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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엔에 송환호소 팩스/고상문씨 가족/고등판무관 개입 요청

    수도여고교사로 북한에 납북된 고상문씨의 가족들은 3일 상오 고씨의 송환을 호소하는 탄원서를 「유엔 긴급 인권구조 팩스」를 통해 호세 아얄라 라소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에게 보냈다. 고씨의 형 상구씨는 이날 아침 외무부 인권사회과에 설치된 팩스를 이용,가족들 이름으로 보낸 탄원서에서 고씨가 납북되던 지난 79년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한뒤 『지난 15년은 절망과 시련의 시간이었다』고 말하고 고씨의 조속한 송환을 위해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이 직접 개입해 줄 것을 요청했다. 고씨 가족은 또 『이제 더이상 갈구해온 재회를 기다릴 여유가 없고 우리 가족의 결합을 가져오는 마지막 기회로서 당신에게 편지를 드린다』고 말하고 『우리의 작은 절규가 유엔인권 고등판무관실에 도달하여 우리의 사랑하는 아들이 하루속히 돌아오길 기원한다』고 호소했다. 유엔 긴급인권구조 팩스는 지난 5월 유엔인권사무국이 세계 여러지역에서 발생하는 인권사례에 대한 고발을 접수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24시간 운영되는 긴급 구조 요청제도이다.이에 따라 고씨 가족의 탄원서는 즉각 유엔 인권 고등판무관에게 전달되며 고등판무관은 이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한뒤 고씨가족에게 이를 알리게 된다.
  • 8·2보선 3곳 당선자 인터뷰

    ◎강원 영월·평창 김기수씨/“산적한 지역현안 해결에 몰두” 『정치초년병으로서 정치적 경력이 많은 분들을 물리치고 당선된 것은 확실히 영광이 아닐 수 없지만 영광에 앞서 무거운 책임을 느낍니다』 승리가 확정된 순간 민자당의 김기수당선자는 가난과 배고픔에 자살까지 기도했던 성장기의 시련이 상기되는듯 담담하고 낮은 어조로 소감을 피력하고 『앞으로 고 심명보의원의 지난 2년동안 활동공백으로 산적한 지역현안 사업들을 해결하는데 몰두하겠다』고 했다. 평창출신인 김씨는 지역현안 사업으로 제천취수장설치문제와 덕포 상습침수지 배수펌프설치문제등 주로 녕월지역의 숙원사업을 지적했다. 그는 특히 농민유권자가 절반을 넘는 곳에서 민자당후보가 당선된데 대해 『이제는 농민들이 시시비비와 각 당의 정책적 득실을 잘 안다』면서 『이는 우리 당이 내놓은 농어촌발전대책에 농민들이 큰 희망을 걸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며 야당의 위기론은 이제 사라졌다고 본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승리요인에 대해서는 『이번 선거는 김권·관권선거가 사라지고 인물과 정책본위로 치러졌으며 따라서 당의 정책이 크게 호응을 받은 결과』라고 공을 중앙당에 돌렸다. 개정된 선거법으로 선거운동을 한 소감을 묻자 『40여년동안 익숙해온 선거풍토가 하루아침에 바뀌어 솔직히 어려움도 있었지만 유권자들의 빠른 의식전환으로 사상 유례없는 깨끗한 선거로 당선돼 기쁘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경쟁후보와 달리 중앙당이 지원을 전혀 해주지 않은 점에 대해서는 『중앙당의 지원에 있어서는 야당에 결정적 열세를 면치 못했다』는 말로 섭섭함도 토로했다. ▲평창출신(57) ▲춘천고·서울대법대졸▲행정고시합격▲평창경찰서장 ▲LA총영사관 영사 ▲경찰대 교수부장 ▲강원도경찰국장 ▲부산지방경찰청장 ▲경찰청차장 ▲이상호씨(52)와의 사이에 1남1녀. ◎대구수성갑 현경자씨/“대구시민이 「심판」에 감사할뿐” 『고맙습니다,고맙습니다…』 대구 수성갑의 현경자씨(신민)는 하염없는 눈물로 당선의 기쁨을 나타냈다. 20일동안의 선거운동기간 인이 박힌 듯 당선이 확정된 뒤에도 두손을 내밀며 허리를 깊숙이 굽혔다.도무지 팔을 치켜들줄 몰랐다. 3일 새벽 간발의 우세가 요지부동의 승리로 굳어지면서 선거사무실에 모습을 나타낸 현씨는 쏟아지는 축하인사에 눈물로 답했다. 『그저 「해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대구시민들에게 고맙다는 말밖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고맙습니다』 줄곧 「박철언전의원의 부인」인 현씨는 『이번 선거는 현정부의 표적사정에 대한 대구시민들의 심판』이라고 옹골차게 말했다. 현씨는 『금배지를 달기 위해 출마한 것이 아니라 현정부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출마한 것을 여러분들이 잘 알지 않느냐』면서 『이제 민심이 어디에 있는지가 확연히 드러났다』고 말했다. 『처음 출마를 결심할 때만 해도 「이러면 무엇 하나」하는 생각에 무척 망설였다』면서 『그러나 투옥돼 있는 남편을 생각할 때마다 너무도 억울해 마음을 다잡았다』고 밝혔다. 『유세가 너무 힘들어 고통스럽다가도 다른 11명의 후보로부터 집중공격을 받을 때는 오히려 오기가 났다』는 현씨는 『남편으로부터 일주일에 한차례씩 오는 격려편지가 가장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비록 정치에는 문외한이지만 대구시민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남은 1년반의 임기동안 최선을 다하겠다』면서 『특히 정부의 일방적인 독주를 견제하는 역할에 충실하겠다』고 다짐했다. ▲경북 고령(47) ▲경남여고 ▲한양대 역사학과 ▲연세대학원 ▲근육병환지돕기후원회장 ▲성나자로마을후원회장 ▲적십자중앙부녀회원 ▲향토문화복지연구소고문 ▲제일여성대학명예회장 ◎경북 경주 이상두씨/“공정경쟁속 정책대결로 당선” 『지방색을 거둬내고 민주당에 표를 던져주신 경주시민 여러분께 존경을 표하고 싶습니다』 2일 경주시 보궐선거에서 막판 혼전끝에 당선된 이상두씨(54·민주당 경주시지구당위원장)는 헹가래를 쳐주는 당원들앞에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씨는 『전국 최고의 상수원건설,경주역사이전및 교통체증해소,대책없는 쌀수입개방 저지,황성공원등 천년고도의 문화공간 확충등 선거과정에서 제시된 지역개발 및 정책공약을 착실히 실천,남은 1년반의 임기동안 유권자들의 기대에 반드시 보답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씨는 특히 『개정선거법에 따라 여야후보들이 금권·관권의 개입없이 공정한 경쟁속에 정책대결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이 당선에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이씨는 이날의 당선을 『14대 국회들어 민주당의 불모지가 된 영남권에서 첫 의석을 확보,영남지역의 이른바 「비민주정서」를 불식하는 교두보를 마련한 작은 혁명』이라고 표현했다. 이씨는 아울러 『어려운 세월동안 묵묵히 뒷바라지 해준 아내에게 감사한다』고 말하고 선거운동기간동안 노심초사하다가 쓰러진 부친 이용우옹(75)께 첫 당선보고를 드리고 싶다고 했다. 이씨가 정치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지난 60년 건국대 법학과에 입학한뒤 외숙이자 국회의원이었던 최영근 현 민주당 상임고문 집에 기거하면서부터. 67년 경주에서 7대 국회의원에 첫출마,낙선의 쓴잔을 마셨다. 87년 평민당 지구당위원장을 맡아 88년 13대 선거에 출마했으나 뿌리깊은 「반 호남정서」속에 낙선한뒤 「범민주연합」 경주시·군 공동대표로 활동하는등 정치에의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경주 외동출생(54) ▲경주고졸,건국대 법학과 중퇴 ▲신동아백화점·대성콘크리트대표 ▲7·13·14대 국회의원출마,91년 도의회출마 ▲범민주연합경주시·군공동대표 ▲민주당 이기택대표 정치담당특별보좌역 ▲민주당 경주시지구당위원장.
  • 북 김정일 신체제/핵문제 강경유지/일지 전망

    【도쿄 연합】 북한의 김정일은 권력기반의 열쇠를 쥐고 있는 군의 지지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중동을 비롯,아프리카 제국에 대한 무기매각을 일층 증대시키려 하고 있다는 관측이 미국내에서 점차 높아지고 있다고 일본의 산케이신문이 23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미국의 군사전문주간지 「디펜스뉴스」 최신호를 인용,이같이 전하고 강경파가 우세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군의 압력으로 김정일 신체제는 곧 재개될 미국과의 핵교섭에서도 태도를 보다 경화시키게 될 것이라는 견해가 강해 핵확산금지조약(NPT)체제는 시련에 봉착할 것같다고 밝혔다.
  • 덕수궁/궁궐:9(서울 6백년만상:46)

    ◎함녕전 화재후 1906년 중건/고종,수옥헌을 거처로… 을사조약 체결도/석조전은 최초 서양식건물… 9년걸려 지어 덕수궁은 궁의 이름을 고종의 존호를 따온데서 알 수있듯이 고종과는 떼 놓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종41년(1904년) 4월14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불이나 대한문과 대분의 전각이 불에 탔다.중신들은 고종에게 경복궁이나 창덕궁으로 옮길 것을 권했으나 경복궁의 민비 참변사건과 창덕궁에서 갑신정변·임오군란의 쓰라린 경험때문에 옮기기를 꺼려했다.이에 고종은 화마를 면한 수옥헌으로 거처를 옮기고 중건에 착공,2년뒤 완공을 보았다. 오늘날 남아 있는 모든 전각들은 이때 지어진 것들이다. 고종이 거처를 옮긴 수옥헌에서 이듬해 11월18일 이등박문을 앞세운 일제의 강압과 이완용의 매국행위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됐다.또 고종이 헤이그밀사사건을 계획했던 곳이기도 하다.결국 이 사건으로 고종이 왕위에서 물러나고 왕위를 이어받은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길때까지 거처로 삼았다.지금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으나 수옥헌은 정동교회를 조금지나 오른쪽으로 꺾어져 들어가 미대사관저와 인접한 곳에 있었다. 영국의 건축가 하딩이 설계,1900년에 공사에 착공한뒤 9년만에 완공한 석조전은 두개의 동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우리 나라 최최의 서양식 건물로 화강암으로 쌓아 올린 3층건물이다.임금의 거처로 쓰일 예정이었으나 완공을 못보고 국운이 기울어 빛을 보지 못했다. 석조전은 광복후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이후 국립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다 지금은 궁중유물 전시관과 문화재관리국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덕수궁의 또하나의 현대식 유물은 석조전 앞의 청동 분수대.1937년 만들어진 이 분수대는 2차대전당시 일제에 의해 전시물자로 철거돼 콘크리트로 대체됐다가 지난 84년 복원됐다. 정문인 대한문을 들어서면 여느 궁궐과 마찬가지로 김천교라는 돌다리가 놓여있다.이 돌다리는 일제가 자동차 통행을 위해 흙으로 덮었두었으나 광복후 40년이 지나도록 존재자체를 모르다가 지난 86년에 비로소 복원되는 말못할 사연을 안고 있다. 일제에 의해축소되고 훼손된 덕수궁은 1960년대 들어 또한번 시련을 겪었다.태평로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담장을 허물어 대한문에서부터 태평로 파출소까지 철책을 두른 것이다. 이때 오늘날 시민들의 만남의 광장으로 애용되고 있는 대한문과 문앞을 지키고 있는 두마리의 석수도 태평로의 도로가 넓혀진 만큼 뒤로 물러나는 설움을 받았다.이것도 모자라 서울시는 덕수궁을 시민공원으로 만든다는 발상아래 스케이트장을 만들고 상점과 음식점을 지었다.담장도 뒤로 물러 앉은 상태로 복원됐으나 궁궐내부는 옛모습을 많이 잃었다. 그러나 옛것과 새로운 것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덕수궁안에 들어서면 언제나 유유자적했던 선조들의 정취를 맛볼 수 있어 좋다. 비록 옛 모습이 훼손되기는 했어도 서울의 궁궐 가운데 가장 도심에 자리잡고 있는 덕수궁의 규모는 1만8천여평.크기는 작지만 각박한 현실에 쫓겨 사는 서울시민들에겐 더없이 소중한 휴식공간으로 서울의 새로운 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 흥망성쇠(백제를 다시본다:20)

