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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金三雄 칼럼-방울새와 조개 노리는 어부

    ”삼한이 나날이 서로 싸우니 백만창생이 고통 속에 지새웠네.신라·백제는 어찌 몰랐던고,입술이 다치면 이빨이 시린 것을.수당(隨唐)이 방울새와 조개 모두를 노리는 어부인데도.” 조선 초기 재상을 다섯번이나 지낸 문인 서거정(徐居正)이‘삼국사를 읽고’란 글에서 개탄한 내용이다. 지금 일본 보수세력은 북한의 금창리 핵시설 의혹과 광명성 1호 발사를 계기로 군사첩보위성 도입과 전역미사일방위(TMD)체제를 서둘고 있다.최근 일본 언론은‘노동미사일 실전배치’‘대포동미사일용 지하기지 건설’ 등을대서특필하면서 한반도 위기설을 제기한다. 연립정권을 발족한 집권 자민당과 자유당은 유엔평화유지군(PKF)에 대한 자위대의 참가동결 해제에 합의하고,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분담금(10%)도 거부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북한의 이른바‘강성국가 건설’노선과 미사일개발이 일본 보수세력에 명분을 주고 재무장의 기회로 활용되고 있는 셈이다.이와 관련,최근 중국 외교부대변인은 일본의‘평화헌법 준수’를 촉구하면서 급속한 우경화에 우려를 나타냈다.한·미국방장관은 연례안보협의회에서 북한에 핵의혹 해소와 미사일개발 중단을 촉구하고,한·일국방장관회담에서는 양국 국방당국간 핫라인 개설과 해군합동훈련에 합의했다. 북한의 모험주의적 현실 인식이 일본의 재무장과 동북아의 군비경쟁을 부른다.북한은 김대중정부의 햇볕정책을‘반통일 대결론’으로 치부하면서 계속‘사회주의 강성국가 건설론’을 제기한다. 북한 입장에서는 햇볕정책에 호응하는 것이 사는 길이다.‘햇볕’이란 용어가 거북스럽다면 화해정책이면어떤가.문제는 대결 아닌 화해와 협력을 통한 평화공존의 길을 찾자는 것이다. 북한은 한국과 화해협력의 바탕에서 당국자간의 대화에 나서야 한다.한국정부가 상호주의원칙에 융통성을 보이면서 비료,종자 등 농산물자의 지원 계획을 밝히고 성의를 보였다.북한도 상응하는 자세로 나와야 한다. 북한이 신년사에서 먹는 문제 해결을 공식 언급할 정도로 식량문제는 대단히 심각한 상태다.우리가 지원할 씨감자나 슈퍼옥수수 등이 파종 시기를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햇볕정책이북한체제가 당면한 위기를 넘기는 좋은 기회인 데도 이를 대결론으로 받아들이면서 강경론을 펴는 것은 북한 스스로는물론 누구에게도 바람직하지 못하다.오로지 일본에 구실을 줄 뿐이다. 남북한은 고려의 삼한 통일 이후 1,300년 동안 봉건왕조와 일제식민지를 함께 겪은 민족공동체다.분단 반세기 만에 북한은 300만 기아자,남한은 170만실직자라는 지극히 어려운 공동위기 시대를 맞게 되었다.그리고 미국과 일본에서는 한반도 위기설이 나돌게 되었다. 과거 신라는 당을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북한은 소련과 중공을 끌어들여 6·25전란을 일으켰다.지금 한국은 미·일과 협력하여 북의도발에 대비하고 있다.역사에 부끄러운 원교근공(遠交近攻)정책을 끝내기 위해서는 북한이 변해야 한다.‘민족’이란 접두어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화해협력의 길에 나서야 한다.북한은 변화를 통해 대통령이 제기한 핵의혹과 미·일 수교 등 일괄타결론이 성사되면 경제건설에 큰 도움을 받을 수있을 것이다. ‘극단의 시대’를 쓴 영국의 에릭 홉스봄은베를린장벽 붕괴시점을 20세기종점으로 시대구분한다.유일한 냉전지대 한반도는 언제까지 20세기로 남을것인가.지금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4자회담이 평화체제 구축과 긴장완화의 전기가 됐으면 한다.남북당국은‘방울새와 조개 모두를 노리는’어부를경계해야 한다.
  • 전문가 진단-”내부갈등이 통일 막는 최대 장애물”

    “남북화해에 앞서 ‘남남화해’가 더 시급하다” 동서 지역갈등 문제를 통일문제와 연관시켜 연구하고 있는 민족통일연구원 曺敏기획조정실장(정치학박사)의 문제제기다. 曺실장은 통일전문가이지만 지역감정 연구에도 상당기간 천착해 왔다.국내적 통일기반 조성방안의 일환으로 ‘지역갈등 해소방안 연구’라는 연구보고서를 낸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曺실장은 우리 사회 내부의 지역갈등은 그 자체가 분단극복의 장애요인으로 보고 있다.나아가 동서화합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통일을 맞으면 지역갈등 문제가 보다 ‘광역화’될 것이라는 점을 우려했다.이 때 통일한국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는 탓이다. 그는 북한 내에도 평안도와 함경도간에 지역감정은 있지만 남한에서만큼 큰 문제는 아니라고 보았다.남한 주도의 통일후 북한주민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면 더 큰 문제라는 것이다. 더욱이 영호남 지역갈등이 치유되지 않은 상황에서 통일이 되면 그 폐해는엄청날 것이라고 지적했다.즉 “북한 전역이 남한 한쪽 지역의 ‘내부 식민지’로 떨어질가능성”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동서 지역갈등에다 ‘이등국민’으로 전락한 북한주민들의 불만에따른 남북간 지역갈등이 중첩되게 된다.이는 정치·제도적 통합이 사회·문화적 통합으로 순조롭게 이어지는,진정한 남북통일을 가로막는 최대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曺실장은 이같은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한 몇가지 대안을 제시했다.이중 통일 전에 우리 사회 내에서 서유럽 수준의 진보적 이념정당의 출현을 허용하자는 주장이 가장 주목할 만하다. 요컨대 “우리 내부의 정치적 투쟁이나 이합집산이 지역연고 따위가 아니라 정책적·이념적 차이에 따라 이뤄지게 해야 한다”는 취지다.이는 분단 반세기동안 제대로 된 정책대결 대신 지역주의만 판을 쳐왔다는 반성론과 무관하지 않다.지역감정도 냉전구도 하에서 모두가 다 보수를 자처,배출구가 없어진데 따른 역기능의 하나일 수 있다는 시각이다.具本永
  • 金三雄칼럼-지나간 미래

    ”시간은 과연 앞을 향하여 가는 것인가,그렇지 않고 미래에서 현재로 다가와서 과거로 흘러가는 것인가,미래를 향하여 가는 것이라면 그 미래는 어디에 장만되어 있는 것이며,또 과거로 흘러가는 것이라면 그 과거는 어디에남아있는 것일까.”(金奎榮) 인간은 무궁한 공간을 쪼개어 시간을 만들고 매듭을 지어 의미를 부여하지만 원래 시간은 무형의 존재로서 그저 흐를 뿐이다. 비래거금(非來去今),오는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닌 것이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세계를 사는 유한의 존재다.‘세계란 글자는 바로 이 양자가 결합된 상황을 말한다. 즉 세(世)는 시간,계(界)는 공간을 의미한다. 누구라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할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한계상황적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흘러가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심장을 가진 우리 자신의 생명이다. 백년을 산다 해도 잠자고 병들고 철부지 시절을 빼고 나면 남는 시간은 지극히 짧다. 카알라일의 ‘오늘’ 여기 흰 날이 왔도다 낭비하지 말지어다 영원에서 이 날은 나왔고 영원으로 밤이면 돌아간다이 날을 미리 본 눈이 없고 보자마자 곧 사라져 버린다 여기 흰 날이 왔도다 낭비하지 말지어다. 카알라일은‘오늘’이란 시에서 시간의 소중함을 일깨웠다. 오늘에 충실하는 사람에게 시간은 언제나 새롭고 값지다. 오늘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이 미래에 충실하기는 어렵고 더구나 역사에 충실할리 만무하다. 우리 20세기는 주체적 시간을 상실한 죽은 공간의 역사였다. 식민지와 분단과 동족상잔과 군사독재로 이어지는 탈주체의 시대였다. 그렇게 살아온 20세기의 마지막 한 해가 밝았다. 돌이켜보면 흘러간 것은시간이 아니라 인간이고 역사였는지 모른다. 흘러간 시간(역사)에 대한 가치와 아쉬움을 모르는 사람에게 ‘오늘’의 의미는 무엇일까. 연초부터 유로화가 유럽질서를 바꾸고 미국의 화성탐사선이 11개월간의 우주비행에 나섰다. 3000년대를 설계하는 나라의 소식도 들린다. 100년 전인 1899년 윌버 라이트는 비행기가 날려면 반드시 세 축의 운동이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실험끝에 (몇년후)비행기 제작에 성공했다. 그 무렵 조선의 수구와 개화세력을 대표하는 최익현과 유길준은 단발령의‘논쟁’을 벌였다. 결과는 쇄국과 외세의 대결로 나타나고 마침내 망국노아니면 매국노가 돼야 했다. 20세기 끝자락에 닥친 경제식민지 1년만에 ‘신용평가 상향조정’등 경제회생의 빛이 보이는데,정치가 개혁의 발목을 잡으면서 시간을 허송한다. 역사학자 라인하르트 코젤렉은 ‘지나간 미래’에서 자연적인 시간과 차별적으로 인식되는 역사적 시간에 주목한다. 개인의 시간을 축내도 억울한데,막중한 시기에 국가의 시간 즉‘역사적 시간’을 낭비하는 정치는 범죄다. 지금이 ‘529호실’타령이나 할 때인가. 우리 미래가 지나간 역사의 반복이서는 안되겠다. 국민이나 정치인이나 자연적 시간과 함께 역사적 시간을 분별하고 아끼는자세가 필요하다.
  • 정직한 역사 되찾기-친일의 군상(21회)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가곡 ‘선구자’의 제1절이다.노랫말이 담고 있는 비극적 서사성과 장중한선율,게다가 가사 구절마다 배어있는 조국 광복의 웅지가 어우러져 부르는이,듣는 이 모두를 숙연케 하는 노래가 바로 이 노래다.가히 ‘국민가곡’이라 부를 만하다.일송정(一松亭)에 오르면 멀리 서쪽으로 용정(龍井)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발아래 북쪽으로는 해란강(海蘭江)이 서에서 동으로 유유히 흐른다.이곳이바로 ‘선구자’의 고향이다.그러나 유구한 세월 속에서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데 없다’.말 달리던 선구자도,활을 쏘던 선구자도….‘선구자’의 주인공들은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오직 그들이 부르던 노래만 남아 입으로,가슴으로 전해오고 있다. ■시인·작사가 尹海榮‘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가곡 ‘선구자’의 제1절이다.노랫말이 담고 있는 비극적 서사성과 장중한선율,게다가 가사 구절마다 배어있는 조국 광복의 웅지가 어우러져 부르는이,듣는 이 모두를 숙연케 하는 노래가 바로 이 노래다.가히 ‘국민가곡’이라 부를 만하다.일송정(一松亭)에 오르면 멀리 서쪽으로 용정(龍井)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발아래 북쪽으로는 해란강(海蘭江)이 서에서 동으로 유유히 흐른다.이곳이바로 ‘선구자’의 고향이다.그러나 유구한 세월 속에서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데 없다’.말 달리던 선구자도,활을 쏘던 선구자도….‘선구자’의 주인공들은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오직 그들이 부르던 노래만 남아 입으로,가슴으로 전해오고 있다. 1932년 10월 어느 날 저녁.만주 하얼빈에 살고 있던 청년작곡가 趙斗南(1912∼1984)에게 낯 모르는 한 청년이 찾아왔다.키가 작고 마른 체격의 청년은조두남에게 시 한편을 내놓으며 곡을 붙여달라고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조두남은작곡을 해놓고 그 청년을 기다렸으나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조두남은 그가 주고간 시의 내용으로 봐 그를 독립군 정도로 여겼다.이 내용은 조두남이 ‘선구자’ 작곡에 얽힌 비화를 소개하면서 작사가 윤해영에 관해 언급한 것이다. 尹海榮의 일제시대 행적이 밝혀진 것은 90년대 초반.한동안 윤해영은 ‘신비의 인물’로 여겨져 왔다.지난 90년 한국을 방문한 연변대학의 權哲교수는 “윤해영은 독립군이 아니라 시인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권교수에 따르면 윤해영은 1909년 함경도에서 출생,소학교 교사를 하다가 시인이 됐다는 것.초창기 그의 시는 ‘선구자’에서 엿보이듯 민족적 색채가 강했다.그러나 그는 식민지 시대를 겪으면서 훼절,친일로 전향하였고 해방후에는 공산주의를찬양하는 시를 썼다고 권교수는 주장하고 있다.권교수의 주장대로라면 윤해영은 결국 만주 친일파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는 셈이다. 친일파들 가운데 행적입증이 가장 쉬운 부류는 단연 문사(文士)들이다.곳곳에 친일의 흔적(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윤해영 역시 예외가 아니다.일제하 만주에서 간행된 ‘만주시인집(滿洲詩人集)’(1943년 간행)과 ‘반도사화 낙토만주(半島史話 樂土滿洲)’에 남아있는 그의 친일시 몇 편을 우선 살펴보자. ‘오색기 너울너울 낙토만주 부른다/백만의 척사들이 너도나도 모였네/우리는 이 나라의 복을 받은 백성들/희망이 넘치누나 넓은 땅에 살으리…’(‘낙토만주’ 제1절) 운율과 형식이 가곡 ‘선구자’를 본뜬듯이 꼭 같다.그러나 속생각은 정반대다.우선 ‘오색기(五色旗)’는 일제의 괴뢰국 만주국의 국기(國旗)를 말한다.만주국은 만주족·몽고족·한족·일본족·조선족 등 오족(五族)으로 구성돼 있었다.만주국 국기의 다섯 가지 색깔은 각 민족을 상징한다.만주국의 통치이념인 ‘오족협화(五族協和)’는 여기서 나온 말이다. 이 무렵 윤해영은 태극기 대신 오색기를 들고 있었다.바로 ‘낙토만주’는반민족 정서의 정수라 할 만하다.당시 만주에는 조선땅에서 건너간 유랑민들이나 독립운동가들의 가족들이 숨어서 은거하던,말 그대로 ‘고난의 땅’이었다.이를 두고 그가 ‘낙토’ 운운한 것은이미 민족의 반대편에 서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시에 흐르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지극히 낭만적이고 평화롭다.‘말달리던 선구자’를 외치던 정신은 온데 간데 없고 선구자들이 말달리던 만주국을 이상향(理想鄕)으로 미화하고 있다.‘유사품’ 한 편을 더 소개하자. ‘흥안령(興安嶺) 마루에 서설(瑞雪)이 핀다/4천만 오족(五族)의 새로운 낙토(樂土)/얼럴럴 상사야 우리는 척사(拓士)/아리랑 만주(滿洲)가 이 땅이라네…’(‘아리랑 滿洲’,‘만선일보’ 1941.1.1) 이 시는 윤해영이 만주국 기관지 ‘만선일보(滿鮮日報)’ 신춘문예 민요부문에서 일석(一席:1등)을 차지한 작품이다.심사평에서 평자(評者)는 이 시의 3연 2행 ‘기러기 환고향(還故鄕) 님 소식(消息)가네’를 두고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귀에 익은 ‘아리랑’에다 전통타령조까지 가미한 것이 흥겨운 민요 한 편을 만난 기분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작품이 나온 시기와 장소이다.1939년 10월 조선에는 ‘국민징용령’이 내려졌고 2개월 뒤인 12월에는 ‘창씨개명령’이 공포되었다.그 무렵 만주에서는 ‘선만일여(鮮滿一如)’,즉 ‘만주와 조선은 하나’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대륙침략에 조선의 물자와 인력을 총동원하고 있었다.이같은 형국에 척사(拓士·개간꾼)들 앞에서 ‘얼럴럴’ ‘낙토’ 운운한 것이 당시 윤해영의 시(詩) 정신이요,민족관이었다.이름이 ‘아리랑’이지우리 전통민요 ‘아리랑’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1940년대 그는 만주국 친일조직인 협화회(協和會)의 간부를 지내기도 했다.친일의식이 행동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한편 윤해영이 1941년에 쓴 시 가운데 ‘발해고지(古址)’라는 시가 있다.이 작품은 윤해영이 발해유적을 답사하면서 민족의 비극을 돌아보는 내용을담고 있다.‘변절자’ 윤해영이 정신적 방황을 거듭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윤해영의 시세계를 연구해온 인천대 오양호교수(국문학)는 “일제말기 우리 지식인들이 운명적으로 겪어야 했던 비극의 편린을 보는 느낌”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지난해 가을에도 해묵은 논쟁으로 나라가 시끄러웠다.바그너 곡(曲) 연주를 둘러싼 찬반론이었다.이스라엘은 아직도 공식 석상에서 바그너 작품 연주를 금하고 있다.바그너가 제공한 반(反) 유태정신이 나치즘의 이론적인 기틀을 제공,민족감정에 배치된다는 것이 ‘연주금지’의 이유다.바그너는 1883년에 사망했다.그러므로 금세기에 자행됐던 유태인 탄압과는사실상 직접적 관계는 없다.그러나 이스라엘은 아직도 바그너의 작품 연주 금지를 풀지 않고 있다.이스라엘 민족이 편협해서일까. 예술작품의 참 가치는 기교가 아니라 정신이다.鄭雲鉉 jwh59@
  • 기고-정치사찰과 정보수집의 간극

