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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8부터 12·3 계엄까지… 민주주의적 감정은 어떻게 문학과 접속하나

    5·18부터 12·3 계엄까지… 민주주의적 감정은 어떻게 문학과 접속하나

    지난해 12·3 비상계엄부터 올해 4월 대통령 파면, 6월 새 정부 출범에 이르기까지 반년은 우리 국민이 그 어느 때보다 혼란을 겪은 시기였지만 우리 민주주의의 놀라운 회복력이 입증된 시간이기도 했다. 계간지 ‘창작과비평’ 2025년 여름호(208호)는 ‘민주주의적 감정과 새로운 문학’이라는 주제의 특집을 통해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실천을 만들어 내는 민주주의적 감정이 어떻게 문학과 접속하고 새로움을 일굴 수 있는지, 그 감정의 서사학을 분석했다. 문학평론가인 황정아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는 김금희의 장편소설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통해 지금 이 순간의 책임, 자신의 ‘차례’에 대한 시민들의 각성이 갖는 역사적 깊이와 감정의 역할, 의미에 관해 이야기한다. 지난해 비상계엄은 맥락 없이 내려진 것이었지만 선포된 순간 수많은 이들이 5·18 광주를 떠올렸고, 더 거슬러 올라가 박정희 시대의 계엄을 기억했다. 계엄군이 광주 시민에게 가했던 폭력이 이제 우리에게 닥쳐오고, 광주 시민이 계엄군에 맞서 보여 준 저항을 이제 내가 할 차례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황 교수는 말했다. 황 교수는 “역사적 인식이라는 개념처럼 역사적 감정이라는 개념도 있다면 ‘내 차례’라는 느낌이 바로 그것”이라고 했다. 그는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새로운 역사’란 역사의 쓰라림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수리의 역사임을 보여 준다”며 “세상 어딘가에 우리가 경험하는 지금이 아닌 시간이 흐르고, 많은 이들이 각자 다른 시간을 거느리고 있음을 깨닫는 때야말로 역사와 제대로 만나는 순간이며 ‘내 차례’임을 인식하게 해 준다”고 덧붙였다. 황규관 시인은 ‘‘니’와 인간의 공동체’라는 글에서 “시는 인간의 감정을 일차적인 출발지이자 도착지로 하는 장르인바 ‘사회적 감정’의 출렁임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며 “시로 인한 ‘감정의 공동체’는 전체주의적 강압이 만든 무차별적 동일성이 아니라 비추는 빛에 따라 서로 다르게 반사되는 빛이 한데 모여 통일된 색조를 띠는 것 같은 이치”라고 말한다. 황 시인은 김해자의 여섯 번째 시집 ‘니들의 시간’ 속 시 언어가 가진 공동 감정을 포착하고, 우리가 잃어버린 타인과 세계와의 연결을 시에서 되살리고 있음을 짚는다. 시에는 단수의 목소리라 하더라도 개인의 감정은 집단적 관계를 통해 형성되기 때문에 그 목소리에 복수의 감정이 들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황 시인은 “시에 가르침의 임무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보다 먼저 시가 ‘니’와 한몸이 돼야 할지 모른다”며 “이렇게 나온 작품이 현실의 집단 감정에 동요를 일으키면서… 창조적 순간을 불러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기억은 우리를 이어주고, 다음 세대로 흐르는 것”

    “기억은 우리를 이어주고, 다음 세대로 흐르는 것”

    “기억이라는 게 불확실하고 모호하죠. 과거의 한 시점을 떠올리는 것인데, 그리 단편적이지 않아요. 여러 경험이 침범하고 간섭하죠. 그런 중층적인 기억의 성질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세 번째 시집에 이르러 하고자 하는 말이 분명해졌다. 최근 출간된 시인 김미령(50)의 ‘제너레이션’(민음사)은 ‘기억’에 관한 시집이다. 앞선 두 시집 ‘파도의 새로운 양상’과 ‘우리가 동시에 여기 있다는 소문’은 일종의 ‘자기 탐색’이었다. 이제는 뚜렷한 방향을 가지게 됐단다. 200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해 올해로 20년 차를 맞은 중견 시인이다. 14일 서울 강남구에 있는 민음사 사옥에서 그를 만났다. “자기 탐색은 ‘자기혐오’에서 시작하죠. 누구에게나 그런 기질이 조금씩 있잖아요. 그렇게 정체성을 찾는 거죠. ‘나’에게서 벗어나려는 의도도 있었어요. 나를 지우려는 강박이 있었는데, 거기서 자유로워지니 ‘내가 쓰고 싶은 문학’이 무엇인지 보였던 것 같아요.” 20년간 세 권의 시집. 문단에 정해진 규칙이 있는 건 아니지만 과작(寡作)인 것은 분명하다. 등단 후 첫 시집이 나오기까지 12년이 걸렸다. 2017년, 2021년 그리고 2025년, 꼭 4년마다 한 권의 시집을 엮는다. 시인은 “자기가 바라보는 세계관을 비롯해 시인의 ‘몸’이 바뀌는 시간이 필요한데, 그것에 최소 3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제너레이션’. 한국어로는 ‘세대’라고 번역된다. 하지만 ‘세대’라는 말 안에도 다양한 의미가 있다. ‘젊은 세대’, ‘한 세대 전의 이야기’, ‘3세대 컴퓨터’. 모두 ‘제너레이션’이라는 말로 포괄할 수 있다. ‘제너레이션’이라는 시는 시집에 총 네 번 등장한다. 다른 시가 그렇듯 역시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이건 이제부터 새로 시작되는 이야기지만 낯익은 이야기이고/그도 모르게 그에게 전해지던 유구한 슬픔이자/언제나 닿고 싶었지만 끝내 이르지 못한 그 자신 안의 흐릿한 풍경인지도 모른다고”(‘제너레이션’ 부분·15쪽) 그래서 기억이란 무엇인가. 왜 우리에게 기억이 필요한가. “기억은 결국 내 기억과 공동체의 기억이 이어져 있다는 연결감으로도 확장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내 이전 세대에서 전해져 내 이후 세대로 흐르는 것이기도 하죠. 기억은 철학과 문학의 오랜 관심거리였는데요. 가상현실이 범람하는 가운데서도 자기 그리고 공동체의 뿌리에 대한 기억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근본이라고 생각합니다.”
  • 한국男·일본女 부부, 1년 새 40% 늘었다

    한국男·일본女 부부, 1년 새 40% 늘었다

    한국인 남성과 일본인 여성이 결혼하는 사례가 빠르게 늘고 있다. 과거 ‘한국인 여성-일본인 남성’ 중심이었던 한일 국제결혼의 흐름이 바뀐 것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이런 변화를 조명하며 그 배경에 한류 문화의 확산과 양국의 소득 격차 축소가 있다고 13일 보도했다. 한국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인 남성과 일본인 여성 간 결혼은 1176건으로 전년보다 40% 급증했다. 10년 사이 최다 기록이다. 반면 일본인 남성과 한국인 여성의 결혼은 147건에 그쳐 10년 전과 비교하면 5분의1 수준으로 감소했다. 닛케이는 “1970~1980년대에는 일본의 경제력과 농촌 노동력 부족으로 한국 여성들이 일본으로 시집을 갔다면 지금은 상황이 정반대”라고 전했다. 이어 “한국에 관심을 가진 여성이 결혼을 위해 이주하는 사례가 증가한 것은 2010년대 중반 이후”라며 “그 사이 1인당 명목 국내총생산(GDP)에서 한국이 일본을 추월해 남성 급여는 동등해졌다”고 덧붙였다. 2004년 일본에서 방영된 한국 드라마 ‘겨울연가’ 이후 한류가 일본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며 한국에 호감을 갖는 일본 여성도 크게 늘었다. 2000년 이후 결혼한 한일 커플 300쌍을 조사한 오이카와 히로에 홍익대 교수는 닛케이에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 여성 중 30~40%는 ‘삶의 보람’과 ‘한국에 대한 동경’을 이유로 꼽는다”고 분석했다. 이런 흐름은 방송에서도 포착된다. 지난해에는 한국 남성과 일본 여성 간의 연애를 다룬 예능 프로그램 ‘한일 로맨스 혼전연애’가 방영돼 화제를 모았다. 다만 양국 관계는 여전히 변수다. 오이카와 교수는 “2019년 불매운동 당시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 여성의 95%가 불안을 느꼈다”며 “한국에 사는 일본인 여성들은 한일 관계가 악화할 수 있다는 점을 늘 인식하고 있다”고 짚었다.
  • [황수정 칼럼] 국힘, 고쳐쓰기는 글렀다

