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총수·CEO들의 세밑 풍경
올 한해를 보내는 재계 총수들과 최고경영자(CEO)들의 마음이 착잡하다. 개별 기업들로는 명암이 교차하지만 재계 전체로는 ‘시련의 한 해’였기 때문이다. 요동치는 대선 정국 속에서도 묵묵히 글로벌 현장을 챙기는 총수도 있고, 해외에서 돌아온 총수도 있다. 대선을 앞두고 해외 출장파보다는 국내 체류형이 더 많은 것이 올해 세밑 풍경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돌아오고
17일 재계에 따르면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석달간의 일본 요양을 끝내고 지난 15일 귀국했다. 첫 작업으로 ㈜한화 지분 4%(300만주)를 3명의 아들에게 증여했다.20일부터는 충북 음성 꽃동네에서 의무 봉사활동(3년내 200시간)에 들어간다. 동시에 그동안 다소 밀쳐놨던 그룹 현안도 직접 챙긴다. 다만, 행보에는 다소 제약이 예상된다. 이날 한화건설·한화L&C·한화테크엠의 대표이사직에서 각각 물러났기 때문이다. 금고 이상의 판결을 받은 등기이사를 3개월 안에 교체하지 않으면 건설업 면허가 취소되는 현행법 규정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다. 이로써 김 회장은 한화갤러리아와 드림파마 2개 계열사 대표이사 직함만 갖게 됐다.
●조용히 국내에서…
해마다 이맘때면 해외에서 경영구상을 다듬었던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서울 한남동 자택에서 칩거 중이다. 삼성은 최근 그룹이 처한 사정을 감안해 해마다 1월2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던 신년하례식을 사실상 취소했다. 이 회장의 생일 때(1월9일) 하려던 ‘자랑스런 삼성인상’ 시상식도 또다시 늦춰질 공산이 높다.
이 회장과 달리 연말연시 해외에 잘 나가지 않는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서울 한남동 자택에서 대선을 지켜볼 계획이다. 당분간은 해외출장 계획이 없다. 올해 평양으로, 개성으로, 백두산으로 분주히 ‘대북 세일즈’를 펼쳤던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도 연말연시에는 조용히 서울에 머물 계획이다.
●분주히 오가고
올해 해외를 가장 많이 나간 총수는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다.
정 회장은 올해 지구를 세 바퀴나 돌았다. 여수 엑스포 유치를 위해서였다. 평창올림픽 유치 실패로 낙담했던 국민들에게 ‘단비 같은 희소식’을 안겨주었음은 물론이다. 그 와중에 슬로바키아 기아차 공장 준공식, 체코 현대차 공장 기공식, 브라질 현대제철 철광석 장기공급 계약식, 중국 기아차 2공장 준공식도 찾아 현지 직원들의 사기를 높였다.
최 회장은 일주일에 하루 반나절은 해외에 있었다. 총 14차례,74일간이나 해외출장을 다녀왔다. 가장 압권은 한국에서 비행기로만 20시간 날아가야 하는 페루 방문이었다. 페루에 도착하자마자 최 회장은 다시 헬기를 타고 정글로 들어갔다. 카미시아 유전 시추 현장을 직접 보겠다는 욕심이었다. 젊은 총수의 열성에 감복한 페루 대통령은 석유화학사업 분야의 상호 협력을 굳게 약속했다.
총수가 이렇다 보니 계열사 CEO들도 몸을 편히 ‘놀리지’ 않는다. 신헌철 SK에너지 사장은 올해 열네차례나 해외출장길에 올랐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도 한 달에 평균 두 번은 비행기를 탔다. 지난해보다 크게 늘었다. 대우건설 인수로 챙겨야 할 해외사업장이 늘어난 것이 직접적인 요인이다. 아랍에미리트연합, 카타르, 리비아 등 먼 곳도 마다않고 해외 건설수주에 힘을 보탰다.
‘라이벌’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횟수에서는 박 회장에게 뒤진다. 그러나 2월 캄보디아(프놈펜 취항),7월 미국 시애틀(B787 공개),10월 내몽골 쿠부치사막(녹색생태원 조림),11월 중국 베이징(남방항공 스카이팀 가입),12월 중국 톈진(톈진 화물터미널 합작사업) 등 성과는 알찼다.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은 전국경제인연합회장, 한·일경제협회장 등 맡은 대외 직함이 많아 누구보다 바쁘게 국내외를 오갔다. 통신업계 트로이카인 KT 남중수·SK텔레콤 김신배·KTF 조영주 사장도 대표적인 해외파다. 홍준기 웅진코웨이 사장은 지난 3월 취임 이래 한 달에 평균 일주일은 해외에서 보냈다. 한 재계 인사는 “통상 대선이 낀 해에는 재벌 총수들이 없던 출장도 만들어 해외로 나가는 게 관례인데 올해는 대부분 국내에 머무는 것도 달라진 풍경 중의 하나”라고 전했다. 시대가 변화하면서 대선을 앞둔 정치권이 종전보다 깨끗해졌고 재계에서도 과거보다는 대선자금에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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