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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일 개봉 ‘짝패’ 감독·주연으로 투맨쇼 류승완·정두홍

    25일 개봉 ‘짝패’ 감독·주연으로 투맨쇼 류승완·정두홍

    이쯤되면 이건 실험이다. 나름의 실험정신 없는 영화가 어디 있겠냐마는 ‘짝패’(제작 외유내강·25일 개봉)는 제대로 실험을 했다. 일단 형식이 그렇다. 류승완 감독이 직접 주인공이 되어 액션화면을 가로세로 요란하게 활강한다.‘죽거나 혹은 나쁘거나’‘피도 눈물도 없이’‘주먹이 운다’ 등 리얼액션의 독자적 계보를 그어온, 바로 그 감독이 말이다. 스크린의 절반은 정두홍 감독이 잘라갔다. 한국 액션영화의 무술지도를 도맡아온 그에겐 첫 주연작이다. 스타배우 없는 25억원짜리 액션 소품. 돈 되겠나, 충무로에 끌끌 혀차는 소리가 돌 만도 했다. 순도 100%의 리얼액션을 위해 기필코 뭉쳐야 했다는 두 사람. 흥행성적표야 받아봐야 알겠지만 시사회에서 공개된 영화는 선도높고 다부졌다. 이 영화의 알맹이를 ‘소품’이라 몰아붙일 사람은 적어도 없을 것같다. “돈이 없어서 우리 둘이 찍은 게 아녜요. 우리 둘이 찍는다고 하니까 투자가 안 붙은 거지….”(류승완 오른쪽) “꼭 우리가 찍어야 했다니까요. 꽃미남 스타들이 두어달 연습해서 찍는 그런 액션 말고 진짜 액션. 우리라서 가능한 한국형 무술영화….”(정두홍) 지난 10일 삼청동 카페에서 만난 두사람은 “액션 이상의 무엇을 담은 활극을 찍고 싶었다.”고 했다. 오랜 갈증 끝에 달게 냉수 한사발을 들이킨 표정들이 그럴까.‘액션 짝패(한 짝을 이룬 패거리)’의 인터뷰엔 나른한 포만감이 깃들었다. 류 감독은 이 영화에서 1인4역 했다. 제작, 감독, 주연에 시나리오(초고는 ‘혈의 누’의 작가 이원재)까지. 태생적으로 생산성이 높은 작품인데, 정 감독의 참여가 경제성을 배가시킨 셈이다.“‘아라한 장풍대작전’(2004) 촬영현장에서 정 감독의 제안으로 함께 꼭 진짜 액션 한편 찍자고 약속했다.”는 류 감독은 “지금껏 내 액션물들은 다른 장르에 많이 기대 늘 본격액션에 대한 갈증이 컸다.”고 했다. 그리고 “촬영현장에서의 라이브 액션 감도가 스크린으로 고스란히 전달되지 못하는 게 항상 안타까웠다.”는 정 감독. 액션과 카메라의 생리를 두루 꿰고 있는 류 감독, 액션의 질감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정 감독의 조합은 영화의 대본 같은 전제요건이었다. 영화는 개발바람이 불어닥친 지방 소도시를 배경으로 두 남자의 진한 우정을 그렸다. 지역 주먹세계를 휘어잡던 보스 왕재(안길강)가 살해되자 그의 막역한 고향 후배 석환(류승완), 서울에서 형사로 뛰는 친구 태수(정두홍)가 함께 살인범을 추적한다. 살인범을 쫓는 미스터리극으로 출발한 영화는 비감(悲感)과 유쾌의 정조를 섞바꿔가며 몸으로 만들 수 있는 아날로그 액션의 끝점을 보여준다. 대역도, 그 흔한 와이어도 쓰지 않았다. 대역을 쓸 요량이었으면 류 감독이 주연하지도 않았을 것이고.“우리 능력으로 찍을 수 없는 장면은 처음부터 넣질 않았다. 대역은 대기시켰다가 앵글을 봐야 하는 리허설때만 썼다.”(정) “무릎 인대를 다치는 바람에 다리를 끌어야 하거나 가볍게 뛰어내리는 등의 간단한 몇 장면만 대역을 썼다.”며 류 감독은 “대역의 몸동작과 배우의 감정표현 장면을 따로 찍지 않아도 됐으니 액션과 감정이 율동감있게 묘사된 것같다.”고 만족해 했다. 제작자(서울액션스쿨 식구들을 투입하는 현물투자)로 참여한 정 감독 역시 ‘생날’액션에 대한 갈증이 엄청났다. 연기가 돋보이더라는 말에 “‘옹박’의 토니 자를 볼 때처럼 연기자 아닌 그냥 무술인으로 봐달라.”고 정색하더니 액션미학이 꽃피우기 힘든 한국영화의 현실을 꼬집기도 했다.“영화의 주요장치로써의 폭력이 우리나라에선 애매하게 정치적 피해를 봤다.”는 얘기였다. 기다렸다는 듯 거드는 류 감독,“영화 속 폭력은 으레 정치적 메타포를 담게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폭력(영화)의 반골정신이 정권의 색안경에 불순한 것으로 오랫동안 냉대받은 게 사실이다.” “흥행을 하든 못하든 원은 풀었다.”는 두사람.“촬영장에서 의견이 맞서 불편한 적도 있었죠. 취향이 많이 달라요.(웃음)”(류) “그래도 한번도 얼굴 붉혀본 적은 없어요. 영화에 대한 에너지가 똑같다는 사실만큼은 서로 아니까.”(정) “맞아. 어떤 경우에라도 손해보는 기분은 둘다 안 들었거든.”(류) 지난해 직접 제작사를 차렸으니 류 감독에게 ‘짝패’는 창립작이다.“16㎜로 찍은 단점을 보완하려고 지금까지의 내 영화들 중에서 가장 원색을 많이 썼다.”는 그에게 아주 진한 멜로라인의 액션을 찍을 마음은 없냐고 물어봤다.“‘피도 눈물도 없이’보다 더 진한 멜로는 못 찍겠고… ‘이터널 선샤인’같은 이를테면 변칙멜로는 찍어보고 싶네요.” 글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대학 벤처 성공하려면 전문경영인에 맡겨야”

    “대학 벤처 성공하려면 전문경영인에 맡겨야”

    “대학 벤처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전문 경영인이 필수입니다.” 중국의 대표적인 정보기술(IT)그룹인 팡정(方正)그룹의 웨이신(魏新) 회장은 대학 벤처가 좋은 기술이 있어도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경영의 문제라고 지적했다.10일 성균관대 중국대학원, 삼성경제연구소 공동 주최 ‘2006 한·중 국제포럼’에 참가하기 위해 지난 9일 방한한 웨이 회장은 이렇게 강조했다. 웨이 회장은 팡정그룹을 ‘2005년 중국 최고 벤처 기업상’을 받는 기업으로 성장시킨 주인공이다. 팡정그룹은 1986년 베이징대를 모체로 문을 열어 성장해온 대기업으로 이 대학 법인화에 따른 자금운영에 큰 기여를 하고 있는 기업이다. “중국은 대학에 대한 정부 지원도, 교수들 월급도 적죠. 그래서 거의 모든 대학들이 기업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한때 1만개에 육박했던 대학 기업은 절반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지난해 팡정그룹이 전체 대학 기업 매출의 4분의1을 차지할 정도로 나머지는 영세한 수준이다. 레이저인쇄 기술을 기반으로 시작한 팡정그룹이 연 매출 3200억 달러를 내는 중국 500대 기업이 된 핵심 열쇠는 인사였다. 웨이 회장은 “대학 벤처를 들여다 보면 대부분 교수들이 연구는 물론 경영까지 한다.”면서 “기술 자체가 아무리 혁신적이라도 대학 벤처가 성공하기 힘든 이유가 여기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전문경영인뿐 아니라 사람의 인품에 따른 인사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정직과 성실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사상은 바꾸되 사람은 바꾸지 않는다.’는 철학으로 잦은 인사 이동은 옳지 않다고 믿는다. 대학 기업은 일종의 산학 협동이다. 하지만 단순히 ‘협동’ 수준이 아니라 대학의 연구진이 회사와 일체가 돼야 한다고 그는 강요했다.“연구진을 기업의 한식구로 봐야 합니다. 기술에 대한 계약금뿐만 아니라 상용화 여부와 상관없이 계속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웨이 회장이 강조하는 것은 기술의 혁신이었다. 한국이 외환위기를 겪었던 것이 핵심 기술의 부족이었듯 중국도 언젠가 그런 한계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그는 “마오쩌둥이 ‘과학기술은 국가의 힘’이라고 말했던 것은 개방의 물결을 타고 있는 중국이나 이미 몇몇 세계적 브랜드를 갖고 있는 한국 모두에 적용되는 얘기”라고 말했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저출산 이대론 안된다] (상) 아이낳기 왜 기피하나

