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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언론들 ‘윤미향 기소’ 대서특필…요미우리 “文정부 타격”

    日언론들 ‘윤미향 기소’ 대서특필…요미우리 “文정부 타격”

    위안부 피해자 지원 활동의 중심에 서 있었던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4일 각종 부정·비리 의혹으로 기소되자 일본 언론들은 이 사실을 상세히 보도하며 높은 관심을 보였다. 한일 갈등과 과거사 문제에서 일본 정부와 마찬가지로 강경한 입장을 보여온 보수 언론은 이번 일이 문재인 정부에 큰 타격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요미우리신문은 15일자 8면 톱기사에서 “위안부 지원단체 정의기억연대(옛 정대협)의 기부금 유용 의혹과 관련해 한국 검찰이 14일 이 단체의 전 이사장 윤미향 의원을 사기와 업무상 횡령 등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며 “지난 5월 의혹이 불거진 이후에도 윤 의원을 계속 감싸온 문재인 정권과 여당이 큰 타격을 입게 됐다”고 보도했다. 요미우리는 “정의연은 위안부 출신자들의 생활지원과 홍보활동 등을 벌이는 단체로, 윤 의원은 2005년부터 약 15년간 대표를 맡는 등 지원의 상징적 존재였다”고 소개했다. 이어 “윤 의원은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된다고 규정한 2015년 일한(한일) 합의에 강하게 반대하는 등 한국 정부의 위안부를 둘러싼 대일 정책에 깊이 관여해 왔기 때문에 향후 활동에 대한 영향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또다른 위안부 지원단체 ‘나눔의집’도 지난달 민관 합동조사에서 2015년 이후 5년간 대부분의 기부금을 부정하게 유용한 것으로 드러나는 등 잇단 금전 스캔들이 위안부 지원단체 활동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다”고 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도 이날 “정의연, 나눔의집 등 일련의 의혹의 배경에는 일본 식민지배하에서 일어난 역사 문제의 ‘피해자’나 이를 지원하는 시민단체가 한국 사회에서 성역시됐던 적이 있기 때문”이라며 “활동에 대한 일체의 비판이 허용되지 않으면서 이들은 정치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고 주장했다. 니혼게이자이는 또 “정의연은 진보정당의 유력한 지지단체로 한국 정부와 서울시에서 거액의 보조금을 받아 왔으나 위안부 출신 생존자가 줄어들면서 ‘단체의 존속 자체가 목적이 되고 있다‘는 주장이 적지 않은 상황”이라며 “정의연을 상대로 한 기부금 반환소송이 제기되는 등 한국 내에서도 이들의 활동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비극의 역사 ‘귀무덤’… 일본인도 왜군 만행 알아야”

    “비극의 역사 ‘귀무덤’… 일본인도 왜군 만행 알아야”

    과거사에 대한 일본 정부의 진정성 있는 사과를 촉구해 온 전직 일본 외교관이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조선 침략 만행을 다룬 책을 일본어로 펴낸다. 아마키 나오토(73) 전 레바논 주재 일본대사는 10일 임진왜란 만행의 결과로 생겨난 ‘귀무덤’을 주제로 ‘기린이여 오라’라는 제목의 일본어 서적을 출간한다. 기린은 평화 시대를 상징하는 상상 속 동물이다. 김문길(75) 부산외국어대 명예교수의 귀무덤 연구성과를 중심으로 일본인 독자에 맞춰 내용을 편집했다. 귀무덤은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왜군이 조선인의 귀나 코를 베어와 묻어놓은 곳으로 일본에 5곳이 있다. 가장 큰 교토의 무덤에는 조선인 12만 6000여명의 귀와 코가 묻혀 있다. 아마키 전 대사는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당시 왜군이 저지른 만행을 대부분 일본인이 모른다”며 “과거에 대한 일본의 사과와 미래를 위한 한일 협력의 계기를 만들기 위해 책을 펴내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퇴임과 관련해 “이번 기회에 한일 관계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으며, 그 원점은 올바른 역사인식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근대화 이후의 조선 등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등에 대해 일본 정부가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2015년 일본의 군대 보유와 교전권을 부정하는 ‘헌법 9조’를 수호하자는 뜻에서 이를 당명으로 하는 인터넷 정당을 창당하기도 했다. 2003년 주레바논 대사 재직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에게 미국이 주도하는 이라크 전쟁에 관여하면 안 된다는 의견을 제시한 것이 문제가 돼 외무성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장교가 ”다 쏴“ 지시”…미얀마군, 로힝야족 학살 최초 증언 영상 나왔다

    “장교가 ”다 쏴“ 지시”…미얀마군, 로힝야족 학살 최초 증언 영상 나왔다

    2017년 미얀마 정부군이 저지른 이슬람 소수민족 로힝야족 대학살 당시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다 쏴라”는 장교 상관들의 명령을 이행했다는 탈영 군인 2명의 영상 증언이 처음으로 나왔다. 8일(현지시간) AP·뉴욕타임스(NYT)는 인권단체 ‘포티파이 라이츠’가 해당 영상 증언을 확보했으며, 이는 미얀마 정부군이 벌인 대학살에 직접 참여한 군인들의 최초 공개 고백이라고 전했다. 대량학살과 강간, 방화가 자행됐다는 증언이 로힝야 난민 피해자가 아닌 가해 당사자의 입에서 직접 나온 셈이다. 탈영한 이등병인 묘 윈 툰은 영상에서 “당시 학살에 가담해 희생자들을 감방탐과 군사기지 인근 집단 무덤에 매장했다“고 말했다. 역시 이등병인 자우 나잉 툰은 “동일한 시기에 ‘아이나 어른이나 눈에 보이는 대로 죽여라’는 상관 명령을 따랐다”며 “약 20개 마을을 소탕했다”고 진술했다. 이들이 작전에 참여한 지역은 방글라데시와 인접한 미얀마 서부 타웅바자르 지역의 마을이다. 군인들의 증언은 방글라데시에 은신 중인 로힝야 난민들에게서 제기된 인권유린의 구체적인 주장과 일치한다고 NYT는 전했다. 두 군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들이 저지른 대규모 학살과 방화, 강간을 증언했다고 이 신문은 덧붙였다.다수의 현지 마을 사람들은 이들이 증언에서 제공한 집단묘지의 행방을 확인했지만, 미얀마 정부는 학살지 대부분이 불태워진 이유로 학살 사실 자체를 거듭 부인해 왔다. 이 영상은 반군 민병대가 녹화한 것으로, 두 사람은 지난달 미얀마를 탈출해 7일 국제형사재판소(ICC)가 있는 네덜란드 헤이그로 이송됐다. 이들은 구류상태에 들어갔고, 향후 법정에서 증언을 하거나 증인 보호에 들어갈 수 있다. ICC는 현지 군인과 지도자들, 미얀마 정치인들이 로힝야족 대량 학살에 관여했는지 여부를 심사하는 소송을 시작했다. 앞서 아프리카국 감비아가 지난해 ICC에 미얀마를 인종 말살 혐의로 제소한 상태다. 미얀마 독립 직후부터 시작된 정부군의 로힝야족 학살은 2017년 서부 리카인주에 거주하던 무국적 난민들을 화염방사기 등 무력으로 공격하며 극에 이르렀다. 당시 목격자와 생존자들은 “노인들은 목이 잘렸고 어린 소녀들은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2017년 8월부터 한 달 사이 어린이 730명을 포함, 최소 6700명의 로힝야족이 숨졌다고 추정했다. 유엔은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약 200개의 로힝야 정착촌이 완전히 파괴됐다고 밝혔다. 유엔 인권이사회 진상조사단은 지난해 보고서에서 “미얀마에서 대량학살 행위가 발생하거나 재발할 우려가 있으며, 이를 방지·조사하고 효과적인 법률을 제정해 집단학살을 처벌할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는 심각한 위험이 있다”고 밝혔다. 미얀마의 실권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은 지난해 12월 대량학살 혐의에 대해 군부를 지지하고 정부의 박해 행위를 비난하지 않는 등 수수방관하고 있다는 국제사회의 비난도 받고 있다. 미얀마와 로힝야족의 갈등 관계는 역사적으로 복잡다단한 측면이 있다. 미얀마 및 방글라데시에 걸쳐 거주해 온 로힝야족은 불교국인 미얀마의 영국 식민지배 당시 민족분리정책으로 주요 민족인 버마 민족을 통치하는 제2지배계급 노릇을 하며 버마족과는 앙숙이 됐다. 영국에 이어 일본이 식민 통치할 때도 일본에 협조하는 등 버마족 입장에서는 ‘앞잡이’ 노릇을 했다. 미얀마는 1947년 독립 이후 조직적으로 로힝야족 탄압에 나섰고, 2017년 대대적 토벌로 70만명 이상이 국경을 넘어 방글라데시로 도피했다. 그러나 100만명까지 늘어난 방글라데시 난민촌이 로힝야족은 올해 코로나19로 인해 또다시 보트 피플이 되어 떠도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홍성룡 서울시의원, 서울시교육청 일본 제국주의 상징물 사용 제한 조례 제정

    홍성룡 서울시의원, 서울시교육청 일본 제국주의 상징물 사용 제한 조례 제정

    서울시의회 홍성룡 의원(더불어민주당·송파3)이 대표발의 한 ‘서울특별시교육청 일본 제국주의 상징물의 사용 제한에 관한 조례안’이 8일 열린 제296회 폐회 중 제2차 교육위원회 회의에서 원안 가결됐다. 조례안은 오는 15일 예정된 본회의를 통과하면 공포 즉시 시행될 예정이다. 조례에서 규정한 ‘일본 제국주의 상징물’은 일본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군사기와 조형물 또는 이를 연상시키려는 목적으로 사용된 그 밖의 상징물이다. 조례가 시행되면 서울시교육청 본청·직속기관·교육지원청·교육감 소관 각급 학교 등에서 이러한 일본 제국주의 상징물 사용이 제한된다. 교육감은 조례에 따라 일본 제국주의 상징물 사용현황 등에 대한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사용을 지양하는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도록 구성원을 대상으로 필요한 교육을 실시하여야 한다. 홍 의원은 “2020도쿄올림픽·패럴림픽 조직위원회가 욱일기와 욱일기를 표현한 유니폼 사용을 사실상 허용하는 등 일본은 일제강점기 식민지배와 위안부, 강제징용 등 침탈행위에 대한 진정한 사과와 배상은커녕 반인륜적 과거사를 상품화 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라고 지적하고,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우리 청소년들이 일본 제국주의 상징물이 디자인된 옷이나 기념품 등을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어 올바른 역사교육에 대한 중요성이 한층 강조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홍 의원은 이어 “올바른 역사를 가르쳐야 할 공교육의 현장에 일본 제국주의 식민사관과 일제 잔재가 버젓이 방치되고 있는 상황을 계속 두고만 볼 수 없다”라며, “본 조례가 단편적·1회성 교육에서 벗어나 일본의 왜곡된 식민사관에 대한 지속적인 교육을 실시할 제도적 뒷받침이 되어 미래의 주인공인 청소년들이 올바른 역사관을 갖는데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라고 전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강희정의 아시아의 美] 우리도 그들처럼: 황금빛 교역의 시대

