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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42)안의현감(安義縣監) 연암 박지원의 행정론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42)안의현감(安義縣監) 연암 박지원의 행정론

    경남 함양군 안의면 안의초등학교 교정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비석 하나가 서 있다.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 선생에 관한 역사와 선생께서 활동하셨던 18세기 영조 정조시대의 조선 지성사와 사회사의 한 단면까지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사적비(事蹟碑)다.위대한 문학가로서의 면모와 탁월한 행정가로서의 면모를 함께 느낄 수 있으며,특히 안의현감이라는 지방의 한 작은 고을을 다스리는 행정관 시절의 흥미로운 일화들은 정치와 권력의 남용으로 고통받는 이 시대를 향하여 무언의 꾸짖음을 던지고 있다. 오늘은 산 좋고 물 좋은 지리산 아래 함양 안의면의 오월 녹음을 주우며 그 푸르고 향그러운 색깔 속에 살아있는 한 지성의 인간과 세상을 향한 말씀을 들으려 길을 떠난다. 연암 박지원 선생을 두고 칭송하는 글귀는 매우 많다.‘그의 문장은 천마(天馬)가 하늘을 나는 것 같아 굴레를 씌우지 않았건만 자연스럽게도 법도에 다 들어맞는다.그러므로 그의 문장은 문장 가운데 으뜸이라 할 만하며,뒷 사람들이 배워서 이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글과 ‘영국에 셰익스피어가,독일에 괴테가,중국에 소동파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박지원이 있다.’는 글이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이같은 선생은 흔히 ‘양반전’‘허생전’ 등 부패한 사회상과 타락한 양반 사회를 풍자적 기법으로 통렬하게 비판한 소설가로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선생의 나이 44세 때 청나라 여행을 계기로 국내 보수파들의 극렬한 비난을 무릅쓰면서 쓴 ‘열하일기’는 당시 문단에 충격을 던진 놀라운 문체로서 선생의 글이 단순히 글 재주에 의지한 것이 아니라 시대와 인간의 삶을 새로운 지평으로 이끌고 가기 위한 위대한 통찰력과 상상력이 결합된 신선함의 상징이었다.여기에서 선생은 행정가 혹은 정치가로서의 안목과 구체적 능력을 암시하기도 했다. ●나이 50에 임금분부로 마지못해 벼슬길 이렇듯 천하 제일가는 문장가로 널리 알려진 선생이었지만 한사코 과거시험을 거쳐 벼슬길에 나아가는 일은 극력 회피했다.주위의 권유가 하도 잦고 간곡하여 몇 차례 과거시험장에 나간 적이 있었다.그러나 답안지를 작성한 뒤에는 이름을 적지 않았고,글 대신 그림을 그려 놓거나 엉뚱한 시편들을 대신 적기도 했는데,이 때 선생이 지은 글은 곧잘 큰 유행이 되기도 했고 많은 이들로 하여금 감탄과 아쉬움을 함께 자아내기도 했다.심지어 임금의 명령으로 과거시험장에 억지로 나간 적도 여러번 있었지만 모두 이름을 적지 않았다.벼슬이나 권세가 깊은 학문과 향기 짙은 문학세계를 해칠 수 있다는 선생의 청정한 지조,혼탁하고 광분한 지성사를 꾸짖어 바로잡을 능력을 갖추지 못한 채 세상에 나아가면 더욱 세상을 어지럽힐 뿐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정직과 청빈을 집안의 가훈으로 이어받은 선생 또한 몹시 가난하게 살았다.가난과 고난 속에서도 마치 독서하는 군자처럼 살았던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떴는데,선생이 나이 50세 때 임금의 거듭된 분부를 차마 뿌리치지 못해 음관(蔭官)으로 벼슬길에 나간지 반 년도 못 된 때였다.아내를 여읜 지 얼마 안되어 다시 맡며느리의 상을 당한 뒤로는 끼니 챙겨 줄 사람도 없이 19년여를 혼자 살았다.그 고적하고 불편한 생애의 후반에 이르러서야 선생의 학문과 행정가로서의 세계가 더욱 깊고 넓게 완성될 수 있었다. 선생이 참으로 엉뚱하게도 경상도 안의현감이라는 지방 목민관으로 부임한 것은 1792년 1월이었다.1796년 봄에 서울로 돌아갈 때까지 5년 동안 안의현감을 지내면서 남긴 업적은 2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공직자와 정치가들에게 변함없는 교훈이자 반드시 닮아야 할 목표로 남아 있다.53세에 안의현감으로 부임한 선생 앞에 맨 먼저 던져진 과제는 아전들의 오래된 폐단이었는데,공금횡령과 현감을 속이고 우롱하는 행동이었다.다른 하나는 공금횡령을 부추기는 주변의 권유와 부정부패를 일삼아야만 출세할 수 있다는 공공연한 현실이었다. ●군량미 향곡 9000섬 야금야금 도둑질 지방관청의 실무 담당자들인 아전은 모두 그 지방 출신자들인데다 오래도록 아전으로 지낸 터여서 관내의 모든 일을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거기에 비해 서울에서 임명되어 오는 현감의 임기는 정해져 있지 않아서 언제든지 바뀔 수 있었다.따라서 현감은 짧은 임기 동안에 안의지역에 관한 일들을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떠나는 일이 흔했다.이같은 사정을 알고 있는 아전들이 고의적으로 현감의 임기를 되도록 짧게 만들기 위한 수작을 부리는 폐습이 뿌리 깊었다.부임하는 현감으로 하여금 안의 지역의 행정 업무에는 아예 손도 못대게 하기 위해 교활한 함정을 파서 빠뜨렸다.아전 상호간의 비리를 적은 투서를 익명으로 현감에게 보내는 것이었다.투서자가 익명이기 때문에 투서에 적힌 당사자를 소환하여 조사하면 으레 시치미를 잡아 떼면서 누명을 덮어 썼다고 항변했다.이같은 투서사건을 조사하느라 시일을 보내다보면 현감 본연의 업무는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고,그러는 사이에 현감이 무능하다거나 죄없는 아전들을 잡아들여 족치면서 뇌물을 요구한다는 투서가 서울로 보내졌다.결국 현감은 서울로 불려가거나 다른 지역으로 겨갔다. 아전들의 이같은 행동은 자신들이 저지른 공금횡령 사실을 은폐시키기 위한 계획적인 짓이었다.아전들이 저지르는 공금횡령의 대표적인 사례는 군량미로 책정된 곡식인 향곡(餉穀)을 도둑질하는 것이었다.각 고을에서 백성들로부터 거두어들인 대동미 중에서 일부는 서울로 올려보내고 나머지는 여러 가지 용도에 대비하기 위해 지방관청에다 보관해 두고 있었는데,이 곡식을 아전들이 야금야금 도둑질하여 선생이 안의현감으로 부임했을 때는 무려 6만여 휘(열 다섯 말이나 스무 말을 일컫는 수량의 단위)나 되었다.10말을 한 섬으로 치면 무려 9000섬이나 되는 엄청난 곡식이었다.아전들의 고질적인 횡령으로 국가와 지방관청은 늘 재정부족으로 허덕였다.선생은 특유의 직관과 지혜로서 아전들의 농간을 혁파하고 그들이 훔쳐 낸 공금을 모두 환수했다.그 과정에서 어느 한 사람도 죄를 묻거나 궁지에 몰아 넣지 않고 깊이 뉘우치면서 기쁜 마음으로 죄를 갚도록 함으로써 안의 사람들로부터 커다란 존경을 받기 시작했다. 선생은 과오를 저지른 아전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칠 수 있도록 다양한 교훈과 모범을 보였다.선생의 정직함과 청빈함이 아전들에게 교훈이 되었다.앞서 간 수많은 현감들의 탐욕과 위선이 아전들을 공금횡령으로 밀어 넣은 것이라고 선생은 말했다.오늘날의 저 많은 국가 공직자들과 지도자들이 다시 살펴봐야 할 두렵고 또 두려운 역사적 교훈이자 민주주의가 제대로 되기 위한 철학이다.이렇게 채워진 곡식을 두고 서울의 중앙관청 고관들로부터 나눠 갖자는 유혹이 있었다.어차피 없어도 좋은 것이므로 나눠갖자는 제의였다.또한 늘그막에 가난 때문에 지방 수령 노릇을 하니까 적당히 챙기면 가난은 면할 수 있으리라는 중앙의 벼슬아치들이 예사로 주고받는 말은 선생으로 하여금 더욱 청빈하게 만들었다.빈번한 흉년 때마다 굶주리는 백성들을 도울 때 선생이 한결같이 정성을 쏟은 것은 얻어 먹는 사람의 인권과 명예를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또한 부득이 아랫사람에게 곤장을 쳐야 할 경우에는 곤장질이 끝난 후 반드시 사람을 보내 맞은 곳을 주물러 멍을 풀게 했다. ●죄 묻거나 궁지에 몰지않아 모두 감복 “고을 원 노릇은 좋은 일이지만 사람을 매로 다스리는 일만큼은 몹시 괴롭고 싫다.”고 했다. 선생은 지방관청 행정가가 가장 공력을 많이 들여야 할 것으로 몇 가지를 꼽아 실천했다.가난한 사람을 돕되 가난의 원인을 해결해 주는 것,상업과 농업의 중요성만큼 장사하고 농사 짓는 사람의 인권과 명예를 존중해 주는 것,농민들의 노동력을 능률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청나라에서 실시하는 여러 가지 농기계를 제작하여 보급하는 것,지역민들이 자신들의 고장에 대한 긍지를 갖고 살도록 하기 위해 지역 문화를 발전시키는 것들을 꼽았다. 선생의 이같은 위업은 조선 후기 타락한 양반 관료들의 부패와 탐학의 만연으로 가려져 있었지만,오늘 다시 선생의 청렴과 결백한 행정가로서의 삶은 우리 시대를 향해 또 한 번 꾸짖는다.너는 왜 공무원이 되었느냐고. 선생은 부인과 함께 황해도 장단구 송서면 대현리에 묻히셨는데,지금 누가 그 무덤의 풀을 베고 술잔을 올리는지 알 길이 없다.
  • [조정래의 세상보기] 인간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이 문제를 놓고 새삼스럽게 마음 무거워진 당신의 우울을 이해합니다.저도 그 새삼스러움에 맞닥뜨려 우울하기 때문입니다. 저 수천년 전부터 인간은 인간을 알고자 했습니다.그러나 그 일은 지난하기 그지없어 결국은 철학이라는 학문체계까지 이루게 되었습니다.그리고 무수한 철학자들이 그 답을 찾아내려고 골몰해 왔습니다.그러나 그 성과는 아주 보잘것없이 미미했습니다.왜냐하면 인간이란 그만큼 복잡미묘하고 애매모호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라크에서 벌어진 포로 학대를 보고 마음 우울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고,인간 존재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회의하지 않은 사람도 없지 않을까 합니다.그러나 인간이란 그렇게 잔인하고 야비한 존재라는 것을 불현듯 확인해야 하고,그럴 때마다 우리는 슬픈 우울에 잠길 수밖에 없습니다.지금이 인간과 문화에 대한 인식이 약했던 중세도 아니고 인권 존중을 인류의 최상의 가치로 공동인식하고 있는 ‘문화의 세기’에 그런 일이 저질러져 우리의 슬픔은 더 깊습니다.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세계는 ‘21세기는 문화의 세기이며 평화의 세기’라고 합창을 했습니다.당신은 그 아름다운 말을 믿었다고 했습니다.저도 믿었습니다.아니,믿고 싶었습니다.그런데 21세기는 첫발부터 전쟁으로 시작되었습니다.“지옥에 다녀온 기분이다.그 지옥을 우리가 만들었다는 게 문제다” 이라크의 포로 학대 장면을 담은 비공개 사진과 비디오를 본 미국 상·하의원들 중 한 사람이 한 말입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지성인인 촘스키 교수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서 그 부당성을 처음부터 냉정하게 비판해 왔습니다.그 부당함에 더하여 미국은 급기야 포로 학대의 지옥까지 만들었습니다.지금 미국을 향해 쏠리고 있는 세계인들의 우울한 눈초리를 세계의 최강국이라는 미국은 의식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21세기가 문화의 세기이고 평화의 세기라고 했던 것은 몽상적 희망사항일 뿐이었습니다.당신이 회의하고 있는 인간의 속성상 그 희망은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20세기를 돌이켜보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20세기를 보내면서 세계의 지식인들은 20세기의 특징을 세 가지로 요약했습니다.전쟁과 학살의 세기.전지구적 공해 유발의 세기.과학 발달의 세기.두 가지는 부정적이고,한 가지는 긍정적인 평가였습니다. 첫번째로 전쟁과 학살을 꼽은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20세기 100년 동안에 지구상에서 전쟁이 없었던 것은 겨우 13일 정도이고,그 줄기찬 전쟁 속에서 인간은 인간을 1억명이나 죽였던 것입니다.돈 1억이 아니라 사람이 1억입니다.그것이 인간입니다.서로서로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탐욕을 위하여 인간은 거침없고,서슴없고,가차없이 상대방을 죽이는 존재입니다. 20세기와 함께 사회주의권이 몰락해 자본주의는 아무런 견제세력 없이 21세기를 독주하게 되었으니 그 탐욕은 얼마나 커졌겠습니까.그래서 그 시작이 이라크 침공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신은 인간을 긍정할 수 없는 것을 괴로워했습니다.그건 당신만의 괴로움이 아니라 인간을 생각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갖는 괴로움이고 외로움일 것입니다.이 세상에 생명 있는 것들은 수없이 많지만,인간처럼 동류끼리 동류를 그렇게 줄기차게 죽여온 일이 없고,더구나 효과적으로 많이 죽이기 위해 머리 싸매고 연구해가며 수많은 무기를 만들어낸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을 긍정하지 않고서야 무슨 의미로 살 수 있겠습니까.또한,인류의 역사 속에는 받들고 우러를 수 있는 참되고 인간다운 인물들이 적지 않았습니다.그런 사람들이 가르치고 실천한 것을 본받아 세상이 바르게 되어 가기를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당신의 우울 앞에서 더 이상 다른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저의 우울이 됩니다. 작가·동국대 석좌교수
  • [조정래의 세상보기] 인간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이 문제를 놓고 새삼스럽게 마음 무거워진 당신의 우울을 이해합니다.저도 그 새삼스러움에 맞닥뜨려 우울하기 때문입니다. 저 수천년 전부터 인간은 인간을 알고자 했습니다.그러나 그 일은 지난하기 그지없어 결국은 철학이라는 학문체계까지 이루게 되었습니다.그리고 무수한 철학자들이 그 답을 찾아내려고 골몰해 왔습니다.그러나 그 성과는 아주 보잘것없이 미미했습니다.왜냐하면 인간이란 그만큼 복잡미묘하고 애매모호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라크에서 벌어진 포로 학대를 보고 마음 우울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고,인간 존재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회의하지 않은 사람도 없지 않을까 합니다.그러나 인간이란 그렇게 잔인하고 야비한 존재라는 것을 불현듯 확인해야 하고,그럴 때마다 우리는 슬픈 우울에 잠길 수밖에 없습니다.지금이 인간과 문화에 대한 인식이 약했던 중세도 아니고 인권 존중을 인류의 최상의 가치로 공동인식하고 있는 ‘문화의 세기’에 그런 일이 저질러져 우리의 슬픔은 더 깊습니다.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세계는 ‘21세기는 문화의 세기이며 평화의 세기’라고 합창을 했습니다.당신은 그 아름다운 말을 믿었다고 했습니다.저도 믿었습니다.아니,믿고 싶었습니다.그런데 21세기는 첫발부터 전쟁으로 시작되었습니다.“지옥에 다녀온 기분이다.그 지옥을 우리가 만들었다는 게 문제다” 이라크의 포로 학대 장면을 담은 비공개 사진과 비디오를 본 미국 상·하의원들 중 한 사람이 한 말입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지성인인 촘스키 교수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서 그 부당성을 처음부터 냉정하게 비판해 왔습니다.그 부당함에 더하여 미국은 급기야 포로 학대의 지옥까지 만들었습니다.지금 미국을 향해 쏠리고 있는 세계인들의 우울한 눈초리를 세계의 최강국이라는 미국은 의식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21세기가 문화의 세기이고 평화의 세기라고 했던 것은 몽상적 희망사항일 뿐이었습니다.당신이 회의하고 있는 인간의 속성상 그 희망은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20세기를 돌이켜보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20세기를 보내면서 세계의 지식인들은 20세기의 특징을 세 가지로 요약했습니다.전쟁과 학살의 세기.전지구적 공해 유발의 세기.과학 발달의 세기.두 가지는 부정적이고,한 가지는 긍정적인 평가였습니다. 첫번째로 전쟁과 학살을 꼽은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20세기 100년 동안에 지구상에서 전쟁이 없었던 것은 겨우 13일 정도이고,그 줄기찬 전쟁 속에서 인간은 인간을 1억명이나 죽였던 것입니다.돈 1억이 아니라 사람이 1억입니다.그것이 인간입니다.서로서로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탐욕을 위하여 인간은 거침없고,서슴없고,가차없이 상대방을 죽이는 존재입니다. 20세기와 함께 사회주의권이 몰락해 자본주의는 아무런 견제세력 없이 21세기를 독주하게 되었으니 그 탐욕은 얼마나 커졌겠습니까.그래서 그 시작이 이라크 침공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신은 인간을 긍정할 수 없는 것을 괴로워했습니다.그건 당신만의 괴로움이 아니라 인간을 생각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갖는 괴로움이고 외로움일 것입니다.이 세상에 생명 있는 것들은 수없이 많지만,인간처럼 동류끼리 동류를 그렇게 줄기차게 죽여온 일이 없고,더구나 효과적으로 많이 죽이기 위해 머리 싸매고 연구해가며 수많은 무기를 만들어낸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을 긍정하지 않고서야 무슨 의미로 살 수 있겠습니까.또한,인류의 역사 속에는 받들고 우러를 수 있는 참되고 인간다운 인물들이 적지 않았습니다.그런 사람들이 가르치고 실천한 것을 본받아 세상이 바르게 되어 가기를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당신의 우울 앞에서 더 이상 다른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저의 우울이 됩니다. 작가·동국대 석좌교수˝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41)草衣 선사의 꿈(下)

