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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럼펫 천재/디지 길스피 재평가작업

    ◎재즈음악 창시자… 지난달 75세로 타계/“청중 압도 불세출의 연주가” 추모 한창 미국에서는 요즈음 75세로 지난달 타계한 세기적인 트럼펫 주자 디지 길스피(Dizzy Gillespie)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한창이다. 그것은 재평가작업이라기 보다는 그가 남긴 업적과 연주자로서의 뛰어난 천재성에 대한 추모작업 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 할지도 모른다. 그의 천재적인 연주기법은 그가 활발하게 연주활동을 하던 50∼60년대에도 따를자가 없었지만 그 이후에도 그만한 연주자가 나오지 않고 있다는게 정설이다.그의 연주는 지극히 역동적이고 혁명적 이어서 청중들은 놀라움을 넘어 쇼크를 받곤 했다. 뿐만 아니라 작곡가이자 재즈음악의 한 창시자 이기도 한 그의 예술가적 유산은 어느 재즈음악가 보다 폭이 넓었다.디지는 몇사람만의 작은 그룹에서 부터 거대한 오케스트라에 이르기 까지 어느 그룹과도 자유롭게 연주를 했다.또한 재즈음악과 그가 생애 후반에 심취했던 라틴음악 사이를 아주 쉽게 넘나드는 보기드문 천재였다. 1917년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한 시골에서 태어난 디지는 어려서 부터 아버지로 부터 사사를 받았다.직업연주자가 된 것은 18살때.그로부터 4년후인 스물두살 때는 벌써 당시 명성이 대단했던 캡 캘러웨이 오케스트라의 일원이 돼있을 만큼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20대때 이미 「비봅」으로 알려진 그의 고유한 연주 스타일을+ 창안해냈고 스물여덟살때인 1945년에는 대규모 모던 오케스트라를 창단 할만큼 성장 해 있었다. 디지 길스피가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은 것은 1956년.그와 그의 악단이 미국 국무부의 친선사절로 그리스 유고슬라비아와 라틴아메리카 여러나라를 순회연주 하게 되면서 부터였다.이 연주여행은 정부보조금으로 연주활동을 한 최초의 재즈음악인들로 더욱 유명 했었다. 디지가 지금 새삼스럽게 평가되고 있는 일면은 그가 이른바 「딴따라」와 위대한 음악가의 역할을 동시에 해냈다는 점이다.한 평론가는 『디지가 택한 길로 미국에서 혁명적인 일을 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인데 그는 해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의 뛰어난 포용력과 친화력은 언제나 무대를 지배했고 그는 또 그의 독특한 카리스마적 개성으로 연주장을 장악 했다.그래서 그는 그가 서는 나이트 클럽이나 거대한 콘서트 홀의 분위기를 마음대로 조종하는듯 했다.독특한 개성과 뛰어난 연주가 그에게 그런 능력을 부여 한 것이다. 『나는 결코 남이 무슨 연주를 했는지 또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뒤를 돌아 본적이 없다.오직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고 연습에 몰두하며 내 앞길만을 걸었을 뿐이다.때문에 나는 아프리카 어느 오지에서도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 본 일이 없다.어느 곳에나 어떤 것을 연주 할 새로운 방법이 있었다』 디지가 세상을 떠나기 1년전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남긴 말이다.
  • 철도청 전자계산사무소 우종옥소장(이런자리 저런일)

    ◎철도 서비스 개선의 핵심 역할/80년 승차권 전산판매 큰 성공… 경영혁신/“안방서도 티케팅” 종합전시장 개발 한창 철도청 전자계산사무소(소장 우종옥)는 철도이용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용자들의 서비스를 개선하는데 선두에 서서 다양한 서비스를 창출하는 철도의 중심기관이다. 1년에 7억5천만명의 승객과 6천여만t의 화물을 수송하는 철도의 전산실 직원 1백25명은 우리철도의 두뇌이며 심장이라는 자부심으로 근무하고 있다. 『철도청은 지난68년 정부기관으로는 최초로 전자정보처리시스템(EDPS)개발위원회를 발족시켜 업무를 전산화하기 시작했고 지난 80년에는 철도승차권 전산판매에 성공,경영혁신을 이루게 됐습니다』 지난 62년 국립교통고등학교 통신과를 졸업한뒤 63년 철도청에 들어와 올해로 철도근무가 30년이 넘은 우종옥소장(49)은 전자계산소에만 25년을 근무해왔다. 지난 90년 육상운송분야의 시장개방에 따라 선진국의 우수한 기업들과 경쟁해야하는 우리 철도는 승차권판매에서 수송·배달까지 온라인으로 연결되는 첨단전산시스템 구축이 절실히 요청되어 전자계산사무소 직원들은 새로운 프로그램작성에 여념이 없다. 오는 96년에 철도종합전산망이 완성되면 안방에서도 승차권을 구입할 수 있게 되고,열차의 잔여석 확인,관광지별 여행안내및 열차이용방법,화물의 탁송및 운임지불,수출입화물의 집배송및 통관·하역·수송·배달까지를 일괄처리 할 수 있게 된다. 우소장은 『프랑스와 독일·일본·영국등 철도선진국들은 종합전산망체제를 완비해 놓고 있다.우리철도도 98년 이후에는 경부고속철도가 완공되어 전국이 1시간40분거리로 좁혀지게 된다.승객서비스는 물론 국제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도 종합전산망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우소장은 25년동안 전산실에 근무하면서 승차권무인자동판매기를 개발하고 철도정보를 가정용 컴퓨터에까지 보급,팩시밀리에 연결시켜 전산망이 구축된 은행과 우체국·책방등에 전달,승객들의 서비스를 향상시켜 여섯차례에 걸쳐 철도청장표창과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그는 또 2조5천억원이 넘는 철도청 예산의 원가·자재·물품·인력관리로예산을 절감하고 열차시간표등을 전산화하여 수송력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시골에서 국민학교를 다닐때 눈덮인 들에 기적소리를 울리며 지나가는 기차를 동경해서 기관사나 여객전무가 되려고 철도학교에 입학했으나 본의아니게 전산업무만 보게됐다』 철도청에 30년이상 근무하고 있으나 기차를 탄 시간은 일반시민들보다도 적다는 우소장은 『우리철도의 종합전산망구축이 평생 소원』이라고 말했다.
  • 「엠마누엘의 집」 운영 김성애씨(봉사하는 삶:4)

    ◎중증장애인 7명을 친자식처럼/뇌성마비·정신박약자 수족노릇/먹이고 씻기다 보면 하루가 짧아/“몸은 힘들지만 이들의 웃음보면 내마음까지 정화”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만봐도 웃는 아이들입니다.몸은 힘들지만 이들을 보고 있으면 내마음이 깨끗이 정화되는 것 같습니다』 성남시 수정구 신흥1동 48 81번지언덕배기,장애자들의 보금자리인 「엠마누엘의 집」을 꾸려가고 있는 김성애씨(여·31).뇌성마비·정신박약등 중증 장애자 7명을 돌보며 오갈데 없는 할머니 2명과 함께 자신의 3살난 딸을 데리고 살고 있는 그는 항상 밝은 웃음을 잃지 않는다. 김씨가 이일을 처음 시작한 것은 남편이 선교를 목적으로 외국으로 떠나고 난 직후인 지난해 5월부터.성남의 한 교회 집사로 있던 친정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한후 그 보상금으로 「엠마누엘의 집」을 마련했으나 노령인데다 사고 후유증으로 장애자 돌보기를 계속할 수가 없게 되자 김씨가 나선 것이다. 『처음엔 딸 「환희」의 교육상 좋지않으니 딸을 다른곳에 맡기라고 주위에서 권유하더군요.그러나 어렸을때부터 이들 장애인들이 똑같이 축복받은 생명체임을 받아들이고 또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었습니다』 김씨는 처음 데려왔을때 걷지도 못할 뿐아니라 아무것도 먹지 않던 지영이(12·뇌성마비)가 이제는 이방 저방 걸어다니고 세네톨씩이나마 숟가락으로 밥을 직접 떠먹게 된일이 최근에 있었던 가장 기쁜일이라고 한다.입을 앙다물고 물도 거부하는 지영이가 입을 벌리는 찬스만 기다리다 밥을 떠넣는등 밥을 먹이기 위해 7개월동안이나 온갖 노력을 해왔기에 지영이 밥먹을 의지를 보인 날짜가 1월2일이라는 것도 잊지 못할 정도다. 김씨가 돌보고 있는 장애자들은 겉으로 보면 모두 10세 전후의 어린이들로 보이지만 실제로 지영이만 빼놓고는 모두 20세를 넘어섰다.30살인 백말숙씨(정신박약)의 경우 이들중엔 그래도 말귀를 좀 알아듣는 편이지만 지난 설에 세배하는 것을 터득한 뒤부터는 손님들만 찾아오면 무조건 큰절을 하고 동요 「나리나리 개나리」를 같이 불러주면 좋아서 방안을 껑충 뛰어다니는 수준이다.다른이들도 밥을손으로 먹거나 배변도 가리지 못하는 정도. 보증금 3백만원 월세 20만원에 세를 낸 「엠마누엘의 집」 살림살이는 성남 한사랑회등 봉사단체와 교회등에서 매달 30만원정도 보내주는 후원금으로 꾸려지고 있다.항상 빠듯한 살림이라 김씨가 직접 나가 돈을 벌어보겠다는 생각도 해봤다.그러나 수족을 쓰지 못하는 장애자들을 먹이고 씻기는데도 하루가 벅차 주저앉고 말았다.특히 중증장애자들에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간질을 원생들이 차례로 한번씩은 하는데다 몸이 거북하기라도 하면 이마를 벽에다 찧는등 자해를 해 잠시도 눈을 뗄수가 없기 때문이다. 방세와 부식비,수도·전기요금외에 지출이 만만찮은 항목은 약값.감기등 잔병치레가 많고 누가 한번 앓으면 줄줄이 쉽게 전염이 된다.그러나 시골출신이 대부분인 원생들이 중증 장애자이면서도 주민등록서류에 장애인등록조차 돼있지 않은 탓에 최근까지 장애인혜택을 받을수 없었다.다행히 지난 5일 원생들이 성남 인하병원에서 진단을 받아 다음주쯤엔 약을 무료로 탈수있는 장애인 카드를 발급받게 돼 한시름 놓았다. 김씨는 매주 토요일마다 쌀과 반찬을 갖고 찾아오는 교회 친구들과 병원진료등을 위해 한번씩 전쟁같은 나들이를 할때마다 와서 원생들을 실어주는 성남 「사랑의 교통봉사대」 택시운전사들,자신도 시력이 나빠 힘들지만 원생들을 함께 돌보는 두 할머니,또 같은 동네에 살면서 매일 한번씩 들러 보살펴주고 약 타오는일등 바깥일을 도맡아 해주는 오빠(김성수씨·44)등 따뜻한 마음의 사람들이 주위에 있어 힘든줄을 모른다고 말한다. 『몸은 쓰지 못하지만 사리분별력이 있는 경숙(20)이가 결핵을 앓고 있는 말숙이의 약먹는 것을 챙겨주고 또 말숙이가 경숙의 용변보는 일을 도와주는등 부족한 이들끼리도 서로돕고 사는 지혜와 사랑을 갖고 있습니다』 정상인도 이들처럼 남들에 대한 사랑을 갖고 지혜로운 삶을 살아갔으면 하는것이 김씨의 소망이다.
  • 분교교사 3년의 결실/윤국진 보령군 송학국교 송도분교 교사(교창)

