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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서울신문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마지막 여름방학/김수은

    [2019 서울신문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마지막 여름방학/김수은

    “아이구, 우리 이쁜 오수리 밥 먹으끄나. 잘 먹고 쑥쑥 커야제.” 오소리 밥그릇에 우유를 부어주는 할머니 표정이 내 눈에 아주 익숙하다. 내 엉덩이를 토닥이면서 했던 말과 표정이 똑같았다. 어쩜 저럴 수가. “오수리가 아니라 오소리거든요.” 나는 퉁퉁거리며 소리쳤다. 온통 새끼 오소리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할머니는 내 말도 못 듣는 눈치다. 할머니는 동물들에게 먹이를 줄 때도 그냥 주는 법이 없다.“오메, 꿀꿀이 검은 털이 아주 멋지구만. 코는 또 얼매나 튼튼한지 몰러. 저기 꼬꼬들한테 가서 마늘밭에는 들어가면 안 된다고 해라이.” 여름방학 동안에 엄마와 아빠가 해외 출장을 가게 되어 나는 할머니 집으로 내려왔다. 어려서부터 엄마가 출장 갈 때면 제일 먼저 달려온 사람은 할머니였다. 이번에도 할머니가 올라올 줄 알았다. 그런데 할머니는 새끼 오소리를 돌봐야 한다고 했다. 방학이 시작된 날 우리 가족은 할머니 집으로 향했다. 할머니 집은 마을과는 좀 떨어져 있는 산자락 아래에 있었다. 할머니 집에 도착한 엄마 아빠는 뒷산 너럭바위를 가리키며 빠르게 말했다. “저 산은 절대로 혼자 가면 안 된다. 늑대가 있는 산이야!” “어디를 가든 할머니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거다. 알았니?” 아빠는 황구를 꼭 데리고 다녀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할머니가 나를 반가워한 건 딱 첫날뿐이었다. 다음 날부터 할머니의 관심은 동물들에게로 옮겨갔다.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새끼 오소리였다. 나는 매일 할머니의 심부름, 그러니까 동물들의 시중을 드느라 바빴다. 내가 할머니 집으로 오겠다고 한 건 무엇보다 할머니의 무한 사랑 때문이었다.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먹는 것은 물론 오줌을 싸는 것까지 장하다고 손뼉을 쳐주던 할머니의 요란한 칭찬. 그리고 그때마다 한없이 부풀어 오르던 기분 좋은 느낌을 말이다. 가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경쟁을 해야 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나중에 시골에 가서 할머니랑 살 거라며 큰소리를 쳤다. 그런데 새끼 오소리 하나 때문에 인기 서열에서 밀려나 버리다니. 이럴 바엔 집이 더 나을 뻔했다. 인터넷 게임도 하고, 마트에 들락거리며 달고 시원한 것들을 입에 물고 지내다 보면 한 달이 금방 갈 텐데. 그래도 초등학교 마지막 여름방학인데, 뭔가 좀 아쉬웠다. 무엇보다 영원할 것 같았던 내 후원자인 할머니의 마음이 영 돌아설 것 같지 않다는 절망감이 더 컸다.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꼼짝없이 엄마 아빠가 집에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안개로 둘러싸인 산은 해가 떠오른 다음에야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바람이 다니는 길 위로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아침이면 계곡으로 크고 작은 새들이 모여들었다. 나는 텅텅, 계곡을 울리는 새의 날갯짓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할머니의 하루는 동물들의 먹이 만드는 일부터 시작됐다. 맨 처음에 할머니가 살피는 건 새끼 오소리였다. 그 다음은 황구, 양양이, 돼지, 닭들 순이었다. 또 울타리 밖 후박나무에 사는 박새도 있었다. 할머니는 후박나무 잎이 햇빛을 받아 반짝일 때쯤이면 울타리 앞에서 휘익, 길게 새소리를 냈다. 박새들이 날아와 할머니 손에서 곡식을 물어 가면, 닭들도 샘 부리듯 꼬꼬댁거리며 뛰어올랐다. 파닥거리는 닭들의 짧은 날갯짓은 정말 우스웠다. 할머니는 깔깔대고 웃는 나를 보며 검지를 세워 입에 댔다. “쉿, 닭들은 니가 흉보는 줄 안다니께.” 오늘도 어김없이 할머니의 칭찬이 이어졌다. “횡구는 먼 데서 나는 소리도 겁나게 잘 듣지야? 횡구가 있어서 얼메나 든든한지 몰러. 저 살랑거리는 꼬리 좀 봐라이.” “황구라고요, 횡구가 아니라니까요.” “우리 양양이는 냄새도 기가 막히게 잘 맡지야. 이렇게 동그랗고 이쁜 눈으로 창고에 쥐가 들어가는지 잘 봐라이.” “꿀꿀아, 네 목소리는 아주 힘차고, 씩씩해. 들으면 힘이 나는 소리여, 고맙다 고마워.” 할머니는 어느 녀석에게나 맞는 말을 잘도 찾아냈다. 아마 온종일 칭찬을 해도 지치지 않을 것 같았다. 녀석들도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면 꼬리를 흔들며 뛰어왔다. “저 오소리 새끼는 어디서 왔어요?” “두어 달 전쯤 산에 갔다가 길을 잃고 헤매는 놈을 주워 왔제.” “어쩌다 새끼 혼자서요?” “그때가 어스름 했제. 그냥 뒀다가는 큰 짐승에게 먹힐 것 같았응께.” “어미가 안 찾아요?” “그라제 어미가 찾고말고. 우리 손자 야무진 것 좀 봐라. 눈맹울은 또 얼매나 또렷또렷한지 몰러.” 칭찬은 분명 할머니 특기였다. 나는 할머니의 말을 들으면 자신감이 차올라 고개가 절로 세워지면서도 슬쩍 긴장됐다. 일을 시키기 전에는 늘 칭찬부터 쏟아내는 할머니의 실체를 열세 살이 되어서야 알다니. 아무튼, 할머니의 말은 거절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이제부터는 오수리에게 지렁이를 멕여야 쓰것는디. 우리 손주가 지렁이 좀 잡아 봐야제?” 이렇게 해서 내가 하루에 하는 일 중 지렁이 잡는 일이 하나 더 늘어나 버렸다. 할머니는 오소리 코가 아주 민감해서 냄새로 자기 식구들을 알아본다고 했다. 어미가 새끼를 찾을 수 있게 다음 주부터는 산에 데리고 다닐 거라는 계획도 세워 놓고 있었다. 주둥이가 뭉툭해서 돼지를 닮은 오소리 새끼는 인형같이 귀여웠다. 특히 얼굴의 검고 흰 줄무늬는 마치 물감으로 그려 놓은 것 같았다. 자라면 크고 날카롭다는 발톱도 아직은 만져 볼만해서 사납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내가 깡통을 손에 들고 나가면 황구와 닭들이 앞장을 섰다. 황구는 닭들이 땅을 헤쳐 놓으면 나를 향해서 짖어댔고, 나는 그렇게 지렁이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새끼 오소리가 지렁이를 먹기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나자 할머니가 나와 황구를 불렀다.  “이제 오수리를 돌려보내야 쓰것는디.”  “어미가 어디에 있는데요?”  “그거는 모르제.”  “네?” “지금 에미가 새끼를 엄청나게 찾을 것 아니여, 에미가 새끼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안 쓰것냐?”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새끼 냄새를 맡아야 에미가 새끼를 찾아올 것 아니여.”  “아하, 그렇겠네요.”  “그란께, 이제부터 네가 새끼를 데리고 매일 저기 너럭바위까지는 다녀와야 쓰것다.”  “네? 엄마가 산은 위험하다고 했는데요.”  “괜찮어, 횡구가 있잖냐.”  할머니는 아침이 되자 배낭에 새끼 오소리를 담았다.  “너럭바위까지 가는 도중에 서너 번은 오수리를 꺼내서 오줌을 누게 해라이. 그래야 에미가 새끼 냄새를 맡을 것이여. 오수리는 뎀비지만 않으면 위험하지 않을 거여. 그래도 새끼를 보면 흥분할 수가 있응께, 냄새만 흘리고는 빨리 데리고 와야 쓴다. 횡구, 너는 주변 냄새를 잘 맡어야제.”  할머니는 내 키만 한 막대기를 건넸다.  “오수리는 야행성이라 낮에는 잘 돌아다니지 않제. 그래도 만일 오수리가 뎀비기라도 하면 이 막대기로 내리쳐라. 오수리는 꾀가 많아 먼저 죽은 체할 것이여. 그때는 지체 말고 도망을 쳐야 헌다.” 나는 황구랑 산으로 향했다. 우리는 계곡에 늘어진 왕 버드나무를 지나 붉은 소나무 앞에서 한 번 쉬었다. 새끼 오소리는 부지런히 주변을 돌아다니며 냄새를 맡고 오줌을 쌌다. 양양이는 바위 위에서 우리를 지켜보며 따라왔다.  우리가 계곡을 벗어나 산 중턱까지 왔을 때였다. 길이 두 갈래로 나뉘었다. 황구가 어느 길로도 성큼 나서지 않아 우리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너럭바위는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길은 바위를 피해 산봉우리를 돌아서 나 있는 길과 바위 사이로 나 있는 길로 나뉘어 있었다.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 나는 새끼 오소리를 배낭에서 꺼냈다. “야 인마, 너희 가족이 사는 굴이 어디야? 너 때문에 우리가 이게 뭔 고생이냐고.” 새끼 오소리는 우리 주변만 뱅뱅 돌뿐 더 나가지는 않았다. 갑자기 황구가 하늘을 보고 컹컹 짖어댔다. 박새 떼였다. 황구가 반갑다는 듯 펄쩍 뛰었다. 박새가 무리 지어 바위로 난 길 위에서 뱅뱅 돌았다. 우리는 박새를 따라 다시 걷기 시작했다.  너럭바위까지 갔을 때는 해가 머리 위에 떠 있었다. 황구가 너럭바위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바위 사이 여기저기 냄새를 맡던 황구가 갑자기 바위 밑을 향해서 짖기 시작했다. 바위 밑은 무성한 풀로 가려져 있었다. 황구가 바위 밑에서 짐승들 냄새를 맡은 게 분명했다. 나는 등이 오싹해졌다.  산속은 빨리 어두워진다는 할머니 말이 생각나 곧장 돌아섰다. 내려오는 길은 갈 때보다 훨씬 쉬웠다. 내려오면서 보니까 할머니는 계곡 아래 냇가에서 고둥을 잡고 있었다. 우리를 발견한 할머니는 허리를 펴고 손뼉을 짝짝 치며 두 팔을 크게 벌려 반겼다.  “우리 손자가 오늘 큰일 해브렀네이. 니는 이 일이 얼매나 큰일인지 아적은 모를 것이여. 암은 큰일이고말고.”  나는 또 힘든 것도 다 잊어버리고, 황구가 바위 밑 굴을 냄새로 찾아낸 일, 양양이가 멀리서 우리를 든든하게 잘 지켜준 것, 박새가 길 안내를 얼마나 잘했는지를 신이 나서 떠들었다.  “맞어, 바로 그것이여. 무슨 일이든 다 힘을 합해서 한 거라는 것을 잊지 말어야 혀!”  이틀 후, 두 번째 산을 오를 때는 몸이 훨씬 가벼웠다. 나는 배낭을 지고도 황구를 따라 빨리 걸을 수가 있었다. 새끼 오소리도 자기 오줌 눈 자리를 잘도 찾아냈다.  사흘 후, 우리는 세 번째 길을 떠났다. 바위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전에 왔던 길이 아닌 곳을 골라서 새끼 오소리를 내려놓았다.  “오소리, 너도 이제 염치가 있으면 너희 가족이 사는 굴을 좀 찾아봐라.”  황구는 새끼 오소리가 움직이면 어쩔 줄 몰라서 낑낑거리며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멀리서 양양이도 야옹거렸다.  다음 날 할머니는 마루 위에 있던 새끼 오소리 집을 담장 옆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오소리 집 문을 살짝 열어 두었다.  어스름 해 질 무렵이었다. 박새가 유난히 시끄럽게 짖어댔다. 할머니는 집안 곳곳에 있는 불을 모두 끄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 손님이 오실지도 모른다. 혹시 무슨 소리가 나도 밖에 나오지 마라이.”  나는 어둠 속에서 창문으로 오소리 집을 지켜봤다.  계곡에서부터 시작된 어둠은 산 전체를 휘감았다. 어둠을 뚫고 마침내 오소리 가족이 찾아왔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였다. 오소리들은 오소리 새끼의 똥구멍을 서로 비벼가며 냄새를 맡았다. 가족 확인이 다 끝났는지 오소리는 새끼를 데리고 집을 떠났다. 어둠 속이었지만 내 눈에는 똑똑히 다 보였다.  오소리가 집을 떠난 그 날 밤은 참으로 이상했다. 황구나 양양이, 닭과 돼지가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은 것이다. 다음 날 아침이 됐을 때 오소리 집은 텅 비어 있었다. 돌담 안으로 빛이 넘쳐 들었다. 나와 황구는 목을 길게 빼고 빈 오소리 집을 들여다보았다. 덩그러니 비어있는 새끼 오소리 밥그릇에 아침 햇살이 가득 찼다.  나는 울타리 앞에 서서 한참 동안 산을 올려다보았다. 햇빛이 계곡으로 흘러들어 물과 만나고 있었다. 쏴,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어댔다. 나도 나무가 되어 두 팔을 벌렸다. 새소리가 바람을 타고 계곡 가득 울려 퍼졌다.  그 후론 할머니는 오소리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해가 질 때면 할머니는 여전히 손에 모이를 쥐고 울타리 앞에 서서 새소리를 냈고, 박새는 후박나무와 할머니 손 위를 오가며 날았다.  아침마다 할머니의 칭찬은 이어졌지만, 나는 전처럼 그렇게 기분이 들뜨거나 하지는 않았다.  엄마가 전화해온 건 방학이 끝나기 일주일 전이었다.
  • [이호준의 시간여행] 고무신이 품은 추억

    [이호준의 시간여행] 고무신이 품은 추억

    얼마 전 어느 모임에서 한 여성의 신발이 화제가 됐다. 그녀는 그날 하얀 남자 고무신을 신고 왔다. 요즘도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니….그 자리에 있던 모두들 조금은 낯설고 신기한 눈치였다. 하지만 고무신을 신은 그녀는 당당했다. 그날의 패션과도 절묘하게 어울렸다. 덕분에 대화는 자연스럽게 어릴 적 신던 고무신 이야기로 흘러갔다. 고무신 하나에 얼마나 많은 추억이 들어 있는지 무용담 늘어놓듯 온갖 이야기가 쏟아졌다. 고무신만큼 ‘국민 신발’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신이 또 있을까? 산업화가 궤도에 오르고 너도나도 운동화나 구두를 신을 때까지 대개 고무신을 신었다. 고무신이 이 땅에 들어온 건 1920년대라고 한다. 첫선을 보였을 때는 복음처럼 반가웠을 거라고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가죽신이나 비단신을 신을 수 있었던 일부 계층을 제외하면 짚신이나 나막신이 전부 아니었던가. 한없이 질기고 비가 내려도 새지 않을뿐더러 짚신에 비하면 어느 정도 방한 기능까지 갖췄으니 얼마나 대단해 보였을까. 물론 처음부터 아무나 신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널리 보급된 1960~1970년대까지도 고무신 한 켤레 값은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찢어지면 당연히 기워서 신는 것으로 알았다. 꿰매는 것으로 감당이 안 될 정도가 되면 장에 들고 나가 때워서 신었다. 그런 과정이 반복되고서야 마지막으로 엿장수 손에 넘어갔다. 고무신은 폐타이어가 주원료였는데, 생산의 진입 장벽이 그리 높지 않은 편이었다. 왕자표, 말표, 범표, 기차표, 타이어표, 진짜 다이아…. 손꼽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상표가 쏟아져 나왔다. 그만큼 잘 팔렸다. 흰 고무신은 표백제를 첨가해서 만들었는데 검정 고무신보다 비쌌다. 고무신은 아이들에게 좋은 장난감이었다. 뒤축을 앞쪽에 구겨 넣고 모래밭에서 밀고 다니면 그게 자동차였다. 개미나 딱정벌레를 태워 냇물에 띄우면 배가 되었다. 내에서 놀다가 물고기를 잡으면 신발 안에 보관했고, 꽃 속의 벌을 신발로 덮쳐서 뱅뱅 돌리기도 했다. ‘신발치기’라는 놀이도 있었다. 어쩌다 신발을 잃어버린 아이는 ‘칠칠치 못한 녀석’이 되어 눈물을 쏟을 만큼 혼났다. 같은 디자인으로 크기만 다르게 찍어 내는 고무신은 네 것 내 것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웃지 못할 일들도 자주 생겼다. 어른들은 잔칫집이나 초상집에 가기 전에 신발에 표시부터 했다. 불에 달군 송곳으로 작은 구멍을 내거나, 실로 꿰매 X자를 표시하기도 했다. ‘양심불량’인 사람은 헌 고무신을 신고 가서 새 고무신을 신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 학교도 예외는 아니어서 신발장 앞에서 내 신이니 네 신이니 싸우기도 했다. 특히 시골 아이들은 새 신을 사거나 새 옷이라도 얻어 입으면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했다. 누가 볼 때만 신발을 신고 혼자 걸어갈 때는 벗어서 들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다. 빨리 달릴 땐 벗겨지기 일쑤여서 벗어서 손에 쥐거나 허리춤에 매달고는 했다. 오래전부터 고무신을 구경하는 게 쉽지 않다. 절 같은 곳에서는 여전히 필수품이지만, 국내에서 생산하지 않기 때문에 중국산이 들어온다고 한다. 편하고 예쁜 신발이 넘쳐나는 세상에 고무신을 새삼 그리워할 일이야 있을까. 하지만 비 오는 날 찌걱거리며 걸어갈 때의 그 묘하던 느낌, 붕어를 잡는다고 냇물을 막고 고무신으로 물을 퍼낼 때의 그 신나던 손놀림이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바지 훌훌 걷어붙이고 고무신 신고 가르마처럼 길게 뻗은 논둑길을 걷고 싶은 마음은 나이가 많아질수록 그 무게를 더한다.
  • 뭍이 그리워 갯골 타고 온, 바다… 섬이 그리워 바다 물들인, 노을

