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식민지
    2026-06-06
    검색기록 지우기
  • 입소
    2026-06-06
    검색기록 지우기
  • 토막
    2026-06-06
    검색기록 지우기
  • 전주역
    2026-06-06
    검색기록 지우기
  • 기표
    2026-06-06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5,600
  •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 주도적으로 외친 수원 기생들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 주도적으로 외친 수원 기생들

    술과 웃음을 파는 여성으로 잘못 인식돼온 기생들이 독립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주권 침탈과 치욕적 건강검진에 분노한 수원기생 33명은 김향화(당시 23세) 주도로 기생으로서는 처음 1919년 3월 29일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일제는 조선 왕조 별궁인 화성행궁을 식민지 통치를 위한 행정기구와 병원으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민족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사진은 독립운동에 참여한 수원 기생으로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가 1918년 발간한 ‘조선미인보감’에 소개한 프로필이다. 일제는 잔치나 술자리에 나가 노래와 춤 등으로 흥을 돕던 기생을 매음녀인 창기(娼妓)와 동일하게 취급하면서 폄훼했다. 원래 기생은 ‘해어화’(解語花·말을 알아듣는 꽃)로 불렸다. 예술적 능력뿐 아니라 학문, 사회적 이슈에도 밝았다. 김향화도 가곡, 가사, 시조, 경성잡가, 서관소리, 검무와 승무, 정재(궁중무용)에 능한 데다 서양악기였던 양금도 잘 쳤던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뉴스
  • [글로벌 In&Out]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한국 독립운동을 재평가하자면/알파고 시나씨 하베르 코레 편집장

    [글로벌 In&Out]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한국 독립운동을 재평가하자면/알파고 시나씨 하베르 코레 편집장

    2주 후면 한국인들에게 중요한 일주일이다. 3ㆍ1절 100주년이다. 100이라는 숫자는 어느 나라에서도 의미가 있는 숫자이다. 그러다 보니 올해 3ㆍ1절 그리고 3ㆍ1절을 통해 한국의 독립운동이 특별히 관심 대상이 될 거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임시정부를 둘러싼 논란이나 좌우로 갈렸던 독립운동에 대해서 애국심을 고취하지 못하고 국익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논쟁들이 심심찮게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논쟁들이 어설프게 진행되다 보니 국민 머릿속에 독립운동을 중요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등의 문제 제기들이 잇따라 발현된다. 과연 한국의 독립운동은 어떤 평가를 받아야 마땅한가? 1895년 명성황후의 피살 사건에서 1910년 경술국치로 이어지던, 즉 자유를 잃은 시기부터 시작해서 광복을 얻은 1945년까지의 기간을 외국 사례와 비교해서, 내 나름대로 재평가를 해 보았다. 많은 나라의 독립 역사와 한국의 독립 역사를 비교했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보이는 것이 독립 후의 나라 상태이다. 일부 나라들이 독립했지만, 나라 운영은 잘 되지 않았다. 외국인 입장에서 봤을 때 차라리 독립을 안 하고 외세의 지배를 받고 살았으면 현재 상황이 훨씬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나라가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한국은 1945년 독립한 뒤 한국인의 삶이 매일매일 나아졌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식민지 시절에도 ‘해방’에만 집착한 것이 아니었고, ‘왜 주권을 잃었을까’란 질문을 스스로 하면서 국민을 계몽하는 등의 교육사업 등에 큰 투자를 했다. 그러다 보니 독립했을 때 나라를 운영할 현대적인 국민이 준비되어 있었다. 독립과 관련된 또 다른 쟁점은 학살 문제이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다른 나라 독립운동가들과 달리 현명한 사람들이었다.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일본 제국 군부 중심인물이나 조국을 팔아먹은 배신자 한국인을 대상으로 물리적 폭력을 강행했다. 무고한 일본인이나 하급경찰은 죽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다른 나라의 독립군은 식민지 세력과 싸울 때 식민지 제국의 무고한 시민을 대대적으로 죽일 때도 있었다. 이러한 면에서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무장투쟁은 평화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신기한 점은 독립운동가들이 무력투쟁할 장소를 고를 때도 일제가 한국 민간인을 대대적으로 학살하지 않도록 자국민의 안전까지 신경 썼다. 물론 일제가 한국인을 학살하는 만행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중ㆍ일 전쟁 때 일본군의 난징학살과 같은 대학살이 한반도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서술하니 한국 독립운동을 높이 평가할 만한 면이 눈에 잘 보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김치 맛있어요” 식으로 ‘외국인이 한국을 칭찬한다’는 등의 미디어 활동을 포퓰리즘으로 생각하고, 개인적으로 무척 싫어한다. 예전에 한국 사회의 비판할 부분을 마음껏 비판했던 사람으로, 한국 독립운동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을 찾아서 칭찬하는 것이다. 특히 한국 젊은이들이 선조들이 얼마나 힘들게 독립운동을 했는지를 느끼고, 도덕적인 면에서 ‘해방’했다는 점을 같이 기억했으면 좋겠다. 민족 대표 33인이 독립선언문을 읽은 태화관이 어떤 레스토랑이니, 임시정부는 어느 나라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정을 무시해도 된다느니, 민족 대표 33인이나 임정 의원 중에서 친일 행적을 했던 사람들이 있다느니 하는 논쟁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물론 학자들은 연구 차원에서 감정에 치우침 없이 역사적 사실을 끝까지 따져야 한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불필요하게 국민의 통합 의식을 흔드는 일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 배우보다 몸값 높은 조선 최고의 변사는?

    배우보다 몸값 높은 조선 최고의 변사는?

    무성영화 시대 외국어 자막 등 해설 필수변사의 입담에 흥행 좌우… 스카우트 싸움도무성영화 시대의 영화관 풍경을 떠올려 보자.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스크린 옆의 변사(辯士)가 영화를 해설하는 모습이 아닐까. 변사는 서양에서 발명된 영화라는 매체와 전통적인 동양의 공연 방식이 만나 빚어낸 독특한 산물이다. 물론 서구 영화관에도 영화를 설명하는 해설자 역할이 있었지만, 이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영화의 줄거리를 소개하는 정도였다. 기본적으로 서구의 무성영화는 영상과 영상 사이 간(間) 자막 화면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영화 고유의 언어와 문법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일본과 조선 등지에서는 외국어 자막을 비롯해 등장인물의 대사를 관객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해 줘야만 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무성영화 시대 변사라는 직업은 일본 흥행 산업의 산물이다. 일본뿐만 아니라 식민지였던 조선, 대만 그리고 일본인 흥행업자들이 시장을 개척했던 태국과 만주에서도 존재했다. 조선에 변사가 전문직업인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1910년 경성고등연예관이 개관하면서인데, 영화 상영 전 조선인 변사와 일본인 변사가 번갈아 등장해 한국어와 일본어로 각각 영화에 대해 설명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이때 조선인 변사로는 서상호, 이한경, 김덕경이 활약했다. 이후 조선인 관객을 대상으로 한 우미관과 일본인 관객을 대상으로 한 대정관과 황금관이 속속 등장하면서 변사의 해설도 언어별로 구분됐다. 무성영화 시대의 흥행 성적은 오로지 변사의 입담에 좌우됐다고 할 정도로 변사는 스타 중의 스타였다. 보통 변사들은 70~80원의 월급을 받았다고 하는데, 당시 일류 배우가 40~50원의 월급을 받았고 고급 관리들의 월급이 30~40원 정도였음을 생각하면 변사들의 대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우미관의 주임 변사로 유명했던 서상호가 1918년 단성사가 활동사진관으로 개관하며 스카우트된 것처럼 변사는 무성영화 흥행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변사가 전성기를 구가한 무성영화 시기 단성사의 주임변사 서상호, 조선극장의 김조성, 우미관의 이병조가 3대 변사로 꼽혔고, 우정식·서상필·김덕경·성동호 등도 이름을 날렸다.
  • “크래커총이 진짜라면”… 금지의 시대 꼬집다

    “크래커총이 진짜라면”… 금지의 시대 꼬집다

    1960~1990년 주제… 13개국 100명 참가 탈식민지·독재·산업화 등 사회변화 유사“박정희 군사독재 시대였기에 (예술가들이) 하고 싶은 작업을 하지 못하는 시대였지만, 언제나 새로운 걸 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었어요.”(한국 전위 미술의 대가 김구림) “(수하르토)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제 입장을 대놓고 얘기할 수 없어서 총 모양 크래커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인도네시아 ‘신미술운동’ 주요 멤버 FX 하르소노) 금지의 시대에 무엇이라도 했던 예술가들. 외부로부터 이식한 게 아니라 철저히 자생적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겠다는 열망이 그들을 들끓게 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지난달 31일부터 시작한 ‘세상에 눈뜨다: 아시아 미술과 사회 1960s-1990s’ 얘기다. 전시를 열고자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해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싱가포르국립미술관, 일본국제교류기금 아시아센터가 4년여 동안 조사·연구했다. 한국, 일본, 중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태국, 인도, 미얀마, 캄보디아의 아시아 13개국 주요 작가 100명의 작품 170여점이 이렇게 모였다.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아시아는 탈식민, 이념 대립, 베트남전쟁, 민족주의 대두, 근대화, 민주화운동 등 급진적인 사회 변화를 경험했다. 전시를 기획한 배명지 학예연구사는 “(국가들 사이에) 직접적인 상호 작용은 없었지만, 그들 간 예기치 않은 공명을 발견하는 데 중점을 뒀다”며 “국가별 전시가 아닌 초국가적인, 비교문화적인 방식으로서의 전시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전시는 ‘구조를 의심하다’, ‘예술가와 도시’, ‘새로운 연대’의 3부로 구성했다. 동시기 각국의 작가들이 비슷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유사한 표현 방식을 차용한 것을 보면 소름이 돋는다. 전시장 입구에서 한 무더기 핑크빛 총과 맞닥뜨린다. 인도네시아 작가 FX 하르소노의 ‘만약 이 크래커가 진짜 총이라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습니까?’다. 1965년 수하르토 통치 이후 1966년을 기점으로 표방한 이른바 ‘신질서’에 따라 인도네시아에서는 정치적 성격의 예술과 미디어는 늘 검열 대상이었다. 엄혹한 시대를 살았던 작가는 부지불식 간 일상에 잠입한 폭력성을 크래커 총으로 은유했다. 독재정권이라는 정치상과 더불어 소비 자본주의 침투라는 달라진 경제상에 대한 두려움도 엿보인다. 전시장 한쪽에는 ‘0엔’짜리 모형 지폐가 자리한다. 1000엔짜리 모형 지폐를 제작했다가 통화 사기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일본 작가 아카세가와 겐페이. 그는 이후 지폐에 ‘0’이라는 숫자를 의도적으로 삽입했다. 한국의 오윤 작가는 조선시대 불화를 차용해 물신주의를 ‘지옥’에 비유했다.(‘마케팅Ⅰ: 지옥도’) 군데군데 인간 군상을 살펴보는 재미가 있는 이 그림에서 펄펄 끓는 물에 내던져지는 화탕 지옥은 휘발유 제품명 ‘CX3’, 거대한 나무 판에 짓이겨지는 석개 지옥은 코카콜라와 연계된다. 소비사회를 상징하는 코카콜라의 메타포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지옥도 옆에는 콘돔을 씌운 콜라 유리병이 자리한다.미술관의 큐레이팅을 따라가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해 보는 것도 전시를 즐기는 방법 가운데 하나다. 가령 관객이 무대 위에 앉은 오노 요코의 옷을 자르는 영상 ‘컷 피스’는 당대에는 폭력과 전쟁(특히 베트남전쟁)에 대한 항의로 여겨졌다. 그러나 요즘엔 페미니즘 작업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전시 말미 ‘젠더와 사회’에서 만나는 ‘생각하는 누드’에서는 필리핀 여성미술연대 ‘카시블란’ 창시자인 줄리 루크가 제왕절개수술의 상처가 역력한, 모성 경험으로서의 자기 신체를 드러낸다. ‘폭력’과 ‘모성’이라는, 여성의 신체에 각인된 제각기 다른 키워드를 떠올리게 한다. 전시를 보면 “아시아 현대미술의 새로운 경향이 외부나 서구에서 영향을 받은 게 아니라 내부의 정치적 자각, 이전과 다른 예술 태도, 새로운 주체 등장을 따라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미술관 측의 설명을 이해할 수 있다. 제1·2전시실, 중앙홀을 아우르는 방대한 규모에 각 나라 역사를 되새기느라 작품들 앞에서 걸음을 떼기가 쉽지 않다. 오랜 시간을 가지고 충분히 음미할 것을 추천한다. 오는 5월 6일까지. 글 사진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평창유산 한반도 비핵화에 중요… 북·미 2차회담 진전 희망”

