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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생차시배지 하동군에 다인박물관 건립, 2022년 하동야생차문화엑스포 개최도 추진

    야생차시배지 하동군에 다인박물관 건립, 2022년 하동야생차문화엑스포 개최도 추진

    우리나라 야생차 시배지인 경남 하동군 화개면에 야생차 역사·자료를 전시하고 야생차를 체험하는 다인(茶人)박물관이 건립된다. 하동군은 14일 1200년 하동녹차와 전통차 농업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2022년 하동야생차문화엑스포 개최 기반 조성 등을 위해 다인박물관을 건립한다고 밝혔다.신라시대부터 척박한 자연환경을 극복하고 1200년 동안 보전·계승되고 있는 하동 전통차 농업을 전 세계가 보전해야 할 중요한 농업유산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2017년 11월 세계중요농업유산에 등재됐다. 군은 야생차 시배지인 화개면 정금리 야생차 밭 2400㎡에 올해부터 2022년까지 4년간 국비·지방비 등 100억원을 들여 2~3층 규모 한옥 구조로 다인박물관을 지을 계획이다. 다인박물관에는 우리나라 차 계보 역사를 정리·기록한 다인관을 비롯해 대한민국 최고 다구 등을 전시하는 다구관, 국내 최고·유명 다인들이 소장한 유물 등을 기증 받아 전시하는 유물관 등이 마련된다. 또 야생차와 관련한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스토리관, 야생차를 활용한 족욕·다도·다식 등을 체험하는 웰니스케어 체험존 등도 설치한다. 군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다인박물관을 건립하기 위해 이날 서울시 평창동 보주박물관에서 윤상기 하동군수와 정계, 재계, 문화계, 언론계, 학계 등 각계 대표 차인 4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다인박물관 건립 간담회를 개최했다. 군은 이날 간담회에서 전국 각계 인사 33명을 다인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으로 위촉하고 위촉장을 전달한 뒤 다인박물관 건립과 관련한 다양한 의견을 들었다. 추진위에는 김종규 국민문화신탁이사장, 김동호 전 문화융성위원장, 임권택 영화감독, 원로 차인 박동선, 유인촌 전 문체부 장관, 김복일 국제창작다례회장, 김종회 경희대 교수, 원로 배우 최불암씨 등이 참여했다. 또 정홍원 전 국무총리, 정구영 전 검찰총장, 이기수 전 고려대 총장, 김기재 전 행자부 장관, 손길승 SK 명예회장, 도응 칠불사 주지, 정호승 시인, 이양호 장학재단 이사장, 김애숙 대렴문화원장 등 하동출신 인사 10명도 추진위원으로 위촉됐다. 박물관 건립추진위는 앞으로 세계적인 차문화 중심지인 하동의 야생차 문화를 알리고 확산하는 활동을 비롯해 박물관 건립 추진을 위한 소장 유물 기증, 전시콘텐츠 및 기본구상 자문 등 다양한 역할을 한다. 이날 간담회에서 군은 이기수 전 고려대 총장을 오는 5월 열리는 제23회 하동야생차문화축제 명예대회장으로 위촉했다. 이와 함께 2022년 야생차문화엑스포 개최계획과 준비사항 등을 설명하고 자유토론 및 의견수렴 시간도 가졌다. 윤상기 군수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다인박물관을 건립해 1200년 역사를 가진 하동 전통 차농업 가치를 재조명하고 2022년 야생차문화엑스포 성공 개최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하동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청주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주 맛보세요”

    “청주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주 맛보세요”

    충북 청주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주인 신선주가 시판된다. 청주시는 20여년간 판매가 중단됐던 충북무형문화재 제4호 신선주가 오는 20일쯤 본격 출시된다고 10일 밝혔다.신선주는 한약재 10가지를 100일 이상 숙성시킨 생약제를 찹쌀, 전통누룩 등과 발효시켜 만든 술이다. 신선주는 변비 제거와 백발 등에 효능이 있다고 전해진다. 신라시대 최치원 선생이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계원리 마을 앞 신선봉에 정자를 짓고 친구들과 신선주를 즐겨 마셨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이번에 판매되는 신선주는 1병에 3만원이다. 알코올도수는 18도, 크기는 500㎖다. 기능보유자의 어려움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신선주가 살아난 것은 시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선선주가 잊혀져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시는 지난해 8월 ‘청주신선주 육성 기본계획’을 수립했다. 이어 부서간 협업체계를 구축하고, 농업회사법인 설립, 주류제조면허 취득, 상표등록 신청 등 신선주 출시여건을 도왔다. 시의 행정적 지원을 받은 신선주 기능 이수자 박준미씨는 자비로 상당산성 입구 회전교차로 인근에 사업장과 시음장을 만들었다.시 김응민 가공수출식품팀장은 “신선주는 계원리 함양박씨 문중에서 18대째 400년 동안 이어온 가양주”라며 “청주의 대표 특산품으로 각광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우선 사업장에서 판매를 시작한 뒤 판로를 확보해 마트에서도 시판할 예정”이라고 했다. 청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고려 강화중성에서 방어시설 치(雉)와 외황(外隍) 첫 발견

    고려 강화중성에서 방어시설 치(雉)와 외황(外隍) 첫 발견

    고려는 1231년 몽골의 1차 침입 이후 2차 침입 직전인 1232년에 개경에서 강화로 도읍을 옮겼다. 몽골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내성, 외성과 함께 강화 중성을 겹겹이 축조했다. 내성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흙을 다져 만든 중성은 총길이만 8.1㎞에 달한다. 이 강화중성이 만들어진 당시 함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방어시설이 이번에 처음으로 확인됐다. 한백문화재연구원은 6일 강화 옥림리 주택신축부지에서 발굴조사를 한 결과 성벽 외곽의 돌출된 능선부에 쌓은 방어시설인 치(雉)와 성벽 바깥에 만든 물없는 도랑인 외황(外隍) 유적을 확인했다고 6일 밝혔다. 치에서는 목책 구덩이 9기가 발견됐는데 능선을 따라 한 줄을 이룬 형태다. 목책에 사용된 나무기둥을 뽑아내기 위해 인위적으로 기둥자리를 파내고 흙을 다시 메운 상태였다. ‘고려사절요’ 기록(권17 고종 46년 6월)에 따르면 몽골은 고려와의 전쟁을 끝내기 위한 강화협정을 맺으면서 강화도성을 허물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협정 이후 실제로 몽골 관리가 성벽을 허무는 과정까지 감시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연구원 측은 이번 조사를 통해 “강화 중성의 일부인 목책을 인위적으로 허물고 다시 메운 흔적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치와 함께 외황과 초소의 흔적도 확인됐다. 외황은 치를 두 겹으로 둘러싼 형태다. 풍화암반층을 L자형과 U자형으로 파내고 흙을 성벽처럼 다져 올려 도랑을 만들었다. 또 신라 토기를 버린 폐기장도 확인됐는데 신라시대부터 군사 목적의 방어시설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연구원은 추정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77년간 외지 떠돌던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 진주에 귀환·복원

    77년간 외지 떠돌던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 진주에 귀환·복원

    국보 제105호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이 외지로 반출돼 떠돌다 77년만에 경남 진주로 귀환해 원래 모습대로 다시 세워졌다. 국립 진주박물관과 진주불교사암연합회는 27일 국립진주박물관 야외전시장에서 이날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 점안식(點眼式)과 복원기념식을 했다고 밝혔다. 점안식은 석탑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의식이다.범학리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화강암 석탑이다. 산청군 산청읍 범학리 둔철산 자락 경호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범호사지)에 처음 세워졌다. 조선시대 절이 사라지면서 무너져 내린 상태로 절터에 방치돼 있던 것을 1941년 한 일본인 골동상이 매입해 대구지역 공장 공터에 옮겨 놓았다.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유물 실태조사 과정에서 대구에 있는 석탑을 확인하고 압수해 1942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옮겼다. 미군 공병대가 1946년 5월 서울 경복궁 안에 석탑을 세웠으나 1994년 경복궁 정비사업으로 다시 해체돼 23년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햇빛을 보지 못하고 보관돼 있었다. 국립진주박물관은 귀중한 문화재가 수장고에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이관을 요청해 국립중앙박물관이 지난해 2월 국립진주박물관에 이전·전시를 결정했다. 진주박물관은 야외 석조물 정원에 부지를 조성해 석탑을 원형 그대로 조립해 세웠다. 특히 진주박물관은 석탑 반출 과정에서 없어진 하대석을 복원하면서 석탑을 처음 만들때 사용했던 원석인 섬장암((閃長岩)을 산청 범학리 근처 정곡리 폐 채척장에서 찾아내 이 원석을 이용해 훼손된 석탑을 원래 모습으로 복원했다. 복원된 범학리 석탑은 높이 4.145m, 무게 12t이다. 범학리 석탑은 경남지역 석탑 가운데 탑 외부에 부조상이 새겨져 있는 유일한 탑으로, 상층 기단에는 신장상((神將像) 8구, 1층 탑신에는 보살상 4구가 정교한 조각기술로 새겨져 있다. 이같은 신장상과 보살상 조합은 독특한 사례로 통일신라 후기 석탑 양식 연구에 중용한 지표가 되는 등 범학리 석탑은 뛰어난 학술적 가치가 인정돼 1962년 국보로 지정됐다. 최영창 국립진주박물관장은 “오랫동안 여러 곳을 떠돌아 다녔던 석탑이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와 세워져 안식과 함께 생명력을 되찾았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범학리 석탑은 오는 30일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된다. 진주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문중의 힘, 한국 정치마저 지배했다

