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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故변두섭,DJ서 ‘연예계 마이더스의 손’ 입지전적 인물

    故변두섭,DJ서 ‘연예계 마이더스의 손’ 입지전적 인물

    ‘연예계 마이더스의 손’으로 불린 변두섭(54·예명 변대윤) 예당 엔터테인먼트 회장이 4일 오전 자신의 사무실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서울 서초경찰서는 변 회장이 서초동에 위치한 예당 사무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고 밝혔다. 변 회장을 발견한 사무실 직원이 경찰에 신고했으며 사무실에서는 유서가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 관계자는 “타살로 볼 만한 정황이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면서 “유족 등을 상대로 사망 원인 등을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기 가수 양수경(46)의 남편인 변 회장은 연예계에서는 입지전적인 인물로 통한다. 전남 화순 출신으로 광주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10대에 상경해 레스토랑 DJ로 일하다가 1980년대 초 예당기획을 만들어 가요계에 뛰어들었다. 이후 1992년 예당음향을 설립한 뒤 2000년 예당엔터테인먼트로 상호를 변경하고 2001년 코스닥 업체로 등록하는 등 승승장구하며 30여년간 가요계의 마이더스 손으로 불렸다. 최성수, 듀스, 이정현, 조PD 등 스타를 배출했고 서태지와 이승철 등 유명 가수들도 예당을 통해 음반을 발매하면서 스타 제작자로서 이름을 알렸다. 2001년 종합 엔터테인먼트 회사로 방향을 바꾼 뒤에는 최수종, 최지우, 이정재 등 배우를 영입하면서 급속도로 성장했다. 현재 예당 엔터테인먼트에는 가수 임재범, 알리 등이 소속돼 있다.  1991년 암으로 투병하는 등 시련도 있었으나 암을 극복한 뒤 1998년 자신이 성공시킨 가수 양수경과 결혼해 화제가 됐다. 1996년 한국연예제작자협의회 이사, 한국영상음반협회 이사도 역임했다.  한편 예당 측은 이날 오후 보도자료를 내고 “변 회장의 사인은 자살이 아닌 과로사”라고 주장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다.  윤샘이나 기자 sam@seoul.co.kr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사설] 박 정부 100일, 이제 시스템으로 움직일 때다

    박근혜 대통령이 내일로 대통령에 취임한 지 100일을 맞는다. 이 기간은 임기 5년 국정의 틀을 짜는 소중한 시간이었는데 인사 파동, 윤창중 전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 북한의 3차 핵실험, 개성공단 폐쇄 등 안팎의 시련과 도전으로 순탄치 않았다. 박 대통령 스스로 “어떻게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라고 말할 만큼 일도 많고 탈도 많았다. 갤럽의 여론조사를 통해 본 박 대통령의 100일 성적표는 중간 정도다. 역대 대통령의 취임 100일 때 지지율을 보면 박 대통령의 지지율(52%)은 김영삼 전 대통령(83%)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 이명박(21%)·노무현(40%) 전 대통령보다는 높다. 지지율에 일희일비할 것은 아니지만 대통령은 향후 더 좋은 성적표를 받기 위해 무엇에 더 신경 쓰고, 무엇에 더 매진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때다. 박 대통령은 “신(神)이 나에게 48시간을 주셨으면 했다”고 할 만큼 퇴근 후에도 각종 보고서를 챙겨 보는 등 국정 운영에 매진해 왔다. 하지만 여론조사를 보듯 ‘준비된 여성대통령’이라는 기대에 다소 미흡한 것도 사실이다. 대북·외교 정책에 있어서 원칙과 신뢰를 바탕으로 안정감을 보여줘 후한 점수를 받는 데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평가가 그다지 높지 않은 것은 총리·장관 후보자들의 잇따른 낙마에서 보인 인사 난맥상과 불통 논란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부실한 인사검증시스템도 한 원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박 대통령의 ‘나홀로’ 인사스타일이 고쳐지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인사 실패는 반복될 가능성이 클 수밖에 없다. 그간 박 대통령은 ‘1인 리더십’을 보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의 지시를 따르라’는 식이어서 대화와 소통은 상당히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된 지 52일 지나 통과된 것도 야권과의 소통 부족에 기인했는데 여당, 내각과의 관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각종 회의에서 1만 2000자, A4 용지 15쪽 분량의 말을 대통령이 쏟아내고 장관이나 수석 등 참모들은 깨알같이 받아쓰는 데만 여념이 없다면 대통령이 강조하는 ‘창조’는 꽃필 수 없다. 지난 100일은 논밭에 씨를 뿌리는 파종의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물과 거름을 듬뿍 주며 정성을 기울여야 수확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근혜 정부의 성패는 사실 지금부터가 더 중요하다. 대통령이 나서 모든 것을 지시하려고만 할 게 아니라 총리·장관들이 전면에 나서도록 해 국정 전반에 ‘창조 행정’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시쳇말로 ‘SSKK’(시키면 시키는 대로, 까라면 까고) 공무원들만 넘쳐날 것이다. 대통령은 한발 짝 물러서 긴 호흡으로 큰 그림을 그리고 총리·장관들이 중심이 돼 안정적 시스템으로 국정이 굴러가도록 해야 한다.
  • [명사가 걸어온 길] 자수성가 정열과 집념의 여성 CEO 이길여

    [명사가 걸어온 길] 자수성가 정열과 집념의 여성 CEO 이길여

    가천대 길병원은 얼마 전 지역 병원으로서는 유일하게 삼성서울병원, 세브란스병원 등 내로라하는 대형 병원들과 나란히 2013년도 ‘연구중심병원’으로 선정됐다. 또 가천대 이길여 암·당뇨연구원의 교수진이 참여해 ‘식욕억제물질’을 처음 발견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 연구원은 가천대 길병원·뇌융합과학원 등과 함께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뿐만 아니다. 지난달에는 24년 전 가천대 길병원에서 태어난 네 쌍둥이 자매 중 세 명이 합동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네 쌍둥이가 무사히 태어날 확률은 70만분의1 정도였음에도 이길여 회장의 노력으로 모두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었다. 이 회장은 형편이 넉넉지 못한 네 쌍둥이 부모에게서는 병원비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들이 대학에 입학하면 등록금을 내 줄테니 연락을 달라”는 당부까지 했다. 네 쌍둥이 자매는 현재 길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 열정과 집념의 여인으로 알려진 이 회장의 일생을 상·하로 나눠 2주에 걸쳐 싣는다. 만약 당신이 자식에게 단 하나의 재능을 물려줄 수 있다면 무엇을 줄 것인가. ‘뜨거운 열정’을 주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당신의 열정 온도는 몇도나 되는가. 잘 모르겠다면 이런 시 한편 감상해보자.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길이 있다/길이 끝나는 곳에서도/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스스로 봄길이 되어/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이 흩어져도/보라/사랑이 끝나는 곳에서도/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스스로 사랑이 되어/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절망을 극복하고 닦아낸 새 희망의 길을 노래한, 시인 정호승의 ‘봄길’이다. 그 희망의 길은 어떻게 닦아야 할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흔들리지 않는 집념과 6월의 태양처럼 뜨거운 정열. 그렇게 그 길을 만들어냈다. 그랬다. 한 여자의 일생에서 ‘열정의 수은주’는 한번도 눈금이 변한 적이 없었다. 과거나 지금이나 그 열정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지나온 걸음걸음이 모두 범상치 않은 흔적으로 남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보증금 없는 병원, 최초 진료카드 시스템 도입, 여성의사 최초 의료법인 설립, 국내 최초 해외 교육원 개관 등 ‘최초’와 ‘최고’ 등 여러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그러나 이들을 한마디로 압축하자면 ‘건국 이후 가장 크게 자수성가한 여성 CEO’라는 평가다. 2011년 경원대, 경원전문대, 가천의대 등을 ‘가천대’로 통합시킨도 것도 의사로서뿐만 아니라 최고경영자의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사건’이었다. 또한 시사주간지 뉴스위크 선정 ‘2012년 세계의 위대한 여성 150인’에 선정될 만큼 국제적으로도 유명하다. 가천길재단을 진두지휘하는 이길여 회장이다. 가천길재단은 가천대 길병원, 가천대 글로벌캠퍼스, 가천대 메디컬캠퍼스, 가천문화재단, 신명여자고등학교, 새생명 찾아주기운동본부, 가천 미추홀 청소년 봉사단 등으로 이루어졌다. 이 회장을 가리켜 어떤 사람이냐고 새삼 물어본다면 답으로 압축할 수 있는 키워드가 몇 있다. 첫번째가 결코 식지 않는 ‘열정’이고, 두번째는 바람을 일으키는 ‘바람개비’이며, 세번째는 남을 위한 봉사정신이 담긴 ‘숟가락’이다. 또한 남들보다 항상 앞서 나가는 ‘개척정신’이다. 지난달 24일 오후 인천 연수구에 있는 가천대 메디컬캠퍼스에서 이 회장을 만났다. 때마침 학교 운동장에서는 체육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이 회장은 하얀 체육복 차림에 학생들과 함께 행진을 하고, 달리기 신호를 보내는 등 여념이 없다. 젊은 학생들과 서스럼없이 어울리는 모습이 새삼 놀라웠다. 학생들도 그런 이 회장과 함께 즐겁게 어울리며 화합을 다지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잠시 후 이 대학 총장실에서 마주앉았다. 요새는 어떤 일로 바쁜지 먼저 물었다. “올해는 매력, 담력, 실력 등 세 가지를 키우려고 합니다. 가천대학과 길병원의 스타일이라고나 할까요. 또한 학교통합에 따른 커리큘럼 정리와 구조조정, 그리고 세계적인 대학을 향한 커리큘럼을 새로 짜는 일로 바쁘지요. 특히 학생들의 취업률을 높이는 데 무엇보다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는 올해로 의사의 길을 걸어온 지 꼭 55년째이다. 소감을 묻자 주저없이 자신만큼 많은 환자를 본 사람도 없을 것이라면서 그만큼 죽어가는 사람도 많이 살렸다고 술회한다. 또한 그동안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을 텐데 어떻게 극복했는지 물었다. “참된 인생은 다른 사람에게 이로운 사람으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살다보면 위기를 겪게 마련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위기는 삶의 일부이며, 중요한 것은 그 위기를 어떻게 넘기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결정됩니다. 위기 때마다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맞서 왔습니다. 모험과 도전에 익숙해진 탓인지 오히려 위기를 즐기며 기회로 바꾸기 위해 노력해온 것 같아요. 바람개비는 맞바람이 강할수록 힘차게 돌아가거든요. 길병원 로비에 큰 바람개비를 설치한 것도 의료진은 물론 환자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어린 시절 수수깡 속을 빼고 막대에 끼워 돌리는 바람개비 놀이를 많이 했다. 이때마다 그는 항상 1등을 했다. 빠른 속도로 달리면 빨리 돌고 바람이 부는쪽으로 달리면 잘 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바람개비는 가만히 있으면 돌지 않는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앞으로 달려나가 바람을 일으켜야 돌아간다는 원리를 터득했던 것. 바람을 만들고 바람에 부딪히며 헤쳐나가는 것, 그것이 이 회장이 살아온 삶이다. 어려움과 시련이 닥칠 때면 항상 이 같은 바람개비를 떠올리곤 했다. 앞으로도 가천대를 모두가 부러워하는 글로벌 명문대로 키우기 위해 맞바람을 이기고 힘차게 나아갈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전북 옥구군 대야면 죽산리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한학에 밝았고 아버지 역시 그 영향을 받았다. 길여(吉女)는 딸만 둘을 낳아 시어머니 눈밖에 난 어머니를 위로하는 뜻에서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다. 이름 덕분인지 그에겐 늘 행운이 따랐고 위기가 오더라도 기회로 만들 수 있었고 한눈팔지 않는 외길 인생을 걸을 수 있었다. 그가 가는 곳은 길(Way)이 됐고 좋은(吉)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의사가 된 것을 한번도 후회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아주 행복한 길을 걸어오고 있다. 정신문화연구원장을 지낸 유승국 박사가 지어준 그의 호 가천(嘉泉) 또한 ‘아름다운 기운이 솟아오르는 샘’이라는 뜻이고 보면 그의 팔자 자체가 천생 행복한 의사가 아닐까 싶다. 또 있다. 어린 시절 어머니한테 밥과 반찬은 온데간데없고 놋숟가락만 가득 담긴 광주리에 대한 태몽 얘기를 자주 들었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의사가 되고 나서 수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운명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어머니는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할머니한테 자주 구박을 받았다. 이런 모습을 보며 열 아들 부럽지 않은 딸이 되겠다고 몇번이고 다짐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이러한 각오로 급장이 됐고 이후 한 가지 목표를 세우면 기필코 그것을 이루어내고야 말겠다는 근성이 생겨났다. 졸업할 때까지 단 한번도 1등 성적을 놓친 적이 없었다. 의사가 되겠다는 강한 생각을 가진 것도 이 무렵이다. “우리 시골집에는 강아지와 고양이를 여러 마리 키웠어요. 주인 없이 길에 돌아다니거나, 다리가 부러지거나, 눈이 다치거나 몸에 심한 상처를 입은 불쌍한 동물들이었죠. 이들에게 약을 발라주고 붕대를 감아주고 또 포대기로 강아지를 업고 다닌 적도 많습니다. 그러다가 강아지가 죽으면 뒷산에 묻고는 한동안 울기도 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의사놀이를 한 셈이다. 또 장티푸스에 감염된 친한 친구가 갑자기 죽는 모습을 보고 의사에게 필요한 두 가지 감정, 즉 생명에 대한 무한한 경외감과 죽음에 대한 철저한 두려움을 경험하게 된다. 의사가 되겠다고 확실하게 다짐한 것은 1948년 35세의 아버지가 급성폐렴으로 치료 한번 제대로 받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면서였다. 이리여고에 진학한 그는 의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부를 했다. 1등을 한번도 놓치지 않았고 1951년 전쟁의 와중에 서울대 의대에 합격했다. 지나온 세월을 생각해도, 밤하늘의 뜬 달을 보면서도 저절로 눈물이 났다. 모든 가능성은 꿈꾸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렇게 대학을 마치고 전북 군산으로 내려가 세계평화봉사단에서 의료봉사로 의사 생활을 시작했다. 거기서 영국인 의사 골든을 만났다. 이 회장은 골든의 헌신적인 봉사정신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고 진정한 봉사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얼마 후 골든은 서울적십자병원에서 수련의(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소개해줘 군산에서 서울로 자리를 옮겼다. 적십자병원에서의 과정을 마칠 무렵 인천에서 개원한 친구가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동인천역 앞 허름한 2층짜리 적산가옥에서 산부인과 의사로 첫발을 내딛게 됐다. 김문 선임기자 km@seoul.co.kr
  • [CEO칼럼] 우리의 클래스는 영원하다/방한홍 한화케미칼 대표

