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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남외대, 지역사회와 연계한 프로그램 활발

    영남외대, 지역사회와 연계한 프로그램 활발

    영남외국어대학(총장 정영아)이 지역사회에서 최고의 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다채로운 지역연계 프로그램을 활발하게 운영하고 있다. 우선 대학의 우수한 교수진과 최첨단 교육시설을 충분히 활용해 지역 초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양질의 무료 생활영어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이는 재학생들의 지식 및 재능기부로 지역사회 학생들에게 양질의 교육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또한 95년부터 대구·경북지역 최초로 ‘사회봉사’라는 교양과목을 교양필수로 지정, 재학생이면 반드시 고아원, 중증장애요양원, 경로당, 독거노인, 관공서 등으로 봉사활동 및 국토청결캠페인 등의 실습을 이수해야만 학점을 취득할 수 있도록 해 깨끗하고 아름다운 지역만들기에 앞장서는 대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영남외대 관계자는 “각종 지역연계 프로그램을 운영, 대학캠퍼스내에서만 머무르게 하지않고 지역사회와 나눔으로써 살아있는 지식인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며 “앞으로도 교육과 지역봉사 등 다방면에서 내실있는 교류를 지속적으로 해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영남외국어대는 진리, 정의, 봉사의 학훈 아래 21세기 지식정보화사회에 적합한 맞춤형 인재를 양성하는데 교육의 목적을 두고 있다. 국내최초로 사이버강의를 실시해 학습분야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으며 지속적인 교육환경 개선과 외국대학과의 교류를 통해 글로벌 영남외대로서의 위상을 높여가고 있다. 개설학과로는 영어과, 일어과, 비즈니스러시아어과, 보육복지상담과, 노인복지재활과, 사회복지과, 유아교육과, 부동산재테크과, 보건복지행정과, 신재생에너지과, 간호과, 치위생과, 작업치료과, 태권도과 등이 있으며, 신입생 모두에게 다양한 장학혜택을 지원하고 스쿨버스와 최신복지시설의 기숙사도 무료로 제공한다. 인터넷뉴스팀 nownews@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2) ‘단성호적’으로 본 노비의 삶

    [선택! 역사를 갈랐다] (22) ‘단성호적’으로 본 노비의 삶

    단성현(현재 경남 산청군)에 사노(私奴) 형제가 살았다. 그들의 아버지는 평민, 어머니는 어느 양반집 종이었다. 17~18세기의 ‘단성호적’에서 우리는 그들 일가족을 만난다. 역사의 주름진 그늘에 숨겨진 ‘노비 정체성’을 이야기하자.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인구의 30~40%가 노비였다. 양반은 고작 10~20%였다. 그때 우리가 평민 또는 노비였을 가능성은 80% 이상이다. 노비 일가의 역사는 곧 우리들의 과거였다. ●1678~1789년 13개 호적 추적 노비의 역사를 쓰려고 1678년부터 1789년까지 작성된 13개의 호적을 뒤졌다. 흥룡 형제와 그들의 일가·친척에 관한 기록을 다 모았다. 6세대 167명을 알아냈다. 그들과 결혼했거나 그들의 상전으로 기록된 또 다른 600여명도 조사하였다. 모두 770명가량이었다. 17~18세기 흥종 일가의 삶에 관한 이야기는 그렇게 탄생하였다. 호적이란 본래 무미건조하고 단편적인 기록이다. 이름, 나이, 가족관계 등만 사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런 정보들을 이리저리 모아놓으면 하나의 서사가 일어난다. 아무런 의미조차 없어 보이는 사실의 단편들이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로 재탄생한다. 여기에 미시사 연구의 즐거움이 있다. ●문태리의 종들 1678년 흥룡(당년 53세)과 흥종(당년 51세) 형제는 경남 산청군 문태리에 거주했다. 그들은 기혼이었고 슬하에 자녀를 두었다. 호적에 따르면 그곳에는 마흔 집이 살았다고 했다. 단성에서는 중간 크기의 마을이었다. 문태리는 이를테면 행정리였다. 실지로는 네댓 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었다. 지금도 그곳에 가면 골안땀, 동쪽토란땀, 비진동, 진태, 주막거리 등이 있다. 단성현은 토지가 비옥했다. 산수도 아름다웠다. 특히 적벽과 신안강은 절경이라 양반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인구와 농지면적으로 보면 작은 고을이었으나, 명문 양반이 많아서 문과 및 생원진사 합격자 수가 진주 다음이라는 호평이 있었다. 경남 서부지역에서는 선비 많기로 소문났던 고을이었다. 문태리 서편으로는 큰 내(川)가 흘렀다. 남강 상류였다. 강줄기를 따라 양쪽으로 문전옥답이 즐비하였다. 마을 뒤편으로는 야트막한 산자락이 북동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내렸다. 밭은 주로 산기슭에 흩어져 있었다. 흥룡네는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문태리에는 그들과 처지가 같은 노비가 아홉 집이었다. 호적에는 빠진 기록이 있기 마련이었다. 실제 숫자는 그보다 많았을 것이다. 남의 종노릇을 하였던 그네들은 주인집을 나와서 독립된 가호를 구성하였다. 양반들이 옹기종기 모인 진태 마을에는 주인에게 얹혀사는 노비들도 많았다. 1678년 문태리의 노비 인구는 46명으로 조사되었다. 전체 인구가 139명이었으니, 대략 3분의1이 노비였다. 평민은 스물한 집으로 노비보다는 많았다. 하지만 문태리에서 평민과 노비를 엄격하게 나누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그들은 마을에 뒤섞여 살았고, 들판에서 함께 일하였다. 경제적으로도 처지가 엇비슷했던 데다, 군역(軍役)이나 부역 같은 부담을 똑같이 담당하였다. 노비가 군역을 졌다는 말이 신기할지도 모르겠다. 17세기 말에는 흥룡 형제처럼 주인집에서 멀리 사는 외거노비에게 병역의무가 부과되었다. 18세기 중엽부터는 주인이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노비에게 군역을 매기는 것이 보통이었다. 주인집이 가까울수록 노비의 신원이 확실하다고 믿었다. 노비에게 군역을 요구하려면 관청에서는 주인의 양해를 구했다. 물론 형식에 불과한 일이기는 하였다. 여차하면 노비와 평민이 서로 결혼하였다. 법으로는 금지된 일이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난한 평민은 노비와 별다를 바 없었다. 이야기의 주인공 흥룡 형제의 경우만 해도 평민 아버지(양대생)가 맹씨댁 여종(덕개)과 결혼하지 않았던가. ●진태리의 양반들 양반들은 ‘진태’ 마을에 몰려 살았다. 박씨들이 주인이었다. 그들은 단성현의 최고 양반들끼리 모여 작성한 ‘향안’에 이름을 올렸다. 그들과의 인연으로 잠시 그곳에 와서 사는 타성 양반들도 있었다. 18세기 말까지도 이런 사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양반의 서자는 평민들과 마찬가지로 군역을 졌다는 사실이다. 17세기 후반까지는 그러하였다. 하지만 18세기부터는 서자들도 그 의무에서 벗어났다. 평민이나 노비와는 달리 그들은 점차 양반 대접을 받았다. 17세기 말 문태리에는 서자까지 포함해 양반이 열 집이었다. 주민의 4분의1이 넓은 의미로 양반이었다. 거기서 만약 서자를 제외한다면 양반은 10%를 조금 넘었다. 한데 양반들 가운데서 재산이 많은 집은 거의 없었다. 벼슬을 한 양반도 없었고, 사역 중인 노비의 숫자도 약간명에 불과했다. 시골양반의 가세는 초라하였다. ●흥종 후손, 종살이로 살거나 도망가거나 1670년대 말 흥종의 어머니 덕개가 사망하였다. 아버지는 그에 앞서 일찍 세상을 떴다. 흥종의 아내 순대(당년 45세)는 건너편 청현마을의 최진사댁(최경) 종이었다. 장인과 장모도 그 집안 노비였다. 관습대로 흥종의 두 딸, 숙굴이와 화구리도 그 집안 종이었다. 화구리는 이미 시집을 갔고, 열 살밖에 안 된 숙굴이도 주인집으로 옮아갔다. 숙굴이는 최진사의 며느리, 과부 조씨의 시중을 들었다. 숙굴이는 이를테면 사역비였다. 그보다 2~3년 전 과부 조씨는 숙굴이의 이모 옥비를 시아버지 최진사에게 바치고 그 대신 순대와 숙굴이 모녀를 받았다. 청현의 최씨들도 단성에서는 이름난 양반이었다. 진사 최경은 1639년(인조17) 진사시험에 합격한 수재로 향안에 이름이 올랐다. 그 할아버지 최기종도 생원시에 합격해 가문의 명성을 떨쳤다. 세월이 한참 지난 18세기 말까지도 흥종의 처가 쪽 사람들은 최씨댁에서 종살이를 하였다. 특히 흥종의 처제 매월대의 자손들은 대대로 그러하였다. 매월대의 손녀 팔례는 진주로 이사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예외였다. 최씨댁은 형편이 곤란해지자 노비를 팔아치우기도 하였다. 1730년쯤 매월대의 손자 삼학의 주인은 한 마을에 사는 이만복이라는 양반으로 바뀌었다. 종살이가 싫어 달아나는 이들도 생겨났다. 1741년 매월대의 손녀 삼랑은 주인집(최덕령)을 떠나 몰래 하동으로 달아났다. 21년이 지난 1762년까지도 삼랑은 돌아오지 않았다. 일찍이 1719년 아내의 고향 남원(전북)으로 도망간 매월대의 아들 광이도 끝내 붙잡혀 오지 않았다. 18세기에는 해마다 도망 노비가 증가하였다. 주인들이 가난해지자 그들은 노비를 통제할 힘이 약해졌다. 종들은 연고지로 도망을 쳤고, 주인들은 그 사실을 알았지만 붙들어 올 힘이 없었다. 종을 붙잡아 오려면(추노) 해당지역 관청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미약한 양반이 노비를 붙잡으려 나타나면 고을의 수령과 아전들이 심하게 방해하였다. 그들은 자기 고을의 세원(稅源)을 지키려고 애썼다. 이래저래 도망 노비의 수가 자꾸 늘어났다. 국가적으로나 도망친 노비 개인에게나 이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노비나 도망을 치지는 못했다. 흥종의 자손은 18세기 말까지도 여전히 종살이에 분주하였다. ●흥룡 후손, 18c후반 평지식인 부상 흥종보다 두 살 많은 형 흥룡의 자손들은 처지가 완전히 달랐다. 그들 중에는 누구도 더 이상 종살이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서히 문태리의 주인으로 성장하였다. 대대로 문태리에 모여 살며 마을 일까지도 좌우하였다. 두 형제의 자손이 고향에 눌러 살았지만 그들의 삶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차이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흥종의 아내 순대는 청현마을 최씨댁 종이었다. 그에 비해 흥룡의 아내는 양인, 즉 평민이었다. 이것이 결정적 차이였다. 따지고 보면 흥룡의 자손들도 서울에 사는 맹씨댁 종이었다. 하지만 서울은 한창 멀었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양인으로 행세하였다. 18세기가 되자 흥룡의 자손 중에는 수공업자가 나왔다. 흥룡의 증손 양인필이 ‘옹장’(옹기장) 노릇을 하더니, 출가한 증손 양만득도 ‘인출장’(인쇄기술자)이 되었다. 그 뒤로 이 집안에서는 수공업자가 부쩍 많아졌다. 18세기 후반 숫돌을 만드는 ‘여석장’은 그들의 가업이었다. 그때 문태리에서는 숫돌 만드는 일이 유행했는데, 기술자의 대부분은 흥룡의 후손이었다. 돈을 제법 번 사람들도 나왔다. 그래서 돈 있는 흥룡의 현손자와 5대손들은 서원과 향교에 출입하며 원생 또는 교생 노릇을 하였다. 그들은 군역을 면제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양반대접을 받을 정도로 출세하지는 못했다. 어쨌든 그들은 실력을 갖춘 평민지식인으로 부상하였다. ●비정규직은 ‘현대판 노비’ 진태리 사람들은 문태리 사람들과 통혼하지 않아 현지 방문을 통해 나는 1960년대까지도 문태리 뒷산에서 숫돌이 생산된 점을 확인하였다. 수백년 동안 주민들은 부업으로 숫돌을 만들었는데, 명품으로 거래되었다. 숫돌 덕분에 문태리의 경제형편은 이웃마을들보다 한결 좋아졌다. 이것은 진태 마을 주민들과의 대화에서도 거듭 확인되었다. 현지에서 나는 한 가지 놀라운 증언을 들었다. 1960년대까지도 진태 마을사람들은 문태리 사람들에게 반말을 썼다. 숫돌이나 만드는 천한 사람들이라 여겨서 그랬단다. 토박이 양반 박씨들은 아직도 문태리 사람들과 통혼하지 않는다. 20세기까지도 흥룡의 자손들은 단성의 양반사회로 진입하지 못했다. 우리 아이들이 배우는 역사교과서에서는 조선후기에 양반의 수가 부쩍 늘었다고 가르친다. 19세기 말에는 양반이 8~9할이나 되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흥룡 일가의 역사는 그런 변화가 하나의 희망사항에 불과하였음을 증명한다. 지금도 여러 가지 형태로 신분의 장벽이 존재한다. 학벌도, 재산도, 성별도, 나이도 차이가 아닌 차별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래서 현대판 노비인 비정규직 문제도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 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 ‘자기 의견’ 없는 일본인 눈치보는 문화 때문이다

