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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장 행정] 중구, 전통시장-백화점 상생협약 지원

    [현장 행정] 중구, 전통시장-백화점 상생협약 지원

    “시장 상인들 마인드가 바뀐 게 가장 큰 변화입니다. 마케팅 노하우 전수 등을 통해 본인 가게 손님뿐만 아니라 다른 가게 손님에게도 친절하려고 노력하거든요. 물론 매출도 늘었습니다.” 중구 신당동 약수시장 상인회 최복수 회장은 25일 “매월 고객들을 겨냥한 이벤트를 펼치는데 홍보효과도 커 용산, 이태원 등 다른 지역에서도 찾아온다”며 이같이 덧붙였다. 고객 이탈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전통시장 상인들에게 백화점의 선진 유통기법을 알려줌으로써 시장을 활성화하자는 취지로 중구에서 마련한 ‘전통시장 살리기’ 특화사업 덕분이다. 올해 4월 상생협약을 맺은 롯데백화점은 약수시장 홍보, 환경개선, 상인복지를 지원하고 있다. 상인들은 지난 22일 동 주민센터에서 ‘웃음 강의’를 들었다. 지난 4월엔 친절 교육도 받았다. 최 회장은 “롯데에서 꾸준한 친절 교육과 제품 배치, 쇼핑백 제작, 고객 응대법 등도 알려줬다”며 “전국 8개 시장 상인회장과 3개국 전통시장도 다녀왔고 정보교류도 하고 있다”고 전했다. 롯데는 장애인 부부가 운영하는 부산기름집을 시범점포로 선정해 벽과 바닥을 타일로 교체하고 간판, 조명 등을 리모델링했다. 원산지와 가격 표시판도 만들어줬다. 김복순 사장은 “가게가 깨끗해져 손님도 많이 늘었다”고 말했다. 지난달에는 신세계백화점이 남대문시장 발전 협약을 맺었다. 남대문시장상인회는 신세계와 매월 상생협의회를 갖는다. 구도 진행사항을 점검하면서 행정 지원에 나선다. 구는 첫 프로젝트로 오는 29일부터 다음 달 5일까지 신세계 본점 식품매장에서 남대문시장 먹거리 특별전을 갖는다.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인기를 끄는 호떡, 용수염, 이남설한과, 순이네 빈대떡, 떡볶이, 죽 등을 판매한다. 최창식 구청장은 “꾸준한 노력으로 지난달 제10회 전국우수시장박람회에서 전통시장 활성화에 기여했다는 평가와 함께 중소기업청장 표창을 받았다”며 “전통시장과 백화점이 상생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 사진 홍혜정 기자 jukebox@seoul.co.kr
  • [현장 행정] 중구, 전통시장-백화점 상생협약 지원

    [현장 행정] 중구, 전통시장-백화점 상생협약 지원

    “시장 상인들 마인드가 바뀐 게 가장 큰 변화입니다. 마케팅 노하우 전수 등을 통해 본인 가게 손님뿐만 아니라 다른 가게 손님에게도 친절하려고 노력하거든요. 물론 매출도 늘었습니다.” 중구 신당동 약수시장 상인회 최복수 회장은 25일 “매월 고객들을 겨냥한 이벤트를 펼치는데 홍보효과도 커 용산, 이태원 등 다른 지역에서도 찾아온다”며 이같이 덧붙였다. 고객 이탈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전통시장 상인들에게 백화점의 선진 유통기법을 알려줌으로써 시장을 활성화하자는 취지로 중구에서 마련한 ‘전통시장 살리기’ 특화사업 덕분이다. 올해 4월 상생협약을 맺은 롯데백화점은 약수시장 홍보, 환경개선, 상인복지를 지원하고 있다. 상인들은 지난 22일 동 주민센터에서 ‘웃음 강의’를 들었다. 지난 4월엔 친절 교육도 받았다. 최 회장은 “롯데에서 꾸준한 친절 교육과 제품 배치, 쇼핑백 제작, 고객 응대법 등도 알려줬다”며 “전국 8개 시장 상인회장과 3개국 전통시장도 다녀왔고 정보교류도 하고 있다”고 전했다. 롯데는 장애인 부부가 운영하는 부산기름집을 시범점포로 선정해 벽과 바닥을 타일로 교체하고 간판, 조명 등을 리모델링했다. 원산지와 가격 표시판도 만들어줬다. 김복순 사장은 “가게가 깨끗해져 손님도 많이 늘었다”고 말했다. 지난달에는 신세계백화점이 남대문시장 발전 협약을 맺었다. 남대문시장상인회는 신세계와 매월 상생협의회를 갖는다. 구도 진행사항을 점검하면서 행정 지원에 나선다. 구는 첫 프로젝트로 오는 29일부터 다음 달 5일까지 신세계 본점 식품매장에서 남대문시장 먹거리 특별전을 갖는다.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인기를 끄는 호떡, 용수염, 이남설한과, 순이네 빈대떡, 떡볶이, 죽 등을 판매한다. 최창식 구청장은 “꾸준한 노력으로 지난달 제10회 전국우수시장박람회에서 전통시장 활성화에 기여했다는 평가와 함께 중소기업청장 표창을 받았다”며 “전통시장과 백화점이 상생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 사진 홍혜정 기자 jukebox@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19) 강남(상)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19) 강남(상)