    “평창유산 한반도 비핵화에 중요… 북·미 2차회담 진전 희망”

    “이번 평창평화포럼에서 엿볼 수 있듯 지방정부와 중앙정부의 지속적인 지원이 중요하다. 이런 노력은 동북아시아 평화를 다질 기반 구축에 기여할 수 있다.” 10일 강원 평창군 대관령면 알펜시아 컨벤션센터에서 이틀째 열린 ‘평창평화포럼’에서 만난 요시오카 다쓰야(59·일본) 핵무기폐기국제운동(ICAN) 의장은 “이번 포럼이 2020 도쿄하계올림픽과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 이후 올림픽까지 나아가길 바란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포럼은 한반도를 넘어 세계평화의 씨앗을 심은 2018평창동계올림픽 1주년을 맞아 11일까지 진행된다. 레흐 바웬사(76) 전 폴란드 대통령을 비롯한 세계 각 분야 평화운동 단체 대표들과 시민 등 1200여명이 뜨거운 토론을 펼치고 있다. ‘평창에서 시작하는 세계 평화’를 주제로 한반도와 세계 평화의 비전, 로드맵을 짜는 시간이다. 요시오카 의장을 만나 세계 평화와 한·일 관계 해법 등에 대해 들었다.→ICAN은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유엔 핵무기금지조약(TPNW) 준수와 이행을 촉진하는 100여개국 500여개 비정부기구(NGO)와 연합한 글로벌 네트워크다. 호주에서 첫발을 뗐는데 2007년 4월 오스트리아에서 공식 기구로 출범했다. 이후 글로벌 네트워크로서의 획기적인 세계 협정은 2017년 7월 7일 뉴욕에서 탄생했다. TPNW 체결 및 비준에 집중하고 있다. 50개국이 서명하고 비준하면 법적 효력을 발휘할 것이다. 현재 70개 가맹국과 21개 정당이 참여했다. ‘폭탄 투하 금지’와 같은 관련 캠페인에도 열심이다. 일본을 비롯해 각국 주요 은행과 금융기관으로부터 핵폐기에 대한 진지한 약속을 이어 가고 있다. 핵무기 사용의 비극적 결과를 널리 알리려는 노력으로 2017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나는 ICAN의 국제조종그룹 10명 가운데 한 명으로 NGO인 피스보트 설립자이기도 하다. 이번 포럼에선 ICAN을 대표한다. →NGO로 활동하며 어려운 점, ICAN이란 큰 주제에 대한 시민사회의 역할은. -ICAN에 닥친 도전은 핵무기를 소유하지는 않았지만 안보 정책에서 핵 억지력에 의존하는 핵우산 국가들이 조약 가입을 꺼린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핵무기를 비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핵 폐기는 인도주의적으로도 절실하다. 핵무기 사용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핵은 모든 사람들에게 직접적이고 지속적인 위협을 가한다. 평화를 지키는 데 반하고 국가 간 공포와 불신을 낳을 뿐이다. 핵무기를 금지하고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핵무기 사용에 대한 유일한 보증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민사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미 TPNW가 밟은 과정에서 입증됐다. 노벨평화상을 ICAN에 주겠다는 노벨위원회의 결정에 의해 인정된 셈이다. →평화올림픽으로 기록된 평창대회의 의미는 무엇이고, 한반도 비핵화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는지. -전 세계 사람들이 평창동계올림픽을 보았다. 또 남북한 선수들이 함께 행진하는 장면에 감동했다. 남북 여자선수 연합으로 이뤄진 아이스하키 ‘팀코리아’도 잊을 수 없다. 평창동계올림픽 전에는 판문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만나 손을 흔드는 것을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다. 올림픽은 세계인들에게 희망을 안긴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런 유산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기 바란다. 적어도 이런 과정은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매우 중요한 진전이다. 우리는 베트남에서 이뤄질 제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지도자들이 마침내 6·25전쟁 종식을 선언하고, 구체적인 단계를 밟기를 희망한다. 핵무기 없는 한반도 건설에 필수적인 단계다. 또 남북한이 TPNW에 가입한다면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 과정에서 강력한 국제 지원을 얻어 낼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최근 한국·일본 관계가 다소 소원해진 느낌이다. 해법은 무엇이라고 여기는지. -우선 일본 시민으로서 일본은 과거 식민지화와 침략에 대한 책임을 먼저 인식하고, 이 책임에 대해 진지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동시에 우리는 양국 사회의 신뢰 구축을 촉진하기 위해 더 많은 시민사회 활동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역사에 대한 공통적인 이해의 증진과 역사 교육에 대한 반영을 포함할 수 있다. 이러한 시민사회의 협력과 평화 활동을 통해 동북아 평화 구축에 필요한 두 사회 모두에 더 많은 자신감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다. →2030년까지 세계 평화운동의 공동 실천 의제를 마련할 평창평화포럼에서 ICAN의 역할은. -포럼에선 ‘평창평화의제 2030’을 위한 기본안(프레임 워크)이 채택된다. 이후 1년에 걸쳐 국제적으로 지역과 주제별 후속 논의를 통해 2020년 평창평화포럼에서 정식으로 평창평화의제 2030을 선언하게 된다. 2020년 포럼 이후 10년간 특정 쟁점을 다루는 각 조직이나 운동이 개별적으로 또는 별개로만 작동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자신들의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꾸준히 노력하는 한편 다른 많은 분야와의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ICAN은 TPNW의 조기 발효를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다. 이 캠페인은 시민사회 파트너, 정부 및 여러 분야의 다른 행동가들과 협력해 계속 작동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 국민들과 세계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한반도의 평화와 비핵화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위한 필수적인 평화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 동북아 평화 및 세계 평화 달성을 위해 더 강력한 연대 운동과 더 많은 공동 행동을 계속 구축하기를 원한다. 평창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요시오카 다쓰야는 누구 日 시민사회 지도 30년 국제활동…‘피스보트’ 세워 亞민간 화해 촉구지금까지 30년간 일본 시민사회를 이끌며 교육과 분쟁 해결 분야에서 국제적으로도 맹활약 중이다. 와세다 대학생이던 1983년 비정부기구(NGO)인 ‘피스보트’(Peace Boat)를 설립한 뒤 일본과 다른 아시아 국가 민간인들 간 화해와 대화를 촉구하는 운동을 펼쳐 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군사 침략에 대해 1980년대 초 일본 정부가 역사 교과서 검열을 단행하자 이에 맞서며 설립했다. 아시아·남태평양 섬 방문을 시작으로 세계 일주 크루즈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평화와 분쟁을 주제로 한 저술 활동도 활발하다. 평화문화 구축과 같은 문제에 대해 유엔에서 연설하도록 초청도 받았다. ‘지구촌 무장갈등 예방을 위한 글로벌 파트너십’(GPPAC) 창립 멤버이자 동북아 사무국장으로, 전쟁 폐지 캠페인을 벌여 2008년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아울러 2017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핵무기폐기국제운동(ICAN) 리더로서 국제 운영 그룹 ‘피스보트’ 회원을 맡았다. 환경적 지속가능성에 대한 강한 의지와 비화석연료·비원자력 발전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을 높여야 한다는 열정적인 믿음을 갖고 ‘피스보트’의 생태계 발전을 주도해 세계적으로 눈길을 끌고 있다. 평창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황성기의 시시콜콜]‘지식인 성명’ 일본에서 홀대받은 이유

