름을 쓸어안아 보면서 섬진강 기슭으로 난 그림 같은 길을 따라 걸어오른다.화개(花開)다.화개장터다. 화개 골짜기는 유난히도 절이 많았다.시대마다 예사로 쉰개가 넘는 절들이 화개천 물소리를 나누어 들으면서 이쪽저쪽 산자락마다 들어 앉아서는 고통의 바다 건너는 법을 묻고,대답하면서 한 천년을 좋이 살았다.절이 그토록 많았던 이유가 무엇일까? 어쩌면 하동 역사 속에 아프게 저며 넣어진 젊은 목숨들이 이승에 살아남은 자들을 향하여 왜 사느냐고 물어온 화두를 풀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그랬을 것이다.적어도 하동땅에서 삶을 곧추세우려는 이들이라면 한번쯤은 옛사람들이 던져 놓은 저 생사(生死)화두를 들고 밤을 지새워봐야 옳다. 참 무겁고 힘에 버거운 명제다.이같은 명제를 신명나게 풀어서 세상 사람들의 일상사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세상 사는 지혜를 일러준 한 사람을 만나보면 세상살이가 지겹고,고통스럽고,후회스럽지만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나그네는 성큼 쌍계사 일주문을 들어선다.아직은 겨울의 품안이라 손이 시리다. 대웅전 오르는 돌계단 아래서 나그네가 물어 물어 찾아 온 혜소 스님의 그림자를 만났다. 국보 제 47호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다.신라 사람 고운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손수 썼다. 나그네가 찾는 혜소스님이 진감선사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분이다. 838년쯤엔가 민애왕이 혜소스님을 만나고 싶다는 간곡한 청을 넣었으나 그는 승려가 권력자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이유를 들어 완곡히 사양한 일이 있었다.왕은 나라를 생각하면 되고,승려는 그 나라의 백성을 생각하면 된다고 했다.백성을 생각하는 것은 하늘을 생각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백성들의 나라이며,백성은 왕이 낳은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내신 것이니 왕은 백성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왕은 백성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야 정치하는 왕이 추구하는 것은 사람을 다스리는 일이지만 승려는 그 사람들을 섬겨야 하므로 비록 만난다 하더라도 아무 도움될 일이 없다고 했다. 인물 잘나고,좋은 옷으로 몸을 치장했으며,정치와 권세에 도움되는 학식과 경험을 두루 갖추어 왕에게 도움되는 사람은 세속에서 찾는 것이 옳다는 말도 했다. 민애왕은 존경심이 우러나서 존경의 뜻으로 사신을 보내면서 혜조(慧照)라는 법명을 내렸다. 지혜의 빛이 세상을 환하게 비춘다는 지극한 존경심을 담은 이름이었다. 이름을 가져온 사신은 민애왕의 간곡한 청을 다시 전했다.경주까지 한 번만 다녀가시라는 부탁이었다.그래도 응하지 않았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민애왕이 내린 이름의 비칠 조(照)를 부를 소(昭)로 고쳐버렸다.이 시대를 사는 스님들이 새기고 또 새겨봐야 할 옛일이다. 그는 고통받는 민중을 구원할 수 있게 되기를 목표로 정하고 수행을 시작했다.하지만 민중의 고통은 바다같이 넓고 커서 어떻게 하는 것이 구원이 될지 그것을 아는 것이 더 급했다. 민중을 구원한다는 일이 자칫 화려한 관념적 수사에 그쳐버리고 실제로는 민중에게 고통을 더하는 짓이 되기 쉽다는 것을 깨닫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중 속으로 들어가서 그 자신이 민중으로 살아가야만 민중의 고통을 절절하게 느끼게 되는 점이었다.깨달아야만 실천할 수 있는 것.그러자면 평상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나와 민중을 둘로 양립시켜서는 안 된다.하나가 되어야만 한다.그래야 하는 일이 즐겁고,즐거워야만 오래 계속할 수 있다.그는 자신이 큰힘 들이지 않고 즐겁게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헐벗고 굶주리는 고통이 가장 흔하고 큰 것이기는 하지만 남에게 줄 옷과 밥을 마련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능력으로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계속하기란 불가능하고,어려운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자칫 자신을 자랑하게 되기 쉽다는 것도 알았다. 