    [저출산 이대론 안된다] (상) 아이낳기 왜 기피하나

    “그냥 밥만 먹여 애를 키울 순 없잖아요. 요즘 젊은 사람들이 이기적이어서, 그러니까 자식보다는 자기만 생각해서 출산을 잘 안한다는 주장도 있던데 정말 현실을 모르는 말이에요.” 공무원 김모(36)씨가 최근 가장 듣기 싫은 소리는 ‘애들은 자기 먹을 건 갖고 태어난다.’는 어른들의 말이다. 일곱살짜리 딸을 둔 김씨 부부는 일찌감치 둘째아이 출산을 포기했다. 공무원 9년차인 그의 월급은 수당을 포함해 270만원 정도. 이 중 70만∼80만원은 딸의 유치원과 학원 등 교육비로 들어간다.100여만원은 세 식구가 사는 기본생활비다. 주택구입 때문에 은행 대출이자로 매월 나가는 40만원을 빼고 남은 돈은 보험과 적금에 들어간다. “아이가 두 명이라면 어떻게 사나 싶어요. 이런 게 보통사람들 얘기라고 생각해요. 특별히 궁하지도 남지도 않는 생활이지만 다들 지금 있는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은 겁니다.”6년 전 대전으로 발령난 김씨는 서울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면 걱정이 태산이라고 했다. 그는 “그나마 대전은 교육비 등 지출이 비교적 적은 편인데 서울에 가면 자연스레 아이에게 들어갈 비용이 늘어날 것”이라며 한숨지었다. 우리나라 여성들의 합계출산율이 지난해 1.08명으로 사상 최저치를 경신하면서 저성장과 고령화 등 미래에 대한 어두운 전망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출산·양육에 대한 사회적 지원체계의 미비와 젊은 부부들의 개인주의적 특성 등이 원인으로 지적된다. 젊은 부부들이 체감하는 출산·양육의 환경과 실태에 대해 들어봤다. 결혼 8년차 동갑내기 성낙원·이선민(36)씨 부부도 자식이라곤 외동아들 종민(6)이뿐이다. 부부는 결혼 3년 만에 아이를 얻었다. 하지만 맞벌이로 정신없다 보니 둘째아이 낳을 시기를 놓쳤다.“처음 아이 낳아 키우고 직장 일에 정신없이 살다가 자리잡힐 만하니까 이미 30대 중반이 돼 있었더군요. 아이 욕심이 없진 않지만 그 사이 유산한 경험도 있어 하나만 키우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사실 하나 키우는 것도 결코 녹록지 않다. 성씨는 “아내가 공무원이라 첫 아이 낳고 육아휴직을 1년간 얻었지만 여전히 아이는 장모님이 맡아 기르고 있다.”면서 “또 다른 출산이 부모님의 희생을 강요해야 하는 것이 아직은 우리의 현실”이라고 했다. 아이가 하나라서 걱정되는 점도 있다. 아내 이씨는 “아이가 성인이 되어 외롭지는 않을까 그리고 형제자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을 놓치지는 않을까 많이 걱정된다.”면서 “이런 고민은 한 아이 부모들의 공통적인 고민”이라고 말했다. 경기도 산본에 사는 정모(29)씨는 2004년 5월 남편(29·회사원)과 결혼했지만 이제껏 아이를 갖지 못했다. 직장인 학원에 보육시설이 없는 데다 육아휴직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아이 학대 등으로 시끄러운 사설 보육시설에 아이를 맡기기는 더욱 싫었다. 초등학생 아이를 둔 같은 학원 여교사가 아이 운동회 등을 이유로 조퇴할 때마다 터져나오는 주위의 수군거림도 부담스럽다. 서울과 부산에 사는 양가 부모에게 양육을 부탁하기도 힘들었다. 정씨는 전세 1억 3000만원짜리 아파트에 살면서 남편과 맞벌이로 월 430만원 정도를 벌어 내집마련의 꿈을 키워왔지만 결국 아이를 낳기 위해 지난 3월 학원을 그만뒀다.“직장 내 육아시설이 필수적으로 갖춰져야 하고 직장에서 엄마들을 좀더 우대해 줄 수 있는 분위기가 돼야 합니다. 정부가 산후도우미 비용 등 아이를 낳으면서부터 들어가는 부대비용 등에 대해 현실적인 지원방안을 내놓지 않으면 출산율이 높아지긴 힘들 겁니다.” 서울 성동구 마장동에 사는 김모(29·여)씨는 사교육비 문제를 꼬집었다.2004년 5월 동갑내기와 결혼한 김씨도 지난달 육아전문지 기자일을 그만뒀다. 그는 “정부가 사교육비 절감을 위해 초등학교 3학년부터 실시하는 영어 교육을 1학년으로 당긴다는데 현실에선 아이들의 영어 사교육 연령만 낮추는 결과를 낳고 있다. 정부 시책이 엄마들의 마음을 너무 모른다.”고 지적했다. 그는 “일을 그만두면서까지 아이를 기르려고 하지만 사교육비가 두려운 게 사실이라 벌써 걱정된다.”고 말했다. 아이가 많으면 많은 대로 걱정이다. 충북 증평군에 사는 연경옥(36·여)씨는 초등학교 6학년과 5학년 딸,1학년 아들 등 셋을 기르고 있다. 남편(40)과 화원을 운영하며 한달에 250만∼300만원가량을 벌지만 두 딸의 학원비와 과외비에만 110만원이 들어간다. 이 때문에 아들은 3만원짜리 학습지로만 교육시키고 있다. 애들한테 150만원 정도 쓰고 가족보험에 70만원을 붓고 나머지로 생활을 하다보면 적금은 생각지도 못한다. 결혼 12년이 됐지만 24평 아파트에서 전세 2500만원에 살면서 내집마련은 꿈도 못꾸는 이유다.“맞벌이에 바쁘다보니 큰 딸이 두 동생을 보살피는 엄마 역할을 하며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환경에서 아이 셋을 키우는 건 모험이지요.” 유영규 이재훈기자 whoami@seoul.co.kr
  • [제1회 입양의 날] ‘입양 가정’ 김정권·박진씨 부부의 사례

    [제1회 입양의 날] ‘입양 가정’ 김정권·박진씨 부부의 사례

    “말할 수 없이 예쁘죠. 할 수 있다면 힘 닿는 데까지 입양하고 싶어요.” 김정권(42)·박진(40)씨 부부는 ‘자식 부자’다. 둘도 많다는 세상에 딸 셋, 아들 둘을 뒀다. 셋은 ‘배 아파가며’, 둘은 ‘사랑으로’ 낳았다. 남편 김씨는 “아내가 몸이 워낙 약해서 결혼 전부터 입양을 해서 키우자고 약속했는데, 감사하게도 세 아이를 낳아 키우게 됐어요. 그러다 아이들이 초등학생이 되면서 입양을 다시 생각하게 됐죠.”라고 했다.“막상 입양을 하려니까 걱정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죠. 내 자식 이상으로 키울 수 있을까. 키우면서 은연중에 차별하게 되지는 않을까….”부인 박씨는 입양을 결심한 후에도 갈등이 심했다고 했다. 그래서 부부는 준비기간을 가졌다.10개월을 품어 배 아파 낳듯 2년간을 가슴으로 품었다.“항상 입양할 아이를 위해 기도했고, 세 아이들에게도 동생이 올 거라고 준비를 시켰어요. 아이들도 나중엔 동생 언제 오냐고 채근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죠.”동생 이름도 아이들이 직접 지었다고 했다.“입양은 우리 가족이 한 일 중에 가장 현명한 선택이에요. 그래서 둘째아들 이름이 현명이가 됐어요.”그렇게 2004년 2월 넷째 현명(당시 2살)이가 입양됐다. 그리고 지난해 막내딸 미진(당시 생후 2개월)이까지 데려와 모두 일곱 식구가 됐다. 부부는 “가능하면 계속 입양을 하고 싶어요. 원래 유자녀를 포함해 입양은 5명까지만 가능한데 특별승인을 받아서 입양 신청을 해놓았다.”고 했다.“어떤 분은 대뜸 묻기도 해요. 얼마나 버느냐고. 풍족하지도 않지만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이들이 커가고 함께 사랑하는 걸 보면 정말 행복해져요.”얼마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단다.“현명이가 동생 미진이를 예뻐한다고 얼굴을 토닥였는데 미진이가 우니까 형 현이가 현명이를 혼내더라고요. 현명이도 서러워 울고. 그냥 두고 봤는데 좀 있다 문을 열어 보니 형이 현명이를 꼭 안고 침대에 누워 잠들었더라고요.”바로 이럴 때가 행복한 순간이라고 했다. 부인도 “미진이는 아직도 새벽에 두 세번씩 깨서 봐줘야 하는데, 그럴 때도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이런 게 키우는 정”이라고 말했다. 가족은 닮아가는 건지 현명이와 미진이가 클수록 큰 아이들을 닮아가 신기하단다. 걸음마를 시작한 미진이도 다음주면 첫 돌을 맞는다. 부부는 초대장을 건넸다.“저희 가족은 배아파 낳은 자녀 미혜(중1), 현(초6), 미나(초3), 가슴으로 낳은 자녀 현명(4살), 미진(1살) 일곱 식구랍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일곱 식구의 막내인 미진이의 첫 생일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강혜승기자 1fineday@seoul.co.kr
  • 檢, 피고인 호칭도 ‘전관예우’

