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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사가 걸어온 길] (11) 한국 헌법학의 태두 김철수 (상)

    [명사가 걸어온 길] (11) 한국 헌법학의 태두 김철수 (상)

    열두 살 되던 해 일제가 패망했다. 환희에 천지가 요동쳤다. 해방. 어렸지만 그게 뭔지 너무도 잘 알았다. 그러나 조국의 운명은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혼돈과 분열이었다. 국토는 남북으로 찢기고 민중은 좌우로 갈렸다. 얼마 전까지 ‘조국 해방’을 외치며 함께 어깨를 걸었던 동지들이 생각이 다르다고, 처지가 다르다고 원수가 돼 등을 돌렸다. 어제까지 한 교실에서 공부했던 친구가 좌익 프락치로 몰려 책상을 비웠다. 해방 공간의 극심한 무정부 상태를 보며 소년은 결심했다. 반드시 국가 시스템의 뼈대가 되는 헌법을 공부하겠노라고. 그 다짐대로 헌법 연구는 평생의 업이 됐고, 소년은 우리나라 헌법학의 ‘태두’(泰斗)가 됐다. 지난 10일 서울 동작구 상도동 한국헌법연구소에서 만난 김철수(80) 서울대 명예교수는 5시간에 걸친 긴 인터뷰에도 피로한 기색 없이 꼿꼿하게 여든 성상의 인생과 철학을 얘기했다. 1933년 7월 대구에서 빈농(貧農) 집안의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책 읽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다. 유복한 친구를 둔 덕에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책 읽느라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다. 통학 기차 안에서도 그의 손에는 항상 책이 들려 있었다. “친구 아버지가 당시 대구지역 마사회 회장이었어요. 경마장에는 일본 사람들이 자기들 나라에서 가져온 세계 문학대전집, 세계 사상대전집 같은 책들이 그득그득 꽂혀 있었지요. 그때 읽은 책 중 가장 감명 깊었던 게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었어요. 강의 중에 ‘레 미제라블’을 말하면 학생들은 ‘아 장발장이 빵 하나 훔쳤다가 탈옥하는 거요?’ 정도의 반응이 대부분이었지만 사실 이 책은 대단한 책입니다. 무려 26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 형벌, 정치, 법철학 등 다양한 사회 문제와 고민이 담겨 있으니까요.” 책에 빠져 살던 김 교수의 관심이 사회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은 나라가 광복을 맞으면서였다. ‘민주국가 건설’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어떤 민주주의를 택하느냐를 두고 극심한 분열 양상이 온나라를 휩쓸었다.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나라가 완전히 엉망이었지요. 특히 제가 살던 대구는 당시 공산주의의 총본산인 모스크바(소련의 수도)에 빗대어 ‘한국의 모스크바’로 불렸을 정도예요. 좌익의 활동이 국내 어떤 도시보다도 활발하고 강했어요. 그러다 보니 저는 극렬한 좌우 대립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며 큰 충격을 받았어요. 경찰이 사람을 잡아가고 때리고, 또 반대되는 공공기관 테러가 일어나고. 우리 사회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바로 헌법이었던 것이지요.” 1947년 제헌(制憲) 헌법을 만든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법대생이나 학자들이 보던 고시 잡지 등을 읽으며 헌법학자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때가 우리 나이로 열다섯이었다. 1950년 전쟁이 터졌다. 고도근시로 고생하던 그는 전쟁터로 끌려가지 않았다. 1952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전쟁 탓에 서울의 대학들이 부산으로 피란 온 터였다. 부산의 허름한 판자촌에서 법학 강의를 들었다. 법학도들이 ‘천막 강의실’에서 힘겹게 공부하던 이 시기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불법적인 개헌을 추진한다. 이른바 ‘발췌개헌’의 시작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부산으로 피란 가 있는데 거기에서 임기 4년이 만료됐어요. 이 대통령은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헌법을 고치려 들었는데, 이걸 야당이 반대했고 그 결과로 야당 의원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어요” 이 대통령은 “전시에 부산에 침투한 간첩이 많으니 소탕을 해야 한다”는 이유를 대며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이내 속셈을 드러냈다. 간첩을 잡겠다던 당초 주장과 달리 야당 의원과 무고한 시민에 대한 검거와 폭력이 이뤄졌다. “야당 지도자였던 장면 선생도 잡아넣었어요. 3명 이상 모이면 잡아갔어요. 국회로 출근하는 버스가 있었는데 버스에 탄 채로 계엄사령부에 끌려 가기도 했어요. 옛 경남도청에 무덕관이라고 해서 유도 연습장 같은 곳을 국회의사당으로 썼는데 그 일대에 ‘백골단 깡패’들이 쫙 깔려 있었어요. 이 대통령에 반대하는 의원은 전부 계엄사령부로 소환했다고 보면 될 겁니다.” 김 교수는 해방 이후 우리 사회의 질곡의 상당 부분은 친일파 등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지만 일부 불가피한 대목도 있었다고 말했다. “광복 이후 친일파 척결은 예견된 수순이었습니다. 그래서 친일파를 처벌하는 법률도 만들었는데 법률로 처벌하려다 보니까 당시 정부관료, 경찰, 군인 등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걸렸던 거죠. 일제강점기 때는 외국 유학자를 비롯해 능력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이 대통령이 보기에 친일파를 다 쫓아내면 행정이나 정치를 못하겠다 싶었던 거죠. 반민특위에 걸렸던 경찰들을 풀어주고, 결국 그 경찰들이 치안 등 최소한의 사회 시스템을 유지해 전쟁통에 질서를 유지했다고 볼 수 있죠. 일부 사람들은 이 대통령이 반민특위를 없앴다는 이유로 친일파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당시의 사정도 일부 헤아릴 필요는 있을 겁니다.” 이 대통령은 연임에 성공했고 1953년 전쟁이 끝났다. 김철수는 스무 살의 청년이 됐다. 김철수는 한 살 아래 학과 동기를 만나 사랑을 키워갔다. 궁핍과 혼돈의 시대에 서울대 법대 커플의 사랑은 주위의 부러움과 시샘을 샀다. 하지만 당사자들을 포함해 그 누구도 이들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날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대화 주제가 ‘첫번째 아내’로 옮겨가자 김 교수의 목소리톤이 낮아졌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김 교수의 첫 번째 아내는 한국 문학계와 여성 예술인들 사이에서 ‘불꽃처럼 살다간 여인’으로 회자되는 전혜린이다. 두 사람은 부산에서 맺은 인연을 서독(독일 통일 전) 뮌헨에서 키워나갔다. 전혜린이 1955년 먼저 뮌헨대 유학길에 올랐고 김 교수는 이듬해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이역만리에서 기쁨과 고통을 나눴다. 문학가가 꿈이었지만 아버지의 성화로 법대에 진학했던 전혜린은 독문학과에 입학해 그토록 바랐던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체계적인 법 공부에 목 말랐던 김 교수는 법학 공부를 이어갔다. 하지만 전쟁국가 출신 동양인에게 서독은 마음 놓고 공부만 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은 아니었다. 당시 누구나 그랬듯 너무도 가난했다. 나라를 벗어나 공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선택받은 삶이 됐던 시절이었다. 대통령의 허가가 있어야만 외국 송금이, 그것도 최고 50달러까지만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두 사람은 장학금과 통·번역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계를 꾸렸다. 전혜린은 훗날 유학생활의 궁핍에 대해 “물을 마시니까 죽지는 않더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인에 대한 시선은 싸늘했다. 지구상에 한국, 코리아라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사람들에게 한국에서 왔다고, ‘코리아’라고 그러면 아프리카 콩고에서 왔냐고 그랬어요. 그 나라에 기차는 있느냐, 뭘 먹고 사느냐 등 질문을 해대는데, 미개인 취급을 하더군요. 교수들도 저를 보며 전쟁 중인 나라에서 공부는 무슨 공부를 했겠느냐며 일본 학생들과도 크게 차별을 뒀습니다. 약소국 국민의 설움이란 게 뭔지 당해 보지 않고서는 알기 어렵습니다.”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소외감은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했다. 1957년 그들은 뮌헨에서 결혼을 했다. 생활은 결혼 전과 다름 없이 곤궁했지만 함께한다는 것만으로 의지와 위안이 됐다. 그러던 중 전혜린은 1959년 딸을 낳고 한국으로 돌아가 이듬해 성균관대에서 강사로 둥지를 틀었다. 김 교수는 2년 뒤 모교 교수 자리를 제안받고 서울로 돌아왔다. 배 고프고 힘들었던 서독 생활을 정리하고 고국에 왔지만 서울에서는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귀국하자마자 5·16 쿠데타가 터졌다. 박정희 당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이 무력으로 청와대를 장악했다. 당시 박정희 군부가 취한 여러 조치 가운데 ‘군 미필자는 공무원이 되지 못한다’는 게 있었다. 시력이 나빠 군대에 못 간 김 교수는 공무원인 서울대 교수에 임용되지 못했다. 서울대는 물론 어디에서도 군 미필자인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아내와의 관계도 벌어지기 시작했다. 먼저 입국한 전혜린은 대학에서 강의하며 서울의 문인들과 어울렸다. 밤 늦게까지 명동에서 삶과 죽음, 예술을 논했다. “아내가 언제부턴가 문인의 죽음을 동경했어요. 처음에는 나는 사회규범과 질서를 중시하는 법학자이고 아내는 사회의 틀보다는 자유와 이상을 갈망하는 문학가라서 서로 다르겠거니 했는데 이 사람이 자꾸 ‘니체도 카프카도 일찍 죽었다’ 이러면서 빨리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거예요. 수면제도 많이 갖고 다니고. 그러다 보니 저도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결국 두 사람은 1964년 합의이혼을 했다. 그리고 1년 뒤 전혜린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그는 교수 임용 제한이 풀리면서 서울대 법대 학생과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2년 뒤 김 교수는 고교 교사와 재혼을 했다. “아내는 지금도 꼬박꼬박 그 사람(전혜린)의 제사를 지내고 있어요. 자기가 낳은 아이들에게도 제사에 꼭 참석하라고 그러고. 참 고마운 사람이죠.” 그는 사별한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반평생 이상을 함께하고 있는 지금의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함께 표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큰 시련을 겪고 난 그는 다시 연구에 매진했다. 체계적인 헌법학 이론과 정력적인 강의, 활발한 저술활동으로 헌법학계에서 빠르게 자신의 입지를 굳혀갔다. 이는 박정희 군사정권이 새롭게 부상하는 법학자에 대해 점차 날카로운 감시의 눈초리를 들이대도록 만드는 빌미가 됐다. 드디어 등장한 유신헌법의 시대. ‘학자 김철수’는 어떻게든 이 난국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김철수가 걸어온 길 1933년 경북 대구 출생(6남 1녀 중 장남) 1956년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1957년 서독 뮌헨에서 전혜린과 결혼 1961년 서독 뮌헨대 졸업 1962년 서울대 법과대학 조교수 1967년 미국 하버드대 법과대학원 수료 1971년 서울대 법학박사 1972년 서울대 법과대학 교수(~1998년) 1988년 한국공법학회 회장(~1989년) 1990년 한국헌법연구소 소장(~2001년) 1995년 한국법학교수회 회장, 국제헌법학회 이사 1998년 제주 탐라대 총장(~2000년)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1998년~) ■주요저서 헌법학(1972) 현대헌법론(1979) 비교헌법론(1980) 법과 사회정의(1982) 한국헌법사(1988) 법과 정치(1995) 정치개혁과 사법개혁(1998) 헌법정치의 이상과 현실(2012)
  • 4·19 정신 계승… 민주주의 발전 밑거름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올해로 창설 50주년을 맞이한 가운데 지난 50년간 선거 제도의 변화에 관심이 쏠린다. 선거가 곧 민주주의의 발전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중앙선관위는 10일을 유권자의 날로 지정했다. 1948년 5월 10일 치러진 제헌국회의원 총선거일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주 선거로 기록된 제헌총선에서는 의원 200명이 선출됐고 임기는 2년이었다. 당시 전체 후보자 948명 가운데 44%에 해당하는 417명이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이때 기록한 95.5%라는 투표율은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1960년 이승만 대통령의 3·15 부정선거와 이에 따른 4·19혁명은 선거사와 민주주의에 큰 변곡점이 됐다. 선거관리위원회가 1963년 1월 21일 헌법기관으로 창설된 것도 4·19혁명 정신에 따른 것이었다. 1967년 대선에서 실시된 월남 파병 군인의 우편투표는 재외국민 투표의 효시가 됐다. 시련도 많았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헌법’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대통령과 국회의원 정수 3분의1을 뽑도록 하면서 국민의 선거권이 침해되기도 했다. 중앙선관위원장과 위원 9명도 대통령이 임명했다. 1987년 16년 만에 부활한 직선제로 치러진 13대 대선에서는 서울 구로구을 선관위 투표함 탈취사건이 발생했다. 투표함 이송 과정에서 ‘부정투표함’이라는 오해를 사면서 군중시위가 벌어져 56명의 사상자가 난 사건이다. 중앙선관위는 10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제2회 유권자의 날 기념식을 개최한다. 서울대입구역과 혜화역 등에서 선거 사진 전시회를 비롯해 기념마라톤대회, 국회의원 정수 축소와 후보자 토론회 컷오프제 관련 대학생 토론회도 열린다. 이영준 기자 apple@seoul.co.kr
  •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고개를 숙이고 앉았던 정한조의 입에서 한마디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시냇가에 허물어진 집은 사기 접시 같은데, 북풍에 이엉 날아가 서까래만 앙상하네. 묵은 재는 눈에 섞여 아궁이는 싸늘한데, 뚫린 벽 틈으로 별빛 새어드누나. 집안의 살림살이 너무나 빈약하여 모두 내어팔아야 7, 8푼도 못 되네. 세 가닥 조 이삭은 삽살개 꼬리 같고, 매운 고추 한 두름은 닭의 창자를 닮았네. 깨어진 항아리는 베로 발라 새는 구멍을 막았고, 찬장과 시렁은 새끼줄로 묶어 떨어지지 않게 하였네. 구리 수저는 오래전에 호장에게 빼앗겼고, 쇠 냄비는 이웃 토호에게 빼앗겼네. 다 해진 푸른 무명 이불 한 채뿐이니, 부부유별이란 말 이 집에선 말뿐이네. 젖먹이 적삼은 어깨와 팔꿈치가 드러나고, 태어난 이래로 바지도 버선도 알지 못하네. 다섯 살 난 맏이는 이미 기병으로 첨정되고, 세 살 난 작은 아이는 벌써 군관에 입적되었네. 두 아들 군포가 1년에 500푼이니, 하루빨리 죽기를 바라는데, 옷가지가 무슨 소용인가. 늑대와 호랑이가 밤마다 찾아와 울 밖에서 으르렁대네. 남편은 나무하러 산으로 가고, 아낙은 방앗간에 품팔이 가니, 대낮에 사립문 닫힌 모양 참담하기 그지없네. 아침 점심 두 끼는 굶고 밤에 돌아와 군불 지피며, 여름에는 다 해진 무명옷에 겨울에는 베옷을 입네. 들녘의 냉이는 이미 싹이 묻혔으니, 땅이 풀려 새싹 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고, 술지게미라도 얻어먹으려니 남의 집 술 익기를 기다릴 뿐이네. 지난봄 향미 닷 말을 꾸어 먹었는데, 그 일로 금년에는 살아남지 못하리. 나졸이 사립문에 들이닥치면 겁이 덜컥 나지만, 동헌에 끌려가 곤장 맞을 일을 걱정하지는 않네. “시생은 이런 옛날 언문 시구를 중얼거리곤 합니다. 세상이 도둑과 무뢰배와 들치기, 날치기 들로 어지럽게 된 것은 모두 벼슬아치와 글줄깨나 읽었다는 선비 들의 과욕 때문이지요.” “원래 벼슬아치들이란, 가난 속에 살면서도 의리를 지키고 도리를 어기지 않으며 나라의 어려운 일에 바른말하고 살아가면 되었는데, 언제부턴가 그 도리가 흐트러지고 말았소.” “우리들이 어찌 그런 사정을 모르겠소. 그런데 도둑들의 행동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들이 배울 점이 있소. 도둑들은 빈둥빈둥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들과는 달리 밤 깊은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뜬눈으로 일한다는 것이오. 자신들이 겨냥하던 일을 하룻밤에 결단 내지 못하면, 다음날 밤에 다시 죽기 살기로 담판을 짓는다 하오. 뿐만 아닙니다. 도둑들은 같이 일하는 동배간의 행동거지를 자기 자신의 일처럼 엄중하게 생각하지요. 그리고 아주 적은 소득에도 목숨을 걸 뿐만 아니라, 아주 값진 물건에도 크게 집착하지 않고 반푼 어치도 안 되는 물건과 미련 없이 바꿀 줄 아는 너름새가 있습니다. 도둑은 자신에게 닥친 시련과 위기 따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이겨낼 줄 안다는 것이오.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 일이 무슨 짓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이지요.” 귀 기울여 듣던 조기출이 말했다. “우리 상단의 동무들과 도둑들이 마음가짐이나 처세함에 있어 근본이 다르지 않아 놀랐습니다.” “하긴….”
  • 살생부 오른 박주영

