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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간자율 확대 서비스 질 개선/이양 대상 사무

    ◎요양기관 지정·취소 의보연합회로/국민연금관리권 시·도공단으로 행정자치부가 중앙정부에서 지방으로 넘기기로 한 11건의 업무를 또다시 민간에 이양하기로 한 것은 현실성을 감안하고 국민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다. 우선 장애인 여부를 판정하는 장애인 판정위원회를 폐지하기로 해 장애인들은 민간의료기관의 진단결과로 장애인 등록 여부를 가릴 수 있게 됐다.현재 장애인 복지법은 장애인 등급조정은 장애판정위원회에서 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의 시·도는 위원회를 두고 있지 않다.또 위원회가 있다 해도 전문 의료기관의 진단결과를 바탕으로 장애인 등록을 결정해 왔기때문에 이중적인 절차를 거쳐야만 했다. 또 보건복지부 장관이 요양기관을 지정하도록 한 것을 공무원 및 사립학교교직원 의료보험공단과 의료보험연합회가 자율적으로 지정할 수 있도록 했다.또 요양급여를 잘못 책정하는 등 부당 요양기관이 생길 경우 공무원 및 사립학교 의보공단 및 연합회가 지정을 취소할 수 있도록 했다.요양기관 지정과 취소를 같은 기관에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취지에서다. 국민연금의 관리권한을 보건복지부 장관에서 시·도 국민연금관리공단 이사장으로 넘기겠다는 것은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서다.현재 국민연금법 83조 2항에는 국민연금의 장기적인 안정유지를 위해 복지부 장관이 공단에 위탁관리운용토록 되어 있다.그러나 지역에서 거둔 연금을 해당 지역에서 관리운용하면 그만큼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얘기다. 일반건설업자가 상호,대표자,영업소재지 등의 변동사항이 생길 경우 사무처리도 대한건설협회가 맡을 수 있도록 했다. 나머지 4건은 다음과 같다. △제조담배 소매인 및 홍삼류 판매인 지정(장애인복지법 27조1항) △의료보험 연합회의 차입금 승인(의료보험법 시행령 73조) △건축사보 신고수리(건축사법 2조2호) △낚시어선의 검사((낚시 어선업법 9조)
  • 금강산 관람료/張淸洙 논설위원(外言內言)

    꿈에도 그리던 금강산 구경을 마침내 가게 됐다. 22일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현대그룹 鄭夢憲 회장은 다음달부터 금강산 관광을 떠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북한측과 합의한 내용을 보면 4박5일 기간으로 관광비용은 미화 1,000달러(한화 약 130만원)에 합의함으로써 예정대로 9월25일 4,000여명의 1차관광단이 출발할 수 있게 됐다. 관광코스는 구룡연,만물상,해금강,삼일포,총석정등 5개장소,4개코스로 확정됐다고 한다. 예로부터 세계적인 명산으로 이름이 높았던 금강산, 그래서 「금강산을 보기전에는 산수의 아름다움을 말하지 말라」는 시어(詩語)가 나오게 됐고 사람들은 금강산을 한번 보고 죽으면 원이 없겠다는 말까지 나왔던 금강산을 구경할 수 있다고 하니 여간 기쁜일이 아니다. 더욱이 원한의 휴전선때문에 한발짝도 갈수 없는 북한땅 금강산을 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역사적 사건으로 볼수 있다. 그러나 금강산 가는 길에 여비가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든다. 비자발급 수수료,입산료등 북한측에 지불해야 할 공적비용을 감안하면 1,000달러의관광비용은 너무 비싸다. 특히 현대 측이 고향을 그리는 실향민들에게 우선권을 준다고 한 점을 감안하면 영세 실향민들의 금강산 구경은 「그림의 떡」이 될 수 밖에 없다. 적은 비용으로 우리 국민이면 모두가 한번은 금강산 구경을 할 수 있는 그런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경비를 절감할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 관광객 수송로를 단축하는 문제를 고려해 볼 수 있다. 현재 확정된 수송로는 하오 6시 동해항을 출발, 다음날 아침 7시에 장전항에 도착하는 것으로 돼 있다.정전협정 체제에서 여러가지 제약과 풀어야 할 법적장치가 있는 것이 사실이나 남북교류협력의 제도적 차원에서 관광수송로 단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예컨대 현재 대북식량지원의 경우처럼 해상에서 남북이 인수·인계하는 절차를 적용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이번 금강산 관광사업은 정부가 아닌 민간차원에서 이루어진 만큼 현대측이 이같은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했어야 한다. 현대가 분단의 비극을 청산하고 민족공동번영의 기틀을 마련한다는 차원에서 금강산 관광사업을 추진했고 북한의승인을 얻어 냈다고 한다면 이같은 문제에서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 냈어야 한다는 판단이다. 아무튼 금강산 관광사업은 진정한 의미의 남북화해와 협력의 기념비적 이정표를 세우는 역사성에 입각해서 진행돼야 할 것이다.
  • 高宗의 부부싸움(秘錄 南柯夢:21)

    ◎“황태자 폐위” 궁중流言 나돌아/고종 “맏아들 폐위는 나라 망치는 일” 진노/“누구의 획책인가…” 嚴妃 추궁하자 졸도/30분뒤 깨어나니 노여움 풀고 부부화해/“가화만사성 경의 말들어…” 번갈아 하사품 고종과 엄비의 가정불화는 마침내 엄비의 기절로 끝나게 되었으니 궁중 사건으로는 큰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런 긴급 사태를 당하여 정환덕은 고종에게 “안심하십시요.30분 뒤에는 깨어나십니다”라고 말씀드렸다.과연 깨어날수 있을까.이 예언이 맞지 않으면 당장 해임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30분이 지나 밤 8시가 되었다. 엄비께서 갑자기 몸을 옆으로 둘리시더니 얼굴을 벽에 대고 구슬같은 눈물을 흘리시며 숨을 몰아 쉬셨다.기사회생한 것이다.상궁과 내인이 급히 뛰어 대청에 나와 고종에게 엄비가 깨어난 것을 아뢰었다.황상께서는 급히 달려가서 엄비가 깨어나신 것을 확인하셨다.너무 기뻐 좌우를 돌아보시더니 “정시종(鄭侍從=정환덕)의 추산법(追算法)은 과연 천하 제일이다”하시며 칭찬하시기를 마지 않으셨다. 어떻게 엄비의회생을 예언할 수 있었을까.그건 정환덕이 엄비의 졸도가 약으로 치료될 일이 아니라 화병으로 일시 까무라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엄비가 졸도하기 전 정환덕이 엄비에게 불려가 고종과 독대 내용을 질문받은 일이 있었다.그 뒤 소문이 고종의 귀에 들어가 다시 고종에게 불려갔으니 사태의 심각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터이다. 황상께서는 경위총관(警衛總官) 이근순(李根淳), 궁내협판(宮內協判) 이봉래(李鳳來),탁지대신(度支大臣) 이용익(李容翊),평양참령(平壤參領) 길영수(吉永洙),호위대참장(護衛隊參長) 이서구(李書九) 등 요인들이 즐비해 있는 가운데 대청에 좌정하시어 나(정환덕)에게 물으시기를 “지금 엄비가 너를 불러 무슨 일을 묻던가”고 하시었다.이에 아뢰기를 “엄비께서 단지 나라 일을 걱정하시며 왕실의 운명에 대해 점치라고 하셨을 뿐 그 밖에는 다른 말씀은 없었습니다”고 했다.황상께서는 “알겠다”고 하시면서 자리를 뜨셨다. 그때 나는 몸을 일으켜 “한 말씀만 더 드릴 일이 있습니다”고 아뢰었다.“무슨일인가” 하시기에 “속담에도 있듯이 집안이 화평하면 모든 일이 잘 된다”(家和萬事成)고 하였습니다.군신간에도 화목하여야 나라가 잘되는 것이오니 폐하께서는 부디 매사 평화와 관용과 원만으로 해결하시고 상벌을 분명히 하시며 허실(虛實)을 분명하게 하신다면 궁중은 물론 장안도 아무탈 없이 승평(昇平)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만일 그렇지 못하면 위험과 난리가 박두하게 될 것입니다. 본시 권좌에 오르면 그 순간부터 정신이 몽롱해져서 정사를 그르치게 마련이다.1904년은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던 해다.그런데 국왕이 부부싸움에만 정신을 팔고 있었으니 그것은 마치 클린턴이 성추문 사건에만 신경을 쓰다가 미국의 대외정책을 그르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라가 위태롭다는 말은 입달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던 말인데 ‘남가몽’에 보면 성주목사를 심선택(沈善澤)이 이같은 말을 하고 있다.심선택은 북간도 개척을 진언한 인물이다. 편안할 때 위태함을 잊지말아야 하고 즐거울 때 우환을 잊지말아야 한다(安不忘危樂不忘憂)는 것은 고금의진리입니다.지금 나라 형편을 보건데 겉으로는 태평한 듯 하지만 속으로는 지극히 험난하여 문자 그대로 누란의 위기요,‘눈섭이 타는 위급’(燒眉之急)이라 할 것입니다.그러나 모두가 이같은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앉아서 바라만 보고 있으니 이것은 마치 만신창이가 된 몸에 도화분을 발라 상처를 가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근본을 다스려야 낫지 말초를 다스려서야 나을 수있는 병이 아닙니다.지금이야말로 국가를 치료할 양약이 필요할 때입니다. 병든 나라를 치료하기 위한 양약이라고 했는데 이름이야 ‘개혁’이든 ‘제2의 건국’이든 상관이 없다.지금이야말로 그런 약이 필요한 때 아닌가. 아무튼 고종과 엄비의 부부싸움은 엄비의 졸도로 일단락됐는데 사실은 배후에 엄청난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정환덕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내시가 한사람 있었는데 이름이 봉시(奉侍:내시) 강석호(姜錫浩)였다.이 사람이 불시에 정환덕을 찾아오더니 엄청난 궁중비밀을 털어놓았다.정환덕도 몰랐던 일이기에 깜짝놀랐다. 봉시 강석호가 내게 찾아와 “영감께서는경선궁 사건을 실지로 미리 알고 계셨습니까”하고 물었다.이에 답하기를 “사실은 부부싸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아직도 안개속에 있는 것 같습니다”고 했다.강석호는 말하기를 “영감이나 저나 천안(天顔:임금)을 지척에서 모시는 몸으로서 다같이 나라와 고락을 함께 하고 있는 처지가 아닙니까” 하며 목소리를 낮추면서 “근일에 궁중유언(宮中流言)이 돌고 있는데 민비 소생인 황태자(순종)를 폐해 대군(大君)으로 강등하고 엄비의 소생인 영친왕을 황태자로 모시고 저 한다는 말이 돌고 있는데 황상폐하께서 이 소리를 들으시고 크게 진노하셔 말씀하시기를 ‘예부터 맏아들을 폐하고 어린 아들을 세운다는 것은 국가를 망치는 근본이라 했다.어느 반역분자가 이런 일을 획책하고 있는가’하시면서 엄비를 나무라셨습니다.엄비가 황공무지하여 어쩔줄 몰라 하시다가 까무라치게 된 것입니다.영감께서는 이 일을 알고 계셨습니까. 강석호는 부부싸움의 진상은 대개 그러하니 “이런 어려운 시기를 당해 앞으로 우리 두사람은 대소사를 가릴 것없이서로 협력하여 나가자”고 제의해 왔다.정환덕이 “물론 그렇게 해야지요”라고 동의했는데 얼마 뒤 고종이 정환덕을 불러 치하하였다. 황상께서는 “짐이 경의 말에 따라서 궁중의 유언비어를 말끔히 씻어 냈더니 화기(和氣)가 되살아났다.이 어찌 가화만사성 아니겠느냐”하셨다.엎드려 아뢰기를 “이는 이 나라의 훙복이옵니다.옛말에 ‘착한 마음을 한번 품으면 길신(吉神)이 따르고 악한 마음에 흉귀(凶鬼)가 따른다’고 하였사오니 이제 이 나라는 다시 회생할 것이옵니다”고 아뢰었다. 이때 고종은 손수 금일봉(금화 200환)을 하사하며 정환덕을 치하하였다.그런데 다음날 경선궁에서 엄비가 정환덕에게 “약간 정표를 준비했으니 받아 가라”는 하명이 있었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이 물건을 그냥 받아갔다가는 큰일날 것 같았다. 그래서 10여일을 그냥 맡겨두고서 찾아가지 않았더니 엄비께서 “저번에 약간의 정표한 물건은 왜 받아가지 않느냐”고 물으셨다.대답하기를 “너무 황송해 받아가지 못했습니다”고 하였다.그리고 나서 황상께 고하기를 “경선궁에서 약간의 정표로 하사하신 물건이 있었습니다만 감히 받을 수가 없어 이처럼 말씀드립니다”고 아뢰었다. 황상께서는 “무슨 물건이든가”고 물으시기에 “엄비의 말씀이 ‘막중 존엄한 자리를 가까히 모시는 신하로서 의복이 남루해 혹시 정결하지 못하여 냄새가 날까 두려워 다소의 의복을 하사한다’하셨습니다만 아직 펴보지 못하였습니다”고 아뢰었다.이에 고종이 “받는 것이 옳다”고 허락하셔 마침내 선물을 받아 펴보았다. 펴보니 구름 무늬 비단으로 만든 크고 작은 예복 각 한 벌씩과 물소뿔띠와 학을 그린 흉배자 각 한 벌,수단(繡緞) 두필,왜비단 두필,순인갑사(淳仁甲紗) 한필,가는 모시 세필,분명주 두필,목양목 두필,백미 10섬,지화(紙貨) 300환.씨를 뺀 화솜 50근.안동포 두 필 그 밖에 여러 물건이 들어 있었다. 고종은 200환밖에 하사하지 않았는데 엄비는 이처럼 지화 300환 이외에도 엄청난 물품을 하사하였으니 그때도 지금처럼 경제권이 여편 쪽으로 넘어갔던 것 같다.
  • 高宗과 조개탕(秘錄 南柯夢:20)

