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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대통령 최초”…‘이재명의 외교’에 日언론 들썩

    “한국 대통령 최초”…‘이재명의 외교’에 日언론 들썩

    본격 ‘외교의 시간’에 돌입한 이재명 대통령의 행보에 일본 언론의 시선이 집중됐다. 교도통신과 요미우리신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특히 이 대통령이 양자외교 첫 방문국으로 일본을 선택한 최초의 한국 대통령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이 대통령은 3박 6일 일정의 일본, 미국 방문을 위해 23일 출국했다. 이날 오전 일본 하네다 공항에 도착한 이 대통령은 도쿄에서 1박 2일간 한일 정상회담 등 일정을 소화한 뒤 미국으로 향한다. 일본 언론은 이 대통령이 미국을 찾기 전 일본을 먼저 방문한 것에 주목했다. 교도통신과 요미우리신문은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한국 대통령이 다자 회의 참석을 제외하고 양자 외교 첫 방문국으로 일본을 택한 것은 처음이라고 전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이념보다도 실익을 중시하는 이 대통령은 전례에 얽매이지 않고 (방문국을)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설했다. 이어 이 대통령이 지난 6월 캐나다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참석을 계기로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고 조기 일본 방문을 조율했다면서 “취임일로부터 불과 80일 만에 (일본 방문이) 실현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취임 80일만 빠른 방일…광복절 낀 8월도 처음”닛케이는 이 대통령의 이번 일본 방문이 이전 정권들과 비교하면 여러모로 이례적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부터 역대 한국 대통령 10명 중 이명박 전 대통령 방일 사례(취임 55일만) 다음으로 이 대통령의 방일이 빨랐다는 설명이다. 닛케이는 한국 대통령의 일본 방문은 역사 문제 등을 감안해 조율해야 해서 시간이 걸리는 편이라면서 “대일 관계를 중시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일본 방문에) 224일, 윤석열 전 대통령도 310일이 소요됐다”고 덧붙였다. 신문은 이 대통령이 광복절 전후로 반일 분위기가 조성되는 8월에 일본을 방문한 것에도 주목했다. 일본 총리가 한국을 첫 공식 방문한 1983년 이후 양국 정상의 상호 방문이 8월에 이뤄진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던 것을 고려하면, 이 대통령의 이번 방일은 최근 국제 정세를 고려한 실용외교 차원으로 풀이된다고 신문은 전했다. 이 대통령이 이날 보도된 아사히신문, 닛케이 등 일본 언론과 서면 인터뷰에서 “과거를 직시하되 미래로 나아가자”며 일본 측에 협력을 제안한 것에 대해서도 ‘실용주의’라는 평가가 나왔다. 아사히는 이 대통령이 ‘과거 직시’를 요구하면서도 한일관계 발전에 긍정적 자세를 보인 배경에는 한국에 대한 이해가 깊다고 평가받기도 하는 이시바 총리와 한일관계 기초를 견고히 하려는 의도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한일 정상 합의문에 ‘미래 지향’ 명기 예정”요미우리 “日, 역대 내각 역사인식 계승 표명”이와 관련해 요미우리신문은 이 대통령이 이시바 총리와 정상회담 후 공동 언론 발표 형태를 통해, 미래 지향의 관계 발전 등 내용을 합의문에 담을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최종 조율 중인 합의문에는 “양국 정상은 국교 정상화로부터 60년간 쌓아 올린 기반에 기초해 양국 관계를 안정적이고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간다. 또 역사 문제와 관련해서는 일본 측이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과가 포함된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포함해 역대 내각이 보여온 역사 인식의 계승을 다시 표명한다. 양국 정상 간 ‘셔틀 외교’ 활성화와 한일, 한미일 안보협력 등의 내용도 담긴다. 여기에 수소에너지를 비롯한 청정에너지 보급, 전략물자 공급망 구축 등 경제 안보 측면의 협력도 언급될 예정이라고 이 신문은 전했다.
  • 이 대통령 “광복절 순국선열 희생에서 특히 마음 쓰인 건 재일동포”

    이 대통령 “광복절 순국선열 희생에서 특히 마음 쓰인 건 재일동포”

    이재명 대통령은 일본 첫 순방인 23일 재일동포들과 만나 “80년 광복절을 맞이해 순국선열의 숭고한 희생을 떠올렸을 때 특히 마음이 쓰였던 분들이 바로 재일동포 여러분”이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200여명의 재일동포와 오찬 간담회를 하고 “대한민국 대통령이 양자 방문국으로 첫 일본을 찾은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이 대통령은 “아픔과 투쟁, 극복과 성장을 반복한 이 굴곡진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굽이굽이마다 우리 동포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다”며 일본 식민지 시대의 아픈 역사를 떠올렸다. 이 대통령은 “광복의 기쁨도 잠시 조국이 둘로 나뉘어 대립하면서 타국 생활의 서러움은 아마 쉽게 잦아들지 않고 오히려 더 커져갔을 것”이라면서 “그럼에도 여러분들께선 언제나 조국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버팀목이 되어주었다”고 추켜올렸다. 이 대통령은 민주화 시기 재일동포들이 억울하게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로 고통을 겪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대한민국 국가 폭력에 희생당한 피해자와 또 가족 여러분께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공식적으로 다시 한번 사과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이 대통령은 또 1903년 간토대지진 조선인 대학살을 떠올리며 “100년 전 아라카와 강변에서 벌어진 끔찍한 역사 그리고 여전히 고향 땅에 돌아가지 못한 채 일본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골들의 넋을 결코 잊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다시는 반인권적인 국가 폭력이 벌어지지 않는 나라다운 나라, 국민의 안전한 일상을 책임지는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드린다”고 했다. 이 대통령은 재일동포 지원 확대에 나서겠다고 약속했다. 이 대통령은 “양국 국민이 서로 신뢰의 마음을 나누며 서로의 삶을 풍부하게 채워주는 한일관계의 새로운 역사, 동포 여러분이 만들어주신 빛나는 성과”라고 평가했다. 이어 “여러분의 빛나는 활약이 다음 세대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동포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이중 민단 중앙본부 단장은 환영사에서 “이 대통령은 광복절 80주년 즈음해 재일동포에 특별 메시지도 발표해주었다”며 “재일동포들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이며 크나큰 보상이었다”고 밝혔다.
  • 87체제 이후 등장한 ‘뉴라이트’… 정쟁거리로 소모된 역사 [87년 체제 ‘대한민국’만 빼고 다 뜯어고치자]

    87체제 이후 등장한 ‘뉴라이트’… 정쟁거리로 소모된 역사 [87년 체제 ‘대한민국’만 빼고 다 뜯어고치자]

