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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구청장 새꿈새구정]③ 문병권 중랑구청장

    [서울 구청장 새꿈새구정]③ 문병권 중랑구청장

    “무상급식도 중요하지만 강남·북의 교육격차를 줄이기 위해서 원어민 교사 배치 등 공교육발전을 위한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문병권(60) 중랑구청장은 4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낡은 컴퓨터를 최신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하듯이 학교시설이나 장비등 학교환경개선에 앞장서겠다.”며 이같이 밝혔다. ●3선 성공, 발로뛰는 ‘예산유치의 귀재’ 6·2지방선거에서 강남을 제외한 지역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유일하게 살아남은 문 구청장. 지역주민들에게 ‘일 잘하는 구청장’ 이란 이미지를 심어 당선될 것을 일찌감치 예감한 그 역시 이번 선거에서 힘겹게 3선에 성공했다. “엎치락 뒤치락할 때 어떤 심정이었나.”라는 우문에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는 관록이 묻어나는 여유있는 답변이 날아왔다. “지난 8년간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중랑구가 서울시 청렴도 평가에서 항상 1위했듯이 자신있었습니다. 그리고 상대후보와 4년전 맞부딪친 적도 있기 때문에 일로 승부를 걸면 당선될 거라 믿었습니다.” 3선에 성공했지만 문 구청장은 고립된 섬에 홀로 살아남은 듯 외로워 보인다. 여소야대 틈바구니에서 그가 펼쳐나갈 앞으로의 4년행정이 그래서 더욱 궁금해진다. 문 구청장은 8년전 처음 구청장에 당선되기 전에 썼던 휴대전화 번호를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당선되면 누구나 휴대전화 번호부터 먼저 바꾸는 게 일이다. 이런저런 민원이 밀물처럼 쏟아지고, 난처한 전화를 받는 당혹스러운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다. 왜 안 바꾸느냐는 질문에 당선될 때 가졌던 초심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란다. 3선에 성공한 노장의 초심은 “매사에 최선을 다하자.”는 소박한 결의였다. 그는 민선5기 역점사업으로 면목동 뉴타운 지정을 맨 먼저 꼽았다. 1960~70년대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완료된 저층주택 밀집지역인 면목동은 소방차가 진입할 수 없는 등 기반시설이 절대적으로 취약하다. 특히 사가정역에서 면목역 구간은 2차선으로 지역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 서울시와 지속적인 협의를 거쳐 뉴타운으로 지정하는 게 구민들에게 던진 가장 큰 공약이었다. 문 구청장에게는 주민들과 다른 구청장들이 지어준 닉네임이 있다. ‘예산유치의 귀재’라는 소리를 듣는다. 예산확보를 위해 발이 부르트도록 다니는 그에게 적합한 별명이다. 그래서 이번 정책사업 유치도 자신한다. 중랑발전에 필요한 정책사업이라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정부와 서울시 관계자를 몇 번이라도 찾아가서 설득했고 예산을 따냈다. 2002년부터 지금까지 1조 963억원이란 엄청난 투자사업 예산을 유치한 것이 이를 입증한다. 서울의료원 유치, 면목선 경전철 유치, 이화교 확장, 겸재교신설, 사가정길 확장, 면목체육관 건립 등은 그가 발로 뛰어 일궈낸 성과다. 그렇다고 8년을 돌아보며 아쉬움 남지 않는 것은 아니다. 43만 중랑구민의 꿈과 여망이었던 북부지방법원·검찰청사 유치가 바로 눈앞에서 물거품된 일은 두고두고 가슴에 남아 있다. 법원청사건축위원회의 심의가 있었던 당일 유치신청에 나섰던 다른 자치구에서는 실무직원만이 참석하였으나 그는 달랐다. 43만 중랑구민의 유치염원을 전하기 위해 직접 참석해 이전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설득하느라 진땀을 뺐던 기억이 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부지방법원·검찰청사는 도봉구로 넘어갔다. ●명문학원 유치 등… 교육메카로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사업이 물거품된 것이 지금은 전화위복이 됐다. 법조타운 부지에 서울 동북권 거점병원인 서울의료원을 유치하고 자율형 사립고 부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열악한 교육환경에 놓여있던 중랑구가 교육메카로 부상할 수 있는 디딤돌을 하나 쌓은 것이다. 그는 ‘교육없이는 지역발전도 없다’는 신념을 가졌을 만큼 교육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옛 강원산업 연탄공장 부지에 건립중인 지상 48층의 초고층 명문학원 유치에서 그 신념을 엿볼 수 있다. 교육 문제에 관심이 깊은 구청장에게 자녀교육관을 묻자, 온화한 얼굴에 불그레 홍조를 띤다. “일에 빠져 정신없다 보니 아이들 교육에 신경을 많이 못썼죠. 하지만 교육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믿음인 것 같아요. 아이들 스스로가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데 한몫한 것 빼고는 한 일이 없어요.” 문 구청장은 얼마전 입적한 법정스님의 잠언집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의 한 구절을 떠올리며 앞으로의 4년행정 각오를 대신했다.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는 것, 이것이 세상 사는 지혜의 전부이다.” 그가 3선에 성공한 것도 바로 이 외유내강 덕분은 아니었을까. 강동삼기자 kangtong@seoul.co.kr ●문병권 중랑구청장 자타가 공인하는 행정 전문가이다. 30여년간 국무총리실과 서울시, 영등포구, 중랑구에 재직하면서 국가행정과 지방행정을 두루 경험했다. 1200여명의 직원들과 1년에 한번은 꼭 함께 식사할 정도로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 한나라당 출신으로 3선에 성공한 만큼 중랑구를 동북권 르네상스의 중심도시로 만들겠다는 각오다.
  • [주말데이트]프랑스 문화전도사 한홍섭 ‘쁘띠 프랑스’ 회장

    [주말데이트]프랑스 문화전도사 한홍섭 ‘쁘띠 프랑스’ 회장

    평생 일군 기업을 ‘쿨하게’ 정리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연매출 100억원이 넘는 알토란 같은 기업을 버리고 새로 시작한 일이 그리 돈이 될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면 더더욱 그럴 게다. 무엇엔가 단단히 ‘꽂혀’ 있거나, 굳건한 신념이 없다면 쉬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다. 경기 가평에 프랑스 마을 ‘쁘띠 프랑스’를 세운 한홍섭(64) 회장은 전자(前者)에 속한다. 그의 프랑스 문화에 대한 애정은 거의 ‘신앙’에 가까워 보인다. 한 회장이 목재 도료 전문제조업체로 입지를 굳힌 신광페인트를 정리하고 쁘띠 프랑스를 세운 것은 2008년 7월. 딱 2년째다. 하지만 짧은 기간과 입장료(8000원) 부담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수도권은 물론 지방의 관광객들도 즐겨 찾는 ‘전국구’ 관광명소가 됐다. 요즘엔 중국, 태국 등 외국 관광객들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초창기엔 TV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 촬영 장소라는 후광을 적잖이 입었던 게 사실이다. 요즘도 ‘강마에’(김명민) 작업실이 어딘지 보기 위해 쁘띠 프랑스를 찾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프랑스 문화를 한국에 전하려는 한 회장의 열의를 빼고 이같은 현상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프랑스의 무엇이 그에게 이처럼 강한 영감을 준 것일까. “파리에서 남쪽으로 180㎞쯤 떨어진 곳에 오를레앙이란 곳이 있는데, 풍광이 좋은 곳이어서 오래된 성들이 많지요. 이곳에 미셰린 (그린)가이드 선정 골프장 1000곳 가운데 첫 번째로 꼽힌 골프장이 있어요. 그곳에서 전형적인 프랑스식 건축양식의 클럽 하우스를 보고 첫눈에 매료되고 말았지요.” 고색 창연한 목조 클럽 하우스와 조우한 이후 한 회장의 프랑스 열병(熱病)은 시작된다. 갈 때마다 조각이나 그림을 한 점씩 사오다, 점차 농가 주택 전체를 들여오고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프랑스 주택은 독일 등 다른 유럽 지역에 견줘 허술하면서도 은은한 매력이 있어요. 특히 프랑스 중부 지방의 주택들은 겨울철 많은 눈 때문에 지붕이 45도가량 뾰족하게 솟아 독특한 풍경을 선사하죠. 쁘띠 프랑스 건물 설계의 모티프가 된 것도 그런 까닭이고요.” 처음 관심을 둔 곳은 역시 오를레앙 지역. 쁘띠 프랑스 개관을 염두에 두고 오를레앙 인근 농가 건물 등에서 썼던 목재들을 들여오다 점차 다른 지역에까지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웃지 못할 사연도 많았다. “노르망디 지역 복덕방에 괜찮은 물건(매물)이 하나 나왔더라고요. 꼼꼼하게 살펴본 뒤 (계약을 앞두고)한국으로 들여가겠다고 말하니 복덕방 주인이 펄펄 뛰며 화를 내더군요.” 부동산 업자는 필경 자신들의 문화가 돈에 팔려나간다는 느낌에 기분이 상했을 터. 자신들의 선조가 한국에서 문화재를 약탈해 간 역사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때론 도둑 취급을 받기도 했다. 솔로뉴 지역에서 마음에 쏙 드는 집을 부동산 업자와 함께 봐둔 뒤, 사전 통보없이 두 번째 방문해 집을 둘러보다 이웃들에게 도둑으로 몰려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는 것. 이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쁘띠 프랑스가 프랑스 문화를 흉내내는 데 그치는 건 아니냐는 지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 회장으로서도 가장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다. “쁘띠 프랑스 개관을 준비하는 20년 동안 가능성 있는 사업이라 말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하지만 프랑스 문화를 한국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었죠. 건물 자재, 살림 도구 등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오래 전 프랑스인 누군가가 쓰던 것들이에요. 거기서 그들의 체취를 느끼고 우리와 다른 아름다움을 찾는다면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물론 이곳을 어떻게 느끼는가는 관람자의 몫이겠지만요.” 한 회장은 이제 쁘띠 프랑스의 외형보다 내면을 치장하는 데 집중할 계획이다. “건물 주변에 야생화 26종을 식재해 뒀는데, 보름 지나고 나면 새 꽃이 피어 늘 새로운 느낌을 줍니다. 그처럼 전시를 다양하게 꾸려나갈 생각입니다. 요즘엔 프랑스 인형전을 열고 있습니다. 100년 전 패션쇼장에서 소품으로 쓰던 것 등 다양합니다. 고흐마을 오베르슈와즈 미술관에서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슬라이드로 편집한 전시회를 들여오는 방안도 프랑스 문화원 등과 협의 중에 있습니다.” 공들여 가꾼 공간을 방문객들이 허투루 보고 가면 집주인으로서는 아쉬움이 남는 법. 한 회장은 “쁘띠 프랑스엔 200년 된 장롱과 의자, 루브르 앤티크 등에서 사온 진귀한 물건들이 많다. 대강 보지 말고, 구석구석 꼼꼼하게 봐 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글 사진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월드이슈] “북조선의 이념·자주성 지키며 살고파”

    [월드이슈] “북조선의 이념·자주성 지키며 살고파”

