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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택 세금, 정치인가 경제인가…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전경하의 집중]

    주택 세금, 정치인가 경제인가…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전경하의 집중]

    최근 집값 급등… 장특공제 공론화토허구역·세입자 계약갱신청구권다주택자 다른 ‘숨통’ 필요할 수도OECD국 보유세 실효세율 0.33%한국 0.15%… 30개국 중 20위 수준GDP 대비 보유세 비율 1.0% ‘비슷’취득세, 자가·임차 결정에 큰 영향‘똘똘한 한 채’ 쏠림 막는 방안 필요정권 지향 아닌 시장 안정이 ‘관건’아파트 등 주택은 살 때(취득세), 갖고 있는 동안(보유세), 팔 때 가격이 올랐으면(양도소득세) 세금을 낸다. 취득세와 양도세는 거래세이며 보유세에는 재산세와 종합부동산세가 있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보유세가 ‘좋은 세금’이라며 개선을 권고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쉽지 않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도입된 종부세가 좋은 예다. 이듬해 지방선거에서 여당 참패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거론된다. 누가 덜 내고 더 내느냐의 문제가 되면서 정치적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올 한 해도 부동산 세금이 뜨거운 이슈가 될 전망이다. # 커지는 장특공제 개정 압박 서울 마포구의 전용면적 85㎡ 아파트에 자가 거주 중인 김모씨. 두 자녀가 독립했지만 몇 년 더 산 뒤 아파트를 팔고 규모를 줄여 다른 곳으로 이사 갈 생각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집값이 가파르게 올라 양도소득이 10억원을 훌쩍 넘는다. 양도세를 많이 내면 선택지가 대폭 줄어든다. 1세대 1주택자에게 주어지는 장기보유특별공제(장특공제)를 최대한 받는 것이 해결책이다. 양도소득세는 6~45% 누진세율이다. 세금이 매겨지는 과세표준(과표) 구간을 낮추는 것이 중요하다. 장특공제는 최대 80%다. 1주택자 장특공제는 보유기간은 3년, 거주기간은 2년부터 시작해서 1년마다 4% 포인트씩 높아진다. 거주·보유기간이 각각 10년을 넘으면 양도소득의 80%가 과표에서 제외된다. 양도소득이 10억원이라면 8억원(80%)을 뺀 2억원이 과표가 된다. 양도소득이 20억원이면 제외되는 금액이 16억원. 많이 오른 주택일수록 혜택이 커진다. 다주택자도 최고 30% 장특공제를 받는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23일 소셜미디어에 “주거용이 아닌 투자·투기용이라면 장기 보유했다고 세금 감면은 이상해 보인다”고 올렸다. 다주택자 장특공제는 문재인 정부 당시인 2018년 폐지됐다가 윤석열 정부에서 1년 단위로 연장돼 왔다. 1세대 1주택자에 대한 장특공제 손질 가능성도 있다. 문재인 정부는 거주기간은 그대로 두고 보유기간 대신 양도차익에 따라 공제율을 차등적용하는 방식을 추진했다. 양도차익 5억원 미만은 지금처럼 40%를 인정하고 5억~10억원 미만은 30%, 10억~20억원 미만은 20%, 20억원 이상은 10%로 축소하는 방식이다. 당시에는 무산됐지만 ‘똘똘한 한 채’ 쏠림 현상으로 다시 거론되고 있다. 현재 다주택자의 양도소득세율은 2년 이상 보유할 경우 기본 세율이다. 문재인 정부 때 도입된 조정대상지역 2주택자는 기본 세율에 20% 포인트, 3주택 이상자는 30% 포인트를 더하는 조치가 윤석열 정부에서 1년 단위로 유예돼서다. 이 유예가 5월 9일 끝나고, 장특공제 적용도 배제된다. 다주택자의 양도세 부담이 대폭 커진다. 10·15 부동산대책으로 조정대상지역이 서울 4개구(강남·서초·송파·용산구)에서 서울 전역과 경기 12개 지역으로 넓어졌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서울 다주택자는 37만 2000명(2024년 기준)이다. 경기 다주택자는 56만 1000명인데 이 중 상당수가 조정대상지역에 포함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당 지역은 토지거래허가구역이기도 하다. 매수 후 실거주 2년이 의무라 갭투자는 불가능하다. 10·15 대책으로 주택담보대출 한도가 15억원 초과 25억원 이하 주택은 4억원, 25억원 초과 주택은 2억원이다. 10억원 이상의 현금을 동원할 수 있어야 살 수 있다. 문제가 하나 더 있다. 세입자의 계약갱신청구권은 계약만료 기간 2개월 전까지 행사할 수 있다. 서울 전역에서 집값이 오르면서 계약갱신청구권 행사가 늘고 있다. 본인이 직접 거주하지 않으면 팔기 어려운 상황이다. 팔기보다 버틸 가능성이 커지는데 이 경우 양도세 중과 대상이 아니다. 현재 거론되는 ‘숨통’은 거래 마무리가 아닌 계약 시점. 또 다른 숨통이 필요할 수 있다. # 7월 세제개편안, 선거 없는 내년 적용 정부는 10·15 대책에서 보유세와 거래세를 ‘조정’한다고 했다. 매년 7월 세법개정안이 발표되고 다음 해부터 적용된다. 6·3지방선거가 끝나고 7월 발표될 세법개정안은 내년에 적용된다. 이미 관련 연구용역이 진행 중이다. 선거가 없는 해라 세법 개정에 따른 정치적 부담이 적을 수 있다. 토지+자유연구소가 지난해 9월 발간한 ‘OECD 국가 부동산 보유세 실효세율 분석’에 따르면 한국의 보유세 실효세율은 0.15%(2023년 기준)다. 비교 가능한 회원국 30개국 중 20위다. 실효세율은 부동산 세수 총액을 민간 부동산 자산가치 총액으로 나눈 값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은 0.33%. 국내총생산(GDP) 대비 보유세 비율(1.0%)은 OECD 평균(0.95%)과 비슷하다. 보유세 실효세율은 자산, GDP 대비 보유세 비율은 소득이 기준이다. 소득 대비 부동산 가격이 높은 우리나라 특징이 여기서도 나타난다. 보유세는 2005년부터 재산세와 종부세로 이원화됐다. 재산세율은 0.1~0.4%(1세대 1주택은 0.05~0.35%), 종부세는 0.5~5.0%다. 재산세 세율과 과표 구간은 2009년 개정 이후 변화가 없다. 9억원(1세대 1주택은 12억원) 이상 주택에 부과되는 종부세는 과표 구간이 세분화되고 세율이 몇 년 단위로 바뀌었다. 재산세는 기초자치단체가 걷는 지방세다. 지방공공서비스에 대한 비용 개념이다. 국세인 종부세는 중앙정부가 걷어 전액을 지자체에 배분한다. 지방 간 재정 격차를 보완하는 기능은 있으나 사용처는 정해져 있지 않다. 청년임대주택 등 주거복지에 쓰자는 주장이 종종 나오나 지방재정과 관련된 문제라 아이디어 차원에 그치고 있다. # 세금 부담의 숨은 카드 재산세와 종부세 세율은 법률로 정하지만 세금부담액은 시행령이나 정부 의지로 조정할 수 있다. 우선 공시가격이 시세를 얼마나 반영하는지(현실화율)가 중요하다. 문재인 정부는 현실화 로드맵을 발표하고 2035년 90% 반영을 추진했다. 집값 자체가 벼락같이 오르면서 없던 일이 됐다. 올해 현실화율은 아파트 등 공동주택은 69%, 단독주택은 53.6% 등으로 2023년 이후 변동이 없다. 현실화율은 그대로지만 집값이 오르면 공시가격도 오른다. 공시가격은 건강보험료 산정, 기초연금·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선정 등에도 기준으로 쓰인다. 공시가격이 오르면 지역가입자의 건강보험료가 오르고, 복지 수급자가 탈락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공시가격의 얼마를 과표로 정하는지도 변수다. 2009년 시장 동향을 반영하고 보유세 부담 조정 목적으로 공정시장가액비율(공정비율)이 도입됐다. 현재 재산세와 종부세의 공정비율은 60%다. 공시가격이 10억원이라도 과표는 공정비율에 따라 6억원이다. 법률에 정해진 종부세 공정비율은 60~100%, 재산세는 40~80%(1세대 1주택은 30~70%)다. 정부가 이 범위 안에서 공정비율을 정하면 된다. 문재인 정부는 종부세 공정비율을 95%까지 끌어올렸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100%, 즉 공정비율 폐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 가격 조정 없는 취득세 집을 사거나 상속·증여받을 때 내는 취득세는 거래액 자체가 기준이다. 주택 관련 다른 세금보다 계산이 단순하다. 취득세율은 1주택자에 한해 1~3%다. 규제지역이고 다주택자가 되면 세율이 대폭 오른다. 조정대상지역 3주택자의 취득세율은 12%다. 생애 최초로 주택을 구입했을 때 실거래가가 12억원 이하면 최대 300만원까지 취득세를 감면해 준다. 지난 연말 일몰 예정이었으나 본인 거주 목적에 대한민국 국민에 한해서라는 조건을 붙여 2028년 말까지 연장됐다. 인구감소지역에 집을 사도 감면받을 수 있다. 소득 조건에 제한이 없고 신청해야 받을 수 있다. # 세부 대책에 성공 여부 달렸다 국토연구원은 2023년 ‘부동산세제의 시장 영향력과 향후 정책방향 연구’를 내놨다. 주택의 자가 또는 임차 결정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세제는 취득세로 평가됐다. 취득세와 재산세 인상은 전세가격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반면 종부세와 양도세 인상은 시차를 두고 전세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 부담 증가가 임대료를 통해 임차인에게 전가되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연구원도 2022년 종부세 등 보유세 인상이 임대차 거래에서 월세 비중을 높이고 임대료 부담을 증가시켰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취득세 비중이 높다. 취득세는 주택시장 경기에 영향을 많이 받는 취약한 재정이다. 취득세 의존도를 낮추려면 지방세인 재산세를 높일 필요가 있다. 공시가격 현실화율과 공정비율을 좀 더 현실화할 필요가 있다. 보유세를 높여도 부동산에 대한 기대수익률이 그 부담을 상쇄할 정도면 집값은 오른다. 주택 투자가 다른 투자보다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다면 주택 수요는 계속될 것이다. ‘똘똘한 한 채’ 쏠림 현상을 막기 위한 방안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러 연구기관들의 연구 결과가 축적돼 있다. 부작용을 최소화할 세부 대책이 정권의 지향점이 아닌 부동산시장 안정과 주거복지 목표를 위해 추진되는 것이 관건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 AI發 고용 쇼크 현실로… ‘사회 붕괴’ 막을 골든타임 남았나 [해시드 김서준 대표]

    AI發 고용 쇼크 현실로… ‘사회 붕괴’ 막을 골든타임 남았나 [해시드 김서준 대표]