    내가 처음 이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파도소리가 철조망보다 더 가슴을 죄어 왔었다.교사로서 모든 것이 새롭기 때문이었다.전교생을 다 모아야 4학급에 55명이라는 것이 우선 낯설고,복식이라는 수업체제가 또 여간 낯선 것이 아니었다. 주민들의 생활도 신기하기는 마찬가지였다.물때에 맞춰 바다로 나가는 시간은 새벽 3시가 예사였다.아이들은 자연 꼭두새벽부터 학교로 모여들게 마련…. 달포쯤 지켜본 어린이들은 공부도 잘하고 마음씨가 수정처럼 맑았다. 또 아주 건강해서 새로 시설한 철봉이 채 2년을 버티지 못하는 강한 바닷바람 속에서도 끄떡 없이 뛰어다녔다. 그러나 씩씩하고 착한 그들에게는 미래를 설계할 체험적 정보들이 매우 부족했다. 사설 학원에서 쓰다 버린 8비트 컴퓨터를 얻어다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그 무렵이었다. 봄가을 소풍은 가능한대로 섬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찾았다.방학이면 어린이들을 밖으로 내몰았고,전교생을 소년단에 가입시켜 도회의 어린이들과 어울릴 기회를 늘려보았다. 사실 이런 일들을 추진하기엔 불안한 구석들이 있었지만 믿고 지원해주신 김기래교장선생님과 교육청 장학사님들의 격려와 학부모님들의 신뢰가 큰 힘이었다. 그러기를 3년여….어린이들의 모습이 많이도 변했다.8비트가 의젓한 XT로 변했고 아이들은 그걸로 만화를 그리고 있다.소년단 활동에 나서서 도회의 어린이들과 만나면 어깨가 두 뼘쯤 더 벌어지는 것 같다.바닷가를 뛰어다니다 망둥이나 물새 새끼를 들고와서 선생님께 군밤을 먹어도 그들은 시골뜨기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눈치다. 부족한 시설과 도서를 어린이들에게 개방해 놓고 속썩는 선생님들의 마음을 이해하기로 한다. 해가 지는 대천 앞바다의 하늘에 또 파도가 밀려온다. 교실에도 물소리가 가득하다. 아이들이 흘려놓고 간 물빛 웃음소리들이 또 한바퀴 빈 교실을 돈다.
  • 「어린이집」 운영 처녀4인(봉사하는 삶:3)

    ◎저소득층 부담더는 탁아봉사 3년째/모두 이대출신 20대 “아이들의 대모”/하루 11시간씩 15명 돌보는데 큰 보람/“시설넓혀 아이들에 보다 양질의 교육시키는게 소망” 심선경·박금희·남성옥·서현경씨등 20대 중반의 네 처녀에겐 아이가 아주 많다.지훈이 예슬이 호용이 새롬이 규홍이 세미 지영이 미림이 등 이름만도 예쁜 아이가 모두 열다섯이나 된다.물론 직접 낳은 아이는 아니고 낮동안만 돌보아주는 남의 아이이긴 하지만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결코 친부모에 못잖다. 이화여대를 졸업한 이들 네 처녀는 반월·시화공단의 배후도시인 경기도 안산에서 비영리탁아소인 「꿈나무 어린이네 어린이집」을 3년째 운영하고 있다.대부분 인근공단에서 맞벌이하는 아이들의 부모가 일찍 출근하면 네 처녀는 온전히 아이들의 대모가 된다.아침 7시30분부터 저녁 6시30분까지 11시간동안 아이들과 계속 말하고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관절과 허리 등에 가벼운 신경통까지 얻었지만 이들에게 아이를 돌보는 일은 다른 어떤일보다 즐겁고 보람있다. 꿈나무 어린이네에는 부모가 생산직에 근무하거나 전월셋집에 사는 생후30개월에서 6살까지의 어린이들이 있다. 대학시절 여성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이들이 처녀의 몸으로 탁아사업에 뛰어든 것은 지난 91년.같은 여성으로서 일하는 저소득층 여성의 부담을 덜어주자는 순수한 동기에서였다.그러나 지금은 여성문제만큼 양육문제 또한 중요한 문제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게 됐다. 사회사업,가정관리,신문방송학등을 전공한 이들은 졸업후 1년간 여성·탁아·양육 등에 대한 공부를 하고 아르바이트와 서울의 부모님 도움으로 구한 1천2백만원으로 안산에 15평의 전셋집을 얻어 탁아방의 문을 열었다.매달 적자를 면치 못하는 탁아방의 운영을 위해 네사람은 가난한 살림 꾸려가는 억척어멈처럼 온갖 일을 다한다.이들이 탁아방의 운영을 위해 이제까지 해온 부업은 1일찻집,달력 만들어팔기,꿀판매,대학축제때 음식 만들어팔기 등 다양하다.우리나라 사회복지수준의 열악함을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생각했던것보다 상황은 훨씬 어려워 이들은 때때로 심한 좌절감을 느끼기도 한다.『시골구석에서 공도 없다는 애보는 일을 한다고 부모님이 핀잔하실때나 정부에서 비협조적일때면 우리가 여기서 무얼 하고있나 하는 좌절감이 들때도 없지 않아요.또 94년부터 발효되는 영유아보육법은 탁아시설의 시설규정을 까다롭게 정해 영세한 탁아소의 부담만 가중시킬것같아 걱정입니다』 인간적인 나약함조차 숨기지 않는 이들은 그러나 모든 악조건을 꿋꿋이 헤쳐나가는 또순이역할을 잘해나가고 있다.처음 이들을 경원시했던 주위 주민들을 협조자로 만들고 탁아정책에 대한 청원과 요구대회를 열어 조그만 성과를 이끌어내기도 했다.또 아이들의 어머니로 자모회를 구성하고 아버지까지 탁아운영에 참여시키는등 탁아에 대한 사회인식의 교정에도 힘쓰고 있다.앞으로 시설을 넓히고 아이들에게 보다 양질의 교육을 시키는게 소망인 이들은 주위의 격려와 후원으로 이같은 소망이 결코 불가능하지만은 않을것이라며 희망찬 내일을 꿈꾼다.
  • 최익현선생/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을사조약 체결되자 “항일의병” 횃불/74세 거유,“조약은 무효” 전북 태인에서 거병/대마도 유배뒤 순국… 전국적 배일투쟁 “점화”/“나라위해 생사초월” 무성서원연설 민족혼 일깨워 노옹의 항쟁은 열하루밖에 되지 않았다.그가 이끄는 의병의 병력과 무기도 보잘 것 없었고,정부측의 반응도 냉담했다.정부는 일제의 눈치를 보느라 오히려 해산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면암 최익현­1906년 6월4일부터 14일까지의 「뜨거운 날들」은 선생의 이름과 함께 역사에 붉게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한반도에 요원의 불꽃으로 번지게 한 의병항쟁의 불씨를,선생이 지폈다는 뜻만으로서가 아니다.선생은 「나라가 흥하는 것은 우리의 문화 우리의 마음을 잃지 않는데 있으며,인권도 중요하고 민권도 중요하지만 국권 없이는 모든 것을 잃는다」는 진리를 가르치며 이같은 독립정신을 온몸으로 실천한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경기도 포천 출생 당대 유학의 거봉으로 74세나 된 선생이,국권회복을 부르짖고 구국창의의 깃발을 높이 든 것은 일관된 삶의 자세에서 비롯됐다. 1833년 경기도 포천군 가범리에서 출생한 면암은 일찍이 이항로 문하에서 「애국여부 우국여가」의 사상을 이어받고,그 이념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철저하였다. ▲1871년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리자 그 부당함을 상소 ▲고종의 신임을 얻어 호조참판이 된 뒤,누적된 적폐를 바로 잡으려다 오히려 기득권층의 반발을 받아 제주도로 유배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결사반대하며 지부소(도끼를 가지고 상소를 올리며 답을 기다리는 것)를 올렸다가 흑산도로 유배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공표되자 청토역복의제소를 올려 항일운동을 전개 ▲1905년 소위 을사5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화와 박재순·이완용·이근택·이지용·권중현등 「오적」처단을 주장한 청토오적소를 올린 일등은 흐트러짐 없는 인간 최익현의 한 단면이다. 1906년 3월15일.선생은 가묘에 하직을 고하고 집안 사람들과 이별,집을 떠나기로 결심했다.상소만으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러나 선생은 다시 한번 참담함을 맛보지않을 수 없었다.판서 이용원·김학진·참판 이성렬·이남규등에게 서신을 보내 「함께 국란에 대처할 것」을 바랐으나 한사람도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선생은 애제자 고석진의 소개로 「태인사람 임병찬」을 만나게 된다.임병찬은 임실군수까지 지내다가 왜인들의 정치를 마다하고 사퇴한 올곧은 선비였다. 『호남의 선비들이 장차 의병을 일으키려 하는데 모두 선생을 맹주로 생각하고 있으므로 그곳으로 가셔야 하겠습니다』 이후 두달 남짓동안 거의가 준비됐다.시골 포수들로부터 총칼이 모아지고,2백여명의 우국지사가 모여들었다. 6월4일.태인 무성서원에서 있은 선생의 강회는 항일의병의 역사적 분기점을 이룬 날로 기록된다. 『지금 왜적들이 국권을 농락하고 역신들은 죄악을 빚어내 오백년 종묘사직과 삼천리 강토가 이미 멸망지경에 이르렀다.나라를 위해 사생을 초월하면 성공 못할 염려는 없다.나와 함께 사생을 같이 하겠는가!』 불꽃에 민족혼을 일깨운 의병들은 이날 정읍에 무혈입성,총칼과 탄환을 거두고 군사를 모집했다.또한 일제에 16개 죄목을 들어 국권의 침략과 국제적 배신행위를 통렬하게 지적한 장문의 규탄서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후 정읍에서 흥덕으로,다시 순창 구암사에서 순창읍내로 행군하였을 때에는 의병의 수가 5백여명을 넘게 되었다.힘을 얻은 「면암의병」들은 파죽지세로 곡성을 거쳐 남원으로 밀고 들어 가려 했으나,순창으로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남원 방비가 워낙 견고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의병은 8백여명으로 불어났다. 6월11일.광주관찰사 이도재가 사람을 보내 고종의 칙지를 전해왔다.선생은 큰 기대를 갖고 이를 펼쳐 보았으나 그 내용은 엉뚱하게도 『의병을 해산하라!』는 것이었다. 면암은 『이미 소장을 올려 의병을 일으키게 된 연유를 말씀 드렸으니,나의 진퇴는 관찰사의 직권으로 지휘할 바가 아니다』는 답장을 보냈다.그리고 다시 남원진입을 꾀했다. ○고종,의병 해산령 그러나 남원을 지키고 있는 부대가 왜군이 아니고 우리측 진위대임이 확인되었다. 진위대(경군)측은 『대감이 민병을 해산시키지 않으면 전진이 있을 뿐』이라는 통보를 세차례나 보내왔다.선생은 괴로워했다. 선생은 임병찬에게 『동포끼리 서로 박해하는 것은 원치 않으니 즉시 해산시키라』고 명령했다.쉽사리 흐트러지지 않던 의병들은 눈물을 머금고 해산되었다.선생 곁에 끝까지 남은 의병은 12명 뿐이었다. 6월14일.선생일행은 서울로 압송되었다.그리고 우리 사법부가 아닌 일제에 의해 재판을 받게 된다. 「대마도 감금 3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선생은 1907년 1월1일 단식 끝에 한많은 적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선비정신의 귀표 역사학자 박성수교수(정신문화연구원)는 면암의 항일운동과 관련,『선생은 1876년 개항 이후 줄곧 외침을 경고했으며 이에 맞서 나라를 구하는 길은 오로지 국론을 통일해 일치단결하는 것밖에 없다고 부르짖어 온 분이었다』며 『그러므로 선생이 70고령을 무릅쓰고 무기를 들었다는 소식은 단지 그것만으로도 여간 큰 충격이 아니었는데 외딴 섬 대마도에서 순국하셨다는 소식은 온 국민의 가슴에 칼을 꽂은거나 다름없는 슬픔과 분노를 안겨 주었다』고 평가했다. 선생의 항쟁 이후 호남을비롯한 전국 각지에서는 우후죽순처럼 의병들이 일어난 점만 보아도 당시 선생이 위대한 민족주의자로서,국민들의 정신적 지주였다는 점이 입증되는 셈이다. 선생은 순국직전 임병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죽음에 있어 마땅히 죽을 곳에서 죽으면 삶보다 부끄러울 것이 없다.나 이제 죽을 것이니 황상에게 올릴 마지막 소를 비밀히 간직하였다가 본국으로 돌아 가는 날 전해주길 바란다』 고국으로 돌아온 선생의 영구행렬 앞에는 「춘추대의 일월고충」이라는 깃발이 나부꼈다.
  • 구미공단 근로문예상 작품집 출간

