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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0) 고약장수에서 종6품 오른 피재길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0) 고약장수에서 종6품 오른 피재길

    홍천 피씨(皮氏)는 전형적인 중인 집안이다. 대부분의 중인은 문과를 하던 사대부 집안에서 분파되었는데, 피씨는 문과 급제자가 없다. 조선시대 양반들의 1차 시험이었던 생원 진사시의 합격자 명부 ‘사마방목’에도 피씨는 없으니, 전형적인 중인이라고 볼 수 있다. 중인 집안의 족보를 간추려 모은 ‘성원록(姓源錄)’에는 홍천 피씨가 두 집안 실려 있는데, 중시조인 피수장(皮壽長)과 피하조(皮河照)가 모두 무인 출신이다. 두 집안의 후손들은 역관, 계사, 율관들과도 혼인했는데,‘성원록’을 편찬한 이창현은 이 집안을 의원 집안으로 분류했다. 종기를 잘 고쳤던 피재길(皮載吉)의 후손은 기록되어 있지 않아, 그의 직계에게는 의원의 맥이 끊어진 듯하다. ●어머니에게 처방 배워 고약을 만들어 팔다 의원 피홍즙(皮弘楫)은 주로 종기를 고쳤는데, 백광현과 달리 침으로 째기보다 약을 잘 써서 고쳤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에 재길은 아직 나이가 어려, 아버지의 의술을 이어받지 못했다. 어머니 박씨가 남편 옆에서 보고 들었던 여러 처방을 그에게 가르쳤다. 재길은 의서를 배우지 않았으므로, 약재를 모아 고약을 달이는 법만 배웠다. 종기를 고치는 온갖 고약을 팔러 여염을 돌아다니면서도 의원들과 맞서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여염의 민간인뿐만 아니라 사대부들도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다 고약을 사 썼는데, 효험이 매우 뛰어났다. 1793년 여름에 정조 임금의 머리에 헌데가 났다. 여러 가지 침과 약을 써보았지만 오랫동안 낫지 않았다. 헌데가 얼굴과 턱으로 퍼졌다. 게다가 날씨까지 무더워, 정조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내의원의 여러 어의(御醫)들도 어쩔 줄 모르고, 대신들도 날마다 모여 의논했지만 대책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정조를 옆에서 모시던 사관 가운데 피재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있어, 그를 불러들여 치료법을 물으시라고 추천했다. ●웅담 고약을 처방해 정조의 헌데를 사흘 만에 고치다 피재길은 미천한 신분이었으므로, 임금 앞에서 떨며 땀만 흘리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좌우에 있던 여러 의원과 신하들이 모두 속으로 비웃었다. 정조가 가까이 다가와 진찰하게 하였다.“두려워 말고 네 솜씨를 다하라.” 그러자 재길이 말했다.“신에게 한 가지 처방이 있는데, 이 증상에 써볼 만합니다.” 물러가 약을 지어 바치라고 명하자, 웅담을 여러 가지 약재와 함께 고아서 고약을 만들어 붙였다. 정조가 “며칠이면 낫겠느냐?”고 묻자,“하루면 통증이 멎고, 사흘이면 다 나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사흘 뒤에 정말 다 나았다. 정조가 약원(藥院)에 유지를 내렸다. “전해 오는 약에서 조금 벗어나긴 했지만, 그동안의 괴로움을 다 잊게 해주었다. 요즘 세상에 뜻밖에도 숨은 솜씨와 비장된 의서가 있으니, 의원도 명의(名醫)라 말할 만하고, 약도 신약(神藥)이라 말할 만하다. 그의 수고를 갚을 방법을 의논하라.” 약원의 신하들이 “우선 내침의(內鍼醫)를 맡게 하고 6품을 내린 뒤에 벼슬을 주십시오.”라고 청하였다. 정조가 허락하고 즉시 나주 감목관(監牧官)을 제수하였다. 감목관은 지방의 목장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종6품 관원인데, 대개는 부사나 첨사 같은 지방 수령들이 겸직하였다. 중인이나 서얼이 수령에 천거되려면 먼저 감목관을 지내기도 하였다. 감목관 벼슬을 준 것은 나중에 수령으로 임명하겠다는 뜻이기도 해서,‘성원록’에도 피재길을 의원으로 소개하지 않고 목관(牧官)이라고 소개했다. 의원이 겸할 수 있는 명예직인 셈이다.‘정조실록’ 17년(1793) 7월16일 기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임금의 병환이 평상시대로 완전히 회복되었다. 지방 의원인 피재길이 단방(單方)의 고약을 올렸는데, 즉시 신기한 효력을 냈기 때문이다. 피재길을 약원의 침의(鍼醫)로 임명하도록 하였다.” 피재길이 종6품 나주 감목관으로 임명되자, 신의 피재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청구야담’에서는 그의 명성을 이렇게 기록했다.“(감목관으로 임명되자) 약원의 여러 의원들이 모두 놀라 감복했으며, 두 손을 맞잡고 그에게 맞서기를 사양하였다. 이로부터 피재길의 이름이 온 나라 안에 퍼졌으며, 웅담고약이 천금의 처방이 되어 세상에 전해졌다.” ●임금의 목숨을 구해내지 못해 유배되다 천금의 처방을 터득했지만, 그가 갑자기 부자가 된 것은 아니다. 민간의 고약장수가 내의원 침의로 승격했지만, 임금의 병을 치료하는 것은 언제나 목숨을 담보해야 할 정도로 위태하고도 귀중한 일이었다.1800년 여름에 정조가 병에 걸려, 여러 의원들이 온갖 처방을 올려도 쾌유되지 않았다.‘정조실록’ 6월22일 기사에 약원의 여러 신하들을 접견하는 기록이 실렸다. 도제조 이시수가 안부를 묻자 “잡아당기는 통증이 조금 나은 듯하다.”고 답했다. 화성유수 서유린이 “수라를 이미 드셨습니까?”라고 묻자 “수라를 어찌 챙겨 먹을 수 있겠는가. 겨우 쌀미음을 조금 마셨을 뿐이다.”라고 답했다. 이병정이 “봉해 올린 장고( 膏)는 드셨습니까?”라고 묻자 “지금 같은 입맛으로 어찌 먹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정조는 신하들의 안부인사를 다 들은 뒤에 “피재길에게 지방의원 김한주·백동규와 함께 들어와 진찰해 보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온갖 음식이 입에 맞지 않고, 마땅한 약도 없었으므로, 믿을 데라곤 웅담고약의 신의 피재길 한 사람뿐이었다. 내의원 의원들이 며칠이 되어도 고치지 못하자, 온 나라에서 이름난 의원들을 모두 불러들여 지방 의원들이 함께 진찰하였다. 피재길이 진찰하고 나자 정조가 “찹쌀밥을 붙인 뒤에 고름이 많이 나왔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나 곪았는가?” 물었다. 김한주는 푹 곪았다 아뢰었고, 백동규는 고름이 많이 나왔지만 아직도 푹 곪지는 않았다고 아뢰었다. 의원들 사이에도 진단이 다르게 나오자, 정조가 “마루 밖으로 나가 앞으로 쓸 처방을 자세히 의논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이튿날이 되어도 정조의 종기는 아물지 않고, 오히려 더 커졌다. 등골뼈 아래쪽부터 목뒤까지 여기저기 부어올랐는데, 연적만큼 크게 부어오른 곳까지 있었다. 정조는 도제조 이시수에게 “병이 든 지 오래 되어 원기가 차츰 약해지고 있으니, 지방의 잡다한 의원들은 더 이상 들여보내지 말라.”고 명했다. 피재길을 믿은 것이다. 그러나 하루가 또 지나도 차도가 없자, 이제는 피재길도 믿을 수 없었다.24일에는 정조가 “어제 정오부터 나오는 고름이 조금 적어졌다. 이제는 피재길 한 사람에게만 진찰하게 할 수 없으니, 여러 의관 가운데 누가 좀 더 나은가?” 물었다. 그러나 피재길의 치료도 끝내 효험이 없어, 정조는 나흘 뒤인 6월28일에 세상을 떠났다. 순조가 즉위한 뒤에 가장 먼저 한 일 가운데 하나가 정조를 살려내지 못한 의원들의 죄를 따지는 것이었다.7월4일 사헌부에서 “내의(內醫) 강명길과 피재길, 방외의(方外醫) 심인을 국문해서 실정을 알아냈으니, 속히 형벌을 시행하도록 하소서. 그 나머지 약(藥)에 대해 의논한 의원들도 아울러 엄히 조사하여 해당되는 형벌을 속히 시행하소서.”하고 아뢰었다. 곧바로 피재길을 유배보내라고 명이 떨어졌으며, 언관들은 의원들을 역의(逆醫)라고 명명하였다. 임금을 제대로 치료못한 책임 정도가 아니라, 시해한 혐의까지 덮어쓴 셈이다. 열흘이 넘게 고문당하던 끝에 의원 강명길은 매맞아 죽었으며, 피재길은 7월14일에 함경도 무산으로 유배되었다. 순조 3년(1803) 2월6일에야 대왕대비의 명으로 대사령이 내려 무산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침술과 고약 하나로 고약장수에서 종6품까지 올랐던 피재길은 결국 침술과 고약 때문에 천리 유배길에 올랐다. 전문지식인 중인의 책임이자 비애라고도 할 수 있다. ●21세기까지 애용되는 고약의 효험 20세기의 고약으로는 이명래고약, 됴고약 등이 유명한데, 이명래 고약은 전통적인 고약과 좀 다르다. 파리외방전교회의 드비즈 성신부가 1895년에 아산 공세리에 부임해 공세창을 헐고 성당을 지었다. 중국을 통해 입국했던 드비즈 신부는 라틴어로 된 약용식물학 책의 지식과 한의학 지식을 응용해 고약 만드는 비법을 창안해내고, 공세리성당 신도였던 요한 이명래에게 전수했다. 이 고약이 처음에는 드비즈 신부의 한국 이름을 따서 성일론(成一論) 고약이라고 불리다가, 이명래의 민간요법까지 더해지며 1906년 아산에서 이명래고약집이 개업했다고 한다. 성한 살은 다치지 않고 굳어진 고름만 골라 뿌리를 뽑는 발근고(拔根膏)가 이명래고약의 핵심인데, 소나무뿌리를 태워 만드는 기름에다 약재를 녹여 만들었다. 발근고가 종기를 터뜨리면 고약이 고름을 빨아낸다. 우리나라 신약 제1호라고 할 수 있는 이명래고약의 비법은 100년 넘게 사위에서 사위로 전수되고 있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37) 계림로 14호분 출토 황금장식 보검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37) 계림로 14호분 출토 황금장식 보검

