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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 표준時도 ‘광복’ 추진(조약돌)

    ◎한반도 지나는 127도30분으로 ○…8·15 광복절을 맞아 한국의 ‘표준시’를 되찾자는 움직임이 정치권 일각에서 번지고 있어 화제. ‘제2의 건국’ 선언과 발맞춰 일본과 함께 사용하고 있는 ‘동경 135도’에서 한반도를 지나는 ‘127도 30분’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 국민회의 趙舜衡 의원은 9일 “‘시간의 광복’없이 진정한 민족주체성을 회복하자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면서 ‘표준시에 관한 법률’의 개정법안을 의원입법 형태로 이번 정기국회에 제출하겠다고 기염. 우리나라의 표준시는 대한제국시대 당시 동경 127도 30분을 표준 자오선으로 정했으나 일제시대인 1912년 식민지 통치의 편의를 위해 일본의 표준시와 동일한 동경 135도로 변경했었다.
  • 姜萬吉 교수 독립운동사 학술회의 주제 발표

    ◎민족해방운동은 근대국가 수립 과정 일제식민지시대 좌우익의 통일전선운동은 해방공간에서는 평화통일운동으로 전환됐으며 분단시대의 통일운동은 ‘대등통일’이어야 한다고 姜萬吉 고려대 교수(한국사)가 7일 주장했다.姜교수는 이날 광복 53주년 및 독립기념관 개관 11주년 기념 제 12회 독립운동사 학술회의 주제발표에서 이같이 주장하고 민족해방운동은 근대국가 수립 과정이었다고 말했다.다음은 주제발표 요약이다. 우리 민족이 일본제국주의에 강점당한 것은 알려진 대로 무력을 앞세운 일본제국주의의 강압에 의해서였다.그러나 또하나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조선이 사상적으로 성리학 유일사상 체제가 너무 오랫동안 지속됐기 때문에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지 못했다는 점이다. 조선은 자본주의와 국민주권주의를 배우지 못해 일제 강점후 민족해방을 독자적으로 지도할 세력을 가질 수 없었다.그러나 조국의 독립을 위한 좌우익 통일전선운동은 계속 추구됐다.좌익 노선은 3·1운동 전에도 일부 형성됐었으나 3·1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했다.3·1운동의 실패와 좌익의 본격적인 등장 이후 우익 세력은 일부가 타협주의 노선으로 나아갔다.그러나 비타협적인 우익도 일정한 세력으로 존속됐다.주로 지주및 상층 자산계급은 타협주의 우익으로,비타협적인 우익 세력은 중소자산계급을 중심으로 형성됐다는 분석이 있으나 그 구분은 분명하지 않았다. ○노동자 농민 의식성장 우익의 일부가 타협주의 노선으로 나아간 것은 노동자와 농민계급의 의식성장으로 민족내부의 계급적 갈등이 시작되고 일본이 적극적으로 유인했기 때문이었다. 우익의 일부 세력이 타협주의로 변하고 그 때문에 민족해방운동전선이 약화됨에 따라 민족해방운동의 새로운 방법론이 모색되지 않을 수 없었다.좌익과 비타협적인 우익 세력이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투쟁력을 강화하는 일이 더욱 절실해진 것이다.1920년대 중반에 좌익과 비타협적인 우익 세력에서 동시에 통일전선론이 일어난 것도 이때문이었다. ○협력과 분열 반복 좌우익은 시대상황에 따라 협력과 분열을 반복했으나 일본제국주의의 패망이 가까워진 1940년대 전반기에 접어들며 통일전선운동은 전체 민족해방운동으로 더욱 적극화됐다. 민족해방운동전선은 좌우익을 막론하고 해방과 함께 38도선이 획정되고 남북에 분단국가가 성립되는 상황이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이 때문에 좌우익은 해방후 미·소 양군이 남북을 분할 점령한 조건에서도 통일된 단일민족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운동을 계속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일제 강점시대의 민족해방운동 과정 전체가 곧 자산계급과 노동계급의 지도층이 함께 참가한 근대민족국가 수립과정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그것이 해방 후 민족분단의 위험이 높아진 상황에서는 좌우익 정치세력이 함께 참가한 통일민족국가 수립운동으로 이어졌다. 외국자본주의 세력의 침입이후 한반도에는 근대민족국가 수립운동이 꾸준히 추구됐는 데 그 운동이 좌우익으로 나뉘었던 일제시대에는 민족해방운동 과정에서 통일전선운동으로 계속됐다.해방 후 민족분단시대에는 그 운동이 평화통일 그것도 대등 통일 운동으로 연결됐다고 할 수 있다.
  • ‘수난 4代’ 독립운동가 가문(金三雄 칼럼)

    무궁화 피고 태극깃발 물결치는 8월,우리는 해방 53년과 건국반세기를 맞는다.여전히 분단상태에서 북쪽은 기아,남쪽은 실업의 고통이 따르지만 아무려면 일제식민지 시대의 참혹했던 생활에야 비하랴. 8월이면 우리는 감사해야 할 수많은 애국지사 순국선열을 생각한다.해방을 못보고 눈을 감은 선열들과 해방후에도 독재정권에서 신산한 삶을 사신 지사들을 잠시라도 생각하면서 이 8월을 맞았으면 싶다. 흔히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고 했다.그만큼 일제의 탄압이 심했고 역대 정권이 지사들과 유족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데서 생긴 말이다. 나는 독립운동을 하다가‘3대가 망한’집안을 알고 있다.실제는 4대째 수난과 시련을 겪고 있다.이것은 단순히 한 가문의 수난사이기보다 왜곡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의 단면이라 하겠다. 동농(東農) 金嘉鎭은 상해임시정부 고문과 북로군정서 고문을 지낸 독립운동가다.망명에 앞서 항일단체 대동단을 조직,총재로 있으면서 의친왕 이강공(李堈公)의 상해 탈출을 기도하여 만주 안동현까지 갔으나 붙잡히고 동농은 74세의 고령으로 상해에 망명했다.그 가문의 고난은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큰아들 의한(毅漢)은 부친과 함께 망명하여 대동단원과 광복군 창건에 참여하다가 해방후 납북되고,며느리 정정화는 시아버지와 남편의 뒤를 따라 상해로 탈출하여 임정 밀사 자격으로 독립운동자금 모금의 밀명을 띠고 여섯 차례나 국내에 잠입하면서 밀령을 수행했다.최근 나온 ‘長江日記’는 여성독립운동가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다. 손자 자동씨는 4·19이후 진보매체인 ‘민족일보’ 기자로 일하다가 군사정권의 핍박을 받고 이후에는 민간통일운동에 헌신해왔다. ○저항하다 탄압받는 민족양심 金씨의 사촌형 석동씨도 광복군으로 활동했다.자동씨의 큰 딸 진현씨는 유신시절 학생운동으로 대학에서 제적되고 졸업후에는 의료보험연합회 노조위원장을 지냈으며,둘째딸 선현씨는 노태우정권시절 웨스트팩은행 노조위원장으로 외국계은행 노동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탄압과 시련이 따랐던 것은 당연하다. 동농에서 선현씨까지 4대째 이어지고 있는 이 가문의 고난은 한 가족사의 아픔이기보다 민족사의 비극이다.바로 일제와 독재에 저항하고 탄압받는 민족적 양심의 정형이다.동농의 가문뿐만 아니라 상당수 독립운동가 집안이 독재정권과 싸우다가 고난을 겪었다. 그런데 문제는 국민의 정부에서도 별로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솔직히 국민이 정권교체를 선택한 것은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그늘진 곳에는 햇볕을 비추고 굽고 휜 것은 펴고 단절된 것은 이으라는 시대적 소명이었다. ‘정직한 역사를 되찾으라’는 소망이었다. 최근 보훈처는 동농의 서훈을 또 다시 거부했다.이유는 간단하다.일제로부터 ‘남작’을 받았다는 것이다.물론 ‘남작수여’는 악질 친일파의 대명사다.그렇지만 동농의 경우는 다르다.일제는 종3품이상 고관 72명에게 작위를 주면서 “조선귀족들은 한일합방에 찬성했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각종 기록은 “동농은 작위를 거절했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합병후 작위를 주었으나 불락(不樂)하였다”(조선독립소요사론)고 썼다.또 설혹 작위수여의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이공속죄(以功贖罪)’즉“공을 세우면 죄를 용서받는”것이 대원칙이다. ○무원칙한 보훈처 정부는 제2건국을 표방하고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선포했다.그렇다면 임정 법통을 이어받은 정부가 임정 고문을 지낸 동농을 친일부역자로 몰아 구정권과 똑같이 서훈을 거부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주변에서는 보훈처가 동농의 후손들이 복지부 서훈심사의 불공정성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반정부적인 활동을 해온 전력때문에 서훈이 거부된 것으로 인식한다.납득하기 어려운 처사이다.동농의 아들과 며느리에게 훈장을 준 국가가 그 장본인을 제쳐놓은 것은 모순이다. ‘만절(晩節)을 보면 소지(小志)를 안다’고 했다.동농의 경우가 그렇다.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기록을 뛰어넘어 4대째 시련을 겪고있는 동농가문에 더 이상의 절망을 주어서는 안된다.합당한 서훈과 함께 상하이 송경령 능원에 방치된 동농의 유해를 환국시켜 뒤늦게나마 애국지사를 대접해야 하겠다.
  • 制憲 50돌을 돌아본다:4­1/보안법 문제(정직한 역사 되찾기)

