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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건축 이야기] (13) ‘법이 머무는 곳’ 법주사 팔상전(捌相殿)

    [종교건축 이야기] (13) ‘법이 머무는 곳’ 법주사 팔상전(捌相殿)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209, 조계종 제5교구 본사 법주사(주지 도공 스님). 신라 진흥왕조인 553년 의신 스님이 창건했고 혜공왕조인 776년 진표 율사가 중창한 ‘호서제일가람’이다. 정유재란때 불타 없어졌지만 사명대사와 벽암대사에 의해 1624년에 복원된 사찰.‘법이 머문다.’란 뜻의 법주(法住)는 불법을 구하기 위해 인도에 유학했던 창건주 의신 스님이 흰 노새에 불경을 싣고 와서 후학을 양성할 절터를 찾기위해 머물렀다는 연기설화로 인해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시대에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법상종 종찰의 면모를 유지해 왔으며 지금은 국내 대표적인 미륵도량이자 화엄사찰이기도 하다. 산내암자 11개, 말사 80개를 거느린 주요 본사답게 이런저런 사연이 많지만 아무래도 법주사의 핵심은 국내 유일의 목조탑인 팔상전(국보 제55호)이다. 흔히 사찰의 탑이라면 화강석으로 만든 석탑을 떠올릴 만큼 나무로 세운 목탑은 생소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원시불교 이래 탑전은 목조의 전통을 유지해 왔으며 ‘삼국유사’ 등에도 탑의 시원이 목조였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전한다.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까지도 목탑이 세워진 사실이 만복사지 탑지에서 밝혀졌고 조선시대까지 전해져왔음이 각종 유적들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법주사 팔상전으로, 이 팔상전은 현재 목조 탑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1984년까지만 해도 전남 화순 쌍봉사 대웅전이 법주사 팔상전과 함께 목조탑의 쌍벽을 이뤘으나 아쉽게도 소실됐다. 법주사 경내의 중심에 선 팔상전은 사방에 계단이 설치된 석조 기단위에 5층으로 올린 5층 목탑이지만 내부는 가운데 벽을 중심으로 한 통간 건물로 되어 있다. 정사각형 모양의 사찰 전각 기단은 사제(四諦)와 팔정도(八正道)를 상징한다. 특히 동서남북에 배치된 계단은 구도자에게만 허락된 수행의 경지를 상징하는 것으로 통한다. 기단에 올라서 안으로 들어가면 사방 네 벽에 두 폭씩의 팔상도가 모셔져 있음을 보게 된다. 그 벽면 앞에 불단을 만들어 불상을 봉안했고 불상 앞에 납석원불과 나한상이 모셔져 있다. 전체 5층 가운데 1·2층은 5칸,3·4층은 3칸,5층은 1칸으로 구성한 것도 특이하다. 팔상전이란 석가여래의 일생을 8단계로 나누어 표현한 그림인 팔상도를 모신 전각. 쌍계사. 통도사. 운흥사. 선암사. 범어사 등의 팔상전에서도 이같은 팔상도를 볼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 사찰의 팔상전에 모셔진 팔상도가 불단을 향해 평면적으로 나열되어 한꺼번에 전체를 볼 수 있지만 법주사 팔상전의 경우는 사뭇 다르다. 한가운데 조성된 네 벽을 돌아가면서 각 벽면에 두 폭씩을 배치했기 때문에 한 곳에서 전체를 다 볼 수가 없다. 팔상도의 8폭을 전부 보기 위해선 팔상전 안을 한 바퀴 돌아야 하는데 팔상도를 따라 돌다보면 결국 가운데 벽 심초석(心礎石)에 봉안된 불사리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탑돌이를 하게 되는 셈이다.(지난 1968년 팔상전을 해체수리할 때 심주(心柱) 밑에서 사리장치(舍利裝置)가 발견되어 이곳이 불사리를 봉안한 장소임이 확인되었다. 목탑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된 것은 법주사 팔상전이 처음이다.) 팔상도를 따라 탑돌이를 한 뒤 문을 나서서 지붕을 올려다보면 2층 처마 아래 모서리에 새겨진 난쟁이 모습의 인물과 용 형상이 눈길을 끈다. 이 가운데 연꽃 봉오리 위에 쪼그려 앉아 두 팔과 머리로 추녀를 받친 모습의 난쟁이상이 흥미롭다. 왕방울 눈에 나선형 눈썹과 짙은 수염을 갖고 있는데 부처님을 공양하고 불전을 수호하는 불교 외호신 중 하나라고 한다. 법주사 팔상전의 가장 큰 특징은 뭐니뭐니 해도 불사리를 봉안한 탑에 더해 예배 공간의 기능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탑의 내부를 예배공간으로 썼던 기록은 삼국유사 권5 ‘월명사도솔가(月明師兜率歌)’조의 “동입내원탑중이은(童入內院塔中而隱)”이라는 구절에 처음 나타나는데 “동자가 탑 속으로 숨어들었다.”는 내용이다. 학계에서는 사람이 탑 안으로 숨어든다는 것은 탑 내부에 큰 공간이 있었음을 의미하며 법주사 팔상전이 바로 동자가 숨어들었다는 그 탑 형식의 목탑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 팔상전은 지난 1968년 해체 보수공사 이후 내부 통풍이 안되고 벽면에 습기가 심하게 차오르는 등 훼손될 위기에 처해 있다. 법주사 주지 도공 스님은 “미륵신앙과 화엄사상을 함께 담은 법주사의 중심건물인 팔상전은 불사리 봉안처로서의 탑 성격과 예배장소의 기능을 동시에 갖춘 유일한 탑전인데 예산과 보존 처리의 어려움 때문에 훼손되어 가는 문화재를 그대로 방치할 수밖에 없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kimus@seoul.co.kr 사진 남상인기자 sanginn@seoul.co.kr ■ 법주사의 명물들 법주사 경내 곳곳에는 크고 작은 명물들이 들어서 있다. 팔상전을 비롯해 석련지, 쌍사자석등이 국보로 지정됐고 보물도 12점으로 국내에서 가장 많은 국보·보물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이 가운데 마애여래의상(磨崖如來倚像)과 사천왕상, 석련지, 대웅보전, 금동미륵대불은 신도와 관람객들의 시선을 가장 많이 받는 문화재들이다. 우선 일주문을 지나 팔상전과 대웅보전을 가기 위해 통과하는 천왕문의 사천왕상은 국내 사찰중 가장 큰 규모. 천왕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조선 후기 맞배지붕 건물인데 중앙 통로 양쪽 2칸에 높이 5.7m, 둘레 1.8m 크기의 사천왕상을 2구씩 배치해 천왕문을 통과하는 이들의 시선을 제압한다. 사리각 옆 암벽에 조각된 전체 높이 6.18m 크기의 마애여래의상도 독특한 불상. 둥근 얼굴과 감은 듯 뜬 눈에 잘록한 허리 등 비사실적인 추상이 인상적이다. 연꽃 잎이 불상 주위를 둘러싼 연봉이 불상을 둘러싸고 발 아래엔 반쯤만 조각된 연화문상석이 놓여 있다. 석련지는 원래 법주사의 본당이었던 용화보전의 장엄품을 설치했던 것. 신라 성덕왕조때 화강석으로 조성됐는데 8각 지대석 위에 3단의 굄을 만들고 다시 굄돌을 올려 그 위에 구름을 나타낸 동자석을 끼워 무량수의 감로천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신라 진흥왕때 창건된 대웅보전 안의 불상 3구는 국내 사찰 법당에 봉안된 소조불 좌상중 가장 큰 것. 중앙에 비로자나불, 좌측에 노사나불(아미타불), 우측에 석가모니불을 모셨는데 각각 마음, 덕, 육신을 뜻한다고 한다. 최근 개금불사를 마치고 점안식을 가졌다. 팔상전 왼편, 미래 미륵부처님의 현존을 의미하는 금동미륵대불은 국내 최대의 규모.8m 높이의 기단 위에 25m높이로 조성됐는데 소요된 청동만도 160t이나 된다고 한다.
  • [23일 TV 하이라이트]

    ●인사이드 월드(YTN 오전 10시25분) 고가에 거래되고 있어 ‘화이트 골드’라 불리는 비막치어. 남극해에 서식하는 비막치어가 불법 어선들의 지나친 어획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3년 안에 비막치어는 멸종되고 말 것이다. 비막치어의 멸종을 막기 위한 환경보호단체들과 불법 어선들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살펴보자.   ●미디어 바로보기(EBS 오후 8시) 일본의 유력 일간지, 아사히 신문 서울지국장 이치카와 하야미 기자. 기자를 넘어 자신을 한·일문화교류의 허브라고 여기며 오늘도 취재거리를 찾아 서울거리를 뛰고 있는 그를 만나본다. 또 사람들의 일그러진, 그렇지만 그 속에 담긴 진실된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내는 한상균 기자를 만나본다.   ●연개소문(SBS 오후 8시45분) 신라 성주가 장렬하게 전사하고, 신라군의 방어선은 뚫린다. 용춘은 화랑들에게 용기를 북돋우며 출군을 명한다. 화랑들은 용맹스럽게 싸우고, 화랑을 애송이로 생각했던 고구려군은 당황한다. 한편, 천관녀는 김유신을 위해서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신을 삼고, 독주를 마신 후에 춤을 추다가 세상을 떠난다.   ●발칙한 여자들(MBC 오후 9시40분) 은영은 자신을 속인 정석을 용서할 수 없다며 이혼하자고 한다. 동네 포장마차에서 미주를 만난 정석은 술이 조금 취하자 애도 있는데 은영이 이혼하자고 한다며 말도 안 된다고 말한다. 정석이 이혼하기 싫어하는 걸 눈치챈 미주는 은영의 마음을 돌릴 방법이 하나 있다고 말하는데….   ●싱싱 일요일(KBS2 오전 8시) 남편은 광고회사, 아내는 은행을 다니며 안정적 도시생활을 했던 양정석 김희경 부부는 8년 전 자연과 함께 여유로운 삶을 찾고자 농촌으로 가 소를 기르기 시작했다. 인공수정과 분만하는 소들을 꼼꼼히 살피고 기록하는 일은 하루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아름다운 목장을 가꾸는 양정석씨 가족을 만나본다.   ●신화창조(KBS1 오후 11시) ‘한국에서 만든 줄자’라는 의미를 담은 KOMERON 상표를 달고 세계로 수출되고 있는 코메론 줄자. 가축용 줄자에서 원목지름측정 줄자까지 총 200여 가지를 생산하고 있다. 바이어들의 냉대와 무시를 받던 OEM기업에서 자사 브랜드로 세계 시장에 우뚝 서기까지,30년간의 지독한 뚝심과 저력을 만나본다.
  • [한민족 문화유전자를 찾아서] 언어·예술상징(하)

    [한민족 문화유전자를 찾아서] 언어·예술상징(하)