    [황성기의 시시콜콜]‘지식인 성명’ 일본에서 홀대받은 이유

    지난 6일 일본 시민·지식인들이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촉구한 성명의 보도를 놓고 한·일 간 극명한 온도차를 보이고 있다. 한국 언론에는 7일자에 이어 8일자에도 보도됐지만 일본 언론에는 아사히신문 단 1개 신문 만이 두 문장 짜리의 짧은 기사로 7일자에 처리했을 뿐 다른 전국지나 방송, 통신사는 아예 언급조차 없었다. 한국 언론들은 성명 내용을 6일 연합뉴스에 이어 7일자 조간에 일제히 보도했다. 심지어는 사설로까지 언급돼 `한일관계 악화 더 이상 방치 말라는 日 지식인들의 호소’(동아일보 7일자), ‘아베 내각에 식민지배 사죄 촉구한 일본 지식인들’(한겨레신문 8일자), ‘日 지식인들 식민지배 반성 성명, 아베 총리는 새겨듣기를’(한국일보 8일자) 등으로 성명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극심한 한·일 보도의 온도차 성명을 들여다 보자. ‘무라야마 담화, 간 총리담화에 바탕을 두고 식민지지배를 반성·사죄하는 것이야말로 일·한, 일·북 관계를 계속해서 발전시키는 열쇠이다’라는 긴 제목에 말하고자 하는 바가 함축돼 있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우쓰미 아이코 게이센여학원대 명예교수, 다나카 히로시 히토쓰바시대 명예교수 등은 이날 도쿄 시내의 중의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성명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이종원 와세다대학 교수 등 총 226명이 발기인으로 혹은 서명을 통해 동참 의사를 표시했다. 성명은 “일본과 한국, 일본과 북한 사이에 남은 모든 문제를 무라야마 담화와 간 담화를 바탕 삼아 새로운 마음으로 성실히 협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북한의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대처해 나가야 한다”면서 “일·한 간의 이른바 ‘징용공’ 문제인 전시 노무 동원 피해자 문제에 대해서도 진지한 대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호의적인 對韓 보도 어려운 분위기 일본의 반성과 사죄를 촉구하는 지식인 성명이 일본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을 것은 자명하지만 이렇게 일본 언론에서 무관심과 홀대를 받는 것은 드문 일이다. 지난해 10월까지 서울특파원을 지낸 도쿄신문 정치부의 우에노 미키히코 기자는 “한국 신문을 7일에 읽고 성명이 나온 사실을 알게 됐다”면서 “지금 일본에 통계부정 논란, 아동학대 문제가 있어서 기자들이 관심을 안 가졌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우에노 기자는 “그러나 그런 이유보다는 일본 여론이 지식인들의 이런 주장을 받아들일 여지가 없는 상태”라고 분석한다. 그는 “이 분들 주장을 역지사지 해보자. 한국 지식인들이 최악인 지금의 한·일관계 타개를 위해 ‘위안부 합의도 잘 지키고 강제 징용문제도 65년 청구권 협정에 따라 해결하자. 일본과 한 약속을 잘 지켜야 미래지향적인 양국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식으로 주장하면 한국에서 수용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비교적 진보적인 도쿄신문 독자까지 레이더 사건에 대해 ‘한국은 말도 안되는 주장을 자꾸 하는 나라다. 어떻게 하라’라는 의견을 보내오고 있다. 한국, 특히 문재인 정권에 대해 호의적인 주장을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예전보다 훨씬 없어졌다”고 말했다. 오쿠조노 히데키 시즈오카현립대학 교수(한국정치)는 보다 신랄하다. 그는 “성명에 이름을 올린 학자, 언론인들은 항상 한·일관계에서 그런 운동을 하시는 분들인데다 새로운 내용도 없다”면서 “일본 사회 분위기가 새로운 것이 없는 이야기를 뉴스로 다룰 상황은 아닌 것 같다”고 지적했다. 오쿠조노 교수는 “일본에서는 위안부, 징용피해자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은지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한국은 도대체 왜 이럴까. 이웃나라여서 이사갈 수도 없는데 앞으로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하나’ 하는 단계로 넘어갔다”고 전했다. 韓 ‘조속한 입장 발표’ 日 ‘냉정한 대처’ 주문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20년간 한국을 취재하고 있는 한 일본인 저널리스트는 “진보적 일본 매체조차 보도를 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일본 여론이 한국에 대한 불신감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역으로 한국에서 비슷한 기자회견이 열렸다고 하면 결과가 어떨지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라면서 “한국 정부가 하루라도 빨리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하고, 일본도 역정만 내지말고 냉정히 대처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2010년 한·일 병합 100주년 때에도 양국 관계 개선을 촉구하는 성명을 냈던 일본 지식인들의 ‘2019년 성명’을 둘러싼 한·일의 보도 격차는 갈수록 깊어지는 양국의 골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는 점에서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다음은 성명 전문 일본과 한국은 이웃나라로, 협력하지 않으면 양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아 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러한 양국 사이에 1904년 이후 41년간 군사 점령, 1910년 이후 35년간 식민지 지배가 일본 제국에 의해 한반도에 가해졌다. 이것이 양국 역사의 암부(闇部)를 만들었다. 한국·조선인의 역사 기억에서 이것을 지울 수는 없으며, 일본인은 이것에 대해 인간적으로 대처하는 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조선 식민지지배는 1945년 8월 15일로 끝났지만 일본인은 국가, 국민으로서 한국 병합과 식민지 지배에 대해 반성하고 사죄하는 모습을 오랫동안 보이지 않았다. 일본은 독립한 조선의 한 쪽 나라인 대한민국과 국교를 정상화하는 한일조약을 1965년 체결했다. 그러나 1910년의 병합조약이 처음부터 무효였다는 한국 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합의에 의한 병합이었고 식민지 지배는 없었다는 주장으로 일관했다. 쌍방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는 점을 확인한다’라고 명기된 청구권협정이 체결되었지만 근본적 인식의 분열은 극복되지 못한 채 방치됐다.  이런 한·일조약에 근거하여 일본은 대한민국과의 국교를 유지하고 경제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다면적 협력을 발전시켜 왔다. 20여 년이 지난 1987년 한국에서는 군부 독재정권 시대에 종지부를 찍는 민주혁명이 일어났다. 그리고 나서야 1995년 자민당, 사회당, 신당 사키가케의 3당 연립내각의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각의결정을 통해 패전 50년 총리담화를 발표하여 처음으로 식민지 지배에 대해 반성하고 사죄했다. 일본은 “아시아 제국(諸國) 사람들”에게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인해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죄의 마음을 표명”한 것이다. 이 반성과 사죄는 19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의 한·일 파트너십 선언에서 “한국 사람들”을 향해 표명되었고, 2002년에는 김정일 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북·일 평양선언에서 “조선 사람들”을 향해 표명되었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이러한 반성과 사죄표명은 획기적이었다. 그러나 반성과 사죄 표명의 완성을 위해서는 병합 그 자체에 대한 역사 인식이 추가되어야 한다.  한국병합 100년을 맞은 2010년, 우리 일본의 지식인 500명은 한국의 지식인 500명과 함께 병합의 과정과 병합조약을 비판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우리들은 “한국병합은 대한제국의 황제로부터 민중에 이르기까지 격렬한 항의를 군대의 힘으로 짓누르고 실현시킨 문자 그대로 제국주의 행위이며, 불의부정(不義不正)한 행위였다”라고 지적한 다음 병합조약에 대해서는 “힘으로 민족의 의지를 짓밟은 병합의 역사적 진실”을 “평등한 양자의 자발적 합의로, 한국 황제가 일본에 국권 양여를 신청하여 일본 천황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한국병합에 동의했다는 신화”에 의해 덮어 숨기는 것이고, 조약의 전문(前文)도 본문도 거짓임을 명백히 밝혔다. “이리하여 한국병합에 이르는 과정이 불의부당한 것처럼 한국병합조약도 불의부당하다”, 이것이 우리들의 결론이었다.  이 성명은 2010년 5월 10일 발표된 이후 제2차 서명자가 추가되어 7월 28일에 다시 발표됐다. 그리고 이 성명에 답이라도 하듯 일본 정부와 간 나오토 총리는 8월 10일 각의결정을 통해 한국병합 100년 총리담화를 발표했다. 그 담화에는 다음과 같은 일본정부의 인식이 담겨 있는데 반성과 사죄가 재차 표명됐다.  “정확히 100년 전 8월,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어 이후 36년에 걸친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었습니다. 3·1 독립운동 등의 격렬한 저항에서도 나타났듯, 정치적·군사적 배경 하에 당시 한국인들은 그 뜻에 반하여 행해진 식민지 지배에 의해 나라와 문화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저는 역사에 대해 성실히 임하고자 합니다. 역사의 사실을 직시하는 용기와 이를 인정하는 겸허함을 갖고, 스스로의 과오를 되돌아보는 것에 솔직해지고자 합니다. 아픔을 준 쪽은 잊기 쉽고, 아픔을 받은 쪽은 쉽게 잊지 못하는 법입니다. 이러한 식민지 지배가 초래한 다대한 손해와 아픔에 대해, 재차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죄의 마음을 표명합니다”(간 나오토 총리 담화)  이것이 일본이 ‘한국병합’으로부터 100년, 식민지 지배 종식으로부터 55년이 지나서야 도달한 역사인식이다. 한국 국민의 비판에 스스로의 노력이 더해져 이루어진 반성과 사죄의 새로운 지평이다. 이 총리담화의 성과로 일본 통치 하에서 조선총독부가 빼앗아 일본의 황실 재산으로 삼은 ‘조선왕조의궤’가 담화가 발표된 그 해에 한국 정부로 반환되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일본과 대한민국, 일본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사이에 남은 모든 문제를 무라야마 담화와 간 담화를 바탕 삼아 새로운 마음으로 성실히 협의하여 해결해야 한다. 일본 정부와 국민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과거 25년간 여러 노력을 해 왔지만 이 문제는 현재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무엇보다 북한의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이른바 ‘징용공’ 문제, 전시 노무동원 피해자 문제가 큰 문제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한·일조약 당시의 협의와 2000년대 한국 정부의 적극적 노력이 있었지만 20만명 정도로 일컬어지는 전시 노무동원 피해자와 그 유족들의 불만의 목소리가 다시금 한·일관계를 흔들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위안부 문제와 마찬가지로 한층 더 진지한 대처가 필요하다. 북한의 전시 노무동원 피해자 문제에 대해서도 같은 대처를 고려해야 한다. 이 외에도 ‘한국인 BC급 전범’ 문제도 존재한다. 전범으로 사형판결을 받은 92세의 이학래 노인은 지금껏 일본 정부에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일본은 북한과의 국교정상화를 신속히 실현해야 한다. 일본 정부와 국민은 무라야마 담화, 간 담화를 바탕 삼아 남북한 정부와 국민들의 협력을 얻어 남아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올해는3·1 독립선언이 발표된 지 100년이 되는 기념비적 해이다. 일본에 병합되어 10년 간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조선 민족은 이날 일본인들에게 일본을 위해서라도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고 설득하고자 했다. 이제 우리들은 조선 민족의 이 위대한 설득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동양 평화를 위해 동북아시아 평화를 위해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바탕으로 한·일, 북·일 간의 상호 이해, 상호 부조(扶助)의 길로 나아가야 할 때이다.   2019년 2월 6일
  • [와우! 과학] 200년간 사라졌던 남아공의 ‘잃어버린 도시’ 찾았다