    ◎보안법 상처의 흔적들/시행 50년… 멍든 인권 곳곳에/曺奉岩 등 수많은 政敵에 간첩죄 적용/사회 전반에 올가미… 한해 수백명 구속 영화 ‘레드 헌트’는 제주 4·3항쟁때 양민 학살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지난해 9월 홍익대학교에서 열린 인권영화제와 한달 뒤 부산에서 개최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다. 검찰은 이 영화 상영과 관련,인권영화제를 주최한 인권사랑방 대표 서준식씨를 지난해 11월 구속했다. 국가보안법상의 이적표현물 반포 혐의였다. 그러나 부산영화제(조직위원장 문정수 부산시장) 상영과 관련해서는 구속된 사람이 없었다. 같은 영화 상영을 둘러싸고도 보안법 적용은 이렇게 다르다. 검찰은 당시 “서씨는 비전향 사상범으로 고의성 여부가 문제된다”고 밝혔다. 사상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법적용이 다를 수 있다는 논리다. 국제사면위원회를 비롯한 국내외 인권단체들의 석방노력으로 서씨는 얼마전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국가보안법을 둘러싼 논란과 시비는 끊이질 않았다. 보안법과 관련,서준식씨의 경우처럼 세인의 주목속에 논란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조용히 처리되는 사건이 훨씬 많았다. 올해로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지 50주년을 맞지만 보안법 역사의 뒷면에는 대한민국 인권의 상처투성이 흔적들이 가득하다. 우리 사회에서 보안법을 비켜갈 수 있는 분야는 어디에도 없었다. 진보적인 정치인,지식인,학생,노동자 등이 보안법의 올가미에 걸려 죽기도 하고 감옥에도 갔다. 진보적 정치운동과 관련, 보안법에 의한 최대의 피해사례로는 조봉암과 진보당사건 및 2차 인민혁명당 사건,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등을 들 수 있다. 1958년 1월11일 밤 경찰은 조봉암 위원장 등 진보당 간부 10여명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야당 당수 조봉암은 간첩혐의를 뒤집어쓰고 다음해 7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심 재판장인 유병진 판사는 이승만 정권의 간첩조작에 저항해 무죄를 선고했으나 항소심에서 뒤집혔다. 유병진 판사는 우익세력들에 의해 용공판사로 몰렸고 2년후 법복을 벗어야 했다. 2차 인혁당사건은 1974년 전국적인 반(反)박정희 투쟁을 준비하던 민청학련을 용공으로 몰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던 배후조직을 조작한 사례로 비판받고 있다. 10년전 1차 인혁당 사건에서 이미 경미한 혐의로 판명됐던 인혁당이 10년 뒤 재건되어 정부전복을 꾀했다는 것. 그러나 2차 인혁당 사건은 1차 때보다 더 증거가 없다는 의혹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75년 대법원에서 상고는 기각됐고,24시간도 못되어 8명이 처형됐다. 보안법과 관련,현대언론사에서 최대의 필화사건으로 꼽히는 것은 1961년의 ‘민족일보’ 사건이다. 진보적 혁신 언론을 표방한 민족일보는 용공언론으로 몰려 조용수 발행인의 사형집행과 함께 폐간의 운명을 맞아야 했다. 그러나 당시 공소장에 용공으로 단정돼 예시된 것들은 ‘통일에의 전진을 위하여’‘남북교역 시기는 성숙하였다’ 등의 제목하에 실린 기사들이다. 보안법 위반 사건 가운데 한가닥의 온정도,최소한의 법적 기본권과 인간의 존엄성조차도 기대할 수 없는 게 바로 간첩사건이다. 공안기관은 월·납북자의 친·인척,정보사법 전과자,조총련의 연고가족,납북 귀환어부 등의 신상 정보를 모두 입력해 놓고 있다. 이러한 신상 정보는 언제라도 ‘간첩사건을 조작할 수 있는 자료’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실제로 조작 의혹이 적지않았다. 78년 귀국중 간첩혐의로 체포돼 20년째 갇혀 있는 조상록씨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독소조항/반국가단체 구성·가입죄­노동·학생단체 등 민주화 운동 조직 파괴/찬양·고무죄­개념 모호해 자의적 해석 가능… 남용 심각/불고지죄­‘침묵의 자유’ 침해… 반인륜적 행위 강요 치안유지법,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국방보안법,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불온문서임시취체법…. 일제가 군사파시즘의 길을 걸으면서 국내외 반대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제정했던 대표적인 법률들이다. 이중 치안유지법은 일본 및 식민지의 사회주의자와 반체제주의자,독립운동가 등을 처벌한 대표적 악법이었다. 국가보안법은 탄생(1948년 12월1일) 과정부터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빼닮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형법의 특별법인 이 법이 형법 제정(1953년 9월18일)보다도 빨리 만들어졌다는 것은 당시 반대세력을 누르기 위해 이 법이 얼마나필요했던가를 잘 보여준다. 국가보안법은 제2장의 제3∼10조가 범죄로 규정되는 행위들과 처벌을 정하고 있는 핵심적인 조항들이다. 이중에서도 제3조·7조·10조가 가장 독소적이고 남용될 소지가 많다고 비판받는 조항들이다. 제3조는 반국가단체 구성 및 가입,가입권유 등에 대한 처벌로 제7조 3항의 이적단체 구성·가입죄와 함께 민주화운동 조직을 파괴하는 주요한 조항으로 지목돼 왔다. 형벌도 반국가단체 수괴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밖에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가혹하다. 그러나 막상 반국가단체로 낙인찍힌 단체들의 면면을 보면 단순한 반정부적 노동·학생운동 조직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생운동조직인 전민학련과 민청학련,기독교 청소년들의 신앙공동체인 한울회 등이 대표적 사례다. 제7조는 반공법 제4조를 그대로 승계한 것으로 찬양·고무 및 이적단체 구성과 가입,이적표현물 제작·반포·판매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가장 심각하게 남용돼온 조항으로 일반 형법 등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보안법의 ‘상징’과도 같다. 이미 헌법재판소에서 “그 문언상 위헌이나 한정적 해석하에 합헌”이라는 한정 합헌 결정이 내려진 바 있다.먼저 찬양·고무·동조라는 개념이 너무 애매모호해 지극히 자의적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집을 철거하려는 당국자에게 “김일성보다 더한 놈들”이라고 했다가 구속되고(1978년), “북한이 남한보다 중공업이 더 발달되어 있다”고 했다가 이 조항에 걸려 유죄를 선고받기도 했다(1976년). 10조는 반인륜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불고지죄 조항이다. 모든 보안법 위반자에 대한 불고지를 처벌하다가,91년 개정때 3조·4조·5조의 죄에 한해 성립하도록 범위를 축소했다. 또 친족관계일 때는 죄를 감경(減輕) 또는 면제할 수 있도록 했다. 개정에도 불구하고 불고지죄는 ‘침묵의 자유’를 침해하고 직무상 취득한 비밀을 지켜주어야 하는 직업윤리를 저버리지 않으면 안되는 반사회적인 행태를 여전히 강요하고 있다. 수년전 서경원 의원 방북사건에서 한겨레신문 윤재걸 기자가 인터뷰중 알게된 사실을 신고하지 않아 구속된 것이 대표적 사례다. 김동식 간첩사건과 관련,불고지죄 혐의로 구속됐다 항소심에서 무죄선고를 받은 전 서울대 삼민투위원장 함운경씨는 “설사 보안법 위반자라는 것을 알아도 친구나 친척을 당국에 신고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라며 불고지죄의 반인륜성을 비판했다. ◎北 형법은 가혹한 反인권적 악법/유추해석 인정·중벌위주 형벌체계 적용 국가보안법 개폐론이 불거져 나올 때마다 거론되는 것이 북한의 반국가사범에 대한 가혹한 형법체계다. 보안법보다 훨씬 가혹한 법조항들이 북한내 통일논의 자체를 원천봉쇄하고 있는 상황에서 보안법만을 폐지하면 ‘남쪽만의 무장해제’가 아니냐는 시각이다. 북한 형법은 자유민주주의국가의 기본 원칙인 법치주의 원리를 무시한 가장 비민주적인 악법으로 평가받고 있다. 우선 북한 형법은 유추해석을 인정해 죄형법정주의를 무시하고 있다. 제10조에 “형사법에 동일한 행위를 규정한 조항이 없을 때는 종류와 위험성으로 보아 가장 비슷한 행위를 규정한 조항에 따라 형벌을 정한다”고 돼 있어,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범죄인으로 규정,처벌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공소시효에 대한 명문규정도 없다. 제42조는 “반국가범죄와 고의적 살인죄에 대해서는 기간에 관계없이 형사책임을 추궁할 수 있다”로 규정,범인은 죽을 때까지 형사소추를 받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을 비방하거나 그들에게 저항하는 행위는 반국가범죄(제44∼55조)로 규정,사형이나 전재산 몰수형으로 처벌하게 돼 있다. 또한 은닉범,불신고범,방임범의 처벌규정을 두고 있고,반국가범죄의 경우 이를 예외없이 적용하고 있다. 형벌의 종류를 규정하고 있는 제21조에는 반국가범죄의 경우 ‘○○년 이상의 로동교화형에 처한다”고 돼 있어 우리법의 “○○년 이하의 형에 처한다”는 형식에 비해 중벌위주의 형벌체계를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한없는 형량을 선고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반인권적 형벌체계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앰네스티와 보안법/“국제인권기준에 맞게 개정해야”/매년 인권보고서 통해 개폐 촉구 “양심수를 양산해온 국가보안법은 국제인권법에 크게 미달하는 수준입니다. 이는 국제인권기준에맞도록 개정돼야 합니다”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로스 대니얼스 집행위원은 지난해 말 한국을 방문,이렇게 말했다. 그는 “어떤 사상을 가졌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테러단체를 조직하거나 폭력혁명을 공개적으로 추구하지 않은 이상 구속돼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앰네스티의 인권보고서를 통해 “보안법 위반으로 매년 체포되는 수백명 중 상당수가 폭력이 아닌 단지 ‘고무찬양’과 ‘이적행위’ 등으로 구속됐다”고 지적했다. 앰네스티는 매년 인권보고서를 통해 한국의 국가보안법 개폐를 주장해왔다. 또한 주요 보안법 위반 사건마다 항의성명과 함께 피해자 석방을 촉구했다. 지난 96년에는 보안법 개정과 안기부의 권한 남용 방지 장치 마련을 촉구하는 편지를 우리나라 정당 대표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특별취재반 ▲특집기획팀=李昌淳 팀장·許南周·李穆熙 차장, 金聖昊·任昌龍 기자
  • 월드컵 폐막/崔弘運 논설위원(外言內言)

    금세기 마지막 인류의 제전(祭典)인 ’98 프랑스 월드컵 축구대회가 막을 내렸다. 지난 달 11일 개막,열전 33일 동안 20억 지구촌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64경기를 치르면서 수많은 새로운 기록들이 쏟아져 나왔으나 역시 개최국 프랑스의 우승만큼 감동적인 드라마는 없는 것 같다. 이번 프랑스의 첫 우승은 지난 30년 우루과이 원년대회 출전이래 실로 68년만에 거머쥔 쾌거다. 그것도 많은 전문가들이 우승후보로 지목했던 남미 강호 브라질을 3대 0으로 완파하고 얻은 승리여서 더욱 값지다. 결승전 시상식에서 그 큰 웃음을 보이며 자국 대표팀 주장 디디에 데샹에게 꿈에 그리던 국제축구연맹(FIFA)컵을 수여하던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과 열광하는 선수 및 그라운드 안팎의 프랑스인들의 모습에서 진정한 승자의 환희를 볼 수 있었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며 통산 5회 우승과 대회 2연승을 노리던 브라질을 꺾은 프랑스팀은 명실상부한 세계 제1인자다. 미드 필드 강화와 철벽수비를 통한 조직력을 가지고도 호나우도를 비롯한 화려한 스타군단의 브라질을무력하게 할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준 경기내용이 무엇보다 극찬을 받아야 한다. 여기엔 지난 94년 미국 월드컵대회 유럽지역 예선 탈락의 고배를 마신 대표팀을 맡아 끊임없이 조직력 강화와 선수간의 인화를 강조해 온 에메 자케 감독이 있었다. 그는 티에리 앙리,릴리앙 튀랑,지네딘 지단 등 승리의 주역들을 게임마다 적절히 기용,제 때 기량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한 지장(智將)의 면모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프랑스팀의 최대 자랑은 역시 ‘인종의 용광로’라 불릴만큼 인종간의 벽을 허물고 단합된 모습을 보여준 점이라 할 수 있다. 주전 가운데 3명만 본토 출신이며 대부분 카리브해 연안이나 아프리카 등 옛 식민지에서 귀화한 선수들이지만 훌륭히 뭉쳐 제 역할을 다 했다. 프랑스사회가 완전히 인종간의 갈등을 해소한 건 아니지만 이번 월드컵에서 보여준 통합은 스포츠를 통해 인류가 무엇을 이룩할 수 있는 지를 시사하고 있다. 프랑스 국민들은 이런 정신으로 하나가 돼 20세기 마지막 대회를 유사이래 가장 모범적인 제전으로 승화시켰다. 이제우리 차례다. 세계의 시선은 21세기 첫 대회를 공동개최하는 한국과 일본에 쏠려있다. 2002년엔 300만명 이상의 축구팬들과 관광객들이 몰려온다. 4년은 짧다. 정신차려 준비하지 않으면 ‘나라망신’차원을 넘어 또 다른 위기가 올지 모른다. 월드컵은 단순한 스포츠제전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 柳鍾根 전북지사 IMF 경제특강/“개방해서 경쟁력 확보해야산다”

    ◎지난 5년 세계화 외쳤지만 의식은 대원군시대/‘外資유입 경제식민지 전락’ 피해의식 극복해야 柳鍾根 전북도지사는 “세계화 시대에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길은 경제를 개방해서 경쟁을 통해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며,이를 위해서는 외국자본이 들어오면 경제식민지가 된다는 피해의식과 패배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柳지사는 “지난 5년간 우리는 세계화를 외쳤지만 그 의미를 몰랐고 의식은 대원군 시대에 머물렀다”고 지적하고 “역사적·문화적·정치적으로 폐쇄적인 사회는 값진 대가를 치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柳지사는 8일 MBC­TV의 ‘IMF 경제특강’에 출연,“흔히 한나라가 잘살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를 앞질러야 한다는 제로섬 관점이 있었지만 지금은 세계가 상호의존적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이 지난해 11월 외환사정이 어려워 IMF에 긴급요청을 했고 IMF가 도와준 것은 세계경제가 상호의존적이 어서 한국 경제가 어려워질 경우 그 파급효과가 선진국에까지 미칠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柳지사의 강연내용을 요약한다. 과거 강대국들은 자기만 잘 살아야 한다는 제로섬의 관점에서 식민지 수탈정책을 폈으나 2차 대전을 기점으로 세계가 함께 사는 사회를 지향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2차대전후 미국은 마샬플랜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유럽에 경제원조를 제공,경제적 안정과 민주주의 및 평화정착을 통해 유럽을 단일시장으로 통합시켰다. 1930년대 공황을 극복하면서 선진국은 실수를 범했다. 당시 상호의존도가 높았던 선진국들은 경제공황이 자기나라에 영향을 주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제로섬의 논리에서 ‘이웃을 거지로 만들자’는 정책을 폈다. 수출만 하고 수입을 하지 않는 정책을 폄으로써 공장가동이 중단되고 실업자가 증가돼 결국 실물경제가 위축되는 결과를 낳았다. 미국의 경기가 최악일 때 실업률이 25%까지 치솟았다. 선진국들은 이같은 경제홍역을 브레튼 우즈 협약을 통한 자유무역체제인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로 해결했다. 더불어 잘사는 지구적 공동체로의 전환이 이뤄졌다. 이같은 자유무역체제는 보호무역주의의도전에 직면,부분적으로 이를 수용하면서 도쿄·우루과이 라운드를 거쳤고 더욱 강화됐다. 우루과이라운드는 86년 시작돼 94년 완전 타결됐고 95년 1월1일 새로운 국제무역 체제인 세계무역기구(WTO)로 탈바꿈했다. WTO가 지향하는 바는 10년간 단계적으로 경제적 규제를 철폐,2005년 1월1일부터 경제적 국경을 없애자는 것이며 이는 곧 국경없는 무한경쟁시대를 의미한다. 바로 세계를 단일시장으로 통합하자는 것이다. 전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는 것이 바로 세계화이며 우리와 세계를 구분하는 이분법적 구분은 이제 국제현실에 맞지 않는다.
  • 제2건국론/김용운 지음(화제의 책)