    초의의 동다문화(東茶文化)는 한국문화론의 한 원류다.사람이 만든 음식 중에 차보다 더 고결하고 완전한 것은 없다.일반적으로 음식은 주된 재료와 양념으로 부르는 부재료가 합쳐져서 만들어진다.그러나 차는 찻잎 그 자체만으로서 완전한 음식이 된다.하나이면서 모두가 되는 귀한 물건이다.하나 속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차다.차의 이같은 특성 때문에 일찍이 종교 의식용으로 쓰여졌다.불교 수행자들은 차가 지닌 약리적 효능과 함께 하나이면서 모든 것을 지녔다는 상징성을 받들어 차와 함께 하는 고유의 의식을 만들고 전해왔다. 초의가 차를 이용하여 술로 찌든 조선 후기 사회의 폐습을 타파하기 위한 나름의 시도를 할 수 있게 된 데는,초의 개인의 비범한 능력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지성인들과 깊은 교류를 통한 깨달음도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정약용,김정희,홍현주로 대표되는 스승이자 동무들과의 만남은 초의에게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도록 하는 적극적인 동력이 되었다.초의는 부처의 깨달음이 집약된 화엄사상의 실체를 현실세계에서 구현하고자 했다.즉 ‘모든 것은 모든 것과 관계 있고,그 관계는 평등하다.’는 존재 상호간의 상생성,연기성,평등성을 차와 차살림을 통하여 실천했다. ●당대 지식인과 폭넓은 교류 모든 것들의 관계를 결정지은 인물이 정약용이었다.초의는 정약용의 실학 사상과 홍현주의 시론(詩論)이나 문장론을 매개로 조선 문인들과 정약용 사이에 오고 간 불꽃 튀는 시론 문답,김정희와의 절절한 교우관계에서 한 지성인이 겪어내는 시대적 고뇌를 곁에서 지켜보았다.누구도 혼자 사는 것이 아님을 다시 깨달았다. 그 때 정약용이 말하기를,‘차를 알고 마시는 민족은 흥하지만,차를 모르고 마시지 않는 민족은 망한다.’는 천둥번개같은 외침이 있었다.음식에 관한 폐습을 혁신시키지 못하면 개인이든 민족이든 끝내 불행해지고 만다는 큰 깨달음에서 얻어진 빛나는 사리였다.여전히 문제는 술에 취해 사는 사회였고,그 사회의 지도자들이 넋을 처박고 사는 술이라는 음식이었고,그 음식에 대한 뒤틀린 습관이었다.중국과 일본은 차문화의 뿌리가 깊고 탄탄한데다 술만큼 차를 숭상했다.그리하여 그들은 역사 속에서 늘 강자였고,지배자로 군림했다. 정약용이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강진에 유배 중일 때였다.정약용은 정치사상적인 측면에서 볼 때 같은 천주교인인 이승훈,이가환과 함께 채제공(蔡濟恭,1720∼1799)의 계자(系子)가 되었다.조선 후기의 대표적 정치가인 채제공은 불교와 천주교를 원칙적으로는 배격하되 그 장점만은 잘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매우 특이한 정치철학을 실천한 인물이었다.정약용이 처음으로 전라도 지역 암행어사로 나갈 때 그를 추천했던 채제공은 엉뚱하게도 천주교 교인인 정약용에게 한 승려를 만나보도록 권유했다.지리산에서 수행중인 연담(蓮潭) 유일(有一)이라는 승려였다.조선의 유생들로부터는 극단적으로 배척받는 불교와 천주교지만 두 종교가 지닌 민중교화력을 인정하는 채제공으로서는 정약용과 유일을 만나게 해줌으로써 유생들로서는 불가능한 새로운 시대를 위한 논리와 실천방안이 마련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서였다. ●‘목탁대신 칼’ 호국불교의 시대 두 사람은 만났다.뒷날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된 이후 정약용에게 차를 가르쳐 준 혜장(惠藏,1772∼1811)이 유일(有一)의 제자였고,초의는 유일선사의 법통을 전수받은 제자였으며,초의와 정약용 또한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아마도 이들의 인간관계에서 우러난 시대정신이 초의의 동다문화를 탄생시키는데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특히 초의가 승려로서 확립한 다선일미사상(茶禪一味思想)은 그 뿌리가 깊고 매우 현실적이다.민중의 존재와 삶을 이해하고 돕는 것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는 이른바 보살정신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매우 처절한 실천력을 요구했다.즉 유생들에 의한 불교 배척과 승려 탄압 정책으로 불교의 명맥이 위기에 처했을 때 탁월한 수행자가 등장하여 위기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보살정신을 실천했다. 조선 중기 명종 때의 보우(普愚)는 질식당하기 직전의 불교를 자신의 목숨과 바꾸어 사실상 조선 불교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보우는 불교 회생을 위해 승과(僧科)를 부활시켜 인재양성의 터전을 닦아 놓고 유생들의 손에 죽임당했다.그가 부활시킨 승과에 합격하여 새로운 인물로 등장한 사람이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였다.두 분은 목탁 대신 칼과 창을 쥐고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 도탄에서 허덕이는 조선민중을 구하면서 손에 피를 묻힌 불멸의 보살들이었다.살생하지 말라는 지엄한 계율을 위배하면서 동족의 생명을 지키고 구원해 낸 행위에서 우리는 다선일미(茶禪一味) 정신의 궁극을 읽어낼 수 있다.이 때의 차(茶)는 곧 중생을 상징하며,선(禪)은 곧 부처의 마음이니,조선불교를 호국불교라 부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초의의 동다문화는 이같은 역사적 뿌리 위에서 새롭게 피어난 중생구원론이기도 하다.즉 사회 지도자의 품성을 올바로 키우고,민족의식을 드높여 키우기 위해 초의가 꾼 또 다른 꿈은 중생들의 살림살이 걱정이었다. ●장 제조법 전파등 중생구제 힘써 1830년을 지나면서 조선사회는 붕괴되어 갔다.모든 세계 인류가 변하고 있는데 조선의 양반사대부들만 중국의 그늘에 스스로 갇혀서 변화를 극력 반대했다.부패와 타락이 주된 흐름이었다.가난한 민중들은 지옥같은 나날을 보내면서 두려움과 배고픔에 시달렸다.끝없는 불안에 지친 민중들은 살림살이의 핵심이 되는 장 담그는 일조차 할 수 없었다.가난할수록 장이 있어야만 가난을 견딜 수 있었다.이 시기에 초의가 장 담그는 법을 보다 정확하게 정리하여 가르친 일이나 단방약을 개발하여 세속에 널리 퍼뜨린 것은 초의의 중생 사랑 그 자체였다.단방약은 민중들의 질병을 완화시켜 주기 위한 조치였다.사회 경제적 토대가 붕괴되고 신분질서가 해체되는 혼란 속에서 민중들의 질병은 더욱 심했다.병이 나도 치료할 길이 없었다.가난 때문에 약을 구할 수도 없었다.그 때 초의는 한 두 가지 약초나 조선 산천에 흔하게 자라는 풀잎이나 뿌리 혹은 열매로 간단하게 약을 만들어 먹는 법을 개발하여 널리 퍼뜨렸다.원래 조선의 사찰에는 이같은 단방약에 관한 처방이 여러 가지로 전해져 왔다.승려들 스스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해야 하는 억불정책의 결과였다. 승려들의 질병과 세속인의 질병은 약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치료 방법도 달라야 한다는 것이 초의의 생각이었다.그렇게 개발한 단방약은 매우 빠르게 조선 전역으로 파급되어 많은 민중들의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덜어주었다.이같은 생각과 실천의 결과들이 한데 모여서 나온 것이 동다문화였다.언제까지 중국만 바라보고 살 수 없으며,그래서도 안된다고 믿었다.지치고 좌절한 민중들이 희망을 품게하는 일,공자 맹자의 가르침을 외우고 쓰는 일보다 내 나라에서 자라는 곡식과 풀잎을 잘 알고 가꾸어 배불리 먹고 이웃과 나누는 것이 더 급한 것임을 실천하기 위하여 살았던 초의였다.초의의 동다(東茶)는 그렇게 만들어졌다.지금 이 나라 강산에는 차문화가 흥청거린다.東茶를 말하는 이들 대부분이 아직도 중국 차문화를 선전하고 있다.더 늦기 전에 참회해야 한다.정약용 선생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새겨보면서 부끄러워해야 하느니. ˝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41)草衣 선사의 꿈(下)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41)草衣 선사의 꿈(下)

