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신간회
    2026-04-08
    검색기록 지우기
  • 자가용
    2026-04-08
    검색기록 지우기
  • 해외출장
    2026-04-08
    검색기록 지우기
  • 콘택트
    2026-04-08
    검색기록 지우기
  • 중동 전쟁
    2026-04-08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76
  • [서울의 문화재] (1) 한용운의 심우장

    [서울의 문화재] (1) 한용운의 심우장

    서울에 살면서 서울의 진면목을 제대로 아는 시민들은 얼마나 될까. 우리 곁에 수백여곳의 조상 혼이 담긴 훌륭한 유적과 유물이 존재하지만 상당수 시민들은 바쁜 일상탓에 관심을 두지 않거나 무심코 지나쳐 버리기 일쑤다. 일부는 외국에 비해 볼 것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것은 잘못된 편견이다.612년 동안 대한민국의 수도로서의 역할을 해온 서울에는 국보의 38.9%, 보물의 25.5%가 산재해 있다.<16면 서울통계 서울의 문화재 참고> 이번 호부터 서울의 진면목을 바로 알고 느낄 수 있는 숨겨진 유적과 유물을 소개한다. 과거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지만 과거는 현재를 보는 거울이다. 한번쯤 가족들과 우리 선조들의 혼과 삶을 느낄 수 있는 그곳에 들러보면 어떨까. # 심우장을 찾아서 지난 3일 만해 한용운(1879∼1944)선생이 1933년부터 만년을 보낸 서울 성북동 ‘심우장’(서울시 기념물 제 7호)을 찾았다.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인 그의 삶과 혼을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일제 총독부와 마주보기 싫어 북향으로 지은 집’인 심우장에 얽힌 이야기는 여러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직접 찾는 것은 처음이다.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다. 관련 정보도 많지 않다. 가는 길은 지하철 4호선 한성대 입구역 5번 출구로 나와 성북초등학교 방향으로 1.5㎞ 걸어 가거나,6번 출구로 나와 초록색 버스 1111번,2112번 버스를 타고 종점인 명수학교에서 내리면 된다. 종점에서 10m쯤 거슬러 내려와 오른쪽 언덕길로 50m쯤 올라가면 심우장이 나온다. 역에서 걸어서는 15∼20분, 버스는 5분이면 도착한다. 입장료는 없다. # ‘님의 침묵’을 만나다 성북구에서 지정한 ‘우리동네 명소’라는 간판을 따라 올라가자 ‘尋牛莊(심우장길 16호)’이라는 글이 쓰인 검은색 간판을 만났다. 인근의 개인집과 섞여 있어 쉽게 구분할 수는 없지만 심우장에서는 알수 없는 기(氣)가 느껴졌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수령 90년이 넘어 보이는 커다란 소나무 한그루와 함께 정면 4칸에 측면 2칸짜리 역 ‘ㄴ’자형 한옥 기와집 한 채가 나타났다. 이곳은 원래 성밖 마을 북장골로 불리던 한적한 동네였던 탓에 관람객들은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한산했다. 집안 곳곳에서는 한용운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었다. 먼저 한용운이 서재로 썼던 온돌방 문을 열자 정면으로 ‘님의 침묵’을 이 반겼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그의 서재에 걸린 님의 침묵은 새로운 느낌을 전해준다. 그 옆으로 한용운과 손병희 선생 등 민족대표 33인이 참석한 가운데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는 기록화가 걸려 있고, 그 아래에 선생이 기초한 ‘공약삼장’이 들어 있는 ‘3·1 독립선언서’가 눈에 들어온다. 또 한용운 선생의 초상화와 석정 안종원의 글씨 등 족자가 걸려 있다. # 깨달음을 얻는 곳 심우장은 북향으로 지어졌다. 한용운이 이 집을 지을 때 ‘남향하고 있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보기 싫다.’하여 고의로 등지고 지었기 때문이다. 서재 앞에 걸린 심우장이라는 현판은 위창 오세창 선생이 쓴 글씨다. 심우장은 ‘소를 찾는 집’이라는 뜻으로 한용운의 아호 중 ‘목부’(牧夫·소를 키우는 사람)에 따온 것이라 전해진다. 또 불교용어로는 성불이 되기 위한 ‘무상대도’(無常大道)를 깨우치기 위해 공부하는 집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 아는 만큼 보인다 한용운 선생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심우장에 가기에 앞서 그의 삶을 되집어보면 관람이 더 유익하다. 충남 홍성에서 출생한 한용운의 자는 정옥(貞玉), 아호는 만해(萬海)이며, 용운(龍雲)은 법명이다. 한용운은 독립운동가로 28세에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중국으로 망명해 의병학교를 설치해 독립군을 양성했다.3·1운동으로 체포돼 옥살이를 한 뒤 1926년에 시집 ‘님의 침묵’을 펴낸 뒤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에 가담했다. 이 집에서는 역사소설 ‘흑풍’과 ‘심우장 만필’ 등을 집필했다.1944년 선생이 중풍으로 입적한 뒤 이 집은 그의 친딸인 한영숙 여사가 소유하고 있다가 1972년 만해사상연구회에 기증했다. 현재는 심우장 앞 마당에 있는 별채에 성북구청 소속 직원이 거주하며 관리하고 있다. 글 사진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오늘의 눈] 북관대첩비와 남북 문화 교류/김미경 문화부 기자

    100년만에 일본 야스쿠니신사에서 벗어나 고국의 품에 안긴 북관대첩비가 원소재지인 북한으로 옮겨진 1일, 인수·인도식이 열린 개성 성균관은 ‘반갑습니다’라는 노래가 흐르며 축제 분위기였다. 남측 대표단을 맞은 북측 인사들은 “이번 인수·인도가 남북 문화재 교류와 일본에 약탈된 문화재 반환에 큰 계기가 될 것”이라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남측 관계자들도 북측의 반응에 화답했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이참에 남북 최고당국자간 문화재 회담을 갖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남북이 함께 이끌어낸 북관대첩비 환수 및 인수·인도는 불교단체 등 민간 주도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미묘한 외교관계로 정부당국에서조차 제대로 추진하지 못한 일을 민간이 손잡고 해냈다는 점에서 남·북 문화유산 교류가 확대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한다. 그동안 남북 민간에 의한 문화 교류는 적지 않게 이뤄져왔다. 불교천태종의 개성 영통사 복원, 불교조계종의 금강산 신계사 삼층석탑 복구, 기독교계의 평양 봉수교회 재건 추진 등이 대표적이다. 또 북한이 개성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도 남한 전문가들의 조언이 많이 작용했다. 그러나 북한은 겉으로는 종교단체나 NGO 등을 앞세우지만 실질적으로는 당이나 군이 이들을 통제하고 있다. 그런 만큼 민간 교류를 더욱 활성화해 북한당국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북관대첩비환수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 김원웅 의원은 식이 끝난 뒤 “조계종이 일본 도쿄대에 요구하고 있는 조선왕조실록 반환에 대해 남북이 공조하자는 공문을 북측에 전달했다.”면서 “올해 단재 신채호 선생의 서거 70주년과 내년 신간회 창립 80주년을 맞아 남북이 함께 연구자료집을 출간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남북 대표단이 함께 식사를 한 자남산려관에서는 ‘통일을 위하여’라는 구호가 여기저기에서 터져나왔다.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문화유산·스포츠 등 문화 교류가 최선의 방법이다. 남북 민간 교류가 확대되도록 정부당국과 정치권의 측면 지원도 절실하다. 김미경 문화부 기자 chaplin7@seoul.co.kr
  • 15일 ‘신간회’ 79주년 기념식

    일제 강점기 국내 최대의 항일민족운동단체였던 신간회의 창립 79주년 기념식이 15일 오후 3시 서울 YMCA 대강당에서 사단법인 민세 안재홍 선생 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열린다. 이번 기념식은 1931년 신간회 해체 이후 처음으로 개최되는 것이다. 기념식엔 박유철 국가보훈처장, 김국주 광복회장 등이 참석한다. 신간회는 1927년 총무간사로 핵심역할을 담당했던 안재홍 선생을 비롯해 신채호·박헌영 선생 등 민족주의 및 사회주의 진영 인사 34명이 창립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4년만에 해체됐었다.
  • ‘인혁당사건’ 등 진실규명 길터

    과거사법 처리가 1년여의 여야간 줄다리기 끝에 국회 통과를 눈앞에 두게 됐다. 극적 합의에 이르게 된데는 4·30 재·보선의 결과가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여야 모두 선거후유증을 극복하고 국민에게 상생을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도 작용했다. 물론 각기 실리도 챙겼다. 한나라당은 핵심 쟁점이었던 조사대상 범위에서 ‘동조세력’을 빼는 대신 ‘적대적 세력’을 추가했고, 조사위원에 국회 몫을 한명 늘려 입지를 강화했다. 열린우리당도 범위에서 ‘동조세력’을 삭제하고, 조사위원에 ‘성직자’를 삽입시켜 자신의 목소리를 어느정도 관철시켰다. 여야가 합의한 과거사법의 과거사정리위원회의 활동기간은 4년으로 하되 2년 연장할 수 있도록 했다. 위원회는 조사대상자나 참고인이 3회 이상 출석 요구에 불응할 경우 10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다. 과거사법은 일제강점기 이후부터 최근까지의 사건 가운데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해 발생한 인권침해사건과 조작 의혹 사건을 조사대상으로 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이뤄진 독립운동의 경우 신간회 사건 등 공적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일제하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집중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러나 이 같은 분류에 따른다면 북한 김일성 전 주석의 항일 빨치산 운동도 조사대상이 될 수 있어 논란이 예상된다. 광복 이후와 한국전 전후의 민간인 학살사건 등도 조사대상이다. 몽양 여운형과 고하 송진우 등 건국 이전의 요인 암살 사건도 조사대상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과거 정권의 부당한 공권력 행사로 인해 발생한 인권침해사건과 조작 의혹사건의 경우 최근 국가정보원과 국방부, 경찰청 등 국가 기관들이 자체적으로 규명작업에 착수한 사건들과 겹치는 경우가 많을 것으로 전망된다. 국가기관이 자체적으로 조사에 착수했다고 하더라도 과거사정리위가 각 사건에 대해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법적인 권한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사정리위가 구성될 경우 자체적인 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하지 않은 사법부 관련 사건들에 대한 조사가 우선적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피고인 8명이 대법원의 사형선고 하루 만에 형이 집행된 인혁당 사건의 경우 우선적으로 조사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와 함께 한나라당의 주장대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거나 적대적인 세력에 의한 테러·인권유린·폭력·학살·의문사’도 조사범위에 포함됨에 따라 북한에 의한 양민학살 사건과 좌익세력의 폭력사건도 조사대상이 될 전망이다. 박준석기자 pjs@seoul.co.kr
  • 조병옥 박사 45주기 추도식

    일제 강점기 흥사단과 신간회 등을 통해 민족 계몽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유석 조병옥(1894∼1960) 박사의 45기 추도식이 15일 오전 10시 국회 헌정회관에서 열린다. 조병옥박사기념사업회(회장 민관식) 주관으로 열리는 이날 추도식에는 황인환 서울지방보훈청장을 비롯한 광복회원과 유족 등 15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충남 천안 태생인 조 박사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14년 미국으로 건너가 안창호 선생이 주도한 흥사단 결성에 참여했으며, 뉴욕 거주 동포들을 중심으로 한인회를 조직했다.
  • 서대문구에 가면…자연과 역사 체험 한걸음에