    김수정(53)씨는 조선적을 유지하고 있다. 아직까지 한국 국적으로 바꿀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 사실상 무국적 상태로 살아가는 조선족에게 현실적인 제약은 은행 대출과 해외 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오사카에서 부동산업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큰 규모의 사업이 아니라 은행에 대출받을 일이 없다. 얼마전 일본인과 함께 서울을 가기 위해 오사카 한국영사관에 임시 여권을 신청했지만 거부당했다. 하지만 아직까진 감내하고 살 수 있다고 한다. 김씨 가족들은 최근 한국 국적으로 바꿀 것을 심각하게 논의했다. 둘째 아들이 공주대에 진학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가족들이 며칠간 치열한 논의끝에 부인과 둘째 아들만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렇다고 김씨가 한국에 대한 반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인터뷰내내 “우리 한국”이라는 표현을 쓰고, 한국이 민주화를 달성하고,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발전을 이룬 것에 대해 누구보다 감격스럽다는 점을 전했다. 하지만 그로서는 조선적을 유지하는 게 이념과 자주성을 지키기는 일이라 생각해 한국 국적 취득을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는 “북조선은 가난하게 생활하고 있지만 ‘자주독립’, ‘자주성’을 내세우는 걸 높이 평가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씨가 이런 신념을 지키는 데는 차별받고 가난했던 성장배경도 한몫했다. 제주 출신인 조부모는 오사카에 이주해 와 9남매를 낳아 어려운 생계를 꾸려갔다. 김씨의 부친은 17세때 나이를 속여 군대에 입대할 정도였다. 군인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한 명이라도 입을 줄여야 한다는 절박한 이유 때문이었다. 김씨는 히가시 오사카 중학교에 다닐 때 반의 학생위원장 선거에서 당당히 1위로 선출됐다. 하지만 조선적이라는 이유로 위원장을 포기해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 학생주임이 찾아와 재선거를 할 것을 종용해 일본 학생이 추천을 받아 위원장이 됐다. 간사이대학에 진학해서는 조선역사연구회에 가입해 우리나라 역사의 우수성과 한민족으로서 자긍심을 깨달았다. 김씨는 이후 “어떤 일을 하더라도 조선사람으로 살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아들 둘도 민족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일본 학교를 보내지 않고 조선학교에 진학시켰다. 이번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한국과 북한팀을 똑같이 응원했다는 김씨는 “남과 북이 빨리 통일이 돼 동포들의 국적문제를 해결해 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씨줄날줄]軍과 문민통제/노주석 논설위원

    한국전쟁에서 활약했던 맥아더(1880~1964) 원수는 1,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전설적 군인이자 당대 누구 못지않은 정치적인 인물이었다. 정치감각은 좀 지나친 측면이 있었다. 태평양전쟁 초기 3개월 동안 태평양사령부에서 나온 언론성명서 142건 중 109건이 맥아더 장군의 이름으로 공식발표됐다. 다른 장교의 이름은 아예 언급되지 않았다. 모든 공문서 표지에 ‘맥아더사령부’라는 겉표지를 따로 붙였다. 이 시기 사령부는 공식 명칭 대신 맥아더사령부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그 정도는 약과였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 병력감축 문제를 놓고 맥아더와 갈등을 빚던 트루먼 행정부는 1945년 9월과 10월 두 차례 맥아더에게 귀국을 요청했다. ‘요청’이라는 격식을 갖췄지만 사실상 군통수권자의 ‘명령’이었다. 그러나 미군의 최고 연장자이며 선임 장교인 맥아더는 불응했다. 맥아더는 너무 바쁘고 위험하기 때문에 도쿄를 떠날 수 없다는 이유를 대 트루먼을 격앙시켰다. 야심만만하던 맥아더는 자신이 워싱턴과 링컨 대통령에 필적하는 위인이라고 생각했다. 나머지는 ‘그저 그런’ 대통령에 불과했다. 맥아더는 이 사안의 중요성과 의미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아마 나는 역사상 본국으로 소환하려는 대통령의 요청을 거절한 첫 번째 군인이 될 거야. 할 일이 많아 시간을 낼 수 없다고 말할 작정이야.”라고 보좌관에게 말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 후에도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과 미국의 타이완 정책을 놓고 정부와 장군 간 불협화음이 계속됐지만, 맥아더의 대중적 인기가 너무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대통령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1951년 4월11일 마침내 트루먼은 대통령의 안보정책에 관한 함구령을 여섯 번이나 위반한 맥아더를 명령 불복종으로 해임했다. 트루먼은 탄핵위기를 맞았고, 맥아더의 해임에 반대하는 여론에 의해 미국에는 헌정위기가 닥쳤다. 그러나 미국 국민과 의회는 ‘군에 대한 문민통제(Civil Control )’ 원칙을 수호했다. 당시 미국 합동참모본부도 ‘군은 항상 민정당국에 의해 통제돼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이 해임되지 않으면 민정당국의 군에 대한 통제력이 상실됐다고 미국 국민이 비난할 것이다.’라고 결론 내리면서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최근 자신의 아프간 정책을 비판한 매크리스털 아프간 주둔군 사령관을 소환해 전격 경질했다. 맥아더 이후 60년 만의 항명장군 파동이지만 미국의 문민통제 원칙에는 흔들림이 없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생명의 窓] 기도 세리머니/박광서 서강대 물리학 교수

    [생명의 窓] 기도 세리머니/박광서 서강대 물리학 교수

    남아공월드컵에서 한국 축구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원정 16강에 진입했다. 가슴을 졸이고 밤잠을 설치며 응원한 국민들은 우리 선수들의 자랑스러운 활약에 피로를 잊은 듯했고, 내친김에 8강, 4강까지 가자며 한껏 들뜬 기분이다. 그러나 옥에 티랄까, 일부 선수들의 기도 세리머니가 또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특히 한국 선수들의 기도행위는 유별나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박주영 선수는 프리킥 골 직후 운동장에 무릎 꿇고 앉아 자신의 신에게 보고를 드렸고, 경기가 끝나 16강이 확정되면서 기독교 선수들은 따로 둥글게 모여 기도를 했다. 그 옆을 어색하게 지나가는 팀동료들이나 그 장면을 지켜보아야 하는 국민들이 느끼는 이질감과 박탈감은 안중에 없는 듯했다. 환희심을 반감시키는 부적절한 행위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이유다. 골을 넣거나 승리가 확정되었을 때 기쁨에 들떠 외치거나 자신의 신념에 따라 종교적 표현도 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 극적 심리상태를 두고 각박하게 따지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 더구나 “패한 사람이나 팀에, 또는 자책골을 넣었을 때는 신이 잠시 외면하거나 저주했단 말이냐?”며 유치하고 까다로운 논리를 들이대고 싶지도 않다. 다만 순수한 스포츠를 종교로 오염시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과 공인이란 신분을 잊지 말고 온 국민과 함께 기뻐하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다. 얼마 전 인터넷 여론조사에서도 “공인으로서 자제해야 한다.”는 의견과 “신앙의 자유가 있으니 개인문제다.”로 팽팽하게 나뉘었다. 지극히 공적인 상황에서 지극히 사적인 행동을 하는 데 대해 국민의 상당수가 불편해하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지구촌의 화합과 축제의 마당인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국제적인 스포츠행사에 종교 같은 신념체계가 개입되는 것은 금물이다. 유럽국가에서는 역사상 ‘인종 = 종교’의 의미로 이해해 왔기 때문에 인종적 차별·반감 행위 금지 조항만으로 종교차별도 함께 금기시해 왔다. 그러나 2006년부터 국제축구연맹(FIFA) 윤리규정은 ‘자신의 지위나 역할을 사적 목적이나 개인적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것은 물론, 민족·인종·피부색·문화·언어·종교·성에 있어서 타인에게 불쾌하거나 차별적인 언행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있다. 세계인들이 지켜보는 경기장에서 노골적인 기도행위가 사라지지 않자 급기야 구체적으로 ‘종교 금지’를 삽입한 것이다. 최근 제프 블래터 FIFA 회장이 월드컵의 종교오염에 대해 우려하면서 이례적으로 기도 세리머니의 자제를 요청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정서적 소외감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공인인 국가대표의 자기중심적 행위로 인한 무례와 불쾌감이다. 국가대표는 선발되는 순간부터 국가예산으로 관리·운영되며, 우수한 성적을 올릴 경우 포상금·연금·병역면제 등의 혜택을 주고, 그 일거수일투족이 공중파 방송을 타며 전 국민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는다. 공무원은 아니지만 국민의 대표로서 공무를 수행하는 공인이 공개된 장소에서 자신만을 위해 종교의식을 하는 것은 오만과 독선으로 비쳐진다. 국제윤리규정과 국민을 무시하면서까지 기도와 선교행위를 고집하며 ‘패거리문화’를 조장하는 선수가 국가대표일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 사회에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돼 있다. 하지만 누구라도 종교라는 이름만 걸면 어디서든지 무슨 짓을 해도 사회적 제재를 받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마음속으로 믿는 소극적 신앙의 자유는 무제한이지만, 밖으로 나타내는 적극적 종교행위는 타인의 종교자유가 침해되지 않을 권리가 우선돼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마치 담배를 싫어할 권리가 담배를 피울 권리보다 우선한다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나, 개인의 종교선택의 자유가 종교사립학교의 종교교육의 자유보다 더 본질적인 자유라는 대법원의 판결처럼. “공인의 공적 마당에서 이뤄지는 공적 행위가 공적 모럴의 제약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종교과잉으로 인한 피로감의 누적에 대해 지적한 이 같은 말을 곱씹어 볼 때다.
  • “엘리트? 아니 우리학교는 ‘평민’ 만들기가 목표”

    ‘평민 만들기’를 목표로 하는 학교가 있다면 어떨까. 말로는 다 ‘전인교육을 하자’고 하지만 사실상 ‘1등 만들기’와 ‘출세’를 지향점을 삼고 있는 한국 교육 현실에서는 깜짝 놀랄 일이다. 엘리트를 배출하기도 바쁜 마당에 굳이 평민 교육이라니. 하지만 그런 학교가 실제로 있다. 충남 홍성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일명 풀무학교)는 ‘더불어 사는 평민’이 교훈이다. 50년 역사, 대안학교의 원조로 불리는 이 학교는 지역을 떠나버릴 엘리트가 아닌 마을과 함께하는 공동체 구성원을 키워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곳에서는 마을은 학교를 지원하고 학교는 다시 마을 구성원을 배출하는 공동운명체 메커니즘이 작용한다. ●“학교는 마을 구성원 키워내는 곳”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는 이런 ‘모범 사례’를 들며, 교육은 아이들을 학교나 학원에만 몰아넣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서 “진정한 교육은 온 마을이 함께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신간 ‘마을이 학교다’(검둥소 펴냄)는 그의 신념을 반영한 공동체 교육현장 보고서다. 박 상임이사는 전국 곳곳의 대안교육기관들을 찾아 다녔고, 기관장들은 물론 학생과 주변 마을 주민들까지 꼼꼼히 인터뷰했다. 전작 ‘마을에서 희망을 만나다’에서 건강·복지·교육 등 다양한 주제를 다뤘던 그가 이번에는 교육에만 역량을 집중한 셈. 박 상임이사가 인식하는 한국의 교육현실은 참담하다. 그는 “공교육은 무너지고 사교육이 그 자리를 채우며 가계 부담을 키웠다.”고 말한다. 교육 현장도 황폐해져 약육강식과 경쟁 논리가 판을 치고, 기러기 아빠가 양산돼 가정마저 무너지고 있다. ●새로운 교육 모색하는 학교도 소개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새순처럼 솟는 희망이 바로 ‘대안교육’이다. 그는 풀무학교 같은 대안학교만 찾아간 게 아니다. 일반 학교들 중에서도 끊임없이 지역과 소통하며 새로운 교육을 모색하는 학교들을 모두 좋은 사례로 소개했다. 한 예가 경기 양평 세월초등학교. ‘마을로 나가는 학교’를 지향하는 이곳은 수업시간마다 기회를 만들어 교사와 학생들이 마을로 나간다. 거기서 마을 역사 쓰기, 영화만들기 등 활동을 벌여 마을과 사람들을 알아 간다. 책은 ‘학교’라는 형식을 완전히 벗어난 청소년 교육기관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청춘’ 같은 청소년문화공동체나 지역단위로 있는 주민·어린이도서관이 그런 곳이다. 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등 교육을 두고 고민하는 집단을 찾아가 한국 교육의 새로운 길도 함께 모색한다. 1만 3000원.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이용철의 영화만화경] ‘하얀 리본’

