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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글라 총파업… 60개시 마비/총리퇴진 요구

    ◎정당간 충돌 5백여명 부상/시위대 열차정지·폭탄투척 등 혼란 극심 【다카 AP 로이터 연합】 칼레다지아 총리 내각의 퇴진과 조기선거 실시를 요구하는 방글라데시 야당 주도의 총파업이 2일째 접어든 3일 정당간의 충돌로 약 5백명이 부상하고 교통수단이 마비되는 등 전국이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이날 시위군중들은 수도 다카에서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였으며, 일부 과격시위대는 최소한 4개 열차를 정지시키고 철도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는 등 전국 약 60개 도시의 기능이 마비됐다. 또 다카의 미르자 골람하피즈 법무장관과 집권당 의원의 집 앞에서 사제폭탄이 폭발했으나 부상자느 발생하지 않았다고 경찰은 밝혔다. 이번 총파업 와중에서 약 5백여명이 부상하고 경찰차량에 돌등을 던지며 과격시위를 벌인 2백명이 경찰에 체포된 것으로 알려졌다.
  • 폴리네시아서 대규모 반핵 시위/미·일 등 세계정치인 1백여명 참가

    ◎일 다케무라 장관 “핵 실험은 인류에 대한 테러” 【파페에테 AP 로이터 연합】 프랑스의 핵실험 재개가 임박한 것으로 전해진 가운데 폴리네시아의 수도 파페에테에서는 2일 2천∼3천명의 시위대가 남태평양에서의 프랑스 핵실험 계획에 항의하는 대규모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에는 미국과 일본,독일,호주,덴마크,벨기에 등의 의원등 전세계 정치인 1백여명이 참가해 프랑스의 핵실험 결정을 비난하는 연설을 했으며 상당수의 반핵운동가들이 합류했다. 이날 파페에테 거리에는 프랑스와 영어,타히티 현지언어로 쓰인 반핵구호가 담긴 각종 깃발이 내걸렸으며 일부 깃발에는 「학살자 시라크」라는 구호와 히로시마원폭 희생자들을 묘사한 그림 등이 새겨져 있었다. 특히 독립운동 지도자 오스카 테마루와 다케무라 마사요시(무촌정의) 일본대장상은 시위대를 이끌고 파페에테 중심가 6㎞구간을 행진하면서 프랑스의 핵실험 철회를 요구했다. 「핵실험 금지」라고 새겨진 T­셔츠를 입고 시위에 참가한 다케무라 장관은 『20세기가 끝나가는 시점에서아름다운 남태평양에서 핵실험이 재개되려 하고 있다.이것은 인류에 대한 테러 행위와 같다』며 프랑스의 핵실험 재개를 비난했다.
  • “불 핵실험 저지” 절정/곳곳서 시위… 파리경찰,수십명 구금

    ◎스위스 불 영사관 점거 【파페에테(타히티)·파리 AP 로이터 연합】 프랑스의 핵실험재개가 임박한 가운데 파페에테의 정부청사에 여성시위대가 난입하고 무루로아 환초주변에 항의선박이 속속 도착하는 등 31일 핵실험저지움직임이 절정에 달했으며 그린피스는 이날 핵실험진동감지를 위해 수중음파탐지기를 시추했다.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수도 파페에테에서 핵실험반대집회를 갖던 여성들은 이날 시가행진중 경찰의 저지를 뿌리치고 정부청사에 난입,고위층과의 즉각 면담을 요구하는 기습시위를 벌였으며 30여명의 여성시위대가 2시간동안 국제공항옆의 군용활주로를 점거하기도 했다. 이같은 저지움직임은 2일 유럽 각국과 일본,호주,뉴질랜드 등지의 국회의원 1백여명을 포함,파페에테의 반핵운동가 1만5천여명이 참석할 핵실험재개저지시위로 최고조를 이룰 전망이다. 【파리 AFP 연합】 파리경찰은 핵실험반대서명을 정부에 전달하기 위한 인간사슬을 금지한 데 대해 항의시위를 벌인 반핵운동가들과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 끝에 수십명의 그린피스회원을 구금했다. 관리들은 구금된 사람이 환경압력단체회원중 일부로 파리시내 곳곳에서 프랑스의 예정된 핵실험을 비난하는 불법시위를 벌였다고 밝혔다. 【제네바 로이터 연합】 스위스 반핵운동가들이 1일 프랑스의 핵실험재개에 항의,스위스서부 로잔등의 프랑스영사관건물을 점거했다고 프랑스 관리들이 밝혔다. 또 독일에 이웃한 북부바슬의 프랑스영사관에서도 반핵운동가들의 점거시위가 30분동안 벌어졌다.
  • 한국에선… 일본 대사관(한국속의 일본,일본속의 한국:20)

    ◎“과거인식 잘못” 반일정서에 곤혹/비중있는 재외공관… 직원 50명/교역 급속 증가… 경제업무 중시/정치·안보 밀접한 동맹… 정무분야 중요 서울 종로구 중학동 18의 11,한국일보사와 연합통신사의 사이에 주한 일본대사관이 자리잡고 있다.1백m쯤 떨어진 미국대사관이 세종로 큰 길가에 보란듯이 서 있는 것에 비하면 일본대사관은 주변의 고층빌딩 사이에 5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을 숨기듯 웅크리고 있다. 우리나라에 일본정부의 사무소가 처음 설치된 것은 지난 65년이다.우리가 먼저 49년 1월에 주일 대한민국 대표부를 설치했으며,일본이 65년 주한 일본정부 사무소를 설치한 것이다. 65년 12월18일 한일기본조약 및 부속협정이 발효되면서 양측 대표부와 사무소는 대사관으로 승격했다.일본은 이후 부산에 총영사관을,제주도에 출장소를 각각 1곳씩 설치했다. ○11명째 대사 보내 양국간의 국교가 정상화된 뒤 일본은 66년 3월16일 기무라 시로(목촌사랑칠)초대 대사를 부임시킨이래 지금까지 모두 11명의 대사를 한국에 보냈다. 현재의 주한 일본 대사는 야마시타 신타로(산하신태랑).32년생으로 도쿄대학 법학부를 졸업한뒤 외무성에 들어가 미국 안전보장과장과 독일대사관 참사관,태국 대사,정보조사국장등의 요직을 거친 엘리트 외교관이다.야마시타대사는 특히 미국과의 안보조약 업무를 계속 담당해왔기 때문에 한·미·일 3국간의 안보협력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주한 일본대사가 접촉하는 인사의 폭은 매우 넓고 깊다는 것이 외무부 관계자의 설명이다.일본대사가 임기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갈 때 열리는 환송연에서는 정치·경제·사회·문화등 각 분야의 한국내 유력인사는 모두 볼 수 있다고 한다. 야마시타 대사의 경력이 말해주듯 주한 일본대사관은 일본의 재외공관 가운데서도 매우 중요한 곳으로 손꼽힌다. 5대 대사를 지낸 스노베 료조(수지부양삼)의 경우 외교관으로서 최고직인 외무차관에 오르기도 했다.또 일본 외무성에서 아주국장과 북동아과장등 아시아쪽의 중요한 외교포스트를 맡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국을 거쳐야 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있다. 일본의 재외공관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곳은 물론 워싱턴의 주일대사관으로 외교관 숫자만 1백명이 넘는다. 현재 주한 일본대사관에 근무하는 외교관은 모두 50명선.이 숫자는 미국과 중국·러시아·영국·프랑스 등보다는 적지만,일본이 중시하는 서방선진 7개국(G­7)에 파견한 외교관의 숫자의 평균과 비슷한 것이다. 특이한 것은 주한 일본대사관에 근무하는 외교관의 90%가 용산구 동부이촌동의 아파트 지역에 몰려산다는 점이다.한국에 파견된 일본 언론인들도 마찬가지다.일본대사관의 한 직원은 그 이유를『개포동에 있는 일본인 학교에서 동부이촌동에 스쿨버스를 보내기 때문』이라고 자녀교육을 이유로 들며『집단거주촌을 만든다든지 하는 의도가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고 설명했다. 65년 수교이래 한·일관계가 양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일본대사관의 한국정부와의 협의사항도 날로 늘어나고 있다.한·일 양국이 정치,안보상의 동맹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정무분야도 중요하지만 교역이 늘어남에 따라 경제분야의 업무도 마찬가지로 중시되고 있다. ○비판여론에 촉각 일본대사관측이 양국관계에서 가장 신경쓰는 부분은 바로 일본의 역사인식에 대한 한국인의 비판적 여론이다.특히 올해 광복 50주년,한·일국교정상화 30주년을 맞는 시점에서도 일본에 대한 한국 국민의 「적대적」태도가 그다지 바뀌지 않고 있는 데 대해 매우 당혹스러워 하고 있다.일본 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일본도 역사인식을 바로잡는 것이 중요한 현안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으며,지난 8월15일의 무라야마총리 담화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국민의식을 개선하기 위한 작업을 해나가고 있다』고 말했다.이 관계자는 그러나 『과거의 불행한 역사에 대해 일본 뿐만 아니라 한국인 스스로의 책임도 인정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는 것같다』고 최근의 한국내 여론조사 결과를 제시하기도 했다. 일본대사관은 한국내에서 반일감정이 확산될 때마다 학생시위대의 공격목표가 되기도 한다.지난 75년 8월15일 문세광이 육영수여사를 저격했을 때 일본대사관은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으며,지난 6월6일에도 학생들이 안국동 일본공보문화원에 화염병을 던져 도서관이 불타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양국의 인적교류가 확대되고 있으며,이에 따라 주한대사관의 영사업무도 폭주하고 있다. 일본대사관측이 제공한 일본 법무성자료의 통계에 따르면 93년 일본인의 해외여행지 1위는 미국,2위는 한국이다.또 같은해 한국인의 해외여행지 1위는 일본,2위는 미국이다.87년부터 우리정부가 해외여행을 단계적으로 자유화하면서 일본 방문자는 87년 16만9천9백74명에서 지난해 59만5천6백90명으로 크게 늘었다.그러나 아직까지 약간의 규제가 있지만 미국처럼 비자받기가 어렵다는 불평은 나오지 않고 있다고 여행사 관계자들은 말한다. ○대부분 지한파로 한편으로 일본 대사관이 「관리」해야 하는 한국내의 일본인은 1만1천명 정도다.94년 10월1일을 기준으로 볼 때 장기체류자가 8천7백18명,영주자가 4백79명으로 공식집계되고 있다.장기체류자는 역시 민간기업인이 2천1백90명으로 가장 많고,유학생이나 연구원이 1천6백46명,자유업이 98명,특파원등 언론관계인이 74명,기타 4천4백9명등이다.유학생 가운데는 대사관에 체류를 신고 하지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신고된 숫자는 실제 체류자보다 적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에 체류를 마치고 돌아가는 일본인들은 각자의 경험에 따라 한국에 염증을 느끼거나 애정을 느끼거나 한다.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한국 근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일본 외교관들은 대체로 지한파의 성향을 갖게 된다고 한다.양국의 국민감정이 좋지 않은 가운데 적극적으로 양국관계를 개선하려다 보니 자연히 상대방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 대만 3개도시서 대규모 반중시위

