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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규환 기자의 차이나 스코프] 중국 이름 짓고 배갈 마시는 아프리카 사람들

    [김규환 기자의 차이나 스코프] 중국 이름 짓고 배갈 마시는 아프리카 사람들

    지난달 11일 아프리카 서북부의 세네갈 수도 다카르에 있는 ‘공자학원’(孔子學院) 중국어 교실. 교실에는 중국어 책과 포스터, 한자로 빼곡히 씌어진 칠판 등 온통 중국과 관련된 소품들로 꾸며져 있었다. 중국어 선생님이 “매점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말하자 1학년 학생들은 “매점은 어디에 있습니까”를 힘찬 목소리로 따라했다. 중국어 선생님인 쿠마크 바쿰은 중국 동북부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대학에서 3년간 유학생활을 했다. 2016년 귀국해 이 학원에서 3년째 중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바쿰은 “오늘 중국어 수업 내용은 매점을 이용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라며 “이 문장을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학생들에게 반복적으로 따라하도록 한다.”고 설명했다.2016년 2월 개관한 이 공자학원은 중국 정부가 250만 달러(약 27억원)를 지원받아 다카르 소재 셰크앙타디오프대학 안에 설립됐다. 학원 안으로 들어서면 중국 춘추시대의 공자상(像)이 인자한 웃음을 띠고 방문객들을 반갑게 맞는다. 학원은 현재 강의실 7개와 멀티미디어 홀, 원형극장, 도서관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500여명의 학생들이 중국어 및 중국 문화를 배우고 있다. 중국 정부는 12명의 직원 월급을 포함해 운영비, 수업 보조금을 지원해 친중파 양성에 힘쓰고 있다. 세네갈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번영하고 안정된 민주 국가로 꼽히며,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은 까닭에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하는 아프리카의 관문 국가이기도 하다. 중국이 아프리카 국가를 ‘은밀히’ 공략하고 있다. 아프리카 최대 교역국가로 떠오른 중국의 ‘소프트 파워’(군사력이나 경제제재 등 물리적 힘이 아닌 민간교류와 원조, 예술, 학문, 교육, 문화 등 무형의 힘으로 다른 나라에 미치는 영향력을 의미)가 미국과 유럽을 제치고 빠르게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중국과 아프리카 간 교역량과 직접투자 규모가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일대일로(一帶一路, 육·해상 실크로드) 사업을 추진 중인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2015년 중국·아프리카 협력 포럼에서 향후 3년간 아프리카 대륙에 600억 달러 규모의 원조와 투자를 하겠다고 선언한 뒤 이를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이에 따라 중국의 아프리카 교역량이 1990년대 7배가 늘어난데 이어 2000년대 들어서는 10년 동안 10배 이상 확대된 덕분에 중국은 아프리카의 최대 교역국가로 부상했다. 중국의 아프리카에 대한 직접투자(FDI) 규모도 지난해 상반기 기준 16억 달러에 이른다. 전년 같은 기간보다 22%나 급증한 수치라고 중국 상무부는 설명했다.글로벌 컨설팅업체인 매킨지는 지난해 6월 아프리카 전역에 진출한 중국 기업 현황을 다룬 ‘사자와 용들의 춤’(Dance of the lions and dragons)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아프리카에는 중국 기업 1만여개가 활동하고 있으며 이 중 90%가 민간기업이라고 밝혔다. 이들 기업의 74%가 아프리카 진출에 낙관적인 태도를 보였고, 63%는 장기 투자를 하고 있다. ‘차이나프리카’(Chinafrica)라는 신조어가 생겨난 이유다. 중국(China)과 아프리카(Africa)의 합성어로 2000년대 들어 나타나는 중국의 공격적인 아프리카 진출 움직임을 일컫는 말이다. 게다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 우선주의’를 내걸고 반이민 정책을 강화하고 있는 데다 유럽 역시 이민자들에 대한 장벽을 쌓아올리면서 중국이 그 틈새를 재빠르게 비집고 들어가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올해 1월 아프리카 국가들을 겨냥해 “우리가 왜 ‘거지 소굴’ 같은 나라들의 이민을 받아줘야 하느냐”고 푸념하는 바람에 아프리카의 거센 반발을 사기도 했다. 미국과 유럽이 아프리카 출신 학생들에 대한 비자 발급을 까다롭게 하는 동안 중국 정부는 장학금까지 지급하면서 오히려 이들의 중국 유학을 유치하는 등 선심을 쓰고 있다. 소프트 파워 전파의 첨병 역할을 하는 곳은 아프리카의 39개국 54곳에 설립된 공자학원이라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지난달 17일 보도했다. 공자학원은 중국 교육부가 세계 각국의 대학과 연계해 중국어와 중국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세운 비영리 교육기관이다. 지난 2월 기준으로 세계 138개국에 공자학원 525곳이 설립됐다. 아프리카 국가 곳곳에 침투한 공자학원에서는 중국어와 중국 역사, 문화뿐 아니라 청년들의 취업에 필수적인 엔지니어링과 정보기술(IT)을 가르치는 까닭에 인기가 날로 치솟고 있다. 특히 공자학원의 경우 해마다 50명 안팎의 우수 학생들을 뽑아 장학금을 지급해 중국 대학에서 공부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중국이 막강한 경제력을 이용해 ‘소프트 파워’ 전파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 젊은이들은 현지 중국 기업에 취업하고 중국과의 교역에서 사업 기회를 얻는 등 ‘차이나 드림’을 이루거나 중국의 영향력 확대의 과실을 따먹기 위해 기를 쓰고 중국어를 공부한다. 셰크앙타디오프대학 공자학원에 다니는 압둘라예 디예(25)는 “세네갈 최대의 도로와 건물들은 중국 기업들에 의해 건설됐다”며 “중국어를 배워 중국 회사에 취직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국과 세네갈을 연결하는 민간 외교관이 되고 싶다”고 덧붙였다. 디예의 동급생인 앙디 쿤타(24)는 “우리 가족은 중국어를 배우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당당히 말한다. 그는 이어 “중국에 관한 모든 것이 나에게 놀랍다”면서 “중국 문화를 좋아하고, 중국 음식을 좋아한다”고 중국예찬론을 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공자학원에 다니는 학생들 중 일부 중국 마니아들 사이에는 중국 이름 갖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이들의 중국 이름은 보통 자신의 성격을 표현하거나 아프리카 이름을 문자 그대로 번역해 짓는 경우가 많다. 바쿰은 리가오핑(李高平)이라는 중국 이름을 지었다. 디예는 그가 키가 크고 조용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귀띔했다. 이곳에 진출한 중국인들도 중국 전통 문화 전파에 앞장서고 있다. 지난 20년 동안 중국인 100만명 이상이 아프리카에 진출했다. 중국인들은 양계장부터 정보통신, 건설업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의 각종 산업을 장악하고 있으며, 아프리카 전역에 차이나타운을 세웠다. 곳곳에 생겨난 중국인 식당과 상점 등은 현지인들과의 교류의 장이 되고 있다. 다카르 차이나타운에서 세네갈인들이 중국 바이주(白酒·배갈)를 마시며 건배를 외치는 것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중국 정부는 공자학원 외에도 다카르 흑인문명박물관과 국립극장 건설에 자금을 지원해 소프트 파워 전파를 측면에서 돕고 있다. 덕분에 아프리카 대륙에서 공용어로 쓰이는 프랑스어와 영어, 포르투갈어 등을 밀어내고 중국어가 공용어가 될 날도 멀지 않았다는 전망마저 나온다. 세네갈 공자학원의 책임자인 마마도 폴은 “지금과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중국어는 프랑스어처럼 공용어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게 될 것”이라며 “50년 이내에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그는 “50년 후에는 아프리카의 링구아 프랑크 (Lingua franca·서로 다른 모국어를 쓰는 사람들이 소통할 때 사용하는 제3의 언어)가 중국어가 될지도 모른다”면서 영어와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등과 같은 이전 식민지 국가의 언어가 이제 위협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khkim@seoul.co.kr
  • [금요 포커스] 교육 불모지에 희망의 씨앗을 심다/송기동 국립국제교육원장

    [금요 포커스] 교육 불모지에 희망의 씨앗을 심다/송기동 국립국제교육원장

    “한국 친구들이 만든 강좌가 정말 재밌었어요. SNS를 통해 공부하는 것이 신기하고, 한국에 대해 알 수 있어 참 좋았어요. 이런 기회를 접할 수 있게 도와준 선생님께 감사드려요.” 남태평양 외딴 섬나라 피지에 파견된 우리 선생님에게 현지 고등학생이 건넨 말이다. 컴퓨터와 휴대폰 자체가 생소한 피지 학생들에게 한국의 교육영상을 활용해 학습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높였다.훌륭한 스승은 한 사람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장애를 이겨낸 기적의 주인공 헬렌 켈러 곁에 설리번 선생님이 있었던 것처럼 누구나 마음 한 곳에 큰 울림을 준 선생님의 추억을 하나쯤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지난 반세기 우리나라가 식민지와 전쟁의 폐허를 딛고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루어 낸 데에도 어려웠던 시절,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우리의 희망 ‘교육’이 있었기 때문이다. 콩나물시루 교실, 2부제 수업 등 열악한 환경에서도 사랑과 열정으로 가르쳤던 선생님들이 있었기에 많은 우수한 인재를 배출할 수 있었다. 과거 우리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는 과정 속에서 미국, 독일 등으로부터 많은 교육 원조를 받았다. 교과서 제작을 위한 인쇄공장 설립, 실생활에 필요한 직업교육훈련원 지원 등은 우리 학생들이 가난과 빈곤을 딛고 배움을 이어 가도록 이끄는 희망이 됐다. 이제 우리 교육은 그 정신을 이어받아 국내에 머무르지 않고 전 세계로 눈을 돌려 우리 경제 규모와 위상에 걸맞은 책임과 의무를 다할 필요가 있다. 교육부 국립국제교육원은 한국의 우수한 교육경험을 전수하고자 2013년부터 개발도상국에 우리 교원을 파견하고 있다. 에티오피아, 카자흐스탄 등 4개국 20명 파견을 시작으로 5년여에 걸쳐 세계 곳곳에 뿌려놓은 우리 교원들의 열정의 씨앗이 어느덧 싹을 틔우고 있다. 우리 교원이 가르친 우간다 학생이 ‘전국 중등학교 과학경진대회’에서 당당히 1위에 입상하는 쾌거를 이루는가 하면 피지에서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선생님과 학생들의 적극적인 소통을 통해 과학, 컴퓨터 경진대회에서 수상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또한 스와질란드에서는 교통사고로 입원해 진급시험을 포기한 학생을 위해 휴일도 반납한 채 열심히 가르쳐 최고 등급으로 합격시키기도 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한국 선생님들의 노력으로 지난해부터 한국어를 제2외국어 선택 과목으로 지정해 정규 수업을 개설했다. 제2외국어 중 한국어 인기가 가장 높다고 한다. 또 태국은 올해부터 대학입학시험에 한국어를 채택했으며,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서도 한국어 수요가 크게 늘어나는 등 한국어 학습 열기는 실로 대단하다. 우리 선생님들은 드라마나 케이팝의 높은 인기를 활용해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하고, 한복을 함께 체험해 보거나 비빔밥과 같은 한국 요리를 가르쳐 주기도 하는 등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전 세계에 전파하는 선봉에 서 있다. 현재 세계 각국에서는 한국의 우수한 교육 경험과 열정을 공유하고자 더 많은 교원의 파견을 요청하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 정부는 2016년부터 파견 규모를 확대해 장기 파견교원 140명, 교ㆍ사대생 중심의 단기 해외교육봉사 160명 등 300여명의 교원을 20여개 국가에 파견하고 있다. 올해 1월 말레이시아에 파견된 한국어 선생님은 “매일 33도를 웃도는 더운 날씨에도 냉방이 잘 되지 않는 교실에서 수업을 하고 나면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됩니다. 하지만 수업이 끝난 뒤 수줍은 미소로 다가와 고마움을 표현하는 아이들의 선한 눈빛을 볼 때면 어느새 수업의 피로감은 사라지고 제 자신이 따뜻한 감동과 위로를 받을 때가 더 많아요”라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열악한 환경이지만 배움에 대한 열정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아이들이 ‘헬렌 켈러를 절망에서 끌어올린 설리번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먼 땅 어디선가 어려운 이들에게 사랑과 용기를 심어주고 있는 해외에 파견된 우리 선생님들에게 마음으로라도 카네이션 한 송이를 달아드리고 싶다.
  • “재팬 패싱없다” 日 달래는 靑

    “납북자 北 요청해 日역할 활용을” “재팬 패싱(일본 배제)은 없다.” “북·일 관계 개선에 협력하겠다.” “일본인 납치자 문제 해결을 돕겠다.” 문재인 대통령은 비핵화 대화 국면에서 일본에 3가지를 약속했다. 4·27 남북 정상회담 사흘 전에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로부터 일본인 납치자 문제를 제기해 달라는 공식 요청을 받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이 문제를 언급했다. 지난 3월에는 대북특사단으로 북한을 방문했던 서훈 국정원장이 아베 총리를 직접 만나 방북·방미 결과를 설명했다. 문 대통령이 일본을 챙기는 이유는 비핵화를 대가로 북한의 경제 재건을 지원할 때 일본이 자금줄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미 민간기업 자본을 활용해 북한에 투자하는 식으로 경제 번영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바꿔 말하면 미국 정부 자금은 한 푼도 투입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중국이 북한에 몰아주기 식으로 경제지원을 하면 한국과 미국의 대북 영향력이 축소될 위험이 크다. 가장 좋은 그림은 한국과 일본이 북한의 경제 재건 자금을 대는 것이다. 일본이 대북 경제지원의 한 축을 짊어져야 한국도 부담을 덜 수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 4월 청와대에서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을 만나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 정착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고자 일본이 건설적 역할을 해 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연구소장은 29일 “북·일 수교가 실현돼 북한이 일본으로부터 식민지 지배 배상금으로 최소 200억 달러 이상을 받아낸다면 경제 재건 자금으로 유용하게 쓰일뿐더러 한반도 통일비용도 절감할 수 있을 것”이라며 “김 위원장도 이 정도는 계산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일본이 납치자 문제를 들어 북한을 자극할 우려도 있다. 그렇다고 일본을 ‘방해세력’으로 규정하면 진짜 방해세력이 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배제할 대상이 아니라 달래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청와대도 같은 인식이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납치자 문제를 북한에 제기하더라도 판을 흔들 정도의 변수가 되진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미·일 동맹을 강조해 온 일본으로선 미국의 의사에 반하는 돌출 행동을 하기 어렵다. 북한도 2014년 ‘스톡홀름 합의’에서 납북자 재조사를 일본에 약속하고 진상조사를 실시하는 등 한 차례 성의를 보인 바 있다. 박영준 국방대 안보대학원 교수는 “일본의 역할을 더 긍정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면서 “납북자 문제는 일본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진지한 조사를 해 달라고 북한에 요청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백지연의 생각의 창] 오후 다섯 시와 여섯 시 사이