    검찰이 브로커 윤상림씨와 거액을 주고받은 혐의 등으로 불구속 기소된 피고인들에 대한 공판을 진행하면서 법원 예규를 어기고 검찰 출신 피고인에게 적절치 못한 호칭을 사용해 구설수에 올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부장 문용선) 심리로 9일 열린 공판에서 검찰은 윤씨와 부하직원들에게서 뇌물 4500만원을 받은 혐의로 법정에 나온 최광식 경찰청 전 차장에게 간단한 경력과 개인신상을 물은 뒤 재판 내내 ‘피고인’이라며 일관되게 불렀다. 하지만 검찰은 윤씨에게 사건수임 대가로 3000만원을 지불한 혐의로 기소돼 최 전 차장에 이어 법정에 선 검찰 출신 서모 변호사에게는 개인신상에 대한 질문을 생략했다. 또 재판 내내 서 변호사를 심문하면서 ‘변호사님’이라고 불렀다. 대법원 예규에 따르면 법정에서는 직위 고하에 상관없이 ‘피고인’으로 부르도록 돼 있고,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 등을 나타낼 수 있는 호칭은 삼가도록 돼 있다. 한편 이날 서 변호사에 이어 피고인 신분으로 법정에 선 김학재 변호사는 “검찰이 제 식구 감싸기란 비판을 피하려고 나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며 윤씨에게 사건소개 대가로 1억 3500만원을 건넸다는 혐의를 부인했다.박경호기자 kh4right@seoul.co.kr
  • [길섶에서] 강아지/이호준 뉴미디어국장

    밖에서 돌아오는 아내의 품에 강아지 한 마리가 안겨 있다. 웬 강아지냐는 물음에, 화풀이라도 하듯 사연을 쏟아놓는다. 집 근처에서 헤매고 있는 강아지 한 마리를 발견하고, 누군가 잃어버렸을 거란 생각에 경비실로 데려갔단다. 하지만 경비실에서는 “낮부터 돌아다녔는데 누가 버린 것 같으니 내버려 두라.”고 하더란다. 그래도 밤새 밖에서 헤맬 것을 생각하니 버려두고 올 수가 없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는 그 길로 부근 아파트의 경비실마다 찾아다녔다. 강아지 분실신고가 들어왔는지 물었지만 모두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분실견이 아니라 유기견임이 확실해진 것이다. 그녀는 분노했다. 싫으면 아예 키우지나 말지, 가족처럼 지내다가 어떻게 폐품처럼 버릴 수 있느냐는 것이다. 애완동물과 같이 살다 보면 식구 못지않게 정이 든다. 그래서 잃어버리게 되면 산 값의 몇 배라도 들여 찾으려 한다. 하지만 사는 게 팍팍해져서일까. 요즘은 심심찮게 버림받은 개들을 보게 된다. 하긴, 늙고 병들면 부모도 버린다는 세상이니…. 이호준 뉴미디어국장 sagang@seoul.co.kr
  • 인천이 원조 ‘성냥공장’

    인천이 원조 ‘성냥공장’

    ‘인∼천의 성냥공장, 성냥공장 아가씨….’ 나이 40을 넘긴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불러봤을 그 시절의 국민가요(?)다. 체면을 따지지 않아도 되는 술자리 등에서는 단골로 등장해 수준을 ‘끌어내리는 데’ 일조하면서도 분위기를 띄우는 묘한 노래였다. 하지만 끝부분이 상당히 저급해 성희롱의 잣대가 엄격해진 요즘 아무 데서나 불렀다가는 다음날 아침이 편치 않을 것이다. 아무튼 지난날 군대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불려져 제대 후 “정식 군가인 줄 알았다.”고 회고하는 싱거운 사람까지 있는가 하면, 모 전방부대에서는 사단장이 사병들과 함께 손을 흔들며 문제의 ‘끝부분’과 후렴까지 힘차게 불렀다는 믿기지 않는 얘기도 있다. 이 노랫말처럼 ‘인천’ 하면 성냥공장과 직공 아가씨들이 연상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인천이 우리나라 성냥산업의 시발지이자 메카였기 때문이다. 1900년 러시아 대장성이 발행한 ‘조선에 관한 기록’이란 보고서에는 “1886년 인천 제물포에 외국인들의 지휘 아래 성냥공장이 세워졌다. 그러나 얼마 안가 생산이 중단됐는데, 그 원인은 일본제 성냥이 범람했기 때문이다.”고 적혀 있다. 이 기록만으로는 성냥공장의 정확한 위치, 상호 등을 알 수 없지만 한국 최초의 성냥공장이 인천에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는 최초의 성냥공장은 1917년 10월 인천 동구 금곡동(당시 금곡리)에 설립된 ‘조선인촌주식회사’다. 이 공장이 인천에 들어선 것은 성냥 재료로 압록강 오지에서 생산되는 목재를 배편으로 쉽게 들여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천 한 세기’라는 책자는 “당시 서울에는 성냥공장을 세울 만한 마땅한 부지가 없었고, 전력도 인천보다 부족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금곡리에는 대형 변전소가 자리잡는 등 공장 가동에 필요한 전력 사정이 서울보다 나았다. 또 항구도시라 값싼 노동력이 풍부했다. 비슷한 시기에 서울이나 대구 등지에 세워진 성냥공장들이 별 재미를 보지 못하고 문을 닫은 것도 이같은 여건들이 뒷받침되지 않은 탓이다. 조선인촌주식회사는 신의주에 부속 제재소까지 두었고, 직원도 남자 200여명, 여자 300여명 등 모두 500여명에 달했다. 성냥 제조는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어서 당시로서는 드물게 여성을 많이 고용했는데, 이것이 ‘성냥공장 아가씨’라는 야릇한 노래가 탄생한 배경이다. 그 무렵엔 기계화가 이뤄지지 않아 성냥개비에 인(燐)을 붙이고 성냥개비를 성냥갑에 넣는 작업 등을 전부 수작업으로 했는데, 이 일을 주로 당시 가난했던 어린 소녀들이 맡았다. 이 회사는 ‘패동(佩童)’,‘우록표(羽鹿票)’,‘쌍원표(雙猿票)’ 등의 성냥을 국내 소비량의 20%에 달하는 연간 7만 상자(하루 2만 7000갑)를 생산했다. 특히 성냥갑 제조를 위해 하청을 준 곳이 500여가구에 달할 정도로 규모나 생산량이 대단했다. 이 집들은 온식구가 성냥갑 만드는 일에 매달렸다고 한다. 1930년대에는 성냥공장 여공들이 낮은 임금에 항의해 파업을 일으켰다. 성냥개비 1만개를 붙여야 60전을 받고 하루 13시간 꼬박 서서 일해야 하는 등 노동환경이 지나치게 열악했다. 여공들에 대한 비인격적인 대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여성 근로자를 비하하는 뜻이 담긴 ‘성냥공장 아가씨’에는 이처럼 애틋한 사연이 담겨 있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사설] 인권 선진국 도약을 기대한다

    법무부가 어제 인권국을 출범시켰다. 때늦은 감이 없지도 않지만 적극 환영한다.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면서도 인권에 관한 한 후진성을 면치 못해온 것이 사실이다. 국제사면위원회 등으로부터 자주 권고를 받아온 점이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2001년 8월 국가인권위원회가 발족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 이전까지는 법무부 인권과에서 검사 2∼3명이 인권업무를 모두 관장해 오다시피 했다. 그만한 인력으로 제대로 된 인권정책을 입안할 수 있었겠는가. 인권국은 앞으로 국가 인권정책을 수립하고 소외계층의 법률구조를 담당한다. 또 법무행정 관련 인권침해를 예방하고 사후 구제를 맡는다. 인권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국민들이 더 많은 혜택을 볼 것 같다. 초대 인권국장에 민간 인권 전문가를 기용하기로 한 것도 잘한 일이다. 검사장급 등 제 식구보다는 외부인이 조직을 훨씬 잘 운영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인권은 무엇보다 전문성을 필요로 한다. 기왕이면 국민의 신망이 두텁고 오랫동안 인권 활동을 해 온 사람 가운데 발탁하기 바란다. 인권위원회와의 관계도 잘 정립할 필요성이 있다. 기능이 다르다고 하지만 업무중복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인권위 따로, 인권국 따로 정책을 쏟아내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이 떠안게 된다. 상호 존중과 긴밀한 협조가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이유다. 인권위측이 이번 인권국 설치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바람직하다. 인권위는 외부의 눈치를 보지 않는 대신 권고에 그친다. 그러나 인권국은 실제로 집행력이 있다. 두 기관은 ‘인권 시너지 효과’를 내는 데 머리를 맞대야 한다.
  • [배지환의 DICA FREE oh~] 주제가 있는 사진 #12

