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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국민소득 통계의 허와 실/손성진 수석논설위원

    [씨줄날줄] 국민소득 통계의 허와 실/손성진 수석논설위원

    국민소득 이야기가 나오면 실감이 나지 않는다. 소득이 2만 5000달러라면 한화로 1인당 2500만원이 넘고 네 식구 한 집은 평균 1억원이 넘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국민소득을 말할 때 GDP(국내총생산)보다는 GNI(국민총소득)를 사용한다. GDP는 외국인을 포함해 우리나라에서 가계·기업·정부가 창출한 부가가치를 모두 더한 값이다. GNI=GDP+해외순수취요소소득이다. 즉, GDP에서 한국인이 외국에서 벌어들인 소득을 더하고 국내 거주 외국인들이 외국으로 갖고 나간 소득을 뺀 게 GNI다. 엊그제 한국은행이 발표한 지난해 1인당 GNI는 2만 6205달러였다. 한화로는 2869만원쯤 된다. 평균 가구원수 3.25명을 곱하면 가구당 소득이 8516만원이 돼야 한다. 지난 한 해 평균가구소득은 4994만원이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가계가 실질적으로 벌어들인 소득의 개념에 PGDI라고 하는 ‘개인총처분가능소득’이 있다. GNI에는 가계뿐만 아니라 정부나 기업이 벌어들인 부분도 포함돼 있어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GNI에서 정부가 징수하는 세금, 사회보험 부담금과 기업의 잉여금을 제외한 소득이 PGDI로 실제의 가계소득이라 할 수 있다. 지난해 1인당 PGDI는 1만 4690달러(한화 약 1608만원)다. GNI에서 가계 몫인 PGDI 비중은 56.1%다. 100개를 만들었는데 정부와 기업이 44개를 갖고 가계엔 56개만 돌아갔다는 말이다. 여기에 포함된 민간 비영리단체의 소득까지 뺀 순수한 가계소득은 1500만원 안팎이라고 한은은 설명했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GNI 대비 PGDI 비중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거의 최하위라는 점이다. 2012년은 57.9%였는데 1년 새 더 떨어졌다. 미국(74.2%), 영국(69.0%), 일본(64.2%)은 물론 OECD 평균 62.6%(2012년 기준)에도 훨씬 못 미쳐 25개 회원국 중 18위다. 우리보다 낮은 나라들은 복지대국이라는 스웨덴·덴마크·네덜란드 등이다. 무상복지 서비스가 통계상 개인소득으로 잡히지 않아서 우리보다 낮다고 한다. 우리가 사실상 꼴찌라는 얘기다. 국민소득이 늘었는데 체감 경기는 썰렁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배경에는 통계상의 허점이나 착시가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국민소득이 적잖은 폭으로 오른 것은 2008년에 유엔이 정한 새로운 기준 탓도 있다. 그동안 GDP에 잡히지 않았던 연구·개발(R&D) 비용과 무기 구입비 같은, 가계소득과는 거의 상관이 없는 것들이 반영됐다. R&D 비중이 높고 무기구매량이 많은 우리나라는 영향을 많이 받았다. 국민소득 수치가 커졌다고 좋아할 것만은 아닌 셈이다. 손성진 수석논설위원 sonsj@seoul.co.kr
  • [동물박사가 들려주는 동물이야기] ‘사불상’을 아시나요

    [동물박사가 들려주는 동물이야기] ‘사불상’을 아시나요

    소의 발굽을 가졌으나 소가 아니고, 모가지가 길어 낙타의 목인데 낙타도 아니고, 사슴의 뿔을 가졌으나 사슴이 아닌 것 같고, 나귀의 꼬리를 가졌으나 나귀도 아닌 동물은 뭘까. 코를 보니 소 같으나 소가 아니요, 몸통은 나귀와 같으나 나귀도 아니요, 말의 꼬리를 가졌으나 말도 아닌 것은. 머리가 길쭉해 말머리 같은데 말도 아니요, 몸통이 소 같으나 소도 아닌 것은 무엇일까. 정답은 사불상(四不像)이다. 글자대로 이리저리 달리 보여서 붙은 이름이다. 1866년 프랑스 신부 아먼드 데이비드에 의해 서양에 처음 알려졌다. 그는 중국에서 선교사로 지내다가 사불상 사체 3개를 확보해 본국에 보낸다. 생물학자 알퐁스 밀른 에드워즈는 프랑스어로 선교사인 페어에 발견자 이름을 붙여 ‘페어 데이비드 사슴’(Pre David’s deer)이라 불렀다. ●中에만 분포한 야생종… 야생 멸종 단계 분류 사불상은 명나라 신화에도 등장한다. 그만큼 오래 중국에만 분포한 야생종이었으나 꽃사슴처럼 가축화하는 덴 실패했다. 1900년 중국 야생에서는 멸종됐다. 다행히 직전 몇 마리가 유럽에 보내져 식구를 늘렸으나 두 차례 세계대전으로 다시 크게 줄었다. 영국 베드포드 공작 11세는 동물원과 사파리에 남은 녀석을 모아 마릿수를 늘렸다. 지금은 세계 곳곳에서 사불상을 사육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자연보전연맹에서는 1996년 심각한 멸종 위기 단계(Critically Endangered), 2008년엔 야생 멸종 단계(Extinct in the Wild)로 분류했다. 야생에 있는 수십 마리로는 유전적 다양성이 크게 떨어져 유전적 병목현상을 곧 빚기 때문이다. ●3개월이면 수컷 머리에 사슴처럼 뿔 자라 서울동물원에는 사불상 두 쌍이 있다. 사슴사에는 11종의 사슴이 살아간다.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수컷 머리에 나뭇가지처럼 대칭으로 뻗어 자라나는 뿔이다. 대개 머리의 뿔 자리에서 봄부터 솟아나기 시작하면 매우 빠르게 성장하는데 바깥 피부는 보드라운 털로 덮여 벨벳이라 일컫는다. 3개월 정도 자라면 차차 딱딱하게 골화되면서 녹각으로 변해 멋진 사슴뿔이 된다. 이듬해 봄에 저절로 떨어져 나가고 그 자리에서 뿔이 솟아나 자란다. 뿔이 자라는 시기나 모양은 종에 따라 다양하다. 사불상이 가장 먼저 올라온다. 겨울에 벌써 뿔이 자라기 시작해 3월이면 골화로 6월쯤 여기저기 뿔질을 해대 벨벳을 벗겨 내고 뿔 끝을 창끝처럼 갈기 시작한다. 가을로 접어들어 아침저녁 찬 바람 탓에 일교차가 커질 무렵, 수컷들은 저마다 큰 뿔을 머리에 짊어지고 쏘다니면서 서로 경계하기에 이른다. 털 빛깔도 짙어질 뿐만 아니라 수컷이 뿌려대는 특이한 냄새를 풍기는 오줌 때문에 방사장엔 격전을 앞둔 전장처럼 긴장감이 감돈다. 뿔이 골화될 때 나무 등의 물체에 머리를 숙인 채 흔들어대며 뿔질을 해 벨벳처럼 보였던 바깥 피부층이 벗겨져 나가고 뿔 끝은 창처럼 뾰족해진다. 이쯤이면 발정기를 맞은 것이다. 보통 땐 큰 눈을 끔벅거리며 순해 보이기만 하던 놈들이 서로 뿔을 걸어서 이리저리 비틀거나 밀쳐보기도 하고 떨어졌다가 세게 부딪치기도 하면서 최강자를 가린다. 숨을 헐떡거리면서 뿔끼리 부딪치는 소리도 대단하지만 뿔에 찔려 크게 다치거나 죽기도 한다. 그래서 수컷을 격리하거나 마취 뒤 뿔을 잘라버림으로써 불상사를 막는다. 짝짓기에 사로잡혀 사료섭취도 뒷전이라 번식기 끝물엔 체중도 매우 줄고 쓰러지기도 한다. 마법에 걸린 듯 난폭하게 공격하도록 만드는 행동변화의 원인은 바로 남성호르몬의 작용이다. 모든 종류의 사슴이 뿔을 가지고 있진 않다. 고라니와 사향노루의 수컷은 뿔 대신에 위턱뼈에 엄니가 8㎝ 정도 두드러지게 발달해 아래로 향하면서 안쪽으로 약간 굽은 칼 모양을 띤다. 암컷에도 엄니가 있긴 하나 0.5㎝ 정도로 아주 짧다.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 원산의 문착(Muntjac)이나 미얀마 고산지대에 주로 사는 터프티드 사슴(Tufted deer)의 수컷은 아주 짧은 뿔과 송곳니를 모두 가지고 있다. 산타할아버지 썰매를 끈다는 순록은 특이하게도 암수 모두 뿔을 가졌다. 진화생물학적으로 보면 건강하게 성장한 수컷일수록 튼튼하고 멋진 뿔을 가질 것이고 좋은 유전자를 지니고 있을 게 분명해 싸움에서 이길 확률이 높다. 좌우 대칭으로 멋지게 자란 뿔을 가진 녀석이야말로 여러 암컷과 짝짓기를 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방식으로 우수한 유전자가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뿔과 유전자의 상관관계에 대한 재미있는 연구 결과가 있다. 늑대에게 잡아먹힌 사슴의 뿔을 조사했더니 좌우 대칭을 이루지 못한 게 많았다. 결국 크고 멋진 뿔을 가진 사슴이 살아남아 대를 이어나갈 수 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다. ●서울동물원에 두 쌍… AI로 임시폐장 중 안타깝게도 조류인플루엔자(AI)로 임시폐장 중이라 사불상을 볼 수 없다. 지난 주말 가족 봄나들이로 대공원을 찾았다가 아쉽게 되돌아가는 시민들을 보고 뼈아팠다. 하루빨리 정문을 활짝 열어 이런 질문을 듣고 싶다. “저기요, 사불상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하죠.” vetinseoul@seoul.go.kr
  • [통일독일에서 배운다] “돈 없어 한국 못 오는 파독 근로자 많아… 정부·사회단체 지원 절실”