    미국의 온라인 보험사 레모네이드가 최근 테슬라 운전자를 위한 보험 상품을 출시했다. 테슬라의 자율주행 소프트웨어인 FSD(Full Self-Driving)가 실제로 작동한 주행 구간에 한해 보험료율을 약 50% 낮추는 내용이다. 차량이 실시간으로 보내는 데이터를 통해 ‘사람이 운전한 구간’과 ‘FSD가 운전한 구간’을 구분하고 후자에 훨씬 낮은 보험료를 물리는 방식이다. 점점 무너지는 ‘모라벡의 역설’AI·로봇이 노동자 대체하는 시대단순 노동마저 로봇에 잠식 당해 이 소식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자율주행이 안전해 보인다”는 느낌 때문이 아니다. 보험사가 FSD 주행에 대해 인간 운전의 절반 수준 보험료율을 적용한다는 것은 자율주행이 “더 안전할 수도 있다”는 논쟁의 시대가 끝나고 “(기계가) 더 안전하고 더 저렴하다”는 경제적 사실의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물류 회사도 자율주행 트럭을 도입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보험료와 사고 비용, 인건비가 동시에 떨어지는 구조에서 인간 기사를 고용할 경제적 근거는 희박해진다. 오랫동안 인공지능(AI) 연구자들 사이에는 ‘모라벡의 역설’이라는 말이 있었다. 체스 챔피언을 이기는 건 컴퓨터에게 쉽지만 방 안을 걸어 다니는 것처럼 인간에게 쉬운 일은 기계에 어렵다는 뜻인데 이제 이 역설이 무너지고 있다. 의료, 법률, 회계 등 전문 분야는 물론 조리, 청소, 배송 등 단순 노동 분야에서도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고 있다. 맥킨지는 보고서에서 로봇이 노동자를 대체하는 흐름이 더디게 진행된다고 해도 2030년까지 전 세계에서 최대 3억 7500만 명이 직업을 바꿔야 할 수 있다고 예측했다. 여기서 우려되는 건 AI 시대로 전환하는 속도다. 생산성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고용은 무너지며 사람들의 지갑은 얇아진다. 그러나 생활비가 획기적으로 싸지거나 기본소득이 지급되는 사회는 훨씬 천천히 온다. 이 같은 전환의 구간을 스타트 업계에서는 ‘죽음의 계곡’이라고 부른다. 투자금은 떨어지고 매출은 아직 안 나오는 이 구간에서 많은 회사가 사라진다. AI와 로봇의 시대에는 회사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이 계곡을 건너야 한다. 헨리 포드는 노동자에게 높은 임금을 준 이유에 대해 “(그들이) 내 차를 살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만드는 사람이 사는 사람이어야 경제가 돌아간다. 그런데 AI와 로봇은 월급을 받지 않고 소비도 하지 않는다. 로봇이 물건을 만들고 배송하지만 그걸 살 사람은 돈이 없다. 공장은 돌아가는데 시장은 텅 빈 기묘한 풍경이다. 사회 지켜낼 완충장치 만들자일자리 줄어들면 소비력도 붕괴변화 충격 흡수할 정책 준비해야수백만 명의 실직자를 부양할 재정이 마련되거나 생활비가 극적으로 싸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생산성 향상의 과실이 모두에게 돌아가기 전에 일자리 감소로 인한 소비력 붕괴가 먼저 올 가능성이 크다.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균형에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전에 통과해야 할 어두운 시간이 얼마나 길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이 간극을 줄일 방법은 없을까. 완벽한 해법은 없지만 충격을 분산시키는 완충 장치들은 상상해 볼 수 있다. ① 디지털 연금 배당 2019년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데이터 배당’이라는 개념을 꺼냈다. 데이터로 돈 버는 기업들이 그 원재료를 제공한 시민들에게 일부를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테슬라의 자율주행이든 챗GPT든 결국 인간이 만든 데이터를 먹고 자랐다. 이 논의를 조금 더 발전시키면 AI 기업이 모델을 학습시킬 때마다 일종의 저작권료를 내고 그게 국민에게 분배되어야 한다는 설계가 나온다. 이는 세금이나 복지가 아니라 정당한 대가다. 노동 소득이 끊겼을 때 과거에 내가 만들어낸 데이터가 나 대신 돈을 벌어오는 셈이다. 일종의 디지털 연금이다. ② 자동화 절감 비용의 복지 기금화 빌 게이츠가 ‘로봇세’를 이야기한 이후 자동화로 인한 세수 감소를 어떻게 메울지에 대한 논의가 이어져 왔다. 자동화로 절감된 비용을 고정된 세금 대신 ‘전환보험’ 기금으로 내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류 회사가 로봇 도입으로 인건비를 40% 줄였다면 그중 일정 비율을 기금으로 넣는 식이다. 특정 직종이 자동화로 사라졌다는 게 데이터로 확인되면 해당 노동자에게 수십 년간 이전 소득의 60~70%를 자동 지급하는 방식이다. 자동차 보험이 사고 위험에 따른 피해를 보전해 주는 것처럼 전환보험은 기술 변화의 충격을 분산한다. ③ AI 초과 이윤으로 민간 소비 보장 소비가 무너지는 걸 막으려면 소득이 아니라 소비 자체를 지켜야 한다. 현금을 주는 대신 식료품, 전기, 통신, 교통, 기본 의료 등 꼭 필요한 것들을 살 수 있는 바우처를 주는 방식이다. AI와 로봇 덕분에 물건값이 떨어지는 영역부터 적용하자. 핵심은 “사람에게 돈을 준다”가 아니라 “사람이 소비자로 남아 있게 한다”는 발상의 전환이다. 자동화로 이익을 본 기업의 초과 이윤을 소비 쿠폰으로 돌리는 구조다. 돈이 아니라 장바구니를 채워 주는 것이다. ④ 공공 AI의 보급 병원비, 변호사비, 학원비, 교통비의 상당 부분은 ‘전문가 인건비’다. AI가 이를 대체하면 원가는 급락해야 한다. 그런데 그 혜택이 기업 이윤으로만 간다면 사회적 완충 효과는 없다. 국가가 직접 무료 또는 거의 무료인 공공 AI 서비스를 제공하면 어떨까. ‘AI 의사’가 1차 진료를 무료로 보고 자율주행 공공버스가 24시간 무상 운행되는 식이다. 월급이 50만원으로 줄어도 아프거나 이동하거나 배우는 데 돈이 거의 안 든다면 버틸 수 있다. 돈을 더 주는 대신 돈 쓸 일을 없애는 전략이다. ⑤ AI의 보편적 자원화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는 ‘보편적 기본 연산’이라는 개념을 내놨다. 모든 사람이 AI 컴퓨팅 자원의 일부를 받아서 쓰거나 팔 수 있다는 것인데 이를 더 구체화하면 AI는 보편적 기본 도구가 된다. 모든 시민에게 AI 비서, 코딩 도구 등을 주는 것이다. “일자리를 드립니다”가 아니라 “혼자서 뭔가를 만들 수 있는 최소한의 도구”를 쥐여 주는 것이다. 창업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완전히 맨손인 상태를 막는 안전망이다. ⑥ 일자리 나누기 아이슬란드에서 2015년부터 몇 년간 주 4일제 실험을 했다. 주당 근무 시간을 40시간에서 35~36시간으로 줄이되 월급은 그대로 뒀다. 결과는 놀라웠다. 생산성은 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오른 곳도 있었다. 스트레스와 번아웃은 확 줄었다. 지금 아이슬란드 노동자의 90% 가까이가 이 혜택을 받고 있다. 자동화 시대에 이 모델을 확장하면 어떨까. 일자리가 100개에서 50개로 줄 때 50명을 자르는 대신 100명이 절반씩 일하게 하는 것이다. 줄어든 임금의 일부는 정부가 자동화세로 메운다. 이렇게 하면 실업자가 되어 기술에서 뒤처지는 걸 막을 수 있다. 사회 전체가 AI 시대에 적응할 시간을 버는 것이다. ⑦ 사회 안정 비용의 창출 “기술 혁명은 늘 새 일자리를 만들어왔다”는 말이 이제 틀릴 수 있다. 질문을 바꿔야 한다. “어떤 직업이 생길까?” 대신 “어디에 사람을 일부러 많이 쓸 수 있을까?”이다. 교육, 돌봄, 예술, 지역 공동체 같은 영역은 효율이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사람이 많을수록 좋을 수 있다. 한 반에 학생 50명보다 15명이 낫고 노인 한 명을 10분 돌보는 것보다 1시간 함께하는 게 낫다. 생산성 대신 참여도, 정서적 가치, 사회 안정 기여도를 측정하자. 국가가 의도적으로 ‘비효율’을 사는 것이다. 노동은 더 이상 ‘가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안정시키는 비용’이 될 수 있다. 공원의 잔디를 로봇이 깎을 수 있어도 사람이 깎게 하는 선택, 그게 고용이고 사회 안정 비용이다. ⑧ 복지 쿠폰 발급 일본 후레아이 키푸에서는 1995년부터 노인을 돌보면 시간 크레딧을 준다. 이 크레딧은 나중에 내가 쓰거나 당장 멀리 사는 부모님에게 줄 수 있는 쿠폰 같은 것이다. 흥미로운 건 노인들이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보다 이 크레딧으로 일하는 사람을 더 좋아했다는 점이다. 이 모델을 발전시켜 노인 돌봄, 아이 돌봄, 동네 봉사 등 AI 대신 인간이 하면 크레딧을 주고 정부가 이 크레딧으로 공과금이나 식료품을 살 수 있게 보증하면 어떨까. 실직자들이 “나는 이제 쓸모없다”고 느끼지 않게 하면서 AI가 필요 없는 틈새에서 인간이 경제 활동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다. 소비자이자 시민 역할 계속되려면“자동화 이후에도 무너지지 않는새로운 사회로 가는 시간표 필요”기술 발전은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책의 역할은 브레이크가 아니라 충격을 흡수하고 분산시키는 완충장치다. 전면 자동화를 한꺼번에 허용하는 대신 분야별로, 지역별로, 시차를 두고 도입해야 한다. 역설적인 미래도 상상해 볼 수 있다. 기계가 만든 서비스가 표준이 되고 저렴해질수록 사람이 직접 하는 서비스는 부유층을 위한 사치품이 될 수 있다. 사람이 직접 운전하는 택시, 사람이 서빙하는 식당, 사람이 가르치는 학교가 오히려 프리미엄이 되는 세상이다. 대부분은 기계의 서비스를 받고 일부만 ‘인간 프리미엄’을 누리는 계층화된 미래다. 수제 가죽 구두가 대량 생산되는 공장 신발보다 비싼 명품 대접을 받는 것과 같다. 역사적으로 기술 혁명은 늘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왔지만 이번에는 다를 수 있다. 과거의 자동화는 육체노동을 대체하면서 사무직으로 이동할 길을 열었지만 지금은 AI가 사무직마저 대체하고 로봇공학은 남은 육체노동까지 가져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새로운 사회 계약이다. 사람이 더 이상 생산에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닌 시대로 가고 있지만 소비자이자 시민으로서의 역할은 여전히 필수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사회는 ‘일한 만큼’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 자체에 대해 최소한의 몫을 보장해야 한다. 가치의 기준을 ‘무엇을 하느냐(Doing)’에서 ‘존재한다는 것(Being)’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 전환이 늦어질수록 우리는 기술적으로는 풍요롭지만 사회적으로는 빈곤한 시대를 겪게 된다. 창고는 가득 찼는데 가게는 텅 빈 마을과도 같은 상황이다. 레모네이드의 보험 상품은 단순한 신상품이 아니다. 기계의 행동 기록이 곧 신용이 되고 가격이 되는 시대, 기술이 사람을 대체하는 새로운 경제 질서의 시대가 오고 있다. 그러나 그런 시대가 오더라도 사회는 사람 없이 돌아갈 수 없다. 우리가 설계해야 할 건 더 빠른 자동화가 아니라 자동화 이후에도 사회가 무너지지 않는 시간표다. 김서준 해시드 대표
  • 남겨라 예금, 나눠라 투자

    남겨라 예금, 나눠라 투자

    금융은 숫자와 제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예·적금, 주식, 펀드같은 금융상품의 수익률부터 카드·보험 활용법, 절세 등 재테크 전략, 주가·환율·금리의 흐름은 경제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개인의 자산 관리와 소비 판단 역시 그 영향 아래 있다. 서울신문은 새로 만든 ‘K금융 업그레이드’에서 생활 밀착형 금융 정보부터 금융사 전략과 업권 현황, 제도 변화와 시장 구조를 분석기사와 인터뷰 등으로 소개한다. 이를 통해 급변하는 금융 환경 속에서도 독자들이 시장의 흐름을 읽고 판단하는 데 필요한 맥락을 전한다. “증시는 불장이라는데, 그렇다고 예금을 다 빼서 사자니 금방 떨어질까 봐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직장인 김모(39)씨는 새해를 맞아 자산 배분을 다시 고민하고 있다. 코스피가 연일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우며 ‘꿈의 오천피’(코스피 5000)를 눈앞에 두고 있지만, 주식 비중을 한 번에 늘리기는 부담이 크다. 금리 방향도 여전히 불확실해 예금을 그대로 둘지, 일부를 옮길지 판단이 쉽지 않다. 20일 서울신문이 4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 자산관리(PB) 센터장·지점장들의 의견을 종합한 결과, 연초 재테크의 공통된 조언은 ‘한 번에 옮기지 말고, 나눠서 가져가라’로 요약된다. 예금 비중을 급격히 줄이기보다 채권을 중심으로 주식과 금, 구조화 상품(주가·지수·금리 같은 특정 조건에 따라 수익이 결정되는 금융상품)을 나눠 담는 분산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산 배분의 출발점으로는 예금과 현금성 자산을 20% 안팎으로 유지하라는 조언이 많았다. 김성영 신한은행 신한 Premier 패밀리오피스 서울센터 지점장은 “연초에는 정책과 금리 변수가 동시에 작용하면서 시장 변동성이 커질 수 있다”며 “예금과 현금은 추가 매수나 리밸런싱을 위한 대기 자금으로 들고 있는 편이 좋다”고 말했다. 채권은 연초 자산 배분의 ‘중심축’으로 꼽혔다. 오웅섭 KB국민은행 명동스타PB센터 센터장은 “금리 인하 국면에서는 이자 수익과 함께 채권 가격 상승에 따른 평가 이익도 기대할 수 있다”며 “2~5년 정도의 중단기 우량 채권이나 관련 펀드가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설명했다. 이원휴 하나은행 Club1 도곡PB센터지점 지점장도 “미국 단·중기채와 한국 중·장기채를 혼합해 분산 접근하는 전략이 연초 환경에 적합하다”고 말했다. 주식 투자에 대해서는 ‘비중은 유지하되 나눠서 접근하라’는 조언이 공통적이었다. 박태형 우리은행 TCE시그니처센터 PB지점장은 “연초에는 주가 변동성이 확대될 수 있어 정해진 기간에 나눠 투자하는 방식이 부담을 줄인다”고 말했다. PB들은 AI·반도체 등 성장 산업의 흐름은 유효하지만 조정 국면을 활용해 시차를 두고 접근하는 전략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만기 자금 운용과 관련해서도 ‘전액 이동’보다는 ‘시점 분산’ 전략이 강조됐다. 박 지점장은 “일정 비율은 CMA나 MMF 등 유동성 자산으로 두고, 나머지는 채권과 주식으로 단계적으로 재배치하는 방식이 연초 환경에 적합하다”고 말했다. 금과 구조화 상품 역시 변동성에 대비한 보조 수단으로, 금은 실질금리 하락과 지정학적 리스크에 대비한 헤지 자산으로, 구조화 상품은 비중을 제한해 활용하는 접근이 필요하다는 조언이다. 마지막으로 연초에 특히 경계해야 할 선택으로는 무리한 추격 매수와 레버리지 투자가 꼽혔다. AI 등 단일 테마에 대한 과도한 추격 매수나 고변동 레버리지·인버스 상품에 대한 장기 베팅은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 D램 급등에 밥상 물가도 ‘들썩’…생산자물가 4개월 연속 치솟아