    ◎‘원형 공존론’ ‘국민국가 완성론’ 실체 서유럽인들은 ‘대결’을 역사의 중심개념으로 생각한다. 정(正)·반(反)·합(合)의 대결구도를 갖는 헤겔의 변증법이 있고,파우스트의 신과 악마의 대결을 본딴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의 구도도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새뮤얼 헌팅턴이 내세우는 ‘문명충돌론’도 서구적인 대결정신을 그 중심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이론에 맞서 원로수학자 김용운 교수(한양대)가 주장하고 있는 것이 바로 ‘원형 공존론’이다. 21세기는 국제역학의 대결이 아닌 공존의지로 전개되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한걸음 나아가 그가 요즘 제시하고 있는 것이 ‘국민국가 완성론’. 이 책에는 그의 문명사관이 압축돼 있는 ‘원형 공존론’과 짝을 이루는 ‘국민국가 완성론’의 실체가 담겨 있다. 김교수는 “대한민국은 아직도 국민국가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동안 지역차별을 비롯한 여러 형태의 차별의식이 횡행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는것. 진정한 의미의 국민국가의 완성 없이는 21세기 국제화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비(非)서구 국가 가운데 국민국가 형성에 성공하고 식민지화를 면한 나라는 일본과 터키 두 나라뿐이다. 김교수는 일본이 국민국가를 아룬 이유는 지도자의 책무의식과 피통치능력에 있다고 지적한다. 권위에 추종하는 일본인의 성향을 일러주는 예로 그는 일본 작가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의 말을 인용한다. “일본인의 충(忠)은 개의 충(忠)이다” 지식산업사 8,000원.
  • 무형문화재의 존재 이유/沈雨晟 공주민속박물관장(서울광장)

    중요 무형문화재를 지정하기 시작한 것이 1964년이니 어언 30여년전의 일이다. 그것은 금세기 초 서구문물의 일방적 유입으로 기존의 가치관이 송두리째 흔들리자 전승문화가 생활 밖으로 밀려나면서 자초한 자기상실을 극복키 위한 일종의 긴급조치였다. 다양한 무형의 문화유산 가운데 민족문화의 노른자위가 되는 소중한 것들을 선별·지정하여 그를 보존하므로써 새롭게 창출될 한국문화의 맥을 잡는 받침대가 되고자 한 이 조치는 남모를 안간힘이었다. 문화란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 흡사 톱니바퀴에 치는 윤활유에 비유되는 것이라 하겠는데 언제부터인가 문화니 예술이니 하면 일상생활과는 별개의 다소 사치스런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그 뿐인가. 이 문화를 논할 때 ‘불변하는 원형’을 내세우고 있음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문화란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변천과 함께 변할 수 있으며,자생적 생명력을 지니는 것일진대 그러한 속단은 문화를 회고적인 것으로 고착시킬 염려가 있다. ○전승문화 원형보존 의무 우리가 1964년 이래 중요 무형문화재를 지정함에 있어 그의 지정근거가 된 원형이란 것도 해당분야 기·예능보유자가 인정 될 무렵 보유하고 있던 것이니 역시 전승과정에서의 한 ‘꼴’을 원형으로 삼아 더 이상 인멸·변질되지 않도록 하자는데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문화식민지 아픈 과거 이런 때에 생각이 깊지 못한 사람들은 남의 나라에 없는 무형 문화재 지정을 자랑삼기도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동양 3국으로 일컫는 일본,대만,우리나라(중요 무형문화재 지정순서)가 무형문화재 지정의 종주국(?)이 되었음은,이 세 나라의 지난 역사 가운데 스스로 주인 노릇을 못한 부끄러운 과거가 있었던 증거임을 어찌 깨닫지 못한단 말인가. 가장 무서운 정신적 문화식민지를 거친 여독으로 일본도 대만도 우리나라도 독창적 자기문화가 일실되고 보니 60년대초,서둘러 중요 무형문화재의 지정이란 방편으로 자구책을 펴게 되었던 것임을 어찌 아직도 모를까. 여기에는 이 사업의 주관처인 문화재 관리당국의 책임을 먼저 물어야 한다. 중요 무형문화재 기·예능보유자는 자신이 무형문화재의 보유자로 인정된 근거가 된 원형에 충실한 전수교육에 일념해야 할 터인데,일단 관리당국의 지시·감독이 철저치 못했다. 기능분야 예능분야 할 것없이 원형의 보존보다는 새롭고 유행스런 것의 개발에 더욱 신경을 쓰니 본디의 인정이유가 무색케 되고 말았다. ○‘현대화’는 전문가의 몫 기·예능보유자가 할 일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설정한 원형의 보존에 충실해야 한다. 그를 바탕으로 오늘의 것으로 재창출하는 일은 인정된 보유자가 아닌 해당분야 전문가들의 몫이다. 이제는 그런 구별을 하지 않아도 될 단계에 이르렀다면 중요 무형문화재를 별도로 지정할 이유가 없어진다. 좀 이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문화재 관리당국이 얼마만큼 앞을 내다보는 안목으로 무형문화재 정책을 펴 나가느냐에 따라 우리도 이른바 선진국들처럼 구태여 무형문화재의 지정 없이도 독창적 문화를 주체적으로 꽃피울 수 있는 날을 앞당기게 될 것이 아닐까 한다.
  • ‘한지붕 두가족’ 불협화음/홍콩 반환 1년