    ◎근초고왕,북 평양성·남 마한까지 정복/야심적 국토 확장… 가야도 영향권에/고구려 장수왕에 한성 잃고 공주로/한강유역 되찾은 성왕 사후엔 서남부에 고립… 1백년뒤 멸망 우리 역사상 삼국시대처럼 장기간에 걸쳐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던 때는 달리 없다.삼국이 본격적으로 정립의 형세를 갖추게 된 것은 대략 4세기 중엽이었다.그리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이 7세기 후반으로 접어들 무렵이었으니,삼국간의 항쟁은 3백년동안이나 지속된 셈이다. 현재 남한지역에는 약 8백개소에 달하는 고대 산성이 분포되어 있다.삼국간의 항쟁이란 이 산성의 탈취를 둘러싼 공방전에 다름아니었다.그런데 삼국의 전쟁양상을 보면,고구려와 신라가 대체로 영토팽창을 목적으로 하여 시종일관 공세적 입장을 취한 반면 백제는 고토의 수복 내지 조국수호를 목적으로한 수세적 입장을 취한 점이 특색이라 할 수 있다.하긴 이는 어디까지나 대체적인 경향을 말한 것일뿐,주어진 형편에 따라서 혹은 군주의 개성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방어적 입장 견지 백제가 가장 야심적인 팽창을 꾀한 것은 4세기 중엽 근소고왕때였다.실로 그는 백제의 전역사를 통틀어 으뜸가는 정복군주였다.바야흐로 당시는 중국이 남북조 분열의 혼란기에 접어들 무렵이었다.이에 따라 그때까지 줄곧 중국세력과 대치해 있던 고구려는 재빨리 대동강유역에 있던 낙낭군을 없애버리고 여세를 몰아 황해도일대로 진격해왔다.이에 이른바 대방고지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던 근초고왕은 북진을 개시,고구려군을 황해도방면에서 잇따아 격파했다.근초고왕은 369년 고구려대군을 치양(백천)전투에서 크게 이겼고,2년 뒤에는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케 했다.한편 근초고왕은 방향을 남쪽으로 돌려 호남지방에서 끈질기게 버티고 있던 마한 잔존세력을 정복했고,다시 서쪽으로 손을 뻗쳐 경상도 남해안지방의 가야세력에도 영향력을 과시했다.신라는 백제의 위협에 직면하여 고구려에 원조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다만 근초고왕이 죽은 뒤 백제는 차츰 수세에 몰리게 된다.광개토왕의 대원정으로 백제는 크게고전했고,서기 475년에는 장수왕이 거느린 고구려대군이 수도 한성(서울)을 기습적으로 포위공략하여 개로왕을 잡아 죽였다.이때 백제는 기름진 한강유역을 송두리째 고구려에 빼앗겨 충남 아산∼천안을 국경선으로 하여 고구려의 남침에 대비했다.이렇게 시작된 공주시대 60여년간은 백제 최대의 시련기였다.다만 이 시기에 신라와 우호친선관계를 유지한 것이 그나마 큰 힘이 되었다. 서기 538년 성왕은 야영도시 공주를 버리고 오래 전부터 점찍어둔 부여로 천도했다.성왕은 국가중흥을 기약하며 여러 부문에서 나라의 면목을 일신했다.그런 다음 신라의 진흥왕을 설득하여 551년을 기해 북진을 개시,한강유역에서 고구려군대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지난날 백제의 심장부이던 한강하류 현서울일원은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왔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동맹국이었던 신라가 갑자기 표변하여 한강 상류지역에서 하류지역으로 소리없이 침투하여 순식간에 백제군을 몰아내었다.이로써 성왕의 웅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신라의 배신행위에 격분한 성왕이 신라국경으로 쳐들어가던중 현 충북 옥천지방의 관산성에서 신라군의 기습을 받아 장렬히 전사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사실이다. ○부여로 옮겨 정비 이때부터 백제는 660년에 멸망될 때까지 한반도 서남부에 고립된 채 국가경영을 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비록 때때로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에 대항했으나,서해안과 남해안을 제외한 모든 방면에서 신라에 의해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다.하긴 신라의 약점도 있었다.왜냐하면 백제와의 국경선이 너무나 길어진 결과 전선의 탄력성이 감소했기 때문이다.7세기 전반기에 무왕은 이 점을 최대로 이용했다.그는 40여년간 재위하는 동안 신라의 약점을 계속 건드렸다.전북 무주에 있는 나제통문일대와 남원 설봉에서부터 소백산맥을 넘어 경남 함양에 이르는 일대가 당시의 격전지였다.백제는 이 두 방면의 전투에서 우세를 보이기도 했으나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전선은 고착되고 말았다. 무왕의 아들 의자왕은 641년 즉위하자마자 신라에 대해 야심적인 전쟁을 벌였다.즉 백제군은 함양을 발진기지로 하여 단기간내에 멀리 진주·협천방면에까지 손을 뻗쳤다.신라의 낙동강방면군 사령부가 위치했던 합천의 대야성이 함락된 것이 642년의 일이었다.이로써 백제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신라 수도 경주를 위협하게 되었다.그러나 이같은 의자왕의 군사적 승리가 백제 멸망의 원인이 되었음은 역사의 아리로니가 아닐 수 없다.왜냐하면 이로써 의자왕은 헛된 자만심에 빠져 그 뒤 정치를 그르치게 되었고,반면 신라는 국가위기상황에서 절치부심하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제국의 군사력을 이용하고 말겠다는 비밀외교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삼국항쟁을 통해서 볼 때 백제는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평화지향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근초고왕때 고구려군대를 격파하면서 승승장구 수곡성(황해도 신계)서북에까지 이르렀던 장군 막고해가 이 정도의 승리로 만족해야 한다며 회군을 건의한 사실이라든지,불교 교리에 투철했던 법왕이 599년 즉위하자마자 일체의 생물을 죽이지 말도록 금령을 내리면서 심지어 물고기 잡는 그물까지 불태워버리게 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일화다.사실 같은 시기 신라 최고의 지성이었던 원광법사가 세속5계를 제정,비록 단서를 달긴 했지만 살생을 허용했던 것과는 큰 차이가 난다. ○합천 대야성 함락 삼국시대는 첩보전이 유행한 때이기도 했다.고구려의 장수왕이 백제를 치기 전에 승려 도임을 첩자로 백제에 밀파하여 개로왕을 유혹,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이게 하면서 내부분열을 꾀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이 점은 신라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김유신은 현령이었던 조미곤을 포로로 가장하여 백제에 잠입시킨 뒤 그를 통해 백제의 기밀을 입수했을 뿐아니라 끝내 좌평 임자와 같은 유력인사를 매수하는 데 성공했다.그러나 백제의 경우에는 이같은 비열한 첩보전략에 열중한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어 기이한 느낌마저 든다.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항상 비정한 것이고,인간의 선의만 가지고서는 결코 대업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 대목이라고 생각된다. ◎전쟁기록/6세기후반부터 본격 삼국항쟁/옥천전투선 백제 성왕등 3만명 전사 삼국이 정립한 시기는 영토확장을위한 많은 정복전쟁을 수행했기 때문에 사실상 대립의 시대에 해당한다.「삼국사기」에 나타난 크고 작은 정쟁기록만 보아도 4백80회에 이른다. 이 같은 기록은 「삼국사기」 전체 기사 가운데 16.8%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전쟁기사의 비중은 큰 것이다. 그러나 전쟁의 횟수는 「삼국사기」기록 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고구려 광개토왕릉비의 비문을 통한 전쟁기록만 검토해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광개토왕 재위연간(AD 392∼412년)의 전쟁기사는 고작 3회 정도이지만,능비에 적은 전쟁기록은 7회로 집계되었다. 광개토왕 자신이 종횡무진으로 전쟁에 참여한 정복군주라는 점을 고려하면 비문 기록이 합당할 수도 있다. 광개토왕릉비가 보여주는 것처럼 4세기는 우선 국왕중심으로 지배체제를 확고히 하는 시기다. 권력이 국왕에게 집중되면서 국왕이 친히 총사령관으로 정복전쟁에 참여한다. 보기라는 말로 보병과 기병이 동원된 가운데 오늘날 경기 북부와 서울일원에서 광개토왕이 백제 아화왕과 직접 조우하는 것도 이시기다. 동북아 세력판도변화에 따라 고구려가 후연과 같은 북방에 신경을 쓰고 있을 무렵 고구려 남방을 공략하기도 했다. 이같은 전쟁은 일반백성의 참여는 물론 경제력이 뒷받침 되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결국 잦은 전쟁은 국력 대결양상의 총력전 기반구축을 촉진함으로써 6세기 후반이후 1백년 동안 삼국은 피나는 항쟁기를 맞는다. 백제의 경우 「삼국사기」 백제본기 전체기사 가운데 전쟁기록은 20.6%를 차지한다. 전체평균치(16.3%)에 비해 높은 것은 고구려와 신라를 겨냥하고 싸웠기 때문이다. 백제 쪽에서 볼때 가장 처참한 전쟁은 왕이 전사하는 AD554년 관산성(옥천)전투다. 신라에 의해 3만대군을 잃었다. 이를 원상 회복하는 데 반세기가 걸렸다. 삼국이 막바지 각축을 벌인 7세기 중반에 백제가 거둔 빛나는 승리가 있다면 AD642년 신라의 수도를 위협한 대야성 함락. 같은 해 신라군을 몰아낸 당항성(경기 화성군 서신면 당성) 전투와 더불어 백제의 마지막 전승으로 기록된다.
  • 「독단 이미지」 벗으려 했으나…/황낙주의장 첫 의정운영 평가

    ◎사회권 독점 반대… 야발언기회 확대/“강단있다”·“밀어붙이기식” 반응 갈려 황락주국회의장은 의장으로서 의사봉을 잡은 첫무대부터 시련을 겪어야 했다.14일 폐회된 제1백69회 임시국회 초반 입법부 수장직에 오르면서부터 예상됐던 일이다.그는 야당의 끈질긴 반대 속에 의사운영을 원만하게 이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직접 체감했다. 황의장이 첫 시련을 무난히 극복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야가 서로 다른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특히 지난 9일 대법관 임명동의안의 처리를 놓고는 더하다.황의장이나 민자당측은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표결처리한 것은 의회민주주의에 부합되는 것으로 잘한 일』이라고 호평을 내리고 있다.민자당이 처음부터 기대했듯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한 강단을 보여줌으로써 강행할 사안이 있으면 강행한다는 것을 입증시켰다』고 칭찬했다.반면 민주당은 이같은 「밀어붙이기식 운영」이 14대 국회 후반기동안 계속될 것이라고 성토하고 있다.박지원대변인은 『다수결원칙을 내세워 소수의견을 무시한 것은 힘의 논리에 기초한 국회운영』이라고 비난했다. 이러한 이견은 황의장 개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여와 야라는 상반된 두 의정주체의 속성상 불가피한 것이다. 황의장은 이만섭전임의장과 다른 면을 부각시키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이전의장이 사회권을 독점한다고 불만을 품어왔던 그는 이춘구·홍영기부의장에게도 의사봉을 자주 넘겨주어 회의를 고르게 이끌고 가려고 했다.취임 일성에서 강조했듯이 집권당의 「독단시비」를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 민주당 의원들에게 발언기회도 되도록 많이 주는 노력도 엿보였다.대법관 임명동의안에 대해 표결을 선포한 뒤에도 민주당 의원에게 발언기회를 주려했다.민주당측에 대한 발언허용은 국회법에 위배된다는 민자당측의 반대에 부딪쳐 철회됐지만 나름대로 야당을 배려하는 노력은 높이 평가될 만하다는 대목이다. 황의장에게는 자신의 정치생명을 좌우할만큼 민감한 시험대가 곳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국민 특히 농민들의 정서를 등에 업은 민주당의 강력한 반대속에 처리해야 하는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동의안의 국회비준문제다.대법관 임명동의안은 민주당의 비교적 강도가 약한 반대속에 넘어갔지만 이 비준은 민주당에서 「몸」으로 막을 기세다.지난해 겪었던 내년도 예산안 처리도 예외일수 없고,후반기로 갈수록 여야간의 첨예한 대립을 극복해야 한다. 그는 첫무대에서 가라앉히지 못한 「독단시비」를 해소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포부를 갖고 있다.그래서 야당의 지도부는 물론이고 평의원까지 열심히 만날 계획이다.
  • “북핵 조기해결의 찬스” 판단/미의 대북한 유화제스처 배경