    살생부 오른 박주영

    스페인 프로축구 셀타 비고에 임대된 박주영(28)이 원 소속팀인 잉글랜드 프로축구 아스널의 방출 선수 명단에 포함됐다는 현지 언론의 보도가 나왔다. 1일 축구 전문 매체 ‘커트 오프 사이드’에 따르면 아르센 벵거 아스널 감독은 박주영을 비롯해 니클라스 벤트너, 마루아네 샤마흐를 다음 시즌 전력에서 제외, 여름 이적시장에 내놓을 작정이다. 벵거 감독은 새로운 공격수 영입 계획을 갖고 있는데 다비드 비야(FC 바르셀로나)와 스테판 요베티치(피오렌티나)를 영입 리스트에 올려놓은 채 각각 1000만 파운드(약 170억원)와 2400만 파운드(약 410억원)를 제시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매체는 “벵거 감독이 선수 급료 지출을 줄이려고 이들 3명에 대한 헐값 이적 제의에도 귀를 기울일 것”이라고 전했다. 아스널의 입장이 정해진 만큼 박주영도 아스널 복귀를 포기하고 새로운 팀을 알아보아야 할 상황에 내몰렸다. 최근 전 소속팀 AS 모나코와 릴이 관심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아스널이 박주영을 영입하면서 지불한 이적료 500만 파운드(약 85억원)를 회수하겠다는 자세를 굽히지 않으면 이적 협상이 잘 풀리지 않을 수 있다. 박주영이 최근 2년 동안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지 못했기 때문에 선뜻 이 금액을 내놓고 영입할 팀도 찾기 어려운 실정. 이적료가 낮춰지면 여러 팀들이 관심을 보일 수 있지만 아스널의 입장은 확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아스널이 팀에서 내보내기로 정한 만큼, 이적료를 낮춰 박주영이 수월하게 다른 팀으로 이적할 수 있게 배려하는 것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이래저래 그에겐 시련의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김일수 樂山樂水] 창조를 자극하는 시련

    [김일수 樂山樂水] 창조를 자극하는 시련

    잔인한 달, 사월이 지나고 오월이 왔다. 며칠 후면 국보 1호, 숭례문이 복구를 끝내고 다시 우리 곁으로 다가온단다. 숭례문이 불길에 휩싸여 무참히 무너져 내리던 5년 전의 그 광경은 우리 모두에게 큰 상실의 고통처럼 느껴졌었다. 그 고통을 넘어 다시 부활하는 숭례문을 되새기며, 문득 ‘고독해방 심리학’의 저자인 스위스 정신의학자 폴 투니에의 말이 떠오른다. ‘창조적 고난’이라고. 모종의 상실이 인간의 창조성을 자극하여 건설적인 변화를 낳게 하고, 고난과 고통이 바로 성숙과 발전의 기회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고난을 통해 성숙하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쇠락하는가? 그 원인은 개인의 운명이나 유전적 성향에 있다기보다 이들이 외부의 제도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영향에 크게 좌우된다. 건설적인 영향은 기왕의 고난을 성숙의 열매로 변화시킬 수 있지만, 파괴적인 영향은 그 고난의 상처 자리에 그대로 머무르게 한다. 비교적 단순하게 보이는 이 논리를 우리는 국가나 사회제도에 적용해 볼 수 있다. 왜 형벌제도를 통해 어떤 사람은 변화하는 반면, 다른 사람은 재범·누범의 굴레 속에 갇혀 살게 되는가. 어떤 사람은 형벌이라는 고통의 과정 속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사회와 화해하는 자리로 나아가는데, 다른 사람은 동일한 과정 속에서 미움과 분노, 절망의 반응을 보이는가. 더 나아가 우리는 이 논리를 학문의 세계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진리를 탐구하는 치열한 학문의 세계에도 실패와 좌절의 위험은 항상 따르게 마련이다. 어떤 이들은 성공의 열매를 맛보지만, 다른 이들은 실패의 고배를 마시기도 한다. 과학의 세계에서 연구자들은 거듭된 실패를 거쳐 새로운 가설이 진리라는 최종 단계에 이르러 간다. 거듭된 실험에서 쓰라린 실패를 반복하는 연구자들의 고통이 얼마나 가슴 저리는 아픔이 될지 우리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원천기술과 같은 세계 초일류를 다투는 연구 분야에서 막대한 연구비 투여와 세간의 집중된 시선을 감안하면, 고독한 실험실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실패가 얼마나 힘든 고통이 될까.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라는 평범한 진리를 잊어버린 채, 우리는 어느새 세상사에서 불패 신화, 성공 신화에 길들여져 왔다. 창조적 실패를 자극하는 선한 영향력을 지닌 인적·제도적 장치를 우리는 아직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학문적 속임수나 표절 같은 일탈 행위가 잦아들지 않는 결과를 낳는다. 대학도, 정부도 이제는 연구자들에게 실패의 정직한 보고자가 될 수 있는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한다. 오늘 한 사람의 실패가 밑거름이 되어 내일 다른 성공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우리나라의 학문적 연구시장에 축적된 정직하고 양심적인 실패보고서는 성공한 연구성과 못지않게 내일의 값진 자산이 될 수 있다는 긴 안목을 키워야 한다. 그래서 외롭고, 치열한 정신적 씨름을 하는 이 땅의 연구자들이 당장의 연구 결실에 연연하기보다 연구 과정에 충실하면서, 실패와 성공을 아우르는 풍요로운 지적 시장을 형성해 나갈 수 있도록 분위기를 진작시킬 필요가 있다. 마침 새 정부 들어 창조경제 논의가 한창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창조경제의 지평에 안착하려면 먼저 한 번의 실패를 값진 창조의 밑거름으로 삼고 도약할 수 있는 관심과 배려의 장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어야 한다. 미당(未堂 )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울고, 시인은 잠 못 이루는 고뇌의 시간들을 보탰다고 한다. 국화꽃 같은 한 송이의 연구 결실을 거두기 위해 지금 우리는 고독한 연구자들의 곁에서 무얼 하고 있는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연구자들에게 희망의 나라를 열어 주어야 하겠고, 경계를 뛰어넘어 그들의 상상력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부처 이기주의의 칸막이도 거둬들여야 한다.
  • 마음을 움직인 1700여 강연 기획자 한동헌