    [황수정 칼럼] 국힘, 고쳐쓰기는 글렀다

    보수 유튜브 가로세로연구소(가세연)가 대형 콘서트를 열었다 하자. 그 자리에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이 왔다면. 1만 5000명 관객 앞에서 가세연 운영자가 “누님”, “형님” 부른다면. 질펀한 농담까지 주고받는다면. 김어준씨가 기획한 콘서트에서 이런 상상은 현실이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 김민석 국무총리(당시 후보자), 우원식 국회의장, 더불어민주당 당권 주자인 정청래 의원 등. 한마디로 ‘진보 올스타 쇼’였다. 뒷말이 구구했으나 배가 아파서 나온 소리들. 지리멸렬 보수 진영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 볼 그림이다. “원더풀 월드가 왔다”는 김씨의 말은 맞다. 세상은 판이 바뀌었다. 그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것은 무엇보다 ‘총리 김민석’. 번번이 용퇴 세력으로 몰렸던 86그룹에서 재상이 나왔다. 86세대 당대표(송영길), 대통령비서실장(임종석)이 있었으나 차원이 다르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은 아니었다. 김 총리가 출판기념회 두 번으로 거둔 수익은 2억 5000만원. 시집 한 권이 1만 2000원 안팎. 몇 권을 팔아야 인세로 그 돈을 벌까. 페북에 정치 비판을 잘도 하던 입바른 진보 작가들은 다 어디 갔을까. 쓴소리 한마디 없다. 세상의 판이 바뀌었다는 구체적인 증거다. 이재명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비교적 후하다. 대통령을 해 본 사람처럼 노련하다. 그를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그렇게 평한다. 체념 심리도 크다. 이 대통령이 잘해 주기를. 이 기대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다. 이게 다 국민의힘 때문이다. 제구실을 언제 할지 기약이 없다. 혁신위원장을 맡았던 안철수 의원마저 두 손 들었다. 최소한 2명의 인적 청산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권영세 전 비대위원장과 권성동 전 원내대표. 두 사람의 탈당 코스프레도 없이 쇄신을 말하고 있다. 쇄신을 믿어 줄 사람은 없다. ‘되는 집’과 ‘안되는 집’은 차이가 분명하다. 3년 만에 정권을 탈환한 ‘되는 집’ 민주당은 뺄셈 정치의 뻘짓을 하지 않는다. 수박 프레임에 조리돌림을 당해도 때가 되면 꾸역꾸역 당을 돕는다. 임종석, 박용진이 그랬다. 컷오프를 당해도 선당후사. 인간성이 특별히 좋아서가 아니다. 그런 조직 문화가 민주당에는 뿌리내려졌다. ‘안되는 집’ 국힘은 안되는 이유가 보인다. 뺄셈 정치에 털끝만큼의 죄의식도 없다. 당대표를 멍석말이로 두들겨서 내친 전력이 이미 두 번이다. 대선 18일 전에 허겁지겁 최연소 비대위원장을 앞세우더니 이번에는 딱 48일. 급전 돌려막듯 쓰고는 또 버렸다. 당 쇄신을 하고 물러나겠다니 쇄신당할까 겁난 구주류 세력들이 잘라냈다. 당내 몇 있지도 않은 ‘될성부른 떡잎’ 김용태에게 깊은 내상만 입혔다. 이런 식이다. 뺄셈 정도가 아니라 자해 수준이다. 3년 넘게 계보를 잇는 자해 드라마는 친윤들 때문이다. 모두가 아는 진실이다. 안철수 혁신위원장 사퇴에 권성동 의원이 “그 자체로 혁신 대상”이라 공격했다. 국힘이 안되는 집일 수밖에 없는 생생한 사례다. 딴사람은 몰라도 국힘을 이 지경 만든 사람이 공개적으로 할 소리는 아니다. 권영세, 나경원, 김기현, 윤상현 등 친윤 구주류들은 지금 숨소리도 크게 내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당에 덜 해롭다. 안철수 혁신위가 깨지자마자 8월 전당대회에 나서려는 이름들이 들린다. 김문수, 나경원도 들어 있다. 사람들은 하품부터 하고 있다. 국힘을 고쳐 쓰기는 아무래도 글렀다. 총선이 3년이나 남은 현실은 국힘 쇄신을 가로막는 근원적 장애물이다. 진흙탕 싸움 끝에 비윤계가 새 당권을 쥔다 한들 앞은 캄캄하다. 국힘의 지역구 의원 89명 중 64명이 영남·강원권이다. 공천권을 행사해 이들을 물갈이할 방편이 당장은 없다. 무슨 수로 쇄신을 증명하고 여론을 회복할 수 있겠나. 전방위 특검 수사로 내란동조당 꼬리표가 굳어질 수도 있다. 위헌 정당 해산의 벼랑에 서는 최악의 상황이 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앉아서 죽으나 서서 죽으나. 국힘은 큰마음을 먹어 두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전당대회를 하고도 길이 안 보이면 결단해야 한다. 소멸하든 소생하든 영남당은 딴살림을 살게 갈라서라. 남은 ‘극소수당’이 23년 전처럼 천막당사를 쳐라. 보수 회생은 몰라도 보수 궤멸만은 막겠다면. 황수정 논설실장
  • 광주시,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에 윤범모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추천

    광주시,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에 윤범모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추천

    광주광역시가 광주비엔날레를 이끌 새로운 수장으로 윤범모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추천했다. 강기정 광주시장은 최근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이사 후보로 윤 전 관장을 재단 이사회에 공식 추천했다고 밝혔다. 이사회 최종 의결을 거쳐 대표이사로 임명될 예정이다. 윤 후보자는 국내 대표적인 근대미술사학자이자 평론가로,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에 당선되며 평단에 입문한 이후 약 40여 년간 활발한 비평 및 연구 활동을 펼쳐왔다. 가천대 미술대학 교수,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명예석좌교수,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며 학문적 기반과 예술행정 역량을 두루 쌓았다. 광주비엔날레와도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1995년 비엔날레 창립 당시 특별전 기획자로 참여했으며, 2014년 특별전 전시감독으로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오랜 기간 미술계에서 쌓아온 기획력과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세계 5대 비엔날레로 자리잡은 광주비엔날레에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적임자로 평가받고 있다. 윤 후보자는 특히 국립현대미술관장 재임 동안 한국미술의 위상을 높이고, 국내외 교류 전시 기획 및 협업 사업 등을 추진했다. 문화중심도시 광주시가 국립현대미술관 광주관 등 3대 국립시설 유치에 나서고 있는 만큼 국립현대미술관 광주관 유치에도 중요한 연결고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근대미술-시대정신과 정체성의 탐구’, ‘김복진 연구’, ‘화가 나혜석’, ‘한국미술에 삼가 고함’, ‘미술의 전통과 시대정신’, ‘현대미술관장의 수첩’, 시집 ‘멀고먼 해우소’, ‘토함산 석굴암’, ‘파도야, 미안하다’ 등이 있다. 윤범모 후보자는 향후 광주비엔날레재단 이사회의 승인을 거쳐 임명될 예정이다.
  • 100년 만에 사라진 도시 ‘마산’…태양처럼 빛나던 인물은 남았네

