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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대의 스승
    2026-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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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곡가 이건용(이세기의 인물탐구:110)

    ◎정연한 논리로 「한국음악」 새지평 열어/선율의 언어로 이시대 고뇌·슬픔·분노표출/「제3세대」 동인결성,자생적 「노래문화」 운동 이건용은 「탁월한 이론가이며 실험가적 기질을 타고난 작곡가」이다.평론가 노동은(목원대)에 의하면 그는 명석한 「민족음악론」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음악을 생각하면서 창작으로 이를 실천하는 사람이다.무비판적인 서양음악의 추종을 경계하면서 그가 가진 음악언어의 방법으로 우리시대가 지닌 고뇌와 슬픔과 분노를 노래하고 있다. 서양음악을 처음 받아들인 제1세대와 서양음악의 세련화작업에 치중해온 현대음악을 거쳐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우리음악양식을 구축한다」는 취지아래 그는 지난 81년 「제3세대」동인을 결성,매해 두차례에 걸친 작곡발표회와 「민족음악논쟁」으로 그때마다 작곡계에 커다란 자극과 파문을 던져왔다.그런 한편으로는 「민족음악연구회」를 통해 「이 땅에 자생적 음악문화」를 꽃피우기 위한 「노래운동」을 펼치면서 새로운 한국음악의 지평을 여는 토대를 마련해왔다.특히 정연하게 이론을 전개시킨 「한국음악의 논리와 윤리」 「민족음악의 지평」 등의 저서는 80년대 우리음악 논의의 한 흐름을 만들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매년 2차례 작곡발표 그렇다면 그가 주장하는 「한국음악」이란 무엇인가. 「한국음악」논의에서 그는 「음악」의 입장에서는 「한국에서 행해지는 여러 음악을 한국음악」이라고 전제한다.그러나 「한국」의 입장에서는 「한국에서 창작되었다고해서」「전통음악을 살렸다고해서」 굳이 「한국음악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전통음악이 있긴 하지만 「살아있는 문화란 정체될 수 없으므로」「전통음악을 한국음악으로 삼을 수 없다」것이 그의 논리의 요지다. 그가 이처럼 투철한 음악정신과 음악관을 가진데는 그나름대로의 음악적 갈등과 어두웠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쓴 「나의 서른아홉살」이란 인생록에 보면 그가 「서른아홉살이던 86년에는 서울에선 아시안게임이 열리고 있었고 대학에는 시위와 전경과 최루탄과 돌멩이와 체포와 제적」이 있었다.「나는 나라를 이끄는 정치인도아니요,사회를 지도해야할 책임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격렬한 소용돌이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음악이 우리의 삶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제도적으로 보호 권장해야할 아무런 의미도 없잖은가」라는 자문과 「냉담하게 외면할 것인가」 「참여인가」의 번민에 시달리면서 그는 한 소장교수로서 틈이 날때마다 글을 쓰고 노래를 만드는 것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구약성서에서의 「수천년전 이스라엘백성이 부르짖었던 처절한 함성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느냐」에 바탕을 둔 「분노의 시」를 발표했고 황지우의 「만수산 드렁칡」 하종오의 연시, 음악극 「우리들의 사랑」 「구로동 연가」를 만들어 그 시절의 아픔을 대변해 보이고 있다.오늘의 현실을 나타내는 시들을 「노래말」로 정교하게 배열하고 추고하여 생략된 의미의 틈속으로 음악이 끈끈하게 스며들게 하는 것이 그의 한 특징이다.그래서인지 「시없는 음악이나 음악없는 시」를 그는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한국적 신명과 흥과 멋과 국악기의 풍부한 음색을 살려 관현악곡 독주곡 합창곡을 써나갔고 지난 94년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열린 동학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들의 노래」는 단연 압권의 작품으로 손꼽힌다.이건용 칸타타로 지칭되는 이 대작은 「장엄 장중한 오케스트레이션」과 웅장한 대양과도 같은 스케일로 동학혁명에서의 민중의 분노와 한시대의 급변을 급류처럼 그려내고 있다.그중에서도 동학군이 탐관오리를 처단하고 창고를 열어 굶주린 백성을 규휼하는 합창 「탄다 타오른다」는 「탄다 탄다 탄다 탄다 탄다 타오른다.봉화가 타오른다」는 단어의 음절변화와 가사의 음절에 장식적인 음표를 달고 「길게 곡선을 그리는 멜리스마를 사용하여」 불길이 치솟아오르는 모습을 음악적으로 묘사해내고 있다.독창과 합창의 자연스러운 어울림이 돋보이는 「한번이 아니어라 천번을 피었어라」는 「짧은 합창, 리토르넬로를 부드럽게 반복하면서 순간적으로 짓밟힌 아픔보다 생명체의 영원함을 작곡자의 의도대로 종교적 정신적차원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완결보다 과정을 중시이에 대해 허영환은 「한국국적의 20세기 작곡가로서 그의 품안에 너무나도 많은 이질적인 음악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겠으나 막상 그의 작품에서는 여러 음악들이 극렬하게 부딪치는 일은 결코 없다」고 단정한다.그는 「작품에서의 완결성보다 도전성을,있음보다 되어가는 과정」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고 「사람­음악­우리나라」를 작품 곳곳에 드러내는 것이 특별히 남다르다.이른바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알고 의식있게 행동하는 음악가인 것이다. 그는 평남 대동에서 출생하여 가족과 함께 6·25때 월남,서울예고때부터 음악으로 소설을 쓰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고 음대 재학중에는 연극활동으로 오태석·정하연 등과 교류를 가지면서 작곡보다는 소설과 연극연출에 열중했다.그의 문학적 기량은 67년 아직 대학 2학년때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소설인 「석기시대」가 이를 대변해준다. ○항상 젊은 기수로 “우뚝”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그린 이 소설은 줄곧 병석에 누워있던 아버지에 대한원망과 집안을 이끌지 못하는 가장의 무능과 불행에 빠진 육신에 대한 상념과 연민이 「서로 속고 감추는 감정으로 남아」 결국 진정한 사랑에 이르지 못한다는 그자신의 자화상일수도 있다.그의 스승이자 선배인 이강숙교수는 『평소의 그는 진지하게 연구하고 파고들면서 자신의 분수와 지성을 잃지 않는 두뇌의 예술가』라고 조언한다.부인 이진숙씨와의 사이엔 아들만 형제. 사회에 영합하는 예술가가 아닌 미래를 바라보는 예술가가 되기 위해 그는 한 시대를 염두에 두면서도 「지나치게 현대적이지 않고 지나치게 국악적이지 않으며 지나치게 조성음악적이지도 않는 음악」으로 음악을 듣는 사람들의 삶에 보탬이 되는 기능적 가치에 중점을 두고 있다. 확실한 것은 그는 「민속음악과 새로운 음악,그리고 요즘의 대중음악과 순수예술사이의 갭을 메우려는 작업에 치중하면서」 「기존양식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새 방식을 찾아 「미래에 추구될 어떤 음악」인 한국음악을 성취하려는 확실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그리고 자신의 확신을 「가장 확실하게 실천」하기 위해 「신선한 정신」 「항상 젊은 기수」로 우리의 정면에 언제나 풋풋하게 서있다. □연보 ▲1947년 평남 대동군 출생 ▲65년 서울예고 졸업 ▲6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부문 「석기시대」 당선 ▲69년 서울대 음대 작곡과 졸업 ▲74년 서울대 음대 대학원 졸업 ▲76년 프랑크푸르트 음대 졸업 ▲79∼83년 효성여대 음대 교수 ▲83년 서울대대학원 미학과 박사과정 수료,제3세대동인 결성 ▲83∼92년 서울대 음대 교수 ▲88년 올림픽개막행사 「새싹」 작곡 ▲89년 민족음악연구회 결성 ▲93년 이건용창작음악 발표회(예술의 전당) ▲94년 이건용칸타타 「들의 노래」(국립중앙대극장) 발표,CD출반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작곡과 교수,동대 교학처장,민족음악연구회회장,민족음악협의회 자문위원,월간 「민족예술」 편집자문위원,음악학 계간지 「낭만음악」 편집고문 〈작곡집〉 「태주로부터의 전주곡」 「남려로부터의 전주곡」(84년)「회년을 위한 노래」(91년) 「빠름­느림­더느림」(92년) 가곡집 「우리가 물이 되어」 이건용 합창곡 전3집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분노의 시」 「AILM을 위한 미사」 「첼로산조」(93년)외 국악관현악곡 실내악 및 독주곡 교성곡 성악곡 무용음악 오페라 「솔로몬과 술람미」 등 다수 〈저서〉 「민족음악의 지평(84) 「한국음악의 논리와 윤리」(87년) 「민족음악론」(90년)역서 막스베버저 「음악사회학」(93년) 〈수상〉대한민국무용제 음악상(80년) 공간대상(82년) 서울평론상(87년) 서울무용제 음악상(93년) KBS 음악대상(95년) 김수근문화상(96년)
  • 서양화가 이만익(이세기의 인물탐구:108)

    ◎내면세계 귀기울이는 「문학적 화가」/중학때 국전입선… 「출품자격」 논란 일으켜/매서운 절제력으로 격조있는 개성 표출 「냉철한 지성의 화가」로 지칭되는 화가 이만익,그는 하나의 정해진 틀과 격식에 얽매이기보다 새로운 것을 향해 달리고 변모하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투철하게 이룬 완벽주의라고 할수 있다.그가 지난해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말하는 그림,소리없는 시」란 부제로 「40년 회고전」을 열었을때 화단 일각에서는 그의 나이가 「40년전」을 열기에는 아직 미치지 않았다는 의아심을 갖는 이들도 있었다.그러나 그는 「그림 40년전을 여는 뜻」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충만한 침묵」 머물러 『그림을 좋아해서 그림에 매달리고 미술반활동을 시작한 것은 효제국민학교 2학년때부터고 그 일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니 이는 실로 50년에 이르는 세월』이며 「철없이 어린 날에 끄적거린 것이 어찌 그림이겠는가 웃을지도 모르지만」 「철모르고 순진하게 바쳤던 지난날의 시간들에 더없이 애정이 간다」고 했다.그래서 「한걸음멈추어 서서 지나온 나를 돌아다보고 맞이할 시간을 다시 준비」하기 위해 그가 겪은 「좌절감의 흔적」들을 한자리에 모아 펼쳐보이기로 한 것이다.전시에는 52년 그가 경기중 2학년때 그린 스케치에서 95년 신작에 이르는 2백40여점의 대작 소품이 대대적으로 선보였다. 이만익의 그림은 우리 역사의 삶속에 깃들인 인물들을 하나같이 관조하는 분위기다.잔잔하게 미소띤 얼굴에는 기다림이나 그리움,슬픔과 기쁨이 엇갈리고 기다림과 그리움의 연민 위에는 「충만한 침묵」이 초연히 머물러 있다.그가 정물이나 풍경이 아닌 인물에 유달리 집착하는 것은 화가 자신의 예술적 영감을 하나의 생명에 보다 적극적으로 표명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선은 굵고 힘찬 유기적인 곡선에다 색채는 원시적인 원색이면서도 미술적인 녹청 군청 산호색이 정제된 조화를 이루고 있다.이른바 선과 색은 표현적 차원이 아닌 상징적 의미이며 정교하게 계산된 필치와 「긍정적 시각」으로 선명한 회화효과를 추구해내고 있다.삶을 찬미하는 마음에서 나온 장식성 또한 「정감의 세계를 논리적으로 정돈시킨 것」으로 이는 그의 최근의 예술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은 크게 세가지 시기로 분류된다.50년대와 60년대는 주로 역 대합실이나 아기를 등에 업은 노인,생활에 지치고 고단한 청계천일대의 풍경 등을 대상으로 삼고있고 프랑스 유학 이후 어둡고 탁한 색채 대신 색채의 순도와 강도를 살린 장식적 화면을 조성하게 되었다.이른바 포만과 방출을 통과하여 마음속에 붓을 담가 그리는 「독자적 양식」을 구축하게 된 셈이다. 그는 『그림이 어렵고 모호해져서 공허한 논리로 옹호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그래서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인가」를 발견하기 위해 문학적 주제와 소재를 선택하게 되었고 고구려 건국신화의 주인공인 주몽을 장대한 기상으로 정립하거나 「정읍사」 「삼국유사」속의 민족적 정서와 순수한 심성,민화·민담·탈춤에 이은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등 판소리에서 서민의 정취와 시와 해학의 의미를 찾아내고 있다. ○풍경보다 인물에 집착 이에대해 오병남 교수는 그의인물들은 「지워도 지워지지않는 우리의 한 자화상」이며 작가는 『인생의 애환과 정한에 직접 가담하지 자기 감정의 통로를 차단하여 그림속의 사연을 노출시키지 않는다』고 지적한다.즉 그의 특기인 「무심한 방관자로서 작품에서의 작가의 감정을 매섭게 절제·생략하고 있다」는 평이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태어나는 것처럼 그도 어릴때부터 「그림 잘 그리는 아이」로 운명이 결정지어졌다.그리고 남들보다 배이상의 아픔과 어려움을 겪어냈다 하더라도 그때마다 「풍운이 있는 곳엔 항상 서조」가 깃들이고 있음을 예감하여 비통과 고통마저도 「우주의 상서로운 빛,자연의 은총,인간의 따스한 정」으로 극복해왔고 그로인한 여유와 사유의 차원에서 「무념」의 경지를 맞게 됐는지도 모른다. 황해도 해주 상동에서 그는 배재고와 일본 와세다대를 졸업한 부친과 경기고녀 출신인 지식인 부모밑에서 태어났다.부친은 해방전 타계하고 46년 어머니 이경숙 여사를 따라 6남매가 월남,53년 경기중 3년때 그린 「정동의 가을」과 「골목」등 2점이 제2회 국전에 입선하기도 했으나 중학생의 국전입선이 논란되면서 국전출품자격을 「대학 3년 이상」으로 규정시켜놓은 바로 그 장본인이기도 하다. 서울대 미대 재학중 국전 특선으로 다시 한번 야심에 찬 경력을 쌓았고 졸업후에는 대학때의 스승인 이봉상의 안국동 화실에 드나들면서 앙가주망 동인 활동으로 「의식있는 그림」을 발표하여 그때마다 화단의 기대를 모았다.66년부터 국전 3년연속 특선,이후 4년간은 「맹랑한 낙선」의 고배를 거듭 마신 끝에 그는 「미술계라는 제도권」과 국전의 불합리성을 새삼스럽게 절감하고 프랑스로 떠났다. ○언제나 자신감 넘쳐 이만익의 세계에는 러시아 해빙시대의 기수이던 예프투셴코의 분위기가 언뜻 풍겨난다.혹은 혁명적 이미지의 르페브르나 실존적인 야스퍼스같은 프로필이 엿보일 수도 있다.어쩔수 없이 예술가의 면모를 굳건하게 지닌 그는 「회화의 문학성」을 끝내 고집하여,미술평론가 원동석에 의하면 그는 「이 시대 걸출한 문학적 화가」에 틀림없다.「그림속의 잔물결같은 미소와 슬픔을아련하게 깔면서 음영이 없는 원색의 대비,모나지 않은 형태의 균형감각,원근법을 무시한 평행적 구성등은 마치 영원을 향해 정지하고 있는 옛 벽화를 연상시킨다」는 것이 그의 평이다. 당당한 눈빛과 언제나 자신감에 넘치는 명쾌한 실천적 행동은 어느 장소에서나 그늘이나 복안이나 위선이 없어보인다.평소 술을 즐기고 친구를 좋아해서 폭넓은 층과 친분을 트면서 사적인 모임에는 미인 부인인 김대화씨를 대동하기도 한다.자녀는 남매.지난 6월에는 시카고에 체류중인 여장부같은 어머니 이경숙여사가 92세의 나이로 그림전을 열어 집안의 기세를 한껏 과시해보였다. 이만익은 「항상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고 자기가 들은 것을 마음속에다 솔직하게 기록할줄 아는 명철을 지닌 작가」다.격조있는 개성과 군더더기가 없는 단순한 평면성으로 누가 봐도 「이만익의 것」임을 알게하는 자신만의 세계를 이룩했으나 그는 끊임없이 불뿜는 활화산인 듯 특유의 암자색을 분출하려는 정열로 또한번의 용틀임과 비약을 꾀하는 시기다. □연보 ▲1938년 황해도 해주 출생 ▲1953년 경기중 3년때 국전입선 ▲1959년 서울대 재학중 국전특선 ▲1961년 서울대 미대졸업 ▲1966∼68년 국전 연속3회 특선 ▲1962∼94년 앙가주망 동인전 ▲1973년 제1회 개인전겸 도불전 ▲1973∼74년 프랑스 아카데미 괴츠연수,르살롱전(은상) ▲1975년 귀국개인전(서울미술회관) ▲1977년 서울미술관 개인전 ▲1978년 서울미술관 개인전 ▲1979년 동덕미술관 개인전 ▲1980년 파리 개인전 ▲1981∼84년 「현대문학」지에 「그림으로 보는 삼국유사」 연재 ▲1982년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신세계미술관및 광주개인전 ▲1983년 이탈리아 한국현대미술전(밀라노),국제조형작가회의(IAA) 한국대표단참석(헬싱키) ▲1984년 문예진흥원미술회관 개인전 ▲1985년 「그림으로 본 삼국유사」출판기념전(선화랑) ▲1986년 현대화랑초대 판화전, 파리 그랑팔레·독일 브레멘개인전 ▲1987년 ’87현대작가초대전(국립현대미술관),현대화랑초대 개인전 ▲1989년 서울갤러리·부산일보화랑·라디오프랑스초대 개인전(파리) ▲1988년 서울올림픽 및 장애자올림픽미술감독 ▲1990년 도쿄 아트엑스포 개인전 ▲1991년 현대화랑·부산금화랑 개인전 ▲1992년 강남현대화랑·쥴리아나 아트갤러리 개인전 ▲1994년 제5회 이중섭미술상수상기념전(조선일보미술관),춤과 음악의 미술전(한가람미술관),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1995년 이만익 그림 40년회고전(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수상〉이중섭미술상(93년)
  • 천년문화유산 한시대 법의 잣대로 재서야/이병기(서울광장)