    [CEO칼럼] 우리의 클래스는 영원하다/방한홍 한화케미칼 대표

    흔히 명문 구단이라고 불리는 세계 유수 스포츠 클럽들의 공통점은 어떤 조건에서도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낸다는 것이다. 주축 선수들이 팀을 옮기고, 부상으로 이탈하는 선수들이 많아도 결코 좌초하는 법이 없다. 초반에 좀 삐끗하더라도 시즌이 끝날 때쯤이면 어느덧 우승권에 가 있다. 가끔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워 한두 해 반짝하는 팀이 있긴 하지만 명문 구단과는 거리가 있다. 스포츠 팬들은 이를 두고 ‘클래스는 영원하다’고 말한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먹는다’는 말처럼 어떤 스포츠의 어느 리그에서도 우승은 해본 팀이 계속하는 경향이 있다. 명문 구단은 이기는 것에 익숙하고, 이기는 법을 알기 때문에 어떤 조건에서도 치고 올라간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선수가 바뀌고 감독이 바뀌어도 그들의 자신감은 DNA처럼 계속 이어져 클래스를 유지해 나간다. 우스운 가정이지만 만약 전 세계 국가를 대상으로 누가 어려움을 잘 극복 하는지 겨루는 ‘어려움 극복 올림픽’이 있다면 우리나라는 우승을 밥 먹듯 하는 ‘명문 국가’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일제 식민지 통치에서 시작해 6·25전쟁, 1, 2차 오일 쇼크, IMF 외환위기, 2008년 금융 위기까지 수많은 어려움을 딛고 기적적인 성장을 일궈 냈다. 1960년대 초까지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했던 나라, 당시 케냐의 국내총생산(GDP)보다도 낮은 세계 최빈국이었던 우리나라가 세계 굴지의 경제 대국이 됐다. 골드만 삭스 회장은 이런 우리를 보고 “내 평생 아프리카 수준의 소득 국가에서 주요 7개국(G7) 수준 소득 국가로 탈바꿈한 경우는 처음 본다” 며 “모든 국가가 보고 배워야 할 모범국“이라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또한, 1997년 IMF 외환 위기와 2008년 금융 위기를 전 세계에서 가장 빨리 극복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반복되는 시련을 통해 골수에 박힌 ‘위기 극복 DNA’가 재도약의 기회를 만든 것이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녹록지 않아서 아무리 위기를 극복해도 늘 새로운 형태의 위기가 찾아오곤 한다. 지금도 우리는 어렵고 힘든 시기를 겪고 있다. 세계를 덮은 불황은 언제 회복될지 불투명하고, 기업들은 혹독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모든 성장 요소는 막혀 있는 듯 보이고 새로운 활로를 뚫기도 쉽지 않다. 기업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까지 퍼진 먹구름은 이 땅의 젊은이들마저 한계치로 떠밀고 있다. 미래가 되어야 할 그들은 이미 ‘88만원 세대’나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이른바 ‘삼포 세대’로 내몰리고 있다. 모두가 힘들고 포기하고 싶고, 의욕이 꺾일 수 있을 때다. 하지만 유례없는 어려움 앞에서도 위기 극복 경험을 통해 우리는 분명 이 상황을 이겨내고, 그 결과 더욱더 큰 자신감과 자부심을 갖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옛날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또는 ‘하면 된다’와 같은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느 쪽이 더 힘들다고 비교할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지금은 세계가 하나로 묶여 있어 과거처럼 우리만 열심히 잘한다고 극복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를 볼 때 우리의 DNA는 절박함의 크기가 클수록 더 진가를 발휘했다. 사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할 수 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능력을 보여 줄 때다. 마라톤에서 육체적으로 가장 힘든 구간은 반환점이라고 한다. 지금껏 뛰어 온 거리를 다시 뛰어야 한다는 부담과 앞뒤로 뛰는 선수들에 대한 압박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2013년의 반환점을 코앞에 두고 있다.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도 반드시 이겨내겠다던 출발선에서의 다짐이 약해졌다면 다시 신발끈을 조여 보자. 내친김에 위기 극복을 넘어 올해 안에 반전의 기회로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래서 먼 훗날 또다시 ‘그때 우리 참 대단했지’라고 얘기할 수 있는 역사를 만들어 보자. 우리의 클래스는 영원하다.
  • [향토기업 특선] 섬유소재 ‘우단’ 생산 구미 ㈜영도벨벳

    [향토기업 특선] 섬유소재 ‘우단’ 생산 구미 ㈜영도벨벳

    ㈜영도벨벳은 국내외 벨벳(Velvet) 업계가 인정하는 ‘강소기업’이다. 경북 구미시 원미동에 있지만 세계 최고·최대의 벨벳 생산 및 수출 1위를 자랑한다. 이탈리아의 벨루티 가문이 발명한 벨벳은 짧고 부드러운 솜털이 있는 천 실크로 이탈리아에선 벨루토, 일본에선 비로드로 불리고 우리에겐 우단(羽緞)이란 이름으로 친숙한 섬유 소재다. 영도벨벳의 전신은 1960년 대구 평리동에서 창업한 영도섬유다. 창업과 함께 독일과 일본에서 밀수되던 벨벳을 국내 처음으로 자체 개발에 촉망받는 기업으로 떠올랐다. 이후 50여년간 벨벳만 전문으로 제조해 왔다. 국내외에서 벨벳 수요가 늘면서 회사는 초창기부터 성장의 물살을 탔다. 현재는 전체 매출 중 95% 이상을 해외에서 올리고 있다. 이 때문에 국내보다 세계에서 더 잘 알려졌다. 영도 벨벳은 위용도 당당한 세 마리의 독수리가 그려진 ‘쓰리 이글’(Three Eagle) 브랜드를 달고 120개국으로 수출된다. 세계 원단 사상 ‘제1호 브랜드 마케팅’으로 기록됐다. 예나 지금이나 주된 수출국은 중동과 중앙아시아, 중남미 지역이다. 특히 아랍인에게 영도 벨벳 제품은 최고의 혼수예단이라 중동지역은 최대의 수출 전략지다. 이탈리아의 ‘조르조아르마니’, 미국의 ‘앤클라인’ ‘탈보트’, 스페인의 ‘자라’, 일본의 ‘이토추패션’등 세계 일류 패션 브랜드는 수십년째 영도 벨벳 제품만을 고집하고 있다. 최근 들어 중국이 수출시장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그 바탕에는 벨벳 분야 20여개의 특허를 획득한 영도만의 우수한 제품 기술력과 노하우가 있다. 영도 벨벳은 일본산보다 품질은 우수한 반면 단가는 낮아 제품 경쟁력이 뛰어나다. 유연성과 탄력성이 풍부한데다 물세탁도 가능한 장점도 지녔다. 검은색 일변도에서 빨강, 노랑, 파랑 등 다양한 색깔을 입힐 수 있는 첨단 벨벳이다. 물론 회사는 혹독한 시련도 겪었다. 1995년 최신형 직기 150대를 도입한 지 불과 2년 뒤인 1997년에 닥친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로 부도 직전까지 몰리기도 했다. 이유순 이사는 “영도벨벳의 최대 무기는 세계 최대 규모의 벨벳 생산시설과 최고 수준의 연구인력 20여명으로 운영되는 자체 연구소”라고 소개했다. 회사는 벨벳 소재를 활용한 액정표시장치(LCD)용 러빙(rubbing)포 개발로 재도약의 나래를 활짝 펴고 있다. 2008년 세계 최초의 아세테이트 재질 러빙포를 개발, 세계시장 점유율을 확대해 가고 있다. 이 제품 역시 기존 세계시장을 휘어잡은 일본 제품보다 공정이 간편하고 가격이 저렴한 반면 LCD의 시야각과 명도, 색상구현, 터치감은 월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LCD 패널 제조에서 핵심소재부품인 러빙포는 스마트폰과 TV, 모니터 등에 들어가는 LCD 화질을 선명하게 하고 제품 수명을 늘려주는 역할을 한다. 영도벨벳의 LCD용 러빙포는 현재 전세계 시장에서 점유율이 미미하지만 향후 5~10년 내에 50% 수준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영도벨벳은 올해 매출액을 지난해보다 50억원 늘어난 400억원으로 기대한다. 특히 러빙포 매출은 지난해보다 5배 늘어난 50억원을 예상한다. 영도벨벳은 가족친화형 기업으로 유명하다. 집이 없는 직원들에게 집을 제공해 주고 자녀 출산·양육비 및 장학금 지원 등 각종 복지시책을 편다. 지역사회 공헌활동도 활발하다. 2011년부터 매년 대구·경북지역 학생 108명에게 장학금을 주고 자투리 원단을 활용한 나눔 프로젝트인 ‘어메이징 벨벳’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2009년에는 구미시장학재단과 계명대에 각각 1억원씩의 장학기금을 내놓기도 했다. 회사 관계자는 “영도벨벳은 ‘쓰리이글’이라는 명품벨벳 브랜드로 세계시장에서 자리를 굳혔지만 임직원들은 창업 때의 초심을 잊지 않고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구미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박근혜 대통령 취임 100일] ‘北 리스크’ 관리 美 지지 확보·中 공조 성과… 인사난맥 ‘오점’

