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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시대 굴식돌방무덤 발견, 유물 확인 안 되는 이유는..

    신라시대 굴식돌방무덤 발견, 유물 확인 안 되는 이유는..

    문화재청은 지난 13일 중부고고학연구소가 긴급 발굴조사를 시행하고 있는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대평리 산23-1번지 일원에서 신라 시대 굴식 돌방무덤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양평 신라 돌방무덤은 중부지역에서 발견된 신라 고분군으로는 최대 규모로, 유물은 도굴로 인해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조사팀은 고분의 축조 방법과 석실의 구조로 미뤄 6∼7세기에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중부고고학연구소 측은 이미 이 신라 돌방무덤들은 양평군 내에서는 잘 알려졌으며, 도굴은 이미 30년 이전부터 이뤄졌다고 밝혔다. 뉴스팀 seoulen@seoul.co.kr
  • 가을 끝자락길 번뇌 내려놓길 마음 쉬어가길

    가을 끝자락길 번뇌 내려놓길 마음 쉬어가길

    ‘춘마곡 추갑사’(春麻谷 秋甲寺)라 했다. 봄엔 신록이 아름다운 마곡사를, 가을엔 단풍이 고운 갑사를 찾으라는 뜻이다. 개창 시기가 삼국시대까지 올라가는 고찰을 어찌 풍경으로만 찾으랴. 조붓한 숲길 여기저기에 숱한 가르침이 배어 있을 터. 한데 범부로선 당최 그 뜻을 헤아릴 수가 없으니, 하릴없이 절집 구경만 해야 할 판이다. 꼭 가을이 아니라도, 갑사는 한번은 가봐야 할 절집이다. 이름부터 도저하지 않은가. ‘하늘과 땅과 사람 가운데서 으뜸(甲)’이라니 말이다. ●420년 백제시대 창건… 탱화 등 문화재도 가득 충남 공주의 계룡산 자락에 깃든 갑사는 420년(백제 구이신왕 원년)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556년 혜명대사가 중건했으나, 1597년 정유재란(선조 30년) 당시 1000여 칸에 이르렀다는 당우가 죄다 불타 사라졌다. 현재 모습은 전란 이후 중창 불사를 통해 새로 세워진 것이다. 오랜 연혁만큼이나 문화재도 많다. 국보인 갑사 삼신불괘불탱화(국보 제298호)와 보물 다섯 점, 도 유형문화재 일곱 점 등이 남아 있다. 특히 철당간과 지주는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으로는 유일하게 남아있다. ●초입엔 노오란 눈 흩날리는 은행나무길 일반적인 인식이 그렇듯, 갑사는 단풍이 아름다운 곳이다. 먼저 은행나무가 이방인의 시선을 잡아끈다. 공주에서 갑사로 드는 길목 양편에 늙은 은행나무들이 400~500m 남짓 터널을 이뤘다. 혈기방장했던 시절, 위로만 솟구치려 했던 나무는 나이 든 지금 옆으로 넓게 가지를 펼쳤는데, 그 가지마다 노란 이파리가 한가득이다. 꼭 노란색 눈 폭탄을 맞은 듯하다. 무엇보다 매표소부터 갑사에 이르는 이른바 ‘오리숲길’의 오색단풍이 일품이다. 인위적으로 전나무나 소나무를 일렬로 심어 놓은 절집들과 달리 참나무 등의 활엽수와 단풍나무가 그야말로 다채롭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특히 팽나무와 느티나무는 수백년은 족히 넘은 자세로 이방인을 맞고 있다. 겨울을 앞두고 몸 안에서 물을 모두 빼낸 나무의 이파리는 단풍으로 물든 뒤 낙엽이 돼 떨어진다. 이런저런 낙엽들이 쌓여 만든 푹신한 길을 걷는 맛도 각별하다. 등산을 좋아하는 이라면 갑사에서 출발해 용문폭포, 금잔디고개를 지나 삼불봉으로 이어지는 등산로의 단풍도 놓칠 수 없다. 이름난 절집으로 난 길은 들머리부터 시끌벅적하다. 승속의 경계를 지나는 느낌이다. 조금씩 발걸음을 옮기면 소음은 멀어지고, 그제야 새소리, 물소리가 가까이 다가온다. 오리숲길은 갑사로 가는 길에 소나무와 느티나무 숲이 약 2㎞(5리) 정도 이어져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리숲길 아래엔 힘을 다한 나뭇잎들이 그득하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바스락바스락 기분 좋은 소리를 낸다. 절집까지는 세 개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살아온 세월을 가늠하기 어려운 느티나무들이 곁을 지키고 있는 일주문을 지나면 네 명의 사천왕이 동서남북을 지키는 사천왕문이다. 숲은 사천왕문을 통과하면 한층 울울창창해진다. 경내로 들어서려면 해탈문을 지나야 한다. 말 그대로 부처의 세계로 드는 문이다. ●세 개의 문 지나면 승속 경계속으로 불자가 아니더라도 갑사의 자태는 누구나 감탄할 만하다. 단청은 퇴색됐다. 강당 등 일부 건물의 단청은 겨우 무늬의 흔적만 남아 있다. 그 위에 시간이 더께로 내려 앉았다. 대웅전 건물이 공사 중이어서 다소 아쉽지만 기교를 부리지 않은 건물들의 웅장함에 아쉬움은 저만큼 사라지고 만다. 갑사 위쪽의 계곡을 따라 걷는 맛도 각별하다. 이를 ‘갑사구곡’이라 부른다. 일제강점기 때 중추원 부의장과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했던 윤덕영이 계곡을 따라 올라가며 경치가 빼어난 곳마다 아홉 가지 이름을 붙여 놓은 것이다. 이름이 지어진 경위야 떨떠름하지만, 사람의 일로 풍경이 가려지는 법은 없다. ●빼어난 경치 9곳 갑사구곡서 신원사까지 계곡 초입의 한옥 건물이 인상적이다. 윤덕영의 별장 ‘간성장’으로 지어졌다가 훗날 ‘전통찻집’으로 쓰여진 건물이다. 사방에 유리창을 댄 한옥은 계곡의 물길과 어우러져 독특한 자태를 선보이고 있다. 계곡을 굽어보는 문설주에 기대앉아 차 한 잔 마실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겠으나, 아쉽게도 출입이 통제돼 멀리서 입맛만 다실 수밖에 없다. 내친걸음 신원사까지는 돌아보는 게 좋겠다. 갑사에서 차로 20분 남짓 떨어져 있다. 신원사는 640년 백제 의자왕 때 보덕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신원사는 살아낸 세월에 견줘 소박하기 짝이 없다. 전각들의 단청은 흑백 사진처럼 낡았으되, 절집 마당에 깔린 잔디의 연초록 빛깔만큼은 여태 싱싱하고 영롱하다. 무엇보다 대웅전 오른쪽의 중악단 건물이 독특하다. 계룡산 산신에게 제사 지내던 산신각으로, 한때 명성황후(1851~1895)가 머물며 국운 융성을 기도했다는 곳이다. 중악단은 생김새부터 독특하다. 입구에 솟을대문을 세웠고, 사방을 둘러친 담장엔 아름다운 문양의 글귀를 새겨놓았다. 얼핏 규방을 보는 듯하다. 탱화 속 산신 또한 임금이 입는 용포를 걸쳤다. ‘이색적인 패션 감각’의 산신이다. 이 산신 덕에 평일에도 무속인들의 발걸음이 잦다고 한다. 글 사진 공주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41) →잘 곳:갑사 초입에 갑사 유스호스텔(856-4666)이 있다. 공주한옥마을(840-2763)은 단체가 묵기 좋다. 공주박물관 인근에 있다. 반포면의 동학산장(825-4301)도 깔끔하다. →맛집:초당칼국수(856-4331)는 담백한 칼국수가 일품이다. 인공의 맛으로 치장하지 않은 소박한 육수에 쫄깃한 면을 끓여 먹는다. 새이학가든(854-2030)은 공주국밥, 금강관(857-6700)은 깔끔한 한정식으로 이름났다. 동해원(852-3624)은 짬뽕 하나로 전국에 이름을 알린 집이다.
  • 고령군·크레모나 ‘현의 노래’

    고령군·크레모나 ‘현의 노래’

    한국의 가야금 발상지인 경북 고령군과 세계적인 바이올린 제작도시인 이탈리아 크레모나 시가 손을 맞잡고 문화·경제 교류 등 상생 협력에 나섰다. 곽용환 고령군수와 잔루카 갈림베르티 크레모나 시장은 10일 오전(현지시간) 크레모나 시청에서 두 도시 간 ‘동서양 문화·경제교류’ 협약을 체결했다. 협약 내용은 ▲상호 간 전시박람회, 현악기 공연, 축제 등의 문화 교류 ▲각종 문화활동 정보 교환 ▲지역 조직 및 민간단체 간의 문화 예술 활동 교류 ▲경제, 통상 교류 및 증진 강화 등이다. 고령은 한국 3대 악성의 한 명으로 꼽히는 신라시대 우륵(?~?)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가야금이 탄생한 곳이다. 이탈리아 북부 지역에 있는 크레모나 시는 인구 7만 5000여명으로 바이올린 제작자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탄생한 곳이다. 갈림베르티 크레모나 시장은 “오늘 협약으로 양 도시 간의 교류 협력 증진에 큰 발전이 있기를 기원한다”고 했다. 곽 군수는 “고령군과 크레모나 시는 현악기(가야금과 바이올린) 발상지로 역사·문화적 동질감을 갖고 있다”면서 “이번 협약으로 양 도시 간 문화교류는 물론 음악 인재육성 및 경제 분야에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고령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新국토기행] 하동군

