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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색다른 인터뷰] 박근혜·MB 때보다 후퇴한 대입 개편안…이게 교육인가

    [색다른 인터뷰] 박근혜·MB 때보다 후퇴한 대입 개편안…이게 교육인가

    “2022학년도 대입 개편안은 교육계 대참사다. 이게 교육인가.”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 지난 15일, 서울 청계광장에 촛불이 켜졌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등 언론이 ‘진보 교육단체’로 규정한 곳들이 모였다. 이들은 ‘문재인 대통령 교육공약 되찾기 국민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연대해 이날부터 11월 10일까지 매주 토요일 촛불문화제를 열기로 했다. ‘촛불 정부’가 대통령의 교육 공약을 포기하자 이를 되살리기 위해 교육 단체가 촛불을 든 건 역설적이다. 국민운동을 주도한 송인수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공동대표는 “박근혜·이명박 정부 때도 대입 제도를 이처럼 퇴행적으로 돌리진 않았다”고 비판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상대평가 유지 및 수능 전형 확대 등을 핵심으로 한 ‘2022학년도 대학입시 개편안’은 공약 파기이자, 20여년간 차근차근 쌓아 온 교육 개혁의 방향을 정반대로 되돌린 것이라는 게 송 대표의 판단이다. 집회 하루 전인 14일 서울신문과 인터뷰를 하던 그는 “1년에 학생 300여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걸 언제까지 방관해야 하느냐”며 펑펑 울었다.→‘2022학년도 대입 개편안’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상대평가·경쟁적 줄세우기 방식인 수능에 오히려 힘을 실어 줬다는 점에서 시대 흐름과 맞지 않는다. 지금 기업들은 혁신 역량이 있는 인재를 뽑으려 하는데 그 핵심이 협업 능력이다. 일등부터 꼴찌까지 줄 세우는 상대평가는 협업을 가로막는다. 마이크로소프트(MS)사는 스티브 발머가 회장일 때 직원을 상대평가했다. 상위 20%는 인센티브를 주고 하위 10%는 퇴출시켰다. 결과는 참혹했다. 직원들이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욕심에 정보를 동료와 공유하지 않았다. 구글과 경쟁하는 대신 동료끼리 싸웠다. MS는 2013년 상대평가를 중단했다. 세계적 기업들은 이제 절대평가로 인사 관리를 한다. 기업에서 요구하는 협업능력 등 혁신 역량은 초·중·고교 때부터 키워야 한다. 상대평가 체제 속에서는 그 능력을 키울 수 없다. 수능과 학교 시험을 절대평가로 바꿨어야 했다. 그런데 이번 대입 개편안은 상대평가제를 고수했다. 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개편안이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보다 후퇴한 것인가. -그렇다. 1995년 김영삼 정부가 했던 5·31 교육개혁 이후 23년간 ‘아이들을 표준화된 성적에 따라 한 줄로 세우는 대신 다양한 능력에 따라 여러 줄을 세우고, 암기 지식 대신 미래사회에 필요한 능력을 키워 주자’는 기조로 교육 정책이 만들어져 왔다. 관료들도 세계적 흐름을 아니까 이를 거스르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 때도 ‘2015개정교육과정’을 만들어 융·복합 능력을 키우도록 문·이과 구분 등 칸막이를 없앴다. 교육과정 변화로 수업 내용·방법이 달라졌으니 평가 제도도 이에 맞게 고쳤어야 한다. 그런데 이번 결정으로 수능은 상대평가로 남긴 채 수능 위주 선발 비율을 더 늘렸다. 학생들이 수업을 듣는 대신 수능 대비 EBS 문제풀이를 하게 됐다. →수능 비율을 높여 대입 공정성을 강화해 달라는 요구가 어느 때보다 컸기 때문에 정부로서도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지 않은가. -공정하기로 따지면 시험 출제는 학교보다 국가가 하는 편이 낫고, 채점은 사람(교사)보다 기계가 하는 게 낫다. 수능은 국가가 낸 시험을 기계가 채점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불과 10년 전 참여정부 때만 해도 국민들은 수능보다는 교사가 평가하는 내신으로 대학 가는 방식을 더 원했다. 지난 10년 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첫째, 국민들이 보수정권 시절 횡행한 권력형 비리를 겪으면서 “모든 곳에는 무임승차가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양극화가 심각해졌는데 패자를 위한 복지 정책은 강화되지 못해 그야말로 정글사회가 됐다. ‘살인적인 경쟁을 감수할 테니 공정하게만 평가해 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두 번째는 국민들이 내신 전형의 발전된 형태인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을 믿지 못하게 됐다. 비교과 요소가 복잡하고 어려운데, 정보를 얻는 게 쉽지 않고 준비할 게 너무 많았다. 내신 교과 평가도 못 미더운데 간간이 학생부 비리가 터졌다. 그래서 공정한 듯 보이는 수능 위주로 학생을 뽑아야 한다는 요구가 많아졌다. →국민의 바람을 볼 때 대입 개편 방향이 꼭 틀렸다고 할 수 없지 않나. -국민의 공정성 요구는 맥락이 있고, 정당하다. 하지만 국가는 이를 일차방정식이 아닌 고차방정식으로 이해하고 처방을 내놨어야 한다. 공정성 요구와 함께 한국을 둘러싼 세계적 상황, 국가의 미래 전략, 관련 교육정책들과의 연계 등을 고려해 답을 찾았어야 한다. 길이 없지 않다. 예컨대 학종 공정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수상 경력·자율동아리 등 학생부의 비교과 요소를 걷어내면 된다. 이 부분은 수능 지지자와 학생부 전형 지지자끼리 합의가 됐다. 하지만 교육부가 숙의제를 통해 정한 새로운 학생부 형태는 이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수능 점수가 좋은 일부 아이만 선택하고 나머지는 버리는 방식의 공정은 옳지 않다. 학령인구가 주는 마당에 모든 아이가 각자의 재능에 따라 살아갈 힘을 보장해 주는 쪽으로 교육하는 게 진짜 공정이다. 공정을 바라는 사회 요구는 대입만 건드려서는 풀 수 없다. 기업 채용 절차 때 관련 법 제정을 통해 출신학교 차별을 없애고 실력에 따라 선발하며, 권력형 부정 등 채용 비리는 단호하게 처벌하고, 직업 간 임금격차를 최소화하는 등의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2022 대입 개편안 결정 이후 학교 현장의 혼란이 감지되나. -‘2015 개정 교육 과정’이 현 고1부터 적용되면서 교사들은 (학생 참여형 수업 도입 등) 수업 방식을 바꾸려 했는데 대입 개편안 발표 이후 멈칫하고 있다. ‘대입에서 수능 영향력이 커지면 그냥 예전처럼 5지선다 문제풀이 수업만 하면 되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또 고교학점제(대학처럼 학생이 희망진로·적성에 따라 원하는 수업을 듣고 일정 학점을 이수하면 졸업하는 제도)를 시범 실시하는 연구·선도학교 105곳의 교사도 힘이 빠졌다. 학점제에 맞춰 커리큘럼을 짜놨는데 학점제 도입이 3년 연기된 데다 공부해야 하는 수능 선택 과목이 늘어 대입에 더 불리해진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대입이 이런 방향으로 가면 고교는 문 닫아야 한다. 수능에 최적화된 교육을 제공하는 곳은 인강(인터넷강의) 사교육 업체다. →대입 제도 개편 때 보인 혼란은 정권 내부 능력 부족 탓인가. -여러 경로로 확인해 보니 청와대는 혁신 교육에 대한 철학도, 로드맵도 없고 이를 실현할 인력도 없다. 청와대 사회수석실이 부동산·여성·노동 등과 함께 교육까지 담당한다. 김수현 사회수석은 부동산 전문가다. 교육은 부동산 문제보다 해결이 10배 더 어렵다고 한다. 경험 없는 사람이 ‘학력고사 시대가 좋았어’라거나 ‘정시 확대하면 최소한 표는 깎아 먹지 않겠다’는 생각에 이런 결정을 했다고 본다. →김상곤 교육부 장관의 잘못은 무엇인가. -김 장관이 교육 정책의 바람직한 방향을 몰랐던 게 아니다. 그런데 청와대에 보고할 때마다 (수정하라는 상징적 의미의) 빨간 줄이 쳐져서 왔다고 한다. 김 장관의 잘못은 이때 자기 직을 걸고 싸우지 못했다는 점이다. 대통령 통치를 보좌하겠다는 마음이 커서 각을 세우지 못했다. 교육부 장관으로서 정치가 아닌 아이들을 지켰어야 했다. →새 교육부 장관 후보자인 유은혜 의원에게도 기대가 없나. -유 의원이 생각하는 정책 방향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유 의원 역시 갈등에 맞서는 타입이 아니다. 지금은 통찰력을 가지고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소신껏 일하는 교육 수장이 필요하다. 여전히 컨트롤타워는 청와대다. 현 정부 들어 교육수석이 없어졌는데 살려야 한다. →교육 정책의 흐름을 다시 돌릴 수 있다고 보나. -쉽지는 않다. 아이러니하지만 희망이라고 한다면 세계 흐름이나 기업이 바라는 인재상과 우리 교육 정책이 너무 달리 간다는 점이다. 이렇게 퇴행의 길로 가다 보면 깨닫게 될 것이다. 기업이 창의적이고 소통·협업 능력을 갖춘 인재를 바라는데 이를 키워줄 학교 교육만 반대로 갈 수는 없다. 지금 교육 정책은 포식자가 무서워 모래에 고개를 처박은 타조와 같다. →‘숙명여고 내신 유출 의혹’ 이후 학부모들이 매일 집회를 여는데 어떻게 보나. -교육계 비리는 다른 영역 비리보다 훨씬 심각하게 봐야 한다. 교육자의 비리로 발생하는 피해는 다음 세대까지 간다. 교사가 잘못하면 ‘학교 선생님인데 좀 봐주지…’ 하는 인식으로 솜방망이 처벌을 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교육자 비리가 밝혀지면 다른 건보다 몇 배 더 혹독하게 처벌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중한 비리에 연루된 교사가 있다면 파면시키고, 그런 일이 반복되면 사립학교는 재단을 바꿔야 한다. 다만 일부 비리를 근거로 ‘교사는 주관적으로 평가하지 말고 컴퓨터로만 평가하라’고 해서는 안 된다. 교사가 의사나 법관처럼 전문성에 기반해 평가하지 못하면 미래가 없어진다. 비리 처벌과 교사의 평가권은 나눠 생각해야 한다. →아이를 입시지옥으로 밀어 넣고 싶은 부모는 없다. 그러나 입시에 실패하면 아이들이 평생 차별의 지옥에서 살아갈까 봐 두려워한다. -입시지옥에서 아이를 건져내면 그 아이가 그냥 멍하니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밟는다. 생각이 깊어지며 독립적 의사 결정을 할 줄 알게 된다. 미래 사회가 원하는 인재도 이런 아이들이다. 기업의 평균 수명은 8년 정도라고 한다. 갑자기 길거리에 나앉았을 때 다음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정신의 힘을 갖추는 게 곧 실력이다. 