    ‘동방의 진주’ 홍콩이 7월1일로 중국에 반환된 지 꼭 한돌이다.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홍콩 차이나의 1년’은 세계인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비록 법적으로는 ‘1국가 2체제’로 자유분방한 영국식 정치환경이 보장됐지만,역사적 주권 귀속이 주민들에겐 무겁게 다가왔을 것이다. 아직 ‘생부모’(중국)보다는 150년을 함께 생활해온 ‘양부모’(영국)쪽에 더 마음이 쏠린 그들이었다. 더욱이 때마침 밀어닥친 아시아권 경제위기에서 홍콩도 예외가 아니다.변혁의 물결로 소용돌이치는 홍콩의 오늘을 진단해 본다. ◎급속 中國化 부작용… 국제 비즈니스센터 위상 흔들/개혁세력 선거 승리… 시민 상당수 “英領시절 그립다” 홍콩이 50년 시한부인 특별행정구라는 지위로 중국에 귀속된 지 어언 1년. 사회주의 체제하의 12억 본토인과 시장경제하의 650여만 홍콩인들이 ‘한지붕 두가족’처럼 딴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 ‘1국 2체제’구도는 겉보기엔 순조롭게 뿌리를 내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질적인 체제의 접목 과정에서 내부적으로 큰 몸살을 앓고 있다. 변화의 방향은‘탈(脫)영국 중국화’로 요약된다. 홍콩은 더 이상 동서양가치가 조화롭게 공존하던,과거의 ‘동양의 진주’가 아니다. 올들어 홍콩거주 영국인들의 ‘엑소더스’도 가속되고 있다. 반환 이전 3만1,400여명을 헤아리던 영국인들이 현재 2만7,000여명으로 줄었다. 중국 정부의 음양의 간섭으로 서구식 자유주의도 눈에 띄게 위축되고 있다. 문제는 급속한 ‘중국화’과정에서 장점보다는 부작용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영국 통치의 강점이었던 ‘법의 지배’가 약화되는 대신 인치와 연고주의가 고개를 들고 있다. 영국령일 때보다 한층 무질서해진 교통질서가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중국어 전용이나 서구적 질서의 실종은 그렇찮아도 위기국면인 홍콩경제의 주름을 깊게 하고 있다. 금융·무역 등 국제 비즈니스센터로서의 홍콩의 위상을 약화시키고 있는 까닭이다. 다수 홍콩인들의 불안감도 증폭되고 있다.최근 홍콩대 사회과학원의 여론조사가 이를 입증한다. 주민 대다수가 영국 통치를 그리워하는 역설적인결과가 나온 탓이다. 이는 지난해 9월 주권반환 100일에 즈음한 홍콩정부의 여론조사 결과와는 극히 대조적이다. 당시엔 주민의 80%가 “‘홍콩 차이나‘가 더 안정되면서 번영할 것”으로 내다봤다. 요컨대 홍콩과 중국이 협연하고 하고 있는 ‘1국 2체제’교향악은 아직 미완성 상태로 불협화음을 빚어내고 있는 셈이다. 중국 귀속후 처음 실시됐던 지난달 입법회(의회)선거에서도 이 여론이 반영됐다. ‘홍콩발전민주연맹’ 등 친중국계는 불공정 시비 속에 간선제로 뽑는 의석을 독식,억지로 다수파가 됐다. 하지만 민주당 등 개혁세력이 직선제인 지역구 20석중 15석을 석권,사실상 승리를 거뒀다. 이 결과는 중국 귀속 이후 상황에 대한 홍콩인들의 강력한 불만표출로 받아 들여진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기묘한 동거체제가 벌써 삐걱거리고 있는 징후인 것이다. ◎홍콩은… 홍콩은 홍콩섬과 대륙의 구룡반도,그리고 부근의 240개의 조그마한 섬들로 되어 있다. 모두 합해 면적은 1,067㎢. 제주도가 1,845㎢이니 제주도의절반보다 조금 큰 편이다. 주변 경관이 아름답고 동서양간 경제교류의 징검다리로 보물과 같은 존재라 해서 흔히 ‘동방의 진주’로 불린다. 그러나 157년전만 하더라도 홍콩섬은 불모의 땅이었다. 고작 해적의 소굴에서 ‘동방의 진주’로 변신한 것은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부터. 1841년 아편전쟁의 와중에 홍콩섬에 영국군이 처음 진주했고 이듬해에 아편전쟁이 끝나면서 영국에 할양된다. 18년후 2차 아편전쟁이 4년만에 매듭지어지며 구룡반도와 스톤 캐터스섬이 영국 영토가 된다. 그리고 1898년의 의화단 사건을 수습하면서 영국은 란타나오섬을 비롯한 200여개의 섬들을 또 넘겨받는 대신 할양기간을 99년으로 조정하는 조약을 맺었다. 60년대에서 80년대를 거치며 홍콩은 아시아는 물론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되면서 영국이나 중국에 ‘효자’노릇을 톡톡히 한다. 실제로 중국정부는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게 했던 조약들이 평등하지 않다면서도 공식적으로 반환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79년 반환협상을 시작했고 84년 협상에서 역사적인 ‘97년 홍콩반환에 관한 공동성명’에 조인하면서 97년 7월1일 157년만에 본래의 중국 땅이 되었다. 그리고 1년이 흘렀다. ◎누가 이끄나/董建華·陳方安生 1국2체제 실험 주도/李柱銘 민주당수 “개혁세력의 희망봉”/통화전문가 任志剛 경제 조타수 역할 ▲둥젠화(董建華·61) 행정장관=홍콩이 중국에 반환될 때부터 가장 많은 스폿라이트를 받았던 인물. 지난 1년동안 톈안먼(天安門) 사태 추도행사를 보장하고 입법회의 선거를 실시하는 등 유화 정책을 많이 썼다. 홍콩의 초대 행정장관으로서 앞으로 4년간 ‘1국 2체제’실험을 주도해나갈 인물이다. ▲천팡안성(陳方安生·58) 행정총리=둥젠화 행정장관 아래 홍콩의 관료들을 이끄는 제2인자. ‘홍콩의 대처’로 불린다. 영국 통치시절 홍콩 번영의 반석이라 할 깨끗한 행정관료 조직을 중국 귀속 이후에도 별 흔들림없이 잘 지켜내고 있다는 평이다. ▲스투화(司徒華) 지련회 주석=홍콩 민주 운동 단체의 대부격인 ‘애국민주운동을 지원하는 홍콩시민들의 연합회’(약칭 지련회)주석. 톈안먼 사태 기념 촛불시위 등을 주도. 중국의 인권탄압상을 국내외에 알리며 홍콩시민의 민주화 교사역을 하고 있다. ▲리주밍(李柱銘·60) 민주당 당수=5월24일 홍콩이 중국이 반환된 후 처음 치러진 입법회 선거에서 화려하게 재기했다. 귀속 전 최대 정당인 민주당의 수장. 이번 입법회 선거에서 민주당 등 개혁세력이 지역구를 휩쓰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민주주의 수호자’인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중국을 방문하는 길에 당연히 자신을 만나야 한다고 주장해 미국측을 난감하게 만들기도 했다. ▲조셉 얌(任志剛·50) 홍콩 재정사 금융관리국 총재=아시아 경제위기를 통해 급부상한 통화정책 전문가. 지난해 10월 미국 달러에 대한 홍콩달러 가치 하락 압력이 거세자 하룻밤 사이에 홍콩 이자율 280% 인상을 단행,환율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주역이다. 홍콩 경제 순항의 열쇠를 쥔 인물이다. ◎달라진 것들/北京語 배우기 열풍… 모르면 2류시민/“아편전쟁은 침략전쟁” 中 역사관 주입/영국紋章 사라지고 紫荊化도안 사용 홍콩 특별행정구의 거리에선 이제 그 흔하던 대영제국(大英帝國)의 왕관 로고를 찾아볼 수 없다. 엘리자베스 여왕 동상은 물론 우표에 찍힌 여왕 흉상도 사라져 버렸다. 대신 특별행정구를 상징하는 박태기나무꽃(紫荊花 자형화)도안이 행정특구 깃발에서부터 경찰제복에 이르기까지 뒤덮고 있다. 지난해만해도 어색하던 지하철과 공공장소에서의 보통화(普通話 베이징 표준어)의 사용도 자연스런 일이 됐다. 영국 통치 시대 홍콩에선 영어와 광둥어(廣東語)만을 사용해 보통어는 소통이 불가능한 외국어에 불과했다. 초등학교 등 각급 학교에선 보통화 교육이 필수가 됐다. 아직 완벽하지 못한 보통화를 배우려는 공무원과 직장인들로 학원은 계속 호황이다. 영국 치하에서 영어에 능숙하지 못하면 2류 시민이 됐던 것처럼 이제 매끄러운 보통화 실력없이는 설땅이 좁아지고 있다. 각급 학교의 교과서가 개정된 것은 물론이다. 중화민국은 타이완(臺灣)으로 격하됐고,역사는 영국의 식민지배적 관점에서 중국의 역사관으로 대체됐다. 예전 영국령 홍콩 시절 교과서에서는 아편전쟁이 자유무역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일어났다고 기록했지만 이제는 본래 모습대로 침략전쟁으로 제자리를 찾았다. 공휴일도 달라졌다. 6월 두번째 토요일부터 시작되던 ‘여왕 탄신 기념일’연휴는 지난해로 홍콩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대신 10월1일부터 3∼4일간 이어지는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수립일이 홍콩섬과 구룡반도를 뒤덮는 불꽃놀이 속에 가장 성대한 축제일로 자리 잡았다. 지난해 7월1일 이전까지 법원의 최종 판결은 영국의 추밀원에서 결정했으나 이제는 홍콩에도 최종심 법원이 설치돼 자체적으로 처리하고 있다. 거리의 외환 환전창구에선 인민폐(중국돈)를 바꿔주고 있고 인민폐를 홍콩돈처럼 받는 상점도 늘고 있다. 물론 ‘베이징 바람’이 점점 거세질 수록 ‘홍콩 차이니즈’들의 정치적 참여와 비판의식도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홍콩의 중국화는 어쩔수 없는 대세로 굳어지고 있다. ◎경제/불황 주름살/1분기 마이너스성장 실업률 15년래 최악 중국 반환 1주년을 맞는 홍콩이 요즘 우울하다. 홍콩의 버팀목은 단연 경제. 꼭 영국과 결별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때마침 닥친 아시아 경제위기에 휩쓸리며 어려움을 격고 있다. 90년대 들어 5%대의 경제 성장율을 유지해 왔으나 올들어 1·4분기에는 -2%를 기록했다. 경제가 침체되다 보니 실업률도 최악의 상황이다. 1.4분기 실업률은 4.1%. 최근 15년이래 가장 높은 것이다. 96년의 실업률은 2.8%,지난해 2.5%였다. 지난해 중국 귀속을 앞두고 불안심리가 팽배하면서 오르기만 했던 부동산 가격과 주식의 폭락은 사뭇 심각하다. 주가는 1년 전보다 절반 아래로 떨어졌고 부동산도 40∼50% 수준에 머물고 있다. 홍콩 경제가 자랑하는 고정 환율제마저 흔들리고 있다. 홍콩 달러가 실제가치보다 높게 평가되면서 수출 경쟁력이 탄력을 잃고 1년 내내 붐비던 관광객마저 발길이 뜸해졌다.중국에 편입되면서 11%나 줄었던 관광객이 올들어 24%나 더 감소했다. 재무장관격인 도널드 창(曾蔭權) 재정사(財政司)는 지난 17일 올 경제성장률 3.5%의 달성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몇년간경제 전망도 어둡다고 털어 놨다. 버팀목인 경제가 허약해지자 홍콩 사회가 흔들린다. 실제로 최근 홍콩대학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홍콩장래에 대한 불신도(不信度)도 지난해 9%에서 25%로 늘어났고 신뢰지수는 최저수준을 기록했다. 동북아와 동남아의 요충지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세계최고의 컨테이너 수송능력과 첵납콕 신공항 등으로 요약되는 아시아 금융·무역의 중심지 홍콩. 그러나 싱가포르와 상하이(上海)가 홍콩의 자리를 맹렬히 추격하는 상황에서 ‘동방의 진주’가 얼마나 더 ‘제 색깔’을 유지할지, 의구심이 커가고 있다.
  • 한일청구권 협정 재조명 공동심포지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과 일본의 ‘전후 보상을 생각하는 변호사협의회’는 26일 서울 서초동 변호사회관 대회의실에서 ‘전후 책임,한일청구권 협정의 재조명’이란 주제로 공동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번 심포지엄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연금지급청구소송을 냈다가 1심에서 기각당한 재일교포 石성기씨(77)등이 최근 한국 정부를 상대로 헌법소원을 낸 것을 계기로 재일한국인 상이군속 보상에 대한 바람직한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됐다. 재일교포 金敬得 변호사와 민변 張完翼 변호사가 발표한 ‘재일한국인 상이군속의 전후보상재판의 추이와 전망’과 ‘전후 보상 헌법소원의 의미’를 요약한다. ◎전후보상재판 추이·전망/재일한국인 日 원호법 적용 당연/金敬得 재일교포 변호사 재일한국인의 보상청구권에 대한 한일양국의 견해는 완전히 엇갈린다. 일본 정부가 재일한국인의 보상청구권은 지난 64년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보는 반면 한국 정부는 그렇지 않다는 입장이다. 한일청구권협정 제3조는 이 협정의 해석 및 실시에 관해서 한일양국간에 다툼이 있을 때에는 중재위원회를 설치해 해결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石성기씨는 1심에서 패소한 뒤 한국 정부에 대해 일본 정부에 중재 요청을 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으나 한국 정부는 아직도 일본 정부에 중재요청을 하지 않고 있다. 이번에 제기한 헌법소원은 중재 요청을 안하는 한국 정부의 행위가 한국 헌법에 위배되는 지를 문의하는 것이다. 식민지 지배 아래 일본국의 침략전쟁에 동원된 한국인 군인과 군속의 보상은 일차적으로는 일본국이 져야 하며 일본은 재일한국인 상이군속에 대해 원호법을 하루 빨리 적용해야 한다. 동시에 한국정부는 더이상 재일한국인의 전후보상문제가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해서 해결됐다는 구실을 일본 정부에 주지 않도록 하루 빨리 한일청구권 협정 3조에 의한 중재를 일본 정부에 요청해야 한다. ◎전후보상 헌법소원의 의미/징집피해자 배상 정부가 나서야/張完翼 민변 변호사 일본 정부가 한일 청구권 협정의 특정조항에 대해 한국 정부와 다르게 해석하고 있으므로분쟁의 신속한 해결을 위해서는 양국 정부가 중재위원회의를 설치해 그 결정에 따르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특히 재일 한국인 피해자들은 거의 80이 넘은 고령이어서 언제 사망할지 모르는 처지이기 때문에 재일 한국인의 청원은 재외국민이 정부에게 긴급하게 외교적 보호를 요청한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상당한 기간 내에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도 아직까지 중재위원회 설치 문제에 관해 명확한 입장조차 표명하지 않고 있는 것은 ‘공권력의 불행사로 인해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을 침해’받은 것이므로 헌법재판소에 부작위 위헌확인 청구가 가능하다. 한국 정부는 일본 식민지 지배 하에 강제 징집 징용되어 현재까지 고통받고 있는 피해자들이 만족할 만한 조치를 현재까지 취하지 않고 있으며 사법적인 구제도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상태다. 그러므로 이들의 피해를 배상할 새로운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 재일 한국인 피해자들이 제기한 이번 헌법소원이 그들만이 아닌 모든 피해자들에게 정부와 국민들의 관심과 분발을 촉구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 48년 白凡 북행길을 가다(휴전선 해빙의 시대 오는가:上)

