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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업大亂 이렇게 풀자­실업정책 방향

    ◎실업자 피부로 느낄 대책 세워야/기업 도산·폐업 속출… 하루 10,000명 실직/구조조정·실업해결 부처마다 처방 제각각/지원사업비 10조 효율적으로 집행돼야 국제통화기금(IMF) 긴급 구제금융이 결정된 직후인 지난 해 12월3일.李起浩 노동부장관은 노동부의 모든 과장들에게 대량 실업사태에 대비한 아이디어를 리포트로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현재 시행중인 실업대책은 이때 과장들이 외국의 서적들을 뒤지거나 주변에서 귀동냥해 만든 리포트가 골격이 됐다. 당시만 해도 올해의 경제성장률은 3% 내외로 예측됐다.이 때문에 IMF 시련이 아무리 혹독하다 하더라도 올해의 실업률은 4∼5%를 넘지 않으리라는 전망 아래 연간 평균 실업자도 85만명 정도로 예측됐다. 노동부는 이 정도의 실업률이라면 4조원 정도의 재원만 동원하면 실업사태를 무난히 잠재울 수 있다고 호언했다. 낙관적인 전망은 올 1월까지도 이어져 한국노동연구원 등 핵심 연구기관의 관계자들조차 “실업자 숫자를 아무리 높게 잡아도 120만∼130만명을 넘지 않는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3월이 되면서 낙관론은 자취를 감추고 우려섞인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일시적인 현상에 그칠 것으로 예상했던 고금리 행진이 지속되면서 기업의 도산 및 폐업이 속출,하루 발생 실업자 수가 1만명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각 부처에서는 일제히 대책을 쏟아내기 시작했다.당연히 정책의 혼선이 잇따랐다. 노동부와 여당은 구조조정이 다소 지연되더라도 실업문제에 먼저 대처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재경부와 기획예산위 등은 신속한 구조조정만이 실업문제의 해법이라면서 ‘선(先) 구조조정’을 강조하고 나섰다. 노동·건설교통부 등과 여당은 실업문제의 처방책으로 대규모 공공투자를 통한 ‘신 뉴딜정책’의 필요성을 주장했다.반면 재경부와 기획예산위 등은 IMF 합의사항 등을 들어 여기에 제동을 걸었다.유럽식의 실업부조 제도 도입 문제도 여권 내에서 일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3월17일 金대통령 주재로 열린 2차 경제대책조정회의에서 李 노동장관이 10조원 규모의 사회안전망 구축을 제의하자 李揆成 재경부장관은 즉각 “재원이 없다”고 반대했다. 환경부가 한탄강에서 요란하게 펼친 ‘황소개구리 잡기’ 행사는 1,000명이 동원된 공공근로사업이었지만 포획한 황소개구리는 한마리에 그친 일도 있다. 실업자를 지원하기 위한 사업이라 하더라도 막대한 국민의 세금이 투입되는 만큼 그 돈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지에 대한 감독과 감시가 이뤄져야 할 것으로 지적됐다. IMF체제 이후 빚어진 대량실업 사태에 대해 관련 부처들의 정책협조가 초기부터 보다 긴밀하게 이뤄졌다면 이같은 혼선은 상당부분 피할 수 있는 것들이다. 초긴축 상황에서 10조원이라는 막대한 재원을 쏟아부었음에도 관료들과 실직자들이 느끼는 체감지수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설익은 정책 발표나 수치에 집착한 양적인 실업대책에서 탈피해야만 실직자들의 체감지수를 높일 수 있을 것 같다. ◎실업자 사회안전망/실업가정 기본적 생활 국가서 보장 실업자 사회안전망(social safety network)이란. 실업자와 그 가족의 기본적인 생활을 국가가 보장해줌으로써 빈곤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각종 제도적 장치를 말한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업자 등 사회 취약계층이 당하는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한 장치이다. 우리나라는 1차적 사회안전망으로 고용보험제도,2차적 사회안전망으로 생활보호제도(한시적 생활보호제도 포함),보완적 사회안전망으로 공공근로사업·실업자 직업훈련·실업자 대부사업 등을 시행하고 있다. 최근 여권은 실업자가 일시적으로 급증하는 긴급 상황에서는 긴급 식품권·의료권 등을 배급하는 3차 사회안전망의 도입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기고­趙南弘 經總 상임부회장/고용시장 유연성 높여라 우리 경제의 국제경쟁력 회복을 위한 구조조정이 모든 부문에서 진행되고 있다.국제경쟁력 저하에는 지나친 고용의 경직성이 주원인이 되고 있다. 기업은 해고의 어려움때문에 호황기에도 적극적으로 인력 확충에 나서지 못했고 불황기에는 과잉 인력으로 경영난을 겪었다. 따라서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를 다시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구조조정과 함께 반드시고용시장의 유연화가 따라야 한다. 실업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을 때 선진 각국이 시행했던 정책을 살펴보자.스웨덴 덴마크 등 북유럽 국가들은 주로 공공부문의 고용을 늘리는 정책을 채택했다. 반면 영국 미국 뉴질랜드 등 영미권 국가들은 노동시장 규제 완화와 사회보장제도 축소로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고 기업의 고정비용을 줄여 고용을 창출시켰다.독일 프랑스 등 대륙권 국가들은 고용안정에 주력하며 근로시간 줄이기로 실업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미·영 노동시장 규제 완화 그 결과 고용 유연성을 높인 미국과 영국은 실업률이 낮아졌고 고용안정에 치중,유연성이 낮았던 유럽국가들은 실업률이 지속적으로 높아졌다.결국 고용안정에만 치중하면 오히려 중장기적으로 실업률이 더 높아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이 있다.영미식은 비록 실업률이 낮지만 빈부차가 심하며 유럽·대륙권은 실업률은 높으나 빈부격차가 작다.이 때문에 사회정의 문제가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일하는 사람들간의 빈부차이를 말하는 것이며 전체 실업인구를 감안한 개념인지는 한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비정규 고용 활발해져야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직급간 임금격차가 영미에 비해 극히 미미하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빈부격차의 우려때문에 저유연성·고실업을 택할 이유는 없다. 고용의 유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파견근로제,파트타임,임시직 및 계약직등 비정규 근로형태의 고용이 활발해져야 한다.우리나라의 파트타임 비율은 전체 취업자의 7%로 구미 선진국의 2분의 1∼3분의1 수준에 비하면 극히 저조한 실정이다. 파견근로의 경우도 우리는 금년 7월부터 파견근로자보호법을 시행하고 있다.그러나 파견대상 업무를 지나치게 제한,취업중인 파견근로자 23만여명 가운데 10만여명이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해 있다.당연히 파견근로 대상업종은 ‘원칙 허용,예외 규제’방식의 네거티브 시스템으로 바뀌어야 한다. 과거 우리는 3% 미만의 완전고용을 누려왔으나 앞으로 그같은 경우를 기대하기 힘들다.오히려 100만명 이상의 실업이 항상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 경우 실업자수를 줄이는 노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여러 사람이 단기간 실업을 공유함으로써 한사람이 장기간 실업상태에 있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즉 고용 유연성을 높여 ‘직장내 고용안정’이 아닌 ‘노동시장내 고용안정’의 개념이 정착돼야 한다. ○평생직장 개념 탈피를 한 직장내의 평생고용이라는 개념에서 탈피하지 않으면 현재의 실업문제 해결은 매우 어렵게 될 것이다.96년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마저도 종신직을 상징하는 철밥통 원칙을 폐기한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제2건국으로 21세기를(사설)

    올해는 광복 53주년이자 건국 50주년이 되는 해다.그래서 1998년의 8·15를 맞는 국민들의 감회는 여느 해와 다를 것이다.IMF한파에 수해까지 겹친 상황에서 맞는 8·15는,오히려 더더욱 감회가 진할 지도 모른다.그것은 건국 50년만에 처음 들어선,진정한 민주정부에 대한 신뢰와 기대 때문일 것이다. 金大中 대통령은 이같은 국민들의 뜨거운 신뢰와 기대에 부응하여 역사적인 건국 50주년을 맞는 8·15에,온 국민이 동참하는 ‘제2의 건국운동’을 제창했다.우리 모두가 역사의 주인으로서 우리의 운명을 새롭게 개척하는 시대적 결단으로,총체적 개혁을 통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완성하여 세계 일류 국가로 재도약하자는 것이다.그러면서 金대통령은 그를 위한 지표로서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의 전환,관치경제에서 시장경제로의 전환,보편적 세계주의의 새 가치관,지식과 정보 중심의 지식기반 국가건설 등 국정운영의 6대 과제를 제시하고 그 성취를 다짐했다. ○고난의 憲政 50년사 우리 헌정 50년사는 고난의 역사였다.우리는 독립국가를 건설할만한 자체 역량을 갖추지 못한채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았다.그 결과 동서 이데올로기의 희생물이 되어 국토가 분단되고,6·25라는 동족상잔을 겪어야 했다.그런 와중에서 우리는 친일 반민족세력을 숙청함으로써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역사적 과업을 놓쳤다.李承晩 자유당 독재를 1960년 4월 학생혁명으로 무너뜨리고 張勉 내각의 제2공화국이 들어섰으나,朴正熙 소장이 주도한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길고도 긴 독재의 암흑기에 빠져들게 되었다.한 사람이 제멋대로 제3·제4공화국을 선언하고 18년동안이나 독재의 철권을 휘둘렀으니, 국민들로서는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그러나 朴정권의 독재도 1979년 10월26일 밤 궁정동 안가에서 들려온 총성 몇발로 허망하게 막을 내리고,80년 한때 ‘서울의 봄’이 찾아온듯 했으나 全斗煥 소장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5·17쿠데타에 의해 다시 군사독재로 원점회귀하고 말았다. 全斗煥 대통령의 5공과 盧泰愚 대통령의 6공을 거쳐 장군출신이 아닌 金泳三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들어섰으나 외환대란을 남기고 물러났다. ○그러나‘忍冬草’의 저력이 비록 우리 헌정 50년이 고난과 오욕으로 점철되었으나 국민들이 독재에 굴종한 것은 아니었다.아니,우리 헌정 50년은 ‘민주쟁취사’로 기록돼야 옳다.1960년 4·19학생혁명,1980년 5·18광주민주항쟁,1987년 6월항쟁 등이 그 굵직한 발자취다.그리고 민주제단에 스스로 목숨을 바쳤거나 고문 등으로 희생된 민주열사들과 감옥을 제집 드나들듯이 해온 수많은 민주투사들이 우리의 자산이다.그러므로 이름없는 무수한 인동초들이 폭압의 엄동설한을 이겨내고 헌정 50년만에 金大中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를 세움으로써 마침내 민주의 꽃을 피워낸 것이다. 그러나 통일문제에서는 이렇다할 큰 진전이 없이 냉전 이데올로기 대립속에 끝없는 남북대결로 민족의 역량을 소모해 왔고,한반도 평화정착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여전히 안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 국민들은 경제건설에도 팔을 걷고 나섰다.개발독재가 밀어붙이기도 했지만,우리 국민들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땀을 흘려 불과 30여년만에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다.그러나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세계 11위의 경제대국이라는 자랑도 잠시였을 뿐 전 정권의 국정관리 부실로 IMF구제금융이라는 치욕을 안고 말았다. ○“큰일 맡을 민족의 시련” 그러나 IMF사태는 예정돼 있던 일인지도 모른다.권위주의,부정부패,관치금융,불공정 경쟁 등 과거 우리사회의 잘못된 관행들이 총체적으로 빚어낸 결과이기 때문이다.따라서 우리는 IMF사태를 계기로 우리사회를 선진사회로 끌어올려야 한다.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하다.우리사회를 옥죄어 왔던 권위주의를 청산하고 사회 각 부문에 민주적 가치를 확산해야 하며,부패구조를 청산해서 투명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그렇게 될 때 우리사회는 분열과 갈등에서 벗어나 화해와 통합의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닫힌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범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가치와 규범을 받아들여야 한다. 세계무역기구(WTO)체제가 말해주듯 지금은 지구촌시대이며 세계전체가 하나의 시장이 되고 말았다.세계의 진운(進運)을 따라가지 못하는 국민은 역사의 낙오자가 될 뿐이다. 21세기와 새로운 1000년대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하늘은 큰일을 맡길 민족에게는 먼저 시련을 준다고 했다.총체적 개혁으로 하루빨리 IMF관리체제를 벗어나 21세기에는 세계 일류 국가로서 역할과 책임을 다하자.우리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
  • 金 대통령 제2건국 선언­건국 50주년 경축사 전문