    최근 국회 529호실 사태로 신년 벽두부터 정치권은 모든 국회일정을 접어둔 채 정치적 공방을 계속하고 있고,이러한 일련의 사태 흐름에 일반국민들은의혹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집권당 국민회의는 국회 529호실 사태를 529호실 강제진입과 기밀문건 탈취에 의한 국가안보 위협 사건으로 규정하고 검찰의 엄정한 수사를 촉구하였다.이에 비해 한나라당은 529호실에서가져간 문건 일부를 공개하면서 안기부가 야당의원뿐만 아니라 여당의 핵심인사와 비밀회의 및 발언까지도 정치사찰을 했다고 주장한다. 정보당국의 개인정보 수집은 선진 민주주의국가에서도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다.미국의 중앙정보국(CIA)·연방수사국(FBI),독일의 해외정보국(BND)·국내정보국(BFV) 등 선진 민주주의국가들도 고위공직자,사회 유명인사들의정보를 수집하고 있는 점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선진 민주주의국가들에서 정보당국의 개인정보 수집은 자유민주주의적 헌정질서 및 법질서 수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선진 민주국가에서 민주적 법치국가 수호 차원에서 수행되는 정보당국의 통상 정보수집 기능과 권위주의적 독재국가의 체제 수호 차원에서 행해지는 정치사찰은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권위주의적 독재국가체제에서 정보당국의 일반정보 수집은 자유민주주의적 헌정질서 수호 목적으로 이루어지는것이 아니라 독재체제 유지차원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측면에서 정치사찰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이다. 예컨대 일제하의 정보수집은 우리민족을 말살하는 식민지통치 차원에서 이루어진 이상,정당성이 없다.또한 제3공화국 중앙정보부 창설 이래 우리 헌정사에서도 개인에 대한 무작위적 정보수집 및 정치사찰,정치인 미행,불법연행,감금,협박 등의 정치공작 등 기본권 유린행위가 다반사로 발생했다는 점은더이상 비밀이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작금 벌어지고 있는 국회 529호실 사태의 요점은 ‘국민의 정부’가 과연 민주적 법치국가 수호 차원에서 정보수집을 했는가 여부이다.이 경우 안기부 정보활동은 일반적 정보수집 행위로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권위주의체제 유지차원에서 정보수집 활동을했다면 안기부 행위는 국민들의 지탄을 받아도 마땅하다. ‘국민의 정부’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동시 병행발전 명제를 내걸고 각종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더구나 정권 자체가 고의적으로 국민들의 인권을침해하고 있다는 객관적 증거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이러한 면에서 고찰할 때 ‘국민의 정부’는 최소한 권위주의국가 형태를 지양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여지므로 안기부의 국회 정보수집행위를 정치사찰로 간주하기는 쉽지 않다.더욱이 대부분 공식문건은 성격상 국회 및 국회의원 동향 등 일상적인 정보수집 행위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야당을 공작대상으로 삼고 여당에 유리하게 하는 정치사찰로 간주할 수 없다.그러므로 한나라당이 ‘국민의 정부’ 안기부의 일반적 정보수집 행위를 자유민주주의적 헌정질서 유무에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정치사찰로 주장한다면 이 또한 시대착오적 주장이 아닐까. 한편 내각제 추진 관련 정치권 전망,한나라당 의원 탈당 가능성 및 대응책등에 관한 529호실에서 나온 메모는 직원의 개인적인 비공식메모라 할지라도 정치사찰 의혹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소지를 안고 있다고 하겠다.따라서 ‘국민의 정부’ 안기부는 민주화 과정에 부응하여 내부개혁을 보다 과감하게추진함으로써 국민들의 한줄기 의혹의 시선까지도 불식시켜야 하는 과제를안고 있다. 한나라당은 과거 권위주의정권의 모태가 되었던 정당으로서 정치사찰,미행,불법연행,감금,협박 등의 정치공작의 원죄를 아직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이러한 원죄를 청산하고 민주정당으로 거듭날 경우 한나라당의 주장도 일면 국민들에게 민주주의 및 기본권 수호 차원에서 설득력 있게 들릴 수 있을지도모른다.그렇지 않을 경우 한나라당의 정치사찰 주장은 권위주의체제하에서형성된 기득권을 유지할 목적의 정치공세로 국민들에게 각인될 뿐이란 것을알아야 할 것이다.
  • 신춘 논단-20세기 남은 한해의 과제

    20세기 남은 한해의 첫날이 밝았다.한국역사상 유례없는 파란곡절의 20세기가 올해로 막을 내리고 새 천년 21세기 여명을 맞게 된다. 세기말과 새 천년의 어간에 선 1999년은 청산과 새 설계의 한해가 돼야 한다.무엇을 청산하고 무엇을 설계할 것인가. 먼저 식민지배와 분단과 독재와 지역갈등과 IMF로 상징되는 민족모순과 그잔재를 청산해야 한다. 우리는 20세기 초입에서 식민지로 전락하고 중간시점에서 동족상잔을 치르고 세기 말에 IMF환란을 겪게 되었다.분단과 독재와 실업사태 등 모든 갈등구조는 여기서 연유한다. 무능한 지도자는 범죄다.대한제국 지도층은 국제정세에는 장님과 같았고 국내문제에는 색맹이었다.밀물처럼 밀려드는 외세의 침략에는 눈뜬 장님처럼허둥대고 개혁과 통합이 요구되는 국내문제는 개화·쇄국으로 나뉘어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사시적이었다.결과는 참담한 식민지 전락이었다. 지도층의‘장님과 색맹현상251은 해방후에도 나타났다.해방정국에서 찬탁과 반탁,단독정부와 통일정부수립을 둘러싸고 또 다시 국제정세에는 눈뜬 장님이었고 국내 권력투쟁에는 이념의 색맹이 되었다.결과는 분단과 동족상쟁으로 나타났다. 장님과 색맹의 정치는 자유당 12년 독재와 30년이 넘는 군사정권 그리고 여기에 뿌리를 둔 사이비 문민정부로 승계되는 반세기 정치권력의 모순으로 이어졌다.이 기간 물량위주의 성장이‘한강의 기적251을 이루었지만 사회정의와 국제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성장은 IMF허상으로 나타났다.색맹권력이 만든 비극이다. 정경유착,지역갈등,도덕타락,강력범죄,가정해체,공직부패 등 반사회 반국가적 현상은 이같은 모순구조가 빚은 산물이다.이런 것들을 청산하지 않고 21세기를 항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분단과 남북적대의 해소없이는 민족모순의 해결은 공염불이다.‘유일한 분단국251이 지구촌의 치욕이지만,남한 150만 실업자 북한 300만 기아자,세계최고의 군사밀도와 북한의 핵개발과 생화학무기개발 등은 자칫 민족 전체의파멸을 불러올 재앙으로 이어질지 모른다. 양측에서 존재하는 극우 극좌세력의 준동은 민족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조선조 때의 극심한 예송논쟁이나 한말 쇄국·개화파 대결이 국난과 망국을 불러왔듯이 지금 남북간의 적대적 이념대치는 한민족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밝은 구석도 보인다.무역수지와 경상수지의 흑자에 이어 외환,환율,물가안정,주식시장의 활성화,국제신용도 향상,재벌의 빅딜과 구조조정 그리고 정경유착의 단절로 우리 경제의‘안개251가 걷히고 있다.실업과 내수부진 등 부정적 요인이 없지않지만,정치·사회불안 등 비경제논리가 경제회생을 억누르지만 않는다면 전망은 밝다.올해는 국가의 모든 역량을 국제경쟁력 향상에기울여야 한다.북한은 부분적이지만 시장경제적 요소확대,암시장 허용,금강산개방,금창리 지하시설 현장 접근 가능성등 변화의 모습을 보인다.남북간에 인적 물적 교류도 활발하고 대북투자 물량도 확대되고 있다. 남북간의 엷은 햇살은 김대중대통령의 햇볕정책의 영향이 크다.정부가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일관되게 정경분리 정책을 견지하면서 대북 화해정책을 추진한 결과 아직은 엷지만 화해와 협력의 햇살이 50년 언땅을 녹이게되었다. 차제에 미국의대북경제제재 완화,미·일의 대북수교 등 북한의 개혁과 개방을 불러올 서방의 가시적 조처가 나타난다면 한반도의 냉전기류는 크게 바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총성없는 혁명의 한가운데 서 있다.과거처럼 폭력혁명이 아닌변화와 개혁의 혁명이다.5대 재벌이 빅딜과 구조조정을 통해 사실상 재벌해체의 과정에 있으며 정부의 4대 개혁과 공직부패 척결이 진행되고 있다.문제는 정치권이다.낡은 행태와 구습을 반복하면서 고비용 저효율의 틀을 벗지못한 정치권이 지역단위 정당체제, 소영웅주의적 의정활동,총독부형 지방행정구조를 고치지 못하면 국난극복의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다. 무엇보다 국민분열적 선거제도와 국회·정당구조를 국민통합형으로 바꾸고무능력자와 부패정치인을 퇴출시켜야 한다.21세기 한국을 20세기적 정치틀에서 19세기형 정치인들에게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치권이 개혁을 단행하여 정치발전과 경제회생에 앞장서야 한다.정치개혁이 없는 국정개혁은 미봉책일 뿐이다.인류역사상 가장 극심한 변화가 예상되는 21세기를 한해 앞두고올해를 민족사적인 낡은 질서의 청산과 새 세기를향한 새 설계의 준비기간으로 활용해야한다.정치개혁이 선결과제다. [김삼웅 본사주필]
  •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7회)-일본문학보국회원 장혁주