    ◎소떼 넘은 분단 현장 和解의 瑞氣/잇단 장성회담·투자설명회 “변화 실감”/임진강나루 서쪽 5㎞엔 통일대교 관통/긴장·대결의 무대 판문점 화해·교류의 場으로 변화/평화로운 비무장지대 산새·짐승의 낙원으로/50년전 白凡의 북행길 鄭 회장 대남방송속 귀국/역사에 묻힌 평화통일론 DJ 햇볕론으로 재구현 鄭周永 현대명예회장의 최근 소떼몰이 방북과 그로 인한 올가을 금강산 관광에의 기대는 온국민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다. 6·25 48주년 아침,또다시 처절한 동족상잔의 비극이 되새겨지는 때이지만 여느해와는 다른 희망과 기대가 샘솟고 있다. 서울신문은 그 남북해빙(解氷)의 기운을 전하기 위해 당시 남북간 민족의 교통로였던 판문점 일대와 철원,고성을 찾았다. 이는 백범 金九 선생이 민족통일의 염원을 안고 북으로 향했던 50주년 되는 해여서 의미를 더해주고 있다. 분단 50년. 그 긴 인고(忍苦)의 세월을 지나온 분단의 땅에도 마침내 ‘화해의 봄’은 오는가. 불행한 식민지시대의 시인 이상화의 소망대로 1945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왔다.그러나 그 봄은 너무나 짧았다. 한반도는 곧 분단의 긴 겨울로 접어들었다. 한국전쟁은 분단의 벽을 더욱 높였다. 그러나 이제 분단의 겨울을 헤치고 ‘화해의 봄기운’이 판문점으로부터 피어오르고 있다. 이같은 새로운 변화의 기운은 분단의 비극을 증언하는 역사의 현장으로 긴박한 갈등과 첨예한 대결의 무대였던 판문점의 개념을 바꿔놓았다. 화해와 교류의 장소로 그 기능과 분위기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판문점의 변화는 鄭周永 명예회장이 16일 소떼 500마리와 함께 군사분계선을 넘는 새로운 풍속도로 나타났다. 얼음보다 더 차가운 판문점의 긴장이 초여름의 뜨거운 태양과 새정부의 ‘햇볕정책’에 의해 화해의 따듯한 분위기로 녹아드는 순간이었다. 그가 돌아오던 23일의 판문점은 마치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이 된 듯 북적거렸다. 판문점에 있는 군사정전위 회의실에서도 이날 7년만에 유엔사와 북한군 장성들이 마주 앉았다. 군사대화 채널이 다시 열린 것이다. 또한 중립국감독위 캠프 스위스측 건물에서는 120여명의 외국 투자가들이 참석하는투자설명회가 열렸다. 놀라운 변화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판문점으로부터 남서쪽 8㎞에 있는 도라전망대. 북한군 초소가 손에 잡힐듯 가깝다. 남과 북이 푸르름으로 이어진 비무장지대(DMZ)는 평화로웠다. 산새와 짐승들은 울창한 삼림 속에 그들의 낙원을 이루고 있었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원초적 평화와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나 분단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그 평화로움 속에도 긴장만을 느낄뿐이었다. 때마침 다시 시작된 북한의 대남방송은 남북간의 긴장과 대결의 심각함을 알려주었다. 냉전이 20세기 후반 긴장 속에 세계평화를 유지했듯이 냉전의 잔영이 짙게 남아 있는 DMZ에는 긴장과 평화가 공존하고 있었다. 대남방송은 시대의 흐름을 역류하는 실패한 혁명론을 낡은 레코드판처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한 대남방송 속에 판문점을 넘어온 鄭명예회장은 남북경제교류의 새 시대를 열었다. 그가 갔던 길은 50년전 金九 선생이 갔던 길이다. 백범은 남북 협상을 위해 48년 4월19일 38선을 넘었다. 金九 선생은 그 당시 지금의 통일대교로부터 동쪽으로 5㎞ 정도 떨어진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임진강을 건넜다고 그와 함께 평양에 갔던 金祐銓 전 광복회부회장은 말했다. 그는 백범이 50년전 임진강을 건넜던 나루터를 22일 다시 찾았다. “金九 선생의 평양 방문은 민족의 운명을 외세에만 맡기지 않고 통일을 위해 우리 스스로가 노력했다는 소중한 역사”라고 金 전부회장은 말했다. 백범의 자주적 평화통일론은 그러나 빛을 보지 못해왔다. 백범을 죽인 일그러진 권력은 그의 통일론을 역사속에 묻어두었다. 그러나 백범의 통일론은 민족의 자주적 화해와 통일을 추구하는 金大中 대통령에 의해 다시 구현되고 있다. 남북관계는 그러나 한쪽만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 북한의 호응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북한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鄭명예회장의 방북과 판문점에서의 대화·교류를 허용하면서도 같은 시간 동해안에는 북한의 잠수함이 있었다. 북한의 이중전략은 남북관계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화해를 어렵게 해왔다. 남북관계는 그동안 화해와 단절이 반복돼 왔다. 해빙의 조짐이 있다가도 돌발사건이 발생하면 다시 남북관계는 얼어붙곤했다. 남북관계에서 낭만적 환상은 금물이라는 사실을 체험했다. 그러나 70년·80년대의 남북화해에는 한계가 있었다. 세계사를 지배하던 냉전이라는 큰 틀 속의 남북관계였기 때문에 냉전이라는 이념의 벽을 넘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한반도의 냉전은 계속되고 있지만 세계사적인 냉전은 끝났다. 국제정세가 크게 바뀌면서 남북관계에도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해졌다. 金大中 대통령은 국제변화를 적극적으로 활용,남북관계의 새로운 틀을 짜고 있다. 그것은 북한을 포용하는 햇볕정책을 바탕으로 한 과거와 다른 차원의 남북교류와 화해다. 햇볕정책은 鄭명예회장의 방북과 금강산개발 합의라는 열매를 맺었다. 鄭씨가 달린 통일대교로부터 판문점까지 이어진 새로운 도로는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과 어우러져 통일의 희망을 갖게 한다. 鄭씨도 통일의 가능성을 느꼈다고 말했다. 도라전망대 근처 통일촌에 사는 윤여원(31)씨도 “鄭명예회장의 방북등 남북교류의 활성화를 통해 화해와 통일이 하루빨리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도라전망대 바로 앞의 DMZ는 한국전쟁의 포화로 ‘죽음의 땅’이 되었던 곳이다. 그 폐허가 지금은 자연의 보고로 바뀌었다. 위대한 자연의 복원력은 죽음의 땅을 ‘생명의 낙원’으로 바꾸어 놓았다. 남과 북의 단절도 자연의 복원과 같이 화해로 이어질 날이 다가오는 듯하다. ◎白凡북행 수행 金祐銓씨/“鄭周永씨 방북은 역사의 진전”/새정부 對北유화정책 매우 반가운 일/그분의 평화통일노력 재평가 중요 징표 金九 선생과 함께 평양을 방문했던 金祐銓 전 광복회부회장이 22일 백범이 건넜던 임진강 나루터를 50년만에 다시 찾았다. “金九 선생이 통일의 큰 뜻을 품고 건넜던 임진강 나루터에 다시오니 감개 무량합니다.” 광복군 출신으로 백범을 가까이에서 모신 金 전부회장은 잠시 회상에 잠겼다. “金九 선생의 소원했던 통일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백범이 갔던 길을 반세기만에 鄭周永 현대명예회장이 다시 간 것은 중요한 역사의 발전입니다.” “金九 선생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는 지도자들이 노력하면 통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분단상황은 그 때보다 훨씬 견고합 니다. 그러한 분단상황이 金大中 대통령의 유화적 대북정책으로 해빙의 조짐이 보이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입니다. 그것은 金九 선생의 평화통일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징표입니다.” 金전부회장은 나루터 주변이 많이 변했다고 말했다. “50년전에는 주변에 집도 별로 없어 황량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반대로 어렵게 평양을 방문하는 길이라 더욱 쓸쓸한 마음이었죠.” 그러나 지금은 전혀 분위기가 다르다. 나루터는 군부대의 통제로 마음대로 다닐 수도 없고 주변에는 현대식 건물들이 많이 지어졌다. 화려한 건물들은 대부분 음식점이다. 임진강 특산물인 황복과 민물장어 간판이 어지럽게 걸려 있다. 나루터 근처는 새로운 도로공사로 어수선했다. 그러나 임진강은 민족의 비극과 통일의 염원을 동시에 안은채 오늘도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
  • 중국/그 문화를 읽으면 과거·현재·미래가 보인다

    ◎中 관련서 세권 잇달아 발간/서양중심 시각 탈피 新해석 나폴레옹은 일찌기 중국을 두고 “중국이 눈을 뜨면 세계를 뒤흔들 것이다”라고 했다. 그 중국은 이제 ‘잠자는 사자’에서 깨어나 서구인들의 동양회귀(East turning) 열기의 진원이 될 만큼 거대 관심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은 과연 어떤 나라이며 어떤 방식으로 이해해야 할까. 최근 잇달아 나온 세 권의 책 ‘중국문화의 이해’(을유문화사)·‘중국이 보인다’(일빛)·‘코카콜라 병에 빠진 중국’(자작나무)은 하나같이 문화라는 창을 통한 중국이해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중국 문화의 이해’는 국내 최초로 ‘허사(虛辭)사전’을 펴낸 건양대 김원중 교수(중문과)가 지은 중국 문화론이다.김교수는 이 책에서 지금까지의 중국 문화를 보는 관점이 유럽 중심주의 시각,즉 동양의 정체성에 시선을 고정시킨 서양우월적 태도에서 나온 것임을 지적한다.동양학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철저히 서양인의 시각에서 씌어진 식민지 학문이라는 성격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교수가 말하는 중국 문화의 특징은 중화(中華)사상으로 요약된다.그것은 동양은 자체 근대화 능력이 부족하므로 먼저 눈 뜬 서양이 동양을 도와줘야 한다는 제국주의적인 의미의 문화 우월주의와는 구분된다.수백년 전부터 유럽과 교류해온 광동시에서 서구 문물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거나,중국인들이 1860년 이전까지만 해도 정부의 공문서에서 외국인을 ‘만이(蠻夷)’라고 썼던 것은 그 두드러진 예다. ‘중국이 보인다’는 국내의 중국학 교수 26인이 쓴 중국문화 에세이.이책의 지은이들은 중국을 만들었고 또 만들어 갈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진정으로 예(禮)가 무엇인지 알았던 공자,위대한 청백리 공청천,문학을 사랑했던 중국의 정치지도자들,비행기가 사흘이나 늦게 출발해도 무덤덤하기만 한 보통 중국인들,자신의 시 ‘물소’에서 묘사했던 것처럼 ‘고생하면서도 화 한 번 안내고 살았던’ 시인 애청(艾靑,1910∼1996) 등이 그 주인공이다. 특히 중국의 역대 황제나 정치가들 가운데는 문학에 관해 깊은 소양을 지닌 인물들이 많다.이것은 어쩌면 하나의 전통인도 모른다.예컨대 춘추전국시대의 제왕이나 정치가들 중에는 ‘시경’의 시들을 암기,외교의 장에서 시구절로 화답함으로써 외교적 성공을 거둔 경우가 적지않다.항우는 유명한 ‘해하가’를 읊었고,한 고조 유방은 ‘대풍가’를 남겼으며,조조 삼부자(三父子)는 당대 최고의 시인들이기도 했다.송나라의 진종은 직접 ‘권학시’를 지을 정도였다.이런 전통은 현대까지 그대로 계승됐다.모택동은 전통 형식의 시사(詩詞)들을 즐겨 지었다.모택동의 대표적인 사(詞) ‘심원춘·설’의한 토막. 그가 ‘서정시인’으로 높이 평가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책에서는 이밖에 ‘온 우주를 먹는다’는 중국인들의 요리문화,다양하기 그지없는 술문화,‘쪽빛 개미’로 표현될 정도로 쪽빛 옷을 즐겨 입는 중국인의 옷문화 등이 소개된다. 일본 요미우리 신문 북경 특파원을 지낸 탄도 요시노리(丹藤佳紀)씨가 쓴 ‘코카콜라 병에 빠진 중국’(김양수 옮김)은 ‘민부국강(民富國强)’의 기치 아래 개혁·개방의 길을 걷고 있는 현대 중국을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샤하이(하해·下海:돈을 더 벌려고 직장을 옮기는 일),커커우커러(가구가락·可口可樂:코카콜라),따꺼따(대가대·大哥大:핸드폰)….변화의 바람에 휩싸인 개방 중국에는 이처럼 신조어들이 많다.이 책에서는 중국의 사회변화를 알려 주는 100가지의 키워드를 골라 내 중국을 읽는다. 1990년대 중국학의 과제는 박물관에 존재하는 ‘정물(靜物)로서의 중국’이 아니라,실제로 우리 곁에서 숨쉬고 움직이는 ‘등신대(等身大)로서의 중국’을 파악하는 것이다.이번에 나온 세 권이 중국관련서는 중국의 과거와 현재,미래를 주로 정신문화적 관점에서 살폈다.중국의 문화를 알면 중국의 강점과 약점,치부와 긍지를 똑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白凡 재조명:4·끝(정직한 역사 되찾기)

