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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섶에서] 첫 봉급/이용원 특임논설위원

    온 가족이 모인 이번 설에 화제는 단연 장조카의 ‘첫 봉급’이었다. 취직해 1월 말 처음 월급을 탄 조카아이는 식구들을 한자리에 모으더니 봉투 하나씩을 내밀었다. 할머니·아버지·어머니 것에는 각각 50만원을, 여동생 것에는 10만원을 담았다. 그러더니 첫 월급 200만원은 식구들이 나눠 썼으면 한다면서, 다음 달부터는 제 용돈 50만원만 남기고 나머지는 저축해서 집을 따로 마련하겠다고 했다. 장조카는 착하되 소심했고, 영리하되 허약했다. 그래서 입대 후 전방에서 근무할 때는 할머니의 걱정이 끊이질 않았다. 본인도 꽤나 힘들어했다. 하지만 제대 후에는 심신이 모두 강건한 젊은이로 변해 공부에도, 아르바이트에도 적극적이 되었다. 이제 취직을 하였으니 앞가림은 하게 됐다. 게다가 가족을 배려하고 제 미래를 준비하는 마음 씀씀이를 보면 앞으로도 성실한 사회인으로 살아갈 터이다. 아이들이 커가는 걸 확인하면서 내 나이 한살 더 먹는 게 하나도 억울하지 않은, 유쾌한 설날 아침이었다. 이용원 특임논설위원 ywyi@seoul.co.kr
  • [씨줄날줄] 예단(禮緞)/김성호 논설위원

    보통 사람이면 모두 거친다는 4가지 통과의례 관혼상제(冠婚喪祭)의 둘째인 결혼. 서로 다른 집안의 남녀가 ‘부부 연’을 맺는 결혼의 전제는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동고동락하는 백년해로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주변엔 중간에 파탄을 맞는 부부들이 숱하다. 작년 한해만 해도 12만쌍이 파경에 이르렀다니 한달 평균 1만쌍이 갈라서는 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의 이혼 수준이다. 다른 경제·문화적 배경의 남녀가 함께 살자면 어찌 갈등과 마찰이 없을까. 생활이 복잡다단해진 탓일까, 이혼 사유도 갈수록 다양해지는 추세다. 가장 큰 원인인 배우자의 외도부터 가정폭력, 도박, 경제적 무능력, 종교와 성격 차이, 가족과의 갈등…. 그런데 요즘 결혼 즈음에 주고받는 예단(禮緞)·예물을 둘러싼 불화가 부쩍 늘고 있단다. 결혼 초기의 파경이 적지 않고 초기 파혼의 주 원인 중 하나가 바로 혼수의 충돌이라니 서글픈 일이다. 혼수 중에서도 사치스러운 예단·예물은 파경의 큰 씨앗이다. 본디 예단·예물은 사랑의 징표요, 새 식구를 맞는 예절의 기본. 남의 딸을 달라는 청혼에 응한 여성 측을 배려한 감사 표시가 예물이었다. 예단도 남자가 여자 집에 장가 와서 살면서 함께 이룬 재산을 본가로 들어갈 때 가지고 갔던 것. 조선 중기 이후 전통 신분제 붕괴로 잘살게 된 계층에서 신분 과시차 사치스러운 예물·예단을 주고받기 시작한 게 호화 혼수의 시초란다. 예단·예물이 ‘잘간 시집, 잘간 장가’의 잣대가 되고 있으니 고약한 ‘사랑의 상품화’다. 불화를 겪던 부부가 결혼 5개월 만에 파경을 맞았다. 결정적 사유는 바로 예단비. 결혼 전 여자 측 부모가 남자 측에 보낸 예단비가 무려 10억원이고 그 가운데 예물비 명목으로 2억원을 돌려받았단다. 예단비 반환을 놓고 티격태격하던 부부가 맞소송 끝에 갈라선 것이다. 법원은 신랑 측에 예단비 8억원을 돌려주라는 판결을 내렸다는데. ‘혼인과정에서 주고받은 예단은 혼인이 성립하지 않으면 반환키로 조건이 붙은 증여와 성격이 유사하다.’는 판결의 파장이 만만치 않아 보인다. 일찍이 조선시대엔 ‘시집 가고 장가 가는데 재물을 논함은 오랑캐의 도’로 여겼다고 한다. 부부란 지게미와 쌀겨로 끼니를 이으면서도 새로운 세상을 함께 꿈꾸고, 두려울 것 없는 사랑의 힘으로 버텨가는 동행과 의지의 관계일 텐데. 돈으로 사고 파는 부부의 백년가약도 결국 허위와 허식으로 얼룩진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단면이 아닐까. 김성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부대예산 횡령의혹 장군 軍 ‘내사종결’ 결정 논란

    국방부가 부대예산을 횡령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장군에 대해 ‘내사종결’ 결정을 내려 ‘제 식구 감싸기’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해 12월 장군 진급 인사 직전 국방부 등에 접수된 육군 이모 준장에 대한 투서 내용 일부가 사실로 밝혀지는 바람에 이 준장이 전역 지원서를 내면서 양측에 대한 조사가 마무리됐다. 국방부 조사본부는 1일 “이 준장이 본인의 이름이 거론되고 평소 아끼고 좋아했던 후배로부터 투서가 있었다는 말을 전해듣고 사실 여부를 떠나 더는 부대지휘가 어려운 점 등을 이유로 전역 지원서를 제출했고 지휘계통에서 이를 승인했다.”고 밝혔다. 조사본부는 이어 “투서를 확인한 결과, 제보자는 문제가 많은 사람이 장군으로 진급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는 정의감에서 투서했으며, 부대 운영비 유용은 후배들과 사석에서 이 장군의 부적절한 예산 사용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작성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이 준장이 전역 지원서를 제출한 것은 수도권 부대의 헌병단장으로 근무하면서 공금을 횡령한 혐의가 포착됐기 때문이다. 군의 한 관계자는 “횡령 금액이 다양한 건에서 발생했다지만 건당으로는 큰 액수가 아니라서 수사를 시작했더라도 불구속 사안”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앞서 지난해 육군본부 수사단이 벌인 이 준장에 대한 투서 내용 조사도 부실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金배지 단 女의원들의 설 나기는

    金배지 단 女의원들의 설 나기는

    긴 설 연휴가 시작됐지만 여성들은 그리 반갑지 않다. 오죽하면 명절 스트레스가 부부싸움이나 직장을 옮기는 후유증보다 더 크다는 분석도 나올까. 시댁, 조상, 낯선 친척을 챙기느라 친정 부모님에게 소홀해지는 것까지 더하면 여성들에게 ‘명절 해방’은 괜한 소리가 아니다. 여성 국회의원이라고 다를 바 없다. 한나라당의 ‘입’으로 활약 중인 배은희 의원은 서울의 큰집에서 차례를 지낸다. 집안 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가 고향으로 간 탓에 평소 하지 않던 집안일까지 해야 한다. 배 의원은 “집에서 국회의원 티 내면 큰일난다. 며느리는 며느리일 뿐”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원내 대변인인 전현희 의원은 외동 며느리다. 올해도 경북 선산의 시댁으로 내려가서 오랜만에 가족, 친지들과 뜻깊은 시간을 보낼 계획이다. 전 의원은 “명절은 여성들에게 힘들다. 하지만 시어머니와 남편이 힘을 모아준다면 여성들의 소외감도 줄일 수 있다.”고 기대했다. 자유선진당 대변인을 맡고 있는 박선영 의원은 결혼 이후 명절 때마다 찾던 경기 여주의 시댁을 더 이상 가지 않는다. 올해부터 시어머니를 직접 모시고 있다. 손위 동서가 있지만 건강이 좋지 않은 탓에 사실상 맏며느리 역할을 한다. 박 의원은 “남편이 설거지는 해 주지만 한계가 있는 것 아니겠나. 명절을 쇠고 나면 입술이 터질 지경”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나라당 정미경 의원의 남편은 6남매 중 다섯째다. 명절이면 충남 청양의 시댁으로 향한다. 시아버지가 남편과 시동생에게 설거지, 청소를 맡겨서 명절 스트레스가 덜한 편이다. 곧 의정보고회를 해야 하지만 명절만큼은 못 다한 효도를 하려고 한다. 정 의원은 “정치인 며느리라 평소 부모님들께 잘하지 못해서 죄송하다. 이번에는 시어른들을 모시고 여행이라도 가볼 계획”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국회 여성가족위원장인 민주당 최영희 의원은 명절이면 홀로 지내시는 시어머니를 뵈러 간다. 올해 96세지만 정정한 편이라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최 의원은 “며느리가 일하면 우리 아들이 더 나서서 거든다. 오히려 시어머니들이 그런 경우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민주당 박영선 의원에게 설 명절은 휴가나 마찬가지다. 미국의 동서 집에서 지내는 시어머니가 해마다 신정을 쇠러 1월 1일에 서울로 나온다. 신정 무렵이 조금이라도 물가가 싸다는 이유였지만 ‘국회의원’ 며느리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배려였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고 한다. 박 의원은 “재래시장을 가보니 구제역 여파로 돼지고기 값이 2배로 올라 선뜻 사지 못하고 망설이는 분들이 많아 가슴이 아팠다.”며 안타까워했다. 올해 18년차 주부인 같은 당 김유정 의원은 설거지 전담이다. 시댁 식구들과 정치 얘기도 허심탄회하게 하는 편이다. 김 의원은 “시댁이 있는 원주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세가 강한 지역이지만 지난 재·보선에서 민주당이 시장을 거머쥐는 등 분위기가 달라졌다.”며 이번에도 민심 탐방을 게을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구혜영·장세훈·허백윤기자 koohy@seoul.co.kr
  • [女談餘談] 설날, 다문화사회의 핏줄/박상숙 산업부 차장급

    [女談餘談] 설날, 다문화사회의 핏줄/박상숙 산업부 차장급

    미국 연수 중 아이가 그곳에서 초등학교 1학년을 마쳤다. 24명 정원의 학급에는 선생님이 4명이나 됐다. 처음엔 담임과 인턴교사만 소개를 받았기에 나머지 두 여성은 매일같이 아이의 학교를 찾아오는 극성엄마쯤으로만 여겼다. 교실을 찾을 때마다 그중 한명의 여성이 한 지체장애아동 옆에 나란히 앉아 가방을 싸주고 옷을 입혀주는 등 도와주는 모습을 목격했다. 한동안 그 백인여성과 구릿빛 피부를 지녀 인도나 파키스탄계로 보이는 그 아이의 관계가 궁금했다. 엄마와 아들인가? 왜 저렇게 안 닮았지? 장애아동은 집 안팎에서 부모의 손길이 없으면 안 되는 한국적 현실을 깔고 두 사람을 보니 혈연관계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했던 것이다. 뒤늦게 그 여성은 온전히 그 아이만을 위해 배치된 보조교사란 걸 알았다. 불법이민자로 골치를 앓아온 미국에서는 이들을 막기 위해 온갖 법과 제도를 도입하는 곳이 늘고 있지만 주(州)마다 합법적으로 땅을 밟은 이방인들이 최소한의 교육, 복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제도를 갖추고 있다. 그 아이를 볼 때마다 ‘저 아이가 한국에 있었다면 어땠을까?’를 떠올렸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다문화가정 아이들의 65%만이 초·중·고를 다니고 있다고 한다. 몇년 전 한 세미나에서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의 현실을 목도하고 나라의 미래가 걱정될 지경이었다. 10만여명으로 추산되는 다문화가정 아이들은 장차 한국의 일꾼이 될 새싹들이다. 그러나 사회적 무관심 속에 거리를 떠도는 아이들이 늘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얼마 전 우리는 귀화 외국인 10만여명 시대를 맞았다. 인도 출신으로 10만번째 귀화 한국인이 된 주인공은 최근 개정된 이중국적 허용 제도 덕을 봤다. 이처럼 이 땅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과 그 자녀들을 ‘우리 식구’로 끌어안는 사회적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을 앞두고 핏줄이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거주 외국인이 100만명을 넘어섰는데 생물학적 의미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고 너무나 속 좁은 일이다. alex@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3월 새앨범 내는 ‘찔레꽃’ 소리꾼 장사익