    칸영화제에 등장할 때마다 황금종려상 후보로 거론되던 미카엘 하네케는 안타깝게도 매번 고배를 마셔야 했다. 2009년, 그에게 드디어 황금종려상을 안겨준 ‘하얀 리본’은 다소 의외의 작품이다. ‘하얀 리본’은 서늘한 모던시네마와 자극적인 소재, 충격적인 장면을 예상한 관객이 하네케를 새로 보게 만든다. 아우구스트 잔더의 옛 사진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 흑백영상은 20세기 초반의 북(北)독일 지방을 충실하게 재현했으며, 실로 거룩하게 부활한 영화예술의 향취에선 칼 데오드르 드레이어, 잉마르 베르히만,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가 떠오른다.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얼마 전, 겉보기에 평화로운 독일 북부의 한 마을에서 이상한 사건이 하나둘 일어난다. 마을의 실질적 주인인 남작의 아들이 사고를 당하면서 연결되지 않던 의문들이 해결점을 찾는 듯하지만, 구체제에 얽매인 남작과 신부 그리고 마을사람들은 변화의 시간이 몰고 온 낯선 일들이 뜻하는 바를 깨닫지 못한다. 마을 전체가 의심과 공포에 휩싸인 가운데, 아이들을 가르치는 마을 선생이 뜻밖의 진실을 밝히려 한다. ‘하얀 리본’은 루터의 프로테스탄트주의가 지배하는 고립 사회를 빌려 이후 독일에서 벌어질 광기의 역사를 읽는다. 하네케에 따르면, 소명을 얻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자신의 신념을 맹신하고 행동을 강요하면서 역사의 비극을 빚는다는 거다. 그리고 아이들이 맞이할 미래의 시간에 어른들의 죄가 유전되는 순간 비극이 순환된다는 거다. 하네케는, 아이들이 어른들의 죄악에 복수하지 않는다 해서 그들에게 복수할 마음마저 없는 건 아니라고 단언한다. ‘하얀 리본’의 포스터는 울고 있는 소년의 얼굴을 담았다. 아이들은 정녕 슬픈 마음으로 복수하는 것이다. 비토리오 데 시카는 1940년대 초반 연출한 ‘아이들이 우리를 보고 있다’에서 비슷한 주제를 탐구한 바 있다. 어떻게든 가족이 화목하길 원하는 어린 소년과 달리, 소년의 부모는 가정을 지키는 데 서툴다. 끝내 아빠가 자살하자, 기숙학교에 다니던 소년은 엄마가 내미는 손길을 거부하고 돌아선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어른들의 책임을 통감했을 데 시카는 소년이 어떤 어른으로 자랄지 묻는다. 미래에 대한 데 시카의 근심은 ‘하얀 리본’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어른들이 종종 잊고 지내는 사실은, 아이들이 어른의 거짓과 죄·잘못을 분명히 보고 듣는다는 점이다. 하네케는 ‘하얀 리본’이 역사에 관한 영화가 되길 의도했으면서도 명확한 역사적 사건을 그리진 않았다. 선생의 내레이션이 영화 내내 지속되지만, 그는 자기 기억이 명확하지 않다고 고백하며, 영화 스스로도 끝내 범죄자를 밝히지 않는다. ‘하얀 리본’의 ‘종결되지 않은 드라마 투르기’는 관객이 해석할 여지를 남겨둔다. 하얀 리본을 본 관객이 극장을 나서면서 질문을 계속하는 건 그래서다. 하네케는, 관객이 이야기와 주제에 개입하고 상상하는 과정을 통해 영화와 좀더 자유롭게 호흡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하얀 리본’은 그의 바람이 단지 희망사항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영화평론가
  • [당신들과 우리들의 대한민국] “내 이름은 야 인마… 툭하면 맞아도 꿈☆ 포기 못해”

    [당신들과 우리들의 대한민국] “내 이름은 야 인마… 툭하면 맞아도 꿈☆ 포기 못해”

    미얀마에서 온 마웅저(41)가 한국에서 얻은 첫 직장은 인천의 한 도색 공장. 하루 12시간 일하고 한 달에 50만원을 받았다. 한국인의 반밖에 되지 않았다. “야 인마.” 이게 공장에서 마웅저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결코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함께 일했던 미얀마 친구는 걸핏하면 사장에게 얻어맞았다. 7개월을 일했는데, 월급은 5개월치밖에 못 받았다. 이듬해 경기 부천의 구두 형틀 만드는 공장으로 옮겼지만 사정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한번은 TV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동료가 채널을 돌렸다. “너 같은 건 우리나라 여자 쳐다볼 자격이 없어.” ●힘겨운 난민의 삶 2000년에는 정식으로 난민 신청을 했다. 법무부로부터 신문과 비슷한 인터뷰를 받았지만, 돌아온 것은 ‘불허한다’는 통지. 그것도 신청한 지 5년이 지나서였다. 법원은 다행히 마웅저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법무부는 계속 상소를 하며 ‘발목’을 잡았다. 결국 2008년 대법원에서 승소하면서 난민으로 인정받았다. “하늘의 별을 땄다.” 난민으로 인정된 직후 어떤 기분이 들었느냐고 묻자 마웅저는 이렇게 말했다. 방글라데시 소수민족 ‘줌머족’ 로넨(42)의 삶도 ‘코리안 드림’과는 거리가 멀었다. 택시를 탔다. 외국인인 걸 눈치챈 기사. “어디 가냐?” “5000원이다. 내놔.” 서른을 훌쩍 넘긴 로넨이었지만, 초등학생 대하듯 했다. 난민 인정에 인색한 정부 탓에 처음 몇 년간은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공장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나이지리아 선교사 빅토르(가명·46)는 우리나라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해 있다. 입국과 동시에 난민신청을 했지만 불허됐고, 1심 재판에서도 졌기 때문이다. 위협을 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밝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찰이나 무슬림으로 추정되지만 입증할 방법이 없다. 8월 2심 재판이 열리지만, 결과가 바뀐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내 이름은 (나이지리아) TV에도 많이 나왔기 때문에 돌아가면 바로 들킨다. 한국 정부는 내가 죽기를 바라는 것일까요.” 미얀마 출신 코와인(42)은 원래 변호사였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공장 행을 면할 수 없었다. 사실 그는 일을 해서는 안 됐다. 난민 신청 기간 중에는 취업이 금지돼 있기 때문. 하지만 난민 신청을 한 지 4년이 지나도록 결과를 받지 못했다. “I need too much money for living expenses, so should I work.(생활비 때문에 일을 안 할 수가 없었어요.)” 코와인이 눈물을 흘리며 털어놓은 하소연이었다. ●‘꿈’을 안고 대한민국으로 왔지만 1988년 8월8일. 세계사에 ‘8888 버마민중항쟁’으로 기록된 날이다. 수도 양곤의 고등학생이었던 마웅저. ‘군부 독재 정권 물러나라’라는 피켓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갔다. 대학생 형, 스님들과 어깨동무를 한 채 목 터져라 “민주주의”를 외쳤다. 항쟁은 서슬 퍼런 군부의 총부리에 밀려 실패했지만, 마웅저의 투쟁은 계속됐다. ‘버마전국학생연합(ABSFU)’에 가입해 ‘지하운동’을 했다. 탄압이 시작됐다. 생사를 함께하기로 결의했던 동료들은 하나 둘 경찰에 잡혀갔다. 이름을 바꾼 채 공사판을 전전해야 했다. 어머니와 다름없던 누나가 마웅저를 부른 것은 1992년. “망명해라.” “여권도 비자도 없는데….” “브로커를 쓰자. 돈은 내가 댈게.” 누나는 푼푼이 모았던 21만차트(Kyat·미얀마 화폐단위)를 내놓았다. 우리나라 돈으로 하면 350만원쯤 된다. 큰돈이다. 마웅저는 대한민국을 골랐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이 8888항쟁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마음이 끌렸다. 2년 뒤 마웅저는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이 미얀마 민주화를 도울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줌머족’ 로넨은 ‘인종 청소’를 하는 정부에 맞서 무장단체에서 활동했다. 산악지대인 치타공에서 종족의 생존을 걸고 싸우다 체포됐다. 3년간 옥살이를 하고 마을로 돌아왔지만, 탄압은 더 심해졌다. 마을에는 1㎞마다 하나씩 검문소가 들어섰다. 대원들은 지나가던 사람들을 ‘심심하면’ 때렸다. 1999년에는 대규모 약탈과 방화가 있었고, 여성들이 집단으로 성폭행당하기도 했다. 로넨은 이듬해 고향을 떠났다. 한 살배기 아들을 품에 안은 채 한국으로 왔다. 한국인이 같은 몽골계고, 불교신자가 많다는 점에 끌렸다. 경제·사회적으로 발전한 중견국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전사(戰士)’가 아닌 ‘시민(市民)’으로 살 수 있다는 꿈이 가슴을 매웠다. 빅토르는 나이지리아 ‘오순절협회(PEN)라는 곳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강연에 나가 나이지리아의 부패한 경찰을 강하게 비난했다. 낯선 남자의 전화가 걸려왔다. “하고 있는 일 그만둬라.” “누구냐?”고 물으면 끊었다. 험악한 인상을 한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와 가족을 위협했다. 운전기사가 괴한에게 폭행당하고 차를 빼앗기기도 했다. 그는 2005년 한국에 왔다. 처음에는 미국을 생각했지만, 총이 없는 한국을 선택했다. 기독교도가 많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난민으로 인정받으면 가족들도 불러 ‘제2의 삶’을 꾸릴 계획이었다. ●여전히 꿈 키우는 난민들 그러나 난민들은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먹고살려는 게 아닌 신념과 양심, 존엄을 지키기 위해 온 것인 만큼, 다양한 활동을 하며 꿈을 키워가고 있다. 마웅저는 1998년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끌고 있는 ‘버마민족민주동맹(NLD)’ 한국지부를 만들었다. 미얀마 대사관 앞으로 가 시위를 하고, 틈 날 때마다 길거리로 나가 우리나라 사람에게 미얀마의 실상을 알리고 있다. 2004년부터는 우리나라 시민단체에서 활동했고, 다음달에는 자신이 직접 단체를 만들 예정이다. 단체명은 ‘버마민주화를 돕는 단체’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한국인 동료 100여명이 함께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코와인은 2003년 인천에 작은 미얀마 불교 사찰을 세웠고, NLD 회원들과 민주화운동에 쓸 자금을 모으고 있다. 국내 이주노동자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고 있으며, 매주 화요일에는 미얀마 대사관 앞에서 1인 시위를 한다. ‘주한미얀마 소수민족 연합회’ 회장이기도 하다. 한때 대사관이 그를 외국환거래법을 위반했다는 트집을 잡아 검찰에 고발했지만, 투쟁은 멈추지 않는다. 카카나(27·여)는 얼마 전부터 일요일에는 출근하지 않는다. 공장에서 나오라고 해도 “절대 안 된다.”며 버틴다. 일요일만큼은 ‘재한줌머인연대’ 사무실에 나가 한국어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말을 어느 정도 익히면 미용기술을 배울 계획이다. 빅토르는 한남동의 한 교회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다. 강제 송환을 당하더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할 것이다. 동생이 정치 운동을 하는 바람에 연좌제에 걸려 2005년 한국에 온 쇼네(가명·40·토고)는 8월 둘째를 낳는다. 병원비가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최근 난민에게도 의료 혜택을 확대하는 정책을 발표해 시름을 놓았다. 새로 태어날 아이는 한국을 보고 느끼며 자랄 것이다. 임주형기자 hermes@seoul.co.kr
  • [이사람] 심명필 4대강살리기추진본부장

