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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듭 나야할 사법부(재산공개 공직사회:5·끝)

    ◎“대법원장 용퇴 개혁 기폭제로”/축재의혹·무소신 법관들도 결단을/독립적인 법 수호자 위상 되찾아야 11일 상오 10시25분.단 9분동안의 퇴임식을 마치고 미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대법원청사를 떠나는 김덕주대법원장의 뒷모습에는 쓸쓸함이 베어 있었다. 3년3개월의 남은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35년의 법관생활을 마감한 김대법원장 자신은 물론 그를 떠나보내는 법관들의 가슴속엔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수장의 도중하차를 지켜보는 아픔과 불신받는 사법부에 대한 회한이 엇갈렸을 것이고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많은 국민들은 사법부를 법과 정의를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라고 믿고 있다.입법·행정부의 월권과 권력남용을 막고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사법부의 역할에 신뢰와 존경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재산공개 결과로 나타난 현실은 국민들을 실망시켰고 어떤 배신감같은 것을 안겨주었다. 전국 곳곳에 땅투기를 한 법관이 있는가하면 주택을 다섯채씩이나 갖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대쪽같은」 법관상을 마음속에 그려오던 국민들은 이번에 사법부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지금까지 곳곳에서 들려오던 「사법부 불신」의 소리가 근거없는 비난이 아니었음을 알고 더욱 가슴 아파했다. 김대법원장의 퇴임은 비단 자신이 투기의혹에 휘말렸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같은 사법부의 총체적인 실상에 대한 책임을 진 것이다. 이제 남은 숙제는 사법부가 뼈저린 자성속에서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어 하루빨리 치부를 씻어내고 국법수호자로서의 새로운 모습을 되찾는 일이다. 단지 재산공개의 후유증을 치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권력의 소용돌이속에서 중심을 잡지못했던 과거의 모습에서 탈피,정의로운 사법부로 환생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비단 이번 재산공개 파동때문에 사법부가 시련을 겪게 된 것이 아니라 사법부에 누적돼온 무사안일과 무소신이 이번 일로 표출되었다는 인식아래 오히려 좋은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충고이다. 따라서 재산공개 파동을 수습하면서 동시에 사법부가 환골탈퇴하려면 우선 재산형성 과정에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나머지 법관들이 스스로 거취를 정해야 한다는 지적이다.더이상 언론과 여론의 질책에 끌려갈 것이 아니라 이제 사법부 스스로가 주도적·자발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한다. 이 길만이 물러난 김대법원장의 뜻을살리는 길이고 사법부가 거듭 태어날 수 있는 유일무이의 방법이다. 대법원이 상급법원이긴 하지만 법률적으로 독립성을 갖고 신분이 보장돼 있는 법관의 진퇴를 결정할 수 없는 맹점이 있다.따라서 법관 개개인이 양심에 비추어 결단을 내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그러나 법원내부에서는 이와 반대되는 견해도 없지 않다. 김대법원장의 사퇴는 피할 수 없었다하더라도 사람이 물러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며 보다 결자해지의 자세로 근본적인 개혁을 시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대법원의 한 중견판사는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내부알력은 재산공개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니라 외압과 권력에 흔들렸던 사실이 문제인 만큼 이제부터는 이 부분에 개혁의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판사도『흐트러진 사법부의 위상을바로잡는 것이 김대법원장 퇴임이후 남은 사람들의 숙제』라면서 『그 일이 10년이상의 오랜 시간이 걸릴지라도 사법부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할 수 있는 여건을 실질적으로 만들어 가는 일』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아무튼 재산공개 파동은 우리 공직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일단면을 드러낸 것이며 이를 계기로 사법부가 앞장서서 권위와 자존심을 회복하는 선두그룹으로 나서주기를 지금 국민들은 바라고 있다.
  • “재산의혹 공직자 자퇴 마땅”/김덕주대법원장 사퇴계기 여론 빗발

    ◎청렴·도덕성 검증이 공개의 참뜻/잘못 스스로 인정,응분의 책임져야 재산공개파동으로 김덕주대법원장이 물러난 것을 계기로 재산형성 과정에서 물의를 빚고있는 다른 법관이나 공직자·정치인들도 용퇴해야한다는 여론이 높게 일고있다. 이같은 여론은 재산공개의 취지가 고위 공직자들에 대한의 고도의 청렴성과 도덕성을 검증하자는데 있으므로 그렇지않은 것으로 나타난 공직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응분의 책임을 져야한다는 거이다. 특히 명의신탁이나 위장전입등 불법적인 방법으로 부동산투기를 하는등 축재를 한 공직자는 차제에 마땅히 물러나야 한다는 지적이다. 공직사회 내부에서조차 최근 재산공개로 비롯되고있는 일련의 파동이 신한국 건설을 위한 개혁의 과정에서 기성세대들의 잘잘못을 가려내는 시험장인 셈이라면서 성공적인 개혁을 위해서는 그만한 시련을 견뎌내야 한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국민들 또한 김대법원장의 사퇴를 지켜보면서 재산공개와 관련해 문제성있는 공직자들이 용단을 내려야할 시점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더나아가 이번 기회에 공직자의 재산검증을 통해 더욱 깨끗한 공직자상을 정립하고자하는 재산공개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는 불법적인 축재자뿐만 아니라 재산의 형성과정을 돌이켜보아 도덕적·양심적인 면에서 공직자의 참모습에 어긋나는 행위를 한 법관이나 공직자·정치인도 함께 인책 사퇴해야 한다는 의견도 강력히 대두되고 있다. 그것이 사법부의 수장으로서 재산공개파동의 책임을 지고 깨끗이 물러난 김대법원장의 뜻에도 부합되리라는 견해이다. 한기찬변호사는 『대법원장의 퇴진은 사법부가 다시 태어나 국민의 신뢰위에 서는 계기가 될 것』이라면서 『아울러 부도덕한 법관과 공직자,특히 과거 정치권력에 영합해 스스로 사법권독립을 저버렸던 무소신 판사들의 책임표명도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표정수씨(33·회사원·서울 노원구 상계동 주공아파트 604동 701호)는 『대법원장 같이 높은 사람이 물러났으니 나도 사퇴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직위의 높고 낮음을 따지기전에 누구나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아는 책임의식이중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 재산공개로 구설수에 오른 법관 가운데 서울고법 조육부장판사는 9일 재판중이던 법정에서 『양심에 꺼리는 일을 한적이 없다』는 요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여하튼 대법원장의 사퇴로 공직자 재산공개에따를 파문이 일파만파로 이어질 조짐이며 당사자 스스로 어떻게 거취를 표명하느냐가 많은 국민들의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 대이스라엘 무력투쟁 29년/해체 앞둔 PLO 약사

    ◎64년 창설… 아라파트 장악후 활기/88년 독립국 수립 선언후 온건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테러와 게릴라전으로 점철된 29년간의 대이스라엘 투쟁을 마감하고 팔레스타인 독립국의 꿈에 부푼채 과도정부로의 발전적 해체를 추진하고 있다. 지난 64년 창설된 PLO는 야세르 아라파트의장이 69년 집권하면서 본격적인 투쟁에 나섰다.72년 뮌헨올림픽 선수촌에 「검은 9월단」을 투입,이스라엘선수 11명을 살해하고 87년부터는 점령지내에서 인티파다(봉기)를 전개하는 등 줄곧 악명을 드높여왔다. PLO는 74년에는 아랍정상회담에서 팔레스타인의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받고 유엔의 옵서버 자격도 획득했다. 극한투쟁에도 불구하고 가시적인 성과를 이룩하지 못한 가운데 PLO는 지난 88년 팔레스타인 독립국 수립을 선언하면서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인정함으로써 미국과 대화의 길을 텄다.그러나 90년 2월 이스라엘 해안에 팔레스타인 게릴라가 침투한 사건으로 미국과의 대화가 다시 중단됐다.8월에는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를 지지한데 따른 보복으로 사우디 아라비아,쿠웨이트 등 온건 아랍산유국들로부터의 재정지원이 끊기면서 외교·경제적으로 심각한 궁지에 몰렸다.PLO는 그후 연간예산을 2억달러에서 1억2천만달러 수준으로 반감시키고 순교전사 가족등에 대한 생활지원금과 점령지내 병원,대학 등에 대한 보조금을 대폭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불만이 터져나오고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하마스 등 과격파 회교근본주의 무장세력들이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지지기반을 넓혀감에 따라 아라파트는 대화를 통해 목표를 달성하려는 방향으로 선회했다.그럴수록 이스라엘과의 대화 자체를 부인하는 강경파의 반발과 퇴진압력은 거세졌고 제한자치 평화안이 마침내 합의되자 암살위협까지 제기되는 등 팔레스타인인 내부 분열이 심각한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앞으로 팔레스타인 자치가 실시돼도 상당한 혼란이 예상된다.그러나 어느 정도 시련기만 거치면 진정한 중동평화가 정착될 수 있으리란 견해가 지배적이다.과격파들의 목소리가 겉으로는 크지만 온건 아라파트 진영을 지지하는 생활고에 지친,말없는 팔레스타인인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현재 중동 각국을 중심으로 흩어져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인은 약5백만명에 달한다.
  • “구시대 청산” 곳곳에 신선한 충격/김영삼정부 6개월 분야별 업적

