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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칸이 여덟 번 부른 남자 그래도 별 느낌없다는 남자… 그는, 홍상수다

    칸이 여덟 번 부른 남자 그래도 별 느낌없다는 남자… 그는, 홍상수다

    우연적 만남이 빚어내는 관계의 변주. 반복되는 듯하지만 조금씩 달라지는 상황의 디테일. 명징한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기보다는 툭툭 일상의 단편을 던진다.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다. 맞다. 홍상수 영화다. 제65회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대된 ‘다른 나라에서´(31일 개봉) 역시 기이하고도 매혹적인 홍상수 식 화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보증을 잘못 선 어머니와 함께 모항이란 해변마을로 잠적한 영화과 학생(정유미)의 내레이션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그는 안느(이사벨 위페르)란 이름을 가진 3명의 여인이 나오는 시나리오를 쓴다. 첫 번째 안느(사진 위)는 잘나가는 영화감독인데 한국인 부부(권해효·문소리)와 함께 여행을 온다. 두 번째 안느(아래)는 남편이 해외출장을 간 틈을 타 연인관계인 영화감독(문성근)과 모항에서 접선한다. 세 번째 안느는 한국여자에게 남편을 빼앗기고서 지인인 민속학 교수(윤여정)와 모항에 온 이혼녀다. 각각 에피소드는 별개로 존재한다. 그런데 상황이 반복되면서, 인물과 소품들은 다른 에피소드 속 상황과 묘하게 얽혀 들어간다. 칸 출국을 이틀 앞둔 홍 감독을 지난 11일 만났다. →칸영화제 경쟁부문만 해도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극장전’ 이후 벌써 세번째인데. -고생한 배우들한테는 좋은 자리가 될 거란 생각은 든다. 하지만 칸 영화제 측에서 경쟁부문이라고 이름 붙였을 뿐이지 내가 영화를 만들 때 다른 작품들과 경쟁하려고 만든 건 아니니까(특별한 소감이나 기대는 없다)…. 다만 내 영화를 보고, 느끼는 부분이 사람마다 다를 텐데 그 반응을 집중적으로 들을 수 있는 기회란 점은 좋다. #글쎄 왜 칸이 날 좋아하는지 안 궁금해 →13편의 연출작 중 8편이 칸에 초대받았다. 왜 칸은 홍상수를 선호할까.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알 길도 없고, 궁금하지도 않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다른 나라에서’는 어떻게 구상하게 됐나. -장소(전북 부안군 모항)를 먼저 정했다. 영화를 찍을 만한 곳인지 여행 겸해서 2011년 초 1박 2일로 갔다. 아담하고 좋더라. 어떤 영화를 찍을지는 모르지만 그해 7월쯤 찍기로 했다. 그러다 그해 5월쯤 이사벨 위페르가 사진전을 위해 서울에 왔다. 인터뷰를 보니 한국 감독 중 나와 다른 누군가와 (작품을) 하고 싶다고 했더라. 전에 파리에서 두번쯤 만나 안면은 있었다. 그래서 점심을 같이했다. ‘7월에 뭔가 찍을 건데, 뭔지는 모르는데 혹시 관심있느냐.’고 물었다. 더 묻지도 않고 하겠다더라. 그 친구를 주인공으로 정해놓고, 할 수 있는 얘기가 뭘까 생각했다. (한국 사람이) 외국인과 만날 때 수줍음과 과잉 친절을 떠올렸다. →촬영 당일 아침에 쓴 ‘쪽대본’을 주는 걸로 유명한데. -‘하하하’(2009)까지는 그래도 트리트먼트(시놉시스를 발전시킨 형태. 그림 없는 콘티의 개념)가 있었다. 전체의 30~40% 정도의 디테일은 있었다. 그런데 ‘옥희의 영화’(2010)부터 미리 알고 시작하는 부분이 확 줄어들고 있다. #아침마다 쪽대본 쓰는 게 적성 맞아 →점점 즉흥 작업을 선호한다는 얘기인데. -주어진 시간이나 준비가 없으니까 다른 머리를 쓰게 되고 현장에 더 집중한다. 그러면 튀어나오는 게 달라진다. 이번에도 촬영 2~3주 전 이사벨에게 1인 3역을 시키기로 결정했다. 스쳐가는 생각들을 메모해 놓고, 하루 분량을 찍고, 촬영한 분량을 생각하며 잠든다. 아침에 집중해서 시나리오를 쓰는 식이다. →당일 시나리오를 써서 완성한 영화가 처음 구상과 얼마나 비슷한가. -처음 구상이란 게 별 게 없었다. 외국인과 한국인이 만날 때 표피적이고 상투적으로 반복되는 양상들이 있다. 직감적으로 이걸 하면 되겠다 싶은 거다. 내가 조각가라고 치자. 어딜 갔다가 큰 돌을 봤다. 그 안에서 언뜻 형상이 보여 스튜디오로 갖고 온다. 깎아 들어가다 보면 돌 안에도 숨겨진 색도 있고 엉뚱한 결도 드러난다. 그러면 얼굴을 조각하려던 부분에 다른 형상을 새길 수도 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그날의 날씨, 촬영하는 동네 상황. 배우의 인품 같은 게 모두 결이 된다. 새로운 결이 튀어나올 때 판단하고 반응을 한 게 모여 영화가 된다. 뚜렷한 메시지나 주제의식이 있는 영화는 10명이 보면 다 비슷비슷한 반응이다. 하지만 (내 영화처럼) 이렇게 만들어진 경우에는 사람마다 다르게 보게 된다. 내가 원하는 게 그런 거다. →충무로에선 보기 드문 방식인데. -특별할 건 없다. 작곡가, 화가, 소설가들이 다 이런 방식이다. 전체를 다 구상해 놓고 소설을 쓰거나 작곡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경우는 드물다. 매번 일어나는 반응과 결정들이 반복되는 건데 기질에 맞는다면 좋은 방법이다. 나에게는 잘 맞는다. →당신의 영화 속 남성 캐릭터는 주로 교수나 시인, 영화감독들인데 십중팔구 위선적이고 찌질하다. 왜 그런가. -그 사람이 다룰 수 있는 인간형, 타입이란 게 정해져 있다. 그걸 평생 반복하는 거다. 평생 소시민들만 다루는 감독들도 있지 않나. 내가 뜬금없이 장르영화 감독처럼 대통령이나 공군조종사를 캐릭터로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나야 찌질한 캐릭터 평생 다룰 수밖에 →초기 작품과 비교하면 갈수록 경쾌해진다. -첫 작품을 35살에 찍었고, 지금 52살이다. 사람이 겪는 게 있으니까 영화적 표현도 계속 옮겨가는 것 아니겠나. 그렇다고 내 변화에 대해 정리하고,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해봐야 소용도 없다. 말이란 게 구속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경계하는 편이다. →왜 좀 더 명료하고 익숙한 영화를 찍지 않나. -나에게 영화란 귀한 기회이고 발견의 장이다. 하루, 하루의 삶이 단순하지가 않다. 복잡하다. 모순되고. 설명될 수 없을 뿐 아니라 해결 안 되는 일들도 많다. 그런 느낌들은 영화를 지금처럼 만들 때 더 근사치로 표현된다. 영화로 삶에 대한 해답을 내놓고자 하는 게 아니다. 삶의 복잡함을 비슷하게 구현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그런 영화를 스크린 앞에서 공유하는 과정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국가기관 보유 콘텐츠 7만건 민간 무료개방

    신라 최고의 문장가 최치원이 쓴 ‘계원필경’, 18세기 실학사상의 최고봉이었던 박지원의 ‘연암집’ 등 국가 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당대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의 문집 등이 민간에 무료로 개방된다. 행정안전부는 18일 “한국고전번역원, 한국문화정보센터에서 국가 데이터베이스(DB) 사업으로 디지털화한 역대 선조들의 문집과 한국 전통 문양 원형 등 7만 건에 가까운 자료를 공개한다.”면서 “원문 자료는 상업적 활용, 가공 등에 필요한 저작권을 확보해 제공하는 만큼 일부 자료를 제외하고는 영리·비영리 목적에 관계없이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계원필경, 연암집 외에도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이이의 ‘율곡전서’ 등 통일신라시대부터 구한말까지 역대 저명한 문집을 디지털화해 기계 가독형 문서(XML 형식)로 제공한다. 또 연화문수막새와당 기와 문양, 채화문단 복식 문양 등 전통 문양을 디지털화해서 공유자원포털(Data.go.kr)에서 내려받을 수 있게 했다. 모두 6만 9606건이다. 단 고전번역총서 177건은 문집총간(973건), 전통 문양(6만 9606건)과 달리 심의를 거쳐 비영리적 목적으로만 사용하도록 범위를 한정지었다. 이로써 지난해 7월 공공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정보 중 모바일용 앱 등 신규 서비스로 재창출할 수 있도록 만든 공유자원포털의 콘텐츠 이용 빈도는 더욱 높아질 전망이다. 지금까지 9696건의 텍스트, 이미지, 동영상 등이 민간에 제공됐다. 장광수 행안부 정보화전략실장은 “국가 DB로 구축된 가치 있는 공공 정보가 민간 분야에서도 자유롭게 활용돼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도록 제공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면서 “이번에 개방한 자료들 역시 교육용 콘텐츠, 민간 포털의 백과사전, 게임 그래픽 디자인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돼 문화 한류를 더욱 확대, 재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11) 허균과 김육