    [강희정의 아시아의 美] 우리도 그들처럼: 황금빛 교역의 시대

    임진왜란 약 50년 전인 1543년 포르투갈 배 한 척이 폭풍을 만나 일본 규슈 남쪽 다네가시마라는 섬에 표류했다. 이 배에서 처음 구한 철포 2정이 훗날 조총의 원형이 된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서양 문물에 눈을 떴고, 활발하게 교역을 했다. 대항해시대의 선두주자였던 포르투갈은 1510년에 이미 인도 고아를 점령했다. 포르투갈의 뒤를 이어 스페인, 네덜란드가 적극적으로 일본과의 교역을 텄다. 특히 네덜란드는 임진왜란 이후 에도 막부시대를 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쇄국정책으로 인해 일본과 교역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가 됐다. 일본은 네덜란드라는 창구를 통해 서구의 학문·사상을 접했고, 이를 난학(蘭學)이라 통칭했다. ‘난’은 네덜란드를 뜻한다.일본은 이때 접한 서양인들을 남만이라 불렀다. 그들이 실제 일본의 남쪽에서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서양의 등장은 막을 수 없는 물길 같은 것이었고, 그 영향을 보여 주는 16~17세기의 특정한 미술을 남만미술이라 불렀다. 그중 난반뵤부(南蠻屛風)는 이 시대를 잘 보여 주는 그림으로 현재 약 90점 이상이 남아 있다. 난반뵤부에는 보통 항구에 들어온 서양인 상인과 가톨릭 선교단, 그들의 배와 이를 보는 일본인이 그려졌다. 병풍마다 그림의 세부와 필선, 채색은 달라도 전반적인 구성은 대체로 이와 같다. 16세기 일본인의 눈에 비친 서양 사람, 서양의 문물은 어떤 모습이었고, 어떤 인상을 주었을까? 일본인들에 비하면 서양인들은 키가 훌쩍 크고, 신분에 따라 다른 옷을 입은 모습이다. 성장(盛裝)을 한 원정단, 혹은 상단의 우두머리는 발목에서 잘록하게 묶은 긴 바지, 혹은 무릎까지 오는 바지를 입었고, 붉은색이나 검은색 스타킹을 신었다. 같은 시대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의 초상화 속 인물과 다르지 않다. 일본의 화가가 실제 인물들을 눈여겨보았던 모양이다. 바지가 보이지 않는 길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예수회 선교단이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식민지 개척길에 선교단을 앞세운 것도 다시 확인된다. 그림에는 검은 피부의 노예로 보이는 인물이 적지 않은데 그중 일부는 터번을 쓰고 있다. 이들은 포르투갈이 점령했던 아프리카 사람일 수도 있고, 인도나 동남아 사람일 수도 있다. 돈과 노동력이 되는 사람을 사고파는 일이니 지역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12폭으로 이뤄진 ‘난반뵤부’(남만인도래도)는 가노 나이젠(1570~1616)의 1598년 작이다. 중앙에 큰 돛이 달린 장대한 두 척의 배를 두고 양옆으로 왁자지껄한 항구 풍경을 그렸다. 배는 갤리온 무역선으로 보인다. 배를 보고 환호하는 사람들과 상인들에게 달려가는 개, 코끼리를 타고 가는 서양인, 실어 간 물건을 열어 보는 사람도 보인다. 이 병풍은 화려한 금박지에 두껍게 색을 입힌 금벽화(金碧畵)다. 난반뵤부는 일본 전통의 금벽화에 서양 화법을 가미해 서구 문물에 관한 일본의 호기심을 드러낸다. 금벽화는 에도 막부시대에 쇼군이나 다이묘 등 집권층의 성과 궁전을 장식하기 위해 그려졌다. 애초에 권력자들의 위세를 과시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만큼 그림도 크고 강한 인상을 준다. 활발한 동서 교역이 부를 가져다준다고 믿었기 때문에 난반뵤부는 상인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세계가 빗장을 걸고, 지속적인 거리두기로 경제적·심리적 타격이 이어지는 나날이다. 하루속히 이 그림처럼 활기차고 역동적인 날이 다시 오기를 희망한다.
  • “나는 삼한의 원수를 갚았노라”… 대만서 떨친 23세 청년의 항일투쟁

    “나는 삼한의 원수를 갚았노라”… 대만서 떨친 23세 청년의 항일투쟁

    황해도서 태어나 공직생활 접고 일본행日서 차별·멸시 겪으며 항일 의지 다져1년 남짓 日 생활 이후 대만서 점원 취업 타이중 방문 日 육군대장에게 단도 던져일제, 사건 의미 축소 위해 보도 통제도속전속결식 재판 끝에 사형장에서 순국 “나는 삼한(三韓)의 원수를 갚았노라. 죽음의 이 순간을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다만 조국 광복을 못 본 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은 계속하리라.”(조명하 의사가 대만 타이베이의 일제 처형장에서 순국 직전 남긴 유언) 조명하. 이역만리 대만에서 일왕의 장인이자 육군대장을 척살(刺殺)하려 했던 독립운동가다. 그러나 생소한 이름이다. 평범한 청년이 오직 자신의 의지만으로 단독 거사를 감행했다는 점에서 사이토 조선 총독을 죽이려 했던 송학선 의사와 똑 닮았다. 당시 대만은 조선처럼 일제의 지배를 받았다.조 의사(義士)는 1905년 4월 4일 황해도 송화군 하리면 장천리 310에서 부친 조용우와 모친 배장년의 4남 1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함안인데 강직한 성품으로 때로는 고집불통이라는 평판을 듣는 가풍이었다고 한다. 8대조인 조형은 광해군 때 무과에 급제했지만 벼슬을 거부하다 인조반정 이후에야 장수가 돼 병자호란 때 수많은 적을 물리쳤다.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의사의 부친 조용우는 아들이 사형을 당하자 “사나이 대장부가 마땅히 할 일을 하고 죽었다”며 슬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부친 “대장부가 마땅히 할 일을 하고 죽었다” 이런 가문에서 자란 의사는 비록 가난했지만 성품이 강직하고 의협심이 강했다. 보통학교라도 아무나 다니기 어려웠던 시절에 송화보통학교에 들어가 1920년 졸업한 의사는 1924년 송화읍의 친척이 운영하는 한약방에서 한약 조제와 처방법을 익혔다. 여기서 나중에 척살에 사용하는 독극물 제조법을 습득한 것으로 보인다(독검 사용에는 논란이 있다). 1925년 의사는 오금전 여사와 결혼해 아들을 낳았는데 유일한 핏줄인 조혁래다. 의사는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고자 황해도 신천군청 지방서기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의사가 공직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순종의 승하와 6·10만세운동으로 일제에 저항하는 외침이 온 나라를 뒤덮을 때였다.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의사는 6개월 만에 서기직을 버리고 갓 태어난 외아들과 아내는 남겨둔 채 일본이라는 또 다른 세상으로 나아갔다. 의사의 일본행이 거사 계획을 염두에 둔 일이었는지는 확인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부인 오씨는 1987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떤 계획도 말하지 않아 공연히 눈치만 볼 뿐이었다. 그도 한 인간이었기에 부모에 대한 효성과 앞으로 태어날 자식에 대한 애착이 없을 리 없다. 그러나 그의 굳은 뜻은 아무도 가로막지 못하였다. 결심의 그날은 자꾸만 가까웠다.” 1926년 9월 의사는 가족도 모르게 일본행 배에 올랐다. 의사는 오사카에 도착해 건전지 공장과 속옷 공장에서 잡역부로 일하고 야간에는 상공학교와 상공전수학교에 다니며 주경야독했다. 일본어에 능통했던 의사는 일본인 행세를 하는 게 취업과 학업에 유리하다고 판단했는지 명하풍웅(明河豊雄)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했다. 일본으로 간 목적이 곧 독립운동의 준비가 아니라 단순히 견문을 넓히고 돈을 벌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본에서 민족 차별을 경험하고는 항일 활동의 의지를 다졌다고 볼 수 있다. 의사가 집으로 편지를 보내면서 바로 소각하라고 한 것은 행적을 일제에 노출하지 않으려는 생각이었다. 의사가 대만으로 간 것도 1년 남짓 일본에서 생활하며 겪은 차별과 멸시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 마음 한쪽에서는 언젠가 일제를 응징하는 거사를 계획하고 있었다. 대만은 청일전쟁에서 패한 청나라가 일제에 할양함으로써 우리보다 먼저 일본의 식민지가 됐고 우리 못지않게 항일투쟁이 격렬했다. 대만에도 한인들이 진출해 주로 어업과 상업, 노동에 종사하고 있었다. 한인들은 대만 노동자들에게도 탄압을 당하는 등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 1927년 11월 대만에 도착한 의사는 부귀원이라는 일본인 차포(茶鋪)에 점원으로 취업했다. 이듬해 5월 일왕 히로히토의 장인이자 일본 정계의 거물인 육군대장 구니노미야가 육군특명검열사 자격으로 타이중시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신문을 통해 접하고 응징할 것을 결심했다. 1928년 5월 14일 오전 주 청사 건물을 떠난 구니노미야의 차량 행렬은 타이중역으로 향했다. 9시 55분 의사는 타이중시 중구 자유로 2단 2호 앞의 나무 밑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차량이 커브를 돌자 10대 가운데 두 번째 차에 타고 있던 구니노미야에게 단도(독검)를 던졌다. 그러나 단도는 운전사의 왼쪽 어깨만 스치고 결과적으로 처단에는 실패했다.●조 의사 부친·형도 경찰서에 갇혀 ‘고초’ 의사는 경비병과 사복 경찰에게 붙잡혔다. 일제는 관련 인물들을 밝히려고 먼저 고국의 가족을 연행했다. 의거 사실을 전혀 몰랐던 부친은 한 달, 형은 석 달 동안 경찰서에 갇혀 악독한 심문을 받았다. 의사는 속전속결식 재판 끝에 거사 다섯 달 만인 1928년 10월 10일 오전 10시 사형장에서 순국했다. 의사의 나이 겨우 23세였다. 일제는 총리가 직접 나서 한 달간 보도를 통제할 정도로 큰 사건으로 취급했다. 재판부는 완전히 우발적이며 사상적 배경이 없고 외국생활의 외로움과 비참함이 동기였다고 주장했다. 의사가 거사 직전 자살을 하려다가 우연히 구니노미야의 동선을 알게 돼 죽이려 했다고도 했다. 이는 사건의 의미를 축소하기 위한 일제의 의도임이 명백하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조 의사의 거사는 계획된 항일 의거로 보인다. 그러나 어떤 주장도 사료가 뒷받침돼야 한다. 의사가 ‘독검’(毒劍)을 던졌는지, 구니노미야가 맞았는지, 맞은 것이 원인이 돼 사망했는지도 규명해야 할 부분이다. 국가보훈처는 공훈록에 “구니노미야가 의사가 던진 단도에 목을 맞았고 중상을 입어 사망했다”고 싣고 있는데 근거가 부족하다. 구니노미야가 칼을 맞아 후유증으로 8개월 만에 사망했다는 주장도 검증이 필요하다. 구니노미야의 사망 원인은 단지 복막염이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비록 송학선 의사처럼 조 의사가 척살에 실패했더라도 거사의 의미는 퇴색될 수 없다. 정부는 1963년 의사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조 의사 선양사업은 대만 한인들이 먼저 시작해 1978년에 의거 50주년 기념식을 열고 타이베이 한국학교에 흉상을 세웠다. 지난해에는 새 동상(입상)을 제막했다. 1985년에는 사단법인 조명하의사 기념사업회가 창립됐고 의거 60주년을 맞은 1988년에는 경기도 과천 서울대공원에도 동상을 건립했다. 외아들 조혁래 선생도 부친의 공적을 밝히는 데 힘을 보탰다.●대만서 선양사업…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조 의사의 유해는 순국 3년 만인 1931년에 환국,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묻혀 있다. 현재 기념사업회장은 이자욱(전 대일고 교장) 서경대 초빙교수가 맡고 있다. 조경환(조 의사의 장손)·장병원(세림기전 대표)·한사홍(정선명주 대표)씨가 이사로 돕고 있고 김준식(전 대일외고 국어교사)·유단희(전 홀트학교 근무)씨는 감사를 맡았다. 연구실에서 만난 이 회장은 “대만에서도 연구회장인 김상호 교수 등이 연구 활동을 활발히 해 최근에 거사 지점을 정확히 밝혔다. 단검 사진도 발견했다”고 말했다. 대만 슈핑과기대에 재직 중인 김 교수는 “당시 하늘을 찌를 기세를 가진 구니노미야는 자신의 딸을 왕태자와 약혼시켰으나, 아들에게 색맹이 있음을 알게 된 왕실에서 파혼을 요구하자 파혼하면 ‘가족을 다 죽이고 가만 있지 않겠다’고 왕실을 향해 으름장을 놓을 정도의 인물이었다”면서 “의사의 척살 사건은 훗날 이봉창 의사 폭탄 의거의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씨줄날줄] 영화 ‘뮬란’ 보이콧/이종락 논설위원

