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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박지원의 ‘열녀전’ /정일남 시인

    [기고] 박지원의 ‘열녀전’ /정일남 시인

    조선시대 신분제의 질곡에서 신음한 계급은 노비들뿐만이 아니다. 서자(庶子)들도 같은 맥락에서 설움을 받고 살았다. 천재적인 문재(文才)를 소유하고도 어머니의 신분이 후처라는 이유로 자식은 출세 길이 막혀 벼슬에 오르지 못했다. 조선의 신분제는 근대로 가는 길을 가로막았다. 얼마나 많은 인재가 여기에 묶여 이름도 없이 사라졌던가. 이런 신분제도에 의해 조선사회의 인재들은 사회진출이 균등하지 못했다. ‘다시 시집간 여자의 자손에게는 벼슬을 주지 마라.’는 법이 있다. 조선시대 양반들을 위해서 만든 악법이었다. 그래서 서자는 아무리 두뇌가 영리해도 벼슬길에 오를 수가 없었다. 이런 제도에서 살아온 여인들의 한을 어찌 다 헤아릴 수가 있으랴. 한국 여인들의 한이 독특한 양상을 띠게 된 원인이 여기에 기인했다. 자식의 출세를 위해서 과부로 살아야 했던 여인들의 괴로움은 천형과도 같았다. 연암 박지원이 쓴 ‘열녀전’의 줄거리는 이렇다. 열녀가 된 어머니가 어느 날 동전 한닢을 꺼내 아들에게 보인다. 차마 꺼내기 어려운 말을 아들 앞에서 호소한다. “이 돈에 윤곽이 있느냐?” “없습니다.”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아들에게 말했다. “이것이 바로 네 어미의 죽음을 참게 한 부적이다. 내가 이 동전을 십년이나 문질러서 글자가 다 닳아진 것이란다. 어찌 과부라 해서 정욕이 없겠느냐.” 결국, 어머니는 십년 동안을 동전을 문지르며 정욕을 견디어 냈다는 이야기다. 너무도 감동적이고 슬픈 이야기다. 아들의 출세를 위해 재혼하지 않고 동전만 굴린 십년의 세월을 상상해 보자. 어머니는 그런 희생으로 오직 아들만을 생각했다. 비록 과부로 살더라도 아들이 출세해서 벼슬에 오르기를 갈망했다. “가물가물한 등잔불이 내 그림자를 조롱하는 것처럼 고독한 밤에는 새벽도 더디 오더구나. 창가에 비치는 달이 흰빛을 흘리는 밤, 나뭇잎 떨어지는 때나 외기러기 하늘을 울며 갈 때나, 닭 우는 소리도 없고 어린 종년이 코를 골 때, 내가 누구에게 고충을 호소하겠느냐. 그때마다 이 동전을 꺼내 매만지고 방바닥에 굴렸다.” 이 기막힌 말을 듣고 아들과 어머니는 서로 부둥켜안고 한없이 울었다. 오늘의 여인들이여. 우리 어머니들이 겪었던 고충을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한 번이라도 생각을 해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불륜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사회가 오늘의 사회가 되었다. 옛날로 돌아가자는 얘기는 아니다. 불륜의 사회에서, 향락의 사회에서, 사치와 방종의 사회에서 우리는 로마의 멸망을 읽었다. 성의 개방사회를 그릇된 사회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개방사회라고 해서 분별력을 잃어서야 되겠는가. 연암 박지원은 말한다. ‘동전을 십년 동안 굴린 과부의 고백을 통하여 죽는 것보다 과부가 되어 수절하는 것이 더 어렵다.’라고 주장한다. 이치에 맞는 얘기다. 박지원은 이 작품을 통해서 조선사회의 모순된 제도에 의해 고통받았던 여인들의 한을 세상에 고발했다. 하지만, 오늘의 사회와 같은 불륜의 사회를 연암이 바란 것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열녀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 농업인재양성 매진하는 장태평 前 농림수산식품부장관

    농업인재양성 매진하는 장태평 前 농림수산식품부장관

    ‘땅에 자랐어도/ 하늘을 닮은 수박/ 둥글고/ 시원하고/ 가슴 가득 붉은 노을을 지녔다.’ 그가 2001년 출간한 시집 ‘강물은 바람 따라 길을 바꾸지 않는다’에 실린 98편 중 스스로 가장 아끼는 작품이다. 제목은 ‘수박’. 크고(太) 평평하다(平)는 본인의 이름을 연상시키기 때문은 혹시 아닐까. 지난 3일 장태평(62) 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을 만났다. 서울 서초동에 새로 낸 그의 사무실에서였다. 장관 재직시절(2008년 8월~2010년 8월) 가장 역점을 두었던 농협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가 임박해서인지 표정이 한결 밝아보였다(실제로 그를 만난 다음날인 4일 농협법 개정안이 국회 상임위를 통과했다<서울신문 3월 5일자 1면 보도>). 장 전 장관은 다음 .달 1일 ‘더푸른미래재단’의 이사장으로 취임한다. 이곳을 통해 ‘미래농수산실천포럼’을 운영, 우수 농업인재를 양성하겠다는 계획이다. 키워드1:“한국에 ‘마쓰시타 정경숙’ 필요한 이유를 아나?” →우선 재단 설립을 축하드린다. 한국판 ‘마쓰시타(松下) 정경숙’을 만든다고 하셨는데. -마쓰시타 정경숙은 일본의 미래 정치인 양성 프로그램이다. 농업과 농촌의 ‘슈퍼(Super) 인재’, ‘명품 리더’를 키우는 것이다. 꿈나무 농업인을 잘 교육해 농촌의 경영혁신을 이끄는 조직으로 육성할 것이다. 농업인 300~400명을 모아 10년 정도 양성하고 이 가운데 100명을 연 매출 100억원 이상의 정예 농업경영자로 키워낼 것이다. 이들에게는 농업을 포함해 우주, 원자력, 생물 등 다양한 분야에서 창의력을 자극하는 기회가 제공된다. 농업은 혼자서는 힘들다. 네트워킹을 해야 한다. 우리 포럼이 바로 그런 장(場)을 만드는 울타리와 마당이 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래 농업인재 양성은 좀 진부한 주제처럼 들리기도 한다. -소 1마리를 800만원에 팔아도 사육하는 데 700만원이 들었으면 100만원 밖에 못 남긴다. 결국 500만원에 키워 700만원에 파는 사람보다 못한 것이다. 1억원 벌었다고 좋아하는 농민 중에 상당수는 실제로 좀 더 잘했으면 2억원을 벌었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농업 CEO에게 기업가 마인드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벼농사 말고 다른 거 할 게 없나를 고민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똑같은 비용과 노력을 들였을 때 어떤 산업보다도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게 농업이다. →지금까지의 시도와 차별성을 기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동안은 인재 육성에 있어 창의성이 배제됐다. 사람들이 디자인, 정보기술(IT), 예술 같은 분야에서만 창의성을 강조하지만 그렇지 않다. 자동차를 만들 때에는 모든 부품이 표준화돼 있고 과정이 균일화돼 있다. 단순하다. 하지만 농업을 봐라. 스스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고민하고, 결정해야 한다. CEO도 이런 CEO가 없다.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해야 한다. 지식만으로는 부족하고 창의력이 중요한 이유다.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라는 책이 있지 않나. 렉서스(도요타의 고급 자동차)는 같은 모델이라면 모든 제품들이 다 똑같지만 올리브는 같은 품종이어도 지역마다, 나무마다, 가지마다 똑같은 열매가 없다. 창의력이 제조업보다 농업에 더 요구되는 가장 큰 이유다. 키워드2:“충주 장안농장에 가면 알 수 있는 것” →현재 염두에 두고 있는 모범사례가 있나. -충주에 가면 유근모씨가 대표로 있는 장안농장이란 곳이 있다. 유씨는 15년쯤 전에 건설업을 접고 300만원 들고 충주로 내려가 상추, 케일, 양배추 등 유기농 쌈채소 농장을 시작했다. 지금은 공동체 전체로 10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친환경, 유기농, 우수농산물(GAP), ISO 9001, 이노비즈 등 관련 인증을 두루 받았다. →이곳의 성장과정에 비결이 있다는 얘기인가. -유 대표는 품질을 인정받아 백화점에 채소를 납품하기 시작했는데 일정시점이 되니 공급 물량이 달리게 됐다. 혼자서는 도저히 백화점의 요구량을 감당할 수 없었다. 생각 끝에 동네 형님들 3명에게 같이 재배할 것을 권했다. 그러다 차츰 인근으로 확대됐고 지금은 120가구가 참여하고 있다. 처음에는 인근 지역농가를 중심으로 확대됐는데 이후 제주당근 등 다양한 구색을 갖추기 위해 전국 각지에 협력농장이 조성됐다. 새로운 형태의 농촌공동체 회사가 탄생한 것이다. →그런 식의 성공이 어디 쉽겠나. -그래서 슈퍼인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단 전국에 100명만 제대로 육성하면 된다. 100명이 각각 100가구와 공동농장을 형성하게 되면 총 1만 농가가 경쟁력을 갖추게 된다. 쉽게 말해 규격화, 기술개발, 고객관리, 마케팅, 브랜드, 유통 등은 슈퍼인재를 중심으로 하고 농민들은 편하게 매뉴얼에 따라 농사를 지으면 된다. 합동법률사무소, 합동회계사무소의 농업판이라고 할 수 있다. 키워드3:“우리 농협이 하나로클럽이나 운영해야 하나?” →사실 그런 것들은 기존 농협이 해야 할 부분 아닌가. -바로 그거다. 내가 그래서 농협을 개혁하고 신·경분리(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의 분리)를 하자고 외쳤던 것이다. 현재 우리 농협은 장안농장처럼 품목에 따라 구성돼 있지 않고 지역에 기반해 있다. 선진국은 오렌지, 키위, 파프리카, 화훼, 돼지, 소고기 등이 다 품목별로 협동조합을 통해 생산·판매된다. 뉴질랜드의 세계적인 키위 브랜드 ‘제스프리’도 하나의 주인이 있는 게 아니라 그 나라 키위협동조합이다. 미국 선키스트(오렌지), 네덜란드 그리너리(화훼), 덴마크 대니쉬 크라운(돼지고기)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 농협에도 하나로클럽 같은 판매조직이 있지 않나. -하나로 같은 소비자 판매가 어디 농협이 할 일인가. 농민이 생산한 걸 농협에서 팔아준다는 것이 언뜻 그럴싸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과연 하나로에서 120만 농가의 생산품을 다 팔아줄수 있나. 양돈조합 중에 몇 군데나 이곳에 들어올 수 있을 것 같나. 입점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 말도 못한다. 내가 장관으로 있을 때 이곳에 입점하게 해 달라는 청탁이 상당했다. 농협은 산지 유통을 해야지 소비지 유통을 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신·경분리를 안 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나무가 햇빛 따라 자라고 물 따라 뿌리를 뻗듯 모든 게 변화에 맞춰 자연스럽게 발전해 나가야 하는데 농업에서는 아주 오랫동안 그게 참 안 됐다. 기득세력이, 아니면 미래 변화가 불안한 사람들이 용기가 없어 가로막았다. 하지만 그들도 자기들의 결정이 손해나는 방향이라는 것은 뻔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쌀 관세화를 지금까지 미룬 것, 농업에 과도한 특혜를 줘서 스스로 자생력을 키우는 것을 가로막은 것 등이 따지고 보면 다 그런 것 아닌가. →신·경분리가 그렇게 중요한가. -뉴질랜드 제스프리의 경우 개별 농가를 위해 유통, 마케팅 등을 하고 수익의 25%를 떼어간다. 정부에서 돈 한푼 주지 않으니 재배방법 개선하고 병충해 방지 연구하고 상품화, 브랜드 홍보 등 하려면 그만큼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 농협을 보라. 농업의 자금 융통에 도움을 주라고 부여한 금융기능이 최고의 수익사업이 돼 버렸고 정작 필요한 공동구매, 공동판매 등은 저 밑에 내팽개처져 있다. 그야말로 본말전도다. →금융이 농협에 그렇게 걸림돌이 되나. -지금 농협 업무의 80%가 금융에 몰려 있다. 12~13%는 자회사에 있고 농협 고유의 일은 6~7% 수준이다. 농협 내부에는 금융쪽에 있어야 출세 한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 하지만 신·경분리를 하게 되면 4000~5000명이 농협 고유의 일을 할수 있도록 바뀐다. 고유의 농민 지원 사업을 하게 되면 분위기가 싹 바뀔 것이다. 막상 신·경분리를 해보면 반대했던 사람들이 왜 진작에 이걸 안했느냐고 정부를 원망하게 되지 않을까. →실질적인 이득이 또 뭐 없나.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사업에 대한 풍족한 지원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신·경분리만 제대로 되면 우리나라 협동조합은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뉴질랜드 제스프리는 수익의 25%를 조합이 가져가지만 우리나라는 5% 정도면 충분할 수 있다. 농협이 금융사업을 통해 돈을 벌어 풍부한 조합운영 지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키워드4:“구제역 사태의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을까?” →구제역 사태가 100일이나 이어지면서 책임소재 등 논란이 많다. -1차적인 책임은 축산농들에게 있다. →정부의 대응에도 문제가 많지 않았나. -그 부분 대해서는 ‘노 코멘트’하겠다(농식품부를 떠난 지 6개월가량 된 상황에서 언급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는 얘기). →축산농가들의 얘기를 좀 더 해보자. -시설관리, 사육방법, 경영마인드 이런 것들이 변화를 못 따라간 것이다. 구제역이 조금씩 일어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일이 커진 것은 국제적 망신거리다. 구제역은 선진국에는 없는 가축 질병이다. 동남아시아 등 가축방역이 극히 불량한 나라에서만 일어나는 병이다. 한 축산농이 베트남에 다녀와서 문제가 생겼다. 네덜란드 같은 선진국 축사를 보고 오지 왜 베트남을 다녀오나. 병원균이 우글대는 나라에 도대체 왜 가는지, 그게 참 신기할 정도다. →축산업이 빠르게 대형화됐지만 문제는 여전한 것 같다. -이건 규모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업화·대형화를 선진화와 동일하게 여기지만 절대로 별개의 문제다. 이번에도 어디선가는 1만마리 이상 기업농이 구제역으로 가축 다 죽였지만 오히려 소규모로 하는 영세농들은 열심히 노력해서 하나도 안 걸렸다고 하지 않나. 결국 규모가 크고 작고의 문제가 아니란 얘기다. 규정이나 원칙이 정해졌으면 그걸 지키는 게 중요한 것이지. →축산농가들의 태도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시다. -우리 축산업의 규모는 커졌지만 생산성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일례로 네덜란드는 어미돼지 1마리를 통해 1년간 출하하는 돼지가 24마리이지만 우리나라는 14마리에 불과하다. 우리도 10년 전에는 17마리였다. 오히려 10년 전보다 늘기는커녕 3마리가 줄어든 것이다. 키워드5:“내가 SNS에 열정을 쏟는 이유가 뭔지 알아?”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에 관한한 관료 출신 중 최고의 대가로 꼽히시는데(장 전 장관은 ‘새벽정담’이라는 개인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기에 실린 글과 사진을 모아 지난해 말 ‘새벽을 여는 편지’를 출간했다. 현재 3200명가량의 페이스북 친구를 두고 있다.). -정보의 상호작용과 이를 통한 놀랄 만한 변화의 경험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2008년 농식품부 장관으로 취임하고 나서 두어달쯤 지나 페이스북에 가입했다. 마크 저커버그(페이스북 창립자)가 나한테 감사패라도 보내야할 거다. 친구들한테 내가 아주 많이 선전을 했다. 동창생들한테 페이스북 친구요청 메일을 보냈는데 다들 가입을 꺼려하길래 내가 “이거 진짜 좋은 거다, 앞으로 이쪽으로 모든 게 모아질 것 같다.”면서 정성껏 설득했다. →새로 시작하는 인재양성 사업에서도 SNS는 빼놓을 수 없는 도구가 된 것 같다. -‘미래농수산실천포럼’의 공식 출범에 앞서 페이스북에 먼저 포럼을 개설했는데 사이버 회원이 360여명 가입했다. 이곳에서 예상 외로 좋은 아이디어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김태균 온라인뉴스부장 windsea@seoul.co.kr ●장태평 前 농림수산식품부장관은 ▲1949년 전남 무안 출생 ▲경기고,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행정고시 20회 ▲경제기획원 장관비서관·소비자정책과장, 재정경제부 법인세제과장·재산세제과장, 국세심판원 상임심판관, 농림부 농업정책국장, 재경부 정책홍보관리실장, 국가청렴위원회 사무처장
  • 고은 시인 ‘아메리카 어워드’ 수상