    서대문구에 가면…자연과 역사 체험 한걸음에

    학부모들은 여름방학 동안의 자녀 교육이 신경쓰이는 대목이다.서울 서대문구(구청장 현동훈)가 운영하고 있는 서대문자연사박물관과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등은 이같은 걱정거리를 더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시간적 노력과 경제적 비용을 크게 들이지 않아도 자연과 역사를 배우는 ‘체험의 장’으로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자연이 숨쉬는 서대문자연사박물관 연희동 안산 자락에 위치한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은 서대문구가 전국 자치단체 가운데 처음으로 건립한 자연사박물관이다.지난해 개장한 박물관은 인간과 자연관·생명진화관·지구환경관 등 3개의 주제관과 기획전시실·시청각실·가상체험실 등의 부속시설로 이뤄져 있다.전시표본과 수장품은 대형 공룡 모형을 비롯,4000여점에 이른다. 현 구청장은 “이곳에서는 각종 동·식물들을 직접 만져보고 체험할 수 있다.”면서 “또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지구와 생명체의 탄생 등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고 말했다. 특히 박물관은 유치원·초등학생들의 여름방학을 맞아 7월 20일부터 8월21일까지 7개 분야에 75개 특별강좌(정원 1500명)를 마련했다. 유치반의 경우 ▲금붕어는 내 친구 ▲집짓는 선수 거미,초등 저학년반은 ▲우리 동네 꽃나무 ▲모래야,넌 어디서 왔니? ▲바다는 기름을 싫어해요,초등 고학년반은 ▲갑옷 입은 곤충 ▲화산섬 제주도 등이다.강좌는 일요일과 월요일을 제외한 평일에 오전반과 오후A·B반 등 3개반으로 나뉘어 선택의 폭을 넓혔다. 접수는 다음달 3일(추가접수기간은 다음달 6∼10일)까지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실시한다.수강료 1만원. ●역사가 숨쉬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서대문사거리에 있는 독립문을 돌아 독립문공원을 가로질러가면 나타나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1908년 경성감옥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 뒤 3·1독립만세운동과 105인 사건,신간회 사건 등 굵직굵직한 항일독립운동에 연루됐던 애국지사들이 옥고를 치렀던 곳.1923년 서대문형무소,1945년 서울형무소,1961년 서울교도소,1967년 서울구치소 등으로 명칭이 바뀌다가 1992년 서대문독립공원으로 탈바꿈했다.이어 1998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새롭게 단장을 마쳤다.15동의 옥사 가운데 7동과 보안과청사,사형장 등이 보존돼 있다. 이 중 보안과청사를 꾸며 만든 ‘역사전시관’은 1층에 애국선열의 활동상을 대형스크린을 통해 보여주는 영상실과 기획전시실 등이 들어서 있다.2층으로 올라가면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의 의거를 3차원 입체영상으로 재현한 매직비선과 실물크기의 벽관·독방 모형 등이 눈길을 사로잡는다.또 지하1층 ‘체험의 장’은 애국지사들의 밀랍인형과 고문장면을 생생하게 재현했으며,‘유관순굴’로 불렸던 여성용 감방도 볼 수 있다.사형장에 들어서면 한 그루의 미루나무가 서있다.사형수들이 이 나무에 기대어 통곡한 뒤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현 구청장은 “하루 평균 2000여명,연간 150만명이 찾고 있다.”면서 “2001년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고이즈미 총리가 참배하는 등 매년 8만명의 외국인 관광객이 다녀가는 국제적인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서대문구에 가면…자연과 역사 체험 한걸음에

    학부모들은 여름방학 동안의 자녀 교육이 신경쓰이는 대목이다.서울 서대문구(구청장 현동훈)가 운영하고 있는 서대문자연사박물관과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등은 이같은 걱정거리를 더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시간적 노력과 경제적 비용을 크게 들이지 않아도 자연과 역사를 배우는 ‘체험의 장’으로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자연이 숨쉬는 서대문자연사박물관 연희동 안산 자락에 위치한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은 서대문구가 전국 자치단체 가운데 처음으로 건립한 자연사박물관이다.지난해 개장한 박물관은 인간과 자연관·생명진화관·지구환경관 등 3개의 주제관과 기획전시실·시청각실·가상체험실 등의 부속시설로 이뤄져 있다.전시표본과 수장품은 대형 공룡 모형을 비롯,4000여점에 이른다. 현 구청장은 “이곳에서는 각종 동·식물들을 직접 만져보고 체험할 수 있다.”면서 “또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지구와 생명체의 탄생 등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고 말했다. 특히 박물관은 유치원·초등학생들의 여름방학을 맞아 7월 20일부터 8월21일까지 7개 분야에 75개 특별강좌(정원 1500명)를 마련했다. 유치반의 경우 ▲금붕어는 내 친구 ▲집짓는 선수 거미,초등 저학년반은 ▲우리 동네 꽃나무 ▲모래야,넌 어디서 왔니? ▲바다는 기름을 싫어해요,초등 고학년반은 ▲갑옷 입은 곤충 ▲화산섬 제주도 등이다.강좌는 일요일과 월요일을 제외한 평일에 오전반과 오후A·B반 등 3개반으로 나뉘어 선택의 폭을 넓혔다. 접수는 다음달 3일(추가접수기간은 다음달 6∼10일)까지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실시한다.수강료 1만원. ●역사가 숨쉬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서대문사거리에 있는 독립문을 돌아 독립문공원을 가로질러가면 나타나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1908년 경성감옥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 뒤 3·1독립만세운동과 105인 사건,신간회 사건 등 굵직굵직한 항일독립운동에 연루됐던 애국지사들이 옥고를 치렀던 곳.1923년 서대문형무소,1945년 서울형무소,1961년 서울교도소,1967년 서울구치소 등으로 명칭이 바뀌다가 1992년 서대문독립공원으로 탈바꿈했다.이어 1998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새롭게 단장을 마쳤다.15동의 옥사 가운데 7동과 보안과청사,사형장 등이 보존돼 있다. 이 중 보안과청사를 꾸며 만든 ‘역사전시관’은 1층에 애국선열의 활동상을 대형스크린을 통해 보여주는 영상실과 기획전시실 등이 들어서 있다.2층으로 올라가면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의 의거를 3차원 입체영상으로 재현한 매직비선과 실물크기의 벽관·독방 모형 등이 눈길을 사로잡는다.또 지하1층 ‘체험의 장’은 애국지사들의 밀랍인형과 고문장면을 생생하게 재현했으며,‘유관순굴’로 불렸던 여성용 감방도 볼 수 있다.사형장에 들어서면 한 그루의 미루나무가 서있다.사형수들이 이 나무에 기대어 통곡한 뒤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현 구청장은 “하루 평균 2000여명,연간 150만명이 찾고 있다.”면서 “2001년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고이즈미 총리가 참배하는 등 매년 8만명의 외국인 관광객이 다녀가는 국제적인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8)인간이 평등할 수 있을까?-백정해방운동 (上)

    20세기 세계를 움직인 100대 사건 중 하나는 1923년 진주에서 일어난 형평사운동이었다.여러 세기에 걸쳐 인간 이하의 천민으로 분류되어 수탈과 탄압,능멸과 죽임의 공포 속에서 살아온 백정(白丁)들도 인간이라는 백정해방운동을 형평사운동이라 불렀다.일본의 부락민(部落民),유대인 차별 정책인 게토,인도의 최하층민 수드라,노예시장의 매매물건인 아프리카 흑인들과 같이,1923년 이전 한국의 백정들도 인간이 어찌 평등할 수 있느냐는 조선시대 정치이념의 제물로 희생된 우리의 이웃이었다. 형평사운동을 계획하고 탄생시켰으며,그후 십여년 동안 한국사회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인권문제를 줄기차게 제의했던 사람들 중에서 강상호(姜相鎬)와 장지필(張志弼) 두 사람을 꼽을 수 있다. ●진주 형평사운동은 ‘백정해방운동’ 장지필은 대물림한 백정 집안 후손이었다.그의 부친 장덕찬(張德贊)은 경남 의령의 백정인데 상당한 재력가였다.백정의 주된 사업인 도살업,육류판매,피혁의 건조와 가공,쇠기름(牛脂)의 생산 판매,소피(牛血)를 이용한 식품의 제조와 판매,가축의 내장과 뼈의 판매,이를 이용한 음식점의 독점적 운영은 오랫동안 백정 계급만의 전용물이었다. 이 사업은 이윤이 많이 남기로 유명한 데다 국가로부터 세금 징수의 대상도 아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생각이 깊었던 이들은 큰 재산을 모을 수도 있었다.19세기 후반 이후 서울과 지방의 토호들은 백정들의 전유물이었던 도축장 경영권을 빼앗는 농간을 부렸다.많은 백정들은 토호들의 자본에 흡수되어 신분의 억압 외에 다시 경제적 수탈 대상이 되었고,이중의 인권유린에 시달렸다. 장덕찬은 대구의 김경삼,부산의 이성순,마산의 이상윤과 박유선,진주의 이학찬 등과 함께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백정출신 부호였다.당시에는 재력가라 하여도 백정신분으로 서당이나 향교 같은 교육기관에 나가 공부할 수 없었다.백정들은 평민들과 같은 자리에 머무는 것은 물론이고 공공장소에 얼씬거리는 것도 금지되었으며,교회 설립 초기에는 일반인과 백정이 함께 예배보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장덕찬은 집에 독선생을 초빙해 자식들에게 공부를 시켰는데,장덕찬의 아들 장지필은 요즘식 가정교사 밑에서 공부하여 일본 메이지대학까지 유학하였다.행운아였던 셈이다. ●‘장지필’은 백정 출신의 부호 장덕찬은 평생토록 백정 해방을 꿈꾸며 투쟁하였다.그는 1887년 무렵 경상도 관찰사에게 백정도 패랭이를 벗고 망건을 쓸 수 있게 해 줄 것을 요구하며 경상도 71개 군에 있던 백정공동체인 도중(都中)들을 모아 시위를 벌였다.그 과정에서 곤장을 맞고 고문도 당했지만 요구를 끝까지 외쳐 경상도 백정들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었다.장덕찬에게 곤장을 가하며 백정들의 요구를 거부했던 경상도 관찰사는 이호준(李鎬俊·1821∼1901)인데 그의 아들이 한일합방을 주도한 이완용이다. 관찰사와 담판을 벌였을 만큼 재력과 식견을 갖추었던 장덕찬은 아들에게 백정 해방을 위한 투쟁정신을 물려주었다.아버지의 뜻을 잇는 장지필은 세상의 두터운 차별의식과 싸우기 위해서는 재력과 신학문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고 믿어 동경유학을 감행했고,귀국하여 백정해방 운동에 전력을 다한 백정 해방 이론가이자 실천가였다. ●‘강상호’ 양반신분으로 독립운동 헌신 반면 강상호는 당시 진주사회의 대표적인 지성인 중 한 사람으로 양반신분이며 부유한 집안의 큰아들이었다.일제 식민지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이 문맹에서 눈을 떠야 한다며 학교 세우기와 신식교육을 장려했고,직접 기미년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한 행동하는 지성이었다.애국계몽운동의 하나로서 동아일보 창간 주주로 참여했고,신간회활동 등 일제에 문화적으로 항거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장지필과 강상호가 지향하는 백정해방운동의 목표는 서로 달랐다.강상호는 민족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이 미분화된 상태에서 순진하다 할 수 있는 민족운동노선을 따른 데 반하여,장지필은 백정 고유의 산업에 일반인들이 진출하지 못하게 하여 백정계급의 경제적 토대를 지키고 장차 백정들의 삶을 향상시키고자 하였다.관념적인 백정해방운동은 성공할 수 없으며,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천한 신분인 백정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뿐이라고 믿었다.경제적 자신감이 있어야만 백정해방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두 사람이 믿는 바는 달랐지만,1923년이라는 시대상황은 한국역사상 최초의 인권해방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장지필과 강상호가 함께 움직일 수 있게 하였다. 1919년 기미만세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문화통치를 표방하였다.민중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워진 것이다.국내에는 다양한 사회운동 조직이 생겨났고,각 조직은 민족해방운동의 뜻을 폈다.겉으로는 조직 회원들이나 민중의 계몽을 표방했으나 궁극적으로는 민족해방을 바란 것이다. 민족해방운동은 크게 세 가지 갈래로 나뉘었는데,첫째는 일본에 무장 투쟁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한 민족독립운동으로 만주와 중국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애국주의 이상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치중했다.두 번째는 대종교,보천교 등의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한 운동이었고,세 번째는 3·1운동을 이끈 세력이 주도한 문화 계몽 운동이었다. 강상호가 문화 계몽 운동에 매진하고 있던 중에 진주의 대표적인 부자 백정 이학찬이 새집을 장만하여 강상호의 이웃으로 이사하였다.강상호는 이학찬의 이사를 계기로 백정들과의 교류를 시작하게 된다. 원래 진주 지방에는 여느 행정 관청이 있는 주요 지방 도시와 마찬가지로 관청 관할 아래에 백정들의 거주지가 정해져 있었다.이른바 백정마을 혹은 백정놈 동네였다. 경국대전에서 규정한 백정단취(白丁團聚) 조항에 따라 거주이전이 금지되었고 죽는 날까지 한 곳에 머물러 살았다.혹 거주지를 이탈하면 엄하게 처벌받았는데,마을 밖으로 여행하기 위해서는 관청에서 발행한 통행 증명서가 필요했다.통행증명서에는 목적지와 여행 기간이 적혀 있어서 이를 어길 때에도 무거운 처벌이 내려졌다. ●개도살 요구 거절한 백정, 매질당해 죽어 그러나 1863년 고종임금이 즉위하면서 실시한 특별사면으로 백정마을에서 살던 백정들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얻게 된다.거주이전 금지 규정이 해제되자 전국의 백정들은 숙명 같았던 옛 거주지를 벗어나 일반인들이 사는 마을 가까이로 옮겨가기 시작했고,재력 있는 백정은 마을 안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백정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강상호는 기미 독립만세 시위 이후 어느날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하였다.진주공원에서 청년들에 의해 백정이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청년들은 백정마을에 사는 백정을 강제로 데려와 개를 잡으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 백정은 청년들의 요구를 완강하게 거절하였고,결국 매질을 견디지 못해 죽었다.이후 백정들이 청년들을 고소하였지만 죽은 백정은 호적이 없으므로 그를 죽인 청년들에게 살인죄를 적용할 수 없다는 일본 경찰의 판결이 내려졌다.살인죄가 성립하려면 죽은 자의 신원이 확인되어야 하는데 아무런 법률적 증거가 없으므로 산짐승이나 벌레를 죽인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이 사건은 강상호가 백정해방운동에 적극 관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8)인간이 평등할 수 있을까?-백정해방운동 (上)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8)인간이 평등할 수 있을까?-백정해방운동 (上)