    100년 만에 사라진 도시 ‘마산’…태양처럼 빛나던 인물은 남았네

    공기 좋고 물 좋아 ‘결핵 치료’ 메카김춘수·구상·서정주 등 명사 거쳐 가 불종거리엔 남겨진 사랑 이야기들골목골목마다 예술의 흔적도 가득일제강점기 광복·해방 흔적부터시·노래·건축 켜켜이 쌓인 역사들근현대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딱 100년간 존속했던 도시가 있다. 경남 ‘마산시’다. 1910년부터 2010년 6월 30일까지 ‘마산시’였고, 그해 7월 1일부터는 창원시에 속한 ‘구’가 됐다. 마산엔 세월의 층위가 여러 겹이다. 근현대를 빛낸 인물들의 궤적이 겹겹이 쌓여 있다. 다른 도시라고 그렇지 않을까마는 마산은 남다르다. 신병 치료를 위해, 사랑을 찾기 위해, 일제강점기 조국 광복을 위해 여러 분야의 명사들이 마산의 거리를 오갔다. 그 흔적을 찾아간다. 짧지만 강렬했던 도시, 마산의 인물들을 톺아보는 여정이다. 노사연, 이만기, 황정민, 강호동 같은 내로라하는 현역 스타들 이전의 마산엔 바로 그들이 있었다. 그들이 남긴 이야기를 찾는 과정에 ‘도시의 얼굴들’(허정도 지음·지앤유 펴냄)이란 책이 많은 의지처가 됐음을 앞서 밝힌다. ●결핵이 만들어낸 히트곡 ‘산장의 여인’ 레트로는 힘이 세다. 쇠잔하면서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마산이란 옛 도시에 급격히 관심이 쏠린 건 ‘하얀 나비’의 가수 김정호 때문이다. 광주에서 태어나 1970~1980년대를 풍미하다 마산에서 숨을 거둔 가수다. 결핵으로 서른셋 나이에 요절한 그의 생애를 따르다 보니 그 끝자락에서 마산결핵요양소(현 국립마산병원)와 만났다. 한데 김정호뿐이 아니었다. 그 자리를 거쳐 간 당대의 스타들은 무수히 많았다. 마산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결핵 치료의 메카’였다. 변변한 약이 없던 시절, 폐결핵에는 맑은 공기가 최고의 치료제였다. 물 좋고 공기 좋은 마산에 결핵 환자를 위한 병원, 요양소 등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다. 나도향, 구상, 김지하, 서정주, 김춘수 등 문인과 계훈제, 함석헌 같은 사회운동가, 음악인 등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이 병원을 거쳐 갔다. ‘산장의 여인’이란 당대의 히트곡도 이 병원에서 탄생했다. 결핵 환자를 위한 위문 공연에 동행한 전설적인 작사가 반야월이 인근 요양소에 머물던 한 여인을 보며 한 편의 가사를 남겼다. 이 글에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등의 명곡을 만든 작곡가 이태호가 곡을 붙인 게 ‘산장의 여인’이다. 사연 많은 공간이긴 하나 여전히 결핵 환자를 돌보는 곳에 관광객까지 발걸음할 필요는 없지 싶다. 중요한 건 그들이 마산에 남긴 이야기니 말이다. ●옛 마산 명소들 모여 있는 ‘불종거리’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들으려면 불종거리로 먼저 가야 한다. 마산의 주요 도로 중 하나다. 창동예술촌, 상상길, 250년 골목길 등 옛 마산을 기억하는 여러 명소들이 불종거리를 중심으로 얽혀 있다. ‘불종’은 예전에 불이 난 것을 알리기 위해 친 종이다. 1977년 사라졌지만 이름만은 길 위에 고스란히 남았다. 마산이란 지명을 키워드 삼을 때 가장 앞줄에 세워야 할 이는 노산 이은상이다. ‘그리운 금강산’과 더불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한다는 가곡 ‘가고파’를 쓴 시조 시인이다. 불종거리 옆 상남동에서 태어난 그가 29세 때인 1932년에 고향을 그리며 쓴 시에 곡을 붙인 게 ‘가고파’다. ‘노산’이란 그의 호도 생가 뒤의 노비산에서 따온 것이다. 다만 그에 대한 후세의 평가가 정치 지형에 따라 극단으로 나뉘어져 아쉽다. 독립유공자이면서 한편으로 친일, 반민주 인사다. 이처럼 사뭇 다른 평가를 받는 이들은 마산에서 교편을 잡았던 시인 김춘수, 요양차 마산에 머물렀던 시인 서정주 등 꽤 많다. ●나도향의 작품‘물레방아’ ‘뽕’의 탄생 스물넷 꽃다운 나이에 요절한 나도향도 폐결핵 치료차 마산에 머물렀다. 경성의전(현 서울대 의대)에 입학했으나 의사의 길을 거부하고 ‘글쟁이’가 된 그가 마산에 온 건 1925년 여름이다. 그는 ‘벙어리 삼룡이’, ‘물레방아’, ‘뽕’ 등 자신의 대표작을 모두 그해 마산에서 발표했다. 나도향의 원래 이름은 ‘경사스러운 손자’라는 뜻의 경손이다. ‘벼꽃 향기’란 뜻의 도향이란 이름은 월탄 박종화가 지어 선물한 것이다. 하지만 나도향의 집안에선 이 이름을 싫어했다고 한다. 잠시 떠돌다 사라지는 ‘향기 향(香) 자’가 싫어서다. 가족들의 우려가 맞았던 걸까. 그는 파릇한 나이에 너무도 허무하게 세상을 떴다. 그가 마산에서 만났다는 ‘영옥’이란 여인과의 사랑 이야기도 애틋하다. 그의 소설 ‘피 묻은 편지 몇 쪽’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무서운 행복’은 영옥과 만나는 것입니다. 만나면 만날수록 나의 가슴 속에는 오뇌와 번민이 고조될 뿐입니다. 아아! 안 만나겠습니다. 다시는 안 만나겠습니다./ 내가 참으로 영옥을 사랑하니까 그와 만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가지고 가지요. 나의 관 뚜껑을 덮을 때 나의 가슴에는 그의 사랑을 가지고 가렵니다.” 이는 실제 작가의 이야기다. 그가 내려올 때처럼 구마산역(현 육호광장)을 통해 마산을 떠날 때 영옥이란 여인이 남몰래 눈물로 배웅했다지. ‘사랑하기에 떠난다’는 삼류 신파극 같은 문장도 연원을 따지면 이처럼 기막힌 사연이 있다. 불종거리에 맺힌 사랑 이야기는 또 있다. ‘조선의 루돌프 발렌티노’(당시 할리우드 최고의 미남 배우)라 불리던 임화와 마산 지역 유지의 딸 지하련이 주인공이다. 둘의 이야기는 임화의 마산행에서 시작된다. 임화는 일제강점기에 사회주의 문학단체인 ‘카프’를 이끌던 인물이다. 결핵에 걸린 그는 자신보다 과격한 사회주의자인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한 뒤 치료차 내려간 마산에서 지하련을 만난다. 지하련의 헌신적인 보살핌을 받고 회복한 임화는 그와 결혼해 현 산호공원 아래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한다. 여기가 이른바 ‘지하련 주택’이다. 둘이 살던 집은 당시 최고급 주택이었다. 지금도 남아 있긴 한데 돌보는 이가 없어 거의 무너질 지경이다. 둘의 사랑 이야기도 해피 엔딩은 아니다. 임화는 6·25전쟁 뒤 북한에서 처형됐고, 그의 시신을 찾아 평양 거리를 헤매던 지하련도 평안북도 어디선가 쓸쓸히 죽음을 맞았다. 남에선 월북한 빨갱이로, 북에선 반동분자로 둘은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했던 셈이다. ●통영 사는 여인 찾아 헤매던 시인 백석 예전 불종거리는 마산 바다에서 잡은 대구 등 해산물을 내륙으로 옮기는 중요한 통로였다. 싱싱한 해산물을 가득 실은 리어카가 신바람을 내며 해산물을 쏟아 내면 기차가 팔도로 실어 날랐다. 그 길 끝에 구마산역이 있던 것도 그런 이유다. 구마산역에 내려 불종거리를 걸으며 사랑을 찾아 헤맨 이 중엔 시인 백석도 있다. 1936년 백석은 통영에 사는 ‘천희’(‘처녀’의 사투리) 란을 찾아 불종거리를 걸었다. 당시 경성에서 통영까지 가려면 부산이나 마산을 거쳐야 했다. 부산은 한 번, 마산은 세 번 내려왔다는데 결국 그는 란을 만나지 못했고 결혼에도 이르지 못했다. 그가 조선일보 평기자로 일하던 시절, 노산 이은상이 같은 신문의 주간이었다니 인연의 얽힘은 참 상상을 뛰어넘는 듯하다. 그의 이름을 담은 ‘백석이 다녀간 작은 책방’이란 북카페가 육호광장 인근(천하장사로 109)에 있다. 북카페 뒤는 ‘노산동 문학마을’, 더 뒤는 마산문학관이다. 북카페에서 냉커피 한 잔 사 들고 백석을 생각하며 동네를 헤매는 맛이 각별하다. 1945년 해방 무렵, 마산엔 ‘귀환동포촌’이 폭넓게 형성됐다. 일본에 살던 동포들이 귀환하면서 생긴 현상이다. ‘지상으로 소풍 온’ 시인 천상병도 이 무렵 마산에 정착했다. 오동동에 정착한 천상병은 6년제였던 마산공립중학교 2학년에 편입해 1951년 졸업했다. 이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뒤로는 오직 시로만 고향을 그리워했을 뿐 마산과 별다른 인연을 맺지 못한다. 사실 마산 사람들조차 천상병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독재 정권의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그날은’) 고문을 당하고, 행려병자로 정신병원에 갇혔을 때도 그를 동향이라 여긴 이는 별로 없었다. 그나마 그가 다닌 중학교 후배들이 학교 담장 옆길을 그의 호를 따 ‘심온길’이라 부르고, 벚꽃 필 무렵에 그를 기리는 골목 음악회를 연다니 천상으로 돌아간 그가 흐뭇해하려는지. 천상병이 시인의 길을 걷게 된 데는 ‘꽃의 시인’ 김춘수의 역할이 컸다. 당시 국어 선생이자 천상병의 담임이었던 김춘수가 “모든 것이 그러하듯, 네가 그것에 닿아야만 네 것이 될 수 있다. 김춘수”라 적은 글이 담긴 ‘구름과 장미’라는 시집을 선물했고 이때의 감동이 천상병을 평생 시인으로 살게 했다고 한다. 김춘수는 통영 사람이지만 20대에서 30대 후반까지 마산에서 생활했다. 마산을 대표하는 독립지사 허당 명도석의 딸과 1944년 결혼해 살았다. 해방도 마산에서 맞았다. 당시 그는 러닝셔츠 차림으로 불종거리를 쏘다니며 해방감을 만끽했다고 한다. 그의 대표 시 ‘꽃’ 역시 1952년 6·25전쟁 당시 마산에 머물 때 썼다고 한다. ●마산의 긴자… 가요 오동동타령의 고향 불종거리를 중심으로 수많은 골목길이 실핏줄처럼 연결돼 있다. 창동예술촌, 상상길, 250년 골목길 등 이름도 다양하다. 창동예술촌은 ‘에꼴드 창동 거리’, ‘마산예술흔적 거리’, ‘문신예술 거리’ 등 세 테마로 나뉘어 있다. 조성된 지 오래돼 쇠락한 느낌도 있지만 차분히 둘러볼 만하다. 불종거리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오동동 문화의 거리다. 오동동은 대중가요 ‘오동동타령’이 태어난 곳. 통술집 골목으로 유명하다. 일제강점기부터 ‘마산의 긴자’라 불릴 만큼 화려했다니 통술 거리의 역사도 그리 짧지만은 않은 듯하다. 거리 안에 ‘3·15의거 발원지 기념관’이 있다. 집안과 불화하면서도 한국 무용계의 태두가 된 김해랑, 동요 ‘고향의 봄’의 가사를 쓴 이원수 등도 오동동 일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원수가 상업학교 2학년이던 1929년, 일본에서 건너온 아이 하나가 마산보통학교(성호초등교)에 입학한다. 그가 마산이 낳은 세계적인 시머트리(좌우대칭) 조각가 문신이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다 돌아온 그가 추산 아래 정착해 조성한 공간이 현 창원시립문신미술관이다. 올해 타계 30주년을 맞아 그림, 조각 등 다양한 작품들을 전시 중이다. 그의 묘도 미술관 안에 있다. 문신미술관 아래엔 추산야외조각미술관이 있다. 각국 조각가 10명의 작품이 곳곳에 숨은 그림처럼 감춰져 있다. ●건축 거장 김수근의 벽돌 건축의 시작 양덕성당은 한국 현대 건축의 거장 김수근이 붉은 벽돌로 상징되는 종교 건축 시대의 서막을 연 공간이다. 서울의 불광동성당, 경동교회와 함께 그의 3대 종교 건축물로 꼽힌다. 양덕동은 1970년대 마산수출자유지역에 다니는 노동자들이 셋방을 얻거나 기숙 시설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동네였다. 이들을 위해 지은 곳이 양덕성당이다. 당시 김수근이 책임 건축가로 지목한 이가 승효상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전설로 남은 건축가와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가 함께 만든 건축물인 셈이다. 양덕성당의 모티브는 ‘바위산에 핀 수정꽃’이다. 성당 꼭대기에 꽃봉오리가 있고 건물이 그 주변을 감싸는 형상이다. 마산역에서 10분 거리다. 마산은 언덕이 많은 해안 도시인데도 시원하게 바다가 조망되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 접근성에선 문신미술관과 산호공원이 좋다. 다만 문신미술관은 오후 6시 이후 문을 닫아 야경을 볼 수 없는 게 흠이다. 문신미술관 뒤 회원현 성터의 정자에선 마산항 일대를 조망할 수 있다. 문신미술관에서 10여분 정도 걸어 올라야 한다. 술이 유명했던 마산에는 국내 최대 주류 박물관이 있다. 향토 주류업체 무학이 2015년 개관한 ‘굿데이뮤지엄’이다. 다양한 술을 대륙별로 나눠 전시했다. 장수암은 요즘 ‘신상’ 여행지로 주목받는 절집이다. 번다한 마산 도심에서 벗어나 적요한 남해를 응시할 수 있다.
  • [훔치고 싶은 문장]

    [훔치고 싶은 문장]

    전쟁과 나(유은실 지음 이소영 그림, 우리학교) “그럼. 일러바치는 건 말이지, 전쟁 일으키는 거에 비하면 코딱지나 다름없어. 난 전쟁이 싫어. 평화가 좋고.” 불개미는 할머니가 아홉 살에 겪은 전쟁을 떠올리게 한다. 총알이 날아드는 전쟁터보다, 기차 지붕에 매달리는 피난민보다 어린이를 더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휠체어를 탄 할아버지를 모시고 피난을 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걱정은 아이의 마음을 짓누르지만 옆집 아저씨, 학교 친구, 동네 마트 사장님은 각기 다른 이유로 아이의 부탁을 거절한다. 하지만 일러바치는 것보다 ‘전쟁을 일으키는 게 제일 나쁘다’는 이모의 한마디는 아이의 근심을 녹여 버린다. ‘멀쩡한 이유정’, ‘순례주택’의 유은실과 이소영의 협업이 눈부신 그림책이다. 68쪽, 1만 6800원. 칠월은 보리차가 잘 어울리는 달(박지일 지음, 난다) “내가 하는 작업은 쓰기. 쓰는 것은. 시가 안 써질 땐 안 써지는 시에 대한 글을 쓴다. 안 써지는 시에 대한 글도 잘 안 써질 땐 일기를 쓴다. 일기도 안 써질 땐 어떡하나. 글쎄. 안 쓰면 되지.” 열두 명의 시인이 릴레이로 써나가는 열두 권의 책, 매일 한 편, 매달 한 권, 1년 365가지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난다의 ‘시의적절’ 시리즈의 7월을 시인 박지일이 맡았다. 시 여덟 편과 함께 산문, 짧은 이야기와 일기, 단상 등이 실렸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매일 써 내려가는 시인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188쪽, 1만 5000원. 다리(하트 크레인 지음, 손혜숙 옮김, 미행) “지하철에서, 작은 방이나 다락에서 나와/ 잰걸음으로 미친 듯 그대 난간으로 달려가/ 거기서 잠시 몸 기울일 때 셔츠는 날카롭게/ 부풀어 오르고 말 없던 행렬에선 농담이 터진다.” 미국의 시인 하트 크레인(1899~1932)의 시집이 국내 처음 소개됐다. ‘다리’는 총 1000행이 넘는 원대한 장시이자 서사시로 총 8장, 15편의 시로 구성됐다. 다리를 매개로 한 기술 문명의 집대성을 통해 미래 세계의 희망을 말한다. 15편의 시는 각각 해설을 달고 있고 이 해설은 퍼즐 조각을 맞추는 것처럼 서사의 윤곽을 알려 줘 독자가 시의 주제나 방향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176쪽, 1만 7500원.
  • 시는 외계인의 꿈… 사랑의 능력을 끝까지 믿어봐요[오경진 기자의 노이즈캔슬링]

