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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神을 믿듯 세리 믿었다”/아버지 朴峻喆씨,감격의 순간 기고

    ◎마지막 버디퍼팅 낭랑한 홀컵소리에 환호/연장 초 4타차 뒤지자 “경기 끝났다” 수군거림/“반드시 역전기회 온다” 세리 우승 예감 적중 ‘세계 골프계의 여왕’으로 등극한 박세리의 아버지 朴峻喆씨(48)는 7일 마지막 버디 퍼팅이 성공하는 순간의 감동을 콜러 블랙울프런GC 현지에서 적어 서울신문사에 보내왔다. 朴씨의 글을 간추려 소개한다. 내 생애 이토록 눈물을 줄줄 흘린 적은 결코 없었다. 이 먼 이국 땅에서,이처럼 감동적인 골프경기를 보게 될 줄이야. 교민들도 눈물을 펑펑 쏟았다. 미국인들까지도 눈시울을 붉혔다. 세리가 그 주인공이 아니었더라도 난 눈물을 흘렸을 게다. 서든 데스까지 가며 피를 말리게 했던 연장전 경기. 세리도 그러했지만 한국의 순박한 시골처녀 모습의 제니 수와지리폰도 지독했다. 세리나 수와지리폰이나 기량 외의 그 무엇인가로 천근만근 무게로 어깨를 짓누르는 중압감을 이겨내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것은 바로 정신력이었다. 연장 초반 4홀이 지나며 세리가 4타차로 뒤졌을 때 주위에서는 “이미 경기가 끝났다”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그건 세리를 모르고 한 말이다. 1대 1 승부에서 세리는 진 적이 거의 없다. 끝까지 상대를 물고 늘어지며 포기하지 않는 세리가 경기를 역전시키는데는 단 한번의 기회로 충분하다. 그러나 홀을 거듭할수록 세리에 대한 믿음과 함께 수와지리폰에 대해 두려움이 느껴졌다. 정말 서로가 ‘지독한 상대’를 만난 것이다. 연장 18번 홀에서 세리가 티샷한 볼이 러프 깊숙이 빠졌을 때 사실 절망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최선을 다했는데 후회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리는 무릎까지 차는 물에 맨발로 들어가는 어려움 속에서도 보기로 위기를 넘겼고, 반면 추아시리폰은 보기로 무너졌다. 그순간 ‘세리가 우승하라’는 운명의 뜻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 세리가 이길 것이라는 예감은 적중했다. 세리는 마지막 홀인 서든 데스 두번째 11홀에서 혼신의 힘을 발휘했다. 연장 초반 그렇게 정확하던 추아시리폰의 버디 퍼팅은 홀컵 왼쪽으로 비껴갔고 승리의 여신은 세리에게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까지도 누구 손을 들어줄까 망설이던 신은 마침내 세리를 선택한 것이었다. 세리의 4.5m 버디 퍼팅은 홀컵에 빠려들어갔고 나는 그린으로 뛰어들어가 세리를 번쩍 안아올렸다. 내 딸, 아니 자랑스러운 대한의 딸은 그렇게 세계를 재패했다.
  • 우리풀 질경이/하진규 건설기술연구원장(굄돌)

    시골을 고향으로 둔 사람은 대부분 질경이라는 들풀을 알 것이다. 우리의 끈질긴 민족성과 닮은 데가 있어 나는 이 풀을 좋아한다. 오늘 책장을 정리하다가 오래전 책갈피에 끼워 둔 바랜 질경이를 발견했다. 그래서 새벽 산책길에 싱싱한 질경이를 찾기로 작정하고 집을 나섰다. 그러나 동네 고원의 자그마한 길도 전부 아스팔트로 포장돼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한참을 돌아보다 나무 없는 길가에 질경이 몇 포기가 잎이 엇갈린 채 땅에 비스듬히 누운 것을 보고는 반갑기까지 했다. 밝고 탁 트인 양지바른 지역이나 높은 지대의 자갈밭 등 산과 들 어디서나 여름에 흔히 보이는 다년생 풀이 질경이다. 들이나 산에서 자라는 풀은 대개 한약재로 쓰는데 질경이도 꽃 전체를 차전초(車前草),씨앗은 차전자(車前子)라고 하여 만성간염·동맥경화증에 효험이 있다고 하며,거담제·이뇨제로도 쓴다. 억세게 자란 풀은 보통 약용이지만 타원형 또는 난형인 잎은 식용이기도 하다. 이름으로도 알 수 있듯이 질경이는 마차가 다니는 길에서 밟히고 또 밟히면서도 잘 자라는끈질긴 풀이다. 이렇게 고난을 받으면서도 결코 음지를 지향하지 않고 양지 바른 곳을 좋아하는 질경이. 홍오선 시인은 질경이라는 시에서 “밟혀도 짓밟혀도/지천으로 널린 목숨/오욕으로 끝간 자리,숨죽이며 참았다가/오연히 눈 틔운 잎맥/웃음으로 뒤채는가”라고 읊었다. 우리는 지금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구조조정에 따른 부실기업과 그룹의 해체,그리고 금융기관 통폐합으로 많은 실업자가 생기고 있다. 그러나 짓밟혀도 척박한 자갈길에서 끈질기게 생명을 유지하는 질경이와같이 강인한 의지력으로 우리는 다시 일어서야 한다.
  • 아태지도자회의 ‘외국인이 본 한국’ 강연회 주제발표

    ◎한국경제난 누구 탓인가 아시아·태평양 지역내의 민주주의와 인권 향상을 위해 설립된 비정부국제기구인 ‘아태민주지도자회의’(FDL­AP,사무총장 金世雄)는 최근 아태평화재단 강당에서 ‘외국인의 관점에서 본 한국’이라는 주제로 제3차 강연회를 가졌다. 다음은 주한 호주 대사관 스코트 로버트 드와 서기관이 ‘세계화,의식개혁,교육’이라는 주제로 발표한 주제논문 요약. 세계화가 급속히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모든 국가들은 보다 더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됐다.따라서 한국이 겪고 있는 경제난이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미친다. 일본의 불황은 호주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이제 세계의 무역관계는 더욱 긴밀하게 됐고 문화교류도 많아졌으며 외국여행하기도 쉬워졌다.전세계 국가들은 고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각국 유기적 영향권에 세계가 풍부해지면서 동시에 복잡해지고 있다.현재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무시하면 안된다.현재의 농부들은 세계무역기구(WTO)의 방침에 관심을 가져야만 된다.시골 사람들도 미국 무역정책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느끼게 됐다.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들의 ‘세계’가 확대된 것이다.그래서 의식개혁이 필요하다. 국가라는 것은 많은 사람의 협력적 모임이다.국민이 모여 국익을 위해 여러 기구를 설치한다.협력을 하게 되면 보다 큰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그런 제도에 참여하면 안정적이고 풍부한 생활이 가능하다. 물론 이렇게 사람들을 모으면,한 사람이 대표가 되고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당연하다.지금처럼 복잡한 세계속에서 혼자 국가를 지도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나라를 잘 지도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수적이다.