    [선택! 역사를 갈랐다] (11) 허균과 김육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569~1618)과 대동법의 주창자 김육(1580~1658). 임진왜란 전에 연이어 태어나고 한 세대 이상의 차이로 생을 마감한 두 사람은, 서로 교분은 없었지만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다.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난 허균은 조숙한 천재로 이름을 날렸으나 이단아, 괴물로 비난받다가 50세에 반역죄로 죽었다. 몰락한 가문 출신인 김육은 45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70세에 정승이 되었고, 조선을 대표하는 명재상의 반열에 들었다. 두 사람의 희비가 엇갈린 것은 시대가 그만큼 격동하였기 때문이었다. 낡은 질서가 균열하고 새 살이 돋아날 때 지식인은 현실 변화를 모색한다. 그 점에서 그들은 출발점을 공유했다. 그러나 여정과 도달점은 너무나 달랐다. 새로운 질서가 모색되던 시기, 그들은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남겼는가. ●시인의 감성 vs 경세가의 의지 허균은 최고의 명문가 출생이었다. 부친 허엽과 맏형 허성은 동인(東人)의 영수로 활약했고, 둘째형 허봉은 관료와 시인으로 유명했다. 누님 허난설헌은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시인이다. 화려한 가문의 정수를 허균은 모두 흡수했다. 26세에 문과에 급제했고, 당대를 주름잡던 시인 이달에게 시를 배우고 마침내 뛰어넘었다. 그는 시평에도 탁월하였다. 명나라의 뛰어난 문사 주지번(朱之蕃)과 시를 화답하고 조선의 시를 소개하는 감식안을 두고, 신흠 같은 문장가 또한 “이 자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의 정령이 변한 것이다.”라고 혀를 내둘렀다. 천재 시인 허균은 분방한 기질 때문에 평생을 비난받았다. 귀양지에서 그는 푸줏간 앞에서 입맛을 다신다는 뜻의 ‘도문대작’을 짓는다. 사대부가 팔도의 진미를 소개하는 일도 드문 일인데, 그는 한 술 더 떠 “식욕과 성욕은 사람의 본성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조관기행’이란 글에서는 기생들과의 만남과 놀았던 일까지 솔직히 고백하였다. 그는 도덕 아래 가려 있던 인간의 감성과 욕망, 그 즐거움을 가식 없이 내보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조선, 전쟁의 참화를 겪고 주자학을 재건 이데올로기로 선택한 조선의 상황은 그의 날개를 꺾어버리는 비정한 현실일 뿐이었다. 김육은 몰락한 가문 출신이었다. 고조부 김식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자결한 뒤로 가문은 한미해졌다. 부친과 모친마저 임진왜란 전후에 사망하였기에 그는 고모부에게 의지하며 컸다. 26세에 문과 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 유생이 되었으나, 광해군이 신임하는 정인홍을 비판한 일 때문에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서 관직에 오를 희망을 접어야 했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영영 재야에 남아 있었을지도 몰랐다. 앞날을 예감할 수는 없었지만, 김육의 내면에는 앞으로의 행보를 결정할 중요한 씨앗이 심어져 있었다. 그는 어릴 적 ‘소학’을 읽다가 사람과 사물을 사랑하고 타인을 구제한다는 ‘애물제인’(愛物濟人)이란 구절을 좌우명으로 삼게 되었다. 훗날 그는 “애물은 인(仁)에 근본하고, 제인은 의(義)에 근본하고, 의혹을 푸는 일은 지(智)에 근본한다.”고 정리하였다. 어짊에 기반한 사랑, 바름에 기반한 헌신, 그리고 앎에 기반한 판단을 사람의 본성으로 보았던 그는 사랑에 기초해서 전개되는 구체적인 개혁과 실천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편력하는 이무기 vs 기다리는 잠룡 허균의 호는 교산(蛟山)이다. 자신이 태어난 강릉 인근에 이무기(蛟)가 출현해서 생긴 지명에서 땄다.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분방한 행동은 당시 기준으로는 비상식적이었기에 그에게는 의례 비방이 따라다녔다. 요망한 자, 천지간의 괴물, 인륜을 어지럽힌 자, 금수 등이었다. 사상의 편력 또한 행실에 못지않았다. 사명당을 비롯한 승려들과 두루 사귀고 도가 수련에도 빠졌으며, 서학과 천주교까지 접하였다. 비판에 대한 허균의 대항 논리는 명쾌하였다. “남녀 간의 정욕은 하늘이 주신 것이요, 인륜은 성인의 가르침이다. 하늘이 성인보다 높으니 차라리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하늘이 내려주신 본성을 어길 수 없다.”고 했다. 자연스러움을 최고 기준으로 내세우는 그의 논리에서, 성인이 내세우는 도덕과 사회 기강은 근본을 거슬러 재규정하는 일에 불과했다. 임진왜란 이후 주자학을 통해 사회를 재구축하던 긴박한 시대에서 그런 논리는 불온하기 짝이 없었다. 이중 삼중으로 비판받는 허균은 명분에 얽매인 이들에게 경고했다. 그대들은 명분을 앞세워 하늘이 내린 재주 있는 자들을 배척하고 있다(‘유재론’). 재주 있는 자가 한 번 호령하면 원망을 품은 백성과 숨죽여 있던 이들까지 동조하여 가장 무서운 세력이 된다(‘호민론’). 하늘 아래 평등한 인민이란 새로운 패러다임을 지녔던 그는 주류에서 이탈한 비주류, 조선에서는 결코 용이 될 수 없는 그야말로 이무기였다. 김육의 호는 잠곡(潛谷)이다. 출사의 길이 막혀버린 34세, 농사지으러 내려간 경기도 가평의 잠곡이 그의 호가 되었다. 처음에는 거처할 곳이 없어 굴을 파고 나무를 대충 얽어 지냈다고 한다. 당시 생활을 보여주는 기록은 거의 없지만, 그가 여기서 농민들과 어울리고 노동의 질고를 체험하였음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소탈한 농사꾼 김육은, 서울에서 간혹 귀한 이가 찾아와도 입던 옷 그대로, 하던 일 그대로 맞이하였다. 가문에는 전설 같은 일화도 전한다. 농한기에는 숯을 구워 서울에 가 팔았는데, 새벽에 동대문을 열면 맨 처음 들어오는 숯장수가 그였다고 한다. 은거한 지 3년째 김육은 회정당(晦靜堂)이란 작은 집을 지었다. 그런데 ‘어둡고 고요하다’(晦靜)는 이름에 담긴 뜻이 의미심장하다. 후배 장유는 그 뜻을 이렇게 풀었다. “군자는 험난한 상황에서 천하를 경륜하기 위해 준비하면서 곤궁한 생활도 달게 여긴다. 소리를 거두고 빛을 갈무리하니 그가 있는지도 모른다. 급기야 기운이 무르익어 움직이면 산악을 흔들고 하늘을 밝히니 그 기세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기회는 오게 마련이다. 회정당에서 세상을 나갈 때를 기다리며 곤궁을 달게 여기는 김육은 때를 기다리는 잠룡이었다. ●홍길동의 꿈 vs 안민(安民)의 현실 허균은 감성에만 빠진 시인이 아니었다. 서얼, 천민과 스스럼없이 사귀었던 그는 그들의 희생에 값하는 지도층의 책임을 누구보다 강조하였다. 특히 정치의 잘잘못에 대한 국왕의 책임을 무섭게 걸고 넘어갔다. 주자학자들이 국왕의 마음가짐을 강조하며 결과에 대한 검증을 모호하게 흐렸던 데 반해, 그는 정치·경제·국방 등 결과를 검증할 수 있는 구체적 정책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당시 현실에서 그 책임에 답할 사람을 과연 찾을 수 있었을까. 없다면 남은 길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자기가 탈출하거나 아니면 판을 새로 짜는 것이다. 현실에 저항하다 탈출하여 새 질서를 세우는 허균의 염원은 모두 ‘홍길동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꿈에 불과했다. 현실의 그에게는 탈출할 율도국이 없었다. 그는 자신을 따르던 7인의 서자(庶子)가 역적으로 몰리자 극적인 변신을 꾀한다. 인목대비를 폐하려는 광해군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국왕의 측근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제자 기준격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하여 그는 전격적으로 능치처사되었다. 허균이 왕조의 전복을 정말로 꾀했는지는 미스터리다. 말년의 변신은 꿈을 접고 권력에 아부했던 모습일 수도, 아니면 반역을 위한 극적인 변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 반역에 성공했을지라도 그가 꿈 꾼 평등은 시대를 너무 앞서나간 것이었다. 신분의 완전 철폐는 그로부터 30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김육의 관운은 인조반정 이후에 순탄하게 풀렸다. 새 정부가 특별 기용하였고 문과에도 급제하였다. 출발은 늦었지만, 그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개혁책을 건의하였고 차근차근 실현하였다. 그가 일생 심혈을 기울인 개혁은 대동법의 확대 시행이었다. 세금 제도를 바꾸어 민생을 도모하는 대동법을 삼남에 확대하는 일은, 그가 우의정이 되어서야 비로소 시행되었다. 김육은 대동법 말고도 여러 방면에서 민생과 복리를 위해 노력하였다. 병자호란 직후에는 ‘구황벽온방’이란 의서를 간행하여 기근과 돌림병을 막고자 하였다. 수차와 수레를 사용하여 생산력을 높이려 했고, 은광을 개발하고 점포를 설치하여 상공업을 진흥하려 했고, 도시에서 화폐를 유통하고 전국으로 확대하여 시장경제의 활성화를 꾀했다. 그 주장들은 후대에 대부분 실현되었다. 시대를 선도할 수 있었던 그의 저력은 민생을 중심에 놓고 이념과 실질을 적절히 운용한 데 있었다. ●이상의 대동, 현실의 대동 유학의 경전 ‘예기’에는 차별 없이 모두가 행복한 대동 사회가 그려져 있다. 이 소박한 이상은 고대, 중세의 개혁·혁명의 출발지이자 종착지였고, 현대의 민주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와도 결합하여 변화의 불을 댕겼다. 17세기 초 조선의 갈림길을 두고 허균과 김육이 대동 세계를 기획한 것은 같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다른 길을 갔다. 허균은 거침없는 비판으로 위선을 폭로했고, 때론 일탈과 파격을 피하지 않았다. 김육은 현실에 충실했고 구체적인 실천에 주력했다. 허균이 하늘을 보며 세상을 뛰쳐나갈 때, 김육은 땅을 보며 세상 속으로 가라앉았다. “예절과 가르침이 어찌 자유를 구속하리오, 인생의 부침 다만 정(情)에 맡길 뿐. 그대들은 그대들의 법을 쓰시게, 나는 나대로의 삶을 이루겠으니.”(허균, ‘문파관작’) “성인의 법은 백성들에게 은택이 돌아가게 하는 것일 뿐이다. 나는 어리석고 생각이 얕아 학문이 어떠한 것인지 잘 모른다. 오로지 바라는 바는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일처리를 실질적으로 하는 것이니, 절약하여 백성을 아끼고 부역과 세금을 줄이는 것이다. 공허한 것을 추구하며 뜬구름 잡는 글은 숭상하고 싶지 않다.”(김육, ‘호서대동절목서’) 급진적인 평등을 꿈꾸며 자유롭게 인생을 편력한 허균도 매력적이지만, 노동 중에 묵묵히 인생의 도리를 깨친 김육의 통찰 또한 저력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선택을 앞에 둔 우리는 허균을 가슴 속에, 김육을 머릿속에 넣어야 하지 않을까. 이경구(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 ‘신비주의’ 한국 불교, 기독교 실용주의 배워라

