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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택! 역사를 갈랐다] (17) ‘실학거성’ 정약용 & ‘북학거두’ 김정희

    [선택! 역사를 갈랐다] (17) ‘실학거성’ 정약용 & ‘북학거두’ 김정희

    다산(茶山)과 추사(秋史)는 19세기를 대표하는 조선 최고의 지식인들이다. 한 사람은 조선 실학(實學)을 집대성한 인물로 추앙받고, 한 사람은 북학(北學)의 종장으로 일컬어진다. 중국은 한 번도 가보지 않았고 청나라의 학술과 문화에 우호적이지 않았던 다산, 청나라에 유학하여 중국인을 스승으로 삼고 청나라의 학술과 문화를 배우고 좋아했던 추사, 이런 사실만으로도 이들의 삶이 달랐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당색(黨色)마저 달랐으니 애초부터 가까이 지내기엔 서로가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럼에도, 추사는 다산의 아들 정학연과 가까운 친구였고 선배인 다산을 존경했다. 다산 사후에는 다산의 제자들이 추사의 문하를 수시로 출입하며 교유하였다. 이렇게 두 사람의 삶이 다르면서도 닿아 있는 것은 정치적인 이유로 죄인의 몸이 되어 유배형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유배의 설움 글로 푼 정약용 대대로 문한(文翰)을 숭상하는 집안에서 태어난 다산은 정조 임금의 총애를 온몸으로 받았던 신하이자 제자였다. 그런데 출세가도를 달리던 다산에게 시련이 닥쳤다. 젊은 시절 천주학(天主學)에 관한 책을 읽고 연구했던 게 화근이었다. 다산의 집안에는 형님과 매형을 비롯한 천주교도들이 많았다. 호기심 많던 다산이 천주학에 관심을 뒀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후에 다산은 성균관에 들어가면서 천주학과의 인연을 끊지만, 젊은 시절 그가 한때 마음을 두었던 천주학은 결국 인생의 항로를 바꾸고 만다.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젊은 시절 천주학에 몸담았던 사실은 점점 다산의 목을 겨누는 칼로 변해갔다. ●든든한 후원자 정조 죽자 유배생활 시작 상황이 악화되자 다산은 짐을 챙겨 고향으로 돌아갔다. 1800년 봄의 일이었다. 얼마 후 다산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정조가 승하하자, 다산은 다음해 2월에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 10월에 상경하여 재조사를 받았지만, 이번에는 다시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고 만다. 죄인의 몸이 되어 강진을 찾은 다산을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801년 겨울, 강진에 도착한 다산은 동문 밖 술집에 거처를 마련했다. 동천여사(東泉旅舍) 뒷골방인 사의재(四宜齋)였다. 이곳에서 1806년 여름까지 지냈다. 1805년 겨울은 승려인 아암(兒庵)의 배려로 아들 정학연과 함께 보은산방(寶恩山房)에서 지냈다. 1806년 가을에는 제자 이학래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서 1년 남짓 살았다. 이렇게 떠돌던 다산은 1808년 봄부터 1818년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다산초당(茶山草堂)에 머물렀다. 다산은 유배생활 대부분을 제자를 가르치고 저술하는 일로 보냈다. 누구보다도 승려들과 많은 교유를 하였고 차(茶)를 사랑했지만,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었다. 강진에 도착한 다음해 봄부터 붓과 벼루를 옆에 두고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저술에 매달렸다. 그 때문에 왼쪽 어깨에 마비 증세가 나타나 폐인이 될 지경이 되었고, 시력은 나빠져 늘 안경을 끼고 살았다. 다산이 그렇게 저술에 매달린 것은 폐족(廢族)이 되어버린 자신의 가문과 자신을 구원할 길이 오직 저술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저술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후대에 전하고, 이로써 죄인의 오명을 벗어 던지고 싶었던 것이다. ●폐족 벗어나기 위해 두 아들의 학문정진 강조 한편으로는 두 아들에게 수시로 훈계의 글을 써 보내 공부를 강조했다. 청족(淸族)은 공부를 하지 않아도 저절로 존경을 받게 되지만, 폐족이 된 마당에 학문에 힘쓰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천시하고 세상에서도 버림을 받게 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두 아들이 자포자기하면 자신의 저술이 후대에 전해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함도 있었다. 자신의 글이 전해지지 못한다면 후세 사람들은 단지 관청의 문서만 가지고 자신을 평가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은 끝내 죄인의 오명을 벗을 수 없다고 여긴 것이다. 이런 절박함은 다산으로 하여금 500권이라는 방대한 저술을 남기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유배의 恨 서화로 푼 김정희 김정희의 증조부는 영조 임금의 사위였다. 그런 집안에서 자랐으니 왕실의 한 구성원인 셈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남부러울 게 없는 생활을 하였다. 1810년 부친을 따라 중국 연경(燕京·지금의 베이징)을 다녀온 뒤로 북학의 종장으로 성장하였다. 연경의 지식인들은 김정희와 교유하기를 희망하였고, 김정희의 연구 논문이 나오기를 기다리곤 하였다. 이미 동아시아 최고의 석학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親청’ 추사, 反청 다산 선배로 여기고 후학들끼리 교류도 그러나 김정희가 45세 되던 1830년에는 부친 김노경이 전라도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840년에는 그 자신마저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모두가 정쟁 속에서 빚어진 일들이었다. 평생 고생이란 걸 모르고 살았던 김정희에게 제주도의 유배생활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음식은 거칠어 목에 넘어가지도 않았고, 날씨는 맞지 않아 걸핏하면 앓아누웠다. 제주도에 도착한 다음해, 추사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가장 친한 친구 김유근의 부음이 전해졌던 것이다. 김유근은 추사를 유배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가장 큰 희망이었는데, 이제 그 희망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김유근의 사망 소식을 들은 뒤로 추사는 미쳐버린 듯, 정신이 나가버린 듯하였다. 하늘을 향해 혀를 차고 밥상을 대하면 수저를 드는 것조차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돌멩이가 목구멍에 걸린 듯하고 대못이 가슴에 박혀 있는 듯하여 몰골은 날마다 말라가고 정신도 따라서 나가버린 것 같았다. 슬픔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추사는 두 번째 아내인 예안(禮安) 이씨와 사별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반대파들의 박해도 끊이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서울의 친구들과는 소식도 점차 끊어졌다. 젊은 시절 그렇게도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마저 소식 한 통 전해오지 않았다. 그런 추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책뿐이었다. 역관이었던 추사의 제자 이상적은 그런 추사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중국에 갈 때마다 최신의 서적들을 구해다 추사에게 보내주었다. 모두 쉽게 구할 수 없는 책들이었다. 그 덕분에 몸은 제주에 있었지만, 중국 소식을 손금 보듯 하며 지낼 수 있었다. 유배 가기 전이나 유배 간 뒤나 언제나 똑같이 자신을 대하는 이상적의 행동을 보면서 추사는 문득 ‘논어’의 구절을 떠올렸다. ‘자한’ 편의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라는 구절이었다. 공자께서는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나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꼈듯이, 사람도 어려운 지경을 만나야 진정한 친구를 알 수 있는 법이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추사는 이상적의 행동이야말로 공자가 인정했던 송백(松柏)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추사는 그 고마움을 그림에 담아 이상적에게 선물하였다. 그렇게 ‘세한도’가 탄생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추사체로 불리는 그의 글씨는 바로 9년간의 유배생활 속에서 탄생하였다. 추사 또한 평생 수많은 저술을 하였고, 유배기간에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말년에 자신의 저술을 두 번에 걸쳐 불에 태워버렸다. 그가 남긴 것은 그의 혼이 담긴 서화뿐이었다. ●올해 다산 탄생 250주년… 활발한 학술행사 열려 18년 유배생활을 저술로 보냈던 다산, 9년 유배생활을 예술로 승화시킨 추사, 이들의 삶은 이렇게 같으면서도 달랐다. 한 사람은 가슴 속에 쌓인 것을 밖으로 풀어내 책을 지었고, 또 한 사람은 가슴 속에 쌓인 것을 붓 끝에 모아 서화로 표출했다. 올해는 다산이 세상에 태어난 지 2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여러 곳에서 다양한 전시회와 함께 그의 삶과 업적을 조명하는 학술행사가 열린다. 다산의 바람대로 죄인이라는 오명은 오래 전에 씻어졌다. 이제 다산을 죄인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500권의 저술을 남긴 위대한 학자로서의 명성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다산의 치열했던 삶이 온전히 살아나기를 기대해 본다. 박철상(고서연구가)
  • [선택 기로에 선 유럽] 스페인·伊 국채 또 ‘시련’…“한국, 최악땐 2%대 성장”

    [선택 기로에 선 유럽] 스페인·伊 국채 또 ‘시련’…“한국, 최악땐 2%대 성장”