    [백지연의 생각의 창] 오후 다섯 시와 여섯 시 사이

    근 몇 년 동안 페미니즘의 사회적 관심사를 담은 작품 창작과 더불어 고전적 이론서에 대한 관심이 부쩍 활발하다. 청년 세대들이 ‘성의 정치학’(케이트 밀레트)이나 ‘다락방의 미친 여자’(산드라 길버트, 수전 구바)와 같은 고전들을 열심히 읽는 모습을 보면 ‘페미니즘 리부트’의 열기가 새삼 실감난다. 여러 책 중에서도 근대 여성 작가의 문학적 상상력에 스며들어 있는 불안과 분노, ‘괴물’과 ‘미친 여성’의 상징을 고찰한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페미니즘 비평 담론에 주요한 상상력을 제공한다.오랜만에 다시 본 이 책에서 나의 눈길을 여전히 붙드는 부분은 ‘제인 에어’에 관련된 해석이다. 십대 시절 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제인 에어’는 ‘키다리 아저씨’의 주디와 ‘작은 아씨들’의 조, ‘빨간머리 앤’의 앤이 성장한 듯한 모습을 보여 주는 캐릭터였다. 제인은 예쁘지 않지만 지적이며 독립심이 강한 매력적인 여성이다. 더구나 고아인 제인과 귀족 로체스터의 사랑, 제인의 유산 상속으로 벌어지는 반전은 신데렐라 로맨스의 대중적인 플롯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페미니즘 비평 공부를 하면서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 새롭게 만나는 버사 이야기는 그동안 기억 속에 묻혀 있던 몽환적 존재를 생각하게 했다.다락방에 감금된 미친 여성 버사는 당대 영국의 제국주의 이데올로기가 억압한 식민지 현실을 상징하기도 하고 상속제도에 얽혀 원치 않는 결혼 생활을 해야 하는 가부장적 체제의 모순을 드러내기도 한다. 비평가인 길버트와 구바가 무엇보다 공들인 해석의 중심은 제인 에어와 버사 메이슨의 공통점에 있다. 버사는 엄격한 계급사회에서 고아로서 투쟁하며 살아온 제인의 표출되지 않은 분노를 투사하는 인물이다. 제인은 독특한 개성을 지닌 여성이기는 했지만, 큰 틀에서는 당대 사회의 관습과 규범에 어느 정도 적응하고 따르는 여성이었다. 그녀 내면에 숨겨진 결혼에 대한 불안, 신분사회에 대한 비판, 잠재한 광기와 폭력은 버사라는 존재를 통해 작품 속에서 발현됐던 것이다. 최근 5권으로 재출간된 ‘오정희 컬렉션’(문학과지성사ㆍ2017)을 살펴보며 환기하는 것도 여성 존재의 내면 안에 숨은 여러 가지 욕망의 양상이다. 오정희 소설이 주목하는 광기와 불안, 황폐한 일상은 가부장적 현실을 견디며 살아가는 여성들의 역사를 다양하게 보여 준다. ‘유년의 뜰’ ‘중국인 거리’ ‘저녁의 게임’ 등 뛰어난 작품들이 많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야회’(夜會ㆍ1981)다. 이 작품은 어떤 현란한 이론과 비평에도 묶이기를 거부하며, 여성의 삶에 대한 심도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주부의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 명혜는 어느 날 남편을 따라 한 저택의 사교 모임에 참석한다. 그녀는 아이를 키우는 주부의 일상 속에서 소설을 쓰는 쉽지 않은 시도를 하고 있다. 그녀 마음에 일렁이는 고독과 불안은 “오후 다섯 시와 여섯 시 사이”의 시간에 극대화된다. 가족들의 식사 준비를 하며 무심히 내다보는 바깥 풍경은 “한없이 느린 흐름과 불투명한 긴장” 그리고 “해가 지고 밤이 되기까지의 외로움과 적막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녀가 대저택의 숨겨진 풍경에서 발견한 감금된 미친 남성은 자신의 내면에 일렁이는 불안과 욕망이기도 하다. 밤이 깊어 아이를 업고 길을 걸어나오는 명혜는 술기운에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더러운 모임’이라는 욕지기를 내뱉는다. 그녀의 나지막하면서 싸늘한 이 고백은 오정희의 ‘야회’를 떠올릴 때 독자인 내가 가장 위로받는 구절이기도 하다. 가부장적 삶의 모순 속에 살아가는 여성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현실들을 마주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세계를 끊임없이 꿈꾼다. 소설 속의 명혜는 밤마다 늦도록 불을 켜놓고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려고 분투한다. “흰 종이 위에서는 어떤 것도 유치하고 흔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지만, 명혜는 밤마다 책상 앞에 앉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 구절에서도 감지되듯이 ‘오후 다섯 시와 여섯 시 사이의 기나긴 흐름을 날아가는 흰 새’는 ‘글 쓰는’ 여성의 내부에만 있는 열망이 아니다. 삶이라는 들끓는 현실을 감당하면서 또 다른 나은 세계를 꿈꾸는 모든 이들의 마음에 있는 상징이다.
  • 마크롱, 목숨 걸고 아이 구한 불법체류 청년에 ‘깜짝 시민권’

    마크롱, 목숨 걸고 아이 구한 불법체류 청년에 ‘깜짝 시민권’

    맨손으로 5층 올라 구출한 22세 엘리제 궁으로 초청·감사장 전달 프랑스 소방대원으로 채용까지프랑스 파리 시내의 한 아파트 발코니에 매달린 아이를 맨손으로 구한 아프리카 출신 불법체류자 청년에게 프랑스 정부가 시민권을 부여하고 소방대원으로 채용하기로 했다.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28일(현지시간) 집무실인 엘리제궁으로 말리 출신인 마무두 가사마(22)를 초청해 경찰서장의 서명이 담긴 감사장을 전달하고 프랑스 국적을 부여한다고 밝혔다. 가사마는 지난 26일 저녁 8시쯤 파리 18구의 한 거리를 지나다가 행인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들이 쳐다보는 곳을 바라보니 아파트 5층 발코니에 한 아이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발코니 손잡이를 붙잡고 버티는 아이가 언제 추락할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 가사마는 즉시 아파트 발코니를 한 층씩 맨몸으로 기어올라가기 시작했고, 30초 만에 5층까지 올라가 무사히 아이를 낚아챘다. 주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대는 이 청년이 아이를 구하고 몇 분 뒤에야 도착했다. 아이는 부모가 집을 비운 사이 발코니 문이 열린 곳으로 나왔다가 변을 당할 뻔한 것으로 전해졌다. 가사마는 “구조 당시 생각할 틈도 없이 몸이 즉각적으로 반응했다”고 말했다. 가사마는 몇 달 전 프랑스의 옛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말리에서 건너왔고 사실상 불법체류자 신세였지만 이제 평생을 프랑스에 거주해도 따기 어려운 시민권과 프랑스 공무원 자리를 한꺼번에 얻게 됐다. 가사마가 아이를 구출하는 장면은 행인이 영상으로 찍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공유해 큰 화제가 됐다. 온라인에서는 영웅적 행위를 높이 평가해 그에게 특별 체류허가를 내주라는 청원 운동도 개시됐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서동욱의 파피루스] 소년의 나라

    [서동욱의 파피루스] 소년의 나라

    딸아이가 초등학교에서 처음 어린이 신문을 구독했을 때의 일이다. ‘소년××’ 식으로 시작하는 이름을 가진 신문이었다. 신문을 받아서 집에 온 아이가 시무룩해서 말했다. 처음엔 잘못돼서 두 장이 중복으로 배달된 줄 알았다는 것이다. 옆에 앉는 남자 아이에게는 ‘소년××’ 신문, 자기에게는 ‘소녀××’ 신문이 올 줄 알았는데, ‘소년××’만 두 장이 온 것이다.그 실망감에 동참하자니 마음이 아팠다. 아이는 오로지 ‘소년××’만 있는 세상의 문턱에 깜짝 놀라며 첫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국어사전상 소년의 첫 번째 뜻은 ‘어린 사내아이’로 돼 있다. 당연히 ‘소년’이란 단어로 검색되는 외국어도, 예를 들면 ‘boy’이다. 국어사전에서 소년의 두 번째 뜻은 중성적인데, ‘젊은 나이. 또는 그런 나이의 사람’이다. 이런 사전을 근거로 들어 ‘소년’에는 어린 남자나 여자 아이 모두 포함될 수 있다고 위로했어야 할까? 그러자니 아이가 생활 속에서 생생하게 체득한, 소녀와 반대되는 의미의 소년이란 뜻을 무시한 채 무슨 법이라도 지키는 양 사전에만 맹종해서 억지 강요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 왜 ‘소녀’라고 표기하고서, 소녀라는 말에 남녀 모두가 포함되는 것으로 쓰면 안 돼?” 이렇게 반문할 게 뻔했다. 말의 역사에는 불평등이 고스란히 녹아 있고, 어쨌든 우리 집 소녀는 지금 마음에 들지 않는 이름을 지닌 소년 신문을 본다. 지불하는 구독료는 소년들이 내는 것과 동일하다. 문화와 역사와 말이라는 것은 지층이나 암석의 결처럼 단단히 형성돼 있는 것이라 불만족스럽기 짝이 없더라도 바꾸기 어렵다. 그러니 못생긴 지층의 표면만 슬쩍 가리듯 타협안으로 여기저기 임시 공사를 한다. 예를 들면 소년이란 단어가 소녀라는 말의 반대말인 동시에 슬쩍 중성화되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정말 문화와 역사와 말(써 놓고 보니 세 가지의 정체는 사실 ‘일상생활’ 그 하나다) 안에 내재하는 성적 불평등을 아이와 함께 뚫고서 만족스러운 삶에 도달하기는 매우 어렵다. 딸아이가 어렸을 때 읽을 만한 동화책을 골라 보려니 정말 못 읽을 것투성이였다. 안 그럴 것 같지만 이른바 고전 명작일수록 더 그랬다. 기껏 지위가 높아 봐야 아버지 보호를 받는 공주, 왕자로 인해서만 수동적으로 행복해지는 여자, 왕자 구해 주는 조연으로 만족하기, 마녀로 몰아 왕따시키기, 효녀의 아버지 뒷바라지, 현모양처라는 이름의 끝 모를 노동, 식민지 개척자 백인 청년과 토착민 유색인 소녀의 사랑 등등. 동화는 남자의 판타지가 신나게 점령한 식민지인가? 한마디로 모두 아이에게 읽힐 게 못 됐다. 문화가 길이 아니라 꼭 장애물 같았다. 우리가 고전으로 아는 것들 가운데는 지금은 폐기돼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은 것이다. 고전이 되기 위한 좁은 관문을 지키는 평가의 시선 역시 다 남자들의 눈으로부터 나왔기에 그러리라. 이와 정반대편의 요즘 작품들도 접했지만, 솔직히 만족스럽지 못했다. 성적 불평등의 서사를 너무 잘 알고서 그 대척지에서 제시돼야만 하는 명제에만 마음을 둔 나머지, 빈약해진 도식적인 이야기를 밀고 나가기 급급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념을 학습하는 일은 어느 나이에 도달한 인간에게는 매우 중요하지만, 아이들은 정해진 목적지를 두지 않고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독서란 아직 인위적인 노력의 성과가 아니라 물고기의 물과 같은 ‘환경’이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곡절 끝에 든 생각은, 성적 불평등의 해소는 현재 입법의 문제(물론 이게 가장 중요하다) 이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악습을 지우는 문제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성적 불평등의 해소는 신화, 종교, 고전, 명작 등등의 긍정적 이름으로 암석의 결처럼 오래 굳어진 문화 그 자체와 싸우는 일이다. 유전되는 나쁜 형질이 있다면 그것은 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 역사, 말 안에 있다. 인간의 지혜는 인간의 어리석음도 함께 가져가는 까닭에 문화, 역사, 말 자체가 싸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을 것이다. 이게 싸움이 되냐고? 우리가 니체냐? 모든 가치의 전도 후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기대하는 거냐? 대답은 단순하다. ‘그렇다’이다.
  • <김규환 기자의 차이나 스코프> 중국이 아프리카를 은밀히 공략하는 까닭은?

    <김규환 기자의 차이나 스코프> 중국이 아프리카를 은밀히 공략하는 까닭은?