    [와우! 과학] 200년간 사라졌던 남아공의 ‘잃어버린 도시’ 찾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잃어버린 도시’의 흔적이 확인돼 학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라이브사이언스 등 과학전문매체의 6일 보도에 따르면 비트바테르스란트대학 연구진은 1400년대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도시 ‘퀘넹’(Kweneng)의 흔적을 새롭게 발견했다고 밝혔다. 연구를 이끈 카림 사드르 교수 연구진은 해당 도시가 완벽하게 사라진 시점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1820년대 당시 심각한 내전으로 도시가 파괴된 뒤 해당 지역에 거대한 수풀과 초원, 호수 등이 형성되면서, 그야말로 자연에 파묻혀 사라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연구진이 해당 도시의 흔적을 발견한 곳은 남아공 북동부 가우텡주(州)에 있는 수이케르보스란트 자연보호구역 내로, 해당 도시는 이 자연보호구역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거대한 수풀림 아래에 잠들어 있다. 연구진에 따르면 해당 도시는 1825~1875년 일부 구역이 재건축된 흔적이 남아있으며, 1960년대 당시 항공 관측을 통해 해당 도시의 존재 사실이 추측된 바 있지만 명확하게 도시의 규모와 구조물이 파악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잃어버린 도시의 흔적을 찾기 위해 동원된 것은 구글어스를 이용한 위성이미지 및 레이더스캐닝 기다. 이 레이더 기기는 공중에서 쏜 레이저 광선이 땅 속 물체 등에 닿을 경우 되돌아오도록 설계돼 있으며, 돌아오는 광선의 거리 등을 토대로 지하 구조물의 형태를 3D로 파악할 수 있다. 그 결과 몇 백 년전 존재했다가 현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 도시에는 돌로 지어진 주택과 농가가 즐비했으며, 이러한 건축물의 수는 800~900채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됐다. 도시의 규모는 길이 10㎞, 폭 2㎞ 정도로 보이며, 도시가 전성기를 이뤘을 당시, 각각의 건축물 또는 집에 거주한 주민의 수는 적게는 5000명, 많게는 1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연구진은 추측했다. 규모가 비교적 큰 농가의 입구에서는 축사의 흔적도 있었으며, 곡물을 보관하거나 사회적 지위를 나타냈던 것으로 추정되는 낮은 석조탑도 함께 확인됐다. 연구진은 아프리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우리는 남아프리카 지역의 식민지 시대 이전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다. 남겨진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면서 “우리는 레이더 기술을 이용해 찾은 잃어버린 도시의 흔적을 통해 기록에 없는 역사적 공백을 채울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송현서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아하! 우주] 우주로 떠난 전기차 로드스터는 어디쯤 달리고 있을까?

    [아하! 우주] 우주로 떠난 전기차 로드스터는 어디쯤 달리고 있을까?

    정확히 1년 전인 지난해 2월 6일(현지시간), 민간우주기업 스페이스X와 전기자동차 회사 테슬라의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가 자동차 한대를 시험 발사한 팰컨 헤비 로켓(Falcon Heavy)에 실어 우주로 보냈다. 바로 테슬라의 전기차 로드스터(Roadster)로, 운전석에는 우주복을 입은 마네킹 '스타맨'(Starman)이 앉았다.또한 조수석 앞 대시보드에는 더글러스 애덤스의 책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첫 머리에 나오는 경고문 '당황하지 마라'(Do not Panic)라는 문구를 새긴 명판을 붙어있다. 마치 사람이 자동차를 타고 우주여행을 하는듯한 모습은 세계적인 관심을 모았고 테슬라 입장에서는 자사의 차를 홍보하는 톡톡한 재미도 누렸다. 그로부터 1년 후 로드스터를 타고있는 스타맨은 우주의 어디쯤을 '달리고' 있을까? 현재 로드스터의 정확한 위치는 ‘로드스터는 어디에 있나'(Where is Roadster)라는 위치 추적 사이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엔지니어 출신인 벤 피어슨이 개설한 사이트를 보면 현재 로드스터는 화성 궤도를 훌쩍 넘어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 반대편 쪽에 위치해있다. 지구로부터의 거리는 약 3억6400만㎞로, 8176㎞/h의 속도로 우리와 멀어지고 있다. 로드스터가 지상에서 3만6000마일의 보증수리가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미 1만3000배를 넘어섰다.흥미로운 점은 로드스터가 영원히 화성 너머에 머무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로드스터는 태양 중심 궤도를 타원형으로 돌면서 태양과 지구에 가까워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한다. 지구와 가장 가까워지는 때는 오는 2091년으로 이 시기 로드스터는 지구와 달 거리만큼이나 다가온다. 물론 오랜 여행 중인 로드스터와 스타맨을 다시 고향으로 데려올 지는 스페이스X의 몫이다. 로드스터를 우주로 떠나보내는데 성공한 팰컨 헤비는 민간 최초의 심우주 로켓으로 길이는 70m, 폭 12.2m에 달한다. 미 항공우주국(NASA)의 막강한 새턴 V 달 로켓 이래 최강의 것으로, 발사 추진력이 다른 발사체의 두배이며, 보잉 747의 18대를 합쳐놓은 수준이다. 지구 저궤도(600~800㎞)를 기준으로 최대 63.8t까지 운반할 수 있다.지난해 2월 6일 시험발사에 성공하면서 '화성을 정복'하겠다는 머스크 회장의 야심찬 계획은 본격적인 닻을 올렸다. 이는 팰컨 헤비가 사람과 화물을 지구에서 화성으로 이주시키는 이른바 화성 식민지 프로젝트의 핵심이기 때문으로, 스페이스X는 오는 2024년까지 이 로켓에 대형 유인 탐사선을 탑재해 화성에 인간을 착륙시킬 계획이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日 지식인 “日, 과거사 반성해야 한·일, 북·일관계 발전”

    “전향적 대응으로 대립 관계 풀어가야” 한·일 양국의 갈등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 220여명이 식민지배 등 제국주의 과거사에 대해 반성하고 사죄하는 자세를 자국 정부에 촉구했다. 이들은 일본 정부가 한국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를 담은 1995년 무라야마 담화 등을 근거로 남북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등 6명은 6일 도쿄에 있는 국회 중의원 제2 의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총 226명이 서명한 ‘2019년 일본 시민 지식인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에는 와다 교수를 포함해 저명한 일본인 교수, 변호사, 언론인 등 20명과 이종원 와세다대 교수 등 21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2010년 한·일 병합 100주년 때에도 양국 관계 개선을 촉구하는 성명을 냈던 이들은 “현재의 비정상적인 대립과 긴장 관계를 우려해 긴급히 성명을 발표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들은 성명에서 “‘무라야마 담화’와 ‘간 총리 담화’를 바탕으로 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야말로 한·일, 북·일 관계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열쇠”라고 강조했다. 무라야마 담화는 1995년 연립내각을 이끌던 무라야마 도미이치 당시 총리가 태평양전쟁 패전 50주년 담화를 통해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해 처음으로 반성하고 사죄한 것을 말한다. ‘간 총리 담화’는 간 나오토 총리 때인 2010년 한·일 병합 100년을 맞아 발표한 것으로, ‘다대한 손해와 아픔에 대해 재차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죄의 마음을 표명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와다 교수 등은 “한국, 조선인의 역사 기억에서 이 부분(식민지배)을 지울 수 없고, 일본인들은 이 역사에 대한 인간적 대처에서 벗어날 수 없다”며 “일제의 지배는 1945년 8월 15일 끝났지만 일본인은 국가, 국민으로서 한국 병합과 식민지 지배에 대해 반성하고 사죄하는 모습을 오랫동안 보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위안부 문제와 강제징용 문제에 대해서도 일본 정부의 전향적인 대응을 주문했다. 이들은 “올해는 3·1 독립선언이 발표된 지 100년이 되는 기념비적 해”라며 “일본에 병합되어 10년간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조선 민족은 이날 일본인들에게 일본을 위해서라도 조선이 독립해야 한다고 설득하고자 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한편 일본 방위성은 ‘레이더 갈등’과 관련한 후속 조치로 한국에 해상자위대 호위함 ‘이즈모’를 파견하려던 계획을 취소했다고 지난 5일 공식 발표했다. 당초 일본은 올 4~5월 한국에서 열리는 다국 간 해상합동훈련에 맞춰 부산항에 이즈모 등을 파견할 계획이었다. 우리 군도 앞서 지난달 27일 이달 중으로 예정했던 해군 1함대사령관의 일본 방문을 무기한 연기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청춘을 리노베이션하다 - 대구 수창청춘맨숀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청춘을 리노베이션하다 - 대구 수창청춘맨숀

