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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창 오세창전(외언내언)

    3·1운동 33인의 한 분이며 언론계의 선구자이고 서예와 전각의 독보적 대가였으며 금석문·미술사학자로서 탁월한 안목을 지녔던 분­바로 위창 오세창 선생이다.르네상스시대에는 한 사람이 여러 분야에서 천재성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아 「르네상스적 인물」이라고 불렀다.화가·조각가·과학자·해부학자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사람이 그 예가 된다. 독립운동가로서 「3·1선언」에 민족대표로 참여했다가 3년의 옥고를 치른 것만으로도 그의 자취는 우뚝하다.33인 중 상당수가 3·1운동 뒤 변절,친일파가 됐던 점을 고려한다면 그의 비중은 더욱 높아진다.언론인으로서의 오세창은 1886년 박문국에 들어가 한성주보의 기자를 했으니 근대신문 최초기의 기자라고 할 수 있겠다. 언론을 통한 구국활동에 힘을 쏟은 그는 초창기 만세보·대한민보 사장을 지냈으며 광복후 1945년 11월22일에는 81세 고령에 창간된 서울신문의 초대 사장으로 추대됐을 정도.언론계를 떠난지 반세기만에 「해방조선의 대변지」인 서울신문 창간 사장으로 복귀한 것이다. 독립운동가로,언론인으로 너무도 우뚝했던 탓에 예술가로서의 오세창은 일반에게 그리 알려지진 않았다.일찍 서구문명과 학문에 눈떴던 그는 서화에도 뛰어난 감식안을 가지고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우리나라 역대 서화가 1천1백17명의 사적과 평전을 집대성한 역저 「근역서화징」을 펴냈다.해박한 지식과 고증을 바탕으로 한 이 저서는 우리 미술사 연구의 시원을 이룬다. 전서와 전각으로 일가를 이루었던 위창의 작품을 모은 특별전시회가 오늘부터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다(4월7일까지).서예작품 1백20여점 외에 전각도장 2백40점과 감식자료 30여점 등이 전시돼 그의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부친 오경석이 중국의 명사들과 교유하며 주고받은 서간과 위창 자신의 서신들도 함께 전시돼 당시 지식인들의 생활 일면을 보여주기도 한다.그의 예술적 노작들은 해방 이전 일제하의 질곡밑에서 이루어졌다.식민지 치하에서 그의 예술혼이 더욱 치열했음을 알게 한다.
  • 1백58조원의 1백58조 배로도 안될…(박갑천 칼럼)

    일본에는 「땅 끌어당기기」신화가 있다.일본의 땅뺏기버릇은 그런 신화에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게 한다.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신화다. 옛날 지금의 시마네켄(도근현)동 쪽 이즈모(출운)라는 나라에 야쓰카미즈오미쓰누노미코토(팔속수신진야명)라는 신이 있었다.나라를 둘러보고 조붓하다 생각하면서 늘릴 마음을 먹는다.바다저쪽은 신라땅.거기 길게 뻗쳐있는 곶에 밧줄을 걸어 잡아당긴 곳이 지금의 히노미사키(일어기),때려박은 말뚝이 산베산(삼병산),밧줄이 오야시로마치(대사정) 서쪽 해안으로 되었다.같은 방법으로 이웃나라(고지,좌기,농도)땅도 끌어당긴다.그렇게 면내어 넓힌 땅이 지금의 시마네반도라 한다. 신화에는 그 겨레의 마음이 어린다.섬나라여서 남의 땅에 개염부리는 걸까.그 괴상한 이름의 신은 신라땅부터 당겨갔다.신화의 발상지가 지금의 시마네켄이라는 점이 또 흥미롭다.오늘날의 땅뺏기라 할수있는 독도영유권 주장도 이른바 「시마네켄고시」라는 것으로써 하고있지 않은가.시마네켄은 예나 이제나 땅뺏기 전초기지로구나 싶어진다. 민족문제 연구소에서 「조선총독부 통계연보」등 일본쪽 자료를 바탕으로해서 만든 논문이 나왔다.「식민지배기간 일본정부 수탈에 대한 연구」가 그것이다.그에 의할때 인력수탈·물자수탈·자금수탈…등을 합치면 요새 우리돈으로 1백58조원에 이른다는 계산이다. 물론 적은 돈은 아니다.하지만 결코 돈으로 갚아낼수 없는 수탈도 있다.그것은 35년 강점기간동안 입힌 마음의 생채기.온겨레가 기죽어 오금을 못편 세월이었다.그들의 땅뺏기에 맞서 싸우다 죽은 사람은 얼마인가.그 고결한 죽음을 돈으로 장사웃덮기할 수 있겠는가.멀쩡한 젊은이들 끌어다가 총알받이 만들었을때 흘린 유족의 눈물을 돈으로 갈음해낼수 있겠는가.이른바 「정신대」로 끌려가 한살이를 망친 여성의 한을 돈으로 탕감해 낸다고 할수도 없다.1백58조원의 1백58조배로도 보상해낼수 없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돈이 앞서가면 모든 길이 열린다』(셰익스피어 「윈저궁의 바람둥이 아낙네들」)고 했다.『황금이 말문을 열때 혀는 힘을 잃는다』는 말과 맥이 같다.그러나 돈으로만 따지려들때 『입에 이길수는 있을지 몰라도 마음을 굴복시킬 수는 없다』(「장자」잡편:천하).할퀴여찢긴 마음이 어찌 돈으로 아물겠는가. 그걸 아물리는 길은 참마음의 뉘우침뿐이다.하건만 저들은 어떤가.지금 오히려 독도에 밧줄걸어 영차 영차하려 하지않는가.
  • 김 대통령의 ASEM 인은 성공적(사설)

    ◎한국외교 21세기 지평 넓혔다 김영삼 대통령의 성공적인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외교로 한국이 선진국외교로 진입하는 마지막 관문을 통과했다는 국제적 평가를 받게 됐음을 우리는 의미있는 일로 받아들인다.세계외교의 전통적 중앙무대인 서유럽 국가들과 아시아국들간의 포괄적 유대강화를 논의한 이번 방콕 정상회의에서 한국 대통령이 핵심적 중개자·조정자의 역할을 훌륭히 해냄으로써 한국외교는 곧 선진국기구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과 더불어 당당하게 선진대열에 서는 새 지평을 열게 된 것이다.이는 곧 유엔 안보리이사국 진출과 함께 문민정부가 설정한 외교 선진화의 양대목표 달성을 뜻한다. ○선진국외교 관문을 통과 이번 1차 ASEM에서 한국의 활약이 성공적이었으며 앞으로 ASEM에서 주도적 역할을 맡게 됐음을 단적으로 확인해주는 대목이 오는 2000년 3차 정상회의의 한국개최 결정이다.유럽연합(EU) 15개국,아시아 10개국등 25개국 정상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영국 2차회의(98년)에 이어 3차 정상회의를 한국에서 열기로 결정한것은 향후 한국의 세계 외교무대에서의 역할과 위상을 예고해주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25개국 정상들이 참석하는 국제회의 개최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며 21세기가 시작되는 해에 두 대륙 정상들이 대거 참가하는 회의를 개최한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처음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것이기 때문이다. 김대통령은 3차회의의 한국개최를 제의,만장일치로 유치하는 외에 우리의 조정자적 입지를 최대한 살려가며 ASEM에서의 우리 위상을 강화하는데 성공 했다.아시아·유럽 두 대륙간 경제협력 3원칙을 제시하고 아울러 초고속정보통신망 건설,장기적 발전방향과 협력모델을 제시하기 위한 「아시아­유럽 비전그룹」설치등을 제안하여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김대통령은 특히 한국이 아시아·유럽·북미라는 세계 3대축을 연결시키는 핵심에 위치해 있으며 아시아와 북미를 잇는 아·태경제협력체(APEC)에서 중요한 중개자 역할을 하고 있음을 들어 ASEM에서도 같은 입지를 확보했다. ○핵심조정역 휼륭히 수행 김대통령은 취임후 3년동안 모두 8번 해외순방외교에 나서 77차례의 정상회담을 가졌다.9번째 순방외교인 이번 ASEM 정상회의에서 큰 성과를 올린데는 이같은 순방·정상외교가 밑거름이 됐음은 물론이다.아울러 식민지배와 침략의 역사 때문에 유럽국과 일본을 꺼리는 동남아국가연합(ASEAN)7개국의 정서가 우리에게 유리한 요소로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김대통령은 이번 ASEM 정상회의 참석과 함께 인도·싱가포르순방을 통해 우리외교의 영역을 대서양­인도양­태평양으로 크게 넓혔다.특히 신실크로드 개척을 통한 서남아와의 교류확대 기반조성은 우리외교사에 새 장을 기록한 것이었다.또한 중국·일본 총리와의 개별회담에서 어업협정등 쌍무적 현안들을 논의,적잖은 실무적 성과를 올렸다.특히 한·일정상회담에서 독도문제에 대한 우리입장을 분명히 하면서도 양국관계의 파탄을 피하는등 원숙한 외교솜씨를 발휘한 것은 특기할 일이다. ○21세기 주도할 청사진을 이제는 각론으로 들어가 외무부를 비롯한 행정부처가 구체적 결실을 거두는 작업으로 분주해야 할 차례라고 본다.ASEM의 다소 추상적 회의결과에서 알찬 실리를 챙기는 일을 2000년 3차 정상회의 준비작업과 함께 추진해야 한다.유럽연합 개별국 및 인도등 순방국들과의 실질협력을 증대할 후속조치도 서둘러야 한다.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번 김대통령 순방외교가 일궈낸 가장 큰 메시지를 가시화하는 일일 것이다.『21세기를 맞아 우리국력이 세계 6위권에 접어들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 외교무대에서 중개자·조정자로서 중심 역할을 맡게 될것』이란 예고에 걸맞는 「21세기 마스터플랜」을 마련하는 일이 그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 이달의 독립운동가 신석구 선생

