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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0세 가수 넬슨,눈물의 새 음반

    ◎사이먼 등 후배들이 온정… 파산서 재기 노년에 접어들어 아들을 잃고 파산선고를 받는 등 숱한 역경에 처한 컨트리송 가수 윌리 넬슨(60)이 후배 가수들의 도움에 힘입어 활동을 재개했다. 온갖 시련속에서도 음악에 대한 열정만은 잃지 않았던 윌리 넬슨은 조만간 전속사인 컬럼비아사를 통해 컨트리 대표곡을 모은 음반「오크로스 더 보더라인」을 발표할 예정이다.음반발표 외에도 4∼5월 두달동안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등의 TV방송 출연,60세 생일축하 콘서트(4월30일)를 비롯,활발한 재기공연 스케줄도 잡혀있다. 6살의 어린 나이에 기타교육을 받고 10살때 이미 댄스홀에서 연주생활을 시작한 윌리 넬슨은 그동안 「나잇 라이프」「조지아 온 마이 마인드」「핫브레이크 호텔」「올웨이즈 온 마이 마인드」등 숱한 히트곡을 발표했다. 또 지난 75년 「레드 헤디드 스트레인저」,78년 「스타더스트」등의 명반을 비롯,지금까지 40장 가까운 앨범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91년 크리스마스때 33살된 아들이 자살하고 뒤이어 파산선고를 당하는 등 윌리 넬슨에겐 시련이 잇따랐다.당시 그는 정부에 대한 빚 1천6백70만 달러를 변제하기 위해 텍사스의 목장과 골프장,스튜디오는 물론 진공청소기 등의 가재도구와 골프채마저도 경매에 내놓아야 했다. 아직까지 5백40만 달러의 빚이 남아 있긴 하지만 앞으로 이를 몇년에 걸쳐 갚기로 정부측과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다. 이번에 나오는 음반 「오크로스 더 보더라인」은 후배가수인 폴 사이먼과 보브 딜런,피터 가브리엘,시너드 오코너 등이 연주와 보컬 등을 도왔다. TV쇼에서 교황의 사진을 찢어 화제가 되기도 했던 시너드 오코너는 이번 음반에서 「포기하지 말아요」란 노래를 가벼우면서도 강한 목소리로 불러 주었다. 또 폴 사이먼은 윌리 넬슨을 위해 지난 86년 발표했던 자신의 히트곡 「그레이스랜드」를 새롭게 편곡했다.『미시시피 삼각주는 내추럴기타(브랜명)처럼 반짝인다』고 시작되는 이 곡은 원래 사이먼이 만들어 윌리 넬슨에게 취입을 요청했던 곡으로 사랑을 잃은 아픔과 상처의 치유를 노래하고 있다.
  • 미·러,“북핵 공동대응”/클린턴·옐친 오늘 2차회담

    ◎탈퇴철회·사찰 집중논의/러에 16억불지원 합의/1차회담/G7·IMF통해 별도경원 추진 【밴쿠버(캐나다) 외신 종합】 클린턴 미국대통령을 수행중인 백악관의 한 관리는 4일 상오(한국시간 5일 상오)열리는 미·러시아 2차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핵문제가 논의될 것이라고 3일 밝혔다. 이 관리는 3일 1차 미·러시아 정상회담이 끝난 후 배경설명을 하는 가운데 『오늘 이 문제(한반도 핵문제)가 논의되지 않았으나 내일은 거론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핵문제에 대해서는 클린턴대통령과 옐친대통령이 공통된 자세를 갖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2차 회담에서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번복을 위한 공동대책이 논의될 것임을 시사했다. 이에 앞서 클린턴대통령과 옐친 러시아대통령은 3일 하오(한국시간 4일 상오)캐나다 밴쿠버에서 첫 정상회담을 갖고 옐친에 대한 미국의 확고한 지지를 과시하는 한편 10억달러에 달하는 미국의 대러시아 직접원조를 포함,러시아를 돕기 위한 국제적인 경제지원 방안에 대해 집중 논의했다. 클린턴대통령은 예정보다 30분 길어져 약 2시간동안 계속된 이날 회담에서 대러시아 경제지원이 ▲미국의 직접 지원과 ▲일본등 서방선진7개국과 국제통화기금(IMF)등 국제적인 차원 두 채널로 추진될 것이라는 점을 밝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미국측 구상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지아해협을 내려다보는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총장 관사에서 진행된 1차 회담이 끝난 후 스테파노풀로스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회담이 광범위한 문제에 대한 예비회담적 성격을 띠었다고 말하고 이날 저녁 만찬회담과 4일 2차 회담에서 구체적인 경제종합지원방안과 국제안보문제가 논의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대러시아 직접지원 형식을 통해 ▲곡물차관 7억달러▲산업민영화 지원 2억2천5백만달러▲중소기업 창업지원 5천만달러등 약 10억달러에 달하는 지원안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스테파노풀로스대변인은 클린턴이 첫날 회담의 분위기에 만족했다고 전하면서『클린턴 대통령은 오랜 시련에도 좌절하지 않는 투사 옐친을 좋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클린턴대통령이미야자와(궁택)일본총리와 러시아 지원문제를 논의한 내용을 옐친대통령에게 전달했다고 밝힘으로써 오는 14·15일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서방선진7개국(G7) 외무·재무장관회담을 통해 일본등의 대러시아 지원방안이 강력하게 추진될 것임을 시사했다.
  • 동서양 연극 명작 스크린 감상/중국 경극서 영 리어왕까지 무료로

    ◎매주 토 예술의 전당서 6월말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내에 위치한 문예진흥원 예술자료관은 4월부터 6월까지 동·서양연극의 명작들을 레이저디스크나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대형 스크린으로 감상하는 「정기토요명작감상회」를 개최한다. 매주 토요일 하오 2시부터 무료로 진행되는 명작감상회에는 고승길(중앙대연극학과) 서연호 교수(고대 국문과)와 연출가 김효경,오태석씨등이 해설을 곁들인다. 오는 10일에는 「쿠티야탕」 「가타칼리」 「악사가나」「차아우」등 인도의 연극과 「천국」 「당악무」등 중국의 경극,「무악」 「분라쿠」등 일본의 가부키를,17일에는 경극 「패왕별희」,24일에는 가부키「가명수본충신장」을 상영하는등 4월에는 동양연극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기위해 아시아 주요국의 연극을 감상한다. 6월에는 키리테 카나와, 호세 카레라스등의 성악가가 출연하는 뮤지컬 「웨스트사이드스토리」(5일),말론 브랜도 주연,엘리아 카잔 감독의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2일),아서 밀러 원작,이태주 번역의 우리 연극 「시련」(17일),로렌스 올리비에 주연의 「리어왕」 등 서양의 뮤지컬과 연극을 대형스크린으로 감상한다. 장소는 예술자료관 3층 다목적 감상실.문의는 (02)525­3491∼3.
  • 러시아 한인(외언내언)

    러시아인들은 그곳 한인들을 카레스케라 부른다.한인스스로 고려인이라 자칭한데 연유한다.공산 소련때부터 그리 불렀다니 일제에 나라잃고 해방후엔 분단·대립됐던 조국의 비극을 말하는것 같다.조선인도 아니요 한국인도 아닌 하필이면 고려인인가.광복과 통일의 염원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러시아 한인이민의 시작은 1863년 보리고개때부터다.가난과 기아의 한인13가구가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땅에 정착한 것이 효시다.월경자가 늘어나자 러시아측은 설득과 처벌의 위협으로 귀환시키려 했으나 돌아가도 굶어죽거나 처벌받을수 밖에 없다며 버티는 그들을 어쩔수 없었다. 강인한 이주민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황무지를 개간하고 수공업을 일으켜 기어이 러시아정부의 신임을 얻었으며 1917년엔 연해주와 시베리아 일대의 한인이 22만5천여명에 이른 것으로 전해진다.일제가 조국을 강점하자 독립군을 일으켜 투쟁에 나서기도 했던 이들은 그러나 또한차례 시련을 겪게 된다.스탈린의 강제이주인 것이다. 스탈린은 연해주 한인들을 「불온인민」으로 낙인찍어 37년 9월부터 4개월간 18만이나 중앙아시아 황무지로 강제이주시킨 것이다.나치스의 유태인호송을 연상시키는 화물열차에 실려가면서 기아와 질병으로 희생된 자가 무릇 수천명에 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망국민의 수모요 비운이었다. 오늘의 구소련 중앙아시아일대 거주 한인들이 바로 그들이며 그 후예인 것이다.러시아의회가 31일 통과시킨 「러시아한인 명예회복법」은 바로 그들의 수난과 수모에 대한 56년만의 공식사죄요 명예회복조치인 것이다. 아쉬운 것은 이 법이 러시아한인에만 해당된다는 점이다.정작 강제이주민의 뿌리가 있는 중앙아 우즈베크(18만)와 카자흐(10만) 한인에게도 연해주 이주자격등 같은 사죄와 명예회복조치가 있었으면 한다.이들지역은 지금 유혈분쟁의 위기에 처해있다.러시아와 관계공화국의 배려가 있어야 할것이다.
  • 김태식 민주당 신임총무(인터뷰)

    ◎“국회법개정 등 의회개혁에 앞장설터/여와 지방자치단체장선거 우선 협상” 『국회법 개정과 예결위의 상설화등 의회정치의 개혁을 추진하는데 앞장서겠습니다』­정당사상 첫 자유경선을 통해 민주당 새원내총무에 당선된 김대식의원은 18일 당선직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치의 중심처인 국회에서 개혁의 고삐를 당기는 역할을 해나가겠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자유경선을 통해 선출된 소감은. ▲가까이 지내던 동료,선후배 의원들과 경쟁하는데 대한 인간적인 고통이 컸다.그러나 경선에서 얼굴을 붉힐만한 일없이 페어플레이를 했으며 특히 경선이 끝난뒤에도 마음의 꽃다발을 던져준 홍사덕의원에게 감사드린다. ­2차 투표에서 비주류측이 표를 몰아준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비주류가 표를 모아준 것인지는 아직까지 알 수가 없지만 당 전체를 모양새있는 그림으로 만들기 위해 표를 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앞으로 여당과의 관계는 어떻게 풀어나갈 계획인가. ▲당 지도부와 충분히 협의 하겠다.그러나 현안으로 걸려있는용공음해,지방자치단체장 선거문제가 우선 협상대상이 될 것으로 본다. ­국회활동을 통한 개혁구상은. ▲우선 국회활동을 저해하는 국회법을 개정하는데 중점을 두겠다.또 우리당이 줄곧 주장해온대로 예산결산위원회를 상설화해 예산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있도록 노력할 생각이다.김영삼대통령이 의회정치의 신봉자인만큼 여야의 협의를 통한 국회활동이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한다. ­현재 당이 주류와 비주류로 나뉘어 계파간에 알력이 있는 것으로 비치기도 하는데. ▲총무에 당선된뒤 인사말을 통해 대표 경선에서 탈락한 김상현·정대철의원의 의견도 수렴하겠다고 언급한 것을 기억해달라.나름대로 오랜 당료생활을 거치면서 친화력을 익혀왔다고 생각한다. 김신임총무는 지난 71년 이철승씨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뒤 11대 때 처음 국회에 등원해 주로 재무위와 경과위등에서 활약,당내 재경통으로도 통한다. 91년 수서사건이 발생했을 때 공갈혐의로 구속돼 시련기를 맞았으나 무죄 석방된뒤 지난 14대 총선에 당선된데 이어 제1야당의 원내사령탑을맡게 됨으로써 정치적 사면을 받은 셈. 부인 박진원씨(52)와 1남 2녀를 두고 있다. ▲전북 완주·54세 ▲중앙대 경제학과 ▲11,13,14대 의원 ▲평민당대변인·총재비서실장 ▲민주당 전북도지부장.
  • 연극배우 최종원씨(이세기의 인물탐구:20)