    “자갈마당” 대구의 공공장소에서 자갈마당이라는 단어를 입으로 내뱉는 순간, 주변 분위기는 말 그대로 ‘갑분싸’로 빠져든다. ‘자갈마당’은 과거 서울의 청량리나 미아리, 부산의 완월동과 같은 대표적인 대구의 집창촌을 달리 부르는 이름으로 이제는 거의 명맥이 끊긴 곳이기도 하다. 바로 이 어둡고 숨겨진 '청소년 통제 구역'의 골목 앞에 대놓고(?) 예술 문화 공간이 하나 생겼다. 대구 수창청춘맨숀이다.상전벽해. 바로 이 거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자갈마당은 버스 안에서조차도 아이들의 고개를 황급히 돌려야 했던 ‘19금’ 가득 담긴 금기의 골목이었다. 그러나 원래 이 땅이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수탈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가슴 아픈 자리라는 사실은 지역 사람들도 잘 모른다.1894년 청일 전쟁 직후 일본군 통신대가 주둔하면서 대구의 개천들이 몰려 있던 현 달성공원 앞 습지 바닥에 대구읍성 철거 중에 나온 각종 자갈 및 흙들을 깔았고 이후 여기를 자갈마당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1909년이 들어서면서 자갈마당에 있던 기존의 일본 군대를 위한 공창지역 옆에 하급 노동자를 위한 본격적인 유곽지가 따로이 조성되면서 이 지역이 집창촌으로 본격적으로 탈바꿈한다. 1910년 3월에는 오오이시(大石)상회가 대구 태평로에 국내 최대 규모의 담배 연초 제조공장을 설립하였고 해방 후 전매청의 이름으로 고스란히 자리는 남게 되었다.이후 전매청 대구연초제조창이 있는 이 지역을 중심으로 각종 공구 상회, 달성공원, 기계부품공장 등이 1930년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들어서면서 자갈마당 주변은 대구 북구 지역의 관문 역할을 하며 번성가도를 달린다. 그러다 1999년 6월 한국담배인삼공사(현 KT&G) 대구연초제조창으로 사용되던 건물들이 노후화로 인해 줄줄이 폐쇄되면서 이 거리도 급속도로 쇠락의 운명을 맞게 된다. 수창청춘맨숀은 바로 강제 철거 위기에 놓여 있던 옛 담배인삼공사 직원들의 수창동 관사를 2017년 12월부터 리노베이션한 곳이다. 이 장소에서 젊은 예술가들에게 창작의 공간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전시 관람 판매 공간도 아울러 마련하자는 의도로 가지고 실험적으로 조성한 문화공간의 또 다른 이름이 수창청춘맨숀이다.예전 전매청 관사를 둘러싸고 있던 붉은 색 담장은 허물어 현재 야외 전시장 및 주차 장소로 사용하고, 관사 내부 3층 아파트 규모 2개 동은 청년 작가들을 위한 창작 예술 센터와 전시 공간으로 탈바꿈하였다. 이 수창청춘맨숀의 또 다른 특성은 타 지역의 리노베이션 공간과는 달리 직접 자신이 만든 작품을 전시 판매할 수 있게 하여 일반인들도 흥미를 지니고 다가갈 수 있도록 하였다.수창청춘맨숀에서는 현재 20~30대 젊은 작가들의 설치미술작품, 미디어 아트, 평면 회화 등을 선보이고 있다. 또한 수제 맥주 만들기, 패션화보 촬영하는 법, 다큐영상 제작법 등 다채로운 체험 활동 공간도 제공하고 있어 일반인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청년 예술가들을 위한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수창청춘맨숀 활성화 성공 여부는 전국에 산재한 노후 도심 재개발 방향에 의미있는 방향성을 제공할 듯하다. <대구 수창청춘맨숀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 슬럼화된 옛 집창촌 골목이 예술의 힘으로 살아나고 있는 현장. 세월이 바뀌었다. 2. 누구와 함께? - 연인들과 함께. 젊은 공간. 3. 가는 방법은? - 대구 수창 초등학교 앞에 있다 - 시내버스 수창초등학교 : 300, 523, 808, 836, 939, 동구2, 북구2 - 지하철 달성공원역 하차. 4. 감탄하는 점은? - 완전히 뒤바뀐 거리의 풍경.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아직은 좀 더 많은 홍보가 필요한 공간. 6. 꼭 봐야할 전시품은? - 과거 전매청 직원들의 구술 역사. 전매청 직원들이 살던 아파트의 흔적들. 7. 토박이들이 추천하는 먹거리는? - ‘마당갈비’, 북성로 돼지불고기 골목, 순대 ‘이모식당’, 돼지바베큐 ‘청춘을 파는 상회 서재점’, ‘부산설렁탕’ 8. 홈페이지 주소는? - https://www.facebook.com/Suchangmansionofyouth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대구예술발전소, 달성공원, 삼성상회 옛 터, 서문시장 10. 총평 및 당부사항 - 거대 자본이 아닌 젊은 청년 예술가들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아직은 좀 더 많은 홍보와 작품 구성이 필요하다. 출발점은 분명 멋지다.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말빛 발견] 일본군 ‘위안부’/이경우 어문부장

    1930년대 초 일본군 점령 지역에서 강간 사건이 빈번해진다. 반일 감정은 점점 커져 가고, 성병에 걸리는 군인들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일본군은 이를 방지하고 병사들에게 성적인 위로를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위안소’를 둔다. 식민지인 조선과 타이완의 여성들을 동원하기 시작한다. 취직을 시켜 준다고 속이거나 납치하는 방식으로 여성들을 끌고 갔다. 그러고는 ‘위안부’(慰安婦)라는 이름을 붙였다. ‘위안’(慰安)은 ‘위로하여 마음을 편하게 함’이라는 뜻이다. 자발적인 것처럼 자신들의 의도를 담아 자신들의 시각에서 이렇게 불렀다. 불편하지만 우리도 ‘위안부’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대신 ‘위안부’에 작은따옴표(‘ ’)를 한다. 지금까지 ‘위안부’라는 말로 문제를 제기하고 운동을 펼쳐 왔기 때문에 ‘위안부’를 지우지 않은 것이다. 역사적 용어로서 ‘위안부’라고 표시한다. 더 정확하게 사실을 드러내는 말은 ‘일본군 성노예’다. 그렇지만 생존해 있는 분들은 직접적이어서 이 표현을 거부한다. 국제사회에서는 이 표현을 공식적으로 사용한다. 역사적 사실의 본질을 잘 보이고 있다고 본 것이다. 최근엔 시민단체에서도 이를 따른다. 어떤 말을 쓰든 아프다. 이경우 어문부장 wlee@seoul.co.kr
  • “일본 정부가 사죄할 때까지…” 김복동 할머니 육성 영상 눈길

    “일본 정부가 사죄할 때까지…” 김복동 할머니 육성 영상 눈길

    “힘없고 빽 없는 사람들은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겠지요. ‘공장에 가는데 죽기야 하겠나, 생각하고 간 곳이 공장이 아니고 일본군을 상대하는 공장이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복동 할머니의 육성이 담긴 영상 하나가 눈길을 끌고 있다. 이 영상은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의 아픔 그리고 육성 인터뷰’라는 제목으로 2017년 8월 2일 서울시 공식 유튜브 채널에 띄워졌다. 영상은 김복동 할머니가 본인의 나이와 이름을 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김 할머니는 1940년 만 14세 나이로 일본군 위안부 연행 당시 상황을 술회한다.일본에 속아 8년 세월을 희생당한 김 할머니는 “근근이 목숨만 살아서 집에 오니까 나이가 22살이라고 하더라고요. 8년이라는 세월을 암흑 속에서 목숨만 살아 돌아온 우리…”라며 사죄하지 않는 일본의 행태에 분노했다. 이어 김 할머니는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는 일본에 강력하게 쓴소리를 냈다. “우리 국민이 한 푼 한 푼 모아서 소녀상을 건립했고, 앞으로 후손들이 자라서 우리나라에서 이런 비극이 있었구나, 하는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 해놓은 것을 자기네들이 치우라고 할 권한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식민지 시대인 줄 아는 모양이지요?”라며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끝으로 김 할머니는 일본에 진정성 있는 사죄와 법적 배상을 요구한 뒤, 우리 국민에게는 감사와 함께 관심을 부탁했다. “일본 정부가 사죄할 때까지 우리 국민 여러분께서 같이 협조해서 하루라도 빨리 우리가 죽기 전에 사죄받도록 해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이러한 할머니의 소박한 바람은 이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으로 남게 됐다. 한편, 김복동 할머니는 지난 28일 오후 10시 41분 향년 93세의 나이로 영면에 들었다. 김 할머니는 2017년부터 대장암 투병 생활을 해왔으며, 여러 차례 수술에도 최근 건강이 크게 나빠진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27일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모 할머니가 향년 9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올해만 벌써 ‘위안부’ 피해 할머니 2명이 잇따라 돌아가시면서 피해 생존자는 이제 23명으로 줄었다.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 [최만진의 도시탐구] 또 목포의 눈물인가?

    [최만진의 도시탐구] 또 목포의 눈물인가?

    ‘목포의 눈물’은 1935년 이난영이 불러 대성공을 거두었던 노래이다. 당시 목포는 일본과 중국에 가깝다는 지리적 장점으로 일제 수탈을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에 일찍부터 개항을 강요당했고, 식민지 열강들 중에 일본이 유일하게 영사관을 설치했다. 강점기 동안에는 경제 수탈을 위해 동양척식회사 목포지점과 은행 등을 설립하여 비옥한 전라도의 쌀과 목화를 일본으로 실어 날랐다. 이에 많은 조선인이 노동에 동원되었고 때로는 임금조차도 받지 못하는 억울함을 맛보던 곳이 목포항이었다. 억압을 몸소 느끼다 보니 항일운동도 활발하게 일어났고, 일제는 목포형무소나 목포경찰서를 세워 잔혹하게 통치하였다. 이난영의 노래가 더 사랑을 받았던 이유는 나라 잃은 한을 그 특유의 애잔한 목소리로 실어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목적이 어찌됐든 당시 목포는 도시계획과 건축으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고, 근대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런 일제의 개발은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첫째로는 당연히 식민화의 도구다. 두 번째로는 그나마 긍정적인 것으로 근대적 건축과 도시계획의 도입이었다. 특히 서양의 영향을 받은 건축가나 도시계획가에게는 제약이 많은 일본에 비해 조선은 실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이로써 목포에는 일본식 가옥 외에도 고전주의, 절충주의, 근대건축 등 다양한 형태의 서양건축물이 들어서게 되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엽의 유럽도시를 재현하는 듯했다. 또한 도시계획 측면에서도 1930년대에 대규모 사업인 ‘시가지계획령’ 지정을 받는 등 괄목할 만한 변화를 경험했다. 근대적 격자형 도로망과 지구가 생긴 것도 이때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설치된 방공시설도 일부 보존되어 있기도 하다. 최근 많은 화제를 낳고 있는 ‘목포 문화거리’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이다. 목포 도심은 해방 직후나 산업화과정에서 변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전체가 그야말로 근대도시의 살아 있는 박물관이다. 이는 당시의 도시, 건축, 생활상을 이해하고 읽어낼 수 있는 좋은 사료임에 틀림이 없다. 그간 아쉬웠던 것은 건축물과는 달리 도시공간에 대한 문화재지정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1910년대의 나진이나 진해는 유럽식 개념을 도입한 획기적 성격의 신도시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일본에서조차도 볼 수 없었던 이 계획이 가지는 의의는 상당히 크며, 향후 도시 보존과 개발에 있어 많은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 도심에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군대가 연합군 폭격기에 대응 사격을 위해 만들었던 방공타워가 있다. 탄환 흔적이 곳곳에 있는 이 콘크리트 덩어리는 주변 공원과 함께 생태체험 공간으로 거듭나 사랑받고 있다. 한 특정 정치인에 대한 투기 의혹에 대한 논쟁은 차치하고 도심 공간 전체를 문화재로 지정하고 이를 관광, 산교육, 도시 되살리기 사업의 소재로 삼는다는 것은 바람직해 보인다. 따질 것은 따지되 목포에서 제2의 눈물을 쏟아내게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 또 목포의 눈물인가?