    “서울은 넓다. 아홉 개의 구(區)에 가(街), 동(洞)이 대충 잡아서 380개나 된다. 동쪽으로는 청량리 너머로 망우리, 우이동 동북쪽으로는 의정부를 지척에 둔 수유리, 서쪽으로는 인천가도 중간의 영등포 끝, 동남쪽으로는 한강 너머의 천호동 너머, 서남쪽으로도 시흥까지 이렇게 굉장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넓은 서울도 370만명이 정작 살아 보면 여간 좁은 곳이 아니다. 가는 곳마다, 이르는 곳마다 꽉꽉 차 있다. 집은 교외에 자꾸 늘어서지만 연년이 자꾸 모자란다….” 소설가 이호철이 1966년 2월부터 신문에 연재한 ‘서울은 만원이다’의 한 대목이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시작된 1967년은 우리나라에서 보릿고개가 사라진 역사적 전환기였다. 해방 전후 100만명 선을 유지하던 서울 인구는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팽창하기 시작해 1959년 200만명, 1963년 300만명, 1970년 550만명을 넘어섰다. 매년 큰 도시 한 개(30만명)씩 인구가 불었다. 서울 곳곳은 공식통계상 13만채, 비공식적으로는 20만채 이상의 볼썽사나운 판잣집으로 뒤덮였고 시민들은 교통지옥에 시달렸다. 택지난과 교통난 해결이 급선무였다. 서울은 폭발 일보 직전이었고 비상구가 필요했다. 한강 너머 ‘신대륙’ 진출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강남은 논밭과 과수원, 초가집이 어우러진 한갓진 농촌이었다. 서울 사람들이 먹을 과일과 채소를 공급하는 초식(草食) 농사가 주를 이뤘다. 손수레에 채소와 과일을 싣고 강을 건넌 뒤 돌아올 때는 배설물을 실어다가 거름으로 썼다. 뽕밭이었던 잠원동은 무가 자라기 좋은 모래 토질이어서 단무지 농사가 성황이었고, 서초동은 미군과 서울 사람이 사갈 화초가 만개한 꽃동네였다. 압구정은 배나무 과수원골, 도곡동은 도라지 특산지, 청담동은 물 맑은 청숫골이었다. 이때 강남 사람들은 강 건너 강북 사람을 ‘서울사람’이라고 부르며 마치 상전 모시듯 했다. 1963년 행정구역 개편이 ‘강남신화’의 틀을 제공했다. 서울은 종전보다 2배 이상 확장돼 오늘의 모양새를 갖췄다. 지금의 강남 지역과 중랑, 강북, 노원, 은평, 강서, 구로, 금천, 관악구가 서울시에 편입된 것이다. 양주, 의정부, 고양, 광주, 과천, 시흥 등 서울을 둘러싼 경기도의 알토란 같은 땅이 서울 품에 안겼다. 5·16 쿠데타 주도 세력으로 현역 육군 소장이던 윤태일 서울시장의 공이 컸다. 군복을 입고 다녀서 ‘군복시장’이라고 불린 그는 박경원 내무부 장관, 박창원 경기도지사와의 기 싸움에서 힘을 발휘했던 것 같다.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교수는 “이 구역 확장이 없었더라면, (만약) 구역 확장이 늦게 이뤄졌더라면 강남 개발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치 지지부진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오늘날 ‘강남’은 불과 50년 전 공중전화나 전신전화취급소조차 없는 ‘깡촌’이었다. 서울로 편입되고 나서는 남서울, 제2 서울, 새 서울 등으로 띄워졌지만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한때 강남 지역의 통칭은 영동이었다. 문희옥의 유행가 가사처럼 ‘여기는 남서울 영동’이었다. 강남이라는 지명은 1975년 성동구 언주출장소와 영등포구 신동출장소가 합쳐져 강남구가 생기면서 대세로 굳었다. 초창기 강남은 자체 지명을 갖기보다는 이웃과의 지리적 관계 속에서 존재했다. 영동은 ‘영등포의 동쪽’이라는 행정편의적 작명이었고, 남서울은 단순히 ‘서울의 남쪽’이었다. 지금의 강남 지역을 이루는 광주군 언주면과 대왕면, 시흥군 신동면 등 옛 지명은 도로(언주로, 대왕 판교로)와 학교(대왕초·중교, 언주초·중교, 신동초교) 이름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할 뿐이다. 서울의 초식 재배지였던 과거사를 가능하면 지우고 싶었던 모양이다. 오늘날 부와 권력의 정점을 이루는 강남이라는 지명에는 또 다른 차별적 통념이 존재한다. 강남은 최초 ‘한강의 남쪽’을 의미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강남구·서초구·송파구·강동구 등 4개 구로 범위가 좁혀졌다. 완전히 자리를 잡은 1990년대 이후에는 강남구·서초구·송파구 3개 구를 강남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아직도 강남구·서초구 2개 구나 강남구 1개 구를 ‘진정한 강남’이라고 여기는 시각이 엄연하게 존재한다. 강남이라는 화려한 이름 뒤에는 곡절이 많다. 화신백화점 재벌 박흥식의 1962년 남서울 신도시계획구상이 강남 개발의 첫발이었다. 1966년 1월 서울시가 내놓은 남서울계획이나 같은 해 8월의 새서울백지계획도 ‘박흥식 프로젝트’의 복사판에 그쳤다. 본격적인 강남 개발은 2년 뒤 영동지구 구획정리사업이 시작되면서 닻을 올렸지만 성공 가능성은 불투명했다. ‘서울=사대문’이라는 600년 묵은 등식이 그리 쉽사리 깨지지 않을 듯 보였다. 그러나 불과 20년 만에 ‘뜨는 강남, 지는 강북’의 시대가 ‘훅’하고 왔다. 강남은 철저하게 계획된 도시다. 1969년 12월 한남동과 신사동을 잇는 한남대교(제3한강교)의 개통과 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 개통이 결정타였다. 1964년 서독 방문길에 아우토반을 달려 본 박정희가 1967년 대통령 재선에 성공하자 고도 경제성장의 혈류인 고속도로 건설을 지시한 것이다. 고속도로 편입 용지 매수비용이 문제였다. 정부가 용지 매입비를 줄이려고 고속도로의 기점인 제3한강교에서 양재동에 이르는 7.6㎞를 구획정리사업을 통해 무상확보토록 조치하면서 강남 개발의 물꼬가 터진 것이다. 영동1지구는 도로·학교·공원 등 공공용지 확보를 위해 세 차례나 구역 확장을 되풀이한 끝에 1971년 2월 최종적으로 1695만㎡(513만평)까지 늘어났다. 강남이라는 빈 땅을 부산~대구~대전~강남~한강~사대문에 연결함으로써 허허벌판의 개발 가능성이 활짝 열렸다. 영동2지구 개발계획은 1970년 11월 5일 발표됐는데 1206만㎡(365만평)의 엄청난 부지와 너비 70m에 길이 3.6㎞, 너비 50m에 길이 6.9㎞의 광폭 간선도로가 놓이는, 상상을 초월하는 첨단 격자형 가로계획이 선보였다. 대표적인 계획도시 미국 수도 워싱턴DC에서도 볼 수 없는 넓은 길이었다. 광화문길(세종대로)보다 70배나 긴 길이 강남 땅에 ‘쭉’ 그어진다는 놀라운 소식이었다. 1, 2지구를 합쳐 2901만㎡(878만평)의 광활한 신천지가 개벽을 기다리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강남은 4개의 산(내사산)에 둘러싸여 더 뻗어 나갈 곳이 없는 사대문 구시가지의 더할 나위 없는 대안이었다. 구시가지를 대궐과 성곽이 살아 있는 역사문화도시로 남겨 두고 현대적 신시가지로 개발할 만한 여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역사적으로도 2000년 전 한성백제의 옛 도읍지이자 다가올 황해시대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현대화와 도시화가 판친 1970~80년대의 시대정신에 딱 맞았다. 한 건을 노리는 조급주의와 독재정권을 향한 충성 일변도 정책 그리고 정치자금 마련을 위한 부동산 투기의 흑막이 없었더라면 환상적인 도시가 만들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강남의 성공 배경에는 ‘말 못할 안보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다. 한국전쟁 때 한강을 건너 피란길에 올랐던 서울 사람들에게 한강인도교 폭파와 강을 건널 수 없어 발을 구르던 기억은 씻을 수 없는 상처였다. 다리 건너편 강남은 다시 재현될지도 모르는 피란길의 두려움을 잠재우는 안도감을 제공했다. 남북 긴장 조성을 통해 권력 연장을 획책했던 박정희 정권이 강북 억제와 강남 이전을 부추긴 점이 작용한 것이다. 강남은 폭발했다. ‘말죽거리 신화’가 시작된 지 20여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세계 최대 규모의 아파트공화국으로 우뚝 섰다. 서울 거주자의 절반, 우리나라 전체 주거자의 절반이 아파트에 사는 아파트 시대가 이때 촉발된 것이다. 강남발 부동산 광풍으로 남한의 땅값 총액은 올 현재 5000조원이 넘는다. 남한 땅을 팔면 우리보다 42배 큰 미국의 절반을 살 수 있고, 100배 큰 캐나다를 여섯 개나 살 수 있다고 한다. 말죽거리 신화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지하철 3호선 양재역 동남쪽 말죽거리가 강남 부동산 투기의 원조이자 온상이었다. 말죽거리는 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로 도망가던 인조가 말에서 내릴 새도 없이 안장에 앉아 죽을 먹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1960년대 초 3.3㎡당 300~400원 하던 땅값이 10년이 지난 1970년 초 최고 50배 올라 2만원을 호가하더니 1970년대 말에는 1000배 이상 뛰어 50만원을 훌쩍 넘어섰다. 같은 시기 강북의 신당동과 후암동은 10배, 25배 올랐을 뿐이다. 강남 땅값은 2003년 1000만원을 넘어선 이후 현재 3000만원을 호가한다. 달랑 300원 하던 땅값이 무려 10만배 오른 셈이다. 강남은 세계에서 유례없는 군사작전식 초고속 압축성장의 유일무이한 모델이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축복과 국내 최대 규모의 판자촌인 구룡마을 재개발 논란에서 보듯이 부동산 투기의 그늘에서 비롯된 천민자본주의의 저주가 공존하는 곳이다. joo@seoul.co.kr
  • 신당동의 비밀 떡볶이는 알까

    광희문을 지나면 나오는 동네, 중구 신당동엔 예로부터 죽은 넋을 달래는 신당이 많았다. 그래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그럴 만하다. 지금 이곳에 자리한 광희문은 조선 때 도성 안에서 죽은 시신을 밖으로 내보내는 출구였다. 시구문(屍軀門),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부른 까닭이다. 중구 문화재단은 오는 28일 충무아트홀 컨벤션센터에서 열리는 ‘2013 충무문화포럼’에서 신당동의 역사성과 신당동 떡볶이의 유래 등 ‘신당동 시간 매핑’ 프로젝트를 발표한다고 14일 밝혔다. ‘예술공간 돈키호테’ 박혜강 대표, 큐레이터 이명훈씨 등과 주민 등이 참석한다. 재단은 지난 7~11월 충무아트홀 인근 신당동 일대를 답사하며 역사를 되짚어보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아트홀 주변과 광희문 일대를 비롯해 신당동 일대에 흩어져 있는 기록을 찾아내고 지역 토박이와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적 사실과 기억을 재구성하는 마을 리서치 작업이다. 현재 5곳만 남은 퇴계로 대장간 거리를 시작으로 옛 전찻길 자리인 한양공고 앞, 서양 건축 1세대 유학파 김중업이 설계한 산부인과 건물, 과거 시구문시장 자리, 봉제공장, 신당동 떡볶이 타운, 구불구불한 옛길의 흔적이 남은 대추나무 골목까지 곳곳을 뒤졌다. 재단 관계자는 “지역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문화와 공간, 사람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신당동 시간 매핑’은 신진 예술가와 주민이 함께 하는 공공 예술 프로젝트”라면서 “이번 프로젝트와 더불어 신당동의 역사성과 문화성에 이야기를 입혀 새로운 서울의 명소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 돈가방 찾아준 ‘천사 미화원’