    [배지환의 DICA FREE oh~] 주제가 있는 사진 #12

    새벽 1시. 서둘러 짐을 싸고 일행이 있는 곳으로 출발했다. 그곳의 봄을 구경하려 몰려드는 인파들을 피해야 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오후가 되면 역광이 되는 탓에 눈으로만 즐기고 오기엔 너무도 아까운 거리와 풍경인 만큼 밤을 꼬박 새우며 고속도로와 국도를 번갈아 달렸다. 거의 오지에 가까운 탓인지 좀처럼 목적지를 찾을 수 없었고, 인근 근처를 계속해서 맴돌다 30여분이 지난 후에야 물어물어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전7시. 밤을 꼬박 새워 달려간 그곳에 아침 햇살이 물에 잠긴 나무들에게도 물 위에도 따스하게 내리쬔다. 해가 떠오른다는 걸 알고 있는지 자라식구들도 한쪽에 자리를 잡고 일광욕을 즐기는 모습을 보니 좀 처럼 구경하기 힘든 오지의 풍경을 보러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주산지는 청송군 주왕산국립공원 남쪽끝에 위치한 오지의 신비한 저수지이다. 저수지 속에 자생하는 100여년이 훨씬 지난 능수버들과 왕버들은 울창한 수림과 함께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운치있는 경관을 자랑한다. 이 신비롭고 조용한 풍경은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꿈속에서 본 어느 기억속에 자리잡고 있는 한 편의 장소인 듯하며,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그러한 풍경이기에 아직 못 가본 분들에게 꼭 추천해주고 싶은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주산지는 늦가을 새벽에 피어오르는 물안개로도 유명한 곳이다. 주산지를 가는 방법은 서울에서 출발해서 중앙고속도로를 따라 서안동IC에서 안동, 영덕방면의 34번국도, 청송방면31번국도, 주왕산국립공원 방면 914번 지방도로를 이용하여 찾으면 된다. 다소 찾기 힘든 곳이기는 하나 주변 이정표와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찾다보면 어느새 꿈속에서 본 듯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질 것이라 생각된다. 셔터스피드는 1/60, 조리개는 F:11,ISO는 100. www.cyworld.com/pewpew
  • [클릭 지구촌 이곳!] 中 베이징 한복판 식당 ‘레드캐피털’

    [클릭 지구촌 이곳!] 中 베이징 한복판 식당 ‘레드캐피털’

    |베이징 이지운특파원|베이징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레드 캐피털(Red Capital)’. 중국 이름으로는 홍쯔쥐러부(紅資俱樂部)라는 호텔 겸 레스토랑이다.1년 내내 100%에 가까운 객실률을 기록하는 곳으로, 주 고객층인 서양인 사이에서 특히 유명하다. 하지만 객실은 단 5개.2인실 셋,1인실 둘이다. 전통 가옥인 ‘사합원(四合院)’ 하나를 약간 손질해 만든 만큼 방들도 좁다. 인기의 비결은 뭘까. 청조(淸朝) 분위기의 내부 장식에 전통 침대만으론 설명이 부족하다.2인실 190달러,1인실 150달러에 각각 15%의 세금을 추가로 내야 하기 때문에 요금도 거의 1급 호텔급이다. 게다가 시내 동북쪽 전통 가옥 밀집촌에서 간판도 없는 호텔을 찾아내기도 쉽지 않다. 입소문 없이는 찾아내기도 어렵다는 얘기다. 답은 현장에 있다. 지난 주말 찾은 레드 캐피털. 가뜩이나 좁은 마당 한가운데 자리한 돌무더기가 맨먼저 눈에 들어온다. 어른은 드나들기도 어려울 만큼 좁은 구멍이 나 있고, 지하로 내려가는 돌계단이 매우 가파르다. 깊이는 2m 남짓, 안으로 제법 넓은 공간이 나 있다. 미니바가 있고,2곳에 테이블을 놓고 10여명은 족히 앉아 술을 마실 수 있을 정도다. 팻말이 눈에 띈다.‘탱크를 막을 수 있는 무기 개발을 가속화하라.’ ‘전쟁 대비능력을 강화하라….’ 아래에는 ‘1969년 10월17일, 국가부주석 겸 국방장관 린뱌오(林彪)’가 적혀 있다. 방공호(防空壕) 였다. 중국 정부는 1960년 후반 소련과의 분쟁으로 긴장이 극도에 달하자 도심 지하에 대규모 방공호를 건설했다. 성내 모든 가옥에도 각각 방공호를 파게 했다. 그리고 방공호는 집집마다 연결되도록 했다. 민간 방공호는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다. 새 건물을 지으면서 없어졌거나 옛집 형태로 남아 있더라도 막아 버린 곳이 많다. 한 직원은 “방공호는 뒤에 도둑들이 들어와 물건을 훔쳐 가는 통로로도 쓰였다.”고 귀띔한다.“어렸을 때 집안 어른들이 종종 온 집안 식구가 모여 방공호를 파던 때의 얘기를 하곤 하셨다.”고도 했다. 방공호 내부는 혁명의 냄새가 물씬하다. 홍위병의 홍색 목도리에 각종 혁명 판화, 총과 무전기…. 이른바 ‘혁명 마케팅’인 셈이다. 공산혁명 사적지 관광을 일컫는 ‘홍색(紅色) 관광’이 유행하면서 더욱 인기다. 호텔 식당 겸 레스토랑은 어떤가. 직원은 문 옆에 늘어진 낡아 빠진 커튼을 자랑한다.‘많은 기밀의 배후를 알고 있는 커튼’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의 집무실에 있던 커튼이라고 한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사용했다는 라디오도 있다.‘50년대 만들어진, 고위층이 사용하던 것 가운데 하나’라는 푯말이 붙어 있다. 개인사무실에서 쓰던 것으로 저우 총리는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국제뉴스를 통해 영어·불어·독어·일어를 완벽하게 익힐 수 있었다고 한다. 내부 소파는 저우 총리와 펑더화이(彭德懷), 천이(陳毅) 등 고위 인사들이 외국 손님을 맞을 때 앉았던 것이라고 한다.‘정책을 결정한 의자(決策椅子)’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이 모든 게 당과 정부의 핵심지도자들의 집무실인 중난하이(中南海)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라고 하니,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중난하이가 가구와 집기 등을 교체할 때 당시 ‘힘있는’ 사람들이 헌 것들을 따로 챙겨 두었는데, 호텔 사장인 미국인이 중앙판공실의 친구로부터 직접 구해온 것”이라는 설명이 이어진다. 언젠가 현지 한 신문의 칼럼이 ‘다시 부는 홍색 물결’을 언급하며 이 곳을 거명한 것을 보니 과히 틀린 얘기만은 아닌 듯하다. 직원들의 의상도 모두 혁명시대의 것들이다.60∼70년대의 대자보와 마오쩌둥 주석의 사진과 어록, 당시의 인민일보와 북경일보가 펼쳐져 있다. 레드 캐피털은 평범한 중국의 전통가옥에 또 다른 ‘과거’의 흔적인 ‘혁명’의 기운을 살린 뒤 ‘유행’에 올려 태운 하나의 전형이랄 수 있다. 그야말로 ‘혁명’과 ‘자본’이 어떻게 결합돼 ‘홍색 자본(紅資)’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홍색 자본가(Red Capitalists)시대를 맞아 이런 조합에서 만개하는 한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jj@seoul.co.kr
  • [가정의 달 특집] 5월11일 입양의 날

    [가정의 달 특집] 5월11일 입양의 날

    # 입양은 또 하나의 아름다운 출산 어머니의 뱃속에서 열 달을 인내하며 힘든 산통 끝에 세상에 나온 소중한 생명, 그러나 이보다 더 아름다운 탄생의 순간이 있다. 지난달 14일 찾은 성가정 입양원. 서울 성북동 북악산 자락에 있는 국내입양기관이다. 봄 햇살이 따사롭게 내려앉은 오솔길을 따라 들어서자 입구에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인연은 입양입니다’라는 팻말이 보였다. 마침 그날은 강인중(36·충남)·한여빈씨 부부가 건이(4·친생자) 동생 상우(가명·8개월)를 입양하는 날이었다. “떨리고, 설레고, 고맙고... 상우를 만날 생각에 어젯밤엔 잠이 오질 않더군요. 건이가 병원에서 태어나던 날, 그런 감정이에요.” “오늘부터 건이와 상우가 형제가 되잖아요. 서로 ‘형제라는 느낌의 끈’을 하루라도 빨리 이어주고 싶어 일부러 새 옷을 사지 않고 건이가 입던 옷과 양말을 깨끗이 세탁해 왔어요.” 첫아들 건이를 낳고 둘째는 애초부터 입양을 계획했던 강씨 부부.“입양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사랑의 표현”이라면서 “입양문화가 확산돼 버림받은 아이들이 가정에서 행복하게 자랐으면 한다.”고 말했다. 성가정원을 나서는 강씨 가족에게 윤영수(48) 원장 수녀가 “이 아이는 하느님이 주신 겁니다. 상우야, 이젠 형과 마음껏 뛰어놀며 건강하고 예쁘게 자라라.”고 하자, 양부모 품에 꼭 안긴 상우는 ‘천사의 미소’를 지으며 성가정원 식구들과 작별인사를 나눴다. 1954년 전쟁고아와 혼혈아동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입양이 시작된 이래, 해외입양 일변도에서 최근 국내 유명인들의 입양사실 발표와 사회적 인식의 변화 등으로 차츰 국내공개입양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땅에서 태어난 많은 아동들이 사회적 무관심과 경제적인 이유로 국내가정에 입양되는 숫자보다 외모, 언어, 문화가 다른 먼 이국땅으로 더 많이 보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2005년 한해 입양 아동 수는 3562명이고 이중 2101명이 해외로 입양됐다. 국내입양은 절반에 못 미치는 1461명(41%)으로 특히, 국내입양의 경우 대부분 ‘비밀입양’을 하는 것이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대한사회복지회 선혜경 입양부장은 “유독 핏줄을 중시하는 혈연주의와 경제적 부담이 국내입양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며 “ 고아수출국이라는 오명을 씻기 위해서는 입양문화 의식의 변화와 함께 제도적 개선책도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입양가족에 대한 정부의 경제적 지원은 미미한 상태다. 지난 2월 세 번째로 새별(8)이를 공개입양한 안나오미(33·서울 노원구)씨는 “입양할 때 알선기관에 내는 200만원 상당의 알선료가 경제적으로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 ‘돈을 지불하고 아기를 사온 것’으로 바라보는 사회적 편견이 더 힘들다.”며 “입양수수료 문제만이라도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취재기간 내내 눈 맞출 곳 없어 허공만 쳐다보는 아기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입양이라는 제도를 통해 가정에서, 사랑과 관심으로 이 아이들을 보살펴야 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자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이들은 ‘부자(富者)인 부모가 필요한 것도, 완벽한 환경도 아닌, 오직 가족의 사랑과 눈 맞춤’이 필요한 연약한 아이들이다. 글 사진 최해국기자 seaworld@seoul.co.kr
  • [길섶에서] 알람 공해/육철수 논설위원