    초의의 동다문화(東茶文化)는 한국문화론의 한 원류다.사람이 만든 음식 중에 차보다 더 고결하고 완전한 것은 없다.일반적으로 음식은 주된 재료와 양념으로 부르는 부재료가 합쳐져서 만들어진다.그러나 차는 찻잎 그 자체만으로서 완전한 음식이 된다.하나이면서 모두가 되는 귀한 물건이다.하나 속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차다.차의 이같은 특성 때문에 일찍이 종교 의식용으로 쓰여졌다.불교 수행자들은 차가 지닌 약리적 효능과 함께 하나이면서 모든 것을 지녔다는 상징성을 받들어 차와 함께 하는 고유의 의식을 만들고 전해왔다. 초의가 차를 이용하여 술로 찌든 조선 후기 사회의 폐습을 타파하기 위한 나름의 시도를 할 수 있게 된 데는,초의 개인의 비범한 능력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지성인들과 깊은 교류를 통한 깨달음도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정약용,김정희,홍현주로 대표되는 스승이자 동무들과의 만남은 초의에게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도록 하는 적극적인 동력이 되었다.초의는 부처의 깨달음이 집약된 화엄사상의 실체를 현실세계에서 구현하고자 했다.즉 ‘모든 것은 모든 것과 관계 있고,그 관계는 평등하다.’는 존재 상호간의 상생성,연기성,평등성을 차와 차살림을 통하여 실천했다. ●당대 지식인과 폭넓은 교류 모든 것들의 관계를 결정지은 인물이 정약용이었다.초의는 정약용의 실학 사상과 홍현주의 시론(詩論)이나 문장론을 매개로 조선 문인들과 정약용 사이에 오고 간 불꽃 튀는 시론 문답,김정희와의 절절한 교우관계에서 한 지성인이 겪어내는 시대적 고뇌를 곁에서 지켜보았다.누구도 혼자 사는 것이 아님을 다시 깨달았다. 그 때 정약용이 말하기를,‘차를 알고 마시는 민족은 흥하지만,차를 모르고 마시지 않는 민족은 망한다.’는 천둥번개같은 외침이 있었다.음식에 관한 폐습을 혁신시키지 못하면 개인이든 민족이든 끝내 불행해지고 만다는 큰 깨달음에서 얻어진 빛나는 사리였다.여전히 문제는 술에 취해 사는 사회였고,그 사회의 지도자들이 넋을 처박고 사는 술이라는 음식이었고,그 음식에 대한 뒤틀린 습관이었다.중국과 일본은 차문화의 뿌리가 깊고 탄탄한데다 술만큼 차를 숭상했다.그리하여 그들은 역사 속에서 늘 강자였고,지배자로 군림했다. 정약용이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강진에 유배 중일 때였다.정약용은 정치사상적인 측면에서 볼 때 같은 천주교인인 이승훈,이가환과 함께 채제공(蔡濟恭,1720∼1799)의 계자(系子)가 되었다.조선 후기의 대표적 정치가인 채제공은 불교와 천주교를 원칙적으로는 배격하되 그 장점만은 잘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매우 특이한 정치철학을 실천한 인물이었다.정약용이 처음으로 전라도 지역 암행어사로 나갈 때 그를 추천했던 채제공은 엉뚱하게도 천주교 교인인 정약용에게 한 승려를 만나보도록 권유했다.지리산에서 수행중인 연담(蓮潭) 유일(有一)이라는 승려였다.조선의 유생들로부터는 극단적으로 배척받는 불교와 천주교지만 두 종교가 지닌 민중교화력을 인정하는 채제공으로서는 정약용과 유일을 만나게 해줌으로써 유생들로서는 불가능한 새로운 시대를 위한 논리와 실천방안이 마련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서였다. ●‘목탁대신 칼’ 호국불교의 시대 두 사람은 만났다.뒷날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된 이후 정약용에게 차를 가르쳐 준 혜장(惠藏,1772∼1811)이 유일(有一)의 제자였고,초의는 유일선사의 법통을 전수받은 제자였으며,초의와 정약용 또한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아마도 이들의 인간관계에서 우러난 시대정신이 초의의 동다문화를 탄생시키는데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특히 초의가 승려로서 확립한 다선일미사상(茶禪一味思想)은 그 뿌리가 깊고 매우 현실적이다.민중의 존재와 삶을 이해하고 돕는 것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는 이른바 보살정신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매우 처절한 실천력을 요구했다.즉 유생들에 의한 불교 배척과 승려 탄압 정책으로 불교의 명맥이 위기에 처했을 때 탁월한 수행자가 등장하여 위기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보살정신을 실천했다. 조선 중기 명종 때의 보우(普愚)는 질식당하기 직전의 불교를 자신의 목숨과 바꾸어 사실상 조선 불교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보우는 불교 회생을 위해 승과(僧科)를 부활시켜 인재양성의 터전을 닦아 놓고 유생들의 손에 죽임당했다.그가 부활시킨 승과에 합격하여 새로운 인물로 등장한 사람이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였다.두 분은 목탁 대신 칼과 창을 쥐고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 도탄에서 허덕이는 조선민중을 구하면서 손에 피를 묻힌 불멸의 보살들이었다.살생하지 말라는 지엄한 계율을 위배하면서 동족의 생명을 지키고 구원해 낸 행위에서 우리는 다선일미(茶禪一味) 정신의 궁극을 읽어낼 수 있다.이 때의 차(茶)는 곧 중생을 상징하며,선(禪)은 곧 부처의 마음이니,조선불교를 호국불교라 부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초의의 동다문화는 이같은 역사적 뿌리 위에서 새롭게 피어난 중생구원론이기도 하다.즉 사회 지도자의 품성을 올바로 키우고,민족의식을 드높여 키우기 위해 초의가 꾼 또 다른 꿈은 중생들의 살림살이 걱정이었다. ●장 제조법 전파등 중생구제 힘써 1830년을 지나면서 조선사회는 붕괴되어 갔다.모든 세계 인류가 변하고 있는데 조선의 양반사대부들만 중국의 그늘에 스스로 갇혀서 변화를 극력 반대했다.부패와 타락이 주된 흐름이었다.가난한 민중들은 지옥같은 나날을 보내면서 두려움과 배고픔에 시달렸다.끝없는 불안에 지친 민중들은 살림살이의 핵심이 되는 장 담그는 일조차 할 수 없었다.가난할수록 장이 있어야만 가난을 견딜 수 있었다.이 시기에 초의가 장 담그는 법을 보다 정확하게 정리하여 가르친 일이나 단방약을 개발하여 세속에 널리 퍼뜨린 것은 초의의 중생 사랑 그 자체였다.단방약은 민중들의 질병을 완화시켜 주기 위한 조치였다.사회 경제적 토대가 붕괴되고 신분질서가 해체되는 혼란 속에서 민중들의 질병은 더욱 심했다.병이 나도 치료할 길이 없었다.가난 때문에 약을 구할 수도 없었다.그 때 초의는 한 두 가지 약초나 조선 산천에 흔하게 자라는 풀잎이나 뿌리 혹은 열매로 간단하게 약을 만들어 먹는 법을 개발하여 널리 퍼뜨렸다.원래 조선의 사찰에는 이같은 단방약에 관한 처방이 여러 가지로 전해져 왔다.승려들 스스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해야 하는 억불정책의 결과였다. 승려들의 질병과 세속인의 질병은 약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치료 방법도 달라야 한다는 것이 초의의 생각이었다.그렇게 개발한 단방약은 매우 빠르게 조선 전역으로 파급되어 많은 민중들의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덜어주었다.이같은 생각과 실천의 결과들이 한데 모여서 나온 것이 동다문화였다.언제까지 중국만 바라보고 살 수 없으며,그래서도 안된다고 믿었다.지치고 좌절한 민중들이 희망을 품게하는 일,공자 맹자의 가르침을 외우고 쓰는 일보다 내 나라에서 자라는 곡식과 풀잎을 잘 알고 가꾸어 배불리 먹고 이웃과 나누는 것이 더 급한 것임을 실천하기 위하여 살았던 초의였다.초의의 동다(東茶)는 그렇게 만들어졌다.지금 이 나라 강산에는 차문화가 흥청거린다.東茶를 말하는 이들 대부분이 아직도 중국 차문화를 선전하고 있다.더 늦기 전에 참회해야 한다.정약용 선생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새겨보면서 부끄러워해야 하느니.
  • [책꽂이]

    ●그곳이 멀지 않다(나희덕 지음,문학동네 펴냄)98년 시인에게 김수영문학상을 안긴 시집의 개정판.7년전을 돌아보는 겸허한 마음결을 담은 시인의 서문에다 섬세한 언어감각으로 그린 맑은 서정을 다시 만날 수 있다.7000원 ●문(나쓰메 소세키 지음,유은경 옮김,향연 펴냄)아사히 신문사 전속작가가 1910년 연재한 장편소설.친구에게 양보했던 옛 여인을 다시 만난다는 내용을 복선과 암시가 깔린 추리소설식으로 전개한다.9000원 ●오래도록 내 안에서(김정인 지음,문학수첩 펴냄)99년 등단한 시인의 첫 작품집.65편의 시에서 이미지 기법을 쓰되 관념에 머물지 않고 엄숙한 시적 자아로 고양된 삶의 의식을 노래한다.7000원 ●4teen­포틴(이시다 이라 지음,양억관 옮김,작가정신 펴냄)일본 신세대 감성을 대표하는 작가의 성장소설.14세 소년 사인조와 주위 인물을 통해 10대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눈으로 다루며 어른의 세계를 꼬집는다.129회 나오키상을 받았다.8900원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박주택 지음,문학과지성사 펴냄)지난해 현대시 작품상을 받은 시인의 네번째 시집.‘판에 박힌 그림’ ‘시간의 육체에는 벌레가 산다’ 등 시편을 통해 이유없는 불안과 허무에 사로잡힌 내면의 심층을 형상화한다.6000원 ●울 준비는 되어 있다(에쿠니 가오리 지음,김난주 옮김,소담 펴냄)베스트셀러 ‘냉정과 열정사이’의 작가가 낸 단편집.표제작 등 12편의 작품에서 결혼했거나 결혼할 여자들이 맛보는 고독감,자유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9000원 ●당신은 꽃보다 아름다운가(최홍길 지음,민미디어 펴냄)현직 교사가 11편의 이야기 형식으로 들려주는 학교 이야기.매일 복잡한 일들이 벌어지는 그 공간에서 고민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담았다.7000원 ●검은 전쟁(서종건·송명흡 지음,자음과모음 펴냄)한국과 일본 사이에 10년 뒤 전면전이 벌어진다는 가상 아래 쓴 장편.인터넷 작가로 이름을 날린 두 저자가 분 단위로 사건을 빠르게 전개한다.8500원˝
  • 저잣거리로 내려온 사찰음식