    ◎嚴妃,남편 바람기 재우려 안간힘/“女色 멀리하도록 잘 보필하라” 鄭환덕에 경고/기다리다 못한 엄비 직간했다 고종의 미움 사/부부끼리 서로 의심… “왕비 폐출”흘리기까지/크게 놀란 엄비 가슴치며 하소연하다 쓰러져… ‘왕과 왕비’라고 부부싸움을 하지말란 법은 없다. 다만 원인이 다를 뿐이다. 가난이 유죄라고 사가에서는 돈때문에 부부싸움을 하지만 왕실에선 돈 걱정할리 없다. 걱정이 있다면 여자 문제다. 고종은 참조개탕을 즐기셨는데 하루는 조개탕을 들다가 이가 뿌러졌다. 누구의 책임인가 당연히 감선청(監膳廳)이 책임을 져야 했다. 상감께서 참조개탕(蛤子湯)을 좋아하셨다. 그래서 감선청에서는 조석으로 수라상에 조개탕을 올렸는데,하루는 상감이 조개탕을 드시다가 앞니 하나가 뿌러져 소반위에 떨어졌다. 덩그렁하며 소반에 이가 떨어지자 상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옆에 있던 순종은 크게 웃으시면서 측근을 불러 명하시기를 “감선당번은 무엇을 했는가. 당장 원도로 유배하라”고 명하셨다. 감선당번은 서인택(徐仁宅)과 이봉천(李鳳天) 두 사람이었다. 한 개 치아로 말미암아 두 사람이나 유배당하게 됐으니 과연 국법이 무섭기도 하다. 조개탕 사건이 일어나서 그랬던가. 우연치 않게 고종과 엄비사이에 작은 전쟁이 벌어졌다. 1904년 고종의 나이가 50대 초반이었으니 아직 노쇠하였다고 보기 어려웠고 조개탕을 즐겨 그랬는지 양기에도 별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엄비는 상감의 옥체에 이상이 있을까 두려워했다. 순비(엄비)께서 내게 은근히 말씀하시기를 “상감께서는 늙지도 않고 젊지도 않은 나이(非老不少之年)신데 방사(房事=남녀의 동침)가 너무 빈번하셔 옥체를 상하실까 두렵소. 그대는 상감을 항상 가까히 모시고 있으면서 어찌 한번도 간하여 아뢰지 않았는가”라고 나무라셨다. 며칠 뒤 순비께서는 병풍 뒤에 숨어서 상감마마의 동정을 살피셨다고 들었다. 왕비도 여자인지라 남편이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질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정환덕을 불러서 질책하듯 원망하듯 황상을 잘 보필하라 했다. 엄비의 질책을 받고 정환덕은 기어이 상감께 성색(聲色)을 삼가하시라는 말씀을 드리기로 결심했다. 마침 상감이 매우 기분좋은 상태에서 정환덕에게 물었다. 상감께서 자못 기쁜 기색으로 물으시기를 “역색(易色)이란 말뜻을 아는가”하셨다. 이에 아뢰기를 역색이란 얼굴빛을 바꾼다는 뜻으로 여색을 좋아한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에는 귀천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아옵니다. 그러나 즐거움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슬픔이 찾아오고(樂極哀生) 음탕함이 극에 달하면 재앙이 찾아오는 것(淫極災生)이 자연의 이치라 군자는 반드시 중도를 지킴으로써 재앙을 미연에 방지하였습니다”고 아뢰었다.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엄비는 직접 고종에게 이렇게 간했다고 하는데 후환이 두려운 말이었다. 근래 국법이 해이하여 궁인들이 대궐 밖을 수시로 드나들고 있으니 혹시나 병에 걸려 들어오는 아이가 있지 않을까 두렵사오니 궁인을 상대하실 때는 반드시 정환덕에게 명하시어 그 사람의 몸에 병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때 고종은 묵묵 부답하며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날 고종은 정환덕을 불러 독대하시더니 말씀하시기를 “짐이 경과 함께 지내기를 밖으로는 군신지간(君臣之間)이었으나 안으로는 부자지간으로 정분을 나누어왔다. 그러니 무슨 말을 하지 못하겠는가. 묻겠는데 엄비에게 큰 비밀이 있다고 들었다. 그대는 아는가. 숨김없이 대답하라”고 하시었다. 깜짝 놀란 정환덕은 시침을 떼고 대답하기를 “청천벽력같은 말씀으로 소신은 전혀 아는 바 없습니다”라고 단언했다. “정녕 그러한가?” 고종께서 다시 다그쳐 물어 보았는데,그때 정환덕의 등에는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그러면서도 “도끼로 맞아죽는다고 해도 아뢸 말이 없습니다”고 잡아뗐다. 집에 돌아와 곰곰히 생각하니 동네사람의 부부싸움도 말리기 어려운데 하물며 국왕 내외에 있어서랴. 무슨 재주로 말릴 수 있겠는가 싶었다. 다음날 대궐에서 입궐하라는 명이 내려 인력거에 올라탔다. 대한문에 들어서니 안내자는 “오늘은 함녕전에서 부르신 것이 아니고 경선궁에서 부르신 것이니 그리로 갑시다”고 했다. 경선궁에는 엄비가 계셨다. 엄비가 물으시기를 “그대는 상감을 뵙고 무슨 말을 하였는가”고 하셨다. 사실대로 대답했다가는 대번에 야단맞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드디어 속여서 말씀 드리기를 “어제 밤 상감께서 소신에게 물으신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간사한 무리들이 혹은 일본에 붙고 혹은 러시아에 붙어 유언비어를 만들어 서로 이간질하고 마침내는 나라를 팔아 먹고 있으니 이 나라 운명의 길흉이 어떠한가를 물으셨습니다. 다른 말씀은 없었습니다”고 아뢰었다. 그러자 엄비께서는 손으로 가슴을 치며 말씀하시기를 “상감께서 내게 의심을 품으셔 장차 나를 폐출하기로 했다고 들었는데 그런 말씀이 있었는가”하셨다. 나는 시침을 떼고 “소신은 듣느니 처음입니다. 내외간 일을 상감이 소신에게 물으실리 있겠습니까. 천부당 만부당한 일입니다”고 대답했다. 엄비가 손으로 가슴을 치면서 신하에게 하소연했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뒤 엄비가 졸도하여 의식을 잃고 말았다. “순비가 졸도하여 죽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어린 영왕은 어머니를 부르며 통곡하고 있으며 상궁나인들은 한편으로 엄비의 입에 기름을 넣어 드리고,다른 한편으로는 물을 목구멍에 넣어 드리느라 분주하다. 약으로는 사향환(麝香丸)을 갈아 드리고 있으나 삼키지 못하고 침을 흘릴 뿐이다. 어찌 하면 좋겠는가” 하시기에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니 길한 일이 모인다’(用死終生吉相聚)는 말을 인용하며 “염려 마시옵소서. 반시간만 지나면 깨어나실 것입니다”고 아뢰었다. 벽시계를 보니 7시반이었다. 고종께서는 시계를 보더니 “과연 8시에는 깨어나시겠느냐”고 물으셨다. 그러더니 “너는 여기 있으라” 하시며 종종 걸음으로 대청으로 나가 내의(內醫)를 불러 화제(和劑)를 쓰라고 하시니 내의들은 강화자음전(降火磁陰煎)이 좋다느니 청심진정탕(淸心鎭靜湯)이 더 좋다느니 의견이 엇갈렸다. 그러기를 30분이 지나 괘종시계가 8시를 쳤는데 그때서야 내의의 화제가 나왔다. 사후 약방문 격이었다.
  • 어린이문화축제

    어린이들이 음악·무용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체험할 수 있는 문화축제가 열린다. 국제문화교류협회(이사장 김상우)는 제1회 어린이 문화축제를 14일부터 16일까지 매일 상오 9시부터 하오 8시까지 서울 능동 어린이대공원 야외음악당 등지에서 개최한다. 입시위주의 교육에 찌들려 좀처럼 여가를 내기 어려운 어린이들의 정서함양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국군 군악대의 축하연주로 막을 올릴 이 축제는 15일 우지원의 농구교실,가족오락 ‘벽을 넘어서’,서울발레시어터 공연,리틀엔젤스 예술단의 전통무용과 합창공연 등으로 이어진다. 또 마지막날에는 민족예술단 놀이패 우금치가 마련한 환경마당극 ‘형설지공’과 정명훈이 지휘하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정명훈과 함께 하는 어린이 음악회’가 펼쳐진다.3436­4271∼3
  • 北間島 개척(秘錄 南柯夢:19)