    이달 초순 세네갈 수도 다카르에 있는 ‘공자학원’(孔子學院) 중국어 교실. 교실에는 중국어 책과 포스터, 한자로 빼곡히 씌어진 칠판 등 중국과 관련된 소품들로 꾸며져 있었다. 중국어 선생님이 “매점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말하자 1학년 학생들은 “매점은 어디에 있습니까?”를 힘찬 목소리로 따라했다. 중국어 선생님인 쿠마크 바쿰은 중국 동북부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대학에서 3년 간 유학생활을 했다. 2016년 귀국해 이 학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바쿰은 “오늘 중국어 수업 내용은 매점을 이용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라며 “이 문장을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학생들에게 반복적으로 따라하도록 한다.”고 설명했다.2016년 2월 개관한 이 공자학원은 중국 정부가 250만 달러(약 27억원)를 지원을 받아 다카르 소재 셰크앙타디오프대학 안에 설립됐다. 학원 안으로 들어서면 중국 춘추시대의 공자상(像)이 인자한 웃음을 띠고 방문객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학원은 현재 강의실 7 개와 멀티미디어 홀, 원형극장, 도서관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500여명의 학생들이 중국어 및 중국 문화를 배우고 있다. 중국 정부는 12명의 직원에 대한 월급을 포함해 운영비, 수업 보조금을 적극 지원해 친중파를 ‘양성’하고 있다. 세네갈은 서부 아프리카의 가장 번영하고 안정된 민주 국가로 꼽히며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아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하는 아프리카의 관문 국가이기도 하다. 중국이 아프리카 국가를 ‘은밀히’ 공략하고 있다. 아프리카 최대 교역국가로 떠오른 중국의 ‘소프트 파워’(군사력이나 경제제재 등 물리적 힘이 아닌 민간교류와 원조, 예술, 학문, 교육, 문화 등 무형의 힘으로 다른 나라에 미치는 영향력을 의미)가 미국과 유럽을 제치고 빠르게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과 아프리카 간 교역 규모는 연간 20%씩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중국 상무부에 따르면 중국의 아프리카에 대한 외국인 직접투자(FDI) 규모는 지난해 상반기 기준 16억 달러이다. 전년 같은 기간보다 22%나 급증했다. 일대일로(一帶一路, 육·해상 실크로드)사업을 추진 중인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2015년 중국·아프리카 협력 포럼에서 향후 3년 간 아프리카 대륙에 600억 달러(약 64조 원) 규모의 원조와 투자를 하겠다고 선언한 뒤 이를 실천하고 있다. 이에 따라 중국의 아프리카 교역량이 1990년대 7배가 늘어난데 이어 2000년대 들어서는 10년 동안 10배 이상 확대된 덕분에 중국은 아프리카의 최대 교역국가로 부상했다. 글로벌 컨설팅업체인 맥킨지(McKinsey)는 지난해 6월 아프리카 전역에 진출한 중국 기업 현황을 다룬 ‘사자와 용들의 춤’(Dance of the lions and dragons)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아프리카에는 중국 기업 1만 여개가 활동하고 있으며이중 90%가 민간기업이라고 밝혔다. 이들 기업의 74%가 아프리카 진출에 낙관적인 태도를 보였고 63%는 장기 투자를 하고 있다. ‘차이나프리카’(Chinafrica)라는 신조어가 생겨난 이유다. 중국(China)와 아프리카(Africa)의 합성어로 2000년대 들어 나타나는 중국의 공격적인 아프리카 진출 움직임을 일컫는 말이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 우선주의’를 내걸고 반이민 정책을 강화하고 있는 데다 유럽 역시 이민자들에 대한 장벽을 쌓아올리면서 중국은 그 틈새를 재빠르게 비집고 들어가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올해 1월 아프리카 국가들을 겨냥해 “우리가 왜 ‘거지 소굴‘같은 나라들(shithole countries)의 이민을 받아줘야 하느냐”고 푸념하는 바람에 아프리카의 거센 반발을 사기도 했다. 미국과 유럽이 아프리카 출신 학생들에 대한 비자 발급을 까다롭게 하는 동안 중국 정부는 장학금까지 지급하면서 오히려 이들의 중국 유학을 장려하며 선심을 쓰고 있다. 공자학원은 해마다 공자학원에서 50명의 우수 학생들을 뽑아 장학금을 지급해 중국 대학에서 공부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중국이 막강한 경제력을 이용해 ‘소프트 파워’ 전파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소프트 파워 전파의 첨병 역할을 하는 곳은 아프리카 국가에 50곳 넘게 설립된 공자학원이라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지난 17일 보도했다. 공자학원은 중국 교육부가 세계 각국의 대학과 연계해 중국어와 중국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세운 비영리 교육기관이다. 지난해 10월 기준으로 142개 국가와 지역에 공자학원 516곳이 설립됐다. 아프리카 국가 곳곳에 침투한 공자학원에서는 중국어와 중국 역사, 문화뿐아니라 청년들의 취업에 필수적인 엔지니어링과 정보기술(IT) 기술을 가르쳐 인기가 날로 치솟고 있다. 아프리카 청년들은 현지 중국 기업에 취업하고 중국과의 교역에서 사업 기회를 얻는 등 차이나드림을 이루거나 중국의 영향력 확대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 기를 쓰고 중국어를 공부한다. 이 공자학원에 다니는 압둘라예 디예(25)는 “세네갈 최대의 도로와 건물들은 중국 기업들에 의해 건설됐다”며 “중국어를 배워 중국 회사에 취직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국과 세네갈을 연결하는 민간외교관이 되고 싶다”고 덧붙였다. 디예의 동급생인 앙디 쿤타 (24)는 “우리 가족은 중국어를 배우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당당히 말한다. 그는 이어 “중국에 관한 모든 것이 나에게 놀랍다”면서 “중국 문화를 좋아하고, 중국 음식을 좋아한다”고 중국예찬론을 폈다.사정이 이렇다 보니 공자학원에 다니는 학생들 중 일부 중국 마니아들 사이에는 중국 이름 갖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이들의 중국 이름은 보통 자신의 성격을 표현하거나 아프리카 이름을 문자 그대로 번역해 짓는 경우가 많다. 바쿰은 “리가오핑(李高平)”이라는 중국 이름을 지었다. 그는 키가 크고 조용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디예가 귀띔했다. 이곳에 진출한 중국인들도 중국 전통 문화 전파에 앞장서고 있다. 지난 20년 동안 중국인 100만명 이상이 아프리카에 진출했다. 중국인들은 양계장부터 정보통신, 건설업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의 각종 산업을 장악하고 있으며, 아프리카 전역에 차이나타운을 세웠다. 곳곳에 생겨난 중국인 식당과 상점 등은 현지인들과의 교류의 장이 되고 있다. 다카르 차이나타운에서 세네갈인들이 중국 바이주(白酒·배갈)을 마시며 건배를 외치는 것이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중국 정부는 공자학원 외에도 다카르 흑인문명박물관과 국립극장 건설에 자금을 지원해 소프트 파워 전파에 측면에서 돕고 있다. 덕분에 아프리카 대륙에서 공용어로 쓰이는 프랑스어와 영어, 포르투갈어 등을 밀어내고 중국어가 공용어가 될 날도 멀지 않았다는 전망마저 나온다. 세네갈 공자학원의 책임자인 마마두 풀은 “지금과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중국어는 프랑스어처럼 공용어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게 될 것”이라며 “50년 이내에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그는 “50년 후에는 아프리카의 링구아 프랑크 (Lingua franca·서로 다른 모국어를 쓰는 사람들이 소통할 때 사용하는 제3의 언어)가 중국인이 될지도 모른다”면서 영어와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등과 같은 이전 식민지 국가의 언어가 이제 위협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인터뷰 플러스] “영세중립 평화통일로 한반도 평화 제도화하자”

    [인터뷰 플러스] “영세중립 평화통일로 한반도 평화 제도화하자”

    “5000년 역사의 새로운 운명의 길에 꽃이 피려 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한반도 평화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한반도는 세계 평화의 중심 국가입니다. 한반도에 평화가 와야 동북아 평화가 있고, 세계 평화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남북은 이 기회를 잘 살려 평화를 먼저 제도화시키면서 경제협력을 하고 통일로 나가야 합니다. 제도화란 영세중립입니다.” 강종일 한반도중립화연구소 소장은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제도적 방안으로 영세중립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국민들이 걱정하는 통일비용에 대해 “걱정할 이유가 없다”면서 “남한의 자본과 기술, 북한의 인력과 자원이 만나고, 여기에 미·일의 자본이 덧붙여지면 되레 남한은 국민소득 4만 달러 북한은 2만 달러를 10년에서 15년이면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근 미국의 글로벌 금융회사인 골드만삭스가 예측한 ‘통일 한반도 세계 2등 국가 된다’는 예측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는 또 “남북경협은 개성공단과 같은 특구를 10개에서 15개 정도 건설해 북한 사람들의 경제생활 수준을 먼저 올려 줘야 한다”면서 “이때 해외에 나가 있는 우리 기업들이 북한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강종일 소장은 1937년 전남 곡성에서 태어나 1962년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고려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 수료(1964),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1992)를 거쳐 1997년 미국 하와이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 강 소장은 1964년 대한일보 기자를 거쳐 주미얀마 대사관 1등 서기관, 원광대학교 외래교수, 인하대학교 외래교수, 선문대학교 외래교수를 역임했다. 1999년부터 한반도중립화연구소 소장을 21년째 맡아 한반도의 평화정책을 위한 제도방안으로 영세중립을 주창해 오고 있다. 저서로는 고종의 대미외교(2006), 한반도 중립화로 가는 길(2007), 한반도 생존전략 중립화(2014·오른쪽 사진), 고종의 영세중립 정책(2015)이 있다. 편집자 주→4·27 남북정상회담의 성공개최를 계기로 한반도가 새로운 평화시대의 희망을 갖게 됐습니다. 북미정상회담도 앞두고 있습니다. -4·27 남북정상회담을 통한 판문점 선언은 새로운 한반도 평화시대의 대전환입니다. 그런데 평화란 제도적 장치로 뒷받침돼야 지킬 수 있습니다. 남북이나 북미나 평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는 아직 나오지 않았어요. 이런 점에서 남북 간 1단계는 4·27 정상회담의 성공개최로 끝났고, 이제 2단계로서 북미정상회담이 있습니다. 북미정상 회담 결과에 따라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북아는 새로운 질서가 나오게 될 겁니다. 동북아 역사는 상당히 바뀔 것으로 봅니다. →한반도 평화가 동북아질서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씀이시네요. -지구상에 평화가 오려면 반드시 한반도에 평화가 먼저 와야 한다는 것은 전제조건입니다. 그 이유는 세계 1·2·3·4등 국가들의 이해가 한반도에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한반도가 세계평화의 중심국가인 거죠. 아직도 한반도는 세계평화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강국들의 싸움터로 남아 있어요. 그래서 저는 한반도가 영세중립을 함으로써 완전히 4개국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해 온 겁니다. 이제 남북정상회담으로 발동이 하나 걸렸어요. 북·미, 남·북·미, 남·북과 미·중으로 이어지는 정상회담을 통해 완전히 결판을 내야 합니다. 어찌 됐든 한반도 입장에선 5000년 역사 운명의 길이 꽃을 피우려 하고 있잖습니까. 우리가 먼저 평화를 해 놓고, 제도화시키면서 경제협력을 하고, 통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선은 평화입니다. 그다음 북미회담 후에 개성공단 열고, 금강산도 열면 남북경제공동체 논의가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북한에 개성공단 같은 것을 최소한 10개에서 15개 정도 개발할 수 있게 도움을 줘야 합니다. →남한의 투자로 북한의 경제특구를 열자는 말씀인가요. -네, 그래요. 다만 북한에 제1차로 들어갈 기업은 남한의 기업체여야 합니다. 이때는 국내에 있는 기업체가 아니라, 해외에 나가 있는 기업체가 들어가야 합니다. 한국에 있는 기업체는 한국을 먹여 살리고, 중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에 나가 있는 기업체들이 북한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 남한의 자본과 기술이 북한의 노동력과 지하자원 등 4가지 생산요소가 결합되도록 해야겠죠. 그렇게 10년을 가면 한반도는 세계에서 1등 국가가 됩니다. 우리는 4만 달러 이상 올라가고, 북한도 2만 달러로 올라가면 코리아가 세계 1~2등 국가가 된다는 골드만삭스의 예언대로 되는 겁니다. →평화와 함께 남북경협이 당면과제란 말씀인가요. -남북과 북미정상회담이 판을 크게 흔들고 있어요. 이때 우린 바로 경제협력으로 들어가서 남북경제공동체로 가야죠. 북한 사람들의 경제생활 수준을 올려 줘야 해요. 그래야 통일 비용도 안 들어가요. 북한은 북일수교를 조건으로 북한이 일본에 요구한 200억 달러 청구권 자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 미국이 가만히 있겠어요. 미국도 북한에 그 대가를 내놔야 될 겁니다. →평화가 정착단계에서 비전이 좀 필요한데요. 그 제도적 장치가 영세중립화란 말씀이죠. 평화는 제도적으로 지켜내지 않으면 또 무너집니다. 제도적 정착이란 중립화가 됨으로써 가능합니다. 만일 중국의 시진핑이 중국몽을 이뤄가지고 영구집권을 하면 우리가 영세중립화하기가 어려워요. 미국은 이제 평화를 외치는 국가로 재탄생하면, 제국주의 미국은 가고 중국이 제국주의로 올라서서 군사력과 국력 면에서 미국을 능가했을 때는 또 제1국이 되어가지고 세계를 좌지우지합니다. 그러기 전에 영세중립 평화통일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중립화 통일 운동의 저변확대였습니다. 다음은 정책화를 거쳐 제도화로 나가야죠. 우리가 통일을 했다 하면 인구가 8000만에 가까워요. 세계 10위 권에 들어 있어요. 유럽의 독일, 프랑스 레벨에 들어갑니다. 우리는 4대 강국 속에 끼어 있어요. 이것은 소위 지정학적 문제로 숙명인데요. 숙명은 바꿀 수 없어요. 그러나 운명은 우리의 노력에 따라서 바꿀 수 있습니다. →제도적 장치로서 보통 ‘자립· 동맹·중립’의 세 가지를 말하는데요. -지구상에 192개의 독립국가가 있다고 하지만 이 3가지를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자립을 하는 것, 그러나 우리는 지정학적으로 어렵습니다. 자립을 못 하면 그다음은 동맹인데요. 우리가 미국과 동맹하고, 북한은 중국하고 동맹하는 체제가 굳어지면, 동맹은 강자와 약자가 하는데 약자는 서러움이 있어요. 그래서 동맹도 그렇고, 3가지 중에 하나밖에 없어요. 영세중립이에요. 그래서 안보를 영세중립으로 하면 국방비로 쓰던 돈을 복지로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국민들 잘 살아요. 북한은 연방제로 체제유지를 원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연합제나 북한의 연방제가 시스템 면에서 거의 동일하므로 남과 북이 통일을 위해 이제는 양편의 안을 모두 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북한이 덩샤오핑식의 개혁개방으로 간다는 말씀이신가요. -중국이 개방을 하면서 사회주의 이념과 정치를 꽉 쥐고 있으니까 발달은 발달대로 되고 있잖습니까. 북한이 덩샤오핑의 모델을 도입하면 평화가 돼서 우리는 물론 일본, 미국이 또 투자하지 않겠습니까. 평양의 대동강변 트럼프타워 가능성이 있지요. 만약 평양에 트럼프타워가 건설되면 세계평화의 상징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러시아는 또 가만히 있겠습니까. →앞서 제도화를 말씀하셨는데요. 국내적으로 영세중립법 제정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직은 정책화가 안 돼 시기적으로 좀 이릅니다. 정부가 우리 영세중립에 대해서 검토할 때가 정책화입니다. 정부의 안이 국회에서 입법화되었을 때 제도화가 된 겁니다. →그렇다면 중립화 방향, 방법은 무엇입니까. -현재 중립화에는 4가지 사례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방법은 외국의 승인을 받아서 하는 스위스 모델입니다. 스위스 모델은 1515년에 우리는 영세중립을 하겠다고 국회가 선언을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300년 후인 1815년에 스위스가 영세중립국이 됩니다. 그때 8개국이 보증을 했습니다. 두 번째는 오스트리아 모델입니다. 1945년에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이 오스트리아를 4등분 했어요. 그래서 4개국 군대가 주둔을 했습니다. 오스트리아 국민들이 1945년에는 우리가 패전국이니까 좋다 했는데, 46년 되니까 숨을 못 쉬겠어요. 4개국 주둔비 줘야 되죠. 46년부터 ‘자, 우리는 영세중립으로 나가겠습니다’ 하고 세월이 흘러 1954년이 되었어요. 거의 9년 만인데 10년째가 되니까 소련이 ‘프라하의 봄’으로 그 병력을 다른 데로 돌려야 했어요. 그래서 1955년에 영세중립에 관한 모스크바 협정을 맺었습니다. 이를 미국, 영국, 프랑스가 추인으로 찬성해 영세중립국가가 되었습니다. 세 번째 모델은 코스타리카 모델이에요. 그 나라는 2차 대전 이후에 과거에 군대들이 태국처럼 계속 혁명을 해요. 미국하고 손잡고 혁명을 하고, 그러면 미국은 무기 팔고… 국민들은 가난하게 됐죠. 그러자 소위 애국지사들이 중심이 된 국회가 영세중립을 한다고 선언을 함과 동시에 군대 해산 명령을 내려 버렸습니다. 스스로 원한 영세중립 선포예요. 과거 우리 고종이 그렇게 했잖아요. 고종 1904년 1월 20일 조선은 영세중립국이라 선포했지만 러일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실패합니다. 네 번째는 유엔에 요구한 방법입니다. 1995년 9월에 투르크메니스탄 모델로서 유엔이 승인한 경우입니다. 이상과 같은 모델이 있으니까 우리가 미·중·러의 동의를 못 받아도 남북만 합의해 버리면 어떤 모델로 하든 상관이 없어요. 유엔에서 코리아 영세중립국이다고 승인하면 되는 거죠. 물론 미국이나 중국이 비토하면 어렵습니다만 한반도를 영세중립하지 않으면 미국은 한반도를 중국에 빼앗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미국은 발도 못 붙여요. 한반도가 완전히 중국으로 들어가 버릴 수 있어요. 미국이 1953년 남한의 영세중립국을 거론한 이유이기도 합니다.→영세중립국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시작하게 된 배경과 동기는 무엇인가요. -미국에서 공부할 때 한국 근대사를 연구했는데, 고종의 영세중립 정책을 알고부터입니다. 고종의 대미정책은 초기에 갈등이 있었어요. 우리는 신미양요라고 하는 한미전쟁이 있었잖아요. 그때 우리가 전쟁에서 이겼지요. 당시 미국은 조선을 개방하려고 들어왔다가 전쟁하고 그냥 나간다, 그래서 미국이 실패했다고 했죠. 그래서 고종은 기대를 했어요. 1882년 5월 22일 한미수호통상조약을 맺으면서 미국이 수호해 줄 거로 알았죠. 미국이란 든든한 배경이 생겼으니 일본도 이제 우리를 못 먹는다고 기대를 했어요. 그런데 이후에 미국이 우리를 배반한 거죠. 그것이 1905년 7월 29일의 카쓰라 태프트 밀약 아닙니까. 그다음 2주 후인 8월 12일 일본은 제2차 영일동맹을 맺고, 9월 5일 일본이 루스벨트 미 대통령을 친일파로 만든 후에 러일전쟁을 종식하는 평화협정을 맺었습니다. 루스벨트는 이것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아요. 그리고 11월 17일이 옵니다. 을사늑약이죠. 그리고 나자 미국은 11월 30일 철수해 가버립니다. 우리가 비참한 식민지로 전락하는 역사적 과정의 책임입니다. →영세중립에 대해 현실에서 국민적 관심, 학계의 관심은 그리 높지 않은 것 같은데요. 그래도 연구를 꾸준히 해 오셨습니다.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어요. 왜 우리나라가 역사적으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우리 국민들에게 첫째 내가 만든 용어입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외세지향성입니다. 5000년 역사에서 자주독립보다는 어떤 큰 나라하고 동맹이냐 보호냐 이런 데 기대고 살려는 우리나라 국민성입니다. 처음에는 안보를 위해서 강한 국가에 붙어요. 그런데 나중에는 권력을 잡기 위해서 개인의 욕심이 나와 버려요. 그래서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좋은 모델 하나가 있죠. 우리나라가 망한 거죠. 두 번째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지정학은 강대국 4개에 좌지우지 당하는 이 숙명을 운명학적으로 바꾸고 싶어요. 지정학적 숙명은 못 바꿉니다만 지정학적 운명으로 하면 바꿀 수 있습니다. 외세 지향적 국민성을 바꿔 보겠다는 거죠. 지금도 우리 국민의 외세 지향성의 뿌리는 생생하게 살아 있어요. 누가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제가 중립화 통일 운동을 21년째 하는 이유입니다. 한반도에 씨 뿌리는 사람도 필요하잖아요. 지정학적 숙명을 바꾸려면 씨 뿌리는 자가 있어야겠죠. 나는 씨 뿌리는 자예요. →마지막으로 중화(中和)를 마음의 중심에 두고 한반도의 영세중립화로 지정학적 숙명을 운명으로 바꾸기 위한 길을 걸어오셨는데요. 박사님에게 중화란 무엇인가요. -중화를 연구해 보니까, 우주 만물에 연관되어 있어요. 중화에서 주역이 나옵니다. 주역이라는 것은 4500년 전에 나오는 이론으로서 가장 앞서가고 있는 주역이, 그 다음에 중용이 나옵니다. 공자가 완성을 했죠. 주역은 공자가 완성을 했고, 중용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완성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차피 거의 연결이 됩니다. 중용에서 다시 중립이 나옵니다. 중립에서 이제 영세 중립화가 나와요. 중화란 한반도의 영원한 평화를 위한 뿌리입니다. 서원호 객원기자 guil@seoul.co.kr
  • [유성호의 문학의 길목] 다시 보는 ‘천변풍경’