    ◎김정일의 입지 넓혀줘야 긴장해소 도움/평양 자극 자제… 강온파 권력투쟁 차단 클린턴 미행정부가 북한의 김정일체제를 현실로 인정하고 대북유화정책을 지속키로 사실상 방침을 정한 것은 북핵문제등 한반도 긴장요인을 가급적 빨리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10일 미국과 북한은 김일성주석 장례가 끝난뒤 제네바에서 3단계 고위회담을 재개키로 합의했다.이에 앞서 클린턴행정부는 남북한정상회담과 미­북고위회담이 계속 추진되기를 바란다는 「대화계속」입장을 밝혔다. 미국이 사실상 김정일체제를 인정키로 한 것은 두가지 이유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첫째 모든 정보를 종합할때 적어도 현재로선 김정일의 권력승계가 순조롭고 신속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북한의 은밀한 정보획득이 극히 어려운 실정이지만 김일성 장례절차진행과 인민대표자대회의 소집등 공개된 정보로 미뤄볼때 김정일에로의 권력이양이 비교적 원만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김정일체제 인정을 통해 그의 입지를 확고히 해주는 것이 북핵문제의 조속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다. 미국은 북한핵문제가 결코 시간을 오래 끌 수 있는 성격의 문제가 아닌것으로 판단하고 있다.지난 6월 원자로에서 인출한 연료봉들은 현재 냉각저수조에 보관돼 있지만 북한측은 늦어도 8월말에는 연료봉 표피의 화학작용으로 안전에 문제가 생기기때문에 이를 꺼내 재처리를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제네바회담에서 미측은 저수조의 용액을 특수여과시키거나 조절함으로써 그 기간을 연장시키는 기술을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으나 북측은 구체적인 대답을 하지않은 것으로 워싱턴 포스트지는 전하고 있다. 또 북한측은 김일성 사망에도 불구하고 「정책의 연속성」은 보장될 것이라고 포괄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김일성의 핵동결 약속이 확실히 지켜질 것인지 여부에 대해 구체적으로 확답을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워싱턴은 권력승계문제로 북한내부가 혼란에 휩싸일 경우 핵문제가 무작정 방치되거나 핵개발을 지지하는 군부의 환심을 사려는 권력경쟁자들에 의해 강경노선 증폭현상을 빚을 수도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클린턴행정부는 제임스 울시CIA국장이 지적했듯 수개월후 북한이 핵폭탄 4∼5개를 제조할 수 있는 분량의 플루토늄을 보유하게 되는 사태를 반드시 막아야한다는 절대절명의 과제를 안고있다. 따라서 북한이 내부 체제정비에 몰두,대외정책수행을 제대로 하지않을 경우 미­북고위회담은 무한정 지연되고 북한군부가 또다시 플루토늄을 추출,핵위기를 초래할 가능성이 없지않다고 보는 것이다. 북한이 장례후 고위회담을 재개하자고 제의는 했으나 구체적으로 일자를 밝히지 않았다.김정일의 권력승계가 순조롭게 이뤄질 경우 북한당국은 이를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3단계회담을 조기에 재개하자고 제의할 것으로 보인다. 미행정부는 김일성의 핵동결약속이 기억에 생생한 상태에서 하루라도 빨리 핵문제를 해결해보자는 것이 기본입장인 셈이다. 미국은 이와 함께 아주 민감한 권력이양기를 맞은 북한을 자극하거나 신경을 곤두세우게하는 행동은 극히 자제한다는 방침이다. 말하자면 깨지기 쉬운 유리접시를 조심스레 함속에 옮겨놓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 「미­북회담 연기」 발표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 전인민은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주석의 서거에 깊은 비통과 슬픔에 잠겨 있다.우리의 사회주의 대의명제가 중첩된 난관과 시련들을 뚫고 장도에 올라 있고 우리의 혁명과 민족통일 앞에 새로운 국면이 열리고 있는 이 역사적 시점에 우리 당과 인민의 위대한 지도자이시며 자애로운 어버이이신 김일성주석께서 갑작스럽게 서거한 것은 우리 당과 혁명 그리고 온나라의 가장 큰 손실이다.이와 관련해서 미국측 수석대표인 로버트 갈루치 국무차관보는 오늘 제네바주재 DPRK 상주대표부로 우리 대표단장인 강석주 외교부 제1부부장을 찾아와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주석의 서거에 애도를 표시했다. 강석주대표단장은 로버트 갈루치씨가 미대표단과 정부를 대신해 애도를 전한데 대해 감사를 표시했다. 이에 따라 DPRK대표단은 현재의 북·미 3단계 고위급회담을 장례식 기간동안 연기할 것과 뉴욕의 외교채널을 통해 3차회담 재개일자를 결정할 것을 제의했다.미대표단은 이같은 제의에 이해를 표시하고 동의했다.
  • 중국의 강제적 인구정책 고발/「…여인의 투쟁」 미서 출간

    ◎중절수술 맡았던 간호사 수기를 소설로 지난 80년 중국에서는 급증하는 인구로 경제가 위협을 받자 당차원에서 1가정 1자녀 갖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79년 등소평의 연설에서 비롯된 이 운동은 80년부터 의료진에 피임 또는 중절수술 성과할당제까지 시행하는등 강제성을 띠면서 여성의 인격을 짓밟았다. 당시 강행되던 무더기 수술을 담당했던 간호사이면서 마침내는 엄마로서 자신도 강제 중절수술에 직면했던 한 여인의 충격적인 이야기를 담은 책이 최근 발행됐다. 「한 어머니의 시련­중국의 1자녀 정책에 저항한 여인의 투쟁」이라는 긴 제목을 가진 책의 저자는 중국 유학 경력이 있는 미국 인류학자 스티븐 모셔. 스탠포드대 인류학 박사과정에 있던 모셔는 80년 미국인 학자로는 처음으로 중국 현장학습의 기회를 얻었다.평소 중국혁명에 매력을 느끼던 모셔였지만 9개월의 짧은 중국 체류 뒤에는 회의를 품게 됐다.임신한 중국여인들이 강제 중절수술을 받으러 떼지어 병원을 찾는 모습을 목격하고나서부터다. 80년대 대만의 신문에 중국사회를 비판하는 글을 자주 발표해 중국당국의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던 모셔의 이번 책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1인칭 소설이다. 시대적 배경은 하나만 낳기 운동이 극에 달해 이를 어길 경우 대중적 비판,무거운 벌금,직위 강등,식량배급 중단 등의 불이익을 받은 80년대 중반.당시 임신중절이나 불임수술 등의 시행건수가 1년에 3천만건에 달했을 때다. 소설의 주인공 치안은 기술자의 딸로 대약진운동과 배고픔속에서 유년과 청년시절을 보냈으며 간호학을 배우던 셴양의학대학에서는 홍위병으로 활약했다. 그녀가 처음으로 중절수술에 나선 곳은 어느 시골.남아선호사상이 뿌리깊은 시골에서는 1자녀운동이 뿌리내리기 힘들었다.따라서 당은 많은 의료진들을 시골에 보내 피임교육과 더불어 중절수술을 강행하도록 했다.치안은 이 환자에서 저 환자로 옮겨 다니며 절개하고 깁고,1시간내 10여명의 생명을 없애는 끔찍한 경험을 했다. 치안은 어느 트럭공장의 출산규제 할당량을 맡고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여성연맹대표들이 여성 노동자의 생리기간과 피임방법을 모두 탐지하고 있었다.만약 한 여성이 두번째 임신을 했을 경우 공개회의때 혹독한 비판을 하고 그래도 출산을 고집하면 「치료」를 받는데 동의할 때까지 광속에 감금하기도 했다. 치안도 할당량을 채우기 위한 방편으로,임신을 숨기던 친구를 찾아내 광속에 집어넣어 수술을 종용했다.결국 친구가 눈물을 흘리며 병원을 찾자 치안은 극심한 감정의 혼란을 겪는다. 이처럼 같은 여성으로서 여성의 몸과 마음을 아프게 했던 치안이 당의 정책에 등을 돌리게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90년 미국에서 장학생으로 공부를 하고 있던 남편과 함께 살게 되면서 3번째 임신을 한 치안은 본국에서 태아를 당장 없애라는 명령의 편지를 받는다.자신이 강제로 중절수술을 받아야 할 처지에 놓이자 그때서야 그동안 자기가 저지른 일이 얼마나 반인간적이었는지를 깨닫고 당관료들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품으며 이 정책의 반대자로 나선다. 지금도 2000년대 총인구 12억을 목표로 1자녀갖기 운동을 추진하고 있는 중국.부작용이 많은 이 운동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 「김일성사상」 정관가 반응과 대응