    고은 시인 ‘아메리카 어워드’ 수상

    고은(78) 시인이 미국 컨템퍼러리 아츠 에듀케이셔널 프로젝트(Contemporary Arts Educational Project)가 주관하는 ‘아메리카 어워드’(America Award) 2011년 수상자로 선정됐다. 1994년 제정된 이 상은 평생 세계문학에 기여한 문인에게 주어지는 공로상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영국 극작가 해럴드 핀터와 포르투갈 소설가 조제 사라마구를 비롯해 오스트리아 작가 페터 한드케, 시리아 시인 아도니스 등 세계적인 거장들이 수상했다. 한국·중국·일본 등 아시아 지역에서는 고은 시인이 첫 수상이다. 고은 시인은 7일 “보름 전 올해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통지를 받았다.”며 “(연작시집) ‘만인보’ 완간을 비롯해 그동안의 문학적 성과에 대해 인정해 준 것으로 들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이런 상을 받게 돼 감사하고 앞으로 창작에 더 전념할 계획”이라며 “올해 상반기에 시집 두 권을 내는 것을 목표로 저작에 몰두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에는 지금까지 ‘내일의 노래’ ‘만인보’ 등 고은 시인의 시집 약 10권이 소개됐으며, ‘히말라야 시편’이 상반기 중에 출간될 예정이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사람 아끼고 존중하는 게 최고 가치”

    고종주(63) 부산지법 부장판사가 8일 부산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정년퇴임을 한다. 이는 흔히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하지 못하면 일찌감치 옷을 벗고, 변호사 개업을 해온 관례를 깬 것으로 상당히 드문 일이다. 고 판사의 이력도 그만큼 특이하다. 경남 남해 출신인 고 판사는 1974년 부산대 법대를 졸업하고, 곧바로 행정고시에 합격, 당시 문교부 산하 행정기관에서 5년 2개월간 근무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업무를 계속 맡게 되자 사법시험에 도전, 1980년 사시 22회로 합격해 28년 6개월간 부산과 마산, 대구, 울산 등에서 법관으로 근무했다. 승진에 연연하지 않고, 후배 법관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 온 고 판사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돋보이는 판결로 세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2009년 2월 성전환자를 강간한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에게 처음으로 유죄를 인정했고, 그해 1월에는 ‘부부강간죄’를 처음으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2003년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고 판사는 2004년 첫 시집 ‘우리 것이 아닌 사랑’을 발간했고, 2009년에는 두 번째 시집 ‘대구지하철 중앙로역에서’를 내기도 했다. 또 최근에는 30년 가까운 법관생활을 마무리하면서 기억에 남는 판결과 소회, 합리적인 판결을 위한 제언 등을 담은 415쪽짜리 산문집 ‘재판의 법리와 현실’을 발간했다. 고 판사는 6일 “인생 60년 세월을 통해 선배들에게 배운 것은 ‘사람을 아끼고 존중하는 것이 인생사 최고의 가치’라는 사실”이라면서 “앞으로 어떤 역할을 맡더라도 이런 가르침을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내년엔 아흔, 그래도 캔버스 앞에만 서면 가슴이 뛴다”

    “내년엔 아흔, 그래도 캔버스 앞에만 서면 가슴이 뛴다”

    “제사 지내려면 병풍이라도 있어야 했으니 동양화 쪽은 그래도 먹고살 만했는데 서양화는 참 어려웠어.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 간 이중섭(1956년 작고)은 국제극장 뒤에서 점심으로 만날 호떡을 얻어먹었지. 그땐 호떡이 제법 커서 한끼로 때울 만했거든. 가격은 생각 안 나는데, 그렇게 비싸지도 않았어. 그런데 그 호떡 하나 사먹을 돈조차 없어 늘 쩔쩔맸지. 그러니 주인장이 불쌍해서 돈 조금만 받고도 주고, 공짜로도 주고 그랬어. 미안하고 고마웠던 이중섭이 할 줄 아는 거라곤 그림이니, 그림 하나를 정성껏 그려서 줬어. 주인장도 그걸 받기는 했는데 참 난감한 거야. 나중에 보니 그걸 장독 뚜껑으로 쓰고 있더라고. 유화물감이니까 기름기가 있어서 물기를 잘 막아주거든. 자존심이 무척 강했던 이중섭이지만 제 눈으로 그걸 보고도 아무 말 못했지. 그땐 시절이 그랬어.” “아깝네요. 그거 하나 잘 갖고 있었으면 지금 몇억원은 할 텐데.” “예술가의 삶이란 게 그런 거 같애. 내가 프랑스에서 살던 곳이 페뢰야. 빛이 좋아 화가들이 좋아하는 곳이지. 고흐가 살던 오베르하고 가까운 곳이기도 해. 언젠가 오베르에 갔더니 그곳 주민들이 이런 얘기를 해. 고흐가 권총자살하는 데 잘못 쐈대. 즉사한 게 아니라 한 3~4일 앓다가 죽은 거지. 장례가 골치 아팠어. 이름 없는 가난뱅이 화가인 데다, 그런 방식으로 죽었으니 다들 꺼림칙한 거지. 겨우겨우 이웃의 도움을 받아 장례를 치렀는데 이번엔 삯으로 줄 돈이 없는 거야. 그래서 그림 하나씩 가져가라 그랬대. 그런데 아무도 안 가져갔다는 거야. 그때 아무거나 하나 골라 집었어 봐…. 어휴.” 지난 3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백영수(89) 화백을 만났다. 이중섭·김환기·장욱진·유영국·이규상 화백 등과 더불어 1950년대 신사실파 화폭을 개척한 대표적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신사실파는 일본을 통해 유입된 서구의 후기인상파적 화풍을 뛰어넘기 위해 이들이 결성한 단체다. 동인 중 유일한 생존 작가가 백 화백이다. 한국 근대미술의 산 증인으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가 1977년 프랑스로 떠났다가 올 1월 34년 만에 영구귀국했다. 따뜻한 느낌의 ‘모자(母子) 시리즈’로 국내는 물론, 유럽 화단에도 상당히 이름이 알려져 있다. 롯데호텔에서 백 화백을 만난 것은 영구귀국 뒤 첫 전시가 롯데호텔 1층 롯데갤러리 재개관전이어서다. 롯데호텔 전신은 1956년 세워진 반도호텔이다. 이곳 1층의 반도화랑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갤러리다. 롯데갤러리 재개관을 맞아 백 화백을 비롯, 김종화(93), 권옥연(84), 황용엽(80), 윤명로(75) 등 원로 작가 다섯 명의 작품을 모았다. 백 화백은 ‘모자 시리즈’와 더불어 ‘여백 시리즈’를 내놓았다. 그런데 원로 작가들의 명성에 비해 호텔 로비 한쪽 구석에 자리 잡은 갤러리가 어째 좀 옹색해 보인다. 내걸린 작품 수도 그리 많지 않다. 백 화백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에이, 이것만 해도 엄청난 거지. 반도화랑은 더했어. 그 시절 화랑이란 게 일종의 기념품 가게였거든. 반도호텔 맞은편에 미국공보원이 있었고 옆에는 국립도서관이 있었지. 거기다 최고의 요지였던 명동이 곁에 있었고…. 그러다 보니 드나드는 외국인들이 많았는데 이 사람들이 반도화랑에서 작품들을 사갔어. 이때 박수근(1965년 작고)이 그린 그림이 조선 풍속화야. 외국인 눈에 맞춘 거지. 덕분에 미군 부대 초상화가에서도 벗어났고….” 반도화랑에서 일을 배운 박명자(67) 회장이 나가서 살림 차린 곳이 바로 현대화랑(지금의 갤러리 현대)이다. 박수근 화백도 반도화랑 전시를 통해 화단에 본격 데뷔했다. “그땐 반도호텔이 9층인가 해서 주변에서 제일 높았어. 그림 그린답시고 몰려다니면서 명동에서 막걸리 한잔 마시고 9층 칵테일 바에서 분위기 내고 그랬지. 반도화랑을 열었던 이대원(2005년 작고)이 오며 가며 이런저런 일거리도 줬고….” 당시 서양화 위상은 볼품없었다는 게 백 화백의 회고다. 심지어 이념 장벽까지 있었다. 장욱진(1990년 작고) 화백은 땅과 황소를 벌겋게 그렸다고 기관원에게 끌려갔단다.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추궁당하던 시절, 이중삼중 생활고에 시달렸다. “나도 무지하게 일했어. 서울신문사 뒤에 코오롱 아케이드 있지? 그게 1969년에 지어졌는데 그 지하 아케이드 디자인을 내가 했어. 그것만 했겠어? 국립극장이 생긴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무대미술 작업도 내가 했지. 문예잡지나 시집 같은 책에다 삽화며 도안 그려넣는 일도 숱하게 했어. 그런데 그건 비교적 사정이 나은 거였어. 그나마 (작가) 이름값이 있으니 얻을 수 있는 일거리였거든. 이름 없는 작가들? 그냥 마냥 굶는 거지 뭐. 이중섭도 그렇게 굶어 죽은 거지.” 당시 작가들이 ‘괜찮은 일거리’로 꼽았던 것이 백화점 전시였다. 그런데 이것도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다. “백화점 전시라는 게 지금처럼 멋지게 하지 않았어. 맨 꼭대기층에 전시해 두면 사람들이 내려오면서 보고 상품을 사라고 해둔 거지. 일종의 미끼 상품이야.” 그렇게 자존심에 상처 받아가면서도 뭐가 좋아 그렇게 그림에 매달렸을까. “그냥.” 허무한 답이다. 말이 이어진다. “하얀 캔버스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아 있으면 그냥 좋아. 이번엔 내가 또 뭘 만들어낼 수 있을까, 막 설레. 얼마 전에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에 갔는데 마네 그림이 너무 좋은 거야. 여러 번 본 건 데도 너무 좋더라구. 나도 저렇게 멋진 거 하나 그리고 싶다, 이 생각밖에 안 들어.” 젊었을 때도 그 생각만으로 버텨냈다고 한다. “내 젊었을 때만 해도 샤갈, 미로, 피카소, 달리가 살아 있을 때였어. 수입된 유럽잡지를 통해 그 그림을 보면 너무 부러운거야. 나도 저런 작가가 되고야 말테다, 그 희망 하나로 버틴 거지.” 실은 한가지 이유가 더 있단다. “좋아하는 일인 데다 늙어 죽을 때까지 할 수 있잖아. 마티스는 아흔 넘어 손에 힘이 떨어지니까 가위로 종이를 오려서 작품을 만들어냈어. 르누아르는 말년에 골다공증이 오니까 몸에다 붓을 묶어서 그림을 그렸어. 그걸 보면서 그림이란 게 평생 할 수 있는 직업이구나, 하는 계산도 했지.” 그렇게 지켜온 게 바로 한국 현대미술이라는 자부심이 강하게 묻어나온다. 1977년 프랑스로 건너간 것은 파리의 한 화랑이 백 화백의 진가를 알아봤기 때문이다. 초대전으로 프랑스에 불러 들이더니 아예 주저앉혔다. 10년 넘는 활동기간 동안 큰 개인전만도 22차례, 이런저런 전시회까지 합치면 100회 넘게 전시를 열었다. ‘한국에서 건너온 뛰어난 화가’라는 명성이 쌓였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1989년 교통사고를 당하더니 1994년 위암 선고까지 받았다. 한동안 붓을 놓을 수밖에. 몸을 추스린 뒤 더 이상 비행기를 타기 싫어 영구귀국을 결심했다. 원래 살던 경기 의정부 집으로 고스란히 되돌아왔다. 하지만 창작 의욕만큼은 왕성하다. 아직도 주머니에 종이와 연필을 넣고 다니면서 눈을 사로잡는 장면은 재빨리 스케치한다. “아직 더 그릴 수 있어. 언젠가 프랑스 한인회에서 경로잔치 같은 걸 해 주겠다길래 펄쩍 뛰었지. 아직도 하얀 캔버스 앞에만 서면 가슴이 뛰는데 무슨….” 속으로는 고민도 있다. “미술가란 남이 안 하는 모양이나 색깔을 찾아내야 하니 스케치를 계속 모아두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 중에 작품으로) 뽑아내야지. 그리는 시간 자체보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더 필요해.” 오는 10월쯤 신작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글 사진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백영수 화백이 걸어온 길 ▲1922년 경기 수원 출생 ▲1945년 일본 오사카미술학교 졸업 ▲1945년 전남 목포고등여학교 미술교사 ▲1947년 서울 화신백화점 개인전 ▲1952년 해군 종군화가 미술전 ▲1953년 신사실파전(국립미술관)▲1973년 국립현대미술관 60년전 ▲1977년 프랑스행 ▲1978년 소시에테 나쇼날 보졀 그랑파레(파리) ▲1981년 프랑스 주재 한국작가전(파리), 프랑스현대작가전(도쿄도미술관) ▲1983년 살롱 도톤느 그랑파레(파리) ▲1985년 AAM전(파리) ▲1986년 프랑스 작가 초대전(일본, LA), 국제현대미술전(모나코) ▲2007년 신사실파 60주년(서울) ▲2011년 영구 귀국
  • 김영남 네 번째 시집 ‘가을 파로호’