    그리스 재총선 이후 전문가들은 2000억 유로에 달하는 스페인·이탈리아의 국채만기와 미국 경기 회복속도가 세계경제의 방향을 결정할 것으로 내다봤다. 중국의 경착륙 우려는 현실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쪽이 약간 많았지만 경제성장률이 낮아질 것이라는 데 모두 동의했다. 유럽·미국·중국 등 G3(주요 3개국)가 현 상황을 ‘국제공조’ 등으로 벗어나지 못하면 올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은 최악의 경우 2%대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서울신문이 17일 정영식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임희정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 이재준 KDI 경제동향연구팀장, 이근태 LG경제연구소 연구위원, 김창배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 등 5명을 대상으로 ‘그리스 재총선 이후 세계경제진단’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5명의 전문가들은 유로존 문제가 막바지에 왔기 때문에 국제 공조가 빨라질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재준 팀장은 “그리스가 잔류를 하든 탈퇴를 하든 그보다 큰 문제는 8~9월이면 부실채권 문제가 심각해질 스페인”이라고 말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올해 3분기 국채만기 규모는 각각 625억 유로, 1382억 유로로 2000억 유로를 넘는다. 스페인 은행의 부실대출액(1394억 유로)은 명목 국내총생산(GDP·1조 734억 유로)의 13%다. 6.8%인 이탈리아의 부실대출액도 높은 편이다. 여기에 미국과 중국 등 G2(주요 2개국)의 경기회복 둔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중국의 경우 경착륙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성장세는 둔화될 것으로 봤다. 정영식 수석연구원은 “부동산 가격 급락 등 중국경제에 악재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 정부가 금리 인하나 재정지출 확대 등 강한 정책 수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경착륙은 막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반면 이근태 연구위원은 “지방재정문제나 부동산 버블 위험 때문에 중국 역시 리먼브러더스 사태처럼 대대적인 부양책을 쓰기 힘든 상황”이라면서 “경착륙까지 가지 않는다고 단정짓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중국의 경우 내부 문제가 경기 회복을 막는 주요 이유라면 미국은 유로존의 영향이 크고 어떤 복병이 악재로 떠오를지 모르는 상황이다. 김창배 선임연구원은 “3월까지 경제 성장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지만 최근 고용증가세나 주택경기회복세가 주춤하고 있다.”면서 “침체로 가진 않을 것 같지만 예측하기 아주 힘든 상황이다.”라고 전망했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추가부양책을 내놓을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임희정 연구위원은 “3차 양적완화정책(QE3)에 대한 기대가 많은데, 미국이 유로존과 무역·금융면에서 묶여 있어 영향을 받겠지만 그 정도가 우리나라만큼 심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반면 미국의 추가부양책이 세계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이재준 팀장은 “현 상황에서 미국이 양적 완화를 안 하는 것만으로 미국의 경기는 나아지고 있다고 봐야 하기 때문에 미국의 통화정책 변화가 세계경제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유로존·미국·중국 등 3대 경제권의 영향을 크게 받는 우리나라 경제에 대한 전망은 3% 중반대를 유지할 것이라는 전망부터 2%로 힘들 것이라는 예측까지 크게 엇갈렸다. 경제협력기구(OECD)가 지난달 전망한 우리나라 올해 경제성장률은 3.3%다. 김창배 선임연구원은 “현 세계경제 상황이 진정국면으로 가지 못할 경우 수출 감소가 계속되면서 올해 2%대 경제성장률도 힘들 것으로 보인다.”면서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에 마이너스 성장까지 경험했던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재준 팀장은 “유로존 문제로 수출에 타격을 입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수여건이 상당히 개선되면서 경제성장률이 3%대 중반대를 달성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경주·이성원기자 kdlrudwn@seoul.co.kr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82)경기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82)경기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더 오를 곳이 없었다. 나무는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하늘 끝에 닿을 듯 솟구쳐 올랐지만, 맨 꼭대기 나뭇가지는 더 이상 오를 곳을 찾지 못했다. 하늘 문에 막힌 건지, 긴 팔로 무거운 하늘을 떠받친 건지…. 지상 42m의 높이에서 나무는 절대수평을 이뤘다. 하늘을 떠받치는 천신만고를 이겨낸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수평으로 무겁게 걸터앉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키가 큰 은행나무인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의 압도적인 풍경에 제압당한 채, 저절로 흘러나오는 감탄사를 씹어 삼키며 쓴 필자의 나무 칼럼 속 한 구절이다. 초여름 용문사 은행나무는 소나기를 머금은 구름을 머리에 이고 서 있었다. 쭉 뻗어오른 나뭇가지 끝부분이 절묘하게 수평을 이룬 모습은 그저 ‘장관’이랄 수밖에! 낮게 드리운 소나기 구름과 높지거니 솟은 나뭇가지의 아스라한 경계는 마치 땅과 하늘을 나누기 위해 잘 벼린 면도날로 선을 그은 듯한 수평이다. ●마의태자가 심었다는 설 신빙성 “소문만 듣다가 오늘 처음 보게 됐는데 정말 대단하군요. 1000년을 넘게 살아온 이유가 금세 이해됩니다. 전국을 다 돌아다녀도 이런 나무는 보기 어려웠어요.” 나무를 찾아 울산에서 왔다는 심규강(60)씨는 나무를 처음 만난 느낌을 여러 차례 감탄사로 표현했다. 나무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던 그는 나무를 배경으로 사진 한 장을 찍고 ‘진정한 우리나라 대표 나무’라고 강조했다. 용문사 은행나무 앞에서는 누구라도 감탄사부터 내놓는다. 구름을 떠받들고 선 높이에 감동하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무려 42m다. 빌딩 한 층의 높이를 대략 3m로 볼 때 13층이 넘는 높이다. 눈어림이 가능하지 않다. 절집 지붕이 아득히 낮게 깔려 있음에도, 도무지 그의 높이는 한눈에 가늠할 수 없다. 천연기념물 제30호인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는 우리 민족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영험한 나무다. 특히 망국과 침략으로 이어진 시련의 민족사를 담았다는 점도 우리나라 대표 나무로서 손색이 없다. 나무는 신라 때의 고승 의상대사가 꽂아둔 지팡이가 자랐다고도 하지만, 그보다는 신라 최후의 임금 경순왕의 세자인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안고 금강산에 들어가던 길에 용문사에 들러 심은 나무라는 이야기에 보다 신빙성이 있다. 어느 쪽 이야기를 받아들이든 나무는 1100년을 넘은 긴 세월을 살아왔다. ●우리나라 최초로 벼슬을 한 나무 망국이라는 치욕의 설움을 안고 생명을 얻은 나무는 어쩌면 태생부터 수난의 역사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독특한 유전자를 가졌는지 모른다. 나무에 얽혀 전해오는 숱한 이야기들이 모두 민족 흥망성쇠와 관련됐기에 드는 생각이다. 일제 침략이 본격화하기 직전인 1907년의 이야기도 그렇다. 이른바 정미의병 항쟁 때에 일본 군은 의병의 집결장소라는 이유로 용문사에 불을 질렀다. 절집과 숲이 불에 탔지만 나무는 용케도 버텨냈다. 사람들이 나무에 ‘천왕목’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것도 그런 때문이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고종이 승하하던 날에도 큰 가지 하나를 스스로 부러뜨려 내려놓았다고도 한다. 뿐만 아니라 나라에 변란이 있을 때에는 큰 울음을 운다고도 한다. 나라의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온 나무의 명성을 일찌감치 잘 알았던 조선의 세종은 나무에 벼슬을 내렸다. 정삼품에 해당하는 당상관이라는 높은 벼슬이었다. 이는 소나무에 정이품 벼슬을 내린 세조보다 훨씬 앞서는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벼슬을 한 나무가 용문사 은행나무다. 이 나무의 높이를 측정하는 데에는 곡절이 있었다. 나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던 1962년의 측정값은 60m였다. 그리고 40년 뒤인 2003년, 천연기념물을 재조사한 문화재청은 나무의 높이를 67m로 고쳐서 발표했다. 그만큼의 높이로 솟아오른 은행나무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2005년 어느 공중파 방송의 오락 프로그램에서 이 나무의 높이를 측정했다. 당시 방송사에서는 대형 크레인을 나무 앞으로 가져갔다. 크레인을 나뭇가지 끝까지 끌어올린 뒤 건축물의 높이를 측정하는 방법을 이용해 측정한 결과는 약 42m 였다. 이후 필자를 비롯한 관련 인사들이 의문을 제기했고 급기야 문화재청에서는 지난해 봄 특별한 발표 없이 나무의 높이를 42m로 수정했다. ●영원히 잃지 않을 강인한 생명력 “1000년이 넘었어도 강인한 생명력을 잃지 않는 참 영험한 나무예요. 여전히 가을이면 열매를 무성하게 맺어요. 해걸이를 하기는 해도, 많이 맺힐 때는 바닥에 떨어진 은행만 주워도 여덟 가마니 정도를 모으지요.” 용문사 주지 호산 스님은 가을이면 은행을 예쁜 바구니에 담아 나무의 가치, 생명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분들께 선물한다고 했다. 나무에 담긴 생명력을 여러 사람과 나누려는 베풂이다. “사람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같은 공기로 숨쉬며 1000년을 살아온 나무죠. 같은 자연에서 나무는 사람으로부터, 사람은 나무로부터 생명을 얻습니다. 나무와 사람은 한몸입니다. 나무 뿌리 부분에 천연 해우소가 있잖아요. 그것도 사람과 나무가 하나의 순환 고리에 놓여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죠.” 나무는 사람이 버린 것을 좋은 거름으로 빨아들여서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이야기다. 1000년의 생명은 결국 나무와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는 평화로운 자연의 순환 이치 속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글 사진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 가는 길 경기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626-1 용문사 경내. 서울에서 양평 용문사를 가려면 서울외곽순환도로에서 이어지는 중부고속국도의 하남나들목으로 나가는 것이 좋다. 팔당대교를 건너 국도 6호선을 타고 27㎞쯤 가면 양평읍에 이른다. 양평읍에서 12㎞쯤 더 가면 국도변에 용문휴게소가 나온다. 여기에서 1㎞ 남짓 더 가면 마룡교차로가 나오는데 오른쪽으로 난 나들목으로 나가서 곧바로 좌회전한다. 식당이 즐비하게 늘어선 몇 굽이의 고갯길을 따라 5.7㎞를 가면 용문사에 닿는다. 주차장에서 1.2㎞쯤 걸어 들어가면 절집 앞에 나무가 있다.
  • 사랑의 힘?…혼수상태 빠진 男 울린 약혼女 목소리

    사랑은 그 어떠한 시련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는 것일까. 혼수상태에 빠진 남성이 약혼녀의 목소리를 듣고 기적처럼 회복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알려져 진한 감동을 주고 있다. 7일(현지시각)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 등의 보도에 따르면 교통사고로 머리 수술을 받은 뒤 혼수상태에 빠졌던 영국인 청년이 인도네시아 약혼녀의 전화를 받기 위해 손을 움직이고 눈물을 흘리는 등의 기적적인 반응을 보였다. 감동 사연의 주인공은 매튜 테일러(31). 그는 지난해 7월 인도네시아 발리 섬에서 오토바이를 타던 중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당시 약 1년 6개월 동안 현지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테일러는 인도네시아대학을 다니던 한다야니 누룰(27)과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다. 테일러는 수술을 받은 뒤에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아 영국으로 보내졌다. 이후 그는 혼수상태에서 각성하기 위한 자극 프로그램을 받아 왔지만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았다. 급기야 테일러를 따라 함께 입국했던 약혼녀는 3주 전 비자가 만료돼 본국으로 돌아가게 됐다고 한다. 테일러의 계부 사이먼 무어는 언론에 “아들의 귀에 전화기를 대주자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면서 “그녀(약혼녀)가 그에게 무언가를 부탁하자 그는 침묵의 ‘예스’를 했다.”고 말하며 기뻐했다. 이에 대해 의료진은 테일러가 반혼수 상태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뇌손상 자선단체 헤드웨이의 루크 그릭스는 “테일러는 혼수 상태 각성 프로그램의 효과를 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테일러는 사고 당시 의료 보험에 가입하지 않아 수술과 치료에 10만파운드(약 1억 8000만원)의 거액이 들었다고 한다. 계부인 무어가 집 담보 대출를 추가해 5만달러를 마련했으며 양부인 대럴도 그 절반을 낸 것으로 전해졌다. 윤태희기자 th20022@seoul.co.kr
  • [돌연 사퇴 표명 2人…왜] 신충식 농협 회장직 사의