    【대북 AP 연합】 대만인 약 2만명이 20일 수도 대북을 비롯한 주요 3개 도시에서 중국의 미사일 실험에 항의하고 대만의 독립을 지지하는 시위행진을 벌였다. 이날 대북에서는 시위군중 약 1만명이 『우리는 대만인이지 중국인이 아니다.중국은 패권주의를 중단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3시간 동안 행진을 벌였다. 시위행진을 주최한 관계자들은 대북 이외에 중부도시 대중과 남부도시 대남에서도 시위행진이 있었으며 모두 1만명 가량이 참가했다고 전했다. 시위대는 특히 대만 북부 해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국의 제2차 미사일 실험에 강하게 항의했다.
  • 시위­진압의 악순환/박찬구 사회부 기자(오늘의 눈)

    시위대와 공권력 사이의 「힘겨루기」는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16일 밤늦게까지 도심 곳곳에서 벌어진 대학생들의 격렬 시위와 경찰의 과잉 진압은 30도를 웃도는 무더위 만큼이나 시민들을 답답하게 했다. 시민의 공간인 장충단 공원이 최루탄으로 뒤덮였고 이에 질세라 학생들은 도심 곳곳에서 과격시위를 벌였다.1백90개 중대,2만여명의 전경들과 쇠파이프로 무장한 6천여명의 학생 시위대는 「시민생활 보호」와 「잘못된 역사의 심판」이라는 타협점없는 명분을 내세워 한치의 양보도 없는 싸움을 치렀다. 악순환의 고리는 이어져 학생·전경 50여명이 진압봉과 쇠파이프에 부상을 입었고 시위 현장을 촬영하던 기자 4명이 전경에 폭행당하는 어이없는 사태까지 일어났다.숨을 헉헉대며 도심의 이곳 저곳을 쫓고 쫓기는 학생과 경찰의 공방은 시위 후진국으로서 우리의 자화상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무더위와 짜증으로 인한 경찰의 과잉진압도 무리수였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경찰과 시위대사이의 불신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 많다. 경찰은 올해초 바람직한 시위문화 정착을 위해 「경찰통제선」(폴리스 라인)제도를 도입했다.평화시위를 보장하는 대신 다른 시민이나 교통흐름에 피해를 끼치지 않도록 통제선을 정하는 것으로 시위대와 공권력간의 신사협정인 셈이다. 경찰은 그러나 이번 집회에서는 이를 무시했다.대학생들이 쇠파이프와 화염병까지 준비해 과격 시위가 뻔한 마당에 어차피 무너질 통제선을 설정한다면 공권력의 체면이 뭐가 되냐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한 경찰 간부는 이를 두고 『법을 무시하는 시위대에게 법의 논리로 설득할 수 있겠느냐』고 강경한 논리를 폈다.그는 또 『경찰이 진압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실수를 하기도 했지만 이날 시위 진압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하기도 했다. 학생들도 당초 주최측이 취소한 거리행진을 강행하려해 경찰의 강제 진압을 자초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이처럼 경찰과 학생의 틀에 박힌 시나리오는 우리시대의 현주소일 수 밖에 없다.이성보다 「힘의 논리」가 앞서는 현실에서 「통일」과 「미래」로 가는 광복 50주년의 참된 의미는 어디서 찾을 것인가.
  • 호남일대 의병 규합 항일무장투쟁/이달의 독립운동가/전수용 선생

    ◎대동창의단 조직… 일군과 70여차례 교전/31세에 붙잡혀 순국하자 부인도 따라 자결 『어차피 한번 죽고 마는 것이니 의병에 충실하다 죽어서 끝내 좋은 이름을 차지하는 것만 하겠느냐』 구한말 의병대장으로 활약한 해산 전수용 선생(1879년10월18일∼1910년7월18일)이 남긴 「진중일기」의 한 대목이다. 선생은 이 우국시에 표현된 그대로 31년 짧은 생애를 항일운동의 제단에 기꺼이 불사른 애국지사였다. 전북 임실 출신인 선생은 24세 때인 1903년 면암 최익현등 호남선비들이 개최한 시국강연회에 참석,이들의 우국충정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선생은 얼마뒤 최익현이 을사조약체결에 반대,조정에 창의토전소를 올리고 호남 유림을 규합해 창의의 기치를 높이 들자 궐기장소인 태인으로 찾아갔으나 진영이 빈약한 데 실망,일단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붙잡혀 대마도로 끌려가 순국한 최익현의 창의는 비록 실패로 끝맺음했지만 항일운동의 선봉으로서 국민 사이에 항일의식을 용솟음치게 하는 계기가 됐다. 선생은 최익현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간 뒤 곳곳에서 의병운동이 확산됨에 따라 1908년 전북 임실에서 결성된 창의동맹단에서 참모로 처음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창의동맹당은 진안과 임실을 중심으로 전주·장수·무주·남원·순창·구례·곡성등 호남 동부지역 9개군을 활동지역으로 삼고 있었다. 이들은 이 지역에서 경찰서·헌병분견소·수비대 등을 습격하고 일군 토벌대와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1908년3월 남원 사촌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패한데 이어 4월 진안과 임실의 경계인 대응전투에서 다시 참패,활동이 위축되자 선생은 다른 의병부대를 찾아나섰다. 선생은 광주에 머물던중 황국시위대 참위 출신인 정원집이 수십명의 병사와 함께 찾아와 의병대장을 맡을 것을 요청함에 따라 대동창의단을 조직하게 됐다. 『왜노는 우리나라 신민의 불구대천의 원수다.임진란의 화 또한 그렇거니와 을미 시국모는 물론이고 우리 종사를 망치고 인류를 모두 죽일 것이니 누가 앉아서 그들의 칼날에 죽음을 청할 것이오.힘써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자』 선생은 이같은 창의문을 통해 의병을 일으킨 동기를 공포하고 일군과의 전투에 돌입했다. 대한제국군 출신·유생·농민·포수등 5백여명으로 결성된 대동창의단은 1908년8월부터 10여개월동안 맹활약,일본군과 70여차례 교전을 벌였다. 선생은 부대를 1백∼1백50여명으로 쪼개 야간에 이동하면서 투쟁하는 게릴라식 전법을 도입했다. 이들은 일군 헌병분견소나 경찰서·수비대의 움직임을 은밀히 알아낸 뒤 매복했다가 기습하는 작전으로 여러 차례 성과를 올렸다.이들은 한때 호남 서남부지역을 완전장악할 정도로 세력을 떨쳤다. 선생은 이런 가운데 이웃 의병부대와 꾸준히 연락을 취해 서로 위기에 빠질 때 도움을 주고받았으며 1908년 겨울 호남의병연합체인 호남동의단이 발족하자 대장에 임명됐다. 호남의병의 정신적 지주로 떠오른 선생은 부대를 10개로 나눠 전남·북일대에서 일본군과 투쟁을 벌이면서 친일파 징계등의 일도 펼쳤다. 한편 일제는 끊이지 않는 의병활동을 봉쇄하기 위해 전국 시·읍·군·면에 산재한 성벽을 파괴,의병활동의 거점을 제거하는 작업을 벌였다. 또한 1만1천여명의 병력을 동원,대대적인 의병토벌작전을 펼치고 1909년에는 일본본토에서 2개 여단을 파견,의병토벌에 돌입했다. 마침내 대한제국의 의병해산령이 내려지자 선생은 1910년5월 세가 기울었음을 느끼고 부대장에서 물러나 시골로 몸을 숨기고 후일을 기다리기로 했다. 일제는 그러나 선생을 체포하기 위해 현상금을 내걸고 탐문에 나섰다. 선생은 남원 고래산에서 서당을 열고 어린이를 가르치던중 한 밀고자의 제보를 받고 달려온 일군에 붙잡혔다. 『서생이 무슨 일로 갑옷을 입었나.본래 세운 뜻이 틀려지니 한숨만 나오는구나』 일제에 붙잡히면서 이같은 우국시를 남긴 선생은 광주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교수형으로 순국했다.선생이 순국하자 부인 김해 김씨는 집에서 독약을 마시고 자결,선생의 절개와 부인의 지조는 충신열사의 사표로 의병활동사에서 길이 이름을 남기고 있다. 정부는 선생의 공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대검 사용·「최루탄 살해」 확인/5·18 해소된 의문점