    김영남 네 번째 시집 ‘가을 파로호’

    물과 꽃의 공통점이 있다. 한 음절의 단어라는 것? 맞다. 뭇 생명을 잉태하는 근원이라는 것? 맞다. 아름다움의 본질을 품고 오랜 문화예술사를 통해 숱한 가인들로부터 다양하게 변주됐다는 것? 맞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다. 젊은 시인 김영남이 욕망을 담아 즐겨 사용한 시재(詩材)라는 점이다. 김영남이 자신의 네 번째 시집 ‘가을 파로호’(문학과지성사 펴냄)에서 드러낸 시정은 농염하기만 하다. 꽃을 노래할 때도, 호수나 바다를 노래할 때도 시인은 짓궂은 욕망을 슬쩍, 혹은 노골적으로 보여준 뒤 상대방의 표정을 빤히 쳐다본다. 생물학적 나이로 54세니 이미 중견시인의 반열에 오르고도 남는다. 삶을 관조 연(然) 하는 것이 어울릴 법한 나이다. 짐짓 심각한 척해도 되고, 같은 시어라도 그렇게 읽으라는 식의 기호를 담을 수 있겠건만 애써 거부한다. 한데 시력(詩歷)을 따지면 199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니 ‘고작’ 14년차에 불과하다. 어쩐지…. 장난치고 싶어, 연애하고 싶어, 새로운 시 쓰고 싶어 안달이 났다. 김영남이 여전히 젊은 시인이고, 젊은 시인이어야할 징표다. 시집의 첫 시편부터 애사롭지 않다. ‘…/우물가 집 뒤란의 누나 방에/ 굴러다니는 피임약이여, 그걸/ 영양제로 주워 먹고 건강한 오늘날이여’(‘앵두가 뒹굴면’ 중)라고 노래하거나 ‘…/ 이 아저씨들 하역 다 끝나면 나는/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가 쪼그라든 콘돔을 앞에 두고/ 저건 점박이, 이건 꼽새 아저씨 것 하고 한 번 우겨보리라’(‘나로도 호박꽃’ 중)라며 풋풋한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자신의 성장기의 일부를 내밀히 고백한다. 그리고 목련, 동자꽃, 나팔꽃, 능소화, 할미꽃, 코스모스, 성에꽃, 튤립, 찔레꽃 등을 차례로 호출한다. 꽃마다 유혹과 욕망의 시상이 기억과 상상력을 통해 버무려져 있다. 찔레꽃은 ‘포옹에 관한 리뷰’가 되고, 튤립은 ‘자전거에서 내린 소녀’이며 능소화는 ‘그예 그리움으로 담을 타는 여인’이 된다. 시인의 장난끼는 바다를 대하면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절벽과 마주 앉아 한잔 크게 나누어보지 않으면 잘 모르리라/…/ 저 강진만 바다를 형님! 형님! 하고 불러보자’(‘강진만’ 중)라며 바다와도 벗을 맺거나 ‘새벽녘 다랑논에 나가/ 모내기하는 앵강만을 데려와 씻겨 벗겨 눕혀본다’(‘앵강만 일출’ 중)고 하며 자연에 대한 호방한 욕망을 거침없이 뿜어낸다. 시와 인생을 가지고 노는 일망무애(一望無涯)함이 부러움을 자아낼 만하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이슈 인터뷰] “함께 고통 나누는 심정… 문학·종교와 통해”

    [이슈 인터뷰] “함께 고통 나누는 심정… 문학·종교와 통해”

    평생을 고독한 인문주의자로 살아왔던 이어령 이사장이 지난해 기독교로 귀의했다. 그해 3월 신앙 고백서인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펴냈고, 11월에는 시집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도 내놨다. ●실명 위기 딸 권유로 ‘첫발’ 계기는 딸의 아픔이었다. 2006년 5월 미국에서 법률가로 살던 딸 민아씨가 하와이병원에서 실명 진단을 받았다. 하와이로 간 그에게 독실한 신자였던 딸은 교회를 권유했고 이어령은 마침내 교회에 몸을 던졌다. 세례는 이듬해 7월 일본에서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에게 받았다. 그런데 그는 기독교 투신이 화제가 되는 것에 적잖이 불편한 심정을 드러냈다. 하지만 관점은 조금 다르다. 주류 기독교계에 가깝기보다는 김규항이 쓴 ‘예수전’을 떠올리는 화법을 쓴다. “종교란 것이 결국 아픔에 대한 공감 같은 것 아니겠어요. 문학도 본질적으로는 허무주의예요.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고. 그런 심정이 종교와도 통하는 것 같아요.”라는 답변을 내놨다. ●“영·육 분리할 필요 있나요” 영혼만 강조하고 몸을 부인하는 사고방식도 편치 않은 듯했다. “영과 육으로 나누는 게 좀 그래요. 예수도, 사람의 아들로 몸을 가진 채 태어났고, 사람의 아들인 예수가 그렇게 살았으니, 이제 평범한 사람도 자신의 삶에 대해 변명할 수 없게 된 게 중요하거든요. 이를 분리할 필요가 있을까요.” ‘왜 기독교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도 그랬다. “종교가 무엇이냐, 그 자체가 중요하지는 않아요. 지하철 보세요. 입구는 여러 곳이라도 갈 곳만 잘 찾아가면 되지 않나요. 종교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가야 할 방향만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그 종교가 무엇이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봐요.”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아이들 눈높이 음악 보여드릴게요”

    “아이들 눈높이 음악 보여드릴게요”

    “제가 평소에 ‘초통령’(초등학생의 대통령)이란 소릴 듣는데, 어린이들이 저를 많이 사랑하더라고요. 이번 동요를 계기로 어린아이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합니다.”(조권) 2AM의 리더이자 예능계의 ‘깝권’ 조권이 데뷔 후 처음으로 동요 노래를 발표했다. 숭실대 문예창작과 교수이기도 한 최승호 시인의 동시(童詩)에 방시혁이 곡을 붙인 ‘원숭이’를 직접 부른 것. 방시혁은 ‘총 맞은 것처럼’(백지영), ‘죽어도 못보내’(2AM) 등을 히트시킨 대중음악 작곡가다. 최근에는 한 TV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독설 심사평’으로 이목을 끌고 있다. 조권은 24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방시혁과의 인연으로 이번 작업에 참여하게 됐다.”면서 “동요를 부르면서 다시 태어난 듯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동요의 가치에 대해서는 “순수함과 단순함”이라고 답했다. 간담회에 함께 참석한 방시혁도 “가요나 만화 주제가가 아니라 자기 나이에 맞는 노래를 즐길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에 아이들이 진짜 즐길 수 있는 동요를 만들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어 “솔직히 아직 결혼도 안 했고 아이도 없어 처음 작업 의뢰를 받았을 때 ‘해도 되나’ 하는 고민이 들었다.”면서 “그런데 최승호 시인의 동시를 보고 나자 강한 매력이 나를 잡아당겼다.”고 털어놓았다. 방시혁은 “상상력이나 소리만으로 동시를 만들어낸다는 게 신선한 자극이었고 시의 언어에 나만의 소리를 입혀서 새로운 즐거움을 줄 수 있겠다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이번 작업은 ‘최승호·방시혁의 말놀이 동요집’(비룡소 펴냄)이라는 제목의 CD 음반으로 나왔다. 조권이 부른 ‘원숭이’도 여기에 수록됐다. 최승호 시인의 다섯권 동시집에서 21편을 엄선해 방시혁이 모두 곡을 붙였다. 최 시인이 2005년 처음 펴낸 ‘최승호 시인의 말놀이 동시집’은 13만부 이상 팔리며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방시혁은 국내 동요 문화의 척박한 현실을 지적하며 동요 전문 유통사 설립 계획도 공개했다. 그는 “하다 보니 아주 재미있어 동시와 연계한 창작동요 부흥 작업을 할 계획”이라면서 “‘엉클뱅’이라는 동요 유통사를 설립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 문화재 등록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 문화재 등록