    [김문이 만난사람] 3월 새앨범 내는 ‘찔레꽃’ 소리꾼 장사익

    산 너머 저쪽이다. 어머니는 배추를 팔러 나갔다. 돌아오는 언덕 길이 꼬불꼬불 멀었다. 오늘도 늦으시려나….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그렇게 기다렸다. 어느 날엔가 막차의 기적소리가 들려왔다. 어쩔 거나, 어머니가 걱정된다. 그래서 읊었다. ‘열무 삼십단을 이고/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해는 시든지 오래/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아무리 숙제를 천천히 해도 엄마 안 오시네/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아주 먼옛날~’ 1989년 요절한 기형도의 시 ‘엄마 걱정’에 나오는 대목이다. ‘엄마 걱정’은 지난 해 10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시작해 연말 제주 무대에 이르기까지 노래로 불려져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장사익 소리판 역(驛)’이란 제목으로 전국 투어에서 선보였던 것. 공연 도중 기형도씨의 어머니를 초청해 아들의 ‘엄마 걱정’을 눈물 나도록 불러 관객들과 함께 감루(感淚)의 바다로 빠지게 했다. 장씨 자신도 참외장사를 했던 어머니의 추억을 토해냈다. 그런 ‘엄마 생각’에서 장사익(62)씨는 오는 3월 새 앨범을 낸다. 원래 노래풍도 그렇고 소재를 선정하는 스타일도 ‘한 많은 우리 것’을 찾고 있지만 이번 새 앨범에는 특유의 ‘토장’(土醬)을 더욱 진득하게 담아낸다. ‘산너머 저쪽’ ‘엄마 걱정’ 등의 신곡에다 ‘삼식이’ ‘아버지’ ‘여행’ ‘섬’ 등 11곡을 맛깔스럽게 버무린다. 2008년 ‘꽃구경’ 이후 3년 만으로 7번째 앨범이다. 타이틀곡은 ‘역’이다. 장씨는 다른 가수와 달리 신곡이 나오면 먼저 무대공연을 통해 선보인 다음 녹음 과정을 거친다. 장씨의 노래는 요즘 들어 더욱 중장년층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해 국내 양대 공연장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유료 관객 점유율을 집계한 결과 장씨의 ‘역’ 공연이 전체 좌석 중 유료 관객 점유율 97%로 1위에 올라 인기도를 입증했다. 그는 ‘찔레꽃’으로 많은 팬들의 애간장을 충분히 녹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노래 제목처럼 여전히 ‘이게 아닌데’라고 하면서 차원을 높인다. 그럴 것이 북악산을 바라보는 집 창가에 찾아오는 새들과 그 산 기슭에 드러누운 부처와도 대화를 나눈다. 또한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묵향’과 함께 튼튼 60대 세월로 ‘독공’(獨功)의 길을 걷고 있다. ●풍경이 모여드는 마당 서울 종로구 홍지동에 위치한 장씨의 집. 10여개의 풍경이 앞마당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 각자 불어오는 찬바람에 의지해 겨울소리를 내고 있었다. 녹차를 마시면서 한 시간여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장씨의 오랜 친구들이 계속 찾아온다. 비둘기와 까마귀, 참새들이 나뭇가지에 와서 교대로 떠들고 재잘거리고 뭐라고 지껄인다. 뒷산 언덕 높이에서는 이를 시샘하듯 매 한 마리가 크게 날갯짓을 한다. 뿐만 아니다. 연못에서 동면하는 개구리 10여 마리도 아직 기척은 없지만 목청을 가다듬으며 때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장씨 집에는 계절별로 번갈아 가며 노래를 부르는, 그런 자연의 오케스트라가 있다. 겨울에는 새들이 저마다 고운 목소리로 멋을 내고 4, 5월이 되면 개구리가 뒤질세라 울어댄다. 개구리들은 영특하게도 여름에 매미 소리가 나와야 비로소 입을 다문다. 또 그 매미들은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풀벌레한테 인계를 한다. 다시 겨울이 오면 참새들이 울면서 자연의 크리마스 카드를 연출한다. 하여 장씨는 이들에게 노래할 수 있는 공간과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클래식과 국악이 함께 나오는 FM 라디오 음악을 잔잔하게 하루 종일 틀어준다. 새들이 얼마나 음악을 좋아하고 잘 듣는지 장씨 스스로 깨닫는다. 때문에 굳이 창문 열고 사람소리를 내지 않는다. 혹 사람의 소리가 나면 그들은 얼른 도망가버린다. 장씨는 새들에게 곰팡이 생긴 쌀을 먹이로 준다. 이런 평화로움에 지나가던 고양이도 잠시 낮잠을 즐기고 간다. 전원 교향악이 따로 없다. 올봄에는 닭 몇 마리를 새 식구로 불러들일 생각이다. “(그들이) 울다가 지치면 딴 놈이 와서 울어줍니다. 아주 자연스러워요. 일년 사계절이 그럴진데 요즘 세상에서는 한꺼번에 뛰려는 사람들이 많아요. 자가용 타는 것이 왠지 슬퍼져서 대중교통을 이용합니다. 그러다가 지하철에서 여러 사람이 휴대전화에 의존하는 모습을 볼 때 소름이 끼친다는 생각도 듭니다. 올해에는 주변을 살피면서 느리게 가 보면 어떨까요. 휠체어를 탄 장애우들은 이것저것 살피면서 아주 천천히 움직이잖아요.” 문득 그의 노래가 대부분 느리면서 호소력 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표곡 중 하나인 ‘봄날은 간다’가 떠올랐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가~안다.’ ●개발한 글씨체로 일필휘지 요즘 그는 서예에 푹 빠져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여지없이 먹을 갈고 한 시간여 동안 붓을 잡아 화선지에 자신이 개발한 독특한 글씨체를 일필휘지로 써내려 간다. ‘동백아가씨’ ‘찔레꽃’ 등의 노래가사는 기본이고 마음에 드는 시구절 등 주로 한글로 쓴다. ‘느림의 미학’과 ‘위안과 희망’이 장사익류의 소리라면 또 다른 ‘장사익류의 서체’를 개발해낸 셈이다. 지인들에게 안부편지를 쓸 때도 꼭 붓글씨를 고집한다. 주위에서는 전시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한 작품수준의 경지라고 평가한다. 그는 조선후기 3대 명필 중 한 사람이었던 창암 이삼만(李三晩)의 글씨체를 무척 좋아한다. 장씨는 “창암의 서예전이 다음 달 27일까지 예술의전당에서 열리고 있다.”면서 글씨의 근본을 오로지 자연에서 구했기에 물처럼 흐르는 멋이 물씬 풍긴다고 말했다. 또한 평론가들도 “먹이 농담하듯 곡선과 직선, 음양의 요소를 조화로움의 극치로 풀어낸다. 자연의 소리가 글씨에 스며들어 붓이 춤추듯 노래하는 것 같다.”고 평한다. “한글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00년 정도입니다. 한자인 경우에는 추사 김정희 서체니 중국의 아무개 서체니 하고 있지만, 한글은 쓰는 사람이 임자입니다. 계속 쓰다 보면 아름다운 글씨가 나오고 그게 곧 자신의 글씨체가 되겠지요. 노래가 몸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서예는 노래를 집중하게 하는 정신력의 소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2004년 작고한 음악인 김대환씨를 예로 든다. 평생 아리랑과 반야심경구절만 쓰다 보니(앞으로 썼다가 뒤로 썼다가 반복하면서) 왕희지 서법보다 더 자유분방해졌다는 것이다. 김씨는 1990년에 쌀 한톨에 283자의 반야심경을 모두 써 넣어 세계 기네스북에 등재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장사익 소리판 역’ 완결무대 이어져 이런 얘기를 하고 있을 때 부인 고완선씨가 떡과 과일을 가져왔다. 고씨는 남편에게 “사진촬영도 하는데 기왕이면 옷을 갈아입고 하시지.”라고 했다. 그러자 장씨는 “어때 뭐, 원래 노숙자차림이 내 모양인데 뭐.”라고 웃어넘긴다. 알콩과 달콩으로 미소를 주고받는다. 마루바닥 한쪽에 오래전에 부부가 함께 만든 병풍이 눈에 들어온다. 제목은 ‘백년가약서’이다. ‘하늘 고완선과 땅 장사익은 금후 100년 동안 항상 사랑하고 존경하고 늘 행복함을 유지시킨다는 약서(約書)를 씁니다. 단, 100년 후에는 영원으로 계약조건을 변경합니다.’ 올 한해는 얼마나 많은 공연이 기다리고 있을까. 높아가는 인기도만큼 여기저기에서 오라는 데가 더욱 많다. 이달 대구와 부산, 일본 후쿠오카 등에서 협연을 끝낸 데 이어 2월에는 경북 안동(11일), 서울 노원(17일), 경기 군포(19일) 등에서 협연이 예정돼 있다. 3월 1일에는 김대환 추모공연에 참가한다. 또 이달에는 단독공연이 있는데 울산(15일)과 창원(19일)에서 이어지며 4월에는 전주, 과천, 춘천 등에서 단독공연을 가질 예정이다. 지난해 10월에 시작된 ‘장사익 소리판 역’의 완결편을 마무리짓는 무대가 5월까지 10여 차례 이어진다. 전직 카센터 직원, 독서실 운영, 가구점 총무, 전자회사 직원, 보험회사 직원…. 장씨는 마치 죽장에 삿갓 쓰고 그러하듯, 일찍부터 방랑과 고난의 길을 걸었다. 인생살이의 산전수전을 겪은 다음 40대 중반에 소리꾼으로 데뷔했다. 다른 사람보다 늦었지만 삶의 내공이 쌓여서인지 무대 위에서 넘어지고 깨진 것을 얘기할 수 있어 오히려 음원이 시원했다. 일찍 ‘국민 소리꾼’이 된 것도 여기에 있겠다. “노래는 진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노래는 맑아야 하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희망도 있고 위안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관객들과 같아지겠지요. 지금 생각하면 노래를 참 잘 택했구나 하고 있습니다.” 장씨는 가수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냥 소리꾼일 뿐이라고 한다. 애정을 얻어도 고통이요, 또 애정을 버려도 고통이라는 말이 있다. 소리를 얻었을 때도 많은 고통이 있었을 테고, 또 언제가 버려야 하니 더 많은 고통을 생각하고 있을 터. 그래서 요즘도 ‘이게 아닌데’로 스스로 채찍을 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편집위원 km@seoul.co.kr ■ 장사익은… 1949년 충남 홍성군 광천읍 광천리 삼봉마을에서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당시 부친은 소문난 장구잡이였다. 소리의 기질을 자연스럽게 이어받았다. 장씨는 초등학교 때 웅변을 잘했다. 어릴 때는 장차 정치가를 생각했다. 하지만 먹고사는 것이 시급해 1965년 서울 선린상고에 진학했다. 전 프로야구 선수 김우열씨와 동기동창. 고 3 때 종로에 있는 생명보험회사에 취직했다. 이때 인근 낙원동 음악학원에 다니며 노래연습을 틈틈이 했다. 직장생활 3년 후 공병으로 군입대를 했지만 소리솜씨가 좋아 31사단 문선대에서 근무했다. 1972년 제대 후에는 무역회사, 전자회사 영업사원, 노점상, 카센터 등을 전전했다. 그러면서 정악피리와 태평소 등을 스스로 익혔다. 1993년에는 김덕수 사물놀이패 등을 따라 전국을 돌아다녔다. 때마침 그해 전주대사습놀이에서 ‘공주농악’으로 장원에 뽑혔다. 또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결성농요’로 대통령상을 탔다. 이듬해 전주대사습놀이에서도 ‘금산농악’으로 장원에 올랐다. 그러던 1994년 11월 주위의 권유로 서울 신촌에서 첫 공연을 했다.100석 규모의 극장에 300여명이 몰려 대성황을 이루었다. 내친김에 1집앨범 ‘하늘가는 길’을 발표하면서 정식 가수로 데뷔해 오늘날에 이르게 됐다. 지금까지 ‘기침’(1999) ‘허허바다’(200) ‘사람이 그리워서’(2006)‘ ‘꽃구경’(2008) 등 6집 앨범을 냈다.
  • 윤아-김희철, ‘깡패놀이’ 불량커플 셀카

    윤아-김희철, ‘깡패놀이’ 불량커플 셀카

    슈퍼주니어 김희철과 소녀시대 윤아가 ‘깡패놀이’에 푹 빠졌다. 김희철은 27일 자신의 트위터에 “올리란다. 불량배 콘셉트 희깡패&임깡패, 아 둘이 유치원놀이 하는 거 웃기는데 영상을 올려야하나 말아야하나, 우주대스타 희, 민낯도 여신 융”이라는 글과 함께 윤아와 찍은 사진을 올렸다. 사진 속 김희철은 검정 가죽재킷 차림으로 헤어스타일에 잔뜩 힘을 준 채 카메라를 강렬한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다. 바로 옆에 그가 팔을 어깨에 올리고 있는 이는 바로 소녀시대 윤아. 청순한 평소의 이미지는 온데간데없이 시크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노려보며 과자를 먹고 있어 웃음을 자아낸다. 이를 본 네티즌들은 “선남선녀 불량커플” “여신과 깡패놀이 하고 노는 희님” “무서운 게 아니라 귀엽다” “윤아는 저렇게 먹어도 말랐어” 등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편 같은 소속사 식구인 김희철과 윤아는 이전부터 특별한 우정을 과시하며 함께 찍은 다정한 셀카들을 공개해 눈길을 끈 바 있다. 사진 = 김희철 트위터 서울신문NTN 오영경 기자 oh@seoulntn.com
  • [문화마당] 시골 이야기/공선옥 소설가