    김영삼대통령 문민정부의 지난 6개월은 구시대의 청산과 새로운 가치·질서의 확립이라는 2가지 흐름으로 요약할 수 있다.이는 개혁이라는 한마디로 통칭되고 있으며 개혁은 시대적 대의라는 인식이 자리를 잡았다.권위주의가 타파되는 대신 개방의 기운이 뿌리를 내려가고 있다.문민정부 6개월의 성과를 정치·경제·사회등 분야별로 점검해 본다. ◎정치/윗물 맑기 본격화… 깨끗한 정치 구현 정치권은 우선적인 개혁의 대상이었다.그리고 선도세력이기도 하다.공직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정치권과 공직사회는 이미 여러차례 호된 시련을 겪었다.그러나 현재 진행중인 재산등록·공개,금융실명제의 실시는 끊임없이 자기반성과 혁신을 요구하고 있다.앞으로도 몇차례의 크나큰 파문이 예고되기도 한다. 새정부 출범이후 정치권과 공직사회에 대한 개혁은 「윗물 맑기 운동」에 의해 이루어졌다.이는 개혁의 최우선 당면과제였던 부정부패척결,국가기강 확립과 맥을 같이했다.고위공직자 재산공개에 뒤이은 사정작업에 의해 구체화됐다. 김대통령은 취임 직후 재산을 스스로 공개했고 정치자금을 단 한푼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이는 결과적으로 엄청난 개혁과 변화를 몰고온 사전조치였다. 새로 임명됐던 각료를 포함,무수한 고위 공직자와 정치인들이 옷을 벗었다.직무상의 비리와 관련,수많은 전·현직 공직자들이 처벌을 받았다. 율곡사업과 평화의 댐 건설의혹을 포함,사회 각분야의 누적된 비리에 대한 척결작업이 줄을 이었다. 군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군 수뇌부에 대한 전격적인 인사조치를 통해 하나회라는 핵심인맥과 관련됐던 정치군인들이 철저히 배제됐다.군을 정치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한 장치들이 단계적으로 강구되기 시작했다. 같은 흐름으로 과거사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이루어졌다.12·12가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된 데 이어 4·19와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새로운 평가가 내려졌다.상해 임시정부선열 5위의 유해를 봉환하고 구조선총독부와 관저건물을 철거키로 하는 등 민족정기 회복을 위한 조치도 병행됐다. 그러나 파문도 크다보니 정치권에서는 인치·법치 논쟁까지 벌어지기도 했다.개혁이 통치권자의 의지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정치실종」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도 높았다.정치권으로서는 정경유착의 단절에 따른 정치자금조달이 큰 문제였다. 다행히 이른바 기득권층의 금단현상은 서서히 약화돼 가는 듯한 징후를 나타내고 있다.스스로 개혁에 앞서 가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정치권은 깨끗한 정치구현을 위한 제도마련 작업에 착수한 상태이다. 새정부의 향후 과제라고 할 수 있는 아래로부터의 개혁,법과 제도에 의한 개혁을 위한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돼 가고 있는 것이다. ◎경제/자리잡는 실명제… 신경제 구체화 개혁 6개월은 우리 경제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먼저 경제에 대한 정부와 기업,가계등 경제 주체들의 의식이 크게 바뀌었다.6공 때까지의 흥청망청한 분위기가 사라졌다.아직 「다시 뛰는 분위기」로까지는 이어지지 못했지만 과소비에 대한 반성은 확실하게 자리잡았다. 정부는 단기적인 경기활성화 정책인 신경제 1백일 계획(3월22일∼6월30일)과 과감한 제도개혁을 목표로 한 신경제 5개년 계획(7월1일∼97년말)을 차례로 시행했다.이같이 중·장기 경제정책을 병행한 것은 우리 경제가 구조적인 중병을 앓아왔다는 반성에 기초한다.1회용 대증요법보다는 병의 원인인 환부를 도려내 활력을 되찾기 위한 것이 「신경제」 개혁의 골자인 셈이다. 금융실명제의 전격 단행은 경제개혁을 위한 「혁명」이나 다름 없다.5,6공 정권은 금융실명제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놓고도 두 차례나 시행하지 못했었다. 실명제로 지하에서 얼굴을 드러낼 돈은 30조원 안팎으로 추산된다.지난 해 우리나라 국내 총생산이 2백32조원임을 감안하면 13% 수준이다.이 엄청난 자금이 세척을 통해 산업자금으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경제는 정치와는 달리 「빨리 끓지도·식지도」 않는 속성을 갖는다.우리 경제는 아직 지표상으로 회복된 상태가 아니다.수출증가율이 7월 이래 다소 높아졌지만 상반기 평균 증가율에 미치지 못했다.경상수지는 다시 악화됐고 실업률은 6년만의 최고치인 3.2%에 이르렀다. 개혁에 따른 부작용이 없는 것도 아니다.대기업의 투자심리가 아직 본격적으로 회복되지 않고 있다.개혁의지와 사정태풍이 투자를 가로 막는 결과를 빚기도 했다.또 실명제로 성장·물가·국제수지등 정부가 잡아놓은 올해 거시경제 목표가 당초 기대에 훨씬 못미칠 것으로 우려된다.때문에 신경제 5개년 계획에서 설정한 「총량지표 전망」을 수정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정부는 아직 실명제의 부작용이 예상했던 것보다 심한 것은 아니며 신경제의 궤도를 수정해야 할 단계는 아니라는 입장이다. 개혁은 곪은 곳을 수술하는 작업이다.아프고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다.따라서 경제적 성과를 당장 눈앞의 경제 지표로 연결짓는 것은 성급하다.좀더 차분히 지켜 보면서 구조적·제도적 모순을 바로 잡아 우리의 성장 잠재력을 확충하는데 힘을 모아야 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사회/각계 비리척결로 자정바람 도출 6개월동안 숨가쁘게 몰아친 개혁의 성과와 영향이 가장 두드러지게 표출된 분야가 사회부문이다. 과거 권위주의시대에 관행처럼 묵인되어왔던 우리사회 곳곳에 도사리고 있던 각종 비리가 성역없이 척결됨으로써 개혁의 체감지수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군·검찰·재벌총수등 이전 같으면 접근이 어려웠던 권력 상층부의 비리에 대해서도 예외없는 단호한 법의 적용을 강조,공권력집행의 새로운 면모를 과시했다. 이 때문에 사정 대상자 선별과정에 대한 시비와 지나친 과거 들추기식 개혁이라는 일부의 지적이 있었음에도 불구,새정부의 개혁작업이 국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기틀을 제공했다. 특히 검찰은 발빠른 개혁뒷받침 수사는 갖가지 비리척결에 크게 기여했고 사법부와 변협등 사회 각 부문에 걸쳐 자정과 개혁의 목소리를 이끌어 내는 전기가 됐다고 볼 수 있다. 군인사비리사건을 시작으로 율곡사업 비리사건·정보사 민간인테러사건등으로 이어진 군관련 비리에 대한 수사는 문민시대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동안 역대 군사정권아래서 군은 사실상 성역으로 치부돼 비리가 있어도 손도대지 못한채 묻혀 지나가기가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3개월 가까이 진행됐던 슬롯머신업계의 비리에 대한 수사는 검은돈과 권력층과의 유착고리를 끊겠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볼수있다. 더욱이 이 사건으로 6공의 정계실력자로 군림했던 박철언의원뿐만 아니라 그동안 또 하나의 성역으로 간주돼온 검찰조직의 수뇌부들이 구속·퇴진되는 사태까지 이어져 공직자들의 윤리의식을 되돌아 보는 기회가 됐다는 점도 의미를 부여 할 수 있다. 아울러 일부 대기업 총수들과 변호사들의 비윤리적 불법행위등이 드러나 우리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뼈저린 자기반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서울지법 소장판사들의 사법부 개혁 요구에서 비롯한 사법부의 개혁 몸짓과 변협의 자정 노력·각 사회단체들의 광범위한 개혁 동참 움직임은 이같은 정부의 단호한 개혁작업에 대한 각계·각층의 화답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는 부정부패가 원천적으로 발붙일 수 없도록 하는 제도의 정착과 국민의 의식전환을 위한 개혁작업이 병행돼야 한다는 것이 새정부의 개혁활동을 지켜본 국민들의 한결 같은 기대이다.
  • 대만 국민당「내분 치유」 정치력 시험대/파란우려속 14차 전대개막

    ◎대중 적대청산등 위기타개 모색/중앙위원교체등 개혁수용 할듯 대만 집권 국민당의 제14차 전국대표대회(전당대회)가 16일 개막돼 7일간의 일정에 들어갔다. 지난 88년이후 만5년만에 열리는 이번 대회에는 창당이래 최대규모인 2천4백98명의 대표가 참석했다.그러나 이같은 화려한 외양과는 달리 대회에 임하는 국민당의 심기는 편치가 못하다.지난해 총선에서 야당인 민진당에 의석의 3분의 1을 내주는 사실상의 참패를 한 이래 거듭된 당내 계파간 갈등과 야당의 개혁공세에 가위눌려 온데다 최근 당내 비주류 일부가 따로 당을 만들어 떨어져나가고 이번 대회가 끝나면 탈당사태가 재연될 것이라는 소문에 전례없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런만큼 이번 전당대회의 최대관심사는 국민당이 분당사태를 잠재우고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어떤 카드를 도출해 낼 것인가에 모아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국민당은 이번 대회기간중에 당헌 일부를 개정하고 간부선출방식도 개선하는 등 주류·비주류간의 알력 해소방안들을 마련할 예정인 것으로 전해졌다. 17일 의제에 오를 당헌개정 초안에 따르면 「통일목표를 추구한다」「국토분열을 반대한다」는 내용을 서문에 명시,국민당이 대만의 독립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또 초안 9조,36조,39조에서는 「대적투쟁공작」이라는 용어를 모두 삭제,중국과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겠다는 의지도 담고 있다. 이는 그동안 국민당 주류가 말로는 본토수복을 외치면서도 내심으로는 대만의 독립을 방조하고 있다는 비주류측의 불만을 무마시키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 국민당은 이와함께 권력의 핵심인 중앙위원회 위원 2백10명과 이들중에서 선출되는 중앙상무위원 31명의 절반씩을 이번 대회에서 무기명투표로 선출할 예정이다. 이밖에 이번 대회에서는 18일 당주석을 선출하고 주석의 임기제(4년)도 도입할 예정인데 주석에는 현 이등휘총통이 재선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최근 당내 권력투쟁의 최대현안으로 부각된 부총통제 신설문제에서는 주류와 비주류가 아직까지 접점을 찾지 못해 이를 둘러싸고 전당대회가 파란을 겪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비주류측은 부총통을 1명만 두고 이를 자신들 몫으로 할당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반해 주류측은 학백촌전행정원장(총리)의 실세등장을 우려,2∼3명의 부총통을 고집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전당대회가 44년 장기집권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국민당이 외부 도전에 대한 응전에 앞서 내부의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정치력을 갖고 있는가의 여부를 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 문민시대의 광복 마흔여덟돌(사설)