    오늘처럼 서구 문물로 꽉 채워진 일상생활을 살면서 새삼 한국의 고유 문화를 생각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오히려 국제화·세계화를 지향하는 이마당에 한국 고유 문화를 거론하는 것은 너무 국수주의적인 자세가 아닌가 반문당하기 쉽다.우리 문화를 너무 고집하지 말고 넓은 아량으로 세계 각국의 문화를 수용하면서 세계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이다.그러나 기실 국제화가 진전될수록 각 나라와 민족에게 더욱 소중해지는 것이 바로 자신의 고유문화이다.스스로의 문화가 없이는 세계 공동체를 위해서도 기여하는 바가 없게 되고,다른 한편 자기 고유문화의 바탕위에서 만들어진 창의적인 제품이 없이는 세계 산업경쟁 대열에 서기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구한말 격변기와 일제 강점기를 통해서 단절되었던 한국의 고유 문화는 해방후 민족갈등기와 산업개발기를 지내면서 아직도 복구하지 못하고 있다.그 결과,이제는 무엇이 한국 문화인지 알기 어렵고,이를 배태한 정신문화가 무엇인지는 더욱 알 수 없게된 시점에 이르렀다.이따금 사극속에 나타난 선조들의 생활양식을 보며 이를 가늠해 볼 따름이다.그러나 현실과의 괴리가 깊어 공감하기가 어렵거니와,더욱이 오늘의 생활 속에 되살리기는 불가능한 일이 되고 있다.사극 속의 생활양식은 그 시대의 정신문화가 구체화한 것으로서 그 정신문화를 이해하지 않는한 이를 공감하거나 재생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역사속 격랑을 수없이 겪으면서도 아직 우리 고유문화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곳이 있다.바로 불교 사찰들이다.불교 사찰들은 지난 1천6백년의 역사속에 우리 고유문화를 가장 잘 보존,계승해 왔다.절집 그 자체가 기와집 한옥 양식이요,식생활·의생활에 있어서도 전혀 서구양식의 침투없이 과거의 우리 고유양식을 보존하고 있다.몇해전 송광사 대웅보전의 중창불사시에도 당시의 무형문화재 목수,기와공들을 모셔다가 순수한 재래식 한옥 양식을 그대로 살렸다고 한다. 이와같은 외형적인 문화양식도 물론 중요하지만,불교 사찰이 계승하고 있는 더욱 소중한 부분은 한국 정신문화이다.그곳에는 속세의 모든 인연을 끊고 출가한스님들이 모여 치열한 수도정진을 하면서 쌓아올린 높은 경지의 정신문화가 있다.그속에 신라 원효스님,고려 보조국사를 비롯한 이나라 정신적 스승들의 가르침이 이어진다.천년 역사의 거친 세파속에서도 불교가 항상 새롭게 피어나온 것은 이와같은 불타는 구도정신이 살아있었기 때문이다.이것은 결코 불교만의 것일 수 없으며,꺼뜨릴 수 없는 한국 정신문화의 소중한 불씨일 것이다. 철저한 고행과 구도 수행을 하는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진리가 있다.애욕을 끊고 무소유의 삶을 사는 사람들만이 전해줄 수 있는 메시지가 있다.이 세상에 이러한 사람들이 있어 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 넉넉해지고 희망에 차게 된다.이것은 대량 소비,물질만능의 혼탁한 현세 삶을 정화시켜 줄 청정한 샘물이요,정신적 물질적으로 짓눌려 살아온 우리 민족의 장래를 밝혀줄 희망의 등불이다. 최근 들어 합천 해인사 인근에 골프장을 건설하는 문제를 두고 파문이 일고 있다.해인사에서 산등성이를 하나 넘는 위치에 골프장을 건설하겠다는 업자측의 주장과 이를 반대하는주민,불교계,각종 문화·환경·시민단체의 주장이 엇갈려 오다가 법정 투쟁으로 비화되기에 이른 것이다.서울 고등법원은 이미 골프장 개발업자측의 승소 판결을 내린바 있고,이제 대법원의 최종 판결만 앞두고 있는 상태라 한다. 단순한 법의 논리에 입각하면 법원이 업자측 승소 판결을 내린 것은 공정한 일이었을는지 모른다.그러나,천년을 잇는 문화유산에 대해서는 이렇듯 짧은 시대를 풍미하는 법의 잣대로만 잴 수는 없다.해인사 팔만대장경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세계 문화유산인 점도 그러하거니와 더욱 중요한 것은 해인사가 우리나라 정신문화의 소중한 보루이기 때문이다.이 정신문화의 보루는 속세와 격리되어 자연환경속에 묻혀 있을 때에만 그 맥통이 이어진다.개발은 불가역의 일방 통행과정이다.골프장 건설을 통해 일단 개발의 도화선이 점화되면 번져가는 개발열기속에 이 보루는 멀지않아 와해되고 말 것이다.골프장 건설 하나 때문에 천년을 지켜온 정신문화의 불꽃을 꺼뜨릴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 한국무용가 배정혜(이세기의 인물탐구:98)

    ◎춤사위 40년… 「한국 창작품」 토양 일궈/민주적정서·사회풍습 등 현대기법으로 표현/안무 생각할땐 3­4일간 식음 전폐하며 상념 「당신은 큰 모란,내일 사경/ 당신의 영위에 첫이슬 내려/ 그 이슬로 원귀들 씻겨 필경/ 삼도천건느리라」 이는 91년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올려진 서울시립무용단의 「떠도는 혼」을 보고 시인 김지하가 춤을 만들고 춤춘 배정혜에게 보낸 즉흥헌시다. 실제로 그의 춤을 본 사람이라면 구천을 떠도는 푸르른 영혼과 젖은듯이 파도치는 슬픔,가슴저미는 한과 창백한 분노가 천상의 불꽃으로 산화되어 장과 한과 원화까지도 춤속에 용해하고 있음을 체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무대는 음악이 춤을 능가하지 않으면서 의상과 장치,소품하나라도 춤의 일부이며 흑백속의 적,흑적속의 백으로 절제된 조명은 깃털처럼 가벼운 움직임과 강철같은 강인함,내딛는 보폭마다 백태의 곡선이 연출되는 모든 장면마다 절륜의 명화를 그리고 있다. 무용평론가 김태원은 배정혜의 춤을 「낮은 강둔덕에 선 건강한 갈대」에 비유한 적이 있다.「배정혜의 마르고 뾰족한 몸짓은 우리 전통춤의 정적 자태를 잃지 않으면서 춤의 본체적 바닥을 드러낼뿐 멋부림이나 태깔부림을 외면한 순수서정춤」이라고 했다.그리고 87년 예년의 평균 1백50여회에 비해 2백40여회가 넘는 폭등한 공연중에서도 단연 배정혜의 「유리도시」를 「문제작」으로 손꼽았고 「올해의 값진 수확」·「분명 한국춤의 진일보를 뜻한다」고 춤평론집 「예술춤시대의 탐색」에서 밝히고 있다.이 「유리도시」는 「문학성과 창작성」이 두드러진 작가의 야심작으로 한때 「그것이 한국춤이냐 현대무용이냐」라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나 연극연출가 오태석은 「우리 몸짓 가운데 힘이 숨어있는 곳을 그는 꿰뚫어보고 있다」면서 무용계의 찬반을 불식시켜버렸다. 그가 평론가들에게 집중적으로 조명된 것은 77년 김소희창에 황병기음악을 쓴 「타고남은 재」가 먼저다.그해 박용구씨는 춤지에다 「배정혜의 작품세계,지평을 여는 한가닥의 빛」이란 제목으로 「우리민족이 다듬어온 정밀하고 유현한 세계를 드높은 차원에서 구현하였고 기백을 뼈대로 하면서 흥과 멋을 훌륭히 살려낸 남성무를 개발해 보여준 것은 우리춤의 신기원을 이룩한 또하나의 위업」이라고 평가한바 있다.이순열도 「놀랍고도 영감적인 춤」,정병호 역시 「수제천의 아름다움을 일깨운 배정혜의 춤은 원형을 재해석하면서도 자기주관을 강하게 투입시켜 또다른 원형을 만들고 있다」고 그의 춤세계를 세밀하게 분석해내고 있다. 배정혜의 「춤언어의 정확성」과 「춤사위마다의 변화」,그의 역동적 동작은 그가 춤추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예정된 결과다. 어릴때는 강원도 원주 산골에서 농사를 짓던 배석균씨와 장옥여씨의 3남1녀중 장녀,본명은 배숙자.해방과 더불어 서울에 올라와 춤꾼인 삼촌 배명균씨를 만나면서 6세이전부터 춤추기 시작했고 12살되던 해 첫무용발표회를 열자 당시 경향신문(55년 4월16일자)은 「장추화 조광 김백봉제씨들의 지도밑에 무용을 전공했다는바 그 앙증스럽고 간드러진 춤은 만장의 관객을 도취시켰다」고 특필했다. 69년 제3회 창작무용발표회를 가졌을 때는 그가 안무하고 춤춘 「가랑잎」에 대해 현대무용가 육완순이 「그의 춤은 깨끗하고 섬세하며 오랫동안 연마해온 기교는 놀랄만큼 정확하다」고 감탄을 보냈고 「현대적인 감각과 극적 이미지를 되살린 새로운 시도와 민족적 정서와 사회적 풍습을 현대적 수법으로 미화시킨 무대」(서울신문 69년 12월11일자)로 그의 창작성을 격려하고 있다.그러나 조동화는 「춤의 성년기로 접어든 여유와 저력있는 공연」은 호평하면서도 「춤사위나 표현의 체질개선을 시도한 창작무용」이라는 어휘에는 별로 호의를 보이지 않다가 「떠도는 혼」「타고남은재」가 잇따라 발표되자 78년 신동아(10월호)에 「말없이 자기힘의 실체를 보여준 사람」으로 배정혜를 지칭하고 「춤사위 하나하나를 결코 허툴게 다루지 않으면서 한국무용이 감히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보완 발전시킨 새해석」으로 창작성을 인정고 있다. 서울시립무용단장 배정혜.그의 수많은 예술가적 배경의 특징중에서도 그는 무용이 아닌 문학을 전공한 문학도출신이란 점이 남과 다르다. 숙대 국문과를 졸업할 때까지 그의 주임교수이던 김남조시인을 비롯,그의 주변에서는 그가 「춤추는 배숙자」임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또 묵고적 기질은 안무를 할 때는 생각이 무르익을 때까지 3,4일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시체처럼 누워있다가 가없는 상념에 침잠한 끝에 지혜의 극에 치달아야만 비로소 춤의 선을 성취해낸다. 그의 이런 다부지고 묘한 면은 지난번 서울시립무용단장에 내정된 무렵에도 원로 박용구 조동화 차범석과 전임자인 문일지가 그를 추천하여 아무런 장애가 없는 데도 단원들에게 먼저 작가로서의 「작품성」과 「창의력」을 보여준 다음 자신이 정한 것을 말없이 지키면서 지난 7년동안 무용단을 이끌어왔고 4년전 프랑스와 스위스공연에서는 주최측으로부터 체류비와 개런티를 받는 자존심을 세우기도 했다. 철저한 춤꾼으로서의 그의 정신은 73년 재미교포인 김광섭씨(사업)를 만나 약혼,10년이나 지체하다가 39세이던 83년에 뒤늦게 결혼했으나 춤때문에 아이를 갖지 않았고 부군 역시 이를 이해하여 「춤추는 아내」로만 그를 아끼고 외조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지난 4월,스승이자 삼촌인 「배명균선생 고희기념」무대에서 초기에 추었던 「주마등」「풀잎」「혼령」으로 한국고전무용의 「정중동」과 「미선의 지고함」을 펼쳐보이더니 지난주에는 서울시립무용단 정기공연에서 「우리춤 50년 뿌리찾기」로 원로들의 간판춤을 정리하여 무용계의 리더다운 사명감을 실천하고 있다. 무대에 오른지 40여년이 넘는 오늘,그의 춤은 「한국창작춤의 토양을 일궈가는 세대」로서 정상에 서있으며 그의 재능을 극구 찬양하는 정병호씨에 의하면 「당대 그를 빼고는 한국무용사를 말할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객석에 엄숙과 침묵을 던지는 무위적정의 춤」은 언제 어디서나 새로 태어나고 새로운 것을 지향하면서 앞으로도 그는 그만의 춤언어로 「지혜의 향기」를 끝없이 길어 올리게 될 것이다. □연보 ▲1944년 강원도 원주출생 ▲49년 장추화무용연구소입소 ▲53년 김백봉사사 ▲54년 전국무용콩쿠르1등,최현사사 ▲55년 제1회 무용발표 ▲58년 제2회 무용발표 ▲59년 조광(발레)사사 ▲60년 도쿄 나고야 오사카순회공연 ▲69년 제3회 무용발표 ▲70년 숙명여대국문과졸업 ▲74년 숙대체육대학원졸업 ▲74∼87년 선화예고무용부장,한영숙 이매방 임준동의 「승무」「살풀이」,이정범「농악」사사 ▲77년 제4회 무용발표,작품「타고남은 재」로 「그해의 최우수작」선정,김천흥「양주탈춤」「춘앵무」사사 ▲78년부터 김선봉「봉산탈춤」,이동안「태평무」사사 ▲84년 리을무용단창단 ▲86∼88년 국립국악원상임안무자 ▲87년 「유리도시」안무·출연,국립오페라단 「처용」안무 ▲89∼현재 서울시립무용단단장 ▲90년 「불의여행」안무·출연,한국무용가협회선정 「90 최우수무용가」,90 북경아시안게임 문화예술축전참가 ▲91년 88올림픽기념및 유엔가입경축공연 ▲92년 프랑스 스위스전역 총19회공연 ▲94년 서울시립무용단 20주년기념 「녹두꽃이 떨어지면」안무 ▲95년 평론가 7인이 선정한 ’95 우수무용작품전 「두례」공연,「서울까치」안무,프랑스순회공연 ▲96년 배명균선생고희기념 배정혜무용발표(정동극장),「우리춤 50년 뿌리찾기」공연
  • 무능하고 용렬한…(송정숙 칼럼)