    마음을 움직인 1700여 강연 기획자 한동헌

    EBS ‘화제의 인물’은 1일 밤 8시 20분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 강연기획자 한동헌’ 편을 방송한다. 한동헌은 국내 최고의 강연 전문 기업 CEO다. 김태호 PD, 김제동, 박원순, 제레미 리프킨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명사 1300여명을 섭외해 새로운 강연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그의 주 업무다. 그는 회사 설립 3년 만에 1700여 차례의 강연을 기획했고, 그 경험 등을 바탕으로 3000여명에 이르는 명사 네크워크를 구성했다. 세대, 지역, 분야를 가리지 않는 광범위한 연결망이다. 그는 원래 컨설팅 회사를 다니던, 제법 실력을 인정받았던 회사원이었다. 처음 기획한 강연에 11명의 명사를 불러들였고, 그 강연에 5000명의 청중이 몰렸다. 이후 200여 건의 크고 작은 강연을 기획하면서 다양한 명사들을 통해 가치 있는 이야기와 감동의 장면을 만들어 냈다. 한동헌 대표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개인의 가치와 개성. 그래서 그의 사무실은 그 흔한 사장님 집무실과 다르다. 대학 동아리방을 연상시킬 수 있는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하루 업무를 시작한다. 매주 월요일을 빼곤 출퇴근 시간마저 딱히 정해져 있지 않다. 이런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혁신적인 강연이 탄생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한 달에 진행하는 강연만도 250여 차례에 이르지만, 처음 사업을 시작했을 때는 남모를 시련도 많이 겪었다. 직원들 월급을 줘야 한다는 압박감에 정작 자신은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좋은 아이디어를 놓치지 않기 위해 중고 서적을 늘 뒤적이며, 보다 가치 있는 이야기를 전해 줄 수 있는 명사를 발굴하기 위해 발로 뛰어다닌다. 물론 한동헌 대표도 책의 가치를 부정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잘 읽은 책 1권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이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정확한 강연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강연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는 더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서다. 그래서 아예 회사에 강연장을 만들었다. 명사를 실컷 섭외했는데 적당한 강연 장소가 없어서 애먹은 경우가 많아서다. 영화감독 강제규, 건축가 구승회, 가수 하림 등 많은 이들이 여기서 좋은 말을 남기고 갔다.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김문이 만난 사람] 소리인생 50년… 경기민요 무형문화재 이춘희 명창

    [김문이 만난 사람] 소리인생 50년… 경기민요 무형문화재 이춘희 명창

    맑고 투명하다. 부드러우면서도 섬세함이 있다. 하여 경쾌함이 그지없다. 편하고 친숙하게 다가온다. 그런데 듣기는 좋지만 제대로 부르기는 결코 쉽지 않다. 우리가 흔히 듣는 ‘아리랑’도 그렇다. ‘아리랑’을 제대로 부르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된장국이라도 다 똑같은 된장국이 아니듯 말이다. 그래서 경기민요는 부르기가 무척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지난해 12월의 일이다.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본부 회의장에서 우리의 ‘아리랑’을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키로 하는 순간이었다. 즉석에서 이춘희 명창에 의해 아리랑 열창이 이루어졌다. 심금을 울리는 명창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엄숙했던 회의장 분위기는 어느새 편하고 부드러워졌다. 많은 박수갈채를 보내면서 한국의 ‘아리랑’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다들 ‘역시 세계 문화유산이여~’ 하는 것 같았다. 무형문화재57호(경기민요) 이춘희 명창은 50년 소리인생을 맞이하고 있다. 전통민요협회 이사장, 한국전통예술학교 교장 등의 직함 외에도 대학 강의와 공연 등으로 여전히 분주하다. 5월 한 달만 해도 4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가정의 달 명품 콘서트-행복’에 출연한다. 국악오케스트라와 함께 북한 작곡가 최성환의 ‘아리랑 환타지’로 시작해 ‘이별가’ ‘한오백년’ 등 애조띤 노래 위주로 부른다. 8일 어버이날을 맞아 부산국립국악원에서 ‘회심곡’ 등 평소 즐겨 부르는 경기민요를 열창한다. 그러면서 ‘아리랑’을 들고 서울, 부산, 대구 등 주요 도시를 순회하는 공연을 한다. 아리랑의 세계 인류무형문화재 등재를 기념하기 위한 무대이기도 하다. 그는 무대에 설 때마다 빼놓지 않을 만큼 ‘아리랑’을 각별하게 여긴다. 우리 민족의 한을 늘 가슴에 품는 까닭이다. 지난 22일 낮 한양대 캠퍼스 음악관에서 이 명창을 만났다. 매주 월요일에 한양대 강의가 있기 때문이다. 봄날 햇볕이 따사로운 음악관 앞에서 잠시 사진 촬영을 한 뒤 안으로 들어가 마주 앉았다. 요즘 근황에 대해 물었더니 “얼마 전까지 맡고 있던 국립국악원 예술감독은 임기가 다 돼 그만두었고, 보다시피 대학과 한국전통예술학교 등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고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전통예술학교에서는 1년 전부터 학교장을 맡고 있단다. 경기민요 등 전통예술을 배우려는 40여 명의 학생이 현재 공부 중이며 생긴 지가 얼마 안 돼 졸업생은 아직 4명 정도라는 설명이 이어진다. 다음 달에 있을 공연 준비는 잘 돼 가느냐는 질문에 “늘 하는 공연이기도 하지만 소리 인생 50년이기도 하고 특히 유네스코 등재를 기념해 아리랑 전국 순회공연을 하게 돼 의미가 있는 것 같다”는 소감으로 대신했다. 얘기가 나온 김에 지난 12월 유네스코본부 회의장에서 ‘아리랑’을 부를 때의 느낌이 어떠했는지 다시 물었다. “그날 오전부터 한복을 입고 11시간을 꼬박 기다렸습니다. 장소가 무대도 아닌 썰렁한 회의장이고 그쪽 분들의 귀를 깜짝 놀라게 해야 하는데 걱정이 됐죠. ‘아리랑’이 문화유산으로 확정됐다는 발표가 있자마자 객석에 앉아 있다가 바로 ‘아리랑~’ 하면서 소리를 지르며 앞쪽으로 치고 나갔지요. 분위기가 확 달라졌고 표정을 보니 아주 호의적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노래가 끝나자 ‘정말 아름다운 소리다’ ‘같이 사진 찍자’고 하면서 인터뷰하자는 사람이 많더군요. 지금도 그 광경이 눈에 선합니다. 제 자신도 정말 감동적이고 역사적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도 아리랑을 늘 부르고 사랑했지만, 앞으로도 더욱 좋아하게 된 운명이 됐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2년 전 독일 단독 공연무대에서도 이와 비슷한 감동을 하였다고 회고한다. “반주 4명과 함께 아리랑, 회심곡 등을 불렀습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감상하던 독일인들이 공연이 끝날 때 많은 박수와 함께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독일인들이 진중하게 한국의 민요를 감상하는 모습을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외국에서의 반응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매우 좋습니다. 우리 민요를 들고 해외로 자주 나가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에게 경기민요란 어떤 것인지 물었다. “진짜 수도 서울의 민요이며 경쾌하고 투명하면서 야질야질하다. 그러나 밝음과 섬세함 등 전체를 넘나들어야 하기 때문에 부르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대답이 얼른 돌아온다. 이어 “경기민요에는 옛날 역사나 변화의 과정이 없다. 그래서 15년 전부터 희로애락이 담긴 실험적인 소리극을 통해서 많은 성과도 거두었고 진화를 거듭해 오고 있다”고 부연했다. 소리극은 그가 매년 공연 때마다 시도하는 단골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경기민요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을까. 그는 서울 토박이다. 집안 대대로 용산구 한남동에 살았다. 그 때문에 어릴 적 친척집에 가느라 기차를 탈 일이 한 번도 없었다. 그에게 유일한 즐거움은 라디오 등을 통해 흘러나오는 경기민요를 대중가요처럼 듣는 것이었다. 특히 14살 때 라디오 드라마 ‘장희빈’의 주제곡에 홀딱 반했다. ‘구중궁궐 긴 마루에 하염없이 눈물짓는 장희빈~’으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사춘기 소녀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당시 우상으로 여겼던 황금심씨가 불렀으니 더욱 그랬다. 무조건 가수가 되고 싶었다. 소녀의 이런 열망이 깊고 깊어져 어느 날 위경련이 생겼다. 병원 응급실에 실려갔다. 일주일째 입원하던 날 주위에서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주라’고 권유했고 부모는 딸을 살리고 싶은 심정으로 노래를 허락했다. 결국, 가수가 되려고 대중가요 학원에서 3년 가까이 최숙자의 ‘백령도 처녀’ 등 당시 유행하던 여러 대중가요를 배웠다. 그러던 16살 때 우연히 친구 따라 종로3가에 있는 민요 학원을 가게 됐다. 그곳에서 경기민요 명창 이창배(1983년 작고) 선생을 만나면서 민요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이창배 선생은 당시 ‘선소리타령’의 명인이었다. 혹독한 가르침을 받던 어느 날 이창배 선생한테 ‘너한테 노래가 도대체 뭐냐?’라는 질문을 받게 되고 그 답을 구하려고 죽기 살기로 소리 연습을 했다. 지금처럼 녹음기나 캠코더가 없어 항상 귀로 듣고 연습을 했다. 밥을 먹을 때나 길을 걸을 때에도 늘 소리를 질러댔다. 길을 걷다가 전봇대나 담벼락에 부딪힌 경우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후회도 적지 않았다. 수입이 있는 것도 아니고 레슨비에 교통비를 감당하기 힘들어 여러 번 그만둘까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이창배 선생한테 소리 배운 지 10년이 흘렀다. 이후 명창 안비취 선생의 문하로 들어가면서 기량이 일취월장했다. 하지만 그에게 찾아온 또 하나의 시련이 있었다. 다름 아닌 무대 공포증이었다.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을 때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무대는 엄청 무서웠습니다. 벌벌 떨리고 숨이 차고 중환자처럼 공포증이 심했습니다. 병원에 가서 진단받고 약을 먹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극복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는 운동을 하면서 극복했지요. 그러면서 노래 연습 또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했습니다.” 방음장치를 한 골방에서 하루는 ‘유생가’만 30회, 또 하루는 ‘제비가’만 30회 등 매일 다섯 시간씩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면서 소리를 했다. 뿐만 아니다. 한동안 두문불출하고 산을 찾아 판소리의 득음 과정처럼 소리를 내고 또 소리를 내는 혹독한 고행을 해서야 비로소 스스로 창법을 터득했다. 그래서 1985년 첫 개인 발표회 무대를 무난하게 끝냈다. 자신의 소리인생에서 가장 자신감을 준 무대였다. 이를 두고 “아마 실패했으면 어디에 가서 죽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후 여러 차례 성공적으로 무대에 서면서 그의 진가를 발휘해 나갔다. 1997년 나이 50에 스승 안비취의 계보를 이어 경기민요 문화재 보유자가 되면서 명창이라는 수식을 얻었다. 그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무대는 그때도 무서웠지만 5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무섭다”며 웃는다. 소리는 한도 끝도 없기 때문이란다. 그에게 꿈을 물었다. “우리나라에는 국악 중·고등학교는 있으나 초등학교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면서 모든 예술이 그렇지만 어릴 때부터 시작해야 기초가 튼튼해지고 명창과 대가가 나오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여력이 되는 대로 제자를 양성하는 일에 온 힘을 쏟을 것이며 그 제자들이 잘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꿈이라고 말한다. 또한 자신이 어렵게 소리인생을 살아온 만큼 후학들에게는 좀 더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겠다고 말한다. 선임기자 km@seoul.co.kr ■이춘희 명창은 194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0대 때부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대중가요와 경기민요에 심취했다. 14살 때 대중가요 학원에서 노래공부를 하다가 16살 때 경기민요 학원에서 이창배 선생을 만나 민요의 길로 들어섰다. 10년 동안 경기민요를 배운 뒤 안비취 선생의 문하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무대에 서면서 이름을 알린다. 1985년 첫 개인 발표무대를 시작으로 매년 국내외 공연을 가졌다. 1997년 나이 50에 안비취 선생의 계보를 잇는 무형문화재 57호에 지정되면서 명창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2012년 12월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본부 회의장에서 ‘아리랑’이 인류무형문화재로 등재되는 순간 ‘아리랑’을 불러 역사적 순간을 연출했다. 현재 한국전통민요협회 이사장, 한국전통예술학교 교장 외에 여러 대학에 강의를 나가고 있다. 제23회 한국방송대상 국악인부문 대상(1996년), 제32회 대한민국 문화예술대상(2000년), 국민훈장 화관문화훈장(2004년) 등을 수상했다.
  • “암투병, 어떤 시련도 이길 자신감 갖게 했죠”