오랜 궁리 끝에 일감을 찾아냈다.몸이 불편하거나 가난하여 신발을 신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짚신을 삼아서 신겨주기로 했다. 짚신 삼는 솜씨는 자신도 갖고 있었다.짚을 장만하는 데는 큰돈 들이지 않고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짚을 구해 잘 손질하여 일을 시작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다 보니 저절로 입에서 염불이 흘러나왔다.굳이 염불이라 할 것도 없었다.그냥 좋으니까 흥얼흥얼거리는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13)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법(상)

    누군들 고통속에 머무르고 싶은 이가 있겠는가. 지금 이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나 고요한 평온을 누리고 싶지 않은 이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게 쉽지 않느니,아주 드물게는 이대로 영원했으면 싶을 때도 있었지만, 오,그때는 순간으로 짧은 것. 비록 짧게였지만 깊게 느껴졌던 그 순간을 맛본 사람은 자주 꿈을 꾸느니.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것에 대하여 꿈 꾸느니. 오늘은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법을 배우러 또 길을 떠난다.길은 경남 하동 섬진강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푸른 전설과 향기짙은 신화의 몸 위로 흘러간다.언제 걸어도 새로운 길이다.길에서 만난 바람에게 묻는다.하동의 옛 일과 옛 사람을 묻는다.옛 사람 가운데서 노랫말 없는 노래를 소리로 부르면서 근심걱정 많은 세상 사람들에게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법을 가르쳤던 쌍계사 혜소(慧昭,774∼850) 스님 소식을 묻는다. 그 스님이 말했던가,노래했던가.노래한다는 것은 뭍 새들 우는 소리,뭍 벌레들 우는 소리,바람소리 물소리 천둥소리 빗소리,아 서리내리는 소리 속으로,숨어 흐느껴 우는 외로운 사람 울음소리 속으로,입으로 소리내지 않고 마음으로 우는 사람 마음속으로 들어가 한몸이 되는 것이라고.가서 자연이 되는 것이라고.그리하여 모든 것과 함께 가는 것이라고.그것이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법이라고.그 스님은 쌍계사에 계실거라고 바람이 말했다.어쩌면 보고도 못 알아 볼지 모른다는 야릇한 말을 나그네 뒤에다 던지고는 숲으로 들어가버렸다. 하동 옛일이 아름답지만은 않았다고 송림(松林) 바람이 전해준다. ●자연에 동화돼야 고통 사라져 하동은 신라와 백제가 서로 뺏고 빼앗기는 두 나라의 변방이면서도 서울 못지않은 전략거점이었다.진주도 한동안 백제 땅이었다.신라에 진주를 내주고 하동으로 물러선 백제는 더 후퇴할 수가 없었다. 신라는 하동을 넘고 섬진강을 건너야 호남평야를 얻고 중국 가는 편리한 뱃길을 잡을 수 있었다.두 나라의 전투는 하동 땅 산과 들에서 자연 오래 끌고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젊은 사내들의 목숨이 서로 겨눈 창 끝에서,화살 끝에서,칼날 위에서 이슬같이 스러져 갔다.그 젊은 영혼들의 산화(散花)가 다시 이승으로 돌아와 지리산 철쭉꽃으로,차꽃으로 피고 졌다. 산화란 비록 꽃은 피었어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꽃이라는 식물학적 정의도 있으려니와 절집의 재식(齋式)에서 범패(梵唄)를 부르며 꽃을 뿌리는 일을 두고서도 일컫는 말이니,쌍계사에 살았던 저 혜소 스님이 범패를 세속으로 모셔 내려와서 민중으로 하여금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한가지 지혜로 응용하셨으니,하동의 옛일이야말로 이 땅의 향기 짙은 신화가 아니겠는가. 두 나라 전쟁의 참화가 오래 절규했던 하동 땅이었으므로 이 모진 아픔을 치유해 사람이 이웃하여 살게 하기 위해서는 비범한 사랑의 힘이 필요했을 것이다.