    아직 소장인 ㄱ신부는 그 형님도 성직에 있다.그는 좀 늦게 신부가 되었기 때문에 분방한 청년기를 보냈다.그래 그런지 그는 신부 같지 않게 재미있는 화술로 좌중을 이끈다.그가 그의 연로하신 노모이야기를 해준 일이 있다.이미 주교의 자리에 오른 지 오래된 당신의 큰아드님이 어머니께 다녀가는 날이면 그분은 문밖까지 배웅하며 똑같은 당부를 하신다고 한다. 평소에는 주교인 아드님을 너무 어려워해서 마주하고 제대로 말도 못하는 어머니신데 배웅할 때만 되면 『…돈조심하고 여자조심하라…』는 당부를 반드시 하시는 것이다.특히 「여자」대목만은 빼놓지 않으시는 것이다.ㄱ신부는 그러는 노모가 못마땅하여 한번 핀잔을 드린 적이 있다.『주의줄 걸 주셔야지 형님한테 돈이니,게다가 여자라니…』 그러나 그 엄격한 주교형님은 그런 아우신부를 말리며 『어머니가 그런 말씀 하실 수 있을 때까지 자식은 그 말씀을 들어드려야 하는 것이 도리니라』고 했다는 것이다.사람이란 직능이 「신의 대리인」에 이르러도 유혹에 약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아는모성의 자애와 아들의 효성이 인상적이다. 두분 모자의 그런 장면을 보며 자신은 여자에게 유혹당하는 일이 가장 부끄러울 일이라고 ㄱ신부는 생각했었다.그런데 그가 성직의 사표로 삼고 있는 그의 스승신부는 그에게 오히려 『제일 조심할 일은 돈』이라고 가르쳤다고 한다.권력·여자·돈의 「3대유혹」중에서 권력의 유혹은 말하자면 일을 잘하려는 욕심일 수도 있다.또 「여자의 유혹」은 『아니할 말로 막판에 신부옷 벗으면 그뿐』이지만 사람이 돈에 더럽혀지면 추하고 구제불능이 되는 것이니 돈의 유혹에만은 빠지지 말라고 가르쳤다는 것.돈이란 금욕의 수도승도 멸망시킬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들게 하는 이야기였다. 웬일인지 노태우씨 비자금비극은 이 이야기를 상기시켰다.처음 TV에 나와 「무릎꿇고」 빌던 노씨는,『얼굴이 사색이 된다』는 말을 실감시켰다.그때 그는 끝나고 만 것같다. 그는 오늘을 사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정상에 이르렀던 사람이다.영광과 명예,그리고 영화까지 골고루 누린 사람이다.그런 그가 파렴치한처럼 되어 밤새워 치욕의 문초를 당하고,지니고 있던 모든 것을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은 뒤 경호원의 무릎에나 얼굴을 파묻었으니 「먹으면 깨어나지 않는」 알약을 생각했을 만하다. 그는 마이더스의 손처럼 돈을 만들었지만 마이더스왕의 비극처럼 그는 수천억원의 돈을 먹을 수도 쓸 수도 없는 돌덩어리로 만들고 끝나버렸다.그리고는 아버지의 죄 때문에 얼굴을 들 수 없는 아들딸을 만들고,공범 의심받는 아내를 만들고 일가친척,사돈의 팔촌까지 고개를 들 수 없게 만들고,고향사람들이 그를 부끄러워하게 만들었다. 온갖 객적은 호기심을 마구 보이는 언론은 그의 수감생활도 신나게 보도했다.수인번호를 합치면 「60(육공)」이 된다느니 아침에는 꽁치조림이랑 밥을 다 먹었고 저녁에는 깍두기를 몇쪽 남겼다느니 하는 식의 「씨잘데없는」 보도를 해대는 것들을 미루어보면 감옥의 그는 입맛을 잃지 않고 있는 것같다.혁명세력에게 유폐된 프랑스왕 루이 16세는 그 수인 같은 생활중에도 잘 요리된 고기를 우아하게 나이프질하여 먹는 일을 즐기는 듯했다고 한다.전기작가 스테판 츠바이크는 그 대목을 아주 냉소적으로 묘사하여 무능하고 용렬했던 그의 모습을 전했다.마리 앙투아네트를 단두대에 보내고도 맛있는 스테이크를 우아하게 즐기던 「무능하고 용렬했던」 루이 16세의 이미지가 노씨에게 겹치는 느낌이다. 온갖 민족적 고난을 극복하고 치열한 근면과 자존심으로 오늘을 이룩해온 우리를 이토록 어이없고 분통터지게 만든 그의 존재를 역사는 왜 마련한 것일까.모든 일에는 뜻이 있는 법인데 겉으로는 안 드러나도 반드시 뜻이 내재하는데 이 일의 뜻은 무엇일까. 이른바 「개발독재」를 선택하고 시행하는 동안 외자에 의한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같은 규모의 내자가 형성되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 기업을 다소 편법으로라도 키워야 했으며 그 과정에 정경유착의 필요악은 발생됐고 그것이 마침내는 질기고 억센 고질이 되어 좀처럼 끊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그 근원을 없애려면 핵폭탄만큼 강력한 폭탄을 던져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는 오염된 분화구를 봉쇄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한 폭탄이 필요했던 것이리라.그렇게 쓸어낸 다음이라야 정치가 경제에게 「단 한푼도 손을 내밀지 않는」 의지도 성취될 수 있고 정당성을 지닌 체제가 지난 시대의 검은 연기를 흡입하는 불건강함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그 폭탄용으로 위력은 거대하면서 「무능하고 용렬한 사람」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전직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박탈할 수 있는 규정이 마련된다고 한다.비록 대통령을 지냈더라도 죄인이 국민의 혈세를 호사스러운 삶에 축내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은 온당하다.그런데도 노씨에게 적용될 이 법이 우리는 통쾌하지 않다.우리 혈세를 써도 좋으니 이렇게 부끄러운 「전직대통령」은 안 생겼으면 좋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 극작가 차범석(이세기의 인물탐구:83)

    ◎리얼리즘 바탕 「정통극 파수꾼」 40년/대표작 「산불」 전쟁의 인간파괴 신랄하게 묘파/부당한 것 거부하는 「연극계 면도칼」로 한평생/최승희 무용보고 「무대 인생」 예감… 이해랑·유치진 문하서 엄격한 수련 희곡작가 차범석은 연극계의 로맨티시스트다.동숭동 마롱카페에 나가보면 젊은 연극인들에게 둘러싸여 그는 맥주를 마시며 연극과 인생을 논하고 있다.「주역만 있고 조연 없는 연극은 있을 수 없다.우리의 삶은 큰 배역만 탐내는 한편의 연극 같이 보이지만 작은 배역 없이 큰연극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파우스트보다 메피스토 텔레스가 진짜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역이듯이 무대 구석구석에 세워둔 단역조역들의 몫에서 극중 희열과 비감,완미가 성취된다.무릇 물이 얕으면 큰배를 띄울 수 없는 것과 같이 깊고 다양한 여러 경험이 크고 광활한 연기력을 키운다」고 후배들을 가르친다. 한배우가 무대에 등장했다가 맡은바 임무를 다하고 퇴장하기까지 그것은 하나의 삶을 생생하게 되살리는 일이다.그런만큼 배우는 등장도 중요하지만 퇴장도 중요하다.막을 내리기가 무섭게 분장을 지우고 무대를 떠나는 사람을 보면 「자기포기와 무책임」이 느껴지지만 연기의 온기를 오래도록 가슴에 담는 배우의 모습에선 「비장미가 넘친다」고 찬양해 마지않는다. 그가 63년부터 20년이나 이끌던 극단산하를 해체한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연극을 지상목표로 삼으려는 의지는 눈비비고도 찾아볼 수 없이 연기를 가르쳐 무대에 설만하면 그들은 철새처럼 돈을 따라 텔레비전으로 가버린다」고 했다.「연극은 집단예술인만큼 인간적인 결합 없이는 아무런 작업도 가능하지 않다.그럼에도 정신적인 반항이 없는 정지된 예술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껍질을 깨는 아픔을 모르는 젊은이들이 환멸스럽다」고 그는 한 글에서 개탄하고 있다.이어서 「기대할 수 없는 것에 얽매어 질척대는 것은 자기비하이자 존재를 흩트리는 추일 수 밖에 없으며」「부나비처럼 떠도는 인간불신풍조속에서 나만이 홀로 절개와 의리를 지키는 것은 명분 없다」고 절규했다. 적자를 면치못하는 극단의 영세한 상황속에서도 「산불」「밀주」「대리인」「손탁호텔」등 알찬 창작극으로 꾸준히 「좋은 무대」를 이끌던 산하는 「연기자의 연극정신부재」「저질공연우려」등을 내세워 83년 연극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미련과 아쉬움을 남긴채 이렇게 무대에서 사라져갔다. 칠순의 나이와는 상관 없이 언제나 만년청년 같은 그는 옛 예술가의 낭만과 니힐과 반항과 순수를 지금도 면면히 지니고 있다.그가 「한달이면 29일」을 술을 마시는 이유는 사람들과의 따사로운 온정에 굶주려 「정을 마시기 위해 술잔을 든다」는 것이며 인생의 어둡고 뒤틀린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은 「긍정에의 동경이 너무 강한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 40년간 「연극계의 면도칼」로 불리면서 그는 과연 부당한 것을 굳이 옳다고 양비론을 펼치거나 불가능한 것을 가능할 수 있다고 과장한 적이 없다.연극상을 심사하는 과정에서도 무의미한 공연기록과 긴 연륜을 앞세우기보다 작품의 질과 연기력을 따져 날카롭게 자격여부를 가려낸다.또한 스스로의 조로를 경멸하여 연극의 모든 일에 은근히 참여하고 옳바른 소리를 주저 없이 하면서도 「번뜩이는 재기나 교변」 사물에 대한 심정의 움직임에서 세말적인 기미대신 싱그러운 미소로 만사를 감싸기 때문에,각층의 폭넓은 호감을 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극단산하를 잃은후 그는 한국연극협회 이사장,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사,대한민국예술원회원과 청주대 예술대학장등 여러 역할을 전전했다.86년에는 88올림픽을 앞둔 88서울예술단 초대단장에 임명되었으나 이번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창단기념 시연회에서 공연을 관람하던 관련장관이 코를 골고 잔 것에 자존심을 심하게 상한 나머지 사표를 내던진 씁쓸한 에피소드를 남기고 있다. 시간과 함께 그의 까다로운 일면은 전보다 많이 부드러워졌고 반항과 증오와 충동에서 시작한 초기의 경험을 버리고 「삶이란 양파를 벗겨내듯 아무리 벗겨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는 서서히 깨닫게 되었나보다.그 때부터 톡쏘는 옳은 소리를 줄이고 자신을 스스로 경계하는 계신공구의 자세로 전환했다. 그의 지나온 인생은 평온한 중에 끝 없는 파고가 잔물결처럼 파동치는 것이 남과 다르다. 목포의 개화되고 풍족한 집안에서 일본 메이지대(명치대) 법학과를 나온 차남진씨의 3남3녀중 차남. 남부러울 것 없는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내면서 집안의 서고에 파묻혀 아리시마 다케오(유도무낭) 무샤노코지 사네아쓰(무자소로 실독)의 소설에 탐닉하고 일본 히메지(희로)고교에 시험을 보러갔다가 낙방하고 돌아오는 길에도 후지자와 다케오(등택)의 「신설」을 가슴에 품을 만큼 열렬한 문학지망생의 시기를 보냈다.어릴 때의 아명은 평균.광주고보시절 목포 평화극장에서 열린 최승희무용공연을 보고 「정중동의 미세한 움직임과 끊어질듯 이어지고 멈춘듯 움직이는 유현미와 고담미」에 반해 그는 훗날 「무대」와 관련을 갖게 되리라는 예감을 굳혔다. 그는 철저한 리얼리스트이기도 하다. 뒤늦게 23세에 대학에 진학해서 문자그대로 「경마장의 말처럼 정해진 코스를 필사적으로 달리면서」 엄격한 스승인 이해랑 유치진문하에서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 정통극」을 추구하기 시작했고 연극계는 언제부턴가 「리얼리즘의 희곡작가」 또는 「리얼리즘의 파수꾼」으로 그를 부르게 되었다. 「나름대로 나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치열하게 몸부림쳐왔다.나라는 인간은 일관성도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아온 모순덩어리라는 생각 때문이다.그 증거로 나의 인생행로에는 투쟁이나 저항의 흔적이 없다.적극적인 동참이나 협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그렇다면 나는 뭐란 말인가」.그러나 평론가 유민영은 「그의 작품은 투철한 역사의식으로 구시대의 붕괴와 전후의 사회변화,변천하는 사회속에 갈등하는 개인의 삶을 끈질기게 묘파」하고 있고 특히 대표작 「산불」은 「전쟁이 얼마나 철저하게 인간을 파멸시키는 가를 미사여구나 기교 없이 신랄하게 파고든 리얼리즘 희곡의 최고봉」으로 손꼽고 있다. 지난해 출판한 고희기념문집 「목포행 완행열차의 추억」에서 그는 「지금까지 나는 대과 없이 살았고 욕심부리지 않았고 하고싶은 일과 가고싶은 길을 지칠줄 모르고 살았으니 행복하다」고 고백하고 있다.영원한 동반자인 박옥순여사와의 사이엔 3남2녀.자녀는 모두 출가하고 송파구 가락극동아파트에서 부부가 노후를 함께 하고 있다. 언제나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소시민」을 자처하고 있지만 실은 서릿발 같은 차가운 이성을 정으로 융해시킨 처절한 삶의 애가와 뜨거운 인간애의 정수를 이룩했다는 점에서 그의 존재는 참으로 「큰배우」의 역할이 아닐 수 없다.이제 그의 퇴장은 「한편의 좋은 작품」을 남기는 일이며 연극계가 그를 두고 「이시대 마지막 휴머니스트」라고 한 말대로 그는 지금도 동숭동 마롱카페에 앉아 「배우가 되기전 먼저 인간이 될 것」을 젊은 연극인들에게 당부하며 그의 「정」을 높이 치켜들고 있다. □연보 ▲1924년 전남 목포 출생 ▲1942년 광주고보 졸업후 도일 ▲1946년 연희전문 문과 입학 ▲1949년 제1회 전국대학연극경연대회 희랍극 「오이디푸스왕」연 출 수상 ▲1951년 처녀작 「별은 밤마다」 공연(목포문화협회 주최)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밀주」당선,제작극회 창단 ▲1961∼71년 문화방송 제작부장·편성부국장 역임 ▲1962년 「산불」 초연(국립극단) ▲1963∼83년 극단 「산하」대표 ▲1965년 이대·연대 출강 ▲1966년 연세대 영문과졸업,국제PEN대회 뉴욕회의 참가 ▲1968∼74년 한국연극협회이사장 ▲1969년 신연극 60주년기념 「그래도 막은 오른다」 공연 ▲1972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사 ▲1973년 예총부회장 ▲1975년 ITI베를린회의 참가 ▲1978년 ITI한국본부 부위원장,대한민국연극제 심사위원 ▲1981년 대한민국예술원 정회원 ▲1983년 서울극작가그룹 발족,회장 ▲1984∼86년 청주예술대학장 ▲1986년 서울88예술단장 ▲1988년 청주대 교수협의회회장 ▲1991년 「연극의 해」집행위원장 대한민국 예술원회원·한국연극협회이사·공연윤리위 심의이원 희곡집 「껍질이 째지는 아픔없이는」「대리인」「산불」「학이여 사랑일레라」「식민지의 아침」,수필집 「거부하는 몸짓으로 사랑했노라」,고희기념문집 「목포행 완행열차의 추억」,차범석문학전집(12권·융성출판)등 대한민국 문화예술상(70)·대한민국 예술원상(82)·동랑연극상(83)·대한민국 문학상(91)·이해랑연극상(93)
  • 한국화가 산정 서세옥(이세기의 인물탐구:79)