이는 초·중·고교 때부터 길러야 한다. →단체 창립한 지 올해로 10년 됐는데 궁극적 목표가 무엇인가. -대한민국에서 입시 경쟁 탓에 죽는 아이가 한 명도 없는 세상, 사교육비 1만원도 쓸 필요가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이 목표를 말하면 사람들은 “말이 되느냐”고 냉소한다. 그러나 북미·남미·유럽 등 다른 나라는 이미 다 누리는 세상이다. 서울의 한 사교육 과열 지역에 아파트를 보러 가면 부동산 업체들이 “이 동네에서 (투신) 사고가 없는 아파트는 찾기 어려워요”라고 한다더라. 한 해 300여명의 아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기성세대는 아이들이 경쟁 속에서 죽어 가도록 한 가해자다. 이창구 사회부장 window2@seoul.co.kr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송인수는 누구인가 1964년 강원 원주에서 태어났다. 학창 시절 닭장사를 하던 어머니를 거들면서 공부해 한 국립 사범대 영어교육학과에 입학한다. 졸업 뒤에는 서울 신림고·삼성고·구로고 등을 돌며 13년간 교사로 일했다. 학생들에게 불법 찬조금을 걷는 문제를 두고 부장 교사와 갈등을 빚는 등 교직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고 한다. 2000년 기독교 신자인 동료 교사들과 ‘좋은교사운동’을 만들었고, 2003년 퇴직 뒤 같은 단체 대표를 맡아 본격적으로 교육 운동에 뛰어들었다. 2008년 6월에는 당시 참교육학부모회장이었던 윤지희씨와 의기투합해 ‘묻지마식 사교육 관행’을 없애려는 목적으로 교육시민단체인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세웠다. 사걱세는 구호 대신 실증적 데이터에 기반해 사교육 문제를 비판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4년에는 ‘공교육 정상화 촉진 및 선행교육 규제 특별법’(초·중·고 정규 교육과정에서 배울 내용을 방과후수업 등에서 미리 배울 수 없도록 한 법) 제정을 주도하기도 했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양기탁 구속·의연금 횡령 의혹에 화병 난 베델 ‘하늘나라로’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양기탁 구속·의연금 횡령 의혹에 화병 난 베델 ‘하늘나라로’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해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은 1907~1908년 영국 법원에서 두 차례 재판을 받았다. 그가 중국으로 복역하러 간 사이 일제는 양기탁을 구속하고 베델에게도 국채보상 의연금 횡령 의혹을 덧씌웠다. 결국 베델은 신보를 살리고 자신의 명예도 회복하려 동분서주하다가 스트레스로 갑작스레 숨을 거뒀다.●양기탁 구속으로 국채보상운동 동력 약화 베델이 1908년 6월 영국 법원의 두 번째 재판으로 구속돼 상하이에서 3주 금고형을 마친 다음날인 7월 12일. 한 일본 경찰이 밤늦게 서울 광화문 대한매일신보사 사옥을 서성거렸다. 신보 건물이 영국인 치외법권 지역이어서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던 그는 평소 알고 지내던 양기탁(1871~1938)에게 “잠깐 물어 볼 말이 있다”며 밖으로 불러 냈다. 건물 안에 있던 양기탁이 무심코 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경찰은 그를 체포했고 곧바로 경시청에 가뒀다. 국채보상 의연금을 횡령했다는 혐의였다. 신보의 두 기둥인 베델과 양기탁에 대한 일제의 역습이었다. 일본은 베델이 형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기 전에 양기탁을 구속해야 한다고 봤다. 베델이 조선에 있을 때 그를 구금하면 분명 영국 정부에 도움을 청할 것이 분명했다. 결국 일본은 베델이 구속됐다가 조선에 오기 직전 양기탁을 잡아들였다. 통감부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1841~1909)도 양기탁 구속 이틀 뒤인 14일 돌연 해외로 휴가를 떠났다. 그가 이번 일에 간여하지 않은 것처럼 꾸미려는 의도였다. 일본은 양기탁이 조선인이기에 베델 말고는 어느 영국인도 그의 신병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으로 봤다. 하지만 영국 총영사 헨리 코번(1871~1938)은 이 사건이 영국인 소유 신문사에서 벌어진 일이어서 이를 묵과하지 않았다. 양기탁은 구속됐다가 구타 등으로 다쳐 병원에 이송되던 중 탈출해 신보사로 숨었다. 일본은 양기탁의 인도를 요구했지만 코번은 이를 거부하고 그에 대한 고문을 끝까지 막았다. 결국 양기탁은 코번의 도움 덕분에 인도주의적 환경에서 재판을 받아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코번은 영국의 동맹국인 일본과 외교 갈등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총영사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그해 8월 런던으로 돌아갔다. 6개월쯤 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외교관 자리에서 물러났는데 당시 49세였다.●금고형 이후 달라진 여론… 당황한 베델 베델은 7월 11일 금고형을 마치고 17일 조선에 돌아왔다. 하지만 불과 몇주 사이에 자신을 바라보는 조선인들의 시선이 크게 차가워졌음을 깨닫고 당황했다. 그와 양기탁에게 도덕적 타격을 입혀 신보와 KDN을 무력화하려던 일제의 공작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그가 조선에 들어올 무렵부터 한국인이 운영하던 친일 신문들은 일제히 “베델과 양기탁이 국채보상 의연금을 횡령했다”는 의혹을 다룬 기사를 쏟아냈다. 신보를 통해 자신의 무고함을 해명하고 국채보상금 총합소에서 나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지만 일본에 협력하는 친일 매체들이 만들어낸 ‘파렴치범’ 프레임에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애초 국채보상운동은 한계가 명확했다. 국민들의 순수 모금만으로 조선의 1년치 국가 예산에 맞먹는 1300만원을 모으겠다는 생각 자체가 현실성이 떨어졌다. 설사 모금운동이 일본에 위협이 될 만한 수준으로 성장하더라도 일본은 언제든 ‘화폐개혁’ 카드를 꺼내 그간 모은 의연금을 휴지조각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런 불안감이 내재된 상황에서 베델과 양기탁의 국채보상금 횡령 의혹까지 생겨나자 운동의 동력이 크게 떨어졌다. 이 둘에 대한 국민적 불신도 커졌다. 실제로 8월 10일에 열린 국채보상금 총합소 특별위원회에서 회계감사 이강호는 “베델이 의연금 운영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조선인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겁박했다. 지금보면 적반하장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당시 베델의 횡령 의혹에 대한 국민적 여론이 좋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베델은 자신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같은 달 27일 열린 의연금 총합소 평의회에 직접 참석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는 이 자리에서 인생 최악의 굴욕감을 맛봤다. 그가 감옥살이를 하고 온 사이 평의회 의장 자리를 한석진 국민신보 사장이 차지하고 있어서였다. 국민신보는 한국인이 창간한 대표적인 친일지이자 매국단체 일진회(1904~1910)의 기관지였다. 1907년 7월 고종이 일본의 강압에 못 이겨 왕위를 순종에게 넘기자 시위 군중들이 이 신문사의 사옥과 인쇄 시설을 부수기도 했다. 일진회는 항일단체로 출발했지만 단체 간부들이 대거 일본에 매수돼 친일단체로 탈바꿈했다. 그런 신문사의 사장이 국채보상 총합소의 최고 책임자가 됐다는 것은 사실상 국채보상운동이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갔음을 뜻했다. 그간 친일 행적을 무릎 꿇고 사죄해도 모자랄 인물이 되레 조선의 독립을 돕다가 감옥까지 다녀온 자신을 비난하며 파렴치범으로 몰아가는 모습에서 끝없는 환멸을 느꼈을 것이다. 일부 조선인들이 자신을 ‘의연금에 손을 댄 좀도둑’으로 취급하는 상황에 모멸감도 컸을 것 같다. 이에 대해 베델의 부인 메리 모드 게일(1873~1965)은 베델 사후인 1910년 8월 영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남편(베델)은 그 일에 대해 단 한 번도 조선인을 원망하거나 서운해하지 않았다. 그저 일본과의 싸움에서 반드시 겪어야 할 운명으로 생각했다”고 밝혔다.●中 언론 “베델, 횡령 실토” 의도적 오보 8월 30일 중국 일간지 ‘노스차이나 데일리뉴스’가 “베델이 국채보상금 횡령 혐의를 자백했다”는 기사를 냈다. 도쿄 특파원이 일본 당국자의 말을 듣고 쓴 기사였다. 해당 기사는 일본을 중심으로 중국과 동남아에서 발행되던 영자 신문에 빠르게 퍼졌다. 당시 조선에서 국제적으로 가장 유명한 인사였던 베델은 이 기사 하나로 ‘순수한 열정을 지닌 조선 독립운동가’ 이미지에 치명상을 입었다. 베델은 곧바로 중국 법원 등에 이 신문사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확인 결과 해당 기사는 일본 국민신보 기자가 영자신문 특파원을 가장해 쓴 것이었다. 일본의 공작이었다. 베델은 소송에서 이기며 자존심을 회복하지만 이미 그에 대한 신뢰는 크게 무너진 뒤였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몸과 마음의 건강을 모두 잃었다. 일제의 압박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독주와 담배로 달랜 탓이 컸다. 평소에도 몸을 돌보지 않던 성격이었던데다 오랜시간 명예훼손 소송과 신보 재정 지원에 나섰던 탓에 그는 이듬해인 1909년 5월 1일 심장 팽창 증세로 숨을 거뒀다. 겨우 서른일곱살이었다. 영국 출신 역사연구가 에이드리언 코웰(62·싱가포르 거주)은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조선을 구하려고 했던 이유를 이른바 ‘젠틀맨’(올바른 일에 목숨을 거는 신사도 소유자) 정신에서 찾았다. 코웰은 “베델은 당시 최고 수준의 학교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었고, 영국 성공회 전도사의 딸인 어머니로부터 ‘올바름의 추구’라는 종교적 가치도 전수받았다. 이것이 훗날 조선에서 그의 삶을 지배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서울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싱가포르 오경진 기자 oh3@seoul.co.kr
  • [어떻게 사법이 그래요] 있지도 않은 車 압수수색… 20대의 6년을 피고인으로 살았다