    1925년 발간된 김소월(1902~1934)의 시집 ‘진달래꽃’이 문화재로 등록됐다. 등록대상은 1925년 12월 26일 매문사가 내놓은 초간본으로 한성도서에서 나온 3권과 중앙서림에서 나온 1권 등 모두 4권이다. 이 시집에는 ‘진달래꽃’ 외에 127개 작품이 실려 있다. 문화재청(청장 최광식)은 24일 “1920년대 출간된 책 가운데 꽃 같은 것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책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일부 지적이 있었으나 서지학자 등 관련 전문가들의 논의 결과 문제가 없다고 판단해 간행시기와 발행자 기록 등을 인정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선생집 등 8건도 보물로 지정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싱글 라이프] 돌이키고 싶은 10년전 선택

    [싱글 라이프] 돌이키고 싶은 10년전 선택

    “그때 내가….” 돌이켜 봐서 후회되는 일 몇가지 없는 사람이 있을까. 현실에 100%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2010년 9월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직장인 822명을 대상으로 ‘청소년기에 희망했던 직업과 현재의 직업이 일치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66.9%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어릴 때의 꿈을 실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지를 보여주는 설문조사 결과다. 또 ‘일치하지 않는다’고 응답한 사람의 31.1%가 ‘능력개발이 부족해서’라고 답했고, 27%는 ‘진로설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서’라고 하는 등 과거 자신의 노력이나 선택을 이유로 들었다. ‘1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잊고 싶은 기억을 돌이키고, 엇갈린 인연을 이루고 싶지 않을까. 10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싱글들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또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 들어 봤다. “그때 용기 낼 걸”… 접어버린 첫사랑·꿈 ●짝사랑했던 첫사랑의 결혼식서 축가 12일 서울 방배동. 송세혁(가명·30)씨가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대학 동기 P의 결혼식 피로연에서다. 이날 송씨는 결혼식장에서 축가까지 불렀다. 송씨는 10년 전인 2001년 대학에서 그의 첫사랑을 만났다. 같은 과 동기였던 P는 잘 신어보지 않은 듯 하이힐을 신고 힘겹게 계단을 올랐다. “약간 팔자 모양으로 걷던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보이면서도 귀엽고 매력적이었다.”고 그는 돌이켰다. 특히 노래방에만 가면 자신에게 “노래를 잘한다.” “목소리가 멋지다.”고 칭찬하던 P였다. 송씨는 혹여 자신을 좋아하는 것은 아닌지 한 음절 한 음절에 목소리에 혼을 담았다. P의 매력을 알아챈 건 송씨뿐만이 아니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몇몇 동기와 선배들도 P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이때부터 서로 말 못하는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승자는 예상치 못한 곳에 있었다. 이듬해 아직 고백을 못하고 끙끙대던 송씨에게 날벼락 같은 소식이 들렸다. 3월 말년휴가를 나온 선배와 P가 사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고백 한 번 못하고 마음 졸이기만 수백번, 수천번. 송씨는 학교 근처 하천에서 강소주를 마셨다. 학교에 다니는 둥 마는 둥 그는 학기를 마치는 대로 입대를 했다. 휴가 때마다 P의 소식을 물었지만, P는 여전히 그 선배와 열애 중이었다. 밤에 둘이 지하 매점에서 키스하다 경비아저씨한테 들켰다는 소문이며, 단둘이 인천 앞바다 섬으로 여행을 갔다가 파도가 세 며칠을 지내고 왔다는 친구들의 ‘디테일’한 진술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소주잔을 비우는 일뿐이었다. 결국, P가 10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자신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송씨에게 축가까지 부탁했다. 낮부터 마신 술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송씨는 “그때 고백을 했어야 했는데…. 다시 기회가 있을 줄 알았어요.”라고 말하며 애써 웃어 보였다. 그러면서도 “그래도 행복해 보이니 마음은 놓이네요. 이렇게 말할 자격은 없지만….”이라면서 “저도 이제 제 사랑을 찾아야죠.”라고 말했다. ●“아버지 사업 망해 로커꿈 접어” “슈퍼스타 케이(K)를 보니 다시 무대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이 솟아요.” 휘경동에 사는 김진수(31)씨는 10년 전 로커의 꿈을 접었다. 김씨는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97년 여름 친구들과 밴드부를 결성하고 자신은 보컬을 맡았다. 얼마 안 되는 용돈을 모으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연습공간도 빌렸다. 축제 때 그의 헤드뱅에 인근 학교 여학생들은 자지러졌고, 인기를 독차지한 그는 친구들로부터 시샘도 받았다. 하지만 성적은 사정 없이 곤두박질쳤다. “이 놈이 공부는 안 하고.” 성적표를 받아보고 화가 난 그의 아버지는 방에서 기타 줄을 튕기고 있던 김씨에게 와 기타 줄을 끊어놓기까지 했다. 그래도 김씨는 굴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몰래 밴드 연습을 하면서 마이크를 내려놓지 않았다. 재수 끝에 2000년 4년제 지방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김씨는 이제는 취미가 아니라 진짜 가수가 되기 위한 밴드활동을 시작했다. 연예매니지먼트사를 찾아다니며 자신의 노래를 홍보하면서 스타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이듬해, 아버지가 하던 사업이 망하게 돼 빚더미에 앉게 돼 가수의 꿈을 ‘잠시’ 접을 수밖에 없었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는 그는 기타 줄을 튕길 수 없었다. 생활비와 학비를 손수 벌어야 했다. 김씨는 “엄한 아버지보다 무서운 게 ‘생활’이더라고요. 가끔 밴드활동을 계속했다면 지금 어땠을까 후회될 때도 있죠.”라고 말하며 애써 의연한 척 억지웃음을 지었다. 일탈을 모르던 ‘범생이’ 탈피하고파 ●“공부만 했더니 친구 안 남아.” “줄기차게 공부만해서 명문대학에 진학하고, 대기업에 다니고 있긴 한데….” 서울 서초동에 사는 오주연(가명·27·여)씨는 가끔씩 초·중·고교 동창생들의 미니홈피에 들어가 본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9년이 지나 달라진 친구들의 모습을 보다 추억에 잠겨 혼자 배시시 웃기도 했다. 하지만 금세 요동치는 감정을 억누르기는 어려웠다. 친구들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며 자신의 빈자리에 질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씨는 학창시절, 공부에만 몰두했다. 공부말고는 별다른 취미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에게 소홀했던 것이 후회로 남는다.”고 그는 말했다. 딱히 친구들을 멀리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와서 보면 초·중·고교 시절에 만나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들이 거의 남지 않았다. 반에서 1, 2등을 다툴 정도로 공부를 잘했던 오씨다. 부모님도, 선생님도 그를 자랑스러워했고 그는 늘 어른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오씨는 모범생이기도 했다. 친구들이 밤에 야간 자율학습을 빼먹고 공원에 놀러가자고 할 때도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어제 진짜 재밌었지. 킥킥킥.”라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눠도 강씨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내로라하는 명문대학에 입학했고 지금도 역시 내로라하는 대기업에 다니고 있다. 하지만 친구는 거의 남지 않았다. 그는 “10년 전 고등학생 때로 돌아간다면 공부보다는 친구들하고 깔깔대며 웃고 떠들고 어울려 다닐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20년 넘게 이어진 일상, 이젠 깨고 싶어” “부럽네요. 일탈할 수 있는 특권. 마음만 먹으면 하늘을 날 수 있겠다는 용기.” 경기 분당에 사는 권혜영(28·여)씨는 일본작가 이시다 아라가 쓴 포틴(4teen)의 책장을 덮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평범한 14살 중학생들이 매일 모여서 일상을 깨는 것을 보고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라면서 자신이 10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날라리가 되지 않겠다.”고 말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일곱 살부터 시작된 그의 학교생활은 대학졸업 후 그대로 직장생활로 20년 넘게 이어졌다. 장소만 바뀌고, 오전 7시 등교에서 오전 9시 출근으로 시간만 조금 바뀌었을 뿐이다. 그때부터는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루틴”이 시작된다. 직장생활 5년차였던 그는 한참 회사생활이 지겹다고 느끼던 그다. 권씨는 다시 고등학생이 된다면 “시간표대로 짜인 일상을 살지 않고 오늘은 어떤 기발한 것을 해볼까 하며 고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소설에서처럼 방학 때 부모님께 거짓말하고 친구들끼리 자전거로 여행을 떠난다든지 아니면 수업을 제치고 온종일 만화책을 읽고 돌아온다든지 어찌 보면 소소하지만, 그때만 할 수 있는 그런 일을 해 보고 싶어요.”라며 깔깔 웃었다. 만족감 없는 직업… 꿈을 좇았더라면 ●“고시공부할걸….” “고시공부했더라면 지금쯤….” 입사 8년차 대기업 과장인 김영섭(가명·35)씨는 대학생 때 고시 공부를 하지 않았던 것을 가장 큰 후회로 삼는다. 법학과를 졸업할 2004년 그의 주변에는 사법시험·행정고시를 준비하던 친구들이 많았다. 그가 대기업에 취직을 했을 때 모두 부러운 눈으로 보던 친구들이다. 체육복 차림에 모자를 눌러쓴 친구들에 둘러싸여 우쭐해 했던 그다. 하지만, 이때로부터 채 5년도 지나지 않아 상황은 역전됐다. 친구들이 하나둘씩 판검사가 되고, 정부 요직에서 근무하면서 그의 직장은 딱히 내세울 만한 것이 못돼 버렸다. 특히 이제 갓 마흔이 넘은 선배들이 줄줄이 명예퇴직을 신청하는 걸 보고 있으면 아직 장가도 못 간 김씨는 불안하기만 하다. 그는 “친구들은 늦었지만 서른두세 살에 고시합격하고 선보고 해서 시집·장가도 잘 갔는데, 저는 일만 죽도록 하다 보니 장가도 못 갔네요.”라면서 “이제 남은 건 두둑한 뱃살하고 벗겨지는 이마밖에 없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며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교사? 역사학자? 제주도에 사는 이정화(29·여)씨는 2007년부터 5년째 초등학교 교사다. 하지만 이씨는 10년 전인 2001년 대학 입학 원서를 쓸 때만 해도 자신이 교사가 되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그의 꿈은 역사학자. 중·고등학교 6년 내리 한마음이었다. 하지만 원서를 쓰던 그날, 모든 것이 바뀌었다. “교대를 가라.”는 부모님의 권유에 처음엔 황당해 했고, 다음 순간 무서웠다. 처음이었다. 부모님께 진학에 대해 상의해 본 적이 이때말고는 없었다. 하지만, 이씨는 부모님에게 설득됐다. ‘IMF’ ‘경기’ ‘취업’ 운운하시는 부모님의 논리에 설득된 것이 아니다. 그는 “막연하게 ‘역사 공부는 꼭 직업이 아니라도 할 수 있는 거잖아’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결국, 두어 시간 짧은 설득작업 끝에 그는 교대에 지원서를 제출했다. 대학 4년을 마쳤고, 삼수를 하긴 했지만, 임용고사에 합격했다. 최고의 교사는 아니지만 인기있는 교사가 됐다. 그래도 늘 역사에 대한 관심을 붙들고 있다. 늘 새로운 역사 관련 서적이 그의 가방에 자리 잡고 있다. 역사공부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 것이다. 그러면서도 ‘교사가 되길 잘했다. 천직이다.’라고 생각하는 이씨다. 그는 “수업 시간에 저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순진한 표정을 보면 교사가 된 게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여전히 제가 대학 때 한국사를 공부했다면 지금은 어떤 길을 가고 있을까하는 궁금증은 있어요.” 이씨가 1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교대가 아닌 사학과에 지원했을까? 이씨는 “아마도….”라며 말끝을 흐렸다. 윤샘이나·김양진기자 ky0295@seoul.co.kr
  • “법원은 사회에서 격리된 유리城 같아”

    “법원은 사회에서 격리된 유리城 같아”