그 사랑으로 두루 평온을 숨쉬는 공존의 미학이 생겨나도록 하동 사람들이 빌었을 것이다. ●영·호남이 하나된 공존의 미학 `花開洞天’ 기원은 마침내 이루어졌다.하동 말씨에 전라도 사투리의 억양이 자리잡았고,하동의 음식 맛에 전라도의 간과 향기가 배어 있음이 그것이다.둘이면서 하나가 된 공존의 미학을 완성시킨 전형적인 문화가 탄생한 것이다. 또한 그 문화는 전라도와 경상도 경계를 이루며 흐르는 섬진강 강물을 나눠 먹고 사는 사람들의 생활로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한 어머니 젖을 나눠먹고 자란 형제들인 것이다. 이같은 하동의 옛일은 이미 화엄사상이 만개할 토양이 되었고,화엄이 꽃 피는 화개동천(花開洞天)을 만들었다. 나그네는 송림을 지나 키낮은 차나무들의 높은 푸름을 쓸어안아 보면서 섬진강 기슭으로 난 그림 같은 길을 따라 걸어오른다.화개(花開)다.화개장터다. 화개 골짜기는 유난히도 절이 많았다.시대마다 예사로 쉰개가 넘는 절들이 화개천 물소리를 나누어 들으면서 이쪽저쪽 산자락마다 들어 앉아서는 고통의 바다 건너는 법을 묻고,대답하면서 한 천년을 좋이 살았다.절이 그토록 많았던 이유가 무엇일까? 어쩌면 하동 역사 속에 아프게 저며 넣어진 젊은 목숨들이 이승에 살아남은 자들을 향하여 왜 사느냐고 물어온 화두를 풀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그랬을 것이다.적어도 하동땅에서 삶을 곧추세우려는 이들이라면 한번쯤은 옛사람들이 던져 놓은 저 생사(生死)화두를 들고 밤을 지새워봐야 옳다. 참 무겁고 힘에 버거운 명제다.이같은 명제를 신명나게 풀어서 세상 사람들의 일상사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세상 사는 지혜를 일러준 한 사람을 만나보면 세상살이가 지겹고,고통스럽고,후회스럽지만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나그네는 성큼 쌍계사 일주문을 들어선다.아직은 겨울의 품안이라 손이 시리다. 대웅전 오르는 돌계단 아래서 나그네가 물어 물어 찾아 온 혜소 스님의 그림자를 만났다. 국보 제 47호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다.신라 사람 고운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손수 썼다. 나그네가 찾는 혜소스님이 진감선사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분이다. 838년쯤엔가 민애왕이 혜소스님을 만나고 싶다는 간곡한 청을 넣었으나 그는 승려가 권력자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이유를 들어 완곡히 사양한 일이 있었다.왕은 나라를 생각하면 되고,승려는 그 나라의 백성을 생각하면 된다고 했다.백성을 생각하는 것은 하늘을 생각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백성들의 나라이며,백성은 왕이 낳은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내신 것이니 왕은 백성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왕은 백성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야 정치하는 왕이 추구하는 것은 사람을 다스리는 일이지만 승려는 그 사람들을 섬겨야 하므로 비록 만난다 하더라도 아무 도움될 일이 없다고 했다. 인물 잘나고,좋은 옷으로 몸을 치장했으며,정치와 권세에 도움되는 학식과 경험을 두루 갖추어 왕에게 도움되는 사람은 세속에서 찾는 것이 옳다는 말도 했다. 민애왕은 존경심이 우러나서 존경의 뜻으로 사신을 보내면서 혜조(慧照)라는 법명을 내렸다. 지혜의 빛이 세상을 환하게 비춘다는 지극한 존경심을 담은 이름이었다. 이름을 가져온 사신은 민애왕의 간곡한 청을 다시 전했다.경주까지 한 번만 다녀가시라는 부탁이었다.그래도 응하지 않았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민애왕이 내린 이름의 비칠 조(照)를 부를 소(昭)로 고쳐버렸다.이 시대를 사는 스님들이 새기고 또 새겨봐야 할 옛일이다. 그는 고통받는 민중을 구원할 수 있게 되기를 목표로 정하고 수행을 시작했다.하지만 민중의 고통은 바다같이 넓고 커서 어떻게 하는 것이 구원이 될지 그것을 아는 것이 더 급했다. 