    1973년 6월, 경북 경주의 대릉원 옆으로 계림로를 개설하는 공사를 하다가 6세기 신라 고분이 하나 발견되었습니다. 배수로를 파면서 우연히 무덤으로 보이는 돌무지가 삽에 걸리는 바람에 발굴이 이루어졌지요. ‘계림로 14호분’으로 이름 붙여진 이 무덤은 길이 3.5m에 너비 1.2m로 대릉원 일대에 있는 고분으로는 크기가 작았지만 왕릉에 버금갈 만큼 화려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봉분이 흔적도 없이 깎여나간 위에 민가가 지어져 있었기에 오랜 세월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무덤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출토품은 피장자의 허리춤에서 나온 황금 장식 보검이었습니다. 길이가 36㎝에 이르는 이 보검은 황금으로 장식하고 군데군데 홍마노를 깎아 넣어서 격조 높은 색조의 조화를 이루고 있지요. 당시 보검의 출현에 학계는 긴장했습니다. 너무나도 이국적인 정취를 풍겼기 때문이지요. 보검을 자세히 보면 테두리와 내부가 수많은 금 알갱이로 장식되어 있는데, 바로 그리스 로마 양식인 누금 기법이라고 합니다. 이후 이 보검이 외래 문물의 영향을 받아 신라에서 제작된 것인지, 수입품인지 논란이 없지 않았지만 요즘은 외국에서 유입된 것이라는 시각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2001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열린 ‘신라황금’특별전에 출품되었을 때도, 아예 ‘외래품(Imported Goods)’ 코너에 진열되었으니까요. 신라는 서역과 문물교류가 매우 활발했던 만큼 계림로 14호분 자체가 외국인의 무덤이 아니었겠느냐는 추측도 없지 않습니다. 이런 모양의 보검은 해외에도 유례가 드문데, 카자흐스탄의 보로로에 지역에서 출토된 칼과 중국의 신장(新疆)위구르자치주에 있는 키질 제69굴의 벽화에 그려진 무사의 칼이 가장 비슷합니다. 모두 실크로드의 중간기착지라고 할 수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입니다. 한 걸음 나아가, 이 보검의 제작지를 로마 세계와 직접 연결시킨 사람은 일본학자 요시미즈 쓰네오(由水常雄)입니다. 그는 2001년 일본에서 출간된 뒤 2002년 국내에서도 번역된 ‘로마 문화 왕국, 신라’에서 일찍부터 그리스·로마 문화를 받아들인 다뉴브강 남부 트라키아 지방의 켈트족이 이 보검을 만든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요시미즈는 켈트 지배자의 사신이 직접 신라로 가져왔거나 신라의 사절이 그곳에서 하사받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실크로드 상인이 신라의 고위층에게 판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이 정도의 최상급 의례용 보검이라면 상거래 대상은 아니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트라키아는 375년부터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한 훈족, 즉 흉노의 근거지입니다. 유럽을 100년 동안이나 공포로 몰아넣은 아틸라의 본거지이지요. 게다가 장식 보검은 아틸라가 유럽을 제패한 시기, 로마와 이집트, 서아시아에서 유행한 스타일이라고 합니다. ‘신라·서역교류사’를 쓴 정수일 교수는 4∼6세기 신라와 로마 사이에 이렇듯 상상을 초월한 만남이 있었던 것은 흉노 등 실크로드로 서역과 교류하던 유목민족 국가가 통로 역할을 했기에 가능했다고 설명합니다. 그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로마 세계에서 만들어졌지만 신라의 수도 경주에 묻힌 황금 장식 보검이라는 것입니다. dcsuh@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9)숭록대부까지 오른 ‘神醫’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9)숭록대부까지 오른 ‘神醫’

    약을 쓰는 의원과 별도로 침의를 양성하자는 주장은 세종시대 전의감(典醫監) 책임자였던 황자후가 처음 내세웠다.“병을 속히 고치는 데는 침이나 뜸만 한 것이 없습니다. 의원으로서 침을 놓고 뜸을 뜨는 구멍을 밝게 알면 한 푼의 약도 쓰지 않고 모든 병을 고칠 것입니다. 지금부터 중국의 의술을 익히는 법에 의해 각각 전문(專門)을 세우고 주종소(鑄鐘所)로 하여금 구리로 사람을 만들게 하여, 점혈법(點穴法)에 의해 재주를 시험하면 의원을 취재하는 법이 또한 확실해질 것입니다.” 허임의 ‘침구경험방’ 첫 판본이 나온 지 7년 뒤인 효종 2년(1651)에 내의원의 부속청으로 침의청(鍼醫廳)이 설치되었다. 당대 침구술의 최고 실력자들이 왕궁에 모이게 된 것이다.‘내침의선생안’에 202명의 내침의, 즉 내의원 침의 명단이 실렸는데, 이 가운데 외과수술로 가장 이름을 날린 침의가 백광현이다. ●의서를 보지 않고 침을 써서 말을 고치다 침의로 이름난 백광현(白光炫·1625∼1697)은 사람됨이 순박하고도 조심스러웠다. 자기 동네에서도 너무 진실스러워, 마치 바보 같았다. 키가 큰 데다 수염이 길었으며, 눈에서 번쩍번쩍 빛이 났다. 대를 잇는 의원이 아니라, 처음엔 말의 병을 고쳤다. 말의 병에도 여러 가지가 있어서 그 처방을 모은 ‘마의방(馬醫方)’이 광해군 8년(1616) 4월 의주에서 간행되었지만, 그는 이런 책을 보지 않고 오로지 침만 써서 치료했다.‘마의방’에 말의 경혈도가 있어서 경혈을 찾아 침을 찔러 넣으면 편했는데, 그는 자기 방식을 고집해 경험을 쌓았다. 임상실험을 충분하게 한 것이다. 말침은 사람에게 시술하는 침에 비해 납작하고 넓은 봉 형태이며 철제로 만들었다. 침을 오래 놓을수록 손에 익어지자, 사람의 종기에도 시험을 해보았다. 지금은 종기가 별로 나지 않지만, 조선시대에는 위생관념이 열악해 많이 났으며, 심하면 목숨까지 잃게 되는 큰 병이었다. 침으로 사람의 종기까지도 고쳐 기이한 효험을 많이 보게 되자, 드디어 사람 고치는 것만 일삼았다. 마의(馬醫)에서 침의(鍼醫)로 전업했으니, 신분이 상승한 셈이다. 그가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었던 까닭은 의과를 거쳐 내의원에 들어가지 않고 민간에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의 종기를 보고, 상황에 따라 달리 시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날이 갈수록 그의 진단이 더욱 정확해졌다. 중인들의 전기를 많이 지었던 정내교가 백광현의 전기도 지었는데, 그가 종기의 뿌리를 뽑은 방법을 이렇게 설명했다. “대개 종기에 독이 가득 차면 근(根)이 생기는데, 옛 처방으론 이걸 고칠 방법이 없었다. 광현은 이런 종기를 보면 반드시 커다란 침을 써서 근을 발라내어, 죽을 사람도 살렸다. 처음엔 침을 너무 세게 써서, 어떨 때에는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에게 효험을 보고 살아난 사람들이 차츰 많아졌으므로, 병자들이 날마다 그의 대문에 모여들었다.” 정내교는 “지금 세상에서 종기를 째고 고치는 법은 백태의에게서 시작되는데, 그 뒤에 배운 자들은 모두 그에게 미칠 수 없었다.”고 했다. 약으로 치료할 수 없는 종기를 외과적으로 치료하는 방법을 처음 개발한 것이다. 시술하다 환자를 죽이기까지 했다는데, 사람이 아니라 말부터 치료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째보면서 임상실험에 일찍 성공했고, 사람에게 시술할 무렵에는 이미 침술이 손에 익었을 것이다. 침을 놓는 솜씨는 의서를 많이 보았다고 익힐 수 있는 게 아니다. 병자들이 모여들수록 의술 베풀기를 좋아해, 더욱 힘쓰고 게을리하지 않았다. 몸을 사리지 않았으며, 돈을 밝히지도 않았다. 침으로 째서 뿌리를 뽑는 비법을 써 그의 이름을 크게 떨쳤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신의(神醫)라고 칭송했다.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의 종기를 똑같이 고치다 그는 의과에 합격하지 않았지만, 언제부턴가 내의원에 배속되었다. 현종 11년(1670) 8월16일 실록에 “왕의 병환이 회복되자 백광현에게 가자(加資)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품계를 한 급 올려주었다는 뜻인데, 몇품이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숙종은 10년(1684) 5월2일 정사에서 그를 특별히 강령현감(종6품)에 임명했다가 포천현감으로 바꾸었는데,“의관의 수령 임명이 여러 번 중비(中批)에서 나와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진실로 만족하게 여기지 않았었는데, 백광현이 미천한 출신이고 또 글자를 알지 못하는데도 별안간 그를 이 벼슬에 임명하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대론(臺論)이 일어났다.”고 사관은 기록했다. 어의들이 왕의 병을 고치면 승진하고, 의원으로 더 이상 승진할 자리가 없으면 지방 수령으로 발령내는 경우가 많았다. 왕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의원에게 상을 주는 것이 당연했다. 백광현이 현종의 목에 난 종기를 고치고, 효종비 인선왕후의 머리에 난 종기도 큰 침으로 수술하여 완치시켰으며, 자신의 목에 난 종기와 배꼽에 난 종기까지 침으로 치료했으니 종6품 현감으로 발령내는 것쯤은 숙종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더구나 효종이 종기를 제대로 고치지 못해 세상을 떠났으므로, 종기에 대한 두려움도 컸다. 중비(中批)는 임금의 뜻이다. 백광현을 내의원의 관직에 올려주는 것은 상관없지만, 지방 수령은 문과나 무과에 급제한 양반이 임명되는 것이 관례였으니 파격적인 대우였다. 사간원에서 그를 반대할 명분이 없자 “글자를 알지 못한다.”고 반대했다. 그가 전형적인 의과 출신이 아닌 데다 전통적인 의서(醫書)도 보지 않고 경험에 따라 치료한 침의였으므로, 한문에 약한 것을 트집잡은 것이다. 그는 1691년에 지중추부사,1692년에 숭록대부로 승진했는데, 실제 직책이 없는 벼슬이나 품계였다. 정내교는 그의 전기를 쓰면서 높은 벼슬에 오른 그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다.“숙종 초엽에 어의로 뽑혔는데, 공을 세울 때마다 품계가 더해지곤 해서 종1품에 이르렀다. 벼슬도 현감을 지내, 민간에서 영예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병자들을 대할 때에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부름이 있으면 곧 달려갔고, 가서는 반드시 자기의 정성과 능력을 다하였다. 병이 다 나은 것을 본 뒤에야 치료를 그만두었다. 늙고 고귀해졌다고 해서 게을러지지 않았다.” ●“백광현이 세상에 없어서 죽는구나” 정내교는 전기를 쓰면서, 자신이 실제로 본 백광현의 신통한 진단을 이렇게 증언했다. “내 나이 15세 때에 외삼촌 강군이 입술에 종기가 났다. 백태의를 불러왔더니, 그가 살펴보고 ‘어쩔 수가 없소. 이틀 전에 보지 못한 게 한스럽소. 빨리 장례 치를 준비를 하시오. 밤이 되면 반드시 죽을 게요.’라고 말했다. 밤이 되자 과연 죽었다. 그때 백태의는 몹시 늙었지만, 신통한 진단은 여전했다. 죽을 병인지 살릴 병인지 알아내는 데 조금치도 틀림이 없었다. 그가 한창때에는 신기한 효험이 있어서 죽은 자도 일으켰다는 게 헛말은 아니었다.” 정내교가 15세 때라면 백광현이 71세 되던 1695년이다.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데, 이 해에 재상을 치료한 기록이 실록에 실려 있다.12월9일에 각기병을 앓는 영돈녕부사 윤지완에게 왕이 백광현을 보냈는데, 사관은 “백광현이 종기를 잘 치료하여 기이한 효험이 많이 있으니, 세상에서 신의(神醫)라 일컬었다.”고 설명했다. 효종 10년(1659) 5월1일에 약방에서 문안하자, 효종이 “종기의 증후가 이같이 날로 심해 가는데도 의원들은 그저 심상한 처방만 일삼고 있는데, 경들은 심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답하였다. 의관 유후성이 산침(散鍼)을 놓자고 아뢰어 그대로 따랐지만, 효험이 없었다.3일에는 병이 위독해 편전에 나가지 못했으며, 왕이 입시한 의관들에게 종기의 증후를 설명하라고 명했지만 아무도 분명히 말하지 못했다.4일에는 의관 신가귀가 침을 놓자고 했으며, 유후선은 놓으면 안 된다고 했다. 신가귀가 침을 놓았지만, 혈락(血絡)을 범하는 바람에 피가 그치지 않고 나와 효종은 결국 세상을 떠났다. 한 달 뒤에 신가귀는 교수형을 당했다. 효종 10년이라면 백광현이 아직 내의원에 들어오지 못하고, 민간에 돌아다니며 경험을 쌓던 시절이다. 몇 년 뒤였다면 효종의 종기를 침으로 고치지 않았을까? 정내교는 백광현의 전기를 끝내면서 “종기가 생겨서 그 독을 고치기 어렵게 된 사람들은 요즘도 반드시 ‘세상에 백광현이 없으니, 아아! 이젠 죽을 수밖에 없구나.’라고 탄식한다.”고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몇십년 뒤에도 그의 신통한 침술을 잊지 못했던 것이다. 백광현은 4형제였는데,2남 광린(光璘)과 4남 광현이 의원으로 활동했다.4형제의 후손 가운데 역관, 의원, 계사가 골고루 배출되었는데, 광현의 후손에서 대를 이어 침의가 많이 나왔다. 정내교는 “그가 죽은 뒤에 그 아들 흥령이 대를 이어 의원이 되었는데, 꽤 잘한다고 소문이 났다.”고 했다. 그의 침술이 아들을 통해 가업으로 전수된 것이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손학규 ‘장외경선’ 선언