    ◎“간도 개간해 영유권 회복” 은밀히 제의/관직 물러난 심선택,부국강병책으로 진언/고종,“뜻은 거창하나 재정연구뒤 착수” 지시/심,“삼도 어사삼으면 수령출척 충당” 아뢰니 “흉년에 민폐 끼칠라…” 물리치자 없던 일로 두만강 건너 이북의 땅을 북간도(北間島)라 한다. 지금 연변 조선족이 사는 곳이다. 이곳이 고조선과 고구려,그리고 발해의 옛 강역이었던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인데,그토록 귀한 땅이 대륙의 이민족에게 넘어간 것은 고려때부터로 알려지고 있다. 그때 간도땅을 차지한 민족을 만주족,일명 여진족이라 하는데 여진족은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워 중원을 정복하는데 성공한 민족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사학자 가운데는 여진족이 이민족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금과 청의 역사를 중국사에서 떼어내 한국사의 일부로 끌여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가 만일 계속 간도땅을 영유하고 있었다면 약소국의 설움을 맛보지도 않았을 것이요,일제로부터 침략당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렇게 중요한 간도에 고종황제가관심을 가진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어느날 심선택(沈善澤)이 나(정환덕)를 찾아왔다. 이 사람은 전 동부승지 의평(宜平)의 아들이다. 지난해 엄귀인(嚴貴人:엄비)의 여동생에게 장가들어 외척이 되더니 그 인연으로 성주목사(星州牧使)자리를 얻어 나갔다. 그러나 겨우 일년이 지나 어머니 상(喪)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나 집으로 돌아왔다. 상를 마친 뒤 아무 직업도 없이 있다가 드디어 나를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말하기를 “매우 좋은 일이 있소이다. 영감께서 황상께 아뢰어 꼭 성취되었으면 합니다. 이것은 국가를 위한 일이요,창업공신과도 맞먹는 일이니 생각이 어떠하십니까”라는 것이었다. 심선택은 흥분하고 있었다. 그가 말하고 싶은것은 북간도 개척문제였다. 그래서 정환덕은 “순서대로 조용히 말씀해보시오”라고 말했다. “북간도는 원래는 조선 땅으로 사방이 4천리나 됩니다. 남이(南怡) 장군이 당시에 백두산의 북쪽인 중국 동부지역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고 여기가 조선 땅이라는 것을 밝혔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가보면 그 지역이텅비어 있고 관할하는 사람도 없으니 그곳에 공사관(公使館)이나 영사관(領事館)을 설치해 중국과 조선이 서로 무역을 하고 버려진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지으면 부국강병책이 스스로 그 안에 있을 것입니다. 영감께서는 이 사업을 각별히 힘써서 주선해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드디어 북간도의 지도 한장과 북간도에 관한 사실을 조사한 서류 한 점을 꺼내 나에게 주었다. 세종때 남이장군이 세웠다는 백두산정계비는 백두산보다 훨씬 북쪽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하며,목격자도 많은데 일제가 폭파했다는 설이 있다. 그뒤 18세기초에 다시 청나라가 강요하여 정계비를 백두산 남쪽에 새로 세우게 되어 백두산 천지까지 빼앗기는 수모를 겪었다. 이때 문제된 강이 토문강인데 청은 토문강을 두만강이라 주장하고 우리는 두만강이 아니라 해란강이라고 주장했다. 심선택은 이같이 간도땅의 역사를 잘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종에게 건의하여 간도땅을 되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돈이었다. 그런데 상감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은 거창한데 재정이 어려워 섣불리 착수할 수가 없다. 아직은 보류하고 재정을 연구한 뒤 착수하기로 하자”고 분부하셨다. 그래서 심선택에게 상감의 교시가 이와같다는 뜻을 설명했다. 그랬더니 “상감의 교시가 비록 그와같다 해도 좋은 방도가 있으니 상감께서 우리일가 심상훈(沈相薰)을 불러 “북간도의 일을 심선택과 상의하여 보라고 처분을 내리시면 방도가 나올 것이니 다시 그렇게 아뢰어 달라”고 했다. 그래서 대궐에 들어가 다시 아뢰었더니 상감께서 심상훈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북간도 일은 심선택과 함께 상의해 처리하라”고 교시하시었다. 심상훈은 대한제국의 공신으로 고종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심선택이 심상훈의 도움을 받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심선택의 말에 문제가 있었다. 이에 심상훈이 심선택에게 “상감께서 북간도 일을 어른(심선택)과 상의해보라는 교시를 내리셨는데 무슨 방도가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대감께서 잘 여쭈시어 나를 북쪽 삼도(三島) 어사(御史)로 삼아 옛 식대로 마패(馬牌)를 가지고 현지 수령들을 출척(黜陟)하는 권한을 갖게 해주신다면 일년도 되기 전에 쉽사리 몇천만원은 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뒤에 북간도에 들어가 시설을 하면 재정의 부족은 근심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어찌 국고(國庫)의 돈으로써 경비를 낭비하는 일이 있겠습니까”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농민들은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에는 많이 이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역경을 딛고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청나라의 강압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 문화와 의복을 지켰다. 청나라의 관리들은 한국농민들에게 머리를 깎고 청나라 옷으로 갈아입으면 토지소유권을 준다고 유혹하였으나 백의민족으로서 긍지를 저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대한제국 정부는 1902년 우리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범윤(李範允)을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로 임명,파견하였다. 이 때문에 심상훈과 심선택은 의견충돌이 일어나 각자 화를 내고 헤어졌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심선택은 국가의 일에는 뜻이 없는 사람이었다. 한탄한들 어찌하겠는가. 그 뒤 심상훈이나를 찾아와 “북간도의 일은 다시 여쭈지 말라”고 단단히 요청하였다. 그리고 심상훈이 황상께 입대해서 아뢰기를 “신(臣)이 저의 일가 심선택의 말을 들어보니 북쪽 삼도(三島)백성의 재산을 거두어서 북간도를 개척하자고 하기 때문에 ‘민간의 재정이 고갈돼 있고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한데 이러한 때를 당해 저같은 일을 하고자 한다면 일이 성취되지 않을뿐 아니라 도리어 재앙을 받게 될 것이니 서로 관계하고 싶지않다’고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니 황송한 마음은 모두 여쭈지 못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상감께서 말씀하시기를 “알았다”고 하시었다. 이에 심선택이 나에게 찾아와 말하기를 “저 일가 사람 심상훈이 나의 말을 믿지 않고 이와같이 반대하고 있으니 어찌 하면 좋겠는가”라고 했다. 내가 대답하기를 “상감께서 처음부터 즐겨하지 않았기 때문이요,심상훈이 반대한 것이 아니니 차차 일의 형편을 보아가며 도모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많은 말을 하지 말라”고 하니 심선택은 물러가고 말았다. 독도는 우리땅이라 했듯간도도 우리땅이었다. 우리 농민들이 개척한 땅이어서 이름을 간도(墾島)라 불렀던 것인데 일제가 ‘사이 간’자로 바꿔 간도(間島)라 명명했고 1909년에 마침내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어 땅을 중국에 넘겨주고 말았다.
  • 순명황후의 恨(秘錄 南柯夢:18)

    ◎독수공방 20년 후사 없어 坤宮 미움사/純宗 음양이치 잘몰라 빈궁 침실 발길 끊어/보다못한 嚴妃 영친왕 시켜 억지合房도 허사/종묘 주춧돌 28칸 반… 나라운수 예언한듯/33세에 쓸쓸히 승하하자 四廟에 큰불 조선왕조가 멸망한 원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일제의 침략 때문이었다.그러나 우연하게 왕실안에 이변이 거듭 일어나고 있었으니 그중의 하나가 조선왕조 최후의 임금인 순종(純宗,1907∼1910)에게 후사가 없었다는 일이다.순종은 명성황후가 어렵게 나은 외아들이었는데,불행히 여자를 몰랐다. 하루는 어린 영친왕이 함녕전으로 뛰어오더니 순종의 옷소매를 잡고 빈궁(嬪宮=순명황후 민씨)한테 가시자고 졸랐다.본시 순종께서는 음양의 이치(남녀관계)를 잘 모르셔 허송세월만 하고 계신지라 엄비(영친왕의 생모)께서 걱정하시던 끝에 어린 영친왕을 시켜 순종을 억지로 빈궁의 침실로 모시게 했던 것이다. 순종은 영친왕이 이끄는대로 따라가다가 빈궁 침실을 두어걸음 남겨두고 돌아서고 말았다.그러자 어린 영친왕이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엄비가 나타나 순종에게 꼭 한번만 빈궁에게 가보시라고 권했다.순종이 난처해서 멈칫거리고 있을 때 빈궁이 직접 나와서 순종을 자기방으로 모셨다. 순종이 방에 앉자마자 미리 준비해뒀던 주안상이 들어왔다.상궁과 나인 모두가 밖으로 나가 일이 잘 되기를 기원했다.그러나 방안에서는 아무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빈궁으로서는 시집온지 20년만인 이날 처음으로 화촉을 밝히는 것이었으니 운우의 기쁨이 얼마나 그리웠겠는가.그러나 순종께서는 앉은 자리가 뜨뜻해지기도 전에 일어나시더니 함녕전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선원계보’에 보면 순명황후 민씨는 민태호의 딸로서 11살(임오 1882년)때 태자비로 간택되어 33살(갑진 1904년)에 승하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그사이 22년 동안을 처녀의 몸으로 지냈다고 하니 그야말로 청상과부보다 못한 쓸쓸한 일생이었다. 이후에도 밤다다 11시경이면 순종이 빈궁의 침소를 찾았으나 아들을 낳을 희망은 전혀 없었다.도대체 우주만물이 모두 음과 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람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가 있겠는가. 가령 한 마을에 아리따운 처녀가 있어 향수를 뿌리고 얼굴에 분을 바르고 눈썹을 그린 뒤 웃는 낯으로 남자를 바라본다면 아무리 군왕이라 하더라도 쏠리게 마련이고 여색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인데 어찌 순종께서는 이것을 모르시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순종의 이같은 행동은 국가의 운명과도 관계되는 일이다.왜냐하면 당초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종묘의 주춧돌을 놓을 때 28칸반으로 정했는데,이로 미루어 본다면 이 나라의 운수는 가히 움직이기 어려운 일인가. 조선왕조 건국시에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길 때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활약이 컸다.그래서 많은 일화가 남아있는데 그중 하나가 종묘다. 정도전이 종묘의 칸수를 28칸 반으로 정하고,‘창엽문(蒼葉門)’이란 액자를 단 것은 그가 미리 500년 후의 일을 예측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남가몽·8,4월15일자 참조) 최근 장안에 다음같은 동요가 유행하고 있는데 그 가사는 이러하다.‘어제 불고 그저께 분 바람은/러시아 군대의 대포소리요/지금 방금 떨어지는 달은 빈궁전하의 운명이로다’(昨日再昨吹去風 露國軍隊砲聲也 方今時今落來月 嬪宮殿下運命也)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순명황후께서 승하했는데 이때 장안에 위와 같은 동요가 나돌았다는 것이다.이 이야기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대한제국사의 한 단면이다.그보다 더 재미있는 일화는 순명황후 민씨가 시어머니 명성황후에게 미움을 사 고된 시집살이를 했다는 얘기다.이것 또한 전혀 새로운 사실이다. 본래 곤궁(坤宮=명성황후)이 살아계실 때 며느리인 빈궁과 뜻이 맞지않아 서로 원수보듯 하였다.매일아침 저녁으로 빈궁이 대전과 곤궁께 문안인사를 드릴 때 원삼에 띠를 두르고 사배(四拜)를 올리셨다. 그때 순명황후는 문지방 밖에 서서 물러가라는 명이 떨어질 때까지 서서 기다려야 했다.간혹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서 있거나 밤이 늦도록 서서 벌을 받을 때가 있었다고 하니 그 고통은 형언할 수없는 일이었다.거기다 남편인 순종이 음양의 이치를 알지 못했으니 순명황후의 운명은 기구하기만 했다. 무릇 음식과 남녀의 이성관계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인데독숙공방(獨宿空房)하며 낙을 모르고 지내기를 20년이나 되었으니 그 쓰라린 고초를 무엇으로 다 형용하리.차라리 왕비가 되기보다 사가의 부인이 된 것만 못하지 않았는가.이리하여 1904년(甲辰 고종 41년) 10월 보름 경운궁 강태실(康泰室)에서 승하하셨으니 향년 33세였다. 순명황후 민씨가 죽자 곧바로 계비 윤씨를 태자비로 봉했는데 윤택영(尹澤榮)의 12살난 딸이었다.그러나 동궁(순종)전하께서는 처음에 친영(親迎)을 마친 뒤로는 한번도 들르시지 않았으니 지난 날의 빈궁과 지내듯 담담하게 허송세월하게 되었다.세상에 이런 일이 또 있겠는가.세상사람들이 말하기를 “순종은 고자”라고 했는데 과연 그랬을까.나는 오해라고 생각한다. 정환덕은 순종이 고자가 아닌 이유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하고 있다. 본래 국법에 따르면 동궁의 바지밑에는 소변보는 구멍이 있고 오줌눌 때는 가까이 있는 내시로 하여금 요강(溺器)을 바치게 하였다.그때 내시는 황공하옵게도 동궁의 성기를 엿보게 되고 요즘 소리로 양기가 발동하여 힘이 있는가 없는가를 가늠할수 있었다.또 털이 검고 무성한 것을 눈으로 확인하기도 하였다.그런데 어찌 고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혹시 성기가 미리 발동하는 조루증은 아닌지 모르겠다. ‘마땅히 동해야 할 때 동하지 않고 동하여서는 아니될 때 동했던 것(當動而不動 不當動而動)’이 아닌지 의심스러운 것이다.어찌 되었건 그 생리를 알 수 없다.대저 신하된 도리로 감히 입을 열지 못할 일인 줄 알면서 입을 연 것은 오로지 진실이 그렇다는 것을 밝히고 싶어서이다.누가 감히 순종을 고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순명황후가 나이 설흔세살에 한 맺힌 일생을 마칠 때 또 다른 이변이 일어났다.그것은 서울의 사묘(四廟)에 큰 불이 난 것이었다. 당초 명성황후 생전시 북묘를 세우고 이어 광무 6년(1902년)에 동묘를 세워 서울에는 모두 동서남북 4묘가 있었다.그런데 1904년에 큰불이 일어났고 그때 장안의 시민들이 모두 달려들어 불을 껐던 것이다.그래서 안에 모셔 놓았던 신상(神像)은 무사히 불길을 피했는데 사당은 전소하고 말았다. 지금 동대문밖 숭인동에 사묘중의 하나인 동묘가 남아있다.이것은 본래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04년(선조 32년) 국난극복을 기원하는 뜻에서 세운 일종의 무묘(武廟)였다.성균관을 일명 ‘문묘(文廟)’라 했고,사묘는 외침을 막아주는 무신의 사당이었다.하필이면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순명황후가 돌아가신 1904년에 사묘가 불이 나고 덕수궁에도 불이 났는지,지금도 사람들은 일제가 저지른 방화로 믿고 있다.어찌 되었건 화재사건은 한많은 순명황후가 죽으면 일어난 사건이었고,그래서 모두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던 것이다.
  • 궁중의 중상(秘錄 南柯夢:17)