    ◎“주말의 충격”… 즉각 비상근무 돌입/사망원인·조문사절 배경 분석 분주/김 대통령 오찬중 보고에 “깜짝”/북의 군사동향 시시각각 체크/박 경호실장 회담전 사망 예감 들었다” 9일 낮 북한주석 김일성의 돌연한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정·관가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비상조치와 더불어 앞으로의 대응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긴박하게 움직였다. ▷청와대◁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개최 보름을 앞두고 김일성의 돌연한 사망에 접한 청와대는 당혹감과 아쉬움이 교차. 김영삼대통령은 이날 긴급안전보장회의를 소집한 자리에서 『보름후면 남북정상이 함께 모여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장래를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계획이었는데 아쉽게 됐다』고 솔직한 심정을 피력.김대통령은 『그러나 계속해서 한반도의 평화와 7천만의 안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역설해 남북대화의 빠른재개에 대한 희망을 피력. 김대통령이 이날 김의 사망소식을 접한 것은 본관 인왕실에서 있은 여성정책심의위원들과의 오찬장.김대통령은 12시2분쯤 김석우의전비서관의 메모를 통해 이를 보고받고는 『김일성이 죽었다고 한다』면서 놀란 표정으로 퇴장. 김대통령은 곧바로 옆방으로 들어가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리도록 조치하고 국가안전보장회의 소집을 지시. 김대통령은 12시10분쯤 뉴스를 듣고 황급히 청와대로 들어온 한승주외무·이병대국방장관,김덕안기부장,박관용비서실장,정종욱외교안보·주돈식공보수석과 대책회의를 갖고 국민들이 안심하도록 당부하고는 우리가 전쟁을 하는 일은 없을 것임을 북한에 확인시키는 「평화정책불변」을 강조. ○…이날 안전보장회의에서 김대통령은 『우리정부는 언제 어떤 사태가 일어나더라도 대응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춰왔다』면서 『국민들은 어떤 변화에도 동요 없이 생업에 전념해달라』고 거듭 당부. 이날 안보회의가 급거 소집되는 바람에 관계장관들은 대개가 회의가 임박해서야 청와대에 도착했고 정재석경제부총리는 김대통령이 입장,국민의례까지 끝내고서야 입장. 청와대에 10여분 일찍 도착한 관계장관들도 상황파악이 안돼 대기실에서 의견을 교환하기에 바빴는데 한승주외무장관은 이영덕국무총리가 『외국의 조문사절을 안받는게 굉장한 의미가 있는 것 같다』면서 판단을 구하자 『글쎄요』라고만 언급. 또 이양호합참의장은 이날 회의참석자들에게 군당국이 준비한 「김일성사망관련 군사대비」란 비밀문건을 배포. 주수석은 안전보장회의가 끝난뒤 통일부총리·외무·국방장관,안기부장의 분석적인 보고가 있었다고 발표했으나 그내용에 대해서는 함구. ○…청와대의 박상범경호실장은 얼마전 김대통령에게 『정상회담 전에 김일성이 죽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는 자신의 생각을 전했던 것으로 알려져 관심. 박실장은 꿈에 김일성이 죽는 모습이 자주 나타난다면서 김의 사망을 전망했었는데 관계자들은 박실장이 기공에 뛰어나고 오랜 경호전문가로 감각이 발달했다는 점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반응. ▷총리실◁ ○…이영덕국무총리는 상오 11시 조지호 중국 산동성장의 예방을 받은 뒤 북한의 중대발표 소식을 접하고 집무실에서 대기하다 TV를 통해 김일성의 사망소식을 들었다. 이총리는 곧바로 청와대에연락을 취한 뒤 이흥주비서실장과 김시형행정조정실장을 불러 김일성의 사망에 따른 부처별 긴급조치사항을 점검할 것을 지시. 이총리는 하오 1시30분쯤 집무실에서 간부들로부터 상황보고를 받은 뒤 국가안전보장회의 참석을 위해 청와대로 출발. 한편 황영하총무처장관은 하오 1시30분 전 공무원에 대한 비상대비령을 발동,비상시 즉시 연락이 가능한 체제를 유지하고 부득이한 사유로 근무지를 벗어날 때에도 미리 행선지를 알리도록 지시. ▷내무부◁ ○…내무부는 이날 하오 1시를 기해 전국경찰에 갑호비상근무령을 내리고 일선 행정기관장에게 정위치 근무를 지시하는등 긴급조치 마련에 발빠른 행보. 최형우장관은 이날 방한중인 중국 산동성 조지호성장 일행과 오찬을 함께 하던중 긴급호출을 받아 식사시간을 단축시킨채 긴급안전보장회의와 비상국무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청와대로 총총걸음. 비상근무중인 본부 공직자들은 TV뉴스에 눈길을 모은채 김일성의 직접적인 사망원인과 북한의 동향,그리고 앞으로 북한체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등 관심이 집중.한 고위 관계자는 『유일체제의 김일성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후계체제가 확립될 때까지 시간이 걸리거나 후계구도 불안정으로 우리에게도 시련이 닥칠 것에 대비해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국방부◁ ○…국방부는 평양방송을 통해 낮 12시쯤 김일성사망 사실이 밝혀지면서 급박하게 움직이기 시작. 국방부는 먼저 전군에 경계태세 강화조치를 내려 유사시에 대비하는 한편 전직원의 퇴근을 중단하고 이미 퇴근한 직원들도 이날 하오 3시까지 사무실에 복귀토록 조치.이와함께 비상시 위기조치반을 가동하기 위한 사전단계로 위기관리 초기대응반을 운용.국방부 정책기획관이 반장인 초기대응반은 정책·인사·동원·군수등 관련 부서 실무진으로 편성돼 미리 준비돼있는 위기상황 대비책을 점검하고 대책을 강구하는 임시 기동타격대(태스크 포스). 초기대응반은 이날 첫 회의에서 김정일의 권력승계가 원활히 이루어질 것인지를 예의주시하면서 상황에 맞춰 대책을 세워나가기로 일단 방침을 수립. 국방부는 또 조만간 차관보를 반장으로 하고 실무국장등을 위원으로 하는 위기조치반을 본격 가동할 예정. 한편 한미연합사는 이날 낮 12시30분 클라우치참모장등이 참석한 가운데 한미연합사 위기조치반을 따로 소집,북한의 정세를 면밀히 살펴보기로 결정. 국방부는 또 북한의 군사동향과 정세변동상황에 대한 정보를 그때그때 입수할 수 있도록 정보수단의 운용을 늘리는 방안을 주한미군측과 협의할 계획. ▷외무부◁ ○…김일성의 사망이 북한 내부는 물론 남북관계,동북아정세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내다보면서 미국·일본·중국·러시아등 주변 4강과 긴밀히 연락을 취해가며 사태를 예의주시. 한승주외무부장관은 김의 사망소식을 접한 직후 크리스토퍼 미국무장관과 제네바에 있는 북­미 3단계회담 미측 수석대표인 로버트 갈루치 국무차관보등과 전화통화를 갖고 향후 대책을 숙의. 한장관은 또 전기침중국외교부장과 고노 요헤이(하야양평)일본외무장관,안드레이 코지레프 러시아외무장관과도 가능한 빠른 시간안에 연락을 취해 김일성의 사망에 따른 국제공조체제를 구축할 방침. 외무부는 이날 한장관 주재로 열린 긴급 간부회의에서 외무부차원의 대책을 집중 논의하는 한편 사태의 중대성을 감안,박건우차관을 반장으로 관계 실국을 중심으로 비상대책반을 설치. 외무부는 아울러 김일성의 정확한 사망원인과 미·일·중·러시아등 주변 4강의 움직임등을 면밀히 체크해 보고하도록 재외공관에 긴급 지시. ▷통일원◁ ○…낮12시부터 송영대차관 주재로 긴급간부회의를 열고 다각적인 대응책을 논의. 이날 상오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온 이홍구부총리겸 통일원장관은 하오 1시15분쯤 「북한의 권력구조와 김주석의 사망에 따른 남북관계전망」이라는 긴급분석자료를 챙겨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에 참석. 통일원은 김일성의 사망이 자연사이냐 사고사이냐에 따라 앞으로의 북한정세가 판이하게 달라질 것이라고 판단,모든 채널을 통해 이를 확인하느라 각 사무실이 분주. 정보분석실은 김일성의 사망보도 이후 흘러나오는 북한뉴스를 시시각각으로 체크,상부에 보고하는등 남북정상회담준비를 위한 비상근무체제를 발전시킨 긴급근무체제에 돌입. ▷경제기획원◁ ○…한이헌경제기획원 차관은 9일 낮 긴급 경제부처 차관회의를 소집,남북 경제교류 등에 미칠 영향을 분석하고 이번 사태로 우리 경제가 흔들리지 않도록 만반의 조치를 강구해 줄 것을 당부. 기획원은 이미 남부관계의 변화 가능성을 여러 각도로 예상해 각 상황 별로 다각적인 시나리오을 마련해 놓은 상태.따라서 이를 재점검하는 외에 당장 대북관계와 관련한 별도의 대책은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 김일성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의 평화적인 대북 경제교류 방침에는 별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보이나 북한의 새로운 권력체계가 안정될 때까지는 남북 경제교류는 사실상 중단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민자당◁ ○…국회본회의가 끝난 직후 김일성의 사망소식을 접한 민자당은 크게 놀라워하면서 즉각 긴급 고위당직자회를 소집하는 등 앞으로의 안보대책과 당의 대응방향을 수립하기 위해 긴박하게 움직였다. 국회일정을 마치고 청구동으로 귀가하던 김종필대표는 라디오를 통해 소식을 듣고 곧바로 하오3시 긴급 고위당직자회의를 소집하고 사안의 심각성을 고려,당3역외에 황명수국회국방위원장과 신상우정보위원장을 특별히 참석시키라고 지시.이날 긴급고위당직자회의에서는 한반도의 안보정세와 관련,행정부를 당차원에서 적극 뒷받침하는 방안과 대국민안보의식 고취방안 등이 집중 논의됐다. ▷민주당◁ ○…9일 민자당의 대법관 임명동의안 일방처리에 항의,본회의장을 퇴장한뒤 긴급의원총회를 열어 대책을 논의하다가 김일성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서둘러 회의를 중단하고 사태파악에 착수. 이기택대표는 이날 의총도중 경주시 보선대책본부 현판식에 참석하기 위해 김포공항으로 가다 문희상비설실장의 긴급연락을 받고 즉시 국회로 돌아와 긴급최고위원회의 소집을 지시. 민주당은 회의에서 이영덕국무총리가 11일 본회의에 출석,정부가 수집한 모든 정보를 토대로 종합적인 상황을 보고해 줄 것을 요구하는 한편 신도시 장애물 활용 발언파문과 관련해 제출한 이병태국방부장관 해임건의안은 「국군의 비상태세 준비」를 위해 즉각 철회키로 결정. 민주당은 이와함께 당지도부를 비롯한 간부들을 전원 서울에서 대기하도록 하는 등 비상연락망을 구축,긴급사태에 대비.
  • 83년 이후 「서열 2위」… 당·정·군 장악

    ◎73년 김영주축출… 공적활동 전면등장/반대세력 반발불구 통치권확보 성공/성격 독선적·일부선 “통 크다”… 영화·연극에 큰 관심,직접 제작도 김정일이 사망한 북한주석 김일성에 대한 장례위원 가운데 서열 1위로 발표됨으로써 차기 권력승계작업이 일단은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공산정권의 전례로 비추어 볼 때 숨진 최고지도자의 장례위원장을 맡은 인사가 예외 없이 차기 통치권을 맡아 왔기 때문이다. 이날 그에 대해 북한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이 혁명의 계승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김정일은 20여년동안 끈질기게 권력승계 작업을 해온 결과 지난 83년 공식서열 2위에 오른 뒤부터 김일성 사망 직전까지 김일성에 이어 2인자의 위치를 굳혀왔다.군최고 사령관,원수,국방위원장,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중앙군사위원등 그의 맡아온 직책이 이를 입증한다.이복동생 김평일과의 불화설등 반대세력과의 권력투쟁설이 끊임없이 나돌기도 했지만 통치권 장악에 거의 성공한 것으로 관측돼 왔다. ○92년부터 승계완료그는 당·정·군등 북한내 3대 기본권력구조 가운데 형식적인 통수권은 국방위원장직으로 군에 대해서만 갖고 있다.그러나 김일성이 국가주석으로 정을,당 총비서로 당을 이끌어 오면서 형식적인 통수권자였지만 김정일은 사실상 이들 기관도 통치해 왔다는 것이 북한전문가의 대체적인 의견이다.이들 전문가들은 이미 권력승계작업은 지난 92년 김일성의 80회 생일부터 이 문제가 거론되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완료됐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와 관련해 김영남외교부장은 같은해 9월 제47차 유엔총회 참석차 뉴욕에 들렀다가 우리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김정일이 사실상 북한의 통치자라고 밝혔었다.앞서 같은해 4월1일 김일성생일행사의 하나로 개최됐던 주체사상토론회에서 김정일이 「당·국가·군대의 수위」로 지칭되고,김부자의 생일을 전후해 오진우인민무력부장,이종옥부주석,연형묵정무원총리등 당시의 당·정·군 간부들이 김정일에 대한 대를 이은 충성을 다짐하기도 했다.이때부터 김일성은 점차 일선에서 물러나는 듯한 움직임을 보여 이같은 관측을 뒷받침했다.김정일은 지난 92년 인민무력부장 오진우원수와 8명의 차솔진급자에게 계급장을 달아 줘 군통수권에 대한 첫 공식행사를 가짐으로써 이를 대내외에 천명했다.이어 지난해 4월에는 군 최고통수권자인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됐으며 3개월뒤 장성 99명에 대한 승진인사를 단행,혁명1세대를 퇴진시킴으로써 군을 완전 장악했다. 김정일이 후계자로 부각된 것은 지난 73년.사상·기술·문화 3대혁명소조운동과 3대혁명 붉은기쟁취운동의 실무지도자로 공적활동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같은해 9월 삼촌 김영주를 밀어내고 조직·사상담당 비서로,74년 2월 노동당 정치국 정치위원으로 추대됐다.그는 74년 2월 노동당 제5기 8차 전원대회에서 후계자로 결정됐으나 70년대까지만 해도 「당중앙」으로 모호하게 불려졌다.그러나 80년대부터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로 표현되기 시작했다.83년 4월이후 오진우인민무력부장을 제치고 당서열 제2위로 부상하면서 명실상부한 후계자의 위치를 굳혔다. 85년 4월에는 「당·국가수위」로 지칭됐다.85년 7월 북한언론으로부터 「김정일시대」라는 용어가 등장하고,91년에는 인민경제대학총장 김국훈이 김정일을 「미래의 위대한 수령」으로 후계구도를 공식적으로 가시화했다.이어 91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추대된뒤 92년 4월20일 원수칭호,93년 4월 최고인민회의 9기5차회의에서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됨으로써 군을 장악한 명실상부한 실권자로 등장했다. ○원래 이름은 「정일」 김정일은 김일성과 그의 첫부인인 김정숙 사이에서 태어난 2남1녀중 장남으로 지난 41년 2월16일생이고,원래 이름도 정일이라고 한다.그러나 뒤늦게 그를 우상화하는 편법으로 정일로 바꿨고 2년뒤 그의 출생연도도 1년 낮췄다는 설도 있다.82년은 이른바 「조선의 어머니」인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의 출생 90돌이자 김일성의 70돌이며,김일성이 창건했다는 조선인민혁명군의 50돌이었는데 그의 이름도 이에 맞춰 변조했다는 것이다.그의 이복동생 평일,성일에서 보듯 원래 항렬이 일자였다는 것이다. 어릴때 이름이 「슈라」인 것으로 미루어 출생지는 옛 소련이었음을 알 수 있으나 구체적인 지명은 사마르칸트,오케얀 스카야,하바로프스크등으로 엇갈린다.그러나 그를 우상화하는 과정에서 「백두미령」에서 출생해 『혁명의 준엄한 시련을 체험하면서 성장했다』고 미화됐다.북한은 이를 위해 김일성이 빨치산 활동을 할 때 백두산의 한 귀틀집에서 『백두산의 정기를 한몸에 받고 태어났다』는 이른바 「백두산정기설」을 뒷받침하는 각종 흔적들을 조작하기 시작했다.백두산의 「정일봉」,김정일의 탄생을 칭송하는 이른바 「구호나무」등이 그 흔적이다. ○3세대 평양 들어와 김정일은 세살때 광복과 함께 부모를 따라 소련함정을 타고 평양에 처음 들어왔다.43년 소련에서 태어난 남동생 「유라」(소련명)가 있었으나 2년뒤 김일성 관저 연못에 빠져 죽었다.7살때인 49년 9월 생모 김정숙이 출산중 사망하면서 여동생 김경희(46년생)와 함께 김일성의 외6촌동생 강연실에 의해 키워졌다.그의 성격은 생모와 사별후 난폭해지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성격은 괄괄하고 과격하며 독선적이나 통이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김일성앞에서도호주머니에 손을 넣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그는 아버지가 너무 바빠 홀로 어린시절을 보내온 것을 자주 불평했다고 한다.66년 홍일천과 연애결혼해 딸 하나를 낳고 69년 이혼한 뒤 73년 김혜숙과 재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일은 평양의 남산유치원을 나와 49년 간부 자녀들이 다니던 남산 제 4인민학교를 다녔으며 57년 8월 평양제1중학교,60년 8월 평양 제1고급중학교,64년 김일성대학 정치경제학과를 각각 졸업한뒤 노동당에 입당했다.70년 당 문화예술부장,71년 선전선동부 부장으로 진출하면서 영화촬영및 연극공연작업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온 것으로 전해진다.「피바다」「한 자위대원의 운명」「꽃파는 처녀」등 주요 영화와 가극을 직접 제작하는등 일년에 1백50∼2백편의 영화를 만들어 올만큼 북한영화계의 최고권위자로 꼽힌다.이같은 영화에 대한 애정때문에 신상옥씨 부부를 납치한 것이 깊숙이 베일에 가려져 있던 정체가 상세히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연표◁ △1941.2.16 소련 사마르칸트 출생(북한측,백두산 출생주장) △1953.2 만경대혁명학원(인민반)수학 △1960.8 남산고급중학교 졸업 △1964.3 김일성대학교 졸업(정치경제학과) △1964 노동당 조직지도부 지도원 △1971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 △1973.11 노동당 정치위원회 후보위원 △1974.2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 △1974.2 「후계자」로 결정(노동당 제5기 8차전원회의) △1980.10 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6차 당대회) △1980.10 노동당 비서국 비서 △1980.10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1990.5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1991.12.24 인민군 최고사령관(노동당 제6기 19차 전원 회의) △1992.4.20 원솔 칭호 △1993.4 국방위원회 위원장(최고인민회의 9기 5차회의)
  • TV드라마 주제가 히트곡으로 부상