    광복절 아침이다.마흔여덟돌이다.상해 임시정부요인 다섯분 선열의 유해를 봉환하여 국립묘지에 모신지 닷새만이다.서른두해만에 참다운 문민정부가 세워진지 반년만이다.민족의 자존심과 민족정기의 회복을 위해 옛 총독부건물과 한때 청와대본관으로 불리던 그 총독관저를 헐어버리기로 대통령이 결단하고 국민들이 합의한게 바로 엊그제이다. 다시한번 챙겨보는 이 일련의 새로운 일들로 하여 광복 48돌 아침은 새삼 감개가 짙지않을 수없다. ○미완성의 광복 48년전의 광복은 글자그대로 우리에게 빛을 복원해줬다.질곡과 압박에서 해방되었고 감겼던 눈이 틔는 순간이었다.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미완의 것으로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아직도 그것은 미완의 장으로 남아있다. 우리 민족의 광복은 지상의 환희였다.그러나 그것은 곧바로 국토의 단절과 민족의 분단으로 이어졌고 이윽고는 동족전쟁의 시련과 비극으로 연결됐다.광복의 오늘이 아직도 미완인 것은 그로 인한 것이었다.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민족적 대결과 분단의 상징인 휴전선을 부수고 판문점을 열어 민족을 한 띠로 묶는 과업으로부터 「광복의 완성」을 시작해야한다. 하긴 이 역시 쉬운일이 아니다.서울에서 판문점,평양까지 통일기원 인간띠잇기운동이 제의됐어도 저쪽은 외면이다.그러니 이제 미완의 광복은 북쪽 당국자들의 인간성회복과 그쪽 동포들의 인권회복으로부터 비롯돼야 할 것이다. 다시 서른두해만의 문민정부를 얘기할지음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부끄러운 민족으로 살아왔는가를 새삼 새기지 않을 수없다.온통 권위주의색채의 군사문화가 지배한 지난 30여년은 정권의 정통성과 대표성이 항상 의문의 대상이었고 그에따라 민족의 정체성마저 회의를 느낄 지경이었다.문민정부가 값지고 소중한 것은 그런 끊임없던 의문과 회의가 주권자의 판단과 선택으로 완전히 해소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돌아오신 선렬들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부끄러운 민족으로 살아왔는가는 고국에 돌아오신 다섯분 선열들이 말없이 증언한다.그러나 그 어른들은 못난 후손들을 책망하기보다 오히려 격려하고 위로할 것이다.선열들을 안장하면서 후손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교훈을 새겨야 했는가.비록 때늦은 봉환이었고 아직도 많은 어른들이 이역땅에 누워있지만 국민들은 이번 임정요인의 봉환을 통해 이렇게들 합의했을 것이다. 첫째 임시정부의 연면하고 정당한 법통을 새 문민정부가 실질적으로 승계했다는 사실에 대한 확인이다.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정신과 법통성계승을 확인검증한 첫 가시적조처였다고 할수있다. 둘째로 민족정기와 자긍심을 바로 세우는 획기적 계기였다는 사실이다.일제하 국내외 독립투쟁에서,특히 임정요인들의 활약상은 얼마나 우뚝하고 찬연한 것이었던가.앞으로 완성될 광복사는 나라가 쇠했을때 이를 구하고자 감연히 일어서 싸웠고 죽어서도 죽지않고 민족의 정기로 살아남은 이 어른들에 의해 더욱 빛날 것이다. 다음으로 선열의 봉환은 과거 친일의 잔재를 일소하는 계기도 되었다는 점이다.나라를 빼앗겼음도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그보다 더 부끄러운 일은 광복후 친일파들이 활개를 치며 살게했다는 사실이 아닐수 없다.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은 여전히 가난에 허덕였으나 이들은 일제하에서 쌓은 배경으로 흔들림이 없었다.일제잔재 청산의 대상들인 것이다. ○다시 쓰는 현대사 지금은 국립묘지에 편히 잠드신 선열 박은식선생은 그 명저 「한국통사」의 서문에서 『국혼은 살아있다』고 썼고 그것은 이제 그의 비명의 한 구절이 되어있다.말그대로 국혼은 살아있어 분단속에서도 민족은 살아숨쉬고 임정의 법통을 계승한 문민정부는 살아움직인다. 그러니 이제 우리의 광복현대사는 다시 쓰여져야 한다.『과거의 사실이 진실로 어떠했던가』를 밝히는 작업은 역사학자의 본령만은 아니다.그것은 전 민족의 몫이어야 한다.지나간 근 50년동안 타의에 의한 광복을 자의에 의한 발전의 원동력으로 승화시키지 못한 우리에겐 역사에 대한 강요된 논리나 주장을 감연히 거부할 용기도 부족했다. 변화와 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김영삼대통령이 지적한바 「제2의 광복운동」으로서 우리는 이제 새로운 역사탐색으로서 「있었던 그대로」,「있는 그대로」의 사실과 실상을 찾아내어 역사를 바로잡고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는일에 나서야한다.그리하여 국사를 비롯한 모든 교과서에 광복현대사 굽이굽이마다 왜곡되고 굴절된 민감한 부분을 새로 쓰고 이 사실과 함께 문민시대의 의미와 미래지향의 정신을 넓고 깊게 투영시켜야 한다. 지금으로부터 광복의 의미를 되살리고 완성하는 길은 이 시대의 정신이기도 한 변화와 개혁의 성공을 이루고 궁극적으로는 민족의 통일을 성취하는 일 이외의 다른것이 아니다.남과 북이 통일을 이룰때 애국선열들이 시작한 광복운동은 비로소 대단원을 이루게될 것이다. 모든일의 성취가 결국 사람에 달렸다면 국권상실과 민족분단의 지난 세기를 민족번영과 통일의 새로운 세기로 바꾸는 책임 역시 국민에게 있다.그런 점에서도 2년후에 맞을 광복 50주년은 우리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역정에 한 획을 긋는 해가 되어야한다.
  • 경영부실과 경제논리/염주영 경제부기자(오늘의 눈)

    국제그룹 해체에 대한 헌재의 위헌결정으로 양정모씨와 국제그룹 스토리가 다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다.그러나 해체당시와 지금 양씨와 국제를 바라보는 세인들의 시각과 평가는 매우 대조적이서 그간의 시대변화를 실감케 한다. 85년 2월21일 그는 「부실기업인」의 오명을 안고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당시 신문지면을 뒤덮었던 국제그룹 스토리는 「부실재벌에 고단위 처방」「족벌경영에 철퇴」「방만한 기업경영이 자초한 비극」등으로 묘사됐다. 8년5개월이 지난 지금은 국제 스토리가 「정치보복에 쓰러진 기업」「권력비리에 항거한 투사기업인」 등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모든 변화는 권위주의시대가 끝나고 문민시대가 열린 결과로 나타난 부산물이다.국제 스토리가 다시 쓰여지게 된 집적적인 계기인 헌재의 국제그룹 해체 위헌결정도 이같은 시대변화의 큰 흐름속에서 파생된 것으로 이해된다. 문제는 헌재의 위헌결정으로 국제 해체가 「정치적 타살」이었음이 밝혀진 것과 기업주의 경영부실 책임여부는 엄연히 다르다는 점이다.대통령의 위법행위가 「통치행위」차원에서 이뤄졌다는 이유로 그 책임이 면제될 수 없다는 것이 「법의 논리」인 것과 마찬가지로 기업주의 경영부실 책임이 다른 이유로 면책되거나 가려질 수 없다는 것 또한 냉혹한 「경제논리」이다. 국제는 해체당시 계열사의 전체 자본금이 1천9백여억원에 불과했지만 무리한 기업확장과 방만한 투자로 부채는 그 8.5배인 1조7천억원에 달했다.경제가 불황국면으로 치닫고 있음에도 대규모 사옥 신축과 골프장 건설을 강행했고,자금난은 극도로 심해져 완매채와 타입대 등의 변칙금융으로 겨우 연명했다. 헌재의 위헌결정으로 부각된 정치권력의 기업 「학살」과 이로인해 기업주가 겪어야 했던 시련과 회한의 나날들에 대한 연민의 정때문에 이같은 경영부실의 내면이 가려져버린 느낌이다.부실기업의 정리는 적법 절차와 함께 경제논리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다.
  • 통폐합설속 맞은 우울한 생일/성장 견인차/기획원 32돌

    ◎개발시대 지나 위상 하락/“새 역할 찾기” 변신 안간힘 경제기획원이 22일 개원 32주년을 맞았다.그동안 6차례의 경제발전5개년계획을 입안해 이끌어오는 등 기획원은 성장의 견인차역할을 톡톡히 해왔다.그러나 개발경제의 시대가 지나고,성장뿐 아니라 안정과 균형이 강조되면서 새로운 변신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한국경제를 주도하던 기획원의 위상저하는 위로는 이경식부총리부터,아래로 말단직원에 이르기까지 공통으로 느끼고 있다. 이부총리는 이날 기념사에서 『기획원이 과거의 영광에도 불구하고 현재 시련에 직면해 있다』고 진단,새로운 위상정립과 역할의 수행을 강조했다.그는 80년대후반에 대두된 정치민주화로 개발경제시대의 정부의 통제와 지시가 먹혀들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정부의 경제정책조정방식이 새로운 정치·사회적 여건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시련을 겪는다는 설명이다. ○…문민정부 들어 기획원사람들을 가장 우울하게 하는 것은 기획원의 통폐합설.최근에 수그러들기는 했으나 정부가 공약한 신경제정책의 경제행정조직개편이 가시화되면 언제든지 재론될 공산이 큰 「시한폭탄」의 성격을 갖고 있다. 때문에 기획원관료들은 요즘 기획원폐지설에 「기획원 필수론」으로 정면대응한다.이부총리가 이날 『지난 32년동안의 경이적인 경제발전은 기획원의 존재와 역할이 없었던들 불가능했다』고 목청을 높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획원사람들도 『경제규모의 확대와 질적인 변화에 발맞춰 자체변신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공감한다.다만 과거의 화려한 업적을 정부주도경제운영의 부산물로 치부하고,기획원을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조직으로 매도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반응이다. ○…기획원의 자체변신 노력은 여러 군데에서 나타난다.이부총리는 지난달부터 계속된 김영삼대통령과의 격주 독대회동을 자신의 입지확보와 기획원의 위상강화를 위해서 십분 활용한다. 기획원이 경제부처 가운데에서도 최고의 엘리트집단인 것은 주지의 사실.그러나 인사적체가 심각하다.이부총리는 하위직 승진의 물꼬를 트기 위해 두달 전 김대통령의 승인을 얻어 1급 두명을 용퇴시키는 과감한인사를 단행했다.또 유난히 적체가 심한 사무관들의 인사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다른 부처의 과장급으로 「시집보내기」를 시도하는등 탈출구를 모색하고 있다. 기획원에는 공정거래위나 예산실·대조실처럼 규모가 작은 부처만큼 큰 실·국들이 많다. 복잡다기한 여러 조직과 기능을 추스리고 사기를 높이는 것은 국가경제의 활성화와 관련해서도 새로은 과제가 되고 있다.
  • 율곡수사이후 강군의 과제(사설)