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 논쟁을 한 뒤에야만 국민들이 지지하는 효율적 정책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책과정 적극 참여를 한국의 정책은 결국 한국사람들이 결정해야 할 사항이다.내 생각에는 정책을 잘 세우기 위해 두가지가 필요하다고 본다.하나는 지식이고 또 하나는 사고력이다.국민들은 교육을 통해 이를 배울 수 있다. 한국의 교육제도는 지식전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같다.지식전달은 교육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사고력 키우기도 중요하다.두가지의 균형은 나라에 따라 다르지만 모든 나라가 사고력 키우기를 지식전달 만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듯 하다.사고력 키우기를 무시하게 되면 국가가 어려운 상태에 빠졌을때 대책을 모색하기가 쉽지 않다.그래서 우선적으로 한국에서 사고력 키우기에 중점을 두어 교육제도를 개편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국의 근대역사를 보면 한국사람의 활동성을 엿볼 수 있다.한국사람들의 활동성 덕분에 한국은 지금 완전히 민주화됐다. ○사고력 키우는 교육을 그러나 지난해 국제통화기금(IMF)위기때 한국에서 좋지 않은 경향을 봤다. 한국의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 IMF 때문에 무엇이 일어났다는 식이다. 한국의 경제난이 IMF 탓이라는 말이다.한국의 경제난이 IMF 탓이라고 생각하면 IMF가 그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그렇지만 그 경제난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은 IMF가 아니라 바로 한국 사람들이다. 가장 좋은 대책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들이 그 정책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모든 문제가 다른 사람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 과정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에 나중에 정책결정 과정 자체가 약해진다.한국인들이 올해초 ‘금모으기 운동’과 같은 정신으로 모든 정책과정에 참여한다면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온화씨 번역 ‘누가 역사의 진실을 말했는가’

    ◎역사속 법과 정의의 관계는?/소크라테스∼나치 30가지 재판 연대순 정리/단순한 사실 나열 탈피 사회·정치적 의미 고찰 법은 어쩌면 만능의 신인지 모른다. 로마제국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카이사르 암살범들에게 복수할 때 원로원을 억압했던 수단은 바로 법이었다. 250년동안 유럽을 휩쓴 ‘마녀재판’에서처럼 수십만 명의 인간을 몰살할 수도 있다. 그런가하면 1963년부터 65년까지 계속된 ‘아우슈비츠 재판’은 수백만명을 학살한 나치범죄의 전모를 밝혀냈다. 법은 정말 정의로운 것일까. 정의는 과연 재판을 통해 실현될 수 있을까.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법과 정의 사이에는 숨막히는 긴장관계가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지난 주 출간된 ‘누가 역사의 진실을 말했는가’(푸른역사)는 한 시대를 대변하는 재판 사례들을 통해 ‘역사 속의 법과 정의’ 문제를 조명한 법정(法庭)세계사다. 지은이는 독일 뮌헨대학 고대사 교수인 크리스티안 마이어 등 30명. 독문학자 이온화씨(이화여대 강사)가 우리말로 옮겼다. 이 책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소크라테스 재판에서부터 테러리스트들간의 전쟁이라 불리는 바아더­마인호프 재판에 이르기까지 서른 가지의 역사적 재판들이 연대순으로 정리돼 있다. 우리는 흔히 소크라테스 재판을 잘못된 판결로 간주한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재판이 당시의 정황으로 볼 때 나름대로 타당했음을 강조한다. 소크라테스의 자유분방한 사고는 당시 아테네의 민주적인 개혁사회에서조차 지나치게 진보적인 것이었다는 것이다. 로마제국에 대항한 예수에 대한 재판도 주목되는 사건. 지금까지 예수 재판은 성경에 나오는 복음서의 재판을 기준으로 해석돼 왔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나자렛 예수의 재판을 로마인의 속주국 통치사의 관점에서 다룬다. 당시 로마의 지배자들은 속주국인 팔레스티나 지방 하층민의 폭동을 막아야 했다. 그래서 하찮은 사건도 아주 엄하게 다스렸으며,무장한 반란군과 종교가를 구분하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추종자를 이끌고 다니는 예수와 같은 시골 사람은 당연히 반란군 대장 쯤으로 보였을 것이다. 즉 예수는 사회안정이라는 지배세력의 정치적 요구에 이용당한 희생양이었던 셈이다. “이기면 충신 지면 역적”이라는 우리 속담이 있다. 이처럼 권력싸움에 졌기 때문에 죄인이 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역사인물들은 수없이 많다. 프랑스혁명의 희생자 루이 16세가 그랬고,크롬웰의 재판으로 ‘사법살인’을 당한 영국왕 찰스 1세가 그랬다. 앙시앵 레짐의 마지막 왕인 루이 16세는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특별법정에서 단 한 표의 차이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판결은 물론 정치적 테두리 안에서 내려졌다. 결국 루이 16세는 단두대에 세워졌고,프랑스 사회에는 정치재판이라는 불행한 전통이 남았다. 엘리자베스 여왕도 자신의 권좌를 넘보는 친척 메리 스튜어트를 20년 동안이나 감금한 뒤 반역혐의로 사형시켰다. 또 프랑스 혁명 이후 ‘조국의 구원자’라고 칭송받던 당통도 국민공회의 극좌파 지도자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제거당했다. 사회여론이 판결을 지배한 예도 꽤 많다. 프랑스의 유태계 육군장교 드레퓌스의 반역혐의에 관한 재판은 그 대표적인 경우다. 드레퓌스는 유태주의적 적개심에 의해 유죄판결을 받았다. 당시 군 수뇌부는 드레퓌스가 무죄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군의 존립을 위해 그를 귀아나 해변의 감옥으로 보냈다. 작가 에밀 졸라의 공개 고발로 드레퓌스는 결국 사면됐지만 정의가 완전히 바로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드레퓌스 사건은 12년 동안이나 논란을 불러 일으키며 프랑스 제3공화정에 오점을 남겼다. 이 책에서는 소크라테스에서 나치까지 2,000년 역사를 뒤흔든 법정사례들을 다룬다. 하지만 단순히 역사적 사실만을 나열하거나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개별 사건들이 세계역사에서 차지하는 사회적·정치적·역사적 의미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그런 만큼 독자들은 스스로 역사의 법정에 선 피고 또는 법관이 돼 역사를 해석해 볼 수 있다.