    D램 급등에 밥상 물가도 ‘들썩’…생산자물가 4개월 연속 치솟아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급등하면서 물가 전반에 부담을 주고 있다. 이른바 ‘반도체 슈퍼 사이클’로 D램 가격이 1년 새 두 배 가까이 뛰며 산업재 가격이 상승했고, 농·축산물 가격 오름세와 겹치며 물가 상승 압력이 커지는 모습이다. 20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생산자물가지수는 121.76으로 전월보다 0.4% 올랐다. 지난해 9월 이후 넉 달 연속 상승이다. 생산자물가는 기업이 물건을 만드는 단계에서의 가격 흐름을 보여주는 지표로, 오름세가 이어지면 시차를 두고 소비자물가에도 영향을 준다. 한국은행은 공산품과 농림수산품 가격이 함께 오른 점을 이번 물가 상승의 배경으로 꼽았다. 이문희 한은 물가통계팀장은 “반도체와 1차 금속 제품 가격이 오르고, 농림수산품도 상승하면서 생산자물가가 전반적으로 높아졌다”고 설명했다.특히 메모리 반도체 가격 상승이 두드러졌다. D램 가격은 전월 대비 15.1%, 전년 동월 대비 91.2% 급등했다. 플래시메모리도 전년보다 70% 이상 올랐다. 반도체 업황이 살아나고, 인공지능(AI) 서버 투자로 수요가 늘어난 영향이 크다는 분석이다. 이 여파로 공산품 가격은 전월보다 0.4% 상승했다. 컴퓨터·전자 및 광학기기 가격이 2.3% 올랐고, 1차 금속 제품도 1.1% 상승했다. 농축산물 가격도 만만치 않다. 농산물 가격은 전월 대비 5.8%, 축산물은 1.3% 올라 농림수산품 전체 가격이 3.4% 상승했다. 사과, 감귤, 닭고기 등이 큰 폭으로 올랐다. 전기·가스·수도 요금과 서비스 업종 가격도 모두 소폭 상승했다. 수출 상품까지 포함한 총산출물가 역시 전월 대비 0.4% 올랐다. 기업 전반의 비용 부담이 커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 팀장은 “중간재·원자재 등 생산자 물가가 소비자물가에 즉각적으로 반영될지, 시차를 두고 반영될지는 기업의 경영 여건, 가격정책, 정부의 물가 안정 대책 등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며 “하락세인 국제 유가가 물가에 어떤 영향을 줄지도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 한국 경제는 우상향 성장 중인데… 환율 하락 공식은 깨졌다

    한국 경제는 우상향 성장 중인데… 환율 하락 공식은 깨졌다

    국채 발행으로 경제 선순환 기대IMF “올해 한국 성장률 1.9% 전망”현실은 유동성 과잉으로 원화 약세기준금리도 더 올릴 수 없어 난감 이재명 정부는 ‘확장재정’으로 경제를 성장시키겠다고 공언했다. 올해 예산도 전년 대비 8.1% 늘어난 727조 9000억원을 편성했다. 정부는 국채 발행을 통한 확장재정으로 경제가 성장하고 시중 금리가 오르면 화폐 가치도 상승하는 선순환을 기대했다. 하지만 현재 한국 외환시장은 이런 교과서적인 흐름에서 벗어나 지독한 원화 약세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확장재정을 통한 성장’이란 고정 변수 속에 ‘고환율’이란 복병을 마주하면서 ‘재정의 딜레마’에 빠진 모습이다. 1999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로버트 먼델 교수가 주도한 ‘먼델-플레밍 모형’에 따르면 확장재정은 국내 통화(원화) 강세(환율 하락)로 연결된다고 알려져 있다. 핵심 전제는 변동환율제와 통화량 고정이다. 정부 지출이 국내총생산(GDP) 반등으로 이어지고, 경제 펀더멘털(기초 체력)이 튼튼해져 원화 수요가 증가해 자국 통화 강세로 연결되는 흐름이다. 확장재정의 효과는 확실히 나타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19일(현지시간) 발표한 세계경제전망에서 한국의 올해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지난해 10월보다 0.1% 포인트 올린 1.9%로 제시했다. 앞서 재정경제부는 올해 2.0%를 달성할 것으로 전망했다. 1.0%를 기록한 지난해보다 2배 큰 성장 폭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론과 달랐다. 경제가 살아나는데도 원화에 대한 매력도가 여전히 낮아 원달러 환율은 현재 1500원대를 위협하고 있다. 이는 ‘통화량 고정’이라는 전제가 깨진 것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유동성 과잉과 이에 따른 물가 상승으로 원화 가치가 하락한 것으로 분석된다. 확장재정의 성장 효과보다 통화량 증가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난 것이다. 유혜미 한양대 경제금융대학 교수는 19일 “확장재정은 성장률을 끌어올려 원화 강세 요인이 될 수 있지만 효과는 시차를 두고 나타난다”면서 “초기에는 오히려 유동성 공급 효과가 먼저 작용해 원화 약세 요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통화 당국의 금리정책도 딜레마다. 최근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동결한 건 경상 수지, 금리, 환율을 모두 잡을 수 없는 ‘트릴레마’(삼중고) 상황에서 내린 고육책으로 풀이된다. GDP를 더 끌어올리려면 금리를 내려야 한다. 하지만 고환율 상황에서 금리를 내리면 금리가 더 높은 미국으로 달러가 빠져나가 환율이 더 뛰게 된다. 환율을 잡겠다고 금리를 더 올릴 수도 없는 상황이다. 유동성을 억제하면 환율은 안정을 찾겠지만 경제 성장에 역효과가 날 수 있어서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확장 재정이라도 지역사랑상품권과 같이 경기 부양 효과가 낮은 정책보다는 정부 투자나 소비 지출을 늘리는 방식이 환율 잡기에 효과적일 수 있다”면서 “재정투입으로 늘어나는 통화량보다 GDP 증가 폭이 더 커야 원화 가치를 높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 완치 한달 만에 재감염 ‘충격’…“걸렸어도 또 걸린다” 환자 속출 ‘비상’

    완치 한달 만에 재감염 ‘충격’…“걸렸어도 또 걸린다” 환자 속출 ‘비상’

    지난해 연말부터 유행이 꺾였던 인플루엔자(독감)가 소아·청소년을 중심으로 다시 늘고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특히 B형 독감이 예년보다 이르게 확산하고 있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중순 이후 감소세를 보이던 독감 유행은 7주 만인 올해 2주차(1월 4~10일)를 기점으로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다. 이 기간 의원급 의료기관의 독감 의심환자(ILI)는 외래환자 1000명당 40.9명으로, 전주(36.4명)보다 12.3% 늘었다. 이번 절기 유행 기준(9.1명)을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독감 바이러스 종류의 변화다. 호흡기 검체 분석 결과, 지난해 말 A형 36.1%, B형 0.5%였던 검출률은 올해 2주차에 A형 15.9%, B형 17.6%로 바뀌었다. B형이 A형을 앞지른 것이다. A형 독감에 걸렸더라도 B형 독감에 또 걸릴 수 있다. 두 종류 독감의 증상은 거의 같다. 감염되면 보통 1~4일의 잠복기를 거쳐 38도 이상의 발열과 함께 기침, 인후통, 두통, 근육통, 콧물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소아의 경우 구토나 설사 같은 소화기 증상이 동반되기도 한다. 통상 B형 독감은 늦겨울에서 이른 봄에 유행한다. 하지만 올해는 시기가 앞당겨졌다는 게 방역당국의 판단이다. 질병청은 “B형 독감이 예년보다 이르게 유행 양상을 보이고 있어, 감소세를 보이던 독감 감염이 다시 증가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연령별로 보면 소아·청소년을 중심으로 확산세가 두드러졌다. 올해 2주차 기준 독감 의심환자는 7~12세가 1000명당 127.2명으로 가장 많았고, 13~18세(97.2명), 1~6세(51.0명)가 뒤를 이었다. 보통 학령기 연령층을 중심으로 유행이 이어지면 시차를 두고 가정과 직장 등으로 전파된다. 질병청은 B형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이번 절기 백신 생산에 사용된 바이러스(백신주)와 매우 유사해 예방접종 효과가 있고, 치료제 내성에 영향을 주는 변이는 없는 것으로 확인했다며 예방접종을 권고했다. 임승관 질병청장은 “아직 인플루엔자 예방접종을 받지 않은 65세 이상 어르신과 어린이, 임신부 등 고위험군은 지금이라도 접종을 받아달라”며 “손 씻기, 기침할 때 옷소매로 코와 입 가리기, 다중밀집 밀폐 공간 마스크 착용, 실내 환기 등 호흡기 감염병 예방수칙을 지켜야 한다”고 당부했다.
  • 신미숙 경기도의원, 경기도 학교 공간 정책 전환의 시작…연구용역 최종보고회 참석

    신미숙 경기도의원, 경기도 학교 공간 정책 전환의 시작…연구용역 최종보고회 참석

    경기도의회 교육기획위원회 신미숙 의원(더불어민주당, 화성4)은 15일(목), ‘지방교육자치 실현을 위한 학교 공간의 창의적 구성 및 활용에 관한 연구용역 최종보고회’에 참석해 경기도 학교 공간 정책의 구조적 개선 과제를 검토하고 경기도교육청의 적극적인 대응을 주문했다. 이번 연구용역은 신도시 지역의 과밀학급 문제와 1기 신도시·구도심의 학생 수 감소 및 폐교 등 경기도 전역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교육 현실을 진단하고 학교 신설, 증축, 재구조화, 폐교 활용 등 학교 구조 개선 과정에서 학교 공간을 어떻게 창의적으로 활용할 것인지 대안을 모색해보고자 추진되었다. 연구를 수행한 나라살림연구소 김민수 공동연구원은 보고를 통해 ▲도시 개발속도와 학교 설립 절차 간의 시차, ▲학교용지 확보 과정에서의 제도적 갈등, ▲학생수 감소에 따른 지역 쇠퇴 우려 등 교육현실이 직면한 과제를 언급하며 학교 공간 설계시 ▲퍼실리테이터 운영, ▲생애주기비용 관점에서의 투자 관리체계 도입, ▲경기도형 학교 공간 평가체계 마련을 제안했다. 신미숙 의원은 보고회에서 “경기도는 신도시의 과밀과 구도심의 인구 감소소가 동시에 진행되는 만큼 ‘학교를 짓는 문제’와 ‘학교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는 분리해서 바라볼 수 없다”며 “학교 공간은 단순한 건축이 아니라 교육과정·통학·안전·지역사회와의 연계까지 함께 고려해야할 정책 영역이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신 의원은 “이번 연구 결과를 토대로 정부 부처에 건의할 과제와 교육청이 직접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을 구분하여 우선순위를 정립하고, 관계 부서 간 협의와 검토를 거쳐 실행가능한 학교 공간 개선 과제를 단계적으로 추진할 것”을 강조했다. 한편, 이번 연구 결과는 경기도교육청의 학교 신설·증축·재구조화 사업 추진체계 개선과 학교 공간 데이터·평가 플랫폼 구축, 관련 조례 제·개정 검토를 위한 기초자료로 활용될 예정이다.
  • 몸짓에 담아낸 혁신과 클래식