    돈가방 찾아준 ‘천사 미화원’

    경로당 운영비 등 1000여만원이 든 돈 가방을 찾아준 환경미화원의 이야기가 뒤늦게 알려져 화제다. 주인공은 서울 중구청 청소행정과 소속 환경미화원 최현주(53)씨. 최씨는 4일 “다른 사람이 발견했더라도 주인에게 돌려줬을 것”이라며 “두 아들에게 부끄럼 없는 아빠로 살아왔다”고 말했다. 최씨는 지난달 22일 청소 작업을 하다가 가로수 옆에 놓인 가방을 발견했다. 최씨는 가방에 있는 신분증을 확인하고 구청을 통해 가방 주인인 이양순 광희문경로당 회장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이 회장은 최씨의 전화를 받고서야 돈 가방을 잃어버린 것을 알았다. 가방에는 경로당 운영비 500만원이 든 직불카드와 1000만원이 든 개인 현금카드, 약간의 현금이 들어 있었다. 이 회장은 고마운 마음에 신상을 물었지만 최씨는 당연한 일이라며 극구 사양했다. 최씨는 이 회장의 거듭된 요청에 이름만 말해줬다. 이런 사실은 최근 신당동에서 열린 한 행사장에서 이 회장이 최창식 중구청장에게 귀띔하면서 알려졌다. 구는 최씨에게 조만간 표창하기로 했다. 홍혜정 기자 jukebox@seoul.co.kr
  • 신당동 떡볶이 골목 증축 가능해진다

    중구는 21일 서울시에 중부시장을 포함한 묵정공원 일대, 신당동 떡볶이 골목, 성안마을, 서애길 류성룡 터, 남소영길 리모델링 활성화 구역 지정 결정 신청서를 제출했다. 5곳 26만 3499㎡다. 건물 대부분이 15년 이상 된 노후 지역이다. 구는 활성화 구역으로 확정되면 시비를 지원받아 건축디자인계획 용역에 들어간다. 구는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는 대규모 개발보다는 지역 경쟁력 확보와 도심 이미지 개선을 겨냥해 이 같은 계획을 꾀했다. 리모델링 활성화 구역에서는 기존 건축물의 외형 보전, 내진 성능 보강, 에너지 절약 등을 건축계획에 반영해 건축물 면적의 30% 범위에서 증축할 수 있다. 시는 용적률, 건축물 높이 제한, 대지안 조경·공지 등 건축디자인계획 수립 전까지 자치구 건축위원회 심의를 거쳐 완화 조치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최창식 구청장은 “리모델링 활성화 구역 지정 통과 땐 신속하게 건축 허가를 처리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홍혜정 기자 jukebox@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종로(하)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종로(하)

    >>세운상가와 물거품이 된 녹지축 조성계획 우리가 흔히 세운상가라고 부르는 상가는 하나의 건물이 아니다. 종로에서 퇴계로에 걸쳐 남북으로 1㎞에 이르는 8개 동의 거대한 건물군이다. 종로변 세운상가(현대상가)에서 시작해 청계천로를 건너면 대림상가로 이어지고 을지로 쪽 삼풍상가와 풍전호텔을 지나 만나는 마른내길을 건너면 나오는 신성상가와 진양상가가 퇴계로에 면하는 어마어마한 구조물이다. 아파트도 흔치 않던 시절인 1966년 6개 건설업체와 개인 지주 모임 등 8개 업체가 분할 시공해 1970년 초 완공했다. 언필칭 동양 최대였다. 종로, 청계천로, 을지로, 퇴계로 등 도심을 동서 방향으로 관통하는 4개의 큰길을 남북 방향으로 거스르는 모양새 자체가 파격이었다. 한때 ‘도시 속의 도시’로 칭송받았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역린(逆鱗)은 ‘도시의 괴물’로 낙인찍혔다. 과거 없이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법. 세운상가에도 당대사가 담겨 있다. 세워진 지 50년이 지난 시점에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건물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세운상가는 처녀가 애를 낳은 것 이상으로 말 못할 태생의 비화를 간직하고 있다. 세운상가 터는 일제가 미군공습 때 화재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소개공지(疏開空地)로 비워 놓은 공터였다. 일제는 서울시내 19곳에 이르는 소개도로에 대한 대대적인 건물 철거작업을 시행했는데 그때의 유산이다. 종묘 앞~필동, 서울역~회현동, 필동~신당동, 서울역~충정로, 서울역~갈월동, 원남동~동대문~광희문 등이 주요 소개도로였다. 덕분에 해방 후 퇴계로, 의주로, 율곡로, 청파로 같은 큰길을 쉽게 낼 수 있었다.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은 1966년 6월 20일 “종묘 앞에서 대한극장 앞 사이의 무허가건물 일체를 철거 정리하고 도로용지 일부에 민간자본을 유치해서 산뜻한 건물을 짓겠다”라는 계획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해 허락을 얻었다. 공병장교(예비역 준장) 출신답게 전격적인 철거 작전을 실시했다. 당시 신문보도를 보면 인현동 지역의 무허가 상가주택 1100채가 자진 철거하거나 강제 철거됐다. 다른 지역의 철거 대상 무허가 건물도 1000채를 넘었다. 무려 2200채의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는 사상 최대의 작전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불과 두 달 만인 1966년 8월 말 도로용지를 제외한 너비 50m, 길이 893m, 총면적 4만 4737㎡(약 1만 3533평)의 부지가 조성됐다. 기공식날 김 시장은 세운상가라는 휘호를 남겼다. ‘세운’(世運)이라는 작명은 ‘세계의 기운이 모인다’는 뜻이었다. 1970~1980년대 세운상가는 장사동·입정동·산림동의 기계공구상가, 부품상가와 함께 국내 전자산업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했다. 1987년 용산 전자상가가 세워지기 전까지 한국의 실리콘밸리였다. 최초의 개인용 PC를 개발한 삼보컴퓨터와 ‘아래아 한글’의 한글과 컴퓨터 등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음향기기 관련 기기를 사거나 수리하려면 세운상가로 가야 했다. 전자제품과 컴퓨터, 업소용 게임기, 불법 성인물과 해적판 등의 천국이었다. 도청장치와 감시카메라 업체는 지금도 호황을 누린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이 건물은 민자 유치를 통한 지역정비, 상가와 주택이 결합한 고급 주상복합이었다. 뿐만 아니라 종로에서 퇴계로까지 보행 데크로 연결하고 차량과 보행자를 분리하는 첨단 건물이었다. 그러나 시공사와 조합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통에 시대를 앞서 가던 보행 데크 개념 등은 제대로 적용되지 않은 미완의 실패한 건물이 됐다. 2003년 청계천 복원을 계기로 창경궁~종묘~세운상가~퇴계로~남산~한강까지 서울의 녹지축을 복원키로 하면서 철거 대상으로 지목됐다. 실제 2009년 현대상가가 철거돼 녹지축이 일부 조성됐지만 ‘남산르네상스’를 부르짖던 오세훈 시장이 물러나면서 또 한 번 미완인 상태로 남았다. 1층을 도로로 사용하고 상부에 주상복합을 짓는 세운상가의 설계 형태는 이후 낙원상가에도 재연됐지만, 보편적인 도심개발 형태로 정착되지 못했다. 어쨌든 세운상가는 도심재개발사업의 초기 사업모델을 제시했고 이후 서울 도심부의 경관적 측면, 기능적 측면에서 다양한 논란을 일으킨 ‘문제적’ 건물로 남았다. 세운상가는 판잣집과 집창촌 철거 같은 시대적 소임을 다했지만, 미래에 대한 통찰력이나 역사의식 없이 이뤄진 즉흥적인 바벨탑 쌓기가 도시에 얼마나 큰 상처인지를 보여주는 증좌(證左)로 남았다. 김수근은 자신의 설계목록에서 세운상가를 빼곤 했다. >>세계 최대 집창촌 종삼 소탕 ‘나비작전’과 동대문운동장 종묘와 사창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외람스럽게도 한국전쟁 이후 20년 동안 종묘 앞에는 ‘종삼’(鍾三)이라는 이름의 세계 최대 규모의 집창촌이 기생하고 있었다. 1966년 그때로 되돌아가 보자. 종묘 앞에서 대한극장에 이르는 너비 50m, 길이 1㎞에 무려 4만 9586㎡(약 1만 5000평)의 공지에 2200여동의 무허가 판잣집과 집창촌이 자리 잡고 있었다. 판잣집이라기보다 천막집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세운상가가 들어선 바로 그 자리다. 1950년 초 종묘 앞에 국회의사당을 짓는 계획이 문화재관리국의 반대로 무산되면서 어떤 식으로든 정리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문화재관리국이 조선왕조의 정신적 고향인 종묘 앞에 국회의사당을 지을 수 없다고 주장하자 전주이씨 양녕대군파인 이승만 대통령이 이를 수용해 남산 조선신궁 자리에 건립하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1968년 종삼을 소탕하려는 ‘나비 작전’이 펼쳐졌을 때 종삼의 범위는 종로3가와 4가, 단성사 뒷골목, 종묘 앞 일대를 중심으로 낙원동, 봉익동, 훈정동, 와룡동, 묘동, 권농동, 원남동은 물론이고 길 건너 남쪽의 관수동, 장사동, 예지동까지 암세포처럼 퍼져 있었다. 당시 서울시가 현재의 낙원상가부터 종로5가까지 조사해 보니 윤락여성 1368명, 포주 11명, 바람잡이 17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낙원동 등 한옥지구(고급), 종묘 앞 등 무허가 건물지대(하급), 종묘 건너편 소개도로 터(최하급) 등 3등급으로 분류됐다. 이 지역을 현장 답사하던 김현옥 시장과 중구청장 일행에게 윤락여성이 접근해 유객 행위를 했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흥인지문(동대문)은 종로의 끝이자 도성의 동쪽 관문이었다. 동대문종합시장(동대문쇼핑타운)은 18세기 영조의 청계천 준설 때 퍼낸 흙이 쌓여 생긴 인공산(假山)이 있던 자리였다. 1899년 전차가 다니면서 전차의 차고지로 쓰였다. 전차가 사라진 1970년 종합시장건물이 들어섰고, 시장 뒷골목에 책 도매상가들이 모여 ‘대학천’이라는 책골목 길을 형성했다. 서적도매상의 산실인 대학천은 동숭동 옛 서울대 문리대에서 청계천 쪽으로 흐르던 하천 이름이다. 1977년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이 생기기 전 동대문종합시장 한쪽에는 동대문고속버스터미널이 자리 잡고 있었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의 전면 개통과 함께 고속버스시대가 열린 터였다. 고속버스 기사와 안내양이 지금의 항공기 승무원처럼 각광받던 때였다. 서울 도심에는 버스회사에 따라 동대문을 비롯하여 서울역 앞, 관철동, 충무로 등 6개의 고속버스터미널이 어지럽게 난립하고 있었다. 동대문터미널은 이용 인원이 가장 많은 ‘메이저’ 터미널이었다. 한남대교와 장충단공원을 거쳐 직선코스로 도심에 진입할 수 있는 최적의 입지조건이었지만 강남 개발과 강북 인구 분산이라는 대세에 밀려 사라졌다. 주차장 터에는 6성급 메리어트호텔이 지어지고 있으며 완공을 앞두고 있다. 중앙청과 서울시청,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은 1950~1970년대 우리 사회의 바로미터였다. 중앙청이 정치의 무대였다면, 시청 앞은 정치가 시각화되는 장소였다. 또 서울운동장은 스포츠제전의 장이기에 앞서 정치의 장이었다. 경기대 건축대학원 안창모 교수는 “시청 앞 행사를 보면 당시 정치적 화두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서울운동장은 스포츠시설이었지만 스포츠보다는 정치의 무대로 사용된 기록이 많았다. 야구장이 있던 곳은 1882년 임오군란의 현장이다. 본래 훈련도감의 군대 주둔지였으나 이를 신식군대인 별기군의 훈련장으로 사용했는데 사건 당시 구식 군대의 습격을 받은 일본인 교관이 숨지면서 임오군란을 촉발한 곳이다. 숨 가빴던 1950년대 말~1960년대 초 격동의 시절 서울운동장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84회 생일축하 행사(1959년 3월 26일)가 열린 지 두 해 뒤 4·19혁명 1주년 행사(1961년)가 열렸고 이듬해에는 5·16 1주년 행사(1962년)가 열렸다. 운동장이 시대의 거울이었다. 훈련도감 훈련장~경성운동장~서울운동장을 거쳐 동대문운동장이었던 자리에 2009년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 조성됐다. 그 중심에 이라크가 낳은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내년 3월 완공을 앞두고 자태를 드러냈다. 마치 외계 비행물체를 연상케 하는 전위적인 금속 질감의 건물 외형이 생경하다. 600년 동안 서울을 지켜온 보물 1호 흥인지문과 외계 물체의 기 싸움이 궁금하다. joo@seoul.co.kr
  • [한국산업기술시험원] 전기시설 수리·어린이과학교실 등 재능 나눠 이웃사랑 실천