  • 모차르트 ‘레퀴엠 미사’ 진혼곡(명반과 함께하는 음악여행:4)

    ◎검은 가면의 만파식적(萬波息笛) 1.울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린다.그림자는 점점 더 짙어진다.짙음만으로 비극성(悲劇性)에 도달하려는 것처럼.그것은 음악이 시작되기 전부터 아니 태초(太初)부터,지금까지 깔리고 쌓여 오는 것 같다.그렇게 순식간에 음악의 공간이 마련된다. 레퀴엠 아에테르남 도나 에이스.안식,영원한,주소서,그들에게.언제부터 ‘레퀴엠’이라는 단어가 슬픔과 위안을 그 자체로 동일시했던가.언제부터 ‘키리에’라는,‘주님’을 뜻하는 단어가 그 자체 인간 존재 비극성의 명징한 음악적 응축으로 되었는가.라크리모사(눈물),호스티아스(봉헌),베네딕투스(찬양),아뉴스 데이(신의 어린 양)은 또 어떻게? 서양음악의 레퀴엠 전통은 그렇게,‘단어를 음악으로 만들’ 만큼 위대하다.그리고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그중 가장 인간의 체취로 온습(溫濕)하다. 모차르트,쫓겨난 천사의,인간적인 체취? 왜냐하면,이 작품은,놀랍게도 자기 자신을 위한 진혼곡이다.그리고 이 작품 이래 모든 걸작 진혼곡들은 미사곡이 아니라 비극 자체가 등장인물인 장엄한 오페라로 화한다. 2.어느 날 짙은 안개를 꿰뚫고 검은 가면을 쓴 사내가 모차르트에게 나타난다.진혼곡을 써다오… 그는 죽음의 사자(使者) 같았다. 이 곡은 혹시 나를 위해 쓰라는 것이 아닐까,그렇게 나는 사형선고를 받은게 아닐까…모차르트는 작곡을 하면서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그는 가난과 방탕으로 병들고 지쳐 있었다.그의 작곡 속도가,원래 빨랐지만,병적으로 더 빨라졌다.미처 악보에 옮겨 적기가 힘들 정도로 악상(樂想)이 유령처럼 어른댔다. ‘돈 때문에’ 오페라 ‘마적’과 ‘티토의 자비’를 마친 후 그는 다시 레퀴엠에 몰두한다.심신이 점점 더 황폐해가고,그는 음악 속으로,진혼곡 속으로 그리고 죽음 속으로 속속 빠져 들어갔다.죽음이 더 먼저 왔다.레퀴엠은 미완으로 남았다. 모차르트의 생애를 다룬 음악영화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의 재능을 시기한 이탈리아 출신의 선배 음악가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죽음의 공포’로 내몰아 살해했다,혹은 독살했다는 푸슈킨-림스키 코르사코프류 이야기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시재(詩才)를 시기하여 정지상을 죽이는 김부식의 이야기를 우리 고려사는 품고 있다.‘삼국사기’의 명문장가이자 대학자였던 김부식이 왜 시골 뜨기 시인 동창(同窓)을 선망­질투­증오했을까. 3.그러나 실제 고려사는 훨씬 더 복잡하다.정지상은 혁명적인 예술가였지만 정치적 미망(迷妄)에 사로 잡혔다.김부식은 보수적인 대학자였고,현실주의자였다.‘모차르트 독살’설은 우선 사실과 다르다. 살리에리는 베토벤,슈베르트,그리고 리스트를 가르친 훌륭한 스승이었고 존경받는 오스트리아 황제궁 음악감독이었다.1790년 황제 죠셉 2세가 죽고 새로 부임한 레오폴트 2세가 살리에리 대신 자신을 음악감독으로 써 주기를 바랐던 모차르트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는 재능은 있었으되 말썽꾸러기였던 것.살리에리는 그런 그를 두둔하느라 진땀을 흘렸을 것이다.그가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몰랐을 리는 없다.그러나 자신의 제자들 또한,특히 베토벤이 모차르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리라는 것을 몰랐을 리도 없다. 기교만 보자면 모차르트는 놀라운 음악의 신동(神童)이다.그러나 진정한 예술가로서 그는,아니 그도,평생 동안 거대한 벽과 싸워야 했다.그 벽은 바로 이탈라이 오페라 부파 음악. 이 음악장르는 이탈리아 본토 뿐 아니라 파리와 빈 등 서유럽 음악중심지에서 그야말로 창궐했다.일반인들은 그 장르가 구사하는 기발한 악상,무엇보다 음탕한 대사를 즐겼지만 모차르트는 달랐다.테너의 고음 선율이 청아한채로 뒤틀릴 때 그는 죽음의 검은 가면을,죽음이 삶 속에 제 모습을 언뜻 언뜻 내보이면서 흘리는 웃음을,어리석은 삶을 너그럽게 포괄하는,비극을 넘어서는,수 천년 나이를 먹은 웃음의 경지를 보았다.그렇다.그는 현대성의,미래예술의 한 핵심을 보았다. 4.모차르트의 부파 풍(風)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돈 조반니’‘코지 판 투테’는 모두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를 차용하고 선망한다. 그러나 자연스러운,비비꼬는 이탈리아 청아성(淸雅聲)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독일적 서정의 극치를 구현한다.그렇게 ‘마적’은 부파적인 요소를 최대로 삭제한 채 독일 오페라 음악사의 최고절정에 달하고,최후작 ‘티토의 자비’는 오페라 세리아다. 물론 모차르트 음악은 가장 위대한 인류 유산 중 하나다.‘이탈리아 오페라 부파’라는 벽은 그가 스스로 키운,그렇게 실제보다 더 거대한 벽이고,그의 위대함을 담보해 주는 예술가의,예술의,시련의 벽이었다. 그렇게 그가 자기 자신을 위한 진혼곡을 남긴다.지상으로 쫓겨왔던 천사가 지상을 떠나며 남기는 유언은,지상적으로 뭉클하다.하나님,이제는 이 창조의 속박을 벗게 하소서.그 유언이 지상에 남은 모든 인간을 위한 만파식적이 된다.살으라,고통받으라,의미를 창조하라… ‘살리에리 이야기’는 35세에 요절한 천재 모차르트를 위한 허구다.그러나 예술가는 더 깊은 진실을 이야기 속에 은유(隱喩) 혹은 상징(象徵)으로새겨 넣는다. ‘검은 가면’이야말로 진실의 핵심을 담고 있다. 모차르트 레퀴엠은 대개 브루노 발터의 연주를 최고의 것으로 친다.그의연주는 모차르트 음악의 한 본질인 일상적 우울의 장려미(壯麗美)를 총괄적으로 보듬고 있다.다만,그것조차 풀어헤치고 절망하는 모차르트,그 절망의 진지함에 기적적으로 묻어나는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의 검은 가면이,카를 뵘의 연주와 달리 보이지 않는다. 어쨌거나,불쌍한 살리에리.그는 모차르트보다 6년 먼저 ‘이탈리아에서’태어나 34년을 더 살았다. 1971.녹음,1983 DG 413 553­2 GH 소프라노:에디트 마티스/알토:율리아 하마리/테너:비슬라브 오크만/베이스:카를 리더부쉬 빈 국립오페라 합창단/빈 필하모니커/지휘:카를 뵘 ◎레퀴엠,부파란 레퀴엠.‘죽은 자를 위한 미사’ 통상 미사에서 ‘글로리아’(영광송)와 크레도(신앙송)부분이 빠지고 ‘디지레’(진노의 날)부분이 첨가된다.팔레스트리나와 빅토리아,그리고 베를리오즈,베르디,포레가 걸작을 남겼다.브람스 이래 진혼곡은 통상 미사곡과 다른 가사를 사용하거나 기악만으로 구성되면서 더욱 일반화,현대화되었다. 오페라 부파. 일상의 삶에서 소재와 등장인물을 뽑아내는 희극(喜劇)오페라.오페라 세리아의 반대.페르골레시 ‘마님이 된 하녀’,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로시니 ‘세빌랴의 이발사’와 ‘신데렐라’를 거쳐베르디 ‘팔스타프’에서 최고의 경지에 달했다. 마티스(1938∼)는 모차르트,슈트라우스 해석에 능한 스위스 소프라노.하마리(1942∼ )는 헝가리 메조소프라노이다.레퍼토리가 다양하다.오크만(1937∼ )은 폴란드 테너.차이코프스키,모차르트와 베르디까지 소화한다.리더부쉬(1932∼ )는 바그너역으로 너무나 유명한 독일 베이스. 빈 필하모니커.1842년 창단.역대 주요 지휘자는 니콜라이,말러, 바인가르트너,푸르트뱅글러,카라얀,뵘 등. 뵘.모차르트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오페라에 정통한 오스트리아 지휘자.그가 지휘한 두 작곡가의 오페라 전곡집이 DG 레이블로 나와 있다.