    흔히 한국 불교는 어렵다고 한다. 기초 교리며 깨달음을 얻는 과정의 고난, 그리고 득도의 경지…. 알 듯 말 듯 한, 아니 쉽사리 손에 잡히지 않는 이론과 실천의 연속임에도 ‘한국 불교는 이것이다.’라는 명쾌한 안내는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그 길을 묻는 이들에게는 ‘근기가 약하다.’ 혹은 ‘공부가 부족하다.’라는 질책과 함께 그저 끊임없이 수행하라는 다그침만 무성하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그 어려운 공부 대신 염불과 기도 위주의 기복 신앙쯤에 안주하기 일쑤다. ‘이게 도무지 뭣 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이뭣고·김영명 지음, 개마고원 펴냄)는 바로 그 근본적인 의문과 실상을 꼬집은 책이다. 저자는 서울대와 뉴욕주립대에서 공부한 정치학자. 한림대 교수이면서 불교를 접한 지 4년쯤 되는 초보 불자라 할 수 있다. “전문 분야에 대해 문외한인 지식인이 그 전문 분야를 처음 접하면서 자기가 가진 지식을 통해 품을 수 있는 여러 의문을 제기하고 그 대답을 시도한 것”이라는 겸양의 의도와는 달리 한국 불교의 곳곳을 쑤셔 풀어낸 모순과 의문점들에서 녹록지 않은 내공이 읽힌다. ‘수행 참선에만 정진하라는데 그러면 누구나 깨달음을 얻고 보살이 될 수 있는 것일까.’, ‘늘상 무소유를 강조하면서 큰스님이 입적하면 왜 국장(國葬) 뺨치는 다비식을 여는 걸까.’, ‘본디 나는 없다고 하면서 참나를 찾으라고 하는데 그 참나는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등…. 저자는 결국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이는 현상과 가르침의 바탕에 애매한 교리 해설이며 이해하기 힘든 한자어투성이, 선뜻 다가갈 수 없는 과도한 신비주의가 있다고 말한다. ‘염세적인 종교’며 ‘그들만의 골방 종교’라는 비판도 그런 연유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거듭 한국 불교의 교리 대중화를 제안한다. 예를 들어 어려운 ‘돈오’라는 용어를 쓸 게 아니라 ‘번개 깨달음’이라 부르고 ‘점수’를 ‘쌓아 깨달음’ 식으로 쉽게 풀어 쓰자는 말이다. 뜻 모를 문자가 아닌 중생의 언어로 분명하게 이야기해 달라는 주문이다. 여기에 얹어 불교 역시 대중 종교인 이상 위로와 고통 해소 측면에서 기독교의 적극성과 실용주의를 배울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말로만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한다)을 외칠 게 아니라 실질적인 중생 구제의 방편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불교와 인연을 맺은 후 ‘법구경’과 ‘수타니파타’를 읽을 때마다, 고즈넉한 사찰 경내를 거닐 때마다, 또 소박한 명상에 잠길 때마다 어디서도 구하지 못한 차분함과 평온을 경험했다.” 불교를 매력적인 종교로 평가한 저자는 결국 “지금처럼 법 공양으로만 뿌듯해한다면 중생과 불리된 ‘그들만의 불교’로 전락할 것”이라 매듭짓는다. 1만 5000원.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좌파들 애국가 못 부를 이유 있나”- 조지 오웰

    “좌파들 애국가 못 부를 이유 있나”- 조지 오웰

    “애국주의가 보수주의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점유되는 것이야말로 천부당만부당. 보통 사람들은 이미 사회주의에 경도”되어 있음에도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고 말해서 문 앞에까지 온 지지자들을 되돌려 내보내는 좌파의 멍청함이다. 보통 사람들의 “가장 평범한 정서도 이해 못 하는 계몽된 좌파 지식인”보다는 “유니언 잭을 보고 가슴 뛰는 보통 사람”이 되라. ‘존 메이너드 케인스’(로버트 스키델스키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번역 등을 통해 영국 정치 경제사에 대한 수준 높은 얘기를 들려주고 있는 고세훈 고려대 공공행정학부 교수. 두 사람을 더 다루고 싶다 했다. ‘동물농장’과 ‘1984’로 유명한 세계적인 작가 조지 오웰(1903~1950), 그리고 우리에게 낯설지만 영국 노동당의 핵심 이론가인 리처드 토니(1880~1962)다. 케인스가 현대 세계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라면 오늘날 한국의 현실에서 이 두 명의 삶은 참고할 부분이 많다는 뜻이다. 그 가운데 ‘조지 오웰-지식인에 관한 한 보고서’(한길사 펴냄)가 먼저 나왔다. 타이밍도 기막히다. 진보 논쟁이 한창이라서다. 오웰은 평생 외롭고 가난하게 살았다. “최초의 상업적 성공을 안겨 준 ‘동물농장’의 인세가 밀려들기 시작할 무렵 마지막 소설인 ‘1984’가 거둘 놀라울 성공을 미처 누리지 못한 채” 폐결핵으로 숨졌다. 외롭고 가난한 것보다 오웰을 더 괴롭힌 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이해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동물농장’을 반공 우화로만 생각하는 세태에 슬퍼하기도 했다. 물론 소련을 비판한 것은 맞다. 2차대전 동맹국이라는 이유로 스탈린의 패악에 눈감고 심지어 아첨까지 하는 좌파 지식인들을 못 견뎌 했다. “거짓을 말하고 진리를 억압하는 것이 정치적 대의를 진전시키는 길이라는 사고”와 “독재 방식, 비밀경찰, 역사의 체계적 조작을, 자기 편인 한 수용할 태세를 완벽히 갖춘 상태”가 파시즘보다 더 무서운 유럽 위기의 뿌리라 봤다. “히틀러가 책을 불태웠다면 스탈린은 책을 다시 썼다.”는 엄연한 진실을 들여다보라는 것이다. 오웰이 보기에 “좌파 지식인이 스탈린을 숭앙”하는 꼴은 “글래스고 빈민가 아이들이 알 카포네를 숭배”하는 것과 똑같다. 1943년 11월부터 영국 노동당 내 좌파그룹 기관지 ‘트리뷴’에 소련 공산당을 극렬하게 비판하는 칼럼을 쓰는가 하면 소련에 아첨한 지식인들에게 아예 대놓고 “한번 창녀는 영원한 창녀”라고 쏘아붙이기도 했다. 1949년에는 소련 공산당의 선전 공세에 맞서기 위해 만들어진 영국 외무부의 정보조사처(IRD)에다 영국 내 공산당 비밀 당원과 동조자들 35명의 명단을 넘기기도 했다. 이런 전력들 때문에 오웰은 좌파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노동계급을 동경했으나 자신의 출신 성분을 배반할 수 없어 결국 중간계층으로 되돌아갔고 그 뒤 비뚤어진 선입관으로 사회주의를 비난한 배신자로 취급받았다. 그의 생각을 이해해주는 든든한 후원자가 받쳐주지 않을 때면 그의 글과 책은 늘 인쇄가 미뤄지거나 거부당했다. 후대 좌파에게도 비판 대상이었다. 문화 연구로 유명한 마르크스주의 문화 이론가 레이먼드 윌리엄스도 오웰을 비판했다. 그럼에도 저자는 오웰이 ‘비판자들의 상상 이상으로 더 뿌리 깊은 신념을 지닌 사회주의자’였다고 본다. 실제 오웰은 평생 사회주의 혁명을 염원했다. 결혼 6개월 만에 ‘반(反)파쇼’를 위해 트로츠키 민병대원으로 스페인내전(1936~1939)에 참가, 목에 관통상을 입기도 했다. 전간기와 2차대전을 겪으면서 영국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나는 것이 모든 문제의 궁극적 해결책이라 믿었다. 이를 위해 오웰은 영국 노동자들이 식민지 보유로 인한 이득을 포기하고 전반적인 생활 수준이 하락하는 것까지 감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도 산업국가의 모든 좌파 정당은 실제로는 가짜”라는 질타는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서구 좌파들에게 ‘노동자 국제 연대 운운하면서 잘난 척 그만하고 식민지부터 먼저 포기해 보시지.’라고 말한 것이다. 저자가 오웰을 두고 “사회주의를 국제적 맥락에서 보려 했던, 제국주의 문제를 정직하게 대면하려 했던 마지막 사회주의자”라고,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정직한 우파 지식인이나 정치인들이라면 오웰의 내부 고발 행위에 함부로 박수를 쳐댈 수 없을 것”이라 평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책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영국 전통에 뿌리 박은 사회주의’에 대한 얘기들이다. 오웰은 거창하고 어려운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남을 깔보는 중간 계급적 우월감이라는 최악의 흔적”을 지닌 좌파 엘리트 지식인들을 경멸했기에 노동자 스스로 결정하는 민주적 사회주의, 윤리적 사회주의를 주장했다. 이는 ‘좌파 애국주의’로 이어진다. 애국주의, 하면 벌써 좌파들은 눈꼬리가 올라간다. 그런 단어는 극우 맹동 세력, 반동분자나 쓰는 말 아니던가. 해서 애국가를 그토록 거부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오웰은 “애국주의가 보수주의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점유되는 것이야말로 천부당만부당”하다고 말한다. 그가 답답해한 것은 “보통 사람들은 이미 사회주의에 경도”되어 있음에도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고 말해서 문 앞에까지 온 지지자들을 되돌려 보내는 좌파의 멍청함이다. 보통 사람들의 “가장 평범한 정서도 이해 못 하는 계몽된 좌파 지식인”보다는 “유니언 잭을 보고 가슴 뛰는 보통 사람”이 되라고 주문한다. 6장 ‘좌파 애국주의를 위하여’에 등장하는 “늙은 보수주의자의 뼈 위에 사회주의를 세울 수 있는 가능성”이란 말은 두고두고 음미해 볼 만한 묵직한 표현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사족 하나 붙이자면, 1949년 영국 정부에 공산당 동조자 35명의 명단을 넘긴 사건은 ‘세작질’이 아니다. 오웰은 명단만 넘긴 게 아니라 소련 공산당의 선전 선동에 맞설 수 있는 ‘진정한 영국의 사회주의자들’을 정부에 적극 추천하기도 했다. 전후 영국에서 미국과 같은 매카시즘 광풍이 몰아닥치지 않은 것은 오웰의 그런 세심한 배려 덕분이었다는 평가는 거기서 나온다. 이 평을 누가 했을까. 바로 크리스토퍼 히친스(1949~2011)다. 추악한 독재자들과 거래했다며 마더 테레사에게 독설을 퍼붓는 등 거칠고 직설적인 화법 때문에 여기저기서 희화화되곤 하는 바로 그 다혈질 좌파 히친스 말이다. 2만 4000원.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2012 여수세계박람회] 국민관심 더하고, 바가지요금 빼고, 대기시간 나누고