    신충식 NH농협금융지주 회장 겸 NH농협은행장이 7일 회장직 사의를 전격 표명했다. NH농협금융지주는 신 회장이 이날 오전 임시경영위원회를 소집, 새로운 회장을 선임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다만, 신 회장은 은행장 직은 그대로 유지한다. 정부 출자 지연, 노조의 총파업 예고 등 안팎으로 시련을 겪고 있는 시점이어서 사의 배경을 둘러싸고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다. NH농협금융 측은 신 회장이 9일 농협금융 출범 100일을 맞아 ‘지주체제의 안정적인 출범’이라는 소임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것으로 판단해 사의를 밝힌 것이라고 설명했다. 예정된 순서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한 관계자는 “처음부터 지주회사 회장은 외부에서 영입할 계획이었으나 노조 측의 관료 반대 등으로 마땅한 후보가 없어 (내부 출신인) 신 회장이 겸임한 것”이라고 말했다. 오달란기자 dallan@seoul.co.kr
  • 회기동, 벽화마을로 다시 태어난다

    동대문구는 회기동 주민자치위원회, 경희대 미술대학과 손잡고 회기동 골목길에 주제가 있는 벽화를 그리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고 4일 밝혔다. 회기동을 벽화 마을로 만드는 이 프로젝트는 앞으로 3년에 걸쳐 추진된다. 스토리텔링 골목길 조성 사업은 회기동이 대학가와 어우러져 있는 지역적 특성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고민에서 출발했다. 많은 대학생이 거주하는 회기동 골목길 가운데 16곳을 선정해 각각 ‘20대 길을 묻다’ ‘골목에 핀 꽃’ ‘사랑이 머무는 골목’ ‘20대 시련의 거리’ 등의 이름을 명명해 현존감을 부여하고 그 이름에 맞는 테마의 벽화를 그린다. 작업에는 경희대 미술대학 소속 교수진과 학부생, 대학원생 및 공공미술 동아리 회원들이 참여해 실제 작업 인원은 연간 인원으로 2400여명에 이르는 대대적인 규모가 될 전망이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많은 그리스인 탈세”… 라가르드 발언 파문

    크리스틴 라가르드(56)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그리스인의 납세를 촉구하는 발언을 하자 그리스가 발끈하면서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연립정부 구성에 실패한 그리스 정치 지도자들까지 라가르드 발언을 반박하는 데 가세했다고 AFP와 영국 일간 가디언 등이 2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발단은 26일자 가디언과의 라가르드 인터뷰. 라가르드는 “나는 그리스 위기보다 아프리카 어린이의 빈곤을 더 걱정한다.”면서 “많은 그리스인이 세금을 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인터뷰 내용이 보도되자 그리스가 들고 일어났다. 라가르드의 페이스북에 순식간에 1만 건이 넘는 반박 메시지가 붙었고, ‘그리스인은 라가르드에 반대한다’는 제목의 새로운 페이지까지 등장했다. 사회당의 에반겔로스 베니젤로스 대표는 라가르드가 그리스를 “모욕했다.”고 흥분했고, 급진좌파연합인 시리자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대표는 “그리스 노동자들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세금을 낸다.”고 반박했다. 한 그리스인은 “당신이 누구길래 나한테 세금을 내라고 하나.”라며 “집사람은 4년째, 나는 5개월째 실직 상태이며, 4개월 된 아기까지 있다.”고 밝혔다. 퇴직 공무원이라는 한 여성은 “단 한 푼도 탈세한 적이 없다.”며 “나와 우리 가족을 당신은 세금 도둑과 똑같이 취급했으니 사과하라.”는 글을 올렸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라가르드가 해명에 나섰다. 그는 27일 페이스북에서 “나는 그리스 국민과 그들이 직면한 도전을 안타깝게 생각한다.”면서 “그리스가 시련을 극복하도록 IMF가 지원하는 것도 이런 이유”라고 강조했다. 라가르드는 세금과 관련, “그리스가 위기를 극복하고 회복하기 위해서는 모든 이가 공정하게 부담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혜택을 많이 받는 사람들이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라가르드의 해명에 대해 그리스 정계의 반응은 엇갈렸다. 사회당의 베니젤로스는 “위기를 겪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그리스를 모욕할 수 없다.”며 라가르드의 해명을 받아들였다. 반면 시리자의 치프라스는 “그리스는 라가르드의 연민을 구해야 할 처지가 됐다.”면서 “탈세라면 (당사자인) 부자들은 손도 대지 않고, 노동자들만 추적한 사회당이나 신민당이 설명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 [제20회 공초문학상] “정계에 발 담근 채 상 받으려니 황송하다”

    [제20회 공초문학상] “정계에 발 담근 채 상 받으려니 황송하다”

    “공초처럼 구도자적인 자세로 세속에 물들지 않고 초월적으로 살아가려고 했는데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런 상태에서 상을 받으려니까 죄송스럽고 황송하다.” 제20회 공초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시인 도종환(58)은 24일 거듭 “기쁘고 송구스럽다.”는 말을 되뇌었다. 19대 국회의원 당선자 신분인 그는 10번째 시집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에 수록된 ‘나무에 기대어’로 영광의 수상자가 됐다. 등단 20년 이상 된 시인에게 주는 공초문학상은 자본주의의 잣대로 재단하면 소박한 상이다. 그러나 이근배 공초문학상 심사위원이 “작품의 수준뿐만 아니라 문학상 중 유일하게 작가의 인품을 평가한다.”고 했을 만큼 권위 있는 상이다. ●신동엽·정지용·윤동주·백석문학상 등 받아 ‘접시꽃 당신’으로 잘 알려져 있는 도종환은 어지간한 문학상은 거의 받았다. 1990년 신동엽창작상, 2009년 정지용문학상, 2010년 윤동주문학상, 2011년 백석문학상 등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한 시대 문학을 맨 앞에서 개척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 것도 아니고 근대문학의 문을 연 문학적 업적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미안하다고 했다. 도종환에게 시는 삶의 길이고 나침반이고 희망이고 살아가는 이유다. 살아가면서 가장 고마운 일은 시를 만났다는 것이고 시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시가 있어서 20대 논산훈련소도 견뎠고 교육 민주화 운동으로 교도소에 갔던 30대도 버틸 수 있었다. 40대에 자율신경 실조증에 걸려 산속에서 10년간 두문불출하고 요양할 때도 시 덕분에 삶의 끈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어렵고 고통스러운 기간을 헤쳐 나갈 때마다 용기를 준 것은 시였다. 애초 미술가가 꿈이었는데 미대에 갈 수 없게 된 좌절을 시작(詩作)으로 풀어냈단다. 이제 그에게 미술은 ‘10대 때 좋아했던 사람과의 아름답지만 돌아갈 수 없는 사랑’이다. 시와 문학은 도종환 내면의 광기를 분출시키거나 순화시키는 일을 자연스럽게 해왔다. 청년기의 광기가 시를 통해 분출됐고 아내와의 사별을 거치면서 순화됐고 해직 교사가 되면서 다시 분출됐지만 산속에서 요양하던 10년 동안 다시 광기가 가라앉으면서 문학이 익어갔다는 것이다. 4·11 총선을 앞두고 민주통합당의 지역구 공천심사위원이 됐을 때도 정치를 한다는 생각을 못 해 봤다. 흔히 ‘자기가 심사하면서 자기를 끼워 넣느냐.’고 오해할 수 있지만 비례대표 공천심사위원회는 따로 꾸려져 있었으니 파렴치한 일을 한 것은 아니다. 비례대표 공천심사가 끝나갈 무렵 19대 국회에 문화 예술계를 대표할 사람이 없어 영입하고 싶다는 제안이 왔다. 시인이 정치권에 들어가면 ‘최소한 중상이거나 사망’이라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등과 상의했다. 황지우 시인이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직에서 쫓겨난 일, 2008년 촛불 집회 이후 문화예술위원회가 문인들에게 ‘집회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고 요구한 일 등 지난 5년간 문화 예술인의 자존심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는 인식이 그가 영입 제안을 받아들인 배경이었다. 국회에 들어가 문화계의 파행을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시나리오 작가가 굶어 죽는 등 창작 예술인들의 생계가 어렵고 보험 혜택도 받지 못하는 복지의 사각지대도 없애고 싶었다. 정치에 참여했던 시인은 유정회 국회의원을 한 김춘수와 양성우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에 이어 세 번째다. 도종환은 “험난한 판에 들어가도 품격을 잃지 않는 국회의원, 사유의 품격과 언어의 품격, 글의 품격을 잃지 않는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강조했다.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파스는 ‘시인은 언어에 봉사하는 자’라고 했다. 언어의 존재를 확연하게 드러내 주고 언어의 기능을 회복시켜 주는 사람이 시인이다. 국회의원은 국민에게 봉사하는 자라고 생각한다. 국민의 존재를 확연하게 드러내 주고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는 사람이다. 시인으로서 언어에 봉사하듯 국회의원으로서 국민에게 봉사하겠다. 퇴행했던 민주주의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임기가 끝나면 시인으로 돌아오겠다. 공초처럼 인생의 후반기를 초연하게 살겠다.”고 다짐했다. ●수상일과 상임위 구성일 겹쳐… 그의 선택은? 이근배 공초문학상 심사위원은 “도종환 시인이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행여 창작 활동을 소홀히 하게 되는 것 아닌가 하고 수상을 걱정했지만 임헌영 선생 등이 도종환 시인의 성품으로 보건대 그럴 리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고 밝혔다. 이런 평가처럼 도종환은 “올여름에 산문집과 월북 시인 오장환의 시 해설서 등 2권을 내놓는다.”면서 “국회의원이 돼도 시인으로서 역할을 계속하겠다.”고 약속했다. 시인과 국회의원을 병행하려는 그에게 첫 시련은 6월 7일 공초문학상 수상식이다. 국회가 첫 상임위 구성을 하는 날로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데 공초문학상은 수상식, 성묘 등 종일 행사가 이어져 국회에 갈 수 없다. 6월 7일 그는 어떤 선택을 할까?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도종환 시인은… ▲1954년 충북 청주 출생 ▲충북대학교 국어교육학과 ▲1984년 동인지 분단시대 ‘고두미 마을에서’로 등단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을 지냄 ▲주요 수상:신동엽창작상(1990), 정지용문학상(2009), 윤동주상 (2010), 백석문학상(2011) 등 ▲주요 시집:‘고두미 마을에서’ ‘접시꽃 당신’ ‘슬픔의 뿌리’ ‘해인으로 가는 길’ 등 ▲수상작:‘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중 ‘나무에 기대어’
  • [주말 하이라이트]