    뭍이 그리워 갯골 타고 온, 바다… 섬이 그리워 바다 물들인, 노을

    바닷물이 갯골을 타고 육지를 드나듭니다. 갯벌 위로 게가 기어다닙니다. 서해 어느 해안가의 모습이 아닙니다. 경기 시흥 도심에 자리한 갯골생태공원이 보여 주는 풍경입니다. 잠깐, 갯벌이 아니라 갯골입니다. 갯골은 갯벌 사이를 뚫고 난 물고랑을 말합니다. 서해 바닷물은 하루 두 번, 갯골을 따라 시흥 땅을 적십니다. 바다가 땅을 그리워한 나머지 땅으로 향하는 길을 낸 것만 같습니다. 밀물과 썰물이 드나드는 갯골에는 농게, 방게, 흰뺨검둥오리, 칠면초가 어울려 살아갑니다. 겨울이 오면 도요물떼새를 비롯해 수많은 철새가 이곳에서 먹이를 찾고 숨을 돌리겠죠. 갈대의 황금빛, 물 빠진 갯골의 회색빛, 칠면초의 불그스름한 빛. 자연이 풀어놓은 물감에 눈과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소금기 머금은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곳, 갯골생태공원에서 생동하는 갯골을 보았습니다.#도심에 난 바닷길, 갯골생태공원 갯골생태공원이 어떤 곳인지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시흥갯골을 이해하는 게 먼저다. 시흥갯골은 서해에서 밀려온 바닷물이 시흥 육지를 파고들며 낸 물길이다. 바닷물이 들어왔다 빠져나가기를 수천수만 번. 물이 쓸고 간 곳은 움푹 팼고 양옆에는 진흙이 쌓여 굽이굽이 급경사를 이뤘다. 이곳은 경기도에서 유일하게 내륙 깊숙이 들어와 있는 내만갯벌이기도 하다. 갯골생태공원은 갯골이 감싸 안은 공원이다. 염전체험장, 소금창고, 갯골생태학습장, 탐조대, 사구식물원 등 볼거리가 다채롭다. 사람이 쉬어 가는 공원은 게, 염생식물, 철새 등 다양한 동식물의 보금자리다. 시흥갯골 일대는 보존 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 국가 해양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됐다. 갯골생태공원에 우리가 보고 알고 지켜야 할 풍경이 있다. 생태공원은 부지가 넓지만 탐방코스가 나뉘어 있어 일정에 맞춰 움직이기 편하다. 흔들전망대, 염전체험장처럼 공원에서 꼭 들러야 할 곳을 추린 30분 코스부터 공원 인근의 자전거다리까지 다녀오는 3시간 코스까지 다양하다. 물론 갯골을 따라 발길 닿는 대로 걸으며 풍경을 완상하는 것이 제일이다.#천일염 만들어 보는 염전체험장 생태공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염전체험장이다. 시흥시 내만으로 흘러드는 바닷물은 예부터 이 지역에 염전이 발달한 이유다. 1934년, 시흥갯골이 있는 경기만 일대에 우리나라 최대 규모 염전 중 하나인 소래염전이 만들어졌다. 148만㎡(약 45만평) 규모의 염전은 한때 우리나라 소금 생산량의 30%를 도맡았다. 일제의 야욕은 우리 땅에서 난 소금을 우리가 맛보지 못하게 했다. 일제는 소래염전에서 생산한 소금을 수인선과 경부선 열차로 부산항에 옮긴 후 일본으로 실어 갔다. 해방 이후에는 염전의 운영 주체가 국가에서 민간으로 바뀌었다가 소금이 과잉 생산되며 1996년 폐염전이 됐다.생태공원에는 80여년 역사의 소금창고 2채와 체험에 쓰이는 염전이 남아 있다. 염전체험장에서는 햇빛에 증발한 소금을 모아 천일염을 만드는 과정을 체험할 수 있다. 소금이 수북한 염전 체험장에 아이들이 둥그렇게 둘러서 있다. 밀대를 손에 쥐고 흩어진 소금을 한가운데로 그러모은다. 맨발로 소금도 밟아 본다. 도시에 사는 아이들이 느껴보지 못한 감각, 경험하기 드문 체험이다. #자연과 마주하는 갯골생태학습장 소금창고 뒤편, 갯골생태학습장은 갯골생태공원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공간이다. 갯벌 위 나무 데크 관찰로를 따라 갯골에 사는 생물과 눈을 맞출 수 있다. 농게, 방게 같은 게 종류가 있는가 하면 칠면초, 퉁퉁마디처럼 소금기 있는 땅에서 자라는 염생식물 군락도 있다. 갯벌에서 먹이를 찾는 철새들도 해마다 시흥갯골에 들른다. 갯골은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 저어새의 훌륭한 먹이터이자, 남반구에서 겨울을 나고 북반구에서 번식하려 매년 1만 5000㎞가 넘는 거리를 비행하는 도요물떼새에게 중요한 중간 기착지다.크고 붉은 집게발을 가진 농게 수컷이 갯벌 ‘구멍’에서 나타나자 아이들은 게 설명문을 절로 읽는다. 책이나 영상 콘텐츠가 따라잡지 못하는 생생한 자연 학습이다. 갯벌에 있는 크고 작은 구멍은 게와 지렁이 같은 저서생물이 사는 집, 서식굴이다. 갯골에 밀물이 차면 굴속에 들어가 있다가 썰물이 돼 물이 빠지면 굴 밖으로 나와 먹이활동을 한단다. 풀에도 단풍이 든 걸까. 1년에 7번 색깔이 바뀌어 칠면초라고 불리는 염생식물은 가을이면 붉은 자줏빛을 뽐낸다. 진흙투성이 갯벌에서 어쩜 이리 고운 물이 들었을까 너도나도 감탄한다. 사람 키만 한 갈대도 무성하다. 가을바람에 자기들끼리 부대끼는 소리가 시골에서 듣던 싸리 빗자루 소리 같다. 갯골생태학습장을 내딛는 걸음걸음에 가을이 따라붙는다.#바람 불면 흔들… 22m 높이 흔들전망대 공원의 랜드마크는 22m 높이의 흔들전망대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게 설계돼 흔들전망대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구조적으로는 안전하다. 전망대는 갯골 바람이 휘돌아 오르는 느낌을 나타내고자 나선형의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계단을 빙글빙글 돌아 6층에 오른다. 꼭대기에 이르자 도심에서 볼 수 있으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던 장면이 펼쳐진다. 자연과 사람이 스스럼없이 어울린 풍광이다. 물 빠진 갯골이 공원을 휘감아 돌고, 사람들은 억새 사이에서 사진을 찍는다. 아이들이 잔디밭에서 숨차게 뛰어노는 동안, 왜가리와 청둥오리는 갯골에 무리 지어 쉰다. 동식물에게 살 곳을 내어주고 사람을 불러 모으는 갯골. 갯골생태공원에 살아 숨 쉬는 자연이 있다.#신석기시대로 떠나는… 오이도 선사유적공원 1960년부터 오이도 곳곳에서 패총이 발견됐다. 안말패총, 소래벌배총, 신포동패총 등 오이도 전역 6개 지점에서 총 12곳이 발견됐으니 섬 전체를 유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패총은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가 무덤처럼 쌓인 유적을 말한다. 그뿐 아니다. 신석기인들의 집터, 빗살무늬토기, 돌을 그물에 매달아 물속에 가라앉게 해 물고기를 잡는 데 사용한 어망추, 식기 등의 유물도 발굴됐다. 신석기시대부터 오이도에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다. 이로써 시흥 오이도 유적은 중부 서해안에서 신석기시대 패총을 대표하는 유적이 돼 2002년 사적 제441호로 지정됐다.까마득한 선사시대 생활상을 직접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곳이 있다. 오이도 뒤편에 자리한 시흥 오이도 선사유적공원이다. 공원은 43만㎡(약 13만평) 규모의 선사유적지 부지를 단장해 올해 4월 문을 열었다. 얕은 구릉을 오르내리며 패총전시관, 억새길, 선사체험마을, 야영마을 등을 산책하듯 둘러볼 수 있다. 공원의 하이라이트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재현한 선사체험마을이다. 잔디밭에 갈대로 엮은 움집 여러 채가 늘어서 있는데 원뿔형의 무주식 움집부터 시흥 능곡동 움집까지 당시 주거 형태를 완성도 있게 재현했다. 밭을 갈아 농사짓는 사람, 빗살무늬토기를 굽는 사람, 움집에서 사냥한 고기를 손질하는 사람도 생생한 조형물로 되살아났다.#해·바다· 갈매기·바다냄새· 낙조… 일몰 명소 오이도 시흥 서남쪽의 섬이었던 오이도가 육지가 된 지 100년이 다 돼 간다. 때는 일제강점기인 1922년, 염전 개발을 위해 오이도와 안산시 사이에 제방을 쌓으며 오이도는 육지가 됐다. 누군가는 오이도에 볼 것이 뭐가 있냐고 한다. 그럼에도 오이도가 서울 근교의 당일치기 여행지로 끊임없이 거론되는 건 바다와 낙조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글 이수린(여행작가) 사진 장명확(사진작가) ■여행수첩(지역번호 031) →가는 길 : 서울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서해안고속도로를 지나 제3경인고속화도로를 이용한다. 서해안고속도로 도리터널로 들어가 제3경인고속화도로를 따라가다 연성IC에서 ‘신천동, 시흥시청’ 방면으로 우회전한다. 하중교차로에서 ‘부천, 시흥IC’ 방면으로 우회전하고 하중교차로에서 좌회전하면 갯골생태공원이다. →맛집 : 오이도 ‘빨강등대’에서 함상전망대로 가는 길가에 활어회, 조개구이, 바지락칼국수 등을 파는 식당이 즐비하다. 조개포차(010-7338-7338)는 모차렐라치즈가 듬뿍 올라간 조개구이를 무한으로 낸다. 자연석돌판생오겹살(507-6670)에서는 돌판에 오겹살, 오리훈제고기, 전복, 새우, 주꾸미를 한데 구워 먹을 수 있다. →잘 곳 : 갯골생태공원에서 차로 5분 거리에 갯골캠핑장(488-6998)이 있다. 부티크호텔K 오이도점(319-9598)은 서울 지하철 4호선 오이도역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다.
  • [신가영의 장호원 이야기] 거미들과 귀곡산장

    [신가영의 장호원 이야기] 거미들과 귀곡산장

    어스름히 새벽이 오면 우렁찬 장닭이 아침을 깨운다. 졸음을 눈꺼풀에 달고 나선 적막한 마당. 울타리 너머 마을은 벌써 하루를 시작해 부산하다. 마당에 나서면 제일 먼저 만나는 피튜니아. 요즘 꽃을 제일 많이 올리는 채송화, 아직 졸음에서 벗어나지 못해 입을 꼭 닫고 있다. 참 지독한 여름이었다. 아침이면 만나던 거미줄이 요즘 보이지 않더니 무심코 걷다 머리카락에 휘감기고 얼굴에 붙어 버린다. ‘이누무 거미줄.’닭장으로 가는 길 멀지도 않은데 만나는 거미만 해도 여럿이다. 거미줄 만들어 길목을 막는 건 주로 왕거미들. 나무와 나무 사이, 벽과 기둥 사이, 지주대와 넝쿨 사이 등등 공간만 있으면 멋진 그물들을 만들어 낸다. 그중 산왕거미가 만든 거미줄은 가장 크고 놀랍다. 높은 밤나무 가지에서부터 고추밭 지주대까지 길게 줄을 내어 건들면 쨍 소리 날 듯 팽팽하고 짱짱했다. 방패연처럼 커다란 장막을 친 그물이 아침 햇살을 만나 반사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었는데 작년에 만난 풍경이다. 올해는 더위 탓이었을까 그렇게 큰 거미줄은 보이지 않았다. 제일 흔하게 만나는 건 호랑거미와 무당거미들이다. 그들은 고추밭 사이에 그물을 치고는 모기나 파리뿐만 아니라 때론 메뚜기를, 날개 떨어진 나비도, 길 잃은 말벌도 거미줄로 칭칭 감아 놓는다. 요즘 제일 흔한 것이 매미인데 걸린 건 본 적이 없다. 너무 시끄러워 그러려나. 구석진 곳에는 얼기설기 먼지처럼 불규칙적인 공간 만드는 풀거미, 유령거미들도 보인다. 작은 거미들이라 유심히 보지 않으면 슬쩍 사라지고 만다. 거미줄을 이용하지 않는 것도 많은데 잡초를 매다 보면 달아나기 바쁜 늑대거미들, 예쁜 꽃 속에 숨어 있다가 다가오는 벌레들을 잡아먹는 꽃거미들이 그렇다. 괴기하기도 하고 때론 화려한 그들을 발견하는 것, 텃밭과 화단을 돌보는 즐거움 중의 하나다.때로 귀곡산장이라 한다. 끈끈한 거미줄에 걸리면 즐거울 리 없으니 빗자루로 걷어내야 하건만 그냥 두니 듣는 핀잔이다. 작정하고 걷어냈던 닭장 앞에는 더이상 거미가 줄을 늘이지 않는데 말이다. 도시에 살았다면 서둘러 치웠겠지만 온갖 벌레가 암약하는 시골에서 그들을 잡아먹는 거미는 흉측한 곤충이 아니다. 함께 사는 고양이들이 잠자리며 나비, 나방에 쥐와 뱀, 새들까지 잡아 오지만 거미 잡아 오는 건 아직 보지 못했다. 시시할 수도 있겠고 만만치 않거나 도망을 잘 치니 그런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여전히 실을 잣고 있을 그들. 언제 끊어지고 망가질지 몰라도 끊임없이 운명의 그물을 짜며 이어 나가니 그 공덕이 참으로 아름답다. 그들이 이 마당의 주인이고 예술가이다. 화가
  • [민선7기 단체장에 듣는다] “주민 하소연 듣는 구청장 될 것…편중된 복지·문화시설 안배”

    [민선7기 단체장에 듣는다] “주민 하소연 듣는 구청장 될 것…편중된 복지·문화시설 안배”