    손학규 ‘장외경선’ 선언

    이틀간 경선 일정을 거부하고 잠행했던 대통합민주신당 손학규 후보가 21일 경선 복귀를 선언, 와해 위기의 경선 국면이 일단 정상화됐다. 손 후보는 그러나 경선 캠프 해체를 전격 발표해 향후 경선 과정에 어떤 파장을 몰고 올지 주목된다. 손 후보와 정면 충돌 양상을 보였던 정동영 후보는 “무엇이 새 정치이고 구태정치인지 토론할 용의가 있다.”며 경선 후보 3자 회동을 제안, 성사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손 후보는 경선 일정 거부 이틀 만인 이날 오전 서울 여의도 캠프 사무실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대통합민주신당과 함께 끝까지 가겠다.”며 경선 완주 의사를 밝혔다. 손 후보는 “당권 밀약설, 공천 보장, 줄세우기 부담에서 국회의원들을 해방시켜드리고자 한다.”면서 “대선 승리를 위해서는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오늘로 경선대책본부를 해체하겠다.”고 밝혔다. 또 그는 “경선은 자발적 국민참여를 바탕으로 치르겠다. 민주시민, 노동자, 농어민, 양심적 지식인, 학생 등으로 구성된 자원봉사단을 중심으로 진정한 국민경선의 정신을 살리고자 한다.”며 향후 활동 계획 방향을 제시했다. 하지만 손 후보는 이날 오후 부산 정책토론회와 관련 “경선관리 능력도 없는 지도부가 국민들에게 오직 경멸의 재미만 주는, 말꼬리 잡기, 낡은 이념 싸움, 낡은 패거리 싸움인 그 토론회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힌 뒤 불참했다. 손 후보측 우상호 대변인은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참배하기 위해 불참하는 것”이라면서 “향후 당의 모든 공식적인 경선 행사에는 빠짐없이 참석한다.”고 설명했다. 손 후보는 “당 지도부는 부정 동원 선거에 대한 조사를 조속히 실시, 다음 경선 전까지 마무리해 발표해 주시기 바란다. 실현되지 않을 경우 엄중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면서 시민·종교인·대학생 등 외부 인사들로 구성된 ‘부정동원선거 국민감시단’ 구성을 주장했다. 정 후보는 이날 오전 부산에서 가진 선대위 회의 모두 발언에서 최근 구태정치 논란에 대해 “정동영의 정치는 붉은 악마와 같은 서포터스 정치”라며 손 후보 및 이해찬 후보와의 3자 회동을 제안했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이주노동자 첫 합동 수계법회

    이주노동자 첫 합동 수계법회

    한국에 들어와 살고있는 외국인 노동자 500명이 한꺼번에 계를 받는 대규모 수계(受戒)식이 열린다. 조계종 총무원이 이주노동자불교협의회와 함께 다음달 7일 조계사 대웅전에서 마련하는 ‘이주노동자 수계법회 및 문화마당’행사. 조계사 창건주간을 맞아 스리랑카, 네팔, 몽골, 방글라데시, 베트남 등 불교권 국가에서 이주해온 노동자 500여명에게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이 직접 계를 주는 자리로 조계종단 최초의 외국인 합동 수계식인 셈이다. 이번 수계식은 그동안 몇몇 조계종 사찰에서 진행해온 이주 노동자 지원활동을 토대로 마련됐다. 조계사는 부설 이주노동자지원센터를 통해 이들에 대해 무료진료와 법률 상담을 진행해 왔다. 안산 보림선원도 산재 환자와 구직 노동자 지원을 돕고 있다. 수계식 참가자도 대부분 이같은 사찰의 지원활동에 참여했던 이주 노동자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사찰들의 이주노동자 지원은 지난 2월 여수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를 계기로 지관 스님이 본말사 주지연수를 다니면서 사찰마다 이주노동자 대책을 세울 것을 지시한 데 따른 것. 조계사 이주노동자지원센터며 안산 보림선원도 모두 그때 이후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조계사에는 몽골불자회와 네팔불자회가 생겼고 다음달 경기도 양주에는 스리랑카 스님이 운영을 맡는 이주노동자지원센터 부설 쉼터도 문을 열 예정이다. 화계사는 다음달 28일 산재 사망자 등 이주노동자 합동 천도재를 지낸다. 조계종 총무원과 조계사는 “그동안 불교권 국가 출신 이주 노동자들이 한국에서 신행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드물었다.”며 “이번 행사는 종단 차원에서 각 사찰의 이주 노동자 지원 활동을 결집해 신행터와 소통공간을 마련해주는 한편 이들의 출신국 드라마 상영이나 한글교실 운영 같은 활동을 체계적으로 해나가기 위한 첫자리”라고 설명했다. 한편 이날 수계법회가 끝난 뒤 조계사 일원에서는 다양한 문화마당이 펼쳐진다. 극락전과 대웅전 주변에서 수계자들의 화합마당이 열리며 수계자들에 대한 무료법률 상담 및 미용 서비스도 진행된다. 조계사 백송 주변에선 한국 전통놀이 및 불교관련 용품 만들기 체험행사가 있고 대웅전앞 특설무대에서 타악공연 야단법석과 동남아전통공연 등으로 꾸며진 공연마당도 펼쳐진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굿음악제 ‘운맞이 대동굿’

    지난 14일 경기도 문화의 전당 야외공연장에서는 경기문화재단 창립 10주년을 기념하는 정통 황해도굿 양식의 대동놀이판이 벌어졌다. 굿을 하기 전 악을 울려 잡귀를 쫓아내는 의식인 ‘신청울림’을 시작으로 진행된 이번 굿판은 굵은 빗줄기 속에서도 300여명의 관중이 모여 만신들의 복을 받았다. 이번 굿판에서는 참가한 모든 사람들에게 붙어 있는 부정을 물리쳐내는 ‘초부정’, 자손들의 명과 복을 발원하는 ‘칠성’, 운이 사나운 사람을 위해 돼지로 대수대명 시켜 나뿐 액운을 막아내는 ‘타살’ 굿 등이 7시간 넘게 이어졌다. 이날 굿판의 하일라이트인 ‘작두굿’은 우천으로 아쉽게도 연기되었지만 한국문화의 정체성을 규정해줄 수 있는 원형질의 ‘굿’을 만신들과 함께 대운을 기원하는 진짜 굿이었다. 손진호기자 nasturu@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옴부즈맨 칼럼] 신정아 보도와 언론의 품격/최영재 한림대 언론학부 교수

    “신정아가 아동 유괴범이나 연쇄살인범,1000억대 사기범 그 이상의 취급을 받는구나. 따져보면 대학졸업장 가라(가짜)로 만들어서 대학교수한 잡범에 불과한데…민생이 어려운데 무슨 과거사냐 어쩌냐 그러더니 막상 주요 언론들이 한달내 붙들고 난리치는 사건은 이런 잡범이구나.” 신정아의 자진 귀국 소식을 전하는 지난 16일 한 신문의 인터넷판 기사에 달린 댓글이다. 이번 사건이 문화계, 지식층, 정치권력이 연루돼 있는 데다 일탈적이고 기이한 구석이 있어 상당 정도 기사거리가 되겠지만 이렇게까지 언론이 ‘난리’를 칠 만큼 큰 기사일까.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지난해 일본의 베스트셀러 1위는 후지와라 교수가 쓴 ‘국가의 품격’이었다고 한다. 여러 이유로 국가와 민족의 품질이 떨어지고 있다는 일본인들의 위기감을 반영한 결과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일본에서는 남성의 품격, 여성의 품격, 기업의 품격, 변호사의 품격과 같은 품격이란 말이 유행이라고 한다. 신정아 사건은 분명 이땅에 존재하는 대학의 품격, 지식인의 품격, 고위관료의 품격, 나아가 국가의 품격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엔 언론이 스스로 품격 문제에 걸려들고 말았다. 대한민국 언론은 품격없는 신정아 사건을 보도하면서 선정, 왜곡, 추측, 공격, 심지어 마녀사냥식 보도와 같은 스스로의 품격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른바 정론지를 자처하려면 아무리 추문 보도라 할지라도 객관적 사실보도 원칙을 지키면서 그때그때 권력 감시를 위한 문제제기 보도를 했어야 했다. 초기 신씨의 가짜학위, 권력층의 비호 의혹을 제기할 때까지만 해도 비교적 절제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마도 변양균 전 정책실장과 신씨와의 부적절한 관계 의혹이 나오면서 신문은 객관보도, 정론, 품격, 절제, 배려, 공정보도와 같은 소중한 저널리즘 가치를 너무도 쉽게 내팽개쳤다. 왜 이럴까. 신정아 보도는 어느새 의혹과 추측 보도, 공공의 영역을 넘어 사생활 영역을 침범하는 성추문식 보도, 싸구려 소설 같은 허구 보도로 상당부분 채워지고 있다. 어떤 신문사는 신씨의 누드사진을 실어 스스로 더 이상 언론이기를 포기하고 있다. 정말 왜 이러는 걸까. 과열경쟁체제에서 좀더 선정적으로 좀더 소설처럼 쓰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을 것이라는 무의식적 강박과 상업주의적 히스테리가 한국 언론들을 사로잡고 있다. 신정아 같은 사건이 터지면 신문들은 상당한 분량의 지면을 거의 매일 독자를 사로잡을 기사로 채워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인다. 이런 과열과 강박의 상업주의 공간에서 신문들은 객관과 품격 보도가 오히려 경쟁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이럴 때일수록 품격을 유지한 객관 보도는 양식 있는 시민 독자의 신뢰를 받는다. 서울신문은 변양균 청와대 정책실장의 사표 보도 이후 비교적 차분하게 보도했다.11일자 1면 “변양균 ‘신정아 해명’ 거짓말”, 다음날인 12일자 1면 “변양균 영향력 수사”, 그리고 15일자 3면 “눈덩이 의혹…변씨 개입 어디까지”와 같은 기사들은 담담한 제목과 객관적인 기사쓰기가 돋보였다. 하지만 13일자 1면 “홍기삼씨, 신정아 옆동 입주” 제목의 기사와 관련 기사들은 홍기삼 전 동국대 총장의 오피스텔이 신씨의 옆동에 있다는 사실이 마치 큰 의혹인 양 대서특필해 쓴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같은 날 5면 “신씨, 진짜애인 따로 있다?” 제목의 가십성 기사는 별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신씨는 사귀는 두명의 남자를 숨겨놓은 채 변 전 실장과 만났던 셈이다.”라고 해 기사의 정체성이 의심스럽다. 추문, 지저분한 소문이 나돌 때일수록 언론이 스스로의 품격을 세우면, 독자인 국민의 품격도 살고, 나아가 대한민국의 품격도 좋아진다. 최영재 한림대 언론학부 교수
  • ‘민족경제론’ 외친 故박현채 그의 삶과 사상 되짚어본다