    ◎시·수필·사진 등 5개부문 55편 담아/역대수상자 신작 엮은 「꿈」도 선봬 일하며 창작열을 태워가고 있는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제8회 구미공단 근로문예상 우수작품집 「쓰러지며 웃는법」과 역대 수상자들의 신작을 엮은 「꿈,너무 긴」이 함께 나왔다. 중부관리공단(이사장 지일환)이 매년 실시해오고 있는 이 문예상은 시·수기·단편소설·수필및 콩트·사진등 5개 부문에 걸쳐 공모하는데 지난해에는 모두 1천여편의 작품이 응모돼 근로자들의 높은 관심을 반영했다. 이번에 나온 문예상작품집에는 시부문 「강마을」(이재순·창성기업),수기부문 「내일을 향하여」(정현숙·코오롱),단편소설부문 「가위소리」(이종률·한국중기),사진부문「시골아이」(박우현·한진금속공업),콩트및 수필부문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이상미·한국전자) 등 각 부문 최우수작품을 포함해 모두 55편의 작품이 실려있다. 한편 문예상 역대수상자들중에서 계속해서 작품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신작을 모아놓은 「꿈,너무 긴」에는 박서분(시)권순곤(수필)민혜숙(콩트)최준호(단편소설)등 수상자 14명의 작품 25편이 수록돼있다.
  • 공식지명 한자화… 고유 땅이름 푸대접(건널목)

    ○…우리나라의 땅이름은 시골의 마을이름까지도 행정상 공인되는 법적 지위를 가진 지명은 철저하게 한자화 돼있다.그래서 적어도 땅이름을 통해서 볼때 우리나라는 철저하게 중국의 「문화식민지」 임을 부인할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서울대 지리학과 객원교수로 와있는 윤홍기교수(뉴질랜드 오클랜드대)는 최근 한국땅이름학회(회장 이영택)가 주최한 땅이름연구발표회에서 「뉴질랜드 땅이름정책과 우리 땅이름」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이같은 견해를 제시.그는 『독립된 국가를 가진 단일민족국가에서 국민이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 토박이 땅이름이 우리나라 만큼 푸대접받고 공인받지 못하고 있는 예는 드물다』고 꼬집는다. ○…윤교수는 뉴질랜드의 도시이름및 길이름을 분석,영국인이 거주하던 대도시를 제외하고 중소도시에서는 90% 이상이 원주민인 마오리주의 토속어로 돼있다고 지적한다.그러면서 뉴질랜드정부도 길이름을 정할때 우선적으로 토속어 이름에 공식지명의 지위를 주고 있다고 밝혔다.그러나 우리 토박이 땅이름은 상당히 살아남아 쓰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공식지명의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어 뉴질랜드의 땅이름이 영국화된 것보다 더 철저히 중국 한자화 돼있다는 것으로 보았다. ○…윤교수는 또 우리나라의 도시에는 아직도 길이름이 안붙은 곳이 많은데 이는 전통적으로 우리의 지리감각이 서양사람과 달랐기 때문이라는 설명.그러나 자동차문화의 발달에는 작은 도로까지 길이름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앞으로 우리나라도 대도시는 물론 중소도시까지도 길이름을 붙여야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그는 이어 퇴계로 충무로 을지로등 훌륭한 조상의 이름을 땅이름에 부르는 것은 서양식이며 우리는 전통적으로 조상의 이름을 땅이름에 붙여 마구 부르는 것을 온당치 못한 것으로 생각했다.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이미 붙여진 길(땅)이름은 그대로 두더라도 앞으로 새로 붙일 길이름은 우리 토박이말이 있다면 그 말을 우선적으로 살려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 도덕성의 회복/김상복 할렐루야교회 목사(굄돌)

    우리 민족 반만년의 역사중 이 시대 지금 살고있다는 사실을 나는 대단히 즐겁게 생각하고 있다.삼국시대,신라시대,고려시대,조선시대,일제시대나 해방 전후 시대도 아니고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가 민족역사에서 가장 좋은 시대라고 믿는다.우리 부모님들은 일제시대와 6·25를 거치시면서 고생만 하시다가 떠나셨거나 떠나실 날들을 며칠 안남기고 계시다.그 분들은 우리 민족의 고난기에 고통을 뼈속까지 체험하시고는 시련의 씨가 우리 때에 와서 드디어 꽃피는 것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가셨다.그러나 우리 세대는 일제말기와 6·25를 지나며 가난의 고통을 경험했으나 그 고통을 딛고 일어나 오늘과 같은 새 시대를 맞게되는 그 과정에 깊숙이 참여해왔고 사실상 이 시대를 일으키는 한 원동력으로 살아왔던 것이다.그리고 그 수고의 열매를 다소나마 맛보며 살고있다.오늘 우리는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가장 좋은 때에 살고 있다. 입고 있는 옷만 하더라도 반만년 역사 속에서 어느 시대에 우리 보다 더 좋은 옷들을 입고 산 적이 있었는가? 얼마전 어느 작은 시골 동네에 갔던 적이 있었다.마침 길거리는 퇴교하는 어린 아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활짝 웃으며 장난을 치는 아이들은 하나 같이 아름다운 갖가지 색깔의 옷들을 귀엽게 입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그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시골인지 서울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우리들이 어렸을 때를 상기하며 「아,참 좋은 시대가 왔구나!」나도 모르게 혼자 중얼거렸다.최근 북쪽의 김주석은 백성들에게 「이밥에 고기국」을 먹이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는데 남쪽에서는 「이밥에 고기국」시대를 지나 건강식을 찾아 주부들이 애를 쓰고 있다.미국 백악관 앞에서는 집없는 사람들이 어쩌다 겨울에 굶거나 얼어죽는 사람도 가끔 나타나지만 이 나라에서는 지금 굶어 죽지는 못한다.알려지기만 하면 정부든 사회든 이웃이든 간에 도움의 손길이 오기 때문이다.어디를 가도 자가용들이 너무 많이 길에 깔려있어 약속시간을 지키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 언제 우리 역사에서 지금처럼 물질적 풍요로움을 누리며 살아본적이 있었나? 경제,사회,교육,문화,예술,체육,종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괄목할만한 발전을 해왔다.놀라운 일이다.이나라에서는 죽도록 공부하지 않고는 대학을 떨어질 자격조차 갖지 못한다.그동안 정치와 도덕성 이 두가지가 큰 문제였는데 지난번 선거를 통해서 이제는 정치 세계마저도 또 한단계 전진할 수 있게 되었다.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정치와 함께 도덕성의 회복을 통해 우리가 내적 변화를 한번만 창출해 낼 수 있다면 우리 민족의 최선의 날들은 다가오게 될 것이다.이런 날들이 우리 시대동안에 오기를 바란다.
  • 페루/반정게릴라 학교 침투 혈안(세계의 사회면)