    ◎등장인물 이미지와 조화…진한 감동전해/대부분이 무명가수들… 문의전화 쇄도/M­TV 「서울의 달」/S­TV 「사랑의 향기」 테마곡 인기 요즘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TV드라마의 주제가와 테마곡들이 드라마의 인기와 더불어 히트곡으로 떠오르고 있다. 등장인물의 이미지나 드라마의 분위기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감동을 더욱 진하게 전해주는 이들 드라마 주제가는 목소리의 주인공들 대부분이 무명가수들이어서 방송국에는 주제가와 가수를 묻는 문의전화가 쇄도한다. 인기를 끌고 있는 곡들은 SBS­TV의 「사랑의 향기」,「세 남자 세 여자」,MBC­TV의 「서울의 달」과 「종합병원」,「사랑을 그대 품안에」등 한창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는 TV드라마의 배경음악들. 잔잔한 감동을 안겨주는 드라마 「사랑의 향기」에 등장하는 노래는 「나에게 대답해 줘」와 「사랑의 향기」 등 두곡.연주가 출신의 신예 작곡가 김현종이 작곡을 맡았다. 최진실의 상대역으로 나오는 이병헌이 경주용 자동차를 타고 질주하는 장면의 배경으로 깔리는 「나에게 대답해줘」는 하드록풍의 리드미컬한 곡으로 메털그룹 출신의 신예 최강훈이 호쾌한 분위기를 살려 노래했다.레게풍의 「사랑의 향기」는 극중 캠퍼스 커플인 전도연과 오대규의 테마곡으로 쓰이고 있다.이 곡은 6개월여의 공백을 깨고 재기한 하수빈과 CF모델 출신의 신인 손우민이 불렀다. 신세대 젊은이들의 꿈과 사랑을 그린 「세남자 세여자」에서 경쾌한 리듬으로 흐르는 곡은 지난해 방연된 「두려움 없는 사랑」의 테마음악을 작곡했던 오진우가 작곡했다.코믹한 가사가 어우러진 이 노래는 현재 연세대 지질학과에 다니는 신인 박진영이 불렀다. 「서울의 달」에서 한석규와 최민식이 서로의 견해차이로 갈등할 때 흘러 나오는 룸바리듬의 「서울 이곳은」은 텁텁한 목소리의 언더그라운드 가수 장철웅이 불렀다.서울이란 낯선 도시에서 방황하는 두 사나이의 시련,우정과 사랑을 적절히 그려낸다. 「종합병원」에서 이재룡의 사랑의 아픔과 이재룡을 사모하는 김지수의 애타는 심정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혼자만의 사랑」은 외국곡에 우리말 가사를 붙인 번안곡으로 김태영이 불렀다. 최근 MBC예술단이 직접 음반을 내놓은 「사랑을 그대 품안에」의 주제가도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는 주인공 차인표의 인기 못지 않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처럼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삽입곡들이 히트하면서 무명이던 가수들의 얼굴이 하나 둘씩 전면에 나타나는 것도 특기할만한 일.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30대 중반의 젊은 연출자들도 영상과 적절하게 맞아 떨어지는 배경음악이 드라마를 더욱 분위기있게 포장해 준다는 점도 간과하지 않고 있어 드라마의 주제곡 제작은 더욱 활성화될 전망이다.
  • 경복궁/소실 2백76년만에 중건/궁궐:2(서울 6백년 만상:39)

    ◎고종황제 아관파천후 “폐궁” 비극 맞아/일제 남쪽 전각헐고 총독부건물 신축 『영상대감,왕부의 존엄은 무엇으로 상징됩니까』대원군이 폐허로 방치된 경복궁을 함께 거닐던 영의정 조두순에게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궁궐이 장엄해야 합니다…』 대원군의 결심은 이미 서 있었다. 고종 2년(1865년) 4월 초사흘 창덕궁 희정당에 중신회의를 소집,경복궁 중건을 반대하는 중신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열흘뒤에 곧바로 공사에 들어갔다.3년뒤인 고종4년 11월 「왕조의 상징」 경복궁은 중건됐다.크기나 규모에서 건물의 생김생김에 이르기까지 창건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임진왜란으로 정궁이 소실된뒤 정확하게 2백76년만에 열성조의 숙원이 이뤄지게된 셈이다. 경복궁 중건을 위해 동원된 인력만도 3만6천여명,경비는 7백40여만냥이 투입됐다.이렇게 해서 중건된 경복궁은 3백50여동의 건물에 전체 대지면적이 13만평으로 5보에 1루,10보에 1각이라 형용할 정도로 많은 건물이 들어서 명실상부한 정궁으로서의 위용을 갖추었다. 『남문을 열고 파루를 치니 계명산천 밝아온다.에 에헤이야 얼널널널거리고 방아로다』로 시작되는 「경복궁타령」은 이때 각지에서 동원된 인부들이 공사를 하면서 부른노래로 오늘날에도 회자되고 있다.경복궁의 창건은 축복속에,중건은 백성들의 원성속에 이뤄졌건만 이를 무대로 펼쳐지는 사건들은 다를게 없었다. 왕자들간의 골육상쟁을 재현이라도 하듯 천인공노할 비극이 구중궁궐 깊숙한 곳에서 또다시 벌어졌다. 고종 32년(1895년) 너무나 뜻밖에도 경복궁 중건의 기수 대원군을 부축하고 광화문을 통해 궁내로 들어온 일본인 폭도 60여명이 국모 민비를 무참히 살해하고 시신을 이불에 말아 석유를 뿌려 불태운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이다.당시 이 사건에 가담했던 일본인 기쿠지는 자신이 쓴 「조선잡기」에 『궁내부대신 이경직과 상궁들이 참혹하게 칼에 맞아죽는데 살아있는 상궁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우는 이가 있는가 하면 피투성이가 된채 벌벌떠는 상궁도 있었다.그 참혹한 광경은 눈뜨고 못볼 지경이었다』고 적고 있다.실제의 상황은 이보다 훨씬 참혹했으리라는것은 미루어 짐작할수 있다. 피비린내나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고 4개월 뒤인 12월28일(태조가 경복궁에 입어하던 날) 정조가 왕자의 난으로 서울을 버리고 개성으로 돌아갔듯이 비운의 황제 고종은 남몰래 황태자(순종)를 데리고 북문인 신무문을 통해 아라사공관(러시아공관·현 문화체육관 옆)으로 천도아닌 파천을 감행하는 비애를 맛봐야 했다.고종과 순종이 아관에서 나온뒤에도 경복궁에 들지 않고 덕수궁에 머물러 있었으니 엄청난 국고를 들여 중건한 경복궁은 30년만에 폐궁이 되는 운명을 맞게 됐다. 1910년 한일합방이라는 민족의 수난사와 더불어 경복궁은 일제의 민족정기 말살정책으로 또 한번 시련을 겪어야했다.근정전을 제외한 궁내의 남쪽 전각들을 모두 헐어버리고 그자리에 조선총독부건물을 지었다.이로써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10여채에 불과하다. 총독부건물은 해방후 중앙청으로 쓰이다 86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문을 열었으나 문민정부가 들어선 지난해 8월 김영삼대통령이 전격적으로 총독부건물의 철거결정을 발표,경복궁은 새봄을 맞을 채비를 하고있다.
  • 서울 신포니에타/50회 정기연주“위업”/20일 예술의전당 음악당서

    ◎자금난 겹쳐 리더 김영준 한때 집 저당잡혀/창단 6년만에 대표적 실내악단으로 성장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준씨(41)가 이끄는 서울신포니에타가 20일 예술의전당 음악당에서 제50회 정기연주회라는 「위업」을 달성한다. 앞날에 대한 불안감을 안은 채 이 국내 최초의 직업 실내악단이 창단연주회를 가진 것은 1988년 4월 11일. 경사스러운 제50회 정기연주회를 앞둔 요즘 김씨의 인사말은 『아직 이혼 안했어요』다. 지난 86년 빈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김씨는 직업 실내악단을 만들기 위한 조언을 구하려 일본의 세계적인 실내악 단체인 텔레만 앙상블의 한국인 2세인 리더를 찾아갔다고 한다.그의 답변은 『연주회를 열 때 마다 집이며 세간살이를 다 날렸다.그러고 나니 아내가 이혼을 요구해왔다.그러나 개인적인 시련에 반비례해 악단은 모습이 만들어져 갔고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면서 『가정의 행복은 버릴 각오를 해야 할 것』이라고 겁을 줬다. 김씨는 이후 그의 말대로 공연 때 마다 곤두박질을 쳤고 집을 저당잡히고 거리로 쫓겨날 위기를 겪기도 했다.그러나 6년이 지난 지금 서울신포니에타는 한국 실내악단을 거론 할 때 마다 가장 먼저 떠올려지는 단체로 성장했다.물론 그의 아내 서정실씨는 이혼을 요구하기는 커녕 서울신포니에타의 바이올린 주자로 참여해 남편을 돕고 있다. 김씨는 서울신포니에타를 이끌면서 서울시향의 악장을 맡고 있으며 또 서울시립대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기도 하다.그런 가운데 한해에 1백회 이상의 연주회를 갖는 국내에서 가장 바쁜 음악인이다.그는 이 모든 일에 무엇하나 소홀한 것이 없다.그렇지만 다른 곳에서 얻어지는 경제력 만큼은 서울신포니에타에 일방적으로 쏟아 붓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이왕 시작했으니 앞으로도 더욱 힘을 쏟아 텔레만 앙상블 이상으로 국제적인 경쟁력을 가진 악단으로 키워가겠다는 것이다. 이번 연주회의 레퍼토리는 로시니의 현악소나타 3번과 바흐의 피아노협주곡 라단조,레스피기의 옛 무곡과 아리아.피아노 협연자 만 예핌 브론프만에서 요하네스 롤로프로 바뀌었을 뿐 창단 연주회 때 그것과 똑 같다.문의는 732­0990.
  • 달맞이/손정박(굄돌)