    변경론(邊境論·Marginal theory)이란 무엇일까. 사상과 관련된다. 이곳도 아니고 저곳도 아닌 경계선에서 눈치를 살피는 사상적 갈등을 말한다. 이웃 나라 일본을 보자. 사실 우리는 일본인의 진심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속내를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진심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말을 잘 하지 않는다. 일본 정치인들은 미국 대통령처럼 철학과 비전을 드러내 놓고 연설을 하지도 않는다. 이를 두고 사상가들은 변두리적인 성격(변경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 앞장서서 근대화를 이룩했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패망했지만 스스로 이룩한 근대화를 발판으로 급속하게 경제성장을 함으로써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 이런 과정에서 일본문화론이 양산됐다. 신간 ‘일본 변경론’(우치다 타츠루 지음, 김경원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은 일본·일본인을 일본 지식인의 시선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일본을 규정짓는 핵심적 특성을 ‘변경성’에 두고 있다. 원래 일본인은 ‘변두리인’의 성격을 타고났으며 이를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지적한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일본 고베여학원 대학 명예교수인 저자는 모국 독자에게는 다소 꺼림칙하게 들릴 수도 있는 ‘불편한 진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파헤친다.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군림했던 일본을 중심국이 아닌 ‘주변국’으로 내세운 근거로 섬나라 일본이 근대화를 이룩하는 과정에서 종교, 언어, 문화, 정치 이데올로기 등 일본 사회 곳곳에 뿌리 깊게 박혀 있음을 밝히면서 일본은 전쟁을 일으킬 때도 주체적 판단을 내리기보다 주변 눈치를 보며 ‘그럴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결정했다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이 책은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이어령의 ‘축소지향의 일본인’, 롤랑 바르트의 ‘기호의 제국’처럼 일본을 이해하는 커다란 틀거리를 제공해 준다. 일본인 저자가 스스로의 역사적 사고와 행동의 패턴을 변경성을 통해 비판적으로 분석함으로써 훨씬 설득력 있는 일본론과 일본문화론을 보여 준다는 데 흥미롭다. 아울러 변경성이 일본 국가 정체성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한다.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얕보이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이유는 군사력이 약하거나 돈이 없거나 영어를 못 해서가 아닙니다. 자기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존재가 됐고 이제부터 어떻게 하고 싶은가를 ‘자신의 언어’로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국가와 국민에 대해 진중하고 두툼하고 깊은 맛이 나는 ‘자기 의견’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본문 138쪽) 1만 3500원. 김문 선임기자 km@seoul.co.kr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12)공주 고마나루 명승길

    [길을 품은 우리 동네] (12)공주 고마나루 명승길

    비단물결은 깊은 산림을 지나 백제의 옛 도시 공주로 휘감아 돌아간다. 공산성의 깃발, 고마나루의 황포돛은 옛 정취를 자아내고 백제의 옛 숨결을 전해주듯 비단 물결에 나부낀다. ‘잊혀진 왕국’ 백제의 옛 도읍인 공주에 역사의 향취를 느끼며 도보여행을 즐길 수 있는 ‘고마나루 명승길’이 조성됐다. 백제 웅진시대의 숨결과 근현대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어 의미를 더한다. 고마나루길은 공산성~무령왕릉~공주박물관~공주보~연미산자연미술공원~금강교를 돌아보는 코스가 14㎞에 달한다. 단순히 보고 지나칠 수 없는 명승지가 많아 완주하려면 4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공산성~무령왕릉~공주박물관~고마나루 등 웅진시대와 황새바위~공주보~연미산자연미술공원~금강교를 답사하는 근현대사 코스 설계가 가능하다. 공산성과 고마나루, 무령왕릉은 공주시민이 선정한 ‘공주 10경’에도 포함됐다. ●“공산성은 천혜의 요새” 접근성이 좋은 공산성이 출발점이다. 웅진시대 방어거점이었던 공산성은 야산의 계곡을 둘러싼 포곡형(包谷型) 산성으로 길이가 2.66㎞에 달한다. 강 건너편에서 보면 성곽이 능선을 따라 오르내리는 모습이다.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 석성으로 개축했다. 성벽은 높이 2.5m, 폭 3m 정도로 보수됐고 성벽을 따라 노란색 바탕에 봉황 등이 그려진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공산성은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지로 통일신라시대 김헌창의 난이 일어났고, 조선시대 이괄의 난 당시 인조가 피란한 역사를 품고 있다. 금서루·공북루·영동루·진남루 등 동서남북 4개 누를 비롯한 다양한 유적이 복원됐다. 금서루에 오르면 유유히 흐르는 금강과 공주의 구도심을 한번에 조망할 수 있다. 동성왕의 연회 장소였던 임류각, 조선시대 임금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머물던 쌍수정, 우물인 연지, 영은사 등을 통해 역사 속에만 있는 ‘웅진’을 만나게 된다. 4~10월(7, 8월은 제외) 매주 토·일요일 오전 11시부터 5시까지 정시마다 수문장 교대식이 열린다. 오인숙 문화관광해설사는 “공산성은 금강과 계룡산, 차령산맥을 품고 있는 천혜의 요새라고 할 수 있다.”면서 “현재 입구는 서문이지만 과거에는 호남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남문을 거쳐 북문에서 배를 타고 한양으로 올라갔다.”고 말했다. 남문 앞에는 박찬호 선수가 운동을 했던 느티나무가 있어 관심을 끈다. 무령왕릉 가는 길에 황새바위에 들렀다. 황새가 많이 살았다는 설과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목에 씌우는 칼인 ‘항쇄’를 차고 바위 앞에 끌려가 처형돼 황쇄바위로 불렸다는 설이 함께 존재한다. 1801년 2월 28일 김대건 신부의 외조부로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이 서울에서 충청 감영(공주)으로 환송돼 황새바위에서 참수된 후 순교지가 됐다. 사형이 집행될 때면 백성들은 공산성에 올라 그 광경을 구경했다고 한다. 순교자 337위와 순교탑, 명상의 길 등이 조성돼 있으며 천주교 신자들의 성지순례지가 되고 있다. 송산리고분군의 7호분으로 불리는 ‘무령왕릉’은 묘지석과 최초의 토지거래서인 매지권이 발견돼 피장자를 확인할 수 있는 삼국시대 유일의 왕릉이다. 무덤에서는 다량의 유물이 발굴됐는데 12종목 17건이 국보로 지정될 정도로 절대연대가 확인된 유물이라는 점에서 백제사 연구의 보고(寶庫)로 평가받는다. 중국의 무덤 형식인 벽돌무덤으로 중국제 도자기와 일본산 금송을 사용한 관재 등을 통해 백제사회의 국제성을 엿볼 수 있다. 지난 1997년 영구 비공개 결정이 내려진 후 고분의 내부를 직접 볼 수는 없고, 지난 4월 리모델링한 송산리고분재현관에서 아쉬움을 달랠 수 밖에 없다. ●현대의 공주 속으로 지난해 10월 공주보가 완공됐다. 총연장 280m의 보는 무령왕을 상징하는 봉황을 모티브로 비단수(금강)를 지키는 모습을 상징화했다. 수변공원과 32.4㎞에 달하는 자전거 도로가 조성돼 수려함을 더한다. 연미산은 연미터널이 건설되기 전까지 공주와 청양을 연결하던 연미치고개로 유명하다. 연미산자연미술공원은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공원 입구에서 이어진 등산로를 따라 나무, 흙 등 자연 재료를 주로 이용해 만든 작품들이 숲과 어우러져 이색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정안천생태공원은 공무원과 시민들의 참여로 조성된 상징적인 공원이다. 33만㎡에 연꽃 연못(9만㎡)이 만들어졌고 10만여 송이의 튤립, 100만 포기의 꽃잔디 등이 식재돼 있다. 남녀노소 누구나 산책을 즐길 수 있도록 자전거 산책로와 메타세쿼이아길, 앵두나무길 등 테마길이 조성돼 있다. 1만 5000㎡의 자연학습장은 장미동산과 물레방아 연못, 모래놀이터 등을 갖춰 유치원생들의 생태학습 및 체험 장소로 활용된다. 공주시 산성동과 신관동을 연결하는 다리인 금강교는 1933년 만들어졌다. 1986년 공주대교가 건설되기 전까지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연결하던 유일한 ‘통행길’이었다. 6·25 전쟁 당시 교량 대부분이 파괴돼 복구가 이뤄졌다. 현재는 구시가지로 진입하는 차량만 이용 가능한 일방통행로로 공산성과 연계, 명소로 부상했다. 택시기사 김정권씨는 “전에는 다리가 이것밖에 없어 버스 2대가 묘기를 부리듯 아슬아슬하게 지나다녔다.”면서 “추억이 깃든 장소이다 보니 운전할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금강산도 식후경 여행의 즐거움 중에는 맛난 음식을 빼놓을 수 없다. 공산성 서문 맞은편에는 대표적 음식거리인 ‘백미고을’이 있다. 공주의 대표음식을 만날 수 있는데 밤의 고장답게 밤국수와 밤피자 등을 내놓는 음식점은 물론 쌈밥, 60년 전통의 따로 국밥집, 칼국수집 등 다양하다. 가까운 거리에 ‘백미백선’(백가지 맛과 백가지 볼거리가 있는)을 지향하는 산성시장에서 장터 분위기도 느낄 수 있다. 고마나루 인근, 공주보에서 시내방향으로 한옥마을이 조성됐다. 한옥 10여채가 모여 있는 이곳은 지자체가 관광객 유치를 위해 조성한 숙박촌이다. 공주를 둘러본 뒤 부여에서 숙박, 단순히 지나치는 지역에서 머무는 도시로 변화하는 첫 시도로 전통 한옥의 구들장 체험을 할 수 있다. 숙박객이 직접 나무를 때보고, 공주 밤과 감자 등을 구워 먹을 수 있어 겨울철에 인기가 높다. 공주 박승기기자 skpark@seoul.co.kr ●13회는 대구 ‘칠성로’와 광주 ‘육판서길’을 소개합니다.
  • 우리밀 학교·군 급식 공급 늘린다