    “주민이 하소연할 수 있는 구청장, 언제든 항의할 수 있는 구청장이 되고 싶습니다.” 이승로 서울 성북구청장은 22일 구청장실에서 진행된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현장’이라는 단어를 유독 많이 썼다. 현장을 중요시하는 그의 신념은 1995년 30대 중반 처음 구의원이 됐을 때부터 시작됐다. 평범한 주민 누구나 자신의 아이디어, 개선 방안 등을 내놓을 수 있도록 주민이 있는 곳, 삶의 현장을 찾아다니겠다는 게 그의 오래된 약속이다. 민선 7기 성북구청장으로 일하면서도 이 구청장은 ‘이동하는 현장 구청장실’ 등 주민과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창구를 운영할 계획이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선거 소회가 있다면. -정말 많은 표(득표율 64.4%)를 주셨기 때문에 만족의 기쁨보다는 주민들의 기대치에 보답하기 위해 ‘앞으로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까’ 하는 고민이 더 컸다. 무겁고 조심스럽다. 지금까지 열 개의 일을 했다면 이제는 열다섯 개, 스무 개의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제가 순수하게 가진 것 이외의 것(문재인 대통령,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지지)이 많이 작용을 했기 때문에 겸손하게 구청장직을 수행하려고 한다. 앞에 서서 지휘봉을 휘두르는 구청장이 아닌 어렵고 힘들 때 근거리에서 의지하고 하소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유세 기간 동안 가장 많이 들었던 소리가 “구청장과 쉽게 면담할 수 있으면 좋겠다”였다. 구청에 알아보니 구청장 업무가 굉장히 빡빡하다 보니까 사전에 면담 일정을 조정하는 게 힘들다고 들었다. 그래서 주민이 구청을 찾아오는 것보다 내가 주민을 만나러 가야겠구나 생각했다. 매일은 어렵겠지만 동별로 이동하는 현장 구청장실을 운영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선거 기간 중 어려운 점도 있었다. 매우 많은 단체, 관계자가 민원을 제기했다. 그중에는 이기적 요구와 함께 “우리의 요구를 들어 줘야 당선될 수 있다”고 말하는 단체도 있었다. 하지만 표를 빌미로 한 님비(NIMBY)에 대해서는 과감히 반대 의사를 밝혔다. 대신 다른 성북구민의 지지를 받겠다는 각오였다.→우선적으로 처리할 현안은 무엇인가. -전임 김영배 구청장이 워낙 잘했다. 김 전 구청장이 해 왔던 사업 중 공동체 사업, 마을 사회적기업 등 관련 부서와 협의해 승계할 부분은 이어 나가려 한다. 그 밖에 성북구의 고질적인 민원을 우선순위로 처리하려고 한다. 먼저 지역 내 편중된 시설들에 대한 안배가 필요하다. 가령 복지시설의 경우 ‘성북 을’ 지역에 편중돼 있다면 문화공간의 경우 ‘성북 갑’ 쪽에 몰려 있다. 4년 내 빠른 속도로 시설들을 안배하려고 한다. 이 밖에 공공 주차장 문제, 폐쇄회로(CC)TV 문제 등은 추경해서라도 우선적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재개발 문제의 경우 과거 시의원하면서 도시계획관리위원회에서 일해 봤지만, 행정이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은 제한적이다. 6부 능선을 넘어선 곳의 경우 시간을 지체하면 할 수록 조합원들의 부담이 커지기 때문에 행정적으로 최대한 지원을 해서 시간을 단축하려고 한다. 반면 지지부진하게 조합원 갈등이 커지는 곳의 경우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향후 4년간 구 발전 구상은. -크게 세 가지로 사람 중심 가치를 실현하는 주거환경 및 교통체계 개선, 소외 없이 이웃과 행복한 복지·문화 공동체 조성, 활력이 넘치는 살맛 나는 경제도시 구현이다. 주거환경과 교통체계 개선의 경우 유해환경 업소 정비, 내부순환로 월곡 하향 램프 설치, 골목길 안심 프로젝트, 정릉 북악산 생태 탐방로 조성 등 10대 핵심 사업으로 추진하려고 한다. 사람과 숲이 공존하고 교통체계가 개선된 편리하고 안전한 도시에서 성북구 주민들이 질적으로 개선된 주거환경을 체감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 복지·문화 조성은 구체적으로 노인복지관 건립, 건강100세 지원센터 조성, 성북동 근현대 문학기념관 조성 등 10대 사업이 포함된다. 고령화·저출산 극복을 위한 수요자 맞춤형 복지정책 다각화는 물론 생활공간과 밀접한 곳에 체육 문화 활동 증진 인프라를 조성해 전 세대, 모든 계층이 소외 없이 이웃과 즐기고 누리는 행복한 도시를 조성하는 것이 목표다. 경제도시 구현은 창조지식 문화벨트 조성, 가상현실(VR)·증강현실(AR) 제작지원센터 건립, 청년창업 지원, 전통시장 등 골목상권의 활성화, 정릉천 만남의 광장 조성 등이 포함된다. 성북구에 8개 대학이 있는데, 이를 활용해 청년 인재들이 지역에서 미래를 꿈꿀 수 있고 더불어 골목상권이 활성화돼 도시 전체가 활력이 넘치도록 하고 싶다. →문재인 정부에서 지방분권을 강조하는데 향후 가야 할 방향은. -국세를 지방세로 대폭 전환해야 한다. 총 조세 대비 20%인 지방세의 비중을 40%로 확대해 독자적인 재정 운영이 가능하도록 법과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 중앙에서 재원과 권한을 쥐고 있다 보니 지방정부만의 특성을 살리기가 힘들다. 지방분권은 대통령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국회의원들의 의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선출직 지방자치단체장, 구의원들이 국회의원들과 교감하는 게 중요할 것으로 본다. →마지막으로 구민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구청장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오랜 시간 지역에 머물면서 주민과 소통하며 형님처럼, 아저씨처럼 남고 싶다. 마을에 문제가 생겼을 때 주민들이 쉽게 찾아와 자문을 구하는 어른이 되는 게 목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주민과 끊임없이 만나 소통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이승로 구청장은 30대에 2대 지방선거 구의원 무소속 당선…“모든 것은 현장에” 이승로 성북구청장은 1959년 전북 정읍 시골 마을 농사꾼의 2남 4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급격히 기우는 집안을 살리기 위해 학업과 농사일을 병행해야만 했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정읍농림고등학교(현 정읍제일고) 농기계과에 진학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고등학교 시절 늘 반장을 맡았고 동아리에서도 리더를 맡아 활동했다. 이후 생활고로 대학 진학을 미룬 채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식품 유통업에 뛰어들었다. 고향을 떠나 1986년부터 서울 성북구 석관동에서 정치 입문 직전까지 냉동식품 유통업을 하면서 석관동이 제2의 고향이 됐다. 1995년 실시된 제2대 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석관·장위동 지역 성북구의원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당시 30대 중반으로 6명의 후보 중 가장 젊은 후보로 성북구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그가 초선의원으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민생현장’이었다. 민원이 발생하면 현장에서 주민의 이야기를 듣고 일의 해결 과정을 주민에게 소상히 설명했다. 문제 해결도 중요하지만, 주민이 원하는 건 자신들의 의견과 주장이 정당한 절차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그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초선 구의원 당시 스스로 다짐한 ‘모든 것은 현장에서’라는 약속을 지금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두 번의 구의원 이후 2002년 서울시의원, 2006년 성북구청장 등에 도전했지만 낙선했다. 2007년 당시 정동영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 선거캠프에서 일하기도 했다. 2012년 건강진단에서 위암 2기라는 진단을 받았지만, 1년여의 항암치료 기간을 견디고 암을 극복해 냈다. 이후 54세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서울시의원이 됐으며 뉴타운 사업이 해제된 장위 13지구를 도시재생사업에 포함시키는 등의 현장 정치로 주민의 호응을 얻었다.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 밤새 32㎞ 걸어 첫 출근하던 흑인 청년에 건네진 선물은

    밤새 32㎞ 걸어 첫 출근하던 흑인 청년에 건네진 선물은

    미국 앨라배마주 버밍엄 근처 시골 동네 홈우드에 사는 흑인 청년 월터 카는 이삿짐을 옮겨달라고 부탁한 고객 집으로 첫 출근하는 날 공교롭게도 자동차가 고장 났다. 버밍엄의 고객 집까지는 32㎞ 거리였는데 그는 첫 출근 날 새벽 일찍 도착하려고 밤새 걷기로 했다. 도중에 경찰관들이 수상쩍어 말을 붙였는데 그의 사연에 감명 받아 아침까지 사먹이고 그를 자동차에 태워 데려다줬다. 이 얘기는 소셜 미디어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첫 고객이었던 제니 라미는 페이스북에 지난 13일(이하 현지시간) 아침 6시 30분 초인종이 울리는 바람에 부부가 일어났다고 털어놓았다. 현관 앞에는 카와 경관들이 함께 서 있었다. 원래 걸으면 아침 8시쯤 도착할 작정이었는데 경관들이 태워주는 바람에 동료들보다 일찍 도착한 것이었다. 경관들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부부는 정말 놀랐다. 동료들이 올 때까지 쉬라고 했더니 카는 빨리 이삿짐 싸는 일을 돕겠다고 했다. 부엌 짐을 챙기면서 라미는 원래 그의 고향이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이며 텍사스주 휴스턴으로 이사 온 뒤 허리케인 카트리나 때문에 살던 집이 완전 파괴됐다는 사연을 듣게 됐다. 그녀는 “월터와 그의 여정을 듣고 얼마나 감동 받았는지 이루 표현할 수가 없다”며 “밤새 걸으며 얼마나 외로웠을까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얼마나 많이 최선의 방법인지 고민했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우리집에 왔고 난 이 젊은 친구에게 완전히 반해버렸다”고 적었다.카의 열성은 값진 보상으로 돌아왔다. 이삿짐 센터 ‘벨홉스’의 루크 마클린 최고경영자(CEO)는 주말에 테네시주에서 손수 운전해 새 직원을 만나려고 주 경계선을 넘었다. 카를 만나 차 한 잔을 나눈 마클린은 2014년형 포드 이스케이프 키를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마클린은 “솔직히 그 친구에 압도당했다. 그가 그날 했던 모든 일은 정확히 우리가 해야 할 일, 진정성과 열성이었다”고 말했다. 카는 “정말로?”라고 되묻고는 키를 감사히 받아들었다. 온라인에서는 카가 자신의 차를 수리하도록 돕자는 모금 운동이 펼쳐져 8000달러가 걷혔다. 그는 12월 대학을 졸업할 예정이다. 해병대에 자원했다가 돌아와 물리치료를 전공하려고 마음 먹고 있다. 그는 16일 AL 닷컴과의 인터뷰를 통해 “오랫동안 기다렸던 첫 직장이었다. 내가 헌신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어떤 도전이든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해주고 싶었다. 사람들이 불가능하게 만들지 않는 한 불가능은 없다”고 강조했다 라미는 카를 힘껏 끌어안은 뒤 “우리 모두의 삶을 통째로 바꿨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바꾸고 영감을 불어넣었는지 월터, 당신은 모를 것이다. 아주 특별한 젊은이고 대단한 일들을 해낼 것이다. 이미 해냈고”라고 격려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이호준의 시간여행] 오일장에서 만나는 추억

    [이호준의 시간여행] 오일장에서 만나는 추억

    지방에 갈 때마다 날짜만 맞으면 무조건 5일장에 들른다. 내게 5일장은 여전히 고향을 상징하는 깃발이고 잃어버린 보물창고다. 그곳에서는 상품만 파는 게 아니라 추억도 판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오래 잊고 있었던 것들을 발견할 땐 반가운 마음에 괜스레 울컥하기도 한다. 대체 저런 걸 누가 살까 싶은데도, 노인들은 신문지만 한 전을 펴놓고 앉아 손님을 기다린다.그 노인을 만난 건 경기도 어느 읍의 오일장에서였다. 자료를 구할 만한 행사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는데 영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읍내 구경이나 하자는 심사로 행사장을 빠져나왔다. 운이 좋았던지 마침 장날이었다.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구경하다 튀김도 사 먹고 싸구려 옷도 한 벌 샀다. 그렇게 흘러간 시간을 뒤지고 다니던 끝에, 길가에 작은 전을 펼쳐 놓은 노인을 보았다. 장터에도 진입하지 못하는 ‘잡상인’인 셈이었다. 전을 폈으니 파는 물건들인 게 분명한데 상품이 너무 초라하여 가격을 묻기도 민망했다. 잡곡 몇 가지에서부터 오그라든 시금치까지 그날 아침 집에서 동원할 수 있는 건 모두 이고 나온 모양인데도 그리 볼품이 없었다. 정작 내 눈길을 잡은 건 잡곡이나 채소가 아니었다. 볏짚으로 엮은 달걀 꾸러미에 시선을 온통 빼앗기고 말았다. 아! 대체 얼마 만에 보는 달걀 꾸러미인지…. 시골에서야 아직 드물지 않은 물건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래전 도시에 편입된 나로서는 뜻밖의 물건을 만난 셈이었다. 노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얼마냐고 물었더니 반색하며 3000원이라고 대답했다. 놓아 먹인 토종닭이 낳은 알이니 몸에도 좋다고 입에 침이 말랐다. 손님은 꾸러미에 반하고 파는 사람은 달걀을 자랑하는 ‘동상이몽’이 이루어진 셈이었다. 한 꾸러미에 3000원이면 하나에 300원인 셈이다. 달걀 값이 폭락했다는 뉴스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비싸다고 손사래를 칠지 모르지만, 내게는 조금도 비싸 보이지 않았다. 누가 뺏을세라 얼른 돈을 치렀다. 운도 좋지, 우연히 들른 장터에서 달걀 꾸러미를 만나다니. 튼튼한 계란판이 넘치는 세상에 아직도 이런 게 있다니…. 초등학교 2, 3학년쯤이었을 것이다. 반 아이 하나가 학교 우물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 담임 선생님이 깊은 곳까지 들어가 건져 올렸다. 다음날 그 아이의 어머니가 선생님께 고맙다고 가져온 선물이 달걀 한 꾸러미였다. 지금으로 보면 좀 생뚱맞아 보일지 몰라도 가난한 집에서 달걀 10개는 그리 쉽게 내놓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달걀은 현금 대우를 받았다. 아이들이 학용품을 사야 하거나 미술 준비가 필요할 때 어머니는 돈 대신 달걀을 쥐여주었다. 평소에 쌀독 깊은 곳에 하나 둘씩 모았다가 열 개, 스무 개가 차면 꾸러미로 만들어 돈을 사거나 필요한 물건으로 바꾸었다. 우물에 빠진 아이의 집에서 가져온 것도 그렇게 아끼고 아껴 모았던 달걀이었을 것이다. 집에서 가장 귀중한 것을 자식의 목숨을 구해준 선생님께 드리고 싶었을 것이다. 5일장에서 만난 노인과 달걀 꾸러미 위에 반백 년 전의 교실 풍경이 겹쳐졌다. 별 일도 아닌데 참 이상했다. 시야가 자꾸 흐려졌다. 그 시간 이후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이 모두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에서 조금도 자라지 않은 아이 하나가 거기 서 있었다. 노인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선 뒤에도 마음은 내내 장터로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 [메디컬 인사이드] 관악산까지…야생진드기의 습격