    ◎「독립선언」 민족대표… 신사참배 끝내 거부/감리교 구역장 맡아 전도하며 항일운동/일장기 게양 거부… 체포·투옥 고초 겪어 국가보훈처는 2일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으로 태화관 독립선언식에 참석하고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투옥되는 등 국권회복에 힘쓴 은재 신석구선생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선생은 1875년 5월 3일 충북 청원군 미원면 금관리에서 신재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유가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 한문을 수학한 선생은 20대 초반 서울에서 한학을 가르치고 농사를 짓기도 했으나 개항 이후 외세의 침략과 침탈의 위기에 놓인 조국의 현실은 선생을 안주하도록 하지 않았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전개된 반일 국권회복운동은 언론,종교,교육,학술을 통한 국민계몽운동과 즉각적 무력투쟁인 의병운동으로 나뉘었다.선생은 이 가운데 종교를 통한 국민계몽운동으로 국권회복을 모색했다. 선생은 1908년 3월 미국인 선교사 왕영덕(A·W·Wasson)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개성 북부교회를 맡게 된다.한국 병탄 이후에는 감리교 강원도 홍천구역장과 경기도 가평구역장으로 활동하면서 암암리에 국민계몽활동을 폈다.1910년대 전도를 통한 국민계몽활동은 곧 항일의식의 고취요,독립운동의 전파나 다름없었으며 1919년 2월 감리교 목사인 오화영의 권유로 3·1운동의 추진계획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선생은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으로 선정되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가졌다.이 일로 선생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같은 일제의 탄압은 선생의 몸을 구속할 수는 있었어도 독립의지를 꺾지는 못했다.선생은 재판정에서 『조선독립은 이루어진다.독립이 될 때까지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당당히 대답,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일제는 1931년 9월 만주침략과 중·일전쟁을 도발하면서 본격적인 「황민화」정책을 감행한다.이에 따라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해 일본어 상용,신사참배,황국신민서사,창씨개명 등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일본 신도에 대한신사참배는 감리교 목사이자 민족대표인 선생에게 종교적으로는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위요,민족적으로는 식민지 정책에 협력함으로써 조국과 민족을 배반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때문에 감리교단 결정에 의해 신사참배를 하던 분위기 속에서도 선생은 이를 단호히 거부,1938년 7월 다시 체포돼 2개월간 갖은 악형을 당하고 중병이 들어 석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끝내 굴복하지 않고 1939년 5월 신사가 없는 지역인 평남 용강군 신유리 교회의 담임으로 가서 항일 운동을 계속했다.1941년 3월에는 조선감리교회를 일본 기독교단의 산하에 두고 일제의 침략전쟁에 호응하려는 감리교 통리자의 친일 배족행위에 반대하다가 강제로 은퇴당하기도 했다. 같은해 12월 일제의 태평양 전쟁 도발 때에는 일본 경찰의 민족운동자 예비검속 조치로 1개월 이상 구금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더욱이 광복직전인 1945년 5월 선생은 대동아 전쟁 전승기원 예배 및 일장기 게양을 거부하다 용강경찰서에 다시 피검되는 등 한시도 일제에 대한 항쟁을멈추지 않았다. 광복 이후 선생은 북한지방에 남아 반공운동을 전개하다가 1949년 3·1절 기념 방송사건,1947년 3월 기독교민주당 비밀결사 사건으로 2차례 투옥됐다.이어 1949년 4월 진남포에서 반공비밀결사를 이끌었다는 죄목으로 북한 중앙정치보위부에 체포돼 10년형을 선고받았다.선생은 평양형무소에서 복역중 국군의 평양탈환 직전인 1950년 10월 10일 공산군에게 총살돼 순국했다.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일 정치인의 “적반하장”(오늘의 눈)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느끼는 것중 하나는 일본인들이 말을 참 잘한다는 것이다.말을 잘하는 것은 좋게 보면 사고가 잘 정리됐다고 할 수 있겠지만 굳이 뒤집어 이야기하면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거나 교묘히 책임을 회피하고 상대방에게 책임을 지우는데 말솜씨를 발휘한다는 부정적 인상을 받기도 한다.일본 정치지도자들의 연설을 들으면서 이상과 목표에 대해 뜨거운 감동을 받는 일은 매우 드물기도 하다. 77주년을 맞은 3·1절날 일본 국회의사당과 외무성 앞에서 한국에서 온 두 시민단체의 시위가 있었다.모두 독도의 영유권 주장에 대한 규탄시위였다.지난해 3·1절에도 일본 국회의사당 앞에서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 국회의원을 만나 바른 해결을 호소하고 이어 지지자들이 시위를 벌였었다.2년 연속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가 벌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보는 마음은 착잡하다. 게다가 야당인 신진당의원 54명이 이날 「한국에 의한 독도의 점거에 대해 일본정부는 단호하게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이들은 성명에서 한국의 실효적 독도지배를 「명백한 침략행위」,「폭거」라고 표현해 듣는 귀를 의심케 했다. 돌이켜 보자.일본은 제국주의 수법을 일찍 배워 수천년 이웃나라를 집요하게 침략해 들어왔었다.한반도 식민지 침략의 과정에서 독도를 일방적으로 자국령으로 편입시켰다.식민지를 지키기 위해 중국을 침략했고 중국침략에 대한 국제압력에 대항하기 위해 동남아를 차례차례 침략하고 전쟁을 일으켰다.하지만 연전호소카와 모리히로(세천호희)전총리가 과거사에 대해 「침략전쟁」을 일으켰다면서 사죄하자 보수세력들은 거세게 반발했다.그뒤 「침략행위」로 표현수준이 낮아졌다.지난해 12월 종전기념식에서는 총리가 침략이라는 말조차 쓰지 않고 어물쩍 넘어갔다. 학살,탄압,경제적 착취,침략,전쟁,집단강간,강제노동,생체실험,민족말살 획책으로 점철된 수십년 침략을 침략으로 표현하지 않는 그들이다.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조차 침략의 역사를 반성하지 않는 증거이거늘 한국의 독도점유를 침략이라고 표현하다니….「말에 의한 침략」에 다름아니다. 아시아민족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 저들의 침략행위와 똑같이 침략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국제적으로 한국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려는 말의 유희임에 분명하지만 말솜씨 차원을 넘어 분수를 모르는 적반하장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 독도서 맞은 3·1절/한승원 작가(기고)