    “임금이 당나라 태종의 고사(古事)를 본받아 즉위 이래의 사초(史草)를 보려고 하니, 대신이 상언하여 옳지 못하다 하고, 대간에서도 또한 상서하여 옳지 아니하다고 하였으므로, 임금이 이에 따랐다.(태조실록,4년)”조선 시대의 격동기였던 조선 초기 실록의 한 부분이지만 정작 실록 속 주인공인 태조는 보지 못한 기록이다. 이번에 소개할 우리 민족 문화상징들인 조선왕조실록, 한글, 풍물, 탈춤, 판소리 등을 돌아볼 때, 우리가 민족문화 내용들을 보다 제대로 안다면 오늘날의 우리 문화 생활을 보다 넓고 깊게 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에서 철종에 이르기까지 472년 간에 걸친 25대 임금들의 기록이다. 이 방대한 역사 기록을 세계에서도 인정하여 유네스코도 1997년 이를 세계기록유산의 하나로 등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 사실 외에도 조선왕조실록은 그 편찬 과정이나 관리 면에서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남긴다. 조선왕조실록은 사관의 사초들에 의해 대부분 이뤄지는데, 사관은 비록 정7∼9품의 하급 관리였지만 항상 궁중에 들어가 왕과 신하들이 국사를 논의하는 것을 기록하였으며 그 잘잘못까지 직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이뤄진 사초나 실록은 위의 태조 때의 기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비록 군왕이라 할지라도 볼 수 없었다. 군왕은 ‘국조보감(國朝寶鑑)’ 같은 역사책을 보는 것 정도에 머물러야 했던 것이다. 또한 실록들은 4∼5사고로 여러 질들이 분산 보관되었기에 한두 사고의 멸실에도 실록을 보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실록과 관계되는 정신과 지혜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이어받아야 할 것이다. # 한글 세계 현존 문자중 가장 과학적 한글은 오늘날 국외에서 더 많이 알아주는 문자다. 현재 세계에는 5000여개의 말들이 있지만, 이 중 100여개만 문자를 가지고 있다. 또 이들 문자들 중 특정한 시기에 과학적 방식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한글뿐이다. 이러한 한글의 과학성과 실용성은 1446년 세종대왕의 ‘훈민정음(訓民正音)’ 반포 이후 오늘날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낮은 문맹률을 보이는 것으로 분명히 입증되었다. 그래서 유네스코에서도 현재 ‘세종대왕 문맹 퇴치상(King Sejong Literacy Prize)’을 제정하여 해마다 각 나라의 문맹 퇴치에 공이 큰 사람들에게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겐 자랑스러운 일이다. 거문고는 고구려의 왕산악이 진(晉)나라의 칠현금을 개조해서 만들었다 하는데, 예부터 ‘모든 악기들 중의 으뜸(百樂之長)’이라 하였듯, 우리나라의 전통 악기들 중 대표적 악기다. 대금은 우리나라의 전통 관악기들 중 폭넓은 음악 세계를 실현할 수 있는 악기다. 대금과 같이 대(竹)로 만들어, 가로 부는 적(笛)류는 다른 나라들에도 많으나, 우리나라의 대금은 음량이 풍부하고, 취공(吹孔)이 넓어 입술로 소리들을 조절할 수 있으며, 다른 나라의 적(笛)류에는 거의 없는 청공(淸孔)이 있어 거칠면서도 청아한 소리를 낼 수 있는 특징이 있다. 청공은 갈대 속청을 붙여 만든 구멍이다. 풍물은 우리가 흔히 ‘농악’이라고 하는 것이다. 풍물에는 우선 정초 집돌이 때 치는 ‘매구(埋鬼)’와 모심기나 김매기 두레 때 치는 ‘풍장’ 두 가지가 있다. 정초의 매구는 한 해가 오기 전인 섣달 그믐께에 잡귀잡신들을 몰아내는 중국의 나례(儺禮)에서 유래한 것인데, 충렬왕 21년에 이미 민간의 나례를 금했다고 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시대부터 이미 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두레 때 치는 풍장은 두레가 나면 마을신이기도 한 농신을 농신대에 모셔 가기에 이에 따른 풍악과 두레패들의 오락으로도 활용되는 과정에서 내려온 것이다. 이 중 본격적인 풍물이 이뤄지는 것은 매구를 칠 때다. 정초에 마을의 집집들을 돌다 보름께는 ‘판굿’이라 하여 밤새도록 수준높은 풍물가락들을 치며 노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 섣달 그믐 잡귀신 몰아내는 ‘매구’ 탈춤은 각 민족마다 있는 것이고, 각 민족에게 또한 나름의 역사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전승되는 세계의 탈춤들을 보았을 때 우리나라의 봉산 탈춤, 양주 별산대 놀이, 통영 오광대 놀이 등과 같이 잘 짜여지고 발달된 탈춤들은 없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판소리도 또한 세계적인 고급 성악 예술이다. 판소리는 조선 후기에 성립된 우리나라의 성악 예술의 하나로 강력한 발성과 고도의 음악 세계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서양의 오페라 정도가 이러한 판소리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수준 높은 세계적 예술이다. 그래서 2003년 판소리는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만 왜 이런 판소리와 같은 수준높은 성악 예술이 성립되었는지 그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에는 그 당시 다른 나라에는 없는 광대 집단이란 특수 신분 집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광대 집단이라면 하나의 신분적 조건으로 광대의 역을 공식적으로 담당한 집단인데, 다음에 보듯 1846년 경기도에만 해도 4만명에 달했고,1894년 갑오경장 때 비로소 ‘창우’ 곧 ‘광대’ 신분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이들 광대 집단은 신라 진흥왕 때부터 있었던 산대희를 위해 필요한 집단이었다. 산대희는 나라에 큰 경사가 있거나 중국 사신이 올 때 행해졌는데, 커다란 산 모양의 구조물을 설치하고 그 위와 아래에서 가무백희를 하는 것이다. 이 경우 조선 시대에는 600명 정도의 광대들이 동원되었듯, 이미 그 이전에도 수백 명의 광대들이 동원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러한 산대희 등을 공식적으로 담당하는 하나의 신분 집단으로서의 광대 집단이 성립된 것이다. 중국의 경우는 송나라 중기에 관청에 소속된 이러한 하나의 특수 집단으로서의 광대 집단은 해방되었다. 중국에서는 민간에서도 광대들이 많았기에, 유사시에는 이들을 동원하면 되었으므로 종래와 같이 관에서 이들 광대 집단을 잡고 있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민간에서의 광대들이 별로 없었기에, 근대 무렵인 1894년까지도 관에서는 이러한 산대희를 하는 광대 집단을 하나의 신분 집단으로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신분 집단으로 수많은 광대들이 근대 무렵까지도 있었던 것은 세계 민속 예능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다. 판소리를 비롯하여 앞서 든 풍물, 탈춤 등이 현재 세계 민속예술에 있어 그 수준이 월등히 높은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 판소리 유네스코 인류구전유산 선정 이러한 광대 집단의 사람들로는 경기이남의 세습무 집안 사람들과 경기이북의 재인촌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에 대한 광대 집단적 접근은 최근에야 비로소 이뤄지고 있다. 아리랑은 애국가 다음가는 우리 민족의 노래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아리랑’으로 부르는 노래는 1926년에 만들어진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주제곡으로 서양 음악식으로 작곡된 것이다. 그러면 민요 아리랑과 이 영화 ‘아리랑’의 주제곡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1864년 경복궁 중건 때 강원도 사람들이 그 지역에서 벌채한 나무를 뗏목으로 만들어 한강을 타고 내려와 공사장으로 운반하는 과정에서 서울에서 오늘날 ‘정선 아리랑’이라고 하는 강원도 아리랑을 불렀다. 이에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고종이 아리랑을 즐겼다 하듯, 서울 지역에서는 이 강원도 아리랑을 경토리로 선율을 조금 바꿔 부른 이른바 ‘본조 아리랑’을 성립시켰다. 이후 이러한 본조 아리랑이 지방에도 퍼져 밀양 아리랑, 진도 아리랑 등이 성립되었다. 당시의 이러한 아리랑 문화와 관계해 나운규는 자신의 영화 제목을 ‘아리랑’이라 했고, 그 주제곡 ‘아리랑’도 크게 성공했던 것이다. 이번에 문화관광부가 선정한 100대 민족 문화 상징은 사실상 문화관광부가 정리하고 있는 민족 문화 상징의 일부에 불과하다. 우리 민족 문화 상징이 어떻게 100개에만 머물겠는가? 또 사실 많을수록 더 좋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라도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을 문화적 차원에서 또다시 돌아보게 된 것은 참으로 뜻 깊은 과정이었다. 손태도 문화재 전문위원
  • [씨줄날줄] ‘淸나라 시조’/이용원 수석논설위원

    중국이 고구려사는 물론 고조선·발해의 역사까지도 자국사의 일부로 편입하려는 음모를 봉쇄하려면, 우리가 오히려 중국 금(金)·청(淸)나라의 역사를 한국사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며칠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중국의 동북공정 연구 성과에 대한 분석과 평가’라는 세미나에서다. 우리 민족의 범위를 넓게 보아 금·청은 물론 원(元)·요(遼)나라 역사도 한국사의 일부라고 한 주장은 진즉부터 있어 왔다. 중요한 것은, 이같은 주장이 그동안에는 재야사학자들의 전유물이었지만 이번에는 주류 학계 일각에서 처음으로 제기되었다는 사실이다. 금·청을 한국사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그 근거로 금나라 황실의 뿌리가 신라 왕족에서 나왔으며, 그 뿌리의식은 금을 이은 청나라까지 지속됐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송사’ ‘금사’ ‘만주원류고’등 중국 사서 일부에는 금 태조 아골타의 8대조가 신라 왕족 김함보(또는 김준)라거나,‘국호를 신라왕의 성씨에 따라 금(金)으로 지었다.’라는 대목들이 나온다. 이와 함께 청나라 황실의 성(姓)인 ‘애신각라(愛新覺羅)’를 ‘신라를 사랑하고 잊지 않는다.’라고 해석해 그들 스스로 신라의 후손임을 자부했다고 믿는다. 따라서 금·청은 신라계가 만주에 세운 또 다른 국가이므로 금·청의 역사는 곧 한국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학설에 대한 반론 또한 만만찮다. 김함보에 관한 기록이 너무 단편적인 데다 사서마다 차이가 있어 그가 신라인인지, 고려인인지 또 왕족 출신인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 우선 지적된다. 아울러 ‘애신각라’에 대해서도, 만주어 아이신(황금)과 자오뤄(겨레)를 합한 단어를 한자 음을 빌려 표기한 것일 뿐 신라 사랑과는 하등 관련없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한걸음 더 나아가 금·청의 황실이 가령 신라 왕족의 후손이라 한들 금·청의 국가적·민족적 정체성은 변하지 않는다고 반대론자들은 결론짓는다. 금·청의 역사를 한민족사에 편입하자는 주장은 듣기에 좋을지 몰라도 스스로 함정을 품고 있다. 정교한 논리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고구려사를 제것이라고 주장하는 중국 측의 어거지나 다를 바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번에 말을 꺼낸 학자들의 분발을 촉구한다. 이용원 수석논설위원 ywyi@seoul.co.kr
  • [부산에서 서울까지 다시 걷는 옛길] (11) 충주길(하)