    “법원은 사회에서 격리된 유리로 만든 성(城)과 같습니다.” 15일 퇴임한 이재홍(55·사시19회) 서울행정법원장은 퇴임식 자리에서 법원의 폐쇄성과 관료주의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 이 법원장은 “법관들은 성에 살며 유리창을 통해 밖을 보고 그걸 통해 판단하고 있다.”며 “법관들이야말로 사회를 잘 알고 판단해야 되는데 점점 폐쇄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최소한 성 안에서는 의사소통이 돼야 하는데, 그것도 잘 안되는 게 우리의 현실”이라며 “법원의 관료화를 완화시켜 나가는 게 우리의 과제”라고 밝혔다. 이 법원장은 최근 부쩍 논란이 되는 전관예우에 대한 입장도 밝혔다. 그는 “법관들은 청렴하게 열심히 일하지만 일반인의 불신은 없어지지 않듯, 법관들이 전관예우가 없다고 해도 일반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나 역시 전관이 되겠지만, 어떻게든 그런 생각을 불식시켜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퇴임하는 자신을 ‘시집가는 노처녀’로 비유해 “여기저기서 청혼이 많이 들어와 골머리를 앓고 있다.”며 로펌(법률회사)에서의 영입 제의가 많음을 암시했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씨줄날줄] 예단(禮緞)/김성호 논설위원

    보통 사람이면 모두 거친다는 4가지 통과의례 관혼상제(冠婚喪祭)의 둘째인 결혼. 서로 다른 집안의 남녀가 ‘부부 연’을 맺는 결혼의 전제는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동고동락하는 백년해로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주변엔 중간에 파탄을 맞는 부부들이 숱하다. 작년 한해만 해도 12만쌍이 파경에 이르렀다니 한달 평균 1만쌍이 갈라서는 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의 이혼 수준이다. 다른 경제·문화적 배경의 남녀가 함께 살자면 어찌 갈등과 마찰이 없을까. 생활이 복잡다단해진 탓일까, 이혼 사유도 갈수록 다양해지는 추세다. 가장 큰 원인인 배우자의 외도부터 가정폭력, 도박, 경제적 무능력, 종교와 성격 차이, 가족과의 갈등…. 그런데 요즘 결혼 즈음에 주고받는 예단(禮緞)·예물을 둘러싼 불화가 부쩍 늘고 있단다. 결혼 초기의 파경이 적지 않고 초기 파혼의 주 원인 중 하나가 바로 혼수의 충돌이라니 서글픈 일이다. 혼수 중에서도 사치스러운 예단·예물은 파경의 큰 씨앗이다. 본디 예단·예물은 사랑의 징표요, 새 식구를 맞는 예절의 기본. 남의 딸을 달라는 청혼에 응한 여성 측을 배려한 감사 표시가 예물이었다. 예단도 남자가 여자 집에 장가 와서 살면서 함께 이룬 재산을 본가로 들어갈 때 가지고 갔던 것. 조선 중기 이후 전통 신분제 붕괴로 잘살게 된 계층에서 신분 과시차 사치스러운 예물·예단을 주고받기 시작한 게 호화 혼수의 시초란다. 예단·예물이 ‘잘간 시집, 잘간 장가’의 잣대가 되고 있으니 고약한 ‘사랑의 상품화’다. 불화를 겪던 부부가 결혼 5개월 만에 파경을 맞았다. 결정적 사유는 바로 예단비. 결혼 전 여자 측 부모가 남자 측에 보낸 예단비가 무려 10억원이고 그 가운데 예물비 명목으로 2억원을 돌려받았단다. 예단비 반환을 놓고 티격태격하던 부부가 맞소송 끝에 갈라선 것이다. 법원은 신랑 측에 예단비 8억원을 돌려주라는 판결을 내렸다는데. ‘혼인과정에서 주고받은 예단은 혼인이 성립하지 않으면 반환키로 조건이 붙은 증여와 성격이 유사하다.’는 판결의 파장이 만만치 않아 보인다. 일찍이 조선시대엔 ‘시집 가고 장가 가는데 재물을 논함은 오랑캐의 도’로 여겼다고 한다. 부부란 지게미와 쌀겨로 끼니를 이으면서도 새로운 세상을 함께 꿈꾸고, 두려울 것 없는 사랑의 힘으로 버텨가는 동행과 의지의 관계일 텐데. 돈으로 사고 파는 부부의 백년가약도 결국 허위와 허식으로 얼룩진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단면이 아닐까. 김성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행정의 달인 29인을 말하다] (4) 공간개선 분야

    [행정의 달인 29인을 말하다] (4) 공간개선 분야

    지방행정의 달인이 회가 거듭할수록 독자들의 반향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번에 소개하는 달인은 공간개선분야 달인들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축구형 모형 화분디자인을 개발한 달인, 색깔있는 벼로 자기 고장을 알리는 농촌지도사, 주민들의 손길이 깃든 항아리 등으로 소공원을 꾸민 달인, 한라산 지킴이 등이다. 5회인 전기기계분야 달인은 2월 7일자에 소개한다. ■‘발상의 전환자’ 충북 괴산군 농업기술센터 농촌지도사 최병열 씨 유색벼로 그린 논그림 찬사… 올 달나라 토끼 도전 “발상의 전환이 충북 괴산군을 전국에 알렸습니다.” 충북 괴산군 농업기술센터 최병열(46) 농촌지도사는 유색벼를 활용한 논그림으로 공간구조 개선분야 ‘지방행정의 달인’으로 선정됐다. 최씨가 전국에서 처음으로 세가지 유색벼(황색, 자주색, 녹색)를 활용해 논에 그림을 그린 것은 2008년 4월이다. 2200만원을 들여 감물면 이담뜰의 논 2.3ha를 임대해 가로 100m, 세로 150m 크기의 상모돌리기 그림을 연출했다. 바닥을 평탄하게 만든 논을 가로·세로 1m 간격으로 세분화해 석회로 밑그림을 그리고 20여명이 투입돼 모내기까지 하는 데 걸린 시간은 총 15일. 이런 과정을 거쳐 거대한 논그림이 완성되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괴산에 유색의 ‘미스터리 서클’이 나타났다며 국내 언론에서 앞다퉈 취재했고 일본 농업인 신문에도 보도됐다. 초등학교 3학년 교과서를 비롯해 ‘농경과 원예’, ‘그린매거진’, ‘청정 충북농업’, ‘새농사’ 등 각종 농업책자에도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논그림은 연간 3만 5000여명이 다녀가는 괴산의 관광명소가 됐다. 숭실대 언론홍보학과 김민기 교수는 논그림의 홍보가치를 2200억원으로 평가했다. 군은 개청이래 최대 홍보효과를 가져왔다며 2009년 최씨에게 1호봉 특별승급 포상을 줬다. 논그림이 탄생하기까지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최씨의 집념이 있었기에 기발한 아이디어는 빛을 볼 수 있었다. 최씨는 2005년 일본 해외연수 도중 농업연구소에서 황색을 띠고 있는 유색벼를 보고 논그림에 도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최씨는 유색벼 종자증식을 위해 재배와 연구를 반복했다. 2007년에 초기물량보다 100배나 증가한 유색벼를 확보했다. 색상은 황색, 자주색, 검붉은색, 흰색, 녹색 등 총 다섯 가지를 갖췄다. 2006년 괴산군 발전전략 과제로 ‘유색벼를 이용한 논그림’을 제안했지만 채택되지 않았고, 2007년에는 군에 예산을 요구했지만 또다시 외면 당했다. 그러나 최씨는 개인 돈으로 육묘상자와 못자리상토를 구해 볍씨를 파종하고 육묘를 하는 등 포기하지 않았다. 농업기술센터 내에 ‘농촌사랑’이라는 군정연구 동아리까지 만들었다. 이런 노력 끝에 탄생한 논그림은 ‘유색벼를 이용한 논그림 형성방법’이라는 이름으로 2008년 특허출원됐다. 경기도 시흥시는 최근 2000만원을 괴산군에 주고 기술이전을 해갔다. 최씨는 논그림을 활용해 다양한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논그림과 주변관광지를 연계해 새로운 관광상품을 만들고, 논그림 주변에서 전국 사진촬영대회도 개최할 예정이다. 또한 도시 소비자들을 논그림 작업에 참여시키고 논그림 이름 붙이기 이벤트도 계획하고 있다. 최씨는 “올해는 토끼의 해를 맞아 토끼가 달나라에서 떡방아를 찧는 모습을 연출할 계획”이라며 “농촌도 이제는 아이디어로 승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괴산 남인우기자 niw7263@seoul.co.kr ■ ‘공공 조경연출 1인자’ 경기 수원시 녹지과 주무관 최재군 씨 평면 개념 화단 입체화… 지속 가능 생태녹지 조성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은 모두 훌륭한 조경 재료입니다.” 도시화단 조성의 달인으로 뽑힌 경기 수원시 녹지과 최재군(44·녹지7급)주무관의 꿈은 공공분야 화단연출의 1인자가 되는 것이다. 그는 꿈을 현실로 이루기 위해 1996년 임업직 공무원에 도전, 지금까지 15년째 지방 녹지 업무를 담당하며 수원시의 도시 환경을 획기적으로 변모시켰다. 특히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그가 연출한 축구공 모형 화분은 국내외 관람객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평면 개념의 화단을 입체화한 첫 시도였다. 최 주무관은 “당시까지만 해도 공공 화단연출은 88 서울올림픽 때처럼 주요도로 곳곳에 단품종의 꽃을 심는 수준에 그쳐 도시 환경과 어울리지 않았고, 시민들의 눈길도 끌지 못했다.”면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월드컵인 만큼 월드컵 열기를 높일 수 있는 소재로 축구공을 떠올렸다.”고 말했다. 최 주무관의 손길은 화단연출에서 그치지 않았다. 