    [어떻게 사법이 그래요] 있지도 않은 車 압수수색… 20대의 6년을 피고인으로 살았다

    2013년부터 6년, 나청년(27·가명·유학생)씨의 20대 절반 이상이 허비됐다. 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1부(김영문 현 관세청장이 당시 부장)가 2013년 11월 발표한 ‘미국 대입시험(SAT) 기출문제 유출 수사’에 연루된 피고인 24명(법인 포함) 중 한 명이 되면서다. 청년씨의 재판은 1심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공소유지용 핵심 증거를 재판에 제출 못하자 꼼수를 쓴 검찰, 검찰이 공소유지 논리를 찾을 때까지 무한정 대기한 법원 때문이었다. 법원은 검찰 사정은 살뜰하게 봐줬지만, 긴 재판 때문에 미국 대학 학기가 열릴 때마다 재판부에 여권 발급 허가를 새롭게 받아야 했던 청년씨 사정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나마 6년 동안 별별 검·판사의 행태를 본 게 인생공부는 됐다. 정식 사법 공조 대신 김앤장을 통해 받은 미국 기업의 문건을 법정 증거라며 밀어붙인 검사, ‘재판이 길어지면 피고인 손해’라며 슬쩍 검사 편에 서던 판사…. 공통점도 찾았다. 기소했지만 증거가 없을 경우 피고인의 범행 인정(자백)을 유도해서라도 유죄로 만들겠다는 결의, 임수빈 변호사가 저서에서 ‘무오류의 신화에 갇혀 잘못을 반성·번복하지 않는 검찰’이라고 비판한 지점을 청년씨는 직접 겪었다.20대 초반 청년씨는 미국 명문대 7곳에 이미 동시 합격했지만, 장학금을 받아야 했기에 SAT 성적을 더 높이려 공부 중이었다. 문제은행 출제 방식인 SAT를 대비하려면 기출문제를 많이 풀어야 했기에 청년씨는 수백만원을 들여 SAT 시험지를 제공받는 방법을 알게 됐다. 수백만원이 부담이 된 청년씨는 한 어학원 장터 게시판에 기출문제 시험지를 판매한다고 올린 뒤 수십만원에 시험지를 판매했다. 이렇게 번 돈으로 다시 SAT 시험지를 구했고, 이것을 또 되팔았다. 검찰은 SAT 시험지 거래를 저작권법 위반으로 봤다. 이들이 기출문제를 거래함으로써 미국 칼리지보드사가 보유한 저작권을 침해했다는 논리다. 검사는 2013년 11월 작성한 공소장에서 ‘2010년쯤부터 2013년 3월쯤까지 또 다른 상위 기출문제지 판매 브로커로부터 SAT 기출문제지를 입수해 총 358회에 걸쳐 2억여원을 받은 후 자신의 이메일을 통해 SAT 기출문제지를 제공함으로써 영리를 목적으로 칼리지보드의 저작권을 복제, 배포해 침해했다’며 유학 준비 중이던 청년씨를 ‘브로커’로 규정했다. 기출문제지를 보낸 뒤 당시 같이 살던 할머니 명의 계좌로 돈을 받은 것을 검찰은 ‘차명계좌를 활용했다’고 적었다. 뿐만 아니라 할머니의 거래 내역까지 모두 범죄금액에 포함시켰다고 청년씨는 기억했다. 범죄액을 2억여원으로 정한 검찰은 청년씨가 사치스럽게 돈을 탕진했을 것이라고 짐작, 청년씨의 자동차 등을 압수물 목록에 기재했지만 20대 유학준비생에겐 애당초 자동차가 없던 터라 ‘있지도 않은 물건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이 발부되는 촌극도 벌어졌다. 더욱이 검찰은 내사 중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았는데, 수사 전 단계에서 압수수색 영장 발부는 형사소송법과 검찰사건사무규칙에 따라 원칙적으로 허용되면 안 된다. 이 대목은 재판 과정에서 또 다른 공방의 불씨가 됐다. #공판준비절차는 공판기일 전 쟁점을 정리하고 입증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검찰과 변호사 측이 주장 요지·증거 목록 등을 협의하기 위해 여는 심리를 말한다. 형사소송법 266조 12에선 ‘사건을 공판준비절차에 부친 뒤 3개월이 지난 때 공판준비절차를 종결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SAT 기출문제 유출 재판의 공판준비절차는 31개월 동안 4차례 판사가 바뀌며 9차례 진행돼 형사소송법에 위배됐다. 대대적인 수사 결과 발표와 함께 기소가 단행됐지만, 재판은 초반부터 삐걱거렸다. 저작권법 위반 혐의를 확인하려면 ‘원본’과 ‘침해물’을 대조해 검증해야 하는데, 검찰이 ‘원본’인 SAT 시험지를 저작권자인 칼리지보드로부터 확보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사건을 심리하는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형사18단독 담당 판사들은 하나같이 “원본이 없으면 공소기각(무죄 선고)을 하겠다”고 검찰 측에 으름장을 놓았지만, 검찰이 증거 확보를 못한 채 재판을 지연시킨 2년 7개월 동안 ‘무죄’를 결단한 판사는 없었다. 사건을 방치했다 1~2년 뒤 정기인사·사무분담 재배치로 재판부 교체가 4차례 이뤄졌다. 피고인 24명의 변호사들은 “원본이 없는 상태에서 이들이 푼 기출문제들이 원본 문제와 실질적으로 유사한지 검찰이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고 항변을 거듭했다. 결국 검찰은 재판이 시작된 지 1년 만에야 미국에 형사공조 요청을 했다. 그런데 검찰은 SAT 문제 저작권자인 칼리지보드가 아니라 SAT시험 관리감독 업체인 ETS에 사법공조를 요청했다. 형사공조협정에 따라 미국 FBI가 2016년 3월 미국 ETS 직원을 인터뷰한 조사서를 법무부에 보냈다. 이 조사에서 ETS는 “SAT 원본을 보내지 않겠다”고 답변했다. SAT 기출문제 유출 수사에서 검찰이 피해자로 규정한 칼리지보드와 ETS가 수사에 적극 협조하지 않은 이유는 미국과 한국의 저작권법 침해 사건 처리 방식이 다른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ETS 측 미국인은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 “미국에서는 이런 (저작권 침해 관련) 것은 민사소송으로 다룬다”며 고소하지도 않은 저작권 침해 사건을 한국 검찰이 수사해 형사재판을 하는 이유를 궁금해하기도 했다. #간이공판제도는 피고인이 범행을 인정(자백)하는 사건 재판을 신속하게 하기 위해 법정에서 증거조사 절차를 생략하는 제도다. 검사가 증거를 제시하고, 피고인 측이 반박하거나 설명하는 증거조사 절차 없이도 형사재판을 하게 만든 이 제도는 유신 시절인 1973년 1월 도입됐다. 사법 공조를 통해 SAT 시험지 원본 확보가 불가능하게 되자, 검찰은 다른 방식으로 과거 SAT 문제지 확보를 시도했다. 이와 관련된 미국 ETS 자료는 로펌인 김앤장을 통해 검사실에 전달됐다. 이렇게 편법으로 전달된 자료 역시 원본은 아니었다. 변호인들은 김앤장을 통해 검찰이 자료를 확보한 경위에 의구심을 표시하며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고 반발하는 한편 재판 증거는 법정에 제출되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검사와 판사는 자료 분량이 많다며 피고인과 변호사가 검사실을 방문해 자료를 열람하게 했다. 이때부터 검찰과 법원은 피고인들을 종용하기 시작했다. 검사는 피고인별로 적용된 기출문제 유출 건수를 줄여 주겠다고 회유했고, 판사는 “미국(ETS)에서 자료를 변호사를 통해 보내와 제출을 하나, 미국에서 바로 (사법 공조로) 제출을 하나, 그게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라고 공판에서 말하며 검찰의 편법적 증거 제시를 두둔했다. 재판을 장기화시킨 장본인인 법원과 검찰은 또한 “재판이 길어지면 피고인이 힘들다”며 혐의 인정을 종용했다. 결국 청년씨를 제외한 23명의 피고인이 재판에 불려다니는 고단함을 못 이겨 차례차례 벌금형 선고를 받아들였다. 자백한 사건에만 활용되어야 하는 ‘간이공판제도’를 적용해 법원은 ‘피고인들이 검찰 증거를 수용했다’는 전제하에 검찰 증거가 적법한지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채 피고인별로 수백만원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결국 법원의 도움을 받아 검찰은 23명의 피고인을 제압했다. 유일하게 간이공판제도 수용을 거부하고 검찰과 싸우겠다며 남은 1명인 청년씨에 대한 검찰과 법원의 압박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어떻게 사법이 그래요’ 다음 회에선 공동 피고인 24명 중 유일하게 검찰·법원의 회유를 거부한 뒤 유학생 나청년씨가 새롭게 경험한 압박 수단, 이미 국회 국정감사에서 3년 연속 부당함을 지적받은 이 사건 재판이 여전히 시정되지 않는 원인인 검찰의 ‘무오류 신화’를 파헤칩니다.
  • [열린세상] 도서관에 푹 빠진 지도자들/유종필 전 관악구청장

    [열린세상] 도서관에 푹 빠진 지도자들/유종필 전 관악구청장

    뜨거운 이슈로 가득한 현 시국에 정치인들에게 도서관 이야기를 하면 “무슨 한가한 소리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꿈이 있는 사람이라면 도서관 이야기를 한가한 것으로 치부하지 말아야 한다. 지난 10년 동안 세계의 위대한 도서관들을 둘러보면서 도서관마다 정치지도자들의 행적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서 느낀 바가 많았기에 하는 말이다.‘도서관 공화국’이라 불리는 미국은 대통령들이 퇴임 뒤 도서관을 만드는 것이 관례화됐다. 도서관 마니아인 오바마는 퇴임 2년여 전부터 도서관 건립 계획을 발표하고 10억 달러를 모금했다. 뉴욕, 하와이와 경합 끝에 건립지로 선정된 시카고 잭슨공원을 가 보니 널찍한 터에 잔디가 곱게 자라고 있었다. 2008년 말 그가 처음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필자가 만난 미의회도서관 관계자들은 “새 대통령에게 도서관에 대해 특별히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인식이 잘 돼 있다”고 했다. 상원의원 시절 전미도서관대회에서 4만여명의 도서관인들을 상대로 한 기조연설을 하여 갈채를 받았던 그는 대통령 당선 뒤 “미드맨해튼도서관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오바마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도서관 친화적 인물이다. 보스턴에 있는 케네디대통령도서관을 찾았을 때 케네디 부부의 드라마틱한 인생과 인기를 말해 주듯 내외국인으로 북적거렸다. 세계 최대 최고의 도서관인 미의회도서관은 주요 건물의 명칭을 애덤스(2대), 제퍼슨(3대), 매디슨(4대) 등 대통령 이름에서 따왔다. 건국 초기 국가 도서관 발전의 초석을 놓은 대통령들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표시라고 한다. 레이건이 그 바쁜 취임 첫해에 본관도 아닌 매디슨관 준공식에 참석한 것을 보면 미국에서는 대통령의 도서관 중시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프랑스가 자랑하는 미테랑국립도서관은 미테랑의 의지와 열정이 없었다면 탄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문화대국 프랑스의 위상에 걸맞은 단일 규모 세계 최대의 도서관을 짓겠다고 선언했다. 20층 건물 4개가 지하로 연결된 이 도서관은 미테랑이 신축 계획부터 부지 선정, 설계 당선작 결정까지 전 과정을 주도하면서 무려 40여 차례 건설 현장을 방문했다고 한다. 오늘의 러시아 판도를 완성한 표트르 대제는 최초의 서구식 도서관인 과학아카데미도서관을, 에르미타주박물관을 있게 한 예카테리나 2세 여왕은 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도서관을 설립했다. 무인의 이미지가 강한 푸틴은 2007년 국정 연설에서 전국 도서관의 허브 역할을 하게 될 현대식 디지털 도서관 설립 계획을 발표했고, 후계자 메드베데프가 완성하고 개관식에 참석했다. 러시아 정신의 보고인 러시아국가도서관이 크렘린궁 바로 앞에 위치한 것은 정치권력과 지식의 공존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영국 하원은 도서관 상임위원회를 설치해 의회도서관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는데, 상임위원 가운데 디즈레일리, 글래드스턴 등 총리가 5명이나 배출된 사실은 도서관의 중요성을 말해 준다. 의회도서관을 잘 활용한 정치인을 물어보니 대처를 내세운다. 탄탄한 논리에 비해 유머가 약한 대처는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수험생처럼 도서관에 틀어박혀 연설 준비를 했는데, 장시간 준비한 위트 넘치는 연설을 메모도 없이 함으로써 마치 평소 실력인 것처럼 과시했다고 한다. 쿠바의 카스트로는 혁명 초기 지식인들이 국외로 대거 탈출하자 남은 지식인들을 국립도서관으로 불러모아 설득하는 연설을 했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비롯해 외국 국가원수를 만날 때도 국립도서관을 즐겨 이용할 정도로 도서관을 가까이했다.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대왕과 정조대왕이 각각 왕실도서관인 집현전과 규장각을 설립해 지식 통치를 펼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두 임금의 공통점은 선왕으로부터 ‘건강을 해치니 책을 그만 읽으라’는 금서령(禁書令)을 받을 정도로 지독한 독서광이었다. 권력과 지식이 결합할 때 과거보다는 미래 비전을 가진 민본정치가 가능했으며, 그 혜택은 치자와 피치자 모두에게 돌아갔다. 큰 꿈을 꾸는 정치인이라면 사교 시간을 줄이고 의원회관과 마주 보고 서 있는 국회도서관부터 자주 찾는 것이 어떨지….
  • 쌀 직불금 재배면적 따라 단가 차등화 추진