    율곡사업 비리에 대한 감사원 감사와 검찰의 수사결과는 두가지 측면에서 우리에게 교훈을 남겼다.첫째는 문민정부의 개혁사정에는 군이라 해서 더 이상 성역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해준 것이며,둘째는 우리 군이 거듭나기 위한 계기부여의 기회가 됐다는 점이다.국민들이나 군내부의 반응도 대체로 그렇다고 보면 틀림없다. 우리는 이번사건 감사와 수사를 지켜보면서 비록 일부 군수뇌부의 비이라 해도 국가안보및 국토방위와 직결된 국책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저질러진 비리라는 점에서 국민들이 받는 충격이 무척 컸으리라고 본다.특히 국민들의 군에 대한 실망이 자칫 불신으로 발전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 마저 하지 않을 수 없었다.분단상황에서,그것도 국가안보를 책임지는 자리에 있는 군의 최고위간부들이 무기중개업체등으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선뜻 받았다는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충격과 우려는 문민정부의 결단과 우리 군의 거듭나려는 의지로 이제 말끔히 씻어졌다고 본다.정부의 이번 개혁사정은오랜 군사정권의 보호아래 저질러진 군수뇌부의 비리를 낱낱이 밝혀내 단죄했다.한마디로 성역중의 성역으로 치부돼온 군도 결코 성역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문민정부가 아니고는 해낼 수 없는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새 정부가 들어선 뒤 거듭 나려는 군의 의지 또한 여러면에서 확인된바 있다.사조직의 해체를 비롯,구타등 이른바 기합을 추방하겠다는 다짐이 그것이다.율곡사업 비리에 대한 감사와 수사도 군의 거듭나는 과정의 하나다.앞으로도 군의 개혁은 중단없이 계속돼야 한다.김영삼대통령이 어제 권령해 국방장관에게 사표를 반려하고 더욱 분발할 것을 당부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우리 군이 이번 일로 창군 이후 가장 큰 내부적 상처를 입은 것은 사실이다.그렇다고 군의 지휘체계가 조금이라도 흔들릴리가 없다고 본다.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했다.상처가 아물면 새살은 돋는 법이다.현재 군이 겪고 있는 시련이 아무리 혹독하다 해도 군은 의연한 자세로 이를 극복해 낼 수 있다고 온국민들은 믿는다. 율곡사업은 전국민의생명과 안위가 걸린 우리 군의 최대무기구입 사업이다.이 사업은 군의 전력증강을 위해 앞으로도 계속 추진해야 한다.따라서 이제부터 군은 심기일전하여 모든 일에 새로운 각오로 임해야할 것이다.과거와 같은 부정과 부패는 또다시 발을 불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조사에서 드러난 미비점들을 보완,보다 효율적인 정책을 세워 강군에의 길로 박차를 가해야 할것이다.
  • 하타 쓰토무 신생당 당수(일 신당돌풍의 두 주역)

    ◎내각불신임 주도한 개혁화신 하타 쓰토무(우전자·58) 신생당 당수는 일본에 야당만의 연립정부가 들어설 경우 가장 유력한 총리감으로 꼽혀온 인물. 개혁의 기치를 들고 이번 7·18총선에 참여,신생당을 사회당에 이은 제2야당으로 끌어올린 장본인이다. 지난달 18일 내각 불신임 투표에서 자신의 추종자들로 하여금 찬표를 던지게 해 55년 결당이래 자민당에 최대의 시련을 안겨주면서부터 정치에 식상한 일본인들에게 개혁의 화신으로 비쳐지기 시작했다. 그결과 그는 개인 퍼스낼리티가 먹히지 않던 일본 정치무대에서 새로운 스타로 부상했다. 그는 자민당 시절 중간자적 입장을 고수했으며 극우를 거부하는 한편 사회당에 대해서는 극좌노선의 포기를 종용하는 중도보수 성향을 보여왔다. 69년 중의원의원으로 정계에 입문,농수산상·대장상등 요직을 두루거쳤다.앞으로 신생당의 실질적 지도자인 오자와 이치로(소택일낭)와의 관계설정을 과제로 남겨두고 있다.
  • 소말리아 미군 “사면초가”/“무리한 작전” 비난에 내분겹쳐

    소말리아 파견 유엔평화유지군이 중대한 시련을 맞고 있다. 지난 12일 소말리아 최대 군벌 아이디드의 거점을 공습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소말리아인이 희생되고 이에 격분한 소말리아인들이 서방의 취재기자들을 살해하는 유혈보복으로 이어지자 유엔군,특히 이번 작전을 주도한 미군에 전세계적인 비난이 집중되고 있다. 이같은 비난에는 특히 유엔군에 참여하고 있는 일부 국가도 가세하고 있는데다 평화유지활동 자체에 대한 회의표명과 재검토 요구까지 나오고 있어 향후 유엔의 활동반경및 방법과 관련,관심을 끌고 있다. 소말리아에 병력을 파견한 24개국가운데 2천6백명의 인원수에서 미국·파키스탄에 이어 3위인 이탈리아는 13일 미군의 작전중단과 평화유지군 임무의 재검토를 요구하면서 유엔군작전에 대한 합의가 없을 경우 자국군을 모가디슈에서 철수시키겠다고 유엔본부에 통보했다.역시 같은 파병국가인 노르웨이도 작전의 일시중지를 촉구하고 나섰으며 파병국가는 아니지만 아일랜드도 소말리아사태를 다루기 위한 파병국가들간의 국제회의를 개최하라고 촉구했다. 유엔군을 겨냥한 이같은 비난대열에는 교황청,아프리카단결기구(OAU),국제구호·자선단체 등이 줄을 잇고 있다.한편 미국은 2천2백명의 해병 기동군을 소말리아에서 홍해상으로 이동시키고 금주내로 공격기 4대를 철수키로 하는 등 한발 물러서는 자세를 취하면서도 4천명 이상의 해병을 잔류시켜 유엔작전에 계속 참여하겠다고 밝히고 있다.이와 함께 독일(1천7백명),프랑스(1천1백명) 등도 미국과 계속 보조를 맞춰 나가겠다고 밝혀 평화유지군 참여국가들은 이번 공습을 계기로 양분되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당초 소말리아 각 군벌들간의 내전이 유엔군의 개입이후 현지 민족주의세력들과 유엔군간의 대결로 변질된 상황에서 유엔군진영에 나타나고 있는 내분조짐이어서 향후 유엔의 활동방향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번 공습으로 유엔군이 얻은 것이라고는 비난과 자중지란,그리고 무고한 인명피해와 소말리아인들의 고조된 적개심일뿐 작전의 표적인 군벌지도자 아이디드는 여전히 공격권을 벗어나 보복을 다짐하고 있다.갈수록 딜레마가 깊어지는 형국이다.
  • 이달의 독립운동가 나철선생(다시 새기는 그 충절)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을사5적 처단 실패후 대종교 창시/32세때 관직 버리고 유신회 조직… 항일/합방후 “민족정기수호” 단군신앙 포교/“암흑시대 겨레의 횃불”… 독립운동 정신적 지주로 대종교 창시자인 나철 선생은 1863년 12월 2일 전남 낙안현 남상면 금곡리(현 보성군 벌교읍 금곡리)에서 부친 나용집씨와 모친 송씨 사이에서 3형제중 둘째아들로 출생했다.족보명은 두영이었으나 인영으로 개명한뒤 대종교 창교후 철로 바꿨다. ○전남 보성서 출생 1902년 29세때 문과에 장원급제한 선생은 32세때 징세서장으로 있다가 일제의 침략야욕이 내정간섭으로 나타나자 1905년 5월 일제부패관리의 실상을 좌시할 수 없다며 관직을 사임했다.그뒤 강진출신 오기호지사등을 중심으로 비밀결사인 유신회를 조직,구국운동에 앞장선다.그해 미국 포츠마츠에서 노일전쟁의 종전을 위한 강화회담이 열리게 되자 우리의 입장을 미국조야에 호소하기 위해 도미할 것을 결심,미국행을 시도했으나 일본측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6월 유람을 빙자,일본 도쿄에 가게 된다.거기서 그는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가 조선정부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특별전권대사로 조선에 파견된다는 보도를 접하고 그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진정한 평화를 위해 노력해 줄 것을 촉구했으나 회신을 받지 못하자 일왕궁성 앞에서 3일동안 단식하며 항쟁하기도 했다. 선생은 우여곡절 끝에 을사5조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오기호와 함께 『매국노를 모두 죽이면 국정을 바로 잡을 수 있다』며 칼 2자루를 행낭에 감추어 11월30일 귀국한다.이듬해 1월 선생과 오기호는 학부대신리완용 외부대신박재순 군부대신리근택 내부대신리지용 농상공부대신권중현등 세칭 「5적대신」을 일시에 처단할 것을 계획했다.동지들을 규합,자금도 모으고 권총 8정도 구입했다.각국에 보내는 공문과 내외국민들에게 보내는 포고문도 작성했다.첫번째 거사일을 음력 정월 초하루(2월13일)로 정하고 5적이 신년하례를 드리기 위해 입궐하는 기회를 이용,처단하려 했으나 결사대들이 제때에 도착하지 않아 실패했다.이후 4차례에 걸친 처단시도는 이런저런이유로 뜻대로 되지 않았다.체포된 동지 한명이 고문에 못이겨 거사전말을 실토하면서 동지들이 차례로 붙잡혀가자 선생은 제발로 일제 수사기관에 출두,1907년 7월3일 유배 10년형을 받는다.그는 지도로 유배지가 결정돼 헌병의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29일 인천을 출발했다.그러나 운이 좋았던지 유배 4개월여만에 오기호등과 함께 특사로 풀려난다. 1910년 8월 경술7조약 체결로 일제는 우리나라의 통치권을 완전히 빼앗았다.너무도 치욕적인 조약이어서 선생은 새로운 구국운동과 민족중흥의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나라가 이 지경에 이른 원인은 무엇보다 오랫동안 사대사상에서 비롯된 교육의 잘못에 있음을 깨닫게 됐다.선생은 흔들리는 민족전통정신을 바로잡기 위해 단군의 정신을 널리 알리는 작업에 착수했다.단군의 정신으로 민족고유의 종교역사를 완성하고 민족정기를 새롭게 하여 보국안민과 제인구세를 기해 보자는 의도였다. 선생은 1909년 정월 15일 평소 뜻을 같이 하던 오기호등 수십명과 함께 서울 제동 취운정에서 제천의식을 갖추고 단군교를공식 종교로 공표하고 통상의 건국기원에 1백24년이 앞선 4366년을 개천의 기념으로 삼았다. ○초대교주로 추대 모든 교인들로부터 교주인 도사교로 추대된 선생은 1910년 7월30일 칙령을 발표,그때까지 한얼교 또는 천신교로 불리던 단군교를 대종교로 개명하고 대종교의 창시자가 된다.대종교는 이후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구심점이 돼 급속도로 발전한다.선생은 대종교의 도사교가 되면서 이름을 인영에서 철로 바꾼다. 선생은 경술7조약이후 일제침략세력을 몰아내는 일이 어렵게 되자 성지순례의 길을 나서게 된다.그 옛날 단군이 남긴 손길과 발자취를 몸소 알고 역사와 교훈을 깨달아 겨레의 나아갈 길을 믿아보려고 한 것이다.두만강을 건너 백두산 아래의 중국 동삼성에 이르러서는 대종교의 확대포교를 구상하게 된다.이 곳이 고대로부터 우리 민족이 살던 곳이었고 수많은 애국독립지사가 정착하고 있었던 곳이었기 때문이었다.선생의 노력으로 대종교는 이 곳에서 크게 번창했다.선생은 한편으로 교인과 교포들의 자녀교육을 위해 교육시설도마련,민족교육을 실시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시켜 나갔다. 선생의 이같은 행동은 일제의 대종교에 대한 탄압을 불러 일으키게 했다.국내에서는 탄압이 더욱 심해져 마침내 선생은 총본사가 있던 화룡면 청파호에서 귀국을 서두르게 된다.당시 일제는 신포교규칙에 의한 종교등록을 강요하고 있었는데 대종교에서는 완벽한 서류를 냈으나 군소종교단체는 모두 등록을 받아주면서도 대종교의 등록서류는 신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반송했다.가증스런 종교탄압이었다.선생의 신변도 위협해왔다.창교이래의 최대의 시련이었다. ○구월산에서 순교 선생은 순교와 수도의 길중 택일을 위해 매일을 기원했다.이윽고 구월산 삼성사 참배계획을 공지하는데 이는 단군 성적지를 믿아 순교하려는 결단이었다.1916년 음력 8월4일 참배길을 떠나 이틀뒤 삼성사에 도착한다.8월 한가위 동네 교인들과 제례를 올린 선생은 『오늘부터 3일간 절식수도에 들어갈 것이니 절대로 문을 열지 말라』고 방문을 봉하게 하고는 순교의 길을 택한다.다음날 제자들이 선생을 믿았을 때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여러 유서들이 나왔으나 모두 죽음으로써 침략자들에게 항쟁한다는 뜻이었다.선생의 나이 54세. 정부는 이같은 선생의 항일공훈을 추앙하여 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김일성/“NPT탈퇴 과오” 김정일 견책설