    시는 외계인의 꿈… 사랑의 능력을 끝까지 믿어봐요[오경진 기자의 노이즈캔슬링]

    ‘시(詩)는 외계인이 꾸는 꿈이다.’ 얼마 전 시집 ‘나 외계인이 될지도 몰라’(문학동네)를 엮은 신이인(31) 시인을 만나 시와 문학에 관해 한참을 떠든 뒤 내린 결론이다. 저 아리송한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두 가지 질문이 해명돼야 한다. 꿈은 무엇인가 그리고 외계인은 누구인가. “이 세계와 내가 피차 낯설다고 느낄 때. 그 감각을 지닌 이는 모두 외계인이죠. 시인은 당연히 외계인입니다. 하지만 평범한 직장인이라고 다를까요? 어쩌면 우리는 다 외계인일지도 모릅니다.” ●경계에 머무르며 탐구하는 시인 경계(境界)에 머무르며 그곳을 탐구하는 시인. 2021년 등단 당시 한 선배로부터 이런 평가를 들었던 신이인은 이제 스스로 외계(外界)에 있다고 말한다. 신춘문예 당선 소식을 듣자마자 멀쩡히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냈다. 그렇게 2023년 나온 첫 시집 ‘검은 머리 짐승 사전’(민음사)과 이번 시집은 사뭇 다르다. 지극히 솔직한 필치로 시인의 불안한 내면을 전했던 전작과 달리 이번에는 다채로운 이미지와 상황이 앞세워진다. 그래도 결국 ‘시는 시인의 이야기’라는 게 그의 지론. 끊임없이 자기를 내보이는 글쓰기. 그래서 시인은 “시를 쓰는 일이 종종 부끄러울 때도 있다”고 고백했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확신하지 못하겠어요. 그 존재나 가치에 판단을 내릴 만큼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이죠. 신과 헤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조금 시간을 갖는다고 할까요. 죽기 전에는 다시 그에게 돌아갈지도.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신이인은 신을 배신한 시인이다. 모태신앙이었으나 이십 대의 어느 날 신에게서 멀어지기로 작정했다. 세상이 방종으로 흐르지 않도록 중심을 잡고 규율을 세우는 것이 사회에서 종교가 가진 역할일 터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서 그것이 속박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교회를 나가지 않은 지 꽤 오래됐으나 그는 아직 신의 자장(磁場) 안에 있는 듯했다. ‘뱀’, ‘부활절’, ‘방주’…. 시집에는 성경을 떠올리게 하는 시편이 여럿 담겼다. 신의 가르침을 ‘사랑’이라고 배우지만 현실의 종교는 그 사랑을 온전히 설파하고 있는가. 신이인의 시는 ‘사랑할 수 있음’과 ‘사랑하지 않음’ 사이를 진동한다. “사랑은 무엇이라고 말할수록 미궁에 빠지는 것입니다.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계속 시를 쓰죠. 알았으면 단언했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이렇게 헤매는 것 아닐까요. 중요한 건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한편이 되지 않더라도 계속 사랑하겠다’는 것. 내 사랑의 능력과 희망을 믿는 것이죠.” 이제 첫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꿈’은 무엇인가. 시집 마지막에는 ‘꿈동산’이라는 시가 나온다. 시인은 원래 이 시를 시집의 제목으로 밀어붙이기도 했다. ‘꿈의 기계’, ‘꿈의 옷’ 등 제목에 꿈이 들어가는 시가 11편이나 있다. 전체 시가 52편임을 고려하면 이는 상당히 의도적이다. 시인이 ‘꿈’이라는 것에 무언가를 강력하게 투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물론 꿈에 관한 여러 과학적, 의학적 연구와 정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논외로 치고 시인이 정의하는 꿈이란 무엇인지 물어봤다. ●꿈에서 서사 빼면 내 상태 알 수 있어 “인간의 진실을 거짓처럼 구현해 나한테 다시 보여 주는 게 꿈이라고 생각해요.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 꿈에서는 의미심장하게 뒤틀리죠. 꿈에서 서사나 이미지를 벗겨 내면 지금 내가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죠. 시도 그렇습니다. 시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야기를 통해 굴절돼 독자에게 가잖아요. 하나의 이야기가 프리즘을 통과해 여러 각도로 펼쳐지지만 그것 역시 다 각자의 진실이죠. 결국 시인에게 시는 꿈이네요. 안 보이는 곳에서 혼자 지르는 비명이기도 하고요.”
  • [정은귀의 시선] 폭풍우도 길들일 수 없는 것

    [정은귀의 시선] 폭풍우도 길들일 수 없는 것

    나는 봄의 첫 날에 태어났다 21일 미치광이가 될 줄 모르고 폭풍우도 길들일 수 없는 씨앗을 심으려 태어난 줄 모르고 그리하여 착한 페르세포네는 비에 젖는 풀밭을 바라보며 비에 젖는 커다란 낟알을 바라보며 밤에는 늘 울고 있다. 그 울음은 아마 그녀의 기도겠지 ― 알다 메리니 ‘나는 태어났다’ 낯선 도시에 오면 새로운 시인을 알게 된다. 내게 새로운 장소는 새로운 언어, 새로운 시와 동격이다. 낯선 공간에서 어떤 시인을 만나게 될까 늘 설레는 이유다. 알다 메리니(1931~2009)를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만났다. 밀라노에서 태어나 이탈리아가 사랑하는 시인이 된 그녀. 여덟 살에 단테의 ‘신곡’을 읽고 외웠다지.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는 딸이었다지. 어릴 때부터 문학에 재능이 있었으나 열다섯 무렵에 2차 세계대전의 상흔으로 심각한 거식증을 앓았다지. 정신병원에서 20년을 보내면서도 시 쓰기에 몰두했다지.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여러 번 추천되었다지. 상은 타지 못했어도 지금도 큰 사랑 받고 있다지. 그럼 된 거지. 새로 알게 된 시인의 언어가 강렬해서 시집을 주문해 바쁜 일정 중에도 틈틈이 읽고 있다. 나는 이탈리아어를 모르니 영어에 의지하는데, 고맙게도 번역가가 있어 이탈리아어에서 영어로 다리를 놓아 주었다. 고맙다. 다행이다. 사진 속 시인의 얼굴을 바라본다. 한 손에는 담배를 들고 한 손에는 원고 뭉치로 보이는 종이 더미를 움켜쥐고 어딘가를 바라본다. 시선이 깊다. 열여섯 살에 “마음의 첫 그림자” 정신병을 만났다 한다. 자기 삶을 관통한 크고 작은 폭력을 시에 새긴 그녀. 시는 그녀가 기댈 수 있는 의지처이자 구원, 해방이었다. 학교에서 공부도 잘했고 이탈리아에서 가장 사랑받는 시인이 되었지만 한때 이탈리아어 시험에 낙제점을 받았다는 말도 있는 걸 보면 역시나 딱딱한 시험은 창조력을 가늠하지 못하는 것인가. 이런저런 추측과 함께 시를 들여다본다. 봄에 태어난 그녀. 이 시는 시인이 예순 즈음에 썼다고 한다. 그 나이에 이르면 자기 인생에 대해 어느 정도 정리가 된다. 옛날에는 불에 덴 듯 뜨거웠던 상처도 아물게 된다. 지난 시간이 돌아다보이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가늠하는 거리도 생긴다. 그러니 봄날의 첫 기운 받아 태어난 자신이 미친 사람이 된 그 기막힌 현실을 시로 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정신병의 시작 지점이 실은 전쟁이 젊은 영혼에게 가한 상처인 것을 보면, 시인의 정신병은 이 세상이 한 보드라운 영혼에 입힌 외상이다 싶다. 살아서 지나는 온갖 크고 작은 일들, 비극적 사건 속에서 연약하고 부드러운 영혼은 내상을 입는다. 상처는 저마다 완벽하기에 각각의 영혼의 무게만큼 엄중하고 무겁다. 상처는 딱지 앉으며 잊히기도 하지만 회복될 수 없는 치명타를 몸에 가하기도 한다. 내상과 외상은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 몸과 영혼은 다르지 않다. 시인은 그러나 안다. 자신이 쓰는 시의 언어가 폭풍우도 길들일 수 없는 씨앗을 심는 일이라는 것을. 어린 페르세포네는 시인의 또 다른 영혼이다. 지하세계의 왕 하데스에게 끌려가 그의 신부가 된 소녀는 일 년의 반은 하계에서 보내고 일 년의 반은 세상에 올라와 엄마 데메테르를 만난다. 가엾은 페르세포네의 울음이 기도라고 하니, 생각해 본다. 이 세계는 실은 수많은 울음의 기도 안에서 영위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시의 마음이 울음이고 기도인 것을. 세계의 폭력에 지지 않는 눈물의 아우성이 있어 끝없는 전쟁과 무도한 폭력에 계속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을. 아직 시인의 집에 가보지는 못했지만 시인의 집 근처에 시인을 기리는 다리가 있다 하니 다녀올 예정이다. 아마도 그 다리 난간에는 여느 관광지가 그러하듯 사랑을 약속하는 연인들의 열쇠들이 알록달록 달려 있겠지. 영원한 사랑을 믿었던 연인들은 계속 사랑 안에 있을까. 헤어져 서로 다른 리듬으로 살까. 죽은 이들도 많겠지. 그러나 그들을 묶어 주었던 기도는 여전한 염원으로 살아 있겠지. 시가 오늘 우리에게 눈물의 기도로 살아 있듯이. 정은귀 한국외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 장석영 대한언론인회 회장, 신작 시집 ‘위대한 고백’ 등 출간