수원시민이 즐겨 찾는 수원천을 가꾸기 위해 2003년부터 심기 시작한 튤립이 수원천 일대를 가득 채우기 시작하면서 2007년 ‘수원천 튤립축제’로 발전했다. 별도의 사업 예산 없이 일반 조경 사업비를 활용해 개최한 튤립축제는 연인원 30만명이 찾는 대표적인 저예산 지방축제로 자리잡았다. 겨울철 시골 농수로 펌프는 최 주무관의 눈을 통해 얼음공원으로 재탄생 했다. 최 주무관은 “꽃이 살 수 없는 겨울에도 수원천 주변을 가꿔 1년 내내 주민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싶었다.”면서 “농수로 펌프 끝에 물이 얼어 있는 것을 보고 얼음공원을 만들어 보기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수원천 얼음공원은 다른 지방자치단체들이 기술을 배워가면서 주요 지자체 겨울 문화로 성장하고 있다. 공공화단 연출뿐만 아니라 상용 화분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최 주무관은 매일 화분에 물을 주는 번거로움을 줄이는 방법으로 등잔(燈盞)을 주목, 심지 급수 화분을 개발했다. 심지 급수 화분은 화분 속에 물탱크와 부직포를 이용한 심지를 설치해 식물이 원하는 양의 물을 스스로 흡수하도록 한 화분이다. 그는 이제 화단 연출을 넘어 지속가능한 생태녹지(ESSG)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지속가능한 생태녹지란 녹지 내 생태계가 선순환하는 것으로 광교신도시와 호매실지구 도시개발사업이 대표적이다. 이들 도시에는 가로수와 조경 품종 등을 다양화해 병해충 발생을 줄이고, 토양오염 없는 천연의 숲을 조성할 방침이다. 최 주무관은 “녹지라고 해서 단순히 잔디공원만을 만드는 곳이 많다.”면서 “잔디는 관리를 위해 제초제를 많이 사용하게 되고, 과도한 제초제 사용으로 녹지가 토양을 오염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설명했다. 최 주무관은 “우리나라 조경의 발전과 생태도시 건설을 위해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다.”면서 “임업직 공무원의 직분을 다한 뒤에는 후배양성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박성국기자 psk@seoul.co.kr ■‘마이더스 손’ 전남 진도군 환경미화원 전석환 씨 항아리·절구통 등으로 만든 15개 소공원 지역 명소로 전남 진도군에서 환경미화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전석환(45)씨는 ’진도의 마이더스 손’으로 불린다. 아무 쓸모 없는 폐기물도 그의 손을 거치면 예쁜 조형물이 되고, 관광명소가 되기 때문이다. 진도군은 잊혀져 가는 농촌의 애환을 되새기고 추억을 더듬는 시골 풍경을 묘사하기 위해 2007년 ‘아름다운 연도변 가꾸기’사업을 추진했다. 전씨는 이 사업을 위해 진도군의 관문인 국도 18호선을 따라 유휴지 및 버려진 땅을 골라 대나무와 항아리 등을 활용해 원두막, 마차, 장독대, 물레방아, 항아리 조형물 및 수세미 덕을 만드는 등 15개의 소공원을 조성했다. 소공원은 지역 명물 공원으로 발전돼 관광객들에게 사진 촬영과 스토리 텔링의 명소로 인기를 얻고 있다. 전문 예술가가 아니기에 전씨가 만든 조형물들은 엉성한 면도 있지만 주민들과 관광객들은 소박하고 투박한 예술성을 감미했다며 이곳을 자주 들르고 있다. 조형물로 사용했던 절구통, 항아리들은 모두 관내 주민들이 기증한 것들이었으며, 창고에 방치된 먼지투성인 항아리가 전씨의 손을 거쳐 독특한 예술 작품이 되었고 이후 ‘마이다스 손’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 같은 사실이 주민들에게 널리 알려져 항아리를 기증하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17세에 섬마을에 시집 와 바깥 뭍 구경 한번 못하고 한 평생을 산 80세 할머니는 섬에서 살면서 자신의 혼이 담겨있는 절구통과 항아리 등의 소장품을 좋은 일에 사용하라고 선뜻 내놓아 직원 모두가 감명을 받기도 했다. 전씨는 기증한 항아리 등을 수집하러 갈 때마다 만나는 주민 모두 그 물건에 사연과 애정이 스며있단 걸 느꼈다. 이 점에 착안해 기증한 주민들의 애정을 담고자 ‘희로애락이 깃든 항아리 100인상’을 만들게 되었다. 기쁘고 화나고 슬프고 즐거운 우리네 삶의 다양한 모습을 주제로 항아리에 담아냈다. 친정어머니의 유품인 항아리를 기증한 주민은 고물장수에 팔려고 했었는데 멋진 조형물로 변모하게 돼 지나갈 때마다 어머니의 따뜻한 품이 생각난다며 오히려 감사하다는 말을 하곤 한다. 2009년 희망근로 프로젝트 사업의 일환으로 1만 5000㎡ 규모의 항아리 수생식물공원이 조성되었다. 전씨는 이곳에도 그동안 쌓아온 실력을 총 결집해 물레방아, 항아리탑, 춤추는 항아리, 통나무다리 등을 만들어 전시하게 되었다. 이후 항아리 수생식물공원은 개인 블로그와 입소문을 타고 현재 진도의 숨겨진 명소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전씨는 지방자치단체들이 도로변에 수천, 수억원을 들여 랜드마크나 야간 조명 시설 등 경관사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비해 작은 비용으로, 또 주민들이 참여해 함께 만들었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전씨는 “콘크리트 바닥으로 대변되는 청소년들과 원두막의 향수를 가진 세대들, 그리고 외지인들이 진도를 ‘전통미 넘치는 소박한 시골길’로 아로새겼으면 더할 나위 없는 바람이다.”고 말했다. 진도 최종필기자 choijp@seoul.co.kr ■‘35년 한라산 지킴이’ 제주 한라산 국립공원관리부 청원경찰 신용만 씨 고산식물·풍경 등 DB화… 세계자연유산 등재 힘써 “한라산은 저의 전부입니다. 우리나라, 나아가 세계인이 사랑하는 한라산을 만드는 게 저의 평생의 꿈입니다.” 해발 1950m 남한 최고봉 한라산을 매일같이 오르 내리는 신용만(59·한라산국립공원관리부 청원경찰)씨를 두고 제주사람들은 ‘한라산 지킴이’라 부른다. 35년간 한라산국립공원에서 청원경찰로 일하면서 아마도 3만번은 한라산을 올랐다는 신씨. 그가 한라산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976년. 한라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한라산의 매력에 빠져 청원경찰로 한라산과 동거를 시작했다. 한라산은 전국의 청원경찰 근무지 가운데 기상 환경이 가장 혹독한 곳이다. 연평균 4도 이하 기온, 해발 1700m 이상 지역에서 매주 1회 이상 숙박하며 밀렵 등 불법행위를 단속하는 게 지난 35년간 신씨의 일상이었다. 신씨의 주 업무는 한라산을 훼손하는 불법행위 단속이다. 그는 매일 단속활동과 병행해 한라산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기록하기 시작했다. 훼손 실태를 고발하기위해 카메라도 자비로 구입했다. 신씨는 “훼손 실태를 정확히 알려야만 보호의식도 생기고 복구방안도 마련할 것 같아 틈틈이 한라산 훼손의 역사를 기록했습니다.”고 말한다. 신씨의 훼손지역 기록을 통해 한라산국립공원은 현재 70% 이상 훼손지 완전 복구가 추진 중이다. 한라산 자원 기록의 데이터베이스화는 신씨의 평생 역작이기도 하다. 신씨는 요즘도 매일 무거운 식물도감과 카메라를 짊어지고 한라산을 오른다. 1992년부터 노루, 고산지대 특산식물 등 2만여점의 한라산 식생자원을 혼자 정리했다. 이를 토대로 신씨는 2001년 식물분야 권위자인 고 이영노박사 함께 ’제주도 자생식물도감’으로 펴냈고 한국식물도감에도 자료를 제공했다. 계곡, 기암, 절벽, 사계절 풍광 등을 카메라에 담아 4만여점에 이르는 방대한 한라산 경관 자원도 정리했다. 한라산에서는 연평균 44명의 조난자가 발생한다. 이런 조난자를 구하는 것도 그의 일이다. 신씨는 수시로 조난자을 업고 험한 탐방로를 내려오는 바람에 관절이 좋지 않아 요즘도 병원치료를 병행하고 있다. 1988년 일본 NHK 취재 기자가 해발 1700m에서 쇼크로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자 현장 부근에 있던 신씨가 인공호흡을 실시, 소생시키고 하산해 살렸다. 이후 NHK사장이 이례적으로 직접 한라산을 찾아 감사의 뜻을 전했다. 신씨는 한라산의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등재에도 한몫했다. 유네스코의 제주 현지 조사시 한라산 전문 해설사 역할을 자처해 동행하며 성심껏 한라산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알렸다. 그는 2007년부터 사이버수사대를 조직해 인터넷 상에서 돌아다니는 한라산 불법 무단탐방 등을 조장하는 사진 등 게시물 등을 적발, 삭제를 요청하는 등 준법 산행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신씨는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제주가 세계 7대 자연경관에 선정될 수 있도록 한라산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굳건히 지켜 나가겠습니다.”고 다짐했다. 제주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주민에 의한! 주민을 위한! 행정의 달인 29인을 말하다] (4)공간개선 분야