    [유성호의 문학의 길목] 다시 보는 ‘천변풍경’

    박태원이 1936년에 쓴 소설 ‘천변풍경’의 무대를 역사적으로 살필 수 있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분관인 청계천박물관은 ‘천변풍경’ 특별전을 지난 4일부터 오는 7월 1일까지 개최한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천변풍경’의 배경인 서울 청계천 주변에서 살던 서민들의 삶과 문화를 역사적으로 소개하는 의미 있는 콘셉트를 취하고 있다. 박태원은 이상(李箱), 이태준, 김기림 등과 함께 활약했던 모더니스트 계열의 작가로서 섬세한 묘사와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필치로 1930년대 서울의 청계천변에서 살던 서민들의 생활을 사실감 있게 보여 주었다. 박태원의 집이 청계천 위에 걸친 광교 맞은편에 있었으니, 그에게 청계천이란 삶의 구체적인 터전이기도 했던 셈이다. 특별히 박태원의 ‘천변풍경’은 ‘조광’에 연재하다 장편으로 개작돼 1938년 단행본으로 출간됐는데, 연재 때부터 큰 주목을 받아 세태소설이나 리얼리즘의 범주에 대한 논쟁을 불러오기도 했다. 박태원은 이 작품과 함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같은 소설을 통해 1930년대 소설 미학의 한 경지를 보여 준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박태원에게는 이상과 정인택이라는 1930년대 문인들과의 삽화가 유명하게 따라다닌다. 이상과 정인택은 권영희라는 여급을 두고 경쟁했다. 권영희는 원래 이상과 연인 관계였지만, 정인택이 자살 소동까지 벌여 마침내 1935년 8월 29일 권영희와 결혼하게 된다. 이때 사랑의 패자였던 이상이 사회를 보았고, 그 결혼식에 박태원이 하객으로 참석했다. 그리고 6·25전쟁 중에 정인택 부부도 박태원도 모두 북으로 간다. 작가 황석영은 이승만 정부가 후퇴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구금하거나 처형했을 때 북쪽이 구금 시설을 접수하면서 살아남은 수감자들 가운데 박태원이 끼어 있었다는 권영희의 증언을 들려준 바 있다. 월북 후 정인택이 숨을 거두자 부인을 남쪽에 둔 박태원이 권영희와 재혼을 한다. 박태원은 1965년에 실명했고, 1968년에 뇌출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됐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원고지 모양의 특수한 틀을 이용해 글을 쓰다가 마침내 권영희에게 구술해 ‘갑오농민전쟁’이라는 대작을 완성하게 된다. 한때 이상의 애인이었고, 한때 정인택의 아내였던 그녀가 끝까지 박태원 곁에서 대작을 남기는 순간이었다. 박태원은 1986년에, 권영희는 2001년에 작고했다고 한다. 이래저래 권영희라는 한 여성이 거쳐 온 한국 근대사가 한편으로는 비극적으로, 한편으로는 파란만장하게 다가온다. 특별하게도 전시회실 입구에는 봉준호 영화감독의 축하 화환이 놓여 있었다. 봉 감독의 어머니가 박태원의 작은딸 박소영이니 박태원은 그의 외할아버지가 되는 셈이다. 큰딸 박설영만 아버지와 함께 북에서 살면서 평양기계대학 교수를 지냈다고 한다. 작은아들 박재영은 근자에 ‘구보 씨와 더불어 경성을 가다’라는 책에서 ‘구보의 길’을 제창하기도 했는데, 참으로 부지런히 아버지의 흔적을 탐사해 가는 열정적인 분이다. 어쨌든 박태원의 남다른 가족사가 식민지와 분단을 가로지르는 순간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이번 전시회는 박태원의 시대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천변의 변화상을 중요한 시각 자료를 통해 보여 주는 데 공력을 다했다. 청계천은 서울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하천으로 서울이 수도가 되기 전부터 흘렀는데, 1977년에 복개가 완료됐고 2005년에 다시 그 형태를 복원하는 역사를 거쳐 왔다. 그런데 이번 전시회에서는 청계천 복원 때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요소까지 포함한 재복원의 계획까지 암시하는 의욕을 보였다. 복원 후 남은 과제를 보완해 더욱 실감 있는 서울의 명물 청계천을 미래상으로 추진하겠다는 것인데, 이는 개발 논리와 생태 감각이 충돌을 일으키면서 한 공동체가 역사적 유산들을 어떻게 간직해 가야 할지에 대한 암시를 주기에 족한 것이었다. 경험해 볼 만한 청계천 시간 여행이었다.
  •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일제가 제기한 ‘요동의 장통이 낙랑 백성 이끌고 모용씨 귀속설’ 여전히 통용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일제가 제기한 ‘요동의 장통이 낙랑 백성 이끌고 모용씨 귀속설’ 여전히 통용