    몸짓에 담아낸 혁신과 클래식

    지난해 1059개 무용작(서양·한국·대중)이 2064차례 무대를 장식했고 75만여명이 공연장을 찾았다(1월 14일 기준). 공연예술통합전산망을 통해 나타난 흐름을 보면 무용 공연은 2021년 671회, 2022년 834회, 2023년 875회, 2024년 900회로 완만한 상승선을 그리다가 지난해엔 가파르게 증가했다. 해외 인기작들을 불러오면서 관객층을 넓힌 것이 주효했다. 올해도 관객들의 눈높이를 더욱 높일 작품들이 펼쳐진다. ●양대 발레단의 레퍼토리 대결 국립발레단은 ‘백조의 호수’(4월 7~12일)로 올해의 문을 연다. 낭만 발레의 정수 ‘지젤’(10월 13~18일), 드라마 발레 ‘카멜리아 레이디’(11월 10~15일), 연말 스테디셀러 ‘호두까기인형’(12월 12~27일)까지 다채롭게 준비했다. 모두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한다. 현대 발레 두 작품을 묶은 ‘더블 빌’(5월 8~10일·서울 GS아트센터)에선 영국 로열발레단 상주안무가인 웨인 맥그리거의 ‘인프라’와 현대 발레의 상징적 레퍼토리로 꼽히는 ‘봄의 제전’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발레곡 ‘봄의 제전’(1913)은 바슬라프 니진스키(초연 안무)부터 모리스 베자르, 케네스 맥밀런, 피나 바우슈 등 당대의 안무가들이 한 번쯤 도전한 작품이다. 국립발레단은 2014년 한국 초연을 한 글렌 테틀리 버전(1974)을 공연한다. 유니버설발레단의 2026년은 ‘한국 창작발레의 역사부터 클래식 대작까지’로 정리된다. 한국 창작 발레의 상징으로 꼽히는 ‘심청’(5월 1~3일 예술의전당)이 창작 40주년을 맞아 기념 공연으로 돌아온다. 국립극장 초연 이후 꾸준히 무대에 오른 ‘심청’은 한국 고전과 서양 발레를 조화시키며 전 세계 12개국 40여개 도시에서 공연했다. 예술의전당과 공동기획으로 준비한 ‘백조의 호수’(8월 14~23일)에 이어 ‘고전발레의 교과서’로 불리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10월 2~4일)도 명단에 올렸다. 마린스키 스타일의 화려하고 정교한 연출로 130년이 지난 지금도 사랑받는 작품이다. 천재 안무가 모리스 베자르(1927~2007)의 베자르 발레 로잔(BBL)이 25년 만에 서울을 찾아 상징적 작품 ‘볼레로’, ‘불새’와 함께 아시아 초연작 ‘햄릿’(4월 23~24일 GS아트센터) 등을 선보인다. 명문 몬테카를로 발레단은 고전 발레 ‘백조의 호수’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 버전으로 국내 초연한다. 5월 16~17일 예술의전당 공연을 전후해 화성예술의전당과 대전예술의전당에서도 공연한다. ●현대무용 ‘아이콘’들의 내한 현대 무용에선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는 ‘혁신의 아이콘’들이 연이어 내한해 무용애호가들을 설레게 한다. 웨인 맥그리거는 국립발레단과 선보이는 ‘인프라’에 앞서 자신의 무용단과 ‘딥스타리아’(3월 27~28일 GS아트센터)를 공연한다. ‘웨인 맥그리거 시리즈’를 기획한 GS아트센터는 최첨단 기술을 무용, 시각예술과 결합한 ‘딥스타리아’와 함께 몸과 기계의 교감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3월 말부터 4월 초까지 운영한다. GS아트센터는 이어 조각가 코헤이 나와와 안무가 다미앵 잘레가 협업해 장르의 특징을 응축한 ‘플래닛[방랑자]’(6월 25~26일)를 올린다. 28일에는 신작 퍼포먼스도 선보일 계획이다. LG아트센터 서울은 ‘관객들이 놓쳐서는 안 될 세계 최고 수준의 작품을 시차 없이 소개한다’는 모토에 걸맞게 눈에 띄는 작품들을 세웠다. 독보적인 무용 언어를 구축해온 크리스탈 파이트가 지난해 영국 올리비에상 최우수 무용작품상을 받은 ‘어셈블리 홀’(6월 5~7일)로 첫 내한 무대를 연다. 인간의 내면, 권력과 폭력 같은 주제를 정밀한 군무로 구현했다. 지난해 한국 무용계에서 최고의 화제작으로 꼽힌 ‘해머’의 안무가 알렉산더 에크만이 ‘한여름 밤의 꿈’(6월 12~14일)을 들고 다시 방한한다. 북유럽 백야를 배경으로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축제를 현대 발레극으로 펼쳐냈다. 2015년 로열 스웨덴발레 초연 당시 건초 더미 위에서 펼쳐지는 폭발적인 군무는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며 ‘발명가이자 혁신가’라는 극찬을 받았다. 에크만은 세종문화회관·서울시발레단 초청으로 ‘선인장(Cacti)’도 올린다. 프란츠 슈베르트의 현악사중주 ‘죽음과 소녀’를 공통분모로 ‘캣티’와 크리스티안 슈푹의 ‘죽음과 소녀’(8월 15~16일 서울 국립극장 해오름극장)를 ‘더블 빌’로 묶었다. 에크만의 작품이 유머와 풍자가 어우러졌다면 슈푹의 작품은 특유의 시적인 연출과 음악의 정서가 녹아들어 있다. ●신진 안무가들의 실험적 작품도 국립현대무용단은 신진 안무가 정록이와 정재우의 ‘더블 빌: 머스탱과 개꿈’(4월 3~5일)으로 올 시즌을 시작한다. 여러 작품에서 실력을 입증해온 김보라 안무가의 ‘내가 물에서 본 것’(6월 12~14일)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관객을 만난다. 지난해 한국 초연한 윌리엄 포사이스 안무가의 ‘하나의 편평한 것, 복제된’을 이재영 안무가의 ‘메커니즘’, 정철인 안무가의 ‘비보호’와 엮어 ‘트리플 빌’(10월 2~4일)로 올린다. 두 작품 모두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무대에 오른다.
  • 환율 안 잡히자… 수입물가 6개월 연속 상승

    환율 안 잡히자… 수입물가 6개월 연속 상승

    원달러 환율이 연일 오르면서 지난달 수입물가가 6개월 연속 상승했다. 수입물가는 통상 1~3개월 시차를 두고 소비자물가에 반영되는만큼 조만간 ‘밥상물가’도 밀어올릴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행이 14일 발표한 ‘2025년 12월 수출입물가지수 및 무역지수(잠정)’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기준 수입물가지수(원화 기준 잠정치·2020년 수준 100)는 142.39로 전월(141.47)보다 0.7% 올랐다. 전년 동월 대비로도 0.3% 올랐다. 수입물가지수가 전월 대비 6개월 연속 오른 것은 2021년 5월∼10월 이후로 4년 2개월 만에 처음이다. 국제유가가 하락했지만, 환율이 상승하고 1차 금속제품 가격이 오르면서 수입물가를 끌어올렸다. 12월 두바이유 가격은 배럴당 평균 62.05달러로 전월(64.47달러) 대비 3.8% 하락했지만, 같은 기간 원달러 평균 환율은 1467.40원으로 전월(1457.77원)보다 0.7% 올랐다. 유가 하락으로 인한 물가 하락을 고환율이 상쇄한 것이다. 지난해 12월 수출물가지수(원화 기준)는 11월(139.42)보다 1.1% 오른 140.93으로 집계됐다. 역시 6개월째 오름세다. 품목별로는 컴퓨터·전자 및 광학기기(+2.7%), 1차 금속 제품(+5.3%) 등을 중심으로 공산품이 전월 대비 1.1% 상승했다. 농림수산품은 0.4% 하락했다. 이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종가 기준으로 전 거래일보다 3.8원 오른 1477.5원에 마감했다. 10거래일 연속 상승은 금융위기 이후 처음이다. 한편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광의 통화(M2) 비율이 지난해 3분기 기준 153.8%로 집계됐다. 같은 기간 경제대국 미국(71.4%)의 2배가 넘는 규모다. 정부의 ‘확장재정’ 기조로 실물경제 대비 많은 양의 원화가 시중에 풀리면서 원달러 환율 고공행진이 고착화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 경찰, 김경 긴급체포 없이 임의동행만… 강선우는 ‘뒷북 출금’

    경찰, 김경 긴급체포 없이 임의동행만… 강선우는 ‘뒷북 출금’

    ‘1억 공천 헌금 의혹’ 고발 13일 만김경 조사 3시간 30분 만에 마무리경찰 “요건대로”… 金 재소환 방침강, 압수 휴대전화 비번 제공 거부법조계 “짜고 치기… 골든타임 놓쳐” 강선우 무소속 의원을 비롯해 김경 서울시의원, 남모 전 보좌관 등 ‘공천헌금 1억원’ 의혹의 핵심 피의자들이 출국금지됐다. 경찰은 지난 11일 입국한 김 시의원을 곧바로 대면조사하는 등 수사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긴급체포 없이 임의동행으로 3시간 반만에 조사를 종료하며 또다시 ‘봐주기 수사’ 논란에 휩싸였다. 12일 경찰에 따르면, 서울경찰청 공공범죄수사대는 전날 오후 11시 10분 임의동행 방식으로 김 시의원을 불러 이날 오전 2시 45분까지 3시간 30분가량 조사를 진행했다. 김 시의원은 조사를 마친 뒤 ‘조사에서 무엇을 소명했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차량을 타고 자리를 떠났다. 경찰이 고발 13일만에 이뤄진 핵심 피의자의 첫 대면조사를 너무 일찍 끝낸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박정보 서울경찰청장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시차와 건강 등 문제로 오랫동안 조사가 가능한 상태가 아니었다”며 “배려를 하는 게 아니라 조사가 가능해야 하지 않냐”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최대한 빨리 (재소환해) 수사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아울러 박 청장은 강 의원과 김 시의원, 남 전 보좌관에 대해 출국금지 조치를 취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전날 김 시의원이 입국하자마자 휴대전화를 압수하고 자택 등 압수수색 영장에 정치자금법 위반,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죄, 청탁금지법 위반 혐의를 적시했다. 전날 강 의원은 압수수색 현장에서 자신의 아이폰 휴대전화를 제출하면서 비밀번호 제공은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에 비협조한 셈이다. 경찰은 수사 상황에 따라 구속영장 신청 등 신병 처리 여부를 검토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경찰이 전날 김 시의원을 긴급체포하지 않고 임의동행 방식으로 수사를 진행한 데 대해 ‘봐주기 수사’를 한다는 비판이 높아지고 있다. 김 시의원이 이미 ▲1억원의 뇌물을 줬다는 자수서를 제출했고 ▲텔레그램 탈퇴와 재가입을 반복하며 증거인멸 우려가 나오는데다 ▲서울시장 후보 경선을 위해 불교 신자 3000명을 입당시키려 한 의혹으로 고발당한 점 등을 고려하면 긴급체포 사유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경찰은 “강제수사에는 필요한 요건과 절차가 있고 검찰과 법무부를 거쳐야 한다”며 “(피의자가) 자진해서 입국해 조사를 받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체포를 강행하면 역고소 등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해명했다. 법조계에서도 경찰이 절차를 핑계로 ‘수사 골든타임’을 놓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검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이런 사건은 피의자들이 진술을 맞출 기회를 주면 안 되는데 수사가 늦어지며 실제로 3명의 진술이 점점 닮아가고 있다”며 “증거인멸 가능성이 높은데도 강제수사를 하지 않은 건 말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법조인 출신인 김웅 전 국민의힘 의원도 전날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 긴급체포 안 할거라고 예상했다만 설마 진짜 그럴 줄은…”이라고 비판했다.
  • 초유의 국방비 미지급 와중… 정부 ‘한은 마통’ 또 5조 썼다

    초유의 국방비 미지급 와중… 정부 ‘한은 마통’ 또 5조 썼다

    ‘국방비 미지급 사태’ 여파가 이어지는 가운데, 정부가 지난달에도 일시 자금 부족으로 한국은행에서 5조원을 빌려 쓴 것으로 나타났다. 7일 한은이 박성훈 국민의힘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달 한은에서 5조원을 일시 차입했다. 지난해 9월 14조원을 차입한 뒤 석 달 만인 12월 다시 돈을 빌린 것이다. 지난해 연간 누적으로는 164조 5000억원에 달하는 자금을 한은에서 빌려 썼다. 이는 2024년(173조원)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큰 규모다. 정부는 세입과 세출 사이 시차가 발생해 자금이 부족해지면 한은에서 잠깐 돈을 빌렸다가 되갚는 일시 대출 제도를 활용한다. 계엄·탄핵 정국으로 혼란스러웠던 지난해 상반기 88조 6000억원에 이어 대선 후인 하반기에도 75조 9000억원을 차입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에 따라 정부는 지난해 총 1580억 9000만원의 이자를 한은에 납부했다. 지난해 연간 누적 이자액 역시 2024년(2092억 8000만원)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많았다. 앞서 국방부는 지난해 연말까지 각 군과 방위사업체 등에 지급했어야 하는 총 1조 3000억원 규모의 국방비를 아직 지급하지 못한 상태로 전해졌다. 이와 관련, 재정경제부는 “정부는 12월 세입과 세출의 구조적 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해 상환 가능한 범위 내에서 필요 최소 한도로 차입하는 것”이라며 통상적인 일이라고 설명했다. 국방비 미지급 논란에 대해선 “지난해 세수 여건이 좋아져 재정 집행을 연말까지 독려하다 보니 연말 자금 집행이 증가해 지급이 지연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 초유의 국방비 미지급 와중…정부 ‘한은 마통’ 또 5조 썼다

    초유의 국방비 미지급 와중…정부 ‘한은 마통’ 또 5조 썼다

    ‘국방비 미지급 사태’ 여파가 이어지는 가운데, 정부가 지난달에도 일시 자금 부족으로 한국은행에서 5조원을 빌려 쓴 것으로 나타났다. 7일 한은이 박성훈 국민의힘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달 한은에서 5조원을 일시 차입했다. 지난해 9월 14조원을 차입한 뒤 석 달 만인 12월 다시 돈을 빌린 것이다. 지난해 연간 누적으로는 164조 5000억원에 달하는 자금을 한은에서 빌려 썼다. 이는 2024년(173조원)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큰 규모다. 정부는 세입과 세출 사이 시차가 발생해 자금이 부족해지면 한은에서 잠깐 돈을 빌렸다가 되갚는 일시 대출 제도를 활용한다. 개인이 은행에서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해 필요할 때 수시로 자금을 충당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계엄·탄핵 정국으로 혼란스러웠던 지난해 상반기 88조 6000억원에 이어 대선 후인 하반기에도 75조 9000억원을 차입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에 따라 정부는 지난해 총 1580억 9000만원의 이자를 한은에 납부했다. 지난해 연간 누적 이자액 역시 2024년(2092억 8000만원)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많았다. 박 의원은 “정부가 지난달 5조원에 달하는 ‘급전’을 빌려 쓰고도, 일부 부처 예산을 제때 집행하지 못한 것은 나라 곳간 관리의 허점을 드러낸 사례”라고 지적했다. 앞서 국방부는 지난해 연말까지 각 군과 방위사업체 등에 지급했어야 하는 총 1조 3000억원 규모의 국방비를 아직 지급하지 못한 상태로 전해졌다. 이와 관련, 재정경제부는 “정부는 12월 세입과 세출의 구조적 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해 상환 가능한 범위 내에서 필요 최소 한도로 차입하는 것”이라면서 “2023년 12월에 4조원, 2024년 같은 달에도 이미 5조원을 차입했다”며 통상적인 일이라고 설명했다. 국방비 미지급 논란에 대해선 “지난해 세수 여건이 좋아져 재정 집행을 연말까지 독려하다 보니 연말 자금 집행이 증가해 지급이 지연된 것”이라면서 “이럴 때는 1월에 순차적으로 자금 집행을 한다”고 해명했다. 연말 세출 소요가 집중돼 나타난 회계 절차상의 문제이지 재정 운영상 실수는 아니라는 것이다.
  • 우주를 떠도는 행성의 질량과 거리 측정 성공했다 [달콤한 사이언스]

    우주를 떠도는 행성의 질량과 거리 측정 성공했다 [달콤한 사이언스]