    [부산에서 서울까지 다시 걷는 옛길] (11) 충주길(하)

    마당바위를 지나쳐 달리던 영남대로는 국도 3호선과 갈라져 충주시내로 접어든다. 달천(달래강) 오른쪽에 길이 나 있다. 지금은 시가지가 발달돼 있지만 험준한 산들이 없고 널따란 평야지대가 펼쳐져 예전에는 여기부터 행인의 발걸음이 훨씬 빨라졌을 듯하다. 충주시 살미면 향산리에서 국도와 잠시 결별한 옛길을 따라 300m쯤 올라가면 대림산성이 나온다. 단월동 창골을 둘러싸고 있는 이 성은 둘레 4906m의 토석혼축이다. 높이 4∼6m로 충북도기념물 110호이다. 충주박물관 길경택 학예연구실장은 “신라말·고려초 지은 성으로 앞에 달천이 해자(垓字·성 밖으로 둘러판 못) 역할을 하는 ‘천혜의 요새’”라고 말했다. ●임장군, 이심바위 전설로 이 성에 조선 선조 때 지어진 ‘정심사’라는 절이 있고 그 앞을 ‘삼초대’라고 부른다. 작은 산이나 골이 깊고 경사가 크게 져 있다. 입석 안내판에는 ‘임경업(1594∼1646) 장군이 대림산에서 태어나 학문을 닦고 3단계로 석축을 쌓아 무술을 연마했다.’고 써있다. 건너편 산 밑에 장군의 묘가 있다는 것도 알려주고 있다. 달천을 건너 임경업 장군의 묘가 있는 풍동에서 만난 주민 김희순(73)씨는 “이 마을에 임장군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다 매년 시제에 전국에서 임씨들이 와 제사를 지낸다.”고 전했다. 달천을 따라 삼초대를 거쳐 1㎞남짓 가던 길은 유주막 마을에서 시내 도로와 합쳐진다. 단월역이 있었던 곳으로, 예전에는 주막촌이 형성됐었다. 조선조 학자인 유영길과 동생인 영의정 유영록 등 유씨 가문 사람이 많이 왕래한 데서 이름이 붙여졌다. 유주막에서 풍동으로 가는 달천변 절벽에 이심바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도로확장 공사로 사라지고 없다. 이 바위는 임장군이 새벽 훈련을 하고 달천 물을 떠마시려는 순간, 강 속에서 이무기가 나타나자 꼬리를 잡고 내동댕이치자 바위가 움푹 파이며 이무기가 죽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옛길은 시 외곽을 흐르는 달천을 따라 가다 임경업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렬사와 철불좌상(보물 512호)이 있는 단호사를 지나 달천교에 다다른다. 이 철불좌상은 충주가 예전에는 주요 철 생산지였음을 방증하고 있다. 현재 달천교는 두개가 있다. 모두 2차선으로 서울쪽으로 가는 다리는 1990년에 건설됐고 시내쪽으로 들어오는 것은 1999년에 바로 옆에 만들어졌다. 충주문화원 김영대 사무국장은 “일제시대 초까지 이곳에 나루터가 있고 부근에 뱃사공촌과 주막촌이 발달했었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고 말했다. ●피눈물 흘린 당간지주 달천교를 건넌 옛길은 국도 3호선과 겹치면서 충주시 주덕읍까지 한참을 내달린 뒤 신니면 방면으로 방향을 튼다. 3호선을 타고 5∼6분간 달리다 군도 27호로 빠져 면사무소 앞을 지나쳐 다시 그만큼을 달리면 신덕저수지에 도착한다. 널따랗고 시원하게 펼쳐진 저수지 곳곳에 낚시꾼들이 보인다. 당초 군도 27호가 국도 3호선이었으나 몇년 전 국도가 새로 만들어지면서 이전 길이 군도로 바뀌었다고 한다. 길에서 오른쪽으로 저수지를 끼고 돌아 깊숙이 들어가면 ‘숭선마을’이 있다. 행정구역은 신니면 문숭리에 해당한다. 이 마을회관 앞에 높이 4.2m에 이르는 사찰의 당간지주가 서 있다. 당초 숭선사에서 기를 꽂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당간지주만 남아 있는 것이다. 숭선사는 고려 광종이 954년에 어머니인 신명순성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이다. 마을이름도 이 절에서 따와 내려오는 것으로 전해진다. 신명순성 왕후는 고려 태조의 비(妃)로 충주유씨 유긍달의 딸이다. 정종과 광종 등 5남2녀를 낳았다. 당간지주 앞에 있는 안내판에는 ‘당간지주는 동서 한 쌍이 서 있었으나 일제가 신덕저수지를 만들 때 석재로 쓰기 위해 동쪽 지주를 잘랐다. 하지만 이를 자른 사람이 화를 입어 서쪽 지주가 보존됐다.’고 써 있다. 주민 정건양(88·여)씨는 “일본 사람이 수놈을 가져가 저수지 만드는데 쓰고 암놈을 더 자르려는 데 이 징대(지주)에서 피가 나 못 가져갔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주의 무릎 부근에 주먹 크기로 파인 흔적이 남아 있다. 현재 지주는 검은 이끼에 덮인 채 볏가마니를 쌓아두는 기둥으로 쓰이고 있었다. 되돌아 나오면 저수지 바로 위에 동락초등학교가 나타난다. 한국전쟁에서 첫 승리를 거둔 곳이 이 학교이다. ●전쟁과 여교사 학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김재옥 교사 기념관’이다. 김 교사는 이 학교에 재직하던 한국전쟁 때 승리의 주역이었다.6·25가 터진 1950년 7월7일. 이 학교를 점령 중이던 북한군의 정보를 국군 6사단 7연대 1·2대대에 알려줘 저녁식사 때 기습적으로 공격, 전쟁후 첫 승리를 거두게 한다. 이튿날까지 계속된 소탕작전으로 북한군 800명이 사살되고 90여명이 포로로 잡혔다. 장갑차 3대와 각종 총기를 포획하고 ‘소련제’임을 알리는 총기 1점을 유엔에 보내 참전을 이끌어내는 데 힘이 됐다. 이 전투에서 국군은 1명만 경상을 입는 완승을 거뒀다. 김 교사는 이 부대 소대장과 결혼, 남편을 따라 강원도 인제에서 학교 설립에 힘을 보태며 단란하게 지내다 1963년 10월 ‘고재봉사건’ 때 원한대상으로 오인받아 일가족이 몰살되며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국방부는 김 교사의 반공정신을 알리기 위해 ‘전쟁과 여교사’라는 영화를 만들어 전국에 상영하기도 했다. 교정에는 ‘김재옥 여교사 충혼탑’이 있고 200여m 전방에 별도로 ‘동락전승비’를 세워 김 교사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고 있다. 이곳에서 얼마 안 가면 신니면 모남리가 나온다.‘모도원’이란 돌팻말만 남아 있는 이 마을은 조선조 나그네들이 쉬었다 가던 길로 주막이 많았다. 주민 김성숙(66·여)씨는 “30년전 이사왔을 때는 70가구가 넘었는데 지금은 20가구도 안 된다.”면서 갈수록 작아지는 마을 분위기를 전했다. 폐가도 더러 보이고 길 건너에는 폐가조차 한 채도 없어 썰렁했다. 이 마을을 넘자마자 충북 음성군 생극면으로 빠지고 군도나 지방도를 따라 옛길은 경기도 용인으로 들어간다. 글 사진 충주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달래강 전설과 문학 옛날 충주 달래강변에 오누이가 있었다. 오누이는 강 건너편에 있는 밭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 어느 날 오누이는 평소처럼 일을 끝내고 강을 건너고 있었다. 강은 소나기가 퍼부은 뒤라 많이 불어 있었다. 앞서 강을 건너던 여동생의 옷이 불어난 물에 흠뻑 젖으면서 속살이 훤히 내비쳤다. 여체가 아름답게 드러났다. 오빠는 욕정이 솟구쳤다. 죄의식에 사로잡힌 오빠는 들고 있던 낫으로 자기의 성기를 찍었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러자 누이가 통곡하면서 말했다. “달래나 보지. 달래나 보지…” 했다고 한다. 이 말에서 ‘달래강’이란 강 이름이 생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전설은 ‘달래’라는 지명이 있는 다른 지방에도 비슷한 내용으로 떠돌고 있다. 오빠인지 남동생인지, 낫으로 찍었는지 돌로 찍었는지 명확하지 않게 뒤섞여 내려오는 것을 보면 부풀려져 오랫동안 생명을 이어온 듯하다. 더구나 충주 달래강은 영남대로를 따라 흘러 행인들이 쉴 새 없이 오가던 곳이 아니던가. 호기심이 동할 ‘근친상간’ 내용을 담은데다 내용도 애달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딱 좋은 전설이다. 충주에서 태어난 ‘농무’의 시인 신경림은 ‘달래강 옛나루에’ 시에서 ‘달래강 옛나루에 목을 잡고/이렁저렁 한세월 녹두적이나 구웠지/여름도 유월 진종일 돌개바람 일고/돌개바람 일어 모래기둥 올리고/어리석은 길손들만 찾아 들더라’고 노래하고 있다. 달래강은 속리산에서 발원해 탄금대까지 120여㎞를 달리는 조그만 천이다. 임진왜란 때 중국의 한 명장이 달래강 물을 떠먹은 뒤 “명나라에서 유명한 여산의 약수보다 낫다.”고 칭송했다고 한다. 이런 일로 맛이 단 냇물이라고 해 단냇물이 됐다.‘달다’의 달냇물로 변했으며 한자로 바뀌어 지금의 ‘달천’이 됐다는 설도 있다. ‘저 건너…억새꽃 무더기여, 그걸 보고가면 제일 얕은 여울이여’ 등 달래강을 시로 노래해온 향토시인 임연규(52)씨는 “어릴 적 놀이터인 달래강이 버릴 것 같아 남들에게 자랑도 하지 않는다.”고 애틋함을 내보였다. 한국문인협회 충주지부 엄인순 사무국장은 “충주에서 태어난 문인치고 달래강을 노래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충주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한민족 문화유전자를 찾아서] (9) 언어·예술상징(상)

    [한민족 문화유전자를 찾아서] (9) 언어·예술상징(상)