    ◎계엄군의 시위 과잉진압 사실로/「헬기사격」,충돌방지 위한 불빛/「별도세력」 군부대 지휘 없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군부대가 대검을 사용했으며 광주 외곽지역의 무고한 시민에게도 총격을 가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무장헬기에서 기총소사를 하거나 「별도의 세력」이 사전계획에 따라 군부대를 지휘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검찰은 18일 80년 5·18 당시 군부대가 착검상태에서 위력시위를 하던 중 투석공격을 당하자 시위대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대검으로 피해를 입힌 사실이 인정된다며 대검 사용사실이 없다는 군관계자들의 주장을 일축했다. 검찰은 특히 손옥례씨등 12명의 사망자 또는 부상자에게 자상(나상)이 발견된 점에 비추어보면 설혹 지휘관의 의사와는 무관하더라도 공수부대원들이 대검을 사용한 사실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한 공수여단 5개 대대가 21일 광주교도소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시위대 수십명을 천막 등으로 덮은 트럭에 실어 연행하면서 최루탄을 터뜨려 5∼6명을 질식사하게 하고 다수의 화상환자를 발생시키는 등 무력시위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민간인 피해사례도 확인됐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 부대가 교도소근처를 지나가던 김성수씨일가를 시위대로 오인해 총상을 입혔으며,철수 및 교전과정에서 숨진 시신 12구를 교도소부근에 가매장한 사실도 확인했다고 말했다. 검찰은 그러나 헬기에서 기총소사를 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사격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없는데다 사격장면으로 보이는 사진상의 헬기 아래쪽 불빛은 사격에서 발생한 섬광이 아니라 헬기에 부착된 충돌방지용 불빛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검찰은 부상을 입은 피해자는 물론 시신의 검시기록에서도 기총사격에 의한 사망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자료를 찾을 수 없는 점도 이같은 사실을 뒷바침한다고 설명했다. 검찰은 또 5월18일 11공수여단의 추가투입이 공수부대원과 학생들이 충돌하기 전에 결정된 것은 사실이나 이는 광주 시위상황을 보고받은 육본이 군병력의 증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특전사령관의 의견을 들어 결정한 것일 뿐 별도의 지휘계통에 있는 「세력」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 밝혔다. 검찰은 당시 계엄사령관이 자위권 보유를 천명한 시간과 각 부대가 자위권발동을 지시한 시간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은 사실이나 계엄사령관이 발표하기 전에 자위권발동을 승인받은 사례등이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최초발포경위에 대해서는 5월19일 광주고교근처의 시위대가 장갑차에 불붙은 짚단을 던지려 하자 한 장교가 공포를 쏘고 다시 위협사격을 하는 과정에서 주위에 있던 학생 1명이 부상을 당한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은 그러나 21일 전남도청앞에서는 도로에 나와 단순히 구호를 외치는 사람은 물론 총상자들을 구호 또는 호송하거나 심지어 구경 나온 사람에게까지 발포한 것으로 조사돼 당시 실탄제공 및 사격통제에 상당한 문제점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 시위대가 장갑차 포위하자 장교 첫발표/「5·18」수사 의문점 규명