    지금까지 발견된 외계 행성은 5000개가 넘는다. 대부분 태양 같은 항성(별) 주위를 도는 행성들로, 별 없이 도는 ‘나 홀로 행성’은 스스로 빛을 내지 않아 발견하기가 매우 어렵다. 발견하더라도 떠돌이 행성이 지구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고, 얼마나 무거운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한국, 폴란드, 이스라엘, 영국, 스위스, 스웨덴, 독일, 미국, 뉴질랜드 10개국 과학자들이 모인 국제 공동 연구팀이 지상과 우주에서 동시 관측을 통해 최근 발견한 떠돌이 행성의 질량과 지구로부터 거리를 측정하는 데 성공했다고 4일 밝혔다. 이번 연구에는 중국 베이징대, 베이징 국립 천문 관측소, 저장대 고등 물리학 연구소, 천문학 연구소, 칭화대, 서호대, 한국 천문연구원, 충북대,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 폴란드 바르샤바대, 이스라엘 바이츠만 과학 연구소, 영국 케임브리지대, 워윅대, 빌라노바대, 스위스 제네바대, 스웨덴 룬드대, 독일 막스 플랑크 천문학 연구소,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하버드-스미스소니언 천체물리학 센터, 뉴질랜드 캔터베리대 소속 물리학자, 천문학자들이 참여했다. 이 연구 결과는 과학 저널 ‘사이언스’ 1월 1일 자에 실렸다. 행성은 보통 하나 이상의 별 주변을 돌고 있지만, 일부 행성은 은하계를 홀로 떠도는 것으로 알려졌다. 떠돌이 행성이나 나 홀로 행성이라고 불리는 이 천체들은 주변에 별을 발견할 수 없다. 스스로 빛을 거의 내지 않아 미세중력렌즈라는 효과를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 근거한 현상인 미세중력렌즈는 관측자와 멀리 떨어진 별 사이로 행성 같은 천체가 지나갈 때, 천체의 중력이 렌즈 역할을 해 뒤쪽 별의 빛을 휘게 하고 일시적으로 밝게 증폭시키는 현상이다. 문제는 미세중력렌즈 현상은 행성까지 거리를 명확히 파악하기 어렵고, 질량도 측정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에 연구팀은 짧은 찰나의 순간에 나타나는 미세중력렌즈 현상을 통해 새로운 떠돌이 행성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전 발견들과는 달리 여러 지상 관측소와 가이아 우주망원경을 활용해 지구와 우주에서 떠돌이 행성을 동시에 관측함으로써 거리와 질량을 밝혀냈다. 연구팀은 서로 멀리 떨어진 두 관측 지점에 빛이 도달하는 시간의 아주 미세한 차이를 통해 ‘미세중력렌즈 시차’를 측정했다. 이들은 이를 ‘유한 광원 점 렌즈 모델링’과 결합하여 행성의 질량과 위치를 밝혀냈다. 유한 광원 점 렌즈 모델링은 배경에 있는 별이 단순한 점이 아니라 크기를 가진 면적체라고 가정하고, 렌즈 역할을 하는 천체를 점으로 간주하여 분석하는 수학적 방식으로 렌즈 전체의 질량 등을 정밀하게 산출한다. 이번에 발견된 떠돌이 행성은 목성 질량의 약 22% 수준이며, 우리 은하 중심부에서 약 3000파섹 떨어진 곳에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연구팀은 이 행성의 질량이 토성과 비슷하기 때문에 작은 별이나 갈색 왜성처럼 홀로 생성된 것이 아니라 어느 행성계 내부에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한다. 질량이 작은 나 홀로 행성들은 별 주변에서 태어났으나, 인접한 행성과의 상호작용이나 불안정한 동반성의 영향과 같은 중력적 격변을 겪으며 궤도 밖으로 쫓겨났을 것이라고 연구팀은 보고 있다. 2026년 새해 처음 발표된 사이언스 논문에 대해 가빈 콜먼 영국 런던 퀸 메리대 물리·화학부 교수는 “이번 연구 결과는 행성들이 어떤 다양하고 역동적인 경로를 통해 성간 공간에서 움직이는지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콜먼 교수는 “현재까지 발견된 떠돌이 행성은 불과 몇 개에 불과하지만, 2027년 발사 예정인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낸시 그레이스 로먼 우주 망원경 프로젝트로 탐지 사례가 급증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낸시 그레이스 로먼 우주 망원경은 ‘미세중력렌즈’를 활용하며 허블 우주 망원경보다 100배 넓은 시야를 갖고 은하계에 숨어 있는 수천 개의 떠돌이 행성을 찾아낼 것으로 기대된다.
  • 언어의 고고학/김세정 [서울신문 2026 신춘문예 - 소설]

    언어의 고고학/김세정 [서울신문 2026 신춘문예 - 소설]