    [新국토기행] 하동군

    경남 하동군은 경남지역 서남쪽 끝에 있는 농촌지역이다. 1개 읍과 12개 면이 있으며 지난 9월 현재 인구는 5만 79명이다. 면적은 675.5㎢로 경남 전체의 6.4%를 차지한다. 하동군은 경남지역만 놓고 보면 변방이다. 그러나 남해안 전체로 보면 중심지역이다. 영호남이 만나는 교통 요충지인데다 자연경관이 수려해 현재보다 미래가 더 기대되는 지역이다. 남쪽으론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아름다운 남해를 품고 있다. 한라산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높은 지리산(해발 1915m)이 우뚝 솟아 북쪽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서쪽에는 깨끗한 섬진강이 전남도와 경계를 이루며 흐른다. 바다와 강, 산, 계곡이 어우러져 구석구석 절경과 명승지를 빚어 놨다. 특산물과 먹거리도 풍성하다. 문학에서도 섬진강과 지리산은 무한한 창작 공간이다. 문학인들에게도 다양한 작품 배경과 소재를 준다. 이병주의 ‘지리산’, 박경리의 ‘토지’와 같은 대한민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가와 작품을 탄생시켰다. 농업과 관광, 문학의 고장 하동군은 이제 갈사만 산업단지를 중심으로 한 첨단산업을 접목, 하동시로의 야심 찬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하동이란 지명이 역사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신라시대 때다. 삼국사기지리지에 모래가 많은 지역이라고 해서 한다사군(韓多沙郡)으로 부르다가 신라 경덕왕이 ‘하동’으로 바꿨다(757년)고 기록돼 있다. 섬진강 동쪽에 있는 지역이란 뜻이다. 하동 여러 지역에서 고인돌이 발견됐다. 청동기 시대 문화 및 농경사회의 증거다. 청동기 시대 이전부터 크고 작은 강과 하천을 중심으로 취락이 형성돼 다사국으로 발전해 오늘에 이르는 유구한 역사의 고장이다. 고려사지리지에는 고려시대에 하동은 청하현으로 불렸고 진주목에 속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선 태종 때 남해현을 합쳐서 하남현(河南縣)으로 했다가 1415년에 다시 분리했다는 기록도 있다. 1704년 하동 도호부로 승격됐고 1895년에 진주부 하동군이 됐다. 하동군은 농업을 생활 터전으로 삼아 왔다. 농림어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70%가 넘는다. 지리산 등 산이 많은 지리 조건으로 공업은 발달하지 못했다. 고전·적량·진교면 등 3개 면 농공단지에 17개 업체가 입주했으나 150명 이하의 중소기업들이다. 현재 하동에 있는 가장 큰 산업시설은 금성면 가덕리의 하동화력발전소다. 1997년 1·2호기 준공을 시작으로 2009년 8호기까지 4조 2000여억원을 투입, 건립돼 주변 지역경제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올해 하동군 세수입의 23%에 해당하는 32억원의 세금을 냈다. 주변 금성·금남·고전 3개 면 지역에 장학·복지 등 사업으로 올해 27억 3900만원을 지원했다. 농업이 경제의 중심이던 시절에는 하동군 인구가 10만명을 훨씬 넘었다. 1965년 14만 3894명을 정점으로 경제개발과 도시화에 따라 인구는 줄고 고령화됐다.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28%에 이른다. 인구가 5만명에 턱걸이하고 있으나 곧 5만명 선이 붕괴될 것으로 보인다. 하동읍 출신인 전봉환(53) 기업지원담당은 “초등학교 시절만 해도 5일마다 열리는 하동장날이면 읍내가 온통 사람으로 가득 찰 정도로 인구가 많았다”고 회상했다. 인구 감소로 2012년 4월 19대 국회의원 선거 때부터 사천·남해·하동 3개 시·군이 한 선거구로 통합되는 설움을 겪었다. 이후 12~17대 6번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번도 지역출신 의원을 배출하지 못했다. 남해 출신 박희태 전 국회의장이 13~17대 내리 당선됐다. 이 때문에 군민과 향우들 사이에 지역출신 의원이 없어 지역개발과 발전이 뒤떨어졌다는 자조와 한탄이 많다. 10여년 전부터 하동군은 인구 증가 시책의 하나로 귀농·귀촌인 유치에 발벗고 나섰다. 그 성과가 나타나지만 자연 감소와 유출 등으로 줄어드는 인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올 들어 상반기에 111가구가 귀농·귀촌했다. 최근 10년 새에 1000여 가구 2737명이 왔다. 30~50대의 비교적 젊은 귀농인들 가운데 억대의 높은 소득을 올리는 귀농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성공한 귀농인들이 새로운 귀농·귀촌인을 불러들이며 활력을 주고 있다. 또 하동군은 새로운 고소득 특산품을 발굴하고 있다. 군은 청암·횡천면 일대에 30만㎡에 이르는 미나리단지를 조성한다. 지리산 기슭이라 깨끗한 물이 풍부해 품질 좋은 미나리를 생산할 수 있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하동 야생 녹차를 비롯해 딸기, 부추 등 친환경 청정 농산물은 하동의 새로운 소득원이 되고 있다. 하동은 영호남 길목으로 지리적 요충지여서 옛날부터 도로와 시장이 발달했다. 섬진강 물길은 하동포구로 불리며 육상교통이 발달하기 전까지 하동의 주요 교통수단이었다. 하동포구는 화개, 악양, 하동읍, 갈사 등지를 거쳐 바다에 이르는 하동의 섬진강 물길을 통칭한다. 예로부터 하동장, 화개장은 남원·구례 등 지리산 산간지역의 물산과 여수·삼천포·남해 등지의 해산물이 모이고, 보부상들이 모여들던 전국에서 손꼽히던 큰 장이었다. 외지인들은 장날이 되면 배를 타고 남해를 거쳐 하동포구를 통해 하동으로 들어와 물건을 사고팔거나 바꿨다. 육로가 발달하면서 포구 이용이 줄고 강바닥에 모래가 쌓이면서 섬진강 뱃길은 끊어졌다. 1968년 경전선 개통에 이어 1973년 하동을 거쳐 부산~순천을 잇는 남해고속도로 완공은 하동지역의 발전에 계기가 됐다. 1980년대 들어 인근 광양에 제철소가 들어서고 화개·악양면을 중심으로 한 지리산권 자연자원을 활용한 관광산업이 활성화되면서 지역 경제는 눈에 띄게 발전했다. 곳곳에서 지역 특색을 살린 축제가 열려 지역경제에 한몫하고 있다. 고로쇠축제, 화개장터벚꽃축제, 하동야생차문화축제, 술상전어축제, 북천면 코스모스 메밀꽃 축제, 악양 대봉감축제, 참숭어축제, 토지문학제, 이병주국제문학제 등이 해가 거듭될수록 유명해지고 있다. 특히 차와 문학의 고장 악양면은 2009년 슬로시티로 지정돼 느림의 여유를 체험하는 지역으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이제 하동 전역은 사통팔달의 도로망이 이어져 전국 어디서든지 편하게 오갈 수 있다. 진주~하동~광양으로 이어지는 경전선 철도 복선화 공사도 내년에 완공된다. 하동군은 10여년 전부터 대규모 산업단지 조성 사업에 나섰다. 농업과 관광만으로 지역경제 살리기와 인구 증가에 한계가 있어서다. 2003년 금성·금남면을 포함한 광양만권 일대가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되면서 하동군은 갈사만 산업단지를 비롯해 대송산업단지, 두우레저단지, 덕천에코시티 등 4개의 대규모 단지조성 사업을 시작했다. 전체 면적은 1216만 5000㎡(약 369만평)이며 사업비 2조 8199억원이 투입된다. 1조 5970억원이 들어가는 갈사만 산업단지(해안매립 317만 4000㎡, 육지 243만 9000㎡)에는 해양플랜트, 에너지, 철강 등의 기업이 입주한다. 대우조선해양이 이미 66만 1000㎡를 분양받았다. 해양플랜트종합시험연구원이 16만 5000㎡의 부지에 건물을 짓고 있다. 이곳에 영국의 해양플랜트 명문대학교인 애버딘대학의 하동캠퍼스가 들어선다. 2016년 하반기 개교한다. 석·박사 등 145명의 전문인력 양성과정이 운영된다. 2개 산업단지는 현재 부지를 분양하고 있다. 골프장과 숙박시설 등이 들어설 두우레저단지와 단독주택, 아파트, 상업시설 단지로 개발되는 덕천에코시티는 사업자를 모집하고 있다. 최근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인상공회의소 전석호 회장과 관계자 5명이 산업단지 조성현장을 둘러보고 군의 투자유치를 “적극 돕겠다”고 약속했다. 하동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정말 ‘개판’된 축제

    정말 ‘개판’된 축제

    경주개 동경이 보존연구소는 26일 경북 경주시 건천읍 용명리 탑골마을에서 제1회 ‘개판 축제’를 개최했다. ‘개들의 땅, 개들의 세상’이라는 슬로건 아래 지난 8월 마을 주민들에게 천연기념물 제540호인 동경이 새끼 7마리를 분양하고 동경이마을로 지정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자리다. 경주를 비롯해 포항 등 인근 지역의 반려견 300여 마리가 몰려들었다. 진돗개, 풍산개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토종견인 동경이들은 먼저 하객(?)인 반려견과 동호인들 앞에서 주인에 대한 복종과 인명 구조견 시범을 근사하게 선보였다. 이를 지켜보던 다른 반려견들은 멍멍 짖어대는 것으로 박수를 대신했다. 이어 마을 주민과 동경이는 반려견들과 함께 어울려 운동회와 보물찾기, 장기자랑 행사를 이어 갔다. 참가자들은 동경이와 반려견들의 재롱에 내내 들뜬 표정이었다. 또 길이 200m의 대형 동경이 벽화와 홍보관, 동경이 사육 농가 및 쉼터 등을 둘러보고 소원 리본을 달기도 했다. 동경이(東京狗)는 경주의 옛 지명인 동경(東京)에서 사육하는 개라는 의미로, 신라시대부터 경주 지역에서 사육되다가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상서로운 개의 형상으로 여겨지는 고마이누와 닮았다는 이유로 학살당해 멸종 위기에 놓였다. 꼬리가 짧거나 없는 게 특징이다. 사람에게 매우 친화적이어서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동물 매개 치료에도 이용되고 있다. 전국에 300여 마리가 있다. 경주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고려 불화보다 귀한 ‘나전경함’

    고려 불화보다 귀한 ‘나전경함’

    경함(經函)이란 불교 경전을 보관하는 함을 이른다. 고려 나전칠기로 만든 경함은 통상 뚜껑 윗부분 각 모서리를 모죽임한 장방형의 형태로, 자개와 금속선을 함께 사용한다. 이 중 지난 7월 90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고려 나전칠기 경함’은 국내에 단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아 국보급으로 불린다. 각 면에 모란당초(牧丹唐草) 무늬가 가득 장식됐으며 2만 5000여개의 자개가 사용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고려 불화보다 더 중요한 유물로 꼽히는 고려 ‘나전경함’(螺鈿經函)을 비롯해 2010년부터 최근까지 수집한 불상과 불화, 초상화, 도자기 등 문화재 12점을 모아 14일부터 11월 30일까지 상설전시관에서 신소장품 특별공개전인 ‘새롭게 선보이는 우리 문화재’전을 이어 간다. 전 세계에 단 9점만 남아 있다는 고려 나전경함을 비롯해 유물 대다수가 일반에 처음 공개되는 것들이다. 높이 30㎝인 통일신라시대 ‘금동불입상’은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춘 불상으로, 보석이 박혀 있는 보기 드문 작품이다. 박물관 관계자는 “방형의 얼굴과 평면화된 이목구비, 얼굴이 큰 신체 비례, 선으로 새긴 옷 주름, 내의(內衣)를 입고 법의(法衣)를 양어깨에 걸친 옷차림새 등에서 전형적인 통일신라 후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 준다”고 설명했다. 정조 시대 최고의 초상화가로 꼽히는 이명기(1756~1802)가 그린 ‘김치인 초상’(1787년)은 길이 177㎝, 폭 71.5㎝로 비단에 채색한 작품이다. 왕실 화원화가인 이명기는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치인을 그렸는데, 쌍학문(雙鶴紋) 흉배를 부착한 단령(團領)을 입었으며 정1품 이상이 차는 서대(犀帶)를 착용했다. 정조가 그림을 보고 내린 어찬(御贊)이 화면에 적혀 있다. 19세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정왜기공도병’은 종이에 색을 입힌 것으로 정유재란의 마지막 해인 1598년 전라도 순천과 인근 바다에서 벌어진 여러 전투 장면을 시간과 공간의 흐름에 따라 묘사했다. 화면에 금채를 사용하고 구불구불한 윤곽선을 반복해 산을 표현한 점, 길쭉한 비례로 인물을 표현한 점 등이 일본 회화의 특징으로 꼽힌다. 박물관 측은 전쟁에 참여한 중국 종군화가의 그림을 일본 화가가 모사한 작품으로 보고 있다. 전시에는 이 밖에도 19세기 조선 시대 작품으로 사찰에서 불교 의식 등에 사용하던 북(법고)을 올려놓는 ‘법고대’와 15~16세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분청사기 조화어문 편병’, 감식안과 예술적 재능을 지닌 강세황(1713~1791)의 그림 등이 포함됐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新 국토기행] 청주