    20세기 세계를 움직인 100대 사건 중 하나는 1923년 진주에서 일어난 형평사운동이었다.여러 세기에 걸쳐 인간 이하의 천민으로 분류되어 수탈과 탄압,능멸과 죽임의 공포 속에서 살아온 백정(白丁)들도 인간이라는 백정해방운동을 형평사운동이라 불렀다.일본의 부락민(部落民),유대인 차별 정책인 게토,인도의 최하층민 수드라,노예시장의 매매물건인 아프리카 흑인들과 같이,1923년 이전 한국의 백정들도 인간이 어찌 평등할 수 있느냐는 조선시대 정치이념의 제물로 희생된 우리의 이웃이었다. 형평사운동을 계획하고 탄생시켰으며,그후 십여년 동안 한국사회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인권문제를 줄기차게 제의했던 사람들 중에서 강상호(姜相鎬)와 장지필(張志弼) 두 사람을 꼽을 수 있다. ●진주 형평사운동은 ‘백정해방운동’ 장지필은 대물림한 백정 집안 후손이었다.그의 부친 장덕찬(張德贊)은 경남 의령의 백정인데 상당한 재력가였다.백정의 주된 사업인 도살업,육류판매,피혁의 건조와 가공,쇠기름(牛脂)의 생산 판매,소피(牛血)를 이용한 식품의 제조와 판매,가축의 내장과 뼈의 판매,이를 이용한 음식점의 독점적 운영은 오랫동안 백정 계급만의 전용물이었다. 이 사업은 이윤이 많이 남기로 유명한 데다 국가로부터 세금 징수의 대상도 아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생각이 깊었던 이들은 큰 재산을 모을 수도 있었다.19세기 후반 이후 서울과 지방의 토호들은 백정들의 전유물이었던 도축장 경영권을 빼앗는 농간을 부렸다.많은 백정들은 토호들의 자본에 흡수되어 신분의 억압 외에 다시 경제적 수탈 대상이 되었고,이중의 인권유린에 시달렸다. 장덕찬은 대구의 김경삼,부산의 이성순,마산의 이상윤과 박유선,진주의 이학찬 등과 함께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백정출신 부호였다.당시에는 재력가라 하여도 백정신분으로 서당이나 향교 같은 교육기관에 나가 공부할 수 없었다.백정들은 평민들과 같은 자리에 머무는 것은 물론이고 공공장소에 얼씬거리는 것도 금지되었으며,교회 설립 초기에는 일반인과 백정이 함께 예배보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장덕찬은 집에 독선생을 초빙해 자식들에게 공부를 시켰는데,장덕찬의 아들 장지필은 요즘식 가정교사 밑에서 공부하여 일본 메이지대학까지 유학하였다.행운아였던 셈이다. ●‘장지필’은 백정 출신의 부호 장덕찬은 평생토록 백정 해방을 꿈꾸며 투쟁하였다.그는 1887년 무렵 경상도 관찰사에게 백정도 패랭이를 벗고 망건을 쓸 수 있게 해 줄 것을 요구하며 경상도 71개 군에 있던 백정공동체인 도중(都中)들을 모아 시위를 벌였다.그 과정에서 곤장을 맞고 고문도 당했지만 요구를 끝까지 외쳐 경상도 백정들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었다.장덕찬에게 곤장을 가하며 백정들의 요구를 거부했던 경상도 관찰사는 이호준(李鎬俊·1821∼1901)인데 그의 아들이 한일합방을 주도한 이완용이다. 관찰사와 담판을 벌였을 만큼 재력과 식견을 갖추었던 장덕찬은 아들에게 백정 해방을 위한 투쟁정신을 물려주었다.아버지의 뜻을 잇는 장지필은 세상의 두터운 차별의식과 싸우기 위해서는 재력과 신학문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고 믿어 동경유학을 감행했고,귀국하여 백정해방 운동에 전력을 다한 백정 해방 이론가이자 실천가였다. ●‘강상호’ 양반신분으로 독립운동 헌신 반면 강상호는 당시 진주사회의 대표적인 지성인 중 한 사람으로 양반신분이며 부유한 집안의 큰아들이었다.일제 식민지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이 문맹에서 눈을 떠야 한다며 학교 세우기와 신식교육을 장려했고,직접 기미년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한 행동하는 지성이었다.애국계몽운동의 하나로서 동아일보 창간 주주로 참여했고,신간회활동 등 일제에 문화적으로 항거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장지필과 강상호가 지향하는 백정해방운동의 목표는 서로 달랐다.강상호는 민족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이 미분화된 상태에서 순진하다 할 수 있는 민족운동노선을 따른 데 반하여,장지필은 백정 고유의 산업에 일반인들이 진출하지 못하게 하여 백정계급의 경제적 토대를 지키고 장차 백정들의 삶을 향상시키고자 하였다.관념적인 백정해방운동은 성공할 수 없으며,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천한 신분인 백정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뿐이라고 믿었다.경제적 자신감이 있어야만 백정해방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두 사람이 믿는 바는 달랐지만,1923년이라는 시대상황은 한국역사상 최초의 인권해방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장지필과 강상호가 함께 움직일 수 있게 하였다. 1919년 기미만세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문화통치를 표방하였다.민중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워진 것이다.국내에는 다양한 사회운동 조직이 생겨났고,각 조직은 민족해방운동의 뜻을 폈다.겉으로는 조직 회원들이나 민중의 계몽을 표방했으나 궁극적으로는 민족해방을 바란 것이다. 민족해방운동은 크게 세 가지 갈래로 나뉘었는데,첫째는 일본에 무장 투쟁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한 민족독립운동으로 만주와 중국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애국주의 이상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치중했다.두 번째는 대종교,보천교 등의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한 운동이었고,세 번째는 3·1운동을 이끈 세력이 주도한 문화 계몽 운동이었다. 강상호가 문화 계몽 운동에 매진하고 있던 중에 진주의 대표적인 부자 백정 이학찬이 새집을 장만하여 강상호의 이웃으로 이사하였다.강상호는 이학찬의 이사를 계기로 백정들과의 교류를 시작하게 된다. 원래 진주 지방에는 여느 행정 관청이 있는 주요 지방 도시와 마찬가지로 관청 관할 아래에 백정들의 거주지가 정해져 있었다.이른바 백정마을 혹은 백정놈 동네였다. 경국대전에서 규정한 백정단취(白丁團聚) 조항에 따라 거주이전이 금지되었고 죽는 날까지 한 곳에 머물러 살았다.혹 거주지를 이탈하면 엄하게 처벌받았는데,마을 밖으로 여행하기 위해서는 관청에서 발행한 통행 증명서가 필요했다.통행증명서에는 목적지와 여행 기간이 적혀 있어서 이를 어길 때에도 무거운 처벌이 내려졌다. ●개도살 요구 거절한 백정, 매질당해 죽어 그러나 1863년 고종임금이 즉위하면서 실시한 특별사면으로 백정마을에서 살던 백정들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얻게 된다.거주이전 금지 규정이 해제되자 전국의 백정들은 숙명 같았던 옛 거주지를 벗어나 일반인들이 사는 마을 가까이로 옮겨가기 시작했고,재력 있는 백정은 마을 안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백정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강상호는 기미 독립만세 시위 이후 어느날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하였다.진주공원에서 청년들에 의해 백정이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청년들은 백정마을에 사는 백정을 강제로 데려와 개를 잡으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 백정은 청년들의 요구를 완강하게 거절하였고,결국 매질을 견디지 못해 죽었다.이후 백정들이 청년들을 고소하였지만 죽은 백정은 호적이 없으므로 그를 죽인 청년들에게 살인죄를 적용할 수 없다는 일본 경찰의 판결이 내려졌다.살인죄가 성립하려면 죽은 자의 신원이 확인되어야 하는데 아무런 법률적 증거가 없으므로 산짐승이나 벌레를 죽인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이 사건은 강상호가 백정해방운동에 적극 관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 대한매일 민영화/ 독립정론지 대한매일의 指紋

    “엎드려 원하건대 여러분께서는 춘추의 대의로 곧은 붓을잡은 몸이 신문사에 있으니,손으로 역사의 일기를 기록하여천지의 바른 윤리를 돌리어 인민의 귀와 눈을 넓히면,인의(仁義)로 성벽을 삼고 필묵이 무기가 되어 시골군사 10만명보다 나을 것이오니,더욱 높고 깊게 힘쓰소서.” 호남창의대장 기삼연(奇參衍)이 1907년에 쓴 ‘대한매일신보사 여러분에게’란 글이다. 기삼연은 당시 대한매일신보가 의병투쟁을 상세히 보도하면서 을사5조약의 부당성과 일제의 국권침략을 비판하자 감사의 사연과 함께 ‘의병 10만명보다 나은’ 신문이란 과분한서한을 보냈고 이 내용은 그대로 지면에 실렸다. 그랬다.나라 운명이 풍전등화일 때 대한매일신보 지사들은생명을 내놓고 일제와 싸우다가 신문사를 송두리째 빼앗겼다.일제 암흑시절 홍명희선생은 신간회의 이름을 ‘시경(詩經)’의 ‘고목신간(古木新幹)’에서 취했다.고목나무에 새 가지가 돋는다는 의미였다.대한매일이 바로 그것이다.현재 발행중인 가장 오랜 역사에서 ‘독립정론지’의 새 가지를 만방에 떨치게 된 것이다.대한매일은 “마치 미켈란젤로가 돌속에 갇힌 누군가를 꺼내주기 위해 정을 들고 돌을 쪼았던것처럼”(함성호,건축가)과거 영욕의 역사를 딛고 공익과 국민복지와 민족화합을 위해 2000년대를 앞서가는 신문으로 거듭난다. 지금은 1세기 전 대한매일신보의 지사들이 맞섰던 상황과는 크게 다르다.우리 국력도 엄청나게 성장하고 국민의 교육수준은 세계 최상위권이다.그렇지만 그때와 비슷한 대목도 적지 않다.수구와 개화파 대신 보수와 개혁 세력,청·일의 간섭 대신 중·일의 거대 강국화,역외(域外) 미국의 간섭도 비슷하다.그때나 지금이나 정쟁이 모든 가치를 뒤흔들고 남북분단은 민족국가의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국가적 아젠다를 설정하고 민심을 모아 역사발전의 이정표를 세우는 건강한 언론이 없다는 점이다.국세청 세무조사에서 드러나듯이 수백억 탈세와 횡령을 일삼는 사주들과 이들에게 봉사하는 신문에서 건강한 여론을 기대할 수 없다.족벌신문이 단합하여 여론을 생산하고 왜곡하는사회에서는 다양성을 생명으로하는 민주주의가 발전하기 어렵다.선진민주 국가들은 하나같이 건강한 신문을 갖고 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프랑스의 르몽드,영국의더 타임스,일본의 아사히신문이 대표적이다.영국의 더 타임스는 40만부 발행이지만 400만부 팔리는 대중지 ‘더 선’보다 더 영향력을 갖는다. 우리는 발행부수에 연연하지 않고 정확한 보도와 논평으로정직한 국민과 함께하고 여론을 향도하고자 한다.E·H·카는 “역사가 정확을 기한다는 것은 미덕이기 전에 하나의 신성한 의무다”라 했지만 어찌 역사뿐일까.신문은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우리는 “감히 도연명이 깨끗한 국화이슬로 먹을 갈아 그 먹으로 조국 진나라의 역사를 쓰던”(鄭寅普)심경으로 정직하고 정확한 신문을 만들 것이다.‘무이유언(無易由言)’의 가르침을 배울 것이다.“쉽게 남따라서 이야기 하지 않고 가볍게 말하지 않는” 그런 신문을 만들고자 한다. 제레미 리프킨이 “모든 문화는 그 자체의 고유한 시간의지문을 지니고 있다”고 했듯이 대한매일은 고유하고 정직한 지문이 깃든 신문을 만들 것이다.지문은 사람마다 다르며그 모양이 평생 변하지 않는다.마찬가지로 대한매일은 박은식·양기탁·신채호 등 애국지사들의 지문이 묻은 민족언론으로서 세계를 살피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지면에 담을 것이다. 독립정론지의 새 출발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허나 대한매일은 지난 1세기 한국사회의 독특한 역사적 경험을바탕으로 꿋꿋히 독립정론의 외길을 걸을 것이다. ‘非所困而困焉 名必辱(비소곤이곤어 명필욕)’이라 했던가.“몸을 기대서는 안될 곳에 몸을 기대면 반드시 위험이 미친다”는 ‘역경(易經)’의 가르침이다.우리는 권력이나 정파나 재벌이나 지역주의에 기대지 않고 ‘독립정론’의 가시밭길을 가고자 한다.그리하여 대한매일의 지문을 역사에 길이길이 남기고자 한다. 김삼웅 대한매일 주필 kimsu@
  • [편지로 본 1940년대 문단秘史] (4)식민지 저항적 지식인