    ‘민족경제론’ 외친 故박현채 그의 삶과 사상 되짚어본다

    ‘지구화시대의 자립경제’,‘국경 없는 자본’과 ‘민족경제’,‘신자유주의’와 ‘경세제민(經世濟民) 경제학’….2007년 현재 이런 의미쌍은 논리적으로 가능한 언어조합이 아니다. 비현실적인 이항대립이자 형용모순 취급을 받고 있는 게 사실이다. 초국적 자본통합이 가속화되고 있는 시대, 민족경제란 시대착오적 화두(?)를 붙들고 끙끙대는 이들이 있다. 민족경제론의 주창자 고 박현채(1934∼1995) 교수(조선대 경제학과)의 후학들이다. ●진보사회과학 중요유산 박현채 사망 10주기(2005년 8월17일)에 맞춰 계획된 ‘지구화시대 박현채 경제사상의 의의와 재구성’ 토론회가 2년여를 끈 끝에 21일 개최된다. 민주사회정책연구원과 ‘고 박현채 전집발간위원회’ 주관으로 서울 중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육장에서 열린다. 토론회는 박현채 사상의 핵심이자 산업화시대 저항담론의 구심점이었던 민족경제론을 지구화 시대의 맥락에서 재성찰·재구성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독재권력에 맞설 언어가 빈곤했을 때, 민족경제론은 시대가 공유한 무기였다.1978년 ‘민족경제론’(한길사) 출간은 한국 토착경제학의 싹을 틔우는 일대 사건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외자주도형 산업화에 대립각을 세우며 자립경제를 주장했던 박현채의 사상은 비판지식인들의 이론적 전진기지가 됐다.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학자와 책을 묻는 여론조사들은 박현채와 ‘민족경제론’을 늘 다섯 손가락 안에 꼽아왔다. 산업화시대는 갔고, 지구화시대가 도래했다. 민족경제론은 ‘과거의 이론’으로 버려졌다. 국민국가를 넘어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파악할 수 있는 이론적 확장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92년 대선 때까지 박현채가 골간을 잡았던 김대중의 ‘대중경제론’도 97년 대선 땐 유종근 전 전북지사와 이강래 대통합민주신당 의원의 손을 거치며 박현채의 흔적을 지웠다. 박현채는 잊혀진 존재가 됐고, 민족경제론은 재벌의 경영권 방어논리로 오용되고 있다. 시대의 변화가 불러온 아이러니다. 그렇다면 박현채 후학들은 왜 ‘폐기된’ 민족경제론을 복원하려 하는 것일까. 정확히 말하면 ‘민족경제론의 문자적 복원’이 아닌 ‘민족경제론적 문제의식의 복원’이다. 토론회 사회를 맡은 조희연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는 “민족경제론의 문제의식은 경제총량지표로 파악되는 국민경제가 아닌, 민중 삶을 보장하는 국민경제의 확립”이라면서 “민족경제론은 민중의 기본적 삶과 직결된 공공성이 해체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반드시 재검토돼야 하는 한국 진보사회과학의 중요한 유산”이라고 평가했다. 주류경제학이 돌보지 못하는 ‘생활하는 민중의 구체적 삶의 요구’를 지탱하려면 민족경제론의 발전적 재구성이 시급하다는 절박함이 토론회 저변에 깔려 있다. ●DJ 대중경제론에도 영향 토론회의 행간을 읽는 핵심 키워드는 ‘대안적 상상력’이다. 민족경제론 재해석 작업이 당장의 대안을 내놓긴 힘들지만, 대안의 단초가 될 다양한 상상력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길 기획자들은 기대하고 있다. 조희연 교수는 민족경제의 재구성 방안으로 공공성 강화를 강조하고, 장상환 경상대 교수는 글로벌 체제의 급진적 변혁 가능성을 탐구한다. 또 권영근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소장은 자립경제의 단초로 쿠바 모델에 주목하는 견해를 밝힐 예정이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를 ‘화석연료에 의존한 탄소경제’라고 정의하는 박승옥 시민발전 대표는 “석유 고갈과 동반할 자본주의 파국에 대비하려면 지역공동체 운동과 에너지·식량 자립, 지역자치를 실천하는 길밖에 없다.”며 생태적 자립경제를 주장한다. 박현채 10주기 및 전집발간에 맞춰 기획된 토론회는 발간작업이 늦어지며 한 차례 연기됐고, 박현채 사상을 계승하는 민족경제연구소 설립이 난항을 겪으며 또다시 늦춰져 이번에 열리게 됐다. 박현채가 몸담았던 조선대가 설립을 거부한 이후 연구소는 성공회대·한신대·상지대가 컨소시엄으로 운영하는 민주사회정책연구소가 내부 기관 형태로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민주사회정책연구소는 한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지구화와 공공성’이란 주제로 민족경제론의 현재화작업을 체계화하고 있다. 민족경제론의 재구성은 이제 첫발을 떼고 있는 중이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8) 침술의 대가 허임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8) 침술의 대가 허임

    의원은 전형적인 중인의 직업이지만, 모두 중인은 아니다. 중인이 형성되기 전인 조선 전기에는 물론 선비들이 의원 활동을 했으며, 중인층이 형성된 조선 중기 이후에도 선비 출신의 의원이 많았다. 이들을 유의(儒醫)라고 하였다.‘동의보감’을 저술한 허준도 서얼이긴 하지만 양반 출신이다. 그랬기에 그의 아들이 대를 이어 의원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허준과 함께 선조의 주치의였던 허임은 관노의 아들인데 의원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은 의원으로 대를 잇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의 집안은 중인층으로 정착되지 못했지만, 그의 대표적인 제자 최유태와 오정화의 집안을 통해 그의 의술이 전승되었다. ●관노 허억봉과 여종 사이에 태어난 허임 허임이 선조나 광해군의 신임을 받아 승진할 때에도 끝내 따라다닌 꼬리표가 관노의 아들이라는 점이다.1617년 2월12일에 광해군이 허임을 영평현령에서 양주목사로 승진시키자 사헌부에서 “허임의 아비는 관노이고 어미는 사비(私婢)이니, 비천한 자 가운데 더욱 비천한 자입니다.”라고 출생 신분을 들고나와 반대하였다.18일부터 26일까지 계속 반대하자, 광해군도 결국 지쳐서 3월9일에 부평부사로 내보내는 형식으로 타협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지만, 관노와 여종 사이에 태어난 천민을 서울 인근의 목사(정3품)로 내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강원도 양양의 관노였던 허억봉은 어린 나이에 장악원 악공으로 뽑혀 서울에 올라왔다. 악생은 양민이지만, 악공은 천민이었다. 장악원 첨정 안상이 ‘금합자보(琴合字譜)’를 만들었는데, 허억봉의 연주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 악보는 목판본으로 간행된 악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 보물 제283호로 지정되었는데, 안상은 서문에 이렇게 썼다.“내가 가정 신유년(1561)에 장악원 첨정이 되었는데, 악공을 시험할 때에 쓰는 악보와 책을 보니 문제가 있었다. 예전의 합자보(合字譜)를 버리고 다만 거문고와 상하 괘(卦)의 차례만 있으며, 손가락을 쓰는 법과 술대를 쓰는 법은 없으니, 거문고를 처음 배우는 자들이 쉽게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악사 홍선종을 시켜 당시의 곡조를 모으고 약간의 악보를 보태어, 합자보를 고쳐 내게 하였다. 또 허억봉에게 적보(笛譜)를 만들게 하고, 이무금에게 장구보를 만들게 하여 그 가사와 육보(肉譜)를 함께 기록했다. 홍선종은 기보법(記譜法)에 통달하였고, 허억봉과 이무금은 젓대와 장구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 자들이다.” 이달의 시에는 그가 악사(樂師)로 소개되고, 서성의 시에는 전악(典樂)으로 소개된다. 관노 출신이었지만 장악원 연주자 사이에 솜씨를 인정받아 연주 책임자까지 승진한 것이다. 그의 아우 허롱도 악사였다. 허씨대종회 허장렬 부회장은 “허조(許稠)가 좌의정으로 있던 세종 때까지는 하양 허씨가 떳떳한 양반이었는데, 아들 허후와 손자 허조가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반대하다가 죽고 자손들은 관노가 되어 충청북도 괴산군에 배속되었다.”고 고증했다. 그래서 허임의 선조 묘소가 괴산에 있게 된 것이다. 관노가 된 허임이 좌의정 김귀영의 계집종과 부부가 된 사연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데, 허임기념사업회 손중양 이사는 이렇게 추측하였다. 허임이 태어났다고 추정된 1570년 직전에 김귀영이 예조판서가 되었다.‘금합자보’를 만드는 과정에서 장악원의 대표적인 연주자로 인정받은 허억봉은 당연히 김귀영의 집에 자주 부름받았을 것이고, 그러한 과정에서 계집종 박씨와 눈이 맞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관노인데다 어머니도 여종이었으면 허임은 당연히 종이 되었어야 하는데, 허임을 비난하는 글에도 그가 종이었다는 기록은 없다. 아버지가 전악까지 오르면서 제도에 따라 면천되고, 허임도 천인의 신분을 벗어난 것이다. ●어머니를 고쳐준 의원에게 품을 팔며 침술 배워 어머니 박씨가 병에 걸렸는데, 집이 가난해 의원을 불러다 치료할 수가 없었다. 의원이 진맥해서 처방을 내주어도 약재가 비싸기 때문에, 서민들은 몇 차례 침만 맞고도 고칠 수 있는 침술을 더 좋아했다. 그런데 허임의 집안은 너무 가난해서 침 놓은 수고비조차 갚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침 놓아준 의원의 집에 가서 잡일을 도와주는 것으로 치료비를 대신했다. 그런 과정에서 눈썰미가 있던 허임이 침구법을 배운 것이다. 신통한 침술로 이름을 날렸던 그는 75세 때에 자신의 평생 경험을 집대성하여 ‘침구경험방’이란 책을 냈는데, 그 머리말에서 자기가 침술을 배운 과정을 이렇게 기록했다.“명민하지 못한 내가 어려서 부모의 병 때문에 의원의 집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오랫동안 공들여 어렴풋이나마 의술에 눈을 떴다.” ‘의가(醫家)’라고만 표현했는데, 앞뒤 문맥을 보면 침의였던 듯하다. 전의감이나 혜민서에서 의학생도로 정식 공부를 하지 못했지만, 그는 스무살이 갓 넘자마자 현장에 나가 침술을 베풀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해군을 따라 황해도, 충청도 등지를 돌아다니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광해군의 신임을 받기 시작했다.1595년에는 종6품 의학교수가 되었으니, 체계적으로 의술을 배우지 않은 그로서는 상당히 빠르게 승진한 것이다. 의원은 크게 약을 쓰는 약의(藥醫)와 침을 쓰는 침의로 나뉘어지는데, 약의는 의과에 합격해야 했고, 침의는 민간 출신도 많았다. 약의를 침의보다 높게 여기긴 했지만, 병에 따라 약의와 침의의 역할이 달랐으며, 약재가 넉넉지 않은 전쟁 중에는 침의의 할 일이 많았다. 허임을 치종교수(治腫敎授)라고도 표기했으니, 외과적인 치료도 겸했음을 알 수 있다. 선조 말년에 병이 깊어지자 여러 의원들이 자주 입시하여 치료했는데, 실록에는 허준과 허임의 이름이 번갈아 나온다. 특히 1604년 9월23일 한밤중에 편두통을 일으키자 선조가 허준에게 “침을 놓는 것이 어떻겠는가?” 물었다. 허준이 “침의들은 항상 ‘반드시 침을 놓아 열기를 해소시켜야 통증이 줄어든다.’고 말합니다. 소신은 침 놓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만, 그들의 말이 이러하기 때문에 아룁니다. 허임도 평소에 ‘경맥을 이끌어낸 뒤에 아시혈에 침을 놓을 수 있다.’고 했는데, 이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선조가 병풍을 치게 하고, 허임에게 침을 놓게 했다.50대의 허준이 30대의 허임의 침술을 임금 앞에서 인정했는데, 약으로 며칠 끌다가 침을 맞고 완쾌된 선조는 한 달 뒤에 허임을 6품에서 정3품으로 승진시켰다. 허임이 현역에서 물러나 공주에 살 때에도 광해군은 그를 왕궁으로 불러 침을 맞았으며, 너무 늙어 말을 탈 수 없게 되자 처방이라도 보내 달라고 하였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그는 한평생 치료경험을 집대성해 ‘침구경험방’을 지었는데, 내의원 제조 이경석이 발문을 썼다. “태의 허임은 평소 신의 기술을 가진 자로 일컬어져 평생 구하고 살린 사람이 손으로 다 헤아릴 수 없다. 그간 죽어가던 사람도 일으키는 효험을 많이 거두어 명성을 일세에 날렸으니, 침가(針家)들이 추대하여 으뜸으로 삼았다.” 18세기 초엽에 조선으로 유학을 온 오사카 출신의 일본 의사 야마카와(山川淳庵)가 ‘침구경험방´을 일본에 가지고 가서 1725년 일본에서 간행하였다. ●제자 최유태와 오정화를 통해 침술 전승 허임이 공주에 정착하자 후손들이 서울의 중인들과 연결되지 못했지만, 허임의 침술은 제자들을 통해 대대로 전수되었다.‘급유방(及幼方)’이라는 의서에 숙종시대 명의 두 사람을 소개했는데, 이들이 모두 허임의 제자였다. 그 기사는 이렇다. “숙종시대에 태의(太醫) 최유태와 별제(別提) 오정화는 모두 허임에게서 침술을 전수받아 당대에 이름났다. 나는 이 두 사람에게서 그 침술의 연원을 전해들었으므로 자세히 기록하였다.” 최유태는 9대 의원으로 이름난 청주 한씨 출신이다. 최귀동부터 계손, 덕은, 준삼, 응원, 유태를 거쳐 만선, 익진, 택증과 택규에 이르기까지 9대가 모두 의원으로 활동했다. 응원은 내침의(內針醫)인데,23세 되던 1651년 의과에 합격한 작은아들 유태는 아버지의 침술을 전수받지 않고 허임의 침술을 전수받았다. 응원의 맏아들 유후는 1639년 의과에 합격했는데, 그의 후손들도 만상, 익명, 홍훈까지 의원으로 활동했다. 오정화의 집안은 11세 오인수까지 문과 합격자를 낸 양반이었지만,13세 오구가와 14세 오대종이 무과에 합격해 무반이 되었으며, 오대종의 맏아들인 15세 오인량이 역과에 합격하여 역관 가문이 되었다. 둘째아들인 오제량은 무과에 급제해 무반의 전통을 이어받았는데, 그의 아들 오정화(吳鼎和)가 역관의 딸과 결혼했지만 가업을 잇지 않고 허임의 침술을 전수받으면서 그의 후손 가운데 한 계파는 역관으로 이어지고, 한 계파는 의원으로 이어진다. 의과에 합격해 활인서 별제(종6품)까지 오른 오정화는 침만 잘 놓은 것이 아니라 약까지 처방을 내려 의약동참의로 이름을 올렸는데, 그의 후손들은 17세 지철,18세 덕신,19세 명검,20세 인풍까지 여러 대에 걸쳐 모두 침술 의원으로 대를 이었다. 오정화의 아들 17세 지항부터 24세 경석까지 8대에 걸쳐 역관을 낸 것도 유명한데, 이미 26회부터 29회까지 4회에 걸쳐 역관 오경석과 오세창의 중인 활동에 대해 소개한 적이 있다. 오경석의 사위 이용백은 대표적인 중인 집안의 족보를 집대성한 ‘성원록’ 편찬자로도 널리 알려졌는데, 그는 이 책의 해주 오씨 항목에서 역관으로 이어지는 17세 지항의 계파를 정통으로 놓고, 의원으로 이어지는 17세 지철의 계파를 왼쪽에 배치하였다. 허임의 후손들은 중인으로 자리를 잡지 못했지만, 허임의 침술은 제자 최유태와 오정화를 통해 대대로 전수되면서 중인 침의의 전문성을 더욱 확고히 했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김석의 Let’s wine] 송편 한입 와인 한 모금…情 두배