    ◎조국의 막내 땅… 동해수문장이여! 우리들의 막내둥이 땅,독도.너를 만나기 위해 떠나기 전날밤 나는 잠을 설쳤었다.3m이상의 파도가 일거라는 일기예보가 있었고,내 꿈은 내내 뒤숭숭했던 것이다. 오래전부터 나는 독도 너를 생각하기만 하면 「삼국유사」속의 만파식적을 떠올렸다.물결을 따라 오락가락하면서 하나로 되었다가 둘로 되었다가 했다는 섬과 그 섬의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자 외적이 물러갔다는 설화.그것은 아마 우리 민족이 섬나라 일본의 해적들에게 시달려온 첫번째 기록일 터이다. 일본의 역사를 읽어보면 자꾸만 「정한론」이 고개를 들곤 하는 것을 볼 수 있다.그 나라의 집권자들은 정치형편이 불안해지면 「정한론」으로써 돌파해 나가곤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임진왜란·정유재란을 일으켰고,36년간 우리를 식민지배했었다.요즘 들어서도 그들 중의 우파들은 식민지배가 우리 민족을 근대화시키는데 이바지했다는 둥,독도가 자기네 땅이라는둥 하고 허튼소리를 하곤 하는 것이다. 기상예보가 들어맞지 않기를 바라면서 나는 배에올랐고 조마조마해지는 가슴을 맥주로 달랬다.갑판위에는 달빛이 어렸고,하늘은 맑았고,별들이 총총했다.겨울 밤바다라고 하기에는 공기가 너무 따뜻했고 바다도 잔잔했다.귀바퀴 뒤에 붙이는 멀미약 처방을 한 사람들은 네가 몸담고 있는 동해바다의 파도를 깔보기 시작했다.한데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막내둥이 땅인 네가 우리에게 품을 열어주지 않을 거라는 불길한 조짐임을 나는 짐작했다.맑은 하늘 저 깊은 곳에 투명한 황새깃털 모양의 구름들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그 조짐대로,독도 너는 우리가 상륙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우리는 선상에서 흩뿌리는 겨울 비를 맞으며 행사를 치렀고,너의 품에 안겨보지 못한 아쉬움과 슬픔이 담긴 눈길로 너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뱃머리를 돌리지않으면 안되었다. 이쪽으로 가면서 어찌보면 코끼리처럼 보이고,다시 저쪽으로 가면서 어찌보면 코뿔소 처럼 보이고,눈을 씻고 다시 보면 돌진하는 성난 멧돼지 같고,거대한 군함 같은 우리들의 막내 땅,동해바다의 의젓한 수문장인 독도 너는 우리들의 숭엄한 자연이구나. 애초에 네 땅이냐 내 땅이냐 하는 논의 자체를 기분 나빠하듯 싶은 우리들의 막내인 독도.너를 위하여 어떠한 헌사를 해야 할지 나는 막연해진다. 돌부리에 다친 새끼 발가락이 아리고 쓰라려지듯,요즘 논의 되고 있는 너의 존재로 인하여 나의 중추신경줄에 아픔이 일어나 내내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불현듯 달려 왔다.하여 기분 나빠하는 독도야,다음에 찾아 올 때엔 부디 웃는 낯으로 나를 받아 들이고 기꺼이 품어다오.
  • 3·1절과 일본이기기(박화진 칼럼)

    일흔일곱번째 맞는 3·1절이다.우리에게 있어 「3·1절 그리고 일본은 도대체 무엇인가」를 다시한번 곰곰히 생각하게 되는 날의 이 아침이다. 특히 금년은 우리에게 3·1절이 있게한 일제의 패망과 3·1독립운동의 목적을 마침내 달성했던 광복후 50주년을 지내고 처음맞는 3·1절인 것이다.뿐만아니라 불과 50년만에 경제대국을 건설하고 정치·군사대국을 넘보면서 전성기의 일제를 능가하는 국력을 쌓은 일본의 아시아맹주를 노리는 패권주의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조짐이 여러가지로 드러나고 있는 시점이어서 더욱 의미심장한 3·1절이라 할수 있다. 「역사는… 적어도 일본의 경우엔 되풀이되는 것인가」,우리와 아시아 그리고 세계를 상대로 저지른 과거의 잘못에 대한 그나마의 형식적인 사죄와 반성도 볼수없게된 지금이다.침략전쟁을 미화하는가하면 이웃나라에 대한 국권찬탈을 합법적인 것으로 정당화하고 나섰으며 식민지통치가 발전의 은혜를 베풀었지 않는가고 강변할 만큼 변한 일본이다.그리고 마침내 역사적·현실적으로 명명백백한 우리국토인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 억지를 부리고 있는 일본을 우리는 보고있다. 역사·지리적으로 어쩔수없는 숙명적 이웃이요 경쟁자인 이 일본을 우리는 어떻게 해야한단 말인가.냉철한 이성의 입장에서 다시한번 진지하게 생각하고 현명하게 대처해나갈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될 역사적 시점에 우리는 지금 서있다고 할수 있다. 오늘의 우리국민과 정부가 갖고있는 대일자세와 정책은 한마디로 광복과 건국초기 이승만대통령의 반일육과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수있다.일제식민지로부터의 해방과 이데올로기분단의 건국이라는 한계상황의 불가피한 결과가 이대통령의 「반공과 반일」정책이요 국민교육이었다.그의 반일은 일제와 일본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주된 내용이었다.그것이 지난 50년간에 걸친 우리의 대일자세와 정책의 기본바탕을 이루어 왔다고 할수 있다.그리고 그것은 그동안 나름대로의 역사적 소임도 다했다고 평가할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대일자세와 정책은 실력없는 이승만식 감정적 반일만으로는 안된다는 사실을 오늘의 일본은 보여주고있다고 할수 있다.분노와 증오의 반일은 결국 실속없는 감정의 폭발로 이어질수밖에 없는 것이었다.80년대초의 일본역사교과서 왜곡파동에서 볼수 있듯이 그것은 일본에 대한 일시적 견제는 될수 있어도 근본적인 억제책은 될수 없는 것이었다.지금 우리가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은 단기간에 쉽게 간단히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바로 그 근본적인 이성적 억제책이며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일본을 능가하는 힘이요 국력이라 하지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왜 일제에 망국의 한을 당해야 했는가」부터 반성해야 할 것이다.그것은 오로지 사악한 일본제국주의 때문만인가.우리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책임도 없는 것인가.우리는 모든 것을 너무 일제탓으로만 돌린것은 아닌가 등에 대한 철저하고도 근본적인 발상전환적 자기반성에서부터 새출발해야 할 것이다.우리의 잘못과 책임이 더 크다고 각성할때 비로소 극일과 승일의 근본적인 일본대책은 시작될수 있다.결국 3·1절은 감정적 대일증오와 분노보다는 이성적 자기반성의 날로 승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일본이 우리를 우습게 보지 못하도록 하고 역사왜곡은 물론 더이상 망언을 못하도록 할뿐아니라 독도에 대해서도 엉뚱한 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할 「최선의 유일한」 방법은 결국 국력을 키우는 「부국」뿐이라고밖에 할수 없다. 그런 장기적 기본인식과 바탕의 노력위에서 가슴은 후련하나 실속없는 감정폭발 보다는,실속을 기할수 있는 이성적 대응을 냉철히 강구해 나가는 것도 현명한 대응일수 있다.무조건적이고 범국가적인 대일단결과 통합을 기하고 그것을 국가외교력으로 결집시키는 한편 역사왜곡과 망언 및 영토적 팽창주의가 계속되는한 일본의 유엔안보리상임이사국 진출을 반대하는 문제등에 대해 중국을 포함하는 동병상련의 아시아제국과 외교연합전선을 형성하는 것도 당장의 효과적인 억제책일수 있다.
  • 3·1절 새 감회(외언내언)

    올해 77번째 3·1절을 맞는 감회는 예년과 좀 다른것 같다.우리 후손들로선 무언가 새롭고,선열들에게도 떳떳하다는 느낌이다.광복 50주년을 맞아 작년 8월 단행된 구총독부청사 철거개시작업이 민족정기를 새롭게 일깨운 결과일 것이다. 지금 독도문제를 둘러싸고 국민적 일체감이 그 어느때보다 단단하게 조성된 것도 일제 잔재 청산을 통해 바로잡힌 민족정기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해방후 나라의 토대를 잡기도 전에 6·25라는 동족상잔 때문에 일제 잔재 척결을 철저히 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물론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정권의 소극적인 대처도 문제였다.그 결과 일제 침략과 식민지배의 상징인 총독부 청사가 해방 50년이 되도록 버젓이 서있었던 것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친일파가 독립유공자로 둔갑해 아직도 대한민국의 상훈록에 버젓이 등재돼 있다는 사실이다.지금 우리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에 대한 사법처리로 대표되는 역사 바로잡기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친일파 문제도 바로 이 역사 바로잡기 차원에서,민족정기 회복차원에서 재정리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보훈처는 독립유공자들 가운데 일제시대 친일파와 부역자였던 사실이 밝혀질 경우 이들의 상훈을 박탈할 방침이라고 한다.이를 위해 보훈처는 관계실무자와 사학계 교수들로 심사위원회를 구성,1895년 을미사변부터 해방때까지 항일활동으로 독립유공자로 선정,포상된 7천9백여명을 대상으로 본격적인 정밀조사에 착수할 것으로 알려졌다. 길게는 1백년전,짧게는 50년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친일행적을 색출해 상훈을 박탈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또 문민정부 출범초 이와 유사한 계획이 친일파 후손들의 방해로 좌절됐던 일을 상기한다면 웬만큼 강한 의지가 아니고선 이 일을 추진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걸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정부가 주도하고 있는 역사 바로잡기 운동은 친일파 정리문제에서도 새 국면을 열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 공직자 뛰어야 나라가 산다/조해녕 총무처장관 국정신문 기고