    학과 필수모듈인 어학 파트에서 ‘초급 그리스어’를 들을 거라고 말했을 때, 홍은 조금 놀란 듯했다. 당장 졸업 작품부터 준비해도 모자랄 세 번째 학기였다. 그리스어나 라틴어는 아무리 날고 기어도 ‘이쪽 친구들’에 비해 부족하다는 걸 잘 알지 않느냐고, 차라리 일본어를 듣는 편이 도움이 될 거라고 홍이 종용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강의실에 모인 학생들은 겨우 열 명 남짓이었다. 상대적으로 비인기 언어라 그런지 학생 수는 다른 수업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원탁으로 빙 둘러앉은 좁은 강의실에서는 쿰쿰한 곰팡이 냄새와 학생들이 흘리는 땀내가 뒤섞여 불쾌한 냄새가 났다. 교수가 학생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부르며 그리스어 학습 동기를 물었을 때, 그들 대부분은 어머니나 아버지가 그리스 계통이지만 자신은 그리스어를 전혀 할 줄 모른다는, 아마 높은 확률로 거짓말일 것임이 분명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풀어내고 있었다. 아마 수업 하나쯤은 먹고 들어가려는 심산이겠지. 사실 그런 학생들은 생각보다 흔했다. 이쪽은 어머니가 프랑스인이고, 저쪽은 할머니가 러시아인이고, 쟤는 어릴 때부터 함께 살았던 삼촌이 루마니아인이래, 하는 이야기는 너무 흔하디흔해서, 그런 일에 누군가 이의를 제기하는 것조차 우스꽝스러울 지경이었다. 곧 교수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는 강의실에서 유일하게 동양인인 내가 그리스어 수업을 들으려는 이유를 내심 궁금해하는 듯했다. 그 호기심 어린 미소에 힘입어, 그럭저럭 교수가 만족할 만한 대답을 내놓을 수도 있었다. 가령, 코흘리개 시절부터 그리스 신화에 관심이 있어 제대로 연구해 보고 싶었다거나,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에 희랍어가 등장한다는, 꽤 그럴듯한 말로 이야기의 물꼬를 틀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학습 동기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사유였고, 이들에게 그 이유ㅡ‘아오리스트의 마지막 습작을 읽기 위해서’라는 말은 절대 할 수 없을 것이다. 솔직히 그 말을 독일어로 제대로 설명할 자신도 없었다. 나는 그저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고, 그 사람이 내게 들려줬던 이야기를 생각했다. 그 사람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일생에 한 번쯤은 안티고네를 원서로 읽어 보고 싶어서요. 금발로 덮인 두피 곳곳에 희끗한 새치가 돋아난 중년의 교수가 나를 응시했다. 그러고는 턱에 난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흥미롭다는 듯 빙긋 웃더니, 다른 학생들을 둘러보면서 이 학생이 아주 ‘야심 찬 계획’(ambitionierten Plan)을 가져온 것 같다는 모호한 농담을 던졌다. 그는 말했다. 그 계획에 이르기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은 그리스 방언을 익혀야 하는지. 현대 그리스어에 대한 배경지식은 물론, 고전 그리스어의 아티카 방언, 이오니아 방언과 아이올리아 방언까지. 소포클레스나 호메로스 같은 작자들을, 화자가 사라진 언어를 읽으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지 아냐면서. 시대와 지역별로 나눈 그리스어의 기원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설명 방식은 내 어깨를 점점 짓눌렀다. 마치 모든 학생 앞에서 나의 ‘야심 찬 계획’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이 자리에서 당장 밝혀내겠다는 듯. 그의 눈빛은 이제 처음 드러냈던 조소를 넘어 약간의 경멸마저 내비치는 듯했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내가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라는 것, 그 사실에 관해서라면 이미 오래전에 들은 적이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수업에서 학습 동기를 제대로 밝혔더라면, 어쩔 수 없이 나의 ‘계조모’(Stiefgroßmutter)라고 소개해야 했을, 적어도 내가 아는 지구상의 유일한 아오리스트(Aorist)인 나의 할머니 하나코 씨로부터 말이다. * 시제(Tense)는 시간(Time)과 시상(Aspect)과 함께 작동한다. 할머니의 ‘아오리스트의 필사 노트’는 그렇게 시작된다. * 내가 그 노트를 처음 발견한 것은 라이프치히대학 문창과에서 석사 첫 학기를 보낸 직후였다.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학기 과제를 제출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초봄이었다. 많이 아프셔? 출국하기 전에도 할머니의 건강 상태는 좋지 않았다. 어제 쓰러지셨어, 라고 수화기 너머의 엄마는 말했다. 또? 엄마는 답하지 않았다. 조금 지친 목소리로 첫 학기도 보냈는데 한국에 한 번 들어와야 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아무 음악도 영화도 틀지 않은 채 맞은편의 화면을 응시했다.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노란 경로를 따라 비행기 모형이 느리게 움직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한반도 오른편에 있는 섬나라를 바라보았다. 문득 홍의 고향인 하코다테와 후추시의 거리가 얼마나 먼지 궁금했다. 엄지와 검지를 펼쳐 그 사이를 가늠해 보았다. 겨우 손톱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좁은 너비였다. 부모님은 대학에 합격한 후에야 유학에 대한 나의 의지를 인정했다. 엄마는 애초부터 내가 독일에 가는 것을 반대했다. 왜 거기까지 가서 또 글을 쓰려고 하냐고. 대체 돈은 언제 벌 셈이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굳이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찬성하지도 않았다. 아마 아버지는 내심 형과 함께 시장의 곡물 가게를 이끌어 가기를 바랐을 것이다. 독일에 오기 전까지 나는 서울로 도망간 형 대신 아버지의 쌀가게 일을 도왔다.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의 얼굴은 생각보다 밝아 보였다. 불과 삼 주 뒤에 죽음이 임박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혈색에, 당황한 사람은 오히려 나였다. 나중에 병실 복도에서 엄마에게 들은 바로는 내가 한국에 도착하기 전날부터, 할머니의 정신이 거짓말처럼 맑아졌다고 했다. 나를 보자마자, 할머니는 거친 손으로 내 뺨을 매만졌다. 밥은 잘 먹고 다니느냐고, 애가 왜 이렇게 피골이 상접해 뱃가죽이 등에 눌어붙었느냐면서. 요 몇 달 동안, 자신의 모습을 한 번도 거울에 비춰 본 적 없는 사람처럼 말했다. 나는 그런 할머니의 손길이 낯설기도 했고 멋쩍기도 했다. 할머니가 그 정도로 내게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녀가 나의 손을 잡아 침대 위에 살며시 놓았다. 나는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지 몰라 할머니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창밖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저물어 가는 햇빛이 할머니의 눈동자 속에서 반달 모양으로 일렁이면서 반짝였다. 그녀의 눈 밑에 오랜 세월 동안 자리 잡았을 것임이 분명한 푸르스름한 그림자가 비쳐 보였다. 할머니는 해외 생활은 잘 맞는지, 음식은 어떤지, 앞으로 무슨 글을 쓰고 싶은지 약간의 시차를 둔 채 차분히 물어왔다. 침묵이 찾아올 때마다 우리는 잠시 창밖을 보면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와 나누는 대화는 항상 그랬다. 할머니는 서른이 다 되도록 취업하지 않은 나의 처지를 별달리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가 나에게 묻는 것은 미래뿐이었다. 그것이 정말 나의 미래를 궁금해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나의 현재에 딱히 관심이 없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배우고자 하는 문학을 진지하게 궁금해하는 사람은 가족 중에서 할머니가 유일했다. 입원하기 전부터 종일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을 끼고 살았던 할머니였다. 그녀는 내가 유럽에서 인종차별을 겪지는 않았는지, 왜 라이프치히를 선택했는지, 독일의 문학 수업에서는 정말 그리스 신화들을 중요하게 읽는지, 평소 자신이 궁금해했던 질문들을 연이어 쏟아냈다. 나로서는 평생 장사를 하면서 살아온 외할머니와 동년배임에도 불구하고, 질문의 방향이나 밀도가 전혀 다른 할머니의 목소리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답하면서도, 가슴속에서는 그런 지적인 대화를 가족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에 묘한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독일에서 지내면서 궁금해진 것들도 많았다. 가령 일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던 할머니의 시간에 대해. 홍과 같은 나라에서 나고 자랐으나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그녀의 발자국-그 삶의 궤적에 대해. 그러고 보니 너 마침 잘 왔다. 한참 동안 질문을 쏟아내던 할머니는 나를 보더니 갑자기 생각난 것이 있다고, 혹시 집에서 노트 한 권을 가져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노트요? 희랍어 노트 말이야. 요즘에도 그리스어를 공부하고 계시냐고, 내가 깜짝 놀라 묻자, 할머니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일생에 한 번쯤은 안티고네를 원서로 읽어 봐야 하지 않겠니. 나는 조금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옆에 앉아 있던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엄마는 이미 이런 상황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는지 어서 갔다 오라는 듯 문을 향해 조용히 턱짓했다. 나는 외투를 챙기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생긴 노트인데요? 아오리스트. 네? 표지에 아오리스트의 필사 노트라고 적혀 있어. 처음 들어 보는 단어였다. 내가 반사적으로 아오리스트가 무엇이냐고 묻자, 할머니는 답답하다는 듯 외쳤다. 왜 이리 군말이 많아. 일단 가져와. 그러면 다 설명해 주겠다고, 할머니는 힘도 없으면서 내 엉덩이를 팡팡 내려치고는 지갑에서 오만 원을 꺼냈다. 갔다 오면서 밥도 먹고 와. * 아오리스트(Aorist)는 무정시제이다. 아오리스트로 포착된 사건은 완결적으로 제시되며, 문맥에 따라 과거에만 묶이지 않고 다양한 시간으로 퍼져 나간다. α -(아니다) όριστος(규정된, 한정된)는 정해지지 않은(αόριστος) 불확정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όριστος는 ὅρος(경계)에 맞닿아 있다. ‘무정’은 ‘부정’(不定)일 수도 있고 ‘미정’(未定)일 수도 있다. ‘부정’(不定)과 ‘부정’(否定)을 착각해서는 안 된다. 구별되어야 한다. * 사실 할머니의 일생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 할머니를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였고, 그때 우리는 구포시장 근처에 있는 고급 중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당시는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 지도 겨우 한 달밖에 안 된 시기여서, 나는 그 모든 상황이 이상하고 낯설기만 했다. 할머니는 외할머니와 같은 나이인데도 열 살은 더 많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와 부드러운 말투 때문인지 외할머니에게선 느낄 수 없던 우아한 기품이 느껴졌다. 할머니의 첫인상은 내게 꽤나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건 그날, 내가 절반쯤 남겨 버린 짜장면을 할머니가 자신 앞으로 가져가 거침없이 먹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이미 간단한 저녁 식사를 하고 와 배가 부른 상태였다. 조금 전부터 할머니가 내 그릇을 유심히 지켜보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긴 했지만, 갑자기 그릇을 가져가 처음 보는 아이가 남긴 잔반을 거리낌 없이 먹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네가 입이 짧은 모양이구나. 할머니가 조용히 입을 닦으면서 말했다. 내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부모님을 바라보자, 아버지가 아무리 그래도 잔반을 드시냐고, 아직 출출하시면 한 그릇을 더 시켜 드리겠다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한 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됐다. 그냥 딱 한 입 정도만 더 먹고 싶었어. 그리고 할미가 손주가 남긴 음식을 먹는다는데. 그깟 잔반이 뭐가 대수냐. 할머니가 반대편 손으로 냅킨을 꺼내 들며 덧붙였다. 이제 가족인데. 당시, 나는 그런 할머니의 행동에 내심 감동을 받았다. 물론 그것이 완벽하게 의도된 행동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할머니는 아마 아버지의 남동생 내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것이다. 그 여자가 나이가 어린 엄마를 가족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을. 그런 분위기를 내심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강렬한 첫 만남에도 불구하고 나와 할머니 사이의 감정적 거리는 꽤나 오랫동안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할머니는 구포동에 있는 오래된 주공아파트 단지에 홀로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마치 분기 보고서를 쓰듯, 의무적으로 식재료를 잔뜩 사서 할머니를 방문했고, 그럴 때마다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을 것이라는 의례적인 감사 인사를 건넸다. 내가 할머니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은 그때가 전부였다. 하지만 정작 할머니와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나는 그 어색한 시간을 견디기 위해 괜히 할머니의 방안을 둘러보곤 했다. 안방의 벽에는 그 흔한 가족사진 한 장조차 붙어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런 시간들 속에서 할머니를 조금씩 알게 됐다.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를 엿들으면서-이제 돈 쓰는 법도 좀 배우세요. 평생 고된 일만 하시고. 저희가 하지 말라고 해도 식당 일에, 식모 생활에… 몸 쓰는 일만 하셨잖아요-그녀의 성격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두 아들이 용돈을 줘도 일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 그렇게 번 돈의 대부분을 저금하는 사람. 남편의 병수발을 들고, 두 아들이 먹을 반찬을 만드는 데 평생을 보낸 사람. 그러나 정작 두 아들은 일본식 반찬을 학교에 가져가는 것을 부끄러워해서 집에 두고 가고, 먼저 간 남편은 자신을 호적에 올리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사람. 일생을 거부당한 사람. 그래서 누구보다 상처받은 사람이 할머니였다. 그래서 가끔 아버지가 못마땅했다. 한 시간이 지나 정해진 칭찬의 레퍼토리가 모두 소진되면, 마치 알람 시계라도 설정해 놓은 사람처럼 이제 그만 가 봐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아버지를 보고 있자면, 할머니의 기만당한 삶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도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가장 가까이서 보고 들었을 텐데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쏜살같이 일어나 집을 나서려는 모습을 바라볼 때면 마치 아버지의 진심을, 아직 오지 않은 불편한 미래를 보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어머니 인생도 굴곡이 많았지. 아버지는 종종 제사를 지낼 때도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할머니가 친모가 아니라 계모라는 사실, 친모는 아버지를 낳은 지 이 년도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그때 들었다. 구포동 할머니는 1928년에 도쿄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어릴 때 부모를 따라 조선으로 넘어와 구포에 정착했다고. 열여섯 살이 되던 해, 조선인 남자와 눈이 맞아 결혼했지만, 불과 일 년 만에 병에 걸린 남편과 사별했다고 했다. 일본인 송환 때 돌아가지 않으신 걸 보면 아는 친척도 없으셨던 모양이야. 우리한테는 아들을 조선에서 키우고 싶어서 그랬다고 하셨지만. 하나밖에 없던 아들은 전쟁 중에 죽었다고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스물세 살 때 할아버지를 만난 거라고 아버지는 덧붙였다. 아버지 바람기가 보통이 아니니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지. 제사상에 할아버지의 영정을 놓을 때마다 아버지는 그 시절이 떠오르는 듯했다. 하지만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구포동 할머니를 들이기 전까지 집안에 몇 명이 거쳐 갔는지. 다들 하나 같이 화장이 진한 술집 여자들이었다고 했다. 구포동 할머니는 어린 아버지가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은 유일한 여자였다. 다른 여인들처럼 분 냄새를 풍기지도 않았고,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정신이 산만한 아버지를 따끔하게 혼냈다고. 그래서 아버지는 이 사람이 아니면 싫다고 했다. 다른 여자들은 싫다고. 어머니로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어린 아버지의 고집에, 할머니는 얼마 가지 않아 쌀가게 사모님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어머니도 참 박하게 사셨지. 같이 시장에 가면 사람들이 수군거리지를 않나. 그때만 해도 말을 좀 어눌하게 하셨으니. 대놓고 쪽발이라고 부르는 못된 인간들도 많았어. 나나 동생도 사춘기 때는 참 못됐지. 길가에서 친구들이랑 걷다 어머니를 만나면 일부러 못 본 척하고 피해 다녔으니. 어머니도 숨통 트일 때라곤 가끔 일본인 친구들 만나러 가는 게 전부셨을 거야. 거기 모임 이름이 뭐랬더라, 부영회였나? 나중에 검색해 보고서야 나는 그 모임의 이름이 ‘부용회’(芙蓉會)라는 걸 알게 됐다. 아버지는 자신의 생떼로 별난 할아버지 곁에서 평생을 살아야 했던 할머니의 삶을, 할아버지의 권유로 이른 나이에 아이를 세 번이나 유산해야 했던 그녀의 인생을 얼마간 가엾게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아버지는 할머니에 대해, 하나코라는 인간에 대해 그 이상의 의미를 느끼지는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에게 할머니란 그저 어머니, 지극히 언어적인 의미로서의 ‘어머니’일 뿐이었다. * 무정시제 연습 55 지배하다 현재 시제 : 지배하고 있다 과거 시제 : 과거에 지배를 했고 그 일은 그때 완결되었다 완료 시제 : 과거에 지배를 했고, 현재에도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 무정 시제 : 과거에 지배를 했지만 그 일은 그때 완결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무정 시제 연습 178 잃어버리다 현재 시제 : 잃어버리고 있다 과거 시제 : 과거에 잃어버렸고 그 일은 그때 완결되었다 완료 시제 : 과거에 잃어버렸고, 현재에도 여전히 잃어버리고 있다 무정 시제 : 나는 과거에 잃어버렸으나, 그 일은 그때 완결되었고, 지금도 잃어버리고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나는… 과거에 아이를 잃었으나, 그 일은 그때 한 번으로 완결되었고 지금도 잃고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만 지속되거나 반복되는 일이 아니기에 이것은 미완료가 아니다. 과거에 발생한 그 일이 현재에 하나의 상태로 고정돼 있다고 말할 수 없기에 완료도 아니다. 나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알 수 없기 때문에 잊지 않는다. 영원히 재현할 수 없다. 늘 불완전한 중얼거림으로 남아 있다. 이 모든 것이 그 死語(사어)로부터 비롯되었다. * 홍과 만난 것은 베를린에서 어학원을 다니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어학원 친구의 소개로 시내에 있는 한식집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홍은 내가 살고 있던 사설 기숙사 근처에 살고 있었다. 한 번 외식을 할 때마다 잔고가 추락하는 독일의 미친 물가 덕에, 우리는 제법 큰 공용주방이 있는 나의 기숙사에서 함께 요리를 하면서 가까워졌다. 홍이나 나나 독일의 행정은 지긋지긋해했지만, 맥주만은 사랑했다. 홍의 아버지가 외교관이라는 것, 일본에서 태어나 하코다테에서 초등학교에 다녔다는 것, 일본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그때 들었다. 솔직히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얼마간 비참해지기도 했다. 그건 아마 잦은 변화 속에서도 자상함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홍의 아버지에 대한 인상이 나의 친부에 대한 의문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친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친가와도 교류가 없었다. 친부는 고등학교 때까지 복싱선수로 활동하다 부상을 당한 뒤부터 구포시장의 도축업자로 일했다고 들었다. 내가 다섯 살 때, 심장병으로 죽은 그는 나에게 자랑할 만한 번듯한 직업조차 남기지 않았다. 고집불통에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인간. 아들보다는 딸을 원해 내 이름을 중성적으로 지어버려, 늘 사람들에게 나는 남자라고 해명하게 만든 사람. 그것이 내가 엄마에게 들은 친부에 대한 전부였다. 어릴 때는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괜히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우리 아버지는 지금 해외에 계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들을 읊어 놓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러지 않았다. 엄마가 재혼한 뒤부터는 나에게도 번듯한 아버지가 생겼으니까. 나는 새아버지를 친아버지처럼 이야기했다. 아버지가 곡물 사업을 하고 있다는 모호한 말로 사람들의 상상력을 은근히 조장했다. 친구들과 격투기 시합을 볼 때면 우리 아버지도 복싱을 했었다고 말했고, 식당에서 시킨 소고기가 생각보다 적어 보일 때는 아버지가 축산업을 해서 아는데, 라는 말로 운을 뗐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렇지 않았다. 오류는 있었을지언정 틀린 말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너희 할머니도 일본에서 태어났다고 하시지 않았어? 언젠가 홍이 그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물론 홍은 그 할머니가 혈연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나는 언젠가 그 말을 하려 했다. 때가 되면 홍의 머릿속에서 파편적으로 떠다닐 나의 가족들을 구분 지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일본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 일본인이셔. 술에 취한 그날에도 그랬다. 나도 모르게 말을 내뱉고서야 아차 싶었지만, 말을 고치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야. 그럼 너, 어떻게 보면 일본인 혼혈인 거네? 나에게 친근감을 느끼는 듯한 그 미소가 좋았다. 그 미소가 나도 모르게 거짓을 사실처럼, 허구를 진실처럼 이야기하게 만들었다. 그런가? 나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근데 부모님도 아니고 기껏해야 할머닌데…. 얘 좀 봐. 21세기에 무슨 그런 시대착오적인 발언이야. 피곤함에 지쳐 있던 홍의 눈빛이 갑자기 선명해졌다. 됐고. 할머니 이야기 좀 더 해 봐. 혹시 자세히 말해 줄 수 있어? 그즈음 홍은 소논문을 위해 일본 여성들의 이주사를 정리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해명하는 일을 포기했다. 구포동 할머니가 도쿄도 후추시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오랫동안 부용회라는 재한일본인 처들의 모임을 주도적으로 이끌던 사람이었다고 아버지에게 들은 그대로 말했다. 쌀가게에서 나오는 수익을 몇 번이나 빼돌려 해방 후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인들의 생계를 돕고, 홀로 이국땅에서 죽은 그들을 위해 손수 장례까지 치러 주는 바람에 할아버지에게 죽도록 맞은 적도 있다고. 그러고 보니 이번에 장례식 끝나고 할머니 노트 가져왔는데. 노트? 무슨 노트? 그게… 할머니가 좀 특이한 분이셨거든. 그리스어 공부가 취미셨어. 나는 서랍 어딘가에 있는 할머니의 노트를 가져왔다. 할머니의 장례를 치른 후에, 엄마가 버리려던 것을 겨우 말려서 들고 왔다고. 구포동 할머니가 살아 있는 동안 썼던 수십 권의 노트들 중 하나라고 했다. εἰ μέν κ᾽ αὖθι μένων Τρώων πόλιν ἀμφιμάχωμαι 만약 내가 여기 머물며 트로이의 도시를 두고 싸운다면, ὤλετο μέν μοι νόστος, ἀτὰρ κλέος ἄφθιτον ἔσται 내게서 귀향은 사라지겠지만, 불멸하는 명성을 얻게 될 것이다. 할머니는 이 부분을 반복적으로 필사하셨어, 라고 나는 말했다. ‘일리아스’의 문장이래. 왜? 그야 나도 모르지. 잠깐 줘 봐. 홍이 할머니의 노트를 들고 가더니 빠르게 뒤쪽의 페이지를 훑었다. 할머니랑은 한국어로 소통했어? 응. 정확히 말하자면 일본어가 침투해오는 부산식 한국어긴 했지만. 너희 할머니 작가였어? 무슨 소리야? 너 뒷부분 안 읽어 봤어? 그냥 필사노트라 앞쪽만 읽었는데? 홍이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다시 노트를 건넸다. 그러고는 마지막 몇 페이지를 다시 읽어 보라고 했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녀에게서 노트를 건네받았다. 그녀의 말대로 뒤페이지에는 앞쪽의 시제 연습과는 달리 꽤 긴 산문이 있었다. 모두 그리스어로 기술돼 있었다. 할머니는 그 위에 일본어로 ‘아오리스트의 마지막 습작’이라고 적어 놓았다. 나는 홍을 한 번 쳐다보고는 이국의 문자들을 멍하니 응시했다. * 모든 아오리스트는 언어의 흐름 속에서 소외된 존재다. 그러나 소외되었다는 사실이 사라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오리스트는 단일하고 완결된 사건이지만 지속성과 반복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아오리스트는 사라짐이 아니라 한순간의 존재다. 아오리스트는 불멸하는 명성을 추구한다. 끝났으나 끝나지 않은 것들을 찾아 헤매고, 떠나왔으나 정주하지도 귀향하지도 않으며, 죽었으나 결코 죽음 속에 내버려두지 않는다. 마치 나의 아이처럼. 마치 아이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나처럼. 알 수 없는 것으로 끊임없이 남겨 두려 하는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영원한 탐구가 가능해진다. 나는 무정시제이다. 나는 한 명의 아오리스트다. * 그리스어 수업은 처참한 성적표와 함께 끝났다. 홍의 말대로 나는 이미 수준급의 그리스어 지식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 틈에서 시간이 갈수록 기가 죽었고, 독일어로 작품을 써내느라 수업조차 제대로 참석하지 못한 날이 잦았다. 그리스어를 다시 공부하기로 결심한 것은 그로부터 반년 뒤였다. 졸업작품을 최종적으로 제출한 늦가을부터였다. 홍과는 그즈음을 전후로 헤어졌다. 나는 학업에 뜻이 없었고, 독일에 계속 체류할지조차 불확실한 상황이었지만, 홍은 미국에서 박사 유학을 계속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이미 이국에서의 만남과 헤어짐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사람들이었다. 그래서일까. 서로의 삶을 응원하고 깔끔하게 돌아섰던 마지막조차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처럼 느껴졌다. 한국에는 돌아가기로 결정했어? 아직 잘 모르겠어. 교수님이 졸업 작품을 출간해 보자고 하시는데. 너는 마음에 안 들지? 홍의 즉답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결말 부분을 좀 더 고치고 싶어서. 신중하게 써야지. 홍이 말했다. 너희 할머니 얘기잖아. 나는 그 말에도 잠시 주춤했다. 이번에도 홍의 대답이 곧장 돌아와서는 아니었다. ‘너희 할머니’라는 말. 마음이 잠시 흔들렸다. 일본에서 보고 싶은 게 있어. 겸사겸사 한국도 잠시 가고. 다른 계획은 있어? 그냥 친구들이나 만나겠지. 그간 미룬 성묘도 좀 가고. 홍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건 좀 궁금하네. 뭐가? 너희 할머니가 쓴 글들. 너는 마지막까지. 왜, 연구에 도움이 될 것 같아? 그간 미국행 준비로 바빴는지 홍의 얼굴이 부쩍 수척해져 있었다. 아니, 라고 말하면서 홍이 미지근하게 미소 지었다. 그건 너만 알고 있는 게 맞는 것 같아.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오래전처럼 화면 속의 경로를 응시했다. 홋카이도와 도쿄. 고료카쿠 타워와 도쿄 타워. 이제 나는 그곳으로부터 밀려나고 있었다. 오쿠니타마 신사와 유쿠라 신사로부터. 내가 한때 가깝다고 느꼈던 공간들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장소들에 대한 체감까지 사라진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 웅크려 있던 그 수많은 장소들의 생동감까지 잃고 있는지는. 언젠가 홍과 함께 하코다테시의 도심을 거닐었던 적이 있다. 홍은 유년을 보낸 그곳에 다시 가고 싶어 했고, 그해 여름, 우리는 홍의 고향인 홋카이도로 떠났다. 홍은 이곳에 올 때마다 자신이 여기서 살았는지 헷갈린다고 했다. 그 시절이 자신에게 정말로 존재했는지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고. 한때 이곳을 떠났고, 떠남에 고통을 느꼈지만, 지금도 그렇게 느끼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그런 느낌이 있다고. 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야 나는 그것이 지극히 아오리스트적인 느낌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해되지 않았던 일들을 아오리스트적 사고로 접근하니, 그 모든 일들을 아오리스트적 사건으로 남겨 둘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친모를 잃었고, 그때 그 일은 완결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잃고 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죽은 친부는 나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때 그 일은 완결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남기고 있지 않은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날,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상주인 아버지와 작은아버지의 이름 아래에는 ‘손자’라고 적힌 칸이 있었고, 그곳에 내 이름은 없었다. 아버지는 경황이 없었다고 했다. 남동생이 기입을 맡았는데 자신이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고. 그래도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않냐…. 작은아버지란 사람은 여전히 엄마와 나를 무시했다. 나는 그 장례식장 구석에서 양복을 차려입고, 서울에서 몇 년 만에 내려온 형과 마찬가지로 몇 년 만에 만난 사촌 동생이 사람들을 맞이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가족에겐 애도할 권리조차 없구나. 그런 문장이 문득 떠올랐다. 그 학기에 교수가 기말과제를 내주며 했던 말-이번 학기에는 신화적 원형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보세요-이 연이어 생각났다. 그때 느낀 박탈감은 이미 완결되었다. 그러나 그 박탈감이 아직까지 어딘가에서 지속되고 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어서…. 너는 이야기를 만들지. 그날 병원에서 할머니는 내게 말했다. 왜 그러고 싶니? 아이들의 목소리가 여전히 창밖에서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였다. 내가 가져다준 노트를 유심히 보는 할머니에게 말했다. 계속 쓰다 보면 잊을 수 있을까 싶어서요. 누구에게도 고백한 적 없는 진심이었다. 엄마에게도, 한국에서 글을 쓰던 친구들에게도, 라이프치히 학우들에게도 말하지 못한 진심. 변주하다 보면 그 이야기를 진실이라고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러자 할머니가 갑자기 나의 손을 덥석 잡아들었다. 그러지 마. 네?…. 나는 당황했다. 그런 신음에 가까운 말을 내뱉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할머니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할머니는 왜 그런 말을 했던 것일까? 그때는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할머니가 나보다 오랫동안 글을 쓴 사람이란 걸 알고 있으니까. 비록 할머니에게 나는 지극히 언어적인 차원에서의 손자에 불과했지만. 할머니의 글을 읽으면서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었다. 할머니는 왜 일본어도 한국어도 아닌 언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을까? 평생토록 자신의 삶을 부정당한 사람은 그 부정조차 부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이중부정이 삶을 긍정의 세계가 아니라 영원한 미지의 세계로, 비타협의 상태로 남겨 둔다면 어떨까? 미정도 부정도 아닌 그런 상태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고 할지라도, 그 왕복운동으로 인해 삶의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다면. 비록 할머니의 글에 신화와 문법에 대한 오독이 있을지라도, 나는 할머니가 노년에도 조화나 타협을 포기한 진정한 예술가라고 생각했다. 내가 할머니에게 완료형이 될 수 없는 시제였던 것처럼, 나에게도 예술가 하나코는 완료형이 될 수 없는 시제다. 할머니와 나는 그런 점에서 닮았다. 우리는 현재와의 연결성이 불확실한 아오리스트였다. 어쩌면 그래서 여전히 그리스어를 배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오리스트를 쓰기 위해. 아오리스트로 말하기 위해. * 나는 무덤이 되고 싶다. 한때 무정시제라는 언어체계였으나 그 야성적인 규칙에서마저 빠져나가 버린, ‘정해지지 않았다’는 규정에서조차 탈출해 버린 야성의 시간이 묻힌, 어느 범박한 무덤*이 되고 싶다. * 후추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오후였다. 미리 예약해 둔 호텔에 들러 체크인을 했다. 할머니의 노트를 넣은 백팩을 메고 바깥으로 나오니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인터넷으로 알아본 식당은 신사 근처였다. 신사 정문에서 본당까지는 꽤나 기다란 돌길이 일자로 뻗어 있다. 홍과 하코다테를 방문했을 때 들렀던 유쿠라 신사와는 확연히 다른 풍경이다.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말끔하게 도색된 유쿠라 신사의 도리이와 달리, 이곳의 석조 도리이에는 검은 이끼들의 흔적이 역력했다. 밝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다. 단지 회색빛으로 수수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을 뿐. 길을 따라 양쪽에 늘어선 나무 도리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성역의 기둥들은 차라리 무덤가에 꽂힌 묘목들에 가까워 보였다. 할머니의 소설은 이곳, 오쿠니타마 신사의 어둠 축제를 배경으로 시작된다. 주인공은 이곳을 떠났던 어린 할머니와 같은 나이인 여덟 살 소녀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이천 년의 역사를 지닌 신사로 들어선 소녀. 그러나 어째서인지 일본식도 한국식도 아닌 안티고네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의 얼굴 위로 노란 등빛이 번진다. 나는 할머니의 소설을 손에 쥔 채 그들의 맞은편에 쭈그려 앉는다. 이곳에는 빛이 없지만 저곳에는 빛이 있다. 그 빛 속에서 소녀는 부모님에게 신사의 전설을 듣는다. 대장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부인의 순산을 기원했던 이곳에는 늘 행복과 결연의 신이 사람들의 운명을 예언하고 있다고. 앞으로 우리 딸은 어떻게 살려나. 그런 물음으로 시작되는 소설은 오로지 어머니와 딸의 대화로만 이루어진다. 마치 미래를 단정 짓듯, 혹은 예언하듯 미래형의 아오리스트로 기술된 이 소설에서 할머니는 미래를 잃지 않는다. 비록 단발성과 완결성으로 끝난 사건일지라도, 아오리스트의 불확정성이 이미 완결된 운명적 사건에 대한 상상을, 그 미래에 관한 끝없는 고투를 가능하게 한다. 그 습작에서 할머니는 농사꾼이었던 남편과 다시 사별하게 된다. 그러나 일 년 만에 헤어지지는 않는다. 할머니는 그를 더욱 극진히 간호했고, 사별하게 될 남편은 무려 일 년을 더 살게 된다. 그 일 년 동안, 할머니는 그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조선어가 서툴러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분명한 목소리로 고백한다. 할머니는 소설에서도 할아버지와 결혼한다. 시장 사람들에게 쌀가게 사모님으로 불리고, 결국 이번에도 할아버지의 주사에 뺨을 맞고, 결국 이번에도 임신했던 아이를 유산한다. 그러나 유산할지언정 잃어버리지는 않는다. 할머니는 아이와 함께 육 년을 살게 된다. 아이는 여섯 살이 되던 해, 피란길에 장티푸스에 걸려 죽음을 맞이할 운명이지만, 그가 죽기 두 달 전, 할머니는 아이의 손을 잡고 고향인 후추시에 방문한다. 바로 이곳에 와서 아이와 함께 밤의 축제를, 가부키극을, ‘거대한’(μέγα) 건물과 ‘넓은’(εὐρὺ) 하늘, ‘꺼질 줄 모르는’ (ἄσβεστον) 불빛들을 지켜본다. 어느새 그들이 바라봤던 집은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하늘의 풍경도, 그들을 비추었던 불빛도 희미해진다. 시간은 아이를 잃고 하나코 씨를 잃는다. 돌길 한편에 쭈그려 앉아 그들을 바라봤던 나도 잃어서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겠지만, 반대로 무언가 분명 거대하게 남을 것이라고, 아오리스트는 말한다. 하늘을 바라봤던 사람의 심장에 단발성의 고통이 있었고, 그것은 이제 사라졌지만, 그 고통이 얼마나 넓었는지 미래의 자신은 분명 알 것이라고, 아오리스트는 말한다. 한때 이곳에서 손을 잡고 있었던 사람들을 밝혔던 불빛, 한순간의 빛과도 같은 그 시간은 이제 사라졌지만, 그 순간은 꺼지지 않을 것이고, 그 시간은 어느새 내가 될 것이며, 나는 미래에도 이곳에 있다고, 아오리스트는 말한다. *허수경, ‘꽃핀 나무 아래’(‘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사, 1992), ‘나는 비애로 가는 차 그러나 나아감을 믿는 바퀴/살아온 길이 일테면 자궁 하나/어느 범박한 무덤 하나 찾는 거라면’
  • 친명 vs 친청… ‘지도부 흔들면 내란’ 발언 두고 “사퇴하라” 신경전