    [메디컬 인사이드] 관악산까지…야생진드기의 습격

    중증열성혈소판감소증후군 2013년 첫 발병 때보다 7.6배↑ 참진드기 ‘라임병’도 급증 우려 풀 무성한 곳은 무조건 피해야 0.2~10㎜ 크기의 작은 거미류 동물인 ‘진드기’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해충하면 모기나 바퀴벌레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진드기가 옮기는 병이 언론에 가장 많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진드기는 가까이서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동물이기 때문에 실제 경각심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태를 점검했습니다. 진드기가 옮기는 병 중에서 ‘중증열성혈소판감소증후군’(SFTS)이라는 병이 있습니다. 2009년 중국에서 집단 감염 사례가 발생했는데 2011년에야 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를 분리할 수 있었습니다. 2013년 우리나라에서도 첫 감염자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환자 증가 속도가 심상치 않습니다. 2013년 환자는 36명이었는데 지난해는 272명으로 7.6배로 늘었습니다. 이 병은 치사율이 높기로 유명합니다. 병을 주로 옮기는 작은소피참진드기는 ‘살인진드기’라는 악명까지 얻게 됐는데 지난해 사망자만 54명이나 됩니다. 가장 큰 문제는 SFTS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약이 없다는 것입니다. 환자에게는 38도 이상의 고열과 오심, 구토, 설사 등 소화기 증상이 나타나고 심하면 혈뇨·혈변 등의 출혈, 심하면 다발성 장기부전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많은 분들은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 병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곳까지 다가왔습니다. ●관악산에서도 SFTS 진드기 확인 서울대, 전북대, 경북대, 경상대, 충남대 등 5개 대학 공동연구팀이 2015년 서울 관악구 서울대 캠퍼스를 둘러싸고 있는 관악산에서 참진드기를 채집해 조사한 결과 약충과 유충 등 비교적 어린 진드기에서 SFTS 바이러스가 검출됐습니다. 대도시의 등산객이 흔히 다니는 길목도 이제 안심할 만한 공간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질병관리본부가 2013~2016년 SFTS 감염자를 역학조사했더니 환자의 주 연령층은 50대 이상으로 남성은 50~60대, 여성은 80~90대가 많았습니다. 남성은 농부나 임업 종사자, 여성은 텃밭을 관리하는 주부가 많았습니다. 인구 대비 감염자 발생률은 제주 지역이 비교적 높은 편이었습니다. 진드기는 기온이 높은 곳에서 주로 서식하는데 제주 지역에 농업 종사자가 많은 것도 환자 발생에 영향을 미쳤습니다.문제는 기온의 변화입니다. 한반도의 기온이 오르면서 진드기가 점차 북상할 가능성이 높아진 것입니다. 이희일 질병관리본부 연구관은 23일 “환자가 급증한 것을 한 가지 영향만으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진드기가 점차 북상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며 “남부에서 서식하는 진드기 종이 북쪽으로 올라오는 현상이 확인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최근에는 이름조차 생소한 ‘라임병’ 환자도 급증하고 있습니다. SFTS와 마찬가지로 참진드기가 옮기는 병입니다. 항생제를 쓰면 환자 대부분이 회복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해외 유입 환자만 주로 보고된 병입니다. 그런데 2016년에 해외 유입 환자가 9명, 국내 환자가 18명으로 조사됐습니다. 2015년 환자 수가 9명이었는데 3배로 늘어난 것입니다. SFTS와 마찬가지로 국내 기온이 높아지면서 환자 수가 증가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1994년부터 환자가 발생한 ‘쓰쓰가무시증’ 환자도 급증하는 추세입니다. 쓰쓰가무시증은 SFTS와 달리 ‘털진드기’가 옮기는데 인구 10만명당 환자 수가 2001년 도시 2.8명, 농촌 15.9명에서 2016년 도시 11.7명, 농촌 65.6명으로 각각 4배 이상으로 증가했습니다. 심한 열과 오한, 근육통, 두통이 주 증상인데 위험 요인을 분석한 결과 농업(41.0%), 야외 활동(31.4%), 텃밭 및 주말농장(21.2%)으로 나타났습니다. 야외 활동은 주로 등산, 감·밤·도토리 따기, 성묘·벌초 등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주의가 필요합니다. SFTS는 4~11월, 쓰쓰가무시증은 10~11월 진드기 감염이 집중됩니다. 진드기는 전국에 퍼져 있지만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종류에 따른 서식지에 일부 차이가 있습니다. 용태순 연세대 의대 환경의생물학교실 교수는 “참진드기는 산림이 잘 보존된 강원, 경기, 경북, 충남·북, 경남, 제주에 많이 분포하고 털진드기는 경남, 전남·북, 충남에서 많이 발견된다”고 설명했습니다.●습하고 작은 동물 많은 풀숲에서 서식 진드기가 많이 사는 공간, 즉 가장 위험한 곳은 수풀이 많이 우거진 지역입니다. 이 연구관은 “진드기는 건조한 환경에 취약한데 수풀이 우거지면 습해지고 병을 옮기는 숙주동물인 쥐 같은 작은 동물이 많이 살아 생존하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진다”며 “풀이 무성한 지역이라면 무조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습니다. 벌초나 농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들어가야 한다면 긴바지와 긴팔 셔츠를 반드시 챙겨야 합니다. 등산로를 벗어나 풀숲으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한 행동입니다. 용변을 볼 목적으로 정해진 등산로에서 이탈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행동도 피해야 합니다. 이 연구관은 “주변의 위험 요인을 낮추려면 농로와 등산길 주변의 잡초를 깔끔하게 제거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말했습니다. 작업복과 일상복을 구분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작업복을 들고 집에 들어갈 때는 입구에 들어서기 전 반드시 털고 바로 세탁하는 것이 좋습니다. 머리카락, 귀 주변, 팔 아래, 허리, 무릎 뒤, 다리 사이 등에 진드기가 붙어 있지 않은지 꼼꼼히 확인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망자 중 고령자가 많은 것은 만성질환 등으로 병에 더 취약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농촌에 부모 등 가족이 있다면 진드기의 위험성을 강조해야 합니다. 용 교수는 “노인은 병에 대한 저항력, 면역력이 낮아 주로 시골에 환자가 많다”며 주의를 당부했습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김응교 교수 작가의 탄생] 피로 쓴 투명한 詩… 노동자의 고단함을 노래한 ‘일곱 번째 인간’

    [김응교 교수 작가의 탄생] 피로 쓴 투명한 詩… 노동자의 고단함을 노래한 ‘일곱 번째 인간’

    지난달 주헝가리 한국문화원이 주최한 ‘윤동주-요제프 아틸라 시인 심포지엄’을 위해 부다페스트를 찾았다. 다뉴브강을 그윽하게 품고 있는 도시의 야경은 황홀 그 자체였다. 바로크, 아르누보, 네오클래식의 아름다운 건물에 매혹되었지만 부다페스트의 역사가 담긴 영화 한 편이 떠오르면서 감탄사는 이내 한숨으로 바뀌었다. 우울한 일요일이라는 뜻의 ‘글루미 선데이’. 2차 대전 당시 부다페스트에서 일어났던 유대인 학살의 비극을 배경으로 한 영화의 제목은 원래 피아노 연주곡에서 따온 것이다. 1933년 헝가리 피아니스트가 만든 동명의 연주곡은 라디오 전파를 탄 지 두 달 만에 헝가리에서만 180명이 넘게 자살하는 초유의 사태를 초래했다.“13세기에 건축된 왕궁은 몽골군의 습격으로 파괴됩니다. 몽골군이 들어올 때 속수무책이었다고 합니다. 15세기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왕궁을 다시 짓는데 오스만튀르크에 의해 다시 부서져 버리지요. 그 후 헝가리는 좋은 시기를 맞이해요. ‘헝가리 제국’이라고 할 수 있는 시대죠. 1860년부터 1910년까지 가장 화려했던 시기였을 거예요. 그런데 전쟁에 패하면서 영토의 60%쯤을 빼앗겨요. 2차 대전 무렵 히틀러와 힘을 합치면 영토를 회복할 수 있다는 꿈에 러시아 사회주의에 반대하며 히틀러 나치에 붙지요. 당시 의사, 언론인, 변호사 등 사회 지도층의 반 이상을 차지하던 유대인을 학살하기 시작합니다. 헝가리 나치정당, 화살십자당이 주도했지요. 1944년 3월부터 불과 몇 달 사이에 집중해서 학살한 겁니다. 이 시기에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된 110만명 중에 44만명이 헝가리 유대인이라고도 하지요.”주헝가리 한국문화원 김재환 원장의 열정적인 설명을 들으며 왜 이곳에서 집단 자살을 일으킨 전설의 금지곡이 나왔는지 알 수 있었다. 겉으로는 화려한 헝가리 제국의 역사에는 감출 수 없는 슬픔이 많았다. 부다페스트를 찾은 목적 중 하나는 헝가리가 낳은 시인 요제프 아틸라(1905~1937)의 발자취를 밟는 것이었다. 시집 ‘일곱 번째 사람’을 읽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유네스코가 2005년을 ‘요제프 아틸라의 해’로 정할 정도로 세계문학이 기억하는 역사적 인물이다. 행사를 위해 만난 헝가리 시인 커러피아트 오르쇼아는 “아틸라는 헝가리가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라고 말했다. 윤동주와 아틸라는 야만의 시대를 노래한 시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심포지엄에서 만난 헝가리 청중들은 윤동주의 시에서 아틸라를 만나고 싶어 하는 듯했다. 행사에서 심보선 시인이 아틸라의 대표 시 ‘일곱 번째의 인간’에 영향을 받아 쌍용차 해직자들의 자살 행렬을 추모한 시 ‘스물세 번째 인간’을 썼다는 말을 들었을 때 마음이 무척 쓰렸다. 다뉴브 강가에 요제프 아틸라의 동상이 있는데 다 떨어진 셔츠만 입고 오래 굶어 삐쩍 마른 몸을 재현하고 있다. 그가 얼마나 굶주렸는지 그의 시에 자주 나온다.“작은 빵조각이라도/ 아무거라도/ 적선을 구한다.”(개) “친구여, 나는 한 주 내내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칠일 동안) “나는 사흘째 아무것도/ 빵 한 조각도 먹지 못했다.”(온 마음을 다하여) “나는 하루걸러 한 끼 먹는데/ 위궤양은 매일같이 나를 좀먹는다.”(마지막 전투) “나는 어제도 굶었지만/ 악마는 내 대신 배를 채웠다.”(메달) 비참한 표현들인데 이상하게 시큰하기는커녕 담담하다. 아홉 살 때 배급소에서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아침 7시 반까지 밤새 줄을 섰어도 내 차례가 되기 바로 전에 보급품이 떨어졌다는 소리를” 듣고서도 우직하게 배고픔을 견딘다. 빈궁했지만 그는 “나는 곤궁 가운데서도 오만했다!”(소네트)고 할 만큼 자긍심이 있었다. 헐벗은 동상 앞에서 비행기 타고 여기까지 올 수 있는 살 만한 처지인 나는 괜히 미안하다. 굶어 죽을 처지였지만 그는 작가로서 명랑함과 팽팽한 긴장을 놓치지 않았다. “국제적 자질을 지닌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서정시인”이라고 게오르그 루카치가 썼듯이. 아틸라 시집 ‘일곱 번째 사람’을 몇 번이나 곰삭여 읽었는데, 다시 읽고 싶을 정도로 매혹 자체였다. 시집을 읽는 내내 오랜만에 눈시울이 뜨거웠다. 남녀노소 빈부를 가리지 않고 헝가리인이 모두 사랑하는 아틸라의 시는 나에게 큰 의미를 주었다. 그중에 ‘유리 제조공’은 특히 시를 쓰는 자세뿐만 아니라 삶을 대하는 곡진한 태도를 생각하게 했다. 불을 일으키고도가니 속에투명한 용액을 끓여피와 땀을 섞어 넣는유리 제조공.남은 힘으로용액을 붓고는매끈한 판유리를 만든다. 해가 뜨면도시로,작디작은 시골 마을 오두막으로빛을 가져간다. 노동자로 불리기도 하고시인으로 불리기도 하는 그들 -노동자나 시인이나 매일반이긴 하지만.조금씩 피를 써 버리다투명해진다. 그리고미래로 향하는 큼지막한 크리스털 유리창이우리에게 끼워진다. -‘유리 제조공’제목 때문에 이 시는 노동자의 삶을 그린 시로 보인다. 1연은 유리 만드는 공정을 상세히 재현하고 있다. 아침이 되면, 도시와 시골 오두막까지 “빛을 가져간다”는 표현은 따스하다. 그의 삶은 지지리도 고통스러운 가난에 시달리던 노동자의 삶이었다. 비누공장 노동자인 아버지와 세탁부로 일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기소개서’에 이렇게 썼다. “나는 1905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종교는 그리스정교, 아버지는 요제프 아론, 아버지는 내가 세 살 때 헝가리를 떠났다.” 나는 마침내 이해한다메아리치는 대양 건너아메리카로 간 아버지를 이해한다. 고국에서의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희망은 쓴맛을 보았다.아버지는 비누 제조에 신물이 났다. -‘나는 마침내 아버지를 이해한다’에서 그의 아버지는 아메리카로 돈을 벌러 갔고 아틸라는 아동보호국의 주선으로 양부모에게 입양됐지만 아틸라는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돼지치기를 했다. 이후 할머니가 데려가 부다페스트에서 학교를 다녔다. “3학년이 독본에서 훈족 왕 ‘아틸라’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독서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내 이름이 아틸라여서 더 흥미로웠다. 기독교인 이름에는 아틸라라는 이름이 없다고 들었기 때문에 아틸라 왕 이야기가 놀라웠다. 나는 이를 계기로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아틸라가 1937년 입사지원서로 쓴 ‘자기소개서’에는 작가의 탄생을 알리는 시점이 보인다. 이름에 얽힌 의문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의문”으로 발전하고, 그 의문을 쓰기 시작했을 때 돼지치기 소년 아틸라는 시인 아틸라로 변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지점에서 뇌와 가슴은 성찰과 기록의 엔진을 돌리기 시작한다. 가족을 부양하려고 진종일 무거운 세탁물을 나르며 지쳐 가던 어머니 몸속에는 암세포가 번지고 있었다. 그가 16세였던 1919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아틸라는 신문팔이, 선박 급사, 옥수수밭 경비원, 시인, 번역가, 항만 하역부, 날품팔이 등 20개에 달하는 직업을 전전하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아니 살았다가 아니라, 버텼다. 이 시는 분명히 유리를 제조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유리 제조공’은 유리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이면서, 시 쓰는 사람 이야기, 노동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든 인간을 그린 이야기다. “노동자로 불리기도 하고/시인으로 불리기도 하는 그들”(3연)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노동자 모습을 그대로 글 쓰는 사람, 시 쓰는 사람의 자세와 연결시킨다. 노동을 시 쓰듯이 한다면, 시를 노동하듯이 쓴다면, 성실하게 시 쓰는 노동자는 얼마나 행복할까. “조금씩 피를 쓰다/투명해지고”는 끔찍하면서도 아름다운 표현이다. 이 시에는 “투명”이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온다. 얼마나 투명해야 제대로 시를 쓸 수 있을까. 얼마나 투명해야 솔직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시는 피로 쓰는 것이다. 시는 투명해질 때까지 쓰는 것이다. 유리처럼 투명해질 때까지 피로 써야 한다. 니체 말대로 피로 써야 한다. 그것은 시 쓰는 데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삶 자체를 진정한 인간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아틸라는 가장 유명한 시 ‘일곱 번째 사람’에서 그가 그리는 인간상을 이렇게 표현한다.할 수만 있다면 시인이 되어라 시인은 일곱 사람으로 이루어진다- 대리석 마을을 짓는 사람 꿈을 타고난 사람 하늘의 지도를 그릴 줄 아는 사람 언어의 선택을 받은 사람 자신의 영혼을 만들어 가는 사람 쥐를 산 채로 해부할 줄 아는 사람- 둘은 용감하고 넷은 슬기롭지만 너 자신이 일곱 번째라야 해.” - ‘일곱 번째 사람’에서 여기서 말하는 시인은 글 쓰는 시인이 맞다. 열일곱의 나이에 첫 시집 ‘아름다움의 구걸인’을 발표했던 아틸라는 노동자의 궁핍함과 희망을 시집에 담았다. 문단의 주목을 받았지만 지독한 가난에서 탈출할 수 없었다. 가난했지만 그의 시는 군색하지 않다. 그의 시에서 말하는 ‘시인’이란 직업으로서의 시인을 넘어선다. 그냥 시 쓰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지도를 그리듯 미래를 보는 사람, 자신의 영혼을 만드는 긍지의 사람, 짐승을 산 채로 해부하듯 끔찍한 일도 감내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할 수 있겠다. 아틸라 문학관에도 가보았다. 오래 묵은 옛 건물 골목 골목을 에돌아 문학관에 닿았다. 자그마한 정원에 사방이 둘러싸인 3층 연립주택이었다. 이름이 같은 아틸라라는 직원은 66㎥(20평)쯤 될까 말까 한 작은 문학관을 상세하게 안내해 주며 멀리서 찾아온 나그네를 맞아 주었다. 2층에 아틸라가 쓰던 방이 있다고 하는데 들어가 보지 못했다. 작은 건물에서 아틸라가 그리워하던 어머니를 생각해 봤다. 자그마한 체구의 어머니,세탁부들이 대개 그렇듯 일찍 돌아가셨다.무거운 세탁 바구니를 옮길 때 떠는 다리,다리미질이 주는 두통, 그들에게는 빨래더미가 산이고다리미의 수증기는 구름이었으며 - ‘어머니’에서 암으로 일찍 죽은 어머니를 잊지 못하던 아틸라는 1930년 당시 불법이었던 공산당에 입당하여 가난을 극복해 보려 했지만 1933년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공산당에서 쫓겨난다. 극도의 절망에 시달리던 그는 1937년 12월 서른두 살의 고단함 몸을 화물열차에 던져 마감했다. 짧은 생애라 하지만 극빈 노동자 집에서 태어나 자본주의의 밑바닥을 체험하며 32년을 견딘 것은 얼마나 처절한 견딤이었을까.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건 ‘시’가 있었기 때문 아닐까. 그에게 ‘시’는 생명 그 자체였다. 부다페스트에 윤동주를 전하러 갔던 나는 요제프 아틸라를 만나고 왔다. 윤동주 시처럼 아틸라 시도 쉽지만 검박한 일상어에는 심연이 있다. 윤동주가 말했던 “모든 죽어가는 것”(서시)을 아틸라는 감정적인 수작 없이 냉철하고 천천히 응시했다. 아틸라는 죽어가는 것 자체였다. 세상이 버거운 독자들은 아틸라가 견뎌온 힘겨운 삶을 읽으며 위안을 받는 모양이다. 그의 비극적 시는 독자들에게 세상 앞에서 담담하게 마음의 채비를 하라고 권한다. 아틸라의 처절한 시 앞에서는 어떤 불평도 싱겁다. 다른 대륙에서 살았던 두 시인은 죽어가는 것을 시로 쓰는 지점에서 불멸의 시인으로 탄생했다. 시인·숙명여대 교수
  • [월드피플+] 세계 울린 ‘눈송이 소년’ 그후…아빠도 만났다