    최근 국제 곡물가격 급등으로 애그플레이션(곡물가 급등에 따른 인플레이션) 우려가 나오고 있는 가운데 정부가 국산 밀 수매자금을 대폭 늘리고 학교와 군 급식에 우리 밀 공급을 확대하기로 했다. 제2 주식인 밀의 자급 기반을 확보해 국제 곡물가격 파동에 대비하겠다는 것이다. 농림수산식품부는 29일 올해 우리 밀 수매자금을 기존보다 108억원 증액된 308억원으로 늘렸다고 밝혔다. 올해 우리 밀 예상 생산량 4만 2000t을 전액 수매할 수 있는 규모다. 농식품부는 지방자치단체 및 일선 교육청과 협의해 2015년까지 최소 100개 학교 급식에 우리 밀 제품을 공급하는 등 수요처 확보에 나선다. 현재는 경기도 내 10개 학교만이 시범적으로 우리 밀 제품을 공급받고 있다. 수입밀 제품이 사용되는 군인 급식도 우리 밀로 대체할 계획이다. 연간 군인 급식에 사용되는 밀가루 6543t을 우리 밀로 대체하면 국내 생산농가는 82억원의 소득증대 효과를 누리며, 75억원의 수입 대금이 절감될 것으로 분석된다. 농식품부는 군인 급식의 우리 밀 대체에 50억원이 필요할 것으로 보고 내년도 신규예산을 기획재정부와 협의 중이다. 우리 밀을 이용한 술 제조도 활성화된다. 주정용(酒精用)으로 사용되는 보리를 일정 부분 우리 밀로 대체하는 등 내년에 총 2만 8000t의 우리 밀이 술 제조에 쓰인다. 주류협회는 주정용 우리 밀을 ㎏당 900원에 수매하기로 농식품부와 합의했다. 농식품부가 밀 자급기반 확대에 나선 것은 최근 국제 곡물가격 동향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미국 시카고상품거래소(CBOT)에서 밀은 지난 26일 t당 325달러에 거래를 마쳐 6월 초순에 비해 40% 이상 급등했다. 대두는 t당 608달러로 애그플레이션이 한창인 2008년보다 높게 형성됐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국민 1인당 연간 31㎏을 소비하는 밀이 쌀에 이은 제2의 주식인 만큼 자급기반 확보가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 임주형기자 hermes@seoul.co.kr
  •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 ‘청개구리 성공신화’ 화제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 ‘청개구리 성공신화’ 화제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56)이 최근 펴낸 책 ‘청개구리 성공신화’가 화제다. 한국 경제의 성공비결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이다. 저마다 ‘한강의 기적’을 꿈꾸는 개발도상국들이 ‘한국 경제 따라하기’를 위한 좋은 교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청개구리라는 제목이 기발하고 도전적이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거꾸로 좇아 성공했다고 해서 붙였다고 한다. 책은 그 흔한 사진 한장 없이 글만 빼곡하다. 경제 관료와 세계은행 이사로 있으면서 배우고 터득한 경험이 그대로 응집돼 있다. 복잡한 걸 단순화하는 특유의 논리와 ‘확신범’에 가까운 강한 소신도 돋보인다. 우리의 소중한 경제개발 경험을 개도국한테 전수하는 ‘개발경제학의 한류’ 바람을 일으키자는 게 이 책의 결론이다. 저자는 한국 경제 발전은 블루오션을 찾기 위한 치열한 지적 고뇌, 성공의 희망사다리를 오르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의 결과라고 진단한다. 경제 발전 성공에는 ▲유능하고 안정적이며 비전있는 리더십 ▲잘 짜여진 계획 ▲유능한 정부 관료집단 ▲계획 실천에 필요한 자금 등 네가지 요소가 잘 갖춰져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경제 치적에 관한 한, 박정희 대통령은 이론의 여지없이 오늘을 설계하고 기반을 다진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저자가 한국의 경제발전 과정을 기적 이전에 하나의 수수께끼라고 규정한 발상도 흥미롭다. 한국은 서구의 지식인들이 주장하고 국제기구가 앞장서 설파한 경제발전 공식을 그대로 구사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길을 선택한 게 주효했다고 분석한다. 수입 대체전략 대신 수출 드라이브 전략을, ‘일시적 전면개방과 규제철폐’를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대신 ‘점진적인 개방과 규제의 단계적 완화’를 선택한 것 등이 성공의 비결이라는 것이다. 고시제도, 높은 교육열, 선비정신 등도 성공의 원동력이 됐다고 말한다. 경제성장 과정에서 재벌은 경제발전 초기에 불균형 성장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입장을 저자는 견지한다. 재벌을 앞세워 선택과 집중을 하지 않았다면 압축성장이 어려웠을 것이란 주장이다. 재벌의 도덕성 문제와 존립 그 자체는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최근 정치권이 열을 올리는 ‘경제 민주화’는 대선을 앞둔 표퓰리즘(대기업 때리기)의 캐치프레이즈에 불과하다고 반박한다. 한국은 자신의 성공에 안주하고 자신의 성공스토리를 자랑하는 데서 벗어나 국제사회에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주문한다. 한국형 원조 모델을 개발하고 통합원조 전담부처를 적극적으로 신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 전 장관은 행시 22회로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과장·국제금융국장, 세계은행 이사, 기획재정부 1차관, 필리핀 대사, 대통령 경제수석 등을 지낸 뒤 최근까지 동국대 석좌교수로 재직하다 미국 헤리티지 재단으로 1년간 연구를 위해 떠났다. 주병철기자 bcjoo@seoul.co.kr   
  • [저자와 차 한 잔] 진보의 재구성 모색 ‘정치의 이동’ 펴낸 장은주

    [저자와 차 한 잔] 진보의 재구성 모색 ‘정치의 이동’ 펴낸 장은주

    참 거북살스럽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 영전에 바친다’는 헌사도 부담스럽기만 하다. 철학이 ‘집 나갔다’는 말을 너무 쉽게 듣는 여의도 정치판에 전해져야 마땅한 쓴소리인데 도시 귀 기울여 듣는 이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10년 만에 집권한 보수 정권은 역시나 권력형 비리로 비칠거리고, 권력을 내준 진보 진영은 통합진보당 사태에서 보듯 지리멸렬하기만 하다. 그래서 진보 진영과 자유주의 세력 사이에 놓인 ‘이념적 한강’에 다리가 되고 싶었다는 장은주(48) 영산대 법대 교수가 낸 ‘정치의 이동’(상상너머)을 이 무더위에 펼쳐 놓았다. 지난 18일 서울신문 회의실에서 만난 장 교수에게 집필 동기부터 물었다. 그는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뒤 독일 프랑크푸르트 요한볼프강괴테 대학에서 ‘하버마스와 그람시의 시민사회론 비교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대학이 있는 경남 양산과 서울의 참여사회연구소를 오가며 ‘지금, 여기’에 몰입하고 있다. 장 교수는 “우리 정치의 발전 방향에 대한 철학적 모색을 정리해 보고 싶은 생각을 평소 갖고 있었다. 지난해 여름방학에 A4 용지 150쪽 분량으로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 초고를 썼다. 아내인 하주영 박사와 대학 친구이자 출판기획가인 이건범이 읽어 보더니 ‘꼭 필요한 얘기’라며 더 많은 사람이 읽었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시각장애 1급인 이씨가 이런저런 보완할 점들을 지적하고, 초고를 들춰본 이양수 한양대 교수가 A4 30쪽 분량의 의견을 보내와 1년에 걸쳐 책으로 엮었다. 그가 한창 집필에 속도를 내던 때 “모두 책을 산 것처럼 보이지만 누구도 끝까지 읽어 보지 않은 것 같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 열풍이 일었다. 그의 초고 제목은 ‘왜 어떤 정의인가’였다. 그러던 차에 일보 전진을 희망하던 이들에게 거듭된 절망을 선사한 4·11 총선 패배와 진보당 사태를 맞게 됐고, 도리어 책 속의 발언에 무게가 실리게 됐다. 무상급식으로 인한 복지 논쟁이나 용산 참사, 한진중공업 사태를 비롯한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도 장 교수의 논지를 풀어 가는 실마리가 됐다. 그는 “진보·자유 진영이 왜 이렇게 망가지게 됐는가 하면 근본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정치적 지식인’들이 진보 정치의 본성을 이해하는 낡고 잘못된 정치적 사유 습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그의 주장은 단순할지 모른다. 1980년대 불의의 체제를 분노로 견뎌 왔던 진보주의자들이 지독한 성찰을 통해 ‘보수적 진보’의 인식틀을 과감히 깨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시각에서 ‘분배 패러다임’이라 이름 붙인 ‘엄청난 괴물’을 넘어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재화의 분배에만 초점을 맞추는 정의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존중하는 정의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는 것. 그가 진정 바라는 정치의 방향은? “시민들이 민주주의의 주체가 되고 그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스스로 생각하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공론장이라던가 토론, 대화를 통해 바람직하고 합리적인 정책을 찾아내는, 시민 중심의 민주주의로 나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지식인 중심의 정치보다 시민 주체성, 아래로부터의 자발적 정치 참여 과정이 올바른 정치 개혁의 방향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게 ‘민주적 공화주의’라고 했다. 독자들이 어떻게 읽어 줬으면 할까? 장 교수는 “대학 교육을 받고 사회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쓰려고 노력했다.”며 “정답을 제시하려고 하는 책이 아니라 함께 모색하며 현실을 돌아보는 책”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 누구보다 정치적 지식인들이 읽어 줬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똑똑하고 정의롭다고 자부하는 이들이야말로 이 책의 문제의식에 제대로 부딪쳐 볼 일이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시시콜콜 인적사항도 고객 신용평가 반영