    [新 국토기행] 청주

    마한의 영토였던 청주는 삼국시대를 맞아 상당현(上黨縣)이라고 칭해지며 삼국이 각축했던 군사적 요충지였다. 삼국이 청주 땅을 번갈아 지배하면서 청주지역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유물이 모두 출토됐다. 이에 많은 사람은 ‘삼국 문화가 소통하는 지역’이라며 청주가 갖는 문화적 의미가 크다고 말하고 있다. 이후 통일신라시대 들어 서원경(西原京)으로 등급이 오르면서 교통과 지방행정의 중심지가 됐고 이런 위상은 고려시대까지 이어졌다. 서원경은 다섯 개의 작은 서울을 의미하는 오소경(五小京)의 하나로, 지방의 중요 도시를 뜻한다. 청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고려 태조 23년(941)이다. 고려 우왕 3년(1377)에는 청주 흥덕사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가 간행됐다. 조선시대 한때 수운이 발달한 충주가 교통의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청주가 쇠퇴기를 맞는 듯했으나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며 청주는 다시 중심 도시의 명성을 되찾았다. 당시 경부선 개통은 수운 교통 중심 체제에서 육상로 교통 중심 체제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청주는 날로 융성해 1908년 충주에 있던 관찰사가 청주로 이전했다. 관찰사는 지금의 도청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청주의 도시화는 1910년 시작됐다. 이때 청주읍성 성벽을 허물고 그 돌을 이용해 하수도를 설치하고 간선도로를 만드는 사업이 시작됐다. 박영수(76) 전 청주문화원장은 “청주읍성이 지금까지 그대로 보존됐다면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안동 하회마을을 가지 않고 청주읍성을 보러 왔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이 사업으로 인해 바둑판 같은 모양의 시구(市區)가 형성됐고 1920년 충북선이 개통되며 청주는 정치·경제·산업 등 여러 측면에서 활성화됐다. 충북선은 1921년엔 청주~조치원 간, 1923년엔 증평까지, 1928년엔 충주까지 연결됐다. 1946년 미군정하에 청주읍은 청주부로 승격했고, 청주군은 청원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때부터 청주부와 청원군은 독립된 행정구역이 됐다. 그해 청주에는 해방 후 한강 이남 최초의 4년제 대학인 청주상과대학(지금의 청주대)이 개교했다. 당시 전문대학들이 4년제 대학으로 승격한 사례는 있었지만 처음부터 4년제 대학으로 인가를 받은 것은 해방 후 청주상과대학이 처음이었다. 청주가 ‘교육의 도시’로 불리게 된 계기가 이때 마련됐다고나 할까. 3년 후 청주부는 청주시로 승격했다. 당시 인구는 6만 4463명. 현재의 1개동 규모보다 적었다. 시로 승격했지만 1950년 한국전쟁으로 청주역, 형무소, 교량, 각종 군사시설이 많이 파괴됐고 휴전 후의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빈곤으로 도시 발달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후 행정동 분동, 청원군 일부 지역 편입 등을 거쳐 1989년 2개의 출장소가 설치됐고, 1995년에 출장소가 구청으로 승격됐다. 1차산업이 지배적이던 청주지역 경제는 1970년대 경부고속도로 개통, 청주산업단지 조성, 미호천 지역 농업개발사업, 청주~충주~제천 국도 포장, 대청댐 완공 등으로 급속하게 발전, 산업도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박 전 원장은 “서울에 가려면 지금의 세종시인 충남 연기군 조치원까지 가서 기차를 타야 했는데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청주에서 버스를 타고 갈 수 있었다”며 “시간이 한 시간가량 단축됐었다”고 회상했다. 산업단지 조성은 청주의 인구 급증을 가져왔다. 청주지역 제조업의 핵심인 청주산업단지는 1차로 1970년 11월 조성이 완료됐고 이후 단지를 넓혀 나갔다. 현재 367개 업체가 입주해 있다. 이곳에서 일하는 총 근로자 수는 2만 7463명에 달한다. 청주는 도청 소재지로서 충북지역을 대표하는 도시지만 타 지역 사람들에겐 작은 지방도시에 불과했다. 아직도 수도권의 적지 않은 사람이 충북의 도청 소재지를 충주로 아는 등 자존심을 구기고 있다. 대한민국의 중심에 위치했으나 힘 있는 정치인을 배출하지 못하고 도세가 약해 중앙 정치권이 외면하면서 국가의 주요 사업에서도 항상 소외돼 왔다. 야구장 시설이 열악해 충청도 연고팀 한화이글스가 있는데도 1년에 프로야구 경기가 10경기 내외로 열리는 등 각종 인프라의 수준이 매우 낮은 실정이다. 2012년까지만 해도 백화점이 없어 많은 시민이 대전으로 원정 쇼핑을 가기도 했다. 지역 전체 인구에서 학생 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 ‘교육의 도시’로 알려졌을 뿐 오랫동안 내세울 게 없는 곳으로 인식돼 왔다. 한 시청 공무원은 “다선 의원이 많이 나와야 하는데 청주는 그렇지 못한 게 지역 발전의 걸림돌로 작용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난 7월 청주시와 청원군이 ‘청주시’로 통합되면서 이제는 중부권 핵심 도시로 성장할 가장 주목받는 지자체가 됐다. 우선 84만명에 육박하는 인구는 전국 230개 시·군·구 중 인구 규모 7위에 해당된다. 전국 인구의 1.6%를 차지하며 비수도권 중에는 경남 창원시(108만여명)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행정구역 면적은 총 940.3㎢에 이른다. 전국 인구 50만명 이상 도시 가운데 2위로, 대전시(540㎢)보다 크고 서울시(605㎢)의 1.6배에 달한다. 공무원 1인당 담당 주민은 315명이다. 인구 80만명 이상의 기초자치단체 중에서는 창원시 244명에 이어 두 번째로 적다. 예산은 1조 6000억원을 넘어 ‘광역시’에 버금가는 매머드급이다. 전국 기초자치단체 중 창원시와 성남시, 수원시에 이어 네 번째로 큰 규모다. 행정구역은 2개구 30개동에서 4개구 3개읍 10개면 30개동이 됐다. 오송첨단의료복합단지, 오창과학산업단지 등 완공된 산업단지 6곳과 조성 중인 산업단지 3곳을 거느리며 경제력도 막강해졌다. 이들 산업단지에 입주해 있거나 입주 계약을 체결한 업체는 700곳이 넘는다. 옛 청원군에 위치한 청주국제공항과 KTX 오송역이 관내로 들어오면서 청주는 명실상부한 교통의 중심지로 성장할 기반도 갖추게 됐다. 내년 1월 KTX 호남선이 개통되면 오송역은 전국 유일의 KTX 경부·호남선의 분기역이 된다. 여기에 세종시와 청주공항을 연결하는 도로망이 구축되고 수도권 전철도 연결된다. 청주시는 최근 2030년까지 추진할 도시계획의 밑그림을 확정했다. 청원구는 세종대왕이 머물렀던 초정약수 주변에 세종문화치유단지를 조성하고 청주공항 주변에 항공정비 물류특화단지를 건설해 ‘문화와 항공의 고장’으로 꾸밀 예정이다. 상당구는 농촌지역에 전원지역특성화마을, 친환경유기농 특화단지, 치유 숲 등을 조성해 ‘자연이 숨 쉬는 생활권’으로 탈바꿈시킨다. 서원구는 충북대, 청주교육대, 서원대 등 교육자원을 활용해 교육특구를 조성하고 금강을 활용한 역사문화체험 수변공간을 만들게 된다. 흥덕구는 오송 첨단복지단지를 중심으로 바이오 및 화장품산업을 육성하게 된다. 청주·청원통합추진공동위원장을 지낸 김광홍(77) 대한노인회 충북연합회장은 “청주가 행정구역 통합을 통해 획기적인 발전의 전기를 마련했다고 본다”면서 “청주는 오송 바이오산업, 오창의 IT산업, 청주공항주변의 항공정비산업 등 미래산업을 모두 함축하고 있는 지역인 만큼 신수도권의 핵심 도시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는 청주를 전국에 알리는 일도 중요하다”며 “오송역 명칭을 청주오송역으로 바꾸는 등의 논의가 필요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청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13) 산성(중)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13) 산성(중)