    극심한 추위로 인해 머리가 눈송이처럼 변해버린 한 중국인 소년의 사연이 현지는 물론 전세계를 울렸다. 홍콩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 등 중국언론들은 12일 윈난성 루뎬현의 가난한 시골마을에 사는 왕푸만(8·王福滿)과 학교에 온정의 손길이 쇄도했다고 보도했다. 왕군의 사연은 얼마 전 인터넷과 언론에 보도된 사진 한장에서 시작됐다. 초등학교 3학년인 왕군은 매일 아침 4.5km 거리에 있는 학교를 가기위해 1시간 이상 걷고 또 걷는다. 그러나 최근 아침 기온이 갑자기 영하 9도로 떨어지면서 학교에 도착했을 때 왕군의 머리카락과 눈썹은 고드름처럼 변해버렸다. 왕군의 학교 교장은 "왕군의 모습을 보고 같은 반 친구들이 킥킥 웃어도 전혀 곤혹스러워하지 않았다"면서 "오히려 우스운 표정을 지어 아이들을 웃게 만들었다. 그래서 귀여웠다”고 밝혔다. 특히나 왕군은 추위로 갈라진 손까지 보여주며 주위 사람들을 감동을 안겼다. 왕군은 “할머니 농장 일을 돕다보니 동상에 걸렸다”면서 “아빠를 몇 달 동안 보지 못해 무척이나 그립다”고 말했다. 보도에 따르면 왕군의 아버지는 다른 도시에서 일하는 이주 노동자로 어머니는 가족을 버리고 떠나 현재 누나, 할머니와 진흙 집에서 살고 있다. 소년의 사연이 알려지자 온정은 불어닥친 추위를 금방 녹였다. 왕군의 갈라진 손에는 장갑이, 그리고 따뜻한 옷과 모자가 기부됐다. 인민일보는 "10만 위안(약 1600만원)이 넘는 후원금이 학교에 도착했으며 144개의 옷과 난방기구가 기부됐다"면서 "왕군 뿐 만 아니라 학생 81명에게 500위안(약 8만원) 씩 주어졌다"고 보도했다. 사실 기부 만큼이나 왕군에게 더 기쁜 소식은 뒤늦게 알려졌다. 한 회사가 외지에 나가있는 왕군의 아빠에게 일자리를 제안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왕군은 뉴스를 보고 집으로 돌아온 아빠가 용돈으로 손에 쥐어준 5위안(약 800원)을 받고 가장 기뻐했다. 왕군은 "많은 사람들이 선물을 주고 도와준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행복하다"면서 "돈을 부지런히 저축해 아빠가 아플 때 치료비로 쓰고싶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지하실 감금 여성, 10년 만에 풀려나…성폭행 출산까지

    지하실 감금 여성, 10년 만에 풀려나…성폭행 출산까지

    루마니아 출신의 한 여성이 지하 감옥에서 구출돼 10년 만에 바깥 세상으로 나올 수 있게 됐다. 그녀는 자신을 가둔 남성에게 수차례 성폭행과 구타를 당했고, 심지어 두 명의 아이까지 낳았다. 29일(이하 현지시간) 이탈리아 언론매체 라 레푸블리카는 지난 26일 가해 남성 알로이시오 조르다노(52)가 차량점검을 하려고 차를 세운 사이 경찰에 체포됐다고 보도했다. 경찰은 조르다노와 함께 있던 남자아이의 더러운 행색을 수상히 여겨 아이가 사는 곳을 보자고 요구했다. 그리고 이탈리안 남부 지젤리아 근처 시골에서 헐어빠진 오두막집 한 채를 발견했다. 집 내부엔 빗장에 묶여 마치 ‘노예’와 같은 행색을 한 여성이 있었다. 집은 쥐와 벌레가 들끓었고 전기나 수도 장치도 없었다. 화장실 대신 나무 의자 아래 놓인 플라스틱 양동이와 판지로 만든 침대가 전부였다. 29세로 밝혀진 여성에게는 9살 아들과 3살 딸 아이가 있었으며, 일상적인 폭력을 당해도 어떤 의료적 치료도 받지 못했다. 조르다노는 여성의 심한 상처를 낚싯줄로 꿰맸다. 현지언론에 따르면, 그는 1995년에도 여성 유괴 및 성폭행 혐의로 5년형을 선고 받고 수감됐다. 그러나 4년 뒤 모범수로 풀려났다. 이후 집으로 돌아온 그는 불치병에 걸린 아내의 간병인이었던 피해 여성을 만났다. 2007년 조르다노의 아내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당시 19세 피해 여성의 악몽이 시작됐다. 그녀는 “‘지낼 장소를 마련해주겠다’며 창고 밑 비밀 장소로 끌려갔고 10년 동안 바깥 세상과 차단됐다”면서 “1년 동안은 씻지도 못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현재 조르다노는 학대, 감금, 복합적인 성폭행 혐의로 기소된 상태다. 사진=라 레푸블리카 캡쳐 안정은 기자 netineri@seoul.co.kr
  • [길섶에서] 총리의 일본 친구/황성기 논설위원

    그제 열린 국회 본회의 총리 인준안 표결을 누구 못지않게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본 일본인. 바로 5월 15일자 이 코너의 바로 위쪽 ‘씨줄날줄’에 소개된 ‘총리 후보자의 일본 친구’의 주인공 니시모리 시오조 전 고치현의회 의장이었다. 전남지사 시절 니시모리 전 의장과 맺은 우정을 다룬 칼럼이 게재된 당일 이낙연 총리가 서울신문 칼럼을 읽고 니시모리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이 총리는 9시간 걸려 고치에서 무안까지 지사 퇴임식에 참석해 준 데 대해 감사의 뜻을 표시한 것은 물론이다. 니시모리가 “일본 시골의 은퇴한 정치인인 제가 총리와 함께 신문 칼럼에 등장하는 게 폐가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고 하자 이 총리는 “무슨 말이시냐. 전 대단히 기쁘다”고 격려했다고. 인준안이 통과된 직후 이 총리에게 축하 전화를 했다는 니시모리는 필자에게 “국제감각을 지닌 분이 총리가 되셨으니 한·일 관계는 물론 한국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 주시길 바란다”고 소망을 전했다. 10일 아베 신조 총리의 특사 자격으로 방한하는 니카이 도시히로 자민당 간사장과 함께 목포를 거쳐 서울에서 이 총리와 재회한다고 한다.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 ‘안단테’ 카이, 진지한 현장 비하인드 컷 ‘훈남 그 자체’

    ‘안단테’ 카이, 진지한 현장 비하인드 컷 ‘훈남 그 자체’

    엑소(EXO) 카이의 촬영현장 사진이 공개됐다. KBS가 2017년 새롭게 선보일 사전제작 드라마 ‘안단테’ 측은 대본을 꼭 쥐고 연기 열정을 활활 불태우는 카이의 촬영 현장 비하인드 컷을 공개했다. 공개된 사진 속 카이는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대본 삼매경에 빠져있다. 리허설 전 박기호 감독 과 의견을 교환하고 있는 동안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진지한 눈빛으로 경청하면서도 두 손으로 대본을 꼭 잡고 있는 카이의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다. 카이의 대본사랑은 촬영현장에서도 유명하다고 한다. 찬바람에 손이 곱아드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늘 손에 대본을 들고 극 전개를 꼼꼼히 체크하며 대사 연습을 반복하는 카이의 모습은 안단테 촬영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또한, 컷 소리가 나면 제일 먼저 모니터 앞으로 달려가 연기를 체크하고, 감독 및 다른 배우와 끊임없이 피드백을 주고받는 등 남다른 연기 열정을 펼치는 카이의 모습에서 드라마에 대한 기대감 또한 높여주고 있다. 카이는 ‘안단테’에서 엄마를 철저하게 속여 온 대가로 서울을 떠나 시골학교로 전학가게 되는 18세 고등학생 시경으로 출연, 반항적인 거친 매력과 함께 극심한 변화 속에서 요동치는 인물의 복잡한 내면을 어떻게 보여줄지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제작사 관계자는 “카이는 열정과 성실함 진지함을 고루 갖춘 모습으로 모든 장면에 최선을 다해 임해 매일매일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며 “앞으로의 성장이 더욱 기대되는 배우”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안단테’는 전형적인 도시 아이인 시경이 수상한 시골 고등학교로 전학가면서 맞부딪치는 낯선 경험들을 통해 진정한 삶과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기적같이 눈부신 순간들을 그린 힐링 성장드라마다. 사진 = 유비컬쳐 연예팀 seoulen@seoul.co.kr
  • [길섶에서] 시간여행/임창용 논설위원

    40년 만이었던 것 같다. 지난 주말 포천 국사봉 등산길. 고향 마을 뒷산이다. 해발 754m로 오르기가 만만치 않다. 중학교 때 친구들과 객기로 정상을 밟아 본 뒤 이번이 두 번째다. 비 온 뒤 계곡은 힘이 넘친다. 바위를 때리는 물소리가 우렁차다. 어릴 적 함께 산에 올랐던 친구들이 의기투합했다. 그땐 다람쥐처럼 날렵했던 시골 소년들이었다. 겁 없이 잣나무 꼭대기에 올랐고, 다래 덩굴에 원숭이처럼 매달려 열매를 따 먹었다. 깊은 소(沼)를 향해 너덧 길 바위 꼭대기에서 주저 없이 뛰어내렸다. 이젠 모두 오십 중반. 비탈만 만나면 성긴 머리숱 밖으로 비 오듯 땀을 쏟는다. 혹여 미끄러질까 더듬거리며 발을 딛는 모양이 우스꽝스럽다. 다래가 지천이다. 머루도 간혹 보인다. 잣이 벌써 여물었는지 바닥에 나뒹구는 잣송이에서 진한 향내가 난다. 나이를 잊고 다래 덩굴에 매달려 본다. 입안에서 터트린 다래의 진액이 달다. 한 친구의 장난기가 발동한다. 참나무를 칭칭 감은 다래 덩굴을 모아 쥐고 힘차게 점프를 한다. 덩굴이 끊어질까 조마조마하다. 무사히 착지하자 너나 할 것 없이 매달린다. 잠시나마 소년 시절로 돌아간 친구들. 참 유쾌한 시간여행이었다. 임창용 논설위원 sdragon@seoul.co.kr
  • [新전원일기] 철학을 심고 삶을 일군다…욕심 버리고 생명 키운다 …속도 줄이고 느리게 걷자

    [新전원일기] 철학을 심고 삶을 일군다…욕심 버리고 생명 키운다 …속도 줄이고 느리게 걷자

    귀농이나 귀촌, 생태운동이나 자연농법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하나같이 추천하는 ‘최고의 귀농 바이블’이 바로 일본인 후쿠오카 마사노부의 ‘짚 한 오라기의 혁명’이라는 책이다. 무농약, 무비료, 무제초, 무경운을 실천하는 완전 자연농법의 필요성을 주장한 이 책을 번역한 최성현(60) 작가는 무려 30년째 귀농 생활을 해 온 자급농이기도 하다. 이 책은 전 세계 16개국 언어로 번역돼 자연주의자들의 귀감이 됐고, 지금까지도 ‘자연에 가장 해를 덜 끼치면서 인간 스스로에게도 가장 이로운 농법’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나는 친구의 추천을 통해 생태적 귀농의 또 다른 대부라 할 수 있는 야마오 산세이의 ‘더 바랄 게 없는 삶’, ‘어제를 향해 걷다’를 읽으며 ‘과연 이토록 아름다운 우리말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번역자가 누굴까’ 하고 궁금해했다. 그리고 지난주 그를 만났다. 그는 충북 제천 산골에서 홀로 지내며 자연농법을 실험하다가 지금은 가정을 이루어 강원 홍천에서 3대가 함께 사는 귀농 생활의 주인공이 됐다. 그의 집에 도착했을 때 아내와 어머니께서 풍성한 시골 밥상을 그득하게 차려 놓으신 채 기다리고 계셨다. 때아닌 진수성찬을 얻어먹으며 가족들의 이야기를 함께 들었다. 알고 보니 최씨 부부는 ‘바보 이반의 산 이야기’를 통해 작가와 독자의 인연으로 만나 결혼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최씨는 한 달에 한 번씩 ‘지구학교’를 열어 지금까지 몸으로 부딪치며 배워 온 자연농법의 기술을 가르친다. 지구학교는 커다란 건물은 아니지만 아름다운 원두막에서 자연과 벗하며 최씨가 자연농법을 배우는 살아 있는 귀농 멘토링 장소다. 그는 ‘쥐구멍에 볕들이기’라는 정감 어린 이름의 모임도 함께 운영하며 ‘경청’을 유일한 원칙으로 삼아 그 누구도 서로에게 갑질을 하지 않는 완전한 평등을 추구하는 소통과 놀이문화도 실험하고 있다.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했다고 들었다. 귀농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100% 책의 영향이다. ‘짚 한 오라기의 혁명’이라는 책이다. 내게는 복음서였다. 그만큼 강력했다. 1988년 3월에 충북 제천으로 귀농했다. 마을과 3㎞ 정도 떨어진 산속이었다. 집 한 채가 있을 뿐인 곳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살았다. 그런데 2007년 무렵 제천시가 새로 제정한 문화·관광 개발 지역에 그곳이 포함돼 됐다. 떠나야 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원래는 제3의 터전을 찾을 생각이었다. 부부간에 긴 대화를 나눴다. 그 결과 내 고향을 사원으로 삼기로 했다. →보통 귀농 하면 도시 생활의 염증 때문에, 복잡하고 비정한 도시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는 ‘안티 도시’로서의 귀농을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그런데 최성현 농가의 귀농은 좀 다르다. -그것도 ‘짚 한 오라기의 혁명’이 준 영향 때문이다. 그 책을 읽은 뒤로 나는 누굴 만나나 자연농법을 이야기했다. 그 얘기밖에 할 줄 몰랐다. 그렇게 길이 정해졌다. 높은 곳에는 다른 사람들이 가게 내버려 두고, 나는 바닥에서 자연농법으로 자급자족을 하며, 철학을 연구하고, 시를 짓고 싶었다. 그게 가장 좋다고 그 책은 나에게 아주 강력하게 말했다. 문명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후쿠오카의 말에 나는 100% 공감했다. →주로 어떤 농작물을 어떤 농법으로 기르고 있는지, 올해 폭염 때문에 힘들진 않았나. -1000평 정도의 땅에 주곡인 벼농사를 비롯해 여러 가지 콩, 수수, 녹두, 팥, 옥수수, 보리, 호밀과 같은 잡곡 농사도 하고 있다. 감자, 고구마, 야콘, 땅콩, 배추, 무, 파, 오이, 호박, 고추, 부추, 들깨, 수박, 참외, 오크라, 딸기, 가지, 토마토, 옥수수, 토란 등이 있고, 산야초나 과일나무도 있다. 처음엔 땅이 황폐했다. 화학비료와 트랙터에 오랫동안 시달려 온 밭이라 땅이 기력을 회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자연농법을 실현한 지 5~6년 만에 그동안 떠났던 수많은 벌레들, 풀들, 동물들이 돌아오며 땅이 살아났다. 땅이 웃음을 찾게 된 것이다. 땅을 갈지 않기 때문에 물을 더럽히지 않는다. 비료를 쓰지 않기 때문에 땅을 더럽히지 않는다. 풀 두고 가꾸기를 하기 때문에 지구의 열기를 떨어뜨리는 역할을 한다. 자연농법은 가뭄에 강하다. 모든 논과 밭이 풀과 풀의 잔사로 덮여 있기 때문이다. 병충해에도 강하다. 벌레를 죽이는 농약을 쓰지 않기 때문에 천적들이 알아서 균형 있는 생태계를 유지한다. →농사 수익은 어느 정도인가. -완전 자급농이다. 상업적으로 농산물을 내다 파는 것이 거의 없다. 가족들 먹고사는 것이 풍족하지 않지만 삶의 가치를 실천하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어서 좋다. →농촌에서 가정을 꾸려 간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가사노동 분담은 어떻게 하나. -아내와 어머니가 계시기에 요리는 내 차례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가끔 설거지를 할 뿐이다. 쓰레기통 비우기와 분리 배출은 늘 내가 한다. 청소도 하고 그러지만 어머니나 아내가 보기에는 많이 부족할 것이다. 우리 애는 지금 초등학교 2학년이다. 두 가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튼튼한 몸, 둘째는 책 읽는 버릇이다. 우리 부부는 그걸 돕고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도 아이에게 좋다. 그리고 혼자서도 자연농법으로 논밭 농사를 해낼 수 있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는 소망을 갖고 있다. 자연농법은 정말 좋다. 인류의 미래가 거기에 있다. 아이 인생에 자연농법을 선물로 주고 싶다. →‘오래 봐야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에 보면 살아오면서 느낀 자연의 가르침, 일상의 지혜가 오롯이 담겨 있다. 귀농 이전과 이후의 가장 큰 차이라면. -만약 귀농을 하지 않고, 일이 잘 풀렸다면 지금쯤 대학의 철학 선생이 돼 있을 것이다. 대학은 대학 나름대로 좋은 점이 있지만 대학 바깥은 바깥대로 좋다. 무엇보다도 자유스러워 좋다. 아무도 연구비를 주지 않는 건 아쉽지만(웃음). 인류는 현재 지구를 파괴하는 부끄러운 방식으로 밥상을 차리고 있다. 인류의 농업은 환경 파괴의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다. 새로운 길이 필요하다. 나는 그 길을 찾고 있다. 씨앗을 뿌리며, 논둑을 거닐며…. 그 길에서 찾은 새로운 인생의 아름다움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것 같다. →생태적인 비전을 꿈꾸는 지구학교는 어떤 곳인가. -인류는 인류라는 우물에 갇혀 눈이 있으되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로 살고 있다. 우물에서 나와 지구에서 보면 인류는 큰 벌레다. 무서운 속도로 숫자가 늘어나고 있고, 경악스러운 속도로 지구를 먹어치우고 있다. 앞날이 걱정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큰 탈이 날게 분명하다. 자연농법은 현재까지 인류가 찾아낸 가장 지구에 좋은 길이다. 거기서 출발하자는 게 지구학교다. 교재는 나의 논밭이다. 자연농법의 철학과 실제를 배운다. 3월부터 12월까지 한 달에 한 번 모인다. 1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모인다. 고등학교 학생, 무직자, 가정주부, 종교인, 회사원부터 정년 퇴직 대학 교수까지 다양하다. 30대가 가장 많다. →귀농·귀촌을 준비하거나 꿈꾸고 계신 분들께 조언을 해 준다면. -세상에서, 혹은 그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 먹는 것을 먹고, 가장 가난한 사람이 사는 집에서 살아도 좋다고 여기는 자리까지 가면 좋다. 그것이 편하고 미래도 밝다. 환경과 나는 하나다.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나와 나 아닌 것은 하나다. 나는 나 아닌 것이 있어서 산다. 나 아닌 것에 잘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해야 한다. 남에게 욕을 하면 금방 욕이 내게로 돌아오는 것처럼 공기와 물, 땅에서도 같다. 돌아온다. 반드시 돌아온다. 소나 닭이나 돼지도 같다. 모든 것이 그렇다. 그의 농가에서 잊을 수 없는 세 가지를 경험했다. 첫 번째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농가의 밥상이었다. 그의 부인과 어머니께서 직접 차려 주신 농가의 밥상에는 고기나 생선이 전혀 없이도 최고의 맛을 내는 고유의 식재료들이 가득했다. 햇감자와 강낭콩을 가득 넣어 만든 잡곡밥, 집에서 빚은 된장의 구수함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된장찌개, 온갖 나물과 푸성귀들로 만든 밑반찬들, 그저 고추장에 찍어 먹기만 해도 맛있는 오이, 그리고 멜론처럼 연둣빛 빛깔을 내면서 멜론보다 훨씬 달콤한 맛을 내는 신기한 참외까지. 그 모든 것이 자연농법의 축복이었다. “많이들 먹어요”를 연발하시는 어머니 덕분에 배가 이미 부른데도 먹고 또 먹었던 풍성한 밥상은 잊지 못할 환대의 기억이다. 두 번째는 탐나는 작업실이었다. 툇마루와 장지문과 구들장이 남아 있는 낡은 한옥이 그의 작업실로 쓰이고 있는데, 작업실의 분위기가 너무 아늑해 저절로 글이 술술 풀릴 것 같은 설렘을 느꼈다. 밤에는 쏟아지는 별빛과 은은한 달빛을 벗 삼아 더욱 용맹정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 번째는 바로 내가 떠날 때 그가 손에 쥐여 준 햇밤 세 알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워낙 비가 쏟아져서 차가 막힐까봐 조금이라도 빨리 출발하려고 황급히 자동차문을 닫으려는 내게 그는 ‘햇밤 세 알’을 내 손에 꼭 쥐여 주었다. 방금 밤나무에서 떨어진, ‘제때 여물어 제때 떨어진’ 밤알들이었다. 느림의 철학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그를 인터뷰하고는 나도 모르게 ‘빠름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지금도 그 햇밤 세 알을 새하얀 접시에 담아 두고, 방 안으로 성큼 쳐들어온 때 이른 가을 향기에 뭉클한 희열을 느낀다. 남들보다 빠르고, 남들보다 뛰어나기를 바라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까지도 착취하며 살아왔다. 뒤돌아보니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남들보다 더 성숙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 했고, 때로는 나 자신이 ‘조숙함’을 넘어 ‘웃자라 버린’ 느낌에 쓸쓸해지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성장 신화의 내면화’였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오래 피어나는 꽃이 되고 싶었지만, 그것은 자연스러운 존재의 모습이 아니라 인공의 신화였다. 그렇게 빨리, 많이, 오래 피는 꽃은 생화가 아니라 조화인 것이다. 내 방 안에 조금 일찍 도착한 가을 소식, 이 햇밤 삼형제를 당분간 먹지 않아야겠다. 이 눈부신 가을의 징표로, 그리고 ‘지구학교’를 다녀온 ‘미숙한 청강생’의 마음으로 간절한 바람을 실어 보낸다. 아직 너무 늦지 않았기를. 우리가 자연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한 이 순간이 ‘지구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학교’에 입학하기에 너무 늦지 않은 순간이기를. 글쓴이 작가 정여울 2013년 제3회 전숙희 문학상 수상. 주요 작품으로 ‘공부할 권리’,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등이 있다.
  •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김원길 바이네르 사장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김원길 바이네르 사장