    [통일독일에서 배운다] “돈 없어 한국 못 오는 파독 근로자 많아… 정부·사회단체 지원 절실”

    “경제적인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남아 있는 광부, 간호사 출신 교포들이 눈을 감기 전에 고국을 한 번이라도 방문할 수 있도록 정부나 사회단체 등의 지원이 있었으면 합니다.” 남해 독일마을 하이디하우스에 살고 있는 우춘자(77)씨는 고국의 가족 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독일의 동료들을 걱정했다. 그는 34세 때인 1971년 독일에 간호사로 갔다가 66세이던 2003년 초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씨도 독일에 파견된 대부분의 간호사와 마찬가지로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우씨는 “당시 받는 월급으로 어린 자녀 2명 등 네 식구가 먹고살기 힘들어 친구와 함께 간호사에 지원해 독일로 갔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는 한 달에 2만원을 받다가 독일로 갔더니 22만원을 받았다. 우씨는 독일에서 월급의 10% 정도만 생활비로 쓰고 나머지는 고향으로 보내는 생활을 8년 넘게 지속했다. 그러다 독일에 정착하기로 마음먹고 현지에서 저축을 시작했다. 계약된 3년을 마친 우씨는 간호사 자격증을 받아 프랑크푸르트 대학병원에 들어가 2000년까지 근무한 뒤 정년퇴직했다. 우씨는 “대학병원에서 2주일 야간근무를 한 뒤 1주일 쉬는 형태로 근무를 하면서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기 위해 쉬는 1주일은 다른 병원에서 근무를 하는 ‘투잡’ 생활을 퇴직할 때까지 계속했다”고 말했다. 우씨는 “처음 독일행 비행기를 탈 때는 걱정도 많이 했지만 독일에 도착해 일을 시작한 뒤부터는 하루도 쉬지 않고 근무를 했다”며 독일에서의 팍팍했던 생활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는 “현재에도 독일에서 어렵게 살고 있는 간호사나 광부 출신 교포가 많이 있다”며 “이들이 눈을 감기 전에 고국을 한 번이라도 방문할 수 있도록 정부나 사회단체 등의 지원이 있었으면 한다”고 눈시울을 적셨다. 우씨는 “한국에 살고 있는 간호사나 광부 출신 교포들이 숙박 등의 편의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남해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박주형 옥택연 우비형제, 살짝 무서운 이유는? ‘눈빛 반전’

    박주형 옥택연 우비형제, 살짝 무서운 이유는? ‘눈빛 반전’

    박주형 옥택연 우비형제 인증샷이 화제다. KBS2 ‘참 좋은 시절’ 촬영 현장에서 의형제 박주형과 옥택연이 검은 외투의 모자를 눌러쓰고 다정하게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최근 소속사 JYP ACTORS 공식 페이스북을 통해 공개된 사진 속 박주형과 옥택연은 우산 대신 외투의 모자를 쓰고 빗줄기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카리스마 있는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해 눈길을 끈다. 또한 두 사람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어 보이거나 혀를 빼꼼히 내민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귀여운 매력을 발산해 보는 이를 미소 짓게 한다. 두 사람은 드라마에서 의형제와 다름없는 관계로 등장한다. 대부업체 사장과 그의 보디가드인 두 사람은 드라마에서도 신의와 우애로 서로를 대한다. 실제로도 같은 소속사 식구인 둘은 의리를 자랑하며 촬영에 임하고 있다. ’박주형 옥택연 우비형제’ 인증샷을 본 네티즌은 “박주형 옥택연 우비형제, 진짜 형제 같아” “박주형 옥택연 우비형제, 멋지다” “박주형 옥택연 우비형제, 둘 다 잘 생겼다” “박주형 옥택연 우비형제..드라마 본방사수”등의 반응을 보였다. 사진 = 서울신문DB (박주형 옥택연 우비형제)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성추행 당한 女軍 자살했는데 가해자 소령에 고작 ‘집유 4년’

    군사법원이 지난해 10월 강원도 화천 모 부대에서 성추행과 가혹 행위에 시달리다 자살한 여군 대위 사건과 관련해 가해자로 지목된 노모(37) 소령에게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앞서 징역 5년을 구형한 군 검찰은 재판부의 선고 형량이 낮다며 항소할 뜻을 밝혔다. 이날 판결을 두고 사태의 엄중함과 사회적 파장에 비춰 형평성에 어긋난 ‘군 감싸기’가 아니냐는 비판도 적지 않다. 육군 2군단 보통군사법원은 20일 1심 공판에서 “피고인 노 소령은 사망한 오모 대위의 직속상관으로서 그에게 가했던 직권남용 가혹 행위, 욕설과 성적 언행을 통한 모욕, 어깨를 주무르는 신체 접촉을 통한 강제추행 등이 유죄”라면서 이같이 선고했다. 육군 관계자는 “군사법원은 영관장교인 피고인이 소속 부하의 인격을 모독하는 지나친 질책과 여군을 비하하는 언행을 지속해 피해자에게 극단적 선택을 하게 한 점 등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누적 판매량 100만장” 고속도로 여왕 금잔디 지상파 뉴스 깜짝 출연

    “누적 판매량 100만장” 고속도로 여왕 금잔디 지상파 뉴스 깜짝 출연

    ”누적 판매량 100만장” 고속도로 여왕 금잔디 지상파 뉴스 깜짝 출연 누적 판매량 100만장을 넘어선 ‘고속도로의 여왕’ 트로트 가수 금잔디가 메들리 앨범 ‘트로트 금잔디 파트 7, 8’을 출시해 화제다. 금잔디는 지상파 뉴스 프로그램에도 깜짝 출연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금잔디 소속사 올라엔터테인먼트 측은 18일 “금잔디는 지난 1년여 간 직접 선곡 작업부터 편곡까지 참여하면서 한곡 한곡 심혈을 기울였다. 금잔디만의 새로운 스타일의 노래들로 재탄생했다. ‘트로트 금잔디 파트 7,8’은 오는 20일부터 전국 음반 매장에서 출시한다”고 밝혔다. 이번 앨범에서 금잔디는 여러 선후배 가수들의 신곡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했다. 신곡 ‘어쩔사’(어쩔 수 없는 사랑)를 비롯해 KBS2 주말극 ‘왕가네식구들’ OST로 사랑받은 ‘사랑찾아 인생찾아’, 진성의 ‘안동역에서’, 류기진의 ‘사랑도 모르면서’, 강민의 ‘세월아 청춘아’ 등 총 40곡을 수록했다. 그동안 매년 ‘트로트 금잔디’ 앨범 시리즈를 발매해온 금잔디는 누적 판매량 100만장을 돌파하면서 ‘고속도로 여왕’으로 불릴 만큼 인기를 얻고 있다. 아이돌 못지않은 음반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금잔디는 음악 방송이 아닌 시사프로그램에도 출연한다. 트로트 가수로는 이례적으로 오는 19일 방송하는 KBS1 ‘뉴스토크’에 출연할 예정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전통 춤 인생 50년… 이 시대의 춤꾼 국수호