    ◎혼신다해 역동적 연기하는 “진짜 배우”/주어진 역할에 정열바쳐 특유의 개성표출/「리어왕」서 고뇌하는 내면연기로 주목받아/갖가지 삶의 모습 소화해내며 끝없는 연기변신 시도 거칠고 투박하다.솔직하고 꾸밈이 없다.불같고 칼같은 그의 성격상 중용과 중도를 지키는 모호한 태도는 맞지않는다.기백과 의리,정의감과 정열로 뭉쳐진 연극배우가 최종원이다. 아직은 들판에 풀어논듯한 포효와 폭만이 도사려보인다.그러나 탁탁 부러지기보다 불에 달군 쇠처럼 강인함이 돋보인다.부러지는듯 휘어지고 휘어졌다가도 제자리에 돌아와 설줄아는 투지,꿋꿋한 자존심이 그의 대명사다.만사에 주저함이 없다.한다면 한다.연기를 할때도 몸을 사리지않고 전신을 던진다. TV출연 때문에 연극연습에 소홀한 선배나 후배를 보면 연극만을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의 사기를 위해서라도 연극을 그만두어 줄것을 당당히 요구한다.TV인기,연기보충처럼 연극에 참여하는건 연극모독이자 관객모독,처럼부터 연극할 자격도 없다고 못박는다. 또 연출자나 제작자에겐 배우들의 좋은 연기를 끌어낼수 있을만큼 완벽하고도 만족한 여건을 갖춰달라고 말한다.그는 언제 어디서나 연극배우의 입장에서 배우의 권한을 옹호하고 주장한다. 한때는 연기자그룹을 발족하고 초대회장이 되어 본격적으로 배우들의 출연료 계약문제를 연극계에 제기한적도 있었다. 91년 연극의 해를 위한 모임에서는 그동안 창작극 활성화와 극단 지원 결과 과연 그 성과가 어땠는가를 따져 관계자들을 긴장시켰다.그때도 그자리에서 막연하게 단체를 지원하여 지원금의 효력을 희석시키기보다 한사람의 연기자를 집중적으로 지원해보는 방법을 고려해보는게 어떠냐고 물었다. 그는 이런식으로 열성적으로 연극무대를 지켜왔다.20년간 1백여편,아마도 그처럼 많은 연극에 출연한 배우도 드물 것이다.최종원이 끼지 않으면 연극이 안된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주어진 무대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게 밀착하여 그는 이미 「최종원 특유의 색깔과 체취가 물씬 풍기는 살아있는 연기」를 구사한지 오래다. 최종원의 출생과 성장기는 마치 일부러 설정해놓은 무대와 인물구성처럼 파란만장으로 점철되어있다.그것은 어쩌면 소설이나 연극보다 더 가파른 삶의 진실이라 할수 있다. ○탄광촌서 유년기 보내 강원도 태백,광부의 8남매중 막내.태백공고 졸업후 그는 그의 부친이나 형들처럼 함태 탄광에서 탄분석기사로 일한적이 있다. 이 일을 하기위해 3개월동안 갱(갱)속에서 생활하는 연수기간을 거쳐야했다.그리고 3개월 연수를 끝내고 갱속에서 나오던날,동료중의 하나가 지하로 떨어져 죽는 슬픔을 눈앞에서 겪었다.그는 동료의 시체를 찾아내겠다고 울부짖었다.그러나 수직 6백m 지하로 떨어지면서 비좁은 갱벽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을 시체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낼수 없었다. 동네에선 하루가 멀다하고 사람이 죽어나갔다.곡소리가 그칠날이 없었다.남편을 잃고 자식을 잃은 부인네들의 통곡소리,이런 생활에 지쳐 걸핏하면 보따리를 싸들고 도망치는 가족들,남자들은 대낮부터 술상에 둘러앉아 탄가루에 찌든 목을 술로씻어 내렸다.슬픔은 차라리 사치임을 그는 어린시절에 진작 터득하고 있었나보다.어머니에게 손목을 잡혀초상집에가면 어른들은 술마시고 어린애들은 떡이나 국수를 얻어먹는다.청소년기에는 남의 상가에 가서 상여메는 일을 도맡다시피했다.상여를 멨던 광목한필을 얻을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산도 나무도 심지어는 빨래줄에 널린 빨래까지도 온통 검은색 뿐인 묵화같은 탄광촌,그는 둘째형이 메탄가스로 질식사하는 사고를 겪은후 더이상 참지못하고 고향을 탈출했다.술집외상,싸움질,비통,울분,가난과 무기력이 집합된듯한 극지의 땅을 떠나지않는한 타고 태어난 운명적 비극을 모면할수 없을것 같았다. 그는 집을 떠나 서울에서 간호원으로 일하고 있던 손위 누이의 자취방에 얹혀살았다.농무가 눈앞에 쌓인것처럼 막막할뿐,대책도 목적도 없었다.평소 연극을 좋아하던 누이가 갑자기 「연극을 해보는게 어떠냐?」고 물었다. 연극이라면 고등학교때 박종화원작의 「금삼의 피」를 해본적이 있었다.그때 맡았던 「연산군」이 미련처럼 내면에서 꿈틀거렸다.그러나 배고픈 그에겐 연극은 너무나 한가한 소리였다.몇달을 빈둥거리다가 서울연극학교(현 서울예전)에 입학원서를 냈다. 면접하는 날 동랑 유치진선생이 『자네는 왜 연극을 하려는가』고 물었다.그는 대뜸 「연극을 위해서」라고 대답했다.연극을 위해서 왠지 자기자신이 필요한 존재일 것 같았다.남다른 경험을 요구하는 연극무대에서 그는 끝내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70년,전국대학생극협의회가 주최하는 연극 「콜렉터」로 정식 데뷔,그때 협의회 자문으로 있던 유현목 하길종감독이 그의 연기의 가능성을 인정해주었다.그는 차츰 연극무대에 침몰되어갔다.의사 형사 주정뱅이 농부 공사판 감독에서 백만장자 워벅스,무기력한 세일즈맨,에쿠우스와 햄릿,방화범에 이르기까지 그는 수많은 연기변신을 시도해나갔다.연극평자들로부터 「좋은 재목」「탄탄한 연기자」「능란하고 현란한 연기구사」로 평가되기도 했다. ○70년 「콜렉터」로 데뷔 그러나 모든 역할이 그때마다 절실하게 밀착되는건 아니었다.전혀 엉뚱하고 생소하여 접근이 불가능한 역할은 얼마든지 있었다.83년 안민수연출의 「리어왕」이 그랬다.오랜만에 동랑의 연극에서 타이틀 롤을 맡게됐으나한달반의 연습이 지났는데도 도무지 연기 이미지가 포착되지 않았다.하나의 역할을 끝내고 또다른 새로운 성격을 몸속에 채워야한다.그러나 리어의 모습은 아득한데서 맴돌뿐 이에 탐닉되지 않았다.그는 이 역할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최종원의 잠재된 수많은 가능성을 간파하고있던 연출자는 오히려 그에게 1주일간의 휴가를 주었다. 『리어는 특별한 인간이 아니다.한 가정에 가장이 있고 회사에는 사장이 있듯이 그는 한나라의 왕이다.너무 부담갖지 말라』고 위로했다.리어왕의 고뇌와 갈등이 전광처럼 뇌리를 스쳤다.결국 「리어왕」은 최종원의 내면연기를 끌어낸 화제작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의 대표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무슨일에든 망설이는 법이 없다고 했으니 시시때때로 연극이냐 생활이냐,연극에 대한 회의에 시달렸다.연극의 열성만큼이나 다른 일을 했다면 그도 남들처럼 풍요롭게 살수 있었을 것이다.아무리 온몸을 던져 무대를 지켜도 느는건 눈덩이처럼 커지는 빚뿐이었다.연극을 할수록 가난의 공동은 깊이 패어갔다. 연극초기때부터 줄곧 살고있는 명륜동3가 언덕바지에서 부부(부인 정영애씨)와 딸 둘(고1,중3)네식구가 전셋집을 전전하면서 그는 10원을 아끼기 위해 연탄을 직접 날라다 쓴적도 있다.생활때문에 어쩌다 1년에 한두편 TV베스트셀러극장이며 「마유미」등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가족들이 그의 연극보다 TV나 영화출연을 더 좋아하는 것에 그는 위기감을 느꼈다. 『당신은 연극배우의 아내다.나는 처음부터 연극배우였다.이를 전제하고 결혼했었다』고 단호하게 못박았다. 가족들이 불편해 하더라도 그는 연극을 포기할 순 없었다.다른 동료들처럼 TV나 영화로 돌 생각은 더더군다나 없다.연극은 천직이고 다른일은 생계수단에 지나지 않았다.85년이후 TV출연을 일체 끊어버렸다. 연극무대를 지키는 배우는 드물다.자신의 직업에 자랑스러움과 긍지를 갖게된 그로서는 이런 현실이 안타까웠다.관객들이 두시간전부터 극장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뉴욕의 브로드웨이나 일본 연극계가 부러웠다.그는 뜻맞는 동료를 만나면 배우들의 의식개혁을 부르짖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갖가지 삶을 다양하게 비쳐보는 연극의 매력,어떤 예술과도 견줄수 없다.인간이 전신으로 할수 있는 총체예술은 연극의 수단을 능가할 수 없다고. ○작년 「극발전연」 발족 지난해 그는 연극계의 선배이자 존경해온 연기자인 전무송과 의기투합,순수연극을 지향하는 극발전연구회를 발족하여 첫무대로 이강백작 김광림연출의 「북어대가리」를 동숭동 성좌소극장에 올렸다. 자신의 주어진 삶을 한치의 오차없이 지키려는 창고지기 전무송과 갇혀진 창고속의 삶으로부터 끊임없이 탈출을 꾀하려는 최종원의 거칠고 절박한 모습에는 그 옛날 탄광촌을 벗어날 때의 몸부림이 실려있어 보는이의 가슴에 전율같은 감동을 흐르게 한다. 더구나 23년간 기다려온 대선배 전무송과의 연기대결은 「연염의 조화」에 비유될만큼 그의 성숙을 확인시켜주었다. 이제 어떤 역할에든 책임져야 하는 위치. 심장의 고동소리까지도 생생하게 객석에 전달하고 싶어하는 그의 정열은 모든 고통과 시련을 딛고 이긴 투지의 결정에 틀림없다.머리카락 한올 까지도 혼신을 다해 역동적으로 연기해내는 배우가 우리에게도 있음을 연극계는 물론 연극을 사랑하는 관객 모두는 고마워하고 자랑스러워 하고 있다. □연보 ▲1949년10월 강원도 태백 출생 최석담씨(84)와 김옥녀여사(85)의 4남4녀중 막내 ▲67년 태백공업고 광산과 졸업 ▲68년 함태탄광 탄분석기사 ▲69년 상경,서울 연극학교 (현 서울 예전)연극영화과 입학 ▲70년 서울연극학교 학생회초대회장 ▲〃 전국 대학생 극 협의회 주최 연극 「콜렉터」로 데뷔 ▲〃 수재민 돕기 지방공연 「점을칩니다」 1팬,「교행」 「춘향전」 ▲71년 재경 강원도 학우회주최 연극 「형제」로 강원도 일원 공연 ▲77년 세종문화회관 개관기념공연(이진순연출 「북벌」) ▲83년 연기자그룹창립(초대·2대·8대 회장역임) 85년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연극영화과 졸업 87년 극단 부활과 이재한작·연출 「배비장전」 미국지역 45일간 순회공연 89년 영화 「마유미」 촬영차 도미 ▲90년 서울연극제 「아버지바다」 개인연기상 수상기념 뉴욕 연수 ▲91년 「연극의해」 기획위원▲〃 배우협회 창립(창립기념공연 윤대성작·정일성연출 「출세기」) ▲92년 일본동경 다이니아이리스 페스티벌 참가(김상열작 「길」) ▲현재 한국연극협회이사·극예술발전연구회 창립멤버(전무송과 발족) 「거룩한 직업」「어린왕자」「달집」「우회」「베니스의상인」「방화광」「노부인의 방문」「날개」「동물원이야기」「그리고 리어든양은 마시기 시작했다」「탱고」「검찰측증인」「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리어왕」「내·물·빛」「에쿠우스」「햄릿」「밤의묵시록」「신화1900」「욕망이라는이름의전차」「꽃을 사절합니다」「지금은 부재중」「티타임의 정사」「세일즈맨의 죽음」「환타스틱」「심판」「출구없는방」「애니」「만리장성」「아가씨와 건달들」「매춘Ⅱ」「헬로 미스터후라이데이」「하나를 위한 이중주」「기막힌 사내들」「아버지바다」「토선생전」「살로메」「누가 버지니아울프를 두려워하랴」「락스트리트」「그리운 앙트완느」「마네킹의축제」「변신」「격정만리」「길((욕)」「아침부터 자정까지」등 앙코르공연외 초총공연만 100여편이상,현재 「북어대가리」공연중.영화 「아제아제바라아제」「마유미」「꿈」「나의아내를 슬프게 하는것들」등…. 영화연극상·서울연극제개인연기상·동아연극상대상·서울극평가그룹상
  • 북핵에 긴장 고조되는 한반도(해외사설)