    그의 웃음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언제부턴가 그 자리에 있었던 듯했다. 좌절과 시련을 이겨내면서 더 커지고 짙어진 것일까. 소박하게 꾸며진 사장실 문을 열면 ‘힘들어도 괜찮아’라고 적힌 액자가 첫눈에 들어온다. 사무실과 공장을 겸하고 있는 경기 일산 본사에서 지난 17일 만난 김원길(55) 바이네르 사장에게서 “힘들어도 괜찮다”고 스스로 되뇌며 넘어지고 일어나 달려온 40년을 들어봤다. -옷가지 몇 벌이 든 작은 가방 하나를 들고 나는 영등포역에 내렸다. 처음 밟은 서울 땅. 또래들처럼 학교에 다녔더라면 고2 새 학기의 시작에 들떠 있었을 1978년의 봄이었다. 당시 영등포는 사람과 상점, 공장, 유흥가로 지금보다 훨씬 더 번잡했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들. 겁이 났다. ‘내가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목이 탔다. 화장실에서 벌컥벌컥 수돗물을 마시고 세수를 했다. 시간은 오후 4시. 자, 이제부터 한 집 한 집 내가 있을 곳을 찾아나서 보자. “제가 구두 만드는 기술이 있는데요, 저 좀 써 주시면 안 될까요.” 하지만 땅거미가 내리고 전등에 하나둘 불이 들어와도 나를 받아주는 곳은 나오지 않았다. 퇴짜를 맞은 집이 스무 곳 가까이 되어갈 즈음, 문래동 쪽 허름한 구둣방에서 나를 받아주었다. 월급은 없이 하숙집에서 먹여 주고 재워 주기만 하는 조건이었지만 마다할 수가 없었다. -내 솜씨를 본 구둣방 주인은 좀 놀라는 눈치였다. 열일곱 살 먹은 ‘충청도 촌놈’치고는 실력이 꽤 괜찮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곳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여름이 되자 주인이 불렀다. “장마철이라 물건이 너무 안 팔린다. 더이상 널 먹이고 재워 줄 능력이 안 된다.” 말하자면 정리해고였다. -“구둣방에서 잘렸어요.” 몇 달 동안 하숙하며 친해진 룸메이트 형에게 사정 얘기를 했다. “내가 강원도 양양 출신이어서 잘 아는데, 설악산에 가면 일자리가 있을 거야.” 귀가 번쩍 뜨인 나는 다음날 새벽같이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로 달려갔다. 그날 늦은 오후가 돼서야 도착한 설악산. 몇 달 전 영등포 역전에서처럼 상점과 산장의 문을 한 집 한 집 두드렸다. 하지만 하숙집 형의 말과 현실은 달랐다. 서울로 돌아갈 차비는커녕 김밥 하나 사먹을 돈도 없는데 서늘한 밤이 찾아왔다. 그런데 그냥 죽으란 법은 없었다.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말할 요량으로 찾아간 산장에서 “방 청소하고 손님들 가방 들어 주면 한 달에 5만원을 주겠다”고 제안을 했다. -당시 설악산은 신혼여행이 피크였다.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짐을 들어 주자 팁이란 걸 주는데, 한 번에 2000~3000원은 기본이었다. 새로운 삶의 희망에 들뜬 신혼부부들은 일반 등산객들보다 손이 컸다. 지배인이 보는 데서 받은 팁은 도로 토해내야 했지만, 그렇지 않은 팁은 고스란히 내 주머니에 들어왔다. 팁에 맛을 들인 나는 강아지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가 밖에서 발소리가 나면 누구보다 먼저 뛰어나갔다.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말을 해야 더 많은 팁을, 그리고 지배인이 안 보는 데서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노하우가 쌓여갔다. 한 달이 지나자 다락방에 몰래 감추고 벽돌로 눌러놓았던 팁이 50만원으로 불어났다. 월급의 10배였다. 그 돈을 들고 나는 미련 없이 설악산을 떠났다. -어려서부터 우리 집은 정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1961년 충남 당진에서 5남 2녀의 셋째로 태어났는데, 가족이 의지할 거라곤 손바닥만 한 논 몇 마지기가 전부였다. 나는 초등학교 들어갈 때부터 허약한 형을 대신해 풀 베고, 땔감 구하고, 논에서 피 뽑는 노동의 무게를 다 짊어져야 했다. 그 보상일까. 초등학교까지만 보낸 형, 누나와 달리 아버지는 나를 중학교에 넣어주셨다. 하지만 중학교 3년 동안 수시로 학업 중단의 위기가 찾아왔다. “엄마, 저…학교에서…100원만 가져오래요.” 집안 사정 뻔한데 차마 말 못하고 있다가 어렵게 입을 열면 어머니는 새벽부터 이집 저집 문을 두드리며 돈을 꾸러 다녀야 했다. “진작에 얘기했으면 좀 더 일찍 알아봤을 것 아니니.”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 봐야 어머니의 긴긴밤 잠 못 드는 괴로움만 더 깊어졌을 거란 사실을. 풀이 죽은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물을 애써 외면하며 집을 나서곤 했는데, 나는 울지 않았다. -학교생활은 1977년 2월 중학교 졸업과 함께 마침표를 찍었다. 중학교 3년이 나에게 보장된 최후의 학업이란 걸 이미 다 알고 있었던 터라 고등학교 진학 얘기는 아버지도 나도 꺼내지 않았다. “원길이는 내 밑에서 구두 기술 배워라.” 서산 읍내에서 작은 구둣방을 하시던 작은아버지가 같이 일을 하자고 하셨다. 초등학교 때 지게를 직접 만들기도 했던 조카의 손재주를 익히 알고 있던 작은아버지였다. 하지만 ‘좁은 곳’에서 평생을 ‘족(足)쟁이’로 썩고 싶지는 않았던 나는 그 손을 뿌리치고 ‘넓은 곳’을 찾아 경기 고양군 지축면(현재의 지축동)의 분재농장에 취직을 했다. 하지만, 한 달 1만원을 받아서는 내 한 몸 먹고 자기에도 빠듯했다. 슬슬 염증이 났다. -“돈 번다고 올라가더니 사는 게 그리 만만하더냐.” 그해 9월 추석에 집에 와서 작은아버지를 다시 만났다. “욕심 부리지 말고 우리 가게로 와라. 이 기술 하나면 먹고사는 데 문제없다.” -서산 구둣방에서 처음 배운 것은 가죽과 밑창이 단단히 붙도록 망치질을 하고, 접착면에 ‘뻬빠질’(사포질)을 하는 일이었다. “역시, 원길이 손재주는 대단하구나.” 남들이 1년을 해도 떼지 못한다는 남성용 구두 제작 전 공정을 나는 5개월 만에 마쳤다. “그 재주로 시골에 있긴 아깝다. 서울 가서 서울 기술 배우거라.” 동료 아저씨들의 말이 몇 번 반복되자 마음이 흔들렸다. 작은아버지는 나의 고민을 이해해 주셨다. 그래서 작은아버지가 쥐여주신 차비를 들고 나는 1978년 그 봄에 영등포역 가는 기차를 탔던 것이다. -설악산에서 번 55만원으로 경기 성남 상대원동에 월셋집을 얻고 서울 중곡동 어린이대공원 근처 구두 공장에 취직했다. 당시 제화업계의 판도는 금강제화, 에스콰이아, 엘칸토, 케리부룩의 순이었다. 내가 들어간 곳은 케리부룩에 납품하던 참스제화였다. 본격적으로 여성용 구두 만들기를 익혔는데, 얼마 후 나는 참스제화 안에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최고의 기술을 갖게 됐다. 그렇게 5년이 지났을 즈음 케리부룩에서 나에게 오라고 손짓을 했다. 1983년 9월 스물두 살 때였다. -‘생산라인에 있으면 신발을 20켤레 만들 수 있지만 관리자가 되면 2000켤레, 2만 켤레의 생산을 직접 관장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늘 ‘더 큰 것’, ‘더 높은 곳’에 목말라 했다. 그래서 나를 믿고 부른 케리부룩 김정현 사장님에게 ‘생산직’이 아닌 ‘관리직’에 배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사장님은 원했지만 주변에서 말들이 나왔다. ‘생산관리를 고작 중졸 출신에게 맡기다니’와 같은 것들이었다. -그래도 나는 계속 관리직의 문들 두드렸고, 얼마 후 포장반에 배치됐다. 구두에 상표를 붙여 사각 박스에 담는 단순노동을 하는 곳이었지만, 그나마 관리직이라는 이름표를 갖고 있는 부서였다. 생산라인에 있을 때 100만원이던 월급이 포장반으로 오니 20만원으로 깎였다. 나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했는데, 그 계산은 적중했다. 몇 달 후 완제품을 최종 검사하는 검수반으로 옮겼다. ‘완벽한 제품’을 강조하며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깐깐하게 검사를 했다. 어느 날 공장 기술자 100여명이 “우리를 괴롭히는 김원길을 자르라”고 대놓고 사장님에게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하지만 사장님은 나를 지지했다. 제품의 완성도가 높아지는데 그걸 마다할 사장이 어디 있겠나. 나는 ‘시키지 않은 짓’도 자발적으로 나서서 했다. 시장 조사였는데 금강제화, 에스콰이아, 엘칸토 등 경쟁제품 중에 잘 팔리는 건 어떤 게 있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분석해 리포트를 작성했다. -1989년 인천백화점에서 우리 케리부룩 매장을 퇴출시키겠다고 통보해 왔다. 내가 영업관리를 하며 어렵게 입점을 성사시킨 지 한 달여 만이었다. 월 매출이 600만원으로 다른 업체의 5분의1밖에 안 된다는 이유였다. 백화점에 시간을 한 달만 더 달라고 했다. ‘저 많은 걸 나 혼자선 절대로 못 판다. 고객의 입소문을 통해 팔리도록 만들어야 한다.’ 반값 특가 세일과 동시에 내가 백화점 매장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자, 여러분, 케리부룩 CM송 부르시면 구두를 그냥 드립니다.” 당시 ‘허리를 미끈하게 펴고~ 무릎을 쭉 뻗으면~ 케리부룩 케리부룩 예쁘게 걸어요~’라는 우리 TV CM송은 꽤나 인기가 있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한 달 매출이 1억 1000만원으로 거의 20배가 됐다. 그걸 계기로 뉴코아, 롯데, 신세계 등 서울 시내 백화점에 속속 입점을 했고 나는 ‘영업의 달인’으로 통하게 됐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에 대한 시기와 모함도 커져 갔다. ‘사장이 되려고 한다’, ‘회삿돈을 제 맘대로 쓴다’ 악성 루머가 사내에 돌았다. 사람들에게 실망을 하고 분노를 하니 더이상은 회사에 다닐 수가 없었다. -1990년 사표를 던졌다. 언젠가는 예정됐던 일, 그게 조금 앞당겨졌다고 생각했다. 이듬해 케리부룩 퇴직금 280만원과 사장님이 별도로 챙겨주신 200만원을 밑천으로 서울 용산에 선심(구두의 앞코에 들어가는 부속) 제조회사를 차렸다. 간판은 ‘원길’로 내걸었다. 장사는 그럭저럭 됐는데 돈이 안 들어왔다. 못 받은 외상값이 2000만원이 넘어갔고, 빚이 쌓여 갔다. 답답한 마음에 전에 거래했던 롯데백화점 명동 본점의 바이어를 만났다. “아이고, 김 대리 회사 관두고 나서 케리부룩 엉망 됐어요.” 케리부룩 김 사장님에게 전화를 드렸다. “롯데백화점에 물건 한 트럭 보내주세요. 제가 팔아볼게요.” 매출의 10%가 내 몫이었다. -“사장님, 제가 직접 구두 만들어서 케리부룩 상표 붙여 팔겠습니다.” 다시 기세가 오른 나는 케리부룩에 로열티를 주고 하청공장을 통해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호사다마는 이번에도 비껴가지 않았다. 1993년 케리부룩 대표가 된 전문경영인이 케리부룩 상품권을 헐값에 불법 발행해 구속이 됐고 회사는 부도가 나고 말았다. 상품권들은 휴지조각이 됐고 나는 산더미처럼 쌓인 구두와 빚더미에 거리로 나앉을 판이 됐다. 불면의 날이 이어졌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싶은 충동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밀려왔다. 하지만, 20대 때 연탄가스를 마시고도 씩씩하게 출근을 했던 나였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때마침 어떤 고마운 분이 급전을 융통해 줘서 최종 도산에는 이르지 않을 수 있었다. -회사 이름을 ‘안토니’로 바꾸고 그럭저럭 구두회사를 꾸려가고 있던 1994년 뜻하지 않은 전기가 찾아왔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세계 최대 구두 박람회 ‘미캄’에 갔는데 바이네르의 컴포트화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에게 “나와 한국 독점판매 계약을 맺자”고 했다. 당시 바이네르는 하루 1만 2000켤레를 생산하는 대형 업체였다. 한국 수출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그들을 나는 어렵사리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예상대로 국내에서 바이네르는 중년 이상의 여성들을 중심으로 날개 돋친 듯 팔렸다. 하지만, 이탈리아 현지에 주문을 넣고 제품을 받기까지 무려 석 달이나 소요되는 문제가 나타났다. 직접 생산이 절실해졌다. -“내가 한국에서 알아주는 구두 기술자다. 바이네르 상표를 붙여서 우리가 직접 만들어 팔면 안 되겠나. 바이네르의 명성에 먹칠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그들을 꼬박 6개월을 설득했다. 나의 한결같은 노력은 바이네르 회장을 감동시켰고, 결국 나는 일산의 아파트형 공장에서 하루 50켤레씩 컴포트화 생산을 시작했다. -바이네르로 가파른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는데 뜻하지 않은 악재가 터졌다. 나를 아껴주었던 이탈리아 본사 회장이 돌아가시고 그 분의 아들이 가업을 물려받았는데, 회계사 출신인 그는 우리에게 무리한 요구를 해왔다. ‘한국에서 그렇게 잘 팔리는데, 로얄티를 이 정도 밖에 안 내나.’, ‘이탈리아 본사에서 수입해 가는 물량을 더 늘려라.’ 아들의 횡포가 갈수록 심해지면서 나는 서서히 바이네르와의 결별을 준비했다. 광고도 바이네르의 비중을 줄이고 우리 자체 브랜드인 안토니에 집중했다. 그런데 2008년 ‘리먼 브러더스 사태’로 대표되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남부 유럽은 특히 충격이 컸다. 거기에서 바이네르라고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게다가 바이네르는 당시 유럽과 홍콩 증시에 상장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투자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극심한 자금난을 겪게 됐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11년, 나는 이탈리아로 가서 아들을 만났다. “너희들 자금난이 심각하다는데, 내가 지원을 해줄 테니 바이네르 브랜드를 나에게 팔아라.” 그들은 나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현재 이탈리아에 바이네르 공장이 10군데 정도 있는데 그들이 쓰는 브랜드 상표권은 내가 갖고 있다. -바이네르 신발이 편안한 비결이 뭐냐고 많은 사람이 묻는다. 그러면 나는 “고객의 마음은 당신이 그 질문을 하는 이 순간에도 변하고 있다는 걸 명심하라”고 일러준다. 고객은 항상 더 예쁘고, 더 편안한 구두를 찾는다. 그걸 떠올리면 절대로 연구개발(R&D)을 게을리하거나, 맘 놓고 쉴 수가 없다. 고객은 혹시 한 번은 몰라도 절대로 두 번은 봐주지 않는다는 걸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김태균 경제정책부장 windsea@seoul.co.kr ■ 김원길 바이네르 사장 발이 편안한 신발을 뜻하는 ‘컴포트화’를 통해 연간 500억원대의 매출을 올리는 업계 3위 바이네르의 최고경영자(CEO)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구두 분야의 장인(匠人)으로, 특히 ‘중졸 신화’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바이네르는 백화점을 중심으로 전국 60여곳에 매장을 두고 있다. 가난으로 배움을 다하지 못했던 그는 다양한 봉사활동을 통해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안토니 장학회’를 운영하고 있으며 골프 꿈나무에게 연간 2억원 이상을 지원하고 있다. 해마다 5월이면 수도권의 독거노인을 초청해 효도잔치를 열고 있다. 박애원, 벧엘의집 등 수많은 복지시설에 물품을 보내고 있다. 1억원 이상 고액기부자 클럽인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기도 하다. 직원들에게 업계 최고의 급여를 보장하고 이탈리아 밀라노, 미국 라스베이거스 등 다양한 해외 연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1961년 충남 당진 출생 ▲당진 도성초등학교, 미호중학교 ▲1984년 전국기능경기대회 제화부문 동상 수상 ▲1994년 안토니 설립 ▲2008년 국무총리 표창, 2012년 자랑스러운 중소기업인상, 2012년 철탑산업훈장, 2013년 아름다운 납세자상 수상
  • [생명의 窓] 고요에 대하여/이재무 시인