    [김문이 만난사람] 전통 춤 인생 50년… 이 시대의 춤꾼 국수호

    그저 손 끝 하나가 나풀거릴 뿐인데 지나간 세월이 아지랑이로 나타나고 다가올 미래를 살며시 열어젖힌다. 또한 꺼져가는 한 자락의 영혼에 생명을 불어넣어 하늘 높이 솟아올린다. 조지훈이 ‘승무’에서 읊었던 한 구절이 떠올려진다.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올린 외씨버선이여/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먼 하늘 한개 별빛에 모두오고~’ ●농악소리에 혼이 팔려… 16세때 처음 장구춤 1964년, 그러니까 전주농고 1학년에 막 입학했을 때였다. 우연히 농악소리에 혼이 팔려 농악대에 들어갔다. 북 치고 장구 치고,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그저 신이 났다. 전주 권번의 춤사범 출신인 정형인 선생이 이런 그를 보고 미래의 춤꾼으로 확실히 점지하고 지도를 했다. 그리고 몇달 뒤 덕수궁 석조전 앞에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가 열렸다. 열여섯 어린 나이에 관객들 앞에서 처음으로 장구춤을 췄다. 이때부터 그의 춤 인생길은 손짓과 몸짓을 휘휘 감아돌며 시작됐다. 중요무형문화재 27호 ‘승무’ 이수자이자 이 시대의 춤꾼으로 유명한 국수호(66)씨. 먹고살기 어려웠던 시절, 여자도 아닌 남자가 춤에 빠져 살다 보니 어느덧 50년 세월이 후딱 지나갔다. 하여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최근 서울 종로구 아르코 예술극장에서 ‘춤 인생 50주년’을 기념하는 무대(춤의 귀환)에서 다시 한번 그의 진가를 발휘했다. 그는 이 무대를 통해 하나의 ‘화두’를 던졌다. 아직도 우리 전통춤이 기거할 ‘집’이 없다는 안타까운 현실과 이제는 ‘전용극장’이 하나라도 있어야 한다는 절박함을 호소했다. 많은 문화예술인들도 공감하는 무대가 됐다. 지난 12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있는 ‘디딤무용단’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그 ‘화두’부터 꺼낸다. “우리나라에는 우리의 전통예술을 맘껏 펼칠 수 있는 무대는 없고 오페라 등 서양식 무대만 있습니다. 창(판소리)만 하더라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데 전용극장이 없잖아요. 한국인에게는 의식주가 삶의 버팀목입니다. 그렇듯이 우리 정신의 버팀목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바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가(歌), 무(舞), 악(樂)에 있지요. 집도 없이 공연한다는 것은 빈터에 공염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50년 동안 그렇게 춤을 추다 보니 항상 마음 놓고 공연할 수 있는 ‘공간’이 절실했습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순수예술의 집’이다. 국립극장이나 국립국악원, 예술의전당 등도 있지만 한국적인 것이 아니라 대부분 서양의 공연을 염두에 두고 지어졌다는 것이다. 이웃나라 중국의 경극만 하더라도 베이징과 상하이 등 대도시는 물론 지방마다 전용극장이 수없이 많으며 일본의 가부키(歌舞伎)와 노(能) 역시 국립극장을 비롯해 여러 지방에서도 마음 놓고 공연할 수 있는 전용극장이 있어서 전통의 맥을 제대로 이어나가고 있다고 말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국립은 고사하고 도립이나 시립에서 운영하는 전통 극장조차도 없다고 말한다. 우리 춤이 지지부진하고 대중에게 잊혀 가는 이유가 바로 특성화된 ‘순수예술의 집’이 없기 때문이며 이는 춤뿐만 아니라 음악, 창극 모두에 해당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한국의 음악과 소리, 그리고 춤은 한국인의 기호품이 아니라 한국인한테 필수적인 의식주에 해당되는 영혼의 양식이라는 것이다. “순수예술 문화는 우리의 정신적 샘입니다. 따라서 한국인은 그 물을 마시고 살아가야 하며 그것이 튼튼해야 대중문화도 튼튼해지는 것이지요. 일본이 국가차원에서 전통예술에 관심을 갖고 융성시키는 것은 바로 국가를 위한 국민의 정신적 힘이 강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 문화융성위원회가 있지만 이러한 부분을 간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고구려 당시 동맹제나 무천제 등을 보십시요. 이는 곧 고구려의 정신이었고 광활한 땅을 거느릴 수 있는 국가권력의 튼튼한 발로였습니다.” ●정형인·박금슬 선생은 춤인생 최고의 스승 이와 관련된 얘기를 더 나누다가 화제를 바꿨다. 춤인생 50년을 잠시 돌아보자는 의미에서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그는 전북 완주에서 태어났다. 3~4세 때 비봉면 마을에 전주댁이라는 무당이 있었다. 쾌자 자락을 휘날리며 꽃을 들고 길길이 뛰는 무당과 옆에서 장구와 꽹과리를 치면서 경을 읽는 모습이 어린 그에게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의 예술적 끼는 주변 환경도 한몫 거들었다. 봉황이 난다는 비봉마을 골짜기마다 꽃가지 사이로 지저귀는 산새들의 소리를 들으면서 어깨가 저절로 으쓱으쓱해졌다. 초등학교 운동회 때에는 단상에 올라가 아리랑 춤을 춰 인기를 끌기도 했다. 이에 대해 “그런 시골의 정취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도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서울 같은 곳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대단한 기억으로 남는 시절이었다”고 회고한다. 그의 부친은 토지개량조합장 등을 거쳐 1960년대초까지 민선 면장을 지냈다. 이런 집안 분위기 때문에 그는 춤과 음악을 좋아하는 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전주 서중학교에 진학한 그는 혼자 하숙을 하면서 브라스밴드부에 가입했다. 북을 치고 서양의 악보를 아버지 몰래 공부했다. 음계와 악보를 알고 분석할 수 있는 기초를 다진 것도 이때였다. 졸업 무렵 아버지가 농고에 진학할 것을 권유했다. 할 수 없이 전주농고 토목과에서 측량을 공부했다. 하지만 몸속 깊이 내재돼 있는 끼는 주체할 수 없었다. 정규수업이 끝나자마자 농악대에 가서 북과 장구, 한국 음악과 무용 등을 익혔고 18세까지 정형인 선생한테 승무와 북춤, 남무 등 남자춤을 배웠다. 서라벌예술대학에 진학해서는 송범과 김백봉 선생한테 강의를 들었고 특히 박금슬 무용연구소에서 3년간 숙식을 함께하며 박금슬 선생이 오세암 천월스님으로부터 사사한 바라 승무를 익혔다. 정형인과 박금슬 선생은 그의 춤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한영숙, 은방초 등 당대 무용계를 주름잡던 전통춤꾼들을 사사했다. 1971년 군 복무 시절이었다. 전북도지사의 부탁으로 1사단장한테 특별휴가를 얻은 그는 전주농고 농악대에서 잠시 안무를 하게 됐다. 얼마후 그의 지도를 받은 전주농고 농악대는 전국대회에 출전해 대통령상을 받았다. 대회가 끝나자 전국의 고등학교에 농악대가 생기는 붐이 조성됐고 그의 안무실력은 자연스럽게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1973년 2월 제대한 그는 때마침 국립무용단이 생기자 남자로는 처음으로 입단하면서 월급받는 직업무용수가 됐다. 이때부터 ‘국립무용단 남자 무용수 1호’라는 꼬리표가 항상 붙어다녔고 매스컴에서 집중조명을 받았다. ●국립무용단 남자 무용수 1호로 주목받아 “제가 국립무용단에 들어갔을 때 송범 선생께서 단장을 맡고 있었지요. 10년동안 여자 단원이 20명쯤 있었는데 남자는 저 혼자였지요. 남자라는 이유로 일주일에 한 번씩 언론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날마다 주인공이었죠 뭐.” 이 무렵 남자무용수 시대를 예상하고 중앙대 연극영화과 3학년에 편입해 춤극을 공부했다. 기존의 무용에 극적인 요소를 결합시켜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이어 대학원에 진학해 민속학을 전공했고 ‘한국 민속 연희연구’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러한 이론적 행위는 그의 춤 인생에 있어서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는 예술적 바탕이 됐다. 직접 무대 출연은 물론 대본, 안무, 연출, 음악 등 여러 영역으로 넓혀나가는 작업을 꾸준히 해나갔다. 대학원 졸업과 동시에 27세에 서울예대 교수로 임용됐고 이후 중앙대에서 26년간 교수직을 겸하면서 30년 가까이 국립무용단에서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러면서 130여개국 순회공연을 통해 한국의 전통춤을 어떤 식으로 추고 어떤 식으로 창작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에서부터 김만중의 ‘구운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로 세계인이 공감할 작품을 만들어냈다. 특히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 2002년 월드컵 개막식 등에서 총괄 안무를 맡아 세계인들에게 여러 감동을 선사했다. ●“1년에 한두편 창작 춤극으로 관객과 소통하고파” 그는 지난 50년 세월을 뒤돌아보면서 “춤도 춤이지만 자료수집하느라 참 바쁘게 지냈다. 이사할 때 무용 관련 책만 트럭 10대분이 넘었다. 이런 것들이 작품의 골격을 세우고 무너지지 않게 하는 튼튼한 인문학적 토대가 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생각하는 춤의 매력은 진정 무엇일까. “인간이면 지닐 수 있는 핏빛 움직임이 있습니다.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공들여닦여지고 정신이 들어간 움직임을 통해 미학적으로 보여질 때 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력을 쌓은 실 하나가 내 가슴에서 저쪽 사람의 가슴으로 건너갈 때 금실이 되는 것처럼 춤의 매력은 세련미와 정성들여 쌓은 공력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나이가 60대 중반이지만 무대 위에서는 여전히 청춘이다. 건강비결을 묻자 “걷기를 주로 하고 불필요한 생각을 하지 않으며, 예술과 관련되지 않는 불필요한 곳에는 되도록 가지 않으려 한다”면서 “가끔 식구들과 먹거리가 좋은 데 찾아가는 것을 작은 행복으로 여긴다”고 대답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는 1년에 한두 편씩 창작 춤극을 만들어 가급적 소극장 무대에서 관객들과 더 가까워지겠다고 말한다. 선임기자 km@seoul.co.kr ■국수호는 88올림픽 개막식 등 안무가로도 명성 춤극의 지평 넓혀 1948년 전북 완주에서 태어났다. 1964년 전주농고 1학년때 스승 정형인 선생한테 농악과 한국음악, 장단 등을 익혔다. 그해 공식무대인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장구춤을 췄다. 이후 서라벌예대에서 무용을 전공하고 중앙대에서 연극영화를, 중앙대 대학원에서 민속학을 전공했다. 1973년 국립무용단에 입단했고 이듬해 ‘왕자호동’을 시작으로 30여 편의 작품에서 주역을 맡았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안무를 병행해 안무가로도 명성을 쌓았다. 88올림픽 개막식과 2002년 월드컵 개막식 공연의 안무를 맡았고 국립무용단 단장, 서울예술대 교수, 중앙대 교수 등을 역임했다. 1987년에는 국수호디딤무용단을 창단해 ‘무녀도’ ‘대지의 춤’ ‘한국 환상’ ‘봄의 제전’ ‘명성황후’ 등으로 춤극의 지평을 꾸준히 넒혔다. 주요 수상으로는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전북농악지도 대통령상(1971년), 88올림픽 개회식 안무 ‘화합’(국무총리표창), 최우수 예술가상 한국예술평론가협회 작품상(1988년), 한국 예술평론가협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인물(1999년), 제16대 대통령 취임식 총괄안무 대통령표창(2003년), 올해의 예술가상 춤극 ‘고구려’(2006년) 등이 있다. ‘세계 춤 기행문집- 춤 내사랑’ ‘국수호 춤 작품집-국수호의 춤’ 등의 저서를 펴냈으며 현재 국수호디딤무용단 예술감독 겸 이사장을 맡고 있다.
  • 선예, 남편따라 아이티 선교…소희·선예 빠진 원더걸스 어쩌나