    ◎스스럼없이 화필 휘젓는 큰 예인/작품마다 영혼이 움직이듯 팽팽한 긴장감/화려한 채색 거부… 발묵·석묵법 자재로이/77년 「한국현대회화 유럽전」때 “동양문화의 진수” 보여 산정의 성북동 무송재는 지금 녹음이 한창이다.큰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벌써 그 짙푸른 녹색으로 인해 집안은 유현한 산곡과도 같다.안채로 통하는 디딤돌 외에 새파란 이끼가 휘덮인 마당은 모든 것이 푸른 가운데 허공에 우러른 첨단에마저 서슬 푸른 냉기가 감돈다.「일편연홍난입문,한조각의 붉은 빛도 문안에 들어올 수 없다」는 산정의 말대로 영롱산관 죽리관 수죽원하관 창하헌 등 그의 당호들은 집안에 넘치는 푸른색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화실 창앞에 쭉쭉 뻗어 있는 청청하고 곧고 차가운 대나무며 지금 막 피기 시작한 보랏빛 추국에 이르기까지 추호의 시든 빛을 보이지 않는 영롱한 환경은 서울 한복판이건만 실로 아득한 선경인 듯 감탄스럽기만하다.여기에 손님을 접대하는 응접실과 한옥중의 한채에 온통 중국고서적이 산적해 있어 그의 방대한 독서량이 얼마만한것인가를 미루어볼 수 있다. 그는 성북동 전에는 노송으로 우거진 월곡동에 살다가 대학때의 스승인 근원 김용준을 그리워하여 지금부터 20여년전 스승의 노시산방이 있는 이곳에 한옥을 지어 이사했다. ○회화예술 변혁 앞장 산정은 널리 알려지다시피 서시문화를 두루 갖추고 상식에 안주하려는 회화예술에 변혁과 개혁의 화업을 이뤄낸 동양화 대가다.초기에는 범속과 권위와 형식에 대한 강렬한 저항정신을 앞세워 「고루협애가 없는 방종자일한 표현」으로 개혁의지의 향방을 모색하다가 차츰 「감각의 해방을 원점으 로 되돌린 절제화면」을 이룩하면서 남보다 일찍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평론가 이경성씨는 그의 첫번째 전시 팸플릿에서 그와 같은 유사성을 「명대의 서위나 청초의 석도」에 비유하고 오광수 역시 「수묵화를 감필묘법으로 구사한다는 차원에서 남송의 양해나 선화파의 목계의 화격」에 닿아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에 비해 정병관씨는 「모든 진실한 작품은 침착하다」는 칸딘스키의 말을 인용하여 『산정의 작품은 무한을 생각케 하는활짝 트인 화면공간속에서 「숭고한 형이상학적인 회화」를 구축하고 있다』고 결론짓는다.과연 그리지 않으면서 그리는 상태,말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듯하고 표현하지 않으면서 표현하려는 자기모순을 함축한 그의 작품은 「그 형식과 내용면에서 영혼이 움직이는 듯한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89년 개인전에서 선보인 「군무」「사람들」시리즈는 「붓으로 그렸다기보다는 붓을 던졌다는 표현이 더욱 옳다」는 정병관씨의 평에 많은 사람이 공감한 바 있다.즉 「붓의 전진하는 속도감과 상하로 누르고 떼는 강약의 압력은 낭만적인 금선의 무쌍한 변화」와도 같으며 「발묵과 석묵법의 자재로운 움직임」은 바로 산정 그림의 즉흥성과 필연성이기 때문이다.따라서 산정은 「스스럼없이 필력을 구사할 줄 아는 이 시대 재능이 뛰어난 예인」으로서 「흉중의 고고특절한 품성 없이는 문자향과 서권기를 지니지 못한다」는 추사의 지론을 실천시킨 화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20세때 뒤늦게 입문 그가 화단에 등단한 것은 아직 대학재학중이던 20세였으나 뒤늦게 45세되던 해 서울 첫 개인전을 열 때까지만 해도 그의 그림에는 일정한 채색과 반추상의 형태가 깃들여 있었다.그러나 산정 자신은 「분명히 말해두지만 나는 메마른 구각이나 비좁은 질곡은 싫다」고 천명했고 이후 채색이 없는 검정색의 선묘형상들은 그 기호적인 성격과 힘과 자발성을 채색의 경우보다 한층 강하게 나타내게 되었다. 그는 우리 화단에서 그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언제나 커다란 구심점을 긋고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오늘날 수많은 미술대전에서 동양화가 구상·비구상으로 나눠지게 된 것도 단순히 이 작가의 작용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화단에서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후 산정은 유럽쪽에 눈을 돌려 수많은 해외전에서 한국회화의 독자성을 인정받았다.그중 77년 9개월에 걸친 「한국 현대회화 유럽전」에서는 현지 신문들이 「서세옥의 추상적인 묵화들은 동양화라 일컬어지는 한국 전통미술의 현대적 전모를 집약함으로써 서양인에게 동양문화의 진미를 보여주었다」(르피가로 78년6월28일자)고 쓰기도했다. ○올 11월 개인전 열어 그는 어릴 때부터 수많은 고서화가 있는 집안환경에서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리며 자라났다.독립운동을 하던 부친 서장환(석련)공은 세 아들중 일총한 산정을 특히 총애하여 「성동」이란 아호를 내려주었으나 대학시절 영운(김용진) 춘곡(고희동) 소전(소전 손재형)등 그의 스승들이 「세옥」의 옥자와 관련된 「옥출곤강(금과 옥돌은 산에서 캔다)」이란 의미의 「산정」을 지어주었다. 지난해 서울대 정년퇴임후 산정은 무송재 녹음속에 파묻혀 그의 전생애가 그렇게 일관해왔듯이 자유하는 예술가로서의 절제와 생략과 탈속의 묘를 구체화하는 시기일 것이다. 그의 테마는 여전히 인간에 집착한다.세월도 서릿발 같은 그의 의지를 피해가는지 언제나 만년청년 같은 그는 「적진에 뛰어들어 호랑이나 사자를 사로잡듯」 우주의 올바른 기운을 수백호 화면속에 역동적으로 되살려내고 있다. 요즘은 오는 11월로 잡힌 개인전과 그가 발족한 한·중미술협회의 요청으로 그동안 써온 한시를 친필서예로 꾸미는 「산정문집」 출간준비에여념이 없다.그중 연전에 중국 양자강을 둘러보며 지었다는 「단현」이 눈에 띈다. 「비지양현회 농현감금심 고산류수곡 적막실지음 석현호불기 천재거무회 수주아양곡 공류일금대(이땅의 두 현인이 만나 거문고로 서로 마음을 느끼니 이는 고산곡과 유수곡이라,지음이 없으니 적막하구나.옛 현인 불러도 일어나지 않고 천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니 누가 고산 유수곡을 연주할 것인가,속절없이 거문고 튕기던 언덕만 남았구나)」이는 중국 춘추시대의 거문고 명인이던 백아가 그의 거문고소리를 좋아하던 종자기가 죽자 거문고 현을 끊어버린 일화를 그린 시로 그들이 거문고를 타던 양자강가에 서자 이런 시를 읊게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3∼4년전까지만해도 송죽 우거진 뜰에서 산정은 가까운 이들을 모아 거문고며 가야금연주를 즐기곤 했다.그러나 명고수 김명환씨가 4년전 작고하고 단골손님이던 언론인 예용해씨마저 지난해 타계하자 화가는 혼자 남아 그때의 감흥을 한편의 시와 한점 획(화)으로 남기게 됐나보다. 이제 산정댁의 대나무가 그 놀라운 푸른빛을 뻗치고 소나무향이 온산을 뒤덮어도 이 풍치를 음미할 만한 유장한 현금은 울려지지 않는다.단지 우거진 나뭇닢이 단 한 잎도 시든 기색 없이 싱싱한 생명력을 지니는 것처럼 시들 줄 모르는 산정의 붓끝은 그 탁발한 금선의 선율로 「청청속의 노주」를 결국 성취하게 될 것이다. □연보 ▲19 29년 대구생 ▲49년 제1회 국전서 「꽃장수」로 국무총리상 수상 ▲50년 서울대 미대 졸업 ▲54년 제3회 국전서 「휘월의 장」으로 문교부장관상 수상 ▲54∼95년 서울대 미대 교수 ▲59년 묵림회 창립대표위원 ▲61∼82년 국전 심사위원·운영위원 ▲62년이후 상파울루비엔날레 칸국제회화제 이탈리아회화제 인도트리엔날레 도쿄비엔날레 파리현대미전 등 출품 ▲64년 국제조형예술(IAA) 한국위원회위원장,신인예술상 심사위원장 ▲64∼88년 한국미협이사장·회장 ▲66∼71년 유럽·남북미 34개국 여행,한국현대미술 프랑스순회전 ▲70년 국전 초대작가상,한국미술대상전 심사위원 ▲73년 예총부회장 ▲74년 서세옥전(현대화랑초대전) ▲77∼78년 한국현대 동양화유럽순회전,스웨덴 폴란드 독일 프랑스 ▲79년 서세옥전(도쿄 우에다화랑 초대) ▲82∼85년 서울대 미대학장 ▲83년 서세옥전(뉴욕 퍼시픽아시아박물관초대),전국미대협의회회장 ▲85년 서세옥특별전(뉴욕 바로카레지미술관 초대) ▲89년 서세옥전(현대화랑 초대),뤼턴오브 마르코폴로전(프랑스 파리) ▲90년 한국작가전(중국 북경),한·중미술협회 결성 ▲91년 한·중미술대전(중국 북경)이후 서울·남경·상해 등지서 교류전시 그외 한국회화대전및 아세아현대미술전 한국미술상황전 LA87미술전 조선일보미술관개관기념 현대작가초대전 서울올림픽아트 국제현대미술전 등 다수 출품,국민훈장석류장 서울시문화상 한·중미술협회회장,미협고문
  • 1월의 문화인물/표암 강세황 선생/서화가로 단원 김홍도의 스승

    ◎학술강연회·유고집 발간 등 기념행사 문화체육부는 조선 시대의 서화가이자 문신인 표암(작암)강세황선생을 95년 1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했다. 시·서·화의 삼절로 일컬어지는 강세황(1713∼1791)선생은 기예를 겸비한 사대부 서화가로서 창작과 화평을 통해 18세기 우리나라 화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서화에 뛰어나 1784년(정조 8년)천추부사로 북경에 갔을 때 그의 서화를 구하려는 청나라 사람이 많았다고 전해 온다. 중국의 화론·서법·예술론을 수용하고 배우면서도 우리 실정에 맞게 지도하고 권장해 한국적인 남종 문인화풍이 자리잡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림으로 산수 사군자와 서체로 전서 예서에 뛰어났던 선생은 단원 김홍도를 제자로 두었다. 저서에 「표암유고」,그림에는 벽오청서도,송도기행첩,사군자병풍 등이 있다. 문체부를 비롯한 관련단체는 선생을 기리는 학술강연회,유고집 발간 등 다양한 기념행사를 마련한다.
  • 소리 안나게 목표 이루는 「외유내강형」/내가 아는 이홍구총리

    ◎누구와도 대화할수 있는 친화력 소유/교수로 재직땐 “합리적인 스승” 평들어 이홍구 신임 국무총리를 잘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가 『결점이 없는 사람』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이신임총리의 친구나 동문,함께 일했던 동료,제자들은 『요란한 소리를 내지 않지만 목표한 바는 반드시 성취하는 전형적인 외유내강 형의 인물』이라고 그를 소개했다. 이총리와는 40년 지기인 이세중대한변호사협회장은 『중·고교시절 그는 정규 배구선수로 활동하면서도 학업성적은 항상 상위권을 유지했다』고 기억하면서 『남에게 부담스러운 행동은 결코 하지않는 성격』이라고 말했다.이회장은 『흔히 학자출신이 전공분야에만 편중된 지식을 갖는 경우가 있는데 이총리는 전공이 아닌 다른 분야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면서 『그런 장점 때문에 그가 행정부에 몸담고 있는 동안 폭넓은 시야로 균형과 조화를 유지하면서 행정수완을 발휘했다』고 말했다.이회장은 특히 『모든 사람에게 온화하고 편안한 인상을 주며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는 친화력이 그의 장기』라면서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고 해이된 공무원 조직의 기강을 바로 세우며 산업과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어 세계화의 흐름을 읽는데 능력이 발휘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총리의 경기고 2년 후배로 경기고 총동창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민자당의 정재문의원은 『가정에서나 학계에서,그리고 동문 관계에서도 가장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라면서 『정치학자,통일원장관,대통령 특보,주영대사등 행정경험을 두루 쌓아 세계화시대의 총리로서 손색이 없다』고 말했다. 정의원은 『문민정부 출범 뒤에도 대통령이 그를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회 수석부의장과 통일부총리로 잇따라 임명한 것은 두터운 신임 속에서 총리수업을 시킨 것으로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총리를 통일원장관으로 보필했던 정대규 통일원 정보분석실장은 『겉으로는 서생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추진력이 대단한 분』이라고 말했다.정실장은 『외모는 부드럽고 온화해 보이지만 결코 유약한 스타일이 아니다』면서 『직원들을 다그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알아서 일하도록 만들고한번도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정실장은 『이총리는 통일원장관 재직시절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를 통해서 통일원이 입안했던 정책들을 거의 대부분 정부의 정책으로 추진해왔다』고 평가 했다. 이총리가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80년대 초반 정치철학등의 강의를 받았던 한 제자는 『당시 이교수는 학생들이 다소 무리가 있는 질문을 하더라도 끝까지 경청한뒤 답변을 하곤 했다』고 기억을 돌이킨뒤 『학생들 사이에서 합리적인 분으로 평가됐다』고 전했다.그는 그러나 『이총리가 학계와 관계를 두루 거치면서도 거의 적을 만들지 않았던 것은 뚜렷한 색깔이나 소신없이 자기관리에만 신경써 왔다는 측면도 있다』고 지적하면서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하는 그가 어려운 시기에 어떻게 복지부동하는 공무원들을 이끌고 총리의 임무를 수행해 나갈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 조훈현 세계바둑대회 사이클링 제패