    근대 여성작가 중 가장 치마폭이 넓었던 최정희는 유파와연령을 초월하여 문우들과 교유했는데 그 중 소중한 것으로는 국제 입찰에 부칠만한 중량급 서간문도 포함되어 있다. 바로 김사량(金史良,본명 時昌,1914∼1950)의 편지이다.일본에서 더 유명한 김사량은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이 어떻게 살아야 했던가를 일깨워 준 근대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한전형으로 평가받고 있다.평양에서 1914년에 태어난 그는 평양고보 재학 중 배속장교와 일본인 교사 및 그들에 동조하는 조선인 교사 배척을 위한 동맹휴학을 주도해 퇴학처분을 받고는 형 시명(時明,교토제대 법학부 졸업 후 사법·행정 양과 합격,홍천·평창 군수,조선인 최초의 전매국장,8·15 후에는 중앙산림조합연합회 이사장 등을 지냄)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밀항했다.학창시절에는 연극에 관심이 많아 신협(新協)극단과 연계,장혁주(張赫宙)가 각색한 ‘춘향전’의모국 순회공연에도 참여하는 등 많은 활동을 펼치다 여러이유로 경찰에 자주 구금 당했다. 결혼 직후 하이네에 관한 논문으로 도쿄제대 독문학과를졸업(1939)한 그는 잠시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서울의 하숙집에서 출세작 ‘빛 속에서’를 썼다.이 무렵에 아마 서울의 잡지사와 문인들을 접할 기회가 있었을것인데,최정희와의 인연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도쿄제대 대학원 입학허가를 받은 그는 6월 아내와 도일,일본과 한국 문단을 잇는 가교 역할을 맡게 된다.편지에서 김사량은 매우 조심스럽게 최정희의 ‘지맥’을 추천했으면 싶었으나,이미 일본의 다른 출판사(赤塚書房)가 추진하고 있던조선문학 선집에 관여하는 장혁주가 손을 댔기에 ‘흉가’로 하는 게 어떠냐고 묻는다.몇 차례 오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편지는 최정희가 자신의 소설을 일본에 소개되기를 희망한데 대한 답신 내용이 대부분이다. 장혁주는 누구였던가.김사량보다 먼저 등단한 그는 잡지사,문인 등을 후배에게 소개시켜 주는 역할을 했던 재일조선인 문단의 대선배였다.1905년 대구에서 출생한 그의 본명은 은중(恩重),창씨개명은 노구치 가쿠주(野口赫宙,첫 창씨명은 野口이었음)로,불륜사건에 연루되어 도일,본처와 이혼,일본여자와 재혼,8·15후 아예 일본으로 귀화해 버린 인물이다. 그는 초기의 민족적인 성향과는 달리 친일화 정도가아니라 아예 혈통까지도 일본인화 해야된다는 각오로 일본여자와 결혼을 감행한 친일문학인 가운데서도 발군의 활약을 보여주었다.1952년 10월,6·25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변장한 채 일본 ‘부인구락부’ 특파원 신분으로 입국하여 취재활동을 한 뒤 일본으로 돌아가 한국을 힐난하는 글을 써서 당시 문학단체가 법석을 떨게 했던 장본인이다.그는 아예 일본문학보국회에 가입하여 활동에 열을 올렸던 인물로한국을 영원히 등진 조국상실자가 되었다. 최정희의 ‘지맥’은 평론가 한식(韓植)이 번역을 맡은 것으로 드러나며,편지에 직접 쓰지는 않았지만 김사량은 ‘모던 일본’에다 이광수의 ‘무정’을 번역했는데,아마 이 사실은 고의로 언급하지 않은 것 같다.김사량은 ‘조광’에장편 ‘낙조’(1940.2∼1941.1)를 연재하면서 모국어 문제에 대하여 매우 겸허하게 최정희의 조언을 구하고 있지만사실 그는 ‘양국어 작가’로 손색이 없었다.그가 ‘삼천리’에 발표한 글로는 잡문 ‘조선문학과 언어문제’(1941.1)와 소설 ‘지기미’(1941.4)인데,이 두 사실을 편지에 대입해 읽으면 그와 최정희의 교유가 대략 1939∼1941년임을 알 수 있다.중요한 사실 한가지를 짚고 넘어가자.‘문예춘추’는 1935년 일본최고의 아쿠다가와 (芥川)문학상을 제정했는데,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김사량이 이 상의 후보작으로 뽑혀 일약 일본문단의 유망주가 되었다(1940.2).1941년12월 9일 새벽 진주만 기습에 따른 사상범예방구금법으로감금당했고,유명세만큼 그에게 부하되는 역사적인 책무도커서 친일을 강요받았으나 거절했다. 일본 문학인들의 구명운동으로 이듬해 1월29일 석방된 그는 이내 귀향,조용히 지내려 했지만 강제동원을 피할 수 없었다.이효석(1942년 작고)이 있었던 평양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사가 된 건 1944년 4월.강제 친일에 동원되면서도 일본문인들과의 술자리에서 격렬하게 식민통치를 비판하던 이투사는 1945년 2월 조선출신학도병 위문단으로 중국에 파견,일정을 마친 뒤 탈출,화북조선독립동맹에 참여하여 떳떳하게 해방을 맞았다.이때의 탈출 투쟁기는 ‘노마만리(駑馬萬里)’란 제목으로 남아있다. 1945년 11월 서울에서 그의 희곡 ‘호접’이 단성사에서 공연되는 등 광복 후 한국 좌익문단의 정화에 일조했던 그는이듬해 평양으로 돌아가 6·25때 종군작가로 참가,후퇴 도중 원주 부근에서 지병인 심장병으로 낙오된 채 행방불명된 게 그의 최후다(안우식 지음,심원섭 옮김 ‘김사량 평전’ 참고).김사량은 자신의 친일행각이 강제에 의한 것임을 문학인들에게 공공연하게 실토했던 점과 모험을 무릅쓴 극적인 탈출로 민족해방투쟁에 나섰던 문학인이었다는 점에서식민지시대 저항적 지식인의 전형으로 세계 저항문학사에손색이 없는 작가이다. 극적인 생애는 한설야(韓雪野)도 마찬가지다.기생 이름 같은 낭만적인 필명과는 달리 1900년 함주(함흥)에서 태어난그는 1976년 북한에서 사망할 때까지 영욕을 두루 겪은 비극적인 문학인의 한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아버지는 군수를 지낸 인물인데,유명한 한의학자 이제마(李濟馬)의 제자로,홍범도(洪範圖)등의 의병활동을 무마시키라는 일제의 강요를 거절코 고향을 떠나 피신했다.한설야는 경성제일고보에다니다가 서모(庶母)와 불화로 귀향,함흥고보로 전학,3·1운동에 관련되어 구금 체험을 한다.중국,일본 등지를 떠돌거나 유학 한 뒤 ‘조선문단’으로 등단한 그는 서울에 머물렀다가(1925∼1926),아버지가 많은 빚을 남기고 죽자 중국 동북지방으로 이주했다가 이듬해(1927) 귀국하여 카프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문학과 사상 연구회,‘한설야 문학의 재인식’).한설야가 조선일보에 입사한 것은 1932년경인데 함남지역에 특파됐다가 본사에 왔을 때는 경영권 문제로 매우 복잡 미묘할 때였다.창간 초기부터 경영진의 시국 순응 성향과 편집진의 민족의식 지향이 갈등관계를 유지했던조선일보는 계속 사주가 바뀌면서도 반일논조 때문에 정간과 필화가 잇따랐다.신간회(新幹會)운동으로 안재홍(安在鴻)사장이 구속되는 등 혼란을 틈타 고리대금업을 하던 채권자 임경래(林景來)가 조선일보 경영권을 주장하여 조병옥(趙炳玉)·주요한(朱耀翰)의 정통 편집팀과 대결,두 개의 조선일보 발행이라는 희극이 연출되다가 방응모(方應謨)가 참여,부사장을 거쳐 발행인이 된 것이 1933년 7월(사장은 조만식).이 혼란 속에서 한설야는 학예부에 근무하며 노동 현장소설의 신기원이란 평가를 받은 이북명(李北鳴)을 발굴하여 ‘질소비료공장’을 연재 중단 당하는 등 카프노선에 충실한 언론인으로 활동한 것 같다. 당시 정황을 한설야는 단편 ‘세로(世路)’에서 너무나 자세히 언급하여 한국언론사의 충실한 증인 역할을 해주고 있다.소설은 자신이 회사로부터 해직 통고서를 받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왜 그렇게 됐는가에 대한 자초지종을 회상하고있다.등장인물은 모두 실명이지만 사정상 이니셜을 썼는데,쉽게 알만한 인물들이 그대로 나온다.새 경영진은 기구와인사 개편을 통하여 그때까지 신문사의 주류였던 M일파(투옥 경력자 등으로 묘사)를 약화 시키는데,이 과정에서 인간적인 배신감과 사회적인 공분이 폭발한 한설야는 술자리에서 변절한 동료의 뺨을 후려친 게 화근이 되어 권고 사직을 당했다. 조선일보 사사(社史)에 의하면,1934년 1월 1일자로 대폭적인 인사이동이 있었는데,특히 이 소설의 중요한 모티브가된 M(문석준)의 좌천도 바로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미뤄 볼 때 한설야의 퇴직도 이 무렵일 것이다.이 문석준은 1943년 함흥에서 한설야와 함께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한설야는 1944년 5월 석방) 당하는 주인공이다.1934년은 그에게 매우 불행한 한 해였다.해직 후 8월 그는 카프 2차사건으로 구속됐기 때문이다.달필인 한설야의 편지는 함흥에서보낸 것인데,아마 1941∼2년초 경 ‘삼천리’가 ‘대동아’로 개제하기 직전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최정희가 한설야에게 잡지에 재수록할만한 짧은 작품을 추천해 달라는 청탁에 대한 회답 형식인 이 편지에서 그는 ‘강아지’와 ‘능금’을 천거했다.앞의 작품은 ‘한설야 단편집’에 실려 있는데,그게 1941년 7월에 나왔으며,뒤의 것은 1940년 간행 단편집 ‘귀향’에 게재된 것으로 볼 때,그리고 ‘대동아’개제가 1942년 3월부터였음을 감안하면 이 편지가 씌어졌던 시기는 밝혀질 것이다.이 무렵 그는 함흥에서 서점·극장·인쇄소 등에 손을 대는 등 생업과 창작에 전념하면서 해방의 날을 준비하고 지냈다.여담이지만 한설야는 광복 후북한에서 ‘김일성장군 전기’를 비롯한 여러 작품을 쓴 한편 소련(1947),평화옹호 세계대회 참석차 프랑스(1949) 등지를 방문하는 등 중추적인 역할을 하다가 1962년 비판당한 후 불행한 최후를 마치고 작품도 판금,아직도 전면적인 해금이 안된 상태에 있다. 임헌영 문학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 [편지로 본 1940년대 문단秘史] (1)김동환 가족사