    한국 문학사전보다는 일본 현대문학사전에 더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 작가 장혁주는 식민지 시대 때 일본문단으로 등단한 최초의 한국인으로 문명을 떨 쳤던 인기작가였다.1932년 ‘아귀도’(餓鬼道)란 사회성 짙은 작품이 일본의 유명한 ‘개조’(改造)지 제5회 현상공모에 당선된 후 그는 일·한 두 나라 에서 두 언어로 민족의식이 짙은 작품활동을 하여 금서 조처를 받는 등 아나 키즘적 경향이 짙은 작가로 주목을 받았다. 1905년 대구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장은중(恩重)이고,창씨개명은 노구치 가쿠주(野口赫宙),일본인으로의 귀화명은 노구치 미노루(稔)이다.그가 쓴 단편 ‘다른 풍속의 남편’은 일인칭 소설로 ‘나’는 작가이다.모국(한국) 에서 간통사건에 연루되어 일본으로 피신,본처와 헤어지고 일녀 게이코와 결 혼하여 겪게 되는 서로 다른 풍속의 부부생활 중 아내로부터 온갖 수모와 학 대를 견디면서도 일본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각오를 다지는,말하자면 단순한 ‘친일’의 차원이 아니라 혈연적인 일본인화의 표상이다.자전적 요소가 짙 은 이작품처럼 그는 일본문단으로 등단한 이후 일녀 노구치 게이코(野口桂 子)와 결혼,아내의 성을 자신의 성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한국 근대문학사에서는 ‘무지개’ 등의 작가에다 문단 페스트균의 논쟁 유발자로 여전히 장혁주란 이름으로 남아있는 노구치의 친일행적은 임종국이 ‘친일문학사’에서 간략히 밝혔고,광복 이전 일본에서의 활동은 하야시 고 지(林浩治)의 ‘재일 조선인 일본어 문학론’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숱한 친일문인을 제치고 새삼 장혁주를 거론하는 까닭인 즉 그가 친일을 위하여 조선문인보국회가 아닌 일본문학보국회 회원으로 맹활약했었기 때문이다. 두 저서가 다 광복 이전의 ‘친일’행적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에 해방 후의 활동은 묻혀 있었는데,장혁주가 일본인으로 귀화했던 1952년 전후에 취했던 그의 태도는 가히 충격적이다.그는 구태여 해방된 조국을 버리고 일본으로 귀화한 이유를 “한국 조야가 자기를 환영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반역자 취급 을 하고 있기 때문”(조선일보 1952.10.14)이라고 밝혔다. 귀화 직후인 10월 19일부터 28일까지 열흘 동안 일본 잡지 ‘부인구락부’ (婦人俱樂部) 특파원 자격으로 한국전쟁을 취재한 그의 행위를 ‘서울신문’ 은 ‘민족반역자 장혁주 변장가명으로 불법입국’(1952.11.2)이란 제목으로 아래와 같이 격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수난의 조국을 배반하고 일신의 영화를 누리기 위하여 스스로 일본국에 귀화한 민족의 반역자 장혁주가 .....그 더러운 발자국을 유엔 종군기자라는 복장에 감추어 극비리에 이 땅에 들여 놓고 다시 돌아갔다는 사실이 일본의 신문보도로써 이제 밝혀졌다.....그는 10일간이란 체류 기간에 서울을 비롯 하여 그의 더러운 눈으로 본 한국의 그릇된 일편을 일본 요미우리(讀賣)신문 에 게재케 하여 결국 일본에 귀화함으로써 왕도낙토(王道樂土)를 얻었다고 술회하였다......그는 이번 여행을 극비밀리에 계획하여 유엔군 병사의 복장 을 빌려 입고 심지어는 변장을 위하여 검은 안경에 안대까지 하여 유엔종군 기자의 패스포트로써 이 땅의 눈을 속여 가면서 온갖 곳을 돌아 다녔다는 것 이다.” 이어 ‘서울신문’은다음날 ‘장혁주 등의 비국민 행위를 규탄’이란 기 사에서 “친일작가 장혁주가 자기의 과거를 돌아보아 그 잘못을 회개하지 못 하고 아직도 8.15 해방 전과 꼭 같은 죄과를 범하고 있다”고 서두를 쓴 뒤 “조국에의 반역을 감행하고 조국을 팔아 외국인의 안목을 현혹하게 하며 민 족의 위신을 떨어뜨리게 하는 일은 우리가 그대로 묵과할 수 없다.위정당국 은 하루 빨리 이 자를 체포해 오게 하여 국민의 엄정한 심판을 받게 해야 된 다”고 역설한다.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행동했던 재능있는 이 작가의 초상은 역사와 문학을 다시 진지하게 생각토록 만들기에 충분한 자료가 될 것이다. 任軒永(문학평론
  • 마카오,중국 반환 1년 앞으로

    ◎포르투갈령 442년만인 내년 12월20일에/특별행정구 주비위 준비 한창/50년동안 一國兩制 유지키로 포르투갈령으로 돼 있는 마카오가 441년 만인 오는 99년 12월20일 0시를 기해 중국의 품에 다시 안긴다. 중국은 식민지 역사를 청산하는 한편 대만과의 통일만 과제로 남겨두게 됐다. 중국 광둥(廣東)성의 주장(珠江) 삼각주 남단에 있는 마카오는 마카오반도와 타이파·쿨로아네 등 크고 작은 섬으로 구성돼 있다. 인구는 42만명에 면적은 18.4㎢로 서울의 중랑구와 비슷하다. 국민소득은 1만7,500달러로 선진국 수준. 인구의 95%가 중국인이고 포르투갈인은 3%에 불과하다. 중국어를 비롯,광둥어·영어·포르투갈어 등이 혼용되고 있다. 마카오가 세계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1551년.아시아 무역로 개척에 나선 포르투갈 상인들은 잠시 기항할 장소를 물색하다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1557년 포르투갈은 조공품의 보관장소가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어 중국으로부터 조차하는 데 성공했다. 1882년 영국이 홍콩을 강제로 할양받자 포르투갈도 1887년 청나라와 리스본의정서를 맺어 식민지로 할양받았다. 마카오는 ‘도박의 왕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카지노·오토바이경주 등 관광산업이 크게 발달해 있다. 한때 무역항으로 황금기를 누리기도 했으나 홍콩이 성장하면서 위상이 위축됐다. 2차대전 중에는 중립을 표방해 홍콩과 중국 난민들의 피난처가 됐다. 가톨릭 예수회가 성 바오로성당을 세운 인연으로 金大建 신부가 이곳에서 사제 서품을 받기도 했다. 마카오의 반환이 적극 추진되기 시작한 것은 87년 홍콩 반환이 합의되면서부터. 홍콩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50년 동안 일국양제(一國兩制)를 유지토록 했다. 중국은 지난 5월 이미 마카오 대표 등으로 구성된 마카오특별행정구(SAR) 주비위를 발족시키고 반환을 위한 작업에 한창이다.
  • 호치민/李慶衡 논설위원(外言內言)

    金大中 대통령은 15일 하노이에서 열리는 아세안정상회의에 참석중 베트남을 국빈방문,우리나라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호치민(胡志明)묘소를 참배할 예정이다. 베트남 민족의 위대한 ‘붉은 별’로 추앙을 받고 있는 호치민(1890∼1969)은 프랑스 식민지 치하의 베트남 북부 예안에서 출생,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아래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베트남 독립의 초석을 닦은 인물. 그가 사망한지 30년이 가까운 오늘날까지도 베트남 국민들의 정신적 우상이 되고 있으며 언제나 다정한 ‘胡아저씨’로 통하고 있다. 호치민은 청년기에 고국을 떠나 파리 등 해외에서 30년간을 보내며 혁명의 지도자로 성장했고 51세 때 귀국하여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을 결성해 주석자리에 올랐다.2차 대전후 프랑스가 영국·중국과 거래끝에 베트남 전역에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자 그는 대불(對佛)항전을 시작했다. 프랑스와의 전쟁은 1954년 그의 동지인 지압장군이 이끈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로 일단락되었으나 이어 체결된 제네바평화협정으로 베트남은 북위17도선을 경계로하여 남북으로 분할되고 말았다. 프랑스군이 물러나자 동서냉전체제하의 미국이 그 공백을 메웠고 1960년대에 접어 들어서는 베트콩·북베트남(越盟)과 미군이 맞붙은 ‘정글속의 지루한 전쟁’이 계속되었다. 결국 그가 사망한지 6년 뒤인 75년4월 월맹은 월남을 적화하고 전체 베트남을 통일하는데 성공했다. 우리나라는 월남전 참전기간(64년 9월∼75년 4월)동안 연인원 31만명의 장병을 파견했고 이중 4,624명이 전사했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호치민의 월맹군과 베트콩을 상대로 피를 흘렸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국제사회에선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지난 96년 당시 金泳三 대통령은 베트남을 방문했지만 베트남측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월남참전의 과거사를 의식,호치민묘소를 참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金대통령의 호치민묘소 참배는 양국이 솔직하게 구원(舊怨)을 씻고 양국관계를 한 단계 끌어 올려 놓겠다는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인 것같다. 우리로서도 이제 베트남 인민들이 국부(國父)로 우러러 보는 호치민을 그들의 입장에 서서,그리고 우리만의 존재가 아니라 상호간의 관계속에서 바라보는 성숙한 외교적 시각을 가져볼 시기가 온 것 같다.
  • 황무지 개간권과 항일논조(대한매일 秘史:9)

    ◎일 50년간 토지사용 요구 강력 비판/영구 식민지화 속셈 폭로에 유생들도 궐기/개간권 확보 실패하자 대한매일 탄압 시작 대한매일은 창간직후부터 강력한 항일민족지로 발행되었다.그러나 항일논조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비판하면서 부터였다.일본이 한국의 황무지 개간권을 얻어내어 이를 영구적인 식민지로 만들려는 공작에 착수한 것은 러일전쟁 직전인 1904년 1월부터였다.일본은 처음에는 태국(Siam)의 땅을 얻어내려 했다가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한국으로 눈을 돌렸다.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한 표면상의 인물은 일본 대장성의 관방장을 역임한 나가모리(長森藤吉郞)였다.나가모리는 개인 자격으로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는 듯이 가장했지만 사실은 일본 정부의 치밀한 계획 아래 진행된 것이었다. ○전국토 3분의 2가 넘어갈판 일본이 요구한 내용은 한국에서 명백하게 이용,경작하고 있는 토지 이외의 국토를 모두 개간하고 정리·개량·척식하는 권리와 그를 이용하고 이익을 거두는 모든 경영권을 우선 50년 동안나가모리에게 위임하라는 것이었다.일본은 한국에서 현재 경작하고 있지 않은 땅에 대한 사용권을 얻어서 50년 동안 이를 개간하여 경영하되 50년이 지난 뒤에는 사용기간을 또다시 연장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이러한 계약이 체결되는 경우에 일본측이 차지할 수 있는 ‘황무지’가 얼마나 될것인지 정확한 넓이가 계산된 것은 아니었지만 외부협판 윤치호는 전 국토의 3분의 2가 일본측에 넘어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일본의 입장에 호의적이었던 주한 영국공사 조단은 적어도 경작 가능한 토지의 3분의 1은 될 것으로 추산된다고 본국에 보고했을 정도였다.일본이 황무지 개간권을 차지한다면 한국의 광대한 토지는 영구히 일본의 점령하에 놓이게 될 것이며 한국은 자연스럽게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 운명이었다. 이같은 사태에 직면하여 당시 양대 일간지였던 황성신문과 뎨국신문 등이 이를 폭로하였고 주로 유생(儒生)들이 중심이 되어 격렬한 반대운동이 일어났다.황성신문은 7월6일자 논설을 비롯하여 7월7일부터는 3회에 걸친 연속논설을 게재하여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의 부당함을 비판했다.대한매일이 창간된 것은 러일전쟁 직후의 불안한 사회 분위기에 일본의 부당한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반대하는 운동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인 7월18일 이었다.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반대하는 국민적인 운동을 대한매일이 외면할 수는 없었다. 대한매일은 창간 4일후인 22일자에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반대하는 윤치호의 글을 게재하였다.이때부터 대한매일은 일본의 부당한 요구를 비난하기 시작하였다.황무지 개간권 문제는 일본에서 발행되는 일본어 신문과 영어신문에도 논란이 일어났으므로 대한매일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는 일본에서 발행되는 친일논조의 영어신문 재팬 메일과 고베 해럴드와는 논전을 벌이면서 한국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대한매일의 일본에 대한 비판은 9월2일부터 5회에 걸쳐 연재된 「한국에 일본위력이라」는 논설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났다.이 논설은 1895년의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래 한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정책을 낱낱이 들춰내면서 실례를 들어 일본을 공격하였다.특히 마지막부분에서는 주한 일본 공사관의 대리공사였고 침략외교의 선봉장이었던 하기와라(萩原守一)를 신랄하게 비난했다.하기와라는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林權助)와 함께 을사조약 체결을 강요했던 일본 공사관의 제2인자였다.하기와라는 동경제대 출신으로 외교관의 경력이 화려했으며 본국에서는 정치적인 배경도 튼튼한 야심에 넘치는 젊은 외교관이었다.그는 하야시와 함께 한국침략 정책에 있어서는 늘 강경파였다. ○배설추방… 신문발행 중단 공작 대한매일을 비롯한 민족진영의 반대로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는 실패로 돌아갔다.그러나 하기와라는 대한매일에 직접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하기와라는 배설의 일본 공사관 출입을 금지시키고 배설을 한국에서 추방하고 신문발행을 중단하도록 하는 공작을 시작한 것이다.대한매일은 더한층 항일적인 논조를 강화하였고 고종을 비롯한 민족진영은 대한매일을 더욱 뜨겁게 후원하였다.
  • “佛 외규장각 도서점유는 국제법상 불법”