    [박근혜 대통령 취임 100일] ‘北 리스크’ 관리 美 지지 확보·中 공조 성과… 인사난맥 ‘오점’

    박근혜 대통령이 4일로 취임 100일을 맞는다. 임기 5년 동안 국정의 틀을 짜는 중요한 시기에 안팎으로 어느 정권과 비교해도 시련과 도전이 거센 시기였다. 취임 초 고위공무원들의 잇단 낙마파문에 이어 ‘박근혜 인사 1호’인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파문 및 경질은 박 대통령의 ‘나 홀로 인사’ 스타일과 청와대 시스템 부재가 빚은 전형적인 ‘인사 실패’라는 평이다. 반면 북한 도발 및 개성공단 사태 등 ‘북한 리스크’ 관리는 확고한 한·미공조 속에서 일관되고 침착한 대응을 유지하며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평을 받고있다. 국정수행 능력에 대해서 평가가 엇갈린다. 저성장 기조와 잠재성장률 하락 등의 악재 속에 힘들게 도출한 공약 가계부와 부동산 대책, 추경예산안과 주요 대선공약인 4대 사회악 근절 및 경제민주화 추진은 여전히 논란의 한복판에 있다. ■정치 靑 내부 경직된 문화 … 주요 정책 로드맵도 차질 지난 100일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는 활동 공간이 적었다는 데에 전문가들의 의견은 일치했으나 평가는 엇갈렸다. 윤희웅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분석실장은 긍정적인 측면을 눈여겨봤다. 그는 “이전 정부와 다르게 대통령직인수위원회나 정권 초반에 조용하고 차분한 행보를 보인 게 이전 정권과 다른 점”이라고 평가했다. 윤 실장은 “아직 국민들이 대통령을 냉정하게 평가하는 국면이 되지는 않았다”면서 “대선 때 대통합을 강조했던 연장선상에서 청와대 대통합위원회 등의 역할을 강조하면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청와대 내부의 경직된 문화와 당청 간 소통의 부재 등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지적도 적지 않았다. 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정부조직법 통과는 출범 이후 바로 시작돼야 하는데, 국회 논의 과정에서 정치력의 부재를 여실히 보여줬다”면서 “앞으로 청와대에서 이니셔티브를 갖고 주도적으로 이슈를 끌고 갈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통령의 리더십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청와대 문화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김형준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대통령의 리더십을 깨알 리더십이라고 하는데 이는 좋은 현상이라고 볼 수 없다”면서 “청와대가 지나치게 대통령 중심으로 가다보면 모든 일을 대통령이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백종섭 대전대 행정학과 교수는 “새 정부 출범이 50여일이나 늦어지면서 이 시기에 긴요한 주요 정책 로드맵도 늦어진 감이 있다”고 지적했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라오스의 강제 북송 문제와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을 보면 박 대통령이 정부 조직과 국정 전반에 대한 장악력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면서 “박 대통령의 비전에 대한 공감대가 낮아 보인다”고 주장했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외교·통일·안보 北 ‘도발후 보상’ 불허… 원칙적 입장 견지 호평 새 정부의 틀이 채 갖춰지기도 전에 밀려온 ‘북한발(發) 악재’는 걸음마도 떼지 못한 박근혜 정부를 가시밭길로 몰고 갔다. 핵심 대북정책인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북한의 연이은 도발로 첫 삽을 뜨기도 전에 난관에 부딪혔고, 북한과의 강(强) 대 강 대결로 대화는 단절됐으며 지난 10년간 유지해온 개성공단도 잠정 폐쇄됐다. 남북관계 회복의 불씨는 갈수록 수그러들고 있는 상황이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연구교수는 “강변일변도 정책, 유연성이 부족한 접근 때문에 남북관계에 불안 요소가 커졌다”며 “신뢰가 특히 중요한데, 말싸움과 기싸움이 이어져 남북 간 신뢰는 더 크게 훼손됐다”고 비판했다. 보다 유연한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반면 박근혜 정부가 대북 문제에 있어 ‘도발 후 보상’이라는 과거 패턴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원칙적 입장을 견지한 것은 바람직했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이춘근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통상 북한에 당근만 주고 결과물은 받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북한이 먼저 변하라며 공을 넘겼다”며 “태도변화를 이끌어낼 단호한 메시지를 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새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미국의 협력과 지지를 이끌어 낸 것도 성과로 꼽힌다. 또 한·미 동맹 60주년을 맞아 향후 60년 미래에 대한 양국관계의 발전방향을 정립함으로서 새로운 변화의 흐름을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명박 정부 때와 달리 중국과의 공조도 잘 이뤄졌다는 평가가 많다. 다만 이 과정에서 불거진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문과 외교난맥상을 여실히 보여준 라오스 탈북청소년 9명의 북송 사건 등은 오점으로 남았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는 “외교안보 부처 간 조정체계를 회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중구난방식의 정책조정 과정을 정비해 예측가능성을 좀 더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복지·노동 기초연금·무상보육 등 공약 이행 재원대책 부실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과정에서 제시한 경제민주화와 맞춤형 복지 등 복지·노동 공약은 유권자들은 물론 전문가들에게 전체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취임 100일을 맞은 현재 공약이행 가능성을 두고 의구심이 높아지고 있다. 무엇보다 애초 복지·노동 공약 이행을 위한 재원마련 대책이 부실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정책후퇴 조짐이 나타나면서 공약을 실천할 의지가 퇴색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대표적인 보건복지 분야 공약이었던 기초연금을 둘러싼 논란은 재정추계에 대한 고민 없이 내놓은 공약이 초래한 혼란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노인층 지지를 얻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기초연금 20만원 지급’ 공약은 당장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소득과 국민연금 가입 기간에 따라 월 4만~20만원씩 차등지급’하기로 하면서 약속위반 논란에 휩싸였다. 이마저도 소득에 관계없는 보편 지급 조항까지 폐지하자는 움직임이 정부안에서도 적지 않다. 무상보육을 둘러싼 중앙·지방 논쟁은 복지재정을 누가 어떻게 부담할 것인지, 복지전달체계는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다양한 고민을 정부에 던져주고 있다. 당장 서울시에서는 이번 달부터 양육수당 부족 사태가 현실화한다. 진주의료원 폐업도 정부·여당이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으면서 공공의료 확충 공약이 후퇴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총선 당시부터 경제민주화 쟁점을 선점하며 강력한 정책의지를 여러 차례 강조했다. 하지만 취임 이후에는 대기업 규제완화와 투자 장려도 강조하고 있어 노동계 일각에서는 경제민주화 의지에 의구심을 내비치고 있다.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경제 고용창출 제자리걸음… 능동적 경제성장 대안 절실 “처음 3개월, 6개월 이때 (국정과제를) 거의 다 하겠다는 각오로 붙어야 된다.”(올 2월 국정과제 토론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박 대통령은 새 정부 출범 전에 유난히 ‘속도전’을 강조했다. 각종 이해 관계가 첨예하게 얽힌 난제들은 힘이 실리는 정권 초반이 아니면 풀어내기 어렵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경제 분야에서는 ‘차분한 기조’가 유지됐다는 게 전반적인 평가다. 좋게 말하면 ‘관리형 모드’로 일관했고, 나쁘게 말하면 ‘리더십 실종’이 드러났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현 정부 경제팀이 손을 놓고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현오석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새 정부 출범(2월 25일) 이후 거의 한 달 만인 3월 22일 임기를 시작했다. 이후 ‘새 정부 경제정책 추진방향’(3월 28일), ‘주택시장 정상화 대책’(4월 1일), ‘추가경정 예산’(추경·16일), ‘투자 활성화 방안’(5월 1일), ‘벤처 활성화 대책’(5월 15일), ‘공약 가계부’(5월 31일) 등 굵직한 대책들을 연달아 내놨다. 하지만 문제는 일련의 정부 대책이 경제성장의 대안을 제시하는 능동적인 성격보다는 경기 침체의 골을 메우는 소극적인 대응에 그쳤다는 점이다. 추경은 경기 후퇴에 따른 12조원의 세수 확보가, 4·1 부동산 대책은 부동산 경기 침체 회복이 목적이었다. 벤처 활성화 대책 등은 ‘대기업이 독점한 구조를 놔둔 채 벤처 창업만 독려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효과도 제한적이다. 전월 대비 전산업 생산 증가율은 2월 1.1%에서 4월 1.6%로 지지부진한 상태다. 소비자심리지수도 2월 102에서 5월 104로 제자리걸음이다.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이 최근 “민생경제의 핵심인 일자리 창출은 제자리 걸음이고 경제 성장률도 저조해 ‘민생경제 대통령’이라는 약속은 실종된 느낌”이라고 비판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김종석 홍익대 경영대학장은 “아베노믹스는 화끈하게 한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박근혜 정부는 구호만 요란할 뿐 구체성이 없이 표류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앞으로는 경제 부흥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각론에 충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세종 이두걸 기자 douzirl@seoul.co.kr
  • 라디오 국민DJ ‘별밤’으로 떠나다

    라디오 국민DJ ‘별밤’으로 떠나다

    국내 라디오 DJ계의 대부 이종환씨가 30일 폐암으로 별세했다. 76세. 2011년 폐암 진단을 받고 투병생활을 하던 이씨는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열흘 전 서울 노원구 하계동 아파트 자택으로 옮겨 지냈다. 고인은 국내 포크음악이 뿌리내리는 데 산파 역할을 했다. 음악다방 디쉐네의 DJ로 활동하다 1964년 MBC 라디오 PD로 입사한 고인은 1970년대 ‘별이 빛나는 밤에’와 1980년대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의 DJ로 맹활약하며 대중의 인기를 누렸다.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 ‘여성시대’를 진행하는 등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그는 1989년 미국으로 떠나 미주 한인방송 사장까지 지냈다. 1992년 귀국해 MBC FM ‘이종환의 밤으로의 초대’로 국내 방송에 복귀했다. 이후 ‘이종환,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 ‘이종환의 음악살롱’ 등으로 명실상부한 최고 DJ로 명성을 이어갔다. 1996년에는 MBC가 20년간 라디오를 진행한 DJ에게 주는 골든마우스 상을 최초로 수상했다. 해박한 음악 지식과 특유의 소탈한 입담으로 전국의 청취자를 끌어모으며 김광한, 김기덕과 함께 ‘3대 DJ’로 불리기도 했다. 대중음악계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1970년대 음악감상실 쉘부르를 만든 주인공. 1973년 듀오 쉐그린(이태원, 전언수)과 함께 종로 2가에 쉘부르를 열어 가난한 음악인들에게 무대를 마련해 주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쉐그린, 어니언스, 김세화, 남궁옥분, 신계행, 양하영 등의 스타를 배출해 가수들 사이에서는 ‘대장’으로 불렸다. 돌출 행동 등으로 시련도 있었다. 2002년 ‘지금은 라디오 시대’를 진행하면서 자신을 비난한 글을 올린 청취자에게 폭언을 해 DJ 자리를 내놨고, 이듬해 7월엔 MBC FM 4U ‘이종환의 음악살롱’에서 음주 방송을 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2005년 4월 tbs FM ‘이종환의 마이웨이’로 방송에 복귀한 그는 지난해 11월 건강을 이유로 방송을 떠났다. 한편 그의 별세 소식이 알려지자 방송·가요계는 종일 술렁거렸다. 그와 함께 1995~2002년 7년여간 라디오 프로그램(지금은 라디오 시대)을 함께 진행했던 방송인 최유라는 이날 오전 자신의 트위터에 “어렸을 적 참 무섭고 어려웠던 분이었다. 할아버지 냄새 날까 마이크 돌려놓고 방송하시던 분… 아프실 때도 모습 흉하다며 못 오게 하셨던 분”이라며 고인을 추모했다. 쉘부르의 맏형 격인 쉐그린의 이태원은 “쉘부르는 그에게 사업이 아니라 음악을 정말 사랑했기에 시작했던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장지는 충남 아산. 발인은 6월 1일 오전 6시 30분. 유족으로는 부인 성성례씨와 1남 3녀(한열·효열·효선·정열)가 있다. (02)2072-2010.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 [피플인 스포츠] 2013 아시아 5개국 대회 준우승 이끈 15인제 럭비대표팀 주장 박순채