    ◎고종 총애 지극하니 궁궐축출 모략이…/정환덕 상감모시기 10년… 정적들 시기받아 감기로 며칠 쉬는 틈타 지방으로 좌천 공작/“시골군수가 소원” 거짓주청에 임금도 속아 “일주일만 참으라” 했으나 한달넘게 무소식 이튿날 정오 상감 부자께서는 신(정환덕)을 급히 입궐하라 명하시고 말씀하시기를 “鄭가 성을 가졌다해서 모두 나라에 해를 끼쳤다고 할 수 없다.필시 경(卿=정환덕)을 몰아내기 위한 계책이었으니 사퇴하지 말 것이며 정가성을 가진 사람으로 추방당한 모든 사람을 다시 입궐,근무토록 하라”고 분부하시니,환호의 소리가 하늘에 닿고 궁중에 화기가 넘쳐 났다.그러나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누군가 말했듯이 정치란 반칙투성이의 축구시합이라 했다.권력의 속성 가운데 가장 더러운 부분이 바로 권력투쟁이다.권력투쟁에는 반드시 중상모략이 오가게 마련이라 선비가 권력의 주변에 가까이 가면,온갖 수모를 당하고 물러서게 마련이다. 정환덕 이하 모든 정씨가 궁중에서 숙청당한 사건은 장지동의 군함사건을 계기로 당대의 세도가 길영수(吉永洙)와 말다툼을 한 데서 비롯되었다(남가몽 15회 참조). ○길영수와 말다툼 화근 길영수로 말하면 본래 지관(地官)출신으로 고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하더니 1889년 과천군수를 거쳐 일약 13도부상도반수(十三道負商都班首)로 뛰어 올라 전국의 보부상을 지휘하여 황국협회(皇國協會)를 조직,야당인 독립협회의 개혁요구를 몽둥이로 진압한 국가유공자(?)였다.광무정권을 수립하는데 가히 일등공신이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거물을 상대로 일개 시종이 싸우기란 벅찬 일이었다. 다행히 1903년 한 선비의 상소로 “육군부령 길영수는 간사한 무리로서 성총을 빙자하여 민재(民財)를 약탈하고 관직을 매매하는 등 나라를 병들게 한자”란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정환덕의 다음 정적은 길영수보다 더 엄청난 거물 이용익(李容翊) 이었다.이용익은 임오군란 때 민비(명성황후)를 도와 매일 서울∼장호원간을 달려서 왕래한 충신으로 고종의 신임을 얻어 광무개혁을 사실상 주도한 인물이었다.그는 부정부패를 일소하기 위해 지방수령(군수) 331명에 대해 일제 수사를 벌였다. 이용익이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재무장관)으로서 열읍의 포흠 (浦欠:부정행위)낸 수령을 조사하고 보니 전국 360 고을(郡) 가운데 단 한 면도 온전한 곳이 없었다.이 때문에 포흠을 낸 관찰사(도지사)와 수령들이 도망쳐 피신하였는데,경남 산청의 단성(丹城)군수도 역시 그 가운데 들게 되어 사촌 정환기가 도망치고 말았다. 저번에 이용태(李容泰)의 주선으로 정환기를 내장원(內藏院)의 산림기사(山林技師)로 취직하게 만들어 주었더니 이 꼴이 되고 말았으니 모두 빈 공중의 꽃이 된 것이다.한탄한들 무엇할까. 정환덕이 출세했다 하여 시골에서 일가친척들이 무작정 상경해 한 자리 청탁하는 사람이 많았다.요즘같은 세상에도 상경한 시골의 일가친척을 냉대하였다가는 크게 욕을 먹는데,그때야 더했다.서대문 정환덕의 집에는 쉴새없이 일가친척이 찾아 왔는데,단성군수와 운봉군수를 시켜준 사람은 멀지 않은 사촌들이었다. ○사천군수 재기용 호소 사천(泗川) 군수 정환기(鄭煥琦)는 단성군수로 가게 되었는데 길영수가 들어서서 자기가 추천한 윤치일(尹致日)을 사천군수로 삼았기 때문에 정환기가 좌천된 것이다.얼마 안되어 정환기는 또다시 영양(英陽)군수로 좌천되었다. 그런데 정환기의 군수 자리가 길영수의 훼방으로 이렇게 좌천되게 되니 정환덕이 참다 못해 상감에게 하소연을 했다.그러자 황상께서 물으시기를 “단성군수 정환기가 너에게 4촌이 되느냐” 하시었다.대답하기를 “그러하옵니다”.또 말씀하시기를 “영양군수가 단성군수보다 낫지 않느냐” 하시었다. 대답하기를 “네,그러하옵니다.두 곳의 군수 자리 중 어느 곳이 나은지는 우열을 가리지 못하오나 소신의 천박한 생각으로는 단성군이 사천군만 못하고 영양군이 단성군만 못하오니 본래의 사천군으로 돌려 주시는 것이 옳을까 합니다”.상감께서 “그렇다면 그렇게 하기로 하라” 하시었다. 이로써 알수 있듯이 정환덕에 대한 고종의 총애는 지극하였다.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정환덕에 대한 모략은 더욱 극성스러워 마침내 궁궐에서 물러나 시골에 가서 군수를 살게 되었다. 간사한 무리들이나를 대궐에서 축출할 계획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여러 차례 실패하고 성공하지 못했으니 다시 무슨 일을 가지고 헐뜯을 것인가. 그런데 그들은 내가 잠시 병들어 누워 있는 동안에 상감에게 아뢰기를 “정환덕은 10년 가까이 상감마마를 지척의 자리에서 모셔 오면서 더 부지런하고 더 힘써서 밤을 낮으로 삼고 공경하고 경계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0년을 하루같이 충성하다보니 지쳐 병이 들었습니다.그러니 이제는 산수 좋은 고을을 택해서 잠시 소풍하듯 고을살이를 하게 하면 어떠하오리까”하고 아뢰었다.황상께서 이들의 말을 옳게 여기시어 드디어 충남 대흥(大興)현감을 제수하시었다.그러나 그것은 내 뜻이 아니었다. 생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듯이 정환덕이 잠시 감기로 대궐에 나가지 못한 틈을 타서 길영수 일파로 보이는 정적들이 그를 지방으로 보내려 했던 것이니,눈뜨고 코베어 가는 세상이었다. 하루는 비서장(秘書長) 김하영(金夏榮)이 우리집에 찾아와 문병하고 상감이 나를 충남 대흥군수로 제수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물론 이것은 저들의 공작이었다.이튿날 늦게 대궐에 들어가 입대했더니 상감께서 물으시기를 “병은 완쾌되었느냐.그동안 누가 와서 네가 지방의 외읍(外邑)을 맡아 나가는 것이 소원이라 하여 내가 너를 대흥군수로 제수했는데,너의 의향은 어떠한가” 하시었다. 땅에 엎드려 아뢰기를 “성상의 은총이 이와같이 융성하고 흡족하오니 참으로 송구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그러나 대흥군수로 나가고 싶다는 말은 제가 한 말이 아니옵니다.10년을 하루같이 모셔온 이 몸이 어찌하여 하루 아침에 멀리 귀향가듯이 대궐을 떠날 수 있단 말입니까.신이 비록 보잘 것없는 사람이오나 바라옵건대 해타(咳唾:바로 턱앞)에 두시어 부리신다면 그보다 더 영광이 없겠습니다”고 하였다.황상께서 들으시더니 “내가 한번 더 저들에게 속았구나.그러나 기왕 발령을 냈으니 잠시 내려가 군수로 부임했다가 일주일 이내에 다시 올라오도록 하라고 하시었다. ○“턱앞 두시어 부려달라” 정환덕이 대흥군수로 내려간 것은 1903년 3월7일이었다.일주일 뒤에 다시 올라오도록 하겠다던 말씀을 믿고 임지로 내려갔으나 한달이 넘어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임지에 부임한지 한달이 넘도록 올라오라는 분부는 없고 내부(內部=내무부)로부터 자리를 비우지 말라는 훈시만 날아왔다.
  • “포근한 경찰서 만들겠다”/첫 여성경찰서장 金康子 총경

    ◎70년 여경 공채로 투신… 무술·사격 수준급 “기쁨보다는 책임감에 어깨가 무거울 따름입니다” 여성으로는 41년 만에 경찰서장에 취임한 金康子 총경(53).여경 창설 52주년 기념일인 1일 충북 옥천경찰서장으로 발령받아 1,500여 여경들의 숙원을 풀었다. 金총경은 “주민들이 언제라도 서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도록 편안하고 사랑이 넘치는 경찰서로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자유당 정권시절인 47∼57년 청소년·부녀자 범죄를 전담했던 여자경찰서’ 서장은 있었지만 일선 경찰서장으로는 金총경이 처음이다. 金총경은 “첫 여성 경찰서장의 임지로 고 陸英修여사의 고향인 옥천이 배정된 것도 나름대로 뜻이 있는 것 같다”면서 “그 분의 꽃같은 이미지처럼 주민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베풀겠다”고 말했다. 金총경은 전남 구례에서 태어나 전남여고와 조선대 가정학과를 졸업한 뒤 70년 12월 여경 공채를 통해 경찰에 투신,공항검색요원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91년 9월에는 경정으로 승진한 뒤 서울경찰청 초대 민원실장과 서울 노원·양천·남부경찰서 방범과장을 거쳐 지난 3월 28년만에 ‘경찰의 꽃’이라는 총경으로 승진했다. 태권도 3단에 사격도 수준급인 金총경은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 때는 여자 선수촌과 여성 VIP 경호업무를 총괄하기도 했다. 서울 경찰청 민원실장 시절에는 성폭력 문제 상담 및 여성범죄 사후처리를 전담했고 여자 형사기동대 설치를 제안하기도 했다. 金총경은 “남존여비사상에 물든 남자 동료들의 과잉보호가 오히려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면서 “후배들도 편안함에 안주하지 않고 열정을 가지고 노력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편 金桓局씨(54·공무원)와 고등학생인 두 딸을 두고 있으며 4년 전부터 시어머니(72)와 함께 살고 있다.
  • 金 대통령 인촌강좌 특강­이모저모

    ◎金 대통령,해박한 역사지식으로 청중 압도/“경제개혁 잘하라고 박사학위 준것 같다” 金大中 대통령은 30일 고려대에서 명예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생애 9번째 박사학위다.그는 또 현직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대학에서 특강을 했다.‘우리 민족을 생각한다’를 주제로 한 이날 강연에서 그는 우리민족의 저력과 내일에 관한 해박한 역사 지식을 유감없이 발휘했다.金대통령은 강연 30분에 이어 참석자들과 30분동안 질의응답을 벌였다. ○…金대통령은 강연에 앞서 사회자가 인촌강좌의 내역을 소개하기도 전 웃옷을 벗고 칠판에 ‘우리 민족을 생각한다’는 강의 제목을 쓰고 단상 중앙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사회자는 金대통령의 열의를 감지한 듯,“오늘은 역사적인 현장”이라며 “오늘 박사학위를 받았으므로 金大中 교수님으로 부르겠다”며 강의를 부탁했다. 金대통령은 처음부터 “내가 공자앞에서 논어를,부처 앞에서 설법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분위기를 부드럽게 유도했다.그는 이외에도 강연과 질의응답 도중 “섯달 그믐날 시집온 며느리에게 시어머니가 ‘정월 초하루날이니 시집온지 2년 됐는데 애가 없느냐’고 물었다더라”,“대통령이 말 한마디를 잘못하면 큰 문제가 되니까 나오지 말라고 했는데 만용때문에 나왔다” “룩셈부르크에 빌 게이츠 같은 사람이 10명만 있어도 세계 최대 부자나라가 된다”는 등 속담과 특유의 유머를 섞어가며 청중들에게 다가갔다. ○…金대통령은 명예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것을 놓고 “의미가 있다” “길조다”고 말해 경제난 극복이 최대 관심사임을 은연중에 내비쳤다.그는 “기업 구조조정과 개혁발전이 잘되라고 박사학위를 준 것 아닌가 생각했다”며 “이런때 쓰려고 아전인수(我田引水)란 말이 있었구나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말해 청중들로 부터 웃음과 함께 박수를 받았다. 金대통령은 열의 가득한 ‘선생님’답게 시종 손으로 제스처를 써가며 열변을 토했다.특히 지역주의 극복,정경유착 근절,부정부패 일소 등을 얘기할 때는 목소리를 높이고 실업대책과 중산층의 붕괴 우려 등에 대한 질문에 답변할 때는 차분하게 말하는 등강연내내 ‘노련한 선생님’답게 리듬과 강약을 조절했다.
  • 가족문제 다룬 현대무용