    [한국산업기술시험원] 전기시설 수리·어린이과학교실 등 재능 나눠 이웃사랑 실천

    KTL은 다수의 이공계 석·박사를 보유한 만큼 사회공헌활동도 남다르다. ‘기술 나눔, 사랑 나눔’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2009년부터 꾸준히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2011년부터는 연말연시 연탄배달과 김장담그기 등 일반적인 사회공헌활동에서 탈피, 수요자 중심의 맞춤형 사회공헌활동으로 전기·전자기술 재능나눔과 과학기술이야기 교육 봉사 등을 펼치고 있다. 국내외 전기·전자제품의 전기안전인증업무를 선도하는 공공기관으로서 재능 나눔 문화를 확산해 지역사회와 유대를 강화하고 사회복지시설과 소외계층에도 사회복지 공동 모금회를 통하여 매월 기부금을 전달하며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2009년부터 사회복지시설을 찾아 재능 나눔 봉사활동을 하고 있으며 올해에는 경기 안양시 평화의집을 방문해 전기시설 수리 등 봉사활동을 펼쳤다. 평화의집은 18세 미만의 결손가정 아동 100여명을 보호하고 있는 시설이다. KTL은 지난 7월 평화의집을 찾아 장마철에 발생하기 쉬운 감전사고와 화재 등 전기안전사고를 예방하고자 평화의집 내부 노후 된 전기배선과 콘센트, 고장 난 비상등과 유도등을 모두 새것으로 교체하고 선풍기 등 고장 난 전기용품과 형광등기구 등 전기기구들도 모두 수리해줬다. 지역사회 저소득층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려고 실시 중인 ‘어린이 과학교실’은 좋은 호응을 받고 있다. 서울 중구 신당동의 신당 꿈 지역 아동센터에서 지역아동을 대상으로 ‘전기가 만들어지는 원리’, ‘천둥 번개가 치는 이유’ 등의 특강 실시하며 과학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주고 흥미를 심어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KTL은 또 2011년 12월부터 한국노동복지센터와 공동으로 재생 PC 나눔 사업도 하고 있다. 사랑의 재생PC 나눔은 2011년 24대, 2012년 62대, 올해 56대 등 사용하지 않는 제품 중 재생 가능한 컴퓨터, 프린터, 모니터, 노트북, 복합기 등을 수리하거나 업그레이드해 한국노동복지센터에 기증하고 있다. 복지센터는 이를 다시 필요한 시설과 개인에게 기증한다. 이 밖에 지역 내 사회복지시설인 구로지역아동센터와 구로3동 주민센터 등을 통해 저소득가구에 생활물품과 성금을 맡기고 있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언어·취업·상담… 다문화 지원 한번에

    서울 중구가 25개 자치구 가운데 처음으로 다문화 가정 건강 실태 조사를 실시하는 데 이어 12일 신당동 시설관리공단에 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개관한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는 사무실, 교육장 4곳, 상담실 2곳을 갖췄다. 언어발달지도사, 방문교육지도사 등 전문 인력 19명이 근무한다. 동국대 산학협력단이 운영을 맡는다. 협력단은 다문화가정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육, 통합 가족·취업 지원 교육, 가족 상담 서비스 등을 추진할 예정이다. 구는 또 다문화가정 건강 실태, 문제점 등을 파악해 국가와 지자체가 지원하는 질병 치료나 예방 서비스 등을 효과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들 계획이다. 구는 조사 대상자들에게 안내문과 동의서를 발송한 뒤 조사에 동의한 사람에 한해 1대1 면접조사를 실시한다. 수집된 자료는 사회과학 통계 프로그램(SPSS)으로 분석한 뒤 다문화가정 건강 실태 기초 자료, 의료 취약계층 공공의료서비스 접근도 개선 자료 등으로 활용한다. 홍혜정 기자 jukebox@seoul.co.kr
  • “싸이 비하면 우린 아기… 하이힐 벗고 우리 색깔 찾았죠”

    “싸이 비하면 우린 아기… 하이힐 벗고 우리 색깔 찾았죠”