    ◎러 이타르­타스통신 「아주회보」 보도/“국정에 무능” 문책에 위상약화/신경과민증 나타나… 두달간 집무 못해 북한의 김일성주석은 최근 일련의 국정운영 잘못에 대한 책임을 물어 아들이자 공식 후계자인 김정일비서를 심하게 질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러시아의 이타르 타스통신이 발행하는 「아시아 회보」최신판이 보도했다. 민감한 국제문제가 주내용을 이루고 있어 주로 정부기관과 연구소등에 배포되고 있는 이 회보는 「김정일의 건강 상태」라는 제목의 지난 22일자 평양발 기사에서 이같이 전하고 김정일이 최근 이같은 질책에 따른 신경과민증으로 두달간이나 집무를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보도했다. 한편 역시 이타르 타스통신이 발행하는 「24」지도 29일 김일성주석이 최근 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결정 등 중요문제처리와 관련,김정일을 견책했으며 이 때문에 김비서의 위상이 다소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다음은 「아시아 회보」가 전한 내용의 발췌다. 김일성주석의 아들이자 공식후계자인 김정일이 아버지로부터 엄중한 질책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김정일은 현재 신경과민증을 앓고 있으며 이미 최근 두달간이나 집무를 보지 않고 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지난 4월말과 5월초 서방의 신경병리학자들이 평양으로 초빙되었다.북한요인들은 『김정일이 당시 몇주일 동안이나 자신의 집무실에서 밤새워 일했으며 이 때문에 현재 휴식을 취하면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 대중매체들은 지금 김정일의 이름을 드물게 상기시키고 있는데 이는 김일성이 아들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다는 최근의 풍문들을 설득력있게 대변해주는 것이 될수도 있다. 지난 5월12일 모든 신문의 2개면에 걸쳐 게재된 「한국전 승리 40주년」에 즈음한 중앙당 명의의 호소문에는 김정일의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외국의 많은 북한관측통들은 금년 51세인 김정일이 당,인사문제,군,경제,사회생활 등 모든 영역에서 지나치게 많은 업무를 장악하면서 「친애하는 지도자」로서의 공식칭호에 어울리지 않게 일련의 과오를 저지르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북한에서는 예로부터 고위 간부요원들을 양탄자위로 호출,엄중문책하는 관례가 있다.현재의 고위간부중 이런 문책을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엄중문책을 받은 당사자는 지방으로 보내졌다가 일정기간이 지나면 다시 중앙으로 복귀하는데 이런 시련을 겪은 당료는 상부방침에 무조건 맹종하게 된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예를 들면 김일성자신의 후계자에 대해 「객관적으로」 대하려 하는 것인지 아니면 금년 81세인 그가 국정운영과 서민의 생활고에 대한 책임을 어느 정도 벗어버리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려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 어쨌든 김정일이 어떤 과오를 범했는지는 베일속에 가려져 있다.북한 관측통들은 지금 북한 지도부내에서는 김정일의 지지자와 김일성의 「나이든 근위대」간에 은밀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면서 김정일이 권력을 장악하면 김일성지지자들은 축출될 것으로 보고 있다. 김정일의 건강상태가 어느 정도 심각한지는 누구도 확실히 말할 수 없다.
  • 바이올리니스트 김민씨(이세기의 인물탐구:31)