    ◎“해낼수 있습니다… 희망·용기를 가집시다”/우리민족은 21세기를 위해 ‘준비된 민족’/‘제2의 건국’ 국민운동 모두 동참합시다/2000년부터는 세계 일류국 대열에 꼭 합류/고생·기쁨 함께하며 영광된 주인이 됩시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은 광복 53주년 기념일이자,대한민국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이하는 역사적인 날입니다.저는 이 자리를 빌려 국민 여러분에게 충심으로 존경과 사랑의 인사를 올립니다.아울러 북한동포와 해외동포들에게도 따뜻한 안부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뜻 깊은 날을 경축하면서 저는, 국민 여러분과 함께 새로운 결의와 각오를 다지고자 합니다.이는 국가의 나아갈 방향을 새로이 정립하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며,민족의 재도약을 이룩하기 위해 국민 모두가 동참하는 ‘제2의 건국’을 제창하는 일입니다. ○민족의 재도약 결의 대한민국 건국 50년사는 우리에게 영광과 오욕이 함께 했던 파란의 시기였습니다.국토분단과 동족상잔 그리고 수십년간의 군사독재로 인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우리는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을 이 땅에 건설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50년만에 이룩한 여야간 평화적 정권교체를 통하여 ‘국민의 정부’를 세웠습니다.세계의 모든 민주시민들이 이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는 국민과 함께 정권교체의 기쁨을 나눌 겨를이 없었습니다.저는 당선되자마자 6·25 이후 최대의 국난을 극복해야 한다는 무거운 책무를 짊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6개월은 오랫동안 누적된 병폐를 청산하고 잘못된 관행을 바꾸기에도 짧은 기간이었습니다.본격적인 개혁은 이제 시작입니다.우리가 가는 길은 가혹하고 힘겨운 고난의 길이지만,용기 있는 국민에겐 기회와 가능성을 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정부수립 50주년을 맞이하여 ‘국민의 정부’가 ‘제2의 건국’을 통하여 추구할 철학과 원리,그리고 총체적 개혁의 미래상을 국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작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된 이래 저는 잠시도 쉴 틈없이 국가위기의 극복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다해 왔습니다.국민 여러분의 성원과 협력에 힘입어 외환위기가 일단 수습되었습니다.상당히 많은 외환보유고와 더불어 환율과 금리도 하향 안정되고 있습니다.물가도 어느 정도 안정 추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경상수지 흑자는 크게 늘어났고 외국인 투자환경도 획기적으로 개선되고 있습니다. 노사간 대타협을 위한 노사정 협의기구가 창설되어 착실히 운영되고 있습니다.금융,기업,노동,그리고 공공부문의 4대 구조조정이 강도있게 진행중입니다. 또한 대ASEM 외교와 대미 외교에서도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합니다.이 모두가 국민 여러분의 성원 덕택입니다.깊이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시련의 터널 벗어나야 그러나 국난을 극복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완성을 향해 나아갈 길은 아직 멀고도 험난합니다.과거의 유산이 계속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그동안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정경유착과 관치금융 그리고 부정과 부패를 일삼았습니다. 그 결과,경제를 포함한 우리 사회 모든 부문은 총체적으로 부실해졌고,국제경쟁력은 취약해졌습니다.외환위기는 필연적인 인재였습니다.이 원인은 반드시 규명되어 앞날의 교훈으로 삼아야겠습니다. 우리는 ‘제2의 건국’을 추진해야 할 여러 가지 절실한 필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우리는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방만한 몸집을 줄이고 거품을 빼며,효율을 높이는 구조조정 작업에 박차를 가해야 합니다.물론 이것은 고도성장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견디기 힘든 시련임에 틀림없습니다. 안타깝지만 현재의 고통을 달리 피할 길이 없습니다.오직 국민과 정부가 하나가 되어 고난의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극복함으로써,하루빨리 이 시련의 터널을 벗어나는 길 만이 남았을 뿐입니다. 더이상 오늘의 저효율과 고비용의 체제로는 국제경쟁에서 살아 남을 수 없습니다.국가의 생산성과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구조개혁이 불가피합니다.오랫동안 관치경제에 눌려있던 미완의 시장경제를 ‘제2의 건국’을 통하여 경쟁력있는 체제로 완성해야 합니다. 한편,우리는 지적으로 고급능력을 갖춘 인적자원을 크게 육성해야 합니다.우리의 미래는 국민 개개인의창조적 실천능력을 배양하는데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교육혁명,정보혁명,첨단기술혁명,벤처기업혁명,그리고 문화산업을 이끌어 갈 인재양성이 우리의 국운을 좌우할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 국민은 모두가 국난극복에 동참할 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과감한 개혁과 새로운 출발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인 저에게 강력한 리더십으로 개혁을 이끌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국민의 정부’와 여당에게 개혁의 선봉이 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야당에 대해서도 이 고난의 기간만은 정쟁을 중단하고 정부의 노력을 지원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이하여 한강의 기적을 이룬 국민의 저력을 다시 모아 ‘제2의 건국’을 시작하라는 국민 여러분의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저는 기꺼이 저의 신명을 다 바쳐 여러분이 명령한 바를 성취하고자 합니다. ○국민 지혜 모아야 성공 ‘제2의 건국’은 우리가 역사의 주인으로서 국난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그 운명을 새롭게 개척하려는 시대적 결단이자 선택입니다.또한 ‘제2의 건국’은 산업화와 민주화의 저력을 바탕으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완성하기 위한 국정의 총체적 개혁이자 국민적 운동을 가리킵니다. ‘제2의 건국’으로 가는 길은 대한민국의 법통을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역대의 권위주의적인 통치방식과는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오직 ‘국민의 정부’가 표방해온 새로운 국정철학인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우리가 지금부터 추구해야 할 국정의 방향입니다.‘국민의 정부’는 이러한 국정철학을 기초로 그 실천 원리로서 자유와 정의 그리고 효율을 중시합니다. 우리는 오늘,뜻깊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이하여 ‘제2의 건국’을 향한 장도의 첫 걸음을 시작합니다.‘제2의 건국운동’은 정부가 위에서 일방적으로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국민이 생활의 현장에서 지혜를 모아 꾸려 갈 수 있어야 합니다.그래야만 성공할 수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이 생활속에서 주인으로서의 책임의식을 가지고 나라일에 참여하고,서로 협력하여 대한민국의 국제적 경쟁력을 세계최고의 수준으로 높이는 것이 ‘제2의 건국’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다 같이 내일의 승리를 기약하는 ‘제2 건국운동’의 대열에 참여합시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국민의 정부’는 ‘제2의 건국’을 계획하고 추진하고자 다음과 같이 국정운영의 6대 과제를 제시합니다. ○부정부패 철저히 척결 첫째는 권위주의로부터 참여 민주주의로의 대전환을 이룩하여 국민과 정부사이에 쌍방통행의 정치를 만들겠습니다.과도한 중앙집중의 폐해를 도려내고 행정,재정,교육,치안 등 모든 분야에서 지방정부의 권한과 책임을 과감히 확대할 것입니다.지방경찰제도도 실현하겠습니다. 무엇보다 ‘국민의 정부’는 국민의 국정에 대한 참여의식을 저상시키는 부정부패를 철저히 척결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천명합니다. 특히 모든 국민이 기쁜 마음으로 국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망국적인 지역대립을 반드시 청산할 것입니다.이를 위하여 인사와 지역발전의 공정한 처리가 철저히 이행될 것입니다. 저는 대통령으로서 모든 지역의 모든 국민을 존경하고 사랑하겠습니다.저는 4,500만 국민의 대통령이자 7,000만 민족을 위한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저에게 지역의 차별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국민 여러분에게 굳게 다짐하는 바입니다. 나아가 모든 정당이 전국적으로 고르게 국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겠습니다.저효율 고비용의 국회제도도 크게 개혁되어야 합니다.인사청문회제도도 공약한대로 실시하겠습니다. 각 자치단체별로 중요한 문제에 대한 주민투표제의 도입도 추진하겠습니다.언론도 스스로의 노력과 국민의 여론에 따라 개혁을 단행해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21세기는 참여정치의 시대입니다.국민이 모든 국정분야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합니다.이것이 ‘제2건국’의 정치적 기본목표입니다. 둘째는 관치로부터 경제를 해방시켜 시장경제의 자율성을 높이는 구조개혁에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불필요한 정부규제를 과감히 줄이고,기업·금융·노동·공공부문 등 4대 분야의 구조조정을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해낼 것입니다.앞으로는 기업을성공적으로 운영하여 흑자를 내고 세계와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외화를 많이 벌어들인 기업인만이 애국적 기업인으로서 존경받고 발전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한편,수출을 늘리고 외국인 투자를 적극 유치하고자 합니다.이를 위하여 수출금융을 과감하게 지원하고 외국인 투자촉진법을 연내에 입법하겠습니다. ‘제2의 건국’아래서는 무엇보다도 정보와 첨단기술 중심의 지식기반 산업국가를 건설하는데 심혈을 기울일 것입니다.유망한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을 전략산업으로 육성하겠습니다.또한 농어민의 생산물이 제값을 받을 수 있도록 물류체제를 바꾸기 위해 농업정책을 획기적으로 전환하겠습니다. 이렇듯 관치경제의 폐습을 일소하고 모든 경제활동이 시장경제의 원리에 따라 이루어지도록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제2의 건국’이 지향하는 경제적 목표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합니다. 셋째는 독선적 민주주의와 같은 폐쇄적 사고에서 벗어나 보편적 세계주의로 나아가는 새로운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이미 시작된 WTO체제는 앞으로 수년내에경제적 국경을 없앨 것입니다.이제는 세계와 더불어 경쟁하고 협력하는 가운데 같이 생존하고 같이 번영해 나가야 합니다. ○지식 기반의 국가 건설 그런데 세계에는 아직도 우리 한국을 ‘접근하기 힘든 나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이래서는 안됩니다.세계를 친구삼아 우리 나라의 이미지를 적극 개선하는데 힘써야 합니다.좋은 이미지야말로 수출과 관광 그리고 투자유치를 위한 필수조건입니다.저는 세계주의 시대에 적응할 수 있도록 각종 국제교류를 촉진하고,인재의 양성에도 적극 힘쓸 것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세계를 받아들이고 세계로 나아가는 세계주의야말로 ‘제2의 건국’아래서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인 것입니다. 넷째는 물질주의의 공업국가를 창조적 지식과 정보중심의 지식기반 국가로 바꾸어야 합니다. 민족의 운명을 좌우할 정보와 과학기술의 수준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켜야 합니다. 이를 위해 ‘국민의 정부’는 교육입국의 이상아래 오늘의 소모적인 교육을 창조적인 교육으로 바꾸는 데 앞장설 것입니다. 무엇보다 지·덕·체삼위일체의 전인교육을 실시해야 합니다.입시지옥이 없는 대학입시제도를 실현하며 학부모의 과외부담을 대폭 줄이겠습니다.실력있는 학생만을 졸업시키고,학벌주의도 타파할 것입니다.그리고 교육자의 수준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 조치를 추진하겠습니다. 학교 가는 것이 즐거운 교육을 실현함으로써,어린이와 청소년 스스로가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마음껏 가꿀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이러한 교육개혁을 위한 종합적인 실천방안을,이제 활동을 시작한 ‘새교육공동체위원회’가 수립하고 추진할 것입니다. 창의적이고 다양한 교육과 더불어 21세기의 기간산업인 문화산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켜야 합니다.교육과 문화의 창달을 통한 지식기반 국가의 건설이 곧 ‘제2 건국’의 이상인 것입니다. 다섯째는 노사간의 대립과 갈등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화합과 협력의 시대를 향한 신노사문화를 창출하는 역사적 대전환을 이룩해야 합니다. 고통과 성과의 공정한 분담에 바탕을 둔 신뢰는 ‘제2 건국’의 기초입니다.특히 저는 종업원지주제와 사회보장제도의 강화 등으로 경제성장의 성과를 공평하게 나누겠습니다. 세계적 추세에 따라 우리도 노사 쌍방간에 화해와 협력의 관계를 이룩하는 것이야 말로 국제적 무한경쟁 속에서 함께 살아남는 길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이러한 신노사문화 창조의 사명을 띠고 노사정위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공정한 여건속에 서로에 대한 믿음과 양보로 노사간에 대타협을 이루어야 합니다.그래서 적어도 ’99년 말까지 쟁의가 없는 노사협력체제를 성사시킬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마지 않습니다. 이와 더불어 정부는 지금 10조원에 달하는 거액을 투입해서 실업대책에 모든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내년에도 이를 더욱 강화시켜 나가겠습니다.앞으로 모든 근로자는 예외없이 고용보험의 혜택을 받게 됩니다.일용근로자에게도 공공취로사업 또는 생계비 보조금을 지급합니다. 저는 이 자리를 빌려 국민 여러분에게 확실히 약속합니다.앞으로 모든 실업자에 대해 먹을 것과 입을 것,그리고 의료혜택과 초중등학교 교육비에 대한 최소한의 보장을 반드시 실현하여,직업을 갖지 못한 국민의 삶을 지키는데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이러한 노력이야말로 ‘제2의 건국’이 추구하는 신노사문화 창조를 위한 뒷받침이 될 것입니다. 여섯째는 지난 50년간 한반도를 지배해온 남북대결주의를 넘어서,확고한 안보의 기반위에 남북간 교류협력의 시대를 열어 나가고자 합니다. ‘제2 건국’의 기치아래 ‘국민의 정부’는 남북간의 오랜 불신을 해소하고,정경분리의 원칙에 따라 남북간의 경제적 교류와 협력을 증진하고자 합니다.아울러 남북간에 문화,종교 등 여러 분야의 교류도 촉진할 것입니다. 한편,이미 천명한 대북정책의 3대원칙,즉 ‘북의 어떠한 무력도발도 용납하지 않는다,북한에 대한 흡수통일을 원하지 않는다,남북은 상호 교류협력을 실현한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할 것입니다.이를 통해 우리는 한반도에 전쟁의 위험을 없애고 평화통일의 기반을 쌓아 나갈 것입니다. 저는 오늘 8·15 광복절을 맞이하여 북한 당국에게 말합니다.오늘의 냉엄한 국제현실에서 우리 민족이 살아남으려면 무엇보다 한반도에 화해와 교류협력의 새로운 장을 열어야 합니다.우리는 이미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의 틀 안에서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공존공영의 관계를 얼마든지 실현할 수 있습니다. ○이산가족 고통 덜어줄것 ‘국민의 정부’는 남북기본합의서의 정신에 입각하여 북한의 안정과 발전을 지원할 용의가 있습니다.우리는 금강산 개발과 농업개발을 포함한 모든 경제협력을 지원하고 권장할 것입니다.특별히 강조할 것은 남북 양측이 모두 인도적 정신과 동포애로서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그리하여 혈육에 대한 그리움속에 애태우고 있는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어야겠습니다. 이렇듯 지금 남북간에는 서로 협의하고 논의할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이미 남북간 합의로 구성되어 있는 분야별 공동위원회들을 하루속히 가동시켜야 합니다.공동위원회의 정상운영에 앞서 우리는 장차관급을 대표로 하는 남북상설 대화기구를 창설하여 성실한 대화의 장을 갖기를 제안하는 바입니다.저는 북한이 원한다면 이 모든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대통령 특사를 평양에 보낼 용의가 있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국민의 정부’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기본철학과 자유·정의·효율의 3대 원리 아래,참여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완성,세계주의와 지식기반 국가의 실현,신노사문화의 창조와 남북간의 교류협력 촉진 등 앞서 말씀드린 6대 국정과제의 실천을 ‘제2 건국’의 나아갈 길로 삼고자 합니다. 이를 위한 종합적인 정책과 프로그램의 개발 그리고 그 실천을 위해 ‘제2의 건국’을 위한 국민운동이 국민적 참여속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제2건국’의 기치 아래 세계 속의 선진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는 많은 지식인과 전문가,그리고 깨어 있는 국민의 참여가 요망됩니다.국민 여러분,이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국난을 타개하고,다시 일어서는 민족의 내일을 힘차게 열어 나갑시다. ○국민의 저력 굳게 믿어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이제 우리는 ‘제2의 건국’을 위한 힘찬 출발을 시작합니다.고생도 같이하고,기쁨도 같이하는 ‘제2의 건국’을 이룩합시다. 저는 일생을 국민 여러분 곁에서 자유와 정의를 위해 살아왔습니다.그 때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세월을 40년 넘게 감내해 왔습니다.저는 반드시 국민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수많은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산업화와 민주화의 위업을 이룩한 우리 국민의 저력을 저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21세기가 지식과 문화의 시대라면,조상으로부터 유별난 교육열과 유구한 문화유산을 물려받은 우리 민족이야말로 21세기를 위해 준비된 민족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한때의 인기보다 후세의 평가를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면서,21세기를 향한 ‘제2의 건국’에 혼신의 노력을 경주할 것입니다.그리하여 국민 여러분과 같이 98년은 전면적인 개혁에 총력을 다하고,99년말까지는 IMF관리 체제를 종결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그리고 2000년부터는 우리 한국이 세계 일류국가의 대열에 참여하는 민족의 재도약을 반드시 실현시키겠습니다. 국민 여러분,희망과 용기를 가집시다.우리는 해낼 수 있습니다. 조국의 광복과 민주대한의 수호를 위하여,그리고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몸받쳐 싸우다가 먼저 가신 애국 영령들이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손에 손을 잡고 하나가 되어 ‘제2의 건국’을 향해 힘차게 나아갑시다.이 시대의 영광된 주인이 됩시다.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내일을 물려줍시다. 감사합니다.
  • 현대그룹/鄭周永의 現代정신(한국경제를 이끌어온 기업)