  • 고종의 지병(秘錄 南柯夢:14)

    ◎용한 의사 宮에 들이려 참봉 임명/가래에 피 섞여 고생… 病 이름 몰라 근심/內醫들 못 미더워 侍從에 名醫 추천 의뢰/“성명 미상” 아뢰니 즉석 作名후 벼슬 내려 ‘한국 사람들은 사람을 잘 믿는 경향이 있다’.구한말에 의료선교사로 내한해 고종의 각별한 신임을 받은 호레이스 N.앨런(H.N.Allen)의 말이다. 그는 한국 사람의 특성으로 ‘사람을 너무 잘 믿는 습성’을 들었다.그래서 그런지 그 당시 서울에는 사기꾼들이 득실거렸고,그 중 일부가 궁궐에까지 손을 뻗쳐 이권을 챙겼다. 하루는 서대문의 정환덕이 집에 경상북도 칠곡에서 올라 왔다는 류호영(柳好永)이라는 시골선비가 찾아왔다.초면이라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고 좌정한뒤 류호영은 들고 온 손가방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였다.종이에는 시한 수가 적혀 있었으니 내용은 이러했다. ○“한양에 사기꾼 득실” ‘언젠가 내가 요직에 오르게 된다면 즐겨이 선생을 수령으로 임명하겠네.산좋고 물좋은 고을을 맡아 나가서 소나무 계수나무 숲 사이에서 글이나 읽게나.운현궁 씀(他年我若當路在 好使先生爲守令 出宰山水鄕 讀書松桂林 雲峴宮書)’ 사연은 류호영의 선친이 1863년 아직도 대원군이 재야에서 고생하고 있을때 보수도 제대로 못받고 운현궁의 가정교사 노릇을 했었다는 것인데,그때어린 고종이 직접 친필로 써 주신 글이 위의 글이니 이것을 꼭 황제에게 보여 달라는 것이었다. 정환덕은 어느날 한가한 틈을 보아 류호영의 글을 임금님에게 보여 드렸다.그러나 고종은 이에 속지 않고 말씀하시기를 ‘이 필적은 참으로 50년전의 것이다.또 어렸을 때 일을 기억하기도 어려운 일이니 진짜인지 가짜인지 신중하게 분별해 보겠다’ 고 하시면서 서류를 바닥에 내려 놓으셨다.두말할 것도 없이 이 시문(詩文)은 사기였다. 정환덕이 고종 황제를 직접 모시고 있는 시종원부경(侍從院副卿)이었기 때문에 청탁도 많이 들어왔다.류호영은 그 중의 하나였다.어느날 이중철(李中喆)이라는 사람이 명의(名醫)를 가장하고 정환덕에게 접근해 왔다. 이중철을 알게 된 것은 개성 인삼장수로 돈을 번 이필화(李必和)의 소개 때문이었다.하루는 이필화가‘우리 집에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후손이라 자처하는 명의가 기숙하고 있는데 한번 전하께 소개하여 주시게’ 하는 것이었다.고종은 기침을 하면 가래에 피가 섞여 나오는 혈담(血痰)으로 고생하고 있었다.기관지염이거나 폐병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재야 의사” 속여 접근 ‘며칠을 지난 뒤에 황상께서 지밀(至密)에서 직접 침뱉는 그릇을 가지고 나오시어 나에게 보이시며 말씀하시기를 “짐이 더러운 담이 있어 간혹 이와같이 토해내게 되는데 무슨 약을 쓰면 효험이 있겠는가.안경을 끼고 살펴보면 혈담인데 왜 더러운 담이라 하는가 하면 피혈(血)이란 글자를 꺼리기 때문이라 한다”고 하셨다. 대답하여 아뢰기를 “혹 주무시는 잠이 도수에 지나치시면 그럴 수도 있고 옥체(玉體)가 건강을 잃으시어 그럴 수도 있사오니 별다른 염려는 없을 것으로 압니다.그러나 의관(醫官)을 불러 물어 보시지요.” 상감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른바 내의(內醫)란 자들은 한 사람도 의사라고 할 만한 자가 없으니 외부에 혹시 유명한 의사가 없겠냐”고 하시었다. 여기서 갑자기 이필화가 말하던 재야에 숨은 군자라는 사람이 머리에 떠올라 드디어 아뢰기를 “신(臣)이 지난 번에 우연히 개성 사람 이필화가 전하던 말을 들어보니 그 집에 머무르고 있는 나그네 이씨의 의술이 유명하다고 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재야에 숨은 군자입니다.병에 대하여 증세를 살피며 화제(和劑)를 써서 약을 쓰는 것이 신출귀몰하여 비록 예전에 화타(華陀:후한의 명의)와 편작(扁鵲:전국시대의 명의)이라 하더라도 이 사람의 술법만 같지 못하다고 합니다.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성상께서는 생각이 어떠하십니까’ 그런데 그 다음의 대화내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왜냐하면 정환덕이 이중철을 임금께 추천하였으나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아 이름을 모른다 했는데 즉석에서 능참봉(參奉)벼슬을 내렸기 때문이다.흔한 것이 능참봉이라 하지만 임명절차가 이래서야 되겠는가. ‘성상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은 어느 시골에 사는 누구인가.”고 하시었다.대답하여 아뢰기를 “선정신(先正臣) 이황의 후손이라 하옵니다.”하니 “그렇다면 현재 무슨 관직을 가지고 있느냐.”고 하시었다. 대답하여 아뢰기를 “백신(白身:벼슬하지 않는 몸)입니다.”했더니 그렇다면 “궁내부 주사로서 불러보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시었다.이에 아뢰기를 “오직 성상의 뜻에 달린 것이고 신(臣)의 알 바가 아닙니다.”라고 했다. 또 돌아보시며 말씀하시기를 “이미 선정(先正)의 후손이라면 재랑 (齋郞:奉)으로 쓰는 것이 가할 것이라 하시면서 드디어 동궁(東宮:세자)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능관(陵官:참봉) 가운데서 혹 결원된 자리가 없느냐”하시니 동궁이 “지금 능관은 결원이 없고 영희전(永禧殿:종묘의 永寧殿) 참봉은 결원이 있습니다.그러하니 이 사람으로써 그 결원을 보충하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하시었다. ○“임용 뒤에 본명으로” 또 나를 돌아보시며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의 성은 이씨이고 이름은 무엇인가.”하시었다.대답하기를 “아직 자세히 알아보지 못했습니다.”하니 동궁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름자를 자세히 안 뒤에 임용하는 것이 좋을까 하니 내일 네가 나가서 자세히 알아서 보고하는 것이 좋겠다.”하시었다. 그러자 상감께서 말씀하시기를 “내일 불러서 진찰을 받아 볼 계획이니 먼저 이름자를 기록해야 되기 때문에 임시로 임용한 뒤 나중에 본명으로 고치고 표를 부쳐두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하시었다.동궁께서 아뢰기를 “퇴계의 종손 항렬 가운데 글자에서 가령 중(中)자를 차용한다면 중자 아래에는 무슨 글자로 사용할까요.”하니 상감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 여름철이니 여름하(夏)자를 쓰는 것이 또한 무방할 것이니 ‘이중하(李中夏)’라고 써서 궁내부에 내리고 영희전 참봉을 임명하라.”고 하시었다.’ 벼슬이 없는 사람은 궁궐에 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가명을 써서 발령을 내렸던 것인데,아무리 그렇더라도 이중하의 경우는 심했다.