    친명 vs 친청… ‘지도부 흔들면 내란’ 발언 두고 “사퇴하라” 신경전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 보궐선거에 나온 정청래 대표 측 당권파와 ‘찐명’(진짜 친이재명) 후보를 자처하는 비당권파 인사들이 30일 첫 합동토론회부터 신경전을 벌였다. 친명계인 유동철 후보는 이날 서울 여의도 민주당 중앙당사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당청 갈등이 있는 것처럼 비치게 만드는 분들이 오히려 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작심 발언했다. 그러면서 친청(친정청래)계인 이성윤 후보가 지난 23일 합동연설회에서 “지도부를 흔드는 것은 내란 세력과도 같다”고 말한 것을 겨냥해 “후보에서 사퇴하거나 적어도 상처받은 당원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에 이성윤 후보가 “지도부를 흔드는 것과 비판하는 것은 다르다”고 맞서자, 유 후보는 “최고위원 자격이 없다”고 쏘아붙였다. 과거 행적을 둘러싼 설전도 벌어졌다. 정 대표와 가까운 문정복 후보는 “이재명 대표의 체포동의안 가결이라는 아주 엄혹한 시기에 저는 연판장을 돌리면서 막았다”며 “그 당시 강득구 후보는 함께한 기억이 없다”고 했다. 이에 강 후보는 “당시에 저도 가장 앞장서서 싸웠다”며 “사실을 근거로 말해야 한다”고 받아쳤다. 정청래 지도부를 겨냥한 발언도 이어졌다. 이건태 후보는 “당청 갈등은 없다”면서도 “다만 대통령이 외교 일정을 소화할 때 다소 시차적으로 뒷받침을 못 한 엇박자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후보들은 정 대표가 재추진을 시사한 대의원·권리당원 1인 1표제 추진과 관련해선 한 목소리를 냈다. 정 대표 체제에서 조직부총장을 맡았던 문 후보는 “당직 선출시 1인 1표제는 당원주권 정당의 초석”이라고 했다. 다만 이건태 후보와 강 후보는 각각 “마치 본인들만 1인 1표제를 주장하는 것처럼 말씀하는 건 부당하다”, “의원들 중 제가 1인 1표제를 반대하는 것처럼 프레임을 만드는 분이 있다”며 불편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정 대표는 전날 유튜브 ‘새날’에서 친명 대 친청 대결 구도를 부인하며 “(최고위원 후보로 나선) 다섯 명과 다 친하다”며 유화 메시지를 냈다. 그러면서 “그들이 최고위원이 되면 정청래 당대표 체제의 최고위원들이고, 정청래 당대표 지도부”라고 했다.
  • 글로벌 IB, 내년 한국 물가 전망치 상향