    MB정부, 1948년 건국 주장 수용이후 친일 인물 미화 작업 등 시도尹정부 땐 홍범도 흉상 철거 논란‘포스트 87’ 역사 논의는 거의 없어“다양한 관점 수용, 미래 만들어야” ‘역사 전쟁’은 윤석열 정부 이전까지만 해도 대중에게 익숙하지 않은 용어였다. 기껏해야 만주 지역에 있었던 나라들의 역사를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한국의 근현대사는 물론 고대사까지 곁눈질하는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응하는 것이 역사 전쟁의 전부로 여겨졌을 뿐이었다. 현재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역사 전쟁은 기존 해석을 뒤집으려는 이들과 이에 맞서 기존의 해석을 지키려는 이들의 충돌을 말한다. 역사 전쟁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2013년 뉴라이트 인사들이 주도하는 한국현대사학회가 중고교 역사 교과서를 비판하면서부터다. 그들은 당시 “현행 교과서의 한국 근현대사 부분은 대한민국 탄생을 죄악시하고 있으며 스탈린, 김일성, 박헌영이 공유하는 인식의 기본 틀로 구성돼 있다”며 역사 전쟁을 선포했다. 뉴라이트는 1960년대 반전 평화운동, 페미니즘 운동, 탈권위주의 운동에 반발해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에서 등장한 정치적 이데올로기 중 하나다. 한국의 뉴라이트는 노무현 정부 중반, 탄핵 후폭풍으로 보수 세력이 심각한 위기에 빠진 2004~2005년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한국의 뉴라이트는 대외적으로는 친일과 친미, 역사관으로는 식민지 근대화론, 이승만 국부론, 박정희 경제발전론 등을 앞세우며 1987년 민주화로 획득한 ‘87 헌법’을 반대하는 태도를 보인다. 역사학계를 비롯해 학계는 어떤 해석에 대해 반대되는 입장이 나오면 건전한 논의와 합의를 통해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 ‘정반합’의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 정치가 개입되면 학계의 건전한 논의나 자정 과정이 왜곡된다. 한국의 역사 전쟁이 지금처럼 격화되고 사회적 문제가 된 것은 정부가 직접 역사 전쟁의 선수로 뛰기 시작한 이명박 정부 때부터다. 이명박 정부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대한민국 건국 원년으로 삼자는 뉴라이트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정권 출범 직후 국무총리 산하에 ‘대한민국 건국 60년 기념사업회’를 설치했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교학사 교과서 사태나 역사 교과서 국정화 시도 등과 함께 친일 인물 미화 작업 등 뉴라이트 시각으로 역사를 해석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윤석열 정부에서는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일제강점기 독립전쟁 영웅들의 흉상을 철거하겠다고 선언하는 등 역사 전쟁이 절정에 이르렀다. 보수 정부에서 역사 전쟁이 격화되는 이유는 역사 해석을 이념 전쟁의 측면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과거를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해 미래 권력을 이어 가겠다는 생각이 저변에 깔린 것이다. 한국 현대 민주주의의 계보를 살펴본 ‘모두의 민주주의’ 저자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는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공고화 과정에서 과거사 청산이 추진되는 가운데 한국 근현대사 역사 인식을 둘러싼 역사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진 것”이라며 “뉴라이트를 비롯해 보수적 사회운동이 시작된 것은 보수 세력이 친일·독재 청산을 내세우는 과거사 문제로 자신들의 정체성 혹은 주도권이 손상을 입을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성재 충북대 교수는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란 당시 2023년 계간지 ‘문학인’ 겨울호에 ‘동상에게 죄를 물을 수 있는가’라는 글을 싣고 “논쟁은 반드시 민주적 가치, 타문화에 대한 존중, 인류애, 약자에 대한 배려와 같은 의식을 전제로 해서 이뤄져야 한다”며 “동상이 지닌 역사성과 가치를 논하기보다 정치적 의도를 앞세우는 바람에 논쟁이 전쟁으로 확산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역사 전쟁은 사실 과거를 해석하는 관점에 대한 문제다. ‘포스트 87’을 이야기할 때 정치, 사회, 노동, 복지, 경제 분야에 대한 논의는 활발했지만 문화예술 특히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었다. ‘87체제’가 시작된 이후 뉴라이트가 등장해 지금과 같이 역사까지 정쟁의 대상으로 삼는 역사 전쟁이 벌어지는 현시점에 다른 분야와 달리 적어도 역사 인식이라는 측면에서는 87체제의 변혁이 아니라 87체제 회복이나 바로 세우기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지금처럼 역사 해석을 두고 국론이 분열되는 상황은 역사 해석을 정쟁에 이용한 정치권이 촉발한 만큼 해결도 정치권이 앞장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4월 말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선출 직후 첫 공식 일정으로 현충원을 찾아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했다. 당시 이 대통령은 아직 역사적 평가가 끝나지 않은 이승만, 박정희 두 전직 대통령 묘역을 참배한 이유에 대해 “망인들의 문제와 평가는 역사가들과 시민사회에 맡겨도 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역사학계는 이처럼 정치인들이 앞장서서 역사적 해석을 국론 분열의 빌미로 만들지 않고 통합의 메시지를 던질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평가하도록 학계에 맡겨야 한다는 말이다. 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국가로 일컬어지는 역사공동체는 한국인이라는 존재자가 있음을 가능하게 만드는 존재”라면서 “뉴라이트처럼 한국이라는 존재 속에 우리가 존재자로 있었던 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몰역사적 관점”이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종 다양성이 건강한 생태계를 형성하듯 정체성을 흔드는 극단적 주장은 배제하되 다양한 관점을 수용해 우리 스스로 미래 역사의 답을 만들어야 한다”며 “포스트 87체제에서는 제대로 된 미래 역사 인식을 위해 열린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 독립기념관 노조, “김형석 관장 역사의식 동의할 수 없다”

    독립기념관 노조, “김형석 관장 역사의식 동의할 수 없다”

    독립기념관 노조는 김형석 관장의 광복 80주년 경축식 기념사 논란과 관련해 19일 “김 관장의 역사 인식에 동의할 수 없다”며 대국민 사과를 촉구했다. 노조는 이날 김 관장실을 항의 방문해 이런 내용의 입장문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노조는 입장문을 통해 “광복 80주년을 맞아 발표된 김 관장의 기념사는 겉으로 보기에 국민 통합과 역사 성찰을 강조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문제점이 명확하다”고 주장했다. 노조는 김 관장이 기념사에서 광복을 ‘연합국의 승리로 얻은 선물’로 묘사한 데 대해 “1943년 발표된 카이로 선언에서 연합국은 일본 패망 이후 조선의 독립을 보장한다고 명시했지만, 당시 국제사회에서는 미국·영국·중국이 한국 문제를 둘러싸고 신탁통치 등 다양한 이해관계를 논의하고 있었고 영국은 자신들의 식민지 문제로 인해 한국 독립을 강력히 반대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러한 관점은 다양한 해석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만 아니라 연합국의 식민지들조차 해방될 수밖에 없었던 전 세계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운동 성과를 강대국의 ‘선물’로 폄하하는 관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다양한 역사 해석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독립기념관 건립 목적인 독립 정신에 어울리지 않는 관점을 독립운동에 대한 독립기념관의 입장과 해석에 포함하려는 시도로 읽힐 수 있다”고 지적했다. 노조는 한국 독립운동 가치와 독립기념관의 정체성을 훼손한 김 관장에 대해 강력한 유감을 표명과 함께 광복절 경축식 논란으로 얼룩진 것에 대해 독립기념관 구성원, 대한민국 국민에게 사과를 촉구했다. 앞서 김 관장 기념사 논란과 관련해 지난 17일 반박문을 통해 “기념사에서 국민 통합을 위해 역사 문제에 대한 갈등을 치유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광복을 세계사적 입장에서 보면 ‘연합국의 승리로 광복이 되었다’라고 주장하는데, 함석헌은 ‘뜻으로 본 역사’에서 ‘8∙15 해방은 하늘이 준 떡’이라고 표현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곧이어, 그러나 이런 해석은 ‘항일 독립전쟁의 승리로 광복을 쟁취했다’라는 민족사적 시각과 다른 것이라고 지적하며, 3.1운동과 임시정부 독립투쟁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일부 언론에서는 뒷부분은 모두 빼버린 채 ‘연합국의 승리로 광복이 되었다’는 인용 부분만 발췌해 내용을 왜곡 보도했다”고 주장했다.
  • [이종수의 산책] 광복, 갑자기 온 선물이었나

    [이종수의 산책] 광복, 갑자기 온 선물이었나

    광복을 말하는 게 낯설어지고 있다. 시간의 이끼가 과거를 생소하게 만들어 놓기 때문이다. 때로 그것이 우리에게 약으로 작용한다고 하니, 기억의 퇴색을 원망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상처와 고통이 아직 선명하고 그 범위가 사람, 제도, 정신, 땅에 이르기까지 광범하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는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아직 외치고 있다. 광화문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진영 간 싸움, 한반도의 남북 분단도 일제강점의 비극에서 비롯된 바 크다. 상처의 뿌리를 바르게 인식해야 치유와 예방을 할 수 있는데, 광복절 날 경험한 목사의 설교나 언론인의 글은 안타까웠다. 우리가 총 한번 쏴 보지 못하고 국권을 상실했으며 광복 역시 연합국에 의해 선물로 주어졌다는 내용이 그랬다. 과거에 대한 비분강개로 이해하려 해도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자기 비하가 역사 왜곡과 정신의 위축을 불러온다. 역사의 어둠을 밝히고자 피를 뿌린 수많았던 이들에게는 모독이다. 평화주의자 안중근은 재판관이 이토를 처단한 이유를 물었을 때 10만명 이상의 의군과 조선인이 항거하다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사형을 각오한 순결한 영혼이 증언한 1910년 이전의 상황이다. 국권을 빼앗긴 경술국치 후의 투쟁과 희생은 정확히 말하기 어렵지만, 신뢰할 만한 자료가 하나 있다. 2013년 일본 도쿄의 한국대사관이 이사 과정에서 발견한 희생자 명부 67권이다. 거기에는 투쟁 기간의 희생자 수가 23만명 이상으로 나타나 있다. 이 문건은 1953년 이승만 정부가 제2차 한일회담에서 일본에 제시하려고 전국적 조사를 통해 작성한 것이기에 객관성이 상당 수준 있다. 이게 최소의 수치이고 다른 연구들은 수백만 명까지 추정한다. 1943년 11월 27일 한국의 독립을 결의한 카이로선언도 마찬가지다. 미국, 영국, 중국이 구조적으로 일본의 대척점에 있었지만 거저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 아니었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재정을 뒷받침하던 재미 한인들과 안창호, 김규식, 박용만 같은 지도자들이 미국에 독립의 필요성을 깊이 각인시켜 놓았다. 이에 미군은 전략국(OSS)을 통해 한국의 광복군과 한반도 진입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중국은 김구의 활동과 안중근, 윤봉길의 거사로 큰 자극을 받았고 영국은 1943년 광복군의 인면전구공작대와 연합군을 구성해 인도와 미얀마에서 일본과 전투를 벌였고 그 기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내의 투쟁과 저항을 경험한 일본의 통감부 경찰 간부 아이바 기요시는 패전 후 일본으로 도망가 외무성 고문을 하며 ‘조선민족 사상에 관한 관견’을 썼다. 거기서 그는 ‘35년 한국을 지배해 보니 한민족을 일본화하려면 적어도 300년은 더 걸릴 것’이라고 썼다. 일본이 일찍부터 침략을 준비하며 진행해 정작 병탄이 있던 1910년에는 완만한 투쟁이 표출된 면도 있다. 구마모토현은 1890년대 지금의 서울 남산 한국의 집 자리에 기숙학교 ‘낙천굴’을 설립해 미래의 식민지배 인력을 양성했다. 총독부 경찰 삼인방 사카이, 소노키, 아이바는 모두 여기 출신으로 이들은 주말에 한강변 낚시꾼들과 어울렸으나 아무도 그들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일본이 도쿄대 고토 분지로 교수를 한국에 보낸 것도 1900년이었다. 그는 광물학자로 자원 수탈의 관점에서 한반도의 지질과 광물을 조사했다. 한국인이 알고 있는 산맥 개념은 그가 만들어 제시한 것으로 지형적으로는 낭림, 적유령, 차령, 노령산맥이 실재하지 않는데도 그의 개념은 오래 살아남았다. 1941년 12월 9일 광복군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도 한반도에 진격하지 못한 채 종전을 맞은 건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총 한번 쏴 보지 못하고 나라를 잃었다거나 광복이 연합국의 선물로 주어졌다는 말은 오늘의 한국 사람이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인식들이다. 더위가 지나고 나면 서울의 옛 서대문형무소 자리를 찾아가 담장에 붙어 있는 강우규 의사의 눈빛을 보라. 시간이 더 있다면 한 해 3만명 이상의 한국인이 다녀가는 뤼순 감옥을 순례해 보라. 신채호와 우덕순, 최흥식, 안중근이 거기 있다. 우당 이회영도 아직 거기에 살아 있다. 이종수 연세대 국제캠퍼스 부총장
  • [특파원 칼럼] 전범이 된 조선인을 아십니까