    鄭周永. 현대그룹 창업자이면서 아직도 실질적 오너인 ‘왕회장’. 그를 한마디로 형언하기에는 모자람이 너무 많다. 살아있는 우리나라 경제의 역사이자 증인이랄까. 그는 불모의 땅에 경제기적을 이룬 한국 근대화의 큰 축이다. 朴正熙 전 대통령에 비견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누가 감히 소떼 방북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경색된 남북협력을 소떼로 뚫어보겠다는 기막힌 발상. 소떼 방북은 불굴의 의지가 얼마나 위대함을 창조할 수 있는 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鄭회장의 오늘은 무엇보다 강원도 통천에서 뼈저리게 겪었던 체험을 승화시킨 정신력에서 비롯된다. 그의 행보는 현대정신에 그대로 녹아있다. ‘창조적 예지’ ‘적극 의지’ ‘강인한 추진력’이 바로 그것이다. ◎초인적 의지로 불가능에 도전/황량한 울산바닷가서 중공업立國 바라봐/막힌곳 창조적 예지로 뚫어 경제기적 창조 창조적 예지는 ‘중공업 한국’을 일군 원동력이 됐다. 60년대말 울산의 황량한 바닷가에 수십만t 건조능력의 조선소를 세우리라 생각한 사람은 鄭 회장 밖에 없었다. 71년 사업계획서와 울산 미포만의 백사장 사진 1장을 들고 영국 런던으로 차관을 얻으러 간 사실은 차라리 아스라한 추억이다. 서산의 4,700만평에 이르는 대규모 간척지를 옥토로 가꾼 것도 그의 선견지명을 잘 보여준다. 84년 최대 난공사인 최종 물막이 공사를 보자. 그는 대형 유조선을 이용,엄청난 압력의 물 흐름을 막아 둑을 완성하는 기상천외의 기법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의 초인적 의지와 추진력은 오늘의 ‘현다이’ 명성을 낳았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鄭회장을 불세출의 인물로 각인시킨 대역사였다. 68년 2월 428㎞건설에 착공해 2년5개월이라는 세계 최단기간 완공기록을 세웠다. 76년에는 중동붐을 타고 ‘20세기 최대의 역사’로 불린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산업항을 9억4,000만달러에 따냈다. 단일공사로 세계 최대 건축공사인 알코바 공공주택사업(6억3,000만달러),젯다 공공주택공사(5억2,000만달러)등도 鄭회장 특유의 돌파력과 추진력,긍정적인 사고가 빚어낸 작품이었다. 자동차사업 진출도 마찬가지. 76년 포니 출시에 이어 86년엑셀의 미국 진출이라는 신화를 낳았다. 최근에는 첨단 전자산업에 주력하고 있다. 鄭회장은 이제 남북통일의 길을 튼 금강산 개발사업에 필생의 열정을 쏟고 있다. 鄭회장의 성공은 정신력의 승리 외에 다름 아니다. 그는 자서전‘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정치와 경제에 기적이란 없다. 기적이란 인간의 정신력으로 실현한 것에 대한 변명일 뿐이다. 확실히 우리는 이론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해냈다. 이것은 바로 정신의 힘이다. 신념은 불굴의 노력을 창조할 수 있다. 진취적인 정신,이것이 기적의 열쇠다” ◎現代의 야심찬 경협계획/소떼로 금강산 가는길 텄다/새달 25일 첫 관광객 출발/44억弗 수출단지도 구상/금강산 광천수 금명 개발 500마리 소떼 방북은 20세기에 마지막으로 연출할 수 있는 장관이었다. 이는 곧 거대한 남북 경제협력사업을 국내·외에 알리는 서곡이기도 했다. 현대는 ‘금강산 사업’에 향후 20억달러를 들여 추진한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하일라이트는역시 금강산 관광사업. 오는 9월 25일이면 3만2,000t급 ‘현대금강산호’가 1,000여명의 관광객을 싣고 동해항을 출발한다. 북한측과의 합의와 방북실무단의 협의가 일정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다. 관광객들은 4박5일의 일정으로 해금강 등 4개 관광코스를 둘러보게 된다. 실향민들은 고향땅을 어루만지며 한줌의 흙을 소중히 간직해 올 것이다. 현대는 금강산일대를 등산관광코스,해안관광코스,호수 및 온천관광코스,연안관광코스 4개 권역으로 나눠 개발할 참이다. 호텔 쇼핑센터 골프장 노래방 공연장 등 각종 숙박·위락시설도 마찬가지다. 이곳을 통일된 한국의 최대 관광지로 가꿔 설악산관광과 연계시킨다는 생각이다. 곧 관광객 모집에 나서고 비용도 150만원 선에서 결정할 예정이다. 남북경협은 해주 경공업단지와 자동차조립사업이 핵심을 이룬다. 국내 섬유 신발 피혁 등 유휴설비의 20%를 이전,연간 44억달러를 수출한다는 구상이다. 하루 100t규모의 금강산 광천수도 개발한다. ◎어떻게 성장했나/47년 세운 현대토건,6·25후 최대건설사 발돋움/67년 현대자동차 설립 86년에 美國 처녀수출/73년 조선소 세우기도 전에 26만t 유조선 수주/75년 오일쇼크땐 중동진출해 달러 벌어들여 현대그룹의 역사는 47년 5월 야심찬 강원도 청년 鄭周永이 서울 초동에 세운 현대토건에서 시작한다. 해방의 어수선한 경제상황에서 서서히 명성을 다져가던 鄭회장은 50년 현대건설로 상호를 바꾼다. 같은해 터진 6·25는 오늘날의 현대를 일구는 밑바탕이 됐다. 제1한강교 복구공사를 비롯,수많은 미군 공사를 따내며 급속도로 사세를 확장,60년 국내 건설업계 1위에 오른다. 이후 현대는 ‘최초’ ‘최대’라는 각종 최상급 수식어를 갈아치운다. 65년 국내 최초로 해외 건설시장에 진출했다.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세계 무대에 이름을 내밀었다. 이어 베트남 알래스카 괌 호주 인도네시아 등 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갔다. 67년에는 현대자동차가 세워졌다. 미국 포드자동차와 계약을 맺고 ‘코티나’를 조립생산했다. 76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유모델 ‘포니’를 탄생시켰다. 세계에서 16번째,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2번째로 자체 고유모델 생산국이 됐다. 73년 설립된 현대조선소는 오늘날 현대중공업의 모태. 기술과 자본이 전무하다시피했던 당시 鄭회장은 선진국을 상대로 치열한 외교력을 발휘,냉담한 반응을 보이던 그들을 설득,영국과 스위스 은행에서 1억달러의 차관을 들여왔다. 오일쇼크로 우리 경제가 꽁꽁 얼어붙어 있던 75년,현대는 중동으로 눈을 돌렸다. 미수교국이었던 이라크 리비아에도 현대의 깃발을 꽂음으로써 민간외교의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86년에는 국내 최초로 미국에 ‘포니 엑셀’을 수출한다. 4개월만에 5만2,400대를 판매,프랑스 르노가 갖고 있던 수출원년 최다판매 기록을 갈아치우는 기염을 토했다. 鄭회장은 87년 명예회장으로 물러나고 鄭世永 회장이 그룹회장에 취임했다. 지금의 금강산개발로 대표되는 현대의 남북경협은 89년부터 시작됐다. 국내 기업인 가운데 최초로 방북한 鄭회장은 이때 이미 금강산 공동개발,시베리아개발 공동참여,원산 철도차량공장 등에 대해 장기적 구상을 세웠다. 96년부터 鄭夢九 회장 체제가 출범했고 지금은 鄭夢憲 회장과의 쌍두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현대의 히트상품 2選 ◎현대자동차 아토스/서민을 위한 벤츠A급 ‘서민을 위한 벤츠 A급’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의 극찬이다. 요즘 각광받는 경차의 대명사다. 4기통 엔진을 장착해 정숙성과 성능이 뛰어나다. 급커브때 안전성도 뛰어나다. 안락한 실내공간과 대형차 못지않은 화물칸을 갖췄다. 초보·여성운전자에게 유리하도록 설계됐고 타고내리기가 편하다. 에어백 등 다양한 안전사양을 겸비했다. 올해 열린 제네바 모터쇼에서 가장 실용적인 차로 선정되기도 했다. ◎현대정공 싼타모LPG/경제성 뛰어난 미니밴 국내 최초 미니밴 싼타모의 후속 제품.5·6·7인승 다양하다. 평일에는 출퇴근,주말에는 레저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경제성이 뛰어나 연료비가 휘발유 값의 3분의 1이면 된다. 자동차세도 연간 6만5,000원에 불과하고 구입시 세금도 70만원 절약할 수 있다. 출시 한달여만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있다. 환경친화적이라는 특장도 갖췄다. 기본가격은 1,313만원. □현대그룹 계열사 현황(*:상장회사) * 1·현대자동차·67.12.29·자동차 제조/판매 2·현대중공업·73.12.28·선박 건조 및 수리업 * 3·현대건설·47.5.25·건설업 * 4·현대전자산업·83.2.23·반도체,정보,산업전자 등 * 5·현대정공·77.7.1·공작기계,철도차량 제조 등 * 6·현대종합상사·76.12.8·종합 무역업 * 7·현대자동차써비스·74.2.26·자동차판매 및 정비사업 * 8·현대상선·76.3.25·해상운송업 * 9·현대산업개발·86.11.29·주택건설,해외건설업 등 *10·인천제철·53.6.10·재강,압 연,주단강 등 제조 11·현대정유·64.11.2·원유정제 12·현대정유판매·73.12.24·석유류 제품 도·소매 13·현대석유화확·88.9.1·유기화학 제품제조 *14·현대리바트·77.7.1·가구 및 목가공품제조업 *15·고려산업개발·76.3.16·건설업,제조업 *16·대한알루미늄공업·73.7.19·알루미늄 및 합금제조업 *17·현대강관·75.3.18·철강제조 *18·현대에베이터·84.5.23·전기산업용 기계*19·현대미포조선·75.4.28·선박수리 및 개조 20·현대엔지니어링·74.2.11·공학관련 써비스업 21·케피코·87.9.3·자동차 부품 제조 22·현대정보기술·93.9.1·정보서비스 등 23·현대중기산업·89.11.1·건설장비 대여업,수리용역 24·금강기획·83.11.1·광고업 *25·현대증권·62.6.1·증권업 *26·현대종합금융·76.12.31·종합금융업 *27·금강개발산업·71.6.15·백화점,호텔업,의류제종 등 28·한보쇼핑·87.3.31·유통업 29·현대알루미늄공업·87.11.1·알루미늄 및 합금제조업 *30·현대해상화재보험·55.3.5·금융보험업(손해보험) 31·현대문화신문·90.8.29·신문발행 32·현대세가엔터테이먼드·96.11.27·게임전문회사 33·티존코리아·97.5.21·컴퓨터 및 주변기기 도소매업 기타 전화기,음향기,서적 도소매업 34·현대경제연구원·86.10.10·경영자문 및 사업서비스 35·현대투자자문·88.3.19·투자전문업 36·선일상선·72.1.18·무역 37·한소해운·90.11.1·해상운송(대극동지역) 38·현대자원개발·90.8.23·자원개발39·동해해운·91.6.5·운수관련써비스업(대극동지역) 40·현대물류·88.6.13·운수관련 써비스업 41·현대우주항공·94.2.23·기계 및 장비제조업 42·현대할부금융·93.12.22·금융써비스업 43·현대유니콘스·87.10.21·프로야구운영업 44·한국물류·90.1.31·보관업,부동산업,도매서비스 45·현대파이낸스·96.2.1·금융업 46·서울프로덕션 47·다이아몬드베이츠·96.7.19·광고업 48·현대선물·97.1.21·금융서비스업 49·현대에너지·96.11.22·민자발전 *50·한국프랜지공업·74.7.15 51·국민투자신탁증권·82.6.22·증권,투자신탁업 52·현대기술투자·97.4.8·창업투자업 53·현대방송·97.5.30·케이블TV 프로그램제작 공급업 및 영상사업(영화제작 배급) 54·인천공항외항터미널·97.5.9·서비스 부동산업 55·서한산업·96.4.3·자동차부품 제조 *56·동서산업·75.9.1·비금속 광물제품 제조 57·동서관광개발·90.2.1·오락,문화 및 운동 관련 58·신대한·93.12.1·절연선 및 케이블 제조 *59·주리원백화점·82.11.26·종합도소매업 60·울산방송·97.9.1 61·국민투자신탁운용·98.2.23·기타 금융업 *62·울산종합금융·81.10.21·기타 금융업
  • ‘수난 4代’ 독립운동가 가문(金三雄 칼럼)

    무궁화 피고 태극깃발 물결치는 8월,우리는 해방 53년과 건국반세기를 맞는다.여전히 분단상태에서 북쪽은 기아,남쪽은 실업의 고통이 따르지만 아무려면 일제식민지 시대의 참혹했던 생활에야 비하랴. 8월이면 우리는 감사해야 할 수많은 애국지사 순국선열을 생각한다.해방을 못보고 눈을 감은 선열들과 해방후에도 독재정권에서 신산한 삶을 사신 지사들을 잠시라도 생각하면서 이 8월을 맞았으면 싶다. 흔히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고 했다.그만큼 일제의 탄압이 심했고 역대 정권이 지사들과 유족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데서 생긴 말이다. 나는 독립운동을 하다가‘3대가 망한’집안을 알고 있다.실제는 4대째 수난과 시련을 겪고 있다.이것은 단순히 한 가문의 수난사이기보다 왜곡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의 단면이라 하겠다. 동농(東農) 金嘉鎭은 상해임시정부 고문과 북로군정서 고문을 지낸 독립운동가다.망명에 앞서 항일단체 대동단을 조직,총재로 있으면서 의친왕 이강공(李堈公)의 상해 탈출을 기도하여 만주 안동현까지 갔으나 붙잡히고 동농은 74세의 고령으로 상해에 망명했다.그 가문의 고난은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큰아들 의한(毅漢)은 부친과 함께 망명하여 대동단원과 광복군 창건에 참여하다가 해방후 납북되고,며느리 정정화는 시아버지와 남편의 뒤를 따라 상해로 탈출하여 임정 밀사 자격으로 독립운동자금 모금의 밀명을 띠고 여섯 차례나 국내에 잠입하면서 밀령을 수행했다.최근 나온 ‘長江日記’는 여성독립운동가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다. 손자 자동씨는 4·19이후 진보매체인 ‘민족일보’ 기자로 일하다가 군사정권의 핍박을 받고 이후에는 민간통일운동에 헌신해왔다. ○저항하다 탄압받는 민족양심 金씨의 사촌형 석동씨도 광복군으로 활동했다.자동씨의 큰 딸 진현씨는 유신시절 학생운동으로 대학에서 제적되고 졸업후에는 의료보험연합회 노조위원장을 지냈으며,둘째딸 선현씨는 노태우정권시절 웨스트팩은행 노조위원장으로 외국계은행 노동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탄압과 시련이 따랐던 것은 당연하다. 동농에서 선현씨까지 4대째 이어지고 있는 이 가문의 고난은 한 가족사의 아픔이기보다 민족사의 비극이다.바로 일제와 독재에 저항하고 탄압받는 민족적 양심의 정형이다.동농의 가문뿐만 아니라 상당수 독립운동가 집안이 독재정권과 싸우다가 고난을 겪었다. 그런데 문제는 국민의 정부에서도 별로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솔직히 국민이 정권교체를 선택한 것은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그늘진 곳에는 햇볕을 비추고 굽고 휜 것은 펴고 단절된 것은 이으라는 시대적 소명이었다. ‘정직한 역사를 되찾으라’는 소망이었다. 최근 보훈처는 동농의 서훈을 또 다시 거부했다.이유는 간단하다.일제로부터 ‘남작’을 받았다는 것이다.물론 ‘남작수여’는 악질 친일파의 대명사다.그렇지만 동농의 경우는 다르다.일제는 종3품이상 고관 72명에게 작위를 주면서 “조선귀족들은 한일합방에 찬성했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각종 기록은 “동농은 작위를 거절했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합병후 작위를 주었으나 불락(不樂)하였다”(조선독립소요사론)고 썼다.또 설혹 작위수여의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이공속죄(以功贖罪)’즉“공을 세우면 죄를 용서받는”것이 대원칙이다. ○무원칙한 보훈처 정부는 제2건국을 표방하고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선포했다.그렇다면 임정 법통을 이어받은 정부가 임정 고문을 지낸 동농을 친일부역자로 몰아 구정권과 똑같이 서훈을 거부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주변에서는 보훈처가 동농의 후손들이 복지부 서훈심사의 불공정성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반정부적인 활동을 해온 전력때문에 서훈이 거부된 것으로 인식한다.납득하기 어려운 처사이다.동농의 아들과 며느리에게 훈장을 준 국가가 그 장본인을 제쳐놓은 것은 모순이다. ‘만절(晩節)을 보면 소지(小志)를 안다’고 했다.동농의 경우가 그렇다.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기록을 뛰어넘어 4대째 시련을 겪고있는 동농가문에 더 이상의 절망을 주어서는 안된다.합당한 서훈과 함께 상하이 송경령 능원에 방치된 동농의 유해를 환국시켜 뒤늦게나마 애국지사를 대접해야 하겠다.
  • 삼성그룹(한국경제를 이끌어온 기업)