    “사진 찍을 때도 예쁜 척 금지, 브이(V)자도 금지, 인위적인 표정과 포즈 모두 금지예요. 자유롭고 개성 있는 모습이 저희 색깔이니까요.” 머리에 쓰는 헬멧을 바구니처럼 하나씩 손에 들고 14일 서울신문사를 찾은 5인조 신인 걸그룹 크레용팝(웨이, 소율, 금미, 초아, 엘린)은 자신들을 이렇게 소개하며 활짝 웃었다. 첫눈에도 ‘심상찮은’ 걸그룹이다. 단추를 목까지 채운 티셔츠에 미니스커트 아래로 긴 트레이닝복을 받쳐 입고 머리에 헬멧을 쓴 채 ‘빠빠빠’를 외치는 이들은 민망한 노출이나 선정적인 춤 동작 없이도 맹렬한 기세로 가요계에 급부상했다. 재미있는 안무, 신나는 노래가 이들의 병기다. “‘빠빠빠’로 생각지도 못한 사랑을 받게 돼 한동안 적응이 안 됐어요.”(소율), “온라인 음원 사이트에서 ‘빠빠빠’가 1위를 한 날 눈을 씻고 차트를 다시 봤어요. 저희끼리 소리를 지르면서 좋아했죠.”(웨이) 지난해 7월 데뷔한 이들은 엄밀히 말하면 ‘중고 신인’이다. 데뷔 앨범은 다른 걸그룹들과 차별화하지 못하면서 실패했고, 석 달 뒤 낸 두 번째 앨범도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지난 6월 발표한 세 번째 앨범 타이틀곡 ‘빠빠빠’도 초반에 묻히는 듯했으나 한 달여 만에 역주행해 정상까지 올랐다. “‘빠빠빠’가 음원 순위 100위에 걸쳐 있어서 기뻤어요. 그것도 처음이었거든요. 잠깐 내려가는 듯했는데 SNS에서 뮤직비디오와 안무 연습 동영상이 입소문을 타면서 순위가 올라가기 시작했어요.”(초아) “가요 관계자들이 예전에는 음반을 내면 순위가 점점 올라가는 게 정상인데 요즘은 이런 일이 통 없었다고 얘기해 주시더라구요.”(엘린) 이들의 안무를 보면 누구나 입가에 미소를 짓게 된다. 특히 다섯 명의 멤버가 5기통 엔진처럼 뻣뻣한 자세로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는 ‘직렬 5기통’ 춤은 장안의 화제다. “원래는 위아래로 뛰는 동작만 있었는데 체력 소모가 많더라구요. 그래서 점프할 때 손동작을 추가했는데 피스톤이 움직이는 것 같은 착시현상을 주면서 그런 이름이 붙었어요. 원래 저희는 ‘두더지춤’, ‘점핑춤’, ‘널뛰기춤’이라고 불렀었죠.” 실제로는 도입부에 손을 45도 각도로 올려붙이고 추는 개다리춤을 가장 좋아한다는 이들은 “뛰어다니는 동작이 많아 숨이 차지만 무대에서는 티 안 내고 밝게 웃으려고 표정 연습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이들의 노래와 춤은 연예인은 물론 경찰관, 외국인들까지 패러디에 동참하며 신드롬을 낳고 있다. 방송인 김구라가 한 프로그램에서 선보였던 ‘구라용팝’도 그중 하나다. 따라하기 쉽고 코믹한 안무에다 중독성 있는 멜로디로 이들은 ‘제2의 싸이’로 불린다. 미국 빌보드는 지난 13일 공식 홈페이지에 “지난 1년간 바이러스처럼 퍼진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이을 스타가 탄생했다”며 크레용팝을 소개했다. 세계적 음반사 소니뮤직엔터테인먼트와도 앨범 라이선스 계약을 맺었다. “싸이 선배님에 비하면 저희는 코흘리개인 셈인데 나란히 이름이 거론되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죠. 소니와 계약한 것도 기분 좋구요. 코믹 걸그룹이라는 이미지도 저흰 아주 마음에 들어요. 저희만의 유쾌한 면모를 원없이 보여 줄 수 있잖아요.” 히트곡 ‘빠빠빠’가 탄생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오랜 시행착오의 결과물이다. 데뷔 앨범을 내고도 방송에 출연하지 못하던 이들은 자신들을 부각시켜야 한다는 절박감에 2집 ‘댄싱퀸’ 때부터 트레이닝복을 입기 시작했다. 후속곡 ‘빙빙’으로 활동할 때도 교복에 트레이닝복을 입은 불량 여고생을 콘셉트로 잡았다. “아이돌 홍수시대이다 보니 좀 더 과감히 우리 색깔을 보여 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댄싱퀸’ 때 발차기와 고독춤 등 특이한 안무를 살리려고 트레이닝복을 입자고 제가 먼저 제안을 했죠. 원래는 쫄쫄이를 입으려고 했는데 발차기 느낌이 잘 안 살아서 트레이닝복으로 바꿨어요. 그때부터 일명 ‘추리닝돌’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면서 팬들이 생겨났어요.”(웨이) 털모자에 트레이닝복을 입고 명동, 홍대, 신당동 등 길거리에서 게릴라 콘서트를 펼치기도 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우리가 가수인지 댄서인지 헷갈려하는 분들이 많았다. 그래서 옷에다 그룹과 멤버 이름을 새겨넣기까지 했다. 수도권 지역은 아마 거의 다 돌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헬멧을 쓰게 된 것은 초아의 아이디어. 초아는 “독수리 5자매 같은 느낌을 주고 싶어서였다”고 했다. 이들의 의상은 다 합해 대여섯 벌이 고작이다. 헬멧에 있는 두 줄의 띠는 매번 매니저가 색깔을 바꿔 붙인다. 삼복더위에 온몸을 꽁꽁 싸맨 의상이 더울 법도 하지만 트레이닝복 예찬론을 펼쳤다. “데뷔 때는 저희도 하이힐에 귀걸이 등 액세서리를 하고 춤을 췄는데 모두 다 뺐어요. 요즘은 다른 걸그룹들이 밥을 먹어도 배 안 나와 보여서 좋겠다고 부러워해요.” 크레용팝의 뒤에는 30~40대 아저씨팬들, 일명 ‘저씨팝’이 버티고 있다. 이들은 “공개방송 때 ‘저씨팝’들도 트레이닝복에 헬멧을 쓰고 오셔서 우릴 응원해 준다”고 웃었다. 일본에서도 미니 콘서트를 열 정도로 인기가 높다. 그런 과정에서 한때 일본의 괴짜 걸그룹들을 모방했다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늘 무대에서 최선을 다해 장기를 펼쳐 보이겠다는 생각에 TV 예능 프로그램에는 나가지 않는다는 원칙도 세웠다. 인기가 수직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는 이들은 다음 앨범에서는 어떤 아이디어로 팬서비스를 할까, 즐거운 고민 중이다. “‘빠빠빠’는 가사가 많지 않고 반복되는 부분이 많아 저희 모습을 다 보여 드리지 못한 것 같아요. 다음 앨범에는 발라드도 넣어 더 다양해진 색깔을 보여 드릴 겁니다.”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⑧ 1950~60년대 : 파괴와 재건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⑧ 1950~60년대 : 파괴와 재건