    ◎“위대한 白凡사상 새정부서 법통 계승”/통일염원 안고 넘었던 38선 반세기 만에 다시 열려/京橋莊 반드시 복원… 문화재로 지정 영구보존 해야 서울신문은 ‘정직한 역사 되찾기’ 일환으로 백범 金九 선생을 재조명하고 있다. 이는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이면서도 잘못된 평가를 받아온 金九 선생을 역사의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것이다. 백범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통해 일그러진 현대사와 가치관의 혼돈을 바로잡고 사회정의를 확립하지 않으면 안된다. 金九 선생의 업적·사상·통일론 등과 이들을 오늘의 현실에 어떻게 승화시킬 수 있는가를 백범 재조명을 마무리하는 좌담회를 통해 알아본다. 서울신문 金三雄 주필의 사회로 열린 좌담회에는 金九 선생 아들 金信 장군,저명한 백범연구가인 金祐銓 전 광복회부회장과 李萬烈 숙대교수(한국사 전공) 등이 참석했다. □참석자 金信(金九 선생 아들) 金祐銓(전 광복회부회장) 李萬烈(숙명여대 교수) 金三雄(사회·주필) ▲金三雄 주필=金九 선생이 남북협상을 위해 38선을 넘은지 50년만에 鄭周永현대명예회장이 판문점을 통해 북한땅을 밟았습니다. 그때와 지금의 정황은 물론 다릅니다. 하지만 백범이 갔던 길을 반세기만에 鄭명예회장이 다시 간것은 중요한 역사의 발전입니다. 백범이 서거한지 거의 50년만에 백범노선과 같은 金大中 대통령 정부가 들어서며 정경분리·상호주의 원칙을 바탕으로 남북관계에 물꼬가 트이고 있습니다. 金대통령의 워싱턴 방문중 미국도 대북 제재중 일부를 해제할 방침을 발표했습니다. 국제환경과 남북관계의 이러한 변화로 백범노선을 실천할 수 있는 단계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오늘의 상황에 접목시킬 수 있는 백범사상과 통일론 등에 대해 우선 논의해 보죠. ○좌·우파 모두 포용… 문화국가 건설 ▲李萬烈 교수=백범은 동학·유학·불교·기독교 등을 섭렵하며 그들을 민족주의라는 큰 틀 안에서 완전히 용해시켰습니다. 다원적 종교가 있는 사회에서 여러 종교를 민족주의로 수렴시킨 것은 큰 의미가 있죠. 백범은 또 좌파세력과 민족주의 우파의 통합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러한 포용력을 배경으로 독립과 통일,더 나아가 문화국가 건설을 지향했습니다. 통일이 안되면 완전한 자주국가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한차원 더 높은 문화국가는 더욱 어렵다고 인식했죠. 민족의 미래를 위해 통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金주필=백범은 임시정부를 27년간이나 이끌었습니다. 그러한 예는 세계사에도 없는 일이죠. 독립운동사에서 백범의 역할과 위치는 어떻습니까. ▲金祐銓 부회장=임시정부에서 백범의 역할은 절대적이었습니다. 독립운동의 화신이었죠. ▲金주필=그러나 백범은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李교수=백범 반대세력이 정권을 잡았기 때문이죠. 통일지향 세력이 아니라 남북분단 세력이 정권을 잡은 후 기득권 유지를 위해 백범의 자주적 평화통일론을 묵살했습니다. 집권세력은 백범의 업적도 평가절하했죠. 백범에 대한 잘못된 평가의 긴 그림자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 남아 있습니다. ▲金주필=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자격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귀국후에도 주도권을 잡지 못했죠. 해방공간에서 백범이 왜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고 생각합니까. ▲金부회장=주도권을 잡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주도권은 잡았으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미국과 갈등을 빚었죠. 5·10선거 후에도 국회에서 金九 선생 지지가 많았어요. 남북협상 때도 108명의 문화인이 지지성명을 발표하지 않았습니까. 金九 선생이 돌아가신 후 반대파가 정권을 잡아 빛을 보지 못한것 뿐입니다. 특히 미국에서 공부한 학자들이 미국의 입장에서 백범을 본 오류의 결과입니다. ▲金信 장군=주도권 문제와 관련,金부회장의 생각과는 조금 다릅니다. 주도권을 잡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어요. 임시정부 지도자들은 미국의 강요로 개인 신분으로 귀국할 수 밖에 없었는데다 친일세력의 조직적인 반발로 어려운 상황에 빠졌죠. 친일세력들은 임시정부 요인들이 정권을 잡으면 자신들이 위험하다는 판단아래 똘똘 뭉쳤습니다. 일본에 아부했듯이 그들은 미군정에 아부했고 李承晩에게도 아부했습니다. 李박사정권에서 권력의 핵심을 차지했죠. 현대사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입니다. 가족에게 고통을주고 개인과 조상을 희생하면서 싸워온 독립투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습니다. 일제 식민통치 때 친일파 형사들에게 잡혀갔던 독립투사들이 해방후에 다시 그들에게 잡혀가는 기막힌 일들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친일세력들은 해방후 당연히 벌을 받고 독립투사들은 보상을 받았어야 했는데 거꾸로 됐죠. 그때 잘못된 역사 청산작업 때문에 현대사가 일그러진 것입니다. ▲金주필=백범은 분단을 거부하고 평화통일을 위해 남북협상을 추진했습니다. 남북협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남북지도자 공동성명 발표 큰 의미 ▲金부회장=남북협상에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는 것은 잘못된 평가입니다. 대표자 연석회의는 북측의 각본대로 움직였기 때문에 성과가 없었지만 백범이 관심을 가진 것은 남북지도자 회담이었어요. 金九 선생,金奎植 박사,金枓奉,金日成 등 4명의 지도자들은 4월30일 회담후 공동성명까지 발표했죠. 공동성명은 전문과 4개항으로 구성돼 있으며 통일정부 수립을 명시하고 있어요. 남북지도자가 만나 공동성명까지 발표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북한 단독정부 수립도 적극 반대 ▲金장군=평양에서 아버님이 연설하실 때 남쪽만의 단독정부는 절대 반대한다고 말씀하시자 열렬한 공산당식 박수가 터져나왔죠. 그러나 북쪽에서의 단독정부 수립도 반대한다고 하시자 장내는 조용했습니다. 북쪽만의 단독정부 수립도 반대한다는 것은 언론에도 일체 보도되지 않았어요. 북측도 남쪽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는 내용만을 발표했습니다. ▲金주필=백범의 자주적 평화통일 정신을 오늘의 상황과 어떻게 연계시킬수 있을까요. ▲金장군=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초기에는 민족주의자 뿐만 아니라 좌파와 무정부 인사도 참여했습니다. 임시정부가 어려워지자 많은 사람들이 떠났지만 충칭(重慶)으로 옮겨왔을 때도 연합정부였죠. 연합정부였던 임시정부의 법통과 아버님의 통일론을 이어받아 통일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독립운동 때도 독립의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독립을 위해 싸우는 일은 비현실적이라는 비관론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독립을 이룩하지 않았습니까. 통일도 지금은 쉽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통일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金주필=임시정부는 1941년 대일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임시정부가 주체가 되어 전승국으로 대접받고 전후 처리문제에서도 발언권을 강화하기 위한 포석이었죠. 그러나 연합국은 그러한 대접을 해주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李교수=프랑스는 소극적이나마 임시정부를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영국 등은 인정하지 않았죠. 미국은 임시정부가 분열돼 있기 때문에 어느 정부를 인정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핑계에 지나지 않았어요. 사실은 독립운동때 임시정부가 중국에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중국과 가까워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영국은 자신들의 식민지 때문이었죠. ▲金주필=시해되던 날은 일요일이었는 데도 金信 장군은 그날 옹진에 가셨죠. 암살음해 세력이 金장군을 떼어놓기 위한 음모는 아니었나요. ▲金장군=유엔대표단과 함께 갔었습니다. 그러나 명령에 따랐을 뿐이었어요.어떤 음모가있었는 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평양에서 돌아온 후 암살에 관한 여러가지 풍문이 많았고 그것들을 여러차례 아버님께 말씀드렸죠. 돌아가시기 이틀전에는 박동엽씨 등 2명이 경교장으로 찾아와 보다 안전한 병원에 입원시키라는 말도 했어요. 그말을 아버님께 전했으나 나는 떳떳하며 겁낼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기념관 건립·학술상 제정 등 절실 ▲金주필=새정부의 탄생을 계기로 임시정부의 법통계승과 백범사상을 이어받을 사업을 추진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백범 기념관 건립,전집 출판,학술상 제정,백범과 3열사의 묘가 있는 효창공원 성역화 작업 등이 있을 것입니다. 먼저 기념관 건립과 관련,李교수께서 말씀해 주시죠. ▲李교수=백범 기념관은 꼭 필요합니다. 서거 50주년(1999년)이나 2000년의 새 세기가 시작되기전 기념관이 지어져야 합니다. 건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했으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어요. 기념관을 지을 때는 국민의 이름으로 지어야 합니다 이상적인 장소는 서대문형무소 자리일 것입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오랫동안 옥고를 치렀고 그곳은 통일로의 출발점입니다. 백범의 독립과 통일정신이 어우러질 수 있는 곳이죠. 효창공원도 국립묘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광주의 망월동 묘지는 이미 국립묘지 수준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효창공원이 국립묘지 수준이 안된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金주필=백범이 머물렀던 경교장(京橋莊)의 복원문제는 어떻습니까. ▲金부회장=영구 보존을 위해 우선 문화재로 지정해야 합니다. ▲金주필=백범을 기념하는 독립상과 통일상 등을 만들면 어떨까요. ▲李교수=좋은 생각입니다.그러나 셋방살이도 꾸려가기 힘든 백범기념협회에서 그런 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죠. 상을 만들려면 백범의 이상인 독립국가·통일국가·문화국가를 상징하는 독립·통일·문화상을 만들고 차차 확대하는 것이 어떨까요. ▲金주필=金九 선생에 대한 여러가지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민족의 큰 스승인 백범의 사상과 통일론 등이 명실상부한 민주정부로 제2건국이라 할 수 있는 金大中 대통령 정부에 의해 이땅에서 완벽하게 구현되고 남북의 화해와통일로 이어지도록 모두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더욱 강렬해집니다.
  • 지구촌 분쟁지역 점검

    지구촌이 뒤숭숭하다.엘니뇨가 몰고온 기상이변으로 곳곳에서 인류가 끔찍한 시련을 격었다.아시아는 엎친데 덮친 겪으로 경제위기까지 맞고 있다. 그러나 인류를 가장 안타깝게 하는 것은 전쟁.유럽의 발칸반도에서는 ‘인종 청소’라는 대학살이 또다시 시작될 것 같다는 소식이 전해진다.아프리카에서는 한달째 무모하게 죽고 죽이는 국경분쟁이 이어지고 있다. 아시아도 조용하지가 않다. 카슈미르를 중심으로 반세기 이상 국경분쟁을 겪고있는 인도와 파키스탄은 핵실험을 강행해 인류를 전율케 했다.어느새 전쟁을 하기 시작했거나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도는 세계의 분쟁지역을 긴급진단해 본다. ◎코소보 세르비아측 알바니아계 탄압 배경/민족성지서 이민족 판치다니…/세르비아 전성기유적 코소보에 오롯이/주민 90% 알바니아계 자치 누리며 생활/현정부 자치권 박탈하자 독립 외치며 투쟁/서방,인종청소 우려 ‘공습 불사’ 개입 태세 유럽의 발칸반도를 흔히 ‘화약고’라고 한다.발칸반도의 신(新)유고연방세르비아공화국 코소보주에서 포연이 피어 오른다.끝이 보이지 않는 게 더 큰 문제다. 발칸반도를 자칫 전쟁으로 몰아 넣을 수도 있는 ‘코소보 사태’는 세르비아군이 자국민이면서 종족이 다른 코소보주 주민들을 유혈 탄압하면서 비롯됐다.코소보주는 세르비아 공화국 땅이면서도 주민은 엉뚱하게 90%가 알바니아계.코소보 사람들은 종족이 다른 까닭에 세르비아로부터 분리,독립하고 싶어 한다.코소보해방군(UCK)이라는 무장단체까지 만들었다. 세르비아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분리주의자들을 색출한다는 이유로 즉각 군사행동을 폈다.알바니아계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면 무차별 포격한다.3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5만명 이상이 집을 버리고 이웃 알바니아 등으로 피난을 갔다.세르비아가 알바니아계를 없애거나 코소보에서 모두 쫓아내려 한다고 우려한다. ▷배경 및 발단◁ 본질은 민족 갈등이다.유고에서는 세르비아계,알바니아계,몬테네그로계 등이 얽혀 산다.전체는 1,100만명 정도.알바니아계는 200만명 정도로 코소보에 몰려 산다.코소보의 90%가 알바니아계.세르비아계로 둘러싸인 알바니아계‘인종의 섬’같은 형국이다. 코소보의 고난이 시작된 것은 9년전인 89년.밀로셰비치 대통령은 티토정권이 들어선 2차 세계대전이후 인정해온 코소보의 자치권을 박탈했다.코소보는 91년 급기야 독립을 선언하고 나선다.세르비아는 바로 옆의 알바니아가 사주했고 물심 양면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세르비아 사람들에게 코소보는 결코 내줄 수 없는 땅이다.정신적 고향이 자성지이다.세르비아의 전성기인 14세기 스테판두산 왕국 시절의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실제 1차 세계대전 때까지만 해도 세르비아계가 차지하고 있었다.전쟁이 끝나며 바로 옆에 있는 알바니아 사람들이 대거 몰려와 오늘에 이르렀다. 미국을 포함한 서방국가들이 세르비아가 코소보에서 ‘인종 청소’를 감행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세르비아는 95년 7월까지 3년이나 계속됐던 이른바 보스니아사태에서 ‘인종 청소’을 감행해 세계의 지탄을 받았다.유고연방에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독립을 선포하자 세르비아는 즉각 응징에나섰다.보스니아사람들을 아예 없애버리기로 하고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었다. ▷사태 전망과 해결◁ 세르비아는 보스니아 때와 마찬가지로 무차별 보복을 할 것이다.그러나 보스니아 사태와는 사안이 사뭇 다르다.코소보 뒤에는 알바니아라는 나라가 있다.벌써 5만여명이 알바니아로 국경을 넘었다.알바니아를 근거지 삼아 장기적인 무력항쟁태세를 갖춘다면 세르비아는 알바니아를 공격하려 들 것이다.전쟁으로 번지기 십상이다. 사태의 심각성은 즉각 감지됐다.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는 즉각 세르비아에 물리력을 자제할 것을 경고하며 무력시위에 나섰다.알바니아에는 전투기를 치키로 했다.여차하면 폭격을 감행할 참이다.세르비아와 알바니아에 함께국경을 대고 있는 마케도니아에는 지상병력을 파견키로 했다. 그러나 무력시위나 결의안 만으로 이번 코소보 사태가 풀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상대가 아예 없어져 주기를 바라면서 벌이는 싸움이다.보스니아 사태에서도 그랬듯 다국적 평화유지군이 개입해야 발칸의 화약고가 잠잠해질 것같다. ◎印·파 카슈미르 분쟁 뿌리와 현주소/종교갈등이 핵경쟁까지 불러/주민 60%가 이슬람교도/47년 독립때 ‘파’ 귀속 희망/힌두교도 嶺主 인도에 양도/‘파’ 즉각반발 3차례 전쟁/협정이후 양국 분할 통치/모두 완전한 지배는 못해 인도와 파키스탄이 영유권 싸움을 하고 있는 카슈미르 지역이 세계의 눈길을 끌고 있다. 두나라가 지구촌의 우려와 비난을 무릅쓰고 핵실험을 강행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이 곳 때문이었다.세차례나 싸웠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상대를 압도할 무기가 필요했고 앞다투어 핵무기 개발에 진력해왔다. 카슈미르는 인도와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과 중국 등이 국경을 함께 맞대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때문에 두나라간에 치열한 영유권 다툼을 가져왔고 남아시아의 화약고가 됐다.22만여㎢의 면적에 500만여명이 살고 있다.인구의 60% 이상이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 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종교적 차이로 서로 다른 나라가 된 인도와 파키스탄.카슈미르는 어느 나라의 영토도 아니었다.주민들은 당연히 종교가 같은 파키스탄으로 편입될 것을 기대했다.그러나 힌두교도인 영주(領主)가 인도에서 원조를 받았다는 명분을 내세워 통치권을 인도에 넘겼다. 파키스탄이 즉각 반발하며 전쟁이 벌어졌다.유엔이 중재에 나섰고 어느 쪽에 편입되기를 원하는지에 대해 국민투표를 실시했다.서로 다른 의견이 팽팽히 맞섰고 결과적으로 분열만 조장했다.그리고 65년과 71년 또 두번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세번째 전쟁이후에는 협정을 맺었다.카슈미르를 두개로 쪼개 북부의 아자드 카슈미르는 파키스탄이,남부의 잠무 카슈미르는 인도가 통치하도록 했다.어느 나라도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해 지금도 분쟁의 불씨를 안고 있다.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 무력충돌 원인과 전망/독립당시 국경선 획정이 불씨/이웃사촌이 앙숙 사이로… 평화적 해결 불투명 아프리카 북동쪽에서 한달 가까이 총성이 그치지 않고 있다.국경선을 둘러싸고 에티오피아와 이웃 에리트레아가 전면전을 방불케 하는 국경분쟁을 치르고 있다. 이번분쟁은 지난달초 에리트레아가 잃어버린 땅을 되찾겠다고 국경을 넘어 에티오피아를 공격하면서 본격화했다.에티오피아의 반격과 함께 두 나라는 전투기까지 동원,수도와 주요 도시들을 서로 폭격했다.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의 국민소득은 각각 400달러와 570달러.모두 95년도 기준치이지만 요즘이라고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근래엔 심한 가뭄마저 들어 더욱 먹고살기가 어렵게 됐다.싸울 형편도 못되는 두 나라가 곧 전면전에 돌입할 태세다. ▷발단과 배경◁ 직접적인 원인은 국경분쟁이다.에리트레아가 에티오피아 서북부에 위치한 티그레주의 바다메를 침공해 점령한 것은 지난달 12일이었다. ‘내 땅은 내가 차지한다’는 생각에서였다. 하루아침에 ‘내 땅’을 빼앗긴 에티오피아도 발끈했다 두나라의 응어리는 6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에리트레아는 2차대전이 끝나면서 50여년만에 이탈리아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났다.그러나 독립국가는 되지 못했다.국력이 월등했던 에티오피아가 흡수 통합해 버렸다.에티오피아와는 천년도 넘게 같은 생활권으로 살아왔던 터.에리트레아는 즉각 해방전선을 조직해 무력항쟁을 벌인다.그리고 31년만인 93년 마침내 신생 독립국으로 탄생했다. 그러나 국경선이 문제였다.이번 분쟁의 빌미가 된 티그레주 일부가 에티오피아 땅으로 되어 있었다.에리트레아는 이탈리아의 식민지에서 벗어날 당시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며 자국 영토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지금까지 에티오피아에 편입되어 있었다. 모호한 국경선이 늘 분쟁의 불씨로 남아 있었지만 지난해까지만 해도 두 나라는 우호적이었다.한나라나 다름없이 화폐도 같이 쓰던 이들이 틀어지게 된 것은 지난해 11월.에리트레아가 에티오피아 통화 ‘비르’를 버리고 ‘나크파’라는 화폐를 만들었다.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레아가 괘씸했다.예전과 달리 교역을 하면서 미국 달러로 결제해 줄 것을 요구했다.에티오피아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온 에리트레아는 당장 큰 타격을 입었다.에티오피아의 국민총생산액은 250억달러에 이르지만 에리트레아는 20억달러.두나라 국민감정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잠재되었던 국경분쟁이 자연스레 불거졌다. 미국과 르완다,리비아 등이 앞다퉈 분쟁의 중재에 나섰다.두 나라에게 93년 이후 지켜져 왔던 국경선으로 각자 군대를 철수시키고 협상을 갖도록 촉구하는 평화안을 제시했다.그러나 감정이 절정에 다다른 두나라가 영토분쟁을 평화적으로 매듭지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두 나라 비교◁ 에티오피아 면적은 112만8,000㎢로 한반도의 5.5배쯤 된다.인구는 6,000만명.이탈리아의 침략을 물리치고 독립을 유지했던 나라로 한국전쟁 때 우리를 돕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적 안정을 찾지 못한 채 지금까지 극빈국에 머물고 있다. 반면 에리트레아는 국토의 크기를 비롯해 전체인구와 국민총생산액 등 국력이 에티오피아의 10분의 1 수준.종족과 언어가 9개에 이르고 이슬람교에서 기독교까지 종교도 복잡한 것은 두나가 모두 똑같다.
  • 이옥순씨 에세이 ‘인도여자에게 마침표는 없다’ 펴내