    [2012 여수세계박람회] 국민관심 더하고, 바가지요금 빼고, 대기시간 나누고

    우리나라에서 처음 열리는 해양 엑스포가 12일 개막된다. 이번 엑스포는 1993년 대전 엑스포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두 번째 엑스포로 해양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하지만 낙후된 전남 지역의 소규모 축제로 전락할 것이라는 우려도 없지 않다. 올림픽, 월드컵과 함께 세계 3대 축제로 꼽히는 엑스포지만 국민의 56%만이 관심있는 것으로 조사됐기 때문이다. 한국갤럽이 지난달 전국의 만 19세 이상 성인 남녀 1605명을 대상으로 휴대전화 조사를 한 결과 개최지에서 가까운 광주·전남 거주자의 관심도가 72%로 가장 높았으며 서울 56%, 부산·울산·경남 55%를 보였다. 관람 의향도 광주·전남 도민들이 36%로 가장 높았으며 서울 12%, 인천·경기 10% 등을 보였다. 자칫 광주·전라권만의 ‘지역 축제’에 머물 우려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 같은 우려는 입장권 판매부진으로 나타나고 있다. 조직위는 8월 12일까지 93일간 국내외에서 1000만명의 관람객들이 올 것을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개막전까지 300만장을 예매하려던 입장권 판매계획은 지난달 30일 기준으로 100만장에 그쳤다. 해외입장권 판매도 9900장에 지나지 않는다. 조직위는 50만 해외관람객 유치를 목표로 했다. 조직위는 해외 관광 상품개발과 외국인들의 좋은 평판으로 외국 관광객들이 찾아오길 바라는 방법 이외에 뚜렷한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개최도시가 중소도시라는 지리적 한계와 국가·정부 기관 등의 상대적 관심 소홀, 조직위의 소극적 마케팅 등이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바가지 요금 문제도 조직위가 해결해야 할 과제다. 여수의 대표 음식인 게장백반은 5000원대에서 이미 8000원대로, 4만~5만원대 숙박업소 요금은 벌써 10만원을 넘고 있다. 생수도 가격이 2배 이상 올랐다. 바가지 요금 근절을 위해 정부 합동점검반의 활동 강화가 요구된다. 피해를 본 관람객은 부당요금 징수사례를 신고센터(1899-2012)에 고발하면 된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서 생길 대기시간을 줄이는 것도 과제다. 조직위는 주최국 전시관을 비롯해 주제관 한국관 아쿠아리움 등 8개 전시관에 대해 예약시스템을 도입했다. 혼잡방지를 위해서다. 한사람이 최대 2개 전시관을 예약할 수 있다. 예약 대상인 8개 전시관 중 아쿠아리움은 종일 예약으로만 운영키로 했다. 아쿠아리움은 영구시설물로 박람회 이후에도 볼 수 있다는 점을 알려 혼잡도를 분산시켜야 한다. 나머지 전시관들은 선착순 입장이어서 대기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밖에 20명 이상의 ‘단체예약 전용데스크’ 추가설치도 필요하다. 전용데스크는 현재 정문과 1문, 3문에 위치한 종합안내소 3개소에만 마련된 상태다. 조직위 관계자는 “운영 요원들에 대한 지속적 교육과 개막후 1주일이 가장 중요한 만큼 완벽한 준비로 국민들이 가장 가보고 싶은 장소가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여수 최종필기자 choijp@seoul.co.kr
  • 세상을 탐하는 혼령과 퇴마사 군단의 대결

    세상을 탐하는 혼령과 퇴마사 군단의 대결

    영국의 인기 판타지 호러 드라마 ‘페이즈’가 한국에 상륙한다. 글로벌 미드 채널 AXN은 11일부터 매주 금요일 밤 9시에 ‘페이즈’를 2회 연속 방송한다. 드라마의 제목이기도 한 ‘페이즈’는 승천하지 못하고 지상에 떠도는 혼령을 뜻한다. 이 혼령들은 지상에 너무 오래 있다 보면 좀비처럼 몸이 썩기 시작하고, 계속 살아남기 위해 인육을 먹는 것으로도 모자라 세상을 페이즈의 소굴로 바꾸려 한다. 인간 세상을 탐하는 페이즈와 인간을 보호하려는 비밀의 퇴마사 군단 엔젤릭스 간의 숨막히는 대결이 이 드라마의 관전 포인트다. 이야기는 17세 고등학생이자 왕따인 남자 주인공 폴이 어느 날 페이즈를 목격한 뒤 세상 종말의 악몽과 함께 엔젤릭스 능력을 갖게 된 것을 알게 되면서 시작된다. 쌍둥이 누나, 학교 친구들 등 주변인으로부터 무시만 당하던 폴은 비밀리에 페이즈를 멸망시키기 위한 공포스러운 전쟁에 대비하고 학교에서는 갑자기 영웅으로 부상하는 등 혼란스러운 일만 생긴다. 이러한 폴과 페이즈의 이야기는 빠른 전개와 탄탄한 구성을 바탕으로 6개의 에피소드를 통해 시청자들을 강하게 몰입시킨다. 특히 이 작품은 영국의 장수 드라마 ‘닥터 후’의 제작자 캐럴라인 스키너와 유럽을 사로잡은 청소년 성장 드라마 ‘스킨스’의 작가 잭 손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모았다. 잭 손은 영국의 권위 있는 엔터테인먼트 시상식인 로열 텔레비전 소사이어티 어워드에서 2011년 최고의 작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AXN 측은 “‘페이즈’는 영국 디지털 케이블 채널인 BBC 3에서 2011년 방송될 당시 각종 매체에서 ‘영국 최고의 쇼’로 호평받는 등 영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드라마”라면서 “국내에서 최근 영국 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신선한 소재로 인기를 모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2012 여수세계박람회] 바가지상술 추방

    [2012 여수세계박람회] 바가지상술 추방

    정부가 오는 12일 여수엑스포 개막을 앞두고 바가지 요금 등 불법행위 단속에 나섰다. 국토해양부는 공정거래위원회, 여수시, 국세청 등 8개 정부기관으로 이뤄진 정부합동점검반을 구성해 지난 2일부터 여수시내 숙박업소 점검에 착수했다고 8일 밝혔다. 합동점검반은 엑스포가 끝나는 오는 8월 12일까지 지속적으로 식당·모텔 등 관련 업소의 요금을 모니터링할 예정이다. 바가지요금 외에 요금 담합, 예약 거부 등도 단속 대상이다. 피해를 본 관람객이 직접 신고할 수 있는 신고센터(1899-2012)도 운영 중이다. 관련 홍보 스티커도 제작해 부착했다. 앞서 점검반은 지난 2일과 4일 50개 숙박업소를 두 차례 점검해 20곳을 적발하고 13곳에 대해서는 영업정지, 개선명령 등의 행정조치를 내렸다. 7곳은 세무조사를 의뢰했다. 최근 여수지역에선 엑스포 개막을 앞두고 일부 음식점과 숙박업소들이 특수를 노려 요금을 슬그머니 올리고 있다. 여수의 대표 음식인 게장 백반은 1인분에 평균 5000원에서 8000원까지 가격이 올랐다. 생수도 시중가격의 2배 이상 급등했고, 일부 모텔은 하루 4만~5만원하던 숙박료를 10만원까지 올려받고 있다. 엑스포기간을 성수기로 판단하고 예약 자체를 받지 않고 있는 업소도 부지기수다. 여수시 홈페이지에도 “먼 미래를 생각해 절대 바가지 상술은 근절해야 한다.”는 글이 잇따라 올라오고 있다. 여수시는 다음주까지 인하된 가격으로 요금을 신고한 업소들을 중심으로 숙박업소 명부를 시 홈페이지에 올릴 방침이다. 여수 최종필·서울 오상도기자 choijp@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10)김상헌과 최명길