    남한정부는 12일 평양이 핵비확산조약탈퇴를 발표한 직후 긴급회의를 열었다.서울의 한 장관은 북한이 이라크에 비교될만한 엄청난 국제적 압력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일본도 「중대한 반향」을 우려했다.판문점 휴전회담후 40년이 지났어도 한반도는 여전히 긴장의 무대로 남아있다. 평양은 이 조치를 「국가이익의 방어」라면서 두가지 사건을 핑계로 삼고있다.북한공산체제는 먼저 「팀 스피리트」훈련을 「핵전쟁작전」으로 몰아붙인다.이 훈련은 미국의 5만명 병력과 가장 현대적인 군장비가 동원되어 한국군 7만명과 함께 지난 8일이후 휴전선 후방에서 실시되고 있다. 평양은 또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사무국 일부 책임자의 부당한 행위」를 비난한다.유엔의 기구인 국제원자력기구가 군사 목적으로 핵재처리를 하고 있을 것으로 보이는 두시설을 국제사찰단에 이달 25일까지 공개하도록 최후통첩했던 것이다.북한은 분명히 이 두사건을 하나로 묶으려 한다. 워싱턴과 서울은 핵무기를 아주 빨리 만들만한 능력이 실제로 평양에 있다고 본다.한·미두 정부는(이들뿐만 아니다)그러한 능력이 진부한 말장난을 일삼으면서 무슨일을 저지를지 모를 북한정권의 손에 놓이게 되는 것을 우려한다.북한 정권은 위기감에 휩싸여 있다.정치적으로는 1948년부터 통치해온 80세된 김일성 원수의 퇴진이 임박해 있으며 경제적으로는 중요한 동반자및 후견인을 구소연방의 해체이후 잃어버렸다.국제적으로는 친밀한 중국마저 이웃의 핵능력 획득 가능성에 불안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번 사태는 화해및 불가침조약으로 이루어진 1991년말 남북한 사이의 상호접근이 허약한 것임을 확인케 했다.남북한은 실로 판이하다.서울에서는 김영삼씨가 1961년 이후 최초의 민간대통령으로 직무를 시작하여 부패추방과 군부의 재정비에 착수했다.이것이 노멘클라투라와 권력복합의 통치체제안에서 어떤 의미를 가진다면 북한의 군부가 야심을 품을 수도 있다. 그 반면에 김영삼씨는 모든 한국 지도자의 장래 목표인 재통일의 개념을 아직도 개발하지 못했다.남한은 무슨일이 있더라도 적대적인 형제 북한이 시련을 겪는 일없이 통일이 진전되도록 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으나 이제 이 자세의 견지가 어렵다는 것이 드러난 것 같다.
  • 대북한화해 전향노력에 「핵찬물」/NPT탈퇴 남북관계에의 영향

    ◎이인모씨 송환결정 등 결단 무위로/기업인 방북허용 등 전면 유보될듯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선언은 「변화와 개혁」이라는 대전제하에 남북관계의 기본틀을 새롭게 짜기 시작한 김영삼정부에 찬물을 끼얹는 경악할만한 사태전개가 아닐수 없다.동시에 「3·12」사태는출범후 첫 대북조치로 이인모노인의 무조건 송환이라는 쉽지않은 결단을 내린 새정부가 전향적이며 긍정적인 대북정책추진의지에도 불구하고 북측의 긍정적인 호응을 토대로 이같은 의지를 실천,결실을 맺는데 엄청난 시련을 겪을 것임을 시사한 예고 시그널이기도 하다. 또한 김영삼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언급한 정상회담제의,이인모노인송환결정등 일련의 대북화해메시지에 대한 북측의 첫대응이 NPT탈퇴라는 초강경 반격으로 나타남으로써 향후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결정과정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관측된다. 이제까지 우리 정부는 북측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결국은 북한핵문제해결의 방향이 조만간 잡혀지지 않겠느냐는 전망을 토대로 남북관계 전개를 구상해온것이 사실이다.따라서 이달말 팀스피리트훈련이 끝나게 되면 남북대화가 지난 10월 이후의 긴 동면에서 벗어나지 않겠느냐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었다.그러나 북한의 NPT탈퇴는 이같은 예상을 뒤엎은 것이어서 향후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도 근본적으로 재수정될 것으로 보인다.그리고 그 결과는 이제까지 검토되던 기업인의 방북허용을 포함한 전반적인 대북유화조치들의 전면유보 이상으로 비화될게 분명하다. 뿐만아니라 북한의 NPT탈퇴는 북측의 대남·대외정책이 전면적으로 보수강경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예고하는 것이란 점에서 90년 1차남북고위급회담 개최 이후 상승국면을 타온 남북관계에 최대의 파경위기를 초래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결과적으로 그간 체제고수파와 개방파가 노선투쟁을 치열하게 벌여온 것으로 알려진 북한은 이번 조치를 통해 극단적인 체제고립쪽을 택했음을 내외에 밝혔다는게 관측통들의 분석이다. 이는 어떤 형태의 대내외 개방이든 그것이 결국은 체제붕괴로 이어질 것이라는 보수강경파의 목소리가 개방온건파를 압도했음을 의미하는것으로 향후 북한이 보다 강경한 대응으로 일관할 것임을 시사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또한 북한의 NPT탈퇴는 부자세습체제를 완결하려는 과정에서 빚어진 김일성부자와 군부간의 마찰에서 빚어진 결과라는 풀이도 가능하다.즉 권력세습을 서두르고 있는 김정일이 군부를 완전장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군부가 온건개방파의 주도로 대외개방을 추진한 결과가 특별핵사찰압력가중과 팀스피리트훈련 강행이나며 반발,그 무마책으으로 NPT탈퇴라는 초강경 카드를 사용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다. 이 경우 북한은 NPT탈퇴로 외교고립과 경제난이 보다 심화될때 강·온파간에 심각한 노선갈등을 겪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 갈등이 ▲전쟁도발과 같은 대외폭발 또는 ▲내부폭발로 가거나 ▲극적인 해결의 길로 들어서는 3개의 시나리오를 상정할 수 있다.그러나 첫번째 가능성은 현재 팀스피리트훈련이 진행되고 있어 현실성이 없으며 두번째는 북한내부의 복잡한 권력변동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우리측이 가장 우려,그 대비책을 세워야될 경우다.마지막은 「NPT탈퇴=협상카드」를 전제한 것으로 북한이 90일간의 유예기간중 남북간 또는 미국과의 대화를 통해 북한핵문제와 관련,「주고 받기식」협상을 본격화할 때 문제해결의 돌파구를 여는 계기도 될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갖게 한다. 그러나 이같은 전망들은 어디까지나 장기적인 측면에서 가능한 것이고 현재로선 이인모노인의 방북을 계기로 기대되던 「남북관계의 봄」은 실종의 위기를 맞고 있으며 자칫 두터운 핵구름이 상당기간 한반도를 뒤덮을 것이라는 분석이 보다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 정갑래 수산청 어업진흥관(만나고 싶었습니다)

    ◎“원양업계 불황타개 다각 노력”/영어자금·해외생산지원금 대폭 증액/국제협정통해 안정적 어장확보 주력/인력·자금난 해소위한 정책개선도 적극 검토 한때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비유되던 원양어업이 80년도부터 불어닥친 불황에다 최근 연안국들의 입어료인상과 공해상의 어로규제등으로 제2의불황을 맞고 고전하고 있다.캐나다와 러시아등 연안국들이 자국연안공해상에서의 조업금지를 요구하고 있는가하면 국내경기침체로 은행여신이 어려워지면서 원양업체의 부도가 잇따르고 있는 실정이다.정부의 원양어업정책을 총괄하고 있는 수산청 정갑래어업진흥관을 동원수산 이현수이사가 만나 우리 원양업계의 당면 문제와 정부의 대책등에 대해 들어봤다. ­최근들어 국제어업환경이 크게 악화되고 있습니다.국내원양업계도 부도등으로 자생력을 잃을 정도의 시련기를 맞고있다는 우려의 소리가 나오고 있는데요. ▲지난 한햇동안 총2백90개 원양업체가운데 11%에 달하는 32개사가 도산했거나 법정관리에 들어가 있는 상태이며 이 가운데 국내원양업계를 이끌어온 고려원양·삼호물산·덕수물산등 대표적인 회사가 포함돼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국내명태의 주요 공급해역이었던 북태평양베링공해에 대한 조업이 93∼94년동안 중지돼 31척의 대형트롤어선들이 발이 묶여있고 지난 1월초부터는 전공해상의 유자망조업이 금지돼 1백39척의 유자망어선이 다른 어법으로의 전환이 불가피한 실정입니다. ­연안국들의 입어료인상등 제재가 예사롭지 않습니다.정부채널에서 이들 국가와의 교섭과 앞으로의 새로운 어장개발등에 대한 계획이 있는지. ▲정부는 갈수록 설 땅이 좁아지고 있는 원양업계의 지원을 위해 14개 어업협정체결국과의 협력을 강화해 나가는 한편 이미 가입돼 있는 대서양참치보존위원회등 8개 국제수산기구에서의 역할을 증대시키고 북대서양수산기구(NAFO)등에의 신규가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또 입어료를 내고 조업하는 인도네시아·페루등 25개국 연안에서의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어장확보를 위해 교섭을 강화하고 있으며 올해 아르헨티나·페루·가이아나와 어업협정을 추진,남빙양저어자원을개발해 나갈 계획입니다. ­우리나라의 주된 조업수역의 하나인 캐나다와 러시아가 자국연안의 어자원보호를 이유로 국내어선들의 철수를 요구하고 나섰는데요. ▲주요어장 보유국들은 어자원의 자국화선언과 함께 2백해리경제수역(어업전관수역)을 선포하고 있으며 공해상에까지도 어자원보호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추세입니다.북대서양수역의 경우 지난달 캐나다정부로부터 이 수역에 진출해 있는 3척의 트롤어선이 철수하지 않으면 경제보복을 하겠다는 통보를 받은 상태입니다.아시다시피 캐나다정부는 자국어선에 대해서도 어자원감소를 이유로 이 공해상 출어를 금지하고 있습니다.러시아도 2백해리 경제수역으로 둘러싸인 오호츠크공해상을 「생태계재난수역」으로 규제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캄차카반도수역등 양국합의수역에 대해서는 입어료인상을 요구해 이에대한 협상이 진전을 보지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수산업계가 겪고있는 어려움은 어장이 좁아지는데다 자금난과 인력난의 심각성입니다.은행여신만 해도 담보물이 있어야 대출이 되는데 부동산이 없는 원양업계로서 특별배려가 있어야 한다고 보는데요. ▲좋은 지적입니다.정부에서도 심각한 상황에 있는 원양어업의 선원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국인의 고용과 일부 제조업체에 적용하고 있는 병역특례제도를 원양업계에까지도 확대하기로 하고 관계부처와 협의를 하고 있습니다.또 최근 경기불황으로 도산에 직면해 있는 원양업체에 대해서는 중소기업지원차원에서 자금지원을 확대하고 원양업계의 특수성을 감안한 대출제도개선안을 마련,관련당국과 협의할 계획입니다. ­항간에 원양에서 잡아오는 어류를 수입수산물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같아 안타깝습니다.정부차원에서의 홍보가 필요하다고 보는데요. ▲원양업계가 그동안 어려운 여건에서도 국내 수산물수급에 기여한 공이 컸습니다.우리 식탁에 영양가 높은 수산물을 올려놓았던 것도 사실이고 말입니다.지난해에는 5대양에서 약1백만t의 어획고를 올려 국내전체어획량의 31%(3백25만t)를 공급했습니다.특히 건강식품으로 각광받고 있는 참치류는 1백%를 공급했으며 명태·꽁치 90%,오징어는 약70%를 충당했습니다.일부품목은 수출로 외화획득에도 일익을 담당해오고 있지 않습니까.차제에 정부와 국민들의 이같은 잘못된 인식을 고쳐 5대양에서 국익을 위해 일하고 있는 우리 원양선원들의 사기를 북돋워야 하겠습니다. ­국내외로 어려움이 더해가는 원양업계에 대한 구체적인 지원책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정부는 올해영어자금을 지난해보다 2백여억원이 늘어난 1천억원을 업계에 지원하고 해외생산지원자금도 지난해 2백억원에서 올해는 4백50억원으로 늘렸습니다.이와함께 앞으로는 2백해리경제수역에서의 입어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어업을 허가하고 공해어업은 연안국과의 합의하에 조업을 하도록해 원양어업대국으로서의 책임을 갖고 대응해 나갈 것입니다. ­원양업계에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원양업계가 지금까지 세계 각 수역에서 국내수산물수급과 외화획득에 힘써 온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그러나 불법어업으로 인한 마찰과 개별입어로 인한 업체간의 제살깎아먹기식 입어등 부정적인 측면이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앞으로 해외어장에서 업계간의 과당경쟁으로 인한 전체업계의 불이익이 없도록 개별행동은 지양해야만 합니다.
  • 「일부각료 비리 파문」 반응과 자성의 목소리