    ◎번영된 통일국가 건설 사명감 투철해야/「역사바로세우기」는 제2건국운동 인식을 조해녕 총무처장관이 「역사바로세우기와 공직자상」이라는 시론을 26일자 국정신문에 기고했다.「공직자가 뛰어야 나라가 산다」는 부제로 21세기를 앞둔 공무원 사회의 분발을 촉구하는 조장관의 글을 요약한다. 동아시아의 시계를 1백년만 되돌려 보자.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개방압력이 밀려오자 1천여년 동안 유지되던 동양 3국의 중세봉건주의는 종말을 고하였다. 중국은 1898년 무술개혁의 실패로 열강의 실질적 지배하에 떨어졌고,우리나라는 1894년 갑오경장의 실패로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반면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린 개혁세력들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재빨리 서구의 발전된 제도를 도입한 결과 근대산업국가를 이룩해 놓았다. 역사에는 가정이 필요 없겠지만 일본의 명치유신을 주도한 사무라이 계급 같은 사회집단이 만약 당시 우리나라에 있었다면,그리하여 김옥균의 개혁사상을 뒷받침할 수 있었다면 우리의 역사는 과연 어떻게 전개되었을까.1962년 우리 정부가 제1차 5개년계획을 세운 이후 34년 동안 우리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경험하였다.불과 1백달러 미만의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달러 수준으로 증가하였고,무역규모로는 세계 13위의 무역대국으로 발전하였다. 이렇듯 급속한 산업화의 성공배경으로 학자들이 수많은 요소를 나열하고 있지만 그중 빠지지 않는,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 성공적인 관료조직을 들고 있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이처럼 공무원들은 책상위에서,때로는 산업현장에서 우리나라의 지도를 바꾸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였다. 이제 불과 4년 뒤면 대경쟁(Mega Competition)의 시대가 기다리는 21세기이다.밖으로는 각종 무역개방압력이 밀어닥치는가 하면,안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북한과 대치하면서 한민족의 역량을 한군데로 결집시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흔히 공무원의 사기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자.과연 오늘을 사는 우리 공무원들은 어디서 진정한 의미의 사기를 찾아야 할까.나는 감히 사명감과보람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 개발시대에 우리 선배공무원들이 오직 조국을 내손으로 한번 근대화시켜 보자는 데서 사명감을 찾았다면 21세기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의 우리는 살 가치가 있는 깨끗하고 정의로운 사회,한민족 전체가 번영을 공유하는 통일국가 건설에서 다시 한번 사명감을 불태워야 한다.세계일류국가 건설에 매진하는 집단이 되어야 한다.우리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다. 우리의 자녀와 손자·손녀가 대대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터전을 굳건히 하고,통일 이후의 국가경영을 위한 각 분야의 정책을 지금부터라도 차분히 준비해 줄 수 있는 집단은 바로 공무원 사회 밖에 없다. 「역사바로세우기」운동이 잘못된 과거의 전환에 머무르지 않고,우리 사회의 새로운 출발을 기약하는 「제2의 건국」으로 승화될 수 있도록 우리 공무원이 나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국립극단,내일부터 「반도와 영웅」 공연

    ◎인니 독립전쟁 참가 한인의 기구한 삶/전주출신 양칠성씨 모델 국립극단이 올해 첫 공연작품으로 연극 「반도와 영웅」(김의경 작·장진호 연출)을 29일부터 국립극장 소극장 무대에 올리고 있다. 「반도와 영웅」은 비교적 메시지가 무거운 창작극으로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3년부터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이 끝난 1950년까지의 격랑기에 이국땅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실존인물 「양칠성」을 소재로 한 작품.전쟁 말기 일본군에게 끌려나가 일본 남방군포로 감시요원으로 일하다 전쟁 직후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참전한 양칠성씨(최상설 분)와 그의 일본군 상관 아오키(이문수 분)사이에 펼쳐지는 인간관계를 다루고 있다. 일본군으로부터 갖은 박해와 수모를 받고 암울한 식민지 민중의 설움을 씹으며 살던 양씨는 일본 패망후에도 귀국선을 타지 못한채 인도네시아 독립군으로 변신해 정글을 누비게 된다. 그러나 그토록 죽이고 싶던 아오키가 전투중 부상당하자 양씨는 그를 구출하려다 끝내 네덜란드군에게 잡혀 1949년 8월10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이 작품의 밑바닥을 훑고 있는 메시지는 「전쟁이란 승자와 패자,가해자와 피해자 구분없이 모두를 황폐화시키는 굴레가 된다」는 사실. 1915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난 실존인물 양씨는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서의 공적을 뒤늦게 인정받아 지난 75년 인도네시아의 가루트 영웅묘지에 안장돼 나라잃은 설움을 조금이나마 달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이번 공연에는 국립극단의 원로배우 백성희·장민호씨를 비롯,최상설·이문수·정상철·권복순·전국환씨 등 중견들이 총출동한다. 3월19일까지.평일 하오 7시30분,토·일 하오 4시.
  • 일 역사왜곡 버릇 왜 못고치나(사설)

    일본의 중·고교 역사교과서가 문부성 검정과정에서 진실을 축소,은폐하도록 강요되고 있음이 밝혀져 또다시 우리를 실망스럽게 하고 있다.문부성은 출판사들이 제출한 원고내용중에 일본의 식민지지배와 전쟁책임,징용·종군위안부등과 관련된 사실을 축소,왜곡토록 정정을 요구해왔다는 것이다.예컨대 96년 고교 사회교과서에서 「젊은 여성도 정신대등의 명목으로 전장에 송출했다」는 내용을 「젊은 여성도 공장등에 동원됐다」로 바꾸게 했다. 한국인 징용자의 수도 당초의 「70만∼2백만명」에서 「약 80만명」으로 축소시켰고 「한국인 종군위안부 8만∼20만명」은 아예 삭제해버렸다.여전히 반성할 줄도,속죄할 줄도 모르는 일본정부의 본심을 그대로 내보였다.이같은 역사왜곡은 침략전쟁과 식민지지배에 대한 정치지도자들의 잇따른 망언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을 끝내 외면하고 호도하려고 하는 일본정부의 인식은 참으로 소아병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정부는 지난 93년 호소카와(세천)총리 등장이후 전쟁책임에 대한 반성을 역사교과서에 반영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종군위안부나 징용문제도 수록토록 했다.그러나 이같은 시정약속과는 달리 그 이후에도 계속 사실은 은폐와 축소에 급급해옴으로써 일본정부의 이중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역사란 과거의 거울이며 특히 역사교과서는 2세에게 국가관·세계관을 길러주는 길잡이다.그런데도 일본은 불행하던 과거의 한·일관계를 망언으로 왜곡하고,2세의 역사인식마저 굴절·오도시키려 하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일본정부는 일본군국주의가 한국과 아시아 이웃에게 가한 침략전쟁의 죄과를 겸허하게 반성하도록 역사교과서의 왜곡을 시정해주기 바란다.끝내 진실을 은폐하고 축소하려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불행을 잉태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일본은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대국으로 발돋움하고 있으면서 언제까지 궁색한 아집에 사로잡혀 있을 것인가.
  • 문민정부 개혁 3년/주요국정 평가와 과제/좌담