    [씨줄날줄] 영화 ‘뮬란’ 보이콧/이종락 논설위원

    1998년에 개봉한 애니매이션 ‘뮬란’은 나이 많은 아버지를 대신해 남장을 하고 전장에 나가 훈족을 물리치는 데 혁혁한 공헌을 세운 1500년 전 중국의 장편 서사시 목란사의 얘기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뮬란이 여성의 몸으로 전장에서 온갖 시련과 육체적 한계 상황을 극복해 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중국 황제와 나라를 구한 뮬란은 애니메이션에서는 물론 현실의 중국에서도 일약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 애니메이션이 22년 만인 올해 블록버스터 실사 영화로 돌아왔다. 디즈니 라이브 액션으로 돌아온 ‘뮬란’은 단순히 동명 애니메이션의 실사화가 아닌, 세상의 편견과 금기에 맞선 아름답고 강한 전사 ‘뮬란’의 재탄생에 초점을 맞췄다. 코로나19로 미국에서는 영화관 상영을 포기하고,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인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공개한다. 반면 중국을 비롯한 중화권에서는 오는 11일부터 영화관에서 상영한다. 서구에 비해 코로나 확진자가 덜한 한국 영화관에서도 오는 17일에 개봉한다. 1000대1이라는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고 뮬란으로 캐스팅된 유역비(중국명 류이페이)부터 견자단(중국명 전쯔단), 공리, 이연걸까지 중화권 대표 스타들이 총출동했다. 중화권에게 환영받아야 할 이 영화가 국가별·지역별 반응이 사뭇 다르다. 중국에서는 대환영이지만 네티즌 민주화 연대운동을 이어 가는 홍콩, 대만, 태국 등 이른바 ‘밀크티 얼라이언스’ 지역의 소셜미디어에서는 ‘#보이콧 뮬란’ 캠페인이 한창이다. 뮬란을 연기한 주연 여배우 유역비가 블로그인 웨이보에 ‘나는 홍콩 경찰을 지지한다. 이제 (시위대가) 나를 때려눕힐 수 있을 것이다. 홍콩은 정말 수치스럽다’라고 올린 글 때문이다. ‘때려눕힐 수 있을 것’이란 발언은 지난 7월 홍콩 민주화 시위대가 중국 관영매체 기자를 폭행한 사건을 비꼰 것이다. 유역비는 미국에서 태어난 중국인 혈통이나 중국으로 이주해 활동 중이라 중국 당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처지다. 영화에서 텅 장군 역으로 나오는 견자단 역시 ‘영국의 식민지 지배 종식, 중국 반환 23주년 기념’ 글을 페이스북에 공유했다. 홍콩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는 조슈아 웡은 지난 4일 트위터에 “디즈니가 베이징에 굽실거리고, 유역비는 공공연히 홍콩 경찰의 만행을 지지한다. 인권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뮬란 보이콧을 촉구한다”며 관람 반대 운동에 동참해 줄 것을 요구했다. 홍콩 시위대는 오히려 민주화운동 리더인 아그네스 차우가 ‘홍콩의 뮬란’이라고 치켜세우고 있다. 뮬란은 과거에는 여성 차별에 맞섰지만, 현재는 중국의 민주화를 위해 싸우는 투사의 상징으로 색다른 주목을 받고 있다. 흥행 여부가 주목된다. jrlee@seoul.co.kr
  • 벨기에 베르비에 분수서 181년 전 숨진 시장의 심장 담긴 상자가

    벨기에 베르비에 분수서 181년 전 숨진 시장의 심장 담긴 상자가

    벨기에 동부 베르비에 시에 있는 분수를 다시 짓기 위해 해체하는 과정에 작은 납 보관함이 나왔다. 안에는 알코올이 가득 찬 병 속에 사람의 심장이 보관돼 있었다. 상자 겉에는 ‘피에르 다비드의 심장이 1883년 6월 25일을 기념해 온전히 자리하고 있다’고 새겨져 있었다. 다비드는 이 시의 초대 시장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은 1839년이었다. 건초 말리는 다락에서 떨어져 68세를 일기로 숨졌다. 이 분수가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된 것은 1883년의 일이었다. 적어도 44년 동안은 다른 곳에 보관돼 있었다는 뜻이 된다. 이 상자는 지금은 이 도시 미술관에 특별 전시돼 있다. 리모델링 시공사인 베르비에 알더만 공공작업의 막심 데게이는 “상자가 분수 위쪽, 피에르 다비드의 흉상 근처에 간직돼 있다는 이 도시의 오랜 전설이 현실이 됐다. 분수를 다시 짓기 위해 마치 상자를 넣어두려고 미리 파놓은 듯한 곳에서 상자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지난달 20일 한 인부가 “정말로 흠결 하나 없는 상태로” 발견했다고 덧붙였다. 시는 그를 기리는 전시를 기획하며 자금을 모금하기 시작했다. 유족들은 심장을 다시 전시 공간에 매장하는 데 동의했다. 이미 베르비에 시 홈페이지(verviers.be)는 적절한 장식을 갖춘 전시관을 세우기 위해 수십년 걸려 돈을 모았다. 물론 베르테 광장에 있는 분수 말고 어떻게 초대 시장을 기리는 게 최선의 방안인지에 대해선 논쟁이 있었다.다비드는 벨기에가 독립한 1830년 등 격동의 시대를 살았다. 1800년부터 8년 동안 시장으로 일했는데 그 때만 해도 벨기에는 프랑스 식민지였다. 1815년부터는 네덜란드에게도 지배 당하다 독립을 쟁취했고 다비드는 같은 해 다시 시장에 선출됐다. 그의 가장 빼어난 업적은 1802년에 소방대를 창설한 것으로 당시만 해도 대단히 혁신적인 일이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이데올로기를 동경할 정도로 프랑스를 좋아했지만 네덜란드 통치 시기도 헤쳐 나왔다. 베르비에는 네덜란드 통치에 저항해 봉기를 일으킨 곳 중 하나로 이 와중에 많이 훼손됐으며 다비드는 재건 작업을 훌륭하게 지휘해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박상익의 사진으로 세상읽기] 경성제대 의학부의 일본인 교수들