    ◎중앙대 개교 80돌 ‘외규장각 고문서’ 주제 학술회의/정부,시간 걸리더라도 반환협상 벌여야/소학집성·보천가 등 추가 보유 확인 프랑스에 있는 ‘외규장각 도서’는 과연 반환될 수 있을까. 답은 반환된다는 것.이유는 간단하다.군사를 앞세워 빼앗아간 불법 행위이기 때문. 중앙대학교는 최근 개교 80주년을 맞아 한국과 프랑스의 현안인 ‘외규장각고문서’ 반환문제를 검토·분석하는 학술회의를 가졌다. 이 대학 이보아 교수는 ‘잃어버린 문화재를 찾아서’라는 주제발표에서 문화재 반환을 둘러싼 국가간의 알력은 ‘제3차 세계대전’ 또는 ‘문화전쟁’이라고 불린다며 여기에는 ‘문화민족주의’,‘문화국제주의’라는 대립적인 견해가 맞서고 있다고 밝혔다. 문화민족주의는 민족의 문화유산인 문화재를 보존·계승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반출된 문화재는 이동경위의 적법성을 따져 불법일 경우 원산국으로 반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이들은 또 문화재가 원래 위치나 원소유자에서 이탈하는 것은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손상이며 언어에 대한 접근권,역사적 전통 등 학술연구의 측면에서도 원산국에 있는 것이 우선적이라고 말한다. 반면 문화국제주의는 문화재는 인류 공동의 재산이라며 문화재의 원적(原籍)보다는 과학적 보존 및 정보의 원활한 유통을 강조한다.과거에 문화재를 약탈해간 프랑스,영국 등이 이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문화재 반환은 불법적으로 반출됐을 경우 식민국가와 피식민국가를 중심으로 실제 이루어지고 있다.과거의 역사적 상흔에 대한 도덕적 책임론과 함께 국제정의에도 부합되기 때문이다.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벨기에는 아프리카 식민지 국가들에 문화재를 돌려줬고 미국은 헝가리 국왕의 대관식에 사용했던 왕관을 반환했다.아이스랜드는 중세문학에 대한 필사본을 250년만에 덴마크로 부터 돌려받았다. 지난 6년동안 관계 부처인 외교통상부,교육부,문화관광부 사이에서 복지부동하고 있는 외규장각 도서의 경우 이동경위가 전시 약탈행위를 통한 불법유출이 명백,법리적 측면에서 우리에겐 유리하다.또 외규장각 도서는 파손도서창고에서 방치된 채 발견됐다.인류 공동의 재산이라는 문화국제주의 국가들의 주장이 헛점이 있음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서울대 백충현 교수도 외규장각 도서는 국제법상 불법 점유인 만큼 완전한 반환만이 정의를 회복하는 길이라면서 이교수의 주장에 동의했다.백교수는 과거에 추진되온 고문서의 국내 일시전시 또는 동질의 문화재 교환에 의한 반환 등의 타협책은 이 문제를 미결상태로 놓아두는 것보다 못하다며 정부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원칙에 입각,반환협상을 벌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서울대 이태진 교수는 ‘강화도 외규장각 도서의 피탈경위와 도서 현황’을 발표하면서 현재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는 병인양요 때 약탈해간 191종 297책 외에도 소학집성(小學集成)과 보천가(步天歌),팔세아(八歲兒) 등 32점이 더 있는 것을 확인했다며 새로운 사실을 공개했다. 이밖에 이화여대 홍성필 교수 등은 구체적인 문화재 반환사례를 발표했다.
  • 친일의 군상/前 이화여대 총장 金活蘭(정직한 역사 되찾기)

    “아세아 10억 민중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결전이 바야흐로 최고조에 달한 이 때 어찌 여성인들 잠잣코 구경만 할 수가 잇겟습니까.이 날을 위한 마음의 준비는 이미 벌서부터 되여 잇섯습니다.내지(일본)학도들과 함께 전문대학 법문계(문과) 반도(조선)학도들은 우렁찬 진군을 이르키어 특별지원병으로서 오는 1월20일에는 영예의 입영을 하게 되엿습니다.이번 반도학도들에게 열려진 군문으로 향한 광명의 길은 응당 우리 이화전문학교 생도들도 함께 거러가야될 길이지만 오직 여성이라는 한가지 리유 때문에 참렬을 못하는 것입니다.…아프로는 결전하의 국가목적에 쪼차 한사람이라도 더만히 우수한 지도원을 양성하기에 전력을 다할 각오가 잇슬 뿐입니다.” 金活蘭(1899∼1970)이 1943년 12월25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每日新報)’에 기고한 ‘男子에게 지지안케­皇國女性으로서의 使命을 完遂’라는 제목의 기고문 중 한 대목이다. ◎이대 키운 공 크지만 ‘여성계 상징’으론 논란 여지/3·1운동 당시 한때 지하 독립운동 조직과 연계/1936년 이화학당 부교장 시절부터 변절 첫 걸음/동포청년 전쟁에 내몰고도 사과 한마디 없어/“비상시국에 있어 기독교 여자청년들도 내선일체의 깃발 아래로 모여 시국을 재인식하는 동시에 황국신민으로서 앞날을…” 일제하 지식인이 신문에 쓴 친일성향의 글 한 두편을 통해 그의 삶 전체를 평가받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거대한 감옥’또는 ‘노예선’으로 불리는 일제 식민지시대에 쓴 글이라면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그러나 여기에는 몇가지 조건이 있다.우선 생명에 위협이 있었느냐,그리고 나중에 자신의 행적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성했느냐 하는 점 등이다. 모든 지식인들에게 지조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몇몇 의사·열사가 이에 속할 뿐이다.그러나 지식인이라면 자신의 과오에 대한 반성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그러나 거의 모든 친일 지식인들은 자신의 친일행위를 반성하지 않았다.친일 지식인들이 더 비난받는 이유중의 하나는 이 때문이다. 일제시대 여성 지식인이었으며 최근 그의 이름을 딴 상(賞)제정 문제로논란이 되고 있는 김활란은 역사 앞에서 용서받을 수 있을까?답은 긍정적이지 않은 것 같다.이유는 그가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다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따라서 그의 이름을 딴 상 제정은 지식인 사회에서 여러 논란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흔히 김활란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수식어 가운데 하나는 ‘여성박사 제1호’다.그는 학사·석사·박사를 따기까지 세 차례에 걸쳐 5년간 미국유학을 했다.귀국해서는 미국인 선교사 아펜절러(당시 이화여전 교장)의 뒤를 이어 1939년 이화여전 교장에 취임했다.굳이 나눈다면 그는 친미(親美)인사로 분류되는 사람이다.그런 그가 ‘대동아전쟁’이 터지자 친일,반미(反美)인사로 돌변하였다. ○전쟁 터지자 반미로 돌변 “저 흑노(黑奴)해방의 싸움을 성전(聖戰)이라 했고 십자군의 싸움도 성전이라고 했다.…제일선 장병과 보조를 같이 하여 도의를 무시한 물질제일주의의 서양문명을 박차버리고 동아(東亞)의 천지로부터 미영(美英)을 격퇴하여 버리자”.김활란은 조선임전보국단 주최 ‘결전부인대회’결성식(1941.12.27,부민관 대강당)에서 ‘여성의 무장’이란 주제로 미영 타도를 외쳤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일제하 대부분의 친미·기독교계 인사들(白樂濬·申興雨 등)이 그러했듯이 그 역시 다시 친미인사로 변신했다.그는 미군정 시절 초대 이화여대 총장에 취임했고 이승만정권 하에서 한미(韓美)재단 이사 등을 지냈다. 3·1만세의거 당시 김활란은 이화학당 대학과를 마치고 모교의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그 무렵 지하독립운동 조직과 연결돼 활동하고 있었다.‘7인의 전도대(傳道隊)’를 만들어 기독교 포교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단순한 전도활동 수준을 넘는,일종의 민족운동이었다.20년대 후반 좌우 민족진영의 통합으로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자 뒤이어 27년 4월 여성계 민족단체로 근우회(槿友會)가 결성되었다.그는 근우회 창립멤버로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이듬해 돌연 활동을 중단하고 미국유학을 떠났다. 31년말 그는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농촌교육 관련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고 이듬해 귀국했다.귀국후 문맹퇴치·봉건잔재 타파 등을 내걸고농촌운동에 주력하였는데 이는 미국유학을 한 인텔리 여성의 소박한 조국에 대한 헌신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일제 침략전쟁 미화·선전 그의 친일행보는 36년 이화학당 부교장으로 있던 시절 첫걸음을 내딛는다. 그해 말 총독부 사회교육과 주최 ‘가정의 개선과 부인교화운동의 촉진’을 위한 사회교화간담회에 참석하였다.37년 1월 그는 총독부 학무국의 알선으로 ‘조선부인문제연구회’를 결성하였고 7월 들어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애국금채회(愛國金釵會)’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이 단체는 한일병합후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들의 부인들이 주동이 돼 전쟁물자로 바칠 금비녀·가락지를 모으기 위해 결성한 친일 여성단체였다.이후 여러 친일단체에서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방송선전협의회,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임전대책협의회,조선교화단체연합회,조선임전보국단,조선언론보국회 등등. 그의 활동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기독교 활동이다.38년 6월 조선YWCA의 회장으로 있던 그는 “비상시국에 있어 기독교 여자청년들도 내선일체의 깃발아래로 모여 시국을 재인식하는 동시에 황국신민으로서 앞날을 자기(自期)하는 의미에서…”(매일신보,38년 6월9일)라며 일본YWCA에 가맹을 발표하였다.당시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다가 학교가 폐교를 당하고 구속자·순교자가 잇따르던 때였다. 39년 4월 이화여전 교장에 취임한 이후 그의 친일행각은 본격화되었다.물론 그 배경에는 학교를 지키기 위한 목적도 없지는 않았다.그러나 김해 김씨인 그의 문중이 본관을 따라 ‘김해(金海)’로 창씨를 한 것과는 달리 그는 독자적으로 ‘천성활란(天城活蘭·아마기 가쓰란)’으로 창씨개명하였다.‘어차피 창씨를 해야한다면 정말 (일본식으로)창씨를 해서 자신의 독립된 일가를 세울 생각’이었다.(金貞玉의 저서 ‘이모님 金活蘭’중에서) ○순풍에 돛단 배처럼 살아 ‘대동아전쟁’ 개전(41.12.8) 이후부터는 강연·방송은 물론 가두로 나서서 일제의 침략정책을 미화,선전하였다.특히 여성들을 대상으로 ‘어머니나 딸·동생으로서’ 징병·징용·학병 등 인력동원에 대한 이해와 협력을 촉구했다. 43년8월1일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가 실시되자 그는 “황국신민의 무쌍(無雙)한 영광인 징병제는 드디어 우리에게도 실시되었다.…일시동인(一視同仁)의 황공하옵신 성지(聖旨)에 다시금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나라를 위하여 불덩이 같이 끓는 피와 몸을 통털어 바쳐 성은(聖恩)에 보답할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렸으며 반도 남아의 의기를 뵈일 기회는 드디어 왔다.이 얼마나 기쁜 일이며 수 천년 역사 이래 모처럼 보는 거룩한 감격…”(‘매일신보’1943년 8월7일)이라고 썼다. 그는 해방직전 심한 눈병으로 고생하고 있던 자신을 문병차 찾아온 조카(金貞玉 전 이대교수)에게 “남의 소중한 아들들을 전쟁터에 내보내라고 연설을 하고다닌 죄값”이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김정옥의 앞의 책 중에서) 당시 여기자 崔銀喜는 그를 두고 ‘모질고 악착한 역경을 맛보지 않고 순풍에 돛단 배처럼 산 행운아’라고 평했다.식민지 시대와 격동기를 산 지식인의 일생이 대체로 고뇌와 아픔으로 점철됐겠지만 그는 상류층의 한 층을 이루는 생애로 일관하였다. 그가 60년 가까이 이화인(梨花人)으로 살면서 일제하와 건국기에 학교를 지키고 가꾼 공로는 인정할만 하다.그러나 그를 여성교육계,나아가 한국여성계의 상징으로 내세우기에는 그의 일생 가운데 ‘흠결’은 큰 편이다.이대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보기에는 그의 친일활동이 적극적이었다.이대측의 ‘김활란상’ 제정 추진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 보다는 그의 떳떳하지 못한 삶이 비판의 도마에 오르는 또 하나의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김활란 연보 1899년 인천 출생 1914년 이화학당 대학과 졸업 1918년 이화여전 교수·부교장 1928년 ‘근우회’ 발기인으로 참여 1931년 미국 컴럼비아대 철학박사(‘여성박사 1호’) 1937년∼45년 애국금차회·임전대책협의회·조선언론보국회 등 친일 단체 간부로 활동 1939년∼70년 이화여전 교장·이화여대 총장·이화학당 이사장 1948년∼65년 한국대표로 유엔총회 6회 참석 1950년 공보처장 1952년 ‘코리아타임스’ 사장 1954년∼61년 국제기독교선교위원회 부위 원장 1955년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1959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 1963년 대한민국장·막사이사이상·다락방상 수상 1965년 대한민국 순회대사 1970년 별세,망우리 금란동산에 묻힘.대한민국 1등수교훈 장추서 1996년 추모문집 발간,그의 친일 논쟁을 계기로 ‘인터넷 반민특위’이 등장 1998년 이대측의 ‘김활란상’ 제정 계획 발표로 찬반논란
  • 日 진보지식인 가토 노리히오 평론집 ‘사죄와 망언 사이에서’

