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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업카드사 공격경영 ‘눈길’

    ‘카드 대란’의 시련을 혹독하게 겪었던 전업 카드사들이 은행의 ‘후광’으로 비교적 쉽게 영업을 해왔던 은행계 카드사들을 위협하고 있다. LG, 삼성, 현대, 롯데 등 전업 카드사들이 은행계 카드사들과 ‘맞장’을 뜰 수 있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최근 활발한 자금조달에서 비롯됐다. 잇단 자산담보부증권(ABS) 발행 등으로 ‘실탄’을 마련해 공격적인 마케팅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대규모 부실로 자금조달이 힘들었던 전업 카드사들은 최근 부실을 털어내면서 자신의 자산 담보만으로도 거액을 끌어 들이고 있다. 특히 6%대를 육박하던 채권 발행 금리가 최근 은행계 카드사들이 모(母)은행에서 조달하는 금리와 엇비스한 4%대로 떨어져 “이제 한 번 해볼 만하다.”는 목소리가 높다.전업 카드사 중에서도 매각을 앞둔 LG카드의 약진이 단연 눈부시다. 올 상반기 7716억원의 순이익을 낸 LG카드는 그동안 채권단의 채무 만기연장에 연명해야 했다. 그러나 올들어 국내에서만 1조 4400억원 규모의 회사채와 ABS를 발행했다. 지난 8일에는 홍콩에서 메릴린치(주간사)와 외부기관의 지급보증 없이 자사의 카드매출 채권을 담보로 4억달러 규모의 해외 ABS를 발행하는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경쟁 카드사들은 LG카드의 최근 행보에 대해 “비싼 값에 팔리기 위해 너무 과욕을 부리는 것 아니냐.”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한다. 현대카드도 지난 10일 GE소비자금융(GE Consumer Finance)으로부터 6783억원의 자금을 투자받은 것을 계기로 재무구조 개선 효과는 물론 신용등급 상승, 리스크 관리기법 향상 등을 꾀하게 됐다. 정태영 사장은 GE와의 제휴로 가장 기대되는 효과로 조달금리 하락을 꼽았다.다른 카드사들이 신용대출을 크게 줄이는 것과는 달리 롯데카드가 공격적인 신용대출에 나서고 있는 것도 관심을 끌고 있다. 전업 카드사들의 공격적 경영에 대해 시중은행 카드사업 담당자는 “양측의 조달금리가 비슷해지면서 마케팅 능력이 훨씬 뛰어난 전업계가 유리한 국면을 맞고 있다.”고 말했다.이 관계자는 “매각을 앞둔 LG카드가 더 공격적으로 나갈 것이고, 경쟁 관계에 있는 카드사들도 이에 맞불을 놓는 상황”이라면서 “후발주자들과 은행계까지 가세하면서 카드업계 전체가 또다시 치열한 시장 쟁탈전에 빠져드는 느낌”이라고 덧붙였다.이창구기자 window2@seoul.co.kr
  • 色色남녀-내 남자는 소년?

    영어로 사랑한다는 표현은 메이크 러브(make love)와 폴 인 러브(fall in love)라고 하는데 ‘사랑’이라는 뜻을 깊이 표현한 것은 ‘메이크 러브’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사랑을 ‘아모르’(amour)라고 부르는 유래를 신화(神話)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모르는 이성간의 사랑을 뜻하며 로마 신화에서는 큐피드, 그리스에서는 에로스라고 불리는 연애의 신(神)이다. 그는 아프로디테의 아들로 늘 황금화살을 갖고 다녔는데 그 화살에 찔리면 사랑에 빠진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뛰어난 미모로 아프로디테의 노여움을 산 프시케(psyche:영혼, 나비)를 혼내주러 갔다가 실수로 자신의 화살에 찔려 사랑에 빠지고 둘은 부부가 된다. 큐피드는 자신의 모습을 보려고 하면 영원히 헤어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를 하고 동생의 행복을 시기한 언니들의 부추김으로 프시케는 약속을 어긴다. 큐피드가 떠나자 남편을 찾아 온갖 시련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 프시케. 큐피드는 프시케를 구하고 아프로디테에게 간청하여 결혼을 허락 받는다. 비로소 프시케는 불로불사의 생명을 얻는다. 이 큐피드와 프시케의 신화는 우리에게 사랑에 대한 여러 가지를 보여주고 있다. 첫째, 사랑은 돌발적으로 찾아 올 수 있다는 것이며 둘째, 프시케가 약속을 어긴 것은 사랑의 미성숙과 도전을 의미하고 셋째, 남편의 사랑을 되찾고자 시련을 겪는 동안 프시케의 영혼은 성숙하고 넷째, 그 고통의 시간을 통과한 후에야 진정한 사랑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얼마 전 오랫동안 프랑스에서 살다 온 40대 남자와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가 말하길 “언어는 문화와 밀접한 것 같아요 프랑스에서는 사랑을 한다는 표현도 ‘그 사랑을 한다’(faire l‘amour 페르 라무르)고 해요 그’나는 당신이 보고 싶다‘(I miss you)는 표현도 영어나 우리나라는 내가 주어가 되는데 불어는 ’당신이 나에게 부족하다‘(tu me manques 튀 므 망크)고 하거든요 사랑도 최소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파트너십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어릴 적에는 사랑은 열정이 중요하다고 느꼈는데 살아보니까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는 누군가와 사랑의 느낌으로 빠져들 때 그의 어떤 부분이 나를 매혹시키는 걸 느낀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진부한 관계’ 혹은 ‘권태로운 관계’로 사랑의 화면이 변경되면 나를 ‘뻥’ 가게 만든 그 부분 때문에 속이 뒤집히는 걸 경험하게 된다.‘당신이 있어 행복해요!’가 ‘당신 때문에 미치겠어요!’로 바뀌는 것이다. 그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아마도 쌍방과실이라 봐야 할 것이다. 수 차례의 연애 실패 경력자로서 인생에서 배운 것 중 하나는 나와 한 때 시절 인연을 맺었던 상대는 어떤 면에서는 모두가 내 스승이었다는 사실이다. 언젠가 하도 답답하여 유명한 역학자에게 상담을 받은 적이 있었다.“도대체 나의 진짜 인연은 어디 있나요? ”그랬더니 50살이 넘어야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럼 여태껏 만난 사람들은 남자가 아니라 소년들이었다는 건가?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띵 하면서도 정곡을 찔린 듯했다. 나도 진짜 ‘남자’를 만나면 제대로 사랑을 만들 수 있을까? 성칼럼니스트 sung6023@kornet..net
  • ‘슈퍼맨’ 부인 폐암 투병중

    지난해 숨진 영화 ‘슈퍼맨’의 주인공 크리스토퍼 리브의 부인 데이나 리브(사진 오른쪽·44)가 폐암으로 투병 중이라고 AP통신 등이 9일(현지시간) 전했다. 데이나는 이날 성명을 통해 “최근 폐암 진단을 받아 최고의 의료진으로부터 치료를 받고 있으며 상태는 낙관적”이라면서 “머지않아 건강이 회복됐다는 소식을 전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 사실을 발표한 이유는 한 타블로이드 신문이 이를 기사화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시련을 맞이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더 크리스(크리스토퍼 리브의 애칭)가 나와 함께 있음을 느끼고 있다.”면서 “늘 그랬듯이 나는 그를 힘과 용기, 희망을 가지고 역경에 맞선 인물의 전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장택동기자 taecks@seoul.co.kr
  • [세계육상선수권대회] 게이틀린 “큰 무대가 내 체질”

    8일 새벽 핀란드 헬싱키 올림픽스타디움 트랙. 전세계 수억명의 눈길 속에서 8명의 인간탄환들이 ‘탕’하는 출발총성과 함께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숨죽인 레이스에서 출발이 7번째로 늦었던 한 사나이가 50m지점부터 허벅지 근육을 꿈틀대더니 쭉쭉 앞으로 치고나와 가장 먼저 결승선에 닿았다. 저스틴 게이틀린(23·미국)이 2005세계육상선수권대회 남자 100m 결승에서 9초88을 기록하며 마이클 프레이터(23·자메이카)와 킴 콜린스(29·세인트키츠네비스 이상 10초05)를 역대 최대 격차인 0.17초 차로 여유있게 제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로써 게이틀린은 지난해 아테네올림픽에 이어 또다시 메이저무대를 점령하며 큰 무대에서 강한 ‘간큰 총알’임을 온몸으로 보여줬다. 올림픽과 세계선수권 연속 제패는 칼 루이스(44)와 모리스 그린(31·이상 미국) 등에 이어 사상 5번째. 게이틀린은 세계기록(9초77) 보유자인 아사파 파월(23·자메이카)이 허벅지 부상으로 빠진 이날 레이스에서 스타트 반응속도가 0.157초로 8명 가운데 7번째로 늦었으나 후반 폭발적인 스피드로 만회하며 지구상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가 됐다. 뉴욕 브루클린 출신으로 185㎝,79㎏의 이상적인 체격을 지닌 게이틀린은 고등학교 때 허들로 육상을 시작해 타고난 순발력과 스피드를 갖췄다는 평가를 들었지만 아테네올림픽 때까진 그저 그런 기대주에 불과했다. 숱한 단거리 스타들을 길러낸 ‘마이더스의 손’ 트레버 그레이엄 코치의 지도를 받으며 기량을 갈고 닦았지만 2001년에는 금지약물 암페타민 양성반응으로 1년 동안 트랙에 서지 못하는 시련도 겪었다. 아테네올림픽에서는 2위 프랜시스 오비켈루(27·포르투갈·9초86)를 사진판독 끝에 100분의1초 차로 힘겹게 제치며,80년 모스크바올림픽에서 애런 웰스(영국)와 실베오 레오나르드(쿠바)가 10초25의 같은 기록으로 사진판독을 거친 이후 24년 만에 가장 작은 차이로 금메달을 목에 걸어 운이 좋았다는 비아냥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서 2위와 최대 격차를 내며 당당히 우승을 차지, 군소리를 잠재웠다. 게이틀린은 앞으로 동갑내기 파월과 함께 세계 육상 단거리계를 양분하며 세계기록 단축을 위한 선의의 경쟁을 펼칠 전망이다.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日우정민영화법 부결 후폭풍] (상)격랑 휩싸인 일본 정국

    [日우정민영화법 부결 후폭풍] (상)격랑 휩싸인 일본 정국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최대 개혁과제로 인식돼 온 우정민영화법안이 8일 참의원 본회의에서 부결되고, 중의원이 해산되면서 일본정국의 격동이 시작됐다. 무엇보다 개혁으로 상징된 고이즈미식 정치는 표류 상태다. 아울러 포스트 고이즈미를 향한 찜통더위 속의 선거전은 어느 때보다 뜨거울 전망이다. 일면 금융시장 개방의 성격이 강한 우정민영화 좌절은 일본으로 향했던 미국 등 해외자본의 이탈이 우려돼, 금융시장도 요동치고 있다. 소수 극우세력을 등에 업은 고이즈미식 강경외교도 제동이 걸릴 것인지 주목된다. |도쿄 이춘규특파원|일본 정국의 한여름 대격랑이 시작됐다. 개혁을 기치로 2001년 4월말 출범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밀어붙이기식 개혁이 최대 시련을 맞은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지난 4년 3개월여의 집권 기간 중 초기에는 국민의 높은 지지를 바탕으로 사법개혁, 도로공사 민영화, 연금개혁, 국립대학 특수행정법인화, 기초자치단체의 대대적 합병 등 개혁조치를 일사천리로 단행했다. 반면 일본정치의 상징인 파벌의 힘은 조금씩 무력화시켰다. ●고이즈미의 개혁 좌절 하지만 고이즈미 개혁의 정점으로 불리는 우정민영화가 끝내 좌초되고 말았다.‘반(反)고이즈미 세력’들이 정치생명을 걸고 반격을 취한 결과, 참의원에서 관련 법안이 부결됐기 때문이다. 반고이즈미 세력은 그동안 낡은 정치의 상징인 ‘반개혁세력’으로 몰리면서 정국 운용에서 철저히 소외되자 우정민영화 법안을 계기로 ‘거사’했고 일단 성공을 거뒀다. 이처럼 중의원 해산 정국은 개혁과 반개혁의 충돌 결과로 인식된다.9월에 치러질 것으로 보이는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공명당과 연합, 과반수를 확보해 고이즈미가 총리에 재선되면 우정민영화 법안을 다시 제출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과반 획득에 실패하면 고이즈미 정권은 사실상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민주당 지지율 우세 민주당이 제1당이 되면 정권교체가 이뤄져 1993년 이래 12년 만에 비(非)자민당 정권이 탄생하게 된다. 물론 선거결과에 따라 민주당 단독, 사민당 등과의 연립 등 여러 변수가 생겨 최종적으로는 정계개편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현실성을 띤다. 정계개편의 에너지는 충분하다는 평이다. 우선 자민당은 중의원에서 전체 의원(249명)의 20% 이상이 이미 당지도부의 지시를 거부한 채 중의원 본회의에서 우정민영화 법안에 반대나 기권(혹은 불출석)했고, 당지도부는 공천배제 의사를 밝혀 극적인 타협점이 없는 한 집단 모반파들이 신당 창당 모색 등 길을 달리 해 정계개편의 불씨가 될 것 같다. 이들이 민주당과 손을 잡는 것도 상정해 볼 수 있다. ●양당정치 공고화되나 자민당과 민주당의 ‘양당정치’가 공고화될지도 관전포인트다. 일본 정국은 2002년 북한이 일본인 납치문제를 시인한 뒤 급격히 우경화,2003년 11월 중의원, 지난해 7월의 참의원 선거에서 잇따라 정계의 한 축을 담당했던 사민·공산당이 쇠퇴했다. 무엇보다 과반수가 넘는 안정적인 제1당이 등장할 수 있느냐도 중요한 변수다. 일본 정치는 그동안 자민당이 안정적인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해 공명당과의 연립정부를 가동, 애초부터 정국 불안의 요인을 지고 있었다. 하원격인 중의원 2003년 11월 총선거에서도 자민당은 정원 480명의 과반에 미달하는 237석을 얻은 뒤 보수신당(4), 무소속(3)을 영입해 겨우 과반을 넘겼다. 이후 보궐선거에서 잇따라 선전, 현재 의원수는 249명이다. 한편 자민당과 민주당 등 각 당의 분석과 언론사들의 자체 조사 결과 대부분 민주당의 우세로 나오고, 자민당 반란의원 51명 가운데 20명 정도만 생환할 수 있을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taein@seoul.co.kr
  • 이천수 ‘월드컵본선까지 쭉~’