    “선진(先進)이 후진(後進)이 되고 후진이 선진이 된다.”고 했던가? 이번에 소개할 우리 민족의 문화 상징들인 고구려 고분 벽화, 고려 청자, 팔만대장경, 직지심체요절 등을 돌아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그렇게 막강했던 고구려가 마침내는 삼국 중 가장 약했던 신라에 망하고, 중세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모든 면에서 앞섰던 우리나라가 근대에는 일본에 나라를 내주지 않았던가? 그러나 한 시대의 위대한 문화는 그 시대적 관점에서 제대로 평가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문화에 대한 기본적 시각이 아니겠는가? 2004년 북한이 신청한 북한 소재 ‘고구려 고분군’과 중국이 신청한 중국 영토 내의 ‘고구려 수도, 귀족과 왕족의 무덤’이 모두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것은 한때 요하(遼河) 이동의 요동은 물론 북만주 지역까지 차지하고, 남으로는 한반도의 절반 이상까지도 내려와 있었던 고구려라는 하나의 강력한 나라의 역사를 인정하는 것인 동시에 이들 고구려 고분들에 있는 상당수 벽화들을 인류 문화적 차원에서 인정한 것을 뜻한다. 현재 고분 벽화가 있는 고구려의 고분은 무려 107기 정도에 이른다. 고분 벽화는 어느 나라에나 있을 수 있지만, 고구려 고분 벽화처럼 일정한 역사 기간(4∼7세기)에 그 규모나 수적 차원에서 이렇게 방대하게 이뤄진 것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영향을 준 중국의 경우도 고분 벽화 고분은 10기 정도에 머물며, 그 수준도 고구려에 비할 것이 못 된다. 고분 벽화에 있어서만은 고구려는 세계적 위치에 있다. 현재 서울 역사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고구려 고분 벽화’(9.2∼10.22)는 북한 소재 고분들 중 6기의 고분들에 있는 벽화들만 사진으로 전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 속에 있는 인물 풍속화, 각종 상징 문양, 청룡, 백호 등의 사신도(四神圖), 널방의 천장에 장식된 하늘 세계의 모양들은 관람자들의 찬탄을 받고 있다. 오늘날 고구려의 영광은 이들 고분 벽화로부터 다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 세계 유례 드문 고구려 고분벽화 우리나라에서는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라고 하면, 미륵 보살이 대좌에 앉아 왼쪽 다리는 내리고 오른쪽 다리는 왼쪽 무릎 위에 올려 놓은 채, 오른팔을 굽혀 손가락을 오른 뺨에 대고 몸을 앞으로 약간 굽힌 상을 뜻한다. 이것은 미래불인 미륵불이 중생 제도를 위해 명상을 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반가사유상은 6세기경 삼국 통일 직전의 신라에서 크게 유행한 미륵 신앙과 관련, 경북 안동에서 발견된 보관(寶冠)을 쓴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경주에서 출토된 삼산관(三山冠)을 쓴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이 가장 유명하다. 이 두 반가사유상은 첫눈에 봐도 불교 예술품의 걸작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들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은 그 동안 해외의 전시들에서도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서산 마애삼존불은 충남 서산군 운산면 용현리에 있다. 서산군 운산면은 중국의 불교 문화가 태안 반도를 거쳐 부여로 가는 행로상에 있었는데, 마애삼존불이 조성된 위치도 당시에는 경개가 절승(絶勝)한 곳이었다 한다. 오늘날에도 경상도 부처님은 무섭고, 전라도 부처님은 온화하다. 서산마애불은 흔히 ‘백제의 미소’라고 하듯 햇빛이 비치면 웃는 모습을 짓는다. 복스러운 얼굴에 눈은 행인형(杏仁形, 살구씨 모양)으로 약간 큰 편이며, 입도 약간 벌리고 있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여래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보살상, 오른쪽에 반가사유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현재의 부처인 석가, 과거의 부처인 제화갈라(提和渴羅) 보살, 미래의 부처인 미륵 보살이 형상화된 것이다. 오늘날 남아 있는 백제 시대의 대표적 불상이다. # ‘반가사유상’ 해외서도 주목 팔만대장경은 우리가 받아들인 불교 문화를 또다른 차원에서 완성한 것이다. 대장경은 부처의 말씀을 적은 경(經)을 비롯, 불교와 관계되는 서적들을 모은 것으로, 기독교의 성경, 회교의 코란에 해당한다. 그래서 불교를 받아들인 나라들은 모두 이 대장경을 갖추어 두고자 했다. 그래서 중국, 거란, 고려, 몽고, 티베트, 서하 등 여러 나라들에서 여러 차례 대장경들을 마련하여 오늘날 알려진 것만 해도 20여종에 이른다. 이 중 그 규모나 엄정성, 보관 상태 등을 볼 때, 고려 고종 때16년에 걸쳐 이뤄진, 우리가 흔히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는 고려 대장경이 단연 압권으로 현재 중국과 일본 대장경의 전범이 되고 있다. 팔만대장경은 모두 8만 1258장으로 되어 있고, 이에는 1501종 6708권의 불서들이 들어 있다. 고려 청자, 분청사기, 백자는 각기 고려, 조선 전기, 조선 후기의 도자기들이다. 일상생활 용기들로 쓰인 이런 도자기들이 왜 중요한가? 그것은 이들이 자기(磁器)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용기들로 사용한 토기, 도기(陶器), 자기 등 중 자기가 사용된 시기는 길지 않다. 자기는 점력을 가진 점토로 모양을 만들고 그 위에 유약을 입혀 1300도 정도의 고화도로 구워낸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자기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15세기 이전만 하더라도 중국과 우리나라뿐이었다. 자기 중 먼저 이뤄진 것이 청자다. 청자는 중국에서도 당나라 때부터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였고, 우리나라도 통일 신라 후기 때부터 이뤄지기 시작했다.14,15세기에 이르자 청자 문화는 백자 문화로 전환되고, 다시 백자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일본, 동아시아, 서아시아, 지중해 연안과 서부 유럽으로 널리 퍼져 갔다. 시작은 중국이, 그리고 한국이 이를 뒤따랐다. 그리고 중국인도 ‘천하제일’이라 한 고려청자만의 비색(翡色)을 완성한 점, 태토(胎土)에 홈을 파고 흑토나 백토를 넣어 메워 굽는 상감(象嵌) 기법을 개발한 것, 산화동(酸化銅) 안료로 붉은 색을 내었던 것 등은, 그대로 우리나라 자기사의 업적인 동시에 인류 자기사의 업적이 되는 것이다. # 일본의 국보된 진주민가 제기 한편 분청사기(粉靑沙器)는 청자 바탕에 백토를 입혀 여러 모양들을 낸 것으로, 우리나라에 15∼16세기 약 200년간 이뤄지다 이후 백자로 발전하였다. 이렇듯 고려 청자, 분청사기, 백자 등은 일종의 생활 용기들이지만 수준 높은 예술품이었기에, 조선 시대에는 국가 차원에서 이러한 요업(窯業)을 관리했고, 궁궐에 소속된 화공들도 이러한 자기 제작들에 동원되어 그림을 그리곤 했다.2004년 11월 현재,307종의 국보들 중 청자가 24점, 분청사기가 5점, 백자가 17점 등 모두 46점의 자기가 국보로 되어 있다. 이러한 청자, 백자 등과 달리 막사발은 말 그대로 적당히 점토를 빚어 유약물에 한 번 담가 구워 만든 것으로, 대중용으로 대량생산을 한 것이다. 이러한 막사발은 밥그릇, 국그릇, 술잔 등으로 민가에서도 흔하게 사용된 것인데, 임진왜란 때 이런 막사발조차도 만들지 못했던 일본인들은 이러한 막사발을 많이 가져다 차그릇인 다완(茶碗)으로 썼다. 그리고 이들 중 몇 점은 현재까지도 일본 국보나 보물, 명품 등으로 소중하게 관리되고 있다. 현재 일본의 1급 국보인 기자에몬이다(喜左衛問 井戶) 다완은 임진왜란 때 경남 진주 근처의 민가에서 제기(祭器)로 사용되던 것을 가져간 것이다. 일본에 있어 국보인 도자기는 이것이 유일하다. 조선과 일본의 자기 문화 격차와 간단한 그릇에도 들어 있었던 조선 도공들의 미의식이 빚어낸 하나의 역사적 결과다. 한지는 중세 문화인 불교·유교 문화를 우리가 받아들여 문화 생활을 하게 되는 과정에서 일찍부터 중국에서부터 받아들여 우리나라에서 발전시킨 것이다. 요즘은 나무로 만든 펄프 종이로 인해 한지는 우리 문화의 한 구석으로 밀려났지만, 우리나라의 오랜 문화생활과 관계되는 이 한지는 문화사적으로 그렇게 가볍게 보아 넘길 일은 아니다. 직지심체요절(1377)도 그렇다. 이 책은 고려말 명승인 경한(景閑,1298∼1374)이 지은 것인데, 책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것이 우리 문화에서 중요한 것은,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본이기 때문이다. 독일인 구텐베르그의 ‘42행 성경’보다 무려 80년이 앞선 것이다. 이 책은 1887년 주한 프랑스 대리 공사로 서울에 왔던 콜렝드 드 플랑시에 의해 수집되어,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러한 각 시대를 대표하는 우리나라의 문화 유적이나 유물들을 돌아볼 때, 우리 시대는 과연 어떤 문화를 가장 중요시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의 시인 존 업다이크는 자본주의 사회인 미국이 가장 문화적 힘을 모으는 곳은 15초짜리 스폿(spot) 상업 광고라고 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도 과연 그럴까? 지금까지의 우리 문화사로 볼 때, 적어도 우리나라만은 그렇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손태도 문화재 전문위원
  • “12일은 누구를 태우시겠습니까?”

    보건복지부가 젊은 층의 금연을 유도하고 대학 내 금연 분위기 조성을 위해 실시한 ‘2006 금연아이디어 공모전’에서 김용준(서울디지털대학)씨 팀의 “오늘은 누구를 태우시겠습니까?”가 영예의 대상을 차지했다. 대상에 이어 금상은 최현식(한성대)씨 팀의 ‘담배 피우러 가시는군요.’가, 은상은 최수만(경기대)·김주현(한성대)씨가, 동상은 이태윤(홍익대)·신석진(〃)·황진용(목원대)씨가 각각 수상자로 선정됐다.발명품 부문에서는 금·은상 수상작을 내지 못했으며, 김영훈(신라대)·강민지(숙명여대)씨와 동국아이디어뱅크팀이 공동 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이번 공모전에는 광고·발명품 부문에 모두 281개 팀(331개 작품)이 참가했으며, 복지부는 수상작을 포스터로 제작해 전국 주요 대학에 배포하고 순회전시회도 가질 계획이다.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 “신개념 낸드기술 반도체 새역사 썼다”

    “35년 플래시메모리 반도체의 새 역사를 썼다.” 황창규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사장은 11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발상의 전환으로 신개념 ‘CTF’(Charge Trap Flash) 낸드 기술의 개발이 가능했다.”며 강한 자부심을 보였다. 황 사장은 “현재 4위권인 노어플래시 부문도 이르면 2007년 1위에 등극, 명실상부한 플래시 메모리 선두기업으로 자리매김하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세계 D램시장의 강세로 올 3·4분기 반도체 매출이 사상 최대 규모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황 사장과의 일문일답.▶다른 회사가 CTF 기술로 낸드플래시를 생산하면 특허 사용료를 받나.-우리는 이미 12건의 CTF 기본특허를 등록했다.CTF가 대세가 될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특허료를 받게 될 것으로 본다.▶낸드플래시 및 D램 가격 전망은.-낸드플래시 가격은 하반기부터 안정되고 있다. 내년 1분기 말 일시적인 공급 과잉을 거치겠지만 하반기 신제품 출시와 함께 다시 안정될 것이다.D램은 시장이 다양화되면서 공급 부족이 나타나고 있다. 현재 삼성전자도 주요 메이커 수요의 70% 수준밖에 공급하지 못하고 있다.2009년까지 가격이 좋을 것으로 본다.▶삼성전자 반도체총괄과 경쟁사의 차이점은 뭔가.-시설투자와 연구개발에 있다. 올해 삼성전자는 반도체 연구개발에 2조 8000억원을 투자한다.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CTF 기술만 보더라도 5년 전 개발에 착수해 3년 전에 개발팀을 꾸렸다. 이런 개발팀이 30∼40개가 있다. 앞으로 5∼10년 내에 어떤 개발을 해낼지 상상해보라. 그게 삼성전자와 다른 회사의 차이다.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붓끝으로 살린 천년 고도 경주