    [주민에 의한! 주민을 위한! 행정의 달인 29인을 말하다] (4)공간개선 분야

    지방행정의 달인이 회가 거듭할수록 독자들의 반향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번에 소개하는 달인은 공간개선분야 달인들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축구형 모형 화분디자인을 개발한 달인, 색깔있는 벼로 자기 고장을 알리는 농촌지도사, 주민들의 손길이 깃든 항아리 등으로 소공원을 꾸민 달인, 한라산 지킴이 등이다. 5회인 전기기계분야 달인은 2월 7일자에 소개한다. ■ ‘공공 조경연출 1인자’ 경기 수원시 녹지과 주무관 최재군 씨 평면 개념 화단 입체화… 지속 가능 생태녹지 조성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은 모두 훌륭한 조경 재료입니다.” 도시화단 조성의 달인으로 뽑힌 경기 수원시 녹지과 최재군(44·녹지7급)주무관의 꿈은 공공분야 화단연출의 1인자가 되는 것이다. 그는 꿈을 현실로 이루기 위해 1996년 임업직 공무원에 도전, 지금까지 15년째 지방 녹지 업무를 담당하며 수원시의 도시 환경을 획기적으로 변모시켰다. 특히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그가 연출한 축구공 모형 화분은 국내외 관람객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평면 개념의 화단을 입체화한 첫 시도였다. 최 주무관은 “당시까지만 해도 공공 화단연출은 88 서울올림픽 때처럼 주요도로 곳곳에 단품종의 꽃을 심는 수준에 그쳐 도시 환경과 어울리지 않았고, 시민들의 눈길도 끌지 못했다.”면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월드컵인 만큼 월드컵 열기를 높일 수 있는 소재로 축구공을 떠올렸다.”고 말했다. 최 주무관의 손길은 화단연출에서 그치지 않았다. 수원시민이 즐겨 찾는 수원천을 가꾸기 위해 2003년부터 심기 시작한 튤립이 수원천 일대를 가득 채우기 시작하면서 2007년 ‘수원천 튤립축제’로 발전했다. 별도의 사업 예산 없이 일반 조경 사업비를 활용해 개최한 튤립축제는 연인원 30만명이 찾는 대표적인 저예산 지방축제로 자리잡았다. 겨울철 시골 농수로 펌프는 최 주무관의 눈을 통해 얼음공원으로 재탄생 했다. 최 주무관은 “꽃이 살 수 없는 겨울에도 수원천 주변을 가꿔 1년 내내 주민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싶었다.”면서 “농수로 펌프 끝에 물이 얼어 있는 것을 보고 얼음공원을 만들어 보기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수원천 얼음공원은 다른 지방자치단체들이 기술을 배워가면서 주요 지자체 겨울 문화로 성장하고 있다. 공공화단 연출뿐만 아니라 상용 화분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최 주무관은 매일 화분에 물을 주는 번거로움을 줄이는 방법으로 등잔(燈盞)을 주목, 심지 급수 화분을 개발했다. 심지 급수 화분은 화분 속에 물탱크와 부직포를 이용한 심지를 설치해 식물이 원하는 양의 물을 스스로 흡수하도록 한 화분이다. 그는 이제 화단 연출을 넘어 지속가능한 생태녹지(ESSG)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지속가능한 생태녹지란 녹지 내 생태계가 선순환하는 것으로 광교신도시와 호매실지구 도시개발사업이 대표적이다. 이들 도시에는 가로수와 조경 품종 등을 다양화해 병해충 발생을 줄이고, 토양오염 없는 천연의 숲을 조성할 방침이다. 최 주무관은 “녹지라고 해서 단순히 잔디공원만을 만드는 곳이 많다.”면서 “잔디는 관리를 위해 제초제를 많이 사용하게 되고, 과도한 제초제 사용으로 녹지가 토양을 오염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설명했다. 최 주무관은 “우리나라 조경의 발전과 생태도시 건설을 위해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다.”면서 “임업직 공무원의 직분을 다한 뒤에는 후배양성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박성국기자 psk@seoul.co.kr ■ ‘발상의 전환자’ 충북 괴산군 농업기술센터 농촌지도사 최병열 씨 유색벼로 그린 논그림 찬사… 올 달나라 토끼 도전 “발상의 전환이 충북 괴산군을 전국에 알렸습니다.” 충북 괴산군 농업기술센터 최병열(46) 농촌지도사는 유색벼를 활용한 논그림으로 공간구조 개선분야 ‘지방행정의 달인’으로 선정됐다. 최씨가 전국에서 처음으로 세가지 유색벼(황색, 자주색, 녹색)를 활용해 논에 그림을 그린 것은 2008년 4월이다. 2200만원을 들여 감물면 이담뜰의 논 2.3ha를 임대해 가로 100m, 세로 150m 크기의 상모돌리기 그림을 연출했다. 바닥을 평탄하게 만든 논을 가로·세로 1m 간격으로 세분화해 석회로 밑그림을 그리고 20여명이 투입돼 모내기까지 하는 데 걸린 시간은 총 15일. 이런 과정을 거쳐 거대한 논그림이 완성되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괴산에 유색의 ‘미스터리 서클’이 나타났다며 국내 언론에서 앞다퉈 취재했고 일본 농업인 신문에도 보도됐다. 초등학교 3학년 교과서를 비롯해 ‘농경과 원예’, ‘그린매거진’, ‘청정 충북농업’, ‘새농사’ 등 각종 농업책자에도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논그림은 연간 3만 5000여명이 다녀가는 괴산의 관광명소가 됐다. 숭실대 언론홍보학과 김민기 교수는 논그림의 홍보가치를 2200억원으로 평가했다. 군은 개청이래 최대 홍보효과를 가져왔다며 2009년 최씨에게 1호봉 특별승급 포상을 줬다. 논그림이 탄생하기까지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최씨의 집념이 있었기에 기발한 아이디어는 빛을 볼 수 있었다. 최씨는 2005년 일본 해외연수 도중 농업연구소에서 황색을 띠고 있는 유색벼를 보고 논그림에 도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최씨는 유색벼 종자증식을 위해 재배와 연구를 반복했다. 2007년에 초기물량보다 100배나 증가한 유색벼를 확보했다. 색상은 황색, 자주색, 검붉은색, 흰색, 녹색 등 총 다섯 가지를 갖췄다. 2006년 괴산군 발전전략 과제로 ‘유색벼를 이용한 논그림’을 제안했지만 채택되지 않았고, 2007년에는 군에 예산을 요구했지만 또다시 외면 당했다. 그러나 최씨는 개인 돈으로 육묘상자와 못자리상토를 구해 볍씨를 파종하고 육묘를 하는 등 포기하지 않았다. 농업기술센터 내에 ‘농촌사랑’이라는 군정연구 동아리까지 만들었다. 이런 노력 끝에 탄생한 논그림은 ‘유색벼를 이용한 논그림 형성방법’이라는 이름으로 2008년 특허출원됐다. 경기도 시흥시는 최근 2000만원을 괴산군에 주고 기술이전을 해갔다. 최씨는 논그림을 활용해 다양한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논그림과 주변관광지를 연계해 새로운 관광상품을 만들고, 논그림 주변에서 전국 사진촬영대회도 개최할 예정이다. 또한 도시 소비자들을 논그림 작업에 참여시키고 논그림 이름 붙이기 이벤트도 계획하고 있다. 최씨는 “올해는 토끼의 해를 맞아 토끼가 달나라에서 떡방아를 찧는 모습을 연출할 계획”이라며 “농촌도 이제는 아이디어로 승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괴산 남인우기자 niw7263@seoul.co.kr ■ ‘마이더스 손’ 전남 진도군 환경미화원 전석환 씨 항아리·절구통 등으로 만든 15개 소공원 지역 명소로 전남 진도군에서 환경미화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전석환(45)씨는 ’진도의 마이더스 손’으로 불린다. 아무 쓸모 없는 폐기물도 그의 손을 거치면 예쁜 조형물이 되고, 관광명소가 되기 때문이다. 진도군은 잊혀져 가는 농촌의 애환을 되새기고 추억을 더듬는 시골 풍경을 묘사하기 위해 2007년 ‘아름다운 연도변 가꾸기’사업을 추진했다. 전씨는 이 사업을 위해 진도군의 관문인 국도 18호선을 따라 유휴지 및 버려진 땅을 골라 대나무와 항아리 등을 활용해 원두막, 마차, 장독대, 물레방아, 항아리 조형물 및 수세미 덕을 만드는 등 15개의 소공원을 조성했다. 소공원은 지역 명물 공원으로 발전돼 관광객들에게 사진 촬영과 스토리 텔링의 명소로 인기를 얻고 있다. 전문 예술가가 아니기에 전씨가 만든 조형물들은 엉성한 면도 있지만 주민들과 관광객들은 소박하고 투박한 예술성을 감미했다며 이곳을 자주 들르고 있다. 조형물로 사용했던 절구통, 항아리들은 모두 관내 주민들이 기증한 것들이었으며, 창고에 방치된 먼지투성인 항아리가 전씨의 손을 거쳐 독특한 예술 작품이 되었고 이후 ‘마이다스 손’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 같은 사실이 주민들에게 널리 알려져 항아리를 기증하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17세에 섬마을에 시집 와 바깥 뭍 구경 한번 못하고 한 평생을 산 80세 할머니는 섬에서 살면서 자신의 혼이 담겨있는 절구통과 항아리 등의 소장품을 좋은 일에 사용하라고 선뜻 내놓아 직원 모두가 감명을 받기도 했다. 전씨는 기증한 항아리 등을 수집하러 갈 때마다 만나는 주민 모두 그 물건에 사연과 애정이 스며있단 걸 느꼈다. 이 점에 착안해 기증한 주민들의 애정을 담고자 ‘희로애락이 깃든 항아리 100인상’을 만들게 되었다. 기쁘고 화나고 슬프고 즐거운 우리네 삶의 다양한 모습을 주제로 항아리에 담아냈다. 친정어머니의 유품인 항아리를 기증한 주민은 고물장수에 팔려고 했었는데 멋진 조형물로 변모하게 돼 지나갈 때마다 어머니의 따뜻한 품이 생각난다며 오히려 감사하다는 말을 하곤 한다. 2009년 희망근로 프로젝트 사업의 하나로 1만 5000㎡ 규모의 항아리 수생식물공원이 조성되었다. 전씨는 이곳에도 그동안 쌓아온 실력을 총 결집해 물레방아, 항아리탑, 춤추는 항아리, 통나무다리 등을 만들어 전시하게 되었다. 이후 항아리 수생식물공원은 개인 블로그와 입소문을 타고 현재 진도의 숨겨진 명소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전씨는 지방자치단체들이 도로변에 수천만원이나, 수억원을 들여 랜드마크나 야간 조명 시설 등 경관사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비해 작은 비용으로, 또 주민들이 참여해 함께 만들었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전씨는 “콘크리트 바닥으로 대변되는 청소년들과 원두막의 향수를 가진 세대들, 그리고 외지인들이 진도를 ‘전통미 넘치는 소박한 시골길’로 아로새겼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고 말했다. 진도 최종필기자 choijp@seoul.co.kr ■ ‘35년 한라산 지킴이’ 제주 한라산 국립공원관리부 청원경찰 신용만 씨 고산식물·풍경 등 DB화… 세계자연유산 등재 힘써 “한라산은 저의 전부입니다. 우리나라, 나아가 세계인이 사랑하는 한라산을 만드는 게 저의 평생의 꿈입니다.” 해발 1950m 남한 최고봉 한라산을 매일같이 오르 내리는 신용만(59·한라산국립공원관리부 청원경찰)씨를 두고 제주사람들은 ‘한라산 지킴이’라 부른다. 35년간 한라산국립공원에서 청원경찰로 일하면서 아마도 3만번은 한라산을 올랐다는 신씨. 그가 한라산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976년. 한라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한라산의 매력에 빠져 청원경찰로 한라산과 동거를 시작했다. 한라산은 전국의 청원경찰 근무지 가운데 기상 환경이 가장 혹독한 곳이다. 연평균 4도 이하 기온, 해발 1700m 이상 지역에서 매주 1회 이상 숙박하며 밀렵 등 불법행위를 단속하는 게 지난 35년간 신씨의 일상이었다. 신씨의 주 업무는 한라산을 훼손하는 불법행위 단속이다. 그는 매일 단속활동과 병행해 한라산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기록하기 시작했다. 훼손 실태를 고발하기위해 카메라도 자비로 구입했다. 신씨는 “훼손 실태를 정확히 알려야만 보호의식도 생기고 복구방안도 마련할 것 같아 틈틈이 한라산 훼손의 역사를 기록했다.”고 말한다. 신씨의 훼손지역 기록을 통해 한라산국립공원은 현재 70% 이상 훼손지 완전 복구가 추진 중이다. 한라산 자원 기록의 데이터베이스화는 신씨의 평생 역작이기도 하다. 신씨는 요즘도 매일 무거운 식물도감과 카메라를 짊어지고 한라산을 오른다. 1992년부터 노루, 고산지대 특산식물 등 2만여점의 한라산 식생자원을 혼자 정리했다. 이를 토대로 신씨는 2001년 식물분야 권위자인 고 이영노박사와 함께 ’제주도 자생식물도감’으로 펴냈고 한국식물도감에도 자료를 제공했다. 계곡, 기암, 절벽, 사계절 풍광 등을 카메라에 담아 4만여점에 이르는 방대한 한라산 경관 자원도 정리했다. 한라산에서는 연평균 44명의 조난자가 발생한다. 이런 조난자를 구하는 것도 그의 일이다. 신씨는 수시로 조난자를 업고 험한 탐방로를 내려오는 바람에 관절이 좋지 않아 요즘도 병원치료를 병행하고 있다. 1988년 일본 NHK 취재 기자가 해발 1700m에서 쇼크로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자 현장 부근에 있던 신씨가 인공호흡을 실시, 소생시키고 하산해 살렸다. 이후 NHK사장이 이례적으로 직접 한라산을 찾아 감사의 뜻을 전했다. 신씨는 한라산의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등재에도 한몫했다. 유네스코의 제주 현지 조사시 한라산 전문 해설사 역할을 자처해 동행하며 성심껏 한라산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알렸다. 그는 2007년부터 사이버수사대를 조직해 인터넷 상에서 한라산 불법 무단탐방을 조장하는 사진 등 게시물을 적발, 삭제를 요청하는 등 준법 산행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신씨는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제주가 세계 7대 자연경관에 선정될 수 있도록 한라산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굳건히 지켜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제주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전통·퓨전 한복 디자이너가 말하는 설빔 트렌드

    전통·퓨전 한복 디자이너가 말하는 설빔 트렌드

    우리나라 여성의 92%가 갖고 있지만 지난 일년 동안 한번도 안 입은 옷은 뭘까. 바로 한복이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지난달 20~30대 여성 64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한복에도 유행이 있는 걸까. 60년간 한복지를 만든 집에 시집 가, 자연스럽게 한복 디자이너가 된 이현숙(오른쪽) 디자이너는 전통 한복을 충실하게 재연한다. 젊은 남성 한복 디자이너인 이서윤(왼쪽)씨는 한국 무용을 하다가 군 복무 중 바느질의 매력에 빠졌고, 이제 퓨전 한복의 대표주자로 자리 잡았다. 전통 한복과 퓨전 한복을 대표하는 두 디자이너에게 설을 앞두고 최신 한복 경향에 대해 물었다. 이현숙씨는 “한복에도 유행이 있고 지금도 변화가 진행 중”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한복의 유행은 크게 색상과 소재, 형태를 들 수 있는데 저고리 길이, 깃과 동정의 너비, 치마 길이, 장식 기법 등이 시대에 따라 바뀐다.”고 설명했다. 한복을 가장 많이 마련하는 때는 명절이 아닌 결혼이다. 혼주가 입는 한복 색도 유행을 탄다. 시어머니는 푸른 계열, 친정어머니는 주로 분홍 계열 한복을 입었으나 최근 들어서는 다양한 색상이 등장하고 있다. 치마와 저고리를 다른 색으로 입는 경향도 두드러진다. 천연염색에서 볼 수 있는 치자색, 대황색과 잇꽃으로 물들인 부드러운 분홍색 등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색상이 대세라고 이현숙씨는 귀띔했다. 서양의 레이어드 룩(겹쳐 입기)과 비슷한 유행이 한복에도 있다. 얇게 비치는 옷감으로 만든 홑(한겹)옷을 겹쳐 입으면 안에 입은 옷의 색상이 보색으로 은은하게 비쳐 나와 색상의 묘미를 살려준다. 이현숙씨는 “명절 특집 프로그램이나 드라마에서 연예인들이 잘못된 한복을 입고 나오면 이를 유행으로 착각하는데 이는 안타까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머리가 제대로 나지 않은 어린 아이가 하는 배씨 댕기가 중년부인이나 왕비의 머리에 버젓이 얹혀 있다. 성인 남자들이 간편복으로만 입던 배자(조끼)를 입고 어른들께 세배를 올리기도 한다. 이서윤씨는 “한복은 서양 패션과 달리 유행의 전환이 빠르지는 않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한복의 세계화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퓨전 사극의 영향으로 퓨전 한복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고 소개했다. 새틴이나 면처럼 양장에서 주로 쓰는 소재를 한복의 팔이나 몸통 등 일부에 쓰는 식이다. 지난해 가을 미국 뉴욕 패션 위크에서는 디자이너 캐롤리나 헤레라가 한복의 영향을 받은 드레스를 대거 선보여 큰 화제를 낳기도 했다. 헤레라의 웨딩드레스는 ‘케네디 가문’의 여성들이 주로 입었고 재클린 오나시스(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 부인)도 유명한 고객이었다. 헤레라는 동정과 고름을 단 원피스, 갓 모양의 모자에 드레스를 입은 스타일을 선보여 ‘한복의 세계화’란 동기를 부여했다. 이서윤씨는 “한복은 얼마 전까지 전통적인 수나 금박으로 화려함을 부각시켰지만 최근에는 여백의 미를 활용하거나 자연적이고 소박한 느낌을 주는 문양 장식을 주로 한다.”며 “이는 세계적인 유행을 반영한 것으로 앞으로 한복에 현대적 요소가 가미되면 젊은 층과 외국인에게도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강석우 총리실 기획관 시인 등단

    강석우 국무총리실 정책홍보기획관이 시집 ‘해풍, 일어나다’를 내고 등단했다. 행정고시 32회인 강 기획관은 경남 통영 출생으로 진주고와 단국대, 미국 시러큐스대 맥스웰스쿨(행정학 석사)을 졸업했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안식년 틈타 지리산 산자락서 삶을 돌아보다