    장석영 대한언론인회 회장, 신작 시집 ‘위대한 고백’ 등 출간

    장석영 대한언론인회 회장이 신작 시집 ‘위대한 고백’, ‘외로운 밤에는 별이 많아지는 까닭을 아는가?(국보문학)를 동시에 출간했다. 아내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담긴 작품에는 할미꽃과 밤하늘의 별들을 주제로 한 다양한 시들이 담겼다. 장 회장은 시인이자 수필가로 활동 중이다. ‘위대한 고백’은 보잘 것 없어 보이는 할미꽃의 위대한 정체성에 대한 발견을 담담하게 담아냈다는 평가다. ‘외로운 밤에는 별이 많아지는 까닭을 아는가?’에서는 몇년간 지병에 시달리던 아내를 잃게 된 슬픔과 상실감이 담겨 있다. 장 시인은 “시는 나에게 세상을 아름다운 존재로 느끼게 하는 힘이 된다”며 “나를 생각하고 백지에 올리는 순간은 시간을 잊게 해준다. 그래서 시에 천착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 “누군가에 작은 쉼이 되길”…삼척시 공무원 시집 출간

    “누군가에 작은 쉼이 되길”…삼척시 공무원 시집 출간

    박수옥 삼척시 문화관광체육국장이 퇴직을 앞두고 시집 ‘선물 같은 그리움’을 냈다. 시집에는 박 국장이 공직생활 중 틈틈이 쓴 72편의 시가 담겼다. 시와 함께 실린 그림은 박 국장의 큰딸 김지현 서양화 작가가 그렸다. 김 작가는 “또 다른 장을 시작하는 귀한 발걸음이 된 이 시집 한권이 엄마에게는 새로운 시작이 되기를, 그리고 읽는 이들에게는 깊은 공감과 울림으로 다가가길 바란다”고 전했다. 1966년 정선에 태어난 박 국장은 일찍 고향을 떠난 뒤 중·고교를 졸업했고, 1986년 공직에 입문했다. 이후 40년 가까이 삼척시청에서 근무하며 평생교육과장, 문화홍보실장 등을 역임했다. 2019년 전국 공무원 문예대전에 시부문 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박 국장은 이달 말을 끝으로 공로연수에 들어간다. 박 국장은 26일 “시집은 지나간 날들에 대한 조용한 위로이자, 나 자신에게 보내는 따뜻한 응답이기도 하다”며 “이제 이 글들이 누군가의 마음에도 작은 쉼이 돼 닿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정치 말고 예술에 몰두했다면…’ 찰스 1세의 아까운 재능

    ‘정치 말고 예술에 몰두했다면…’ 찰스 1세의 아까운 재능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의 국왕인 찰스 1세(1600~1649)는 스튜어트 왕조를 세운 제임스 1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병약했고 말더듬이 심한 편이었다. 그런데 형 헨리가 사망하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생각지도 않게 12살에 왕위 계승권자가 된 것이다. 찰스는 프랑스 루이 13세의 여동생 앙리에트 마리아와 결혼해 6남매를 뒀다. 이들의 결혼은 계약에 의한 것이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다스리기엔 찰스의 능력은 보잘것없었다. 찰스는 왕이 된 첫해부터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의회와 반목했다. 세금 징수 때문이었다. 찰스는 누이가 시집간 팔츠 선제후국을 돕고자 자금이 필요했다. 그러나 의회가 이를 거절하자 독단적으로 채권을 발행하려 했다. 단두대에서 마친 삶찰스는 전지전능한 왕으로서 국정을 운영하고자 했다. 당연히 왕권을 제한하려는 의회와 갈등을 빚었다. 결국 11년간 의회를 폐쇄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정복에 자금이 필요해지자 어쩔 수 없이 의회에 동의를 구해야 했는데, 1642년 양측은 이 문제로 정면충돌했다.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 4년이나 지속된 1차 내전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의 승리로 끝났다. 찰스는 투옥과 탈옥을 반복하다가 1649년 1월 30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내전은 영국 역사상 왕을 반역죄로 처형한 첫 사례가 됐다. 비공식 초상화찰스 1세는 선왕이 신봉하던 왕권신수설을 고민 없이 받아들였다. 그는 의회와 정면으로 충돌할 만큼 정치 감각이 없었고 시대를 읽는 눈도 모자랐다. 그런데 예술에 대한 안목만큼은 꽤 탁월했으며 자신을 꾸밀 줄도 아는 멋쟁이였다. 안토니 반 다이크가 그린 ‘사냥 중인 찰스 1세’는 왕의 공식 초상화는 아니다. 사냥 중에 잠시 휴식을 취하는 일상의 모습을 그렸다. 언뜻 보면 귀족의 초상화처럼 보인다. 그림 속 주인공이 왕이라는 사실은 오른편 아래 적힌 비문 ‘찰스 1세, 대영제국의 왕, Carolus.I.REX Magnae Britanniae’에서 드러난다. 멋쟁이 왕실물 크기로 그려진 이 초상화는 1635년 찰스의 권세가 정점에 있던 시기에 그려졌다. 그가 사냥 도중 잠시 말에서 내려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이에 두 수행원이 말을 보살피고 있다. 말고삐를 쥔 인물은 찰스를 대신해 그림을 구매하던 엔디미온 포터다. 포터는 친구인 루벤스와 반 다이크 작품을 비롯해 유럽 다른 나라의 작품을 사들여 찰스의 컬렉션을 풍성하게 했다. 그림 속 말은 찰스에게 고개를 숙여 왕에 대한 예우를 다하고 있다. 찰스는 군주로서의 위엄이나 진지함보다 자연인으로서 자유를 만끽하는 듯 보인다. 찰스는 160㎝가 조금 넘는 키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이를 알아챈 반 다이크는 아래에서 위로 올려보는 위치에서 그림을 그려 키에 대한 고민을 없앴다. 찰스의 세련된 취향은 패션 아이템에서 잘 드러난다. 비스듬히 쓴 모자와 귀걸이, 레이스 칼라, 은색 공단 재킷, 붉은 바지, 가죽 장갑과 부츠는 세련된 그의 취향을 보여준다. 그가 수집한 예술품은 작품성이 상당했다. 흩어진 찰스의 예술품들찰스는 티치아노와 홀바인, 뒤러 등 당대 최고 화가들의 작품을 사고 루벤스, 반 다이크에게 예술을 의뢰하는 등 뛰어난 컬렉션 라인을 보유했다. 그러나 그가 화이트홀 궁에서 참수당하자 아들 찰스 2세는 해외로 도망쳤다가 11년 뒤인 1660년에야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아버지가 수집한 예술품들은 유럽 곳곳으로 헐값에 팔려나갔다. 찰스가 소유했던 예술품 상당수는 현재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과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컬렉션의 핵심을 이룬다. 영국 왕의 사냥 뒤 휴식을 그린 ‘사냥 중인 찰스 1세’가 루브르에 자리 잡게 된 이유다. 찰스는 정치보다 예술에 더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그가 정계가 아닌 예술 영역에서 일했다면 영국 미술계의 명성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사람은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입을 때 가장 빛난다.
  • ‘정치 말고 예술에 몰두했다면…’ 찰스 1세의 아까운 재능 [으른들의 미술사]

    ‘정치 말고 예술에 몰두했다면…’ 찰스 1세의 아까운 재능 [으른들의 미술사]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의 국왕인 찰스 1세(1600~1649)는 스튜어트 왕조를 세운 제임스 1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병약했고 말더듬이 심한 편이었다. 그런데 형 헨리가 사망하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생각지도 않게 12살에 왕위 계승권자가 된 것이다. 찰스는 프랑스 루이 13세의 여동생 앙리에트 마리아와 결혼해 6남매를 뒀다. 이들의 결혼은 계약에 의한 것이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다스리기엔 찰스의 능력은 보잘것없었다. 찰스는 왕이 된 첫해부터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의회와 반목했다. 세금 징수 때문이었다. 찰스는 누이가 시집간 팔츠 선제후국을 돕고자 자금이 필요했다. 그러나 의회가 이를 거절하자 독단적으로 채권을 발행하려 했다. 단두대에서 마친 삶찰스는 전지전능한 왕으로서 국정을 운영하고자 했다. 당연히 왕권을 제한하려는 의회와 갈등을 빚었다. 결국 11년간 의회를 폐쇄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정복에 자금이 필요해지자 어쩔 수 없이 의회에 동의를 구해야 했는데, 1642년 양측은 이 문제로 정면충돌했다.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 4년이나 지속된 1차 내전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의 승리로 끝났다. 찰스는 투옥과 탈옥을 반복하다가 1649년 1월 30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내전은 영국 역사상 왕을 반역죄로 처형한 첫 사례가 됐다. 비공식 초상화찰스 1세는 선왕이 신봉하던 왕권신수설을 고민 없이 받아들였다. 그는 의회와 정면으로 충돌할 만큼 정치 감각이 없었고 시대를 읽는 눈도 모자랐다. 그런데 예술에 대한 안목만큼은 꽤 탁월했으며 자신을 꾸밀 줄도 아는 멋쟁이였다. 안토니 반 다이크가 그린 ‘사냥 중인 찰스 1세’는 왕의 공식 초상화는 아니다. 사냥 중에 잠시 휴식을 취하는 일상의 모습을 그렸다. 언뜻 보면 귀족의 초상화처럼 보인다. 그림 속 주인공이 왕이라는 사실은 오른편 아래 적힌 비문 ‘찰스 1세, 대영제국의 왕, Carolus.I.REX Magnae Britanniae’에서 드러난다. 멋쟁이 왕실물 크기로 그려진 이 초상화는 1635년 찰스의 권세가 정점에 있던 시기에 그려졌다. 그가 사냥 도중 잠시 말에서 내려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이에 두 수행원이 말을 보살피고 있다. 말고삐를 쥔 인물은 찰스를 대신해 그림을 구매하던 엔디미온 포터다. 포터는 친구인 루벤스와 반 다이크 작품을 비롯해 유럽 다른 나라의 작품을 사들여 찰스의 컬렉션을 풍성하게 했다. 그림 속 말은 찰스에게 고개를 숙여 왕에 대한 예우를 다하고 있다. 찰스는 군주로서의 위엄이나 진지함보다 자연인으로서 자유를 만끽하는 듯 보인다. 찰스는 160㎝가 조금 넘는 키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이를 알아챈 반 다이크는 아래에서 위로 올려보는 위치에서 그림을 그려 키에 대한 고민을 없앴다. 찰스의 세련된 취향은 패션 아이템에서 잘 드러난다. 비스듬히 쓴 모자와 귀걸이, 레이스 칼라, 은색 공단 재킷, 붉은 바지, 가죽 장갑과 부츠는 세련된 그의 취향을 보여준다. 그가 수집한 예술품은 작품성이 상당했다. 흩어진 찰스의 예술품들찰스는 티치아노와 홀바인, 뒤러 등 당대 최고 화가들의 작품을 사고 루벤스, 반 다이크에게 예술을 의뢰하는 등 뛰어난 컬렉션 라인을 보유했다. 그러나 그가 화이트홀 궁에서 참수당하자 아들 찰스 2세는 해외로 도망쳤다가 11년 뒤인 1660년에야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아버지가 수집한 예술품들은 유럽 곳곳으로 헐값에 팔려나갔다. 찰스가 소유했던 예술품 상당수는 현재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과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컬렉션의 핵심을 이룬다. 영국 왕의 사냥 뒤 휴식을 그린 ‘사냥 중인 찰스 1세’가 루브르에 자리 잡게 된 이유다. 찰스는 정치보다 예술에 더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그가 정계가 아닌 예술 영역에서 일했다면 영국 미술계의 명성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사람은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입을 때 가장 빛난다.
  • “한국은 문학의 나라… 세계인들 K팝·드라마에 열광하는 원천” [서동철의 노변정담]