    이천수(24·울산)가 돌아왔다. 빠른 발과 정확한 공 컨트롤, 날카로운 돌파력과 과감한 슈팅으로 그라운드를 휘젓고 다니며 한국 축구의 차세대를 책임질 ‘밀레니엄 특급’이라 불렸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7일 대구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05동아시아연맹축구 운명의 한·일전. 이천수는 전반 10분 페널티박스 오른쪽에서 공을 툭 치고 들어가다 골키퍼를 스쳐 왼쪽 포스트를 살짝 벗어나는 강한 왼발 스핀슛을 날렸다.14분 뒤에도 같은 자리에서 수비수 한 명을 가볍게 따돌리더니 낮게 깔린 강슛으로 오른쪽 그물을 출렁이며 일본 수비진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했다.이밖에도 이날 4차례의 날카로운 전진패스로 김두현(23·성남)과 함께 중원을 지배하며 전성기의 기량을 선보였다. 이천수는 2002한·일월드컵 당시 대표팀 막내의 자리에서 전 경기에 출장하며 소금 같은 활약을 펼쳤다. 이듬해 K-리그에서 6경기 연속골을 터뜨리며 강한 인상을 남겨 같은 해 7월 레알 소시에다드와 계약했다. 한국인 최초의 스페인 프리메라리거. 이때만 해도 특유의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하지만 빅리그 무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누만시아로 임대되는 수모까지 겪다가 결국 한 골도 기록하지 못하고 올해 초 국내로 유턴했다. 부평고 시절부터 탄탄대로를 겪던 이천수에겐 축구인생 첫번째 시련이었다. 돌아온 이천수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형형색색으로 물들였던 머리칼은 차분한 검은색으로 바꿔 그을린 피부와 조화를 이뤘고 때마침 터진 결혼 스캔들도 별로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4개월 동안 경기를 뛰지 못한 공백을 딛고 지난달 피스컵에서 몸을 조율하더니 동아시아대회에서 부활의 몸짓을 한껏 과시했다.2006독일월드컵에서 어느덧 대표팀 중견의 위치에 오를 이천수의 부활은 시련을 겪고 있는 한국 축구에 청신호가 되고 있다.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휠체어 타고 8일도 ‘희망 덩크슛’

    휠체어 타고 8일도 ‘희망 덩크슛’

    “농구공을 처음 잡는 순간 거짓말처럼 제 인생이 다시 시작됐어요.” 휠체어 농구팀 국가대표선수인 서영동(25)씨. 그는 초등학교, 중학교때까지는 투수와 3루수로 활약하던 ‘잘 나가던’ 야구선수였다. 프로선수가 꿈이었지만 한창 방황하던 사춘기 시절 큰 사고를 당하면서 희망을 접었다. 고등학교 1학년인 17살때 오토바이를 몰고 가다 차와 부딪혀 오른쪽 허벅지 이하를 모두 잃었다. ●프로야구 선수 꿈 잃고 방황 팔뚝에 보이는 많은 흉터가 말해주듯 다분히 ‘험하게’ 살아온 그였지만, 감내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시련이었다. 더구나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던 야구를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은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몇년을 허송세월하다 뒤늦게 고교를 졸업하고, 직업전문학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만난 체육선생님은 “휠체어 농구를 한번 해보라.”고 권했다. “이 몸에 무슨 운동을 하라는 건지 벌컥 화부터 냈죠. 그런데 휠체어농구를 하고 있는 체육관에 막상 들어서니까 생각이 확 바뀌더라구요.‘그래 이건 바로 나를 위한 운동이야.’” ●농구로 새인생… 국가대표 영광까지 농구를 시작하고 활달한 성격도 되찾았다. 타고난 운동신경덕에 실력도 금세 늘었다. 포지션은 센터였다. 서씨는 직업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휠체어 농구팀이 있는 무궁화전자에 입사했다. 얼마 안 있어 국가대표로도 뽑혔다. 회사 농구팀에서는 큰 형님뻘인 김호용(34)씨를 만났다. 그와 손발을 맞추며 기량이 더 늘었다. 김씨는 3살때부터 소아마비를 앓았다.“손이 크니 나보다 농구를 더 잘 하겠다.”는 다른 선수의 한마디에 농구를 시작한 게 벌써 10년이 됐다. 정확한 슈팅을 자랑하는 ‘베테랑’ 김씨도 국가대표다. 차량용청소기, 휴대전화충전기를 만드는 무궁화전자에서 서씨는 조립을, 김씨는 품질관리일을 맡고 있다. 이 회사의 직원은 모두 163명이며, 이 가운데 130여명이 장애인이다. 무궁화전자는 삼성전자가 234억원을 투자해 만든 별도법인이다. ●“흠집생긴다고 체육관 안 빌려줄 땐 속상해” 김씨 등은 다른 직원과 똑같이 근무하고 일과가 끝난 뒤 1주일에 3차례에 걸쳐 2시간씩 연습을 한다. 실내체육관을 빌려서 하는데, 장소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바퀴 때문에 흠집이 생긴다고 체육관을 잘 안빌려줘요. 이해는 하지만 솔직히 서운합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서씨와 김씨가 주축이 된 무궁화전자는 전성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지난 6월 이후 열린 전국 규모의 휠체어농구대회 3개를 모조리 휩쓸었다. ●“내년 네덜란드 대회 꼭 참가할 것” 국가대표로서 이들의 목표는 같다. 내년에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하는 것. 이 대회에 참가하려면 오는 10월 열릴 예선에서 아시아·오세아니아에 배당된 2장의 티켓 중 하나를 따내야 한다. 호주는 어렵겠지만,10점 정도 차이 나는 일본은 3점차로 이긴 적도 있어 ‘타도 일본’을 외치고 있다. 서씨는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서도 요즘 구슬땀을 흘리며 슈팅을 가다듬고 있다. 수원 김성수기자 sskim@seoul.co.kr
  • [세계의 도청 실태] 국가 감시 개인파괴 다뤄

    [세계의 도청 실태] 국가 감시 개인파괴 다뤄

    영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Enemy of the state)’는 국가기관의 도청과 감시가 얼마나 개인을 철저하게 파괴할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난 1998년 개봉됐을 때만 해도 이 영화에 나오는 첨단 장비를 이용한 치밀한 도청과 감시는 ‘공상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제는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국가기관의 도·감청을 합법화하는 법안에 반대하던 한 국회의원은 미 NSA 요원에게 피살되고 이 장면은 우연히 사진작가의 카메라에 잡힌다. 변호사 로버트 딘(윌 스미스 분)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 장면이 담긴 디스켓을 갖게 되면서 그에게는 감당하지 못할 시련이 찾아 온다. 갑자기 변호사 사무실에서 해고당하고, 금융기록이 조작돼 신용불량자가 된다. 다른 사건 때문에 연락을 주고 받던 옛 애인은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여기저기 숨어보지만 NSA는 항상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위협을 가한다. 자신이 왜 쫓기는지, 자신의 행적을 NSA가 어떻게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지 영문을 모르던 딘은 전직 정보기관 요원 브릴(진 해크먼 분)을 만나면서 궁금증을 풀게 된다. 딘의 옷과 신발, 소지품에는 초소형 전자추적장치가 숨겨져 있고 집에는 구석구석 감시카메라가 설치돼 있었다. 통화내용은 물론 그가 다른 사람과 나누는 모든 대화는 정보기관에서 도청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NSA는 마치 딘의 옆에서 보는 것처럼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 속에서 딘은 브릴의 도움을 받아 NSA에 멋지게 복수를 한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개인이 국가기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맞서 싸울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장택동기자 taecks@seoul.co.kr
  • “운동하며 생긴 자신감이 제 오른손”

    그는 어쩔 수 없는 왼손잡이 배드민턴 선수다. 셔틀콕을 받쳐들 오른팔이 없기 때문이다. 왼손목을 유연하게 움직여 라켓 끝으로 셔틀콕을 살짝 추켜올린 뒤 바람을 가르는 서브와 스매싱을 쏟아붓는 모습에 탄성이 쏟아진다. 전남 화순군 중앙배드민턴클럽 조준성(45) 회장은 10살 때 오른팔을 잃었다. 부모님이 운영하는 정미소에서 장난을 치다 벨트에 팔이 끼었다. 소아마비로 다리까지 불편한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사고였다. 게다가 집안까지 기울면서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앓아 누웠다.●사재털어 2층 배드민턴체육관 지어 하지만 조 회장은 물러서지 않는 용기를 지닌 사람이었다. 날품팔이, 보리타작, 잡부일 등으로 악착같이 돈을 모아 10명의 가족을 부양하면서도 화순군에서 손꼽히는 부농으로 거듭났다. 그런 그에게 두번째 시련이 찾아왔다. 일에만 매달려온 삶이 갑자기 허무해지고 사업 스트레스가 쌓이면서 술이 부쩍 늘어 몸이 급격히 허약해진 것. 보다못한 친구가 3년 전 배드민턴이라는 운동을 권했다. 모두가 의아해했다. 무엇보다 몸의 균형이 중요한 배드민턴에서 한팔이 없는 탓에 중심이 잡히지 않아 애를 먹었다. 지난 2월 전남 장성 홍길동전 기념 배드민턴 대회에서는 상대방이 조 회장의 한팔로 넣는 서브 방식을 문제삼아 힘들게 해온 운동에 좌절감을 안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꿋꿋하게 실력으로 상대방을 꺾어 그의 신기를 지켜보던 관중 모두에게 열화와 같은 박수를 받기도 했다.●“땀흘리고 운동하면 장애 콤플렉스 사라져” 조 회장은 지난해 11월 사재 2억 7000만원을 털어 화순군에 2층짜리 배드민턴체육관을 지었다. 실내체육관을 빌리기 어려워 운동할 수 없는 이웃들을 위해 지었기 때문에 아무나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다. 조 회장은 “땀흘리고 운동을 하면 내 몸이 가지고 있는 콤플렉스를 모두 잊어버릴 수 있다.”면서 “저처럼 몸이 불편한 분들이라도 용기를 가지고 꼭 자기만의 운동을 찾아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열린세상] 학교 밖의 문화교육/이해준 공주대 사학과 교수

    경제적 풍요와 국민의 의식수준 향상은 문화적 수요와 기대를 다양화·고급화시킨다. 문화예술 향유층도 특수계층 독점에서 점차 일반화·교양화하는 추세이다. 그리하여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차별은 점차 의미가 없어지고, 이에 따라 문화행정·문화정책의 기본 방향도 보다 ‘광범한 시민, 일반교양인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반면교사 같기도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문화정책이나 문화교육은 ‘너무 많았거나’ 아니면 ‘도대체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또 문화정책과 교육정책은 있었어도 ‘문화교육정책’은 없었다는 주장도 많다. 문화교육정책은 문화를 담당하는 문화관광부와 교육을 담당하는 교육인적자원부 사이의 사각지대였기 때문이다. 과거 우리의 문화교육은 공동체적 문화 기반 속에서 학교교육과 무관하게 이루어졌다. 사실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전해지는 문화교육도 있었고, 할아버지가 손자를 끌어안고 가르치는 가정교육도 있었다. 며느리는 시집의 새로운 가풍을 전수받기 위해 모진 시련을 감내하여야 했다. 농사꾼들은 농사꾼대로, 또 나무꾼도 그들 나름의 문화전수 방법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부정하거나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현대와는 달리 전통사회에서는 공동체 문화기반 위에서 다양한 문화교육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지고, 또 그 효용성을 충분히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구식의 학교교육이 일반화되면서 그러한 전통적 문화교육의 모습은 점차 의미를 상실하여 갔다. 의미와 가치도 평가절하되어 학교교육과 맞설 수 없는 무용지물처럼 되었다. 과연 이러한 과정이 올바른 것이고, 당연한 것일까? 한국의 풋풋한 농민문화를 이야기할 때 어김없이 꺼내는 ‘두레’를 예로 이야기해 보자. 두레문화는 ‘모듬살이의 지혜’이자,‘공생(共生)의 지혜’였다. 그리고 그것은 이론과 객관적·합리적 논리 때문이라기보다 오히려 눈빛과 숨소리만으로도 교감한, 다정하고 끈끈한 인간관계(情)가 밑바탕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문화였다. 또 그것은 오랜 동안의 경험과 체득을 통해 우리의 실정에 맞게 정착된 것이었다.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인간관계나 이해관계는 거의 소멸되어버렸다. 인간적 감성보다는 이해타산적인 계산기가 되어가고 있다. 과거 두레가 발생·발전하였던 사회와 다르게 오늘의 사회가 그렇게 바뀌었으니 옛날의 두레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말할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쯤에서 우리가 곰곰 생각해 볼 일은,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이 과연 정상적이고 바람직하냐는 것이다. 필자는 이에 대해서 “결코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고 싶다. 경제적인 문제가 목전에서 아른거리니까 자신을 발견하지 못할 뿐이지, 정신을 되찾으면 이것이 사람 사는 세상인가를 갈등할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때에 따라 간사하게 자신을 바꾸거나 타협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보면 매우 지혜로워서 반성도 잘 하고 참가치를 추구하는 현실 극복의 의지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비록 시대는 다르지만 두레문화의 참된 전통이 현대사회에 맞게 개선·개량·적용될 여지가 충분함을 아는 일이다. 그리고 그런 필요에 대한 공감대를 확산하는 것이 전통의 올바른 이해이며, 바로 이러한 점을 문화교육·전통문화교육이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제도권 내의 학교교육보다, 학교 밖의 문화교육이 오히려 더 싱싱하고 씩씩해야 한다고 믿는다. 좀 격한 말이지만 그러다 보면 생각 있는 학교교육이 곁눈질을 하거나 참을 수 없어 제 길을 걸어갈 때까지, 그 때까지는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기 때문이다. 이해준 공주대 사학과 교수
  • [세계인-우리는 이렇게 산다] ‘생활로봇’ 왕국 꿈꾸는 日 오사카