    지리산 동쪽 끝자락인 경남 산청군 금서면 수월리 금서암.솔바람 대바람에 감싸인 오월 중순의 금서암은 고적하기 그지없었다.초입 가로수에 매달린 오색 연등과 맑고 고운 풍경소리만이 산사를 알려 줄 뿐이다. 차나무와 쑥 덤불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앞마당으로 들어서자 구수한 된장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마당 한쪽에 된장·간장 항아리 수십개가 햇빛에 반짝거렸다.불전의 향 보다 정겨운 된장 냄새에 여염집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때마침,한 비구니가 나왔다.금서암 주지이자 사찰음식연구가인 대안(大安·45)스님이다.무테 안경을 쓴 스님은 해맑고 피부도 고왔다.무엇을 드시기에 저토록 고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대청 마루에 앉기를 권하곤 햇차를 내왔다.입안 가득한 차향에 머리까지 맑아졌다. 지난해 ‘사찰음식 다이어트’란 책을 낸 스님은 1985년 3월 출가하면서 음식과 연을 맺었다.“해인사로 출가했는데,그때 채공(반찬 만드는 일) 소임을 맡았지요.국일암에서 성원(86)노장을 모시면서 사찰 음식 조리법을 물흐르듯 익혔지요.”물론 어머니의 손맛 내림도 있을 듯하다.스님의 속가 형제들 가운데 4명이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다. 그러다가 지난 98년 6월 금서암 불사를 일으키면서 본격적인 ‘공양’을 시작했다.“천일기도 중이었는데,인부들의 식사 세끼에 새참 세끼를 1년 넘게 했지요.”도토리를 주워 묵을 쑤고,마을 방앗간까지 걸어가서 콩을 갈아 두부를 만들고,콩나물 기르고….이때 음식 실력이 쑥쑥 자랐고,인부들은 모두 ‘맛있다!’는 인사로 대안스님에게 답했다.“나중에 인부들이 고맙다면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하루치의 일당을 시주했지요.” 그리고 대안스님은 자신을 증거로 ‘사찰 음식은 약이다.’라고 강조했다.승가대학 재학 중이던 90년,스님은 갑상선 기능항진증이란 진단을 받았다.“몸이 붓기 시작하더니 6개월만에 12㎏이나 늘었죠.”디스크에 좌골신경통,합병증까지 생겼다.“무엇보다도 피둥피둥 살찐 수행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불편했고요,저 자신도 위축되고 소심해졌지요.” 그래서 생사의 결단을 내려야겠다며 지리산으로 향했다.94년에 지금의 금서암 자리에 스러져가는 헌집을 마련하고,걸망을 풀었다.“나물과 약초를 뜯었고,밤을 줍고,송이를 따고…,선방 생활을 하다가 천일기도를 시작했지요.” 갑상선이 나았다는 진단은 98년도에 받았고,사찰음식으로 섭생한 결과 지난해에는 갑상선을 앓았던 흔적조차 없어졌다는 검진 결과를 받아냈다.“먹을거리의 소중함을 깨달았지요.몸무게도 시나브로 정상으로 돌아와 가뿐합니다.”지금은 58㎏,산나물 위주로 된 사찰 음식이 약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대안스님의 산나물 설법이 이어졌다.“나물의 백미는 들미순인데,경남 하동 사람들은 ‘두릅 팔아 들미 나물 사먹는다.’고 하지요.들미 나물은 1000m이상,고지대에 살아 따기 힘들지요.”또 봄나물이 좋지만 더욱 좋은 것은 월동 준비를 하는 가을철 어린 산나물이란다.영양분을 잔뜩 끌어모아 저장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리곤 스님은 공양간(부엌)으로 들어갔다.손놀림은 분주한 듯 보였지만 딸그락거리거나 그릇 부딪치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부엌일도 수행정진인 듯 조심스러웠다.산야초 초밥·함지쌈·엄나무순밥 등을 만들어 들고 나왔다.맛이 담백했다.달지도 짜지도 시지도 맵지도 않았다. 대안스님이 말하는 사찰 음식은 기교를 부리지 않는 것이다.수행정진에 열중하는 스님들을 위해 만들어진 만큼 부드럽고,담박한 것이 특징이다.“사찰음식에는 청정(淸靜)·유연(柔軟)·여법(如法) 3덕이 있지요.”청정은 마늘·파·달래·부추·무릇 같은 오신채와 인공조미료를 쓰지 않아 맛을 자연에 가깝게 내는 것이다.짜거나 맵거나 한 자극성이 없이 부드럽게 조리하는 유연이고,양념을 많이 하지 않고 반찬 가짓수는 적어도 골고루 내는 것이 여법이란 설명이다.“이 세가지 원칙만 지키면 성인병 걱정 없어요.요즘 사찰 음식이라고 하면서 기름에 튀기거나 구워내는 음식이 많은데 이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한마디 주의를 줬다. 최근 웰빙 바람을 타고 산사의 음식이 저잣거리로 내려왔다.“자연주의를 실천하는 사찰음식이 내려간 것은 바람직한데 손 닿는대로,속이 차도록 먹는 것이 아니라 절제가 가장 중요한 사찰음식의 의미입니다.” 금서암(산청) 글 이기철기자 chuli@ 금서암(산청) 사진 정연호기자 tpgod@ ■ 알寺한 맛집 사찰 음식을 저잣거리에서도 맛볼 수 있는 대표적인 식당은 서울 인사동 4거리 세종화랑 골목의 산촌(735-0312)이다.한때 스님이었다가 환속한 김연식(58)씨가 운영한다.점심 1만 8700원,저녁 3만 1900원으로 가격이 비교적 센 편이다.메뉴는 들깨죽·생두부·튀김요리 등 16가지가 나온다.그러나 저녁에 한국전통무용과 승무 공연이 있어 점심보다 더 비싸다.일반인들을 위해 파·마늘·부추 등 오신채를 넣는데,진짜 사찰음식 맛을 원하면 하루 전에 미리 예약해야 한다.또 직접 담근 된장·고추장·쌈장 등과 같은 장류와 장아찌·한과·공예품 등도 함께 팔아 외국인들로부터 인기가 높다.최근엔 경기도 고양시 벽제역에서 보광사 가는 길목에 고양점(031-969-9865)을 냈다.고양점의 ‘스님 공양상’은 인사동과 마찬가지로 16가지가 나오는데 1만 5000원이다. 서울 삼청동 정독도서관 골목의 감로당(3210-3397)은 사찰 음식을 32년째 연구하고 있는 이여영(53)씨가 운영한다.오신채를 먹지 않는 남편의 식성에 맞추다가 불교음식에 빠져 아예 음식점을 차렸다.점심은 25가지 반찬이 나오는데 2만 3000원,저녁에 3만 8000원이다.계란은 물론이고 젓갈이나 멸치도 사용하지 않는 순수 채식식당이다.일품요리로는 표고버섯유자탕수·연근오미자탕수·별미 잡채 등이 1만 5000∼1만 8000원이다.이씨는 내달 2일 사찰음식 강의를 앞두고 25일까지 수강신청도 받고 있다. 서울 안국동로터리에서 인사동 골목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소심(734-4388)도 채식인들 사이에 유명한 식당이다.투박한 듯 보이는 나무 탁자와 의자가 오히려 정겹다.주인 김인혜(55)씨는 “스님들의 음식이 건강식이라 관심이 많았는데,집에서 먹는 것처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젓갈은 물론이고 오신채도 쓰지 않는다.정식은 1만 5000원,비빔밥 7000원,버섯전골(저녁)은 1인분에 1만원이다. ■대안스님의 사찰 요리조리 대안스님은 조계사 수선회와 연을 맺어 불가에 입문했다.전북 전주 출생.오랜 정신적 방랑을 끝내고 85년 3월 해인사로 출가했다.국일암의 노스님을 시봉한 것을 계기로 사찰 음식을 본격 익혔다.대중들의 마음의 살까지 빼기 위해 ‘사찰음식 다이어트’란 책을 냈다. 대안스님은 대구 불교방송에서 사찰음식에 대해 강연하고,시연회를 하는 등 ‘절밥’ 대중 공양을 위해 애쓰고 있다.지금은 경남 산청군 금서면의 금서암(055-973-6601) 주지를 맡고있다. ●스님과 만드는 산야초 초밥 재료 두릅·더덕·새송이·곤달비·우엉·생고사리·개발딱주·표고버섯·제핏잎 적당량,간장·참기름·깨 적당량 만드는 법 (1)각종 산채는 깨끗이 씻어 물기를 제거하고 끓는 물에 데쳐낸다.(2)더덕은 돌려깍기를 해서 고추장 양념을 해서 팬에 구워낸다.(3)우엉도 돌려깍기를 해서 촛물에 조려낸다.(4)생고사리는 삶아 간장과 참기름에 볶아내고,버섯은 모양대로 썰어 간장과 참기름에 덖는다.(5)산채나물은 간장·참기름·깨를 넣고 조물조물 무쳐낸다.(6)초밥에 (5)의 산채나물을 얹거나 돌려감아 접시에 담아낸다. 촛물 만들기 재료 진간장·감식초·조청 ½큰술,설탕 1큰술,집간장 약간. 만드는 법 (1)양조 간장을 냄비에 넣고 끓이다가 설탕과 나머지 재료를 넣고 끓인다.(2)약한 불에 오래도록 끓여 걸죽하게 만든다.(3)식힌 다음 밥에 섞어 모양대로 밥을 만든다. 팁 (1)불린 쌀로 물을 약간 적게 넣어 고슬고슬 밥을 지어 식힌다. ●함지쌈 재료 감자 1개,당근¼개,표고버섯 2장,새송이버섯½개,오이 ⅓개,청·홍 피망⅓개씩,쌀종이(라이스 페이퍼) 2장,곤달비 2장,(볶은)소금·겨자 약간씩 만드는 법 (1)감자를 쪄서 뜨거울 때 소금과 겨자를 넣고 으깨놓는다.(2)당근과 표고·새송이버섯은 잘게 썰어 볶는다.(3)오이는 잘게 썰어 소금과 식초로 간한다.(4)청·홍 피망은 잘게 썰어 소금과 식초로 간한다.(5)으깬 감자에 (2)∼(4) 재료를 넣고 섞는다.(6)쌀종이를 뜨거운 물에 넣어 적셔내면 부드럽게 된다.(5)를 모양있게 싸서 적당히 썬다. ●방아전 재료 방아 100g,제핏잎 20g,된장 1작은술,고추장 1작은술,밀가루 3큰술,들기름(또는 식용유) 적당량 만드는 법 (1)방아와 제핏잎에 된장과 고추장·밀가루를 골고루 섞어 반죽한다.(2)반죽은 약간 걸쭉하게 한다.밀가루가 많이 들어가면 딱딱해 맛이 없어진다.(3)팬을 달궈 (2)를 한 숟가락씩 떠 올려 굽는다.식용유보다 들기름에 구우면 감칠맛이 더한다. ●생고사리 들깨찜 재료 생고사리 100g,쌀가루 1작은술,들깨가루 1큰술,집간장·들기름 1큰술씩 만드는 법 (1)생고사리는 싱싱한 것으로 골라 바로 데친다.(2) 데친 고사리는 물에 담그지 말고 들기름을 두른후 볶는다.(3) (2)에 집간장으로 간하고 물을 자박하게 부어 끓으면 들깨가루와 쌀가루를 넣어 익힌다. 팁 여름에는 생들깨를 갈아 깨국이 진하지 않게 먹으면 원기를 돋운다. ●엄나무순밥 재료 엄나무순 50g,불린 쌀 1국자,표고버섯 1개,양념장 만드는 법 (1)엄나무순을 잘게 썰어 밥을 앉힌다.(2)표고버섯은 곱게 채를 썬다.(3) (1)과 (2) 함께 넣고 밥을 지은 후 양념장을 곁들인다. 양념장(집간장 1큰술,양조(진)간장 2큰술,청·홍 고추 각 2개,표고버섯(다져 볶은 것) 1개 팁 엄나무순은 봄철 입맛을 돋우는 약용식물이다. ●가죽부각 재료 가죽나무순 200g,찹쌀풀 100g,집간장 3큰술,통깨 조금,식용유(튀김용) 적당량 만드는 법 (1)가죽나무순은 그늘에 말려 조금 시들게 한다.(2)시든 가죽나무순에 찹쌀풀,집간장과 통깨를 넣고 묻혀 줄에 매달에 그늘에 말린다.(3)튀김솥에 식용유를 조금만 두르고 (2)를 튀겨낸다. ˝
  • ‘베지밀’ 정·식품 정재원 명예회장

    “옛날 어머니가 드셨던 콩국에서 착안했습니다.콩국 먹는 여성은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유방암에 훨씬 덜 걸린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지요.” 정재원(87) 정·식품 명예회장은 지난 30여년간 콩과 두유의 유익함을 주장해와 ‘두유 전도사’로 통한다.그는 20일 오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에메랄드룸에서 (사)인간개발연구원 초청으로 이루어진 조찬특강에서 모처럼 자신의 ‘베지밀 인생이야기’를 털어놨다.그는 지난 73년 정·식품을 설립,세계 최대의 두유 전문회사로 올려놨다.또 소아과 의사 출신으로 대두인 ‘베지밀’을 국내 최초로 개발,성공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그는 지난 1964년 미 샌프란시스코 UC메디컬센터의 디머 박사 밑에서 알레르기 연구를 하던 중 ‘유당불내증’을 처음 알게 됐다.즉 체내에 유당을 분해하는 효소세포가 선천적으로 결핍돼 모유나 우유에 함유된 유당이 정상적으로 소화되지 못하는 병이다.이는 ‘베지밀’ 태동의 계기가 됐다고 그는 술회했다. 원래 정 회장은 37년 의사검정고시에 합격,소아과 의사로 출발했다.당시 아이들이 모유나 우유를 소화시키지 못해 양양실조와 탈수증,폐렴과 합병증을 일으켜 사망하는 경우를 자주 접했다.이를 위해 대용 유액인 쌀죽과 밀가루 죽,또는 과즙,야채즙,비타민 등을 섭취시켜 보았으나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유학 도중 그는 대두가 유아를 위한 3대 필수영양소를 함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특히 유당성분이 없다는 사실을 밝혀냈다.이는 어린이를 위한 최적의 대용식인 ‘콩국’임을 확신했다.65년 귀국한 그는 동물실험 등을 거쳐 두유에 관한 특허를 받는다. “67년 마침내 식물성 밀크라는 뜻의 ‘베지밀’ 제품명으로 상업화를 시작했습니다.처음에는 가내공업이었지요.수요가 점점 늘어나자 경기도 신갈에 공장을 지어 하루 20만병의 생산규모를 갖추게 됐습니다.” 이후 국민소득 수준의 향상으로 성인병 등이 증가하자 정 회장은 ‘유당불내증’에서 만성질환의 예방과 치료 쪽으로 눈을 돌렸다.92년 청주공장의 중앙연구소에서 동물실험을 통해 ‘콩의 효능’을 여러가지로 입증하기도 했다.그는 내친김에 ‘베지밀C’로 95년 미국과 호주에서 낙농특허를 획득했다.이후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콩 학술대회를 매년 개최하며 연구결과를 꾸준히 세계에 알렸다. 이같은 노력으로 그는 99년 미 워싱턴DC에서 열린 제3차 국제 대두학술대회에서 최고상(콩 연구의 세계 6인상)을 받았다. “평소 인류 건강에 ‘이 몸을 바친다.’는 신념과 철학으로 살아왔고 여생도 그렇게 보낼 것입니다.” 그는 61년 런던대 소아과대학원을 수료한 직후 일본의 도쿄소아과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서울성모병원과 연세대에서 교수로 재직했다.자신의 아호를 딴 ‘혜춘장학회’ 이사장으로 재임중이다.꼼꼼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는 87살의 나이에도 젊은이 못지않은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이는 ‘콩의 힘’이라며 웃었다. 김문기자 km@seoul.co.kr˝
  • [책꽂이]

    ●세치 혀가 백만군사보다 강하다(리이위 엮음,장연 옮김,김영사 펴냄) 칼에는 두 개의 날이 있지만,사람의 입에는 백 개의 날이 있다고 한다.말의 중요함을 강조한 말이다.이 책에는 명나라 황제를 목매어 자살하게 한 우금성,진시황을 꾸짖어 헛됨을 깨닫게 만든 모초,촌철살인의 유머로 경쟁자를 물리친 처칠 등 동서양 현인들의 성공을 위한 ‘말의 책략’이 담겼다.예컨대 지상매괴(指桑罵槐)는 뽕나무를 가리키며 홰나무라고 꾸짖는다는 말이다.즉 다른 사람이나 남의 일을 거론하면서 상대를 비판하라는 얘기다.1만 8900원. ●이소크라테스(김봉철 지음,신서원 펴냄)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유명한 연설문 작가이자 수사학 교사,정치평론가였던 이소크라테스의 삶을 조명.98세라는 긴 생애를 살다간 한 지식인의 삶과 사고의 행적을 통해 고전기 그리스 사회의 변질과 쇠퇴양상을 살핀다.그가 산 기원전 4세기 아테네는 ‘그리스의 학교’라고 불릴 만큼 문화적으로 풍요한 시대였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데모스테네스도 이 시대 사람들이다.이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 전통을 이어받아 현실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인 가치관을 추구했다.2만원. ●김현준의 재즈노트(김현준 지음,시공사 펴냄) 우리의 시선과 안목으로 바라본 재즈론.재즈비평가인 저자는 ‘재즈는 악보가 없는 즉흥음악이다’라는 말은 재즈의 본질을 왜곡하는 발상이라고 비판한다.재즈는 추상적인 악보를 통해 연주자들의 해석과 접근에 보다 많이 의존하지만,작곡가의 의도에 따라 세세한 편곡에 이르기까지 악보를 구체화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재즈의 역사를 톤과의 갈등으로 보는 저자는 ‘재즈에서의 톤’은 기술적인 요소가 아니라 연주자의 정신을 표출하는 형이상학적 본질임을 일깨워 준다.1만 4000원. ●진화적 풍경(복거일 지음,자유기업원 펴냄) 사회적 현상들을 진화의 개념으로 설명한 에세이.소설가이자 사회평론가인 저자는 자유주의 체제가 성공한 근본적인 요인은 그것이 진화에 가장 호의적인 체제이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건축생태계(arcology)의 사회적 함의’‘천사들이 밟기 두려워 하는 곳’‘유전자 혁명과 인류의 진화’‘천도론과 갑오경장’ 등 60여편의 글이 실렸다.1만 8000원. ●제로니모 자서전(제로니모 지음,최준석 옮김,우물이 있는 집 펴냄) 제로니모는 그 호전성과 용맹성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아파치족 전사다.생전에 총알도 그를 꿰뚫을 수 없다는 신화를 만들어 냈으며 실제로 10여군데의 총상을 입고도 살아 남았다.미국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인디언이었고 서부 개척민들에게 제로니모라는 이름은 공포 그 자체였다.미국인들은 자신들의 군사용 헬기에 아파치라는 이름을 붙였고,지금도 공수부대의 낙하병들은 비행기에서 뛰어내릴 때 “제로니모”라고 소리친다.이 책에는 제로니모가 직접 구술한 자신의 생애가 담겼다.1만원.˝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40)草衣 선사의 꿈(上)