    환경 의무 등 추가 ‘공익형’ 2020년 시행 작물 생산 균형·곡물 자급률 향상 기대 정부가 쌀 직불금을 줄 때 농가에 환경 의무를 추가하고 재배면적에 따라 지급 단가를 차등화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농림축산식품부는 11일 이러한 내용을 담은 ‘쌀 목표가격 변경 및 직불제 개편 방안’을 공개했다. 쌀 직불제는 쌀값 하락으로부터 농민들의 소득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다. 재배면적당 일정 금액을 지급하는 방식인 고정직불금, 산지 가격이 하락했을 때 목표 가격 대비 산지 쌀값 차액의 85%를 보전해 주는 변동직불금 등 두 가지로 나뉜다. 일각에서는 쌀 직불제가 농가의 쌀 생산을 유발해 수급 불균형을 부채질하는 원인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전문가들은 중장기적으로 변동직불제를 폐지하고 모든 농지에 기본직불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농업인 단체는 농지직불금과 농민수당 신설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정부는 2020년 시행을 목표로 기존 직불제에 공익적 가치를 추가한 ‘공익형 직불제’ 도입을 준비 중이다. 이를 위해 직불제 수혜 농가에 기존 농지 형상·기능 유지, 농약·화학비료 사용기준 준수, 농지·공동체·환경·안전 등의 의무를 추가하는 방안을 고려 중이다. 또 재배면적이 큰 농가에는 단가를 낮추고, 면적이 작으면 단가를 높이는 등 단가를 차등화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직불제 개편을 통해 균형 된 작물 생산을 꾀하고, 곡물 자급률 향상과 농업·농촌의 공익적 기능을 확산하겠다”고 강조했다. 한편 농식품부는 올해 쌀 생산량은 지난해 397만t보다 다소 감소하겠지만 수요량은 지난해를 웃돌 것으로 예상했다. 장진복 기자 viviana49@seoul.co.kr
  • [열린세상] 그리우면서 그립지 않은 점심 풍경/김세정 런던 그린우즈 GRM LLP 변호사

    [열린세상] 그리우면서 그립지 않은 점심 풍경/김세정 런던 그린우즈 GRM LLP 변호사

    영국인 직장 동료가 집 근처에 새로 생긴 한국 음식점에서 처음으로 한국 음식을 먹었다고 자랑했다. 아주 맛있더라고 했다. 그러게 맛있었겠다. 외국 생활이 길어질수록 한식이 맛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한국에서 살 때는 오히려 서양 음식을 더 좋아했지만 말이다. 요즘 런던에서 한식은 썩 인기가 좋은데, 드라마나 케이팝 등 한류의 영향일 수도 있고, 더해서 건강식이라는 인상도 있다. 동료도 그런다. 이건 더 건강한 음식이잖아, 야채도 많고.그런데 과연 한식이 ‘늘’ 더 건강한 음식인가. 사실 그건 경우에 따라 다르다. 일단 한식은 매운 경우가 많다. 한식은 요새 점점 매워지고 자극적이 되는 듯한데, 어쩐지 음식이 사회 분위기를 따라가는가 싶다. 또한 한식은 대개 짜다. 더구나 달다. 처음 영국에 와서 음식을 먹을 때는 영국 음식이 매우 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짠맛을 그대로 강조하기 때문이다. 반면 한식은 달기 때문에 짠 것을 잘 모르게 된다. 즉 짠맛을 단맛으로 덮는다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맵기까지 하면 짠맛 단맛 매운맛이 어우러져 맛있다. 한국인의 입맛에는 이 ‘단짠매’ 맛은 매우 맛있는 맛인 것이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화상마저 입을 수 있는 온도로 식탁에 떡하니 올라오는 김치찌개나 된장찌개라니. 배가 고프지 않아도 입맛 돌지 않는가. 그러나 어쩌다가 한식을 점심으로 먹고 들어온 날은 물을 참 많이 먹게 된다. 심지어는 마구 졸리다. 집밥이 아닌 경우 맛을 내기 위해 필수적이라는 MSG 때문인지 아니면 맵고 달고 짠맛을 중화시키기 위해 한 공기 수북이 먹는 탄수화물을 소화시키려는 노력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예전에 서울에서 일할 때, 점심을 먹고 들어오면 대개들 낮잠을 자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내가 기억하는 서울의 점심시간 풍경은 대략 다음과 같다. 거의 모든 직장의 점심시간이 12시이니 12시 땡 치면 대개의 직장인이 부랴부랴 신데렐라처럼 뛰쳐나와 식당으로 모여 든다. 이때 누구도 끼워 주지 않아 혼자 식사를 하러 가야만 한다면 심각한 상황이고, 반대로 사유가 있어 점심을 고사하고 싶어도 말을 꺼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여간 무리를 지어 식사하고, 대개 일행 중 가장 위력이 센 자의 뜻에 따라 메뉴가 결정된다. 윗분이 국물 있는 한식만을 선호하시면 늘 국물 있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국물은 식탁에서도 펄펄 끓어야 하고, 심지어는 같은 그릇에 숟가락을 담가야 하기도 한다. 국물이 끓기 때문에 소독이 된다는 논리도 동원된다. 하지만 제 아무리 위력을 자랑하는 윗분인들 접대를 해야 하는 상대와 식사를 한다면, 그러니까 을의 위치로 떨어지게 된다면 전날 저녁 과음과 숙취로 쓰린 속을 부여잡고 크림 스파게티를 먹어야 하는 일도 있는 것이니, 위력이란 덧없고 상대적인 것임에도 참 열심히들 휘두른다 싶지만. 아니면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땐 맘껏 휘두르는 것인가. 말하자면 맵고 짜고 달고 뜨거운 것을 다 같이 급하게 먹었다는 이야기다. 영국에서는 이런 식의 점심 풍경은 보기 힘들다. 우선 점심은 별일이 없는 한 간단하게 먹는다. 펄펄 끓는 국물 요리를 점심으로, 그것도 한 시간 내에 후다닥 먹고 게다가 커피까지 마시고 들어와서 이를 닦고 낮잠을 잔다는 것은 영국의 직장인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 싶다. 게다가 12시가 되면 일제히 점심시간 이렇지 않고, 각자 편할 때 점심 식사에 할당된 시간만큼 자기가 알아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바쁘면 점심을 거르거나 자기 자리에 앉아서 일하며 간단히 때우는데, 이는 야근을 하지 않으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정시에 퇴근을 하기 위해서는 느긋한 점심시간을 포기하더라도 업무를 마칠 수밖에 없다. 무척이나 더웠다는 이번 여름에야 연일 펄펄 끓는 찌개 찾고 그럴 겨를이 있었겠냐마는. 더위는 한풀 꺾였고, 52시간 근무제는 시작됐다. 한국의 야근 및 회식 풍경이 벌써 바뀌었다던데 점심시간 풍경은 또 어떠려나. 물론 나는 점심으로 먹는 한식과 그걸 같이 먹을 수 있는 동료들이 그립다. 하지만 늘 다 같이 같은 것을 먹으러 다녀야 하는 것과 심지어 저녁도 같이 먹고 들어와 당연히 야근하자고 하던 것은 안 그립다.
  •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北으로 간 김기림 기념비 日에 건립… 평화 추구한 시인 재평가 되길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北으로 간 김기림 기념비 日에 건립… 평화 추구한 시인 재평가 되길

    시인 김기림(金起林)의 기념비가 일본 센다이에 있는 도호쿠대학 구내에 11월 30일 건립된다. 김기림 시비는 그가 다닌 서울 보성고(송파구 방이동)에 있으나 일본에 기념비가 건립되기는 처음이다. 일제 시대 교토의 도시샤대학을 다닌 윤동주(1917~1945) 시인의 기념비가 1995년 2월, 정지용(1902~?) 시인의 시비가 2005년 12월 도시샤대학 구내에 건립된 바 있다. 김기림이 1936년부터 1939년까지 다닌 도호쿠제국대학은 일본 제국주의의 관료 양성을 위한 도쿄·교토제국대학과는 달리 연구 중심의 대학을 표방하고 연구의 자유가 비교적 존중된 학교였다. 서울대 일본연구소의 남기정 교수에 따르면 유대인 사상가 카를 뢰비트가 1936년부터 5년간 나치스를 피해 도호쿠대학에 재직했을 정도다. 1922년에는 세계적인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센다이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김기림이 도호쿠대학을 선택한 이유가 아인슈타인에 있을 것이라고 남 교수는 추정한다.기념비 건립은 몇 년씩 걸리던 윤동주, 정지용 때와는 달리 빠른 속도로 이뤄지고 있다. ‘센다이에서 김기림을 생각하는 한·일 시민 네트워크’라는 이름으로 ‘김기림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진 게 지난해 11월. 남 교수를 중심으로 김기림 연구의 권위자인 김유중 서울대 국문과 교수, 이진원 서울시립대 교수, 고선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연수원 교수 등이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사업회가 기념비 건립준비위원회로 전환한 것은 지난 6월이다. 기념비 건립에 관심을 보인 외교부가 지원에 나서고, 도호쿠대학에서 협력 의사를 밝히면서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준비위에 각계 참여도 늘어나고 있다. 다음은 기념비 건립위원회 한국 측 대표인 남기정 교수와의 일문일답 내용. →일본 정치 전공이다. 시인 김기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2002년 도호쿠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우연히 김기림이 영문학과를 다녔다는 사실을 알고 살짝 흥분한 적이 있다. 그의 글을 찾아 읽으면서 그가 평화를 중심으로 사고한 ‘평화주의자’임을 알게 됐다.→김기림 기념비가 윤동주 기념비, 정지용 시비와 다른 점은. -윤동주는 한국 문학사에서 주류로 자리잡은 뒤 일본에 시집이 번역됐다. 일제의 ‘치안유지법’에 희생된 시인이기 때문에 과거를 반성하는 일본 시민들이 ‘윤동주 읽기’를 전국적으로 전개했고, 평화운동의 상징적 의미로 읽혔다. 그에 비해 김기림은 일본에서는 덜 알려진 존재다. 센다이 지방에서 김기림을 일찍이 알고 공부한 아오야기 유코 같은 한국 현대문학 연구자가 김기림을 읽는 모임을 만들고 자료를 축적해 책도 냈다. 기념비는 김기림을 일본에서 발굴한다는 데 의의가 있다. 즉 윤동주, 정지용 시비는 이미 알려져 있던 한국 문학가를 일본적 맥락에서 재평가하고 기리는 뜻이었다면 김기림 기념비는 그의 일본 행적, 문학적 성과를 드러내는 출발점이다. →도호쿠대학의 협조는 어느 정도인가. -부지 제공을 비롯해 대단히 협조적이다. 우에키 도시야 부총장이 7월 11일 서울에 왔을 때 김기림 얘기를 했더니, 그 자리에서 기념비 건립까지 생각하고 지원하겠다고 했다. 그보다 3개월 전인 지난 4월 센다이총영사관에서 공공외교 차원에서 도호쿠대학을 방문했는데 그때 이미 한·일 교류에 많은 관심을 총장부터 갖고 있었다. 그래서 얘기가 빨랐다. 당시 도호쿠대학 측은 김기림의 학적부도 찾아서 보여줬다. 아쉽게도 졸업 논문은 센다이 폭격 때 불타고 없어진 듯했다. →부지는 결정됐나. -후보지 세 곳을 대학 측에서 제시했는데, 우리가 현장 답사해 보니 벚꽃 두 그루가 있는 개방적인 풀밭이 있었다. 여기가 더 좋겠다고 했더니 얼마 전 도호쿠대학 측이 “좋다”는 허가를 해줬다.→기념비 디자인은 누가 하는가. -시인 이상에 조예가 깊은 김민수 서울대 디자인학부 교수에게 상의를 했더니 관심을 보여줬다. 김 교수는 이상을 알아 봐준 김기림에 관심이 있다는데, 기념비에는 그의 정신이 담겨야 한다고 했다. →앞으로 일정은. -10월에는 기념비를 발주하고 11월 29일 센다이에서 전야제를 가진다. 30일에는 기념비 제막식에 이어 ‘김기림과 평화’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고, 센다이 시민 중심의 ‘문학의 밤’ 행사도 개최한다. 김기림이 한·일 시민사회를 가깝게 하는 상징이 되어 기념비가 세워진 뒤에도 모임을 갖고 연구가 진전이 됐으면 한다. 또한 남북 문인들이 김기림을 생각하는 기회도 마련됐으면 좋겠다. →기념비 건립의 의미라면. -김기림은 시도 시이지만, 많은 평론을 썼다. 해방 공간에서 시가 문학사에서 갖는 역할이 크지만, 김기림은 평론가로서, 경세가로서의 모습도 갖고 있다. 일본에 의해 굴절되지 않은 조선의 모더니즘을 그만큼 고민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왜 지금이냐’ 는 의미도 중요한데, 한반도의 그 시기를 살았던 지성인, 지식인에 대해 우리 사회는 극단적인 잣대로 평가한다. 이념적 잣대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은 무시하거나 과도한 해석을 하는 경향이 있다. 남북이 평화 프로세스를 전개하면서 해야 할 것은 분단 정권 수립 이후 지나치게 양극단으로 가 있었던 부분들을 바로잡는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통일과 화해로 가는 길이다. 그런 점에서 양극단 사이에 난 좁은 길에서 평화를 추구했던 김기림을 평가했으면 한다. 그는 정치적 주의·주장을 떠나 민족의 안팎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분열과 분단을 극복하고자 했던 인물이다. marry04@seoul.co.kr
  • “문익점의 기업가 정신, 우리 시대 적용 고민해야”