    [생명의 窓] 고요에 대하여/이재무 시인

    도시의 소란 속에 시달리다 보면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오래전의 일상 풍경이 불쑥 망각의 수면 위로 떠올라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때가 있다. 그 풍경들은 절기마다 각기 다른 형상으로 다가와서 애틋한 향수에 젖게 하는 것이다. 요 며칠은 두서없이 떠오르는, 유년의 풍경들이 그때와는 전혀 다른 실감을 내게 안겨다 주었다. 항시적으로 배고픔에 시달리던 아이가 감나무 아래 서 있다. 지난밤 비바람에 시달리다 가지를 버린 풋감들이 패잔병처럼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정적만이 무섭게 고여 가득 출렁거리고 있을 뿐 집 안에는 아무런 기척이 없다. 먼 산에서 출산 후 부쩍 여윈, 소쩍새 울음소리가 우련하게 들려온다. 둥근 고요가 데굴데굴 굴러가다가 마당 구석에 머문다. 여기저기서 예의 까만 고요 새끼들이 몰려와 막 끓기 시작한 냄새를 물어 나르고 있다. 일 년 중 고요의 힘이 가장 세지는 때를, 나는 어릴 적 보냈던 시골에서의 여름 정오쯤으로 기억하고 있다. 빨랫줄 바지랑대 그림자의 키가 가장 작아지는 소서나 대서 때의 정오에는 한동안 각축하듯 울어 대던 매미들이 폭염에 지치는지 울음을 뚝 그치고 동네 고샅을 하릴없이 쏘다니다가 돌아온 누렁이도 마루 밑 그늘 속으로 기어들어가 오수를 즐긴다. 애호박들을 주렁주렁 매단 채 흙 담장을 기어오르던 호박 줄기도 축 늘어져 있고, 담 둘레에 핀 맨드라미는 병든 닭 볏처럼 색이 바래져 있다. 숫돌 다녀온 왜낫처럼 날 선 햇살이 따갑게 내려 축축한 생각의 습기를 말려 버린다. 심해처럼 깊은 정적 속에 세상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다 익은 살구 씨처럼 단단했던, 그 시절 성하의, 쥐 죽은 듯 고요한 세계가 문득 간절하게 그립다. 얼마 전의 시골에서 한 사나흘 묵을 때의 일이다. 바깥 볼일이 있어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와 보니 빈집 가득 달빛이 가득 들어차 출렁이고 있었다. 마당에, 뜰 방에, 마루에, 헛간에, 빈방에 달빛은 고여 푸르게 출렁이고 있었던 것이다. 아, 달빛! 텃밭에는 때마침 장다리꽃들이 피었거나 피기 시작했는데 그 송이, 송이마다에도 달빛은 스미어 온 천지가 달빛 치마폭에 감싸인 은빛 세상이었다. 그 밤 나는 차마 불을 켜지 못했다. 행여 달빛이 놀라 달아날까 봐 달빛 모시느라 숨도 크게 쉬지 못했던 것이다. 달빛으로 가득 찬 고요의 세계가 내 영혼을 세상 바깥 먼 나라로 데려다주었다. 그즈음 나는 또 한밤중 시골길을 걷다가 자전거 바퀴만 한 커다란 달빛이 앞산 등성이를 타고 오르는 것을 보았다. 숨은 신이 밟아 대는 페달로 칠 부 능선을 느리게 굴러가는 달빛 은륜, 그 환한 달의 숨소리가 가루약처럼 마을의 지붕 위에 하얗게 흩날리고 있었다. 순간, 달의 살찐 궁둥이가 어찌나 탐스럽게 보이는지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더듬어 대고 있었다. 사방팔방에서 갑자기 수확철 도리깨질에 쏟아져 내리는 깨알 웃음소리가 까르르 까르르 들려왔다. 놀라서 둘러보고 올려다보니 창공에 총총총 떠 있는 별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나는 누가 볼세라 슬쩍 손모가지를 거두어들였다. 고요가 멀쩡한 나를 추행범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고요는 힘이 세다. 제 주장을 하지 않아서 늘 소음에 시달리고 주눅이 들고 내몰리는 것 같지만 고요가 패배한 적은 없다. 제풀에 지쳐 소음이 나뒹굴 때 공간을 차지하는 것은 고요다. 혼자 있어도 내면이 시끄러운 사람아, 고요가 그립지 않은가? 우리의 본향, 생의 맨 나중에 닿아야 할 고요의 나라.
  • 누구나 즐기는 한강 요트, 여행 기간만 쓰는 유모차 …다날쏘시오 ‘공유 서비스’

    누구나 즐기는 한강 요트, 여행 기간만 쓰는 유모차 …다날쏘시오 ‘공유 서비스’

    ‘시골쥐가 대접한 변변치 않은 음식에 실망해 집으로 돌아온 서울쥐, 산해진미를 고양이에게 쫓겨 가며 먹는 서울쥐의 처지에 혀를 차며 시골로 돌아간 시골쥐.’ 아마 ‘둘은 서로를 애처롭게 여기며 평생 서울 혹은 시골에서만 살았다’로 이야기가 끝날 것이다. ‘공유경제’와 그것을 구현해 준 정보통신기술(ICT)의 수혜를 입기 전까지 우리 삶도 그랬다. 강원도 춘천으로 기차여행을 떠난 서울 사람은 설사 카레이서처럼 운전을 잘할지라도 뚜벅거리다 버스나 택시를 타야 했다. 항공사 수하물 규정 때문에 유모차를 못 싣고 제주에 도착한 서울 출신 젊은 여행자 부부라면 남편에게 짐을 몰아 지우고 아내는 아기를 업고 안아 가며 힘겹게 여행해야 했다. 그러니 요즘 차량 셰어링(공유) 앱인 ‘쏘카’, 중고물품 거래 앱인 ‘헬로마켓’이나 ‘중고나라’가 인기를 끌고 셰어링 포털을 표방한 ‘다날쏘시오’가 론칭 두 달 만에 80만 다운로드를 기록하며 모회사인 ‘다날’ 주가 부양에 일조하는 현상은 오랫동안 누구나 느끼던 시·공간의 제약을 해소시킨 서비스에서 비롯됐다. 중고 물품에 대한 거리낌이 줄어드는 추세도 있지만 말이다. 정보통신부 관료·스코틀랜드왕립은행 한국 대표 출신으로 지난 1일 취임한 다날쏘시오의 이상무(48) 대표는 “공유와 소유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일상생활 속에서 순환하는 게 공유경제의 미래상”이라고 정의했다. 써 본 뒤 제대로 알고 사는 ‘경험소비 욕구’, 시·공간의 제약 없이 자유롭게 서비스를 누리고 싶은 ‘적시소비 욕구’, 생애 과정 중 잠시 사용하더라도 가장 최적화된 제품을 누리고 싶은 ‘효율소비 욕구’ 등이 반영돼 공유경제 산업이 꽃피었다는 설명이다. 다날쏘시오의 공유 대상 서비스 역시 이 같은 욕구를 겨냥, 확대 중이다. 장마철인 요즘 위닉스와 함께 벌이는 ‘제습기 셰어링 이벤트’는 하루에 1000~2000원씩 내고 제습기를 집에 설치해 1주일 이상 써 본 뒤 마음에 들면 구매하고 필요 없다고 판단되면 셰어링을 끝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사실상 신제품을 써 본 뒤 구매 결정을 할 수 있는 ‘경험소비’ 과정인 셈이다. 다날쏘시오가 최근 선보인 ‘한강 요트 셰어링’은 꼭 필요할 때 특별한 경험을 누릴 수 있는 ‘적시소비 욕구’를 반영한 예다. 다날쏘시오는 7일 “청혼 이벤트나 가족 행사에 이색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슈퍼카나 요트 등을 셰어링 서비스로 발굴하고 있다”며 “제주도에서 렌터카를 이용할 때 유모차를 함께 대여하는 등 공유 서비스를 묶어서 제공하는 방안도 모색 중”이라고 설명했다. 아직까지 공유경제 확산을 이끄는 큰 축은 ‘효율소비’ 경향이다. 다날쏘시오는 본격 사업을 시작한 4월 중순부터의 누적 셰어링 6300여건을 분석하면 유모차·전동카·바운서와 같은 유아용품이나 샤오미 나인봇·에너바이크와 같은 모빌리티라고 밝혔다. 모두 몇 달에서 몇 년 동안만 쓰지만 제품의 질이 담보돼야 할 제품군이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과학커뮤니케이터 이덕환 서강대 교수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과학커뮤니케이터 이덕환 서강대 교수