    [문화마당] 시골 이야기/공선옥 소설가

    유난히 추운 겨울이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듯이 여름이 그다지도 뜨겁더니 겨울이 또 이다지도 차갑다. 한여름에 2만, 3만원 나오던 가스비가 이번 겨울 난방비까지 포함하여 무려 27만원이 나왔다. 가스요금 청구서를 들고 추위 때문이 아니라 돈 때문에 덜덜 떨면서 생각하는 것은 저 어린 시절의 나무 때던 아궁이다. 겨울이면 눈 안 오는 날은 언제나 산에 나무를 하러 다녔다. 새끼줄도 아까워 칡넝쿨로 나무를 묶어서 여자는 머리에 이고 남자는 지게에 져서 부엌 나무청이나 헛간에 나무를 부렸다. 그래서 겨울산은 인근 마을 사람들로 늘 사람 소리, 사람 냄새, 사람 훈기로 가득 차 있었다. 어찌나 갈퀴로 긁어댔는지 겨울산 바닥들은 마치 맨살처럼 반들반들했다. 물론 누군가는 반들반들한 것을 두고 ‘바닥에서 피가 나도록 긁어댔다.’고 표현했지만. 겨울산을 ‘피가 나도록’ 긁어야 했던 것은 한겨울에 얼어죽지 않으려는 몸부림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가스비 때문에 가슴이 ‘애려’ 피눈물이 날 판이다. 그 시절은 적어도 난방비용 나갈 걱정으로 가슴 쓰릴 일은 없었으니, 지금보다 속은 편했던 시절이었음에 틀림없다. 그 속 편했던 시절을 떠올리고 마침 시골 친구집에 갔더니, 웬걸, 여기는 아예 동토의 왕국이다. 왜 불을 때지 않느냐 했더니 불 땔 아궁이 없어진 지가 언제냐고, 기름값 무서워 겨울 내내 온 식구가 그나마 싼 전기장판에 의지해 산다며 돈 나가는 것보다 차라리 추위 견디는 게 낫다고 쓴웃음을 짓는다. 시골의 난방 사정 말이 나온 김에 우리나라 시골의 전반적인 삶의 기반 문제로 화제가 옮겨갔다. ‘도시가스’라는 말도 있듯이 지금 우리나라 거의 모든 시골에는 도시 주택에서 비교적 싸게 쓸 수 있는 난방용 가스가 공급되지 않고 있다. 가스가 공급될 수 있는 시설 자체가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시골 사람들은 도시 사람들보다 훨씬 비싼 난방 비용을 지불하며 살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주민의 대부분이 노인층인 시골은 그래서 겨울이면 난방비 아까워서라도 노인들이 마을회관에서 ‘합숙 아닌 합숙’을 하는 경우도 꽤 있다고 한다. 시골의 문제 중에 또 하나는 물 문제다. 옛날에는 사철 맑은 물이 샘솟는 마을 공동샘이 있거나 각 가정이 우물을 파거나 해서 식수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잘 나오던 마을 공동샘도 물이 말랐거나 쓸 수 없거나 하고 우물 또한 오염됐거나 메워진 지 오래다. 마을샘과 우물을 더 쓸 수 없게 된 시점이 언제부터였을까. 내 기억으로는 마을에 상수도를 놓은 뒤부터였던 것 같다. 새마을사업의 일환으로 계곡물을 탱크로 모아서 관을 이용해 각 가정에 보내는 시설을 만든 이후부터 사람들은 공동샘에 갈 일도, 우물을 팔 일도 없어졌다. 상수도물을 쓰면서 편리한 점은 있지만 이제 가뭄이 들면 대책이 없게 되었다. 사람들이 찾지 않고 방치된 공동샘은 더러워졌고 우물을 파도 그 물을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구제역으로 살처분한 짐승의 핏물이 나올까 걱정스러운 판이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 조건인 에너지와 물 문제가 작금의 우리나라 시골에서는 가장 어려운 문제로 되어 있다. 도시의 난방 문제, 외국 아프리카의 더러운 식수 문제를 거론하는 사람들은 봤어도 나는 한겨울 시골의 난방 문제, 시골의 물 문제를 걱정하는 사람을 최근에 본 적이 없다. 시골 지역구 국회의원들도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거론하고 개선하고자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대신에 그들은 어디에 어떻게 도로를 건설하고 어디에 어떻게 무슨 공장을 끌어오고 어디를 어떻게 개발하고…, 그런 말만 한다. 그나저나 4대강을 파고 강 주변을 개발하려는 이유가 만성적인 물 부족을 해결하려고 그런 것이라는데, 또 누구는 강을 깊이 파면 그나마 주변의 지하수도 강 쪽으로 흘러가서 지하수 고갈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하는데,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정치하는 사람들이 과연 시골에 관심이나 있는지 나는 그것이나 먼저 좀 알고 싶다.
  • 윤복희, 스무살때 결혼한 가수남편 유주용과의 파경 속내 틀어놔

    윤복희, 스무살때 결혼한 가수남편 유주용과의 파경 속내 틀어놔

     ’여러분’ 등 많은 히트곡을 불러온 60대 중반의 가수 윤복희가 20대 때 첫 남편과의 헤어진 이유를 털어놨다.  윤복희는 27일 방송된 SBS ‘배기완·최영아·조형기의 좋은아침’에 출연,스무살 때 결혼한 동료 가수 유주용과의 관계 등 속사정을 얘기했다.  그는 “유주용이 오빠이자 아버지같은 존재였다.”면서 “어려서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할 때부터 의남매로 지내 보디가드처럼 챙겨줬다.”고 밝혔다. 윤복희는 “남편의 어머니도 친딸처럼 챙겨줬다. 당시 무의식적으로 유주용과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1968년 결혼했고, 시댁 식구와 함께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떠났다.  윤복희는 “나 때문에 유지용이 많은 희생을 했다.”면서 “한국에서 가수 활동을 접고 미국으로 가 윤복희의 매니지먼트 일만 했다.”고 미안해 했다. 하지만 다섯살때부터 무대에 서왔던 윤복희는 결혼 이후 무대에 서지 않고 싶었다.  그는 이런 이유로 불만을 가진채 결혼 생활을 이어오다 결국 파경을 맞았다. 이유는 뜻하지 않은 윤복희의 스캔들 때문이었다. 윤복희는 이후 1977년 가수 남진과 결혼했지만 6개월만에 헤어졌다. 두 번째 남편인 남진에 대해서는 이날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 [씨줄날줄] 공귀족/이춘규 논설위원

    과거 우리의 명절은 사계절 농사 주기와 관계가 깊었다. 농사일을 시작하는 음력 1월 1일은 설날이고, 수확기인 8월 15일은 추석이었다. 우리네 조상들은 설날에는 전해 가을 수확한 곡식으로, 추석 때는 햅쌀과 햇과일로 상을 차려 조상들에게 제사 지내고, 일가친척들이 모여 앉아 덕담을 주고 받았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설날 마을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집단 세배하는 풍경이 낯설지 않았다. 명절 풍습은 1960년대 이후 급속한 산업화·도시화로 크게 변했다. 마을공동체 구성원들이 모여 놀이를 하던 단오·칠석 등 명절은 빠르게 쇠퇴했다. 설과 추석이 되면 고향을 떠났던 많은 사람들이 기차·버스를 타고 고향을 찾았다. 기차 객차는 물론 기관차 빈 곳, 짐칸도 사람들이 빽빽이 타고 이동했다. 사고도 많아 1960년 1월 서울역 압사사고로 31명이 숨졌고, 1975년 9월에는 용산역 참사로 4명이 숨졌다. 명절은 기쁨이자 고통이었다. 명절은 보통 며느리들에게 아픔이다. 살림이 빠듯한 어머니들의 명절 고통은 심하다. 한동안 며느리, 어머니의 명절 고통이 조명을 받았다. 최근 들어서는 말은 못하고 삭이는 아버지, 특히 장남들의 명절 고통이 부각되고 있다. 시댁 식구들과 함께하기 꺼려하는 부인이나 형제들의 누적된 갈등을 중재해야 하는 장남의 고통이 심각하다는 것. 남북 이산가족이나 직장을 구하지 못한 청년실업자들의 명절 고통은 말할 필요조차 없을 터. 보통 일본인들의 명절나기도 힘겹다. 일본에서는 연말연시와 어린이날 전후, 오봉(추석) 연휴 때 대이동을 한다. 철도·비행기·버스가 임시 증편된다. 평소보다 요금은 비싸지만 고향 가는 귀성전쟁은 연례행사다. 취직빙하기를 맞은 청년 미취업자나 미혼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명절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인터넷에는 며느리들의 명절 스트레스 하소연이 넘친다. 미국·유럽에서도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 휴가 때 귀성전쟁이 만만찮다. 중국에서는 춘제(설) 귀성을 두려워하는 공귀족(恐歸族)이 늘었다고 현지 언론들이 전했다. 열차표 구하기, 부모 선물, 친척 세뱃돈 등이 부담스럽다. 맞선을 보라는 부모 독촉까지 겹치면 물심양면의 부담이 가중된다. 중국언론 인터넷여론조사에 따르면 ‘왜 귀성하고 싶지 않으냐’는 질문에 젊은이 44%가 ‘비용 과다’를 꼽았다. 대졸자 월급 1~2개월 분인 4000위안(약 68만원) 안팎 귀성비용은 공포란다. 명절이 원수 같다던 어른들의 말씀처럼 명절 고통은 만국공통인가 보다.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소설가 이순원 “한없이 다정한 어머니 꼭 다시 돌아오세요”

    선생님…, 다시 한번 또 불러봅니다. 선생님…. 지난 22일 아침 저는 전국에서 모인 길꾼들과 함께 제 고향 강원도의 바우길 위에 있었습니다. 길을 걷는 도중 김영현 선배가 전화문자로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소식을 알려주었습니다. 대체 이게 무슨 거짓말 같은 소식인가 믿어지지 않아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고 나무숲 사이의 하늘을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겨울 하늘은 저토록 차고 맑은데, 제 기억 속에 하고많은 선생님의 모습 중 3년 전 어느 봄날, 박경리 선생님을 저 세상으로 보내 드리던 영결식장에서 저희를 두고 이렇게 떠나시면 남은 사람들의 빈자리는 어떻게 하시냐고 우시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마음을 차분히 하려고 해도 차분해지지 않았습니다. 함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하자 모두 저처럼 놀란 얼굴을 하였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도 그리고 오래도록 선생님의 책을 읽어온 독자들에게도 가슴 한구석을 텅 비게 하는 소식이었습니다. 저는 23년 전 선생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내리 10년간 신춘문예에 낙방하다가 어느 문예지에 응모한 제 작품을 선생님께서 뽑아 주셔서 정식으로 한국 문단에 나왔습니다. 옛날 선비들에게는 어려서부터 글을 가르쳐 준 사사스승과 과장에서 글을 뽑아 준 발탁스승이 있는데, 두 스승에 대한 예를 언제나 같이 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새 작가로 저를 뽑아 주신 것을 지금도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언젠가 동인문학상 시상식 때 선생님께서는 제 어머니에게 다가오셔서 두 손을 꼭 잡아주셨습니다. 저에게는 그 모습이 마치 저와 저의 문학이 이 땅에 있게 해 주신 두 어머니의 모습 같았습니다. 이것은 선생님에 대한 저만의 생각이 아니라 한국의 거의 모든 후배 작가들이 우리가 현역작가로 함께 글을 쓴다는 것만으로도 선생님께 한없이 기대고 의지하며 위로받아 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한국문단에 참으로 큰 어머니의 모습으로 선생님께서 후배 작가들을 지켜봐 주셨고, 저희는 또 선생님의 넓은 품에 저마다 한식구로 위안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어디 우리 작가들에게만이겠습니까? 제가 함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했을 때 모두 똑같은 마음과 똑같은 얼굴로 놀랐던 것은 한국의 모든 독자들 역시 지금껏 선생님의 글에서 한없이 따뜻하고 넓은 어머니의 모습을 느껴 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전에 어떤 독자는 선생님의 글에 대해 세 줄만 읽으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고, 책을 다 읽고 나면 한없이 다정한 모습으로 위로받은 느낌이라고 말했습니다. 독자들도 그렇고 함께 글을 쓰는 작가들도 그렇고, 선생님은 선생님을 직접 뵌 사람들에게도 뵙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어머니의 모습으로 우리 문학을 지켜 오셨고, 마지막까지도 손에서 펜을 놓지 않은 현역 작가로 살아오셨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이 더 믿을 수 없고, 더 애통한 것인지 모릅니다. 선생님의 수많은 독자분들도, 또 글을 쓰는 저희도 아직 선생님을 놓아 드릴 준비가 전혀 안 되었는데 어느 아침 선생님께서는 홀연히 저희 곁을 떠나셨습니다. 이별의 놀라움은 언제나 이제까지 겪어 보지 못한 일처럼 낯설고 눈물은 또 언제나 이렇게 늦게 흐르는가 봅니다. 선생님…, 우리에게 너무 크시고 고우신 선생님…. 누가 이렇게 바쁜 걸음으로 선생님을 우리 곁에서 데려가는지요. 좀 더 오래, 그리고 아직도 많이 선생님을 봐야 할 우리의 빈 가슴은 어떻게 하라고 이렇게 선생님을 데려가는지요. 눈물이 앞을 가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겠습니다. 가셔도 잊지 마시고 저희와 이 땅의 독자들에게 다시 한번 돌아오세요, 선생님. 손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꼭 돌아오세요, 선생님…. ●이순원은 1958년 강릉 출생. 1988년 등단.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효석문학상, 한무숙문학상 등 수상. ‘은비령’, ‘정동진’, ‘워낭’ 등 출간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청제비꽃/신진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청제비꽃/신진

    청제비꽃/신진 청제비꽃은 올해도 작년과 같은 꽃을 피운다. 새끼손톱만치 작은 꽃 향기 싱거운 꽃 쓰잘데없는 꽃을 봄마다 피우다니. 그래도 청제비꽃 해마다 식구는 제일 많이 늘린다.
  • [주말 영화]

    ●가위손(EBS 일요일 오후 2시 40분) 언덕 꼭대기에 지어진 대저택에서 외롭게 살아가던 빈센트 박사는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줄 인조인간을 창조한다. 박사는 인조인간인 에드워드(조니 뎁·왼쪽)에게 심장과 뇌를 비롯한 모든 걸 넣어 주지만 손을 완성하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그래서 에드워드는 인간의 손대신 날카로운 가위손을 달고 그 넓은 저택에서 홀로 외롭게 살게 된다. 어느 날 화장품 외판원 펙(다이안 위스트)이 저택을 찾아온다. 그녀는 가위손 때문에 온통 상처투성이인 에드워드에게 연민을 느끼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다. 그의 가위손은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지만 정원 정리나 미용에서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 준다. 에드워드는 처음 맛보는 인간적인 삶에 행복감을 느끼며, 펙의 딸인 킴(위노나 라이더·오른쪽)과 아들 케빈(로버트 올리버리), 남편 빌과 함께 가족처럼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킴의 남자 친구 짐은 아버지의 값비싼 물건을 훔칠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그는 잠긴 문을 여는 데 가위손 에드워드를 이용하려 한다. ●좋지 아니한가(KBS1 토요일 밤 12시 55분) 콩가루도 뭉치면 좋지 아니한가. 고개를 들라, 우린 가족이다. 공통분모 제로, 화기애매한 심씨네 가족. 무관심하기로 치자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고, 애정 없음으로 치자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다섯 식구들이 있다. 허리띠 졸라 맨 억척스러운 엄마(문희경)와 그로 인해 고개를 숙여 버린 아빠(천호진), 전생에 왕이었다고 믿는 아들 용태(유아인)와 존재 자체가 미스터리한 딸 용선(황보라). 그리고 무협작가랍시며 백수 신세를 면치 못하는 이모(김혜수)는 그 놈의 핏줄이 뭔지 한 집에 모여 ‘화기애매’하게 살고 있다. 그들은 오늘도 고민한다. 서로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왜 한 집에 모여 살아야 하는지. 그렇게 덤덤하기만 하던 그들에게 공동의 위기가 닥쳤다. 조용하기만 하던 심씨네 가족은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중간첩(OBS 토요일 오후 11시 20분) 냉전의 차가운 공기가 흐르는 1980년, 동베를린. 한 발의 총성이 어둠이 내려앉은 잿빛 거리의 정적을 깬다. 그 소리와 함께 한 남자를 둘러싸고 격렬한 총격을 벌이는 남과 북. 남자는 마침내 게이트를 넘어 남한으로의 귀순에 성공하고, 남측 정보기관 내 대공정보 분석실로 배정된다. 그는 남조선 혁명 과업을 부여 받고 남파된 대남 공작원 림병호다. 위장 귀순에 대한 의심을 불식시키고, 남측의 신뢰를 쌓으며 남한 생활을 한 지 어느덧 3년. 병호는 드디어 북의 첫 번째 지령을 접수한다. 라디오 프로그램의 DJ 윤수미와 접선하라는 것이었다. 연인으로 위장해 수미와 관계를 쌓아 가는 병호. 어느 순간부터 그는 고정간첩의 정해진 삶을 살아야 하는 그녀에게 차츰 연민을 느끼기 시작한다.
  • 은평-다문화가정 ‘윈·윈’ 전략 가동