    선예, 남편따라 아이티 선교…소희·선예 빠진 원더걸스 어쩌나

    걸그룹 원더걸스의 멤버 선예가 아이티에서 5년간 선교활동을 한다. 선예는 원더걸스 공식 팬카페 홈페이지에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라며 글을 올렸다. 그는 “인생의 방향이 조금 더 명확해졌다”며 성경의 ‘돌아온 탕자’를 언급해 “남편과 함께 전도를 위한 NGO단체를 설립했다. 첫 활동으로 오는 7월에 아이티에 들어가서 약 5년 간 아이티에서 지내기로 했다”고 밝혔다. 선예의 글에 따르면 그의 아이티행은 소속사와 원더걸스 멤버들과는 합의가 끝난 것으로 보인다. 선예는 “부족하지만 늘 좋은 모습으로 찾아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글을 마무리했다. 선예는 지난해 1월 캐나다 교포 출신 선교사 제임스 박과 결혼한 뒤 10월 딸을 출산했다. 이후 12월 원더걸스 시절부터 몸 담았던 JYP엔터테인먼트와 재계약을 했지만 이번 아이티 봉사활동 선언으로 향후 활동이 당분간 중지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원더걸스의 소속사인 JYP엔터테인먼트는 “선예가 아이티에 가더라도 원더걸스를 탈퇴하는 것은 아니다”고 분명히 밝혔다. 다음은 선예가 직접 올린 글 전문 안녕하세요. 선예입니다. 오랜만에 글로 인사드리네요. 제 인생의 방향이 조금 더 명확해져 여러분께 말씀드리려고 글을 씁니다. 지난 7년간 원더걸스로서 정말 많은 사랑을 받고 국내외를 오고가며 제가 감히 겪을 수 없을 만한 놀라운 경험들을 했습니다. 그런 소중한 경험을 만들어준 원더걸스 동료 멤버들, 회사 식구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원더걸스 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는 말씀 다시 한 번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미국에 건너간 후부터 전 저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며 늘 궁금해 왔던 것들, 맘 속 깊숙히 품고 있던 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교회를 통해 아이티에 봉사활동을 일주일 간 다녀오게 되었고 그 일주일의 시간이 저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이티에서 가장 제 마음에 감동이 되었던 것은 성경말씀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 곁에서 열심히 칭찬받으며 일했지만 둘째 아들은 집을 나가서 아버지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매일매일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눈물 흘리며 손꼽아 기다리셨지만 첫째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모른 체하며 늙은 자기 일만 열심히 하머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알고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자기 일만 열심히 할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위해 동생을 찾으러 나가야 하는데 첫째 아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첫째아들의 모습이 바로 제 자신 같았습니다. 성경의 복음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아이티의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그동안 개인적인 성공에만 집중하고 살았던 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복음을 모르는 세상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이 모든 과정 중에서도 제 마음은 점점 더 확고해져갔고 이제 남편과 함께 전도를 위한 NGO단체를 설립하여 제 2의 삶을 시작하려합니다. 저희 부부는 올해 7월에 아이티에 들어가서 약 5년 간 아이티에서 지내기로 하였습니다. 연예인으로서의 모든 활동도 이런 목표의 연장선 상에서 해나갈 계획입니다. 이런 결정을 이해해주고 격려해준 원더걸스 멤버들, 회사 식구들, 팬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또 아직까지 속상해하시는 분들께는 앞으로 성실히 살아가는 모습으로 이해를 구하겠습니다. 부족하지만 늘 좋은 모습으로 찾아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예올림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선예, 남편과 아이티 봉사활동…JYP가 밝힌 원더걸스 미래는

    선예, 남편과 아이티 봉사활동…JYP가 밝힌 원더걸스 미래는

    걸그룹 원더걸스의 멤버 선예가 아이티에서 5년간 선교활동을 한다. 선예는 원더걸스 공식 팬카페 홈페이지에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라며 글을 올렸다. 그는 “인생의 방향이 조금 더 명확해졌다”며 성경의 ‘돌아온 탕자’를 언급해 “남편과 함께 전도를 위한 NGO단체를 설립했다. 첫 활동으로 오는 7월에 아이티에 들어가서 약 5년 간 아이티에서 지내기로 했다”고 밝혔다. 선예의 글에 따르면 그의 아이티행은 소속사와 원더걸스 멤버들과는 합의가 끝난 것으로 보인다. 선예는 “부족하지만 늘 좋은 모습으로 찾아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글을 마무리했다. 선예는 지난해 1월 캐나다 교포 출신 선교사 제임스 박과 결혼한 뒤 10월 딸을 출산했다. 이후 12월 원더걸스 시절부터 몸 담았던 JYP엔터테인먼트와 재계약을 했지만 이번 아이티 봉사활동 선언으로 향후 활동이 당분간 중지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원더걸스의 소속사인 JYP엔터테인먼트는 “선예가 아이티에 가더라도 원더걸스를 탈퇴하는 것은 아니다”고 분명히 밝혔다. 다음은 선예가 직접 올린 글 전문 안녕하세요. 선예입니다. 오랜만에 글로 인사드리네요. 제 인생의 방향이 조금 더 명확해져 여러분께 말씀드리려고 글을 씁니다. 지난 7년간 원더걸스로서 정말 많은 사랑을 받고 국내외를 오고가며 제가 감히 겪을 수 없을 만한 놀라운 경험들을 했습니다. 그런 소중한 경험을 만들어준 원더걸스 동료 멤버들, 회사 식구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원더걸스 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는 말씀 다시 한 번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미국에 건너간 후부터 전 저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며 늘 궁금해 왔던 것들, 맘 속 깊숙히 품고 있던 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교회를 통해 아이티에 봉사활동을 일주일 간 다녀오게 되었고 그 일주일의 시간이 저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이티에서 가장 제 마음에 감동이 되었던 것은 성경말씀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 곁에서 열심히 칭찬받으며 일했지만 둘째 아들은 집을 나가서 아버지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매일매일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눈물 흘리며 손꼽아 기다리셨지만 첫째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모른 체하며 늙은 자기 일만 열심히 하머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알고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자기 일만 열심히 할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위해 동생을 찾으러 나가야 하는데 첫째 아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첫째아들의 모습이 바로 제 자신 같았습니다. 성경의 복음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아이티의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그동안 개인적인 성공에만 집중하고 살았던 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복음을 모르는 세상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이 모든 과정 중에서도 제 마음은 점점 더 확고해져갔고 이제 남편과 함께 전도를 위한 NGO단체를 설립하여 제 2의 삶을 시작하려합니다. 저희 부부는 올해 7월에 아이티에 들어가서 약 5년 간 아이티에서 지내기로 하였습니다. 연예인으로서의 모든 활동도 이런 목표의 연장선 상에서 해나갈 계획입니다. 이런 결정을 이해해주고 격려해준 원더걸스 멤버들, 회사 식구들, 팬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또 아직까지 속상해하시는 분들께는 앞으로 성실히 살아가는 모습으로 이해를 구하겠습니다. 부족하지만 늘 좋은 모습으로 찾아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예올림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전문]선예, 남편과 아이티行…원더걸스 남은 멤버 거취는

    [전문]선예, 남편과 아이티行…원더걸스 남은 멤버 거취는

    걸그룹 원더걸스의 멤버 선예가 아이티에서 5년간 선교활동을 한다. 선예는 원더걸스 공식 팬카페 홈페이지에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라며 글을 올렸다. 그는 “인생의 방향이 조금 더 명확해졌다”며 성경의 ‘돌아온 탕자’를 언급해 “남편과 함께 전도를 위한 NGO단체를 설립했다. 첫 활동으로 오는 7월에 아이티에 들어가서 약 5년 간 아이티에서 지내기로 했다”고 밝혔다. 선예의 글에 따르면 그의 아이티행은 소속사와 원더걸스 멤버들과는 합의가 끝난 것으로 보인다.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선예의 결정으로 원더걸스는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는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한 네티즌은 “리더가 5년간 자리를 비우는데 사실 상 해체가 아닌가”라는 의견을 내비쳤다. 또 다른 네티즌은 “시대를 풍미했던 원더걸스도 이렇게 해체하는구나”라며 댓글을 달았다. 선예는 “부족하지만 늘 좋은 모습으로 찾아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글을 마무리했다. 선예는 지난해 1월 캐나다 교포 출신 선교사 제임스 박과 결혼한 뒤 10월 딸을 출산했다. 이후 12월 원더걸스 시절부터 몸 담았던 JYP엔터테인먼트와 재계약을 했지만 이번 아이티 봉사활동 선언으로 향후 활동이 당분간 중지될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선예가 직접 올린 글 전문 안녕하세요. 선예입니다. 오랜만에 글로 인사드리네요. 제 인생의 방향이 조금 더 명확해져 여러분께 말씀드리려고 글을 씁니다. 지난 7년간 원더걸스로서 정말 많은 사랑을 받고 국내외를 오고가며 제가 감히 겪을 수 없을 만한 놀라운 경험들을 했습니다. 그런 소중한 경험을 만들어준 원더걸스 동료 멤버들, 회사 식구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원더걸스 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는 말씀 다시 한 번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미국에 건너간 후부터 전 저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며 늘 궁금해 왔던 것들, 맘 속 깊숙히 품고 있던 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교회를 통해 아이티에 봉사활동을 일주일 간 다녀오게 되었고 그 일주일의 시간이 저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이티에서 가장 제 마음에 감동이 되었던 것은 성경말씀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 곁에서 열심히 칭찬받으며 일했지만 둘째 아들은 집을 나가서 아버지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매일매일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눈물 흘리며 손꼽아 기다리셨지만 첫째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모른 체하며 늙은 자기 일만 열심히 하머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알고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자기 일만 열심히 할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위해 동생을 찾으러 나가야 하는데 첫째 아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첫째아들의 모습이 바로 제 자신 같았습니다. 성경의 복음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아이티의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그동안 개인적인 성공에만 집중하고 살았던 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복음을 모르는 세상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이 모든 과정 중에서도 제 마음은 점점 더 확고해져갔고 이제 남편과 함께 전도를 위한 NGO단체를 설립하여 제 2의 삶을 시작하려합니다. 저희 부부는 올해 7월에 아이티에 들어가서 약 5년 간 아이티에서 지내기로 하였습니다. 연예인으로서의 모든 활동도 이런 목표의 연장선 상에서 해나갈 계획입니다. 이런 결정을 이해해주고 격려해준 원더걸스 멤버들, 회사 식구들, 팬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또 아직까지 속상해하시는 분들께는 앞으로 성실히 살아가는 모습으로 이해를 구하겠습니다. 부족하지만 늘 좋은 모습으로 찾아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예올림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선예, 5년간 아이티 봉사…소희도 없는 원더걸스 미래는