    ◎지구촌 여성의 20%… 그들 삶의 무게/1시간42분마다 한명꼴 지참금 관련 강요된 죽음/속박넘어 자유 얻을 날은… 인도의 ‘위대한 영혼’ 간디는 “힌두 여성은 신이 인류에게 준 선물”이라고 당당히 말했다.또 인도 고대의 법전인 마누법전은 “여성의 몸은 신성하기 때문에 꽃으로라도 때려서는 안된다”고 가르친다. 인도의 현실은 이러한 진리를 간단히 배반한다.죽은 남편의 화장더미에서 함께 타죽게 하는 ‘사티’의 전통이 아직도 숨쉬고 있고,지참금이 적다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사리에 불을 붙이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인도에는 카레가 없다’의 저자로 잘 알려진 이옥순씨(숭실대 강사)가 펴낸 ‘인도여자에게 마침표는 없다’(사과나무)는 인도 여성들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문화에세이다. “얼마 전 인도 연방의회의 한 의원이 ‘단발머리를 한 여자들은 인도인이 아니다’라는 말을 해 말썽을 빚은 적이 있었습니다.인도에서는 단발머리여성들은 보통 부도덕하고 헤픈 여자로 간주됩니다.이 정도면 인도 남성들의 사고는 초(超)보수적이라고 할 만하죠.인도 벵골 지방에는 ‘여자와 말이 있어야 할 곳은 남자의 다리 밑’이라는 모욕적인 속담도 있어요” 그러나 그는 인도 여성들의 척박한 삶 속에서도 희망의 단서를 찾아낸다.‘바라트 마타’ 곧 ‘인도의 어머니’로 불린 인디라 간디 총리와 ‘작은것들의 신’으로 영국 최고의 문학상인 부커상을 거머쥔 아룬다티 로이가 그 예다. “1966년 인디라 간디가 48세의 나이로 총리직에 오르자 남성들은 몹시 못마땅해했습니다.그러나 지난 71년 파키스탄과의 전쟁에서 보여줬듯 그는 결단력과 단호한 성격을 지닌 지도자로 역사에 확실하게 자리매김돼 있어요.오늘날 인디라 간디는 힘의 여신인 ‘두르가’로 숭배받을 만큼 영향력 있는 인물로 통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인도를 실재하는 구체적인 나라가 아니라 하나의 추상으로 떠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명상의 나라,굶주리고 헐벗은 몸으로 갠지스 강을 찾아와 행복하게 죽어가는 사람들,곳곳에서 신의 현현을 목도할 수 있는 영혼의 나라….인도는 과연 타락한 물질세계의 대안인가.‘정신주의’라는 알약을 내세워 인도를 과거에만 묶어두려 했던 영국 제국주의의 시선을 우리가 은연중 본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자신은 무한대의 세속적 욕망을 향해 줄달음치면서도 인도는 그저 심신이 고달플 때 잠시 쉴 만한 영혼의 땅으로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한,우리는 이기적인 이방인일 뿐이다.이 책은 바로 이러한 자성적 관점에서 씌어졌다. “이방인의 편견이 만들어낸 인도에 대한 허상을 깨고 인도의 명암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자는 게 이 책의 집필 의도입니다.문맹,결혼지참금,부정부패,저개발,부당 착취와 같은 사회문제에 몸살을 앓으며 요로운 삶을 꿈꾸는 보통사람들이 호흡하는 땅이 인도예요.인도에 성자가 넘치고 종교가 넘치는것은 그만큼 삶이 힘들고 고단하다는 반증이 아니겠어요” 97년 유엔의 세계인구에 관한 보고서에 따르면 인도 여자들은 1시간42분마다 한 명 꼴로 결혼지참금과 관련해 사망하는 것으로 돼있다.해마다 약 5,000건의 ‘강요된 죽음’이 발생하는 셈이다.인도에서 결혼은 한편으로는 ‘비즈니스’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바람처럼,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니 경(經)에 나오는 이 구절처럼 인도의 여성들이 속박을 넘어 자유를 얻을 날은 언제쯤일까.전세계 여성인구의 5분의 1을 차지하는 인도여성,그들의 옹이진 삶은 이 세상 모든 여성들이 풀어야 할 숙제다.“이 책 속의 인도여성들 이야기를 가볍게 읽되 결코 가볍지 않은 그들의 삶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헤아렸으면 합니다” 인도 델리대학에서 ‘식민주의와 교육’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씨는 현재 식민지시대 인도와 영국의 관계를 다룬 에세이집 “인도에 온 ‘영국신사’”(가제)를 구상중이다.그는 나이 밝히기를 한사코 꺼렸다.
  • 아치에州 독립운동 가혹한 탄압/인니 인권단체 폭로

    ◎印尼軍,수년간 3만9,000명 학살 【자카르타 AFP 연합】 인도네시아 군대가 지난 몇년동안 북부 아치에주의 분리독립운동을 저지하면서 3만9,000명 이상을 살해했다고 인도네시아 인권단체인‘아치에 비정부기구 포럼’이 5일 폭로했다. 이들은 또 올들어 말레이시아에서 불법 이민자로 추방된 아치에 출신인 1,000∼3,000명이 독립세력과의 관련설 때문에 아직도 경찰에 구금돼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의 예산지원을 받고있는 콤나스 함(인권위원회)은 위란토 국방장관과 함께 이 문제를 다룰 것이라고 말했다.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아치에는 분리독립 움직임으로 특별 군사작전 지역으로 선포돼 있으며 외교관이나 외국기자들의 방문이 엄격히 통제돼있다. 아치에 민족해방전선은 지난 70년대부터 ‘자바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투쟁을 벌여왔으며 인도네시아 당국은 90년대 초부터 반군을 소탕하기 위한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벌여왔다.
  • 인도­파키스탄 핵긴장 폭발할까

    ◎印 핵실험·카슈미르 포격전… 갈등 심화/美 등 국제사회 압력이 충돌 완충작용 인도와 파키스탄의 해묵은 적대관계가 다시 무력충돌로 내닫고 있다. 이달초 실시된 인도의 지하 핵실험은 파키스탄에 충격을 가하면서 두나라 관계를 최악의 상태로 몰아넣었다.영토분쟁지역인 카슈미르에서 26일 대규모 포격전이 벌어지는 등 갈등은 점점 수위를 높이고 있다. 인도는 카슈미르 주둔병력을 증강시키고 있고 파키스탄도 접경지대 주민들을 무장시키면서 더 큰 충돌에 대비하고 있다.47년과 56년,71년 등 세차례 전면전을 벌였던 두나라가 핵개발경쟁을 둘러싸고 다시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인도에게 핵개발경쟁의 선수를 빼앗긴 파키스탄이 공언대로 핵실험을 강행한다면 서남아시아의 안정과 세계적인 핵 비확산 노력이 뒤흔들릴 위험도 높다.핵실험에 이어 핵탄두를 운반할 미사일 개발과 재래식 군비증강 경쟁이 잇따를 것이란 전망이다. 핵개발을 둘러싸고 두나라가 외교적 해결책이나 대화 모색없이 대결상태로 치닫는 이유는 상대방의 핵개발을 용인하지 못하는 안보 불안감 때문이다.골 깊은 상호불신과 전쟁을 통해 누적된 적대감,공존하기 어려운 가치관과 종교 등이 바탕에 깔려 화해를 어렵게 한다. 한반도 면적 크기의 카슈미르지역을 둘러싼 영유권 다툼도 관계회복의 걸림돌이다.47년 영국의 식민지배 종식 후 영토분할 과정에서 통치권은 인도에 넘어갔지만 거주민의 70% 가량은 파키스탄과 같은 이슬람교를 믿고 있어 파키스탄을 배후로 한 분리독립운동과 폭동이 반복되고 있다. 최근 인도정부가 국내의 정치적 분열과 불안정을 핵개발과 민족주의적인 대외 강경외교정책으로 돌파하려는 시도도 충돌 위험성을 높인다.이런 추세에 따라 카슈미르지역 등 인도·파키스탄 국경지역은 상대방의 주요 도시를 겨냥한 미사일과 중무장 병력들이 집중배치돼 몇 안되는 ‘화약고’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미국 등 국제사회의 압력과 경제제재를 견디기 어려운 파키스탄의 경제상황,중국 등과의 불편한 관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인도의 속사정등은 전면적 충돌을 제약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 서울신문 제정 6회 공초문학상 수상 詩人 신경림씨