    [이사람] 심명필 4대강살리기추진본부장

    “지방선거는 지역 일꾼을 뽑는 자리이지 국책 사업을 평가하는 장은 아닙니다. 국정과제와 지방선거를 연결짓는 것은 지나친 면이 있습니다.” 지난 18일 정부과천청사에서 만난 심명필(60) 국토해양부 산하 4대강살리기추진본부장은 6·2지방선거 결과를 4대강 사업과 연관짓는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17%의 공정률을 보이며 내년 중순 이후 윤곽을 드러낼 사업을 원점으로 되돌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항변이기도 하다. 최근 4대강 사업은 외적으로 궁지에 몰렸다. 사업에 반대하며 불교계의 문수 스님이 소신공양했고, 지방선거에선 야당이 압승하며 지역별 사업추진에 제동이 걸릴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다. 그동안 제기돼 온 ‘속도전’ ‘예산부족’ ‘퇴적토·수리모형실험’ 문제와 함께 당장 이달 말부터 공사현장의 홍수해 피해예방까지 난제가 쌓여 있다. 심 본부장은 이날도 낙동강 수계의 10여곳 현장을 둘러보고 올라온 터였다. 그는 “현장 관계자들을 격려하고 수자원공사, 지자체 등과 업무협의를 마쳤다.”면서 “(시민단체의 우려처럼) 당장 올 여름 장마에 공사현장에서 피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가물막이’가 설치된 구간 중 이포보, 칠곡보, 구미보 등 ‘가동보’ 구간은 이미 이달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수문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20여일간의 1차 전국 투어 그는 조심스럽게 다음달 초 시작될 ‘전국 투어’에 대해 언급했다. “4대강 사업이 처음부터 정치 쟁점화되면서 본질을 충분히 설명할 시간이 부족했다.”면서 “1차로 20여일간 지역민과 기초·광역 단체장, 지역 언론인 등을 만나 필요성과 효과에 대해 알리려 한다.”고 말했다. 첫 민생투어로, 낙동강이나 영산강 수계에서부터 시작될 예정이다. 심 본부장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때도 비슷한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을 따름”이라며 “1999년의 수해방지종합대책(24조원 규모)과 2003년의 수해방지대책(42조원 규모)이 대표적”이라고 덧붙였다. ●단체장들과 의견 나누고 싶어 자치단체장의 4대강 사업 찬반논란에 대해선 유감을 표시했다. “4대강 인근 기초단체장 66명 중 46명은 사업에 찬성하더라.”면서 “지역민이 더 원하는 사업인 만큼 지자체에서 찬반을 얘기하려면 좀더 검토해서 얘기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전국 투어 기간에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단체장들과 만나 의견을 나누겠다고 희망했다. “만약 자치단체장들이 준설토 적치장 허가 제한(기초단체장)이나 농경지 리모델링 사업 허가 제한, 엄격한 공사기준 적용(광역단체장) 등으로 사업을 지연시킨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는 “우선 설득하겠다.”면서 말을 아꼈다. “대부분 인·허가는 마무리돼 큰 영향은 없을 것”이라면서도 “소송까지는 안 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4대강 사업에 대한 ‘신념’은 변함 없었다. “지난해 4월 소명을 가지고 본부장에 취임했다.”면서 “10~20년이 지나 한두 차례 큰 홍수와 가뭄을 겪다 보면 국민들로부터 장기적 평가가 나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민의 환영을 받고 싶다” 심 본부장은 인천국제공항을 예로 들어 “매립지 위 공항에 대해 일부에선 활주로가 울퉁불퉁해 비행기가 이·착륙할 수도 없을 것이라 말했지만 지금은 문제 없다. 그렇게 얘기했던 분들이 지금은 4대강 사업을 반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역설적으로 종교·시민단체의 중심가치인 ‘생명’과는 거리를 좁힐 수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실제로 최근 이준구 서울대 교수와 벌인 인터넷 논쟁에선 “4대강 사업은 가뭄대비, 홍수예방, 수질개선, 지역경제 활성화 등을 위해 추진되는 종합프로젝트”라고 재차 강조했다. 심 본부장은 지도자의 정치적 욕심과 과시욕이 사업에 가속도를 붙였다는 비판과 관련, “경제가 어려워 일자리 창출이 필요한 시점이었고, 하천과 관련된 만큼 가능하면 짧은 시간에 마무리짓는 게 안전과 비용 측면에서 유리했다.”고 설명했다. 또 “최근 비판적 단체가 주최한 토론회에 잇따라 참석,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토론회 뒤 반대 측 인사들과 만나 얘기하며 의견 공유의 가능성을 엿봤다.”고 자평했다. 그는 “온 국민의 환영을 받으며 사업을 진행하지 못해 아쉽다. 시간이 지나면 국민에게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며 답변을 갈무리했다. 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 약력 << ▲1950년 경북 선산 ▲경북고, 서울대 토목공학과, 미국 콜로라도주립대 공학박사 ▲인하대 대학원장, 한국수자원학회 회장, 국토해양부 4대강살리기추진본부장(장관급)
  • “사진 속 그녀는 아내·어머니였을 뿐”

    “사진 속 그녀는 아내·어머니였을 뿐”

    “그는 전 세계 인권운동의 상징이다. 지난 20년 중 14년을 가택에 연금된 채 살았다. 그러나 옛 사진 속에서 그는 한 남자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일 뿐이다.” 17일(현지시간) 가디언은 미얀마 민주화운동을 이끌어온 199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아웅산 수치 여사의 미공개 사진 12장을 게재하고, 평범했던 그의 일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대해 조망했다. 18일 수치 여사의 65번째 생일을 앞두고 공개된 사진 대부분은 1999년 사망한 남편 마이클 아리스 옥스퍼드대 세인트존스 칼리지 교수가 소장하고 있던 것들이다. 가디언은 “20여년 전 노벨위원회는 수치 여사 대신 두 명의 아들과 가족에게 상을 수여해야 했다.”면서 “미얀마 군정의 감금은 가족을 향한 그의 개인적인 마음조차 옭아매고 있다.”고 강조했다. 공개된 사진 속에서 25살의 아웅산 수치는 부탄의 눈덮인 산을 오르고 있다. 가디언은 이를 ‘마치 13세의 소녀 같은 모습’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당시 수치 여사는 이미 유엔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부탄 왕족의 가정교사였던 남편에게서 프러포즈를 받은 시점이었다. 아리스 교수는 “아내는 히말라야의 산을 오르는 것을 좋아했고, 종종 축복받은 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회고하곤 했다. 1972년 1월1일 영국에서 열린 결혼식은 불교식으로 치러졌다. 가디언은 “옥스퍼드 출신의 청년은 한 나라의 운명을 가녀린 어깨에 짊어진 신부와 결혼했다.”고 묘사했다. 수치 여사에게도 어머니로서 행복했던 한때가 있었다. 수치 여사는 티벳과 부탄을 연구하는 아리스 교수를 따라 함께 옮겨다녔으며 첫 아들 알렉산더가 태어난 직후에는 고향 미얀마(당시 버마)를 찾았다. 1977년 태어난 둘째아들 킴은 수치 여사에게 더 많은 시간을 가족에게 힘쓰도록 했다. 사진에도 담긴 수치 여사의 옥스퍼드 집 테라스는 아직도 미얀마 사람들이 즐겨찾는 곳이다. 가디언은 “고작 10년 후 이 사진의 주인공은 모국으로 돌아가 자신이 믿는 신념을 위해 평생을 바치게 됐다.”면서 “그는 이를 ‘운명’이라고 표현했고, 아내와 어머니를 잃은 가족들도 이를 받아들였다.”고 전했다. 1988년 수치 여사는 위독한 어머니를 보기 위해 귀국했다가 군사정권의 폭정에 시달리는 국민들을 위해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1999년 아리스 교수는 전립선암으로 영국에서 숨졌다. 미얀마 군정은 마지막으로 아내를 보겠다는 아리스 교수의 입국을 거부했고, 수치 여사는 자신이 떠날 경우 다시는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혼 직전, 수치 여사는 남편에게 “단 한 가지, 내 조국의 사람들이 나를 원하면 당신은 내가 그들에 대한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부탁했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서로에 대한 이 부부의 약속은 훗날 그렇게 지켜졌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툭하면… ‘울보 정대세’

    툭하면… ‘울보 정대세’

    까무잡잡한 피부, 날카로운 눈매에 단단한 근육질 몸매. 정대세(26·가와사키)는 참 ‘못되게’ 생겼다. 그런데 울보다. 지난해 정대세는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북한 대표팀의 최전방에서 맹활약, 44년 만에 본선 진출을 이끈 뒤 6월19일 소속 팀 합류를 위해 하네다공항으로 귀국했다. 이틀전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경기에서 후반 40분 교체돼 그라운드를 나온 정대세는 대성통곡했고, 기자들은 그 이유를 물었다. 정대세는 “(교체 뒤) 5분간 지금까지 저의 축구인생 25년의 모든 것이 주마등처럼 흘러가서 이성을 잃었다. 그래서 울부짖었다.”고 답했다. 이내 굵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또 “신념을 포기하지 않아 보답을 받았다는 생각에 지난 모든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고 했다. ‘조선인’이 갖은 차별을 받는 일본에서 재일교포 3세로 태어나 오로지 어머니의 나라, 북한의 대표로 월드컵 무대를 밟겠다는 꿈을 위해 살아온 자신에 대한 축하와 격려의 눈물이었던 것. 44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북한의 첫 경기 브라질전이 벌어진 16일 새벽 요하네스버그의 엘리스파크 스타디움. 경기에 앞서 국가가 울려 퍼지자 정대세는 눈물을 왈칵 쏟았다. 국가가 끝날 때까지 그는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정대세는 “세계선수권대회에 나와 세계 최강 브라질과 만나서 울었다.”고만 했다. 가슴 벅찬 눈물의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기가 시작되자 그는 브라질을 위협하는 맹수로 돌변했다. 북한은 전·후반 90분 대부분을 극단적 수비전술을 펼쳤고, 원톱 정대세만 브라질 진영에서 바삐 움직였다. ‘고독한 스트라이커’였지만 ‘세계 최강’의 브라질 포백라인을 완벽히 뒤흔들었다. 역습상황에서 하프라인 부근으로 날아온 대부분의 공중볼을 선점했고, 전방으로 쇄도하는 동료에게 열심히 연결시켰다. 장신의 브라질 수비수들과의 몸싸움과 위치선정에서 승리한 것이다. 정대세는 패색이 짙었던 후반 44분 자신의 헤딩 어시스트를 받아 골을 터트린 지윤남(34)에게 달려가지 않았다. 동료들이 세리머니에 정신이 팔려 있던 그 순간 정대세는 브라질 골문에서 자블라니를 들고 하프라인으로 달려갔다. 팀의 승리와 ‘골잡이는 1경기에 1골을 넣어야 한다.’는 자신의 좌우명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후 정대세는 수차례 중거리 슛을 날렸지만 모두 골문을 비켜갔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고, 그는 또 울었다. 골을 넣지 못한 아쉬움의 눈물이었다. ‘울보’ 정대세가 21일 포르투갈전에서 호쾌한 골로 26년 축구인생의 설움을 한 방에 날려 보낼 수 있을지 관심이 모인다. 장형우기자 zangzak@seoul.co.kr
  • [中 학자가 본 한국전쟁]中 냉전체제 공산권 ‘양대 축’으로

    [中 학자가 본 한국전쟁]中 냉전체제 공산권 ‘양대 축’으로

    한국전쟁은 중국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뒤 치른 첫번째 전쟁이다. 새로운 중국은 한국전쟁을 통해 국제무대에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전쟁은 국제관계의 관점에서뿐 아니라 중국에 있어서도 충분히 연구할 만한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국제정치나 세계구조의 관점에서 중·소 동맹의 체결은 중국을 냉전의 한 방향으로 이끌었고, 한국전쟁은 중국을 그 최전방으로 밀어넣었다. 그리고 그 영향은 1960년대 말까지 지속됐다. 중국 입장에서 한국전쟁은 두 가지 측면의 영향을 끼쳤다.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서의 영향력 확대와 냉전의 선봉에 섰다는 점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소련과 북한이 가장 위급했던 시기에 단독으로 병력을 파견해 참전했다. 당시의 결정은 사회주의 진영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스탈린 역시 감동했다. 소련은 중·소 동맹 협상 과정에서 중국에 최대한도로 양보했다. 모스크바는 태평양으로의 출구와 부동항을 잃을 수 있는 위험에 직면하기도 했다. 스탈린이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김일성의 주장에 갑자기 동의하고, 전쟁초기 중국의 군사행동을 막은 것은 이 같은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중국의 참전은 소련이 어쩔 수 없이 양보해 맺을 수밖에 없었던 중·소동맹을 신뢰의 기초에서 새롭게 확립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중국은 소련과 사회주의 진영으로부터 대량 경제원조를 얻어낼 수 있었고, 아울러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서 명성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이 같은 결과는 마오쩌둥의 혁명 정서를 더욱 고무시켜 아시아 혁명을 이끌고, 더 나아가 세계 혁명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욕망을 자극했다. 중국이 1950~60년대 반제국주의 투쟁의 선봉에 서서 그 당시 가장 혁명적인 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이다. 한국전쟁은 또 중국과 미국 사이의 적대와 증오를 심화시켰고, 이데올로기적 투쟁 과정에서 이 같은 정서는 장장 20여년이나 지속됐다. 마오쩌둥이 친소련 일변도의 정책을 선택한 것에 대해 말한다면 국제관계와 국제왕래의 경험과 이해가 부족했던 데다 미국에 대한 불신과도 무관치 않다. 한국전쟁 기간중 마오쩌둥은 미국 정부의 모습을 주시했다. 미국은 타이완(臺灣)이 신중국에 속하지 않는다고 선포한 뒤 타이완 해협을 보호한다며 해군을 출동시켰다. 이로 인해 마오쩌둥은 결국 통일대업을 달성하지 못했다. 3년 동안의 막대한 희생을 핑계삼아 중·미 양국의 지도자들은 국민들을 상대로 상대방에 대한 적대감을 주입했다. 상대방을 추악한 모습으로 선전했다. 20여년 동안 중국인들은 모두 미국이 중국의 주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같은 국민들의 정서를 기초삼아 중국은 오랫동안 냉전의 최일선에서 전투적 입장을 견지할 수 있었다. 이런 것이 모두 한국전쟁 기간에 태동됐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중국이 참전한 동기는 여러가지를 꼽을 수 있다. 동북 공업기지 보호와 반동세력의 위협을 해소하기 위해 국가 밖의 전쟁이 필요했던 마오쩌둥의 고민이 있다. 또 하나는 혁명 전파에 대한 마오쩌둥의 신념과 의지다. 마오쩌둥은 미 제국주의를 물리쳐야 한다는 열정에 넘쳤고, 혁명의 동력을 지속시키면서 중국의 국제지위를 높일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다. 막 혁명을 완수한 중국이 처한 복잡한 환경과 조건도 빼놓을 수 없다. 타이완 문제가 대미 항전 욕구를 자극했고, 국제 분업구조하의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중국의 책임과 의무를 요구했다. 중국의 참전은 이처럼 여러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결정됐다.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주관적 동기와 객관적 목적은 사실 합리적이고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세운 전략적 목표와 방침은 현실조건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다. 중국은 유리한 조건에서 전쟁을 그만둘 수 있었던 역사적 기회를 놓치는 근본적인 오류를 범했다. 자신의 힘을 너무 과신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중국이 참전의 최초 목표를 억지로라도 달성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너무 많은 불필요한 대가를 치렀다. 게다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세계는 평화와 안녕을 얻지 못했다. 한국전쟁은 미·소 대결과 자본주의·사회주의 양대 진영의 냉전상태를 더욱 심화시켰다. 한국전쟁은 강대국 간, 특히 핵무기를 보유한 강대국 간의 전쟁은 어느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 첫번째 전쟁이다.
  • [조은지기자의 월드컵 토크] “첫골 고맙고 뿌듯…참 듬직한 놈이야”