    [특파원 칼럼] 전범이 된 조선인을 아십니까

    지난 13일 ‘왜 조선인이 전범이 됐는가’를 주제로 전시가 한창인 도쿄 신오쿠보 고려박물관을 찾았다. 열댓 명의 일본인들 사이에서 나이가 지긋한 해설 봉사자 다니가와 요시히로가 말했다. “명예 회복과 일본 정부의 사과를 요구합니다. 당사자들은 이미 모두 세상을 떠났고 2·3세들이 서명운동을 이어 가고 있지만 현실은 결코 쉽지 않네요. ” 포로 학대 혐의로 BC급 전범이 된 조선인들은 군속으로 끌려가 대부분 포로 감시원으로 동원됐다. 태평양전쟁 후 전범 재판에 선 한반도 출신은 148명, 이 중 23명은 사형됐다. 일본은 국적을 박탈해 전범 생존자 지원 대상에서 제외했고, 조국은 그들을 친일파로 몰았다. 우리 정부가 전범 조선인을 강제동원 피해자로 인정한 건 2006년이 돼서였다.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모든 문제가 끝났다며 사과하지 않았다. 이번 전시는 일본인들이 중심인 ‘동진회를 응원하는 모임’의 지원으로 열렸다. 동진회는 BC급 전범으로 사형수를 지냈다 풀려난 고 이학래씨가 일본 정부에 조선인 전범의 구제를 요구하며 만든 단체다. 이씨는 17세에 태국의 연합군 포로수용소 감시원으로 배치됐다. 단순 감시원이었지만 전범 재판에서는 책임자로 몰려 사형 선고를 받았다. 감형으로 출소했지만 한국에서는 부역자, 일본에서는 ‘없는 존재’였다. 그는 “반강제였다 해도 일제에 부역했다”는 부채감 속에서 평생을 살았다. 1991년 이씨는 7명의 조선인 전범 생존자들과 함께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보상과 사과를 요구하며 법정에 섰지만 3심까지 모두 패했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보상은 입법의 재량”이라는 취지의 판결을 했다. 이에 2008년 일본 야당인 민주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특별급부금 법안이 제출됐으나 심의조차 못한 채 폐기됐다. 2016년에는 자민당 의원들까지 참여한 초당파 법안이 추진됐으나 결국 무산됐다. 그리고 2021년 4월, 마지막 생존자였던 이씨가 세상을 떠났다. 가해자이자 피해자라는 이중 낙인 속에 그들의 이름은 쉽게 드러나지 못했다. 그러나 폭주하는 일본 군국주의에 평범한 삶을 빼앗겼다는 사실만은 지워지지 않는다. 올해는 광복 80년, 일본 패전 80년인 해다. 일본 총무성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기준 일본 인구 1억 2380만 명 중 88.8%가 전후에 태어난 세대라고 한다. 공교롭게도 일본에서는 제국주의를 미화하며 ‘일본인 퍼스트’를 외치는 참정당 같은 세력이 힘을 얻고 있다. 식민지와 전쟁 피해를 목격하고 증언해 온 세대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전후 세대의 책임을 이어 조선인 전범의 명예를 되찾는 일에 애쓰는 일본인들의 희끗한 머리를 바라보며 해방 이후 세대인 우리는 어떤 책임을 다해야 하는지 스스로 묻게 된다. 광복 80년을 맞은 지금, 우리는 그날의 기억과 책임을 제대로 이어 가고 있는가. 명희진 도쿄 특파원
  • 조선 아이들을 전쟁기계 부속품으로… 일제의 야만적 야욕

    조선 아이들을 전쟁기계 부속품으로… 일제의 야만적 야욕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한 지 올해로 80년이다. 갖은 수탈과 억압으로 점철된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어린이들의 삶은 어땠을까. 지금 아이들과 무엇이 달랐을까. 일제강점기 대중문화와 한일 관계사를 연구하는 배우 출신 이영은 박사가 쓴 이 책은 1938년 열린 ‘조선총독상 글짓기 경연대회’ 수상작들을 통해 군국주의 제국의 식민지에 살았던 어린이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다. 특히 저자는 조선 어린이들의 세계와 여러 이유로 식민지 조선에 건너와 살게 된 일본인 어린이의 세계를 병치해 출신 사회와 배경의 차이로 인해 다른 세계관을 학습하게 될 수밖에 없음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돌아오는 길에 동네 잡화점에서 생강과 파를 사고, 이걸로 어머니의 병이 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저는 바로 숙모에게 약을 건네고 여동생을 업고 마당에 나가 놀았습니다. 그 후부터 어머니를 더욱 소중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중학교 1~2학년 정도에 해당하는 경성미동공립심상고등소학교 제3학년 김삼석의 ‘어머니의 병환’이라는 글의 일부다. 전라북도이리공립심상고등소학교 제3학년 도도 히데코의 글 ‘정돈’은 방 정리를 안 한다고 엄마에게 혼이 나는 모습을 기록했다. “갑자기 어머니의 큰 목소리가 공부방에서 들려왔습니다.…어머니는 바닥을 보면서 ‘…이렇게 어질러 놓고, 몇 번이나 주의를 줘도 이런 식이니까, 아무리 공부를 해 봐야 머릿속에 들어오겠니?’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상을 묘사한 짧은 글인데도 식민지 조선인 어린이와 일본인 어린이 삶의 차이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아이들의 시선으로 쓰인 글들이지만, 읽다 보면 조선총독부의 수상작 선정 기준을 알 수 있다. 앞서 사례처럼 어린이들 글은 일상을 소재로 하고 여러 감정이 담겨 있지만 공통점이 있다. 바로 총독부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국가주의 교육의 성공 사례들이라는 점이다. 어린이는 장래에 사회 일부로 편입돼야 하는 존재이니만큼 어른들, 특히 지배계급의 기준과 판단에 맞춰 넣어야 한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 이 책은 아이들의 시선으로 보는 일제강점기의 역사이면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을 어떻게 마주하고 키울지에 관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 대한민국 백 년의 질문: ‘진짜 죄인’은 누구인가