    또 목포의 눈물인가?

    ‘목포의 눈물’은 1935년 이난영이 불러 대성공을 거두었던 노래이다. 당시 목포는 일본과 중국에 가깝다는 지리적 장점으로 일제 수탈을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에 일찍부터 개항을 강요당했고, 식민지 열강들 중에 일본이 유일하게 영사관을 설치했다. 강점기 동안에는 경제 수탈을 위해 동양척식회사 목포지점과 은행 등을 설립하여 비옥한 전라도의 쌀과 목화를 일본으로 실어 날랐다. 이에 많은 조선인이 노동에 동원되었고 때로는 임금조차도 받지 못하는 억울함을 맛보던 곳이 목포항이었다. 억압을 몸소 느끼다 보니 항일운동도 활발하게 일어났고, 일제는 목포형무소나 목포경찰서를 세워 잔혹하게 통치하였다. 이난영의 노래가 더 사랑을 받았던 이유는 나라 잃은 한을 그 특유의 애잔한 목소리로 실어냈던 것이 아닌가 싶다.목적이 어찌됐든 당시 목포는 도시계획과 건축으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고, 근대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런 일제의 개발은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첫째로는 당연히 식민화의 도구다. 두 번째로는 그나마 긍정적인 것으로 근대적 건축과 도시계획의 도입이었다. 특히 서양의 영향을 받은 건축가나 도시계획가에게는 제약이 많은 일본에 비해 조선은 실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이로써 목포에는 일본식 가옥 외에도 고전주의, 절충주의, 근대건축 등 다양한 형태의 서양건축물이 들어서게 되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엽의 유럽도시를 재현하는 듯했다. 또한 도시계획 측면에서도 1930년대에 대규모 사업인 ‘시가지계획령’ 지정을 받는 등 괄목할 만한 변화를 경험했다. 근대적 격자형 도로망과 지구가 생긴 것도 이때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설치된 방공시설도 일부 보존되어 있기도 하다. 최근 많은 화제를 낳고 있는 ‘목포 문화거리’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이다. 목포 도심은 해방 직후나 산업화과정에서 변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전체가 그야말로 근대도시의 살아 있는 박물관이다. 이는 당시의 도시, 건축, 생활상을 이해하고 읽어낼 수 있는 좋은 사료임에 틀림이 없다. 그간 아쉬웠던 것은 건축물과는 달리 도시공간에 대한 문화재지정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1910년대의 나진이나 진해는 유럽식 개념을 도입한 획기적 성격의 신도시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일본에서조차도 볼 수 없었던 이 계획이 가지는 의의는 상당히 크며, 향후 도시 보존과 개발에 있어 많은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 도심에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군대가 연합군 폭격기에 대응 사격을 위해 만들었던 방공타워가 있다. 탄환 흔적이 곳곳에 있는 이 콘크리트 덩어리는 주변 공원과 함께 생태체험 공간으로 거듭나 사랑받고 있다. 한 특정 정치인에 대한 투기 의혹에 대한 논쟁은 차치하고 도심 공간 전체를 문화재로 지정하고 이를 관광, 산교육, 도시 되살리기 사업의 소재로 삼는다는 것은 바람직해 보인다. 따질 것은 따지되 목포에서 제2의 눈물을 쏟아내게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글: 최만진 경상대 건축학과 교수
  • [색다른 인터뷰] “3·1독립선언, 현대적 관점서도 탁월한 동아시아 평화선언문”

    [색다른 인터뷰] “3·1독립선언, 현대적 관점서도 탁월한 동아시아 평화선언문”

    3·1 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한국과 일본은 과거보다 더 높고 두터운 장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성난 얼굴로 응시하고 있다. ‘피해’와 ‘가해’라는 역사의 대척점에서 상대를 바라보는 방향과 관점이 극명하게 엇갈리기 때문이다. 두 나라 사이의 어두운 과거를 정리하고 발전적인 미래를 추구한다는 당위론적 명제는 갈등과 대립 속에 좀체 현실화하지 못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한·일 연구에 오랜 시간 천착해 온 도노무라 마사루(53) 도쿄대 교수(한국학연구센터장)를 지난 24일 도쿄 메구로구 고마바 캠퍼스 연구실에서 만나 100년 전 한국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의 의미와 발전적인 양국 관계를 위한 제언을 들어 봤다. 도노무라 교수는 지난해 국내 번역된 책 ‘조선인 강제연행’을 비롯해 활발한 저술활동을 펴고 있다.→오랫동안 일제강점기 한반도 연구를 해 오셨는데, 3·1 독립운동의 의미를 요약한다면. -3·1 독립선언은 현대적 관점에서 봐도 탁월한 내용이 담긴 동아시아 평화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다. 군사력을 바탕으로 다른 나라를 강압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동양의 전통이 아닌데도, 일본이 조선을 힘으로 누르며 그 평화적 전통을 깨고 있음을 지적했다. 일본의 지배하에서는 조선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에 독립을 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당시나 지금이나 3·1 독립선언서를 제대로 읽어 본 일본인은 거의 없다.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무엇을 주장하는지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쉽다. →3·1 독립선언은 ‘우리 민족이 우리의 힘으로 살아가는 정당한 권리’를 특히 강조했는데. -독립선언서는 자신들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독립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한국인들 스스로 자립의 길을 걷겠다는 선언이었다. 관련해서 일본이 한국을 기만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지적했다. 일본의 통치로 조선이 발전하고 있다는 일본 측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당시 일본은 철도와 도로가 놓이고 근대적인 학교와 병원이 세워지고, 농업생산이 늘었음을 통계적으로 보이며 조선 통치를 정당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독립선언서는 그것이 조선인이 추구하는 행복의 본질과는 무관한 것임을 강조했다. →당시 3·1 독립운동을 보는 일본 내 분위기는 어땠나. -일본 언론에서는 ‘천도교라는 미신을 믿는 불온한 사람들이 무지하고 어리석은 한국의 대중을 선동해 만세를 외친 사건’ 정도로 보도했다. 일본은 “천황(일왕) 아래에서는 일본인도 조선인도 평등하다”고 선전했지만, 그렇다면 왜 조선인들이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3·1 운동은 일본에서 어떻게 기억돼 왔나. -식민통치 기간 중에도 3·1 운동을 기념하려는 움직임은 일본 당국의 거센 탄압 속에서도 지속됐다. 특히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민족해방을 계급투쟁 혁명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마다 3월 1일을 전후해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전단지 배포나 집회 개최 등을 시도했다. 일본 경찰들은 이것이 또 다른 민중운동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경계했고, 193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이에 대한 탄압이 한층 강화돼 거의 대부분 공공장소에서 3·1 운동을 기념하는 활동이 불가능해졌다. →1945년 일본의 패전 후에는 어땠는가. -전쟁이 끝나면서 3·1 운동을 기념하는 움직임이 되살아났다. 1947~48년 신문을 보면 재일 조선인들이 3·1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모임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본 진보진영에는 3·1 운동을 세계혁명을 위한 기념비적 사건으로 평가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전후로 과거 한국 식민지배 문제를 다시 돌아보게 된 일본인이 늘면서 3·1 운동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조선의 독립에 대한 일본사회의 분위기는 어땠나. -일본이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대다수 일본인들은 타국에 대한 식민지배에 찬성했던 것이 사실이다. 국민을 소중히 여기고 국민들의 생활을 최우선으로 여겨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1894년 청·일 전쟁 이후 제국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압도적으로 높아졌다. 1930년대 이후가 되면 대다수 일본 국민들이 침략전쟁을 적극 지지하게 된다. 하지만 침략에 대해 반대했던 사람들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주변국을 침략하는 것은 일본의 전통이 아니며, 소국주의와 평화주의를 견지해야 한다는 이념을 바탕으로 식민지배에 반대한 정치인과 언론인도 있었다. 물론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자기 주장을 드러낼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라는 한계는 있었다. 패전 후 조선에 대한 불평등한 지배 관계를 깨닫고 이를 반성하며 속죄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했던 일본인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식민자(植民者) 2세’로 불리는 한반도 출생자로 유명 소설가였던 가지야마 도시유키는 ‘이조잔영’과 같이 식민시대 조선의 아픔을 그린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최근 일본에서 과거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 분위기가 이전보다 약해졌다는 평가가 많다. -과거 ‘무라야마 담화’가 나오던 때는 물론이고 자민당의 하시모토 류타로, 오부치 게이조 총리 등 시절만 해도 과거사와 관련해 반성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자민당 소장파가 세력을 얻은 후에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역사수정주의 책들이 많이 나온 가운데, 1990년대 말 이후 보수우파의 현실참여 활동이 부쩍 늘어난 것 등도 이유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최근 한·일 관계 악화의 주된 이슈는 일제 징용 노동자에 대한 한국 법원의 배상 판결이다. 강제동원 문제는 어떻게 봐야 하나. -‘징용’이라는 말은 오해를 부를 수 있기 때문에 ‘전시노무동원피해자’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조선인 노무동원의 피해는 매우 광범위하다. 직접 노동을 했던 당사자만이 아니다. 동원됐던 사람의 가족들, 강제동원을 피해 산골에 은신하느라 인간답게 못 살았던 사람들도 모두 피해자다. 특히 미쓰비시니 신일철이니 장소와 시기를 기억하고 있는 피해자들은 재판이라도 받을 수 있으니 다행인 경우다. 당시 조선은 학교교육을 받지 못해 일본어는 물론이고 한글조차 못 배운 사람이 대다수였다. 그렇다 보니 자신이 홋카이도에 있었는지, 규슈에 있었는지, 언제부터 언제까지 강제노동을 했는지를 전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소송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상을 받을 수 없다. 어찌 보면 가장 큰 피해자일 수 있는 사람들이 재판 시도조차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피해까지 다 고려해 구제하려면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한·일 관계 미래에 대해 한 말씀 하신다면. -일본에는 정치인이나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한국의 3·1 운동 100주년 기념을 통해 일본에 대한 반감과 반일 행동이 강화될 것으로 우려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보다 3·1 운동은 동아시아의 평화를 응원하고 한국인들 스스로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벌인 독립운동이라는 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일본의 중년 이후 세대에게 한국은 경제적으로 낙후되고 오랫동안 군사독재가 지배했던 나라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젊은 세대에게 한국은 경제적으로 잘사는 민주주의 국가로서 이미지가 강하다. 이는 미래 한·일 관계에 희망을 주는 부분이다. 글 사진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도노무라 교수는 누구 1966년 일본 홋카이도 출생. 와세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와세다대 사회과학연구소,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등을 거쳐 2007년부터 도쿄대 대학원 종합문화연구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공은 일본근대사. 주요 저서와 논문으로 ‘재일조선인 사회의 역사학적 연구’(2010년 국내번역), ‘식민지 시기에 있어서 재일조선인의 문화활동’ 등이 있다.
  • 보훈처, 국가 유공자 명패 사업 본격 추진