    문중의 힘, 한국 정치마저 지배했다

    조상의 눈 아래에서/마르티나 도이힐러 지음/김우영·문옥표 옮김/너머북스/984쪽/4만 5000원‘한국은 전통적으로 특정 엘리트 집단이 사회를 통치하고 지배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한국사를 연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갖는 공통의 인식이다. 그 인식의 바탕은 정치가 사회를 좌우한다는 정치 우위의 판단이다. 하지만 한국은 거꾸로 사회가 정치를 지배하고 움직이는 체제로 이어져 왔다면 어떨까.마르티나 도이힐러 런던대 명예교수는 이 책에서 정치에 대한 사회 우위의 한국을 파헤쳐 눈길을 끈다. 종전 ‘한국의 유교화 과정’(1992년)과 같은 지론이긴 하다. 하지만 ‘유럽 한국학의 선구자’라는 별명답게 한국 사회의 권력과 지배 양상을 색다른 시각으로 풀어내 눈길을 끈다. “고유의 친족 이데올로기는 신분의 위계와 배타성을 찬미하면서 ‘운명의 붉은 실’처럼 신라 초부터 19세기 말에 이르는 한국 역사를 관통했다.” 한국을 움직여 온 지배층을 출계집단, 즉 공동의 조상으로부터 본인들의 혈통을 추적하는 ‘친척 집합체’로 콕 짚는다. 그 친족 이데올로기는 4~5세기 신라시대에서 시작된다. 골품제, 세족(世族), 사족(士族) 등 이름을 바꿔 가며 변신과 적응을 거듭했으며 대를 이어 권력과 부를 유지해 갔다. 출계집단들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 권력투쟁을 벌였고 그 결과 귀족 가문이 출현했다는 주장이다.그 친족 이데올로기가 19세기 말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건 바로 철저한 신분 가르기 때문이다. 양민, 노비들이 자신들의 집단에 편입할 수 없도록 이중, 삼중의 경계막을 세웠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고집스러운 사회적 차별’의 고수다. 여기에 중국에서 들여온 과거제와 주자학마저도 입맛에 맞게 변형해 권력 재창출과 유지의 도구로 썼다. 과거제만 보더라도 중국은 실력에 근거해 과거 급제자를 뽑은 반면 한국은 사실상 양반에게만 응시 자격을 부여한 게 대표적 사례이다. 문중의 발달도 그런 맥락에서 찾아진다. 고려 말 유입된 신유학의 원리대로라면 맏아들인 장자가 상속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이 땅에선 형제·친척 간 갈등을 해소하는 방안으로 문중이 고안됐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가족보다 폭넓은 개념인 문중은 비공식적인 조직이지만 분명히 존재한다”고 쓰고 있다. 능력주의 원칙이 담긴 과거제와 주자학도 엘리트의 월권에 대한 제약이 아니라 오히려 지배 강화에 쓰인 셈이다. ‘고유의 친족 이데올로기’는 조선 건국으로까지 이어진다. 학계에선 ‘신흥사대부 조선 건국론’이 정설로 굳어져 있다. 하지만 도이힐러 교수는 “고려의 세족이 조선의 사족으로 바뀌었을 뿐, 신흥사대부는 원래 없었다”고 잘라 말한다. 이 파격적 주장을 놓고 학계의 논란이 예상된다. 저자는 조선시대 당쟁을 놓고도 정치적 주도권을 잡으려는 싸움이었을 뿐만 아니라 엘리트가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벌인 광범위한 사회 현상으로 본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이 엘리트 집단이 오랜 세월을 버틴 배경에 ‘종교적’이라 할 만큼 철저한 조상숭배와 제사를 놓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정확히 알았고, 신분에 따라 조상을 모시는 사당 앞에 도열하는 순서도 달랐다.” 책 제목도 이 부분에 주목해 딴 이름이다. 결국 이런 전략을 통해 친척 집합체들은 정권 교체는 물론 왕조 교체 같은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살아남는 엄청난 내구력을 발휘했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친족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작용하고 있을까. 요즘도 자식의 결혼을 앞둔 부모가 결혼 상대의 가문을 들추는가 하면 지역구 의원의 국회 입성에도 그런 사회적 기반이 알게 모르게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이렇게 결론 짓고 있다. “역사적 실체로서의 양반은 나라를 도탄에 빠뜨렸다는 비난에 자주 휩싸이지만, 양반의 신분을 내세우는 것은 심지어 오늘날에도 개인의, 나아가 지역과 국가의 정체성을 구성할 때 여전히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한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통도사 가는 길 - 양산 통도사(通度寺)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통도사 가는 길 - 양산 통도사(通度寺)

    “나는 왜 통도를 ‘通道(통도)’로 알았을까?” <민음사, 조성기, 통도사 가는 길. 1996> 대부분 눈치채지는 못할 듯 하다. 경상남도 양산에 위치한 통도사의 현판을 보고 있자면 가운데 글자인 ‘도’는 길을 뜻하는 ‘道(도)’가 아니라 법이나 단위, 수준, 경지를 뜻하는 ‘度(도)’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 '통도'는 일반 중생들 지레짐작의 ‘길이 통한다’라는 의미보다는 결국 승려가 되고자 하는 자가 ‘부처가 다다른 수준, 즉 해탈의 경지에 이르고 싶다’라는 출가 발원(發願)을 되짚는 말이다. 이리하여 통도사는 일반인의 상식에서 벗어나 다시금 반전의 의미를 갖게 된다.국내에 위치한 사찰들은 각기 나름대로의 고유한 성격과 특징 및 가람배치를 통하여 절집으로서의 개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중에서 삼보사찰의 경우 이러한 성격을 더욱 더 잘 나타내고 있다. 즉 양산에 위치한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봉안한 불보(佛寶)사찰로 유명하며, 합천 해인사는 부처님의 말씀(法)인 팔만대장경을 간직하고 있는 법보(法寶)사찰로, 순천의 송광사는 보조국사 이래로 총 열여섯 분의 국사를 배출한 승보(僧寶) 사찰로 이름나 있다.이중 통도사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사리탑이 있는 제1 적멸보궁이기에 대웅전에는 불상이 없는 사찰로도 유명하다. 여기서 적멸보궁이라 함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전각을 일컫는 말로 우리나라에는 5대 적멸보궁이 있다. 그 중 통도사가 으뜸인 셈이다. 통도사 법당의 모양도 무척이나 특이하다. 하나의 법당이지만 방향에 따라 다른 이름을 품고 있다. 동쪽방향으로 법당에 들어가면 대웅전이 되고, 남쪽으로 올라서면 금강계단이라 부르며, 서쪽으로는 대방광전의 이름으로, 북쪽은 적멸보궁의 현판을 걸고 있다. 이리하니 예로부터 통도사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품고 있다는 자신감에 여느 사찰에서나 즐겨 사용하는 흔한 가람배치 형식은 취하지 않고 스스로의 개성을 확실히 갖추고 있다.여기서 또 한 번 관람객의 호기심을 살짝 흔드는 글자가 통도사에 숨어 있다. 흔히들 통도사에는 유명한 금강계단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 여기저기 계단이 어디로 올라가야 하는지 묻는 장면도 종종 목격된다. 흔히들 계단이라 하여 ‘오르내리는’ 용도를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의 ‘계단’은 승려가 ‘계를 받는 제단’을 의미한다. 즉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된 장소에서 ‘금처럼 굳센 계율을 새로이 승려가 되는 사람이 받는 제단’이라는 뜻으로 대웅전의 또다른 이름이기도 하다.통도사의 역사는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646년(신라 선덕여왕 15) 자장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데 이때 자장이 당나라로부터 643년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부처님 사리와 가사, 대장경 400여 함을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봉안한 곳이 통도사다. 자장은 계단(戒檀)을 쌓고 난 뒤 승려를 배출하고자 노력하였다.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사찰이 전부 소실되어 현재 우리가 만나는 통도사의 건물들은 1645년(인조 23) 우운(友雲)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들로 조선 중기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따라서 대웅전을 비롯하여 보광선원, 응진전, 명부전, 삼성각, 산신각, 관음전, 용화전, 대광명전, 세존비각,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不二門) 등 조선의 시간과 더불어 통도사 만의 깊은 시간을 넉넉히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통도사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 우리나라 삼보사찰 중의 하나다. 한 번은 가 볼만한 곳이다. 2. 누구와 함께? - 가족 단위, 연인들. 늦은 가을. 3. 가는 방법은? - KTX울산(통도사)역에서 13번 시내버스를 이용. (첫차 07:12 / 막차 21:13 / 운행횟수 16회) 소요 시간은 30분정도. 택시 이용시 소요 시간은 20분정도이며 택시요금은 25,000원정도. 4. 감탄하는 점은? - 대웅전, 금강계단. 영축산의 놀라울 만큼 아름다운 늦가을 풍광.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주말이면 인산인해. 주중도 방문객이 많다. 6. 꼭 봐야할 장소는? - 금강계단, 대웅전, 세존비각, 명부전 7. 토박이들이 추천하는 먹거리는? - 산채비빔밥 ‘경기식당’, 조촐한 시골 분식 ‘달맞이꽃 분식’, 홍합밥 ‘동심’ 8. 홈페이지 주소는? - http://www.tongdosa.or.kr/kor/index.php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작지만 있을 것은 다 있는 놀이공원 ‘통도 환타지아’, 동래 범어사, 금정산성 10. 총평 및 당부사항 - 통도사는 큰 절집이다. 일주문에서 불이문, 대웅전까지 일직선으로 뻗은 가람배치와 더불어 진신사리를 품고 있다는 시찰의 자부심이 한껏 느껴지는 대형 사찰이다. 늦은 가을이 제격인 사찰.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지리산에 남아 있는 고운 최치원 흔적