    대한민국 백 년의 질문: ‘진짜 죄인’은 누구인가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역에 군악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침내 열차 문이 열리고 이토 히로부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기회를 엿보던 한 사나이도 모습을 드러냈다.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장관과 의장대의 환영을 받으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그 순간 사나이는 품속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코레아 우라!” (대한독립만세) 사나이의 외침과 함께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총알은 정확히 이토 히로부미의 몸을 관통했다. 이토는 쓰러졌고 주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총을 쏜 사나이는 다시 한번 “코레아 우라!”를 외쳤고, 러시아 헌병대가 그를 제압했다. 그는 순순히 체포되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당당함이 가득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절대 빠질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다. 하지만 이 의거가 갖는 근본적 의미보다 ‘대한제국 의병이 일본 고위 관료를 저격했다’는 사실만 부각되는 점이 아쉽다. 대한제국 의병의 처절한 역사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군대를 동원해 고종황제가 있던 경운궁을 포위했다. 그리고 을사오적을 앞세워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했다.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해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이 모든 것을 지휘한 인물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였다. 을사늑약 소식이 알려지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을사의병이라고 불린 이 항일 투쟁에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백성이 참여했다. 1907년 일본은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근대식 무기와 군사 전술에 익숙한 해산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의병의 전력은 향상되었고 활동 지역도 넓어졌다. 당시 의병 활동을 정미의병이라고 부른다. 한일 합방을 계획하던 일본은 의병 부대 제거를 위해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시작했다. 의병으로 의심되는 마을은 포위한 뒤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였다. 그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일제의 토벌 작전으로 한반도 남부의 의병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북부의 의병들은 토벌을 피해 만주와 연해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안중근 의사가 쏜 총알의 의미 당시 의병 부대는 대부분 소규모였고, 정식 군사 훈련을 받은 일본군을 상대하기에는 무기와 보급이 열악한 상태였다. 의병들의 무기는 화승총과 죽창 등 재래식 무기였다. 해산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신식 소총을 확보했지만 그 수가 턱없이 모자랐고 총알도 부족했다. 일본군의 탄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항일 의병 활동도 점차 위축되었다. 심지어 패배주의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그러던 1909년, 하얼빈에서 안 의사가 조선 침략의 원흉이자 최고 사령관인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 소식은 항일 의병들에게 “우리도 해낼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고 항일 투쟁 활동에도 다시 불이 붙었다. 나아가 평범한 사람들의 항일 투쟁 의식을 고취해 1919년 3·1 운동과 같은 전국적인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안타까운 건 당시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살인’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그가 속한 천주교 교단에서는 의병의 무력 투쟁 활동을 폭력으로 간주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 교인은 안중근 의사와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안 의사가 총을 쏘게 만든 ‘진짜 죄인’은 누구일까. 서울 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 버스를 타고 남산도서관에 내리면 바로 옆 계단을 통해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안중근 의사라는 위대한 인물을 기리기에는 너무 작은 공간이라는 느낌을 준다. 정문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좌상에 인사하고 안으로 들어서면 그의 출생과 의병 활동, 의거, 순국에 이르는 빛나는 일생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안중근 의사가 여순 감옥에 있을 때 썼다고 전해지는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라는 글귀도 볼 수 있다. 이곳을 나설 때면 역사적 사실을 넘어, 잊어버린 애국정신과 뜨거운 나라 사랑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 대한민국 백 년의 질문: ‘진짜 죄인’은 누구인가 [한ZOOM]

    대한민국 백 년의 질문: ‘진짜 죄인’은 누구인가 [한ZOOM]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역에 군악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침내 열차 문이 열리고 이토 히로부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기회를 엿보던 한 사나이도 모습을 드러냈다.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장관과 의장대의 환영을 받으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그 순간 사나이는 품속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코레아 우라!” (대한독립만세) 사나이의 외침과 함께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총알은 정확히 이토 히로부미의 몸을 관통했다. 이토는 쓰러졌고 주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총을 쏜 사나이는 다시 한번 “코레아 우라!”를 외쳤고, 러시아 헌병대가 그를 제압했다. 그는 순순히 체포되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당당함이 가득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절대 빠질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다. 하지만 이 의거가 갖는 근본적 의미보다 ‘대한제국 의병이 일본 고위 관료를 저격했다’는 사실만 부각되는 점이 아쉽다. 대한제국 의병의 처절한 역사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군대를 동원해 고종황제가 있던 경운궁을 포위했다. 그리고 을사오적을 앞세워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했다.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해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이 모든 것을 지휘한 인물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였다. 을사늑약 소식이 알려지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을사의병이라고 불린 이 항일 투쟁에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백성이 참여했다. 1907년 일본은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근대식 무기와 군사 전술에 익숙한 해산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의병의 전력은 향상되었고 활동 지역도 넓어졌다. 당시 의병 활동을 정미의병이라고 부른다. 한일 합방을 계획하던 일본은 의병 부대 제거를 위해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시작했다. 의병으로 의심되는 마을은 포위한 뒤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였다. 그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일제의 토벌 작전으로 한반도 남부의 의병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북부의 의병들은 토벌을 피해 만주와 연해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안중근 의사가 쏜 총알의 의미 당시 의병 부대는 대부분 소규모였고, 정식 군사 훈련을 받은 일본군을 상대하기에는 무기와 보급이 열악한 상태였다. 의병들의 무기는 화승총과 죽창 등 재래식 무기였다. 해산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신식 소총을 확보했지만 그 수가 턱없이 모자랐고 총알도 부족했다. 일본군의 탄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항일 의병 활동도 점차 위축되었다. 심지어 패배주의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그러던 1909년, 하얼빈에서 안 의사가 조선 침략의 원흉이자 최고 사령관인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 소식은 항일 의병들에게 “우리도 해낼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고 항일 투쟁 활동에도 다시 불이 붙었다. 나아가 평범한 사람들의 항일 투쟁 의식을 고취해 1919년 3·1 운동과 같은 전국적인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안타까운 건 당시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살인’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그가 속한 천주교 교단에서는 의병의 무력 투쟁 활동을 폭력으로 간주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 교인은 안중근 의사와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안 의사가 총을 쏘게 만든 ‘진짜 죄인’은 누구일까. 서울 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 버스를 타고 남산도서관에 내리면 바로 옆 계단을 통해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안중근 의사라는 위대한 인물을 기리기에는 너무 작은 공간이라는 느낌을 준다. 정문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좌상에 인사하고 안으로 들어서면 그의 출생과 의병 활동, 의거, 순국에 이르는 빛나는 일생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안중근 의사가 여순 감옥에 있을 때 썼다고 전해지는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라는 글귀도 볼 수 있다. 이곳을 나설 때면 역사적 사실을 넘어, 잊어버린 애국정신과 뜨거운 나라 사랑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 “아들아, 조선을 위한 투사가 돼라”… 피 끓어오르게 한 윤봉길의 편지