    은평-다문화가정 ‘윈·윈’ 전략 가동

    은평구가 ‘아시아를 품은 대조동’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아시아를 품은 대조동 프로젝트는 문화적·경제적으로 소외되기 쉬운 다문화가정에 사회 참여와 적응의 기회를 제공해 정서적 소외감을 극복하도록 하는 것이다. 또 아시아의 문화체험을 통해 자라나는 청소년은 물론 주민들에게 세계적인 감각을 길러주고, 문화적 포용력을 키울 수 있는 계기를 심어준다. 김우영 구청장은 대조동 자치회관에 ‘꿈나무 어린이 영어회화’ 강좌를 개설했다고 11일 밝혔다. 대조동 자치회관에서는 필리핀 출신으로 영어회화 강사 경력이 있는 결혼이주 여성 데이지 모르코스 박(38)씨를 강사로 채용해 초등학생들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친다. 다문화가정의 외국인 주부를 활용해 자립과 사회참여를 돕고, 우리 아이들에게는 적은 비용으로 영어회화를 배울 기회를 제공하는 ‘윈·윈’ 전략이다. ‘꿈나무 어린이 영어회화’ 교실은 3개월 과정으로 매주 월·목요일 오후 3시 30분~5시 열린다. ‘대조동 자치회관에서는 결혼 이주 여성의 사회 적응을 돕고자 다양한 지원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우선 ‘함께 가는 아시아여행’은 아시아 각국의 문화를 배우는 프로그램으로 중국·일본·몽골·베트남·타이완·필리핀 등 아시아 각국에서 온 결혼 이주 여성들이 직접 강사가 되어 우리 아이들에게 자국의 전통문화와 역사 등을 가르친다. ‘예쁘지 않은 꽃은 없다’는 프로그램은 우리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다문화가정 이주 여성들에게 우리말과 음식, 문화 등을 가르쳐 준다. 지난해 12월에는 다문화가정의 결혼 이주 여성들과 그 자녀가 함께 김장도 담그고 음식도 나눠 먹으며 우리 문화를 이해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남우현 대조동장은 “결혼이주 여성들도 서비스 제공자로서 긍지를 가지고 생활할 수 있게 됐다.”며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고 더불어 사는 지구촌 식구라는 생각으로 애정 어린 관심을 부탁한다.”고 밝혔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당·정·청 협력” 한발 뺀 安 vs “내 동의도 없이” 격앙된 金

    “당·정·청 협력” 한발 뺀 安 vs “내 동의도 없이” 격앙된 金

    ■‘갈등’ 수습 나선 안상수 정동기 감사원장 후보자 사퇴 논란의 핵심 인물이 된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지난 10일 정 후보자에 대한 부적격 입장을 속전속결로 발표하며 이례적인 ‘결단력’을 보였고, 11일에도 ‘당 중심론’을 거듭 강조했지만, 하루 만에 한발 물러선 모양새다. 지나치게 청와대에 각을 세우는 것처럼 비쳐지는 데 대한 우려에서다. 안 대표는 오전 여의도 당사에서 가진 신년 기자회견에서 “민심을 수렴하는 당의 입장에서 국민 여론이 국정에 충분히 반영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전날 최고위원회의에서 정 후보자에 대해 사퇴를 요구한 것이 민심을 반영한 것이라는 것을 최대한 강조한 것이다. 전날 안 대표는 특보단과 조찬을 함께하면서 정 후보자에 대한 여론을 청취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자리에서는 특히 대통령 비서 출신인 정 후보자가 제3의 독립기관인 감사원장 자리를 맡는 것에 부정적인 여론이 많고, 국민들의 지적이 맞다는 데 공감대를 형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 안팎에서는 당장 오는 4월 재·보선과 내년 총선, 대선까지 모두 승리로 이끌어야 하는 안 대표로서 정부·청와대에 앞서 민심을 읽는 제스처를 취해야 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특히 총선을 앞두고 있는 의원들이 여론을 체감하며 느낀 불안감이 당과 청와대에 불만으로 표출됐다. 계속되는 설화(舌禍)로 사퇴압력까지 받고 있던 안 대표로서는 이러한 불만을 잠재우며 결단력 있는 모습으로 상황을 돌파하려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11일에는 이 수위가 한층 낮아졌다. 연설문 문구도 수정했다. 오전 9시쯤 언론에 배포한 연설문에는 “불가피할 경우 견제할 것은 제대로 견제하고 보완해 나가겠다.”는 문구가 포함됐다가 오전 10시에는 빠졌다. 안 대표는 신년 기자회견에서 별도의 질의응답도 하지 않고 연설문을 낭독한 뒤 바로 자리를 떠났고, 극도로 말을 아꼈다. “왜 ‘견제’ 문구가 빠졌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당·정·청이 협의해서 잘해 나갈 것”이라고만 에둘러 말했다. 당의 한 관계자는 “당·청 관계 갈등 등 민감한 질문이 나올 수 있어 질의응답 시간을 갖지 않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한편 안 대표는 기자회견에서 “서민경제 살리기와 일자리 창출에 더욱 매진하겠다.”고 강조했다. 또 정치선진화를 위한 방안으로 국회 개헌특위 구성, 선거구제 개편, 국회선진화 관련 법안 통과 등을 주장했다. 허백윤기자 baikyoon@seoul.co.kr ■中서 급거 입국 김무성 “누구도 나에게 (정동기 감사원장 후보자 부적격 결정에 대해)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한 최고위원만 동의했다는 게 정확하다.” 중국에 출장갔다가 12일 귀국할 예정이었던 한나라당 김무성 원내대표는 11일 오전 5시 서둘러 입국했다. 국회 집무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에게 그는 정 후보자의 부적격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음을 피력했다. 얼굴은 굳어 있었다. 김 원내대표는 우선 “당·정·청은 공동운명체다. 후보자의 적격 여부를 떠나 이처럼 중요한 문제는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또 “업무 분장상 원내대표가 할 일인데, 하루만 참아주면 내가 들어와서….”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어 “같은 식구끼리 내밀하게 문제 제기하는 절차를 밟는 게 예의”라고 덧붙였다. “당이 대통령에게 우선권을 줬어야 했는데 갑자기 확 터트리니 대통령이 얼마나 화가 났겠는가.”라는 말도 했다. 김 원내대표의 이 같은 발언은 거사를 주도한 안상수 대표를 비판하고, 청와대의 입장에 동조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 문제 제기 방식의 적절성을 놓고 당내에서 자중지란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는 셈이다. 김 원내대표는 안 대표와의 통화 내용도 소개했다. 그는 “최고위원회의 시작 1시간 전에 안 대표가 전화를 걸어 ‘여론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했다. 그래서 일정을 취소하고 귀국하겠다고 하니까 안 대표가 ‘돌아오면 상의하자’고 했다. 그런데 최고위원회의 말미쯤에 원희목 대표비서실장이 최고위원들이 모두 부적절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나에게 통보했다.”고 말했다. 다만 김 원내대표는 “이 문제에서 나만 발을 뺄 생각은 없다. 정 후보자가 자진 사퇴하는 것으로 일단락 지어야 한다.”면서 “이를 놓고 문책론을 거론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정 후보자에 대해 “인격적으로 나무랄 데가 없는데 안됐다. 서울대, 연·고대 출신이 아니고서 대검차장까지 오른 사람이 거의 없는데 얼마나 몸가짐을 잘했으면 올라갔겠느냐.”며 동문(한양대) 후배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다. 이창구기자 window2@seoul.co.kr
  • 해커 고용해 디도스 공격 ‘사이버 조폭’

    해커 고용해 디도스 공격 ‘사이버 조폭’

    조직폭력배가 어디까지 진화할까. 최근 기업사냥꾼, 주가조작 세력과 손잡고 코스닥 기업을 집어삼킨 조폭<서울신문 2010년 12월 28일자 9면>이 등장한 데 이어, 이번에는 해커까지 고용해 경쟁사 인터넷 사이트를 마비시키는 ‘사이버 조직폭력’까지 감행했다. 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2부(부장 김영대)는 9일 불법 도박사이트를 운영하는 폭력조직원의 사주를 받아 경쟁사에 분산서비스거부(DDos·디도스) 공격을 감행한 서버임대업자 이모(32)씨를 정보통신망 이용 촉진 및 정보보호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하고, 해커 박모(37)씨를 불구속 기소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또 이씨 등에게 디도스 공격을 부탁한 인천 석남식구파 조직원 염모(34)씨 등 달아난 4명을 수배하고, 단순 가담자 4명을 약식기소했다. 검찰에 따르면 이씨 등은 석남식구파가 운영하는 불법 도박사이트 서버를 관리해주다 이들의 부탁을 받고 지난해 11월 21일~12월 15일 하루 한두시간씩 경쟁 도박사이트 109곳에 디도스 공격을 감행해 서버를 마비시킨 혐의를 받고 있다. 조직원 염씨 등은 경쟁 사이트가 마비되면 자신들이 운영하는 사이트에 고객이 몰릴 것으로 보고 이씨 등에게 해킹을 돕기 위해 공격용 서버와 좀비PC 5만여대의 목록을 제공한 것으로 조사됐다. 디도스 공격은 악성코드에 감염돼 원격 제어를 받는 좀비PC 여러대를 이용해 특정 서버에 동시에 접속하거나 특정한 동작을 요구하는 등의 방법으로 서버를 마비시키는 해킹기법이다. 기존에는 정책에 대한 불만 표출이나 해킹 실력 과시 등을 목적으로 정부 사이트를 대상으로 시도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폭들은 이를 다양한 분야에 활용했다고 검찰은 전했다. 이들은 서버를 다운시켜 경쟁업체의 영업을 방해하는 것 외에도, 악성코드를 심어놓은 상대의 패를 보면서 도박 승부를 조작해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또 지난해 11월 23일~12월 10일 한 유명 구직사이트에 “디도스 공격에 안전한 우리 서버를 쓰라.”고 제안했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디도스 공격을 감행해 월 3170만원의 강제 계약을 맺기도 했다. 검찰 관계자는 “종래 해커들이 사이버 청부 폭력을 한다는 소문은 무성했으나, 조폭이 이들을 고용해 디도스 공격을 감행하고 사이버 세계로 활동 영역을 넓힌 사실이 확인되기는 처음”이라며 “지속적 단속으로 무분별한 신종 범죄 확산을 방지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검찰은 악성프로그램을 퍼뜨려 온라인게임 서버를 디도스 공격하거나 상대방 패를 확인해 인터넷 사기도박을 한 혐의 등으로 황모(17)군 등 5명을 소년부 송치 또는 불구속 기소하고 박모(16)군 등 3명을 입건유예했다. 이들은 이씨 등의 지시를 받아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일하며 범죄를 도운 것으로 나타났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6월 강원 화천에 ‘감성마을 전시관’ 여는 소설가 이외수 씨

