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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贊51% vs 反49%… 스코틀랜드 독립하나

    贊51% vs 反49%… 스코틀랜드 독립하나

    ‘51% 대 49%.’ 307년 만에 영국 연방에서의 독립을 결정하는 스코틀랜드 주민 찬반 투표가 오는 18일(현지시간) 시행되는 가운데 여론조사에서 독립 찬성 비율이 처음으로 반대를 앞질렀다. 지난 한 달간 독립을 지지하는 여론은 무려 12%나 뛰었다. 막판에 전세가 뒤집히자 외신들은 “전 세계가 놀랄 이변이 연출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8일 가디언 등에 따르면 여론조사기관 유고브가 지난 2~5일 스코틀랜드 주민 108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독립 찬성은 51%, 반대는 49%로 나타났다. 분리독립 여론조사에서 독립 지지 의견이 앞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영국 중앙정부는 당황한 기색이다. 급기야는 개입을 자제하던 노동당이 구원투수로 나섰다. 가디언은 “스코틀랜드 출신인 고든 브라운 전 총리가 독립안이 부결되면 노동당이 재집권해 정부의 무능함을 심판하고 스코틀랜드 자치권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거는 등 영국 연방 구하기 선봉에 섰다”고 전했다. 노동당은 영국 하원에서 59석을 차지하는 스코틀랜드가 사라지면 자신들의 의석도 40석 이상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감에 전·현직 지도부가 반대 운동에 뛰어든 상태다. 스코틀랜드가 연방에서 분리되면 영국의 국토 면적은 3분의1가량 줄어든다. 북해유전 등 천연자원의 손실도 불가피해진다. 이 때문에 연방정부는 스코틀랜드 자치정부에 조세권과 예산권까지 이양하는 획기적인 자치권 확대를 약속하며 민심 진화에 나섰다. 스코틀랜드는 1707년 스코틀랜드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 간 합병에 따라 단일 국가로 편입됐다. 그러나 식민지배 시절부터 누적된 민족 갈등에 경제난까지 더해져 정부와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이에 2011년 분리독립을 당론으로 내건 스코틀랜드국민당이 자치정부 의회 다수당이 되면서 정부와 협상을 거쳐 주민 투표가 결정됐다. 관건은 경제다. 스코틀랜드 자치정부는 이미 세계 최고 부국 수준의 기반을 보유하고 있음을 들어 독립하면 당장에라도 주요7개국(G7) 수준의 부자 나라 대열에 합류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국가 수립 비용으로만 15억 파운드(약 2조 5000억원)가 필요하다며 경제 사정이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스코틀랜드와 노르웨이가 인구 규모와 자유민주주의 전통 등 유사점이 많지만 경제대국으로 자리 잡은 노르웨이와 달리 스코틀랜드는 북해유전의 자원이 10년간 빠르게 급감했다는 점, 열악한 사회복지 등에 수많은 돈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점 등을 들어 스코틀랜드의 홀로 서기 효과에 의문을 제기했다. 백민경 기자 white@seoul.co.kr
  • [영화] ‘늑대소년’ ‘관상’ 볼까… ‘전국노래자랑’ ‘소원’풀까

    [영화] ‘늑대소년’ ‘관상’ 볼까… ‘전국노래자랑’ ‘소원’풀까

    명절, 텔레비전 영화 프로그램에서 청룽 또는 인디애나 존스가 빠지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고정 레퍼토리를 선보이던 명절 TV영화 얘기는 옛말이다. 불과 얼마전까지 극장에 걸렸거나 작품성과 인기를 함께 갖춘, 꽤 괜찮은 작품들이 친절하게도 안방을 찾아온다. 방송 편성표에 미리미리 동그라미 쳐놓고 챙겨보자. 연휴 첫날인 6일 SBS에서는 913만명 관객을 동원해 1000만명 기록 턱밑까지 갔던 송강호·이정재·김혜수 주연의 ‘관상’을 밤 8시 45분 편성했다.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과거와 운명을 꿰뚫어보는 천재 관상쟁이가 조선의 운명을 바꾸려는 역모의 시도와 엇갈리며 겪는 풍파가 유장하게 펼쳐진다. 7일에는 KBS2의 ‘늑대소년’과 SBS의 ‘소원’이 준비됐다. 송중기와 박보영이 출연한 ‘늑대소년’은 야생에서 자란 소년이 문명을 접하고 사랑을 배워가는 과정을 그렸다. ‘소원’은 성폭행을 당한 아홉살 소녀와 그 가족들의 이야기다. 분노와 복수가 아니라 풋풋하고 감동적인 희망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담았다. 추석날인 8일 KBS2의 ‘전국노래자랑’은 낮 12시10분에 방송된다. 개그맨 이경규가 제작한 코미디로, 국민MC 송해의 진짜 전국노래자랑과 같은 시간대에 편성됐다. 차례를 지낸 뒤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아이들까지 모두 함께 앉아 보면 좋을 유쾌한 영화다. 한국형 재난영화의 전형을 만들어낸 MBC의 ‘감기’도 볼만하다. 치명적인 감기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분투하고 갈등한다. 국민을 업신여기는 못난 정치인들이 나오고, 국민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미국 전투기에 폭격 명령까지 내리는 멋진 대통령 역할의 차인표의 진지함이 관람 포인트다. 리샤오룽 팬이라면 KBS1의 ‘맹룡과강’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 EBS는 밤 10시 50분 ‘전우치’를 방송한다. 9일 KBS1는 ‘조조 황제의 반란’, KBS2는 ‘더 테러 라이브’, MBC는 ‘스파이’, EBS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준비했다. ‘좋은 놈’은 일제 식민지 시절 보물을 찾아 만주를 내달리는 세 명의 총잡이(송강호, 이병헌, 정우성)들을 그린 한국형 웨스턴 무비. 연휴 마지막날인 10일 KBS2에서는 1200만명 관객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던 ‘7번방의 선물’이 찾아간다. ‘ SBS는 허영만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미스터고’를 방송한다. 인간보다 더욱 인간적인 고릴라가 야구를 하면서 인간과 우정을 나눈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사설] 뉴라이트 학자의 잇단 정부기관 진출

    공영방송의 생명은 신뢰와 공정성이다. 정권 성향과는 무관하게 정치적 독립성을 견지하는 게 공영방송의 제 모습이다. 그런 점에서 이인호(78) 서울대 명예교수의 한국방송(KBS) 이사 추천이 적절한지 의문이다. 방송통신위원회는 내부 검증과 토론 등 절차적 정당성의 결여를 문제 삼은 야당 추천 상임위원들이 퇴장한 상태에서 이 교수를 신임 이사로 추천했다. 낙하산 인사다. 최연장자로 이사장을 맡을 것으로 보이는 이 교수는 뉴라이트 계열 학자로서 편향적인 역사인식을 보여 왔다. 학자의 소신은 존중해야 하지만 그간의 이력과 행적이 사회적·이념적 중립성을 요구받는 공영방송의 책임 있는 자리에 어울리는지 돌아봐야 한다. 이 교수를 포함해 현 정부 들어 뉴라이트 인사가 주요 기관에 포진하고 있는 점은 우려스러운 일이다. 최근 1년 새 한국학중앙연구원장과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대학원장, 방송통신심의위원장에 뉴라이트 인사가 임명됐다. 국정 국사교과서 추진이나 방송 장악을 위한 포석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행여 그런 의도가 있다면 공영방송은 물론 사회가 불신과 분열의 늪에 빠져들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이 교수는 문창극 전 국무총리 후보의 ‘식민지배는 하나님의 뜻’ 운운한 교회 강연에 대해 지난 6월 TV조선에 출연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며 ‘감동받았다’고 발언했다. 문 전 후보를 반민족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라고도 했다. 그를 낙마시킨 대다수 국민 정서와는 동떨어진다. 문 전 후보의 망언을 알린 KBS의 단독 보도에 대해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왜곡 보도’라며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데다 이 교수가 KBS 이사로 추천되자 일각에선 공영방송 길들이기 수순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이 교수는 지난 정권 때 친일사관·독재미화 논란을 빚은 ‘대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의 감수를 맡았고 뉴라이트 계열의 한국현대사학회 고문이기도 하다. 전문성 없는, 정권 차원의 낙하산 인사로는 공영방송이 파행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우려를 되새겨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저께 서울 마포구 상암동 MBC 신사옥 개막 기념식에서 ‘방송의 공정성’과 ‘사회적 책임’을 주문하며 ‘신뢰의 가치’를 강조했다. 하지만, 같은 날 이 교수의 이사 추천 직후 KBS 노조와 야당, 일부 시민단체는 공영방송의 정치적·이념적 편향 가능성을 지적했다. 신뢰와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실질적 조치가 이뤄지길 바란다.
  • [씨줄날줄] 아사동맹(餓死同盟)/문소영 논설위원

    전남 목포에서 배로 1시간 30분 정도 들어가면 신안군 암태도(巖泰島)가 나온다. 암태도는 1923년 8월 일제 강점기에 지주 문재철을 상대로 70~80%로 책정된 소작료를 내려 달라며 농민 600명이 ‘아사동맹’(餓死同盟)을 맺어 투쟁한 지역이다. 암태도 출신인 문재철은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에 빌붙어 전남과 전북 고창 일대의 대지주로 성장했다. 소작농의 아사동맹에 일제는 경찰을 출동시켜 위협했다. 소작농은 소작료를 내고 가족을 굶겨 죽일 것인가, 아니면 소작료 인하투쟁을 하다가 혼자 굶어 죽을 것이냐의 선택지에서 물러설 수 없었다. ‘암태도 아사동맹’이 1년을 끌자 일제는 소작쟁의가 전국으로 확산하는 것을 막고자 1년 뒤인 1924년 8월 중재를 섰다. 지주에게 소작료 40% 인하를 지시했다. 아사동맹의 원조는 1923년 7월 경성의 4개 고무공장 여성 노동자의 파업이다. 그해 고무공장들은 일제히 임금 삭감을 통지했는데 이에 수백 명의 여성 노동자가 ‘경성고무 직공조합’을 결성하고 ‘아사동맹’을 맺었다. 얼마 되지 않는 노임을 삭감하면 가족부양 등이 어려웠던 탓이다. 임금 삭감을 중단하고, 무례한 일본인 감독을 해고해 달라는 요구에 업주 측은 교섭대표를 만나지도 않았다. 옳다구나 하고 파업 참가자 모두를 해고했다. 더 나아가 파업 참가자의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전국 고무 공장에 돌려 취업을 막았다. 부당 노동 행위를 한 것이다. 이에 격분한 여성 노동자 수백 명이 곧바로 굶어 죽기를 맹세하고 공장 앞 공터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1923년 7월 4일 빗속에서 진행된 이 농성으로 인해 전국에서 지지와 성원이 이어졌다. 특히 ‘마산 노농(農) 동우회’는 지지 연설회를 개최하고, 모금을 해 경성의 아사동맹에 보내주었다. 마산의 사례는 경성 고무공장 노동자에 대한 지지가 전국적이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여론이 급속히 악화하고 지지세력이 많아지자 고무공장 기업주들은 해고한 파업 노동자를 전원 복직시키고 임금인상은 물론 상여금 지급을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45일째 단식을 이어가는 세월호 유가족 김영오씨의 단식 중단을 호소하며 지난 22일 이후 서울 광화문 세월호 유가족 농성장에서 동조 단식에 들어간 사람이 급격히 늘었다. 문재인·심상정 등 국회의원과 영화·연극인, 만화가 등이 참여한 누적 단식자는 지난 25일 현재 3300명이다. 해외교포 포함한 온라인 참가자는 2만 5000명, 전국 단식농성장 24곳이다. 일제 강점기도 아닌데 세월호 유가족이 정부와 대립하며 단식을 지속할 이유가 없다. “세월호 유가족의 가슴에 여한이 남지 않도록 철저한 진상 규명과 특별법을 제정하겠다”던 지난 5월 박근혜 대통령의 약속이 지켜진다면 말이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지명(하) - 땅 이름, 無言의 역사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지명(하) - 땅 이름, 無言의 역사