    국가보훈처는 24일 올해 3·1 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임우철 애국지사를 시작으로 ‘국가유공자 명패 달아 드리기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고 밝혔다. 보훈처는 “피우진 보훈처장이 25일 서울 동작구에 위치한 독립유공자 임우철 애국지사 자택을 방문해 새해 첫 ‘독립유공자 명패’를 직접 달아 드리는 행사를 가질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임 애국지사는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공옥사고등학교 토목과 재학 중 동급생과 함께 내선일체(일제가 전쟁협력 강화를 위해 취한 정책)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궁성요배(식민지 주민들이 도쿄 궁성을 향해 절하던 예법)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등 민족의식을 드높이는 활동을 했다. 임 애국지사는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활동하던 중 1942년 12월 일제로부터 체포돼 치안유지법 위반과 불경죄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임 애국지사는 이 같은 공적으로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지방자치단체와 협업을 통해 추진될 예정인 국가유공자 명패 달아드리기 사업은 이달부터 독립유공자 7697명, 4월부터는 민주유공자 2266명, 6월부터 국가유공자 20만 5820명 등을 대상으로 단계적으로 확대 실시할 계획이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이탈리아 부총리 “프랑스가 아프리카를 망쳐 이민 쏟아지는 거야”

    이탈리아 부총리 “프랑스가 아프리카를 망쳐 이민 쏟아지는 거야”

    역사적으로 옳은 말이긴 하다. 루이지 디 마이오 이탈리아 부총리는 지중해를 건너던 난민선 두 척이 침몰하는 바람에 170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우려되는 참변이 발생한 데 대해 지난 20일(현지시간) “유럽연합(EU)은 프랑스와 아프리카를 가난하게 만들어 사람들이 떠나게 만든 나라들을 제재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프리카인은 지중해 바닥이 아니라 아프리카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프랑스는 아프리카 국가들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노력을 결코 멈추지 않아 이런 정책들 때문에 유럽으로의 이민을 촉발했으니 제재하는 게 마땅하다는 논리였다.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과거에도 이민 문제로 여러 차례 충돌한 경험이 있다. 이탈리아는 아프리카나 중동 이민 희망자들이 유럽으로 유입하는 관문 역할을 해왔다. 지난해 프랑스는 지중해를 건너는 난민 보트가 난파했을 때 구조선을 띄우지 않은 이탈리아를 비인도적이라고 비난했고, 이탈리아 관료들은 프랑스는 이민을 받아들이길 거부하면서 웬 위선을 떠느냐고 공박했다. 극우 정당들의 결사체인 ‘파이브스타 무브먼트(M5S)’의 대표인 디마이오 부총리는 “만약 오늘날 사람들이 떠난다면 유럽국가들, 그중에서도 프랑스가 으뜸으로 아프리카 나라 수십 곳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라며 아프리카가 없었더라면 프랑스의 국가경제 규모는 선진 6개국이 아니라 세계 15위에 그쳤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따라 프랑스 외교부는 이날 테레사 카스탈도 프랑스 주재 이탈리아 대사를 파리 청사로 초치했다. 프랑스 외교부 소식통은 디 마이오의 언급이 “적대적이며 명분 없이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EU 협력을 해친다”고 밝혔다고 이탈리아 ANSA 통신이 전했다. 디 마이오 부총리의 말은 일정 부분 진실이긴 하지만 사실 이탈리아 역시 무솔리니 정권이 아프리카를 독일과 나눠 점령하기 위해 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었다가 패망했던 진실 일부를 가리고 있긴 하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법원, 日후지코시 근로정신대·강제징용 피해자도 배상 책임 인정

    법원, 日후지코시 근로정신대·강제징용 피해자도 배상 책임 인정

    1940년대 일본 군수기업인 후지코시에 강제동원됐던 근로정신대 피해자들도 회사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다는 법원 판단을 받았다. 이들은 앞서 1심에서도 승소해 후지코시 측에서 항소했지만 법원은 항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울고법 민사12부(부장 임성근)는 18일 근로정신대·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 등 27명이 일본 후지코시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피해자 1명당 8000만~1억원을 배상하라”는 1심 판결을 그대로 유지했다. 1928년 설립된 후지코시는 태평양 전쟁 당시 12~18세 소녀들 1000여명을 끌고가 일본 도야마 공장에서 데려가 혹독한 노동을 시켰다. 피해자들은 1~2달 군대식 훈련을 받은 뒤 군함이나 전투기 부품을 만드는 작업에 투입돼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10~12시간의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피해자들은 2003년 후지코시를 상대로 도야마 지방재판소에 손해배상 소송을 냈지만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한국인 개인의 청구권은 포기됐다”며 패소했고, 2011년 일본 최고재판소도 이들의 상고를 기각했다. 그러나 2012년 5월 대법원이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과 미쓰비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의 불법행위에 대한 개인 청구권이 소멸됐다고 볼 수 없고, 불법 식민지배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 법원의 판결은 국내에서 효력이 인정될 수 없다고 결론냈다. 이에 따라 후지코시 징용 피해자인 김계순(90) 할머니 등 17명은 “일본 전범기업이 대한민국 국민을 강제동원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피해자들의 행복추구권과 생존권, 신체의 자유, 인격권 등을 침해했다”며 국내 법원에 2013년 2월 소송을 냈다. 2014년 10월 1심은 “피해자들에게 “1인당 8000만~1억원씩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 이후 후지코시 측이 항소해 그해 12월 서울고법으로 사건이 접수됐지만 지난해 12월 마지막 재판이 열리기까지 4년 동안 사건이 진행되지 못했다. 지난해 사법농단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 결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부가 박근혜 정부와 강제징용 사건을 두고 재판거래를 했다는 의혹이 드러나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신일철주금(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을 다시 들어주면서 멈췄던 재판이 재개됐고, 후지코시 강제동원 피해자들도 4년여 만에 다시 승소 판결을 받아들었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김규환 기자의 차이나 스코프] “남중국해 군사기지화는 불법”… 中에 맞짱 뜨는 베트남