    ●단 한 번도 뚫린 적 없는 난공불락 요새 18세기 방랑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 “경기도 여주 서쪽은 광주로, 석성산에서 나온 한 가지가 북쪽으로 한강 남쪽에 가서 고을이 형성되었으며 읍(광주부)은 만 길 산꼭대기에 있다. 옛 백제 시조였던 온조왕이 도읍하였던 곳으로, 안쪽은 낮고 얕으나 바깥쪽은 높고 험하다. 청나라 군사들이 처음 왔을 때 병기라고는 날도 대보지 못하였고, 병자호란 때도 성을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인조가 성에서 내려온 것은 양식이 부족하고 강화가 함락되었기 때문이었다. 강화가 결정되고 나서도 국도(한양)를 외적으로부터 막아줄 중요한 성이라 생각해서, 성 안에다 절 아홉을 세워 스님들을 살게 하고 총섭(總攝)한 사람을 두어 승대장으로 삼았다. 해마다 활쏘기를 시험하여 후한 녹을 주는 까닭에 스님들은 오로지 활과 살로써 업을 삼았다. 조정에서는 나라 안에 스님들이 많아서 그들의 힘을 빌려 성을 지키고자 한 것이었다”라고 적었다. 인조가 스스로 성문을 열고 내려온 것이지 남한산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남한산성은 한성백제, 통일신라,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단 한 번도 뚫린 적이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13세기 전 세계를 휩쓴 무적 몽골군의 두 차례 공격과 병자호란 당시 12만 대군을 이끈 청 태종의 파상공세도 47일간 막아냈다. 해발 400m를 넘나드는 험준한 지형을 따라 본성과 외성을 합쳐 11.7㎞가 넘는 성벽을 쌓았는데 내부는 넓고 평평했다. 우물이 80곳, 연못이 45개에 이를 정도로 물이 풍부해 군량미와 소금만 잘 비축하면 수만 명의 병력이 장기농성할 수 있는 철벽의 금성탕지였다. 우리나라에는 평지성과 산성을 다 합쳐 3000여개의 성이 있다. ‘삼천리금수강산’이니 1리마다 1개의 성곽을 쌓은 셈이다. 가히 ‘성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 남한산성은 산성 축성기법의 교과서라고 할 만하다. 성곽유산으로는 평지 성인 수원 화성에 이어 두 번째로 지난 6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로써 우리는 모두 11건의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한 문화대국이 됐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남한산성이 병자호란 등 국제전쟁을 통해 동아시아 무기발달과 축성술이 상호교류한 탁월한 증거이며 조선의 자주와 독립 수호를 위해 유사시 임시 수도로 계획적으로 축조된 유일한 산성도시이며 자연지형을 활용하여 성곽과 방어시설을 구축함으로써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단계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을 평가했다. 한 해 100만명 이상의 등산객과 관광객이 몰려드는 남한산성이 세계적 명소로 자리 잡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종묘와 사직을 갖춘 행궁은 남한산성이 유일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 24㎞ 떨어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남한산성은 행정구역상 광주시에 63%, 하남시에 24%, 성남시에 13%가 속해 있다. 광주는 고려 태조가 이름 짓기 이전까지 한강 남쪽의 넓고 오래된 땅 한산(漢山)이었다. 하남이라는 지명은 한강의 남쪽, 성남은 남한산성의 남쪽에 면했다고 해서 붙여졌다. 서울과 한강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남한산성의 지리적, 공간적 존재감을 알 만하다. 남한산성은 전란이 일어났을 때 왕의 안전을 담보하는 보장처였다. 왕의 선택지는 대개 강화 섬이 아니면 남한산성이었다. 남한산성에 대한 기록은 주로 광주행궁이라고 남아 있다. 조선시대 전국 각지에는 23곳에 이르는 행궁이 있었다. 별궁 또는 이궁이라고도 했다. 전란에 대비한 광주행궁, 양주행궁(북한산성), 강화행궁, 전주행궁을 비롯해 능행을 목적으로 화성행궁, 이천행궁, 파주행궁, 고양행궁, 풍덕행궁을 지었다. 왕은 질병 치료와 휴양차 온양행궁, 청주행궁, 목천행궁, 고성행궁, 전의행궁 등에 행차했다. 온양행궁 가는 길인 과천행궁과 수원행궁에도 머물렀다. 행궁의 역사는 오래다. 백제본기에 ‘진사왕이 행궁에서 죽었다’라는 최초의 기록이 남았으며 고려사에는 40건의 행궁에 관한 기록이 전해진다. 종묘와 사직을 갖춘 행궁은 남한산성이 유일했다. 국가에 전란이 일어났을 때를 대비한 임시 수도로서의 위상이다. 조선시대 5군영 중 하나인 수어청의 근거지였으며 광주부가 1917년 경안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290년 동안 광주부 관아가 있던 조선시대 최대의 산악 군사행정 도시였다. 규모도 예사롭지 않았다. 광주행궁은 두 개의 궁으로 나뉘었는데 상궐은 73칸, 하궐은 154칸으로 총 227칸의 당당한 규모였다. 임진왜란 때 불타기 전 경복궁은 7715칸, 창덕궁은 4500칸이었다. 화성행궁은 576칸, 북한산성 행궁은 124칸이었다. 대부분의 행궁은 말이 궁이지 왕이 실제 머문 횟수나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에 비해 남한산성 행궁은 인조가 모두 6차례 행차했고 머문 기간도 농성 47일을 비롯해 50일을 넘었다. 이후 숙종과 영조가 서장대를 둘러보았고, 정조는 서성과 남성을 거쳐 북성까지 돌아보고서 서장대에서 군사훈련까지 했다. 이후 철종과 고종 등 모두 6명의 왕이 찾았다. 남한산성이 몽골과 청은 물론 일제에 항거한 외세 저항의 본거지였던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 이후 광주, 이천, 여주 지역 의병 1600명으로 이뤄진 연합의병부대가 주둔하면서 삼남지방 및 강원도 지역 의병 3000명과 합세해 서울로 진격하기로 한 을미의병의 주요 거점이었다. 이후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항거한 을사의병과 1907년 고종 강제퇴위와 군대 해산령에 반발한 정미의병도 이곳에서 일어났다. 일제는 산성 안 행궁과 사찰을 불태우고 철저하게 파괴했으며 광주읍성도 성 아래로 옮겨버렸다. 1, 2차 대몽항쟁의 승전지에다가 척화론을 주장하다 청에 끌려가 죽은 윤집, 오달제, 홍익한 세 학사를 모신 현절사가 세워진 항청의 기운이 항일로 옮아붙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만해 한용운 기념관이 여기에 깃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남한산성에는 백제의 시조 온조를 모신 숭열전이 있다. 정조실록 등에 따르면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군사를 독려하다 앉아서 잠시 조는 사이 꿈에 온조가 나타났다. “적이 사다리를 타고 북성을 오르는데 뭐하고 있는가”라는 말을 듣고 정신이 들어 군사를 보내 격퇴했으며 이에 감읍해 온조왕의 묘를 지어 제사지내게 했다는 것이다. 덧붙여 이서라는 장군이 배향된 이야기도 재미있다. 환궁한 인조의 꿈에 온조가 나타나 “묘를 세워준 것이 고마우나 혼자서는 지내기 외로우니 이서 장군을 보내 달라”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다음날 아침 이서가 죽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인조는 온조가 이서를 데리고 갔다고 생각해 숭열전에 배향했다는 것이다. ●남한산성은 정말 백제의 왕도였을까 남한산성은 과연 백제의 왕도였을까. 택리지뿐 아니라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야승, 연려실기술, 여지도서, 대동지지 등 대부분의 조선시대 지리서들이 남한산성을 백제의 고성(古城)이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고고학적으론 입증된 바 없다. 18세기 홍경모가 지은 ‘중정남한지’에는 “남한산성은 온조가 쌓은 것이라고 하는데 한산 위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도 없고, 문헌에 근거할 것이 없다”면서 “백제의 도읍은 지금의 검단산 아래인 광주의 고읍이며 온조의 고성은 이성산성”이라는 다른 설을 주장했다. 현재까지 하남시 이성산성과 교산동 유적은 물론 남한산성에서도 백제 관련성을 확인할 수 있는 성과는 발굴되지 않았다. 다만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 12년(672년) “한산주(광주)에 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주장성이 남한산성의 원조일 가능성이 크다. 이 시기는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군사 4만명이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시기와 일치한다. 주장성은 당의 침입에 대비해서 신라가 쌓은 한강 이남의 방어거점이라는 것이다. 실제 2007년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보이는 군량미 창고 터가 발굴돼 ‘주장성=남한산성’의 신빙성을 높였다. 남한산성이라는 지명은 선조 대에 자주 등장한다. 조선 초기에는 일장산성이라고 불렸다. 한강과 한양의 북쪽에는 북한산과 북한산성이 있고 남쪽에는 남한산과 남한산성이 있다는 논리에 따른 작명으로 보인다. 남한산성은 ‘인조의 성’이라고 할 만하다. 조선 역사상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와 함께 비운의 임금 1, 2위를 다투는 인조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을까. 반정으로 광해군을 축출하고 즉위했으나 반정공신 이괄의 난 때 공주까지 달아나야 했다. 중립외교를 포기하고 친명배금(親明排) 정책을 내세우다 정묘호란 때는 강화도,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에서 이부자리도 없이 옷을 입고 잠자리에 드는 등 세 번이나 도피행각을 벌였다. 즉위 2년 만인 1624년 남한산성 축성을 명하였고 1626년 성이 완성되자 서부면에 있던 광주부를 옮긴 것도 인조였다. 남한산성은 축성술의 역사를 보여 주는 단순한 세계문화유산이 아니다. 이 땅에는 3000개에 이르는 성이 있었지만, 성의 역할을 제대로 한 성은 평양성과 진주성, 강화성 등 몇 개에 지나지 않았다. 그중 남한산성은 단 한 번도 외세에 빼앗기지 않았던 ‘서울지킴이’ 같은 존재이다. 항몽, 항청, 항일의 구국 혼이 살아 숨 쉰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산성(상)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산성(상)

    한국전쟁 최대의 심리적 트라우마는 ‘서울사수’를 외치던 이승만 정부가 전쟁발발 이틀 만에 서울을 버리고 피란길에 오르면서 한강 다리마저 폭파해 150만 서울시민을 적지에 버린 것이다. 이 대통령은 대전에 머물면서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라는 녹음방송을 내보내 국민을 속였다. 국회가 서울 사수 결의를 전달코자 했을 때 대통령은 경무대에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64년 전 그때 한강 다리를 넘지 못한 서울 사람들의 원한이 부동산 투기로 이어져 오늘의 강남 아파트공화국을 탄생시켰는지도 모른다. 몽진(蒙塵)의 역사는 길다. ‘서울 사수’는 한국전쟁 때 처음 나온 말이 아니다. 고려 이후로 역사를 좁혀도 1010년 거란의 2차 침입 때 도읍 송악(개성)이 함락돼 현종이 나주로 몸을 피한 것을 시작으로 모두 9차례 일어났다. 조선 선조와 인조, 고종 등 3명의 왕이 5차례에 걸쳐 의주와 강화, 남한산성, 러시아공사관으로 각각 몸을 피했다. 인조는 강화, 남한산성에 이어 ‘이괄의 난’ 때 공주까지 도피한 비운의 ‘몽진 3관왕’이었다. 그 이전에 4명의 고려 왕(현종·고종·충렬왕·공양왕)이 거란과 몽골을 피해 강화, 안동 등을 30년 가까이 전전했다. ‘먼지를 뒤집어쓴다’는 몽진이나, ‘도성을 떠나 딴 곳으로 간다’는 파천(播遷) 같은 왕에게만 쓰는 고상한 용어로 헛갈리게 하지만 이승만식 야반도주이기는 매한가지였다. ●도성수성론 대 서울사수론 1751년에 나온 영조의 ‘수성윤음’(守城綸音)은 봉건 전제군주의 폭탄선언이었다. 이제는 도성을 버리지 않겠다는 ‘도성수성론’(都城守城論)이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본격 거론된 것이다. 인조가 1637년 삼전도에서 청에 항복한 지 114년 만이고, 고종이 1896년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기 145년 전의 일이다. 사실 도성과 도성민은 방어의 대상이 아니었다. 외적이 침입해 도성에 접근하면 왕은 신속하게 피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 결과 임진왜란 때 왜군은 부산상륙 18일 만에, 병자호란 때 청군은 압록강을 건넌 지 5일 만에 한양도성을 손에 넣었다. 유사시 왕의 안전을 담보하고자 별도의 보장처(피신장소)를 여러 곳에 마련해 두는 것을 동양 병법의 전통으로 여겼다. 보호해야 할 대상은 오직 왕뿐이었다. 개성, 강화, 화성, 광주 등 4곳에 유수부(留守府)를 두어 중앙관서로 삼았다. 왕이 도성 밖 행차할 때 머물던 행궁이자 피신처였다. 이 중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은 강화도, 수원 화성과 더불어 외침에 대비한 농성 장소였다. 1712년 북한산성 축성공사를 끝낸 숙종은 북한산성에 올라 “내 어찌 도성을 지키는 백성을 버릴 수 있으리”라는 기념시를 지었다. 외침이 있으면 이곳에 들어와 백성과 더불어 성을 지키겠다는 얘기다. 이때 19살이던 연잉군(영조)은 부왕을 부축해 산성에 올랐다. 도성민을 버리고 도망간다면 결코 인심을 얻을 수 없다는 도성 사수 의지가 가슴에 깃든 듯하다. 그러나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인가. 수성윤음이 무색하게 200년이 지난 한국전쟁 때 인민군 남하 3일 만에 대통령은 서울을 버렸다. 영조가 도성을 지키겠다는 결의를 다진 데에는 또 다른 배경이 있었다. 도성 방어 전략의 전환이 불가피한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17세기 말, 18세기 초엽 서울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위상은 임진년과 병자년의 양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도성의 인구가 30만명에 육박했고, 상공업의 발달로 서울은 거대한 소비도시가 됐다. 중세 유럽의 대도시를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선비들의 낙향문화는 사라지고, 경화사족(京華士族)의 벼슬길 독점이 극심했다. 서울은 조선에서 유일무이한 대도시였고, 서울을 떠난 왕은 존재할 수 없는 시대를 맞은 것이다. 서울을 버릴 수 없는 속사정과 함께 이제는 중국과 일본을 향해 큰소리칠 때가 왔다는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했다. 숙종 이후 영조에 걸쳐 삼군부를 중심으로 도성 방어 군사체제를 정비하면서 이들 병력을 동원해 한양도성과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했다. 더불어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을 쌓으면서 도성 방어체제가 비로소 갖춰졌다고 본 것이다. 이승만 정권의 서울 사수 방송은 대국민 사기극이었지만 영조가 직접 지어 반포한 도성 수성 의지는 탄탄한 국력의 과시이자 거듭된 환난에 고생한 대국민용 위로였다. ●북한산과 남한산, 북한산성과 남한산성 조선 개국 이후 서울의 정식 명칭은 한성(漢城)이었다. 백성은 한양(漢陽)이라는 별칭을 즐겨 썼다. 삼국시대 이래 지역명 한주(漢州), 한산(漢山)의 맥을 이어받은 지명이다. 기원전 18년 한성백제가 터 잡은 이후 한강(漢江) 아래쪽 지금의 강남 땅이 중심이었지만 1392년 조선이 백악 아래 오늘의 사대문에 도읍을 정하면서 한강 이북으로 중심지가 북상했다. 한강을 중심으로 북쪽에 있는 산은 북한산(北漢山)이요, 산성은 북한산성(北漢山城)이다. 삼각산은 세 개의 뿔(백운대·만경봉·인수봉)을 이르는 신령스런 산이름이지만 한강 북쪽 산은 모두 북한산이라는 인식이 강해서 본래 산이름이 희미해졌다. 한강 남쪽 산은 남한산(南漢山)이요, 성은 남한산성(南漢山城)인 점도 자연스럽다. 남한산성은 세계 최강 10만 청군의 공격을 45일간 버틴 금성탕지(城湯池)이자 난공불락의 철옹성(鐵甕城)이었다. 남한산성은 함락된 것이 아니다. 강화도 함락과 주사파와 주화파의 분열 그리고 식량이 떨어지자 왕이 스스로 걸어서 내려온 것이다. ‘성곽의 증축과 수리는 사전에 허락을 받을 것’이 6번째 항복조건일 정도였다. 남한산(522m)이 최고봉이고 산성은 일장산과 주장산 두 산 사이에 걸쳐 쌓았다. 우리에게 북한산은 산의 개념이 강하지만 남한산은 산성이라는 인식이 더 세다. 서울의 성곽축조 역사는 한성백제, 삼국의 한강 쟁패, 고려의 남경, 조선의 한양도성 등 크게 네 개의 시기로 나뉜다. 지금의 서울은 한성백제의 위례성, 고려의 남경, 조선의 한성 등 2000년 세월 동안 여러 왕조의 도읍지였기에 궁궐과 내성, 산성의 3중 체제를 두루 갖추고 있다. 한강 남쪽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중심으로 강을 따라 중곡동·옥수동·삼성동·암사동 토성과 대모산성, 양천고성 등이 외곽방어 진지 역할을 했다. 아차산성·이성산성·금암산성·남한산성 또한 백제왕성의 방어기지로 파악된다. 한강 유역과 임진강 유역은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의 각축지였다. 한강권에서는 주장성, 이성산성, 아차산 고구려 보루성, 대모산성, 행주산성 등이 뺏고 빼기는 삼국의 격전지였다. 진흥왕이 북한산 비봉에 순수비를 세워 이곳이 신라 영토임을 알린 까닭이다. 임진강권에도 칠중성·호로고루·고모리산성·당포성·아미성·계양산성 등이 산재했다. 고려시대 성곽의 유구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연흥전이라는 남경별궁을 세웠고, 최영 장군이 북한산성 자리에 중흥산성을 쌓았다는 기록도 전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중국 랴오닝성 환인현 오녀산성이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졸본성이었다. 압록강의 지류인 혼강 북쪽 해발 820m의 솟아오른 암벽 위 조촐한 산성이 기원전 37년 고구려의 첫 둥지였다. 이처럼 우리의 왕성(도성)은 산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삼국시대 초기 산성과 왕성의 이원적 구조가 고구려 평양성과 백제 사비성에서 나타났지만, 후기 들어 산성과 왕성의 일체화가 정립되었다. 고려 송악에 이어 조선 한양 도성에도 이 같은 전통이 이어졌다. 중국에는 한국형 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산성은 자생적 문화유산이다. 평지의 도성과 산지의 산성이 짝을 이루는 조합은 고대 삼국 이후 한반도 도성 축조의 특징이다. 대부분의 성은 산등성이와 산기슭을 타고 쌓았다. 자연지형의 최고 경계점에 성곽을 쌓아 지형의 높낮이를 성곽으로 이용한 것이 중국이나 일본의 축조 기법과 다르다. ●홍지문과 탕춘대성 창의문을 나서 부암동 가는 산등성이가 내려가는 곳에 백석동천이 있고 산줄기가 끝나는 지점에 세검정과 탕춘대 터가 있다. 도성 밖 북쪽을 지키는 군대(총융청)가 새로 생겼다고 하여 마을 이름이 신영동(新營洞)이다. 탕춘대 터에는 세검정초등학교가 들어서 있지만 본래 신라시대 장의사(藏義寺)라는 절터였다.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파랑과 장춘랑 등 두 화랑을 기리는 사찰이었으나 연산군이 이를 허물고 연희장으로 만들어 ‘질퍽하게’ 놀았다고 해서 탕춘대라고 이름 붙었다. 장의사 당간지주가 세검정초등학교 교정 한 귀퉁이에서 1400년의 역사를 뒤집어쓰고 서 있다. 장의사는 비록 사라졌지만 이름은 장의동으로 남았고, 서울의 북소문인 창의문을 장의동에 있는 문이라고 하여 장의문이라고도 불렀다. 인조반정 때 반군이 홍제원에 집결하여 세검정을 거쳐 창의문을 통해 들어와 반정에 성공하였으므로 창의문이 개선문인 셈이다. 풍수 최양선이 숙정문~창의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은 곳이니 길을 내어 지맥을 다치게 하면 안 된다고 하여 태종 때부터 폐쇄한 문을 인조반정 이후 열어 놓았다. 영조는 반정공신들의 이름을 창의문 현판에 새겼다. 안동 김씨 중 이곳에 사는 권문세족을 장동 김씨라고 불렀다. 김정호의 경조 오부도 중 백악과 인왕산 사이에 그려진 성곽과 ‘서성(西城) 한북문(漢北門)’이라는 기록이 곧 오늘의 탕춘대성과 홍지문이다. 서성은 한양도성의 인왕산과 북한산 비봉을 연결하는 4㎞ 길이의 산성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처음에는 한성의 북쪽에 있는 문이라고 하여 한북문이라고 불렸으나 숙종이 친필로 홍지문이라는 편액을 하사하면서 공식 명칭이 되었다. 탕춘대성 안에 전시 식량을 비축하는 곳간을 만들어 평창(平倉)이라고 하였는 데 평창동 지명이 여기서 유래했다. 서울은 도성을 중심으로 3개의 산성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북쪽에는 북한산성, 남쪽에는 남한산성이 있고, 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서쪽 산성이 탕춘대성이다. 원래 도읍은 궁궐과 내성 그리고 외성 등 삼중구조를 갖춰야 하지만 조선은 궁궐과 해자도 없는 도성만으로 버텼다. 외성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양란을 호되게 겪고서야 도성의 군사적 방어체계를 고쳤다. 이를 본 청화산인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한양도성을 ‘온 나라 산수의 정기가 모인 곳’이라고 찬탄했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농촌진흥청과 함께하는 식품보감] (10) 포도