    ◎대학서 국교까지 혁명이념 교육장화/“박봉불만” 교사까지 꾐에 쉽게 넘어가/후지모리 강경단속령 불구 실효 의문 페루의 반정부 게릴라들이 학교에까지 침투,조직확대를 꾀하고 있어 치안당국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특히 게릴라 조직들은 학생들에게 게릴라의 혁명이념을 주입시키기 위해 교사들을 매수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는 아예 학교를 사들여 자기들이 개발한 교과과정대로 가르치고 있는 실정이다. 게릴라들은 처음에는 당국의 눈길을 피해 한적한 시골이나 밀림지역에 있는 학교를 조직원 양성의 주요대상으로 삼았으나 최근에는 대도시로도 진출하고 있어 당국을 더욱 긴장시키고 있다. 학교도 대학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이 다니는 국민학교에까지 손을 뻗쳐 교사들이 게릴라들을 위한 정보센터를 운영하는 현상까지 빚어지고 있다. 게릴라 조직들이 이처럼 학교를 포섭대상으로 삼고있는 것은 교육제도를 이용,그들이 추구하는 혁명이념을 전파시키는 것이 목표달성에 가장 효과적이라고 믿고 있기때문이다. 교조적인 모택동주의나 민족주의 성향을 띠고 있는 반정부 게릴라 조직들은 정부를 전복시킨뒤 노동자 농민이 통치하는 국가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그래서 형편없이 낮은 봉급에 불만을 품고 있는 일부 교사들마저 『정부와 싸워 이기면 좋은 대우를 받게 해준다』는 게릴라 조직의 꾐에 쉽게 빠져들어 게릴라들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고있다.페루 교사들의 한달 평균 봉급은 1백달러에 불과한 실정이다. 페루에서 이같은 활동을 벌이고 있는 게릴라 조직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지난 70년 조직된 「빛나는 길」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가진 게릴라단체. 철학교수 출신이며 지난해 9월 체포된 구즈만에 의해 만들어진 이 게릴라 조직은 지난 10여년동안 정부군과의 충돌로 2만6천여명의 페루인이 희생됐다. 페루 남부 안데스산맥 근처에 있는 후아망가대학에서 조직된 이 게릴라 조직은 교사들을 매수,학생과 동료교사 가족들에게 마르크스와 모택동및 구즈만 사상등을 가르치게 하고 있다.이 조직 자체에서 만든 교과과정을 활용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이 조직이 학교에 어느정도 침투돼있는지는 여러 면에서 드러나고 있다. 최근 한 육군장성이 단속차원에서 페루 중심지에 있는 한 학교를 방문,학생들에게 국가를 불러보라고 했을때 학생들은 국가대신 「빛나는 길」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또 경찰조사결과 이 학교 교사 6명이 수도 리마에서 「반정부게릴라 정보센터」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리마에 있는 학교에 다니는 한 여학생은 『우리 선생님은 「구즈만이 대통령이며 그가 체포됐다고 해서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다.혁명은 중단될 수 없다」고 곧잘 얘기한다』고 털어놓고 있다. 대학도 사정은 비슷하다.반정부 게릴라를 지지하는 내용의 낙서와 벽화로 치장돼있는 캠퍼스가 한 두 곳이 아니다. 페루 정부당국은 캠퍼스에 군을 들여보내 낙서와 벽화를 지우게 하고 지난해 11월엔 후지모리대통령이 『반군게릴라를 선전하는 교사들을 종신형에 처하겠다』는 내용의 포고령을 내리는등 최근들어 더욱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그러나 이같은 강경조치들이 겉돌고 있어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다.
  • 장애인학급 지원 확대를/김병용 경북 영덕국교 교사(교창)

    갖가지 장애인 학생을 전문적으로 교육시키는 특수학교가 아니더라도 일반 국민학교에서도 「특수학급」을 따로 편성하여 운영하고 있다. 국민학교의 일반 학급에서 정상학생과 같이 교육하기가 곤란하거나 교육효과를 거두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수학급」의 학급편성의 대상 아동은 정신 박약아,심신장애아동이기는 하지만 정신발달 지체나 심신장애 정도가 경미해 학교교육이 가능한 아동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시골에서는 시설부족과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정신적·신체적 지체나 장애의 정도가 심하더라도 하는 수없이 「특수학급」에 편성,교육을 시키고 있는 형편이다. 특수학급만을 골라 담임한지 지난해로 4년째이다.아동들의 티없이 맑은 눈망울과 구밈없는 천진한 모습을 보며 가르친다는 것에 한없는 긍지와 보람을 가졌었다. 용변처리도 못하는 석이의 뒷처리를 도와 주면서 땀으로 찌든 옷을 세탁해 입히면서도,학교에서 집까지 손을 잡고 바래다 주면서 귀찮거나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어느날 갑자기 없어져 읍내를 밤새도록헤메다 이튼날 면사무소로부터 연락을 받고 뛰어 갔을때 나를 알아보고 달려와 안길때 자기집조차 찾지못해 방황했을 안스러움에 같이 껴안고 울음이라기보다 차라리 통곡에 가까운 흐느낌을 토해내기도 했었다. 그런 석이가 올 2월이면 국민학교를 졸업하게 된다.아직 제앞가림도 제대로 할 줄 모른는데…. 학부모를 찾아가 상급 특수학교에 진학시키도록 하는게 좋겠다는 의견도 제시해보았지만 생활보호대상자로 겨우 생계를 꾸려가는 마당에 자식들의 교육과 장래문제는 현실과는 먼 동화속의 이야기에 불과할 따름이다. 어쩌면 석이의 상급 특수학교 진학문제는 어느 개인의 사정이라기보다는 사회의 문제인지도 모른다.우리사회도 선진대열에 들게 되었다지만 벽지 국민학교에서 「특수학급」 담임을 맏고 있는 교사에게는 웬지 낮설기만 하다. 지난 77년 특수교육진흥법이 제정,공포된이후 양적으로는 크게 발전해 왔다고 볼 수 있으나 아직도 다듬고 고쳐야 할 부분이 많다는 생각이다. 정신적 신체적 장애자들에대한 취학기회를 무상의무교육으로 확대해야 하겠고 장애정도에 따라 능력에 맞는 적절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길이 보장되어야 하겠다. 특수교육에대한 재정적 지원을 확대하여 우수교사 유치나 시설기준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한 나라의 경제 성장의 목적이 국민전체의 복지를 향상시키기위한 것이라면 전 국민에게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저한의 기본 생활수준을 보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복잡한 귀성길 고생 피하자/상경설쇠기 늘고 있다

    ◎고향가족,부모모시고 서울로/“성묘 못하지만 고궁구경 시켜드리죠” 명절이나 연휴 교통체증을 피해 지방거주 가족들이 대도시 가족들과 합류하는 「귀성역류」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대도시에 사는 자식들이 미리 고향을 찾아 차례를 지내고 추석·설등 연휴에는 시골에 계신 부모들을 서울등 대도시로 모셔 명절을 보냄으로써 많은 식구들이 움직이는 불편을 덜려는 착상이다. 이는 열차·고속버스등 대중교통수단의 귀성표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데다 손수운전자들도 귀성·귀경길에 엄청난 홍역을 치르기 때문이다. 이들 귀성역류가족들은 고향의 웃어른을 직접 찾아보지 않고 서울등으로 모시는 것이 우리의 전통적인 예절에 어긋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극심한 귀성·귀경전쟁에 이제는 부모들도 어느 정도 이해해준다고 말하고 있다.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는 김모씨(36·구로구 구로1동)는 『지난 신정연휴때 대전에 계신 62세의 어머니를 여동생이 모시고 왔다』면서 『연휴때 대전을 가려면 평소의 2시간30분보다 2∼3배인 6∼8시간씩 걸렸으나 어머님이 오실때에는 고속버스표 구하기도 쉬웠고 시간도 1시간40분정도 밖에 안걸렸다』며 만족해했다. 또 홍모씨(42·회사원·서울 성동구 구의동)도 『고향이 전남 광주여서 아이 둘을 데리고 연휴때 간다는 것은 이제 엄두가 안난다』면서 『고향의 남동생 가족이 아버님을 모시고 신정연휴때 머물다 갔다』고 말했다. 홍씨는 또 『성묘는 가족끼리 약속을 정해 명절전후의 일요일을 잡아 치른다』면서 『명절날 성묘를 못하고 부모님을 올라 오시도록 해 죄송한 마음이 들지만 한꺼번에 귀성인파가 몰리는 것을 감안하면 별다른 해결책이 없다』고 덧붙였다.
  • 21세기 한국의 문을 여는 “이어령과의 대화:10