    ◎21일 전남도청앞 충돌전 장교위주 실탄분배­발포경위/전교사령관­31사단장 계통밟아 군병력 투입­군지휘권/광주시내 시위대처 급급… 병력운용 여유없어­무기피탈 방치/인명피해·뚜렷한 피탄흔적·파편 등 확인안돼­헬기 기총소사/8명의 사체서 자상 발견… 대검 사용 인정­대검등 사용/정지불응 미니버스에 총격… 10여명 사망­광주외곽 피해/「신원·사망경위 불명」 많아 확정 불가능­사망자수 검찰이 18일 「5·18」사건의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의문점들이 밝혀졌다.검찰수사 결과 드러난 발포경위 및 헬기 기총소사 여부,대검과 화염방사기 사용여부,사망자 수,무기피탈 고의방치 여부,광주 파견부대 지휘권의 2원화 여부 등 7가지 의문점을 정리해 본다. ▷발포경위◁ ▲공수부대의 발포는 5월20일 하오11시쯤 광주역 앞에서 시위군중에 발포하면서 계속되었는데 21일 하오1시쯤 도청 앞에서의 집단발포의 형태는 시위대의 차량돌진을 저지하기 위한 자위목적의 우발적 사격이 아니라 사전에 계획된 명령에 따라 이뤄졌다는 주장. ­광주에서의 최초발포는 5월19일 하오5시쯤 광주고부근에서 있었던 바,당시 사직공원을 수색하고 복귀하던 11공수여단 63대대 배속 장갑차가 이 학교 부근에 이르렀을 때 시위대가 장갑차를 포위공격하면서 불붙은 짚단을 던져 불을 붙이려 하자 장갑차에 타고 있던 한 장교가 장갑차 문을 열고 공포를 쏘고 다시 위협사격하는 과정에서 주위에 있던 고등학생 1명이 총격을 받아 부상당했음. 또 20일 하오11시쯤 3공수여단이 광주역일대에서 시위대와 공방을 벌이던 중 트럭·버스 등 시위대의 차량돌진으로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수세에 몰리자 3공수여단장은 경계용 실탄을 예하대대에 전달하고 대대장은 이를 장교 위주로 분배해 자신들을 향해 돌진하는 차량을 향해 발포했으며 광주역으로 실탄을 전달하러 가던 특공지원조가 시위대와 마주쳐 진로가 막히자 위협사격을 하는 한편 21일 다시 전남대 앞에서 장갑차·경찰가스차 등 시위대의 차량돌진공격에 대응해 발포,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이는 광주시민의 공분을 고조시킬 목적으로 사전에 계획된 의도적인 발포였다고는 할 수 없음. 이와 함께 21일 전남도청 앞에서의 발포경위에 대해 그동안 국회 청문회 등에서는 시위대의 1차 장갑차공격후 도청에서 철수하던 31사단 병력으로부터 공수부대가 소량의 실탄을 인수하여 장교들에게 분배한 상태에서 다시 시위대가 차량공격을 해오자 장교들이 자위적 차원에서 발포한 것이라고 주장돼왔으나 이번 수사결과 11공수여단 61·62대대는 도청 앞 금남로에서 시위대로부터 차량공격을 받은 후 시위가 소강상태에 들어간 20일 밤 12시쯤 대대장이 대대장 지프 등에 통합보관하고 있던 경계용 실탄을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위급시에만 사용하라는 지시와 함께 중대장이상 장교에게 15발들이 1탄창씩 분배하고 63대대는 21일 상오10시30분쯤 실탄을 분배함으로써 같은 날 하오1시쯤 시위대의 차량공격이 있기 전에 이미 장교 위주로 실탄이 분배돼 있었음이 확인됐음. 또 당일 하오1시쯤 시위대가 장갑차등으로 공수부대에 돌진,공격해오고 병사 1명이 장갑차에 깔려 사망하자 이에 대응해 첫 발포가 있었으며 다시시위대가 장갑차와 버스 등 차량돌진을 계속하자 공수부대 장교들이 집단적으로 발포했고 이와 비슷한 시점에 7공수여단 35대대도 철수하던 31사단 병력으로부터 실탄을 인계받아 이를 장교들에게 분배하는 한편 돌진하는 차량을 피해 인도와 인근 건물로 산개했던 공수부대원중 일부가 도청 및 주변건물 옥상에 올라가 경계를 하고 있다가 접근하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한 사실이 확인됐음. 따라서 이같은 발포는 대대장이나 여단장이상의 상급지휘관이나 별도의 지휘계통에 있는 특정인의 구체적인 발포명령에 따라 행해진 것이거나 광주시민의 공분을 고조시키기 위해 사전에 계획된 의도적인 것으로 인정할 수 없고 현장지휘관인 공수부대 대대장들이 차량돌진 등 위협적인 공격을 해오는 시위대에 대응해 경계용 실탄을 분배함으로써 이를 분배받은 공수부대 장교들이 대대장이나 지역대장의 통제 없이 장갑차 등의 돌진에 대응해 자위목적에서 발포한 것으로 판단됨. 그러나 그 이후 계속된 발포중에는 비록 시위대가 무장을 했다 하더라도 도로에 나와 단순히구호를 외치거나 총상자들을 구호 또는 호송하려 하거나 심지어는 시위현장 부근에서 구경하기 위해 나타난 경우 등 군에 대해 직접적 위협을 가하지 아니한 상태에까지 발포가 이뤄진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 당시 실탄 및 사격통제에 상당한 문제점이 있었음이 확인됐음. ▷군 지휘권◁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상급지휘관인 계엄사령관·2군사령관·전교사령관·31사단장의 정상적인 지휘계통하에 있지 아니하고 별도세력의 사전계획에 의해 지휘되고 있었다는 주장. ­7공수여단 2개 대대를 전남대 등 3개 대학에 배치한 것은 소요예방과 진압을 이유로 육본이 전국 92개 대학에 계엄군을 배치하는 조치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이므로 이때 이미 군병력의 시위진압투입은 전제돼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5월18일 하오 7공수여단 2개 대대가 광주시내 시위진압에 나선 것은 계엄확대선포후 전국에서 유일하게 광주시내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경찰이 군의 투입을 요청하고 있는 상황에서 계엄사령관→2군사령관→전교사령관→31사단장의 계통에서 군병력 투입을 결정한 사실이 인정됨. 11공수여단의 추가투입이 광주시내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학생들이 충돌하기 전인 18일 하오2시쯤 결정된 것은 사실이나 이는 광주 시위상황을 보고받은 육본에서 군병력의 증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다만 공수여단중 적절한 파견부대의 결정을 위해 특전사령관의 의견을 들어 11공수여단을 증원하기로 결정한 것임. 또 초기에 7공수여단을 시위진압에 투입한 후 5월18일 야간에 공수부대를 광주시내에 거점배치하고 19일 11공수여단의 추가작전통제에 다라 책임지역을 구분해 시위진압에 투입했으며 20일 3공수여단의 추가투입에 따라 다시 책임지역을 구분,시위진압에 투입하고 21일 공수부대를 시외곽으로 철수시키는 등 일련의 부대운용에 관한 지휘를 실제 31사단장과 전교사령관이 행한 사실이 인정됨. 21일 하오4시 31사단장의 2개 공수여단에 대한 작전지휘권이 전교사령관에게 전환된 후 광주 재진입작전은 전교사령관이 계엄사령관의 지휘를 받아 특전사령관 등의 자문과 조언을 참고해 그의 책임하에 수행한 것이 인정되며 군부대간의 오인사격은 전교사와 공수여단 및 전교사 예하 각 부대간에 상호 상황전파 및 통제의 미숙,단위부대 지휘관들의 상황판단미숙과 침착성 부족 등에 기인해 발생한 것으로 이를 두고 지휘권 이원화의 결과라고 할 수는 없음. 물론 광주에 파견된 3개 공수여단이 전교사령관이나 31사단장의 작전통제하에 있었음에도 31사단 등과는 무전교신체계가 상이한 상태에서 특전사 일부장교가 전교사에서 전용 무선 발수신장치를 설치해 각 공수여단과 별도로 교신하면서 상황을 파악하고 특전사령관이 11공수여단과 3공수여단의 증원결정에 의견을 제시하고 수시로 광주를 방문하면서 공수여단 지휘관들을 격려하고 광주 재진입작전인 상무충정작전을 수행함에 있어 특공부대를 선정하는 데 관여한 사실 등이 인정되나 이를 가지고 당시 공수여단에 대한 지휘권이 이원화됐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임. ▷무기피탈 방치◁ ▲사전에 계획된 시나리오에 따라 광주 재진입작전의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시민으로 하여금 무기고를 습격,무장을 하도록 상황을 유도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 근거로 광주시민이 광주 외곽지역에서 무기고를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해 광주로 돌아오는 동안 아무 제지를 받지 않았고 이후 외곽도로가 봉쇄되었다는 주장. ­광주에서 시위대에 의한 무기탈취는 19일 하오3시15분쯤 시위대가 기독교방송국을 점거하는 과정에서 31사단 경계병력으로부터 M16소총 1정을 탈취한 것이 처음으로 이 소총은 곧 회수됐으며 그후 20일 하오11시쯤 광주세무서 방화,점거시 지하실 무기고에서 칼빈 17정을 탈취했고 21일 하오1시쯤 광산 하남파출소에서 카빈 9정이 탈취됐으나 시위대가 본격적으로 무기탈취에 나선 것은 21일 하오1시쯤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은 후로 시위대는 광주 인근지역으로 진출,화순·나주 등 지방의 지·파출소와 화순광업소·한국화약 등 방위산업체 등에서 대량의 무기와 실탄을 탈취했음. 당시 조기진압의지와는 달리 시위가 급격히 확산됨으로써 경찰과 군병력이 광주시내 시위에 대처하는 데만도 급급한 상태였고 지방경찰 병력도 대부분 광주시내로 차출돼 인근지방으로까지 진출해 무기를 탈취하는 시위대를 사전에 막기는 어려웠던 상황이었으며 특히 21일에는 전남대에서 3공수여단이,전남도청 앞에는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이 시위대와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결국은 전남도청 등을 포기하고 시외곽으로 철수하는 형편이었으므로 군이나 경찰이 병력운용에 여유가 있는 상태에서 의도적으로 무기고 습격을 방치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움. ▷헬기 기총소사◁ ▲광주에서 무장헬기의 공중사격으로 많은 인명피해가 야기됐다는 주장. ­군관계 자료상으로는 21일 2군사령부가 전교사에 수송용 헬기인 UH­1H 10대,무장헬기 AH­1J(코브라) 4대를 지원하고 사태기간중 헬기가 모두 48시간동안 무력시위를 했다는 기록외에 실제공중사격 실시여부에 대해서는 아무 기록을 발견할 수 없었음. 조비오신부가 헬기사격의 피해자라고 지목한 홍란은 검찰조사에서 부근 건물옥상에 있던 계엄군의 소총사격에 의해 다쳤다고 진술했으며 정낙평은 21일 하오2시쯤 광주경찰서 상공에서 기종미상의 헬기가 기관총 사격하는 것을 목격했으며 부근 진주다방의 종업원이 옥상에서 헬기가 쏜 기관총을 맞고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했으나 진주다방 종업원인 심동선씨(30)에 대한 검시조서에 의하면 사인이 M16소총에 의한 관통총상이고 당시 빌딩옥상에 있던 공수부대원의 사격에 의한 피격이라는 취지의 증언이 있음. 아놀드 피터슨목사는 헬기가 선회하고 상공에서 총소리가 들려 헬기에서 기총사격을 한 것으로 믿고 있으나 헬기사격 자체를 목격하지는 않았다는 것이고 피터슨목사가 사격장면을 촬영한 것을 검찰에 제출한 사진상의 헬기 하단 불빛은 기관총사격시 발생되는 섬광이 아니라 헬기에 부착된 충돌방지등 불빛임이 확인됐음. 이와 함께 광주시내 적십자병원·기독병원·전남대병원의 당시 진료기록부와 응급실 관계자들의 진술을 검토해도 그 당시 각 병원에 헬기총격에 의한 피해자가 들어왔거나 입원·치료를 받은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고 광주시위 관련 사망자 1백65명에 대한 광주지검 사체 검시기록에서도 특별히 헬기기총사격에 의한 사망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할 수 없었음. 또한 AH­1J헬기의 장착무기인 토미사일,2.75인치 로켓,20㎜ 발칸포(1분당7백50발 발사),500MD헬기의 장착무기인 2.75인치 로켓,7.62㎜ 6열 기관총(1분당2천∼4천발 발사)에 의한 표적사격의 경우 나타나는 대규모 인명피해와 뚜렷한 피탄흔적·파편 등이 확인되지 않았음. ▷대검등 사용◁ ▲계엄군이 시위진압과정에서 대검과 화염방사기를 사용했다는 주장 ­당시 광주일원에 투입된 계엄군은 착검상태에서 트럭을 타고 위력시위를 하다가 시위대로부터 투석공격 등을 받으면 착검상태로 하차해 시위대를 추적,체포한 사실이 인정되므로 그 과정에서 대검으로 인한 피해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음. 실제로 사망자 손옥례·권근립씨등 8명의 사체에서 자상이 발견됐고 부상자 하헌남·최승기씨 등이 자상을 입은 점 등을 종합할 때 당시 시위진압현장에서 지휘관의 의사와 상관없이 공수부대원에 의해 대검이 사용된 사실이 인정됨. 군관계자들은 화염방사기가 토치카 또는 장갑차 공격용이므로 인체에 화염방사기를 직접 사용할 경우 전신 중화상으로 대부분 사망했을 것이라는 점 등을 들어 당시 광주에서 화염방사기가 사용되지 않았고 다만 소용진압용 작용제(CS분말)나 소요군중 식별용 유색수를 살포하는 데 화염방사기를 이용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계엄군이 화염방사기로 화염을 방사했거나 화염방사기에 의한 화상사망사실을 인정할 만한 자료를 발견치 못했음. 5월21일 광주시청 앞에서 시위대의 장갑차를 몰고가다 화염방사기 공격으로 화상을 입은 것으로 광주민중항쟁사료전집에 기록된 최강식씨(87년 사망)의 보상금지급 관련서류를 조사한 결과 최씨는 당시 광주시 중흥동의 한 건축현장에서 계엄군에 체포돼 전남대·광주교도소·상무대로 이동하면서 전신을 구타당하고 화상을 입은 것으로 파악됐음. 또 같은 날 전남대 앞 시위에서 계엄군의 화염방사로 안면화상을 입은 것으로 기록돼 있는 최병옥씨(당시 21)의 경우 당시 계엄군에 쫓겨 전남대부근 가정집의 화장실에 숨어 있던 중 화장실 환기창문으로 불꽃이 들어와 얼굴에 화상을 입었으나 그것이 화염방사기에 의한 화염인지는 목격하지 못했다고 검찰조사에서 진술하는 등 다른 피해사례나 목격담에 대한 조사에서도 화염방사기 사용사실을 확인하지 못했음. ▷광주외곽 피해◁ ▲5월21일 공수부대가 전남대와 전남도청 앞에서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하여 5월27일 재진입작전을 할 때까지 시외곽 봉쇄 및 도로차단 등과 관련해 여러 건의 민간인 피해사례가 있었다는 주장. ­이같은 주장 가운데 3공수여단 5개 대대는 5월21일 광주교도소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시위대 수십명을 천막등으로 덮은 트럭에 실어 호송하면서 더운 날씨에도 불구,과다한 인원을 탑승시킨 상태에서 최류탄을 터뜨려 화상환자를 발생시켰고 교도소 도착당시 트럭에는 질식 등으로 인해 5∼6명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음. 3공수여단은 또 같은 달 22일 하오10시쯤 광주교도소부근을 통과하던 김성수씨일가를 시위대로 오인,총격을 가해 가족 3명에 총상을 입히고 그중 김씨의 처 김춘아씨가 후유증으로 사망케 하는 등 24일까지 광주교도소를 방호하는 과정에서 무장시위대와 수차례 교전을 했고 이같은 교전및 부상자치료,철수과정에서 사망한사체 12구를 교도소부근에 가매장한 사실이 확인됐음. 광주∼목포간 도로를 차단하기 위해 효천역부근에 배치됐던 20사단 61연대 병력은 5월22일 상오5시40분과 9시쯤 2차례에 걸쳐 시위대로 오인하고 민간인에 총격을 가해 왕태경 등 2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했음. 5월22일 하오5시쯤에는 20사단 62연대 2대대가 광주통합병원을 확보하기 위해 민가를 사이에 두고 무장시위대와 교전하는 과정에서 인근주민 이매실·함광수씨 등이 총상을 입고 사망 또는 부상했고 23일에는 해남에 주둔하고 있던 31사단 93연대 2대대와 시위대간의 2차례 교전과정에서 박영철씨 등 민간인 2명이 사망했음. 11공수여단 62대대가 매복하고 있던 주남마을 앞 광주∼화순간 국도에서는 23일 상오10시쯤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던 미니버스에 총격을 가해 박현숙씨 등 10여명이 사망했고 남자 중상자 2명이 후송도중 다시 총격에 의해 사망했음. 24일 하오1시30분쯤에는 주남마을에서 송정리비행장으로 이동하던 11공수여단 병력과 시위대 10여명이 송암동부근에서 총격전을 벌이던 중 공수부대의 난사로 전재수 등 어린이 2명이 사망했고 또 전교사 보병학교 교도대 병력의 오인사격을 받고 격분한 63대대 병력이 피격지점부근를 수색해 시위대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무장시위대원 1명과 권근립씨 등 주민 4명이 총격을 받고 사망했음. ▷사망자수◁ 정부 관련 자료에 근거한 광주시위 관련 사망자수는 군인 23명,경찰 4명,민간인 1백66명등 모두 1백93이고 이에 광주시위 관련 행방불명자로 인정돼 보상금이 지급된 사람이 47명임. 그러나 광주시위기간에 발생한 사체 가운데 신원및 사망경위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목격자 진술 등에 의해 사망자가 확인된 경우에도 당시 사체가 발견돼 확인됐는지 여부와 신원불상 사체와의 동일성 여부 등에 대한 판단이 현재로서는 곤란해 광주시위 관련 사망자수를 확정짓는 것은 불가능함.
  • 5월20일/시위진압때 4명 총격 사망/검찰수사로 재구한「5·18」