    ◎일본의 자기기만 어디서 나오나/전후 일본인의 이중심리구조 분석/韓·中 등 피해당사국 수렴여부 관심 서독의 빌리 브란트 수상은 70년대 폴란드의 유태인묘지에서 2차대전의 범죄행위에 대해 사과를 했다. 다분히 정치적 계산이 고려된 것이지만 그는 비가 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릎을 끓고 눈물을 흘렸다. 일본은 얼마전 김대중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식민지 지배의 과거사에 대해 사죄를 했다. 그러나 앞으로 일본에서 이를 뒤집는 발언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수상이 2차대전의 범죄행위에 대해 사과를 하고 각료가 식민지배는 한국근대화에 기여했다며 이를 부인하고 사임하는 ‘비틀림’의 나라 일본. 이러한 자기기만과 모순,이중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전후 일본의 이중심리구조를 분석한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 가토 노리히오의 평론집이 창작과 비평사에서 ‘사죄와 망언 사이에서’(서은혜 옮김)라는 이름으로 나왔다. 이 책의 중심내용이 된 그의 ‘패전후론’(敗戰後論)은 독특한 관점으로 인해 일본 내부에서격론을 불러 일으켰던 평론. 가토는 사죄를 하고 이를 부정하는 실언이 계속되는 것은 역사를 이어받을 주체가 형성돼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전후 일본은 패전을 둘러싸고 전쟁에 대해 책임을 지고 전쟁 및 무력사용을 포기한 평화헌법을 수호하는 진보론자와 대동아 공영권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개헌을 요구하는 보수론자로 양분된다. 전자와 후자는 별개가 아니라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처럼 한쌍이다. 부정한 과거로부터의 새출발은 단절이 아니라 부정한 과거를 끌어안고 시작돼야 한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은 과거를 감싸안는 대신 과거를 잘라버리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패전을 종전이라고 부르는 데에서 이를 엿볼수 있다. 이러한 한계로 인해 지킬박사의 사과는 튼실하지 못하다. 반쪽(진보­호헌)이 머리를 숙여도 또다른 반쪽(보수­개헌)이 이를 부정하는 절반의 사과가 된다. 이러한 인격분열을 역사의 문제로 치환시키면 세계사,일본사 어느 쪽에도 의심을 품지 않고 한쪽만을 신뢰하고 따르는 존재방식이라고 할수 있다. 따라서 현재 일본이 해야할 일은 세계사와 일본사 양쪽 모두와 자신을 관련짓고 그 양자와의 관계 속에서 양쪽을 한줄에 꿰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라고 할수 있다. 세계사 속에 자리잡으며 또한 자국사 속에서도 자리매김될 만한 방식을 만들어내는 것,세계사와 자국사의 틈새를 살아내는 것,이것이 바로 역사의 의미라는 것이다. 이중구조에 대한 저자의 이러한 시각이 한국,중국 등 피해당사국들에게도 받아 들여질지는 의문이다. 일본인의 심리구조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지만 진솔한 사과를 하지 않았다는 명확한 사실에 대한 설명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독자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 서울신문 영욕의 53년 나래 접으며

    ◎솔직한 참회 재탄생 초석으로 정론 벗어났던 일 냉혹히 자성/날카로운 시선·질책 겸허히 수용 서울신문이 지령 16851호,1998년 11월10일자를 마지막으로 영욕 53년의 나래를 접습니다. 11일자로 우리의 뿌리,자랑스런 항일 민족정론지 대한매일로 거듭 태어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수십만 독자와 함께 해온 서울신문 반세기를 마감하며 지난날의 정도(正道)를 벗어났던 일들에 대해 냉혹한 자기반성을 하고자 합니다. 시대에 따라 국민과 독자의 애증(愛憎)이 교차되는 시선 속에 우리 서울신문 가족들은 땀과 눈물로 서울신문을 가꾸고 키워왔습니다. 53년의 연륜을 지닌 서울신문 제호를 새시대 역사의 흐름 속으로 띄워보내며 회한(悔恨)이 서리지 않을리 없습니다. 서울신문은 6·25전란(戰亂) 가운데서도 진중신문을 발행하여 국민들에게 전황을 알려주는 사명감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사회의 밝은 면을 부각시키고 약자를 부축하는 억강부약(抑强扶弱)에도 힘썼습니다. 환경지키기에 앞장서고 농촌경제 발전을 지원했습니다. 한글 전용신문 발행과학자·문필가·예술가 지원 등 민족문화 발전에도 기여했습니다. 그래서 강한 사회면,격조높은 문화면으로 언론계의 선두에 서기도 했습니다. 자본에 휘둘리거나 상업적 사익(社益)에 얽매이지 않고 국익을 우선하는 논조,센세이셔널리즘에 흐르지 않는 품위를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서울신문은 결코 스스로에게 관대(寬大)하려 하지 않습니다. 서울신문 구성원 개개인의 잘못은 아니었다거나 소유구조상 불가피한 일이었다는 등의 변명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 설령 열을 잘했다고 해도 하나의 잘못이 그대로 용서되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성의 아픔이 클수록 재탄생하는 대한매일의 정론(正論)을 향하는 발걸음이 곧고 굳건한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자유당 정권의 나팔수로 검은 것을 희다고,흰 것을 검다고 한 부분에 대한 응징으로 4·19 민주혁명 당시 사옥이 불태워지기도 했습니다. 군사정권의 정통성을 뒷받침하며 언론의 본분을 벗어난 세월이 있었음을 솔직히 인정하며 참회하고자 합니다. 한 세기 한국언론사에 이토록 진솔하게 과거의 잘못을 고해(告解)한 언론사가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비극적 식민지 역사 속에,그리고 권력의 부침(浮沈)속에 교언영색(巧言令色)의 생존술과 상술로 견강부회(牽强附會)해오며 민주언론의 선봉을 자처하는 사례가 없지 않음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솔직한 참회를 재탄생하는 대한매일 앞날의 밑거름으로 삼고자 합니다. 언론의 본분을 지키는 데 피와 땀을 흘림으로써 과거의 잘못들을 속죄코자 합니다. 서울신문은 이미 공익정론지 대한매일로서의 변신을 시작했습니다. 재경부 포항제철 한국방송공사가 대주주인 소유구조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제작과 경영에 일절 간여치 않는다는 확고한 의지를 천명하고 이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편집권 독립에 관한 노사(勞使)합의라는 공정보도의 제도적 장치도 마련했습니다. 우리의 이같은 처절한 자성과 제도적 장치를 바탕으로 어느 편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공익(公益)정론지 대한매일로 재탄생할 것임을 국민과 독자앞에 다짐합니다. 날카로운 시선과 애정의 질책으로 대한매일을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편집권 독립을 위한 대한매일 노사 공동선언문 노조와 회사는 편집권을 존중한다. 회사는 편집권의 독립성을 침해 하거나 훼손할 수 없다. 기자는 언론의 정도(正道)나 자신의 신념과 양심에 반(反)한 기사를 쓰도록 강요받지 않는다. 기자는 공정보도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노사는 편집권 독립과 공정보도를 위해 다음과 같은 점에 합의한다. 1.편집권은 회사의 사시(社是)와 독자의 알 권리에 반하는 부당한 압력이나 간섭에 의해 침해받지 않는다. 2.노조와 회사는 외부로부터의 지면제작 개입을 배제한다. 3.회사는 객관성과 타당성이 없는 편파적인 취재와 보도를 지시할 수 없다. 4.취재기자는 자신이 취재해 보도한 내용이 왜곡되거나 잘못 전달 됐을 때에는 데스크,편집자,국장단에 시청을 요구할 수 있다. 5.언론 자유를 위협사는 사태가 생기면 노사는 합심해서 이에 적극적이고 효율적으로 대응한다. 6.회사는 기자에 대해 회사의 영업 및 수익활동 등 본연의 업무와는 직접관련없는 일에 대해 압력을 행사할 수 없다. 영업 및 수익활동 등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줄 수도 없다. 7.노사는 이상의 내용을 성실하고도 적극적으로 지킨다. 1988년 10월19일 ◎남긴 功/재벌 비판·신문말 다듬기 성과/국가 성장기에 국민총의 결집/문화예술 활동 전폭 지원 서울신문이 진취적으로 남보다 앞서 계획하고 이루어낸 업적은 적지 않다. 특히 한글 전용과 신문말 다듬기를 연구하고 실천한 것은 한국 신문사상 선구적인 것이다. 1956년부터 60년까지 ‘한글판 서울신문’을 부분적으로 냈던 서울신문은 23돌 창간기념일인 68년 11월22일부터는 모든 기사와 제목을 한글로 썼다. 70년 2월14일 ‘신문말다듬기위원회’를 상설기구로 신설했다. 위원회에는 국어학자와 문인 등 7명의 심의위원을 두어 신문말을 다듬거나 새로 만들었다. 심의위원은 정인승 허웅 한갑수 李應百 朴木月 柳周鉉 정재도씨였다. 신문 제작 방침이 수정돼 74년 1월4일 종전 체제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귀중한 성과를 남겼다. 위원회가 정리한 낱말은 1,600여개에이르며 71년 6월28일까지 33회에 걸쳐 지면에 연재됐다. 이때 만든 새 말 가운데 ‘사재기’처럼 널리 쓰이게 된 것이 많다. 요즘 신문들의 한글 전용 편집에도 긴요한 지침이 되고 있다. 한국신문협회가 낸 ‘韓國新聞協會二十年’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서울신문이 힘쓴 이 말다듬기의 성과는 모든 신문의 신문제작현장 종사자들에게 많은 준용과 새로운 대응어를 발굴,사용해 나가게 하는 기폭제 구실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울신문은 상업주의와 선정주의(煽情主義)에 휩쓸리지 않고 공익의 편에 서고자 노력했다. 예를 들면 재벌의 바람직하지 않은 행태를 비판하는 데 과감했다. 재벌에 약한 여느 신문과는 달랐다. 지난 10월9일과 10일 부산 동아대에서 열린 언론정보학회 정기 학술대회에서 박용원씨(동아대 신방과 석사과정)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서울신문은 재벌을 가장 많이 비판한 신문이다. 상업주의의 굴레에서 자유로운 서울신문은 과장,억지윤색,냄비열정의 폐풍을 벗어나 침착하게 보도하는 전통을 세웠다. 서울신문을 매개로해 수행된 공익사업은 헤아릴수 없을 정도다. 서울 세종로 한복판의 충무공 이순신장군 동상,덕수궁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은 서울신문이 애국선열조상건립워원회를 조직하여 성금을 모아 세웠다. 서울신문사 주도로 1966년부터 72년까지 세운 애국선열의 동상은 15기에 이른다. 서울신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보신각종도 서울신문의 노력으로 새해를 여는 울림을 계속하게 되었다. 금이 간 원래의 종을 대신할 새 종을 서울신문이 주도해 만들었기 때문이다. 서울신문은 보도와 행사 개최를 통해 어느 신문보다도 문화예술활동 지원에 열성적이었으며 농어촌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무엇보다도,서울신문이 국가 성장기에 국민총의를 결집하고 국력을 집중하도록 하는 데에 큰 힘을 보탰다는 것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국가발전에 기여한 서울신문 53년의 공이 전적으로 무시될 수는 없다. ◎끼친 過/절대권력 정당화·비호로 점철/10월 유신 지지·군부정권 미화 급급/4·19혁명때 태평로 사옥 불타기도 대한매일로 새롭게 태어나는 서울신문은 지난 반세기에 걸쳐 뼈아픈 족적을 남겼다. 1960년 4월19일 오후 2시. 성난 데모대는 태평로 사옥 앞으로 물밀듯이 몰려왔다. 먼저 취재차량에 불을 질렀고 이어 윤전실로 들이닥쳐 다시 불을 질렀다. 불은 삽시간에 건물 전체에 번졌다. 곧바로 소방차가 출동했지만 데모대원들이 물탱크차를 빼앗아 다른 곳으로 몰고 사라져 버렸다. 자유당 李承晩 독재권력을 비호한 관제언론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폭발했던 것이다. 최근 언론개혁시민연대가 선정한 한국언론의 대표적인 왜곡보도사례 50건 가운데는 서울신문의 보도내용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자유당 4捨5入 개헌 정당화(56년),10월 유신 지지(72년),全斗煥 권력 장악 정당화와 미화(81년),4·13 호헌(護憲)조치 옹호(87년) 등이다. 절대권력의 정당화에 앞장서고 민주화를 외면하거나 소극적이었던 언론의 선두로 꼽혀왔다. 일반 국민들에게 각인된 서울신문의 이미지는 항상 권력의 편에서 당시의 권력자를 옹호하는 전위대였다. 10월 유신때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와 유신체제의 정당성을 위해 ‘해바라기 지식인’을 동원,유신대통령의 선출을 정당화하는 글로 지면을 가득 채웠다. 10·26사태후 80년 ‘서울의 봄’에 이르는 이른바 안개정국 시절엔 신군부 등장의 역사적 필연성을 예고하기도 했다. 5공의 全斗煥정권이 등장하자 “동천의 붉은 해가 불끈 솟았다.‥‥‥”며 그를 찬미하는 연재물을 게재했다. 광주민중항쟁 과정에서도 “북괴방송,광주사태 집중적 선동” “광주시위 선동 남파간첩 검거” “공포의 유혈 무법천지” 등으로 ‘대공(對共)’문제와 ‘파괴성’을 권력의 편에 서서 부각시켰다. 해방후 53년에 걸쳐 점철되어온 서울신문 역사를 되돌아볼 때 일관된 허물은 ‘권력의 대변지’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지나온 시대는 역대 독재권력이 한국전쟁 이후 가열된 냉전시대의 안보논리를 그들의 체제유지논리로 위장한 시대이기도 했다. 어쩌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 시대를 같이 한 한국 제도권 언론의 곡필의 역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서울신문이 적어도 이같은 독재권력을 지지하는 선두에 섰다는 사실이다. 서울신문이 언론의 본분을 벗어났던 대목은 이밖에도 숱하게 많을 것이다.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한 정치문제에서 집권여당의 논리를 지나치게 앞세우고 상대적으로 야당의 입장을 폄하하는 지면을 제작함으로써 균형감각을 잃었다는 비판도 그 사례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또 정부의 정책적 입장을 심도있게 보도한다는 취지를 왜곡하여 절대권력자의 일방적인 논리를 전파하는 데만 급급했던 경우도 없지 않았다. 이제 대한매일은 서울신문의 지나온 역사를 깊이 자성하면서 철저한 자기비판을 토대로 새롭게 출발할 것이다.
  • 진정한 영·호남 화합을 위해/崔弘運 논설의원(대한포럼)