    “문익점의 기업가 정신, 우리 시대 적용 고민해야”

    “기업을 경영하면서 항상 우리 역사에서 ‘롤모델’이 될 만한 경영인이 누가 있을까 하는 갈증을 안고 살았습니다. 누군가는 문익점 선생을 보며 ‘산업스파이’라고 농을 던지기도 하지만, 저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그분이 지닌 기업가정신에 감탄하게 됐지요.” 윤동한(71) 한국콜마 회장은 지난 1일 출간한 역사 경영 에세이 ‘기업가 문익점’을 집필하게 된 배경에 대해 “사농공상을 구분하던 유교 사상에 따라 상업이 상대적으로 조명을 받지 못한 우리 역사에도 참된 기업인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고 4일 말했다.‘목화씨로 국민 기업을 키우다’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1990년 한국콜마를 창업해 화장품과 제약업계를 아우르는 기업으로 성장시킨 윤 회장이 기업인의 관점에서 문익점의 삶을 들여다본 책이다. 문익점은 중국에서 목화씨를 붓대롱에 숨겨 들어와 한반도에 보급한 인물이다. 책에서는 목화씨의 도입에서 재배기술 축적, 종자개량, 목면 제조기술 도입 발전, 전국 확산이라는 일련의 산업화 과정을 후대에 이르기까지 계획적으로 실천한 현대식 기업가로 그렸다. 윤 회장은 “과거에도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은 지속적으로 중국을 오가며 교류했지만, 그들의 선진 문물을 우리 백성들에게 나눠 삶의 질을 높이려는 시도로 이어진 적은 거의 없었다”면서 “문익점이 기업인으로 위대한 점은 목화씨를 들여온 이후 독점적 지위와 막대한 이익을 취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에게 무료로 나눠 주고 재배 기술과 생산 기술 등의 정보를 대가 없이 공유했다는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윤 회장은 학창 시절부터 역사에 대한 관심이 각별했다고 한다. “고등학생 때는 역사 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었어요. 그런데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5남매 중 첫째로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경영학과에 입학했지요.” 그러나 기업인이 된 뒤에도 경영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역사를 통해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 2016년에는 한국콜마를 경영하면서 겪은 일들을 바탕으로 경영 에세이 ‘인문학이 경영 안으로 들어왔다’를 펴냈다. 윤 회장은 문익점 선생을 재해석함으로써 기업인이 지녀야 할 소양을 알리는 동시에 국민들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반기업가 정서를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 “문익점 선생 이후에 이어져 온 국내 산업의 역사를 보면 안타까워요. 한때 일본이 간절하게 원하기도 했던 조선의 가장 중요한 수출품 목면은 일본의 도요타 방적기가 등장하면서 쇠퇴했고, 그렇게 번성한 도요타는 자동차 산업까지 이어져 꽃을 피웠지요.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이익에 앞서 국민을 생각하고, 정보와 기술을 과감하게 공유해 동반성장하는 ‘문익점 정신’을 우리 시대에 적용하는 방안을 함께 고민했으면 합니다.”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누들 플랫폼·인처너… 어떤 정책인지 아시겠습니까

    인천항만公 ‘PORT OWNER’ 발족 어설픈 조합 정책명에 주민들 눈살 “대중성·효율성 반감” 지적 잇따라 지방자치단체나 공공기관이 정책을 만들면서 명칭에 영어나 국적 불문의 조어(造語)성 단어를 남발해 주민들이 정책 취지를 이해하는 데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외국어를 사용하면 세련돼 보이거나 눈에 띌 것이라는 인식이 오히려 정책의 대중성과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4일 인천항만공사에 따르면 지난 3일 ‘PORT OWNER’를 발족시켰다. PORT OWNER는 인천항의 개혁과 변화를 꾀하는 공사의 전반적인 활동을 심의·자문하는 단체로, 한글로 풀이하면 ‘인천항 시민참여 혁신단’이 된다. 이런 말을 두고도 굳이 ‘PORT’(항구)와 ‘OWNER’(주인)를 어설프게 조합해 정식 정책명을 만든 것에 대해 시민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게다가 공사 측은 ‘국민 눈높이에 맞는 활동’을 강조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인천시는 지난달 인천에서 신용카드처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전자상품권인 ‘인처너(INCHEONer) 카드’를 출시했다. 국내 지자체가 발행하는 지역상품권을 종이가 아닌 IC카드로 발행한 것은 처음이다. 지역상권을 살리겠다는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발음조차 헷갈리는 조어성 외국어를 사용한 것에 대해 공감이 가지 않는다는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 인천 중구는 국내 최초로 누들(국수)을 주제로 한 복합문화공간인 ‘누들 플랫폼’을 자유공원 일대에 내년 4월 개관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단절됐던 북성동과 신포동을 포함해 동화마을∼차이나타운∼개항장문화지구∼누들 플랫폼∼신포시장을 잇는 원도심 관광벨트를 구축한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이 역시 명칭이 거슬린다는 말을 듣는다. 누들과 플랫폼(승강장)의 언어 연관성이 떨어지는 데다 국수는 대부분의 국민이 좋아하는 서민음식인데 굳이 영어를 써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인천 부평구문화재단은 6월 16일부터 지난달 26일까지 부평아트센터에서 어린이 체험전시 ‘헬로 브릭’을 진행했다. 아동이 장난감으로 직접 공간을 계획하며 스스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창의력을 키우는 행사인데 아이들이 브릭(brick, 장난감 벽돌)이라는 어려운 영어를 이해했는지 궁금하다. 경기 부천실버인력뱅크는 지난달 시니어클럽 교육실에서 노인일자리 참여자 역량을 강화하는 프로그램인 ‘시니어 리더스쿨’을 운영했는데 참가한 노인들은 더러 실망감을 표했다. 이모(66)씨는 “등굣길 교통지도와 주차위반 등을 단속하는 일을 하는 팀장들에 대한 의례적인 교육인데 리더스쿨이라는 거창한 말이 들어가 대단한 일자리를 제공하는 줄 았았다”고 말했다. 권경주 건양대 교수는 “요즘은 공공기관이 오히려 외국어를 자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정책명에 외국어가 들어가면 정책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고 기억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아예 공공기관 명칭을 영어로 바꾸는 현상도 흔히 벌어진다. 한국수자원공사는 K-water와 혼용돼 사용되지만 막상 회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한국수자원공사라는 말은 하나도 없고 K-water 일색이다. 한국철도공사 역시 잊혀진 지 오래며 KORAIL로 통용되고 있다. 한국토지주택공사는 LH에 주 명칭 자리를 내주고 보조명으로 전락했으며, 서울주택도시공사는 SH공사로 탈바꿈됐다. 김학준 기자 kimhj@seoul.co.kr
  • 이호대 서울시의원, 제283회 서울특별시의회(임시회) 시정 질의

    서울시의회 기획경제위원회 이호대 의원(더불어민주당ㆍ구로 제2선거구)은 9월 3일 제283회 서울특별시의회(임시회)에 출석해 서울시정에 관한 질문을 통해 서울시의 소상공인과 시민들이 모두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는 소상공인 수수료 부담 제로 결제서비스(가칭 서울페이, 이하 서울페이) 정책의 시행을 당부했다. 이호대 의원은 박원순 서울시장과의 시정 질의 및 답변 과정에서 “영세 소상공인의 지원 정책인 서울페이의 시행과 관련하여 나타난 사각지대와 과정의 의혹들을 해소하여 서울페이의 다양한 장점들이 졸속정책이라는 비난에 묻히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며 “꼼꼼한 정책의 검토와 촘촘한 정책 설계를 통해 서울시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정책으로 완성될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이날 이호대 의원은 서울페이 시행과 관련하여 많은 현금보유와 유동성을 중심으로 거래를 하는 방식인 계좌이체와 신용담보를 중심으로 거래를 하는 신용카드 결제방식을 제시하면서, 현재 현금 보유성이 낮은 소비자들의 결제 패턴을 이해하지 못한 계좌이체 방식에 따른 현금 유동성과 신용담보 사이의 괴리를 지적했다. 판매자 중심에서 설계되어 소비자가 소외되는 소비자에게 제공되는 혜택이 미미한 점을 지적하였고, 마지막으로 영세 소상공인을 지원하는 정책이 도리어 고소득 자영업자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서울페이 정책의 역진성’과 특정업체 밀어주기 의혹이 발생한 ‘불공정한 업체 선정 과정’에 대해 지적하였다. 이에 박원순 시장은 “이호대 의원님과 시민들이 걱정하시는 서울페이 정책의 다양한 사각지대와 의혹들을 해소할 수 있도록 촘촘한 설계에 만전을 기할 것이며, 서울페이 정책을 민간과 공공이 협동하는 결과물로 만들 것”이라고 답변하면서 시민들이 우려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심도 있는 검토와 보완을 거쳐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도록 할 것을 다짐하였다. 마지막으로 이호대 의원은 시정 질의를 마무리 하면서 “서울페이 정책 시행이 조금 늦춰지더라도 서울시와 시의회 및 시민들의 숙의를 거쳐서 시민 모두가 함께 웃을 수 있고 행복한 정책으로 발돋움하여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는 훌륭한 사례로 남았으면 한다”고 하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씨줄날줄] 교수노조/박현갑 논설위원