    아침 단잠을 깨우는 알람은 귀찮지만 제때 일어날 수 있어 편리하다. 아내보다 일찍 일어나는 편이어서 알람이 울리면 기상과 동시에 곧바로 끄는 게 습관이 됐다. 모자라는 잠을 몇분 더 채우더라도 일단 알람을 끈다. 곤하게 자는 아내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다. 맞벌이에다 중·고교에 다니는 아이가 셋이다 보니 아침마다 각자 휴대전화 알람이 순서대로 요란하게 울린다. 한 아이가 안 일어나면 그 알람은 5분마다 이어진다. 어쩌다 평일, 집에서 쉬면서 늦잠이라도 청할 요량이면 아침에 족히 1시간은 알람공해에 시달려야 한다. 아이들에게 “다른 식구를 생각해서라도 알람이 울리면 좀 일어나라.”고 당부해 보지만 소용 없다. 그렇다고 새벽녘까지 공부하고 잠든 아이들을 매정하게 깨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짜증을 꾹 참고 이 방 저 방 다니면서 알람끄고 그때부터 육성으로 하나하나 깨우다 보면, 모처럼 쉬는 날 아침잠은 어느새 확 달아나 버리고 만다. 가족끼리라도 최소한의 공중도덕을 지킬 법도 한데…. 애꿎게 문명의 이기를 탓해 본들…. 산새들의 지저귐에 벌떡벌떡 일어났던 어린 시절 고향집이 그리워진다.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씨줄날줄] 라일락/이용원 논설위원

    봄이 오는가 마는가 했는데 어느덧 5월이다. 봄이 왔음을 일깨우는 꽃이 한 둘이 아니지만 그 가운데서도 유독 라일락꽃에 집착하는 까닭은, 어려서 집 뜰에 있던 라일락 두 그루가 뿜어내던 향기를 아직 잊지 못해서일 것이다. 해마다 4월 중순이 돼 라일락이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리고, 그 짙은 내음이 골목을 점령하면 우리 식구는 한동안 이웃사람들 인사 받기에 바빴다. 라일락꽃을 봄의 전령으로 인정한 시인은 적지 않다. 영국 시인 T S 엘리엇은 그 유명한 시 ‘황무지’에서 ‘4월은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추억과 욕정을 뒤섞으며/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겨울은 차라리 따뜻했다’라고 노래했다. 우리 시인 한하운도 ‘라일락꽃’에서 ‘밤하늘의 은별 금별’과 ‘눈물 겹도록 귀여운 소녀의 눈’을 보았다. 그러나 올해는 라일락꽃이 광채를 잃었다.4월 말까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온 한기(寒氣)의 여파일까, 아니면 라일락조차도 황사에는 두 손 들었기 때문일까. 그 옅은 자주색 꽃잎은 왠지 탈색한 듯하고, 그 곁을 지나쳐도 진한 꽃내음을 맡기가 힘들다. 며칠전 출근길에, 앞서 가던 동료 여사원 하나가 사옥 앞 라일락 나무의 꽃무더기를 손으로 훑더니 그 손을 살며시 코 끝으로 가져갔다. 잃어버린 봄의 향기를 아쉬워하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2006년 4월은 잔인했다. 날씨가 우리의 기대를 배반한 것 말고도, 밖으로는 독도 문제를 두고 일본과 팽팽한 긴장 관계를 지속했고 안으로는 현대자동차 비리 등 대형사건이 잇따라 터졌다. 국민에게는 봄이 와도 봄 같지 않은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러나 계절의 여왕 5월이 왔다. 시인 노천명이 ‘청자빛 하늘이/육모정 탑 위에 그린 듯이 곱고/연당 창포잎에/여인네 행주치마에/첫 여름이 흐른다//라일락 숲에/내 젊은 꿈이 나비같이 앉은 정오/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 앞에’(‘푸른 오월’)라고 읊은 그 시기이다. 이제 어두운 기억을 모두 떨쳐버리고 신록의 푸르름과 함께 사회의 활력을 되찾자.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힘을 합쳐 해내야 할 일이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seoul.co.kr
  • [女談餘談] 홀로되신 시어머니/김수정 정치부 기자

    4월 셋째 주. 활짝 핀 진달래가 민망하게도 뒷산 꼭대기에 쌓인 흰눈을 바라보며, 일흔여덟의 시어머니는 당신의 남편을 집 뒤 선산에 모셨다. 집이 아닌 곳에서 잠자는 걸 끔찍이나 싫어하던 시아버님의 성격 때문에 18세 때 결혼한 이후 60년을 하루도 빼지 않고 함께한 남편이었다. “꽃을 좋아하셨으니 좋은 때 잘 가신 거다.”“편안히 성모님 곁으로 가신 거다.” 철늦게 매운 바람이 몰아치는데도 ‘좋은 때’만 강조하셨다. 최면을 걸고 계신 듯했다. 산에 모시고 집으로 돌아온 그날 시어머니는 아들·며느리들을 모아놓고 파격적인 요청을 하셨다.“니들 아버지가 쓰던 침대를 치웠으면 좋겠다. 십수년 안 바꾼 벽지도, 바닥 장판도 바꿨으면 한다. 시커먼 장식장도 버려라.” “맞아요. 그렇게 하세요. 어머니”. 어느 자식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이심전심. 홀로 남은 시어머니가 60년을 함께한 남편을 보내는 날, 눈물을 삼키며 새 세상을 맞고자 하는 의지에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자식들에 기대지 않으려는 여든 살 시어머님의 ‘처절한 몸부림’같았다. 시어머님의 손아래 시누이도 시가쪽 식구이련만,“잘 생각했어요. 오빠 때문에 못 불렀던 친구들도 집으로 부르고 그러세요.”라며 힘을 보탰다. 막내며느리로, 그동안 힘쓸 일이 없었던 나는 식구들의 핀잔까지 들어가며 요즘 유행한다는 ‘포인트 꽃 벽지’로 집을 단장했다. 곳곳의 먼지도 다 털어냈다. 장롱 속에선 60년전 사주단자(四柱單子)도 나왔다. 평소 물건 버리는 걸 그렇게나 싫어하시더니,“다 버려도 된다.”며 무한 권한을 주신다. 자식들을 서울로 보낸 뒤 넓은 집에 홀로 남으신 시어머니. 사회문제 이슈로 접해온 이른바 ‘전국 68만 독거(獨居)노인’ 대열에 드신 게 아닌가. 남의 일이 아니었구나. 갑자기 우울증이라도 찾아오면 어떡하나. 돌아가신 아버님도 최근 수년 우울증 때문에 억지소리, 험한 말도 많이 해 어머니가 속앓이를 하셨다는데…. 이번 주말 찾아뵙겠다는 전화에 “어서 오너라.”라고 하신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엔 “오지 마라. 피곤이 풀리게 푹 쉬어.”하시던 시어머님이다. 김수정 정치부 기자 crystal@seoul.co.kr
  • ‘카메라 열정’ 하나로 해외시장 진출