    ●2012 대기획 SBS 스페셜(SBS 일요일 밤 11시 10분) 사방이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방. 그곳에는 초로의 사내와 젊은 사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멀찌감치 떨어진 채 말없이 앉아 있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다. 누구보다 가까워야 할 부모 자식 간인데도 방 안의 두 사람은 어색하고 불편하기만 하다. 과연 이들에게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한국재발견(KBS1 토요일 오전 10시 30분) 2015년 완공을 앞둔 경기 포천의 한탄강 댐. 인근의 여러 마을들은 댐이 완공되면 수몰된다. 이 때문에 대대로 이어온 삶의 터전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중 한탄강 인근에 위치해 예로부터 아름답기로 소문났던 교동 마을 사람들은 좀 더 높은 다른 부지로 마을 전체를 이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넝쿨째 굴러온 당신(KBS2 토요일 밤 7시 55분) 귀남에게 용서 쿠폰을 받은 양실은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이별 통보 문자메시지를 받은 말숙은 그 길로 세광을 찾아간다. 한편 윤희 부부는 재용의 레스토랑에서 만난 수지와 재용이 각각 귀남, 윤희가 자신들의 첫사랑이라고 하자 서로에게 질투심을 느낀다. ●찾아라! 맛있는 TV(MBC 토요일 오전 11시) 가수 겸 작곡가 윤종신이 출연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아내 전미라가 해주는 집밥이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절친 이현우의 집요한 추궁과 생생한 증언에 결국 장모님이 집에서 해주신 밥이라고 정정했다. MC 이현우, 권오중이 ‘윤종신에게 푸드송 영감을 줄 수 있는 음식’이라는 주제로 요리 대결도 펼친다. ●국회의원 정치성 실종사건(KBS2 일요일 밤 11시 45분) 동일 아빠의 죽음이 자신의 책임인 것만 같은 정치성은 이인자와 함께 섬을 떠난다. 떠나는 배 위에서 옛 추억에 잠긴 정치성은 인자에게 학창 시절 얘기를 들려준다. 그러던 중 인자와 함께 왔던 수행비서가 칼을 꺼내 정치성을 향해 다가간다. 격한 몸싸움 끝에 정치성과 이인자는 둘만 남게 되는데……. ●김병만의 정글의 법칙(SBS 일요일 오후 5시) 우여곡절 끝에 바누아트의 야수르 정상에 도착한 병만족에게 첫 시련이 찾아왔다. 바로 화산에서의 야영이다. 취침은 물론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현재까지도 활동하고 있는 야수르 화산. 과연 병만족은 첫날밤을 무사히 보낼 수 있을까. ●OBS 초대석(OBS 일요일 오전 6시 55분) 4·11 총선 당선자들과 만나는 시간을 갖는다. 이번 주는 안양 동안 지역의 새누리당 심재철 당선자와 함께한다. 그는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 7전 8기의 오뚝이 인생 등 늘 다양한 수식어가 붙는 4선의 정치인이다. 프로그램에서는 그가 앞으로 국가와 지역을 위해 어떤 활동을 계획하고 있는지 자세히 들어본다.
  • [K-코믹스 신한류 이끈다] ③ 1970~80년대 만화를 말하다

    [K-코믹스 신한류 이끈다] ③ 1970~80년대 만화를 말하다

    1970년대 우리 만화는 혹독한 시련의 터널을 지나야만 했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검열과 ‘신촌 대통령’ 합동문화사의 독점, 유해물로 치부하는 사회적 인식등이 만화의 건전한 발전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혹한 속에서도 봄을 부르는 싹은 움을 틔우고 있었다. 주간지와 신문 연재 등 새로운 돌파구의 기반이 마련됐고, 어린이가 아닌 어른을 위한 만화문화가 본격적으로 태동하고 있었다. 결국 1980년대 들어 어린이·성인·순정 만화 잡지들이 봇물을 이루며 한국만화는 바야흐로 ‘르네상스’를 맞게 된다. “1970년대에도 검열이 심했다. 부분수정, 전면수정, 폐기만 있었는데 무사통과는 거의 없었다. 작가들은 만화를 잘 그리는 것보다 검열을 피하는 방법을 연구하기에 바빴다. 합동문화사 체제도 작가들을 옥죄었다. 인기 작가가 마음에 안 들면 이름이 비슷한 작가를 만들어 엇비슷한 작품을 그리게 하는 경우도 많았다. 창작 분량을 강제로 할당하기도 했다. 출판사가 만들어 낸 유령 작가의 작품을 대신 그려야 하는 괴상한 착취 구조도 있었다.”(김형배) ●만화에 가해진 군사정권의 분서갱유 사회적으로 만화가 푸대접을 받는 상황은 1970년대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어린이·청소년 문제가 생길 때마다 만화는 항상 일등으로 몰매를 맞았다. 해마다 어린이날이면 남산이나 동대문운동장에서 불량만화를 모아 태우는 행사가 열렸다. 만화계에서 특히 잊을 수 없는 사건은 1972년 1월 말 일어난 ‘불량만화 파동’이었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 6학년생이 사고로 숨지는 일이 발생했다. 군사정권과 언론은 “어린이가 만화에서 본 내용을 흉내내다 숨졌다.”며 엉뚱한 곳에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특별단속이 시작됐고 경찰은 곳곳의 만화방을 급습해 수만권의 만화책을 폐기처분했다. 그해 10월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을 선포했다. “교육계 전반이 만화에 적의(敵意)를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혀 검증되지 않았음에도 모든 문제가 만화에서 비롯된다는 시각이 팽배했다. 하지만 현재 30~40대인 내 올드팬 가운데 어렸을 때 만화를 읽어서 잘못됐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김형배) ●새로운 만화의 통로, 잡지 1960년대 만화방 중심의 문화는 1970년대 들어 큰 변화를 맞는다. 바로 만화잡지의 확산이었다. 이 시기 어린이 잡지에 실린 만화들은 이전과 달리 호흡이 길어졌다. 1960년대 중후반에 창간된 ‘새소년’, ‘어깨동무’, ‘소년중앙’ 등이 그 중심이었다. 컬러 지면을 도입하고 만화 분량을 대폭 늘린 것이다. 특히 어깨동무는 1972년 사상 처음 별책부록으로 ‘도깨비 감투’(신문수)를 끼워줬다. 본지에 연재하던 만화가 7쪽 안팎이었지만 도깨비 감투는 60쪽이나 됐다. 어린이 잡지의 약진은 서점용 단행본 만화문고 등장으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게 새소년을 발행하던 어문각의 ‘클로버 문고’다. 1972년부터 약 12년 동안 429권이 나오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이 가운데 389권이 만화였다. ●한국만화의 어두운 과거, 표절 클로버 문고는 다른 한편으로, 일본만화 표절이라는 부끄러운 과거를 갖고 있다. 문고의 첫 작품인 ‘유리의 성’(정영숙)과 최고 히트작인 ‘바벨 2세’(김동명) 등 상당수가 일본작품을 베낀 것이었다. 사실 일본만화 표절은 그 역사가 오래됐다. 1952년 한국전쟁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밀림의 왕자’(서봉재)를 첫 표절 사례로 본다. 1951년 나왔던 일본 작품 ‘소년 케냐’를 그대로 옮긴 작품이다. 이후에도 일본만화 표절 및 복제 작품이 인기를 끄는 사례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바벨 2세의 인기 때문에 우여곡절 끝에 ‘바벨 3세’를 그려야 했던 김형배 화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본만화 표절 문제에서 기성 작가 대부분이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 사회가 만화를 창작품이 아닌 소모품으로 생각하는 등 만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결과다. 출판업자들은 돈벌이에 급급해 작가들에게 베끼기를 강요했고, 작가들은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해야 했다. 만화가와 우리 사회 모두 피해자다.” ●1970년대의 수확, 성인만화 잡지 문화의 발달은 성인만화 시대를 열어젖혔다. 1968년 성인 주간지 ‘선데이서울’과 1970년 국내 첫 스포츠신문 ‘일간스포츠’가 창간됐다. 1970년대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이 매체들은 성인만화 시대를 연 쌍두마차다. 일간스포츠의 경우 1972년 ‘임꺽정’, ‘수호지’ 등 고우영의 극화를 싣기 시작하며 그해 2만부에 불과했던 발행부수가 1975년 30만부로 늘어났다. 선데이서울은 1974년 박수동의 ‘고인돌’을 게재하며 성인만화 인기에 불을 댕겼다. 선데이서울의 성공으로 각종 주간지가 나오게 되는데 강철수가 ‘주간여성’에 ‘청춘의 낙서’를 연재하며 성인만화 붐을 거들었다. 신문이나 잡지도 심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지만 어린이 만화나 만화방용 만화보다는 상대적으로 자율성을 누릴 수 있어 성인만화의 활성화에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후 성인만화들도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과정에서는 대대적으로 수정, 삭제 조치를 당해야 했다. ●한국만화 르네상스의 상징, 보물섬 1982년 10월 기념비적인 일이 일어났다. 어린이 만화 월간지 ‘보물섬’이 창간된 것이다. 오로지 만화만 실린,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만화 잡지였다. 상업적으로도 대성공을 거뒀다. 이현세, 허영만, 김수정 등 수많은 인기 작가들이 작품을 연재했다. 그런데 보물섬을 발간한 곳이 육영재단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육영재단은 박정희의 부인 육영수가 설립했다. 보물섬이 창간되던 해 박근혜(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만화에 암흑기를 드리운 대통령의 딸이 우리 만화 르네상스의 이정표를 세웠다는 점은 아이러니한 대목이다. 이후 1985년 ‘만화광장’, 1987년 ‘주간만화’, 1988년 ‘만화세계’와 ‘매주만화’가 나오는 등 1980년대 중반 이후 성인만화 잡지가 잇따라 창간되며 만화의 전성시대가 열린다. 하지만 영세한 졸속 저질 만화 잡지가 양산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1988년 ‘아이큐 점프’, 1991년 ‘소년 챔프’ 등 일본식 체계를 그대로 이식한 잡지가 잇따르며 우리 만화잡지는 다시 변화를 맞게 된다. 1970년대에 어린이 잡지의 강세에 힘입어 명랑만화가 도드라졌다면, 1980년대에는 장르를 불문하고 장편극화가 큰 흐름을 형성한다. 순정만화도 다시 도약기를 맞는다. 김동화, 한승원, 황미나 등이 먼저 지평을 넓혔다. 이어 장편 서사 멜로물을 앞세운 김혜린, 강경옥, 김진, 신일숙 등이 걸작들을 대거 선보였다. 특히 1988년 11월 순정만화 월간지 ‘르네상스’가 창간되며 순정만화의 꽃은 활짝 만개한다. “1980년대 들어 만화가가 데뷔하고 작품을 발표할 매체가 훨씬 다양해지며 우리 만화가 정점을 이뤘다. 어린이 잡지와 스포츠 신문 등이 큰 역할을 했다.”(김형배)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이 기사는 김형배(65) 화백 인터뷰를 바탕으로 최열 ‘한국 만화의 역사’, 손상익 ‘한국만화통사㈛’, 박기준 ‘박기준의 한국만화야사’, 박인하·김낙호 ‘한국현대만화사’를 참고해 재구성했습니다.
  • 문재인 ‘李·朴연대’ 침묵만… 김두관과 대선 단일화설도