    [선택! 역사를 갈랐다] (10)김상헌과 최명길

    1637년 1월 18일 청군에게 포위되어 있던 남한산성의 분위기는 침울했다. 산성으로 쫓겨 들어온 지 한 달이 훨씬 지났지만, 돌파구는 보이지 않았다. 연일 이어지는 매서운 추위에 병사들은 얼어 죽거나 동상에 걸려 쓰러지고, 얼마 남지 않은 군량은 하루하루 줄어들고 있었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구원병이 끊겨 버린 점이었다. 시간은 자신들 편이라고 확신했던 청군 지휘부는 연일 출성과 항복을 독촉했다. 벼랑 끝으로 몰린 조선 조정은 결국 청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조판서 최명길(1586~1647)이 청군 진영에 보낼 문서의 초를 잡았다. 문서는 ‘조선국왕은 절하고 대청국 관온인성 황제께 글을 올립니다.’라는 구절로 시작되었다. 조선이 처음으로 ‘오랑캐’ 청을 황제국으로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예조판서 김상헌(1570~1652)은 글을 보고 통곡했다. 그는 항복 문서를 빼앗아 찢어버린다. 그러자 최명길은 흩어진 종이 쪽을 주워 모아 풀로 붙인다. 처참하고도 희극적인 장면이었다. 왜 한 사람은 찢어버리고, 다른 한 사람은 도로 붙인 것일까? ●원칙을 위협했던 현실 17세기 초반, 조선을 둘러싼 동아시아 정세는 심하게 요동쳤다. 15세기 이래 패권국으로 군림했던 명의 몰락이 뚜렷해지고, 만주에서 급속히 떠오른 후금이 명에 도전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두 나라 사이에 낀 조선의 처지는 괴로웠다. 임진왜란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황에서 대륙 패권의 변동이라는 격변 속으로 휘말렸기 때문이다. 명은 조선을 끌어들여 후금과 싸움을 붙이려 했고, 후금은 후금대로 조선에 중립을 지키라고 압박했다. 명과 후금에 치여 ‘샌드위치’가 된 처지에서 1627년 조선은 정묘호란을 겪는다. 명과의 결전을 앞두고 조선을 묶어 두려 했던 후금의 침략을 받았던 것이다. 후금군 철기(鐵騎)의 돌격을 감당할 수 없었던 조선은 후금과 형제(兄弟) 관계에 입각한 화약을 맺는다. 조선 지식인들은 고뇌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지닌 세계관으로 보자면 만주족 후금은 분명히 ‘오랑캐’이자 ‘금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금을 형으로 섬기는 것은 도무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갈수록 엄혹해졌다. 조선이 ‘임금’이자 ‘부모’로 섬기던 명은 후금에 계속 밀리기만 했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명과의 싸움에서 연전연승하면서 기세가 높아졌다. 급기야 1636년 후금의 홍타이지 칸(汗)은 황제가 되기로 하고 ‘아우’ 조선에 그 사실을 통고한다. 칭제 사실을 알리려 후금 사신 용골대 일행이 입국하자 조선 조야는 정신적으로 공황 상태에 빠진다. ‘중화국 명의 천자(天子)만이 천지간에 군림하는 유일한 황제’라는 조선 지식인들의 믿음과 원칙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조선 조정은 격앙되었다. ●주화냐? 척화냐?의 선택 대다수 신료는 “명은 부모의 나라이고 후금은 부모의 원수인 데다, 명은 왜란 때 조선을 도왔으므로 절대로 배신할 수 없다.”며 용골대 일행의 상경을 막으라고 촉구했다. “용골대 일행의 목을 베어 명으로 보내고 전쟁을 불사하자.”는 초강경론을 펼치는 사람도 있었다. 김상헌은 그 같은 주장을 폈던 척화파(斥和派)의 맏형 격인 인물이었다. 천자국 명을 섬겨온 예의와 명분을 수호하기 위해서도 후금과의 모든 관계를 끊고 결전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명을 위해서라면 종사가 망하는 것도 감수할 수 있다.’는 주장이기도 했다. 소수파였던 주화파(主和派)의 의견은 달랐다. 주화파의 대표자 최명길 또한 ‘오랑캐와 척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정론이자 원칙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문제는 당시 현실에서 ‘원칙’을 관철하려 할 경우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최명길은 ‘임금의 의리는 필부의 그것과 다르다.’며 ‘조선의 임금이 명을 위해 종사를 망하게 할 수는 없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정묘년에 맺은 후금과의 형제관계를 유지하도록 끝까지 노력하되, 후금의 칭제에 대해 호오(好惡)의 감정을 드러내지 말자고 강조했다. 최명길은 ‘오랑캐가 칭제했다.’는 사실 자체에 흥분하여 기존의 관계를 무조건 파기하자고 했던 척화파들을 비판했던 것이다. 인조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는 결국 다수파인 척화파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후금과 맺은 형제관계를 파기하고 절교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절교 ‘이후’에 대한 군사적 대책은 미흡했다. 청이 침략할 경우 서울을 떠나 강화도로 들어가 맞선다는 것이 주된 방책이었다. 1636년 12월 9일 압록강이 얼어붙자 청군 철기는 서울을 향해 내달렸다. 12월 14일 청군 선봉은 지금의 녹번동 부근까지 도달했다. 청군은 의주에서 서울로 이르는 대로 주변의 산성에 들어가 청야작전(淸野作戰·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농작물이나 건물 등 지상에 있는 것들을 말끔히 없애는 작전)을 폈던 조선군을 무시하고 돌격을 감행했다. 허를 찔린 조선 조정은 강화도로 피난할 시간적 여유를 상실했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남한산성에는 1만 4000여 명의 병력과 그들이 45일 정도를 버틸 수 있는 군량밖에는 없었다. ‘춥고 배고픈’ 산성은 청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었고 남·북방의 구원병들은 산성으로 접근하는 족족 청군에게 궤멸하였다. 청은 처음에는 왕세자를 내보내야 항복을 받아 주겠다고 했다. 이어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고, 나중에는 척화신들을 묶어 보내야 한다고 압박의 강도를 높였다. 포위된 산성에서도 ‘선택’을 둘러싼 논쟁은 지속되었다. 김상헌 등은 인조에게 “오랑캐의 신하가 되느니 최후의 결전을 벌여 깨끗이 망하자.”는 주장을 폈고 최명길 등은 “종사와 백성을 생각해야 할 임금은 은인자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산성을 지키던 병사들도 동요했다. 추위와 굶주림, 공포에 지친 병사들 가운데는 항복하자고 시위를 벌이는 자들도 나타났다. 막다른 상황에 몰리자 인조는 결국 최명길 등의 건의를 받아들인다. ●‘선택’의 역사적 의의 인조는 1637년 1월 30일 삼전포(三田浦)로 내려와 항복했다. ‘오랑캐 추장’ 홍타이지에게 세 번 큰절을 올리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적인 항복이었다. 인조가 겪은 치욕보다 더 처참한 것은 수십만의 백성이 청군에게 포로가 되었던 사실이다. 조선 포로들은 심양으로 끌려가 노비로 사역되었다. 많은 포로가 탈출을 시도하다가 죽는가 하면 도로 붙잡힌 포로들은 발뒤꿈치를 잘리는 혹형을 받았다. 포로가 된 많은 여인이 끌려가는 도중 청군의 첩으로 전락했고, 심양에 도착해서는 질투심에 눈이 먼 만주족 본처로부터 끓는 물 세례를 받은 여인도 있었다. 어렵사리 종사와 국체를 보전했지만, 전란 때문에 백성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처절함 그 자체였다. 조선은 과연 이 처참한 국난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일까? 조야를 막론하고 당시 조선 지식인들 대다수가 “명은 중화이고 청은 오랑캐”라는 것을 원칙으로 견지하는 한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원칙’과 ‘현실’이 부딪칠 때 무엇을 가장 우선적이고 소중한 목표로 삼을 것인지를 고려하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남한산성의 함락이 임박했을 때, 김상헌 등이 제기한 주장은 “조선의 신료는 물론 임금도 명을 위해 ‘옥쇄’(玉碎·명예나 충절을 위하여 깨끗이 죽는다는 의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최명길 등은 “조선 임금은 명보다는 조선 백성의 운명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전자가 ‘무차별적 원칙론’이라면 후자는 ‘선택적 원칙론’이었다. 병자호란의 발생부터 종결까지 인조는 양자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병자호란 무렵의 국제질서 변동 과정에서 조선은 ‘독립변수’가 아니었다. 명과 청 사이에 낀 조선은 두 나라와의 관계를 잘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전화에 휘말리고 말았다. 양국과의 관계를 모두 원만히 유지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명과 청이 계속 싸우는 상황에서 ‘종속변수’ 조선은 선택의 기로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이 처한 이 같은 엄혹한 조건을 잘 알고 있었던 최명길은 병자호란 직전 인조에게 ‘결단’을 촉구한 바 있다. 그는 청과의 화친을 강조하면서도 “척화파들의 주장처럼 청과 맞서 싸우려는 것이 ‘진심’이라면 강화도를 포기하고 압록강까지 전진해서 싸우자.”고 촉구했다. 인조가 거부하여 무산되었지만, 이 주장이 갖는 의미는 만만치 않다. 국경에서 결전을 벌이면 승패 또한 그곳에서 조기에 결판날 것이고, 청군이 깊숙이 남하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그렇게 많은 포로가 청군에게 사로잡히는 비극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최명길의 주장이야말로 ‘종속변수’ 조선이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명청 교체의 격변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대안이 아니었을까. 17세기 초반 조선이 명청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로 내몰렸던 사실은 미국과 중국이 맞선 오늘의 현실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존의 패권국이 쇠퇴하고 새로운 강국이 떠올라 그에 도전하는 사태가 빚어질 때 한반도는 예외 없이 위기를 맞았다. 명청 교체를 비롯하여 14세기 후반의 원명 교체, 16세기 후반의 일본 굴기, 19세기 후반의 청일전쟁이 한반도로 몰고 왔던 결과들이 그 생생한 실례다. 다가오는 미·중 대결의 시대, 이른바 G2시대를 맞아 우리는 또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나아가 ‘선택의 기로’로 내몰리는 것을 피하고자 우리는 지금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한명기(명지대 사학과 교수)
  • 중국 문화대혁명의 광기 적나라하게 그리다