    ◎휴교항의 전남대생 18일 공수단과 첫 충돌/21일 무장시민군 도청 접수… 최소 38명 희생/시민군 23일 “무기회수”… 군27일 도청점령 “끝” 상오10시 전남대앞에서 휴교조치에 항의,시위를 벌이던 대학생들과 7공수여단 33대대 병력간에 충돌.하오2시40분쯤 학생·시민들이 금남로로 진출,진압에 실패한 경찰이 군병력 출동을 요청해 7공수 33·35대대가 시위진압에 나섬.이 과정에서 첫사망자 발생.시위대 2천여명으로 불어 시내 중심가에서 산발적 시위.하오5시50분 11공수 61대대 진압에 투입됨. 대검을 착검한 공수부대원들의 강경진압에 분노한 시민·학생들 금남로 일대에서 화염병·투석 시위.상가대부분 철시한 상태에서 11공수 61·62·63대대 학생·시민들을 진압봉으로 무차별 구타,연행함.하오2시 광주지역 기관장회의서 과격진압항의및 연행자 전원석방요구.하오5시 11공수63대대 장교가 M16소총으로 시위대에 첫발포.하오11시 육본이 3공수 5개대대에 추가투입명령. 전남도교위 광주시내 중고교에 임시휴교조치.예비군 무기고에서 카빈17정을 시위대가 탈취.하오4시 금남로일대에 시위군중 2∼3만명 운집하고 택시·버스·트럭 등 차량이 시위에 합세.하오9시45분 진압상황 보도요청을 거부한 광주문화방송국 방화.하오10시30분 진압군에 실탄지급.M60등으로 공포사격.하오11시 전남도청을 제외한 광주전지역을 시위대가 장악.광주역일대 진압과정에서 4명이 총격사망. 20사단 61·62연대 추가투입.시위대들이 광산·영광·함평·화순·나주 등지로 진출,나주경찰서등에서 총기4천9백여정·실탄13만여발·수류탄2백70여발 탈취해 무장.정오 전남대·도청등지에서 수만명의 시위대들이 무장시위 벌임.하오1시30분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대를 향해 집단발포.하오1시35분 광주 외곽도로망 차단하고 진압군 자위권 발동.하오4시30분 전남도청·도경을 시민군이 접수.최소 38명이 총격사망. 광주외곽지역 총격전으로 수십명 사망.상오9시 지역유지와 학생들을 주축으로 시민수습대책위원회 구성.하오3시 도청분수대 앞에서 시민궐기대회개최. 상오9시35분 수습위 시민군들 상대로 무기회수 시작.상오10시 11공수 62대대 병력이 매복한 주남마을 부엉산아래 광주∼화순간 국도에서 미니버스에 타고있던 여고생등 10여명 총격사망.하오3시 도청앞 광장에 5만시민이 운집해 민주수호시민궐기대회 개최. 상오9시55분 호남고속도로 광주인터체인지 부근에서 전교사 예하 기갑학교 병력이 부대복귀중이던 31사단 96연대 3대대 병력을 시위대로 오인,진압군끼리 총격전을 벌여 사병3명 사망.하오1시55분 효천역 부근에서 전교사보병학교 교도대 병력이 11공수63대대 병력을 시위대로 오인,총격전을 벌여 9명 사망. 강경학생·청년들이 수습위를 대신해 무력대항결의.무기반납도 백지화.상오4시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광주재진입작전계획인 「상무충정작전」수립지시해 작성됨.하오5시30분 최규하 대통령 광주방문,담화문발표. 상오10시30분 소준렬 전교사령관 주재로 진압작전 지휘관회의 개최해 27일 새벽 작전개시키로 결정.하오6시 전남도청에서 최후항쟁 주장하는 강경파 2백여명이외에 시위대 해산함. 상오4시 3공수여단 11대대 1지역대 병력이 전남도청 후문으로 들어가 1시간21분만에 도청점령.7공수33대대 8·9지역대 병력도 상오5시6분 광주공원 점령.11공수61대대 4중대 병력은 상오4시46분 도청주변 주요건물 점령.20·31사단은 상오7시15분쯤 광주시내 진입완료하고 10분만에 모든 작전완료.계엄군의 광주재진입작전과정에서 시위대 16명,계엄군 3명 총격사망. ◎고소·고발인 향후 대응방향/「검찰 결성」 불복땐 어찌될까/항고·재항고 기각땐 헌법소원내야/헌법재판소서도 「결정번복」 힘들듯 1년2개월 가량을 끌어온 「5·18」 고소·고발사건이 검찰의 「공소권 없음」 결정으로 일단 마무리됐지만 고소·고발인들이 검찰의 결정에 불복하고 있어 앞으로 전개될 법률적 대응이 주목된다. 현행법상 고소·고발인들이 취할 수 있는 법률적 대응방안은 3단계로 구분된다. 우선 해당 검찰청인 서울지검을 통해 상급청인 서울고검에 항고하는 것.항고가 기각되면 대검에 재항고를 할 수 있으며 재항고마저 기각될 경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청구하는 길이 열려 있다.그러나 이 사건의 경우 고검이나 대검이 1차 결정 당사자인 서울지검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사전조율결과 도출된 결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항고·재항고는 헌법소원을 내기 위한 요식절차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건이 헌법재판소로 넘어간다해도 고소·고발인들의 주장이 관철되기는 현실적으로 힘들다. 비록 헌법재판소가 헌법소원을 받아들여 「인용」 결정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인용결정이 곧바로 검찰의 기소결정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뿐더러 헌법소원을 통해 검찰의 결정을 뒤엎기에는 여러가지 면에서 무리라는 것이다. 우선 검찰은 수사결과 발표를 통해 『사안이 사법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에 공소시효가 언제인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며 공소시효에 대한 판단자체를 하지 않았다. 따라서 헌재가 검찰의 결정을 번복하려면 공소시효부분에 대한 판단을 먼저 내린 뒤 시효만료일 이전에 재기수사명령을 내려야 하는데 고소·고발인들이 주장하는 내란죄의 공소시효(15년)는 오는 8월15일에 만료돼 27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 법조계의 지배적인 견해인 점으로 미루어 시간상 공소시효와 본안에 대한 판단을 함께 내릴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번 사건이 헌재에서 다뤄질 경우 검찰이 유보한 「대통령의 통치행위에 대한 사법적 판단」여부에 대해서도 심판해야 하므로 「정치적 부담」을 안게 된다.종래 통치행위는 검찰이나 법원의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으나 헌재의 헌법판단대상이라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헌재의 인적 구성이나 12·12사건 당시 보인 소극적 자세 등을 감안할 경우 헌재가 8월초쯤 헌법소원이 제기되면 공소시효부분에 대한 판단여부로 시간을 끌다가 결국 『소의 실익이 없다』는 이유로 각하결정을 내릴 공산이 크다. 따라서 고소·고발인들의 향후 법적대응은 실익보다는 검찰의 사법적 판단에 대한 「불복」차원에 그칠 것이라는 것이 법조계의 중론이다. ◎장윤석 공안부장 일문일답/“어떤 비판 제기돼도 최선다한 결정”/고소인 주장 입증할 증거 발견못해/양민학살한 계엄군 처벌도 어려워 「5·18」고소·고발사건의 주임검사인 장윤석 서울지검 공안1부장은 18일 하오 수사결과를 발표한 뒤 기자들과 일문일답을 가졌다. ­검찰의 「공소권 없음」 결정에 대해 상당한 국민적 반발과 파장이 예상되는데. ▲시를 쓰는 것은 시인이 해야할 고유의 일이지만 시를 감상하고 비평하는 것은 국민의 몫이다.어떤 비판이 제기되더라도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80년 8월 최규하 전대통령 하야과정과 발포경위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 「입증자료가 없다」고 발표한 것은 검찰수사력의 부족함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 아닌가. ▲충분한 자료수집과 검토를 했지만 고소인들의 주장을 입증할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최전대통령이 정권에서 물러날 시기를 전후해 강압과 불법행위는 정말 없었는가. ▲전두환 전대통령은 답변서를 통해 강압이 없었다고 진술했으며 최전대통령은 서면질의서에 대한 답변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를 설명할 자료가 전혀 없었다.또 세간에는 이 과정에서 김정렬 전총리가 깊숙이 개입했다는 것이 정설로 돼있는데 김씨 역시 사망해 강압여부에 대해 확인할 수 없었다. ­80년 4월 권정달·허삼수·허화평씨 등이 모여 국보위 설치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정권찬탈등의 의도가 있었다는데. ▲조사결과 4월 당시 그런 논의가 없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80년 8월 최전대통령이 하야하고 간선제를 통해 전전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 두사람간에 강압이 없었다는 말인가. ▲최전대통령이 답변서를 제출하지 않아 알 수가 없었으며 전전대통령의 경우 「당시 최대통령이 스스로 결단했을 것」이라는 답변서만을 냈다. ­광주시민등 양민학살 부분의 책임자들에 대한 개별적 처벌은 가능하지 않은가. ▲공수부대가 광주 외곽지역에서 총격을 가해 주민 2명을 사망케 한 일이 있었으나 발포자와 구체적 경위에 대해 특정되지 않는등 행위자를 가리기 어려워 처벌이 어렵다. ­12·12사건 때는 군형법상 반란죄등 혐의를 인정했는데 5·18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12·12 사건의 경우 소장급 장성이 별넷인 장성을 제거하려 한 것이므로 군형법상 반란죄 인정이 가능했지만 이번 사건은 통치권 찬탈을위한 사전의도가 있었다고 보기 어려웠으며 당시 전씨가 모든 과정에서 부단히 최전대통령의 재가를 받으려고 노력했으므로 전혀 다른 성격이다. ­계엄군에 의한 주민학살만이라도 처벌할 수 없는가. ▲공소시효 5년이 지난 것으로 알고 있다.군형법상 군지휘계통을 들어 책임자를 처벌하기도 어렵다.구체적 행위자등 기본적 사실관계 파악이 어렵기 때문이다. ­집권을 위한 시나리오가 있었다는데 입수했나. ▲입수는 했지만 당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계획서였을 뿐 정권찬탈 음모는 보이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 전전대통령 정권창출위한 기초행위/「5·18」수사 사태의 성격