    ◎단추와 옷고름/괴춤의 여유로 세계를 감싼다/재고 또 재는 합리뒤에 오는것/한국적 가변성·포용성이 새 문명 활로/산업사회의 양복은 긴장의 병리를 유발/한복의 융통성은 「푸는 사회」의 건강처방/「법적죄임」속의 메마른 인간관계/서구의 마약·에이즈·홈레스 유발/바지·저고리 품 닮은 신축적 사고/미래사회 기본정신으로 삼아야 □황규호문화부장=한복은 몸을 싸는 옷이요,양복은 몸을 넣는 옷이라는 지난번의 말씀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 주었습니다.오늘은 보자기 문화에 뒤이어 양복과 한복의 비교문화론을 듣고 싶습니다.그리고 그 비교를 통해서 한국문화의 전망과 그 가능성도 밝혀주셨으면 합니다. ■이어령전문화부장관=양복을 보면 근대 산업문명의 특성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산업화가 합리적인 수치에서 생겨났듯이 양복도 재단사가 인간의 몸을 정확하게 재는 데서부터 태어나게 되지요.인체는 아주 복잡하지 않습니까.그것을 일일이 자눈으로 재어 한치의 오차도 없이 몸에 꽉 맞추는 기술­기계로 찍어내는 공산품하고 매우 유사하지 않습니까. ○여우사냥복서 유래 □우리가 오늘날 입고 있는 양복과 근대 산업문명이 시작된 것과 어떻습니까.그 연대가 비슷한지요. ■연대만이 아니지요.산업혁명을 낳은 영국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입고 있는 그 양복의 고향이지요.즉 남자들의 양복 원형은 영국 지방귀족들이 여우 사냥을 할때 입던 옷이라고 해요.활동적이고 간편하고 기능적인 그 모드가 산업사회의 특성에 맞아 떨어지게 된 것이지요.산업혁명이 보편적인 세계시스템을 구축한 것처럼 양복 역시 이제는 거의 세계인의 의상으로 표준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요. □양복의 생명은 그 재단이고 그 재단기술은 인체를 정확하게 재는 데서 시작된다고 하셨는데 산업사회의 합리주의는 바로 이 재는 문화가 아니겠습니까.그런데 한복은…. ■맞아요.한복은 정확하게 치수를 재지 않아도 되는 의상이지요.만약 옛날 조선조시대의 우리 할아버지네들이 허리를 재고 또 재고 그러고도 모자라 가봉까지 하면서 허리통을 1∼2㎜ 따져가며 핀을 꽂는 양복점 재단사들을 보면 분명 미련한놈들이라고 한숨을 지었을 것입니다.그리고 이렇게 말하셨겠지요.『야 이놈들아 어디를 재는거냐.사람 배라는 것은 숨을 들여 쉴때 다르고 밥을 먹을 때 다른 것인데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을 그렇게 재서 어쩌자는 거냐』.(웃음)그리고 한복의 괴춤의 자랑할 것입니다.한복의 바지는 배를 재지 않고도 입을수 있도록 아예 허리통보다 5㎝가량 넉넉하게 말라 놓은 것이지요.배가 나올때는 풀어 입고 들어갈때는 조여 입으면 그만입니다.이 융통성이 바로 전번에 말한 한국인의 융통성이요 가변성입니다. □서양옷처럼 일일이 치수를 따지지 않아도 입을 수 있도록 디자인 된 것이 한복의 특성이라는 말씀이시군요. ■사실 한복은 앞뒤도 없지 않습니까.(웃음)웬만하면 몸집이 달라도 누구나 입을 수 있는 포용성을 지녔지요.이 너그러움이 몸을 싸고 인생을 싸고 세계를 쌉니다.까다롭게 따지는 옷이 아니라 그윽히 품어주는 옷이지요.임어당은 언젠가 서양과 동양의 문화적 차이를 그같은 시각에서 비교한 적이 있었지요.서양사람(일본사람도 여기에 속합니다마는)들은 굴을 뚫을 때에미리 정확하게 계산해 놓고 양쪽에서 파들어 온다는 것이지요.그래서 한치의 에누리도 없이 도중에서 쌍방의 굴이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고 있는 문명이라는 겁니다.그러나 중국사람들은 양쪽에서 적당히 파들어 온다는 거지요.그러다가 굴이 서로 만나면 재수가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굴이 두개 생기니 더 좋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지요.(웃음) 이런 문명을 가지고는 물론 달나라에 갈 수는 없지요.그러나 정신병원에는 가지 않아도 됩니다. □사실 산업문명은 양복처럼 치수가 맞을때에는 좋으나 조금만 틀려도 거북하기 짝이 없지요.신사복을 입을 때마다 품이 째기도 하고 허리가 조여 후크를 풀어야 만 되는 경우도 많지요.산업사회라는 것도 꼭 그렇게 인간을 숨쉴수 없게 조일 때가 많아요. ■바지만이 아닙니다.양복과 한복의 차이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단추와 옷고름입니다.나는 어째서 세상옷들이,중국옷도 마찬가지입니다.모두 단추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유독 한복만은 여자옷이나 남자옷이나 옷고름을 사용하였는가궁금하게 여겼지요.결국 이것도 치수를 초월한 융통성과 포용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금세 그 수수께끼가 풀립니다.단추는 그 구멍과 정확하게 대응되어야 합니다.단추와 구멍은 한치의 에누리도 용서되지 않지요.위치가 고정되어 있어서 그 간격을 조일수도 풀수도 없습니다.그러나 옷고름은 그렇지 않아요.품이 크면 바짝 조여 맬수 있고 반대로 품이 째면 느슨하게 풀어 맬 수가 있습니다.바지통처럼 여분이 있지요. □옷고름의 길이도 여분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흥부네 집 가난 묘사에도 있듯이 옛날 사람들은 기워 입을 헝겊조차 없어서 고생을 하였지요.그런시절이었는데도 어째서 옷고름을 그렇게 길게 만들었는지 미스터리중의 하나입니다.서양 리본을 보십시오.매고 난 끈은 짤막하게 자르지 않습니까.그런데 한복의 옷고름은 바람에 나부낄 정도이지요.옷감이 귀하면서도 왜 리본처럼 짤막하게 끊지 않았는가.그것이 한국인의 마음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시골에서 아무리 배가 고파도 감을 다 따지 않고 하나 둘 남겨 두지요.까치도 먹으라고말입니다. □시골에서는 그것을 까치밥이라고 부르지요. ■옷고름이나 까치밥이나 그것은 다 궁색한 가운데도 여분을 만들어 내는 한국특유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그 여분의 사상속에서 정도 생기고 포용력이나 융통성 그리고 멋이 생겨난 것이지요.좀더 복잡한 말로 하면 「무용의 용」이라는 겁니다.이것이 바로 후기 산업사회에서는 기능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정보적 가치와 결합될 수가 있습니다. ○도둑이 소송 내서야 □산업문명이 양복처럼 디자인된 것이라면 오늘날 이 옷이 인간의 품에 맞는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처음에는 잘 맞았지요.그런데 1970년대 오일 쇼크나 월남전이 끝나는 무렵만 되어도 점차 허리가 거북하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옷이 되고 맙니다.몸이 달라진 것이지요.한치 두치 따져야 살아갈 수 있는 산업문명은 결국 미국사회처럼 70만이 넘는 변호사를 배출하게 된 것입니다.일인당 비율로 일본보다 17배가 넘는 수이지요.치수를 따지지 않고서도 입을 수 있는 바지처럼 법없어도 사는 것이 한국인이 그리는 이상사회였습니다.정철도 가사를 통해서 『강원도 백성들아 송사를 하지말라』고 소리 높이 외쳤지요.옷에 치수를 따지지 않는 것처럼 한국사람들은 소송은 물론 웬만한 경우에는 따지는 것을 금기시합니다.그래서 누가 따질 때 『지금 나한테 따지자는 거야』라고 하면 상대방은 대체로 좀 수그러들면서 『내가 꼭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라고 변명을 합니다.(웃음) 따지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 한국문화풍토때문이지요. 그러나 미국사회는 따지기를 좋아하는 로고스중심주의이며 법 만능사회입니다.법없이는 못사는 사회를 이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지요.미국의 희극영화에는 거지끼리 싸우다가 마지막에는 나의 고문 변호사를 통해 고소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습니다.전문 변호사를 두지 않고서는 거지짓도 못하는 것이 미국사회라는 풍자지요.현실적으로도 미국에서는 정말 믿기지 않는 소송사건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도둑이 도둑질하려고 학교 실험실에 들어가려 했다가 지붕에 난 창유리를 잘못 밟아 떨어져 척추를 다칩니다.반신불수가 된 이 도둑은 그 학교를걸어 소송을 제기합니다.지붕으로 낸 창문을 지붕색과 똑같이 칠해 놓았기 때문에 창인줄 모르고 밟게 되었다는 겁니다.그러니 그런 착각을 일으키게한 건물주에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었지요.(웃음) 그런데 더욱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이 도둑이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어 결국 합의로 위자료를 타게 되었다는 점입니다.(웃음)그 뿐만이 아닙니다.심지어 교사가 성적을 나쁘게 주어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고 소송을 제기한 학생도 있습니다.(웃음) □복용자로부터 소송이 걸려 올까봐 제약회사가 약품을 개발해 놓고도 판매하지 못하는 경우가 상당수라고 들었는데요…. ■의료분쟁이 아주 심하지요.걸핏하면 환자로부터 소송이 걸려오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의사가 되려면 인술보다 법에 밝은 법술에 능해야 되지요.그러나 소송왕국이 된 미국의 진정한 불행은 법의 고삐에 의해서만 조종되는 메마른 인간 관계속에 있다고 하겠지요.그러한 사회에서는 스트레스가 쌓이게 마련이고 스트레스가 쌓이면 정신질환에 걸리게 됩니다.「사이코」가 일반적인 사회현상이되어 버립니다.한편 사이코에 걸리지 않으려면 스트레스를 풀어야 하는데 가장 손쉬운 방법이 약물에 의한 것입니다.이렇게 해서 미국은 대통령이 선전포고를 하게되는 마약왕국이 되어버립니다.사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미국에는 현재 홈레스(우리말로 하면 집없는 거지)가 전 인구의 1%로 2백50만이고 코카인같은 마약중독자가 또 1%라고 합니다.여기에 또 그만한 에이즈가 있습니다.이것은 미국의 사회를 좀먹는 삼각형으로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지요.홈레스의 대부분은 약물중독의 결과에서 비롯되고 에이즈 환자의 대부분은 약물중독과 상관성이 있습니다.클린턴은 미국경제의 재생을 걸고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지만 그 최대의 난관은 눈덩이처럼 불어가는 재정적자입니다.그런데 바로 홈레스 에이즈 마약의 세가지 사회현상이 재정적자의 삭감을 불가능하게 하는 난적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지요. □서구 산업사회의 궁극에는 그 세가지 나락의 문이 열려 있다는 말씀이시군요.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미국문화의 전철을 밟게 되면 우리의 모습으로 될 수도 있다는 경고구요. ■그렇지요.우리는 그동안 경제 발전의 목표나 정치적 이상을 모두 미국을 모델로하여 한길로 달려 왔지요.그런데 아무래도 우리가 따라간 그 길이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겁니다.미국의 반수 이상은 신문을 읽지 않아 정치에도 세계문명의 전환에도 무관심하고 책을 한권도 구입하지 않은 가정이 6할이나 된다고 하니(92년 통계)미국내에서 새로운 미래의 길을 찾기란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우리자신의 교과서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지요.양복을 벗어던지고 한복을 입으라는 복고주의가 아니라 급변하는 세계에 맞는 새로운 의상을 디자인하는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21세기의 성패 달려 □그 문명의 디자인을 하는데 한복의 옷고름 바지의 포용력을 기본정신으로 해야 된다는 말씀이지요. ■구체적으로 「긴장사회」를 「푸는사회」로 만들어갈때 개인이고 사회고 건강해진다는 겁니다.그렇지 않으면 마약 에이즈 홈레스가 바로 우리의 현실 인류문명의 병이 되어버리는 것이지요.비정상적인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이 세가지 좀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는 막아야 합니다.여기에 21세기의 성패가 달려 있습니다. 아직은 에이즈도 마약도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홈레스의 사회문제도 세계에서 우리나라 처럼 작은 나라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이 말은 이 3대 좀의 온상이 되는 긴장문화가 덜하기 때문입니다.풀었다 조였다 할 수있는 바지와 저고리품처럼 신축성과 포용성이 우리 의식속에 잠재되어 있는 까닭이라고 봅니다.일본만 해도 경제적 번영을하고 있습니다마는 정신질환이라는 면에서는 우리보다 심각하지요.어느날 갑자기 가출을 해버리는 중년 샐러리 맨,10대의 사망률 가운데 반수를 차지하는 자살자,변태성 잔악 살인자….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사건들이 많이 생겨납니다. □겉으로만 보던 미국사회 산업사회가 도달하는 궁극의 풍경을 이렇게 근접촬영을해보니 정말 불안과 공포가 생기는 군요.말끝마다 『미국에서는…』이라고 선진국모방에만 급급했던 것이 엊그제인데….느낌이 새로워지는군요.자 그러면 우리도 옷고름 자락을 남겨두고 다음에 다시 말씀듣기로 하지요.
  • 새 대입시제요강 3월 확정/교육부