    ‘현대’자 붙은 예술은 왠지 어려울것 같은 두려움.‘댄스 시어터 온’이 전혀 겁낼것 없고 ‘현대’무용을 가족끼리 봐도 즐거울 수 있다며 ‘가족과 함께보는 춤’이라는 무대를 준비했다.19∼21일 서울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94년 창단된 ‘댄스 시어터 온’은 예술도 대중적이어야 한다는데 뜻을 모으는 젊은 춤꾼들 단체.공연이름에 걸맞게 네편중 두편이 가족문제를 다룬 몸짓. ‘경로 다방’은 너무 정색하지 않고 노인문제를 살짝 무용 소재로 끌어들여본 작품.뉴욕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는 무용가 안은미씨 신작 안무다.‘가고파’는 김동진 가곡에 맞춰 ‘댄스 시어터 온’ 홍승엽 대표가 안무한 작품으로 ‘향수(鄕愁)에 대한 소품’쯤 되겠다. 이밖에 인형극,마임,무용의 테크닉을 섞어 만든 ‘백설공주’는 97년 서울국제무용제에서 주목받았던 작품.카프카의 ‘변신’을 모티브로 한 신작 ‘다섯번째 배역’도 곁들인다.(이상 안무 홍승엽) 금·토 하오 7시30분,일 하오 5시.272­2153,4.
  • 고종의 지병(秘錄 南柯夢:14)

    ◎용한 의사 宮에 들이려 참봉 임명/가래에 피 섞여 고생… 病 이름 몰라 근심/內醫들 못 미더워 侍從에 名醫 추천 의뢰/“성명 미상” 아뢰니 즉석 作名후 벼슬 내려 ‘한국 사람들은 사람을 잘 믿는 경향이 있다’.구한말에 의료선교사로 내한해 고종의 각별한 신임을 받은 호레이스 N.앨런(H.N.Allen)의 말이다. 그는 한국 사람의 특성으로 ‘사람을 너무 잘 믿는 습성’을 들었다.그래서 그런지 그 당시 서울에는 사기꾼들이 득실거렸고,그 중 일부가 궁궐에까지 손을 뻗쳐 이권을 챙겼다. 하루는 서대문의 정환덕이 집에 경상북도 칠곡에서 올라 왔다는 류호영(柳好永)이라는 시골선비가 찾아왔다.초면이라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고 좌정한뒤 류호영은 들고 온 손가방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였다.종이에는 시한 수가 적혀 있었으니 내용은 이러했다. ○“한양에 사기꾼 득실” ‘언젠가 내가 요직에 오르게 된다면 즐겨이 선생을 수령으로 임명하겠네.산좋고 물좋은 고을을 맡아 나가서 소나무 계수나무 숲 사이에서 글이나 읽게나.운현궁 씀(他年我若當路在 好使先生爲守令 出宰山水鄕 讀書松桂林 雲峴宮書)’ 사연은 류호영의 선친이 1863년 아직도 대원군이 재야에서 고생하고 있을때 보수도 제대로 못받고 운현궁의 가정교사 노릇을 했었다는 것인데,그때어린 고종이 직접 친필로 써 주신 글이 위의 글이니 이것을 꼭 황제에게 보여 달라는 것이었다. 정환덕은 어느날 한가한 틈을 보아 류호영의 글을 임금님에게 보여 드렸다.그러나 고종은 이에 속지 않고 말씀하시기를 ‘이 필적은 참으로 50년전의 것이다.또 어렸을 때 일을 기억하기도 어려운 일이니 진짜인지 가짜인지 신중하게 분별해 보겠다’ 고 하시면서 서류를 바닥에 내려 놓으셨다.두말할 것도 없이 이 시문(詩文)은 사기였다. 정환덕이 고종 황제를 직접 모시고 있는 시종원부경(侍從院副卿)이었기 때문에 청탁도 많이 들어왔다.류호영은 그 중의 하나였다.어느날 이중철(李中喆)이라는 사람이 명의(名醫)를 가장하고 정환덕에게 접근해 왔다. 이중철을 알게 된 것은 개성 인삼장수로 돈을 번 이필화(李必和)의 소개 때문이었다.하루는 이필화가‘우리 집에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후손이라 자처하는 명의가 기숙하고 있는데 한번 전하께 소개하여 주시게’ 하는 것이었다.고종은 기침을 하면 가래에 피가 섞여 나오는 혈담(血痰)으로 고생하고 있었다.기관지염이거나 폐병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재야 의사” 속여 접근 ‘며칠을 지난 뒤에 황상께서 지밀(至密)에서 직접 침뱉는 그릇을 가지고 나오시어 나에게 보이시며 말씀하시기를 “짐이 더러운 담이 있어 간혹 이와같이 토해내게 되는데 무슨 약을 쓰면 효험이 있겠는가.안경을 끼고 살펴보면 혈담인데 왜 더러운 담이라 하는가 하면 피혈(血)이란 글자를 꺼리기 때문이라 한다”고 하셨다. 대답하여 아뢰기를 “혹 주무시는 잠이 도수에 지나치시면 그럴 수도 있고 옥체(玉體)가 건강을 잃으시어 그럴 수도 있사오니 별다른 염려는 없을 것으로 압니다.그러나 의관(醫官)을 불러 물어 보시지요.” 상감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른바 내의(內醫)란 자들은 한 사람도 의사라고 할 만한 자가 없으니 외부에 혹시 유명한 의사가 없겠냐”고 하시었다. 여기서 갑자기 이필화가 말하던 재야에 숨은 군자라는 사람이 머리에 떠올라 드디어 아뢰기를 “신(臣)이 지난 번에 우연히 개성 사람 이필화가 전하던 말을 들어보니 그 집에 머무르고 있는 나그네 이씨의 의술이 유명하다고 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재야에 숨은 군자입니다.병에 대하여 증세를 살피며 화제(和劑)를 써서 약을 쓰는 것이 신출귀몰하여 비록 예전에 화타(華陀:후한의 명의)와 편작(扁鵲:전국시대의 명의)이라 하더라도 이 사람의 술법만 같지 못하다고 합니다.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성상께서는 생각이 어떠하십니까’ 그런데 그 다음의 대화내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왜냐하면 정환덕이 이중철을 임금께 추천하였으나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아 이름을 모른다 했는데 즉석에서 능참봉(參奉)벼슬을 내렸기 때문이다.흔한 것이 능참봉이라 하지만 임명절차가 이래서야 되겠는가. ‘성상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은 어느 시골에 사는 누구인가.”고 하시었다.대답하여 아뢰기를 “선정신(先正臣) 이황의 후손이라 하옵니다.”하니 “그렇다면 현재 무슨 관직을 가지고 있느냐.”고 하시었다. 대답하여 아뢰기를 “백신(白身:벼슬하지 않는 몸)입니다.”했더니 그렇다면 “궁내부 주사로서 불러보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시었다.이에 아뢰기를 “오직 성상의 뜻에 달린 것이고 신(臣)의 알 바가 아닙니다.”라고 했다. 또 돌아보시며 말씀하시기를 “이미 선정(先正)의 후손이라면 재랑 (齋郞:奉)으로 쓰는 것이 가할 것이라 하시면서 드디어 동궁(東宮:세자)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능관(陵官:참봉) 가운데서 혹 결원된 자리가 없느냐”하시니 동궁이 “지금 능관은 결원이 없고 영희전(永禧殿:종묘의 永寧殿) 참봉은 결원이 있습니다.그러하니 이 사람으로써 그 결원을 보충하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하시었다. ○“임용 뒤에 본명으로” 또 나를 돌아보시며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의 성은 이씨이고 이름은 무엇인가.”하시었다.대답하기를 “아직 자세히 알아보지 못했습니다.”하니 동궁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름자를 자세히 안 뒤에 임용하는 것이 좋을까 하니 내일 네가 나가서 자세히 알아서 보고하는 것이 좋겠다.”하시었다. 그러자 상감께서 말씀하시기를 “내일 불러서 진찰을 받아 볼 계획이니 먼저 이름자를 기록해야 되기 때문에 임시로 임용한 뒤 나중에 본명으로 고치고 표를 부쳐두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하시었다.동궁께서 아뢰기를 “퇴계의 종손 항렬 가운데 글자에서 가령 중(中)자를 차용한다면 중자 아래에는 무슨 글자로 사용할까요.”하니 상감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 여름철이니 여름하(夏)자를 쓰는 것이 또한 무방할 것이니 ‘이중하(李中夏)’라고 써서 궁내부에 내리고 영희전 참봉을 임명하라.”고 하시었다.’ 벼슬이 없는 사람은 궁궐에 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가명을 써서 발령을 내렸던 것인데,아무리 그렇더라도 이중하의 경우는 심했다.
  • 이옥순씨 에세이 ‘인도여자에게 마침표는 없다’ 펴내

    ◎지구촌 여성의 20%… 그들 삶의 무게/1시간42분마다 한명꼴 지참금 관련 강요된 죽음/속박넘어 자유 얻을 날은… 인도의 ‘위대한 영혼’ 간디는 “힌두 여성은 신이 인류에게 준 선물”이라고 당당히 말했다.또 인도 고대의 법전인 마누법전은 “여성의 몸은 신성하기 때문에 꽃으로라도 때려서는 안된다”고 가르친다. 인도의 현실은 이러한 진리를 간단히 배반한다.죽은 남편의 화장더미에서 함께 타죽게 하는 ‘사티’의 전통이 아직도 숨쉬고 있고,지참금이 적다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사리에 불을 붙이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인도에는 카레가 없다’의 저자로 잘 알려진 이옥순씨(숭실대 강사)가 펴낸 ‘인도여자에게 마침표는 없다’(사과나무)는 인도 여성들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문화에세이다. “얼마 전 인도 연방의회의 한 의원이 ‘단발머리를 한 여자들은 인도인이 아니다’라는 말을 해 말썽을 빚은 적이 있었습니다.인도에서는 단발머리여성들은 보통 부도덕하고 헤픈 여자로 간주됩니다.이 정도면 인도 남성들의 사고는 초(超)보수적이라고 할 만하죠.인도 벵골 지방에는 ‘여자와 말이 있어야 할 곳은 남자의 다리 밑’이라는 모욕적인 속담도 있어요” 그러나 그는 인도 여성들의 척박한 삶 속에서도 희망의 단서를 찾아낸다.‘바라트 마타’ 곧 ‘인도의 어머니’로 불린 인디라 간디 총리와 ‘작은것들의 신’으로 영국 최고의 문학상인 부커상을 거머쥔 아룬다티 로이가 그 예다. “1966년 인디라 간디가 48세의 나이로 총리직에 오르자 남성들은 몹시 못마땅해했습니다.그러나 지난 71년 파키스탄과의 전쟁에서 보여줬듯 그는 결단력과 단호한 성격을 지닌 지도자로 역사에 확실하게 자리매김돼 있어요.오늘날 인디라 간디는 힘의 여신인 ‘두르가’로 숭배받을 만큼 영향력 있는 인물로 통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인도를 실재하는 구체적인 나라가 아니라 하나의 추상으로 떠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명상의 나라,굶주리고 헐벗은 몸으로 갠지스 강을 찾아와 행복하게 죽어가는 사람들,곳곳에서 신의 현현을 목도할 수 있는 영혼의 나라….인도는 과연 타락한 물질세계의 대안인가.‘정신주의’라는 알약을 내세워 인도를 과거에만 묶어두려 했던 영국 제국주의의 시선을 우리가 은연중 본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자신은 무한대의 세속적 욕망을 향해 줄달음치면서도 인도는 그저 심신이 고달플 때 잠시 쉴 만한 영혼의 땅으로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한,우리는 이기적인 이방인일 뿐이다.이 책은 바로 이러한 자성적 관점에서 씌어졌다. “이방인의 편견이 만들어낸 인도에 대한 허상을 깨고 인도의 명암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자는 게 이 책의 집필 의도입니다.문맹,결혼지참금,부정부패,저개발,부당 착취와 같은 사회문제에 몸살을 앓으며 요로운 삶을 꿈꾸는 보통사람들이 호흡하는 땅이 인도예요.인도에 성자가 넘치고 종교가 넘치는것은 그만큼 삶이 힘들고 고단하다는 반증이 아니겠어요” 97년 유엔의 세계인구에 관한 보고서에 따르면 인도 여자들은 1시간42분마다 한 명 꼴로 결혼지참금과 관련해 사망하는 것으로 돼있다.해마다 약 5,000건의 ‘강요된 죽음’이 발생하는 셈이다.인도에서 결혼은 한편으로는 ‘비즈니스’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바람처럼,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니 경(經)에 나오는 이 구절처럼 인도의 여성들이 속박을 넘어 자유를 얻을 날은 언제쯤일까.전세계 여성인구의 5분의 1을 차지하는 인도여성,그들의 옹이진 삶은 이 세상 모든 여성들이 풀어야 할 숙제다.“이 책 속의 인도여성들 이야기를 가볍게 읽되 결코 가볍지 않은 그들의 삶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헤아렸으면 합니다” 인도 델리대학에서 ‘식민주의와 교육’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씨는 현재 식민지시대 인도와 영국의 관계를 다룬 에세이집 “인도에 온 ‘영국신사’”(가제)를 구상중이다.그는 나이 밝히기를 한사코 꺼렸다.
  • 고종과 嚴妃(秘錄 南柯夢:13)