민중을 구원한다는 일이 자칫 화려한 관념적 수사에 그쳐버리고 실제로는 민중에게 고통을 더하는 짓이 되기 쉽다는 것을 깨닫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중 속으로 들어가서 그 자신이 민중으로 살아가야만 민중의 고통을 절절하게 느끼게 되는 점이었다.깨달아야만 실천할 수 있는 것.그러자면 평상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나와 민중을 둘로 양립시켜서는 안 된다.하나가 되어야만 한다.그래야 하는 일이 즐겁고,즐거워야만 오래 계속할 수 있다.그는 자신이 큰힘 들이지 않고 즐겁게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헐벗고 굶주리는 고통이 가장 흔하고 큰 것이기는 하지만 남에게 줄 옷과 밥을 마련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능력으로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계속하기란 불가능하고,어려운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자칫 자신을 자랑하게 되기 쉽다는 것도 알았다. 오랜 궁리 끝에 일감을 찾아냈다.몸이 불편하거나 가난하여 신발을 신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짚신을 삼아서 신겨주기로 했다. 짚신 삼는 솜씨는 자신도 갖고 있었다.짚을 장만하는 데는 큰돈 들이지 않고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짚을 구해 잘 손질하여 일을 시작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다 보니 저절로 입에서 염불이 흘러나왔다.굳이 염불이라 할 것도 없었다.그냥 좋으니까 흥얼흥얼거리는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 거제 고로쇠 축제

    “참 맛이 묘하네.들척지근한 것이.”라며 한 컵 쭉 들이켜는 아저씨,“이것이 그렇게 피부에 좋다며.눈 딱 감고 함 먹어야 써.”라며 딸에게 한잔 권하는 아줌마. 경남 거제 고로쇠축제장에서 고로쇠 수액을 마시는 이들의 반응은 참 다양도 하다.눈이 녹는 남도의 산자락에 제일 먼저 봄을 알리는 전령사가 나타났다.바로 ‘고로쇠 약수’다.남도의 산에는 벌써 약수통을 짊어지고 고로쇠 수액을 만나러 산을 오르는 행렬이 시작되었다. 대표적인 고로쇠 산지는 경남 거제를 비롯,전북 남원 지리산과 전남 광양 백운산 일대.지역에 따라 채취 시기는 좀 다르나 보통 입춘이 지나면 채취를 시작해 우수(19일)와 경칩(3월5일)사이가 절정기다.시원한 고로쇠 약수를 한 잔 마시며 봄의 기운을 느껴보자. 고로쇠 약수란 고로쇠나무의 수액이다.고로쇠나무는 단풍나무과의 활엽수로 키가 20m까지 자라며 5월에 연한 황록색 꽃을 피운다.해발 400m 부근의 산기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나무다. 수액에는 마그네슘,칼슘,칼륨 등 미네랄 성분이 보통 식수에 비해 40배가량 많이 포함되어 있다.성분이 모두 이온화돼 있어 흡수가 빨라 산후통,위장병,피부미용 등에 좋다고 한다.공해가 적고 해풍을 받지 않은 지리산 일대의 것을 최고로 꼽는다. 고로쇠에 얽힌 전설도 많다.백운산에서 도를 닦던 신라의 고승 도선국사가 이른 봄 득도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으나 무릎이 펴지지 않았다.나뭇가지를 잡고 일어서려던 그가 결국 가지를 부러뜨렸고 거기서 흐르는 수액을 마시고 무릎이 펴졌다고 한다.그래서 뼈에 좋다는 의미로 골리수(骨利樹)라고 불리기도 했다. 고로쇠약수는 찜질방에서 땀을 흘리며 오징어나 과메기 등을 안주삼아 마시면 좋다.풀과 나무냄새가 약간 섞여있을 뿐 달착지근해 누구나 마실 수 있다.약수로 밥을 짓거나 닭백숙을 하면 별미다. 채취법은 크게 두가지로 나무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고 호스를 연결하는 천공법과 도끼나 톱 등으로 V형 상처를 내 흐르는 수액을 채취하는 사구법이 있다. 수액 채취는 법으로 엄격하게 규제되어있다.산림청은 무분별한 수액 채취로부터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수액 채취 관리지침을 만들어 시행 중이다.사유지는 시장이나 군수,국유지는 지방산림청장의 허가를 받아야한다. 고로쇠 채취가 가장 빠른 경남 거제지역은 지난 7∼8일 약수제를 열고 동부면 노자산을 중심으로 고로쇠 채취에 들어갔다.올해는 태풍 ‘매미’의 영향으로 나무들이 가지가 부러지고 뿌리가 제 자리를 찾지 못 해 예년의 절반 수준인 20만ℓ 정도를 채취할 예정이다.구입및 문의는 거제시청 문화관광과 (055)639-3253,골로쇠 채취 협의회(055)637-3370. 한준규기자 hihi@˝