    [세계인-우리는 이렇게 산다] ‘생활로봇’ 왕국 꿈꾸는 日 오사카

    “500년 제조업 벤처의 전통을 살려 오사카를 로봇산업의 메카로 만들자.”. 오사카의 중소기업과 대학, 시 당국은 물론 시민들이 로봇산업 부흥을 통한 ‘모노쓰쿠리(제조업) 오사카’ 부활의 꿈을 키우고 있다.2만여개 중소기업들이 선두에 서고, 대학 교수와 학생들이 아이디어를 제공하면 오사카시·부 정부는 예산을 지원한다.260여만 시민들은 시제품 실험에 적극 응해주는 등 산·학·관·민 일체다. |오사카 이춘규특파원|오사카의 제조업은 16세기 말 오사카성을 축성할 때부터 본격화된다. 총기 제조가 주류였다. 19세기 말 방적업이 활발, 동양의 맨체스터로 불렸고 이후 기계, 부품, 소재산업과 전후에는 철강, 조선, 화학 등을 거쳐 태양전지, 액정패널 같은 각각의 시대가 요구하는 산업과 상품에 끊임없이 도전, 발전해 왔다. ●‘로봇산업=오사카시대’ 열겠다 도전의 도시 오사카시, 나아가 인구 1700만명의 오사카 생활권이 최근 수년간 “로봇산업 하면 오사카”를 세계인이 떠올릴 수 있도록 로봇산업 진흥에 도전하고 있다. 마사키 히로시 오사카부 홍보실장은 “로봇은 물론 바이오, 나노 등 새로운 비즈니스 개발에 도전하겠다.”면서 오사카인들의 끊임없는 ‘도전정신’을 강조했다. 다카노 슈이치 오사카시 로봇산업담당과장도 마찬가지다. 그는 “오사카는 마쓰시타전기산업, 샤프, 산요전기, 미즈노 등 세계적인 제조업의 전통이 있는 고장”이라며 “이처럼 실생활과 관련된 벤처에서 출발한 기업들의 모태인 오사카가 10년 뒤에는 ‘로봇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사카시 주택가에 산재한 2만여개의 중소기업 중 로봇과 관련된 150여개 기업이 현재 로보(RooBo)라는 중소기업네트워크에 가입해있다.7개 안팎씩의 기업·대학연구소 등과 20여개 컨소시엄을 형성, 생활로봇을 만드는 데 도전중이다. 오사카시는 연간 2억 5000만엔을 지원한다. ●도전하는 중소기업이 앞장선다 중소기업중 로봇 연구 및 생산에만 전념하는 기업은 아직 없다. 내년에 로봇전업기업의 출범을 꿈꾼다. 현재는 기업들이 핵심 부품기술을 갖고 개별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형식이다. 로봇제품을 개발, 대기업이 실용화하거나 직접 대량생산하는 것도 목표로 한다. ㈜에잇테크 기무라 토시오 사장, 후쿠치금속㈜ 후쿠치 마모루 사장 등은 현재 산학 연계 컨소시엄을 결성, 대형 수족관 내부를 청소할 로봇을 개발하고 있다. 누전 등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수력을 이용한 로봇이다. 비행기 모형이나 특수스탠드, 금형 등 수많은 제품을 소량 생산하고 있는 에잇테크의 기무라 사장은 “세계에서 누구도 흉내내지 못하는 기술로 세상에 단 하나뿐인 상품을 개발하는 것이 목표”라면서 소방로봇도 개발하고 싶다는 의욕을 비쳤다. ●교수, 연구원, 학생, 시민도 참여 오사카시의 산·학·관·민 합동 로봇산업 진흥에는 오사카대학 대학원의 아사다 미노루 교수 등이 후원자로 활동하고 있다. 시와 오사카부 당국은 자금과 연구공간을 지원한다. 오사카 시내 대학생들은 인턴사원으로 중소기업 현장에서 기술을 익히고, 자원봉사도 한다. 시민들도 기업들이 행하는 제품 실험에 적극 협조한다. 지역특성이다.“오사카사람들은 남을 돕길 좋아한다. 로봇팬들도 많다. 그게 중소기업에는 힘이 된다.”(간사이국제홍보센터 아리야마 히토시 심의역) 오사카 로봇산업의 연구지향점은 인간의 삶의 질 개선. 각종 로봇관련 대회나 이벤트를 만들어 기술력 향상도 꾀한다. 그러면서 병간호나 말동무, 청소 등 인간생활에 도움이 되는 로봇을 개발하기 위해 지혜를 모으고 있다고 아사다 교수는 설명한다. 아사다 교수는 로봇이 인간의 영역을 침해하거나 인간성을 상실시킬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 “인간이 싫거나 힘든 것을 로봇이 대체하면 된다.”고 로봇만의 역할을 강조했다. ●오사카의 꿈 2009년 시작 지난해 11월 로봇전문가인 이시구로 슈가 중심이 돼 오사카역 근처 역전 제3빌딩 16층에 로봇연구실험실을 열었다. 오사카부와 오사카시, 오사카 경제인들이 힘을 모았다. 차세대 로봇산업 진흥과 개발, 지원의 총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로봇연구실험실은 중소기업 로봇산업네트워크를 지원하고, 연구자·기술자와 산업계의 교류를 촉진한다. 시장에서 제품실험프로젝트도 실시한다. 로봇산업 활성화 이벤트도 자주 마련한다. 특히 2011년까지는 오사카역 북쪽의 드넓은 화물열차기지에 로봇산업기업, 도시형주택, 호텔, 연구·개발전시관, 상업지구, 비즈니스센터 등이 들어서는 ‘지식자본’기지를 완성, 로봇산업의 총본산으로 활용한다는 구상이다. 꿈의 로봇산업비즈니스거점은 2009년 우선 완공된다. 오사카시는 지식자본기지 가시화를 위해 지난 15일 북미지역투자유치단 등을 상대로 설명회를 통해 “첨단기술과 인간의 피드백이 잘되고, 서비스와 거주지가 제공되며 노하우가 축적돼 사업 성공률이 높은 오사카에 투자하라.”고 호소했다. 다카하시 토루 오사카시 도시재생기획담당과장은 “마쓰시타, 샤프, 산요 등은 오사카에서 벤처기업으로 출발해 크게 성공했다.”면서 ‘로봇은 왜 오사카인가.’를 강조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2025년 차세대 로봇산업시장은 7조 2000억엔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아울러 오사카시와 연구자, 중소기업인들은 지난 13일부터 17일까지 오사카시 남항지역에서 로보컵2005세계대회를 개최했다. 로보컵은 일본 연구자들이 제창,1997년 시작돼 올해로 9회를 맞았다. 올해는 한국·미국·일본 등 31개국 330여개 팀에서 2000여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taein@seoul.co.kr ■ 아카자와 요헤이 (주)시스테크 사장|오사카 이춘규특파원|항공·우주산업 부품 등을 생산하는 ㈜시스테크 아카자와의 아카자와 요헤이 사장은 “자원이 없는 일본은 제조업을 해야 하는데 비행기, 로켓, 반도체, 디지털제품 등의 부품은 최근 1년반 사이에 새로운 모델이 나오는 등 경쟁이 심해 로봇산업에 도전하게 됐다.”는 전형적인 오카사 중소기업인이다. 아버지 때부터 일궈온 그의 회사는 65년 역사를 자랑한다. 주택가에 위치한 회사에서는 지금도 항공기나 로켓 부품 등을 만들고 있으며 로봇은 전체 매출에서 10%를 차지한다. 시스테크는 시대의 변화에 맞춰 끊임없이 변화, 발전해 왔다.1950년대에 화물열차 부품을 만들었다. 이후 중공업시대가 열리면서 선박 부품을 만들었고,70년대 이후 원자력발전소 터빈, 모터, 발전기 등의 부품을 제작했다. 신칸센과 전차 부품, 항공기와 로켓, 반도체관련 부품까지 만든다. 15일 오사카시내 공장에서 만난 아카자와 사장은 91년 일본경제의 거품 붕괴는 시련이었다고 말했다. 새롭게 도전할 사업을 물색하다 2003년 로봇산업에 뛰어들었다. 전업은 아니고 ‘7명의 로봇산업 사무라이’가 지혜를 모은, 네트워크 형식이다.2003년 300만엔이던 로봇관련 매출은 지난해 2900만엔으로 급증했고, 올해 6000만엔을 예상하고 있다. 그는 오사카의 부활은 로봇산업의 성공여부에 달렸다고 강조한다.2만개의 중소기업 중 800개사가 로봇관련 잠재기술을 갖고 있고, 그 중 150여개사가 로봇산업네트워크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이 오사카 차세대 로봇산업의 기수라는 것이다. 아카자와 사장은 “오사카대 아사다 미노루 교수 등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로봇을 연구시켜 기업들에 연구성과를 제공하는 등 오사카는 로봇산업을 하기에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며 로봇사업에 뛰어든 배경을 설명다. 아울러 90년대 중반 도산위기를 경험한 뒤 대기업 하청만이 아닌 스스로의 사업으로 활로를 찾아야 미래가 있다고 판단, 오사카시 비즈니스인큐베이터에 가입해 그 곳에서 교수·연구원 등의 지원을 받으며 희망을 일궜다. 그의 꿈은 원대하다. 한국기업과 실용로봇 수출관련 상담을 진행중이다.17일 끝난 로보컵2005대회 인간형로봇부문 축구대회에서는 그의 회사가 포함돼 있는 네트워크가 2연패했다.2연패후 지명도가 높아져 지난해 우승한 로봇 ‘비전’을 대학과 다른 중소기업들이 연구용으로 250대나 사갔다. 가격을 현실화시키자 공립중학교들로부터 교재용 주문이 잇따르고 있다. 다양한 로봇도 개발중이다. 손님을 안내하는 펭귄로봇에 대한 주문을 받고, 제작을 서두르고 있다. 피아노에 광택을 내는 로봇도 생산 가능성을 타진받고 신이 나 있다. 로봇사업에 뛰어든 지 3년 만에 로봇계의 신흥강자로 떠오르는 그는 ‘세계인들에게 로봇하면 오사카’라고 알리고 싶단다. 현재는 로봇의 매출에서 연구비를 빼면 마이너스이지만 2년뒤에는 흑자로 전환될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다른 부품사업들도 포함하면 회사는 수년째 흑자경영이다. taein@seoul.co.kr
  • [지금 거창에선] 연극·예술 활기… ‘아시아의 아비뇽’ 꿈꾼다