    ‘낙랑군=평양설’을 신봉하는 남한 강단사학계에서 새로 내세운 마지막 방어 논리가 ‘낙랑군 이동설’이다. ‘낙랑군=요동설’을 입증하는 중국 사료가 계속 드러나자 평양에 있던 낙랑군이 요동으로 이사했다는 새로운(?) 설을 들고 나온 것이다. 군(郡)이 이동하는 것을 중국에서는 ‘교군’(僑郡) 또는 ‘교치’(僑置)라고 한다. 북방에 설치했던 군현들이 북방 기마민족에게 쫓겨 남방으로 도주한 것을 뜻한다. ‘낙랑군 이동설’이란 서기전 109년부터 약 422년간 평양에 있던 낙랑군이 서기 313년 고대 요동으로 이사했다는 주장이다. 과연 그런지 살펴보자.●흠앙과 사대의 과녁이 된 한사군? 먼저 평양에 낙랑군이란 식민지가 422년 동안 존속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자. 낙랑군을 포함한 한사군의 의의에 대해서 남한 국사학계의 태두(泰斗) 이병도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한(漢)의 동방 군현(한사군)이 설치된 이후 산만적이고 후진적인 동방 민족사회는…당시 중국의 발달된 고급의 제도와 문화-특히 그 우세한 철기문화-는 이들 주변 사회로 하여금 흠앙(欽仰:우러러보고 사모함)의 과녁이 되고, 따라서 중국에 대한 사대사상의 싹을 트게 한 것도 속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이병도는 우리 동방 민족사회는 ‘산만하고 후진적인’ 사회라고 깎아내리는 동시에 한사군은 ‘고급의 제도와 문화’였다고 높였다. 철기문화가 서기전 1세기쯤 한사군 때 시작된 것처럼 주장한 것에 대해서는 서기전 4~5세기쯤에 이미 고조선에 철제농기구가 보편화돼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정도로 넘어가자. 이병도의 논리대로 평양을 비롯한 한반도 북부에 자리잡은 한사군을 우리 동방 민족사회가 실제로 ‘흠앙’하고 ‘사대’했다면 420년 이상 존속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한사군의 인구는 계속 증가했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줄어들기만 하는 낙랑군 인구 낙랑군의 인구 변천을 살펴보자. 한(漢)나라는 전한(前漢:서기전 202~서기 8년)과 후한(後漢:서기 25~220년)으로 나뉜다. 전한 말 왕망(王莽)이 신(新:서기 8~23년)을 세워 15년 동안 지배했다가 후한에 무너졌다. 전한의 정사(正史)가 ‘한서’(漢書)이고, 후한의 정사가 ‘후한서’인데, ‘한서’, ‘지리지’는 낙랑군의 인구가 6만 2812호에 40만 6748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후한서’, ‘군국지’는 낙랑군이 6만 1492호에 25만 7050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호수는 큰 차이가 없지만 인구가 절반가량으로 줄어든 것이다. 현도군은 전한 때의 22만 1845명에서 4만 3163명으로 4분의1토막 났다. 그사이 한사군 중 진번군은 낙랑군과 합쳐졌고, 진번군은 현도군과 합쳐졌다. 주변의 군을 통합했고, 후진적인 동방 민족사회가 흠앙하고 사대했는데, 왜 낙랑·현도군의 인구는 대폭 줄어든 것일까? 후한 때는 그나마 낫다. 후한이 무너지면서 위·촉·오(魏蜀吳) 세 나라가 격돌하는 삼국시대가 전개된다. 삼국시대는 위나라 출신의 사마(司馬)씨가 세운 진(晋)나라가 통일하면서 끝난다. 진나라는 낙양(洛陽:265~312)에 도읍했던 서진(西晋:265~316)과 남경(南京)으로 천도했던 동진(東晋:317~420)으로 나뉘는데 그 정사가 ‘진서’(晋書)다. ‘진서’, ‘지리지’는 호수(戶數), 즉 가구수를 적어 놨는데, 낙랑군의 호수가 3700호다. 한 호당 6명으로 잡으면 2만 2000여명 정도로, 전한 때의 40만 6748명에 비해 20분의1로 급감했다. 낙랑군에서 위·촉·오의 운명을 건 대회전이라도 벌어졌다면 모르겠지만 낙랑군에서 그런 전투가 있었다는 기록은 일절 없다. 평양에 422년 동안 버티고 서서 후진적인 동방민족 사회의 흠앙과 사대의 과녁이 된 낙랑군의 인구는 왜 줄어들기만 했던 것일까? ●10만명으로 하북성에서 평양까지 지배? ‘진서’, ‘지리지’에 따르면 낙랑군은 평주(平州) 산하다. 평주는 다섯 개 군(郡)을 관할하는데 창려군(昌黎郡)·요동국·낙랑군·현도군·대방군이다. 그런데 이 다섯 개 군을 포괄하는 평주 전체의 호수가 1만 8100호로서 한 호당 6명씩 잡으면 모두 10만 8000여명 정도다. 중국의 ‘중국역사지도집’은 평주가 지배하는 지역을 지금의 하북성 서쪽부터 한강 이북과 강원도 북부까지로 그려 놨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대한민국 국고 47억원을 들여 만든 ‘동북아역사지도’는 조조의 위나라가 경기도까지 지배했다고 맞장구쳤다. 현재 하북성과 요령성, 북한의 인구는 1억 5000만명이 넘는다. 10만 8000여명 중 여성을 빼면 5만 4000여명 정도다. 여기에서 다시 노약자를 빼면 남성 장정들은 2만~3만명에 지나지 않는다. 2만~3만명의 장정들로 이 광대한 지역에서 농사 지어 가족들을 부양하면서 북경에서 황해도 수안까지 수천㎞에 달하는 만리장성도 지키면서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냈다는 깜찍한 상상력이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 극우학계 및 남한 학계에는 그대로 통용된다. 학문이 아니라 조선총독부와 중국 동북공정의 정치선전을 추종하기 때문에 가능한 발상이다. ●요동사람 장통이 낙랑군을 이전? 그럼 313년에 낙랑군이 평양에서 요동으로 이사했다는 근거는 무엇일까? 송나라 사마광(司馬光:1019~1086)이 편찬한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진기’(晋紀:10)에 이런 기사가 나온다. “건흥(建興) 원년(313) 4월 요동 사람 장통(張統)은 낙랑(樂浪)과 대방 두 군을 점거하고 고구려왕 을불리(미천왕)와 해를 이어 서로 공격했지만 해결하지 못했다. 낙랑인 왕준(王遵)이 장통을 설득해서 그 백성 1000여 가구를 통솔해서 모용외(慕容)에게 귀부하니 모용외는 낙랑군을 설치해서 장통을 태수로 삼고 왕준을 참군사(參軍事)로 삼았다.”(‘자치통감’ 권 88 ‘진기’(晋紀)10) 서기 313년에 요동 사람 장통이 고구려 미천왕과 싸우다가 패해서 1000여 가구를 데리고 선비족 모용외에게 도주했다는 기사인데, 이것이 ‘낙랑군 이동설’의 유일한 근거다. ‘자치통감’에만 한 번 나올 뿐 당대의 정사에는 일절 기록되지 않았다. 장통이 귀부했다는 모용외는 임금이 아니었다. 그 아들 모용황(慕容) 때에야 전연(前燕)을 세운다. 따라서 중국의 역사가들은 기록할 만한 가치가 없는 사건으로 보았다. 또한 고구려 미천왕과 싸운 사람은 ‘요동 사람’ 장통이다. 요동 사람 장통이 평양에 놀러갔다가 낙랑군 사람들의 부탁을 받고 미천왕과 싸웠는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7인의 사무라이’처럼 산적에게 시달리는 마을 사람들에게 용병으로 고용됐는가? 또한 장통이 도주한 곳이 평양 남쪽이라면 모르겠다. 미천왕은 자신에게 패한 장통이 1000가구를 거느리고 수천 리 자국 영토를 지나가는 것을 눈 뜨고 구경하고 있었겠는가? 1000가구를 가구당 6호씩 잡으면 6000명인데, 그중 남성은 3000여명이고, 노약자를 빼면 장정은 1500여명을 넘지 못할 것이다. 1500여명의 패잔병이 남은 민간인 4500여명을 보호하면서 고구려 영토 수천 리를 지나 모용씨에게 간다는 것이 가능한가? 장통은 처음부터 요동에 있던 낙랑군 잔존세력을 가지고 고구려와 싸웠다가 패해서 더 서쪽 모용외에게 도주한 것이다. ‘신의 손’ 세키노 다다시가 북경 유리창가에서 낙랑 유물을 사들인 것은 이 때문이다. 또한 ‘낙랑군 이동설’은 최근에 나온 듯하지만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조선반도사’에서 이마니시 류가 이미 제기한 것이다. 이마니시 류가 ‘요동의 장통(張統)이란 자가 313년 낙랑 땅을 버리고 그 백성 천여 가(家)를 이끌고 모용씨에게 귀속해서 요동으로 이주했다’고 쓴 것을 다시 끄집어낸 것이다. 부처님 손바닥 안이었던 손오공처럼 남한 강단사학계가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21세기 세계 사학사의 수수께끼다.■‘북경서 낙랑군 사람 묘 발견’엔 침묵하는 남한 사학계 ‘위서’(魏書), ‘태무제(太武帝) 본기’에 “연화(延和) 원년(432) 9월 북위의 태무제가 서쪽으로 귀환하면서 ‘영주(營丘)·성주(成周)·요동(遼東)·낙랑(樂浪)·대방(帶方)·현토(玄)의 6군 사람 3만 가(家)를 유주(幽州:북경)로 이주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태무제는 평양은커녕 한반도 근처에도 와 보지 못했으니 이 역시 고대 요동에 있던 낙랑군 등을 서쪽 북경으로 이주시켰다는 기록이다. 2014년 3월 16일 북경시 대흥(大興)구 황춘진(黃村鎭) 삼합장촌(三合莊村)에서 발굴된 고대 고분군에서 낙랑군 조선현 한현도(韓顯度)의 무덤이라고 쓰인 벽돌이 나왔다. “원상(元象) 2년(539) 4월 17일 사망한 낙랑군 조선현 사람 한현도 명기(元象 2年4月17日 樂浪郡朝鮮縣人韓顯度銘記)”라는 내용이다. 평양이 아닌 북경에서 낙랑군 조선현 사람의 묘가 나왔으니 남한 사학계가 흥분해야 하지만 한국에 유리한 사료가 나오면 일제히 침묵하는 법칙에 따라서 이 역시 묵언 수행 중이다.
  • 6자 참가국인데도… 北, 풍계리 취재단에서 日 쏙 빼

    안보리 상임이사국 英 초청받아 “유엔 대북제재 해제 포석” 관측 북한이 오는 23~25일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현장을 취재할 대상을 한국과 미국, 중국, 러시아, 영국 기자로 한정한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2008년 6월 영변 원자로 냉각탑 폭파 당시 북한은 북핵 6자회담 참가국(남북, 미·중·일·러) 언론사를 초청했다. 그때와 비교하면 일본이 빠지고 영국이 포함된 것이다. 영국은 북핵 당사국이 아니다. 우선 일본은 의도적으로 배제했을 가능성이 크다.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가 실현될 때까지 대북 압박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본을 향해 북한 관영매체들은 ‘시대착오적인 망동’, ‘개밥에 도토리 신세를 면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경고해 왔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실장은 13일 “일본이 북한에 대해 계속 강경한 태도를 보인다면 한반도 핵 문제 해결 과정에 끼어들 틈을 주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주려고 일본을 배제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일본은 북·미 정상회담 이후 북·일 정상회담 개최를 희망하고 있다. 북·일 정상회담에서 일본으로부터 더 많은 식민지 배상금을 받아내 경제 발전의 종잣돈으로 삼고자 북한이 압박 공세를 본격화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대신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영국을 포함한 것은 핵 문제 해결 이후 유럽과의 관계 개선과 유엔의 대북 제재 해제를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2008년에는 6자회담이 진행 중이어서 6자회담 참가국에 취재를 허용했지만 지금은 6자회담 국면이 아니니 안보리 상임이사국을 초청하고 당사국인 한국을 넣은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중국, 러시아, 영국은 모두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이다. 유엔 대북 제재를 풀려면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협조가 필요한 데다 영국은 2003년 리비아 핵 폐기 과정에서 미국과 리비아를 중재한 경험이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 북한이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을 대표하는 안보리 상임이사국 중 영국을 선택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사설] 한반도 평화에 중국, 일본 협력 막중하다

    한국, 중국, 일본의 3국 정상회의가 어제 도쿄에서 열렸다. 위안부 문제 등으로 데면데면했던 2015년 11월 때와 달리 한·일, 한·중, 중·일 간의 현안이 어느 정도 정리된 뒤라서 그런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3자, 양자 회담이 진행됐다. 2년 반 전 3국 정상들이 ‘한반도 비핵화의 실질적인 진전을 이루기 위한 의미 있는 6자회담을 조속히 재개하기 위해 공동의 노력을 다한다’는 공동선언을 채택한 것과 비교한다면 어제 회의는 비핵화 입구에 서 있는 상황을 반영해 한·중·일 정상의 구체적이고 진전된 인식 공유가 이뤄졌다는 점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백미는 4·27 남북 정상회담을 지지하는 특별성명 채택이었다. 성명은 판문점 선언에서 ‘완전한 비핵화’ 목표를 확인한 데에 환영의 뜻을 표하고, 북·미 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를 기대하며, 동북아 평화와 안정에 기여할 수 있도록 3국이 공동의 노력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는 입장을 천명했다. 애초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를 넣자는 일본 측 요구가 있었으나, 북·미의 본게임을 앞둔 시점에서 적절치 않다는 우리와 중국 측 반대로 이 같은 성명으로 갈무리됐다.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은 다롄에서 열린 중국 첫 항공모함 실험운용 참관에 맞춰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두 번째 정상회담을 했다. 북·미 회담에 앞서 북·중 동맹의 완전한 복원을 과시하고 비핵화 과정은 물론 비핵화 이후까지 내다본, 김정은 위원장 표현을 빌리면 ‘전략적 협동’을 천명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구상하고 있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남북한과 미국 외에 중국도 반드시 끼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다. 북한을 핵·미사일 개발에서 세계로 이끌어 낸 지금까지의 중국 역할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향후 비핵화에도 막중한 역할을 기대한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게 관계 정상화를 원하는 일본의 의사를 전달하고 김 위원장이 “대화 용의가 있다”는 뜻을 일본에 전했다. 일본이 북·일 관계 정상화를 꺼릴 이유는 많지 않아 보인다. 납치 문제라는 산을 넘어야 하지만, 김 위원장 지시로 2014년 스톡홀름 합의가 도출된 만큼 북한에 해결 의지가 있다고 봐도 될 것이다. 과거 일본의 식민지배, 침략 국가 가운데 북한은 유일하게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하지 않은 나라다.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이루는 데 중국과 일본의 협력은 필수적이다. 비핵화한 한반도, 번영하는 이웃이야말로 중·일의 이익과도 일치하는 것 아니겠는가.
  • 화성 땅속도 조사 … NASA의 끝없는 ‘태양계 탐사’

    화성 땅속도 조사 … NASA의 끝없는 ‘태양계 탐사’