    [피플인 스포츠] 2013 아시아 5개국 대회 준우승 이끈 15인제 럭비대표팀 주장 박순채

    야성적이고 원시적인 남자들의 스포츠, 트라이 하나를 찍기 위해 모두가 헌신하고 희생하는 신사의 스포츠, 전 세계 600만명이 열광하는 스포츠. 럭비다. 2013HSBC 아시아5개국대회(A5N)를 준우승으로 마친 15인제 럭비대표팀 주장 박순채(28·일본 산토리)를 지난 19일 만났다. 만나기 전까지 “말주변이 없고 인터뷰 울렁증이 있는데 어쩌냐”고 고민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유쾌하게 재잘댔다. 그라운드에선 웃음기 없는 전사(戰士)였지만, 유니폼을 벗고 뿔테안경을 쓴 박순채는 순박한 청년이었다. 전날 홍콩전(43-22승)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눈치. “지금까지 한 경기 중에 가장 잘한 것 같아요. 정신적 지주인 유영남(파나소닉)이 후반 30분을 남겨두고 부상으로 빠져서 불안했는데 마무리가 좋았죠. 오윤형(KEPCO)은 어제 트라이 세 개 찍고 보너스킥까지 해서 대회 득점 1위(68점·4경기)가 됐어요. 너~무 힘들었는데 준우승으로 다 보상받은 것 같습니다.” 15인제 럭비대표팀은 강원도 양구에서 고강도 체력훈련을 했고,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일본 원정경기를 다니며 지난 두 달을 빡빡하게 보냈다. 결국 지난해에 이어 아시아 2위를 지켰고, 국제럭비위원회(IRB) 랭킹도 2010년 4월 이후 가장 높은 24위로 두 계단 뛰어올랐다. ‘캡틴 박’은 뭐니뭐니해도 지난 4일 한·일전이 하이라이트였다고 전했다. 순수 일본인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용병을 수혈한 ‘무늬만 일본’에 5-64로 졌다. 한국은 올해 A5N에서 일본을 상대로 유일하게 트라이를 찍었고, 2002년 이후 원정 최소 점수차로 간극을 좁혔다. 프로(톱리그)를 보유한데다 등록선수만 12만명에 이르는 일본을 상대로 나름 선전했다는 게 자체 평가다. 박순채 자신에게도 특별했다. “창피한 얘기지만 치치부노미야 경기장을 처음 밟아봤어요. 소속팀 홈구장인데 동료들이 뛰는 것만 봤지, 그라운드를 처음 누빈거죠. 뭉클하기도 하고, 뭔가 보여줘야겠다는 각오도 컸습니다.” 한국은 졌지만, 그의 이름 세 글자는 확실히 각인시켰다. 파이팅 넘치게 팀을 이끄는 박순채의 모습에 일본 선수들은 놀랐고 또 반했다. 근성만큼은 알아주는 박순채다. 그는 일본 톱리그에서 뛰겠다는 의지만으로 겁없이 현해탄을 건넜다. 스카우트된 것도 아닌데 열정만 믿고 무작정 갔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명문팀 산토리가 관심을 보였다. “일주일동안 입단테스트를 봤어요. 러닝부터 체지방, 웨이트까지 세밀하게 체크하더라구요. 연습경기 20분동안 공을 딱 세 번 잡았는데 운 좋게도 두 번이 독주(獨走)로 연결돼 트라이를 찍었어요. 바로 계약서에 사인했죠.” 팀은 개인 숙소와 자가용 승용차, 비행기까지 살뜰하게 제공했다. 연봉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밝힐 순 없지만, 자유계약(FA)으로 대박친 몇몇 빼고는 프로야구 선수가 부럽지 않을 정도”라며 해맑게 웃었다. 설렘으로 시작한 일본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한국에선 승승장구하던 그가 벤치신세를 졌다. 지난 시즌 한 경기도 못 뛰었다. 파워풀한 럭비가 강점인데 팀은 스피드를 앞세운 럭비라 적응이 어려웠다고. 게다가 산토리는 톱리그 16개 팀에서도 최강팀. 지난 시즌 무패로 우승할 만큼 압도적이고, 기량이 월등하다. 그는 지난해를 ‘시련’이라고 규정짓는 대신 새 시즌에 대한 희망을 전했다. “못 뛰니까 정말 서럽더라고요. 이러려고 일본 온 게 아닌데 참담했죠. 올해는 8월 31일 리그 첫 경기가 잡혔는데 예감이 좋아요. 준비됐으니까 부딪혀봐야죠.” 럭비는 1998방콕·2002부산아시안게임에서 7·15인제 금메달을 따낸 효자종목이지만 일반인에게 생소하다. 삼성중공업·포스코건설·KEPCO와 국군체육부대가 일반부의 전부인데다, 1년에 10경기를 치를까말까 할 정도로 경기 수도 적다. “럭비 한다고 하면 한국에서는 ‘어깨에 뽕 넣고 하는 그거?’라면서 미식축구랑 헷갈려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일본에서는 다들 ‘스고이’하면서 종이를 들이밀거든요. 일본 가서 처음 사인을 해봤어요. 리그 결승 때도 1만 7000명이 운동장을 꽉 채웠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해요.” 박순채는 일단 운동장에서 보면 매력을 알 거라고 확신했다. 거칠고 위험해보이지만 철저히 스포츠맨십을 지키고 트라이 하나를 찍기 위해 15명이 희생하고 뭉친다며 럭비의 매력을 구구절절 읊었다. 일본처럼 바글바글한 관중석을 꿈꿨다. “뜨거운 함성이 있으면 힘들어도 한 발씩 더 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도 ‘헝그리정신’ ‘비인기종목의 설움’ 이런 건 싫어요. 남들이 안 알아줘도 우리만의 색깔로 럭비할 수 있는 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럭비월드컵에 진출해 깜짝 놀라게 하겠다고 장담했다. 내년 A5N우승팀에게 2015년 월드컵 티켓이 주어지는데 결국 걸림돌은 일본이다. “내년까지 열심히 몸 만들고 성장해서 일본 한 번 잡아볼 생각입니다. 월드컵도 무조건 가야죠. 이번 대표팀에도 일본파가 11명이었는데 못할 것 없잖아요?” 조은지 기자 zone4@seoul.co.kr ■프로필 ▲1985년8월20일 출생 ▲아버지 박종수(62), 어머니 김홍련(61), 누나 박혜정(30) ▲190㎝, 105㎏ ▲부개초-부평중-인천기계공고-경희대-포스코(2008~11년)-일본 톱리그 산토리(2012년~) ▲대한민국 남자15인제 럭비팀 주장, 5개국대회 준우승(2013년), 산토리 대회 우승(2012년), 전국체전·봄철리그·대통령배 포스코 3연패(2009~11년) ▲좌우명=최고보단 최선을, 말보단 행동으로
  • [명사가 걸어온 길] (11) 한국 헌법학의 태두 김철수 (상)

    [명사가 걸어온 길] (11) 한국 헌법학의 태두 김철수 (상)