    시시콜콜 인적사항도 고객 신용평가 반영

    24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의 A은행 지점을 찾았다. 직장인 신용대출을 받고 싶다고 했더니 창구 직원은 ‘대출(상담) 신청서’ 한 장을 내밀었다. 대출받는 것과 관계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상세한 인적정보를 요구하는 서류였다. 결혼 여부, 동거가족, 맞벌이 여부, 심지어 결혼기념일까지 적게 돼 있었다. “이런 것까지 적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정보를 빠뜨리면 대출 심사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급한 돈이 필요한 소비자는 은행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직장 자주 옮기면 신용 위험 커 불이익” 최근 감사원은 신한은행이 고객의 학력을 신용평가에 반영해 대출금리를 차별 적용했다고 지적했다. 은행들이 돈을 빌려줄 때 학력까지 본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다. 은행들은 대출을 받으러 온 고객의 시시콜콜한 인적사항을 수집해 신용평가 점수에 반영하고 있다. 직장인 신용대출은 말 그대로 소득과 금융거래이력 등을 바탕으로 돈을 빌리는 것인데도, 은행은 신청자가 얼마나 넓은 집에 사는지, 배우자의 소득은 얼마인지, 고급차를 타는지 등의 정보를 대출 승인 및 금리 산정과 연결시키고 있다. 이날 국민·우리·신한·농협 등 4개 은행의 대출신청서를 받아 살펴보니 결혼 여부를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본 은행은 한 곳이었다. 하지만 4곳 모두 배우자의 소득, 배우자의 주택소유 여부를 물었다. 사실상 결혼 여부를 신용평가에 반영한다는 뜻이다. 한 은행 관계자는 “소득이 많은 배우자가 있다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상환능력이 좋다고 평가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들 은행은 아파트, 주택, 오피스텔, 기숙사 등 주거형태를 표시하게 한 뒤 면적과 거주기간 정보도 요구했다. 자동차 소유정보를 물어본 은행은 3곳으로 보유 차종의 배기량을 적도록 하고, 이 가운데 1곳은 몇년 식인지도 물었다. 전 직장 정보는 필수기재 사항으로 분류돼 있었다. 전 직장의 이름과 최종직위, 재직기간 등을 요구했다. 은행 관계자는 “직장을 자주 옮기는 사람은 신용위험이 크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대출 심사에서 불이익을 받는다.”고 말했다. ●“평가체계 불투명해 대출거부 설명 못해” 은행들은 대출신청서상의 개인정보가 모두 신용평가에 반영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이는 참고용일 뿐이고 금융거래 실적과 외부 신용평가기관의 신용등급 등을 주로 따져 종합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구체적인 신용평가 항목과 가중치 여부는 영업기밀이라며 공개를 거부했다. 시민단체인 금융소비자원의 조남희 대표는 “은행들이 높은 대출금리를 적용받거나 대출이 거절된 고객에게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 주지 않는 것은 자체 신용평가체계가 투명하지 않기 때문”이라면서 “높은 금리를 물리기 위해 사사로운 정보를 활용하는 것은 금융의 공공성을 해치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오달란기자 dallan@seoul.co.kr
  • [열린세상] 쓰시마 단상/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열린세상] 쓰시마 단상/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7월16일부터 18일까지 쓰시마에 다녀왔다. 제주도보다 가까이 있는 이 섬은 과거에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외교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하지만 지금은 자연풍광이 좋은 고요한 섬으로 남아 있다. 쓰시마 이즈하라(嚴原)의 슈젠지(修善寺)에서 고 황수영 선생께서 발의해 세운 ‘대한인 최익현 순국지비’를 보고는 울적해졌다. 정토종의 이 절은 지금은 게스트 하우스로 활용되고 있는데, 순국비는 그 납골원 어구에 간신히 자리하고 있었다. 관광 안내문이나 답사 보고문은 대개 최익현이 슈젠지에서 순국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은 최익현이 함께 갇힌 문생들에게 치포관을 만들어 쓰라고 권했던 엄수영(嚴戍營)은 아니다. 최익현은 엄수영에 갇혀 있으면서 문생들이 상투를 드러낸 채 염발질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상투를 싸맬 크기의 검은 베 조각을 구해 머리를 덮으라고 했던 것이다. 엄수영은 이즈하라에 있던 병영이었고, 슈젠지는 최익현의 시신이 일단 안치됐던 절이다. 광무 10년인 1906년 최익현은 의병을 일으켰다가 순창에서 패해 쓰시마의 감옥에 갇혔다. 최익현은 일본의 문물이 크게 흥성한 것을 눈으로 보았고, 일본의 온순한 통역과 보병들을 만나 보고 타국에도 이웃이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최익현은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 단식을 했다. 민심의 동요를 우려한 이토 히로부미 통감은 쓰시마로 조선의 쌀과 보약을 보내라고 훈령을 내렸다. 일본 병사들이 부산에서 쌀을 가져오자, 최익현은 사흘 만에 일단 단식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울화증과 풍토병 때문에 반 년 뒤에 병사했다. 슈젠지에서 임병찬이 제문을 읽은 후 최익현의 시신은 부산 초량으로 운구됐다. 1907년 1월 11일의 일이다. 나는 최근 ‘국왕의 선물’을 집필할 때 최익현이 고종의 뜻을 따라 대원군을 탄핵해 고종의 각별한 관심을 받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다른 지식인들과는 소원해져서 의병을 일으킬 때 호응이 낮았던 사실을 적었다. 위정척사의 논리는 같았지만 당시 지식인들은 정치적 파벌 의식을 쉽게 버리지 못했다. 지금도 그러하지 않은가. 한편 쓰시마 와니우라(鰐浦)의 한국전망대에는 ‘조선국 역관사 조난 추도비’가 있다. 2000년대에 들어 숙종 29년인 1703년 음력 2월 5일 정역과 부역이 탄 배가 조난하면서 112명이 사망한 사실이 밝혀져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비석을 세운 것이라고 한다. 쓰시마 도주 소게(宗家)의 문서에서 실려 있는 기록을 근거로 했다면서, 격군은 물론 성씨 없는 많은 종자들의 이름을 추도비 앞의 부비(副碑)에 하나하나 새겨 두었다. 거기에는 112명 이외에 기록에 없으나 시신을 수습한 한 사람의 이름을 추기해 두었다. 그런데 ‘숙종실록’의 숙종 29년(1703) 2월 19일(갑오)의 기록에 “일본 도해선이 침몰하여 역관 한천석 등 113명이 모두 빠져 죽었는데, 임금이 호조에 명하여 구휼하는 은전을 별도로 거행하게 하였다.”라고 돼 있다. 곧 한천석 등 113명은 계미사행 때 풍기포(?崎浦)에서 변을 당한 것이다. 당시 왜인이 우리 측의 지참 물품을 조사하려 하자 한천석 등이 저지하는 과정에서 싸움이 크게 일어나 조난을 당하게 됐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렇거늘 조명채의 ‘봉사일본시문견록’을 번역한 책에는 계미를 인조 21년 즉 1643년으로 잘못 설명하고 말았다. 조선 후기에는 와니우라에 우리 통신사들이 오가며 조난자들을 제사 지낸 신당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추도비가 선 것은 저들의 호의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어느 공동체든 공통의 역사 기억을 가질 때 비로소 서로 결속할 수 있다. 역사 교육은 국수주의를 부추기는 것이 결코 아니다. 미국 체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미국 학교교육에서 역사 과목이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말한다. 게티즈버그의 전몰자 수를 어린 학생들에게 외우게 할 만큼 자잘한 사실까지도 공통의 기억으로 형성시켜 나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쓰시마는 왜구의 거점이었고, 동아시아 감합무역의 중개 지점이었으며, 교린외교의 흑막 지역이었다. 우리가 우리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는 이 섬에 대한 역사 기억들을 뚜렷이 공유하지 못하는 것은 정말로 애석한 일이다.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1)조선 천주교 개척 이벽&황사영