    붓끝으로 살린 천년 고도 경주

    “독학은 힘들지만 꾸준히 노력하면 어느 누구보다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한국화가 소산(小山) 박대성(61)은 공식적인 미술교육을 받은 적도, 특정 스승을 사사한 적도 없는 순수 독학 화가다. 경북 청도의 두메산골에서 태어나, 어릴적 제사 때 병풍에 그려진 사군자를 보고 흉내내던 것에서 시작,50년 이상 혼자 그림을 배우고 그렸다.6·25때 왼쪽 손마저 잃은 절망적 상황에서도 그림에 매달린 그는 70년대 국전에 8차례 수상하고, 중앙미술대전 대상을 차지하면서 화단에 돌풍을 일으켰다. 학맥을 중시하는 한국 미술계에서 이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겸재와 변관식, 이상범에 이어 실경산수의 맥을 잇는 작가로 명성을 얻은 박대성은 지난 몇 년간 신라의 고도 경주를 현대적으로 조형화하는 작업에 힘을 쏟아왔다.8일부터 10월1일까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6년만의 개인전 ‘박대성-천년 신라의 꿈’전이 바로 그 결실이다. 이미 6년째 경주의 솔숲 인근에 화실을 짓고 작업해온 그는 “한국화가 서양화에 밀려 위기라고 하지만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하다보면 탈출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20여년간 표현기법과 재료를 다양화하는 실험을 해왔어요. 먹과 종이가 바로 만나면서 느껴지는 왜소함을 어떻게 떨쳐버릴까 하는 고민도 많이 했고요.” 이번에 그는 다양한 기법이 돋보이는 작품들을 많이 선보인다. 이중 가로 4.4m, 세로 2.5m 크기의 ‘천년 신라의 꿈-원융의 세계’는 마치 탁본을 하듯 먹을 눌러 찍는 기법을 시도했는데, 표현된 형상이 부드러우면서도 은근한 힘을 느끼게 한다. 경주 남산의 여러 구릉을 따라 불국사와 다보탑, 석가탑, 황룡사9층탑, 포석정, 미륵불 등 신라의 대표적 문화유산들이 자리잡고 있다. 신라 벽화에서 나온 듯 뛰노는 사슴 모습이 생동감을 더한다. 길이가 12m에 달하는 대작 ‘법열’은 석굴암 본존불과 십대제자상을 그린 작품. 먹을 머금은 바탕 위에 색채를 전면으로 떠오르게 하는 새로운 방식의 작품으로, 화강암의 질박한 느낌이 나게 했다. 마치 막대 숯을 세워놓은 것 같은 ‘현율’은 자유로움과 힘이 넘쳐나는 작품이다. 원근법을 완전히 무시, 눈에 보이는 자연의 모습이 아닌 자연의 본질과 기운을 담고 있다.“나의 그림은 내 마음 속에 갖고 있는 것을 시각화한 것이다.”란 작가의 말이 실감나는 작품이다. 총 50점.10월1일까지.(02)720-1020.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이 한권의 책] ‘혼세의 삼국’ 균형을 잡다

    요즘 TV사극들의 턱없는 민족주의와 사실왜곡에 황당한 느낌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김춘추-외교의 승부사’(박순교 지음, 푸른역사 펴냄)는 영웅을 그리되, 어깨에서 힘을 뺀 담백한 서술이 돋보이는 책이다. 문장이 밋밋하고 재미없다는 뜻이 아니다. 저자는 김춘추의 집권과정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다. 그만큼 사실(Fact)과 상상(Fiction)을 구분해 보이고 있다. 과장과 오류로 독자를 오도하는 흔한 팩션(Faction)이 아니라, 독자에게 생각할 여백을 돌려주고 있다는 뜻이다. 책은 얼핏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외교 활동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비친다. 김춘추는 약소국 신라가 백제·고구려를 제압하고 통일대업을 달성하는 밑거름이 됐던 당(唐)과의 연합을 성사시킨 인물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고구려와 왜(倭)를 방문해 외교담판을 시도하고 당 태종을 찾아 나당동맹을 완성해 내는 과정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오직 생존만이 지상과제였던 당시 상황에서 실리주의 외교는 유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외교관으로서 김춘추 조명에만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진골에 속해 숨을 죽이며 살아야 했던 한맺힌 가족사와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 마침내 왕위에 오르고 통일의 초석을 놓는 인간 김춘추의 모습에 더 많은 애정을 보인다. 책은 김춘추의 인간적 고뇌와 열정을 사랑하는 딸의 죽음 장면에서부터 풀어나간다. 문희와의 숙명적 인연의 결과 출생한 딸 고타소는 백제 의자왕이 일으킨 침략군에 의해 일가가 몰살한다. 수급(首級)이 잘려나간 처참한 주검 앞에 격분한 김춘추는 고구려행을 결심하며 통일의 의지를 불태운다. 조부 진지왕의 폐위와 가문의 몰락, 아버지 비형의 아들을 위한 희생 또한 김춘추가 절치부심하는 배경이 됐다. 비형은 아들에게 외국어를 가르치고 신라와 왜의 당 유학생을 집안에 초치하여 국제감각을 키워주는 데 전력하는 ‘선진적’ 인물이었다. 진지왕과 유부녀 미도부인의 사랑, 집권 후 소원해진 김유신을 회유하기 위해 예순이 넘은 그와 어린딸을 혼인시키는 장면 등은 제도와 권력의 모순을 보여주기도 한다. 당시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비견되기도 하지만, 개별 국가의 내부사정 또한 물고 물리는 권력다툼의 연속이었다. 동생과 아비를 죽이고 집권하는 당태종,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옹립한 연개소문, 친백제 정부를 제거하고 개혁을 추구하던 중대형 등이 모두 김춘추의 협상 상대자였다. 이들과의 조우 과정에서 드러나는 각국 이야기도 대중에겐 새롭다. 전반을 통하여 적절히 삽입되는 당시의 생활상은 배경에 불과한 듯싶지만 현대 역사학이 추구하는 중요한 탐구 목표이기도 하다. 대략의 둘레만 1023보에 이르렀다는 왕궁 월성의 풍경과 신라군단의 직능·계급별 군장 묘사, 온돌과 바둑·공차기가 등장하는 고구려 풍속 묘사 등은 당시 사람들이 눈앞에 오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삼국사기’‘삼국유사’‘송서’‘양서’‘구당서’‘일본서기’‘동경잡기’ 등 사료를 인용한 각주 때문에 무조건적 몰입보다는 거리두기가 유지된다. 까다로운 문장과 어려운 단어들이 눈에 띄지만 이는 지식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감내해야 할 몫이다. 또한 고대 분위기 재현 효과도 거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김춘추 개인에 초점이 맞춰져 그의 죽음과 함께 삼국통일의 여정이 끝나버리는 것은 조금 아쉽다. 에필로그 하나쯤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1만 5000원. 신연숙 문화담당 대기자 yshin@seoul.co.kr
  • 전국 중·고생 자원봉사대회 대상 2명

    전국 중·고생 자원봉사대회 대상 2명

    제8회 전국 중·고생 자원봉사대회(푸르덴셜생명·한국중등교육협의회 주최) 시상식이 9일 신라호텔에서 열려 청소년 330명이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자기만의 특기를 살려 소외된 이웃의 곁에 적극적으로 다가간 이자원(18·서울 여의도고 3년)군과 김엘리야(17·충남 천안 병천고 3년)양 등 대상(친선대사상) 수상자 2명을 소개한다. ■ “할머니·할아버지를 멋쟁이로 가꿔드려요” 천안 병천고 김엘리야양 “산골 할아버지·할머니를 멋쟁이로 변신시켜 드려요.” 한 달에 두 번 천안 병천 사랑의 마을로 찾아가는 김엘리야양과 친구들의 손에는 화장품과 미용기구가 담긴 가방이 들려 있다. 병천고 미용학과 학생들로 이루어진 ‘뷰티도우미’들이다. 학생들이 오는 날 이곳 할아버지·할머니들은 ‘얼짱’으로 변신한다. 뷰티도우미들은 어르신들의 머리를 손질하고 피부관리, 손·발톱 정리를 해 준다. 영정사진을 찍는 어르신들에게는 메이크업 솜씨를 발휘하기도 한다. “눈이 침침한 어르신들은 손·발톱을 직접 깎기가 어려워요. 정기적으로 관리해 드리지 않으면 손·발톱이 살로 파고들어 위험해질 수도 있답니다.” 처음엔 학생들이 찾아오는 걸 부담스러워하던 노인들도 이제는 ‘뷰티도우미’들이 오는 날이면 먼저 나와 기다린다고 한다. 김양은 이미 대학 미용학과 수시모집에 합격한 상태다.“미용기술을 활용해 선생님이 되거나 해외에서 선교활동을 펼치고 싶습니다.” ■ “신나는 요들송으로 행복을 나눠드리죠” 서울 여의도고 이자원군 “중립국 스위스의 노래인 요들송으로 북한이나 분쟁국 어린이들을 위해 공연하고 싶어요.” ‘친선대사상(대상)’을 받은 이자원군. 열 살 때인 1997년부터 가족과 함께 ‘작은 스위스’라는 음악 봉사단을 만들어 전국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산골 오지학교, 달동네, 장애학교 등 문화에서 소외된 지역을 두루 다녔다. 이군 가족의 요들송 봉사는 요들클럽에서 만나 결혼한 부모의 약속 때문이었다. 외환위기 때 아버지가 실직하고나서 가정형편이 어려운 적도 있었지만 요들송 공연을 다니며 가족애를 돈독히 할 수 있었다. 5년 전부터 보여주기만 하는 공연에서 벗어나 매주 토요일 장애인들에게 스위스 음악을 직접 가르치고 있다.“일회성으로 끝나는 공연보다 함께 배워서 연주하는 공연에서 더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이군은 사회복지학과나 청소년지도학과에 진학해 전문적으로 봉사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씨줄날줄] 기자조선/이용원 수석논설위원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 한국 고대사의 큰 줄기를 자국사로 편입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과정에서 왜곡된 주장이 적잖게 나왔다. 그 가운데 하나가 중국 은(殷)나라의 현인 기자(箕子)가 동쪽으로 와 한민족 최초의 국가인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설이다. 이는 단군조선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물론 한국사가 중국의 영향 아래 시작됐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즉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적극 주장하던 타율성 이론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기자란 역사상 어떤 인물인가. 춘추전국시대의 여러 저작에 등장하는 기자는, 은나라의 마지막 왕이자 폭군인 주왕(紂王)에게 실정을 간하는 어진 신하이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그가 조선 땅으로 건너와 나라를 세웠다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전국시대와 통일왕조 진(秦)을 거쳐 한(漢)나라가 들어선 뒤에야, 은나라가 망하자 기자가 조선 땅으로 망명해 나라를 세웠으며 이를 중국 왕조가 승인했다는 주장이 덧붙는다. 이처럼 새 기록이 나오는 이유는, 한나라가 중화적(中華的) 세계관을 내세워 천하가 중국 통치권임을 강변하면서 주변국 역사를 제 입맛대로 조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국내에서는 ‘기자조선설’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지성 최치원은 기자가 조선으로 건너와 교화를 베풀었을 가능성은 인정했지만 나라를 세우지는 못했다고 보았다.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고려 중기부터 기자는 급격히 각광을 받게 된다. 한국의 역대 왕조는 애초에 유학을 기본 이념으로 건설됐다는 정치적 선전의 상징으로 이용된 것이다. 기자에 대한 숭모는 조선조 들어 더욱 강해졌다. 현재 한국 사학계는 기자조선을 대체로 인정하지 않는다. 한나라보다 앞선 시대의 중국 서책에 이미 조선이라는 국가가 등장하지만 기자와 연계시킨 기록은 전무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단군조선-위만조선-부여 및 삼국으로 이어지는 한국 고대사에서 기자조선을 따로 구분지을 시대가 기록상이건, 고고학상이건 존재하지 않기도 하다. 중요한 건 중국 사학계가 어떤 궤변을 늘어놓느냐가 아니다. 그 왜곡된 역사 서술을 언제라도 깨부술 만큼 우리 고대사 연구가 두터워져야 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이다. 이용원 수석논설위원 ywyi@seoul.co.kr
  • [한승원 토굴살이] 바다 이야기