    ◎“세계화 성공땐 4강 조정역 가능”/통합선거법 등 돈 안쓰는 정치기틀 마련/교육개혁 1∼2년 지나면 효과 나타날 것/개혁통한 미래 개척은 시대적인 명제/제도개혁 초석위 역사바로세우기로 민족정기 회복해야 □좌담 서영훈 신사회공동선연합이사장 이명현 서울대철학과교수 김진현 서울시립대총장 김영삼 대통령이 오는 25일로 취임 3주년을 맞는다.그동안 부정부패 척결·군개혁·돈안드는 선거·금융 및 부동산실명제 등 정치·경제·행정·민생 등 다양한 분야에서 「변화와 개혁」이 이뤄졌다.세계화에 이어 역사바로세우기가 시작돼 민족정기 회복작업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김대통령의 취임 3주년을 앞두고 전문가 혹은 공직자들의 좌담을 통해 「문민개혁 3년」을 분야별로 평가하고 향후 과제를 점검하기로 한다.그 첫회로 서영훈 신사회공동선연합이사장(전KBS사장),김진현 서울시립대총장(세계화추진위원장·전과기처장관),이명현 서울대철학과교수의 정담으로 김대통령의 국정운영 전반을 살펴보았다. ▲서이사장=해방이후 가장 공정하다고 할수 있는 민주선거로 당선된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지 3년이 지났습니다.과거 30년은 개발독재와 군사문화로 상징되는 권위주의가 지배했으며 이 과정에서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한 통치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경제성장이라는 긍정적 측면도 없지 않으나 정경유착으로 구조적 비리가 만연,새정부들어 개혁할 것이 많았죠.그 일환으로 사정이 이뤄졌고 세계화와 역사바로세우기가 뒤따랐어요. ▲김총장=21세기를 앞둔 지금 개혁은 누구도 회피할 수 없는 역사적 명제며 시대정신입니다.30년동안 경제 제일주의 때문에 정치민주주의가 희생됐던 것에 수정이 필요했습니다.정치에 있어서는 민주주의,경제에서는 자유개방·경쟁,그리고 사회분야에 있어서는 복지·인권 개념이 중시되는게 전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입니다.개혁을 통한 미래 개척이 국가의 생존·발전을 위한 과제이지요.때문에 김대통령은 문민정부의 힘을 가지고 정치적 위험부담을 감당하면서 개혁을 추진해왔습니다. ▲이교수=문민정부의 역사적 과제는 첫째,문명사적 대전환을 시작하는 미래지향적 변화와 개혁입니다.둘째는 정치적으로 권위주의·개발독재로 표현되는 잘못된 역사에 대한 궤도수정입니다.이런 과제가 세계화·역사바로잡기로 표현되고 있습니다.목표는 세계화 자체가 아니라 잘 살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서이사장=개혁은 과거 청산적인 것과 미래지향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과거청산의 대상은 30년간 누적된 부정부패와 구조적 비리,정경유착등으로 나눌 수 있을 겁니다. ▲김총장=개혁을 논쟁·타협을 통해 민주적 방법으로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따라서 문민정부 초기 개혁이 청와대 주도로 이뤄졌습니다.구정치인을 정리하고 고위공직자 재산공개가 진행되는 등 성과도 있었지만 정치쪽 개혁을 완성하지 못하고 후퇴했던 적도 있습니다.그러다 다시 개혁이 탄력을 얻어 교육분야 등에서 개혁이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에요.국민이 개혁을 잘한다고 박수는 치면서 방관자로 있는 현상을 바꾸는게 중요합니다. ▲이교수=물이 새는 배를 버리고 새 배를 만드는게 혁명이라면 개혁은 그 배를 타고 가며고치는 것입니다.국회가 바로 개혁의 한 대상이었므로 개혁이 청와대를 중심으로 시작됐습니다.초기의 군개혁·부정축재 사정등에는 예상을 넘는 지지가 있었으나 실명제등 그보다 훨씬 대담하고 사회적 효과가 큰 개혁들이 관심을 끌지 못했어요.개혁은 변화하는 역사적 상황에 대처하는 것이므로 그의 일관성만을 문제삼기는 어렵지요.문제는 체계적이냐 여부와 이를 추진하는 사람들의 진실성 여부입니다.개혁을 정면으로 비판할 사람은 없지만 추진주체들이 그때 그때 순간을 넘기고 있다고 인식된다면 국민의 의구심을 살 소지가 있어요. ○정경유착 고리 척결 ▲서이사장=역사적·문명적 배경을 기준으로 볼 때 국내정치는 해방이후 남북대치의 상황에서 중앙집권적 통치로 일관됐어요.또 국민합의적 계약정치가 이뤄지지 않아 일부 엘리트 또는 한두 개인의 철학에 따라 국가운영이 좌우됐습니다.이 과정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을 장악했고 권력의 비호를 받는 재벌이 생겨 구조적 부정부패로 이어졌습니다.권력은 선거를 통해 나오는 데 금권·부정선거가만연,구조적 비리와 경제적 부정부패가 끊이지 않았어요.김대통령이 취임이후 한국병을 고치겠다고 한 것은 이같은 고리를 없애기 위해서였습니다.깨끗한 정부를 주창하며 고위공직자의 재산공개,금융·부동산 실명제 실시,통합 선거법 제정,정경유착 근절로 깨끗한 도덕사회를 지향했어요.일부에서 실명제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다고 지적했으나 이는 기득권층의 저항이 만만찮았다는 반증이죠. ○일선행정 크게 변해 ▲김총장=우리는 인사치레의 전통에다 미국식으로 사람을 모으고 바람을 잡는 정치가 결부돼 민주주의가 이상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돈 안쓰는 정치를 어렵게 하고 있어요.민주주의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스위스­스웨덴­영국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교수=통합선거법으로 정치에서 돈의 힘이 줄어들게 한 것은 다행입니다.그러나 실명제가 보다 철저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국회의원 후보자 모두가 법에 정해진 7천5백만원 정도로 선거를 치른다는 것은 믿기 어려우며 선거부정 처벌에 공정성 시비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관혼상제에 관한 전통 의식이 여전한 상태에서 돈을 많이 쓸 수 밖에 없는 소선거구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서이사장=선거가 혼탁한 것은 제도보다 유권자와 그동안 잘못된 관행이 문제입니다.독일이나 영국은 돈 안쓰고도 선거를 잘 치러요.한마디로 문화풍토의 문제입니다.선거법을 고쳐도 지켜지지 않는 것은 우리문화가 잘못된데도 원인이 있어요. 정치분야 말고도 경제·교육·행정적 측면도 살펴봅시다.경제가 부패한 것은 지나친 규제탓도 있어요.과거에 인·허가 때마다 지방감독관과 중앙관료에게 뇌물을 바치는 것이 일쑤였습니다.최근들어 행정관서가 달라졌다고 하지만 중앙관서까지 그런지 궁금해요. ▲김총장=일선행정이 변한 것은 사실입니다.우선 가시적인게 컴퓨터의 보급으로 업무처리가 빨라졌고 인사를 잘해요.어깨 힘도 많이 빠진 느낌입니다.위도 개혁적 장치에 대한 시대적 인식을 빠른 시일안에 해나가고 있는 듯 합니다.그러나 아직도 자기보다는 남에게 보다 강한 개혁을 요구하며 자신은 조금이라도 더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장관·국회의원 등 법적 의미의 공직자뿐 아니라 사회 각계의 지도층도 개혁을 솔선수범해야 합니다.기업을 포함,어느 분야든 30명이상 아랫사람을 둔 인사는 공직자라 생각하고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이교수=교육개혁은 지금까지 구조적인 문제점을 제거하는 제도개혁이 중심이었습니다.그 효과는 교육관료나 가르치는 사람들,교육사업·사학 운영자등 그 참여자들이 달라져야 나타날 거예요.상당한 시간이 걸릴 겁니다.일관성이 중요합니다. ▲서이사장=교육개혁이 입시제도나 학교운영등 제도적 측면에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닙니다.교육자의 가치관과 교육윤리·전문성·학생들의 학업자세등도 중요해요.나아가 지도층이 정직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이 21세기에 생존·발전하고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등 지역적 단위에서 다른 나라보다 앞서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세계화입니다.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강대국에 둘러싸여 세계화 없이는 곤란해요.남들이 갖지 못한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야 합니다.우리나라는 우수한 인력과 지식산업,기능이 뛰어납니다.과거경제발전에서의 자신감도 큰 자산이지요.가정윤리가 강조돼야 하고 인간관계에 있어서 서로 존중하고 은혜에 보답하는 문화,정직과 신용이 있는 사회분위기가 조성돼야 다른 선진제국을 쫓아갈 수 있습니다.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자각하고 존중해야 합니다.새로운 사상이 많지만 전통적인 것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전통적 윤리관계인 효도 세계화의 모범이 될 만합니다. ○지도층 솔선수범을 ▲김총장=지금 진행되는 교육개혁이 최선의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교육계가 학생을 선택하는게 아니라 모셔오는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민간기업 등 비교육기관에도 교육이 대담하게 개방되는 정책이 추진되어야 합니다.금년 내년만 지나면 교육개혁의 효과가 나타날 것입니다.교육개혁이야말로 김대통령의 임기 5년이 끝난뒤 가장 가시적 개혁으로 평가받을 것 같습니다. 한국의 세계화는 민족주의가 결부된 독특한 개념입니다.한국은 어떤 중진국·선진국보다 대외의존도가 높습니다.또 미국­일본­러시아­중국 등 4대 강국을 한꺼번에 접한 지정학적 조건을 가진 유일한 나라입니다.따라서 한국의 주체성을 없애자는 세계화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 충실해지려면 세계화가 필요하다는 것 입니다.세계화에 성공하면 4대 강국의 조정자역할도 수행할 수 있을 겁니다.우리의 세계화 전략이 금융·행정·정치개혁과 맞물리면 21세기 들어 한국 자신의 발전은 물론 인류문명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문민정부는 적시에 문제의식을 제기함으로써 통일개념까지 소화할 수 있는 행동강령의 기초를 닦은 셈입니다. ▲이교수=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는데 정면으로 반박할 국민은 없을 거예요.문제는 어떻게 바로잡는가입니다.자유당정권때 일제 식민지 역사를 바로잡는데 실패했어요.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애쓴 사람들이 중심에 못서고 식민통치에 앞선 사람들이 무대에 올라가 주연을 하게 됐지요.중심에 서야할 사람들간에 갈라져 서로 싸웠기 때문입니다.지금도 그런 상황이 반복되고 있어요.역사를 바로잡는다고 하면서 자기 권력을 확대하는데만 몰두하면 문제가 어려워져요.문민정부는 특히 역사바로잡기에서 대의명분에보다 분명히 합치되도록 상을 주고 벌을 주어야 합니다.지난 3년간 제도개혁의 틀을 만들었다면 이제 나사를 죄기 위해 정신사적 중심을 바로잡아야 해요.이를 위해 잘못한 사람에 대한 벌 못지 않게 잘한 사람에게 상을 주는 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개혁세력 결집 긴요 ▲서이사장=역사바로세우기는 첫째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데 주안점을 둬야 합니다.둘째 헌정질서를 지켜 민주주의가 변형되지 말아야 하며 셋째 사회정의를 실현,부정부패와 권력에 빌붙어 사는 세력을 청산해야 합니다.넷째 문화·복지 측면에서도 대다수 국민의 이익을 고려해야 합니다.마지막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해야합니다.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과거의 우를 되밟아서는 안됩니다.개혁의 큰 방향은 잘 잡았어요.앞으로 지역이나 계파,과거의 인연등에 얽매여 정치논리와 타협하지 말고 미래지향적인 개혁을 추진해야 합니다. ▲김총장=지금까지 역사의 흐름에서 정의 편에 서있지 않았다고 객관적인 평가를 받는 사람들은 이제 그것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지내는게중요합니다.친일을 했다거나 독재정권을 만들고 그 하수인을 했던 사람,그리고 경제정의에 어긋났던 사람들은 한때 지도자였다는 사실을 떠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태도를 자제해야 합니다.두 전직대통령의 구속사건을 계기로 더욱 그런 느낌을 절실히 받습니다.역사적 안목을 갖는 개혁세력이 구체적으로 모여 단결하는 노력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역사적 개혁주체세력을 형성하지 못하면 개혁 지속은 힘들다고 봅니다.
  • 군인출신 언론인 뷰 틴 저 「호치민을 따라서」