    [지금 거창에선] 연극·예술 활기… ‘아시아의 아비뇽’ 꿈꾼다

    경남 거창군이 ‘아시아의 아비뇽’을 꿈꾼다.‘거창국제연극제(KIFT)’의 성공을 발판삼아 문화·예술이 살아 숨쉬는 관광지로 거듭난다는 포부다. 거창읍 내에 국제연극문화타운을 조성하고, 사계절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산악형 경전철을 건설, 관광객을 연간 100만명 유치할 수 있는 관광인프라 구축에 나섰다. 거창군은 한반도 남부 내륙에 깊숙이 자리잡은 인구 7만의 작은 군이다. 지리산국립공원과 덕유산국립공원, 가야산국립공원의 중심에 위치, 아름다운 산과 맑은 물을 자랑한다. 아울러 교육과 문화·예술활동이 활발하며, 친 환경·고품질 농산물을 생산하는 청정의 고장이다. ●감성의 숲에 꽃들이 피어나다 이곳에서 거창국제연극제가 열린다. 올해로 17번째.‘감성의 숲에 꽃들이 피어나다’라는 슬로건으로 오는 29일부터 다음달 17일까지 수승대 일대 야외극장과 거창연극학교, 거창문화센터 무대 등에서 화려하게 펼쳐진다. 참가극단과 작품도 45개로 역대 최고다. 특히 프랑스·독일·루마니아·러시아·우크라이나 등 유럽 지역과 페루·브라질 등 남미, 그리고 일본 등지의 극단도 참가, 모두 199회의 공연을 갖는다. 올해 관객목표는 15만명. 지난해에는 10개 국가에서 42개 극단이 참가,150회 공연을 했다. 관객도 11만 3000여명에 달해 객석 점유율 140%가 넘는 매진사례를 기록했다. 이는 입장권 발매숫자를 집계한 것으로 무료 입장객을 포함하면 관객 숫자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2003년 관객 6만 4000여명에 비하면 배 가까이 불어난 것이다. 연극제 집행위원회 이영철 홍보국장은 “올해는 공연 일수와 공연 횟수가 늘어 관객 유치목표는 무난히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거창국제연극제는 지난 1989년 이종일(거창국제연극제 집행위원장)씨 등 지역의 연극인들이 ‘인간·자연·연극’을 모토로 내걸고 개최한 ‘시월연극제’가 모태가 됐다. 객석이 77개뿐인 작은 극장과 학생들이 주로 찾는 한정된 관객, 예산부족 등으로 시련을 겪었지만 이를 극복, 연극제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시월연극제는 연극인들의 끊임없는 고민과 열정으로 5회까지 이어오다 지난 94년부터 거창연극제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이듬 해부터 국제연극제로 격상됐다. 그러다 98년 군수가 대회장을 맡으면서 일대 전기를 가져왔다. 군으로부터 행정 및 재정적 지원을 받는 것은 물론 범 군민적 성원에 힘입어 명실상부한 국제연극제로 자리잡았다. 연극제 개최 시기를 여름 휴가철로 변경하면서 부족한 공연공간 및 관객확보 문제를 해결했다. 국민관광지 수승대의 수려한 자연경관을 무대로 활용하는 등 여타 연극제와 차별화해 지방적 한계를 극복한 것이다. ●KIFT 로드맵으로 꿈★ 이룬다 거창군은 이를 발판으로 관객 100만 시대를 열기 위한 야심찬 계획을 추진 중이다. 우선 73억여원을 투자해 2008년까지 거창읍 김천리 일대에 연극문화타운을 조성할 계획이다. 국제연극문화센터를 건립하고,KIFT문화거리와 아비뇽 공원을 조성한다는 구상이다. 연극문화센터는 현 문화센터를 증·개축, 활용하고, 거창교까지 1.2㎞에 KIFT문화거리를 조성한다. 이 구간에 설치된 전주와 통신선을 모두 땅속으로 묻고, 보도를 확·포장해 가로수의 수종을 다양화하는 등 테마를 달리할 계획이다. 주변 상가도 이미지에 맞게 단장키로 했다. 거창교 주변에 조성되는 아비뇽공원은 소규모의 거리공연과 이벤트장소 등 주민들을 위한 ‘열린 공간’으로 활용할 방침이다. 이와 함께 주말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운영, 수승대 문화관광 상품화 프로젝트도 추진한다. 이미 KIFT를 통해 세계적인 문화관광지로 이름나 있는 위천면 수승대에 사업비 70억원으로 실내극장을 건립할 계획이다. 부지 7000여평에 지상 3층, 연건평 2100평 규모다.1층은 객석 500석 규모의 공연장을 만들고,2층에는 전시장과 세미나장, 휴식공간 등을 꾸미고,3층에는 세계 연극박물관을 조성한다. 사계절 주말 프로그램은 계절별로 테마를 달리한다. 봄에는 어린이와 청소년축제를 개최하고, 여름에는 거창국제연극제가 열리며, 가을은 농촌체험 프로젝트, 겨울은 가족이 테마다. 월별로도 주제를 정한다. 예컨대 1월은 ‘연극, 눈썰매와 겨울이야기’로 어린이들이 연극인과의 만남으로 연극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무대의상 만들기와 분장하기, 대본만들기, 연극 한 토막 따라하기 등 체험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이처럼 특화된 프로그램으로 자연과 역사, 문화가 어우러진 관광도시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거창을 브랜드화한다는 구상이다. 이같은 계획이 현실화되면 연간 100만명의 관광객이 거창을 찾고, 관광수입도 2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거창의 브랜드화로 사과·딸기·쌀·애우(쑥먹인 쇠고기) 등 지역의 농특산물이 얼굴을 갖게돼 1조원에 달하는 간접효과도 기대하고 있다. 이준화 거창군 부군수는 “군이 추진하는 계획이 완성되면 거창은 세계적인 문화·예술도시로 거듭난다.”고 장담했다. 거창 이정규기자 jeong@seoul.co.kr ■ ‘거창 국제연극제’ 매력은 프랑스에 ‘아비뇽 페스티벌’이 있다면 한국에는 ‘거창국제연극제(KIFT)’가 있다. 거창연극제가 비록 역사는 짧지만 아비뇽축제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과 개성을 갖고 있다. 매년 7월 아비뇽페스티벌이 열리는 프랑스 남부의 작은 도시 아비뇽에는 세계 각국에서 수십만의 관광객이 모여든다. 축제가 펼쳐지는 3주간 도시는 연극과 발레·음악 등 공연예술로 가득찬다.1947년 9월 연극배우이자 무대감독인 장 빌라르가 ‘아비뇽에서 예술의 주간을’이라는 기치를 걸고 교황청 안마당에서 3편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면서 시작돼 세계적인 연극축제로 자리잡았다. 피서철에 개최되는 거창연극제에도 10만이 넘는 관객이 몰린다. 지난 89년 영어교사인 이종일(거창연극제 집행위원장)씨 등 지역 연극인들에 의해 시작돼 올해로 17번째를 맞는다. 아직까지 연극 위주로 진행되지만 마당극과 악극·국악 뮤지컬 등으로 장르를 넓혀가고 있다. 거창연극제의 매력은 무대에 있다. 수승대 계곡의 거북바위와 옛 서원, 대나무 숲, 낡은 초가, 허름한 정자, 고목나무 주위 등 자연공간이다. 특히 강변에 세워진 수변무대는 관객들이 벌거벗은 채로 물놀이를 하면서 공연을 만끽할 수 있어 피서문화의 새로운 전형을 만들었다는 평이다. 또 다른 특징은 ‘은행나무 카페’. 수령 300년이 넘는 고목나무 아래 마련된 카페는 배우들과 관객, 연극계 인사들이 친교를 다지는 만남의 장이다. 즉석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공연 후일담이 오가며, 배우들을 보러온 관객들로 항상 시끄럽다. 관객들은 무대보다 더 뜨거운 뒤풀이를 보면서 연극의 매력에 빠져 든다. 거창 이정규기자 jeong@seoul.co.kr ■ 강석진 거창군수 “월성계곡·가조온천 관광명소도 많아” “거창국제연극제에서 한 여름 피서지의 낭만과 연극의 향기에 젖어 보십시오.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는 29일 개막되는 제17회 거창국제연극제(KIFT) 대회장인 강석진 거창군수는 “바가지 상혼이 판치고, 볼거리·놀거리가 부족한 유명 해수욕장 대신 수승대에서 휴가를 즐기라.”며 거창연극제 홍보에 열을 올렸다. 강 군수는 “올해 연극제에는 세계 9개국에서 45개 극단이 참가해 모두 199회 공연한다.”면서 거창연극제가 해를 거듭하면서 참가단체 등 외형적인 규모는 물론 작품의 수준 등 내적인 측면에서도 이미 세계적인 수준임을 자랑했다. 또 “문화·예술이 중앙으로 집중되는 흐름을 깨고 작은 시골 마을에서도 예술축제가 성공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고 했다. 그는 성공비결로 연극인들의 끊임없는 고민과 변함없는 열정, 군민들의 헌신적인 성원을 들었다. 또 수승대라는 자연공간에 마련된 무대와 한 여름 피서철에 개최되는 것도 성공 비결의 하나라고 말했다. 강 군수는 “올해도 15만여명의 관광객이 수승대를 찾을 것으로 전망돼 150억원 이상의 관광수입이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강 군수는 “거창에는 수승대를 비롯, 월성계곡, 가조온천 등 관광객들이 쉽게 접극할 수 있는 관광명소가 많다.”면서 “이와 연계해 프랑스의 아비뇽과 같은 세계적인 문화도시로 발전시킬 계획”이라고 밝혔다. 강 군수는 “오는 2008년까지 교육문화도시로 발전하기 위한 로드맵을 완성할 것”이라며 “관광객 100만시대가 열리면 거창에서 생산된 농축산물이 얼굴을 갖게 되고, 연간 2000억원의 관광수입은 물론 1조원 이상의 간접효과도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거창 이정규기자 jeong@seoul.co.kr
  • 中 ‘토종 금융인’ 잘 나가네

    中 ‘토종 금융인’ 잘 나가네

    “‘빅딜’ 뒤에는 ‘중국산 토종’ 금융가들이 있었다.” ‘중국산 토종’ 금융가들이 외국인들을 밀어내고 다국적 금융회사 등 중국내 금융업계를 움직이는 큰손으로 등장했다고 뉴욕타임스가 20일 보도했다. 그동안 다국적 투자자문회사들을 중심으로 중국내 금융업계를 장악해 온 화교 및 외국 금융가들을 순수 ‘토종’ 중국인들이 대체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중국에서 태어나 자라고 ‘문화대혁명’의 혹독한 시련기를 거쳐 자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40대들. 그뒤 미국에 유학, 석·박사과정을 마쳤지만 중국내 두터운 인간관계를 자산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최근 중국의 해외기업 인수·합병과정에서 이들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지난 4월 중국 최대 컴퓨터회사인 레노보가 IBM 개인컴퓨터 부문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메릴린치의 얼페이 리우가 한 예다. 얼페이 리우는 중도에 포기하기는 했지만 중국 최대 가전그룹인 하이얼(海爾)의 미국 가전업체 메이택 인수 협상도 주도했다. 최근 미국 내 에너지안보 논쟁을 불러일으킨 중국해양석유(CNOOC)의 유노칼 인수 시도 뒤에도 골드만삭스의 팡 펑레이,JP 모건의 찰스 리 등 중국 금융가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밖에 모건스탠리의 조너선 주, 씨티그룹의 웨이 크리스천슨(여) 등이 대표적 인물로 거론된다. 이들은 중국 관료 및 기업가들과의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 중국 정부와 기업간의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이들은 외국 금융가들의 보조 역할에 그쳤다. 그렇지만 이제는 중국의 문화적 배경과 미국적 경영기법을 갖추고 중국내 기업 경쟁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정상의 위치에 올라섰다는 평이다. 이들 가운데 선두 그룹의 연봉은 보너스를 포함,1000만달러(약 100억원)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고 신문은 전했다. 또 월가의 주요 투자자문회사 등 서구 금융업계에서 중국산 토종 금융가를 거액에 ‘모시려는’ 스카우트 열풍도 일고 있다고 소개했다. 뉴욕타임스는 금융업뿐 아니라 주요 법률회사, 벤처캐피털, 초대형 다국적 기업들에서도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토종 중국인들을 선호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석우기자 jun88@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롯데그룹(1)-신격호 회장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롯데그룹(1)-신격호 회장家