    ◎「월간바둑」 올해 바둑계 10대뉴스 1위/2위엔 한국기원의 홍익동시대 개막 뽑아/이창호 국내 16개 전타이틀정복 완료 3위 조훈현 9단의 세계바둑대회 완전 석권이 올 바둑계 「톱뉴스」로 선정됐다. 올 바둑계에는 그 어느 해보다 굵직한 뉴스가 풍성했던 한해.그 가운데서도 한국바둑이 「국제기전 2연패」의 위업을 달성하는데 독보적인 역할을 해낸 조9단의 활약은 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이었다.한국기원과 월간바둑이 선정한 올해 「바둑계 10대뉴스」를 통해 올 한해 바둑계를 되돌아 본다. 1.조훈현,세계바둑 사이클링히트=조9단은 지난 89년 제1회 응씨배에 이어 올해 제5회 동양증권배,제7회 후지쓰(부사통)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 마저 석권,전 국제대회를 한차례이상 차지하는 사상초유의 위업을 달성했다. 2.한국기원 홍익동시대 개막=한국기원은 지난 26년간 바둑계의 본산으로 자리해온 관철동시대를 마감하고 홍익동 4층 건물로 이전,새시대의 막을 올렸다. 3.이창호,국내기전 사이클링히트=이7단은 지난 3월 스승인 조훈현9단을 물리치고 패왕의자리에 처음 오른데 이어 4월 기왕전에서도 조9단을 꺾고 13관왕 등극과 함께 국내 16개 모든 기전을 한차례 이상 차지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4.서봉수,국내통산 1천승위업=서9단은 지난달말 제29기 왕위전 본선리그에서 장수영 9단을 불계로 물리치고 국내기사로는 최초로 대망의 1천승 고지에 올랐다.이는 일본의 사카다(판전영남)9단(1천1백1승)과 임해봉9단(1천7승)에 이은 세계 세번째기록이다. 5.조치훈,일본 1인자 복귀=조9단은 지난 3월 숙적 고바야시(소림광일)9단을 꺾고 8년만에 일본 랭킹1위 기전인 기성을 탈환한데 이어 3,6위 기전인 본인방과 왕좌도 차지,3관왕에 오르며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6.한·중 교류시대개막=한국과 중국은 롯데배 한·중바둑대항전과 한·중 신예바둑대항전을 공동 창설,동반자시대를 열며 한국 중심의 세계바둑계 형성에 첫발을 내디뎠다. 7.윤영선,여류바둑제패=윤초단은 지난 1월 EBS배에 이어 3월 제1기 프로여류국수전도 우승,여류바둑계를 완전 석권했다. 8.프로·아마,2점 접바둑=지난달초 마감된 프로·아마대항전 치수고치기에서 아마측은 총전적 3승7패를 기록,2점 접바둑으로 치수가 최종 결정됐다. 9.중견기사 분발=임선근 8단과 최규병 7단은 명인전과 박카스배의 도전권을 획득,우승을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바둑층이 한결 두터워졌음을 입증했다. 10.박성균,아마2관왕=박성균 아마7단은 제28회 아마국수전 우승에 이어 제21회 학초배쟁탈 전국아마최강자전마저 차지,아마 최강의 자리에 올랐다.
  • 바른길을 걷자/노영현 한국물가정보 회장(굄돌)

    최근 우리사회에서 잇따라 벌어지는 사건·사고의 근본원인은 어디에 있는가를 국민 누구나 한번쯤 깊이 생각해 봤을 것이다.식민시대의 상처가 아물 겨를도 없이 숨가쁘게 성장,개발에 매달려온 우리는 얻은 것 이상으로 더 많은 것을 잃은채,아니 잃은 것도 미처 깨닫지 못한채 오늘을 살고 있다. 한국인 특유의 느긋함과 고귀한 품성은 어디로 가고,각박하고 살벌하며 초조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가.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지름길을 너무 선호하게 되었다.「나만 잘 되고,잘 살면 그만이지 과정은 무시돼도 좋다」는 이기주의로 가득 차 있다. 「지름길이란,때로는 잘못된 길일 수도 있다」는 서양속담을 들추지 않더라도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인륜도덕에 이르기까지 정도를 벗어난 서두름이 얼마나 많은 부작용을 잉태하고 사회를 왜곡시켜 왔는지를 수없이 보아왔다. 남산 외인아파트도 헐렸고 옛 조선총독부건물(국립중앙박물관)도 내년에 헐린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속에 알게 모르게 쌓이고 엉겨붙은 묵은 때는 긁어낼 수도,건물처럼 헐어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이제 시간이 아무리 걸리더라도 조급하게 서둘지 말고 잘못된 부분은 과감하게 근본적으로 고쳐 나가자. 정부는 국민이 공감할 수 있도록 정책개발에 힘쓰고 국민교육 차원에서 교육투자를 늘려 나가고,국민은 나 보다는 공동체의식으로 의식개혁에 앞장서는 노력을 전개할 때다.자식이 부모를,제자가 스승을 구타하는 가치관의 전도현상이 다시는 이땅에서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조금은 더디고 고지식해 보여도 바른 길을 걷자.이 길만이 우리의 본 모습을 찾는 길인 것이다.
  • 청산돼야할 구시대 유물(사설)

    「주사파」라는 암세포의 전이상태가 의외로 심각하다는 것을 또다시 일깨워준다.고교생들을 선동하는 친북 잡지사가 적발된데 이어 이번에는 고교생들을 상대로 주사와 반미를 학습시키고 각종 시위현장에 극렬행동대원으로 활용해온 조직이 적발되었다. 우리의 고교생들은 호기심이 강하고 흡수력이 민감한 그 세대의 특성과 함께 진학압박에 억눌린 매우 독특한 집단이다.그들을 상대로 고도로 훈련된 조직이 접근하면 백발백중 빠져들 게 분명하다.그런데도 간헐적으로 「걸려드는」 소물들만 겨우 검거하는 것이 우리 현실인 듯하다.그러나 이제는 그것만으로는 안된다.어느 분야 어느 부위에 주사균과 암세포의 침윤과 전이가 얼마나 되었는지를 알아내어 과감히 절제하는 일이 시급해졌다. 창궐하는 속도보다 너무 뒤처진 단속으로 주사파에 대한 내성만 강해지고 급기야는 불감증적 현상까지 만연한 것이 현실이어서 고교생들까지 어처구니없는 이념의 올가미에 걸리게 된 것이다.다행히 사회전반의 분위기와 인식이 부분적으로나마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합의를 보이고 있는 것은 천만 다행한 일이다.수업거부가 찬반여부를 묻는 투표에서 부결된 전국 교육대학생들의 경우나 파업 무기만을 전횡하는 노조집행부에 반대하여 차별되기를 원하는 노조원들의 확산 따위가,의식의 건강회복을 위한 기미로 보이는 것이다.이런 계제를 살려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를 돌이킬 수 없도록 피폐화하고 그럼으로써 주사파의 침투경로를 제공해주어온 모든 불법 시위행태를 엄격하게 다스리고 바로잡는 일대작업을 벌여야 한다.그런 뜻에서 우리는 서강대의 「총장 비난 대자보」에 대한 징계회부 논의를 예의 주시한다. 학칙과 법률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스승과 제자 사이,학교와 학생 사이에 있어야할 도의적 의무와 책임에 대해서도 분명한 태도를 회복하는 본격적인 반성의 기회가 마련되어야 한다.특히 운동권의 중심이 되어온 구시대유물의 「대자보문화」 폐해에 대해서는 일대 반성의 청산작업이 있어야 할 것이다.집단의 정명성 뒤에 숨어 무책임하게 행사해온 그 문자의 폭력이 끼친 폐해는 민주화시대의 기여를 무산시킬만큼 심각하다.아무 거증도 하지 않으면서 인신공격과 무고를 하고 흠집을 내는 일을 거듭해오는 동안 체질까지 변질된 젊은이들도 적지 않다. 이런 은닉매체들의 정당하지 못한 역할이 우리에게는 이제 필요없다.그 낡은 무기들이 여기저기서 여전히 흉기노릇을 하는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서강대의 대자보 징계논의는 그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정정당당한 것 이외의 어떤것도 용인하지 않는 것이 건강한 사회를 회복하는 길이다.
  • 유교문화의 영향(백제를 다시본다:26)

    ◎고이왕때 경학사상 바탕 관제 정비/6좌평 16관계는 주례·예기 모델로/4세기엔 경학박사 배출… 일에 파견/성왕땐 태학교육 확충… 졸업생 대부분 관직에 등용 백제의 사상은 유교문화가 근간을 이루었다.이는 백제불교가 계율불교로 자리잡는데도 유교의 영향력이 컸다는 사실에서 발견된다.백제유교의 시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물론 원시유교와도 부딪치지만,북방으로부터 남하한 백제건국 집단과 직결된다.이들 건국집단은 대륙의 선진학술을 수용,경학론이에 입각한 백제유교를 펼치기 시작했다. 백제는 한성시대부터 이미 한대의 경학을 받아들였다.한의 경학을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까닭은 한의 군현이었던 낙낭·대방과 가까이 인접한 지리적 여건 때문이었다.그래서 백제사상은 고조선 이후 전승되어 온 원시유교적 본질과 한대의 경향을 기본으로 틀을 잡아나갔다.이러한 경학사상을 국가사회의 문물제도에 접목시켰다.우리는 여기서 유교가 도교나 불교 보다 먼저 사상적으로 백제를 선점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유교의 영향은 백제초기인 3세기경 국가제도정비에 우선 나타난다.백제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어느 정도 갖춘 것으로 보는 고이왕(AD 234∼286년)때의 중앙관제 제정이 그것이다.고이왕은 중앙관제를 6좌평 16관계로 제정했는데,이는 「주례」의 육관제와 거의 같은 것이다.공복제도를 갖춘 것도 이 시기에 해당한다.그리고 고이왕은 남당에서 정사를 보았다.「예기」명당편에 나오는 남당은 군주가 신하들과 이야기하고 정사를 말하는 장소로 기록되어 있다. ○사회예속에도 영향 유교사상에 의해 국가제도가 정립된 것처럼 일반사회의 예속 또한 유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잘 알려진 바와 같이 유교는 인간도덕성을 매우 중시하면서 예의를 숭상했다.특히 원시유교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예의사상은 백제에까지 면면히 이어졌다.중국의 사서 「주서」백제조는 이를 소상히 설명하고 있다.「백제는 의복이 고구려와 비슷하였다.절을 하는 예는 두손으로 땅을 짚고 공경하는 뜻을 표했다.혼례는 중국 풍속과 거의 같았고,부모와 지아비의 상에는 3년동안 복상했다」는 것이다. 백제가 체제를 굳건히 다지면서 강력한 통제력을 확대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유고사상이 깔려있다.국민을 복종케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술과도 직결된 유교사상은 학술의 발전을 가져왔다.4세기경 백제를 중흥시키는데 공헌한 근초고왕(AD 346∼375년)은 박사 고흥으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케했다.그 사서는 바로 「서기」다.국가 중흥기에 국사로서의 정사를 편찬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인동시에 통치차원에서도 필수적인 국가사업이었을 것이다. 백제가 학문을 중시한 흔적은 「주서」이역전에도 나온다.「풍속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기고 경서와 사서를 좋아했는데,그중에 뛰어난 이는 한문을 읽어 글을 지었다」고 기술했다.또 백제는 중국으로부터 모시박사와 강례박사를 데려왔다는 기사도 보인다.여기 나오는 박사들은 중국에서 초빙한 학자를 가리킨다.그러나 백제에도 일찍이 박사가 있었다는 사실은 앞서 말한 근초고왕때 국사를 편찬한 박사 고흥의 존재를 통해 분명히 파악된다. 우리는 고흥이라는 인물의 백제박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그 이유는 근초고왕 즉위 뒤에 중흥의 시대를 맞은 백제는 중국에서 처럼 관학의 기초를 마련하고 전문학자를 양성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이 분야를 연구한 어떤 학자는 근초고왕 26년(AD 371년)에 고구려를 크게 무찌른 백제가 한산으로 천도한지 얼마 안되어 학교를 창설했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한다.고구려가 세운 태학의 충격을 받아 동진의 태학제도를 청사진으로 그리고 이 학교에서 경학을 전수받고 처음 박사로 임명된 케이스가 고흥이라는 것이다. 우리 역사기록에는 없지만 일본 사서에는 또 다른 백제의 박사가 등장한다.근초고왕 재위연간에 해당하는 시기에 일본에 간 박사 왕인이 그 사람이다.근초고왕의 왕명을 받들어 일본에 갔다가 돌아온 아직기의 추천으로 「논어」10권과 「천자문」1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간 왕인은 일본왕의 태자 도도차랑자의 스승이 되었다.또 경서에 통탈한 그는 왕자 이외에 군신들에게도 경사를 가르쳤다는 것이다. ○왕인,일왕자 교육 일본의 사서 「고사기」는 왕인의 이름을 화이로,「일본서기」는 왕인으로 적고 있다.화이나 왕인은일본식 발음으로 다 같은 「와니」(Wani)라는 점을 고려하면 한자이름의 표기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그리고 「고사기」에는 백제 근초고왕 때 사람으로 되어있으나,「일본서기」는 아신왕 말년쯤에 일본으로 건너온 것 처럼 기록했다.30∼40년의 차이는 발견되지만 왕인이 일본에 유교를 전파한 스승임에는 틀림이 없다.백제는 AD 475년 날로 세력을 확장한 고구려의 핍박속에 웅진(공주)으로 남천하기에 이른다.이어 백제의 중흥대업을 꾀한 성왕(AD 523∼554년)은 도읍을 사비로 옮기면서 여러 제도를 정리,개정했다.내관 12부,외관 10부로 구성된 22부나 22첨노제가 그것이다.이들 관제는 10간12지와 오행사상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백제의 중앙집권체제는 도읍을 사비로 옮긴 뒤에 완비되었다.이와 더불어 성왕은 무령왕이 웅진시대에 중국에 남량의 제도를 본떠 학교를 확충하고 오경박사를 둔 전통을 이어받아 이를 더욱 강화했다.그래서 성왕 때 들어와서는 전경전사가 비로소 등장하거니와,경학교육을 전담한 종래의태학교육은 신설된 22부의 하나인 사도부가 담당하게된다. ○실용교육도 병행 이 사비시대는 유교주의교육이 상당한 성과를 거둔 시기이기 도 하다.특히 상류계층은 태학에서 정규교육을 받아 학문의 수준이 상당히 높았을 것이다.따라서 이들은 주요관직에 등용되었다.중국의 군현제와 흡사한 첨노의 지방장관은 모두 상류층 자제로 충원했다는 기록이 「양서」백제전에 나온다.백제가 교육의 백년대계를 위해 4세기 후반에 창설한 태학교육이 6세기에 만개한 것으로 보면 옳다. 오경박사나 전경박사로 불리는 학관 말고도 전업박사가 나타나는 것도 이때다.전업박사의 존재는 AD 553년(성왕 31년)「백제가 왜국의 요청에 따라 다음해에 의,역,역등의 박사를 일본에 보내주었다」는 「일본서기」기록에서 드러나고 있다.백제는 경학 위주의 관학성격의 교육을 실용교육과 병행하는 방법으로 발전시켰다.따라서 6세기 후반 백제의 교육은 의학을 포함한 여러 전문분야로 확대된다.이는 전통경학이 사회전반에 스며들어간지 오래여서 새로운 실용학문을 추구한 일종의 학술적 경향으로 풀이되는 것이다. 이같은 백제의 선진교육은 일본의 고대학제에 그대로 반영되었다.다만 1세기 정도의 간격을 두고 백제교육제도가 뒤늦게 일본에서 복제되어 나타나고 있다. ◎삼국의 유고/고구려·백제선 교육·통치와 직결/신라는 지리적 여건상 2백∼3백년 뒤져 유교는 동아시아 한자문화권 나라들이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특히 우리나라는 중국과 인접한 지정학적 위치에 따라 유교문화를 일찍 수용했다. 우리나라에 공자의 사상을 집대성한 유교가 부분적으로 처음 들어온 시기는 대략 BC 3세기경 위만조선과 한사군시대로 여겨진다.이 시대의 유교는 예의에 입각한 사회정의와 윤리적 정절을 강조하는 이른바 원시유교다.다시 말하면 중국 은대의 상고신앙을 중심으로 한 종교문화와 주대의 인문주의적 예제문화가 유입된 것이다. 고대국가 가운데 맨 먼저 유교를 수용한 나라는 고구려다.고구려 유교를 자세히 전하는 자료는 없지만 몇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유교문화를 가늠할 수 있다.그 하나가 사서의 편찬인데,「유기」와 「신집」을 국가사업으로 찬수했다.그리고 교육제도의 정립은 가장 큰 고구려 유교문화의 소산으로,오늘날의 대학과 같은 교육기관 태학을 소수림왕 2년(AD 372년)에 설립한 것이다. 백제는 알려진대로 고구려계가 남하하여 세운 고대국가다.따라서 건국 초기부터 유교체제의 통치력을 갖추었다.그 뿐이 아니라 국가차원의 종묘제도 방식을 수용함으로써 유교의 교사지례를 실천했다.이는 온조왕이 창업 6년만에 동명왕묘를 세웠다는 것과 후대의 왕들이 즉위하는 해에 친히 제사를 지냈다는데서 나타나고 있다. 신라의 경우는 한반도 동남쪽에 외지게 자리잡은 데다 중국과도 거리가 멀어 유교수용시기가 늦다.법흥왕 재위시기인 AD 520년에 가서야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기에 이른다.그리고 「국사」편찬은 진흥왕 6년(AD 545년),국학은 삼국통일 후인 신문왕 2년(AD 682년)에 설치하는 등 유교문화가 고구려와 백제보다 2백∼3백년 뒤늦은 시기에 피어나기 시작했다.
  • 김정일 「호칭」/「당중앙」→지도자동지→위대한 수령 격상