    [박상익의 사진으로 세상읽기] 경성제대 의학부의 일본인 교수들

    경성제국대학은 1924년부터 해방을 맞은 1945년까지 존속했다. 설립 준비는 개교 2년 전(1922)부터 진행됐다. 애초의 명칭은 경성제국대학이 아니었다. 1924년 첫 입학생을 모집하는 원서교부 때만 해도 ‘조선제국대학’이었다. 하지만 일제는 ‘조선제국대학’이라고 하면 조선을 식민지가 아닌 ‘하나의 제국’으로 인정하는 꼴이 된다고 해서 서둘러 명칭을 바꿨다. 도쿄(東京), 교토(京都), 도호쿠(東北), 규슈(九州), 홋카이도(北海道) 제국대학에 이은 6번째의 ‘조선제국대학’으로 하려다 갑자기 ‘경성제국대학’으로 급선회했다. 첫 회 신입생 입학시험과 합격자 발표하는 시기 사이에 이름이 바뀐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추측을 해볼 수 있다. 1945년 일본인이 물러간 후 경성제대 캠퍼스를 기반으로 서울대학교가 출발한다. ‘경성’제국대학의 이름을 이어받아 ‘서울’대학교가 된 것이다. 만일 일제가 설립 초기의 의도대로 ‘조선’제국대학이란 이름을 관철했다면 ‘한국’대학교가 되지 않았을까? 경성제대 총장의 권위는 대단했다. 이따금 조선 총독이 대학을 둘러보는 일도 있었는데, 교수나 총장이 현관 앞에 늘어서는 따위의 일은 전혀 없었다. 고등관 중 천황이 직접 임명장을 주는 최고 고등관을 ‘친임관’이라 불렀는데, 식민지 조선에서는 총독과 경성제국대학 총장 둘만이 친임관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대학총장을 국무총리와 동급으로 예우한 셈이다. 경성제대에는 고매한 인품을 지닌 교수도 많았다. 특히 의학부 교수들의 기개는 대단했다. 의학부 제1외과의 마쓰이 곤페이(松井權平) 교수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가 대학생들에게 삭발 명령을 내리고 국민복을 입힌 데 대해 “부질없는 짓이다. 일본은 결국 패한다”고 학생들 앞에서 대놓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부속병원에서 조선인과 일본인 환자를 차별해 진료하지 않았고, 그런 일이 발견되면 크게 나무랐다. 의학부 교수들은 사망할 때 반드시 시신을 실험용으로 써달라고 유언했다. 이비인후과 고바야시(小林靜雄) 교수가 그랬고, 마쓰이 곤페이 교수도 광복 전해에 사망, 제자들에 의해 시체가 해부됐다. 제자들은 스승의 시신 해부를 지켜보면서 숙연한 마음으로 의도(醫道) 확립을 다짐했다. 감염병 확산으로 짙은 어둠이 깔리고 있다. 비록 일본인이지만 경성제대 의학부 교수들의 높은 인격과 엄정한 의료윤리는 어둠을 밝히는 빛이다. 우석대 역사교육과 명예교수
  • [열린세상] 학교라는 허상을 과감히 넘어/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열린세상] 학교라는 허상을 과감히 넘어/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아이가 올해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다. 입학식은커녕 4월 말이 다 돼서야 학교에 처음으로 발을 디딜 수 있었다. 1학기에는 등교일보다 자습날이 더 많았는데, 2학기도 어째 심상찮다. 온라인 수업날에는 모든 돌봄과 교육 노동이 오롯이 주 양육자의 몫이다. 우선 오전 8시까지 교육부의 학생 건강상태 자가진단 사이트에 접속해서 아이의 증상이나 동선 등을 체크해 보고해야 한다. 그리고 오전 시간 안에 초등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해 로그인을 하고, 학년과 반을 찾아 들어간다. 반별 홈페이지에 무사히 도달하면 출석 체크 메뉴에 들어가 매일 날짜별로 댓글 쓰기 방식을 통해 출석 체크를 해야 한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반 홈페이지 안의 게시판 또는 알림장 메뉴에 들어가면 집에서 아이가 수행해야 하는 과제와 학습 내용이 단 몇 줄로 압축, 기재돼 있다. ‘교과서 몇 쪽을 읽은 후 동영상을 보고 여름에 관련된 그림 그리기’ 이런 식의 지시 사항이다. 여기까지의 과정을 스스로 수행할 수 있는 초등학교 1학년은 없다. 결국 아이 옆자리 누군가가 자신의 시간을 베어내어야 한다. 엉덩이를 들썩이는 아이를 붙들고 씨름하며 그 한 줄짜리 미션 몇 개를 완료한다. 과정과 결과물은 스마트폰 카메라에 담아야 한다. 오후에 다시 반 홈페이지에 접속해 로그인한 후 갤러리 메뉴에 그 사진들을 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숙제 검사다. 여기까지 읽다가 벌써 힘이 스멀스멀 빠지는 독자들을 위해 재차 강조하자면 이 과정은 온라인 개학 시 ‘매일’ 해야 한다. 그런데 자주 올라오는 의문이 있다. “장애 아동은?”, “스마트폰 사용이 어려운 가정은?”, “하루 종일 일해야 하는 양육자를 둔 아이는?” 지금의 방식은 이들을 철저히 배제하고 있다. 더 절망인 건 이 불확실성이 기약 없다는 것이다. 거리두기 2단계나 3단계보다 ‘들쑥날쑥’ 등교가 더 무섭다. 발달장애 아동을 기르고 있는 한 엄마는 “계속 이런 식이면 나랑 내 아이가 언제 신문 사회면에 오르게 될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절박한 한계상황이란 뜻이리라. 생존 말고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가 또 있다. ‘교육 격차’다. 고소득층 가정은 오히려 지금 상황을 (몹시) 반긴다는 뉴스도 들린다. 공교육에 빼앗기던 시간을 사교육에 맘껏 쓸 수 있으니 말이다. 암암리에 존재한다는 ‘쓰앵님’들의 전성시대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엄중한 이 시국에 “애를 학교에 보내게 해 달라”고 떼쓰는 것이 아니다. 안전이 전제되지 않은 등교가 사회 전반을 흔들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교육이 태어난 이유를 살펴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본래 교육이란 개별화돼 있었지만, 식민지 시절을 거치며 대규모 학교들이 많아졌고, 일방적 지식 전달형 교육 방식이 보편화됐다. 산업화를 거치며 기형적으로 높은 교육열과 줄 세우기에 맞물려 개별화 교육은 점점 더 그 설자리를 잃었다. ‘모이지 않아야 비로소 일상이 유지되는’ 이 시대에 학교라는 큰 공간에 모여 일괄 수업을 하는 방식은 사실상 수명을 다했다. 교육의 태생 이유인 ‘개별화’에도 역행하고, 교육격차를 가속화하기 때문이다. 이제 학교라는 물리적 공간이 주는 허상을 벗어버리자. 학생이 ‘있는’ 곳에서 개별화된 양질의 교육서비스를 제공토록 교육 정책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전환해야 한다. 특수교육 대상자는 영상교육보다는 순회교육을 늘리고, 누군가가 옆에서 온라인 학습에 연결해 줘야 하는 저학년을 위해 방역수칙을 준수한 돌봄 기능이 강화돼야 한다. 스스로 온라인 학습에 대한 접근이 가능한 학생들에게는 교육격차 해소를 위해 일방적 강의 전달이 아닌 쌍방형 참여 수업 방식이 기본이 돼야 한다. 교육부에서 시범사업이라도 시도하면 어떨까? 2020년 교육부 예산은 약 77조 3800억원이다. 이 중 학교 건물 시설개선비로 3120억원의 예산이 잡혀 있다. 등교냐 휴교냐 무의미한 논쟁은 그만하고 지속 가능한 체계를 속히 도입해야 더 큰 피해가 없다. 무섭게 치솟은 주 양육자(특히 엄마들)의 실직률, 갑자기 생계가 막막해진 방과 후 교사, 학교마다 우왕좌왕하는 분위기에서 눈치 보며 일하는 기간제 교사들도 이 문제와 깊이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 ‘아베의 입’… 日, 징용 배상 등 극우 역사관 안 바꿀 듯

    ‘아베의 입’… 日, 징용 배상 등 극우 역사관 안 바꿀 듯

    후임 총리, 한일 관계 개선 의지에 촉각日기업 자산 매각 전 징용 해법 찾아야“기시다나 이시바가 되면 숨통 트일 수도”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 28일 지병을 이유로 사의를 표명하면서 최악으로 치달았던 한일 관계에 개선의 계기가 만들어질지 관심이 쏠린다. 후임 내각이 아베 내각과 달리 양국 관계 개선에 나설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민당 전체 기류가 아베 총리와 크게 다르지 않아 누가 당 총재로 선출돼 총리직을 계승하든 일제 강제징용 배상 등 과거사 문제의 기본 입장은 바뀌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아베 총리는 2006년 9월~2007년 9월, 2012년 12월부터 현재까지 두 차례 재임하면서 식민지 지배 책임에 구속받지 않는 극우적 역사관을 한일 관계에 투영했다. 두 번째 집권 이후 이듬해부터 올해까지 거르지 않고 2차 세계대전 A급 전범이 합사돼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거나 공물을 보냈다. 아베 총리는 특히 2018년 한국 대법원이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배상 판결을 내리자 반도체 핵심 소재에 대한 수출을 막는 등 보복성 조치를 내려 한일 관계를 최악의 상황으로 만들었다. 한국도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를 통보하며 맞대응하다가 대화를 전제로 한 조건부 유예로 한발 물러선 상태다. 그러나 일본 기업의 자산 매각이 이르면 내년 봄에 실현될 가능성이 있어 그전에 해법이 도출되지 않으면 극한 대립이 재현될 수밖에 없다. 특히 아베 총리의 강경 노선은 한국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 박근혜 정부와 2015년 체결한 한일 위안부 합의를 문재인 정부가 번복하자 한국 정부에 대한 불신을 키웠다. 이에 후임 총리가 외교정책 전반을 객관적으로 재점검하면 한일 교착국면에도 숨통이 트일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온다.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은 지난 28일 “새 내각과도 한일 우호 협력관계 증진을 위해 계속해서 협력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자민당의 태도가 완고하고 일본 내 여론도 아베 총리의 강경 노선을 대체로 지지해 후임 총리가 근본적인 변화를 주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다만 후임 총리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약간의 온도 차는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가장 유력한 총리 후보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아베 정권의 ‘입’을 맡아왔기 때문에 아베 노선을 그대로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 다만, 아베 총리가 후계자로 지목한 적이 있는 기시다 후미오 자민당 정조회장은 당내에서 비교적 비둘기파로 꼽히고, 이시바 시게루 전 자민당 간사장은 야스쿠니 신사에 A급 전범을 합사하는 것을 반대한 적이 있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는 “당내 파벌이 없는 스가 관방장관이 후임이 된다면 아베 총리의 지지를 받은 결과이기 때문에 다른 노선을 펴기 어려울 것”이라며 “반면 비교적 평화 노선을 걸어온 기시다 정조회장이나 역사문제에 반성적 입장을 보여온 이시바 전 간사장이 된다면 한일 관계 개선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 ‘한국 때리기’ 주도한 아베의 퇴장… 한일관계 개선되나[박기석의 외교 통일 수첩]

    ‘한국 때리기’ 주도한 아베의 퇴장… 한일관계 개선되나[박기석의 외교 통일 수첩]

    한국에 대해 강경 노선을 주도했던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8일 전격 사의를 표명함에 따라 한일 관계 개선의 계기가 마련될지 주목된다. 후임 총리가 아베 총리보다는 부드러운 대(對)한국 외교를 추구하며 분위기를 개선시킬 가능성은 있지만, 누가 총리가 되더라도 일제 강제징용 배상과 일본의 한국 수출규제 등 갈등 현안에서 전향적인 태도를 취하며 근본적으로 양국 관계를 회복시키기는 어렵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아베 총리는 2006년 9월~2007년 9월, 2012년 12월부터 현재까지 두 차례 재임 기간 한국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에 더 이상 구속받지 않는다는 기조 하에 역사 문제를 다루면서 한국과 부딪혀왔다. 아베 총리는 2015년 8월 14일 전후(戰後) 70년 담화에서 “그 전쟁(태평양전쟁)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우리 아이들과 손자, 그리고 그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사죄의 숙명을 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며 과거에 대한 사죄를 표명하지 않겠다는 뜻을 시사했다. 아울러 2012년 12월 두 번째 집권한 후 이듬해부터 올해까지 8년 연속 광복절(일본 종전기념일)에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을 보내면서 매번 한국 정부의 항의를 받았다. 아베 총리는 2018년 일제 강제징용 배상 문제가 불거지자 한국에 더욱 강경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한국 대법원이 2018년 10월 일제 강제징용 가해 기업에 손해배상 판결을 내리자 일본 정부는 이듬해 7월부터 한국 수출규제 조치를 취했는데, 이러한 보복 조치는 아베 총리 직속 총리 관저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정부는 강제징용 배상과 수출규제 문제를 해결코자 일본 외무성, 경제산업성과 협의에 나섰으나, 아베 총리의 완고한 태도 탓에 양국이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게 전반적인 관측이다. 아베 총리의 대(對)한국 강경 노선은 한국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과 불신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아베 총리가 2015년 12월 박근혜 정부와 위안부 합의를 체결했으나, 문재인 정부가 2017년 이를 뒤집어 한국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다는 것이다. 다만 문재인 정부는 위안부 합의가 피해자 중심주의에 어긋난다고 판단하면서도 일본에 재합의를 요구하지 않음으로써 위안부 문제를 한일 관계의 쟁점으로 삼진 않았다. 아울러 아베 총리가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에 강경한 태도를 보이며 인기를 얻고, 일본의 식민지 지배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며 일본 우익의 리더가 된 점도 그가 ‘한국 때리기’에 나서게 된 배경으로 풀이된다. 이에 후임 총리는 아베 총리와 달리 개인적인 반감과 불신, 국내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한일 관계를 일신할 수 있지 않겠냐는 기대도 나온다. 하지만 현재 후임 총리로 거론되는 인물은 물론 집권 자민당, 나아가 일본 여론도 아베 총리의 대한국 외교 노선에 대체로 동조하고 있어 포스트 아베 시대에도 한일 관계가 극적으로 변화되긴 어렵다는 전망이 많다.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는 “아베 총리는 한국에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고, 일본 우익의 대표자 역할도 하고 있었기에 한일 관계에서 외교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라면서도 “한일 문제에 있어서 일본 국민은 대체로 한국에 문제가 있다고 보기에 후임 총리가 일본 여론을 설득하긴 어려울 것이며 당분간 긴장 국면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아베 총리가 사임한 것은 한일 관계 악화 때문이 아니라 경기 침체, 코로나19 방역 실패, 정치 스캔들 때문”이라며 “후임 총리가 한일 관계를 개선시킨다고 해서 지지율이 오르지 않을 것이기에 한일 관계에 매진할 인센티브가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문재인 정부가 후임 총리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양국 관계 개선의 모멘텀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전문가의 제언이다. 특히 한국 법원의 배상 판결에 따라 이르면 내년 봄 예상되는 일본 기업의 자산 매각(현금화)이 실현되면 일본이 추가 보복에 나선다고 공언했기에, 그전까지 문 대통령이 후임 총리와 해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양기호 교수는 “연말 예정된 한중일 정상회담 계기 한일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이 관계 개선을 위한 인식을 공유하고 대화의 모멘텀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진창수 수석전문위원은 “아베 정부가 코로나19 방역 실패로 위기에 봉착했던 만큼, 문재인 정부가 차기 일본 정부와 방역에 적극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며 분위기 전환에 나서야 한다”며 “강제징용 배상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가 완고한 상황이지만 문재인 정부도 좀 더 적극적으로 대화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인도 원주민 부족서 코로나 집단 감염 발생…안전지대는 없다