    [김문이 만난사람] 6월 강원 화천에 ‘감성마을 전시관’ 여는 소설가 이외수 씨

    긴 머리 소년이다. 해맑은 웃음이 그렇다. 하얗고 빨간, 원색 톤의 옷을 즐겨 입는다. 선도(仙道)로 향하는 상상력이 특별하다. 아름답고 맛깔스러운 언어를 잘도 골라낸다. 그런데 소년은 수염이 있다. 하여 강원도 산골짜기에 사는 촌로다. 그곳으로 가는 길에는, 산과 들에는 눈부시도록 눈이 쌓여 있었다. 서울에서 경춘고속도로를 지나 5번과 56번 국도를 탔다. 옛날에는 오지여서 하루 종일도 더 걸렸겠지만 시원하게 도로가 뚫려 있어 세 시간 만에 도착했다. 그가 사는 마을 입구에 들어섰다. 처음 반기는 것은 이색 표지판. 좌회전 표시는 새의 부리, 우회전 표시는 물고기의 아가리로 구분했다. 문득 동화 마을에 온 기분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저런 모습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이했을 터. 트위터계의 간달프 작가 이외수(65)씨. 지난 4일 강원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 감성(感性)마을에서 만났다. 6년째 이곳에서 산다. 그날도 웃음이나 옷차림이 영락없는 소년이었다. 네티즌들의 말을 빌려 ‘트위터계의 대통령’이라고 했더니 그는 요즘에는 ‘트위터계의 간달프’라고 한다며 웃는다(간달프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백색의 마법사). 처음 인사를 나눌 때 옆에 때마침 며느리가 있었다. 설은영(33)씨. 올해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로 등단한 작가다. 에궁, 집안 내력이라는게~. 혹시 이씨가 한 수 지도해 줬을까 궁금해졌다. “발표 난 뒤에야 알았습니다. 그래서 야단을 쳤지요. 어떻게 시아버지가 소설 제목도 모르냐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며느리가 ‘미리 말씀드리면 혹시 오해라도 생길까 봐요’라고 대답을 하더군요. 어쨌거나 발표되고 나서야 원고를 처음 봤습니다. 가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 정리돼 있더군요. 저는 늘 아웃사이더였는데 며느리는 객관적 평가로 등단했다고 축하해 줬습니다.” 이씨는 역정 반 웃음 반으로 며느리를 잠시 쳐다본다. 대견스러운 눈길이었다. 남의 자식으로 태어나 이씨 집안에 들어와 큰일을 해 냈으니 무척 좋다는 표정이다. 함박웃음으로 ‘우리 애기’라고 표현하면서 자랑스러워했다. 얼른 며느리의 작품평을 부탁했다. “젊고 건강하고 신선합니다. 보편적 현실의 두려움을 거침없는 필치로 건드렸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신인입니다. 작가로서 가장 힘든 것이 언어이지요. 언어가 생물입니다. 그런 언어에 대해 뼈저리게 느낄 때까지 정진하라고 말했지요.” 그렇다면 이제는 예술가 집안이다. 이씨는 “큰애(아들)는 영화감독을 하고 작은애(아들)는 글과 그림을 잘 그리고, 며느리는 작가이니 예술적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며 껄껄 웃는다. 며느리 설씨는 처녀 때 이씨의 홈페이지에 자주 접속하면서 인연이 됐다. 나중에 채팅방에서 큰아들 한얼씨와 꾸준히 사연을 주고받다가 결혼에 골인했다. 화제를 ‘감성마을’로 돌렸다. 원래는 다목리였다. 궁궐을 세울 때 서까래로 사용했던 나무가 많아 다목(多木)이라는 유래가 있다. 감성마을은 이씨가 창작 공간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직접 지은 이름이다. 왜 그랬을까.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자연이 주인입니다. 자연이 인간에게 전하고, 인간은 그 고마움을 느끼고 다시 전달하는 것이지요. 이런 차원에서 감성마을로 정하자고 했더니 화천군에서 흔쾌히 받아들이더군요. 그래서 한반도, 아니 세계 처음으로 감성마을이 탄생하게 됐습니다.” 새로운 뉴스 하나. 올해 6월에 ‘감성마을 전시관’이 생긴다. 이씨가 그린 그림, 그동안 틈틈이 만들어온 노래 100여곡, 그리고 직접 지은 노랫말 등을 감상하는 것은 물론이고 관련된 문학 영상 콘텐츠와 사진, 동영상 등이 전시관에 진열된다. 찾아온 손님들과 춤을 추고 노래하는 공간도 마련된다. 각자 낯설게 찾아왔지만 다들 식구처럼 만나는 감성의 멍석을 밑바탕에 쫙 깐다. 이성의 머리가 아닌 따뜻한 가슴으로 말이다. 개관식 때는 개그맨 김제동이 사회를 본다. 뿐만 아니다. 감성의 느낌을 계속 연장하기 위해 윤도현 밴드, 가수 김장훈, 김C 등 이른바 ‘이외수 사단’이 돌아가면서 3개월 동안 매주 금·토·일에 개관 기념 공연을 가질 예정이다. 이씨는 이들을 가리켜 ‘재능구걸팀’이라고 했다. 또 있다. 전시관 개관을 시작으로 세계 유일의 ‘감성체험장’이 만들어진다. 인간의 오감을 새롭게 각성시키고 감성의 체험을 확장시키는 코스가 이어진다. 공중에서 낱말카드가 쏟아지면 문장을 제대로 작성하는 등의 다양한 체험방도 있다. “20세기까지 이성이 주도했다면 21세기는 감성이 주도합니다. 이성은 인간끼리 커뮤니케이션을 하지만 감성은 인간과 자연을 소통시키지요. 이곳에 왔다 가면 풍부한 감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감성 전이의 체험장이 있습니다. 철학적인 것을 시각적인 것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트럼펫 소리는 금빛이다.’, ‘회초리는 맵다.’는 식의 청각을 시각으로, 시각을 미각으로 체험하는 것이지요. 자유롭고 창조적 감성을 가질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가 감성체험장을 착안하게 된 것은 10여년 전 ‘감성사전’을 발간하면서였다. 또 지나치게 이성과 성적 중심의 사회를 바라보면서 마음이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준비했다. 그런데 걱정이 하나 있다. 예산 마련이다. 이씨의 생각대로 만들어지려면 간단한 예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체험장 사업은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해 늦어도 5년 이내에 완공할 계획이다. 그는 감성마을에 살면서 여러 가지 일을 벌였다. CF도 찍고 글도 쓰고 방송 진행도 하고 좌충우돌, 종횡무진 별의별 거 다 했다. 화천군 홍보대사, 산천어축제 홍보대사, 자살방지 홍보대사, 쪽배축제 홍보대사, 15사단 홍보대사의 직함도 있다. 재미있는 별명도 붙었다. ‘걸어다니는 휴가증’과 ‘명예헌병’ 등이다. “15사단이 마을 부근에 있습니다. 하루는 부대 창설 기념일인데도 축제가 없더군요. 다른 곳은 다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부대장을 찾아갔습니다. 당시 작품 ‘하악하악’을 발간했을 때였지요. 이 책 500권을 사인해서 선물할 테니 휴가증 500개를 달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부대장이 ‘500명이 한꺼번에 휴가를 가면 전력에 차질이 생기니 200장만 합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200장을 받고 부대 창설 기념일 때 각 초소를 다니면서 근무 중인 이등병이나 일등병 위주로 휴가증을 선물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헌병초소 근무자가 가장 많았어요. 나중에 이런 일이 상급부대에 알려지게 됐고 고맙다는 뜻에서 ‘명예 육군헌병증’을 주더군요.” 흥미로운 일화 한 가지 더. 그는 1년에 서너 차례씩 화천군 관내 군부대에서 강연을 한다. 대상은 주로 ‘관심사병’(문제사병을 뜻함)이다. 신기한 것은 이씨의 강연이나 상담을 받은 병사들 대부분이 의욕적으로 군생활에 적응했다는 것. 그러자 해당 부대장은 이씨에게 “아니 병사들에게 마약을 먹였습니까?”라는 농을 건네기도 했다. 한번 방문할 때마다 20~30명이 됐으니 그의 상담을 받아 군생활에 성공한 사병만 100여명은 족히 될 듯하다. 그의 군대 생활은 어떠 했을까. 훈련병 때 글씨를 잘 쓴다고 해서 주특기 ‘칠빵빵’(700)을 받고 육본 부관감실에서 차트병으로 근무했다. 주로 베트남전 사망자 처리 업무였는데 밤 새우는 일을 밥 먹듯이 했다. 이처럼 밤을 잊은 군대 생활로 오늘날 주침야활(晝寢夜活)의 버릇이 생겼다. “우리는 이른바 하나하나(11)로 시작되는 속칭 와르바시 군번인데 무장공비 김신조 사건이다,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등이다 해서 제대가 무기 연기되기도 했습니다. 내무반에서 44명이 칼잠을 자면서 군생활을 했지요. 그때에 비하면 요즘 군대는 캠핑이나 마찬가지입니다(웃음).” 화제를 고향 마을로 돌렸더니 그는 고향이 4곳이라며 껄껄 웃는다. 어떻게? 우선 육신의 고향이 2곳. 경남 함양 상백리에서 태어나 강원도 인제에서 잔뼈가 굵었기 때문이다. 진주사범을 나와 직업군인으로 있던 아버지를 따라 인제에서 살게 됐고 초중고를 인제에서 졸업했다. 그의 이름이 외수(外秀)인 까닭은 외갓집에서 태어나 ‘외’자가 붙었고 ‘수’는 집안 항렬이다. 그 다음은 정신의 고향인 강원도 춘천과 화천이다. ‘벽오금학도’ ‘황금비늘’ 등 수많은 베스트셀러가 춘천에서 탄생했고 화천에서는 ‘글쓰기 공중부양’ ‘하악하악’ 등의 작품이 나왔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현재 트위터팔로어 1위(54만 7000명)라고 하자 그는 “제 글을 읽어야 잠을 잔다는 사람도 있고, 출근해서 제 글을 읽어야 상쾌하게 일을 할 수 있다는 사람도 많다.”면서 “이 시대는 어른이 없는 시대라고 하는데 꾸짖을 때는 가차 없이 꾸짖는다. 악플러들과는 상종을 안 한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어떤 작품을 준비하는지도 물었다. “사람들이 그래요. 이외수의 대표 작이 뭐냐고 말입니다. 그래서 항상 다음 작품이라고 말하지요. 정말이지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다음 작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자료 준비는 거의 끝났고 1권이 될지 2권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씨의 집 앞마당 장독대에는 눈이 소담스럽게 쌓여 있었다. 날씨는 추웠으나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게 감성체험인가 보다. 편집위원 km@seoul.co.kr ■ 소설가 이외수는 누구 춘천교대 제적 1호·72년 신춘문예 등단… 그림 전시회도 1946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직업 군인이어서 어릴 때부터 강원도 인제에서 살았다. 1964년 인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춘천교대에 진학했다. 집이 가난했다. 한 학기 휴학하며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 다음 한 학기를 다녔다. 그러다 보니 대학을 7년 이상 다닐 수 없다는 학칙에 위배돼 1972년 8학점을 남겨 놓고 쫓겨났다. 춘천교대 제적 1호라는 말이 따라붙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해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견습어린이들’로 당선되자 산속에 들어가 본격적인 문장 공부를 한다. 1975년 ‘세대(世代)’지에서 중편 ‘훈장’으로 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이후 창작에만 전념한다. 첫 장편소설 ‘꿈꾸는 식물’(1979)을 발표하며 섬세한 감수성과 개성적인 문체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들개’(1981), ‘칼’(1982), ‘황금비늘’(1997) 등으로 마니아 층을 확보했다. 이후 ‘괴물’(2002)과 ‘장외인간’(2008) 등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펴냈다. ‘내 잠 속에 비 내리는데(1986), ‘감성사전’(1998), ‘외뿔’(2001), ‘내가 너를 향해 흔들리는 순간’(2003), ‘바보바보’(2004) 등의 산문집을 통해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 오고 있다. ‘풀꽃 술잔 나비’(1987)를 시작으로 몇 권의 시집도 출간했다. 화가로서도 수차례의 개인전을 열었다. 선화집 ‘숨결’(2006)을 출간하기도 했다.
  • [사설] 전교조의 노선 대전환 조짐에 주목한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장석웅 위원장이 어제 ‘투쟁중심 탈피’를 선언했다. 또 “제대로 할 일을 못했다.”는 자성과 함께 교육정책을 제시하는 조직으로 탈바꿈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정부와의 대립과 강경 일변도 노선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으로 활동방식이나 내용에서 적잖은 변화가 예고된다. 우리는 전교조의 노선 대전환 조짐에 주목한다. 지난 1989년 ‘참교육’ 기치 아래 출범한 전교조는 공과 논란에도 불구하고 교육 현장과 정책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권위주의적 학교문화를 공급자에서 수요자 중심으로 변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전교조는 지금 기로에 서 있다. 사회적 시선은 한파만큼이나 차갑다. 과도한 정치·이념 투쟁과 함께 상식을 무시한 제 식구 감싸기에 급급한 탓이다. 부적격 교원뿐만 아니라 성범죄를 저지른 교원까지 감싸는 태도는 힘들게 쌓아 올린 정당성마저 단숨에 무너뜨리는 결과를 불러왔다. 평가방식을 문제삼아 교원평가제 반대에 발벗고 나서 자신들이 비판해 온 기득권 안주를 스스로 추구하는 자가당착에 빠진 것도 국민을 실망시켰다. 장 위원장은 전교조의 현실을 제대로 짚었다. “원래 해야 할 일 대신 투쟁을 해야 했다. 조직을 살리기 위해서.”라는 말은 맞다. 조직 내부도 흔들렸다. 회원수가 2005년 9만명대에서 지난해 10월 기준, 6만명을 조금 넘는 수준으로 줄었다. 정치 지향성이 젊은 교사들과 맞지 않았던 이유에서다. 위기를 자초한 측면이 크다고 할 수밖에 없다. 전교조는 ‘참교육’ 열정으로 가득했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더 이상 조합원의 방패막이 역할에 몰두해서는 안 된다. 진보 교육감과도 “실력이 없다면 같이 갈 수 없다.”는 단호함을 보여줄 필요도 있다. 무엇보다 경쟁 위주로만 치닫는 교육 현실의 바람직한 해법을 찾는 데 눈을 돌려야 한다. 학원으로만 몰려가는 학생들을 학교로 되돌리기 위해 수업의 질을 높이는 일에 앞장서고 매진해야 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장 위원장의 ‘교육정책 제시 중심’ 선언은 바람직하다. 정부와 진정성을 갖고 대화해야 함은 물론이고, 철저한 자기 성찰을 통한 변화를 교육 현장에서 확실히 보여줘야 한다. 전교조는 사회변혁을 위한 운동가들의 모임이 아니라 나라의 동량을 교육하는 교원들의 단체임을 늘 잊지 말아야 한다.
  • [서울신문 2011 신춘문예-소설 당선작] 미치가 미치(이)고 싶은/차현지