    열두 살 되던 해 일제가 패망했다. 환희에 천지가 요동쳤다. 해방. 어렸지만 그게 뭔지 너무도 잘 알았다. 그러나 조국의 운명은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혼돈과 분열이었다. 국토는 남북으로 찢기고 민중은 좌우로 갈렸다. 얼마 전까지 ‘조국 해방’을 외치며 함께 어깨를 걸었던 동지들이 생각이 다르다고, 처지가 다르다고 원수가 돼 등을 돌렸다. 어제까지 한 교실에서 공부했던 친구가 좌익 프락치로 몰려 책상을 비웠다. 해방 공간의 극심한 무정부 상태를 보며 소년은 결심했다. 반드시 국가 시스템의 뼈대가 되는 헌법을 공부하겠노라고. 그 다짐대로 헌법 연구는 평생의 업이 됐고, 소년은 우리나라 헌법학의 ‘태두’(泰斗)가 됐다. 지난 10일 서울 동작구 상도동 한국헌법연구소에서 만난 김철수(80) 서울대 명예교수는 5시간에 걸친 긴 인터뷰에도 피로한 기색 없이 꼿꼿하게 여든 성상의 인생과 철학을 얘기했다. 1933년 7월 대구에서 빈농(貧農) 집안의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책 읽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다. 유복한 친구를 둔 덕에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책 읽느라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다. 통학 기차 안에서도 그의 손에는 항상 책이 들려 있었다. “친구 아버지가 당시 대구지역 마사회 회장이었어요. 경마장에는 일본 사람들이 자기들 나라에서 가져온 세계 문학대전집, 세계 사상대전집 같은 책들이 그득그득 꽂혀 있었지요. 그때 읽은 책 중 가장 감명 깊었던 게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었어요. 강의 중에 ‘레 미제라블’을 말하면 학생들은 ‘아 장발장이 빵 하나 훔쳤다가 탈옥하는 거요?’ 정도의 반응이 대부분이었지만 사실 이 책은 대단한 책입니다. 무려 26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 형벌, 정치, 법철학 등 다양한 사회 문제와 고민이 담겨 있으니까요.” 책에 빠져 살던 김 교수의 관심이 사회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은 나라가 광복을 맞으면서였다. ‘민주국가 건설’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어떤 민주주의를 택하느냐를 두고 극심한 분열 양상이 온나라를 휩쓸었다.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나라가 완전히 엉망이었지요. 특히 제가 살던 대구는 당시 공산주의의 총본산인 모스크바(소련의 수도)에 빗대어 ‘한국의 모스크바’로 불렸을 정도예요. 좌익의 활동이 국내 어떤 도시보다도 활발하고 강했어요. 그러다 보니 저는 극렬한 좌우 대립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며 큰 충격을 받았어요. 경찰이 사람을 잡아가고 때리고, 또 반대되는 공공기관 테러가 일어나고. 우리 사회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바로 헌법이었던 것이지요.” 1947년 제헌(制憲) 헌법을 만든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법대생이나 학자들이 보던 고시 잡지 등을 읽으며 헌법학자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때가 우리 나이로 열다섯이었다. 1950년 전쟁이 터졌다. 고도근시로 고생하던 그는 전쟁터로 끌려가지 않았다. 1952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전쟁 탓에 서울의 대학들이 부산으로 피란 온 터였다. 부산의 허름한 판자촌에서 법학 강의를 들었다. 법학도들이 ‘천막 강의실’에서 힘겹게 공부하던 이 시기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불법적인 개헌을 추진한다. 이른바 ‘발췌개헌’의 시작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부산으로 피란 가 있는데 거기에서 임기 4년이 만료됐어요. 이 대통령은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헌법을 고치려 들었는데, 이걸 야당이 반대했고 그 결과로 야당 의원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어요” 이 대통령은 “전시에 부산에 침투한 간첩이 많으니 소탕을 해야 한다”는 이유를 대며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이내 속셈을 드러냈다. 간첩을 잡겠다던 당초 주장과 달리 야당 의원과 무고한 시민에 대한 검거와 폭력이 이뤄졌다. “야당 지도자였던 장면 선생도 잡아넣었어요. 3명 이상 모이면 잡아갔어요. 국회로 출근하는 버스가 있었는데 버스에 탄 채로 계엄사령부에 끌려 가기도 했어요. 옛 경남도청에 무덕관이라고 해서 유도 연습장 같은 곳을 국회의사당으로 썼는데 그 일대에 ‘백골단 깡패’들이 쫙 깔려 있었어요. 이 대통령에 반대하는 의원은 전부 계엄사령부로 소환했다고 보면 될 겁니다.” 김 교수는 해방 이후 우리 사회의 질곡의 상당 부분은 친일파 등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지만 일부 불가피한 대목도 있었다고 말했다. “광복 이후 친일파 척결은 예견된 수순이었습니다. 그래서 친일파를 처벌하는 법률도 만들었는데 법률로 처벌하려다 보니까 당시 정부관료, 경찰, 군인 등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걸렸던 거죠. 일제강점기 때는 외국 유학자를 비롯해 능력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이 대통령이 보기에 친일파를 다 쫓아내면 행정이나 정치를 못하겠다 싶었던 거죠. 반민특위에 걸렸던 경찰들을 풀어주고, 결국 그 경찰들이 치안 등 최소한의 사회 시스템을 유지해 전쟁통에 질서를 유지했다고 볼 수 있죠. 일부 사람들은 이 대통령이 반민특위를 없앴다는 이유로 친일파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당시의 사정도 일부 헤아릴 필요는 있을 겁니다.” 이 대통령은 연임에 성공했고 1953년 전쟁이 끝났다. 김철수는 스무 살의 청년이 됐다. 김철수는 한 살 아래 학과 동기를 만나 사랑을 키워갔다. 궁핍과 혼돈의 시대에 서울대 법대 커플의 사랑은 주위의 부러움과 시샘을 샀다. 하지만 당사자들을 포함해 그 누구도 이들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날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대화 주제가 ‘첫번째 아내’로 옮겨가자 김 교수의 목소리톤이 낮아졌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김 교수의 첫 번째 아내는 한국 문학계와 여성 예술인들 사이에서 ‘불꽃처럼 살다간 여인’으로 회자되는 전혜린이다. 두 사람은 부산에서 맺은 인연을 서독(독일 통일 전) 뮌헨에서 키워나갔다. 전혜린이 1955년 먼저 뮌헨대 유학길에 올랐고 김 교수는 이듬해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이역만리에서 기쁨과 고통을 나눴다. 문학가가 꿈이었지만 아버지의 성화로 법대에 진학했던 전혜린은 독문학과에 입학해 그토록 바랐던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체계적인 법 공부에 목 말랐던 김 교수는 법학 공부를 이어갔다. 하지만 전쟁국가 출신 동양인에게 서독은 마음 놓고 공부만 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은 아니었다. 당시 누구나 그랬듯 너무도 가난했다. 나라를 벗어나 공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선택받은 삶이 됐던 시절이었다. 대통령의 허가가 있어야만 외국 송금이, 그것도 최고 50달러까지만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두 사람은 장학금과 통·번역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계를 꾸렸다. 전혜린은 훗날 유학생활의 궁핍에 대해 “물을 마시니까 죽지는 않더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인에 대한 시선은 싸늘했다. 지구상에 한국, 코리아라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사람들에게 한국에서 왔다고, ‘코리아’라고 그러면 아프리카 콩고에서 왔냐고 그랬어요. 그 나라에 기차는 있느냐, 뭘 먹고 사느냐 등 질문을 해대는데, 미개인 취급을 하더군요. 교수들도 저를 보며 전쟁 중인 나라에서 공부는 무슨 공부를 했겠느냐며 일본 학생들과도 크게 차별을 뒀습니다. 약소국 국민의 설움이란 게 뭔지 당해 보지 않고서는 알기 어렵습니다.”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소외감은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했다. 1957년 그들은 뮌헨에서 결혼을 했다. 생활은 결혼 전과 다름 없이 곤궁했지만 함께한다는 것만으로 의지와 위안이 됐다. 그러던 중 전혜린은 1959년 딸을 낳고 한국으로 돌아가 이듬해 성균관대에서 강사로 둥지를 틀었다. 김 교수는 2년 뒤 모교 교수 자리를 제안받고 서울로 돌아왔다. 배 고프고 힘들었던 서독 생활을 정리하고 고국에 왔지만 서울에서는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귀국하자마자 5·16 쿠데타가 터졌다. 박정희 당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이 무력으로 청와대를 장악했다. 당시 박정희 군부가 취한 여러 조치 가운데 ‘군 미필자는 공무원이 되지 못한다’는 게 있었다. 시력이 나빠 군대에 못 간 김 교수는 공무원인 서울대 교수에 임용되지 못했다. 서울대는 물론 어디에서도 군 미필자인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아내와의 관계도 벌어지기 시작했다. 먼저 입국한 전혜린은 대학에서 강의하며 서울의 문인들과 어울렸다. 밤 늦게까지 명동에서 삶과 죽음, 예술을 논했다. “아내가 언제부턴가 문인의 죽음을 동경했어요. 처음에는 나는 사회규범과 질서를 중시하는 법학자이고 아내는 사회의 틀보다는 자유와 이상을 갈망하는 문학가라서 서로 다르겠거니 했는데 이 사람이 자꾸 ‘니체도 카프카도 일찍 죽었다’ 이러면서 빨리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거예요. 수면제도 많이 갖고 다니고. 그러다 보니 저도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결국 두 사람은 1964년 합의이혼을 했다. 그리고 1년 뒤 전혜린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그는 교수 임용 제한이 풀리면서 서울대 법대 학생과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2년 뒤 김 교수는 고교 교사와 재혼을 했다. “아내는 지금도 꼬박꼬박 그 사람(전혜린)의 제사를 지내고 있어요. 자기가 낳은 아이들에게도 제사에 꼭 참석하라고 그러고. 참 고마운 사람이죠.” 그는 사별한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반평생 이상을 함께하고 있는 지금의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함께 표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큰 시련을 겪고 난 그는 다시 연구에 매진했다. 체계적인 헌법학 이론과 정력적인 강의, 활발한 저술활동으로 헌법학계에서 빠르게 자신의 입지를 굳혀갔다. 이는 박정희 군사정권이 새롭게 부상하는 법학자에 대해 점차 날카로운 감시의 눈초리를 들이대도록 만드는 빌미가 됐다. 드디어 등장한 유신헌법의 시대. ‘학자 김철수’는 어떻게든 이 난국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김철수가 걸어온 길 1933년 경북 대구 출생(6남 1녀 중 장남) 1956년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1957년 서독 뮌헨에서 전혜린과 결혼 1961년 서독 뮌헨대 졸업 1962년 서울대 법과대학 조교수 1967년 미국 하버드대 법과대학원 수료 1971년 서울대 법학박사 1972년 서울대 법과대학 교수(~1998년) 1988년 한국공법학회 회장(~1989년) 1990년 한국헌법연구소 소장(~2001년) 1995년 한국법학교수회 회장, 국제헌법학회 이사 1998년 제주 탐라대 총장(~2000년)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1998년~) ■주요저서 헌법학(1972) 현대헌법론(1979) 비교헌법론(1980) 법과 사회정의(1982) 한국헌법사(1988) 법과 정치(1995) 정치개혁과 사법개혁(1998) 헌법정치의 이상과 현실(2012)
  • 4·19 정신 계승… 민주주의 발전 밑거름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올해로 창설 50주년을 맞이한 가운데 지난 50년간 선거 제도의 변화에 관심이 쏠린다. 선거가 곧 민주주의의 발전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중앙선관위는 10일을 유권자의 날로 지정했다. 1948년 5월 10일 치러진 제헌국회의원 총선거일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주 선거로 기록된 제헌총선에서는 의원 200명이 선출됐고 임기는 2년이었다. 당시 전체 후보자 948명 가운데 44%에 해당하는 417명이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이때 기록한 95.5%라는 투표율은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1960년 이승만 대통령의 3·15 부정선거와 이에 따른 4·19혁명은 선거사와 민주주의에 큰 변곡점이 됐다. 선거관리위원회가 1963년 1월 21일 헌법기관으로 창설된 것도 4·19혁명 정신에 따른 것이었다. 1967년 대선에서 실시된 월남 파병 군인의 우편투표는 재외국민 투표의 효시가 됐다. 시련도 많았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헌법’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대통령과 국회의원 정수 3분의1을 뽑도록 하면서 국민의 선거권이 침해되기도 했다. 중앙선관위원장과 위원 9명도 대통령이 임명했다. 1987년 16년 만에 부활한 직선제로 치러진 13대 대선에서는 서울 구로구을 선관위 투표함 탈취사건이 발생했다. 투표함 이송 과정에서 ‘부정투표함’이라는 오해를 사면서 군중시위가 벌어져 56명의 사상자가 난 사건이다. 중앙선관위는 10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제2회 유권자의 날 기념식을 개최한다. 서울대입구역과 혜화역 등에서 선거 사진 전시회를 비롯해 기념마라톤대회, 국회의원 정수 축소와 후보자 토론회 컷오프제 관련 대학생 토론회도 열린다. 이영준 기자 apple@seoul.co.kr
  •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고개를 숙이고 앉았던 정한조의 입에서 한마디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시냇가에 허물어진 집은 사기 접시 같은데, 북풍에 이엉 날아가 서까래만 앙상하네. 묵은 재는 눈에 섞여 아궁이는 싸늘한데, 뚫린 벽 틈으로 별빛 새어드누나. 집안의 살림살이 너무나 빈약하여 모두 내어팔아야 7, 8푼도 못 되네. 세 가닥 조 이삭은 삽살개 꼬리 같고, 매운 고추 한 두름은 닭의 창자를 닮았네. 깨어진 항아리는 베로 발라 새는 구멍을 막았고, 찬장과 시렁은 새끼줄로 묶어 떨어지지 않게 하였네. 구리 수저는 오래전에 호장에게 빼앗겼고, 쇠 냄비는 이웃 토호에게 빼앗겼네. 다 해진 푸른 무명 이불 한 채뿐이니, 부부유별이란 말 이 집에선 말뿐이네. 젖먹이 적삼은 어깨와 팔꿈치가 드러나고, 태어난 이래로 바지도 버선도 알지 못하네. 다섯 살 난 맏이는 이미 기병으로 첨정되고, 세 살 난 작은 아이는 벌써 군관에 입적되었네. 두 아들 군포가 1년에 500푼이니, 하루빨리 죽기를 바라는데, 옷가지가 무슨 소용인가. 늑대와 호랑이가 밤마다 찾아와 울 밖에서 으르렁대네. 남편은 나무하러 산으로 가고, 아낙은 방앗간에 품팔이 가니, 대낮에 사립문 닫힌 모양 참담하기 그지없네. 아침 점심 두 끼는 굶고 밤에 돌아와 군불 지피며, 여름에는 다 해진 무명옷에 겨울에는 베옷을 입네. 들녘의 냉이는 이미 싹이 묻혔으니, 땅이 풀려 새싹 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고, 술지게미라도 얻어먹으려니 남의 집 술 익기를 기다릴 뿐이네. 지난봄 향미 닷 말을 꾸어 먹었는데, 그 일로 금년에는 살아남지 못하리. 나졸이 사립문에 들이닥치면 겁이 덜컥 나지만, 동헌에 끌려가 곤장 맞을 일을 걱정하지는 않네. “시생은 이런 옛날 언문 시구를 중얼거리곤 합니다. 세상이 도둑과 무뢰배와 들치기, 날치기 들로 어지럽게 된 것은 모두 벼슬아치와 글줄깨나 읽었다는 선비 들의 과욕 때문이지요.” “원래 벼슬아치들이란, 가난 속에 살면서도 의리를 지키고 도리를 어기지 않으며 나라의 어려운 일에 바른말하고 살아가면 되었는데, 언제부턴가 그 도리가 흐트러지고 말았소.” “우리들이 어찌 그런 사정을 모르겠소. 그런데 도둑들의 행동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들이 배울 점이 있소. 도둑들은 빈둥빈둥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들과는 달리 밤 깊은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뜬눈으로 일한다는 것이오. 자신들이 겨냥하던 일을 하룻밤에 결단 내지 못하면, 다음날 밤에 다시 죽기 살기로 담판을 짓는다 하오. 뿐만 아닙니다. 도둑들은 같이 일하는 동배간의 행동거지를 자기 자신의 일처럼 엄중하게 생각하지요. 그리고 아주 적은 소득에도 목숨을 걸 뿐만 아니라, 아주 값진 물건에도 크게 집착하지 않고 반푼 어치도 안 되는 물건과 미련 없이 바꿀 줄 아는 너름새가 있습니다. 도둑은 자신에게 닥친 시련과 위기 따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이겨낼 줄 안다는 것이오.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 일이 무슨 짓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이지요.” 귀 기울여 듣던 조기출이 말했다. “우리 상단의 동무들과 도둑들이 마음가짐이나 처세함에 있어 근본이 다르지 않아 놀랐습니다.” “하긴….”
  • [김일수 樂山樂水] 창조를 자극하는 시련