    [농촌진흥청과 함께하는 식품보감] (10) 포도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일제강점기 민족 시인 이육사의 ‘청포도’ 중 한 구절이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현대시 중 하나로 손꼽힌다. 색채의 대비와 공감각적 표현을 통해 조국 광복의 소망을 시의 언어로 표현했다는 점과 더불어 우리가 예로부터 즐겨 먹던 포도를 주된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일 것이다. 청포도(나이아가라)는 포도의 대표적인 품종 중 하나다. 포도의 학명 ‘바이티스’는 라틴어로 ‘생명’이라는 뜻이다. 포도는 기원전 6000년경부터 인류 문명과 함께한 지구 상에서 가장 오래된 작물 중 하나다. 우리나라에서는 머루 등 야생종 포도를 채취해 이용한 것이 시초였다. 삼국시대 유럽종 포도가 중국을 통해 전래되면서 재배가 시작됐다. 포도는 예로부터 다복과 다산을 상징해 많은 사랑을 받아 왔다. 통일신라시대의 와당(瓦當·기와 끝을 막는 것), 조선시대 이계호와 신사임당의 포도도 등 관련 문화재가 많이 남아 있다. 포도는 대표적인 여름 과일이다. 수분과 당분 함량이 높으며 풍부한 유기산과 비타민은 물론 다양한 무기질을 함유하고 있다. 포도에는 포도당(글루코스)과 과당(프럭토스)이 많이 함유돼 있다. 포도당이라는 말 자체가 ‘포도에 많은 당’에서 유래했다. 포도당은 동식물의 신진대사에 직접 사용되는 당의 일종으로 많을수록 에너지로서의 이용 효율이 높아져 피로 해소에 효과적이다. 유기산은 소화 작용을 돕고, 인은 칼슘과 함께 뼈의 성분이 된다. 특히 자흑색 포도에 많이 함유된 비타민B1은 심혈관계 안정, 다발성신경염 방지에 좋으며 포도주에 함유된 B12는 항빈혈과 지방변성 억제 작용을 하는 것으로 보고됐다. 포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피로 해소제, 소화제, 이뇨제 등으로 다양하게 이용돼 왔다. 포도는 열매뿐 아니라 새순, 잎, 뿌리까지 약으로 사용됐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포도 열매는 배고픔을 달래고 기운이 나게 한다. 또한 추위를 타지 않게 하고 이뇨작용을 돕는다고 기록돼 있다. 여기에 몸을 든든하게 하며 태아를 편안하게 한다고 전해진다. 고대 그리스 히포크라테스의 활동 기록에서나 성서에서도 포도주를 약으로 활용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히포크라테스는 적당한 양의 포도주를 마시면 질병을 예방하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포도를 언급하면서 포도주를 빼놓을 수 없다. 포도주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술이다. 라틴어 ‘비눔’에서 따온 말이다. 그리스 신화의 ‘디오니소스’(로마 신화의 바쿠스)는 술과 자유, 광기(狂氣)의 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그리스 희비극의 신이자 포도주와 재배의 신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 포도주가 처음 들어온 것은 고려시대 충렬왕 11년(1285년)이다. 원나라의 원제(元帝)가 사위인 고려의 왕에게 포도주를 보낸 것으로 돼 있다. 또 조선 인조 14년(1636년) 대일통신부사였던 김세렴의 ‘해차록’에 의하면 서구산 적포도주를 대마도에서 마셨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본격적인 유입은 고종 때 쇄국정책을 뚫고 독일인 오페르트가 적포도주를 가지고 들어오면서 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와인 다음으로 포도 가공품 중 부가가치가 큰 것은 식초다. 식초(Vinegar)의 어원은 불어의 ‘신맛의 와인’(Vin aigre)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좋은 포도는 색이 진하고 탄력이 있으면서 포도알 표면에 흰 과분이 많고 줄기가 녹색이다. 특히 표면에 있는 흰색의 과분은 포도알 내부로부터 분비된 천연 물질로 포도가 잘 익었다는 지표다. 보통 포도를 들었을 때 송이 윗부분이 가장 맛있고 송이 아랫부분은 신맛이 강하다. 아랫부분의 맛이 좋으면 송이 전체가 잘 익은 포도라는 뜻이다.
  • 그녀가 쓰면, 막이 오른다