    “한국은 문학의 나라… 세계인들 K팝·드라마에 열광하는 원천” [서동철의 노변정담]

    빨갱이 자식에서 유공자 아들로부친은 항일·농민운동 하다 옥살이초교 4년 때 첫 대면… 6·25로 이별2020년엔 국가유공자증·훈장 받아신춘문예 10관왕 되기까지‘당선’되지 않은 것은 뭔가 모자란 탓상상 못 할 고통의 시간 보내며 창작‘기성의 벽’ 넘어 나만의 새로움 제시200만개 단어 가진 우리말주말이면 시를 싣는 신문 적지 않아이런 문학 대접은 한국 말고는 없어‘좋은 시’는 썼는데 ‘위대한 시’는 과제이근배 시인은 ‘신춘문예 10관왕’으로 통한다. 그가 문학청년이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신춘문예는 바늘구멍을 지나기보다 어렵다. 그런 시인에게 ‘우리 사회에서 문학에 대한 존중이 옛날보다는 좀 덜해진 것 아니냐’고 했더니 펄쩍 뛴다. 해마다 1월 1일이면 중앙일간지마다 1면에 신춘문예 당선자의 이름과 사진이 나가고 작품도 실리는 것을 예사로 볼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문사마다 신춘문예에 적지 않은 노력과 비용을 들이는 것은 물론 주말이면 시를 싣는 신문도 적지 않다고 했다. 이렇게 문학을 대접하는 나라가 한국 말고 어디 있느냐고 되물었다. 이른바 문화 선진국에도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는 “한국이 문학의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말은 200만개의 단어를 갖고 있는데 10만개에 불과한 언어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뛰어난 언어로 우리만의 체험을, 나만의 시어(詩語)로 쓰는 것이 시인의 책무라고 했다. 이 시인은 한국 사회에서 문학의 역할, 특히 시의 역할에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우리 드라마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지 않습니까. 드라마라는 게 뭐냐 하면 시예요. 드라마의 스토리가 그렇고, 드라마의 대사가 모두 우리말로 지은 시입니다. 방탄소년단(BTS)도 난리가 났는데 우리말로 시를 써서 노래를 부른 것 아닙니까. 그러니 세계인이 열광하는 한류의 원천은 우리 문학입니다. 그 꼭대기에 시가 자리잡고 있어요. 사람들이 이런 이치를 잘 몰라요.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조선 사회에서도 근본적으로 시를 잘 써야 성공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야 영의정도 하고 좌의정도 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시의 나라입니다. 한국 문화가 최근 크게 각광받는 이유도 우리 언어와 문학에 있다고 봅니다.” 그는 신춘문예 등단을 넘어 일가(一家)를 제대로 이룬 문인이다. 월간 ‘한국문학’을 필두로 다양한 문예지에 주간으로 참여했고 서울예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시 창작을 강의하기도 했다. 힌국시인협회상을 비롯해 다양한 문학상을 수상한 경력에 예술원 회장을 지냈으니 문화예술계의 최고 영예를 누렸다고 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다. 그럼에도 “그동안 ‘좋은 시’는 많이 썼다고 생각하지만 ‘위대한 시’는 쓰지 못했다”고 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모든 시인이 고뇌해야 하는 과제라는 것이다. 이 시인이 최근 펴낸 ‘이근배 육성 회고록’을 펼치면 ‘신춘문예 당선하는 비법 있어요’라는 제목이 큼지막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가 동화출판사 주간 시절 신경림 시인이 5년 동안 편집장을 했는데 신춘문예 당선자가 나오면 “또 이근배구먼” 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의 당선작들은 신춘문예 응모자들에게는 일종의 ‘모범답안’처럼 비쳤다. 그러니 대학에서 시 창작을 가르칠 때 학생들에게 “신춘문예에 당선하는 비결을 알려 주겠다”고 하면 귀가 쫑긋해서 집중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비결’이라며 “신춘문예는 투고한 자만이 당선한다”고 하면 학생들은 일제히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는 것이다. “스포츠도 그렇잖아요. 금메달 딸 줄 알았는데 못 따면 뭔가 모자란 게 있는 것 아닙니까. 내가 공부를 모자라게 했기 때문에 당선되지 않은 것이거든요. 요즘에는 잘 쓰지 않는 표현이지만 예전에는 어떤 작가나 작품을 가리켜 ‘기성(旣成)의 벽을 넘었다’는 평이 큰 덕담이었어요. 이미 만들어져 있는 틀을 벗어나서 자기만의 어떤 것, 지금 있는 것하고는 다른 것을 찾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러니까 남의 아류 같은 것보다는 미래성, 자기 자신에 대한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에게 신춘문예 당선의 비밀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런 생각으로 열심히 썼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보낸 것이 사실입니다.” 시인은 1994년 서울신문에 동학혁명 100주년 기념서사시 ‘동학의 함성을 찾아서’를 연재했다. 당시 문화부 기자였던 필자는 전북 고창의 동학농민운동 현장을 둘러보는 시인의 연작시조기행에 한 차례 동행한 적이 있다. 오래전이지만 그가 역사 현장을 찾은 감회를 봇물 터뜨리듯 즉석에서 운문으로 형상화하는 모습에 크게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구상 시인의 뒤를 이어 공초숭모회를 이끌고 있는 그는 오상순 시인을 기리는 공초문학상을 서울신문과 공동으로 제정해 시상하고 있기도 하다. 시인은 “신춘문예 첫 당선을 서울신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남다르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1960년 12월 31일 밤 명동 향지원 다방에 공초 선생을 모시고 있었어요. 섣달그믐엔 통행금지가 해제됐으니 거리는 발 디딜 틈이 없었지요. 한 친구가 헐레벌떡 들어오더니 “너 신춘문예 당선했잖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당선 사실을 미리 알려 주지 않았으니 1월 1일 자 신문을 보고 확인해야 했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서울신문에 ‘벽’이 당선하지 않았어?” 하고 거듭 다그치는 것입니다. 내가 서울신문에 응모한 사실은 물론 제목도 이 친구가 알 까닭이 없으니 믿을 수밖에요. 막 뛰어서 태평로 서울신문사 뒤편에 가니 배달 차량이 시동을 걸고 있었어요. 가판신문을 10원인가 주고 딱 한 장을 샀는데 쫙 펴니까 ‘응모작은 총 1000여편, 당선작은 시조부의 벽’이라고 대문짝만하게 보이는 겁니다. 이병기 선생과 이태극 선생의 심사평도 함께 실려 있었습니다.” 시인은 신문을 들고 다시 뛰어서 명동 다방으로 갔다. 공초 선생에게 보고했더니 기뻐하면서 손을 굳게 잡아 줬다. 명동 자리가 파하자 삼촌이 사는 남산의 한의원으로 가서 난로에 불을 지피고 의자에서 잤다. 날이 밝자 신춘문예에 응모한 신문사를 돌아다니며 게시판을 확인했다. 경향신문은 시조 ‘묘비명’이 당선됐고, 조선일보는 시조 ‘압록강’이 가작으로 뽑혔다. 이해 신춘문예는 모두 이사천이라는 필명으로 응모했는데 사천(沙泉)은 공초 선생이 지어준 아호다. 1962년엔 동아일보에 시조 ‘보신각종’이 당선됐고 조선일보에는 동시 ‘달맞이꽃’과 시조 ‘바위’가 가작과 가작 2석에 각각 올랐다. “1963년엔 문화공보부 신인예술상에서 시 ‘달빛 속의 풍금’과 시조 ‘산하일기’가 각각 수석상으로 뽑혔어요. 1964년에는 자유시 ‘꽃과 왕령’과 ‘북위선’이 각각 동아일보와 한국일보에서 당선됐지요. 이해 5월에는 동인지에 발표하려고 써둔 시 ‘노래여 노래여’가 있었는데 전에 신촌에서 같이 하숙했던 친구 하나가 영천 하숙집으로 찾아와 문공부 신인예술상 얘기를 꺼내는 겁니다. 같은 방을 쓰던 중학생 이름으로 작품을 건네주었는데 문학부 특선작에 뽑혔어요. 특상은 늘 소설이 탔는데 그해는 시가 된 겁니다. ‘노래여 노래여’는 나를 유명하게 만들어 줬습니다. 이후 문단과 언론에서 신춘문예 일곱 차례와 신인예술상 세 차례를 합쳐 모두 열 차례 등단했다고 ‘10관왕’이라고들 했지요” 시인은 자신을 ‘한글둥이’라고 말한다.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에 들어간 것이 광복 이듬해인 1946년이다. ‘5000년 역사에 한글로 정규교육을 받은 1기생’이라는 것이다. 국어 교과서도 없었으니 선생님이 백묵으로 ㄱ, ㄴ, ㄷ, ㄹ을 써서 가르쳤다. “집안에 어떤 문학적 배경이라도 있느냐”고 물으니 ‘자화상’이라는 시를 보라고 했다. ‘너는 장학사의 외손자요 이학자의 손자라 / 머리맡에 얘기책을 쌓아놓고 읽으시던 할머니 안동 김씨는 / 애비, 에미 품에서 떼어다 키우는 똥오줌 못 가리는 손자의 귀에 / 알아듣지 못하는 말씀을 못박아주었다 /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라 찾는 일을 하겠다고 / 감옥을 드나들더니 광복이 되어서도 집에는 못 들어오시는 아버지와 / 스승 면암의 뒤를 이어 조선 유림을 이끌던 장후재 학사의 셋째 딸로 시집와서 / 지아비 옥바라지에 한숨 마를 날 없는 어머니는 / 내가 열 살이 되었을 때 겨우 할아버지 댁에 들어왔다 / 그제야 처음 얼굴을 보게 된 아버지는 삼팔선이 터져 바삐 떠난 이후 오늘토록 소식이 끊겨있다…저 놈은 즈이 애비를 꼭 닮았어 / 할아버지가 자주 하시던 그 꾸지람…’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를 처음 봤다. 아산에서 적색농민조합을 만들어 농민운동을 하다 옥살이를 하고 농민진흥회에서 민족운동을 이끌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항일운동을 했지만 좌익이라고 광복이 되자 국방경비대에서 죽은 목숨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반동분자로 지목됐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피신시키고 다시 아산으로 갔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만삭의 어머니는 면암 최익현 선생의 문하생인 친정아버지의 회갑연 준비로 부엌에서 일하다 산통을 느껴 외할아버지 소실댁에 가서 외아들인 나를 출산하셨어요. 외할아버지는 황룡이 달려드는 용꿈을 꾸고 소실의 태몽인 줄 알았는데 외손자 꿈이었던 거지요. 할아버지는 감옥을 드나드는 아버지 구명운동에 몸과 마음, 재산을 다 바치셨어요. 손자도 그런 길을 갈까 봐 아버지를 닮았다고 꾸지람을 하셨지요. 어머니는 중학교엔 못 보낸다고 했지만 아래채를 팔아 기어이 입학시킨 것도 할아버지였지요.” 시인은 ‘가장 기쁜 날’이 2020년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이라고 했다. 국가보훈처에서 아버지의 국가유공자증과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날이다. 조선총독부 재판 기록과 당시 신문기사로 아버지의 항일운동 공적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빨갱이 자식’에서 ‘국가유공자 아들’로 바뀌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에게선 용돈 10원도 받은 적이 없는데 국가에서 매달 연금이 나오고 병원비나 약값 모두 공짜이니 엄청난 일 아니냐”고 했다. 그러면서 “할아버지가 그토록 아프게 여기시던 큰아들의 독립운동이 가문을 빛나게 하고 있으니 지금은 어디를 가더라도 아버지 자랑을 한다”며 웃었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하시라’고 했더니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것”이라고 자신의 문학론을 다시 펼쳤다. 그러니 시나 소설로 역사를 다룰 때도 미래가 담겨 있지 않고 과거에 머물러 있으면 문학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는 “남이 하지 않은 일, 자기만 할 수 있는 일을 해서 남보다 반 발짝이라도 앞서나가야 한다”면서 “앞으로도 그런 문학을 할 것”이라고 했다. ■이근배 시인은 1940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났다. 1958년 서라벌예술대학에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해 김동리·서정주 교수의 지도로 소설과 시를 공부했다. 1961년부터 1964년까지 서울신문과 경향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일간지 신춘문예에 시·시조·동시가 당선됐다. 시집 ‘사랑을 연주하는 꽃나무’, ‘노래여 노래여’, ‘추사를 훔치다’와 기념시집 ‘대백두에 바친다’, ‘종소리는 끝없이 새벽을 깨운다’, 시조집 ‘동해바닷속의 돌거북이 하는 말’, ‘달은 해를 물고’, 장편서사시집 ‘한강’, 기행문집 ‘시가 있는 국토기행’ 등이 있다. 한국문학작가상, 가람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만해대상 문학부문 등을 수상하고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서울예대, 추계예대, 재능대, 신성대에서 강의했다. 월간 ‘한국문학’ 발행인, 계간 ‘민족과 문학’과 ‘문학의 문학’ 주간, 간행물윤리위원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2019 세계한글작가대회 조직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글·사진 서동철 논설위원
  • 제11회 김현문학패 심지아 시인·양선형 소설가