    중국 문화대혁명의 광기 적나라하게 그리다

    “일이 이렇게 이루어졌다.” 장편소설 ‘사서’(四書)(자음과모음 펴냄)에는 이런 표현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그 앞의 사정은 ‘부조리하게’ ‘부정하게, 거짓이 난무하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이해는 전혀 안 되지만’이라는 말이 숨어 있는 것 같다. 중국의 노벨문학상 후보 1호로 꼽히는 옌롄커(54)의 ‘사서’(四書)는 논어·맹자·대학·중용 등의 중국 고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소설 속 ‘나’로 지칭되는 작가가 쓴 4권의 책을 말한다. ‘죄인록’과 ‘옛길’ ‘하늘의 아이’ ‘시시포스의 신화’ 등이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강제노동수용소에 끌려온 작가는 그 수용소 사람들을 감시하는 ‘죄인록’을 쓰도록 요구받는다. 그는 ‘죄인록’을 쓰면서 한편으로 ‘죄인록’을 작성하라고 받은 종이와 잉크를 빼돌려 남몰래 자신의 최대 걸작인 ‘옛길’을 쓰기 시작한다. 소설은 이 4권의 책에서 발췌한 내용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개하는 것으로 전개된다. 소설 속에 소설을 배치한 액자소설로, 다양한 시점이 공존한다. 장르도 다양하다. ‘죄인록’은 정부 보고서와 비슷하고 ‘하늘의 아이’는 철학 연구서 같기도 하고 소설 같기도 하다. 99구 강제노동수용소에 개인의 이름이란 없다. 개조돼야 할 대상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개조를 맡은 사람들도 이름이 없다. 99구의 책임자는 볼의 홍조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앳된 10대 공산당원으로 그저 ‘아이’로 지칭되고 아이의 위에는 ‘상부’와 ‘현장’ 등 역시 이름 없는 책임자들이 존재한다. 아무리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이’도 1무(660㎡)에서 600근의 농업 생산량을 내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문화혁명기의 중국에는 현장이 아무리 “1무에 1만근은 거짓이다. 불가능하다.”고 강하게 이야기해도 그만큼 소출을 낼 수 있다고 거짓 보고서를 내는 지도자들(또 다른 아이)이 허다했다. 다른 강제노동수용소보다 9배 많은 지식인을 관리해야 하는 아이는 “125개의 붉은 종이꽃을 모으면 5개의 별로 바꿔주고 이를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 증거’로 삼아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한다. ‘홍화오성제’다. 사람들을 어떻게 조종해야 하는지 아이는 금방 알아낸다.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경쟁을 시킨다. 거짓말도 한다. 그러나 이 희망은 집으로 돌아가기에 충분한 꽃을 모으지 못한 사람들이 각자의 꽃 개수를 알 수 있는 아이의 천막을 태워버리면서 사라진다. 붉은 종이꽃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던 아이의 손에는 이제 권총이 있다. 소설을 읽다 보면 점잖고 고상하다고 알려진 지식인들이 붉은 종이꽃을 얻기 위해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다른 사람의 비밀을 밀고하거나 눈앞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게 다반사이고 아이의 집권 기반을 마련해주는 철학과 방법론도 제공한다.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 같다. 역사의 비극은 이런 지식인들의 자발적인 ‘지적 매춘’ 탓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소설을 쓴 옌롄커는 “중국에는 인민을 해방시킨 진짜 혁명도 있었지만 문화대혁명처럼 미친 혁명도 있었다. 문학은 이런 잘못된 혁명에 대해선 질문하고 해체하고 비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주 중국에서 출판을 거부당한 작가는 이 소설을 2011년에 완성했지만 “이전 저작과 완전히 다른 찬사를 받는 동시에 더 강하고 빈번한 거부를 당했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12년 간 돈 한푼 쓰지 않고 살아온 남자

    12년 간 돈 한푼 쓰지 않고 살아온 남자

    돈 한 푼도 사용하지 않고, 물물교환 등 과거 방식의 경제활동도 전혀 하지 않은 채 12년을 살아온 한 미국 남성이 언론에 소개돼 눈길을 모으고 있다. 다니엘 수엘로(51)라는 이름의 이 남성은 12년 전인 2000년, 자신의 전 재산과 마찬가지였던 30달러를 버리고 스스로 사막으로 건너가 생활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다니엘의 삶은 작가이자 그의 친구인 마크 선든의 최근 책에 실려 세상에 알려졌다. ‘돈을 떠난 남자’(The Man Who Quit Money)라는 제목의 이 책은 다니엘이 십 수 년 간 돈이나 어떤 경제적 활동도 하지 않은 채 자급자족하며 살아온 날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수엘로는 돈과 경제활동이 부족한 채로 살아가는 노숙인들과 다르다. 돈을 쓰거나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소비를 촉진하는 교환방식인 쿠폰이나 정부의 구호품도 받지 않는다. 그는 “우리 사회는 반드시 돈을 가져야 살아갈 수 있게끔 설계된 자본시스템의 일부”라면서 “이렇게 살다가는 멘탈이 모두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수엘로는 자본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권과 운전면허증, 그리고 법적인 이름을 버렸다. 거처를 유타주의 아치스국립공원 끝자락으로 옮기고 수년에 걸쳐 자신의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값비싼 침대 대신 돌을 베고 자고, 풀을 끼니삼아 먹으며 인근 냇가를 욕실 또는 식수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는 “나의 목표이자 희망은 최대한 적게 소유하고, 최대한 많이 나누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선든은 “처음에는 친구의 방식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2008년 세계경제위기가 닥치자 그의 선택과 심정을 알게 됐다.”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의 경제 시스템은 매우 거대해서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 우리는 현재도 다양한 방식으로 자본의 노예로 살고 있다.”고 말했다. 수엘로의 생활은 경제적 위기와 자본주의에 빠져있는 수많은 미국인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으며, 탐욕에 사로잡힌 사회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 대구 약령시로 ‘건강한 소풍’ 떠나볼까

    354년 전통의 대구약령시가 2일부터 6일까지 대구 중구 남성로 약전골목에서 ‘한방문화축제’를 연다. ‘즐거운 동행, 건강한 소풍’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축제는 약령시 부활을 위해 1978년 시작된 이후 올해로 35회째다. 첫날 시민의 건강과 안녕을 비는 고유제, 약령시 개막을 알리는 나라님 어지 전달식, 축제 개시 선포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볼거리도 풍성하다. 뮤지컬 ‘비방문 탈취작전’은 350여년간 이어져 온 약전골목을 배경으로 이 골목을 지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통과 우리 의학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전국 한의학과 학생들이 참가해 한의학 실력을 겨루는 청년 허준 선발대회도 열린다. 우리의 전통 기예를 보여 주고 전승하자는 취지에서 한약시장 종사자와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한약재 썰기 대회도 개최된다.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 등 4가지 체질별로 몸에 적합한 한방요리와 약재를 소개하는 전시회와 체질별 건강 상담을 해주는 사상체질관도 운영된다. 약봉 싸기, 한방비누 만들기를 해보는 한약방 체험과 가족과 함께하는 약사발 빚기, 한방족탕체험 같은 체험 프로그램도 풍성하게 준비돼 있다. 약초 꽃동산에서는 한약초인 인삼, 황기, 작약 등 70여종 2000여점의 약초가 선보이고 약이 되는 음식인 약선이 전시된다. 먹거리장터인 ‘약령 먹거리 잔치마당’에서는 한국전통음식 전시 및 시식회와 대구를 대표하는 향토전통음식을 선보인다. 이 밖에 축제 기간 대구 중구가 실시하는 대구골목 야경투어와 연계한 ‘달빛걷기대회’를 개최한다. 참가자들이 청사초롱을 들고 약전골목 일대를 걸으며 축제의 분위기를 북돋운다. 대구 약령시는 조선 효종의 명령으로 1658년 개설된 한약재 시장이다. 약전골목에는 한의원, 한약방, 인삼사 등 한방 점포 300여곳이 들어서 있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herb.daegu.go.kr/festival)를 참조하면 된다. (053)253-4729. 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백석·설정식·정소파… 다시보는 문학 100년