    풀옷을 이은 수행자 초의(草衣) 장의순(張意恂,1786~1866).그는 조선 후기 조선의 불교문화를 상징하는 참 스승이었다.또한 불교문화에서 비롯된 차살림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침체와 변질을 겪어 온 조선의 차문화를 새롭게 정립하여 물림한 한국 차살림의 완성자다. ●초의는 우리 차문화 완성한 선승 그가 완성한 차살림은 절집 승려만을 위한 것도,조선 양반 사대부들의 한가한 멋을 위한 것도,궁중이나 왕실 혹은 부자들의 호사를 위한 것도 아니다.초의가 생애 대부분을 보낸 19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는 조선의 운명이 벼랑으로 굴러 떨어지려는 듯 위기감이 높아지던 시기였다.시대의 위기는 조선사회를 대표하는 지식인들과 권력층,세도가들이 만들어 냈는데,이들 대부분이 중화사대주의자들로서 스스로 중국 문화의 아류로 자처했다. 중화사대주의자들의 성리학 세계관은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관이었다.세계는 화(華)와 이(夷)로 갈라서고,‘화’만이 문화와 가치이며,‘이’는 문화도 가치도 없는 야만으로 규정했다.화는 세계의 지리적 중심이기도 한 중화(中華)로서 중국 민족의 배타적 독점물이라 단정지었다.그리하여 조선은 중국의 축소판,모조,근사치로서의 소화(小華)라고 여겼다.중화사대주의자인 조선의 성리학자,유생들은 중국에 대해서는 한없는 열등의식을 가졌지만 서양에 대해서는 근거없이 심한 우월의식을 지니고 있었다.이같은 열등과 우월의 이중구조적 세계관 속에서 서양 세력을 배척하는 것을 조선 지성인의 사명감으로 여기게 된 시대였다.초의는 생애 대부분을 이러한 시대에 대한 고뇌와 번민,그에 대한 극복과 희망의 제시를 위해 보냈다. 조선의 주된 이념인 성리학이 사변철학으로 타락하고,제도 문란과 권력의 부패로 국가의 근본인 서민들의 삶이 도탄에 빠져 있을 때,초의는 엉뚱하게도 차농사 짓는 일과 차 만들기,차 마시는 이야기를 그 시대의 화두로 삼았다.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발상이며 과연 누가 공감했을지 의아스럽기도 하다. ●병든시대 희망 제시하려 고뇌 초의는 차(茶)가 음식과 더불어 인간의 운명과 역사를 바꾸는 힘의 시원임을 깨달았다.깨달음을 바탕으로 한 믿음이었기 때문에 그의 말과 행동은 그대로가 진리로 받아들여졌다.정신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이용되어 온 방법들 중에서 음식과 차가 가장 널리 쓰여온 것은 인류의 오랜 경험이기도 했다.초의는 차라는 물건으로 술에 절어버린 조선 후기의 병들고 타락한 시대를 구원하고자 한 구도자였다. 19세기의 승려는 천민으로 분류되었다.조선의 이름난 사찰은 일년 내내 경향 각지에서 유람오는 양반,사대부,세도가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던 시대였다.그들은 조용한 여행자들이 아니었다.언제나 그 지역 현감이나 절 주지에게 그들의 행차 사실을 미리 알렸다.절 아래 마을까지 사인교나 남여(藍輿),나귀 등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라는 뜻이다.승려들은 이 명령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승려들이 고관대작이나 그들 식구를 등에 업고 오르내리기도 했다.어쩌다 실수하는 날이면 능멸과 매질을 피할 수 없었으니 노예나 다름이 없었다. 절에 놀러오면서 승려들이 메는 사인교를 탔던 양반 사대부들은 허랑방탕한 조선 후기 사회와 함께 비틀거리던 중화사대론자들이었다.그들은 차를 마시지 않았거니와 차를 알지도 못했다.다만 술을 알고 취해 살았을 뿐이다.차례(茶禮)라는 설,추석 명절에 조차도 차가 아닌 술로 조상제사를 모셨을 만큼 술에 빠져 살았다.국가의 원천이자 기둥인 농사꾼들은 무거운 부역과 세금,끈질긴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데도 양반사대부들은 술에 취해 살면서 중국 섬기기에 나라의 뼈가 휘었다.농민이 땀 흘려 가꾼 곡식으로 빚은 술을 마시면서 농민의 시름과 수난은 외면했다. 뿌리가 땅에 닿지 않는 관념의 잎만 무성한 성리학의 미몽을 좆는 위선에 차고 무능한 지식인들,젊어서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늙어서는 강산을 더럽히는 세도가들 앞에 초의가 말없이 제시한 것이 차였다.술 대신 차를,독선과 아집 대신 나눔과 양보를,핍박과 죽임 대신 함께 사는 지혜를 제시한 것이다. 차는 은혜를 알게 하는 가르침이며,새로운 시대를 위해서는 새로운 꿈이 필요했다.초의가 새롭게 꾼 꿈이 ‘동다문화(東茶文化)’로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정신의 집이었다.그의 ‘동다송(東茶頌)’은 단순히 중국 차문화와 역사에 관한 서른 한 마디 노래로 편술된 책이 아니라,‘東茶’ 즉 우리나라의 차를 칭송하기 위한 것이었다. ●술대신 차·독선대신 지혜 전파 서른 한 마디 노래 중에 우리나라 차의 빛깔,향기,맛의 우수성이 결코 중국차에 못지 않다는 매우 짧은 한 구절이 숨어 있다.초의가 전혀 새롭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중국 차문화 얘기를 늘어놓다가 슬쩍 우리나라 차의 우수성을 간략하게 끼워 넣은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 역사 전체를 통틀어 놓고 보아도 조선의 것이 중국보다 우수하다고 자신있게 말한 경우는 많지 않다.아니 거의 없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모든 것은 오로지 중국에서 근원하고,의지해왔으며,중국으로부터 떨어져서는 한시도 살아갈 수 없다고 믿어 온 중화사대주의자들은 감히 조선의 것이 중국 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아무리 조선의 것이 중국 것보다 우수한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사실대로 말하고 책으로 엮어낸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하는 위험이라고 여겼다.중국의 그림자도 밟지 말아야 했다. 그런데 초의라는 한 승려가 우리나라의 차가 중국 차보다 우수하다는 사실을 글로 적은 것이다.짧은 이 한 문장이 지닌 뜻은 참으로 위대하다.멀리 신라가 당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동족인 백제를 멸망시킨 그 바보짓 이후 1200여년이 지나는 동안 신라,고려,조선은 한결같이 중국 우월론자들에 의하여 좌우되어 왔다. 다만 조선의 세종임금이 중국 문자가 아닌 조선의 문자를 만들어 널리 쓰고자 했었다.그러나 한문 망령에 덮어 씌인 중화사대론자들은 한글을 암클, 즉 여자들이나 쓰는 글이니 언문(諺文)이라 깎아내렸었다.모든 것을 중국에다 의지했다.심지어 삼국사기(三國史記)라는 역사책은 우리나라 고유의 차문화를 아예 없애버린 위에 통일신라 시대인 828년에 당나라로부터 차 종자를 가져다 왕의 명령으로 지리산에 심은 것을 우리나라 차의 기원이라고 적기까지 했다. ●‘동다승’ 저술 우리차 우수성 알려 중국의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 고려 스스로가 무릎을 꿇고 역사 사실을 왜곡하여 중국의 무릎 아래로 기어든 수치이자 씻을 수 없는 모욕이다. 이렇듯 1200여년 동안 계속된 비굴한 태도를 처음으로 고쳐 잡은 것이 초의의 글귀였다.그것도 중국 문화의 자존심이자 세계 속의 자긍심인 차에 대하여 중국차보다 우리나라 차가 우수하다고 말한 것은 정치적 고려에서가 아닌 사실을 바탕으로 한 초의의 민족문화론이었다. 2004년 5월,지금 이 시간에도 한국의 많은 차인들은 조선의 중화사대론을 계승한 적자임을 긍지로 여기면서 중국 차문화를 선전하는 전도사로서 활보하고 있다.어찌 부끄럽지 않은가? 140여년 전 민족문화의 선각자 초의스님의 동다문화 앞에서 어찌 고개 들고 활보할 수 있는가? 부끄러워하라.또 부끄러워하라.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40)草衣 선사의 꿈(上)