    [김석의 Let’s wine] 송편 한입 와인 한 모금…情 두배

    음력 8월15일. 가을을 세 달로 나누었을 때, 음력 8월이 중간에 들어 ‘중추절’(仲秋節)이라고도 하고, 대표적인 우리의 만월 명절을 뜻하는 ‘가운데’라는 어원의 ‘가배’(嘉俳)라고도 부른다.‘한가위’,‘추석’이라고 일컫고 있는 이 날은 일가 친척이 서로 만나 음식을 나누며 회포를 풀고, 훈훈한 정을 주고받는 우리의 최대 명절이다. 한 상 차려진 명절 음식과 그 사이 놓여 있는 차례주, 이를 둘러싸고 화기애애한 대화를 풀어내는 풍경이 올해에는 조금 색다를 것 같다.‘와인’이 우리 명절의 반가운 손님으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가격대에 받는 사람의 취향만 잘 고려하면 실속과 품격을 모두 갖춘 선물로 손색이 없어 추석 선물 리스트 상위에 오르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와인을 고를까. 합리적인 패키지로 3만원대부터 다양하게 선보이고 있으니, 받는 사람의 취향을 먼저 염두에 두고 선택한 뒤 범위를 좁혀 보는 것도 방법이다. 정성도 중요하지만 취향이나 입맛에 잘 맞지 않거나 상대방의 격에 맞지 않는다면 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받는 이의 와인 취향을 알기 어려울 때는 칠레산 와인이 무난하다. 진한 컬러와 풍부한 맛과 향으로 유명한 ‘선라이즈’나 세 가지 포도 품종의 완벽한 블랜딩을 느낄 수 있는 ‘트리오’가 대표적이다. 당도가 높은 ‘산페드로 레이트 하비스트’는 추석음식인 떡과 잘 어울려 여럿이 마시기에 좋다. 한 등급 높은 와인을 고르려면 8만∼10만원대의 프랑스, 이탈리아 와인이나 뛰어난 품질로 각광받고 있는 유명한 ‘신세계 와인´이면 무난하다. 전형적인 보르도 와인의 맛을 음미하기 좋은 ‘마스카롱 퓌스겡 생테밀리옹’, 고품격 이탈리아 와인 ‘듀칼레 오로’는 가족 및 친지 뿐만 아니라 직장상사나 은사님을 위한 선물로도 적합하다. 와인 애호가라면,2병 세트를 구입하는 것보다 10만∼20만원대의 ‘샤토 브랑 캉트냑’,‘샤토 그뤼오 라로즈’,‘샤토 샤스 스플린’,‘알타이르’ 등의 고급와인 한 병을 선물하는 것이 더 인상적일 수 있다. 또한 프랑스 와인으로 그랑크뤼 등급의 샤토에서 생산하는 ‘세컨드 와인’나 크뤼 부르주아 등급의 와인을 선택하는 것도 추천해볼 만하다. 와인만으로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와인과 훌륭한 맛의 매칭을 이루는 좋은 ‘추석 음식’을 함께 정성스레 준비해 보는 것도 방법이다. 겹겹이 쌓인 솔잎 위에 가지런히 놓인 ‘송편’도 좋다. 향이 너무 강하지 않으면서도 입안을 실크처럼 부드럽게 감싸는 ‘35사우스 멜롯’이나 ‘트라피체 말백’이 송편의 맛을 살리며 입 속에서 끝까지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준다. 와인과 함께 곁들이기 좋은 명절 음식으로는 각종 전 요리도 빼놓을 수 없다. 여기에는 길고 짙은 여운이 감도는 ‘샤토 시트랑’,‘지네스테 마고’ 등 레드 와인이 잘 어울린다. 한국주류수입협회 부회장(금양인터내셔널 전무)
  • 첫 ‘홍어 명인’ 안국현씨

    첫 ‘홍어 명인’ 안국현씨

    전라도 대표 음식인 홍어의 명인(名人)으로 안국현(51·전남 나주시 영산동)씨가 국내 처음으로 선정됐다. 사단법인 대한명인 문화예술교류회(전북 순창군)는 14일 2대째 홍어 요리를 이어오고 전통음식 개발과 발전, 전승에 힘쓴 안씨를 음식부문 홍어 명인으로 뽑았다고 밝혔다. 안씨는 흑산도 홍어의 집산지인 나주 영산포에서 홍어 식당을 운영한다. 안씨가 17년동안 갈고 닦은 솜씨로 만드는 홍어 요리는 10여가지. 그가 자랑하는 삼합은 굽지 않은 마른 김에다 홍어와 돼지고기 편육, 묵은지를 포갠 뒤 돌돌 말아 먹도록 내놓는다. 이번에 안씨와 함께 전통음식부문의 명인으로 폐백요리 임화자(여·전남 함평군)씨 등 8명이 선정됐다. 시상식은 10월 5일 오후 3시 서울 양재동 aT센터에서 열린다. 나주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최준식의 한국종교사 다시 보기/한울아카데미 펴냄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전통을 유불선(儒佛仙)이라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말해왔다. 하지만 최준식 이화여대 한국학과 교수는 어느날 우리들이 우리 자신의 정신세계를 완전히 헛짚고 있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의문은 두 가지였다. 무엇보다 유교와 불교는 그렇다고 해도 한국에 무슨 도교(仙道·선도)가 있었다고 우리 종교 전통에 도교가 들어가야 하는지 궁금했다. 또 다들 유불선, 유불선하는데 왜 유교가 불교를 앞서야 하는지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고 한다. ‘최준식의 한국 종교사 다시 보기’(한울아카데미 펴냄)는 이런 의문에서부터 출발한다.‘유불선의 틀을 깨라’는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최 교수는 이같은 현상이 “그동안 한국의 지식인들이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전통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중국 지식인의 눈으로 한국의 전통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진단했다. 최 교수는 “한국 종교사에서 도교는 없었다.”고 단언한다. 한국의 종교전통에서 선보다 중요한 것은 무(巫)이다. 따라서 유불선의 ‘선’은 ‘무’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 도교와 중국 도교의 역사를 비교하여 한국에는 중국과 같은 도교의 실체가 없었다고 설명한다. 종교집단이 될 수 있는 대표적인 조건의 하나가 사제 집단이 있느냐는 것인데, 한국의 도교에서는 사제나 수도자라 할 만한 집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사제나 조직이 없으니 도교 사원이나 경전도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최 교수는 한국에서 도교가 맥을 추지 못한 이유를 무당이 크게 번성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중국에서 복을 빌어주고, 신의 뜻을 알아주며, 병도 고쳐준 도교 도사의 역할을 한국에서는 무당이 했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유불선이라는 표기 순서도 정확하게 중국의 종교 전통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지적한다. 적어도 고려 말까지는 불교가 국교였던 한국과는 달리 중국에서는 유교가 한나라 때 관학으로 채택된 이후 전통의 자리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최 교수는 “우리는 종교에 관한 한 실학이 아니라 천수백년 동안 허학(虛學)을 하고 있었다.”면서 “무엇보다 앞으로는 무교를 엄연한 한국 종교의 반열에 넣고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만 8000원.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서울대공원 동물원에 가보았지](41)통풍 앓은 ‘콘도르’