    ◎베트남 통일영웅 호치민 해부/“지도력 부족·아첨에도 약한 사람” 비판/공산당에 대한 국민들 환멸감도 표현 베트남 통일의 영웅 호치민과 베트남 공산당에 대해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측면들을 조명한 책이 최근 런던에서 출간됐다. 저자는 베트남군의 대령이었고 언론인이었던 뷰 틴이며 이를 영어로 옮긴 사람은 영국 BBC방송 베트남담당이었던 주디 스토우와 두 반. 「호치민을 따라서」라는 제목이 붙은 이 책의 서문에서 뷰 틴은 『19세기초에 만들어진 베트남의 서사시 「킴 반 큐」가 베트남의 운명을 요약한 것』이라고 단정했다.그는 이 책에서 베트남의 역사를 서사시의 주인공인 큐의 인생에 비유하고 있다.큐는 문벌좋은 가정에서 태어난 소녀였다.서사시에서 큐는 「잔인한 운명」과 부패때문에 매춘부로 10년간 이리저리 팔려다니는 비참한 생활을 겪는다. 뷰 틴은 그녀의 인생역정에 빗대 베트남이 천년동안 중국에 정복됐고 또 천년간 봉건지배에 시달렸으며 1세기동안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했고 짧은 기간(1941∼1945)이지만 일본의지배도 받았다고 적고 있다.뷰 틴은 오늘날은 봉건지배가 저 멀리 뒷전으로 물러나고 대신 공산당이 권력과 지배계급을 장악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1945년 공산당에 참여한 그는 이 책에서 베트남 지도부가 어렵사리 만들어낸 신비의 베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호치민을 실수도 하고 사랑에 빠지기도 했으며 아첨에 약한 사람으로서 묘사하고 있다.호치민은 필명을 사용해 자신을 칭찬하는 두 권의 책을 내기도 했다. 뷰 틴은 토지개혁과 1956년의 민주화 운동기간동안 호치민이 했던 역할에 대해 비판적이다.호치민은 베트남 사람들을 분열시켰던 그 당시 위기에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그는 주장한다.왜냐하면 당시 호치민은 성난 군중들을 달래기 위해 보 규엔 지앞 장군을 현장에 보내는 등 지앞 장군의 개인적 호소에 의존했기 때문이었다. 뷰 틴은 많은 베트남 사람들 특히 혁명에 참가했거나 미국과의 전쟁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는 감정인 공산당에 대한 환멸감을 예리하게 표현하고 있다. 태국 방콕 포스트지의전편집국장인 수파폰 칸웨라요틴은 최근 발간된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의 논평란을 통해 「호치민을 따라서」가 사실 의견 분석이 잘 조화된 책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 「독도망언」은 식민주의 오만(특별기고)

    최근 일본 정부의 수상과 외상은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는 망발을 감행했다.그리고 독도가 자신의 영토임은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명백한 사실임을 강변하고 있다.이와 같은 강변이 전혀 근거가 없는 망언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독도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연고를 다시금 확인해보고,그 국제법적 문제점도 아울러 살펴보아야 한다. ○역사적 연고 확실 독도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연고는 확실한 것이다.원래 독도는 울릉도에 딸린 섬이다.울릉도는 이미 6세기초 신라시대때부터 한반도의 역사에 편입되기 시작했다.그러나 독도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15세기에 편찬된 「고려사」의 지리지의 울진현에 관한 설명에서 시작된다.이 기록 이후부터 우리나라의 고문헌 내지 고지도에서 독도는 울릉도와 확연히 구별되어 우산도 삼봉도 자산도 가지도 등으로 기록되어 왔다.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지명이 변동되는 사실은 항용 있어온 일이며,독도의 명칭도 이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예로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울릉도 주민들은 바위섬인 이곳을 「돌섬」 또는 돌(석)의 방언에 따라서 「독섬」으로 불러왔다. 여기에서 독도라는 오늘날의 명칭이 유래됐다.1900년 구한국 정부에서 지방관제를 개칭하여 이 곳에 군을 설치하고,그 관할 구역으로 울릉도 전도와 「석도」를 명시했다.이 석도는 「돌섬」의 한자 표기였다.그리고 오늘날 일반적으로 불리는 독도는 「독섬」이라는 방언 명칭에서 각기 그 음과 뜻을 취하여 붙여진 이름이다.이와 같은 과정을 살펴보면 독도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연고권은 확고부동한 것이며,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편 일본의 시마네현은 1905년 2월에 고시 40호를 통해서 독도를 다케시마(죽도)로 명명하고 자신의 관할구역으로 비밀스럽게 편입시켰다.이 편입 조처는 일본 내각이 1905년 1월에 단행한 독도에 대한 영토 편입 결정을 따른 것이었다.대한제국 정부는 이와 같은 사실을 1906년 4월에 이르러서야 알게 되었다.이에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그해 5월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임을 분명히 했다.그렇지만 당시는 이미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접수된 이후이므로 독도문제에 관한 일본과의 외교적 교섭은 불가능했다.이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한제국 정부는 자신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독도에 대한 고유한 권리를 천명하는 데에 그쳤다. ○이르조선영토 표기 1905년 이전에는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일본도 인정해 왔다.일본의 대표적 지리학자였던 하야시(임자평)가 1785년에 제작했던 「삼국통람도설」에는 독도를 조선의 소유로 표시했다.일본이 개항한 이후 명치 연간에 육군성에서 제작한 군사지도에서도 독도는 조선의 영토로 분명히 표기되어 있다.한편 1877년 일본 명치 정부의 최고 각료의견기관에서도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었다.여기에서 제시된 몇몇 사례 이외에도 1905년 이전 일본에서 독도가 조선의 소유임을 인정했던 기록들을 더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이처럼 일본의 조야에서는 독도에 대한 조선의 역사적 연고권을 인정해왔다. 한편 일본 정부는 독도가 자신의 영토라는 사실이 『국제법적으로도 명확한 사실』이라고 강변하고 있다.그들이 이와 같은 억지 주장을 내세우는 근거는 이른바 국제법상의 영토 획득 방식인 무주지에 대한 선점의 법리에 있다.그러나 독도는 결코 무주지가 아니라 엄연히 조선왕조의 영토 중 일부였고,종전에는 일본 자신도 이를 인정해 왔었다.울릉도 및 그 부속도서에 대한 신라시대 이래의 역사적 연고권은 분명한 사실이다.백보 양보한다 하더라도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이미 1900년에 독도를 자신의 영토에 분명히 편입시켰다.그러므로 독도에 대한 시마네현의 고시는 무주지에 대한 선점이 될 수 없으며,제국주의적 영토 약탈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일본이 1905년 이곳의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한 데에는 그만한 연유가 있었다.즉 일본은 제국주의적 팽창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러일전쟁을 일으켰다.일본은 러시아와의 해전을 앞두고 동해 일원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비로소 제기하게 되었다.그러므로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 설정은 그들의 제국주의 침략정책 가운데 하나였다. ○반성없는 일 태도 일본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독도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은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청산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그리고 이는 지난날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을 거부하는 방자한 자세임에 틀림없다.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일본의 망발에 대해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그 그릇됨을 바로잡도록 해야 한다.독도는 엄연히 우리의 땅이기 때문이다.
  • 3월 한·일정상회담 취소 검토/청와대