  • 중국에 신下放운동/실직 도시민 자발적 낙향

    ◎1,000만명 농촌서 새생활 【베이징 AFP 연합】 마오저뚱(毛澤東)의 60년대 문화혁명 때 많은 사람들이 농촌으로 강제방출당했던 ‘하방(下放)’운동이 오늘날 대량으로 발생하는 실업자들 사이에서 재연되고 있다. 중국의 차이나 데일리지는 68년 하방과 98년 ‘제2 하방’을 비교하면서 문화혁명 당시 1,700만명의 젊은이들을 ‘재교육’ 명목으로 시골로 내쫓았던 하방운동의 동기가 정치적이었다면 98년 하방 현상의 동기는 경제적인 것이라고 논평했다. 일자리를 잃은 수많은 도회지 주민들은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시골로 내려가 농사나 축산으로 생계를 개척하고 있다.국가통계국 관리의 말에 따르면 이미 1천만명의 도시민들이 농촌 노동력에 흡수됐다. 베이징 당국은 비틀거리는 국영기업들에서 정리해고된 수백만명의 실업자중 희망자들에게 교외의 광활한 시유지를 임대해 주는 계획에 착수했다. 시는 땅을 임대해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길러 소득을 올리는 주민들에 대해서는 3년간 과세유예 혜택을 주고 정규교육을 받지 못해 새 일자리를 얻기 힘든 사람들에게는 1만위안(약 1,200달러)을 지원한다. 98년판 하방은 역이농(逆離農) 현상으로 불린다.지난 10년간 무려 1억2,000만이 넘는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회지로 몰려들어 남아도는 노동력을 형성했었는데 다시 일자리를 찾아 시골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 여야 충북지사 후보 비교

    ◎자민련 李元鐘 후보/풍부한 행정경험 장점/탄탄한 조직력이 무기 자민련 李元鐘 후보는 자민련의 텃밭으로 여겨지는 지역구도,여권의 탄탄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승리를 자신한다. 최근 朱炳德 후보의 신문광고에 대해 정책대결을 외면한 비열한 인신공격으로 규정,검찰에 고발하는 등 강력 대응하고 있다. 李후보는 친화력을 바탕으로 부드럽고 깔끔한 이미지를 앞세워 전 연령층에 파고드는 전략을 구사한다. 특히 행정고시 출신으로 충북지사·서울시장을 거치면서 쌓아온 풍부한 행정경험과 경륜을 강조한다. 칡뿌리를 캐던 시골소년이 공중전화 수금원에서 출발해 서울시장까지 오른 입지전적 출세의 과정에서 ‘알차고 야무지다’는 뜻의 ‘알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희망 98,선택 이원종­충북이 바뀝니다’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충북무역투자공사 설립,도민감사청구제 및 도민과의 정례 TV토론 등 지역경제활성화와 열린 도정 추진 등을 공약으로 제시하고 있다. 대선 직후 한나라당을 탈당,당적을 옮긴 후 공천과정에서 홍역을 치렀고 아직도 당 내부와 지역 국민회의측 당원들의 반발 분위기가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점이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고향 제천 등 북부권의 압도적 지지와 함께 대세를 결정할 청주·청원지역은 물론 남부의 보은·옥천·영동 및 朱후보의 고향인 음성까지 전 시·군에서 모두 승리한다는 전략이다. 특히 후보 스스로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누비는 등 적극적인 선거전을 벌이고 있다. ◎한나라당 朱炳德 후보/“뚝심행정 평가 받을 것”/북부권 집중 공략 총력 한나라당 朱炳德 후보는 선거전 초기 각종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자민련 李元鐘 후보의 우세 분위기가 종반들어 역전됐다고 주장한다. 95년 선거때도 불리하다는 예상을 깨고 당선된 전례와 두 차례 충북지사 재임기간에 보여준 추진력과 뚝심이 긍정 평가될 것으로 기대한다. ‘힘있는 충북 건설’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추진해온 ‘충북도 명예연구소’ 지정 등 농정시책과 65살 이상 노인들에 대한 보건소 무료진료 사업등이 저변표를 끌어모으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또 오송 보건의료과학단지조성과 청주공항 개항을 주요 치적으로 홍보하는 한편 충북선 전철화에서 산간 계곡수 보호,노인요양시설과 치매병원 건립까지 다양한 공약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지사 재임중 마음에 들지 않는 공무원에게 가차없는 질책과 불호령을 내리는 등 지나친 엄격함 때문에 함께 일한 공무원들로부터 후한 점수를얻지 못하는 흠집도 있다.측근들은 이를 ‘솔직함’이라고 옹호한다. 지난 90년 관선 충북지사로 취임한지 6개월만에 단양지역 수재민들에게 “수해가 인재(人災)임을 인정한다”는 각서를 써주고 해임된 전력도 약점이다. 청주중·고 출신으로 청주권 학연을 적극 활용하는 한편 고향 음성을 포함한 북부권을 집중 파고드는 전략을 펴고 있다. 지난 1일엔 李元鐘 후보의 충북도지사 및 서울시장 재직시 우암상가아파트와 성수대교 붕괴사건이 발생했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비방성 신문광고를 냈다가 고발당했다. 구여권의 남은 조직을 최대한 고수,예상되는 자민련의 텃세와 바람을 뚝심으로 이긴다는 각오로 막판 선거전에 임하고 있다. □여야 충북지사 후보 비교 ◇李元鐘 ·나이:56 ·출생지:충북 제천 ·학력:성균간대 행정학과 ·주요경력:행시 4회(66년)·서울시 기획담당관(75년)·서울시 내무국장(80년)·청와대 내무행정비서관(91년)·충북지사(92년)·서울시장(93년)·청주 서원대 총장(96년) ·가족:부인 金辛子(58)씨와 4녀 ·별명:알쫑이 ·재산:11억4,300만원 ·병역:면제(폐결핵) ◇朱炳德 ·나이:62 ·출생지:충북 음성 ·학력:단국대 정외과 ·주요경력:순경 임용(60년)·해양경찰청장(87년)·감사원 감사위원(89년)·충북지사(90년)·경찰위원회 상임위원(93년)·충북지사(95년) ·가족:부인 金鍾君(56)씨와 2남1녀 ·별명:황소 ·재산:9억5,900만원 ·병역:육군 상병 제대
  • IMF시대 집장만 지름길 보인다

    ◎‘내집마련 설계사’ 도움받으면 알짜 정보 ‘일목요연’ ‘3년 뒤 내집 마련을 위해서는 어떤 방법으로 재테크를 하는 것이 좋은가’‘시골에 계신 노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들과 함께 3대가 살려면 어디에 있는 어떤 구조의 아파트가 편리할까’‘돈가뭄에 허덕이는 직장인이 중도금 마련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금융상품은 어떤 것이 있는가’ ○융자·법규 등 상세히 IMF시대를 맞아 이처럼 유망주택 선택에서 중도금 융자 알선,옵션 구입문의,관련 법규 상담에 이르기까지 각종 주택 구입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내집 마련 설계사제도’가 서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200여명 상담 활동 벽산건설(대표이사 金熙瑾)이 지난 1일 선보인 ‘내집 마련 설계사제도’는 사내 특수교육 과정을 거친 주택 관련 분야 종사 직원 200여명이 팀을 이뤄 전화상담과 함께 방문상담,지역마케팅 활동을 해 주고 있다.설계사는 내집 마련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주택 관련 각종 상담을 해주는 이른바 ‘주택도우미’ 출신으로,최소한 주택문제에 관해서는 ‘도사급’임을 자처한다.이들은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소득수준에 맞는 주택마련 방안과 중도금 융자시가장 적절한 금융상품 소개 등 알짜정보를 무료로 제공,서민들의 내집 마련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이들 설계사에게 걸려 오는 문의전화는 하루 200통을 웃돈다. ○할인혜택 정보 유용 이 회사 金東豪 상무는 “어려운 경제여건에 놓인 서민들의 내집 마련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일이 뜻밖에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면서 주택 중도금 연체에 따른 저리의 새 금융상품과 비교적 분양가가 싸고 할인혜택이 좋은 미분양 주택상품에 대한 문의가 특히 많다고 밝혔다. 金상무는 “앞으로 벽산건설이 만든 주택전산망과 인터넷망을 최대한 활용,지역별 주요 건설사의 아파트 분양계획 등의 정보도 제공할 계획”이라며 설계사 제도를 이용하는 사람에게는 자사의 미분양 이파트를 할인 분양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이용전화 767­5262∼4.