    ◎64년이래 총30여개… 「화려한 수사」 일색 「우리 당과 인민의 영명한 수령이시며 우리 모두의 운명이시고 자애로운 스승이신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자주시대의 위대한 태양」「인류가 낳은 걸출한 영웅」…. 자신의 아버지 김일성에 이어 북한 정권 두번째 수장이 될 것으로 보이는 김정일.그에게 그동안 주어진 숨가쁠 정도의 길고 화려한 수사로 다듬어진 숭배의 호칭들이다. 세습후계자 김정일을 떠받쳐온 호칭은 30여개.김일성이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자신에게 붙인 그것을 시차를 두고 물려받거나 재가공해 덧입힌 호칭의 변화과정은 64년 김정일이 김일성 대학을 졸업하면서 시작된 후계작업 30년 역사 그자체로,권력이양의 독도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최근 2∼3년간 등장하기 시작한 「아버지」「수령」등의 호칭은 김정일에 대한 권력승계가 최종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고 특히 김일성 사망 이틀째인 10일 북한 중앙방송에서 나온 「위대한 수령」이란 칭호는 현재까지 「별 무리없이」 북한 정권의 정점에 김정일이안착하고 있음을 내외에 보여주는 증거인 것이다. 김일성대 졸업후 비공식적으로 후계자수업을 받은 김의 첫 직책은 당 조직사업부 지도원.이후 과장 부부장 부장을 거쳐 당 비서직을 맡게되며 이 직책에 맞게 73년까지 불리게 된다.별다른 수식어가 붙었다는 보고는 없다.62년 김일성이 어느덧 남한에서도 익숙한 「경애하는 수령」이라는 개인 우상화차원의 호칭을 처음 붙인 것에 비추어 볼때 당연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의 권력정지 작업이 한창이었던 70년대의 대표적 호칭은 「당중앙」.김정일이 노동당의 양대 기둥인 조직및 선전선동 비서국을 장악한 73년 9월 당중앙위 제5기 전원회의 직후 처음 사용됐고 이후 80년대까지 가장 흔히 쓰인 호칭이다.그의 생일 2월16일을 공휴일로 지정한 75년에는 「유일한 지도자」가,77년에는 「당중앙」이 우세한 속에 「영명하신 지도자」「경애하는 지도자」등이 등장했다. 김정일에 대한 호칭이 질적으로 변화한 것은 80년대 들어서다.80년의 10월 제6차 당대회서 당정치국 상무위원과 당군사위 위원에 오른 3년뒤인 83년 2월 41회 생일을 계기로 「당중앙」대신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가 자리잡았다.현재까지 보편적으로 쓰이는 이 호칭은 북한 주민들사이에 「친지동」이란 비꼬는 말로 쓰인다. 실제 김정일은 91년 12월 군 최고사령관에 취임했음에도 8년전인 83년 5월 「최고사령관」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군의 영향력 강화를 의도한 것으로 풀이된다. 호칭을 통한 미화는 「언어창작」을 넘어서 항일빨치산이 백두산의 나무에 새겨놓았다는 「구호나무」의 역사날조에 까지 이어진다.북한은 87년 「백두산에 광명성이 떴다.광명성(김정일 지칭)미래로 민족 존엄 떨치자」라고 새겨져 있다며 「위대한 영도자」라는 호칭을 썼다. 90년대에는 김일성에 버금가는 호칭이 등장한다.90년 12월 「인민의 운명을 책임진 혁명의 지도자」(노동신문)에 이어 91년 김일성과 동격임을 드러내는 「수령」호칭이 등장하나 미래의 수령이란 의미로 사용됐다.93년조선기자동맹 제7차 대회서 현재를 나타내는 「영명한 수령」으로 표현됐고 올해 3월에는 조선대남방송에서 「주석」으로,5월에는 평양방송에서 「두분의 수령」「탁월한 수령」으로 나와 곧 명실상부한 권력이양이 이루어지리라는 추측을 불러일으켰었다. 「수령」과 같은 카리스마조작 비중을 갖는 「어버이」도 최근 2∼3년전부터 두드러진 호칭. 「오늘은 오실까 우리어버이/내일은 오실까 김정일 동지/우리를 키워준 어버이모습/한해가 다르게 그립습니다」 92년 북한이 보급한 「기다렸습니다」라는 노래의 가사 일부이다.그토록 기다려 왔다는 올해 52세 「어버이」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북한 인민에게 다가갈 것인지 궁금하다.
  • 가야금의 명인 이재숙교수/가야금산조 여섯유파 완주 시도

    ◎13일 김죽파류 산조 시작으로 대장정에/한해 한유파씩 여섯해 동안에 걸쳐 연구 이재숙교수(53·서울대)가 가야금산조의 대표적인 여섯 개 유파를 한해에 한 유파씩 여섯 해 동안에 걸쳐 완주한다.그는 13일 하오 7시30분 국악당소극장에서 김청만명고수의 장구반주로 김죽파류 산조를 탐으로써 그 대장정의 막을 연다.이어 내년부터 오는 99년까지 강태홍류와 성금연류 김윤덕류 김병호류 최옥산류를 차례로 무대에 올린다는 계획이다. 이재숙교수는 분명 가야금의 명인이다.그럼에도 명인이란 호칭으로 불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명인은 일반적으로 어느 수준에 도달한 「잽이」를 높이는 말이다.대학교수인 그에게 명인이란 호칭은 오히려 격을 낮춘다고 생각했을까.대신 연주회를 알리는 홍보자료에는 그의 이름앞에 「한국을 대표하는 가야금연주자」라는 긴 수식어를 붙여 놓았다.가야금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악기다.따라서 가야금의 명인이라면 당연히 한국을 대표하는 가야금연주자가 된다.그런데 「가야금의 명인」이라고 간단히 쓰면 될 것을 왜 정경화나김영욱을 지칭할때 흔히 붙이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처럼 「한국을 대표하는 가야금연주자」라고 썼을까. 그것은 차별화다.자신에게는 스승이지만 기방에서 기량을 닦아 자신의 가락을 완성한 전시대의 명인들과는 구별되고 싶다는 것이다.사람들로 하여금 가야금연주자를 바이올린연주자처럼 생각하게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가야금이 오늘날 같은 붐이 있도록 한 결정적인 공로자가운데 한사람이다.그의 공헌가운데 가장 큰 것은 바로 이같은 노력으로 「여염집 규수」들이 이 악기를 들고 아무렇지도 않게 거리를 나다닐수 있도록 만든 것이라고 할수 있다.그런 인식의 변화가 없었다면 가야금 인구 또한 크게 늘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서울대국악과의 첫입학생이자 국악과대학원의 첫 졸업생으로 전통음악 분야에서 처음으로 석사학위 논문을 썼다.1964년에는 처음으로 가야금만으로 독주회를 가졌다.26세에는 서울대음대의 최연소 전임강사가 됐다.현재 활동하고 있는 가야금연주자의 상당수는 그의 제자다. 그는 가야금산조의대표적인 여섯개 유파를 모두 연주할수 있는 유일한 인물일 것이다.또 이 여섯개 유파를 모두 오선보로 채보해 출판했다.이 가운데는 그가 발굴했다고 해도 좋을 유파가 있고 또 연로한 명인이 잊어버린 가락을 옛 녹음자료를 찾아내 다시 연주할수 있도록 도와준 유파도 있다. 또 가야금을 위해 서양음악 혹은 국악기법으로 작곡된 많은 신작을 초연함으로써 창작 분야에 미친 공헌도 무시할수 없다. 분명 「한국을 대표하는 가야금연주자」 이상이다.그러나 그 수식어에는 자기 악기의 「과거」를 부정하는 일면이 담겨 있는 것도 사실이다.그의 차별화 전략이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그런만큼 내년 이맘때 두번째 무대에서는 「가야금의 명인 이재숙」으로 돌아오면 어떨까.
  • 도예가 황종례씨(이세기의 인물탐구:23)