  • 장나라 中문화원 홍보대사에

    주한 중국대사관은 12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중국문화원 설립 일정을 공개했다. 대사관은 또 문화원 개원에 앞서 중국문화원 홈페이지(www.cccseoul.org)를 개설했으며,가수 겸 탤런트 장나라를 문화원 홍보대사로 위촉했다. 리빈 주한 중국대사로부터 위촉장을 받은 장나라는 “외국인을 중국 홍보대사에 임명한 것은 처음이라고 들었다.”면서 “한국과 중국 두 나라의 문화를 소개하는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싶다.”고 말했다.˝
  • 위안부 주제 누드 이승연 영상 파문

    탤런트 이승연의 ‘종군위안부’ 테마 영상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과 관련단체의 강력한 반발을 사고 있다. 이승연과 네티앙엔터테인먼트는 12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종군위안부라는 의미있는 주제로 영상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승연은 이 영상 프로젝트에서 상반신이 노출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한국여성단체연합,나눔의 집,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대구시민모임 등은 즉각 반발하며 영상 프로젝트 중단을 요구했다.이들은 공동성명에서 “다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모욕과 수치심을 주는 상업주의의 행태에 분노를 금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승연은 기자회견에서 “피해자들이 반대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직접 가서 만나 뵙고 들어볼 생각이며,말씀이 옳다면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승연은 최근 팔라우에서 영상 및 사진촬영을 마쳤고,오는 19일 일본으로 가 추가 촬영한 뒤 3월부터 영상과 사진을 모바일과 인터넷으로 유료 서비스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영표기자 tomcat@˝
  • 역삼동 퓨전일식당 '라꾸’ 럭셔리 오뎅

    따끈한 우동이나 오뎅 국물이 생각나는 계절이다. 우동과 오뎅은 맛이야 최고지만 한끼를 해결하기엔 왠지 부실하게 느껴지게 마련.역삼동의 ‘RAKU’(라꾸)는 이같은 우려를 잠재우면서도,우동과 오뎅의 퀄리티를 내세우는 퓨전 일식당. 신라호텔 식음팀장을 지낸 정윤영 사장이 ‘미식주가’(美食酒家)라는 개념을 도입해 지난해 5월 오픈했다. 미식주가는 일식당 중에서도 고급 요리점에 속하는 요정과 선술집인 이자카야의 중간쯤에 속한다.따라서 인테리어도 정통 일식당보다 모던하면서도 편안한 스타일로 꾸몄다. 요즘 잘 나가는 메뉴는 ‘우동스키’와 ‘모듬오뎅’.우동스키는 우리말로 우동전골쯤 된다.국물에 우동을 넣고 끓이면서 야채와 닭고기 넓적다릿살,새우,오징어,모시조개,홍합,어묵 등을 추가한다.하나씩 건져 먹으면서 정종이나 맥주를 한 잔 곁들이기에 적당하다.내용물이 떨어지면 어묵을 추가로 넣어주고,국물이 자작해지면 밥을 비벼먹을 수도 있다. 모듬오뎅의 주재료는 직접 만든 다양한 어묵들.생선,마,달걀 흰자 등을 반죽해 버섯의 갓에 얹어 만든 것 등 공이 들어간 어묵에다 토란,문어 등 야채와 해산물을 넣는다.어묵을 튀길 때도 찬물을 끼얹어 기름을 분리하는 방법으로 느끼한 맛을 없앴다.고소함이 덜한 대신 담백한 맛이 특징.정사장은 화려함과 맛을 동시에 갖춘 ‘럭셔리 오뎅’이라고 자부한다. 많은 사람들은 오뎅을 어묵의 다른말로 이해하지만 오뎅은 원래 고기,야채,어묵 등을 꼬챙이에 끼워 먹는 것을 의미한다고.일본 관동지방 농촌에서 일꾼들이 간편하게 먹기 위해 만든 음식에서 유래됐다고 한다.라꾸에선 오뎅의 이같은 취지를 살려 한끼 식사로 부족함이 없도록 내용물을 충실히 했음을 내세운다. 임창용기자 sdrag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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