    서울서 지내는 이라면 바닷가 항구도시에서의 삶은 그 자체로 충분히 부러움의 대상이다. 하지만 정갈하고 과묵하게 시(詩) 쓰는 선비에게는 시의 서정을 다듬기에 그마저도 번잡스러웠나 보다. 허형만(66) 시인이 내놓은 열세 번째 시집 ‘그늘이라는 말’(시안 펴냄)은 목포대 국문과 교수이면서 안식년을 틈타 구순 어미의 품으로, 지리산 산자락으로 파고들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인 시어(詩語)로 풀어낸다. 시의 시선은 땅으로, 낮은 곳으로, 작은 것으로, 침묵으로 향한다. 39년째 접어든 시력(詩歷)이 궁극적으로 머무는 지점은 자기 자신이다. 시편 ‘절하다’에서 어머니가 밭에서 캐낸 ‘줄줄이 딸려 나와 세상을 밝히는/ 저 붉은 고구마’에게도 두손 모아 절하고, ‘우루루 쏟아지는’ 어머니의 독경 소리에도 절하는 시인의 섬김의 뜻이나, ‘야생의 바람을 껴안고 잠든 강을/ 이리 무심히 바라보고 있느니’(‘겨울 노래’ 중)라며 자연으로 침잠함은 한결같은 성찰의 몸짓이다. 지리산으로 들어선 이유 또한 시로 설명했다. ‘…들어서는 안될 소리 듣고 말았으니/…/아예 귀 자를 수밖에, 그래 자른 귀 염(殮)하여/ 솔바람소리 맑은 양지 바른 곳에 묻기 위해’(‘귀를 염하다’ 중)였다고 부끄러이 고백한다. 연작시 ‘산거’(山居)에 이르러서는 산중에 묻힌 여유로움과 기쁨,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발견의 정수가 느껴진다. ‘말 잊은 지 이미 오래’인지라 ‘졸참나무 숨소리도 들을 수 있게 되었다’고, ‘갓밝이 닭울녘/ 동녘 하늘로 아스라이 번지는/ 저 빛살 참 곰살갑다’고 소박하게 노래한다. 문학평론가 유성호 한양대 국문과 교수는 발문을 통해 “허형만 시인은 우리 시단의 세 흐름인 서정, 실험, 참여 가운데 서정의 적자로 꼽힌다.”면서 “이번 시집에서 선보인 서정의 간단 없는 심화는 자기 성찰과 타자 발견의 시학을 두드러지게 보여준다.”고 평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한국의 어머니가 꿈속에서 독일어로…”

    “한국의 어머니가 꿈속에서 독일어로…”

    “모어(母語)는 잊혀지는 게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언어의 현장과 떨어져 있어 스스로 자기 운동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시인 허수경(47)이 지난 19일 서울 서교동 한 음식점에서 기자들과 만났다. 꼬박 10년 만의 고국 방문이다. 문학동네 시인선집을 통해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을 낸 데 이어 자전적 성장소설 ‘아틀란티스야, 잘 가’를 조만간 내놓는다. ●독일어는 일상언어… 한국어는 어머니의 언어 1987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한 허수경은 1992년 독일로 건너가 뮌스터대학에서 고대 근동고고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1년 4월 잠시 들른 이후 다시 10년이 흘렀다. 그 사이 2005년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을 내놓았고, 6년 만에 다섯 번째 시집으로 돌아왔다. 조국을 떠난 시인은 고향의 안락함을 포기한 대가로 모국어를 사용해 디아스포라(離散)로서 인류 보편의 사유와 시상에 다다를 수 있게 됐다. 그는 ‘빌어먹을’을 통해 고스란히 이를 보여준다. 허수경은 “낯설 줄 알았는데 다들 반갑게 맞아줘서 집에 돌아온 것 같다.”고 경상도 사투리가 여전한 말투로 환국의 감회를 밝혔다. 그의 고향은 경남 진주다. 파격적 형식의 이번 시집에 대해서는 “늘 내 시가 수다스러운 게 마음에 걸렸는데 여기서 구해줬다.”며 환하게 웃었다. 그에게 독일어는 생활 속 일상 언어다. 또한 수메르어와 아카드(메소포타미아 고대어)는 고대의 흔적들과 대화하기 위한 학문의 언어다. 하지만 한국어는 허수경을 비로소 시인이게 하는 어머니의 언어다. 그러나 그가 어느날 꿈속에서 만난 어머니 얘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한국에 살고 있는 어머니는 독일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데, 어느 날 내 꿈에 나타나 독일어로 말하고 있었지요.” ●젊은 후배들 없는 길 가는 사람되길… 판타지와 같은 상황까지 담아낼 수 있는 문학동네 시인선에 대한 칭찬이었건만 그날 새벽녘 문득 잠자리에서 깨어나 허탈해했을 허수경의 모습이 떠올려진다. 사무쳤을 그리움과 먹먹함도 함께 느껴지니 짠함이 앞선다.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진짜 있는 길인지, 없는 길인지 스스로 묻곤 합니다. 하지만 이것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죠. 젊은 후배 시인들이 없는 길을 가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불현듯 시단에 등장해 정련된 민족과 민중의 정서를 보여준 뒤 홀연히 독일로 떠난 시인이 젊은 후배들에게 건네는 당부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詩 담는 그릇 확 바뀌었네

    詩 담는 그릇 확 바뀌었네

    시(詩)를 담는 그릇을 깨뜨렸다. 그리고 아주 새로운 그릇을 빚어냈다. 겉에는 파랑, 빨강, 검정의 ‘은은한 원색’을 곱게 칠했다. 모양도 눈에 설다. 수십년 동안 모두가 그러려니 했던 시의 그릇을 완전히 바꿔냈다. 두배 가까이 커졌고, 세로를 가로로 비틀었다. 그 결과? 시는 해방됐고, 시의 새로운 도전은 시작됐다. 출판사 문학동네가 2년 남짓 준비 끝에 최근 선보인 시인선집은 한국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겠다는 야심찬 기획 의도답게 시집의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파격을 도모했다. 첫 걸음을 뗀 1차분 시집은 3권이다. 최승호의 ‘아메바’, 허수경의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송재학의 ‘내간체를 얻다’이다. 세권 모두 여러 형식의 실험을 도입하고 있다. 판형의 혁신을 시도한 특별판은 물론, 보편적인 일반판도 함께 펴냈다. 예컨대 최승호는 바뀐 형식의 시집에서 한 페이지를 네개의 공간으로 나누고 한 편의 시를 네개의 새로운 이미지로 변주하는 자체 확장의 실험을 단행한다. 허수경은 ‘카라쿨양의 에세이’ 같은 시편에서 무려 9쪽에 이르는 분량으로 ‘에세이 같은 시’를 썼다. 일반판 시집으로는 13쪽이다. 희곡 형식의 시 ‘내가 쓰고 싶었던 시 제목, 의자’도 신선하게 다가온다. 최근 시의 흐름이 단형 서정시 형태가 아닌 서사화, 산문화를 띠는 형태로 나아가고 있지만 기존의 판형으로는 그저 답답한 틀 안에 가둬지는 인상을 준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새로운 시집의 판형이 그저 산문시에만 적합한 것은 아니다. 송재학의 ‘내간체를’을 보면 선명한 이미지를 새겨낸 길지 않은 시편이다. 오히려 절대적으로 넓은 여백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했다. 이는 새로운 ‘그릇’이 전통적 서정시와 산문시에 모두 어울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새 판형의 시집을 받아본 시인들도 흡족해하며 후한 평가를 내렸다. 최승호는 “도전과 실험을 가능하게 한다는 새 판형의 잠재성을 직접 확인했다.”면서 “시의 배치를 통해 차별성을 선명히 보여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아메바’는 최승호의 열세 번째 시집이면서 그동안 내놓은 12권의 시집에서 골라낸 58편 시의 이미지들로 재구성됐다. 기존의 시편 속 이미지가 새롭게 분열하고 증식 확산하며 새로운 생명을 얻어가는 식이다. 허수경 역시 “산문성이 강조되는 시대에 시집(의 형식)이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면서 “전 지구적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시의 메시지와 산문화한 서정성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 같다.”고 만족감을 나타냈다. 문학동네 시인선은 올해 20~30권 정도 출간될 예정이다. 중진과 신인들을 고르게 참여시킨다는 복안이다. 김민정 문학동네 편집자는 “100여명의 시인들을 직접 찾아갔고, 표지 시안만 100개 넘게 놓고 고민했다.”면서 “새로운 실험이 가능할 것 같다는 시인들의 반응을 보고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문학동네 시인선을 기획한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단순히 형식적 차별성을 선언하듯 과시하기보다는 실제로 차별할 수 있는 장(場)을 여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면서 “젊은 시인들과 노련한 시인들이 새로운 판형에서 어떤 실험을 할지 기획자 입장에서도 몹시 궁금하고 기대가 크다.”고 털어놓았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최중경 지경부장관 후보자 인사 청문회

    최중경 지경부장관 후보자 인사 청문회

    “까도 까도 의혹이 남는 ‘까도남’이다.”(민주당 강창일 의원) vs “부동산 투기는 없었다.”(최중경 후보자) 18일 국회 지식경제위 인사청문회에서 야당 의원들은 최중경 지식경제부장관 후보자를 ‘까도남’에 빗대며 투기 의혹을 집중 추궁했다. 반면 최 후보자는 “투기는 없었다.”고 맞섰다. 하지만 부동산 매입 경위와 자금 출처 등에 대해선 명확한 해명을 내놓지 못했다. 최 후보자는 여당 의원들마저 투기 의혹을 캐묻자 “(부동산 차액의)사회환원 문제를 숙고해 보겠다.”, “(역삼동 오피스텔 탈세 의혹과 관련) 깊이 반성한다.”며 한 걸음 물러섰다. 민주당은 “고위공직자로서 신뢰성의 바닥을 보였다.”며 부적격 의견을 모았고, 한나라당은 “충분한 역량을 가진 인물로 공직수행에 큰 문제가 없다.”고 맞섰다. 국회 지경위는 19일 전체회의를 열고 인사청문 경과보고서를 채택한다. 여야 의원들은 최 후보자의 부인과 처가가 1988년 공동 매입한 충북 청원군 임야 1만 6562㎡와 대전시 유성구 복용동 168-1 밭 850㎡, 장모에게서 상속받은 복용동 168-8 일대 농가와 대지 1276m² 등의 매입목적을 검증하는 데 집중했다. 청원군 임야는 취득 3개월 만에 토지수용으로 6배의 수익을 냈고, 유성구 토지는 가격이 15배나 올랐다. 최 후보자는 “청원군 임야는 처가의 선산용으로, 유성구 토지는 주말농장용으로 매입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민주당 노영민 의원은 “시집간 딸 명의로 선산을 사는 게 상식에 맞느냐.”고 따졌다. 한나라당 이상권 의원도 “1988년 32살 사무관이던 후보자의 월급이 40만원 미만이었을 텐데 그 땅들을 절대 살 수 없었을 것”이라면서 “솔직히 장모가 (투기)했다고 시인하라.”고 꼬집었다. 이에 대해 최 후보자는 “당시 처남 셋이 군복무 중이거나 학생이었다. 아내의 급여와 축의금을 관리하던 장모가 알아서 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민주당 조정식 의원은 유성구 농지 매입과 관련, “서울 청담동에 사는 부인과 장인이 158㎞나 떨어진 곳에 주말농장을 두고는 실제 경작도 안 했다.”면서 “비자경농가의 농지소유를 엄격히 제한한 농지개혁법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최 후보자는 “투기가 아니다.”면서 “청와대에서 이미 충분히 스크린(검증)했다.”고 항변했다. 다만 최 후보자는 한나라당 정태근 의원이 “두 땅은 투기 성격이 분명하다. 투기로 불린 돈에 대해선 사회 환원을 하는 게 어떠냐.”고 묻자 “심사숙고해 보겠다.”고 말했다. 또 부인이 오피스텔 임대업을 하며 부가세 600여만원을 탈루한 사실에 대해 “복잡한 세무제도로 세무당국조차 몰랐던 것이고, 청와대 검증에서도 체크가 안 됐다.”면서도 “결론적으로는 깊이 반성한다.”고 말했다. 이어 “청문회 전 강남세무서에 징세소멸시효가 지난 것까지 포함, 총 793만원(의 세금)을 다 냈다.”고 설명했다. 여야 의원들은 정책검증에도 공을 들였다. 미래희망연대 정영희 의원은 “최 후보자가 기획재정부 2차관 때 고환율 정책을 고집해 통화옵션 상품인 ‘키코’(KIKO)에 가입한 중소기업의 피해를 키웠다.”고 지적했다. 최 후보자는 “키코 피해는 리먼브러더스 사태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선진국 진입을 위해 대·중소기업의 동반성장 방안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최 후보자는 최근 유가 경직성 논란에 대해선 “유류세(탄력적용)나 유통마진 문제를 취임하면 자세히 들여다보겠다.”고 말했다. 그는 공적자금이 투입된 대우조선해양의 ‘국민주’ 전환 방안에 대해선 “소유구조와 산업적 효과 등을 고려해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성규·허백윤기자 coo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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