    [김일수 樂山樂水] 창조를 자극하는 시련

    잔인한 달, 사월이 지나고 오월이 왔다. 며칠 후면 국보 1호, 숭례문이 복구를 끝내고 다시 우리 곁으로 다가온단다. 숭례문이 불길에 휩싸여 무참히 무너져 내리던 5년 전의 그 광경은 우리 모두에게 큰 상실의 고통처럼 느껴졌었다. 그 고통을 넘어 다시 부활하는 숭례문을 되새기며, 문득 ‘고독해방 심리학’의 저자인 스위스 정신의학자 폴 투니에의 말이 떠오른다. ‘창조적 고난’이라고. 모종의 상실이 인간의 창조성을 자극하여 건설적인 변화를 낳게 하고, 고난과 고통이 바로 성숙과 발전의 기회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고난을 통해 성숙하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쇠락하는가? 그 원인은 개인의 운명이나 유전적 성향에 있다기보다 이들이 외부의 제도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영향에 크게 좌우된다. 건설적인 영향은 기왕의 고난을 성숙의 열매로 변화시킬 수 있지만, 파괴적인 영향은 그 고난의 상처 자리에 그대로 머무르게 한다. 비교적 단순하게 보이는 이 논리를 우리는 국가나 사회제도에 적용해 볼 수 있다. 왜 형벌제도를 통해 어떤 사람은 변화하는 반면, 다른 사람은 재범·누범의 굴레 속에 갇혀 살게 되는가. 어떤 사람은 형벌이라는 고통의 과정 속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사회와 화해하는 자리로 나아가는데, 다른 사람은 동일한 과정 속에서 미움과 분노, 절망의 반응을 보이는가. 더 나아가 우리는 이 논리를 학문의 세계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진리를 탐구하는 치열한 학문의 세계에도 실패와 좌절의 위험은 항상 따르게 마련이다. 어떤 이들은 성공의 열매를 맛보지만, 다른 이들은 실패의 고배를 마시기도 한다. 과학의 세계에서 연구자들은 거듭된 실패를 거쳐 새로운 가설이 진리라는 최종 단계에 이르러 간다. 거듭된 실험에서 쓰라린 실패를 반복하는 연구자들의 고통이 얼마나 가슴 저리는 아픔이 될지 우리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원천기술과 같은 세계 초일류를 다투는 연구 분야에서 막대한 연구비 투여와 세간의 집중된 시선을 감안하면, 고독한 실험실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실패가 얼마나 힘든 고통이 될까.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라는 평범한 진리를 잊어버린 채, 우리는 어느새 세상사에서 불패 신화, 성공 신화에 길들여져 왔다. 창조적 실패를 자극하는 선한 영향력을 지닌 인적·제도적 장치를 우리는 아직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학문적 속임수나 표절 같은 일탈 행위가 잦아들지 않는 결과를 낳는다. 대학도, 정부도 이제는 연구자들에게 실패의 정직한 보고자가 될 수 있는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한다. 오늘 한 사람의 실패가 밑거름이 되어 내일 다른 성공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우리나라의 학문적 연구시장에 축적된 정직하고 양심적인 실패보고서는 성공한 연구성과 못지않게 내일의 값진 자산이 될 수 있다는 긴 안목을 키워야 한다. 그래서 외롭고, 치열한 정신적 씨름을 하는 이 땅의 연구자들이 당장의 연구 결실에 연연하기보다 연구 과정에 충실하면서, 실패와 성공을 아우르는 풍요로운 지적 시장을 형성해 나갈 수 있도록 분위기를 진작시킬 필요가 있다. 마침 새 정부 들어 창조경제 논의가 한창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창조경제의 지평에 안착하려면 먼저 한 번의 실패를 값진 창조의 밑거름으로 삼고 도약할 수 있는 관심과 배려의 장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어야 한다. 미당(未堂 )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울고, 시인은 잠 못 이루는 고뇌의 시간들을 보탰다고 한다. 국화꽃 같은 한 송이의 연구 결실을 거두기 위해 지금 우리는 고독한 연구자들의 곁에서 무얼 하고 있는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연구자들에게 희망의 나라를 열어 주어야 하겠고, 경계를 뛰어넘어 그들의 상상력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부처 이기주의의 칸막이도 거둬들여야 한다.
  • 살생부 오른 박주영

    살생부 오른 박주영

    스페인 프로축구 셀타 비고에 임대된 박주영(28)이 원 소속팀인 잉글랜드 프로축구 아스널의 방출 선수 명단에 포함됐다는 현지 언론의 보도가 나왔다. 1일 축구 전문 매체 ‘커트 오프 사이드’에 따르면 아르센 벵거 아스널 감독은 박주영을 비롯해 니클라스 벤트너, 마루아네 샤마흐를 다음 시즌 전력에서 제외, 여름 이적시장에 내놓을 작정이다. 벵거 감독은 새로운 공격수 영입 계획을 갖고 있는데 다비드 비야(FC 바르셀로나)와 스테판 요베티치(피오렌티나)를 영입 리스트에 올려놓은 채 각각 1000만 파운드(약 170억원)와 2400만 파운드(약 410억원)를 제시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매체는 “벵거 감독이 선수 급료 지출을 줄이려고 이들 3명에 대한 헐값 이적 제의에도 귀를 기울일 것”이라고 전했다. 아스널의 입장이 정해진 만큼 박주영도 아스널 복귀를 포기하고 새로운 팀을 알아보아야 할 상황에 내몰렸다. 최근 전 소속팀 AS 모나코와 릴이 관심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아스널이 박주영을 영입하면서 지불한 이적료 500만 파운드(약 85억원)를 회수하겠다는 자세를 굽히지 않으면 이적 협상이 잘 풀리지 않을 수 있다. 박주영이 최근 2년 동안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지 못했기 때문에 선뜻 이 금액을 내놓고 영입할 팀도 찾기 어려운 실정. 이적료가 낮춰지면 여러 팀들이 관심을 보일 수 있지만 아스널의 입장은 확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아스널이 팀에서 내보내기로 정한 만큼, 이적료를 낮춰 박주영이 수월하게 다른 팀으로 이적할 수 있게 배려하는 것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이래저래 그에겐 시련의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마음을 움직인 1700여 강연 기획자 한동헌

    마음을 움직인 1700여 강연 기획자 한동헌

    EBS ‘화제의 인물’은 1일 밤 8시 20분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 강연기획자 한동헌’ 편을 방송한다. 한동헌은 국내 최고의 강연 전문 기업 CEO다. 김태호 PD, 김제동, 박원순, 제레미 리프킨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명사 1300여명을 섭외해 새로운 강연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그의 주 업무다. 그는 회사 설립 3년 만에 1700여 차례의 강연을 기획했고, 그 경험 등을 바탕으로 3000여명에 이르는 명사 네크워크를 구성했다. 세대, 지역, 분야를 가리지 않는 광범위한 연결망이다. 그는 원래 컨설팅 회사를 다니던, 제법 실력을 인정받았던 회사원이었다. 처음 기획한 강연에 11명의 명사를 불러들였고, 그 강연에 5000명의 청중이 몰렸다. 이후 200여 건의 크고 작은 강연을 기획하면서 다양한 명사들을 통해 가치 있는 이야기와 감동의 장면을 만들어 냈다. 한동헌 대표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개인의 가치와 개성. 그래서 그의 사무실은 그 흔한 사장님 집무실과 다르다. 대학 동아리방을 연상시킬 수 있는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하루 업무를 시작한다. 매주 월요일을 빼곤 출퇴근 시간마저 딱히 정해져 있지 않다. 이런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혁신적인 강연이 탄생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한 달에 진행하는 강연만도 250여 차례에 이르지만, 처음 사업을 시작했을 때는 남모를 시련도 많이 겪었다. 직원들 월급을 줘야 한다는 압박감에 정작 자신은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좋은 아이디어를 놓치지 않기 위해 중고 서적을 늘 뒤적이며, 보다 가치 있는 이야기를 전해 줄 수 있는 명사를 발굴하기 위해 발로 뛰어다닌다. 물론 한동헌 대표도 책의 가치를 부정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잘 읽은 책 1권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이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정확한 강연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강연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는 더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서다. 그래서 아예 회사에 강연장을 만들었다. 명사를 실컷 섭외했는데 적당한 강연 장소가 없어서 애먹은 경우가 많아서다. 영화감독 강제규, 건축가 구승회, 가수 하림 등 많은 이들이 여기서 좋은 말을 남기고 갔다.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김문이 만난 사람] 소리인생 50년… 경기민요 무형문화재 이춘희 명창