    [선택! 역사를 갈랐다] (21)조선 천주교 개척 이벽&황사영

    1779년(정조 3) 겨울. 남인의 젊은 학자들이 천진암에서 강학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벽(李蘗)은 눈발이 날리고 호랑이가 출몰하는 100여리의 밤길을 내달려 강학회에 참여했다. 이벽의 등장으로 유학을 강마하던 모임은 대번에 서학과 천주교에 대한 토론장이 되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784년. 이벽의 권유를 받은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하자 조선에서 본격적으로 천주교(가톨릭)가 싹텄다. 천주교는 지식인을 비롯한 중인, 평민과 천민, 여성 등 각양각색 인물들에게 퍼져갔다. 정조가 승하하고 반 년 정도가 지난 1801년 1월.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정약용의 조카사위 황사영(黃嗣永)은 서울을 빠져나와 충청도 제천의 산골짜기 배론(舟論)에 숨어들었다. 배론의 토굴에 숨어지내며 그는 장문의 편지를 썼다. 편지는 북경 교구장 구베아(Gouvea) 주교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편지 말미에서 황사영은 조선 교회의 재건을 위해 전대미문의 요청을 했다. 편지는 그가 잡히면서 공개되었고 조선 조정은 뒤집어졌다. 이른바 ‘황사영 백서(帛書) 사건’이었다. 한국 천주교는 진리를 찾던 이들이 자발적으로 택했지만 그 선택은 박해가 예고된 고난의 여정이었다. 가시밭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들은 진정 하늘에 오르는 사다리를 발견했던 것일까. ●18세기 중국 통해 서학·천주교 유입 17세기 초 조선 사람들은 ‘유럽’이란 또 하나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 18세기에 접어들자 서양의 천문, 역법, 수리, 의학에 관한 서적과 기물에 더욱 익숙해졌고, 북경에 간 사신들은 으레 선교사가 거주하는 천주당을 방문하였다. 그 결과 저들도 나름의 진리가 있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당시 서양과 그들의 학문에 대해 가장 해박했던 인물은 이익(李瀷)이었다. 그로 인해 서학(西學)이 일세에 풍미하게 되었고, 그의 문하에서 이른바 ‘친서파’(親西派)로 일컬어지는 이가환, 권철신, 정약전·정약용 형제, 이승훈 등이 배출되었다. 이익 문하의 학자들은 여전히 ‘서학 수용’에 머물러 있었다. 서학은 새로운 지식일 따름이지, 유교의 가르침에 상응하는 새 가르침이 아니었다. 그런데 홀연 학문에서 신앙, 신념으로 건너뛴 인물이 나왔다. 이벽이었다. 이벽은 어려서부터 ‘하늘의 도리’에 뜻을 두었다. 20세쯤 서학서에 충격받았고, 25세 전후에 서학 서적을 망라해 읽고는 드디어 마음을 바꾸고 천주교를 신봉하였다. 이 시기 전후에 그는 조선 최초의 호교서로 평가받는 ‘성교요지’(聖敎要旨)를 집필한다. 그것은 천지를 주관하는 천주(天主)에 대한 선언이었다. 그의 선언은 성리학의 근본 원리인 천리(天理)에 대한 도전이었다. 성리학에서 하늘은 천리이다. 천리는 우주 질서의 원리, 사물의 물리, 사회의 윤리이다. 천리는, 우리가 ‘하늘’을 들을 때 떠올리는 ‘하느님’, ‘푸른 하늘’ 같은 인격성과 자연성이 약하고, ‘질서·조화·바름’과 같은 추상성과 윤리성이 강한 개념이다. 천리는 유교 왕국 조선에서는 모든 질서의 원천이자 가치의 근원이었다. 이벽은 ‘천리는 현실에서 공허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천리에 비해 천주는 인격적 존재로 현실감이 있고 내세관마저 채워주는 존재였다. 그는 양 개념이 대립적이라고 여기지 않고 서로 보완되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대다수 조선인들은 천주 선언을 유교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으로 보았다. ●관대하던 정조 사후, 1801년 대대적 박해 시작 천주교를 찬성하건 반대하건, 지식인들은 ‘천리’와 ‘천주’의 대결이 가져올 파장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서로 대결한다면 그것은 문명 사이의 가치관 전쟁이자, 그에 동반한 사유와 많은 개념들을 재조정하는 일이 될 터였다. 16세기 천주교를 동양에 전파했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이 점을 알고 있었고, 두 문명 사이의 대화와 상호 이해를 도모하였다. 선교사들은 ‘Deus’(God의 라틴어)를 유교 경전에 등장한 상제(上帝)와 유사한 천주로 번역했고, 또 천주를 천지의 대부(大父)·대군(大君)이라고 소개하였다. 천주교 설명에 유교의 텍스트와 개념을 빌린 것이다. 이 같은 설명 방식은 중국에서보다 조선에서 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유교적 이상 사회를 가장 진지하게 고민했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천주교에서 유학과 일치하거나 때론 유학을 뛰어넘는 가능성을 보았다. 예컨대 한때 천주교 신자였던 정약용은 인격적 상제관에 기초한 새로운 유학 틀을 구상하였다. 정약용에게 영향을 미쳤던 이벽 또한 천주교를 축으로 유학의 미비점을 보완하려 하였다. 그러나 사회, 윤리 측면에서 문제는 매우 복잡하였다. 천주교인들은 천주 공경이 대효(大孝), 대충(大忠)이므로 유교 윤리는 천주교에서 완성되고, 유학자들이 오히려 천지의 군주와 부모를 모른 체한다고 역공했다. 물론 그 논리는 유교 윤리의 소멸로도 해석될 수 있었다. 더 위험한 것은 천주 앞에서 군(君)·신(臣), 부(父)·자(子)의 수직적 위계가 사라지는 일이었다. 천주교인들이 자신들은 충성과 효도를 어긴 적 없다고 아무리 강변해도, 대다수 지배층은 ‘천주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논리 속에 잠재한 현실적 파괴력을 알고 있었다. 백성 하나하나가 박해를 감내하면서 자신이 신앙을 결단했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유교적 명분 질서가 사라진 무부, 무군의 미래였다. ●“서양군 통해 유교 압박”… 황사영 백서 큰 파장 1785년(정조 9) 형조의 적발로 최초의 천주교 모임이 발각되었다. 신부도 없이, 지식인들이 서로 성직을 맡아 진행한 모임이었는데, 정조의 관대한 처분으로 그럭저럭 무마되었다. 모임의 주동자였던 이벽은 사건 이후 얼마 안 되어 30대 초반의 나이로 요절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도 전해진다. 본격적 박해를 경험하지 않은 이벽은 차라리 행복했다. 1801년에 터진 대대적 박해는 일부 신자들을 극단적 선택으로 몰고 있었다. 그 와중에 황사영의 백서 사건이 터졌다. 백서의 내용 대부분은 순교자들의 전기이다. 당대는 물론 지금까지 논란을 부르는 부분은 후반부이다. 황사영은 교회 재건을 위해 몇 가지 방책을 제시했는데, 그중 ‘조선을 청에 내복(內服)시킴, 서양 군함과 병사를 통해 압박함’이 들어 있었다. 그 방책은 반국가, 반민족적 구상이라고 줄곧 비판받았다. 교회 재건이라는 동기와 박해라는 정황을 인정하더라도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 비판의 골자였다. 백서의 청원은 너무나 대담하고 몽상적이어서 교인들 사이에도 논란이 있었고, 당시 북경 교회가 그대로 감행하기도 어려웠다. 황사영 역시 실제 그렇게 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정부를 압박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그 방책들을 제시하였다. 그가 반정부, 반국가 의지가 강했다면 가장 쉬운 길은 교인들의 무력 봉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반란에는 분명히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해 보자. 황사영은 왜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종교의 보편 진리를 꿈꾼 그는 서양의 도리를 신뢰했던 듯하다. 예수회가 전한 서양은 안정된 생활, 인정이 넘치는 풍속, 약한 자에 대한 배려와 형제애가 실현된 ‘이상적 사회’였다. 현실의 고통이 강할수록 이상적인 바깥 세계에 대한 동경과 기대는 증폭되기 마련이다. 기독교적 형제애에 대한 갈망이 커질수록 전통적인 유교 윤리, 혈통 의식, 국제 관계 등은 무력하거나 부정적으로 보였을 법하다. 선교사가 청 황제, 기독교 국가의 군대를 움직일 수 있다고 믿고 싶었던 지나친 기대감은 그의 판단력을 가려버렸다. ●지금도 유교문화 속 기독교 신자 수 동아시아 1위 천주교와 유교의 보완을 꿈꾸었던 이벽의 노력은 정약종, 정하상 등으로 맥을 이어갔다. 일부 교인들은 동서양의 이상적 인간상을 투영하여 그를 되살렸다. 19세기 후반 천주교 공동체의 염원이 담긴 예언서 ‘니벽전’에서 그는 학문에 능통한 선비, 득도한 신선, 승천하는 예언자로 그려졌다. 황사영은 대역부도죄로 체포되어 능지처사되었다. 비극은 그의 개인과 가족, 당대 교인들에게만 끝나지 않았다. 지배층과 일반 백성은 백서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인들을 정말로 무부무군의 무리, 나라를 팔아먹는 무리로 여기게 되었다. 두 사람의 선택은 현재의 우리에겐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국은 유교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으면서도 기독교(가톨릭과 개신교) 신자 수가 1위인 동아시아의 특이한 국가이다. 전근대의 보편 가치와 근대의 보편 가치를 상징하는 두 종교 사이에 현재의 우리가 놓여 있다. 예수회 이벽의 선택은 ‘내 안의 가치’와 ‘타인 안의 가치’를 동등하게 존중하고 서로 대화하는 자세와 통한다. 그리고 종교, 문명,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 사이의 조화에 힘쓰는 이들을 통해 계승되고 있다. 그러나 인정과 대화는 아슬아슬한 줄타기이다. 서로의 부족함을 고백하는 겸손에서 대화는 출발하지만, 나·우리 혹은 타자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고정해 버리면 성찰과 다양한 해석이 설 자리는 사라져 버린다. 그 점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 황사영은, 박해라는 정황을 감안하더라도, 외재(外在)하는 기준을 절대화해 버렸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다원을 긍정하고 독선에 빠지지 않는 자세야말로 언제나 곰곰이 생각해 볼 덕목이었다. 세계화, 다문화, 정보화가 가속하는 지금에서는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이경구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 주한미군 ‘7000명 분량’ 역대 최대 마약 밀수

    전·현직 주한 미군 장병과 공모, 성인 7000명이 동시에 투약할 수 있는 분량의 신종 마약을 국제우편을 통해 국내에 밀반입, 미군들에게 팔아 온 현역 주한미군 사병이 검찰에 붙잡혔다. 밀수한 마약 규모는 3480g(시가 1억 1000만원어치)으로 지금껏 적발된 미군 관련 마약 범죄 가운데 최대 규모다. 관세청이 지난 한 해 동안 압수한 3059g보다 많다. 서울중앙지검 강력부(부장 김회종)는 지난 16일 미 8군 2사단 소속 A(22) 이병에 대해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조만간 신병을 확보할 방침이라고 19일 밝혔다. 검찰은 앞서 지난 3월 주한미군 출신 B(21·구속기소)와 B의 친구 C(23·여·불구속기소)를 마약 밀수·판매 혐의로 붙잡아 수사하던 중 A 이병의 연루 사실을 추가로 밝혀냈다. A 이병은 마약사건에 연루돼 구속되는 첫 현역 미군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A 이병은 지난해 8월부터 지난 1월까지 6차례에 걸쳐 헝가리와 미국 인터넷 사이트에서 구매한 합성대마(JWH-120, 210) 3480g을 국제우편을 통해 몰래 들여온 뒤 국내에 거주하는 미군 장교와 외국인 등에게 판매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 측은 “국내 유명 모델에게도 마약을 팔았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실제로 한국인에게 판매한 사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들이 들여온 합성대마는 1회 흡입량이 0.5~1g으로 적발된 분량은 최대 7000명분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일명 스파이스, 스컹크로 불리는 ‘합성대마’(JWH-018)에 화학물질 구조 일부를 변형시킨 변종 마약으로, 액체 상태의 마약을 담뱃잎에 뿌려 담배처럼 흡연하는 방식인 탓에 거부감이 적은 데다 환각 효과가 6~8시간 지속되는 등 기존 마약류보다 5배 이상 강하다. 반면 가격은 200분의1 수준으로 저렴해 최근 주한 미군들뿐만 아니라 국내 클럽 등지에서 외국인과 유학생들 사이에 인기를 끌고 있다. 국내에서는 2009년부터 마약류로 지정됐다. 조사 결과 30g당 100달러에 구입, 10배나 비싼 1000달러에 팔아 이익금을 나눴다. 관세청이 압수한 신종 마약은 2009년 30g에 불과했으나 2010년 605g, 지난해 3059g에 달할 정도로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검찰은 올 초부터 지난 5월까지 전·현직 주한 미군이 밀반입하다 적발된 합성 대마가 전체의 80%에 이를 만큼 주한 미군이 국내 마약시장의 공급책이 되고 있다고 판단, 관세청과 함께 해외 공급책 등 배후를 밝혀내는 수사도 병행하고 있다. 지난 1월에는 향정신성의약품인 신종마약 ‘AM-2201’ 55g을 국제우편으로 밀반입한 주한 미군 L 상병을 검거했다. 3월에는 히로뽕과 대마초, 신종환각제 ‘MDPV’ 등 마약류 다섯 가지를 밀수입해 판매하려 한 전 주한 미군을 구속했다. 검찰은 오는 23일 주한 미군으로부터 A 이병의 신병을 넘겨받는 대로 구속영장을 집행할 방침이다. 또 구속 뒤 24시간 안에 기소해야 한다는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SOFA)에 따라 곧바로 기소하기로 했다. 최재헌기자 goseoul@seoul.co.kr
  • 安, 사실상 출마 선언

    安, 사실상 출마 선언

    범야권 대선 주자로 거론되는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19일 발간된 대담록 ‘안철수의 생각’을 통해 주요 정치 현안과 정책 구상을 밝히며 사실상 대선 출마 의사를 표출했다. 그는 ‘안철수 현상’에 대해 “낡은 체제와 미래 가치의 충돌”이라고 자평하며 향후 정치 행보에 적극 나설 것을 시사했다. 안 원장은 저서에서 4·11 총선에서 야권의 패배가 대선 출마를 고민하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고 밝혔다. 안 원장은 “4·11 총선 전에는 야권의 승리를 의심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그렇게 되면 야권의 대선후보가 제자리를 잡으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수순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총선이 예상치 않게 야권의 패배로 귀결되면서 나에 대한 정치적 기대가 다시 커지는 것을 느꼈다.”며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 열망이 어디서 온 것인지에 대해서 무겁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안 원장은 또 청소년에게 조언하는 형식으로 “도전은 힘이 들 뿐 무서운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앞으로 책임 있는 정치인의 역할을 감당하든, 아니면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 세상의 변화에 힘을 보태는 역할을 계속하든 더 많은 사람들과 힘을 모아 나가고 싶다.”고 강조했다. 안 원장과 9차례에 걸쳐 인터뷰를 해 책으로 엮은 제정임 세명대 교수는 이날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안 원장이 지지율이 높다는 이유로 대선에 출마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말하며 국민에게 자신의 생각과 정책을 밝히고 국민의 의견을 경청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고 말했다. 제 교수는 “안 원장이 실수와 시행착오를 적지 않게 겪었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 성공했는데 대통령의 자리에서도 실수와 시행착오가 용납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며 “안 원장은 국민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소상히 밝혀 자체 검증을 받고 최종 결심을 하겠다고 말했다.”고 안 원장과의 대화 내용을 전했다. 안동환기자 ipsofacto@seoul.co.kr
  • [새터민 2만시대의 자화상] 일용직으로 근근이 생계…이방인 꼬리표에 ‘눈물’