    “도시는 기억으로 살아간다”(The city lives by remembering)고 미국의 시인 랠프 왈도 에머슨은 읊었지만, 서울은 600년 고도의 기억이 별로 없다. 마치 신흥도시 같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통에 불타고 약탈당했으며, 일제강점기 도읍에 대한 자취는 강제적으로 지워졌다. 조선총독부-경성시청-남산 조선 신궁을 상징 축선으로 하는 식민 도시로 치장됐다. 한국 전쟁통에 그나마 남은 것 대부분이 파괴됐다. 1960년대 이후 개발독재시대의 무지막지한 개발 광풍을 타고 또 한 번 뭉개졌다. 역사의 향기는 흩어졌다. 한강 이남으로 영역을 확대한 서울은 사실상 한국전쟁 이후 새로 건설된 신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대문 안에는 표지석만 어지럽게 남았을 뿐이다. 전쟁과 대사건은 도시를 재건한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 폭격을 앞둔 맥아더는 “원래 도시란 천재지변이나 전쟁을 겪고 나면 그전에 비해 몇 곱절 더 크고 좋은 새 도시로 부흥된다. 미국이 재건을 도울 것이니 서울은 앞으로 이상적인 현대 도시로 탈바꿈할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실제 1644년 대화재로 도시의 80%가 타 버린 영국 런던은 옥스퍼드대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 교수에 의해 오늘의 런던으로 재건됐다. 일본 도쿄도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잿더미가 됐지만 탁월한 도시계획가 고토 신페이(後藤新平) 도쿄시장의 주도로 세계 도시계획 사상 유례가 없는 시가지 개조를 통해 새로 태어났다. 런던과 도쿄는 세계대전으로 또 한 번 타격을 입었지만, 옛 도시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서울의 재건은 성공작일까? 서울을 역동적인 현대 도시로 평가할 수는 있지만, 역사 도시로 평가하기엔 머쓱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서울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은 꽤 혼란스럽다. 서울은 네 번 결정적인 상처를 입었다. 16세기 일본과 중국 군대에 의해 약탈당했으며, 근대 일제강점기엔 성곽을 허물고, 상징 축을 강제로 바꾸는 방법으로 도시 형태가 조작됐다. 한국전쟁기 유엔군과 한국군의 청야(淸野)작전(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농작물이나 건물 등 지상에 있는 것들을 말끔히 없애는 작전)을 통해 철저하게 파괴됐다. 1960~70년대 우리 손으로 남은 문화재를 헐어서 치워 버렸다. 맥아더의 말처럼 기회는 있었다. 1952년 전후 복구 차원의 첫 도시계획안을 마련하면서 세종로 등 39개의 큰길을 확장하거나 신설하고, 광화문광장·서울시청광장·남대문광장 등 19개의 광장을 만드는 과감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재정부족 등을 이유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유럽의 오래된 도시처럼 구도심(사대문 안)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사대문 밖이나 강남 신시가지를 개발하겠다는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의 전환이 없었다. 한국전쟁 이후 ‘광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서울 집중이 기회를 날려 버렸다. 집중을 막으려고 온갖 정책을 동원했지만 약효가 듣지 않았다. 해방 전후 100만명대였던 서울 인구는 1966년 380만명, 1970년 540만명을 넘어서더니 1990년 1000만명을 돌파해 버렸다. 수도 서울 행정은 집 지을 땅을 확보하고, 도로를 넓히고, 교통수단을 늘리고, 수돗물을 공급하고, 쓰레기를 치우는 것에 매달렸다. 만약 그때 인구의 서울 집중을 막을 수 있었더라면 서울은 한가롭게 전차가 다니며, 꼬불꼬불한 골목길이 정겨운 기와집이 빼곡한 도시로 남았을 것이다. 한강과 북한산이 주는 자연의 세례를 맘껏 누리는, 풍광이 뛰어난 성곽 도시로 유지됐을 것이다. 1950년대 서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손정목 전 시립대 교수의 ‘서울도시계획이야기’를 기본으로 사대문 밖 풍경을 상상해 보자. 동쪽으로 동대문을 나서면 신설동 큰 길가까지 집이 들어 차 있지만, 바깥은 논밭 천지다. 신당동에 집이 드문드문했을 뿐 금호동·옥수동 일대는 산이었다. 왕십리를 지나 한양대 일대는 미나리꽝이었고 성동교의 나무다리가 삐꺽거렸다. 남쪽 한강대교에 이르는 동빙고동과 서빙고동 주민은 1000명 안팎이었고, 원효로 일대는 대부분 논밭이었다. 노량진, 상도동, 대방동, 영등포는 큰 길가조차 목가적인 전원 풍경을 연출했다. 서쪽으로 신촌을 지나 마포 전차 종점을 벗어나면 벌거숭이 산과 논밭이 펼쳐졌다. 동북쪽은 미아리고개, 서북쪽은 독립문과 현저동이 경계였다. 지금의 강남·서초·송파·강동·강서·관악·구로·금천·도봉·노원·은평구 등은 모두 경기도였다. 서울의 고층 건물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최고층 건물은 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 있던 8층짜리 반도호텔이었다. 이웃 조선호텔과 한국은행 모두 일제가 남긴 건물이었다. 1955년에 종로 사거리에 2층짜리 신신백화점이 신축됐고, 1957년 광화문 사거리와 을지로 1가에 3층짜리 국제극장과 5층짜리 개풍빌딩이 각각 들어섰다. 1958년 남대문에 7층짜리 그랜드호텔이 문을 열자 구경 인파가 몰렸다. 당시 서울 도심부의 평균 층 높이는 2층이 채 되지 않았다. 도심부를 고층화하려고 주요 간선도로변의 건물 높이를 3~5층 이상으로 정할 정도였다. ‘한강의 기적’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된 1962년부터 약 20년간의 고도성장기를 일컫는다. 이 기간 서울은 경천동지할 변화를 겪는다. 서울의 공간 변화는 1966년부터 1980년까지 15년간 거의 이뤄졌다. 주택지·도로·상하수도·지하철 등 현대 서울의 하부구조가 이때 거의 갖춰졌다.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절대권력자의 ‘분부’를 이행한 김현옥·양택식·구자춘이라는 3명의 ‘충복’ 서울시장이 재직한 기간과 일치한다. 서울의 얼개는 박 대통령의 구상과 지시에 의해 거의 결정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6년 서울도시기본계획안이 세워졌다. 서울의 균형 발전을 꾀하려고 사대문 안에 집중된 입법·사법·행정부의 기능을 분산시키려는 계획이 눈에 띈다. 입법부는 남서울(강남·서초구), 사법부는 영등포, 행정부는 용산 일대, 세종로 지역은 대통령 관저 및 직속기관 배치 지역으로 정했다. 지금 와서 보면 입법부와 사법부의 입지가 맞교환됐고, 서울시청이 용산으로 옮겨가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교통계획을 보면 서울역~청량리(1호선), 서소문~을지로~성동(2호선), 갈현동~종로2가~을지로2가~퇴계로~천호동(3호선), 우이동~종로4가~퇴계로~말죽거리(4호선) 등의 지하철 4개 노선 건설계획이 잡혀 있다. 10년 뒤 구자춘 시장에 의해 2호선이 을지로와 영등포~영동을 잇는 순환선으로 변경되는 등 엄청난 노선 변화가 일어났지만, 지하철 4개 노선에 대한 기본 구상이었다. 이 밖에 4개 순환선과 14개 방사선을 간선도로망으로 7개의 고속도로를 건설한다는 계획과 노면 전차는 철거하고 광화문 사거리와 시청 앞 광장에는 지하차도를 만들고, 시청 앞 광장 지하는 지하도시화한다는 계획도 포함돼 있다. 도심 재개발과 강남·송파 등 남서울개발, 뚝섬·창동·망우 등 동서울개발, 불광·성산·김포·시흥지구의 서서울개발 등 신시가지개발 계획이 들어 있다. 1년 예산이 170억원에 불과한 서울시가 20년 앞을 내다보고 인구 500만명을 예상해 3235억원의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한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언론으로부터 ‘즉흥계획’ ‘실현성 없는 독단’ ‘재무계획 없는 무지개’ 등등 융단폭격을 맞았다. 그러나 격변의 15년 중 7년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 기획관리실장 등을 지내며 계획을 수립하고 집행한 손정목 전 교수는 “꿈도 환상도 아니었다. 최초의 기본계획이었다는 점, 도심부 재개발이니 고도지구, 미관지구 개념이 도입돼 일반에 공개됐다는 점, 70~80년대 전국 모든 도시가 수립한 도시계획의 모델이 됐다는 점 등에서 의미가 있다”고 회고했다. 불완전하나마 서울시 장기계획의 틀이 된 것이 사실이다. 일제 말기인 1940년부터 1965년까지 서울은 잠자는 도시였다. 1937년 중·일 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이 터져 건축자재를 구할 수 없었고, 한국전쟁이 이어지면서 건축 행위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 건물이 목조건물 수명 30년을 다한 상태였다. 장충동, 신당동 일대와 남대문로, 충무로, 을지로 등 일본인 주거지에 정원이 딸린 일본식 저택과 주택이 밀집해 있었다. 가회동·명륜동·동숭동·북아현동 일대에는 한옥촌이 빼곡하게 형성돼 있었다. 마포, 왕십리, 동대문을 벗어난 지역은 논밭이었다. 사대문 안과 독립문, 신촌, 신설동, 돈암동, 신당동, 용산이 서울의 전부였다. 노면 전차 노선을 기준으로 보면 동쪽으로 청량리·왕십리, 남쪽으로 노량진·신길동·영등포, 서쪽으로 마포·신촌, 서북쪽으로 독립문, 동북쪽으로 돈암동 전차 종점까지가 서울이었다. 지방에서 무작정 상경한 사람들의 주거인 무허가 판잣집이 도심에서 가까운 하천변이나 산비탈을 차지했다. 1966년 당시 13만여채의 판잣집이 서울 곳곳에 달동네를 이루고 있었다. 서울은 개발행 특급 열차가 출발하기 직전의 폭풍전야였다. joo@seoul.co.kr
  • 약수역 천장에서 물이 콸콸… “약수역에 약수가 쏟아져”