    풀옷을 이은 수행자 초의(草衣) 장의순(張意恂,1786~1866).그는 조선 후기 조선의 불교문화를 상징하는 참 스승이었다.또한 불교문화에서 비롯된 차살림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침체와 변질을 겪어 온 조선의 차문화를 새롭게 정립하여 물림한 한국 차살림의 완성자다. ●초의는 우리 차문화 완성한 선승 그가 완성한 차살림은 절집 승려만을 위한 것도,조선 양반 사대부들의 한가한 멋을 위한 것도,궁중이나 왕실 혹은 부자들의 호사를 위한 것도 아니다.초의가 생애 대부분을 보낸 19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는 조선의 운명이 벼랑으로 굴러 떨어지려는 듯 위기감이 높아지던 시기였다.시대의 위기는 조선사회를 대표하는 지식인들과 권력층,세도가들이 만들어 냈는데,이들 대부분이 중화사대주의자들로서 스스로 중국 문화의 아류로 자처했다. 중화사대주의자들의 성리학 세계관은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관이었다.세계는 화(華)와 이(夷)로 갈라서고,‘화’만이 문화와 가치이며,‘이’는 문화도 가치도 없는 야만으로 규정했다.화는 세계의 지리적 중심이기도 한 중화(中華)로서 중국 민족의 배타적 독점물이라 단정지었다.그리하여 조선은 중국의 축소판,모조,근사치로서의 소화(小華)라고 여겼다.중화사대주의자인 조선의 성리학자,유생들은 중국에 대해서는 한없는 열등의식을 가졌지만 서양에 대해서는 근거없이 심한 우월의식을 지니고 있었다.이같은 열등과 우월의 이중구조적 세계관 속에서 서양 세력을 배척하는 것을 조선 지성인의 사명감으로 여기게 된 시대였다.초의는 생애 대부분을 이러한 시대에 대한 고뇌와 번민,그에 대한 극복과 희망의 제시를 위해 보냈다. 조선의 주된 이념인 성리학이 사변철학으로 타락하고,제도 문란과 권력의 부패로 국가의 근본인 서민들의 삶이 도탄에 빠져 있을 때,초의는 엉뚱하게도 차농사 짓는 일과 차 만들기,차 마시는 이야기를 그 시대의 화두로 삼았다.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발상이며 과연 누가 공감했을지 의아스럽기도 하다. ●병든시대 희망 제시하려 고뇌 초의는 차(茶)가 음식과 더불어 인간의 운명과 역사를 바꾸는 힘의 시원임을 깨달았다.깨달음을 바탕으로 한 믿음이었기 때문에 그의 말과 행동은 그대로가 진리로 받아들여졌다.정신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이용되어 온 방법들 중에서 음식과 차가 가장 널리 쓰여온 것은 인류의 오랜 경험이기도 했다.초의는 차라는 물건으로 술에 절어버린 조선 후기의 병들고 타락한 시대를 구원하고자 한 구도자였다. 19세기의 승려는 천민으로 분류되었다.조선의 이름난 사찰은 일년 내내 경향 각지에서 유람오는 양반,사대부,세도가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던 시대였다.그들은 조용한 여행자들이 아니었다.언제나 그 지역 현감이나 절 주지에게 그들의 행차 사실을 미리 알렸다.절 아래 마을까지 사인교나 남여(藍輿),나귀 등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라는 뜻이다.승려들은 이 명령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승려들이 고관대작이나 그들 식구를 등에 업고 오르내리기도 했다.어쩌다 실수하는 날이면 능멸과 매질을 피할 수 없었으니 노예나 다름이 없었다. 절에 놀러오면서 승려들이 메는 사인교를 탔던 양반 사대부들은 허랑방탕한 조선 후기 사회와 함께 비틀거리던 중화사대론자들이었다.그들은 차를 마시지 않았거니와 차를 알지도 못했다.다만 술을 알고 취해 살았을 뿐이다.차례(茶禮)라는 설,추석 명절에 조차도 차가 아닌 술로 조상제사를 모셨을 만큼 술에 빠져 살았다.국가의 원천이자 기둥인 농사꾼들은 무거운 부역과 세금,끈질긴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데도 양반사대부들은 술에 취해 살면서 중국 섬기기에 나라의 뼈가 휘었다.농민이 땀 흘려 가꾼 곡식으로 빚은 술을 마시면서 농민의 시름과 수난은 외면했다. 뿌리가 땅에 닿지 않는 관념의 잎만 무성한 성리학의 미몽을 좆는 위선에 차고 무능한 지식인들,젊어서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늙어서는 강산을 더럽히는 세도가들 앞에 초의가 말없이 제시한 것이 차였다.술 대신 차를,독선과 아집 대신 나눔과 양보를,핍박과 죽임 대신 함께 사는 지혜를 제시한 것이다. 차는 은혜를 알게 하는 가르침이며,새로운 시대를 위해서는 새로운 꿈이 필요했다.초의가 새롭게 꾼 꿈이 ‘동다문화(東茶文化)’로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정신의 집이었다.그의 ‘동다송(東茶頌)’은 단순히 중국 차문화와 역사에 관한 서른 한 마디 노래로 편술된 책이 아니라,‘東茶’ 즉 우리나라의 차를 칭송하기 위한 것이었다. ●술대신 차·독선대신 지혜 전파 서른 한 마디 노래 중에 우리나라 차의 빛깔,향기,맛의 우수성이 결코 중국차에 못지 않다는 매우 짧은 한 구절이 숨어 있다.초의가 전혀 새롭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중국 차문화 얘기를 늘어놓다가 슬쩍 우리나라 차의 우수성을 간략하게 끼워 넣은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 역사 전체를 통틀어 놓고 보아도 조선의 것이 중국보다 우수하다고 자신있게 말한 경우는 많지 않다.아니 거의 없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모든 것은 오로지 중국에서 근원하고,의지해왔으며,중국으로부터 떨어져서는 한시도 살아갈 수 없다고 믿어 온 중화사대주의자들은 감히 조선의 것이 중국 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아무리 조선의 것이 중국 것보다 우수한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사실대로 말하고 책으로 엮어낸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하는 위험이라고 여겼다.중국의 그림자도 밟지 말아야 했다. 그런데 초의라는 한 승려가 우리나라의 차가 중국 차보다 우수하다는 사실을 글로 적은 것이다.짧은 이 한 문장이 지닌 뜻은 참으로 위대하다.멀리 신라가 당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동족인 백제를 멸망시킨 그 바보짓 이후 1200여년이 지나는 동안 신라,고려,조선은 한결같이 중국 우월론자들에 의하여 좌우되어 왔다. 다만 조선의 세종임금이 중국 문자가 아닌 조선의 문자를 만들어 널리 쓰고자 했었다.그러나 한문 망령에 덮어 씌인 중화사대론자들은 한글을 암클, 즉 여자들이나 쓰는 글이니 언문(諺文)이라 깎아내렸었다.모든 것을 중국에다 의지했다.심지어 삼국사기(三國史記)라는 역사책은 우리나라 고유의 차문화를 아예 없애버린 위에 통일신라 시대인 828년에 당나라로부터 차 종자를 가져다 왕의 명령으로 지리산에 심은 것을 우리나라 차의 기원이라고 적기까지 했다. ●‘동다승’ 저술 우리차 우수성 알려 중국의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 고려 스스로가 무릎을 꿇고 역사 사실을 왜곡하여 중국의 무릎 아래로 기어든 수치이자 씻을 수 없는 모욕이다. 이렇듯 1200여년 동안 계속된 비굴한 태도를 처음으로 고쳐 잡은 것이 초의의 글귀였다.그것도 중국 문화의 자존심이자 세계 속의 자긍심인 차에 대하여 중국차보다 우리나라 차가 우수하다고 말한 것은 정치적 고려에서가 아닌 사실을 바탕으로 한 초의의 민족문화론이었다. 2004년 5월,지금 이 시간에도 한국의 많은 차인들은 조선의 중화사대론을 계승한 적자임을 긍지로 여기면서 중국 차문화를 선전하는 전도사로서 활보하고 있다.어찌 부끄럽지 않은가? 140여년 전 민족문화의 선각자 초의스님의 동다문화 앞에서 어찌 고개 들고 활보할 수 있는가? 부끄러워하라.또 부끄러워하라. ˝
  • 국내유일 중남미문화원 이복형 원장

    “우리의 반대쪽에 있어 멀게만 느껴지던 중남미는 어느덧 우리곁에 다가와 있습니다.가장 서민적인 음식인 삼겹살이나 대표적인 토속음식 홍탁의 홍어도 칠레나 페루에서 오지요.칠레 와인도 마니아들에겐 인기죠.” 이복형(李福衡·73) 중남미문화원장,70년대부터 멕시코·아르헨티나·코스타리카 등 중남미 국가의 대사를 지내 ‘한국 최고의 중남미 전문가’로 꼽히는 그는 요즘 신바람이 난다. 지난달 최초로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된 칠레,경제공동체 브릭스(BRICs)의 선두 브라질 등 라틴 아메리카가 성큼 다가오면서 ‘중남미 통(通)’으로 중남미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던 그의 말을 들으려고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기 때문이다. “사실 라틴 아메리카는 그리 먼 곳이 아닙니다.더욱이 우리에겐 합리나 이성보다도 혀끝으로 먼저 느끼게 했지요.옥수수·감자·토마토·고추 등의 원산지가 바로 중남미 아닙니까.” ●멕시코 대사 등 지낸 중남미통 중남미는 어쩌면 화두일 뿐,앞서 해외문물을 보고 겪은 사람으로서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또다른 데 있다.“세계인이란 다원화된 문화를 수용하는 태도를 말합니다.한데 우리는 ‘세계화는 곧 미국화’로 잘못 인식하고 있거든요.독점적 외래문화를 극복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라틴 아메리카입니다.” 물론 실용적인 것도 무시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중남미의 자원은 무궁무진하고 인구도 통합 출범한 EU보다 많은 4억 7000여만명에 달해 잠재력이 엄청 큰 거인과 같은 대륙이지요.구리·동·은·주석·석유 등의 광물도 풍부하고,농산물은 우리와 계절이 반대이기 때문에 보완적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는 30여년 외교관 생활의 대부분을 바쳤던 중남미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담아 양쪽의 문화적 가교 역할을 하기 위해 외교관에서 은퇴한 이듬해인 1994년,경기도 고양시 고양동에 중남미문화원을 세웠다.국내 최초이자 유일한 중남미문화원이다.일반인들은 거의 중남미에 대해 관심도 없던 때였다. 문화원이 선지 10년,중남미문화원에 대한 입소문이 나면서 주한 라틴아메리카 대사관들은 자신들이 할 일을 대신해준다면서 적극 후원해줄 정도로 달라졌다.오는 15일엔 멕시코의 국보급 가면전시회가 한달간 열릴 예정이다.그리고 올 10월엔 문화올림픽이랄 수 있는 세계박물관대회(ICOM)도 예정돼 있다. ●10년 전 건립 ‘문화전도사’ 자임 그가 중남미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74년,우리와 중남미의 거리는 실제거리보다 더 멀었다.“일반인들은 한국의 위치는커녕 이름도 몰랐지요.식자층에게는 한국전쟁과 분단,전쟁고아의 이미지가 너무 강했습니다.”더욱이 그들은 우리나라를 턱없이 얕잡아보고 있기도 했다.“그들은 신대륙이 발견된 500여년 전에 유럽에 의해 개화된 반면 우리는 50년 전에야 비로소 개화된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더라니까요.” 지금은 서로 이해의 너비와 깊이가 그 당시보단 넓어지고 깊어졌지만 여전히 피상적인 것이 안타깝다는 그다. 우리 국민들은 라틴 아메리카에 대해 군사독재,극심한 외채와 모라토리엄,하이퍼 인플레이션과 빈부 격차 등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 게 사실이다.정열적이면서도 축구를 잘한다는 밝은 면도 있지만 이는 제한적이다. 남미 또한 우리를 좋게 보지 않기는 마찬가지.남북 분단과 전쟁고아,군사독재와 외채의 이미지가 강하다는 것이다.자동차와 휴대전화가 수출되고,2002월드컵을 통해 작지만 응집력이 강한 나라라는 긍정적인 인식이 생겨났지만,이도 최근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는 요즘도 아침 5시에 일어나자마자 CNN과 NHK를 통해 세계의 흐름을 읽는다.33년간의 대사 생활 등 직업 외교관으로서 퇴직한 지 10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습성 탓이다.지인들은 그런 그를 아직도 ‘대사’로 부른다. 중남미문화원 옆 미술관의 지하에 마련된 그의 집무실엔 중남미의 그림과 조각,공예품 등과 함께 뉴스위크(Newsweek)지와 일본 최대부수의 종합 월간지 분게이슈(文藝春秋)가 늘려 있다.외교관 출신답게 영어·일본어·스페인어·포르투갈어에도 능통하다. 그는 중남미 전문가란 자부심이 매우 강하다.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래의 아메리카, 특히 중남미의 역사에 정통하다.이들 지역의 찬란했던 고대 문명도 줄줄이 꿰고 있다.멕시코 이남 35개국에서 다양한 형태의 정부와 정권이 명멸함에 따라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에서부터 브라질의 룰라 정권까지 다양한 정부 형태에도 해박하다. ●우수박물관상 2차례 수상도 중남미문화원은 6000여평의 규모로 개관당시에는 박물관 한 동으로 시작했으나,97년에 미술관,2001년에 야외조각공원까지 꾸몄다.두 차례나 우수박물관상을 탔던 이 문화원에는 3000여점의 중남미 공예품이 있다. 이 원장 부부가 중남미의 작은 장터에서 일일이 사 모은 것들이다.“대사 시절 주말이면 어김없이 골동품 시장과 벼룩시장을 찾아다녔지요.” 혼잡한 장터에서 아내를 잃고 쩔쩔매던 일,부피가 엄청 큰 촛대를 안간힘을 쓰며 차에 옮기던 기억들이 새롭다. 1962년 대통령 의전비서관으로 주로 육영수 여사의 통역을 담당했으나 65년 외무부 의전과로 가면서 직업외교관으로의 길을 걸었다.스페인 대사관 참사관과 주 마이애미 총영사를 빼곤 죽 중남미의 일을 했다.73년 스페인 참사관 시절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의 인연을 이야기했다.당시 대학생이던 박 대표가 우리나라에서 건조한 유조선 진수식 참석차 마드리드로 와 그의 통역을 맡았던 것이다.그는 박 대표를 만나면 “민생을 당부하야지요.그렇잖으면,‘이눔’하고 혼내겠습니다.”라며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퇴직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현역 때보다 오히려 더 바빠요.하루 예닐곱시간씩은 문화원을 정리하지요.나뭇가지 다듬기,잔디깎기,꽃심기,쓰레기 치우고 소각하기…” 골프장에서 허비하는 시간도 아까워 골프를 끊었다는 이 원장에게서 중남미의 정열이 그대로 묻어나는 듯했다.중남미문화원(031)962-9291.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동국대(법대) 육군 통역장교(예비역 소령) ▲62년 대통령비서실(영어 의전비서관) ▲75년 비동맹 외상회의 한국 대표단 ▲81년 도미니카(공) 대사 ▲84년 수교훈장(숭례장) ▲83년 외무부 구주국장 ▲85년 아르헨티나 대사 ▲89년 멕시코 대사 ▲93년 국제 루벤 다리오 재단 니콰라과 명예회원 ▲96년 체육훈장(맹호장) ˝
  •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이덕일 지음

    실학의 완성자,개혁군주 정조의 오른팔,500여권의 방대한 저술,문학·역사·철학·과학기술 등 온갖 학문을 섭렵한 르네상스적 인물,행정의 최일선에서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실천적 지식인….다산 정약용의 이름은 곧 우리 역사의 자부심이다.그러나 실제로 다산은 타고난 천재라기보다는 노력형에 가까웠다. ●정조 보좌 조선 근대화 이끌어 그가 성균관에 입학한 지 6년이 지나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자 정조가 꾸중을 했다는 일화는 다산의 이같은 일면을 잘 보여준다. 역사평론가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씨가 펴낸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전2권,도서출판 김영사)은 실학과 선진 과학문물,인간중심의 새로운 사상으로 침몰해가는 조선사회를 구하려 했던 다산과 그 형제들의 이야기다. 다산은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 벽파에 둘러싸인 정조를 현명하게 보좌하며 합리적 행정과 산업의 근대화를 이끌었다.역사상 최초의 계획도시인 화성의 대역사를 이룩했으며,암행어사로 민생을 살피거나 지방관으로 근무하며 개혁사상을 현실에 접목하는 데 매진했다.곡산부사로 일할 때 베푼 선정은 나중에 그가 국문을 당할 때 지배층이 민심이 두려워 그를 사형에 처하지 못했을 정도로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남인 계열인 다산과 그 형제들의 든든한 후견인이었던 정조가 1800년 급서하면서 다산이 누린 영광은 막을 내렸다.다산의 집안은 1801년 신유박해로 풍비박산이 났다. 정조 치세에서 억눌려 있던 노론 벽파가 어린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에 나선 정순왕후를 앞세우고 남인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에 나선 것이다.한국천주교사에 길이 남을 교리연구가인 막내형 정약종은 천주교 신앙을 고수하다 장남 철상과 함께 사형됐으며,조선 최초로 영세를 받은 매형 이승훈 또한 순교했다.다산과 그의 둘째 형 정약전이 제사 문제 등 성리학과 충돌되는 점 때문에 천주교를 저버린 것과 대조적이다.다산의 이복맏형 정약현은 그의 사위가 황사영인 탓에 갖은 고초를 겪었다.정조 사후 멸문지화에 가까울 정도로 몰락한 집안에서 다산과 정약전이 목숨을 건졌지만 그들은 각각 전라도 강진과 흑산도에 유배됐다.두 형제는 살아선 다시 만날 수 없었다.다산은 무려 18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났다. ●지배권력 집중공격에 만신창이 삶 책은 다산은 물론 박해로 점철된 삶을 민중과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킨 정약전에 대해서도 비중있게 다룬다.정약전은 유배지 흑산도에서 어부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의 삶에 동화됐고,‘복성재’라는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쳤다.저자는 사대부들이 모두 경전 연구에 매달리는 현실에서 민중의 삶에 직접적 도움을 주는 어류생태를 연구한 정약전이야말로 진정한 실학자의 전형이라고 말한다. ●조선후기 인물사 3부작 완결편 이 책은 저자의 조선 후기 인물사 3부작의 완결편이다.1부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에선 사후 3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송시열과 노론이 조선사회를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로 만들고 이를 명분으로 노론 일당독재를 구축하는 과정을 그렸으며,2부 ‘사도세자의 고백’에선 사도세자가 정신병자여서 죽임을 당한 게 아니라 노론 일당의 전제에 맞서 싸우다 살해된 것임을 밝혀냈다.이번에 펴낸 3부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에선 주자학 유일사상과 노론 일당독재 체제에 맞서 새로운 사회를 이룩하려 했던 정조와 다산 형제들의 파란만장한 드라마를 다뤘다.저자는 다산과 그의 형제들을 성리학 이데올로기에 의해 경직화된 체제로 치닫던 조선후기라는 시대를 거부하고 열린 사회를 지향한 선구자로 자리매김한다.각권 1만29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어버이날 맛집]불고기? 불도장?