    한 여인이,생신을 보름 남짓 앞둔 91세의 한 여인이 1993년 3월 18일 세상을 떠났다.‘백구 신원혜지묘(白鷗 申元惠之墓)’라는 묘비명만으로는 이 여인의 죽음이 한국 문학사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아리송할 것이다.그러나 그녀의 이름위에 있는 ‘파인 김동환(巴人 金東煥)’이란 각자(刻字)를 보노라면 ‘아,파인의 본처가 그때까지 생존했더란 말인가’라는 자못 회고조의 감탄사가 나올 법하다.1903년 원산에서 태어난 신원혜가 서울 정신여고를 졸업,블라디보스토크,간도,원산 등에서 중학교 교사로 있다가,서사시 ‘국경의밤’으로 이미 명성을 얻은 두 살 연상의 시인 김동환과 결혼한 건 1926년 3월 14일이었다. 가난한 시인의 아내이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3남 1녀를얻은 그녀는 1942년 작가 최정희(崔貞熙)와 남편의 관계가알려지자 시인의 “우유부단한 처신을 안타깝게 지켜”보다가 기어이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고 그 극심한 어머니의 분노를 이겨내지 못한 아버지는 끝내 여관으로 잠시의 거처를 정하였다”고 셋째 아들 김영식(金英植·68)은 회상한다.“그 후 어머니는 교회 일과 모교인 정신여고 동창회 봉사활동에 전념하면서 아픈 상처를 홀로 달래고” 지냈는데,나중 동네 아낙들에게 “아무리 남편이 속을 썩이더라도 집에서 나가 달라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한다(김영식,‘아버지 파인 김동환-그의 생애와 문학’). 조혼이 아닌 어엿한 신여성과 연애를 거쳐 사랑이 그득한결혼을 했던 파인의 예기치 못했던 탈선이 문단에서는 가십이었으나 그의 고향을 비롯한 애독자들로부터는 마침 휘몰아친 친일문학과 함께 따가운 매도의 대상이었다.어쩌면 이 두가지 탈선은 오히려 동시에 수행되면서 인간과 민족의존재론적 본질을 벗어나 원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해준 도피처 역할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파인의 친인척과 고향 사람들로부터 동정과 애정을 받은 것은 정작 남편이 버린 여인 신원혜였다.아니,파인 조차도 그녀를 버릴 수 있었을까. 서울이 인민군에 점령당한 직후인 1950년 7월 초 파인은 홀연히 귀가했다.피신 차 이뤄진 이산가족 상봉은 비록 짧았으나 단란했는데,이내 최정희의 자수 권유를 받고 나간(7.23) 뒤 그대로 납북,생사도 모르게 분단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앓은 게 이 일가족이었다.가족이랬자 두 아들은 일찍세상을 떠나버려,셋째 영식과 딸 영주(英珠·63)뿐이었다. 영식은 서울 경복고를 거쳐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대통령 비서실,주불 한국대사관 등에서 근무하다 정년을 맞았고,영주는 정신여고와 이화여대 국문과를 나와 시인으로 등단,캐나다 밴쿠버에 살고 있다. 이 한많은 여인이 죽음을 앞두고 마련해 둔 유품 속에는파인의 사진과 애증이 교차하는 몇몇 증빙 서류들,그리고자신이 묻힐 묘소와 묘비명이 포함되어 있었다.살아서 쫓아냈던 지아비를 죽어서야 한 문패 안으로 맞은 것이다.보따리 속에 파인이 보낸 편지도 한 묶음 있었다.파인은 맨몸으로 집을 나갔으니 여러 유품들은 저절로 신원혜가 간직했을 터여서 여간 소중한 자료가 아니리라는 기대에 부푼다.신원혜는 파인에게 보냈던 기라성같은 문인들의 편지를 그 격변의 역사를 헤치면서 고이 간직해 왔었다.신혼초 서울의정동,다동을 거쳐 종로구 돈의동 74번지로 호적을 옮긴 뒤,적선동(1927.5),인사동(1930.7),견지동(1933.12),필운동(1935.10),옥인동(1936.11),통인동(1938.1),효자동(1940.2)을전전하다가 1941년 6월 12일 적선동 183번지의 목조 기와집으로 이사,거기서 해방을 맞았다. 만주로부터 돌아온 피난민의 딱한 사정 때문에 방세도 안받고 그대로 살게 했던 이창규씨가 어느날 정전(停電)이 되자 성냥불을 켜들고 초를 찾다가 넘어져 석유난로에 점화,순식간에 집이 불타 버렸다.바로 1946년 12월 12일 오후 7시쯤,파인의 유품이,그리고 그가 ‘낭자 신원혜’에게 보냈던 달콤한 연애편지가 잿더미로 변해버린 순간이다.일가는창성동 자교(紫橋)교회 목사 사저에서 신세를 지다가 청운동(1948.5∼1953.2)으로 옮겨 6·25와 1·4후퇴를 겪으면서도 행여나 남편이 돌아오려나 싶어 몇 년간 이사도 하지 않았다.이제 파인과 신원혜는 갔고,사랑의 편지도 불타버렸다.그러나 1947년부터 납북당했을 때까지의 격랑을 헤치며 파인이 한 지아비와 육친의 정으로 아내 신원혜와 자녀에게보냈던 32통의 편지는 문단 비사의 차원을 넘어 가난했던글쟁이의 인생론적인 비애를 느끼게 한다. 중학생 아들(영식)과 초등생 딸(영주)을 아내에게 맡긴 빈털터리 시인 김동환은 이 무렵 최정희로부터 지원(1942년생),채원(1946년생) 두 딸을 가진,허리가 휘청거리는 아버지였다.최정희와의 보금자리였던 덕소에서 8·15를 맞은 파인의 심경은 실로 착잡했을 것이다.그의 뇌리에는 선비적 지조의 상징인 매월당 김시습의 18대 후손으로서 민족운동에투신했던 화려한 투쟁 경력들-민요 전설시의 거봉,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중앙위원,침략주의에 항거했던민완 기자,잡지 ‘삼천리(三千里)’의 폭발적인 성공과 민족의식이 강한 각종 출판물 간행,신간회 집행위원 등등이스쳤을 것이다.이런 경력 때문에 오히려 더 부정적으로 보였던 친일행위의 오점들은 그로 하여금 발빠른 자성과 회오의 눈물을 흘리게 했다.“진흙 속에 빼앗긴 두 발 겨우 뽑고/오래 가뒀던 옛 날개 와락 펴 멀리 쳐다보니”(‘돌아온 날개’),“새나라 백성들은 이래서는 안된다/우리는소생하지 않으면 안된다”(‘소생’)는 참회와 함께 “올해엔콩팥을 맘대로 심어/천리객은 몰라도 십리의 벗 맞아들여/소찬에 약주라도 싫도록 대접할꺼나”(‘起耕’)라는 은인자중의 자세를 보여줬다.반민특위 때 그가 자수(1949.2.28)할 수 있었던 심리적인 배경도 여기서 비롯한 것이다. 그가 이승만 정권이나 한민당 추종이 아닌,조선민주당 대변인격으로 정당활동에 몸담았던 것(1946.2)은 나름대로의민족관을 지녔기 때문으로 풀이된다.혼란 속에서 숙원이었던 잡지 ‘삼천리’ 복간에 온 정력을 쏟았는데,민족 독립노선이나,문인으로 발 빠르게 자아비판한 채만식을 부각시킨 걸로 봐서 다분히 참회적인 자세를 취했다.을지로5가 여관에서 업무를 시작한 파인은 틈틈이 아내와 아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납득시키려고 난필의 쪽지를 보냈다.우편 배달이 아닌 사환이나 인편을 통해 직배시킨 경우가 많았던 시절이라 겉봉에는 ‘영식 모(英植 母)’ 혹은 아예 ‘영식 전(展)’이라 쓰고는 원고지나 적당한 백지에 절박한 용건만적어 보냈다.서른 두 통의 편지중 가장 빈도수가 많은 내용은 잡지 일로 인쇄소에 붙어 있어야 한다든가,당장 돈이없으니 우선 얼마만 보내고 며칠 뒤 더 보내겠다는 등등이다.신원혜의 이성적인 결벽과는 달리 어린 남매들이 아버지에게 귀가와 생활비를 독촉하는 전화를 했던 데 대한 회답으로 보인다. 이 역마살의 시인을 신원혜와 함께 묻고 딸 영주는 “기다리면 다시 올 사람인가/시를 만드시던/파인,내 아버지//하늘 밑을 파고/그를 묻었다.//그가 다니던 길도/함께 넣었다.//눈물도 못 내고/기어 가/나도 묻힌다.//아 아,내 아버지 파인”(‘아름다운 작별’)이라고 마음을 추스렸다.이렇게 담담해질 수 있는 시인으로서의 김영주와는 달리,아버지로부터 버림 받았던 딸로서의 김영주는 무척 신랄했다.“친일행동과 여자 문제로 부끄러운 아버지 책을 써서 알리는 것은 정말 내가 부끄러워요”라며,“아버지는 실패한 인간입니다.자신만 실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세상에서 천국의 모형을 이루어 살라고 주신 한 가정의 책임을 저버리므로 해서,어머니와 우리 자녀는 가장아픈 불행을 체험했으며,어머니의 고통과 수치와 배반에 대한 증오와 세상이 보내는 그 부끄러운 수근거림을 어떻게 감당하셨는지 놀라울 뿐입니다”(김영식,위와 같은 책)라고 통매했다. 그러나 파인의 애틋한 조각편지들은 실패한 인간의 자료로서가 아니라 역사의 멍에를 헤어날 길 없었던 인정미 넘치는 나약한 한 서정시인이 치러야만 했던 가정과 사랑과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갈기갈기 찢어진 상처일 것이다. “몸 무고히 학교에 잘 다니느냐.마음에 어느 날 잊은 적이 없었다”거나,“추위가 심하니,남대문 야미(暗)시장에 가서,영식이나 영주의 외투 한 벌 사서,한 아이라도 입히오”,“한방의 침술 운운하지만 큰 아이들 때(장남 영사는 16세로 1942년에,차남 영창은 17세로 1947년에 사망)에 보아도도무지 믿을 사람들이 못 되니 더 보이지 말고,내가 정초에 영식이를 데리고 전문 신의(新醫)들에게 보여 충분히 치료할 터이니,아이에게 겁나는 말을 일체 말고,내가 가기를 기다려 주오”라는 등등의 구절에 이르면 이 시인이 얼마나가슴으로 울었던가를 알법도 할 것이다.“내일 산소에 가는 일은 중지하고,5월 단오에나 가기로 하오”란 구절은 바로 두 아들이 묻혔던 미아리 공동묘지로,거길 가면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묘소에 절하라’고 말한 후 묵념을 했고,어머니는 쌍봉 무덤 앞에 엎드려 흐트러진 모습으로” 울부짖었다고 김영식은 회고한다.살뜰한 지아비와 부정(父情)이 넘치는 글이기에 오히려 다른 서간문에 못지 않게 돋보이는 이 글들을 쓴 주인공이 어째서 가정을 버릴 수 있었을까. 임 헌 영 문학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선생 평전 나왔다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1888∼1964)선생의 평전이 민음사에서 출간됐다.저자는 정치학자로 ‘정치전기학’을 연작 형태로 내오고 있는 김학준 현동아일보 사장겸 발행인. 총 13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기본적으로 가인의 삶을 편년체로 서술하고 있다.제3∼7장에서는 가인이 경성전수학교교수로 있다가 32세 되던 해인 1920년 변호사로 전신해 조선공산당사건,김상옥의사사건 등 독립운동 사건을 변호한사실과 조선물산장려운동,조선민립대학 설립운동 및 신간회중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한 사실 등을 사료로 적시하고 있다. 직업적으로 볼 때 법률가인 그의 삶은 해방후부터 본격적으로 꽃피기 시작한다.미 군정청 사법부장 및 법전 기초위원으로 신생 대한민국의 법률토대를 마련하였으며,1948년정부수립 후에는 초대 대법원장으로 임명돼 1957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법전 편찬과 법원 조직 정비에 헌신하였다.특히 이듬해 반민특위가 결성되자 특별재판부 재판관장을 맡아 친일,반민족행위자 처단에 진력하였는데 이 일로 당시이승만 대통령과 불편한 관계를 갖기도 했다. 정년퇴임후 그는 ‘정치인 김병로’로 변신,인생의 후반부를 정치권 언저리에서 마감하였는데 그의 정치역정은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순탄치만은 않았다.제5대 민의원 선거에 고향인 전북 순창에서 출마한 그는 육군법무관 출신의후배 법조인인 홍영기 후보(전 국회부의장)에게 패배하기도했다.이 때 주변에서 그에게 홍후보 진영에서 불법선거운동을 했다며 선거무효및 당선무효소송을 내라고 권하자“선거는 한번 하지 두번 하나”라는 한마디로 거절하기도했다. 그는 민정당 대표 최고위원,국민의 당 대표 최고위원을 지냈으며,1963년에는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에 맞서 범야권 대통령후보 단일화에 앞장서기도 했다. ‘평전’은 가인 개인의 삶은 물론 그가 살았던 시기,즉우리 현대사의 정치상황과 당대 정치인들의 활동상을 엿볼수 있는 재미도 주고 있다. 정운현기자 jwh59@
  • 매일신보‘서울기사 색인집’나와