    어린이날인 지난 5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반덴버그 공군기지에서 무인 화성탐사선 ‘인사이트’를 실은 아틀라스5 로켓이 발사됐다.인사이트는 오는 11월 26일 7개월여의 항해를 마치고 화성 북쪽 엘리시움 평원에 착륙해 본격적인 화성 속살 파헤치기에 나선다. 올해 미국항공우주국(NASA) 캘린더에는 인사이트를 포함해 우주 탐사를 위한 계획들이 빼곡히 기록돼 있다. 특히 올 9월까지는 태양계와 지구 탐사를 위한 위성이 3대가 더 발사될 예정이다. 우선 열흘 뒤인 오는 19일 지구중력장과 기후변화 측정을 위한 ‘그레이스·포’ 위성이 발사되고, 오는 7월 31일에는 태양 에너지 방출에 대한 연구를 수행할 ‘파커 태양 탐사선’이, 9월 12일에는 극지방의 얼음 두께와 지구 지표면 두께, 구름 상태를 관측하는 ‘아이스샛2’ 관측 위성이 발사된다. 플로리다주 케네디우주센터에서 발사되는 파커 태양 탐사선을 제외한 다른 탐사선들은 모두 캘리포니아 반덴버그 공군기지에서 발사될 예정이다. 인사이트는 화성 표면의 물 흔적이나 암석 성분, 지표형태 분석을 통해 생명체 흔적을 찾아 나섰던 패스파인더, 오퍼튜니티 같은 화성탐사선들과는 달리 화성 지각 구조와 지표 내 열분석과 같은 화성 내부 탐사에 집중하게 된다. 이를 위해 인사이트에는 열이 지표면 아래에서 얼마나 빨리 전달되는가를 파악해 지구 지각과 비교 분석하는 열류량 측정기, 화성 지각 내 진동과 혜성이나 소행성과 충돌했을 때 발생하는 충격파 등을 파악하기 위한 초정밀 지진계가 설치돼 있다. 또 라디오파 측정기를 장착해 탐사선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한편 화성이 축을 중심으로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지를 분석해 중심 핵의 크기와 구성 성분이 액체인지 고체인지를 밝혀내게 된다. 인사이트의 임무는 태양계 생성 기원과 화성의 진화 과정을 알아내는 것이지만 훗날 화성 식민지화를 위한 사전 작업이라는 시각도 있다.열흘 뒤에 발사되는 ‘그레이스·포’는 지구 중력과 기후변화 관측을 목적으로 2002년 발사된 그레이스 위성의 임무를 이어 가기(follow-on) 위한 탐사 위성이다. 그레이스·포 탐사위성은 지하수 저장량의 변화와 대형 호수, 강의 유량 변화에 대한 데이터 등 지구 전체 수자원의 변화를 추적하게 된다. 지하수 저장용량이 변하게 되면 미세한 중력 변화가 나타나기 때문에 이를 통해 지하수 수위를 측정하게 되는 것이다. 지구 수자원의 변화를 파악하는 것은 지구 기후변화를 분석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7월 마지막 날 발사되는 인류 최초의 태양 탐사선 ‘파커 태양 탐사선’(PSP)은 태양과 620만㎞ 떨어진 곳까지 근접해 태양 대기 가장 바깥층인 코로나를 분석하는 등 태양 에너지 방출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다. NASA 관계자는 “태양풍이나 태양흑점 폭발로 인한 우주 날씨 변화가 인류에 미치는 영향이 점점 커지고 있으며 태양이 태양계 전체 생존에 미치는 영향으로 미루어 볼 때 PSP의 태양 탐사 임무는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런 중요성 때문에 나사는 세계적인 천체물리학자이자 태양풍을 처음 예측한 유진 파커 시카고대 명예교수의 이름을 탐사선에 붙이는 한편 태양 탐사에 동참한다는 의미와 탐사의 중요성을 부여하기 위해 마이크로칩에 신청자의 이름을 담아 탐사선과 함께 쏘아 올리는 이벤트를 전 세계를 상대로 펼쳤다.올해 가장 마지막으로 발사되는 ‘아이스샛2’ 위성은 전 세계 얼음의 분포와 두께 변화만을 측정하려는 목적으로 발사되는 탐사위성이다. 이 때문에 다른 탐사위성들과는 달리 ‘아틀라스’라고 불리는 고성능 레이저 측정장치만을 장착하고 발사될 예정이다. 극지방 해빙뿐만 아니라 만년빙이 녹고 사라지는 정도를 파악하기 위한 아이스샛2는 현재 기후 변화의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 주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지구 궤도를 근접해 지나가면서 지구를 위협하는 소행성들을 탐사하기 위한 위성들도 올해 속속 임무에 착수하게 된다. 가장 먼저 일본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가 2014년 12월 3일 발사한 탐사선 ‘하야부사2’는 다음달 1일 지구 근접 소행성 ‘류구’의 궤도에 진입하게 된다. 2016년 9월 8일 나사가 발사한 소행성 무인탐사선 ‘오리시스·렉스’도 오는 8월 17일 소행성 ‘베누’의 궤도에 진입한다. 1999년 처음 발견된 베누는 앞으로 100년 이내에 지구와 충돌할 가능성이 큰 행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2135년 9월 말 충돌 가능성이 크다고 알려져 있다. 충돌 위험이 높아질 경우 폭파시키기 위해서는 소행성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필요한데 이를 위해 오리시스·렉스는 베누의 모양과 주요 성분을 관찰하고 샘플을 채취해 지구로 귀환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 [글로벌 인사이트] “국가가 대를 끊었다”… 日 강제불임수술 피해자들의 절규

    [글로벌 인사이트] “국가가 대를 끊었다”… 日 강제불임수술 피해자들의 절규

    2만 5000명의 남녀가 평생 자기 아이를 갖지 못하도록 국가로부터 불임수술을 받았다. 그중엔 9살짜리 여자아이도, 10살 된 남자아이도 있었다. 10명 중 7명은 여자였다. 상당수는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의사의 손에 이끌려 몸으로 파고드는 차가운 메스를 받았다. 싫다고 발버둥치다가 마취제를 맞고 수술대에 쓰러진 이도 있었다. “대(代)를 이었다가는 사회에 짐이 될 불량한 유전자를 가졌다”는 이유에서였다. 일본에서 1996년까지 존속됐던 ‘우생(優生)보호법’ 아래에서 ‘합법’을 가장해 이뤄진 국가 주도의 인권 유린이었다. 일본 사회는 반성하고 있다. 그런 악법을 어떻게 70년이나 유지해 왔는지, 또 그 법이 사라지고 20년이 넘게 흐른 지금까지 어떻게 피해자들의 눈물을 외면할 수 있었는지를 말이다.강제 불임수술의 실태와 피해자의 고통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올 1월 미야기현에 사는 61세 여성 A씨가 국가를 상대로 1100만엔(약 1억 1000만원)의 피해보상 소송을 처음으로 제기한 게 발단이 됐다. A씨는 열다섯 살이던 1972년 12월 ‘유전성 정신박약’을 이유로 난관을 묶는 수술을 강제로 받았다. 잦은 복통 등 수술 후유증으로 고생하던 그는 서른 살 즈음 ‘난소낭종’ 진단을 받고 오른쪽 난소를 절제했다. 이 때문에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로부터 파혼을 당했다. 지난 3월 28일 센다이 지방법원에서 열린 첫 공판에서 A씨 측 변호인단은 “피해자는 어릴 적 마취 치료로 인한 부작용으로 정신병 증세를 보였는데, 이를 파악하지 않은 우생보호심사위원회의 잘못으로 강제 수술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이를 가능하게 한 우생보호법은 출산에 대한 자기결정권 및 개인 존엄과 행복 추구권을 침해해 헌법에 위배된다”고 밝혔다. ●14세 때 설명 못듣고 수술대 오른 70대男도 소송 A씨에 이어 70대 남녀 4명이 오는 17일 도쿄, 센다이, 삿포로 등 3개 도시 법원에 같은 내용의 소송을 낸다. 도쿄 지방법원에 소장을 내기로 한 미야기현 출신 남성은 아동 보호시설에 있던 14세 때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한 채 수술을 받았다. 그는 “내 인생을 돌려받고 싶다”고 했다. 우생보호법이 일본 국회를 통과한 것은 1948년이었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기 직전인 1940년 나치 독일의 ‘단종법’(斷種法)을 참고해 만들었던 ‘국민우생법’을 이어받아 다니구치 야사부로라는 산부인과 의사 출신의 참의원이 입법을 주도했다. 다니구치는 “패전으로 영토가 협소해진 가운데 인구는 많고 식량은 부족하다. 급속한 인구 증가를 막기 위해 선천성 유전병자의 출생을 억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당시 일본은 전후 식민지에서 귀환한 사람들과 ‘베이비붐’에 따른 출생아 급증 등으로 인구 과잉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었다. 극심한 식량난과 주택난 속에 국민들의 큰 저항 없이 탄생한 우생보호법은 기존의 국민우생법보다 더한 독소조항을 갖고 있었다. 바로 ‘강제 불임수술 허용’이었다. 국민우생법하에서도 ‘다산(多産) 장려에 반한다’는 이유로 강제 수술은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1949년 전국 시행… 후생성 ‘강제수술 가능’ 공문 1949년부터 유전성 질환 등을 이유로 한 국가 주도의 정관 수술과 난관 수술이 전국적으로 시행됐다. 당시 후생성은 강제 수술 여부에 대한 지방 행정기관들의 문의에 대해 “본인의 동의에 반해 수술을 행하는 것도 가능하다. 신체구속이나 마취약의 사용도 인정된다”고 답했다. 1952년에는 유전병이 아닌 일반 정신질환이나 지적장애를 앓는 사람들도 강제 수술 대상에 새롭게 편입됐다. 수술 대상은 급격하게 늘어났다. 정부 공식통계에 따른 우생보호법 불임수술은 총 2만 4991건. 이 중 3분의2(66%)에 해당하는 1만 6475건이 본인 동의 없는 강제 수술이었다. 미성년자도 2337명이나 됐다. 미야기현에서는 9세 여아와 10세 남아에게 수술이 이뤄졌다. 수술은 1955년(1362건)을 정점으로 감소세로 돌아섰지만, 1970년대 중반까지도 연간 100건 이상 규모로 실시됐다. 마지막 수술은 1992년에 이뤄진 1건이었다. ●일부 의사·공무원 ‘실적 채우기용’ 집행 법을 집행하면서 일부 의사들은 범죄에 가까운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홋카이도는 1965년 8~11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우생보호심사위원회 없이 서류 심사만으로 3명에 대한 강제 수술을 결정했다. 후쿠오카현에서도 1981년 3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같은 과정으로 수술대에 오른 20~39세 남녀가 최소 6명이다. 1960년 오이타현은 한 정신과 의사가 제출한 여성 5명 강제 불임수술 신청서에 대해 “실제로 진찰한 결과인지 의문”이라며 보류 결정을 내렸다. 5명에 대한 건강진단서 기재 내용이 하나같이 ‘병명: 정신박약’, ‘현재상황: 정신 발육이 지체돼 있어 유전병이 인정된다’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군마현에서는 1955년 우생보호법 대상 환자가 맹장염으로 병원에 실려오자 의사가 산부인과 전문이 아닌데도 맹장수술을 하면서 동시에 불임수술을 진행했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자기 잇속에 눈이 멀기는 일부 공무원들도 다르지 않았다. 강제 수술 건수가 1950년대 중반 이후 감소하자 실적에 부담을 느낀 후생성 공무원들은 1957년 수술 실적 증대를 독려하는 공문을 지방행정기관에 내려보냈다. 당초 예상했던 수술 실적 목표치를 밑도는 기관에는 주민 계몽활동 등 노력을 더 열심히 하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자기 실적을 위해 무리한 집행에 나선 현장 공무원들도 적지 않았다. 전체 수술건수 2593건으로 전국 최다인 홋카이도의 경우 1950년대에 ‘우생수술 1000건 돌파’, ‘전국 1위 실적’ 등의 홍보물을 만들기도 했다. 이 법에 대한 문제 제기가 오랜 기간 일본 내에서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부 정치권의 폐지 움직임도 있었다. 하지만 늘 국회에 가면 후순위로 밀렸다. 그러던 중 1994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국제인구개발회의, 1995년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된 세계여성회의 등에서 이 문제가 집중적으로 다뤄졌다. 여당인 자민당은 국내 의견 등을 수렴해 1996년 우생보호에 관한 조항 등을 삭제하고 ‘모체보호법’으로 바꿨다. 이후에도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는 2014년까지 3차례에 걸쳐 강제 불임수술 피해자들에 대해 일본 정부가 구제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2016년에는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도 피해 실태 조사와 피해자 법적 구제를 권고했다. 이때마다 일본 정부는 “합법적인 조치였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강제성 입증·소멸시효 해석이 쟁점으로 앞으로 진행될 피해 보상 소송에서는 자신이 강제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피해자들이 어떻게 입증할지가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강제 수술 1만 6475명 가운데 누구인지 자료가 분명한 경우는 26%인 4347명에 불과하다. 피해 보상 등 권리 청구가 가능한 민법상 제척기간(일종의 소멸시효)을 어떻게 볼지도 쟁점이 될 수밖에 없다. 불임수술을 받은 지 모두 20년이 넘어 ‘불법행위로부터 20년이 지나면 배상 청구권이 소멸한다’는 일본 민법상 제척기간은 일단 완성됐기 때문이다. 불임수술에 동의한 사람 중에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었던 경우가 많아 향후 정부의 피해자 지원이 이뤄졌을 때 상당한 논란이 될 전망이다. 이를테면 한센병 회복자가 요양원에서 결혼하려면 불임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사실상 강제 수술이나 다름없다. ●스웨덴, 재판 없이 곧바로 피해보상 법률 제정 피해 소송이 본격화할 조짐을 나타내자 정치권도 뒤늦게 따라가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여야는 지난 3월 6일 오쓰지 히데히사 전 후생노동상을 대표로 하는 초당파 의원 모임 ‘옛 우생보호법하에서의 강제 불임수술에 대해 생각하는 의원연맹’을 발족시켰다. 자민당은 강제 불임 문제를 다루는 실무팀을 구성했다. 일본과 비슷한 우생학적 수술이 행해졌던 노스캐롤라이나, 버지니아 등 미국의 일부 주와 독일, 스웨덴 등에서는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보상이 이뤄지고 있다. 1976년까지 강제 수술이 이뤄졌던 스웨덴의 경우 재판 없이 곧바로 피해 보상을 해 주는 법률이 제정됐다. 마쓰바라 요코 리쓰메이칸대 교수는 요미우리와의 인터뷰에서 “고령자가 된 피해자들을 위해 당장 있는 자료만으로 빠르게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고 보상해 주어야 한다”며 “이와 별개로 앞으로 몇 년이 걸리더라도 국가의 강제 불임수술의 실체를 반드시 규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경남 창원에 강제징용 노동자상 제막