    선예, 5년간 아이티 봉사…소희도 없는 원더걸스 미래는

    걸그룹 원더걸스의 멤버 선예가 아이티에서 5년간 선교활동을 한다. 선예는 원더걸스 공식 팬카페 홈페이지에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라며 글을 올렸다. 그는 “인생의 방향이 조금 더 명확해졌다”며 성경의 ‘돌아온 탕자’를 언급해 “남편과 함께 전도를 위한 NGO단체를 설립했다. 첫 활동으로 오는 7월에 아이티에 들어가서 약 5년 간 아이티에서 지내기로 했다”고 밝혔다. 선예의 글에 따르면 그의 아이티행은 소속사와 원더걸스 멤버들과는 합의가 끝난 것으로 보인다. 선예는 “부족하지만 늘 좋은 모습으로 찾아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글을 마무리했다. 선예는 지난해 1월 캐나다 교포 출신 선교사 제임스 박과 결혼한 뒤 10월 딸을 출산했다. 이후 12월 원더걸스 시절부터 몸 담았던 JYP엔터테인먼트와 재계약을 했지만 이번 아이티 봉사활동 선언으로 향후 활동이 당분간 중지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원더걸스의 소속사인 JYP엔터테인먼트는 “선예가 아이티에 가더라도 원더걸스를 탈퇴하는 것은 아니다”고 분명히 밝혔다. 다음은 선예가 직접 올린 글 전문 안녕하세요. 선예입니다. 오랜만에 글로 인사드리네요. 제 인생의 방향이 조금 더 명확해져 여러분께 말씀드리려고 글을 씁니다. 지난 7년간 원더걸스로서 정말 많은 사랑을 받고 국내외를 오고가며 제가 감히 겪을 수 없을 만한 놀라운 경험들을 했습니다. 그런 소중한 경험을 만들어준 원더걸스 동료 멤버들, 회사 식구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원더걸스 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는 말씀 다시 한 번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미국에 건너간 후부터 전 저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며 늘 궁금해 왔던 것들, 맘 속 깊숙히 품고 있던 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교회를 통해 아이티에 봉사활동을 일주일 간 다녀오게 되었고 그 일주일의 시간이 저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이티에서 가장 제 마음에 감동이 되었던 것은 성경말씀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 곁에서 열심히 칭찬받으며 일했지만 둘째 아들은 집을 나가서 아버지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매일매일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눈물 흘리며 손꼽아 기다리셨지만 첫째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모른 체하며 늙은 자기 일만 열심히 하머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알고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자기 일만 열심히 할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위해 동생을 찾으러 나가야 하는데 첫째 아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첫째아들의 모습이 바로 제 자신 같았습니다. 성경의 복음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아이티의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그동안 개인적인 성공에만 집중하고 살았던 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복음을 모르는 세상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이 모든 과정 중에서도 제 마음은 점점 더 확고해져갔고 이제 남편과 함께 전도를 위한 NGO단체를 설립하여 제 2의 삶을 시작하려합니다. 저희 부부는 올해 7월에 아이티에 들어가서 약 5년 간 아이티에서 지내기로 하였습니다. 연예인으로서의 모든 활동도 이런 목표의 연장선 상에서 해나갈 계획입니다. 이런 결정을 이해해주고 격려해준 원더걸스 멤버들, 회사 식구들, 팬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또 아직까지 속상해하시는 분들께는 앞으로 성실히 살아가는 모습으로 이해를 구하겠습니다. 부족하지만 늘 좋은 모습으로 찾아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예올림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선예 “남편과 5년간 아이티 봉사”…원더걸스 멤버들 합의했나

    선예 “남편과 5년간 아이티 봉사”…원더걸스 멤버들 합의했나

    걸그룹 원더걸스의 멤버 선예가 아이티에서 5년간 선교활동을 한다. 선예는 원더걸스 공식 팬카페 홈페이지에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라며 글을 올렸다. 그는 “인생의 방향이 조금 더 명확해졌다”며 성경의 ‘돌아온 탕자’를 언급해 “남편과 함께 전도를 위한 NGO단체를 설립했다. 첫 활동으로 오는 7월에 아이티에 들어가서 약 5년 간 아이티에서 지내기로 했다”고 밝혔다. 선예의 글에 따르면 그의 아이티행은 소속사와 원더걸스 멤버들과는 합의가 끝난 것으로 보인다.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선예의 결정으로 원더걸스는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는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한 네티즌은 “리더가 5년간 자리를 비우는데 사실 상 해체가 아닌가”라는 의견을 내비쳤다. 또 다른 네티즌은 “시대를 풍미했던 원더걸스도 이렇게 해체하는구나”라며 댓글을 달았다. 선예는 “부족하지만 늘 좋은 모습으로 찾아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글을 마무리했다. 선예는 지난해 1월 캐나다 교포 출신 선교사 제임스 박과 결혼한 뒤 10월 딸을 출산했다. 이후 12월 원더걸스 시절부터 몸 담았던 JYP엔터테인먼트와 재계약을 했지만 이번 아이티 봉사활동 선언으로 향후 활동이 당분간 중지될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선예가 직접 올린 글 전문 안녕하세요. 선예입니다. 오랜만에 글로 인사드리네요. 제 인생의 방향이 조금 더 명확해져 여러분께 말씀드리려고 글을 씁니다. 지난 7년간 원더걸스로서 정말 많은 사랑을 받고 국내외를 오고가며 제가 감히 겪을 수 없을 만한 놀라운 경험들을 했습니다. 그런 소중한 경험을 만들어준 원더걸스 동료 멤버들, 회사 식구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원더걸스 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는 말씀 다시 한 번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미국에 건너간 후부터 전 저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며 늘 궁금해 왔던 것들, 맘 속 깊숙히 품고 있던 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교회를 통해 아이티에 봉사활동을 일주일 간 다녀오게 되었고 그 일주일의 시간이 저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이티에서 가장 제 마음에 감동이 되었던 것은 성경말씀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 곁에서 열심히 칭찬받으며 일했지만 둘째 아들은 집을 나가서 아버지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매일매일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눈물 흘리며 손꼽아 기다리셨지만 첫째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모른 체하며 늙은 자기 일만 열심히 하머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알고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자기 일만 열심히 할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위해 동생을 찾으러 나가야 하는데 첫째 아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첫째아들의 모습이 바로 제 자신 같았습니다. 성경의 복음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아이티의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그동안 개인적인 성공에만 집중하고 살았던 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복음을 모르는 세상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이 모든 과정 중에서도 제 마음은 점점 더 확고해져갔고 이제 남편과 함께 전도를 위한 NGO단체를 설립하여 제 2의 삶을 시작하려합니다. 저희 부부는 올해 7월에 아이티에 들어가서 약 5년 간 아이티에서 지내기로 하였습니다. 연예인으로서의 모든 활동도 이런 목표의 연장선 상에서 해나갈 계획입니다. 이런 결정을 이해해주고 격려해준 원더걸스 멤버들, 회사 식구들, 팬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또 아직까지 속상해하시는 분들께는 앞으로 성실히 살아가는 모습으로 이해를 구하겠습니다. 부족하지만 늘 좋은 모습으로 찾아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예올림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선예 “남편과 함께 아이티 선교 5년”…JYP “원더걸스 탈퇴 아니다”

    선예 “남편과 함께 아이티 선교 5년”…JYP “원더걸스 탈퇴 아니다”

    걸그룹 원더걸스의 멤버 선예가 아이티에서 5년간 선교활동을 한다. 선예는 원더걸스 공식 팬카페 홈페이지에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라며 글을 올렸다. 그는 “인생의 방향이 조금 더 명확해졌다”며 성경의 ‘돌아온 탕자’를 언급해 “남편과 함께 전도를 위한 NGO단체를 설립했다. 첫 활동으로 오는 7월에 아이티에 들어가서 약 5년 간 아이티에서 지내기로 했다”고 밝혔다. 선예의 글에 따르면 그의 아이티행은 소속사와 원더걸스 멤버들과는 합의가 끝난 것으로 보인다. 선예는 “부족하지만 늘 좋은 모습으로 찾아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글을 마무리했다. 선예는 지난해 1월 캐나다 교포 출신 선교사 제임스 박과 결혼한 뒤 10월 딸을 출산했다. 이후 12월 원더걸스 시절부터 몸 담았던 JYP엔터테인먼트와 재계약을 했지만 이번 아이티 봉사활동 선언으로 향후 활동이 당분간 중지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원더걸스의 소속사인 JYP엔터테인먼트는 “선예가 아이티에 가더라도 원더걸스를 탈퇴하는 것은 아니다”고 분명히 밝혔다. 다음은 선예가 직접 올린 글 전문 안녕하세요. 선예입니다. 오랜만에 글로 인사드리네요. 제 인생의 방향이 조금 더 명확해져 여러분께 말씀드리려고 글을 씁니다. 지난 7년간 원더걸스로서 정말 많은 사랑을 받고 국내외를 오고가며 제가 감히 겪을 수 없을 만한 놀라운 경험들을 했습니다. 그런 소중한 경험을 만들어준 원더걸스 동료 멤버들, 회사 식구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원더걸스 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는 말씀 다시 한 번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미국에 건너간 후부터 전 저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며 늘 궁금해 왔던 것들, 맘 속 깊숙히 품고 있던 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교회를 통해 아이티에 봉사활동을 일주일 간 다녀오게 되었고 그 일주일의 시간이 저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이티에서 가장 제 마음에 감동이 되었던 것은 성경말씀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 곁에서 열심히 칭찬받으며 일했지만 둘째 아들은 집을 나가서 아버지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매일매일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눈물 흘리며 손꼽아 기다리셨지만 첫째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모른 체하며 늙은 자기 일만 열심히 하머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알고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자기 일만 열심히 할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위해 동생을 찾으러 나가야 하는데 첫째 아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첫째아들의 모습이 바로 제 자신 같았습니다. 성경의 복음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아이티의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그동안 개인적인 성공에만 집중하고 살았던 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복음을 모르는 세상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이 모든 과정 중에서도 제 마음은 점점 더 확고해져갔고 이제 남편과 함께 전도를 위한 NGO단체를 설립하여 제 2의 삶을 시작하려합니다. 저희 부부는 올해 7월에 아이티에 들어가서 약 5년 간 아이티에서 지내기로 하였습니다. 연예인으로서의 모든 활동도 이런 목표의 연장선 상에서 해나갈 계획입니다. 이런 결정을 이해해주고 격려해준 원더걸스 멤버들, 회사 식구들, 팬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또 아직까지 속상해하시는 분들께는 앞으로 성실히 살아가는 모습으로 이해를 구하겠습니다. 부족하지만 늘 좋은 모습으로 찾아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예올림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선예, 돌연 아이티 5년 봉사…소희 이어 원더걸스 또 위기?