    ‘카메라 열정’ 하나로 해외시장 진출

    얼마나 암담했던지요. 남들은 좋은 직장 들어가서 자리 잡아 나가는데, 저는 음침한 도서관만 전전했지요. 취직한 친구들을 만나면 괜스레 나만 못났다는 생각에 잠도 안 왔습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로 했어요. 바로 카메라 가게를 차리는 것이지요. 드넓은 중국 대륙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기차로만 꼬박 30시간 걸리는 곳에 가는 것도 신났어요. 그곳에 가면 카메라가 있으니까요. 이제 웬만한 카메라 동호인들은 우리 물건을 제법 알아준답니다. 자, 가슴을 펴고 하늘을 보세요. 누구 말대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으니까요. 글 김유영기자 carilips@seoul.co.kr 사진 김명국기자 daunso@seoul.co.kr ‘청년실업 50만명 시대’에 해외 시장에 진출해 창업에 성공한 젊은이가 있다. 주인공은 인터넷 쇼핑몰 ‘레드카메라(www.redcamera.co.kr)’의 김주섭(34)씨. 클래식 카메라, 토이 카메라, 폴라로이드 카메라, 바늘구멍 사진기 등 톡톡튀는 카메라를 취급한다. 2001년 중국에 있는 친구로부터 카메라를 공급받아 판매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집에서 일했지만, 이제는 서울 중구 신당동에 40평짜리 사무실을 마련했다. 김씨는 어엿한 사장님이고, 친구는 중국 지사장. 이들을 포함해 모두 6명이 레드카메라를 이끌고 있다. ●눈칫밥 백수생활 굿바이 원래 김씨의 꿈은 해운업계의 ‘마도로스’였다. 전공을 바꿔 다시 대학에 입학, 무역학을 공부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외환위기로 어렵던 1999년 학교를 졸업해도 김씨가 일할 곳은 없었다. 토익 점수도 그리 좋지 않은 데다 학교 성적도 뛰어나지 못했다. 열정만으로는 모자랐다. “도서관을 전전하면서 부모님 보기에도 부끄러웠지요. 남들은 좋은 직장 들어가서 자리잡아가고 있는데, 저는 공부도 늦게 시작해 일자리도 못구하고…. 결국 뉴질랜드로 어학연수를 떠났지만 그곳에서조차 제 자신이 못났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날 중국에 교환학생을 가있는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중국·러시아 카메라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 돈벌이가 되지 않겠냐는 것. 카메라 하면 죽고 못사는 김씨였기에 친구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김씨는 고교 시절 1년 넘게 어머니를 졸라 수동 카메라를 산 뒤 언제 어디를 가나 카메라를 갖고 다녔다. ●중국 샅샅이 뒤지며 사들여 국내서 판매 김씨는 뉴질랜드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짐만 풀고, 다시 중국으로 떠났다. 일단 친구를 만났다. 베이징, 상하이, 쿤밍, 광저우 등 중국을 헤집고 다니면서 카메라를 사들였다. 기차로만 꼬박 2박3일 걸리는 곳에 가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 어딜 가도 카메라가 있기 때문이었다. “중국 시장이 어마어마하게 큰 만큼 카메라에 대해서도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중국을 다니면서 ‘그래, 취업은 포기하자. 내 사업을 해서 부모님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자. 보란 듯이 성공하겠다.’는 생각이 마구 솟구쳤지요.” 중국에 친구를 남겨두고 김씨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홈페이지를 만들어 현지에서 사온 카메라를 하나씩 하나씩 팔았다. 친구가 물건을 보내주면, 김씨가 홈페이지에 사진을 올리고 되파는 방식이다. 상호는 ‘레드 카메라’로 정했다. 주력 상품이 러시아·중국·동독 등 공산권 카메라이고, 공산권 국기 색이 빨간색이어서 붙인 이름이다. ‘틈새시장’을 뚫은 덕분인지 카메라 한 종류당 1000만원어치가 팔려나가는 등 ‘대박’이 났다. 김씨를 볼 때마다 혀를 끌끌 차던 어머니의 잔소리도 줄어들었다. ●발품+성실로 불황 타개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이용자 집단도 한정돼 있고 유사 업체도 생겨나면서 판매세가 주춤했다. 더욱이 중국 위안화 절상으로 가격 경쟁력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다. 우선 대형업체에 납품하기로 마음먹었다. 쉽지 않았다. 기존에 물건을 공급한 업체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던 셈. 남들이 팔지 않는 상품을 대량 공급하는 것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중국에서는 발품을 더 팔아 보다 독특한 카메라를 발굴했다. 문제는 한국에서 제품을 사들일 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은행에 대출받으려고 했더니 담보를 요구했어요. 집은커녕 자동차도 없는데 대출 받는 것 자체가 무리였던 셈이지요. 그런데 서울신용보증재단에서 영세 사업자를 위한 특별대출을 해준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덕분에 담보·보증 없이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고, 점찍어 뒀던 카메라를 사들일 수 있었습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인터넷 쇼핑몰에서는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상품이 모두 동나게 됐다. 이를 바탕으로 대형 업체에도 납품을 하기 시작했다. 한 군데 판로를 뚫으니까 다른 곳에도 판로가 생겼다. 김씨는 현재 이마트, 코즈니,10X10 등에 카메라를 공급하고 있다. 또 하나의 전략은 인터넷 쇼핑몰에 사진을 띄우는 일. 제품인 카메라 사진만 올리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로 찍은 사진도 홈페이지에 올려서 카메라에 대한 관심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좋아서 찍기 시작한 게 먹고 살기 위해 찍는 것으로 변한 셈이었다. 자동카메라와 달리 수동카메라는 색감이 예쁘게 나와서 매력이 있었다. ●취업보다 나은 창업 선택 김씨에게 취업보다 창업이 더 나은 선택이었는지 물었다.49%는 아쉬운 마음이지만,51%는 여전히 잘한 결정이었다고 답했다. 중소 업체인 만큼 대형 업체에 물건을 공급하면 60일이 지나서 대금을 받는 등의 애로사항도 있다. 생각만큼 물건이 안 팔릴 때면 머릿 속은 복잡하기만 하다. 일단 딸린 식구들의 월급은 꼬박꼬박 챙겨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김씨는 자신이 일궈낸 만큼 성취감도 크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했다. “조건 좋은 회사라면 누구도 마다하지 않겠지만 그런 곳에 들어가는 게 현실적으로 힘들 수도 있지요. 번듯한 직장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다면 더 없이 행복할 수 있을 겁니다.” 김유영기자 carilips@seoul.co.kr
  • [여성&남성] 사랑을 식게하는 말들

    [여성&남성] 사랑을 식게하는 말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을 수 있다지만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 별 생각 없이 습관처럼 하는 말이 상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고 심지어 이별을 불러올 수 있다. 애인 혹은 배우자에게 듣기 싫어하는 말에 대해 여성과 남성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혹시 평소에 비슷한 얘기를 자주한다면 지금부터 고쳐보면 어떨까. 여자친구와 4년째 사귀고 있는 오모(28)씨. 언제부턴가 자신이 실수를 할 때면 여자친구가 “남자들 다 똑같아.”라고 말해 기분이 상한다. 오씨는 “내 입으로도 농담 삼아 ‘남자들 다 늑대야. 믿지마.’라고 말하긴 한다.”면서 “하지만 여자친구 입에서 그런 얘기를 들으면 도매금으로 나쁜 놈 취급 받는 것 같아 듣기 싫다.”고 말했다. 맞벌이를 하고 있는 강모(35)씨는 남편이 입버릇처럼 “피곤하다.”고 말하는 것이 싫다. 강씨는 “똑같이 밖에서 일을 하는데 혼자 매번 피곤하다는 말로 대화를 피한다.”면서 “같은 말이라도 좀 기분 나쁘지 않게 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비교하는 말은 금물 많은 연인 혹은 부부들이 이같은 말을 무심결에 내뱉고 있다. 막상 화를 내기엔 소심해 보일 것 같아 애써 표정 관리를 하지만 듣기 싫은 게 사실이다. 사랑하는 사람간에 피해야 하는 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이다. 설사 농담이라고 해도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냥 웃어 넘기기 쉽지 않다. 최근 여자친구와 헤어진 김모(29)씨는 예전에 사귀던 남자와 비교 당할 때면 참을 수 없었다.“오빠는 이렇게 좀 해주면 안돼?”“예전 남자친구는 안 그랬는데.”라고 말할 때면 평소 사랑스러웠던 여자친구가 그 순간만큼은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결혼 5년차인 이모(37)씨는 아내가 옆집 남자 얘기를 할 때면 담배를 들고 베란다에 나간다. 이씨는 “주말에 요리를 해줬다든지 결혼기념일에 어디에 갔다 왔다더라 같은 얘기를 들을 때면 스트레스를 받는다.”면서 “그나마 연봉으로 비교당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지만 기분 나쁜 건 사실”이라고 털어놓았다. 비교 당하는 게 싫은 건 여자도 마찬가지다. 대학원생 이모(27)씨는 남자친구가 연예인과 자신을 비교할 때면 짜증이 난다.“그냥 해본 소리야.”라고 말해 화를 낼 수도 없지만 들을 때마다 남자친구 입을 막아버리고 싶다. 또 다른 이모(27)씨도 예전에 사귀던 남자친구로부터 비슷한 얘기를 자주 들었다. 이씨는 “처음에는 ‘내 눈에는 네가 제일 예뻐.’라고 말하던 사람이 시간이 좀 지나자 ‘너는 친구들처럼 요가나 헬스 안 하냐.’라는 말을 했다.”면서 “그러면서도 꼭 얘기 끝에 ‘넌 지금도 예뻐.’라고 말해 화도 낼 수 없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넌 몰라도 된다고? 자신을 무시하는 말에 기분좋은 사람이 있을까. 설사 진심은 아니더라도 뭔가 감추거나 내가 하는 행동을 무시하는 듯한 말투에 사랑은 점점 식어간다. 두 살 많은 남자친구와 4년째 사귀고 있는 이모(25)씨. 남자친구가 자기 식구들과 길게 통화하거나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는데 “아무 일도 아냐.”“몰라도 돼.”라는 식으로 이야기할 때면 기분이 나쁘다. 이씨는 “여자친구이니 문제가 있으면 같이 털어놓고 공유하고 싶은데 그런 말을 들으면 무시당하는 것 같고 겉도는 기분이 들어 속상하다.”고 했다. 임모(27)씨 역시 남자친구에게 뭔가를 물어봤을 때 “됐어.”“별거 아냐.”라면서 숨기려고 할 때면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저도 숨기고 싶은 일이 가끔 있죠.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래도 습관처럼 저런 말을 내뱉는 남자친구가 때로는 야속해요.” 2004년 결혼해 지난해 말 아기를 얻은 정모(30)씨는 부인이 ‘남자’를 무시하는 듯한 말을 할 때면 섭섭하다. 얼마 전에는 새로 산 아기 카시트를 뒷자석에 고정시키는 방법을 잘 몰라 이것저것 시도하자 아내가 “그것도 잘 못하냐. 빨리 좀 해봐.”라며 신경질을 냈다. 정씨는 “사실 남자는 언제나 인정받고 싶은데 그런 걸 헤아려줬으면 좋겠다.”고 귀띔했다. ●대답이 짧으면 사랑도 줄어든다 오는 10월 결혼하는 박모(30)씨는 예비 남편에게 불만이 딱 한 가지 있다. 지나치게 말이 없는 것. 처음에는 과묵한 모습에 반했지만 사귄 지 2년이 조금 안 된 지금은 답답할 때가 많다. 박씨는 “나도 말이 많은 편이 아닌데도 데이트할 때면 거의 혼자서 말을 한다.”면서 “남자친구가 하는 말은 주로 ‘응.’‘알았어.’‘여기 맛있네.’‘다 먹었어?’ 정도”라고 전했다. 회사원 정모(29)씨가 남자친구에게 기대하는 것은 좀더 적극적인 ‘맞장구’다. 하지만 자신이 무슨 얘기를 하면 집중해서 들어주긴 하지만 다 듣고 나서 “그렇구나.”라는 말, 딱 그 한마디밖에 없다. 지난해 결혼한 차모(29)씨는 차라리 아내가 과묵하다면 덜 서운할 것 같다. 가끔은 수다라고 여겨질 만큼 말이 많지만 대부분 자기 얘기다. 차씨가 뭔가를 얘기하면 “그래?”라고 말한 뒤 “있잖아 근데 말이지.”라며 금세 화제를 자기 얘기로 바꾼다. 그는 “나도 잊고 있던 얘기를 아내가 기억 하고 있을 때면 혼자 떠든 건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을 한다.”면서 “그럼에도 평소 아내의 짧은 대답은 조금 아쉽다.”고 했다. ●헤어지자는 말은 아껴라 헤어지자는 말을 밥 먹듯 하는 것도 많은 연인들의 불만 사항이었다. 김모(29)씨는 “사귀다 보면 싸울 수도 있지만 그때마다 헤어지자고 하면 곤란하다.”면서 “최대한 이해하려고 하지만 ‘헤어지자.’는 말을 들으면 막상 화를 억누르기 힘들다.”고 했다. 나길회 이재훈기자 kkirina@seoul.co.kr
  • [씨줄날줄] 교원단체 3파전/오풍연 논설위원