    신격호 롯데 회장은 빚을 몸속의 열에 비유하곤 한다. “몸에 열이 오르면 병이 나고 심하면 목숨이 위태롭다. 과다한 차입금은 만병의 근원이다. 특히 잘하지도 못하는 업종에 빚을 내 사업을 벌이는 것은 사회적으로 죄를 짓는 일이다.”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의 과다한 차입경영이 논란이 되고 있는 요즘, 신 회장의 말은 울림이 크다. 일각에서는 “껌 팔아 부자됐다.”며 롯데의 국가경제 기여도를 얕잡아 보기도 하지만, 기여도가 높다는 삼성·현대·LG 등이 저마다 골칫덩이 자식 한두 개 때문에 국가경제에 고통을 줄 때도 롯데는 어느 계열사 하나 그런 곳이 없었다.“실패하더라도 빚을 돌려줄 수 있는 범위에서만 투자한다.”는 신 회장의 무차입 경영 덕분이다. 롯데그룹의 부채비율은 지난해 말 현재 70.3%. 삼성(50.0%) 다음으로 재무구조가 튼실하다. 단돈 83엔을 들고 일본땅에 건너가 ‘조센징 장사꾼’이라는 멸시를 받아가며 부(富)를 일군 신 회장. 그렇게해서 번 돈으로 고국에서 다시 기업을 일으킨 그는 한·일 양국에 사업체를 갖고 있지만 지금껏 과실송금을 한번도 한 적이 없다. 한국에서 번 돈은 고스란히 한국에 재투자하고 있다. 고(故) 정주영 현대 창업주가 중후장대 기간산업을,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경박단소 첨단산업을 일으켰다면, 신 회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서비스산업을 개척한 선구자다. 몇 안되는 생존 창업주인 그는 여든을 훌쩍 넘긴 지금에도 여전히 서울과 도쿄를 오가며 ‘셔틀경영’을 하고 있다. ●또다른 이름 시게미쓰상 그는 홀수달에는 신격호, 짝수달에는 시게미쓰 다케오(重光武雄)가 된다. 홀수달에는 한국에서, 짝수달에는 일본에서 일한다. 그의 셔틀경영이 언제쯤 시작됐는지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주위에서는 모국 투자가 시작된 1960년대 말부터라고 짐작한다. 벌써 30년째다. 월말이 되면 수행원도 없이 혼자 공항에 나가 훌쩍 비행기를 탄다. 생활철학인 거화취실(去華就實·화려함을 멀리하고 실속을 추구)이 엿보이는 단면이다. 한국에 머무를 때면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34층을 쓴다. 집무실 겸 숙소다. 외출은 거의 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바로 옆의 롯데백화점 매장을 둘러보는 정도다. 올빼미족에게 반가운 얘기 한가지. 신 회장은 창업주 총수로는 드물게 ‘새벽형 인간’이 아니다. 오전 8시쯤 일어나 9시에 호텔방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그를 오랫동안 지켜본 임원들은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라고 입을 모은다. 우선, 말수가 적다. 칭찬에도 인색하다.“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이 지론”이라고 스스로 말할 만큼 완벽주의자다. 타고난 내성적 성격에 오랜 일본생활까지 겹쳐 웬만해서는 ‘혼네’(속내)를 내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때로 냉정하다는 얘기도 듣는다. 둘째아들인 신동빈 롯데 부회장이 “결단코 자상한 분은 아니다.”라고 했을 정도다. 언론에도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단돈 83엔 들고 일본으로 신 회장은 1922년-원래는 1921년생이지만 호적에 1년 늦게 올랐다-경남 울주군 삼남면 둔기리에서 5남5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울산농업보습학교를 나와 경남도립 종축장에 기수보로 취직했지만 “박봉의 삶이 싫어” 1941년 일본행 관부연락선을 탔다. 이 때가 열아홉살. 고향친구 자취방에 얹혀 살며 신문·우유 배달 등 닥치는 대로 잡일을 했다. 돈이 모이면 헌책방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작가 지망생의 꿈은 오래 가지 못했다. 문학으로는 먹고 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기술을 배워야 했다. 와세다고등공업학교(현 와세다대 이학부) 화학과에 입학했다. 일본 패전의 기색이 짙어가던 1944년 어느날, 조선인 청년의 성실성을 평소 눈여겨보던 한 일본인 노인이 “커팅오일(기계를 갈고 자르는 선반용 기름) 사업을 해보라.”며 선뜻 6만엔을 내놓았다. 그러나 첫 사업체는 공습을 맞아 완전히 불타버렸다.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친구들은 “귀국선을 타자.”고 종용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고는 살 수 없는 게 그였다. 빚을 갚으려면 돈을 벌어야 했다.1946년 5월 도쿄 스기나미구(區)의 낡은 창고에 가마솥을 내걸었다. 그럴 듯한 간판(히카리특수화학연구소)도 달았다. 커팅오일을 응용해 만든 비누와 크림이 불티나게 팔리면서 1년반만에 노인에게 진 빚을 모두 갚았다. 내친 김에 비누를 만들던 가마솥과 국수를 뽑아내던 기계로 껌을 만들었다. 또다시 대박. 신주쿠 허허벌판에 종업원 10명의 주식회사 롯데가 탄생했다. 껌회사에 소설 여주인공(‘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샬로테) 이름을 붙인 발상이 생뚱맞아 보이지만, 못다한 문학청년의 꿈은 그렇게 해서 다소 풀렸다.1948년 6월28일의 일이다. 신 회장은 훗날 “롯데라는 이름은 내 일생일대의 최대수확이자 최고의 선택”이라며 흡족해했다. 그가 1967년 한국에 롯데제과를 설립했을 때, 일각에서는 “고국에 대한 첫 투자가 겨우 소비재 사업이냐.”며 비판했다. 신 회장은 이렇게 항변한다.“한·일 수교로 모국 투자길이 열리자 당시 정부는 내게 종합제철소를 지어달라고 했다. 그래서 후지제철소(현 신일본제철)의 도움을 받아 설계도까지 만들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정부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직접 제철소(포항제철)를 짓겠다고 했다.” 어찌됐든 그렇게 ‘성공한 재일교포 사업가’로 고국에 진출한 그는 한국롯데를 국내 재계서열 5위의 ‘유통 명가’로 키워냈다. 지난해 말 현재 자산 29조 7000억원, 계열사수 41개, 종업원수 3만 5000명이다. 일본롯데에 비교도 안됐던 매출액(26조원)은 7대3 규모로 역전됐다. ●일본인 아내와 재혼 신 회장은 조혼 풍습에 따라 1940년 둔기리의 고향처녀(노순화)와 결혼했다. 신혼생활은 신 회장의 일본행 가출로 1년여만에 끝났다. 노 여사는 남편의 금의환향을 끝내 보지 못하고 1951년 29살에 요절했다. 신주쿠 허허벌판에서 일본 1위의 껌업체 하리스와 10년 상전(商戰)을 벌이는 동안, 신 회장에게 큰 힘이 돼준 이는 1952년 재혼한 일본인 아내 다케모리 하쓰코(竹森初子·78)씨였다. 결혼후 남편성을 따 시게미쓰로 바꿨다. 당시 일본 외무성 대신의 여동생이었다. 경영에 일절 참여하지 않는 시게미쓰 여사는 성품이 온화하다는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우리말을 잘 하지는 못하지만 알아듣기는 한다. 신 회장은 노 여사와의 사이에 맏딸 영자씨를, 시게미쓰 여사와의 사이에 동주·동빈 두 아들을 두었다. 롯데가의 한 인사는 “동주와 동빈이는 일본에서 나고 자라 집안에서는 히로유키, 아키오라는 일본이름으로 더 친숙하게 불렸다.”고 전했다. ●백화점 주역 신영자 부사장 모녀 신 회장의 맏딸 영자(63)씨는 롯데쇼핑 총괄 부사장 겸 호텔롯데 면세점 총괄 부사장을 맡고 있다. 부산여고와 이화여대 가정학과를 나왔다. 유통업계의 라이벌 이명희 신세계 회장과는 대학 동창이다. 지난해 말 롯데면세점 모델인 ‘욘사마’ 배용준씨의 사진전에 직접 참석했을 만큼 회사일에 적극적이다. 유통 사업가답게 의상과 화장이 화려하다. 다소 깐깐하다는 지적도 있지만 새어머니인 시게미쓰 여사와는 팔짱을 끼고 다닐 정도로 사이가 좋다. 1967년 장오식 전 선학알미늄 회장과 결혼해 1남3녀를 두었으나 지금은 독신이다. 가장 눈에 띄는 자녀 혼사는 막내딸 정안(31)씨. 지난해 5월 영국계 로펌 클리포드&챈스의 이승환(37) 변호사와 결혼했다. 이 변호사는 한국케이블TV 대구방송 회장과 영남일보 주필을 지낸 이종명씨의 아들.‘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 모임’의 회원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외아들 지만씨의 변호를 맡기도 했다. 잡화 바이어(차장)로 일하던 정안씨는 결혼후 휴직, 남편과 함께 해외에 머무르고 있다. 친구 소개로 이 변호사를 만나 2년간 연애했다. 주례는 시아버지의 절친한 ‘지기’ 한완상 한성대 총장이 맡았다. 한 총장과 이 전 회장은 미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함께 하기도 했다. 신 부사장이 사업적으로 가장 의지하는 이는 둘째딸 선윤(34)씨다. 미국 하버드대 심리학과를 나와 97년 롯데쇼핑에 입사, 올해 초 이사로 승진했다. 명품관 ‘에비뉴엘’ 개관의 일등공신이다. 외할아버지를 닮아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다. 성격도 소탈해 직원들 사이에 평이 좋다. 인테리어 회사 사장과 결혼했으나 지금은 독신이다. 외아들 재영(38)씨는 롯데에 포장지를 납품하는 인쇄업체 ‘재영상공’의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맏딸 혜선(36)씨는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선윤씨처럼 독신이다. ●일본롯데 이끄는 큰아들 동주 동주(51)씨는 일본롯데 부사장이다. 결혼이 다소 늦었다. 서른여덟살이던 92년 3월 서울 잠실 롯데호텔에서 재미교포 사업가 조덕만씨의 둘째딸 은주(41)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동주씨가 일본롯데의 미국법인 지사장으로 발령나면서. 아버지를 닮아 내성적인 그는 의외로 열살 연하의 거래처 여직원에게는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남덕우 전 경제부총리가 주례를 본 두 사람의 결혼식은 이례적으로 언론에 공개됐다. 아들(정훈·12)만 하나다. 현재 일본에 살고 있는 동주씨는 아오야마(靑山)학원과 같은 대학원에서 경영공학을 전공했다. 롯데와 무관한 미쓰비시 상사에서 10년간 샐러리맨 생활을 하다 87년 한국롯데에 입사했다.“순수하고 학자 같다.”는 게 주위의 공통된 평가다. ●한국롯데 이끄는 둘째아들 동빈 동빈(50)씨는 형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나고 자랐다. 역시 형이 다닌 아오야마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미국 컬럼비아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MBA)를 받았다.88년 일본 롯데상사의 이사로 롯데에 합류하기까지,8년을 다른 회사(노무라증권)에서 일한 것도 형과 같다. 한국무대에 데뷔한 것은 90년 호남석유화학 상무를 맡으면서. 증권사에 오래 있어서인지 수치에 매우 밝다.97년 2월 한국롯데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이중국적자이던 그는 한국생활을 시작하면서 일본 국적을 정리했다. 처음엔 우리말이 서툴렀으나 지금은 발음이 조금 어색할 뿐, 대화를 주고받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와인을 즐기지만 폭탄주는 좋아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문학 기질을 이어받아 사석에서 가끔 괴테의 시를 영어로 읊기도 한다. 이승엽 프로야구 선수가 뛰고 있는 일본 롯데 지바 마린스의 구단주 대행도 맡고 있다. 세간에는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알려져 있으나 집안 인사의 얘기는 다소 다르다.“형인 동주보다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 적극적인 성격은 아니다. 원래 신씨 집안 남자들이 활달한 편은 못된다.” ●한·일 넘나든 현해탄 혼맥 롯데가는 물론 재벌가를 통틀어 화려한 혼맥의 정수로 꼽히는 게 동빈씨의 결혼이다.85년 형보다 먼저 일본에서 다섯시간에 걸친 일본전통 혼례식을 치렀다. 신부는 일본의 대형 건설사 다이세이의 오고 요시마사 부회장의 둘째딸 마나미(眞奈美·46)씨. 일본 귀족학교인 가쿠슈잉(학습원)을 졸업한 재원이다. 일본황실의 며느리감 후보로도 거론됐다. 후쿠다 다케오 전 일본 총리가 중매를 서고 주례까지 맡았다. 결혼식에 나카소네 당시 총리를 비롯해 전·현직 일본 총리가 세 명이나 참석해 한·일 양국에서 떠들썩한 화제가 됐다. 마나미씨를 만나본 한 인사는 “평범하고 참한 인상”이라고 전했다. 아들 유열(19)군과 규미(17)·승은(13) 두 딸을 두고 있다. 부인과 자녀들은 일본에 살고 있다. 한달에 두세번 신 부회장이 일본으로 건너간다. 신 회장이 ‘셔틀 기업경영’을 하고 있다면, 신 부회장은 ‘셔틀 가족경영’인 셈. 수행원 없이 다니는 것은 부자(父子)가 똑같다. ●남다른 고향사랑과 초고층 건물에의 꿈 해마다 5월이면 신 회장은 울산시 울주군 둔기리 호숫가의 너른 잔디밭에서 사재를 들여 잔치를 벌인다.69년 대암댐 건설로 고향마을이 물에 잠기자 전국에 흩어진 고향사람들을 수소문,1971년 5월 돼지머리에 막걸리를 기울인 것이 시초가 됐다. 이후 지금껏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있다. 모임 이름도 고향에서 따 ‘둔기회’라고 지었다. 처음엔 수십명이던 회원수가 아들·며느리·손자의 가세로 지금은 수백명으로 불어났다. 고향 못지 않게 신 회장에게는 애틋한 대상이 있다. 파리 에펠탑 같은 세계 최고층 건물이다. 여든살이 되던 해인 2002년,112층 건물 청사진을 내보이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언제까지나 고궁만 보여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교통영향 평가 등에 걸려 지금껏 삽도 떠보지 못했다. 신 회장은 ‘건설통’ 서울시장에게 기대를 걸며 초고층 건물을 재추진하고 있다. ●유통명가 떠받치는 롯데맨들 롯데에는 사장단 회의가 따로 없다. 지난해 신설된 정책본부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계열사간 조정자 역할을 한다. 호텔롯데 소속의 김병일(62) 사장이 신동빈 부회장(본부장)을 도와 부본부장을 맡고 있다.73년 호텔롯데 경리부장으로 입사해 81년 그룹 기획조정실 이사를 시작으로 20년 이상 신 회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신 회장 부자의 심중을 가장 정확히 읽어낸다는 핵심참모다. 짧은 스포츠형 머리가 트레이드 마크. 그룹 내 손꼽히는 재무전무가로 말수가 적다. 그룹의 모태인 롯데제과는 경리분야에서 20년 잔뼈가 굵은 한수길(64) 사장이 맡고 있다. 자일리톨껌 등 ‘연타석 홈런’으로 경영성과를 끌어올렸다. 호텔롯데와 롯데쇼핑은 삼성 출신의 장경작(62) 사장과 ‘젊은’ 이인원(58) 사장이 각각 이끌고 있다. 신세계백화점과 조선호텔 사장을 지낸 장 사장은 올 2월 롯데맨으로 변신했다. 수익사업의 귀재라는 수식어를 달고다닌다. 평균 연령이 60대인 롯데 경영진 사이에 드물게 50대인 이 사장은 97년 CEO(최고경영자)로 파격 발탁돼 8년간 장수하고 있다. 관리·영업·매입 등 백화점 3대 요직을 모두 거쳤다. 의심나면 끝까지 파헤친다. 할인점 업계 최초로 중소기업 박람회를 연 롯데마트 이철우(62) 사장과 정통 엔지니어 출신으로 현대석유화학 인수 주역인 호남석유화학 이영일(64) 사장도 눈에 띈다. 신 회장의 가족 가운데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이는 친동생인 신준호(64) 롯데햄·우유 부회장과 5촌조카 신동인(59) 롯데자이언츠 구단주 대행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지금의 롯데를 일구는데 일조했으나 지금은 한발 물러나 있다. 음료업계 최초로 순 매출액 1조원 돌파의 대기록을 세운 롯데칠성음료 이종원(61) 대표이사 부사장, 스피드 경영으로 유명한 롯데건설 이창배(58) 대표이사 부사장, 워커홀릭(일중독자)으로 불리는 롯데삼강 이광훈(57) 대표이사 전무 등도 빼놓을 수 없는 롯데맨이다. 황각규(51) 롯데쇼핑 상무와 강현구(45) 롯데닷컴 상무 등은 신 부회장의 관심사업을 보좌하고 있다. ●“평창면옥에 해답이 있다” 이철우 사장의 회고다. “잠실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의 일이다. 백화점을 짓기는 했는데 신세계의 세 배인 드넓은 매장을 채울 일이 걱정이었다. 회장님은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며 타박하시더니 평창면옥에서 해답을 찾으라고 했다.” 당시 서울 평창동에 있던 평창면옥은 5000원짜리 밥맛이 워낙 좋아 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사람들이 왜 굳이 시간과 비용을 들여 그곳까지 가겠는가. 이유는 단 하나다. 바로 상품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고객에게 꼭 필요하고 훌륭한 상품을 만들면 문제는 절로 해결되기 마련이다.” 신 회장의 이 얘기는 지금도 롯데 임직원들 사이에 자주 회자된다. hyun@seoul.co.kr ■ 절친했던 신격호·정주영 회장 신격호 회장은 생전의 정주영(왕회장) 현대 창업주와 절친했다. 왕회장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직접 추도사를 쓰기도 했다. 신 회장이 일곱살 아래다. 흥미롭게도 두 사람의 인생 역정은 매우 닮았다. 우선 대가족의 장남이다. 신 회장은 동생이 9명, 왕회장은 7명이다. 중농·빈농의 아들로 농사규모는 달랐지만 식솔이 워낙 많아 삶이 퍽퍽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성공 신화의 시작이 가출이라는 것도 같다. 두 사람 모두 열아홉살 때 “앞이 안보인다.”며 집을 뛰쳐나왔다. 사업 시작후 최대의 시련도 ‘불’이었다. 신 회장은 처음 차린 커팅오일 공장이 불에 몽땅 타버려 빚더미에 올라 앉았다. 왕회장도 첫 사업인 자동차수리공장이 불에 타는 바람에 고초를 겪어야 했다. 신 회장은 이 때문에 지금도 임직원들에게 자나깨나 불조심을 외친다. 롯데호텔 준공 때 멀쩡한 새 건물의 복도 천장을 뜯게 한 뒤 손전등으로 직접 방화 장치를 확인한 일화는 유명하다. 공교롭게도 죽을 고비도 한차례씩 넘겼다. 여든이 다 될 때까지 직접 운전을 하고 다녔던 신 회장은 언젠가 밤길에 귀가하다가 트럭과 정면으로 부딪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왕회장도 새벽에 울산공장을 시찰하러 직접 운전하고 가다가 차가 바닷물에 빠져 죽을뻔 했다. 발상도 기발하다. 신 회장은 풍선껌에 대나무 대롱을 함께 포장해 장난감처럼 불 수 있게 했다. 왕회장은 겨울 골프에 빨간 골프공을 도입한 주인공이다. 이 유명한 빨간공 일화를 남긴 1970년 초봄 라운딩의 동반자가 바로 신 회장이었다. 신 회장은 훗날 “폭설이 내려 (하얀 골프공을 찾을 수 없는 만큼)의당 약속이 취소된 것으로 여겨 하마터면 큰 실수를 할 뻔했다.”고 회고했다. M&A(인수합병)보다는 직접 공장말뚝 박기를 즐겼던 것이나 귀향잔치(둔기회·소떼방북)를 벌인 점도 똑같다. 다만, 신 회장은 언제나 소리가 나지 않았고 왕회장은 늘 요란했다. 대선 출마 등 말년에 한눈을 판 왕회장과 달리 신 회장이 사업에만 전념하는 것도 결정적 차이다. hyun@seoul.co.kr ■ 신동빈 부회장 ‘큰어머니’ 제사 해마다 직접 지내 지난달 21일 저녁 서울 성북동 신영자 롯데쇼핑 부사장의 자택. 검정 옷차림의 신씨가문 후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이 날은 종손인 신격호 회장의 첫 부인 노순화 여사의 기일이었다. 신동빈 부회장은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어머니’의 제사를 주관했다. 누나인 신 부사장은 말없이 ‘생모’의 제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여느 재벌가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다. 신 회장이 재혼한 아내와의 사이에서 얻은 동빈씨는 한국에 정착한 이후 노 여사의 제사를 꼬박꼬박 지내고 있다. 집안에서나, 그룹에서나,‘후계자’로서의 입지를 빠르게 굳혀가고 있는 모습이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후계구도와 관련해 “정해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며 언급을 회피하던 그룹측은 이제 공공연하게 “후계구도 작업은 끝났다.”고 단언한다. 신 부회장이 일본인 아내를 맞은 점 등을 들어 일본롯데를, 신동주 일본롯데 부사장이 장남인 점 등을 들어 한국롯데를 맡을 것이라는 분석이 한때 유력했지만 현재로서는 뒤집힌 셈이다. 신 부회장은 지난해 10월 신설된 정책본부의 장(長)을 맡으면서 후계자 논란을 확실하게 잠재웠다. 재계는 “그룹 대권을 둘째아들에게 넘기겠다.”는 신 회장의 의지로 해석했다. 신 부회장은 온라인쇼핑몰·편의점 사업 등에서 이렇다할 실적을 내지 못했지만,KP케피칼·현대석유화학 등을 성공적으로 인수함으로써 아버지의 신임을 굳혔다. 현장을 중시하는 것은 아버지의 영향을 그대로 받았다. 지난 4월에는 롯데마트 금천점에 불쑥 나타나 한 시간 동안 매장을 둘러보기도 했다. 현장에서 지시한 내용은 나중에 꼭 확인한다. 상장(6개사)에 인색한 기업 문화와 보수적인 토양을 어떻게 바꿔나갈지 주목된다. hyun@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기고] 대학의 위기와 구조개혁/김우상 컬럼비아 서던대 교수·명예논설위원