    서울 시내에서 어른들을 모시고 가기엔 신라호텔 중식당 팔선(02-2230-3366)이 좋다.이곳에서 어른들에게 가장 인기있을 법한 메뉴는 불도장(佛渡墻).‘입산 수도중인 스님이 고소한 냄새에 못이겨 절 담을 뛰어 넘었다.’고 해서 붙여진 불도장을 팔선이 국내에서 가장 먼저 도입했다.상어지느러미와 해삼·자연송이·잉어부레 등을 육수에 담아 3∼4시간 쪄내는 것으로 재료 고유의 깊은 맛을 낸다.보양요리일 뿐만 아니라 고단백이기도 하다.불도장이 포함된 코스 요리는 12만·15만원.하지만 불도장만 따로 주문하면 6만 6000원.이외에도 북경오리(6만 8000원),해삼전복(5만 9000원) 등이 있다. ‘뼈대있는 한국의 맛’ 갈비는 철분과 필수아미노산 등의 영양이 풍부해 어른들에겐 좋은 음식이다.지하철 5호선 마포역 1번출구 근처의 마포왕갈비(02-716-8001)는 개업한 지 30년이 넘어 ‘마포갈비’의 원조로 자칭하고 있다.갈비의 앞뒤를 칼로 촘촘하면서 얇게 다져 치아가 약한 어른들도 큰 무리없이 먹을 수 있는 것이 이 집의 특징이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맛있는 식사가 어머니가 차려주는 것이 아닐까?이런 모토로 소설가 양귀자씨가 운영하는 어머니가 차려주는 식탁(02-333-5616)도 권할 만하다.이 집의 코스 메뉴 이름도 가정적이다.죽·샐러드·잡채·전·탕·튀김·육류 등으로 구성된 이모정식(1만 5000원)은 점심만 된다.여기에 연어쌈과 냉채요리가 추가된 고모정식(2만 5000원),생선회와 대하·생선요리가 더 들어가는 어머니정식(3만 8000원)으로 모두 2인분 이상만 주문받는다.낚지볶음(2만원),생선회(3만원),꽃게 튀김(2만원) 등의 일품요리 도 있다.예약하면 손님이 원하는 가격으로 식단을 짜기도 한다.또 15일까지 봄 요리축제를 연다.건강식인 은행죽·국물맛이 담백한 초교탕·부드러우면서 깊은 맛이 나는 연근전 등을 포함해 13가지 코스가 나오는 축제 메뉴는 3만 5000원이다.매주 일요일은 휴무다.˝
  • 문화사랑 여류명사모임 ‘예올’

    “우리의 전통문화를 아끼고 잘 보존하기 위해 주부들이 모였습니다.외국인들도 많은 관심을 갖고 적극 참여하고 있지요.” 우리의 ‘옛것’을 지키는 아줌마들의 모임인 ‘예올’의 박선희(67)회장.‘예올’은 단순한 전통문화 지킴이를 넘어 한국 주재의 외교관들에게도 인기를 끄는 이른바 ‘아줌마 외교클럽’이라는 점에 눈길을 끈다. 4일 오전 10시30분 서울 안국동에 위치한 고 윤보선 전 대통령의 고택 앞마당 잔디밭.두루마기 한복을 입은 연세대학 국제교육교류부의 조원경 교수가 40여명의 청중을 상대로 ‘한국의 미학’을 강의하고 있었다.청중 가운데에는 한국에 주재하는 외국의 외교관 및 부인들도 많았다.7,8명의 유학생도 눈에 띄었다. 조 교수는 ‘도솔가’‘가시리’‘황진이’ 그리고 정철의 ‘권주가’ 김동환의 ‘국경의 밤’ 등 한국의 전통시에 대해 유머를 섞어가며 소개했고 참석자들도 대부분 열심히 메모를 해가며 진지하게 경청했다. 이날 행사는 ‘예올’에서 마련했다.‘예올’ 회원 가운데 고 윤 전 대통령의 며느리의 권유로 이루어졌다. “한국의 미학,우리의 전통문화와 역사·종교 등을 주제로 한달에 한번꼴로 소개하고 있습니다.한국주재의 외교관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외국 유학생들도 많이 참여하고 있지요.” ‘예올’은 훌륭한 고전(옛것)의 세계를 오늘에 올바르게 이룩한다는 뜻으로 소설가 윤후명씨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박 회장은 설명했다.이 모임은 3년전 ‘아줌마들의 건전한 수다’에서 시작됐다.어쩌다 외국에서 온 친지나 지인들에게 유적지를 보여주러 가면 너무 황폐해 있는 광경을 자주 대하는 것이 부끄러웠단다.이후 2001년 12월 창립 발기인대회를 열었고 이듬해 6월 서울시 문화재청으로부터 비영리사단법인 ‘예올’로 정식인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후 매달 모임을 갖고 문화재 보호사업,문화재 관련 교육 프로그램도 꾸준히 열었다.장소는 주로 서울역사박물관.국사편찬위원회 위원과 각계 문화재 전문가 등도 초청했다. 또 ‘사직단’‘창경궁’ 등의 주요 사적지를 한달에 한번꼴로 찾아 잡초뽑는 일 등의 자원봉사도 벌이고 있다.‘예올’에는 축구협회의 정몽준 회장 부인 김영명씨가 운영위원,그의 언니인 김영자씨가 부회장으로 활동중이며 현재 500여명의 회원이 참여하고 있다. 김문기자 km@seoul.co.kr˝
  • 日 베스트셀러 ‘꼬리내린 개의‘ 저자 사카이 준코

    |도쿄 황성기특파원|출판 불황의 일본에 대박이 터졌다.작년 10월 1판을 낸 지 지금까지 18만부를 찍었다.‘꼬리내린 개의 울음소리(負け犬の遠吠え)’란 제목이 우선 눈을 끈다. 꼬리내린 개란 결혼하지 않은 독신녀를 가리킨다.저자 사카이 준코(酒井順子)의 분류법에 따르면 “30대,미혼에 무자식인” 여성이 그들이다.느낌이 꼭 들어맞진 않지만 ‘서른 독신녀’,혹은 ‘노처녀’쯤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결혼을 늦게 하는 만혼(晩婚) 추세는 지구촌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일본은 가히 세계 수위를 달린다.도쿄에 사는 30대 초반 여성의 미혼율이 38%에 이른다.그녀의 책은 일본에서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독신녀들에게 바치는 일종의 응원가다. ●독신녀 ‘모험·안정’ 두 유형으로 분석 “꼬리내린 개란 모험과 안정의 두 가지 길이 있을 때 재미있는 모험 쪽을 선택하는 여성이에요.호기심에 저항 못하는 사람인 거죠.괜히 창피해서 남자를 붙잡지 못한다거나,동성인 여성에게는 인기가 있는 사람이죠.” 사카이는 그의 책에서 모험과 안정의 예를 이렇게 든다.미혼 직장여성이 2명의 남성으로부터 데이트 신청을 받는다고 하자. 한 명은 소박하고 성실한 동갑내기이지만 화제가 빈곤하고,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을 모르는 탓에 잡지에 소개된 싸구려 술집으로 초대한다.다른 한 명은 경험이 풍부한 연상의 기혼남으로 그녀를 고급 복집에 데리고 간다.태어나서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복 요리에 호기심이 생겨 기혼남과의 모험을 택하는 것이 꼬리내린 개,독신녀다. 안정을 택하는 여성은 비록 얘기가 재미없고 싸구려 술집이더라도,동갑내기(안정)를 택해 결혼으로 골인한다는 즉 ‘싸움에 이긴 개’라는 것이 사카이의 논법이다.그녀의 책을 사보는 층은 누구일까. “압도적으로 꼬리내린 개(독신녀)들이 많이 읽어요.그렇지만 의외로 이긴 개(기혼녀)들도 ‘실은 나도 꼬리내린 개 체질이지만 결혼해버렸다.’는 반응이 오곤 해요.”그녀의 책을 사는 독신녀들은 “그래,그렇지.”라고 탄복하면서 읽는다.공감하는 대목이 많아서이다. “독신녀라는 게 옛날에는 특수한 존재였어요.미혼자들은 어느 쪽인가 하면 신념을 갖고 결혼하지 않거나,전쟁에 나가 남성들이 많이 죽어서 결혼을 할 수 없었다는 이유가 확실히 있었습니다.그러나 지금은 이유가 없어요.왠지 결혼하지 않을 것 같은 것이지요.그렇다고 결혼을 하고 싶다는 소망이 없는 것도 아니예요.결혼하고 싶지만 생각대로 안되는 거예요.그래서 독신녀들은 번식해 가는 것입니다.” ●독신녀의 독특한 심리·행동패턴 담아 사카이 그녀 자신도 37세의 독신녀다.책을 쓰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기혼에다,아이까지 있는 여자에게 지지 않으려고 아둥바둥거리기보다,‘졌다.’고 스스로의 약점을 인정하고 배를 내보이는 편이 살아가기 편한 것 아닌가요.게다가 미혼이더라도 (자유자재로 일하고 돈쓰고)행복하다고 어필하기보다는 ‘난 이렇게 불행해요.’라고 꼬리를 내려버리면 괜한 다툼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 독신녀들이 그녀의 이런 논리에 100% 찬성하지는 않더라도,독신녀만이 이해할 수 있는 독특한 심리,행동패턴을 소프트터치로 그려 호감을 샀다. 그녀는 일본의 만혼,특히 여성의 만혼을 이렇게 분석한다.“여성이 경제력을 갖게 돼 생활을 위한 결혼은 하지 않아도 된 점이 있어요.부모나 이웃사람의 눈이나 ‘압력’을 의식하지 않게 된 것도 꼽을 수 있고요.독신보다는 결혼 쪽이 훨씬 집안 일이나 노동량이 많아서 이런저런 일들을 생각하면 결혼할 기분이 안드는 거죠.” 사카이 본인은 왜 아직까지 독신인가.“결혼하고 싶다는 기분은 있지만,상대가 없어요.결혼을 해달라고 하는 상대와는 하고 싶지 않아요.”더 캐묻자 “결혼했다는 경력은 필요해요.결혼해서 남자가 뭔가를 해줄 것이라는 기대는 없어요.아마 결혼하면 곧바로 이혼할지 몰라요.(웃음)”라고 털어놓는다. 그녀의 책 말미에는 꼬리내린 개가 되지 않기 위한 10계명이 나온다.제1조가 “불륜을 저지르지 말 것”이다.“주위에 불륜을 저지르는 독신녀들이 너무나 많아요.간통죄가 있다면 줄어들까요.왜 불륜으로 치닫는가 하면 모험,안정 가운데 모험을 택하기 때문이죠.” 생생한 경험이 없었다면,10계명의 제1조로 쓰기 힘들 것 같다.“그래요,(불륜 경험이)있어요.어느 순간부터 불륜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작정했어요.지금은 남자친구도 없고,불륜도 저지르지 않고 있지만요.” “남자 말투를 쓰지 말 것(2조)”,“여성지를 읽을 것(4조)”,“여자들에게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 것(7조)” 등도 10계명 중 눈에 띈다. 비판은 있다.여성을 결혼 여부로 간단히 ‘이긴 개’,‘진 개’로 나누는 구분법은 경박하기 짝이 없다는 지적이다.“기혼여성으로부터는 의외로 비판이 없지만,독신녀에게선 가끔 비판을 들어요.‘난 미혼이지만 예쁘니까 괜찮아.’라든가,‘일을 잘하니까,지지 않았다.’라든가.그런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사실은 그런 얘기를 하는 것 자체가 이미 패배를 인정한 셈이에요.” ●‘독신녀 10계명’ 공감·비판 동시에 ‘꼬리내린 개’가 화두로 뜨면서 바빠졌다.일본 언론은 물론 해외 언론의 취재 요청도 적지 않다.주목할 일본의 사회현상으로 본 때문이다. “CNN,뉴스위크,브라질 잡지 등이 취재했는데,놀랍게도 많은 세계 대도시가 비슷했어요.결혼하지 않고 30대가 된다는 것은 장소가 달라도 심정적으로는 똑같다는 점이에요.” 사회 곳곳에 진출한 독신녀들이 일본 사회,소비 진작에 공헌했다는 자부가 적지 않고,언론이나 경제학자들도 그들의 공헌을 부추긴다. “그럴까요.지금 세금을 내고 있고,이들 꼬리내린 개들이 사라진다면 당장 곤란해질 사람은 있지만 아이를 낳지 않는 죄는 큰 것 같아요.소비만 해도 차세대로 이어지는 소비가 아닌,자신 세대에서 끝나는 거잖아요.” 향후 독신녀들이 더 늘어날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잘 모르겠다.”는 대답.거품경제를 경험한 30,40대와는 달리 지금의 10,20대 여성은 성장기부터 불황을 겪은 탓에 생활을 위해 결혼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현상도 나오고 있다고 진단하는 사카이.말미에 결혼 가능성을 묻자 “안할 것 같다.”는 게 그녀의 전망이다. ■걸어온 길 1966년 도쿄 출생.일본 릿쿄(立敎)대학 졸업 후 광고회사 하쿠호도(博報堂)에서 3년간 일하다,프리랜서로 독립해 집필활동에 전념하고 있다.고교 재학시절부터 여러 잡지에 칼럼을 기고해 이름을 알렸다.‘소자(少子)’,‘번뇌 카페’ 등 다수의 에세이집을 출판했다. marry04@seoul.co.kr˝
  • 韓·日 공주 횡혈묘 ‘주목’