    [김규환 기자의 차이나 스코프] “남중국해 군사기지화는 불법”… 中에 맞짱 뜨는 베트남

    베트남이 남중국해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는 중국과 맞짱을 뜰 기세다. 중국 측의 남중국해 군사기지 폐쇄와 미사일 등 전략자산 배치의 즉각적인 철회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로이터통신은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의 남중국해 ‘우발 충돌방지를 위한 행동준칙’(COC) 협상 초안을 단독 입수해 분석한 결과 베트남이 중국의 남중국해 군사기지 폐쇄와 미사일 등 전략무기 배치 철회를 주장하고 있다고 최근 보도했다. 그러면서 “베트남은 남중국해 인공섬 건설과 해상 봉쇄, 미사일 발사대 등 공격형 무기 배치 등 분쟁 수역에서 지난 몇 년간 중국이 취한 조치들을 불법으로 간주하는 협정(남중국해 COC 협정)을 원한다”고 전했다. 로이터는 이어 “베트남은 중국이 일방적으로 선포한 남중국해 방공식별구역(ADIZ)도 폐지해야 한다는 내용도 초안에 담았다”고 덧붙였다.‘COC’(Code of Conduct)는 중국과 아세안이 2002년 채택한 ‘남중국해 분쟁당사국 행동선언’(DOC)의 후속 조치에 해당한다. 분쟁 당사국 간 우발적인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구체적 지침을 담을 예정이다. 중국과 아세안은 2017년 8월 외무장관회의에서 COC 협상 초안을 채택하고 지난해 3월부터 협상에 본격 착수했다. 아세안 의장국인 태국은 올해 안에 COC 타결을 주요 추진 목표로 제시했다. 베트남은 모든 분쟁 당사국이 핵심 무역항로에서 국제법에 따라 영유권 주장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남중국해 90%의 영유권을 주장해 온 중국이 근거로 제시한 이른바 ‘남해 9단선’을 무력화하기 위한 조치라는 관측이다. 베트남이 대중 강경노선을 표방하면서 올해 타결을 목표로 추진 중인 아세안과 중국의 남중국해 COC 협상은 난항을 겪을 전망이다. 싱가포르 ISEAS 유소프 이샥 연구소의 남중국해 전문가 이언 스토리 시니어 펠로는 “베트남은 중국이 지난 10년간 (남중국해에서) 해 온 일들을 금지하는 내용을 COC 협정에 담으려 한다”며 “따라서 이를 둘러싸고 베트남과 중국 사이에 매우 짜증스러운 언쟁이 예상된다”고 내다봤다. 남중국해는 중국과 베트남, 필리핀, 말레이시아, 브루나이가 맞닿아 있는 해역이다. 서태평양과 인도양, 중동을 연결하는 해상 물류 중심지이자 자원의 보고이기도 하다. 세계 해양 물류의 25%, 원유 수송량의 70%가 이곳을 통과한다. 금액으로는 한 해 5조 3000억 달러(약 5974조원)에 이른다. 석유 매장량은 최소 110억 배럴, 천연가스는 190조 ft3로 추정된다. 중국은 남중국해 주변을 따라 U자 형태로 9개 선(구단선)을 그어 90%를 자국 영해라고 주장하며 베트남과 필리핀,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등과 첨예한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다. 특히 중국은 스프래틀리제도(중국명 난사군도, 베트남명 쯔엉사군도, 필리핀명 칼라얀군도)와 파라셀제도(중국명 시사군도, 베트남명 호앙사군도) 등에 인공섬을 잇따라 건설해 활주로와 항공기 격납고 등을 구축하고 지대공미사일과 발사 차량, 레이더 등을 배치하는 등 군사기지화해 역내에 긴장을 고조시켰다.베트남은 특히 과거 자국이 관할하던 스프래틀리제도와 파라셀제도가 1974년과 1988년에 중국에 각각 강제로 점령당한 ‘아픔’을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다. 2016년 7월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필리핀 정부가 남중국해 대부분에 대한 중국의 영유권 주장이 법적 근거가 없다는 승소 판결을 이끌어냈지만, 중국은 이를 무시한 채 일방적인 영유권 주장을 하고 있다. 중국은 한발 더 나가 2013년 일방적으로 남중국해에 방공식별구역(ADIZ)을 선포하고 이곳을 지나는 모든 항공기는 자국에 식별 신호를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주변국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은 베트남의 도발이 곤혹스럽기만 하다. 힘 자랑을 하려던 중국이 베트남 공격에 나섰으나 번번이 패퇴하는 바람에 ‘트라우마’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1979년 미국과 중국이 정식 수교한 이후 중국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그해 1월 29~2월 5일 워싱턴을 방문한 덩샤오핑(鄧小平)이 지미 카터 미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애송이가 말을 안 듣는다. 엉덩이를 때려 줘야겠다.”(小朋友不聽話 該打打股了) 불과 한 달여 전인 1978년 12월 25일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한 사실을 두고 한 말이었다. 베트남군은 당시 캄보디아 국경을 넘어 1979년 1월 7일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을 함락시키고 중국이 지원하는 크메르루주 지도부는 국외로 탈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중국군 6만여명이 1979년 2월 17일 전격적으로 베트남을 침공했다. 베트남이 국민 총동원령으로 맞섰다. 주력군이 캄보디아 쪽에 배치돼 있어 민병대와 여성들이 전투에 앞장섰다. 중국군은 20만명까지 병력을 늘렸지만 졸전 끝에 2만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한 달 만에 퇴각했다. ‘말 안 듣는 애송이’를 손봐 주겠다던 덩샤오핑은 머쓱해졌다. 190년 전인 청(淸)나라 때도 마찬가지다. 건륭제(乾隆帝)는 베트남 왕이 황제를 칭하자 20만 대군을 보내 베트남을 침공했다. 베트남군은 수륙 양면작전으로 맞섰다. 10만 군사와 전투용 코끼리 100마리를 앞세워 기습작전을 펼쳤다. 청군은 궤멸하고 건륭제는 망신만 톡톡히 당했다. 송(宋)나라와 원(元)나라도 베트남을 침략했다가 쓴맛을 보고 돌아서야 했다. 베트남은 939년 중국 대륙이 5대10국의 혼란기에 접어든 틈을 타 독립한 이후 명(明)나라 때 일시적으로 식민지가 됐던 20년간을 빼고는 1884년 프랑스 식민지가 될 때까지 줄곧 독립을 지켰다. 독립 이후 중국 역대 왕조와 여러 번 전쟁을 치렀지만 그때마다 승리했다. 민족적 자부심이 유난히 강한 이유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을 제외하고 남의 지배를 거의 받지 않았다는 것이 베트남 힘의 원천인 셈이다. 때문에 남중국해의 스프래틀리제도와 파라셀제도를 놓고 중국과 영유권 분쟁을 벌일 때마다 전 국민이 똘똘 뭉친다. 2011년 5월 중국 해군이 베트남 석유·가스 탐사선의 해저 케이블을 끊었을 때 베트남 전역이 반중(反中)시위로 들끓었다. 군부는 “중국이 파라셀제도를 점령하면 우리는 육로로 공격하겠다”고 엄포를 놓으며 분위기를 격앙시켰다. 2014년 5월 중국의 석유시추 장비 설치에 항의하던 베트남군이 다치고 어선이 파손됐을 때도 벌떼같이 들고일어났다. 중국인 소유 공장들이 잿더미로 변하고 화교들은 탈출했고 결국 중국 해군은 철수해야 했다. 지난해 6월에도 베트남 정부가 추진한 경제특구 조성 관련 법안에 외국인 투자자에게 최장 99년간 토지 임대를 허용하는 조항이 들어간 데 대한 항의로 반중시위가 벌어졌다. 일부 시민들은 이 같은 조항이 중국에 특혜를 제공해 자국의 땅을 팔아넘기고 결과적으로 국가 안보가 위협받을 수 있다고 반발한 것이다. 현행법상 다른 지역의 외국인 투자자에게는 최장 70년간 토지를 임대할 수 있다. 베트남 정부의 강경 진압에도 고속도로 점거 및 차량 방화로 비화됐다. 시위대는 해산을 시도하는 경찰에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반중시위는 수도 하노이시, 남부 경제 중심지 호찌민시를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벌어졌다. 반중 정서에 밀린 베트남 정부는 급기야 경제특구 관련 법안 처리를 연기하고 토지임대 조항을 빼기로 했다. 지난해 사태의 기저에는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치열하게 벌이는 영유권 분쟁 등의 이유로 베트남 사회 저변에 짙은 반중 감정이 깔렸기 때문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중국은 당당히 맞짱 뜨는 베트남을 절대로 가볍게 볼 수 없는 것이다. khkim@seoul.co.kr ■이 기사는 서울신문 인터넷 홈페이지에 연재 중인 ‘김규환 기자의 차이나 스코프’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김규환 기자의 차이나 스코프’(goo.gl/sdFgOq)의 전문을 만날 수 있습니다.
  • [황성기 칼럼] 한·일은 파탄을 두려워 말라

    [황성기 칼럼] 한·일은 파탄을 두려워 말라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2008년 금융위기 때 얘기다. 위기의 불똥이 독감 백신 원료를 일본에서 수입하던 국내 업체에까지 튀었다. 2007년 100엔에 700원대이던 엔·원 환율이 그해 연말 사상 최고치인 1600원대까지 치솟은 것이다. 일본에 지불해야 할 대금이 두 배 가까이 늘어난 업체 대표는 발만 동동 굴렸다. 수입을 줄이면 되지만,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에서 독감 백신 대란이 일어날 것은 불 보듯 했다. 결국 대표는 일본으로 달려갔다. 사정을 털어놓자 백신 원료를 공급해 주던 일본 업체는 흔쾌히 가격을 깎아 줬다. 당시 일본에는 독감 백신을 제조하는 업체가 6곳 있었다. 5곳이 일본 국내 공급을 전담하고 1곳만이 한국 등에 원료를 공급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 업체는 거래처인 한국 업체와의 수십년 신의를 고려해 값을 내려 주고, 원료 공급에도 차질이 없도록 해 줬다. 백신 원료를 전량 수입하던 시절이다. 대표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지금도 제약업계에서는 한·일 간의 정치적 위기에도 상관없이 상생하는 일들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과 일본의 갈등이 최고조로 치닫고 있다. 아베 신조 총리의 “한국 대법원 징용 판결은 국제법 위반” 발언(1월 1일)에 외교부가 유감을 표명하고, 문재인 대통령의 “일본 정부는 좀더 겸허해져야” 언급(1월 10일)에 외무성 부대신이 “심히 유감”이라고 되쳤다. 양국 정상의 발언에 대해 외교 당국자가 신경질적으로 일일이 대응하는 것은 근래에 드문 일이다. 서로 대포만 안 쐈지 ‘할 테면 해봐라’ 식의 전쟁 일보 직전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지난해 10월 강제징용 판결이 지금 한·일 위기를 불렀지만, 뿌리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 있다. 1951년부터 시작된 한·일의 국교정상화 협상은 근본적인 문제는 외면한 채 정치 타결로 끝났다. 일제 식민지배가 합법(일본)이냐 불법(한국)이냐를 협정에 분명히 하지 못했다. 한국이 첫 회담부터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제기하자 일본이 맹반발하고 미국이 얼른 개입해 봉인해 버렸다. 외과 수술로 치면 몸 안에 메스를 놔두고 봉합한 것이다. 한·일의 지난 54년은 청구권협정이란 부실한 불쏘시개로 일제 강점이란 역사 문제를 강제 소각시키려 한 과정이었다.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한 대법원 판결이 보여 주듯 결코 태울 수 없는 불완전 연소였는데도 말이다. 한·일이 식민지배의 불법·합법성, 개인청구권의 소멸 여부를 명명백백 가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 타지 못한 역사 문제로 언제든 불타오를 수 있다. 한·일이 65년 이전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고 그래서 파국을 맞을 수도 있지만, 각오를 해야 한다. 일본은 링에 올라와 있다. 법원이 배상판결의 강제집행 신청을 받아들이자 분쟁 상태라 보고 국제사법재판소(ICJ)에 끌고 가기 위한 전 단계로 우리 측에 외교 협의를 요청했다. 우리는 총리실 주도로 관계 부처 대책을 짜고 있다고 하나 두 달 넘게 감감무소식이다. 한국 정부 책임하의 징용 피해자 보상, ICJ 회부 등의 아이디어가 나오고 있으나 이참에 협정의 근본을 따져 화근을 남기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 양국의 포털 사이트를 보면 반일에 비해 반한·혐한 보도가 압도적으로 많은 데 놀란다. 2000년대까지 한국의 반일 보도가 양적에서 우세했으나 지금은 한국은 무관심에 가깝고 일본 혼자서 지글지글 들끓는다. 2002년 김정일·고이즈미 평양 정상회담 이후 일본에 불어닥친 ‘북한 때리기’가 십수년 지나 ‘남한 때리기’로 바뀐 느낌이다. 한국에 대한 혐오와 증오가 증식되는 게 남의 나라 일이라고 방치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1000만명이 왕래하고 물건, 돈이 자유롭게 오가는 21세기에 외교 대립이 뭔 대수냐 할 수 있다. 그러나 양국의 정치 갈등이 앞서 든 제약회사 사례와 같은 풀뿌리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옳지 않다. 파탄과 관계 회복의 갈림길에 왔다. 단기처방, 백약이 무효한 시대다. 파탄을 두려워 말고 한·일이 끝까지 싸워 보기를 권한다. 파탄 뒤의 후유증이 두렵거나 역사에 오명을 남길 것 같다면 두 지도자가 무릎을 맞대는 길밖에 없다. 문 대통령이나 아베 총리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서울 답방, 북·일 정상회담에 관심이 팔려 있다. 현해탄을 끼고 번지는 가까운 불부터 끄는 게 순서다. 정상의 셔틀외교가 7년간 중단된 지금의 한·일은 정상이 아니다.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