    [조은지기자의 월드컵 토크] “첫골 고맙고 뿌듯…참 듬직한 놈이야”

    12일 남아공월드컵 본선 첫 경기에서 이정수(가시마)가 결승골을 터뜨렸다. ‘그리스 신화’는 깨졌고, 16강을 향한 ‘유쾌한 도전’은 탄력을 더했다. 이정수는 “부모님도 생각나지만 스트라이커였던 나를 수비수로 변신시킨 조광래 감독님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지구 반대쪽에서 들려온 제자의 승전보에 경남FC 조광래 감독은 마냥 싱글벙글이다. 14일 조 감독과 함께 ‘훈훈한 이정수’를 반찬으로 즐거운 수다를 떨었다. ●조은지(이하 은) 그리스전의 흥분이 아직도 안 가라앉아요. 매일 ‘타도 그리스’를 외쳤으면서도 이렇게 완벽하게 이길 거라고는 예상을 못 했어요.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얼마나 껑충껑충 뛰었던지. 기자 신분을 망각하고 정신줄을 놓아버린(?) 순간이었어요. 이정수의 선제골이 전반 7분 만에 터진 게 대세에 큰 영향을 준 것 같아요. ●조광래(이하 조) 선제골이 일찍 터져서 쉽게 풀어나간 면이 있죠. 아무래도 월드컵이란 큰 대회에선 위축되기 마련인데 골을 먼저 넣었으니 자신감이 생길 수밖에 없지. 두 번째 박지성 골도 아주 감각적으로 잘 꺾어 차더라고. 우리 후배들 참 장해요. ●은 축구팬들은 박주영 같은 공격진의 발끝을 기대하고 있었잖아요. 그래서 이정수의 골이 의외라는 반응도 있었고. ●조 나는 세트피스 때 이정수가 득점할 수 있는 1순위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걸리면 멋지게 넣지 않을까 했는데 진짜로 넣었죠. 남은 경기에서도 한 골 더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국내에서도, J-리그에서도 세트플레이 때는 많이 넣었잖아요. ●은 대표팀 연습을 보니 키도 크고, 위치선정도 좋고, 상대 수비의 레이더망에서 살짝 벗어나 있고. 그리스전이 끝나고 이정수가 “공격수에서 수비수로 포지션을 바꿔주신 조 감독님이 떠오른다.”고 말했더라고요. ●조 하하하. 나도 봤어요. 고맙지 뭐. 뿌듯하기도 하고. 2002년 안양감독일 때, 신인 드래프트 1순위로 정수를 뽑았어요. 공격수 포지션이었지. 그런데 수비수 자질이 보이는 거예요. 헤딩력에 스피드, 지능까지. 키 큰 애치고는 기술까지 있었어요. 수비수로 갖춰야 될 장점이 다 있는 거지. 수비수는 결정적인 단점이 한 가지씩 있는 법인데, 정수는 안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수비수를 해볼 생각이 없느냐.”라고 물었죠. 잠자코 있더니 “한 번 해보겠습니다.”하데. 그날부터 바로 수비훈련을 시켰죠. ●은 감독님도 대단하시네요. 10년 가까이 스트라이커만 해온 선수한테 갑자기 포지션을 바꾸라고 하다니. 물론 군말 없이 받아들인 이정수도 대단하고요. 그런데 당시 수비수로 변신한 이정수가 선수들 사이에서 ‘위아래도 없는 놈(?)’이란 안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소문이 있더라고요. 막무가내(?)로 달려들어서 상대 선수들이 꺼렸다는 건데요. ●조 당연히 그럴 수밖에. 빨리 자리를 잡아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거칠게 나갔죠. 난 계속 안심을 시키는 입장이었고. 정수 불러서 “수비는 누구나 실수하는 거다. 실수는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해라.”라고 말하는 게 일이었지. 언제부턴가 경기를 보는데 ‘국내 최고의 수비수가 될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요. 정수가 인천-수원을 거치면서는 확신이 굳어졌고요. 사실 이렇게까지 잘할 줄은 몰랐는데…. ●은 그때 수비수로 안 바꿨으면 지금 스트라이커 포지션에 이정수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거 아닙니까. 드래프트 1순위면 공격수로도 가능성이 있었다는 건데. 박주영과 투톱에 선 이정수라. 상상만으로도 훈훈하네요. 하하하. ●조 공격수로서의 자질은 살짝 부족했어요. 순간적으로 상대 뒷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스피드나 민첩성이 떨어졌죠. 축구인생을 결정짓는 문제에서, 자신 있게 수비수로 바꾸자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고. 어떤 선수든, 자기 포지션을 체크해 볼 필요가 있다니깐요. 이 신념은 변함이 없어요. 어린 선수들 포지션을 많이 바꿔봤는데, 실패한 확률이 거의 없어요. ●은 예리한 안목이십니다. 이정수는 인간적으로 참 호감이 가더라고요. 착하게 생겨 점수를 따고 들어가는 면도 있지만, 젠틀한 느낌이랄까. 인터뷰도 방긋방긋 웃으면서 잘하고. 하나라도 더 말해 주려고 애쓰는 모습이거든요. 굳은 표정으로 딱딱하게 말하는 선수들보다 아무래도 정감이 갈 수밖에 없죠. 근데 경기장에선 또 완전히 반대잖아요. 볼 빼앗을 때 보면 빈틈 없고, 투쟁적이고요. ●조 경기장에선 참 끈질기죠. 원래 성격은 침착하고 조용하고요. 은근히 속정도 깊어요. 우리 팀 이용래가 부상이 있어서 가시마 팀 닥터한테 치료를 받으러 갈 일이 있었어요. 월드컵이 얼마 안 남았을 땐데. 숙소를 어디다 정해야 하나 곤란했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정수가 전화해서는 “선생님, 우리 집에 데리고 있을게요. 연습장에 같이 나가서 치료도 받게 할 테니까 걱정 마십시오.” 하더라고요. 참 인정스럽고 듬직한 놈이야, 아. 이제 골도 넣은 월드컵 스타니까 ‘놈’이라고 하면 안 되겠지. 허허허. zone4@seoul.co.kr
  • ‘진돗개 리더십’… 한국인 감독 첫승 새역사 썼다

    ‘진돗개 리더십’… 한국인 감독 첫승 새역사 썼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12일 남아공 포트엘리자베스에서 열린 그리스와의 월드컵 본선 1차전에서 이정수(30·가시마)의 첫 골이 터지자 선수들보다 더 기뻐한 사람이 있었다. 곱게 양복을 차려입은 허정무(55) 감독. 그는 허공으로 회심의 어퍼컷을 날렸다. 거스 히딩크 감독의 세리머니와 묘하게 겹쳐졌다. 활짝 웃는 허 감독 주위로 정해성·박태하·김현태 코치가 달려와 얼싸안았다. 후반 박지성(29·맨유)이 쐐기골을 넣었을 때는 승리를 확신한 듯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마음껏 환호했다. 얼마나 기다려온 순간일까. ‘진돗개’ 허정무 감독이 한국인 감독 최초로 월드컵 본선 승리를 일궜다. 한국이 이번 대회 전까지 월드컵 본선에서 거둔 성적은 통산 4승7무13패. 히딩크 감독의 3승과 딕 아드보카트 감독의 1승이 전부였다. 한국인 지도자는 무승(4무10패)이었다. 허 감독이 첫 테이프를 끊은 것. 허 감독은 2007년 말 대표팀 감독에 취임하면서 “내 축구인생의 모든 것을 걸겠다.”고 했다. “한국인 지도자는 안 된다는 편견을 깨뜨리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못 미덥다는 반응. 무색무취한 대표팀에 ‘허무축구’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이 따라붙었다. 조급함은 계속됐다. 지난해 6월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을 1위로 통과했으나 반응은 냉담했다. 7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지은 축제의 자리에서 “본선에서는 외국인 감독이 필요하지 않냐.”는 질문이 나올 정도였다. ‘허허실실’ 허 감독이지만 그 질문엔 참지 않았다. 발끈했다. “좋은 분이 있다면 언제든지 감독을 맡을 수 있다. 하지만 외국 감독이 무조건 좋다는 식은 곤란하다. 퍼거슨이면 퍼거슨, 무리뉴면 무리뉴 확실하게 이름을 대라.”고 얼굴을 붉혔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데 대한 불쾌함이기도 했고,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기도 했다. 한 번 물면 놓지 않는다는 ‘진돗개’답게 허 감독은 끈질겼다. 끊임없이 편견에 맞섰다. 여론에 흔들리지 않았다. 신념대로 ‘마이 웨이’를 갔다. 때론 독선적이라고 평가절하됐지만 괘념치 않았다. 1986년 선수, 90년 트레이너, 94년 코치로 월드컵 본선을 경험한 ‘월드컵 베테랑’이었다. 학연과 지연을 배제하고 실력에 따라 차근차근 선수들을 점검해 나갔다. 약 2년간 무려 95명의 선수들이 허정무호에 몸담았다. 허 감독은 이름값에 연연하지 않고, 직접 눈으로 꼼꼼하게 테스트하며 선수들을 추려 나갔다. 최종 엔트리 23명 중 허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뒤 대표팀에 발탁된 선수가 무려 9명이다. 이청용(22·볼턴)·기성용(21·셀틱)·조용형(27·제주)·이정수(30·가시마)·정성룡(25·성남) 등은 팀의 주축으로 급성장했다. 한국 축구의 성공적인 세대교체까지 마무리한 셈이다. 허 감독은 월드컵 전 “큰 욕심은 없다.”고 말했다. “사령탑에서 내려왔을 때 ‘그 양반 감독할 때 참 괜찮았어.’ 하고 존경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알쏭달쏭한 목표를 내걸었다. 한국인 감독의 승리라는 새 역사를 쓴 허 감독의 ‘유쾌한 도전’은 어디까지 이어질까. 조은지기자 zone4@seoul.co.kr
  • [한국전쟁 60주년 기획]김일성 각본, 스탈린 연출, 마오쩌둥 주연