    2012년 5월 현재 국내에 거주하는 북한이탈주민은 2만 3700여명. 남한 인구의 0.04%, 북한 인구의 0.1%에 해당한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 해 한 자릿수에 그쳤던 국내 입국 탈북자는 북한의 식량난이 극심해진 199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늘어 2006년 이후에는 연간 2000명을 훌쩍 넘고 있다. 탈북자 2만명 시대, 우리사회 탈북자들의 자화상은 어떨까. 또 그들을 대하는 우리사회의 인식은? 우리 사회에서 탈북자들은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인구 규모나 사회적 상징성에 견주어 훨씬 더 열악한 지위를 갖고 있다. 가중되는 경제적 부담에 이방인이라는 꼬리표까지 더해진 탈북자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신의 신분을 감춘 채 살아가고 있다. 지난 2월 중국의 탈북자 강제 북송이 국제적 이슈가 되면서 국내에서도 탈북자들의 인권보호를 위한 캠페인이 벌어졌지만 정작 이런 염려와 걱정은 더 가까이 살고 있는 국내 거주 탈북자들에게까지 미치지 못했다. 일용직으로 일하며 최저 생계비도 벌지 못하는 탈북 노동자들, 외모와 말투, 출신으로 인해 차별받는 탈북학생들은 여전히 우리사회에서 그들만의 섬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2만여명이 넘는 탈북자들이 국내에 자리잡고서 살고 있지만 실생활에서 탈북자를 만나본 경험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탈북자 친구나 직장동료가 있어 직접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본 사람은 더욱 적다. 일상적인 만남과 대화가 지극히 제한된 상황에서 일반 대중이 접할 수 있는 탈북자의 모습은 가끔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비쳐지는 탈북자 단체의 활동상이나 몇몇 유명한 탈북자 출신 연예인 정도로 제한된다. 일반 국민들이 북한과 그 지도자에 대해 갖고 있는 고정관념처럼 탈북자에 대한 인식도 지극히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탈북자 절반 임시직·일용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이 지난해 한국인 1200명(탈북자 제외)을 대상으로 ‘탈북자에 대한 인식조사’를 실시한 결과 전체의 58.9%가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답했다. 탈북자를 꺼리는 경향은 연령대가 낮아질수록 더 심해져 30대 이상에선 ‘친근하다’고 답한 비율이 40%대였지만 20대에선 31.5%에 그쳤다. 결혼 상대자로서 탈북자에 대한 평가는 50.7%가 ‘꺼려진다’고 답했고, 동업자로도 ‘꺼려진다’는 답변이 36.4%가 나왔다. 이 같은 막연한 거리감과 편견 때문에 한국사회에 정착하려는 탈북자의 상당수는 자신의 신분을 감춘다. 2008년 한국에 들어온 탈북자 김모(46·여)씨는 “변변한 직장을 구하지 못해 음식점 찬모로 들어가려고 해도 북한에서 왔다고 하면 경계심부터 보인다.”면서 “그런 일을 몇번 겪고 난 뒤부터는 아예 조선족이라고 소개했고, 오히려 일자리가 잘 구해졌다.”고 말했다. 탈북자에 대한 인식이 20여년 전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과 함께 탈북자들의 생활도 예전보다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불안정한 고용, 낮은 소득은 지금도 탈북자들의 삶을 흔드는 불안요소다. 통일부 산하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이 실시한 ‘2011탈북자 생활실태조사’는 이들의 삶을 압축해 보여주고 있다. 재단이 지난해 7~8월 주민등록상 거주지가 명확한 8세 이상 탈북자 1만 8997명을 접촉해 이 가운데 8299명에 대해 전문가 면접조사를 실시한 결과 탈북자 3명 가운데 1명은 월소득이 100만원에 미치지 못했고 실업률은 12%를 웃돌아 일반 국민의 3배에 달했다. 그나마 일자리를 구한 경우에도 고용의 질이 낮은 임시직이 15.2%, 일용직이 32.3%였다. 불안정한 고용은 취약한 경제력으로 이어졌다. 탈북자의 월평균 소득은 101만~150만원이 41.3%로 가장 많았고, 50만~100만원이 25%, 50만원 이하도 8.2%였다. 올해 1인 가구 기준 최저생계비는 55만 3300원이다. ●인식개선 위한 홍보·교육 필요 생활고에 시달리는 탈북자 가운데 일부는 범죄의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지난 2010년에는 탈북자 168명이 병원에서 가짜 진단서를 발급받아 국가보조금을 타내다가 무더기로 적발됐고, 같은 해 서울 강남권에서 성매매를 하다가 적발된 탈북여성 이모(26)씨는 “생활고에 시달리다 성매매를 하게 됐다.”고 진술했다. 전문가들은 탈북자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개선하고 안정적 정착을 돕기 위해 정부차원의 홍보와 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임순희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우리 국민이 탈북자에 대해 가진 부정적 인식은 우리 정부 차원에서 이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리는 노력이 부족한 점이 원인”이라며 “탈북자들이 가난하고 못 먹어서 북한에서 도망친 소외계층이라고 생각하지만 탈북자 중에도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조정아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많은 탈북자들이 북한에서의 직업을 그대로 유지하기보다는 식당 종업원이나 단순 노무직 등에 종사한다.”면서 “다문화가족에 대한 교육이 최근 강화되는 것을 계기로 정부차원에서 홍보와 직업 교육 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2011 탈북자 실태조사’에 따르면 설문대상 탈북자의 59.6%가 남한에서 직업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다고 응답했다. 2004년 탈북한 김흥광 NK지식인연대 대표는 “많은 탈북자들이 북한과 노동환경이 다른 한국의 경쟁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라며 “일반 국민들과 인간적 교감을 갖게 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소수자 보호 차원에서 통일부나 하나원 등 탈북자 관련 기관에서 이들의 채용을 과감히 늘려 의사결정 과정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윤샘이나·하종훈기자 sam@seoul.co.kr
  • [새터민 2만시대의 자화상] 관련 단체 수백여개…일부 급진적 행동방식 우려도

    [새터민 2만시대의 자화상] 관련 단체 수백여개…일부 급진적 행동방식 우려도

    현재 통일부에 비영리민간단체로 정식 등록된 탈북자 관련 단체는 50여개. 종교단체와 연계해 국내 거주 탈북자들의 정착을 지원하거나 소규모로 북한 민주화 운동을 하는 단체들까지 포함하면 수백개에 이른다. 1980년 처음 등장한 ‘숭의동지회’와 ‘통일연구회’ 이후 1990년대 말부터는 ‘자유북한인협회’ 등 자발적인 탈북자 단체까지 속속 등장했다. 특히 2000년대 들어 숫자가 크게 늘었다. 국내 탈북자 단체의 성격은 크게 북한 민주화 운동을 펼치는 단체와 탈북자 정착 지원단체로 나뉜다. 지난 2003년 출범한 ‘북한민주화운동본부’를 시작으로 한 북한 민주화 운동 단체들은 정치범 수용소 해체와 3대 세습 종식, 북한의 개혁개방을 촉구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대북전단 살포로 잘 알려진 ‘자유북한운동연합’은 현 정권 들어 남북관계가 경색된 가운데 대형 풍선을 이용해 북한으로 전단을 날려보내는 작업을 강행하면서 논란을 빚기도 했다.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는 “북한인권 NGO단체로서 북한 주민의 자유와 인권 해방을 가장 중요한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다.”면서 “한국은 북한 정권에는 관심이 많지만 정작 기아에 허덕이는 주민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데 대북정책도 북한 주민들을 위해 짜여야 한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탈북자 정착 지원단체로는 국내 거주 탈북자의 69%를 차지하는 여성 탈북자들을 돕는 ‘탈북여성인권연대’가 있다. 재봉과 피부마사지 등의 교육을 통해 탈북여성들의 취업과 자립을 지원하고 이들을 고용하는 사회적 기업도 세웠다. 민주주의와 선거에 대한 기본적인 교육도 실시한다. 북한사회의 실상을 체계적으로 알리기 위한 학술단체도 등장했다. 2008년 조직된 ‘NK지식인연대’는 컴퓨터 공학박사로 북한에서 교수로 근무했던 김흥광 대표를 중심으로 대졸 이상의 고학력 탈북자들이 모인 단체다. 탈북자 단체가 증가하고 활동 영역도 다양해지면서 이들에 대한 평가도 엇갈리고 있다. 한국사회의 일원으로서 제 목소리를 내는 구심점이라는 의견과 일부 단체의 급진적인 정책과 행동방식에 대한 우려의 시선이 교차한다. 강석승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들의 활동이 직접적인 탈북자 지원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윤샘이나·배경헌기자 sam@seoul.co.kr
  • 中 식인물고기 ‘피라냐’ 1마리도 못잡고 결국…

    한마리도 못잡고… 최근 중국 광시성 류저우시 부근에서 발견된 식인물고기 피라냐 포획 행사가 한마리도 잡지 못하고 종료됐다. 지난 7일 지역 주민인 장모씨가 강가에서 애완개 목욕을 시키는 도중 피라냐에게 습격당해 손에 전치 2주 부상을 입는 파문을 일으켰다. 이에 현지 당국이 지역 주민에게 마리당 1000위안(약 18만원)을 지불키로 하는 포획 행사를 시작했던 것. 그러나 당국의 바람과는 다르게 단 한마리도 포획한 주민은 나타나지 않았다. 당국도 지역 주민들과 함께 나흘간 포획작업에 나섰으나 결과는 한마리도 못잡으며 처참하게 끝났다. 류저우시 측은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고 여론을 환기시키고 피라냐도 잡는 행사가 소득없이 끝났다.” 면서 “행사를 계속 이어가면 토종 물고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종료했다.”고 밝혔다. 한편 외래종인 피라냐가 이 지역에서 발견된 이유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당국은 “아마존 지역에 사는 피라냐를 누군가가 이 지역에 방생한 것 같다.” 면서 “피라냐의 천적도 없어 토종 물고기가 큰 피해를 입고 있다.”고 밝혔다. 인터넷뉴스팀 
  • 사랑스러운 살인마… 핏빛 끝장액션…상상 그 이상