    지리산에 남아 있는 고운 최치원 흔적

    통일신라시대 대학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 선생이 지리산에 남긴 흔적을 볼 수 있는 특별전이 경남 하동야생차박물관에서 열린다. 하동군은 20일 지리산 자락 화개골에 있는 하동야생차박물관 3층 특별전시실에서 ‘고운 최치원 특별전’을 올 연말까지 개최한다고 밝혔다.특별전에는 국보 제47호 쌍계사 진감선사탑비를 비롯해 세이암, 삼신동 등 최치원 선생의 친필 석각 탁본과 최치원 초상화 3점, 신식 활판 인쇄기로 찍어 발행한 딱지본 소설 ‘최고운전’ 등 20여점이 선보인다. 쌍계사 성보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문창후 최선생 진영’과 훼손되기 전의 진감선사탑비 모습을 볼 수 있는 목판본도 전시된다.지난 5월 불일폭포 인근 바위에서 발견된 최치원 선생이 쓴 글씨 ‘완폭대(翫瀑臺)’ 석각 탁본과 완폭대·불일암폭포 비경을 그린 겸재 정선의 ‘하동 불일암폭포’ 그림을 함께 볼 수 있다. 완폭대는 최치원 선생이 불일폭포를 감상하던 바위로 이 바위에 ‘翫瀑臺’ 글씨를 직접 쓴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후기 선비들의 지리산 유람록에 완폭대 기록이 남아있으나 1800년대 이후 부터는 기록이 없고 완폭대 바위도 찾지 못하다가 200여년만에 다시 찾았다.장혜금 학예사는 “지리산 화개골에는 최치원 선생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지만 그동안 중요성이 부각되지 못했다”면서 “이번 특별전이 최치원 선생의 하동지역 행적을 연구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하동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50여년 만에 제자리 찾은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

    50여년 만에 제자리 찾은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

    50여년 간 다른 유물로 여겨진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가 제자리를 찾았다. 문화재청은 보물 제455호에 해당하는 유물의 명칭을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에서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로 변경하고,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를 보물 제2001호로 신규 지정했다고 30일 밝혔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 경상도 경주시 노서동 고분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금귀걸이인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는 함께 발굴된 ‘경주 노서동 금팔찌’(보물 제454호), ‘경주 노서동 금목걸이’(보물 제456호)와 함께 1967년 보물 제455호로 지정됐다. 당시 지정 명칭은 ‘태환이식’(太環耳飾·굵은고리 귀걸이)으로 출토지가 명시되지는 않았다. 노서동 금귀걸이는 1933년 발굴 이후 국립중앙박물관과 일본 도쿄박물관이 각각 한 개씩 보관해왔는데,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이듬해 도쿄박물관이 소장한 귀걸이가 국내에 돌아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각종 전시도록이나 자료에서 보물 제455호를 소개할 때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가 아닌 그 형태와 제작 기법이 유사한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 사진이 사용됐다. 2009년 국보와 보물 명칭을 개선할 때도 보물 제455호의 이름이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가 아닌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로 명명됐다. 지난해 보물 지정 명칭이 잘못됐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문화재청은 지난 3월 자문회의와 문화재위원회를 통해 두 금귀걸이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결국 이번에 보물 지정번호를 바로잡았다. 이번에 보물 제2001호로 새로 지정된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는 1949년 경주 황오동 52호분에서 출토된 귀걸이 한 쌍이다. 외형상 주고리, 중간 장식, 마감 장식의 삼단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신라시대 5~6세기에 해당하는 유물이다. 신라시대 경주에서 만든 전형적인 귀걸이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 제작기법과 조형성이 우수하고 펜촉형 장식물의 창의적인 형태와 입체감이 돋보이는 점 등에서 신라 고분 금속공예품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경주엑스포 27~28일 ‘플라잉’ 핼러윈 이벤트

    경주엑스포 27~28일 ‘플라잉’ 핼러윈 이벤트

    경주세계문화엑스포는 핼러윈(Halloween) 시즌을 맞아 27~28일 상설공연 ‘플라잉’ 이벤트를 마련했다고 26일 밝혔다. 이번 플라잉 핼러윈 이벤트는 ‘트릭 오어 트릿 이벤트’와 공연 전후 배우들과 포토타임, 관람료 할인행사로 진행된다. ‘트릭 오어 트릿(과자를 안 주면 장난칠 거예요)’ 이벤트는 관람객이 행사기간 경주엑스포공원에서 플라잉 배우들과 공연 스태프들을 만났을 때 ‘트릭 오어 트릿’ 구호를 외치면 사탕이나 과자를 선물 받을 수 있다. 핼러윈 분장을 하거나 관련 소품을 소지하고 플라잉 매표소에서 ‘트릭 오어 트릿’을 외치면 일행 모두 정가의 60% 할인된 가격에 플라잉을 관람할 수 있다. 대사가 없는 넌버벌 공연인 플라잉은 리듬체조와 기계체조 국가대표 출신 배우와 마셜아츠, 비보잉, 치어리딩 등 화려한 기술의 향연을 즐길 수 있는 익스트림 퍼포먼스이다. 신라시대 화랑이 도망간 도깨비를 잡기 위해 현대의 고등학교로 넘어와 벌어지는 해프닝을 코믹하게 표현했다. 플라잉 관람 시 경주엑스포공원 내 경주타워, 쥬라기로드, 3D 애니메이션도 무료로 즐길 수 있어 가을소풍, 가족나들이 장소로 제격이다. 핼러윈은 가톨릭의 ‘모든 성인의 축일’인 만성절 전야제로 10월 31일 미국 전역에서 행해지는 축제이다. 아이들은 유령이나 괴물 복장을 하고 이웃집을 돌아다니며 음식을 얻어먹는다. 고대 켈트 민족의 풍습에서 유래한 핼러원은 한 해의 마지막 날 음식을 마련해 죽음의 신에게 제의를 올려 죽은 이들의 혼을 달래고 악령을 쫓았다. 이때 악령들이 해를 끼칠까 두려워한 사람들이 자신을 같은 악령으로 착각하도록 기괴한 모습으로 꾸미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것이 핼러윈 분장 문화의 원형이 됐다. 자세한 플라잉 정보는 경주세계문화엑스포 홈페이지나 플라잉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된다. 경주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서울서 문명 처음 싹튼 강동…‘한강의 기적’까지 이뤄냈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서울서 문명 처음 싹튼 강동…‘한강의 기적’까지 이뤄냈네