    땅이름(지명)은 가장 겸허한 모국어이자 무형문화재이다. 지명 속에는 그 지역의 내력이 오롯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지명이란 무언(無言)의 역사이다. 지명에 몇 가지 요소가 덧붙여져 기록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햇볕을 쬐면 역사요, 달빛에 물들면 야사’(野史)라는 말이 생겼다. 우리의 지명은 어떠한가. 한자와 이두(吏)와 우리글의 치열한 ‘3자 경쟁’에서 한자가 압승을 거뒀다. 순우리말 지명은 유일하게 서울이 살아남은 반면 소부리(부여), 한밭(대전), 솜리(이리) 같은 아름다운 우리말 지명은 땅속에 묻혔다. ●지명은 해당 지역의 ‘과거사’ 압축적으로 보여줘 지명은 지역의 내력과 곡절을 숨죽여 외친다. 삼국시대에는 오늘의 양천구와 강서구 일대를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이라고 했다. 이두로 ‘제차’란 구멍, ‘파의’는 바위이므로 ‘구멍바위’이다. 이를 한자로 공암(孔岩)이라고 옮겼다. 옛 한강 공암진 나루요 양천 허(許)씨의 발상지로 알려진 허가바위의 유래가 깃들어 있다. 또 이 바위는 큰 홍수 때 이웃 광주땅에서 떠내려왔다고 하여 광주바위라고도 불렸다. 또 한강을 건너 삼남지방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지점인 노들나루가 있던 상도동에 전국 모든 장승의 우두머리 장승이 서 있다고 해서 장승백이(장승배기)라고 불렀지만, 지명으로 채택되지는 못했다. 이처럼 지명은 해당 지역의 과거사를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한 번의 잘못된 개명은 뜻을 일그러뜨리고, 사실을 비튼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땅이름은 우리말이었지만 기록에는 한자지명으로 남겼기에 우리말 지명이 홀대를 받은 측면이 있다. 조선시대 지방행정체계는 부(部)-방(坊)-계(契)-동(洞) 4단계였다. ‘전국 방방곡곡’이란 말은 여기에서 나왔다. 그러나 한자식 행정체계와는 무관하게 우리는 크든 작든 모든 마을을 ‘고을’이라고 했고,고을의 수령은 높든 낮든 모두 ‘사또’라고 불렀다. 토박이 지명은 조선시대 한자 지명화됐다가 일본 강점기에는 유래조차 짐작할 수 없는 엉뚱한 지명으로 변질됐다. 무쇠로 솥을 만드는 가마터와 대장간이 많이 있다고 하여 무쇠막 또는 무수막이라고 불리던 옛 수철리(水鐵里)는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금호동으로 개악됐다. 물 수(水)는 호수 호(湖)로, 무쇠 철(鐵)은 금 금()으로 멋대로 바꾼 것이다. 금호동이라는 지명에서 옛 대장간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가. 없다면 잘못된 지명변경이다. 1914년 강제 행정개편 이후 불과 100년 사이에 잣골→백동→혜화동, 모래내→사천→남가좌동, 한내→한천→상계·중계·하계동, 배오개→이현→종로4가, 진고개→니현→충무로, 구리개→동현→을지로2가, 박석고개→박석현→갈현동 등으로 전혀 다른 엉뚱한 지명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정도는 덜하지만 붓골→필동, 삼개→마포, 두텁마위→후암, 물치→수색, 새내→신천, 노들→노량, 복삿골→도화동, 삼밭→삼전동, 미나릿골→미근동, 쇠귀바위→우이동, 서래→반포 등 순우리말 지명의 억지 한자화도 지역의 유래와 특색을 퇴색시키고 있다. ●무악이 안산, 아단산이 아차산으로 바뀐 까닭 지명은 시간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작품이기도 하다. 대개 안산(鞍山)이라고 불리는 무악은 서울 풍수의 알갱이를 이루는 내사산(백악-낙산-남산-인왕산) 못잖게 중요한 산이었지만 지금은 존재감이 없다. 무악재라는 험한 고개에 도로가 놓이고 평평해지면서 안산이라는 평안한 이름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았다. 조선 초기 풍수 중 ‘무악주산론’(毋岳主山論)이 있었다. 무악을 서울의 주산으로 정하고 오늘의 연세대와 이화여대 자리에 경복궁을 앉히자는 하륜의 주장이었다. 터가 좁다는 이유로 수용되지 않았지만 ‘백악주산론’과 마지막까지 자웅을 겨뤘다. 태종이 종묘에 나아가 길흉을 점친 결과 백악이 우세하자 태종은 “나는 무악에 도읍하지 아니하지만, 후세에 반드시 도읍하는 자가 있을 것”이라며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무악의 기는 쉽게 꺾이지 않았다. 비록 성 밖으로 밀려났지만 연희궁이라는 이궁이 무악 아래 지어졌다. 정종과 태종, 세종이 차례로 거했다. 세조 때는 서잠실(西蠶室)이라고 하여 양잠을 했고 연산군은 연회장으로 사용했다. 조선 최악의 내란이라고 일컫는 이괄의 난을 진압해 왕조가 이어진 장소가 바로 무악이기도 하다. 또 오늘날 연세대가 연희전문학교에서 출발했고 연희동에서 대통령이 두 명이나 나왔으니 태종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닌 듯싶다. 서울의 외사산(삼각산-용마산-관악산-덕양산) 중 용마산 부분이 좀 헛갈린다. 어떤 이는 용마산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아차산이라고 한다. 그러나 두 산은 다른 산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진 산이다. 서울의 외사산 중 좌청룡을 아차산으로 보고 아차산의 최고봉을 용마봉(348m)으로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고구려 유적지가 발굴되고 온달과 평강의 전설로 유명한 아차산의 지명 유래도 꽤 흥미롭다. 높을 아(峨)에 우뚝 솟을 차(嵯)를 써서 아차산이라고 하지만 높이가 285m밖에 되지 않으니 어울리지 않는 지명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각축지였다는 점에서 ‘내가 잠시 빌려 쓴(我借)’의 뜻으로도 해석하는 등 설이 분분하다. 아차산의 원 지명은 아단산(阿旦山)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다. 삼국사기에 ‘아침 해’(旦)를 의미하는 신성한 터, 아단산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의 이름(李旦)을 사용할 수 없었기에 비슷한 글자를 썼다는 풀이다. 이른바 군주의 이름을 피하는 피휘(避諱) 때문이었다. 경북 대구(大邱)도 본디 대구(大丘)였지만 영조 때 공자의 이름(孔丘)과 같으므로 피휘해야 한다는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치자 정조 때 바꾼 것과 마찬가지 이치라는 것이다. ●청운동·옥인동·인사동은 일제가 만든 합성 지명 서울역사 이천 년의 풍상보다 36년 일제 식민지배의 훼절이 더 엄혹했다. 한국땅이름학회에 따르면 서울 동 이름의 30%, 종로구 동명의 60%가 일제 잔재라지 않는가. 해방 후 창지개명(創地改名) 잔재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으면서 우리 지명의 대부분이 원상회복되지 못했다. 개발연대 이후 우리 손으로 행한 개악 사례도 적지 않다. 서울의 지명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합성지명이다. 서울시민이 사랑하는 청운동, 옥인동, 통인동, 인사동은 급조된 지명이다. 어느 날 갑자기 두 개의 지명을 합치면서 생겨난 정체불명의 이름이다. 일제는 행정개편이라는 이름 아래 멀쩡한 두 개의 지명을 하나로 합쳤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이뤄진 지명말살정책이었다. 지명 속에 전해 내려오는 우리의 얼과 문화를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무서운 음모였다. 청운동은 청풍계(청하동)와 백운동에서 한 글자씩을 따 만들었다. 옥인동은 옥동과 인왕동의 합성이다. 유서 깊은 청풍계와 옥동이라는 지명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를 바위에 새긴 ‘백세청풍’과 ‘옥류동’이라는 글에서 비롯됐다. 청풍계천은 청계천의 발원지이며 청계천이란 이름의 연원이기도 하다. 인왕이라는 명칭은 인왕산에서 비롯됐다. 광해군 때의 기록에 따르면 인왕사라는 절 이름에서 산 이름을 따왔다. 한양도성 안 최고의 경치 좋은 곳으로는 백악의 동쪽 삼청동천(삼청동)을 으뜸으로 쳤고 백악 서쪽 백운동천(청운동)과 인왕산 아래 옥류동천(옥인동) 그리고 낙산 서쪽 쌍계동천(동숭동), 남산 아래 청학동천(필동) 등 다섯 곳을 꼽았다. 여기서 동천(洞天)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수려한 골짜기를 이른다. 내 천(川)을 쓰지 않고 하늘 천(天)자를 쓴 것은 사람만 모여 즐기는 곳이 아니라 신선도 더불어 노닌다는 뜻이다. 우리가 백사실계곡이라고 부르는 부암동 백석동천이나 관악산 자하동천도 풍광에서 빠지지 않았다. 새로 만들어진 청운동과 옥인동이 지명으로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네 개를 둘로 줄이면서 사라진 것들이 아쉬울 뿐이다. ●흐리멍덩한 지명 회복 실패의 교훈 잊지 말아야 서울을 찾는 외국인관광객이 가장 먼저 찾는 곳이 인사동이다. 한국적인 정취를 품고 있으며 인사동이라는 지명도 발음하기 쉽고 어감도 좋다. 그런데 인사동은 관인방의 인자와 대사동의 사자를 강제 결합시켜 지은 것이다. 한경지략에 따르면 “대사동은 곧 탑사동인데 옛날에 원각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석탑만 남아 있다”고 유래를 전한다. 원각사지 10층 석탑 때문에 탑동, 사동, 대사동, 탑사동, 탑골 등으로 불렸고 지금도 탑골공원이나 파고다공원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 백동(잣골)은 숭교방의 동쪽이라고 해서 동숭동이라고 바꿨고 괴동(회나무골)은 의금부가 있는 자리라고 해서 공평동, 옥방동(옥방골)은 인의예지에서 따와 예지동, 사동(탑골)은 낙원동, 원동(원골)은 원서동, 상사동(상삿골)은 원남동이라고 작명했다. 15개 동의 새 지명이 생겼다. 수진방과 송현을 합쳐 수송동이 되면서 송현(솔골)이 사라졌고 옥동과 인왕산동을 합쳐 옥인동을 만든다고 옥동(옥골), 운동(구름재)과 니동을 합쳐 운니동을 만들면서 니동(진골), 육상궁과 온정동을 합쳐 궁정동을 만들면서 온천수가 나오던 온정동이 각각 사라졌다. 서울이라는 유일한 순우리말 지명은 미군정청이 해방과 함께 일방적으로 준 선물이었다. 그러나 해방 후 지명을 회복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우리는 기존의 일본식 지명을 토박이 이름으로 되돌리지 않고 모조리 한자로 바꾸는 우를 범했다. 강제병합 이전의 지명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일본이 멋대로 변경하고 왜곡하고 합친 일본식 지명에서 정(町)을 동(洞)으로 바꾸는 데 급급했다. 세종대왕, 이충무공, 을지문덕 장군, 원효대사, 이퇴계, 민충정공 등 6명의 선현의 시호를 채택해 세종로(광화문통), 충무로(본정통), 을지로(황금정통), 원효로(원통) 등으로 가로명을 변경하는 데 그쳤다. 사라진 숱한 지명의 원혼 앞에 어찌 이리 덤덤한가. 현재 진행 중인 독도와 동해 표기전쟁은 한국과 일본의 지명전쟁이다. 독도냐 다케시마냐, 동해냐 일본해냐는 모두 지명선점 다툼이다. 해방 후 흐리멍덩한 지명회복 실패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람에게 성명(姓名)이 역사이듯 땅에는 지명이 역사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글로벌 시대]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민재홍 덕성여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글로벌 시대]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민재홍 덕성여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 열풍을 보면서 티베트 불교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떠올랐다. 전 세계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종교 지도자 두 분의 한국 방문이 서로 대비되었기 때문이다. 달라이 라마의 한국 방문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이미 추진된 바가 있었지만 우리 정부는 티베트를 지배하고 있는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감안해 무산시켰었다. 그런데 지난 7월 조계종 중앙회가 ‘달라이라마 방한 추진 선포식’을 거행하고 2016년 달라이 라마의 방한을 추진하고 있어 향후 성사 여부가 주목되고 있다. 히말라야 산맥 북서쪽 드넓은 초원에 양떼와 야크들이 살아 숨 쉬는 자연의 땅 티베트. ‘서쪽의 성결(聖潔)한 땅’이라는 뜻을 가진 ‘시짱’(西藏)에는 우리의 일제 강점기와 닮은 티베트인들의 아프고 시린 역사가 있다. 1949년 10월 중국 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을 건립하고, 1950년 10월 인민해방군을 동원해 티베트를 강제 점령했다. 결국 1959년 3월 10일 중국의 티베트 독립을 요구하는 대규모 만세 운동이 일어났고, 달라이 라마는 1960년 인도에 망명 정부를 수립하여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1966년 중국 문화 대혁명의 회오리 속에서 중국은 티베트 불교사원을 다수 파괴하고 티베트어의 사용을 금하는 한편, 대규모 한족을 티베트에 강제 이주시켜 티베트의 중국화를 가속화했다. 1989년 3월 티베트는 독립운동 30주년을 맞아 대규모 독립 시위를 전개하였는데, 중국의 유혈진압으로 갈등의 최고조를 맞이하게 된다. 결국 1999년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독립 대신, 티베트의 문화 전통 유지를 전제로 하는 진정한 자치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중국의 티베트 점령 역사는 1905년 을사늑약, 1910년 일제의 강제 병합, 1919년 전국적인 대규모 독립만세 운동, 3·1운동 이후의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수립, 일제의 강제 탄압, 한글 사용 금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역사와 너무도 똑같은 수순을 밟아 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티베트는 독립에 이르지 못했으며, 현재 자치권의 확보도 녹록지 않은 상태다. 베이징을 출발해 티베트 라싸(薩)까지 48시간 달리는 칭짱(靑藏)철도가 2006년 개통되고, 올 8월 라싸에서 티베트 제2도시 르카쩌(日喀則)까지 추가 구간이 연결되면서, 티베트의 중국화는 가속화하고 있고 유사시 중국군의 투입이 가능해졌으며, 티베트의 전통 문화도 급속히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티베트 출신 베이징대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티베트 젊은 세대 다수는 이미 그들의 정체성을 잃어 버렸고, 티베트 분리나 정치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중국화·현대화에 몸을 싣고 있었다. 식민지배의 역사적 아픔을 공유하는 입장에서 우리는 티베트의 현실과 미래를 진정성 있게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2011년 티베트의 정치적 실권을 롭상 상가이 총리에게 넘겨주고,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종교 지도자로만 남아 세계 각국을 방문하여 법회를 열고 있다. 미국은 중국의 노골적인 반대에도 강연회를 수락했고, 일본도 34차례나 방문을 허락했다. 우리도 더 이상 중국의 눈치를 보며 달라이 라마의 방한을 불허해서는 안 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랬듯, 달라이 라마가 우리 국민들의 환대 속에 한국땅을 밟고 그가 책에서 말했던 ‘용서해라. 그래야만 진정으로 행복해진다’, ‘마음을 비우면 세상이 보인다’와 같은 용서와 치유, 평화의 메시지를 전파해주길 기대한다.
  • [이도운의 빅! 아이디어] 한·일관계 50년, 70년, 120년을 바라보며