    한낮에는 시름시름 볼품 없어도,후줄근한 여름밤 달빛에 이끌려 방죽따라 걷다가 만나는 달맞이꽃은 얼마나 싱그러운가.뒷산에 올라 구멍 낸 깡통에 불씨넣고 휘휘 돌려 불굴렁쇠 만들어가며 맞이하던 정월대보름달은 마음마저 환하게 하지 않는가.바위고개 숨어서 님 마중하던 음전이의 마음이 얼마나 설레고,먹지않아도 배불렀을까를 상상하면 괜히 안면근육 위로 당겨진다. 어쨌든 마중간다는 말에는 기다림 속에 설렘과 기대감 부풀리고 만남 이루어 기쁨과 환희 갖게 된다는 의미가 내포되고,소식에 의한 확신이나 징조에 따른 예견에 근거하여 이루어진다. 얼마전 미국에서 온 친구의 얘기,곧 전쟁이 터지는 곳으로 가는구나 하고 와보니 도대체위기감이 아무데서도 느껴지지 않는단다. 글쎄,역사의 지혜로 이제는 평화공존에 대한 기미를 더 강하게 느끼는 것일까.아니면 몸서리쳐지는 전쟁의 악몽은 애써 외면하는 것일까.그도 아니면 인간은 바보가 아닌한,같은 실수를 두번 저지르지 않으며 엄혹한 시련으로 또다시 이 민족을 시험할 만큼 잔인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때문일까. 공산주의가 언필칭 약한 고리인 제정 러시아를 뚫고 유라시아 대륙건너 중국을 휩쓸고 거센 와류형성하면서 제3세계까지 튀어 번질 때는 무섭기도 했지만,이제는 고인물로 정착돼 가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일까.증오와 투쟁에 근거하는 사상은 심성의 아주 적은 부분만을 나타낼 뿐이며,이기와 무한경쟁을 절제없이 허용하는 사상은 사회적 정의로 규제받는 것이 추세이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기미는 도대체 어떤 것이며,그징조에 따른 예견은 어떻게 내려야 하는가.달맞이 갈 때처럼 신나고 기쁜 마음 일게하는 그런 예견을 광범위하게 공유할 수만 있다면….
  • 위자료 물게된 며느리 구박(사설)

    지참금 핑계로 며느리를 구박하고 마침내 파경에 이르게한 시어머니에게 아들과 함께 위자료를 물라는 판결이 나왔다.온당한 판결인 듯하다. 도대체가 며느리에게 「지참금」이라는 것을 요구하는 이상한 풍습이 언제부터 우리에게 생겼는지 모르겠다.좀 모자란 규수를 마지못해 맞을 때 그 벌충으로 논문서나 밭문서가 딸려오게 한다든가 혼수를 바리바리 싣고 오게 하는 일은 있었다지만 멀쩡한 신부가 시어머니 명에 따라 지참금을 싸들고 시집오는 일은 우리에게 없던 「짓」이다.이 이상한 풍습을 계속 악화시키는 혐의는 시어머니들에게 있다. 폴 케네디라고 하는 미국학자가 한국을 평가하면서 여성들의 높은 교육수준을 지적한 일이 있다.여성의 교육수준은 한 국가가 발전하는 원동력이라는 것이다.선거에서 독자적 판단을 하고,가정경제의 주체로 바른 소비생활을 하며,자녀교육을 올바로 이끌고,민주사회를 성숙시키는 모든 일에 여성의 교육수준은 영향을 미치므로 그것이 사회를 성장변모시키는 직접적 역량이 된다는 것이다.그러기에 여성교육수준이높은 한국은 성장잠재력이 아주 많은 나라라고 그는 지적했다. 그런 한국의 여성들이 망국적인 혼인 풍습을 만들어 혼란스럽게 한다는 것은 창피한 일이다.특히 혼수문제로 갈등을 빚는 집안의 대개가 교육수준이 높은 편이라는 사실은 더욱 한심스런 일이다.며느리는 가족으로 오는 것이지 인질로 오는 사람이 아니다.이렇게 시작한 고부간이라면 심각한 갈등은 처음부터 잉태된다.혼수따위로 평생동안 응어리를 짓게 되고 말게 뻔하다. 오늘날과 같은 국적불명의 혼인풍습들이 양산된 것은 직업적인 중매인이 활동하고부터이다.그런 것에 놀아난다는 점에서는 신부쪽의 잘못도 적지않다.결혼을 허울좋은 조건만으로만 챙기려다가 이상한 풍습에 말려들어 곤욕을 치르는 것이다.자신도 곤욕을 치르고 그런 풍습이 자리를 잡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그런 이상한 결혼은 처음부터 거부해야 한다.스스로 파경을 맞고 법정투쟁같은 시련으로 상처투성이가 되었다는 뜻에서는,비록 판결에는 이기더라도 여성 역시 심한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물질만을 위주로 하는 사고를 벗어나 인성을 깊이 성찰하고 사람 사는 도리나 품위를 중요하게 여기는,삶의 철학을 지니고 있었더라면 이런 선택은 안할수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해괴하고 별난 풍습을 고치기 위해서는 이땅의 시어머니들이 달라져야 한다.또 혼수로 좌우되는 신랑감이란 결코 제대로 된 남편감이 아니다.반드시 후회시킬 사람이다. 사회분위기가 바로잡혀 혼인에 얽힌 이상한 짓들이 고쳐지기 위해서는 법의 선도는 아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이번을 계기로 사회기풍이 조금이라도 건전하게 바로잡히기를 기대한다.
  • 궁궐/서울정도 6백년 기념 문화재 재건사업

    ◎헐렸던 경복궁복원… 숭정전부터 “우뚝”/숭정문·회랑등과 함께 마무리공사 한창/자정전·태녕전등 「2단계 공사」 9월부터/운현궁은 고증없이 증축한 회랑 보수작업 착수 서울 옛 도성안에는 아직도 여러 궁궐이 남아있다.경복궁을 비롯,창덕궁·덕수궁·창경궁 등이다.역사교육장으로 때로는 휴식의 장소로 사랑받는 전통공간이 되어왔다.이들이 모두 조선의 궁궐임을 쉽사리 안다. 그러나 잃어버린 조선의 궁궐들을 아는 이들은 흔치 않다.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까맣게 모르는 조선의 궁궐,그것은 바로 경희궁(사적271호)과 운현궁이다.5대궁의 하나인 경희궁은 서울 종로구 신문로1가 서울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다.모두가 헐리고 2채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궁궐터마저 철저히 파괴되어 버렸다. 그 경희궁이 제모습을 찾기시작했다.1907년 일제통감부가 중학교를 세우면서 헐린 조선의 궁궐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서울시가 정도6백년을 맞아 기념사업으로 추진한 경희궁 복원이 실현되어 정전인 숭정전부터 우뚝세워졌다.그리고 숭정문이 들어서고 회랑이 둘러쳐졌다.오는 9월 준공을 목표로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궁궐터마저 파괴 일제가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왕기가 서린 경희궁을 해체하고 긴 식민통치를 펴는 동안 자취없이 사라진 경희궁.조국광복을 맞고도 한동안 염두에 두지 못한 경희궁복원이야기가 나오더니,지난 87년부터 궁터발굴이 진행되었다.그리고 착공 6년만에 잃어버린 궁궐모습을 떠올렸다.서울시가 이번 1단계 복원사업에 쏟은 예산만도 58억1천3백만원에 이른다. 서울시는 경희궁정비 2단계사업으로 오는 96년까지 편전인 자정전,임금의 초상화를 봉안했던 태령전,임금이 신하들을 접견한 흥정당 등을 복원한다.숭정권 뒤편에 터를 잡았던 자정전 자리는 명지대건축문화연구소가 확인한 바 있다.자정전은 기단지의 호석및 바닥전돌이 발굴됨으로써 이미 복원되고 있는 숭정전축과 일치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궁궐지」에 의하면 경희궁은 본래 외전과 내전이 좌우에 나란히 놓이고 전체적으로 동향을 하고있는 것으로 되어있다.정궁인 경북궁과는 아주 다른 양상을 보인다.경복궁은 남향으로 외전과 내전이 앞뒤에 구성되었다는 점과 다른 것이다.또 경희궁은 정문을 바른쪽 모퉁이에 배치한 것도 특이하다. 이같은 점은 처음 이궁으로 지었던 창덕궁에서도 찾아진다.결국 의도적으로 경복궁보다는 격식을 덜 차렸다는 이야기가 된다.각 건물의 배치는 우선 외전의 경우 숭정전을 서쪽에 앉혀 동향을 바라보게 하면서 주위는 행각을 돌린 가운데 사방에 문을 냈다.숭정전 뒤에는 후전인 자정전이 있고 주변에 태령전이 위치했다.숭정전 오른편 즉 북쪽에 흥정당,그 주변에 왕이 책을 읽는 장소인 존현각과 석음각을 두었다는 것이다. ○58억들여 6년 공사 오른쪽 내전으로는 정침인 회상전,융복전,장락전이 있었다.그 주위에는 용비·봉상이라는 누각과 연못,연회장인 광명전을 배치했다.궁의 외부 출입문은 모두 5군데로 되어 있으며,동북쪽 모서리에 있는 흥화문이 정문이다.경희궁은 흥화문을 거쳐 내전 앞을 지나 서쪽 끝의 외전 정전에 도달하는 특수한 구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경희궁의 전각들은 거의 모두 헐려 없어졌으나 정전인수정전과 정문인 흥화문,후원의 정자 황학정이 남아있다.정전은 1926년 조계사에 매각되어 동국대 캠퍼스에 다시 세워졌다.정면 5칸,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 지붕을 한 주심포양식의 건물.1686년 처음 지은 이 건물은 조선 중기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흥화문 역시 1686년에 세워졌다.지난 1932년 일본인들의 절 박문사로 옮겼다가 지난 88년 제자리에 복원되었다.지난 1923년 민간인에게 팔렸던 황학정은 서울 사직공원 사직단 뒤편으로 옮겨 복원했다. 경희궁은 야주현대궐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그것은 정문인 흥화문의 현판 글씨가 명필이었고 글에서 광채가 나 밤에도 훤히 비추었다는데서 유래한다.흥화문의 현판글씨는 경복궁 동무광에 보관되어 있다. ○교육장으로 활용 서울시는 경희궁을 현재 건립중인 시립박문관과 연계,역사문화공간으로 활용할 계획.경희궁 경내를 야외문화전시공간으로 조성하는 한편 궁중가례를 재현시켜 국내외인들에게 볼 거리를 제공한다는 것이다.그리고 수시로 전통문화행사를 유치키로 했다. 서울시는 경희궁 복원사업 이외에 종로구 운니동 운현궁(사적257호)복원계획도 정도6벡년 기념사업에 포함시켰다.시는 83억2천8백만원을 들여 지난해 토지(2천1백48평)와 건물을 매입,현재 보수작업을 펴고있다.40억3천7백만원을 들여 회랑을 신축하는 등의 보수공사를 오는 95년12월까지 마무리할 계획이다. 이 역사전통공간은 대원군유품을 비롯한 고미술품전시장,전통예절교육장,고건축 연구학습장,전통혼례식장,민속놀이마당으로 활용된다.이를 위해 72평의 회랑을 새로 짓고 마당 3백40평을 확장키로 했다.그리고 고증없이 최근에 증축한 부분을 제거,옛 모습을 되살린다는 것이다. 운현궁은 본래 흥선대원군의 사저다.조선 후기의 주택건축물로,고종이 임금자리에 오른 뒤 대폭확장하면서 궁으로 부르게 되었다.현재의 건물은 대원군이 섭정을 하던 1863∼1873년에 지어진 것이 대부분이다.담에는 4곳의 대문을 설치했다.그 안에는 아재당을 비롯 사랑채인 노안당,안채인 이로당,노안당,선조들을 모신 사당 등을 두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음산한 겨울날 숨을 거두는것으로 시작되는 김동인의 장편소설 「운현궁의 봄」무대이기도 하다.파락호 시절에 겪었던 수모와 시련,이를 극복하고 섭정의 권좌에 도달한 대원군의 체취가 서린 역사현장이다.그래서 운현궁은 풍운의 근세사 바로 그것인지도 모른다. > ▷경희궁 약사◁ ▲1620년(광해군12년)이궁으로서의 경덕궁을 지어 궁궐 모습을 갖춤 ▲1623년 인조가 즉위하면서 정사를 보기 시작함 ▲1654년(문종8년)숙종이 이 궁의 회상전에서 태어남 ▲1688년(숙종14년)경종이 이 궁의 융복전에서 태어남 ▲1760년(영조30년)궁명을 경희궁으로 개칭함 ▲1777년 정조가 이 궁의 숭정문에서 즉위함 ▲1835년 헌종이 숭정문에서 즉위함 ▲1907년 일제 통감부가 궁 서쪽에 중학교를 세움 ▲1915년 경성중학교(서울고 전신)가 궁터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파괴 ▲1922년 전매국 관사용지로 궁터를 파는 등 4만1천여평으로 축소됨 ▲1923∼32년 황학정,숭정전,회상전 뿔뿔이 이축됨 ▲1974년 서울고 이전과 더불어 부지를 현대에 매각 ▲1984년 서울시가 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교환형식을 빌려 부지를 확보함 ▲1985∼87년 경희궁 복원계획에 따라 궁지발굴(단국대) ▲1987년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하던 흥화문을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겨 복원 ▲1989년 숭정전 발굴(명지대) ▲1990∼94년 숭정전,숭정문,회랑공사
  • 핀란드에선:5·끝(녹색환경가꾸자:46)