    “끝이 보이지 않던 투병 생활을 버티도록 도운 게 바로 공부였습니다. 가족은 물론이죠. 이전엔 책 읽기를 지겹게 여겼거든요.” 서울시 시민상 소년상 대상 수상자로 뽑힌 남은채(18·백암고 3년)양은 23일 이렇게 말하며 수줍게 웃었다. 남양은 중학교 1학년이던 2008년부터 2년에 걸쳐 림프종(혈액암)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더불어 사이버 민간외교사절단인 ‘반크’와 양로원 봉사 활동까지 하고 있다. 남양은 “특히 한비야 여행가의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이란 책을 읽고서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야겠다는 마음을 다졌다”고 되돌아봤다. 남양은 “이후 국제기구에 종사하며 경제를 통해 세계 문제 해결에 앞장서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됐다”고 덧붙였다. 남양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약 네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공부를 더 잘했을 텐데 안타깝다’고 하지만 오히려 큰 어려움을 겪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친구들은 거치지 않은 거대한 산을 넘으며 얻은 힘이야말로 어떤 시련이 닥쳐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만들었다”고 말을 끝맺었다. 송한수 기자 onekor@seoul.co.kr
  • [씨줄날줄] 대한문 수난사/함혜리 논설위원

    1897년 10월 12일 새로 지어진 환구단 안은 향 냄새로 가득찼다. 이날 고종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의 출범을 하늘에 고하는 첫 제사를 지내고 황제에 즉위했다. 광무(光武)라는 연호도 쓰기 시작했다. 과거의 왕들은 천자의 나라 중국에서만 하늘에 직접 제를 올릴 수 있다며 제천의식을 삼갔지만 고종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남별궁 터에 환구단을 지어 제를 지냄으로써 자주독립의 의지를 대외적으로 천명했다. 이후 민족자존의 상징인 환구단에서는 1년에 두 차례 제천의식이 거행됐다.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서 환구단으로 향할 때 고종은 정남쪽에 있는 정문 인화문이 아닌 동쪽의 대안문(大安門)을 주로 통했다. 민가가 밀집하고 외국공관이 많이 들어서 있던 인화문 쪽에 비해 대안문 쪽의 도로가 빨리 정비되면서 사람들도 대안문을 주 출입구로 사용하게 됐다. 1904년 화재로 소실된 전각들을 중건하면서 대안문을 수리한 뒤 고종은 1906년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고치고 정문으로 삼도록 했다. 대한문의 영광은 여기까지다. 원래 지금의 태평로 중앙선 부분에 위치했던 대한문은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야 했다.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이 강제체결되고 8월 29일 공포됨으로써 대한제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뒤 일제는 조선의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대한제국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병탄 이듬해 조선총독부는 환구단 건물을 철거하고 총독부 건물에서 소공로까지 대로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1914년 황토현(광화문 네거리)에서 남쪽으로 환구단을 관통하는 태평정통이 개설되면서 대한문은 원래 위치에서 서쪽으로 옮겨졌다. 1926년 조선총독부는 덕수궁 땅 일부를 매각하면서 덕수궁 해체와 함께 대한문을 그 위치에서 다시 30칸 뒤로 물러나도록 했다. 1961년 서울시는 태평로 도로폭을 6m 확장했는데 이때 대한문도 6m 뒤로 물러나야 했다. 철책이던 덕수궁 돌담길이 복원되고 차도가 생기면서 대한문이 도로 한가운데 덩그맣게 남아 차량 통행을 방해하는 신세가 되자 결국 서울시는 1970년 12월 대한문을 22m 뒤로 옳겼다. 현재 위치한 곳이다. 1년 넘게 천막농성이 벌어지던 대한문 옆에서 엊그제 쌍용자동차 범국민대책위원회와 민주노총 등이 참여한 ‘희망지킴이’가 캠핑시위를 벌였다. 서울 중구청이 농성천막을 철거하고 화단을 설치했지만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시위대의 확성기 소리에 고궁의 고즈넉함은 꿈도 꿀 수 없다. 끝나지 않는 대한문의 시련을 바라보는 마음이 참으로 착잡하고 울적하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사설] 朴정부 50일, 소통의 정치로 난국 헤쳐가라

    오늘로 출범 50일을 맞는 박근혜 정부의 초반 성적표는 국민 다수가 체감하듯 기대치를 상당히 밑돈다. 단적으로 각종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국정 지지도가 이를 말해준다. 여론조사기관 한국갤럽의 조사를 놓고 보면 박 대통령이 당선인 신분이던 1월 하순 56%의 지지율로 고점을 찍은 뒤 새 정부 출범 후 지난달 하순 41%로까지 떨어졌다가 지난주 들어 44%를 기록하며 다소나마 회복 기미를 보인 게 고작이다. 대선 때 표를 던진 유권자들조차도 5명 중 1명이 실망스러워한다는 얘기다. 박근혜 정부의 이런 시련은 정부 인사의 난맥과 원칙을 앞세운 박 대통령의 리더십에 어른대는 불통 이미지에서 비롯됐다고 할 것이다. 장·차관 후보자 6명의 낙마를 부른 검증 부실과 전문성을 중시한 나머지 지역과 성(性)의 안배가 이뤄지지 못해 결과적으로 국민 통합의 정신을 구현하는 데는 크게 미흡했던 정부 인사, 그리고 정부조직 개편을 둘러싼 여야의 대치에서 도드라진 박 대통령의 고집스러운 자세가 지지도 하락으로 이어진 것이다. 박 대통령이 최근 여야 지도부를 잇따라 청와대로 초청해 만찬을 함께하며 정치권과의 본격적인 소통에 나선 것은 그런 점에서 의미가 크다. 특히 민주당의 지도부와 소속 국회 상임위원장들을 초대해 인사검증 부실을 사과하고 국정 전반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대화한 것은 가파른 대립 정치만 봐 온 국민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과거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청와대가 모두 출범 초 정치권과 거리를 둔 것이 국정 전반의 주름으로 이어졌던 점을 감안할 때 새 정부의 여의도 다가서기는 올바른 방향이자 자세라고 할 것이다. 모쪼록 이 같은 정치권의 대화 모드가 민생에서의 결실로 이어지길 바란다. 지금 국회엔 경기 활성화를 위한 추경안 편성과 부동산 관련 세제 개정안을 중심으로 민생과 직결된 현안 80여개가 쌓여 있다. 대부분 때를 놓치면 정책효과가 반감되는 사안들로, 그만큼 여야의 조속한 절충이 요구된다. ‘긴밀한 협력’을 상대방의 양보로 간주하는 행태부터 여야는 버려야 한다. 내용보다 타이밍이 중요한 현안들이 대부분인 만큼 내가 먼저 과감하게 양보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협상에 나서기 바란다. 어제 북한은 우리 정부가 꺼낸 대화 카드를 교활한 술책이라며 일축했다. 눈에 확 띄는 선물 보따리를 내놓을 때까지 도발 위협을 계속하겠다는 뜻을 내보인 것이다. 어린아이 떼쓰듯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들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은 소통과 협력 그리고 결속이다. 겁박하면 할수록 우리 사회가 더욱 공고해진다면 결국 제 풀에 지칠 쪽은 북한이다. 그들을 하루속히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기 위해서라도 정부와 여야는 긴밀한 소통으로 제 할 일을 다하는 정치를 보여주기 바란다.
  • 개성공단 잔류 직원들 “저는 염려 말고 거래처 챙기세요”

    “거래처가 끊어지면 공장 식구들은 어떡합니까. 저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알아서 해결할 테니 걱정 마시고 사장님은 어떻게든 남쪽 거래처부터 챙기세요.” 개성공단에서 의류제품을 생산하고 있는 A대표는 12일 개성공단에 남아 있는 직원과 통화하면서 이러한 내용의 메시지를 전달받았다. 개성공단 가동 중단 나흘째인 이날 개성공단기업협회에는 입주기업 대표들 네다섯 명이 사무실을 찾았다. 입주기업마다 최소인원인 한두 명이 남아 있으며, 직원들이 아픈 곳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지만 남아 있는 직원들은 도리어 남쪽 상황을 걱정하고 있다고 전했다. A대표는 하루에도 몇 차례나 개성공단 직원에게 전화를 건다. 식량도 다 떨어졌는데 끼니는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4월이지만 날씨도 쌀쌀한데 밤에 자면서 떨고 있는 건 아닌지 눈에 선하다고 했다. 개성공단기업협회 사무실에 모인 입주기업 대표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전날 북한에 대화를 제의했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정부에 서운함을 내비쳤다. 대표들은 “전재산을 쏟아부어 일군 공장인데, 2004년 개성공단에서 첫 조업을 시작한 이래 지금이 최대의 시련”이라고 전했다. 입주기업 대표들은 오는 17일 방북을 위해 이날 오전 통일부에 방북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들은 개성공단 주재원에게 쌀 등 먹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이날 식자재 등을 싣고 남북출입국사무소로 갈 예정이다. 홍혜정 기자 jukebox@seoul.co.kr
  • [주말 인사이드] 실패한 기업인들이 찾는다는 그 섬… 4주간 무슨 일이