  • 놀부 예찬론/김달호 두성전자 대표(굄돌)

    어느 시인이 놀부를 예찬하는 시를 썼다고 한다.놀부도 좋은 면이 있다고 하면 바보 취급하거나 피식 웃을 사회에서 매우 기발한 착상으로 생각되었다.우리 교육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을 기르기보다 암기식에 치우친 데 따른 사고방식의 결과이다.일상에서도 흥부냐 놀부냐는 흑백논리가 지배한다.흥부는 선이요,놀부는 무조건 악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그러다보니 부자는 나쁘고 가난한 자는 선으로 아이 때부터 인식하기도 한다. 10여년전 미국에서 대통령후보 물망에 오르내린 크라이슬러 회장 아이아코카의 자서전은 미국 자동차산업 2위인 포드가의 비리와 무능을 꼬집었다.포드가 곧 크라이슬러에 밀려 3위로 자리바꿈할 줄 알았다.그뒤 미국여행을 하면서 포틀랜드에 사는 거래선 데이브에게,아이아코카의 책을 보면 포드는 곧 망할 것 같았는데 어째 저리 잘가고 있는가 라고 물었다.그의 대답은 명쾌했다.“Everybody can talk(누구나 말할 수 있지)!”이었다.누구나 말할 수 있는 것일뿐 어찌 아이아코카의 의견이 옳으냐고 반문하는 바람에 잠시 당황하였다.우리나라에서 한번 매스컴을 타면 포드는 놀부,아이아코카는 흥부가 되지 않을까! 흥부는 착하기만 했지 지구촌시대에 보면 가족부양 능력도 없고 경쟁력도 갖추지 못한 시골뜨기에 지나지 않지만,놀부는 심성이 나쁠 뿐이지 이재에 밝아 요즈음 같은 IMF시대에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닐까. 미국식 교육에서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우리처럼 정답을 주고 외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답을 창의적으로 찾아가는 방식이다.교사나 교수는 학생의 도우미 구실을 충실히 하였기에 빌 게이츠 같은 인재가 나오는 강한 나라가 됐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해 IMF 수렁에 빠졌다는 주장도 있다.놀부 예찬론도 있어야 다양한 사고에 창의적인 국민이 되지 않을까?
  • 대관령 박물관(생활속의 박물관·미술관:2)

    ◎굽이굽이 ‘옛길’따라 질박한 삶의 흔적/사임당의 旅路 정취 그대로/나선형 이어진 6개 전시실/통일신라 미륵불상부터 연자방아·돌대야·우물까지 99개의 굽이 굽이마다 옛 사람들의 숱한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영동의 관문 대관령.이 대관령 아래 첫 마을인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어흘리에는 신사임당이 넘나들며 어머니를 그리는 시를 지었다는 ‘대관령 옛길’이 그대로 남아 있다. 정취로 가득한 이 옛길 왼편에 단아한 자태를 드리우고 있는 대관령박물관(관장 洪貴淑)은 영동지방의 명소로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울창한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채 대관령 계곡이 교차해 가로지르는 가운데 들어앉아 마치 대관령에서 굴러 내린 돌 한점이 오똑 앉아 있는 모양이다. 이 박물관이 들어선 것은 지난 93년 5월.30여년간 전국을 다니며 옛 것을 고집스럽게 모아온 한 여성 수집가의 집념으로 어렵사리 만들어진 결실이다.대지 3천평에 건평 220평의 이 박물관은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야외 전시장과 백호방 현무방 토기방 청룡방 우리방 주작방 등 특색 있는유물 1천200점을 갖춘 6개의 전시실이 나선형으로 이어져 관람객들을 맞는다. 영동고속도로를 뒤로 하고 계곡 위에 장난감처럼 얹혀 있는 아담한 목조 난간 다리를 건너면 나타나는 고인돌 모양의 붉은 벽돌 건물.건물 좌우에 석등과 장승들이 마치 문지기처럼 들어서 있어 처음부터 흔치 않은 옛풍광을 전해준다.고인돌을 들어서는 느낌으로 네개의 큰 기둥을 지나치다보면 원형 공간을 앞에 둔 전시관이 우뚝 서 있다.전시관 입구 왼쪽엔 삼신할머니상 2개,오른쪽엔 ‘머슴과 낭자상’이 친숙한 한국인의 얼굴로 다가선다. 전시관 중앙은 불교미술을 보여주는 공간인 백호방.원형 홀 가운데에 2.5m 높이의 통일신라시대 미륵불상이 천정에서 쏟아져 내리는 자연채광을 받으며 온화한 미소를 던지고 서 있다.벽면엔 전통악기인 장구줄을 늘어뜨리고 흰색기둥 위아래를 오방색 띠로 장식해 옛 것과 현대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분위기다.전시장엔 궁중유물 3점이 놓여 있는데 16세기 가마장식끈인 가마수술과 병학서적 등 규장각 고서,그리고 보물급 고려시대 목불(木佛)이 그것.이 가운데 가마수술은 통도사 소장품을 빼놓곤 유일한 것이다. 백호방 오른쪽은 청동기 유물을 모아놓은 현무방.광목천을 사용해 거북이 현상으로 덮은 천정이 인상적이다.천정아래 청동에 금입사한 대구(帶具)부터 구리거울,약물을 끓였다가 덥히는 초두,우물물을 정화시키는 정병들이 색다른 감흥을 전해준다.그 다음은 토기방.진흙과 밀집으로 구석기시대 움막집을 연상시키는 방을 꾸며 구석기부터 고려시대에 걸친 토기들을 보여주고 있다.가야시대 고리장군칼,신라 토우·쇠뿔잔,통일신라시대 토기장군,청동기 무문토기들이 역사의 맥을 짚어준다. 토기방을 보고나면 햇빛을 스며들게 하는 무지개색 기둥들이 청룡방으로 이끈다.온통 녹색으로 칠한 방엔 청자·분청·백자들이 자연스럽게 발길을 모으는데 물고기무늬가 새겨진 어문병과 철사백자인형·분청사기철화문병 등 보물급 자기가 백미다. 다음은 조상들이 사용하던 민속품을 모은 우리방과 고서화를 보여주는 주작방이 차례로 기다리고 있다.마치 한옥을 들어간 것처럼 꾸민 우리방에는 ‘만우정’이란 대원군 친필 현판이 걸려있고 주작방에서는 호렵도·벽사도·설화도 등 조선시대 민화·병풍이 친근감을 더해준다. 전시관을 보고나면 온갖 석물(石物)들이 군상처럼 들어서 있는 야외 전시장이 기다리고 있다.잔디위에 배치된 문관석·동자석 17개와 신라시대 석등 사리탑 부품,고려시대 향료석,조선시대 연자방아·돌대야,남근석 등이 푸근한 느낌을 전하며 은은한 빛을 발산하고 있다.조선시대 우물을 옛모습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도 잠시나마 옛생활의 여운을 감상해볼 수 있는 볼거리다. 여기에다 박물관 북쪽에 병풍처럼 전개되는 푸른 소나무 숲과 계곡도 박물관의 멋을 더해주는 천연 소품.오염된 생활을 잊고 탁족이라도 하고 싶은 자연심을 진하게 자극하는 고즈넉한 풍경이다. ◎洪貴淑 관장 인터뷰/30년 모은 토기·고서화 한자리에/자연미 최대한 살려 소품 일일이 배치/정신적 쉼터 됐으면 대관령박물관 설립자인 洪貴淑 관장은 ‘천의 얼굴’을 가진 개성있는 인물.음대 기악과를 졸업한뒤 서양화와 사진작가로 활동하면서 토기와 고서화에 빠져들어 30년간을 골동품 수집에 바친 이색적인 경력의 소유자다. “골동품 하나하나를 모을 때마다 ‘왜’라는 의문을 갖고 찾아다녔지요.옛토기나 자기 하나하나에 독특한 아름다움이 담겨 있다고 생각할때 귀하고 값비싼 것에만 집착할 수 없게 됩니다” 처음엔 취미로 남들의 눈길을 별로 끌지 않는 토기를 모으기 시작,어느정도 안목도 생기게 됐고 결국은 하루일과를 골동품 가게를 찾는 것으로 마감하게까지 됐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줄곧 살아온 만큼 ‘고향’을 느끼게 해주는 넉넉한 시골풍경이 항상 그리웠다는 洪씨.