    [김문이 만난 사람] 소리인생 50년… 경기민요 무형문화재 이춘희 명창

    맑고 투명하다. 부드러우면서도 섬세함이 있다. 하여 경쾌함이 그지없다. 편하고 친숙하게 다가온다. 그런데 듣기는 좋지만 제대로 부르기는 결코 쉽지 않다. 우리가 흔히 듣는 ‘아리랑’도 그렇다. ‘아리랑’을 제대로 부르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된장국이라도 다 똑같은 된장국이 아니듯 말이다. 그래서 경기민요는 부르기가 무척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지난해 12월의 일이다.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본부 회의장에서 우리의 ‘아리랑’을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키로 하는 순간이었다. 즉석에서 이춘희 명창에 의해 아리랑 열창이 이루어졌다. 심금을 울리는 명창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엄숙했던 회의장 분위기는 어느새 편하고 부드러워졌다. 많은 박수갈채를 보내면서 한국의 ‘아리랑’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다들 ‘역시 세계 문화유산이여~’ 하는 것 같았다. 무형문화재57호(경기민요) 이춘희 명창은 50년 소리인생을 맞이하고 있다. 전통민요협회 이사장, 한국전통예술학교 교장 등의 직함 외에도 대학 강의와 공연 등으로 여전히 분주하다. 5월 한 달만 해도 4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가정의 달 명품 콘서트-행복’에 출연한다. 국악오케스트라와 함께 북한 작곡가 최성환의 ‘아리랑 환타지’로 시작해 ‘이별가’ ‘한오백년’ 등 애조띤 노래 위주로 부른다. 8일 어버이날을 맞아 부산국립국악원에서 ‘회심곡’ 등 평소 즐겨 부르는 경기민요를 열창한다. 그러면서 ‘아리랑’을 들고 서울, 부산, 대구 등 주요 도시를 순회하는 공연을 한다. 아리랑의 세계 인류무형문화재 등재를 기념하기 위한 무대이기도 하다. 그는 무대에 설 때마다 빼놓지 않을 만큼 ‘아리랑’을 각별하게 여긴다. 우리 민족의 한을 늘 가슴에 품는 까닭이다. 지난 22일 낮 한양대 캠퍼스 음악관에서 이 명창을 만났다. 매주 월요일에 한양대 강의가 있기 때문이다. 봄날 햇볕이 따사로운 음악관 앞에서 잠시 사진 촬영을 한 뒤 안으로 들어가 마주 앉았다. 요즘 근황에 대해 물었더니 “얼마 전까지 맡고 있던 국립국악원 예술감독은 임기가 다 돼 그만두었고, 보다시피 대학과 한국전통예술학교 등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고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전통예술학교에서는 1년 전부터 학교장을 맡고 있단다. 경기민요 등 전통예술을 배우려는 40여 명의 학생이 현재 공부 중이며 생긴 지가 얼마 안 돼 졸업생은 아직 4명 정도라는 설명이 이어진다. 다음 달에 있을 공연 준비는 잘 돼 가느냐는 질문에 “늘 하는 공연이기도 하지만 소리 인생 50년이기도 하고 특히 유네스코 등재를 기념해 아리랑 전국 순회공연을 하게 돼 의미가 있는 것 같다”는 소감으로 대신했다. 얘기가 나온 김에 지난 12월 유네스코본부 회의장에서 ‘아리랑’을 부를 때의 느낌이 어떠했는지 다시 물었다. “그날 오전부터 한복을 입고 11시간을 꼬박 기다렸습니다. 장소가 무대도 아닌 썰렁한 회의장이고 그쪽 분들의 귀를 깜짝 놀라게 해야 하는데 걱정이 됐죠. ‘아리랑’이 문화유산으로 확정됐다는 발표가 있자마자 객석에 앉아 있다가 바로 ‘아리랑~’ 하면서 소리를 지르며 앞쪽으로 치고 나갔지요. 분위기가 확 달라졌고 표정을 보니 아주 호의적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노래가 끝나자 ‘정말 아름다운 소리다’ ‘같이 사진 찍자’고 하면서 인터뷰하자는 사람이 많더군요. 지금도 그 광경이 눈에 선합니다. 제 자신도 정말 감동적이고 역사적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도 아리랑을 늘 부르고 사랑했지만, 앞으로도 더욱 좋아하게 된 운명이 됐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2년 전 독일 단독 공연무대에서도 이와 비슷한 감동을 하였다고 회고한다. “반주 4명과 함께 아리랑, 회심곡 등을 불렀습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감상하던 독일인들이 공연이 끝날 때 많은 박수와 함께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독일인들이 진중하게 한국의 민요를 감상하는 모습을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외국에서의 반응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매우 좋습니다. 우리 민요를 들고 해외로 자주 나가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에게 경기민요란 어떤 것인지 물었다. “진짜 수도 서울의 민요이며 경쾌하고 투명하면서 야질야질하다. 그러나 밝음과 섬세함 등 전체를 넘나들어야 하기 때문에 부르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대답이 얼른 돌아온다. 이어 “경기민요에는 옛날 역사나 변화의 과정이 없다. 그래서 15년 전부터 희로애락이 담긴 실험적인 소리극을 통해서 많은 성과도 거두었고 진화를 거듭해 오고 있다”고 부연했다. 소리극은 그가 매년 공연 때마다 시도하는 단골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경기민요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을까. 그는 서울 토박이다. 집안 대대로 용산구 한남동에 살았다. 그 때문에 어릴 적 친척집에 가느라 기차를 탈 일이 한 번도 없었다. 그에게 유일한 즐거움은 라디오 등을 통해 흘러나오는 경기민요를 대중가요처럼 듣는 것이었다. 특히 14살 때 라디오 드라마 ‘장희빈’의 주제곡에 홀딱 반했다. ‘구중궁궐 긴 마루에 하염없이 눈물짓는 장희빈~’으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사춘기 소녀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당시 우상으로 여겼던 황금심씨가 불렀으니 더욱 그랬다. 무조건 가수가 되고 싶었다. 소녀의 이런 열망이 깊고 깊어져 어느 날 위경련이 생겼다. 병원 응급실에 실려갔다. 일주일째 입원하던 날 주위에서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주라’고 권유했고 부모는 딸을 살리고 싶은 심정으로 노래를 허락했다. 결국, 가수가 되려고 대중가요 학원에서 3년 가까이 최숙자의 ‘백령도 처녀’ 등 당시 유행하던 여러 대중가요를 배웠다. 그러던 16살 때 우연히 친구 따라 종로3가에 있는 민요 학원을 가게 됐다. 그곳에서 경기민요 명창 이창배(1983년 작고) 선생을 만나면서 민요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이창배 선생은 당시 ‘선소리타령’의 명인이었다. 혹독한 가르침을 받던 어느 날 이창배 선생한테 ‘너한테 노래가 도대체 뭐냐?’라는 질문을 받게 되고 그 답을 구하려고 죽기 살기로 소리 연습을 했다. 지금처럼 녹음기나 캠코더가 없어 항상 귀로 듣고 연습을 했다. 밥을 먹을 때나 길을 걸을 때에도 늘 소리를 질러댔다. 길을 걷다가 전봇대나 담벼락에 부딪힌 경우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후회도 적지 않았다. 수입이 있는 것도 아니고 레슨비에 교통비를 감당하기 힘들어 여러 번 그만둘까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이창배 선생한테 소리 배운 지 10년이 흘렀다. 이후 명창 안비취 선생의 문하로 들어가면서 기량이 일취월장했다. 하지만 그에게 찾아온 또 하나의 시련이 있었다. 다름 아닌 무대 공포증이었다.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을 때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무대는 엄청 무서웠습니다. 벌벌 떨리고 숨이 차고 중환자처럼 공포증이 심했습니다. 병원에 가서 진단받고 약을 먹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극복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는 운동을 하면서 극복했지요. 그러면서 노래 연습 또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했습니다.” 방음장치를 한 골방에서 하루는 ‘유생가’만 30회, 또 하루는 ‘제비가’만 30회 등 매일 다섯 시간씩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면서 소리를 했다. 뿐만 아니다. 한동안 두문불출하고 산을 찾아 판소리의 득음 과정처럼 소리를 내고 또 소리를 내는 혹독한 고행을 해서야 비로소 스스로 창법을 터득했다. 그래서 1985년 첫 개인 발표회 무대를 무난하게 끝냈다. 자신의 소리인생에서 가장 자신감을 준 무대였다. 이를 두고 “아마 실패했으면 어디에 가서 죽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후 여러 차례 성공적으로 무대에 서면서 그의 진가를 발휘해 나갔다. 1997년 나이 50에 스승 안비취의 계보를 이어 경기민요 문화재 보유자가 되면서 명창이라는 수식을 얻었다. 그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무대는 그때도 무서웠지만 5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무섭다”며 웃는다. 소리는 한도 끝도 없기 때문이란다. 그에게 꿈을 물었다. “우리나라에는 국악 중·고등학교는 있으나 초등학교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면서 모든 예술이 그렇지만 어릴 때부터 시작해야 기초가 튼튼해지고 명창과 대가가 나오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여력이 되는 대로 제자를 양성하는 일에 온 힘을 쏟을 것이며 그 제자들이 잘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꿈이라고 말한다. 또한 자신이 어렵게 소리인생을 살아온 만큼 후학들에게는 좀 더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겠다고 말한다. 선임기자 km@seoul.co.kr ■이춘희 명창은 194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0대 때부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대중가요와 경기민요에 심취했다. 14살 때 대중가요 학원에서 노래공부를 하다가 16살 때 경기민요 학원에서 이창배 선생을 만나 민요의 길로 들어섰다. 10년 동안 경기민요를 배운 뒤 안비취 선생의 문하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무대에 서면서 이름을 알린다. 1985년 첫 개인 발표무대를 시작으로 매년 국내외 공연을 가졌다. 1997년 나이 50에 안비취 선생의 계보를 잇는 무형문화재 57호에 지정되면서 명창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2012년 12월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본부 회의장에서 ‘아리랑’이 인류무형문화재로 등재되는 순간 ‘아리랑’을 불러 역사적 순간을 연출했다. 현재 한국전통민요협회 이사장, 한국전통예술학교 교장 외에 여러 대학에 강의를 나가고 있다. 제23회 한국방송대상 국악인부문 대상(1996년), 제32회 대한민국 문화예술대상(2000년), 국민훈장 화관문화훈장(2004년) 등을 수상했다.
  • “암투병, 어떤 시련도 이길 자신감 갖게 했죠”

    “끝이 보이지 않던 투병 생활을 버티도록 도운 게 바로 공부였습니다. 가족은 물론이죠. 이전엔 책 읽기를 지겹게 여겼거든요.” 서울시 시민상 소년상 대상 수상자로 뽑힌 남은채(18·백암고 3년)양은 23일 이렇게 말하며 수줍게 웃었다. 남양은 중학교 1학년이던 2008년부터 2년에 걸쳐 림프종(혈액암)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더불어 사이버 민간외교사절단인 ‘반크’와 양로원 봉사 활동까지 하고 있다. 남양은 “특히 한비야 여행가의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이란 책을 읽고서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야겠다는 마음을 다졌다”고 되돌아봤다. 남양은 “이후 국제기구에 종사하며 경제를 통해 세계 문제 해결에 앞장서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됐다”고 덧붙였다. 남양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약 네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공부를 더 잘했을 텐데 안타깝다’고 하지만 오히려 큰 어려움을 겪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친구들은 거치지 않은 거대한 산을 넘으며 얻은 힘이야말로 어떤 시련이 닥쳐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만들었다”고 말을 끝맺었다. 송한수 기자 onekor@seoul.co.kr
  • [사설] 朴정부 50일, 소통의 정치로 난국 헤쳐가라

    오늘로 출범 50일을 맞는 박근혜 정부의 초반 성적표는 국민 다수가 체감하듯 기대치를 상당히 밑돈다. 단적으로 각종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국정 지지도가 이를 말해준다. 여론조사기관 한국갤럽의 조사를 놓고 보면 박 대통령이 당선인 신분이던 1월 하순 56%의 지지율로 고점을 찍은 뒤 새 정부 출범 후 지난달 하순 41%로까지 떨어졌다가 지난주 들어 44%를 기록하며 다소나마 회복 기미를 보인 게 고작이다. 대선 때 표를 던진 유권자들조차도 5명 중 1명이 실망스러워한다는 얘기다. 박근혜 정부의 이런 시련은 정부 인사의 난맥과 원칙을 앞세운 박 대통령의 리더십에 어른대는 불통 이미지에서 비롯됐다고 할 것이다. 장·차관 후보자 6명의 낙마를 부른 검증 부실과 전문성을 중시한 나머지 지역과 성(性)의 안배가 이뤄지지 못해 결과적으로 국민 통합의 정신을 구현하는 데는 크게 미흡했던 정부 인사, 그리고 정부조직 개편을 둘러싼 여야의 대치에서 도드라진 박 대통령의 고집스러운 자세가 지지도 하락으로 이어진 것이다. 박 대통령이 최근 여야 지도부를 잇따라 청와대로 초청해 만찬을 함께하며 정치권과의 본격적인 소통에 나선 것은 그런 점에서 의미가 크다. 특히 민주당의 지도부와 소속 국회 상임위원장들을 초대해 인사검증 부실을 사과하고 국정 전반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대화한 것은 가파른 대립 정치만 봐 온 국민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과거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청와대가 모두 출범 초 정치권과 거리를 둔 것이 국정 전반의 주름으로 이어졌던 점을 감안할 때 새 정부의 여의도 다가서기는 올바른 방향이자 자세라고 할 것이다. 모쪼록 이 같은 정치권의 대화 모드가 민생에서의 결실로 이어지길 바란다. 지금 국회엔 경기 활성화를 위한 추경안 편성과 부동산 관련 세제 개정안을 중심으로 민생과 직결된 현안 80여개가 쌓여 있다. 대부분 때를 놓치면 정책효과가 반감되는 사안들로, 그만큼 여야의 조속한 절충이 요구된다. ‘긴밀한 협력’을 상대방의 양보로 간주하는 행태부터 여야는 버려야 한다. 내용보다 타이밍이 중요한 현안들이 대부분인 만큼 내가 먼저 과감하게 양보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협상에 나서기 바란다. 어제 북한은 우리 정부가 꺼낸 대화 카드를 교활한 술책이라며 일축했다. 눈에 확 띄는 선물 보따리를 내놓을 때까지 도발 위협을 계속하겠다는 뜻을 내보인 것이다. 어린아이 떼쓰듯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들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은 소통과 협력 그리고 결속이다. 겁박하면 할수록 우리 사회가 더욱 공고해진다면 결국 제 풀에 지칠 쪽은 북한이다. 그들을 하루속히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기 위해서라도 정부와 여야는 긴밀한 소통으로 제 할 일을 다하는 정치를 보여주기 바란다.
  • [씨줄날줄] 대한문 수난사/함혜리 논설위원