    ◎진통의 정­관가… 도덕재무장 움직임/“근절책 세워 「맑은 공직」 계기삼자”/관가/“공인 흠집없나” 주변관리에 신경/정가 과거의 비리등으로 고위공직자들이 시련을 겪으면서 관가와 정가가 술렁이고 있다. 검증을 거치지 않은 인사에 따른 후유증이라는 지적과 함께 개혁에 대한 일부 기득권 세력의 치밀한 반발이라는 시각도 없지않다. 그러나 이번 파문은 문민정부가 개혁의지를 하나하나 가시화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어 관가등에서 도덕재무장 움직임을 강화하는 노력이 나타나고 있다. ▷관가◁ ○…신임공직자들의 불법행위및 도덕성문제가 잇따라 제기되자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 각부처는 『이번 사건이 공직사회와 국가전체를 맑게하는 도덕재무장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며 수습조치에 총력. 김영삼대통령은 6일상오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새로 임명된 공직자들과 관련,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는 것은 매우 유감스런 일』이라면서 『그것은 공인이 처신과 주변정리를 어떻게 하고 살아가야 하느냐 하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라고 말해 공직자처신과 주변에 문제가 있을 경우 적절한 인사조치를 취할 것을 강력시사. 청와대는 이와관련,박관용비서실장주재로 5일밤 수석비서관들이 참석한 긴급심야대책회의를 연데 이어 6일 상오에도 회의를 갖는등 대책마련에 부심.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신임 공직자들의 적임성시비가 일고 있는데 대해 미봉책이 아닌 근본적 대응책을 마련중』이라며 『이를 위해 내주중으로 예정된 전국무위원들의 재산공개내용을 실사하고 취득경위에 문제점이 있는지 등을 철저히 파악할 것』이라고 언급. 황인성국무총리와 이회창감사원장은 이날상오 깨끗한 공직사상을 구현한다는 방침 아래 김대통령에 이어 본인및 가족의 재산내역,취득과정등을 소상하게 자진공개. 또 총리실간부들은 최근 「골프안치기」를 결의했으며 이같은 결정사항이 다른 부처까지 파급되는등 일부 각료들의 부적격시비에도 불구,새로운 공직자상을 확립키 위한 도덕재무장운동이 확산될 기미. ○…일부 신임각료들의 부동산투기의혹,그린벨트내 불법훼손등 도덕적 결함이 속속 밝혀지자 국무총리실을 비롯한 각행정 부처는 새정부의 개혁의지가 큰 상처를 받게됐다며 당혹해하는 분위기. 총리실 직원들은 『새정부가 「윗물맑기」를 내세웠는데 윗물이 맑지않은 것으로 판명됐다』며 이와같은 분위기 속에서 각부처 공무원들이 윗사람을 모시고 국민의 신뢰를 받는 책임행정을 구현하는 일이 가능하겠느냐』고 회의감을 표시. 또 『새정부출범에 따라 공무원사회는 변화와 개혁을 통한 신한국 창조에 대비해 긴장감이 팽배했으나 일부 각료들의 부도덕한 행위및 축재과정,탈법행위등이 속속 터져나오면서 긴장감이 풀려버린 것같다』고 일부 흔들리고 있는 공직사회를 우려. 황인성국무총리도 이와관련,신임각료들의 도덕적 결함에 대해 몹시 근심하며 어두운 표정이 역력했다는 후문. 공직자의 인사문제를 다루는 총무처관계자들은 『각료인선때 신원에 관련된 철저한 조사가 뒷받침되지않아 발생한 일』이라며 『아직까지 현직공무원으로 승진하거나 전보발령받는 경우에는 아무 문제가 없으나 외부에서 영입됐거나 전직공무원들의 경우에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은 그동안 현직공무원에 대한 꾸준한 정화작업을 반영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해 특히 외부영입인사에 대한 신원조회가 미흡했음을 지적. 한편 정부 민원실에는 부도덕한 행위와 관련된 박모장관등에 대해 『사퇴해야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내용의 민원전화가 꾸준히 걸려오고 있다고 관계자가 전언. ▷정가◁ ○…민자당은 최근 잇따르고 있는 장관들의 부도덕성 시비와 관련,집권여당으로서 무척 당혹해하면서도 김종필대표를 비롯한 고위당직자는 물론 소속의원들도 이에 대한 공식적인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당총재인 김영삼대통령이 내각의 인사권자인데다 정확한 진상도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현실인식 때문이다. 김대표는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우리도 괴롭다』면서 『하지만 김대통령의 명확한 의중도 모르고 또 어느정도까지 사실인지도 모르니 더 이상 얘기하기가 곤란하다』고 구체적 언급을 회피,이같은 분위기를 대변했다. 그러나 확대양상을 띠고 있는 이번 인사파문이 앞으로 「개혁정국」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저마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러면서도 의원들은 이번 일을 계기로 자신들의 주변과 행동거지를 되돌아보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내각의 도덕성시비가 끝나면 민자당의원들의 재산공개 쪽으로 여론의 화살이 옮겨올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지내온 국회의원 생활이 「공인」으로서 어떠한 흠집이나 결격사유가 없었는지 챙기는 경우가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우선 국민들의 곱지않은 시선을 받고 있는 골프장 출입을 가급적 삼가고 호텔이나 호화음식점등을 드나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깨끗한 정치풍토조성을 위해 이권과 관련된 「검은 돈」을 일체 받지 않겠다는 자정의 물결도 일고 있다. 지역구의원들은 경비절감차원에서 화환 안보내기운동을 비롯,경조금및 공식행사참석 줄이기운동을 펼쳐나가고 있으며 일부 의원은 지구당사무실에 이같은 입장을 이미 알렸다. 한 의원은 『공인이 이렇게 무서운 것인줄 몰랐다』고 실토하면서 『이번 인사파문을 계기로 국회의원들도 자신을 되돌아보는 뼈아픈 자성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주당은 음성자금과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외부로부터 어떤 정치자금도 받지않겠다고 한 김영삼대통령의 선언을 일단 환영하는 입장이나 지도부개편등 내부체제가 아직 정비되지 않은 탓에 구체적인 방안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입장. 이기택대표는 6일 『재산공개는 공직자와 모든 의원들이 반드시 해야한다』고 말하고『재선되면 재산을 공개하겠으며 민주당의원들도 공개토록노력할 것』이라고 발표. 깨끗한 정치와 관련,민주당은 인사인준청문회의 제도화,중대선거구제 추진반대,정치자금의 비지정기탁제도의 도입등 상당부분 정부·여당의 견해와 입장을 달리하고 있어 법개정 추진과정에서 논란이 예상.
  • 「심마니의 허튼소리」펴낸 교육부 교원연수과장 장관주씨(화제의인물)

    ◎고교졸업 30여년만에 석사학위/면서기때부터 발자취 진솔하게 엮어/방송고 등선 졸업생들에 선물로 나눠줘 『가슴에 묻어두고 싶었던 이야기가 시련을 겪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용기를 붇돋워 주었다니 고맙기만 합니다』 방송통신고교나 일부 실업계 고교에서 올 졸업생들에게 앞다투어 졸업선물로 나누어 준 자서전적 수상집 「심마니의 허튼소리」를 펴낸 교육부 교직국 장관주 교원연수과장(54)은 『「지천명」의 나이라는 50을 넘기며 살아온 삶의 모습들을 되새김질 해보기 위해 서툰솜씨로 써본 책인데…』며 말끝을 흐렸다. 「심마니의 허튼 소리」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김과장이 갖가지 어려움을 딛고 중앙부처 서기관으로 승진하고 행정학 석사 학위를 따낸 학자로 탈바꿈하기 까지의 과정을 진솔하게 적어논 수상집이다. 그래선지 가정형편이 어려워 제때 정규 고교과정을 밟지못했다가 뒤늦게 통신교육을 통해 고교과정을 이수하고 올해 졸업생을 배출한 일부 방송통신고교와 실업계 고교에서 졸업 선물로 각광을 받았다. 『할아버지로부터 농사일을 배우며 땅의 가르침을 배웠다』는 김과장은 「출세한 촌놈」이면서도 녹조 근정훈장을 비롯,국무총리·장관상을 두루두루 수상할만큼 자타가 공인하는 모범공무원이기도 하다. 『땅이 정직과 성실이라는 삶의 마음가짐을 가르쳐 주었다면 무한히 뻗어있는 길은 소망을 갖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의 원천이었습니다』 성실과 정직으로 일관돼온 김과장의 삶의 자세는 면서기로 시작한 공직생활에서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여 충남 교육청(당시 도 교육위원회)을 거쳐 교육부(당시 문교부)에 간부직원으로 김과장을 변신시켜 갔다. 『30리 길을 걸으며 다짐했던 향학열만을 나이가 들어도 잠재워지지 않았습니다.야간대학에라도 진학해볼까 생각했는데 혹시라도 직장생활이 소홀해질까봐 생각끝에 방송통신대학을 택했습니다』 고교를 졸업한이후 32년만인 83년 방송통신대학에 입학한 김과장은 입학한지 7년만에 꿈에도 그리던 학사모를 썼고 대학원에 진학해 92년엔 행정학 석사학위까지 받았다. 대학시절은 물론 대학원 공부에서도 김과장의 「정직과성실」이라는 생활철학에는 한치 어긋남이 없어 그의 석사학위 논문은 건국대학교 그해 대학원 졸업논문가운데 최우수논문으로 선정되기도 했었다. 『요즘세상에도 2남1녀의 가족들은 물론 며느리까지 꿰맨 양말을 신고 다닐만큼 아버지를 이해해주는 가족들이 고맙다』는 김과장은 『시련에 처한 청소년들에게 「그래도 세상은 살만 곳이다」라는 얘기를 들려 주고 싶다』며 말을 맺었다.
  • 국악인 양승희씨(이세기의 인물탐구:18)