    [주말 인사이드] 실패한 기업인들이 찾는다는 그 섬… 4주간 무슨 일이

    해마다 100만여명이 창업을 하지만 80여만명이 폐업을 한다. 금융위원회와 중소기업청 자료에 따르면 창업 기업의 생존율은 3년 후 55%, 5년 후 39%, 10년 후 24%에 불과하다. 창업자 10명 중 5명이 3년 내 문을 닫는 셈이다. 창업 기업의 폐업 횟수는 1.3회, 재창업 횟수는 0.8회로 폐업 후 50%는 재기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번 쓰러지면 재기하기가 그만큼 쉽지 않다는 방증이다. 실패한 기업인은 죄인이 아니지만 일순간 ‘인생의 낙오자’로 전락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들의 재기를 ‘힐링’으로 접근한 색다른 시도가 남해의 외딴섬, 경남 통영시 한산면 매죽리 죽도에서 진행되고 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조차 없이 벼랑 끝에 몰린 19명이 지난 2월 24일 무거운 마음으로 섬을 찾았다. 4주간의 시간, 그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지난달 21일 통영에서 배를 타고 1시간 만에 도착한 죽도는 인적이 드문 조용한 섬이다. 재기중소기업개발원이 폐교를 리모델링한 죽도연수원에서는 ‘실패 중소기업인 힐링캠프’가 진행되고 있었다. 2011년 11월 첫 캠프를 연 뒤 5회째다. 캠프는 3월과 6월, 11월 등 매년 3차례 진행된다. 연수원으로 가는 길은 시작부터 험난했다. 가파른 오르막길에 세워진 표지판이 눈에 띈다. “묵은 마음 비워서 맑고 둥근 마음만 가득 채워 가는 곳…허밀청원.” 섬에 내리기 전까지 ‘외인구단’이나 ‘실미도’를 연상했기에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글귀다. 가쁜 숨을 돌리려 들어간 연수원 식당에서 형광색 점퍼를 입은 이들이 반갑게 인사한다. 캠프 참가자들이다. 퇴소를 앞두고 그동안 생활했던 텐트와 침낭 등을 정리해 햇볕에 말리는 작업이 한창이다.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표정이 밝은 그들의 모습에서는 얼마 전까지 ‘인생 실패자’로 자책하며 방황했다는 사실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한상하(43) 원장은 “이곳에서 ‘재기’는 재창업이 아니라 잃었던 용기를 되찾고 깨진 가족이 만날 수 있도록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라며 “실패한 사람에게는 실패 마인드가 숨어 있는데 치유 없이 정상적인 패자 부활이 가능하겠느냐”고 반문했다. 4주간 무료로 진행되는 힐링캠프는 방목 형태로 진행된다. 주입식 강의나 창업 스킬 등 성공 기법을 전수하는 과정은 없다. 100명이 넘는 재능 기부자 중 컨설턴트는 배제하고 종교인과 심리치료사 등이 강사로 참여하고 있다. 철저하게 ‘의도된 불편함’을 극복하며 스스로 마음을 관리하는 시간의 반복이다. 사업 실패로 같은 아픔을 경험했던 설립자와 한 원장의 신념, 그리고 재기 과정에서 간절히 필요했던 것을 녹여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캠프는 술과 담배, 휴대전화, 지갑을 수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4주간을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투자하라는 취지다. 오전 5시 50분 기상과 함께 편치 않은 산길을 헤치고 명상 바위에 오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취침 시간은 정해지지 않았다. 식사는 하루 2끼만 제공하고 입소 다음 날부터 퇴소 전날까지 26일간 텐트에서 야영한다. 초기 2주간은 강의장을 제외하고는 대화도 차단된다. 캠프에서는 자급자족을 하기에 농촌 활동도 필수 일과다. 한 원장은 “실패한 기업인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환경을 탓하고 남을 원망한다”면서 “신세 한탄이 아니라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모든 게 내 탓’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전했다. 강당에는 “나는 지금 여기에 왜 와 있는가”, “고난과 좌절은 성공으로 가는 과정일 뿐이다”, “나는 모든 면에서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자기 암시 글들이 곳곳에 걸려 있다. 캠프 참가자는 30대에서 60대까지 다양하다. 처음에는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고 쉽게 말문도 열지 않는다. 실패의 기간이 길수록 이 현상은 더욱 심해진다. 얼굴은 죽을상이고 의욕은 찾아볼 수 없다. 참가자들은 구구절절한 사연을 토로하지만 캠프에서는 철저히 무시한다. “나는 잘했는데…”라고 할 때마다 “너로 인해 다른 사람이 행복했는가”라는 질문이 되돌아간다. 휴먼 영화를 시청하고 100배 절을 올리고 사이코드라마에 직접 출연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마음의 변화를 겪는다. 야영은 캠프의 ‘백미’다. 산속에 설치된 텐트 간 거리는 30m가 넘는다. 아무런 간섭 없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회한, 후회의 뜨거운 눈물을 수없이 흘린다고 한다. 18년간 전자계통사업을 하다 2008년 폐업한 김경곤(59)씨는 “여기 온다고 뭐가 해결될까 하는 고민과 창업자금을 받는 데 유리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반신반의했다”면서 “마음의 어두운 그림자를 털어내면서 몸과 마음이 맑아졌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식품제조유통업을 했던 정영준(51)씨는 위기 탈출을 위해 입소했다. 정씨는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 왔지 스스로를 되돌아볼 기회가 없었는데, 매우 유용한 시간이 됐다”고 말했다. 실패한 기업인들의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김경곤씨는 “아침이 밝아 오는 것이 싫었고 내 이름이 적힌 우편물을 받는 게 두려웠다”면서 “특히 나 때문에 가족까지 피해를 당하는 것이 가장 괴로웠다”고 회고했다. 김씨는 “당시 자살하는 사람에게 공감이 갔다”면서 “남을 원망하는 마음만 들고, 내가 왜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되면서 술로 시간을 허비했다”고 회고했다. 사업이 망한 이들은 대부분 신용불량자로 전락한다. 작은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최소한 신용을 회복해야 하는데 상당수는 빚의 늪에서 헤어날 방법을 찾지 못한다. 익명을 요구한 40대 후반 남성은 “신용 회복을 하더라도 카드 발급이나 대출이 안 되는 등 재기를 위해 기댈 언덕이 없다”면서 “사업이 잘되면 금융권이 제일 먼저 고개를 숙이며 찾아오지만 반대 상황에서 가장 먼저 발목을 잡는 것도 금융권”이라고 성토했다. 캠프를 거쳐 간 68명 중 50%가 재창업(12명)을 하거나 취업에 성공했다. 5년간의 아픔을 딛고 대구에서 재기한 향천의 김영만(47) 대표. 그는 2차례 누룽지 제조 업체를 운영하다 무일푼으로 쫓겨났다. 2008년 이후 신용불량자로 4년간 ‘바닥 인생’을 경험했다. 지난해 3월 2회 캠프에 참가한 후 중소기업청의 재창업 프로그램을 통해 재기했다. 김 대표는 “항상 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고 스스로에게 경종을 울린다”고 전했다. 지난달 22일 4주간의 일정을 마친 5회 캠프 참가자들이 1명의 낙오자도 없이 섬을 나섰다. 그토록 힘겨워했던 현실 속으로 다시 들어선 것이다. 오늘의 실패를 자산이자 축복으로 되돌리는 항해가 시작됐다. 글 사진 죽도(통영) 박승기 기자 skpark@seoul.co.kr 그래픽 길종만 기자 kjman@seoul.co.kr
  • 10년 칩거 지나 ‘용산의 봄’ 꿈꾼다

    10년 칩거 지나 ‘용산의 봄’ 꿈꾼다

    ‘나는 남들이 ‘실패’라고 이야기했던 지난 10년을 잊지 않을 것이다. 나는 감히 지난 10년이 ‘실패’가 아니라 ‘도약’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민선 2기 당시 성장현 용산구청장은 선거를 앞두고 지인들에게 식사를 대접한 일로 2년여 만에 구청장직을 박탈당했다. 그 후 민선 5기 구청장으로 돌아오기까지 10년을 와신상담했던 그는, 그 시간을 두고 최근 발간한 자서전 ‘봄을 이기는 겨울은 없다’(좋은글 펴냄)에서 이같이 평가했다. 그는 “그 시간은 새 출발을 위해 나 자신을 충전할 수 있었던 기회”라며 “꾸준히 30만 용산 구민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힘이 됐다”고 회고했다. 책에는 결코 평탄치만은 않은 정치 인생을 걸어온 그의 삶과 구정 철학이 담겨 있다. 민선 5기 반환점을 돌아온 그는 여기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막연하게 정치인의 꿈을 키운 어린 시절부터 정치 입문 과정과 역경, 구청장으로서의 성과 및 비전 등을 주민들과 대화하는 마음으로 충실하게 기록했다. 책은 성 구청장의 삶을 되짚는 데서 시작한다. 고향 전남 순천에서의 삶과 정치 입문, 구청장 당선과 시련, 10년 칩거 기간에 겪은 인생의 쓴맛을 진솔한 어조로 전한다. 이어 구청장으로서 이뤄낸 ‘세계의 중심 도시 용산’ 만들기의 성과를 소개하고, 또 앞으로 자신이 갈 길에 대한 정치적 의지를 표출하는 데 책의 한 부분을 할애한다. 말미에는 용산구를 연인에 빗대 지역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 ‘나의 비밀스런 로맨스’라는 익살스러운 글을 다양한 사진과 함께 전한다. 그는 자서전을 통해 특히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자연과, 이를 닮은 인생의 순리에 대해 수차례 얘기한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이 겨울일지라도 반드시 봄은 온다. 꿈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는 다짐을 전하기도 했다.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 금감원 “전산사고 책임 묻겠다” 농협 수뇌부 징계 가능성 시사

    농협이 안팎으로 시련이다. 산업은행 민영화가 무산되면서 산은 주식을 출자받기로 한 계획도 틀어진 데다 잦은 전산사고로 금융당국의 고강도 문책도 피할 수 없게 된 처지다. 금융감독 당국이 신동규 농협금융지주 회장의 징계 가능성까지 시사하고 나서 묘한 기류가 감지된다. 최근의 ‘금융기관 수장 대폭 물갈이’와 연관 짓는 해석도 있다. 김수봉 금융감독원 부원장보는 11일 브리핑을 갖고 “농협의 빈번한 전산사고 발생은 취약한 정보기술(IT) 운영체제와 지배구조도 한몫했다”면서 “위법·부당 행위가 확인되면 경영진 등 감독자에 대해서도 엄중하게 조치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신 회장과 신충식 농협은행장 등 계열사 경영진을 겨냥한 발언이다. 농협 측은 “농협이 분리되면서 IT 시스템은 3년 안에 독립하기로 했는데 이런 지배구조로 인한 관리 부족 등으로 전산장애가 야기된 만큼 이후 취임한 신 회장에게 전산장애의 책임을 묻는 것은 가혹하다”고 강변했다. 김 부원장보는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전산장애 개선대책 수립·이행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농협과 체결, 사후 관리할 수 있다고 밝혔다. 당국의 직접 개입 가능성을 시사한 대목이다. 하지만 농협 이사회가 동의할지는 미지수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버티기도 어렵다. 산은 민영화 백지화에 따른 현물출자 대안을 어떻게든 정부로부터 받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농협은 지난해 3월 ‘신·경 분리’(신용사업과 경제사업 분리)를 단행하면서 정부로부터 부족 자본금 5조원을 지원받기로 했다. 이 가운데 4조원은 농업금융채권을 발행해 충당하되 5년치 이자 1600억원은 정부가 내고, 나머지 1조원은 산업은행과 한국도로공사 주식을 각각 5000억원씩 받기로 했다. 그런데 새 정부 들어 산은 민영화가 무산되면서 모든 게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당장 현물 출자를 받기로 한 1조원부터 해결해야 한다. 이자 차익(이차) 보전, 주식 현물출자, 현물출자와 이차보전 혼합 등 크게 3가지 대안이 거론된다. 농협으로서는 주식으로 받는 게 가장 유리하지만 농협이 받고 싶은 주식과 정부가 주겠다는 주식이 서로 다르다. 농협은 한전 등 상장기업 주식을 내심 기대한다. 그렇다고 무한정 주식으로 받을 수도 없다. 금융지주회사법에 따라 다른 회사 주식을 5% 이상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백민경 기자 white@seoul.co.kr
  • [향토기업 특선] (10) 경기 안양(주)파낙스 이엠

    [향토기업 특선] (10) 경기 안양(주)파낙스 이엠

    경기 안양시 만안구 안양8동에 둥지를 튼 ㈜파낙스 이엠은 스마트폰 부품 업계에서 인정해 주는 ‘강소기업’이다. 국내에서 판매되는 스마트폰 10대 중 8대가 이 회사 부품을 사용할 정도로 독보적인 기술력을 갖고 있다. 주력 생산 제품은 전자파를 차단해 주는 소재이다. 전자파는 인체뿐 아니라 전기·전자 제품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자체 기기는 물론 주변 기기 오작동을 유발하기 때문에 전자파가 외부로 나가거나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을 차단해 주는 기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파낙스 이엠은 휴대전화, 노트북, PC, 내비게이션 등 전자제품에 필수적인 전자파 차단 코팅제와 개스킷(두 개의 고정된 부품 사이에 끼워 넣는 패킹)을 생산하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기업 중 하나이다. 동종 기업으로 국내에서는 파낙스 이엠을 포함해 2곳, 해외에서는 독일 1곳과 미국 1곳 등 모두 4개 회사에서 비슷한 종류의 전자파 차단제를 생산하고 있다. 전 세계 전기·전자 제품 시장에서는 독일 업체가 1위, 파낙스 이엠이 2위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지만 스마트폰 시장에서만큼은 파낙스 이엠이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스마트폰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이 회사 매출도 덩달아 늘고 있다. 회사 설립 첫해인 2006년 50억원가량 하던 매출이 6년 만인 지난해 224억원으로 4배 이상 뛰었다. 전체 매출액 가운데 65%가량은 해외 수출로 거둬들인 것이다. 중국을 중심으로 타이완, 베트남 등지가 주요 수출시장이다. 회사 규모가 커지면서 부산에 1·2 공장을 설립하고 중국 상하이에도 해외사무소를 뒀다. 지난해 1000만 달러 수출탑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오는 동안 시련도 있었다. 2008년을 전후해 전자파를 차단해 주는 방식에 변화가 생겼다. 그동안 파낙스 이엠의 주력 생산품은 플라스틱 제품에만 적용되는 전자파 차단용 코팅제였는데 휴대전화 시장이 폴더형에서 스마트폰으로 바뀌고 있었다. 폴더형 휴대전화는 외장이 플라스틱 재질인 반면 스마트폰은 마그네슘 재질이어서 코팅제는 쓸모가 없어져 버렸다. 시장이 사라진 순간이었다. 이 때문에 2009년에는 매출이 36억원으로 급감했다. 회사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이러다 회사가 망할 수도 있다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휴대전화의 트렌드가 스마트폰으로 옮겨가는 환경 변화에 신속히 적응하는 것 외에 뚜렷한 대안이 없다고 판단, 연구 개발에 전력투구했다. 스마트폰 기기에 적용할 수 있는 전자파 차단용 개스킷을 개발하고 문제점들을 보완하면서 독창적인 원천기술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덕분에 특정기기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정보기술(IT) 기기별, 용도별로 적용할 수 있는 다양한 제품군도 갖게 됐다. 현재 전자파 차폐용 개스킷 및 도전성 도료에 관한 국내 특허 14건을 비롯, 관련 해외 특허 7건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출원 중인 특허 3건이 더 있다. 경기도 산하기관인 경기중소기업종합지원센터 도움도 적지 않았다. 파낙스 이엠 본사와 기술연구소는 종합지원센터가 건립한 경기벤처빌딩 안양센터에 입주해 있다. 최대 4년간 저렴한 입주비용을 내면서도 각종 첨단 공용장비를 지원받고 있다. 다양한 정보를 공유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필요한 경영지원, 자금, 기술 등의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멘토링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걸음마를 시작한 초창기 벤처기업에는 구세주나 다름없는 보살핌이었다. 경기중소기업종합지원센터 홍기화 대표이사는 “파낙스 이엠은 독보적인 기술력을 바탕으로 급성장하는 경기도의 강소기업으로 주목받고 있다”며 “제2, 제3의 파낙스 이엠이 나올 수 있도록 유망 중소기업에 대한 연구 개발 및 자금, 무역, 해외마케팅 등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글 사진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명사가 걸어온 길] (8) 한국 스포츠외교 산증인 김운용 前 IOC 부위원장(상)