    [이도운의 빅! 아이디어] 한·일관계 50년, 70년, 120년을 바라보며

    1994년 12월 23일 공로명 주일대사가 외무부 장관에 임명됐다. 1995년 초에 공 장관을 별도로 만날 기회가 있었다. “올해가 광복 50년, 수교 30년인데 한·일 간에 특별한 이벤트가 있느냐”고 물었다. 공 장관은 “올해는 명성황후가 시해된 지 1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면서 “과거사를 재정리하는 차원에서 일본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 입장을 표시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공 장관의 ‘귀국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추가 취재에 들어갔다. 한·일 간에 나름 깊이 있는 논의가 이뤄진 것 같았다. 사과문은 확정되지 않았지만 ‘조선의 황후가 일본인에 의해 살해된 것은 매우 불행한 일로 한국민에게 사죄한다’는 선에서 협의가 오고갔다. 사과문 공표는 명성황후 시해일인 10월 8일 이전에 일본의 관계장관이 입장을 표명하거나, 의원 또는 기자의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한다고 했다. 또 시해 당시에 조선과 일본 사이에 오간 외교문서 등 관련자료도 일본 측이 공개하는 방안도 검토됐다. 다만 명성황후 시해에 일본 정부가 어느 정도 가담했는가를 밝히는 문제에는 양국 간 이견이 있었다. 나는 3월 1일까지 기다렸다가 취재 내용을 1면 톱으로 썼다. 그 해 10월 일본 정부의 명성황후 시해 사과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8월 15일에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는 일본의 태평양 전쟁 당시 식민지배를 공식적으로 사죄하는 역사적인 담화를 발표했다. 1996년 6월 22일부터 이틀 동안 제주도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총리 간의 정상회담이 열렸다. 그로부터 일주일 전쯤 정부 고위관계자가 “정상회담을 계기로 이른바 ‘월드컵 조약’이 추진될 것”이라고 귀띔해줬다. 월드컵 조약은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를 계기로 양국관계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켜 보자는 취지였는데, 1963년에 체결된 프랑스와 독일 간의 ‘엘리제 조약’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프랑스와 독일은 나폴레옹 정복전쟁 이후 보·불전쟁,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무려 1세기 동안 적대관계를 이어왔다. 그런 과거를 청산하고 미래를 위해 화해, 협력하는 내용의 조약에 합의한 것이다. 파리의 엘리제 궁에서 서명된 이 조약의 핵심은 두 나라 정상과 주요 각료들이 빈번이 만나고 국민, 특히 청소년 간의 교류를 확대하는 내용이었다. 월드컵 조약은 독도와 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양국 간의 갈등 때문에 현실화되지 못했다. 그러나 조약에 담으려 했던 정책들은 상당수가 추진됐다. 양국 정상 및 외교·경제·국방장관 간의 정기 회동, 첨단분야에서의 경제교류, 문화협력 강화, 청소년 상호방문 확대 등이 그 주요 내용이었다. 이런 정책들은 결국 1998년 10월 22일 김대중 정부의 역사적인 일본 대중문화 수입개방으로 이어졌고, 더 나아가 2000년대에 일본에서 한류가 꽃을 피우는 중요한 디딤돌이 됐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일본 극우 인사의 발언이나 일부 언론의 보도를 보면 명성황후를 난도질하던 일본 낭인들을 떠올리게 된다. 반면, 일본이 2020년 올림픽을 유치하는 과정에서는 우리 정부가 얼마나 도와줬는가도 의문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한·일 두 나라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 그런 노력이 멈춰 있다. 1995년으로부터 20년이 지났고, 한·일 양국은 내년에 광복(일본은 종전) 70년, 국교정상화 50년, 명성황후 시해 120년을 맞는다. 아무런 이벤트도 없이 흘려보내는 것은 두 나라 모두의 ‘직무유기’가 아닐까. 엘리제 조약을 체결할 당시 프랑스의 대통령은 샤를 드골, 독일의 총리는 콘라트 아데나워. 둘 다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한 민족주의자이고 애국자였다. 그래도 그들은 두 나라와 유럽, 세계사의 미래를 보며 화해, 협력의 길을 택했고, 프랑스와 독일은 유럽연합의 정치와 경제를 이끌어가는 주역으로 우뚝 섰다. 그에 비하면 한국과 일본의 정치지도자와 민족주의자들은 우물 안 개구리나 마찬가지다. 한국과 일본은 왜 프랑스, 독일만 못한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 ‘명량’의 이면을 보자/ 조구호(문학박사, 남명학연구원 사무국장)

    영화 ‘명량’의 인기가 대단하다. 한국 영화 처음으로 관람자가 1500만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거의 국민 세 명 중 한 명이 본 셈이다. 이렇게 많은 국민들이 ‘명량’에 열광하는 것은 세월호 사건을 비롯한 잇달아 터진 사건과 사고에 눈과 귀가 피로하다 못해 지쳐 염증이 난 탓이 아닌가 싶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참사와 인면수심의 만행에 이제 눈과 귀를 닫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서 ‘명량’의 이순신 장군과 같은 지도자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영화의 주인공은 상상 속에 있고, 우리가 몸 담고 있는 현실은 누군가가 타개해 주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 타개하고 개척해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순신 장군 같은 영웅에 목을 매지 말고 영화의 이면을 보아야 한다.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부모형제가 죽어가는 것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참혹한 모습에서 읽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놈들이 사격 연습으로 어린이들을 향해 총질을 하는 것을 비롯해 인간으로 차마 할 수 없는 만행은 임진왜란의 기록에서도 드러난다. 임진왜란 의병장의 한 분인 고대 정경운(1556 -?)이 쓴 ‘고대일록’에서 왜군의 만행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무계진에 이르렀을 때, 적에게 해를 당하여 시신이 강물에 던져졌다. 연약한 아내와 어린 아이가 집에 가득히 통곡하니 인간의 비참한 것이 이때보다 극심함이 없었다. 지난해에 妻弟가 靑松에서 굶어 죽고, 형제가 또 도적의 손에 죽었다. 장인의 자식 중에 나의 아내만 남았으니 참혹하고 참혹하도다. (1594년 1월 16일조) 조카가 산에 이르러 貞兒의 시신을 찾았다. 머리가 반쯤 잘린 채 돌 사이에 엎어져 있었는데, 차고 있던 칼로 휘두르려고 하는 것이 마치 살아 있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 아아! 내 딸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1597년 8월 21일조)   전쟁의 참상은 멀리 임진왜란까지 갈 것도 없이 일제 식민지통치나 6.25 전쟁에서도 겪은 바이다. 위정자들의 잘못으로 무고한 백성들이 외적에 처참하게 살해되고, 참혹하게 굶어죽고, 부녀자들은 노리개처럼 유린당했다. 그래서 ‘명량’의 이순신 장군에 열광하기보다는 전쟁 없는 시대에 사는 것을 감사해야 하고,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노력해야 한다. 지금도 가자 지구와 이라크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떠돌고 있다. 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일까? 위정자들의 잭임이 커겠지만, 국민들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위정자와 국민은 운명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세월호사건을 비롯한 잇달아 터진 사건과 사고로 민심이 흩어지고 국론이 분열되고 있다. 국가를 개조해 볼 모처럼의 기회도 무산되는 것 같다. 임진왜란을 비롯한 일제식민지통치, 6.25전쟁은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다. 국론의 분열과 민심의 이산이 자초한 결과이다. 전쟁 없는 시대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눈앞의 작은 이익을 위해 더 큰 대의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여론을 호도하고, 민심을 현혹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을 비롯한 위정자들도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도록 애국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고, 대학교수를 비롯한 지식인들도 공공의 이익을 위해 솔선해야 한다. 그리고 국민 모두가 자기의 이익보다는 사회와 국가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전쟁은 예고가 없다. 전쟁이 없는 시대는 우리 세대만을 위한 일이 아니다. 우리 후손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무고한 백성들이 왜적의 총칼에 참혹하게 죽어가는 ‘명량’의 이면을 기억하자. 조구호(문학박사, 남명학연구원 사무국장)
  • [세종로의 아침] 나라밖에서 찾는 한국의 가능성/이석우 정책뉴스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나라밖에서 찾는 한국의 가능성/이석우 정책뉴스부 선임기자

    필리핀 민다나오 섬 다바오시의 ‘한·필리핀 직업훈련학교’. 교정에 들어서니 한국 사람임을 알아채고 “안녕하셔요”, “한국, 사랑해요”라며 낙천적인 표정의 학생들이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교정 중앙의 국기게양대엔 필리핀 국기와 함께 태극기가 나란히 펄럭였다. 학교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은 이 학교의 후원자다. 다바오시 부근 ‘코리아-필리핀 미곡종합처리장’에서도 펄럭이는 태극기와 코이카의 지원을 알리는 표식들이 눈에 들어왔다. 유아와 산모를 위해 특화된 ‘카비테 한·필리핀 친선병원’도 마찬가지 분위기였다. 마닐라 근교에 있는 이 병원 관계자들의 친근감도 남달랐다. 한국 정부의 필리핀에 대한 2011~2012년 공적원조는 일본, 호주, 독일 등에 이어 6위였지만 한국에 대한 친근감과 기대는 그것을 훌쩍 넘었다. 자국보다 못살던, 최빈국이 몇 십년 만에 민주화와 경제번영을 이뤄낸 역동성과 성취. 식민지 경험을 거쳤다는 동병상련의 유대감. 식민지배를 하던 선진국들과는 뭔가 다를 것이란 기대감 등등. 그들 눈에 한국은 그렇게 비쳐지고, 기대되고 있었다. 태국이나 캄보디아에서도 현지인들은 한국을 그렇게 여겼다. 우리에게서 자신들의 희망과 가능성을 발견했고, 다른 선진국들과는 다른 유대감과 편안함을 확인했다. 그들은 우리와 더 많은 협력을 기대했다. 지원 규모의 확대를 넘어서 전쟁 잿더미 속의 최빈국에서 일어섰던 그 의지와 그 역사를 따라하고 배우고 싶어했다. 미얀마 중부 건조지대 바간에서 ‘산림관리사업’을 담당하는 코이카의 조성훈 대리는 “사막화를 막고, 농촌개발의 기초를 닦는 이 일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햇볕에 현지인처럼 그을린 30대 미혼의 이 코이카 직원은 미얀마 정부와 지역주민의 호응에 세월도 잊은 듯했다. 캄보디아 왕립 프놈펜대 안에 코이카가 세운 인적자원개발센터(HRD)는 한국어와 한류 확산의 거점이 됐다. 센터 안에선 젊은 캄보디아 수재들이 한국어와 정보기술(IT) 관련 수업을 듣고 있었다. 원조해 준 뒤 최종 결과만 감독하는 다른 나라들의 방식과는 달리 프로젝트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인들이 참여해 관리하고, 자원봉사자들이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현지인과 함께 호흡하며 사업을 진행하는 한국식 방식은 이견 속에서도 힘을 얻고 있다. 동남아 공적원조 현장은 우리가 그동안 유형의 수출을 통해 부를 이룩했다면 이제는 원조와 봉사, 협력을 통해서 국가적 매력과 신뢰라는 무형의 자산을 쌓고, 국가 브랜드를 끌어올릴 때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것은 ‘굴뚝산업’으로는 성장 한계에 부닥친 한국이 지속적인 번영과 생존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도 그러하고, 한국의 성공 역사를 배우려는 국가들의 필요와 요구에 화답하고 조응하며 공존하는 길이기도 하다. 개발 원조는 단순히 남에게 주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질적 성장의 계기이며 스스로를 재정비하는 과정이고, 한국인의 삶과 생존의 공간을 넓혀나가는 작업이다. 공적원조의 과정이 나만 생각하고 내 살길만 찾도록 가르쳐 온 우리 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꿔나가는 신선한 촉매제이자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jun88@seoul.co.kr
  • [당신의 책]

    [당신의 책]