    ◎쫓겨났던 嚴 상궁 돌아와 妃되니…/高宗,명성황후 서거후 失意의 나날/문상 온 嚴씨 우연히 재회… “궁에 머물라”/못생긴 얼굴에도 총애… 아들 보니 英親王 명성황후가 비명에 돌아가시기까지 고종은 창덕궁과 경복궁을 번갈아 오가며 살았다.그 뒤 경복궁 서쪽의 영추문을 빠져나와 정동의 아관(러시아 공관)에 피신했다가 바로 담만 넘으면 다시 아관으로 피신할 수 있는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겼었다. 이처럼 정궁인 경복궁을 두고도 이곳 저곳 별궁을 돌아다녀야 했던 것이 대한제국 황제의 신세였다. ○외아들 純宗에 지극정성 명성황후의 서거는 고종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고 그녀에 대한 사랑은 그녀가 남기고 간 외아들 순종에게로 모아졌다.그래서 덕수궁 함녕전에서 두 부자가 꼭 붙어서 함께 기거했던 것이다. 그럴 때 엄상궁이 나타났다.일설에 의하면 명성황후에게 쫓겨났던 엄상궁을 고종이 즉각 불러들여 함께 살았다는 것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고종이 부른 것이 아니라 엄상궁이 고종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엄상궁도 장상궁처럼 궁궐에서 쫓겨난 뒤 줄곧 수절하고 있었다. ‘엄상궁(嚴尙宮)은 중전마마가 생존해 계실 때에 죄가 있다고 하여 궁궐에서 쫓겨났었다.그 뒤로는 다시 궁궐에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 있으면서 한가롭게 지내고 있었다.그런데 밖에서 생활한 두어해 사이에 의식주가 곤란하여 동분서주하면서 생활이 매우 구차하였다.그러던 차에 갑자기 곤궁(명성황후)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그리하여 대궐에 들어가서 문상을 하게 되었는데,그 뒤로는 자주 안상궁(安尙宮)이 거처하는 방에 드나들었다.그러던 어느 날 상감께서 마침 엄상궁을 보시고 물으시기를 ‘네가 엄상궁이 아닌가.근년에 왜 궁궐을 나가서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느냐.’ 하시니 대답하기를‘자연히 궁궐밖에서 생활하다 보니 들어오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드디어 교시를 내리어 말씀하시기를 ‘지금부터는 궁궐 안에서 머무르고 밖에는 나가지 말라.’고 하시었다.그리고 며칠 후에 불러다가 동쪽에 있는 온돌로 된 지밀(至密) 방안에서 머무르게 하였다.그런 뒤에 임신이 되어 아들을 낳았으니 곧 지금의 영친왕(英親王)이다.엄상궁이 영친왕을 낳은 뒤에는 귀인(貴人:內命府의 종일품 封爵)에 봉해지고 경선당(慶善堂)에 거처하면서 왕실의 재산을 주관했으니 누가 세상만사가 돌아가는 일을 미리 예측할 수 있겠는가’ ○32세 되어 高宗 눈에 들어 엄상궁에게 죄가 있었다는 것은 물론 고종의 사랑을 받아 승은(承恩)하였다는 이야기다.엄상궁은 나이 다섯 살때 궁궐에 애기나인으로 들어와 커서는 황후의 시위상궁(侍衛尙宮)으로 승격한 궁녀였으나,나이가 벌써 32세나 되어 고종의 눈에 들기에는 어려운 과년한 노처녀였다.거기다 장상궁처럼 얼굴이 예쁘지 못했다.예쁘지 못했다기 보다는 못생겼다는 표현이 훨씬 진실에 가까웠다.그런데도 고종은 중전 몰래 엄비를 사랑하여 침소에 불러들여 잠자리를 함께 했던 것이다. 그러면 어찌해서 임금님은 중전의 눈을 피해 상궁과 동침을 하게 되며,상궁은 그렇게 쉽사리 임금님에게 몸을 맡겼는가.아무리 생각해도 의아한데 알고 보면 그리 어려운 문제도 아니다. 보통 임금님의 침소는 임금님과 중전만단둘이 자는 것이 아니라,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병풍을 쳐놓고 네 상궁이 각각 병풍 뒤에 누워서 밤을 지샜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것이었으니 상궁들로서는 방안의 숨가쁜 상황을 일일히 듣고 감상할 수 밖에 없었다.엄상궁같은 지밀상궁은 거의 매일처럼 침소에 들어 숙직하였으니 비록 병풍으로 가려 있었으나 임금님과 한 방에 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그래서 왕은 때때로 상궁같은 나인을 불러들여 시침(侍寢)했는데,이를 승은이라 했다.엄상궁도 승은의 영광을 입은 분이었다. 정환덕이 덕수궁에서 처음 고종을 알현하였을 때 우연히 엄비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그때 일을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엄씨 일가 모두 요직 앉아 ‘네 칸 정도 될까 하는 온돌방이었는데 전등빛이 휘황하게 밝았고 비단으로 만든 카텐에서는 향내가 가득했다.조금 있더니 살찐 얼굴에 기름끼가 번질한 한 미인이 화려한 옷을 입고 나타났다.머리 위에 무엇이 있던가.푸른 포도잎 같은 것이 달려 있고 등 뒤에는 구슬로 허리를 감은 것 같이 보였다.엷은 구름이 달을 가린 듯 하고 바람이 눈을 날리는 것도 같았다.또 아침해가 안개 속에 떠오르는 듯하고 연꽃이 푸른 파도 위에 뜬 것도 같았다.한마디로 말해서 갑자기 궁안에 선녀가 내려온 것으로 착각했다.바로 그녀가 엄비였다. “그대는 누구인가” “어제 밤에 새로 임명받은 시종관 정덕환입니다” “어찌 이곳에 홀로 앉아 있는가”하고 다시 물었다.대답하기를 “상감께서 여기서 기다리라 하시어 앉아 있습니다” 하였다.그러나 엄비는 성난 듯한 얼굴로 말하기를 “비록 그렇다 하더래도 여기 지밀(至密)한 곳에 함부러 들어와 앉아 있는가.썩 나가도록 하라”고 하였다.이말을 들고 밖으로 쫓겨 나오니 정신이 아찔하였다.’ 이상이 정환덕이 엄비를 처음 뵙고 쫓겨난 사연이었는데 그 뒤 고종이 정환덕을 불러 미안하다고 사과했다.정환덕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해놓고 잊어버린 것을 볼 때 고종에게 심한 건망증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뒤 황상께서 입대하라는 명이 있어 즉시 입시하였는데 황상께서 신에게 위로하여 말씀하시기를 ‘저번에는 갑자기 손이 있어그렇게 되었으니 너무 놀라지 말고 안심하라’ 하셨다.그러나 스스로 생각해보니 송구스럽 짝이 없어 불안한 마음 가시지 않았다.왜냐하면 상궁과 시녀가 밤참을 들고 탑전(榻前:임금님앞)에 올릴때 용상 뒤에 모시고 서 있는 분이 바로 엄귀인(嚴貴人)이셨기 때문이다.엄귀인은 영친왕 이은(英親王 李垠)을 낳은 분이시다.’ 엄상궁이 다시 궁안에 들어온 뒤 영친왕을 낳았고,그 때문에 엄귀인으로 승격하고 이어 엄비로 재차 승격하였으니 그 영광은 엄비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았다.엄씨 일가 모두에게 돌아가 요직을 맡게 되었으니 장상궁의 경우와는 정반대되는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 高宗의 외도(秘綠 南柯夢:12)

    ◎중전 잠든 새 至密상궁 불러 雲雨之情/소문난 엄처 황후 사실 알고 “믿는 도끼에…”/상궁 궁밖 축출… 친정 일가붙이 요직서 내쫓아/한달 남짓 지나 낳은 사내아이가 義和君 李堈/대궐 들어온 참봉의 12살 딸에 “기다려라” 언질도 고종에게는 후사가 귀했다.열네살때 명성황후를 정비로 맞아들였으나 여러차례 유산한 끝에 겨우 아들 하나를 얻었으니 이가 바로 순종이다.선원계보(璿源系譜)에 보면 명성황후는 2남인 순종만 순산하였을 뿐 1,3,4남 등 아들 셋과 1녀를 합해 넷이나 유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들 셋·딸 하나 유산 아픔 사가에서도 후사가 없다는 것은 집안이 망하는 징조로 알고 있었던 당시에 왕가에 후손이 없다는 것은 온 국민의 걱정거리이어서 망국의 조짐으로까지 여겼다.그래서 그런지 고종은 명성황후 생존시 소문난 엄처시하(?)인데도 불구하고 자주 외도(外道)하기를 서슴지 않았다.그 중의 하나가 김승현(金勝絃)의 딸이었다.이 사건은 1885년 경복궁에서 일어난 일이다. “지난 어느 해인가 김승현(金勝絃)이 딸 하나를낳았다. 나이가 열 두살 되던 해에 나인을 따라 대궐에 들어와 마음대로 뛰어 놀고 있는데,그때 마침 상감께서 춘생전(春生殿)에 납시어 그녀를 발견했다.물으시기를 ‘너는 누구 집의 딸인가’ 하셨다.대답하기를 ‘전 참봉 김승현의 딸입니다’ 하였다.상감께서 ‘나이는 몇살인가’ 하시니 대답하기를 ‘열두 살입니다’라고 하였다.상감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이곳에 들어왔느냐’고 하시니 대답하기를 ‘나인 정씨를 따라서 들어왔습니다’ 하였다.상감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여자아이의 용모와 언어와 행동하는 예의 범절이 찬찬하고 자세하며 또한 조용하니 참으로 귀인의 모습이다’하시고 드디어 불러서 앞에 가까이 오라고 하였다.그리고는 자세히 살펴보니 고운 자질을 타고나 보통 여염(閭閻) 집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자태가 아니었다.드디어 희롱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나가서 잘 배우고 잘 자란 뒤에 내가 부르는 명령을 기다리라’고 하시었다” 춘생전은 경복궁에 있던 건물로서 지금은 없다.고종은 을미사변이 일어나는 1895년까지경복궁에 기거하고 있었다. “김승현의 딸은 본래 서울에서 생장하여 조숙한 나머지 말 한마디 한마디가 똑똑한데다가 마음씨가 곱고 재주도 뛰어나 하나를 들으면 열가지를 알았다고 한다.드디어 궁궐을 나와 집에 돌아간 뒤에는 내칙(內則) 등 여러 책과 경전(經典),예설(禮說) 등을 읽어서 두루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옛날의 여러 제도까지도 널리 배워 비록 이름난 선비라도 그녀를 이기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상궁과 나인들이 모두 이 이야기를 듣고 김승현의 집을 끊이지 않게 내왕하였다.이 때문에 상감께서도 이 사실을 들으시게 되어 온 궁궐안에 소문이 자자하여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그러나 중전마마(명성황후)께서 호랑이가 넘보듯 감시하고 있었으니 상감께서 비록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다고는 하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을미사변(1895)으로 명성황후가 서거했을 때 김승현의 딸은 스물 두살이었다.스스로 믿기를 황상께서 자기를 불러들여 황후로 삼을 것이라 믿고 고대하였으나 이것은 이른바 늙은 처녀가 신랑감을 기다리는 격이었다.마침내궁궐에서 아무 소식이 없었으니 김씨집에서는 다만 근심만 더하고 심란할 뿐이었다.세월은 유수처럼 흘러 그녀의 나이가 꽤 들었다.그 부모가 시집을 보내려고 했으나 죽기로써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 하면서 다른 곳으로 시집가지 않았으니 그 부모도 딸의 뜻을 굽힐 수 없었다” ○황후 삼으리라 믿고 고대 김승현의 딸이 그 뒤 시집을 갔는지 평생 노처녀로 고종 황제를 사모하였는지는 모르나 어찌되었건 한번 임금에게 간택되면 한 여인의 운명은 그로써 최종 부도처리(?)되는 것이었다.그러나 김승현의 경우는 딸 하나로 불행이 끝났으나 장상궁의 경우는 그 화가 일가친족에 다 미쳤으니 가히 멸문지화라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이 사건은 명성황후가 가장 아끼고 믿고 있던 장상궁(張尙宮)을 고종이 건드림으로써 일어났다.그러니 아무리 임금님이라 하더라도 지나친 외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당했던 張씨 일가 망해 “장상궁은 중전(명성황후)의 신임을 받아 금옥(金玉)처럼 사랑을 받고 있었다.그래서 중전이 장상궁을 지밀(至密)에 두시고날마다 아침이면 머리를 빗게 하고 쪽도 맺게 하여 화장 분(粉)을 내려 주시는 등 은혜를 베풀었다.그 때문인지 장상궁의 친정 일가붙이가 모두 요직에 임명되어 부자가 된자가 부지기수였다.그런데 상감께서 장상궁에게 마음을 두신 지가 꽤 오래되었다.그러나 틈을 얻지 못하여 사랑을 나누지 못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중전께서 깊이 잠든 새를 이용하여 장상궁을 부르시어 갑자기 무산의 운우(巫山雲雨:남녀의 정사)를 나누었다.그 뒤에 장상궁이 임신하게 되어 배가 점점 불러오고 얼굴색은 점차 파리해져 갔다.중전마마가 ‘네가 무슨 병이 있기에 얼굴이 그러한가’ 물으시었으나,대답하기를 ‘음식이 맛이 없고 소화가 잘 되지 않으며 사지가 나른하여 기운이 없을 뿐이지 다른 증세는 없습니다’하였다. 그래서 중궁은 어의(御醫)에게 진찰을 받게 하여 약을 쓰게 했는데 뱃속의 태아는 장차 어떻게 숨기고 지낼 수 있겠는가.임신 8∼9개월에 이르자 장상궁의 배는 매우 불러 뚜렷하게 표시가 나게 되었다.중궁을 가까이 모시던 나인들이 몰래 그 사실을 고해바치니 이에 곤궁(坤宮·명성황후)은 크게 노하여 말씀하시기를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것도 분수가 있지 어찌하여 이와같이 귀신도 모르게 속일 수가 있단 말인가’ 하시고는 드디어 장상궁을 궁궐 밖으로 내쫓고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였다.그 뒤에 장상궁의 친정 일가붙이는 모두 요직에서 쫓겨나 버리니 그렇게도 당당했던 장씨의 집안이 일시에 망하고 말았다” 불쌍한 장상궁은 궁궐에서 쫓겨난 뒤 아이를 낳았는데 이가 곧 의화군(義和君) 이강(李堈)공이었다. “장상궁이 한달 남짓 지나 한 사내아기를 낳았으니 이 분이 의화군이시다.몇해가 지나지 않아 장상궁이 돌아가시자 궁의 이름을 의화라고 했다.그러나 장씨 집안은 문득 꿈과 같이 헛된 한때의 부귀영화 즉 남가일몽(南柯一夢:꿈같은 헛된 한때의 부귀영화)이 되고 말았다”
  • 남성주의 드라마/李世基 社賓 논설위원(外言內言)