    [한국전쟁 60주년 기획]김일성 각본, 스탈린 연출, 마오쩌둥 주연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한 학설은 대략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대표적인 학설이 ‘남침설’이다. 2차 세계대전 후 옛 소련이 자국의 팽창주의에 따라 북한을 부추겨 남한의 무력통일을 획책했다는 주장이다. 대척점에 서 있는 학설이 ‘북침설’이다. 미국이 한국을 조종해 북으로 쳐들어갔다는 주장이다. 중간적 입장에서 나온 것이 ‘남침유도설’이다. 대체로 북한의 북침설을 옹호하는 수정주의적 사관이다. 냉전해체 이후 공개된 러시아문서는 분분한 학설을 일거에 정리하는 ‘스모킹 건(결정적 증거)’의 역할을 했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스탈린과 마오쩌둥 그리고 김일성이 주고받은 대화록과 편지가 담긴 극비문서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제 서방세계는 물론 러시아와 중국의 학자와 일반인들에게도 북한의 남침설은 다시 뒤집히기 어려운 정설로 자리 잡았다. 전쟁을 일으킨 발발자는 누구일까. 전쟁의 주체는 남침설과 북침설, 남침유도설 등 어느 학설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남침설은 스탈린의 김일성 사주설,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공모설, 마오쩌둥 주도설 등이 주류를 이룬다. 지금은 대체로 스탈린과 마오쩌둥 두 사람을 전쟁발발의 공동주체로 본다. 김일성은 괴뢰로 취급해 평가절하하고 있다. 한국전쟁의 발발 원인을 국내적 요인보다, 냉전체제라는 국제적 요인에서 찾은 결론이다. ●스탈린·마오쩌둥 한국전 공동주체 북침설의 입장에서는 이승만을 전쟁의 주동자로 본다. ‘김일성 저작집’ 제6권을 보면 김일성은 1950년 6월25일 새벽 3시 노동당 정치위원회와 내각 합동 비상회의를 소집해 “리승만 도당의 괴뢰군들이 오늘 새벽 38선 전역에 걸쳐 공화국 북반부를 반대하는 불의의 무력침공을 개시하였습니다. 적들은 이미 38선 이북지역으로 1~2km 침공하였습니다.”라고 연설했다. 지금은 북한주민들만 그렇게 믿는다. 중국군이 펴낸 책자에는 ‘1950년 6월25일 새벽, 38도 선에서 오랫동안 계속되어 오던 소규모 무장충돌과 마찰이 마침내 질적인 변화를 일으켜 한반도에서의 대규모 내전으로 전면적으로 폭발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중국은 초기 한국전쟁을 ‘내전’으로 보고 있으며, 미군 등 유엔군 참전과 중국의 개입 이후를 ‘국제전쟁’이라고 보는 시각을 갖고 있다. 한때 수정주의 이론이 득세했다. 스톤의 ‘한국전쟁 비사’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한국전쟁의 기원을 1945년 해방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좌우이데올로기로 나뉜 불완전한 해방의 연장 선상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심지어 스탈린의 옆에서 전쟁결정 과정을 지켜봤던 후루시초프가 ‘회고록’에서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켰다.”라고 밝혔지만, CIA 공작설을 거론하면서 믿지 않았다. 그러나 수정주의 이론은 러시아문서가 비밀에서 해제돼 세상에 공개되자 설득력을 잃었다. 냉전이 해체되면서 이데올로기적 제약이 사라진 것이다. 커밍스는 자신의 이론을 부분적으로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각본을 썼고, 스탈린이 연출했다. 스탈린은 처음에는 김일성의 저돌적인 전쟁공세에 머뭇거리기도 했지만 밑질 것이 없다고 여겼다. 전쟁을 승인하고 군사원조를 제공했으며 마오쩌둥을 설득해 동맹국으로 끌어들였다. 군사고문단을 보내 전쟁준비부터 휴전까지 직접 챙겼다. 1953년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휴전협정 조인은 더 미뤄졌을 것이고 꽃다운 생명의 희생은 더 늘어났을 것이다. ●“김일성은 꼭두각시”… 평가절하 러시아 극비문서가 공개되기 전까지 한국전쟁에서 마오쩌둥의 역할에 대한 평가는 절하된 감이 있다. 갑자기 압록강 국경을 넘어 나타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의해 연합군이 압록강에서 38선 이남까지 밀려난 정도로밖에 알려지지 않은 측면이 있다. 김일성이 전쟁발발을 선창했다면, 스탈린은 총연출을 맡았다. 주역은 사실상 마오쩌둥과 중국이었다. 마오쩌둥은 전쟁을 측면에서 조종했고, 참전을 선택했고, 치렀다. 1950년 9월15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나서 압록강 국경까지 진군했다. 이때부터 한국전쟁을 주도한 것은 중공군이었고, 휴전협정의 관장자도 중국이었다.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의 당당한 주연배우로 등장했다. 마오쩌둥은 소련과 미국이 38선 분할통치에 합의했기 때문에 소련 지상군이 동원되면 미군을 끌어들이는 구실이 된다고 봤다. 하지만 중국해방군은 예외라고 판단했다.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참전을 이끌어낸 김일성의 역할도 무시할 순 없다. 주지안룽 동양학원대학 교수는 저서 ‘모택동은 왜 한국전쟁에 개입했을까’에서 “김일성은 온 힘을 기울여 소국의 지혜로 대국의 지도자를 움직이게 하는 일류의 연기를 펼쳤다.”라고 평가했다. 러시아말과 중국말에 능했던 김일성은 양국 수뇌와 외교관 사이를 오가면서 스탈린에게는 ‘마오쩌둥 카드’를 내밀고, 마오쩌둥에게는 ‘스탈린 카드’로 말을 바꾸는 절묘한 ‘양다리 외교’를 펼쳤다. “마오쩌둥은 평화적 수단에 의한 남북통일은 불가능하며, 통일은 군사적 수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스탈린에게 전달했다. 김일성을 꼭두각시로 깎아내리는 시각도 있지만, 한국전쟁의 시나리오를 쓴 사람은 분명히 김일성이었다. 다만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은 1950년 10월 19일 이전까지 전쟁을 총지휘한 사람은 스탈린이었다. 그는 북한의 군비 요청 사항 중 90% 이상을 지원했다. 1950년 6월15일 평양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는 ‘6월25일 새벽에 진격한다. 조선인민군이 옹진반도를 공격하고 서쪽 연안으로 총공격을 가한다. 적 주력부대는 서울 근방에서 괴멸되고 서울과 춘천, 강릉이 동시 점령될 것이다. 최종적으로 남한은 해방될 것이다.’라고 크렘린에 보고했다. 비밀문서에 나타난 전쟁개시일과 전황이 정확하게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실제 사흘 만에 서울이 점령됐고, 8월20일쯤에는 낙동강 전선을 제외한 남한영토의 90% 이상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는 한편 소련군 군사고문단장인 바실레프스키 원수에게 서울의 총사령부에 상주토록 조치했다. ●기고만장해진 北, 中 홀대 스탈린은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8월25일 김일성에게 다음과 같은 친서를 보냈다. ‘조선인민의 위대한 해방투쟁에 찬사를 바친다. 미군개입으로 부분적으로 실패하는 것에 당황할 필요가 없다. 북한은 고립되어 있지 않으며, 지원할 맹우들이 곁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조종사를 지원하는 방법을 검토하겠다.’ 김일성은 용기백배해 다음날 노동당 정치위원회를 소집했다. 북한지도부는 ‘친애하는 동지 스탈린의 아버지와 같은 심려와 지원이 조선인민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라는 내용의 공식 회답문을 채택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바실레프스키 원수는 9월21일 ‘소련군 제147사단 84전투기연대 소속 전투기 야크-9형 40기의 파견을 모스크바에 요청했고 승인받았다. 소련 공군이 한국전에 참전했다. 바실레프스키 원수는 ‘소련 조종사가 전투에 참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군에게 숨길 수는 없다. 공중전에서 행해지는 교신이 러시아말로 이뤄지기 때문이다.’라고 보고했다. 성공확률 5000분의1에 불과한, 무모하기 짝이 없는 작전으로 보였던 인천상륙작전의 역사적인 성공은 전쟁의 흐름을 180도 바꿔 놓았다. 인민군과 소련군사고문단은 이 작전의 의미를 부정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중국은 서방 측 보도를 보고 이 사실을 알았다. 스탈린은 상륙작전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잘못을 문책해 스티코프 대사를 경질했다. 인민군은 패주에 패주를 거듭했다. 다급해진 김일성과 박헌영은 9월29일 ‘적이 38선을 넘을 때 대비해 소련 측의 직접적인 군사원조를 부탁한다.’라며 보병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스탈린은 응하지 않았다. 마지막 희망은 중국이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급기야 스탈린은 10월13일 ‘중국은 군사개입을 거부하고 있다. 귀하는 소련이나 중국으로 탈출을 준비하고 부대 및 병기를 대피할 필요가 있다.’라는 절망의 통첩을 김일성에게 보냈다. 한국전쟁에 개입한 소련, 중국 그리고 미국 지도자들의 주요 관심사가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열도라는 사실이 러시아 비밀문서에 자주 등장한다.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콜디스트 윈터’에서 “미국이 한국을 위해 죽을 각오로 싸울 태세를 갖춘다는 게 아주 뜻밖의 일은 아니었다. 미국이 정말 염려했던 것은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이었다.”라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은 김일성과의 회담에서 “일본이 분쟁에 개입하는 일은 아마 없을 것.” “미군의 전투력이 일본군 이하이므로 우리가 이긴다.”라는 발언을 했다. 일본에 대한 생각이 은연중에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스탈린도 마찬가지였다. ●美·中·소련 관심대상은 日 스탈린은 패색이 짙어진 10월8일자 김일성에게 보낸 전문에서 일본을 막으려면 중국의 참전이 필요한 논리를 폈다. 스탈린은 ‘국제정세를 보면 군국주의 세력이 부활하지 못한 일본은 미국을 원조할 수 없다. 중국이 소극적인 자세를 유지한다면 일본 군국주의 부활을 막지 못한다.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미국의 동맹자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되살아나는 미래보다 지금이 우리에게 훨씬 유리하다. 이승만 치하의 남한이 미국과 일본의 대륙에 대한 전진기지가 될 수년 후보다 지금이 유리하다.’라고 썼다.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기 전까지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점령국 일본에서 황제처럼 군림했다. 전쟁을 지휘하는 동안 한국에서 하룻밤도 보내지 않았다. 그는 1952년 미국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유력한 공화당 후보로 점쳐지고 있었다. 한국전쟁 최대의 판단오류 중 하나였던 ‘중국 불개입론’은 그의 신념이었다. 이 때문에 ‘2차 세계대전이 낳은 위대한 장군’ 맥아더는 불명예스럽게도 전쟁 기간에 파면당하는 신세가 됐다. 연합군의 ‘크리스마스 공세’는 중공군의 개입시기를 앞당겼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영화리뷰] ‘축구의 신- 마라도나’