    [서울대공원 동물원에 가보았지](41)통풍 앓은 ‘콘도르’

    편식이 나쁘다는 건 알지만 아이의 젓가락이 자꾸 같은 반찬에 쏠리는 걸 막기란 쉽지않다.“잘 먹어주는 게 어딘데.”라며 고마워하다 보면 버릇 고치기가 쉽지 않은데 동물원에서도 유사상황이 벌어진다. 하지만 편식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아기 콘도르의 돌연사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던 지난해 2월2일. 태어난 지 9개월된 암컷 콘도르 새끼의 상태가 급속도로 악화됐다. 사흘 동안 먹이를 먹지 않고 물만 들이켜던 녀석이 머리를 길게 뻗고 가슴과 머리를 땅바닥에 밀착시키더니 심하게 숨을 헐떡였다. 동물원측은 진료실에 입원을 시켜 항생제와 비타민제를 투여하고 링거까지 주사했지만 곧 숨을 거뒀다. 추가 피해 등을 우려한 동물원은 곧 부검에 돌입했다. 그 결과 콘도르의 심장과 간 피막, 소화기관 등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분필가루 같은 흰색 분말이 발견됐다. 사망전 콘도르 몸에 요산이 축적되는 통풍을 심하게 앓았다는 증거다. 흔히 바람만 불어도 아프다는 통풍이 장기 안에 생긴 것으로 병명은 ‘내장성 통풍´이다. 추가 조사결과 혈액 내 요산의 농도도 평균치의 100배를 넘었다. 보통 새들의 내장성 통풍은 ▲배설장애가 생기거나 ▲신장이 손상된 경우 또는 ▲고칼슘 고단백 먹이를 장기적으로 먹었을 때 생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 아기 콘도르를 죽게 한 통풍의 원인은 뭘까. 동물원은 녀석의 오랜 습관인 편식을 꼽았다. ●자연 상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어린 콘도르가 비계보다는 살코기를 좋아하는 것은 우리 아이들과 비슷했다. 당시 어린 콘도르에게는 매일 쇠고기와 닭고기 400∼500g이 번갈아 제공됐다. 그런데 녀석은 사육사들이 고기를 잘라 주면 교묘하게 살코기만 발라 먹었다. 지방덩이나 껍질 등 살코기 이외의 것은 골라내기 바빴다. 결국 초고단백 음식인 순살코기들이 콘도르의 장에서 암모니아를 많이 만들어냈고 다시 이 암모니아가 대장으로 흡수된 후 피 속 요산의 농도를 높이는 원인이 된 것이다. 맛난 것만 골라먹던 극단적 편식이 불러온 비극인 셈이다. 실제 야생에서 동물이 편식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먹이도 부족하고 경쟁도 치열해서다. 동물원측은 “자연에서 부족한 먹이를 여럿이 경쟁하며 함께 먹었다면 이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편식은 인간이 사육동물에게 물려준 나쁜 버릇이 아닐까.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평생 마르크스 연구하고 가르쳐… 자본론은 세상을 보는 올바른 눈”

    “평생 마르크스 연구하고 가르쳐… 자본론은 세상을 보는 올바른 눈”

    지난 3일 김수행(65)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가 내년 2월 정년퇴임을 앞두고 마지막 학기 강의를 시작했다. 학부의 ‘현대 마르크스경제학’과 대학원의 ‘고급 마르크스경제학 연구’ 두 과목을 맡았다. 김 교수는 마르크스 ‘자본론’의 한국판 최초 완역자이자, 국내에서 마르크스경제학으로 외국 대학(런던대) 박사학위를 받은 1호 학자다. 어떤 이는 그를 ‘구좌파’라 부르고, 누군가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로, 혹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라 일컫는다. 이 ‘동의이음어’들은 국내 학계에서 그가 속한 사상적 지형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의 일관된 학문적 고집을 뜻한다. 한국 마르크스경제학의 좌장인 그의 서울대 임용과 퇴임 과정은 국내 마르크스주의가 처한 과거와 현재를 그대로 상징한다. ●마르크스 전공자 채용 재논의결정 아쉬워 1982년, ‘불온사상’ 마르크스경제학을 전공한 김 교수를 받아들인 첫번째 학교는 당시 군사정권에 정면으로 맞섰던 한신대학교였다. 김 교수는 그런 한신대의 민주화를 주장하다 고 정운영 교수와 동반 사직했고,89년 2월 서울대에 자리를 얻었다. 그의 서울대 임용은 ‘정치경제학’ 전공 교수를 원하는 서울대 대학원생들의 수업거부 및 타교 학생들의 연대시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 교수는 “이 사건은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크게 확장하고, 각 대학이 진보적 교수들을 대거 영입해 교과과정을 대폭 개정하게 한 계기가 됐다.”고 회고했다. 서울대 근무 19년째가 되는 올 8월29일, 서울대 경제학부 인사기획위원회는 퇴임을 앞둔 김 교수의 후임으로 마르크스경제학이 아닌 ‘경제학일반’으로 채용자격을 결정했다. 마르크스경제학으로 특정할 경우 우수 교수를 영입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김 교수는 “나를 끝으로 서울대에서 마르크스경제학이란 과목 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지난 5일 서울대 교수회의는 ‘경제학일반’으로 채용자격을 확정하고, 마르크스경제학 전공자 채용여부는 다음 학기에 재논의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자본론 완역 학계기여 가장 뿌듯해 마르크스주의의 ‘위기’, 나아가 ‘종언’을 이야기하는 시대. 김 교수는 “마르크스주의가 위기였던 적은 없다.”고 단언한다. 평생 마르크스를 읽고, 연구하고, 가르쳐온 그는 “90년대 이후 한국 마르크스주의의 급격한 쇠퇴는 마르크스주의 그 자체의 쇠퇴가 아니라, 학문적 유행에 민감하게 처신하며 마르크스주의를 폐기처분한 지식인들의 위기”라고 진단했다.‘변종 마르크스주의’인 스탈린주의가 맹위를 떨쳤던 한국 사회에서 ‘스탈린주의 몰락’을 ‘마르크스주의 몰락’으로 등치시킨 지식인들이 철저한 반성적 평가 없이 너무 빨리 사상적 포기를 단행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 사회과학계는 하나의 화두에 천착해 평생을 연구하는 풍토가 취약하다.”고 일침을 놓았다.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심각한 과제 중 하나로 거론되는 학문후속세대의 재생산 문제에 대해서도 김 교수는 비관하지 않았다.“양극화 심화, 비정규직 급증 등 신자유주의가 양산하는 현실적 문제가 대안적 사회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하고 있고, 대안적 사상의 중심엔 늘 마르크스주의가 있어 왔다.”는 주장이다. 김 교수는 “최근 몇 년 동안 마르크스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늘어나는 현상이 뚜렷하게 감지된다.”면서 “현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문제를 주류경제학이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난 6월 말 제3회 ‘맑스 코뮤날레’를 개최하며 상임대표를 맡았던 그가 “우리는 전진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표현한 것도 이런 까닭이다. 그는 “올해는 한·미 FTA가 타결되고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전면화돼 사회 불평등이 극도로 심화되는 원년”이라면서 “공동체적 연대가 점점 약화되는 지금 마르크스주의를 통하지 않고서는 대안을 모색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퇴임후도 사회과학대학원서 강의 김 교수는 무엇보다 제대로된 연구와 공부의 시급함을 강조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에 회의를 갖기 전에 마르크스주의가 무엇인지부터 철저하게 공부해야 한다.”면서 “그 후에야 어떻게 실천할지, 어떻게 마르크스주의를 뛰어넘을 수 있을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자신 ‘마르크스주의 전파자’로서 역할을 설정하고, 평생 수많은 책을 읽고 쓰며 마르크스주의와 더불어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지적이다. 김 교수가 한국 학계에 기여한 가장 큰 공로는 역시 ‘자본론’ 완역을 꼽을 수 있다. 엄혹했던 시절, 일본에서 귀국하는 친구 이삿짐 속에 북한판·일본판본까지 숨겨와 번역한 ‘자본론’은 마르크스주의에 목말랐던 국내 학계의 지적욕구를 해갈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김 교수는 여전히 ‘자본론’을 “세상을 올바로 보는 눈이자, 자본주의에서 소외된 이들의 삶을 파악하는 유익한 도구”라고 믿는다. 다만 “‘자본론’의 현재화를 위해서는 마르크스가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독점과 금융공황, 대외관계 등을 오늘에 맞게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퇴임 후 김 교수는 비판사회과학 전문 교육기관인 사회과학대학원(가칭)에서 ‘자본론’을 강의할 계획이다. 한국에서 마르크스 전공자들이 생계 위협 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직장인들과 상호부조시스템으로 결합된 학문공동체를 만드는 것도 그의 마지막 꿈이다. 그는 “‘자본론’ 전파에만 몰두하느라 구체적 정책대안을 만드는 데 적극 참여하지 못한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면서 “이젠 짐을 좀 덜었으니 앞으론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김 교수는 가까운 지인들을 초청해 오는 11월22일 조촐한 퇴임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근·현대 지식인 사회’ 강연회

    ‘근·현대 지식인 사회’ 강연회

    광화문문화포럼(회장 남시욱)은 12일 오전 7시30분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김경희 지식산업사 사장을 초청해 ‘한국 근·현대 지식인사회 돌아보기-그 역사와 구조를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강연회를 갖는다.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7) 조희룡이 지은 전기집 ‘호산외기’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7) 조희룡이 지은 전기집 ‘호산외기’