    ◎고교 파행수업 조짐… 발표 늦추기로/대학에도 본고사비율 공개연기 요청 교육부는 13일 내년도 대학입시제도의 골격인 대학수학(수학)능력시험에서 쟁점이 되어온 ▲두차례 시험실시 시기 ▲복수지원 허용여부및 허용범위 ▲대학별 본고사실시 시기등을 새학기가 시작돼 일선 고교에서 반편성이 끝난 3월 중순쯤에나 확정,발표키로 했다. 교육부는 또 이날 내년도 입시에서 대학별 본고사를 치르는 서울대,연세대,고려대등 전국 42개 대학에 협조공문을 보내,대학별 본고사의 골격 발표를 새학기 이후로 미뤄줄 것을 긴급 요청했다. 교육부의 이같은 방침은 대학수학능력시험 세부 시행방안과 대학별 본고사 골격이 당초 예정대로 2월초순쯤에 발표될 경우,일선 고교에서 학급을 희망 대학별로 편법 편성하는등 학사일정을 파행적으로 운영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때문이다. 실제로 일선 고교에서는 최근 방학중 보충수업을 실시하면서 벌써부터 대학수학능력과목들은 배제한채 대학별 본고사의 공통과목인 국·영·수등 본고사 과목만을 집중 학습을 시키는등 고교 교육정상화를 해칠 조짐이 보이고 있다. 또 사회일각에서는 본고사 공통과목인 국·영·수 과목을 대상으로 고액과외가 기승을 부리는등 새 입시제도의 당초 도입 의도와는 달리 입시열기가 전보다 더 과열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지적이다. 교육부는 매년 새해의 구체적인 입시요강은 관례적으로 새학기초에 발표해 왔고 새 입시제도가 입시사상 처음 실시되는 새로운 제도라는 점을 감안,수험생의 수험준비 혼선을 막기 위해 새학기시작 이전인 2월초에 모든 입시골격을 확정,발표키로 했었다. 이에따라 서울대등 본고사를 치르는 각 대학들은 대학별 본고사가 입시사상 최초로 실시되는 시험이기 때문에 입시연구위원회(가칭)를 설치,합리적인 문제유형과 출제기조등을 마련해 왔다. 각 대학들의 본고사 골격에서는 ▲주관식문제로 할 것인지 ▲주관식출제라면 구체적으로 논술형,단답형,완성형,서술형등 문제형태 ▲주·객관식 혼합형으로 출제한다면 주·객관식의 배점비율 ▲출제범위을 교과서로 한정할 것인지 여부 ▲문항당 배점및 시험시간등이 포함되어 있다.
  • 인제대교수 권태완의 성남(명사의 고향:49)

    ◎청계산돌아 십리길 타박타박 걸어 등하교/초가집·등잔불이 정겹던 소박한 촌락/다리네고개 공동묘지 지날땐 “으시시”/서울시 지척인 내고향서 콩이나 심고 가꾸며 여생보내는게 꿈 내 고향은 수평선이 앞에 펼쳐지는 시원한 바닷가도 아니요,기암괴석과 함께 산수가 수려한 멋진 곳도 아니다.말하자면 별로 특색이 없는 조용한 벽촌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듯이 서울 발치에 있으면서도 문명의 혜택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 그런 토박한 농촌에서 나는 태어났다. 지금은 눈앞에 경부고속도로가 달리고 등잔불은 전등으로 바뀌었으며 어디에나 전화를 걸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을 버스까지 들어오고 있다. 이젠 도시의 문명이 부러울 것이 없다 할 만큼 그동안 크게 변화한 것이다.물론 초가집은 사라졌으나 집다운 집이 별로 눈에 뜨이지 않는 데에서 아직도 이 동네의 어설픈 생활 수준을 살필 수 있다.그러나 무엇보다도 외부인의 비닐하우스가 일부 덮였을 뿐 농촌이면서도 농토를 놀리고 농사를 팽개친 현실이 그저 가슴 아프기만 하다. 이제 내 고향은농촌이 아니요,외부인이 잠자러 들락거리는 그러면서도 또 한 차례의 큰 변화를 기다리는 엉거주춤한 촌락이 되고 만 것이다.행정구역으로 볼 때에는 도시에 속해 있으나 그 모습은 여전히 시골이요,분당을 눈 앞에 두고서도 개발 제한 구역에 묶여 있으니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게 될지 그 예측을 불허하는 정중동(정중동)의 고요함이 감싸고 있을 따름이다. ○농촌모습 곳곳에 내 고향은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3통이다.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내려오자면 첫 고개를 넘게 된다.다리네 고개라고 하는 이 고개를 넘어서면 왼쪽에 도로공사가 보이고 오른쪽에는 검푸른 청계산으로 끌고 가는 포장 길이 눈에 들어 온다.이 마을 길이 어린 시절에 내가 학교에 다니던 길이요,지금도 외부와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로서 마을 버스가 다니는 길이기도 하다.이 길을 따라 비닐하우스 숲 사이로 들어가서 구버러진 모퉁이를 한번 돌면 내 고향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여기가 경기도 성남시로 된 것은 최근의 일이고 원래 이곳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금토리 내동이었다.옛날 어른들은 둔투리 안말이라 하셨고 (안동)권씨 양촌자손 안양공파 후손들이 대대로 살 고 있었다. 할머니께서 이 마을로 시집을 오시니까 양식을 넣어 놓을 만한 그릇조차 변변히 없었다고 한다.그래서 할아버지 잠방이의 다리를 잡아 매어 놓고 거기다가 보리쌀을 넣어 놓고 잡수셨다는 이야기다.그때야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가난하였다고 하거니와 우리 집에는 특별히 그럴만한 사유가 있었던 것 같다.할아버지께서 5대 독자이셨고 양자로 이어 온 집안인지라 그때는 농사를 짓고 사는 데 생산력이될 일손이 늘 부족하다 보니 무엇이고 축적될 여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그런데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남달리 부지런히 일하신 덕분에 나는 그래도 배고프지 않은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났던 것이다.일찍이 할아버지한테서 천자문을 배웠고 서당에 가서 명심보감을 배우다가 국민학교에 다니느라고 판교까지 10리 길을 매일 왕래하였던 것이다.지금의 도로공사 자리가 그때는 공동묘지였는지라 하학길에 혼자서 그 앞을 지나갈 양이면 무서워서 힐끗 힐끗뒤돌아 보면서 뛰어 갔던 생각이 지금도 난다. 또,아버지는 12남내 중에 늦게 태어나시고 유일하게 살아남으셨으니,6대째로 독자가 되셨던 것이며 이렇게 우리 집안은 그야말로 자손이 늦고 귀해서 번창하지 못한 것이다.그러니 자연히 항렬이 높아져서 나는 같이 자라던 일가 아이들에겐 증조(증조)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같은 나이 또래에 종조할아버지가 되다 보니 그 아이들은 나를 꽹가리 할아버지라고 놀려대었고 어린 나에겐 그 소리가 그렇게 듣기가 싫었던 것이다. ○손이 귀햇떤 집안 지금은 나이도 들고해서 고향에 가면 일가들이 반기면서 대부(대부)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하지도 않을뿐더러 당연시되고 말았으니 어느덧 나는 동네 대부가 되고만 것이다. 나는 국민학교 6학년때 고향을 떠나왔으며 다시 고향에 잠시 머무르게된 것은 6·25때였다.고향을 피란처로 삼았으며,이집 저집에 가서 얻어먹기도 하였다.의용군에 끌려 가지않은 것도 고향 덕분이며,고향의 인심이 나를 그렇게 숨겨준 것이다. 그러길래 나는 고향과끊임없이 숨쉬고 있으며,틈만 있으면 고향으로 내려가서 나무도 심고 동네 사람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세상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도 객지 생활을 하셨지만 말년에는 고향에 자주 드나드셨다.여러가지 묘목을 심으시면서 아버지의 이상향(이상향)을 가꾸시던 어느날,그 꿈을 채 이루지도 못한신채,아버지는 그만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20년이 지난 오늘날,그 묘목은 제법 자라서 아버지의 산소는 물론,할아버지의 산소와 동네까지도 푸르게 하고있다.그때만해도 나는 아버지께서 나무를 심으시는 이치를 깨닫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경제성이 없다고 만류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할아버지와 할머니,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산소를 모신 내 고향에 나는 지금 나무와 꽃을 심으면서 가신님과 속삭이고 있다. ○부친의 뜻 깨달아 언젠가 이헌조사장(금성사)이 김호길박사(포항공대)와 다녀갔는데,그는 한시 한수속에 내고향을 이렇게 그려냈다. 방권태완박사고리 지호금토격매연 일사귀래반무전 과우취미위수장 천운홍조범화선 금조종두하심작타일유민원계연 시문인생궁극의 청계산하송여년 금년에 소위 회갑을 맞이 했다.그동안에 쓴 글들이 모아져서 수상집이 되었고,가족과 몇몇 친구들이 모여서 조촐하게 저녁을 같이했다.추위를 피하기 위하여 비닐하우스가 임시로 세워졌고,고향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가운데 술잔이 오가고 노래 소리가 울려나왔던 것이다.이 잔치에 초대된 손님은 바로 판교에 같이 다니던 낙생 국민학교 17회 동창생들이었다.어제의 코흘리개들이 모두 할아버지,할머니가 되어 와 준것이 고마웠다.이렇게 내고향이 가까이 있는것이 나의 기쁨이요,자랑이기도 하다.이제 나는 내가 하고있는 봉사가 끝나는대로 고향에 가서 살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공덕비 건립 감사 성천 유달영선생께서 청계산 밑에서 태어났다해서 그 이름에서 「계」자를 따시고 「인」자를 붙여서 「인계」라고 호를 지어 주셨다.이에 부끄러움없이 그야말로 인계답게 여생을 살았으면 하는 것도 내 작은 소망중의 하나.그리고 동네 새마을회관 앞에는 「권태완 박사 공덕비」라고 새겨진 비가 서 있으니,내 어찌 고향 사람들의 따사한 마음을 느끼지 않을 것이며,빚진 마음에서 헤어날 수 있으랴! 「고향!」이 얼마나 포근하고 편안함인가! 동양을 빼놓고도 독일말에는 옛고향(AltHeimat)이라는 멋진 말이 있다.그런데 영어에는 그런 말이 없으니 어찌 된 셈인지 나는 모른다.고향이 없는 영어권의 사람들은 아마도 마음의 한구석이 비어 있으리라. □약력 ▲1932년 12월16일 경기도 성남시 금토동 출생 ▲서울대 화학과 졸업 ▲미 플로리다주립대 박사 ▲미 아이오와주립대 조교수 ▲KIST 책임연구원 한국식품개발연구원장 ▲인제대 식품영양학과 교수 대한화학회 한국식품과학회 회원 ▲저서 「한국식품 연구문헌총람」외
  • 극작가 골도니 2백주기/불 추모공연 붐