    경남 창원에 강제징용 노동자상 제막

    일제 강제징용 희생 노동자 추모와 일제식민지 역사 청산 등을 위한 ‘일제 강제징용 노동자상’이 1일 경남 창원에 세워졌다. ‘일제 강제징용 노동자상 경남건립추진위원회’는 이날 오후 3시 창원시 정우상가 앞에서 일제 강제동원노동자상 제막식을 열고 일본의 강제징용 사죄와 배상을 촉구했다.노동자상 건립추진위는 “일제 식민지배는 우리 민족에게 깊게 팬 아픔이며 회한과 분노의 역사”라고 지적하며 “그 고통의 깊이 만큼 상처는 아직껏 치유되지도, 아물지도 못했다”고 강조했다. 추진위는 “일제 식민지배로 고통받은 우리 민중의 한과 고통을 치유해야 한다”며 “오늘 강제징용 노동자상 제막식이 역사를 바로 세우는 밑거름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추진위는 강제징용 노동자상 건립을 계기로 일제의 강제징용 사죄·배상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제막식이 끝난 뒤 경남 강제징용 노동자 후손으로 보이는 한 남성은 노동자상을 붙잡고 ‘아버지’ 하고 외치며 울기도 했다. 기념식, 축하공연, 제막식 순으로 진행된 이날 제막식에는 추진위 참여 단체 관계자들과 더불어민주당 김경수 의원, 박종훈 경남도교육감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노동자상 건립 사업은 경남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강제징용 피해자 추모 등을 위해 공동으로 추진했다. 경남 각계 시민·노동단체 등이 참여해 추진위를 결성하고 건립성금을 모금했다. 추진위 참여 단체와 상인번영회, 경남도, 경남교육청, 창원시 등 시민사회단체와 여러 기관이 모금에 동참해 1억 7000여만원을 모아 노동자상을 건립했다.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추진위는 노동자상 건립에 이어 대한민국 근·현대 노동사 기념공원과 대한민국 산업사 테마공원 등도 조성할 계획이다. 창원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평양 낙랑군 유물을 가는 곳마다 발견한 ‘신의 손’ 일제 학자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평양 낙랑군 유물을 가는 곳마다 발견한 ‘신의 손’ 일제 학자

    제국주의 고고학이란 말이 있다. 영국의 대영박물관에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5세(서기전 205~180)에 대해서 기록한 로제타스톤이 전시되어 있다. 이집트에 있어야 할 스핑크스와 수많은 미라들도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에 있다. 제국주의 시대 강탈해 간 유물들로 제국주의 고고학의 산물들이다.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일본이 제국주의 고고학을 수행했는데, 앞의 나라들과도 사뭇 다르다. 영국, 프랑스 등은 유물은 강탈했지만 그 나라들의 역사를 바꾸지는 않았다. 반면 일본은 고고학을 한국사 조작의 용도로 악용했다. 더 큰 문제는 일본의 고고학자 니시카와 히로시가 ‘일본 제국주의 아래에서 조선고고학의 형성’(1970년)이란 논문을 쓴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일본인들이 한국 고고학을 시작했는데, 아직도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조선총독부에서 시작한 한국의 고고학 교토대 교수인 고고학자 요시이 히데오는 ‘식민지 지배에 있어서 일본인의 고고학적 조사’(2005)라는 강의를 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가짜로 만들기 위해서 만든 용어인 ‘원삼국’(原三國)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가 강의에서 ‘식민지 시기 조선의 고적 조사사업’을 세 시기로 나눈 것은 음미할 만하다. 첫 시기는 ‘일본인에 의해 본격적인 조사 사업이 시작된 시기’(1900~1908)인데, 두 명의 고고학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한 명은 조선왕실의 유물을 보관하던 이왕직박물관에도 근무했던 도쿄제국대학 인류학연구실 소속 야기 소우사부로(1866~1942)이고 다른 한 명은 지금도 한국고고학계에서 크게 높이는 세키노 다다시(1868~1935)다. 세키노는 원래 도쿄공대에서 조가학(造家·건축학)을 전공한 건축학도였다. 그러나 고대 야마토왜(大和倭)의 수도였던 나라(奈良)의 고건축들을 연구하고, 평성경(平城宮) 유적을 발굴하면서 고고학자를 겸하게 되었다. 그는 백제인들이 망국 후 서기 665년 후쿠오카 북부에 쌓은 조선식 산성인 기이성(基肄城·기이조)도 발굴했으므로 고대 야마토왜가 백제인들의 담로(擔魯·제후국)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세키노는 1902년부터 한국에 여러 차례 와서 유적들을 발굴하는데, 이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한나라 및 낙랑 유물을 ‘우연히’ 발견하는 ‘신의 손’이 되었다.●‘조선고적도보’를 마구 나눠 준 군인총독 요시이가 분류한 ‘식민지 시기 조선의 고적 조사사업’의 두 번째 시기가 ‘조선총독부 주도의 조사체계 확립’의 시기로 세키노가 조선총독부의 자금으로 한국 각지의 고적을 조사하고 다녔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에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개관하고 이듬해 ‘고적조사위원회’를 설치했다. 표면적으로는 한국 내의 유적, 유물들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보존하는 사업처럼 보이지만 요시이가 “한반도의 고고학적 조사는 조선총독부와 관련 있는 일부 일본인들로 제한했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일본인들의, 일본인들에 의한, 일본인들을 위한’ 고고학이었다. 세키노는 가는 곳마다 낙랑 유물을 발견하는 ‘신의 손’이 되고, 일본이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함으로써 세계적인 주목까지 받게 된다. 세키노는 1915년부터 1935년까지 조선총독부 간행으로 초호화판 ‘조선고적도보’(1915~1935)를 발간했다. 여학교 교원들에게도 칼을 차고 교실에 들어가게 했던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총독실에 ‘조선고적도보’를 쌓아 놓고 국내외의 내외빈들에게 마구 뿌렸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군인이었다는 육군대장 데라우치가 고고학을 얼마나 중요한 식민통치의 일환으로 삼았는지를 말해 주는 일화이다.●검증받지 않은 정설, 세키노 다다시 세키노의 발굴 결과에 대해서 남한 학계는 아직 단 한 번도 본격적인 검증 작업을 하지 않고 이른바 ‘정설’로 떠받들고 있다. 낙랑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오영찬 이화여대 교수는 이렇게 썼다. “낙랑군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와 함께 구체적인 역사상이 정립된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의 일인데, 여기에는 고고학 발굴 조사 자료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낙랑고분 발굴 조사는 1909년 도쿄제국대학 건축학과 세키노에 의해 개시되었다.”(오영찬, ‘낙랑군 연구’, 사계절, 2006년, 16쪽) 2016년쯤에는 이른바 젊은 역사학자들이 ‘역사비평’에 조선총독부를 계승한 강단의 기존 학설을 열렬히 옹호하고 나서서 조선일보로부터 ‘국사학계의 무서운 아이들’이란 칭찬을 받았다. 이들은 그 내용을 ‘한국 고대사와 사이비역사학’(역사비평사·2017)이란 책으로 묶어냈는데, 위가야는 “이후 1920년대 중후반에 이르기까지의 (세키노의) 조사를 통해 확인된 유적과 유물들은 낙랑군의 중심지가 평양이었음을 확인시켜 주는 핵심적인 증거로 인정받았다”(124쪽)고 서술하고 있다. ‘낙랑군=평양설’의 뿌리가 세키노의 고고학이란 논리다. ●세키노 다다시의 양심고백? 그런데 세키노가 한국에서 이런 높은 평가를 받는 것에 흡족해할지는 미지수다. 세키노는 조선총독부에서 심혈을 기울인 ‘조선고적도보’의 편집책임자였으면서도 이 책의 내용에 의문도 제기했기 때문이다. ‘조선고적도보’는 평안남도 대동군 대동강면 토성동을 낙랑군을 다스리던 조선현의 군치(郡治)가 있던 ‘낙랑군지치’(樂浪君治址)라고 표기했는데, 세키노는 그 뒤에 물음표를 달아서 의문을 표시했다. 황해군에 있었다는 대방군지치에도 마찬가지 물음표를 달아 놓았다. ‘조선고적도보’의 두 핵심 내용은 ‘낙랑군=평양설’과 ‘대방군=황해도설’인데, 왜 굳이 ‘과연 그럴까?’ 하는 물음표를 붙여 놓았을까. 세키노는 또한 ‘낙랑=평양설’의 결정적 증거라는 ‘효문묘 동종’(孝文廟銅鐘)을 비롯해 자신이 발견한 낙랑군의 주요 유물들마다 ‘우연히 발견했다’고 꼬박꼬박 덧붙여 놓았다. 게다가 우연이 거듭되면 필연이라는 속설을 입증하는 내용을 ‘세키노 일기’(關野貞日記)에 남겼다. 문성재 박사는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2016)에서 세키노의 일기를 몇 대목 공개했는데 1918년 북경에서 쓴 일기에 이런 구절들이 나온다. ①대정(大正) 7년(1918) 3월 20일 맑은 베이징, “(베이징) 유리창가의 골동품점을 둘러보고,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위하여(朝鮮總督府博物館ノ爲メ) 한대(漢代)의 발굴품을 300여엔에 구입함” ②대정 7년 3월 22일 맑음, “오전에 죽촌(竹村)씨와 유리창에 가서 골동품을 삼. 유리창의 골동품점에는 비교적 한대(漢代)의 발굴물이 많고, 낙랑 출토품은 대체로 모두 잘 갖춰져 있기에(樂浪出土類品ハ大抵皆在リ) 내가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수집함” 세키노는 베이징의 골동품 거리인 유리창가에서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위하여’ 한나라 유물들과 낙랑 출토품을 적극적으로 사들였다. 세키노는 왜 평양에 있었다는 낙랑군의 유물을 베이징에서 사서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보냈을까. 낙랑군 유물은 왜 평양이 아니라 베이징에서 거래되었을까. 낙랑군은 평양이 아니라 중국 사료들이 말하는 것처럼 베이징에서 그리 멀지 않은 현재의 하북성 노룡현(盧龍縣) 지역에 있었기에 베이징 골동품가에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낙랑군 유물을 평양이 아닌 머나먼 베이징에서 사서 조선총독부로 보냈다는 세키노의 고백이야말로 ‘만들어진’ 제국주의 고고학의 실체를 증언해 준다.
  • [글로벌 인사이트] 해외 영토 방치한 佛… 성난 주민들 “경제·치안 대책 내놔라”

    [글로벌 인사이트] 해외 영토 방치한 佛… 성난 주민들 “경제·치안 대책 내놔라”