    필름, 뉴욕(스콧 조던 해리스 지음, 채윤 번역, 낭만북스 펴냄) 고전영화부터 최신 블록버스터까지 미국 뉴욕은 전 세계 영화 제작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영화의 도시로 꼽힌다. 책은 앨런 크로스랜드 감독의 1927년 영화 ‘재즈싱어’부터 제임스 마시 감독의 2008년 영화 ‘맨 온 와이어’까지 뉴욕에서 촬영된 영화 44편의 44가지 장면을 영화에 대한 짤막한 리뷰와 함께 소개한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코세이지, 올리버 스톤, 스파이크 리, 우디 앨런 등 뉴욕을 사랑하는 명감독들이 만들어 낸 장면들에 대한 스틸사진들은 영화에서 받은 감동을 되살리게 해 주고 뉴욕의 매력을 재발견하게 한다. 로케이션 지도와 함께 촬영지의 현재 모습을 담은 사진을 함께 실어 영화 팬들에게는 훌륭한 여행 안내서가 될 만하다. ‘영화로 만나는 도시’ 시리즈로 ‘필름, 파리’(마르셀린 블록 지음, 서윤정 옮김)도 함께 출간됐다. 248쪽. 1만 6000원. 이방인의 사회학(김광기 지음, 글항아리 펴냄) 인간 본질의 속성에 대해 ‘이방인’을 화두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사회학자의 작업이다. 게오르크 지멜, 지그문트 바우만, 어빙 고프먼, 알프레드 슈츠 등 이방인학의 대가로 일컬어지는 사회학자들의 이론들을 준거 삼아 정주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삶을 분석, 비판하면서 나름대로 새로운 사회학 이론을 제시한다. 고향 집단을 떠나 새로운 집단으로 진입한 이방인은 두 세계 사이에 가로놓인 자가 된다. 떠나온 곳으로 돌아갈 수 없고 새로운 곳에는 완전히 발을 붙이지 못한다. 이방인들은 토박이들의 문화 유형을 조각난 편린으로 경험하며 그것을 소화하려 노력하지만 완벽한 해석은 불가능하다. 불안과 안도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간극을 좁히지 못하는 현대인의 일상도 결국 이방인이 돼 가는 과정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일상에서 모두가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나와 타인 사이의 메워질 수 없는 심연도 우리 인간은 모두 이방인이라는 명제 아래에서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488쪽. 2만 2000원. 생각하는 여자는 위험하다 그리고 강하다(슈테판 볼만 지음, 김세나 옮김, 이봄 펴냄) 오리아나 팔라치, 수전 손태그, 안나 폴릿콥스카야, 아웅산 수치, 앙겔라 메르켈, 마거릿 대처, 레이철 카슨, 시몬 드 보부아르, 시몬 베유 등 역사에 업적을 남긴 여성 22명을 ‘생각하는 여자’라는 이름 아래 모았다.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등 ‘여성과 독서’라는 주제에 천착했던 독일 작가 슈테판 볼만이 썼다. 학자와 연구자, 운동가와 정치가로 투쟁의 전면에 섰던 여성과 삶 자체가 투쟁이었던 여성들은 활동 분야, 시대, 처한 상황은 달랐지만 각자의 삶을 개척하면서 세상을 바꾸고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 자연과 동물을 보듬고, 평화를 촉구하고, 작고 연약한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며, 비리와 잘못된 권력에 맞서 때론 세상을 불편하게 만들었지만 결과적으로 세상을 바꾼 그녀들을 가장 의미 있었던 순간들을 담은 50여컷의 사진과 함께 소개한다. 300쪽. 1만 5800원. 미국은 드라마다(강준만 지음, 인물과 사상사 펴냄) ‘주제가 있는 미국사’ 시리즈 2권. 전공인 커뮤니케이션학을 토대로 전방위적 글쓰기를 해 온 대중적 논객인 저자가 ‘아메리칸 드림’ 400년의 역사로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네이버에 연재한 ‘주제가 있는 미국사’를 다시 엮어 펴낸 ‘미국은 세계를 어떻게 훔쳤는가?: 주제가 있는 미국사’의 속편으로 시간 순서에 따라 저자가 선별한 주제에 천착해 미국 역사를 풀어낸 28편의 이야기를 모았다. 1607년 제임스타운 식민지의 지도자인 존 스미스를 구한 원주민 추장의 딸 포카혼타스의 이야기를 풀어낸 ‘왜 포카혼타스는 나오미 캠벨이 되었나?’, 뉴잉글랜드의 마녀사냥과 겉과 속이 달랐던 청교도들을 다룬 ‘왜 청교도는 종교적 박해의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었나?’ 등 잘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흥미롭게 펼친다. 336쪽. 1만 6000원.
  • [오늘 69주년 광복절] “한·일 정상회담 개최 필요… 과거사-외교문제 분리 대응을”

    [오늘 69주년 광복절] “한·일 정상회담 개최 필요… 과거사-외교문제 분리 대응을”

    한반도는 2015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내년은 2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벼락같이 왔던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배 해방과 한반도 분단의 비극이 시작된 지 70주년이 되는 역사적 시점이다.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한국과 일본은 1965년 국교 정상화로 관계 복원의 반세기를 맞이하고 있지만 양국 간 과거사 문제와 이를 둘러싼 갈등은 청산되지 않고 있다. 70년 전만 해도 세계의 전략적 중심선에서 비켜나 있던 한반도는 이제 글로벌 경제의 주요 축이자 동북아 각국의 이해가 교차하는 전략적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서울신문은 14일 광복 69주년을 앞두고 서희외교포럼(대표 장철균 전 스위스 대사)과 공동으로 ‘한반도 해방과 분단 그리고 극복해야 할 과제’라는 주제의 좌담을 마련했다. 장 대표, 신복룡 건국대 석좌교수, 여인곤 통일연구원 명예연구위원, 도시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최동주 숙명여대 교수 등 참석자들은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 징용 등 역사적 과오에 대한 반성과 시정 조치는 최근까지도 전 세계에서 확인되고 있는 ‘인류의 시대정신’의 발로로 봐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아베 신조 총리가 추구하는 일본의 우경화와 군국주의는 결코 시대정신이 될 수 없으며,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한·일 양국 관계에 대해서는 과거사와 외교 문제의 분리 대응을 주문했고, 양국 정상회담 개최를 통해 정상화시켜야 한다는 공동의 인식이 컸다. 좌담에서는 한반도 분단의 일차적 책임은 김일성 주석에게 있으며, 향후 그에게 6·25 전쟁 피해뿐 아니라 통일을 지체시킨 역사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견해가 적지 않았다. 정권 교체 때마다 좌우로 흔들리는 우리의 ‘시계추 대북 정책’이 안정적인 남북관계에 부정적으로 작용해 왔다는 점도 제기됐다. →아베 정부 출범 후 한·일관계의 악화 문제는 무엇인가. -도시환 위원(도 위원):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 징용 등 현재 진행형의 과거사 문제는 일본의 불법적인 강점에 의한 식민주의 범죄로 반인도적 범죄 행위다. 국제사회의 철학이 인권 등 인류보편적 가치를 중시하고 있고, 2001년 서구 노예제도와 식민지 지배의 반인도적 범죄를 인정한 더반선언에 이어 아주 최근인 지난해 6월과 9월에는 영국과 네덜란드가 각각 식민통치를 사죄하고 배상을 하는 등 역사적 과오에 대한 시정 조치는 21세기의 시대정신이 됐다. -최동주 교수(최 교수): 군 위안부 문제가 국제노동기구(ILO)의 의제로 제시됐다는 건 중요한 문제다. 위안부를 강제 노동의 관점에서 접근한 것이다. 일본은 1932년 11월 강제노동협약을 비준했고, 1944년 11월까지 효력이 유지됐다.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ILO에서 의제로 논의해야 하지만 일본 정부의 강력한 로비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 정부가 ILO에서 위안부 문제를 의제화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고 있는 데는 우리 스스로가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하지 못한 이유도 있다. →아베 정부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강화되고 있다. -도 위원: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을 통해 독도를 자국 영토로 침탈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카이로 선언(1943년)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년)을 통해 독도는 일본의 행정적 지배 범위에서 제외됐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건 한반도에 대한 점령지 권리 즉, 과거 식민지 영토권을 주장하는 것으로 한국의 독립을 부인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신복룡 교수(신 교수): 독도는 일본 국익에 치명적이지 않다. 절박하지도 않으면서 ‘정치적 제스처’만 하고 있다. 한 일본 학자는 “한국은 독도가 한국 영토를 입증하는 일본 측 자료를 갖고 있다고 하지만 우리도 일본 영토임을 입증하는 한국 측 자료를 확보하고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이 말이 사실이라는 데 있다. 독도 문제는 한·일 양국 학계 간의 전쟁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과 한반도 분단에 대한 우리 안의 인식 차이도 커 우려된다. -도 위원: 식민지근대화론의 핵심은 일제강점기의 한국 경제가 크게 성장했고, 해방 이후 산업화의 토대가 됐다는 주장이다. 매우 자의적 해석으로 조선 후기의 위기도 과장했을 뿐 아니라 식민 체제에서 우리 경제는 대단히 불평등했다. 생산수단은 소수 일본인이 장악했고, 조선인의 인적 자본 형상은 제한적이었다. -여인곤 위원(여 위원): 한반도의 학교 설립과 신문 창간, 전기·전차·철도 개통, 항만 건설 등 한국의 근대화는 일제의 식민 지배 이전인 19세기 말부터 서양의 투자나 자생적으로 시작됐다. 일제가 경인선, 경부선, 경의선, 경원선 등 철도를 부설하고 항만 등을 건설한 건 한국의 근대화가 아니라 식량과 자원 수탈, 그리고 만주와 중국 침략의 교두보 확보 차원이었다. -신 교수: 한국사학사의 기본적인 함정은 망국에 대한 자기 성찰과 회오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망국의 일차적 책임은 우리에게 있지만 식민지근대화론의 경우 그 용어 자체가 잘못됐다. 친일 사학이 아닌 바에야 식민지 시대가 한국을 근대화시켰다고 말하는 학자는 없다. 다만 식민지 시대를 거쳐 한국의 산업화가 진행되었다고 말할 뿐이다. -여 위원: 해방 후 한반도의 38선 분할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목적으로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제안하고, 소련 스탈린이 동의해 획정된 미·소 양국의 합작품으로 봐야 한다. 하지만 분단의 책임은 김일성 주석과 소련에 있다. -최 교수: 38선은 미국 입장에서 소련의 일본 군정 참여를 저지하기 위해 일본 본토와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소련군 진격을 멈추게 하려는 의도가 작용했다. 결국 38선이 한반도를 지리적, 이념적으로 둘로 나누고 전쟁의 불씨가 된 것으로 평가한다. -신 교수: 김일성 주석은 무력으로 통일할 수 있다고 오판하고 개전한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의 오판으로 300만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고, 통일은 70년이 지나도록 미뤄지는 어리석은 결과마저 초래됐다. 나는 김 주석에게 6·25전쟁의 일차적 책임뿐 아니라 분단과 통일을 지체시킨 책임도 크게 물어야 한다고 본다. →남북관계와 북핵, 한·일 갈등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여 위원: 북핵 위기가 20년이 됐지만 해결 전망이 매우 어둡다. 박근혜 정부가 북핵 폐기를 목표로 하되 우선 차선책으로 북핵 개발부터 동결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북한의 천안함 폭침 사과 및 핵 동결과 우리의 5·24 대북 조치 해제를 패키지로 다뤄야 한다. -장철균 대표: 남북관계의 안정적 관리가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정권 교체 때마다 대북 정책이 좌우로 흔들리는 ‘시계추 현상’과 이로 인한 ‘안보 공회전’이 반복되지 않는 게 중요하다. 대북 정책은 정권에 상관없이 일관적이어야 한다. -도 위원: 아베 총리가 지난해 ‘침략의 정의’를 부정한 데 이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려는 건 2차 세계대전 이전의 군국주의 부활의 궤적으로 봐야 한다. 아베 총리의 의도를 경계하며 주시해야 한다. -신 교수: 일본의 우경화는 시대정신이 아니다.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오히려 오랜 경제 침체와 중국의 부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우경화가 발현되는 측면으로 이해하고, 지혜롭게 대일 접근을 모색해야 한다. -최 교수: 중장기적으로 볼 때 한반도 문제에 대한 중국과 일본의 영향력이 더욱 확대될 개연성이 적지 않다고 본다. 우리가 대일 외교를 정상회담 개최 등을 통해 정상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여 위원: 현재와 같은 과거사와 외교 문제를 연계하는 방식으로는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갈 수가 없다. 두 문제를 분리해야 한다.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과 관련해서는 자위대의 개입 조건과 범위를 반드시 우리 정부가 미국과도 미리 협의해야 한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해외여행 | 멕시코 Mexico- 당신의 허니문이 코수멜이어야 하는 이유