    신입생 충원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전국 4년제 주요 국·사립대학들이 정원을 10% 안팎 감축키로 한 것은 한국의 대학사에서 일대 사건이다. 지방의 4년제 대학과 전문대에서 학생이 오지 않아 정원을 감축한 사례들은 많았지만 주요 대학들이 정원을 줄이겠다고 나선 것은 유래가 없다. 대학이 어렵다고들 한다. 괜한 엄살이 아니다. 살림살이가 어렵다면 허리띠를 졸라매서 어려움을 어느 정도 해소하겠지만, 생사기로의 문제라면 허리띠를 졸라매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현재 우리의 대학들이 바로 이처럼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 예상된 일이기는 하나, 대학 신입생이 줄기 시작하여 정원을 채우지 못한 대학이 줄줄이 나오고 있다. 신입생 정원을 반으로 줄인 대학도 있고 아예 폐교를 해버린 대학도 있다. 그럼에도 이런 현상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앞으로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외국의 유수 대학들이 한국에 진출하면, 우리 대학은 더 가혹한 시련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학령 인구의 급격한 감소, 휴학과 전출 학생의 증가, 학생들의 수도권 선호 경향 및 권역별 입시 경쟁의 치열성 등으로 우수한 학생 유치의 어려움과 정원 확보의 곤란함이 가중되어 지방 대학의 존립 기반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어려움의 또 다른 축은 취업난이다. 기업들이 서울 지역 대학 출신자들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지방대의 위축을 가져오는 중요한 요인이다. 구조적인 문제와 더불어 정서적인 차별성이 지방대학들이 겪고 있는 총체적 난국의 실체이다. 그러한 총체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취업보도 기능의 획기적인 강화, 대학 재정 운영의 효율화 제고, 분권화 체제 도입 및 교육·연구의 질 개선 등 각 대학이 나름대로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줄 안다. 이번 국립대 통폐합 및 정원 감축, 지방 대학의 특화 계획은 지역 산업과 연계해 캠퍼스별로 특성화를 추진함으로써 대학 경쟁력 강화를 위한 구조개혁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연구 중심 대학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다. 다행히 참여 정부는 지방 분권과 교육의 균형 발전을 국정 과제로 삼고 3대 특별법을 공포하였다. 대학에서는 그 성과의 가시화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정부 당국이 진정으로 알아야 할 일이 있다. 죽음 직전의 환자에게 “당신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라.”라고 아무리 외쳐도 그것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대학 자체의 힘과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대학들의 자율적인 강력한 구조개혁과 대학들의 구조개혁노력에 대한 교육당국의 특단의 지원조치는 한국의 교육을 위해 선택이 아닌 필수인 것이다. 우리 대학들은 대학 자신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그리고 국가의 미래를 위해 오늘의 위기를 도약의 기회로 삼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정부가 모든 성과를 떠맡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최소한의 해야 할 일을 확실하게 해내는 것이 강한 국가의 작은 정부라는 미국의 석학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의 의미심장한 충고가 뇌리를 스친다. 김우상 컬럼비아 서던대 교수·명예논설위원
  • [스포츠 라운지] 세계 양궁선수권대회 2관왕 정재헌

    [스포츠 라운지] 세계 양궁선수권대회 2관왕 정재헌

    1992년 8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올림픽 양궁장에서 열린 남자 개인 결승전.18살 고3 소년은 여드름이 덕지덕지 난 양볼에 쏟아지는 눈물을 입술에 머금은 채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활시위를 당겼다. 먼저 경기를 마친 상대 플루트 세바스티앙(프랑스)은 110점. 소년으로서는 10점 만점을 맞혀도 107점. 승부는 이미 결정나 있었다. 소년은 한국 남자양궁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의 꿈을 아쉽게 접어야 했다. 그 ‘눈물 많은 청년’ 정재헌(31·현대INI스틸)은 13년이 지난 2005년 6월 이립(而立)의 나이로 ‘질곡의 땅’ 스페인을 다시 밟았다. 하지만 그는 두번 실패하지 않았다. 마드리드 세계양궁선수권대회 남자 개인 결승에서 일본의 모리야 유이치를 102-101로 누르고 금메달을 품에 안으며 감격의 눈물을 쏟아냈다. 단체전에 이어 2관왕. 정재헌은 “2엔드까지 2점차로 뒤지면서 마음먹은 대로 점수가 나오지 않아 바르셀로나의 악몽이 되풀이되는가 싶었다.”면서 “하지만 ‘그럴 순 없다.’며 이를 악물고 마지막 엔드 화살 하나하나에 모든 신경을 쏟아부었다.”고 말했다. ●초코파이 먹고 싶어 궁사의 길로 ‘세계선수권대회 2관왕’ 정재헌은 대구 송현초등학교 4학년때 처음 활을 잡았다.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덩치가 양궁 코치 눈에 띄었지만 정재헌이 양궁을 시작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바로 “양궁을 하면 초코파이와 우유를 무한정 먹을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오직 길은 양궁밖에 없었다. 남다른 운동신경과 뛰어난 체력으로 경북고 1학년 때인 91년 폴란드 세계선수권대회 선발전에서 처음으로 국가대표에 발탁, 이 대회에서 일약 개인전 3위를 기록하며 남자 양궁의 샛별로 떠올랐다. ●뒤늦게 시작된 신의 질투 신의 질투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끝나고 극심한 슬럼프를 겪었다. 정재헌은 “뒤늦게 사춘기가 찾아왔고 생전 처음 여자친구도 생기면서 운동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면서 “하기 싫은 운동에 무리하다 보니 허리에 통증이 오면서 모든 게 귀찮아져 결국 태릉선수촌을 무단 이탈했다.”고 돌아봤다.7일 동안 선수촌을 이탈한 ‘죄’로 93년 2월25일 1년 동안 자격정지를 받았다. 8년의 세월이 흐른 2001년, 정재헌은 절치부심 끝에 중국 베이징 세계선수권대회에 나갈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질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세계대회를 앞두고 해군 특수여전단(UDT)에서 받던 정신력강화훈련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동료 3명과 함께 훈련장을 이탈했다. 또다시 자격정지 5년 통지서가 날아왔다.1년 가까이 술통만 옆에 끼고 살았다. ●“최소 40살까지 선수생활할 것” 정재헌은 2002년 협회의 선처로 징계가 풀리자 정말 마지막이란 각오로 절치부심 운동에만 전념했다. 이 때문에 14년 만에 세계선수권대회에 다시 선 정재헌에게 이번 대회의 의미는 남달랐다. 하지만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기쁨이 더 컸을 뿐 개인전 입상은 크게 바라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훈련한 대로 한발 한발에 집중했을 뿐이었다. ‘무심의 활시위’가 가져온 결과는 최고의 자리였다. 정재헌은 “가장 존경하는 동료이자 남자 양궁의 간판인 박경모(30·인천 계양구청)를 그저 잘 받쳐주자고만 생각했었는데 운이 따랐던 것 같다.”고 겸손해했다. 그렇다면 꿈에 그리던 세계 패자의 명예를 손에 안은 정재헌에게 남은 꿈은 뭘까. 정재헌은 “지난해 아테네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일본의 야마모토 히로시는 43세인 지금까지 철저한 자기관리로 꿋꿋하게 선수생활을 하고 있다.”면서 “남들보다 일찍 시작했다가 시련기를 거치며 오히려 뒤처져 버렸기 때문에 이제라도 철저하게 운동해서 최소 40살까지는 부끄럽지 않게 선수생활을 하고 싶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글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세계청소년축구대회] PK 두방… 메시 ‘탱고 쇼’

    고스란히 ‘메시의, 메시에 의한, 메시를 위한’ 대회였다. 아르헨티나는 3일 새벽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의 갈겐바르트스타디움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축구대회 결승전에서 메시의 페널티킥 2방을 앞세워 나이지리아를 2-1로 꺾고 통산최다인 다섯번째 우승을 차지했다.‘제2의 마라도나’ 리오넬 메시(18·FC바르셀로나)는 대회 6골로 골든슈(MVP)와 골든볼(득점왕) 등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하며 화려하게 축구 영웅의 자리에 등극했다.170㎝,68㎏으로 마라도나와 축구 실력은 물론, 신체조건마저 흡사한 메시는 이미 마라도나와 사비올라(24·AS모나코)의 뒤를 잇는 축구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다.‘검은 독수리’ 나이지리아는 공격형 미드필더 존 오비 미켈의 지휘로 대등한 경기를 펼쳤지만, 천재 미드필더 메시를 놓친 것이 패인이 됐다. 전반 40분 메시는 하프라인에서부터 질주, 수비수 2명을 제치고 페널티지역 안쪽까지 파고드는 드리블쇼를 연출했고, 델레 아델레예의 무리한 태클을 유도해내 페널티킥을 얻었다. 키커로 나선 메시는 상대 골키퍼 암브루제 반젠킨을 완전히 속이고 골문 왼쪽 구석을 향해 왼발로 가볍게 공을 밀어넣어 선취골을 뽑았다. 하지만 ‘아프리카 챔프’ 나이지리아도 그냥 물러나지는 않았다. 후반 8분 치네두 오그부케가 그림같은 다이빙헤딩슛을 날려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아르헨티나는 세르히오 아게로가 후반 30분 페널티지역 오른쪽에서 돌파를 시도하다 페널티킥을 얻어냈고 메시가 다시 침착하게 왼발 대각선슛을 성공시켜 2-1로 승부를 결정지었다. 앞서 열린 3-4위전에서는 브라질이 모로코에 2-1로 역전승,3위에 올랐다. 메시의 만 18년 짧은 인생에도 큰 시련과, 극복이 있었다. 메시는 5살때 아르헨티나의 로사리오 지방에서 축구를 시작한 ‘축구 신동’이었지만, 성장호르몬 분비에 이상이 생기는 희귀병에 걸렸다. 그의 부모는 치료비 마련을 위해 스페인으로 이주했고, 스페인 유소년팀에서 제2의 축구인생을 시작한 메시는 2003년 16세의 나이로 프리메라리가에 진출했다. 지난 5월 바르셀로나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인 17세 10개월 7일에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데뷔골을 기록하고, 최근 2010년까지 계약을 연장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김성수 박록삼기자 sskim@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한진그룹 (1) 창업 趙회장 일가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한진그룹 (1) 창업 趙회장 일가