    인도 원주민 부족서 코로나 집단 감염 발생…안전지대는 없다

    오랜 세월 동안 한 지역에서 고립돼 살아온 원주민 부족도 코로나19 습격을 받았다. 영국 BBC의 28일 보도에 따르면 안다만제도에서 고립돼 살아온 그레이트 안다만니즈(Great Andamanese) 부족의 수는 53명에 불과한데, 최근 이중 최소 10명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인도 안다만제도 북쪽에서 오랜 시간 고립된 채 살아가던 이 부족은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피하지 못했다. 확진자들은 병원으로 이송되거나 격리된 상황이다. 그레이트 안다만니즈 부족민 중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오자, 부족민 전원이 코로나19 검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부족민 검사에 나선 한 의료전문가는 BBC와 한 인터뷰에서 “안다만 부족민들은 검사에 매우 협조적이었다”며 “부족의 많은 구성원이 스트레이트 섬을 포함한 인근 섬을 오가는 과정에서 감염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어 “일부 부족민은 도시에서 소소한 일을 맡아 생계를 이어가기도 한다”며 감염 경로를 아직 추적 중이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안다만제도의 다른 원주민 부족들에게까지 확산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현재 그레이트 안다만니즈 부족 이외에 다른 부족민들의 동선을 파악하고 감염 여부를 확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안다만제도는 그레이트 안다만니즈를 포함해 자라와스 족, 옹게 족, 노스 센티네리스 족, 쇼폼펜 족, 니코바르 족 등 멸망 위기에 처해 있는 5개 부족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부족 대다수는 외부와의 접촉을 극도로 꺼려왔는데, 이중 노스 센티네리스 부족(또는 센티널 부족)은 2018년 당시 전도를 위해 부족이 거주하는 섬으로 들어간 전도사에게 화살을 쏘고 살해하기도 했다. 부족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이 원시 부족에 접근하고 있다. 이번에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온 그레이트 안다만니즈 부족의 경우 18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그 수가 5000명이 넘었지만, 영국이 해당 섬을 식민지화 하고 접촉하면서 질병에 걸리는 등 위험에 노출돼 그 수가 급감했다. 영국 런던에 본사르 둔 비정부기구이자 사라져가는 토착민 살리기 운동을 벌여온 `서바이벌 인터내셔널‘ 측은 “안다만니즈 부족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한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원주민들은 자신의 부족을 죽여 온 전염병의 파괴적인 영향력을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코로나19를 피하지 못한 원시 부족은 그레이트 안다만니즈 뿐만이 아니다. 브라질과 페루에 있는 아마존의 원주민 280명 이상이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사망했다. 특히 브라질 원주민 사회의 지도자들이 코로나19에 감염돼 잇따라 사망하면서 큰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 송현서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세상과 담 쌓은 원주민 마저…印 부족서 코로나 확진자 발생

    세상과 담 쌓은 원주민 마저…印 부족서 코로나 확진자 발생

    오랜 세월 동안 한 지역에서 고립돼 살아온 원주민 부족도 코로나19 습격을 받았다. 영국 BBC의 27일 보도에 따르면 안다만제도에서 고립돼 살아온 그레이트 안다만니즈(Great Andamanese) 부족의 수는 53명에 불과한데, 최근 이중 최소 4명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인도 안다만제도 북쪽에서 오랜 시간 고립된 채 살아가던 이 부족은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피하지 못했다. 4명 중 2명은 확진 판정을 받고 병원으로 이송됐고, 남은 2명은 현재 격리돼 있다. 그레이트 안다만니즈 부족민 중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오자, 부족민 전원이 코로나19 검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부족민 검사에 나선 한 의료전문가는 BBC와 한 인터뷰에서 “안다만 부족민들은 검사에 매우 협조적이었다”며 “부족의 많은 구성원이 스트레이트 섬을 포함한 인근 섬을 오가는 과정에서 감염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어 “일부 부족민은 도시에서 소소한 일을 맡아 생계를 이어가기도 한다”며 감염 경로를 아직 추적 중이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안다만제도의 다른 원주민 부족들에게까지 확산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현재 그레이트 안다만니즈 부족 이외에 다른 부족민들의 동선을 파악하고 감염 여부를 확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안다만제도는 그레이트 안다만니즈를 포함해 자라와스 족, 옹게 족, 노스 센티네리스 족, 쇼폼펜 족, 니코바르 족 등 멸망 위기에 처해 있는 5개 부족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부족 대다수는 외부와의 접촉을 극도로 꺼려왔는데, 이중 노스 센티네리스 부족(또는 센티널 부족)은 2018년 당시 전도를 위해 부족이 거주하는 섬으로 들어간 전도사에게 화살을 쏘고 살해하기도 했다. 부족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이 원시 부족에 접근하고 있다. 이번에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온 그레이트 안다만니즈 부족의 경우 18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그 수가 5000명이 넘었지만, 영국이 해당 섬을 식민지화 하고 접촉하면서 질병에 걸리는 등 위험에 노출돼 그 수가 급감했다. 영국 런던에 본사르 둔 비정부기구이자 사라져가는 토착민 살리기 운동을 벌여온 `서바이벌 인터내셔널‘ 측은 “안다만니즈 부족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한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원주민들은 자신의 부족을 죽여 온 전염병의 파괴적인 영향력을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코로나19를 피하지 못한 원시 부족은 그레이트 안다만니즈 뿐만이 아니다. 브라질과 페루에 있는 아마존의 원주민 280명 이상이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사망했다. 특히 브라질 원주민 사회의 지도자들이 코로나19에 감염돼 잇따라 사망하면서 큰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 송현서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책꽂이]

    [책꽂이]

    바이든과 오바마(스티븐 리빙스턴 지음, 조영학 옮김, 메디치미디어 펴냄)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조 바이든 안내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에 의해 부통령으로 지명된 바이든은 이후 오바마와 정치 브로맨스로 미국 정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외교와 입법 분야에서의 전문성을 살려 부통령직의 모범을 구축했다는 평을 들었다. 408쪽. 1만 8000원.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홍세미 외 4인 지음, 오월의봄 펴냄) 여성 서사로 본 국가보안법.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남편이나 아들의 옥바라지를 하고, 구속자 석방 운동을 벌였으며 동료 기자를 숨겨 줬다는 죄목으로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을 받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조명한다. 민가협 어머니들부터 탈북민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까지 다양한 여성들의 구술이 실렸다. 396쪽. 1만 8000원.내 몸 안에 준비된 의사 2(김재호 지음, 신세림 펴냄) 상대적으로 질병의 원인과 예방에 관심이 없는 현대의학의 한계를 꼬집는 저작. 저자는 코로나19 같은 감염병이 확산되는 현실 속에서 “면역세포가 바이러스로부터 우리 몸을 지킬 수 있도록 면역력을 강하게 유지하는 것이 근본적인 대책이며, 최고의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395쪽. 1만 8000원.서로 다른 기념일(사이토 하루미치 지음, 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펴냄) 언어와 감각이 서로 다른 한 가족이 써내려간 특별한 일상. 청각 장애를 가진 사진가 부부는 각각 음성언어와 수화를 쓰며 다른 세계를 살았다. 들을 수 있는 청인 아이가 태어나면서, 다른 언어를 쓴 부부는 다른 감각을 가진 아이와 지내는 또 다른 경험을 한다. 이 가족이 겪는 작은 사건들을 통해 존재의 소통을 이야기한다. 272쪽. 1만 4000원.포즈의 예술사(데즈먼드 모리스 지음, 이한음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동물생물학자이자 초현실주의 화가인 데즈먼드 모리스의 저서. 일평생 과학과 예술을 오간 그는 선사시대 가면부터 로마 조각상까지 231점의 미술 작품 속에 몸짓 언어(포즈)를 수집했다. 이를 아홉 가지 의사전달 형태로 분류, 포즈에 숨겨진 역사적 사실들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냈다. 320쪽. 3만 2000원.일제의 특별한 식민지 포항(김진홍 지음, 글항아리 펴냄)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전략을 포항의 근대화 과정으로 들여다봤다. 한국은행 포항본부 부국장인 저자는 구한말 당시 한적한 어촌 마을이던 포항동이 면(面)에서 읍(邑)으로 성장하며 일본인들이 발전이라는 구호 아래 부를 축적시키는 과정을 상세히 전한다. 664쪽. 3만 8000원.
  • 광주 찾아 울먹이며 사죄한 김종인 “너무 늦게 찾아”