    신석기·한성백제 거쳐간 고대도시 1963년에야 서울 편입한 신생도시 거북바위 절터에 자리잡은 암사동 1925년 대홍수, 역사 속 유물 드러나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4회 강동(광나루길) 편이 지난 13일 광진구 광장동과 강동구 천호동 및 암사동 일대에서 진행됐다. 각종 행사와 모임이 겹치는 가을 황금 주말을 맞았지만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참석자들은 만사를 제쳐 놓고 투어에 동참했다. 옷을 껴입고 나온 이들은 윗도리를 벗어야 했다. 종착지인 암사동 유적지에서는 때마침 제23회 강동선사문화축제가 열리고 있어서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축제를 만끽했다. 행사 기간 중이어서 입장료는 무료였다.이날 오전 10시 지하철 5호선 광나루역 2번 출구에서 집결한 투어단은 광진정보도서관 앞 광나루 표석을 보고, 광진교에 올라 올림픽대교·천호대교·강변테크노마트·롯데월드타워가 한데 어울린 한강 조망을 감상했다. 이어 광진교 8번가~도미부인상~서거정의 강동예찬비~한국점자도서관~선사마을~암사동 선사유적 순으로 코스를 밟았다. 해설을 맡은 윤현경 서울도시문화지도사(이화여대 박사 과정)는 문학예술경영학 석사답게 전문성을 살려 답사단을 이끌었다. 참가자들은 “내가 사는 곳의 역사를 알 수 있어서 좋았다”, “해설자의 성실함이 돋보였다”, “광진교 8번가, 서울에 이런 곳이!” 등의 호평을 설문에 남겼다. 서울의 동쪽 끝에 위치한 강동구는 이중성을 가진 도시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고대도시이지만 건재 순으로 따지면 서열이 그렇게 높지 않은 신생도시이다. 6000년 전 신석기 시대 유물이 쏟아지고, 2000년 전 한성백제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선사시대와 고대의 도시인 데도 불구하고 서울 진입은 늦었다. 1963년 광주군 구천면에서 서울 성동구로 처음 편입됐고, 1979년 강남구에서 분구했다. 강동구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는 암사동이다. 한성백제 역사는 송파구에, 광나루 영광은 광진구에 각각 넘겨주고 암사동 선사유적지를 차지했다. 서울에서 구석기시대를 거쳐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 사람이 집단으로 거주한 흔적이 가장 뚜렷하게 남은 곳이 암사동이다. 그러나 오래된 도시라는 이미지는 강동구의 빛과 그늘이다. 암사동은 ‘바위절 마을’(岩寺洞)을 한자로 옮긴 지명이다. 암사동 산 23번지 거북이 모양의 바위 위에 지어진 절이라고 하여 구암사(龜岩寺)라고 했다. 그러나 강동구 홈페이지에는 “신라시대에 절이 9개 있어서 구암사(九岩寺)라고 하였다”라는 근거 없는 유래 설명이 붙어 있다. 구암사 옛 터에는 구암정(龜岩亭)이 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지기 전까지 구암서원(龜岩書院)이 있던 자리이기도 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자리에 있던 백중사를 암사라고 기록하고 있고, 서거정이 지은 ‘백중사’라는 시를 통해서도 구암사와 백중사가 이름은 다르지만 동일한 장소에 있던 사찰임을 알 수 있게 한다.2010년 강동문화원에서 펴낸 ‘강동역사와 문화’에 “암사동 동명의 유래는 백중사에서 연유한다. 예부터 백중사를 바위절이라고 불렀으며 이 바위절을 인용해 암사동의 유래가 됐다. 삼국시대 때 암사동에 절이 9개 있었다는 말은 큰 오류다”라고 바로잡았다. 구 홈페이지 오류부터 수정해서 선사유적지에 서 있던 ‘거북바위절’이라는 지명의 유래를 되찾기 바란다. 암사동 선사유적지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전까지는 망각의 장소였다. 대홍수로 한강변의 가옥과 전답이 모조리 수몰되고, 떠내려갔으며, 땅속이 뒤집혔다. 사대문 안까지 물이 찼다고 하니 홍수의 피해는 엄청났을 터이다. 2만여명이 사망하고, 30여만명의 이재민을 남긴 2011년 동일본 대지진에 버금가는 재앙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때 뜻하지 않게 뭍으로 드러난 게 암사동 선사유적이다.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빗살무늬토기를 품은 유물층이 솟아났다. 한강은 우리 문명의 젖줄이자 역사의 물줄기였다. 한강 물줄기가 서울과 처음 만나는 강동지역에 선사시대와 한성백제시대 문화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한 데 주목해야 한다. 한강 유역의 신석기 유적 140여곳 중 대표적 유적지인 암사동은 을축년 대홍수가 남긴 유물이며, 뼈아픈 기억 단자이다. 또 한 번의 반전은 이 사건을 계기로 소양강댐과 팔당댐을 건설, 한강 통제에 성공했기에 1980년대 한강의 기적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투어단이 찾아간 광진교 옛 교명주(橋名柱) 옆에 백제시대 정절의 여인을 상징하는 도미부인의 전신상과 전설이 새겨져 있다. 생뚱맞게 이곳에 서 있는 이유를 모르겠다. 혹시 이곳을 도미나루라고 착각하지는 않을지 걱정스럽다. 도미나루는 따로 있다. 신경림 시인이 ‘목계장터’에서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라고 노래한 것처럼 남한강 물길의 시발점 충주 목계에서 서울까지는 뱃길로 사흘 거리였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를 거쳐 족자섬과 다산 정약용이 나고 자라 묻힌 마재~소내나루 다음 나루가 도미나루이다. 여기서 팔당~당정섬~덕소~미음나루~돌섬을 거치면 광나루에 도착한다. 지금으로 치면 서울역이나 김포공항,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것과 마찬가지다. 광나루는 서울에서 광주 가는 단순한 나루가 아니라 한강의 동쪽 관문이었다. 1973년 팔당댐이 완공되기 전까지 한강을 오르내리던 황포돛배가 다니던 물길이다. 강배와 뗏목의 길이다. 서해안에서 한강을 거슬러 오르던 바다배와는 모양이 다르다. 거친 파도를 헤쳐야 하는 바다배는 배 밑을 둥글거나 뾰족하게 만든 반면 강배는 얕은 여울에서 강바닥에 긁히지 않도록 평평하다. 소금이나 젓갈, 생선을 실은 바다배는 조류를 타고 한강으로 들어와서 양화진이나 마포나루에 짐을 부렸다. 이곳에서 강배에 짐을 옮겨 싣고 서강~용산~한강진~두뭇개~뚝섬~송파~광나루를 거쳐 내륙으로 들어갔다. 목계나루를 떠난 강배는 주로 세곡선이나 땔감용 나무로 만든 뗏목이었다. 남한강 상류에서 곡물을 실은 세곡선은 용산과 서강의 창고까지 들어왔다. 물길로 나르고 운반한다고 해 조운선(漕運船)이라고도 했다.우리는 흔히 강남 개발 이전까지 한강의 남쪽 지역을 허허벌판으로 잘못 알고 있다. 조선의 사대문 중심 역사서술을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에 그대로 수용한 탓이다. 영등포가 처음으로 서울에 편입된 이후 1970년 한남대교와 경부고속도로가 놓일 때까지 강남은 ‘고요한 목초지’로 묘사되곤 한다. 실제로 그랬을까? 사실과 다르다. 18세기 이후 서울 사대문은 중세 봉건 왕도의 성격이 강했지만, 한강변은 역동적인 상업도시였다. 사대문 밖은 신분보다 돈으로 생업을 삼았으며,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는 요지경 세상이었다. 전국의 장사꾼과 일꾼이 몰려와 한강변 성저십리(성 밖 10리)에 거주했다. 세종(1428년) 때 호구조사 결과를 보면 도성 안 인구는 10만 3328명인 데 반해 도성 밖에는 6044명이 살았다. 도성 밖 인구는 전체 서울인구의 10%에 못 미쳤다. 그러나 정조(1789년) 대에 가면 도성 안에 11만 2371명이 살 때 성 밖에는 7만 6782명이 살았다. 18세기 후반 한강변을 중심으로 한 도성 밖 인구가 전체 서울인구의 절반이 넘었다. 한강은 전국의 뱃길을 연결하는 최대의 소비시장을 낀 물류 중심지였다. 전국 팔도에서 물품을 싣고 서울에 모여드는 배가 연간 1만척이 넘었다. 한강변은 흥청거렸다. 을축년 대홍수가 이 모든 것을 휩쓸고 갔을 뿐이다. 서울에서 가장 먼저 문명이 싹튼 강동지역을 비롯한 한강의 남쪽은 천지개벽을 기다리고 있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일정:상암동(문화비축기지) ●일시:10월 20일(토) 오전 10시~낮 12시 ●집결장소:지하철 6호선 월드컵경기장역 2번 출구 앞 ●신청(무료):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 부산 배산성지에서 대형 건물터 발굴…신라시대 축성기법 확인

    부산 배산성지에서 대형 건물터 발굴…신라시대 축성기법 확인

    부산시 기념물 배산성지에서 대형 건물터가 확인됐다. 부산시립박물관 문화재조사팀은 배산성지 2차 문화재 발굴조사를 하면서 높이 6m 규모의 건물 축대와 길이 13m 이상의 대형 건물터를 발굴했다고 16일 밝혔다. 부산 연제구 연산동 산61번지 일원에 있는 배산성지는 흙을 쌓아 만든 토축산성이다. 이번 2차 발굴조사에서는 배산성지 정상 아래 토성 유무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며 집수지 서쪽 약 30m 떨어진 경사지에서 건물 축대와 대형 건물터를 확인했다.축대 내부는 크고 작은 깬돌이나 하천석을 채워 넣었고 외벽 바깥으로는 6단 높이의 석축을 쌓아 보강했다. 대형 건물터는 축대 서쪽 상부에서 길이 12.8m,너비 10m 규모로 남-북 기단열과 초석,배수시설을 갖췄으며 3칸으로 나눴다.성벽 중심부 서쪽은 삼국시대 축성기법인 직사각형 돌을 수직으로 쌓은 것과 달리 동쪽은 통일신라시대 축성기법인 돌을 층단식으로 쌓아 석축산성의 수리나 축조 기법 변화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부산 시립박물관 관계자는 “1,2차 조사 결과를 종합해 볼 때 배산성지는 동남해안에서 동래로 진입하는 왜적의 침입에 대비한 군사적 요충지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부산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강희정의 아시아의 美] 공민왕릉과 남북의 문화유산 보호

    [강희정의 아시아의 美] 공민왕릉과 남북의 문화유산 보호

    올해로 고려 건국 1100주년(918~1392)을 맞았다. 고려는 470여 년을 이어온 왕조이지만, 삼국시대나 조선의 역사와 문화만큼 가까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거리감은 고려의 문화유산이 휴전선 너머에 몰려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공민왕릉만 해도 그렇다.고려말의 공민왕(재위 1351-74)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다뤄져 우리에게는 비교적 친숙하다. 그러나 공민왕릉이 1905년에 도굴되었고, 왕릉 내부에 역사적으로 귀중한 벽화가 있었다는 것은 우리 관심에서 벗어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알아도 고려 왕릉벽화는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공민왕릉 묘실 내부의 동벽과 서벽, 북벽에는 각각 4구씩 모두 12구의 인물상 벽화가 있다. 묘실 벽에 넓은 화강암 판석을 세우고 회반죽을 바른 뒤 그림을 그린 것이다. 일설에는 그림 솜씨가 좋은 공민왕이 직접 벽화를 그렸다는 설도 있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관복을 입고 홀(笏)을 든 인물상은 머리에 12개의 다른 동물머리가 그려진 관을 쓰고 있어 12지신임을 드러낸다. 관에 동물 머리가 표현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저 조회에 참석한 문무백관들이라 단정했을지도 모른다. 12지를 미술로 표현한 것은 통일신라시대부터다. 김유신묘를 비롯해 경주의 여러 능에는 12지신 조각을 무덤 주위에 두른 예들이 적지 않다. 흥미롭게도 이 조각들은 모두 짐승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지니고 무기를 든 무장의 형상이다. 때로는 갑옷을 입고, 때로는 일상복을 입었을지언정 머리는 동물 모양이다. 둘 다 무덤과 관계가 있었으나 한쪽은 능 외부, 다른 쪽은 능 내부로 위치가 바뀌었다. 신라와 고려에서 달라진 동물의 신격화와 의인화는 그에 깃든 사상도 달랐기 때문이다.공민왕릉은 노국공주의 정릉(正陵)과 공민왕의 현릉(玄陵) 두 기를 합쳐 현정릉이라고 한다. 1365년에 노국대장공주가 난산으로 죽자 공민왕이 직접 공주의 능 축조를 지휘하여 9년 만에 완공했다. 공민왕릉의 구성과 건축에는 당시 고려의 수학, 천문, 석조건축 기술이 집대성되었고, 능침제도는 조선 왕릉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왕릉만 봐도 조선은 고려와 이어져 있음이 확연하다. 문화와 역사는 이처럼 퇴적되며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고려의 왕릉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 왕릉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 고려사에는 왕릉이 87기 나오지만, 실제 왕이나 왕비릉으로 추정된 곳은 58기에 불과하다. 북한에서 고려 왕릉의 공식 발굴은 해방 이후 20여 차례 이뤄졌다고 한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에 많은 고분이 도굴되어 유물이 해외로 유출되었다. 고려 왕릉이 이럴진대 휴전선 너머에 있는 문화재의 실상은 우리에게 백지나 다름없다. 대북특사가 오가고 남북협상 진전의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한반도 신경제지도’가 그려지고, 남북의 경제적 격차를 줄이는 남북경제공동체의 구축이 논의된다. 하지만 휴전선 너머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우리의 거리감을 어떻게 좁힐 것인가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다. 오랜 분단으로 남과 북의 문화재 인식, 그 보존 방식과 훼손에 관한 규제가 다르게 구축됐다. 북한 문화재가 도굴되거나 파손되어 ‘탈북’ 대열에 합류한 지 오래다. 남과 북이 이제라도 문화재의 실태파악과 보호에 머리를 맞대야 한다. 경제와 함께 문화재 협력 방안을 남북협상의 테이블에 올리는 일이 시급하다. 고려건국 1100주년을 맞은 지금이 그 적기이다.
  • 고려 건국 1100주년 공민왕릉과 남북의 문화유산 보호