    ◎독자적 음악어법·「긴장의 선율」 일품/화려한 경험·탁월한 직관으로 곡핵심 용해/“정상의 기량·풍부한 감성” 연주로 청중 매료/13년간 「바로크 합주단」 이끌어… “노력이 최고덕목” 삶 일관 칼라일의 말처럼 「음악은 천사의 스피치」,만일 자기자신 안에 아무런 음악적 감흥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는 아마도 영원히 불행한 사람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소나기같은 박수를 받으며 김민이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 활을 움직이기 이전의 숨막힐 듯한 정적까지도 그것은 이미 「절묘한 무음의 음악」이다.피치카토 스타카토 트레몰로로 번뜩이는 자유분방한 테크닉과 모든 음악적 패시지는 청중을 무리없이 곡의 핵심속에 침투시킨다.특히 스마트한 론도의 테마를 제시하면서 코다의 영광으로 소연되는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협주곡은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인해 청중은 가슴죄는 초조감마저 느껴야 한다.바로 이 싱싱한 긴장감이 김민연주의 특징이며 음악적 능력이다. ○난해한 음악에 집착 그의 직관력은 음악적 형태를 순식간에 포착하여 작곡의 모티브에 유연하게 밀착하는 곡해석으로 유명하다.난해하다고 지적되는 부분을 쉽게 소화하면서 작곡자가 의도하는 비밀을 보석처럼 캐내고 다듬어낸다.그러나 자신에게 맞지 않는 테크닉은 그것이 아무리 「하이페츠 테크닉」이라 할지라도 철저하게 외면한 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오랜 연주경험을 통해 「자기 음악을 위한 마음의 환경을 잘 가꾸고 있는 연주가」이며 또는 「음악의 모든 프레이즈(구)들이 음악이 원하는 자연스러운 호흡속에서 상호의존적으로,그래서 무의식적으로 계획에 의해 짜여진 노래이자 노골적인 계획에 의해서 불려지는 노래가 아닌 불가사의한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우리나라에 이만한 연주가가 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하고 자랑스러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이는 한 음악전문지가 기획한 「한국의 명연주가 집중연구」에 음악평론가 이강숙씨가 김민을 추천하면서 쓴 글이다.한상우씨도 「진지하고 확연한 음악적 틀위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매력과 음악어법을 지닌 존재」임을 전제,특히 김민이 집착하는 브리튼이나프로코피예프,슈니트케와 츠빌리히등 현대음악이 갖는 난해성을 「활력있는 테크닉의 조화를 통해 긴장감과 함께 리듬을 확대시켜 강한 공감을 형성하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과연 그에게서 긴장감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그에게서 음악이 사라지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는 어릴 때부터 「확실한 가능성이 돋보이는 유망주」로 성장한 케이스다.본격적으로 바이올린수업을 받던 서울예고시절부터 첼로 정명화와 함께 예고실내악단을 조직하여 활동했고 아직 고교2학년때 서울대음대가 주최하는 전국고교생 음악경연대회에서 선배·동료들을 물리치고 당당히 1등,대학에 들어가자 바로 국립교향악단(현KBS교향악단)에 입단,65년 첼리스트 전봉초씨가 창단한 바로크합주단 부악장등 문자그대로 음악의 탄탄대로 한가운데를 거침없이 걸어왔다고 할 수 있다. ○시련의 독유학 시절 그러나 그가 유학한 독일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파란과 시련을 한꺼번에 안겨주었다.예술가로서의 첫 갈등과 회의속에서 그는 「이제 나는 모든 것이 끝났는가」라는 좌절감에 허우적거렸다.이제까지 알고 있던 자신의 모습은 엄청난 허상이었으며 그런 자신의 실상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소스라칠만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함부르크국립음악원에서 만난 빌프리트 한케교수는 바흐 바이올린곡을 첫과제로 내주었다.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심오한 환상과 고고한 기품,음악의 모든 정교한 기법을 담아야 하는 이 절후의 명작은 고국연주때 「풍부한 음악적 감성」으로 호평받았고 그도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작품의 하나였다. 그러나 한케교수는 1악장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시 연습해올 것을 명령했다.1주일후 다시 교수 앞에 섰으나 이번엔 『이곡을 연주해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교수의 이말은 그의 자존심을 무참하게 짓밟았다.여기에 일본인 학생과 비교되는 수모까지 겪으면서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가파른 위기의식을 느꼈다.여기서 도망친다면 영영 그만이다.자존심을 천재로 알던 그로서는 이때의 모욕의 충격에서 한동안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는 서울예고시절 오케스트라연습에 늦었다는 이유로 당시지도교수이던 이재헌씨가 「주의」했을 뿐인데도 그 길로 연습실을 빠져나가 연주회에 나타나지 않은 적이 있었다.관현악 대신 쳄버오케스트라로 편성하여 바이올린의 비중이 어느 때보다 컸으나 교수는 김민을 나무라지 못했다.건드리면 옥죄는 식물처럼 선병질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에 끝내 「크리스탈 유리잔 다루듯」했다는 에피소드를 남기고 있다.『그때 내가 크게 꾸짖었다면 오늘의 김민의 대성은 없었을 것이다.자존심만 상하게 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할일을 투철하게 해내는 인물』이라고 했다. 그런 김민이 독일에서 당한 모욕은 일생일대 대사건일 수밖에 없었다.6개월 만에 바흐 통과후에도 불가사의한 인내심으로 그는 2년간 한케교수 밑에 머물렀다.그리고 한케교수의 손꼽히는 제자로 인정받게 되자 미련없이 그로부터 떠나버렸다. ○세계30국 순회 연주 이번엔 베를린국립음악원 교수이자 혈기왕성한 토마스 브란디스교수를만났다.브란디스 사사를 원하자 한케교수는 크게 실망하며 「너의 재능과 개성을 키워줄 사람은 나」라고 설득하려 들었다.그러나 그는 여러 스승을 섭력한다는 의지로 브란디스문하에 들어갔고 여기서의 시련은 한케 이상의 고통이었다. 곡마다의 프레이스를 수백번씩 되풀이하면서 이를 다시 자신의 음악으로 만들어나가는 과정은 문자그대로 피나는 훈련이었다. 한케교수가 완벽주의라면 브란디스교수는 이미 인정된 가능성 위에서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고 탐색해나가는 노력파였다. 그는 지금도 제자들을 가르칠 때 자존심을 다쳐 결정적인 상처를 주기보다 끈질긴 집념에의한 노력에의 가능성에 비중을 두고 있다.섬세한 예술가의 심성이란 작은 상처에도 영원한 좌절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그는 끈질긴 노력끝에 눈부신 성취감을 가르쳤다. 음악성을 인정받아 재학중에 함부르크 클라이네 뮤직홀에서 첫독주로 서독음악계에 데뷔,입단이 까다로운 북독일라디오방송교향악단,로린마젤이 지휘자로 있는 베를린방송오케스트라와 함께 전세계 30개국 순회공연했고 그때 만난 줄리어드음대 출신인 피아니스트 윤미경(한양대교수)과 74년에 결혼,지금까지 음악의 협력자·조언자로서의 이상적인 생활을 누리고 있다.둘사이엔 아들 하나(태원·고2). 독일체류 10년만인 79년에 돌아와서 국립교향악단(현 KBS교향악단)악장취임,서울대음대교수·바로크합주단 재창단등 다양한 역할을 빈틈없이 맡아 「자신이 지닌 것과 음악이 원하는 사이를 훌륭하게 중재한다」는 주위의 평을 듣고 있다. 오케스트라보다 규모가 작은 실내악앙상블은 그 음악적 질이 한층 치열하고 치밀한 것이 특색이다.또 섬세하고 투명하여 독주자로서의 세련된 기량을 지니면서 여러 소리를 한데 묶어주는 음악적 조직측면에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 지난 13년간 그는 악장과 지휘를 겸하는 리더로서 이무지치에 비견되는 위치로 바로크합주단을 올려놨고 최근에는 세계정상급 매니지먼트인 콜럼비아 아티스트와 계약,내년부터 세계투어에 들어간다. ○예술가 집안서 성장 그는 원로서예가이며 플루트를 연주하던 심당 김제인씨(82)와 이전 피아노과 출신인 이재순여사(82)의 3남매중 장남.여동생 장희씨는 뉴욕에서 활동하는 화가,남동생 춘씨는 그래픽 디자이너등 예술가집안에서 어릴때부터 그가 하고 싶은 일들을 주저없이 누려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림솜씨가 뛰어나 예고진학 때는 미술과 음악을 놓고 망설이기도 했으나 스승인 임원식씨와 이재헌씨의 강력한 조언으로 바이올린의 길을 택했다. 검은 안경과 검은 티셔츠,북유럽풍의 자유분방한 옷차림을 즐기는 만년소년같은 모습은 어느 한 구석에도 세월의 흔적이나 인생의 혹독한 시련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또 「모든 것은 내가 열심히 한 탓이 아니라 내 위에서 나를 지켜주는 누군가가 있고」그 누군가를 위해 연주한다는 그의 자세는 음악외엔 도무지 딴관심이나 욕심이 없는 듯 검은 연주복,눈부시게 흰 소매끝에서조차 바그너의 무한선율이 언제까지나 끝없이 흘러나올 뿐이다. □연혁 ▲1942년 서울출생 ▲1960년 서울예고졸업(안용구·이재헌 사사)서울대 음대입학(국립교향락단입단·서울대실내악단·한국학생실내악단 활동) ▲1962년 동아음락콩쿠르 입상 〃 국향과 비에니아프스키협연 데뷔 ▲1964년 서울대 음대졸업 ▲1965년 바로크합주단(단장 전봉초)창단멤버 부악장 ▲1968년 피아니스트 신수정과 서독유학독주회 ▲1969년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악원(빌프리트 한케,토마스 브란디스 사사) ▲1972년 재학시 함부르크 클라이네 뮤직홀 첫독주 ▲1972∼74년 쾰른실내악단 부악장,솔리스트,악장 ▲1974년 일시귀국 국립극장 개관기념 독주회 〃 쾰른 실내악단과 캐나다·미국·중남미등 30개국 순회연주 ▲ 〃 북독일라디오방송(NDR)단원및 독주자 ▲1976∼79년 베를린방송 교향악단 단원및 독주자 ▲1977년 바이로이트 바그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단원선발이후(해외다연주참가) ▲1979년 귀국,국립교향락단 악장취임(이후 정기연주·협연참가) 〃 독일문화원주최「바흐,베토벤,프로코피예프를 위한 소나타의 밤」연주 ▲1980년 바로크합주단 재창단 악장겸 리더,해마다 정기연주 4회및 초청연주외 1백50여회연주와 미국등 해외연주 ▲1981년 KBSTV콘서트 텔레만 탄생 300주년 기념 연주 ▲1982년 제4회 독주회 겸 부인인 피아니스트 윤미경과 열번째 부부연주 ▲1984년 KBS교향락단과 일본및 동남아 순회연주 ▲1985년 호암아트홀 초청독주회 ▲1986년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로 월드필오케스트라 제1바이올린 초청연주 ▲1987년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과 듀오이벤트(멜버른) ▲1990년 바로크 합주단 창단 25주년 기념연주 ▲1991년 바로크합주단 동남아 순회연주 ▲1993년3월 서울대 교수 실내악단 창단 첫 연주,한미 우호협회 한국주재 미군과 미국관계자 초청 6월축제 78 한국펜클럽선정 「이달의 음악가상」,87 한국음악가협회제정 「올해의 음악가」,87 바이로이트 바그너페스티벌 10년참가감사패,89 음악동아「올해의 음악가상」,바로크합주단 CD출반
  • 「기적」 실종(통화통합3년­그뒤의 독일:상)