    민주화와 함께 현장 교사들의 목소리도 점차 커지고 있다. 전국의 교원 수만 48만여명에 이르는 만큼 거대한 이익집단으로 볼 수 있다. 게다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이어서 정치·사회적 영향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자녀를 가진 학부모들이 교사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지금 교단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다. 정부가 복수노조를 허용한 탓이다. 교원단체의 효시(嚆矢)는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이다.1947년 11월23일 출범했다. 현재 190개 시·군·구 교원총연합회,1만 1000여개 분회에 18만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있다.1989년 5월2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설립되기 전까지는 거의 독점적 지위를 누렸다. 전교조는 조합원 수(8만명 주장)에 있어서는 교총보다 열세지만 투쟁력은 한 수 위다. 교직원이 교육의 주체로서 민족·민주·인간화교육을 실천하기 위한 참교육 운동을 내세우며 세 확산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한계에 부딪혔다는 지적도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다. 이념교육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총과 전교조간 대립으로 학생들의 피해 역시 적지 않았다. 그런데 엊그제 또 하나의 교원 단체가 탄생했다.‘반(反) 전교조’를 기치로 내건 자유교원조합(자유교조)이 그것이다. 그들의 정책을 들여다 보면 전교조와 정반대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대학입시 전면자율화, 자립형 사립학교의 자유 설립, 학교별 특성화된 교원평가제 실시 등 파격적 과제를 제시했다. 정부의 3불 정책(고교등급제·기여입학·본고사 금지)을 신랄히 꼬집기도 했다. 아울러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옹호하고 헌법적 가치를 수호해 애국운동의 선봉에 서겠다.”는 우익적 주장을 폈다. 물론 교원단체의 설립은 자유다. 그렇더라도 학생, 학부모, 교사가 학교운영의 주체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따라서 교육이 이념적인 잣대로 재단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념투쟁 및 정치적 수단으로 악용되는 것도 좌시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까지 학생교육을 담보로 한 어떠한 시도도 성공하지 못했다.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교원단체간 내 식구 늘리기도 볼썽사납다. 그보다는 합리적 정책 발굴과 대안 제시로 선의의 경쟁을 하기 바란다. 오풍연 논설위원 poongynn@seoul.co.kr
  • [생활의 지혜] 고기 먹고 체했을 때

    식구들과 고기를 맛있게 먹다가 갑자기 체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파인애플을 먹으면 금방 내려간다. 파인애플이 고기를 연하게 해주기 때문에 갈비나 불고기를 잴 때에도 파인애플을 이용하면 좋다.
  • [농업 희망을 쏜다] (3) 농가 소득보전 가능한가