    우리 시대의 화두(話頭)는 단연 개혁과 민족화합이다.오늘의 국난(國難)을 극복하고 당당하게 선진국 대열에 들어 21세기를 주도할 수 있기 위해서는 분명히 이 과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이는 바로 우리 민족의 사활(死活)이 걸린 문제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각 분야에서 더디지만 개혁과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고 화합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본다.이 가운데서도 민족화합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최우선과제가 아닐 수 없다.민족이 남북으로 갈라져 통한(痛恨)의 반세기를 보낸 것만 해도 억울한데 동·서로 일컬어지는 영남과 호남이 대립하고 충청지방까지 지역색을 드러내고 있어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지배계층 권력 다툼의 산물 지역갈등의 뿌리를 찾자면 그 옛날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신라가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를 쳤음에도 백제의 옛 땅인 한강지역을 차지했고 심지어 당(唐)나라와 연합,백제를 점령해 준식민지 정책을 펴면서 오늘의 영·호남 갈등은 시작된다.고려시대에도 호남지역에 대한 지배자들의 압박이 극심했다. 조선시대 역시 영남사림(嶺南士林)들은 권력집단에 속해 있었으나 호남은 유배지로 이용됐다.그러나 이런 불균형과 편견은 지배계층인 양반들의 권력다툼이었을 뿐 피지배층인 평민들에게는 전혀 지역감정이 없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일제시대에 접어들면서 일본은 식민통치수단의 하나로 조선시대 양반들이 유포한 일방적인 편견과 감정을 일반화하고 더욱 조장하며 심화시켰다.이 편견과 감정이 지역패권주의로 발전하고 이토록 풀리지 않는 적대감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60년대 이후다.朴正熙 전 대통령은 군사쿠데타에 의한 집권이라는 콤플렉스를 딛고 장기집권으로 가기 위해 특정지역을 기반으로 한 국가경영을 꾀하기 시작했다.이는 곧바로 편중인사로 나타났다.1공화국때는 장·차관 244명 가운데 서울과 경기,경상도,전라도 출신이 각각 25.6%,18.8%,6.6%였으나 3·4공화국때는 각각 14%,30.3%,13.2%로 바뀐 사실이 이를 극명하게 말해주고 있다.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짓밟고 집권한 5공화국때의 편중인사는 더욱 심화돼 18%와 43.6%,9.6%가 되고 6공화국 들어서는 20%,41%,12.7%가 된다.문민정부가 들어서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죄·용서하는 마음 가져야 건국이후 처음으로 진정한 의미의 정권교체가 이뤄졌다.이번에는 반대로 호남편중인사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이번 국정감사를 앞두고 한나라당 李海鳳 의원이 바로 그 점을 지적해 국민회의측의 반박이 이어졌고 이에 앞서 야당 총재권한대행을 지낸 李基澤씨도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발언을 해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무책임한 발언이라는 비난을 받았다.두 지역의 골이 이렇게 깊게 팬 이유는 바로 정치권력의 야욕 때문이었는데 그들은 아직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정치권의 다툼과는 달리 최근 두 지역의 자치단체나 민간인,학생 등의 교류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것은 다행이며 반갑다.그러나 그 많은 행사도 중요하지만 진정한 화합을 위해서는 사죄하고 용서하는 자세가 앞서야 한다.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청할 때 화해는 시작된다.미래는 그렇게 함께 손잡고 나아가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시대다.
  • 대한매일 역사성과 새 좌표 세미나­주제발표 내용

    ◎국난때 정론 편 대표적 민족지 오는 11일 ‘대한매일’로 역사적인 새 출발을 하는 서울신문이 3일 오후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대한매일의 역사성과 새 좌표’라는 주제의 세미나를 갖고 그 역사적 의의를 재조명했다. 이날 발제자들은 대한매일신보가 창간 당시 풍전등화의 운명에 처한 국운을 바로잡기 위해 항일구국의 기치를 드높였던 민족정론지였다고 평가하고 오늘날 또 다른 국난기를 맞아 그 같은 정신의 부활은 시의적절한 것이라고 역설했다. 특히 새로운 천년,새 세기의 지평에서 공익언론·구국언론으로서 대한매일의 부활은 1세기 전 선각자들이 이루지 못했던 꿈과 도전을 실현시킬 계기가 될 것임을 전망했다. 이날 발표된 ‘대한매일신보 창간 당시의 민족운동과 시대적 상황’(신용하),‘대한매일신보의 논조와 민족 독립운동’(정진석), ‘대한매일의 정체성과 새 좌표’(김삼웅) 세 편을 요약 소개한다. ◎창간 당시 시대적 상황/애국세력 신민회 본부 사내에 설치/국채보상 일어나자 전국적 캠페인/愼鏞廈 서울대 교수·사회학 구한말 ‘을사5조약’의 늑결(勒結)로 외교권 등 국권을 상실한 뒤 가장 과감하게 언론구국운동을 전개한 신문이 ‘大韓每日申報’(대한매일신보·이하 대한매일)였음은 학계의 연구에 의해 잘 알려졌다. 그 요인과 조건을,외국인 명의로 발행돼 일제의 탄압과 검열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왔다. 이런 외적 조건은 일면에 불과한 것이어서 대한매일이 과감한 언론구국운동을 전개할 수 있던 내적 조건을 밝힐 필요가 있다. ○과감하게 언론구국운동 전개 대한매일은 영국인 裵說을 사장으로 고용추대하고 梁起鐸은 총무가 되어 합작으로 1904년 7월18일 창간했다. 원래 대한제국 정부가 한국의 처지와 한국정부의 주장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영어를 사용한 신문의 필요성을 절감,궁내부 예식원 관리인 양기탁 등이 배설을 고용해 창간했다. 예식원 영어통역관인 양기탁은 고종의 내탕금과 李容翊·閔泳煥 등의 자금지원을 받아 신문사 시설을 설치하고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지 임시통신원 배설을 사장으로 고용해 신문을 창간했다. 따라서 대한매일은 양기탁의 주도로 창간됐으며,양기탁은 ‘총무’로서 신문사의 편집과 업무를 총괄했다. 대한매일이 가장 과감하게 언론구국운동을 전개하게 된 내적 조건의 특징은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돼 그 본부를 대한매일 안에다 둔 사실과 직접 관련돼 있다. 신민회는 1907년 4월 초 다섯가지 애국세력이 연합해 창립했는데 그 첫째가 대한매일 집단이다. 양기탁이 총무로,申采浩가 주필로,張道斌(일시 주필)玉觀彬 李章薰 梁寅鐸 金演昶 兪致兼 李晩稙 등이 기자로,林蚩正 姜文秀 등이 회계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신민회 창립 직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이밖에 서울 상동교회,구한국 무관 출신,민족자본가,미주(美洲)에 있는 공립협회(共立協會)등이 참여했다. 신민회에서는 특히 대한매일이 그 핵심세력이 되었다. 신민회 총감독(당수 또는 회장)이 양기탁이었고 본부를 대한매일 내에 두었다. 장도빈은 주도회원에 신민회 청년단체인 청년학우회 간부였다. 신민회 조직을 발의한 것은 안창호 중심의 공립협회였으나 미주에서는 효과가없으니 본국에서 설립해야 한다고 판단해 안창호를 파견했다. 안창호는 1907년 2월 귀국 즉시 대한매일로 양기탁을 찾아갔고 두달 후 다시 만나 신민회를 비밀결사체로 조직하기로 합의했다. 신민회 창립 제의는 안창호가 냈으나 창립은 양기탁 중심으로 되었다. 당시 그는 애국계몽운동의 유력한 지도자로서 국내 애국인사들과 긴밀한 유대를 가졌을 뿐아니라 민중에게서도 큰 존경을 받았다. 아울러 양기탁이 신민회 총감독으로 추대된 것은 그가 대표하는 대한매일의 조직과 세력이 중시됐기 때문이다. 신민회는 전국에 지국을 가진 대한매일을 중핵으로 하여 단기간에 비교적 용이하게 지방지회를 설치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신민회 본부는 대한매일에 있었고 대한매일 영업국장인 임치정과 직원 김홍서가 비밀사무를 보았다. ○安昌浩 중심 신민회 조직 발의 1909년 대한매일의 지사 숫자는 51곳으로 일제가 후에 파악한 신민회 지회 세력과 분포가 거의 일치한다. 신민회는 국권회복이라는 목적의 실행방법으로 ‘신문·잡지·서적의 간행’을 최우선으로 설정했는데 창립 후 독자적으로 신문을 간행하지는 않았다. 대한매일이 신민회의 기관지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이는 장도빈,일제 관원,독립운동가의 자료들에서 확인된다. 대한매일이 신민회 기관지로 전화한 1907년 4월 이후 논설·편집·보도는 매우 열렬하고 전투적으로 되었다. 일제는 1908년 4월 ‘신문지법’을 개정해 외국인 명의 신문이 가진 특권을 모두 없앴으며 대한매일을 해체하려고 배설·양기탁을 고소·구속했다. 그럼에도 대한매일은 굴복함 없이 더욱 적극적으로 의병운동을 지원했다. 이는 대한매일 종사자들이 굳게 단결,신민회 노선에 따른 과감한 언론구국투쟁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대한매일의 민족운동에서의 애국적 전통은 21세기를 맞이하는 오늘 우리 한국 신문에서도 면면히 계승·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논조와 독립운동/李 침략 본격화 맞서 대항논리 제공/직필 논설 통해 항일의병투쟁 고무/鄭晋錫 한국외대 교수·정책과학대학원장 대한매일신보는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부터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까지 나라 안팎의 정세가 몹시 복잡하던 시기에 발행된 대표적인 민족지였다. 일본과 영국은 대한매일이 창간된 때로부터 한일합방까지 대한매일을 외교적인 현안문제로 다루었다. 따라서 대한매일은 언론사,독립운동사,한국문제에 관한 영·일 양국의 외교사,국제사법사 등의 핵심이 되는 연구과제이다. ○한일합방때까지 6년간 발행 대한매일의 항일 언론이 한국의 언론사와 현대사에 미친 영향을 요약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주목할 것은 이 신문의 발행시기다. 이 신문은 러일전쟁이 일어난 직후부터 한일합방이 공포되던 날까지 약 6년 동안 발행되었다. 이 시기는 일본이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한반도에서의 독점적인 우위를 확보하고 침략정책을 노골적으로 추진하던 때였다. 대한매일은 이와 같은 민족사적 전환기에 발간되면서 항일운동의 논리를 제공했고 항일운동을 확산시키는 동시에 한국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이었다. 둘째 대한매일의 외교사적인 중요성이다. 이 신문에는 한국 영국 일본 세나라의 각기 다른 입장이 한반도의정치적 문제와 연관되어 미묘하게 얽혀 있었다. 이 신문은 소유주가 영국인이었으나 한국의 황실과 민족진영이 뒷받침하고 있었으며 논조는 항일이었다. 일본 입장에서 볼 때는 이 신문이 침략정책에 가장 큰 장애요인이었다. 일본은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해 裵說을 한국으로부터 추방하거나 신문을 발행하지 못하게 만들려 했고 그 교섭 상대국은 영국이었다. 영·일간 교섭 과정에서 외교정책,사법 절차상 미묘하고 복잡한 문제들이 야기되었음은 물론이다. 셋째 이 신문은 한반도문제에 있어 영국과 일본의 기본적인 입장과 양측의 외교정책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들을 제공하고 있다. 일본은 영국이 영일동맹으로 맺어진 우호관계라는 점을 내세워 일본의 대한정책을 방해하는 영국 시민 배설에 대해 만족할 만한 제재를 가해달라고 요구했다. 때문에 영국 정부 자체에서도 이 문제의 처리에 고심했다. 처음에는 영국과 일본이 다같이 배설을 한국의 법률과 일본의 군율 등으로 간단히 처리해 보려 했지만 결국은 영국의 재판에 회부하게 되었다. 다섯째 한국민족운동사에서 본 대한매일의 중요성이다. 이 신문은 소유주가 영국인이었으므로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았다. 이로 인해 일본의 한국 침략정책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고 한국 국민들의 저항운동을 자유롭게 보도할 수 있었다. 많은 의병들이 이 신문의 영향을 받아 무장항일투쟁에 가담했으므로 이 신문은 한국 민족독립운동의 정신적인 구심점이 되었다. ○독립운동의 정신적 구심점 여섯째 언론사에 있어서의 중요성이다. 이 신문은 발행되고 있던 기간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최대의 민족지였다는 점만으로도 연구의 필요성은 크다. 발행부수도 당시로서는 최고였지만 국한문 한글 영문의 3종을 동시에 발행한 신문은 한국 언론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대한매일이 벌인 국권수호운동은 1차적으로는 지면을 통해 전개되었다. 대한매일은 일본 침략을 규탄하고 항일무장 의병투쟁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면서 한국 언론사에 가장 빛나는 항일 언론의 역사를 기록했다. 대한매일은 항일의 필봉만으로 일제와 싸운 것이 아니었다. 국채보상운동이 온나라에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던 때에 의연금을 수합하는 총본부격인 국채보상의연금총합소가 되었고 梁起鐸 朴殷植 申采浩 등은 논설로 일제 침략에 항거하는 한편 비밀결사 신민회를 결성하여 항일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했다. 의병들의 무장항일투쟁도 대한매일의 논조에 고무된 바 컸다. 대한매일은 한국 언론사의 주류를 형성하는 위치를 차지한다. 이 신문이 세운 민족 언론의 전통은 일제 치하를 거쳐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 내려오고 있다. 대한매일은 결국 한일합방 직전에 일본측으로 넘어가 합방 후에는 총독부의 기관지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대한매일 발행 당시의 언론사뿐만 아니라 일제시대 언론 연구에도 그 선행연구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정체성과 새 좌표/굴종과 오욕의 역사 치열하게 자성/원래 출발선으로 다시 돌아가 국난극복·21세기의 비전 제시 노력/金三雄 본사 주필 그릇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국민적 목소리가 ‘국민의 정부’가 탄생하면서 거세게 일어났다. 지난 반세기 동안 구조화된 적폐들을 청산하자고 정권교체라는 시민혁명을 이룬 국민 절대다수의 요청에 따라 가장 추한 모습을 지닌 우리 언론을 바로잡자는 언론정화운동과 언론개혁시민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다. 이는 역사의 기승전결 법칙을 교과서적으로 무섭게 반영한 결과라고 본다. 서울신문이 제호를 변경하면서 출생의 뿌리를 찾고 그 정신을 새로이 하면서 새 출발의 전기를 확립하려는 의지는 바로 기승전결의 역사법칙이라 할 것이다. 서울신문은 이러한 역사발전의 전기로,국운이 기로에 처한 1900년대 초의 절망적인 시대 상황에서 민족의 긍지를 일깨우고 자주의 주권회복 기치를 높이 들었던 ‘대한매일신보’의 제호를 회복함으로써 우리가 처한 국난을 이기고 새로운 천년의 21세기에 앞장서고자 한다. 제호 변경은 서울신문이 단순히 대한매일신보의 후신이었다는 인연만으로 막연히 옛이름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백색독재와 군사독재정권의 홍보지로서 본의 아니게 걸어왔던 갖가지 형태의 굴종과 오욕의 역사를 청산하고 원래의 출발점이었던 대한매일신보의 제호를계승함으로써 구국활동·개화운동·애국정신·민족사상·독립정신을 이어받는 제2창간의 역사적 동기를 부여코자 하는 것이다. 서울신문의 전사(前史)에 해당하는 대한매일신보는 당대의 대표급 애국지사들이 참여하여 만든 민족지였다. 신문 경영의 주체는 배설이지만 실질적 신문 제작은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장도빈 등 민족사상이 투철한 항일 언론투사인 우리 선각자들이 맡았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항일운동의 선봉에 선 구국활동의 전위였다.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이 한반도의 영구 식민지화를 꾀하려는 책동임을 지적하면서 그 부당성을 널리 폭로하고,의병 항거를 대서특필했다. 일진회의 합병 주장을 사흘에 걸쳐 통박하고,황성신문과 공동 보조를 취하면서 민족지의 방향을 주도했다. 정간 2회,압수 45회라는 일제의 폭압적 상황 아래서 고종황제의 퇴위 기도를 폭로,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국채보상운동의 실질적 본부 역할을 한 것을 비롯,항일구국운동의 총본산으로서 시대적 사명에 충실했다.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격때는 이들이 반포한 격문을실었으며 군대해산 조치에 저항하여 일제를 통렬히 비난했다. 국권 상실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도 그 정신을 상실하게 되었다. 일제는 1910년 8월29일 한일병합과 함께 눈엣가시와 같았던 대한매일신보를 탈취하여 ‘매일신보’라는 총독부 기관지로 만들었다. 강압에 의한 합병조약이나 을사조약이 원천적으로 불법이기 때문에 무효이듯이 대한매일신보의 강탈도 원천 무효인 것이다. 제작을 처음부터 도맡았던 총무 양기탁은 이 신문의 발행인 명의가 친일 인사로 바뀐 그날부터 자신은 이 신문에서 손을 떼었다는 광고를 게재하고 신문사를 떠났다는 사실에서도 대한매일신보사가 매일신보로 이어질 수 없음을 역사에 밝혀준다. 양기탁 선생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지사들이 매일신보에 참여하지 않은 것에서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결코 대한매일신보의 후신일 수가 없으며, 따라서 새롭게 태어나는 대한매일에서 그 지령을 승계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새 대한매일은 대한매일신보의 지령 1651호와 서울신문의 지령을 합산하여 승계하고,창간기념일은대한매일 재창간일인 11월11일로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서울신문의 제호 변경과 뿌리찾기는 서울신문이란 한 언론사의 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굴종과 오욕의 역사로 점철된 현대 한국 언론계가 반성,회개하며 거듭나고 기회를 마련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모든 언론이 대한매일신보의 정신을 되새겨 21세기 참언론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대한매일은 ‘대한매일의 다짐’을 통해 다음의 4가지를 지향하고자 한다. 첫째,공공이익을 앞세우는 신문. 둘째,국민복지에 앞장서는 신문. 셋째,민족화합을 앞당기는 신문. 넷째,2000년대에 앞서가는 신문. 대한매일은 1세기 전 대한매일신보가 실천하고자 했으나 미처 이루지 못한 꿈과 비전을 새로운 시대,변화하는 사회에서 새로운 ‘국가이성(國家理性)’으로 집약,표현하고자 한다.
  • 다시 조명해본 원인들(IMF체제 1년:1­2)