    ◎“통일비용 오산” 깊어진 경제주름/재정적자·실업 급증… 곳곳서 부작용/노동생산성 하락 등 경기침체 가소 독일은 지금 큰 시련에 처해 있다.▲막대한 통일비용 지출 ▲외국난민의 유입저지 ▲해외평화유지활동에의 참여확대 등 여러 난제들이 산재해 있는데 세계경제의 전반적인 침체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긴 하지만 통일이후 경제침체가 더욱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독일통일의 기산시점은 91년 10월 3일이다.그러나 독일에서의 변화는 이보다 3개월전 통화통합이 이뤄졌을 때부터 이미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오는 7월 1일로 통화통합 3주년을 맞는 「독일의 오늘」을 조명해본다. 독일을 가장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것은 역시 메르체데스 벤츠 자동차라고 할 수 있다.그 메르체데스가 올해초 고급차만 생산한다는 이제까지의 전략에서 탈피한다고 발표했다.「벤츠는 곧 고급차」라는 자부심을 판매부진 때문에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이같은 벤츠의 변신은 가격경쟁력에서 더 이상 경쟁사들을 제칠 수 없게 된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같은 현상은 꼭 벤츠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독일제품들은 지금 전반적으로 가격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그 원인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통일의 부작용」에 그 원인을 돌리고 싶어 한다.물론 그도 한 원인이긴 하지만 그같은 설명이 꼭 옳다고는 할 수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통일이 경제에 주름살을 잡히게 했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90년 7월1일 화폐단일화를 통한 동서독간 경제통합이 이뤄졌을 때 세계는 경제기적에 이은 정치외교부문에서의 독일의 기적에 찬사를 보냈었다.그러나 3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동독의 흡수통합은 하나의 저주』라고 빗댈 정도로 독일인들은 통일 자체에 환멸을 느끼고 있다.지난 3년간 통일로 인해 여러 부작용만 나타났을 뿐 당초의 기대는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통일이 가져온 부작용은 ▲과도한 통일비용 지출에 따른 정부재정적자의 급증▲동서독간 임금격차 해소약속에 따른 생산비 급증▲이에 따른 기업도산및 실업증가 등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중에서도 서독이 40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이룩한 고임금과 짧은 노동시간을 일률적으로 동독노동자들에게 적용하려던데서 생긴 기업들의 생산비 급증과 부담가중은 구동독지역기업들을 소생시키기 어려운 중병에 걸리기 해 독일경제에 큰 해악을 끼쳤다. 그러나 독일경제의 침체원인을 통일에서만 찾으려 하는 것은 올바른 어프로치가 못된다.통일이 예정됐던 경제침체를 조금 앞당겨 촉발시켰는지는 모르나 통일이 아니었더라도 지나친 사회복지비의 부담 등 독일경제는 이미 침체에 빠질 소지를 안고 있었던 때문이다.독일은 40년이 넘게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호황을 누린 결과 곤경에의 대처능력과 이를 극복하겠다는 자신감을 상실한 것 같다. 게다가 「라인강의 기적」을 일궈낸 독일노동자들은 오랫동안 세계 최고의 노동윤리를 가진 것으로 평가됐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못하다.독일의 임금수준이 아무리 높고 또 노동시간이 아무리 짧다해도 노동자들의 생산성이 이를 충분히 보상할 수만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그러나 역동성을 잃은 지금의독일노동자들은 더 이상 높은 생산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경제통합이전 구동독지역에 많은 외국투자를 유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됐지만 지금까지 외국투자의 유치가 지지부진한 것이나 콜총리의 야심찬 구동독국영기업 사유화계획이 큰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같은 원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통일이 독일에 큰 기회를 제공했음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6개 신설주라는 광대한 영토와 1천7백만명의 인구를 얻음으로써 독일의 국력은 분명 그만큼 강대해졌다고 할 수 있다.
  • 이 여사 삶에는 겨레의 아픔이(박갑천칼럼)

    올해 예순여덟인 이인득여사의 생애에는 광복후의 우리겨레 아픔이 어린다.그래서 남의 얘기일수만은 없다.우리 모두의 얘기로도 되는 쓰리고도 아린 행로이다.우리들의 비탄과 우리들의 오열이 그에게서 배어나온다. 그는 스물다섯에 6·25를 맞는다.다섯살·세살의 두아들을 둔채 전선에 나간 남편은 전사했다.여기까지는 그나이또래 우리의 여성들이 겪은 일중의 하나일 뿐이다.아니,그보다 더 비통한 경우들도 얼마든지 있다.부모는 좌익한테 남편은 우익한테 잃은다음 자식은 피란길에서 잃은 사례등등 동서냉전시대가 우리에게 강요한 고통이 어디 한두가지에 그치는 것이던가. 이여사의 아픔은 그에 비길때는 덜하다 할수 있을지 모른다.그러나 세월이 흐른다음 되풀이된 고통의 시련은 가혹했다.남편의 전사통지서를 받은지 20년후 월남전에 나간 작은아들의 전사통지서를 받는 것이 아니던가.어쩌면 남편의 전사통지서를 받았을 때보다 더한 충격을 이때 받았다고 할 것이다. 두싸움 모두 겨레의 뜻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약자로서 큰힘의 소용돌이에 휩쓸려버린 결과였을 뿐이다.그 한싸움에서는 남편을 잃고 그상처가 하마 아물어갈무렵 또다른 싸움에서 아들을 잃었다.그옛날 장자는 아내가 죽었을때 두다리 뻗고앉아 분(질장구)을 치며 노래불렀다는 것이지만 범인이 그렇게 생사를 초월할수 있는 것도 아니다.현충일을 앞두고 찾은 국립묘지에서 그는 두묘역을 오가며 말라버린 눈물로 울음을 삼켰던 것이리라. 저 고려말의 학자 이곡의 「가정집」에 나오는 박행의 여인 조씨도 이여사 같은 슬픔을 짓씹었던 경우이다.친정아버지 조자비는 삼별초의 항몽전때 관군으로 탐라에서 죽고 시아버지 수령궁녹사 한광수는 일본정벌 나갔다가 군중에서 죽고 남편인 대위 한보는 합단과의 싸움에서 죽고 외딸은 남매를 낳아놓고 죽지않던가.나라의 명운과 같은 궤적의 슬픈 삶이었다는 공통점에서 대조가 된다. 일세의 문장이었던 노산 이은상은 일찍이 그 아우를 잃고서 「무상」이라는 글을 남겨 사람들 마음에 감동의 파문을 일으켜온다.『아니디아(Anitya:무상이라는 뜻)!어허 천지가 무상하구나.과연 무엇이 무상인고.…』로써 읊조려나가는 명문이다.한많은 말과 눈물을 지그시 삭이면서 글로 표현해내지 못했다 뿐 어찌 노산의 심경에 미치지 못한다고야 하겠는가.아들손자 며느리와의 노후가 부디 행복하기를.
  • 중국,21세기 「중화경제권」 꿈꾼다(심층취재)

    ◎작년 무역고 세계11위… 그 저력은/개방정책 15년째… 연평균 8.9% 성장/각국자본 유치… 배불리 먹는 「온포」 달성/홍콩 등 세계 3천만 화교와 연계… 경제대국 줄달음 다가오는 21세기 아시아·태평양시대의 주역은 어느나라가 맡게 될까.요즘의 중국경제를 현장에서 바라보느라면 적어도 아시아권에서는 일본과 중국이 다음 세기를 이끌어갈 쌍두마차가 되겠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물론 현단계에서 중국의 경제발전수준이나 국민소득 등을 보면 아직도 후진국범주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하지만 지난 79년부터 시작된 개혁개방을 통한 경제건설이 열매를 거두어 경제적 도약단계에 접어든데다 방대한 국토의 엄청난 자연자원,전세계인구의 22%를 차지하는 인력자원,이미 세계경제의 선두를 달리는 홍콩·대만·싱가포르를 비롯,전세계 곳곳에서 상권을 쥐고 있는 3천만 화교들과의 경제적 유대,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중국인들의 불타는 경제건설욕망 등을 보면 멀지않아 세계경제의 중심이 중국대륙으로 이동해가지 않을까 하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경제특구 4곳에 사실 중국에서 실용주의자 등소평이 등장,마르크스­레닌주의식 경제운용방식을 멀리하면서 오는 2000년까지 농업·공업·국방·과학기술 등 4개부문의 현대화를 달성하겠다고 선언한 78년말만 해도 그들의 경제력은 보잘것없었다.그들 스스로가 10년내 온포(배불리 먹는 문제)단계를 거쳐 20년안에 소강(여유있는 생활)단계로 넘어가겠다는 게 목표였다.그리고 그 목표는 무난히 달성돼가고 있다.현재 11억7천만 인구의 먹고 입는 문제가 해결됐는데,이는 중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등소평의 개혁개방은 이웃의 경험을 이용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우선 다행인지 불행인지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중엔 북한·러시아·아프간·인도·미얀마·베트남 등 어느 하나 잘사는 나라가 없다.다만 중국이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는 몇몇 지역만이 잘살고 있다.이들 잘사는 지역중 홍콩부근의 심수,마카오주변의 주해,대만 건너편의 하문,그리고 홍콩 최대갑부 이가성의 고향인 산두 등을 80년에 경제특구로 선정,자본주의식기술과 경영기법이 대륙으로 흘러들도록 했다. 그후 아무래도 해외문물을 접하기 쉬운 연해도시들을 개방한데 이어 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턴 내륙지방에 대한 본격개방이 시작됐다.내륙에서는 우선 양자강을 끼고 있는 이른바 연강도시들에 이어 철로교통요지들인 연선지역,국경을 접하고 있는 연변도시들이 개방대열에 합류하게 됐다. 지금까지는 이같이 연해·연강·연선·연변도시들을 대상으로 한 이른바 4연개방을 주축으로 개혁개방을 추진해오고 있는 것이다.이를 통해 중국은 그동안 연해지구와 내지,동부지구와 서부지구로 갈라져 현격한 차이를 보이던 경제격차를 해소하는 동시에 내지 곳곳에 위치한 자연자원밀집지구로 개혁개방열기가 스며들도록 하고 있다. 개혁개방을 추진해오는 동안 시련도 많았다.79년부터 지난해까지 연평균 8·9%라는 고도성장을 이룩한 반면 개혁개방으로 자본주의의 부패타락이 들어오고 빈부격차로 계층간 갈등이 심화되며 결국은 서구자본주의국가들의 화평연변정책으로 체제붕괴를 초래할 것이라는 비난까지도 감수해야했다.무엇보다도 큰 시련은 89년의 6·4천안문사태와 그후 일어난 소련·동구의 체제붕괴를 들 수 있다.다행스럽게도 중국은 등의 개혁개방 덕분으로 다른 사회주의국가들과는 달리 붕괴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을 뿐아니라 오히려 요즘은 시장경제체제도입과 더불어 경제건설에 완전 자신감을 갖게 됐다.멀지않아 GATT(관세무역일반협정)체제에 가입함으로써 자유세계 경제권에 합류할 준비를 하고 있으며 그동안의 수출드라이브정책이 성공,지난해 무역액이 한국을 제치고 세계11위로 도약했다.그런가 하면 홍콩기업체중 36%가 중국에 공장을 갖고 있을 정도로 홍콩·마카오·대만을 비롯한 해외화상들과의 연계가 깊어져 중화경제권 형성도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국제경제전문가들은 예고하고 있다. ○GATT 곧 가입 요즘은 시장경제를 도입,정착시키는 데 여념이 없다.그동안 시장경제적 요인을 많이 도입했으나 지난해말 당대회에서는 사회주의시장경제 도입을 그들의 당헌에까지 삽입했다.다만 시장경제 앞에 「사회주의」라는 접두어를 붙인 것은 앞으로도소유방식이 공유제를 주로 하고 사유제를 보완적 수단으로 활용하겠다는 뜻을 갖고 있다. 현재 소유형태별 생산규모를 보면 국영기업이 55%,향진기업이나 주식회사등의 집체기업이 35%,개체호나 3자기업등 사영업체가 10%를 각각 점하고 있다.이는 81년 당시 78.3%,21%,0.7%등과 비교하면 사유부문의 대폭증가를 보여주고는 있으나 아직 공유부문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이같이 공유부문이 주종을 이루고 분배방식도 주주에게 이익금을 나눠주는 자본분배보다는 노임과 같은 노동분배를 주가 되도록 유지해나가겠다는 게 바로 사회주의시장경제이며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라고 중국신문들은 설명하고 있다. 중국이 시장경제를 추진하면서 중앙계획경제분야가 대폭 줄어들어 상부의 간섭이 없어지고 거의 모든 상품가격도 시장가격으로 결정되고 있다.이제는 기업체가 마음에 안드는 노동자를 해고할 수도 있고 마음에 드는 기술자를 초빙할 수도 있으며 일을 잘하면 노임을 올려주고 그렇지 않으면 깎아내릴 수도 있다.그래서 사회주의하에서 일을 잘하든 말든 똑같은 대우를 받던 「그 좋던 시절」은 이제 사라지고 있다. 시장경제추진과 더불어 지난해부터 3차산업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지고 있다.시장경제를 제대로 추진하자면 이 분야를 발전시켜야 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 같다.올해 1·4분기중 3차산업 투자가 전년 동기비 1백25%나 늘어나고 있는 것은 수송·금융·정보·식음·유통등 3차서비스산업에 대한 일반주민이나 당국의 관심이 얼마나 지대한지를 엿볼 수 있다.요즘 중국에서는 「하해」라는 말이 크게 유행하고 있다.이는 자기본래의 직업을 버리고 시장경제라는 바다속에 뛰어들어 장사에 손을 댄다는 뜻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물가고가 난제로 중국경제가 발동이 걸려 잘 움직여가고는 있으나 여기에도 장애요인은 얼마든지 있다.그것은 아직도 남아 있는 관료주의와 무사안일주의적 근무태도,전체 국영기업의 3분의 1이 적자에 허덕이고 있는 점,여기에다 그동안 사회간접자본투자에 소홀했던 점도 큰 짐이 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연해지역에 대한 개발이 많아 육로수송에별문제가 없었으나 현재 철도화물적체율이 40%에 이르고 수송에너지·통신·원자재분야에 병목현상이 예상되고 있어서 이 분야의 막대한 투자가 필요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이와 함께 경제건설에서 소외되게 마련인 농민문제가 남아 있다.최근 사천성에서 각종 잡부금문제로 농민소요가 발생한 것은 그만큼 전국적으로 농민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서방관측통들은 분석한다. 올해 들어서는 경제과열이 또다시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88년 하반기부터 실시된 경제안정화정책(치이정돈)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난해 12.8%의 경이적인 고도성장을 이룩한 데 이어 지난 1·4분기에는 14·1%라는 과열경제양상마저 나타나고 있다.불과 3개월만에 전국 평균소비자물가가 8.6%나 오른데다 전국 35개 주요도시의 생계비는 15.7%,국영기업의 고정자산투자 70.7%,2차산업투자 38.1%등등을 볼 때 확실히 과열징후를 보이고 있어서 당국에선 이자율인상등 조치를 취하며 다소간 열기를 식히려 하고 있다. 중국당국은 과열경기를 진정시켜 연 10%안팎의 성장을 유지해갈 것으로 보인다.과거 천안문사태 직후처럼 강력하게 경기진정책을 쓰지는 못할 것이라는 얘기다.그것은 아직도 중국의 최고실권자로 평가되는 등소평이 최근 『경제발전의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며 고도성장을 당부한 말을 함부로 어길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고난을 체험하는 사랑의 실천/『6·25 음식먹기 운동』 벌인다