    [영화리뷰] ‘축구의 신- 마라도나’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가 맞붙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 8강전. 후반 6분 디에고 마라도나는 호르헤 발다노와 2대1 패스를 하며 영국 진영을 공략했다. 잉글랜드 스티브 호지가 공을 걷어낸다는 게 그만 잉글랜드 골대 앞으로 보내고 말았다. 키가 181㎝인 잉글랜드 수문장 피터 실튼을 앞에 두고 키가 165㎝에 불과한 마라도나가 뛰어올랐다. 공은 그대로 잉글랜드 골문으로 흘러 들어갔다. 사실 마라도나는 왼손으로 공을 건드렸다. 그러나 주심은 그대로 득점으로 인정하고 말았다. 3분 뒤 마라도나는 하프라인 인근에서 60여m에 이르는 귀신 같은 드리블을 선보이며 실튼마저 제치고 쐐기골을 터뜨려 잉글랜드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월드컵 역사에 길이 남은 ‘신의 손’ 사건이다. 마라도나는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1982년 포클랜드 전쟁을 언급하며 당시 경기를 “죽은 동포를 대신해 축구장에서 싸운 것”이라고 말했다. ‘신의 손’ 사건에 대한 그의 언급이 재미있다. “영국 놈의 지갑을 훔치고 튄 것 같았죠.”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3일 개봉한 ‘축구의 신-마라도나’(원제 마라도나 바이 쿠스트리차)는 스포츠 다큐멘터리라기보다 정치 다큐멘터리 인상이 짙다. 가난한 동네에서 태어나 세계 축구팬들의 우상이 됐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마라도나를 좇아가며 그의 정치적 색깔을 부각시킨 것. 하긴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두 차례나 안았던 세르비아 출신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이 수도 없이 다큐멘터리 대상이 됐던 ‘악동’ 마라도나를 다루고자 했던 까닭이 그의 정치 신념이 돋보였기 때문이라지 않는가. 이 작품으로 칸 비경쟁 부문에 초청받았던 쿠스트리차는 ‘신의 손’ 사건을 놓고 “이 경기 이후 개인적인 축구의 역사는 끝났으며 정치 사회적인 의미를 띠게 됐다.”고 선언했다. 마라도나는 작품에서 반미주의자이자 남미 민중의 영웅으로 등장한다. 쿠바를 찾아 피델 카스트로와 농담을 나누기도 한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과 함께 “부시를 몰아내자.”는 연설을 하기도 한다. 쿠스트리차는 여기에 로널드 레이건·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등을 우스꽝스럽게 등장시킨다. 마라도나는 쓰라린 내리막길을 걷기도 한다. 약에 취해 아이들이 성장하는 것을 못 봤다며 가슴을 치는 인간적인 모습도 접할 수 있다. 50세가 된 마라도나는 현재 아르헨티나 축구 대표팀 감독이다. 멕시코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한국과 맞붙었던 마라도나는 남아공 월드컵 조별리그에서도 한국과 승부를 겨룬다. 멕시코 때 현역으로 마라도나에 맞서 그라운드를 내달렸던 허정무 감독이 한국 팀을 지휘하고 있다. 묘한 인연이다. 마라도나에 대한 찬사 일색이라 다소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축구의 신-마라도나’는 관객들의 흥미를 충분히 자극할 만한 작품이다. 96분. 15세 이상 관람가.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평화 위해 DMZ공연”

    “평화 위해 DMZ공연”

    “존 레넌이 노래했던 것처럼 이번 비무장지대(DMZ) 공연이 평화에 기회를 주었으면 한다.” ‘우드스탁의 아버지’ 아티 콘펠드(68)가 1일 서울 청담동 한 음식점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판 우드스탁 페스티벌 개최 소감을 전했다. 그는 “1969년 우드스탁은 전쟁에 반대하기 위한 신념을 갖고 열었다. 이번 공연도 평화를 위한 공연으로 보면 된다.”면서 “아이들이 두려움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미래를 만들고 싶다는 취지에서 기획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69년 우드스탁을 함께했던 파트너들이 하고 있는 페스티벌은 상업화됐다.”면서 “나는 우드스탁 본연의 정신을 유지하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콘펠드는 우드스탁코리아와 함께 ‘더 피스 엣 디엠지 위드 아티 콘펠드, 더 파더 오브 우드스탁69’ 페스티벌을 8월6~8일 경기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에서 개최한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김제동 “보기 불편 하다고 밥줄 끊어서야”

    김제동 “보기 불편 하다고 밥줄 끊어서야”

    방송인 김제동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준비한 프로그램인 케이블 채널 Mnet ‘김제동 쇼’ 진행을 고사했다. 김제동의 소속사인 다음기획 김영준 대표는 1일 “오늘 저희는 정말 참담한 심정으로 어려운 결정을 했다. ‘김제동 쇼’ 진행을 맡지 않을 것임을 알려드린다”며 출연 불가 입장을 밝혔다. 이어 김 대표는 김제동이 지난달 23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진행된 고(故) 노무현 전(前) 대통령 1주기 추도식 사회를 맡은 이후 정치적 민감성을 감안한 듯 저자세를 취한 Mnet 측의 태도를 문제 삼았다. 김 대표는 “Mnet 제작진이 ‘추도식 참석을 재고할 수 없겠느냐’는 요청을 해왔다”며 추도식 이전의 제작진 측 반응을 전한 뒤 후속 논의를 통해 추후 녹화 일정을 협의하기로 하였음에도 최종 결정 시한을 넘긴 Mnet 측에 불만을 표시했다. 김 대표는 Mnet 측의 이 같은 미온적 태도에 대해 “누가 입김을 넣어서 방송편성을 하지 말라고 외압을 행사하지는 않았다고 본다”면서도 “뒷 배경에 ‘예민한 정치적 상황에 대한 고려가 있지 않나’라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또한 김대표는 “MC가 김제동이라는 이유로 정치적 고려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은 김제동 스스로가 더 이상 MC를 맡지 않겠다는 뜻을 대외적으로 공표하고 제작진의 부담을 덜어주는 일”이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 밖에도 김 대표는 “도덕적으로 비난 받지 않은 방송 외적인 활동을 문제 삼는 잘못된 제작관행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라며 “국민들이, 시청자들이 방송을 제대로 볼 권리를 더 이상 뺏기지 않았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다음은 Mnet ‘김제동 쇼’에 대한 다음기획의 입장 전문> 「김제동 쇼」에 대한 다음기획의 입장입니다. 김제동의 소속사 (주)다음기획의 대표 김영준입니다. 오늘 저희는 정말 참담한 심정으로 어려운 결정을 했습니다. 김제동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진정성을 다해 준비한 프로그램인 Mnet의 「김제동 쇼」 의 진행을 맡지 않을 것 임을 알려드립니다. 지난 4월 21일 많은 사람들의 큰 관심 속에 첫 녹화를 별 탈없이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원래 예정되어 있던 5월 6일의 첫 방송 분이 아직도 방송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5월 13일 첫 방송이 나간다.’, ‘6월 중순 채널 정기 개편에 맞추어 방송 된다.’ 라는 트위터를 통한 공지가 나간 이후, 5월 중 예정 되어 있던 녹화가 연달아 취소되면서 6월의 시작을 알리는 오늘까지 첫 방송 날짜를 못 잡고 있는 애매모호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오늘, Mnet 측과 논의되어 왔던 그 동안의 과정을 Fact 위주로 밝혀드리면서 김제동과 저희가 왜 출연 불가 결정을 하게 되었는지를 설명 드리겠습니다. 5월 6일 첫 방송을 앞둔 지난 4월 말, 김제동이 故 노무현전대통령의 1주기 추도식에 사회를 본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Mnet의 제작진에서 추도식 참석을 재고할 수 없겠느냐는 요청을 해왔습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추도식 사회를 본 다는 것이 「김제동 쇼」 의 방송 편성 자체를 흔들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하였을 뿐 만 아니라, ‘유족과 국민과의 약속’, ‘추도식 사회를 정치적 편향으로 바라보는 합리적이지 못한 태도에 대한 지적’, ‘개인적인 신념과 삶의 태도에 대한 문제’ 등을 들어 김제동은 추도식 사회를 보는 것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았고, 추도식 참여를 문제 삼는다면 ‘더 이상 「김제동 쇼」의 진행을 할 수 없다.’라는 의사를 제작진에게 전달하였습니다. 이러한 김제동의 단호한 태도에 대한 Mnet 측의 답변은 ‘그렇다면 추도식 이후 방송여부를 결정하자’ 였습니다. 추도식 사회를 본 행위가 정치적 논란에 휩싸이고, 그 파장이 프로그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를 진솔하게 밝혔기에 그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으나 프로그램이 존속하였으면 하는 저 개인적 판단에 따라 추도식이 끝나고 바로 후속 논의를 통해 추후 녹화 일정을 협의하기로 하였습니다. 방송활동이 뜸해지면서 김제동은 <토크 콘서트>라는 새로운 형식의 공연을 통해 수만의 관객들을 만났으며 대중과의 새로운 소통 창구를 나름대로 만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김제동의 공연 현장을 찾은 Mnet 의 제작진들은 김제동의 사회자로서의 능력과 저력을 인정하여 방청객과 출연진의 벽을 허무는 사람냄새 나는 새로운 토크쇼를 만들어 보자는 취지로 김제동의 출연을 적극적으로 제안 해 왔으며, 제작진의 열정과 진솔한 태도에 김제동과 저희 회사도 의기투합하여 초기 기획단계부터 수 차례의 미팅을 거치면서 정말 모두가 애정을 갖고 첫 녹화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제작진들의 프로그램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저희로서는 추도식 이후 방송을 차분히 준비하자고 김제동을 설득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방송 제작 관행에서 벗어난 방송 연기에 따른 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제가 Mnet 측에 이것만은 수용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제안 한 내용이 있습니다. 1) ‘비’라는 월드 스타의 첫 게스트 출연과 녹화 이후의 훈훈한 이야기들이 이미 언론을 통해 알려졌으니 첫 방송은 파일럿 형식으로라도 방송이 되었으면 좋겠다. 2) 만약 파일럿 형식으로 방송이 되기 어렵다면 티져 광고 형식의 방송 예고 스팟이라도 해주었으면 좋겠다. 3) 첫 방송 연기에 대하여 논란이 되기 전에 Mnet 측에서 공식적인 보도 자료를 통해 ‘김제동 쇼’ 의 편성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혔으면 한다. 제작진들과의 논의 과정에서 위에 제가 제안한 내용들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사람들은 없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어느 것 하나 지켜지지 않았으며, 추도식 이후 방송 여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기로 한 날짜를 훌쩍 넘긴 오늘까지 Mnet 측은 “6월 개편 때 편성 방송 될 것이다. 기다려 달라.” 라는 이해하기 힘든 말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아 부으며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기 위해 노력한 제작진들이 방송 여부에 대한 결정은 차치하고라도 언제 방송되는가에 대한 확실한 언급을 할 수 없는 이 상황을 우리는 엄정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입김을 넣어서 방송 편성을 하지 말라고 직접적인 외압을 행사하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그러나 방송 편성 여부를 두고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뒷 배경에 ‘예민한 정치적 상황에 대한 고려를 누군가 하고 있지 않나?’ 라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중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주는 예능 프로그램의 편성조차 MC가 김제동이라는 이유로 정치적인 고려를 해야만 하는 이안타까운상황에서저희가할수있는것은김제동스스로가더이상 MC를 맡지 않겠다는 뜻을 대외적으로 공표하면서 Mnet 제작진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또한 도덕적으로 비난받지 않는 방송 외적인 활동을 문제 삼는 잘못된 제작관행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는 바입니다. ‘전직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 앞에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 애도를 표하고 사회자로서의 본분을 다하여 국민들의 아픔과 눈물을 닦아주었다고 해서 정치적 편향을 문제삼고, 보기 불편하다는 의견 표명을 넘어서 마이크를 못 잡게 하고 방송 활동을 가로막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일들이 반복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 2010년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김제동의 <토크 콘서트>를 통해 김제동의 어머니와 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개인적 사연은 이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 입니다. 비단 그런 개인적 인연을 넘어서라도 국민 대중들의 슬픔과 기쁨, 아픔과 환희를 함께 더불어 나누고자 하는 김제동 개인의 직업적 태도가 있었기에 추도식 사회를 보는 것에 대해서도 당당 할 수 있었습니다. ‘웃음의 가치에 정치적 편을 가를 수 없다.’는 김제동의 확고한 직업의식이 있었기에 이번 지방선거에 출마한 여러 후보들의 인간적인 도움 요청마저 정중하게 거절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적어도 방송활동을 통해서는 표출되지 않은 김제동 개인의 사상과 이념적 지향, 세계와 인간에 대한 가치가 자기와 다르다고 해서, 추도식에서 고인에 대한 애틋한 추모의 마음을 말로 담은 것 이외 어떠한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 행위 자체를 문제 삼아 ‘너무 정치적이다’, ‘방송에서 퇴출시켜야 된다’ 라는 몰상식의 논리가 실제화 되고 있는 현실에 서글픔을 넘어 이제 분노가 치밀어 옵니다. 이제 더 이상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중문화예술의 생명은 ‘다름의 인정’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대중들의 관심과 사랑으로 일을 계속하는 스타연예인들의 사회참여 활동은 다기다양한 형태로 펼쳐져야 하며, 연예인 스스로가 건강한 주체로 거듭날 수 있도록 대중들의 따스한 격려와 응원, 따끔한 질책과 충고가 필요한 일이지, 보기 불편하다고 밥 줄을 끊게 만들지는 말아야 합니다. 방송에서 김제동을 볼 수 없게 된 많은 분들이 김제동을 걱정해 주십니다. 그럴 때마다 김제동은 “힘든 분들이 저 말고도 많은데 그 사람들에 비하면 정말 저는 괜찮습니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김제동 개인의 역사진보에 대한 확신과 사람중심의 가치에 대한 낙관적 믿음이 어렵고 엄중한 현실에서도 떳떳하게 설 수 있게 하는 것 같습니다. 방송이 아니라면 직접 대중들을 만나는 공간을 만들어 가면서 앞으로도 김제동은 사람들에 웃음을 주고, 사람들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모든 이들과 기쁨의 현장에서 환희의 순간을 같이 할 것입니다. 국민 대중들이, 시청자들이 ‘방송’을 제대로 볼 권리를 더 이상 뺏기지 않았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을 가져 봅니다. 사진 = 서울신문NTN DB 서울신문NTN 장기영 기자 reporterjang@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김제동 “국민들이 볼권리 뺏기지 않았으면…”(전문)