    [서울신문 2011 신춘문예-소설 당선작] 미치가 미치(이)고 싶은/차현지

    아저씨의 아내가 임신을 했다. 아이는 5개월짜리. 5개월 전에 아저씨의 정액이 아내의 질을 파고들어 거센 산성반응에도 끝끝내 굴복하지 않고 수정란을 착상시켰다. 5개월 전이라면 아저씨와 내가 종로 3가 나이스 모텔 205호에서 새벽 내내 서로의 배꼽 속에 손을 넣었던 때다. 나와 만나기 전날이거나 혹은 다음날에 아저씨는 아내와 같이 잠자리에 들었고 기계적인 성교를 했을 것이다. 아저씨의 아내는 궁색한 가짜 신음소리 내기에 바쁜 여자니까. 아저씨는 여자의 신음소리에 민감하다. 신음소리의 진위 여부를 따지는 것에 편집증 환자처럼 집착한다. 그런 아저씨가 나를 좋아하는 까닭은 단 하나. 나는 가짜 신음소리 따윈 내지 않는다. 오로지 진심. 나는 진짜에게만 연다. 그것이 성대든 밑구멍이든 간에. 오늘 만나. 삐리릭. 교실 한구석에서 체육복을 베개 삼아 누워 있던 나는 문자를 확인하고 곧장 가방을 싼다. 든 것도 없는 가방을 메고 나는 교실 밖으로 향한다. 교문을 빠져나오는 도중에 아저씨에게 한 번 더 문자가 온다. 우리가 만나는 시간과 장소가 적힌, 매우 절약적인 문자. 럭셔리 라운지 모텔 507호. 아홉 시. 아홉 시까지, 아홉 시간이나 남았다. 그날도 여지없이 바람이 불었다. 아저씨와 만나는 날은 어쩐지 모르게 세찬 바람이 분다. 한반도가 원래 이렇게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이었나? 아저씨는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며 말했다. 그러게요. 치마 밑단이 바람에 너풀거렸다. 얘, 허벅지 다 보인다. 아저씨가 말했다. 알아요. 그냥 내버려 두는 거예요. 넌 참 미쳤구나. 그래서 이름이 미치인가 보구나. 아저씨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갔더니 장례를 다 마친 식구들이 둘러앉아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하나 둘씩 꺼내고 있었다. 넌 그새 또 어디 갔다 왔니. 그냥 잠깐. 나는 대충 둘러대고 방으로 들어갈 셈이었다. 그런데 할머니. 할머니가 안 보였다. 엄마, 할머니는? 하고 물어보려던 찰나, 내 방 문 틈새로 할머니의 굽은 등이 보였다. 굽은 등은 서서히 몸을 웅크리며 일정한 리듬에 맞춰 떨었다. 할머니는 울고 있었다. 나는 다음날도 아저씨를 만났다. 삼성동 명아장 모텔 313호. 시간은 오후 아홉 시. 나는 근처 화장실에서 교복 와이셔츠를 벗고 보라색 민무늬 원피스를 입었다. 바람이 찼다. 나는 여덟시 오십 오 분에 모텔에 도착했다. 내가 313호의 문을 열었을 때는 이미 아저씨가 다 벗은 몸으로 누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이. 아저씨가 인사했다. 방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쾌적한 향내가 풍겼다. 오히려 첫 번째 갔던 곳이 적당히 촌스러우면서 마음이 편했다. 옷을 못 벗겠어요. 내가 말했다. 아저씨는 보라색 민무늬 원피스를 아래에서부터 위로 벗겨냈다. 그리고는 내 몸 이곳저곳을 꾹꾹 누르듯이 만져댔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냥 참았다. 나는 아저씨가 하라는 대로 몸을 열고 젖히고 오므리고 뒹굴었다. 두툼한 손가락처럼 두툼한 아저씨의 뱃살이 출렁거리며 내 피부에 닿았다. 남의 살을 맞대는 것이 기분이 나빴다. 아저씨의 거죽에 파묻혀 질식할 것 같았다. 물론 아저씨가 그렇게 뚱뚱하지는 않지만 그냥 남의 살결, 살 틈으로 새어나오는 냄새 같은 것이 어쩐지 두려웠다. 한 차례 사정이 끝나고 난 뒤에 아저씨는 모로 누워 담배를 피웠다. 그때까지 나는 아저씨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얘, 너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아저씨가 슬쩍 내게 말을 건넸다. 미치. 미치예요. 아아, 그래. 그래서 내가 너에게 미쳤다고 말을 했었지. 네에. 근데 전 미치진 않았어요. 그냥 미치일 뿐이에요. 음, 그래. 하지만 좀 특별한 이름이구나. 네에. 미카엘 같은 거랑 연관된 건 아니에요. 음, 그렇구나. 그렇다면 미치는 무슨 뜻이니? 미치는 그냥 미치인데요. 별 뜻은 없어요. 음, 그렇구나. 아저씨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고 대화를 끝내겠단 듯 자세를 고쳤다. 등 돌린 아저씨의 넓은 등짝이 우스워 보였다. 나는 아저씨의 담배를 빌려 등짝에 무어라 쓰고 싶었다. 등신이라고. 그때 아저씨 이름을 물어보면 좋았을 걸. 아직도 나는 아저씨 이름을 모른다. 장씨, 김씨, 윤씨, 최씨. 개중에 하나겠지. 여하튼 내가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성씨일 거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아저씨의 두툼한 손가락과, 출렁이는 뱃살, 수염자국이 난 얼굴피부뿐이다. 정수리 근처가 조금 휑한 거나 금이빨로 된 어금니가 하나 있다는 것, 배꼽부터 무성한 털이 하반신 전체를 뒤덮고 있다는 것과 생각보다 발이 아담한 것, 그리고 오른쪽 팔뚝에 개에 물린 자국 같은 게 있다는 것까지. 아저씨의 흉터는 곧 아저씨의 이름이었다. 아저씨와는 일주일에 두어 번 정도 만났다. 만나는 장소는 서울 전역. 아저씨는 최대한 겹치지 않도록 고심하여 장소를 물색하는 것 같았다. 한 번도 같은 동네, 같은 모텔을 반복해서 간 적이 없었다. 생각보다 서울은 넓었다. 구석구석 늘어선 골목과 로터리가 답답할 정도로 복잡했다. 위로 세우고 벙커를 만들고, 한정된 공간의 쪽수를 넓히거나 한 칸짜리 공간을 좁히거나 하는 식으로 자꾸만 넓어져 가는 서울. 뚝딱뚝딱 완공이 끝나면 어디에선가 증축이 시작되고, 어딘가가 매끈해지면 다시 어딘가가 더럽혀졌다. 더럽혀진 부분을 메우는 동안 또 어딘가가 파괴되고 무너져 갔다. 할아버지는 폭설이 내리던 날, 보도블록에서 미끄러져 죽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병원으로 후송된 지 십 칠 분 만에 사망선고를 받았다. 가족들은 오래 살다 가셨으니 여한 없으시리라 판단, 호상이라 여기며 잔칫집처럼 장례를 치렀다. 여기저기서 웃고 떠들고 화투 패를 돌리고 거나하게 취해 노래를 불러대고. 삼일 중 이따금씩 곡소리가 들렸으나 그것도 매우 형식적이었다. 하하호호 웃다가 누군가 곡소릴 내면 얼마간 따라 울어주고, 딸꾹질 멈추듯 뚝 그치면 다시 하하호호하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처음 보는 광경에 놀란 내가 밖으로 빠져나와 교복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낸 순간, 아버지가 홀연히 담배를 물며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서울에서 보는 별은 참 폼이 안 나. 아빠는 소주가 담긴 종이컵을 조심스레 한 모금씩 마셨다. 아빠의 왼손에 달린 담배가 빨간 불씨를 태우며 양복바지를 위협했다. 그거 탈 거 같은데. 내가 말했지만 아빠는 듣지 못했다. 염병할 양반. 보도블록에서 고꾸라지기는. 아빠는 색색의 벽돌이 지그재그로 놓인 보도블록을 얼마간 쳐다보다가 가래침을 뱉었다. 카악, 퉤. 아직 녹지 않은 눈에 가닿은 가래침은 희부연 노란빛을 풍겼다. 아빠는 다 태우지도 않은 담배와 함께 종이컵을 집어 던졌다. 소주가 바닥을 치고 튀었다. 아빠는 불콰해진 얼굴을 하고 다시 식장 안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아저씨에게 문자를 넣었다. 아저씨 뭐해요. 그러나 답장은 오질 않았다. 실은 한 번도 먼저 연락해 본적이 없었다. 뭐하냐고. 역시 묵묵부답. 차라리 보내지 말 걸, 두 번씩이나 씹혔다. 쪽팔리게.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문자가 도착했다. 미친이구나. 오늘 만날까? 미친이라니, 내가 분명 미치지 않았다고 했을 텐데. 미친 아저씨. 나는 눈에 젖은 운동화 끈을 고쳐 매고 곧장 아저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내가 병원 앞에서 택시를 잡으려고 서성이는 동안 아빠는 병원 건물 귀퉁이 어딘가에서 토를 하고 있었다. 아빠는 대충 토하는 것을 마치고는 보도블록에 그대로 고꾸라졌다. 얼굴 표면이 토사물 범벅이었다. 아빠의 긴 속눈썹에 연주황색으로 변한 실파가 붙어 있었다. 더럽게시리. 나는 다시 대로변으로 눈길을 돌렸다. 택시는 쉽게 잡히지 않았고 나는 얼마간 더 병원 앞에 서 있어야 했다. 한쪽 손을 기계처럼 흔들면서 무심코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빠 말대로 별 몇 개가 우스운 크기로 떠 있었다. 저게 무슨 별이야. 그러는 사이에 택시가 잡혔다. 어디 가십니까? 하고 물어오는 택시 아저씨에게 별 보러요, 라고 말할 뻔했다.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삼일 내내 나는 아저씨를 만났다. 만나서 하는 일이라곤 섹스가 전부였고, 섹스가 끝나고 치르는 비릿하고 울적한 냄새들을 소멸시키는 일에 신경 쓰느라 내 가방 속에 구겨져 있을 교복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다. * 아저씨의 아내가 임신을 했다는 말을 듣고 나는 손가락으로 시트자락을 빙글빙글 말았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하면서 어떻게 대꾸를 해야 될까 하는 생각보다는 어떻게 하면 아저씨에게서 아내 얘기를 그만 들을 수 있을까에 대해서 고민했다. 왜 애를 가졌어요? 내가 아저씨 배꼽에 손을 집어넣고 꼼지락거리며 물었다. 아저씨는 간지러웠는지 실실 웃으며 좌우로 몸을 배배 꼬았다. 내가 가진 건 아니고 아내가 가진 거지. 아저씨는 말했다. 그렇지만 아저씨 꺼가 필요하잖아요. 음, 그렇긴 하지만 뭐 그거랑 그거랑 같은 일로 봐서는 좀 그렇지. 그거랑 그거랑 원래 같은 거 아니에요? 그걸 해야지 그걸 할 수 있잖아요. 에이, 하지만 언제나 그걸 하려고 그거 하는 거 아니잖아. 아아, 하긴. 우리도 그거 하려고 그거 하는 거 아닌 것처럼요? 으응, 그래 맞아. 골치가 아픈 일이지, 그거는. 우리는 너무나 많은 그거를 사용했고, 나중에 가서는 굳이 그거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에서까지 그거 타령을 했다. 그러다가 대화의 종반부에서는 그거가 무엇을 뜻하는지, 어디에서부터 그거를 그거로 불렀는지, 그거가 그거가 아닌 다른 그거인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부랴부랴 대화를 마치고 다시 등을 돌려 누웠을 때, 아저씨의 등과 내 등이 맞닿았다. 나는 차갑고 아저씨는 뜨겁다. 섹스를 하고 나면 아저씨가 차가워지고 내가 뜨거워진다. 척추를 나란히 두고 우리는 열과 냉을 반복적으로 옮겼다. 열탕과 냉탕을 번갈아 가는 기분이었다. 아저씨도 참 후졌다. 내가 말했다. 아저씨의 등줄기가 움찔했다. 글쎄 내가 만든 게 아니고 아내가 만든 거라니까. 아저씨가 발로 내 종아리를 간질였다. 굳은살이며 티눈이 박인 피부 표면이 까끌까끌했다. 어떻게 하면 애를 낳을 생각을 해요? 너무 구려. 너무 너무 구려.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어떤 시대기는, 잘 먹고 잘사는 시대지. 너무 구려. 태어나는 일 자체가 구린 시대예요, 지금 이 시대는. 미치. 너는 너무 어린데, 너무 많은 걸 봤어. 그러니까 지금 이러고 있잖아요. 씨발. 나는 울먹였다. 아저씨가 발로 장난치는 것을 멈추었다. 다시 몸이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그 애 낳으면 나 꼭 보게 해줘요. 음, 그래. 그럴 수 있다면 뭐, 그렇게 해보지. 아저씨는 말을 이으며 침대를 빠져나갔다. 어디가요? 똥 누러. 아저씬 왜 만날 그렇게 똥을 싸요? 모르겠어. 난 너만 보면 똥이 마려워. 아내 앞에서는요? 집이건 회사건 똥 싸는 일이 고역인데, 난 너만 보면 똥구멍이 빠져버릴 거 같아. 나는 킥킥대며 웃었다. 똥을 싸고 싶어 재빠르게 화장실로 가는 아저씨의 뒷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나만 보면 똥이 마렵다는 아저씨. 나는 또 한번 아저씨에 관한 흉터를 진하게 새겼다. 똥냄새를 풍기며 침대로 돌아온 아저씨와 뒹굴다가 말고 문득 할머니 생각이 났다. 여든 여덟의 할아버지와 함께 육십 년을 살아온 할머니. 할머니는 일흔 일곱. 열한 살 연상의 남편을 마주 대하며 겪었을 무수한 고통을 유순한 고집과 무지한 강직함으로 이겨낸 할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삼 년 전에 서울로 올라왔다. 평생 동안 밭을 일구고 소를 키우며 지냈던 고향을 저버린 것은 할머니의 류머티즘 관절염이 심해진 탓이었다. 밭을 안 일구면 되지 않냐, 그냥 일 안 하고 시골에 계속 계시면 안 되냐, 하고 심술을 툴툴 부린 내게 엄마는 꿀밤을 먹였다. 네가 시골에 가서 한 번도 살아보질 못해 이러는구나. 시골에 산다는 것 자체가 일이다. 일을 안 하고 살 수 있다는 개념 자체가 없는 곳이야. 등불이 없는 동굴 같은 곳이라고. 그렇지만 친하지도 않은 어른들과 함께 부대껴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걱정 마. 따로 모실 거니까. 따로 사는 데엔 나보다 엄마 몫이 더 컸다. 아빠는 미적지근하게 그러지 뭐, 하며 우리 집 근처에 값이 싼 아파트를 골라 전세계약을 했다. 십육 평형 아파트는 지은 지 이십 년이 넘었다. 군데군데 갈라진 틈새며 월마다 꼬박꼬박 작동 점검을 하는 엘리베이터가 기괴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것 때문에라도 할머니 집에 잘 가지 않았다. 가끔 식용유나 세제 같은 걸 사들고 가는 아빠에게 거기 귀신 나올 것처럼 음산해, 라고 말하면 아빠는 내 콧잔등을 쿡 치면서 노인네들 잠자리 뒤숭숭하게 함부로 말 놀리지 말라고 대답했다. 그깟 귀신, 어차피 동년배들 아니겠어? 속으로 나는 생각했다. 할머니 집 전세계약이 얼마 안 있어 끝날 참이었다. 재계약 여부에 대해 곰곰이 따지고 있던 엄마는 되레 계약기간 전에 죽어버린 할아버지를 조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또 조금 원망하기도 했다. 엄마는 짐들이 가득 들어찬 다용도실을 대충 비워내고 할머니가 덮을 이불을 마련했다. 할머니는 풀지 않은 짐짝처럼 더욱 몸을 웅크리며 집으로 들어왔다. 때때로 자정에 가까운 시간, 내가 비릿한 정액 냄새를 풍기며 집으로 들어오면 건넌방에 있던 할머니가 빠끔히 문을 열고 나를 들여다봤다. 내가 왜요? 라는 기색으로 노려보면 이내 주춤거리는가 싶게 눈을 피하다가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다시금 내 쪽을 살폈다. 내가 한 번 더 뭘 봐요? 라는 표정으로 찌릿, 눈빛을 쏴주면 그제야 다 알겠다는 듯 체념한 얼굴로 방문을 닫았다. 기분 나빠. 내가 닫힌 방문 틈새로 들릴 만큼 크게 말했다. 그럼 방문 너머로 할머니가 쪼그라든 풍선처럼 한숨을 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장례식장에서 보았던 별 몇 개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옹졸하게 쪼그라든 것이 언젠가는 점점 작게, 그보다 더 작게, 그래서 결코 보이지 않을 것처럼 아득해질 것만 같았던 별들. 마치 할머니의 쪼그라든 유방처럼. 너네 엄마니까 네가 알아서 해. 안방에서 언성 높이는 소리가 들렸다. 구질구질한 부부싸움이 또 시작됐다. 카악, 퉤. 아빠의 가래침 뱉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어디서 뱉어 진짜? 엄마가 이전보다 한 톤 높게 소릴 질렀다. 카악, 퉤. 카악, 퉤. 의식적으로 가래를 뱉다가 사래 걸린 아빠가 연신 밭은기침을 토했다. 조금 과장이다 싶게. 나는 방밖으로 나가볼까 하다가 귀찮아져서 그냥 침대에 누웠다. 모텔과는 다른 차원의 이불을 손끝으로 매만지다가 말고 할머니가 궁금해졌다. 엄마 아빠는 아무래도 버려진 짐짝처럼 놓인 할머니 따위는 신경 안 쓰는 것 같다. 미친 엄마 아빠. 나는 방문을 열고 건넌방에 있는 할머니를 살핀다. 방문이 미세하게 열려 있다. 아마도 할머니가 직접 살짝 문을 열어 놓았을 터. 문과 문턱이 아귀가 딱 맞게 붙어 있지 않고 약간 틈을 벌리고 있다. 그 미세한 틈처럼 할머니는 숨을 쉬고 있는지 몰랐다. 사방이 막힌 곳에서, 끝없이 유입되는 물세례에 허덕이듯이. 할머니 서럽겠다. 짝이 없으니 얼마나 비참하겠어. 네 아저씨는요? 아저씨의 귓불을 빨면서 내가 물었다. 그건 여자에게만 국한된 일이야. 남자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워. 아예 머릿속에 그런 게 없어. 이 사람 없으면 죽겠다 싶은 그런 게. 결혼 왜 했어요? 내가 묻자 아저씨는 뜸을 들였다. 글쎄, 돈을 모아야 하니까. 그리고 어쨌든 옆에 사람이 있어야 좋지 않겠어? 남자란 게 그래. 챙겨주고 입혀줄 사람이 꼭 필요하지. 좆나 후졌네, 남자들이란. 내가 말을 마치자 아저씨가 깔깔 웃었다. 뭐가 웃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기분이 나빴다. 미친 아저씨. 뭐 이런 게 다 있지? 덜 말린 해초처럼 무성한 아저씨의 풀숲을 헤치다 말고 나는 입을 뗐다. 입술에 빳빳한 음모가 달라붙었다. 에이, 좀더 해주지 그래. 아저씨가 눈을 감은 채 말했지만 나는 그냥 일어났다. 반투명한 유리 칸막이로 된 화장실로 들어가 온몸을 빡빡 문질러대며 샤워를 했다. 아저씨가 따라 들어왔다. 에이, 미치. 섭섭하게 왜 그래. 