    ◎예술혼 담긴 「귀얄문양」 대가/탁월한 기품·여성스런 섬세함 한획으로 표출/망망대해·일렁이는 갈대숲 등 깊은맛 일품/32세 “늦깎이” 입문… 남을 의식않고 제작에만 몰두 벽제의 하늘은 아름답다.청자의 비색처럼 영롱하다.산자락에 걸친 구름은 분청사기의 문양인듯 엇비슷 비껴있다.이곳이 바로 현대도예에서의 일인자 위치를 지키는 도예가 황종례씨의 작업실이다.절간같은 고요,사람의 기척이라곤 별로 없이 작가 혼자서 흙으로 성형하고 소성한 도예에 그림을 그릴 뿐이다. 그가 벽제에 온것은 72년 초봄이다.그때까지만 해도 진흙구덩이가 푹푹 패이는 삭막한 황무지였으나 도심에서는 가마를 가질수가 없어 일찌감치 이곳 정착을 서둘렀다. 그리고 드넓은 터에 장작을 때는 흙가마와 기름을 때는 현대식 가마를 갖추었다.그로서는 가마를 갖게된 이상 더 바랄 것이 없었다.그동안 축적한 것을 이뤄나가면 그만이다. 새벽 6시면 그는 벌써 작업실로 내려온다.직접 흙을 반죽하고 까다로운 여러 공정을 거쳐 유약칠과 채식에 들어가 한 획으로 문양을 넣기 시작한다.물론 널리 알려지다시피 그의 도예에서의 특징은 귀얄문양이다.그는 이 과정에서는 거의 몰아의 경지다.느긋하고 너그러워 호들갑스러운 데가 전혀 없으나 이때만은 비호처럼 날쌘,귀신같은 솜씨를 발휘한다.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그 순간을 포착하기 힘들다.그때도 그의 얼굴표정에는 온화한 여유가 만만하다. 처음에는 힘없는 붓이 자꾸 흙에 달라붙어 기면의 흡수에 비해 둔한 붓놀림이 따르지 못하자 유화붓을 쓰거나 강도가 센 페인트 붓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귀얄만으로 능란하게 그림을 구사하게 되었다. 귀얄문의 특징은 그릇의 표면이나 내면에 속도감있게 붓자국을 내며 돌리지않으면 습기있는 기면이 당장 흡수해버리기 때문에 단숨에 그릴 수 있는 기량과 기술이 필요하다.그릇의 한면을 한동안 응시하다가 미리 구상해두었던 그림을 일순간에 성립하는 식이다. ○분청사기에서 힌트 옥색하늘이 아득히 푸르르고 망양한 바다와 바람에 일렁이는 갈대숲,희미한 새벽 서광과 붉게 타는 낙조등 도예기가 보여주는 회화세계는 화선지에서와는 다른 그나름대로의 참신하고 깊은 맛이 일품이다.안료의 농도에 따라 얼마든지 절묘한 표현을 자유자재롭게 만들어 나갈수 있는 것도 한 장점이다. 물론 이런 필력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그는 60년대 초부터 청전 이상범에게 붓놀림과 먹의 농담이용법,옥산 김옥진에게 사군자,오당 안동숙에게 풀 나무 산과 바위를 사사하면서 수년간 자기표현을 위한 기초적 탐색을 감행해 왔다. 그의 귀얄무늬는 물론 분청사기에서 쓴 귀얄문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고려상감(상감)같은 상감을 이용한 화장법을 거쳐 분청사기의 귀얄무늬를 추상적 회화로 모색해 나갔다. 그 시절의 그런 그릇에 왜 귀얄 붓자국을 썼는가,시간틈틈이 골동품가게나 박물관을 기웃거리며 관계서적과 도록을 빌려다가 밤을 지새워 연구하기도 했다. 발이나 호·기에다 투각수법의 무늬로 부분장식을 표현하거나 단일색인 소문백자의 경우엔 부드럽게 흐르는 몸체에서 무한한 품위가 배어나왔다. 더구나 화사기에서 쓰이던 회청·회회청의 코발트색깔은 지금도 창조하기 힘든 기발한 색조임에 스스로 탄복해 마지 않았다.꽃잎흩날리는 비화문이며 풀잎 나뭇잎 얼킨 초엽문의 활달한 율동감,살얼음이 깨어진 듯한 빙렬등은 현대도예에서도 시도해 봄직한 분방한 방법임에 틀림 없었다. 황종례의 그릇의 형태는 비교적 큼직하고 대담한 편이다.쑥쑥 뻗은듯 휘어진 곡선을 지니면서 탁발한 기품과 여성적인 섬세함을 담고 있다.너무 작아 조잡하거나 너무 우람하여 넘치지 않는다.야무진 티나 인위적인 기교는 없다.꾸미지않은 순결함속에 오랜 전통을 바탕에 둔 든든한 경륜의 실력이 이를 보는 사람들에게 안심과 환희를 안겨준다. 도예의 기물이 지닌 근본적인 문제들을 파악하자 이번엔 좀더 새로운 세계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시도에 앞장 섰다.무한한 가능성에 비해 시간이 짧기만 했다. 몇사람 되지않는 창작도예에서 「독자성」을 두루 인정받고 있으면서도 그는 『도예의 길은 멀고 그리고 어렵다』고 말한다. ○성취가 일생 과제로 고전하여 어렵게 이룬것만큼 높이 평가되지 않는데 대한 불만이 없는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도무지 그런 울결(울결)과 방종에서 벗어나 흔연한 자세다. 남에게 관심을 갖거나 남을 의식하지도 않는다.그런 자자분한 세상사에 눈돌릴 겨를이 없다.예술가의 자세란 작품에 밀착하여 새 세계에 도전하는 일,그리고 성취만이 평생의 과제이며 목적이다. 그는 인건비등으로 다투는등 사람들에게 시달리기도 싫어 인부들과 손을 끊고 몇년전부터는 흙만드는 일을 직접하고 있다. 12번째 개인전을 연후 수많은 해외전시에 참가,틈틈이 86년 13번째의 개인전을 앞두고 준비해온 1천여점의 작품을 하루 아침에 망친 사건이 있었다. 어느때보다 실험작품이 많아 스스로 기대에 부풀었던 그는 눈앞이 캄캄했으나 「허허!」 한바탕 웃는 것으로 이를 단념해 버렸다.이미 끝난것에 집착하는 것은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았다. 원인은 간단하다.필요한 양을 정확하게 혼합하는 과정에서 인부들이 물과 흙의 분량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이를 지켜보지못한 자신의 불찰로 돌렸다.광주나 이천에 나가면 만들어진 흙을 얼마든지 사다 쓸수 있는것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직접만들어 쓰려다가 생긴 이 낭패가 그로서는 여간 섭섭하지 않았다. 그후론 아직 결혼전인 차남(영학씨·조각·상명여대 출강)이 어머니를 돕고 있다.엎친데 덮친격으로 같은 시기에 그의 도예일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해 주던 부군 이진우박사(전 영동피부과 제일의원)가 몸져 눕는 바람에 한동안 간호에 매달리느라 이럭저럭 작업을 미룰수 밖에 없었다. 황종례씨는 고려청자의 재현이라는 전통도예를 가업으로 가진 황인춘씨를 부친으로 역시 원로 도예가인 황종구씨(전 이대교수)가 그의 오빠다. 어릴때 영등포 대방동에 있던 그의집 과수원속에 부친의 가마가 있었고 그는 그릇을 빚고 건조시키고 조각하고 백토칠에다 다시 이를 벗겨내고 유약등 까다로운 작업을 지켜보는 유년시절에도 하나의 사기나 파와(파와) 한쪽을 어루만지면서 몸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옛 고려왕조·이조왕조의 생활이 따뜻하게 전해졌다고 기억한다. 그후 국민학교 1학년때 조선총독부에 의해 가족이 강제로 개성에 이주,일인들이 선죽교부근에 마련해준 연구소에 살면서 호수돈여고에 다녔다. 미대진학을 꿈꾸며 그림을 그리던 그에게 스승이던 유달영선생의 가르침은 「버려진 제것에 대해 눈뜨라」는 것이었고 특히 졸업을 앞두고 「청년이어 일어나라」는 교훈은 그에게 「나도 무엇인가 나의 일을 하겠다」는 의욕을 심어주었다. 집안형편이 극도로 어려웠으나 그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에 있는 이대미술학부에 진학,어릴때 손바닥 감촉으로 느꼈던 사기의 온기를 못잊어 대학졸업 9년만인 32살때 뒤늦게 대학원에 들어가 도예를 전공했다.그때도 부군이 그의 협력자가 되어주었다. 대학원 졸업전인 61년에 첫 개인전,청자의 태토에 백토로 분장하고 그곳에 단숨에 귀얄문을 그려내는데 매력을 느낀것은 68년 6번째 개인전때부터다. ○“독보적 존재” 평가 「청·백자의 선이 아무리 탁발하다 해도 이를 단순히 재현하는데 그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에 『조작적이고 기교적이 아닌,이른바 이조자기에서 볼수 있는 대중적이고 서민적인 멋』을 담아 새롭게 선보였다. 실내장식품에 지나지 않던 도예를 널리 일상생활에 참여시킨일종의 도예의 활성화 시도였다. 『몇 안되는 창작도예를 만드는 도예가중에서 독자적인 색유사용으로 새 경지를 개척해 왔다는 점에서 황종례는 현대도예에서 단연 독보적 존재』라는게 미술평론가 박래경씨의 평이다.1천여점 작품실패로 9년간 미뤘던 13번째 개인전은 오는 13일 신세계 미술관에서 열리게 된다. 흰색으로 시작됐던 그의 귀얄문은 더욱 다양한 아름다운 색깔로 변모되었고 매끄러운 표면은 입체감과 함께 품위있는 추상회화로 조형효과를 이뤄내고 있다. 청자빛 하늘과 파도치는 바람,흩날리는 꽃잎등 조선시대의 사람의 감정과 미의식을 담은 그의 현대적도예 세계는 그의 성격처럼 온유하고 따뜻하여 번거로움과 무질서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인정과 사색,그리고 은은한 기쁨을 넉넉하게 뿌려주는 안식의 경지다. □연보 ▲1927.12.9 서울출생 개성호수돈녀고 26회 졸업 ▲1945.∼1950.5 이화여자대학교 예림원 미술학부 서양화과(학사) ▲1959.9∼1962.2 이화녀자대학교 대학원(도예전공·석사) ▲1963∼19 81 이화녀자대학교 미술대학 도예과 출강 ▲1965.3∼1966.2 상명녀자사범대학 미술교육과 조교수 ▲1975.3∼현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공예미술학과 교수 ▲1961.12 도예개인전(서울중앙공보관) ▲1963.10 도예개인전(〃) ▲1964.11 도예개인전(신문회관) ▲1966.5 도예개인전(신문회관) ▲1967.8 도예개인전(미팔군전시장) ▲1968.8 도예개인전(일본,경도 조화랑) ▲1971.9 도예개인전(신세계백화점 전시장) ▲1975.4 도예개인전(신세계미술관) ▲1978.9 도예개인전(신세계미술관) ▲1981.1.20 도예개인전(미국 뉴욕) ▲1982.1.29 도예개인전(미국 로스앤젤레스) ▲1984.4.24∼4.29 도예개인전(신세계미술관) ▲1961∼1983 대한민국 미술전 출품 ▲1968.7∼1981 대한산업디자인전 초대작가(디자인 포장센터)심사위원 ▲1973 한국현대도예작가전 초대전(신세계미술관) ▲1975 전국공예가 초대전(미술회관)문예진흥원 주최 ▲1976 여유도예전 초대전(신세계미술관) ▲1977 역대 국전수상작품전(국립현대미술관) ▲1979 한·중·일 국제도예전 초대출품(일본명고옥) ▲1979 한국도예가회 창립전(신세계 미술관) ▲1979 한국미술전람회(뉴질랜드) ▲1980.9.27 한국도예가전 회원전 2회(신세계미술관) ▲1980 국전 초대출품(국립현대미술관) ▲1980.7.10∼7.16 도예2인전 일본 매일신문사 주최(일본 동경도 대환백화점) ▲1981 한국도예가회 회원전 3회(신세계미술관) ▲1982.3.6 도예2인전(일본 구주 복강시) ▲1983 도예2인전(일본 대판시) ▲1984.3.15∼3.20 도림전 출품 ▲1981 서울신문사 도예공모전 초대출품 ▲1981∼1990 현대도예전 일본 순회전(10연간) ▲1982 제1회 대한민국미술제 초대전(국립현대미술관) ▲1982 서울신문사도예공모전 초대출품·심사위원,한미수교 100주년 기념출품(미국) ▲1982 한국현대도예가 회원전 9회(신세계미술관) ▲1983 한독수교 100주년기념출품(독일) ▲1983 서울신문사 도예공모전 초대출품 ▲1968.8 국제미술교수협회 주최 도예세미나(일본,경도) ▲1975.5 한국도예특강 초대(일본 요업시험소) ▲1980.2 자유중국 교육시찰 ▲1983.8.2∼8.20 한일교류전 출품및참가(일본 구주) 대한산업미술가협회 주최 ▲1983.12 MBC초대전 출품(MBC별관 전시관) ▲1986.9 한국현대도예가회 일본 전시 ▲1987.6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출품 ▲1987.8 대한산업미술가협회 출품및 참가(일본 구주) ▲1987.9 서울신문사주최 도예공모전 심사및 초대출품 ▲1989 대한민국 미술대전 초대작가및 운영위원장 ▲1988 대한산업미술가 협회 이사장 역임 ▲1990 서울현대도예비엔날례 초대출품 ▲1991 대한민국 미술협회 부이사장 ▲1992 서울 공예대전 출품 ▲1993 벨기에 앤트워프 박물관 주최 ▲1993.3.26 한국도예문화 특별전 출품 ▷작 품 집◁ 황종례 도예작품집(미진사간) ▷수상◁ 국무총리상·국전 초대작가상·대한민국 문화예술상 ▷현재◁ 경희대 수원캠퍼스 출강·대한미술산업가협회 회원·한국도자기문화진흥협회이사
  • 발레리나 김혜식씨(이세기의 인물탐구:9)