    “당신, 이야기(베트콩 습격으로 한진직원 5명 사망) 들었소? 내 두말도 안하겠소! 우리 운전수들 군인 출신이오. 방어용으로만 할 테니 M16을 지급해 주시오.”(조중건 전 대한항공 부회장) “너 미쳤냐? 어떻게 민간인에게 군대 소총을 나눠주라는 거야.”(찰스 마이어 꾸이년지구 사령관) “돈 벌러 와서 죽을 수는 없지, 우리도 방어는 해야 할 거 아냐.”(조 전 부회장) “미스터 조, 이건 사이공 사령부도 모르는 일이오. 당신과 나만 아는 일이오, 알겠소?그리고 절대 먼저 쏘지 마시오.”(마이어 사령관) 조중건(73) 전 대한항공 부회장이 자서전에서 밝힌 이 대화는 한진이 사지인 베트남 정글에서 어떻게 달러를 벌었는지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해방둥이’ 한진이 ‘수송보국’의 길을 걸은 지 60년. 이런 피와 땀들이 모여 오늘날 육·해·공을 아우르는 ‘세상의 길’을 개척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길라잡이’에는 고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이 서있었다. 길이 있는 곳에 ‘한(韓)민족의 전진(進)’, 한진이 있다며 전장으로, 바다로, 하늘로, 수송 외길을 걸어온 고 조 회장. 이 때문에 한진그룹의 23개 계열사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5대양 6대주에서 한민족의 영토를 세계로 넓히고 있다. ●전장에서 성장한 한진 “형님이 경제시찰단의 일원으로 베트남에 갈 때입니다. 돈 될 만한 사업이 있을 것으로 확신했던 중훈 형은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베트남 꾸이년지역의 풍경에서 바로 사업 아이디어를 찾아냈습니다. 항만을 보니, 화물이 꽉 찬 배가 50척이 몰려 있더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그것만 본 것이 아니라 배들이 짐을 실은 채 마냥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죠. 순간적으로 상황을 파악한 형님은 갑자기 창문에서 휙 돌아앉아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고 합디다. 다른 사장들이 쳐다볼까 싶어 큰 일이라고 생각한 거죠.”조 전 부회장은 한진의 베트남사업 첫발을 이렇게 설명했다. 한진의 화물수송사업은 전후방이 없었던 베트남에서 당연히 쉽지 않았다. 그러나 고 조 회장은 빗발치는 전장을 오가며, 뚝심과 오기로 밀어붙였다. 베트콩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받고, 직원들이 공포에 떨 때는 사기를 높이기 위해 직접 수송 차량의 선두에 서기도 했다. 그런 고생끝에 주어진 과실은 너무나 달콤했다. 한진이 1966년부터 5년간 베트남에서 벌어들인 달러는 무려 1억 5000만달러. 당시 한국은행이 보유한 가용외화가 5000만달러 남짓이었으니, 한진이 베트남에서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진은 베트남 특수로 당당히 재벌 반열에 들어선다. 고 조 회장은 67년 7월 자본금 2억원으로 대진해운을 설립했고, 그해 9월에는 삼성물산으로부터 동양화재를 5억 7000만원에 인수했다. 또 68년 2월에는 한국공항,8월에는 건설회사인 한일개발(현 한진중공업)을 세웠다. 이어 인하대학교도 인수했다. ●부실기업 대한항공공사 인수 고 조 회장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위기이자 도전을 맞이한다. 다름아닌 항공사업이었다. “청와대로부터 호출이 왔었습니다. 어느 정도 짐작가는 내용이었죠.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이후락 비서실장, 김성곤 공화당 의원 등이 수시로 드나들면서 만년 적자 공기업인 대한항공공사 인수를 독촉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형한테 절대 받아들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도 불안해서 저도 형님과 같이 청와대에 따라 갔었습니다. 그러나 그뿐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나라 국적기를 타고 해외 나들이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게 소망이라는데 형님이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조 전 부회장) 고 조 회장은 결국 69년 ‘말 많고 탈 많았던’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했다. 항공공사는 당시 프로펠러기 7대와 제트기 1대를 보유했지만, 전체 좌석수는 점보기 1대보다 적었다. 또 27억원의 부채는 감당키 어려운 것이었다. 이 때문에 임원들은 ‘베트남에서 목숨 걸고 번 돈을 부실 항공사에 모두 쏟아붓게 됐다.’며 크게 우려했다. 그러나 고 조 회장은 과감한 투자와 국제선 개척으로 이를 헤쳐나갔다. 그리고 36년 후 대한항공은 화물수송 세계 1위, 보유 항공기 113대, 매출 7조 2000억원(지난해)이라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창업주에겐 은퇴란 없다” 트럭 한 대로 국내 최대의 운수그룹을 일군 고 조 회장은 팔순의 나이에도 명예회장으로 물러나지 않고, 현장을 챙길 정도로 노익장을 과시했던 정열적인 경영자였다. 그가 모언론 인터뷰에서 “창업주에게 은퇴란 없다.”고 한 말은 그의 성격과 일 욕심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고 조 회장은 또 ‘남이 닦아놓은 길을 뒤쫓으며 훼방하는 얌체사업’을 싫어했다. 모르는 사업에 뛰어들어 ‘문어발식’ 확장도 자제했다.‘낚싯대를 열개, 스무개 걸쳐 놓는다고 해서 고기가 다 물리는 게 아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그는 모르는 사업을 하기보다 수송 전문화에 더 집중했다. 주변에서 ‘돈 버는’ 무역회사를 만들자고 권유하기도 했지만 고 조 회장은 그때마다 “우리가 무역회사를 하면 많은 무역회사들이 우리의 경쟁자가 될 텐데 그들이 우리 비행기를 타고 우리에게 화물을 맡기겠느냐.”며 반대했다고 한다. 그는 1920년 부친 조명희옹과 모친 태천즙 여사의 4남4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부친은 집안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뚝딱거리고 어질러 놓기를 좋아했던 둘째아들에게 ‘동(動)과 정(靜)이 조화를 이룬 사람이 되라’는 뜻에서 ‘정석(靜石)’이란 아호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고 조 회장은 45년 광복 직후 인천에서 한진상사를 설립, 수송 외길의 첫발을 내디뎠다. 고만 고만하던 한진상사가 두각을 낸 것은 56년 미군부대 화물 수송을 맡으면서다. 이때 맺은 미군과의 인연은 한진 성장의 든든한 ‘우군’이 됐다. ●“찰리 조, 보따리 좀 싸봐” 조중건(영어명 찰리) 전 부회장은 창업주인 고 조 회장의 동생이라기보다 사업 동반자이자, 유능한 참모였다. 조 전 부회장은 통역과 포병장교로 6·25 전쟁에 참전한 뒤, 미국 버클리대학에서 수송학을 전공했다. 59년에 귀국한 그는 바로 한진에 합류했다. 조 전 부회장의 본격적인 활약은 베트남 전쟁에서 발휘됐다. 고 조 회장이 1965년 베트남을 시찰한 뒤, 조 전 부회장에게 이렇게 말했다.“니가 가서 보따리 좀 싸봐.”이 말은 한번 기획을 잘 해서 사업으로 만들어 보라는 ‘조 브러더스(중훈·중건 형제)’의 은어였다. 조 전 부회장은 미군 인맥을 활용해 중장비 조달 등의 악조건을 뚫고 베트남 꾸이년항의 미군 용역과 수송작업을 따냈다. 계약금액은 790만달러. 조 전 부회장의 설명이다.“베트남 수송사업을 돌아볼 때 그것은 참으로 100년만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사업이었다.” 조 전 부회장은 또 고 조 회장을 도와 70∼80년대 대한항공의 성장사를 주도했다. 국제노선 개척을 위해 당시 소련과 중국 등 적국까지 넘나들며, 대한민국의 하늘을 넓혀 놓았다. 항공노선과 관련된 에피소드 한토막. 그는 88년 서울올림픽 선수단 수송을 위한 부정기 항공 노선을 뚫기 위해 혈혈단신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구소련 국영 아에로플로트 항공사 사장과 항공청 장관, 체육부 장관을 만나 설득에 들어갔지만, 요지부동이었다. 하루는 그들이 조 전 부회장을 한 궁전의 깊숙한 곳으로 안내하더니, 약속이라도 한 듯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사우나탕과 보드카로 조 전 부회장의 진을 빼기 시작했다. 수십번 반복된 행동으로 조 전 부회장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정신력으로 계속 버티며, 협상을 주도해 나갔다. 동이 틀 무렵 조 전 부회장은 그들의 수장으로부터 긍정적 답변을 얻어냈다. 고 조 회장의 막내동생인 조중식(70) 전 한일개발(현 한진중공업) 부회장은 미국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 뒤 한진에 입사했다. 당시 새로운 건축공법인 H-빔 공법으로 서울 소공동 KAL빌딩 설계 및 시공을 했으며, 중동 특수 때 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 많은 공사를 따내기도 했다. ●조씨가, 명망가로 사통팔달 한진 조씨가의 혼맥은 명망가 집안이 두루 포함돼 있다. 관·재·학·법조계 등으로 폭넓게 뻗어있다. 또 연애 결혼보다 유난히 중매 결혼이 많다는 점이 눈에 띈다. 창업주인 고 조 회장은 1944년 집안 어른의 중매로 평범한 집안의 김정일(82) 여사와 결혼했지만, 그의 동생들과 자녀들은 당대의 유력 인사의 자녀를 배필로 맞았다. 고 조 회장과 김 여사는 슬하에 4남 1녀(현숙·양호·남호·수호·정호)를 뒀다. 장녀인 조현숙(60)씨는 68년 숙부인 조 전 부회장의 중매로 당시 엘리트 법조인인 이태희(65·현 법무법인 광장 대표변호사) 서울지방법원 판사와 인연을 맺었다. 이 변호사는 흥아타이어 감사를 지냈던 이상묵씨의 장남으로 서울대 법대와 미국 하버드대 법학박사 출신이다. 조양호(56) 대한항공 회장은 73년 이재철 전 교통부 차관의 장녀인 명희(56)씨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이씨는 서울대 미대 출신. 고 조 회장과 이 전 차관이 한 모임에서 아들·딸과 관련된 대화를 나누다가 인연이 돼 사돈간이 됐다. 조 회장 얘기다.“양가에서 혼담이 오가던 중에 장모님이 예비 사위 얼굴을 보기 위해 집을 찾아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 사진을 보고 흡족하셨던 모양입니다. 군제대 후에 바로 결혼하게 됐습니다.” 당시 양가의 통혼은 운수기업과 주무부처인 교통부의 고위층 집안이 맺어졌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조 회장의 장인인 이 전 차관은 76년 공직에서 물러난 이후 인하대와 국민대, 중앙대 총장을 역임하는 등 교육계 인사로 활약했다. 조남호(54) 한진중공업 회장은 김원규 전 교육감의 차녀인 영혜(54)씨와 우연히 테니스코트에서 만나 결혼에 성공한 케이스. 형제들 가운데 유일하게 연애결혼에 성공했다. 조양호 회장은 “다른 형제는 해외에서 공부하다 보니 집안에서 혼사를 챙겼지만 둘째는 국내에서 대학을 나오다 보니, 주변 친구들의 도움으로 연애를 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조수호(51) 한진해운 회장은 조씨가가 국내 재벌가와 혈연으로 얽혀지는 첫번째 다리를 놨다. 조 회장의 처가가 롯데그룹 창업주인 신격호 집안이기 때문이다. 부인인 최은영(43)씨의 모친이 신 회장의 넷째 여동생인 신정숙 여사다. 신 여사의 남편은 최현열 전 NK그룹 회장이다. 조정호(47) 메리츠증권 회장은 87년 구자학 아워홈 회장의 차녀인 명진(41)씨와 혼인했다. 이 결혼으로 한진 조씨가는 재계 혼맥의 주류로 편입된다. 장인인 구 회장이 LG 구씨가이기 때문이다. 또 삼성 이씨가와도 바로 연결된다. 구 회장의 부인인 이숙희 여사가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의 차녀다. ●방계 혼맥도 장관 사돈 많아 고 조 회장의 형제자매 혼맥도 전직 장관 가문부터 평범한 집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조중건 전 대한항공 부회장은 이상실 전 상공은행장의 3녀인 영학(68)씨와 결혼해 1남 3녀를 뒀다. 장남인 진호(43)씨는 이종남 전 감사원장의 장녀인 경아(35)씨와 인연을 맺었다. 장녀인 윤정(41)씨는 이동원 전 외무부 장관의 장남 정훈(44)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쌍둥이인 주은(38)씨는 미혼, 주연(38)씨는 김태효(38) 성균관대 교수와 결혼했다. 조씨 가문의 장자인 고 조중렬 전 한일개발 부회장은 최학희(80) 여사와 결혼,2남 1녀를 뒀다. 장손인 조지호(57) 한양대 교수는 이병호 전 상공부 장관의 장녀 숙희(56)씨와 혼례를 올렸다. 차남 건호(53)씨는 재미동포인 윤주덕 내과의사의 딸 영태(51)씨를 아내로 맞았으며, 장녀인 인숙(59)씨는 문영호(66) 전 동부제일병원 내과과장과 혼인했다. 영호씨의 부친은 제일은행 이사를 지낸 문재관씨다. 고 조 회장의 첫째 여동생인 조정옥(82) 여사는 전윤진(89) 전 동양화재 감사와 인연을 맺었으며, 둘째 여동생 조정원(80) 여사는 박두진(78)씨와 혼례를 치렀다. 셋째인 조도원(77) 여사는 박태원(79) 전 한국과학기술원 이사장과 결혼했으며, 막내인 조경숙(75) 여사는 재미교포 외과의사인 박소회(78)씨에게 시집갔다. 고 조 회장의 막내 남동생인 조중식 전 한일개발 부회장은 교육자 집안 출신인 김복수(68)씨를 아내로 맞았다. golders@seoul.co.kr ■ “떠날때는 ‘쿨’ 하게” ‘2인자’ 조중건, 조카 경영권승계 앞두고 야인으로 역사적으로 2인자의 삶은 불행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1인자를 향한 욕심이 화(禍)를 불러들인 탓이었다. 반면 드물게 성공한 2인자는 맺고 끊음이 명확하고, 절제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준다. 조중건(73) 전 대한항공 부회장은 이런 점에서 성공한 2인자로 분류할 수 있다. 그는 1996년 조카들의 경영권 승계가 마무리될 시점에 미련없이 대한항공을 나와 야인으로 돌아갔다. 오너가(家)의 일원이기보다 전문경영인으로서 행동했으며, 나아가고 물러날 때를 알았던 것이다. 1인자에 대한 욕심은 없었을까. 조 전 부회장이 한때 하와이에 머무는 것을 놓고 일각에서는 형제간의 ‘힘겨루기’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 또 조 전 부회장이 일정 기간 대한항공의 ‘수장’을 맡다가 장조카인 조양호 대한항공 사장(현 회장)에게 물려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았다. 한진그룹의 일부 계열사를 받을 것으로 판단한 이도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세간의 예측과 달리 조 전 부회장은 모든 것을 훌훌 털고 하와이로 떠났다. 조 전 부회장은 훗날 이같이 전했다.“형제간이라도 언젠가 헤어질 거면 기분좋게 헤어지고 싶었다. 조카들의 앞길을 막는 것은 보기가 안 좋았다. 또 한국에 있으면 언론 인터뷰를 하게 되고, 이 때문에 본의 아니게 형(고 조중훈 회장)에게 누를 끼칠까봐 신경이 쓰였다.”시쳇말로 어차피 헤어질 거면 ‘쿨하게’ 떠나고 싶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은 “96년 초 작은아버지께서 물러나시기를 원하셨다.”면서 “선친도 그동안 숙부께서 고생하셨던 것을 잘 아셨던 만큼 섭섭지 않게 해드렸다.”고 설명했다. 그럼 조 전 부회장이 생각한 2인자는 어떤 모습일까.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밝혔다.“형이 대한항공의 ‘선장’이었다면, 나는 ‘일등항해사’였다. 선장은 모름지기 새로운 곳을 향한 모험심과 카리스마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 배를 움직이는 것은 일등항해사다.2인자는 항상 해결사 역할을 해야만 했다. 성공확률은 거의 50% 이하였다.” 그는 그렇다고 무조건 ‘예스맨’이 2인자는 아니라고 강조했다. 조 전 부회장은 고 조 회장이 정부로부터 부실기업을 인수할 때마다 형에게 수없이 대들었다.“형, 하지 마시오. 밑빠진 독에 물붓기요.”그러나 조 전 부회장도 끝내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있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최단 기간에 부실 기업을 흑자 기업으로 돌려놓는 것이었다. 고 조 회장이 아이디어를 내놓으면, 이를 현실화하는 것은 언제나 조 전 부회장의 몫이었다. 그는 그 고통을 이렇게 표현했다.“전면에 나선 총수가 그저 ‘이러 저러하니, 알아서 만들어봐.’라고 화두만 획 던질 뿐일 경우가 많다. 물론 1인자에게는 1인자의 고뇌가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지만, 실제로 일을 처리하는 입장에서는 작은 일 하나 때문에 며칠을 헤매야 하는 일이 허다했다.” 그는 그럼에도 2인자의 삶이 만족스러웠다고 회고했다.“2인자들은 1인자가 꾸는 꿈에 덩달아 취해 열정을 다해 일하는 존재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형은 육·해·공의 종합물류 기업이라는 꿈을 내게 보여줬다.” golders@seoul.co.kr ■ 역대 정권과의 인연 1999년 4월20일,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대한항공에 대한 고강도 제재 의사를 내비쳤다. 민간기업에 대한 청와대의 이같은 조치는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빌미를 제공한 것은 대한항공. 대한항공기의 잇단 사고가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는 것이 당시의 분위기였다. 더구나 국적항공사의 항공 사고는 국가 이미지에 미치는 악영향이 적지 않았다. 한진그룹 조씨가(家)로서는 처음으로 맞는 정권과의 갈등이었다. 한진 조씨가와 역대 정권과의 인연은 ‘극과 극’을 달린다는 점에서 국내 여느 재벌가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박정희 정권부터 김영삼 정권까지가 우호적 관계였다면, 김대중 정권때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고 조 회장은 국적항공사 대표라는 신분과 특유의 사교성, 부지런함 덕분에 역대 정권의 핵심 인사와 적지 않은 친분을 쌓았다. 이 때문에 사업상 ‘손해본 장사’도 많았다. 고 조 회장은 리스크를 떠안으면서도 정권이 요청한 부실기업을 잇따라 인수했다. 대한항공공사(현 대한항공)를 비롯해 대한선주(현 한진해운과 합병), 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를 떠안았다. 동시에 미국, 일본, 프랑스 등 해외 인맥을 활용, 민간 차원의 외교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또 30여년간 한진그룹의 ‘2인자’였던 조중건(73) 전 대한항공 부회장도 과거 군경력을 바탕으로 폭넓은 인맥을 구축했다. 그렇다고 인맥을 활용해 특혜를 누린 것은 아니었다. 그가 자서전에서 밝힌 대목이다. “1953년부터 2년간 미국 포병학교 교관 생활로 400여명의 기간 장교들과 많은 인맥을 형성할 수 있었다.(중략)나는 박정희 대통령과 매우 친근한 관계였고 나를 친아우처럼 아껴주셨고, 가끔 당시 혁명 주체들이 내 형(조중훈 회장) 집에서 모여 회의를 했다. 만약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이권과 청탁으로 돈을 긁어모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나 형은 그런 방식으로 돈을 버는 것은 신기루와 같다고 여겼다.” 그러나 98년 DJ정권이 들어서면서 조씨가는 서서히 ‘쓴맛’을 보기 시작한다. 대통령 전세기의 경쟁 입찰제 도입은 그 신호탄이었다. 이어 국세청 조사인력 240여명이 동원된 3개월간의 한진그룹 세무조사는 조씨가를 무척 당혹스럽게 했다. 이처럼 DJ정권이 대한항공에 대해 강하게 ‘칼자루’를 휘두른 이유는 뭘까.1차적으로 DJ정권 출범 이후 크고 작은 대한항공측의 사고 탓이었다. 대한항공의 문제는 기업뿐 아니라 국가 이미지 훼손이라는 것이 정부의 시각이었다. 여기에 과거 조씨가가 보인 ‘반DJ 행보’도 일부 영향을 끼쳤을 것이란 관측도 있다. 세무조사 이후 대한항공은 노선권 배분 차별 등 정부로부터 각종 불이익을 받았다. 그러나 법보다 감정을 앞세운 정부의 무리수도 적지 않았다. 사법부는 대한항공이 잇따라 제기한 노선 배분 소송에서 정부 결정을 뒤엎는 판결을 속속 내렸다. golders@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서울광장] 일과 여가, 그리고 삶의 질/우득정 논설위원