    선예, 돌연 아이티 5년 봉사…소희 이어 원더걸스 또 위기?

    걸그룹 원더걸스의 멤버 선예가 아이티에서 5년간 선교활동을 한다. 선예는 원더걸스 공식 팬카페 홈페이지에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라며 글을 올렸다. 그는 “인생의 방향이 조금 더 명확해졌다”며 성경의 ‘돌아온 탕자’를 언급해 “남편과 함께 전도를 위한 NGO단체를 설립했다. 첫 활동으로 오는 7월에 아이티에 들어가서 약 5년 간 아이티에서 지내기로 했다”고 밝혔다. 선예의 글에 따르면 그의 아이티행은 소속사와 원더걸스 멤버들과는 합의가 끝난 것으로 보인다. 선예는 “부족하지만 늘 좋은 모습으로 찾아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글을 마무리했다. 선예는 지난해 1월 캐나다 교포 출신 선교사 제임스 박과 결혼한 뒤 10월 딸을 출산했다. 이후 12월 원더걸스 시절부터 몸 담았던 JYP엔터테인먼트와 재계약을 했지만 이번 아이티 봉사활동 선언으로 향후 활동이 당분간 중지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원더걸스의 소속사인 JYP엔터테인먼트는 “선예가 아이티에 가더라도 원더걸스를 탈퇴하는 것은 아니다”고 분명히 밝혔다. 다음은 선예가 직접 올린 글 전문 안녕하세요. 선예입니다. 오랜만에 글로 인사드리네요. 제 인생의 방향이 조금 더 명확해져 여러분께 말씀드리려고 글을 씁니다. 지난 7년간 원더걸스로서 정말 많은 사랑을 받고 국내외를 오고가며 제가 감히 겪을 수 없을 만한 놀라운 경험들을 했습니다. 그런 소중한 경험을 만들어준 원더걸스 동료 멤버들, 회사 식구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원더걸스 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는 말씀 다시 한 번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미국에 건너간 후부터 전 저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며 늘 궁금해 왔던 것들, 맘 속 깊숙히 품고 있던 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교회를 통해 아이티에 봉사활동을 일주일 간 다녀오게 되었고 그 일주일의 시간이 저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이티에서 가장 제 마음에 감동이 되었던 것은 성경말씀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 곁에서 열심히 칭찬받으며 일했지만 둘째 아들은 집을 나가서 아버지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매일매일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눈물 흘리며 손꼽아 기다리셨지만 첫째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모른 체하며 늙은 자기 일만 열심히 하머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알고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자기 일만 열심히 할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위해 동생을 찾으러 나가야 하는데 첫째 아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첫째아들의 모습이 바로 제 자신 같았습니다. 성경의 복음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아이티의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그동안 개인적인 성공에만 집중하고 살았던 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복음을 모르는 세상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이 모든 과정 중에서도 제 마음은 점점 더 확고해져갔고 이제 남편과 함께 전도를 위한 NGO단체를 설립하여 제 2의 삶을 시작하려합니다. 저희 부부는 올해 7월에 아이티에 들어가서 약 5년 간 아이티에서 지내기로 하였습니다. 연예인으로서의 모든 활동도 이런 목표의 연장선 상에서 해나갈 계획입니다. 이런 결정을 이해해주고 격려해준 원더걸스 멤버들, 회사 식구들, 팬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또 아직까지 속상해하시는 분들께는 앞으로 성실히 살아가는 모습으로 이해를 구하겠습니다. 부족하지만 늘 좋은 모습으로 찾아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예올림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선예, 5년간 활동 중단 “남편과 아이티 간다” 탕자 말씀 읽고.. [전문]

    선예, 5년간 활동 중단 “남편과 아이티 간다” 탕자 말씀 읽고.. [전문]

    걸그룹 원더걸스의 리더 선예(25)가 남편과 함께 5년간 아이티로 선교를 떠난다. 18일 선예는 원더걸스 팬사이트에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라는 제목으로 장문의 글을 올렸다. 선예는 “미국에 건너간 후부터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며 맘 속 깊숙이 품고 있는 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던 중 아이티에 일주일간 봉사활동을 다녀오게 됐고 그 시간이 제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놨다”고 털어놨다. 성경 속 돌아온 탕자에 관한 말씀에 감동을 받아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는 선예는 “남편과 함께 전도를 위한 NGO 단체를 설립해 제2의 삶을 시작하려 한다. 올해 7월 아이티에 들어가 약 5년 간 아이티에서 지내기로 했다. 연예인으로서의 모든 활동도 이런 목표의 연장선 상에서 해나갈 계획”이라고 전했다. JYP엔터테인먼트에 따르면 선예는 최근 선교 NGO ‘화이트스톤 글로벌’ 설립을 위한 광고를 촬영했다. 모델료는 전액 봉사활동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된다. 선예는 지난해 1월 캐나다 교포 출신 선교사 제임스박(20)과 결혼 후 10월 딸을 출산했다. <이하 선예의 팬카페 글 전문> 안녕하세요. 선예입니다. 오랜만에 글로 인사드리네요. 제 인생의 방향이 조금 더 명확해져 여러분께 말씀드리려고 글을 씁니다. 지난 7년간 원더걸스로서 정말 많은 사랑을 받고 국내외를 오고가며 제가 감히 겪을 수 없을 만한 놀라운 경험들을 했습니다. 그런 소중한 경험을 만들어준 원더걸스 동료 멤버들, 회사 식구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원더걸스 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는 말씀 다시 한 번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미국에 건너간 후부터 전 저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며 늘 궁금해 왔던 것들, 맘 속 깊숙히 품고 있던 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교회를 통해 아이티에 봉사활동을 일주일 간 다녀오게 되었고 그 일주일의 시간이 저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이티에서 가장 제 마음에 감동이 되었던 것은 성경말씀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 곁에서 열심히 칭찬받으며 일했지만 둘째 아들은 집을 나가서 아버지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매일매일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눈물 흘리며 손꼽아 기다리셨지만 첫째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모른 체하며 늙은 자기 일만 열심히 하머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알고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자기 일만 열심히 할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위해 동생을 찾으러 나가야 하는데 첫째 아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첫째아들의 모습이 바로 제 자신 같았습니다. 성경의 복음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아이티의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그동안 개인적인 성공에만 집중하고 살았던 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복음을 모르는 세상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이 모든 과정 중에서도 제 마음은 점점 더 확고해져갔고 이제 남편과 함께 전도를 위한 NGO단체를 설립하여 제 2의 삶을 시작하려합니다. 저희 부부는 올해 7월에 아이티에 들어가서 약 5년 간 아이티에서 지내기로 하였습니다. 연예인으로서의 모든 활동도 이런 목표의 연장선 상에서 해나갈 계획입니다. 이런 결정을 이해해주고 격려해준 원더걸스 멤버들, 회사 식구들, 팬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또 아직까지 속상해하시는 분들께는 앞으로 성실히 살아가는 모습으로 이해를 구하겠습니다. 부족하지만 늘 좋은 모습으로 찾아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원더걸스 선예, 남편과 아이티 봉사…재계약은 왜 했을까

    원더걸스 선예, 남편과 아이티 봉사…재계약은 왜 했을까

    걸그룹 원더걸스의 멤버 선예가 아이티에서 5년간 선교활동을 한다. 선예는 원더걸스 공식 팬카페 홈페이지에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라며 글을 올렸다. 그는 “인생의 방향이 조금 더 명확해졌다”며 성경의 ‘돌아온 탕자’를 언급해 “남편과 함께 전도를 위한 NGO단체를 설립했다. 첫 활동으로 오는 7월에 아이티에 들어가서 약 5년 간 아이티에서 지내기로 했다”고 밝혔다. 선예의 글에 따르면 그의 아이티행은 소속사와 원더걸스 멤버들과는 합의가 끝난 것으로 보인다.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선예의 결정으로 원더걸스는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는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한 네티즌은 “리더가 5년간 자리를 비우는데 사실 상 해체가 아닌가”라는 의견을 내비쳤다. 또 다른 네티즌은 “시대를 풍미했던 원더걸스도 이렇게 해체하는구나”라며 댓글을 달았다. 선예는 “부족하지만 늘 좋은 모습으로 찾아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글을 마무리했다. 선예는 지난해 1월 캐나다 교포 출신 선교사 제임스 박과 결혼한 뒤 10월 딸을 출산했다. 이후 12월 원더걸스 시절부터 몸 담았던 JYP엔터테인먼트와 재계약을 했지만 이번 아이티 봉사활동 선언으로 향후 활동이 당분간 중지될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선예가 직접 올린 글 전문 안녕하세요. 선예입니다. 오랜만에 글로 인사드리네요. 제 인생의 방향이 조금 더 명확해져 여러분께 말씀드리려고 글을 씁니다. 지난 7년간 원더걸스로서 정말 많은 사랑을 받고 국내외를 오고가며 제가 감히 겪을 수 없을 만한 놀라운 경험들을 했습니다. 그런 소중한 경험을 만들어준 원더걸스 동료 멤버들, 회사 식구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원더걸스 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는 말씀 다시 한 번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미국에 건너간 후부터 전 저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며 늘 궁금해 왔던 것들, 맘 속 깊숙히 품고 있던 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교회를 통해 아이티에 봉사활동을 일주일 간 다녀오게 되었고 그 일주일의 시간이 저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이티에서 가장 제 마음에 감동이 되었던 것은 성경말씀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 곁에서 열심히 칭찬받으며 일했지만 둘째 아들은 집을 나가서 아버지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매일매일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눈물 흘리며 손꼽아 기다리셨지만 첫째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모른 체하며 늙은 자기 일만 열심히 하머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알고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자기 일만 열심히 할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위해 동생을 찾으러 나가야 하는데 첫째 아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첫째아들의 모습이 바로 제 자신 같았습니다. 성경의 복음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아이티의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그동안 개인적인 성공에만 집중하고 살았던 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복음을 모르는 세상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이 모든 과정 중에서도 제 마음은 점점 더 확고해져갔고 이제 남편과 함께 전도를 위한 NGO단체를 설립하여 제 2의 삶을 시작하려합니다. 저희 부부는 올해 7월에 아이티에 들어가서 약 5년 간 아이티에서 지내기로 하였습니다. 연예인으로서의 모든 활동도 이런 목표의 연장선 상에서 해나갈 계획입니다. 이런 결정을 이해해주고 격려해준 원더걸스 멤버들, 회사 식구들, 팬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또 아직까지 속상해하시는 분들께는 앞으로 성실히 살아가는 모습으로 이해를 구하겠습니다. 부족하지만 늘 좋은 모습으로 찾아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예올림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내러티브 리포트] “아프리카 예술혼 담은 이 손, 한국에선 14시간 접시만 닦았다”