    ◎죽파의 가야금산조 득음 “외길 인생”/혹독한 수련 견디며 「명인」 향한 일념 불태워/뉴욕 독주회땐 “동양의 신의 경지” 격찬받아/세계 명대학에 한국학과설치 위한 모금연주 등 활동 활발 가볍게 튕기고 힘차게 엮는 줄은 가락마다 깊은 시름,희비가 엇갈려 가슴속에 묻어둔 사연을 한없이 풀어낸다.길어도 길어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 옥수 어느 때는 성긴 빗방울에 오동잎 스치듯,일렁이는 파도에 하늘이 소스라치듯 성난 폭우에 수면이 갈라지고 뇌성이 번뜩인다.활짝 핀 꽃송이가 삽시에 저버리는 아픔을 안으로 삭이는 절제미,청정과 청쾌가 선명한 양승희의 가야금 산조를 듣고있노라면 문득 연전에 돌아간 죽파의 운율이 되살아난다. 명인의 길에 오르기엔 젊고 눈부신 나이,화사하고 여린 용모,그러나 무대에서의 능란하고 당당한 연주솜씨는 당대 명인을 계승한 후계자다운 풍모다. 경건함 중에도 정한의 기개가 감돌고 줄을 타는 손끝에서 처절과 애련이 여울져 스승을 잃고 홀로서기까지의 고통과 시련이 얼마나 큰것인가를 절감케 한다. 양승희는 스승인 죽파 가야금산조 하나에 그의 전인생을 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산조 일인자를 꿈꾸며 오로지 이 한길을 위해 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많은 고초를 스스로 감내해왔다.자신이 걸어온 가시밭길을 새삼 돌이켜볼 여유는 없다.다만 그것이 지금보다 더 험난하고 가파르다해도 미동도 지체도 할 수 없는 위치다.두 아들의 어머니로서 아내와 며느리로서의 길 이전에 「죽파 가야금 산조의 가문」을 이어갈 공인이며 예인의 사명감이 있을 뿐이다. 죽파 김란초는 가야금 산조 창시자의 한사람인 김창조(1865∼1920)의 친손녀로 그는 조부의 산조에다 단몰이(세산조시)를 창작해넣어 독자적인 죽파류 가야금 산조를 성립,국내외에 1백여명이 넘는 제자를 두고있었으나 양승희를 후계자로 삼아 바로 이 산조를 계승시키고 있었다. 양승희는 스승으로서의 죽파의 삶을 전적으로 맡아 극진히 모셨을 뿐만 아니라 죽파의 모든것,예술혼과 예술성,인간의 도리와 예의범절에 이르기까지 스승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분신과도 같은 인연이다. ○곡해석·연주력 출중또 「뛰어난 곡해석과 연주력,끈질긴 노력과 집념,죽파가야금산조를 잇는데 최선을 다하는 지속적인 마음가짐은 누구에게도 비견될 수 없는 비범등이 후계자로 지목된 이유의 하나라는 것이 국립국악원 이승렬원장의 지적이다. 스승댁에 머물면서도 새벽에 눈뜨자 연습,장고에 맞춰 다시 한번,그리고 스승과 맞춰보고 학교에 다녀와서 한바탕 연습,단 한번도 스승을 거스르거나 거역하지 않았다. 「교수」보다는 「연주가」이기를 원하는 스승의 뜻을 받들어 국악의 세계무대 진출이라는 목표를 세워놓고 황병기 나인용 백병동등 국내작곡가들의 창작곡을 받아 초연으로 기량을 확대시켜 나가기도 했다.국악인으로서는 드물게 시립국악관현악단·시향·KBS교향악단과의 대연주회 협연,1년에 수십차례의 해외연주 활동등은 죽파로 하여금 어느 자리에서나 제자를 마음껏 자랑삼을 수 있게 해주었다.특히 85년 뉴욕 카네기 리사이틀 홀에서 가진 독주회 평과 사진이 실린 워싱턴 포스트지를 보고는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그때 미국의 저명 음악평론가인 마리온 자콥슨은 양승희의 가야금연주를 「볼쇼이 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의 솔로를 보는 듯한 황홀감」에 비유,「55분동안의 연주는 꼼짝없이 청중을 사로잡아 마치 동양의 선의 경지를 경험케 했다」고 쓰고 있다. 89년 79세의 나이로 스승이 몸져 눕게되자 양승희는 고려병원에 모시고는 꼬박 3개월을 그의 곁을 지키면서 스승의 어깨를 주물러 드리려면 「몸이부어 손가락자국이 깊이 남는다」고 안타까워 했고 이를 지켜본 국악계의 김소희씨며 박귀희씨는 『형님은 훌륭한 제자를 두셔서 돌아가셔도 여한이 없겠다』고 부러워 했었다. 같은해 9월17일 임종하기 직전에 죽파는 양승희부부를 불러 유산정리와 함께 자신의 장례를 부탁했다.스승의 유언이 아니더라도 양승희는 당연히 상주가 되어 장례기간의 상례지휘는 물론 삼우제와 사십구제,소상제와 대상제,91년에는 고인을 위한 추모음악회를 여는등 스승과 가까웠던 국악계의 원로들을 참여시킨 무대를 마련하여 「난죽같은 사제의 정」을 변함없이 확인시켜 주었다. 양승희는 본래는 서울에서 태어났다.그러나 국민학교 3학년때 정치를 하는 부친을 따라 집안이 모두 강원도 원주로 이사.피아노와 무용을 배우다가 한 미국선교사의 권유로 원주여고 2학년 되던해 가야금을 시작했다. 서울을 오가며 서울대 김정자교수에게 가야금을 사사,처음부터 가야금의 가락이 마음속에 파고들어 타고난듯 악기에 밀착되는 감이었다. 대학교 2학년인 70년 4월 역시 김정자교수의 소개로 사직동에 있는 죽파문하에 입문,그때부터 만19년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스승의 엄격한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고2때 가야금 시작 유난히 청각이 예민한 스승은 한올의 음정차이도 족집게로 집어내듯 가혹하게 교육시켰다.하루 6시간에서 7시간,어느때는 10시간을 해내야만 비로소 만족하는 듯 했다.마음에 들지않으면 노안에 광채를 번뜩이며 가차없이 바로잡아 주었다. 그러는 사이 오랫동안 교제해온 부군 노만균씨와는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3년후인 76년에야 뒤늦게 결혼해야 했다. 「결혼하면 가야금을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스승은 이를 못마땅히 여겼으나 「결혼후에도 가야금 계속은 물론 예술가의 길을 걷는데 적극 협조하겠다」는 시댁측의 다짐을 받고나서야 안심하는 빛이었다.혈육이 없던 그는 친딸같은 양승희에게 대대로 내려온 집안의 옥가락지를 물려주면서 「부디 가야금 가문의 대를 이어줄 것」을 두번 세번 당부해마지 않았다. 그러나 7년간의 혹독한 피나는 훈련과 수련에도 득음하지 못한 제자를 몹시 나무라는 눈빛에 양승희는 결혼 1년만에,낳은지 백일도 안된 아들을 시어머니(송재임여사)에게 맡기고 다시 스승의 문하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여자로서의 행복을 추구했다면 그는 그때 가야금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어린 자식을 떼어놔야 하는 마음은 문자 그대로 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아픔이었다. 부군은 고대와 프랑스유학후 국립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근무,시댁은 훌륭한 가문과 가풍으로 양승희는 얼마든지 풍족한 환경에서 아마도 안락을 누릴 수도 있었다.그러나 남편과 시어머니가 죽파와의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오히려 「예인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박사과정까지 서둘러주었다. ○지난의 수련과정 겪어가야금은 악기를 다루거나 기교를 가르치는 교육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말과 마음으로 전하는 구전심수만이 참다운 예도였다.그해 6개월 다음해 다시 6개월,80년에는 9개월간이나 스승곁에서 성음을 얻기위한 피나는 훈련을 쌓아야 했다. 「학이 살포시 나무가지에 내려앉듯 햇빛 찬란한 해변에 잔물결 반짝이듯 용이 승천하는 힘찬 기운과 동시에 사방이 잠잠하여 침묵하듯 연주하라」는 것이 스승의 연주 지침이었다.차차 국악계의 원로들로부터 「죽파 전성기때의 소리가 난다」는 칭찬과 「매운 손끝에 만만찮은 도전적인 개척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그럴수록 그는 혼신의 힘으로 가야금에 매달렸다.이는 판소리에서의 폭포수같은 성음을 위한 폭포독공백일수련에 못지않은 지란의 과정이었다. 죽파의 총애와 편애로 동료들의 질시와 따돌림이 따랐으나 스승은 그때마다 「높이 나는 새는 눈에 띄는 법,어중간히 날면 백발백중 돌에 맞기 쉽지만 힘찬 비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게 된다」고 감싸주었다.그리고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물려주기 위해 그의 나이가 다했음을 애석하게 여겼다.커다란 회오리가 지나간듯 어쨌든 지난 세월속의 시련은 그에게 인간적인 성숙을 주었다. 그는 세계 각 유명대학에 한국학과 설치를 위한 기금모금 연주등 91년에 10여차례,지난해 20여차례,올해도 연초와 2월까지 유럽지역 순회와 터키연주등 연말까지 해외연주일정이 빡빡하게 짜여있다.물론 그에게 남겨진 가장 큰 과제는 죽파기념관을 세우는 일,전수생들을 위한 연주무대 마련,이에 앞서 스승의 이야기를 창극으로만들기 위해 극본과 음악을 작가와 작곡가에게 의뢰해놓고 있다.그리고 이 모든 진행은 시댁과 남편의 따뜻한 보살핌이 뒷받침이 되어주고 있다. 진양조에서 중몰이 중중몰이에서 자진몰이 휘몰이 단몰이 장단배열을 갖는 죽파산조를 한바탕 타고나면 인생살이 희로애락이 한낱 물거품이라던 스승의 말이 불현듯 새삼스럽다.원형리정,이제 사계의 순리처럼 자연스러운 산조가락의 하나하나가 그의 몸속에서 피가 되고 살이 되고 그 자신이 바로 가야금이 되어 그날이 언제일지는 모르나 마음으로 음조를 울리고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산조미의 극치에 이르고 싶은 것이 오직 절실한 그의 기원이다. □연보 ▲1948년 6월 서울출생,양주창씨(92년작고)와 박정옥여사의 2남4녀중 장녀 ▲58년 집안이 원주로 이사 ▲73년 서울대 음대 국락과졸업 ▲75년 서울대 대학원 졸업 ▲86년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예술철학박사학위) ▲75년∼93년2월 서울대 국악과강사 ▲76∼80년 동덕여대·목원대·성심여사대강사,이대·중앙대출강,한국가야금연주단단장,중요무형문화재23호 김죽파류 가야금산조이수자,준인간문화재 죽파 김란초를 비롯,이창규 황병기 이재숙 김정자 사사 ▲71년 서울대 음대 정기연주회 「죽파류 가야금 산조」독주 데뷔 ▲75년 서울국립국악원주최 신인음악회협연(이성천지휘) ▲77년 가야금 독주회(국립극장소극장) ▲79년 가야금 독주회(세종문화회관)·제1회 유네스코주최 2인음악회(가야금 양승희,거문고 김선한) ▲80년 가야금 독주회(공간사랑)죽파류 55분 가야금 산조 ▲82년 KBS교향악단 정기연주회(지휘 발터 길레센) ▲83년 무형문화재 예술단 창단 1주년기념 특별연주 ▲85년 대한민국음악제 KBS교향악단 협연(지휘 홍연택) ▲85년 미뉴욕 카네기 리사이틀홀 독주,자유중국·일본 독주회 ▲86년 자유중국 NewAspect 초청 국제예술제 국제 고쟁 명가대회참가 ▲88년 가야금 독주회(국립국악원 국악당) ▲89년 서울시향 범세대연주회(세종문화회관) ▲89년 KBS국악대상 축하공연외 해외연주8회 ▲90년 백두산 제천대회,가야금독주회(예음홀)해외연주 7회 ▲91년 KBS 국악관현악단 정기연주 해외연주 10여회 ▲91년 고 죽파 김난초선생 추모음악회주관(국립영화제작소 영화제작)등 해외연주 20여회 ▲92년 미 조지워싱턴대 초청연주 ▲92년 대한민국음악제 연변 김진교수와 남북한 가야금 비교연주등 해외연주 20여회 ▲93년 우즈베크스탄 공화국대 한국학과 설립기금모금외 유럽지역 연주 황병기 작곡 「비단길」「영목」 「밤의소리」「남도소리」 관현악곡 「7현을 위한 새봄」편곡 「Amaging Grace」나인용작곡「가야금 협주곡 도약」「용」「영상」이강덕작곡 「가야금 협주곡Ⅴ」정윤주작곡 「황병기주제에 의한 가야금 콘체르토」백병동작곡 「환명」 제1회 KBS 국락대상,중요무형문화재 예술상 공로상,KBS FM 명인 CD 출반
  • 거산의 항모(외언내언)