    [서울광장] 일과 여가, 그리고 삶의 질/우득정 논설위원

    힐러리 자서전을 쓴 게일 시히(여)는 남성에게도 갱년기가 있다고 단언했다.1980년대 이후 미국의 고용구조가 급변하면서 어떤 이는 40대, 운 좋은 이는 60대 초반 제1직장에서 물러난 뒤 새로운 인생 항로를 찾을 때까지 겪게 되는 시련과 방황을 남성 갱년기에 비유한 것이다. 반면 애비게일 트래퍼드(여)는 ‘나이듦의 기쁨’에서 이 시기를 자신만의 르네상스, 또는 제2의 사춘기라고 규정했다. 지난 수십년간 진행된 장수혁명 덕분에 부모 세대에게는 ‘닫힘’으로 가던 시기가 이제는 ‘새로운 열림’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트래퍼드는 현 세대를 나만의 시간을 경험하는 최초의 세대라고 정의를 내렸다. 그렇다면 이 땅의 수많은 인간 군상들은 무엇을 꿈꾸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77세이지만 건강수명과 노동시장 은퇴연령은 68세다. 평균적으로 인생 마지막 9년을 병마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뜬다는 얘기다. 또 제1직장의 평균 은퇴연령이 52.3세인 점을 감안하면 제1직장에서 떨려난 뒤 15년여 동안 생계 수단이나 소일거리를 찾아 노동시장을 전전해야 한다는 뜻이다. 오는 2030년이면 전 인구의 24%,2050년이면 37%가 65세 이상의 노인이 차지하게 되는, 노령화 진전 세계 1위인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그럼에도 현재 417만명의 노인 중 노후준비가 돼 있다는 비율은 28%에 불과하다. 일에 치이고 자식 뒷바라지에 월급봉투를 쏟아 붓다 보니 어느덧 황혼녘에 홀로 내던져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노인 자살증가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라는 우울한 손익결산서만 남았다.60세 이상의 노인들이 1년 새 17만명이나 취업시장으로 몰리면서 전체 취업자의 10.9%에 이르는 250만명을 돌파했다는 통계 자료도 이러한 분위기의 결과다.65세를 기준으로 하면 남성의 49.3%, 여성의 35.8%가 생활전선에서 허덕이고 있다고 한다. 이번 주말이면 전체 근로자의 40%가 주5일 근무제에 돌입한다지만 모두가 발꿈치를 밟히지 않으려고 앞만 보고 내닫는 삶을 살고 있다. 공공부문 중 일부 ‘철밥통’ 업종 종사자는 여가를 꿈꿀지 몰라도 대부분의 산업현장에서는 초과근무나 휴일근무가 당연시되고 있다.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몸이 성할 때 한푼이라도 더 벌어야 한다는 강박감과 여가에 대한 미숙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빚어진 결과다. 통계청이 매년 발표하는 사회통계조사에서 여가의 활용 방법 조사문항이 TV 시청, 여행, 휴식·수면밖에 없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힌두교에서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확률이 870만분의1이라는데 일의 노예로 한평생을 보낸다면 너무나 허망하다. 제1직장에서 밀려난 뒤 인생의 그라운드 제로에 서서 절망의 나락에 빠져들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여가 훈련을 쌓아야 한다. 일과 여가가 선순환할 수 있도록 삶의 방식을 리엔지니어링해야 한다. 남은 40년을 위해 나만의 시간을 향유하기 위한 로드맵(안내지도)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먼저 여가는 악(惡)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트래퍼드는 ‘받은 것 돌려주기’‘후손들을 위한 정신적 유산 남기기’ 등을 제2사춘기의 주제로 제시하고 있다. 혹자는 독거 노인을 찾아 이불 빨래를 하며 춤추는 청춘 남녀의 광고처럼 ‘즐기는 자원봉사(Voluntainment)’야말로 바람직한 여가 모델이라고 주장한다. 행복의 비결은 목적을 갖는 것과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사회학자들은 말한다. 그리고 목적을 가지려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부단히 자문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주5일 근무제가 아닌 주 이틀 휴무제의 활용에 삶의 질과 미래 행복이 달렸다고 하겠다. 우득정 논설위원 djwootk@seoul.co.kr
  • 日파친코회사 ‘마루한’ 한창우 회장

    日파친코회사 ‘마루한’ 한창우 회장

    |도쿄 이춘규특파원|1945년 10월22일 밤 11시 일본 시모노세키 해안. 얼굴에 보송보송한 솜털이 남아있던 열다섯살 한국 소년이 주위를 살피며 밀항선에서 조심스럽게 내렸다. 손에는 고향의 모친께서 쥐어준 쌀 두 말과 영어사전 뿐이었다. 그것으로 거친 일본생활을 헤쳐가야 했다. ‘일본 파친코 제왕’으로 불리는 재일교포 1세 한창우(75) 마루한 회장의 60년 전 모습은 이랬다. 상전벽해. 일본어판 포브스지는 지난달 순자산 1200억엔(약 1조 2000억원) 이상 되는 일본의 거부 명단을 발표했다. 한국계로는 정보통신(IT) 재벌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이 순자산 4730억엔으로 8위였고, 한 회장은 1210억엔으로 24위에 랭크됐다. 한 회장은 포브스가 지난 3월 발표한 전세계 갑부 순위에서도 584위를 기록한 바 있다. 지난해 마루한의 매출은 1조 2778억엔, 순이익은 210억엔이었다.2010년 매출목표는 5조엔이다. ●도쿄 한복판에 우뚝 선 밀항소년 스스로를 “한국의 보트피플 1호”라고 말하는 한 회장이 도쿄 한복판에 우뚝 섰다. 도쿄역이 발아래 내려다 보이는 초현대식 빌딩의 28층에 있는 마루한 도쿄 본사에서 그를 만났다. 건물 벽면이 대형유리로 돼 있어, 일왕궁도 일부 보이는 요충지다. 임대료가 평당 4만 4000엔인 일본의 심장부에 밀항소년이 우뚝 서있는 것이다. 그의 경상도 사투리는 구수하고, 유창했다.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시고, 지금 고향 삼천포에는 동생이 살고 있다.3남 2녀 중 차남으로 일제 때 징용으로 끌려가 벽돌쌓기 일을 했던 형을 따라 밀항선을 탔다. 한때 사천시로 변경됐다가 삼천포라는 옛 지명을 되찾은 것을 모른 그는 “삼천포라는 명칭을 왜 없애냐고 고향의 선·후배들에게 따졌다.‘삼천포로 빠졌다.’는 것보다 ‘삼천포에 가자.’라는 긍정적인 면을 선전하면 오히려 지역발전에 도움이 될 것 아닌가. 그게 내 철학”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말을 들으며 차별이 심한 일본사회에서 역경을 이겨낸 긍정적 사고방식을 느낄 수 있었다. 밀항 뒤 혼란스러운 일본에서 검정고시로 고졸 자격을 딴 뒤, 호세대학 경제학부를 마쳤다. 호세대학은 당시 일본내 마르크스경제학의 총본산이었다. 그도 마르크스나 엥겔스, 레닌, 마오쩌둥을 접하며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래서 귀국해 정치가가 되겠다는 꿈도 있었지만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접어버렸다. 이후 관심도 마르크스에서 패션으로 옮겨갔다. 대학을 졸업한 뒤 취직하려 했지만 안돼 프랑스로 패션 유학을 떠나기 위해 교토의 미네야마에서 파친코를 하던 매형을 찾아간 것이 인생 항로를 바꿔버렸다. 여비를 빌리러 갔다가 매형이 한사코 파친코 일을 돕게 하는 바람에 주저앉았다. 업체간 경쟁이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매형이 사업을 그만두려고 하자 “성공하면 두배로 드리겠다.”며 인수했다. 그것이 마루한의 모태가 됐다. 이후 미네야마에서 클래식 음악다방도 개업해 성공했고,1967년에는 당시 인기를 끈 볼링장 사업에도 뛰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시련이 될 줄은 까맣게 몰랐다. ●“매일 자살하려 했었다” “시즈오카에 120레인 볼링장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볼링 열기가 식으면서 경영상태가 악화됐고,5년 뒤에는 60억엔이라는 천문학적인 빚을 지고 말았다. 빚 독촉은 심하고, 갚을 길은 없어 매일 자살을 생각했지만 아이들 얼굴을 보니 못하겠더라.” 마음을 다잡았다. 택시운전이나 라면가게라도 해서 빚을 갚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행히 채권은행측이 “독촉을 안할 테니 천천히 갚아라. 신용·노력을 인정한다.”고 해 인감까지 은행에 맡겨놓고 뛰어다녔다. 새 사업을 물색하던 중 나고야 교외의 수천평 벌판에 주차시설까지 갖춘 파친코를 보고 힌트를 얻어 교외형 대형 파친코를 열기로 했다. 볼링장을 처분한 돈과 사채와 곗돈 등으로 시작했다. 자동차시대 도래를 정확히 예측한 사업 전략 덕분에 히메지, 고베 등에 세운 파친코점에 손님들이 물밀듯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호사다마일까. 이즈음 미국으로 영어연수를 갔던 당시 고교 2학년이던 장남이 요세미티 국립공원 계곡서 탁류에 휩쓸려 숨지는 액운을 당한다. 충격으로 열흘 정도 식음을 전폐하다시피하고 울고 또 울었다. 충격은 2년가량 이어졌다. 그래도 사업은 급성장,10년만에 60억엔 부채도 청산했다. 파친코의 선입견을 바꾼 영업전략이 주효했다. 손님을 최우선적으로 배려했다. 돈을 많이 잃은 고객에게는 구슬을 융통해주고 담배로 위로했다. 담배냄새 제거시설이나 샤워시설도 갖춰 카페식 분위기를 연출했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급성장,1995년에는 도쿄 입성의 꿈을 이루고 현재는 전국 180여개 점포에 종업원만 7000명에 달한다. 이 중 한국인은 100여명. 도쿄증권거래소에 상장도 추진 중이다. ●파친코, 이제는 폭력배와 무관 “파친코 하면 폭력조직과 검은돈을 연상한다.20∼30년전만 해도 폭력배들이 귀찮게 했었다. 청소해줄 테니 한 달에 얼마씩 달라는 정도가 있었지만 10여년전 법이 한층 강화되면서 그마저도 없어졌다. 가끔 행패를 부리려는 폭력배가 있지만 즉각 체포된다.” 한 회장은 파친코의 이미지를 바꿔 거대기업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파친코 사장중 한국계가 70%라고 소개했다. 매년 250∼300명의 신입사원 중 대졸이 200여명에 이르고, 도쿄대 출신도 도쿄 본사에만 3명이 근무하고 있는 것은 파친코의 이미지가 바뀐 방증이란다. 그는 일본내 차별을 뛰어넘기 위해 수익금의 1%는 지역사회 봉사용으로 내놓는다.3년 전 일본에 귀화했지만 ‘한국계 일본인’으로 만족한다. 조국에 대한 끈끈한 정은 여전해 1년에 서너차례는 꼭 한국을 찾는다.22일에는 도쿄 인근 지바에서 한국인 150여명 등 7000∼1만명을 초청해 대규모로 ‘매출 1조엔 돌파 기념행사’를 갖는다. 비용만 15억엔이나 들였다. 7남매를 낳아 현재 딸 둘, 아들 넷인 한 회장은 교토의 저택에서 부인, 막내 아들(31)과 함께 살고 있다. 손주들만 7명으로 다복한 편이다. 파친코 제왕의 파친코 실력은 얼마일까. “7∼8번 가볍게 해 본 경험밖에 없다.”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tae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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