    [명사가 걸어온 길] (8) 한국 스포츠외교 산증인 김운용 前 IOC 부위원장(상)

    김운용(82)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을 만나기로 한 건 서울 여의도의 한 오피스텔이었다. 자신의 발자취를 오롯이 모아둔 ‘김운용닷컴’(www.kimunyong.com) 사무실이 입주한 곳이었다. 약속 시간 10분을 앞두고 그가 천천히 걸어들어왔다. 단정히 빗어 넘긴 머리에 남색 캐시미어 코트, 맞춰 두른 고동색 에르메스 목도리는 현역 시절 그대로였다. 이날은 택시법의 재의결을 요구하며 택시업계가 총파업을 벌인 날이었는데, 그는 기자에게 “택시 스트라이크 때문에 오는 길은 괜찮으셨소”라고 영어를 섞어 말을 건넸다. 말투와 몸짓 하나하나에서 한국 스포츠 외교의 첨병으로 오래 활약한 세월이 묻어났다. 1971년 대한태권도협회장에 취임하며 체육계에 발을 들여놓은 뒤 1986년 IOC 위원, 1988년 IOC 집행위원, 92년 부위원장에 당선돼 활동했다. 그동안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유치, 2000년 시드니올림픽 남북 동시 입장, 1994년 태권도의 올림픽 정식종목 승인 등 국민들의 뇌리에 남아 있는 굵직굵직한 스포츠 이벤트들을 진두지휘한 그다. 좌절되긴 했지만 2001년 유색 인종으로는 최초로 IOC 위원장직에 도전, 세계에도 얼굴을 알렸다. 그의 인생을 함축한 ‘올림픽 30년, 태권도 40년’ 문장 속에는 한 사람이 일궜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성취와, 딱 그만큼의 시련이 녹아 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운동과 영어를 유난히 좋아했던 한 소년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베를린올림픽이 열린 1936년, 다섯살 나이에 부모님 손을 잡고 대구 만경관에서 ‘민족의 제전’이란 올림픽 기록영화를 본 것은 마치 어제 일처럼 그의 기억에 생생하다.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하는 모습을 보면서 난생 처음 느낀 강렬한 두근거림은 어쩌면 훗날 그가 올림픽 무대의 중심에서 일하리라는 자기암시로 작용했는지 모른다. 다섯 살 위의 형은 “동아일보가 손 선수의 일장기를 지워서 큰일이 났다”고 말해줬다. 신문사에서 일하던 부친 김도학(1936년 별세)씨의 영향으로 어린 형제는 또래에 비해 아는 것이 많았다. 대구 조선민보사 기자였다가 서무부장 겸 경리부장으로 일했던 부친은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했고 바이올린과 오르간 연주를 즐겼고 문학에도 소질이 있었다. 부친을 닮아 그는 다재다능한 소년으로 자라난다. 서울 욱구중학교(1945년 해방 후 6년제 경동중학교로 변경, 현 경동고)에서 공부 말고도 복싱·스케이팅·공수도 등 운동이라면 가리지 않고 연마했고, 피아노도 개인 레슨을 받을 정도였다. “나는 과목별 편차가 심했다. 영어는 월등히 뛰어났지만 수학은 형편없었다. 그러나 싸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놀기도 잘하면서 5등 하는 게 1등보다 낫다는 생각이었다.”(저서 ‘미련한 사람은 자기 경험에서 길을 찾고 현명한 사람은 선배에게 길을 찾는다’ 중에서) 특히 영어에 대한 그의 열정은 대단했다. “내 꿈이 외교관, 피아니스트, 국제법 학자가 되는 것이었으니까…. 원래 영어를 좋아했다. 중학교 시절엔 방학 때 다음 학년도 책을 미리 읽고 4학년 때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크리스마스 캐롤’(찰스 디킨스), ‘스케치북’(워싱턴 어빙) 같은 문학 작품도 많이 읽었다. 해방이 되고 미군이 들어왔을 때는 그들이 주둔한 동숭동 서울대에 찾아가 보초들과 회화 연습을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선교사가 세운 연희대(현 연세대)를 택하게 됐다. “그때는 (연희대가) 국제적인 학교라 외국 교사가 많아서 성경도 영어로 1주일에 3시간, 회화도 언더우드 부인이 직접 가르치는 3시간, 영어강독 3시간 등 일주일에 영어만 9시간 공부했다.” 그러나 해방,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근대사의 소용돌이는 그가 외교관의 꿈을 이루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대학 2학년이던 1950년 제2회 고등고시 행정 3부(현 외무고시)에 응시한다. 응시원서 마감일인 6월 20일 대학 1학년 수료증과 인지세 2000원을 들고 고시회관에서 원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불과 닷새 뒤 전쟁이 터졌다. 시험은커녕 목숨마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인생은, 특히 그런 격동기를 통과하는 인생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고향인 대구로 피란가지 못해 서울에 갇혀 있던 그는 9월 말 서울이 수복되고 나서 육군본부에서 국제연합 연락장교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게 된다. 병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할 때라 징집 공고가 곳곳에 나붙었는데, 국군과 미군의 공조를 위해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 역시 절실했던 것이다. 당시 19세이던 그는 연희대 학도호국단 사무실에 가서 2학년 재학증명서를 뗀 뒤 이를 4학년으로 고치고 나이도 응시 자격인 21세로 올리는 ‘문서 위조’를 감행하면서 지원한다. 1951년 12월 그는 보병 중위로 임관해 동해안을 지키는 5사단의 사단장 전속부관으로 발령받는다. 인생의 항로는 바뀔지언정 목적지를 바꾸지 않는 것은 그의 영민함 덕이었다. 영어가 나침반이 됐다. 엉겁결에 군인이 됐지만 그는 좋아하는 영어책을 놓지 않았다. 외교관이 될 수 없다면 군사외교 분야에서 활동하면 됐다. 기회는 적극적으로 구하는 사람에게 왔다. 1953년 1월 100대1의 경쟁률을 뚫고 미국 보병학교 훈련 시험에 합격해 조지아주 포트 베닝의 보병학교를 다녀온 것을 비롯해 세 차례나 군사유학을 다녀왔다. “요즘 한창 얘기하는 드론(첨단 무인폭격기)을 1955년에 벌써 공부했다. 산 영어를 많이 하니까 (나를) 써먹기 좋잖아. 직업군인도 아닌데 (군대에서) 내보내지를 않았다. 사단장, 군단장, 군사령관, 참모총장의 전속부관으로 일했다. 참모총장이 미8군과 매일 접촉해 탄약이나 기름을 지원받던 때였으니….” 1960년 4·19 혁명 당시엔 계엄사령관이었던 송요찬 참모총장의 부관으로 일했고 다음해 5·16 군사쿠데타 이후 송 장군이 내각수반(총리)에 오르면서 의전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중령으로 예편한 뒤 1963년 8월 주미대사관 참사관이 돼 워싱턴으로 갔지만 1968년 무장공비 김신조 사건,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 등이 일어나면서 남북관계가 경색되자 청와대에서 미국담당 1급 비서관으로 일하라는 전갈을 받고 귀국한다. 하지만 정치적인 이해가 맞물리면서 경호실 보좌관(차장 1급)으로 발령이 난다. 그 뒤 6년 동안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을 가까이에서 보좌한다. 조금 길지만 그의 육성 증언을 옮겨본다. “장군을 맨 처음에 뵌 건 1954년 2군단 소속으로 강원도 화천에서 포병사령관을 할 때였다. 나는 막 미국 유학을 다녀온 상태였다. 세 번째 유학을 마치고 1군사령부 비서실에 있을 때 그분은 작전참모부장이었는데, 비서실이 참모장 소속이었다. 그때 장군들은 주말이 되면 자유당에 ‘사바사바’하러 다녔는데 박 장군은 안 그랬다. 휘하에 소령이나 대위들 데리고 골목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그러다 우리를 만나면 ‘김 소령 어디가, 한 잔 할래?’ 하고 말도 건넸다. 인정이 많은 분이셨다. 판공비를 본인이 안 쓰고 다 나눠줬는데, 나도 많이 얻어 썼다. 그분의 성품이 드러나는 얘기가 두 가지 있다. 상관이었던 송요찬 장군이 1963년 동아일보에 ‘군은 민정이양하고 복귀하라’는 성명서를 낸 뒤 구속됐잖나. 그걸 풀어주고 송 장군이 나온 뒤에 딸을 하버드 법대에서 공부시키는 걸 도와줬다. 자신이 한 번 친 사람들도 후에는 명예회복을 해줬다. 순경 시켜서 ‘누가 줬다고 말하지 말고 가족에게 갖다주라’며 도움을 주기도 하고. 그러니까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개인적인 에피소드도 있는데, 내가 출장 다녀오면서 여비를 털어서 카디건 같은 걸 사오면 ‘이런 거 왜 사왔어’하며 나무라셨다. 선물 같은 건 당연한 건 줄 알고 ‘좀 더 사오지’ 할 법도 한데, 그 정도로 인정이 있는 분이었다. 5·16 후에는 박 장군이 내각 수반으로 왔을 때 의전비서관으로 있었다. 1968년 청와대 경호실 차장으로 가서 6년간 모시다가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나왔다. 경호실에 가려고 해서 간 게 아니었지만 막상 가보니 (경호실이) 권총만 차는 데가 아니고 미국 식으로 서비스, 즉 공공 업무를 하는 곳이었다. 다른 기관들과 협력도 해야 하고 사전 경비를 위한 장비도 준비해야 하고…. 경호실에 있으면서도 다른 심부름(군사원조 관련)도 많이 했다.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나가지 않아도 됐지만 책임지고 나왔다. 사표를 냈더니 박 대통령이 부르더라고. 장례식 때문에 좀 가다듬고 나서 부르는 거라면서 봉투를 줬다. ‘다시 부를 테니까 가 있어’ 했다. 그런데 그 후에 자신이 암살당했으니…나는 (청와대를) 나와서 태권도만 열심히 했다. 1971년에 유신정우회에서 국회의원 제의도 들어오긴 했는데 내가 고사했다. 4·19 때 자유당이 하루저녁에 무너지는 걸 다 봤는데…절대 안한다고 했다.” 육 여사 묘소에 참배를 하고 청와대를 떠난 김 전 부위원장은 1971년 태권도협회 회장에 취임하면서 스포츠계와 인연을 맺게 된다. 김민희 기자 haru@seoul.co.kr
  • [명사가 걸어온 길] 6. 민주화의 사제(상) 함세웅