    고려 건국 1100주년 공민왕릉과 남북의 문화유산 보호

    올해로 고려 건국 1100주년(918~1392)을 맞았다. 고려는 470여 년을 이어온 왕조이지만, 삼국시대나 조선의 역사와 문화만큼 가까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거리감은 고려의 문화유산이 휴전선 너머에 몰려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공민왕릉만 해도 그렇다. 고려말의 공민왕(재위 1351-74)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다뤄져 우리에게는 비교적 친숙하다. 그러나 공민왕릉이 1905년에 도굴되었고, 왕릉 내부에 역사적으로 귀중한 벽화가 있었다는 것은 우리 관심에서 벗어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알아도 고려 왕릉벽화는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공민왕릉 묘실 내부의 동벽과 서벽, 북벽에는 각각 4구씩 모두 12구의 인물상 벽화가 있다. 묘실 벽에 넓은 화강암 판석을 세우고 회반죽을 바른 뒤 그림을 그린 것이다. 일설에는 그림 솜씨가 좋은 공민왕이 직접 벽화를 그렸다는 설도 있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관복을 입고 홀(笏)을 든 인물상은 머리에 12개의 다른 동물머리가 그려진 관을 쓰고 있어 12지신임을 드러낸다. 관에 동물 머리가 표현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저 조회에 참석한 문무백관들이라 단정했을지도 모른다.12지를 미술로 표현한 것은 통일신라시대부터다. 김유신묘를 비롯해 경주의 여러 능에는 12지신 조각을 무덤 주위에 두른 예들이 적지 않다. 흥미롭게도 이 조각들은 모두 짐승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지니고 무기를 든 무장의 형상이다. 때로는 갑옷을 입고, 때로는 일상복을 입었을지언정 머리는 동물 모양이다. 둘 다 무덤과 관계가 있었으나 한쪽은 능 외부, 다른 쪽은 능 내부로 위치가 바뀌었다. 신라와 고려에서 달라진 동물의 신격화와 의인화는 그에 깃든 사상도 달랐기 때문이다. 공민왕릉은 노국공주의 정릉(正陵)과 공민왕의 현릉(玄陵) 두 기를 합쳐 현정릉이라고 한다. 1365년에 노국대장공주가 난산으로 죽자 공민왕이 직접 공주의 능 축조를 지휘하여 9년 만에 완공했다. 공민왕릉의 구성과 건축에는 당시 고려의 수학, 천문, 석조건축 기술이 집대성되었고, 능침제도는 조선 왕릉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왕릉만 봐도 조선은 고려와 이어져 있음이 확연하다. 문화와 역사는 이처럼 퇴적되며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고려의 왕릉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 왕릉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 ??고려사에는 왕릉이 87기 나오지만, 실제 왕이나 왕비릉으로 추정된 곳은 58기에 불과하다. 북한에서 고려 왕릉의 공식 발굴은 해방 이후 20여 차례 이뤄졌다고 한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에 많은 고분이 도굴되어 유물이 해외로 유출되었다. 고려 왕릉이 이럴진대 휴전선 너머에 있는 문화재의 실상은 우리에게 백지나 다름없다.대북특사가 오가고 남북협상 진전의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한반도 신경제지도’가 그려지고, 남북의 경제적 격차를 줄이는 남북경제공동체의 구축이 논의된다. 하지만 휴전선 너머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우리의 거리감을 어떻게 좁힐 것인가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다. 오랜 분단으로 남과 북의 문화재 인식, 그 보존 방식과 훼손에 관한 규제가 다르게 구축됐다. 북한 문화재가 도굴되거나 파손되어 ‘탈북’ 대열에 합류한 지 오래다. 남과 북이 이제라도 문화재의 실태파악과 보호에 머리를 맞대야 한다. 경제와 함께 문화재 협력 방안을 남북협상의 테이블에 올리는 일이 시급하다. 고려건국 1100주년을 맞은 지금이 그 적기이다.글: 강희정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장
  • 청와대 불상 원래 위치 경주로 옮겨 질까?

    경북 경주시의회가 3일 청와대 경내의 통일신라시대 석조여래불상(청와대 불상·보물 제1977호)의 경주 반환을 촉구하고 나섰다. 경주시의회는 이날 236회 1차 정례회를 열고 한영태 시의원이 제안한 ‘청와대 소재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 반환 촉구 결의안’을 채택했다. 시의회는 “청와대 관저 뒤쪽에 안치된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은 일제 강점기인 1913년 부당한 권력에 의해 경주 남산에서 서울 남산 조선총독관사로 옮겨졌다”며 “이 불상은 총독관사가 1927년 현 청와대 자리로 이전하면서 함께 옮겨져 현재까지 그 자리에 남아있다”고 밝혔다. 이어 “조선총독부 자료에 따르면 경주 남산 아래 도지동 절터에 있던 것을 일본인 오히라가 총독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선물했다는 문서가 있고 현재 불상 앞 표지석에도 경주 남산에서 옮겨왔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며 “문화재는 제자리에 있을 때 가치가 있다”며 반환을 요구했다. 이 불상은 9세기 통일신라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108cm, 어깨너비 54.5cm, 무릎 너비 86cm의 크기로 균형잡힌 신체적 특징과 조각적 양감이 풍부한 것이 특징이다. 불상은 드물게 사각형 연화대좌(蓮華大座)를 갖추고 있는데, 편단우견(偏袒右肩·한쪽 어깨 위에 법의를 걸치고 다른 쪽 어깨는 드러낸 모습)과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왼손을 무릎 위에 얹고 오른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손 모양)을 한 형태는 경주 석굴암 본존상과 닮았다. 본래 경주에 있었지만, 1913년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조선총독이 머물던 서울 남산 총독관저(왜성대)로 옮겨진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1930년대 현 청와대 위치에 새로운 총독관저가 만들어지면 이 위치로 옮겨졌다.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때는 1974년이다. 불상을 받치던 중대석과 하대석은 손실됐으나 나머지 부분 보존 상태는 괜찮은 편이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당당하고 균형 잡힌 모습과 풍부한 양감이 인상적이고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팔각형 대좌 대신 사각형 연화대좌가 있어 독창적이라고 평가한다. 지난해 6월 문재인 대통령이 공관 뒤편을 산책하다 불상 가치를 재평가해볼 것을 지시해 올해 4월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보물로 지정됐다. 경주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남원 교룡산성은 통일신라시대 축조

    전북 남원시에 있는 교룡산성이 조선시대가 아니라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남원시는 “교룡산성이 애초 알려진 조선시대보다 훨씬 이전인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파악된다”고 21일 밝혔다. 남원시는 그 근거로 발굴조사 과정에서 확인한 집수시설이 통일신라시대의 유구(遺構)라는 점을 들었다. 이 집수시설은 산성에서 필요한 물을 모아두는 시설로, 한 변의 길이가 7m인 정방형이다. 굽다리접시와 같은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 다수 발굴된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고 설명했다. 앞서 지난해에는 교룡산성의 군기고(軍器庫) 터로 추정되는 곳이 통일신라 말∼고려 초기에 조성된 대규모 건물지(터)라는 점을 확인했다. 발굴조사는 남원시가 교룡산성 복원을 위해 전라문화유산연구원에 의뢰해 진행되고 있다. 교룡산성은 정유재란 당시 남원주민 1만여명이 일본군에 맞서 싸운 산성으로 유명하다. 이환주 남원시장은 “교룡산성이 적어도 통일신라시대부터 경영돼 오던,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산성임이 밝혀진 것”이라며 “호남을 대표하는 산성으로써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정비, 복원하겠다”고 말했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나 혼자 산다’ 폭염 속 한복 입고 경주 포착 “여름 현무 학당”

    ‘나 혼자 산다’ 폭염 속 한복 입고 경주 포착 “여름 현무 학당”

    ‘나 혼자 산다’ 무지개 회원들이 폭염 속 한복 차림으로 경주에 모였다. 10일 방송되는 MBC ‘나 혼자 산다’(기획 김구산, 연출 황지영 임찬)에서는 폭염을 한방에 날릴 여름방학 특집 ‘여름 현무 학당’이 펼쳐진다. 무지개 회원들이 뭉쳐 함께 떠난 만큼 이들이 선보일 특별한 케미에 기대 지수가 폭발하고 있는 상황. ‘여름 현무 학당’은 지난해 여름 화끈한 웃음 폭탄을 선사했던 ‘여름 나래 학교’를 뒤이을 새로운 여름방학 특집. 전현무가 이끌 이번 정모는 ‘학당’이라는 의문의 콘셉트(?)로 진행된다고 해 시선을 끈다. 이에 맞게 각자의 개성이 묻어나는 한복차림으로 경주역에 모인 무지개 회원들이 단연 시선을 강탈했다고. 뿐만 아니라 전현무는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 근현대사, 21세기, 세계사까지 역사로 가득 채운 독특한 코스를 선보인다. 추억의 수학 여행지인 경주에 온 만큼 전현무 훈장(?)의 지도 하에 첨성대부터 안압지, 다보탑 등 유명 문화재들을 둘러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해 시청자들의 향수를 제대로 자극할 예정이다. 특히 많은 시청자들이 기다려 왔던 ‘나 혼자 산다’의 여름방학 특집이기에 시원한 웃음은 물론 풍성한 이야기로 안방극장에 즐거움을 전할 것을 예고하고 있다. 더불어 오랜만에 무지개 회원들이 모두 모인 만큼 ‘나 혼자 산다’의 레전드 장면의 탄생을 예감케 한다. 전현무와 무지개 회원들의 좌충우돌 경주 여행은 내일(10일) 밤 11시 15분 MBC ‘나 혼자 산다’에서 방송된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추락한 해병대 날개, 방산비리 때문?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추락한 해병대 날개, 방산비리 때문?