    사랑스러운 살인마… 핏빛 끝장액션…상상 그 이상

    전 세계 장르영화의 축제인 제1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이하 PiFan)가 오는 19일 개막한다. ‘사랑, 환상, 모험’을 주제로 열리는 이번 영화제는 47개국에서 총 231편의 다양한 영화가 관객들과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매해 여름 오감을 자극하는 도발적이면서도 잔혹한 스타일의 영화를 선보여 온 PiFan이 올해는 어떤 영화들을 선사해 줄까. 박진형·유지선·홍보미 등 이번 영화제 프로그래머 3인과 함께 올해 PiFan의 경향과 프로그램 섹션별로 꼭 봐야 할 추천작 12편을 꼽아 봤다. 금기에 도전하다 올해는 PiFan의 정체성을 다시 확립시켜 주는 금기에 도전하는 강력한 영화들이 부쩍 늘었다. 무제한으로 성적인 표현을 사용하거나 정신과 신체를 넘나드는 극단의 폭력, 영화 내내 유혈이 낭자한 고어 영화 등 어느 분야든 끝을 보고야 마는 치밀하고 치열한 영화들이 영화제를 장식한다. ▲인브레드<금지구역 섹션> 소년원에 수감된 청소년들이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변종 인간들의 고문을 피해 사투를 벌인다. 한 편의 핏빛 오페라를 보는 듯 한 웰메이드 액션 고문 퍼포먼스.(박진형) ▲클립<금지구역> 질풍노도의 성장기를 겪는 야스나는 좋아하는 소년을 위해서라면 말 그대로 뭐든지 할 수 있는 당돌한 소녀다. 소녀의 성장기와 세르비아 사회의 역동성이 하드코어에 가까운 대담한 영상에 펼쳐진다.(박진형) ▲인간지네2<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섹션> ‘인간지네’ 영화에 푹 빠져 인간지네를 만들고 싶어 하던 마틴은 사람들을 납치해 검은 욕망을 시도하기 시작한다. 14회 PiFan ‘인간지네’의 속편으로 이번에는 10명이 지네로 둔갑한다.(박진형) ▲어느 프랑스 가족의 섹스 연대기<금지구역> 프랑스 소도시에서 3대가 오손도손 살아온 가족에게 찾아온 위기란 바로 섹스. 이제 할아버지에서 손자에 이르기까지 섹스에 대한 세대별 비밀일기가 펼쳐진다. 프랑스 판 19금 전원일기?(박진형) 장르와 장르의 결합 PiFan이 장르영화제이지만 화제작들을 살펴보면 한 가지 장르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장르 교범에 충실하던 영화를 넘어 호러와 코믹을 섞거나 스릴러의 소재들을 잘 결합해 독특한 긴장감을 자아내는 작품들이 선보인다. 코미디, 호러, 퀴어, 판타지, 로맨스, 가족드라마, 사회물 등 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섞였지만 오히려 장르적인 쾌감은 더욱 커졌다. ▲그래버<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아일랜드의 외딴 섬마을을 습격한 치명적인 괴물, 그래버. 괴물의 약점이 알코올인 것을 알아낸 섬 주민들은 그래버를 죽이기 위해 뱃속과 물총을 독한 술로 잔뜩 채우고 출격한다. 할리우드 괴수물에 비해 아일랜드 특유의 정서가 가미된 색다른 재미가 있다.(홍보미) ▲잠자는 에디를 조심하세요<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잘나가던 예술가 라스가 얼떨결에 맡게 된 덩치 큰 자폐아 에디에게는 위험한 비밀이 있다. 바로 잠들면 사람 먹는 살인마가 되는 몽유병에 걸린 것. 유혈이 낭자한 장면에도 불구하고 밝고 경쾌한 코미디 톤으로 사랑스러운 식인마를 보여 준다.(홍보미) ▲레드 주식회사<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영문을 모른 채 지하 회의실에 갇힌 여섯 사람, 그리고 그들을 고문하는 인사 담당. 업무수칙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신체절단의 문책이 뒤따른다. ‘쏘우’와 ‘큐브’를 잇는 완성도 높은 밀실 호러.(박진형) ▲좀바딩 제1탄:레밍턴의 저주<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시골청년 레밍턴은 어느 날 갑자기 게이로 변하고 마을에서는 황당하고 어이없는 사건들이 연달아 벌어지는데. 퀴어, 판타지, 로맨스 등 다양한 장르를 비벼 놓은 이 작품은 필리핀에서 비평과 흥행 모두 성공한 수작.(유지선) 원작의 무한변신 이제 소설이나 만화, 영화, 게임은 서로 경계가 사라진 지 오래다. 유명 만화는 영화로, 소설은 영화 혹은 애니메이션으로 재탄생하여 원작의 재해석은 물론 시각적인 즐거움을 제공한다. 원작보다 더욱 더 짜릿하게 찾아온 영화들의 변신을 지켜보는 것도 이번 영화제의 재미. 또한 아시아 판타스틱영화 제작네트워크(NAFF)에서는 올해 ‘원 소스 멀티유즈’ 포럼을 통해 웹툰 등 다양한 원작이 영화화되는 최근의 경향에 대해 고찰한다. ▲아이와 마코토<폐막작> 아이는 마코토를 위해 무엇이든 다 하려 하지만, 어린 시절의 상처로 인한 마코토의 방황은 그치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가 위험에 처하게 되고 그녀를 위한 마코토의 싸움이 시작된다. 동명의 만화를 영화로 옮긴 미이케 다케시의 사랑과 진실에 관한 지극한 헌사.(유지선) ▲제25제국<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고전 SF 소설 ‘내일은 5만년 후’가 원작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5만년 전 과거로 향하는 세계 2차대전 연합군 특공대의 모험을 그렸다. 나치, 타임머신, 괴물, 로봇, 동성애 등 장르영화의 애장품이 모두 나오는 B급 장르영화 종합선물세트.(홍보미) ▲프로디지 3D<애니판타> 남들과 다른 능력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가진 짐보는 자신과 같은 영재들을 모으지만, 사회의 편견에 분노한 아이들은 세상을 뒤엎을 음모를 꾸민다. 1981년 동명의 베스트셀러 만화를 원작으로 한 3D 애니메이션.(박진형) ▲자살가게 3D<스트레인지 오마주> 삶에 대한 의욕도 희망도 없는 우울한 도시에서 자살에 필요한 용품을 파는 가게 주인이 아기를 갖게 되면서 삶의 기쁨을 느끼게 된다. 파트리스 르콩트가 선사하는 환상의 애니메이션.(홍보미)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사상계, 초기 박정희정권과 어떤 관계였나”… 정진아 건국대 교수 논문

    “사상계, 초기 박정희정권과 어떤 관계였나”… 정진아 건국대 교수 논문

    ‘사상계’는 1960~70년대 가장 대표적인 ‘민족적 저항 잡지’로 손꼽힌다. 1970년 5월 호에 김지하의 시 ‘오적’을 실었다는 이유로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폐간 처분을 받고 사라진 것도 지식인들에게는 ‘저항’을 떠올리는 역사의 한 장면이 된다. 그러나 사상계와 박정희 정권이 처음부터 악연은 아니었다. 사상계의 경제부문 편집위원들은 군사정권의 경제개발정책 골격을 형성할 만큼 협조적이었다. 정부 주도의 계획경제 수립, 농업과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의 전환, 7%대의 높은 성장률 추구, 국민의 소비절약과 내핍의 일상화, 수출증가 등이 그것이다. 정진아(43)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HK교수는 신간 ‘냉전과 혁명의 시대 그리고 사상계’(작은 소명출판 펴냄)에 실은 소논문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초반 사상계 경제팀의 개발담론’에서 사상계와 박정희 정권의 관계를 파헤쳤다. 사상계 인사들은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라고 규정하고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4·19 민주주의 혁명의 계승자로 바라보며 장면 정부의 무능을 극복하려는 불가피한 혁명으로 평가한 것이다. 당시 지식인 대부분이 호의적이었다. 정 교수는 “지식인들은 박정희 등 군사쿠데타 세력들이 ‘혁명 과업을 완수한 뒤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겠다’고 한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처음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 호응 따라서 사상계 경제부문 편집위원들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고문과 각 부처 장관의 고문 등으로 참가했다. 특히 김준엽은 고문 요청을 거절했다가 장준하 등의 적극적인 권유를 받아들여 수락했다. 1962년 1월 경제기획원이 제출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성안 과정에 사상계 편집위원인 성창환 고려대 교수와 이정환 연세대 교수가 참여했다. 정 교수는 “정권의 정통성이 취약한 상황에서 사상계 소장 학자들의 경제개발론을 포용해 환심을 샀지만, 정책 운용에서 점차 노선을 달리했다.”고 말했다. 사상계와 박정희 군사정권 사이의 틈은 군사정권이 한일회담 과정에서 대일 청구권을 포기하려고 하자 벌어졌다. 사상계 측은 대일 청구권 문제를 우선 해결한 뒤 국교를 수립하고, 그 뒤에 일본과의 경제실무를 협의하는 한·일 협정을 추진하라고 요구했다. 결과는 반대였다. 이어 군사정권이 군정 연장을 시도하고, 민족적 자존심을 버리고 원칙 없는 한일회담을 강행하자 사상계는 1962년 7월부터 군사정권의 경제정책에 대해 “의욕의 과잉”, “체계화되지 않은 혼합경제 정책으로 혼란 가중”을 들어 비판하기 시작했다. 1년 2개월의 밀월이 박살 나는 순간이다. 군사정권도 중앙정보부를 설치해 대민 사찰을 강화하고, 정치활동정화법을 제정해 정적들을 숙청해 나갔다. ●‘민생 vs 국가부흥’ 가치 엇갈려 정 교수는 “사상계는 경제개발안에서 일자리 창출 등 ‘민생’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군사정권은 ‘민족과 국가의 부흥’이라는 전체주의적 가치에 역점을 뒀다. 또한 사상계가 민주화와 산업화의 동시 진행을 요구한 반면, 군사정권은 산업화 이후에 민주화를 주장해 산업화가 진행되는 동안 형식적인 민주주의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게 됐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현재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극심한 양극화나 민주주의의 제한 등은 모두 선(先) 산업화, 후(後) 민주화를 주장했던 박정희 정권 때부터 배태된 것”이라며 “파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사회문제를 그때그때 해결하지 못한다면 파이를 다 키운 뒤에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1960년대 경제개발의 교훈”이라고 지적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프로야구] “10구단 재논의”

    프로야구 10구단 창단이 새 국면을 맞았다. 창단 유보를 줄기차게 고수했던 구단들이 창단 논의를 재개하는 쪽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구단 대표들은 10일 서울 도곡동 야구회관에서 제6차 이사회를 열고 10구단 창단과 관련한 재논의 시점과 일정 등 구체적인 방안을 한국야구위원회(KBO)에 위임하기로 했다. 지난달 임시 이사회에서 아마추어 야구의 여건 미성숙과 프로야구의 열악한 인프라 등을 내세워 10구단 창단 논의를 당분간 유보하기로 한 이사회가 불과 한 달도 안 돼 창단 논의를 재개하는 쪽으로 급선회했다. 프로야구선수협회(선수협)와 일구회 등 전 야구인들은 물론 팬들의 항의까지 빗발치는 등 급속도로 악화된 여론을 의식한 것으로 풀이된다. 양해영 KBO 사무총장은 “10구단 창단과 관련해 진전된 제안이 있었다.”면서 “당장이라도 올스타전 보이콧을 선언한 선수협 측과 만나 협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진전된 내용이나 선수협과의 협의 일정 등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이어 “리그는 물론 올스타전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데 모두가 공감했다.”고 덧붙여 지난달 유보 결정보다 전향적인 내용이 담겨 있음을 내비쳤다. 이사회에는 넥센 대표를 제외한 모든 이사가 참석했고 10구단 창단에 반대했던 삼성·롯데·한화 등 일부 구단은 이날 진전된 내용에 반대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선수협은 몇 시간 뒤 서울 마포동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사회의 진전된 제안을 받았다. 내용은 밝힐 수 없지만 불만인 것도 있고 실현 가능성에 의문이 드는 부분도 있다.”며 “오는 13일 선수들과 협의해 올스타전 보이콧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선수협은 10구단 창단이 무산될 위기에 놓이자 21일로 예정된 올스타전 거부를 선언했다. 이사회의 제안이 여론을 일시적으로 무마하기 위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시선도 여전하다. 한편 이사회는 이날 NC 등 9개 팀이 참가하는 내년 정규리그 일정을 팀당 128경기, 모두 576경기로 확정했다. 홀수 구단 운영에 따라 일부 구단이 경기수를 늘릴 것을 주장했으나 이동거리 증가와 월요일 경기로 인한 경기력 저하 등이 우려된다는 현장 의견을 수렴해 기존안 대로 처리했다. 또 실행위원회에서 상정한 신인지명제도 개선과 관련해서는 연고지역 신인 우선지명 방식인 1차 지명제도를 부활하기로 결정했다. 김민수 선임기자 kimms@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19) 류성룡과 조헌