    “정부는 주민 여러분들께 병원 시설, 우회 도로, 학교 등 인프라를 신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이 밖에 공항 시설도 개선하고 항공권 가격을 더 낮출 수 있도록 공항에 취항하는 항공사들의 경쟁을 활성화시킬 것입니다.” 에두아르 필리프 프랑스 총리는 지난 19일(현지시간) 파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동아프리카의 작은 섬 마요트 주민을 위한 인프라 확충 계획을 발표했다. 마요트는 아프리카 대륙과 마다가스카르 사이에 위치한 작은 섬으로 유럽의 프랑스 본토와는 직선거리로 7500㎞나 떨어져 있지만 엄연한 프랑스의 18개 ‘레지옹’(주에 해당하는 광역지방자치단체) 가운데 하나다. 앞서 지난 3월 12일에도 아니크 지라르댕 프랑스 해외영토부 장관이 마요트를 직접 방문해 주민들에게 경찰과 공공서비스 예산 증원을 약속했다. 하지만 인프라 확충과 치안 대책 마련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주민들을 달래기는 역부족이라 이번에 총리가 직접 나서게 된 것이다.‘위대한 프랑스의 재건’을 기치로 내건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정부가 역설적으로 해외 영토에서 순차적으로 쏟아지는 각종 요구와 시위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프랑스에 있어서 해외 영토의 존재는 단순히 ‘유럽연합(EU)의 일부인 프랑스’가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있는 강대국’으로서 프랑스의 높은 위상을 상징하는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가 해외 영토 주민의 생활 여건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지난 70년간 등한시하고 방치했던 결과가 최근 두드러지게 나타나면서 프랑스에 대한 이들 해외 영토의 결속력도 약화되고 있다. 프랑스는 20세기 전반까지 72개 국가에서 세계 육지의 8.7%인 1289만 8000㎢의 식민지를 보유하며 영국 다음가는 제국주의 열강으로 군림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이들 식민지가 대거 독립해 열강으로서 입지는 위축됐지만 여전히 많은 해외 영토를 보유하고 있다. 현재 프랑스가 유럽 대륙 밖에 보유하고 있는 해외 영토는 남태평양과 인도양, 대서양의 11개 지역에 걸친 11만 1700여㎢에 달한다. 이는 남한 면적보다 넓고 프랑스 전체 영토(약 64만㎢)의 17%에 해당된다. 해외 영토의 인구는 270만여명(프랑스 전체 인구는 6700만명)으로 집계됐다. 영국이 보유한 잔존 해외 영토가 포클랜드섬을 비롯한 13개 지역(남극 제외) 1만 8170㎢(총주민 25만여명)에 불과한 것과는 대조적이다.프랑스는 1946년 이후 이 해외 영토를 더이상 ‘식민지’라고 부르지 않는다. 11곳의 해외 영토 가운데 5곳(기아나, 과들루프, 레위니옹, 마르티니크, 마요트)는 행정구역상 유럽 본토와 별 차이가 없는 레지옹의 지위를 갖추고 있다. 이 밖에 규모가 작은 5개 지역은 ‘해외 집합체’(생마르탱, 생바르텔레미, 생피레르 미클롱, 왈리스 퓌튀나, 폴리네시아)로 운영하고 있으며 독립성이 강한 뉴칼레도니아(프랑스명 누벨칼레도니)는 ‘특별 공동체’의 지위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 프랑스 상원 343석 가운데 21석, 하원 577석 가운데 27석이 이들 11개 해외 영토에 할당된 의석일 정도로 본토와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허용하고 있다. 영국이 본국에만 의회 의석을 할당한 것과는 대조적이다.하지만 최근 두 달 가까이 시위가 이어진 마요트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만 달러 정도에 그친다. 인근 국가인 코모로(748달러), 마다가스카르(368달러)에 비교할 바가 아니지만 본토의 4분의1 수준이라 상대적 박탈감이 크다. 마요트의 실업률은 프랑스 전체의 2배인 25.9%에 이르며, 인구 10만명당 의사 수는 18명으로 프랑스 전체 평균의 10분의1에도 못 미친다. 무엇보다 인근 다른 섬들에서 프랑스령인 이곳으로 유입되는 불법 이민자들이 폭증하면서 공공서비스 마비와 치안 불안에 시달려 왔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2월 학교에서 갱단이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마요트 주민들은 “인근 다른 지역이 프랑스에서 독립할 때 우리는 프랑스에 남아 있기를 택했는데 결국 프랑스로부터 배신당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남미 대서양 연안에 있는 해외 영토 기아나 주민들도 지난해 4월 인프라 확대와 치안 강화 등을 요구하는 총파업을 벌였다. 특히 기아나에는 프랑스의 쿠루 우주기지가 있어 프랑스뿐 아니라 EU에도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다. 지난해에 총파업으로 이 우주기지 운영에 차질이 빚어졌고, 한국의 통신위성 ‘코리아샛’ 7호의 발사도 지연됐었다. 프랑스는 기아나 주민이 요구한 공공 인프라에 대한 투자와 경제 활성화를 약속하며 겨우 파업 사태를 진정시켰지만, 청년실업률이 50%에 이르고 인구의 30%가 식수나 전기를 이용하지 못하는 상황이라 여전히 불씨는 남아 있다. 프랑스 인구통계연구소의 클로드 발랑탱 연구원은 AFP통신에 “해외 영토 주민들의 요구는 교육·경제·보건·치안 등의 분야에서 프랑스 본토와 같은 기준을 적용해 달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밖에 신혼여행지로 많이 알려진 남태평양의 뉴칼레도니아 자치의회는 오는 11월 4일 프랑스로부터의 분리독립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할 예정이다. 뉴칼레도니아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세계적 관광지인 데다 전 세계 니켈 매장량의 4분의1에 가까운 양이 매장된 자원의 보고로 경제 수준은 비교적 높다. 하지만 뉴칼레도니아에서는 1985년부터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주장한 무장단체가 활동하기 시작했고, 1988년에는 원주민인 카나크인 무장단체가 프랑스인 판사와 경찰 등 27명을 인질로 잡고 대치하다 결국 프랑스군에 진압돼 70여명이 사망한 비극적 역사가 있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소요 사태가 확산되자 뉴칼레도니아의 자치권을 대폭 확대해 주면서 이를 무마했다. 이후 10년 뒤인 1998년에는 프랑스가 추가 자치권 이양을 단행했고, 뉴칼레도니아는 2014년 이후에는 독립을 포함한 정치적 문제를 언제든지 주민투표에 부칠 수 있게 됐다. 지난해 출범한 뉴칼레도니아의 새 자치정부는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전면에 내세웠다. 지난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주민의 24.4%만 독립에 찬성해 반대 여론(54.2%)이 우세하지만 ‘잘 모르겠다’는 부동층(21.4%)도 많아 그동안 뉴칼레도니아의 과거사 문제 해결에 소극적이던 프랑스 정부는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오는 4일 뉴칼레도니아를 방문해 현지 여론을 청취하고 1988년 인질극 사건의 현장을 방문해 희생자들을 추모할 예정이다. 프랑스가 지금까지와 같이 해외 영토에 대한 투자를 게을리할 경우 이들 지역이 중국과 같은 여타 강대국의 영향권으로 편입될 수 있다는 경고음도 나온다. 실제로 남태평양의 또 다른 해외 영토 폴리네시아에서는 2000년대부터 중국 자본의 투자가 활성화되면서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다. 중국 티앤루이 그룹은 폴리네시아 현지 양식장과 식품 회사에 투자하고 HNA그룹은 호텔을 건립하는 등 폴리네시아에서 중국 자본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고마운 존재로 각인되고 있다. 폴리네시아는 1995년 프랑스 정부가 핵실험을 실시한 지역이지만 프랑스 정부는 이 지역에서 정확한 환경 피해를 산정해 달라는 요청을 거부해 프랑스 정부에 대한 현지 주민들의 반감은 심하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폴리네시아 타히티섬의 중국 영사관이 건물주의 허락 없이 공관에 위성안테나를 설치해 논란이 불거졌다. 중국 영사관의 행태에 화가 난 건물주는 지난 2월 공관 임대 기간이 종료하자 공관 건물을 비워 달라고 요구했지만 중국 영사관은 이를 거부하고 건물주에게 공관을 중국 정부에 팔라고 압박했다. 건물주가 소송을 제기하려 하자 중국을 의식한 폴리네시아 자치정부는 오히려 “어떤 법원도 관련 소송을 맡지 않을 것”이라고 압박해 이 지역에서 프랑스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 외교안보전문매체 더 디플러맷은 “프랑스 정부가 해외 영토에 대해 신경을 덜 쓰는 동안 이들 지역은 중국과 같은 신흥 경제대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그만큼 안보나 환경 측면에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조선인에게 해외 여행은 ‘근대에 대한 동경’이었다

    조선인에게 해외 여행은 ‘근대에 대한 동경’이었다

    근대 조선의 여행자들/우미영 지음/역사비평사/529쪽/2만 5000원 “밤 되어 시모노세키 항에 정박하고 히로시마현에서 아침 해 바라보았지. 해군과 육군을 양성하느라 산자락 바닷가에 길을 내었고 산은 푸르게 숲이 우거졌으니 국방의 위력을 알 수 있었네.”1908년 ‘대한학회월보’에 실린 유학생 옥구생의 글 ‘동도잡시’의 일부다. 그는 당시 선진국이었던 일본에 도착해 군대와 울창한 산림을 마주하고 감탄을 금치 못한다. 강해지는 일본을 본 그는 기울어가는 조선을 돌아보며 “조국을 크게 세우고 다시금 억만세를 외쳐보리라”면서 시를 마무리한다.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한·일병탄 사이에 놓인 유학생의 일본에 관한 부러움과 조국에 대한 다짐이 이렇게 교차한다. ‘근대 조선의 여행자들’은 당시의 다양한 여행자와 그들의 여행 양상, 그리고 여기에 담긴 여행자들의 시선을 담았다. 학생, 기자, 작가, 학자, 정치인을 비롯해 일반 관광객들의 여행기는 물론 당시 문학작품과 관공서 글 등을 수록하고 분석했다. 지금은 여성 대부분이 여행을 자유롭게 즐길 수 있지만, 당시엔 교육받은 극소수 여성만 가능했다. 그 시대 여성들의 외국 여행은 각별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는 억압받는 여성에 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여성 운동가이자 교육자인 박인덕이 1928년 한 잡지에 기고한 ‘조선여자와 직업문제’에도 이런 모습이 드러난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카고시를 향해 올 때 역장마다 여역원(여성 역무원)들이 간단한 행장을 차리고 일하는 것을 본 일이 있다. 어디든지 사업이란 명칭이 있는 곳에는 남녀가 같은 권리를 가지고 일을 한다. (중략) 우리 가정 같아서야 일은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가정 사업에 헤매이기에 감히 다른 일은 염두에도 못 두게 되고…”라고 지적한다. 일제강점기부터 시작한 수학여행에 관한 내용도 흥미롭다. 수학여행이 학교 정기 행사로 정착된 시기는 1920년쯤부터다. 일제는 1911년 제1차 조선교육령 발표 이후 실용주의를 부르짖으며 실업교육에만 치중하다 3·1운동 이후 교육정책을 달리한다. 중등교육과정에 인문교육을 시작했으며, 수학여행은 그 일환이었다. 그러나 당시 사회상 여행은 유흥으로 비칠 수 있다. 동아일보는 1926년 10월 11일자에 “조선의 경제 상태에 비해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여행 시기가 농가의 추수기와 맞물려 인력적으로 낭비”라고 지적하기도 한다.책은 1~5부까지 여행과 여행자의 유형에 따른 다양한 여행기를 수록하고 분석했다. 다만 6부에서는 중외일보사 신문기자인 이정섭을 별도로 빼내 분석했다. 중외일보사는 1920년대 국내외 변화에 맞춰 ‘세계 시찰’을 목적으로 그를 중국과 유럽에 파견했다. 일본에서는 보통선거 시행이 가시화하고, 사회주의 운동이 진전될 때였다. 중국에서는 국민당이 북벌을 전개할 무렵이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민족주의운동이 고조되는 등 역동적인 움직임이 보였다. 지금까지 시찰자 대부분이 일본 식민지 시선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던 반면, 그는 객관적이고 당당한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여행기에서 근대 조선의 음울한 분위기가 조금씩 벗겨지는 것도 이즈음이다. 책은 저자가 썼던 논문을 단행본으로 바꾸며 다소 딱딱하게 읽힌다. 그러나 근대 조선에서의 여행은 어땠는지 살펴보는 여정은 그 자체로 즐거운 여행임에 틀림없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책꽂이]

    [책꽂이]

    추사 김정희(유홍준 지음, 창비 펴냄) 추사 김정희(1786~1856)를 30여년간 연구한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가 재조명한 추사의 일대기. 탄생부터 만년까지 까칠한 천재가 위대한 예술가가 된 과정을 흥미롭게 풀어낸다. 그림 ‘세한도’와 글씨 ‘침계’ 등 280여점의 컬러 도판이 추사 예술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600쪽. 2만 8000원.나는 일본군 성노예였다(얀 루프 오헤른 지음, 최재인 옮김, 삼천리 펴냄) 1942년 일본군이 네덜란드 식민지 인도네시아를 침공했을 때 일본군으로부터 성학대를 받은 사실을 증언한 네덜란드 여성 얀 루프 오헤른의 회고록. 평화와 여성 인권 운동을 펼치고 있는 저자가 지난 50년간 가슴속에 담아둔 고통스러운 기억을 털어놓는다. 308쪽. 1만 7000원.요코 씨의 말 1~2권(사노 요코 지음, 기타무라 유카 그림, 김수현 옮김, 민음사 펴냄) 가식 없는 솔직담백한 에세이로 독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일본 작가 사노 요코가 생전에 발표한 작품 중 큰 공감을 얻었던 글을 엄선해 기타무라 유카가 그림을 붙였다. 노년의 일상, 소박한 기쁨, 잃어버린 것에 대한 쓸쓸함 등 가벼운 소재이지만 묵직한 울림을 주는 글들이 묶였다. 각 권 180쪽. 각 권 1만 4000원.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이유진 지음, 메디치 펴냄) 연세대 중국연구원의 전문 연구원인 저자가 천년 고도 시안, ‘삼국지연의’ 낙양으로 잘 알려진 뤄양, 송나라의 카이펑, 중국 시인 소동파의 고장 항저우, 근현대사의 비극이 서린 난징, 중국의 수도 베이징 등 중국 역사의 심장부를 이룬 여섯 도읍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524쪽. 1만 8000원.엄마가 아니어도 괜찮아(이수희 지음, 부키 펴냄) ‘아이 없는 삶’을 비주류 혹은 비정상으로 분류하는 한국의 가족주의 사회에서 아이 없이 사는 여성들이 겪는 현실적인 문제를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다양한 여성들의 인터뷰를 통해 가정과 사회에서 직면하는 일에 당당하게 대처하는 법도 일러준다. 264쪽. 1만 3800원.공감의 언어(정용실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명사 인터뷰와 책 프로그램 진행자로 이름을 알린 26년차 아나운서 정용실이 공감을 끌어내는 대화와 소통의 가치를 설명한다. 저자는 진정한 호기심으로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고, 감정을 살피는 훈련을 해야 유연한 대화를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244쪽. 1만 3000원.
  • ‘3·1운동 100주년’ 독립운동 산실 안동 임청각 복원

    ‘3·1운동 100주년’ 독립운동 산실 안동 임청각 복원

    경북 독립운동 으뜸마을 선정 충북 임정 대통령 기념관 건립 국채보상운동 아카이브 구축 # 경북 안동시 법흥동에 있는 ‘임청각’은 항일독립운동의 산실로 꼽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1858~1932) 선생의 생가로도 유명한 이곳은 임진왜란보다 앞선 1519년 지어졌다. 현존하는 민가 중 가장 오래된 곳으로 이상룡의 아들 이준형(1875~1942), 손자 이병화(1906~1952)까지 3대에 걸쳐 독립운동가를 배출하기도 했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경북도는 일제강점기 때 강제로 훼손된 임청각의 원형을 복원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연지·사당 배수로를 다듬고 창호나 구들, 기단, 마루 등을 보수할 예정이다. 오는 10월까지 종합정비계획 용역을 마무리하고 전문가와 함께 복원시점·범위 등을 확정한다. # 1894년 청·일전쟁 당시부터 일본은 조선에 대한 적극적인 차관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한국의 재정을 일본에 예속시켜 궁극적으로는 식민지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이를 막고자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대구시도 이런 민족적 운동을 기념하고자 오는 6월부터 ‘국채보상운동 아카이브 구축사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대구시립 중앙도서관에 관련된 디지털 자료를 전시한다.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을 열람할 수 있는 도서관도 만든다.3·1운동 100주년이 1년 앞으로 다가오자 전국 시도 자치단체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행정안전부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위원회’가 제30회 중앙·지방 정책협의회를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을 주제로 26일 열었다고 밝혔다. 경북도는 임청각 복원사업 외에도 독립유공자를 많이 배출한 전통마을을 ‘독립운동 으뜸마을’로 선정해 육성하는 사업도 계획하고 있다. 경북도가 2016년 시행한 연구용역에 따르면 독립유공자를 11명 이상 배출한 마을이 9개 시군에 21곳이나 됐다. 영덕군 창수면 일대 마을에선 독립유공자가 27명이 나왔다. 충북도는 내년부터 2020년까지 임시정부 대통령 기념관을 건립한다. 백범 김구(1876~1949) 등 임시정부 국가수반을 지낸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재조명하기 위해서다. 임시정부 활동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기록화하고, 독립운동 당시 상황을 가상현실(VR)로 체험하는 공간도 마련한다. 위원회는 앞으로 3·1운동에 대한 각계각층의 참여를 이끌어 국민적인 축제로 만드는 전략을 추진하기로 했다. 아울러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의 가치를 세계적으로 알리는 작업도 해 나갈 계획이다. 오경진 기자 oh3@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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