    “아들아, 조선을 위한 투사가 돼라”… 피 끓어오르게 한 윤봉길의 편지

    국경을 뛰어넘은 편지히로히토 즉위식 보러 갔던 이봉창한글편지 소지 이유로 유치장 갇혀김규식, 편지·전보·신문사 찾아가유럽 각국에 한국 기사 518회 게재‘조선공산당 사건’ 12명 피고 무죄日변호사 편지 “이것이 나의 의무”치명적인 오해의 편지밀정 조문 간 이회영 부인 오해받아김창숙 ‘절교 편지’에 얼굴 보고 화해김창숙, 옥살이 차남에게 안부 편지해방되고서야 아들 유골 전해 받아3·1운동 가담했던 이미륵 獨 망명편지로 어머니 별세 소식 듣게 돼 편지란 위험한 물건이다. 1928년 히로히토 일왕 즉위식을 보러 갔던 이봉창은 경찰에 끌려가 일주일 동안 유치장에 갇혀 있어야 했다. 이유는 단 하나, 그가 한글 편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 충실한 일본 국민이 되려고 노력했던 이봉창은 1932년 1월 일왕을 다시 찾아갔고, 수류탄을 던졌다. 3개월 뒤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군에게 폭탄을 투척한 윤봉길은 두 아들에게 이런 편지를 남겼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일본의 침략은 군대와 기차 그리고 우체국과 함께 왔다. 전보와 엽서, 편지는 조선 곳곳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수단으로 작동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편지는 독립운동가들에게도 무척이나 유용한 도구였다. 일제가 공들여 구축한 우편통신망이 독립의 대의를 알리는 ‘틈’으로 작용했다. 또한 사람의 피를 끓어오르게 하는 편지를 통해 결의를 북돋을 수도 있었다. 만주에 있는 신흥무관학교 교관 이탁은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던 안창호와 편지로 독립군기지 건설 관련 정보를 주고받았고,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의사로 활동했던 이태준은 중국 베이징에 있는 김원봉과 의열단 활동을 의논했다. 편지를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멀리 멕시코 이민자들한테서도 독립성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의 편지 속에 대한독립을 위한 열정, 동지나 가족을 잃은 슬픔과 분노, 좌절과 희망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서울신문은 광복 8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들이 주고받았던 편지 가운데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과 사연들을 취합해 그들의 열정과 좌절, 광복과 해방을 향한 염원을 되새겨 봤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프랑스에서 열린 파리강화회의를 통해 한국 문제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던 김규식은 열정적인 외교 활동을 펼쳤고, 그런 노력 덕분에 1919년 3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유럽 각국 신문에 한국 관련 기사가 518회나 게재될 수 있었다. 당시 한 기록은 김규식의 활동을 이렇게 증언했다. “밤을 새워 가며 편지를 쓰고, 전보를 부치고, 신문사를 찾아다녔다.” 독립운동 무대 자체가 중국과 일본, 미국 등으로 넓어지면서 편지 교류도 국경을 뛰어넘었다. 자연스럽게 대의에 동참하는 외국인들도 늘어났다. 광산기술자로 한국과 인연을 맺은 앨버트 테일러는 1919년 3월 7일 영국에 사는 장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내가 아들을 낳았다는 얘기를 길게 쓰다가 끝부분에 자신의 근황을 무심한 듯 전한다. “미국 AP통신 한국 통신원으로 임명됐습니다. 최근까지도 이 일로 매우 바빠서 먼저는 정부 관료들에게 연락하고 또 최근 사망한 한국의 마지막 왕의 국장에 참석했으며, 그리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살피고 그에 관해 기사를 썼습니다.” 테일러가 3·1운동 소식을 전 세계에 알린 수단 역시 편지였다. 테일러는 일본이 설치한 우편 제도를 활용해 3·1운동 상황과 일제의 탄압을 전 세계에 보도했고, 특히 독립선언서를 영어로 번역해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공헌했다. 일제를 비판하고 한국인들을 대변하는 변론 활동에 열성이었던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는 1927년 10월 ‘조선공산당 사건’을 변호해 12명의 무죄 판결을 끌어냈다. 그는 당시 피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설사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도 당신들이 국가 권력의 위법한 검거와 취조에 항의하는 법정 싸움에 협력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안창호는 1927년 지린성에서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른 적이 있는데, 그를 구하기 위해 가장 열심히 뛴 사람은 톈진에 있는 난카이대의 설립자인 중국인 장보링이었다. 장보링은 만주 최대 군벌 장쉐량을 비롯해 유력자들에게 많은 친필 편지를 보내 안창호의 신원을 보증하고 “일본의 요구를 수락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한 달이 안 돼 안창호는 석방될 수 있었다. 독립운동가들은 극도로 긴장한 채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일제 경찰은 물론 밀정의 감시를 의식해야 했다. 그런 긴장감이 때론 치명적인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김달하는 중국 베이징에서 독립운동가 행세를 하다가 1925년 ‘다물단’이라는 독립운동단체에 처단된 일제의 밀정이었다. 김달하는 평소 형편이 어려운 독립운동가와 가족들을 도와주며 환심을 샀는데, 그런 사람 중에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도 있었다. 이은숙은 김달하가 죽은 이유도 모른 채 아들 이규창을 데리고 조문을 다녀왔다. 얼마 뒤 우체부가 김창숙이 보낸 편지를 전해 줬다. “우당장(이회영) 내외가 김달하 초종(初終)에 조상을 갔으니 앞으로 절교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은숙은 품에 칼을 지니고 김창숙이 묵고 있던 집을 찾아가 격하게 항의했다. 결국 김창숙은 이은숙에게 사과하면서 오해를 풀었다. 얼굴도 보기 싫으니 짧은 편지로 대신하겠다는 김창숙의 분노와 직접 얼굴을 보고 오해를 풀지 않으면 자칫 남편의 생명까지도 위험해질 수 있다고 느낀 이은숙의 위기감이 교차하는 장면이다. 김달하가 처단된 계기는 사실 김창숙의 폭로였다. 김창숙은 김달하가 자신에게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귀국하라고 회유했다고 증언했다. 오랫동안 증언 말고는 뚜렷한 물증이 없었다. 하지만 21세기가 돼 결정적 증거가 나왔다. 편지였다. 1998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된 독립운동가 김규흥을 두고 밀정 의혹이 제기된 적이 있다. 1918년부터 2년 동안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으로 일했던 우쓰노미야 다로가 생전에 썼던 일기를 유족들이 2007년 공개했는데 김규흥과 여러 차례 만나 정보를 교환했고 돈도 줬다는 언급이 나왔기 때문이다. 우쓰노미야가 김규흥을 이용한 게 아니라 오히려 김규흥이 우쓰노미야를 역이용했다는 반론도 있어서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다. 그런데 그것과 별개로 김규흥이 상하이에서 1919년 12월 우쓰노미야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김달하의 행적이 드러났다. 김규흥은 편지에서 “김달하를 중요한 자리에 써서 큰일을 맡게 해야 합니다. 그를 후하게 대하고 환심을 얻어야 합니다. 김달하에게 활동비 3만엔을 주고 저에게도 2만엔을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썼다. 일제강점기는 식민지 백성으로 떨어진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숨 막히는 굴레일 수밖에 없었다. 독립운동으로 인한 망명과 수감 속에서 이별의 슬픔을 전하는 편지가 끊이지 않았다. 경성의전에 다니며 의사를 꿈꾸던 이미륵은 3·1운동에 가담했다가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됐다. 이미륵의 어머니는 38세에 어렵게 얻은 3대 독자가 투옥돼 고문받는 것보단 압록강을 건너 망명하는 게 낫다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이미륵은 상하이를 거쳐 1920년 독일에 정착했다. 얼마 안 돼 고국에서 편지가 도착했다. 이미륵은 편지 내용을 담담하게 적는 것으로 훗날 독일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리는 자전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마무리 짓는다. “나는 먼 고향에서 첫 소식을 받았다. 내 맏누님의 편지였다. 지난가을에 어머님이 며칠 동안 앓으시다가 갑자기 별세하셨다는 사연이었다.” 생활비라도 벌기 위해 가족과 떨어져 잠시 귀국한 이은숙은 이듬해인 1928년 남편 이회영의 편지를 받았다. 급한 사정이 생겨 두 딸인 규숙과 현숙을 홍숙경과 홍숙현이란 이름으로 톈진에 있는 부녀구제원(고아원)에 보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규숙은 18세, 현숙은 9세였다. 이은숙은 딸들이 이름까지 바꿔 고아원에 들어갔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아 혼절했다. 1932년 10월 이은숙은 짤막한 편지를 받았다. 지금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데 그곳에서 안정이 되면 편지할 테니 답장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불안해하던 이은숙은 얼마 뒤 딸의 전보를 받았다. “아버님이 다롄 경찰서에서 돌아가셨음. 갈 것인지 통지 바람”이라고 돼 있었다. 그렇게 부부는 영원히 이별했다. 김창숙은 1927년 상하이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돼 14년 형을 받고 복역하다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극도로 나빠졌다. 결국 1934년 형집행정지로 출옥해 4년이나 요양을 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 독립운동 혐의로 1938년 대구형무소에 갇힌 둘째 아들 찬기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뒤 “오장육부가 터질 듯한” 아픔을 느꼈다. 큰아들 환기가 19세 나이에 고문 후유증으로 죽은 뒤 둘째마저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김창숙은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네 아비는 꿈이나 생시, 먹을 때나 쉴 때 언제고 오직 네가 무사히 돌아올 것만 바라고 있다.” 김찬기는 1941년 출옥한 뒤 그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 충칭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했지만 1944년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김창숙은 해방되고 나서야 아들의 사망 소식과 함께 유골을 전해 받았다. 시대가 엄혹하다고 해서 엄숙하고 근엄하고 진지한 편지만 오간 것은 결코 아니었다. 미국 언론인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의 실제 주인공으로 유명한 독립운동가 김산은 ‘혁명을 위해 결혼은 포기하겠다’고 함께 맹세했던 김성숙이 “중산대학에 다니는 아름다운 광둥 아가씨”를 만나 “첫사랑이면서 격렬한 연애” 끝에 결혼하자 큰 배신감을 느꼈다. 김성숙은 “네가 아가씨를 알게 된다면 나보다도 훨씬 깊이 빠져들 거야”라고 말했지만 김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랬던 김산이 몇 년 뒤 사랑에 빠졌다. 김산은 곧바로 상하이로 편지를 보냈다. “나는 당신의 낭만적인 난센스를 모조리 용서합니다. 실은 오늘 밤 나는 어느 사람이 저지른 어떠한 일이라도 용서해 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김 형이 내게 한 말이 맞았어요. 유감스럽게도 너무나 정확했어요.” 김성숙과 두쥔훼이 부부는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일했지만 해방 뒤 김성숙만 귀국하고 두쥔훼이와 세 아들은 중국에 남으면서 생이별하게 됐다. 냉전에 휩쓸리면서 편지를 주고받을 방법조차 없었다. 김성숙은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고국에서 외롭게 세상을 떠났다. 남북 사이 편지 교환도 다를 게 없었다. 영화 ‘고지전’에서는 국군과 인민군 병사들이 전투 와중에도 서로 편의를 봐주며 편지를 몰래 전달해 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그런 편법조차도 불가능해졌다.
  • 퇴진론 이시바 ‘전후 80년 담화’ 보류할 듯

    퇴진론 이시바 ‘전후 80년 담화’ 보류할 듯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올해 ‘전후 80년 담화’ 발표를 보류할 것으로 보인다. 역대 일본 총리들은 10년 간격으로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일(8월 15일)에 역사 메시지를 담은 ‘전후 담화’를 발표해 왔다. 연이은 선거 참패로 퇴진 압박이 거세지는 가운데 집권 자민당 내 보수파의 반발을 의식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시바 총리의 최측근 인사인 나가시마 아키히사 자민당 총리보좌관은 지난 2일 밤 엑스(X)에 “아베 신조 전 총리의 70년 담화 작성 과정을 잘 아는 입장에서 (이시바 내각은) 새로운 각의(국무회의) 결정으로 ‘옥상옥’(불필요한 행동이라는 뜻)이 되는 일은 애초에 고려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전후 담화는 일본이 아시아에서 벌인 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공식 인식을 총리 명의로 밝히는 메시지로 각의 결정을 거쳐 발표된다. 1995년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의 뜻을 담은 무라야마 도미이치 담화를 시작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2005년)·아베 신조(2015년) 담화까지 10년 주기로 계승돼 왔다. 이 가운데 아베 담화는 “후손들에게 사죄의 숙명을 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덧붙여 논란을 빚었다. 각의 결정을 거치는 공식 담화 대신 총리 개인 의견 형식으로 메시지가 나올 가능성은 남아 있다. 나가시마 보좌관은 “이시바 총리는 전후 80년이라는 중대 시점에 코멘트를 내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며 “아베 담화를 부정하거나 무언가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일본을 내세운 미래지향적 메시지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일본 항복문서 서명일(9월 2일) 등이 거론되고 있지만 복잡한 정치 상황에서 이마저도 쉽지 않다는 관측도 나온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총리가 이를 위해 전문가들로부터 의견 청취를 시작했다고 3일 전했다.
  • 1차 대전 직전과 닮았다… 불안•공포에 빠진 세계