    광주 찾아 울먹이며 사죄한 김종인 “너무 늦게 찾아”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19일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아 무릎을 꿇고 울먹이며 사죄했다.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 참배에 나선 김 위원장은 방명록에 ‘5·18 민주화 정신을 받들어 민주주의 발전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적었다. 김 위원장은 감정이 다소 격앙된 듯 울먹이는 목소리로 “호남의 오랜 슬픔과 좌절을 쉽게 어루만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며 “광주 시민 앞에 이렇게 용서를 구한다.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죄송하고 또 죄송하다”고 밝혔다. 그는 “너무 늦게 찾아왔다. 백번이라도 사과하고 반성했어야 마땅한데 이제야 첫걸음을 뗐다. 작은 걸음이라도 나아가는 게 안 나아가는 것보다 낫다는 빌리 브란트의 충고를 기억한다”며 “5·18 묘역에 잠든 분들의 명복을 빌고, 유족들께 깊은 사죄를 드린다”고 말했다. 빌리 브란트는 1971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며 독일 통일 전 서독일의 총리를 지낸 반나치 운동가다. 김 위원장은 “1980년 5월 17일 저는 대학연구실에 있었지만 시위를 중단할 것이라는 방송을 듣고 강연에 열중했다”며 “광주에서 발포가 있었고,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은 얼마간 시간이 지난 뒤에 알게 됐다. 알고도 침묵하거나 눈을 감은 행위, 적극적으로 항변하지 않은 소극성은 잘못”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광주에서 그런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그것을 부정하고 5월 정신을 훼손하는 일부 사람들의 어긋난 행동에 우리 당은 엄정한 회초리를 들었다”며 “일부 정치인들까지 편승하는 태도는 표현의 자유란 명목으로 엄연한 역사적 사실까지 부정할 수 없다. 그동안 잘못된 언행에 당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사과 말씀을 드린다”고 주장했다.김 위원장은 “대한민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뤘다. 2차 대전 이후 식민지 해방국 중 제국주의 국가와 대등하게 어깨를 견주는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며 “세계 어느나 국민보다 성실하게 노력하고 정의롭게 행동한 국민의 땀과 눈물의 결실”이라고 강조했다. 자신이 과거 신군부가 설치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 재무분과 위원으로 참여했던 것에 대해 “그동안 여러 번 용서를 구했지만, 결과적으로 상심에 빠진 광주시민과 군사정권에 반대한 국민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면서 “다시 한번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사과 발언을 하는 도중 감정이 북받친 듯 울먹였고, 원고를 든 손이 떨리는 모습도 보였다. 김 위원장은 이후 추모탑에 헌화하고 15초가량 무릎 꿇고 묵념했으며 윤상원·박기순 열사 묘역과 행방불명자 묘역에 헌화했다. 김 위원장의 사과 발언에 한국대학생진보연합(대진연) 소속 학생들은 “통합당 망언 의원부터 제명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소리쳤다. 그는 이어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국민 통합, 모두 함께 미래로’를 주제로 한 기자회견에서 “미래통합당이 전국 정당으로 나아가기 위해 5·18 가족과 영령들에 사죄하고 5·18망언과 같은 사태의 재발을 막겠다”고 주장했다. 문재인 대통령과의 영수회담에 대해서는 “결론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는 게 성숙됐을 적에 만남의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회동 의제로는 “당면한 현안은 코로나바이러스를 어떻게 슬기롭게 잘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라고 제시했다. 그는 다만 “야당 대표와 대통령이 만나는 것은 국민이 가장 관심 있고 아픈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명분이 있을 때 의미가 있다”면서 “형식적으로 모양만 갖추는 만남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2000자 인터뷰 43]최은미 “강제동원 한일 갈등·위기의 고착화 안 돼, 공존방법 찾아야”

    [2000자 인터뷰 43]최은미 “강제동원 한일 갈등·위기의 고착화 안 돼, 공존방법 찾아야”

    양국 지도자 교체되더라도 한일 경색 계속될 전망 日 2019년 對한국 선행보복 철회 가능성 낮아 문재인·아베 만나야 하나 해결방안 평행선 달려 양국 국민 무관심과 국익 손실 감안해 조기 해결을 시민 레벨의 협력과 연대로 지도자들 압박 필요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 이후 한일관계에 갈등이 고착화되고, 위기가 일상화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적어질 것이며, 피해자들의 고통과 국익 손실만 남는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양국이 갈등을 넘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최은미 아산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19일 서울신문과 인터뷰를 갖고 “한일 지도자의 지지율이 동반 하락 중이라 양국 관계라는 논쟁적 이슈로 정치적 리스크를 부담하려 들지 않을 것”이라면서 “시민 레벨에서의 협력과 연대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최 연구위원과의 일문일답 내용. Q.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의 강제동원 판결 강제집행을 위한 현금화 절차가 8월 4일 시작됐다. 피고인 일본제철의 국내 자산(포스코와 일본제철의 합작회사 PNR의 주식 일부)에 대한 압류명령 공시송달이 끝난 것이다. 그러나 피고가 즉시 항고함으로써 약간의 시간은 벌게 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광복절 축사에서 일본에 협의를 제안했지만 일본에서는 한국이 먼저 구체안을 내놓으라고 한다. 한일 정부가 한 테이블에 마주앉을 가능성은 있는가. 일본 분위기는 어떤가. A. 한일 양국이 국장급협의를 지속하고 있지만 해결방안이 합의되지 않는 한 실무차원의 대화에는 한계가 있다. 양국 정상이 마주앉아 논의해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낮다. 코로나19라는 변수 외에도 양국 지도자 지지율이 동반 하락 중이다. 한일관계라는 논쟁적 이슈로 양국 지도자 모두 정치적 리스크를 지기는 쉽지 않다. 지난해 12월처럼 올해도 한중일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일 정상회담을 기대할 수 있지만 만남 이상의 의미, 즉 문제해결을 위한 합의를 도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본에서는 한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소수이지만 일본의 오류를 지적하는 일본인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 주류는 아니며 대다수는 한국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Q. 개인청구권의 인정, 불인정 논란에 종지부를 찍지 않으면 한일의 경색은 계속되고 관계개선은 힘든 구조가 됐다. 타협점은 찾을 수 있을까. A. 개인청구권은 일본도 인정하고 있다.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 격)는 중국 강제노동 피해자들이 미쓰비시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개인의 청구권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다”라고 판결했다. 야나이 슌지 전 외무성 조약국장, 고노 다로 전 외상도 국회 답변에서 확인한 바 있다. 문제는 “청구권은 살아 있지만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인데, 이러한 모순적 상황에 대해 법적으로 다퉈볼 여지는 있다. 다만 이 문제가 한일 간 모든 사안을 덮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갈등 사안과 협력 사안을 구분해서 관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Q. 일본 정부는 대법원 판결로 청구권협정 3조 2항의 ‘분쟁’이 발생했다고 보고 지난해 초 중재위 구성을 요구했지만 한국이 거부했다. 한국 정부가 1+1안(한일 기업이 기금 출연)을 냈으나 일본이 거부했다. 이 밖에도 문희상 전 국회의장의 1+1+α(모금), 2+2(한일 정부 및 기업) 외에도 국제사법재판소(ICJ) 회부 등 각종 안이 쏟아졌다. 최근 시민단체와 종교단체, 연구자 등이 참여하는 조직을 만들어 중재안을 만들자는 안까지 나왔다. 또한 양정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강제동원 및 위안부 피해자 인권재단 설립에 관한 법안을 발의했다. 이런 각 대안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A. 많은 해결방안이 제시됐지만 어느 안도 한일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1+1은 대법원 판결의 인정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일본 정부가 받을 수 있는 안이 아니었다. 문 전 의장이 제시한 1+1+α는 대법원 판결의 이행을 반영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피해자가 수용할 수 있는 안이 아니었다. ICJ 제소도 선택지로서 고려할 수는 있으나 외교적 노력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라 우선순위에 둘 수 없다. 해결방법에 대한 사회적 컨센서스를 이루는 선행적 논의가 필요하다. Q. 문 대통령(2022년 5월 임기 만료) 아베 신조 총리(2021년 9월 자민당 총재 임기만료)의 퇴장 전까지는 타협이 힘든 게 아닌가 하는 의견을 종종 듣는다. 문 대통령의 3원칙(피해자중심주의, 사법부 판단 존중, 1+1)과 65년 협정으로 모든 게 끝났다는 아베 총리의 입장은 차기 지도자들도 거스르기 어려울 것 같은데. A. 양국의 지도자가 바뀌면 새로운 정권 하에서 새로운 관계 구축을 위한 계기는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양국의 입장차가 현저해 드라마틱한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2018년 판결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일본인의 69%가 “납득할 수 없다”, 한국인의 82%가 “판결에 동의한다”고 답했다. 사안을 바라보는 양국민의 인식차이를 보여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양국 지도자가 바뀐다 하더라도, 그동안 견지해 온 기본 입장에 변화가 나타나기는 어렵다고 본다. Q. 한국이 70년 한미동맹에서 탈피하지 않는 한 정치·경제·안보 면에서 한일 협력은 불가피하다는 시각도 있다. 우리가 일본을 필요로 하는 부분과, 일본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부분은 무엇이 비슷하고 다른가. A. 해방 이후 한일관계는 미국에 의한 세계질서와 한미일 동맹 속에서 시작됐다. 냉전기 양국은 적대적 공존 속에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였다. 현재 중국의 부상과 미중 갈등, 북핵 위협 속에 서로의 존재는 매우 미미하다. 한반도 문제를 중심으로 지역 구상을 펼치는 한국과 인도·태평양 지역에서의 역량 강화와 세계적 위상 증진을 위한 지역 구상을 펼치는 일본과의 협력 범위는 크지 않다. 결국 실리적 협력의 필요성은 있지만 전략적 협력 노력은 큰 비중을 두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Q. 2019년 7, 8월의 일본 보복 조치 철회는 현 상황에선 어려운가. A. 당장은 어렵다. 지난해 7, 8월 조치는 강제동원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는 일본 정부의 입장이 반영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은 상황에서 조치의 철회는 실익이 없다고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적어도 표면상 이러한 입장을 드러내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일정한 시기에 조치를 철회하는 것이 명분상 불가능하지는 않다. 오히려 관계 개선을 위한 포석이라는 측면에서 가능성도 있다. Q. 따지고 보면 65년 체제의 불완전성에서 지금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것인데, 65년 체제의 불완전성, 예를 들어 식민지배의 합법·불합법의 한일 간 불일치를 수정한다든가, 혹은 개인청구권 문제에 대한 한일의 불일치를 수정한다든가 하는 노력은 불가능한가. A. 결국 본질은 식민지배의 불법성에 있다. 1965년 당시 이 문제에 합의할 수 없었던 양국은 “합의를 하지 않았다는 것에 합의한 ‘비합의의 합의’”로 일단락지었다. 결국 문제는 봉합됐고 해결은 다음 세대에 넘겨졌다. 당시로서는 불완전하지만 차선이자, 최선이었을 것이다. 결국 지금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언제든 일어날 문제였고,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필요하다고 본다. 다만 당장의 해결은 어렵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역사교육과 기림사업 등을 통해 꾸준히 고민해 나가야 할 문제다. Q. 시민 레벨의 교류와 협력, 연대를 통해서 톱다운이 아닌 버텀업으로 양국 정부를 압박하자는 논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A. 동의한다. 흔히 양국 지도자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한일관계는 지도자의 결정과 의지만으로 풀기 어렵다. 심지어 그렇게 한다 한들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2015년 위안부합의를 통해 경험했다. 지금의 사회는 더 이상 지도자들의 결정과 합의 만으로 좌지우지되는 사회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레벨의 교류와 협력, 연대를 기반으로 상대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역사문제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좁히며, 문제해결을 위한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해 나가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Q. 한일관계를 전망한다면. A. 당분간 큰 움직임은 없을 것 같다. 현금화를 막기 위한 일본 정부의 지속적인 압박은 있겠지만, 법적 절차에 한국 정부가 관여할 수는 없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위태로운 관계가 지속될 것이다. 걱정스러운 것은 한일관계에 갈등이 고착화되고, 위기가 일상화되는 일이다. 문제해결 노력은 지지부진해지고, 사람들의 관심은 적어질 것이며, 피해자들의 고통과 국익 손실만 남는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양국이 갈등을 넘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최은미 아산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한국외국어대학교를 나와 고려대에서 정치학 박사를 취득했다. 미국 미시간대학교(2012~2013년)와 일본 와세다대학교(2013~2014)에서 방문연구원을 거쳐 국립외교원 일본연구센터 연구교수를 지냈다. 일본 정치외교, 한일관계, 동북아다자협력이 연구테마다.   황성기 평화연구소장 marry04@seoul.co.kr
  • 민주주의는 ‘투쟁·통합’ 두 얼굴 가진 야누스의 정치