    문재인 ‘李·朴연대’ 침묵만… 김두관과 대선 단일화설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으로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인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1일 서울을 찾았다. 오전 11시 국회 당 대표실에서 좋은일자리본부 회의를 주재했고 오후 2시 세종문화회관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3주기 추모전 개막식에 참석했다. 하지만 정치적 현안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 문 고문은 ‘이해찬 대표·박지원 원내대표 연대’ 파문으로 사면초가의 처지다. 당내에서 “문 고문의 대선주자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이해찬 고문과 박지원 최고위원의 구상에 동의했고 지원까지 했다.”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측근들은 “오해가 쌓인 것”이라고 말하지만 본인은 침묵하고 있다. 문 고문은 이날 이·박 합의에 대한 보도진의 끈질긴 질문 공세에도 “오늘은 죄송합니다.”라며 답변을 피했다. 원내대표 경선에 대해서도 “원내대표 선거전이 한창인데 말할 때가 아니겠죠.”라고 말했다. 그는 전날 비공식적으로 “힘들긴 힘들다. 하고 싶은 얘기는 나중에 하겠다.”는 말만 했었다. 문 고문은 이날 수차례 전화를 하고 음성메시지를 남겼지만 응답이 없었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데 대해 민주당 내에서 “문 고문은 대권을 꿈꾸는 공인이다. 사인(私人)이 아니다. 현안에 대해 입장을 밝히는 것은 의무다.”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오해가 있을 경우 그것이 더욱 커질 것도 우려한다. 그의 침묵에서는 억울해도 참겠다는 심정이 묻어 나온다. 민주당 내의 친노(親盧)·비노(非盧)의 틀을 깨지 않고서는 대선에서 이길 수 없고, 설령 이긴다 해도 문제라는 생각에서 해소 방안의 하나로 이·박 연대를 지지했다는 것이다. 민주당 통합을 위한 충정인데 오비이락 격 오해가 생겼다는 것이다. 문 고문은 지난달 24일 박지원 최고위원과 둘이서만 식사를 했다. 박 최고위원은 다음 날 “문 고문이 ‘이·박 연대’를 알고 있었고 동의도 했다.”며 이·박 합의를 공개했다. 이후 문 고문이 두 차례 트위터를 통해 “그것은 담합이 아니라 단합”이라는 등 옹호했다가 ‘선수가 룰에 개입했다.’는 비난을 샀다. 문 고문 측은 “문 고문은 총선 뒤 당선자뿐만 아니라 낙선자들도 두루 만나고 있고 박 최고위원과의 식사도 그 일환이었다. 그 자리에서 그 얘기가 나와 이 전 총리에게 들은 얘기를 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그래서 정치초년병 문 고문이 ‘이해찬·박지원’ 연대에 휘둘렸다는 동정론도 나온다. 민주당 중진의원은 “정치판에 들어오면 다 겪는 일”이라며 문 고문이 시련을 극복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노 전 대통령이 2003년 12월 기자회견에서 불법 대선자금 문제와 관련, “스포츠에 비유하면 대선 구장은 뻘밭 구장”이라고 말했듯이 문 고문도 이 ‘뻘밭’에 뛰어든 형국이다. 한편 새누리당 이준석 비상대책위원은 이날 “문 당선자보다는 김두관(얼굴) 경남지사가 대선에 나올 가능성이 높지 않은가 판단했다. 노무현 정책을 계승한다는 상징성 면에서도 문 고문보다 김 지사가 유력한 후보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해 주목된다. 이른바 문재인 페이스메이커론이다. 민주당 내에서는 “친노 핵심들은 문 고문을 페이스메이커로 한 뒤 최종적으로 김 지사를 대통령 후보로 만들려고 한다.”는 김 지사로의 단일화설이 솔솔 나오고 있다. 김 지사는 취임 2주년인 오는 7월 1일 직후 대선 출마를 선언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춘규 선임기자 taein@seoul.co.kr
  • 양육비 분쟁… 두번 눈물 짓는 이혼가정들

    양육비 분쟁… 두번 눈물 짓는 이혼가정들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KBS 2TV 주말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에서는 전 남편 남구(김형범)와 양육비 문제로 다투는 일숙(양정아)의 이야기가 나온다. 일숙은 남편인 남구가 달마다 딸의 양육비를 입금해 주겠다고 약속하자 이혼에 응했지만 남편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일숙은 따지지만 실제로 남편에게 양육비를 받지는 못한다. 이혼한 것도 괴로운데 양육비 때문에 이중고에 시달리는 일숙의 사연은 드라마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서울가정법원 판사들은 이혼에 따르는 위자료나 재산분할 소송보다 친권·양육권·양육비 소송 등이 더 치열하고 장기화되는 경우가 많다고 입을 모은다. A(54·여)씨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두 딸을 키우고 있던 A씨는 4년 전 남편의 외도를 참지 못해 이혼했고, 법원에서 자녀 한 명당 양육비 30만원씩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자영업을 하고 있던 남편은 법원 판결을 받고 딱 2개월만 양육비를 지급했다. 남편이 늘어 놓은말은 궤변에 가까웠다. ‘키우는 사람이 돈을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남편이 재혼해 여유가 없다는 핑계도 함께였다.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A씨는 남편의 무책임한 행동에 손쓸 방법을 몰랐다. 어떻게든 생계를 꾸려 나가기 위해 화장품 방문판매원, 학습지 판매사원, 붕어빵 장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중·고교생 딸들을 키웠다. 자식들을 나 몰라라한 아버지는 결국 친권도 포기했다. A씨는 자녀의 성을 바꿔 버렸다. 최근 이혼한 B(29·여)씨의 사연도 다르지 않다. 고부갈등과 남편의 술버릇 탓에 이혼한 B씨는 남편에게 양육비를 요구했다. 남편은 강남의 수십억원짜리 주상복합 아파트에 살 정도로 부유하지만 양육비를 주지 않고 있다. 남편은 “양육권과 친권포기 각서를 써 주기 전까지는 돈은 한 푼도 내어 주지 못한다.”고 B씨를 협박하고 있다. 참다 못한 B씨는 양육비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B씨는 “양육비에 대한 고민 없이 덜컥 이혼을 했는데 이런 시련이 또 닥칠 줄 몰랐다.”고 토로했다. 남편이 친권·양육권 등을 포기하라며 양육비를 주지 않아 양육을 포기하는 여성이 상당수다. 서울가정법원의 한 판사는 “여전히 경제권을 남편이 쥐고 있는 경우가 많아 소송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자식을 위해서’라는 생각에 양육을 포기하는 여성들이 많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또 다른 판사도 “재산분할을 양육비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는 남성도 많은데, ‘자식은 함께 키우는 것’이라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진아·이민영기자 min@seoul.co.kr
  • [피플 인 포커스] 3일 지방선거 앞둔 캐머런 英총리

    [피플 인 포커스] 3일 지방선거 앞둔 캐머런 英총리

    시련을 모르던 데이비드 캐머런(42) 영국 총리가 정치적 시험대에 섰다. 오는 3일 지방 선거를 앞두고 긴축재정에 따른 반발과 더블딥(경기 이중침체), 내각 각료들이 얽힌 정치 스캔들 등이 겹쳐 입지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부유한 증권 거래인 집안에서 태어나 명문 이튼스쿨과 옥스퍼드대를 졸업하는 등 엘리트 코스만 밟아 200여년 만에 최연소 영국 총리가 된 캐머런이 악재에 어떻게 대처할지 주목된다. 캐머런의 보수당은 여론조사 기관 유고브가 최근 실시한 조사에서 29%의 지지율에 머물렀다. 2004년 이후 최저 수준이다. 보수당이 추락한 틈을 타 제1 야당인 노동당 지지율은 40%까지 치솟았다. 극우정당인 영국독립당(UKIP)의 지지율도 10%까지 상승했다. 중도 보수 표심이 이동한 것이다. 이대로라면 런던시장 등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 5000명을 뽑는 3일 선거에서 보수당이 패배할 것이라는 관측이 힘을 얻는다. 캐머런과 보수당의 위기는 영국을 덮친 ‘3중고’ 때문이라고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가 29일(현지시간) 분석했다. 영국 언론들은 최근 긴축 예산을 둘러싼 논란, 유조차 운전자들의 파업 가능성,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 일가와 내각 각료 간 유착 의혹 등을 집중 보도했다. 해당 이슈들은 모두 집권당에 불리한 내용이다. 영국 경제가 올해 1분기에도 마이너스 성장세를 보이며 더블딥에 빠진 것도 정부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캐머런은 친(親)서민정책 분야의 일부 실정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보수당 정부만이 경제 위기를 극복해 낼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킨다는 전략이다. 실제 유권자 가운데 다수도 여론조사에서 ‘경제 문제에서는 노동당보다 보수당을 믿는다’고 응답했다. 하지만 머독 소유의 언론 그룹 뉴스코퍼레이션(뉴스코프) 스캔들은 캐머런을 계속 옭아맬 공산이 크다. 캐머런 내각의 제레미 헌트 문화장관은 현재 뉴스코프가 위성방송 ‘B스카이B’를 인수하는 과정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캐머런은 헌트를 해임할 수 있지만, 이럴 경우 헌트를 향했던 십자포화가 캐머런을 직접 겨냥하게 될 것이라고 파이낸셜타임스는 분석했다. 한편 정국 주도권을 쥔 노동당 측은 캐머런을 향한 공세 수위를 높이고 있다. 에드 볼스 노동당 예비내각 재무장관은 “캐머런이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비난에 몰두하면서 영국을 불황에 밀어 넣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헌트를 둘러싼 스캔들을 국회 청문회에서 다루자는 야당의 제안을 왜 거절했는지 이유를 밝히라며 캐머런을 압박했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MB 멘토’ 최시중 구속