    제11회 김현문학패 심지아 시인·양선형 소설가

    심지아 시인과 양선형 소설가가 제11회 김현문학패 수상자로 선정됐다고 문학실험실이 25일 밝혔다. 이인성 문학실험실 대표를 비롯해 김정환 시인, 김태환 서울대 독문과 교수, 김형중 조선대 국문과 교수, 조강석 연세대 국문과 교수가 선정위원으로 참여했다. 선정위원회는 심지아의 시에 관해 “사물에 대한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촘촘하게 빚어낸 세계 이해와 시적 사유”가 돋보였다고 평했다. 양선형의 소설에 대해선 “‘소설’ 형식 자체에 대한 자의식과 멈추지 않는 문학의 본질에 관한 질문들”이라고 설명했다. 심지아는 2010년 ‘세계의문학’을 통해 등단해 시집 ‘로라와 로라’, ‘신발의 눈을 꼭 털어 주세요’를 냈다. 양선형은 2014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해 소설집 ‘감상 소설’, ‘클로이의 무지개’, ‘말과 꿈’ 등을 펴냈다. 수상자들은 김현문학패와 함께 시 부문 1000만원, 소설 부문 1500만원의 창작지원금을 받는다. 시상식은 오는 9월 26일 열린다. 문학실험실은 문학평론가 고(故) 김현(1942~1990)의 25주기를 기려 2015년 이 상을 제정했다. 고인이 세상을 뜬 나이인 만 48세 이하 작가로 5년 이상 활동하면서 해당 장르의 저서를 2권 이상 출간한 시인·소설가를 대상으로 한다.
  • 말하지 않음… 침묵은 곧 詩가 된다

    말하지 않음… 침묵은 곧 詩가 된다

    네 번째 시집 ‘네가 봄에 써야지…’광장 속 혐오 언어에 슬프고 화나상처받는 과정서 새로운 것 보여 말할 수 없기에 말하지 않는 것. ‘침묵’은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단어다. 하지만 부재에서도 현존을 느끼는 인간에게 때때로 침묵은 그 무엇보다 강력한 언어가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침묵은 ‘말하지 않음’으로 말하는 것, 곧 시(詩)가 된다. 시인 심보선(55)이 8년간의 긴 침묵을 깼다. 네 번째 시집 ‘네가 봄에 써야지 속으로 생각했던’(아침달)으로 돌아왔다. “다시는 못 쓸 것 같았다. 다시 쓸 수 있어 기뻤다.”(‘시인의 말’ 부분) 예술과 사회의 관계에 천착하는 사회학자이기도 한 그는 현재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로 일하고 있다. 왜 쓰지 못했을까. 시집을 품에 안고 24일 그의 연구실로 향했다. “가르치고 연구하는 일에 몰두하다 보니…. 제가 게을렀던 것 같아요. 오랜만에 쓰는 것이라 두려움도 컸고요. 그래도 써지더라고요. 전투를 치르듯이 이번 시집을 완성했습니다.” 그간의 침묵에 대해 시인은 이렇게 변명했다. 하지만 시인에게 침묵은 단순히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언어 뒤편에 있는 의미심장한 어떤 것. “나는 대체로 홀로 침묵 속에서 살아간다/침묵은 먼 곳으로 떠난 내가/이곳에 머무른 내게 전하는 안부이다”(‘삶은 나의 일’ 부분) 시인은 오래 침묵하면서 침묵의 정체를 집요하게 탐구한 듯하다. “진실에 다가가서 그것을 드러내 말하고 싶지만, 나의 부족한 말주변이 그 진실을 오염시킨다는 두려움이 있죠. 시인에게는 늘 침묵에의 압박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결국 말하기를 선택하죠. 그 말은 어눌하기도, 갈팡질팡하기도 해요. 논리적 기준에서는 헛소리처럼 들리기도 하죠. 그러나 이것은 시가 침묵을 다루는 방식입니다.” 시인을 밀어붙인 건 출판사와의 약속이었다. 올해 연구년을 맞아 비로소 시 쓰기에 집중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다 지난해 말 별안간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이후 지난하게 이어졌던 혼란스러운 정국. 그래서일까. 이번 시집에서는 ‘분노’의 감각이 엿보인다. 표제작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영혼을 지닌 이들은/너무 슬픈 나머지/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시인의 머릿속을 맴도는 ‘영혼’. 하지만 광장에서 수없이 뿜어져 나오는 혐오의 언어들을 들으며 시인은 회의한다. 우리에게, 인간에게 영혼이란 건 과연 있는가. 회의는 분노로, 분노는 슬픔으로 이어진다. “어떻게 저럴 수 있는가. 슬프고 화가 났어요. 인간에게 영혼은 없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렇게 상처받는 과정을 되짚으니 새로운 게 보였어요. 슬퍼한다는 건 영혼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잖아요. 영혼을 지녀야만 슬퍼할 수 있기에, 그런 자만이 영혼이 없다고 믿게 되는 역설을 보이고 싶었죠.” 시인과 사회학자. 심보선을 이루는 여러 정체성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다.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사실 둘은 긴밀하게 공명한다. 문학이나 사회학이나 결국은 읽고 쓰는 일.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언제나 ‘인간’을 향한다. 인간을 둘러싼 조건들. 그것은 사회일 수도,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 사이의 관계일 수도 있다. “나는 예술가 가족을 시기하지/나는 시인으로 살아가려고/홀로 분투해야 했거든” 기형도 시인의 명시 ‘질투는 나의 힘’의 제목을 그대로 따온 3부의 첫 시는 시와 시인이 무엇인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결과물처럼 읽힌다. 시는 일이 될 수 없고 시인은 직업이 될 수 없다. 시인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시인더러 “시는 취미로만 쓰라”고 한다. 하지만 그래서 시는 더 매력적이다. 왜일까. “시를 써서 먹고사는 건 쉽지 않습니다. 만약 돈을 받는다는 건 회사나 고객의 요구에 맞춰야 한다는 것인데…. 누군가의 주문에 맞춰서 제작한 시가 급진적일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겠죠. 시의 본질은 자유로움이니까요.”
  • 한국 전통시의 아름다움, 프랑스 파리 독자에게 가닿다

    한국 전통시의 아름다움, 프랑스 파리 독자에게 가닿다

    한국의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전통시가 프랑스 파리에 있는 독자들에게 가닿았다. 파리에 있는 한불문화교류센터는 지난 18일(현지시간) 개최된 파리 시(詩) 전시회에 최초로 참가했다고 밝혔다. 같은 날 주 프랑스 한국 대사관 영사부 건물에서 ‘한국 전통시 선집’ 출판을 기념하는 ‘한불 전통시의 밤’ 행사도 가졌다. 한불문화교류센터는 지난해와 올해 프랑스에서 발행한 한국시선집과 개인시집 등 14권을 출품했다. 내년부터는 독립부스를 마련해 꾸준히 참가할 계획이다. 한불문화교류센터는 프랑스 독자들에게 프랑스시인협회 기관지 ‘광장’을 통해 한국의 전통시와 시조를 소개하는 한편 프랑스의 전통시를 소개하는 ‘프랑스 고전시 선집’을 발간키도 했다. 장-샤를 도르주 프랑스시인협회 회장과 유자효 전 한국시인협회 회장이 시의 선정과 해설 등을 맡았다. 조홍래 한불문화교류센터 이사장은 “전통 관련 문화교류는 양국 국민 간 상호 이해를 증대시키고 친선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며 “지속적인 파리 시 전시회 참가와 한국시 콩쿠르를 통해 한국의 시를 프랑스 및 유럽에 널리 알릴 것”이라고 했다.
  • ‘취집’은 옛말? 기혼남녀 10명 중 8명 “맞벌이는 필수”…가사 분담은?