    그녀가 쓰면, 막이 오른다

    올해로 데뷔 10년을 맞은 김민정(40) 작가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극한의 상황에서 한없이 잔인해지는 인간 본성을 사실적으로 그린 김 작가의 연극 ‘해무’가 최근 동명 영화로 제작돼 개봉했다. 대학로에서는 그의 데뷔작 ‘가족의 왈츠’가 9년 만에 공연되고 있다. 그를 최근 서울 용산구 국립극단에서 만났다. 그는 다음달 5일 국립극단의 ‘삼국유사연극만발’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인 ‘만파식적 도난사건의 비밀’의 준비로 분주했다. 프로필의 이력만 훓어봐도 그가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해무’와 ‘가족의 왈츠’는 ‘십년 후’와 함께 그의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작품이다. ‘가족의 왈츠’가 2004년 국립극장 신작희곡페스티벌에 당선돼 데뷔한 그는 이듬해 유인수 당시 연우무대 대표의 제안으로 ‘해무’를 연우무대 30주년 기념작으로 올리게 됐다. ‘십년 후’는 극단 작은신화의 ‘우리연극만들기’ 희곡 공모에 당선됐고, ‘해무’는 2007년 한국연극지가 선정한 한국 연극 베스트 7에 이름을 올렸다. 그의 작품들은 인간과 사회의 본성을 진중하게 파고든다. 때로는 추악한 밑바닥까지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 ‘가족의 왈츠’는 한 가족이 맞이한 파국을 부조리극의 문법을 빌려 그로테스크하게 보여 준다. ‘나, 여기 있어!’는 인간 소외를 극단적으로 묘사했으며, ‘미리내’는 오해와 불신으로 어긋나 버린 마을 사람들에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투영했다. “전 누군가와 싸우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에요. 그래서인지 오히려 내면에서는 갈등의 상황을 치밀하게 파고들게 돼요.” 하나같이 비극을 지향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슬픈 이야기가 주는 카타르시스를 믿거든요. 저에게는 비극이 진정성을 전달하기에 좋은 것 같아요.” ‘만파식적’에서 그는 한층 더 묵직하고 밀도 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예정이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실린 신비한 피리 만파식적을 손에 넣으려는 이들의 아비규환 속에서 권력을 향한 탐욕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우연히 피리를 손에 쥐게 된 시립관현악단 대금연주자 길강이 삼국 통일 직후의 혼란스러운 신라와 현대를 오가면서 권력으로부터 피리를 지켜내려 사투를 벌인다. 작품 속에서 피리를 둘러싼 권력자들의 싸움은 고금을 막론하고 하나같이 추하다. 신라시대 권력자들은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현대 사람들은 사적인 이득과 감투를 위해 길강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대형 사고 앞에서의 책임 전가와 사기극 등 한국 사회를 뒤흔든 여러 사건들과 오버랩되는 대목도 있다. 하지만 그저 무겁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란다. 현대와 과거를 오가는 판타지가 흥미롭게 전개되는 데다 블랙코미디의 요소도 다분하다는 게 김 작가의 설명이다. 또 스스로 ‘삼류’를 자처하지만 낙천적인 기질과 정의감을 잃지 않는 주인공에게서 진한 페이소스를 느낄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곳곳에 웃음 코드를 심어 놨어요. 한참 웃으면서 보다가 막판에 ‘한 방’ 맞은 듯한 느낌을 받으실 겁니다.” ‘만파식적’이 끝나자마자 바로 차기작 ‘이혈’(異血·9월 26일~10월 19일 대학로 예술공간 SM극장)의 막을 올린다. 작가의 이야기는 끝을 모르고 꽃을 피우지만 정작 그는 “컴퓨터 앞에 앉는 게 가장 두렵다”며 웃었다. 9월 21일까지 서울 용산구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 전석 3만원. 1688-5966.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볼거리 풍부한 경주, 맛집도 풍성 ‘정(井)수가성’ 큰 인기

    볼거리 풍부한 경주, 맛집도 풍성 ‘정(井)수가성’ 큰 인기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참 좋은 시절’의 배경은 경주였다. 경주는 어릴 적 수학여행으로 한 두 번은 가봤을 법한 문화관광도시이다. 신라시대부터 내려오는 여러 문화재와 유적지 등이 잘 보존되어 있어 국내뿐 아니라, 외국에도 널리 알려져 사시사철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전통이 살아 숨 쉬는 경주답게 풍경 또한 고즈넉하고 여유로운데, 이런 경치를 보며 입맛을 돋울 맛집도 상당수다. 관광지의 음식점은 소위 바가지로 불리는 높은 가격의 비양심적인 곳이 많기 마련이지만 보문단지내 위치한 ‘정(井)수가성’은 저렴한 가격에 훌륭한 맛으로 정평이 나있다. 경주시의 고위급관계자들과 여러 유명인들이 수차례 들른 곳으로 맛은 이미 인정받았고, 350여명의 동시 수용과 150대의 차량 주차가 가능한 터라, 많은 관광객들은 빠지지 않고 이곳을 들른다. 경주맛집 정수가성은 한우 생고기로 만든 수제 떡갈비 정식과 간장게장 등 전통을 대표하는 한정식부터 고급스러운 다양한 코스요리를 저렴한 가격에 만날 수 있고, 내부시설 또한 깔끔하고 넓어 경주의 경치를 보며 여유롭게 식사할 수 있다. 외국인 관광객들의 방문도 많은 만큼, 특히 외국인들이 선호한다는 석쇠불고기정식도 일품이다. 깔끔하면서 깊은 맛이 나는 요리들과 10여 가지의 정갈한 제철 반찬들은 보기에도 먹음직스럽다. 정수가성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최상의 맛을 선보이기 위해 늘 노력하고 연구하는 최정기 대표를 비롯해 모든 직원들은 매일같이 분주하게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워낙 유명하고 맛이 좋기로 소문난 경주맛집 답게 예약은 필수다. 식사를 마치고 음식만큼이나 정갈하고 느낌 있는 한옥 외관 정수가성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많은 관광객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한국의 대표 관광지 경주에서 한정식을 맛보는 것은 틀림없이 경주여행의 특별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경주맛집 정수가성의 메뉴 및 가격정보는 홈페이지(www.jungsugasung.co.kr)에서 확인 가능하다.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경주여행의 백미 경주맛집 ‘井(정)수가성’ 인기

    경주여행의 백미 경주맛집 ‘井(정)수가성’ 인기

    1년 365일 사계절 내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천년고도의 도시, 경주. 유적지가 많은 관광도시답게 시내거리 곳곳 왕릉이 호젓하게 자리 잡고 있다. 신라시대부터 승계된 전통이 살아 숨 쉬는 도시로 고즈넉하고 여유로운 풍경은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편안한 휴식처가 된다. 더불어 관광도시 경주에는 전통이 깃들여진 정갈한 먹거리가 풍부하다. 그 중에서도 경주의 중심인 보문관광단지내 위치한 한정식 전문점 ‘정수가성’은 경주에 방문하였다면 잊지 말고 들러야 할 맛집으로 꽤나 유명하다. 경주시내에서 지정한 모범음식점으로 이미 경주시 고위급관계자들과 여러 유명인들이 여러 차례 방문. 진정한 한식의 맛을 선보이는 것을 증명하였다.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의 맛깔스럽고 정갈한 한정식을 찾는다면 정수가성이 제격일 것이다. 국내 한우로 손수 만든 수제 떡갈비정식부터 고급 한정식 코스까지 다양한 메뉴를 만나볼 수 있다. 전통의 맛과 알찬 영양 위주로 개발한 메뉴를 여러 고객들에게 아낌없이 제공하는 경주맛집 ‘井(정)수가성’은 경주를 찾은 수많은 관광객들뿐만 아니라, 경주를 아끼고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경주를 대표하는 맛을 선보이는 곳으로 손꼽힌다. 항시 고객들로 붐비는 정수가성은 명실상부 유명한 맛집답게 예약은 필수사항이다. 150여대 주차 공간 및 350명의 동시 인원수용이 가능한 넓은 시설로 소수 관광객부터 단체 관광객까지 편히 식사할 수 있다. 경주를 닮은 정수가성에서 경주를 닮은 맛깔스런 한정식으로 경주여행의 대미를 장식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경주맛집 정수가성의 메뉴 및 가격정보는 홈페이지(www.jungsugasung.co.kr)에서 확인 가능하다.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광역단체장 인터뷰] “돈줄·인사 아직도 중앙정부 손에… 혁신적 지방분권 담은 개헌 필요”

    [광역단체장 인터뷰] “돈줄·인사 아직도 중앙정부 손에… 혁신적 지방분권 담은 개헌 필요”

    김관용 경북지사는 4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진정한 지방분권의 필요성을 특히 앞세웠다. 김 지사는 먼저 “지방자치 20년인 지금까지 지방분권의 핵심 요소인 권력이양과 자원배분 모두 제대로 된 게 없다. 돈과 인사 등 지방의 운명을 여전히 중앙정부에서 틀어쥐고 있다. 지방자치는 한여름에 추운 겨울 옷을 입고 있는 것과 같다”고 지적했다. 분권은 시늉뿐이고 지방자치는 무늬에 그치는 탓이라는 얘기다. 이어 “지방은 중앙정부와의 1대1 균형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합리적, 상대적 균형을 원하고 있다. 이제 이런 균형을 유지할 때”라고 밝혔다. 또 “중앙정부는 지방에 각종 권한과 재정을 함께 넘겨주되 그에 대한 책임은 과감히 물어달라. 서울과 수도권에 꼭 있어야 할 기관이 아니면 과감하게 지방으로 옮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지부진한 분권을 제대로 구현시키기 위해 프랑스처럼 분권정신을 담은 개헌의 필요성도 꺼냈다. 헌법 개정이 이뤄지면 입법·행정·재정 분권 관련 법률을 제정하거나 개정해 진정한 지방균형발전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돼서다. 지역균형발전협의체 공동회장을 맡기도 한 김 지사는 이런 맥락에서 최근 광역단체장 17명과 함께 박근혜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자치조직의 제도적 정비와 재정 분담 등을 위한 새로운 협력 관계 정립을 주장했다. →6선 단체장의 비결은. -도민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도민은 언제나 저의 성적표를 보고 평가해 줬다. 1995년 구미시장에 당선된 이후 지금까지 늘 긴장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도민이 곧 하늘이고, 무서운 존재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도정의 최우선에 늘 먹고사는 문제를 두는데. -도민의 생존권 문제이자 최상의 복지라는 생각 때문이다. 2006년 도지사 선거 구호가 ‘지발(제발) 좀 묵고(먹고) 살자’였다. 민선 4기와 5기 땐 도청 정문에 ‘일자리! 일자리! 일자리!’, ‘취직 좀 하자’라는 문구를 각각 내걸었다. 그리고 투자 유치와 일자리 창출에 올인했다. 그 결과 투자 유치 33조 4158억원, 일자리 37만개를 창출하는 성과를 거뒀다. →투자 유치 30조원, 일자리 10만개 창출이라는 공약의 실현 방안은. -투자·기업 유치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지자체들의 경쟁도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특히 비수도권 지자체들은 열악한 여건 등으로 목숨을 걸다시피 해야 한다. 경제혁신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 ‘3·3·7 사업’을 추진할 계획을 세웠다. 투자 유치 30조원, 유망기업 300개, 7대 산업분야 기업 유치를 위한 전략이다. 이를 위해 정무부지사 직제를 경제부지사로 바꾸고 국내외 투자 유치 활동을 전담하는 전략기동대인 ‘두발로본부’를 운영한다. 해외 글로벌 우수기업 유치를 위해 외국인 투자지역을 15개로 늘리겠다. →대구시장과의 협력 방안은. -6·4 지방선거 후보로서 권영진 대구시장과 함께 ‘대구·경북은 하나다’라는 한뿌리 선언을 한 바 있다. 이제 두 곳이 ‘한뿌리 상생 위원회’(가칭)를 출범시키기 위해 협의를 벌이고 있다. 앞으로 이 위원회를 통해 남부권 신공항 유치 등 각종 상생발전 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다. 시장과 도지사도 자주 만나 대화하고 협력하겠다. →농촌의 고령화와 인구감소 대책은. -인구 감소는 농촌지역 지자체들의 심각한 문제다. 경북의 경우 고령화율이 41%로 전남도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높다. 이런 이유로 최근 20년간 20만명이나 감소했다. 지속적인 출산장려 정책과 함께 귀촌·귀농 인구를 적극 유치해 위기를 극복하겠다. 특히 귀농·귀촌 인구 유치는 농어촌 활성화를 위한 중요한 투자 유치라고 본다. 경북은 최근 10년 동안 귀농인구 1위를 지키고 있다. →내년 도청의 안동·예천 이전은 어떤 의미를 띠나. -단순히 사무실을 옮기는 게 아니다. 새로운 천도(遷都)다. 오는 11월쯤 선발대가 우선 입주한다. 올해 ‘경상도’라는 말이 생긴 지 꼭 700년이 되는 해라 더욱 뜻깊다. 새 도청은 경북과 신라, 민족혼을 깨우는 중심이 될 것이다. 2027년 신도청소재지가 완성되면 문화융성의 시대를 주도할 것으로 기대된다. →경북의 정체성 확립을 강조하는데. -경북 정체성의 바탕에는 화랑·선비·호국·새마을 등 4가지가 있다. 경북은 항일독립운동을 거쳐 6·25전쟁 때 낙동강을 지켜내고 찌든 가난을 새마을운동으로 이겨냈다. 신라시대 삼국통일의 주역도 경북이었다. 이런 저력을 대한민국 발전의 에너지로 확산시켜 나가고 싶다. →농민·청년·여성 사관학교를 잇따라 운영하고 있는데. -2007년부터 농어업 전문 최고경영자(CEO) 양성을 위해 전국에서 처음으로 농민사관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지금까지 8000여명의 전문 인력을 양성했고, 2020년까지 20만명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구인난을 겪고 있는 지역 무역업계, 구직난에 직면한 지역 대학생 간의 간극을 줄이고 실무형 무역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청년무역사관학교를 개교했다. 올해 2기 과정에 80명이 입학해 교육을 받고 있다. 여성 일자리 지원 체계로 사관학교 운영을 알차게 준비 중이다. →지방공기업 및 출자·출연기관 등 산하기관에 대한 인사가 늦어지고 있다. -도 산하 33개 출자·출연기관 가운데 6개 기관장이 임기만료 등으로 공석이다. 현재 이들 기관을 대상으로 진행 중인 조직 진단을 빠른 시일 내에 마무리하고 임명 절차를 거치겠다. 하지만 기관장들의 연봉이 국가기관에 비해 3분의1 정도로 적고, 지방근무 등의 현실적인 문제 등으로 다소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도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저를 믿고 세 번이나 경북 도정을 맡겨주신 데 대해 거듭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발전된 경북의 모습으로 보답하겠다. 우리 도민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 기댈 수 있는 그런 따뜻한 도지사이자 의리 있는 도지사로 남겠다. ‘혼자 가면 길이고, 같이 가면 역사가 된다’고 했다. 공무원들이 주력부대로서 앞장서겠다. 끝까지 믿음을 갖고 성원과 지지를 당부한다. 대담 이동구 사회2부장 정리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몽촌토성서 백제 도로터·수레바퀴자국 발견