    [씨줄날줄] 교수노조/박현갑 논설위원

    근대 대학의 전형으로 독일의 훔볼트대학을 꼽는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에 패하면서 신성로마제국의 중심을 이루던 프로이센이 근대화를 통한 위기극복 방안으로 1810년 세운 대학이다. 근대화를 위한 개혁 조치로 세웠으나 기술인 양성 등 단기적 성과를 추구하기보다 학문의 자유, 진리 탐구를 추구했다는 점이 놀랍다. 그러다 20세기부터 대학은 학문의 상업화에 나선다. 자본주의 확산으로 인간교육보다 직업교육, 지식탐구보다 경쟁과 효율의 가치관을 우선시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 중심에는 늘 교수가 있었다.대학교수 하면 대체로 지성과 양심을 떠올린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이미지가 쉽게 연상되지 않는다. 제자 성희롱에 학점을 앞세운 폭언, 자기 논문 공저자에 자녀 올리기 등 일그러진 모습만이 회자된다. 노동자 이미지는 어떤가? 이 역시 쉽게 연상하긴 어렵다. 교수님은 사회구조 최상부에 자리한 직업이라는 인식이 여전하다. 당사자인 교수의 생각은 다르다. 3년 전 대학신문에서 조교수 이상 전임교수 785명을 상대로 교수 위상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다. 그 결과 ‘지식인의 죽음’, ‘대학은 죽었다’는 비판에 동의한다는 응답이 47.6%나 됐다. 대학이 지식과 학문의 전당이 아닌 취업 양성소로 변하고, 인구 감소로 정원 채우기에 급급하면서 연구와 동떨어진 신입생 모집과 제자 취업 도우미로 내몰리니 걱정스러운 상황은 맞다. 그제 헌법재판소에서 대학교수노조 합법화 결정이 나왔다. 2001년 사학재단의 왜곡된 대학 지배를 위기의 본질로 규정한 교수노조 출범 이후 17년 만의 일이다. 헌재는 교원노조의 주체인 ‘교원’을 초·중등교육법상 교원으로 한정한 교원노조법 제2조가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전국 430개 대학교원 9만여명의 단결권을 인정한 이번 결정으로 사학재단의 구조조정에 교수노조가 어떤 역할을 할지 주목된다. 홍성학 교수노조위원장은 “2002년 계약임용제 시행 이후 비정규직화된 단기, 저임금 교원의 증가, 정부재정지원 사업에 따른 과중한 행정업무 증가 등으로 대학교원의 근로조건은 2001년 노조 설립 때에 비해 더 나빠졌다”면서 “국회는 속히 교원노조법 개정에 나서라”고 요구했다. 비정년 트랙 전임교원은 대체로 1년 계약이 많으나 6개월짜리 계약도 있단다. 계약 아닌 위촉 형태로 일하는 비전임 교원인 시간강사도 사정이 딱하긴 마찬가지니 교원 처우개선 여론이 강해질 것으로 보인다. 교수노조가 노조원 임금과 처우 개선도 해야겠지만 학문 연구와 질 높은 교육 실현에 앞장서기를 바란다면 지나친 바람일까. eagleduo@seoul.co.kr
  • 재난구호·반려동물용품… 이색 명절 선물세트

    명절 선물세트 판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각종 이색 상품들이 늘어나고 있다. 재난구호용품, 반려동물용품까지 등장했다. 이마트는 추석을 맞아 재난구호 키트와 생활용품을 결합한 ‘안전담은 감사세트’를 선보인다고 2일 밝혔다. 조명봉, 보온 포, 호루라기, 구호 깃발, 바셀린 로션 등 지진이나 홍수와 같은 천재지변 상황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재난구호 물품과 생활용품으로 구성된 선물세트다. 지난해 11월 경북 포항 지진과 올여름 전국적인 폭우, 태풍 등 자연재해를 잇따라 겪으면서 마트에서 각종 구호 용품 판매가 증가함에 따라 이 같은 상품을 기획했다는 게 이마트의 설명이다. 또 수제 초콜릿 선물세트인 ‘피코크 쇼콜라티에 선물세트’도 처음으로 등장했다. 20∼30대 젊은층을 중심으로 명절에도 친구나 연인끼리 가벼운 선물을 주고받는 트렌드를 반영했다. 편의점 업계도 이색 선물세트를 잇따라 내놨다. BGF리테일이 운영하는 편의점 CU는 ‘소확행’을 주제로 미디어를 통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각종 소형 주방기기를 판매한다. 예능 프로그램 ‘효리네 민박’에서 가수 윤아가 가져온 ‘윤아 와플기’와 ‘윤식당’에서 정유미가 만두를 튀기는 데 사용한 ‘델키 튀김기’ 등이다. 또 ‘펫팸족’ 1000만 시대를 맞아 온라인 프리미엄 반려동물 용품 브랜드 ‘하울팟’의 애견집, 애견 해먹, 반려동물 전용 간식인 ‘더리얼 레시피 비프로프’, ‘오리 고구마 케이크’, ‘강아지 아이스크림’ 등도 업계에서 단독으로 선보였다. GS리테일이 운영하는 GS25는 버버리 패딩코트와 머플러, 페라가모, 발렌시아가, 마크제이콥스, 보테가베네타의 핸드백, 지갑, 벨트 등 해외 명품 판매에 나섰다.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드디어 찾았다, QR페이 되는 식당”

    “드디어 찾았다, QR페이 되는 식당”

    결제 가능 가맹점 위치 알 수 없어 식사 후 결제 못해 카카오페이로 소득공제도 바로 되지 않아 불편서울시가 결제 플랫폼 사업자, 시중은행과 손잡고 QR코드로 결제하는 ‘제로페이’를 오는 12월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QR페이는 애플리케이션(앱)을 이용한 계좌이체 방식으로 수수료가 없어 소상공인들의 부담을 덜어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지금도 카카오페이와 페이코는 QR코드를 이용한 오프라인 결제 서비스를 제공한다. QR페이가 신용카드 망을 대체할 수 있을까. 지난달 31일 신용카드 없는 하루를 살아 봤다. 아직 신용카드 기반의 삼성페이 등 모바일 결제 서비스에 비해 보급이 느린 한계가 뚜렷했다. 시작은 순조로웠다. 집 근처 한 프랜차이즈 도넛 매장에서 QR페이 방식인 ‘카카오페이’로 도넛과 커피를 사 아침을 해결했다. 카카오페이에서 매장결제를 누르니 ‘지문을 사용하여 인증하세요’라고 떴다. 인증을 마치고 매장 단말기로 QR코드를 스캔하자 결제가 순식간에 처리됐다. 그러나 점심부터는 난관에 부딪혔다. 약속 장소는 카카오페이나 페이코로 결제할 수 없는 식당이었다. 궁여지책으로 함께 식사한 일행이 대신 결제하고, 돈을 카카오페이로 보냈다. 지난 7월 말 기준 카카오페이의 전국 온·오프라인 가맹점은 11만곳이고, 페이코는 오프라인에 14만개 가맹점을 확보했다. CU편의점, 커피빈, 영풍문고 등 대형 프랜차이즈 가맹점이 대부분이다. 카카오페이는 소상공인에게 무료로 QR코드 결제 키트를 제공하지만, 매장에 방문하기 전에는 가맹점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카카오페이 관계자는 “결제 키트를 받은 주소가 매장일 수도, 자택일 수도 있어 사용 가능한 매장의 정확한 위치는 공개가 어렵다”며 “서비스를 개선해 가는 중”이라고 밝혔다. 대형 프랜차이즈는 자체 바코드 결제 서비스도 많아 휴대전화만 있으면 결제할 수 있다. 반면 소상공인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삼성페이는 실물 카드를 쓰지 않지만 카드 결제망을 쓴다. 서울페이는 내년 100만개 점포에 ‘제로페이’를 위한 단말기 등을 지원하기로 했다. 인천에서 개인 카페를 운영하는 김모씨는 “소상공인용 카카오페이는 계좌로 송금하는 방식이라 금액을 따로 입력하고, 포스기로 바로 매출이 잡히지 않아 번거롭다”며 “프랜차이즈와 달리 바로 소득공제도 되지 않아 요청하면 현금영수증을 발행한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7시 서울 종로구 안국역 근처 식당을 찾았다. 벽에 붙은 카카오페이 로고를 본 순간 말이 튀어나왔다. “드디어 찾았다, QR페이 되는 식당!” 글 사진 김주연 기자 justina@seoul.co.kr
  • [간병살인 154人의 고백] 나와 54년 함께한 임자, 미안해