    [한승원 토굴살이] 바다 이야기

    지하철 노약자석에 두 사람의 노숙자가 타고 있었다.50대인 그들은 똑같이 한 자동차 회사의 허름한 하늘색 제복 윗도리를 걸치고 있었고, 한 성당에서 주는 점심을 얻어먹으러 가고 있었다. 불콰하게 취해 있었다. 체구 크고 뻐드렁니 난 쪽이 말했다. “유치한 자식들, 차라리 동원 회사 배 납치한 놈들같이 해적질을 하지!” 체구 작달막한 쪽이 빈정거렸다. “아이고 형님, 우리민족은 신라 때부터 해적들에게 시달려 오기만 했어요. 우리민족이 바다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한지 아시오? 이 반도 땅 해변 해수욕장들은, 물 길 바람 길 파도 길을 고려하지 않은 채 방파제나 부두를 설치하고, 아파트 지으려고 바닷모래 준설한 까닭으로 자갈들만 엉성해져가고 있어요. 썩은 시화호를 만들어놓고, 다시 썩은 냄새 풀풀 나는 새만금 바다를 또 만들어 놓았어요.” “김 박사, 말이 맞다. 바다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들이,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이 땅을 경영하고 있다.” 그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흑산도에 유배된 정약전은 강진의 동생 정약용에게, 바다의 율동에 대하여 물은 바 있다. 실사구시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고, 중국의 고전 가운데 읽지 않은 것이 없는 그였지만, 바다에 대해서 무지한 대표적인 한국선비였다. ‘해변에 산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조수의 왕래와 성쇠는 해석이 불투명하다… 중국의 성인은 모두 서북 지방에서 났으며 해수의 변화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측량함이 없었다. 주역은 미묘한 이치를 담고 있으되 바닷물 흐름에 관해서는 조금도 설명이 없다.’ 주역의 저자는 대륙 한가운데서 살았기 때문에 하늘과 땅의 율동만을 참고하여 주역을 만들었고 바다의 율동 원리를 가미시키지 못한 것이다. 우리 선인들은 바다가 도외시된 중화사상에 젖어 ‘무이 구곡’이나 ‘도산 십이곡’으로 흉내 내며 살았을 뿐이었다. ‘배타는 놈은 자식으로 치지 않는다.’는 말을 속담으로 사용할 만큼 바다를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바다를 멀리했다. 바다는 세상을 막 살아도 아까울 것 없는 상것들이나 사는 시공으로 여겼다. 신라의 귀족들은 광활한 바다를 경영함으로써 거대한 힘을 가지게 된 장보고를 암살하고 그 세력들을 소탕했다. 그 이후, 해적의 발원지인 대마도를 정복한 일과 같은, 바다 경영의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인들은 바다를 외면하고 중국대륙만을 지향했고 그쪽에서 생성 유포된 사상만을 숭상했다. 자연 바다를, 젊은이들이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시공으로 여기지 않았다. 천사들은 거칠 것 없이 지껄거렸다. “규장각에 있어야 하는 보물들이 어째서 프랑스 박물관에 있는지 아시오. 프랑스 해적들이 뺏어간 것이오.” “일본 해적들이 뺏어간 조선왕조실록도 엊그저께 겨우 찾아왔네.” “영국 박물관 미국 박물관 일본 박물관, 일본 골동품 수집가들 창고에 우리 보물들이 얼마나 많이 쌓여 있는지 아시오?” 일찍이 바다에 눈뜨고 바다 경영에 뛰어든 나라 사람들은 바다 저 편 땅(보물섬)에 널려 있는 것을 강제로 훔쳐다가 잘먹고 잘살아왔는데, 바다에 대하여 무지한 우리 선인들은 그들에게 대대로 당하기만 하면서 살아왔다. 그들이 해적들을 영웅시할 때 우리는 뱃사람들을 상놈으로 천시했다.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 바다 경영에 뛰어든 사람들, 고구려 역사를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중국 사람들 사이에서 어려운 실랑이질을 하고 있어요. 땅덩이 동강나 있는 것도 그렇고 북한 핵문제도 그렇고 일본이 독도 빼앗으려 하는 것도 그렇고…” “야,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나는 자존심 상해 죽겠다. 아니, 그 대박 도깨비 기계에다가 왜 하필 ‘바다 이야기’라는 이름표를 달아 가지고 신선한 바다를 물 먹이고 있냐?” 소설가
  • [제16기 비씨카드배 신인왕전-결승 2국] 허영호 5단 우승

    [제16기 비씨카드배 신인왕전-결승 2국] 허영호 5단 우승

    총보(1∼253) 결승에 진출하기까지 원성진 7단은 최원용, 이영구, 강동윤을 물리쳤고, 허영호 5단은 박승현, 이희성, 진시영을 물리쳤다. 모두 실력을 의심할 필요 없는 강자들이지만 원7단이 상대한 쪽이 더 유명한 기사들이다. 세상이 공정하다면 많은 우승후보를 꺾고 결승에 오른 원7단이 우승해야 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고생했기 때문에 힘만 더 들었을 뿐이다. 반면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결승에 오른 허영호 5단은 비축한 힘을 결승에 집중해서 우승을 차지했다. 물론 당일에 연거푸 대국을 하는 것도 아니고 바둑이 심한 체력전의 게임도 아니므로 힘을 비축했다는 것은 모두 정신적인 측면에서 그렇다는 뜻이다. 허5단은 2001년에 입단해서 2003년에 농심신라면배의 대표로 선발되는 등 좋은 성적을 거뒀다. 그 덕분에 2004년 한국바둑리그 때에는 2장으로 선발되었다. 그러나 막상 그때부터는 슬럼프에 빠져 이렇다 할 만한 성적을 거둔 적이 없다. 그랬기 때문에 이번에 결승에 올랐을 때에도 바둑계에서는 대부분이 원성진 7단의 우승을 예상했다. 허5단은 주변의 ‘준우승 축하한다.’는 농담에 웃기만 했을 뿐 어떤 반발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대국에 임했다. 마치 이겨서 실력을 증명하면 되지 무슨 말이 필요하느냐는 듯이 2연승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역대 신인왕 출신기사들은 대부분 대기사로 성장했다. 그렇지만 우승 이후에 오히려 더 성적이 안 좋아진 기사도 있다. 앞으로 허5단이 어떤 모습으로 바둑팬들 앞에 보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오직 본인의 노력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다. 더욱 정진해서 발전하기를 바란다. 한편 원성진 7단은 2연패를 당했지만 대국 내용에서는 거꾸로 상대를 모두 압도했다. 특히 결승1국의 패배에 대해 ‘생애 최악의 역전패´라는 자평이 있었을 정도의 뼈아픈 패배였다. 그러나 억울한 패배이든, 완패이든, 진 것은 진 것이다. 구차한 변명은 본인만 더 추하게 할 뿐이다. 이후 원7단은 농심배 예선결승과 한국바둑리그에서 허5단을 만나 2연승을 거둬, 아쉬우나마 복수전에 성공했다. 한국바둑의 톱기사로 성장할 두 기사는 앞으로 중요한 시합에서 계속 만날 것이다.16기 비씨카드배는 두 명의 뛰어난 신인을 배출하며 끝났다. (173=43,176=170,179=43,184=170,187=43,190=170,193=43,233=168) 253수 끝, 백 5집반승 (제한시간 각 10분, 초읽기 40초 3회, 덤 6집반) 유승엽 withbdk@naver.com
  • “2008년 ‘4세대 휴대전화’ 나올것”

    “2008년 ‘4세대 휴대전화’ 나올것”

    이기태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 사장은 31일 “2008년에는 4G 이동통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휴대전화가 나올 것”이라고 밝혔다. 또 “현재까지 와이브로(휴대인터넷)에 3000억원,4세대(G)에 1000억원 이상 투자했다.”면서 “한국의 정보기술(IT) 산업은 2010년 이후를 준비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이 사장은 이날 ‘4G 포럼 2006’이 열린 서귀포 중문 신라호텔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2008년 말께는 4G 기술을 휴대 단말기에도 넣을 수 있을 것”이라며 “앞으로 3.5G인 와이브로와 4G의 조화로운 기술 발전 가능성에 대한 연구에 주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앞으로 사업자와 벤더들은 4G와 3G,3.5G 서비스의 상충되는 부분을 묶어 기존 시설을 최대한 활용하고, 동시에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최대한의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며 “기존 통신기술이 GSM(유럽통화방식),GPRS(2.5세대 유럽형이동전화),HSDPA(고속하향패킷접속) 등으로 발전했듯,4G도 기존 서비스를 기초로 점진적으로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현재 4G 기술의 발전 정도에 대해 이 사장은 “정지 상태에서 1Gbps, 이동 중에 100Mbps의 전송속도를 내도록 한 4G기술 표준에 맞춰 기술을 개발한 곳은 독일 지멘스와 일본 NTT도코모”라면서 “그러나 삼성전자가 오늘 시연한 4G 기술은 고속 이동 중에도 끊김이 없고, 화질이 좋아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강조했다. 세계 휴대전화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점유율 하락과 관련, 이 사장은 “올해 1억 1500만대 판매 계획을 세웠는데 상반기에 5500만대를 팔아 계획 달성에 큰 문제가 없다.”면서 “다만 노키아와 모토롤라가 저가 시장에 주력해 점유율에 약간의 문제가 있지만 프리미엄 시장에 집중한다는 경영목표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고한 신뢰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수량으로만 한다면 가격을 내리면 많이 팔리겠지만 브랜드나 시장 여건을 보고 또 미래에 대한 투자수요에 맞춰 균형 있게 경영방침을 조절해 나갈 것”이라며 “하반기에는 ‘울트라 슬림폰’ 등으로 상반기보다 좋은 결과를 낼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밖에 와이브로 칩 생산과 관련해서는 “와이브로 칩 설계는 삼성이 했기 때문에 앞으로 삼성전자 반도체를 비롯, 경쟁력 있는 회사가 칩을 생산하도록 넘겨줄 수 있다.”면서 “와이브로 칩은 앞으로 MP3P, 카메라, 컴퓨터, 방송장비 등에도 장착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귀포 정기홍기자 hong@soul.co.kr
  • 4세대통신 첫 성공