    글로벌 IB, 내년 한국 물가 전망치 상향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에 사는 대학생 최준혁씨는 매일 습관처럼 집 근처 메가MGC커피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해 마신다. 하지만 얼마 전 커피 가격이 1500원에서 1700원으로 오르자 주문할 때마다 한 번 더 망설이게 됐다. 그는 “새해부터 편의점 커피 가격도 오른다는데, 갈수록 주머니 사정이 빠듯해져 걱정”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고강도 대응으로 원달러 환율이 급락했지만, 고환율의 여파가 시차를 두고 물가에 반영돼 내년 소비자물가가 더 큰 폭으로 상승할 것이라는 전망이 잇따르고 있다. 앞서 지난 24일 외환당국이 강력한 구두개입과 환율 안정을 위한 세제 대책을 쏟아내자 환율은 1440원대 중반까지 낙폭을 벌렸다. 25일 새벽 2시 원달러 환율은 전장 서울환시(서울 외환시장) 종가 대비 37.90원 하락한 1445.70원에 마감했다. 야간 거래까지 포함하면 지난 4월 4일의 32.90원 이후 하루 최대 낙폭이다. 하지만 글로벌 투자은행(IB)을 비롯한 국내외 주요 기관들은 내년 우리나라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잇달아 상향 조정했다. 블룸버그 집계에 따르면 이달 중순 기준 주요 기관 37곳이 제시한 내년 한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 중간값은 2.0%였다. 지난달 말 1.9%에서 보름 만에 0.1% 포인트 높아졌다. 14곳이 전망치를 상향한 반면, 하향 조정한 곳은 3곳에 그쳤다. 뱅크오브아메리카와 크레디 아그리콜은 각각 1.8%에서 2.1%로 전망치를 0.3% 포인트 올렸다. 노무라(1.9→2.1%), BNP파리바(2.0→2.1%), JP모건체이스(1.3→1.7%)도 상향 조정했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글로벌은 1.9%에서 2.0%로, 피치는 2.0%에서 2.2%로 변경했다. JP모건체이스는 이달 9일 보고서에서 “국제 유가 하락으로 물가 상승세가 잠시 둔화될 수는 있지만, 그 효과는 원화 가치 하락이 뒤늦게 물가에 미치는 영향으로 상쇄될 가능성이 크다”며 “원화 약세가 더 이어질 경우 수입 물가가 오르면서 전체 물가를 다시 끌어올릴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 같은 전망은 지난달 27일 한국은행의 수정 경제전망과도 궤를 같이한다. 한은은 당시 환율 상승과 내수 회복세를 근거로 내년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1.9%에서 2.1%로 올렸다. 환율이 내년까지 1470원 안팎의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경우 물가 상승률이 2.3%에 이를 수 있다는 판단도 내놨다.
  • 글로벌 투자은행(IB)들 내년 韓소비자물가 전망치 잇단 상향

    글로벌 투자은행(IB)들 내년 韓소비자물가 전망치 잇단 상향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에 사는 대학생 최준혁씨는 매일 습관처럼 집 근처 메가MGC커피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해 마신다. 하지만 얼마 전 커피 가격이 1500원에서 1700원으로 오르자 주문할 때마다 한 번 더 망설이게 됐다. 그는 “새해부터 편의점 커피 가격도 오른다는데, 갈수록 주머니 사정이 빠듯해져 걱정”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고강도 대응으로 원달러 환율이 급락했지만, 고환율의 여파가 시차를 두고 물가에 반영돼 내년 소비자물가가 더 큰 폭으로 상승할 것이라는 전망이 잇따르고 있다. 앞서 지난 24일 외환당국이 강력한 구두개입과 환율 안정을 위한 세제 대책을 쏟아내자 환율은 1440원대 중반까지 낙폭을 벌렸다. 25일 새벽 2시 원달러 환율은 전장 서울환시(서울 외환시장) 종가 대비 37.90원 하락한 1445.70원에 마감했다. 야간 거래까지 포함하면 지난 4월 4일의 32.90원 이후 하루 최대 낙폭이다. 하지만 글로벌 투자은행(IB)을 비롯한 국내외 주요 기관들은 내년 우리나라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잇달아 상향 조정했다. 블룸버그 집계에 따르면 이달 중순 기준 주요 기관 37곳이 제시한 내년 한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 중간값은 2.0%였다. 지난달 말 1.9%에서 보름 만에 0.1% 포인트 높아졌다. 14곳이 전망치를 상향한 반면, 하향 조정한 곳은 3곳에 그쳤다. 뱅크오브아메리카와 크레디 아그리콜은 각각 1.8%에서 2.1%로 전망치를 0.3% 포인트 올렸다. 노무라(1.9→2.1%), BNP파리바(2.0→2.1%), JP모건체이스(1.3→1.7%)도 상향 조정했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글로벌은 1.9%에서 2.0%로, 피치는 2.0%에서 2.2%로 변경했다. JP모건체이스는 이달 9일 보고서에서 “국제 유가 하락으로 물가 상승세가 잠시 둔화할 수는 있지만, 그 효과는 원화 가치 하락이 뒤늦게 물가에 미치는 영향으로 상쇄될 가능성이 크다”며 “원화 약세가 더 이어질 경우 수입 물가가 오르면서 전체 물가를 다시 끌어올릴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 같은 전망은 지난달 27일 한국은행의 수정 경제전망과도 궤를 같이한다. 한은은 당시 환율 상승과 내수 회복세를 근거로 내년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1.9%에서 2.1%로 올렸다. 환율이 내년까지 1470원 안팎의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경우 물가 상승률이 2.3%에 이를 수 있다는 판단도 내놨다.
  • 해외투자 열풍에, 증권사 수수료 2兆 ‘역대 최대’…개미 절반은 손실

    해외투자 열풍에, 증권사 수수료 2兆 ‘역대 최대’…개미 절반은 손실

    금감원, 해외 투자 실태 ‘현장 검사’ 전환관련 이벤트·광고 중단 등 개선과제 추진증권업계가 해외주식 영업을 공격적으로 확대하면서 올해 해외주식 위탁매매 수수료 수익이 2조원 수준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개인투자자 해외주식 계좌의 절반가량은 손실 상태에 머물렀다. 19일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해외 투자 실태 점검 중간 결과에 따르면, 올해 1~11월 해외 주식 거래 상위 12개사의 해외주식 위탁매매 수수료 수익은 1조 9505억원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연간 수익(1조 2458억원)을 이미 넘어선 수치로, 2023년 연간 수익(5810억원)의 3배를 웃돈다. 같은 기간 환전 수수료 수익도 4526억원으로 전년(2946억원) 대비 급증했다. 반면 개인투자자의 성과는 부진했다. 올해 8월 말 기준 해외주식 계좌 중 49.3%가 손실 계좌로 나타났다. 계좌당 이익도 50만원에 그쳐 전년(420만원) 대비 크게 줄었다. 해외 파생상품 투자에서도 개인투자자는 올해 1~10월 3735억원 손실을 기록하는 등 최근 5년간 매년 3000억~4000억원대 손실을 보고 있다. 금감원은 증권사들이 해외투자 고객 유치와 시장점유율 확대를 위해 거래금액에 비례한 현금 지급, 수수료 감면, 매수 지원금 제공 등 과도한 이벤트를 경쟁적으로 실시해왔다고 지적했다. 일부 증권사는 영업점과 본점 핵심성과지표(KPI)에 해외주식 실적을 별도로 반영하며 해외투자 영업을 적극 독려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환율 변동 리스크, 시차로 인한 권리 지급 지연, 국가별 과세 체계 차이 등 해외투자 특유의 위험성에 대한 설명은 국내 투자에 비해 충분하지 않았다는 평가다. 대부분 최초 계좌 개설 시에만 위험을 고지하고, 일부 증권사만 고객에게 상시 안내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이에 금감원은 실태점검 결과에 따라 즉시 현장 검사로 전환하고, 이후 대상 회사를 확대해 순차적으로 검사를 실시할 예정이다. 또 오는 3월까지 해외투자 관련 신규 현금성 이벤트나 광고를 중단하고, 증권사별로 해외투자 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에 대한 투자자 안내를 강화하는 등 개선과제를 즉시 추진하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 [씨줄날줄] 배추 국장, 빵 서기관, 우유 사무관

    [씨줄날줄] 배추 국장, 빵 서기관, 우유 사무관

    이명박 정부 출범 첫해인 2008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4.7%였다. 글로벌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유동성이 공급된 때였다. 그 이후 2%대로 내려온 소비자물가는 2011년 4.0%로 다시 치솟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2012년 첫 국무회의에서 품목별 담당자를 정한 물가관리실명제를 지시했다. 정부의 작위적인 물가관리 실패를 풍자할 때마다 소환되는 ‘배추 국장’의 탄생 배경이다. 52개 생활물가를 묶은 ‘MB물가지수’도 나왔다. ‘배추 국장’이 나온 이후에도 배추값은 요동쳤다. 배추는 지역을 바꿔 사계절 재배된다. 재배 기간이 2~3개월이라 기상 여건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금(金)배추’를 막으려면 생산과 유통체계 관리가 중요하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2022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5.1%가 되자 물가책임관이 이듬해 부활했다. 신선 농축산물은 물론 빵·우유·라면 등 9개 가공식품 담당자도 지정됐다. 빵 서기관, 우유·라면 사무관 등이 생겼다. 전담자가 지정된 농식품이 28개였다. 물가책임관이 돌아온다. 기획재정부는 지난 11일 신년 업무보고에서 부처별 차관급 물가안정책임관을 두는 물가관리 대책을 발표했다. 소비자물가를 구성하는 458개 전 품목이 대상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어제 ‘물가안정목표 운영상황 점검’ 설명회에서 “(원달러) 환율이 물가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말했다. 한은은 환율이 10% 오르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0.3% 포인트 오른다고 추산한다. 환율은 79일째 1400원대다. 환율 상승은 1~3개월의 시차를 두고 국내 물가에 영향을 미친다. 물가 상승은 선택지가 제한되는 서민들에게 더 가혹하다. 정부가 물가를 잡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뒷받침돼야 한다. 국내 투자 유인책, 외부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내수 중심 경제 구축 등이 절실하다. 그래야 물가책임관도 일할 맛이 나지 않겠나.
  • [길섶에서] 또 다른 피해자

    [길섶에서] 또 다른 피해자

    이른바 보이스피싱 전화를 처음 받은 것은 30년도 넘은 옛날이었다. 다짜고짜 무슨 범죄에 연루됐다고 겁을 주기 시작했던 것 같다. 휴대전화가 보편화되지 않은 시절이다. 신문사 사회부에 전화를 걸어 사건기자를 위협했으니 어설프기 이를 데 없었다. 장난기가 발동해 “발신지 추적 중”이라고 했더니 뭔가 욕설을 하며 끊었던 기억이 난다. 엊그제는 아침에 전화가 걸려 왔다. 오전 8시 30분이니 일 때문에 연락하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목소리는 곧바로 내 이름을 대며 본인이 맞느냐고 다그쳤다. 그러면서 자신이 어느 지검의 누구 수사관이라 했으니 보이스피싱의 전형이었다. 기분이 상해 “딴 데 가서 알아보라”고 했더니 전화를 끊는다. 동남아 범죄단지가 다시 살아나고 있구나 싶었다. 그런데 폰 너머 여성의 목소리는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문제가 됐던 그곳 주변이라면 우리와 두 시간 시차가 있다. 새벽 6시 30분에 사기전화를 강요당하고 있다는 뜻인가. 혹시 감금된 것 아니냐고, 도와줄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했어야 마땅했다. 한동안 돈을 뜯긴 것 이상으로 답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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