    민주주의는 ‘투쟁·통합’ 두 얼굴 가진 야누스의 정치

    이변이 발생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침체의 늪에 빠졌던 미래통합당의 정당지지율이 민주당을 앞질렀다.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공고한 대세론을 유지하던 이낙연 전 총리의 지지율을 앞섰다. 반면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은 취임 후 처음으로 40% 이하로 떨어졌다. 이 상황을 호사다마(好事多魔)로 해석해야 할까? 이 상황은 민주당이 넉 달 전 4·15 총선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둔 것과 대비되고 두 달 전 60~70%대를 유지하던 대통령의 지지율과도 대비된다. 민주당, 대통령, 이낙연 전 총리의 지지율이 한배를 탄 양상이다. 총선 후 오거돈 사건, 박원순 사건, 윤미향 사건 등이 이어지는 가운데 부동산 문제가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부동산이 강력한 것인가, 아니면 정당체제가 취약한 것인가?● 한국, 해방 후 75년간 투쟁 일변도 정치 지속 프랑스가 낳은 20세기의 실천적 석학 모리스 뒤베르제가 창안한 이론에 ‘뒤베르제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정당정치에서 소선거구제는 양당제에 가깝고 비례대표제는 다당제에 가깝다는 법칙이다. 현실정치에 잘 맞아떨어지는 말이다. 그러나 소선거구 양당제 정치나 비례대표 다당제 정치의 어느 쪽이 정치 안정에 더 기여하는지에 대해서는 만족할 만한 설명이 없다. 정당정치는 시민혁명 이후 유럽에서 먼저 발달해 근대의 정치 발전과 정치적 안정화에 기여했다. 봉건제가 무너지고 근대가 시작되던 혁명기에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이해관계의 갈등을 조절하는 데 정당과 의회와 선거라는 기제가 유용하게 작용했다. 정당은 좌파와 우파, 자본가와 노동자, 지역과 종교, 언어와 문화를 대표했고 정당정치는 이들 간의 차이를 조절하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사회통합과 정치 발전에 기여했다. 이것이 오늘날 유럽 정치의 모습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이에 비견되는 근대정치의 유산을 만들지 못했다. 유럽이 봉건제의 모순을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으로 해결하면서 근대를 열어 나갈 때 조선은 왕조체제의 내적 모순으로 자멸하면서 결국 일본에 의한 식민지 근대를 강요당했다. 우리에게서 근대는 굴절이자 몰락이었다. 우리는 식민지 근대 위에 해방 후 미국식 현대가 수입돼 중첩되는 제3세계의 보편적 과정을 거쳤는데, 여기에 분단과 전쟁이라는 예외적 사건이 부가되면서 한국 정치의 특수성이 만들어졌다. 그 후 해방 75년이 분단 75년이 됐다. 우리는 해방이 곧 분단인 비극의 시대를 살고 있다. 해방 정국은 근대에서 현대로의 과도기였고 한국전쟁은 그 과도기 정치의 결정판이었다. 한반도는 동포와 형제를 절대 악으로 간주하는 절멸의 정치를 구사했다. 절멸의 정치가 남한에서는 우편향의 극단적 이념 대결로 나타났다. 이념 대결은 군사독재를 낳고 군사독재는 지역 대결을 낳았으며, 부조리와 몰상식과 폭력을 낳았다. 이것이 얼마 전까지 보았던 한국 정치의 원형이다. ● 의회는 투쟁에 대한 ‘백신’ 역할 하는 장치 1987년 6월항쟁은 몰상식한 한국 정치를 혁명적으로 바꾸어 버린 대사건이다. 이 사건의 여파가 노태우 정부의 자유화, 김영삼 정부의 탈군사화, 김대중 정부의 재벌개혁, 노무현 정부의 탈권위주의화로 이어졌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의 출범으로 역사적 반동화가 시도됐지만 반동의 물결이 6월항쟁의 벽을 넘지는 못했고, 다시 문재인 정부가 등장하면서 원상회복됐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문제가 있다. 역사적 탈군사화로 독재가 몰락하고 극단적 이념 대결의 시대가 퇴조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치는 여전히 분단에 기초한 우편향적 이념 구조와 내면화된 지역 대결 구조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 이 구조는 한반도에서 분단이 해소되기 전까지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분단국가의 유전자와도 같은 것이다. 그저 분단 구조 위에서 국내외 정세의 영향을 받아 남북 대결과 이념 대결의 강도가 달라지는 정도에 따라 정치적 대결의 양상이 달라지는 정도의 부수적인 변화가 있을 뿐이다. 이것이 한국 정치의 기본틀이다. 한국 정치에 작용하는 최근의 대표적인 국내외 정세는 밖으로는 미중 대결이고 안으로는 대통령 탄핵이다. 미중 대결은 과거의 미소 대결처럼 한국 정치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절대 변수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외생 변수의 특성상 미중 대결이 아직은 한국 정치에 직접 작용하지 않고 다만 미래의 파급력을 미루어 유추할 뿐이다. 반대로 내적 변수인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인한 상황은 최근 3년간 우리 정치에 직접 작용하고 있다. 이것을 탄핵정치 혹은 탄핵의 후폭풍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인데 대결정치, 막말정치, 장외정치 등 최근 보았던 동물국회와 식물국회는 탄핵정치의 생생한 사례들이다. 이것은 보수도 아니고 실용도 아닌, 이념도 없고 철학도 없이 그저 편협한 지역주의에 근거한 극우 화풀이 정치 그 자체였다. 탄핵을 인정하지도 않고 탄핵에 반성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미래통합당의 정당 지지율이 올랐다. 오비이락 격으로 몇 가지 정책에서 진보에 버금가는 정책적 선회를 감행하고 있다. 미래통합당의 정책적 선회가 어떻게 될지 쉽사리 결론을 전망하기는 어렵지만 미래통합당이 탄핵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 우리 정치가 탄핵정치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기에 적극적으로 환영하고 싶다. 정당 지지율 1위 정당이 앞장서서 동식물 국회를 만들지는 못할 것 아닌가. 뒤베르제는 서구 민주주의를 야누스의 두 얼굴에 빗대서 투쟁과 통합의 정치로 설명했다. 투쟁이 없는 통합은 사기성이 짙다. 반대로 통합 없는 투쟁 일변도의 정치는 자기 파괴적이다. 인간사회에서 이익이 대립하는 한 갈등과 투쟁은 불가피하겠지만 시대와 상황에 따라 갈등의 방식과 투쟁의 장소는 선택할 수 있다. 적벽에서 칼로 싸울 것인지 여의도에서 말로 싸울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에서 역사적 진보의 결정적인 증거는 칼을 말로 바꾸고 폭탄을 투표용지로 바꾼 후 의회라 불리는 유연한 상설 전쟁터를 설치해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코로나에 백신이 있는 것처럼 의회는 투쟁에 대한 백신 역할을 하는 장치인데 이 속에서는 투쟁과 통합이 일거에 이루어진다. 중세가 저물어 가면서 신에 대해서 인간이 주목받고 속박에 대해서 자유가 부각되던 인류사 격동의 시절에 뒤베르제가 자유에 대한 논란을 “한 사람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가 시작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끝난다”는 말로 정리했다. 뒤베르제의 자유론은 그보다 200년 앞선 계몽주의 시대의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승계한 것인데, 유럽에 비해 자유를 위한 투쟁의 경험이 제한적인 우리로서는 깊이 경청할 만하다. 특히 절대자유를 방종으로 경계하는 제한자유론이 절대권력의 등장을 몰락의 서막으로 간주해 차단하고자 한 제한권력론에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 분단·반공 기억 넘어 ‘통합’의 정치 시도 기대 우리는 해방 후 75년 동안 투쟁 일변도의 정치를 했다. 우리 정치사의 투쟁은 남북 대결의 연장이었고 미소 냉전의 그림자였다. 그 와중에도 통합의 정치가 시도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냉전과 분단과 지역주의가 넘사벽이었고 몰상식과 부조리가 장애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화도 있었다. 미소 냉전구조가 사라졌고 남북 관계도 예전과 다르다. 무엇보다도 우리 스스로도 많이 변했다. 이런 상황에서 분단과 반공과 과거의 기억에 기대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마침 미래통합당의 정당지지율이 크게 오르고 당의 정강정책에도 커다란 변화가 예고되는 상황이니 이참에 투쟁 일변도의 정치가 투쟁과 통합의 두 얼굴의 정치로 바뀌기를 기대해 본다. 신화 속의 비판적 야누스가 우리 정치에는 희망일 수도 있겠다. 상지대 총장
  • 빈칸으로 남은 경희궁 방공호… 아픈 유산도 안고 가야 할 이유