    해외여행 | 멕시코 Mexico- 당신의 허니문이 코수멜이어야 하는 이유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허니문은 코수멜Cozumel Island이 어떻겠냐고. 일생에 한번은 코수멜을 방문해야 했던 마야 여인들처럼, 일생에 한번은 멕시코를 여행해야 하고, 그것이 허니문이라면 코수멜인 것이 좋겠다고. 코수멜은 아주 먼 옛날부터 생명의 섬, 잉태의 섬이었으므로. 이스라 코수멜 Isla Cozumel 코수멜섬은 멕시코만 하단에서 불쑥 솟아오른 유카탄 반도, 그 반도에서 20km 떨어진 캐리비안 해상에 자리잡고 있다. 킨타나 오Quintana Roo주에 속해 있으며 섬의 수도는 산 미구엘. 멕시코 최대의 유인도이자, 마야 유적지와 해양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어서 해마다 200만명이 찾아오는 대표적인 크루즈 기항지다. 새들이 먼저 발견한 낙원 아마도 당신은 지구상에 ‘코수멜’이라는 섬이 있다는 사실을 지금 처음 들었을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멕시코는 대한민국에서 너무나 먼 나라이고, 마야 문명은 오래전에 사라졌으며, 코수멜은 제주도보다도 작은 섬이니 말이다. 그나마 정보다운 정보를 준 사람은 칸쿤에서 만난 미국인 밥 할아버지였다. “코수멜에 간다고? 페리를 타고 섬에 도착하면 선착장 앞에 커다란 제비상이 있을 거야. 코수멜은 제비의 땅Cuzaam Luumil이거든. 그래서 원래 이름도 쿠싸밀Cuzamil이었고. 남아메리카로 이동하던 제비떼가 쉬어 갔던 곳이 코수밀이었거든. 뭐, 대부분의 관광객들이야 이런 사실에 관심도 없지만.” 제비처럼 날쌘 페리는 육지를 떠난 지 30분 만에 코수멜 선착장에 주민들과 뒤섞인 여행자들을 쏟아냈다. 정말로 선착장 입구에는 커다란 새 조각상이 날개를 활짝 펼쳐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는데 밥의 귓띔이 아니었다면 사실 제비인 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제비들이 먼저 그 가치를 알아봤던 ‘쉬어 갈 만한 섬’ 코수멜은 지금 캐리비안해를 항해하는 크루즈십들이 가장 선호하는 기항지가 됐다. 코수멜의 크루즈 선착장에는 비수기에도 한 달에 5~9척, 성수기에는 무려 25~32척의 크루즈가 입항한다. 마이애미 다음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크루즈 선착장이다. 이 때문에 제주도와 비교해 면적647km²은 3분의 1이고, 인구약 8만5,000명는 6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코수멜은 연간 200만명이 방문하는 멕시코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문제는 오로지 당신에게 허락된 시간일 뿐. 저녁이 되면 다시 배를 타고 떠나 버리는 성마른 여행자들을 위해 코수멜은 효율적인 ‘수용태세’를 갖추고 있다. 이를 테면 ‘찬카납공원Chankanaab Park’이 그렇다. Chakanaab Beach Adeventure Park South Coastal Road 5 miles 성인 21달러, 어린이 14달러 월~토요일 08:00~16:00 스쿠버다이빙 45달러, 스노클링 15달러 www.cozumelpark.com 바다놀이터, 찬카납해양공원 찬카납은 작았다. ‘작은 바다Little Sea’라는 뜻의 마야 이름 그대로 이 천연의 라군은 잔잔한 연못 같았다. 잠시 구름에 가렸던 햇빛이 물속을 비추는 순간, 커다란 크랩 한 마리가 바위틈으로 나왔다가 산호 사이로 사라졌다. 그 뒤를 쫓아 뛰어들고 싶지만 찬카납 라군에서는 수영이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이 작은 바다에 얼마나 많은 물고기와 해양동물들이 살고 있는지는 육안으로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물이 맑다. 최고의 자연수족관이라는 표현대로다. 찬카납은 작지만 찬카납해양공원은 작지 않다. 1980년에 해양생태계 보존구역으로 지정했지만 사람의 접근을 막는 대신 자연과 인간이 사이좋게 공존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개발을 시작했다. 그래서 찬카납해양공원은 멕시코의 역사, 문화, 자연을 조금씩 맛볼 수 있는 어드벤처비치파크가 됐다. 부드러운 모래가 깔린 자연 풀장에서의 수영은 물론이고 바다로 조금만 나가도 스노클링, 스쿠버다이빙 명소가 나온다. 공기호스가 연결된 헬멧을 쓰고 잠수할 수 있는 씨트렉Sea Trek도 있고 물개쇼도 진행된다. 하지만 이곳에서 가장 인기 높은 프로그램은 역시 돌핀 수영이다. 돌고래를 품에 안아 보거나 수영을 함께 즐길 수 있다. 해양스포츠만 있는 것도 아니다. 수백 종의 열대 식물이 자라는 정원을 거닐거나 마사지를 받을 수도 있고, 데킬라 테이스팅을 할 수도 있다. 좀더 아드레날린을 분출할 방법을 찾는다면 지프라인을 추천한다. 시작하자마자 맥없이 끝나 버리는 단 한번의 줄타기가 아니라 7개의 타워 사이를 날아서 이동하는 장쾌한 경험이다. 처음에는 발을 떼기조차 두려워하던 사람들도 거의 1km에 달하는 지프라인 비행을 마치고 나면 개인기 현란한 공중묘기를 마다하지 않는 지프라인의 달인이 될 수 있다. 천국의 수심은 제로 결국 다른 표현을 찾지 못했던 것 같다. 코수멜 사람들은 자신들의 땅을 ‘지상의 낙원’이라고 설명했다. 세상에 ‘낙원 인증’만큼 어려운 것이 또 있을까. 특히 그 낙원이 물속에 있다면 말이다. 코수멜은 멕시코에서 온두라스까지 캐러비안해를 따라 1,000km 정도 이어진 그레이트 마얀 리프Great Mayan Reef에 속해 있다. 65종의 경산호와 350종의 연체동물, 비늘돔, 해면동물, 노랑가오리 등 500여 종의 물고기로도 모자라 예수상, 성모상도 바다 속에서 만날 수 있다. 더 흥분되는 소식은 이 바다의 수질이다. 26~27℃ 사이의 따뜻한 수온, 60m 이상의 가시거리라니. 하지만 코수멜은 이 장점도 가볍게 넘어선다. 코스멜과 리비에라 마야 지역의 지질은 온통 석회암이라 땅 아래에는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복잡한 수중 동굴들이 형성되어 있다. 입구와 출구를 표시한 수중지도가 있을 정도다. 그런데 당신은 다이버가 아니고 그리하여 천국은 너무나 멀다고? 아쉬워하지 않아도 된다. 수면 아래로 내려오지 않는 당신을 위해 거북이들이 모래사장으로 올라와 알을 낳고, 악어들이 기슭에서 헤엄치고, 심지어 돌고래는 당신의 발끝을 밀어 수중에서 뛰어오르게 도와주기도 한다. 코수멜은 아름다운 해변과 100여 개가 넘는 리조트(코수멜은 4,200여 실의 객실을 보유하고 있다)로 둘러싸여 있고 곳곳에 마얀 유적지가 펼쳐져 있다. 남북 길이는 약 48km, 동서 폭은 16km 정도니 렌터카를 빌리면 섬 어디든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다. 얼음을 채운 블루 마가리타 한잔을 옆에 놓고 하루 종일 해변에 누워 있다가 밤이 되면 섬의 수도인 산 미구엘San Miguel의 델 솔 광장으로 내려가 라이브 음악에 맞춰 살사를 춰도 좋다. 천국에 대한 증언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별이 빛나는 천국의 바다 코수멜은 작지만 단조로운 섬이 아니다. 본토와 마주보고 있는 서해안에는 수도 산 미구엘San Miguel을 중심으로 한 다운타운과 리조트들이 몰려 있고, 식수원을 보호하기 위해 개발이 제한된 동해안에는 고즈넉한 프라이빗 해변이 곳곳에 숨어 있다. 올인크루시브로 운영되는 이슬라 파시온Isla de Pasion은 하루 나들이로 좋은 곳이다. 산 미구엘의 선착장을 출발해 30분 정도 달리면 옥빛 라군으로 포위된 섬에 도착한다. 입장료에 왕복 배편과 해먹, 선베드, 샤워 사용, 발리볼, 수중 트램폴린, 카약, 페달 보트뿐 아니라 오픈 바에서 제공되는 음료수와 점심식사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아보카도를 듬뿍 넣은 과카몰리Guacamole, 닭고기 바비큐, 마히 마히 생선요리 등을 즐길 수 있다. 섬 전체가 그레이트 마얀 리프에 속해 있는 코수멜은 어디서 스노클링을 해도 실패하지 않지만 특별히 엘 시엘로El Cielo로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는 불가사리 때문이다. 바다 속에서 별을 볼 수 있는 곳, 그래서 이름이 ‘천국’이다. 코수멜의 별은 그리 깊지 않은 곳에 있어서 수영을 잘 하는 사람들은 맨몸으로 잠수해서 불가사리를 만져 볼 수도 있을 정도다. 동해안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는 곳이 있으니, ‘색의 전망대’라는 뜻의 깔라 미라도르Cala Mirador다. 나뭇가지의 자연스러운 형태를 고스란히 살린 가구와 조형물을 해변에 전시하고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바다에 펼쳐지는 푸른색의 스펙트럼은 일일이 이름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코수멜 토박이인 레이몬은 이 경치 포인트를 놓치지 않고 최근 바를 오픈했는데 그 바텐더가 바로 해변에 전시된 작품들의 조각가이니, 멋진 작품을 구입할 수도 있다. Isla de Pasion Carretera Costera Norte, Cozumel 77600, Mexico 어른 45달러, 어린이 30달러 보트출발 9:00, 11:00, 13:00(섬 체류 약 5시간) +52 (987) 872 5858 www.isla-pasion.com Cala Mirador Carretera Oriental 28km Cozumel, Quintana Roo, Mexico 10:00~16:00 +52 (998) 213 6968 소녀, 악어를 만나다 한국에 돌아온 지 2주쯤 지났을 때 이메일을 한 통 받았다. “잘 돌아갔나요? 여긴 이미 거북이 프로젝트가 시작됐어요. 지난 2주 동안 12개의 거북이알 둥지를 발견했답니다. 알아요. 많은 숫자가 아니죠. 하지만 우리가 계속 찾아볼 거예요. 또 연락해요. 친구.” 발레리아Gaia Valeria Romero는 코수멜의 콜롬비아 라군에서 악어를 관찰할 때 만났던 현지의 소녀였다. 이제 겨우 15살의 그녀는 악어와 거북이, 맹그로브 숲 등 섬의 해양생태계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었다. 7살 때부터 FPMCQROOFundacion de Parques y Museos de Cozumel, Quintana Roo, 킨타나루 코수멜 공원박물관재단에서 지원하는 에코프로그램에 꾸준히 참가했기 때문. “매년 이 바다에 2만5,000여 마리의 거북이가 찾아와 산란을 해요. 5월부터 산란을 시작하는데 그 둥지가 6,000여 개나 되죠. 부화는 2달 정도 있다가 시작되어 10월까지 이어져요. 새끼 거북이가 태어나 바다까지 무사히 돌아갈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이 지역을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어요. 그래서 수영은 절대로 금지예요. 대신 바다거북을 관찰하는 투어 프로그램을 진행하죠.” 멕시코 정부는 1990년부터 바다거북을 보호하기 위해 나섰지만 바다거북은 여전히 위기종이다. 킨타나 오주에서는 13개의 붉은바다거북loggerhead turtle 보존구역이 있는데 코수멜 최남단의 푼타수르에코비치파크Punta Sur Eco Beach Park가 그중 하나다. 라군, 맹그로브, 산호, 해안 사구 등의 다양한 지형을 관찰할 수 있고, 각각의 지형을 보금자리로 삼고 있는 악어, 거북이, 새 등도 더불어 만날 수 있는데 발레리아를 만났던 콜롬비아 라군도 그중 하나다. 수심이 깊지 않은 콜롬비아 라군Colombia Lagoon에는 악어를 가장 가깝게 그리고 안전하게 관찰할 수 있도록 브릿지와 타워를 설치했다. 이곳에 사는 악어 옐로아메리카 크로코다일은 코수멜의 고유종으로 가장 큰 것이 400kg 정도라고 했다. 대형 악어종이 아니라서 그런지 생각보다 동작이 날쌔다. 코수멜의 그 요란한 바람을 온몸으로 느낀 곳은 셀라라인 등대Faro Celarain 전망대다. 공원입구에서 8km 정도 들어가면 섬의 가장 남단에 서 있는 하얀 등대를 발견할 수 있다. 수백년 동안 이 섬을 거쳐 갔던 탐험가와 해적들의 흔적은 등대 1층에 마련된 항해문화박물관Navigation and Cultural Museum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FPMCQROO 찬카납 어드벤처비치파크, 푼타수르에코비치파크, 코주멜뮤지엄, 산 헤르바시오 유적지 등을 운영하고 그 수익을 지역사회와 자연보호에 환원하는 비영리재단으로 300여 명의 장학생 선발, 여름 캠프, 문화예술 워크숍, 공예품 워크숍, 전통문화보호, 바다거북보호 프로그램, 맹그로브조림프로그램, 해변청소 프로그램 등을 진행하고 있다. Punta Sur Eco Beach Park South Coastal Road 15 miles 어른 12달러, 어린이(3~11세) 8달러 주차 시간 | 월~토요일 09:00~16:00 마야는 머물지 않는다 앞서 말했지만 코수멜은 마야여인들이 일생에 한번은 꼭 방문해야 했던 성지였다. 결혼식을 올린 후 이 섬을 방문해 잉태와 풍요의 여신 익셀Ix Chel에게 경배를 올려야만 신성한 결혼의 의식을 온전하게 마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임신과 순조로운 출산을 기원하는 여인들의 정성은 수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당시 여인들이 경배를 올렸던 익셀 여신의 신전이 아직도 코수멜에 남아있다. 코수멜에 있는 6개의 마야 유적지 중 최대 규모인 산 헤르바시오San Gervasio Archaeological Site가 대표적인 장소다. 코수멜 북동부의 작은 정글 안에서 발견된 소규모의 정착지들은 AD300~600년 사이에 형성된 지구도 있고, AD1,250~1,500년대에 형성된 지구도 있다. 그중에서 3,000여 명이 흩어져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산 헤르바시오는 백색의 포장도로Sacbeeob를 통해 다른 정착지와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돌과 조개껍데기 등을 섞어 재료로 사용해 밤에도 달빛을 반사해 길을 잃지 않도록 설계한 것. 이토록 높은 수준을 자랑했던 마야 문명이 스페인 침략 이전에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수학, 천문학, 기상학에서 놀라운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마야인의 건축은 그들의 세계관을 담고 있는데, 예를 들어 마야인들은 4계절(혹은 4방향)이 13번 반복되면 세상이 끝난다고 생각했기에 52년마다 살던 도시를 버리고 새로운 도시로 이동했다고 한다. 산 헤르바시오도 그렇게 52년간 살았던 도시 중 하나일 뿐이지만 정글 속에서 1,000년을 굳건하게 서 있다. 마치 콘크리트처럼 견고해 보이는 건축들은 모두 산호와 고무를 혼합한 재료로 만들어진 것. 때로는 편백나무에서 흘러나온 호박amber에 고무를 섞어서 사용하기도 했다. 산 헤르바시오의 유적들은 마야의 건축 중에서도 높이가 낮은 동해안 양식East Coast Style으로 분류된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작은 손’이라고 불리는 주택인데, 건축가들이 남긴 것으로 추정하는 벽면의 손자국이 아직도 선명하다. 바닥이 아니라 돌침대에서 잠을 잤고 하수도 시스템이 있었으며 음식을 시원하게 저장하는 지하동굴 저장고도 있었다. 또한 노예제도를 갖지 않았고 일처일부제 였으며 카카오를 화폐로 사용했고 옥수수를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마야 문명 이후 코수멜은 멕시코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스페인의 침략과 식민지화, 기독교 개종 등의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섬이라는 조건 때문에 무역항으로 발달할 수도 있었지만 같은 이유로 캐리비안의 해적들에게 숱한 약탈을 당하기도 했다. 1571년 해적 산프로이Sanfroy의 침략을 시작으로 1700년대까지 많은 해적선들이 코수멜섬을 근거지로 삼아 본토를 공략하기도 했으며, 그 과정에서 섬 주민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다. 코수멜에 인구가 다시 급격하게 늘어나게 된 것은 1847년 마야 인디언과 비인디안 사이에 일어난 ‘카스트 전쟁’을 피해 온 이주민들 때문이었다. 승세가 완연했던 이 전쟁에서 마야 인디언들은 농번기가 되자 농작지로 돌아갔고, 이 기회를 틈타 정부는 군대를 재정비하고 역도들을 일망타진하고 말았다. 이 혼란을 피해 많은 난민들이 코수멜에 정착했고 이후 껌의 원료일 치클과 로그우드Logwood를 수출하여 경제적으로도 넉넉해질 수 있었다. 지금도 코수멜의 사포딜라 나무에는 치클을 추출한 상처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현재 코수멜은 관광산업에 집중하고 있다. 멕시코 정부의 주도하에 세계적인 리조트 휴양지로 개발된 칸쿤에 비해서 인지도는 낮지만 코수멜은 멕시코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휴양지였다. 그리고 거대한 리조트와 쇼핑점들이 줄지어 있는 칸쿤의 상업적인 느낌이 싫은 사람들은 여전히 코수멜을 선택한다. 코수멜을 다른 휴양지와 다르게 만드는 초강력 에너지는 ‘생명력’이다. 풍요와 잉태를 약속했던 익셀 여신의 정령은 코수멜의 자연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그래서 이 섬에 들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운을 축복처럼 나눠 준다. San Gervasio Archaeological Site Carretera Transversal Km. 7 성인 9.5달러, 어린이(10세 미만) 무료 주차시간 | 08:00~15:45 글·사진 천소현 기자 취재협조 멕시코정부관광청 www.visitmexico.com 코수멜관광청 www.cozumel.travel ▶travel info Cozumel Island Airline & traffic 멕시코로 가는 직항편이 없어서 일본을 경유해야 한다. 아에로멕시코항공(www.aeromexico.com)은 일본 도쿄에서 멕시코시티까지 직항편을 운행하고 있으며 멕시코 내에서 국내선 연결 노선은 다양하다. 코주멜섬까지의 비행편도 있지만 본토에서 배를 이용할 경우에는 유카탄 반도의 동해안인 리비에라 마야의 플라야 델 카르멘Playa del Carmen에서 코수멜까지 30분 정도 페리를 탑승하면 된다. 울트라마르Ultramar와 멕시코 워터젯Mexico Waterjets 두 개의 페리선사가 있으며 비용은 왕복 16달러 정도다. Hotel B라고 불리는 일류 부티크 호텔-Hotel B Cozumel 배를 타고 가까운 바다에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아예 호텔 B의 선착장에 내렸다. 놀랍게도 오후 4시의 호텔 B 수영장은 라이브밴드의 연주를 즐기는 선남선녀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수영장이 아니라 마치 ‘최상급 수질’의 클럽에 온 것 같았다. 2001년 문을 연 이 부티크 호텔이 그 동안 호텔 B가 추구해 온 아방가르드 정신이 자리를 잡은 결과이리라. 부티크 호텔답게 모든 소품들이 예사롭지 않았는데 멕시코 전통 수공예품이거나 디자인 제품으로 직접 판매도 하고 있었다. Carr. Playa San Juan Km 2.5 Zona Hotelera Norte C.P. 77600 +52 (987) 87 20 300 www.hotelbcozumel.com 또 하나의 완벽한 휴가-Occidental Grand Cozumel Resort 맹그로브 숲에 둘러싸여 있는 옥시덴탈 그랜드 코수멜 리조트는 아름다운 정원 사이에 6개의 레스토랑, 4개의 바, 3개의 수영장이 흩어져 있는 대규모 리조트다. 올인크루시브 리조트답게 낮에도 많은 사람들이 리조트 내부의 수영장과 해변 근처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최고의 다이빙 지역으로 뽑히는 팔랑카 산호Palancar Reef가 가까이 있으며 코수멜 스노클링 명소의 양대산맥으로 꼽히는 엘 시엘로로 출발하는 보트도 리조트 선착장에서 탈 수 있다. 투숙객이 아니어도 별도의 데이패스를 구입하면 식사와 해변 이용이 가능하다. 또한 로열클럽으로 업그레이드하면 클럽 라운지 무료 이용과 개인풀장, 카레타 레스토랑 이용 등이 가능해 리조트 안에 또 다른 럭셔리 리조트를 체험할 수 있다. Kilometro 16.6 Carretera Sur, El Cedral, San Francisco, Palancar 77600-Cozumel, Quintana Roo, Mexico +52 (987) 872 9730 www.occidentalhotels.com Restaurants 집에서 먹는 저녁-Casa Mission Restaurant 넓은 정원에 둘러싸인 오래된 콜로니얼 스타일의 고택에서 흘러나오는 마리아치들의 연주. 그 음악에 곁들이는 데킬라 한잔. 이것이 코수멜 최고의 해산물 레스토랑으로 꼽히는 까사 미션의 선물이다. 은퇴한 정부관료나 고관들이 살았던 이 고택은 현재 미란다 가문Miranda Morales의 소유인데, 거실 공간만을 레스토랑으로 사용할 뿐 내부의 주거공간은 그래도 보존하고 있어서 살짝 훔쳐보는 재미가 있다. 신선한 해산물 요리의 항연 끝에 ‘불꽃쇼’를 통해 만드는 특별한 커피 후식도 근사하다. 여러 가지 해산물을 조금씩 맛볼 수 있는 콤비네이션 메뉴Combinacion Mexican가 221 멕시코페소 MXN다. Avenue between Avenue Juarez and 1º Sur. Street Cozumel, Quintana Roo, Mexico 7:30~23:00 +52 (987) 872 1641 www.missioncoz.com 퓨전 멕시코 요리-Kondesa Cozumel Restaurant 뉴욕에서 요리를 공부한 크리스가 2012년 말에 오픈한 레스토랑. 셰프였던 아버지와 멕시코 출신인 어머니의 DNA를 골고루 자신의 요리철학에 적용하고 있어서인지, 콘데사의 메뉴는 전통적인 멕시코 요리와는 다른 퓨전스타일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고 요리교실도 운영하고 있는데, 물론 모든 재료는 지역에서 생산되는 신선한 식재료를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가든 테이블은 마치 자연 속에서 식사를 하는 느낌이고 자체적으로 개발한 칵테일을 주문할 수 있는 바와 홀은 밤새토록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편안함이 있다. 5ta Av. between 5 and 7 South#456, 77600 Cozumel, Quintana Roo, Mexico +52 (987) 869 1086 www.kondesacozumel.com 데킬라의 재발견 까사 미션레스토랑에서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유명한 데킬라 브랜드인 로스 트레스 토노스Los Tres Tonos의 시음과 데킬라 투어를 할 수 있다. 3대째 데킬라를 만들고 있는 노스 트레스 토노스는 100% 블루 아가베Agave를 사용하고 아메리칸 버번 배럴에 담아서 숙성시킨 데킬라를 판매하고 있다. 한 병을 기준으로 숙성년도에 따라 1병750ml에 55달러, 65달러, 85달러, 110달러. 데킬라 투어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도 있는데 하시엔다 안티구아Hacienda Antigua는 산 미구엘 시내와 칸차납공원에서 만날 수 있다. 멕시코 정부는 데킬라의 전통을 보존을 위해 오직 할리스코 지역에서만 데킬라를 생산을 허가하고 있기 때문에 시음장에서 마시는 모든 데킬라는 할리스코에서 주조한 것이다.
  • [서동철의 시시콜콜] 없는 걸 만들어도 시원찮을 판에…