    오늘 우리는 우리 겨레가 탄 배의 선장을 바꾼다.배의 이름은 「신한국」호.안팎의 축복속에 기적을 울린다.보­.앞으로 5년동안 우리는 이 새로 키를 잡은 선장이 그려가는 항로 따라 대양을 헤쳐간다. 그 대양의 항해에 어찌 순탄함만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때로는 휘몰아치는 폭풍우속의 격랑을 견뎌내야 하고 어느 순간에는 암초의 위협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그뿐이 아니다.「한국병」의 선내가 무사하고 조용할리 없다.그 예상되는 안팎의 시련과 도전을 안고 「신한국」호는 닻을 올린다.「커다란 산」(거산)으로서 믿음직하고 늠름한 선장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본다. 모든 사람의 앞에 서서 이끌고 설득하며 인도해 나가는 지도자의 길은 험난하다.역사상의 지도자들은 그래서 곧잘 『고독하다』는 말로써 그 고충을 표현하기도 한다.사실은 업적이 빛나는 경우일수록 인고의 농도는 더 짙었다고 할 수도 있다.오죽했으면 『4년의 임기는 평생에 가장 비참했던 시절』(JQ애덤스 미국 6대 대통령),『짐은 이나라 제일의 노복』(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대왕)같은 말들이 나왔겠는가』. 「신한국」호는 파고나 암초보다도 「한국병」다스리기에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새 선장이 진작부터 펼쳐온 「윗물 맑히기」의지를 믿으면서 기대를 건다.『백성을 잘 거느리는 자는 백성이 부끄러움을 알도록 한다』는 말이 「관자」(관자:권수편)에 쓰여 있다.백성들에게 수치가 무엇인가를 알게 하는 길을 우리의 새선장은 「윗물 맑히기」에서 찾은 것이다.윗물이 맑아지면 아랫물도 맑아진다.맑아진 기강 속에서 수치스러운 짓이 무엇인가는 극명하게 드러난다.그것을 온 국민이 알고 멀리하게 될때 파고나 암초쯤 두려울게 없다고 할 것이다. 그동안 애를 많이 쓰고 물러나는 옛선장에게도 뜨거운 박수를 보내자.참,그러고 보니 미국의 5명에는 못미치나 우리도 생존하는 전직대통령은 세분이나 된다.
  • 높은 성취의식(한국정신의 원류를 찾는다:7)

    ◎민족 정체성 확립을 위한 캠페인/“시련극복 미래개척” 줄기찬 의지/“보다 나아져야”… 경제발전 이룩해낸 원동력/수단의 타락화 경향… 윤리성 확보 시급 한국인의 중요정신적 의식을 나타내는 것중의 하나로서 높은 성취의식을 들수 있다.지난날 극심한 전화의 잿더미로부터 오늘의 눈부신 경제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중의 하나는 한국인이 갖는 유달리 높은 성취의식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현재를 기준으로 한국인들이 갖는 정신적 자세의 특징중 하나로서 성취의식이 높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마도 어떤 이의를 제시할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생각된다. 성취의식이라고 하면 여러가지 그 특징적 속성을 밝힐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남보다 나아지기 위해서,다시말해서 남보다 우수해지기 위해서라면 비록 힘에 겨운 일 또는 목표라도 마다않고 그 도달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마음가짐을 가리킨다고 하겠다.요컨대 보다 나아지기 위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어떤 도전과 위험을 무릅쓰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의욕에찬 성향을 뜻하는 것이다.성취의식은 목표 등을 이루기 위한 경쟁적인 노력을 전제하고 있는 만큼 어느정도의 윤이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도 하다. ○힘겨운 목표에도 도전 목표자체의 합리성도 문제가 되지만 그 도달을 위한 수단적 합리성이 더욱 요구된다.특히 남과의 경쟁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경기 규칙 등의 준수가 요망되는 것이다.한편에서는 목표도달을 전제하는 성취주의적 성향에는 어느 정도의 비윤리성도 불가피하다고 한다.이는 합리적인 윤리성을 강조하다보면 오히려 성취의식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다.이에 일정한 논리적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오늘의 사회는 많은 사람들이 서로가 복잡하게 얽혀서 사는 사회이다.따라서 각기 자기의 목표,자기의 이익만을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력을 한다면 심각한 무질서와 혼란을 가져와 결국 사회전체로서의 발전보다는 오히려 역발전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이런면에서 성취의식은 상대적으로 우수해지기 위한 성향이지만 그 밑바탕에는 어느정도의 윤리성을 전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대체로 현재를 기준으로 할때 한국인의 성취의식은 높다고 할수 있지만 지난 날의 그런 상태는 어떠한가이다.다시말해서 한국인의 성취의식에 대한 과거의 역사적 근거는 어떠한가이다.어떤 사람들은 지난날 한국인들의 성취의식은 높지 않았다고 한다.그들은 과거 조선조의 경우 청빈,겸양 또는 계층적질서 등을 중요시하는 유교의 가르침,정태적인 전통적 농업사회구조라는 것등을 들어 성취의식이 높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그 당시의 수직적인 신분적 비유동성,생존을 위한 낮은 경쟁상태 등을 기준으로 한다면 어느정도의 그러한 타당성을 인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와는 다른 측면도 적지않다.성취의식을 갖게 하였으리라 믿어지는 다른 중요한 근거를 든다면 우선 조선조시대의 가정을 중심으로 소중히 여겨진 몇가진 중요한 가치체계를 지적할 수 있다.그러한 대표적인 것으로는 소년등과로써 가문을 빛내는 것,입신양명하는 것,덕망과 공로를 세워 명성을 떨치는 것,학문이 높아 남의 존경을 받는 것 등(김태길·1977)은 분명히 성취의식을 촉진하는 가치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입신양명의 가치체계 이와 유사하게 사회구조적으로도 제한적이나마 경쟁적인 과거제도,끊임없이 지속되는 권세를 지향한 문벌 및 가문간의 심한 경쟁 등은 직·간접으로 당시 사람들에게 적지않은 성취지향의식 등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한편 잦은 외침,특히 7년이란 임란으로부터의 재건,사회변혁사상으로서의 실학,그와같은 구체적 실현을 모색한 동학혁명,무엇보다도 한글의 창제와 서원 및 서당 등 교육기관과는 별 상관없이 일반서민,그중에도 적지않은 아녀자에 이르기까지 한글의 체득 등은 비단 한글이 배우기 쉬워서만은 아닐 것이다. 특히 성취의식을 하나의 사회발전을 초래케하는 문화심리적 요인으로 볼때 유교의 영향이 성취의식을 낮게 하였다면 오늘날 전통적인 유교문화권이라고 할 수 있는 동양의 4개 신흥공업국 한국·대만·홍콩·싱가포르 등의 경제발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금세기에 들어오면서 한국인의 성취의식은 더욱 높아지기 시작하였다.점차 낡은 사회구조가 개편되고 대중적 교육이 보급되며 개방경쟁적인 각종 고시제 등 인재등용문이 확대됨으로써 성취의식은 더욱 고취되어 갔다.특히 한국의 독립,극심한 6·25전란,인구의 대이동과 폭발,치열한 생존경쟁,높은 교육열 등은 성취의식을 한층 더 높게 만들어 보다 잘살기 위해서는 무엇인든지 할 수 있다는 이른바 can­do­spirit 등을 갖게 함으로써 이러한 자세는 곧 60년대를 거쳐 70년대의 획기적인 고도경제발전을 가져오게 만들었던 것이다.지금에 와서는 각종 서베이(KIPO시리즈 등)에서 보이고 있는 바와 같이 세계적으로 어느 나라에도 못지않은 높은 성취의식을 가지고 있는 상태이다. 기실 성취의식이라는 개념자체는 비교적 새로운 개념이다.이것은 일부 해당 전문분야를 제외한다면 주로 사회및 경제발전과 관련돼 그런 발전을 가져오는 주된 심리적 성향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파악되어 왔다.따라서 우리나라에서도 60·70년대의 경제발전과 더불어 그 원인중의 하나로 탐색되어 왔던 것이다.이런 면에서 한국인의 특징적 성향을 나타내는 요인의 하나로서 부상 규정되기 시작한 것임으로 그 역사성도 다른 요인,가령 공동체성·평등성 등에 비하여 일천하다.따라서 다른 요인에 비하여 그에 대한 역사적 근거의 추적 등 체계적 연구결과도 적고 또한 정신적 특징을 나타내는 개념으로서의 그 보편화 수준도 낮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를 기준으로 할때 역시 각종 연구결과,특히 기업문화·행정문화 등의 조사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한국인의 한 특징적 성향으로서의 그 강도는 다른 요인에 못지않고 오히려 상대적으로 우위를 나타내고 있는 형편이다. 근래에 와서 성취의식에 있어서도 이장이 생기고 있다.그러한 현상은 두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하나는 성취의식 자체의 타락화 경향이다.이것은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정당화하는 경향으로서 이른바 성취의식의 마키아벨리 주의화이다.자칫 전제된 일이나 목적을 이루고 또는 그런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정당치 못한 수단 및 방법의 동원도 불사하는 바 비윤리적 방안을 구사하는 것이다. ○20년뒤의 발전성 좌우 다른 하나는 최근90년대 들어서면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 이른바 3D현상이다.이와같은 현상은 인간에 있어 최소한의 생존조건인 의식주에 대한 어려움을 체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는것 같다.젊은 세대들의 이와같은 경향은 그들의 중요정신자세로서 곧 성취의식이 높지 않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그렇다면 성취의식의 타락화경향,높지않은 성취의식상태 등을 다시 바로 세우고 또 고취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오늘의 국민의식에 관련된 중요한 과제라고 하겠다. 지금 새로운 경제적 재도약을 위해 기존의 성취의식을 다시 가다듬고 더욱 고취시키는 것은 매우 긴요하다.성취의식은 통상 그 기능면에서의 구체적 결과 가령 경제발전 등을 가져오는데는 일정한 시간적 격차(timelag)를 갖는다.다시 말해서 한시대의 경제발전 등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이미 시간적으로 약20년은 앞서 그 사회사람들의 성취의식이 높게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그래야만 그로부터 20여년후에 발전이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말이다. 이와같은 것은 곧 의식의기능적 결과는 장시간을 요하는 것이고,한편 그 형성 역시 쉽지 않아 또한 장시간을 요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사실 일정한 의식의 정상적인 형성을 위해서는 약 일세대까지 걸릴 수 있는 것이다.그러나 적극적인 의식개혁을 전개해 어떤 이상적인 모형을 전제로 제도화하는 과정을 밟는다면 더욱 효과적으로 이루어져 시간을 단축할 수도 있다.이런 면에서 성취의식 등을 바로잡고 더욱 고취하기 위해서는 두가지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새로 자라나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가정을 중심으로 하되 학교 등을 통한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을 수행하는 사회화과정을 통해 성취의식을 기르는 것이고,다른 하나는 전국민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의식개혁운동을 제도화해서 자발적인 면에서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것 등이다.실제로 쉽지않은 의식의 개혁인 만큼 특히 장기적인 안목에서 인내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하겠다. □약력 이지훈 충북대교수·정치학 ▲1935년 충북 괴산 출생 ▲청주대 정치과 졸업 ▲하와이대 대학원 수료 ▲고려대 대학원 정치학박사 ▲한국정치학회 부회장 ▲현재 충북대교수 ▲저서 「조사분석방법론」「한국정치문화와 정치참여」등 다수
  • 영 전통춤 모리스댄스 복원