자연과 관련된 그림에 유달리 관심이 많았던 그는 지난 80년대엔 서울 장안평에서 화랑을 경영하기도 했다.지금의 자리에 대관령박물관을 건립하게 된 것도 평소 알고 지내던 한 동양화가의 소개에 따른 것. “박물관 부지를 소개받고 지난 90년 이곳에 왔을때는 화전민 4가구가 살고 있는 삭막한 땅이었어요.돌 하나 나무하나 모두 제가 일일이 배치한 것입니다.자연 그대로를 살릴 수 있는 박물관을 원했지요.프랑스 파리의 오르세박물관이 철도역사의 내부구조를 그대로 살려 만든 것을 보고 크게 감명받았습니다.”그래서 이 박물관 내부도 자연스럽게 땅의 구조를 살려 관람객들이 오르내리도록 만들었다는게 그의 설명이다.洪씨는 “인근 관광지를 찾는 이들이 오가는 길에 들러 잠시나마 조상의 숨결이 담긴 유물을 둘러보는 정신적인 쉼터가 됐으면 합니다”라며 이 박물관이 해수욕장과 스키장 등 주변 관광자원과 연계를 희망했다. ◎대관령박물관 가는 길/강릉 시내버스 운행/공항서 승용차 20분 대관령 한 기슭에 자리잡아 인근 강릉 경포대와 오죽헌,용평스키장 등과 더불어 방문해볼 수 있는 박물관이다.현장까지 운행하는 노선버스가 많지 않아 다소 불편하지만 강릉시내에서 가깝고 고속도로 바로 옆에 위치해 쉽게 찾아가 볼 수 있다.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강릉시내에 이르기전 어흘리 마을에서 우회전하면 된다.강릉시내에선 25번 가마골행 노선버스를 타고 25분 쯤 가다가 왼편 어흘리 마을에서 내리면 된다.강릉공항에서 승용차로 20분정도 거리. 연중무휴로 문을 열고 있으며 관람시간은 상오 10시부터 하오 6시까지.관람소요시간은 1시간 정도.관람료는 일반 2천500원,청소년 1천500원,노인·어린이 500원.0391)41­9801.
  • 申昌源 추정 30代 검거 피해 달아나

    【성주=金相和 기자】 탈옥수 申昌源으로 보이는 30대 초반의 남자가 경북 성주군의 시골 다방에 나타나 다방 여종업원과 일주일 동안 사귀다가 경찰이 출동하자 달아났다. 경북 성주경찰서는 18일 상오 8시30분쯤 경북 성주군 초전면 다방 여종업원으로부터 “탈옥수 신창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있다.신분을 확인해 달라”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으나 눈치를 챈 이 남자는 갤로퍼 승용차를 타고 달아났다.경찰은 이 남자와 사귀어 온 다방 여종업원 朴모양(24)이 “탈옥수 신창원과 얼굴이 닮았고 왼쪽 다리에 장미꽃,등에는 새와 사슴 등의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고 진술한 점으로 미뤄 달아난 30대 남자가 탈옥수 申昌源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 변호사 안내제와 사건브로커/이생직 변호사(서울광장)

    지난 4월 초순경 50대후반의 아주머니가 우리 사무실을 찾았다.우리 직원이 “어떻게 오셨느냐”고 물으니 서울지방변호사회의 소개를 받아 왔다고 하는 것이었다.그 아주머니는 남편이 오래전 교통사고로 사망해 보험회사에서 받은 보험금으로 생활을 해오고 있다고 했다.그러나 생활비는 모자랐고 그래서 그 아주머니는 어느 부잣집에서 몇년동안 파출부 생활을 해오고 있었는데 그집 사모님이 그나마 그 보험금을 빌려 달라고 하여 빌려주었으나 몇년이 지나도록 갚지를 않았다는 것이었다.억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루 100명 내외 찾아와 그 아주머니는 주위에서 도와줄 사람도 마땅치 않았고 아는 변호사도 없어서 애만 태우다가 올해 4월부터 변호사회에서 변호사를 안내하여준다는 말을 듣고 이날 아침 그곳을 찾았다가 우리 사무실을 소개받아 이렇게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 3월 변호사회에서 변호사 안내제도를 시행한다는 안내문을 받아보고서는 나도 행정사건과 민사사건 그 중에서도 특히 토지관계사건이나 금융거래사건을 안내받겠다고 신청서를 기록해 보낸 기억이 더올랐다. 최근에는 변호사가 상당히 많아졌기 때문에 변호사 안내제도가 별효과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던게 사실이다.그러나 변호사회에 알아보니 하루에도 100명 내외의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것이었고,실제로 대단한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그간 소송을 맡아서 처리하여 오면서 나는 우리사회가 직접적으로 알고 있거나 중간에 누가 소개하지 않고서는 서로간에 믿음을 줄 수 없는 사회라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초면인 나를 완전히 신뢰하고 일을 맡기는 아주머니를 대하고나서는 우리 변호사가 아직도 신뢰를 완전히 잃고 있지는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나 역시 더 성심껏 일을 처리하겠다는 생각에 열심히 뛰었다. ○사건별 전문변호사 선정 사실 변호사 안내제도는 일본과 미국에서는 이미 시행되고 있는 제도로서 장착돼 있는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시행되게 돼 다소 때늦은 감마저없지 않다. 변호사는 민사,형사,행정,가사,상사,특허 등 6개분야 가운데 2개 분야만을 맡기로 돼있다.사건수가 단연 많은 민사사건의 경우는 토지, 금융,교통사고,의료사고,환경사건 등 여러부분으로 세분화해 사건별로 전문화된 변호사를 선정하도록 하고 있다. 변호사 안내제도는 근본적으로는 사건브로커를 없애겠다는 발상에서 나온제도이다.변호사업계의 브로커문제는 현재 법조개혁의 최대현안으로 부각되고 있으며 실제로 그 폐해는 상당히 심각한 형편이며 그최대의 피해자는 변호사 자신이다 ○안내제 정착땐 브로커 근절 변호사 안내제도가 완전히 장착된다면 사건 브로커는 근절될 것이 확실하다고 본다. 또 한가지 사례를 들자.며칠 전 변호사회의 안내로 토지브로커가 관련된 사건을 상담한적이 있다. 나를 찾은 상담자는 시골에 임야를 소유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무단으로 가건물까지 세우고 농사를 짓고 있어서 철거를 요청했었다는 것. 그러나 그 무단점유자는 오히려 과도한 보상을 요구해 난감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그런데 그에게 토지전문가라는 사람이 나타나서는 사건을 해결을 해줄테니 미리 비용과 사례금을 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것이상담요지였다. 바로 이런 사건이야말로 변호사회 안내제도가 필요한 사건이었다. 그래서 브로커에게 현혹되지 말고 토지관할 소재지 변호사에게 사건을 맡기도록 권유하였고 결국 그 상담자는 브로커가 요구한 금액의 절반수준에서 변호사를 선임했다고 했다.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형사사건도 활성화돼야 서울변호사회가 앞장서 알선제도를 도입한 것은 변호사사회에서 브로커의 폐해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변호사가 어려운 사람들 곁에 가까이 있지 못했던 반성도 담겨있다 하겠다.때문에 안내제도는 변호사 자신들이 이들에게 더 다가 가겠다는 의지로도 보인다. 이제 변호사 안내제도가 좀더 홍보되어 민사관계는 물론,서건브로커의 폐해가 가장 심한 형사사건에서도 활성화되기를 기대해 본다.