    [서동철의 시시콜콜] 없는 걸 만들어도 시원찮을 판에…

    서대문독립공원이 술렁거린다. 철거된 순국열사 추모비의 복원운동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항일투쟁으로 옥고를 치른 선열을 기리고자 1998년 옛 서대문형무소를 공원화한 곳이다. 여기서 고문으로 순국한 애국지사는 유관순 열사를 비롯해 400명에 이른다. 일본의 우경화를 넘어선 군국주의화 움직임을 우리 국민 모두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아베 신조 총리가 일본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 바탕에는 침략을 부정하는 과거사 인식의 오류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상황이라면 서대문독립공원의 존재가치는 더욱 뚜렷해져야 정상이다. 한국을 찾은 일본인들이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의 죄상을 확인하고 역사인식을 바로잡을 수 있는 생생한 역사교육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게 다 옛날 얘기라는 것이다. 공원을 조성하면서 옛 사형장 입구엔 순국열사 추모비가 세워졌다. 이름이 확인된 순국열사 90명의 이름을 검은 빗돌에 금박으로 붙였고 헌화·분향 시설도 갖추었다. 2001년 이곳을 찾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일본 총리는 이곳에서 무릎을 꺾어 헌화했다. 그는 형무소 건물 지하에 재현된 애국지사 고문 장면을 둘러보고 방명록에 ‘사무사’(思無邪)라고 적었다. ‘논어’에 나오는 구절로 ‘그릇된 마음을 먹지 않겠다’는 다짐을 담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그리곤 “식민지 지배로 한국 국민에게 많은 손해와 고통을 안겨준 데 진심으로 반성하고 마음으로부터 사죄하는 마음으로 시설을 둘러봤다”고 말했다. 이곳에 남은 일제강점기 역사의 이미지가 어떤 효과를 발휘하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2009년 추모비와 헌화·분향 시설이 철거됐다. 대신 ‘민족의 혼 그릇’이라는 상징 조형물이 놓였다. 지하의 고문 장면도 철거하고 영상물로 대체했다. 고이즈미 방명록도 이제는 전시하지 않는다. 당시 서대문구청장이 유신시대 이곳이 민주인사를 고문한 탄압의 현장이었다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조명하는 내용으로 ‘종합 정비’한 결과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후 일본 관광객들은 공원을 모두 둘러보고 과거사 인식을 바꾸기는커녕 야릇한 미소만 지으며 돌아가고 있다고 청원에 나선 사람들은 안타까워한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서대문독립공원이 아베의 우경화에 경종을 울리는 역할을 하기는 어렵다. 민주화운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순국선열을 홀대하고 바람직한 한·일 관계 정립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방식은 공감을 얻기 어렵다.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우주 진출할 인류가 먹을 채소, 어떻게 재배되나?

    우주 진출할 인류가 먹을 채소, 어떻게 재배되나?

    우주에 진출할 인류가 먹게 될 채소가 재배되는 과정이 공개돼 눈길을 끌고 있다. 영국 과학주간지 뉴사이언티스트는 5일(현지시간) 이달 최신호(8월 2일 발행)에 ‘우주 샐러드’라는 제목으로 실린 글을 온라인을 통해 공개했다. 이 잡지는 독일 브레멘에 있는 독일항공우주연구소(DLR) 산하 독일우주센터에서 실험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채소의 우주 재배에 관한 연구를 소개했다. 연구를 이끌고 있는 DLR 소속 엔지니어 다니엘 슈베르트 연구원에 따르면 우주에서 채소를 재배하는 것은 지구 환경과 전혀 다른 주기를 가진 태양 빛과 토양을 대신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핵심이다. 따라서 이들 연구진은 화성이나 달과 같은 우주 환경에서도 채소를 재배할 수 있도록 분무재배 방식의 온실 모듈을 설계했다. 이 시스템은 LED 광원을 사용해 일정한 주기로 빛을 쬐어 식물이 광합성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영양분을 제공하는 토양을 대신해 인공적으로 영양분을 제공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키워지는 상추, 오이 등 각종 채소는 흙이 없는 트레이에서 2분에 20초 간격으로 뿌려지는 영양분을 뿌리를 통해 흡수하고 성장한다. LED 광원을 사용하는 것은 지구 자전 주기에 맞춰진 채소가 하루 낮 시간이 14일에 달하는 달의 주기와는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식물을 키우는 데 필요한 영양소도 지구처럼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화성 식민지에 거주할 사람들이나 우주 비행사들이 자급자족으로 배출하는 대소변에서 나오는 화학성분에서 추출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갖춘 최종 시스템은 오는 2016년 남극 대륙의 혹독한 환경에서 테스트 될 예정이다. 사진=게티이미지/멀티비츠 이미지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글로벌 시대] 청일전쟁과 중·일 각축/전가림 호서대 교양학부 교수