    ◎“독도망언 불용… 범국가적 단호대처”/접안공사 방해땐 군사작전 강화/일연립여당대표단 면담 취소 정부는 독도 문제와 관련한 일본의 잘못된 주장이 계속될 경우 3월초 태국 방콕에서 열릴 예정이던 한일정상회담의 개최를 재검토하는 등 범국가적 차원에서 강력대처키로 했다. 정부는 또 「독도는 일본땅」이라고 망언을 한 이케다 유키히코(지전행언) 일본외상의 사과 혹은 공직사임을 요구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함께 현재 진행중인 독도접안시설공사를 조속히 진행시키는 한편 일본측이 독도 접안시설 공사에 대한 방해행위를 할 경우에 대비,독도 주변수역에 대한 군사작전을 강화하는 방안도 마련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김영삼대통령은 이와 관련,10일 오는 12일로 예정됐던 일본 연립여당 대표단의 청와대 예방일정을 취소시켰으며 이수성국무총리와 공로명외무장관도 각각 일본측에 대한 단호한 대처입장을 밝혔다. 청와대측은 이날 이례적으로 윤여전대변인의 논평을 발표,『최근 일본은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 엄연한 대한민국영토인 독도를 그들의 영토라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어 국민들을 분노케 하고있다』면서 『우리는 이러한 망언을 결코 용납할 수 없으며 앞으로 이에 단호히 대처해 나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윤대변인은 또 『일본은 그동안 과거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행위에 대한 반성은 커녕 오히려 기회있을 때마다 이를 미화하는 망언을 되풀이해왔다』고 비판했다. 윤대변인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주장에 대한 청와대대변인 논평발표는 독도문제에 대한 김대통령과 정부의 단호한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총리도 이날 공외무장관을 불러 『독도에 대한 우리의 영유권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원칙인 만큼 외무부가 중심이 돼 강력하게 대처하라』고 지시했다. 이총리는 오는 13일 정례 국무회의에서도 외무부와 국방부등 관계부처가 긴밀히 협조,일본의 독도 관련 망동에 단호하게 대처토록 지시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 “가요표절 막게 「민간 감시기구」 설립을”/강헌씨 음악평론가

    ◎「공륜 표절 방지 토론회」서 주장/음악문화 좀 먹는 독… 「당사자 해결」 실효없어/문화 보호 차원서 정부·언론 등 적극 관심을 우리 가요계의 고질적인 병폐중의 하나인 표절문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당사자 주의」의 민사소송 차원의 해결방안에서 벗어나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민간 자율감시기구가 설립돼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공연윤리위원회(위원장 윤상철)가 「가요표절 문제와 사회윤리」라는 주제로 2일 하오 서울 예술의 전당 영상자료원 영사실에서 마련한 공청회에서 이같이 주장한 대중음악평론가인 강헌씨의 주제발표 내용을 요약 소개한다. 표절은 저작권이라는 지적소유권을 침해하는 범법행위이며 당사자주의에 의해 해결돼야할 친고죄 영역에 속해 있다.그러나 당사자끼리 법정에서 해결을 보는 서구의 경우를 곧바로 우리 상황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다.우리나라에서 당사자주의에 해당되는 국내 작곡가간의 분쟁은 1%미만에 불과하며 거의 대부분이 외국인 음악을 무단차용하는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가장 심각한 것은 양적으로도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일본 대중음악의 무단표절이다.일본 대중음악의 표절은 단지 민족적 자존심 차원이 아니라 문화시장 개방을 목전에 둔 현시점에서 문화종속이라는 새로운 식민지적 성격을 내재하고 있다. 그리고 대중문화의 물질적 토대인 시장의 관점에서 볼때도 표절의 해악은 심각하다.만연한 표절은 한국 대중음악에 대한 불신을 조장함으로써 장기적으로 구매동기의 저하를 불러온다.여기에 우리와 비교할 수 없는 세계적 메이저산업과 일본 음반산업의 매니지먼트 노하우와 자본이 진출한다면 우리 음반시장은 남의 잔치판이 될 것이 자명하다.따라서 대중음악에 한정해 보더라도 표절은 양심불량의 해프닝이 아니라 우리 음악문화 전체를 괴멸시키는 독이며 서구적 관점에 입각한 「당사자주의」의 민사소송 사안으로 해결될 문제가 결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선 외국곡의 무단표절은 제도적 제재가 아닌 신속한 여론조성작업으로 척결해야 한다.이를 위해 수용자대중의 의견수렴 및 검토를 위한 창구가 마련되고 제도·언론간의 원활한 피드백 커뮤니케이션 체제가 이루어져야 한다.의견수렴 및 검토창구의 실질적 기능수행은 공식 행정기구 보다는 대중음악 수용자층의 오피니언 리더와 대중음악 관계자들의 일상적인 결합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이와 함께 자국 문화보호의 관점에서 해당기관이 순수 민간자율창구의 개설과 운영을 적극 지원하는 것은 물론 이 창구가 각 언론기관 및 민간사회단체를 통해 여론화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아울러 현재 통용되고 있는 표절에 대한 공륜의 심의기준을 전면 재검토해 부분적인 악절의 표절 여부보다는 번안곡 수준의 전반적 표절을 가려내는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여론 매체들도 표절문화 종식을 위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
  • 아 니제르 쿠데타 성공/육참총장 주도… 첫 민선대통령 축출

    【니아메(니제르)AP 로이터 연합】 아프리카 니제르의 최초 민선대통령이 27일 발생한 군부쿠데타에 의해 축출,체포됐다. 이브라힘 바레 마이나사라 니제르 육군참모총장(45)은 이날 국영라디오방송을 통한 연설에서 마하마네 우스마네 대통령을 체포했으며 헌정이 중단됐고 임시국가회의가 구성됐다고 밝혔다. 마이나사라 참모총장은 또 자신이 니제르의 새 수반이라고 선언하고 하마 아마두 총리도 체포됐으며 정당활동이 금지됐다고 말했다.그는 자신의 군대가 대통령궁 및 정부청사 등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군인 한명과 대통령 경호원 한명이 사망했다고 덧붙였다.정부관리들에 따르면 쿠데타과정에서 수십명의 군인이 부상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마이나사라 참모총장은 대통령과 야당간 대립으로 인한 정국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했다고 설명했다. 프랑스식민지이던 니제르는 지난 95년 1월 총선이래 정국교착상태가 계속돼왔다. 아프리카 최빈국 니제르는 지난 60년 독립한 이래 74년 첫 민간지도자가 군부쿠데타로 실권했고 그후 복수정당제가 부활된 92년까지 군부의 통치를 받아왔다. ◎새수반 마이나사라/하우사족 출신… 불서 군사교육 받아/대통령 경호대장·보건부장관 역임 군부쿠데타로 니제르의 새로운 지도자로 등장한 이브라힘 바레 마이나사라 육군참모총장(대령·45)은 니제르의 다수파인 하우사족으로 프랑스에서 군사교욱을 받았다. 그는 76년 대통령 경호대장으로 임명됐으며 2년후에는 공수여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86년부터 87년까지 파리주재 니제르대사관의 무관으로 일했던 그는 87년부터 90년까지 보건부장관을 지냈다.그후 2년동안 알제리주재대사를 역임했다. 그는 94년부터 1년간 파리의 국방대학에서 유학한후 95년3월 이번 쿠데타로 우스마네대통령과 함께 축출된 하마 아마도 총리에 의해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다.회교도인 그는 3명의 자녀가 있다.
  • 중,홍콩특구주비위 발족/내년 7월 출범 3부기구 구성 준비