    [농업 희망을 쏜다] (3) 농가 소득보전 가능한가

    # 1.전북 김제시 황산면에서 벼 농사를 짓는 김진필(44)씨는 쌀소득보전 직불금 얘기를 꺼내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김씨는 “정부의 말과 현실은 다르다.”고 말했다. 농지 1만 2000평(4㏊)을 경작하는 김씨는 “이 곳의 쌀 값은 정부가 직불금 산정을 위해 발표한 전국의 평균 가격에 훨씬 못 미쳐 다소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제 지역에선 80㎏짜리 흰쌀의 평균 가격이 12만원선이다. 하지만 정부가 직불금 산정 기준으로 발표한 전국의 평균 가격은 14만원선이다. 때문에 가격에서 차이가 나는 2만원만큼은 소득보전을 받지 못한다. 반면 경기도 지역은 14만원 기준으로 소득보전을 받으면서도 시장에서는 20만원을 받고 쌀을 팔아 ‘꿩먹고 알먹는 격’이라고 김씨는 볼멘 목소리다. # 2.경기 연천군에서 쌀 농사를 짓는 이강옥(47)씨는 “직불금이 실제 경작자에게 돌아가지 않는다.”고 안타까워 했다. 이씨는 3만평 규모의 논에서 벼농사를 짓는다. 하지만 2만 5000평의 주인은 따로 있다. 땅 주인에게 매년 2000만원의 임차료를 내고 소작을 한다. 이씨는 지난해 소득보전직불금으로 약 300만원을 지급 받았다. 하지만 100만원은 땅 주인에게 줬다. 땅 주인이 ‘내 논 때문에 나온 직불금이니 그만큼을 임차료로 올려 받겠다.’고 따져 마지못해 내놓았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소득보전직불금 제도를 놓고 일부 불만이 표출되고 있다. 농림부는 직불금으로 쌀값 하락의 대부분을 보전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쌀 값의 지역별 편차와 실제 경작자를 구분하지 않아 실효성이 떨어지는 부분도 없지 않다. ●농림부,“소득보전 문제없다” 소득보전직불제는 고정직불제와 변동직불제로 나뉜다. 고정직불제는 벼를 심지 않아도 농지 1㏊(3000평)당 평균 70만원을 지급해 준다. 변동직불제는 쌀을 생산했을 때 목표가격과 전국 평균가격을 산정한 뒤 차액의 85%를 지급한다. 예컨대 목표가격이 80㎏ 1가마당 17만원, 평균가격이 14만원이라면 차액 3만원의 85%인 2만 5500원을 쌀 농가에 지원한다. 농림부는 “올해 소득보전직불금을 80㎏짜리 쌀 1가마당 2만 5046원으로 확정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지난해 쌀을 재배한 농가들은 산지 쌀값과 관계없이 80㎏ 1가마당 평균 16만 5574원을 보장받는다. 이는 내년도 쌀에 적용할 목표가격의 97.3%에 이르는 수준이다. 농림부 관계자는 “과거 다른 제도보다 높은 수준으로 소득을 보전, 쌀 값 하락에 대한 농민들의 불안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농민단체,“농촌 양극화 더욱 심화돼” 하지만 농민들의 불만은 적지 않다. 산지 쌀값은 제각각인데, 소득보전은 전국 평균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더욱 심화된다는 것이다.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한농연)가 최근 600평 이상 벼 농사를 짓는 농가 250가구를 상대로 실태조사를 한 결과, 월 평균수입은 85만 3425원으로 전년도보다 4.6% 하락했다. 한농연 박상희 정책조정실 과장은 “쌀 값 하락만큼 소득보전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뜻”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전국의 평균가격보다 쌀 값이 낮은 전라도와 충청도의 경우 소득보전 손실이 크다. 전남 지역은 80㎏짜리가 13만 1000원으로 전국 평균가격보다 9000원 정도 싸다. 박 과장은 “전남 지역을 평균 쌀값이 18만원 이상인 경기도와 강원도 기준에 적용하면 약 2000억원의 추가소득을 보전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지역별로 평균가격 차등 산정하고 소작농 보호 방안 필요 윤석원 중앙대 산업경제학과 교수는 “최소한 도별로 평균 가격을 차별화하고, 목표 가격과 평균 가격의 소득 보전 비율을 95% 수준으로 끌어 올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윤 교수는 “캐나다처럼 개별 농가를 기준으로 소득을 보전해 주는 ‘농가소득안전망 도입’도 필요하다.”면서 “소득이 안정됨에 따라 과잉생산이 우려되면 농지를 휴경시키는 ‘생산조정제’를 도입해 보완하면 된다.”고 강조했다. 소작농에 대한 정부의 관심도 필요하다. 농촌경제연구원 박동규 박사는 “현행법은 직불금이 실제 경작자에게 돌아가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소작농의 경우 직불금이 임차료 인상 문제로 연결돼 곤란을 겪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국내 소작농의 비율은 42%에 이른다. 그는 “법으로 통제하기는 어렵지만, 미국처럼 지자체나 정부가 나서 소작농과 땅 주인간 갈등을 중재하는 방안을 고려해 볼만하다.”고 말했다. 목표 가격과 평균 가격 모두를 시·도별로 따로 정하는 게 상황에 따라서는 보다 효율적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한농연 등 농민단체들은 쌀소득보전직불제 개선 방안으로 “물가상승률과 생산비 단가상승을 감안해 목표 가격을 산정하고, 평균 가격도 도별로 책정할 것”을 제시했다. 또 미곡종합처리장(RPC)이 희망 농가의 물량을 전량 수매하고, 남는 물량은 정부가 공공비축제도로 수매하는 ‘전량수매제도’의 도입 등도 주장했다.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미곡처리장 광역화가 유통개혁 관건 ‘미곡종합처리장(RPC)을 유통개혁의 전초기지로.’ 품질이 좋은 쌀을 생산한다고 해서 농가 소득이 바로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유통 비용을 줄이면서 제값에 팔아야만 농가가 넉넉해질 수 있다. RPC는 쌀의 건조와 저장 및 가공에서 포장과 판매까지 도맡아 처리하는 시설이다. 무역에서의 ‘종합상사’와 같은 역할을 한다.2005년 말 전국의 RPC는 328개로 농협 소속이 181개를 차지한다. 농협 RPC를 통해 판매된 쌀은 지난해 1조 7891억원에 이른다. 과거에는 벼를 수확한 뒤 탈곡→건조→포장·저장→도정→도매상→소매상→소비자로 이어지는 7∼8단계의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하지만 RPC가 탈곡∼도매 과정을 한꺼번에 처리하면서 수확→탈곡·도매(RPC)→소매상→소비자의 4단계로 쌀 유통 과정이 단축돼 관리비용이 크게 줄어들었다. 농협 관계자는 “RPC를 활용한 결과 수확에서 도매까지 들어가는 비용이 35% 줄었고, 미곡의 손실률도 6%에서 1%로 낮아졌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고 말했다. 농협은 올해 쌀 판매액을 지난해보다 6% 더 늘린다는 목표 아래 요식업체, 병원, 학교 등 쌀 소비량이 많은 기관들에 대한 마케팅을 강화한다는 계획이다.RPC 운영조합장들도 지난달 결의대회를 갖고 고품질 쌀 생산과 판매에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RPC의 통합이나 대형화는 유통개혁의 핵심이다. 대형 RPC는 유통·관리·생산 등 분야별로 인력을 나눠 전문성을 높일 수 있다. 농민들도 대규모 유통 체계가 갖춰져야 대형할인점 등에 제값을 받고 쌀을 팔 수 있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RPC의 역할이 농가소득과 직결된다는 주장이다. 이에 농협은 RPC를 시·군당 1개로 통합, 오는 2010년까지 100개로 줄인다는 계획이다. 이미 10여개를 통합했다. 윤석원 중앙대 산업경제학과 교수는 “RPC간 통합이 어려울 경우 공동의 쌀 브랜드을 개발, 연합 마케팅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제안했다. 장택동기자 taecks@seoul.co.kr ■ 농업인 설문조사 “소득증대 정책 시급” 68% “5년뒤 농촌 더 악화” 75% 쌀 시장 개방을 맞아 농민들이 1순위로 바라는 농업정책은 ‘농가소득보전’으로 나타났다. 현행 ‘쌀소득보전직불제’에는 5명 중 3명 정도가 도움이 된다고 여겼고 나머지는 불만이다. 또 수입쌀 시판과 그에 따른 쌀값 하락이 농촌 황폐화보다 더 심각한 문제로 여기고 있으며 5년 뒤의 농촌생활은 더 악화될 것으로 내다봤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지난해 말 전국 농업인 690명을 상대로 ‘농업인 의식구조 변화와 농정 현안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정부가 중점적으로 추진해야 할 정책으로 67.9%가 ‘직접지불제 확충과 농외소득 증대 등 소득정책’을 꼽았다. 특히 ‘쌀소득보전직불제’에는 59.7%가 ‘도움이 된다.’고 응답했다. 반면 38.3%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해 제도보완이 필요한 것으로 지적됐다. 앞으로 확대돼야 할 농촌 투·융자 사업으로도 ‘다양한 직접지불제 실시’(12.3%)를 꼽았다. 쌀 개방과 관련해 가장 우려되는 부분으로는 52.9%가 ‘수입쌀 시판에 따른 쌀값 하락과 벼농사 기반 잠식’을 들었다. 이어 ‘쌀 농사 포기에 따른 농촌 황폐화(29.6%)’,‘농업인의 농정불신 심화로 향후 정부정책 차질 불가피(16.6%)’ 등으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 가장 시급한 대책으로는 63%가 ‘쌀값 하락으로 인한 농가소득 보전방안’이라고 답했다. 특히 경지 면적을 조정할 의사가 있느냐는 질문에 40.6%는 ‘소득보장 대책을 보고 결정’ 또는 ‘축소할 계획’으로 답해 불안감을 드러냈다. 또 74.5%가 ‘5년 뒤 농촌생활이 현재보다 악화될 것’이라고 답해 2003년 66.5%,2004년 67.8%에 비해 미래를 어둡게 봤다. 반면 ‘살기 좋아질 것’이라는 대답은 6.8%로 지난해 7.8%보다 낮아졌다. 정부가 강조해 온 ‘친환경 농업’과 관련, 일반 농업에 비해 ‘소득이 비슷하거나 오히려 감소했다.’는 의견이 74.3%나 됐다. 이 가운데 73.5%는 ‘친환경 규모를 유지하거나 축소하겠다.’고 밝혔다.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30년 봉사의 삶 ‘아름다운 중년’

    “삶이 끝나는 그 날까지 도울 겁니다. 단 한 명이라도 저를 필요로 한다면….” 자신도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커피숍 여주인이 30여년에 걸쳐 버림받은 아이와 독거노인 등 36명을 돌봐온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서울 하왕십리동에서 커피숍을 운영하는 이은주(여)씨가 지금까지 키워낸 아이들은 무려 19명. 그동안 보살펴 온 할머니도 17명이나 된다. 자신의 친자식 5남매까지 합치면 모두 41명을 돌봐온 셈이다. 데려와 키운 아이 중 14명은 고등학교나 군을 마치고 자립해 이씨 곁을 떠났고 할머니도 8명이 세상을 떠나 지금은 14명이 이씨의 도움을 받고 있다. 이씨는 커피숍 운영과 부업으로 번 돈에 손님들이 저금통에 모아준 성금을 보태 생활비와 아이들 학비, 방세를 마련해 왔다. 가게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가운데도 할머니들 식사는 자기 손으로 마련한다. 아이들도 모두 자신의 호적에 올렸다. 이씨가 이들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30여년 전. 혼자 사는 한 할머니를 소개받아 다방에 딸린 방에 모시면서부터다. 이후 불쌍한 아이와 노인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왔고 그때마다 식구로 삼았다. 어느덧 이씨의 새 식구는 30명을 훌쩍 넘어섰다. 신기하게도 봉사하는 삶을 살면서 병은 저절로 나았다. 처음엔 이씨를 극구 말리던 남편과 자녀들도 아픈 몸을 내던져 남을 위해 일하는 것을 보고는 든든한 후원자로 돌아섰다. 이씨는 “때론 힘들어 포기하고 싶은 적도 많았지만 사람의 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끊을 수가 없더라고요.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과 할머니들이 음식을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면서 돌아가신 친정아버지 생각에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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