    [간병살인 154人의 고백] 나와 54년 함께한 임자, 미안해

    “어….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가 그런 것 같아요….” 2016년 9월 경기도 한 경찰서에 중년 남성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신고했다. 출동한 형사들은 안방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 있는 이일자(당시 86세·가명)씨를 발견했다. 이미 숨을 거둔 이씨 목에는 삭흔(索痕·목 졸린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이씨의 남편 정수천(89·가명)씨는 다른 방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곁에는 텅 빈 수면제 통이 나뒹굴고 있었다. “평소처럼 아침에 인사를 드리러 부모님 방에 갔더니 어머니가 눈을 뜨지 않는 거예요. 급히 아버지한테 말했더니…. ‘내가 그랬다’고 하셨어요.” 정씨와 함께 사는 아들 정이준(54·가명)씨가 울먹이며 상황을 설명했다. 형사들이 정씨에게 이것저것 물었지만,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수면제 30알을 한꺼번에 삼켜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다. 수갑을 채우는 것조차 무의미했다. 형사들이 양쪽에서 부축해 경찰서로 데려가는 동안 노인은 다짐하듯 나지막이 읊조렸다. “임자 잘됐어…. 이제 나도 죽어야겠어.” 정씨는 자신이 54년 해로한 아내를 살해했다고 담담하게 인정했다. 다른 말은 없었다. 후회한다거나 선처해 달라는 말도 없었다. 다만 조사 내내 노인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고 담당 형사는 회상했다. 아들은 “도대체 왜 그랬냐”며 울부짖었다. 정씨 아내는 3년 전부터 치매와 퇴행성 척추질환을 앓아 거의 누워 지냈다. 정씨도 천식과 폐기종(폐 안에 큰 공기주머니가 생기는 질병)을 앓고 있었는데 상태가 심해져 하루가 다르게 아내를 돌보기가 어려워졌다. “살날이 얼마 안 남은 걸 느꼈어. 내가 먼저 죽으면 아내는 아들 내외에게 큰 짐이 될 수밖에 없어. 그래서 아내와 함께 가려고 했어.” 정씨는 황해도가 고향이다.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황정민)처럼 격변의 시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서 공부하다 1·4 후퇴 때 남하하지 못하고 북한군에 강제 징용됐다. 이후 국군에게 붙잡히자 북송을 거부하고 반공포로로 석방돼 남한에 남았다. 부모는 물론 친척도 북한에 있었다. 가진 거라곤 몸뚱아리 하나였다.서울 한 대학병원 원무과에 취직했지만 서른이 넘도록 반려자를 찾지 못했다. 지인이 아내를 만나 보라며 중매를 섰다. 평양 출신인 아내는 정씨와 잘 통했다. 청각장애가 있었지만 다정다감했다. 정씨는 1962년 마침내 가정을 꾸렸고, 딸 둘과 아들 하나를 차례로 낳았다. 결혼 후에는 처가와 함께 서울 종로에서 그릇 장사를 하며 돈도 꽤 모았다. 어느덧 인생의 황혼기를 맞은 1986년 정씨는 귀농했다. 서울아시안게임이 열리던 해였다. 여행을 다니다 눈여겨봤던 서울 근교에 아담한 집을 지었다. 작은 텃밭을 일구고, 평소 길러보고 싶었던 페르시안 고양이도 키웠다. 아들이 서울서 하던 사업을 접고 들어와 살면서 세 식구가 오순도순 여생을 즐겼다.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2001년 아 들이 급성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청천벽력이었다. 의사는 2년 반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낫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한 알에 2만 4000원인 약을 하루 네 번씩 먹여 보라고 했다. 약값만 한 달에 300만원. 이미 은퇴한 정씨에겐 큰 부담이었다. 아들도 대리운전과 관공서 기간제 근로자로 일하며 치료비를 보탰지만 가세는 빠르게 기울었다. 다행히 아들은 의사의 예상을 깨고 차츰 병을 극복했다. 2011년에는 필리핀 여성과 늦깎이 결혼을 해 정씨에게 손자도 안겼다. 하지만 함께 웃을 수 있는 시간은 거기까지였다. 치매 증세가 있던 아내가 넘어지면서 허리를 다쳐 하반신이 마비된 것이다. 2014년 일이었다. 정씨는 종일 아내의 간병에 매달려야 했고, 치료비 마련을 위해 다시 일을 해야 했다. 쓰레기를 줍는 공공근로는 여든이 넘은 정씨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거리였다. 텃밭을 담보로 빌린 빚은 점점 불어나 1억원을 넘겼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자 아내의 증세는 점점 악화됐다. 종일 누워만 있는 게 지겨운지 집 곳곳을 기어다니며 대소변을 흘렸다. 밤에는 잠을 자지 않고 아들 내외 방문 앞에서 알 수 없는 괴성을 질렀다. 하는 수 없이 요양원에 입소시켰지만, 석 달 만에 다시 집으로 데려왔다. 아내가 피골이 맞닿을 정도로 체중이 급격히 빠졌기 때문이다. 종종 병문안을 가면 “날 버리지 말라”고 애원하며 붙잡았다. 집에 온 아내는 상반신까지 마비 증세가 번져 왼팔을 제외하곤 움직일 수 없었다. 정씨는 불면증을 앓았다. 처방받은 수면제를 몇 알씩 삼켜도 도통 잠을 잘 수 없었다. 지병인 천식이 악화하면서 건강은 급격히 나빠졌다. 끝없는 악몽이 반복된 2년은 20년 같았다. 자신보다 며느리가 아내 간병을 하는 날이 늘어났다. 뒤늦게 얻은 아이의 재롱을 보며 즐거워하는 아들 내외에게 미안했다. 아들 내외가 아직 곤히 잠든 새벽 5시. 수면제를 한 주먹 가득 움켜쥐고 꿀꺽꿀꺽 삼키고서 아내에게 다가갔다. 넥타이를 목에 감고 떨리는 손으로 잡아당겼다. ‘임자…미안해…. 조금만 참으면 아프지 않을 거야…. 이제 아이들한테 ‘짐’ 되지 말고 저승 가서 같이 마음 편히 지내자.’ “정씨는 아내의 소중한 생명을 빼앗았고 자녀들에게도 큰 충격을 줬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 병원비를 버는 등 가족 중 누구보다 아내를 위해 애쓴 것으로 보인다. 정씨도 큰 고통을 겪고 여생 동안 큰 죄책감과 회한을 안고 살 것으로 보인다. 아내와 평생 사이좋게 살아온 점, 지금껏 죄 없이 선량하게 살아온 점 등을 종합하면 실형 선고는 가혹하다.” 경찰과 검찰은 정씨를 불구속 상태에서 조사하고 재판에 넘겼다. 걷는 것조차 힘겨워하는 정씨를 구속하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대신 딸이 책임지고 정씨를 재판에 출석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재판부도 정씨를 수감하는 건 무리라고 보고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그날 이후 아버지랑 말을 나눈 적이 없어요. 어머니 기일 때도 마찬가지예요. 생각해 보면 자식인 제가 죄인입니다.” 아들은 여전히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한다. 그러나 가끔은 왜 아버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는 최근 아내와 아이를 친정인 필리핀으로 보내고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다. “몇 푼 되지 않지만, 박박 긁어 모아 생활비를 보내고 있어요. 그럼 아이는 지금 집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습니다. 같이 살 수 없는 건 마음 아프지만 필리핀에서 크는 게 아이를 위한 길이에요.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은 다 같겠죠? 아버지도…그런 마음이었겠죠.” 정씨는 지금 아내가 떠난 방에서 산소호흡기에 의존해 살고 있다. 폐렴이 악화했다. “많이 외로우실 거예요. 며느리나 손자도 없고 제가 일 나가면 줄곧 혼자 계시거든요. 오후에 3시간 정도 들르는 요양보호사가 아버지가 만나는 세상 사람 전부입니다. 병환을 털고 일어나신다면 마을회관에서 어르신들과 이야기 나누실 자리라도 마련해 볼까 해요.” 취재 기간 내내 정씨는 산소호흡기에 의존하고 있어 대화하기 힘든 상태였다. 잠시 상태가 호전돼 호흡기를 떼고 기자와 이야기할 수 있었다. 다시 나지막이 읊조렸다. “내가 하지 않으면 누가 했겠어. 잘 갔지 뭐…. 나도 빨리 죽어야지…. 늙으면 죽어야지.” 임주형 기자 hermes@seoul.co.kr 이혜리 기자 hyerily@seoul.co.kr
  • ‘페이시대’ 현찰·카드 없이 살아보니…‘어쩌다 빈대’

    ‘페이시대’ 현찰·카드 없이 살아보니…‘어쩌다 빈대’

    “드디어 찾았다. QR페이 되는 식당!” 서울시가 QR페이를 기반으로 한 ‘제로페이’를 준비 중이다. QR코드를 기반으로 한 앱투앱 결제는 수수료가 없어 소상공인들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QR페이가 신용카드를 대체할 수 있을까. 지난 31일 지갑 없이 하루를 살아봤다. 시작은 순조로웠다. 집 근처 한 프렌차이즈 도너츠 매장에서 QR페이 방식인 ‘카카오페이’로 도넛과 커피를 사 아침을 해결했다. 카카오페이 애플리케이션(앱)에서 매장결제를 누르니 ‘지문을 사용하여 인증하세요’라고 떴다. 인증을 마치자 카카오페이 계좌와 연동되는 QR코드와 바코드가 표시됐고 매장 단말기로 스캔하자 결제가 순식간에 처리됐다. 폰을 꺼내고 앱을 켜는 과정은 다소 번거로웠지만, 각종 포인트를 쌓기 위해 앱을 꺼내는 수고로움은 견딜 만했다. 그러나 점심부터는 난관에 부딪혔다. 약속 장소는 카카오페이로 결제할 수 없는 식당이었다. 궁여지책으로 함께 식사한 친구가 대신 결제하고, 돈을 카카오페이로 송금했다.지난 7월말 기준 카카오페이의 전국 가맹점은 온·오프라인을 포함해 11만곳이다. 그 중 약 8만명은 카카오페이에 결제 키트를 신청한 소상공인이다. CU편의점, 롯데리아, 빕스, 커피빈, 영풍문고 등 여러 프렌차이즈 가맹점이 있지만, 소상공인 가맹점은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카카오페이 관계자는 “결제 키트를 받은 주소가 매장일 수도, 자택일 수도 있어 사용가능한 매장의 정확한 위치는 파악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결국 점심 식사 후 카페를 가기 위해, 프랜차이즈 가맹점에 커피빈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지도 앱에서 위치를 검색한 뒤 10분여를 걸었다. 지갑 없는 생활은 쉬웠지만, 카카오페이만으로 아직 생활은 어려웠다. 대중교통은 스마트폰 무선통신장치(NFC) 기능으로 T머니를 썼다. 삼성페이는 실물 카드를 쓰지는 않지만, 카드 결제망을 이용한다. 스타벅스 등 자체 바코드 결제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까지 더해도 하루 종일 카드를 전혀 쓰지 않기는 쉽지 않다. 직장인 이모(34)씨는 “새로운 금융 서비스를 쓰는 것을 좋아해 카카오페이를 쓰지만 가맹점이 적어서 주로 프랜차이즈 카페나 편의점에서만 쓴다”며 “서울페이가 생겨도 가맹점이 많지 않으면 여러가지 결제 서비스를 번갈아가면서 써야 해 불편할 것 같다”고 말했다. 지갑 없이 QR페이로만 살기를 거의 포기했을 때 즈음. 서울 종로구 안국역 근처에 있는 저녁 약속 장소를 찾았다. 식당을 들어서는 순간, 벽에 붙은 카카오페이 로고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외쳤다. “드디어 찾았다, QR페이 되는 식당!” 김주연 기자 justina@seoul.co.kr
  • ‘페이 시대’ 가 왔다?…지갑 없는 하루 살아보니

    ‘페이 시대’ 가 왔다?…지갑 없는 하루 살아보니

    “드디어 찾았다. QR페이 되는 식당!” 서울시가 QR페이를 기반으로 한 ‘제로페이’를 준비 중이다. QR코드를 기반으로 한 앱투앱 결제는 수수료가 없어 소상공인들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QR페이가 신용카드를 대체할 수 있을까. 지난 31일 지갑 없이 하루를 살아봤다. 시작은 순조로웠다. 집 근처 크리스피크림에서 QR페이 방식인 ‘카카오페이’로 도넛과 커피를 사 아침을 해결했다. 카카오페이 애플리케이션(앱)에서 매장결제를 누르니 ‘지문을 사용하여 인증하세요’라고 떴다. 인증을 마치자 카카오페이 계좌와 연동되는 QR코드와 바코드가 표시됐고 매장 단말기로 스캔하자 결제가 순식간에 처리됐다. 폰을 꺼내고 앱을 켜는 과정은 다소 번거로웠지만, 각종 포인트를 쌓기 위해 앱을 꺼내는 수고로움도 괜찮았다. 점심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약속 장소는 카카오페이로 결제할 수 없는 식당이었다. 궁여지책으로 함께 식사한 친구가 대신 결제하고, 돈을 카카오페이로 송금했다.지난 7월말 기준 카카오페이의 전국 가맹점은 온·오프라인을 포함해 11만곳이다. 그 중 약 8만명은 카카오페이에 결제 키트를 신청한 소상공인이다. CU편의점, 롯데리아, 빕스, 커피빈, 영풍문고 등 여러 프렌차이즈 가맹점이 있지만, 소상공인 가맹점은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카카오페이 관계자는 “결제 키트를 받은 주소가 매장일 수도, 자택일 수도 있어 사용가능한 매장의 정확한 위치는 파악하기 어렵다”며 “아직 가맹점 신청을 받는 중이고, 가맹점임을 확인할 수 있는 스티커를 제공하고 있다”고 밝혔다. 아직 사용자가 직접 가게를 방문하기 전까지는 카카오페이로 결제할 수 있을지 아는 방법은 없다는 뜻이다. 결국 점심 식사 후 카페를 가기 위해, 프랜차이즈 가맹점에 커피빈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지도 앱에서 위치를 검색한 뒤 10분여를 걸었다. 지갑 없는 생활은 쉬웠지만, 카카오페이만으로 아직 생활은 어려웠다. 대중교통은 스마트폰 무선통신장치(NFC) 기능으로 T머니를 썼다. 삼성페이는 실물 카드를 쓰지는 않지만, 카드 결제망을 이용한다. 스타벅스 등 자체 바코드 결제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까지 더해도 하루 종일 카드를 전혀 쓰지 않기는 쉽지 않다. 직장인 이모(34)씨는 “새로운 금융 서비스를 쓰는 것을 좋아해 카카오페이를 쓰지만 가맹점이 적어서 주로 프랜차이즈 카페나 편의점에서만 쓴다”며 “서울페이가 생겨도 가맹점이 많지 않으면 여러가지 결제 서비스를 번갈아가면서 써야 해 불편할 것 같다”고 말했다. 지갑 없이 QR페이로만 살기를 거의 포기했을 때 즈음. 서울 종로구 안국역 근처에 있는 저녁 약속 장소를 찾았다. 식당을 들어서는 순간, 벽에 붙은 카카오페이 로고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외쳤다. “드디어 찾았다, QR페이 되는 식당!” 김주연 기자 justina@seoul.co.kr
  • 별빛 쏟아지는 가을밤... 경복궁에서 즐기는 특별한 ‘야간 산책’