    ◎前 정권 ‘환상속 외환관리’가 주범/물적·정치적 요구 충족에 골몰 시스템 붕괴/기술개발 없는 量팽창위주 재벌정책 탓도 우리 경제가 IMF(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을 받게 된 근본적 이유는 무엇일까. IMF체제 1년을 맞아 위기의 본질을 새롭게 조명해보고 이를 바탕으로 위기에서의 탈출 방안을 모색한다. ■국민의 물질적·정치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만 급급했다=洪尙和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는 지난 6월 펴낸 ‘IMF의 경제식민지를 경계한다’라는 저서에서 “盧泰愚 정권은 ‘한번 믿어주세요’를 앞세운 유화정책으로 물질적 욕구를,金泳三 정권은 ‘중단없는 사정’을 외치며 정치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급급해 경제기반의 붕괴와 사회 위계질서의 파탄을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기업들이 ‘인플레이션 중독’에 빠졌다=尹源培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숙명여대 경제학과 교수)은 최근 발간한 ‘우리 경제의 내일을 위해’라는 책에서 “문민정부 초기의 잘못된 수요확대 정책으로 기업들이 ‘인플레이션 중독’에 빠져 기술개발 대신 자산가치의 확대에만 주력했다”고 지적했다. 기업들은 고(高)부가가치 산업으로의 구조조정에 실패했고 금융기관 돈으로 부동산 투기 등을 일삼아 결국 국내·외 경제 여건의 변화에 신축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金泳三 전 대통령이 부잣집 아들이었기 때문이다=한 언론인은 모 월간지에서 “金전대통령이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26세에 국회의원으로 선출됨으로써 밑바닥 삶을 일찍 졸업했다”며 “대통령이 된 뒤에도 돈의 소중함을 몰라 IMF를 초래한 장본인”이라고 주장했다. 튼튼한 남산 외인아파트를 1,500억원을 들여 폭파한 것이나 2조원을 더 투입해 경부고속철도 대전·대구역을 지하로 내린 점,쌀시장 개방을 막지 못하고 5년간 50조원을 농어촌 개선에 허비한 것은 경제를 망친 대표적 사례라고 했다. ■해외차입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裵善永 청와대 경제수석실 서기관은 자신이 펴낸 경제전문서 ‘화폐·이자·주가에 관한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해외차입이 급격히 늘고 경상수지가 3년 연속 적자를 기록했음에도 외환 당국은 환율 인상을 억제,수출신장과 외채를 줄일 기회를 원천 봉쇄했다”고 분석했다. 결국 지난해 10월 해외차입액이 한국의 대외신인도가 허락하는 차입한도액을 넘었고 외국 금융기관들이 신규 자금 지원을 일거에 중단,위기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종합금융사는 금융시장의 ‘블랙 홀’이었다=李鎬澈 재정경제부 지역경제과장은 ‘IMF 시대에도 한국은 있다’라는 저서에서 “종금사가 돈을 흡수하지만 배출하지는 못하는 ‘블랙 홀’이 된 게 문제”라고 주장했다. 종금사들은 해외에서 단기자금을 빌려 중·장기로 운용하다 대외신인도 급락으로 해외 채권금융기관이 상환을 재촉했다. 은행에서 빌린 급전으로 달러화를 사자 외환시장은 마비됐고 당국은 외환보유고로 환율 방어에 나섰으나 보유고만 탕진한 채 환율은 치솟았다. ■금융감독 당국은 ‘눈 뜬 장님’이었다=姜玎鎬 재경부 국세심판소 상임심판관은 지난 2월 펴낸 ‘캉드쉬 총재의 웃음’에서 금융감독 당국의 책임론을 제기했다. 종금사 투신사 리스사 등이 해외에서 ‘만기에 관계없이 상환을 요청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 돈을 빌리고 있었다. 그러나 당국은 이 조건으로 말미암아 1개 국내 금융기관의 채무불이행이 국가 전체의 신용도 하락으로 확산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음에도 팔짱만 끼고 있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재벌 지원이 화근이었다=스티브 마빈 자딘플레민증권 이사는 지난 5월 발간한 ‘죽음의 고통’에서 “정부는 재벌 죽이기와 은행 죽이기의 귀로에서 재벌의 손을 들어줬다”고 지적했다. 재벌들은 기업제국의 확대를 위해 은행돈을 마구 썼고 지난해 동남아지역에서의 통화 혼란으로 수출 증가에 급브레이크가 걸리자 한꺼번에 무너졌다. ◎또다른 원인 ‘국제금융 음모설’/‘달러 패권주의’ 美國 속셈 없었나 “우리 경제가 IMF(국제통화기금)체제로 전락한 배후에 국제 금융시장의 ‘음모(陰謀)’가 있었다” 李贊根 인천시립대 교수는 지난 3월 펴낸 ‘IMF시대의 투기자본과 미국의 패권’이라는 저서에서 “경제위기의 이면(裏面)에는 국제금융의 본질인 국제적 투기자본과 미국의 패권주의가 자리잡고 있다”고 주장했다. 李교수는 투기자본은 실물경제와 동떨어져 움직이며 국제금융의 글로벌한 통합(자본시장 개방)에 따라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고 밝혔다. 이같은 자본은 ‘기러기떼’가 선두만 좇는 ‘군집(群集)심리’를 갖고 있어 불확실한 속성을 지녔다고 덧붙였다. 게다가 통신기술의 발전으로 투기자본의 이동속도는 광속화(光速化),한국은 부수이익을 노리는 투기자본의 ‘희생물’이 됐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미국은 냉전체제가 종식되자 새로운 ‘힘의 행사’를 바랐고 달러화와 자본자유화에서 그 길을 찾았다. 달러화는 더 이상 안정적 통화가 아님에도 미국은 지난 50년간 국제관계를 움직이는 ‘정치적 화폐’로 활용했다. 미국은 IMF 등을 앞세워 자본자유화를 무차별적으로 확산시켰고 투기자본은 이를 틈타 순식간에 개도국을 휩쓸었다. 미국의 ‘전략’은 외환위기 이후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달러화가 국제 상거래를 지배하는 한 개도국은 미국에 지원을 요청할 수밖에 없고 미국은 그 대가로 시장개방 등 자국 산업에 이익이 되는 ‘전리품’을 챙긴다는 것이 그의 논지이다. 李교수는 “미국은 국가 전략적 측면에서 국제금융시장을 교묘히 이용하고 있다”며 “IMF 위기의 단초가 투기자본에 있는 만큼 국제금융도 책임을 분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장준하 영전에 금관문화훈장을(金三雄 칼럼)