    ◎산성화·해양오염 막으려 주변국과 협정/지리적 특수성으로 발틱국 오물 몰려/자체정화에 한계… 유해물규제등 협력/“중국 산업화로 피해 심한 한국도 사전 대비를” 핀란드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많은 나라다. 핀란드도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 끼여 혹독한 시련을 당한 슬픈 역사를 갖고 있다. 16세기 이후에는 스웨덴의 침략을 받아 3백년동안 지배 당했다.지금도 스웨덴의 잔재가 남아 올란도섬에서는 스웨덴어만 쓰고 있으며 전체 국민의 6%가 스웨덴어를 사용하고 있을 정도다.이 때문에 이 나라 사람들의 스웨덴에 대한 감정은 우리의 한일관계에 못지않다. 헬싱키 대학교 미대 교수 전상호씨(39)는 『스웨덴과 운동경기를 해 지면 그 다음날 바로 국가대표감독이 바뀐다』고 말했다. 근세에 들어와서도 1백년동안 러시아의 지배아래에 있었다. 또 핀란드는 인근 국가에서 날아오는 오염물질과 출구가 좁은 반폐쇄형의 발트해를 끼고 있어 토양과 호수의 산성화·해양오염이라는 원초적인 환경문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사정은 중국에서의 황사·폐수배출로 인해 우리나라가 대기오염과 해양오염문제를 겪고 있는 것과 흡사하다. 핀란드의 가장 큰 환경문제는 날로 심화되고 있는 산성화현상을 어떻게 막느냐 하는 것이다. ○지질 산성화 취약 산성화란 말 그대로 토양·호수등이 산성도(PH)5·6이하로 내려가는 것으로 산성화가 심하게 진행되면 물고기가 살지 못하거나 산림이 고사되는 등 막대한 피해를 끼친다. 강산성비로 60년초 독일 슈바르츠발트의 전나무숲이 고사한 것이나 74년 일본에서 고구마·땅콩등 농작물에 피해가 온 것등이 대표적인 피해사례다. 산성비는 석유나 석탄등의 화석연료를 태울 때 나오는 아황산가스·질소산화물및 염화수소등의 산성가스가 황산이나 질산등의 강산성으로 변해 구름이나 비에 녹아들어 생성되는데 아황산가스나 질소산화물은 상승기류를 타고 수천㎞를 이동하기 때문에 산성비는 종종 국제분쟁을 빚기도 한다. 핀란드 환경보고서에 따르면 90∼91년 2년동안 이 나라에 쏟아진 황산화물은 모두 17만t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핀란드 자체에서 발생한 황산화물은 3만7천t에 불과하고 콜라반도 페테르부르크등 옛 소련에서 가장 많은 8만3천t이 날아왔다.또 서유럽에서 3만t,중유럽 1만8천t,스웨덴·노르웨이에서 7천t등이 발생했다. 먼거리에서 날아오는 오염물질외에도 이 나라 특유의 암반구조와 낮은 기후도 산성화 현상을 부채질하고 있다. 이 나라는 산성화에 취약한 화강암·섬록암층이 전체 암반의 52.5%를 차지하고 있다.반면 산에 잘 녹는 탄산칼슘을 다량 함유하고 있는 석회암은 0.1%에 불과하다.화강암은 석회암에 비해 화학적 풍화작용이 10배이상 빠르게 나타나는 암석이다. 핀란드를 포함한 이 북구의 긴 겨울도 산성화 현상을 막는데 결코 유리하지 않다.난방용으로 쓰이는 화석연료에서 발생하는 황과 질소화합물은 대지 또는 산림에 누적됐다가 봄이 되면 「산성공격」을 시작한다. 핀란드 산성화방지 프로젝트인 하포(HAPO)계획의 조사에 따르면 토양에 석회를 지속적으로 뿌린 결과 경작지의 평균 PH는 지난 13년동안 지속적으로 증가,알칼리성화되고 있지만 토양위에 조성된 산림은 PH가 4이하로 떨어져 산성화의 위험을 보이고 있다. 산성화 현상은 수중지대에서도 두드러진다.하포계획에 따라 호수의 산성화 정도를 조사한 결과는 핀란드 남부 지역의 13%,랩랜드 지방의 2%가 산성화를 억제할 수 있는 완충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랩랜드 남부 지역에 위치한 호수 가운데 11%가량은 PH가 5이하로 나타나 일부 호수에서는 물고기가 살지 않는 것으로 관찰되기도 했다. ○고기 못사는 호수도 산성화 현상에 대처하기 위해 핀란드는 나름대로의 자구책을 강구하는 한편 대외적으론 87년 옛 소련과 이황화탄소 배출량을 50%이하로 감축하는 협정을 맺었다.그러나 대부분의 국제협약이 그렇듯이 구속력이 없는데다 두나라 사이의 배출량 규제차이와 소련의 붕괴등으로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핀란드·스웨덴·에스토니아·폴란드·독일등이 인접해 있는 발트해도 다자간 국제협력을 필요로 하는 곳이다. 발트해는 우리나라의 황해와 같은 반폐쇄형의 내해로서 해류의 이동이 거의 없어 자정작용이 크게 떨어지고 있다.또 염분이 적은 데다 각국에서 배출하는 폐수등으로 해양오염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발트해에 대한 공동대응은 74년 발트해 해양환경오염방지를 위한 협약으로 가시화되기 시작했다.덴마크·독일·스웨덴·폴란드·옛 소련등 7개국이 가입한 이 협약은 80년에 발효돼 91년 헬싱키 협약으로 개정됐다. 협약의 주요 내용으로는 해양오염방지를 위한 공동기금출연을 비롯,해양오염유발물질의 투기행위금지·유해물질통제·과학기술분야의 협력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협약 역시 선진국들이 기술이전을 꺼리는데다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기금출연 어려움등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핀란드의 환경오염을 위한 다자간 국제협력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않다. 중국의 산업화로 중국이 주요 오염배출국가로 등장하면서 우리나라와 일본이 골치를 앓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주한핀란드대사 요르마 율린은 『비록 다자간 국제협력이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으나 한국도 하루빨리 한·중·일 3각 협력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러시아·에스토니아등 사회주의 국가들이 자국의 어려운 사정 때문에 기금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지만 이들 나라는 자국의 연구결과등 자료를 제공하고 나아가 교육을 통해 다자간 환경보호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등 나름대로 기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 김명윤 평통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인터뷰)

    ◎“남북관계 시련기… 총의결집 긴요” 『남북문제가 심각한 상황에 와있는 만큼 모든 지혜를 모아 대통령이 통일정책을 수행하는데 이바지하겠습니다』 이홍구통일부총리의 후임으로 3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에 임명된 김명윤민자당상임고문은 『통일등 남북문제에 대해 평소에 많은 생각을 해왔다』면서 『그러나 지금은 남북관계의 시련기로 개인의 시각이 아니라 총의를 모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자문회의 수석부의장에 임명된 소감은. ▲남북문제가 어려운 상황이라 많은 고민을 해야할 것 같다.자문위원들의 총의를 모아보겠다. ­수석부의장에 임명된 뒤 고문직을 사퇴하고 탈당을 했는데. ▲평통자문회의는 여야를 초월한 인사들로 구성돼 있다.회의를 제대로 이끌어가려면 소속당을 떠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일부에서는 당적이탈을 다른 민자당 고문들의 진로에 영향을 주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절대 그런 것이 아니다.민주평통자문회의의 성격을 생각하고 나의 원칙을 지킨 것일 뿐이다. ­다시 김대통령을 공직에서 대하게 된 기분은. ▲그동안 공식적인 직책은 없었지만 여러 측면에서 도와드리려 애썼다.대통령선거에 낙선했을 때나 당선됐을 때나 늘 함께 했다.이제는 통일문제를 중심으로 도와야겠지만.
  • “「UR농촌」의 갈길 제시했다”/「일본농업탐방」 시리즈를 읽고