    ◎“위기는 기회” 삼성의 도전의식 뜨겁다 초유의 국제통화기금(IMF)사태로 대그룹들마저 하루 아침에 공중 분해되는가 하면 미니그룹으로 속속 변신해가고 있다. 서울신문은 흥망의 부침속에서도 꿋꿋하게 생명력을 지키고 있는 기업을 찾아 재조명해보는 건국 50주년 특집 ‘한국경제를 이끌어 온 기업들’을 시리즈로 연재한다. ◎“초일류 만이 생존” 質경영 뿌리내려/“起亞 꼭 인수” 자동차산업 육성 집념 ‘정권은 유한하고 기업은 영원하다’ 믿든 믿지 않든 재계가 철칙삼아 간직해 온 명제다. 그러나 IMF사태로 이 대마불사론(大馬不死論)도 사라졌다. 재계 1위 삼성. 삼성도 문민정부까지만 해도 잘나갔다. 그렇다고 국민의 정부와 척진 사이는 물론 아니다. 삼성이라고 IMF한파가 비켜갈 리 없다. 계열사 대부분이 내수침체와 수출부진으로 고전하고 있다. 작은 청와대로 불렸던 비서실이 구조조정 본부로 40년만에 간판을 바꿔달았고 문민정부때 특혜시비를 일으켜가며 진출했던 자동차도 IMF한파로 휘청이고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 삼성맨들 사이에서는 옛 사가(社歌)가 유행이다. “고난과 시련속에 일어선 우리…” 삼성맨들은 시련이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에서 우리만이 유일하게 갖고 있는 노하우와 기술은 무엇인가. 우리의 사업과 제품들 가운데 진정 세계 일류라고 자신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되나?” 李 회장이 삼성맨들에게 지금도 던지고 있는 질문이다. 질(質)경영을 통한 초일류는 李 회장이 93년 신(新)경영을 출범시키며 삼성맨들에게 던진 화두(話頭)다. 초일류는 삼성경영의 알파요 오메가. 모든 것이 ‘초일류’에서 시작돼 ‘초일류’로 끝난다. 李 회장은 93년 6월 프랑크푸르트에서 계열사 사장단을 모아놓고 “나부터 변해야 산다”고 역설했다. 제2창업의 2기 경영을 구획정리한 프랑크푸르트 선언이었다. “처자식만 빼고 다 바꿔보자. 고객의 요구에 혁신적으로 대응하고 사회 요구에 정직하게 책임지는 기업이 초일류기업이다. 앞으론 초일류기업만이 생존할 수 있다” 95년 4월엔 북경발언으로 파문을 던지기도 했다. “기업은 2류,행정은 3류,정치는 4류…” 이 발언으로 李 회장이 마음고생을 했지만 李 회장은 이 말이 여전히 맞다고 생각한다. 지금 삼성에게 닥친 또 하나의 시련은 자동차. 삼성자동차 역시 IMF한파로 고전하고 있어 기아차 인수로 돌파구를 찾고 있다. ‘도’아니면 ‘모’의 심정이다. “자동차 한대를 만드는 데는 2만여개의 부품이 들어간다. 자동차 산업은 철강 기계 전자산업 등과 밀접하게 연관된 조립산업이어서 산업간 파급효과가 크다. 자동차 사업진출을 두고 오랫동안 고심했다. 여론의 반대,막대한 투자 등… 수출로 먹고 살아야 하는 우리 경제구조와 자동차 산업수준을 볼 때 누군가는 반드시 새로 참여해서 한차원 높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름대로 국가 장래를 위해 시작했던 자동차 사업이 세간에서 정경유착이니,개인적 취미에서 시작한 것이니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켜 당혹스럽기 그지 없었다. 자동차 산업에 대해 많이 공부했고 경영진과 기술진 등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즉흥적으로 시작한 것이 결코 아니다”(李 회장의 에세이집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삼성의 자동차에 대한 집념은 대단하다. 삼성자동차 부산공장 본관에는 “우리가 왜 자동차 사업을 해야 하는가”라는 글귀가 붙어 있다. 집념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삼성이 기아인수로 위기극복의 계기를 만들어낼 지 주목된다. ◎어떻게 일궈 왔나/밑돈 3만원 삼성상회가 종업원 17만명으로 성장 삼성의 모태(母胎)는 1938년 3월1일에 설립된 삼성상회(三星商會)다. 고(故) 李秉喆 선대회장이 마산에서 정미업과 운수업으로 쌓은 사업수완을 밑천으로 대구시 수동(현 인교동)에 삼성상회를 열었다. 이 것이 오늘날 삼성그룹의 싹이다. 청과류와 건어물을 모아 만주와 북경 등지에 팔고 국수제조업(별표국수)으로 성장가도를 달렸다. 李 회장은 48년 11월 활동무대를 서울로 옮겼다. 상호도 삼성물산공사로 바꿨다. 2년만에 면사수입 등으로 당시 서울의 유명 100사 중 9위에 오르는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 그러다 6·25전쟁을 맞았다. 부산에서 삼성물산을 설립,전쟁의 와중에서도 생필품을 들여다 팔았다. 53년엔 제당(製糖)사업에도 뛰어들었다. 1년만에 설비를늘려야 했다. 54년엔 제일모직을 세웠다. 당시 양복지다운 양복지가 없어 ‘마카오 신사’라는 말이 유행했을 때. 영국제 양복 한벌 값이 봉급생활자 석달치 월급(6만환)이던 데 비해 제일모직은 1만2,000환에 팔았다. 삼성은 물산과 제일제당 제일모직 등 3사를 주축으로 급속성장을 계속했다. 李秉喆 회장은 64년 ‘야심작’ 한국비료를 설립한다. 당시 세계 최대의 요소비료 공장(33만). 그러나 한비는 공정률 80%를 보이다 67년 10월에 국가에 헌납된다. 사카린원료로도 사용되는 비료생산원료(OTSA)가 유출됨으로써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비화됐던 것. 삼성은 당시 한비지분을 요구한 정치인들이 만들어낸 정치공작이라고 주장하나 어쨌든 이 사건으로 그룹이 존폐위기로 몰려 헌납해야 했다(삼성은 이후 94년 7월 한비공개입찰에 참여,한비를 인수한 뒤 삼성정밀화학으로 개명한다). 80년대 들어서는 첨단산업 투자를 서둘렀다. 반도체에 뛰어든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다. 83년에 발표된 64KD램의 개발성공은 한국의 과학기술이 선진대열에 들어었음을 알린 쾌거였다. 李秉喆 회장은 한국경제사에 큰 발자국을 남기고 87년 11월 19일 타계했다. 88년 李健熙 회장 체제가 출범했다. 94년 세계 최초로 256MD램 반도체 칩을 개발한 데 이어 96년에는 또 다시 세계 최초로 1기가 D램을 개발했다. 순풍에 돛을 단 삼성전자는 95년 2조5,054억원라는 사상 최대의 이익을 냈다. 삼성은 지금 매출·자산 80조에 61개 계열사,16만7,0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재계 1위그룹으로 서 있다. ◎인재 제일주의/학력 철폐… 능력주의 지향/첨단시대 개성·창조 강조 한솔 신세계 제일제당 등 위성그룹들을 독립시키고도 부동(不動)의 1위를 지키는 삼성의 저력은 어디서 나올까. 무엇보다 창업자인 ‘거상 李秉喆’의 족적이 워낙 크다 하겠다. 비서실을 통한 특유의 공세적 경영이나 ‘품질은 타협이나 양보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철저한 질(質)경영도 한몫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오늘의 삼성이 있기까지는 인재 제일주의가 있었다. 일찍이 최고 경영자가 인재중용에 눈을 떠 삼성은 57년 국내 그룹으로는 처음 신입사원을 공채했다. 宋世昌 전 삼성항공 사장 등 27명이 그들이다. 신입사원들은 입사 1년간 부서배치를 받지 않고 몸으로 때우는 일부터 배웠다. 호텔같으면 주차관리,에버랜드라면 공원 대청소가 신입사원 몫이었다. 李健熙 회장 체제에서는 학력까지 철폐하는 철저한 능력주의를 고집했다. 치밀하고 밀도높은 교육때문에 ‘인재조련’에 비유됐다. “개성시대,창조시대에는 끼있고 개성이 강한 사람의 신바람과 기를 살려야 한다” 삼성이 겨냥하는 인재는 컴퓨터업계의 빌 게이츠나 영화계의 스필버그,패션계의 베르사체와 같은 이른바 골드컬러(Gold Color). 첨단·정보시대에서 기업의 경쟁력은 화이트(White)컬러도,블루(Blue)컬러도 아닌 골드컬러에 달렸다는 게 李 회장의 지론이다. 신(新)인재 상은 박세리에게서 입증됐다. 골프에 대한 李 회장의 각별한 애정 탓도 있지만 삼성은 박세리라는 싹을 찾아내 ‘초일류 벤처기업’으로 키워냈다. 인재를 보는 안목과 초일류를 키워낼 수 있는 노하우의 합작품이었던 것이다. ◎계열사 및 생산제품 ▷전자소그룹◁ ▲삼성전자­반도체, 가전제품, 기타전자제품 ▲삼성전관­LCD, 디스플레이 ▲삼성전기­전자품목 ▲삼성코닝­TV 및 모니터 브라운관용 유리, LCD유리 ▲삼성SDS­시스템통합, 정보통신 ▲한국휴렛팩커드­컴퓨터, 컴퓨터 주변기기 ▲삼성 GE의료기기­MRI, CT, 기타 의료기기 ▷기계소그룹◁ ▲삼성중공업­기계, 조선플랜트, 중장비, 건설 ▲삼성항공­항공기, 카메라 ▲삼성시계­시계 ▷화학소그룹◁ ▲삼성종합화학­에틸렌, 플로틸렌, 부타디엔, 복합수지 ▲삼성정밀화학­메틸아민, DMF, 말로네이트, 화공기기, 환경설비 ▲삼성BP화학­초산, 비닐초산 ▲삼성석유화학­PTA ▷금융소그룹◁ ▲삼성생명­그린행복연금보험, 홈닥터플러스보험, 슈퍼무지개보험, 허니문설계보험 ▲삼성화재­화재보험, 해상보험, 자동차보험, 상해보험, 연금보험, 해외여행자보험 ▲삼성카드­일시불/할부/현금서비스, 카드론(대출), 할부금융, 통신판매, 보험 ▲삼성증권­주식/채권 매매, 증권저축, BMF, RP, CD, 수익증권 ▷자동차소그룹◁ ▲삼성자동차­자동차 생산 및 판매 ▲삼성상용차­상용차 ▷독립회사군◁ ▲삼성물산­무역, 건설, 자동차 판매, 유통, 의류 생산/판매 ▲제일모직­소모사, 방모사, 울, 소보복지, 방모복지, 카펫, 여성/남성의류 ▲삼성에버랜드­리조트개발/운영, 골프장, 운영사업, 빌딩관리, 컨설팅/에너지사업, 식음사업 ▲삼성엔지니어링­석유화학 플랜트, 정유/가스플랜트, 산업공장/환경오염 등의 엔지니어링 ▲신라호텔­서비스, 컨설팅, 레포츠 사업 ▲중앙일보­일간지, 출판 ▲제일기획­광고기획, 제작, 조사, 마케팅, SP, PR, 디스플레이 이벤트, CI ▲에스원­로컬 경비시스템 및 전자 경비 시스템, 감시 시스템 ▲삼성영상사업단­영상, 영화 ▲삼성의료원­서울병원, 강북병원, 마산병원, 생명과학연구소 ▲삼성문화재단­호암미술관, 호암갤러리, 삼성미술관, 삼성어린이 박물관 ▲삼성복지재단­효행상, 어린이집 건립운영, 소년소녀 가장 돕기 ▲삼성경제연구소­연구, 교육 ▲삼성종합기술원­정보처리, 첨단기술개발 ▲삼성라이온즈­프로야구▷기타 유관 기관◁ ▲인력개발원­연수, 교육 ▲삼성경영기술대학­기술교육 ▲삼성패션연구소­패션 디자인 여구 ▲IDS­디자인 교육, 연구 ▲호암재단­호암상, 청년논문상
  • 여야 국회의장 후보 지상 검증/‘빅’ 對 ‘퀵’ 거포냐 속사포냐

    국회의장 선출을 위한 여야간 힘겨루기가 본격화됐다. 한나라당은 29일 의원총회를 통해 국회의장 후보를 뽑았다. ‘다수당 몫’챙기기 차원에서 의장을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결의도 다졌다. 여권은 여권대로 자신들의 후보를 당선시킬 필의 전략을 숙의했다. 여야 의장 후보를 지상 점검한다. ◎자민련 朴浚圭 후보/지역구 9選 무게 내세워 “의장은 영남” 기치 여당 후보인 자민련 朴浚圭 최고고문은 9선(選)의원이다. 15대 국회 최다선이다. 전국구 의원은 한차례도 안했다. 모두 지역구를 거쳤다. 두 부문에서 기록보유자다. 9선 타이틀은 金泳三 전 대통령과 공동으로 갖고 있다. 그러나 지역구 9선은 혼자만의 기록이다. 朴최고고문은 지난 60년 정치에 입문했다. 4·19 직후 5대 총선에서 첫 ‘금배지’를 달았다. 당시 민주당 구파(舊派)에 속했다. 이때부터 신파(新派)의 金大中 대통령,구파의 金泳三 전 대통령과 40년 인연을 맺었다. 그는 5·16뒤 공화당으로 당적을 옮겨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그러면서도 정치적 고비를 두차례 맞았다. 80년 정치규제가 첫 시련이다. 93년 金泳三 정권 출범 이후 당한 ‘팽(烹)’이 두번째다. 이런 명암이 ‘처세술의 달인’이라는 닉네임을 만들어냈다. 93년은 재산문제가 토사구팽(兎死拘烹)의 빌미로 제공됐다. ‘벌집’으로 불리는 다세대주택을 포함,부동산 과다보유로 파문에 휘말렸다. 결국 국회의장과 의원직을 내던지고 유랑길에 올라야 했다. 金泳三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악연으로 바뀌었다. 그는 94년 야당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金鍾泌 총리서리가 자민련을 창당할때 손을 잡았다. 그러나 金총리서리와는 불편한 관계를 지속했다. 지난해 15대 대선때는 金大中 대통령 편에 섰다. 야권 후보단일화를 촉구하며 ‘탈당 배수진’을 치기도 했다. 金총리서리에 대한 양보 주장이나 다름없었다. 이를 계기로 金대통령과는 더 가까워졌다. 金대통령이 의장 후보로 적극 지지하고 있는 것도 이런 우정과 무관치 않다. ‘호남대통령,충청총리,영남국회의장’이 출마 명분이다. ◎한나라 吳世應 후보/외국어 능통 등 순발력 부각 “공정한국회를” 한나라당 국회의장 후보로 확정된 吳世應 의원은 국회 외무통일위원만 22년 역임한 7선 의원이다. 당내 최다선이다. 그는 영어·불어·독일어·일어·서반아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한 외교통으로 꼽힌다. 국제의원연맹(IPU) 집행위원과 한·미의원외교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다. 吳의원이 28일 당내 후보 경선에서 국제 의원외교 경력을 유난히 부각시킨 것도 이런 이유다. 그러나 吳의원은 15대 전반기 국회 부의장을 지내던 96년 12월 신한국당의 ‘노동법 새벽 날치기 통과’때 金守漢 전 국회의장대신 본회의장 사회를 맡았던 ‘불명예’를 안고 있다. 6공 당시 주가를 올리던 朴哲彦 의원과 가까이 지내는 등 ‘정치적 변신의 귀재’로도 불린다. 때문에 당내 개혁성향 인사들의 표 이탈을 막는 것이 급선무다. 이날 당내 후보 경선에서 吳의원은 ‘입법부 독립’과 ‘국회의 자율성 회복’을 최대 과제로 꼽았다. 후보 당선 직후 기자회견에서 吳의원은 “대통령을 반대하는 당에서,대통령이 임명하지 않은 국회의장이 출현한다면 역사적으로 큰 의의가 있다”며 여권의 朴浚圭 의장후보와 차별화를 꾀했다. 吳의원은 특히 “金大中 대통령과 金鍾泌 국무총리서리가 한나라당 의원 몇사람을 빼내 국회의장 선출에서 이긴다든지 서리 꼬리를 떼려 한다면 현 정권 말기의 책임은 두 분이 져야 한다”고 독설(毒舌)을 서슴지 않았다. 吳의원은 또 “만약 의장으로 당선되면 특정 정당에 편견을 갖지 않고 불편 부당하게 국회를 운영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러나 국회의장 당적 이탈이나 金鍾泌 국무총리서리 임명동의안 처리 문제,내각제 개헌 논란 등 원내 쟁점에 대해서는 “당론에 따르겠다”고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여야 국회의장 후보 신상명세 ▲국민회의·자민련 朴浚圭 출생일:25. 9.12 본적:대구 달성 학력:대구 경복중→일본 마쓰야마(松山)고→서울대 정치학과 지역구:대구 중 재산:18억7천만원 경력:△서울대 정치학과 교수(54년) △부산일보 사장(62) △국회외무위원장(67) △IPU명예종신회원(79) △남북국회회담 수석대표(88) △민정당 대표위원(88∼89) △13·14대 국회의장 △5·6·7·8·9·10·13·14·15대 국회의원(9선) ▲한나라당 吳世應 출생일:33. 4.18 본적:서울 종로 학력:경기중·고→연세대 정외과 지역구:경기 성남분당 재산:9억2천만원 경력:△미국의소리방송 아나운서(60∼64년) △국보위입법위원(80) △IPU한국대표단장(81∼87) △정무 1장관(82∼83) △국회문체공위원장(92) △국회외무통일우원장(94) △15대 국회 부의장 △8·9·10·11·12·14·15대 국회의원(7선)
  • ‘행복의 나라’ 한대수(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5)