    ‘취집’은 옛말? 기혼남녀 10명 중 8명 “맞벌이는 필수”…가사 분담은?

    결혼한 여성이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전업주부로 생활하는 것을 뜻하는 ‘취집(취직 대신 시집)’은 옛말이 됐다. 21일 기혼자 10명 중 8명은 ‘맞벌이’를 필수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결혼정보회사 가연은 25~39세 기혼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한 ‘2025 결혼 인식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 결과 맞벌이의 필요성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잘문에 응답자의 77.6%가 ‘꼭 필요하다’고 답했다. 13.2%는 ‘굳이 필요 없다’, 9.2%는 ‘별 생각이 없다’로 답했다. 현재 가정의 맞벌이 여부는 ‘그렇다’가 69.8%, ‘아니다’가 30.2%로 나뉘었다. 실제 10명 중 7명은 아내가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22년 초 가연이 발표한 조사에서 맞벌이 중이라 답한 기혼의 비율이 60.8%였던 것과 비교하면, 3년새 9% 증가했다. 가사 분담에 대해선 ‘남편과 아내가 거의 비슷하게 분담한다’가 57%로 가장 많이 차지했다. ‘분담은 하나, 아내 위주로 한다(26.4%)’, ‘분담은 하나, 남편 위주로 한다(9.5%)’, ‘분담하지 않고, 대부분 아내가 한다(4.9%)’, ‘분담하지 않고, 대부분 남편이 한다(0.9%)’, ‘기타(1.4%)’ 순으로 나타났다. 전반적으로 아내의 가사 비중이 더 높게 나온 가운데 ‘비슷하게 분담한다’고 답한 남성이 61.8%, 여성이 52%로 나왔다. 또 20대는 60.3%가, 30대는 55.4%가 ‘비슷하게 분담한다’고 답했다. 비슷하지 않다고 느끼는 비율은 여성, 30대에서 더 많았다. 가연 관계자는 “점점 맞벌이를 필수로 여기는 추세”라며 “일·가정 양립을 위한 각종 실효성 있는 정책이 적용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가정에서는 서로의 경제 활동과 가사 분담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태도가 더 중요해지고 있는 것 같다”고 강조했다. 통계청 “30~40대 부부 10쌍 중 6쌍은 ‘맞벌이’” 앞서 지난 19일 통계청이 발표한 ‘2024년 하반기 지역별고용조사 맞벌이 가구 및 1인 가구 취업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기준 유배우 가구(1267만 3000가구) 가운데 맞벌이 가구는 608만 6000가구였다. 연령별로 보면 맞벌이 비중은 30대(61.5%)와 40대(59.2%)에서 가장 높았다. 전년과 비교하면 각각 2.6%포인트, 1.3%포인트 상승했다. 18세 미만 자녀가 있는 유배우 가구는 393만 7000가구였다. 이 중 맞벌이 가구의 비중은 58.5%로 1.7%포인트 늘었다. 막내 자녀 연령별로는 13∼17세(64.1%) 가구에서 맞벌이 비중이 가장 높았고, 7∼12세(59.8%), 6세 이하(53.2%) 순이었다. 자녀 수 별 맞벌이 가구 비중은 1명 58.7%, 2명 59.3%, 3명 이상 52.2%였다. 지역별 맞벌이 가구 수는 경기도(156만 8000가구), 서울(90만 1000가구), 경남(42만 5000가구) 순으로 많았다. 맞벌이 비중은 제주(62.2%), 전남(58.1%), 세종(57.1%) 순으로 높았다.
  • “여성들 몰려와 ‘브래지어’ 바친다”…‘가슴 모양 섬’의 충격 비밀

    “여성들 몰려와 ‘브래지어’ 바친다”…‘가슴 모양 섬’의 충격 비밀

    연애운을 이뤄준다는 소문이 있는 태국의 ‘가슴 모양 섬’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 섬을 방문하는 여성들은 소원을 빌기 위해 브래지어를 봉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1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태국 서부 쁘라쭈압키리칸 주에 있는 한 섬이 ‘연애운 기원 명소’로 주목받고 있다. 이 섬은 여성의 가슴을 닮은 모양으로 인해 ‘코놈사오’(Ko Nom Sao), 직역하면 ‘모유섬’이라 불리며, 최근 연애를 바라는 이들의 순례지로 떠오르고 있다. 이 섬은 본토에서 보트로 약 10분 거리이며,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은 연애운을 기원하며 브래지어를 봉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독특한 풍습은 전설 속 비극적인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졌다. 전설에 따르면 욤도이라는 아름다운 여성이 살았는데 욤도이의 아버지는 딸을 중국계 통치자에게 시집보내려 했고, 어머니는 태국 펫차부리주의 왕자에게 보내길 원했다. 아버지는 뜻을 거역한 욤도이를 살해하고 욤도이의 시신을 바다에 던졌으며, 이후 욤도이의 두 가슴이 각각 섬으로 변했다고 전해진다. 하나는 현재의 코놈사오이며, 다른 하나는 태국 동부 찬타부리주 근처에 형성된 섬이라고 한다. 이후 약 80년 전 폭풍을 피해 피난길에 오른 한 어부가 이 섬 위로 신비로운 빛을 목격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람들은 이것이 욤도이 여신의 영혼이라고 믿었다. 이후 그녀를 기리기 위해 신사가 세워졌고, 시간이 지나면서 사랑을 상징하는 브래지어를 바치는 풍습이 뿌리를 내렸다. 삼로이욧 하위 지구의 기업 사회적 책임 위원회 위원장인 수마테 차로엔숙은 “여신 욤도이의 기적은 오랜 시간 지역 사회에서 널리 인정받아 왔다”면서 “여성들이 봉헌한 브래지어는 분류를 거쳐 지역 여성 단체와 저소득층 여성들에게 전달하는 등 실질적인 도움으로도 이어진다”고 밝혔다. 코놈사오는 매년 수많은 순례자와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으며, 특히 연애와 관련한 소원을 비는 이들이 자주 찾는다. 수맛 위원은 “이곳에서는 독특한 문화적·영적 경험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자연 풍경과 유명한 다이빙 명소도 함께 즐길 수 있다”며 국내외 관광객의 방문을 독려했다. 이 특별한 풍습은 온라인상에서도 화제를 모으고 있다. 누리꾼들은 “꼭 순례를 가고 싶다. 주소 좀 알려 달라”, “안타까운 이야기다. 연애운이 진짜 이뤄질지 궁금하다”, “진정한 사랑과 행복은 신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 [훔치고 싶은 문장]

    [훔치고 싶은 문장]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나태주 지음, 김영사)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너무 섭섭하게 그러지 마시어요. 하느님, 저에게가 아니에요. 저의 아내 되는 여자에게 그렇게 하지 말아 달라는 말씀이에요. 이 여자는 젊어서부터 병과 더불어 약과 더불어 산 여자예요. 세상에 대한 꿈도 없고 그 어떤 사람보다도 죄를 안 만든 여자예요.” 시력 54년간 다정한 시구로 위안을 전해 온 ‘풀꽃 시인’ 나태주가 처음 엮은 산문 시집. 1971년 등단 이후 써 온 50권이 넘는 창작 시집에서 산문시만을 추렸다. 시인은 간간이 산문시를 써 왔는데, 그 산문시들이 한 권의 시집이 되기까지 반세기가 걸렸다. 표제작은 18년 전 당시 시인이 사흘밖에 살지 못한다는 의사의 이야기를 듣고 병상에 누워 자신 곁에서 간호하는 아내를 바라보며 쓴 시다. 212쪽, 1만 4000원. 귓속말 친구(조영서 지음, 우거진 그림, 책읽는곰) “나는 소은이 귓속말이 좋아졌어. ‘너만’이라고 하니까 어쩐지 설레잖아. 하지만 내가 귓속말하기는 어려워. 소은이 귀에 바싹 붙기도 전에 말이 나오거든. 소은이는 괜찮대. 나는 듣기만 해도 된대.” 비밀을 나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 다투더라도 다시 손 내밀 수 있는 용기라는 것을 보여 주는 동화다. 주인공 현지가 자꾸 귓속말하는 소은이에게 “왜 자꾸 귓속말하냐”고 묻자 돌아온 대답, “너만 들으라고”라는 말은 설렘을 느끼게 한다. 귓속말로 가까워지고, 마음으로 친구가 돼 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친구 관계로 어려워하는 어린이들에게 위로와 응원을 건넨다. 68쪽, 1만 1000원. 악녀서(천쉐 지음, 김태성 옮김, 글항아리) “그녀는 이처럼 내 기억 속에서 접촉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었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 속에서 나는 자궁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축축하고 따뜻했다. 그리고 혈맥이 확장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대만에서 첫 동성 결혼을 한 인물이기도 한 천쉐의 소설집. 1995년 대만에서 발표됐을 때 여성들 사이의 정욕 묘사가 지나치다는 이유로 숱한 논쟁을 일으키며 ‘18세 이하 열독 금지’ 딱지가 붙고 얼마 후 절판됐던 책이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나 우리나라에서 소개된다. 작가가 20대 중반에 쓴 네 편의 소설은 젊고, 욕망으로 흘러넘치며, 죽음 충동이 선명하다. 248쪽, 1만 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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