    4세대통신 첫 성공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음악파일 100곡을 3초 이내에, 고화질 영화 1편을 6초 이내에 내려받을 수 있는 4세대(G) 이동통신 서비스를 성공적으로 시연했다. 속도의 한계로 전송이 불가능했던 HD급 영상이 4G에서는 깨짐 없이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진정한 유비쿼터스 사회의 기반 네트워크를 마련한 것이다. 삼성전자는 31일 서귀포 중문 신라호텔에서 열린 ‘삼성 4세대(G)포럼 2006’에서 정지 때에는 1Gbps급, 이동할 때에는 100Mbps급 전송 속도로 끊김 없이 데이터를 송수신하는 4G 시범시연에 성공했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는 2010년께 상용화될 미래 무선통신기술인 4G 표준화 작업을 주도, 기술 선점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4G 기술은 내년 10월께 ITU(국제전기통신연합)가 전세계 공통의 주파수를 결정한 뒤 표준화 과정을 밟게 된다. 1Gbps의 전송 속도면 MP3 음악파일(300MByte) 100곡을 2.4초에,CD 1장(800MByte)짜리 영화 1편을 5.6초에,20M급 HDTV 방송도 12.5초에 내려받을 수 있다. 삼성전자는 특히 이번 공개 시연에서 세계 최초로 60㎞로 달리는 차 안에서 100Mbps급 전송 속도로 초고속 이동통신 서비스를 끊김 없이 이용하게 해주는 ‘핸드오버’(Handover) 구현에 성공했다. 핸드오버란 이동통신 가입자가 이동 중에도 자유롭게 서비스를 사용할 수 있도록 기지국과 기지국 사이를 서비스의 끊김 없이 이동하도록 해주는 기술을 뜻한다. 삼성전자는 또 정지 때에는 여러 사용자가 동시 접속했을 때,1Gbps급 속도로 HD(고화질)방송 32개를 한번에 내려받으면서 동시에 초고속인터넷, 화상통화, 포럼 생중계까지 이용할 수 있는 시범서비스를 시연해 4G의 차별화된 성능을 실감케 했다. 삼성전자의 4G 시범서비스는 현존 최고의 이동통신 기술인 ‘와이브로’(휴대인터넷)의 전송속도 20Mbps보다 더욱 향상된 100Mbps급으로, 대용량 데이터도 안정적으로 송수신했다. 서귀포 정기홍기자 hong@seoul.co.kr
  • ‘천하장사 마돈나’ 공동시나리오 · 감독 이해영 · 이해준

    ‘천하장사 마돈나’ 공동시나리오 · 감독 이해영 · 이해준

    배우나 작품 자체만큼 감독이 주목받기란 흔한 일이 아니다. 톱스타에게 쏠리는 현상이 유별난 충무로에서라면 더욱이나 그렇다.31일 ‘천하장사 마돈나’(제작 싸이더스FNH·반짝반짝)를 개봉시키며 입봉 감독이 된 시나리오 작가 이해영·이해준 커플 이야기다. 커플이라니?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 고등학생의 성 정체성 고민을 코믹화법으로 에두른 영화의 정체를 알고 나면 이 동갑내기 남자감독 커플은 어째 더 수상해진다. 같은 대학(서울예대) 같은 학과(광고창작)의 동기생에서 출발해 둘의 프로필은 완벽하게 일치해 왔다.▲2000년 인터넷 디지털 단편 ‘커밍아웃’각본 ▲2001년 ‘신라의 달밤’원안 ▲2002년 ‘품행제로’각본 ▲2004년 ‘안녕 UFO’각본 ▲2004년 ‘아라한 장풍대작전’각색. 여기에 이름까지 닮은꼴이니 그들의 ‘기묘한 동거’(실제로도 같은 집에 산다)가 궁금할 밖에. “커밍아웃할 사이 아닌가 싶죠? 그런 사이는 절대 아니구요.(웃음)”(이해영, 이하 영) “공동시나리오 작업 때문에 한 집에 살지만, 그래서 더 철저히 서로의 사생활엔 무관심해요. 그래야 오래 함께 일할 수 있으니까.”(이해준, 이하 준) 대학시절 둘이 의기투합한 배경은 간단했다.“전공에는 관심없고 영화에만 관심있는 취향이 일치했고, 펜만 있으면 시작할 수 있는 게 시나리오 같아서” 무작정 덤벼들었다.2,3년 습작기간을 거쳐 비교적 순탄하게 충무로에 안착할 수 있었던 행운남들이었다. 3년 전 TV에서 여고생 씨름부 이야기를 보다가 무릎을 쳤다. 여자가 되고 싶어 누구보다 ‘남자답게’ 모래판을 뒹구는 남자아이 이야기(천하장사 마돈나)는 그렇게 시작됐다. 그런데 왜 직접 메가폰을 잡기로 했을까.“소재가 소재인 만큼 극중의 아주 작은 뉘앙스에 따라 작품의 질감이 달라질 테니까요. 본연의 뉘앙스를 살릴 수 있는 건 우리 밖에 없다고 판단했죠.”(준) “우리에겐 ‘감독’이 아니라 ‘…마돈나’가 먼저였던 거죠. 취향으로 밀고나갈 영화인데 아무한테나 우리 취향을 강요할 순 없잖아요?”(영) 이번 만큼은 남주기 아까웠다는 완곡어법이다. 영화는 ‘웰컴 투 동막골’의 소년병사 류덕환을 뚱보 씨름장사로 만들었다. 코미디 계보에 줄서는 드라마이긴 한데 뒷맛이 평범하지 않다. 성전환 수술비를 마련하려 씨름판에 뛰어든 소년의 이야기에는 코믹하되 낯선 ‘공기’로 꽉 차 있다. 한국 코미디의 방식을 답습하고 싶지 않았기에 때리고 욕하는 극성맞은 전형들을 자제했다. 그런데 시사회장의 관객반응에 놀랐다.“남자주인공이 립스틱을 칠하거나 여자속옷을 입을 때 싸해지는 보수적 분위기는 예상했던 대로구요. 전혀 의도하지 않은 대목에서 폭소가 나올 땐 당황스러워요.”(영) “웃음이나 감동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준)는 연출의도가 ‘…마돈나’를 적잖이 낯선 코미디로 만들었다. 과장된 음향효과를 의도적으로 걷어내 좀 심심하다는 평가도 듣는다. 의도가 제대로 먹힌 셈이다.“성 정체성을 고민하는 지극히 비주류적 소재가 범대중적 코믹 드라마로 인정받는 성취를 맛보고 싶었거든요.”(영) 첫 연출작에 거창한 바람은 없다. 타인에 대한 이해가 있는 한국형 코미디의 새 전형이 됐음 좋겠다는 것, 그뿐이다.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삼성전자 “2010년 가전부문 100억弗 매출”

    삼성전자 “2010년 가전부문 100억弗 매출”

    삼성전자가 올 하반기 생활가전의 ‘야심작’들을 대거 출시했다. 이번 가전제품의 특징은 오감을 자극하는 감성 기술과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의 예술적인 접목이다. 삼성전자는 30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이현봉 생활가전총괄 사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중장기 비전 및 하반기 신제품 발표회를 갖고 감성 기술을 통한 생활 혁신을 선언했다. 이현봉 사장은 “지금까지 삼성전자의 생활가전 제품들이 기술과 성능의 우수성에 초점을 맞춰왔다면, 앞으로는 소비자의 가치로 재해석한 감성 기술과 디자인을 강조하게 될 것”이라며 “감성 기술은 소비자들에게 혁신적인 생활을 선사하기 위해 마련한 새로운 화두”라고 소개했다. 삼성전자는 김치냉장고 ‘하우젠 아삭’과 최저 소음을 자랑하는 진공청소기 ‘스텔스’, 앙드레 김의 화려한 디자인이 가미된 냉장고 ‘지펠’, 은나노 세탁기 등 5대 제품군 40개 모델을 선보였다. 삼성전자는 이번에 출시된 신(新)가전 라인업을 중심으로 글로벌 마케팅을 전개,2010년에는 매출을 100억달러 수준까지 끌어올린다는 계획을 세웠다.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산이 좋아 산으로] 전북 진안 마이산