    ‘MB 멘토’ 최시중 구속

    서울 서초구 양재동 복합유통센터 파이시티 인허가 비리 의혹을 수사 중인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부장 최재경)는 30일 ㈜파이시티 이정배(55) 전 대표로부터 인허가 청탁과 함께 8억여원을 받은 최시중(75) 전 방송통신위원장을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 수감했다. 검찰은 또 박영준(52) 전 지식경제부 차관을 2일 오전 소환해 이 전 대표로부터 청탁과 함께 11억여원의 금품을 받았는지 조사하기로 했다. 이명박 정권의 최고 실세이자 ‘대통령의 멘토’로 불린 최 전 위원장의 구속으로 이번 사건 수사는 최대 고비를 넘어섰다. 이에 따라 박 전 차관과 서울시 고위 간부 등으로 검찰 수사가 확대될 전망이다. 박병삼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판사는 “금품 공여자의 일관된 진술 등 범죄 혐의가 소명되고 수사 진행 경과에 비춰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다.”고 영장 발부 사유를 밝혔다. 최 전 위원장은 건설브로커 이동율(60·구속)씨를 통해 이 전 대표로부터 2006년 7월부터 2008년 2월까지 13차례에 걸쳐 8억여원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다. 최 전 위원장은 취재진에게 “뭔가 많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면서 “큰 시련이라 생각하고 그 시련을 잘 극복해 나가겠다.”고 말한 뒤 서울구치소로 향했다. 앞서 검찰은 이날 영장실질심사에서 건설브로커 이씨의 운전기사 최모(44·구속)씨가 이씨의 차 트렁크에 실린 돈을 휴대전화로 찍은 사진을 동봉해 최 전 위원장에게 보낸 협박 편지 내용을 공개하며 ‘대가성’ 입증에 주력했다. 편지에는 ‘그 돈의 성격을 잘 아시겠지만 시청에 말씀 좀 잘해 달라는 돈인 걸 알지 않느냐. 8억원의 현금을 만드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검찰은 또 박 전 차관으로부터 파이시티 인허가 청탁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강철원(47) 전 서울시 정무조정실장이 이날 중국에서 귀국하자마자 불러 당시 상황 등을 조사했다. 한편 사정 당국은 박 전 차관이 경북 포항 지역 기업인으로 친분이 깊은 이동조(59) 제이엔테크 회장을 통해 카메룬에 머물고 있는 CNK인터내셔널 오덕균(46) 대표와 검찰 수사 상황 등과 관련해 연락을 주고받은 정황을 포착했다. 사정 당국 관계자는 이날 “오 대표는 지난 1월 이 회장 이메일을 통해 박 전 차관에게 ‘800여억원 횡령이라니 말이 되느냐. 억울하다. 귀국해서 모든 것을 밝히겠다’며 따졌고 이에 박 전 차관은 오 대표에게 메일을 보내 귀국을 적극 만류했다.”고 밝혔다. 오 대표는 지난해 10월 카메룬으로 출국한 뒤 지금까지 귀국하지 않고 있으며 검찰은 여권을 무효화하고 인터폴에 수배한 상태다. 검찰은 이 회장이 파이시티 측으로부터 박 전 차관이 받은 돈 등을 ‘세탁’해 온 정황을 포착, 이 회장 자택 등에 대해 지난 28일 전격 압수수색하는 등 이 회장과 박 전 차관의 커넥션에 주목하고 있다. 김승훈·안석기자 hunnam@seoul.co.kr
  • 친노·중부·호남 ‘3각편대’로… 민주 대선용 새틀짜기 시작

    친노·중부·호남 ‘3각편대’로… 민주 대선용 새틀짜기 시작

    민주통합당의 친노(친노무현) 진영이 대선용 새틀짜기를 시작했다. 당 대표는 충청 출신의 전략가 이해찬 전 총리, 원내대표는 호남 출신 재사 박지원 최고위원이 맡는 방안이 추진된다. 친노와 호남의 화합을 바탕으로 영남 출신 문재인 상임고문이나 김두관 경남지사, 수도권의 손학규·정세균 상임고문을 경쟁시켜 대권을 거머쥔다는 구상이다. 1·15 전당대회를 통해 민주당을 장악한 친노세력이 다음 수순으로 호남 끌어안기에 착수했다. 친노와 비노가 갈등하면 대선 승리를 위한 과반 민심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총선 교훈을 바탕으로 당의 노선, 지역 연대 전략을 전면 조정하겠다는 의지다. 하지만 실현하기에는 당 안팎의 역풍 등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친노 진영은 당 소속 의원·당선자 상대 조사를 통해 부산의 친노와 충청권 등 중부지역, 그리고 호남의 DJ(김대중 전 대통령) 직계가 3각 편대 진용을 짜면 대선에서 이길 수 있다고 결론내렸다. 구상의 정점은 이 전 총리다. 이 전 총리는 김원기·문재인 상임고문 등 친노 원로그룹과 동교동계 권노갑 상임고문에게도 구상을 설명, 동의를 구했다. 이 구상은 앞서 지난 24일 문 상임고문이 박 최고위원을 만나 제시한 내용이다. “이제 포스트노무현 시대를 고민해야 한다. 친노·비노라는 분열적 프레임을 극복하지 않으면 대선이 쉽지 않다. 힘을 합해 통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 최고위원은 즉답을 하지 않았다. 이에 이 전 총리가 나섰다. 이튿날인 25일 오전 박 최고위원을 만나 거듭 설득했다. 그러나 역시 동의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그러자 이 전 총리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등이 참여하고 있는 ‘희망 2013·승리 2012 원탁회의’ 원로들을 앞세웠다. 이 친노 진영 구상의 종착점 중 하나는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다. 그를 민주당 대권 경쟁에 들어오게 해 드라마틱한 국민경선을 이끌어 내겠다는 것이다. 지난 전당대회에서 한명숙, 문성근, 박영선 후보에 이어 최고위원 4위에 그치며 좁아진 당내 입지를 확인한 박 최고위원으로서는 독자적으로 당 대표나 대선후보가 될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 차선책으로 원내대표 행을 택해 당내 주도권을 되찾은 뒤 대선후보 결정 과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복안인 것으로 알려졌다. 친노 진영의 구상은 그러나 당장의 역풍을 돌파해도 고비가 많다. 5월 4일 원내대표 경선과 6월 9일 대표 경선 등이 1차 고비다. 역대 민주당 원내대표 경선에선 이변이 잦았다. 1994년(당시에는 원내총무)엔 신기하 전 의원이 주류인 동교동계의 압도적 지지를 받던 김태식 전 의원에게 이겼다. 이듬해엔 역시 동교동계의 지지를 받던 조순형 의원이 박상천 의원에게 졌다. 이후 열린우리당 시절에도 이변이 잦았다.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3주기 뒤 정국 상황도 급변할 수 있다. 야당이나 국민들이 노 전 대통령의 3년상 기간 동안 자제했던 노 전 대통령과 친노세력에 대한 재평가를 실시, 대공세를 펴면 친노세력이 시련을 맞을 수 있다. 지금까지는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애틋함 때문에 자제했던 공세가 불을 뿜을 수도 있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의 민정수석비서관과 비서실장 등을 지낸 문 고문이 참여정부의 실정에 대한 책임론에 부닥치면 친노진영의 구상이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 이춘규 선임기자·이현정기자 taein@seoul.co.kr
  • 분단·체제의 희생양 북녘동포의 수난 그대로…

    북한에서 중학교 교사였던 정선화는 한국의 탈북자 지원기관인 하나원에 있다. 북한에서는 대학교수였던 아버지와 현숙한 어머니 사이에서 어려움을 모르고 살았다. 어렵사리 들어온 한국에서 자유를 찾은 듯하지만, 밤이 오면 전신을 으깨던 치욕과 고통 속으로 끌려간다. 선화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여성 탈북작가 김유경은 선화의 몸과 시선을 빌려 탈북자의 삶을 그린 첫 장편소설 ‘청춘연가’(웅진지식하우스 펴냄)를 냈다. 북 조선작가동맹 출신으로, 2000년대에 탈북한 작가는 체제 유지를 위해 문학이 존재하는 곳에서 벗어나 자유를 담은 글쓰기를 시도했고, 자신과 같은 탈북자들의 현실을 알리는 것으로 글재주를 풀어냈다. 북한에는 1990년대 중반 경제난이 닥쳤다. 소위 ‘고난의 행군’이다. 선화네 가족에도 배급이 끊겼다. 거리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넘쳐 났고, 아이들은 꽃제비가 되거나 도둑질을 하다가 목숨을 잃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병을 얻자 선화는 돈 몇 푼에 중국에 팔려갔다. 덜컥 딸까지 낳았지만 선화는 견딜 수 없어 결국, 딸을 두고 탈출했고, 한국에 들어왔다. 한국에서 선화는 대학교수 딸도, 중학교 교사도 아니다. 그저 탈북자일 뿐이다. 선화처럼 중국에 팔려 갔다가 딸과 함께 탈출한 복녀, 꽃제비였던 경옥, 평양음악무용대학에 다니며 부유했던 미선 등도 하나원에서는 모두 같은 처지이다. 작가는 선화뿐만 아니라 복녀와 경옥, 미선 등 등장인물들의 삶에 골고루, 또 생생하게 힘을 쏟았다. ‘있을 법한’ 인물이 아니라, ‘분명 존재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려주고 싶었을지 모른다. 책날개에는 작가의 말이 담겨 있다. “숨어서 간신히 손만 내밀고 세상에 이 소설을 보낸다.”고 돼 있다.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 터라, 작가와 이메일로 인터뷰를 했다. “이 삶은 현재진행형이며 그 자체가 인간사회에 던지는 강력한 메시지이자 우리 민족이 숙명적으로 풀어야 할 시대적 과제”라는 작가는 “분단시대와 체제의 희생양인 북한인들, 탈북자들의 수난을 흘러가는 물처럼 그냥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을 늘 갖고 있고, 작가로서 문학으로 이에 동참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고 집필 의도를 털어놨다.“ ‘청춘연가’라는 제목에는 “그곳에도 청춘연가가 울리길 바라는 희망과 가능성을 담았다.”고 했다. 하지만 주인공 선화는 치유할 수 없는 병에 걸려 죽음을 눈앞에 둔 처지다. 탈북자의 행복은 허용되지 않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탈북자들은 죽음 이상의 고통을 이겨낸 사람들입니다. 처절한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고 한국에 정착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신음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선화가 겪은 고통은 그중 하나일 뿐 특별한 아픔이 아닐 겁니다.” 작가의 말은 다소 냉정해 보이지만, 독자는 선화의 죽음으로 선화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치유와 희망을 던져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데스크 시각] 자스민, 오원춘과 재외동포/김성곤 산업부 전문기자