    [명사가 걸어온 길] 6. 민주화의 사제(상) 함세웅

    맑은 얼굴 맑은 눈/ 비 온 뒤라면 무지개 걸려/ 그러나 독재나 어떤 잔재 따위에는/ 진흙탕 싸움을 사양할 수 없다/ 그 아들은 한국 천주교회의 앞에서/ 지(知)와 신앙으로 집을 지었다/ 그는 도시의 신부다(고은 시인의 ‘만인보’ 중 ‘함세웅’ 편의 일부) ‘민주화의 사제’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1970~1980년대 불끈 쥔 주먹으로 독재에 맞서면서도 늘 기품을 잃지 않았던 그를 고은은 ‘도시의 신부’라고 불렀다. 서슬 퍼런 박정희 유신 정국 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1974년)을 만들어 박종철군 고문 사망(1987년), 삼성 비자금 조성(2007년) 등 묻혀 있던 진실을 세상에 드러내며 질곡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부딪친 그였지만 이름 앞에 ‘명사’(名士)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이 영 어색하다고 했다. 겸허함을 지켜야 할 사제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거북하다고도 했다. 나이 일흔이 넘도록 흔한 회고록 한 권 내지 않은 이유다. 함 신부는 지난해 8월 사제 생활에서 은퇴했다. 하지만 인권의학연구소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그는 매주 월요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시국미사에 참석하는 등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간다. 영원한 현역을 꿈꾸는 함 신부를 지난 8일 서울 마포구 도화동 인권의학연구소에서 만났다. 함 신부는 광복을 3년 앞둔 1942년 6월 서울의 용산구 원효로에서 태어났다. 유교적 가풍 때문에 가족 중에 가톨릭 신자는 없었지만 집 근처에 천주학당(현 성심여고)이 있어 가톨릭과 서양 문화를 자연스레 접했다. 여덟 살 되던 1950년 6·25가 터졌다. 소년 함세웅은 전쟁의 참상을 바라보며 어렴풋하게나마 신앙에 눈을 떴다. “어느날 집 앞에서 놀고 있는데 쾅 하는 굉음이 나는 거예요. 한낮인데 하늘이 시커매. 나중에 들었는데 B29 폭격기들이 한강 임시다리를 폭파하는 소리였대요. 너무 놀라 친구들과 어디로 우르르 몰려갔는데 거기가 성모병원이었어요.” 병원은 아비규환이었다. 피 칠갑을 한 환자들이 신음하고 있었고 수녀들이 그들을 간호하고 있었다. 인간의 탐욕이 빚은 전쟁, 그 속에서 생사의 경계에 섰던 사람들을 지켜본 경험은 그의 첫 종교적 체험이었다. 그때부터 가톨릭 신자가 됐다. “평범한 신자였던 제가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어요. 성당에서 복사(천주교 미사 때 신부를 돕는 신자)로 활동했는데 그해 11월 2일 위령의 날 신부님과 함께 서울 잠원동, 논현동 일대의 공동묘지를 찾게 됐지요. 너른 터에 빼곡히 들어선 묘지는 정말 충격이었어요. ‘아, 누구나 다 이렇게 묘소에서 끝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6·25와 공동묘지의 체험이 겹쳐 결국 사제가 돼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셈이지요.” ‘천국에 온 것 같았다’는 회고처럼 신학교 생활은 그에게 더없이 잘 맞았다. 4·19 혁명이 전국을 휩쓴 1960년 가톨릭대에 입학한 그는 2학년을 마치고 육군 일반병으로 입대했다. “훈련소에서 헌병으로 차출됐어요. 이야, 이제부터 폼나게 군대생활 좀 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지요. 하지만 제가 배치된 곳이 부산과 광주(경기)의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였어요. 그곳에서 군생활을 꼬박 2년간 했지요. 군대는 대한민국 남성으로서 체험한 첫번째 모순의 사회였어요. 불합리한 일상을 겪으면서도 낙오하지 않으려면 숨죽인 채 순종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박정희 독재를 겪으며 ‘대한민국 모든 남성이 군에서 모순의 사회를 배우고 길들여졌구나’하는 생각에 마음 아팠지요.” 신학 교수의 꿈을 품은 함 신부는 1965년 가톨릭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길에 오른다. 당시는 4년 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취임해 독재와 탄압을 본격화하던 때였다. 햇수로 9년을 로마에 머무는 동안 그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나라 밖에 있다 보니 3선 개헌, 유신체제 선포, 학생과 민주인사들에 대한 투옥과 고문 등 뉴스를 외려 국내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빨리 접할 수 있었어요. 마음 아프고 부끄러웠어요.” 1973년 귀국해 마주친 조국의 첫인상은 낯설었다. 마포대교 등에는 헌병이 총을 들고 서 있었고 서울역에서는 중·고등학생을 동원한 반공 궐기대회가 수시로 열렸다. 그야말로 병영사회였다. 서울 연희동 성당에서 보좌사제로 있던 그를 세상 밖으로 끌어낸 결정적 사건이 1973년과 1974년 잇달아 터졌다. 김대중(1924~2009) 납치사건과 지학순(1921~1993) 주교의 구속이었다. 특히 1974년 7월 지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과 ‘유신헌법 무효’ 양심선언으로 15년형을 받자 성난 사제들이 성당 밖으로 뛰쳐나왔다. 함 신부는 이 과정에서 젊은 신부들을 중심으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했다. 당시 사제단에 참여했던 문정현(73) 신부는 함 신부에 대해 “타고난 조율가이자 소통가”라고 평가했다. 문 신부는 “대표가 없는데도 사제단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박학하고 판단이 빠른 함 신부 덕이었다”고 말했다. 함 신부는 지 주교의 구속에 대해 “돌이켜보니 은총의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이 일을 계기로 사제들이 사회 참여를 시작하면서 유신체제의 모순에 대해 눈 떴다는 얘기다. 유신독재 타파를 외치며 정권에 맞서던 그는 1976년 3·1 구국선언에 참여했다가 구속됐다. 첫 투옥은 시련이자 기회였다. 서대문 구치소 등에서 1년여 옥고를 치른 그는 “제2의 신학교 생활 같았다”고 했다. 차디찬 감옥에서 자신의 인간 본성을 엿본 웃지 못할 촌극도 있었다. “중앙정보부에 체포돼 밤늦게 구치소에 갔는데 교도관이 제 방이라며 안내했어요. 근데 완전히 쓰레기통이야. 그래도 내가 살 방이니 의지를 갖고 아침에 청소를 깨끗이 하고 마음을 가다듬었어요. 근데 다 치워놓으니까 교도관이 ‘방 배치를 다시 해야 하니 나오라’는 거예요. 좀 억울하잖아요. 그래서 ‘싫다. 살 준비 다했으니 내 방이다’라고 하니까 교도관이 ‘교도소에 내방 네 방이 어디 있느냐’고 해요. 근데 옮겨 보니 새 방이 너무 깨끗한 거예요. 청소 좀 했다고 교도소 방 옮기기 싫어한 제 모습이 참…. 덧없는 소유욕이 드는구나 하는 생각에 혼자 웃었어요.” 함 신부는 교도소에서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등과 함께 꼬박 1년간 재판을 받으며 기도와 독서로 마음을 달랬다. 함 신부가 그 지긋지긋하고 끔찍했던 유신독재의 종말을 목격한 곳도 교도소였다. 1979년 미사를 집전하면서 농민 오원춘이 정보기관에 납치·감금당한 일에 대해 강론하다가 경찰에 연행돼 영등포 교도소로 끌려갔다. 두번째 옥살이가 시작됐다. 그리고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암살됐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박정희 피살 소식을 접하며 성경에 나오는 이집트 노예 해방의 기적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함 신부는 김재규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유신독재의 핵심을 제거한 일은 높이 평가해야 해요. 그는 1979년 부마항쟁을 현장에서 지켜본 뒤 박 대통령에게 민심을 수습할 정책을 써야 한다고 건의했어요. 그러나 박 대통령은 경호실장 차지철과 나눈 대화에서 ‘그까짓것 100만~200만명쯤 죽여도 문제 없어. 3·15 부정선거 때 경무대 경호책임자인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내린 죄로 처형당했는데 내가 발포 명령을 한다면 나를 어떻게 할 거야’라고 했다지요. 김재규는 이 말을 듣고 10·26 의거를 결행했다고 재판에서 진술했죠.” 그는 1970~1980년대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기적과도 같은 민초들의 힘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제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 받을 때 피로를 못이겨 눈 감고 있었더니 혼자서 저를 감시하고 있던 중정 요원이 ‘신부님, 정신 차리세요. 소신껏 답변하셔야 해요’라며 응원하더군요. 힘이 불끈 솟았지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질 때 옥중에 있던 이부영 전 의원의 쪽지를 전달한 사람도 이름 없는 양심적인 교도관이었어요. 사도행전을 보면 감옥에서 천사들이 감옥 문을 열어 사도들을 내보내 줬다는 구절이 있잖아요. 그런 기적을 현실에서 체험한 거죠.” 1970년대 함 신부와 함께 군부독재 권력과 싸웠던 이들 중 지금은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적잖이 있다. 이를테면 김지하 시인이나 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 같은 사람들이다. “한 사람을 평가할 때는 시기별로 구별해서 봐야 해요. 인간은 원래 쉽게 변할 수 있는 존재니까요. 예컨대 김지하 시인도 1970년대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던 청년 김지하와 1990년대 이후 현실과 야합한 장년 김지하로 나눠 볼 수 있겠죠. 윤리신학적으로 봐도 사실 선과 악, 천사성과 악마성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거든요. 어느 쪽이 마음속 주도권을 잡느냐의 문제죠. 일제시대 때 최남선, 이광수 같은 분도 일면으로는 얼마나 훌륭했나요. 변절한 것은 시대적 한계를 넘지 못한 그들의 한계죠.” 함 신부는 잘못된 사회·정치 제도를 바로잡는 데 교회(종교)가 앞장서야 한다고 줄곧 강조해 왔다. 왜 하필 교회일까. 그는 “불의 없는 사회를 만들어 사람들이 양심껏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종교적 인간 구원의 핵심이기 때문에 종교가 사회 정화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꽤 오래 전의 일화 하나를 끄집어냈다. “1970년대 어느 부활절 때였어요. 자정 가까운 시간인데 국영기업에 다닌다는 한 40대 신도가 성당에 왔어요. 술에 취했는데 고해성사를 보겠대요. 그러면서 ‘신부님, 어차피 오늘 반성해도 내일 저는 똑같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요. 그냥 저와 술 한잔 하시고 용서해주세요’하는 거예요. 또 ‘신부님은 세상을 모릅니다. 부정과 타협 안 하면 살 수가 없어요. 집에 노모까지 5명이 사는데 회사 월급만으로는 버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적당히 뇌물받아 아래, 위와 나눠 가져야 해요’라고 하더군요. 양심적으로 살려면 회사를 그만둬야 하고 그러면 당장 식구들이 굶어 죽는데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고 묻더군요.” 함 신부는 당시 30대의 젊은 사제였다. 그 신자에게 ‘그래도 천주교 신자로서 양심껏 사세요’라고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아무리 좋은 메시지도 그 사람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신자들이 양심껏 살도록 도우려면 결국 옳지 못한 사회 구조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교(政敎) 분리는 사실 폭압자들의 논리예요. 종교의 이름으로 불의에 항거하면 ‘예배당, 불당에 가서 기도나 하세요’하는 식이죠. 성경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했잖아요. 그러려면 세상 한복판에서 세상을 껴안아야 해요.” (하편에서 계속)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푸른거탑’ 작가 “신병-김수현, 병장-하정우 캐스팅?”