    1차 대전 직전과 닮았다… 불안•공포에 빠진 세계

    1914년 7월 참혹한 전쟁의 시작6500만명 참전 850만여명 전사평화 끝장낸 판단은 누가 내렸나각 지도자 특성 등 전쟁 원인 분석최악 치닫는 모습 생생하게 전달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보불전쟁이라고 배웠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끝난 1871년부터 40여년 동안 유럽은 ‘벨 에포크’, 그야말로 아름다운 시절을 누렸다. 다시는 전쟁이 없을 것이라는 낙천주의적 생각을 바탕으로 식민지 확장을 통한 경제적 번영을 이뤘고, 과학과 기술은 빠르게 발전하고 문학, 음악, 연극, 미술 등 문화적 측면에서도 수많은 걸작이 탄생한 ‘황금시대’였다. 전쟁 없이 10년 이상 평화로운 시기가 이어진 때는 고대 로마 제국의 ‘팍스 로마나’ 이후 벨 에포크 시대가 거의 유일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가 지겨웠던 것일까.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참혹한 전쟁으로 불리는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4년간의 대전이 끝난 1918년 11월 18일을 기준으로 6500만명이 전쟁에 참여했고, 850만명 이상이 전사했으며, 부상자는 가장 적게 잡아도 2100만명에 달했다. 800만명은 포로가 되거나 실종됐다. 근현대 세계사와 국제관계학을 연구하는 캐나다 토론토대 역사학 교수 마거릿 맥밀런은 제1차 세계대전을 다룬 기존 책들과 다른 방향으로 접근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를 누가, 어떤 어리석은 판단을 해 끝장냈는지,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기까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살펴봤다. 그래서 역사 시간에 배운 것처럼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자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부부를 암살한 사라예보 사건 때문이라고 축소하거나, 동맹 구조와 군사 계획 같은 하나의 측면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복잡한 국제 정세와 각국 지도자들의 개인적 특성,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들이 난마처럼 얽히고설키면서 최악의 전쟁으로 치닫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벽돌 책’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맥밀런은 1차 세계대전은 단지 의사결정 권한을 갖고 있던 왕, 정치인, 군 수뇌부, 외교관만의 책임이 아니라고 말한다. 새로운 국제 질서를 원했던 독일, 해양 패권을 지키려는 영국, 내부 균열이 심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군비 경쟁에 나선 러시아, 그리고 발칸반도의 민족주의, 식민지 확장에 대한 야욕 등 복합적 변수 때문에 20세기 초부터 언제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사회진화론에 따른 퇴보에 대한 불안과 공포, 전쟁이 기력 떨어진 사회를 정화해 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확산하면서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공감대가 사회 전체에 형성됐다고 저자는 지적했다. 추가로 전쟁을 체스판 위의 워게임 정도로 생각하고 과학기술이 발전한 상태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얼마나 참혹할 것인지 상상하지 못한 점, 전쟁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여론에 당당히 맞설 용기가 없었던 분위기도 1차 세계대전의 잠재적 원인이라고 맥밀런은 주장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등 곳곳에서 벌어지는 산발적 분쟁, 종교를 등에 업은 무장 단체, 미국 제일주의를 외치며 우방에게도 총질을 하며 ‘관세 전쟁’을 벌이는 도널드 트럼프, 그로 인한 국제 질서 붕괴와 불신 팽배, 극우주의의 급속한 부상 등 현재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분위기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그래서 “선택할 기회는 늘 있는 법”이며 “전쟁은 피하려는 노력이 없을 때 일어난다”는 저자의 말은 100여년 전 역사가 아닌 현재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 “나 지렁이 아니다”…세계서 가장 작은 10㎝ 뱀 20년 만에 발견

    “나 지렁이 아니다”…세계서 가장 작은 10㎝ 뱀 20년 만에 발견

    과학자들 사이에서 멸종된 것으로 우려됐던 ‘세계에서 가장 작은 뱀’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23일(현지시간) 미국 CBS뉴스 등 외신은 심각한 멸종위기종인 ‘바베이도스 실뱀’(Barbados threadsnake)이 20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보도했다.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에 있는 섬나라 바베이도스에서만 사는 바베이도스 실뱀은 성체 몸길이가 10㎝에 불과해 세계에서 가장 작은 뱀으로 꼽힌다. 언뜻 보면 흔하디흔한 지렁이처럼 보이지만 사실 바베이도스 실뱀은 사람들에게 모습을 거의 드러낸 적이 없는 귀하신 몸이다.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에 따르면 바베이도스 실뱀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것은 놀랍게도 20년 전인 2005년이다. 바베이도스 환경부 생태학자 코너 블레이즈는 “1년간이나 이 뱀을 찾아다녔으나 발견하지 못해 점점 비관적인 생각을 했었다”면서 “최근 섬의 숲속 작은 바위 밑에서 이 뱀을 찾아낸 것이 아마 내 경력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일 것”이라며 기뻐했다. 이어 “섬의 고유종 중 하나를 재발견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보도에 따르면 바베이도스 실뱀의 존재가 처음 확인된 것은 1889년이다. 이 뱀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918년이며, 1966년, 1997년 목격됐으며 가장 최근은 2005년이다. 블레이즈는 “바베이도스 실뱀은 몸집이 작을 뿐 아니라 땅속에 사는 습성 때문에 항상 희귀하면서도 신비로운 존재였다”면서 “이번 재발견은 바베이도스의 생물 다양성에 대한 긍정적인 신호”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한편 바베이도스 실뱀은 주로 흰개미와 흰개미알을 먹고 살며 개체 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문제는 한때 바베이도스의 환경이 심각하게 파괴되면서 바베이도스 실뱀 같은 희귀한 토종 생물의 생태가 큰 위협을 받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16세기 유럽인들은 바베이도스를 식민지화면서 천연림의 98%를 파괴했다. 지난 50년 동안 현지인들과 국제환경단체의 노력으로 삼림 면적이 7배로 늘었지만 바베이도스 실뱀이 서식하는 습윤림은 섬에서도 드문 것으로 알려졌다.
  • “나 지렁이 아니다”…세계서 가장 작은 10㎝ 뱀 20년 만에 발견 [핵잼 사이언스]

    “나 지렁이 아니다”…세계서 가장 작은 10㎝ 뱀 20년 만에 발견 [핵잼 사이언스]

    과학자들 사이에서 멸종된 것으로 우려됐던 ‘세계에서 가장 작은 뱀’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23일(현지시간) 미국 CBS뉴스 등 외신은 심각한 멸종위기종인 ‘바베이도스 실뱀’(Barbados threadsnake)이 20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보도했다.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에 있는 섬나라 바베이도스에서만 사는 바베이도스 실뱀은 성체 몸길이가 10㎝에 불과해 세계에서 가장 작은 뱀으로 꼽힌다. 언뜻 보면 흔하디흔한 지렁이처럼 보이지만 사실 바베이도스 실뱀은 사람들에게 모습을 거의 드러낸 적이 없는 귀하신 몸이다.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에 따르면 바베이도스 실뱀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것은 놀랍게도 20년 전인 2005년이다. 바베이도스 환경부 생태학자 코너 블레이즈는 “1년간이나 이 뱀을 찾아다녔으나 발견하지 못해 점점 비관적인 생각을 했었다”면서 “최근 섬의 숲속 작은 바위 밑에서 이 뱀을 찾아낸 것이 아마 내 경력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일 것”이라며 기뻐했다. 이어 “섬의 고유종 중 하나를 재발견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보도에 따르면 바베이도스 실뱀의 존재가 처음 확인된 것은 1889년이다. 이 뱀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918년이며, 1966년, 1997년 목격됐으며 가장 최근은 2005년이다. 블레이즈는 “바베이도스 실뱀은 몸집이 작을 뿐 아니라 땅속에 사는 습성 때문에 항상 희귀하면서도 신비로운 존재였다”면서 “이번 재발견은 바베이도스의 생물 다양성에 대한 긍정적인 신호”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한편 바베이도스 실뱀은 주로 흰개미와 흰개미알을 먹고 살며 개체 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문제는 한때 바베이도스의 환경이 심각하게 파괴되면서 바베이도스 실뱀 같은 희귀한 토종 생물의 생태가 큰 위협을 받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16세기 유럽인들은 바베이도스를 식민지화면서 천연림의 98%를 파괴했다. 지난 50년 동안 현지인들과 국제환경단체의 노력으로 삼림 면적이 7배로 늘었지만 바베이도스 실뱀이 서식하는 습윤림은 섬에서도 드문 것으로 알려졌다.
  • 대항해 시대의 숨결이 깃든, 포르투갈 수도원 에그타르트 이야기