    TV드라마에서의 남성중심·여성비하의 표현은 거의가 고정 틀로 정해져 있다.남성은 가부장적 권위를 갖추고 여성위에 군림하는 한편 여성은 참고 복종하면서 생활속의 갈등을 혼자서 극복해 나간다.이런 여성들의 통상적인 이미지는 언제나 다소곳한채 남편과 자식, 부모와 형제를 위해 헌신봉사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더구나 최근 몇개월사이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로 인한 복고풍(復古風) 드라마에서는 가족주의 회귀가 두드러진다.단지 그것은 가족간의 스토리가 아닌,보수적인 남성중심주의로 퇴행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시청자는 남성지배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이를 부정할 경우 어떤 형태로든 벌을 받게 되거나 결국 불행만을 초래하게 될 뿐이라는 암묵적인 메시지에 물들어버린다. 한국방송개발원이 방송3사 드라마들의 등장인물을 분석한 결과 ‘남성중심주의에 도전하는 여성에겐 불행이 찾아오고’‘순종·인내형에겐 보상이 주어지며’‘여성의 관심거리는 신변 위주인데 비해 남성은 진지하게 사회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표현된다는 지적이다.예를 들어 시어머니와의 갈등 때문에 이혼한 여성이 디자이너로 성공하고 싶어하지만 딸이 심한 우울증에 걸리는 바람에 불행해진다는 것이고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묵묵하게 아들을 키워낸 여성은 아들의 성공으로 보상을 받는다는 식이다.아버지나 남편의 의무는 배제된채 어머니의 책임만을 강조한 예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대장부는 활개를 치고 천하를 경영할 것이요,아녀자처럼 집안에 칩복(蟄伏)하여 일생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 남녀에 대한 정의다.그러나 ‘권리’를 논하는 자리가 아니더라도 상대방을 인간으로 정당하게 인정하고 대우하는 것이 마땅하다.사는동안 각자에겐 여러 역할이 주어진다.남성이 순진한 양이 될 수 있고 여성이 독한 매가 될 수도 있다.여성이 영웅일 수 있는 것처럼 남성이 강변의 민들레일 수도 있다. 우리는 지금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강조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여성희생과 남성군림의 방법을 끈질기게 드라마에 사용하는 것은 구시대적 발상이다.드라마는 시대의 반영이라는 차원에서 좀더 앞을 내다보는 신선한 시각이 아쉽다.
  • 김욱동 교수 펴낸 “문학 생태학을 위하여”

    ◎문학적 관점서 본 환경오염/베어지는 숲들… 오염되는 바다… 아름다운 녹색 자연 문학으로 지킬 수는 없을까… 1980년대가 ‘탈이념의 시대’였다면 1990년대는 ‘환경의 시대’라고 할 만하다.사회생태학·녹색정치학·생태철학·생태윤리 등 사회·인문과학 각 분야에서 불고 있는 ‘녹색 바람’은 이러한 시대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그러나 문학쪽에서 만큼은 이 문제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서양문학가들은 자연을 정복이나 착취의 대상으로 삼아온 서구 세계관에 길들여져 있고,동양문학가들은 주로 경제개발의 피해나 정치 이데올로기 문제에 주목해 왔기 때문이다.서강대 영문과 김욱동 교수가 최근 펴낸 ‘문학 생태학을 위하여’(민음사)는 생태파괴와 환경오염 문제를 문학적 측면에서 다룬 책으로 관심을 모은다. ‘문학 생태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 사람은 미국의 문학이론가 조셉 W.미커다.그는 이 분야의 고전이 되다시피한 책 ‘생존의 희극’에서 문학이 생태위기 극복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그 중에서도 시는 특히 생태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데 가장 걸맞는 장르라는 것이다.그동안 생태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여온 시인들로는 이른바 ‘샌프란시스코 문예부흥’을 주도한 비트 시인 게리 스나이더를 비롯,애드리엔 리치,시어도어 로스케,W.S.머윈 등 미국 시인들이 꼽힌다.특히 스나이더의 작품집 ‘신화와 텍스트’에 실린 시들은 생태시의 전형으로 흔히 인용된다. “숲들이 베어진다/잘려나간다/아합의 숲이,큐벨레의 숲이/…제아미의 소나무도,하이다의 히말라야 삼목(杉木)도/이스라엘의 선지자들에 의하여 잘려나간다/…루터와 웨이어하우저에 의하여 밀려나간다” 제목이 붙어 있지 않은 스나이더 시의 한 대목이다.이 시는 무엇보다 낯선 고유명사가 많이 등장해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한다.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의 주인공으로 더 잘 알려진 아합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요부 이제벨의 남편이고,큐벨레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으로 곡물의 결실과 다산(多産)을 관장하는 신이다.하이다는 캐나다와 미국 알래스카 지방에 살아온 인디언 종족의 이름.또 웨이어하우저는 미국의 유명한 목재 가공업자 이름이고, 제아미는 15세기 일본의 전통극 노(能)의 배우 겸 극작가 그리고 비평가로 활약한 인물이다.스나이더가 이렇게 낯선 이름들을 장황하게 늘어 놓는 데는 그 나름의 까닭이 있다.자연파괴나 환경오염이 너무나도 광범위하게 이루어져 왔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스나이더는 “숲을 지키는 것이 곧시인의 임무”라고 단언했다. 이 책의 일관된 주제는 ‘문학의 녹색화’다.왜 녹색인가.녹색의 프리즘을 통해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그것은 한 마디로 인간 정신의 가장 고귀하고 순수한 영역에 속한다.이를테면 풀 한 포기의 아픔을 걱정하는 마음,대지를 어머니의 가슴으로 여기는 마음,물고기의 물길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우주적 연민의 정조로 모든 존재를 성찰하고자 하는 마음 같은 것들이다.이런 문맥에서 볼 때 정현종의 “구름은 실로 우리 살의 씨앗/우리 피의 씨앗”(‘구름의 씨앗’)이라는 시 구절은 한층 귀하게 읽힌다. 이 책에서는 최근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생태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상세히 다룬다.생태 페미니즘은 가부장 질서를 무너뜨리는 전통적인 페미니즘의 테두리를 넘어 생태 문제에 눈길을 돌린다.생태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의 발전 단계에서 볼 때 가장 뒤늦게 태어난 이론이다.물론 테오도르 아도르노나 막스 호르크하이머,허버트 마르쿠제 등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가들이나 페미니즘의 대모로 불리는 시몬 드 보부아르에게서도 생태 페미니즘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생태 페미니즘은 1970년대 초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생태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맨 처음 사용한 사람은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즈 도본이다.‘페미니즘이냐 죽음이냐’라는 제목의 책에서 도본은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찾는 데 여성의 잠재력이 매우 유용함을 역설했다.이 생태 페미니즘이 비평담론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에 들어서다. 문학 생태학이라는 말은 한편으론 모순어법처럼 보이기도 한다.그러나 순종교배보다 잡종교배를 통해 종종 우량한 후손을 얻을 수 있듯이 문학도 자연과학과의 결합을 통해 창조적인 새 이론을 낳을 수 있다.그뿐만 아니라 오늘날과 같은 생태위기 시대에 문학 생태학은 더욱 조명받아 마땅하다.“모든 이론은 회색이다.영원한 것은 저 생명의 나무의 녹색뿐이다”라는 독일 시인 괴테의 말은 무척이나 시사적이다.
  • 세계지도력의 산실 백악관(美國의 대통령 문화:21·끝)