    지난 17일, 경북 포항 군 비행장에서 한국형 상륙기동헬기 MUH-1 마린온 추락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정조종사 김 모 중령과 부조종사 노모 소령을 비롯해, 부사관 2명과 병사 1명이 사망하고, 1명이 중상을 입었다. 미래 해병대 입체상륙작전의 핵심 전력으로 군 안팎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아온 마린온이었기 때문에 이번 사고가 던진 충격파는 굉장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고로 해병대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해병항공단 편성 일정에 심각한 차질이 빚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군 당국은 사고 직후 해병대사령부 전력기획실장 조영수 준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사고 원인에 대한 정밀 분석에 들어갔다. 이번 사고의 원인에 대해서는 조종사 과실, 정비 불량, 기체 결함 등 다양한 가설이 제기되고 있지만, 정확한 사고 원인은 조사위의 정밀조사가 끝나봐야 확실하게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현재 상황에서 추론 가능한 사고 원인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첫째, 조종사 과실 가능성이다. 항공기는 이·착륙 과정에서 사고에 가장 취약한데, 이·착륙 과정에서의 사고는 조종사의 조작 실수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군 관계자들과 전문가들은 이번 사고에서 조종사 과실이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비행에 나선 조종사들이 베테랑 교관조종사들이었기 때문이다. 사고기를 조종했던 정조종사 故 김모 중령과 부조종사 故 노모 소령은 풍부한 경험을 가진 베테랑 조종장교였다. 특히 김모 중령은 20년 가까운 경력과 3,300시간이 넘는 비행시간을 보유했으며, 미국 비행시험학교까지 수료한 엘리트였다. 부조종사 노모 소령 역시 10년 가까운 경력에 우수한 비행실력으로 선·후배 장교들의 신망이 두터웠던 조종사였다. 이러한 엘리트 조종사들이 몰았던 수리온에는 안전 비행을 돕는 최첨단 비행제어시스템이 탑재되어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조종 미숙에 의한 사고가 발생했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둘째, 정비 불량 가능성이다. 그러나 이 역시 가능성이 높지는 않다. 사고가 난 마린온 헬기는 현재까지 해병대에 인도된 4대의 기체 중 두 번째 기체이다. 올해 1월 해병대에 인도된 6개월 된 사실상 신품 헬기다. 신형 항공기가 부대에 인도되면 부대에서 가장 신경을 곤두세우는 부분이 바로 기체 정비다. 정비사들의 정비 교육과 병행해 정비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모든 것이 FM대로 진행되며, 자칫 정비 불량으로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장비 전력화 일정에 차질이 생겨 담당자들에게 큰 불이익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마린온을 제작한 한국항공우주산업(KAI)는 항공기를 인도한 뒤 운용부대에 전문 인력을 파견해 사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즉, 제작사에서 파견나온 전문 엔지니어까지 정비에 참여하는 상황에서 정비 불량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조종사 과실과 정비 불량 가능성이 낮다면 기체 자체에 결함이 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실 마린온과 그 원형인 수리온은 도입 초기 단계부터 온갖 결함에 시달리며 ‘방산비리의 결정체’라는 오명에 시달린 경험이 있다. 비행 중 진동이 너무 심해서 진동 때문에 기체 프레임에 균열이 가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으며, 방빙 시스템에 문제가 있어 비행 중 불시착한 사고도 있었다. 이처럼 전력화 초기단계에서부터 수많은 결함들이 보고되자 감사원과 국회에서 수차례 관련 내용을 조사했고, 이 과정에서 일부 관계자들이 검찰 조사를 받기도 했다. 수리온 계열 헬기를 둘러싼 수많은 결함 의혹 가운데 가장 논란이 된 것은 동력과 기어박스 계통의 문제였다. 잘 알려진 것처럼 수리온은 유럽의 유로콥터(現 에어버스 헬리콥터스)의 구형 헬기 AS532 쿠거(Cougar) 단동체형의 설계를 구입해 이를 재설계하는 방식으로 개발된 기종이다. 원형인 쿠거는 1977년 첫 비행한 노후 기종인데, 사업 초기단계부터 이러한 노후 기체를 개발 원형으로 선정한 것에 대한 논란이 거셌다. 일반적으로 노후 기체를 개량하거나 이를 바탕으로 개조개발을 하는 경우는 해당 노후기종이 기술적으로 매우 신뢰도가 높은 경우가 많지만, 쿠거 시리즈는 그렇지 못했다. 동력 계통에서 수시로 문제가 발생했고, 추락 사고도 낮았다. 지난 2016년 4월 노르웨이 정유업체 스타토일(Statoil)에서 운용하던 EC225 헬기의 경우 비행 중 로터 블레이드가 샤프트(shaft), 즉 동력전달 축 통째로 공중 분리되며 추락해 탑승자 13명 전원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우리 군의 수리온 헬기도 약 30여 대가 노르웨이 추락 사고기와 동일한 기어박스 부품을 사용했는데, 육군은 사고 발생 직후 대당 7억 5천만 원을 들여 문제의 부품을 전량 교체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엔진 동력 출력 방향 자체가 다른 엔진과 기체를 결합하다보니 결빙 문제나 진동 문제 등 갖가지 문제가 계속해서 터져 나왔던 것이다. 이번 마린온 추락사고 역시 기체 결함이 원인이었다면 이와 같은 동력 계통의 문제였을 가능성이 크다. 일부 보도에 따르면 이번 사고 기체는 진동 문제를 테스트하기 위해 비행에 나섰다가 이륙 직후 로터 블레이드가 기체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변을 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즉, 사고 발생 전에도 진동을 비롯한 동력계통 전반에 문제가 있었다는 말이다. 수리온 계열 헬기의 과거 사고 사례나 이번 사고 현장의 목격담만 종합해 보자면 이번 사고는 기체 결함이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 이를 두고 일부 언론에서는 이를 ‘방산비리’로 몰아가는 분위기다. 과연 수리온은 일각에서 비난하는 것처럼 ‘방산비리의 결정체’일까? 사실 이러한 장비 결함 문제는 수리온을 포함해 소위 말하는 ‘한국형 명품 무기’ 대부분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한다. 최근 세계 방산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K-9 자주포도 배치 초기에는 엔진과 변속기 고장이 매우 잦았고, 주행 중 무한궤도가 끊어지는 사고도 종종 발생했었다.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초의 복합소총으로 탄생했다는 K11은 잦은 폭발사고로 인명사고까지 발생했고, K21 장갑차 역시 교육훈련 중 물 속으로 가라앉아 인명사고를 냈다. 이러한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언론과 여론은 한국형 무기체계의 방산비리라며 비난에 목소리를 높이고, 개발과 전력화 업무를 담당한 관련자들은 줄줄이 수사기관에 소환되어 비리 사범으로 마녀사냥을 당하기 일쑤였다. 과연 한국형 무기체계들의 결함들이 전적으로 방산비리 때문일까? 현장의 목소리는 많이 다르다. 한국형 무기체계 개발은 예산 절감이 미덕처럼 받아들여지는 관료문화 덕분에 최저가로 사업자가 선정되다보니 개발예산과 인력이 충분히 투입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턱없이 부족한 인력과 예산으로 성과를 내야 하다 보니 개발자들의 격무는 관행처럼 굳어졌다. 신라시대에 아이를 쇳물에 녹여 만들어졌다는 선덕대왕신종(일명 에밀레종)의 설화를 빗대어 “한국형 무기들은 공학자들을 갈아넣어 만든 현대판 공밀레종”이라는 자조 섞인 소리도 나온다. 실제로 K-9 자주포 개발 과정에서 1명, T-50 개발과정에서 2명의 엔지니어가 과로로 순직했다. 이렇게 엔지니어들을 희생시켜 무기체계가 완성되어도 문제다. 최저가로 낙찰되었으니 당연히 비용 절감이 요구되었을 것이고, 이 비용 절감은 대부분 시험평가 기간과 횟수를 줄이는 것에서 이루어진다. 100번 테스트할 것을 10번만 테스트한다던가, 봄여름가을겨울 모든 환경 요소를 반영해 테스트해야 할 것을 한 계절에서만 약식으로 테스트하는 식으로 비용 절감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수리온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방식으로 개발된 미국의 UH-1Y 헬기 사례를 예를 들어보자. 이 헬기는 기존의 UH-1N 헬기를 바탕으로 개발되었지만, 개발에 10년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었다. 개발완료 이후 전투용적합판정을 받기까지는 3년이 걸렸다. 개발사와 미군은 UH-1Y의 개발완료와 전투용 적합 판정을 선언하기까지 알래스카와 같은 혹한 지형부터 열사의 사막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조건에서 혹독한 비행시험을 실시했다. 하지만 수리온을 비롯한 한국형 명품 무기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개발 예산과 일정 모두 부족하고, 만에 하나 사고라도 나면 개발자와 제조사는 방산비리사범으로 낙인찍혀 사법당국의 고강도 조사와 여론의 비난을 받아내야 한다. 실제로 최근 군의 한 무인기 개발 프로젝트에서 시제기가 추락하자 당국은 개발에 관여한 5명의 연구원들에게 1인당 13억 4천만 원을 변상하라고 통보했다. 이런 환경에서 K-9이나 T-50과 같은 무기들이 나왔다는 것은 엔지니어들의 분골쇄신(粉骨碎身)이 만들어낸 기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군 당국은 이번 해병대 헬기 추락 사고를 철저하게 조사해 원인을 명확하게 규명하겠다는 입장이다. 조사를 통해 기체 결함이 발견되면 마린온의 추가 생산은 당연히 중단될 것이고, 육군에 납품되고 있는 수리온과 해외 수출도 상당한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고를 계기로 ‘최저가 낙찰에 의한 공밀레 방식 무기개발’ 일변도인 한국형 무기체계 개발 사업 전반에 대한 무거운 성찰이 필요하다. 한국 방위산업의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 군의 전력 공백은 물론 이번 사고와 같이 우리 장병들의 억울한 희생이 언제든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일우 군사 전문 칼럼니스트(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 finmil@nate.com
  • 한국 13번째 세계유산 등재된 산사 7곳의 역사와 특징