    빈칸으로 남은 경희궁 방공호… 아픈 유산도 안고 가야 할 이유

    국보나 보물이 문화유산의 전부는 아니다. 시민의 일상과 조금 더 가깝고 그러하기에 더욱 생명력이 느껴지는 문화유산이 있다. 서울시민이 근현대를 살아오면서 함께 만들어 온 공통의 기억이나 감성이 응축된 유·무형의 모든 것들 가운데 미래세대에게 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대상으로 하는 서울미래유산이 바로 그것이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20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의 ‘제12회 돈의문 주변’은 서울미래유산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코스로 잡았다. 정동의 옛 문화방송 사옥이자 현 경향신문 사옥에서 시작, 창덕여중 담장~경교장~돈의문박물관마을을 거쳐 종착지인 경희궁 방공호로 향했다.총연장 18.6㎞, 높이 5~8m의 한양도성. 조선 건국과 함께 쌓기 시작한 이 성은 놀랍게도 축성 기간이 단 98일에 불과했다. 49일씩 2번에 나눠서 했는데, 그 시기가 각각 한겨울인 음력 1~2월과 추수 뒤 다시 겨울 초입이었다. 봄가을처럼 공사하기 좋은 계절을 내버려두고 굳이 겨울에 공사를 강행한 이유가 있을까. 세상사 모두 이유가 있는 법. 새로운 왕도의 치안을 위해 성을 세월아 네월아 지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또 백성을 오래 잡아 두는 것만큼 원성을 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태조 이래 세종과 숙종, 순조 대를 거쳐 꾸준히 개보수하는 등 힘겹게 짓고 이어 온 한양도성의 현재 모습은 그러나 예전 같지 않다. 흥인지문에서 동대문디자인플라자까지, 광희문 언저리에서 장충체육관까지, 숭례문에서 인왕산 밑까지는 거의 남아 있는 게 없다. 일제강점을 전후한 시기에 한양도성의 평지 부분을 헐어버린 결과다. 일부는 사가의 축대나 벽으로도 이용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번 투어 코스인 창덕여중 후문에 가면 학교 담장의 기초로 이용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한양도성이 일제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것도 물론 아니다. 1963년 사적으로 지정한 이후 1975년쯤 이른바 ‘국방유적 성역화’를 위해 여러 구간에 걸쳐 복구작업을 진행했다. 박정희 정권은 군사정권에 의한 통치의 정당성을 부각하고자 국방 관련 유적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를 진행했다. 문화재는 이렇게 정치적 이유로 사라질 뻔하다가도 역시 같은 이유로 다시 살아나기도 한다.옛 문화방송 사옥은 건물 상부의 창문틀을 브라운관 텔레비전 모양으로 설계하고 송신탑도 남겨 둬 누가 봐도 방송사 사옥답다. 지난주 투어 때 들른 아르코미술관과 아르코예술극장, 그리고 옛 샘터 사옥을 설계한 김수근의 작품이다. 1층 현관부에 외벽을 치지 않고 비워 둠으로써 지금처럼 장맛비가 내릴 땐 잠시 비를 그을 수도 있고, 햇볕이 강할 땐 산책자들의 그늘막 역할을 해 주기도 한다. 일반적으로는 최대한 격벽을 쳐 임대수익을 극대화하고자 하지만 이 건물은 남다른 면이 있다. 건축가의 센스와 건축주의 배려가 엿보인다. 다만 서울 내 김수근의 작품 중 14개가 서울미래유산에 등재됐지만 이 건물은 아직이다. 한국 방송의 역사나 건축적인 면에서 무게감이 각별하지만 아직 소유주의 신청이 없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서울미래유산 목록을 두텁게 할 수 있는 예비후보 같은 건물이다. 다음 목적지는 경교장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가 있던 곳은 중국 상하이도 충칭도 아니다. 돈의문 터를 중심으로 옛 문화방송 사옥 맞은편에 있는 강북삼성병원 자리에 있었다. 최근까지 강북삼성병원의 현관 구실을 해 온 경교장이 바로 그곳이다. 경교장의 원래 명칭은 ‘죽첨장’(竹添莊)이었다. 갑신정변 이전까지 조선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일본공사 다케조에(竹添) 신이치로의 성을 딴 것이었다. 단 실제 소유주는 일본인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금광을 개발해 ‘조선의 황금귀신’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부를 축적한 친일부역 혐의자 최창학이었다.“해방은 도둑같이 뜻밖에 왔다”는 함석헌의 말마따나 갑작스러운 해방은 죽첨장에 새로운 운명을 부여한다. 전투기를 헌납하는 등 친일부역을 열심히 했다 해방을 맞은 최창학이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 이 건물을 오랜 타국 생활 끝에 환국한 임시정부에 내놓은 것이다. 경교장에 여장을 푼 백범 김구 일행은 건물 이름을 왜색이 짙은 죽첨장에서 근처에 있던 다리 ‘경교’의 이름을 따 경교장으로 바꾸고 임시정부 청사로 삼았다. 그러고는 해방정국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남북분단을 막기 위한 활동들을 펼쳐나간다. 김구가 북행을 결의하는 등 통일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한 곳이다. 그러나 1949년 백범이 서거하면서 경교장의 운명은 또다시 파란을 겪는다. 최창학이 되가져간 이후 자유중국대사관과 미군 특수부대사령부, 베트남대사관저 등으로 이용되면서 원래 모습을 서서히 잃어 갔다. 이윽고 1968년 강북삼성병원의 전신인 고려병원에 인수되고부터는 건물 내부가 완전히 개조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까지도 원무과와 X선 촬영실, 의사휴게실 등으로 쓰이면서 외벽만 그대로일 뿐 내부는 원래의 모습을 상당 부분 잃은 상태였다. 그랬던 경교장이 새로운 출발대 앞에 선 것은 2005년이었다. 늦은 감이 있지만, 김구 암살 이후 별다른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던 경교장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것이었다. 그리고 2013년, 사적 지정 이후에도 김구가 암살당한 2층 집무실 정도만 원형에 가깝게 재현돼 관람객을 맞았으나 드디어 건물 전체를 당시의 모습에 가깝게 보수해 일반에 무료로 공개하기 시작했다. 해방정국과 그 이후 펼쳐진 정치지형에서는 등한시될 수밖에 없는 공간이었지만, 민주화 이후 사회적 성숙이 거듭되고 시민사회의 관심이 커지면서 비로소 경교장도 문화재의 반열에 오를 수 있던 것이다. 즉 동시대인들의 관심과 참여 여부에 따라 파괴되기도 하고 보수되기도 하며, 또 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한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문화유산도 생멸함을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이다.경교장과 경희궁 방공호 사이에 있는 돈의문박물관마을, 그중에서도 서울미래유산관을 찾았다. 지금은 470개의 서울미래유산 중 1960~80년대에 시민들의 사랑을 받던 식당과 찻집, 극장을 비롯한 휴식공간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관심이 간 대상은 전시물이 아니었다. 출입문 옆에 비치된 ‘내가 제안하는 서울미래유산’ 설문지였다. 말 그대로 이곳을 찾은 시민들에게 과연 당신이라면 무엇을 서울미래유산으로 꼽고 싶은지 묻고 있었다. 서울미래유산의 본질이 그 질문 속에 녹아 있었다. 무엇이 서울미래유산이 되고 안 되고를 결정하는 것은 전문가들의 식견만이 아니다. 서울미래유산은 다른 어떤 문화재체계에 견줘 개방적인 개념이다. 실제로 시민이 직접 제안한 대상을 두고 서울미래유산 등재 여부를 판단하는 심사가 열리곤 한다. 판단 가늠자는 오로지 서울시민 개개인에서 나아가 우리의 미래세대에게 어떤 가치가 있느냐는 점이다. 시대적 공감대에 따라 문화재로 지정되거나 등재되고, 때론 철회되기도 하는 등 부침을 거듭할 수 있는 문화재란 존재…. 이번 투어는 서울미래유산을 하나도 만나지 않은 여정이기는 했다. 하지만 바로 그러하기에 서울미래유산의 의미와 내용, 나아가 문화유산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루트이기도 했다.마지막으로, 서울에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태평양전쟁의 흔적이지만 시민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공간이 하나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주차장 한쪽에 숨어 있는 이른바 경희궁 방공호가 그것이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초 일제가 미군 폭격에 대비해 만든 것이다. 길이 110여m에 폭 9m, 높이 6m 정도의 규모로, 내부는 20개 남짓한 크고 작은 방들로 구성돼 있다. 특히 콘크리트 외벽의 두께는 자그마치 3m나 됐다. 일제가 만든 서울 시내의 다른 방공호들은 철거되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부정적 유산이기에 보존해야 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서다. 그러고 보면 경희궁 방공호 역시 아직까지 그 어떤 문화재로도 지정되거나 등록돼 있지 않다. 서울미래유산도 아니다. 하지만 그게 온당한 처사일까. 역사와 문화유산을 대할 때 긍정적인 것은 취하고 부정적인 것은 지양하기만 한다면 성찰의 시간이 끼어들 틈이 없다. 암울했던 과거를 떠오르게 할 수는 있지만 도리어 이 시대에 전하는 메시지는 강렬한, 다크 헤리티지가 지니는 현재적 가치는 이 땅의 어제와 오늘을 돌아보게 하는, 즉 성찰과 반성의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데에 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으며, 어떻게 해야 그 상흔을 보듬을 수 있고, 나아가 비슷한 상황의 재발을 막고 더 나은 미래를 그려 보려는 사고의 여유는 이 같은 부정적인 역사유산이 지닌 현재적 존재 이유 중 하나다. 2013년 상암동 일본군 관사가 서울미래유산에 등재된 것처럼 이 방공호도 어떻게든 남아 지나간 식민지 시대의 아픔을 증언하는 동시에 잊지 못할 교훈을 주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지 않을까. 글 권기봉 ‘다시, 서울을 걷다’ 저자 사진 김학영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제13회 항동철길 ●출발일시 : 8월 22일 오전 10시 온수역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사설] 사과·반성 없는 아베, 한일 경색 풀 의지 있나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그제 패전 75주년 ‘전국전몰자추도식’에 참석해 ‘적극적 평화주의’를 강조했다. 적극적 평화주의란 표현이 흡사 평화를 수호하는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듯 들리지만 실은 자국의 안보는 자국이 지킨다는 원칙하에 자위대 역할을 늘리겠다고 강조한 데 지나지 않는다. 일본제국주의 군대에 의해 침략과 식민지배를 경험하고 태평양전쟁 때 군인·군속 등 병력 동원과 군수산업체 등에서 일한 노동자 등의 노무 동원,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등의 아픈 기억을 가진 한국으로선 결코 달가운 연설은 아니다. 아베 총리는 연설에서 사과나 반성의 언급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2012년 12월 두 번째로 총리가 된 뒤 매년 8·15 행사에서 되풀이하던 ‘역사와 겸허하게 마주한다’는 말조차 올해는 쓰지 않았다. 또한 A급 전범 14명이 합사된 야스쿠니에 공물도 보냈다. “과거를 돌아보면서 깊은 반성에 입각해 다시는 전쟁의 참화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한다”고 말한 나루히토 일왕은 아베 총리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지금 한일 관계는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사상 최악이다. 2018년 10월 대법원이 강제동원 피해자의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지만 피고인 일본 기업이 1억원씩의 배상금 지불을 거부하면서 갈등의 골이 커졌다. 일본 정부는 강제동원 문제가 청구권협정으로 다 해결됐다면서 개인과 민간기업 간 민사소송에 사실상 개입해 일본 기업의 배상금 지급을 차단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일본 정부와 마주 앉을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강제동원 해법을 한일 정부가 모색하고 양국 관계 개선을 도모하자는 제안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 제안이 일본 양보를 압박한다느니, 구체적 방안을 한국이 먼저 제시하라느니 하는 얘기들이 나온다는데 어불성설이다. 법원은 강제집행을 위한 일본 기업 자산의 현금화에 들어갔다. 피고의 즉시 항고로 시간을 벌었다지만 결국 현금화의 순간은 오게 돼 있다. 시간이 얼마 없다. 한일은 허심탄회하게 양국에서 제기된 여러 가지 대안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접점을 찾는 노력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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