    1~5세기 백제 초기 도읍지의 일부로 추정해온 서울 잠실 올림픽공원 내 몽촌토성(사적297호)에서 백제인들이 사용했던 도로터와 수레의 바퀴자국들이 발견됐다. 한성백제박물관은 지난해 11월부터 토성 북문 안 내성농장 일대 3500㎡를 발굴조사해 백제인들의 집터와 도로, 후대인 통일신라 때에 조성된 주거지와 우물 등을 발견했다고 29일 밝혔다. 이번에 몽촌토성 북문지 안쪽에서 발견된 도로 유구 2기(1·3호)에는 북문지 방향으로 수레바퀴 자국이 뚜렷이 남아 있다. 2기 모두 노면과 양쪽의 측구(배수구)가 있다. 현재 확인된 도로의 길이는 1호가 약 6m, 3호가 8m가량이며, 노변 너비는 2.9~3.1m다. 측구는 너비 1.6~2.9m, 깊이 40~80㎝다. 노면은 황갈색 점질토와 잡석 부스러기를 다져 조성했고, 도로 양쪽에 조성된 측구는 단면 U자형으로 굴착해 만들었다. 박물관 관계자는 “몽촌토성에 계획적으로 도로가 조성됐고 토성이 왕도 유적임을 다시 확인했다”면서 “앞으로 왕성 안팎의 도로망과 공간 구획 등 백제 왕도의 구성과 도성 구조를 파악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백제문화층 위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생활 양상과 취락 경관을 보여주는 집터 23기와 석축우물 1기, 도로 유구 1기 등 마을 유적이 확인됐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서울 양천고성터서 첫 삼국시대 석성 발견

    서울 양천고성터서 첫 삼국시대 석성 발견

    서울에서 처음으로 강서구 양천고성 터에서 삼국시대 석성(石城)이 발견됐다. 강서구는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한얼문화유산연구원이 사적 372호 양천고성 터를 조사한 결과 서울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삼국시대 석성인 것으로 확인됐다고 21일 밝혔다. 이번 조사에서 성곽 몸체인 체성부의 축조 기법과 성곽의 주요 구조물인 치성부(성벽 바깥으로 돌출된 부분), 수·개축부(처음 성을 쌓은 이후 보수하거나 다시 쌓은 부분)를 확인했다고 구는 설명했다. 또 성벽 내부와 바깥에서는 백제 유물로 추정되는 단각고배(짧은 굽다리 접시)와 통일신라시대 유물로 보이는 태선문(굵은금무늬) 기와 조각도 나왔다. 따라서 양천고성이 삼국시대에 석성 형태로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서울에는 한성도읍기 백제시대 도성으로 평가받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그리고 그 건너편 아차산성과 같은 고대 성곽이 남아 있지만, 통일신라시대 이전 흔적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양천고성은 현재까지 확인된 가장 확실한 삼국시대 첫 석성일 가능성이 커졌다. 손영식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은 “그동안 흙으로 쌓은 삼국시대 토성 등은 서울에서 발견된 적이 있으나 돌로 쌓은 석성은 양천고성 터에서 처음으로 발견됐다”면서 “완전한 형태의 치성부와 성벽 형태를 확인한 것도 큰 성과”라고 말했다. 구는 오는 9월부터 3차 조사를 진행하고, 이를 토대로 종합 복원계획을 수립해 시민 역사교육의 장소로 조성할 계획이다. 양천고성지는 가양동 궁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축성된 옛 성터로, 한강지역의 중요한 산성 유적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아 1992년 사적 372호로 지정됐다.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 [이종원 선임기자 카메라 산책] 세계 문화유산 등재된 남한산성

    [이종원 선임기자 카메라 산책] 세계 문화유산 등재된 남한산성

    ‘성’(城)이란 적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흙이나 돌 등으로 쌓아 올린 장애물을 말한다. 인류는 농경에 따른 정착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담’을 쌓았다. 이것을 성곽의 기원으로 보기도 한다. 특히 외침이 많았던 우리 역사 속에서 ‘성’은 국토를 지키려 했던 ‘호국 의지’의 산물이다. 산지지형인 우리나라는 산에 쌓은 ‘산성’(山城)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 땅에서 산성의 기원은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역사가 깊다. 기원전 1000년 전부터 다른 부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산에 성벽을 쌓기 시작한 이후,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 와서 절정을 이뤄 한반도에만 모두 1200여개의 산성이 세워지게 됐다고 한다. 지난달 한국의 대표적인 산성인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남한산성은 산악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해 만든 성곽이다. 계곡과 능선을 따라 불규칙적으로 성벽을 세우다 보니 산성의 존재를 알기가 어렵다. 적들은 힘들여 험난하고 굽이진 산을 올라야 했다. 방어를 하는 데 탁월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성 안에 수많은 군인과 백성들이 상주할 수 있도록 큰 규모로 지은 것도 남한산성의 특징이다. 자연적인 지형지물 위에 돌을 얹은 형태는 민족 고유의 심미관과 토착기술을 응집하여 만든, 세계에 없는 고유한 성곽의 모양이다. 조상들의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미적 감성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 남한산성 문화관광사업단 신명종 연구원은 “우리 선조들의 산성축성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 ‘산성건축의 교과서’라 불릴 만하다”고 말했다. 이러한 남한산성의 문화재적 가치에 세계가 주목했다. 유네스코는 “남한산성이 지형을 이용한 축성술이 돋보이는 초대형 산성”이라 평가하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를 한 것이다. 또한 체계적 관리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는 점도 이유로 들었다. 남한산성에는 촘촘하게 쌓아 올린 돌의 개수만큼이나 많은 사연이 담겨 있다. ‘남한산성’ 하면 병자호란의 치욕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남한산성은 훨씬 이전부터 이어져 온 긴 역사와 더 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매 시기, 격전의 현장이었던 남한산성은 한강유역과 수도에 대한 방어 기능을 담당한 천혜의 요새였다. 남한산성은 굴곡 많은 세월을 온몸으로 견뎌온 역사의 산증인이다. 수어장대(守禦將臺·지휘관이 군대를 지휘하던 누각)에 올라와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던 이혜선(37·서울 강남구)씨는 “남한산성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축하하는 다양한 행사가 산성 일대에서 열린다는 말을 듣고 가족들과 함께 왔다”며 “아이들에게 남한산성에 대한 역사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고 각종 전시회도 즐거웠다”고 말했다. 남한산성 문화관광사업단 세계유산담당 노현균 팀장은 “남한산성은 굴욕의 역사가 담겨 있지만 끝까지 나라를 지키려던 선조들의 애환과 삶이 그대로 묻어 있는 곳”이라며 “우리가 현재 기억해야 할 남한산성은 위기의 순간에도 역사를 이어온 지혜로움의 산물이며 위대한 문화유산”이라고 강조했다. 오천년 역사와 함께 살아 있는 유산으로 불리고 있는 남한산성이 지금 세계를 매료시키고 있다. 주말이면 한번쯤 호국의 성지인 남한산성에 올라 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기려보는 것은 어떨까. 글 사진 jongwon@seoul.co.kr
  • [농촌진흥청과 함께하는 식품보감] 참외, 통일신라 때부터 재배 일반화… 멜론은 아프리카에서 전파

    참외와 멜론은 식물학적으로는 같은 작물이다. 멜론은 아프리카에서 기원해 메소포타미아부터 인도, 중국 접경 지역에서 주로 재배되다가 세계에 전파됐다. 유럽 지역으로 전해진 것이 현재 서양 멜론이다. 머스크멜론, 캔털루프, 카사바 등으로 나뉘었다. 서아시아 지역부터 우리나라까지 동양으로 전파된 멜론은 참외형이 주종이었다. 우리나라의 참외 재배 역사를 살펴보면 삼국시대 이전에 중국에서 들어온 참외는 통일신라시대 때 이미 재배가 일반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해동역사’(海東繹史)와 ‘고려사’(高麗史) 등의 고문헌에 외(瓜), 첨과(甛瓜), 참외(眞瓜), 왕과(王瓜), 띠외(土瓜), 쥐참외(野甛瓜)에 관해 기록돼 있으며, 조선 시대 유중림의 ‘증보산림경제’에는 참외 종류와 재배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참외는 문화예술의 소재로 이용되기도 했는데, 특히 이를 소재로 한 고려청자, 조선시대 미술품 등은 예술품으로서 가치를 높게 인정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개구리, 열골, 감, 강서, 먹, 노랑, 깐치, 안종 참외 등 오이보다 살짝 단 정도에 초록색 과피를 가진 재래종을 재배했다. 1957년 일본에서 수입된 은천참외는 아삭한 식감에 높은 당도로 우리나라 참외시장에 대변혁을 가져오게 됐다. 이후 우리나라에 적합한 특성을 더한 신은천(중앙종묘·1974), 금싸라기(흥농종묘·1984)가 육성됐다. 신은천은 병에 강하고 과실의 품질을 높였으며 재배도 편리해 급속히 보급됐다. 금싸라기는 이에 높은 당도를 더해 현재 참외의 기준을 확립했으며, 중국과 일본의 참외와는 다른 우리나라만의 참외를 만든 일등공신이었다. 한편 1세기쯤 이탈리아로 들어온 멜론(플리니의 ‘자연사’)은 로마 제국에 빠르게 전파됐으며, 샐러드 등에 채소로 많이 이용됐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남부 유럽을 중심으로 품종 개량과 재배법이 개선되어 캔털루프, 네트멜론, 겨울멜론이 탄생하게 됐다. 네트멜론은 1570년 영국에 도입된 이후 온실에서 재배되어 영국계 온실 멜론이 발달했고, 프랑스에서는 1629년 이후 재배가 일반화됐다. ‘삼총사’, ‘몬테크리스토 백작’으로 유명한 알렉상드르 뒤마는 프랑스 남동부의 카바이용 도서관에 자신의 저서 500권을 기증하면서 그 대가로 일년에 12개의 ‘카바이용 멜론’을 요구할 만큼 멜론에 대한 사랑이 극진했다고 한다. 아메리카 대륙에는 15세기에 이미 재배되고 있었고, 17세기 미국 전역으로 전파됐으며 산업적으로 발달된 것은 1870년 이후로 멜론의 품종개량, 재배기술, 수송, 저장 등이 발달하면서 산업으로 성장했다. 아시아에서는 기후가 건조한 중동과 중국 사막지대에서 재배가 많았으며, 품종에서 다른 대륙과 차이를 보인다. 즉 중국과 중앙아시아의 넓은 지역에서 재배됐으며, 특히 이란과 터키에서 많은 품종이 생겨나고 품질도 높아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중국 신장성과 간쑤성의 건조 지역에서 당도가 높고 맛이 좋은 하미과(합밀과)가 넓게 재배되어 지역 특산물로 황제에게 진상되기도 했다고 한다.
  • 이사지왕, 과연 누구인가…신라시대 환두대도의 주인 이사지왕의 정체는?