    [데스크 시각] 자스민, 오원춘과 재외동포/김성곤 산업부 전문기자

    1980~90년대 일본 정계에 아라이 쇼케라는 정치인이 있었다. 본래는 대장성 관료였지만 정치에 입문, 재수 끝에 중의원에 당선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정치 스캔들에 연루돼 1998년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부친은 장례식에서 “우리들은 부초(浮草)와 같습니다. 고향도 조국도 없습니다.”라는 고별사를 하며 울먹인다. 아라이 쇼케의 본명은 박경재, 제일동포 3세다. 결혼은 일본 여인과 했고, 이름도 일본 이름을 썼다. 그때 이름은 아라이 다케시였다. 국적은 한국이었다. 하지만 때론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은 차별과 이미 일본인으로 성장해 버린 그의 정체성 갈등 등 여러가지 이유로 1962년 일본으로 귀화를 신청, 우여곡절 끝에 5년 만에 일본인이 된다. 이후 그는 우리의 고시에 해당하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 대장성에서 근무를 하다가 정치로 방향을 전환해 중의원에 당선(1986년)된다. 하지만 그 이면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선거전에서 그가 한국인이라는 가계도가 나돌고, 첩자라는 흑색선전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런 시련을 극복하고 그는 정치에서도 한동안 잘나갔지만 증권투자 스캔들은 극복하지 못한다. 도쿄지검 특수부가 수사에 나서고, 당 안팎의 비난이 그에게 집중되자 죽기 전 “다들 했는데 유독 왜 나만…민족차별 아닌가.”라고 울분을 쏟아내기도 했단다. ‘4·11 총선’에서 한 정당의 비례대표로 결혼이주 여성인 필리핀계 이자스민이 당선됐다. 선거 전엔 오원춘이라는 조선족 교포가 행한 엽기적인 20대 여인 살해사건이 알려지면서 외국인 이주자에 대한 비난과 루머가 확산되고 있다. 지지한 정당의 패배, 그리고 경찰의 안이한 대응 탓에 평범한 우리의 이웃이 잔인한 범죄의 희생자가 된 데 따른 분노라는 점은 이해한다. 따라서 일과성으로 그치고 시간이 흐르면 일상을 되찾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자칫 이번 일을 계기로 외국인 혐오증(제노포비아)이 더 심각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외국인 국적 취득자가 100만명을 넘어선 지 오래다. 외국에서 들어오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100년이 넘는 이민역사에다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의 재외동포는 700만명을 헤아린다. 이른바 국제화 시대이다. 어느 나라든지, 심지어 북한까지도 외국인을 배척하고 살 수 없게 국제 환경은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순기능도 있고, 역기능도 있다. 하지만 외국인 거주자 증가는 장점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또 싫다고 내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우리나라 거주 외국인 가운데 상당수가 폐수배출업종이나 건설현장, 서비스업 등 3D 업종에 종사한다. 특히 건설업 종사자도 20여만명을 헤아린다고 한다. 이들이 일거에 빠져나간다면 우리 경제가 지탱하기 힘들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5000만명의 인구에 120만~130만명의 외국인은 그리 많은 수는 아니다. 한 도시의 20%를 넘는 이주 외국인 때문에 정체성 위기를 겪는 유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은 820만명의 인구 가운데 자국민은 100만명이 채 안 된다. 카타르는 92만명 중 자국민은 20여만명에 불과하다.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상태에서도 큰 탈 없이 이들은 국가를 유지한다. 이달 초 중동에 다녀왔다. 한 산유국을 방문할 때 입국장에서 길게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던 제3국 근로자들을 볼 수 있었다. 이에 비해 한국인은 간편하게 입국절차를 밟을 수 있었다. 일부 국가는 비자도 필요 없었다. 30여년 전 우리 근로자들이 중동현장에 나갈 때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는 게 현지 주재원의 얘기다. 외국인 범죄자에 대한 단죄와 외국인 관련 치안의 허점 등 정부의 실책은 따져야 한다. 하지만 극소수 때문에 대다수 선량한 외국인 이주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심해져서는 안 된다. 지금 이 순간 어느 나라에선가 편견 때문에 고통받는 우리 교포들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자. sunggone@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8)정도전과 이방원

    [선택! 역사를 갈랐다] (8)정도전과 이방원

    1398년(태조 7) 음력 8월 26일 밤, 정도전은 이방원과 마주하였다. 정도전은 살려달라고 부탁했지만, 이방원은 거절했다. 1차 왕자의 난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정도전이 꾸었던 꿈은 뒤틀리고 변하였다. 정도전과 이방원, 두 사람은 조선 초기의 신권과 왕권론을 대표하는 역사적 라이벌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정말 역사적 라이벌로 이해할 수 있을까? 두 사람은 나이 차이부터 상당했다. 1392년 조선이 만들어질 때 정도전은 50세의 중년, 이방원은 25세의 청년이었다. 당시로는 아버지와 아들뻘 정도의 차이였다. 혹시 1383년(우왕 9) 정도전이 처음 이성계를 만났던 함주 막사에서 보았던 이방원은 16살의 똑똑하고 야심에 찬 아이로 기억했을 수 있다. 그만큼 라이벌 의식을 느끼기 어렵다는 뜻이다. 두 사람이 살아온 길도 조금 달랐다. 정도전은 경상도 향리 집안 출신이고, 어머니의 혈통 문제로 곤란을 겪기도 했다. 귀족 가문이 얽혀 있는 중앙정계에서 그는 과거시험과 자신의 실력만으로 권력의 정글을 헤쳐나가야 했다. 이 때문에 정도전은 유배를 갔다. 그 후에도 노골적으로 차별을 받았다. 자신이 세운 삼각산 아래 학교를 옮겨야 했고, 이사도 여러 차례 했었다. 아마도 그의 성격은 원칙적이고, 때로 과격했던 것 같다. 이방원은 그보다 좋은 주변 환경에서 좋은 조건에서 살았다. 그는 이성계가 중앙 정계에 등장한 이후에 태어났다. 또한, 이성계의 많은 아들 중에서 드물게 과거시험에 합격했다. 벼슬길에서도 크게 어려운 일을 겪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귀족적 나약함보다 정치적 판단력과 추진력이 있었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살해하는 과정은 그의 냉혹함과 판단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새 술은 새 부대로’ 의견 모은 정도전과 이방원 정도전과 이방원이 당면했던 현실은 국가운영의 문제였다. 고려왕조는 힘들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국제적으로는 새롭게 등장한 명나라와 이전 원나라 사이에서 방황했다. 더구나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은 견디기 쉽지 않은 시련이었다. 특히 왜구의 침략은 시간이 갈수록 더해졌고, 바닷가 지역 사람들을 삶의 터전에서 쫓아냈다. 국내 상황은 더 문제였다. 고려의 귀족들은 지배층이면서도 사회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들은 권력과 경제력을 이용해 남의 땅을 삼켰다. 넓어진 땅에 필요한 일손은 백성을 노비로 만들어 보충했다. 이들에겐 법적 소송도 먹히지 않았다. 귀족들은 자신의 수하에 있던 사람들을 관료로 만들었다. 세금을 내야 할 땅과 군대에 가야 할 사람들이 계속 줄어 갔다. 한마디로 국가운영이 파탄나고 있었다. 새로운 질서와 혁신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공감했다. 여기까지가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정도전은 현실을 바꾸기 위해 이성계와 손잡았다. 고려말 여러 지식인이 정도전처럼 개혁을 생각했다. 그들은 성리학을 공통된 이념적 무기로 삼아 현실에 적용하려 했다. 자신들의 학문을 실학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본 불교는 인륜을 해치는 껍데기 학문이었다.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와 개혁을 꿈꾸었던 세력이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된 사건이었다. 당시 요동 정벌을 추진했던 우왕과 최영 장군 등은 구세력으로 물러나야 했다. 그렇지만, 개혁세력은 점차 분화되어 갔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고 싶어한 정도전과 조준. 적어도 고려왕조의 틀은 유지하려 한 이색, 권근, 정몽주 등은 대립해야 했다. 정몽주의 죽음은 고려의 가을을 재촉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정도전, 고려 귀족을 관료로 대체를 시도하다 정도전은 정치의 근본이 민(民)이라고 했다. 유교 정치의 원리인 셈이다. 권력이 이곳에서 출발하고, 통치자가 민심을 잃으면 덕(德)이 있는 다른 사람에게 권력을 넘긴다. 그래야만 이성계가 국왕이 되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이 백성에서 선비가 등장해서 관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도전에게 선비와 농민은 둘이 아니었다. 그의 의도는 과거 문벌 귀족들이 차지했던 관료 자리를 더 많은 계층과 지역에 개방하는 것에 있었다. 이를 위해 정도전은 지방관 등의 천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도록 했다. 또한, 관료들은 통치를 위한 지식과 능력이 필요했기에 반드시 학교를 거쳐 과거시험을 보도록 했다. 그는 고려시대처럼 과거 시험관과 합격자 사이의 개인적 인맥이 생기는 것을 막고, 이를 위해 사립학교를 약화시켰다. 정도전이 추구한 것은 중앙집권적인 국가운영이다. 그는 중국 고대의 제도인 6부를 원리로 한 중앙 관제를 만들었다. 말하자면 권력이 중앙에 모여 마치 물고기를 잡는 그물처럼 행정망이 펼쳐지는 그런 국가였다. 고려의 행정체계는 마치 벌집처럼 복잡한 자율성을 지녔다. 이 체계가 고려말 국가위기에 대응하는 일에 무기력했다. 국가 자원의 효율적 분배와 동원을 어렵게 만들었던 것이다. 정도전은 이를 중앙에서 효율적으로 처리하고, 가문과 개인 등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지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조선의 중앙집권적인 국가운영방식은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탄생했다. ●이방원, 고려 귀족문벌 다시 정치로 흡수하다 이성계가 집권한 이후 정도전이 당면한 정치적 문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국왕의 후계자 문제, 다른 하나는 명과의 외교 문제였다. 후계자 문제는 빨리 정리되었다. 이성계의 둘째 부인인 강씨 소생의 막내가 후계자로 결정된 것이다. 이성계는 첫째 부인인 한씨 소생으로 6명의 아들을 두었고, 이방원이 그중에서 다섯째 아들이었다. 정도전 등은 공로가 있는 아들을 세우자는 의견이었지만,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이 문제는 정도전이 죽게 되는 원인이 된다. 또 큰 문제는 명과의 외교 마찰이었다. 명 태조인 주원장은 조선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풀지 않았다. 주원장은 조선이 명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명에 사신으로 왔던 이방원 등에 대해 좋은 대우를 해주었다. 특히 명은 외교 문서의 문구가 건방지다는 이유로, 조선에 문서 작성자를 보내라고 요구했다. 명은 정도전에게 책임의 화살을 돌렸다. 정도전은 이 문제에 정면 대응하려 했다. 그는 요동 정벌이라는 카드를 꺼냈다. 그는 이를 통해 정권에 위협이 될 최대 변수, 즉 왕자와 개국 공신들이 거느린 사병(私兵) 문제를 해결하려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요동 정벌 추진은 조준 등과 같은 개혁파까지 이를 반대하게 한 카드가 되었다. 개국 공신들도 자신의 사병을 내놓아야 하기 때문에 여기에 찬동하지 않았다. 이방원은 이런 분위기를 놓치지 않았고, 결국 1398년(태조 7)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방원은 일단 형을 국왕의 자리에 앉혔다. 그렇지만, 그는 본인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한편, 수하들을 요직에 포진시켰다. 이방원이 주로 손을 잡았던 세력은 현실 개혁이 아닌 개선을 주장했던 세력들이다. 이들은 보수파는 아니지만, 기득권층의 이해는 나름대로 보존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던 사람들이다. 고려말 이색 아래에서 공부했던 권근, 하륜 등이 그들이었다. 물론 이방원의 뛰어난 정치적 감각은 이를 뛰어넘고 있었다. 그는 숙청이 끝난 이후에는 모든 정치세력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개혁파였던 조준은 영의정으로 내세웠고, 사돈 관계를 맺었다. 또한 자신이 살해한 정몽주를 복권하고, 정도전의 동생과 아들의 벼슬길도 열어 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과거 귀족 가문으로 중심을 재편하였다. 단, 이들 가문 간의 결속력을 막고자 종실 세력을 키웠다. 한마디로 이방원은 정도전처럼 중앙 정계에 지방세력을 끌어들이지 않고, 이들의 참여를 막았다. 대신에 이들에게는 군역의 면제나 면세와 같은 특권을 주었다. 이처럼 정도전이 추구했던 개혁의 방향은 이방원에 의해 변질되었다. ●일본 학자의 정치적 방법론이 조선사를 왜곡? 그렇다면, 이방원은 왕권 강화론자, 정도전은 신권론자였을까? 여기에는 국가 권력을 보는 시각의 문제가 전제된다. 원래 왕권과 신권의 대립 구도로 정치사를 이해하려 했던 학자들은 일본 학자들이었다. 그들이 메이지 유신을 겪으면서 천황과 봉건 영주의 대결로 정치사를 이해하려는 방법론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왕권이나 신권 등의 말은 모호하고 피상적이다. 예컨대 외척이나 소수 공신에게 특권을 주는 것은 신권의 강화이면서 국왕권의 강화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오해가 바로 정도전의 경우이다. 그는 총재인 재상이 행정실무를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국왕은 도덕적으로 완성된 성인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재상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주장에는 역사적 이유가 있었다. 정도전은 공민왕 이후 여러 고려 국왕들의 파행적인 정치운용과 도덕적 문제를 목격했다. 그는 조선에서 국왕이 소수 귀족가문과 결탁하여 개인적 이익을 취하려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가 재상이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측근인 남은과 함께 군사권을 태조 이성계가 장악해야 한다고 건의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비록 그의 개혁구도는 이방원에 의해 변질되었지만, 그가 지향했던 중앙집권체제는 조선 왕조를 규정짓는 설계도가 되었다. 김인호(광운대 교양학부 초빙교수)
  • [씨줄날줄] 바람/임태순 논설위원