    1897년 10월 12일 새로 지어진 환구단 안은 향 냄새로 가득찼다. 이날 고종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의 출범을 하늘에 고하는 첫 제사를 지내고 황제에 즉위했다. 광무(光武)라는 연호도 쓰기 시작했다. 과거의 왕들은 천자의 나라 중국에서만 하늘에 직접 제를 올릴 수 있다며 제천의식을 삼갔지만 고종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남별궁 터에 환구단을 지어 제를 지냄으로써 자주독립의 의지를 대외적으로 천명했다. 이후 민족자존의 상징인 환구단에서는 1년에 두 차례 제천의식이 거행됐다.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서 환구단으로 향할 때 고종은 정남쪽에 있는 정문 인화문이 아닌 동쪽의 대안문(大安門)을 주로 통했다. 민가가 밀집하고 외국공관이 많이 들어서 있던 인화문 쪽에 비해 대안문 쪽의 도로가 빨리 정비되면서 사람들도 대안문을 주 출입구로 사용하게 됐다. 1904년 화재로 소실된 전각들을 중건하면서 대안문을 수리한 뒤 고종은 1906년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고치고 정문으로 삼도록 했다. 대한문의 영광은 여기까지다. 원래 지금의 태평로 중앙선 부분에 위치했던 대한문은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야 했다.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이 강제체결되고 8월 29일 공포됨으로써 대한제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뒤 일제는 조선의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대한제국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병탄 이듬해 조선총독부는 환구단 건물을 철거하고 총독부 건물에서 소공로까지 대로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1914년 황토현(광화문 네거리)에서 남쪽으로 환구단을 관통하는 태평정통이 개설되면서 대한문은 원래 위치에서 서쪽으로 옮겨졌다. 1926년 조선총독부는 덕수궁 땅 일부를 매각하면서 덕수궁 해체와 함께 대한문을 그 위치에서 다시 30칸 뒤로 물러나도록 했다. 1961년 서울시는 태평로 도로폭을 6m 확장했는데 이때 대한문도 6m 뒤로 물러나야 했다. 철책이던 덕수궁 돌담길이 복원되고 차도가 생기면서 대한문이 도로 한가운데 덩그맣게 남아 차량 통행을 방해하는 신세가 되자 결국 서울시는 1970년 12월 대한문을 22m 뒤로 옳겼다. 현재 위치한 곳이다. 1년 넘게 천막농성이 벌어지던 대한문 옆에서 엊그제 쌍용자동차 범국민대책위원회와 민주노총 등이 참여한 ‘희망지킴이’가 캠핑시위를 벌였다. 서울 중구청이 농성천막을 철거하고 화단을 설치했지만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시위대의 확성기 소리에 고궁의 고즈넉함은 꿈도 꿀 수 없다. 끝나지 않는 대한문의 시련을 바라보는 마음이 참으로 착잡하고 울적하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개성공단 잔류 직원들 “저는 염려 말고 거래처 챙기세요”

    “거래처가 끊어지면 공장 식구들은 어떡합니까. 저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알아서 해결할 테니 걱정 마시고 사장님은 어떻게든 남쪽 거래처부터 챙기세요.” 개성공단에서 의류제품을 생산하고 있는 A대표는 12일 개성공단에 남아 있는 직원과 통화하면서 이러한 내용의 메시지를 전달받았다. 개성공단 가동 중단 나흘째인 이날 개성공단기업협회에는 입주기업 대표들 네다섯 명이 사무실을 찾았다. 입주기업마다 최소인원인 한두 명이 남아 있으며, 직원들이 아픈 곳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지만 남아 있는 직원들은 도리어 남쪽 상황을 걱정하고 있다고 전했다. A대표는 하루에도 몇 차례나 개성공단 직원에게 전화를 건다. 식량도 다 떨어졌는데 끼니는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4월이지만 날씨도 쌀쌀한데 밤에 자면서 떨고 있는 건 아닌지 눈에 선하다고 했다. 개성공단기업협회 사무실에 모인 입주기업 대표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전날 북한에 대화를 제의했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정부에 서운함을 내비쳤다. 대표들은 “전재산을 쏟아부어 일군 공장인데, 2004년 개성공단에서 첫 조업을 시작한 이래 지금이 최대의 시련”이라고 전했다. 입주기업 대표들은 오는 17일 방북을 위해 이날 오전 통일부에 방북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들은 개성공단 주재원에게 쌀 등 먹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이날 식자재 등을 싣고 남북출입국사무소로 갈 예정이다. 홍혜정 기자 jukebox@seoul.co.kr
  • [주말 인사이드] 실패한 기업인들이 찾는다는 그 섬… 4주간 무슨 일이

    [주말 인사이드] 실패한 기업인들이 찾는다는 그 섬… 4주간 무슨 일이

    해마다 100만여명이 창업을 하지만 80여만명이 폐업을 한다. 금융위원회와 중소기업청 자료에 따르면 창업 기업의 생존율은 3년 후 55%, 5년 후 39%, 10년 후 24%에 불과하다. 창업자 10명 중 5명이 3년 내 문을 닫는 셈이다. 창업 기업의 폐업 횟수는 1.3회, 재창업 횟수는 0.8회로 폐업 후 50%는 재기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번 쓰러지면 재기하기가 그만큼 쉽지 않다는 방증이다. 실패한 기업인은 죄인이 아니지만 일순간 ‘인생의 낙오자’로 전락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들의 재기를 ‘힐링’으로 접근한 색다른 시도가 남해의 외딴섬, 경남 통영시 한산면 매죽리 죽도에서 진행되고 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조차 없이 벼랑 끝에 몰린 19명이 지난 2월 24일 무거운 마음으로 섬을 찾았다. 4주간의 시간, 그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지난달 21일 통영에서 배를 타고 1시간 만에 도착한 죽도는 인적이 드문 조용한 섬이다. 재기중소기업개발원이 폐교를 리모델링한 죽도연수원에서는 ‘실패 중소기업인 힐링캠프’가 진행되고 있었다. 2011년 11월 첫 캠프를 연 뒤 5회째다. 캠프는 3월과 6월, 11월 등 매년 3차례 진행된다. 연수원으로 가는 길은 시작부터 험난했다. 가파른 오르막길에 세워진 표지판이 눈에 띈다. “묵은 마음 비워서 맑고 둥근 마음만 가득 채워 가는 곳…허밀청원.” 섬에 내리기 전까지 ‘외인구단’이나 ‘실미도’를 연상했기에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글귀다. 가쁜 숨을 돌리려 들어간 연수원 식당에서 형광색 점퍼를 입은 이들이 반갑게 인사한다. 캠프 참가자들이다. 퇴소를 앞두고 그동안 생활했던 텐트와 침낭 등을 정리해 햇볕에 말리는 작업이 한창이다.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표정이 밝은 그들의 모습에서는 얼마 전까지 ‘인생 실패자’로 자책하며 방황했다는 사실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한상하(43) 원장은 “이곳에서 ‘재기’는 재창업이 아니라 잃었던 용기를 되찾고 깨진 가족이 만날 수 있도록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라며 “실패한 사람에게는 실패 마인드가 숨어 있는데 치유 없이 정상적인 패자 부활이 가능하겠느냐”고 반문했다. 4주간 무료로 진행되는 힐링캠프는 방목 형태로 진행된다. 주입식 강의나 창업 스킬 등 성공 기법을 전수하는 과정은 없다. 100명이 넘는 재능 기부자 중 컨설턴트는 배제하고 종교인과 심리치료사 등이 강사로 참여하고 있다. 철저하게 ‘의도된 불편함’을 극복하며 스스로 마음을 관리하는 시간의 반복이다. 사업 실패로 같은 아픔을 경험했던 설립자와 한 원장의 신념, 그리고 재기 과정에서 간절히 필요했던 것을 녹여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캠프는 술과 담배, 휴대전화, 지갑을 수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4주간을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투자하라는 취지다. 오전 5시 50분 기상과 함께 편치 않은 산길을 헤치고 명상 바위에 오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취침 시간은 정해지지 않았다. 식사는 하루 2끼만 제공하고 입소 다음 날부터 퇴소 전날까지 26일간 텐트에서 야영한다. 초기 2주간은 강의장을 제외하고는 대화도 차단된다. 캠프에서는 자급자족을 하기에 농촌 활동도 필수 일과다. 한 원장은 “실패한 기업인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환경을 탓하고 남을 원망한다”면서 “신세 한탄이 아니라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모든 게 내 탓’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전했다. 강당에는 “나는 지금 여기에 왜 와 있는가”, “고난과 좌절은 성공으로 가는 과정일 뿐이다”, “나는 모든 면에서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자기 암시 글들이 곳곳에 걸려 있다. 캠프 참가자는 30대에서 60대까지 다양하다. 처음에는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고 쉽게 말문도 열지 않는다. 실패의 기간이 길수록 이 현상은 더욱 심해진다. 얼굴은 죽을상이고 의욕은 찾아볼 수 없다. 참가자들은 구구절절한 사연을 토로하지만 캠프에서는 철저히 무시한다. “나는 잘했는데…”라고 할 때마다 “너로 인해 다른 사람이 행복했는가”라는 질문이 되돌아간다. 휴먼 영화를 시청하고 100배 절을 올리고 사이코드라마에 직접 출연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마음의 변화를 겪는다. 야영은 캠프의 ‘백미’다. 산속에 설치된 텐트 간 거리는 30m가 넘는다. 아무런 간섭 없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회한, 후회의 뜨거운 눈물을 수없이 흘린다고 한다. 18년간 전자계통사업을 하다 2008년 폐업한 김경곤(59)씨는 “여기 온다고 뭐가 해결될까 하는 고민과 창업자금을 받는 데 유리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반신반의했다”면서 “마음의 어두운 그림자를 털어내면서 몸과 마음이 맑아졌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식품제조유통업을 했던 정영준(51)씨는 위기 탈출을 위해 입소했다. 정씨는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 왔지 스스로를 되돌아볼 기회가 없었는데, 매우 유용한 시간이 됐다”고 말했다. 실패한 기업인들의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김경곤씨는 “아침이 밝아 오는 것이 싫었고 내 이름이 적힌 우편물을 받는 게 두려웠다”면서 “특히 나 때문에 가족까지 피해를 당하는 것이 가장 괴로웠다”고 회고했다. 김씨는 “당시 자살하는 사람에게 공감이 갔다”면서 “남을 원망하는 마음만 들고, 내가 왜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되면서 술로 시간을 허비했다”고 회고했다. 사업이 망한 이들은 대부분 신용불량자로 전락한다. 작은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최소한 신용을 회복해야 하는데 상당수는 빚의 늪에서 헤어날 방법을 찾지 못한다. 익명을 요구한 40대 후반 남성은 “신용 회복을 하더라도 카드 발급이나 대출이 안 되는 등 재기를 위해 기댈 언덕이 없다”면서 “사업이 잘되면 금융권이 제일 먼저 고개를 숙이며 찾아오지만 반대 상황에서 가장 먼저 발목을 잡는 것도 금융권”이라고 성토했다. 캠프를 거쳐 간 68명 중 50%가 재창업(12명)을 하거나 취업에 성공했다. 5년간의 아픔을 딛고 대구에서 재기한 향천의 김영만(47) 대표. 그는 2차례 누룽지 제조 업체를 운영하다 무일푼으로 쫓겨났다. 2008년 이후 신용불량자로 4년간 ‘바닥 인생’을 경험했다. 지난해 3월 2회 캠프에 참가한 후 중소기업청의 재창업 프로그램을 통해 재기했다. 김 대표는 “항상 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고 스스로에게 경종을 울린다”고 전했다. 지난달 22일 4주간의 일정을 마친 5회 캠프 참가자들이 1명의 낙오자도 없이 섬을 나섰다. 그토록 힘겨워했던 현실 속으로 다시 들어선 것이다. 오늘의 실패를 자산이자 축복으로 되돌리는 항해가 시작됐다. 글 사진 죽도(통영) 박승기 기자 skpark@seoul.co.kr 그래픽 길종만 기자 kjma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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