아저씨가 내 팔뚝에 묻은 거품을 닦으면서 품에 안으려 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샤워기를 아저씨 방향으로 틀었다. 뜨거운 물줄기가 아저씨 살갗에 닿았다. 앗 뜨거워. 아저씨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오늘은 안 할래요, 피곤해요. 저리 가요. 이제 만지지 마요. 아저씨는 몸에 묻은 물기를 털고 아쉬운 표정으로 나갔다. 내가 샤워를 마치자 아저씨는 침대에 걸터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미치. 앞으로 삼주 정도 못 봐. 나는 왜냐고 물어보려다 그냥 말았다. 아내랑 여행을 갈지도 모르겠어. 아무래도 애 낳기 전에 좀 돌아다녀야 될 것 같아서. 애가 나오면 피곤해지잖아. 나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매만지며 물기를 닦았다. 외국을 다녀올까 해. 연차랑 휴가 당겨쓰니까 삼주 정도 여유가 생기더군. 나는 대충 로션을 찍어 바르고 옷을 챙겨 입었다. 가방 속에 든 교복을 입을까 하다가 그냥 관두었다. 아내가 더블린에 가고 싶다네. 난 애초에 더블린이 어디 박혀 있는 덴지도 몰랐다니까. 그냥 동남아 일대나 둘러보고 올 것이지, 무슨. 대충 스타킹까지 신었다. 주머니를 쑤셔 담배를 찾았다. 아저씨가 담배를 건넸지만 무시했다. 삼주 뒤엔 웃으며 보자. 내가 널 좋아하는 건 명랑해서야. …… …… 삼주 동안 똥 못 싸서 어떡해요? 그러게. 그걸 생각 못 했네. 아저씨는 정말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그 모습에 어이가 없어 픽 웃었더니 아저씨가 갑자기 나를 들어 침대 중앙으로 눕혔다. 아직 화 안 풀렸거든요? 내가 말해도 묵묵부답. 아저씨가 좋아하는 보라색 원피스가 내 몸에서 멀어졌다, 부득이하게. 아저씨는 이전보다 더 맹렬하게 내 몸 이곳저곳을 들쑤셨다. 그때 처음으로, 진짜 신음소리라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다음날 일어나보니 엉덩이에 푸른 멍이 흉터처럼 들어 있었다. 언제고 지워질 것이 빤한 흉터가. * 아저씨는 정말 삼주 넘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나는 오랜만에 학교엘 갔다. 책상에 엎드려 잘까 하다가 그냥 수업을 들었다. 의자에 등을 펴고 앉아 있었지만 역시 좀이 쑤셨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수업 종이 쳤다. 삼삼오오 모여 있던 애들이 자리로 가 책상을 정돈했다. 아직 선생이 오질 않았다. 틈을 타 가방을 몰래 들고 빠져 나왔다. 이제 어디든 갈 곳을 찾아야 했다.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데 갑자기 누가 말을 걸었다. 쎄미였다. 나도 데려가. 미친년. 귀찮게시리. 우리는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탔다. 어디 갈 건데? 몰라. 뭐야, 시시하게. 그럼 나 따라와. 그러든지. 우리는 번화가 로터리에서 내렸다. 쎄미는 지하철역으로 나를 데려가더니 역사 안 물품보관함에서 옷을 꺼냈다. 초록색 미니 원피스였다. 넌 갈아입을 거 없어? 나는 가방 안에 든 보라색 민무늬 원피스를 꺼내 보였다. 우리는 쌍방울자매처럼 원피스를 맞춰 입었다. 쎄미가 아이라이너와 립스틱을 주었다. 나는 어설프게 아이라인을 그리고 립스틱을 발랐다. 우리는 피시방으로 갔다. 모니터 한 대를 앞에 두고 나는 쎄미가 게임하는 걸 지켜보다가 졸았다. 얼마 안 있어 쎄미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이제 나가자. 시계를 보니 일곱 시였다. 번화가 로터리는 반짝이고 있었다. 온갖 조명 세례에 비둘기들은 나뭇가지 위로 종적을 감췄다. 보도블록은 연이어 뱉은 껌들과 담배꽁초로 넘쳐났다. 쎄미는 로터리 변방에 있는 건물로 나를 인도했다. 색이 누런 간판에 조명도 시원찮은 것이 딱 학생들이 숨어 술 마시기 좋은 곳이었다.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자 짜리몽땅한 할머니가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손짓으로 인사를 했다. 쎄미가 샐쭉이 웃어 보이며 익숙하게 소주 두 병과 부대찌개를 시켰다. 할머니는 그제야 태연히 일어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나는 가방 안에 있던 담배를 올려놓고 주변을 살폈다. 태반이 고등학생들처럼 보였다. 잘 하지도 못 하는 술을 마시며 저들끼리 신나게 놀고 있었다. 쎄미는 재떨이를 제 앞에 가져다 놓고 그새 담배를 두 대나 피웠다. 나도 라이터를 꺼내 담뱃불을 붙이려는데 어디선가 쎄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쎄미, 오랜만이다. 쎄미가 남자애 둘에게 알은 체를 하며 나를 쳐다봤다. 옳다구나, 같이 놀자는 소리로군.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키가 큰 자식이 쎄미의 옆자리로 가 앉았다. 뒤이어 눈썹이 숯덩이처럼 진한 남자애가 내 옆자리에 비집고 들어왔다. 그새 할머니가 전골냄비가 올라간 부르스타를 들고 와서는 퉁명스레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쎄미와 그 옆에 앉은 꺽다리가 계속해서 술잔을 기울였다. 취하려고 작정을 한 것 같았다. 나는 수저를 가지런히 정리하는 숯덩이 눈썹에게 인사를 하고는 다시 담배를 피웠다. 자박한 국물에 퐁당퐁당 빠져 있는 햄 조각과 두부, 콩나물과 양파. 찌개는 어쩐지 팔팔 끓여도 맛있을 것 같진 않았다. 앞에 두 사람이 기어이 취한 척을 하며 서로 부둥켜안을 때쯤 나는 수저를 들어 국물을 맛보았다. 그랬더니 옆의 숯덩이도 냄비에 제 수저를 꽂았다. 나는 맥주에 콜라와 소주를 조금씩 섞어 숯덩이에게 주었다. 숯덩이가 고마워하며 답례로 자신도 타주겠다고 했다. 각자 서로가 타준 폭탄주를 마셨다. 어쩐지 머리가 핑 도는 기분이었다. 쎄미와 꺽다리는 팔짱은 물론 어깨동무며 심지어는 서로에게 입술까지 드밀며 야단이었다. 소주를 일곱 병쯤 마셨던가. 그 와중에도 쎄미가 자리를 뜰까봐 손을 꼭 부여잡으면서 집에 바래다주겠다는 꺽다리가 숯덩이에게 눈질을 보냈다. 무언의 암시 같은.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거행된 약속이 있었던 듯싶다. 쎄미는 비에 젖은 이불처럼 꺽다리의 팔뚝에 안긴 채 실려 나갔다. 이윽고 숯덩이와 나만 남았다. 숯덩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쭈뼛거렸다. 우리도 일어나지 뭐. 벌써 가게? 그럼 더 있으려고? 시간 별로 없어. 밤은 못 새. 숯덩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끔벅였다. 유치한 반응. 어디로 갈 건지는 정했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숯덩이. 아, 이래서 어린애들은 귀찮다. 다 정한 거 알고 있거든. 모텔로 갈 거 아니야? 일 치르곤 만나 해장할 거 아니었어? …… 그리곤 쎄미랑 나랑 누구 가슴이 더 컸는지 낄낄거리겠지, 뭐. 안 봐도 빤해. …… 빨리 계산하고 나와. 너구리굴처럼 피어오르는 담배연기 속을 헤집고 나와 건물 앞에서 숯덩이를 기다렸다. 숯덩이는 쭈뼛거리며 나왔지만 안절부절 갈피를 못 잡았다. 앞장 서. 내가 말했다. 그래도 돼? 어, 원래 이러려고 했잖아. 내가 인상을 쓰자 숯덩이가 이내 내 손을 잡았다. 손은 잡지 마. 숯덩이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냥 말자. 숯덩이가 말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가장 가까운 영화관에 들어갔다. 심야시간대에 하는 할리우드 영화를 보다가 잠시 졸았다. 조는 내내 숯덩이가 내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박력 없기는. 영화를 다 보고 나와 숯덩이가 팝콘봉지를 쓰레기통에 버릴 쯤에 나는 숯덩이의 팔목을 거세게 붙잡고는 그를 이끌었다. 어디 가려고? 심심한데 그냥 DVD방이나 가든지. 우리는 영화관에서 가장 가까운 DVD방으로 들어섰다. 프런트에서 계산을 하는 숯덩이 몰래 아저씨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러나 숯덩이와 몸을 섞고 난 뒤에도 아저씨에게선 답문이 없었다. 정말이지 짜증나. 나는 검은 소파에 누워 말했다. 숯덩이가 휴지를 찾아 두리번거리다 말고 멈칫했다. 그리곤 내 쪽을 쳐다보며 눈을 흘긋거렸다. 화면에는 에메랄드빛 바닷물이 출렁거리는 게 비쳤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러닝타임이 긴 시리즈물을 선택한 것이 후회가 됐다. 숯덩이가 슬금슬금 내 옆에 드러누웠다. 너 이만 가봐. 싫은데. 그럼 걍 닥치고 가만히 있든지. 어차피 나도 뺑이 치는 거야. 오전 아르바이트하러 가야 되거든. 학교는 안 다니니? 너야말로 학교 다니는 년이 이러고 다니냐? 등신. 너만큼 구린 애 아니거든, 나. 웃기고 있네. 됐다. 그만 말해, 입만 아파. 딱 봐도 사이즈 나와. 나는 뭐 누나들이랑 안 놀아본 줄 아냐. 뭐라고? 나는 울컥 화가 났다. 나는 대충 윗옷을 걸쳐 입고 DVD방을 나왔다. 숯덩이는 자는 건지 자는 척을 하는 건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새벽 다섯 시였다. 거리는 아직 깜깜했다. 추위 탓인지 사람은 별로 없었다. 드문드문 건물 앞 계단에 누워 토사물을 흘리며 잠을 자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으나 거리는 한적했다. 나는 터벅터벅 지하철 역 안으로 들어갔다. 지하철은 아직 운행을 하지 않았다. 나는 내려진 셔터에 기대고 앉아 핸드폰을 꺼냈다. 어쩐지 발가벗은 느낌이 들었다. 숯덩이는 내 몸 이곳저곳을 꾹꾹 눌러주던 아저씨의 손길을 느낀 것일까. 내 몸에 남겨진 아저씨의 냄새를 맡은 것일까. 쪽팔리게, 정말 후지게 자꾸만 눈물이 비어져 나왔다. 아저씨를 만난 건 레코드 가게에서였다. 아담했지만 역사가 오래된 레코드 가게는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했다. 섹션별로 잘 나눠진 음반들은 가게 주인의 손을 거쳐 가지런히 정리되었고 새로운 주인에게로 입양됐다. 주인은 내가 오면 리패키지 앨범이나 베스트 앨범, 내가 모르는 희귀 앨범을 꺼내 들려주곤 했다. 그곳에서 나는 아저씨를 보았다. 존 레넌의 사망주기 30년을 맞아 아저씨는 비틀스의 앨범을 사러 왔다고 했다. 주인은 LP로 된 비틀스의 마지막 앨범을 꺼내주었다. 아저씨는 보물 다루듯 LP를 매만졌다. 그거 복사본 같은데. 내가 다가가 이 말을 전하기 전까지는. 아저씨는 내 쪽을 살피며 무슨 상관이냐는 듯 쳐다보았다. 제가 아는데요. 20년 전에 들어온 건 정식판 거의 없어요. 다 해적판이지. 그리고 진퉁이라 쳐도 몇 억 넘을 걸요? 그냥 작년에 나온 리마스터 앨범 사세요. 저 같으면 그거 안 사요. 내가 말을 마치자 아저씨는 피식 웃으며 LP를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계산을 마친 아저씨는 앨범을 구경하고 있는 내게 다가와 말했다. 이봐, 진퉁. 같이 나가지? 그리고 우리는 곧장 모텔로 향했다. 미치. 론리하츠클럽이란 밴드 아니? 비틀스 노래 제목이잖아요. 후추상사의 밴드. 물론 한국에 그 제목을 딴 인디밴드가 있단 건 알아요. 아니. 론리하츠클럽이란 밴드가 낸 책이 있어. 그 책에 수록된 단편들은 모두 비틀스의 노래 제목으로 이루어져 있지. 그 속에 든 여자주인공 이름도 역시 비틀스의 노래에서 따온 거야. 루시나 리타 같이. 그런데 정말 신기한 건 이 밴드가 남아프리카 출신들이란 거야. 그래서 번역본을 구하긴 힘들어. 그 튼실한 내용의 책은 읽은 사람들마다 모두 엄지를 치켜든다고 해. 더 신기한 건 뭔 줄 아니? 소속된 밴드 팀원이 단 한 명이란 거야. 뭐야. 나머지는 다 세션이에요? 그 밴드는 공연 안 해요? 응. 그 밴드는 단 한 번도 공연을 한 적이 없어. 그 밴드의 업적이라곤 책 낸 게 끝이야. 그게 뭐가 밴드예요. 그냥 작가지. 그러게. 하지만 그 사람이 우기면 밴드겠지. 마치 네 이름이 미치가 아닌데도, 네가 줄곧 미치라고 우기는 것처럼 말이야. * 아침 7시가 다 돼서야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고 몰래 방 안으로 들어오려는데 어쩐지 고요했다. 방문을 열고 둘러보니 집엔 아무도 없었다. 꺼놨던 핸드폰의 전원을 켜니 아니나 다를까 엄마의 문자가 잔뜩 와 있었다. [미친년. 집에 들어오기만 해.], [네 방에 있는 CD 다 갖다 버리기로 결단 내렸다.], [평생 네 멋대로 하다가 죽어. 여한 없이 그렇게 살아라. 부럽다.], [엄마아빠 오늘 등산 가니까 네가 할머니 밥 좀 챙겨드려. 것까지 안 하면 넌 정말 죽는다.] 나는 할머니 방의 방문을 열어보았다. 할머니는 축 늘어진 미역처럼 장롱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기척도 못 느끼셨는지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가 큰 소리로 두어 차례 할머니를 부르자 그제야 어깨를 움찔하는 할머니. 저 왔어요. 밥 드셔야죠. 할머니는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아차. 원피스를 교복으로 갈아입는다는 걸 깜빡했다. 생각해 보니 허접한 실력으로 그린 아이라인도 엄청 번져 있을 것이었다. 밥 챙겨드릴게요. 좀만 기다리세요, 하고 방문을 닫으려는데 할머니가 허공에 손짓하는 것이 보였다. 오라는 눈치인가 싶어 나는 대충 눈 밑에 번진 아이라인을 손으로 닦고 할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할머니의 주름이 징그러울 정도로 많았다. 내 어깨보다 한 뼘은 더 작아 보이는 할머니의 어깨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할머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내 손을 잡았다. 할머니의 손은 사람의 피부라기엔 어색할 정도로 꺼끌꺼끌했다. 뭐 해드릴까요? 정적을 깨고자 몇 차례 여쭈어도 할머니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몇 달 전 백내장 수술을 한 할머니의 눈동자는 부옇게 흐려 보였다. 나는 질문하는 걸 포기했다. 할머니는 다시 장롱에 머리를 기대었다. 할머니는 조만간 부서질 박제나비 같았다. 할머니의 눈가와 손, 입술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생각보다 더 깊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계실 때도 이렇게 주름이 많으셨나. 이곳에 와 있는 것이 가뭄처럼 답답하고 숨 가쁠 할머니. 할머니는 아침마다 이렇게 장롱에 머릴 기대고 무슨 생각을 하실까. 살아 있긴 한 걸까. 살아가고 있는 걸까, 살아지고 있는 것일까. 희정아. 할머니가 내 이름을 불렀다. 잘 지내야 된다. 단디 몸 챙기고. 매사 조심하고. 매사 감사하고. 알제. 어쩐 일인지 눈꺼풀이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방으로 돌아오니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도대체 왜 우는 걸까? 이해가 안 됐으나 눈물은 더 솟구쳤다. 접을 수 있다면 잠깐 시간을 접어놓고 싶다. 정말 구리고 후지다. 나는 집전화기로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가 받아도 상관없다. 어떻게든 끝을 내야 한다. 아저씨의 아내가 받는다면 나는 다 폭로할 것이다. 아저씨와 나는 비틀스를 공유한 사이라고요. 론리하츠클럽이란 밴드 아세요? 남아프리카에 있는 원맨밴드를 아시냐고요. 그런 것도 모르면서 임신은 왜 해요? 그렇게 안정적인 게 좋으면 차라리 소파랑 결혼을 하셨어야지. 아저씨는 그런 남자가 아니라고요. 신호가 계속 가는 동안 나는 쉴 새 없이 중얼거렸다. 아저씨가 받는다면 이제 아저씨와는 정말 끝이라고 말해야지. 아저씨의 똥배를 참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요, 라고. 아저씨도 똑같아. 부인 앞에선 똥도 못 눈다면서 여행은 왜 같이 가요? 왜 나한텐 아저씨 이름도 안 알려줘요? 치사하게 산다. 치사 빤쓰다, 정말…… 그리고 달칵. 수화기 너머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네, 한창길입니다. 아저씨 목소리다. 한창길이라는 이름은 어색하지만 이건 분명 아저씨의 목소리다. 내가 수없이 핥았던 목에서 나는 그 소리 맞다. 허나 나는 한창길이란 이름을 모른다. 그런 이름일랑 들어본 적도 없다. 말씀하세요, 누구시죠? 그러니까. 저는. 저는요, 아저씨. 저예요, 미치…… 그러나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아저씨의 번호를 지웠다. 아마 얼마 안 있어 아저씨에게 연락이 올 것이다. 내게 시간과 장소를 문자로 보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저씨의 번호를 지웠다. 아뿔싸. 이렇게 깔끔할 수가. 잠을 자는 동안 모든 걸 지워야지. 아저씨의 배꼽이 따뜻했다는 것 정도만 남겨두고. 다른 건 다 열여덟이라는 전투의 군사기밀이라 생각하고 블랙박스에 가두어 사장시켜야지. 나는 보라색 원피스를 입은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이윽고 집전화가 요란스레 울리기 시작했다, 한참동안이나. 짜증나게. <끝〉
  • 연평도 주민의 새해 맞이