    한국 13번째 세계유산 등재된 산사 7곳의 역사와 특징

    한국의 13번째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된 ‘산사(山寺), 한국의 산지승원’(Sansa,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은 모두 천년 넘게 불교문화를 지킨 사찰이다. 각 산사마다 다른 창건 시기와 자연환경, 건물 배치, 눈여겨볼 만한 문화재, 설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양산 통도사삼국유사에 따르면 양산 영축산 통도사(通度寺)는 신라 자장율사가 643년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 사리와 금실을 넣고 짠 베로 만든 가사,대장경을 봉안해 창건했다. 통도사 역사를 정리한 책인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에도 비슷한 시기인 646년 자장율사가 연못을 메우고 절을 세웠다고 기록됐다. 통도사는 무엇보다 부처 진신사리를 모신 불보사찰(佛寶寺刹)로 유명하다. 대웅전에 불상을 두지 않고,건물 뒤쪽에 금강계단을 설치해 부처 법신(法身)을 봉안했다. 사찰 명칭은 ‘이곳 산의 모양이 부처가 불법을 설파한 인도 영축산과 통한다’ 혹은 ‘승려가 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누구나 금강계단을 통과해야 한다’는 문구에서 비롯됐다고 전한다. 신라시대에는 계율을 지키는 근본도량이었다.조선 초기에는 수위사찰로 지정됐고, 경남 사찰 대본산 역할을 했다.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15교구 본사다.대웅전과 금강계단은 국보 제290호이고,보물 18점과 경남유형문화재 50점을 보유한다. ● 영주 부석사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혜곡 최순우 선생이 저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에서 극찬한 고려시대 건축물 무량수전(無量壽殿)이 있는 사찰이다. 의상대사가 676년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뒤 처음 지은 절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관련 기록이 있다. 의상대사가 창건 이후 40일간 법회를 연 뒤 대립을 지양하고 마음 통일을 지향하는 화엄사상의 근본 도량이 됐다. 부석사(浮石寺)라는 명칭은 무량수전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이 바위가 아래 바위와 붙지 않고 떠 있다는 사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고려 후기인 1376년 중수했다는 묵서가 확인된 무량수전은 13세기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석사 중심건물로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다. 누대인 안양루에서 올려다보는 무량수전 풍경은 한국 건축의 백미로 꼽힌다. 무량수전은 물론 무량수전 앞 석등과 전각 안에 있는 소조여래좌상,조사당과 조사당 벽화가 모두 국보로 지정됐다. 절이 있는 봉황산은 지세가 봉황을 닮았다는 곳으로, 소백산 국립공원에 속하나 실제로는 태백산과 이어진다. ● 안동 봉정사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인 국보 제15호 극락전(極樂殿)이 있다.1972년 건물을 보수할 때 나온 상량문에 따르면 1363년 처음으로 건물을 중수했다. 규모는 작지만 건축미와 품격이 느껴진다. 봉정사(鳳停寺)를 창건한 인물은 기록마다 차이가 있어 명확하지 않지만, 의상대사의 10대 제자 중 한 명인 능인대사가 7세기 후반께 지었을 가능성이 크다. 능인대사가 봉정사가 있는 천등산에서 수행하던 중 종이로 봉황을 접어 날렸더니 오늘날 사찰 자리에 머물렀다는 설화가 전한다. 천등산은 정상 높이가 574m이고 경사가 완만한 산이다.극락전과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 화엄강당, 고금당이 한데 모여 있으며, 건물 배치는 전반적으로 일자형이다. 임진왜란 시기에 피해를 보지 않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건축물과 불상, 불화가 잘 보존됐다.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안동을 방문했을 때 들르기도 했다. ● 보은 법주사속리산 법주사(法住寺)는 조선시대 지리지 ‘동국여지승람’에 의신조사가 553년 창건했다고 기록됐다. 의신조사가 법을 구하러 여행을 떠났다가 흰 나귀에 불경을 싣고 돌아와 머물렀다는 설화가 사찰 명칭의 유래다. 통일신라시대 승려 진표율사가 미륵보살 계시를 받은 뒤 김제 금산사에서 속리산으로 가다 소달구지를 만났는데, 소가 울자 달구지 주인이 출가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역사적으로는 통일신라시대에 길상사(吉祥寺),고려시대에는 속리사(俗離寺)로 불린 것으로 추정된다. 법주사가 있는 산의 이름이기도 한 속리는 ‘속세에서 떠난다’는 뜻이다. 법상종 중심 사찰이었던 법주사 건물 배치는 화엄사상과 미륵사상 영향을 두루 받았다.가장 유명한 건물은 국내 최고(最古) 오층목탑인 팔상전(捌相殿). 팔상전은 정유재란 때 소실됐으나 사명대사가 1624년 복원했으며, 목탑 아래 월대는 통일신라시대 유물로 알려졌다.팔상전 외에도 쌍사자 석등과 석련지가 국보로 지정됐고, 보물 13건이 있다. ● 공주 마곡사사찰 중심에 계곡이 흐르고 풍경이 아름다운 사찰이다. ‘택리지’와 ‘정감록’에는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좋은 땅으로 기록됐다. 마곡사(麻谷寺) 창건 시기와 과정은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다. ‘마곡사사적입안’은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온 뒤 세웠다고 적었고, ‘마곡사연기략초’에 따르면 보조선사 체칭이 지었다. 자장율사는 7세기,체칭은 9세기에 활동했다. 절은 고려시대에 중흥했다.계곡을 경계로 남원과 북원으로 나뉘는 건물 배치도 고려시대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세조가 마곡사에 들러 ‘만세에 망하지 않을 땅’이라고 평가했고, 17세기 이후 중창을 거듭했다. 마곡사는 남방화소(南方畵所)로 불릴 정도로 많은 승려화가를 배출했고, 백범 김구 선생이 명성황후 시해에 참가한 일본인 장교를 살해해 옥살이하다 탈옥한 뒤 출가했던 절이기도 하다. 국보는 없지만 오층석탑, 영산전, 대웅보전, 대광보전, 석가모니불괘불탱이 보물로 지정됐다. ● 순천 선암사송광사(松廣寺)와 함께 순천을 대표하는 명찰인 선암사(仙巖寺)는 조계산 자락에 자리 잡았다. 선암사 창건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아도화상이 529년 세웠다는 글이 있고, 도선국사가 875년 지었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시대 승려 대각국사 의천이 중창하면서 대찰이 됐으나, 정유재란으로 건물이 모두 불탔고 1759년에도 화재를 겪었다. 이에 따라 건물 배치가 여러 차례 변했는데, 현재 모습은 1824년에 갖춰졌다.중심건물인 대웅전도 같은 해에 재건됐다. 선암사는 절 입구에 사천왕문을 두지 않은 점이 특징이다.사천왕은 법을 지키는 신인데, 조계산 정상이 ‘장군봉’이어서 사천왕을 굳이 설치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경내에 있는 보물 14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유물은 승선교(昇仙橋)다. 화강암을 다듬은 장대석으로 아치인 홍예를 만들었다.이른 봄에 피는 매화인 ‘선암매’는 천연기념물이다. ● 해남 대흥사한반도 남쪽 해남 두륜산에 있는 대흥사(大興寺)는 창건 시점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늦어도 통일신라시대부터 운영됐다. 선암사처럼 아도화상 혹은 도선국사가 창건 주인공으로 알려졌다. 두륜산을 대둔산(大芚山)이라고도 하는 까닭에 사찰도 대둔사로 불린 적이 있다. 두륜산은 높이가 703m로, 계곡과 편백 숲 덕분에 경치가 수려하다.계곡은 대흥사도 지나가는데, 이로 인해 마곡사처럼 건물이 남원과 북원에 나뉘어 배치됐다. 대흥사가 다른 사찰과 구별되는 점은 호국정신이 깃든 도량이라는 사실이다.대흥사에 대해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이라고 평가한 서산대사의 충정을 기리는 사당인 표충사(表忠祠)도 있다. 차 문화도 대흥사의 특징이다.대흥사가 배출한 대종사(大宗師) 13명 중 한 명인 초의선사는 우리나라 다도(茶道)를 재정립한 인물이다. 조계종 22교구 본사로,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이 국보 제308호다. 보물 8건과 전남유형문화재 5건도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연곡사, ‘연기조사’ 창건설·조선 의병 본거지… 왜적과 악연 깊어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연곡사, ‘연기조사’ 창건설·조선 의병 본거지… 왜적과 악연 깊어