    ◎“물좀 주소 물좀 주소 목마르오/시대의 갈증 노래했는데…”/68년부터 명동·대학가 활동/통기타·청바지 문화 선도/2집 앨범 “체제전복” 낙인찍혀/75년 渡美… 음악활동 계속/지난달 일시 귀국 에세이 출간/“개인무대 갖는게 작은 소망” 1975년 한 해를 마감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무렵인 12월 어느날 김포공항 대합실.긴 머리에 청바지 차림의 한 청년이 초췌한 모습으로 뉴욕행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고 있었다.한국 가요계에 파문을 일으키며 청년문화를 주도하던 가수 韓大洙(50)였다.미국 유학후 숨가쁘게 살았던 한국에서의 생활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지나갔다.자신의 음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 땅의 분위기가 한스럽기만 했다.채 피어나기도 전에 꺾여진 꽃처럼 자신의 음악을 가슴에 묻은 채 한대수는 그렇게 훌쩍 한국을 떠났던 것이다. 짧은 활동기간에 비해 뚜렷한 인상을 남긴 이색적인 경력의 싱어 송라이터.통기타와 자유의 청년문화를 생겨나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당시 트로트와 사랑타령 일색이던 대중가요를 뿌리째 뒤흔들며 젊은이들의 우상이 됐던 가수 韓大洙.그는 왜 한국을 떠나야만 했을까. 어린시절부터 남달리 굴곡이 많은 개인적인 삶을 살았던 그였다.핵 물리학자인 아버지의 실종으로 7살때부터 줄곧 조부모와 함께 살았다.10살때 미국으로 이주해 3년간 미국생활을 한뒤 돌아와 한국에서 중학교를 마쳤다.17세때 미국에 사는 아버지의 소재가 확인돼 다시 미국으로 옮겨 고교를 다녔지만 적응하지 못한채 방황의 10대를 보냈다.韓씨의 재능은 이때 발견된다.상담교사의 도움으로 시와 노래를 쓰기 시작했다.나중에 국내에서 히트했던 ‘행복의 나라’‘그날까지’‘옥의 슬픔’같은 노래들이 모두 이때 쓴 것이다.고교졸업후 뉴햄프셔 대학 축산과에 진학했으나 적성이 맞지않아 중퇴,뉴욕 사진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귀국한 게 1968년 초.이때 한국의 가요사는 다시 쓰이게 된다.당시 국내 가요계는 트로트가 지배하던 시기.국내에선 처음으로 싱어 송라이터로 데뷔한뒤 발로뛰는 음악인의 생활로 접어든다.서울 무교동의 ‘세시봉’과 명동의 ‘오비스캐빈’에서 청바지,가죽장화 차림에 통기타 하나들고 포크록을 소개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이듬해인 69년 이렇다할 공연무대에 서기엔 아직 무명가수였던만큼 대학가를 돌기 시작했다. 총학생회장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공연을 의뢰해 축제기간중 이화여대와 서울대,서강대,부산대 강당공연을 통해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이때 언더그라운드 가수로 인상지워지게 됐다.그리고 그해 겨울 그 유명한 서울 남산 드라마센터 공연.그때만해도 드라마센터는 고상한 장르의 유명인들에게만 공연이 허용되던 곳.무명의 대중가수가 무대에 오른 것 자체가 화제거리였다.평소 韓씨의 음악에 매료된 팬들이 어렵게 마련한 데뷔 콘서트였다. 벼르고 별렀던 무대였던 만큼 혼신을 다한 공연이었다.이틀 공연 모두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대성공이었다. 74년 군에서 제대하고 나니 유명해져 있었다.자신이 곡을 쓰고 金敏基가 부른 ‘바람과 나’,楊姬銀이 부른 ‘행복의 나라’가 인기곡으로 불려지고 있었다.신세계레코드사에서 앨범제작 의뢰가 들어왔다.그래서 만든 첫 앨범이 ‘멀고 먼 길’이다.너무나도 반가운 제의라 하루만에 녹음을 모두 마쳤다.‘물좀 주소’‘행복의 나라’‘바람과 나’등 수록곡들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그리고 1년도 채 안돼 시련이 닥쳐왔던 것이다. 75년 가을 두번째 앨범을 만들었다.코리아헤럴드 기자로 재직중일 때였다. 기자로 일하면서 오후엔 남모르게 레코드 취입을 하느라 코피를 쏟기가 일쑤였다.마침내 레코드가 나왔다.이제 자신의 음악을 인정받는 뿌듯함에 마냥 들떠 있었다.기쁨은 채 2주가 못돼 좌절로 바뀌었다.당시 문공부에서 레코드 수거령이 떨어졌다.체제전복적 음악이란 낙인이 찍혔다.첫 앨범 ‘멀고 먼 길’도 함께 묶였다. “‘물좀 주소’등 히트곡들이 대학생들 사이에 번져가면서 정치·사회상 황에 맞물려 당국의 곱지않은 시선을 받았던게 사실입니다.당국이 ‘물좀 주소’에선 물고문을 연상했던 것 같아요.두번째 앨범은 표지가 문제였지요.녹슬은 철조망에 고무신이 걸려있는 모습인데 한국적 정서와 민중을 상징한 것이지요.죄수(철조망)가 흰 고무신을 신으니 박해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었지요” 동양방송과 기독교방송 음악프로 출연도 막혔다.어쩔 수 없이 명륜동 자취방에서 직접 노래하고 녹음한 테이프를 만들어 매장에 내다 팔았다.테이프는 열악한 음질에도 불구하고 불티나게 팔려나갔다.이 테이프는 첫 앨범 취입 전부터 하나 둘씩 만들었던 것으로 이렇게 만든 테이프만도 100여개가 넘는다.하지만 그것도 잠시뿐.감시망이 좁혀지면서 테이프 제작도 할 수 없게 됐고 더이상 설 땅이 없어졌다.마침내 미국행을 결심했다. 이후 줄곧 뉴욕에서 살면서 시·사진·음악활동을 계속했다.89년 ‘무한대’,90년 ‘기억상실’,91년 ‘천사들의 담화’ 등 레코드도 세 집을 냈다.종전의 분위기와는 달리 자신의 삶을 담은 노래들이다.지난해 가을엔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록그룹 10개가 참가한 록페스티벌에도 참가했다.80년 일시 귀국해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약식 공연을 가진지 17년만의 무대였다.그리고 지난달 잠시 귀국해 자전적 에세이집을 냈다.자신의 모든 것을 담은 기록이다. 75년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는 韓씨는 이렇게말한다.“그 시대 정책 자체에 반감을 가진 적은 없습니다.어느 나라나 국가정책과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정신은 엇갈리기 쉽지요.당시 정부의 목적의식을 흐리는 활동이 제재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문화예술인들이 심한 갈증을 느끼는건 당연했구요. 오랫동안 나를 못봐온 팬들을 위해 개인무대를 갖고 싶습니다” ◎사연들/장막을 걷어라 너의 좁은 눈으로 이세상을 더 보자/철조망 유신압제 상징 이유/‘고무신’·‘첫 앨범 잇따라 판금/‘행복의나라’ 희망 메시지 가득한데 68년 귀국후 세시봉과 오비스캐빈에서 시작된 韓大洙의 국내 음악활동은 불과 7년만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귀국전 미국 생활에서 반문화운동(카운터 컬쳐 무브먼트) 경향의 포크록에 심취했던 만큼 국내에서의 활동도 자연스럽게 자유와 젊음으로 대변되는 이 음악으로 시작됐다.미국 고교시절 답답한 생활을 노래에 담은 노래들이 70년대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금지곡이 된 것은 우연의 일치다.대학가를 돌면서 언더그라운드 가수로 인상지워지고 금지문화의 한 주역이 된 것도 사실상 노래말의 상징성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물좀주소’와 ‘행복의 나라로’는 그의 대표적인 노래.“물좀 주소 물 좀 주소/목마르요 물좀 주소/물은 사랑이요 나의 목을 간질며/놀리면서 밖에 보내네/아 가겠소 난 가겠소/저 언덕위로 넘어 가겠소/여행도중에 그 님 만나 본다면/난 살겠소 같이 살겠소”(물좀 주소).“장막을 걷어라/나의 좁은 눈으로 이세상을 더 보자/창문을 열어라/춤추는 산들바람을 한번 또 느껴보자/가벼운 풀밭 위로/나를 걷게 해주세/봄과 새들의 소리/듣고싶고 울고 웃고 싶소/내마음을 만져줘/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행복의 나라로) 유신정권의 압제 아래서 자연스럽게 현실 비유적인 내용으로 인식될 수 있었고 대학가에선 더욱 인기가 좋았다.물은 갈증을 해결하는 그 무엇이며 행복의 나라는 답답한 상황으로부터의 탈출과 희망의 의지가 역력한 상징임에 틀림없다.특히 金敏基 楊姬銀 등 사회성짙은 노래를 주로 불렀던 이들에 의해 불려지면서 자연스럽게 화살이겨냥됐고 마침내 철조망과 흰 고무신을 표지 사진으로 쓴 ‘고무신’ 앨범으로 피할 수 없는 족쇄가 채워진 것이다.‘자유의 길’‘병든 고아’‘술 취한 여자’‘물좀 주소’ 등 노래마다 일일이 검열을 당했고 레코딩까지 허락됐던 앨범 몰수는 韓씨를 떠나게 만들고야 말았다. ◎그의 길 ▲48년 부산출생. ▲64년 부산 경남고교 입학. ▲65년 미국 롱아일랜드 고교로 전학. ▲66년 뉴햄프셔 대학 수의학과 입학. ▲67년 뉴욕 사진학교에서 사진 전공. ▲68년 귀국.작사·작곡가·가수로 데뷔. ▲69년 드라마센터 공연. ▲70년 군입대. ▲74년 첫 앨범 ‘멀고 먼 길’ 발표. ▲75년 두번째 앨범 ‘고무신’ 발표,금지.미국으로 돌아감. ▲89년 ‘무한대’ 발표. ▲90년 ‘기억상실’ 발표. ▲91년 ‘천사들의 담화’ 발표. ▲98년 현재 뉴욕에서 사진작가및 창작활동중.자전적 에세이 출간.
  • 햇볕정책의 시련/李孝成 성균관대 교수·언론학(서울광장)

    지금까지 남한의 대북정책이나 북한의 대남정책은 강경론이 주류였다. 일시적으로 온건론이 세를 얻은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내 다시 강경론이 주도권을 잡곤하였다. 그 결과로 남북한간에는 해가 갈수록 불신과 적대감이 더 커져왔다. 그래서 분단된 지 반세기가 넘었건만 아직도 남북한은 일반인들이 서로 편지 한통,전화 한통 할 수 없는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남북한이 상대를 더불어 같이 살아야 할 동족으로서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극복해야 할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는 강경정책이 주류를 이루어온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이제 현상의 변화를 꾀하고 통일로 나아가려면 강경정책이 아닌 온건정책이 기조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남북한 보수세력 협공 다행히도 국민의 정부는 과거 남한정권들의 대북정책 기조였던 강경정책을 버리고 온건정책을 채택하였다. 그것은 바로 북한을 개방과 변화로 이끌려는 이른바 햇볕정책이다. 햇볕정책은 북한과의 적대적 관계를 정권적 차원에서 이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적대적 의존관계를 청산하려는 온정주의적 정책이다. 이 정책은 남한의 적대성을 이용하여 국민들을 들볶고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던 북한의 보수세력으로서는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고약한 정책이다. 마찬가지로 북한과의 적대적 관계를 이용하여 안정이라는 명목으로 기득권을 보호해 왔던 남한의 보수세력에게도 심히 못마땅한 정책이다. 따라서 햇볕정책은 현상의 변화를 바라지 않는 북한과 남한의 보수세력의 협공을 당할 수밖에 없다. 햇볕정책의 성공여부는 이들의 협공을 어떻게 잘 견디어 내느냐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북한의 보수세력은 남한이 햇볕정책을 포기하고 강경정책을 채택하도록 갖가지 도발을 벌이게 될 것이고 그때마다 남한의 보수세력은 햇볕정책을 공격하며 강경대응책을 요구할 것이다. 북한과 남한의 보수세력은 햇볕정책을 공격하는 데서 또 다시 적대적 의존관계를 맺게 되는 셈이다. 북한의 최근 잇따른 동해안 침투사건과 그를 빌미로 한 남한 보수세력의 햇볕정책에 대한 공격이 바로 그런 예라 할 수 있다. 만일 햇볕정책이 이런 협공에 밀리면 통일은 커녕 북한의 개방이나 변화도 유도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실향민의 고통의 연장이요 남북한 분단의 고착화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과거 동서독 관계는 참고할 만하다. 통독 전 동독은 서독에서 사민당의 집권을,사민당 집권후에는 동방정책을 기를 쓰고 막으려 했다. 왜냐하면,사민당은 기민당과는 달리 동독에 대해서 적대적 태도를 취하지 않고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는 동방정책을 표방한 까닭에 사민당이 지배하는 서독을 대상으로 국민들에게 적대감을 일으키고 국민들을 닦달하는 것이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민당은 결국 집권하였고 동독과 소련에 대한 헷볕정책이라 할 수 있는 동방정책을 추진하였다. 동방정책은 그 추진과정에서 많은 훼방과 시련을 맞기도 했지만 의연히 추진된 결과로 동독과 그 종주국인 소련을 개방과 변화로 이끌어 독일통일의 밑거름이 되었다. ○서독의 사민당 정책 교훈 우리의 햇볕정책도 북한의 개방과 변화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통일을 위한 밑거름이라는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북한과 남한의 보수세력의 협공에 굴하지 않는 의연한 추진이 필요하다. 그들은 햇볕정책이 성공을 거두면 거둘수록 자신들의 기득권이 위협을 당하기 때문에 더욱더 거세게 헷볕정책에 저항할 것이다. 국민의 정부는 이런 저항을 예상하고 대비함으로써 우왕좌왕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 ‘섬소년’ 이정선(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4)

    ◎장발때문에… 첫 앨범 10곡 ‘연금’/‘불신풍조 조장’‘자기 비하’ 갖가지 이유/좌절… 오기… 나중엔 빠져나갈 궁리만/“음악인에 맡기면 자연스레 풀릴 문제를…”/그룹활동 하면서도 ‘언더그라운드’ 고집 ‘닥터 기타’‘국내 최고의 기타 연주가’‘언더그라운드 음악계의 대부’….우리 가요계에서 기타와 언더그라운드 가수를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잔잔한 목소리로 시같은 노래말들을 쏟아내는 李正善씨(48). 20여년간 변함없이 노래를 하고 있지만 방송에서는 거의 모습을 대할 수 없는 고집스런 가수다.고교 1년때 기타를 처음 배웠고 서울대 미대 조소과 2년때 입대해 군악대에서 복무한뒤 복학전 아르바이트삼아 노래를 부른게 평생직업이 됐다.평생직업은 ‘언더그라운드 가수’.보이지 않는 다수의 군중보다 숨소리까지 느낄 수 있는 코 앞의 청중이 훨씬 좋아 ‘언더’를 택했다고 한다. 이 ‘언더’라는 명제가 지난 70년대와 80년대엔 가슴아픈 추억을 남겼지만…. 74년 봄.군에서 제대한지 1년이 지났을 때였다.언더그라운드를 무대로 활동하면서 대학가와 젊은이들에게 이름이 어느정도 알려져 있었다.가수생활을 일반인들에게 처음 공개적으로 알리는 앨범을 받아들고 마치 첫 아들을 얻은 것처럼 좋아했다.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6개월도 채 안돼 레코드 판매금지령이 떨어졌던 것.이미 전국에 5,000여장이 배포돼 있었다.발매금지와 함께 매장에 진열된 것들을 모두 수거하라는 당국의 서릿발같은 명령이었다.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첫 앨범 ‘이리저리’에는 타이틀곡 ‘이리저리’를 포함해 모두 11곡이 실려 있었다.예기치 않은 불호령으로 수록곡 가운데 비교적 밝은 분위기의 ‘모두 다 함께’를 빼놓곤 10곡 모두가 금지곡 운명에 처하게 됐다.실린 노래들은 ‘바보가 되어’‘비오는 날에’‘청개구리 마음’ 등 모두가 일상의 마음을 크게 흔들지 않는 평범한 가사를 담은 잔잔한 분위기의 노래들이다. 앨범 전체가 금지곡집으로 묶였지만 사실상 문제가 된 것은 ‘거리’라는 노래 한 곡의 한 소절.“서로들 믿지 않는 사람만이 거리를 덮었네”가 10곡 모두를‘듣지못할 위험한 노래’로 묶는 단서가 됐던 것이다.‘불신풍조 조장’과 ‘자기 비하’‘문맥이 안통한다’ 는 등 그럴싸한 사유가 노래마다에 붙었다.유신정권의 치부를 애써 감추려는 올가미들이었다. ‘불신풍조 조장’ 등 다양한 금지 명분이 생겨났지만 공식적인 금지사유는 ‘장발’.당시 대대적인 단속 바람에 편승해 李正善의 장발이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레코드 표지모델로 본인 李正善씨가 등장했는데 머리상태가 장발이었다.표지제작 때 돈도 아낄 겸 동네 골목의 공중화장실 앞에서 긴머리를 한채 서있는 모습을 그대로 실었는데 보기좋게 걸려든 것.나중에 이씨가 머리를 짧게 깎고 문제의 노래 ‘거리’를 뺀 채 같은 앨범을 다시 냈는데 이 앨범은 아무런 문제없이 통과됐다.75년 하반기 큰 반응을 얻은 ‘섬소년’판이 그것으로 이 앨범이 사실상 공식적인 첫 앨범이 됐다. 76년 6월 두번째 앨범은 또다른 시련을 몰고 왔다.이번엔 다분히 의도적이었다.처녀 앨범에서 뼈저린 고통을 맛본 뒤 일을 저지른 것이다.‘건전가요를 삽입하라’는 당국의 지시대로 당대의 유행곡인 ‘새마을노래’를 넣었는데 ‘朴正熙 작사·작곡’으로 표기했던 것.당연히 레코드는 판매금지였다.금지사유는 여전히 표지모델의 장발을 문제삼은 ‘퇴폐’.이 앨범도 새마을 노래를 빼자 통과됐다. 李씨는 당시 거듭된 금지와 심의통과,그리고 해금의 악순환을 이렇게 돌이켜 말한다.“젊은 가수들은 대부분 상황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있었습니다.음악을 하는 사람들에게 맡기면 자연스럽게 불만이 해소되고 정리될 수 있는데도 강압적인 조치를 취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리석은 짓이었다고 봅니다.저만 해도 처음엔 좌절을 느꼈고 두번째엔 오기가 생겼는데 다음엔 숨바꼭질 하는 식으로 빠져나갈 궁리를 하게 됐던게 솔직한 심정입니다.사실은 은유적인 표현이 더 위험하고 무서운데…” 레코드가 거듭 판·금 조치를 당했지만 노래는 계속했다.당시 李光祚 韓英愛 등과 함께 4인조 보컬 해바라기를 구성해 서울 명동 가톨릭여학생회관에서 매주 토요일 공연을 가졌다.공연때마다 중부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이 초대받지 않은 손님으로 꼬박꼬박 참석했다.명동 가톨릭여학생회관은 그때만해도 젊은이들이 금지된 노래들을 찾아 부르면서 젊음을 발산하던 요주의 감찰대상지.감시 요원들과 숨바꼭질을 해가며 어렵게 모임을 가졌던 만큼 수난도 많았다.가수들이 불려가기 일쑤였고 공연전 노래목록을 제출하는 사전검열도 숱하게 당했다.“형사들도 노래를 함께 부르고 이야기를 나누도록 분위기를 유도해 가니까 점차 감시가 뜸해지고 나중엔 나오지 않게 되더군요” 79년 ‘풍선’,86년 ‘신촌블루스’를 만들어 활동하는 등 그룹활동을 병행하면서도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고집하고 있는 가수.요즘 흔한 ‘반짝가수’와 달리 언더그라운드를 배경으로 고집스럽게 음악에 매달려온 만큼 애환이 많다.지난 91년엔 기타 관련 전문서적 출판사인 ‘이정선 음악사’를 만들어 지금까지 40여종을 냈다.지난해까지 가끔 국악프로의 편곡과 연수를 맡기도 했지만 여러 가수들이 함께 어울려 노래하는 이른바 ‘떼창’ 프로그램 출연은 시종일관 절대사절.“언더그라운드 가수는 언더그라운드 가수 다워야 한다”는게 그 이유다. ◎사연들/말하는 사람 많아도 말 듣는 사람 없으니 말 같지 않은 말만이/은유적인 표현이 더 무서운데… ‘집권연장 연상시킨다’ 트집도/삶 얘기서 자연대상으로 변화 “말을 하는 사람은 많아도/말을 듣는 사람은 없으니/아무도 듣지 않는 말들만이/거리를 덮었네/신을 믿는 사람은 많아도/사람을 믿는 사람은 없으니/서로를 믿지 않는 사람만이/거리를 덮었네/웃음짓는 얼굴은 많아도/마음주는 사람은 없으니/아무도 받지 않는 웃음만이/거리를 덮었네” 74년 李正善씨의 첫 앨범중 문제가 된 ‘거리’의 가사다.“서로를 믿지않는 사람만이 거리를 덮었네”라는 대목이 ‘불신감을 심하게 조장한다’라는 이유로 당국의 미움을 샀다.이 노래를 빼고 앨범 표지모델의 머리를 장발에서 짧은 머리로 바꿔 다시 만든 앨범은 무난히 통과,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李正善씨의 노래는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다가 나중엔 대부분 자연을 대상으로 삼게 된다.구태여 사람 이야기를 건드려 당국의 미움을 사지않겠다는 의도였다.“어리석고자 어리석고자/어리석고자 어리석고자/사랑이 지나도 그사람 떠나도/안타까움 모르는 바보가 되고저/죽음이 닥쳐도 하늘 무너져도/두려움 모르는 바보가 되고저/콩을 팥이라 미움을 사랑이라 속여도/의심을 모르는 바보가 되고저/배고프면 울음울고 배부르면 웃음웃고/속일 줄 모르는 바보가 되고저”(바보가 되어)“이제는 그만,이제는 그만해도/‘한번만 더 꼭,한번만 더’하고 미련이 남아/맘대로 해라,맘대로 해라하면/‘하기싫어 내가 왜 해’하는 고집이 있고/비오는 날이면 울음우는 청개구리처럼/후회할 것을 후회할 것을/착해져야지 착해져야지 해도/하지마라 하면 자꾸하고 싶은 청개구리 마음”(청개구리마음). ‘바보가 되어’는 유치환시 ‘바위’와 아주 흡사한 분위기의 노래.본래 가사의 의미와 동떨어지게 ‘지나친 자기비하’라는 이유로 금지곡이 됐다. 그런가 하면 ‘청개구리 마음’은 ‘정서미숙’이 금지사유.청개구리 동화를 소재로 사람사는 이야기를 희화적으로 담은 노래지만 첫 귀절과 맨 마지막부분이 ‘정권연장’을 연상시킨다는 억지를 낳았다. ◎그의 길 ▲50년 대구 출생. ▲68년 용산고교 졸업. ▲68년 서울대 조소과 입학. ▲69년 군 입대. ▲73년 복학. ▲74년 첫 앨범 ‘이러저리’ 발표. ▲75년 앨범 ‘이러저리’ 수록곡 금지곡 조치.앨범 ‘섬소년’ 발표. 해바라기 공연활동 시작. ▲76년 졸업.두 번째 앨범 ‘이정선’ 발표. ▲86년 해금. ▲91년 출판사 ‘이정선 음악사’ 설립. ▲97년 MBC 국악 프로그램 ‘샘이 깊은 물’ 국악 편곡·연수. ▲현재 서울예전·동덕여대·동아전문대 출강.
  • 삼엄한 경계에 피서객 ‘썰물’/무장간첩 침투­이모저모