    ‘매일신보’는 총독부 기관지였다는 점에서 흔히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그러나 이 신문은 일제강점기35년간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발행됐다는 점에서 일제시대연구에서는 필수불가결한 자료로 꼽힌다. 최근 서울시립대 부설 서울학연구소는 매일신보에 실린 서울 관련기사를 모아 ‘서울관련 기사색인’(1910∼1945)을펴냈다.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팀이 펴낸 이 색인집은서울학연구소에서 지난 97년 추진한 ‘매일신보 서울 관련기사 탐사’의 성과를 편집,출간한 것으로 서울을 비롯해 양천과천 시흥 광주 양주 고양 등 수도권 일대를 대상으로 했다. 크게 ▲정치·행정 ▲경제·산업 ▲사회·풍속 ▲문화·학술 ▲민족운동 ▲기타 등 6개 분야로 나누고 그 밑에 다시세목을 두었다.한 예로 ‘행정’의 경우 총독부·총독·정무총감·경기도·도지사·경성부·경성부윤·경성부회·중추원·정(町=현재의 동)·총대(總代=현 동장)·관리 등으로 세분했다.또 ‘민족운동’항목에는 공산·노동·청년·학생·여성·소년·신간회·형평사·물산·아나키즘 등의 소항목을만들었다. 특히 ‘학술·예술’의 마지막 부분에 ‘인물’을 소항목으로 다뤄 김옥균 손병희 안창호 여운형 박헌영 등 당대 인물에 관 기사색인을 담아 일제강점기 인물사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되도록 했다. 연구책임자인 서중석교수는 “서울관련 핵심내용을 중심으로 기사의 경중을 감안,일부를 제외하긴 했으나 전체적으로는 고르게 탐사한 결과”라고 말했다.서울시청 홍보관에서 1만원에 구입할 수 있다. 정운현기자 jwh59@
  • [‘6.15’이후의 북한](8)비전향장기수 최하종씨

    지난 9월2일 평양은 들끓고 있었다.64명의 비전향 장기수가 송환되는 이 날을 북측은 임시휴식일(공휴일)로 정했다.아침 10시 판문점을 통해 송환된 비전향 장기수들이 평양시 초입인 통일거리 환영행사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35분.고층아파트촌인 통일거리는 환영인파로 발디딜 틈도 없었다. 이날 북으로 돌아간 비전향 장기수중 한 사람인 최하종씨(73).그의개인사는 우리 현대사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면에서 특기할 만하다. 최씨가 남으로 내려온 것은 62년 3월.‘5·16혁명’ 주체중 한 사람이었던 삼촌 최주종(작고·주택공사 사장 역임)장군을 만나러 내려왔다.최장군은 박정희 전대통령의 만주군관학교·일본육사 후배 출신. 최씨는 함경북도 성진(현 김책시)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중국 하얼빈공대와 김책공대를 나와 당시 국가계획위원회에 근무중이던,북의 청년 엘리트였다.남으로 내려온 이유를 그는 “삼촌과 통일문제를협의하기 위해”라고 밝혔다. 그런데 서울에 와서 삼촌에게 연락하자마자 그는 바로 체포됐다.삼촌은 “그것이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길이다”면서 “재판정에서 ‘강제로 내려왔다’고 진술해라.그러면 내가 빼내 주겠다”고 했다.그러나 최씨는 끝내 “자진해서 내려왔다”고 진술했고 결국 무기형을 받았다. 최씨가 감옥문을 나선 것은 36년 만인 1998년.당시 그는 만70세였다.이북에서 태어나 생의 절반 이상을 이남에서 보내야 했던 그에게는남쪽과는 또 하나의 큰 인연이 있다.바로 북에 두고 온 부인이 서울출신이었던 것이다.부인의 이름은 김재숙(70).대한매일에서 출판한‘북한인명사전’에는 상업성 국장을 지내고 은퇴한 것으로 나와 있다. 김씨는 일제하 신간회 서기장을 지낸 독립지사 김항규 선생(93년 건국포장 추서)의 딸이다.김선생은 해방후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면서 이승만 정부에 참여를 끝내 거부했다.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선생,허헌 변호사와는 일제하 결의형제를 한 사이였지만 김병로 선생이 단독정부에 참여한 후로 그와 결별했다.48년 김선생이 서울의 한달동네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을 때 김병로 대법원장이 경찰 사이드카를 앞세우고 달동네 상가를 찾아오는 바람에 동네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고 한다. 김여사는 48년 월북해 허헌 집안에서 기거했고,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를 나와 상업성에 근무하던 55년,최씨와 결혼했다.그러나 부부는 결혼한 지 6년 만에 헤어져야 했다. 9월2일 오후 7시 평양시민들의 열광적인 환영 속에 환영행사를 마친 비전향 장기수들은 고려호텔 식당에서 가족들과 둘러앉았다.마침내마주앉은 최하종·김재숙 부부.최씨에게 감회를 물었다.“우선 기쁘고요,우리는 다른 이산가족들처럼 헤어지지는 않아도 되니 울 일은없겠구나 했는데 판문점에서 아내의 얼굴을 본 순간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신들을 돌봐준 남쪽 사람들의 고마운 사연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신준영기자 현지르포 junyoung@
  • 전남 완도 ‘빛나는 抗日의 섬’

    전남 완도 출신인사들은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신간회,광주학생의거는 물론 일본의 노동운동에도 깊이 관여했다.지역안에서도 수의위친계활동,일심단사건,고금학교의거,소안배달청년회 사건 등 주목할만한 항일활동을 펼쳤다. ‘완도군 항일운동사’는 바로 ‘군 단위로는 전국에서 가장 격렬한항일운동을 펼친 곳’이라는 이 고장 사람들의 자부심을 담은 기록이다.완도군항일운동기념사업회가 펴낸 이 책에는 완도의 항일운동과관련한 ▲사진기록 ▲지도자 ▲항일노래 ▲관련논문 ▲재판기록 ▲신문기사가 충실히 담겼다. 국토의 서남단에 자리잡은 고장에서 어떻게 이토록 활발한 항일운동이 펼쳐질 수 있었을까.박찬승 목포대 사학과교수는 “완도는 해태양식에서 비롯된 경제적 기반에,보수적인 양반계층이 적었고,해외와 물적·인적교류가 활발했던 목포항이 가까워 개화사상을 일찍부터 받아들였다”고 말한다.그 결과 다른 어느 지역보다 교육·계몽운동이 활발하여 사립학교들이 다수 설립됐고,이 학교들이 항일운동의 기반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완도에는 1913년 사립소안중화학원을 시작으로 노화영흥학원·조약도 약산학교·신지학교·군외 교인학교·노화대성학교·금당학교·모도학원·완도대신학원·노화중통학원·노화충도학원,하도학원·방축리일신학원·횡간학원 사립학교들이 다투어 설립됐다.특히 1905년 토지조사사업이 실시됐을 때 일제가 소안도 등 여러 섬을 왕실에 넘겨주자 4명의 소안면민대표는 토지소유권 반환청구소송을 냈고,13년 동안의 법정투쟁끝에 1922년 승소했다.이른바 ‘소안면 토지계쟁사건’으로,이 때도 소안면민들은 재판에 이긴 것을 기념하여 1만 400원을 갹출,사립소안학교를 세우기도 했다.당시 사립학교의 설립자와 교사들은 당대의 지도자들이었고,그 명성은 함북지방과 서울·중국으로도퍼져 항일운동을 하던 명망가들이 자원해서 완도로 찾아들기도 했다. 완도의 자생적 항일운동은 1914년에는 소안에 본부를 둔 ‘수의위친계(守義爲親契)’로 이어진다.상부상조의 전통적 계로 포장했으나 실제로는 전남북과 경남북을 범위로 한 항일조직이었다.유능한 인재를뽑아 독립운동의 전초기지인 중국과 일본에 파견하고 군자금을 모금하여 중국의 독립군에게 전달하는 한편 중국에서 육혈포를 반입하여국내조직에 배포했다.1920년 100여명의 회원들로 조직된 배달청년회도 기억할만 하다.이들은 친일면장이나 일제경찰과는 어떤 말도 하지않는 이른바 ‘불언동맹’을 맺어 실천하기도 했다고 ‘완도군…’은기록하고 있다. 서동철기자
  • 광복55주년 학술행사