    우리나라처럼 훈·포장이 원칙과 기준 없이 수여되는 경우도 흔치 않을 것이다.독재정권 시절 채찍과 더불어‘당근’의 대용이 되고,김영삼 정권 때까지도 대통령이 국무위원이나 청와대비서실·경호실 요원들에게 나눠주는 선심용이었다. 원칙과 기준 없이 남발되다 보니 막상 받아야 할 사람이 제외되거나 수상하더라도 격에 맞지 않는 경우가 적지않았다. 張俊河 선생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하는 문제로 파문이 일고 있다.문화관광부는 고인이 생전에 사상계(思想界)를 발간하여 한국 잡지문화 발전에 끼친 공로를 높이 평가해 11월1일 잡지의 날에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하기로 했다고 한다. 문화관광부는 당초 잡지협회의 추천을 받아 고인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줄 것을 추진했으나 청와대와 행정자치부의 협의 과정에서 은관문화훈장으로 훈격(勳格)이 한 단계 낮아졌다는 것이다. 어느 부처의 의견 때문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훈장 격하는 크게 잘못된 결정이다.다른 상이면 몰라도‘잡지문화 발전’에 끼친 공로라면 장준하와 사상계에 금관문화훈장을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상계는 우리 잡지 역사에서 단연 선구적 정론지였다.6·25전란으로 폐허가 된 1950년대에 청년과 지식인들에게 자유민주주의 가치관과 폭넓은 교양을 심어준 복음서 역할을 하였다. 사상계의 정론과 비판정신은 4월혁명의 기폭제가 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5·16 후에는 박정희 독재에 대항하여 새로운 전위가 되었다.하나의 월간 잡지가 아닌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한 것이다.그렇다고 저항 일변도의 정치 잡지였던 것은 아니다. 동인문학상으로 상징되는 문학운동과 신인 발굴,지방순회 문화강연회 등 사상계 영역은 미치지 않은 데가 없었다.우리 잡지문화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다. ○정론잡지의 선구자 사상계를 이끈 선구자는 장준하 선생이다.장준하가 누군가.식민지 시절에는 총을 들고 왜적과 싸우고,해방 후에는 金九 선생 비서로서 건국운동에 헌신하고,이승만과 박정희 독재시대에는 펜을 들고 자유민권 수호에 앞장서고,유신체제가 선포되면서 온몸을 던져 민주회복과 통일운동에 헌신하다가 암살 당한 민족 지도자다. 그는 박정희 정부가 북한특사와 통일원장관을 제의할 때 친일 전력과 쿠데타 정권을 이유로 이를 거부하고,군사정부의 훈장 제의도 같은 이유로 거절하였다.올곧게 산 지사적 지식인의 전형을 살피게 된다. ○왜곡 잡지계에 경종 계기를 고인에게는 노태우 정부가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고 1962년에는 필리핀에서 막사이사이 언론문학 부문상을 수여한 바 있다.때문에 새삼 문화훈장추서 문제로 논란이 생긴다면 고인에게 욕주는 일이 될지 모른다. 그렇지만 유족의 항의대로 고인이 생전에 추구하던 50년 만의 정권교체가 이뤄져 국민정부가 출범했는데,정부가 금관·은관·보관훈장 중 기껏 은관문화훈장이나 주겠다는 것은 격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예우에도 미치지 못하고 사상계에 대한 모독이 아닌가 싶다. 정부는 엄격한 기준과 원칙에서 수상자와 훈격을 결정해야 한다.오늘 열리는 국무회의는 장준하 선생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여 업적이 평가되고 대접받는 질서를 보여줘야 한다. 그리하여 이를통해 왜곡과 모해로 지탄받는 잡지계 일각에 경종이 되고 장준하의 정론정신이 모든 언론인의 귀감이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통감부와 대결(다시 태어난 ‘대한매일’:8)

    ◎침탈·탄압에 맞대응/매국노·침략자 규탄/신문지법 등 공포 맞서 논설 통해 간담 서늘케/민족혼 고취·항일 주도 1906년 1월31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초대 통감으로 하는 통감부가 발족되면서 국내 언론은 이전과는 판이한 양상을 띠게 된다. 각국 공·영사관의 철수를 강행,열강의 모든 권익을 빼앗은 통감부는 매국내각을 구성한 뒤 본격적인 한국침탈에 걸림돌이 되는 언론에 대한 탄압에 돌입했다.1906년 4월부터 통감부령 제10호로 언론활동의 통제조항을 둔 보안규칙 시행에 들어간 것을 필두로 1907년 7월24일 李完用 내각으로 하여금 ‘광무신문지법’을 공포토록 해 본격적인 항일 민족지 죽이기에 들어간 것이다.대한매일신보도 1908년 4월 개정된 이 신문지법에 따라 결국 철퇴를 맞고 말았다. 이 시기 통감부는 대한매일에 대해 유달리 집중적인 압력을 가해왔다.대한매일이 을사조약 이후 항일의 필치를 높여간 만큼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이러한 상황에서도 대한매일은 ‘영국인 사주’(裵說)덕에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아 날카로운필봉을 어김없이 휘둘렀고 매국자들을 예외없이 고발했다.그러나 결국 신문지법을 대동한 일제의 탄압에 한껏 타오르던 항일 민족혼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1906년의 보안규칙 시행이나 1907년의 신문지법은 처음엔 국내에서 발행되는 민간신문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그러나 통감부는 사사건건 물고늘어지는 명의의 대한매일을 그냥 놓아둘 수 없었다.따라서 1908년 4월29일 신문지법을 개정,대한매일의 기세를 꺾는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신문지법은 일본의 통감정책에 저해되는 일체의 언론에 대해 발행정지권을 비롯해 벌금형과 체형,신문 인쇄기기 몰수 등 강력한 처벌조항을 담았다.더욱이 1907년 7월24일 신문지법을 발포한지 닷새만에 집회·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이 공포되고 31일 한국군대까지 해산된 것을 보면 대한매일을 비롯한 항일 민족지에 대한 통감부의 탄압이 얼마나 치밀한 것이었나를 알 수 있다. 이 법은 1910년 한일합병이 강행된 뒤에도 계속 발효됐고 해방후 1952년까지 존속한 식민지 악법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가장 날카로운 논봉을 들고 나선 것은 역시 대한매일이었다.정부가 허수아비로 전락한 마당에 숱한 애국지사들은 자유로운 필치를 유지하는 대한매일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통감부와 관련한 일련의 논설들은 이같은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통감부 설치 직후인 1906년 2월9일자 1면 논설 ‘통감(統監)’과 3월9일자 1면 논설 ‘이등후(伊藤侯)’는 통감부 설치의 불법성을 비난한 대표적인 예다.“일본이 이웃나라 안에 자기나라 대표를 파견해 권력을 장악함은 옳지 못한 일”(統監),“한국의 내정은 일인이 지휘하고 외무는 동경에서 관할하니 한국의 독립이란 어디 있느냐”(伊藤侯). 또 8월15일자 논설 ‘한국과 일본’에선 “이등박문은 현존 한국의 노예같은 정부 대신을 지휘해 모든 일을 자기가 집행함이 한국을 일본에 정복된 국민의 지위에 떨어뜨리는 제반 악계를 꾸몄다”고 폭로했다.1907년 1월16일자에는 “을사5조약을 승인하지 않으며 열국의 보호를 요청한다”는 고종의 칙서를 발표해 침략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친일정부가 발행하는 관보 게재를 중단한 것도 획기적인 일이다.법령공포와 정부시책 홍보가 내용인 관보는 한일합병 때까지 발간된 대부분의 신문들이 중요 내용을 전재할만큼 큰 뉴스원이었고 신문보급과도 깊은 관련이 있었다.그러나 일본이 득세하면서 자주성과 독립성을 잃게 됐고 관보기사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익어갔다.대한매일은 마침내 1908년 3월6일자 1면 논설 ‘관보정게(官報停揭)’에서 “관보의 내용이 과연 한국사람의 관보인가”라고 쓰고 이날부터 관보란을 폐지했던 것이다. 이처럼 거듭되는 배일 논조에 격분한 통감부는 마침내 裵說 타도를 결의하고 나섰고 대한매일은 일제의 집요한 탄압에 강하게 맞선 裵說과 논진(論陣)이 추방 혹은 구속되면서 서서히 시들어갔다. ◎신문사들의 수난/주요 재원 신문대금 체납 ‘눈덩이’… 경영난/社告로 납부 독촉… 日帝 탄압에 곡필 보도도 통감부의 언론탄압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국내 언론은 심각한 경영난을 겪게 된다. 사전검열에 따른 기사삭제,반포금지 및 정간이횡행하자 자연 독자들의 신뢰감이 떨어지기 시작했다.따라서 당시의 신문,특히 민족지들은 광고수입이 적은데다 주요 재원인 신문대금의 체납이 많아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고 이에 따라 자유로운 논조를 펴지 못하는 지경에 빠졌다. 실제로 내부 경무국이 펴낸 ‘고문경찰소지’(1910년 간)에 따르면 통감정치 첫해인 1906년 한 해만 하더라도 황성신문은 7건,만세보는 6건,제국신문은 13건이나 기사를 삭제당했다.또 1909년 ‘경찰사무개요’와 ‘조선통감부 시정연감’은 발매반포금지 및 압수처분의 경우 1908년 64건,1909년은 137건으로 기록하고 있다.대한매일만 하더라도 1909년 한 해 동안 발매반포금지 14건에 모두 1만6,314부를 압수당했다. 이같은 탄압이 전개되자 신문 운영에 극심한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민족지들은 대중적인 호소에 적극 나섰다.사고와 잡보를 통해 독지가의 성원과 신문대금 납부를 촉구하기에 이른 것인데 그 사정이 매우 급박했음을 알 수 있다. 황성신문은 “신문대금을 빨리 지불하는 사람은 문명인이라”는 이례적인 사고를 냈고 어떤 대신이 체납금을 보내왔다는 사실을 기사로 보도하기까지 했다.사설에서도 “독자가 신문대금을 지불치 않으므로 신문을 발행 못한다”고 쓰고 있다. 대한매일도 사고에 “본사가 이전하겠는데 수리 정돈에 경비가 매우 모자라니 대금을 송치해주기 바란다”는 글을 올렸다.심지어는 “각 지점에서 본사 대금 체납이 많은데 평양지점은 미납급이 300여원에 달했으니 본사경비를 어떻게 충당할 수 있겠는가”라며 재촉하는 사고를 내기도 했다.한 잡보에는 “재정난으로 휴간한 제국신문의 복간을 위해 각 부인회에서 보조금을 모집하기로 했다”는 글까지 올린 것을 보면 당시 언론이 얼마만큼 극심한 경영난을 겪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 日 안보리 진출 지지해야 하나

    정부는 한일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이끈다는 차원에서 ‘일본의 거부권 없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용인한다는 쪽으로 방침을 바꿨다.이에 대한 찬반론을 싣는다. ◎찬성/‘파트너십’ 근거로 과거 제대로 청산/한발 앞서 나가야/金聖在 한신대 교수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외교통상부의 발표에 대해 논란이 많은 것 같다. 외교부는 ‘거부권을 갖지 않는 상임이사국이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일본이 국제평화 증진을 위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일정한 한계를 그은 것으로 이해된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 반대했다.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일본이 우리나라 식민지 침략에 대한 역사적 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金大中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하여 양국간에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채택함으로써 한·일 관계를 과거사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의 동반자적 관계로 전환시켰다. 가해국인 일본이 아니라 피해국인 우리 나라가 과거사의 족쇄를 과감히 푼 것은 미래 세계의 평화적 지평과 도덕적 정치에 기초한 큰 마음의 외교가 아니고서는 내릴 수 없는 결단이었다. 또한 金대통령은 방일시 “일본의 국제사회에 대한 기여와 역할을 기대한다”고 했다.金대통령의 이 말에는 ‘일본이 소국처럼 처신하지 말고 대국답게 행동하라’는 주문이 담겨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번 외교부의 결정은 이런 金대통령의 큰 정치,큰 외교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소국적 태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본을 볼 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일본을 과거사에 잡아두면 우리도 과거에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못 나간다는 점을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반대/日 자성·사과 미흡/이사국 자격 미달/不戰 결의 등 필요/愼鏞廈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장 일본은 인류역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아직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될 자격이 없다. 첫째 이유는 과거 잘못에 대한 정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2차대전 후 뒤처리에 많은 신경을써온 독일과는 달리 일본은 전후처리를 회피하기에 급급했다.피해국이었던 한국과 중국이 지금도 일본에게 과거에 대한 진정한 사죄를 요구할 정도로 자성(自省)에 인색했다.둘째 이유는 과거사에 대한 단순한 사죄 수준을 넘어서 일본이 앞으로 다시는 인접국을 침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일본은 무라야마(村山)총리 시절 국회에서 부전(不戰)결의를 하려고 했지만 자민당 의원들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태평양전쟁에 대해서도 침략전쟁이 아니라 서양의 침략을 받는 아시아국가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이었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말이다.일본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려면 국회나 국가원수가 부전결의를 한 뒤 우선적으로 인접국의 상호협의를 거치는 절차가 필요하다고 본다. 셋째 이유는 일본이 그동안 국제사회에 기여한 것보다 오히려 얻어간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최근 세계 빈국에 대한 원조가 늘어나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일본이 무역흑자 등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거둬들인 돈에 비해서는 적다는 것이 전세계인의 공통적인 인식이다. 우리 외교안보팀의 일본정책에도 문제가 있다.30억달러의 차관을 얻었지만 일본영화 개방만으로 보상이 충분한데 너무 많은 것을 내주고 있다.일본과는 선린우호정책을 취하되,일본이 침략야욕을 키울 수 있도록,그리고 인접국을 깔보도록 빌미를 제공하거나 오해를 불러일으켜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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