    ◎軍작전 장기화따른 지역경제 타격 우려/침투지역 수심깊고 외진 대진항 가능성 북한 무장간첩 수색 이틀째인 13일 강원도 묵호항 주변을 비롯한 동해안은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진 가운데 피서객의 발길이 크게 줄어 매우 한산한 모습을 보였다. ○…인근 산간지역을 수색 중인 군은야산이지만 숲이 무성하고 녹음이 짙어 96년 강릉 잠수함 침투 때보다 더 힘들어 하는 모습. 한 장교는 “수풀이 우거져 땅바닥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면서 “탐침봉으로 의심나는 곳을 조사하고 있지만 정밀수색이 이만저만 힘든 것이 아니다”라고 하소연. ○…군 당국의 수색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동해시와 강릉시 등은 해수욕장 및 산간지역 출입 통제로 지역경제가 피해를 입을까 걱정이 태산. 군은 12일 낮 12시부터 동해시 망상 등 6개 해수욕장의 백사장 출입과 산간지역 예상도주로 및 은신이 가능한 지역의 입산을 통제 중이다. 또 동해시와 강릉시 강동면 옥계면 등에서는 12일 밤부터 주민들이 자율적으로 야간통행을 제한하고 있다. 동해시는 낮 동안만이라도해수욕장을 개장할 수 있도록 군 당국의 양해를 얻어내는 등 피서객 감소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96년 북한잠수함 침투로 경제적 시련을 겪었던 주민들의 불안을 덜어주기 위해 애쓰고 있다. ○…기상청은 무장간첩들이 침투 때 동해상을 뒤덮었던 해무(海霧)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분석. 동해 레이더기상대에 따르면 침투 시간으로 추정되는 11일 밤부터 12일 새벽 사이 동해시 앞바다는 육안으로는 간첩 침투를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안개가 많이 끼어 있었다는 것. ○…동해시 어달동 횟집거리 해변에서 시체로 발견된 무장간첩의 침투지점은 어달동이 아닌 2㎞ 북쪽 대진항 부근일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대두. 대진항 일대는 수심이 깊고 해발 200m의 바위로 이루어진 봉화대(烽火臺)가 해안과 인접해 침투가 쉽기 때문. 군 당국도 어달동 해변은 횟집이 불야성을 이루는 곳으로 침투 적지(適地)가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 사회지도층 비리 엄단하라(사설)

    현직 판사와 서울시 전·현직 서울시 국장,전·현직 은행장,국영기업체 간부와 한국마사회 전직 경영진 등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지도층 인사들이 직무와 관련,거액의 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서민들을 한없이 허탈하게 한다. 지금 국가가 처한 위기상황이 어느 정도로 심각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다수 국민들의 노력이 얼마나 처절한지를 이들은 과연 모른단 말인가.자기 직분에 충실함으로써 이 국난(國難)을 극복하는 데 앞장서야할 사람들이 오히려 피땀 흘리며 일하는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용기를 꺾는 짓을 했다면 분명 매국노(賣國奴)들이다.사정당국은 철저한 조사와 함께 비리 사실이 확인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도록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투철한 봉사정신과 자기희생으로 우리 사회를 이끌어 나가야 할 각 분야의 지도급 인사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서글프다.정의를 바로 세우고 오직 법에 따라 심판해야 할 법관이 돈을 받고 구속피의자를 풀어주었다는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고 사표를 냈다는 사실앞에서는 할말을 잃게 된다.법조비리를 척결하겠다는 법조계 자체의 결의는 물론 불과 하루전에 변호사법 개정안을 발표하며 법조계를 개혁하겠다고 나선 정부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됐다. 그래도 참고 기다리며 신뢰를 버리지 않았던 국민들의 실망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청구그룹 張회장의 ‘張壽弘리스트파문’으로 일컬어지는 여야 고위 정치지도자들의 뇌물수수설도 심각하다. 검찰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철저히 수사해 엄정한 법의 심판을 받게해야 할것이다.정치권이야말로 지금 민생현안은 뒷전인 채 당리당략에만 매달려 있는 집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국민의 심판도 뒤따를 것이다. 환란(換亂)의 주범이라 할 수 있는 금융계의 비리혐의도 포착됐다.전·현직 은행장 4명이 대출커미션으로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을 받아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것이다.이들은 이 돈으로 행장 연임운동이나 비리수사 무마용으로 정치권에 1인당 수천만원대의 금품을 제공한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는 소식이다.여기에 전·현직 서울시 국장 2명을 포함,지자체 고위간부 3∼4명이 대형공공사업과 관련해서 업체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거나 이권에 개입했으며 국회의원이던 전직 마사회장 2명은 10억∼20억원의 경마수입금을 빼돌린 혐의로 조사를 받고있다.이들 외에 국난을 외면한 채 자기 몫만 챙기는 부류의 사람들도 지탄의 대상이긴 마찬가지다.고통을 나눠가질 때 지금 우리가 겪고있는 이 혹독한 시련도 빨리 극복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 법조비리 뿌리뽑는 계기로(사설)

    법무부가 9일 발표한 변호사법 개정안은 법조비리를 뿌리뽑겠다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담고있다.이 개정안이 오는 9월 정기국회를 통과해 시행되면 분명한 법조개혁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된다.특히 ‘3진 아웃제’로 불리는 상습 비리 변호사의 영구제명제 도입이나 비리 변호사 등록거부,사건브로커 고용 변호사 처벌규정 강화 및 법원과 검·경찰 공무원들의 담당사건 소개금지 규정 등은 획기적이다. 문제는 법원·검찰·변호사회 등 이른바 ‘법조 3륜(輪)’의 개혁에 대한 실천의지일 것이다.아무리 엄한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더라도 이를 지키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법조 3륜은 이 나라 사정(司正)의 중추기관들이다.우리는 지금 국가 전체적으로 엄청난 시련을 겪고 있다.공직사회·금융기관·공기업은 물론 일반 회사마다 진행되는 구조조정과 퇴출, 중소기업들의 무더기 도산으로 실업자가 날로 늘어나고 이에 따라 파산하는 가정도 속출하고 있다.이 큰 소용돌이 속에서 그야말로 고통분담으로 난국을 함께 벗어나려 하지 않고 제 몫 챙기기에만 급급한 사람들이 적잖아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법조계는 이들을 가려내 처벌할 의무가 있다.법조계가 스스로 개혁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런 부류의 집단이나 사람들을 처벌할 수 있겠는가. 때마침 대검찰청이 발표한 법조비리사범 일제단속 결과는 법조개혁이 앞으로 더욱 강력하게 추진돼야 하는 과제임을 일깨우고 있다.변호사 107명과 브로커 401명이 적발돼 이 가운데 브로커 213명이 구속됐다는 소식이다.수임료의 40%를 주고 20여명의 브로커를 고용해 지방사건까지 수임해 온 변호사가 있는가 하면 브로커와 짜고 의뢰인을 속여 7억원을 가로채 미국으로 달아난 검사출신 변호사도 포함돼 있다.브로커들은 대부분 전직 법원 및 검찰직원이 거나 경찰관들이며 이들은 또 현직들과 연계돼 있는 것이 드러났다.이번에 적발된 변호사 가운데 판사출신 23명,검사출신 19명이 포함돼 있는 점도 놀랍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개정안에 판·검사 출신 변호사가 개업할 때 전근무지 형사사건을 일정기간 제한하는 방안이 삭제된 것은 유감이다.이는 법조비리의 중요한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전관예우(前官禮遇)를 근절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위헌소지가 있다는 설명이지만 정부 개혁의지에 대한 오해 가능성이 있다는 재야 법조계의 지적에도 귀를 기울여야할 것이다.제도적인 장치에 앞서 비리를 뿌리뽑겠다는 법조계의 자정 결의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해 둔다.
  • 축구대표팀 질책 그만/金炳局 고려대 교수·정치학(時論)

    21일 저녁. 뉴스가 시작하자 앵커가 차범근 감독의 경질 소식을 전한다. 기술위원회가 미숙한 팀 관리 및 경기운영에 대한 책임을 물어 대회 중간에 감독을 전격교체한다는 전갈이 파리 현지에서 날아온 것이었다. 한 평생을 축구로 살아온 차범근 감독으로서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같았을 것이다. ‘기술 부재’는 그가 태극 마크를 가슴에 달고 축구장을 휘젓고 다니던 청년시절부터 쌓아온 명예와 명성을 순식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놓기 충분한 판결이었다. ○희생양된 국민스타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것은 경질 소식이 전해진 다음의 일이었다. 네덜란드 공격수가 한국 수비수를 제치고 골을 넣는 장면이 텔레비전 화면에 계속 비추어지고 대표팀에 대한 질책과 비난이 줄을 이었다. 한국 축구의 상징인 투혼마저 사라진 ‘최악의 졸전’이라는 관전평이 나오는가 하면 허탈감을 넘어서 ‘분노’의 수준에까지 이른 국민 감정 때문에 축구팀의 귀국길조차 순탄치 않을 지 모른다는 전망마저 점쳐졌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는 환란(換亂)에 바짝 움츠러든국민이 잠시나마 고통을 잊고 기를 펼 기회마저 사라졌다는 비난마저 가세하였다. 아무리 승자만이 살아남는 스포츠의 세계라지만 한 시대의 국민적 스타가 이렇게 추락하는 것은 모두에게 비극이다. 시련이 불어닥칠 때마다 ‘누군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여론에 떠밀려 한 시대의 영웅을 희생양으로 삼는다면 한국 축구는 불모지가 되고 만다. 스타가 없으면 자신의 인생 전부를 축구에 걸고 실력을 키우려는 ‘새 싹’이 돋아날 리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녀사냥 식의 경질은 문제의 본질마저 흐려 놓는다. ‘16강 진출’은 언론과 상혼 및 전문가가 저마다의 손익 계산 및 이해관계에서 조장한 허황한 꿈이었지,축구 그 자체에 대한 국민적 열정과 투자 및 후원 아래 착실히 준비되어온 플랜이 아니었다. 그 ‘거품’이 빠지자 이제는 모두가 차범근 감독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국민적 분노를 달래려 한다. 한국 축구가 오늘의 실패를 거울로 삼아 세계무대로 뻗어나갈 길을 스스로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에 책임전가 안될말 그러나 가장 안타까운 것은 역시 선수 각자의 상처받은 마음일 것이다. 국민은 한국 축구의 연패 행진을 지켜보면서 허탈해하지만 그 허탈감은 대회가 끝나면 금방 잊혀져버릴 한 순간의 감정밖에 되지 못한다. 하지만 바로 거기서 불거져 나오는 질책과 비난은 자신의 인생을 축구에 걸고 살아온 대표팀에게 영원한 상처를 남기는 비수가 되고 만다. ○2002년을 위하는 길 생애 통 털어 한번 출전할까 말까 하는 축구 대잔치에 일승의 신화를 창조하기 위하여 수년 동안 기술을 연마하고 체력을 키워온 선수 당사자로서는 경기 결과에 대한 여론의 평가가 결국 자신이 걸어온 인생을 총결산하는 최후의 심판이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 벨기에전이 치러지기 전에 달라져야 하는 것은 대표팀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더 이상의 질책이 없어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꿈이환란으로 갈기갈기 찢겨질 때 느꼈던 아픔을 거울로 삼아 절망감에 젖고 슬픔에 잠긴 대표팀을 어루만져 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2002년이 밝아진다.
  • 무능한 남편/李世基 논설위원(外言內言)

    요즘의 남편들은 IMF(국제통화기금)체제에 적응하기 위한 전사회적인 구조조정의 물결속에서 언제 직장을 쫓겨날지 모르는 불안한 나날을 살고 있다. 다만 믿을 수 있는 가족과 가정이 있는 한 어떤 시련도 이겨내리라고 결심하지만 발등에 떨어진 불행앞에선 속수무책으로 무능해지지 않을수 없다. 그러나 남편이란 무능해도 실직을 해도 여전히 남편이자 집안의 가장이다. 가정법원이 ‘무능한 남편’과 더 이상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는 이유로 남편을 상대로 낸 이혼소송을 기각한 것은 진정한 부부와 가정의 의미를 깨우친 현명한 판단이다. 복잡다단한 저간의 사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업실패로 생활비를 주지않는다’는 이혼사유는 가정의 소중한 의미를 짓밟는 구차한 차원이다. 남편의 무능력이 이혼사유가 된다면 아내가 가사를 잘못하는 것도 이혼사유가 되어 가정을 온전히 꾸려갈 집안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남편이란 누구인가. 평생동안 가족의 생계를 혼자서 책임져야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인가. 생계를 책임지려하지만 물리적으로 좌절당했을때 가족은 그들에게 등을 돌려야 하는가. 직장에서 쫓겨난 남편들이 집문턱을 떳떳하게 들어서지 못하고 죄나지은 듯이 집밖에서 배회한다면 그처럼 부당한 노릇은 다시 없을 것이다. 돈을 벌면 남편이고 돈없이 무능하면 남편의 자격이 없다는식은 가족간의 와해(瓦解)뿐만 아니라 인생사를 거슬리는 ‘윤리파괴’일 것이다. 이해타산이 개입되어 돈으로 저울질되는 가족관계란 이미 가족일 수가 없다. 만에 하나 좌절과 낙망속에서 남편이 술을 마시고 화풀이를 해도 그 심중을 헤아리는 것이 가족이다. 아내란 어렵고 기쁜 일도 남편과 함께 하는 동반자(同伴者)의 자리다. 실직한 남편이 외출하면 깨끗한 복장에 용돈을 쥐어주고 어디서나 비굴해지지 말도록 격려하는 것이 도리다. 지금은 누구나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실직과 사업실패 등으로 가정이 파탄되거나 생활고로 인한 가정폭력·불화가 예사롭게 목격되는 요즘이다. 이런 때일수록 중요한 것이 가족의 결속이며 가정의 단란을 위해 시련을 극복하려는 것이 우리의 의지다. 모진 한파에 도태되는 가정이 없도록 진정한 이해와 사랑으로 조악한 시기를 헤쳐가는 지혜가 아쉽다.
  • 지구촌 분쟁지역 점검