    ◎계엄확대는 강력한 정국주도의 표현/국보위를 5공 탄생의 산실로 삼아 위헌·위법 여부가 문제되고 있는 행위는 외형적으로 최규하 전대통령의 재가를 받거나 대통령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다. 즉,최전대통령은 중앙정보부 기능의 효율성을 위해 전두환 전보안사령관을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했고 비상계엄 확대 선포안을 재가했으며 계엄사령관은 계엄군을 국가보안목표에 투입하고 정치 목적의 옥외집회·시위와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했다. 또 소요조종자와 권력형 부정축재자를 법에 따라 신중하게 조사토록 당부했으며 합수부는 주요 정치인과 학생 대표들을 체포했다. 이와함께 대통령을 보좌하고 내각과 군의 긴밀한 협조를 위해 국보위를 설치하는 것을 재가하고 전전보안사령관을 상임위원장으로 임명했다. 따라서 이러한 조치들은 모두 최전대통령의 국군통수권 행사이거나 국가 긴급권과 법령에 근거한 집행행위들로서 외형적으로는 최전대통령의 국가행위에 해당된다. 그러나 비상계엄의 확대,정치활동의 금지,국보위의 설치등은 전전사령관이대통령의 지시없이 추진한 조치들로서 정권 창출의 기초행위로서의 실질도 갖고 있다. 먼저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취임,정보를 장악하고 각료회의에도 참석할 수 있게 되어 집권기반을 구축했다. 또한 계엄 확대는 군의 정치개입을 초래하게 되고 비상기구의 설치나 국회의 해산,정치활동의 규제는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에 따라야 하는데도 전전사령관이 참모들에게 입안하게 한뒤 지휘관회의에서 결의하는 형식으로 추진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정국장악 의사 없이는 추진할 수 없는데도 전격 추진,집권한 사실에 비춰 전전사령관은 계엄 확대로 정국을 장악할 의도가 있었다. 특히 정치활동 금지는 대통령의 재가도 받지 않았고 정치권을 배제하고 정국을 주도하겠다는 의사가 강력히 시사된 것이다. 더욱이 가택연금은 법적 근거도 없고 불법구속·가혹행위 시비가 야기되고 재산헌납·공직사퇴도 정국운영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인사들을 제거한 것으로 경쟁자 없이 권좌에 오르게 된 결정적 기반이 되었다. 전국 비상계엄에서는 계엄사령관이 행정을 관장하게돼 있음에도 국보위상임위가 대통령을 보좌한다는 명목으로 내각을 통제하는 계엄사령관의 권한을 행사했다. 또 전전사령관은 상임위원장에 취임하자 헌법개정안을 작성,개헌작업에 반영하는 등 국보위를 5공화국 탄생의 산실로 삼았다. 결국 국보위는 자문기구로서보다는 비상기구와 같이 행정부를 통제하는 권력기구로 운영돼 전전위원장이 실질적 주도자임을 과시하는데 이용되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최전대통령의 국사행위의 외관을 갖고 있어도 실지로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사망으로 초래된 권력 공백기에 12·12 사건으로 군의 주도권을 장악한 전전사령관이 정권을 창출해 나가는 과정에서 전국 비상계엄이라는 특수상황과 국군 보안사령관,중앙정보부장 서리,국보위 상임위원장의 지위를 최대한 활용한 정치적 성격의 행위다. 다만 광주민주화시위의 발단이 된 전남대와 도청앞에서의 학생과 공수부대의 충돌은 학생들이 계엄군의 기습적 대학점령 등에 분격하고 계엄확대를 통한 군의 전면 등장과 김대중씨 등 정치지도자와 학생지도부의 체포에 반발,시위를 벌였고 공수부대가 폭동진압식의 강경진압을 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한 것으로 판단된다. 사태가 악화된 원인은 부대원들이 시위대의 투석으로 부상하자,남녀노소나 시위가담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가격하거나 체포하는 강력한 공격적 진압으로 부상자가 발생하고 연행자들을 반라로 만들어 기합을 주기까지 하여 극도의 분노감과 적개심을 야기시켰다. 또 보도통제로 악성 유언비어가 발생하고 시민들로 하여금 고립감과 격렬한 저항감을 야기,공수부대를 몰아내자는 결의를 하게 됐다. 이에 공수부대에 차량돌진을 감행했고 공수부대가 발포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시민들도 무장저항을 하게 되는 극한 상황에 이르게 됐다. □5·18사건 수사 일지 ▲94·5·13=정동년 광주민주운동연합 상임의장 등 이 사건 피해자 3백22명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등 35명을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 ▲7·13=서울지검,피고소인중 현역군인 14명 국방부에 조사의뢰. ▲10·19=한완상씨등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관련자 22명,전·노 전 대통령등 10명 고소. ▲10·28=장기욱·이부영의원 등 민주당 「민주개혁 정치모임」소속 의원 29명,전·노 전대통령등 신군부 인사 23명 고발(이에 따라 피고소·고발인은 모두 58명으로 늘어남). ▲10·31=5·18관련 고소고발 사건 조사 착수. ▲11·23=정동년씨 소환조사. ▲11·30=장기욱의원 조사. ▲12·1=5·18 당시 민주청년협의회 상임의장 이신범씨 조사.국방부 검찰부,5·18 관련 현역군인 90여명 수사착수. ▲12·2=KNCC 인권위원장 김상근목사 조사. ▲12·5=5·18 당시 31사단장겸 전남지역 계엄분소장 정웅씨 소환조사. ▲12·1∼16=당시 전교사 사령관 소준렬·윤흥정씨 소환. ▲12·17=피고발인중 차달숙씨등 3명 무혐의 처분. ▲12·19=신현확전총리 조사. ▲94·12·21∼95·1·20=당시 공수부대등 진압부대의 대대장급 군간부 소환조사. ▲95·1·25=이희성씨 소환. ▲2·1=국방부 검찰부,김동진합참의장 등 현역군인 12명 조사착수. ▲2·9=당시 합참의장 유병현씨 소환조사. ▲2·15=당시 내무장관 김종환씨 소환조사. ▲2·17=남덕우 전국무총리,신병현 전부총리등 국보위위원 17명 서면조사. ▲2·21=당시 국방장관 주영복씨 소환조사. ▲3·21∼4·7=당시 20사단장 박준병의원에 대한 소환조사를 시작으로당시 보안사 대공처장겸 합수부 수사국장 이학봉전의원,보안사령관 비서실장 허화평의원,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의원,특전사령관 정호용의원 소환조사. ▲4·11=당시 3공수여단소속 상사 첫 소환. ▲4·14=민주당 김옥두·한화갑의원,전두환 전대통령 등 10명을 내란혐의로 고소. ▲4·14=당시 계엄사령관 이희성씨 재소환. ▲4·22=당시 보안사언론팀장 이상재의원 소환. ▲4·26=당시 국방장관 주영복씨 재소환. ▲4·29=전·노 전 대통령에 대한 서면조사서 발송. ▲5·11=「헬기 총기난사」주장 미 피터슨 목사 조사. ▲5·19=노전대통령 답변서제출. ▲6·2=전전대통령 답변서제출. ▲6·7=최전대통령,검찰 방문조사 불응 통보. ▲7·18=최종 수사결과 발표.
  • 불 대사관 혁명기념 행사/대규모 반핵 시위로 곤욕