    ◎‘모든 사람의 집’ 백악관 매년 관광객 수백만명 다녀가/1800년 애덤스 첫입주후 40명 거쳐/“정직 현명한 이들만 살게 하소서”/라이브러리룸 등 6개 20분 소요/시대 초월한 국민과의 교감 피부로 【워싱턴=羅潤道 특파원】 미국 대통령문화의 산실인 워싱턴DC에는 미대통령의 체취를 느끼려는 수백만의 관광객들이 매년 몰려든다.‘펜실베니아 애브뉴1600번지’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진 백악관,스미스소니언 초상화박물관의 대통령실 등은 차치하고라도,워싱턴기념탑,링컨기념관,제퍼슨기념관,프랭클린루즈벨트 기념관,시어도어 루즈벨트 기념관 등 개인 기념관에 이르기까지 도처에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물이 널려 있기 때문이다. 포토맥강과 잔디광장 ‘더 몰’이 어우러져 이뤄내는 아름다움 사이로는 또 케네디센터,윌슨센터,조지 워싱턴 대학,루즈벨트 브릿지,린든 B.존슨 기념공원,제임스 매디슨 빌딩 등 대통령의 이름이 붙은 시설물들도 많아 시내곳곳 어디를 가도 대통령을 만날수 있다.특히 백악관은 미대통령의 권위를 상징함과 동시에 세계 지도력의산실로 역대 미대통령의 삶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어 가장 인기를 끄는 곳이다. 이곳은 내국인이건 외국인이건 누구에게나 개방된다.백악관 남쪽의 ‘방문자센터’에 가서 줄을 서기만 하면 된다.그러나 백악관 방문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보다 부지런해야 한다.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아침 7시부터 선착순으로 줄을 선 사람들에게 3천매,단체관광객에게 1천500매 등 모두 4천500장의 입장권을 나눠준다.대부분의 경우 입장권 분배를 시작,30분이면 동이난다. 입장은 당일 상오10시부터 정오까지만 허용되며 지하1층의 회랑을 통해 첫 방인 라이브러리 룸에서 출발하여 지상1층의 국가만찬장까지 모두 6개의 방만 일반에 공개된다.전체 20여분의 투어다. 백악관은 보통 관광객들이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남쪽에서는 4개층으로,정문쪽인 펜실바니아애브뉴 쪽에서는 3개층으로 보인다.따라서 관광객들은 지하1층 동쪽 회랑의 출입문으로 입장하여 첫방인 ‘라이브러리’만을 본후 지상1층으로 올라가게 된다.지하1층의 다른 방으로는 금도금한 은제품들을 진열한 ‘버메일(금도금)룸’,대통령의 식기 세트를 진열한 ‘차이나룸’,중앙의 ‘외교사절 영접룸’,그 좌측에 2차대전시 루즈벨트 대통령이 전황을 체크하기 위해 사용했던 ‘맵(지도)룸’ 등이 있다. 지상1층에는 리셉션이 열리는 가장 큰 방인 ‘이스트룸’,응접실인 ‘그린룸’과 ‘블루룸’,퍼스트레디들의 응접실인 ‘레드룸’,연회실인 ‘국가만찬장’ 등이 있고 이들 5개의 방은 모두 공개된다.또한 이들 방을 연결하는 중앙회랑에는 대통령들의 흉상과 퍼스트레디들의 초상화들로 장식돼 있다. 그러나 대통령의 집무실과 침실 등 사적 공간이 있는 2,3층은 공개되지 않는다.중앙의 거실인 ‘옐로 오벌 룸’을 중심으로 양측에 대통령의 서재와 조약체결시 사용하던 ‘트리티룸’이 있고 그 양측 옆으로 대통령의 침실과 손님방으로 사용되는 ‘링컨룸’이 있다.대통령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와 각료회의장인 ‘캐비닛룸’은 서쪽 부속건물에 있다. 1792년 초대 워싱턴 대통령의 임기중 착공된후 1800년 11월,2대 존 애덤스 대통령이 퇴임 2개월여를 남기고 미완성인채로 입주함으로써 시작된 백악관에서의 대통령 스토리는 오는 2000년 200주년에 이르게 된다.그동안 워싱턴을 제외하고 클린턴 대통령까지 40명의 대통령을 거쳐오며 조금씩 증개축되어 오늘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거주기간은 윌리엄 해리슨(9대)의 1개월부터F.루즈벨트(32대)의 12년까지 다양하다.임기중 사망한 대통령은 모두 8명으로 4명은 암살,4명은 병사로 기록돼 있다. 한편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이듬해 득녀,백악관에서 자녀를 얻은 유일한 대통령이 됐다.자녀수가 가장 많은 대통령은 타일러로 전처와 후처로부터 모두 8남6녀를 얻었다.다음은 윌리엄 해리슨으로 6남4녀를 기록하고 있다.가족대통령으로는 존 애덤스와 존 퀸시 애덤스(6대)가 부자관계 였고 윌리엄 해리슨과 벤자민 해리슨(23대)은 조부와 손자 사이로 유명하다. 워싱턴에서 또하나 빼놓을수 없는 대통령문화의 본거지는 국립초상화박물관 이다.2층의 대통령실에는 역대 미대통령들의 사진과 흉상,부조 등이 전시돼 있다.언제라도 대통령의 미소를 접하고 그 숨결을 느낄수 있는 곳이다. 시대를 초월한 국민과 대통령의 교감은 이같이 바로 민주주의의 근원을 이루는 또하나의 현장이기도 하다.백악관 ‘국가만찬장’의 벽난로 위에 새겨진 애덤스의 글귀는 긴 여운으로 남는다.“정직하고 현명한 사람들만이 이지붕 아래 살게 하소서.”
  • 고종즉위 40년(秘錄 南柯夢:10)

    ◎외채위기에도 팔도 名妓·악공불러 “지화자…”/세자탄신과 번갈아 요란한 경축행사/극심한 가뭄에 굶주린 백성 줄 이었지만 덕수궁서 잔치상받은 3천여 내직관료/함포고복 속에 “堯임금 시절보다 좋은 세상” 1902년은 지금의 IMF사태에 버금갈만한 대한제국 위기의 해였다.국가의 연간 총세입이 7백50만원에 지나지 않았지난 대포 몇문 사들이는데 20만원이 나들였다.그러니 외채는 늘어나고 돈값은 날로 폭락해 갔다.전라,경상,충청 등 3남에서 거둬들인 토지세 전액이 일본 외채를 갚는데 들어갔다 할 정도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럴 때 큰 행사날이 돌아왔다.고종 즉위 40주년 경축대회가 그것이다.고종의 나이도 바로 이 해에 50을 맞았다.일찍이 조선왕조로서는 이렇게 경사스런 일이 없었다.거기다 세자의 탄신일까지 겹쳐서 부자간에 번갈아 생일잔치를 벌여야만 했다.먼저 세자(순종)의 탄신일 경축행사 광경을 살펴보자. ○50주년 생일잔치 겸해 “음정월을 지나 중춘(仲春) 2월 9일이 오니 세자(명성황후 소생)의 탄신일이다.많은 영재들을 뽑는과거시험을 치르게 됐으니 이를 경과(慶科)라 했다.그래서 그날 팔도의 유생들이 과거보러 상경을 했는데,황상(皇上) 부자분께서는 친히 창경궁의 춘당대(春塘台)에 납시어 합격자를 가리셨다.그러나지난 갑오년(1894년) 경장(更張) 이후로 모든 과거가 폐지되다 보니 경연(經筵)에서 임금께 강의하던 유학은 낡은 학문이 되어 비웃음받는 처지가 되었다.대신 일본과 태서(泰西=유럽)에서 들어온 신학문이 교과목이 되어 마치 국학처럼 우대를 받았다.이러한 시국을 당하여 아관박대(갓 쓰고띠 두른) 차림을 한 선비들은 적막공산에서 썩어버리고 대신 높은 모자에 단장 짚고 뽐내는 들뜬 놈들이 세상에 가득찼으니 선왕이 남긴 정신문화는 영원히 끊어져 없어지고 시세를 타는 서양 풍조만 날마다 급하게 불어닥쳤다.” 세자도 나이 28세.어엿한 청년이 되었고 모후인 명성황후가 비명에 돌아가신 뒤라 고종은 세자의 생일잔치를 성대하게 치르고 싶어했다.옛날같으면 과거시험을 치러 선비들의 사기를 북돋아주었을 터이지만 개화바람에 폐지돼버렸으니 다만 먹고마시고 춤추는 잔치만 요란하였다. ○“5백칸 마당 장막 치고” “지금 춘궁(春宮·세자)의 탄신일을 맞이하여 다만 기생의 노래와 춤으로 요란할 뿐이다.9일 탄신일을 맞아 상감께서는 궁내부에 분부하시기를 관명전(觀明殿) 앞뜰에 장전(張殿·임금이 앉도록 임시로 꾸민 자리)을 베풀고우구청(雨具廳)으로 이름하라 하셨는데 5백여칸이나 되는 마당에 기름먹인 장막을 치고 그 안에 나무판자를 깔았다.그 위에는 비단 무늬를 그린 담요를 깔았다.한가운데 전등을 매달아놓았는데 큰 전등은 해와 달같이 둥글었고 작은 것은 별과 같이 촘촘히 반짝거렸다.” 세자의 생일찬치는 그다지 큰 규모가 아니었으나 고종의 즉위 40주년 경축잔치는 어마어마했다.고종이 26대 임금인데 22대 순조부터 내리 4대에 걸쳐 모두가 단명,재위 40년에 향년 50년을 채운 분이 없었다.22대 정조는 재위 24년에 수(壽)는 49세였고,23대 순조는 34년에 45세,24대 헌종은 더욱 짧아 15년에 23세,25대 철종도 14년에 불과 33세였다.따라서 당시의 정부는 고종즉위 40주년 경축행사를 성대하게 치를 수밖에 없었다. 나라는 외채 때문에 빛더미에 올라 오늘 내일 하는 지경인데,엄청난 예산을 들여 잔치를 벌이고 외국사신을 초청하고,그 때문에 새로 영빈관을 짓고,광화문 네거리에 비각을 세웠다.광화문 비각에는 이런 글이 새겨있다.‘신민의 간절한 소망에 부응하여 원구(圓丘)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제위에 오른 뒤 천하를 소유할 칭호를 대한이라 하고 연호로 광무라 하였다’. 이 얼마나 좋은 글귀인가.대한이 천하를 소유하고 무(武)에 빛났다 하여연호를 광무라 했다는 것이다.그러나 현실은 글귀와는 한참 동떨어져 있었다.1897년에 조선왕조가 허울좋은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겉으로는 면모를 일신한 것처럼 보였으나 6년만인 1902년(광무 6년) 마침내 외채위기를 맞게 되고2년뒤 러일전쟁 발발,그리고 을사조약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해마다 대소조(大小朝·고종과 세자) 두분의 탄신일에는 팔도의 명기(名妓)들을 뽑아올려 무대 위에서 노래와 춤을 추는데 이것을 진연이라 불렀다.궁궐 뜰에는 기이하고 아름다운 화초가 사시장철 봄경치를 방불케 했다.장막 앞에 선 악공과 선녀도 일대의 기관(奇觀)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해 극심한 흉년에다 호열자가 만연하여 모든 행사가 다음해로 연기되었다.잇따른 가뭄과 기근,거기다가 유행병까지 만연하였으니 민심이 흉흉했다.사람들은 모두 정감록에 귀를 기울였다.정감록에는 공공연히 ‘이씨가 망하고 정씨가 흥한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그러나 그것도 모르고 궁궐의 잔치는 성황을 이루었다. ○유행병 만연 인심 흉흉 “이해 7월 25일은 고종황제께서 탄신하신 날이다.함녕전 앞뜰에 또 한번장전을 설치하였는데 한결같이 관명전의 앞뜰에 설치했던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기생이 노래하고 춤을 추고 악공이 북을 치고 피리를 불기를 한결같이 세자의 탄신때와 같이 하였다.상을 겹겹이 차릴 필요가 없었으나 고기를 산처럼 쌓아놓고 포는 숲처럼 준비하였으며(肉山脯林) 술도 샘처럼 차려 잔치를 즐기니(酒泉需雲) 보통 때의 수라상에 비하면 10배가 넘는 가지수였다.또 상에 진열한 것으로 논하면 주척(周尺)으로 1척 이상 높이 진열하였다.내직 3천명의 관료에게 균일하게 지급하여 주어 함께 먹게 하니 흡사 함께떼지어 강에서 물을 먹는 것과도 같았다.각자가 배를 채우되 한 사람도 모퉁이에 돌아 앉아 탄식하는 자가 없었으니 위대하도다,왕의 덕이여. 옛날 요임금 시절에 한사람의 백성이 굶주리면 임금이 말하기를‘내가 배고픈 것이다’라고 했으니 오늘로 보면 모두 잔뜩 먹고 배를 두드리니(含哺鼓腹) 한 사람도 굶주린 자가 없는 것이다.요임금 시절보다 훨씬 좋은 세상이다.” ○서울­옷 전라­음식 사치 3천명의 중앙 공무원들이 덕수궁 뜰에 앉아 잔치상을 받아 먹었으니 나라는 먹고 마시는 가운데 망해가고 있었다.시골에서는 극심한 가뭄으로 못먹고 굶어죽는 사람이 줄을 잇고 있었지만 서울의 덕수궁 밖을 보면 일부 부유층이 외제 비단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자고로 서울은 옷사치,전라도는 음식 사치,경상도는 집 사치로 유명했으나 1902년에는 서울의 옷사치를 빼놓고는 먹고 죽을래도 먹을 것이 없고 집을 지을래도 지을 돈이 없었다. “흥이 다하면 슬픔이 오고 기쁨이 극에 달하면 서러움이 오게 마련이다.돌연 인천 감리 하상기(河相冀)로부터 월미도가 일본인 손에 들어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주지육림 속에 빠져 있을때 인천의 월미도가 날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 美 소포폭탄 테러범 ‘유나보머’에 종신형

    【워싱턴=金在暎 특파원】 ‘유나보머’로 알려진 미국의 반(反)문명주의 소포폭탄 테러범 시어도어 카진스키(55)에 대해 18일 가석방이 허용되지 않는 4회 연속 종신형이 선고됐다.카진스키는 78∼95년 소포폭탄을 보내는 방법으로 3명을 숨지게 하고 여러명을 불구로 만든 혐의로 지금까지 3번이나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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