    김제동 “국민들이 볼권리 뺏기지 않았으면…”(전문)

    방송인 김제동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준비한 프로그램인 케이블 채널 Mnet ‘김제동 쇼’ 진행을 고사했다.김제동의 소속사인 다음기획 김영준 대표는 1일 “오늘 저희는 정말 참담한 심정으로 어려운 결정을 했다. ‘김제동 쇼’ 진행을 맡지 않을 것임을 알려드린다”며 출연 불가 입장을 밝혔다.이어 김 대표는 김제동이 지난달 23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진행된 고(故) 노무현 전(前) 대통령 1주기 추도식 사회를 맡은 이후 정치적 민감성을 감안한 듯 저자세를 취한 Mnet 측의 태도를 문제 삼았다.김 대표는 “Mnet 제작진이 ‘추도식 참석을 재고할 수 없겠느냐’는 요청을 해왔다”며 추도식 이전의 제작진 측 반응을 전한 뒤 후속 논의를 통해 추후 녹화 일정을 협의하기로 하였음에도 최종 결정 시한을 넘긴 Mnet 측에 불만을 표시했다.김 대표는 Mnet 측의 이 같은 미온적 태도에 대해 “누가 입김을 넣어서 방송편성을 하지 말라고 외압을 행사하지는 않았다고 본다”면서도 “뒷 배경에 ‘예민한 정치적 상황에 대한 고려가 있지 않나’라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또한 김대표는 “MC가 김제동이라는 이유로 정치적 고려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은 김제동 스스로가 더 이상 MC를 맡지 않겠다는 뜻을 대외적으로 공표하고 제작진의 부담을 덜어주는 일”이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이 밖에도 김 대표는 “도덕적으로 비난 받지 않은 방송 외적인 활동을 문제 삼는 잘못된 제작관행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라며 “국민들이, 시청자들이 방송을 제대로 볼 권리를 더 이상 뺏기지 않았으면 한다”고 덧붙였다.<다음은 Mnet ‘김제동 쇼’에 대한 다음기획의 입장 전문>「김제동 쇼」에 대한 다음기획의 입장입니다. 김제동의 소속사 (주)다음기획의 대표 김영준입니다. 오늘 저희는 정말 참담한 심정으로 어려운 결정을 했습니다. 김제동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진정성을 다해 준비한 프로그램인 Mnet의 「김제동 쇼」 의 진행을 맡지 않을 것 임을 알려드립니다. 지난 4월 21일 많은 사람들의 큰 관심 속에 첫 녹화를 별 탈없이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원래 예정되어 있던 5월 6일의 첫 방송 분이 아직도 방송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5월 13일 첫 방송이 나간다.’, ‘6월 중순 채널 정기 개편에 맞추어 방송 된다.’ 라는 트위터를 통한 공지가 나간 이후, 5월 중 예정 되어 있던 녹화가 연달아 취소되면서 6월의 시작을 알리는 오늘까지 첫 방송 날짜를 못 잡고 있는 애매모호한 상황입니다.그래서 오늘, Mnet 측과 논의되어 왔던 그 동안의 과정을 Fact 위주로 밝혀드리면서 김제동과 저희가 왜 출연 불가 결정을 하게 되었는지를 설명 드리겠습니다. 5월 6일 첫 방송을 앞둔 지난 4월 말, 김제동이 故 노무현전대통령의 1주기 추도식에 사회를 본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Mnet의 제작진에서 추도식 참석을 재고할 수 없겠느냐는 요청을 해왔습니다.그 당시만 하더라도 추도식 사회를 본 다는 것이 「김제동 쇼」 의 방송 편성 자체를 흔들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하였을 뿐 만 아니라, ‘유족과 국민과의 약속’, ‘추도식 사회를 정치적 편향으로 바라보는 합리적이지 못한 태도에 대한 지적’, ‘개인적인 신념과 삶의 태도에 대한 문제’ 등을 들어 김제동은 추도식 사회를 보는 것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았고, 추도식 참여를 문제 삼는다면 ‘더 이상 「김제동 쇼」의 진행을 할 수 없다.’라는 의사를 제작진에게 전달하였습니다.이러한 김제동의 단호한 태도에 대한 Mnet 측의 답변은 ‘그렇다면 추도식 이후 방송여부를 결정하자’ 였습니다.추도식 사회를 본 행위가 정치적 논란에 휩싸이고, 그 파장이 프로그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를 진솔하게 밝혔기에 그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으나 프로그램이 존속하였으면 하는 저 개인적 판단에 따라 추도식이 끝나고 바로 후속 논의를 통해 추후 녹화 일정을 협의하기로 하였습니다. 방송활동이 뜸해지면서 김제동은 <토크 콘서트>라는 새로운 형식의 공연을 통해 수만의 관객들을 만났으며 대중과의 새로운 소통 창구를 나름대로 만들어 가고 있었습니다.김제동의 공연 현장을 찾은 Mnet 의 제작진들은 김제동의 사회자로서의 능력과 저력을 인정하여 방청객과 출연진의 벽을 허무는 사람냄새 나는 새로운 토크쇼를 만들어 보자는 취지로 김제동의 출연을 적극적으로 제안 해 왔으며, 제작진의 열정과 진솔한 태도에 김제동과 저희 회사도 의기투합하여 초기 기획단계부터 수 차례의 미팅을 거치면서 정말 모두가 애정을 갖고 첫 녹화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그렇기에 제작진들의 프로그램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저희로서는 추도식 이후 방송을 차분히 준비하자고 김제동을 설득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방송 제작 관행에서 벗어난 방송 연기에 따른 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제가 Mnet 측에 이것만은 수용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제안 한 내용이 있습니다. 1) ‘비’라는 월드 스타의 첫 게스트 출연과 녹화 이후의 훈훈한 이야기들이 이미 언론을 통해 알려졌으니 첫 방송은 파일럿 형식으로라도 방송이 되었으면 좋겠다. 2) 만약 파일럿 형식으로 방송이 되기 어렵다면 티져 광고 형식의 방송 예고 스팟이라도 해주었으면 좋겠다. 3) 첫 방송 연기에 대하여 논란이 되기 전에 Mnet 측에서 공식적인 보도 자료를 통해 ‘김제동 쇼’ 의 편성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혔으면 한다. 제작진들과의 논의 과정에서 위에 제가 제안한 내용들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사람들은 없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어느 것 하나 지켜지지 않았으며, 추도식 이후 방송 여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기로 한 날짜를 훌쩍 넘긴 오늘까지 Mnet 측은 “6월 개편 때 편성 방송 될 것이다. 기다려 달라.” 라는 이해하기 힘든 말만 반복하고 있습니다.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아 부으며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기 위해 노력한 제작진들이 방송 여부에 대한 결정은 차치하고라도 언제 방송되는가에 대한 확실한 언급을 할 수 없는 이 상황을 우리는 엄정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입김을 넣어서 방송 편성을 하지 말라고 직접적인 외압을 행사하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그러나 방송 편성 여부를 두고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뒷 배경에 ‘예민한 정치적 상황에 대한 고려를 누군가 하고 있지 않나?’ 라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대중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주는 예능 프로그램의 편성조차 MC가 김제동이라는 이유로 정치적인 고려를 해야만 하는 이안타까운상황에서저희가할수있는것은김제동스스로가더이상 MC를 맡지 않겠다는 뜻을 대외적으로 공표하면서 Mnet 제작진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또한 도덕적으로 비난받지 않는 방송 외적인 활동을 문제 삼는 잘못된 제작관행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는 바입니다. ‘전직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 앞에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 애도를 표하고 사회자로서의 본분을 다하여 국민들의 아픔과 눈물을 닦아주었다고 해서 정치적 편향을 문제삼고, 보기 불편하다는 의견 표명을 넘어서 마이크를 못 잡게 하고 방송 활동을 가로막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일들이 반복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 2010년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김제동의 <토크 콘서트>를 통해 김제동의 어머니와 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개인적 사연은 이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 입니다. 비단 그런 개인적 인연을 넘어서라도 국민 대중들의 슬픔과 기쁨, 아픔과 환희를 함께 더불어 나누고자 하는 김제동 개인의 직업적 태도가 있었기에 추도식 사회를 보는 것에 대해서도 당당 할 수 있었습니다.‘웃음의 가치에 정치적 편을 가를 수 없다.’는 김제동의 확고한 직업의식이 있었기에 이번 지방선거에 출마한 여러 후보들의 인간적인 도움 요청마저 정중하게 거절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적어도 방송활동을 통해서는 표출되지 않은 김제동 개인의 사상과 이념적 지향, 세계와 인간에 대한 가치가 자기와 다르다고 해서, 추도식에서 고인에 대한 애틋한 추모의 마음을 말로 담은 것 이외 어떠한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 행위 자체를 문제 삼아 ‘너무 정치적이다’, ‘방송에서 퇴출시켜야 된다’ 라는 몰상식의 논리가 실제화 되고 있는 현실에 서글픔을 넘어 이제 분노가 치밀어 옵니다. 이제 더 이상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중문화예술의 생명은 ‘다름의 인정’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대중들의 관심과 사랑으로 일을 계속하는 스타연예인들의 사회참여 활동은 다기다양한 형태로 펼쳐져야 하며, 연예인 스스로가 건강한 주체로 거듭날 수 있도록 대중들의 따스한 격려와 응원, 따끔한 질책과 충고가 필요한 일이지, 보기 불편하다고 밥 줄을 끊게 만들지는 말아야 합니다. 방송에서 김제동을 볼 수 없게 된 많은 분들이 김제동을 걱정해 주십니다. 그럴 때마다 김제동은 “힘든 분들이 저 말고도 많은데 그 사람들에 비하면 정말 저는 괜찮습니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김제동 개인의 역사진보에 대한 확신과 사람중심의 가치에 대한 낙관적 믿음이 어렵고 엄중한 현실에서도 떳떳하게 설 수 있게 하는 것 같습니다. 방송이 아니라면 직접 대중들을 만나는 공간을 만들어 가면서 앞으로도 김제동은 사람들에 웃음을 주고, 사람들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모든 이들과 기쁨의 현장에서 환희의 순간을 같이 할 것입니다.국민 대중들이, 시청자들이 ‘방송’을 제대로 볼 권리를 더 이상 뺏기지 않았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을 가져 봅니다.사진 = 서울신문NTN DB서울신문NTN 장기영 기자 reporterjang@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日총리 사임 여론 50% 넘어

    │도쿄 이종락특파원│하토야마 유키오 총리가 벼랑 끝에 섰다. 신문사별로 약간 차이는 나지만 내각 지지율은 20%선이 깨진 데다 총리 사임 여론도 50%를 넘어섰다. 하토야마 총리는 31일 아침 관저에서 기자들에게 사임 압력을 의식한 듯 “신념을 갖고 극복해 나갈 수밖에 없다.”면서 “국민을 위해 확실한 정치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아사히신문이 지난 29~30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내각지지율은 17%로 지난 15~16일 조사와 비교해 4% 포인트 하락했다. 또 민주당 지지율은 21%로 3% 포인트 떨어졌다. 무려 78%는 하토야마 총리가 후텐마 문제를 이달 말까지 결론내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했다. 하토야마 총리의 사임에 대해서는 46%가 “해야 한다.”, 45%가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jrle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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