    약수역 천장에서 물이 콸콸… “약수역에 약수가 쏟아져”

    6일 서울에 뇌전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지면서 곳곳에서 사고가 속출하고 있다. 이날 오후 서울 중구 신당동 지하철 6호선 약수역 지하 3층 계단 천정에서 물이 쏟아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날 역무원들은 오후 1시25분쯤 물이 새는 것을 파악했으며 오후 1시40분쯤 이를 해결해 오후 3시 현재는 큰 문제가 없는 상태인 것으로 확인됐다. 약수역 사고현장은 트위터를 통해 사진과 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네티즌들은 “지하철역 천장에서 물이 쏟아지다니 황당하다”, “약수역에서 약수가 쏟아진다”는 등의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약수역 관계자는 “집중호우로 토사가 배수로에 들어오면서 배수로 캡을 막아 물이 넘쳤다”며 “현재는 배수로를 막은 토사를 제거하는 조치를 해 물이 새는 상황은 아니다”고 말했다.
  • 동네 이름에 ‘역사’ 담았어요

    서울 중구는 오는 20일부터 행정 편의에 의해 숫자 나열식으로 지은 신당 1~6동의 행정동 명칭을 바꾼다고 16일 밝혔다. 따라서 떡볶이 골목으로 유명한 신당 1동은 신당동, 신당 2동은 다산동, 신당 3동은 약수동, 신당 4동은 청구동, 신당 6동은 동화동으로 불린다. 신당 5동은 주민 의견을 더 수렴해 변경할 예정이다. 집 주소와 등기부등본 등에 기재된 법정동 명칭은 유지되며 주민센터 명칭만 달라진다. 신당동 주민들은 지역별 특색을 고려하지 않은 행정동명 대신 옛 역사가 담긴 동 이름으로 변경하자는 의견을 꾸준히 제기해 왔다. 이에 구는 2011년 9월 19~20일 지역 전체 3만 3610가구를 대상으로 행정동 명칭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각 동 주민자치위원회에서 주민들의 의견이 많은 동 이름으로 명칭을 변경하자는 안건을 구의회에 올려 지난 5월 31일 승인받았다. 최창식 구청장은 “획일적인 동 명칭보다는 동별로 의미를 살릴 수 있는 브랜드를 가져야 한다”면서 “동 명칭 변경이 지역 주민의 자긍심을 높이고 마을 브랜드 가치 향상에도 한몫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 [민선 5기 3년! 구정의 품격] 최창식 중구청장

    [민선 5기 3년! 구정의 품격] 최창식 중구청장

    “최고의 복지는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공무원들이 주민 일자리를 찾으러 직접 뛰고 있습니다.” 최창식 중구청장은 올해 8000여개의 새로운 일자리를 만든다는 목표를 세웠다. 1년짜리가 아니라 평생 일할 수 있는 좋은 일자리를 말한다. 최 구청장은 “일시적 고용이 아닌 양질의 일자리가 필요하다”면서 “구정의 초점을 민간 기업을 통한 주민 일자리 창출에 맞추고 있다”고 말했다. 최 구청장은 지난 2월 공공 일자리를 관리했던 일자리추진반을 없앴다. 대신 지역 민간기업과 연계할 수 있는 취업지원과를 만들고 구청 별관 1층에 일자리플러스센터를 새로 설치했다. 또 구청 팀장 간부 80명으로 ‘찾아가는 민간일자리창출특별사업단’을 꾸리고 지역 기업을 돌면서 주민 일자리 만들기에 앞장서고 있다. 이런 노력이 하나둘씩 결실을 보고 있다. 지난해 롯데쇼핑센터에 주민 일자리 1700개를 마련했다. 또 명동 나인트리 호텔과 렉스호텔 등에서 90여개의 새로운 일자리를 찾았다. 최 구청장은 내년까지 중구에 들어설 20여개 호텔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가수 ‘싸이’ 효과 등으로 서울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늘면서 신규 관광호텔이 점점 증가하는 추세”라면서 “현재 사업 승인된 호텔만 20개로 800명의 일자리가 생길 것”이라고 전망했다. 따라서 이들 호텔이 중구 주민을 우선 채용할 수 있도록 업무협약을 맺고 호텔 건설 초기부터 인허가 원스톱 처리와 규제 완화 등 기업과 윈윈하는 종합적인 취업 전략을 펼치고 있다. 또 주민들이 취업 즉시 일할 수 있도록 교육도 강화하고 있다. 중구 여성플라자에서는 객실 코디 교육과정과 호텔현장 실습 등으로 기업이 바라는 인력 양성에 힘쓰고 있다. 기업과 상생을 위한 새로운 지역복지 모델을 실현하고 있는 셈이다. 최 구청장은 “지역 기반 기업이 5만 9000여개로 전국 최고 수준”이라면서 “이를 바탕으로 일자리를 원하는 주민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최 구청장은 일자리 창출뿐만 아니라 서울시 행정2부시장 경험을 살려 새로운 지역개발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는 “노후화되고 정체된 을지로와 퇴계로, 충무로 등에 리모델링을 통한 도심 재창조 프로젝트를 가동할 것”이라면서 “불필요하고 현실과 맞지 않는 건축규제를 과감하게 풀겠다”고 했다. 비현실적인 대규모 개발보다는 작지만 현실성 있는 소규모 구역별 리모델링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장충동 족발마을과 신당동 떡볶이마을 등도 리모델링을 통해 새로운 서울의 관광명소로 재탄생시킨다는 복안도 밝혔다. 최 구청장은 “중구가 주민이 행복한 품격 있는 도시로 거듭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 [의정 포커스] 소재권 서울 중구의원

    [의정 포커스] 소재권 서울 중구의원

    “다산로가 살아야 중구가 살아납니다.” 소재권(58) 서울 중구의회 의원은 30년 동안 어떤 변화 없이 노후한 ‘다산로’ 개발에 많은 애정을 드러냈다. 소 의원은 2일 “다산로 주변에서 30년을 살았는데, 정체된 거리 같다”면서 “신당동 떡볶이 골목과 황학동 중앙시장 등 중구 명소와 연결되는 다산로를 활성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산로는 서울 도심에서 동부권으로 나가는 길목이자 중구의 관광 명소와 인접했는데도 개발이 더디기만 하다. 따라서 그는 다산로 개발 활성화를 위해 용도상향 등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소 의원은 “중구 주민의 중심거리인 다산로 활성화는 기초의원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면서 “주민과 집행부, 국회의원 등이 모여 발전 방향을 논의할 수 있도록 구심점이 되겠다”고 말했다. 그는 황학동 주민의 안전을 위한 파출소 신설과 중앙시장 현대화 사업, 롯데캐슬 베네치아 아파트 인근 구립어린이집 신설 등이 곧 결실을 맺을 것이라고 했다. 소 의원은 “비록 크지 않지만 밤낮없이 주민을 위해 뛰어다닌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한다”면서 “앞으로 청소년 특화 거리와 1동 1공원사업 등이 자리 잡으면 중구 주민 삶의 질은 훨씬 높아질 것”이라고 했다. 조례정비 특별위원장이기도 한 그는 시대 변화와 지역 환경에 맞는 조례 제정에 애쓰고 있다. 특히 주민 복지에 대한 조례 제정에 집중한다. 소 의원은 “풀뿌리 민주주의인 지방자치 시대에 기초의원의 여러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조례 제정”이라면서 “집행부가 주민 삶의 변화나 요구에 걸맞은 지원을 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앞으로 남은 1년 동안 다산로 활성화뿐 아니라 지역 공원화 사업, 황학동 중앙시장 현대화 등에도 전력 투구하겠다고 전했다. 소 의원은 “중구 활성화가 지역 주민의 행복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겠다”면서 “주민의 작은 목소리 하나하나가 정책에 녹아들 수 있도록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 학교폭력 해결책 찾는 좌충우돌 연극부