    광복 55주년을 맞아 각계에서 마련한 항일독립운동 관련 학술심포지엄이 눈길을 끈다.문화관광부가 ‘8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한 백야 김좌진(金佐鎭)장군의 항일투쟁사를 재조명한 학술회의(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 주최)를 비롯해 한국 근현대사의 역사의 현장인 서대문형무소와 항일운동사 심포지엄(서대문구청 주최),그리고 개항 이후 ‘한국 민족주의의 변천과 향후 전망’주제의 학술행사(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주최)가 그것.앞의 두 행사는 10일,마지막 행사는 11일 각각 마련됐다.각 학술행사마다 4건 정도의 학술논문 주제발표와 토론이 마련돼 있다.여러 논문 가운데 일부를 발췌,소개한다. 金佐鎭장군의 항일운동 노선과 정치이념 ‘청산리전투의 영웅’ 백야 김좌진 장군은 대종교(大倧敎)적 민족주의와대종교적 공화주의를 정치적 이념으로 추구하였으며,구체적으로는 단군(檀君)을 정점으로 한 ‘민주적 이상국가 건설’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아울러 김좌진은 대종교인으로 민족주의를 강조하여 국제성을 강조한 사회주의에는 반대했으며,그의 피살은 양대 세력의 분열을 책동한 일본의 계책에 의한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박환(수원대) 교수는 10일 개최된 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 주최 ‘김좌진 장군의 항일운동’ 주제의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북만주에서의 김좌진의 항일독립운동-투쟁노선과 정치이념을 중심으로’제하의 논문에서 이같은 주장을 폈다. 박 교수에 따르면,백야는 철저한 대종교주의자였다.1925년 그가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한 북만주지역은 대종교 신자가 많이 사는 곳으로 그는 대종교를 바탕을 두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같은 전통은 북로군정서 시절부터 계속 이어져온 것이었다.그러나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1926년 화요회파 중심의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북만지역 영안현(寧安縣)에 설치되자 민족주의 색채가 강했던 대종교 계열은 국제성을 강조한 공산주의 계열과 대결양상을 빚게 되었다. 한편 1925년 중국 군벌과 일본군간에 소위 ‘삼시(三矢)협정’이 체결된 후 대종교에 대한 포교금지령과 함께 대종교 세력이 약화되면서 이를 틈타 공산주의자들의 침투가 우려되자 대비책으로 무정부주의이념을 수용했다. 신민부의 후신으로 1929년 결성된 한족총연합회는 권력의 중앙집중을 부정하고 자주적 조직의 연합체를 지향하는 아나키즘 조직으로 공산주의를 반대했다.백야는 독립운동과 반공운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무정부주의사회를 건설한 것이다.결국 그는 대종교적 민족주의에서 대종교적 무정부주의로 이념과 체제를 전환하였다.그의 죽음은 이같은 ‘노선변화’에서 이미에고된 것이었다. 구한말부터 1930년 그가 피살될 때까지 일생을 항일투쟁에 바친 그를 암살한 사람은 조선인 공산주의자 박상실(朴尙實)이었다.박 교수는 그의 피살은“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의 한족총연합화의 대종교적 민족주의 세력과 무정부주의 세력간의 분열 및 한족총연합회와 공산주의 세력 간의 분열책”이라고추정했다.즉 일제는 북만주지역 한인독립세력을 전멸시키기 위해 화요파의간부 김봉환(金鳳煥)을 사주,하수인 박상실을 이용해 백야를 살해했다는 것. 이를 두고 박 교수는 “일제는 화요파를 이용,백야를 처단함으로써 화요파와 한족총연합회를 이간시키고 아울러 한족총연합회의 무정부주의자와 대종교적 민족주의자의 분열도 촉진시키는 ‘이중효과’를 노린 계책을 꾸몄는데화요파 공산당이 바로 여기에 넘어간 것 같다”고 주장했다. 정운현기자 jwh59@. *국제화시대 한국 민족주의. 국제화·세계화시대에서 자칫 편협한 국수주의 정도로 몰리기 십상인 ‘민족주의’.근대이후 우리역사에서 민족주의는 어떻게 변전(變轉)돼 왔고,또앞날은 어떤 모습일까.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는 11일 세종문화회관 컨벤션센터에서 ‘국제화시대 한국 민족주의의 성찰과 전망’이란 주제로 학술행사를 가진다. 이날 행사에서 첫 주제발표자인 김도형(연세대) 교수는 미리 배포한 논문(‘개항 이후 세계관의 변화와 민족문제’)에서 “우리 근대사에서 민족문제는 봉건체제를 극복하고 제국주의의 침략으로부터 나라의 자주권을 유지하는 과정,즉 한국근대사의 전개과정에서 싹텄다”고 밝혔다.김 교수는 민족문제 인식의 논리를 주로 대외적인 관점을 중심으로 검토하면서,지배층 내부에서 전개된 근대변혁론을 흔히 척사론(斥邪論),양무론(洋務論),문명개화론,변법론(變法論)으로 구분하였다. 김 교수는 이 가운데서 척사론자·개화론자는 민족문제 인식에 한계가 있었다고 지적했다.척사론자의 경우 세계화를 거부한 한계,개화론자의 경우 사회진화론의 패배주의에 흘러 외세 의존적인 형태를 띠거나 계몽운동에서 동양주의에 함몰되는 위험성을 가졌다고 지적했다.반면에 변법론적 민족주의는유교를 개혁하고 서양의 신학문을 수용,근대적 개혁을 추구한 점에서 가장바람직한 모델이었다고 주장하고 대표적 인물로 단재 신채호를 들었다. ‘일제 지배하 한국 민족주의의 형성과 분화’라는 논문에서 박찬승(목포대) 교수는 “한국 민족주의는 초기 사회진화론·근대주의 등과 결합,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론을 주된 담론으로 시작하였으며 1910년대 들어 민족평등주의 사상이 싹텄고,이는 3·1운동기 민족자결론과 연결돼 확산됐다”고 주장했다.이어 “20년대 자치운동론을 놓고 찬반론이 난무한 가운데 좌우로 분열된 후 결국은 제국주의의 식민주의 논리를 제대로 비판하지 못한채 변질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특히 박교수는 “식민지하의 한국의 근대민족주의는 자유주의·개인주의와 제대로 결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체주의적 속성을강하게 띠었는데 이는 해방 이후 전제적인 정치권력에 의해 민족주의가 이용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강조했다. 해방후 민족주의와 관련,서중석(성균관대)교수는 ‘냉전체제와 한국 민족주의의 위상’이란 논문에서 “일제하 민족주의의 과제가 반제민족해방이었다면,해방후 민족주의의 주된 과제는 민족국가 형성과 식민체제 청산,즉 탈식민화에 있었다”며 “국가주의라고도 불리는 분단국가 의식이나 냉전이데올로기에 매몰된 것은 민족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주장했다.따라서 미국의 군사력에 전적으로 의존한 이승만정권의 반통일적 ‘통일론’은 민족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아울러 서 교수는 “민족 고유문화의 강조는 민족주의 현상으로 이해될수 있으나 1970년대 이후 유행된 대단군주의는 민족주의에서 일탈한 것”이라고 지적했다.한편 김영한(서강대) 교수는 ‘국제화시대 한국 민주주의의 진로’라는 논문에서 “한국의 민족주의가 나아갈 진로·방향은 ‘통일지향의 민족주의’가 돼야 한다”며 “통일은 민족과 국가가 하나됨과 동시에 냉전체제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을 의미하기 때문에 민족주의에 내포된 통합과 해방의 논리를 모두 실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운현기자. *한민족의 독립운동과 서대문형무소.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소재 구 서대문형무소(현 독립공원)는 한국감옥사의 대명사이자 한국 근현대사에서 우리 민족 수난사의 대명사이기도하다.일제 하에는 숱한 애국지사들이 이곳에서 옥고를 치렀으며,해방후에는반독재 민주투사들이 투혼을 삭여야했던 곳이기도 하다. 서대문구청(구청장 이정규)은 10일 오후 2시 독립공원내 독립관 지하강당에서 ‘한민족의 독립운동과 서대문형무소’라는 주제로 학술심포지엄을 열었다.이번 학술행사는 서대문형무소의 역사적 의의에 대한 학술적 조명이 전무한 상황에서 처음 열린 행사로 의미있는 행사였다. 이날행사에서 남도영 동국대 명예교수는 ‘서대문형무소의 민족사적 의의’라는 기조발제 논문을 통해 “서대문형무소는 일제 식민지 지배에 대한 우리민족의 수난과 저항이 집약된 곳이자,일제의 잔학상을 세계만방에 고발한현장이며 민족정기를 보여준 성전,민족문화 수호의 생생한 현장”이라고 주장했다.남 교수는 1908년 서대문형무소가 이곳에 설치된 이후 1987년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되기까지 80년동안의 역사적 성격을 정리하면서 우리 근현대사에서 서대문형무소가 차지하는 의미를 재조명하였다. 순국선열유족회가 발행하는 월간지 ‘순국’에 ‘서대문형무소 근현대사를장기연재한 후 지난해 이를 단행본으로 묶어 출간한 바 있는 김삼웅 대한매일 주필은 ‘3·1독립운동과 서대문형무소’라는 논문에서 “3·1항쟁으로구속자만 1만8,000여명에 달했는데 이 가운데 서대문감옥에만 3,000여명이수감됐었다”고 밝혔다.김 주필은 3·1항쟁으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거나 이곳에서 순국한 애국선열들을 중심으로 살핀 뒤 “이곳이 일제하 항일운동의 성지”라고 말했다. 이밖에도 김 주필은 3·1항쟁 직후 서대문감옥의 간수를 지낸 권영준의 회고록 ‘형정(刑政)반세기’를 비롯하여 손병희 등 수감 애국지사들의 자서전,서대문형무소 전옥(典獄,교도소장)을 지낸 일본인의 회고기 등을 참고로 당시 수형자들의 참담한 감옥생활을 생생히 복원하였다. 이어 성신여대 이현희 교수는 ‘임시정부 수립 이후의 독립투쟁과 서대문형무소’라는 논문을 통해 임시정부 이후 8·15 해방까지 이곳에 투옥돼 옥고를 치른 애국선열들을 집중 조명하였다.이 교수는 “임정요인을 비롯해 독립군,6·10만세의거 주동자,수원고농학생항일운동 주동자,신간회사건 관련자,수양동우회사건,조선어학회사건,단파방송사건 등 국내외에서 전개된 항일투쟁 관련인사들이 이곳에서 옥고를 치렀다”며 “서대문형무소는 비탄의 역사로 얼룩진 현장”이라고 말했다. 애국지사로서 이날 학술행사에 참가한 이규창 선생은 ‘나의 서대문형무소옥중체험기’를 통해 자신의 옥중체험을 생생히 증언하였다.우당 이회영 선생의 자제인 이 선생은 1935년 3월 상해에서 친일파 이용로를 총살,처단한뒤 일경에 피체,본국으로 압송돼 1936년 4월 징역 1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마포형무소로 이감돼 복역중 8·15해방으로 출옥했다.이 선생은미결수로 서대문형무소 복역중 벽을 사이에 두고 옆방의 애국지사와의 통방(通房)통신법 소개를 비롯해 감방내에서의 애국지사와의 교류,재판과정 등 수형생활 전반을 증언했다. 정운현기자
  • [대한광장] 홍범식, 아 홍범식

    충청남도 금산에는 장렬한 비석이 하나 서 있다.1910년 한일합방 당시 순절(殉節)한 금산군수 홍범식의 비문이다.그 기개와 충절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며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내용이기에 숙연하지 않을수 없다.비문의 내용은 생략하거니와 유사한 비문이 충청북도 괴산 시내에도세워져 있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한다. 1910년 8월 일제는 대한제국을 병탄하였다.1894년 동학농민전쟁 이후 군대를 주둔시켜 강점하다가 마침내 그 야욕을 드러내고야 말았던 것이다.조정은속수무책이었고 부패한 관리들은 일제의 강점과 병탄을 오히려 환영하였으니 통한하고 통탄할 일이 그 아니고 무엇이랴! 송병준 이완용과 같은 친일매국노들에 의하여 한일합방조약은 체결되었고 마침내 고종은 눈물어린 칙서(勅書)를 상하 관리들과 각 수령들에게 내렸다. 그 칙서가 도착하던 날,41세의 젊은 군수 홍범식은 의리와 충절을 지키고자결연히 목숨을 끊었으니 이 어찌 비분장렬하지 않은가! 1910년 한일합방 당시 나라가 망했다는 비보를 듣고목숨을 끊은 사람은 수십 명쯤 된다.그런데그 중에서 만조백관과 수령관리들은 거의 없었지만 이범진 공사와 홍범식 금산군수만이 결연히 자결했던 것이다. 봉건 유교의 근간이던 주자학의 덕목은 군신과 부자의 의리를 가장 소중하게 여겼는데 여기서 군신(君臣)의 덕목은 백성의 나라에 대한 충성을 말하는것이다. 그 덕목으로 수양을 하고 입신을 해서 관리로 재임하던 대다수의 지배계층들은 당연히 나라가 망한 것에 대한 책임을 통감해야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당시 재직하던 60% 이상의 관리들이 일제에 고개를 숙이고 여전히 자리를 지켰다는 사실이다.합방조인식 현장에서 목숨을 끊어야할 고관대작들은 기가 막히게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본천황이 하사하는 합방은사금과 작위를 받았고 중하급 관리들 역시 대부분 일제에 고개를 조아리고 구차한 목숨을 유지하며 일신의 영화를 쫓았다. 아,그러나 어찌 세상에 의인이 없었으랴! 여기 홍범식 의사가 있다.41세의장년,지조있는 현직 군수 홍범식은 한 치의 망설임이 없이 나라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조금이라도 갚겠다는 뜻으로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그러니 그의순절 앞에서 황제 고종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500여년사직(社稷)을 보전해온 나라 조선이라면 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기개를가진 자가 많았어야 한다. 하물며 그 유교의 덕목이야말로 인간의 도리라고그토록 강조하는 지배계층의 태만과 배신에 이르러서 우리는 할 말을 잃어버린다. 그렇다면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홍범식은 누구인가? ‘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의 부친이다.그리고 신간회의 맹장이자 저명한 국어학자였던홍기문의 조부이다.또한 그는 나라를 통치하던 사대부로 정승판서가 대를 끊지 않던 명문거족 출신이다.그런 그가 자신이 속한 계층의 이데올로기를 실천하고자 마지막 수단인 죽음을 택한 것이니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그러므로 그의 기개와 의리를 생각한다면 민족 전체의 스승으로 모셔야 할훌륭한 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홍범식만한 의사가 있었다는 것은 아주 자랑스러운 일이지만,1948년북한으로 넘어가서 돌아오지 못한 홍명희 때문에 그 빛이 가려진다면 이는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충북 괴산에는 그의 생가가 있는데 수백년 풍상을 이고 서 있는 역사적 건축물이니 이를 보전하여 존경의 예를 표하는 것또한 우리 의무의 하나라고 믿는다.8월 한일합방이 있던 치욕의 달에 우리는고개숙여 홍범식 의사의 장렬한 죽음을 생각해야 하리라. 인간이 사는 도리를 배워야 하는 이 여름은 무척 덥다. [김승환 충북대 교수·국문학]
  • 구국의 뜻 되새기자/ 독립유공 이젠 이념의 굴레 벗어야