    대항해 시대의 숨결이 깃든, 포르투갈 수도원 에그타르트 이야기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 남서쪽 벨렝 지역에는 제로니무스 수도원(Mosteiro dos Jerónimos)이 거대한 위용을 자랑한다. 이 수도원은 단순한 건축물을 넘어, 포르투갈 대항해 시대와 달콤한 디저트의 역사를 동시에 품은 곳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에그타르트의 뿌리인 ‘파스텔 드 나타‘(Pastel de Nata)가 바로 이곳 수도사들의 손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수도복 다림질에서 시작된 혁명, 파스텔 드 나타18세기 제로니무스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수도복을 다림질할 때 달걀흰자를 풀 먹이듯 사용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노른자를 어떻게 처리할지가 고민거리였다. 이를 그냥 버리기 아까웠던 수도사들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남은 노른자로 달콤한 커스터드를 만들어 페이스트리 반죽에 담아 장작불에 구워낸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지금의 ‘파스텔 드 나타‘다. 이 달콤한 간식은 포루투갈의 식민지였던 마카오로 건너가 현재 우리가 즐겨 먹는 에그타르트의 원형이 됐다. 일부 전문가는 파스텔 드 나타가 에그타르트 탄생에 영향을 준 것은 맞지만, 두 음식은 엄연히 다르다고 주장한다. 수도원 몰락과 함께 탄생한 ‘파스테이스 드 벨렝’파스텔 드 나타의 전설을 고스란히 간직한 가게가 바로 ‘파스테이스 드 벨렝‘(Pastéis de Belém)이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으로 포르투갈 왕실이 브라질로 망명하고 본국이 프랑스 점령과 영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면서 1822년 자유주의 헌법이 제정되고 사실상 왕정이 폐지됐다. 이로 인해 오랫동안 왕실의 보호를 받던 교회와 수도원들이 몰락하게 됐다. 제로니무스 수도원 역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궁지에 몰린 수도사들은 생계를 위해 ‘파스텔 드 나타’ 레시피를 근처 정제소에 넘겼는데, 이 정제소가 1837년 수도원 바로 옆에 문을 연 가게가 지금의 ‘파스테이스 드 벨렝’이다. 오늘날 이곳은 리스본에서 가장 긴 대기 줄을 자랑하며, 포르투갈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코스로 자리잡았다. 이곳을 방문하는 것은 단순히 맛있는 에그타르트를 맛보는 것을 넘어, 포르투갈의 역사와 전통을 경험하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대항해 시대의 염원, 마누엘 양식의 걸작제로니무스 수도원은 단순히 맛있는 디저트의 발상지를 넘어 포르투갈 대항해 시대의 유산이기도 하다. 1496년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 국왕은 바스쿠 다가마의 성공적 인도 항로 발견을 기원하며 수도원 건립을 명령했다. 1501년 시작된 공사는 무려 100년에 걸쳐 진행되었고, 기존 고딕 양식에 바다와 항해를 상징하는 장식이 가미된 독특한 마누엘 양식 건축물로 탄생했다. 이 수도원은 1940년까지 학교와 고아원 등으로 활용됐고,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역사적·건축학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특히 수도원 오른쪽에 있는 산타 마리아 성당은 바스쿠 다가마가 인도 항해를 떠나기 전 기도를 올렸던 곳으로 유명하며, 지금도 그의 석관이 안치돼 방문객들에게 감동을 선사한다.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포르투갈의 황금기였던 대항해 시대의 웅장한 꿈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희망, 그리고 달콤한 미식의 역사를 동시에 담아낸다. 단순한 관광을 넘어 시간 여행을 통해 포르투갈의 특별한 과거를 마주하는 경험이 될 것이다.
  • 대항해 시대의 숨결이 깃든, 포르투갈 수도원 에그타르트 이야기 [한ZOOM]

    대항해 시대의 숨결이 깃든, 포르투갈 수도원 에그타르트 이야기 [한ZOOM]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 남서쪽 벨렝 지역에는 제로니무스 수도원(Mosteiro dos Jerónimos)이 거대한 위용을 자랑한다. 이 수도원은 단순한 건축물을 넘어, 포르투갈 대항해 시대와 달콤한 디저트의 역사를 동시에 품은 곳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에그타르트의 뿌리인 ‘파스텔 드 나타‘(Pastel de Nata)가 바로 이곳 수도사들의 손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수도복 다림질에서 시작된 혁명, 파스텔 드 나타18세기 제로니무스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수도복을 다림질할 때 달걀흰자를 풀 먹이듯 사용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노른자를 어떻게 처리할지가 고민거리였다. 이를 그냥 버리기 아까웠던 수도사들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남은 노른자로 달콤한 커스터드를 만들어 페이스트리 반죽에 담아 장작불에 구워낸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지금의 ‘파스텔 드 나타‘다. 이 달콤한 간식은 포루투갈의 식민지였던 마카오로 건너가 현재 우리가 즐겨 먹는 에그타르트의 원형이 됐다. 일부 전문가는 파스텔 드 나타가 에그타르트 탄생에 영향을 준 것은 맞지만, 두 음식은 엄연히 다르다고 주장한다. 수도원 몰락과 함께 탄생한 ‘파스테이스 드 벨렝’파스텔 드 나타의 전설을 고스란히 간직한 가게가 바로 ‘파스테이스 드 벨렝‘(Pastéis de Belém)이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으로 포르투갈 왕실이 브라질로 망명하고 본국이 프랑스 점령과 영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면서 1822년 자유주의 헌법이 제정되고 사실상 왕정이 폐지됐다. 이로 인해 오랫동안 왕실의 보호를 받던 교회와 수도원들이 몰락하게 됐다. 제로니무스 수도원 역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궁지에 몰린 수도사들은 생계를 위해 ‘파스텔 드 나타’ 레시피를 근처 정제소에 넘겼는데, 이 정제소가 1837년 수도원 바로 옆에 문을 연 가게가 지금의 ‘파스테이스 드 벨렝’이다. 오늘날 이곳은 리스본에서 가장 긴 대기 줄을 자랑하며, 포르투갈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코스로 자리잡았다. 이곳을 방문하는 것은 단순히 맛있는 에그타르트를 맛보는 것을 넘어, 포르투갈의 역사와 전통을 경험하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대항해 시대의 염원, 마누엘 양식의 걸작제로니무스 수도원은 단순히 맛있는 디저트의 발상지를 넘어 포르투갈 대항해 시대의 유산이기도 하다. 1496년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 국왕은 바스쿠 다가마의 성공적 인도 항로 발견을 기원하며 수도원 건립을 명령했다. 1501년 시작된 공사는 무려 100년에 걸쳐 진행되었고, 기존 고딕 양식에 바다와 항해를 상징하는 장식이 가미된 독특한 마누엘 양식 건축물로 탄생했다. 이 수도원은 1940년까지 학교와 고아원 등으로 활용됐고,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역사적·건축학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특히 수도원 오른쪽에 있는 산타 마리아 성당은 바스쿠 다가마가 인도 항해를 떠나기 전 기도를 올렸던 곳으로 유명하며, 지금도 그의 석관이 안치돼 방문객들에게 감동을 선사한다.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포르투갈의 황금기였던 대항해 시대의 웅장한 꿈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희망, 그리고 달콤한 미식의 역사를 동시에 담아낸다. 단순한 관광을 넘어 시간 여행을 통해 포르투갈의 특별한 과거를 마주하는 경험이 될 것이다.
  • 세계는 지금 ‘뉴스페이스 시대’… 한국은 날아오를 준비 됐는가

    세계는 지금 ‘뉴스페이스 시대’… 한국은 날아오를 준비 됐는가

    지난해 우리 정부는 ‘한국판 나사(NASA)’를 표방한 우주항공청을 출범시켰다. 세계 항공우주산업이 정부 주도에서 민간 주도의 ‘뉴스페이스’ 시대로 전환됨에 따라 발 빠르게 대응하기 위한 컨트롤타워를 구축한 것이다. 최근 인공지능(AI)과 양자 기술이 더 주목받지만 우주산업과 연구개발의 중요성은 여전히 강조되고 있다. 우주산업의 이모저모를 친절하게 알려 주는 책들이 잇달아 눈길을 끈다. ●전문가가 짚어 준 우주강국 도약의 길은 ‘6G와 AI 시대의 우주산업’(메디치미디어)은 33년간 우주 기술과 전략무기 개발 연구에 몸담았던 박종승 전 국방과학연구소장이 미래 국가 경쟁력 유지에서 우주 분야가 어떤 역할을 할지 설명한다. 이와 함께 6G 기술과 저궤도 위성, 위성정찰 기술과 데이터를 기반으로 발전하는 우주산업 변화가 일반인에게 어떻게 다가올지 상세히 알린다. 세계 각국은 정부 주도로만 진행해 왔던 우주산업에 기술이전, 투자 지원, 구매 발주 등 다양한 형태로 민간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저자는 한국이 우주 강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범정부 차원에서 ‘우주 기술 통합 조정 체제’를 만들고 ‘민·군 융합 로드맵’을 수립하며 산업구조를 연구개발 중심에서 기술 상용화 중심으로 재편하는 동시에 우수 인재 유인책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조언한다. ●통신·항법 등 위성 활용법 알고싶다면 ‘우주 비즈니스 레볼루션’(플루토)은 다양한 우주산업 분야 중 위성 활용에 초점을 맞춘다. 재활용 발사체, 우주 관광산업 등은 미디어를 통해 일반인에게도 익숙하지만 위성산업은 중요성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위성 활용 서비스로는 전 세계 어디서나 통신할 수 있는 위성통신, 전 세계 곳곳을 관찰하고 촬영하는 위성관측, 사람과 사물의 위치를 더욱 정밀하게 파악하는 위성항법을 꼽을 수 있다. 책에서는 위성 활용 서비스 시장이 어떻게 형성됐는지와 더불어 스페이스X, 원웹 등 주요 글로벌 업체를 소개하고 이들 사이에 벌어지는 치열한 경쟁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한국이 강점을 보이는 위성 분야를 통한 우주산업 활성화는 민간 부문 수요 창출에 달려 있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왜 우주산업이 중한지 궁금하면 이 책! 그런가 하면 ‘우주 경제 전쟁’(나름북스)은 우주산업이 인류를 위한 것이 돼야 한다고 강변한다. 선진국 중심의 우주개발이 초국적 자본과 국가권력의 새로운 식민지화 무대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뉴스페이스 참여 기업이나 미국의 유인 달 탐사 계획인 아르테미스 프로젝트 등은 모두 자원 약탈과 군사적 지배의 야망을 숨기고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책은 ‘인류는 왜 우주를 탐험하고 개발하려 하는가’에 대한 제대로 된 답을 내놔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기후위기, 불평등, 생태계 파괴, 군사 경쟁과 같은 지구 내부의 모순이 우주에서도 반복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책에서는 우주를 인간의 소유물이 아닌 생태적, 윤리적 공동체로 바라보고 우주를 공유하자는 ‘코스모스 코뮤니즘’을 주장한다.
  • ‘김구 암살범 안두희 처단’ 박기서씨 별세