    【북경=이석우특파원】 97년 7월1일부로 영국식민지에서 벗어나 새로 출범하는 중국 홍콩특별행정구의 제1기 행정부와 입법기관,사법기구 등의 구성준비 임무를 맡게 될 홍콩특별행정구주비위원회가 26일 북경인민대회당에서 공식 발족됐다. 홍콩측 94명과 중국측 56명 등 모두 1백50명으로 구성된 주비위원회는 이날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교석상무위원장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은 뒤 제1차 회의를 가진데 이어 27일까지 이틀동안 조별회의에 들어갔다. 중국측 주비위원회 부주임중 한사람인 왕영범외교부 부부장은 이날 신화통신과의 인터뷰에서,『홍콩의 정권 인수인계와 관련한 각종 준비업무를 잘 처리하는 것은 중국과 영국의 공통적인 역사적 책임이자 홍콩의 장기적 번영과 안정을 보장하는 중요 전제』라고 말했다. 주비위원회의 발족은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가 된 지 1백55년여만에 중국으로 반환돼 특별행정구로서 새로 탄생하기 위한 끝마무리 단계에 들어가는 것이며 홍콩에 대한 중국의 주권회복과 이른바 일국양제(1개 국가,2개 체제)의 시행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의미한다. ◎「홍콩 주비위」 임무와 구성/초대 행정장관 뽑을 선거인단 선출/전기침이 주임… 반중세력 완전 배제 26일 북경에서 「홍콩특별행정구 주비위원회」가 정식 발족됨에 따라 홍콩반환이 실질적인 카운트다운에 들어갔으며 중국은 홍콩문제처리에 보다 직접적인 발언권을 행사하게 됐다. 이 주비위원회가 맡을 포괄적 임무는 홍콩에 대한 중국의 주권회복을 준비하는 인수위원회로서 「일국양제(1개국가 2체제)」,「항인항치(홍콩인에 의한 홍콩통치)」,「고도의 자치」라는 중국의 대홍콩정책 시행과 홍콩의 번영 및 안정을 위한 튼튼한 기초를 마련하는 일이다.보다 구체적으로는 우선 홍콩자치정부 및 임시 입법회구성,초대 행정장관 결정을 위한 선거인단 선출등을 맡게된다.또 각종 법률개폐를 비롯,토지·건물 등 각종 재산의 정리도 담당한다.주비위원회의 가장 큰 과제는 첫 홍콩자치정부의 초대행정장관을 뽑을 선거인단 4백명을 올해 1·4분기안에 선출하는 일이다.이 선거인단은 곧이어 3·4분기중에 행정장관을 선출하게 될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주요 관리들은 이 행정장관의 제청으로 중국 중앙정부가 임명한다 이와 함께 올해안으로 임시입법회를 구성,내년 7월1일 주권이양과 동시에 홍콩의 기존 입법국(의회)을 해산하고 임시입법회로 대체하게 된다.기존 입법국의 해산과 효력정지 등은 지금도 중·영간의 쟁점사항이며 홍콩인에 대한 자치권 부여라는 측면에서 계속적인 논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모두 1백50명의 위원으로 발족된 주비위원회의 최고책임자인 주임자리는 전기침 부총리겸 외교부장이 차지했고 중국공산당 중앙위원이며 국무원 홍콩·마카오담당관실 책임자인 노평 등 9명이 부주임을 맡았다. 전원 중국정부에 의해 선임된 이들 주비위위원 가운데는 홍콩내 반중국세력인 민주당계 입법국위원이 완전배제돼 편파적이란 비난을 받기도 했다.그러나 위원회 부주임중 5명은 홍콩시민이며 이가운데 동건화,양진영,나덕승 등은 벌써부터 홍콩특별행정구 최고책임자인 행정장관직을 차지하고 싶다는 강한 의욕을 보이기도 했다. 26일 주비위성립행사는 인민대회당에서 교석 전인대위원장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교석 위원장은 1백50명의 위원들에게 일일이 위원증서를 나누어 주었다.
  • 「악마의 시」작가 샐먼 루시디/새 소설「무어의 마지막 한숨」출간

    ◎7년째 도피중 집필한 작품/인도 무어가의 가문사 복원 지난 89년 자신의 작품 「악마의 시」가 신성모독이라 해서 이란의 회교지도자 호메이니로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7년째 도피중인 샐먼 루시디.화제의 작가 루시디의 신작이 번역·출간됐다.지난해 9월 영국에서 출간된 최신작 「무어의 마지막 한숨」 상,하를 문학세계사가 내놓았다.(오승아 옮김) 인도 다 가마­조호비 가문의 흥망성쇠를 다룬 이 작품은 루시디의 작가적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작품은 「다 떨어진」 조호비 가문의 마지막 핏줄 무어가 4대에 걸친 가문사를 복원해 들려주는 형식이다. 이 시기는 영국 식민지배와 독립투쟁,독립후 혼돈에 이르는 파란만장한 인도의 근·현대사와 일치한다.인도의 알아주는 갑부였던 다 가마 가문이 몰락의 길로 접어드는데는 이같은 인도역사의 부침이 커다란 배경으로 작용한다.이런 식으로 작품에는 개인사와 인도민족의 역사가 뗄래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로 맞물려 있다. 무어 일가붙이들의 면면은 이 작품에 결코 낙관적으로 드러나있지 않다.향신료공장 주도권을 둘러싸고 친척끼리 잔인한 패싸움과 살인을 마다하지 않는가 하면 마약과 환락에 빠져 난교나 동성애를 일삼는다.이때문에 무어는 하늘의 단죄인지 날때부터 나이의 두배씩 늙어가는 저주받을 조로증을 안고 살아간다. 이처럼 너저분하고 추잡스러운 현대사가 가차없이 까발려지는데도 작품속의 인도는 결코 비관적인 윤곽속에 묻혀버리지 않는다.그것은 심오한 인도의 신화며 풍물이 작품의 배경에 풍요롭게 깔려있기 때문이다. 루시디는 「악마의 시」 파문 이래 돌아갈 엄두를 못낸 고국 인도의 던적스러운 일상 세목들을 극진한 애정으로 되살려내고 있다.인도의 사회적 낙후가 서구인들의 눈에 야만처럼 비칠지라도 그 바탕엔 어떤 합리적 이성도 따라잡지 못할 풍요로운 생명력이 깔려있다는 말을 루시디는 하고 싶어하는듯 보인다. 이 작품은 인도독립의 지도자인 자와할랄 네루나 간디 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정작 인도당국에서는 수입을 꺼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하지만 영국 최고권위 부커상의 96년가장 강력한 수상후보로 거론되는 등 서구 평론가들은 이 작품에 아낌없는 갈채를 보내고 있다 한다.위대한 작가는 정치적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민족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유효한 구실을 한다는 사실을 샐먼 루시디는 잘 보여주고 있다.
  • 문학의 해/반영환논설고문(외언내언)

    문학의 힘은 위대하다.우리들이 평소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영국인들은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의 위대성을 강조한 나머지 그들이 식민지로 갖고 있던 「인도와도 바꿀수 없다」하지 않았는가. 실제로 미국의 죄악이었던 노예해방의 기폭제가 된 것은 1852년 스토부인이 쓴 한권의 소설 「엉클톰스 캐빈」이었다.패전후 실의에 빠진 일본 국민들에게 긍지와 자신감을 갖게 하기 위해 씌어진 역사소설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이 책은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였다. 1930년대 암울한 식민지 청년들에게 불길처럼 번진 농촌 귀향운동은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영향이다.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은 그뒤 여성해방운동의 헌장이 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 그래서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서양속담이 생겨났는지 모른다.당나라가 황소의 난으로 어지러울때 신라의 대문장 최치원은 그를 성토하는 격문을 보냈다.그 문장이 어찌나 훌륭하고 폐부를 찔렀던지 도적의 괴수가 벌벌 떨었다고 한다.문학의 힘을 말하는 예화들이다. 올해는 정부가 정한「문학의 해」,선포식이 19일에 있었다.「문학의 즐거움을 국민과 함께」라는 캐치프레이즈아래 여러가지 뜻있는 행사도 갖는다.올해는 마침 신소설이후 근대문학 1백년이 되는 해.근대문학관도 설립하고 근대문학 1백년탑도 세운다.축제와 행사를 통해 문학을 국민들 곁으로 다가가게 하겠다는 조직위의 생각이다. 오늘날 문학의 입지는 오락성 대중매체에 밀려나고 있는 경향이다.이대로 가면 문학의 영토는 점점 축소될 수밖에 없을 전망이고 따라서 위기론도 대두되고 있다.그러나 인간과 인간성을 심오하게 탐구하고 천착하는 문학의 세계가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문학을 통해 우리는 고귀한 인간정신과 만나게 되고 수백·수천의 주인공의 삶을 체험하게 된다. 문학처럼 위대한 인생의 교사는 없다지 않는가.우리는 문학의 힘과 가치를 높이 인정한다.그러나 시류에 민감하게 영합,상업주의와 결탁하는 문학을 경계한다.문학인의 자성이 기대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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