    일제하 항일독립운동을 벌인 애국지사 가운데는 명백한 독립운동 공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서훈을 받지못한 경우가 상당수 있다.그 이유는대개 두 가지로 압축된다.첫째,조선공산당 등에 가입해 좌익활동을 했거나또는 해방후 월북한 자 둘째,건국후 간첩죄 등의 죄명으로 실정법상 처벌을받은 자 등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당국의 미포상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우선 독립유공자 포상은 일제하 독립운동 공적에 대한 포상인만큼 해방 이후의 행적을 이유로 포상에서 배제한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것이다.또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인 경우 좌익활동이 독립운동의 방편이었을 경우 이를이념에 구애없이 포괄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최근 남북한 관계개선을 계기로 ‘이념의 굴레’에 묶인 독립유공자에 대해 적극적인 포상정책으로 전환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3·1의거 10년 뒤인 1929년 11월 발생한 ‘광주학생의거’의 주역으로 의거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 그로 인해 최종선고에서 징역 4년의 최고형을받은 인물로 장재성(張載性)이란 인물이 있다.4·19후 민주당정부는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건국훈장을 주기로 결정했다.그러나 5·16후인 1962년 3월 1일 당시 독립유공자 공적심사 주무부처였던 내각사무처는 돌연 장씨에 대한 국민장(3등급·현 독립장)서훈를 취소한다고 발표했다.내각사무처는 서훈취소 이유로 신원조회 결과 장씨가 “해방후 조선공산당에 가입,활약하다가 1948년 2월 월북,공산당 대표자회의에 참석했다가 남파된 후 체포돼 7년형을 받고 복역중 6·25 후퇴시 피살된 사실이 밝혀졌다”고 발표했다.동일한 사안에 대해 정권마다 독립유공자 포상에 대한 잣대가달랐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 하겠다. 장재성이 반공이데올로기의 희생자라면 죽산 조봉암(曺奉岩)은 정치적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일제 당시 3·1의거 참가 등으로 3차례에 걸쳐 8년여동안 옥살이를 했고,해방후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 부의장을 지낸 조봉암은 독립유공 공적은 물론 대한민국 정부수립에도 공이 적지않은 인물이다.그러나그에 대한 독립유공 포상은 지금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그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유공자가 달고 있는 ‘빨갱이’ 꼬리표와는 또 다르다.죽산에게는‘간첩죄’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고 있다.이승만정권 시절 진보당을 창당,급진적 정치노선을 표방했고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이승만을 위협하기도 했던 죽산은 ‘국가변란’을 기도한 간첩혐의로 59년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그러나 그가 이승만의 정적으로 몰려 ‘정치재판’에서 억울하게 희생됐다는 사실은 여러가지 정황·증거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한편 죽산 사후 그의 동지 및 유족들은 그의 명예회복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왔으나 아직까지 그에 대한 사면·복권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그에 대한독립유공 포상 역시 한 발자국도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보훈당국은 ‘국가안전에 관한 죄를 범한 자로서 형을 받은 자는 그 서훈을 취소한다’는상훈법에 의거,그에 대한 포상을 거부하고 있다. 보훈당국으로선 실정법에 의해 사형집행을 받은 자가 사면·복권이 안된 상태에서 포상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그러나 문제는 독립유공자 포상제도가 공적 자체보다는 이념의 굴레와 정치적 잣대에 휘둘려 왔다는 사실이다.현행 독립유공자 포상제도가 적잖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보훈처 관계자들 역시 일부 수긍하고 있다.통일시대를 맞아 독립유공자포상과 관련,일대 정책전환이 요구되고 있는 시점이라고 하겠다.지난 95년광복 50주년을 맞아 그동안 이데올로기 문제로 포상에서 제외됐던 이동휘(李東輝)선생 등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에 대한 포상이 실시된 것이 그 첫걸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난달 분단후 첫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계기로 남북관계가 급속도로 호전되면서 해방후 월북,북한정권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출신 인사들에 대한 포상문제도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임꺽정’의 저자이자 1927년 결성된 민족 단일조직인 신간회(新幹會) 부회장을 지낸 벽초 홍명희(洪命熹·내각 부수상 역임),국어학자 출신으로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돼 징역 6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이극로(李克魯·조국전선 의장 역임)선생 등이 대표적 인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한 정치학자는 “통일시대를 앞두고 민족사 차원에서 이들에 대한 독립유공포상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이는 남북간 역사적 동질성을 모색하는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jwh59@. *23년 黃鈺사건 주도 金始顯의사. 생전에 무려 일곱 차례에 걸쳐 24년간 감옥살이를 한 초인적인 애국지사가있다.감옥생활 가운데 16년은 일제하에서 였으니 독립유공 공적이 결코 적지 않다.의열단원 출신으로 1923년 소위 ‘황옥(黃鈺)경부사건’의 주모자로체포된 김시현(金始顯)의사가 그 주인공이다. 김 의사는 거듭된 거사-투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해방을 맞은,몇 안되는 지사형 애국지사다.그러나 김 의사에 대한 독립유공 포상이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유족측은 “보훈처가 지나치게 신중을 기한 나머지 서훈이 지연되고 있다”며 보훈당국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김 의사에 대한 포상이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은 김 의사의 공적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해방후 김 의사와 관련된 정치사건의 ‘전과딱지’가 김 의사의 독립유공 포상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김 의사는 1954년 1월 이승만 대통령 암살미수사건에 연루돼 사형선고(나중에 무기로 감형됨)를 받고 복역중 4·19혁명으로 풀려났다.평소 의협심이 강했던 김 의사는 이승만 대통령이 헌정질서를 짓밟고 독재정치를 펴자 동지유시태(柳時泰)와 함께 그를 처단하려다 미수에 그쳤다.이 일로 구속된 김의사는 4·19의거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후 석방되었으며,특별사면(1960.6.25)까지 받았다. 김 의사의 아들 김봉년(金峯年·78)씨는 “부친이 당국으로부터 특별사면을받은 만큼 그 사건과 관련해서는 원인무효가 됐다고 본다”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 [김삼웅 칼럼] 일제시대 三節士

    역사나 민족문제에 무관심하다가도 3월이면 숙연해지는 사람이 적잖을 것이다. 아직 봄이기에는 바람결 매운 이계절에 우리는 조국해방을 위해 일제와싸우다 가신 선열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오늘의 지도자들을 돌아본다. 참혹했던 일제시대에도 자랑스런 한국인이 많았다. 그들의 희생으로 해방을맞았고 망국사를 독립운동사로 고쳐쓸 수 있게 되었다. 한국사는 변혁기나 국난기에 의롭게 희생된 지사들을 묶어 시대정신으로 받드는 전통을 갖고있다. 백제말 성충·흥수·계백의 삼충(三忠), 고려말 정몽주·이색·길재의 삼은(三隱), 청국에 끝까지 항복을 반대하다가 척화신으로 청나라에 붙잡혀가 살해당한 삼학사(三學士), 온몸을 던져 일제와 싸운 삼의사(三義士)가 대표적이다. 이런 전통으로 식민지시대 돈독한 학문적 바탕에서 절개를 지키면서 끝까지일제와 싸운 단재(丹齋)신채호, 만해(萬海)한용운, 심산(心山) 김창숙선생을삼절사(三節士)로 부르면 어떨까. ‘절개가 있는 사람’을 일컫는 ‘절사’가 어찌 이들 뿐이랴만 세분은 출생연도나 옥고·활동·업적에서 유사한 부분이 너무 많고, 생존시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올해는 단재 탄생 120주년이고 만해와 심산은 119주년이다. 왜 삼절사일까. 본래 ‘삼절(三節)’은 공자가 주역을 너무 여러번 읽어서‘위편(韋編)’이 세차례나 떨어졌다는 ‘위편삼절’의 고사에서 유래한다. 또다른 의미는 “세가지의 뛰어난 일”을 뜻한다. 여기서는 고사나 사전적의미보다 ‘절개를 지키면서 싸운 선비’의 뜻에서 3절사로 부르고자 한다. 단재는 한말과 일제시대 실천적 지식인의 전형으로서 언론·역사·독립운동을 한 흔치않은 인물이다.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권업신문의 주필을 지내면서 항일구국의 필봉을 날린, 언론의 한 분야만으로도 독보적 역할을 했다. 조선상고사·독사신론·조선사연구초 등 사학자로서도 독보적 업적을 남기고‘조선혁명선언’집필 등 독립운동과 중국의 일제감옥에서 옥사당한 것만으로도 위대한 독립운동가로 대접 받는다. 만해는 동학운동에 뛰어들고 불교계 대표로 33인에 선정되어 3·1운동을 주도하고, 옥중에서 ‘조선독립의 서’를 쓰고, 신간회를 지도하고 불교관계항일단체인 만당사건으로 구속되고 시문학과 불교개혁의 기념비적인 ‘님의 침묵’과 ‘불교유신론’을 쓰고 국내에서 끝까지 버티면서 창시개명을 거부하는 등 비타협 노선을 견지했다. 독립운동·시문학·불교재건 등 각분야에서 독보적 역할을 했다. 심산은 매국노의 목을 베라는 상소문을 올리고 국채보상운동에 참가하고 파리강화회의 ‘파리장서’를 주도하고 망명하여 상해임시정부 의정원부의장을맡고 북경에서 단재와 잡지 ‘천고(天鼓)’를 발간하고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14년형을 선고받고 앉은뱅이가 되도록 고문을 당하고 건국동맹남조선 책임을 맡고 ‘자서종요(字書綜要)’‘벽옹70년회상기’등의 저술을 남겼다. 세분은 고결한 인품과 불굴의 독립정신,극심한 고문과 옥고를 겪으면서도 신념을 지킨 한국선비의 사표가 되었다. ‘곧지 않으면 바르지 못한다’는 동양의 전형적 지식인상이다. “아! 과거 수십년 역사야말로 용자(勇者)는 침을 뱉고 욕할 역사가 될 뿐이며 인자(仁者)로 보면 상심할역사가 될 뿐이다.”(단재‘조선혁명선언’) “개성 송악산에서 흐르는 물은 만월대의 티끌은 씻어가도 선죽교의 피는못씻으며 진주 남강에 흐르는 물은 촉석루 먼지는 씻어가도 의암에 서려있는논개의 이름은 못씻는다.”(만해 ‘출옥 후 연설’) “성인의 글을 읽고도 세상을 구제하던 성인의 뜻에 깨우침이 없으면 이것은 거짓 선비다.”(심산‘벽옹73년회상기’) 단재는 추운 겨울에도 꼿꼿이 서서 세수를 했다. 일본놈 천지에 동서남북어느쪽으로도 허리를 굽힐 수 없다는 오기였다. 만해는 주위에서 성북동에 심우당이란 거처를 마련해주자 동남향 창문을 손수 뜯어 북향으로 고쳤다. 총독부가 보이는 쪽에 창문을 낼 수 없다는 독기였다. 심산은 모진 고문 끝에 앉은뱅이까지 되어 평생을 병 속에 살아왔다하여 누군가 그를 벽옹이라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농을 한즉 그는 그후 자기를‘벽옹’으로 불렀다. 앉은뱅이도 자랑스럽다는 결기였다. 김삼웅 주필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