    ‘김구 암살범 안두희 처단’ 박기서씨 별세

    ‘정의봉’(正義棒)이라 적힌 몽둥이로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범 안두희를 처단했던 박기서씨가 10일 별세했다. 77세. 유족에 따르면 박씨는 이날 0시 10분쯤 경기 부천의 한 병원에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시내버스 기사로 일하던 1996년 10월 23일, 인천 중구 신흥동에 거주하던 안두희의 자택을 찾아가 길이 40㎝의 나무 몽둥이로 머리를 수차례 내리쳐 그를 살해했다. 범행 7시간 후 경찰에 자수한 박씨는 “백범 선생을 존경했기에 안두희를 죽였다. 어려운 일이었지만 당당하다고 생각한다”고 진술했다. 박씨가 휘둘렀던 몽둥이에는 ‘정의봉’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고,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이로운 것을 보면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당했을 때는 목숨을 바쳐라)이라는 문구가 적힌 종이로 감싸 보관됐다. 그는 2018년 10월 정의봉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 사건으로 박씨는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1999년 출소했다. 이후 버스회사에 복직해 4년간 더 일한 뒤 퇴직했으며, 택시 면허를 취득해 부천에서 택시 기사로 일했다. 박씨의 빈소는 부천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12일이다. 장지는 화성 함백산추모공원이다.
  • ‘정의봉’으로 김구 암살범 처단한 박기서씨, 세상 떠났다

    ‘정의봉’으로 김구 암살범 처단한 박기서씨, 세상 떠났다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범 안두희를 처단한 박기서(77)씨가 10일 별세했다. 박씨의 유족은 이날 0시 10분쯤 박씨가 경기 부천시의 한 병원에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전북 정읍에서 태어난 고인은 경기 부천시 소신여객 시내버스 기사로 일하던 1996년 10월 23일 인천 중구 신흥동에 있던 안두희 자택에 찾아가 ‘정의봉’이라고 적은 40㎝ 길이의 나무 몽둥이를 휘둘러 안두희를 살해했다. 박씨는 범행 7시간 만에 경찰에 자수하고 “백범 선생을 존경했기에 안두희를 죽였다. 어려운 일이었지만 당당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안두희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1년이 채 되지 않은 1949년 6월 26일 서울 서대문 인근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 자리)에서 권총으로 백범을 암살했다. 이 일로 안두희는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951년 2월에 특사로 풀려나 육군 중령으로 복귀했다. 박씨는 1997년 11월 대법원 상고심에서 징역 3년이 확정됐지만 1998년 3월 김대중 정부 때 사면돼 석방됐다. 이후 소신여객 버스 기사로 일하다가 2002년 개인택시 면허 취득 후 부천에서 택시 기사로 일했다. 박씨는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이로운 것을 보았을 때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당했을 때는 목숨을 바쳐라)’이라는 문구가 적힌 종이로 정의봉을 감싸서 보관했다. 이 문구는 안중근 의사의 유묵으로, 박씨는 평소 백범과 안 의사를 존경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2018년 10월 24일 정의봉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고인의 빈소는 부천장례식장 7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12일 오전 5시. 장지는 화성함백산추모공원이다.
  • 19세기 사회의 축소판, 메두사 호 뗏목…지금이라고 다를까

    19세기 사회의 축소판, 메두사 호 뗏목…지금이라고 다를까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700번 방에는 가로가 7m에 달하는 최대형 작품이 있다. 테오도르 제리코(1793~1824)의 ‘메두사 호 뗏목’은 1816년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그린 르포형 사건 기록이다. 침몰한 군함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뗏목 위에서 절망과 희망을 오가며, 구원의 배를 발견하는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다. 붓질은 눈부시게 정교하고 구도는 미켈란젤로의 조각처럼 극적이지만 해당 사건 자체는 마주보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참혹하다. 그래서인지 이 그림에는 생존의 감격도 인류애의 벅찬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희망보다 무력감이 더 크게 느껴진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1816년, 프랑스 군함 ‘메두사’는 400명을 태우고 식민지를 향해 항해하다가 해안에 좌초된다. 선장은 바닷일이나 군함 관련 일을 해본 적 없는 무능한 귀족 관료였다. 우왕좌왕하는 사이 배는 점점 가라앉았다. 선장과 선원 약 250명은 구명보트에 나눠탔다. 그러나 남겨진 149명의 승객은 구명보트에 오르지 못해 급히 만든 뗏목 위로 버려졌다. 선장 일행은 또 한 번 만행을 저질렀다. 뗏목의 무게 때문에 자신들의 보트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자 149명의 목숨줄을 끊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이들은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하고 망망대해 바다 위에 버려졌다. 이들은 2주 뒤 극적으로 발견됐다. 겨우 15명이 살아남았다. 굶주림과 갈증으로 살인과 인육 섭취의 결과였다. 그것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재였다. 살아남은 이들은 그날의 악몽을 신문사에 털어놨다. 그렇게 바다에서의 악몽이 세상에 드러났다. 이 이야기를 듣고 많은 이들은 분노했다. 제리코는 그것을 캔버스 위로 옮겼다. 제리코는 탐사보도 기자처럼 생존자들을 만나 그날의 참담한 사건을 인터뷰한 뒤 이를 화폭에 기록했다. 생존자 15명은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했다. 이들 가운데 3분의 1은 당시 사건의 충격으로 평생 고통받았다. 제리코는 병자와 노동자, 시체 안치소의 시신을 보고 모델로 삼았다.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지만 그는 실제 시신을 지켜보며 변화 과정까지 면밀하게 연구했다. 제리코는 이 작품을 위해 스튜디오에 직접 뗏목을 제작해 실연하기도 했다. 이 소식을 듣고 친구이자 스승을 찾아온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 역시 작품 속에서 희생자로 남아 있다. 잔인한 인간 보고서 제리코는 인간이 극한 상황에 몰리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생생히 보고 기록했다. 단순한 사건 기록이 아니라 국가와 권력, 인간성의 침몰에 대한 거대한 항변이었다. 제리코는 감정을 절묘하게 절제했다. 가장 높은 파도 위에 서 있는 남성은 깃발을 흔들며 구조선을 향해 손을 뻗지만 그 팔은 높지도 강하지도 않다. 그토록 바란 구원의 순간인데도 희망은 반쯤 식어 있고, 뒤에선 여전히 사람들이 쓰러져 있다. 구원이 오는 순간에도 모두가 구원받지는 못했다. 사실 이 뗏목은 당시 프랑스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구명보트는 특권층이 차지했고 그 외의 사람들은 뗏목에 실렸다가 하나둘 바다에 떨어졌다. 뗏목 위에 버려진 사람들은 특권층을 대신해 희생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배는 침몰하고, 인간은 떠다닌다그림에는 죽음과 생존 사이의 무수한 인간 군상이 등장한다. 절망 속에 고개를 숙인 자, 포기한 자, 자식을 끌어안은 노인, 끝까지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 누구 하나도 영웅은 아니다. 제리코는 고전주의가 숭배했던 위대한 영웅상 대신 뗏목 위에서 떠밀리듯 살아남는 사람들과 위엄 없이 버티는 사람들을 그렸다. 그 모습은 오늘날의 우리와 다르지 않다. 대형 참사와 사건 속에서 누구나 뗏목 위에 놓인 이가 될 수 있음을, 그림은 아무 말 없이 보여준다. 이 그림은 그 해 살롱전에 출품돼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정부는 분노했고 민중은 충격받았다. 제리코는 화려한 신화를 버리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죄책감, 무력감을 가장 숭고한 것으로 승화시킨 화가였다. 그가 만든 뗏목은 단지 19세기의 배가 아니다. 바로 우리가 타고 있는 사회의 작은 모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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