    ◎15세기 풍요기원 의식… 소멸 백년만에 재현 유럽의 섬나라 영국에서는 요즘 약 1세기 전에 거의 자취를 감춘뒤 관광포스터에서나 찾아볼수 있었던 모리스 댄스라는 전통춤의 복원운동이 활발히 일고있다. 꽃과 리본으로 장식된 화려한 중절모,깨끗한 와이셔츠에 십자반도를 두르고 다리에는 스타킹 위에 방울을 주렁주렁 매단 일단의 신사들이 야외풍경을 배경으로 펼치는 경쾌한 율동.아코디언,바이올린,콘서티나(아코디언과 비슷한 악기의 일종)가 어우러져 내는 포크음악에 맞춰 서로 빠르게 교차하면서 발뒤꿈치를 두드리기도 하고 나무막대기를 맞닥뜨리기도 하며 이따금씩 손수건을 꺼내 머리위로 흔들기도 한다.마치 어떤 의식을 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리스 댄스 춤꾼들의 모습이 클레이게이트,헤딩튼,애더베리,셔본 등의 작은 마을들에서 자주 목격되고 있다. 모리스 댄스는 그 기록이 1458년까지 거슬러올라가는 깊은 뿌리를 갖고있지만 시대상황이 변하고 춤의 유래에 관한 해석이 달라짐에 따라 혹독한 수난을 당하다가 끝내 종적을 감췄던 이 나라비운의 전통춤이다. 이 춤의 유래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었지만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초기에는 영국에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 풍요를 기원하던 전통의식에서 파생된 고유의 춤으로 이해됐다.그 결과 이 춤의 장려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헨리7세 등 국왕들이었다.이들은 댄서들에게 재정보조를 해주고 왕궁에서 공연을 갖도록 배려했으며 상류층들의 후원을 적극 독려했다.이에 힘입어 모리스 댄스는 쉽게 대중화되어갔다. 그러나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댄서들은 시련을 맞기 시작했다.성직자들은 왕궁을 누비는 호화스런 차림의 이 춤에 대해 탐탁지 않게 여겼다.그리고 이에 맞물려 춤의 유래에 관한 해석도 명칭(Morris)에서 나타나듯 아프리카 북서부의 무어인들(Moorish)의 전통에서 파생된 외래춤이라는 쪽으로 바뀌었다.당시 댄서들은 얼굴을 검게 분장했는데 이는 모리스 댄스가 무어인의 춤이라는 해석의 유력한 근거가 되었다. 17세기 청교도혁명을 계기로 모리스 댄스는 마침내 불법화되고 댄서들은 음주,신성모독,춤의 난잡성 등을 이유로 재판까지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그 이후로는 음성적으로 명맥만 유지되다 그나마 세기말에 들면서 거의 사라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같은 모리스 댄스가 부활의 기회를 갖게된 것은 작고한 음악사가인 세실 샤프의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그는 1899년 이 춤을 목격하고는 복원을 결심,어린시절 이 춤을 추었거나 본적이 있는 80∼90대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증언과 자료를 수집했으며 이를 토대로 나중 포크댄스협회를 창설했다.요즘 이곳저곳에서 재현되고 있는 모리스 댄스는 이 협회의 고증과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들이다. 모리스 댄스는 아직은 다양한 직업과 연령층으로 구성된 소규모 마을사람들이 아마추어수준에서 재현해내는 동호인활동차원에 머물고 있다.그러나 일반적으로 남성춤으로 인식돼온 이 춤이 여성들에게도 급속히 확산되고있고 최근에는 국내뿐 아니라 홍콩,캐나다에서도 모리스 댄스 클럽이 결성되는 등 사라질뻔한 한때의 위기를 딛고 귀중한 전통 문화유산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 대학을 나서는 이들에게(사설)

    대학들의 졸업식이 한창이다.국민학교부터 시작해서 십육년이상 지녔던 「학생신분」을 벗고 하나의 사회인으로 출발하게 되는 젊은이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다.그들 새로 태어난 학사 젊은이들을 환영하며 사회와 나라를 위해 기여해 줄것을 기대한다. 세상에 태어나 의무교육의 혜택을 받고 중고등학교과정을 거쳐 대학에 합격하여 법정교육과정을 무사히 이수하고 정식 학사로 탄생되는 일은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다.우선 그것을 견딜만한 건강한 신체를 타고나서 알맞는 성장을 하고 또한 각시기에 따른 지능발달기를 무사히 치러야 하며 갖가지 평가와 시험을 거쳐 소정의 자격을 인정받아야만 다음 단계의 학업으로 진급이 된다. 중고등학교를 거치는 동안에도 그 고비고비에마다 갖가지 탈락의 위험이 가로놓여 있고 갖가지 좌절의 기회도 적지 않게 만나게 된다.비행에 물들어 중도포기해야 하는 10대의 시련을 이기고 그 어려운 입학시험의 좁은 문을 거쳐야 비로소 대학의 문턱을 넘어 들어서게 된다.대학문이 얼마나 좁고 들어서기 힘든지는 최근에 있었던 대학입시의 엄청난 부정조직의 실태만 보아도 알수 있는 일이다.총학장이 범죄주역이 되고 학부모가 하수인이 되어 필사적으로 죄를 지어온 것이 다름아닌 자녀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였다.그런 어려움을 뚫고 오늘의 졸업을 맞게 된것다.그러므로 거기 합당할 만한 공헌과 기여를 하는 것이 새로 학사가 된 젊은이들의 도리다. 특히 학사한사람을 만들기 위해서는 학부모와 학교와 당사자만의 노고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한사람의 학사를 위해 국가는 많은 투자를 한다.아무리 의욕적인 부모와 재능있는 자녀라도 국가의 지원을 받지못하는 나라에 태어난다면 고학력의 인재로 만들어지지는 못한다.그런 뜻에서도 대학을 졸업하는 젊은이들은 국가와 민족에게 적잖이 책임을 느껴야 할 것으로 안다. 또한 오늘의 시대는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한국인으로 거듭나기를 촉구하고 있다.모든 한국적인 고질병을 다 벗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한국인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요구하고 있다.가난과 지난 시대에 결은 구세대에게는 기대할 수 없는 거듭나는 한국인을 젊은이들에게 기대하고 있다.품질이 높은 한국인으로 사회와 국가를 이끌어 가는,시대가 부여한 사명을 다 해주기를 기대한다.
  • 장애인 이성대씨(봉사하는 삶:5)

    ◎버림받은 기형아 등에 사랑 선물/외로운 아이들찾아 삶의의욕 붇돋고/대전교도소의 무기수도 7년째 돌봐/“장애인이 먼저 도우면 정상인도 본받지 않겠는가…” 91년에 당한 교통사고 이후로 두 다리를 완전히 잃어가고 있는 이성대씨(35·서울 구로구 독산2동)는 이를 비관해 집안에 주저앉아 있지만은 않다.이씨는 척추와 양쪽다리를 다친 2급 장애인으로 남의 동정과 도움을 받아야할 처지이지만 오히려 자기보다 어려운 이웃을 찾아돌보는데 열심이다. 생과자·빵 등의 선물꾸러미를 들고 목발에 의지해 그가 어렵게 찾아가는 곳은 여러가지 이유로 부모와 헤어진 아이들이 모여있는 서울특별시아동상담소나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기형아들이 있는 서울시립아동병원 등이다. 『지금은 비록 부모와 떨어져 있지만 언젠가는 부모를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살게 될게다』 자칫 삶의 의욕을 잃기 쉬운 아이들에게 그가 해주는 희망의 말이다.언젠가 부모를 만나게 되리라는 희망은 고아로 어렵게 자라온 이씨 자신이 간직해온 꿈이기도 하다.이들에게서 자신의 어릴적 모습을 보는 그는 자신은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자신의 투영인 이들이라도 꿈을 성취하길 바라고 있다.어릴때 헤어진 여동생을 찾기 위해 시작한 일이지만 언제부턴가 부모잃은 아이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교감이 싹텄다. 이같이 이씨는 22세때인 지난 80년부터 적어도 한달에 한번쯤 부모잃은 어린이들 방문하기를 계속해왔다.특정한 곳을 정하지 않고 눈에 띄는 고아원이면 퇴근후 조촐한 선물을 싸들고 들르기도 수십차례다. 이씨는 또 대전교도소에 무기수로 복역중인 김문보씨(64)와 지준만씨(33)를 87년부터 돌봐오고 있다.가족이 해외로 모두 이주하거나 가세가 기울어 이씨외엔 이제 아무도 이들을 찾지 않기 때문이다.이밖에 이씨는 궁핍한 친구를 위해 부부가 쓰는 안방을 내주고 있다.그가 월세든 방에서는 이씨부부와 친구 셋이서 잠잔다. 몇곳에 설치한 자판기 임대로 근근이 살아가는 장애인인 이씨가 자신의 고충속에서도 이처럼 남을 돕는 생활방식을 굳히게 된데에는 실로 많은 시련이 필요했다.주한미군이었던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혼혈아로 태어난 이씨는 두살 아래 여동생과 함께 62년경부터 대구 인제기독병원 부설 고아원에서 고아로 자랐다.66년 여동생과도 헤어져 혈혈단신이 된 그는 고아원을 나와 롤러스케이트 판매로 1천만원을 모았으나 82년에 몽땅 사기당하고 빈털털이가 됐다.이씨는 좌절감속에서도 고아들을 도우며 재기하기 시작했으나 85년 고아출신이라는 이유로 억울한 절도혐의를 뒤집어쓰고 30개월을 대전교도소에서 복역하기도 했다. 모범수로 87년 형기를 마친 이씨는 용접공으로 일하다 90년 현재의 부인인 박정심씨(21)를 만나 가정을 이뤘다.그러나 행복도 잠시뿐으로 91년 구정때 교통사고로 그는 척추,부인은 다리를 다쳐 부부가 동시에 장애인이 되고 아이는 유산됐다.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아 이씨는 무리한 용접작업중에 강관에 깔려 오른쪽다리의 신경을 잃고 치료중 의료사고로 왼쪽다리의 기능마저도 서서히 잃어가고 있다. 『정상인에게 당해만 온 얄궂은 인생이라 한때는 사회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그러나 지금은제 스스로 노력하면 길은 얼마든지 있다는걸 깨닫게 됐습니다』 『사업이 번창하면 더 많은 무기수를 돕고 장애인을 위해서도 일하고 싶다』는 그는 『장애인이 먼저 도우면 정상인들도 이를 본받지 않겠는가』라고 말한다.여동생을 애타게 찾던 그는 미국에 입양된 여동생 이미정씨로부터 최근 서신연락을 받고 27년만에 여동생 상봉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 6공화국 5년간의 부문별 발자취(민주­화합의 시대 열다:7·끝)