    지구촌이 뒤숭숭하다.엘니뇨가 몰고온 기상이변으로 곳곳에서 인류가 끔찍한 시련을 격었다.아시아는 엎친데 덮친 겪으로 경제위기까지 맞고 있다. 그러나 인류를 가장 안타깝게 하는 것은 전쟁.유럽의 발칸반도에서는 ‘인종 청소’라는 대학살이 또다시 시작될 것 같다는 소식이 전해진다.아프리카에서는 한달째 무모하게 죽고 죽이는 국경분쟁이 이어지고 있다. 아시아도 조용하지가 않다. 카슈미르를 중심으로 반세기 이상 국경분쟁을 겪고있는 인도와 파키스탄은 핵실험을 강행해 인류를 전율케 했다.어느새 전쟁을 하기 시작했거나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도는 세계의 분쟁지역을 긴급진단해 본다. ◎코소보 세르비아측 알바니아계 탄압 배경/민족성지서 이민족 판치다니…/세르비아 전성기유적 코소보에 오롯이/주민 90% 알바니아계 자치 누리며 생활/현정부 자치권 박탈하자 독립 외치며 투쟁/서방,인종청소 우려 ‘공습 불사’ 개입 태세 유럽의 발칸반도를 흔히 ‘화약고’라고 한다.발칸반도의 신(新)유고연방세르비아공화국 코소보주에서 포연이 피어 오른다.끝이 보이지 않는 게 더 큰 문제다. 발칸반도를 자칫 전쟁으로 몰아 넣을 수도 있는 ‘코소보 사태’는 세르비아군이 자국민이면서 종족이 다른 코소보주 주민들을 유혈 탄압하면서 비롯됐다.코소보주는 세르비아 공화국 땅이면서도 주민은 엉뚱하게 90%가 알바니아계.코소보 사람들은 종족이 다른 까닭에 세르비아로부터 분리,독립하고 싶어 한다.코소보해방군(UCK)이라는 무장단체까지 만들었다. 세르비아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분리주의자들을 색출한다는 이유로 즉각 군사행동을 폈다.알바니아계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면 무차별 포격한다.3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5만명 이상이 집을 버리고 이웃 알바니아 등으로 피난을 갔다.세르비아가 알바니아계를 없애거나 코소보에서 모두 쫓아내려 한다고 우려한다. ▷배경 및 발단◁ 본질은 민족 갈등이다.유고에서는 세르비아계,알바니아계,몬테네그로계 등이 얽혀 산다.전체는 1,100만명 정도.알바니아계는 200만명 정도로 코소보에 몰려 산다.코소보의 90%가 알바니아계.세르비아계로 둘러싸인 알바니아계‘인종의 섬’같은 형국이다. 코소보의 고난이 시작된 것은 9년전인 89년.밀로셰비치 대통령은 티토정권이 들어선 2차 세계대전이후 인정해온 코소보의 자치권을 박탈했다.코소보는 91년 급기야 독립을 선언하고 나선다.세르비아는 바로 옆의 알바니아가 사주했고 물심 양면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세르비아 사람들에게 코소보는 결코 내줄 수 없는 땅이다.정신적 고향이 자성지이다.세르비아의 전성기인 14세기 스테판두산 왕국 시절의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실제 1차 세계대전 때까지만 해도 세르비아계가 차지하고 있었다.전쟁이 끝나며 바로 옆에 있는 알바니아 사람들이 대거 몰려와 오늘에 이르렀다. 미국을 포함한 서방국가들이 세르비아가 코소보에서 ‘인종 청소’를 감행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세르비아는 95년 7월까지 3년이나 계속됐던 이른바 보스니아사태에서 ‘인종 청소’을 감행해 세계의 지탄을 받았다.유고연방에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독립을 선포하자 세르비아는 즉각 응징에나섰다.보스니아사람들을 아예 없애버리기로 하고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었다. ▷사태 전망과 해결◁ 세르비아는 보스니아 때와 마찬가지로 무차별 보복을 할 것이다.그러나 보스니아 사태와는 사안이 사뭇 다르다.코소보 뒤에는 알바니아라는 나라가 있다.벌써 5만여명이 알바니아로 국경을 넘었다.알바니아를 근거지 삼아 장기적인 무력항쟁태세를 갖춘다면 세르비아는 알바니아를 공격하려 들 것이다.전쟁으로 번지기 십상이다. 사태의 심각성은 즉각 감지됐다.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는 즉각 세르비아에 물리력을 자제할 것을 경고하며 무력시위에 나섰다.알바니아에는 전투기를 치키로 했다.여차하면 폭격을 감행할 참이다.세르비아와 알바니아에 함께국경을 대고 있는 마케도니아에는 지상병력을 파견키로 했다. 그러나 무력시위나 결의안 만으로 이번 코소보 사태가 풀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상대가 아예 없어져 주기를 바라면서 벌이는 싸움이다.보스니아 사태에서도 그랬듯 다국적 평화유지군이 개입해야 발칸의 화약고가 잠잠해질 것같다. ◎印·파 카슈미르 분쟁 뿌리와 현주소/종교갈등이 핵경쟁까지 불러/주민 60%가 이슬람교도/47년 독립때 ‘파’ 귀속 희망/힌두교도 嶺主 인도에 양도/‘파’ 즉각반발 3차례 전쟁/협정이후 양국 분할 통치/모두 완전한 지배는 못해 인도와 파키스탄이 영유권 싸움을 하고 있는 카슈미르 지역이 세계의 눈길을 끌고 있다. 두나라가 지구촌의 우려와 비난을 무릅쓰고 핵실험을 강행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이 곳 때문이었다.세차례나 싸웠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상대를 압도할 무기가 필요했고 앞다투어 핵무기 개발에 진력해왔다. 카슈미르는 인도와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과 중국 등이 국경을 함께 맞대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때문에 두나라간에 치열한 영유권 다툼을 가져왔고 남아시아의 화약고가 됐다.22만여㎢의 면적에 500만여명이 살고 있다.인구의 60% 이상이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 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종교적 차이로 서로 다른 나라가 된 인도와 파키스탄.카슈미르는 어느 나라의 영토도 아니었다.주민들은 당연히 종교가 같은 파키스탄으로 편입될 것을 기대했다.그러나 힌두교도인 영주(領主)가 인도에서 원조를 받았다는 명분을 내세워 통치권을 인도에 넘겼다. 파키스탄이 즉각 반발하며 전쟁이 벌어졌다.유엔이 중재에 나섰고 어느 쪽에 편입되기를 원하는지에 대해 국민투표를 실시했다.서로 다른 의견이 팽팽히 맞섰고 결과적으로 분열만 조장했다.그리고 65년과 71년 또 두번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세번째 전쟁이후에는 협정을 맺었다.카슈미르를 두개로 쪼개 북부의 아자드 카슈미르는 파키스탄이,남부의 잠무 카슈미르는 인도가 통치하도록 했다.어느 나라도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해 지금도 분쟁의 불씨를 안고 있다.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 무력충돌 원인과 전망/독립당시 국경선 획정이 불씨/이웃사촌이 앙숙 사이로… 평화적 해결 불투명 아프리카 북동쪽에서 한달 가까이 총성이 그치지 않고 있다.국경선을 둘러싸고 에티오피아와 이웃 에리트레아가 전면전을 방불케 하는 국경분쟁을 치르고 있다. 이번분쟁은 지난달초 에리트레아가 잃어버린 땅을 되찾겠다고 국경을 넘어 에티오피아를 공격하면서 본격화했다.에티오피아의 반격과 함께 두 나라는 전투기까지 동원,수도와 주요 도시들을 서로 폭격했다.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의 국민소득은 각각 400달러와 570달러.모두 95년도 기준치이지만 요즘이라고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근래엔 심한 가뭄마저 들어 더욱 먹고살기가 어렵게 됐다.싸울 형편도 못되는 두 나라가 곧 전면전에 돌입할 태세다. ▷발단과 배경◁ 직접적인 원인은 국경분쟁이다.에리트레아가 에티오피아 서북부에 위치한 티그레주의 바다메를 침공해 점령한 것은 지난달 12일이었다. ‘내 땅은 내가 차지한다’는 생각에서였다. 하루아침에 ‘내 땅’을 빼앗긴 에티오피아도 발끈했다 두나라의 응어리는 6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에리트레아는 2차대전이 끝나면서 50여년만에 이탈리아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났다.그러나 독립국가는 되지 못했다.국력이 월등했던 에티오피아가 흡수 통합해 버렸다.에티오피아와는 천년도 넘게 같은 생활권으로 살아왔던 터.에리트레아는 즉각 해방전선을 조직해 무력항쟁을 벌인다.그리고 31년만인 93년 마침내 신생 독립국으로 탄생했다. 그러나 국경선이 문제였다.이번 분쟁의 빌미가 된 티그레주 일부가 에티오피아 땅으로 되어 있었다.에리트레아는 이탈리아의 식민지에서 벗어날 당시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며 자국 영토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지금까지 에티오피아에 편입되어 있었다. 모호한 국경선이 늘 분쟁의 불씨로 남아 있었지만 지난해까지만 해도 두 나라는 우호적이었다.한나라나 다름없이 화폐도 같이 쓰던 이들이 틀어지게 된 것은 지난해 11월.에리트레아가 에티오피아 통화 ‘비르’를 버리고 ‘나크파’라는 화폐를 만들었다.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레아가 괘씸했다.예전과 달리 교역을 하면서 미국 달러로 결제해 줄 것을 요구했다.에티오피아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온 에리트레아는 당장 큰 타격을 입었다.에티오피아의 국민총생산액은 250억달러에 이르지만 에리트레아는 20억달러.두나라 국민감정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잠재되었던 국경분쟁이 자연스레 불거졌다. 미국과 르완다,리비아 등이 앞다퉈 분쟁의 중재에 나섰다.두 나라에게 93년 이후 지켜져 왔던 국경선으로 각자 군대를 철수시키고 협상을 갖도록 촉구하는 평화안을 제시했다.그러나 감정이 절정에 다다른 두나라가 영토분쟁을 평화적으로 매듭지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두 나라 비교◁ 에티오피아 면적은 112만8,000㎢로 한반도의 5.5배쯤 된다.인구는 6,000만명.이탈리아의 침략을 물리치고 독립을 유지했던 나라로 한국전쟁 때 우리를 돕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적 안정을 찾지 못한 채 지금까지 극빈국에 머물고 있다. 반면 에리트레아는 국토의 크기를 비롯해 전체인구와 국민총생산액 등 국력이 에티오피아의 10분의 1 수준.종족과 언어가 9개에 이르고 이슬람교에서 기독교까지 종교도 복잡한 것은 두나가 모두 똑같다.
  • ‘아침이슬’ 양희은(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1)

    ◎“나는 가수일뿐… 결코 운동권 못돼”/암울한 독재정권 아래 서정적 노래 통해 정신적 탈출구 제시 했을뿐/‘늙은 군인의 노래’ 부르고 78년 쓸쓸히 노래판 떠나 70년대 청년문화를 주도했던 ‘아침이슬’의 통기타 가수 楊姬銀씨.독재정권의 잇단 금지곡 딱지로 70년대를 ‘금지인생’으로 살아야 했던 그가 이제 아픈 세월을 딛고 우리 앞에 다시 우뚝섰다.세월은 흘렀지만 그때 그 시절 그 노래들은 어두운 시절의 기억과 함께 더욱 강한 행명력으로 살아난다. “긴 밤 지새우고/풀잎마다 맺힌/진주보다 더 고운/아침이슬처럼/내 맘에설움이/알알이 맺힐때/아침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1994년 8월,무더위가 유난히 기승을 부리던 한 여름밤.서울 동숭동 음악전문 공연장 ‘라이브’­.20년의 시공을 초월한 ‘청년가수’ 楊姬銀(46)의 열창에 공연장을 가득 메운 30∼40대의 관객들은 70년대 어두운 기억의 편린들을 떠올리며 숙연한 분위기에 빠져 들었다.가수생활 23년을 결산하는 첫 개인무대였던 이 자리에서는 ‘아침이슬’ 등 70년대의사연 많은 시대곡들이 이어졌다.시간이 흐를수록 관객들의 침묵은 한계에 달했고,급기야는 모두 목이 터져라고 함께 불렀다. 71년 서강대 사학과 1년 재학중 ‘아침이슬’로 데뷔한 뒤 70년대 청년문화의 대명사로 자리매김돼 온 통기타 가수 양희은.가난했던 어린시절과 사랑의 상처,연속되는 금지곡 행진,한창 나이의 투병생활 등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왔다.독재정권의 서슬퍼런 압제의 칼날 아래서 젊은이들에게 노래를 통해 정신적인 탈출구를 제시했던 그녀는 한때는 ‘운동권 가수’로 인식되기도 했다.그러나 楊씨는 자신이 결코 운동권이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암울한 시절 시대상황이 노래까지 어둡게 만들었다고나 할까. 지금은 가정주부로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다.매일 하오 2∼4시 SBS 라디오방송(2시의 친구 楊姬銀입니다) 진행도 맡고 있고 연말로 예정된 콘서트 준비를 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그러나 문득 문득 떠오르는 20대의 아팠던 추억,즉 자신이 불렀던 노래들이 금지곡으로 묶여야만 했던 힘겨운 70년대를 결코 지울 수가 없다.양씨의 ‘금지 인생’은 그 유명한 ‘아침이슬’로부터 시작됐다.金敏基씨가 작사·작곡한 곡을 받아 71년 발표,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이 노래가 같은 타이틀의 앨범에 수록된 ‘엄마 엄마’‘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그날’과 함께 74년 어느날 느닷없이 방송에서 사라지게 된 것이다.72년 새음반 ‘서울로 가는 길’에 실린 ‘작은 연못’‘백구’‘서울로 가는 길’‘새벽길’ 등 10곡도 이때 모두 금지곡 딱지를 받았다.그 외에도 78년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늙은 군인의 노래’ 등 부른 노래중 금지곡만 30여곡에 이른다. 이 노래들이 해금된 것은 지난 84년.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 레퍼터리들이지만 오히려 이 노래들에 실린 무게는 더해만 갔다.대학생들의 시위현장에서,소외된 노동현장에서,젊은이들의 술자리에서….노래를 방송이 원천봉쇄하면 음반도 막히게 마련이지만 그래도 젊은이들은 이들 금지곡들을 용케 찾아서 불렀다. 楊씨는 당시의 상황을 돌이켜 이렇게 말한다. “한마디로 우스꽝스런 해프닝의 연속이지요.‘가사퇴폐’‘시의부적합’‘허무주의 조장’이란 명분인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지요.‘늙은 군인의 노래’만 하더라도 국방부장관이 금지를 명령하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느냐는 꼬투리를 잡아 금지곡 판정을 당했을 정도니까요” 노래가 금지곡으로 묶이고 나니 가수의 생활도 곤궁 속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요주의 인물’로 낙인받은 뒤 본격적으로 도청에 시달렸고 하루 종일 따라붙는 감시의 눈도 여간 불편한게 아니었다.아침이슬 발표 후부터 계속해온 방송도 순탄치만은 않았다.방송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정보부 요원들에게 잡혀 빵집에서 추궁받던 일은 지금도 진저리가 쳐진다고 회고했다.그중에서도 가장 견딜 수 없던 일은 71년부터 계속 맡아오던 방송활동의 중단이었다. “77년 당시 6년째 기독교방송 음악프로 ‘우리들’을 진행하고 있었어요.요원들이 항상 뒤따르던 시절이지요.어느날 느닷없이 사장으로부터 ‘당분간 쉬라’‘네잘못이 아니다’라는 말을 들었을땐 눈물이 핑 돌더군요”.그때부터 방송출연 교섭이 뚝 끊겼다.결정적으로 노래판을 떠나게 된 것은 78년 MBC TV ‘토토즐 사건’이었다.어렵게 출연한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프로그램에서 ‘늙은 군인의 노래’를 불렀다. “‘늙은 군인의 노래’는 평생을 군에서 복무하다 전역한 한 직업군인의 나라사랑을 순수하게 담은 노래였는데 국방부장관이 ‘군 사기 저하’를 이유로 봉쇄하더군요.레코드사 사장이 불려가고 전국 매장에 깔려있는 음반을 모두 수거해 파기시킨뒤 국방부장관에게 보고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지요” 이후 83년 ‘하얀목련’이 나올 때까지 일체의 노래활동을 중단해야 했다.87년에는 결혼했고 남편과 함께 훌쩍 미국행을 결행,지난 93년 돌아올 때까지 드문드문 고국을 드나들며 서정성 짙은 맑은 노래를 모은 음반도 몇 집을 냈다.자신의 노래·방송 인생을 자전적으로 풀어낸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이라는 책도 펴냈다. 처음부터 줄곧 어떤 노래를 부르며 살 것인가를 고민하며 살아 왔다는 楊씨.그는 자신이 받았던 팬들로부터의 사랑을 되돌려주기 위해 다시 노래를시작했다고 말한다.“20대엔 밝은 노래를 부르는 것 자체가 철없는 짓이라고 생각했습니다.노래는 슬픔과 아픔을 함께 나누는데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요즘 신세대들이 흔히 부르는 노래들은 나름대로 의미를 담고 있으면서도 무언가 모자란 느낌입니다.노래는 서정성이 담겨야 합니다.70년대의 금지곡들도 저에겐 모두 서정이었지요”. ◎사연들/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냐고/퇴폐·허무·時宜 부적절 우스꽝스런 해프닝 연속/“네 잘못 아니다” 듣고 눈물/‘붉은태양’이 북측 인사라니… “태양은 묘지위에/붉게 떠오르고/한낮에 찌는 더위는/나의 시련일지라 /나이제 가노라/저 거친 광야에/서러움 모두 버리고/나 이제 가노라.” 이 노래에서 문제가 된 것은 ‘태양은 묘지위에/붉게 떠오르고’부분.붉은 태양이 북쪽의 인사를 암시한다는 억지해석이 금지곡으로 이어졌다.그러나 금지곡 이후 들불처럼 번져 지금까지도 애송되고 있는 걸작이다. “나 태어나/이 강산에/군인이 되어/꽃 피고/눈 내리길/어언 삼십년/무엇을 하였느냐/무엇을 바라느냐/나 죽어/이 강산에/묻히면 그만이지/아 다시 못올/흘러간 내 청춘/푸른옷에 실려간/꽃다운 이 내 청춘.” 평생을 군인으로 살다 전역하게 된 실제 인물의 순수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 이 노래 는 금지곡으로 결정된뒤 대학가와 노동현장에서 개사돼 투쟁가로 변질된 대표적인 노래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느냐는 이유아닌 이유로 금지됐다면 ‘작은 연못’은 당시 대립되는 두 세력들을 빗댔다는 이유로 방송에서 사라진 노래들이다. “너의 침묵에/메마른 나의 입술/차가운 네 눈길에/얼어붙은 내발자욱/돌아서는 나에게/사랑한단 말 대신에/안녕 안녕 목메인 그한마디/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깊은 산 오솔길옆/자그마한 연못엔/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아무 것도 살지 않지만/먼 옛날 이 연못엔/예쁜 붕어 두마리/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깊은산 작은 연못…” 이들 역시 금지 이유와는 달리 서정적인 분위기가 농후하다.◎그의 길 ▲52년 서울 출생. ▲70년 경기여고 졸업. ▲71년 서강대 사학과 입학. ▲71년 ‘아침이슬’ 발표. ▲72년 앨범 ‘서울로 가는 길’ 발표. ▲74년 ‘아침이슬’‘서울로 가는 길’ 금지. ▲77년 기독교방송 음악프로 ‘우리들’ 진행 도중하차. ▲78년 MBC TV‘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출연뒤 ‘늙은 군인의 노래’금지. ▲84년 ‘하얀목련’으로 대한민국 가사대상 수상. ▲87년 결혼,도미. ▲93년 귀국. ▲94년 첫 개인 콘서트. ▲현재 SBS 라디오 ‘2시의 친구 양희은입니다’ 진행.
  • 모차르트 ‘레퀴엠 미사’ 진혼곡(명반과 함께하는 음악여행:4)