    학교폭력 해결책 찾는 좌충우돌 연극부

    서울 중구 신당동에 위치한 장원중학교에는 여학생 15명으로 구성된 연극부가 있다. 이들은 학교폭력을 주제로 한 역할극을 하는 동아리다. 지난해부터 지도교사 없이 직접 대본을 쓰고 연출한 ‘내 친구 정미 이야기’ 공연을 해 왔다. 올해 정식 동아리로 승격되고 첫 후배들을 맞이하자마자 다음 공연이 코앞이다. 이들의 좌충우돌 미션 수행기가 26일 오후 7시 30분 EBS ‘행복한 학교 만들기’에서 펼쳐진다. 연극부에는 실제로 학교폭력 피해자였던 학생들부터 임원을 맡고 있는 모범생, 술·담배 등을 경험해 본 학생들까지 모자이크처럼 모여 있다. 이들은 역할극이라는 직간접적인 체험을 통해 어른들의 시선이 아닌 자신들의 시선으로 학교폭력을 바라보고 대안을 찾는다. 빵셔틀, 물리적 폭력, ‘양(자매)맺기’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금품 강탈까지, 학생들의 연극 속에는 학교폭력의 어두운 면면이 녹아들어 있다. 장원중 연극부에는 전문 지도교사가 없다. 대본, 연습, 연출까지 한 편의 연극을 무대에 올리는 모든 과정을 학생들이 스스로 해나간다. 그러나 저마다 개성이 뚜렷한 소녀들은 한 장면 한 장면 만드는 과정마다 사사건건 부딪친다. 누구는 놀고, 누구는 일하고, 연극부라면 빠질 수 없는 배역 경쟁도 벌어진다. 서로 때리고 맞는 상황을 연습하면서 감정이 격해지기까지 하고…. 공연을 앞둔 연극부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돈다. 서로 부딪치고 언성을 높이는 가운데 부원들의 마음속에 조금씩 갈등이 쌓여간다. 서로를 잘 알고 자신을 더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이들은 1박 2일간의 미션캠프를 떠난다. 1박 2일 동안 주어지는 다양한 미션들을 서로 협력해 수행하는 동안 부원들은 알게 모르게 쌓여 왔던 감정들을 훌훌 털어버리며 서로를 배려하는 법을 배워 간다.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서울시, 중구 ‘박정희 공원’ 지원 거부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공원 건립이 좌초 위기에 놓였다. 최창식 서울 중구청장이 조성 추진 의사를 강력하게 밝혔지만 정부에 이어 서울시가 투자 요청을 사실상 거부했기 때문이다. 서울시 문화정책과는 14일 중구가 제출한 박정희 기념공원 건립에 대해 시와 사전 협의를 하지 않았다며 해당 요청서를 되돌려 보냈다. 지난 11일 관광정책과도 ‘소관 사항이 아니다’라는 이유를 들어 중구의 투자 유치를 반려했다. 중구에 따르면 신당동 일대 4070㎡(1200평) 규모에 285억원을 투자해 주차장을 겸한 박정희 기념공원을 만든다는 계획을 세웠다. 투자 예산 중 정부가 50%(143억원), 서울시가 20%(57억원), 중구청이 30%(85억원)를 부담하기로 돼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시비가 투입될 사업이라면서 계획을 수립할 때 서울시와 전혀 사전 협의를 하지 않았다”며 “앞으로 상황 변화가 있다면 재심사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일단 반송했다”고 설명했다. 지난 10일 박근혜 대통령도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세금을 들여 기념공원을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을 밝혔다. 하지만 중구 관계자는 연초에 보낸 공문에 따라 자치구 사업예산 투자심사 신청을 했고 사전 협의는 필수 요건도 아니다”라면서 “사업이 논란을 빚으니까 서울시에서 부서끼리 서로 떠넘기는 것 아니냐”고 반발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5·16과 같은 역사적 사건이 우리 현대사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크다. 기념공원 건립은 그 흔적을 보존하기 위한 일”이라면서 공원 조성 의사를 밝혔다.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 朴대통령 “박정희 기념공원 건립 말라”

    박근혜 대통령은 10일 서울 중구청이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 거주했던 신당동 가옥과 주변 지역을 기념공원으로 조성하겠다는 계획에 제동을 걸었다. 박 대통령은 이날 오전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기념공원 조성 문제에 대해 “국가 경제가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국민 세금을 들여 기념공원을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물론 해당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관광자원 확보를 비롯해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많은 자금을 들여 기념공원을 조성하는 것보다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따뜻한 마음으로 방문해서 마음으로 기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신당동 가옥은 박 전 대통령이 1961년 5·16 쿠데타를 일으킬 때까지 거주했던 곳으로, 중구청은 2017년까지 가옥 일대 3600㎡를 기념공원으로 건립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미 마포구 상암동에 박 전 대통령 기념관이 있는 데다, 건립예산 300억원 대부분을 세금으로 충당키로 하면서 민주당 등 야권을 중심으로 혈세 낭비 논란이 제기됐다. 박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비슷한 사업을 계획하고 있는 다른 지방자치단체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장세훈 기자 shjang@seoul.co.kr
  • “박정희 기념공원 철회 계획없다”는 중구청…왜?

    서울 중구청이 11일 서울 신당동 박정희 기념공원 조성 사업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재차 밝혀 주목된다. 서울 중구가 박정희 전(前) 대통령의 신당동 가옥 주변 건물들을 세금 286억원으로 사들여 4000여㎡의 공원을 만들겠다고 밝혀 논란이 된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이 분명한 반대를 표시했는데도 중구청이 강행 의지를 보여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박 대통령은 전날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국가 경제가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국민 세금을 들여서 기념 공원을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회의적인 입장을 표시했다. 그러나 중구청 관계자는 이날 “공원 조성에 대한 주민의 공감대가 형성돼 있고 서울시 투자심사도 기다리는 중이라 사업을 철회할 계획은 없다”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주차장을 지하로 옮기면서 상부에 공원을 조성하겠다는 것이고 박 전 대통령 기념 공간은 33평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최창식 중구청장은 이날 오전 MBC 라디오 ‘시선집중’에 출연해 “5·16 혁명 같은 역사적 사건이 우리 현대사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크다. 후세와 우리 시민, 외국 관광객들한테 역사적 사실과 의미, 문화적 가치를 전달하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며 기념공원 강행 의지를 나타냈다. 최 구청장은 지난 3월 4일 박근혜 대통령의 공식 트위터를 패러디한 짝퉁 트위터에 “국운을 일으켜 세울 지도자께서 구청장까지 일으켜 주시니 감사합니다”라며 “서울의 중심 중구를 세계인의 역사 문화도시로 발전시키겠습니다”는 글을 남겼다가 구설에 올랐다. 일각에서는 최 구청장이 박 전 대통령의 향수를 자극해 내년 지방선거에 이용하려는 의도로 박정희 기념 공원 계획을 강행하는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의정 포커스] ‘자원봉사 특별구’ 중구의회

    [의정 포커스] ‘자원봉사 특별구’ 중구의회

    ‘자원봉사 특별구’인 서울 중구의회가 바쁜 의정활동 시간을 쪼개 어려운 주민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27일 중구의회에 따르면 박기재 의장 등 8명의 모든 구의원들은 지역의 복지단체와 어려운 이웃을 찾아다니며 자원봉사 활동을 펴고 있다. 구의원들은 개인적인 자원봉사와는 별도로 지난해 4월부터는 분기별로 의원 모두가 참여하는 의회 차원의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구의원들은 지난 22일 중림동 중림종합사회복지관을 방문해 저소득층 어르신들을 위한 점심도시락 포장과 설거지 등을 하고, 경로식당을 찾은 어르신들에게 점심 배식을 했다. 특히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을 위해 복지사와 함께 도시락을 직접 집으로 배달하고, 어르신들과 대화를 나누며 고충과 애로사항을 듣기도 했다. 이날 자원봉사에는 박 의장과 황용헌 부의장, 허수덕 운영위원장, 김영선 행정보건위원장, 이혜경 복지건설위원장 등이 참여했다. 앞서 지난해 4월에는 신당동 유락종합사회복지관에서 무료배식과 도시락 배달 봉사를 했으며, 같은 해 6월에는 신당동 남산실버복지센터를 찾아가 뇌졸중과 치매로 고생하시는 어르신들을 위한 족욕과 마사지 봉사를 했다. 특히 지난해 9월에는 자매결연 도시인 경기 포천시 과수 농가를 방문해 사과 따기 등 농촌 봉사활동을 펴기도 했다. 구의원 개별적인 봉사활동도 활발하다. 박 의장은 매달 첫째 주 토요일마다 은빛사랑 복지관에서 목욕과 족욕, 손톱정리 등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허 위원장과 김 위원장은 지난겨울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사랑의 연탄 배달 등 적십자 활동을 통해 자원봉사를 하기도 했다. 이 위원장은 적십자 활동과 함께 지역 내 지적장애인 어머니들과 정기적인 모임도 갖고 있다. 김수안 의원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나눔리더스클럽 창립회원으로 의정비 환원 등 기부문화 형성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박 의장은 “봉사활동을 통해 주변에 어려운 이웃들을 직접 만나고 대화를 하다 보면 보다 깊이 있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면서 “어려운 주민들의 고충을 의정 활동에 반영해 모두가 따뜻한 사회,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조현석 기자 hyun68@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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