    [내러티브 리포트] “아프리카 예술혼 담은 이 손, 한국에선 14시간 접시만 닦았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예술흥행(E6) 비자를 발급받고 한국행을 선택한 외국인들이 인신매매, 성매매, 임금 체불, 폭력 등 인권침해 상황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있다. 그간 E6 비자 제도의 부작용이 꾸준히 거론돼 왔지만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관계 부처가 나서서 인권침해에 대한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아프리카 무용 예술가에서 불법 체류자로 전락한 코트디부아르 출신의 에밀라(가명·35·여)와 가수 활동을 기대하고 입국했으나 유흥업소에서 일하다 필리핀으로 돌아간 마리아(가명·23·여)와의 심층 인터뷰를 내러티브 리포트(Narrative Report) 형태로 재구성했다. ■ 아프리카빌리지 무용수 에밀라 2002년 6월. 에밀라(당시 23·여)와 동료 무용수 10명은 지구 반대편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는 ‘코레 뒤 쉬드’(프랑스어로 남한)’. 코트디부아르에서 이틀 동안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는 낯선 땅 한국이었다. 그래도 에밀라는 두렵지 않았다. 코트디부아르의 ‘글라오지에티’ 전통예술극단 단원들은 이전에도 프랑스, 독일, 리비아 등으로 해외 순회공연을 하러 다녔다. 에밀라는 한국에서의 공연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며 기대에 차 있었다. 하지만 에밀라의 기대가 깨지는 데는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이들을 초청한 경기 남양주의 아프리카 예술 체험장인 ‘아프리카빌리지’ 관리자와 함께 도착한 곳은 수도나 화장실은커녕, 주변에 인적조차 드문 폐가였다. 집 안에는 곰팡내가 진동했다. 물을 사 먹거나 씻으려면 20분이나 걸어 나와야 했다. 현실은 점점 악몽으로 다가왔다. 한국에 오기 전 공연단은 하루 8시간씩 일하고 한 달에 200달러를 받기로 계약했다. 하지만 이들이 월 200달러의 급여조차 언감생심이란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이마저도 몸이 아파서 하루 쉬거나 청소를 안 하면 매번 5~15달러씩 공제됐다. 전화비로 1분에 3달러가 떼였다. 업주는 이것들을 한국어로 ‘흑인급여장부’라고 적힌 파일에 기록하고 관리했다. 무엇보다 그들을 힘들게 한 건 노예 취급을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예술가의 자존심은 처절하게 짓밟혔다. 에밀라와 동료 무용수들은 쉬는 날 없이 일해야 했지만 거역할 수 없었다. 하루 3~4회 공연이 끝난 뒤에도 식당 서빙과 요리, 청소, 호객, 제초작업까지 하루 14시간이 넘는 고역을 견뎌야 했다. 그들이 일한 곳은 이름은 박물관이지만, 업소 등록은 음식점으로 돼 있는 곳이었다. 에밀라와 동료 무용수들이 항의하면 업주는 ‘그러면 나가라’며 코웃음을 쳤다. 업주는 알고 있었다. 돈도, 비행기 표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에밀라와 단원들이 목숨을 건 탈출을 하진 못할 것이란 걸. 4개월이 흐른 뒤 에밀라와 동료 무용수들은 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의 도움을 받아 끔찍했던 아프리카빌리지를 탈출했다. 12년이 지난 지금 에밀라의 곁에는 동료 무용수였던 남편 바토(51)밖에 없다. 그들은 사업장을 탈출하는 동시에 E6 비자를 박탈당했고, 갈 곳을 잃었다. 단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사이 코트디부아르에는 내전이 발생했고, 에밀라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 한국에 남기로 한 에밀라는 이듬해 난민 신청을 했다. 하지만 난민 신청은 11년이 지난 아직까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때 유럽 순회공연을 다니는 예술가였던 에밀라와 바토는 결국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 가는 불법 체류자로 이 땅에 남아 있다.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 가수 지망했던 필리핀인 마리아 2010년 12월, 필리핀 국적의 마리아(23·여)는 부푼 꿈을 안고 한국 땅을 밟았다. 필리핀을 강타한 ‘한류’ 열풍 속에서 가수의 꿈을 키운 마리아는 한국에서 “내 꿈에 날개를 달겠다”고 다짐했다. 돈을 벌겠다는 현실적인 목표도 있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필리핀에서 지인 소개로 알게 된 현지 기획사 직원은 “한국에 가면 가수로 일하면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며 마리아를 유혹했다. 간단한 오디션을 거친 마리아는 한국 기획사와 공연 계약을 체결한 뒤 예술흥행(E6) 비자를 발급받아 한국에 들어왔다. 공항에서 만난 기획사 직원은 마리아를 대구의 노래방으로 데리고 갔다. 생전 처음 겪는 추위도 싫었지만, 한국 사람들의 시선은 더 견디기 어려웠다. 한 달 뒤 마리아는 부산의 한 외국인 전용 클럽으로 옮겨졌다. 미국인이 좋아하는 용모에 영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 때문. 생활은 더 비참했다. 업주가 허락하지 않으면 근무시간인 밤에는 물론, 낮에도 클럽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하루 9시간씩 손님 옆에서 술을 따르고, 노래를 불러 받는 월급은 고작 40만원. 필리핀에서 마리아만 바라보는 5명의 식구들을 생각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한 달에 2번씩 정기 휴무를 약속받았지만, 그마저도 지켜지지 않았다. 아파도 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파서 일을 못할 때면 사장이 “하루 수당을 못 벌었으니 벌금으로 10만원을 내라”고 윽박질렀다. 다른 클럽에서 일하는 친구들은 손님의 술 시중을 들고 접대하기 위해 마약을 먹는다고도 했다. 오랜만에 쉬는 날, 마리아는 아파트에 혼자 있기 싫어 자신이 일하는 클럽에 갔다. 손님과 동석해 술을 마셨고, 손님의 요청으로 무대에서 노래도 불렀다. 손님들이 준 팁을 세어 보니 20만원. 이를 본 사장은 득달같이 달려와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 휴무에 번 돈이라고 사정했지만, 사장은 벌컥 화를 냈다. “누가 일하게 해 줬는데 어디서 이렇게 거만하게 나와? 당장 나가.” 그날 밤 마리아는 도망쳤다. 갈 곳을 잃은 마리아는 한국에서 알게 된 친구의 소개로 이주 여성을 위한 쉼터에 머물렀다. 마리아의 사연을 들은 쉼터의 활동가들은 계약을 위반한 업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자고 했다. 업주는 “한국에 입국하는 과정에서 비용이 많이 들었고 세금도 내야 하기 때문에 월급은 그 정도밖에 줄 수 없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후 1년 2개월의 지루한 소송이 이어졌고 법원은 마리아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마리아는 필리핀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임시로 G1 비자(치료·소송 등을 이유로 3개월 이상 머물러야 할 때 내주는 비자)를 발급받아 한국에 머물렀지만 소송이 종료된 만큼 더 머물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2012년 6월, 마리아는 상처만 얻은 채 쓸쓸하게 한국을 떠났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겉도는 개방형직위] “전문지식과 경험 공직사회에 활력… 칸막이 걷어야 혁신 가능”

    [겉도는 개방형직위] “전문지식과 경험 공직사회에 활력… 칸막이 걷어야 혁신 가능”