    ◎통치 스타일/「참용기」로 민주화 시련 극복/강권보다 민의에 의한 해결 택해/권위주의 배척… 「보통사람의 시대」 실현 노태우대통령은 취임초기의 혼란상황을 회고할 때면 「참용기」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참고,용서하고,기다린다는 단어의 머릿글자를 딴 약어다.「참용기」가 갖는 본래의 뜻과 어감도 마음에 들거니와 약어로서의 의미도 본인의 성품과 딱 들어맞는다고 흡족하게 여긴듯 하다. 「인내학 박사」에 얽힌 얘기도 애용했다.『외국 유명대학 총장이 당신은 참기를 잘하니까 인내학 박사(Doctor of Patience)학위를 주겠다고 하더라』는 노대통령의 설명이다. 참는다는 것,이는 노대통령의 고유상표처럼 인식되고 있다.많은 사람들이 「참용기」라는 표현에 고개를 끄덕인다.재임기간 동안 노대통령은 참기 어려운 상황에 수없이 직면했음에도 무던히도 잘 참았다. 노대통령은 취임과 더불어 민주화열기에 따른 대학가 시위와 노사분규에 시달려야 했다.지역·계층간의 집단이기주의도 여기에 편승했다.사회 전반의 질서와 기강이 흔들렸다.불만은 노대통령에게 쏠릴 수 밖에 없었다.보다 강한 공권력 집행을 통해 질서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았다.이때 「물대통령」이라는 소리까지 나왔다.그러나 노대통령은 구체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러면서도 사회는 차차 혼란의 고비를 넘기고 안정의 길로 들어섰다.결국 노대통령은 여론이 돌아서기를 기다렸고 민의에 의해 위기상황이 치유되도록 참았던 것이다. 노대통령 통치 5년은 민주화로 일관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노대통령은 민주화를 역사가 부여한 숙명으로 받아들였고 최고의 가치로 선택했다고 회상하고 있다.오늘날 민주화는 노대통령의 이같은 역사인식과 더불어 「참인내」라는 독특한 통치스타일 때문에 가능했다는 데 대해 많은 전문가들이 견해를 같이 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결단력 부족을 노대통령 리더십의 결점으로 꼽는다.상황이 발생했을 때 즉각 대응하지 못하고 시기를 놓쳐 낭패를 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대통령의 지근 인사들은 그같은 지적이 현상에만 집착한 단견이라고 말하고 있다.민주화 실현이라는 대전제 아래 문제를 해결하려다 보니 시간이 다소 지체됐을뿐 그대신 근본적인 치유가 가능했다고 설명하고 있다.노대통령은 「민주화」와 「능률성」이라는 상반된 가치중에서 「능률성」이 다소 희생되더라도 「민주화」라는 가치를 우월적인 것으로 선택했다고 밝혔다. 노대통령은 명석하면서도 사려가 깊고 온화하면서 신중하다고 주변에서는 말한다.언제나 정시에 일어나고 출·퇴근이 정확하며 과음,과식은 안하는 「모범」으로 알려지고 있다.웬만해서는 화를 내지않고 감정표현을 극히 자제하는 것으로 소문나 있다.어쩌다 미간을 조금 찌푸린 모습을 보고야 화가 났구나 하는 정도를 알수 있을 뿐이라고 청와대 비서관들이 말하고 있다.모수석비서관을 정부요직에 발령하면서도 발표이후까지 한마디도 언급하지않을만큼 자신을 내세우는 일은 자제한다는 것이다. 노대통령의 이같은 성품 모두를 통치권자가 지녀야 할 덕목으로 꼽을 수는 없다.오히려 약점으로 지적될 수도 있다.그러나 6공을 권위주의에서 민주화체제로 넘어간 「과도기」라고 규정한다면 이같은 성품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측면이 많았다고 주변에서는 인식하고 있다.노대통령에 대한 최종적인 역사적 평가에 상관없이 노대통령은 과도기의 국가경영자로서 매우 적절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지난해초 민자당의 차기대통령 후보문제를 둘러싸고 시중에서 이른바 「노심」의 향배를 놓고 많은 이야기가 나오는 상황에서도 노대통령은 「자유경선」이라는 원칙적인 말만을 되풀이 했다.이종찬의원의 경선포기선언으로 모양이 다소 일그러지기는 했지만 노대통령의 침묵은 결국 헌정사상 최초로 집권여당 대통령후보의 자유경선이라는 전통을 세우게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보통사람의 시대」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웠던대로 노대통령도 보통사람의 모습에 충실하려고 애를 썼다.의전이나 경호방식을 대폭 간소화했고 회의방법이나 기자회견의 방식을 개선했다.청와대를 개방하고 「각하」「영부인」등의 용어를 배척했다. 노대통령의 집무실에는 「강유득중」이라고 적힌 액자가 걸려있다.강한 것과 부드러운 것 가운데 중간을 택하라는 뜻이다.이는 노대통령의 좌우명으로 알려져 있다.국가운영에 있어서도 이같은 좌우명은 상당부분 현실로 나타났다.노대통령은 원칙과 현실이라는 명제에 부딪쳤을 때 양쪽을 모두 고려해 결단을 내렸지 한쪽에 치우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6·29선언이나 9·18결단이나 그것이 지닌 원칙적인 의미외에 국민의 바람이라는 현실을 함께 생각했다는 것이다. 노대통령은 지도자가 역사의식을 갖고 모든 일에 임해야 하지만 역사의식이 국민의 생각과 다를 경우 독선이나 권위주의가 된다고 강조한다.노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대해서는 『힘이 못미치지만 성실한 마음으로 열심히 일했으며 잘 참고 기다릴 줄도 알았다고 써주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 “규모 작지만 짭짤”… 중국 사기업 번창(특파원코너)

    ◎1천4백만개 등록… 올 50만개 창업/“농사꾼서 백만장자로”… 입지전 회자/한때 투기꾼으로 매도당하는 시련 겪기도 공산주의국가인 중국에서도 「개인기업」들이 번창,그 수가 급증하고 있다. 중국정부가 사회주의식 시장경제라는 경제정책을 추진하면서 생겨나기 시작한 사기업들은 예상되는 경제자유화폭의 확대와 함께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이들 사기업 소유자중엔 가난한 농사꾼이나 청소부에서 일약 백만장자로 성장한 입지전적 인물도 적지 않다.요즘 중국언론으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는 북경의 무역업자 모우 키숑(52)은 「파리도 고기다」는 격언에 따라 조그맣게 시작한 사업을 지금은 자본금 1억원(1천9백만달러)의 큰 무역회사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아직 자본주의국가의 기준으로 볼때 기업이라 할 만큼 규모가 크지는 않다.현재 중국에는 1천4백70만개의 개인기업이 있으나 이들은 대개 7명이내의 인원으로 구성된 가족단위로 이뤄져 있다.올들어서만도 50만개의 개인기업이 새로 생겨났다.그러나 많은 개인기업들이 세금과 금융혜택을 받기 위해 소규모 집단농장으로 위장하고 있어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중국은 항공·철도·금융 등 국가기간산업과 주요 원자재의 생산 및 판매를 제외하고는 모든 분야에서 개인기업을 허용하고 있다.이 개인기업들은 해외지점을 설치할 수도 있다. 국영기업들이 비효율적이고 방만한 경영으로 약3분의1이 적자운영을 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개인기업들은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이데올로기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속속 개발함과 동시에 알찬 경영으로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숫적 증가와 함께 이들은 사업영역도 활발히 확대시켜가고 있다.현재로서는 개인기업의 4분의3이 소규모 상점·식당·수리점들이지만 건설·광고·첨단기술분야에까지 진출하고 있다. 아직 이들이 중국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국민총생산(GNP)의 10%로 미미하지만 이들은 중국경제 전반에 활력소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의 개인기업은 지난 78년 경제개혁이 시작되면서 등장하기 시작했다.당국의 묵인하에 나타난 소수의 이들 개인기업은 그나마 89년 천안문사태 이후 한동안 「투기꾼」,「사기꾼」등으로 매도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불과 1년전만 해도 정통파 이데올로기세력들은 개인기업을 「신생 부르주아」라고 공격했다.또한 「착취자」라고 매도하면서 이들에 대한 새로운 계급투쟁을 부추기기도 했다.그러나 이러한 공격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는 등소평의 흑묘백묘론에 밀려나 버렸다.중국정부는 앞으로도 민간부문에 대한 통제를 더욱 완화해 나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붉은 자본주의 사기업」들은 아직도 여러가지 불이익과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입장이다.이들은 은행융자를 받거나 원자재를 공급받는데 있어 여전히 애로를 겪고 있다.시장경제를 도입한 다른 공산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는 개인기업을 하려면 뇌물을 바치거나 연줄이 있어야 한다. 또한 개인기업들은 정부가 어느날 갑자기 국영기업으로 귀속시키는 포고령을 발동할 경우 보호받을 길도 막연하다.이것은 개인기업이 보다 활성화할 수 있는 길을 막고 있는 요인이다. 이러한 불안은 개인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에게 조급증을 심어주고 있다.북경의 한 의류상은 『이것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당장 벌 수 있는 만큼 부지런히 벌고 싶다』고 말했다.
  • 재벌의 정치참여 결과는 참담하다(사설)

    국민당이 정주영전대표의 탈당에 이어 소속 의원들의 탈당이 잇따라 붕괴의 위기를 맞고 있다.국민당의 한 의원은 『정 전대표가 나라경제와 정치발전을 위해서는 신한국 창조에 일조하는 게 좋겠다는 뜻을 전했다』고 밝히면서 탈당했다. 정 전대표가 정계에서 은퇴한 것은 본인의 말대로 국가경제 발전을 위해서 참으로 잘한 일이다.우리는 92년 총선을 앞두고 그가 국민당을 창당할 때부터 재벌의 정치참여를 반대한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힌 바 있다.재벌이 정치에 참여하게 되면 정경유착보다 한단계 높은 정경일치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정치가 경제를 지배해서 안되는 것과 같이 경제가 정치를 지배해서도 안된다.그러나 정 전대표는 경제의 정치지배를 시도했던 것이다. 또 재벌이 재벌을 지배하는 현상이 생길 수있다.대선전 김우중 대우그룹회장이 정치에 참여하려 했던 것은 바로 특정 재벌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의도에서 출발했던 것이다.특히 재벌의 정치참여를 계기로 한국의 경제계가 양분되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지 않느냐는 걱정도 강하게 나왔다. 사회적으로는 재벌이 정치에 뛰어들면서 그렇지 않아도 문제가 되고 있는 물질만능 풍조를 확산시켰다.대선과 총선 때 『재벌 돈 안먹고 누구 돈 먹느냐』는 소리가 공공연하게 나돌았다.이같은 금권타락선거에 그치지 않고 돈으로 권력과 명예도 얻을 수 있다는 망국적인 풍조를 정착시킬 위해마저 있었다. 한 재벌이 1년여 동안 정치에 손대면서 빚어낸 경제적 폐해는 그것만이 아니다.정치에 참여한 재벌 전 총수와 관련이 있는 그룹 임직원이 선거운동에 나서는 바람에 생산활동과 수출에 차질이 빚어진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그리고 다른 기업에 불안감과 불확실성을 높여 많은 대기업이 시설투자를 늦추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성공한 일이 없는 재벌의 정치지배가 한국이라고 성공할리가 없다.이번 국민당 사태는 재벌의 정치참여 결과가 얼마나 참담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따라서 경제계는 이제 정경유착이나 정경일치에 한눈을 팔지 말고 오직 본연의 임무인 확대재생산에만 전념해야 할것이다.정 전대표는 『시련은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그의 저서를 재 음미하면서 국가경제에 마지막으로 봉사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를 촉구한다. 이번 국민당 사태는 우리 정치인에게도 커다란 교훈이 될 것으로 보인다.줏대없이 이 정당 저 정당으로 철새처럼 옮겨 다니는 일이 자신은 물론 국가에 얼마나 나쁜 영향을 미치는가를 자성해 보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재벌과 정경유착의 고리를 단절해야 할 정치인이 정경일치에 한 몫을 했다는데 대해 통찰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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