    별빛 쏟아지는 가을밤... 경복궁에서 즐기는 특별한 ‘야간 산책’

    별빛 쏟아지는 밤 ‘비밀의 문’이 열린다. 조선시대 왕이 연회를 즐겼던 연못 위 누각부터 후궁과 궁녀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처소까지. 초대받은 사람들만 야간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곳, 경복궁에서다. 문화재청이 주최하고 한국문화재재단이 주관하는 ‘경복궁 별빛야행’은 조선시대 왕과 왕비가 거닐었을 궁궐의 곳곳을 돌아보며 가을밤의 고즈넉한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다. 2016년 첫 선을 보인 이후 올해 하반기까지 매회 매진을 기록할 정도로 꾸준히 사랑받는 행사다. 낮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고궁의 화려한 밤풍경이 지닌 매력 덕분이 아닐까. 관람객들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과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흥례문에 다다르면 마중을 나온 인솔 상궁과 마주하게 된다. 2시간 동안 경복궁 곳곳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줄 안내원이다. 인솔 상궁은 올해 조선 제4대 왕인 세종의 즉위 600년을 맞아 손님들에게 연회를 베풀라는 전언이 있었다며 대궐 안에서 음식을 만드는 소주방으로 안내한다. 소주방으로 가는 길 근정전 바닥에 어슷하게 놓인 울퉁불퉁한 박석을 밟을 때 조심하라고 일러주는 상궁. 비단 가죽신을 신었던 신하들이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깔았다는 돌을 밟으며 발걸음을 옮기면 어느새 비현각에 이른다. 세종의 맏아들이자 조선의 제5대 왕인 문종의 집무실이다. 문종과 신하로 분한 배우들이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며 각론을 하는 연기를 보며 그들이 당시 품었을 애민 정신을 짐작해본다. 비현각 뒤쪽에는 ‘경복궁의 부엌’인 소주방이 자리잡고 있다. 경복궁에서 음식을 조리·보관·제공하던 공간으로, 100여년 만에 복원되어 2015년 5월부터 일반에 개방됐다. 관람객들은 조선시대 왕과 왕비가 먹었던 일상식인 12첩 반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도슭수라상’을 맛볼 수 있다. ‘도슭’은 도시락의 옛말로 새우냉채, 육포 장아찌, 광어잣찜, 탕평채, 어알탕, 전복만두, 안심구이 등으로 구성돼 있다. 식사를 하는 동안 국악 실내악그룹의 구성진 연주를 감상하며 맛과 풍류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 저녁을 먹고 나면 본격적으로 경복궁 탐방이 시작된다. 궁궐 한가운데 자리잡은 교태전은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거처하던 곳. 왕비의 휴식 공간인 동시에 공식적인 업무가 이뤄졌던 공간이다. 인품이 남달랐던 왕비를 지극히 아꼈던 세종의 애틋한 사랑이 깃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별빛야행 관람객들은 교태전 북쪽에 자리잡은 함화당과 집경당의 내부를 둘러보며 당시 궁녀들의 일상도 엿볼 수 있다. 산책로를 걷다보면 경복궁 별빛야행의 백미로 꼽히는 경회루에 다다른다. 조선시대 사신을 접대하거나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연회를 베풀었던 곳이다. 큰 연못에 비친 웅장한 경회루의 모습은 절로 감탄을 자아낸다. 평소에는 관람이 허락되지 않는 경회루 누상에 올라 대금 연주가의 독주를 들으며 ‘밤의 향연’을 즐길 수 있다. 올해 ‘경복궁 별빛야행’은 예년과 달리 경복궁이 품고 있는 옛 이야기가 더해져 더 풍성한 체험을 할 수 있다. 특히 하반기 행사는 더 많은 관람객이 야행을 즐길 수 있도록 2부제로 운영된다. 9월 2일부터 15일, 10월 6일부터 20일까지(매주 화요일 제외) 총 50회 진행된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책꽂이]

    [책꽂이]

    소설가의 사물(조경란 지음, 마음산책 펴냄) ‘사소한 물건으로 그려 보는 인생 지도’라는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 소설가 조경란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특별한 ‘물건들’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예술과 아름다움에 대한 의식을 새롭게 해 준 사과, 가족에 대해 천천히 생각하게 한 슬리퍼 등 소소한 물건에 깃든 기쁨과 슬픔에 대해 적었다. 304쪽. 1만 3500원.미식대담(이용재 지음, 반비 펴냄) 음식평론가인 저자가 셰프, 파티시에, 바텐더, 주류 브랜드 마케터 등 한국 외식업 종사자 12인을 만나 다양한 주제에 대해 나눈 대화를 기록했다. 음식 분야에 입문한 과정부터 요리에 담긴 아이디어와 목표하는 맛을 내기 위한 노하우, 운영 원칙 및 사업 전략, 좋은 음식과 미래에 대한 고민, 자기계발법 등에 대해 들려준다. 416쪽. 1만 8000원.뮐러 씨, 임신했어?(마르틴 베를레 지음, 장혜경 옮김, 갈매나무 펴냄) 직장 여성을 위한 커리어 관리 전략을 소설 형식으로 그렸다. 어느 날 여자가 된 마초 남성이 성차별을 겪으면서 고군분투한다는 설정. 성희롱에 대처하는 법, 잡일을 떠넘기는 동료에게 대응하는 법 등을 익히며 성장하는 과정을 그렸다. 280쪽. 1만 4800원.세계불평등보고서 2018(파쿤도 알바레도 외 4인 지음, 장경덕 옮김, 글항아리 펴냄) 1980년 이후 세계 각 지역의 불평등 수준과 경과를 소득과 자산을 두 축으로 삼아 분석하고 미래 불평등에 대한 대응 방안을 제시한다. 책 ‘21세기 자본’으로 유명한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를 비롯해 파쿤도 알바레도 파리경제대 교수 등 경제 전문가들이 공동 저자로 참여했다. 472쪽. 2만 2000원.담대한 여정(정세현·황방열 지음, 메디치미디어 펴냄)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언론인 황방열씨와 함께 한반도 정세 변화를 짚어낸다. 북한과 미국의 헤게모니 싸움에서 문재인 정부가 중심을 잃지 않고 어떻게 ‘운전자론’을 이끌어 가야 하는지를 대담 형식으로 정리했다. 304쪽. 1만 6000원.눈 속에 핀 꽃(김민환 지음, 중앙북스 펴냄) 원로 언론학자인 김민환 고려대 명예교수가 2013년 첫 장편소설 ‘담징’에 이어 두 번째로 발표한 장편이다. 억압, 차별, 비리, 부패와 국가 폭력이 일상의 질서로 자리잡았던 군사정권 당시 20대였던 한 지식인의 청춘 회고록. 360쪽. 1만 5000원.
  • “추석에 우리 조상들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지냈을까”

    “추석에 우리 조상들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지냈을까”

    경기 시흥시는 다음달 8일과 15일 전통한옥에서 어린이를 대상으로 추석 관련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28일 밝혔다. 능곡동 향토유적 제4호 영모재에서는 오는 15일 오전 우리 조상들이 추석에 무엇을 하고, 무엇을 먹고, 어떻게 보냈는지 알아본다. 주말 프로그램으로 8일 생태 소품 만들기, 29일에는 승경도 놀이가 진행된다. 영모재는 광해군의 장인인 문양부원군 류다신 선생의 재실이고 고종22년, 1885년에 건립됐다. 죽율동의 향토유적 제7호 생금집에서는 8일과 15일 오후 추석 대표음식인 송편 빚기를 비롯해 강강술래와 차례 의미 배우기를 진행하며 추석의 절기적 특징을 살펴본다. 생금집은 일반가옥으로 금녕김씨 자손이 12대에 걸쳐 살아온 거주지다. 본체는 1913년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고, 황금깃털이 있는 닭을 키워 부자가 됐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이번 프로그램은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1차례당 10명을 모집한다. 오는 30일부터 문화바라지 홈페이지(www.culturesiheung.com)에 회차별 신청 접수하면 추첨해 참가자를 선정한다. 시흥에는 전통한옥 두 곳에 문화유산해설사가 배치돼 전통놀이 체험 등 상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또 매주 토요일에는 천연염색 체험을 비롯해 계피리스 만들기, 시흥 역사 배우기 등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오는 10월 19일부터 28일까지 영모재에서는 전통한옥 활용 특별 프로그램으로 비언어극 ‘성가족’을 공연할 예정이다. 자세한 문의는 시흥시 문화예술과(031-310-6703)로 하면 된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길섶에서] 열무값을 보는 두 개의 눈/임창용 논설위원

    엊그제 아내와 집 인근 마트에 갔을 때의 일이다. 아내가 열무단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너무 비싸다고 투덜댄다. 가격을 보니 3500원이다. “그게 뭐가 비싸. 열무 한 단을 키워 묶어서 내보내려면 공력이 얼마나 드는데.”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내 말에 고개를 돌린 아내 얼굴이 ‘또 그 소리냐’란 표정이다. 폭염으로 농산물값이 크게 오른 뒤 가끔 아내와 벌이는 실랑이다. 쌀이 비싸다고 하면 “한 달 먹을 양식인데 뭐가 비싸냐”고 하고, 배춧값이 폭등해 김치도 못 해 먹겠다 하면 “폭락해 산지에서 그냥 버릴 때도 있다”고 맞대응하는 식이다. 언젠가는 한 판에 5000원인 달걀값이 비싸다기에 “커피 한 잔엔 군소리 없이 5000원을 내면서”라고 타박하자 아내가 되받아쳤다. “당신은 대체 소비자야, 생산자야?” 농산물을 보는 나와 아내의 눈높이는 이리 다르다. 농촌에서 자라 농사일을 가까이 한 나와 농산물을 사서 먹기만 한 아내의 이력이 빚어낸 차이인 듯싶다. 추수 뒤 빈 논을 뒤지며 벼 이삭을 줍고, 땡볕 아래서 열무를 뽑아 밤늦게까지 볏짚으로 열무단을 묶던 기억이 생생한 내겐 농산물값 성토가 그저 야속하다. 농산물에 관한 한 내게 소비자 마인드 무장은 애초에 글러 먹은 것 같다. 임창용 논설위원 sdrago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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