    사마천은 한 시대의 역사를 기록하는 방법으로 본기(本紀)·표(表)·서(書)·세가(世家)·열전(列傳)의 다섯 가지 체제를 채택했다. 본기는 제왕들의 이야기이고, 표는 도표 형식으로 사건을 기록한 것이며, 서는 제도를 서술한 부분이다. 세가는 제후들의 이야기이고, 열전은 제왕과 제후를 제외한 각계 각층의 이름난 사람들 이야기이다. 전(傳)은 ‘그 사적을 적어서 후세에 전한다.’는 뜻인데,‘사기’ 식의 역사서술을 기전체(紀傳體)라고 분류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역사를 서술하는 중요한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벼슬도 못한 중인들의 삶을 전기로 전(傳)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아니다. 남다르게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라야 후세에 전해진다. 한문학의 갈래 가운데 전(傳)이 있어서, 예전부터 충신, 효자, 열녀의 이야기를 전(傳)의 형태로 기록했다. 충(忠)·효(孝)·열(烈)은 삼강(三綱)의 덕목이니, 충신, 효자, 열녀가 생기면 그의 후손들이 이름난 사대부에게 찾아와 전기를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이름난 문인이 전기를 지어야 그의 문집에 실려 그 이름이 후대에 전해지기 때문이다. 충신, 효자, 열녀에게는 나라에서 정려(旌閭)를 내리기 때문에, 임금이나 관찰사, 군수 등이 이름난 문인에게 전기를 지으라고 명하기도 했다. 양반들의 직업은 관리 하나뿐이지만 중인들은 직업이 다양한데다 봉건체제 사회를 살아가는 방법도 또한 달랐기 때문에, 이들을 대상으로 지은 전들도 또한 사대부들의 전과는 내용이나 분위기가 달랐다. 특히 당대의 질서를 거부하고 몸으로 부딪치며 살았던 몇몇 중인들의 전이 관심을 끄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대부들이 교유관계에 따라 중인의 전을 지어주기도 했지만, 중인 후배들이 자랑스러운 선배의 전을 짓기도 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작가가 조희룡이다. 그는 중인들의 전기를 책으로 내게 된 동기를 ‘호산외기(壺山外記)’ 서문에서 밝혔다. “내가 집에 머물면서 무료한 나머지, 내 귀로 직접 듣고 눈으로 직접 보았던 몇 사람의 삶을 기록하여 전을 지었다. 다행히도 이 전기가 천지간에 남아 있다가, 뒷날 독자들로 하여금 지금 사람이 옛날의 ‘사기’를 대했던 것처럼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가 전기를 지었다고 해서, 중인들의 생애가 후세에 꼭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사마천은 ‘사기’ 열전 첫머리에 ‘백이·숙제’를 싣고, 그 끝머리에서 이렇게 질문하였다.“여항인(閭巷人)이 품행을 닦고 이름을 세우려 하더라도, 청운지사(靑雲之士)의 붓에 실리지 못한다면 어찌 그 이름을 후세에 전할 수 있겠는가?” 사마천이 다행히도 청운의 선비였기에 사기에 실린 인물들은 그 책과 함께 이천년 동안 이름이 전해졌지만, 조희룡은 “내가 어찌 사마천 같은 사람이겠는가?”하고 탄식하였다. 후세에 전할 만한 중인들의 전기를 다 지어 놓고도, 역시 중인인 자신의 신분 때문에 이 책마저 땅에 묻히고 말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였다. 그러나 그가 첫 번째 중인들의 전기집을 냈기 때문에 중인들의 남다른 삶이 기록에 남겨졌고, 그 뒤에도 이를 바탕으로 한 중인들의 전기집이 계속 지어지게 되었다. ●찬의 형식을 빌려 중인들의 삶을 평가 조희룡이 56세에 지은 ‘호산외기’에는 효자 박태성부터 시인 박윤묵에 이르기까지 39항목 42명의 전기가 실렸는데, 이 차례는 직업순도 아니고 나이순도 아니다. 대체로 영·정조 때의 사람들 이야기를 자신이 보고 들은 대로 생각나는 대로 쓰다가, 직하시사의 선배격인 송석원시사의 마지막 시인 박윤묵에서 끝냈다. 박태성의 증손자 박윤묵의 이야기에서 끝낸 것은 우연이다. 역관·화원·의원·악공 등 전형적인 중인들뿐만 아니라 바둑꾼·책장수·아전·협객, 심지어는 노비에 이르기까지 그 직업도 다양하다. 지배층 양반이 아닌 사람은 고루 다 포함시켰다. 물론 지배층이 아니었기에 그들의 삶은 위대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지만, 그 속에 참이 있었고, 또한 몸부림이 있었다. 조희룡은 자기의 호인 호산거사의 입을 빌려서, 또는 본문 뒤에 덧붙인 찬(贊)의 형식을 빌려서 이들을 평했다. 서리 박윤묵의 경우를 보자. “처음부터 그에게 인욕(人慾)이 일어나지 않았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지만, 끝내 천리(天理)로써 이긴 자이다. 그런 까닭에 존재(存齋 박윤묵)는 군자다.” 뛰어난 글재주를 지니고도 과거에 응시할 수 없던 그였지만,“평소에 닦은 학문의 힘이 드러나서” 죽은 친구의 첩이 은혜를 고마워하며 스스로 시중 들기를 원했는데도 다른 곳으로 개가시킨 행위를 칭찬했다. 그야말로 사대부들의 궁극적 목표인 ‘군자’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협객과 함께 놀던 시절을 회상하며 지어 사대부들은 대개 전기를 부탁하는 사람들이 가져온 자료를 보고 전기를 썼지만, 조희룡은 자신이 보고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전기로 썼다. 그래서 사대부들은 자신이 확실히 모르는 사람의 전기도 썼지만, 조희룡은 대부분 자신과의 관계를 밝혔다. 그랬기에 그가 지은 전기는 더 신빙성이 있다. 협객 김양원의 전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김양원(金亮元)은 이름을 잃어버리고 자(字)로 불려졌다. 젊었을 때는 협기있게 놀기를 좋아했으며, 계집을 사서 술청에 앉아 술도 팔았다. 몸집이 큰 데다 얼굴도 사납게 생겼다. 기생집이나 노름판으로 떠돌아다녔는데, 서슬이 시퍼래서 사람들이 감히 깔보지 못했다. 언제부턴가 처사들과 일행이 되어 시에 맛들이더니, 지금까지의 버릇을 꺾고 시인들을 따라 노닐게 되었다. 시로써 이름난 사람이라면 젊고 늙고 할 것 없이, 마치 귀한 손님이라도 만난 것처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그는 시를 짓는 솜씨가 재빨라서, 남이 열을 지으면 자기도 열을 짓고, 남이 백을 지으면 자기도 백을 지었다. 남에게 뒤지기를 부끄러워했다.(줄임) 시사(詩社)에 갔다가 하루라도 시를 짓지 않으면 화를 내며 “어찌 시사가 모이는 의미를 저버린단 말이냐?”고 꾸짖었다. 호산거사가 이렇게 말했다.“문인이 술청에 앉아 그릇을 씻었던 모습을 위로는 사마상여로 거슬러 올라가 찾을 수 있고, 아래로는 양원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양원이 어찌 사마상여겠는가마는 그 뜻을 따랐을 뿐이다.”> 대부분의 시인들은 어려서부터 얌전하게 글공부를 했는데, 김양원은 여자를 사서 술집을 차렸다. 기생집뿐만 아니라 노름판까지 휘어잡은 협객이었는데, 시를 배우더니 문장판도 휘어잡았다. 성품 그대로 급하게 지었을 뿐만 아니라, 남들이 게으른 것을 참지 못했다. 그랬기에 성서시사(城西詩社)도 그가 이끌 때에는 시끌벅적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나자 적막해졌다. 사마상여가 부잣집 딸 탁문군을 꾀어 동거했는데도 장인이 그들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자, 이들 부부는 술집을 차렸다. 자기의 딸이 술장사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장인도 결국 살림을 나눠 주었다. 김양원이 사마상여같이 위대한 문장가는 아니었지만, 시대를 제대로 만나지 못해 술장사를 하게 된 것은 서로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김양원의 전기 후반부는 조희룡의 회상이다. <20년 전에 김학연과 함께 흔연관(欣涓館) 화실로 소당(小塘·이재관)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때 서로 “양원에겐 말하지 말자. 시를 지어 그림 그릴 흥취를 깨뜨릴까 염려되니까.”라고 약속했다. 소당이 시를 못 짓기 때문이었다. 흔연관에 이르렀더니 봉우리 그림자가 뜨락에 와 덮였고, 사람의 발자취도 없이 고요했다.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소당이 이웃집 중에게 관음상을 그려주고 있었는데, 미처 다 끝내지 못했었다. 서로 손을 맞잡고 즐거워하면서, 좀처럼 얻기 어려운 오늘의 만남을 놀라워했다. 천장사의 중 금파(錦波)와 용해(龍海)도 마침 이르렀는데, 모두 시를 짓는 중들이었다. 용해는 묘향산에서 온 지가 겨우 며칠밖에 안 되었다. 여러 명승지들을 두루 얘기하는데, 산속의 안개와 노을이 그의 혀뿌리에서 일어나는 듯했다. 이때 비비람이 몰아치더니 안개가 일어나며, 마치 신군(神君)이 오는 듯했다. 갑자기 검은 구름 속에서 “고기 사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로 우스갯소리로 말했다.“아마도 선재동자(善才童子)가 관음보살의 연못에서 잉어를 훔쳐와 우리 인간들을 놀려 주나 보네. 그러지 않고서야 비바람치는 빈 산속에 고기를 팔러 오는 자가 어찌 있겠나?” 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마치 세상 사람들이 그려 놓은 철선(鐵仙) 같았다. 어깨엔 큰 고기 한 마리를 둘러메고 구름을 헤치며 나타나서, 수염을 떨치며 한바탕 웃어댔다.“내가 은하에서 고기를 낚아 왔다네!” 깜짝 놀라 바라보니, 바로 양원이었다. 그가 크게 소리쳤다.“자네들이 나하고는 차마 같이 오지 못하겠다니, 누군들 참을 수 있겠나?” 그러고는 고기를 삶고 술을 데우며, 서로 예전처럼 시 짓기를 재촉했다.> 사대부가 썼다면 전기에 들어가지도 못할 이야기지만, 조희룡의 체험으로 쓰다 보니 김양원의 협객적인 면모가 실감나게 드러났고, 시인과 화가, 스님들이 어울리던 시사의 모습도 구체적으로 남게 되었다. 화가 이재관의 전기가 뒤에 실렸다고 소개해, 관심있는 독자들이 찾아 읽게 만들었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책꽂이]

    ●우리 옛 도자기의 아름다움(윤용이 지음, 돌베개 펴냄) 현역 최고의 도자기전문가인 지은이가 선사시대 질그릇부터 조선백자까지, 각 시대의 역사·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우리 도자기의 발달사를 설명했다.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강의한 ‘한국 도자사’의 녹취를 풀어 보완한 것으로 필자 특유의 구수한 문체가 돗보인다.1만 8000원.●이상과 열정, 조선역사(이범직 지음, 쿠북 펴냄) 조선시대를 전공한 역사학자인 지은이가 창조적 즐거움을 읽게 하고 미래의 희망을 갖도록 하는 역사책은 없을까를 고민하며 쓴 조선시대사. 조선왕조의 지식인들이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가졌던 이상과 열정을 전하고, 또 그러한 이상과 열정이 흐려지고 무뎌졌을 때의 안타까움을 담았다.1만 6000원.●알피니즘 도전의 역사(이용대 지음, 마운틴북스 펴냄) 지은이는 한국 산악계의 산 증인으로 70세가 넘은 지금도 여전히 가파른 암벽을 앞장서 오른다. 코오롱등산학교 교장으로 ‘한국 등산교육의 선구자’로도 존경받는다. 이 책은 대표적인 산악칼럼니스트이기도 한 그가 알피니즘의 태동기부터 현재에 이르는 역사를 기록한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등산사이다.3만원.●링컨의 T-메일(톰 휠러 지음, 임동진 옮김, 소화 펴냄)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혁신적인 신기술인 T-메일(전신)은 링컨의 망원경이자 상황판이 된다. 그는 T-메일로 당부하거나, 독려하며 마치 화상전화를 주고 받듯이 전장과 소통하며 난국을 돌파했다. 이 책은 링컨이 주고 받은 1000여통의 T-메일로 그의 현장리더십을 분석한 것이다.1만 3000원.●캠브리지 중국사(존 K. 페어뱅크 책임편집, 김한식·김종건 책임번역, 새물결 펴냄) ‘캠브리지 중국사’는 1966년 영국에서 처음 기획되어 아직까지도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방대한 기획물이다. 전권을 완간할 예정으로 이번에 먼저 10권 상·하와 11권 상·하가 나왔다.1800년부터 1911년까지 청제국 말기를 다루고 있다. 전4권, 각권 2만 7000원.●생각의 힘을 키우는 토론수업(강병재 지음, 교보문고 펴냄) 토론지도에 관심을 있으나 구체적인 방법에 들어가면 막막해지는 일선 교사나 학원 강사, 자녀 교육에 관심이 있는 부모를 위한 가이드북이다. 토론을 처음 지도하는 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토론수업을 할 때 어떤 준비과정이 필요하고 어떤 절차와 단계를 거쳐야 하는지를 알려 준다.1만 2000원.●오픈 북(마이클 더다 지음, 이종인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워싱턴 포스트’의 서평 담당 기자인 지은이가 들려 주는 청소년 시절의 독서 자서전. 독서에 열중하는 청소년의 모습에서 미국에 국한되지 않은 보편성을 느낄 수 있으며, 미국의 지역 도서관, 중등학교의 독서 교육, 대학의 인문학 교육 등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시사를 발견할 수 있다.1만 5000원.●여풍당당 그녀들의 성공백서(아키야마 유카리·김영숙 등 지음, 이정환 옮김, 에이지21 펴냄)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는 인생이 아니라, 나 자신이 인생을 컨트롤할 수 있어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성공한 여성’들의 이야기. 일본의 경영컨설턴트 아키야마, 그리고 인터넷업체 CEO 등 자신있게 살아가는 한국 여성 네 사람을 소개한다.1만 1500원.●경제학의 거장들-플라톤에서 J S 밀까지(요아힘 슈타르바티 외 지음, 정진상 등 옮김, 한길사 펴냄) 인류 역사에서 사회가 혼란스러울 때 강력한 지도자가 난국을 수습했듯이 경제학의 거장들도 시대 요구에 따라 만들어진 학문적인 위기의 산물이다. 경제학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경제학자 29명의 생애와 사상, 저작을 모았다.1·2 각권 2만 5000원.
  • 사내가 6차례 당한 대형 화재의 ‘미스터리’