    이덕환(62) 교수의 연구실을 찾은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에 놀란다. 우선 ‘화학자’라고 하면 흔히 연상되는 흰색 가운 입고 비커나 시험관 만지는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정말로 그의 연구실엔 컴퓨터와 책만 있다. 또 대화를 하다 보면 “정말 화학자가 맞나” 싶은 의문이 생길 만큼, 다양한 사회 문제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식견을 갖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분자의 세계를 연구하던 조용하고 내성적인 학자가 사람들에게 과학을 전파하는 과학커뮤니케이터로 나서게 된 건 정말 우연한 계기에서 비롯됐다. -“닥터 리, 계속 화학을 할 건가?” “교수님, 제가 배운 게 화학밖에 없는데 다른 걸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아. 난 닥터 리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 이상의 일을 했으면 해. 열흘 동안 한국을 돌아보면서 느낀 건데, 이 나라 사람들은 과학이 뭔지를 잘 모르는 것 같더군. 그래서 난 자네가 일반 대중에게 과학을 알리고 확산시키는 일을 해주면 어떨까 싶네.” -미국 코넬대 유학 시절 나의 박사과정 지도교수이셨던 로알드 호프만(79) 교수님께서 1993년 10월 중순 한 대학 초청행사로 한국에 오셨다. 당시 교수님은 50대 중반의 정력적인 학자이셨고, 마흔을 목전에 두고 있던 나는 부교수로 막 승진을 했던 상황이었다. 존경하는 스승이긴 했지만, 나의 생각은 많이 달랐다. “과학의 대중화라고? 그건 과학을 어설프게 배운 사람들이나 관심 갖는 일 아닌가요?” 호프만 교수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나는 아마 대놓고 이렇게 반박했을지도 모른다. -‘우드워드·호프만 법칙’으로 유명한 폴란드 출신의 호프만 교수님은 1981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신 이론 화학의 대가였다. 몇 권의 시집도 낸 시인이자 철학자이면서 화학의 대중화에 관심이 많아 미국에서 ‘화학의 세계’라는 TV 프로그램에도 참여하고 계셨다. 한국을 오셨을 때에도 미당 서정주 선생을 만나고 싶다고 먼저 요청하셨고, 나중에 두 분의 대화는 월간 ‘현대문학’에 게재되기도 했다. -호프만 교수님과의 만남이 있은 이듬해(1994년) 대한화학회에서 ‘홍보간사’란 자리를 신설했는데, 어쩌다가 내가 그걸 맡게 됐다. 학회 회장대행이었던 채영복(2002~2003년 과학기술부 장관) 박사께서 뜬금없이 나를 지목하셨는데, 대선배의 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1년 전 호프만 교수님과 나눈 대화가 현실이 되는 출발점이었다. -2남 3녀 중 넷째인 나는 맏이인 큰누나와 열 살 차이가 나고 큰형과도 일곱 살이나 차이가 나 꽤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다. 공부하라는 채근도 거의 없었다. 서울에서 초·중·고교를 다 나왔는데 방학숙제도 거의 해 본 적이 없었다. 방학이면 아버지의 고향인 경북 안동에 내려가 산으로 강으로 뛰어다녔는데, 공부를 얼마나 안했던지 시골 내려올 때 가져온 연필을 한 번도 깎지 않고 개학 때 그대로 교실에 가져갔을 정도였다. 그렇게 연필 한 번 쥐어보지 않고 개학을 맞다 보니 학교에 가면 글씨를 쓸 수가 없을 정도였다. 지금도 악필인 건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요즘은 인터넷이나 TV, 신문 등 입시정보를 접할 수 있는 채널들이 다양하지만 당시만 해도 TV는커녕 라디오도 흔치 않았다. 그래서 입시 정보라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때 다들 경기중·경기고를 최고로 쳤는데, 나는 우리 형들이 다니던 경복중·경복고가 더 좋은 줄 알았다. 별생각 없이 경복중에 지원했는데, 경기중에 갔더라면 똑똑하다는 소리를 더 많이 들었을 거란 사실을 입학을 하고서야 알게 됐다. 경복중에서 경복고로 직행을 했는데, 지금 이화여대 석좌교수로 있으면서 과학의 대중화에 큰 기여를 하고 계신 최재천 국립생태원장이 고등학교 1년 선배다. 최 선배가 재수를 해서 서울대 같은 학번 동기가 됐는데, 문리대 이학부 학생 수가 적다 보니 형제처럼 친하게 지냈다. -고2에서 고3으로 올라가는 겨울방학에 할아버지께서 어머니와 함께 상경을 하셨다. 안동에서 큰 정미소를 운영하셨던 할아버지는 손주들 교육과 진로에 관심이 많으셨다. “덕환아, 대학에서 뭘 공부할지 결정했느냐.” “네. 저는 화학을 전공하기로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실망한 표정을 지으시며 의대나 법대는 어떠냐고 하셨다. “할아버지, 저는 법대 가서 평생 죄 지은 사람들 보며 살고 싶지 않아요. 의사가 되서 평생 아픈 사람들 보는 것도 싫고요. 저는 이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과학적으로 들여다보고 싶어요.” 할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다시 안동에 내려가시면서도 실망의 눈빛을 풀지 않으셨지만, 귀여운 넷째 손주의 고집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건 잘 아셨다. 얼마 후 수정 제안을 하셨는데, “화학과보다는 화학공학과가 어떠냐? 공대가 더 취직이 잘 된다는데….” 하지만, 공대 역시 처음부터 내 선택지엔 없었다. -화학에 관심을 갖게 된 건 고2 때부터였다. 화학 수업을 처음 듣는데 “바로 이거야!”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부터 화학과에 가겠다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둘째 누나가 농화학과를 다녔는데 누나의 전공서적에서 원자와 분자의 그림과 화학식들을 보면서 의지가 더 확고해졌다. “덕환아, 화학과는 너보다 성적이 한참 떨어지는 애들이 가는 데야. 좀 억울하지 않겠니?” 담임선생님도 날 의대에 보내려고 고3 내내 설득하셨지만, 내 귀에는 아무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화학 공부를 하러 대학에 갔지만, 1973년 입학 첫 학기부터 석사과정을 마친 1979년 2월까지 6년 동안 한 학기도 처음부터 끝까지 수업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박정희 유신체제에 항거하는 학생들의 집회와 시위로 거의 매 학기 휴교령이 내려졌다. 거의 독학으로 공부를 해야 하는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화학에 대해 눈을 뜨게 해준 분을 만났다. ‘일반화학’ 수업을 하신 김호진 교수님이었다. 김 교수님을 통해 이론화학이라는 분야를 처음 만났고, 그게 평생의 전공이 됐다. -지금까지 번역서와 저서를 합해서 30권 가까운 책을 냈다. 그중 번역서가 20여권이 된다. “전문 번역가도 아닌데 왜 그렇게 번역을 많이 하느냐”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지만 과학처럼 전문성이 필요한 분야는 번역가가 아닌 해당 분야를 잘 아는 사람이 번역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엄밀성과 정확성을 중요시하는 과학에서는 ‘어’ 다르고 ‘아’ 다른 법이다. 제일 먼저 번역했던 것은 1996년의 ‘그림으로 보는 분자 세계와 대칭성’이었는데, 삽화가 많은 화학입문서 비슷한 책이었다. 본격적으로 번역에 나서고 과학커뮤니케이터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호프만 교수님이 쓰신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라는 책부터다. 어려운 이론 화학을 쉽게 잘 풀어내 미국에 있을 때부터 꼭 번역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책이었다. -최재천 선배는 고등학교 때부터 시인을 꿈꿨던 ‘문청’(문학청년) 출신이었지만, 사실 나는 글 쓰는 일을 하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 학교 다닐 때 가장 힘들었고 싫었던 숙제가 바로 작문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논문과 책을 빼고 신문, 매거진 등 대중매체나 인터넷 블로그 등에 쓴 글이 줄잡아 2300편 정도 된다. 1년에 평균 150~200편 정도 쓰는데 일주일에 3~4편꼴이다. 여전히 많은 과학자들이 ‘잡문’이라고 배척하는 분위기가 강한 대중매체에 글을 쓰는 것은 ‘뒤늦게 터진 글솜씨’를 자랑하고 싶어서라거나 내 이름을 알리고 싶어서가 절대로 아니다. 호프만 교수님께서 부탁하셨던 것처럼 사람들이 좀더 과학에 친숙해지고 과학적 사고를 해줬으면 하는 책임감에서다. -나는 과학을 흥미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데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은 불과 100~150년 사이에 나온 지식들이다. 인류가 지구에 살아온 몇십만년과 비교하면 말도 안되게 짧은 시간에 나온 지식들이다. 그런 지식들을 대중이 쉽고 재미있게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역설적이지만 ‘재미있고 쉽게’란 흥미 위주의 과학, 신기술 개발 중심의 과학들이고, 나아가 그런 것들이 과학기피 현상을 불러온다. 재미있다고 하는 얘기만 들은 사람들이 실제로 과학을 공부하다가 어려움에 부딪히면 ‘과학은 쉽고 재미있다더니 어렵고 재미없네, 속았어’라고 쉽게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과학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한 다음 과학을 접근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쓸 때 항상 현실 문제를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우리 사회에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정신이 확산되지 않는 이유는 기술 중심의 과학을 이야기하는 정부와 그런 주장에 은연 중에 동의하는 전문가들 때문이다. 나는 좀 배웠다는 사람들이 “기초과학은 미래 성장동력을 위한 투자”라고 말할 때 정말 화가 난다. 우주론이나 진화론을 100년 연구해 봐야 무슨 성장동력을 얻을 수 있겠나. 기술은 시행착오를 통해 얻는 결과물인데 과학은 그 기술개발을 조직화, 체계화시켜 최종 산물까지 도출하는 시간을 단축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현대과학의 여러 역할 중 3분의1에 불과하다. 다른 3분의1은 사람들에게 정직성과 비판성, 합리성이라는 과학정신을 갖게 해주는 것이다. 나는 이게 과학의 역할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지식의 축적이나 과학정신 함양보다 경제적 가치와 기술개발이란 부분만 강조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기술이전 숫자’, ‘국제학술지 게재 논문 수’ 같은 무의미한 통계가 더 중시되는 것이다. -사회 문제에 대해 이런저런 목소리를 내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이 교수가 다른 데 관심 있는 것 아니냐”라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나는 사람들이 세상을 좀더 과학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작은 밀알이 되고 싶을 뿐이다. 사회와 동떨어진 지식인이란 있을 수 없다. 더군다나 대학교수들은 사회적 명성뿐만 아니라 캠퍼스라는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사회를 위해서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당당하게 얘기하지 못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목소리가 커졌고 눈총도 받았던 것 같다. 아내가 나에게 자주 하는 소리가 있다. “당신은 절대 학교 밖에 나가 다른 것 할 생각은 하지 마라. 당신처럼 성격이 모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 학교 밖에서 무슨 말 했다가는 정 맞는다.” 얼마 후면 정년을 맞는다. 그동안 썼던 나의 ‘잡문’들을 모으고 추려서 과학적 눈으로 우리 사회 문제 전반을 해석해보는 나름 거창한 시도를 해볼까 한다. 꽤나 방대한 작업이 될 것이다. 그래서 더 의미가 있을 것이고,그래서 더 도전해 보고 싶다.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이덕환 교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과학커뮤니케이터’다. 대학에서 화학과 과학커뮤니케이션을 함께 가르친다. 이 교수는 실험 중심인 화학 분야에서 ‘양자화학’과 ‘비선형 분광학’을 전공한 보기 드문 이론 화학자다. 사람들이 일상에서 자주 접하지만 잘은 모르는 과학 주제들에 대해 속시원한 해답과 방향성을 제시하는 걸로 유명하다. 그래서 ‘언론사 기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과학자’로 통한다.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방송에 자주 출연하면서 20권 이상의 대중 과학서적을 번역했다. 특히 2004년에 번역 출간한 ‘거의 모든 것의 역사’는 과학 분야 최고의 스테디셀러 중 하나다. 자신의 대학원 지도교수인 로알드 호프만 미국 코넬대 교수의 저서를 번역한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1996년)는 많은 대학에서 ‘신입생이 읽어야 할 필독서’로 선정됐다. ▲1954년 서울 출생 ▲서울 경복중·고, 서울대 화학과, 미국 코넬대 박사(1983년) ▲서강대 화학과 교수(1985년~), 국제화학올림피아드 운영위원장(2009년), 대한화학회 회장(2012년), 대한화학회 탄소문화원 원장(2013년) ▲대한민국 과학문화상(신문·잡지 부문· 2004년), 과학기술훈장 웅비장(2008년)
  • 해외여행 | [기차를 타면 스위스가 보인다] 아로사 라인-힐링캠프 아로사로 향하는 시골열차

    해외여행 | [기차를 타면 스위스가 보인다] 아로사 라인-힐링캠프 아로사로 향하는 시골열차

    ●힐링캠프 아로사로 향하는 시골열차 아로사 라인Arosa Line 아로사Arosa에 가기 위해 도착한 쿠어 기차역. 머리에는 헬멧을 쓰고 어깨에는 스키를 둘러멘 어린이들이 재잘거리며 어디론가 힘차게 걷고 있었다. 그들이 향한 곳은 아로사행 빨간 열차가 서 있는 플랫폼. 아이들과 함께 늠름한 산양을 담은 그라우뷘덴주의 문장이 그려진 열차에 올랐다. 기차 안은 베르니나 익스프레스보다 소박했다. 관광용 열차가 아니라, 현지인들이 교통수단으로 이용하는 열차다. 깜찍한 아로사 라인은 계곡 사이의 좁은 길을 뚫고 수많은 커브를 돌며 설원을 달린다. 쿠어에서 아로사까지는 약 1시간. 열차를 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아로사를 눈앞에 둔 랑비이스역이다. 열차는 여기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아로사 라인의 하이라이트인 랑비이스 비아둑트Langwies Viaduct를 향해 달린다. 랑비이스 비아둑트는 플레수르Plessur 강 위에 서 있는 거대한 철교. 기차가 다리 위를 달릴 때, 짜릿함이 온몸을 감싼다. 아로사에 도착한 날,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눈이 쏟아졌지만, 끝없이 내리는 눈도 아로사의 사랑스러움을 가리지는 못했다. 코난 도일도 반한 아로사의 깨끗한 공기 꼬불꼬불 이어진 길은 아로사에서 멈춘다. 아로사를 지나면 철길은 없고, 우락부락한 봉우리들만 웅장하게 마을을 감싸고 있다. 아름다운 샨피그 밸리 끝에 자리하고 있는 아로사. 열차가 없었으면 이 산골마을까지 올 수 있을까 싶다. 지금은 아로사가 인기 있는 겨울 휴양지로 꼽히지만, 100년 전에는 아픈 이들에게 유명한 곳이었다. 험한 마을까지 들어올 수 있는 교통수단이 별로 없어 공기가 깨끗했고 높은 계곡이 있어 강한 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 그래서 1880년대 아로사에는 특히 폐렴환자를 위한 요양원이 많았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탐정 셜록 홈즈. <셜록 홈즈>를 쓴 코난 도일도 병마와 싸우는 부인과 함께 아로사에 머물렀다. 럭비와 크리켓, 권투를 망라한 스포츠광으로도 유명한 코난 도일은 이곳에서 스키를 즐겼다. 1894년 영국에서 발행하는 <스트랜드 매거진the Strand Magazine>에 그가 기고한 스키에 대한 기사는 영국인들에게 스키를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코난 도일은 영국인들이 스키를 타러 스위스로 몰려들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그의 예견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하룻밤만 자면 리프트도, 버스도 공짜 1900년대 이후 아로사는 겨울 스포츠를 위한 곳으로 빠르게 변신했다. 100년이 지난 지금은 스위스의 대표 겨울 휴양지 중 하나로 꼽힌다. 그라우뷘덴주에서 가장 긴 225km 활강코스를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스키나 스노보드 외에도 다양한 겨울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오밀조밀해 접근성이 편리한 것도 장점이다. 아로사역 바로 옆에서 케이블카를 타면, 해발 2,653m의 바이스호른Weisshorn까지 오를 수 있다. 여기서부터 신나게 스키를 즐길 수 있다. 아로사가 매력적인 큰 이유 중 하나는 단 하루만 머물어도 대부분의 서비스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산악열차와 곤돌라, 스키리프트는 물론이고 시내버스와 박물관 입장까지 모두 공짜다. 대가족이 와도 지갑 걱정하지 않고 편안하게 즐길 수 있다. 그래서인지 가족단위 여행자들이 많다. 또한 겨울에 오는 관광객을 위한 특별한 이벤트도 있다. 꽁꽁 언 호수 위에서 축구경기를 펼치는 아로사 얼음호수 축구시합과 유럽의 희극인들이 참가하는 아로사 유머 페스티벌이 그것이다. 아로사 유머 페스티벌은 12월에 열리는데 매년 수만명이 참여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다람쥐와 함께 즐거운 산책 아로사에서 인기 있는 곳 중 하나는 다람쥐 트레일. 눈이 펑펑 내리는데 다람쥐가 나타날까 싶지만 기우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 걸어가는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다람쥐를 발견한 것. 분명 살아 있는 다람쥐다. 준비한 견과류를 손바닥에 올려놓으니, 재빠르게 달려와 먹이를 채 간다. 새하얀 눈 덕분에, 짙은 회색 털을 가진 다람쥐가 눈에 잘 보인다. 동심으로 돌아가 다람쥐들과 숨바꼭질을 하며 놀다 보니, 40분 걸린다는 다람쥐 트레일을 1시간이 넘도록 걸었다. 점심을 먹으러 레스토랑에 들어가니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유리창 밖으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따끈한 핫 초콜릿과 스위스 전통음식을 즐기는 가족들을 보니, 그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포근해졌다. 레스토랑 밖에서는 어르신들이 신나게 썰매를 타고 있었다. 아로사에서 썰매는 아이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어찌나 흥겨운지, 그들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환해졌다. 아로사에서 쿠어로 돌아가는 길, 겨우 하루를 보낸 곳인데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문득 아로사가 고향 같다던 자니네의 말이 생각났다. 낮에 본 할머니처럼 신나게 썰매를 타러 아로사에 다시 오겠다는 다짐을 하고서야, 쿠어행 열차에 오를 수 있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Info St. Arosa Navigation | 쿠어에서 아로사까지는 매시간 열차가 출발한다. 약 1시간 소요. 취리히에서 아로사로 갈 때는 쿠어에서 기차를 갈아타야 한다. 전체 소요시간 약 2시간 30분. Food | 그라우뷘덴에 왔다면, 향토음식 카푼스를 맛봐야 한다. 카푼스는 야채와 고기류를 잘게 썬 것을 큰 잎으로 싸고, 그 위에 크림소스를 얹은 스위스 전통음식이다. 겉모양은 통통한 스프링롤처럼 생겼지만, 맛은 다르다. 크림소스 때문에 식감은 부드럽고 안에 든 고기 덕분에 든든하다. Place | 스키를 타지 않더라도 바이스호른에 올라가 보자. 꼭대기에 있는 파노라마 레스토랑에서는 400여 개의 산봉우리들을 360°로 볼 수 있다. www.arosa.ch 에디터 천소현 기자 글·사진 Travie wirter 채지형 취재협조 스위스관광청 www.myswitzerland.co.kr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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