    연평도 주민의 새해 맞이

    <“빨리 돌아가 굴 따야 하는데…” 김포 LH아파트 피란 김영길씨> 연평도 포격 이후 경기 김포에서 피란생활을 하고 있는 김영길(48)씨 가족은 시름 속에 새해를 맞았다. 지난달 19일 인천 찜질방에서 김포 LH아파트로 주거지를 옮겼지만 생활은 달라진 게 없다. “먹고사는 게 제일 큰 걱정이죠. 타지에서 새해를 맞는 게 좋을 일이 뭐가 있겠어요.” 매년 텔레비전으로 챙겨 보던 보신각 타종 행사도 올해는 생략했다. 떡국도 먹지 않았다. 이웃과 함께 떡국을 나눠 먹고, 아이들 손잡고 동네 어르신들 찾아 세배를 했던 지난해를 그리워하며 새해를 맞았다. 피란 생활이 길어질수록 김씨의 주름살도 깊어지고 있다. 연평도에는 언제 돌아갈 수 있는지, 보상은 어떻게 되는 건지 누구도 답변을 해주지 않아 답답할 뿐이다. 김씨는 “연평도 관련 뉴스가 나올까봐 매일 텔레비전 뉴스만 본다.”면서 “미래를 알 수 없으니 막막하기만 하다.”고 토로했다. 김씨의 유일한 희망은 두 자녀다. 찜질방에서 생활할 때 무척 우울해하던 아이들이 김포로 옮긴 뒤부터 차차 안정된 모습을 보여 그나마 위안이 된다. 김씨는 “어른들 눈치 보지 않고 신나게 놀 수 있어서인지 아이들의 표정은 밝아졌다.”면서 “형편이 넉넉지 않아 맛있는 걸 사줄 수 없는 게 아쉽다.”고 말했다. 김씨는 요즘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딱히 하는 일 없이 텔레비전을 보며 지내고 있는 김씨는 “연평도로 언제 돌아갈지 모르니 일자리가 가장 걱정”이라면서 “정부가 일자리를 마련해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른 주민들도 분위기는 비슷하다. 새해를 맞았어도 차분하게 가라앉은 모습들이다. 김씨의 유일한 새해 소망은 연평도로 하루 빨리 돌아가는 것. 네식구의 가장인 김씨는 “유일하게 바라는 건 연평도 집으로 돌아가 두발 쭉 뻗고 잠 한번 자는 것”이라면서 “예전에 하던 굴·조개잡이도 하고, 뭐든 다 할 것이다. 돌아가서 일을 해 돈을 벌어야 처자식을 먹여 살릴 수 있다. 소원은 오직 그것뿐이다.”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민영·김소라기자 min@seoul.co.kr <“평화로운 섬 되게 해달라 기도” 섬 잔류 박미경씨> “새해에는 평온한 가운데 떠났던 주민들이 모두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제 아이들도 또래 친구들과 즐겁게 학교 다녔으면 좋겠고요.” 인천 옹진군 연평도 주민 박미경(42·여)씨는 2일 본지 기자와의 통화에서 한달 넘게 가슴 속에 묻어뒀던 작은 소망을 털어놨다. 그는 새해가 찾아왔지만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열지 않아 아이들에게 맛난 음식조차 장만해 주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도 전하는 말에서는 여유와 푸근함이 물씬 배어났다. 연평장로교회 목사인 남편과 두 아들 등 단란한 네 가족은 새해 첫날, 이웃 주민들이 가져다 준 굴로 음식을 만들고 떡국을 끓여 먹으며 한마음으로 “연평도가 앞으로 살기 좋은 섬이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박씨는 “지난해에는 북한의 추가 포격이 있지 않을까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는데 이제 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면서 “새 학기에는 둘째 아들의 건강이 좋아져 어린이집에 들어가고, 첫째도 초등학교에 입학해 학교 생활을 잘할 수 있다면 더 큰 바람이 없다.”고 말했다. 특히 최근 몰아친 강추위와 폭설 때문에 지연된 마을 복구공사가 빨리 마무리되도록 정부가 힘을 더 실어달라고 부탁했다. 박씨에 따르면 연평도는 갈수록 굴 따는 주민들이 늘어나는 등 점차 활기를 되찾아가고 있다. 꽃게철은 지났지만 230여명의 주민이 섬으로 돌아오면서 깨진 창문을 갈아끼우고 대문을 고치는 등 복구작업도 한창이라고 전했다. 그는 “이웃 분들이 ‘집에 돌아오니 편안하다’ ‘웬만하면 나가지 않고 살겠다’고 하셔서 마음은 편하다.”고 밝은 목소리로 전했다. 그는 정부와 정치인들에게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연평도를 만들어 달라.”는 바람을 전했다. 박씨는 “국가에서는 서해 5도를 요새화한다고 말하지만 거창한 것보다 주민들이 ‘이제 안심하고 살아도 되겠다’라고 하는 신뢰감부터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정현용·최두희기자 dh0226@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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