    ◎개신교 각 선교단테 20개 도시서… 15만 경찰 동참/꽁보리주먹밥·수제비 등 1천원씩 판매 개신교 각선교단체들이 오는 25일 6·25 43주년을 앞두고 고난의 체험을 통한 절제와 사랑의 실천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한다. 한사랑선교회(회장 김한식목사)가 주관하는 「6·25음식먹기운동」은 그 대표적인 것.네번째를 맞는 올해 행사는 21일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등 시내 3개대학에 「6·25음식판매대」를 설치,판매함으로써 본격적인 행사에 돌입한다. 오는 26일까지 계속될 이 행사는 전국 20여개 도시에서 일제히 거행된다.올해는 특히 15만 전국경찰이 동참키로 하고 노동부 전체 산하기관과 대한요식업중앙협의회등이 참여한다.또 전국교회가 20일 주일집회 후에 동참하며 각 직장의 구내식당,음식점,가정도 상당수가 참여,사상 최대규모가 될것으로 보인다. 6·25음식의 종류는 꽁보리주먹밥 수제비 개떡 깻묵 호박죽등이며 1인분에 1천원을 받는다.서울에서는 21∼22일 대학가 판매에 이어 23일부터 26일까지 서울역광장과 잠실롯데에서 대대적으로 펼쳐진다. 한사랑선교회측은 이 운동으로 모아진 수익금을 일차적으로는 그 단체나 교회가 자체적으로 가까이 있는 6·25참전용사나 불우이웃에 전달하는 것으로 하고 있다.그리고 자체 판매대운영에서 모아진 수익금과 운동본부로 전달돼온 수익금은 중앙차원에서 같은 용도로 쓸 계획이다.이에앞서 운동본부측은 17일 올림픽공원 문화회관에서 이 운동의 참가희망자들을 초청,6·25음식 시식회및 설명회를 갖기도 했다(문의 588­1733). 한편 한국이웃사랑회(회장 정해원)는 25∼26일 이틀간 「지구촌 기근퇴치를 위한 전국민 사랑의 굶기운동」을 벌인다.이 운동은 이날을 기해 전국민이 한끼이상씩 굶어 마련된 금식기금으로 우리주변의 결식아동과 아시아 아프리카등지의 기아문제 해결에 동참한다는 취지에서 전개된다(문의 704­9923). 한국이웃사랑회측은 또 이 운동의 일환으로 기독교방송과 함께 26일 하오7시30분 서울 등촌동 88체육관에서 사랑의 굶기운동 공개행사 선교뮤지컬 「지금 우리는」을 공연한다. 한사랑선교회 김한식목사는 이번 6·25고난체험행사에 전국민의 참여를 당부했다.『오늘날 우리의 시련은 감사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6·25당시 상황을 간접체험해보고 감사를 회복하자는 것이 이 운동의 취지입니다.자녀들에게도 훌륭한 교훈이 될것입니다』
  • 한방수련의 42명/집단사표 제출/원광대·우석대

    【전주=조승용기자】 원광대 한방병원 수련의 36명과 우석대 한방병원 수련의 6명은 16일 하오 약사에게 한약 조제를 가능케한 약사법 시행 규칙 개정의 철회를 요구하며 병원측에 집단 사표를 제출하고 한의사 면허증을 보사부에 반납키로 결의했다. 이들은 성명을 통해 『약사법 시행규칙 개정과 관련해 후배 한의대생들이 집단유급이란 시련을 겪고있는 것과 관련,선배 한의사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히고 『교육부와 보사부는 한의대생 집단 유급을 막을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 IAEA,미·북한대화 주시/북핵토의 앞둔 이사회 분위기

    ◎“NPT탈퇴 발효땐 기구 존립기반 위협” 11일부터 북한 핵문제 토의를 앞둔 국제원자력기구(IAEA)정기이사회의 분위기는 매우 침울하다.IAEA가 요구하고 있는 북한 녕변근처의 핵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을 평양당국이 계속 거부하고 있는데도 이를 해결할 아무런 뾰족한 수단을 갖지 못한데 따른 무력감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북한은 IAEA의 존립기반인 핵확산금지조약(NPT)으로부터 탈퇴하겠다고 선언,이제 그 발효시한을 불과 이틀밖에 남겨놓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IAEA의 존립기반과 그 뿌리인 NPT조약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데도 IAEA로선 그저 속수무책인채 멀리 대서양 건너 뉴욕에서 열리고 있는 미·북한간 제3차 고위급회담을 향해 온 촉각을 뻗쳐놓고 있을 뿐이다. 사실 지난 4월 특별이사회에서 북한의 핵문제를 유엔안보리에 넘기기로 결정함으로써 IAEA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한 셈이다.IAEA가 북한의 핵개발에 대한 감시를 책임진 주무기관이기 때문에 이번 이사회에서 북한핵문제가 의제로 상정된 것은 당연하지만 이미 북한핵문제는 IAEA에서의 회의를 통해 해결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섰다.지난 7일 개막된 이사회가 북한핵문제에 대한 논의를 회의 끝부분으로 미룬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뉴욕에서의 회담결과를 지켜보자는 것이 그 이유다.현재 IAEA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뉴욕회담에서 좋은 결과가 얻어지길 기대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뉴욕회담의 결과를 미리 점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북한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아무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뉴욕회담이 결렬돼 예정대로 12일부터 북한의 NPT탈퇴가 공식 발효될 경우다.IAEA와 북한간에 체결된 핵안전협정은 NPT조약 당사국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북한의 NPT탈퇴가 발효되면 자동적으로 무효화된다.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감시·통제할 유일한 방안마저 사라져 북한은 마음놓고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을 것이고 IAEA가 최악의 실패를 경험하는 것은 물론 국제사회 전체가 큰 시련에 빠질 것이다. 물론 경제제재 등 유엔안보리의 제재조치가 남아있기는 하다.그러나 북한이 기존의 입장을 고수,끝내 NPT탈퇴를 강행할 경우 경제제재조치에 굴복해 다시 NPT에 복귀할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우며 설사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IAEA는 북한이 NPT를 탈퇴한다 하더라도 북한과의 외교적 접촉창구는 계속 열어놓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또 북한도 IAEA와의 접촉은 계속하기를 희망하고 있다.그러나 북한이 NPT를 탈퇴하고 그에 대한 대응으로 유엔의 대북한제재조치 등이 취해지는 상황에서 IAEA와 북한간의 대화에 큰 기대를 걸기는 어려울 것 같다. 북한핵문제를 거론하는 IAEA 정례이사회 회의장에서조차 모든 시선은 뉴욕을 향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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