    【웰링턴·시드니 로이터 AFP 연합】 프랑스혁명 기념일인 14일 프랑스의 핵실험 재개 결정에 항의하는 뉴질랜드인들이 웰링턴 주재 프랑스 대사관저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등 뉴질랜드와 호주에서 프랑스를 비난하는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웰링턴에서는 2천여명의 시위대가 이날 프랑스혁명일을 기념하기 위해 외국 인사들을 만찬에 초빙한 자크 르 블랑 프랑스 대사관저 앞에 집결,「핵실험 반대」「태평양에서 물러가라」는 등의 깃발을 흔들면서 『자유,평등,우애,위선』 등의 구호를 외쳤다. 또 호주의 캔버라에서는 시위대들이 프랑스 대사관 앞에 집결,시위를 벌였으며 이 가운데 일부는 프랑스 대사 주최 혁명기념일 리셉션 장소인 컨벤션센터까지 행진했다.
  • 그린피스/불 핵실험 시설물 점거/대원2명 시추장비 올라가/무루로아

    ◎불 해군,워리어호 승선… 몸싸움 【웰링턴 로이터 연합】 국제 환경단체인 그린피스 대원들이 10일 프랑스의 핵실험 계획에 항의하기 위해 남태평양 무루로아 환초에 자리잡고 있는 핵실험장 인근의 시추장비를 점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린피스 뉴질랜드 지부의 마이클 사보 대변인은 『우리는 일부 대원들을 동원,무루로아 환초의 시추장비를 점거했다』면서 『2명의 대원들이 현재 시추장비에 올라가 있다』고 말했다. 사보 대변인은 문제의 시추장비는 지하핵실험용 시추공을 굴착하는데 쓰이는 것으로,이를 점거한 것은 핵실험장의 군사보안조치를 무력화한 것이어서 그린피스측에는 전례없는 쾌거인 셈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프랑스 당국이 현재 이를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아마도 이들을 축출하고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무루로아 AFP 연합】 프랑스 해군은 남태평양 무루로아 핵실험기지 근해에 진입한 환경단체 그린피스 요원들을 「레인보 워리어 2호」에 강제 승선시켜 전관수역 밖으로 쫓아내려 했으나 그린피스 요원들이 강력히 저항하는 등 양측간에 심한 몸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프랑스 외인부대 요원들은 이날 그린피스 요원들을 이들이 타고 온 「레인보 워리어 2호」에 강제로 승선시켰다.프랑스군 소식통들은 그린피스 요원들을 이 선박에 태워 무루로아섬 12해리 전관수역 밖으로 강제 예인할 것이라고 밝혔다. ◎유럽서 반불시위 확산/핵실험 재개결정·그린피스 점거 규탄 【파리 AFP 연합】 프랑스의 핵실험 재개 및 그린피스 감시선 강제 점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10일 유럽 각국에서 잇따랐다. 특히 그동안 프랑스와의 유대관계를 고려해 침묵을 지켜오던 독일도 이날 프랑스의 핵실험 재개 결정에 우려를 나타냈다. 아일랜드와 오스트리아,룩셈부르크에서는 프랑스의 핵실험 재개 및 그린피스 환경감시선 강제 점거에 항의하는 시위행렬이 프랑스 대사관으로 이어졌으며 런던에서도 이같은 시위가 있을 예정이다. 룩셈부르크에서는 몇몇 시위대원들이 프랑스 대사관을 봉쇄하기 위해 출입문을 자물쇠로 채우고 자신들의 몸을 쇠사슬로 문에 연결하는 등 격렬히 항의했으며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도 약 20명의 시위대원들이 이같은 방식으로 프랑스 대사관 봉쇄에 나섰다.
  • 중·일전쟁 기념일 대만서 반일시위

    【대북 AP 연합】 대만이 7일 중·일전쟁 발발 기념일을 맞아 일련의 행사를 시작한 가운데 대만 시위대 1백여명은 이날 대북시가지를 행진하면서 히로히토 전 일왕과 제2차 세계대전 전범인 도조 히데키 전 총리에 대한 화형식을 거행하는 한편 교류협회 대북사무소에 달걀을 던지면서 일본의 사과를 요구했다.
  • 핵실험 반대확산/불서 5천여명 시위

    【파리 AP 연합】 프랑스의 핵실험 재개에 항의하는 시위가 다시 이어져 1일에는 파리 시내에서 5천여명의 반핵시위대가 가두행진을 벌였고 남태평양에 있는 타이티와 뉴 캐레도니아에서는 시위대가 주요 도로를 차단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가스 마스크를 쓰고 북을 치며 시내를 행진한 파리 시위대는 이날 핵실험반대구호가 적힌 깃발과 함께 나무나 꽃 등 식물을 흔들었고 핵폭탄의 버섯구름을 묘사하고 핵실험 재개를 결정한 시라크 프랑스대통령을 지칭한 「시라크 공원」이란 깃발을 흔들며 행진,주목을 끌었다.
  • 팔 자치확대 곧 타결/페레스­아라파트 가자서 회담

    【나블루스·가자지구 AFP 로이터 연합】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서 25일 팔레스타인 시위대와 이스라엘 경찰간의 충돌로 팔레스타인인 3명이 사망하고 50여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양측은 오는 7월1일 이전에 팔레스타인 자치확대 문제를 타결지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서안지구에서는 2천여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단식농성중인 팔레스타인 죄수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며 나블루스 인근 제니드 형무소로 향하다 이스라엘군과 충돌했으며 이스라엘군은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과 총기를 발사했다고 목격자들이 밝혔다. 한편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장과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외무장관은 예정대로 가자지구에서 3시간여에 걸친 회담을 갖고 이스라엘 점령지내의 PLO 자치확대 문제를 논의했다.
  • 중 반체제인사 집중감시… 긴장속 평온