    [글로벌 시대] 청일전쟁과 중·일 각축/전가림 호서대 교양학부 교수

    2014년 7월 25일은 청일전쟁(한국은 갑오전쟁)이 일어난 지 120년이 되는 날이다. 1894년 봄 동학농민군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선 정부는 청에 지원군을 요청했다. 청의 지원군 2400명은 그해 6월 8~12일 아산만에 도착하였다. 당시 일본은 자국의 대사관과 상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조선에 진주시킨 데 이어 6월 12일에는 7000명의 병력을 인천에 상륙시켰다. 7월 25일 청·일 두 나라 군대는 아산만 풍도(豊島)에서 선전포고 없는 전쟁을 시작하였다. 7월 29일 성환전투와 9월 12~15일 평양전투 그리고 9월 17일 황해해전은 모두 일본군의 승리로 이어져 그들은 무패의 전과를 올렸고, 그 기세를 몰아 중국으로 진격한 일본군은 중국에서도 연전연승하였다. 그 결과 청은 화해를 구걸할 수밖에 없었고, 그 다음해 4월 17일 청·일 두 나라는 시모노세키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청일전쟁은 끝이 났다. 청일전쟁은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였기 때문에 청은 2억 3000만 냥을 일본에 배상했는데 당시 청국의 1년 예산의 3배, 일본의 연간 재정수입의 8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청은 타이완과 펑후도를 일본에 할양했고, 현재 중·일 간에 분쟁이 되고 있는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열도)도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청일전쟁의 결과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중국은 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청일전쟁이 끝난 지 120년이 되는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중·일 두 나라의 각축과 한국의 상황은 당시와 너무도 흡사하다. 일찍이 마키아벨리는 역사에 대한 이해에 대해 천년 전의 인간이나 천년 후의 인간의 의식 패턴은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에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고 가늠하는 데에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역사상 동일한 사건은 반복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유사한 사건은 얼마든지 일어난다. 현재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전략의 핵심은 동북아의 새로운 질서 구축이다. 어쩌면 그것은 청일전쟁으로 무너진 중국 중심의 질서(Sino-centric world order)를 회복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반면 동북아의 기존 질서는 한·미·일 삼각협력관계에 기초하고 있다. 중국은 그런 관계의 틀을 깨려 한다. 그리고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왜곡된 역사 인식은 청일전쟁의 영광과 한국을 식민 지배한 미련을 잊지 못하는 망상이라 하겠다. 그렇지 않고는 지난 7월 1일 ‘전쟁할 수 있는 나라’를 선언하면서 자위대의 전력 강화에 몰두하겠다는 일본의 의도를 설명할 수 없다. 청일전쟁은 조선 지배를 둘러싼 청·일 두 나라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조선 땅에서 발발하고 확대되어 중국에서 종결되었지만 조선은 그들의 전쟁터가 되었다. 현재 역사문제와 영유권 그리고 민족적 자존심으로 얽힌 중·일의 각축은 우리의 선택을 어렵게 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도 그들의 각축이 한반도에서 충돌하는 것을 막아야 하는 건 피할 수 없는 한국 외교의 과제이다. 지금처럼 한·중 관계가 진전되는 것을 곱지 않게 보는 것은 일본만이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작금의 한·미·일 공조는 중국이 추진하는 새로운 질서 전략과 충돌된다. 이런 가운데 중국과는 ‘성숙한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지속 발전시킴과 동시에 한·미동맹을 강화해야 하는 한국은 일본과의 공조도 불가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청일전쟁과 같은 불행한 역사 속에서 교훈과 지혜를 찾아 최선의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어둠에 묻힌 20세기… 미래는 더 어둡다

    어둠에 묻힌 20세기… 미래는 더 어둡다

    재평가/토니 주트 지음/조행복 옮김/열린책들/616쪽/2만 8000원 지난 세기가 막을 내리고 불과 10여년이 지났을 뿐인데 아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진다. 그토록 빠르게 망각 속으로 사라져도 될 만큼 20세기가 무미건조했는가 하면 그 반대다.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이념 갈등, 대공황과 두 번의 세계대전, 나치의 인종청소와 대학살, 그리고 공산주의의 몰락 등이 모두 20세기에 벌어졌다. 인류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재앙’으로 점철된 극적인 한 세기였다. 역사학자 토니 주트는 20세기가 끝나고 21세기가 열리는 즈음 사람들이 과거를 보는 관점에 주목했다. 사람들이 과거를 망각한 채 새로운 세계에 이끌리고 있을 때 그는 “사람들은 대체로 기억하기보다는 잊고, 야만이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에 빠졌다”고 진단했다. 신간 ‘재평가’(Reappraisals·2008)는 전후 유럽에 관한 최고의 역사서로 평가받는 ‘포스트워 1945~2005’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주트가 1994년부터 2006년까지 여러 잡지에 기고한 글들을 모은 것이다. 12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집필된 글들은 모두 장문의 서평 형식을 취하고 있다. 얼핏 보아선 각 주제들이 서로 개연성이 없어 보이지만 방대하고도 개별적인 사건과 인물들에 대한 글들은 지나간 한 세기를 예리한 시선으로 꿰뚫고 있다. ‘잃어버린 20세기에 대한 성찰’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책의 서문에서 주트는 “우리는 20세기를 떠나보내며 지나치게 자신만만했고 성찰은 너무 부족했다”면서 “우리가 과거를 너무 쉽게 잊어 과거로부터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고 개탄한다. 책에서 다루는 주제는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들부터 미국의 외교정책까지, 세계화의 경제학에서 악에 대한 기억까지 매우 다양하다. 지리적으로는 벨기에에서 이스라엘까지 포괄한다. 사상의 역할과 지식인의 책임, 망각의 시대에서 최근 역사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가 주된 관심사였던 만큼 주트는 20세기의 지식인에 대해 많은 장을 할애했다. 알베르 카뮈가 1960년 교통사고로 사망한 지 30여년 만에 출간된 소설 ‘최초의 인간’ 서평을 통해 주트는 카뮈가 “매우 비열한 시대의 가장 고귀한 증인”이었으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함을 논해 유대인들의 분노를 샀던 해나 아렌트는 “큰 문제를 옳게 이해했고, 그렇기에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주트는 “20세기를 이해하기 위해선 사상의 힘, 특히 마르크스주의가 20세기의 상상력에 행사한 놀라운 힘을 기억해야 한다”면서 지금은 잊혀진 폴란드 철학자 레셰크 코와코프스키를 재조명했다. 반면 평범한 철학자에 불과했던 루이 알튀세르와 60년 동안 공산당원이었던 에릭 홉스봄은 혹독한 비판을 받는다. 20세기 국가의 역할에 대해 그는 “제일 먼저 의지할 자연스러운 후원자가 아니라 경제적 비효율과 사회적 간섭의 원천으로서 가능하면 시민의 일에서 배제해야 할 대상으로 일반화됐다”며 비판적인 평가를 내렸다. 유대인인 주트는 “오늘날 극소수의 외부인만 이스라엘 사람들을 희생자로 본다. 그러나 진짜 희생자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미국의 대외정책과 신자유주의의 위험에 대해서도 여러 장에 걸쳐 다루고 있다. 미국은 점령당한 적이 없으며 월남전과 같은 신식민지 전쟁에서 굴욕을 맛보았지만 패배의 결과로 고초를 겪기는커녕 부유해졌기 때문에 미국 정부에 전쟁은 여전히 선택 범위 안에 있는 수단에 속하며 그중에서도 최우선으로 쓸 수단이 됐다고 적었다. 그는 또 1차 세계대전에 앞서 몇십년간 자본주의가 전례 없이 팽창하자 사람들은 그것이 무한한 평화와 번영의 시대로 넘어가는 문턱이라고 가정했음을 상기시키면서 21세기 자본주의의 찬란한 번영이 영원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과 기대를 경고했다. 주트는 “새로운 시대를 떠받치는 굵직한 토대들의 대부분은 20세기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며, 현재는 과거의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라며 “잃어버린 세계의 핵심을 놓치면 미래도 없다”고 강조한다. 토니 주트는 1948년 런던에서 동유럽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케임브리지대 킹스칼리지와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하고 케임브리지대, 버클리대, 옥스퍼드대, 뉴욕대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불의를 목격할 때마다 지식인의 시각에서 그것이 잘못됐다고 지적하기를 서슴지 않았던 그는 명성이 정점에 달했던 2008년 루게릭병 진단을 받고 2010년 8월 사망했다. 몸이 거의 마비된 상태에서 동료학자의 도움을 받아 펴낸 책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는 그의 사회적 유언이 됐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함혜리 선임기자의 미술관 건축기행] 佛 케브랑리 박물관

    [함혜리 선임기자의 미술관 건축기행] 佛 케브랑리 박물관

    센 강이 말 그대로 파리의 젖줄이라는 것은 유람선을 타고 한 바퀴 돌아보면 알 수 있다. 노트르담성당과 콩시에르주리가 있는 시테 섬을 비롯해 루브르박물관, 튀일리정원, 에펠탑, 아카데미 프랑세즈, 오르세미술관, 파리 시청사, 국립도서관, 재무성 등 프랑스의 역사와 영화를 보여주는 화려한 건물들이 센 강의 좌안과 우안을 따라 늘어서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최근에 지어진 건물이 케브랑리박물관이다.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아시아, 아메리카 등 비서구 지역의 문명과 예술을 파리 한복판에 모아 놓은 곳으로, 2006년 6월 23일 개관했다. 프랑스의 지성들이 주창해 온 ‘문화 다양성’을 국립박물관의 틀 안에서 기개 있게 구현한 이곳이 돋보이는 또 다른 이유는 기존의 박물관이나 미술관들이 전하지 못했던 ‘친환경’과 ‘지속 가능성’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2006년 개관… ‘지속 가능성’ 메시지 품은 박물관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이 서 있는 샹드마르스에서 한 블록 다음에 위치한 케브랑리박물관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건축가 장 누벨과 조경가 질 클레망, 식물학자 파트리크 블랑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완성됐다. 푸른색 잔디밭에 우뚝 선 에펠탑의 위용에 홀려서 걷다 보면 호스만스타일의 연한 갈색 건물들과 나란히 서 있는, 녹색 식물로 덮인 건물과 만나게 된다. 분명히 특이한데도 결코 튀지 않는 것이 참 희한하다. 그 옆으로 자연스럽게 휘어진 유리 벽에 ‘케브랑리박물관’이라고 쓰여 있기에 망정이지 무심코 걷다 보면 놓치고 지나기 쉽다. 겹쳐진 유리 벽 사이로 난 입구로 들어가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이제 자리를 잡기 시작해 제법 굵어진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건강하게 자라고 있고 바닥에는 키 낮은 풀들이 빽빽하게 자리 잡은 정원이 펼쳐진다. 분명히 엄밀하게 잘 다듬어지고 가꿔졌지만 겉보기엔 야생 그대로의 생태공원에 가깝다. 정원을 지나면 투박한 철제 박스들이 공중에 붕 떠서 길게 줄지어 있는 듯한 본관 건물이 보인다. 장난감 블록을 끼워 놓은 듯 원색의 사각형 박스가 연결된 건물을 원주들이 떠받치고 있는 형상이다. 야생의 숲, 공중에 떠 있는 사각형 매스의 원초적 형태가 이뤄내는 야릇한 공간을 마주하는 순간 유리 벽 바깥의 세상은 까맣게 잊게 된다. 질 클레망이 정성을 기울여 가꾼 다양한 수종의 나무 178그루와 30여종의 식물이 자라는 정원의 넓이는 자그마치 1만 8000㎡에 달한다. 정원의 볼거리는 또 있다. 풀숲에 약 1200개의 조명 막대기를 박아 해가 지면 음습할 수도 있는 정원이 환상의 숲으로 변신한다. 자연과 디지털 미디어의 환상적인 조화다. 이 박물관에서 조경은 건축적 디자인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압권은 센 강변에 면해 있는 5층 규모의 행정동을 장식한 ‘식물 벽’이다. 수직정원으로 불리는 이 생태 벽은 식물학자인 파트리크 블랑의 작품이다. 그는 박물관 개관에 앞서 행정동 건물이 완성된 2004년부터 2년간 다양한 실험을 거쳐 식물의 성장에 알맞은 수분을 유지하고 적절한 배수 능력을 갖춘 생태 벽을 완성했다. 총 800㎡에 달하는 이 벽은 박물관이 추구하는 문화 다양성을 상징하듯 세계 각 지역에서 온 150종 1만 5000점의 식물이 벽을 타고 자라며 인간과 자연의 공생을 웅변하고 있다. ●센 강의 강변선… 그 선을 따라 세워진 유리 벽… 미지의 세계를 만나다 이제 본격적으로 박물관 구경을 해 보자. 그런데 미지의 세계를 만나러 가는 길이 간단치 않다. 기본적으로 세 개의 곡선을 지나야 박물관으로 들어갈 수 있다. 우선 센 강의 부드러운 강변 선을, 그리고 그 선을 따라 세워진 유리 벽을, 마지막으로 둥글게 설계된 건물을 따라 걸은 다음 박물관으로 진입하도록 설계했다. 새로운 작품을 선보일 때마다 예상을 깨는 형태와 공간을 선보이는 것으로 유명한 장 누벨은 결코 우리에게 실망을 안기지 않는다.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의 드넓은 대지를 연상하게 하는 붉은색과 오렌지색을 주조로 꾸며진 투박한 외관을 보고 야생의 정원을 지나면서 마음을 단단히 먹었음에도 내부로 들어가면 갑자기 낮아지는 조도에 당황하게 된다. 동굴 속처럼 어두운 홀 중앙에 건물 2층 높이의 조각상이 높이 서 있다. 주 전시장으로 가는 길은 완만한 오르막 경사로로 뱀처럼 휘어지더니 무려 180m나 이어진다. 별다른 장식이 없이 길게 이어지는 흰색의 경사로를 따라 걸어가다 보면 바닥으로 영상물들이 도랑처럼 흘러간다. 전시장에서 감상하게 될 다른 세계의 문명을 미리 소개하는 내용들이다. 백색의 경사로가 끝나는 지점부터 구불구불한 황토빛의 나지막한 벽이 시작된다. 원시 동굴을 연상시키는 공간이 상설전시 공간이다. 케브랑리는 앞서 언급한 대로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오세아니아의 문명과 예술을 보여 주는 인류학 박물관이다. 국립인류박물관과 국립아프리카·오세아니아 문명사박물관이 합쳐진 데다 개인 수집가 자크 케르사슈의 기증품까지 더해져 소장품이 총 30만여점에 달한다. 기원전 2000년부터 21세기까지 망라하며 이 가운데 지역별로 선별한 문화유산 3500여점을 7000㎡의 공간에 상설전시하고 있다. 외부의 원시적 감성은 내부의 전시에서도 그대로 살아난다. 일반적으로 박물관에서 보이는 쇼케이스에 모든 것을 전시하지 않고 적절하게 유리로 보호된 전시물이 있는가 하면 천장과 벽에 매달린 전시물, 바닥에 놓인 전시물도 있다. 중간중간에 더 상세한 지역 정보와 전시품의 쓰임새를 알 수 있도록 지도와 디지털 부스를 설치해 놓았다. 전시품들 사이를 산책하듯이 감상하다가 다리가 아프면 벽면에 튀어나온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원시의 숲에서 산책하다 고개를 들어 보면 창 사이로 카메라 프레임에 담긴 듯이 에펠탑이 비쳐 보인다. 지상에서 10m 높이에 설치된 길이 210m의 전시 공간을 이루는 구조물은 에펠탑과 같은 철제 구조물로 만들어졌다. 3200t이나 되는 철제 구조물을 만드는 데 7개월이 소요됐다. ●방대한 데이터베이스 구축… 21세기형 박물관으로 우뚝 프랑스 대통령들은 임기 중 기념비적인 문화시설을 남기는 전통이 있다. 조르주 퐁피두 전 대통령은 퐁피두센터를 남겼고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은 전 세계의 건축가들이 대대적으로 참여한 그랑프로제로 파리의 문화적 위상을 한 단계 올려놓았다. 미테랑의 바통을 이어받은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1995년 문화적으로 제3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박물관을 설립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현상설계를 실시했다. ‘문화적 다양성과 예술의 접목’이라는 가치를 담은 장 누벨의 디자인이 선정됐고 그로부터 11년 만에 문을 열었다. 박물관이 개관되자 비유럽권의 토착 예술만을 따로 모아 전시하는 것은 서구와 비서구를 분리해 특정 문명을 평가 절하할 수 있고, 특히 아프리카 등의 일부 수집품은 식민지 시대에 수집된 것들로 제국주의적 색채가 짙다는 비판도 일었다. 하지만 박물관은 각종 기획전시와 문화예술 행사를 통해 다른 세계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한편 방대한 양의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전 세계 박물관 연구소 및 대학들과 공동 연구를 진행하고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으로 21세기형 박물관으로서의 위상을 정립해 가고 있다. lotus@seoul.co.kr
  • [씨줄날줄] 제노사이드/문소영 논설위원