    ‘고지마 중대는 칠불사, 연곡사, 문수암을 남북 양 방향에서 포위 공격했다. 1소대는 하동 방향에서 전진했다.…소대는 오전 7시 반 예정대로 연곡사를 공격, 100명 남짓한 의병대를 오전 10시 반야봉 쪽으로 격퇴시켰다. 의병장을 포함해 22명 사살, 부상 30명, 노획품은 소총 5, 나팔 3 등. 연곡사 14동을 소각함.’ 일본 조선주차군수비대 제18연대의 ‘진중일지’는 1907년 10월 17일 연곡사 전투의 상황을 23일 이렇게 보고했다. 21일자 일지에는 ‘키노 대위의 부대는 진해만요새포병과 함께 연곡사 일대에서 고광순이 이끄는 의병과 충돌, 고광순 이하 약 40명을 쓰러뜨림’이라고 적었다.구례 연곡사는 통일신라시대 연기조사(緣起祖師) 창건설이 전하는 사찰이다.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남해안과 지리산 일대 대표적 수선도량(修禪道場)으로 이름 높았다. 이런 유서 깊은 절을 정유재란 당시 왜군이 불을 질러 철저하게 파괴했다. 그런데 300년 남짓 시간이 흐른 뒤 또다시 일본군의 방화로 전소된 것이다.이날 연곡사에서 일본군과 맞서다 순절한 의병장 고광순(1848~1907)은 임진왜란 당시 금산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의병장 고경명(1533∼1592)의 후손이다. 고광순은 문집 ‘녹천유고’(鹿川遺稿)에서도 12대조인 고경명의 뜻을 이어 항일 의병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음을 밝혔다고 한다. ‘녹천유고’에 담긴 고광순의 ‘열읍(列邑)에 보내는 격문’에는 ‘난신적자는 모두 처단할 것, 내정에 간섭하는 왜적을 몰아낼 것, 민비 시해의 원수를 갚을 것’을 호소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임진왜란 때, 을사늑약 이후 또 한 차례 일본군의 방화로 파괴된 연곡사와 두 시기 각각 전사한 고경명과 고광순의 운명은 닮아 있다. 일본은 1904년 3월 보병 제24연대 병력 4272명을 서울과 부산, 원산에 배치했다. 러일전쟁이 마무리된 1905년 10월에는 보병 제13사단과 제15사단 병력 1만 8398명으로 증강한다. 이렇게 2개 사단으로 무력시위를 벌이면서 11월 17일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할 수 있었다. 일본은 1907년 3월 제15사단을 철수시켰지만, 다시 8월 보병 제14연대를 포함한 여단 병력을 증파한다.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이후 그들이 말하는 ‘소요 사태’에 대비하는 차원이었다. 영호남 의병 탄압이 목적이었던 보병 제14연대가 연곡사를 중심으로 의병을 훈련하고 기습작전을 벌이던 고광순 의병을 공격한 것이다. 연곡사에 가려면 전남 구례에서 경남 하동으로 이어지는 섬진강대로를 따라 달리다 외곡삼거리에서 지리산 피아골 방향으로 접어들어야 한다. 이제는 좌우에 펜션이 가득 들어선 계곡을 따라 오르면 국립공원 관리사무소가 보이고 조금만 더 달리면 오른쪽에 절이 나타난다. ‘지리산 연곡사’(智異山 燕谷寺)라 편액한 일주문은 1995년 세웠다는데, 그 너머로 보이는 천왕문은 아직 단청도 되지 않았다. 연곡사는 1942년 일부 전각을 중건했지만 6·25전쟁 때 피아골 전투로 다시 폐사됐고, 1965년에야 요사채를 겸한 작은 대웅전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큰법당인 대적광전을 비롯한 전각들이 제법 규모 있게 들어서고 있지만 전성기에는 여전히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만행에도 석물(石物)들이 일부가 훼손은 됐을지언정 그런대로 살아남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연곡사에는 흔히 부도(浮屠)라 부르는 승탑(僧塔)의 역사가 집약되어 있다. 대적광전 오른쪽으로 돌계단을 따라 조금 오르면 동 승탑과 탑비가 나타난다. 통일신라시대 말 승탑은 가장 아름다운 부도의 하나로 꼽힌다. 동 승탑과 짝을 이루는 왼쪽의 탑비는 머릿돌과 받침돌만 남았다. 몸돌은 임진왜란 때 파괴됐다고 한다. 받침돌을 가만히 보면 용의 얼굴을 한 거북이 모양이되 날개를 달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상상 속의 동물인 연을 형상화한 것이라는데, 이런 동 승탑비의 모습을 본떠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다.동 승탑과 탑비에서 대적광전 뒤편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북 승탑이 있다. 고려 초기에 동 승탑을 모범으로 삼아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대적광전 서쪽에 떨어져 있는 현각선사탑비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고려시대 승려 현각선사를 기리고자 979년 세운 것이다. 역시 임진왜란 때 비신은 사라졌다.북 승탑에서 서쪽으로 산을 내려가다 보면 소요대사탑이 보인다. 문의 모습을 조각한 안쪽에 ‘소요대사지탑’(逍遙大師之塔)과 ‘순치육년경인’(順治六年庚寅)이라는 두 줄의 오목새김이 있다. 순치 6년은 1649년이다. 탑비를 따로 세우지 않고 승탑에 글자를 새겨 내력을 알리는 조선시대 부도의 전통이라고 한다.소요대사 태능은 임진왜란 때 의승군에 가담했고,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서성 수축을 주도하기도 했다. 왜란 당시 의승군을 이끈 서산대사 휴정의 4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임진왜란 때 불탄 연곡사를 중창한 당사자다. 휴정의 다른 세 제자는 사명대사 유정, 편양 언기, 정관 일선이다.소요대사탑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현각선사탑비 왼쪽 동백숲 아래 작은 비석이 보인다.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다. 고광순 의병이 일본군의 집중공격을 받은 곳이 대적광전 서쪽이라고 했으니 이곳일 것이다. 순절비는 1958년 세워졌다. 이렇듯 연곡사 곳곳에는 왜적과의 악연이 짙게 배어 있다. 연곡사에서 토지면사무소 쪽으로 가는 길 중간의 섬진강변 석주관성(石柱關城)은 정유재란 당시 구례 지역의 사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의 경계로 고려 말기에 왜구를 막고자 성벽을 쌓고 진을 설치했다고 한다. 하동에서 남원으로 가는 길목인 만큼 정유재란 때는 왜군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됐다. 건너편 언덕에는 의병으로 나서 왜군과 치열하게 싸우다 순절한 석주관칠의사(石柱關七義士)의 무덤도 있다. 석주관전투에는 화엄사 의승군이 대거 참전했다. 구례 화엄사라면 연곡사에서 멀지 않다. 화엄사도 연곡사와 같은 544년 연기 조사설이 전한다. 화엄사 의승군이란 곧 연곡사를 비롯한 지리산 일대 승군의 연합군이었을 것이다. 연곡사의 전각이 모두 불타고 탑비 일부가 훼손된 것도 이때일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천안 독립기념관에 갈 기회가 있다면 불원복 태극기(不遠復 太極旗)도 찾아보면 좋을 것이다. 의병장 고광순이 만들어 항일 의병 활동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는 태극기다. 위쪽에 붉은색 실로 ‘불원복’(不遠復)이라 수를 놓았다. ‘머지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씨줄날줄] 백제관음입상/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백제관음입상/서동철 논설위원

    1907년 충남 부여 규암면 규암리의 농부가 밭을 갈다 뚜껑이 덮인 쇠솥을 발견한다. 금동불상 두 점이 담겨 있었는데, 모두 7세기 백제 관음보살입상으로 밝혀졌다. 규암면은 백제 사비도성의 백마강 건너편이다. 규암면사무소가 있는 규암리는 읍내에서 계백로를 타고 가다 백제교를 건너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동네다. 커다란 용기에 담겨 묻힌 불상이나 불교 의례 용구라면 서울 도봉산 기슭의 영국사 터가 생각난다. 영국사 폐사 이후 도봉서원이 세워졌는데 2012년 발굴조사에서 고려시대 금강령과 금강저 등 77점의 불구(佛具)가 쏟아졌다. 경북 영주의 숙수사 터에서도 1953년 학교를 짓다가 질그릇에 담긴 25구의 통일신라시대 작은 불상이 한꺼번에 나왔다. 모두 난리를 만나 훗날을 기약하고 묻었을 것이다. 규암리 백제관음입상 두 점은 일본헌병대를 거쳐 두 사람의 일본인 수장가에게 각각 넘어갔다. 니와세 하쿠쇼가 소장하게 된 불상은 일제강점기인 1939년 보물 제320호로 지정됐다.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국보 제293호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이 그것이다. 이치다 지로에게 넘어간 백제관음은 일본 미술사학자 세키노 다다시가 1932년 펴낸 ‘조선미술사’에 그 아름다운 자태가 담겨 있다. 작품 설명을 보면 출토지와 소장자 이름에 이어 ‘높이는 여덟 치 여덟 푼’이라 했으니 26.7㎝ 안팎이다. 국내의 어떤 백제 금동불상보다도 크다. 빛바랜 책장 속 흑백사진으로 보아도 가슴 설레는 이 걸작이 최근 일본에서 다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백제관음을 소장한 일본 기업인이 우리 미술사학자들에게 공개했고, 진품으로 보인다는 답변을 들었다는 것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당장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얼마가 들더라도 가져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절정기 백제 문화를 보여 주는 이 관음입상을 국내에 들여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벌써부터 300억원이니 500억원이니 하고 거액이 거론되는 것은 유감스럽다. 가격만 따진다면 백제관음이 그 정도 가치에 머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빼앗기다시피 해외로 나간 문화재를 돈으로 찾아오는 잘못된 전례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문화재 당국은 먼저 진품인지를 정밀하게 판별하기 바란다. 동시에 일본인이 소장하고, 일본으로 건너가는 과정에 불법적 요소가 없는지를 조사해야 한다. 문제가 없더라도 매매가 아닌 기증을 유도해야 한다. 기증자에게 사례금을 지급하는 우리 박물관의 제도는 참고가 될 것이다. 소장자가 용단을 내린다면 문화훈장 서훈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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