    이사지왕, 과연 누구인가…신라시대 환두대도의 주인 이사지왕의 정체는?

    ’이사지왕’ ‘환두대도’ ‘이사지왕’은 과연 누구일까. 지난해 발견한 신라시대 칼 환두대도에 새겨진 ‘이사지왕’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은 발굴한 지 80년이 더 지난 신라시대 칼을 느닷없이 수장고에서 꺼내놓고는 이를 찬 주인공은 ‘이사지왕’(爾斯智王)이라고 발표했다. 이 칼에서 이사지왕이라고 적힌 글자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은 이내 언론을 통해 대서특필됐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라왕의 인명 표기와는 대응하기 힘든 이사지왕이 누구인지를 두고 호기심이 일었고, 학계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박물관이 이 칼과 칼이 발굴된 경주분지 신라시대 적석목곽분인 금관총을 주제로 하는 테마전을 마련한다. 오는 8일 이곳 중근세관 테마전시실에서 개막해 오는 9월 28일까지 계속할 기획전 ‘금관총과 이사지왕’에는 문제의 문자가 적힌 고리자루큰칼(환두대도<環頭大刀>)을 필두로 금관총의 다른 유물을 한자리에 모은다. 금관총은 1921년 경주의 한 민가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금관을 출토함으로써 알려졌다. 이를 계기로 조선총독부는 교토제국대학 교수인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와 이 대학 고고학교실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 등이 발굴조사를 벌였다. 조사 결과는 ‘금관총과 그 유보(遺寶)’라는 이름의 보고서로, 1924년 5월 ‘본문 상책’이 나온 것을 시작으로 같은 해 9월 ‘도판 상책’이, 그리고 1928년 ‘도판 하책’이 교토에 근거지를 둔 출판사 지교도(似玉堂)에서 출판됐다. ‘본문 하책’은 예산 부족으로 결국 나오지 못했다. 그러다가 1932년 총독부가 아닌 사단법인 경주고적보존회가 자금 지원을 해서 저자는 하마다의 이름으로 ‘경주의 금관총’이라는 단행본으로 나왔다. 출판사는 같은 지교도. 금관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금관총 유물들은 이후 조선총독부박물관을 거쳐 국립박물관에 수장돼 전해지다가 지난해서야 박물관이 환두대도를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이사지왕’이라는 글자를 확인한 데 이어 같은 금관총 출토 다른 칼과 칼 부속구에서도 ‘八’(팔), ‘十’(십)과 같은 글자를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이번 테마전은 금관총의 발견 과정과 ‘이사지왕’이라는 글자를 확인하는 과정을 소개한다. 교토대학이 보관하던 금관총 보고서 원본도 나온다. 박물관 측은 “이 자료를 보면 당시 금관총 보고서가 어떻게 작성되었고 일본인 연구자는 어떤 부분에 많은 관심을 지녔는지 잘 알 수 있다”고 전했다. 전시실 중앙에는 금관총 유물 출토 모습을 그래픽으로 재현했으며, 그 주변으로 이사지왕 큰칼과 금관총을 대표하는 유물들을 배치한다. 전시품 중 고구려 유물로 추정되는 청동사이호와 초두(용기의 일종)는 주목거리다. 오키나와 해역 일대에서 서식하는 고둥 일종인 ‘이모가이’로 만든 말띠꾸미개(운주<雲珠>)도 선보인다. 테마전과 연계해 11일 오전 10시~오후 6시 박물관 소강당에서는 관련 학술 심포지엄이 열린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이사지왕은 과연 누구?…신라시대 환두대도의 주인 이사지왕의 정체 풀 열쇠는

    이사지왕은 과연 누구?…신라시대 환두대도의 주인 이사지왕의 정체 풀 열쇠는

    ’이사지왕’ ‘환두대도’ ‘이사지왕’은 과연 누구일까. 지난해 발견한 신라시대 칼 환두대도에 새겨진 ‘이사지왕’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은 발굴한 지 80년이 더 지난 신라시대 칼을 느닷없이 수장고에서 꺼내놓고는 이를 찬 주인공은 ‘이사지왕’(爾斯智王)이라고 발표했다. 이 칼에서 이사지왕이라고 적힌 글자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은 이내 언론을 통해 대서특필됐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라왕의 인명 표기와는 대응하기 힘든 이사지왕이 누구인지를 두고 호기심이 일었고, 학계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박물관이 이 칼과 칼이 발굴된 경주분지 신라시대 적석목곽분인 금관총을 주제로 하는 테마전을 마련한다. 오는 8일 이곳 중근세관 테마전시실에서 개막해 오는 9월 28일까지 계속할 기획전 ‘금관총과 이사지왕’에는 문제의 문자가 적힌 고리자루큰칼(환두대도<環頭大刀>)을 필두로 금관총의 다른 유물을 한자리에 모은다. 금관총은 1921년 경주의 한 민가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금관을 출토함으로써 알려졌다. 이를 계기로 조선총독부는 교토제국대학 교수인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와 이 대학 고고학교실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 등이 발굴조사를 벌였다. 조사 결과는 ‘금관총과 그 유보(遺寶)’라는 이름의 보고서로, 1924년 5월 ‘본문 상책’이 나온 것을 시작으로 같은 해 9월 ‘도판 상책’이, 그리고 1928년 ‘도판 하책’이 교토에 근거지를 둔 출판사 지교도(似玉堂)에서 출판됐다. ‘본문 하책’은 예산 부족으로 결국 나오지 못했다. 그러다가 1932년 총독부가 아닌 사단법인 경주고적보존회가 자금 지원을 해서 저자는 하마다의 이름으로 ‘경주의 금관총’이라는 단행본으로 나왔다. 출판사는 같은 지교도. 금관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금관총 유물들은 이후 조선총독부박물관을 거쳐 국립박물관에 수장돼 전해지다가 지난해서야 박물관이 환두대도를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이사지왕’이라는 글자를 확인한 데 이어 같은 금관총 출토 다른 칼과 칼 부속구에서도 ‘八’(팔), ‘十’(십)과 같은 글자를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이번 테마전은 금관총의 발견 과정과 ‘이사지왕’이라는 글자를 확인하는 과정을 소개한다. 교토대학이 보관하던 금관총 보고서 원본도 나온다. 박물관 측은 “이 자료를 보면 당시 금관총 보고서가 어떻게 작성되었고 일본인 연구자는 어떤 부분에 많은 관심을 지녔는지 잘 알 수 있다”고 전했다. 전시실 중앙에는 금관총 유물 출토 모습을 그래픽으로 재현했으며, 그 주변으로 이사지왕 큰칼과 금관총을 대표하는 유물들을 배치한다. 전시품 중 고구려 유물로 추정되는 청동사이호와 초두(용기의 일종)는 주목거리다. 오키나와 해역 일대에서 서식하는 고둥 일종인 ‘이모가이’로 만든 말띠꾸미개(운주<雲珠>)도 선보인다. 테마전과 연계해 11일 오전 10시~오후 6시 박물관 소강당에서는 관련 학술 심포지엄이 열린다. ’이사지왕’ ‘환두대도’ ‘이사지왕’은 과연 누구일까. 지난해 발견한 신라시대 칼 환두대도에 새겨진 ‘이사지왕’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은 발굴한 지 80년이 더 지난 신라시대 칼을 느닷없이 수장고에서 꺼내놓고는 이를 찬 주인공은 ‘이사지왕’(爾斯智王)이라고 발표했다. 이 칼에서 이사지왕이라고 적힌 글자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은 이내 언론을 통해 대서특필됐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라왕의 인명 표기와는 대응하기 힘든 이사지왕이 누구인지를 두고 호기심이 일었고, 학계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박물관이 이 칼과 칼이 발굴된 경주분지 신라시대 적석목곽분인 금관총을 주제로 하는 테마전을 마련한다. 오는 8일 이곳 중근세관 테마전시실에서 개막해 오는 9월 28일까지 계속할 기획전 ‘금관총과 이사지왕’에는 문제의 문자가 적힌 고리자루큰칼(환두대도<環頭大刀>)을 필두로 금관총의 다른 유물을 한자리에 모은다. 금관총은 1921년 경주의 한 민가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금관을 출토함으로써 알려졌다. 이를 계기로 조선총독부는 교토제국대학 교수인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와 이 대학 고고학교실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 등이 발굴조사를 벌였다. 조사 결과는 ‘금관총과 그 유보(遺寶)’라는 이름의 보고서로, 1924년 5월 ‘본문 상책’이 나온 것을 시작으로 같은 해 9월 ‘도판 상책’이, 그리고 1928년 ‘도판 하책’이 교토에 근거지를 둔 출판사 지교도(似玉堂)에서 출판됐다. ‘본문 하책’은 예산 부족으로 결국 나오지 못했다. 그러다가 1932년 총독부가 아닌 사단법인 경주고적보존회가 자금 지원을 해서 저자는 하마다의 이름으로 ‘경주의 금관총’이라는 단행본으로 나왔다. 출판사는 같은 지교도. 금관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금관총 유물들은 이후 조선총독부박물관을 거쳐 국립박물관에 수장돼 전해지다가 지난해서야 박물관이 환두대도를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이사지왕’이라는 글자를 확인한 데 이어 같은 금관총 출토 다른 칼과 칼 부속구에서도 ‘八’(팔), ‘十’(십)과 같은 글자를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이번 테마전은 금관총의 발견 과정과 ‘이사지왕’이라는 글자를 확인하는 과정을 소개한다. 교토대학이 보관하던 금관총 보고서 원본도 나온다. 박물관 측은 “이 자료를 보면 당시 금관총 보고서가 어떻게 작성되었고 일본인 연구자는 어떤 부분에 많은 관심을 지녔는지 잘 알 수 있다”고 전했다. 전시실 중앙에는 금관총 유물 출토 모습을 그래픽으로 재현했으며, 그 주변으로 이사지왕 큰칼과 금관총을 대표하는 유물들을 배치한다. 전시품 중 고구려 유물로 추정되는 청동사이호와 초두(용기의 일종)는 주목거리다. 오키나와 해역 일대에서 서식하는 고둥 일종인 ‘이모가이’로 만든 말띠꾸미개(운주<雲珠>)도 선보인다. 테마전과 연계해 11일 오전 10시~오후 6시 박물관 소강당에서는 관련 학술 심포지엄이 열린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가 ‘금관총 연구와 마립간기 신라 사회’를 주제로 하는 기조강연을 하는 데 이어 ▲ 일제강점기 금관총의 발견과 의의(김대환) ▲ 금관총 출토 이사지왕명 대도의 보존처리(권윤미, 이상 국립중앙박물관) ▲ 신라 적석목곽묘 연구와 금관총(박광열, 성림문화재연구원) ▲ 이사지왕명 대도와 신라 고분 출토 문자 자료(이용현, 국립대구박물관) ▲ 이사지왕과 금관총의 주인공(김재홍, 국민대) 같은 발표가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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