    ◎「1촌1품」·「농산물 종합상사」 인상적/경쟁력강화 농·정·학 공동노력 절실/고부가 농산물로 일시장 진출 모색해야 우루과이라운드(UR)의 타결로 시련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 농촌과 농업의 나갈길을 찾기 위해 지난 2월부터 서울신문에 연재해온 「일본농업탐방」이 26회로 끝났다.「일본농업탐방」이 연재되는 동안 이 시리즈를 읽고 많은 독자들이 여러가지 의견과 느낌들을 보내왔다.그중 관계자 5명의 의견을 골라 소개한다. ◇김영욱씨(농림수산부 농업구조정책 과장)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루과이 라운드(UR)협상 결과의 책임 소재만 따지고 있을 때,서울신문이 지난 2월1일부터 연재한 「일본 농업탐방」은 우리나라 농업이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을 제시 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위기에 놓인 우리의 농어촌을 가장 효과적으로 살릴 수 있는 현실적 대안들이다.서울신문에서 일본 열도를 샅샅이 뒤지면서 소개한 기사는 매우 유익했다. 1촌1품 운동의 선구 마을인 오이타현 오야마 마을의 「다품목 소량 생산전략」이나 니가타현 무이카마치 마을의 「고품종 쌀 유기농법 재배 전략」,대기업과 농민이 손잡고 농산물 가공사업을 성공적으로 펼치는 가가와현의 오가와 농산콤비나트 등등은 좋은 참고가 됐다. 일본에서 농산물 종합무역상사라 불리는 홋카이도 경제농업협동조합연합회(호쿠렌)의 농기업 경영 사례 등이 특히 눈길이 간다.또 미야기현의 농정부 공무원들이 지방 특산물 사진을 넣어 명함을 만들었다는 내용도 재미있었다. 우리나라도 지난 91년 7월 농어촌 구조개선 대책을 발표해 UR 파고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을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올들어서는 농어촌 발전을 위한 특별세를 신설하고,대통령 직속으로 농어촌발전위원회를 구성했다.각계 각층의 여론을 수렴하는 등 농어촌 대책을 마련하는 데 힘쓰고 있다. 이런 시기에 서울신문사에서 농어촌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해 농어촌의 진로를 모색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생생한 기사를 연재해 준 데 대해 고마움을 느낀다. ◇이찬현씨(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 교수) 우리보다 앞서가는 일본 농업의 실태를 26차례에 걸쳐 소개한「일본 농업탐방」 시리즈를 관심깊게 보았다.우리나라가 UR 타결 이후 받을 충격과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는 데 정부,농민단체,농민 그리고 학계에도 유익한 기획물이었다. 일본은 농산물의 자유무역 체제가 올 것을 예상,오래 전부터 철저하게 대비해 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우리 역시 지금이라도 UR 타결이후에 대비,일본에서 추진해 온 다음 몇가지 점에 유의해야 한다. 첫째,구마모토현의 농업연구단지,고품질의 쇠고기를 탄생시킨 일본 제일의 연구소 등은 경쟁력 강화를 위해 농업연구에 과감하게 투자해 왔다. 둘째,오가다 농산물 가공콤비나트,히로사키의 사과 가공공장처럼 농산물 가공으로 부가가치를 획기적으로 높였다. 셋째,지역 실정과 여건에 알맞는 영농발전을 위한 농민 단체의 적극적인 참여로 경쟁력이 높은 농업을 농민단체가 실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대분현 오야마마을,도하쿠마을과 같이 농촌을 「삶의 터」로 손색없이 가꾸어 왔다. 앞에서 지적한 몇가지 점은 우리가 UR에 대비하는 데 실증적 자료로 활용해야 할 것들이다.다만이 시리즈를 이용하는 사람의 편의를 위해 쌀,축산,채소,가공 등으로 분야별로 정리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또한 비디오로 제작해 시청각 교육자료로까지 발전시켰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서병준씨(농협중앙회 해외협력부 차장) 농산물 수입개방 등 농업문제가 매스컴의 주의를 끌기 시작한 이후 일본 농업은 우리가 본받을 점이 많다는 점에서 몇몇 언론사에서 소개해 왔다.그러나 대부분 단편적이고,피상적인 소개에 그친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지난 2월1일부터 석달동안 서울신문에 게재된 「일본 농업탐방」 시리즈는 보다 집중적이고 심층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일본 농업을 이해하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우리 농업의 활로를 모색하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번 시리즈에서 확인한 것은 경제 대국인 일본의 총체적인 힘이 농업 분야에도 그대로 반영됐다는 사실이다.즉 일본 농업은 단순히 1차 산업에 머물지 않고 사회 하부구조와 2·3차 산업,나아가 정보·지식산업과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높은 수준에 와 있다. 이는 한일 두나라농업이 비슷한 면을 갖고 있으면서도 농업의 생산기술을 비롯,농산물 유통 및 가공분야,농업연구 투자,정부의 재정지원 등에서 커다란 격차를 보여주는 요인이다. 이번 시리즈는 우리 농업이 아직도 다른 산업과의 불균형에서 오는 후진성에 큰 문제가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있다.앞으로 우리나라의 경제정책은 산업간,그리고 도시와 농촌간 균형발전을 중시해야 하며 농업 및 농촌에 대한 투자도 그런 맥락에서 적극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왕춘명(농민·경기도 남양주군 수동면 입석리) UR 협상 타결로 영농 의욕을 잃은 농민에게 일본의 농업을 소개,농민들에게 희망을 준 서울신문사에 감사드린다. 전면적인 농산물의 수입개방은 분명 우리 농업에 총체적인 위기를 초래했다.도시민들도 「3D 기피 현상」으로 분야에 따라 노동력이 모자라는 현상이 심한데,손톱밑에 흙이 떨어질 날 없는 거친 노동 속에서 숙명적으로 살아가는 농어촌의 경우 두말할 나위가 없다.여기 저기 폐허가 된 빈 집이 날로 늘어나고 있어 허탈할 뿐이다. 그나마 남아 있는 사람마저 떠날 기회만 노리고 있으니 오늘날 당면한 최대의 농촌문제는 농민이 사기를 잃어 버린 데 있다. 따라서 언론은 드러난 현상만을 단편적으로 보도해 희망이 없는 농업으로만 비쳐지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이번 서울신문의 「일본 농업탐방」은 일본의 농업·농촌·농민과 협동조합의 활동상을 깊이 있게 소개해 뜻있는 농민의 길잡이가 되기에 충분했다. 서울신문을 통해 본 일본 농업은 농촌 그 자체만이 아닌 「농촌과 함께 있는 산업사회」라고 하면 좋을 것 같다.농촌과 농업을 살리기 위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투자와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농업의 상업화에 성공했고,농산물의 가공산업화에 기업의 경쟁적인 참여가 이뤄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 농민도 한번 승부를 내보자는 「프로」로서의 긍지를 갖고 연구해야 하며,정부는 소외되어온 농업 분야에 과감한 투자를 계속해야 한다.농촌도 살 맛 나는 삶의 터전이 될 수 있도록. ◇길형위씨(농수산물유통공사 무역사업본부장) 『쌀 개방 문제 없습니다.오히려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본의 어느 쌀 농가가 했다는 이야기다.품질에서 이미 경쟁력을 가지고 있어 쌀 시장이 개방되면 오히려 자국에서 생산되는 쌀은 품질 차별화로 지금보다 더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자세였다. 아이치현 아츠미군의 국화 선별장에서는 생산된 국화에 숫자로 점수를 매기고 있다.시장에 출하되는 국화는 수·우 등으로 단순 출하되지만,선별할 때는 같은 등급이라도 「수」를 90∼1백점 사이에서 다시 점수를 매긴다. 따라서 농가는 자기가 생산한 꽃이 최고의 점수를 받을 수 있도록 생산에 최선을 다한다. 우리 농산물의 주요 수출시장은 세계 최대의 농산물 수입국인 일본이 될 수 밖에 없다.그러나 우리가 일본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소비자가 원하는 품질과 가격으로 대응할 수 밖에 없으며,일본 농가가 추구하는 최고의 품질 경쟁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 UR 타결로 농업분야에 범국민적인 인식과 관심이 높아진 지금,우리도 새롭게 각오를 다져 무작정 사주기를 바라는 자세에서 벗어나 살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농수산물유통공사는 지난 해 백합 1백만달러 수출을 달성,10만달러에 불과하던 절화류 수출을 10배나 증대시킨 쾌거를 이뤘다.이런 노력으로 세계 최고의 기술과 품질을 실현한다면 세계 최대 농산물 수입국인 일본의 식탁은 우리 농산물로 가득 찰 것이다. 서울신문의 일본농업 탐방을 읽고 우리 농업의 활로가 오직 수출농업에 있다는 점에 더욱 확신을 갖게 했다.이같은 여건을 조성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 할 것이다.
  • 일본 하타내각 출범의 의미(사설)

    일본연립정부의 하타 쓰토무(우전자)총리체제가 25일 공식 출범했다.호소카와총리의 후임체제다.작년8월 38년간의 자민당 1당장기집권을 붕괴시키고 출범한 비자민연립정권의 2기정부라 할수있다.이로써 호소카와총리 사임으로 직면했던 일본연립정권 첫시련의 위기는 일단 극복되었다. 일본정치 혼돈의 표류를 막을수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다행한 일이라 생각한다.그러나 이것이 일본 연립여당정권 당면의 모든 문제 해결을 의미하는것이 아님은 물론이다.총리선정과정의 산고에서 볼수 있었듯이 연립정권을 지탱하는 8개정파 특히 제1당인 사회당과 기타 비사회 당파간의 정책적 이견은 여전하다. 새총리선택 과정을 통해 사회당과 신생당등 연립여당은 주요기본정책에 대해 대체적인 합의사항을 도출해놓은 상태이지만 미일무역 마찰해소,북한핵 의혹 대처,소비세 인상을 중심으로한 세제개혁등 미묘한 중요현안들에 대한 각정파간 특히 제1당인 사회당과 비사회 당파간의 이견과 이해대립은 만만치 않은것으로 드러난바 있다. 따라서 하타정부도 장기안정정부로정착할 가능성은 커 보이지 않는다.이미 드러난 정책적 이견들은 언제든지 새로운 분열의 위기를 몰아올수있는 불씨를 안고있음을 보여주었다.자민당의 진보세력과 사회당의 우파를 망라하는 신보수여당의 출현을 통한 본격적인 정계재편을 위한 과도기적 성격의 정부로 보는 견해가 많다.본격적인 신보수우파정권으로 가는 과정의 정부라 할수있는 것이다. 하타 새일본총리 정부의 외교정책 특히 대한반도 정책도 호소카와총리의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것이다.과거사에 대한 솔직한 인정과 사과,북한핵에 대한 확고한 반대 그리고 경제대국적 위치에 걸맞는 적극적인 국제적 역할과 기여의 강화를 지향하게 될것이 틀림없다.그것이 나쁠것도 없고 탓할일만도 아닐지 모른다.오히려 바람직스런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는것은 연립여당세력의 실세인 오자와(소택일낭)신생당 대표간사가 지향하는 신국가주의 내지는 신보수주의경향의 강화 가능성이다.하타총리는 이미 집단적자위권 행사를 위한 평화헌법의 개정가능성등 대담한 발언을 하고있다.하타정부는 물론 그다음에 올 신보수정권의 장기적 정책방향을 예고하는 것이다.일본국익 지상주의로 발전할때 가져올수 있는 결과를 우리는 경계하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일본연립여당의 제1당이 조총연의 자금지원을 받는 사회당이라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을수없다.정책조정회의에서도 보았듯이 일부 좌파세력은 아직도 대북정책대응에 미온적이다.제재를 해야하는 상황이 벌어졌을 경우 일본의 적극적인 협력에 장애가 될수있음을 경계하는것이다. 부당인력스카우트막아야 경기가 호전되면서 이른바 호황업종에 인력스카우트 바람이 일고 있다.조선·반도체·기계 등 경기회복에 따라 설비증설이 추진되는 기업과 자동차와 같이 신규진출이 예상되는 업종의 경우 인력스카우트전이 치열하다. 자동차업계는 오는 5월 부터 삼성중공업이 상용차 생산을 앞두고 현대·대우·기아 등 기존 메이커의 인력을 빼내가면서 인력스카우트전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기존 자동차업체는 요즘 뚜렷한 이유가 없이 자진해서 사표를 내는 임직원이 늘어나자 비상이걸려 있다. 조선업계는 조선경기 회복 및 도크 증설에 따라 인력부족현상이 일어나면서 대기업체들이 중소업체로 부터 기능인력을 스카우트하는 현상이 시작되었다.또 반도체업계는 대부분의 반도체업체가 설비증설 및 인력보강을 추진하면서 스카우트열기가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다.기계와 철도차량제작 업계 역시 제품수요가 늘면서 인력이 달리자 신규인력을 다른 회사로부터 충당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 한동안 경기 침체로 잠잠했던 부당인력스카우트가 다시 고개를 들면서 그에 따른 부작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대기업의 인력스카우트로 인해 일부 중소조선업체는 핵심설계인력이 빠져나가는 바람에 선박건조 일정이 늦어지고 있다는 것이다.인력스카우트로 인해 생산이 차질을 빚는 것은 물론이고 인건비가 상승하는 등 이중피해가 야기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기능인력을 중심으로 인력스카우트가 일어났으나 요즘에는 고급기술인력과 판매인력까지 스카우트의 손길이 뻗치고 있어 문제가 더 심각하다.인력을 스카우트당하는 업체는 생산성이 떨어질 뿐아니라 기업의 비밀이 침해될 우려마저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해당업체는 인력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 대책마련에 부심하고 있다.특히 중소조선업체들은 부당인력스카우트를 방지해줄 것을 정부에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당국이 부당인력스카우트를 억제토록 유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그 보다는 각 업계를 대표하는 경제단체나 관련협회가 앞장서 부당인력스카우트를 중지토록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지난 91년 부당인력스카우트사태가 일어났을때 대한상의 전경련 무역협회 중소기업중앙회 등 경제단체가 자율규제를 하기로 결의한 바 있다. 인력스카우트에 따른 경영불안과 고용륜이 상실은 어느 특정업체의 일이 아니고 우리산업계 전체의 과제이다.그러므로 경제단체나 관련협회가 나서 부당하게 인력을 스카우트하는 업체를 응징하는 것이 올바르고 효과도 있다고 본다.경제단체는 부당인력스카우트문제를 다룰 수 있는 고용윤리기구를 신설하는 것도 검토하기 바란다.아울러 기능인력의 양성을 위한 대책을 강구하여 스카우트의 악순환현상을 근본적으로 치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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