    ◎대표작 「시골뜨기들」 등 무대에/희곡 모두 백60편 저술… 기념회고록도 발간 이탈리아 극작가 카를로 골도니는 1793년 겨울 파리에서 고독과 가난 속에 죽었다.사후 2백주년이 되는 1993년을 맞아 연초부터 그의 명작 희극들이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 곳곳에서 무대에 올랐다.국립 샤이요극장의 「시골뜨기들」,코미디 프랑세즈의 「충실한 하인」,보르도 드라마센터의 「두 주인의 하인」,코미디 이탈리엔의 「정숙한 신부」등등…. 배우 연출가 그리고 대학인들은 「유럽인 골도니」라는 단체를 만들었다.행사로는 그의 작품 공연뿐만 아니라 40개의 희곡작품들과 「회고록」등의 출판,각종 모임과 토론회 등도 있다.토론회는 그러노블 스트라스부르 파리 그리고 그가 태어난 베니스에서도 열린다.그의 전기(제라르 루시아니 집필)도 나올 예정이다.따라서 올해는 그야말로 「골도니의 해」가 되고 있다. 골도니는 1707년 베니스에서 태어났으나 생의 많은 부분을 프랑스에서 보냈다.처음에는 토스카나말과 베니스말로 작품을 쓰다가 나중에는 프랑스말로 썼다. 그가 쓴 작품은 무려 1백60여편에 이른다.이렇듯 많은 희곡을 쓴 작가는 없었다.이탈리아 연극의 개혁자였고 누구보다도 다작이었던 골도니는 오랫동안 잊혀진 인물이었다.너무 많은 작품이 그의 명성을 가리는 결과가 되었다. 그의 작품들이 다시 읽히면서 다작임에도 태작이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다.그는 자신이 살았던 18세기 이탈리아의 소시민 예술가 귀족 노동자 등 갖가지 인물들을 성실하고 재치있게 그려냈다.어느 역사학자도 당시 시대상을 이보다 더 잘 서술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찬사가 주어졌다.등장인물들은 생동감 있고 장면들은 익살맞아서 그의 작품들은 진짜 오락극이라는 평가를 얻고 있다.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카를로 골도니는 어릴때부터 연극을 좋아했다.처음에는 의사가 되려다 포기하고 변호사가 되려 공부하는 틈틈이 작품을 썼다.경찰서에서 근무하기도 했다.39살때까지 직업을 이것저것 바꾸면서 이탈리아 전역을 방황하다가 고향에 돌아가 극작가가 되었다. 그의 작품은 종래의 이탈리아 연극을 뒤엎는 것이었다.훨씬 후세의 브레히트와도 비슷한 연극관을 벌써 지녔기 때문에 화려한 무대의 요정극이나 요구하는 베니스 연극계 실력자들과는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1792년 그가 파리로 이주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나 이같은 불화 때문이었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파리에서는 극작가로서 어려움없이 활동하면서 한때 프랑스왕 루이15세의 딸들에게 이탈리아어를 가르치는 가정교사가 되기도 했다. 그는 연극의 혁명가라고까지 할수는 없을지라도 양식있는 연극의 장인이었으며 다작의 작가로서 때때로 유행과 타협하기도 했으나 항상 사회적 진실에 대한 주의깊은 관찰자의 위치로 돌아간 예술가였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전 고려대교수 김정흠박사댁(과학계/희망탐방:2)

    ◎화상전화시대를 앞서 산다/미국 사는 딸 세배모습 보며 전화/추석땐 보름달 비춰 달맞이통화/정지화면 전송,6초후 나타나… “정보화시대 실감” 새해가 밝은 지난 1일 하오10시(미국 뉴욕시간 1일 상오8시)쯤 서울 정릉의 김정흠박사(66·전 고려대 물리학과교수)댁. 따르릉,따르릉.여보세요(김박사) 「여보세요 아버님이세요,저 순희예요.그이와 진아랑 같이 새해 세배를 드릴께요.정지화면TV전화기를 켜고 어머님과 나란히 앉아주세요」 그래 알았다.기다려라. 「아버님,어머님 새해에도 복많이 받으시고 내내 건강하세요」 그래 너희들도 새해에 건강하고 하는 일이 잘되기를 바란다(김박사내외). 6초쯤 흘렀을까.미국 뉴욕에서 살고 있는 김박사의 큰딸인 순희씨와 부군 정광현 뉴저지대 회계학과 교수,외손녀 진아양이 나란히 큰절로 세배하는 모습이 김박사의 집에 설치된 정지화면TV전화기를 통해 나타난다. 이어 김박사는 부인 황신영씨(61)와 함께 나란히 앉은 모습을 정지화면TV전화기를 이용,미국으로 보낸다. 정보통신이 발달함에 따라 사람들은 시골에 있는 부모님이나 외국및 지방의 지사에 근무하는 남편,외국에 유학간 아들·딸들의 얼굴을 매일 전화를 하면서 만나 볼 수 없을까하는 의문을 가져왔다. 이에 대한 해답을 김박사가 일본 등에 널리 보급된 정지화면TV전화기를 이용,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지난 64년 미국의 벨테론이 처음 개발한 정지화면 TV전화기는 전화회선을 이용,음성 뿐만 아니라 화상까지 보낼수 있는 전화기로 아직 국내에는 시판되고 있지 않다. 이는 전화기에 딸린 TV카메라로 송신자의 얼굴을 비추고 이리저리 표정을 바꾸다가 가장 좋은 순간의 표정을 포착,촬영단추를 눌러 고정시킨다.이어 송신 단추를 눌러준 후 약6초가 지나면 원하는 상대방에게 자기의 모습을 전송해준다.반대로 수신자의 얼굴을 송신자에게 보낼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화상의 송수신이 몇번이고 가능하다. 김박사 집안의 경우 3년전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들간의 유대를 돈독히 하기 위해 일본에서 정지화면 TV전화기를 구입해 집과 연구실,강남에 살고 있는 맏아들 순찬씨(38·서울위생병원비뇨기과장)집,미국 뉴욕에 사는 맏딸 순희씨(37·성악가)집,텍사스 오스틴시에 있는 둘째아들 순욱씨(30·천문학박사과정)집등 5대를 가지고 있다. 지난해 추석날 밤의 경우 김박사 집안은 정지화면 TV전화기를 이용,멋진 달맞이 행사를 마련했다.서울에서 미국의 뉴욕,텍사스에 있는 아들과 딸에게 8월 대보름달을 보여준 것. 그런데 아쉬운 일은 김박사가 가지고 있는 정지화면 TV전화기로는 화상을 포함한 2인통화만 가능할 뿐 3인통화가 불가능해 한꺼번에 달맞이행사를 하지 못한 것.따라서 김박사는 할수 없이 뉴욕의 맏딸 가족과의 달맞이 통화가 끝난후 다시 텍사스에 있는 둘째아들 순욱씨와 달맞이통화를 해야 했다. 김박사는 『우리 집안에서 1대에 35만원정도하는 이 정지화면TV전화기를 5대나 가지고 있는 것은 과소비처럼 보일수 있다』고 전제한 후 그러나 『설날이나 추석,생일 등에 멀리서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인사도 하고 축하의 말도 전한다는 것은 정보화시대에 사는 실감을 느끼게 하고 돈으로 환산할수 없는 기쁨』이라고 자랑한다. 그러나이 정지화면 TV전화기에도 단점은 있다.얼굴을 남에게 비치기를 싫어하는 사람·밤에 잠을 자다가 잠옷차림으로 전화를 받을 경우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등 프라이버시 침해·이 TV전화기를 이용하려면 상대방도 이 전화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점등. 김박사는 『현재 미국의 경우 정지화면TV전화기도 구식이 되고 대역압축기술(전체화면은 그대로 있고 주로 움직이는 부분인 입 등의 부문만 전송해주는 것)을 이용한 1초에 10번정도 동작이 바뀌는 동화상전화기의 하나인 슬로스캐닝(SS)TV전화기시대에 접어들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또 미국처럼 동화상전화기시대가 열리려면 가입자선로가 광케이블화된 이후에나 가능하므로 지금상태로는 정지화면TV전화기밖에 사용할수 없다며 며 동화상화기등 문명의 이기를 개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개발된 이기를 이용하고자하는 배경문화가 성숙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 배(역사속 바뀌어온 모습을 좇는다:25)