    ◎“문학의 임무는 현실 변화 담는 것”/우리가락·사회참여 거쳐 어머니 품으로 돌아와/체험 못살린 기교 위주 신세대 詩세계 안타까워 “공초선생과는 문학경향이 달라 처음엔 상받기를 주저했어요.그러나 작품세계가 달라도 작품 자체의 완성도를 잣대로 상을 준다는 말을 듣고 망설임이 줄더군요.” 덤덤한 수상소감.사람좋아 보이는 순박한 미소 뒤의 단단함.수상의 기쁨보다 자기 시세계에 더 애정을 쏟는 시인 신경림.그의 겸허에는 고집이 묻어있다. “문단의 존경을 받는 공초선배가 불교나 허무주의에 중심을 두었다면 저는 현실참여에 무게를 두면서 살아왔지요.서로 다른 시정신이 빚을 부조화에 대한 우려 같은 거죠” 우리 문학사에서 그가 남긴 자취는 크다.문학을 떠받치는 양대 축의 하나인 현실주의 흐름에서 그를 빼놓고 이야기 한다는 것은 힘들다. 농심(農心)의 한과 신명을 우리 가락에 절묘하게 담아 70년대 시단에 첫징소리(‘농무’)를 울린 뒤 그의 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체제에 버림받은 ‘못난 놈들’의 현장을 민요 가락에 실어 한올한올 뽑아내면서 ‘새재’를 넘었다.발로 뛰며 보듬어 온 변두리 인생에 대한 참여관찰은 장시 ‘남한강’이라는 절창을 낳았다.그러나 갑작스런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에서 비롯된 흔들림 앞에서 한동안 호흡을 고른다. “단재 신채호 선생도 나라를 걱정하는 글에서 지적했듯 우리 민족에게는 냄비기질이 있어요.저는‘시의 시대’라는 80년대의 불기가 사윈 정신적 배경으로 이 점을 지적하고 싶네요” 더 큰 목소리들이 잽싸게 변신을 모색하던 시절.시인은 다시 특유의 더딘 걸음으로 지난 날의 모습을 추스렸다.‘쓰러진 자의 꿈’을 달래가며 절망의 우물에서 작은 위안과 오래갈 희망을 길어 올린다.91∼92년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을 맡아 지친 문학계를 끌어안았다.다시 6년만에,법인체로 바뀐 이단체의 이사장으로 돌아와 문단의 버팀목을 맡고 있다. 그의 수상시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은 시인의 여정과 닮아 보인다.그러나 시인은 입을 다문다. “시가 설명되어 버리면 실패라고 생각해요.수상시도 그런 맥락에서 읽어주면 좋겠네요” 램프와 칸델라 시절을 거쳐 전등불로 바뀌면서 시인의 눈도 넓어졌다.대처로 나와 많은 것을 보고 들었다.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커지는 건 어머니와 할머니의 모습,그들이 재봉틀로 빚던 노동에 대한 기억이다.다시 램프 시절이 전부가 된 것이다.(‘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문학은 어차피 현실을 떠나서는 숨쉴 수 없다고 봐요.이런 점에서 달라진 상황을 직시하는 ‘실사구시’의 정신이 더 절실한 거구요.미몽에 사로잡힌 정치구호보다 현실의 변화상을 바로 보고 작품으로 얘기하는 게 문학의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구호로 급하게 달구어진 80년대에 대한 냉철한 반성이다.바뀐 세태를 시인은 어떻게 보는가. “IMF한파 여파가 우리같은 글쟁이들에게 심해요.작가들이 마음놓고 글쓸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게 ‘작가회의’의 과제이기도 합니다.하지만 좋은점도 있어요.상업주의에 편승한 문단의 거품을 뺄 좋은 기회죠” 상업성에 대한 시인의 경계는 곧장 신세대 작가들을 향한 우려로 나아간다. “감각과 기교만 난무하지 삶의 체험이 안보여요.시나 문학에는 체험이 실려야 합니다.요즘 젊은이들이 너무 테크닉에만 신경쓰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여기에는 자본의 상업성도 한 몫 한 것 같아요.” 후학들에 대한 웅숭깊은 기대와 걱정.수상시가 수록된 시집의 다음 구절과 그 울림이 같다. “…사람들이 모두 한곳으로만 몰려간다./ 떼밀리고 엎어지면서 뒤질세라 달려간다/ 바위만이 어깨 내밀어 길을 내주고 있다…/그 얼굴에 웃음 서글프다 그 /얼굴에 웃음이 아름답다” □주요 경력 △1935년 충북 충주 출생 △동국대 영문학과 졸업 △1956년 ‘문학예술’에 ‘갈대’ 등으로 추천 등단 △1973년 첫번째 시집 ‘농무’ △1979년 두번째 시집 ‘새재’ △1985년 세번째 시집 ‘달 넘세’ △1987년 장시 ‘남한강’ △1988년 네번째 시집 ‘가난한 사랑노래’ △1990년 다섯번째 시집 ‘길’ △1993년 여섯번째 시집 ‘쓰러진 자의 꿈’ △1974년 만해문학상 △1981년 한국문학작가상 △1990년 이산문학상 △1994년 단재문학상 △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심사평/깨달음 과정속에 시인의 인생론 함축 공초문학상은 등단 20년 이상 되는 시인이 최근 1년동안 발표한 작품(시 혹은 시집)중 공초 오상순 선생의 문학정신과 이념에 걸맞는 시를 그 심사대상으로 삼고 있다. 심사위원 일동은 각자 후보자 2명씩 천거하여 그 추천의 변과 각 시인들의 특장 등을 논의한 뒤 3명으로 압축된 후보를 대상으로 면밀한 토의과정을 거쳤다.심사위원 일동은 그간 공초문학상이 한국 시단의 대가급 시인들에게 수여된 점을 주시하는 한편 권위있는 문학상일수록 중앙문단 중심적으로 운용되고 있다는 점을 적시하면서 지방문단에도 앞으로 넉넉한 관심을 보일 것을 촉구했다. 충분한 토의 뒤 심사위원 일동은 저마다 충분한 수상자격을 갖춘 3명의 후보자를 대상으로 무기명투표를 실시했는데 만장일치로 신경림 시인을 1998년도 제6회 공초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하게 되었다.수상작은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동명의 시집이 창작과 비평사에서 지난 3월 간행됨)이다. 신경림 시인은 70년대 이후 어두웠던 한국 정치사회적 현실에 대하여 시종 서정성 짙은 인간주의적 문학사상으로 서민대중들의 삶을 전통적인 민요 형식의 기법으로 형상화하여 현대 한국시문학사의 한 흐름을 형성시켰다. 특히 이번 수상작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은 시인 자신의 인생 여정이 ‘불’이라는 이미지의 변모로 축약되어 있는데,“멀리 다닐수록,많이 보고 느낄수록 /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는다는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노래하여 그간 시인의 추구해온 인생론이 미학적으로 절묘하게 진테제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공초사상이란 무엇일까.식민지와 분단시대의 모순과 갈등속에서 그 지향할 바를 허무혼을 화두로 삼아 암중모색했던 게 아니었을까 생각하면 그 허무혼이 이제 신경림 시인의 인생론과 접점을 이룬다는 게 오늘의 우리 시문학을 위하여 얼마나 큰 축복이겠는가. 심사위원 일동은 공초의 문학사상이 신경림 시인의 수상을 계기로 더 큰지평으로 열릴 것을 기대해 마지 않는다. 심사위원 章湖 李根培 任憲永 宋秀權 李憲淑
  • ‘세계경찰’美의 이상한 침묵/“印尼문제는 스스로 풀어야할 숙제”

    ◎“수하르토 버릴 경우 국익에 큰 손상” 【워싱턴=김재영 특파원】 인도네시아 사태는 실익을 먼저 고려한다는 ‘미국외교’를 또 한번 확인시켜주었다. 인도네시아 사태가 수일간 지속되는데도 미국은 침묵으로 일관했다.마지못해 밝힌 입장은 ‘잘해야 한다’는 게 전부였다.‘세계경찰’을 자임해온 예전의 미국이 아니다.인도네시아 사태의 분수령이 될 수하르토 대통령의 ‘결단’이 밝혀진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백악관의 에릭 루빈 대변인은 수하르토 대통령의 담화와 관련, “인도네시아 정부가 취해야 할 가장 중요한 조치는 정치개혁과 화해문제를 놓고 각계대표들과 즉각 공개적인 대화를 갖는 것”이라고 언명했다.한마디로 ‘좋게 해결하라’는 것이다. 이어 “수하르토 대통령이 조기총선을 제의한 사실은 알고 있으나 구체적 일정 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확인하지 못했다”고 밝혔다.더이상 입장을 묻지 말아달라는 주문인 셈이다. 미국의 이상한 침묵이나 알멩이없는 언급은 12년전 필리핀 때와 대비시켜보면 더욱 의아심을 자아낸다. 당시 레이건 대통령은 락살트 상원의원을 필리핀으로 보내 마르코스의 퇴진을 직접 촉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이 바뀌어서 미국의 태도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미국의 실익을 고려한 액션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수하르토를 ‘버릴’ 경우 곧바로 닥쳐올 혼란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는 분석이다.국익이라는 측면을 고려하면 수하르토의 뒤를 이을 인물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앞에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때 식민지관계였던 필리핀에 비해 인도네시아는 미국의 관계가 ‘진하지 못했다’는 점도 꼽혔을 것이라는 풀이도 있다. 하여튼 지금까지의 대응으로 보아 수하르토에 대해 미국은 인도네시아의 학생들과는 달리 불확실하고 부정적인 측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을 더 크게 보려고 하고 있다고 요약된다.
  • 戰犯의 영웅화/李世基 社賓 논설위원(外言內言)

    일제시대를 살아본 사람이 아니더라도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에다 한국에서는 강제징병과 학도병제를 실시하고 종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소에서 ‘A급 전쟁범죄자’로 회부되어 48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일본의 군국주의자다. 그런 전쟁범죄자가 일본 영화 ‘프라이드:운명의 순간’에서 전범이 아닌 ‘영웅적 사무라이’로 등장해 중국과 서방언론등에 의한 국제적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일제의 식민지 침탈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대동아전쟁은 일본의 자위(自衛)를 위한 정당한 전쟁이자 아시아 해방을 위한 성전(聖戰)’이었음을 강변하고 도조는 ‘일본의 명예를 지키려다 연합군측의 사전각본에 따라 부당하게 처형되는 희대의 영웅’으로 부상된다는 것이다. 작은 일에 생색내고 무의미한 것도 의미있는체 꾸미는가 하면 엄연한 역사적 사실마저 왜곡하기를 좋아하는 일본사람들이고 보면 또한 번심한 장난을 쳤구나 하는 안쓰러운 감이 없지 않다. 최근까지도 그들은 일본군 위안부나 남경 대학살등을 고교교과서에 기술하는 것은 ‘자학(自虐)사관’ 이라면서 반일교과서 회수운동을 끊임없이 전개해 왔었다. 그릇된 과거를 덮으려는 자체가 이미 그릇됨을 인정한다는 것을 아마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이번 개봉을 앞둔 영화시사회에서 과거사 망언으로 유명한 한 고위관리가“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에 충실할뿐 아니라 핵심을 찾아내는데도 성공하고 있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니 그 뻔뻔스러움에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인간사회에서의 참다운 영웅이란 자신의 존재를 대중속에 파묻고 사는 자존심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선한 영웅이 있듯이 악한 영웅도 있다. 영웅이 없는 사회에서 오죽이나 궁색했으면 전범을 영웅화했겠느냐는 측은한 생각도 든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해서 도도한 세계사를 역행시킬수는 없다. 영화라는 방법으로 과거를 미화하려는 자체가 영웅의 이미지에서는 이미 어긋난 처사다. 차제에 무분별한 일본영화수입을 심사숙고해봐야겠다.우리 청소년의 역사를 보는 눈은 우리어른들이 지켜줘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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