    ◎도약때 새의 비상 방불… “춤의 요정”/외지,“미감번득이는 탐미주의적 포즈” 격찬/세계적 명성 얻고도 자만하지 않는 노력형/포용력있는 성품… 「사치와 무관한 예수셰계」 추구 꽃잎처럼 여리고 가늘고 향기로운 느낌.한국이 낳은 세계적 발레리나 김혜식씨의 이미지다.곧고 균형잡힌 체격과 세련된 용모,예술가의 찬란한 경력과 연륜,세계적 명성에 비해 그의 어느 구석에서도 자랑과 오만,자부심의 기색은 찾아볼 수 없다.알프스 소녀같은 순백한 표정에 말씨도 미소도 웃을때의 눈매도 부드럽다.걸음걸이도 발레리나 특유의 티를 내지않는다. 그러나 목선과 어깨선 조용히 앉아있거나 책을 읽을때 주스를 따를 때도 그에게선 어쩔수 없이 일가를 이룬 한 발레리나로서의 기품이 엿보인다. 잔잔한 리듬이 밴 발동작과 우아한 스텝은 그가 국립발레단 시절 「레 실피드」에서 보여준 「공기의 정령」,또는 몸속에 쇼팽의 선율이 흐르는 듯한 물결같은 움직임이다. 일명 「백색발레」(aballetblanc)로 불리는 「레 실피드」에서의 아라베스크와 절정을 향한 앙트리샤는 그의 많은 묘기중에서도 눈부시게 뛰어난 테크닉으로 손꼽힌다.특히 그의 도약은 그림자무게만큼이나 가벼울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아 곧잘 새의 비상(비상)에 비유되곤 한다. 한발로 선채 한 다리와 한팔을 마음껏 뒤로 뻗치는 앙트리샤는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국 신문과 댄스 전문지등에서 일찍이 「미감이 번뜩이는 탐미주의적 포즈」로 호평된바 있다. 외지 보도에서 그는 언제나 「혜식(Haeshik)」으로 불리고 한국의 임성남 사사를 밝히는등 최근의 「댄스 티처나우」지(92년 1월호)는 「서울에서 온 김혜식」특집기사속에서 「잠자는 미녀」의 「오로라」,또는 「봄의 요정」에서의 「요정(Fairy)」자체로 그의 춤을 표현하고 있다. ○임성남씨에 사사 그는 무대위에서 「사랑스럽고 감미롭고 고혹적」이다.그러나 이 글을 쓴 무용 평론가 레슬리 프라이드맨은 그의 무용가로서의 이면에는 「고집이 세고 책임감이 강하고 주어진 일에 대한 확고한 판단력과 끝까지 해내고야 마는 완벽주의가 도사려 있다」고 밝힌다. 이대 무용과에서 같이 무용을 공부한 미스코리아 출신 오현주씨는 「예술가적 양심과 도덕성,세계적 수준의 발레 기교와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동시에 갖추었으나 언제나 온순하고 겸손하고 관대하다」고 친구를 자랑한다. 그의 관대함과 포용력은 이번 국립발레단 새단장 내정때 이를 질투하고 항의하는 전화를 받고도 수화기를 든채로 코를 골고 잔 이야기가 잘 뒷받침하고 있다. 물론 그의 국립발레단 새단장은 새삼스럽게 거론된 것은 아니다.3년전부터 해마다 동아무용콩쿠르 심사위원자격으로 서울에 올때마다 스승인 임성남씨의 간곡한 권유가 있었고 무용계에서도 양식있는 실력자의 출현을 당연히 환영하는 빛이었다. 「임성남씨가 은퇴하더라도 김혜식이 있으니 안심」이라는 반응이 그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너무 깊이 외국무대에 뿌리를 내린 그로서는 거미줄같은 스케줄에 얽매여서 이를 뿌리치고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지난 16년간 교수로 몸담아온 프레스노대를 포기하기도 쉽지 않았다.그는 캘리포니아 주립대 농공학교수인 부군 김주익씨와의 섬세하고도 다각적인 의논끝에 「나를 키워준 고국에 대한 감사의 차원」에서 힘들고 어려운 결정을 내린 입장이었다. ○유복했던 어린 시절 김혜식은 서울에서 태어났다.아버지 김응순씨(70년 작고)는 고대출신으로 오랫동안 교통부 해운국장으로 재직,비교적 건강하고 구김살없는 환경에서 명랑하게 자란 편이다.집안에 무용을 하는 사람은 없다.다만 사촌언니이며 문단의 중진인 시인 김양식씨가 김혜식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발레리나의 꿈」을 심어주었다. 성공회 유치원시절부터 춤을 추기 시작하여 이화여중때 일본에서 러시아발레를 전공하고 돌아온 임성남무용연구소에 입소,중학교 3학년때 「꽃의 왈츠」에서 군무로 명동 시공관 무대에 섰고 고3 되던해 「백조의 호수」에서 스승인 임성남씨의 파트너로 본격 무대에 데뷔,「발레 신데렐라」로 떠올라 무용계는 일찍이 김혜식 발레시대를 예고했다. 「타고난 재능보다 부족함을 메운다는 노력」을 신조로 하여 그는 밤낮없이 포즈연습에 매달렸고 하루가 멀다하고 토슈스를 해어뜨리는 딸의 춤을 그의 부친이 말없이 뒷바라지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영화 「수정 온디누」를 보고 그때부터 막연히 마것 폰테인의 영국 로열발레 진출을 꿈꾸게 되었다. 당시 미국대사관 공보관으로 와있던 미스터 핸더슨은 김혜식의 「백조의 호수」「레 실피드」에서의 연속회전인 푸에테에 반해 뉴욕시티발레·로열발레 뤼스 드 몬테카를로 공연 필름을 구해주었고 새들러스 웰즈의 「불새」공연에서 눈이 핑핑 돌것같은 마것 폰테인의 현란한 선회를 마치 그 자신의 운명을 응시하듯 지켜봤던 기억을 잊지 못한다. 드디어 그는 67년 5·16장학금을 받아 영국으로 갔고 런던의 로열발레스쿨에 입학,세계적 프린시펄인 줄리아 파론,일리아 워드 도널드 리튼을 차례로 사사,발레스쿨 수료후엔 에롤 에디슨에게서 알레그로 스텝의 보충레슨을 위해 1년간 수업을 연장했다. 그러나 시즌엎이어서 로열발레단 오디션을 놓치는 바람에 「잠자는 미녀」솔로로 니콜라스 베리오소프 감독에게 발탁되어 스위스 취리히발레단에 입단,이 사실은 국내에도 널리 보도되었었다.그는 아름다운 취리히 오페라하우스에 머물면서 각국에서 모여든 재능있는 예술가들과 함께 춤출 수 있는 이상 행복하기만 했다. 그때 미국에 살고있던 동생이 그를 만나러 왔다가 「유명 발레리나의 춥고 가난한 생활」을 보고는 실망을 금치 못하자 『예술은 사치스럽다든가 풍요로운 생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모든 동작이 정지까지도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우냐만이 우리의 생명』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춤출 때외엔 화장을 하지 않는다.멋진 옷을 탐내지도 않는다.유럽 구석구석을 누비는 투어중에도 이 도시에서 저도시로 향하는 비행기 속에서 모든 발레리나들이 그런 것처럼 그도 겨울에 입을 스웨터나 머플러를 뜨개질 하면서 공연 틈틈이 보았던 샛별같은 발레들을 머리속에 그리곤 한다.그중에서도 유럽공연을 가진 캐나다 레그랑 발레 캐나디안의 토슈스를 신지않은 「카르미나 브라나」는 퍽이나 인상적인 무대였다. 그는 이에 자극받아 취리히 발레단과의 3년계약을 끝내고 캐나다 몬트리올 발레단에 입단,오디션에서 2백명중 1명으로 뽑혀 처음엔 세미 솔로이스트,다시 솔로이스트로 올라서 모든 공연에서 「작은 코리안의 센스있는 작품해석,유연한 기량」등의 개인평과 함께 차츰 춤의 요정으로 변신해갔다. ○공연때마다 호평받아 「나이든 모습으로는 무대에 서지 않겠다」는 결심과 함께 30세가 되던 72년,워싱턴 DC 케네디센터에서 있었던 록 발레 「토미(Tommy)」공연에 찾아온 김주익씨와 그해 12월20일 프레스노에서 결혼,캐나다 밴쿠버의 브리티시 콜롬비아에서 농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김주익씨는 「무용하는 와이프를 원치않아」결혼과 함께 그곳 신문들은 「프린세스 차밍과의 결혼을 위해 토슈스를 포기한 발레리나」를 대대적으로 보도해주었다.예상치못한 김혜식 발레 포기는 미국은 물론 한국무용계를 크게 놀라게한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정주부로 머물면서 뜨개질이나 하고 한밤중에 몰래 일어나 발레 필름에 넋을 빼앗기는 아내를 발견한 김주익씨는 「그는 아내이기전에 한사람의 예술가」임을 뒤늦게 깨달았다.더구나 「이 도시에 세계를 누빈 발레리나가 와있다」는 소문과 함께 결혼 3개월만에 프레스노 시립발레단이 「호두까기인형」「잠자는 미녀」공연에 초청,네 왕자와 더불어 추는 「로즈아다지오는 비길데 없는 아름다움의 극치」란 극찬등 프레스노 시립발레단 초청발레리나겸 안무자로 활약하다 77년 프레스노대 연극무용과 교수로 초빙됐다. 자녀가 없는 이들은 푸들 스카티를 아들삼아 키우면서 친구처럼 남매처럼 오로지 세상에 두사람뿐인 것처럼 누구보다 다정한 부부다. 발레에 대해선 문외한이었던 부군도 언제부턴가 발레전문가를 능가하는 발레이론가가 되어 어떤 외조도 마다하지 않는다. 김혜식으로서는 그동안 큰 좌절이나 난관은 없었다.좌절과 난관이 있기 전에 철저한 연습으로 이를 대비했기 때문이다.슬픔이 있었다면 20년 가까이 친자식처럼 키워온 스카티를 지난해 모국방문기간 동안 잃은 일이다.스카티 얘기가 나오면 언제 어디서라도 『나를 닮아서 춤을 잘추었는데,바느질 스티치같은 부우레가 얼마나 귀여웠는데』하며 소녀처럼 눈물을 글썽인다. 그러나 그런 이면에는 「주어진 일에 대한 책임감과 판단,완벽주의」가 도사려 오는 1월 단장취임에 앞서 지난 3주동안 발레단체의 대대적인 정비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지금까지 공연스케줄이 짜져야만 2∼3시간씩 하던 연습을 하루 8시간으로 대폭 늘렸다.타성이 된 모든 잘못된 포즈나 폼은 연습을 통해서 고친다는 각오다. 이제 우리는 본격적인 김혜식 발레시대의 출범과 함께 그가 세계무대에서 호평받았던 젤롬로빈스의 「목신의 오후」,조지 발란신의 「알레그로 블리리안」그리고 토슈스 없는 「카르미나 브라나」를 국립극장 무대에서 보게될지도 모른다.그리고 그것은 그의 우상이었던 마것 폰테인의 이미지를 몸속에 간직한 꽃잎과도 깃털과도 같은,김혜식 특유의 미감이 번뜩이는 불멸의 예술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연보 ▲1942년4월 서울출생 김응순씨와 백운정여사의 3남2녀중 셋째(장녀) ▲61년 이화녀고 졸업 ▲57∼64년 임성남 무용연구소 사사 ▲63년 제1회 동아무용콩쿠르 김상 수상 ▲64년 이대 체육대 무용과 졸업 ▲64∼66년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66년 5·16장학금과 동아일보 장학금 받아 도영,영국 로열발레 스쿨 수학(RADDIPLOMA) ▲67∼69년 아메리칸 발레시어터 특별연수,스위스 취리히 발레단 차석 무용수 ▲69∼72년 캐나다 몬트리올 발레단 프리마발레리나및 솔로이스트 ▲73∼77년 미캘리포니아 피그가든 댄스아카데미 안무및 지도위원 ▲72∼92년12월 미캘리포니아 주립대 프레스노대 연극무용과 교수 ▲67년 이탈리아 댄스페스티벌 초청예술가 참가 ▲68년 스위스 주네브 댄스페스티벌 초청예술가 ▲69년 캐나다 퀘백주립고교및 대학에서 발레교육과 테크닉을 위한 설기지도 ▲70년 미 자코브스 필로댄스 페스티벌 초청예술가 ▲71년 미 케네디센터 개관기념 공연 참가 ▲73∼74년 미 프레스노 시립발레단 발레리나 「잠자는 미녀」「호두까기인형」공연·안무 ▲77∼92년12월 프레스노대 포타볼댄스 투톱을 위한 안무와 초청발레리나 ▲82·86년 포타볼댄스 투톱의 일본 대만등 순회공연 ▲83년 홍콩아카데미 아트센터 발레실기지도 ▲85∼89년 센트럴 캘리포니아 발레콩쿠르 심사위원 ▲87∼89년 미국대학 발레전공 장학생 선발 콩쿠르 심사위원 ▲90∼92년 동아일보 주최 동아무용 콩쿠르 심사위원 「백조의 호수」「로미오와 줄리엣」「잠자는 미녀」「코델리아」「호두까기인형」「프린스 이글」「연」「아이다」「파우스트」「토미」「파이어버드」「미스줄리」「카르미나 브라나」「더트립」「아루키(ARUKI)」「인터플레이」「알레그로 블리리안트」「세레모니」「레 실피드」「목신의 오후」「봄의 요정」등 수십편.
  • 연하장 줄이기,자원절약이다(사설)

    연하장의 계절이다.크리스마스 카드와 함께 한두장씩 날아들기 시작했다.그래도 예년에 비하면 아직은 좀 덜한 편이다.아마도 선거가 겹쳐 미처 배달의 손이 거기 못미치기 때문인 것 같다.이 기회에 연하장 풍속에 대한 전면적인 반성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 계절만 되면 카드와 연하장이 날마다 수북히 배달되어 쌓인다.거의는 뜯어보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넣게되는 것들이다.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과 기관에서 날아들어 열어볼 흥미가 나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이다.인쇄된 주소와 이름으로 성의도 정성도 없이 보내온 것이 역력해서 그렇게 버려도 조금도 가책을 받지 않는다. 이렇게,주고받음의 감흥도 예의도 탈색된 종이를 더 이상 주고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인지 회의가 들게끔 되어버린 것이 연하장문화다. 성과가 없는 것에 그치고 말면 그래도 괜찮다.고급종이로 화려하게 인쇄한 내용물을,역시 고급 봉투에 넣어서 아무런 기능도 시키지 않은채 쓰레기통에 넣는 것으로 낭비되는 자원이 얼마인가.그뿐이 아니다.그것들이 만드는 쓰레기는 또 얼마나막대한가.이름이 새겨진 것을 그냥 버리기가 안돼서 분쇄기에 넣어 버리는 사람도 많다.이중삼중의 자원 낭비와 쓰레기 생산에만 기여한다. 이 「고급포장된 예비쓰레기」를 전달하기 위해서 우편체계는 또 얼마나 혼란을 빚는가.가뜩이나 선거유인물까지 겹쳐서 산더미 같은 우편물에 치여 우편행정은 제구실을 다하기가 어렵다.물론 일년내내 만나지 못했던 친구나 스승,어른이며 이웃들에게 연하장 한장이라도 보내서 서로의 안부를 간결하게 소통하는 본래의 뜻이 중요하기는 하다.그러나 지금 오가고 있는 카드나 연하장은 그런 「원래의 좋은 뜻」에 제대로 부합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연하장 풍습을 바꾸는 것이 당연하다.생각해보면 연하장이나 카드는 사회가 매우 유장하던 시대의 산물이다.퍼스널컴퓨터나 팩시밀리 같은 마술적인 첨단 소통수단이 태어난 현대에는 다소 맞지않는 고전적 산물이다.현대적 기능의 신년인사 교류수단을 개발하고 시간과 자원이 너무 낭비되는 연하장문화는 이제 벗어나야 할 때가 되었다.『연하장 안보내기 운동』을 제창한다.
  • 불교인의 미래지향적 삶 제시/한국불교연구원,국제불교학술포럼 개최

    ◎불교학·사회적역할 과감히 버러야/야마오리/법신불보다 종교를 더 숭배 말도록/이기영/종교제국주의의 콤플렉스는 잘못/정병조 공산주의의 붕괴로 초래된 이데올로기시대의 종언은 종교시대의 도래를 이끌것인가.가치관이 전도되고 불의가 판을 치는 혼탁한 사회에 종교는 어떻게 그 생명력을 지켜갈 것인가. 세계사적 전환기를 맞는 시점에서 불교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해 보이고 불교도들의 미래적 삶의 지표를 제시하기 위한 국제불교학술포럼이 한국불교연구원(이사장 이기영)에 의해 4일 타워호텔 젤코바홀에서 개최됐다. 이 포럼에서 발표된 주제는 ▲불교에서의 삼보(다카사키 지키도·도쿄대 명예교수) ▲불교의 현재와 가능성(야마오리 테츠오·국제일본문화연구소 교수) ▲귀의,사회에 있어서 불교의 역할(루 랭카스터·미캐리포니아 버클리대교수) ▲불교도,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할것인가?(이기영·한국불교연구원장)등.이어서 정병조·권기종·이영자(동국대)노권용·한기두(원광대)프랑코 테데스코교수(단국대)성타스님(불국사)등이 토론자로참석 열띤 논쟁을 벌였다. 이날 가장 관심을 모은 주제는 야마오리교수의 발표로 그는 불교에 대한 불교도들의 「배반」과 불교를 불교학의 얽매임으로부터 또 사회적 역할로부터 해방시킬것을 주장했다.그는 불타와 마지막 여행길에 올라서 불타의 세차례 암시를 깨닫지 못하고 수명연장 건의를 외면함으로써 불타의 열반을 재촉한 제자 아난다를 예수의 존재를 세번 부정했던 베드로에 비기면서 『아난다의 후손인 우리들은 그 배반의 원점에서부터 새로 출발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불교에는 본래 사회적인 역할과 같은것이 없었기 때문에 불교가 사회적 역할로부터의 얽매임에서 스스로 해방될것을 촉구했다.또 불교와 불교학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불교학은 「깨달은자 불타」의 가르침을 담은 것으로 우리들에게 더 필요한 것은 「속인 석가」의 모습인 만큼 불교학 역시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기영교수는 살아있는 부처님과 같은 완성된 각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사람은 자각의 가능성보다 맹종의 가능성이 많고 반면에 중생들과 떨어져 혼자살며 혼자 깨달았다고 자처하는 독각의 무지도 문제라고 지적했다.그는 또 불교는 타종교에 대해 대립의식이나 정복의욕을 갖는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종조를 법신불보다도 더 훌륭한 분으로 숭배하는 종파주의적 태도 역시 지양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편 토론에 나선 정병조교수(동국대)는 상주적으로 보여지는 모든 진리는 타파돼야 한다는 전제하에 오늘날 종교제국주의적 다종교상황 속에서 불교인들이 갖고 있는 막연한 콤플렉스를 지적했다.고아원·양로원등의 숫자로 종교의 사회화를 논하는것은 무의미한데도 불구하고 불교인들이 그 수치비교에서 당혹감을 갖는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그는 경로사상과 조상숭배를 강조해온 불교의 관점에서는 그같은 별도의 사회적 구제시설이 필요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따라서 불교의 기독교화를 철저히 경계해야 하고 찬불가를 비롯한 몇몇 불교의례의 변화,민중불교에서 차용하고 있는 흑백논리와 해방신학적 발상등에 경계를 표시했다.
  • 교직보호향상,「교총」의 전부다(사설)

    새 교총회장이 탄생했다.40만 교직자의 대표로 선출되어 이땅의 교직자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대변하여 교직자들로 하여금 교육의 사명을 다하는 데 어려움이 없게하고 우리의 교육이 안고 있는 현장문제들의 해결에 앞장설 수장이 새로 선출된 것이다. 때마침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갖가지 민감한 사안들 때문에 사회의 많은 시선이 교총에 집중되어 있는 때여서 신임 교총회장에 대한 기대가 새롭기도 하다. 우선 최소한도 전국의 모든 교직자를 산하에 거느린 교총이 정치의 회오리바람에 휩싸이는 일만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새 교총회장에게는 먼저 그것을 당부한다.마침 새로 선출된 이영덕교총회장은 신임회견을 통해서 전교조와 해직교사의 문제에 대한 입장을 명료히하고 있다.『전문직단체인 교직단체는 합당한 지성과 스승다운 자세가 뒷받침돼야 하는데 현재 「전교조」는 이 두가지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으므로 합법화는 아직 논의할 시기가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교직의 길을 함께 걷던 전직 동료들에 대한 연민과 교직내부에 존재하는 갈등에 대한 고민을 초월하여,엉거주춤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 명쾌한 태도를 표출하고 있는 신임교총회장의 의지를 우리는 평가한다. 때마침 범 재야세력이 정치적 입장을 정리하여 한 정당과 연합하고 본격적인 정치투쟁을 벌이려 한다.이 범재야세력의 핵심구성원인 전교조와 그 해직교사들의 복직을 요구하는,이른바 서명교사들이 정치적 혼란기를 틈타 의도적으로 세를 확장시키고 있는 때이기도 하여 여러가지로 긴장스런 시기에 선출된 신임 교총회장이 보여주는 명확한 태도를 많은 온당하고 성숙한 시민들은 다행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교직자단체가 정치적 시각에 노출되는 일은 그 자체가 바람직하지 못하다.이렇게 된 것에는 정치계절이면 어용시비를 벌이던 전시대의 부정적인 유산의 탓도 있다.어느 쪽도 청산되어야 할 일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시대가 끼친 이같은 정치적 상흔을 극복하고 우리의 교육을 바로잡는 본래의 사명과 교직자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일을 충실히 이뤄내도록 거듭 당부한다.특히 최근에 이르러 눈에 띄게 상승된 교총의 위상과 교육계에 공헌해온 새 교총회장의 역량을 아는 우리로서는 많은 기대와 신뢰로 환영의 뜻도 함께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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