    전문성이나 효율적인 정책 수립이 필요한 직위에 공직 내외를 불문하고 직무수행 요건을 갖춘 인물을 공개모집해 선발하는 제도가 개방형직위제도다. 주로 민간 전문가를 영입하자는 취지이지만 도리어 전·현직 공무원 사이에서 지원자가 늘고 있다. 개방형직위에 종사하는 이들이 직접 전하는 체험담과 효과, 문제점, 대안 등을 ‘희로애락’(喜哀)으로 구분해 들어봤다. [희] “올해 나이 64세인데 여생을 남에게 봉사하면서 의미 있게 살고 싶었습니다. 마침 국립병원에서 민간인도 일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죠. 망설이지 않고 바로 지원 신청서를 냈습니다.” 김흥곤 국립소록도병원 안이비인후과 과장은 지난해 3월까지만 해도 20년 동안 개인병원을 운영하던 원로 의사였다. 지금은 국립소록도병원에 입원해 있는 한센병 환자들의 손과 발이 돼주고 있다. 그가 오랜 진료 경험을 공공 의료 영역에서 활용할 수 있게끔 만든 건 개방형직위 임용제도다. 개방형직위제를 통해 공익에 이바지하는 민간 전문가들은 이제 공직사회에서 낯설지 않은 존재다. 김영일 국립장애인도서관장은 조선대 특수교육과 교수로 재직할 때부터 장애인 학생들이 제때 필요한 점자책이나 청각자료를 구하지 못해 어려워하는 걸 보고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그 자신이 1급 시각 장애인인 그는 2011년부터 장애인들이 활용할 수 있는 자료를 확충하고, 자료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환경·시설을 개선하는 일을 하고 있다. 전문 분야에서 쌓은 경험은 자칫 폐쇄적인 순혈주의에 빠질 수 있는 공직사회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성폭력·가정폭력 피해자를 돕는 소송을 많이 다뤘던 김재련 변호사는 지난해부터 여성가족부 권익증진국장으로서 폭력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업무를 총괄한다. 그는 “한 분야를 오래 천착한 외부 전문가를 영입해 경험을 나누는 것이 국민에게 더 잘 복무하는 정부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여운광 국립재난안전연구원장은 명지대에서 30년 넘게 토목 환경을 가르친 경험을 바탕으로 재해대책을 연구한다. 그는 “공무원이 되면서 21세기에 걸맞은 새로운 방재 시스템을 구축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2년 전부터 서울시에서 일하는 김창보 보건정책관 역시 ‘건강세상네트워크’라는 의료 관련 시민단체에서 일한 경험과 보건학 박사로서 품어왔던 문제의식을 공공부문에 전파한다는 보람을 느낀다. [노] “스웨덴에서는 공공부문 관리자가 100% 개방형직위라고 보면 됩니다. 공무원이나 민간인 구분 없이 누구나 전문성과 지도력만 있으면 채용기회가 있습니다. 국적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황선준 경기도교육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은 스웨덴 감사원과 국립교육청에서 14년, 서울시 교육연구정보원장으로 2년을 근무했다. 그의 눈에 비친 한국 공직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그는 먼저 “스웨덴 역시 1960년대까지는 호봉제와 위계질서로 움직였다고 들었다”면서 “지금은 9급이니 5급이니 하는 직급이 없고 행정고시도 없다”라고 강조했다. 업무 분야는 있지만 상하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부 고위직은 물론 학교 교장도 개방형이다. 역량만 인정받으면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시스템에 익숙해진 황 위원이 보기에 한국 공직사회는 관료주의가 너무 심하고 위계질서가 너무 엄격하다. 그는 “직접 일할 직원은 얼마 없는데 계장, 과장, 부장, 국장 등 지시하는 사람은 넘쳐난다”고 꼬집었다. 그는 “장(長)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직책이라면 공무원이건 민간이건 상관없이 문호를 개방하는 것이 혁신적인 조직을 만드는 길”이라고 주문했다. 황 위원뿐만 아니라 개방형으로 공직에 들어간 이들은 너나없이 형식에 치우쳐 있고 칸막이 구조가 심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는 우수한 외부인사를 영입하는 데 장애 요인이 된다. 김창보 국장은 “서울시 노인정책을 예로 들면, 치매와 노인의료는 보건정책관이, 노인요양보험은 복지정책관이 담당한다”면서 “칸막이가 견고한데다 책임자끼리 직접 토론해서 조율하는 걸 어색해한다”고 말했다. 개방형직위 취지와 달리 일부 정부부처가 소속 공무원을 임명하는 ‘제 식구 감싸기’ 사례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중앙부처 개방형직위 관계자는 “가령 과장이 되기 쉽지 않다 싶으면 개방형직위로 우회하는 방식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결국 자기 역량만으로는 안 되는 사람을 구제해주는 건데, 이는 제도 취지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애] “과장·팀장들 모아놓고 보고를 받는데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행정용어가 막 튀어나오더라고요. 그 자리에서 물어보면 혹시라도 얕잡아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알아듣는 척 넘어갔습니다. 나중에 다른 직원에게 넌지시 확인했습니다.” 견고한 위계질서와 촘촘한 인맥으로 이어진 집단에 비집고 들어가서 하나가 된다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다. 김창보 국장은 변변한 사전교육이나 오리엔테이션은 물론이고 전임자한테 인수인계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곧바로 업무에 투입됐던 출근 첫날을 떠올리며 “완전히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결국 공무원 조직도 사람이 움직이는 곳입니다. 뭔가 일을 하려면 예산, 인사, 조직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뚫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죠.” 김 관장은 장애인 학습권을 보장하는 활동을 한다는 데 보람을 느끼면서도 답답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는 “2012년에 국립장애인도서관지원센터에서 도서관으로 바뀌었지만 인력은 10명에서 18명으로 늘어난 게 전부고 예산은 턱없이 부족하다”면서 “가장 답답한 건 법령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적극성과 융통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한국엔 점자도서관 자체가 부족한데 기존에 있는 점자도서관 인프라 개선작업만 전념할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장애인 이용자들이 자료를 쉽게 검색하고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춰야 하는데 아직은 변화가 미비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월 서울시가 정보공개정책과를 신설한 뒤 개방형직위로 임용된 조영삼 서울시 정보공개정책과장은 2000년부터 2012년까지 국회와 청와대 등에서 기록연구사로 일했다. 정규직 공무원 출신인 그조차도 개방형으로 공직에 돌아온 뒤 어려움을 느낀다. 그는 “개방형은 부하들에게 인사에 도움을 주거나 불이익을 줄 수 있다는 걸 각인시키기가 쉽지 않다. 조직 장악력에서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굴러온 돌이라는 인식을 넘어서는 게 만만치 않다. 그건 전문성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면서 “하지만 조직을 장악하지 못하면 전문성 발휘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락] “2012년 사표를 내고 공무원을 그만뒀습니다. 참여정부 인사라는 낙인이 찍혀 2008년부터 사실상 귀양살이를 한 걸 생각하면 속이 다 시원했습니다. 그런데 1년도 안 돼 다시 공무원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조 과장은 시에서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서울기록원 건립과 행정정보공개서비스인 정보소통과장 구축을 진두지휘한다. 그는 “일반직이었다면 힘들었다고 본다. 개방형이니까 이만큼이라도 한 게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조 과장처럼 공직에 있는 사람에게도 개방형직위는 장점이 많은 제도다. 최은정 여성가족부 국제협력담당관도 외교부에서 일하다 민간 금융회사에서 10년 넘게 일했고, 다시 공무원으로 돌아온 사례다. 그는 “공익을 위해 일한다는 긍지를 느낀다. 정책을 만들고 한국을 대표해 국제무대에서 활동한다는 자부심도 크다”고 강조했다. 김창보 국장은 “임기 2년에 총 5년이란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면서 “예전에는 2년 동안 보건정책관이 세 번은 바뀌었다고 들었는데 내가 개방형직위인 덕분에 꾸준히 장기프로젝트를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자평했다. “고문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인권피해자치유사업이나 ‘보호자 없는 병원’ 등 그간 추진한 사업을 생각해보면 나로서는 시민단체나 학계에 있었다면 못했을 사업을 공공부문을 통해 이룬 것이고, 공공부문은 일반직 공무원만으론 벽에 부딪쳤을 사업을 민간전문가를 활용해 달성한 셈입니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은 셈이죠.”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최지숙 기자 truth173@seoul.co.kr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태연 깜짝 생일파티, 엑소 생방송 중 케이크 축하 “무슨 소원?”

    태연 깜짝 생일파티, 엑소 생방송 중 케이크 축하 “무슨 소원?”

    ‘태연 깜짝 생일파티’ 생방송 중 걸그룹 소녀시대 멤버 태연의 깜짝 생일파티가 열렸다. 9일 방송된 SBS ‘인기가요’에서 소녀시대는 신곡 ‘Mr Mr’로 컴백무대를 선보였다. 무대가 끝난 후 인터뷰 자리에서 MC인 엑소 멤버 수호와 백현은 케이크를 들고 등장했다. 이날은 태연의 생일이어서 같은 소속사 식구인 수호와 백현이 깜짝 생일파티를 준비한 것. ‘Happy Birthday’란 자막과 함께 무대 위 MC와 소녀시대 멤버들은 함께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며 태연의 생일을 축하했다. 이날 소녀시대는 ‘Mr Mr’로 컴백과 동시에 1위를 차지하는 기쁨도 누렸다. 태연은 자신의 SNS를 통해 생일파티 인증샷을 공개하기도 했다. 네티즌들은 “태연 깜짝 생일파티 감동이다. 무슨 소원 빌까?”, “태연 깜짝 생일파티 진짜 기뻤겠다”, “태연 깜짝 생일파티, 가장 큰 선물은 1위” 등의 반응을 보였다. 사진 = SBS, 태연 인스타그램(태연 깜짝 생일파티)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세결여 손여은, 시댁 식구들에 광기 폭발 “또라이 아니냐”

    세결여 손여은, 시댁 식구들에 광기 폭발 “또라이 아니냐”

    ’세 번 결혼하는 여자’ 손여은이 김용림과 김정난에게 막말을 했다. 9일 방송된 SBS 주말드라마 ‘세 번 결혼하는 여자’(이하 ‘세결여’) 34회에서는 채린(손여은 분)이 시어머니 최여사(김용림 분)와 시누이 정태희(김정난 분)에게 막말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이날 최여사와 정태희는 채린에게 정태원(송창의 분)과의 이혼을 요구하며 집에서 나가라고 설득했다. 전날 채린은 술을 잔뜩 마시고 인사불성이 된 채 집에 돌아온 상황이었다. 최여사는 “너 낙동강 오리알 되고 나 손녀딸 뺏기고. 네가 한 짓이 너무 엄청나 내 아들한테 뭐라고 할 말이 없었어. 그러니 가망 없는 일에 목매지 말고 네가 결심을 해”라며 채린을 타일렀다. 그러나 채린은 “어머니, 우리 아버지 기부 안하고 그게 다 내 거라도 이러시겠어요? 어머니 눈 밖에 나는 건 죽음이에요”라며 비난을 쏟아냈다. 채린의 막말에 화가 난 정태희는 그간 채린의 행실을 탓하며 “미저리 같다”라고 분통을 터트렸지만, 채린은 “나만 믿어라 하더니 미저리는 이 집 식구들이야. 이 집에 사람은 태원 씨 밖에 없어. 그 인간도 미저리야. 잘해준다고 그러더니 또라이 아냐?”라며 반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최여사가 혈압이 오른 듯 쓰러지려고 하자 채린은 “쇼하지 마세요. 안 속아요”라며 방을 나갔다. 결국 최여사는 “우리가 나가자. 이 집 저년 주고, 우리가 나가”라며 기겁했다. 사진 = SBS (’세 번 결혼하는 여자’ 손여은) 연예팀 seoule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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