    백석·설정식·정소파… 다시보는 문학 100년

    한국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백석(위), 미국유학까지 다녀온 좌파시인이자 월북시인인 설정식(아래), 살아서 탄생 100주년을 맞는 시조시인 정소파와 현대시조 발전에 기여한 시조시인 이호우, 공동체 지향적 시를 쓴 시인 김용호 등 1912년에 태어나 암울한 식민지 시대를 통과하면서 문학의 끈을 놓지 않았던 문인 5명을 재조명하는 ‘2012년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가 5월 3일 개막된다. 당해연도에 탄생 100주년을 맞은 문학인을 기리는 문학제로 2001년 이후 12회째다. ‘언어의 보석, 어둠 속의 연금술사들’이란 대주제로 개막일 오전 10시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23층 세미나실에서 온종일 심포지엄을 열고 이튿날인 5월 4일 오후 7시 연희문학창작촌에서 문학의 밤과 작가별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기획위원장을 맡은 황광수 평론가는 “100년 전 문학을 조명하고 100년 이후의 문학에 대해 고민하는 자리”라며 “당대에 유명하지 않았더라도 꼭 필요한 문인들을 재발견하는 데 의미를 부여하고 달라진 독자의 눈높이 등을 고려해 새로운 의미를 발굴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 기획위원장은 또 “백석은 당시 시인 중 드물게 친일시가 한 편도 없고, 만주에서 살다가 고향 북한으로 간 덕분에 월북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정통적 정서와 모더니즘을 구현한 시인으로, 한국적인 것을 잃어가는 식민지에서 우리의 풍속, 언어, 생활습관 등을 시어로 고스란히 남겼다. 정치색이 전혀 없었던 백석과 달리 시의 즉자성과 즉각성을 강조한 설정식은 시 ‘포도’ ‘해바라기’ ‘잡초’ 등에서 이미지를 차용해 자신의 정치적 의식을 펼친 엘리트 지식인으로, 두 사람 모두 한국에 꼭 필요한 작가였다.”고 말했다. 생존해 100주년을 맞은 정소파 시조시인은 최근 작가회의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에 하이쿠(시문학의 하나)가 있듯 우리 문학에 현대화된 시조를 쓰겠다는 욕심으로 창작에 임했다.”면서 “지금도 생각이 많은 날은 하루에 2~3편의 시조를 쓴다.”고 왕성한 창작력을 자랑하고 있다. 탄생 100주년 기념문학회는 한국작가회의와 대산문화재단이 주최하고 서울시가 후원한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정순왕후 기리며 궁중제례 관람도

    수양대군에 의해 쫓겨나 강원도 영월 유배지에서 죽은 남편 단종을 그리며 60여년이나 홀로 지내다 생을 마감한 정순왕후 송씨(1440~1521)를 기리는 추모문화제가 25일 종로구 숭인동 숭인근린공원에서 열린다. 정순왕후는 단종을 위해 청룡사 동쪽의 작은 산인 동망봉(東望峰)에 초가 암자 정업원(淨業院)을 짓고 매일 동쪽을 바라보며 단종을 그리워했다. 추모제는 식전 행사와 공식 행사, 추모 공연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식전 행사는 정순왕후의 넋을 달래는 진혼무(명인 전은경)를 시작으로 판소리(명인 이용수)와 서울대 국악실내악단의 공연 등으로 이어진다. 본행사인 제례는 종묘제례보존회(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궁중제례 형식으로 진행해 평소 접하기 어려운 의식을 관람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한다. 정순왕후 추모제례 거행을 알리는 ‘집례제청’, 제주를 올리는 세 사람의 헌관인 초헌관·아헌관·종헌관의 배례, 축문을 불태우는 의식인 ‘망헌례’ 등은 자녀에게 역사와 문화 교육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한다. 종묘제례는 2001년 종묘제례악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됐다. 본행사에 이어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국악인 오정해씨 등이 참여하는 판소리 공연, 플루트 연주가 김희숙씨의 추모연주, 연극배우 성병숙씨의 추모시 낭송 등 문화행사도 다채롭게 열린다. 김영종 구청장은 “앞으로도 정순왕후 추모문화제를 종로의 대표적인 지역문화 축제로 발전시켜 나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정현용기자 junghy77@seoul.co.kr
  • [열린세상] 꽃잎 날리는 봄날의 부끄러움/문흥술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

    [열린세상] 꽃잎 날리는 봄날의 부끄러움/문흥술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

    심한 독감으로 며칠을 끙끙 앓다가 이따위 감기에 굴복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공원에 줄넘기를 하러 갔다. 조금 움직이자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는데 어린 소녀가 다가와 앙증맞은 손으로 뭔가를 내게 내밀었다. 빨대를 꽂은 요구르트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공원 저편 벚꽃 나무 아래 소녀의 어머니와 어린 동생이 자리를 깔고 앉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소녀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요구르트를 마셨다. 땀 흘리는 나에게 마실 것을 주려고 한 소녀의 어머니, 예의 바르게 음료수를 건네는 소녀. 그들의 머리 위로 하얀 벚꽃이 훈훈한 봄바람에 눈처럼 날리고 있었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노래가 생각났다. 흩날리는 꽃잎 아래서 춤을 추듯 뛰어노는 아이들. 꽃이 사람이고 사람이 꽃인 황홀한 세상에 사는 천사 같은 이들. 그날은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아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지향하는 고귀한 예술’이라고 목청껏 떠들었는데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수업을 듣는 초롱초롱한 학생들 머리 위로 꽃잎이 춤을 추듯 내리고 있었다. 남에게 베푼다는 것이 이렇게 큰 감동을 주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박완서의 소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를 펼쳤다. 정신적 가치를 상실한 채 물질만능주의에 오염되어 부끄러움을 잊고 살아가는 이기적인 이들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작품을 읽는 순간, 나는 지독한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나는 그동안 다른 사람에게 아무 사심 없이 정말 선의로 요구르트 한 병이라도 선물한 적이 있는지. 돌이켜 보니 예전에는 남에게 베푼 적이 그래도 몇 번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나만 편하면 된다는 자기중심적인 삶만을 살아온 듯하다.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살기는커녕 하나라도 더 얻기 위해 이기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으면서 이제는 제 자신에게조차 정직하지 못한 그런 속물이 되어 있었다. 딸도 독감이 들어 힘들어했다. 너무 아파하기에 아르바이트를 쉬라고 했다. 그런데 딸은 약속한 것이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된다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딸에게 정직해라, 나쁜 짓 하지 마라, 남을 괴롭히지 마라고 가르쳤던 내가 이제는 딸에게 정직함과 신의를 배워야 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그동안 나는 시간 없다고 신호를 무시하고 차를 몰았고, 내 잘못을 남 탓으로 돌렸고, 내게 도움이 되는 일인지를 따지면서 살아왔다. 그뿐만 아니라 선생으로서 학생들에게도 참 부끄러운 짓을 많이 해왔다. 잘못된 것을 보고 잘못되었다고 과감히 비판할 수 있는 지식인이 되어야 한다고 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 정작 나는 불의를 외면해 왔다. 언제부턴가 나는 내 자신까지 속이면서 삶의 진정한 감동을 잊고 살아온 것이다. ‘나는 바담 풍(風) 해도 너는 바람 풍(風) 해라’ 하면서 살아온 격이라 할까. 제자들에게는 젊었을 때 많이 여행 다니고 견문을 넓혀라 말하면서, 정작 대학생 딸에게는 밤에 늦지 말고 일찍 들어와라, 위험하니 여행 다니지 마라 따위의 잔소리를 하는 나는 영락없는 거짓말쟁이에다 이중인격자임에 틀림없다. 수신제가(修身齊家)라 했건만, 내 한 몸조차 제대로 닦지 못하면서 무엇을 다스린다는 말인가. 하물며 남에게 베푼다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는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이들을 보면서,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금수보다 못한 인간들이라 욕했건만, 나 또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그들과 같은 부류가 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이 난다. 벚꽃 날리는 봄날, 나에게 이런 부끄러움을 깨우쳐 준 소녀와 그 가족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드리고 싶다. 그들이야말로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나도 오늘의 이 부끄러운 감정을 반면교사(反面敎師) 삼아 딸에게, 제자들에게 제대로 된 아빠와 스승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은 될 수 없겠지만, 순결한 꽃 앞에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 ‘인간’ 허균의 기개와 번뇌

    허균(1569~1618) 하면 떠오르는 것은 소설 ‘홍길동전’이고, 더 나간다면 시문집 ‘성소부부고’에 수록된 ‘한정록’ 정도일 터. 늘 그의 작품이 먼저이지 정치와 사상에서 시대를 앞서간 혁명가이자 최고의 시인, 문장가, 파직과 재기용을 되풀이한 관리로서의 모습은 쉽사리 언급되지 않는다. 선조~광해군 시대를 사는 지식인으로서 가졌던 고민이나 ‘점잖은’ 사대부 사회에서 아연실색할 돌출행동 때문에 파직이 거듭되면서도 문학적 역량과 방대한 지식으로 재기용될 수밖에 없던 인물상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허균의 기개가 한껏 드러나는 듯한 제목을 달고 나온 신간 ‘나는 나의 법을 따르겠다’(허균 지음, 정길수 편역, 돌베개 펴냄)는 그의 면모를 두루 살필 수 있는 시집이자 정치철학서이며 문학평론이고 자서전이다. 허균에게는 명예와 이익을 향한 욕망을 벗고 은거하고픈 마음이 일생 내내 교차했다고 한다. 해서인지 ‘압록강을 건너며’, ‘진상강에서’, ‘수레 위에서’ 등 많은 시에서 ‘어디로 돌아갈까’ 하는 고민이 가득하다. ‘이대로 떠나 산방 주인 되면 어떨까/내 책 일만 권을 차례대로 꽂아 놓고’(‘설날’ 중에서)라는 소망을 가졌던 허균은 ‘어떡하면 만년에 내 마음 지킬까/옛사람의 책 읽고 또 읽으리라.’(‘읽고 또 읽으리라’ 중에서) 바랐지만 2년 후 역모죄를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허균은 신랄한 사상가이기도 했다. 천하에 두려워할 만한 존재는 오직 백성뿐이고, 그중에서도 호걸스러운 백성(豪民)을 가장 두려워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하늘이 임금을 세운 것은 백성을 잘살게 하기 위해서이지 한 사람이 윗자리에서 오만방자하게 눈을 부릅뜨고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끝없는 욕심을 채우게 하려는 것이 아니므로, 수령 노릇을 하는 자는 호민이 출현하지 않을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따끔한 충고를 했다. 유명한 ‘호민론’이다. 대단한 독서광인 허균은 평론도 명쾌하다. ‘양한연의’는 앞뒤가 잘 들어맞지 않고, ‘제위’는 졸렬하고, ‘수호전’은 속임수가 교묘하니 모두 교훈이 되기에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당대 문인들 사이에서 호평받은 ‘수호전’을 박하게 평가한 것은 오늘날 수호전을 재평가하는 목소리와 맞닿아 있어 흥미롭다. 이 책 한 권으로 당대의 천재든 혁명가든 반항아든, 허균을 두고 적확한 평가를 내리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어떤 삶의 결을 가졌는지, 어떤 사상과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는지를 알 수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9500원.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아인슈타인이 남긴 최고의 명언 10가지는?