    ‘태풍 전야의 고요’ 최근 충남 공주시 우성면 단지리 국도 32호선 도로확장 포장공사 구간의 성재산 경사면에서 확인된 횡혈묘(橫穴墓)에 대한 한·일 양국 학계의 시각과 움직임을 표현할 때 가장 적절한 말일 것이다. 지난 26일 공주 발굴현장에서 고고학자와 전문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1차 지도위원회에서 묘의 주인공과 조성시기를 명쾌하게 단정하지는 못했다.그러나 지도위원회가 현장보존과 함께 5월 말 문화재위원회에서 집중 논의할 것을 결정함에 따라 이 횡혈묘가 국내는 물론,동북아 역사학계의 첨예한 사안이 될 것임을 예고했다. 횡혈묘란 비탈진 산 언덕에 구멍을 뚫고 그 안에 굴과 같은 현실(玄室·무덤방)을 만들어 시신을 안치한 뒤 입구를 판석(板石)으로 막는 무덤 형태.학계에서는 이 묘제가 5세기 말∼6세기 전반 일본 규슈(九州)지방에서 시작해 8세기까지 일본 전역에서 유행해 지금까지 수만 기가 발굴된,일본 고대의 묘제로 보고돼 있다 국내 학계가 주목하고 나선 것은 일본에서만 확인됐던 이 묘가 완전한 형태로,그것도 15기나 무더기로 한반도에서 발견됐다는 점이다.따라서 지난 26일 공주 현장지도위원회에 참석한 학자들은 당연히 공주의 묘가 일본보다 앞선 것인지의 여부와 누구를 위한 묘인지에 관심을 모았다. 학자들 사이에는 묘의 조성 연대를 백제 동성왕(재위기간 479∼500년)부터 무령왕(501∼523년)무렵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와,아무리 빨라도 6세기 중반 전으로 보기 어렵다는 측이 팽팽하다.그러나 발굴단장인 충청문화재연구원 박순발 원장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가장 빠른 시기의 일본 횡혈묘와 비슷하거나 조금 빠르다.”는 입장을 펴고 있다.함께 발굴된 접시,토기 등에 정확한 시기를 알리는 명문이 없는 만큼 연대측정을 통해 밝혀야 하며 문화재위원회의 추후 작업에 따라 확인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묘의 주인공에 관해선 일단 공주 지역에 한정해 나타난 만큼 백제인을 위한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현장 지도위원회에 참석한 일본 가시하라고고연구소 기노시타 와타루(木下亘·48) 총괄연구원도 “토기 제작기법에서 일본토기 스에키(須惠器)와 맞물리는 점이 있지만 현지에서 만든 백제토기로 보아야 한다.”고 말해 이같은 시각을 뒷받침한다.충청문화재연구소는 “횡혈묘가 일본에서 폭넓게 유행했던 무덤 양식인 만큼 이번 발굴작업이 고대 한·일 지배세력의 교류를 비롯해 한·일 고대사의 가려졌던 부분을 메울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김성호기자 kimus@˝
  • [도태위기 침구사] “침·뜸 전문 자격시험 부활을”

    ‘체했을 때 엄지손가락 끝을 바늘로 따라.’ ‘신경통이나 관절염,타박상 치료에는 뜸이 으뜸이다.’ 굳이 병원이나 한의원을 찾지 않아도 누구나 손쉽게 활용할 수 있는 침과 뜸을 활용한 질병 치료법이다.하지만 정작 침과 뜸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침구사는 현재 우리나라엔 50명 남짓이다.지난 50여년간 침구사제도를 인정하지 않아 단 한명의 침구사도 새롭게 배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이에 전통적 민간요법인 침뜸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침구사제도를 양성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정식 침구사는 50여명뿐 1951년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관계법인 국민의료법은 의사·치과의사·한의사를 의료업자로,침사·구사·접골사·안마사를 유사의료업자로 규정했다.이어 60년에 유사의료업자령과 자격시험규정 등 하위법령이 제정돼 침구사 등의 자격시험을 치를 수 있는 제도적 뒷받침이 이뤄졌다. 그러나 62년 국민의료법을 개정한 의료법에서는 다시 유사의료업자제도에 관한 규정이 삭제됐고,결국 침구사 자격시험은 한차례도 시행되지 못했다.까닭에 당시 정부가 인가한 침구사 양성기관에서 교육을 마친 5000여명의 졸업생들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됐다. 다만 해방 이전부터 침구사로 활동했던 사람들에게는 경과규정을 적용,현재 ‘침술원’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침구사를 불인정한 지난 50여년의 공백기는 침구사를 자연도태시킬 위기로 내몰았고,침뜸을 무면허로 시술하는 불법행위자만 양산했다는 지적이다.대한침구사협회 신태호 회장은 “현재 정부의 허가를 받은 침구사는 50여명에 불과하고,신규 자격취득자가 나오지 않는 한 10여년 후면 이마저도 자취를 감출 것”이라면서 “반면 노령층을 중심으로 침뜸에 대한 수요는 꾸준해 무면허로 침뜸을 시술하는 ‘돌팔이’ 침구사만 20만∼3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고 밝혔다. ●“침구사는 고령사회 대비책” 최근 서울대 보건대학원이 내놓은 한 보고서는 2001년 기준으로 국민의료비에서 65세 이상 노인의료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17%지만,고령화 사회(노인인구가 전체의 14%)에 진입하는 2019년쯤에는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것으로 분석했다.또 노인의료비 급증 등 현행 제도와 진료 관행이 이어질 경우 국내총생산(GDP) 대비 의료비 비율은 2001년 6.1%에서 두배 가까이 증가한 11.4%가 될 것으로 예측했다. 이에 대해 정통침뜸연구소 손중양 대외협력국장은 “노인성 질환은 관절염과 고혈압,심장질환,당뇨병,청력·시력장애 등 만성·퇴행성 질환의 비율이 높아 의료비는 많이 들어가는 반면,치료율은 상대적으로 낮다.”면서 “노령화 사회에 대비해 침구사를 양성해야 의료비 부담을 줄이고,노인성 질환에는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양의학에서는 몸의 기가 흐르는 경락 등이 외상이나 부적절한 음식물 섭취,과로 등으로 인해 막히는 경우를 질병으로 본다.이처럼 막힌 경락을 자극해 정상적인 순환상태를 유지하도록 돕는 수단이 침뜸이다. 특히 침뜸은 현대 서양의학으로도 치료가 쉽지 않은 만성질환과 통증을 동반하는 질병 등에 효과가 탁월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최근에는 세계보건기구(WHO)와 미 국립보건원(NIH) 등도 침의 치료효과를 공식인정하고 있다. 약을 구하거나 병원에 가기 어려웠던 60∼70년대 이전까지 침뜸은 갖가지 병을 치료하는 ‘만병통치약’이었고,동네 어른 중 한두명은 침뜸을 시술할 수 있을 만큼 보편적이었다.하지만 정부가 유사의료행위를 엄격히 규제하면서 지금은 한약 조제가 아닌 침뜸 등 간단한 시술을 받기 위해서도 한의원을 찾아야 하는 실정이다. ●제도권 편입이 급선무 침구사들은 침구시술권을 한의사들이 독점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현 체제에 문제를 제기한다.특히 62년 의료법 개정으로 유사의료업자령 등을 삭제하면서 기존 침구사들의 업무를 누가 대신할 지에 대해 법률에 명시하지 않은 채 암묵적으로 한의사들의 독점권이 인정됐다고 말한다. 신 회장은 “현재 1만 3000여명인 한의사에게만 침구시술권을 제한하면 향후 수요 증가에 효과적으로 대비하기 어려울 것”이라면서 “침뜸을 대중생활의술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침구대학을 설립하는 등 전문인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손 국장도 “60년대 초반까지 한의사 국가시험에 침구과목이 포함되지 않았을 만큼 한약을 위주로 교육이 이뤄졌고,지금도 한의대 이수학점(620학점)에서 침구 관련 학점은 12학점에 불과하다.”면서 “침뜸은 독립적인 체계를 갖춘 전문분야로 전문시술자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침뜸을 전통의술로 활용해온 우리나라·중국·일본 등 3개국 중 침구사제도를 운영하지 않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다. 침뜸이 가장 발달한 일본의 경우 의사·치과의사와 별도로 침사·구사·안마사·지압사 등의 면허를 부여하고 있으며,면허 취득자는 병원에 취직하거나 개업할 수 있다.면허시험은 3년제 이상의 전문학교에서 교육을 마친 사람이 볼 수 있으며,매년 130여곳의 교육기관에서 2500여명의 졸업생이 배출되고 있다.지난 2001년 기준으로 일본의 침사와 구사는 각각 12만명에 이르고 있다. 북한도 우리나라의 한의사와 유사한 ‘고려의사’(보건일꾼) 밑에 침술과 구술 등의 전문분야만을 담당하는 ‘중등보건일꾼’을 두고 있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문화예술인등 12개분야 올 新지식인 100명 선발

    2004년도 신지식인 선발 및 포상계획이 26일 발표됐다. 행정자치부에 따르면 5월에서 7월까지 신지식인 신청을 받은 뒤 3단계 심사를 거쳐 연말쯤 농업인·특허인·자영업자·문화예술인·주부 등 12개 분야 신지식인 100명을 선발한다.선발된 신지식인은 정부로부터 훈장과 포장 등 정부포상이 수여되고 500만원에서 100만원에 이르는 부상급도 지급된다. 신청은 시·군·구 자치행정과나 총무과에 하면 된다.1차 심사는 8월에 각 시·도별로,2차 심사는 농림부·금감위 등 11개 중앙행정기관에서 9월 중에 이뤄진다.최종심사는 10월 행정자치부 주관으로 실시되며,11월 대상자를 확정한 뒤 12월 중순쯤 포상수여식이 열릴 예정이다. 조태성 기자˝
  • 윤락업주 상납 일부 사실로

    수년간 경찰에 금품과 향응을 상납했다는 용산역 주변 윤락업주들의 폭로가 일부 사실로 드러남에 따라 서울경찰청은 ‘상납 관행’에 대한 수사를 확대하는 한편 비리 사실이 드러나는 관련자는 전원 중징계하기로 했다. 서울경찰청 수사과는 23일 자체 감사 결과 윤락업주 박모(41)·남모(45)씨 등이 폭로한 내용 가운데 윤락업주들이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용산경찰서 직원들의 식대 48만원을 대납한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경찰은 관련 업주들과 향응·금품 수수 등의 유착의혹을 받고 있는 전·현직 용산경찰서 직원들에 대해 강도 높은 감찰조사를 하고 있다. 윤락업주들이 폭로한 진술서에 따르면 상납비리에 연루된 용산경찰서 전·현직 직원은 30여명이며 상납액수는 3300여만원에 이른다. 경찰은 지난 22일 상납내역을 공개한 윤락업주 남씨가 23일 새벽 자진출두해 폭로내용을 번복한 것과 관련,“남씨가 다시 진술을 뒤집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와 상관없이 전면 수사를 벌이겠다.”고 밝혔다. 경찰은 금명간 법원에서 영장을 발부받아 윤락업주들의 업소와 자택에서 압수수색을 하고 계좌추적도 병행해 ‘상납 장부’의 존재와 금품수수 의혹을 캐기로 했다. 한편 폭로문건에 이름이 언급된 용산서 경찰관들은 윤락업주들의 진술이 “사실무근”이라며 유착혐의를 강력 부인했다. 형사과 강모(29) 순경은 “남씨가 관내에서 오래 윤락업을 한 업주라는 정도밖에 모른다.”면서 “폭로 내용은 사실무근이며 감찰조사를 받은 뒤 떳떳하게 수사를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수산시장 접대자리에 있었던 장모(56) 경감은 “당시 강력반 직원의 부인이 포항에서 물미역과 과메기를 가져왔길래 강력반 회식인 줄 알았다.”면서 “남씨가 그 자리에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강력반장이 계산할 것이라고 해서 남씨와는 관계없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해명했다. 앞서 용산경찰서에서 경찰의 윤락가 수사에 항의하며 분신,입원한 박씨와 경찰 상납내역을 공개했던 남씨는 이날 0시30분쯤 승용차를 타고 서울경찰청에 자진 출두,6시간쯤 조사를 받고 귀가했다. 경찰은 “상납 내용과 관련,조사를 하겠다고 연락했더니 ‘자진출두해 모든 걸 밝히고 끝내겠다.’며 찾아 왔다.”면서 “상납했다는 내용 모두가 꾸며낸 것이라고 자백했다.”고 밝혔다. 유지혜기자 wisep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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