    ◎내일 「천안문」 6돌… 북경표정/관료층 부패수사로 시민관심 분산유도/지원지 북경대는 외부인 출입통제 강화 천안문광장은 평화로웠다.상오에 비가 내린 2일에도 붐비는 관광객들과 연날리는 어린이들의 모습은 천안문광장을 평화롭게 보이게 했다.천안문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천안문과 인민대회당,역사박물관 건물꼭대기에도 오성홍기만이 한가로이 휘날리고 있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아무도 6년전 이곳에서 있었던 자유에의 함성과 탱크,그리고 젊은이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있지 않은듯 했다. 6·4천안문사건의 진원지 가운데 하나였던 북경대학도 교문에서 외부인 통제가 좀더 까다로워졌을 뿐이다.저녁무렵 교정은 학교부설 무도장과 가라오케를 오가는 학생들로 북적거렸고 캠퍼스 곳곳은 아베크족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천안문사건 6주년을 맞는 지금,당시 강경노선에 앞장섰던 고위 책임자들은 대부분 제2선으로 밀려났다.예외라면 북경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했던 이붕 총리 정도.이붕 총리의 결정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인민해방군의 북경진입을 발표했던 당시 양상곤 국가주석은 이미 은퇴했고 강경진압의 중심축이었던 그의 동생 양백빙도 군부내 수족들이 잘리고 입지가 약화되는 타격을 입었다.시위대 진압에 직접 관여했던 북경군구사령관 주의빙과 정치위원 유진화도 「보상」대신 군복을 벗고 인민대표대회 대의원으로 밀려났다.현재 중국 군부는 당시 군의 북경진입과 시위진압을 반대했던 장성들이 장악하고 있다.총참모부장 장만년,국방부장 지호전등 현 군부의 실세들은 당시 군의 무력진압을 반대했던 장애평,서향전등 소위 「8 상장」들의 직계들이다. 강택민 정권은 올초부터 반부패 사정활동과 법제화작업을 가속화시키고 있다.온 국민의 공분과 불안요소가 되고 있는 관리들의 부패에 철퇴를 가하고 국민적인 지지를 이끌어내겠다는 것이다. 중국정부는 지난달부터 반체제인사들에 대한 경계와 감시활동을 강화해왔다.등소평 사망이 임박해지고 있는 시점이어서 평안한 겉모습과는 달리 중국정부로서는 어느 때보다 바짝 긴장하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그래서일부학자들의 정치범등에 대한 관용호소에도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고 있을 정도다.어쨌든 올 「6·4」6주년도 당국의 철통 같은 감시와 경계 때문에 큰 일없이 넘어갈 것으로 보인다.
  • 아주대회 유치 실패/대만군중 반한 시위

    【대북 AFP 연합】 오는 2002년 아시안 게임 개최지로 대만의 가오슝(고웅)을 제치고 부산이 선정된데 따른 대만 대중의 불만 여론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우익 군중이 24일 아시아 올림픽 평의회(OCA)의 아시안 게임 개최지 선정에 항의,대북주재 한국대표부건물에 계란을 던지는등 시위를 벌였다. 일부 시위대들은 한국 정부가 가오슝의 아시안 게임 개최를 좌절시키기 위해 중국과 더러운 속임수를 썼다면서 『한국인은 떠나라』라고 외쳤다. 우익 군중의 항의 시위는 아시안 게임 개최지 선정과 관련,일부 의원들이 정부에 대해 한국 업체들의 입찰을 금지토록 촉구하는가 하면 업계에서는 한국 상품 불매 운동을 촉구하고 나선 가운데 벌어졌다. 일부 의원들은 앞서 정부측에 대규모 건설 공사 입찰에 한국 업체의 참여를 금지시키라고 촉구하고 한국과의 항공회담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 “광주 계엄군 헬기난사 없었다”

    ◎진압참여 육군항공여단 출신 박형우씨 증언/공격용 7대 출동했지만 탄약장전 안해/무장 시민군 상대 50m 저공비행 불가능/“정찰활동만 실시” 당시 헬기 대대장도 주장 80년 광주민주화운동때 계엄군이 헬기에서 시위군중들에 대해 난사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당시 시위대 진압을 위해 현지에 파견됐던 육군항공여단요원이 19일 주장했다. 80년5월19일 육군 제1항공여단 101항공대 소속 헬기 무장사로 광주에 출동했었으며 현재 방콕에서 스피커제조업체인 로열하코사 대표이사로 있는 박형우(49·태국거주,당시 계급 준위)씨는 방콕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당시 헬기에서는 사격을 한 일이 결코 없다고 말했다.다음은 박씨의 증언 요지. ­언제 광주로 출동했는가. ▲80년5월19일 출발해 계엄군의 진압이 완료된 27일께 귀대한 것으로 기억된다. ­각 항공대에서 광주로 출동한 헬기 기종과 대수와 용도는. ▲모두 12대로 이 가운데 사실상의 공격용헬기는 7대다. ­89년2월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에서는 31대의 헬기가 동원됐다는 증언이 있었는데,그렇다면 나머지 19대는 어디서 동원됐는가. ▲광주진압에 동원된 헬기는 제1항공여단에서 출동한 12대 말고도 인근 타부대에서 O1관측기,OH58정찰기,UH1H다목적헬기 등이 주로 병력수송을 위해 차출됐었다. ­광주사태 당시 현지서 선교사로 일했던 미국인 아놀드 피터슨 목사(52·일리노이주 거주)의 「목격담」에 의하면 80년5월21일 하오 3∼4대의 헬기가 광주 일원 상공에서 경고전단 살포후 시위군중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해 14명의 사망자를 포함,1백여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하는데…. ▲납득이 가지 않는다.실제로 공격에 가담할 수 있는 헬기는 101및 502항공대에서 파견된 7대인데 맹세컨대 약실에 탄약을 장전한 적이 없다.무장사가 탄약을 장전해야 사수가 사격을 할 수 있다. ­상부로부터 발포지시를 받은 것 아닌가. ▲받지 않았다.받았다면 탄약을 관리하고 장전하는 무장사가 제일 먼저 알 것이 아닌가. ­그래도 일부 언론보도에 의하면 당시 어떤 광주시민은 헬기가 약 50m 상공을 저공비행하면서 기총난사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하는데. ▲상식적으로도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헬기가 출동한 때는 이미 시민군이 무장하기 시작한 시점이다.50m 상공이라면 이 거리는 지상에서 헬기를 백발백중 명중시킬 수 있는 거리다.이를 뻔히 아는 조종사가 50m 상공을 저공비행하면서 기총소사를 했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50m 상공에서 불을 뿜으며 사격하는 것을 봤다는 사람이 있는데. ▲주민들이 봤다는 것은 예광탄의 불줄기가 아니라 헬기 헤드라이트 불빛일 가능성이 높다.만약 50m 상공에서 집중포화를 맞았다면 명중된 곳이 불바다가 됐을 것이고 주변 사람은 누구나 목격했을 것이다. ­헬기서 기관총 쏘는 소리를 들은 사람도 많다고 하는데. ▲총을 쏘지 않아도 총소리 같은 것을 들을 수 있다.AH1J코브라 공격용 헬기와 MD500 경무장헬기는 날개가 회전익으로 몸통 위에서 프로펠러가 돌아갈 때 공기의 와류 또는 기체 블레이드의 피치 각도가 맞지 않을 때 날개면이 공기와의 마찰로 기관총소리 처럼 「타타타」 소리가 난다.시민들은 이 소리를 총소리로 오인했을 가능성이 있다.
  • 인 카슈미르주/회교도 격화/방화·수류탄 공격… 인군 10명 사상

    【뉴델리·스리나가르 로이터 AFP 연합】 인도 잠무카슈미르주에서 회교분리주의 무장투쟁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나라시마 라오 인도총리가 14일 회교사원 방화사건과 관련,집권 국민회의당 출신 반대세력의 사임압력에 처했다. 지난주 발생한 잠무카슈미르주 스리나가르의 차라르 이 샤리에프마을 회교사원 방화사건과 관련,대정부공세를 준비해온 야당인 바라티야 자나타당(BJP)측은 13일밤 회교사원 방화사건과 관련,의회에 내각불신임안을 제출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회교사원 방화사건으로 파키스탄과의 관계도 악화되고 있는 가운데 베나지르 부토 파키스탄총리는 이날 인도의 파키스탄령 카슈미르 병합위협에 따른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긴급각의를 소집했다. 사르다르 아세프 아메드 알리 파키스탄외무장관은 『파키스탄령 카슈미르를 병합하겠다는 라제시 필로트 인도 안보담당국무장관의 거듭된 전쟁위협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면서 『필로트장관의 무책임한 발언은 카슈미르지역의 정치·치안상황을 악화시켰다』고 밝혔다. 한편 잠무카슈미르주 스리나가르에서는 이날도 주당국의 통금령 실시에도 불구,시위대가 보안군과 충돌하는등 긴장이 계속되고 있다. 경찰 소식통들은 시위군중이 스리나가르시내 8개 지점에서 보안군에 돌을 던지는등 시위를 벌였으며 북부 바라물라마을에서는 국경수비대병력에 수류탄공격이 발생,1명이 숨지고 9명이 다쳤다고 전했다. 이에 앞서 13일에도 회교도 수십명이 잠무카슈미르주도인 스리나가르일대의 힌두교사원과 학교·정부빌딩 등 1백여채의 건물에 불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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