    ‘푸른거탑’ 작가 “신병-김수현, 병장-하정우 캐스팅?”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거쳐야 할 인생의 관문, 군대. 시커먼 남자들만 모인 그 곳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다양한 일들이 벌어지고 또 벌어진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군대에 간 남자들은 밀폐된 그 곳에서 2년 간 어떤 일을 겪는 것일까? 누군가에게는 아련한 추억이자, 또 누군가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인 군대 생활을 코믹하게 그린 tvN시트콤 ‘푸른거탑’(민진기 연출, 최종훈, 김재우, 김호창, 백봉기, 정진욱, 이용주 등 주연)을 보면 조금이나마 그들만의 세상을 짐작할 수 있다. 군필자에게는 향수를, 미필자에게는 ‘예습 효과’를, 여성에게는 호기심을 안겨주면서 그야말로 대박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는 ‘푸른거탑’은 ‘남녀탐구생활’로 인기작가반열에 오른 김기호 작가의 야심작이다. 평범한 일상을 깨알같은 이야기로 풀어내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는 김 작가와 지난 7일 서울신문 사옥에서 ‘푸른거탑’ 뒷담화를 나눠봤다. Q. 에피소드마다 작가 본인의 경험이 많이 녹아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출신’을 궁금해 하는 사람도 많다. 어떤 군 생활을 보냈는지. A. 의정부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26사단에서 81㎜ 박격포 포병으로 근무했다. 알 만한 사람들은 알지만 육군 포병 중에서도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힘들다 해서 ‘꿀보직’이라 부르는 부서다. 그래서 ‘꿀보직 에피소드’도 탄생했다. 나는 사실 ‘얍삽’하게 군 생활을 했다. 초반엔 엄살도, 꾀병도 많이 부리고 잔머리도 굴려서 고참들에게 미움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푸른거탑’ 속 상병처럼 후임을 괴롭히는 성격은 아니었다. Q. 지금까지 방송된 ‘푸른거탑’ 중 가장 아끼는 에피소드는? A. 말년병장이 귀신을 때려잡는 ‘공포의 17초소’는 내가 쓰면서도 많이 웃겼다. 최근에는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라는 에피소드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군 생활 도중 어머니가 돌아가신 일병의 사연을 다룬 에피소드다. 사실 군에 있는 2년 동안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일을 겪는 군인들이 참 많다. 군 생활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애환도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푸른거탑’이 웃음 뿐 아니라 눈물도 쏙 빼는 다른 면을 보여주고자 했다. Q. 남자들은 군대 2번 가는 꿈이 최고의 악몽이라던데. 그럼에도 군필자가 군대 드라마에 열광하는 이유가 뭘까? A. 두 번의 군대는 대한민국 남자에게 가장 큰 시련이자 가장 심한 욕이다. 그 안에 있을 때에는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사실 그걸 마치고 나면 그때 그 시절이 추억이 되어 힘들었던 일들을 잊게 된다. ‘애증의 시간 또는 공간’이 되어버리는 거다. ‘푸른거탑’은 이곳에서의 추억을 건드려 공감을 얻는다. 공감을 주면 웃음은 따라오기 마련이다. 많은 남성들은 추억을 떠올리며 공감하다 웃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 같다. Q. 반면 군대 생활을 잘 알지 못하는 여성 시청자들이 ‘푸른거탑’에 흥미를 가지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A. 준비단계에서 여성 시청자들을 걱정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드라마적인 부분을 강조해 여성 시청자들이 코믹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 군대를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자막도 넣었다. 요새는 아빠, 오빠, 남동생과 함께 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는 여성 시청자들도 있다더라. ‘푸른거탑’이 대한민국 가정의 화목을 도모하는데 일조하고 있는 셈이다.(웃음) Q. ‘군대’ 하면 민감한 부분도 워낙 많다. 군대를 소재로 이야기를 쓰면서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A. ‘푸른거탑’을 보고 군대가 지나치게 가볍거나 장난만 치는 곳, 쓸모없는 짓만 하는 곳이라는 이미지를 줄까봐 항상 걱정한다. 군 명예나 위신을 떨어뜨리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우리는 그저 “코믹한 양념을 조금 넣기는 했지만, 우리 군인들이 이렇게 힘들게, 열심히 군 생활 하고 있으니 응원해 달라. 군인들을 한번 더 생각해 달라.”라고 말하고 싶은 것뿐이다. Q. ‘푸른거탑’에 톱스타를 섭외할 수 있다면? A. 일단 송중기는 세상물정 잘 모르는 해맑은 이미지이니 입대하기 전 청년으로. 신병은 어리버리한 이미지가 함께 있는 김수현. 상병은 까칠하고 성깔있는 캐릭터의 권상우. 병장은 남자다운 느낌의 하정우. 그리고 말년 병장은 능글능글한 이미지의 송강호를 캐스팅 하고 싶다. Q. 작가가 짚어주는 ‘푸른거탑 관전 포인트’는? A. 두뇌게임 또는 심리게임. 시청자들이 예상 못한 결말이 ‘푸른거탑’의 묘미인 것 같다. 작가진과 두뇌싸움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Q. 시청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A. 군필자에게. 군대에서 보낸 2년은 쓸모없는 시간이 아니라 도움이 되는 시간이었을 거다. 꿈을 향해, 그때 그 마음으로 살면 못할 것이 없다. 2년간 수고했다. 미필자에게. 군대, 해볼 만하다. 죽지 않는다. 그 안에서 뭔가를 찾아봐라. 과거도 돌아보고 미래도 그려보고 목표를 찾아서 나와라. 나도 군대에서 작가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여성에게. 군대, 많이 힘들다. 남자들이 군대 이야기 하면 너무 따분해 하지 말고 토닥이며 격려 한 번만 해 달라. 남자들은 그것 하나를 원할 뿐이다. tvN ‘푸른거탑’은 매주 수요일 밤 11시에 방송된다. 사진=김기호 작가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열린세상] 협동조합을 성공적으로 활성화시키자/이영근 전 국민권익위 부위원장

    [열린세상] 협동조합을 성공적으로 활성화시키자/이영근 전 국민권익위 부위원장

    지난해 12월 1일 협동조합기본법이 시행된 이후 3개월이 흘렀다. 시행 두 달 만인 1월 말까지 349개의 협동조합이 설립 신고를 마쳐 221개의 일반 협동조합이 설립되고 4개의 사회적 협동조합이 설립 인가를 받았다. 하루에 3.6개 정도가 설립된 셈이다. 협동조합은 1844년 산업자본주의의 원조국인 영국에서 시작되어 좌우대립의 격랑기 속에서 존폐위기도 겪었고 세계경제위기에서는 합병 등 구조조정의 시련을 거치기도 했다. 그러나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새삼 세계인들의 주목을 끌게 된다. 유엔은 2009년 협동조합의 경제안정 효과와 사회통합 기능에 주목하여 2012년을 ‘세계 협동조합의 해’로 선포하고 각국에 협동조합 활성화를 위한 법과 제도의 정비를 권고하고 나섰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협동조합이 경제적 지속가능성과 사회적 책임을 함께 추구하는 것이 가능함을 국제사회에 일깨워 주었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세계적 흐름 속에서 우리나라도 2012년 1월 협동조합기본법을 제정해 누구나 손쉽게 협동조합을 설립할 수 있게 한 결과 많은 협동조합이 설립되거나 태동하고 있는 것이다. 협동조합은 경제적 생존과 사회적 책임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는 경제모델로 생산적 복지가 가능한 사회적 경제와 경제 민주화의 원동력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서울시 제1호로 신고된 한국대리운전협동조합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 참여하는 조합들은 많은 양질의 안정적인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고, 비정규직의 고용불안과 노사문제 해소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경제의 당면문제 해결을 위해서 협동조합을 활성화시키는 것은 시급하다. 관계기관들의 적극적인 노력도 이루어지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지난 1월 24일 제1차 협동조합정책심의위원회를 개최하고, 협동조합이 일자리와 복지 등 다양한 사회·경제적 요구에 대응할 수 있는 종합적인 정책수단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같은 날 서울시는 ‘협동조합 도시, 서울’을 주제로 협동조합 활성화 기본계획 토론회를 개최해 협동조합에 대한 강력한 기대와 지원 계획을 밝혔다. 하지만 우려되는 점이 없지 않다. 실제 협동조합을 설립하였거나 설립을 추진하는 사람들은 정부나 서울시의 ‘거창한’ 계획이 장밋빛 신기루에 가깝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신고만 하면 간편하게 설립되어야 할 일반협동조합조차 사실상 인가나 허가에 가까운 실질심사로 협동조합이 걸음마를 하기도 전에 진을 빼놓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원을 받으려면 얼마나 많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야 할지, 또 지원을 빌미로 간섭과 규제는 없지나 않을지 걱정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제도적 환경의 정비와 국민적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가 지나치게 실적만을 의식해 협동조합의 가치와 그 운영 원리에 대한 이해를 소홀히 하는 것 같은 느낌도 있다. 의도적으로 특정분야를 유도하거나 직접적인 지원을 하게 되면 대다수의 협동조합들이 자체적인 생존모델을 전제로 사업을 진행하기보다는 정부 또는 지방자치단체들로부터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을지부터 살펴보게 된다. 정확한 방향과 원칙이 없는 정책, 그리고 선심성 지원이 앞선다면 무늬만 협동조합을 양산하여 일자리 창출, 복지 실현이라는 그럴듯한 포장으로 국민의 세금만 축내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과거 사회적 유행의 파도를 타고 정부의 지원에만 의존했던 많은 사회적 기업들이 지원 기간이 끝나자마자 문을 닫거나 사업을 축소하여 세금으로 사익만을 챙기는 ‘철새 사회적 기업인’이 되었던 경우를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협동조합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이탈리아 볼로냐대학의 스테파노 자마니 교수는 “정부는 법과 제도의 정비, 세제상의 간접지원, 그리고 교육과 홍보를 통한 협동조합 생태환경 조성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협동조합 활성화 노력은 자주, 자립, 자조라는 기본 운영원리에 맞게 관 주도의 ‘끌기’식보다는 전문성 있는 민간단체를 활용하는 등 ‘밀어주기’ 방식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정책 개발과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지원은 협동조합의 자생력을 키워주는 간접 지원에 머물러야 한다.
  • 문 잠겨서…알몸으로 호텔 누빈 ‘바보 남성’ 사연

    문 잠겨서…알몸으로 호텔 누빈 ‘바보 남성’ 사연

    마치 코미디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웃기는 상황을 담은 동영상이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18일 유튜브에 게재된 이 동영상의 제목은 ‘호텔에서 이러면 안된다’(Never Do This In Hotel)로 50만 조회수에 육박할 만큼 큰 인기를 얻고있다. 촬영된 일시와 호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 동영상은 한 알몸 남성의 ‘눈물겨운 사투’(?)를 담고 있다. 영상은 알몸 상태의 한 남성이 객실에서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주위를 살피는 것으로 시작된다. 복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남성은 다 먹은 식기를 문 밖에 놓기 위해 밖으로 나온 후 그만 ‘좌절’한다. 객실 문이 그대로 잠겨버린 것.         알몸으로 열쇠가 있을리 없는 남성은 문을 머리로 쿵쿵치며 스스로 책망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문 주위를 서성였다. 이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가자 남성은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한 자세를 취한다. 결국 남성은 문을 열기 위해 호텔 프런트에 가기로 마음먹고는 식기로 ‘중요 부위’를 가리고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그러나 남자의 ‘굴욕’은 계속됐다. 엘리베이터에는 엄마와 아이가 타고 있었고 엄마는 이 남성이 치한인양 아이의 눈을 가르고는 황급히 내린다. 우여곡절 끝에 남성은 프런트에 도착했지만 그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남성이 호텔 직원에게 ‘208호의 키를 달라’고 요청하자 직원이 신분증을 요구하고 나선 것. 2분 36초 짜리의 CCTV 화면을 편집한 이 영상은 ‘연출된 장면’일 가능성도 제기됐지만 네티즌들은 코미디 영화를 보는 것 같다는 평가다. 네티즌들은 “마치 호텔판 ‘미스터 빈’ 같다.” , “알몸 남성에게 신분증을 요구한 호텔 직원도 바보”라며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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