    [산이 좋아 산으로] 전북 진안 마이산

    ‘무진장’의 고을 전북 무주, 진안, 장수 3개 군은 오지 중의 오지였다. 길도 잘 나지 않아 물어물어 찾아오던 시절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지만 여전히 옛 정취가 흠뻑 묻어나는 진안에 들어설 즈음, 맨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오롯이 솟은 마이산(馬耳山·673m)의 자태다. 나란히 솟은 암마이봉(673m)과 숫마이봉(667m)이 마치 말의 두 귀와 같다 하여 이름 붙은 마이산. 신라시대에는 ‘섰다’ ‘솟다’의 한자음 표기로 서다산(西多山), 고려시대에는 ‘솟아오르다’는 뜻의 용출봉(湧出峰)이라 불렸다. 마이산 산행은 종주 코스의 들머리인 합미산성 입구를 찾아내는 일부터 녹록지 않다. 그 옛날 진안 일대의 가장 큰 곡창지대였다는 마령벌을 지나 제멋대로 자란 수풀을 헤치고 야트막한 언덕에 올라섰는데도 산길은 제 몸뚱이를 제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도 넓은 잎을 가진 칡덩굴, 산딸기나무, 보랏빛 싸리꽃이 뒤엉킨 채 떨궈내는 아침이슬을 온몸으로 맞으며 여름내 우거진 잡목 숲을 걷는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다. 20분쯤 지나자 거의 무너져 내려 바닥에 돌무더기만 여기저기 흩어진 합미산성터.1시간쯤 호젓한 오솔길을 더 걸어 덕천교와 만나는 지점에 다다를 즈음부터 오르막이 험해지고 철계단이나 바위에 단단히 고정시킨 굵직한 로프가 더러 눈에 띄기 시작한다. 급한 경사를 타고 오르면 간간이 나오는 전망 좋은 바위는 잠시 마령평야를 내려다보며 숨 고르는 여유가 되어준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서히 드러나는 마이산 종주의 참맛은 이제부터다. 들머리에서 3.3㎞쯤 떨어진 광대봉(609m)에 올라서는 순간, 암마이봉 숫마이봉이 찬연히 솟아오르고 저 멀리 덕유와 남덕유의 능선이 아스라이 흐르고 있다. 금남호남정맥 가운데 떡 버티어 서서 운장산으로 차고 오르는 금남정맥과 영취산에서 덕유산으로 장쾌하게 뻗어나가는 백두대간을 한번에 껴안는다. 풍경에 취해 1시간 남짓 걷는 사이 일행은 어느새 옛 금당사 자리, 고금당 나옹암과 조우한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고려 말 고승 나옹선사가 읊었다는 시. 하지만 나옹선사의 수도처로 전해오는 자연암굴 주변에 그 고귀한 정신은 온데간데없고 짓다 만 사찰의 붉은 철골조만 흉물스럽게 서 있을 뿐이다. 쓸쓸히 나옹암을 뒤로 하고 40분쯤 걸어 바위 위에 있던 나무를 거의 베어내지 않고 지었다는 누각 비룡대(527m)에 올라선다. 암마이봉 수마이봉이 성큼성큼 걸어온 듯 가까이에 있다. 암마이봉 왼쪽으로 봉우리 네 개가 차례로 이어진 삿갓봉도 눈에 들어온다.360도 한 바퀴를 휘돌아 펼쳐지는 파노라마를 인간의 눈으로도, 사진으로도 그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 삿갓봉 삼거리에서 봉두봉(540m)을 지나면 곧 마이산 정상 암마이봉과 숫마이봉이 거대한 두 몸뚱이를 내밀지만 두 군데 모두 통제구역이라 올라갈 수는 없다. 서로 마주볼 뿐 서로 기댈 수 없는 두 봉우리, 우리 역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하산은 돌탑 80여 기가 모여 있는 유명한 탑사,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절이라는 은수사를 거쳐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이 되는 천황문과 화엄굴을 지나 북부주차장으로 하면 된다. 글 정수정 사진 남영호월간 MOUNTAIN 기자 (www.emountain.co.kr) # 여행정보 대진고속도로 무주 나들목으로 나와 30번 국도를 타면 진안까지 30분, 진안 시내에서 마이산까지는 4㎞다. 물 좋은 진안의 먹을거리로는 돼지고기가 유명하다. 북부 주차장 내에 있는 일품가든(063-433-0825)에는 10년 넘게 축산업에 종사한 염기찬 사장이 직접 칼로 썬 환경살을 맛보러 일부러 찾는 사람들이 많다. 진안 시내에는 애저찜의 원조 진안관(063-433-0651)이 유명하고, 전원일기(063-433-1666)의 삼겹살도 인기가 좋다.
  • [한민족 문화유전자를 찾아서] (4) 강역·자연상징(하)

    [한민족 문화유전자를 찾아서] (4) 강역·자연상징(하)

    어느 민족이건 그 민족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온 동식물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동식물은 무엇일까. 우선 많은 사람들은 소나무를 떠올릴 것이다. 소나무는 1940년대만 하더라도 전체 산림면적의 60%를 차지했던 한국의 대표적인 수종이었다. 즉 우리나라 어디서도 접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전근대 시대 소나무는 난방용으로 가장 뛰어난 장작이었고, 관솔 가지는 조명용으로, 목재는 건축과 조선용으로 널리 쓰였다. 소나무는 우리 민족의 먹을거리와도 관련이 깊다. 솔잎으로 만드는 송편, 한약재로 쓰이는 송진에서 기근이 들었을 때 요긴했던 솔잎가루와 소나무껍질까지 참으로 우리 민족의 삶과 깊은 인연을 가진 대표적 식물이 소나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철 푸르른 소나무에 우리 민족은 곧은 절개와 굳은 의지라는 의미를 부여해 왔다.“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 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라고 애국가에서 노래하고 있는 것도 그 한 예이다. 신성한 영물 호랑이 동물 가운데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것은 단연 호랑이이다. 호랑이는 우리나라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에서부터 서울올림픽대회의 마스코트로 이용되기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동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호랑이는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체로 고대로부터 호랑이는 신성한 영물이었으며, 인간의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산신이나 산신의 사자로 숭배의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 현재 남아 있는 산신도 가운데 꼬리를 소나무 사이로 길게 뻗어 구름까지 닿게 하는 호랑이 그림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아왔던 호랑이는 현재 사라지고 없다. 게다가 요즈음 소나무 숲이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지구 온난화와 그 결과 발생하는 소나무 재선충과 솔잎혹파리 등 열대성 병해충 때문이라고 한다. 호랑이와 소나무 숲의 감소가 우리 민족의 기상과 어려움을 이겨내는 정신마저 사라지게 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빛나는 과학기술 측우기 현재는 과학기술의 시대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국 과학기술의 전통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은 아마도 측우기와 물시계, 해시계일 것이다. 측우기는 하늘이나 기후를 경험적으로 살피던 것에서 벗어나 수치에 입각하여 기상을 기록한 세계 최초의 기상관측장비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우리가 자랑할 만한 또 다른 발명품으로는 앙부일구(仰釜日晷)라는 해시계가 있다. 한자를 풀이하자면,“하늘을 우러르는 솥에 비추는 해의 그림자”라는 뜻이다. 인류가 가장 먼저 발견했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광범위하게 사용된 것은 해시계이다. 지면에 막대기만 꽂으면 그림자가 생겨 시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앙부일구는 단순히 하루의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절기까지 알려주는 정밀한 시계였다. 앙부일구의 안쪽 면에는 절기를 나타내는 위선(緯線)과 시각을 나타내는 경선(經線)이 그어져 있다. 태양은 지축을 기준으로 23.5도 기울어져 운행하기 때문에 해 그림자의 길이는 계속 변하게 된다. 세종대의 학자들은 이 점에 주목하여 태양 빛을 받는 면을 오목하게 해서 절기까지 표현할 수 있는 시계를 만든 것이다. 측우기와 앙부일구가 가지는 과학기술사적 의미는 그것이 단순히 세계 최초의 발명품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측우기와 앙부일구는 한성의 중요 궁궐과 관서뿐만 아니라, 지방에도 여러 곳에 설치되어 이용되었다. 특히 앙부일구는 휴대용으로도 많이 만들어졌다. 일찍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널리 보급되어 활용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 가운데 천상열차분야지도도 빼놓을 수 없다. 전근대시대에는 천문현상을 아는 것이 왕업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새로 세워진 조선은 왕조의 권위를 드러내고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천문도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많은 별들을 새로이 관측해서 위치를 정하고 별자리를 구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누군가 조선 태조에게 고구려 때 돌에 새겨 만든 천문도를 탁본한 것을 바쳤다. 그러나 이 고구려 천문도는 연대가 오래되어 조선시대의 하늘과는 약간의 오차가 있었다. 이에 조선초기 서운관에서 새로이 천문을 관측하여 만든 것이 천상열차분야지도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그 자체로서도 중요하지만, 고구려 천문학의 전통을 조선시대에 계승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또한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제작은 조선 나름의 독자적 천문학 확립의 초석이 되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세종은 간의, 혼천의, 일성정시의 등의 장치를 두고 천문을 관측하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나온 산물이 칠정산이라는 우리나라 독자의 역법서였다. 칠정이란 해와 달, 그리고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을 말하는데, 이들 7개 별의 운행을 계산해 놓은 책이 칠정산이다. 천문 관측과 시계의 제작은 서로 상보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와 물시계인 자격루, 해시계인 앙부일구는 모두 밀접한 연관을 맺으며 발전해온 것들이다. 조선(造船) 기술의 상징 거북선 민족의 상징은 무엇보다도 전통이 있어야 한다. 전통이란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우리의 전통 가운데 자랑할 만한 것으로는 조선기술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고려는 원나라와 연합하여 원종과 충렬왕대에 두 차례 일본 정벌에 나선 적이 있다. 이때 유명한 가미카제(神風)를 만나 원정군의 군선이 많이 파괴되었는데, 유독 고려에서 만든 배는 파손 정도가 경미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조선 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인데, 이러한 한선(韓船)의 우수한 전통을 이은 대표적인 배가 거북선이다. 거북선의 전통은 고려시대로 소급된다. 고려는 11세기부터 함경도 지방 여진 해적을 방비하기 위해 과선(戈船)이라는 특수한 군선을 만들었다. 과선은 여진족들이 배 안에 뛰어들어 백병전을 벌이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뱃전에 짤막한 창을 꽂은 배였다. 이 뒤에도 여진 해적이나 왜구를 막기 위해 창이나 칼을 꽂은 검선(劍船)은 계속 만들어졌는데, 개판 위에 칼과 송곳을 꽂은 것으로 보아 거북선은 고려시대 과선과 검선의 후계자임이 분명하다. 다만 거북선은 대형이고, 검선과 과선은 소형 선박이라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거북선은 판옥선에 덮개를 씌운 것이다. 판옥선은 임진왜란의 주력선이다.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은 3척밖에 만들어지지 않았고, 대부분의 전투는 판옥선이 담당했다. 거북선과 판옥선은 장단점을 각기 공유하고 있는데, 거북선은 방탄이 잘되어 있고 적의 접근을 방지할 수 있어 전투 초기의 돌격선으로 유용하다. 그러나 덮개로 인해 공간이 좁아 많은 인원의 승선이 불가능하고, 무게가 많이 나가 추격전에 불리하며, 노꾼과 전투원이 섞이게 되어 전투원의 활동이 원활치 않은 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거북선은 상징이다. 우리 한선 내지 군선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대표 상징으로서 중요한 것이다. 최무선의 등장 이후 여말선초부터 우리 수군은 대포와 같은 중화기를 이용했다. 그런데 일본은 육전용 경화기는 사용했지만, 해전용 중화기는 사용하지 못했다. 이는 일본 군선의 주재료가 삼나무로, 함포 사격으로 인한 엄청난 반동을 견뎌내지 못할 정도로 약하기 때문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일본 군선을 부딪쳐 깨뜨리는 전법을 많이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소나무로 만들어진 조선의 군선이 일본 군선보다 상대적으로 강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재 세계조선소 순위 10위 안에 한국 조선소가 7개가 들어가고, 더욱이 세계 5위까지의 조선소는 모두 한국 조선소라고 한다. 가히 조선 강국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굳이 신라 때 장보고까지 언급할 필요도 없다. 고려시대 이후 현재까지의 배 건조 실력만으로도 훌륭한 문화적 상징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진돗개· 한우· 수원화성 그리고 IT 이 외에도 100대 민족문화상징의 강역 및 자연상징에 진돗개와 한우, 수원화성과 정보통신(IT)이 뽑혔다. 모두 한국 문화를 대표할 만한 것들이다. 그러나 이들 4개의 선정에는 대표성 외에도, 어떤 절박함이 들어있는 것 같다. 현대는 생명산업(BT)과 정보통신산업의 시대이다. 세계적인 종자전쟁에서 우리의 우수한 종자를 다수 확보해야 하고, 과학기술의 전통이 미약한 가운데 정보통신사업을 적극 육성해야 한다. 신견(神犬)으로 불리는 진돗개와 훌륭한 맛의 한우, 정조대의 과학기술이 집대성된 화성의 선정에는 미래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어 보인다. 이정주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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