    제노사이드(genocide)는 라틴어로 인종을 나타내는 제노스(genos)와 살인(cide)을 합친 단어로, 특정 집단이나 종족을 절멸시킬 목적으로 그 구성원을 대량 또는 집단 학살하는 행위를 말한다. 종교적 갈등이나 인종 우월주의, 이념 문제 등으로 인해 발생한다. 제노사이드를 반인륜적인 범죄로 규정해 기소한 최초의 사건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영국·소련·중국이 참여한 국제군사재판에서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의 전범을 기소한 것이다.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나치 전범 기소를 위한 국제군사재판에서 나온 판결은 흔히 ‘뉘른베르크 원칙들’이라 불린다. 뉘른베르크 원칙들은 1946년 12월 국제연합에서 확인됐다. 특히 제노사이드에 대해서는 “인간의 양심과 충돌하며 인류에게 큰 손실을 초래하고 도덕률 및 국제연합의 정신과 목적에 위배한다”는 점에서 ‘문명세계가 비난하는 국제법상의 범죄’임을 분명히 했다. 제노사이드의 역사는 기원전 13세기로 추정되는 그리스와 트로이의 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3세기 해상권을 둘러싼 갈등으로 시작된 로마제국과 카르타고 사이의 전쟁과 1099년 중세 유럽 십자군에 의한 예루살렘 유대인 대학살 등도 대표적인 사례다. 프랑스 영화 ‘여왕 마고’로 잘 알려진 1572년 성바르톨로메오 학살사건 때는 위그노라 불리는 신교도 5000명이 죽었다.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미국이 19세기 북미 대륙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원주민인 인디언을 몰아낸 과정, 소련이 공산당 일당 독재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2000만명의 반대자를 숙청한 일, 1970년대 캄보디아 크메르루주 정권이 200만 양민을 학살한 킬링필드, 1998년 세르비아의 코소보 인종청소 등도 모두 제노사이드 범죄다. 제노사이드는 지금도 여전한 현재 진행형 비극이다. 겨우 반세기 전에 제노사이드의 비극을 겪은 민족이 세운 신생국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향해 대량 학살극을 벌이고 있어 국제사회의 비난이 높다. 미국의 방조도 맹비난받고 있다. 지난 20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지상작전을 벌여 이날 하루만 89명이 죽었다. ‘피의 일요일’이다. 팔레스타인 사상자는 어린이를 포함해 약 600명에 이른다. 이스라엘은 폭탄 안에 수천개의 쇠화살이 들어 있는 치명적인 대량살상 무기도 사용했다. 인류의 원한은 쌓여만 간다. 문명에 물들기 이전인 석기시대에 인류는 평화로웠을 것이라는 기존의 학설을 뒤엎고 폭력적인 ‘원시전쟁’의 가능성을 제시한 로렌스 H 킬리의 주장처럼 인류는 구제 불능의 야만인인가.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국민대통합위원회, 보훈정책 청책간담회 개최

    국민대통합위원회(위원장 한광옥)는 오늘(22일) 오후 2시 국민대통합위원회 19층 대회의실에서 ‘보훈정책 청책(聽策) 간담회’를 개최한다. 이번 행사에는 광복회, 대한민국재향군인회, 5.18구속부상자회 등 독립·호국·민주 보훈단체 임원 14명과 국가보훈처·국방부·안전행정부 담당공무원이 참석할 예정이다. 이번 간담회는 ‘보훈, 국민통합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라는 주제로 국민통합적 측면에서 보훈정책의 과제와 개선방안, 보훈단체의 위상과 역할 제고 문제에 대해 논의 할 예정이다. 국민통합을 위한 보훈정책의 과제로는 △독립유공자 발굴 지연, △보훈수혜를 둘러싼 민원과 갈등, △나라사랑 정책 및 교육의 확대, △보훈단체의 위상과 역할 제고, △제대군인 지원제도 강화, △통일시대에 대비한 보훈정책 수립을 제시 등 이다. 특히, 보훈단체의 위상과 역할제고 측면에서 △단체의 민주성?개방성 강화 및 국민들의 애국심 고취를 위한 수범활동 전환으로 영예로운 단체상 정립, △국토순례, 역사탐방 등 공동사업으로 보훈단체간 협력문화 조성, △정부와의 미래지향적 동반자 관계 형성을 위한 거버넌스 구성 등의 필요성에 대해 심도 있는 의견을 나눌 예정이다. 한광옥 위원장은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배, 6?25전쟁 및 남북분단, 4·19혁명 및 5·18광주민주화운동 등의 역사적 배경으로 독립·호국·민주가 함께 어우러져 외국과는 달리 독특한 보훈체계를 가지고 있다”면서 “이제 보훈정책은 통일시대에 대비하여 국민의 애국정신을 함양하고 국민통합에 이바지하는 정책으로 발전해야 하며, 보훈단체들이 그 선두에서 많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이번 간담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간 국민대통합위원회는 국민들과의 정책소통의 폭을 넓히기 위한 일환으로 현장 단체활동가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국민대통합 청책간담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으며, 오는 8월 19일에는 ‘자원봉사정책 청책간담회’를 개최하여 대한민국 구석구석에서 헌신하고 있는 자원봉사자들의 폭넓은 의견을 수렴하고 개선방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뉴스팀 seoulen@seoul.co.kr
  • [세계의 창] 이·팔 전쟁도 우크라 사태도 100년 전 잉태됐다

    [세계의 창] 이·팔 전쟁도 우크라 사태도 100년 전 잉태됐다

    1914년 7월 28일,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길어야 반년이라던 전쟁이 ‘4년간 36개국 6500만 군인이 참전해 850만명이 죽은’ 총력전이자 참호전으로 변했다. 1차 세계대전이 ‘대(Great) 전쟁’, 혹은 ‘모든 전쟁을 끝낸 전쟁’(the War to end all wars)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가장 큰 변화는 홀대받던 하층노동자와 여성들이 전방 전쟁터와 후방 군수공장에서 흘린 피와 땀의 대가로 ‘신민’(臣民)이 아닌 ‘국민’(國民)으로 거듭났다는 점이다. 그러나 모두에게 제 몫이 돌아갈 수는 없는 법. 제 몫을 챙기지 못한 이들 사이에 불만이 일었고 이는 오늘날 다양한 국제분쟁의 뿌리가 됐다.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 등이 1차 대전 발발 100주년을 기리며 내놓은 보도를 통해 1차 대전이 남긴 유산을 짚어봤다. 키워드는 4대 제국의 몰락이다.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1. 중동 분쟁의 뿌리 - 오스만 제국의 몰락 독립을 미끼로 분할통치하는 것은 제국주의의 오랜 수법이다. 영국·프랑스는 독일·오스트리아 편에 가담한 오스만제국을 해체하기 위해 1916년 ‘사이크스 피코 협정’을 맺었다. 오스만제국 내 소수민족의 독립 열망을 부추겨서 제국을 붕괴시킨 뒤 분할통치하자는 것이었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바로 이 임무를 수행하는 영국 첩보원 얘기다. 아랍세계의 크고 작은 종족분쟁이 여기서 출발했다. 요즘 뉴스를 장식하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충돌도 마찬가지다. 1917년 아서 밸푸어 영국 외무장관은 오스만제국의 일부였던 팔레스타인에다 유대인 국가를 허용한다는 발언을 언론에 흘렸다. 아직 참전하지 않은 미국의 지원을 이끌어 내기 위해 미국계 유대인에게 당근을 던져 주자고 판단한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 건국은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희망사항’ 정도로 치부됐다. 그러나 밸푸어의 발언 이후 현실이 됐다. 반면 오스만제국의 배후를 교란하는 대가로 독립을 약속받은 팔레스타인은 충격에 빠졌다. 양측 대립이 격화되면서 영국은 뒤늦게 “가장 큰 외교적 실수”라고 한탄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이스라엘은 끝까지 건국을 고집했고 1949년 이를 인정받았다. 오랜 분쟁의 시작이었다. 2. 차르가 되고픈 푸틴 - 러시아 제국의 몰락 서구 언론들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흔히 차르라 부른다. 음험한 권력자의 이미지 때문만은 아니다. 푸틴의 정책 자체가 러시아제국 시절에 대한 향수를 내포하고 있어서다. 러시아제국 시절과 지금의 국경선을 비교해 볼 때 가장 극명한 차이는 러시아와 유럽 사이의 완충지대다. 북유럽에서 중부유럽에 걸쳐 핀란드, 발틱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등이 배치되어 있다. 특히 중부유럽은 예부터 곡창지대여서 늘 주변국들이 탐내는 대상이었다. 산업화로 발전해 나가던 서유럽국가들의 텃밭이자 유럽 진출을 도모하려는 러시아의 전진기지이기도 했다. 요즘 우크라이나를 사이에 둔 미국과 러시아 간 다툼도 여기에서 기원한다. 18세기 이후 우크라이나 서부는 독일·오스트리아 쪽에, 중부와 동부는 러시아 쪽에 속했다. 1차 대전 때 독립을 시도했으나 곧 소련에 합병됐다. 공산권이 붕괴하자 바로 독립을 이뤄냈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1차 대전 당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 이후 지금까지 서구의 모든 중부유럽 정책이 러시아를 겨냥하는게 아니냐고 의심한다. 1차 대전 당시의 지정학은 지금도 여전한 셈이다. 3. EU 출범의 씨앗으로 - 대영제국의 몰락 20세기 초 모든 분야에서 미국은 영국을 거의 다 따라잡았다. 그럼에도 식민지, 해군력, 금융시스템으로 무장한 영국은 최강제국의 위엄을 잃지 않았다. 1차 대전은 여기에 결정타를 날렸다. 전쟁 때문에 돈이 부족해진 영국은 1917년 4월 미국의 지원 없이는 3주도 버틸 수 없다며 미국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야 했다. 1차 대전 기간 미국이 연합군에 빌려 준 돈만 해도 모두 71억 달러였다. 1차 대전은 유럽연합(EU)의 씨앗을 뿌려 놓기도 했다. 1919년 파리강화회담 중 프랑스 장교 장 모네는 ‘경제적 통합을 통한 전쟁의 종식’이란 아이디어를 내놨다. 독일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던 연합군은 이를 무시했다. 기회는 몇 차례 더 있었다.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도, 오스트리아의 백작 리하르트 니콜라우스 폰 쿠덴호프 칼레르기도 ‘변덕스러운 정치 대신 지속적인 경제교류가 평화를 보장한다’고 주장했다. 당대 유럽의 지식인들은 열렬히 지지했으나 일반 대중의 반응은 냉담했다. 2차 대전을 겪고 나서야 유럽인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경제적 통합을 통한 영구평화의 달성’이란 꿈을 1, 2차 대전에 책임 있는 독일이 이끌고 있다는 게 역사의 아이러니다. 4. 귀족 세계의 종말 -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몰락 1차 대전이 드러낸 구세계의 빛과 그림자는 단연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다. 근대민족국가 설립이라는 열풍을 차단하기 위해 합스부르크 왕가를 정점으로 결성된 귀족 연합체다. 민족의 이익보다 신분의 이익을 앞세운 것이다. 그만큼 보수적이고 억압적인 성격이 강한 지배체제였다. 근대화 바람을 마냥 피할 수는 없었다. 1914년 산업화에 착수하면서 민족 갈등이 불거져 나왔고 이는 곧 1차 대전의 촉발 원인으로 꼽히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저격 사건으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 전후 제국은 철저히 해체됐다. 땅은 빼앗겼고 나라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로 삼등분됐다. 반면 민족보다 신분을 앞세웠기에 다른 유럽 지역에 비해 유대인 탄압이 덜했고 이 때문에 20세기 초 경제학, 심리학, 철학 등에서 뛰어난 역량을 선보인 유대계 지식인들이 수없이 배출됐다. 나중에 이들이 히틀러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미국은 세계패권뿐 아니라 학문의 패권도 거머쥐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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