    바람만큼 인류 문명이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것도 없다. 삼국유사에 보면 환웅이 인간을 다스리려 하늘에서 내려올 때 우사(雨師), 운사(雲師) 등 비와 구름을 가져오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바람인 풍백(風伯)이었다. 비, 구름보다도 바람이 미치는 영향이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기 순환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바람이다. 따뜻한 공기가 위로 올라가면 찬 공기가 내려와 빈 공간을 메워주게 된다. 바람은 바다와 육지, 고도 등 지표면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물론 지구 회전 에너지의 영향도 받는다. 바람은 위도에 따라 규칙적인 흐름을 보이는데, 적도 위아래의 아열대 지역에서 적도를 향해 서서히 부는 바람이 무역풍이다. 이 북동무역풍을 이용해 아메리카 대륙에 닿은 사람이 콜럼버스다. 15~17세기 대항해의 시대에 유럽 항해가들이 무역풍으로 지구의 지평을 넓혔으니 무역풍(貿易風)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도 당연하다. 반면 적도 북반구와 남반구 각각 위도 30도와 60도 사이에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부는 바람이 편서풍이다. 편서풍은 따뜻하고 온난한 북대서양 해류를 유럽대륙으로 몰고 와 유럽지역은 위도가 높은데도 겨울철에 우리나라에 비해 덜 춥다. 삼국지에서 조조에게 적벽대전의 패배를 안긴 것도 바람이었다. 강하게 불어오는 남동풍에 조조의 배는 싸움 한번 변변히 해보지 못하고 불길에 휩싸였다. 바람은 시인들의 인문학적 상상력, 감수성을 자극한다. 영국의 셀리가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다.’는 ‘서풍부’(西風賦)의 시상을 떠올린 곳도 이탈리아 피렌체의 숲에서 불어오는 서풍이었다. 서정주도 ‘자화상’에서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라고 했다. 윤동주가 ‘서시’에서 부끄러운 과거를 통절히 반성하면서 괴로워한 것도 ‘잎새에 이는 바람’이었다. 바람은 이처럼 희망에서 시련과 역경이 되기도 하고, 고백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전국 곳곳에 많은 피해를 안긴 사상 유례 없는 봄 강풍이 서서히 물러가고 있다. 4월이면 약해져야 할 시베리아 고기압세력이 늦게까지 사그라지지 않으면서 이상 저온 현상까지 몰고와 희망과 생명의 봄을 사납게 만든 것이다. 농작물이 해를 입은 것은 물론 강풍으로 전력 공급이 끊겨 지하철이 멈추는 사고가 나기도 했다. 오늘은 향후 4년을 책임질 국회의원을 뽑는 날이다. 민심은 선거 때마다 요동쳐 변화를 가져왔다. 이번 선거에서도 민심은 바람을 탈 것이다. 유권자들에게 무슨 바람이 불어 어떤 정치 지형도를 만들어낼지 궁금하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마흔한 살, 팔백열세 번째 등판합니다

    마흔한 살, 팔백열세 번째 등판합니다

    노력만으로 스타플레이어가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노력이 없으면 프로야구판에서 오래 살아남기 힘들다. 최고, 최다만큼이나 최장, 최고령 기록을 인정해 줘야 하는 이유다. 현역 최고령 투수에 야수 포함 최고령 선수인 LG 류택현(41)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2010년 방출 뒤 사비 털어 수술·재활 류택현이 두 경기에만 더 등판하면 조웅천 SK 코치가 갖고 있는 투수 통산 최다 경기 출장기록(813경기)을 경신하게 된다. 1994년 동국대 졸업 후 1차 지명으로 OB(현 두산)에 입단한 류택현은 1999년 LG로 이적한 뒤 2010년까지 중간계투 요원으로 활약했다. 2009년 프로 최초로 100홀드를 달성했고, 17시즌을 뛰면서 40경기 이상 출장한 것이 10시즌이나 될 정도로 성실하게 선수생활을 했다. 또 103개의 홀드를 기록, 통산 홀드 순위에서도 SK 정우람(117개)에 이어 2위를 달리고 있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개미처럼, 꿀벌처럼 묵묵히 달려온 그에게 시련이 찾아온 것은 2010년이었다. 왼쪽 팔꿈치 부상 때문에 시즌을 마친 뒤 방출됐다. 여느 마흔 살 투수처럼 조용히 사라질 수도 있었지만 류택현은 달랐다. 자기 돈을 들여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을 했고 기약 없는 재활훈련에 돌입했다. 올 시즌 개막 전, LG는 1년 만에 그를 플레잉 코치로 불러들였다. ●올초 플레잉코치로 복귀… 감격 승리 그리고 지난 8일 대구 삼성전, 그에게 기회가 왔다. 0-0으로 팽팽하던 7회 말 2사 2루 상황에 마운드에 섰다. 타석에는 지난 시즌 홈런왕인 4번타자 최형우가 들어섰다. 2010년 7월 18일 같은 자리에 오른 지 630일 만에 1군에서 던지는 공이었다. 초구로 던진 커브에 최형우의 방망이가 나왔다. 자신감을 얻은 류택현은 공 4개 만에 최형우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이후 류택현은 8회 말 2사 1루에서 마운드를 물러날 때까지 1이닝 동안 4타자를 상대로 1안타 1탈삼진 무실점으로 활약했다. LG는 3-2로 이겼고 류택현은 승리투수가 됐다. 2009년 8월 22일 롯데전 이후 무려 960일 만의 승리였다. 경기가 끝난 뒤 그는 “너무 뿌듯해서 혼자 그 기분을 느꼈다. 지난해 개막전을 구리에서 TV로 볼 때만 해도 이런 날을 상상하기 어려웠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의 812번째 경기였다. ●어제 4경기는 모두 비로 취소 한편 10일 열릴 예정이던 KIA-삼성(광주), 넥센-SK(목동), 한화-두산(청주), LG-롯데(잠실) 네 경기 모두 우천으로 취소됐다. 김민희기자 haru@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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