    ◎검은 가면의 만파식적(萬波息笛) 1.울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린다.그림자는 점점 더 짙어진다.짙음만으로 비극성(悲劇性)에 도달하려는 것처럼.그것은 음악이 시작되기 전부터 아니 태초(太初)부터,지금까지 깔리고 쌓여 오는 것 같다.그렇게 순식간에 음악의 공간이 마련된다. 레퀴엠 아에테르남 도나 에이스.안식,영원한,주소서,그들에게.언제부터 ‘레퀴엠’이라는 단어가 슬픔과 위안을 그 자체로 동일시했던가.언제부터 ‘키리에’라는,‘주님’을 뜻하는 단어가 그 자체 인간 존재 비극성의 명징한 음악적 응축으로 되었는가.라크리모사(눈물),호스티아스(봉헌),베네딕투스(찬양),아뉴스 데이(신의 어린 양)은 또 어떻게? 서양음악의 레퀴엠 전통은 그렇게,‘단어를 음악으로 만들’ 만큼 위대하다.그리고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그중 가장 인간의 체취로 온습(溫濕)하다. 모차르트,쫓겨난 천사의,인간적인 체취? 왜냐하면,이 작품은,놀랍게도 자기 자신을 위한 진혼곡이다.그리고 이 작품 이래 모든 걸작 진혼곡들은 미사곡이 아니라 비극 자체가 등장인물인 장엄한 오페라로 화한다. 2.어느 날 짙은 안개를 꿰뚫고 검은 가면을 쓴 사내가 모차르트에게 나타난다.진혼곡을 써다오… 그는 죽음의 사자(使者) 같았다. 이 곡은 혹시 나를 위해 쓰라는 것이 아닐까,그렇게 나는 사형선고를 받은게 아닐까…모차르트는 작곡을 하면서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그는 가난과 방탕으로 병들고 지쳐 있었다.그의 작곡 속도가,원래 빨랐지만,병적으로 더 빨라졌다.미처 악보에 옮겨 적기가 힘들 정도로 악상(樂想)이 유령처럼 어른댔다. ‘돈 때문에’ 오페라 ‘마적’과 ‘티토의 자비’를 마친 후 그는 다시 레퀴엠에 몰두한다.심신이 점점 더 황폐해가고,그는 음악 속으로,진혼곡 속으로 그리고 죽음 속으로 속속 빠져 들어갔다.죽음이 더 먼저 왔다.레퀴엠은 미완으로 남았다. 모차르트의 생애를 다룬 음악영화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의 재능을 시기한 이탈리아 출신의 선배 음악가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죽음의 공포’로 내몰아 살해했다,혹은 독살했다는 푸슈킨-림스키 코르사코프류 이야기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시재(詩才)를 시기하여 정지상을 죽이는 김부식의 이야기를 우리 고려사는 품고 있다.‘삼국사기’의 명문장가이자 대학자였던 김부식이 왜 시골 뜨기 시인 동창(同窓)을 선망­질투­증오했을까. 3.그러나 실제 고려사는 훨씬 더 복잡하다.정지상은 혁명적인 예술가였지만 정치적 미망(迷妄)에 사로 잡혔다.김부식은 보수적인 대학자였고,현실주의자였다.‘모차르트 독살’설은 우선 사실과 다르다. 살리에리는 베토벤,슈베르트,그리고 리스트를 가르친 훌륭한 스승이었고 존경받는 오스트리아 황제궁 음악감독이었다.1790년 황제 죠셉 2세가 죽고 새로 부임한 레오폴트 2세가 살리에리 대신 자신을 음악감독으로 써 주기를 바랐던 모차르트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는 재능은 있었으되 말썽꾸러기였던 것.살리에리는 그런 그를 두둔하느라 진땀을 흘렸을 것이다.그가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몰랐을 리는 없다.그러나 자신의 제자들 또한,특히 베토벤이 모차르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리라는 것을 몰랐을 리도 없다. 기교만 보자면 모차르트는 놀라운 음악의 신동(神童)이다.그러나 진정한 예술가로서 그는,아니 그도,평생 동안 거대한 벽과 싸워야 했다.그 벽은 바로 이탈라이 오페라 부파 음악. 이 음악장르는 이탈리아 본토 뿐 아니라 파리와 빈 등 서유럽 음악중심지에서 그야말로 창궐했다.일반인들은 그 장르가 구사하는 기발한 악상,무엇보다 음탕한 대사를 즐겼지만 모차르트는 달랐다.테너의 고음 선율이 청아한채로 뒤틀릴 때 그는 죽음의 검은 가면을,죽음이 삶 속에 제 모습을 언뜻 언뜻 내보이면서 흘리는 웃음을,어리석은 삶을 너그럽게 포괄하는,비극을 넘어서는,수 천년 나이를 먹은 웃음의 경지를 보았다.그렇다.그는 현대성의,미래예술의 한 핵심을 보았다. 4.모차르트의 부파 풍(風)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돈 조반니’‘코지 판 투테’는 모두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를 차용하고 선망한다. 그러나 자연스러운,비비꼬는 이탈리아 청아성(淸雅聲)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독일적 서정의 극치를 구현한다.그렇게 ‘마적’은 부파적인 요소를 최대로 삭제한 채 독일 오페라 음악사의 최고절정에 달하고,최후작 ‘티토의 자비’는 오페라 세리아다. 물론 모차르트 음악은 가장 위대한 인류 유산 중 하나다.‘이탈리아 오페라 부파’라는 벽은 그가 스스로 키운,그렇게 실제보다 더 거대한 벽이고,그의 위대함을 담보해 주는 예술가의,예술의,시련의 벽이었다. 그렇게 그가 자기 자신을 위한 진혼곡을 남긴다.지상으로 쫓겨왔던 천사가 지상을 떠나며 남기는 유언은,지상적으로 뭉클하다.하나님,이제는 이 창조의 속박을 벗게 하소서.그 유언이 지상에 남은 모든 인간을 위한 만파식적이 된다.살으라,고통받으라,의미를 창조하라… ‘살리에리 이야기’는 35세에 요절한 천재 모차르트를 위한 허구다.그러나 예술가는 더 깊은 진실을 이야기 속에 은유(隱喩) 혹은 상징(象徵)으로새겨 넣는다. ‘검은 가면’이야말로 진실의 핵심을 담고 있다. 모차르트 레퀴엠은 대개 브루노 발터의 연주를 최고의 것으로 친다.그의연주는 모차르트 음악의 한 본질인 일상적 우울의 장려미(壯麗美)를 총괄적으로 보듬고 있다.다만,그것조차 풀어헤치고 절망하는 모차르트,그 절망의 진지함에 기적적으로 묻어나는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의 검은 가면이,카를 뵘의 연주와 달리 보이지 않는다. 어쨌거나,불쌍한 살리에리.그는 모차르트보다 6년 먼저 ‘이탈리아에서’태어나 34년을 더 살았다. 1971.녹음,1983 DG 413 553­2 GH 소프라노:에디트 마티스/알토:율리아 하마리/테너:비슬라브 오크만/베이스:카를 리더부쉬 빈 국립오페라 합창단/빈 필하모니커/지휘:카를 뵘 ◎레퀴엠,부파란 레퀴엠.‘죽은 자를 위한 미사’ 통상 미사에서 ‘글로리아’(영광송)와 크레도(신앙송)부분이 빠지고 ‘디지레’(진노의 날)부분이 첨가된다.팔레스트리나와 빅토리아,그리고 베를리오즈,베르디,포레가 걸작을 남겼다.브람스 이래 진혼곡은 통상 미사곡과 다른 가사를 사용하거나 기악만으로 구성되면서 더욱 일반화,현대화되었다. 오페라 부파. 일상의 삶에서 소재와 등장인물을 뽑아내는 희극(喜劇)오페라.오페라 세리아의 반대.페르골레시 ‘마님이 된 하녀’,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로시니 ‘세빌랴의 이발사’와 ‘신데렐라’를 거쳐베르디 ‘팔스타프’에서 최고의 경지에 달했다. 마티스(1938∼)는 모차르트,슈트라우스 해석에 능한 스위스 소프라노.하마리(1942∼ )는 헝가리 메조소프라노이다.레퍼토리가 다양하다.오크만(1937∼ )은 폴란드 테너.차이코프스키,모차르트와 베르디까지 소화한다.리더부쉬(1932∼ )는 바그너역으로 너무나 유명한 독일 베이스. 빈 필하모니커.1842년 창단.역대 주요 지휘자는 니콜라이,말러, 바인가르트너,푸르트뱅글러,카라얀,뵘 등. 뵘.모차르트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오페라에 정통한 오스트리아 지휘자.그가 지휘한 두 작곡가의 오페라 전곡집이 DG 레이블로 나와 있다.
  • 지나친 관대/하진규 건설기술연구원장(굄돌)

    유교문화권에 속한 우리 민족은 정에 약하다.그래서 남에게 모질게 한 사람은 반드시 업보를 받는다는 생각을 한다.남의 눈에 눈물을 내는 사람은 제 눈에 피눈물이 난다고도 한다.이렇게 남을 위하는 우리 민족성은 자랑할 만한 것이다. 유럽에서는 이웃이 시끄러워 생활에 방해가 되면 곧 경찰에 신고를 한다고 한다.우리는 불편해도 모처럼 찾아온 친구들과 한잔하면서 회포를 풀겠거니 생각하며 참는다. 그러나 이렇게 남을 생각하는 정과 마음도 때로는 발전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우리는 지금 IMF체제 때문에 정부,기업체,근로자 할 것 없이 구조조정의 회오리 속에 있다.구조조정이라는 구호만 있고 실천은 제대로 되지 않아 대통령께서 강력한 실천의지를 밝힌 적이 있다.그 이후 구조조정이 가시화하면서 새로운 초대형 민간은행이 생긴다고 하며,견실하다고 생각한 대그룹이 해체된다는 보도도 있었다. 피할 수 없는 구조조정이니 고통과 시련을 감내해야 한다.인원을 줄이거나 그룹내 기업을 매각할 때 어느 사람,어떤 업체를 정리할 것인지를 결정해야하는 경영자들은 얼마나 많은 고뇌의 밤을 지새우겠는가.냉혹한 국제경쟁에서 살아 남기 위해 살을 에는 아픔이 따르더라도 환부를 도려내는 고육지책이 절실한 때다. 우리는 웬만한 잘못은 용서의 미덕으로 감싸고 적당히 넘어가는 습성이 있다.굳이 잘못을 나무라거나 벌주면 눈물이 없는 사람으로 치부되기도 한다.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는 어렵다.다만 용서받을 것과 응징받아야 할 것은 구분돼야 한다. 정에 얽매이거나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해서야 어찌 내일을 기약할 수 있겠는가.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구조적인 잘못을 고쳐나가는 데 더 이상 정에 얽매이지 말자.지나친 관대는 미덕이 아닌 시대이다.
  • 좌절감만 안겨준 6·4 선거/朴載昌 淑大 교수·행정학(기고)

    6·4 지방선거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매우 낮은 투표율이다.경제위기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심란한 유권자들에게 선거가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비전을 제시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실로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했겠지만 그중에서도 흑색선전과 인신공격이 끼친 폐해는 매우 크다.나라의 장래야 어찌됐건 눈앞의 영달이나 당선을 위해 몸이라도 팔 것 처럼 이전투구하는 후보자들의 모습에서 이미 좌절된 이 나라의 미래를 떠올렸을 유권자들로서는 가장 무서운 징벌을 구상했을 것이다. 유권자의 사랑과 지지를 호소하고 또 획득해야만 하는 정치인들에게 있어 냉담과 외면처럼 혹독한 시련은 없다.그런 점에서 이번 선거의 높은 기권율은 정치권 모두에게 패배를 안겨준 셈이다.유건자들은 특히 텔레비전 토론회가 상호 비방전이 난무하는 인격 살인의 무대로 변하는 현상을 목격하면서 참담한 좌절감을 맛보았을 것이다. 후보자와 유권자 사이의 직접적인 접촉이 사실상 차단되어 있는 현행 선거법 체제 아래에서 깨어있는 유권자일수록 후보자에 대한 필요한 정보에 목말랐을 것이다.그런 만큼 텔레비전 토론회에 거는 기대가 컸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후보자들의 오만과 자질 부족으로 인해 산산히 깨지고 말았다.이는 사실 선거 이전부터 예상됐었다.현행 선거법은 대통령 선거에 대해서는 텔레비전 토론회의 공정성 보장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으나 지방선거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비책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거법 개정 단계에서 부터 여러 시민운동단체들이 이런 문제점을 경고했지만 정치권은 이를 수용·보완하지 않았다.그리고 이같은 제도상의 미비점은 정략적 타산에 따른 결과이며 이로 인해 유권자들은 엄청난 실망과 좌절감을 느꼈을 것이다. 유권자들은 또 지역감정과 이를 악용하려는 정치권의 몰염치에도 낙담했을 것이다.특히 지역감정이 특정 지역에 대한 배타적 독점권을 보장해 준다는 사실에 착안한 정치권의 무사안일과 권력적 오만은 지역주의에 순치되어 있는 일반 유권자들로서도 더 이상은 참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지역감정에 따라 선거전이 운영되는만큼 이미 선거 결과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는 인식도 유권자들로 하여금 선거전에 흥미를 갖지 못하게 하는 이유의 하나였을 것이다. 어쨌든 이제 선거는 끝났다.선거과정에서 드러난 선거법 상의 문제나 정치권 전체의 자질 부족 현상을 시정하는 과제는 지금부터라도 우리 모두의 지혜를 모아 함께 해결해 나가야할 숙제이다. 그 중에서도 오도된 선거과정으로 인해 우리에게 남겨지게 된 당파적 갈등과 개인적 반목,그리고 인격적 상처는 한시라도 빨리 치유해야 할 과제다.다른 때도 아닌 국난의 시대를 함께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회적 연대와 정치적 결속이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선거라는 정치적 행사 자체가 바로 이런 정치적 효과를 얻자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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