    [선택! 역사를 갈랐다] (19) 류성룡과 조헌

    임진왜란을 앞두고 비둘기파였던 류성룡(1542~1607)과 영조 때 영의정에 추증된 매파 조헌(1544~1592)은 원칙주의자로서 서로 갈등했다. 전쟁 후 류성룡은 ‘징비록’을 저술했고,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전사한 조헌은 그의 제자 안방준의 기록 ‘은봉야사별록’을 통해 잘 알려졌다. 이 두 개의 문헌이 일본에 전래되면서 류성룡과 조헌에 대한 해석은 제2라운드를 맞이한다. ●임진왜란 직전의 일본의 망상 100년 이상 이어지던 일본의 분열상태를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는 중국 명나라는 물론 인도까지 정복하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명나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조선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도요토미는 조선과는 싸울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에 자리한 쓰시마(대마도)의 지배자인 소씨(宗氏)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소 요시시게(1532~1589) 등에게 조선 국왕이 직접 자신에게 항복하러 오게 하라고 지시했다. 조선 국왕이 순순히 항복을 하면 조선과는 전쟁을 하지 않고 조선군을 앞세워 명나라를 칠 것이요, 아니면 조선을 공격하겠다는 것이었다. 쓰시마와 조선의 관계는 도요토미가 생각하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그리고 만일 반도와 열도 사이의 관계가 악화된다면, 그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하는 쓰시마로서는 이래저래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될 터였다. 그래서 쓰시마 측은 조선 국왕 대신 조선 측의 사절단을 오도록 하겠다고 도요토미에게 아뢴 뒤, 이번에는 조선 조정측에 사절단의 파견을 간청했다. 사절단만 보내주면 두 나라 사이에서 전쟁은 피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비둘기파와 매파의 이견 사절단을 파견해 달라는 쓰시마 측의 요청을 받은 조선 조정의 의견은 갈라졌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서 거부했지만 쓰시마 측은 끈질기게 매달렸다. 당시 대제학이던 류성룡은 속히 결론을 내려서 두 나라 사이에 틈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현장에서 동분서주한 실무가였다. 그러나 그는 임진왜란이라는 일본의 침략 전쟁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일본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적대 정책을 펴서는 안 되며, 국내적으로는 전쟁을 대비하고 대외적으로는 능숙한 외교로 전쟁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날의 잘못을 징계해서 뒤의 어려움을 대비한다.”는 뜻을 제목에 담은 ‘징비록’의 첫머리에 성종에게 신숙주(1417~1475)가 남긴 “일본과의 화의를 잃지 마소서.”라는 유언을 실은 것이나, ‘징비록’에서 “왜”라는 호칭과 함께 “일본”이라는 정식 국호를 사용한 데에서도 실무가 류성룡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반면, 조헌은 쓰시마 측의 사절단 파견 요구를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조선과 명나라에서는 일본의 상황을 도요토미가 선왕(先王)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조헌은 신하의 신분으로 임금의 자리를 빼앗는 불의를 저지른 도요토미가 통치하는 일본과는 절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1591년 귀국한 황윤길(1536~?)과 김성일(1538~1593) 등이 가져온 도요토미의 국서 내용에 분개한 조헌은 일본 사신을 참수하고 그 시체를 여러 나라에 보임으로써 불의의 일본을 정벌할 연합군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김상헌(1570~1652)의 ‘청음집’에 적혀 있다. 이처럼 전쟁 발발 목전의 조선 조정에서는 비둘기파와 매파가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립은 전쟁의 위기가 현실화된 상황에서 어떤 나라에서든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조선 군사정보, 일본으로 유출 두 사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일어나고 말았다. 조헌은 전쟁이 일어난 1592년에 고경명·영규 등과 함께 의병군을 이끌고 참가한 금산 전투에서 전사했고, 류성룡은 전쟁이 끝난 1598년에 관직을 삭탈당하고 하회로 낙향했다. 전쟁을 막고자 한 두 사람은 전쟁 중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비슷하게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그래도 류성룡은 ‘징비록’을 집필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조헌보다는 행운이었다. 그 대신, 조헌은 비장한 최후를 맞이함으로써 후세에 변호인을 얻을 수 있었다. ‘은봉야사별록’을 쓴 안방준(1573~1654)도 그 중 하나이다. 그는 하늘이 조헌으로 하여금 살아서는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고 죽어서 후세에 이름을 남기도록 했다며 슬퍼했다. 실로 조헌을 대신하여 그의 변론문을 썼다고 하겠다.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한 ‘징비록’과 ‘은봉야사별록’은 임진왜란을 온몸으로 겪은 류성룡과 조헌, 안방준에 대한 귀중한 증언임과 동시에, 전쟁 당시 조선 측의 상황을 생생하게 담은 중요한 군사적 문헌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헌이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약탈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쟁 후 검은 커넥션을 통해 일본으로 유출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두 문헌이 조선국 바깥으로 유출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683년에 작성된 쓰시마의 장서목록에 이 두 문헌이 나란히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유출 시기는 그 이전으로 짐작된다. 유출된 지역은 아마도 왜관으로 생각된다. ●‘징비록’ 17세기 日 지성계에 큰 영향 근세 일본에서 이야기되던 임진왜란 담론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단계는 임진왜란에 참전한 당사자나 그 주변인이 남긴 증언과 문헌에 의거한 것으로, 여기에는 오로지 일본 측 시각만이 담겨 있다. 그러다가 17세기 초기에 중국 명나라에서 제작된 ‘양조평양록’과 같은 문헌이 일본에 유입되면서, 일본인들은 임진왜란 때 자신들과 싸웠던 적국의 내정(內政)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러나 명측의 문헌에는 자국의 군대가 한반도에 진입하기 이전 단계인 1592년의 전황을 비롯하여 조선 측의 상황이 소략됐고, 조선에 대한 명의 편견 역시 상당했다. 그 결과 일본과 명나라의 문헌을 종합해서 편찬된 ‘조선정벌기’ 등의 문헌에서는, 임진왜란은 일본과 명나라 사이의 전쟁이고 조선은 전쟁의 무대이자 수동적인 역할자에 지나지 않았다는 식으로 기록된다. 역사는 반복돼 1895년 청일전쟁 이후에도 되풀이된다. 17세기 중기 조선의 임진왜란 문헌 몇 점이 일본에 유입된다. 그 가운데 일본 지식인들이 주목한 것은 류성룡의 ‘징비록’이었다. ‘징비록’을 통해 명측 문헌에서 보이는 조선 측에 대한 편견 몇 가지가 수정되고, 조선 측에도 전쟁 영웅들이 다수 존재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일본에 알려졌다. 이순신이 일본에서 ‘영웅’으로 인식된 것도 ‘징비록’의 영향이었다. 비록 임진왜란을 명과의 일대 결전으로 바라보고 싶어 한 근세 일본인들의 관점을 ‘징비록’ 하나가 뒤집을 수는 없었지만, ‘징비록’이 근세 일본 사회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인상을 남긴 것 역시 사실이었다. 예컨대, 1695년 교토에서 출간된 일본판 ‘징비록’의 서문을 쓴 유학자 가이바라 엣켄(1630~1714)은 당시까지 일본에 존재하던 임진왜란의 기록 가운데 ‘징비록’과 ‘조선정벌기’만이 ‘실록’(實錄)이며 다른 것들은 번잡하여 볼 것이 없다고 평하였다. ●日 ‘은봉야사별록’으로 ‘징비록’ 비판 물론 인기를 끌면 반발도 생기는 법. 18세기 후기가 되면서 ‘징비록’을 폄하하는 문헌들이 일본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왜관에서 근무한 경험을 지닌 쓰시마의 학자가 쓴 ‘조선정토시말기’라는 책의 서문에서, 아사카와 도사이(1814~1857)는 류성룡이 “당시 중책을 맡고 있으면서 나라를 그르치고 백성에게 해를 입힌 죄를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에 거짓을 적어 사람들을 속였다.”고 주장한다. 그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징비록’을 ‘실록’이라고 칭송한 가이바라 엣켄을 비판하기 위함으로 보이지만, 어쨌든 상반된 견해가 이 시기의 일본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아사카와는 1849년 일본에서 간행된 ‘은봉야사별록’에도 서문을 실었다. 여기서 그는 “임진왜란 직전에 조선 국왕 선조는 음락했고 조정에서는 류성룡·이덕형 등의 간신이 발호했기 때문에 일본군의 침략에 대응하지 못하고, 명나라의 도움을 기다려서 간신히 나라를 되살릴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양조평양록’의 기사를 끌어와 류성룡과 ‘징비록’을 비판한다. ‘은봉야사별록’를 간행한 것은 미토학(水戸学)이라 불리는 에도시대 후기의 일본중심적 학파의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아사카와처럼 ‘징비록’에 대한 불신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은봉야사별록’을 함께 이용함으로써 ‘징비록’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격하시키는 경향을 보였다. 류성룡과 조헌의 대립과 갈등은 ‘징비록’과 ‘은봉야사별록’이라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임진왜란 문헌에 실려 일본 학자들에게 알려졌다. 이 두 사람 중 어느 한 편을 들 필요가 없던 일본 학자들은 두 문헌을 비교하며 냉정한 눈으로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 측 상황을 서술했다. 조선 내부의 갈등이 근세 일본에서 재현되어 저들에게 편리하게 이용된 씁쓸한 역사적 사실이라 하겠다. 예를 들어, 가와구치 조주(1773?~1834)는 임진왜란 관련 문헌을 종합하여 임진왜란을 연대순으로 편찬한 ‘정한위략’을 간행하였다. 그는 이 문헌의 기본틀을 잡기 위해 ‘징비록’의 서술에 크게 의존하면서도, 이이·조헌과 대립한 류성룡을 비판하는 ‘은봉야사별록’의 구절을 여럿 가져와서 ‘징비록’과 류성룡을 비판한다. 예를 들어 류성룡이 간신이었다는 ‘양조평양록’의 글에 대해 ‘은봉야사별록’에서도 류성룡을 마찬가지로 비판하고 있는 걸 보니 이는 사실이었던 것 같다고 적고 있다. 다만, ‘징비록’에서 우국충정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니 류성룡은 처음에는 나라를 그르쳤으나 전쟁이 일어난 뒤에 반성했음을 알겠다고도 적고 있다. 김시덕(고려대 일본연구센터 HK연구교수)
  • 사람 해치는 괴물 물고기 ‘파쿠’ 美호수서 발견

    남성의 고환을 물어뜯어 사람을 살해한 것으로 악명을 떨친 파쿠 물고기(Pacu fish)가 미국 일리노이주의 한 유명 호수에서 잡혀 파문이 일고 있다. 파쿠 물고기는 이빨이 사람과 유사해 국내에서는 ‘인치어’로 알려져 있으며 남미 아마존에 주로 분포하는 희귀종이다. 이번에 잡힌 파쿠 물고기는 약 25kg으로 지난달 초 한 낚시꾼에 의해 처음으로 포획됐으며 일리노이주 환경당국에 의해 파쿠 물고기로 확인됐다. 호수의 관리인 짐 캐드웰은 “사람같은 이빨과 큰 크기에 깜짝 놀랐다.” 면서 “이 물고기는 호수에 사는 토종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같은 소식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자 현지 주민들은 충격에 빠졌다. 파쿠 물고기가 그 기이한 생김새와 더불어 사람을 해친 적이 있다는 것이 알려졌기 때문. 실제로 지난해 파푸아뉴기니에서 파쿠 물고기가 남성의 고환을 물어뜯어 2명을 살해한 바 있다. 일리노이주 당국은 “파쿠를 기르던 누군가가 호수에 몰래 방생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면서 “더 많은 파쿠가 호수에 있는지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한편 파쿠 물고기는 식인물고기로 알려진 ‘피라냐’의 친척 뻘로 주로 견과류와 해초를 먹고 살며 특히 알몸으로 헤엄치는 남자아이들의 고환을 먹이로 착각해 공격하기도 해 ‘볼 커터’(Ball Cutter)라고도 불린다.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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