    ◎전통 나룻배/배밑 평평… 물의 저항 줄이는데 효과적/돛·노 함께 갖춰 짐·인원 수송에 이바지 강이나 내를 건널 때 손쉽게 탈수있는 배가 나룻배다.나룻배는 요술장이다.돛대를 세워 돛을 달고 키를 꽂아 행선하면 짐배가 되고,돛대를 뉘고 조선식 큰 노를 저어 강이나 내를 건너면 나룻배가 된다.파도가 심하지 않아 흘수가 낮고 모래턱이나 자갈밭에 얹혀도 배밑이 상하지 않게 넓적하게 만들어졌지만,배가 행선할 때에 받는 단면 저항을 되도록 줄이려고 물을 타고 미끄러지듯 나갈 수 있게 고안했다. 나룻배는 많은 편리를 제공했지만 찬사도 사료의 가치도 인정받지 못했다.그것은 비록 숫자는 줄어들었지만 시골의 냇가나 강가에서 아직도 촌로처럼 묵묵히 자기의 할일만을 하고 있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도로사정이 좋지 않던 시절 나룻배는 없어서는 안될 생활의 반려였다.닷새만에 돌아오는 장날이면,고생하여 수확한 쌀·보리·채소등의 짐꾸러미가 시골 아낙들의 머리와 농부들의 등짐에서 내려져 나룻배에 실려지고,해질녘이면 노부모의 제사에 쓰여질 제물과 아이들의 새옷 꾸러미가 나룻배에 실려오게 된다.강,내 그리고 호수 저편의 밭과 논에서 거둔 볏단과 감자 고구마도 부대에 담겨 나룻배로 날라졌다.풍년 들때를 기다려 시집가게된 큰딸의 혼수빔과 결혼식 하객들도 나룻배를 타고 오 갔다.노모의 시신을 싣고 봉양못한 불효를 용서하라고 울던 곳도 나룻배였고,일제 식민정치에 항거하는 독립군의 군자금도 은밀이 실어나르던 것도 나룻배였다.평야보다 산과 내가 많은 우리나라의 지형적인 특성으로 인해 나룻배는 유일한 교통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농촌과 어촌,그리고 산간벽지까지 도로가 놓여지고,냇가나 강을 연결하는 다리가 건설되면서 나룻배를 이용하는 사람의 숫자가 점차 줄어들게 되자 이제는 나룻배의 구경조차 어렵게 되었다.교통사고 세계제일이라는 달갑지 않은 소리를 들었을 때,나룻배 오 간 시절엔 교통사고 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되뇌이며 황혼처럼 아득한 나룻배를 마음에 그려보는 것이다.
  • 중국/개방물결 타고 매춘 확산(세계의 사회면)

    ◎정부의 강경단속 불구 대륙전역 “몸살”/술집 여종업원서 여대생까지 내서/광동성 등 남부해안도시 “가장 극성” 개방의 물결이 휩쓸고 있는 중국대륙에 매춘행위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특히 「매춘산업」은 얼마전까지만해도 개발 붐이 한창 일고있는 광동등 극히 일부지역에서만 제한적으로 성행했으나 지금은 지역에 구애됨이 없이 대륙 전역으로 번져나가고 있다. 흔히 「매춘」하면 대도시나 유흥가 지역이 연상되지만 사회주의국가인 중국에서조차 한적한 시골에까지 이같은 「손길」이 미치고 있다. 중국의 매춘부들은 개인술집 종업원에서 점차 명문대학의 여대생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으로 확대되고있는 추세여서 당국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고있다. 불과 몇년전까지만해도 공식적으로는 금기시됐던 매춘행위가 중국대륙에서 이처럼 성행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개방화 물결에 따른 전반적인 사회분위기의 변화때문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특히 사회주의국가의 경우 정상적인 직장에 다니면서 벌어들이는 수입으로는 생활이 무척 쪼들리기때문에 돈벌이가 훨씬 좋은 매춘에 많은 여자들이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현재 중국에서 매춘행위가 가장 극성을 부리고 있는 지역으로는 뭐니뭐니해도 광동성과 운남성등 개혁의 물결이 가장 거세게 일고 있는 남부 해안도시들이 꼽힌다.특히 이 지역은 돈을 쉽게 벌려는 매춘부들이 중국 전역에서 몰려들기때문에 당국도 단속하는데 한계를 느끼고 있는 실정이다. 광동성에 들어선 호텔과 디스코장,바등의 유흥업소들은 손님을 많이 끌어들이기위해 매춘부들을 이용,치열한 고객유치경쟁까지 벌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뒤 낮엔 직장에 다니면서 밤에 매춘행위를 하고있다는 한 20대 여성은 『하룻밤에 최고 미화 4백50달러를 번 적이 있다』면서 『이는 직장에서 받는 봉급의 1년치와 맞먹는다』고 자랑한다.그녀는 또 『돈만주면 아무나 따라나서는게 아니라 같이 지내도 심심하지않을 사람인가를 잘 살펴보고 따라나선다』고 덧붙이고 있다. 또 북경소재 대학에 재학중인 한 여대생은 『친구들 가운데 매춘행위를 하고있는 학생들을 더러 알고있다』면서 『그들은 예쁜 옷을 입고 인생을 즐기고 싶어 그같은 행위를 한다』고 전한다. 시골도 예외는 아니어서 지난 8월 요령성에서는 마을 공산당 간부 3명이 자기들과 관계를 맺어온 매춘부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준것이 들통나 당에서 쫓겨난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중국 정부당국은 이처럼 매춘행위가 독버섯처럼 번져나가는 것을 막기위해 매춘부들을 1∼2년동안 특별교도소에 보내는등 강력한 단속에 나서고 있다. 중국경찰은 지난 한햇동안 20여만명에 이르는 매춘부와 고객들을 체포한데 이어 올들어서도 지난달에 광동지방에서만 5천여명을 붙잡는등 적지않은 「실적」을 올리고 있다. 또 관광당국도 매춘행위를 막지못하는 호텔에 대해서는 높은 벌금을 물게 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고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같은 당국의 강경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의 매춘행위가 어느정도나 근절될 수 있을 지는 미지수이다.이미 일부지역의 경우 매춘산업이 뿌리를 내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다 개방화추세에 편승해 매춘행위는 더욱 기승을 부릴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 각자 맡은일에 최선을/손상규(소리)

    일전에 손님이 찾아왔다는 민원실 근무자의 연락을 받았다. 친구들은 특별히 급한 일이 아니면 집으로 연락을 하는데 혹시 잘못 찾아온게 아닐까 싶어 재차 확인을 해도 맞는다는 것이다. 학교동기들도 만난지가 오래 되어 내가 구치소에 근무하는지도 잘 모를텐데 누가 불쑥 찾아왔을까 싶어 궁금증을 더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상상도 하지 않은 중학교 동기동창생 3명이 기다리고 있는게 아닌가. 몇번이나 동기들의 모임에 참석을 하자는 연락을 받았지만 근무여건상 시간맞추기가 어려워 건성으로 간다는 대답만 한지도 오래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만난 동기생들이라 벌써 20년도 넘은 긴 세월이다. 육군소령,건축사,토건주식회사 대표의 신분을 가지고 찾아왔다. 강산이 두번 변한 세월에 까까중머리 중학생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어느덧 불혹을 바라보는 중년이 된 것이다. 나와 비슷한 처지인 친구들의 말로는 모임에 참석하면 서너 명만 제외하고는 전부 승용차를 가지고 온다고 한다. 공무원생활 10년만에 겨우 셋방살이를 면한 나와 비교하면 승용차란 단어조차도 사치에 불과할 뿐이다. 짧은 시간에 그동안의 회포를 푼다는 것은 불가능하여 다음에 또 만나기로 하고 헤어지니 착잡한 마음은 숨길 수가 없다. 시골 고향의 읍내에서 중학교를 다닐때만 해도 남녀공학이라 재미있는 일도 많았었다. 단발머리의 소녀들도 지금쯤은 모두 중년부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모처럼 동기생들을 만나고 나니 새삼스럽게 20년전 학창시절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올해도 서서히 저물어간다. 나이 한살을 더 먹는 것과 함께 동기생들의 의식도 더욱 성숙해질 것이다. 각자 맡은바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정과 사회,나아가서는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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