    지난 2004년 보리밭과 땅콩밭 대형 화재 2건,2005년 주택·수박밭 큰 화재 1건,2006년 주택·수박밭 대형 화재 2건,2007년 주택 큰 화재 1건…. 중국 대륙에 한 30대 후반의 남성이 3년새 무려 6차례에 걸쳐 대형 화재사건을 당하는 지독한 불행 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주변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중국 중부 허난(河南)성 카이펑(開封)시 카이펑(開封)현 판춘(範村)향 유포(油坡)촌에 살고 있는 한 남성은 지난 3년동안 무려 6번에 걸친 대형 화재를 당하는 지독한 불운이 뒤따르고 있으나,공안(경찰)당국에서 아직까지 원인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해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고 대하보(大河報)가 5일 보도했다. 대하보에 따르면 지독한 불운의 주인공은 카이펑씨 카이펑현 판춘향 유포촌에 사는 쑤신좡(蘇新庄·39)씨.지난 2004년 6월부터 올 2월까지 모두 6차례에 걸쳐 원인을 알 수 없는 대형 화재가 일어나는 바람에 주택은 물론 과일밭,농기구 등을 모두 불에 타 12만 8000 위안(약 1536만원)의 물질적 피해를 입었다. 쑤씨의 불행한 사연은 2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지난 1985년 DVD를 어렵사리 구입한 그는 낮에는 농삿일을 하고 밤에 동네 주민들을 모아 날로 발전하는 농촌생활상과 앞서가는 영농기법을 보여주며 사이좋게 지냈다. 그러던중 2004년 6월 쑤씨의 집과 땅콩밭이 모두 불에 타버리는 대형 화재사건을 당하면서 그의 행복한 전원생활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쑤씨의 불행은 이 사건을 시작으로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그의 몸과 마음을 완전히 황폐화시켰다. 그해 4월에 이어 10월에는 고대 수확한 땅콩을 모두 불태워버리는 큰 화재를 두번째로 당했고 2005년 6월에는 그가 새로 지은 집과 수박밭을 모두 태워버렸다.2006년 3월과 6월에도 땅콩밭과 수박밭을 또다시 불에 타 황무지로 변했고 지난 2월에는 또다시 집과 그동안 애지중지하던 DVD플레이어와 DVD을 모두 불태워버리는 대형 화재를 당했다. 쑤씨는 “지난 2004년부터 시작된 6차례의 대형 화재 사건으로 집과 귀중품이 불타 못쓰게 된 것을 말할 것도 없고 이에 따른 정신적 충격 엄청나다.”며 “6차례의 화재사건 피해액을 대충 계산해보면 모두 12만 8000위안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피해도 피해지만 지금까지 그 화재사건의 원인이 밝혀내지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쑤씨는 지난 2004년 화재사건이 나자마자 화재사실을 카이펑현 공안(경찰)당국에 신고했다.그러나 첫 사건이 터진지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공안당국에서는 이렇다 할 화재의 근본 원인은 말할 것도 없고 단서 마저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쑤씨는 “물론 피해액도 크지만 화재사건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데 더욱 견딜 수 없는 가슴앓이로 고생하고 있다.”며 “특히 수확철인 가을만 되면 생때 같은 자식인 농산물을 수확할 수 없어 마음이 너무 허탈하다.”고 울먹였다. 특히 지난 2월 6번째 대형 화재 사건이 난 후 지방정부 당국이 쑤씨에게 위로금조로 1만 1000위안(약 132만원)을 무상 지원하겠다고 나서 의혹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이와 대해 루샤오샤(魯小霞) 카이펑현 기율검사위원회 부서기는 “쑤씨에게 돈을 제공한 것은 순전히 6차례에 걸친 대형 화재사건으로 입은 물질적·정신적 피해에 대한 조그마한 성의라고 보면 된다.”고 해명*다. 온라인뉴스부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지구촌 서브프라임 불안 여전

    지구촌 서브프라임 불안 여전

    “마치 폭풍전야와 같다고 할까요.”한 외국계 은행의 글로벌 마켓 담당자가 전한 최근 국제금융시장의 풍향계다.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의 부실로 빚어진 글로벌 신용경색이 ‘부시­버냉키’의 합작으로 진정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일시 잠복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서브프라임 부실이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뇌관’이라는 징후는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관계자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와 유럽중앙은행(ECB) 등이 국제적인 신용경색을 우려, 유동성을 늘렸지만 ‘한차례 주사효과’에 그치고 있다.”고 말했다. 국제금융시장에서 5.3%에 머물던 달러화 펀드의 이자율은 서브프라임 문제로 6.5%까지 올라갔다가 각국 중앙은행의 유동성 공급으로 5.4%까지 떨어졌지만 다시 5.7∼5.8%까지 반등했다. ●‘금리전환부 모기지´가 위험 진원지 안전자산을 선호하는 경향이 지나쳐 같은 신용등급의 채권이라도 ‘호·불호’가 갈리는 시장의 차별화·양극화도 진행되고 있다. 투자자들의 불안심리가 높아져 시장을 지탱해 온 신용평가 시스템마저 흔들릴 수 있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줄 수 있다. 이미 안전자산에 대한 가산금리조차 0.17%에서 0.30% 이상 올라 국내외를 가릴 것 없이 기업들의 차입 여건은 악화되고 있다. 미국계 대형 투자은행의 채권담당자는 “세계 금융시장이 올 하반기를 쉽게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금리전환부 모기지(ARM)’를 위험의 진원지로 지목했다. 2년간 저금리로 빌려줬다가 3년차부터 고금리로 전환하는 방식인데 2005년 이후 이뤄진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80%가 ARM이라고 했다. 올 하반기부터 이 방식이 적용되면 금리가 10%를 넘어 미국에서 모기지 이자를 갚지 못하는 사태가 속출할 수 있다. ●급한 불 껐지만 자금 경색 재발 소지 물론 급한 불은 껐다는 평가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그대로 남아 시장에서의 자금경색이 재발될 소지가 크다는 분석이다. 외국계 투자은행의 한 이코노미스트는 “미국의 부동산 시장은 버블이 확실하고 경착륙이든 연착륙이든 언제든 꺼질 수밖에 없다.”라면서 “서브프라임 문제는 위기의 원인이라기보다 유동성 과잉에 따른 결과로 이제부터가 문제”라고 했다. 그러면서 세계 경기와 국제금융시장이 2∼3년간 평온할 수 없다는 시나리오까지 제시했다. 달러화 약세는 환차손을 막으려는 달러화 자산의 매각으로 나타나 미국내 금리는 올라가고 경제 성장에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미국으로의 수출 의존도가 높은 이머징 마켓들은 타격을 받게 된다. 거꾸로 비정상적인 달러화 강세가 지금처럼 유지되면 미국의 무역·재정적자는 더욱 악화될 것이고 미국내 소비를 외국의 파이낸싱(자본투자)에 의존하는 왜곡된 시장구조도 계속될 수밖에 없다. ●美 초기에 미온적 대처… 신뢰 떨어져 실제 미국에선 주택시장이 침체되면서 자동차 판매 등이 줄어드는 등 ‘부의 감소효과’가 일부 나타나고 있다. 부시 미 대통령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금리를 낮게 유지해 주고 세제 지원까지 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시장에선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기보다 사태의 심각성만 재확인해 준 것으로 보고 있다. 금융연구원 부설 국제금융센터의 관계자는 “미국이 부실의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초기에 미온적으로 대처, 시장의 신뢰도를 떨어뜨린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백문일기자 mip@seoul.co.kr
  • HSBC, 외환銀지분 51.02% 인수 합의

    HSBC, 외환銀지분 51.02% 인수 합의

    영국계 은행 HSBC는 3일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가 보유한 외환은행 지분 51.02%를 63억달러(약 5조 9000억원)에 인수하기로 론스타와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금융감독위원회는 2003년 외환은행 헐값 매각 의혹사건에 대한 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는 외환은행 재매각을 승인할 수 없다는 종전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주식매매대금은 주식인수가 내년 1월31일까지 완료될 경우 63억 1700만달러이며 현금으로 지급될 예정이다.HSBC는 내년 1월31일 이후 거래가 완료되면 1억 3300만달러를 추가로 지급키로 했다. HSBC는 거래가 완료되기 위해서는 금융감독위원회와 공정거래위원회 등의 승인을 비롯한 여러 조건들이 충족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주식취득 승인을 위한 정식 신청서가 내년 1월31일까지 금융감독위원회에 제출되지 못하는 경우 론스타가 계약을 해지할 수 있으며, 내년 4월30일까지 인수가 완료되지 않으면 당사자 일방에 의한 계약 해지가 가능하다. HSBC는 “거래가 완료된 뒤에도 외환은행의 증시 상장은 유지할 예정”이라면서 “수출입은행 등 다른 주주들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에 대한 공개매수를 계획하고 있지 않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HSBC의 외환은행 최종 인수 여부는 아직 불투명한 상태다. 금융감독위원회 홍영만 홍보관리관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외환은행 매각딜과 외환카드 주가조작 관련 재판 결과가 이해관계자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서 “현재로서는 인수 승인을 검토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리처드 웨커 외환은행장은 이날 행내 방송을 통해 “HSBC의 인수로 현재와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을 것”이라며 “행명과 정체성도 유지하고 고용 보장과 현 국내외 지점망 유지도 약속했다.”고 말했다. 외환은행 인수에 관심을 가졌던 국민은행과 하나은행 등 국내 은행들은 HSBC의 외환은행 지분 인수 소식에 당혹스러워하며 법원 판결과 금융감독당국의 최종 결정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문소영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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