    아인슈타인이 남긴 최고의 명언 10가지는?

    20세기가 낳은 천재 과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 그의 상대성이론 만큼 명언 또한 유명하다. 최근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와 디스커버리 채널은 아인슈타인이 살아생전 남긴 명언 중 가장 유명한 10가지를 꼽아 소개하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명언이 개인에 미치는 영감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한 번쯤 읽어봐도 좋을 듯하다. ⑴ 한 번도 실수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한 번도 새로운 것을 시도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⑵ 지식인은 문제를 해결하고 천재는 이를 예방한다. ⑶ 과학이 과학자에게 생계수단만 아니라면 경이로울텐데…. ⑷ 세상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소득세이다. ⑸ 신은 우주를 가지고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 ⑹ 제아무리 지속적이고 불변하는 것일 지라도 현실은 단순한 환상에 불과하다. ⑺ 난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법이 없다. 어차피 곧 닥치니까…. ⑻ 내 학습을 방해한 유일한 훼방꾼은 내가 받은 교육이다. ⑼ 우주와 인간의 어리석음 그 두가지가 무한하다. 그런데 우주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 ⑽ 3차 세계대전이 어떤 무기로 치러질지 모른다. 하지만 4차 세계대전은 아마 몽둥이와 돌로 싸우게 될 것이다. 사진=위키피디아 캡처 윤태희기자 th20022@seoul.co.kr
  • 마을 주민들 잡아먹은 거대 ‘식인 악어’ 결국…

    마을 주민들 잡아먹은 거대 ‘식인 악어’ 결국…

    강에 서식하며 여러명의 사람을 해쳐 스리랑카를 공포에 몰아넣은 ‘식인 상어’가 결국 잡혔다. 최근 스리랑카 현지언론은 “지난 15일(현지시간) 야생 동물국이 닐왈라 강에서 수명의 사람들을 잡아먹은 것으로 추정되는 악어를 포획했다.”고 밝혔다. 닐왈라 강 인근 주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은 이 악어는 빨래 등을 하기 위해 강을 찾은 사람들을 해친 것으로 알려졌으며 최근에도 18세 소녀와 한 주부를 강으로 끌고 들어가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급기야 마힌다 라자팍세 스리랑카 대통령까지 포획할 것을 지시할 정도로 파장이 커졌고 결국 전문가들이 나선 끝에 4m에 육박하는 거대 악어를 포획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강 인근 주민들의 공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현지 야생 동물국 관계자는 “이번에 포획한 악어가 최근 소녀를 해친 악어인지는 더 확인해 봐야 한다.” 면서 “아직 강에 식인 악어가 더 있을 수 있다. 주민들은 강에 갈 때 항상 주의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인터넷뉴스팀   
  • 갤럭시 노트 대항할 ‘아이패드 미니’ 출시?

    갤럭시 노트 대항할 ‘아이패드 미니’ 출시?

    아이폰과 아이패드로 전 세계 IT시장에 새로운 물결을 만든 애플사(社)가 휴대성을 강조한 ‘아이패드 미니’(iPad Mini)를 출시할 것으로 보인다는 예측이 나왔다. 미국 msnbc.com 등 해외언론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애플은 이르면 올 가을 삼성전자와 마이크로소프트 태블릿에 대항할 만한 ‘블록버스터급 기기’를 선보일 것으로 알려졌다. 애플의 ‘아이패드 미니’ 출시 소식을 처음 알린 곳은 중국 포털사이트 ‘넷이즈닷컴’(163.com)이며, 중국 내 애플의 일부 제조업체에서 흘러나온 소식인 것으로 추측된다. 넷이즈닷컴은 2012년 3분기에 아이패드 미니 600만대가 선 공급될 예정이며, 가격은 249~299달러(약 28만 4000~34만원) 선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제조는 중국 내 팍스콘과 타이완의 페가트론 등이 거론되고 있다. 아이패드 미니의 자세한 스펙은 아직 알려진 바 없다. 일부 해외 언론은 아이패드 미니가 7.8인치 크기의 디스플레이를 장착할 것이라고 보도했지만, 애플은 이 같은 루머에 여전히 입을 닫고 있다. 그러나 아이패드 시리즈가 경쟁사 제품에 비해 지나치게 크다는 지적이 잇따라 나온 바 있어 외형과 크기의 변화가 가장 클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애플이 태블릿PC 개발에 변형을 준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삼성 갤럭시 노트의 성공에 있다. 갤럭시 노트는 500만대 이상 판매되면서 전 세계 스마트기기 시장의 판도를 바꿨다. 여기에 아마존의 킨들 파이어까지 가세하면서 뉴 아이패드에 이은 새로운 아이패드 시리즈의 공개가 빨라질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예측이다. 다만 애플이 준비하고 있는 차세대 아이패드가 삼성의 갤럭시 탭 또는 아마존의 킨들 파이어 등과 비슷한 7인치 크기 이상의 태블릿인지, 혹은 5인치 크기의 갤럭시 노트 대항마인지에 대해서는 씨넷(Cnet) 등 IT언론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한편 롱텀에볼루션(LTE) 버전을 제외한 뉴 아이패드는 오는 20일부터 국내에서 정식으로 판매된다.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 단체장 직선 아닌 지방의회서 선임 소규모 지자체 ‘내각제’ 검토

    단체장 직선 아닌 지방의회서 선임 소규모 지자체 ‘내각제’ 검토

    정부가 소규모 기초자치단체를 대상으로 지방의회 의원들이 간선으로 단체장을 선발하는 ‘기관통합형’ 자치제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일종의 내각제 형식으로 이르면 다음 지방선거부터 도입될 수 있다. 지방자치가 도입된 지 20년이 넘었지만 현행 자치제도에 부작용이 많다는 지적과 국가 발전과 지역균형 발전을 위해 획일적인 지방자치를 다양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반영한 것이다. 검토안은 정부 자체안으로 자치구의회 74곳을 폐지하는 등의 지방행정체제개편추진위원회 개편안<서울신문 4월 16일 자 2면>과는 별개다. 정부는 16일 각 지자체의 규모·면적·생활여건 등 특성에 맞게 단체장과 의회의 권한에 차이를 두는 ‘지방자치 다양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정부는 각 지역 특성에 맞는 모델을 개발한 뒤 국회에서 관계법령 개정이 논의될 수 있도록 제안할 예정이다. 정부가 검토 중인 모델은 ▲지방의회에서 행정전문가를 선임해 인사·예산권을 가진 책임행정관을 지자체에 임명하는 방안 ▲입법권과 집행권을 동시에 가지는 5~9명으로 구성된 자치위원회를 구성하는 방안 ▲시장은 그대로 두되 권한 일부를 의회에 넘기는 방안 등등이다. 주민들은 해당 지역의 자치 형태를 투표 등을 통해 자율적으로 선택하거나, 현재 실시하고 있는 제도를 유지할 수도 있다. 기관통합형이란 244개 모든 지자체에 공통으로 적용되고 있는 지방자치 방식인 ‘기관대립형’과 반대되는 형태다. 의회에서 집행까지 담당해 ‘책임행정’을 실현한다는 것이 기관통합형 도입의 취지다. 현재 지방의회는 자치단체를 견제하고, 지역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 도입된 기관대립형 자치제도의 장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갈등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는 인구가 108만 8489명에 이르는 경기 수원시나 인구 1만 742명인 경북 울릉군이 똑같은 형태의 자치제를 채택하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지역 실정을 고려하지 않은 일률적인 형태의 자치제도가 자치 발전을 막는다는 지적이 많다.”면서 “새 제도 전면 시행에 앞서 시범지역을 선정, 지역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되면 본격적으로 도입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인호 조선대 행정학과 교수는 “지방분권을 정착시킨 국가에서는 하나같이 지방자치제 형태가 다양하다.”면서 “우리나라 지자체는 지역의 특수 여건이나 행정수요·재정자립도·자치역량을 고려하지 않은 중앙집권체제의 행정편의적 발상으로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임도빈 서울대 행정학과 교수도 “정부의 지자체 개편안 의도는 의미 있다.”면서도 “무리한 사업 추진으로 위기를 맞은 경기 용인시를 보듯 지방 토착세력들이 권력을 잡아 야합하는 등의 현행 지방자치 병폐를 막을 수 있는 중앙정부의 통제 장치도 뒷받침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양진기자 ky0295@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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