  • 고종즉위 40년(秘錄 南柯夢:10)

    ◎외채위기에도 팔도 名妓·악공불러 “지화자…”/세자탄신과 번갈아 요란한 경축행사/극심한 가뭄에 굶주린 백성 줄 이었지만 덕수궁서 잔치상받은 3천여 내직관료/함포고복 속에 “堯임금 시절보다 좋은 세상” 1902년은 지금의 IMF사태에 버금갈만한 대한제국 위기의 해였다.국가의 연간 총세입이 7백50만원에 지나지 않았지난 대포 몇문 사들이는데 20만원이 나들였다.그러니 외채는 늘어나고 돈값은 날로 폭락해 갔다.전라,경상,충청 등 3남에서 거둬들인 토지세 전액이 일본 외채를 갚는데 들어갔다 할 정도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럴 때 큰 행사날이 돌아왔다.고종 즉위 40주년 경축대회가 그것이다.고종의 나이도 바로 이 해에 50을 맞았다.일찍이 조선왕조로서는 이렇게 경사스런 일이 없었다.거기다 세자의 탄신일까지 겹쳐서 부자간에 번갈아 생일잔치를 벌여야만 했다.먼저 세자(순종)의 탄신일 경축행사 광경을 살펴보자. ○50주년 생일잔치 겸해 “음정월을 지나 중춘(仲春) 2월 9일이 오니 세자(명성황후 소생)의 탄신일이다.많은 영재들을 뽑는과거시험을 치르게 됐으니 이를 경과(慶科)라 했다.그래서 그날 팔도의 유생들이 과거보러 상경을 했는데,황상(皇上) 부자분께서는 친히 창경궁의 춘당대(春塘台)에 납시어 합격자를 가리셨다.그러나지난 갑오년(1894년) 경장(更張) 이후로 모든 과거가 폐지되다 보니 경연(經筵)에서 임금께 강의하던 유학은 낡은 학문이 되어 비웃음받는 처지가 되었다.대신 일본과 태서(泰西=유럽)에서 들어온 신학문이 교과목이 되어 마치 국학처럼 우대를 받았다.이러한 시국을 당하여 아관박대(갓 쓰고띠 두른) 차림을 한 선비들은 적막공산에서 썩어버리고 대신 높은 모자에 단장 짚고 뽐내는 들뜬 놈들이 세상에 가득찼으니 선왕이 남긴 정신문화는 영원히 끊어져 없어지고 시세를 타는 서양 풍조만 날마다 급하게 불어닥쳤다.” 세자도 나이 28세.어엿한 청년이 되었고 모후인 명성황후가 비명에 돌아가신 뒤라 고종은 세자의 생일잔치를 성대하게 치르고 싶어했다.옛날같으면 과거시험을 치러 선비들의 사기를 북돋아주었을 터이지만 개화바람에 폐지돼버렸으니 다만 먹고마시고 춤추는 잔치만 요란하였다. ○“5백칸 마당 장막 치고” “지금 춘궁(春宮·세자)의 탄신일을 맞이하여 다만 기생의 노래와 춤으로 요란할 뿐이다.9일 탄신일을 맞아 상감께서는 궁내부에 분부하시기를 관명전(觀明殿) 앞뜰에 장전(張殿·임금이 앉도록 임시로 꾸민 자리)을 베풀고우구청(雨具廳)으로 이름하라 하셨는데 5백여칸이나 되는 마당에 기름먹인 장막을 치고 그 안에 나무판자를 깔았다.그 위에는 비단 무늬를 그린 담요를 깔았다.한가운데 전등을 매달아놓았는데 큰 전등은 해와 달같이 둥글었고 작은 것은 별과 같이 촘촘히 반짝거렸다.” 세자의 생일찬치는 그다지 큰 규모가 아니었으나 고종의 즉위 40주년 경축잔치는 어마어마했다.고종이 26대 임금인데 22대 순조부터 내리 4대에 걸쳐 모두가 단명,재위 40년에 향년 50년을 채운 분이 없었다.22대 정조는 재위 24년에 수(壽)는 49세였고,23대 순조는 34년에 45세,24대 헌종은 더욱 짧아 15년에 23세,25대 철종도 14년에 불과 33세였다.따라서 당시의 정부는 고종즉위 40주년 경축행사를 성대하게 치를 수밖에 없었다. 나라는 외채 때문에 빛더미에 올라 오늘 내일 하는 지경인데,엄청난 예산을 들여 잔치를 벌이고 외국사신을 초청하고,그 때문에 새로 영빈관을 짓고,광화문 네거리에 비각을 세웠다.광화문 비각에는 이런 글이 새겨있다.‘신민의 간절한 소망에 부응하여 원구(圓丘)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제위에 오른 뒤 천하를 소유할 칭호를 대한이라 하고 연호로 광무라 하였다’. 이 얼마나 좋은 글귀인가.대한이 천하를 소유하고 무(武)에 빛났다 하여연호를 광무라 했다는 것이다.그러나 현실은 글귀와는 한참 동떨어져 있었다.1897년에 조선왕조가 허울좋은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겉으로는 면모를 일신한 것처럼 보였으나 6년만인 1902년(광무 6년) 마침내 외채위기를 맞게 되고2년뒤 러일전쟁 발발,그리고 을사조약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해마다 대소조(大小朝·고종과 세자) 두분의 탄신일에는 팔도의 명기(名妓)들을 뽑아올려 무대 위에서 노래와 춤을 추는데 이것을 진연이라 불렀다.궁궐 뜰에는 기이하고 아름다운 화초가 사시장철 봄경치를 방불케 했다.장막 앞에 선 악공과 선녀도 일대의 기관(奇觀)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해 극심한 흉년에다 호열자가 만연하여 모든 행사가 다음해로 연기되었다.잇따른 가뭄과 기근,거기다가 유행병까지 만연하였으니 민심이 흉흉했다.사람들은 모두 정감록에 귀를 기울였다.정감록에는 공공연히 ‘이씨가 망하고 정씨가 흥한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그러나 그것도 모르고 궁궐의 잔치는 성황을 이루었다. ○유행병 만연 인심 흉흉 “이해 7월 25일은 고종황제께서 탄신하신 날이다.함녕전 앞뜰에 또 한번장전을 설치하였는데 한결같이 관명전의 앞뜰에 설치했던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기생이 노래하고 춤을 추고 악공이 북을 치고 피리를 불기를 한결같이 세자의 탄신때와 같이 하였다.상을 겹겹이 차릴 필요가 없었으나 고기를 산처럼 쌓아놓고 포는 숲처럼 준비하였으며(肉山脯林) 술도 샘처럼 차려 잔치를 즐기니(酒泉需雲) 보통 때의 수라상에 비하면 10배가 넘는 가지수였다.또 상에 진열한 것으로 논하면 주척(周尺)으로 1척 이상 높이 진열하였다.내직 3천명의 관료에게 균일하게 지급하여 주어 함께 먹게 하니 흡사 함께떼지어 강에서 물을 먹는 것과도 같았다.각자가 배를 채우되 한 사람도 모퉁이에 돌아 앉아 탄식하는 자가 없었으니 위대하도다,왕의 덕이여. 옛날 요임금 시절에 한사람의 백성이 굶주리면 임금이 말하기를‘내가 배고픈 것이다’라고 했으니 오늘로 보면 모두 잔뜩 먹고 배를 두드리니(含哺鼓腹) 한 사람도 굶주린 자가 없는 것이다.요임금 시절보다 훨씬 좋은 세상이다.” ○서울­옷 전라­음식 사치 3천명의 중앙 공무원들이 덕수궁 뜰에 앉아 잔치상을 받아 먹었으니 나라는 먹고 마시는 가운데 망해가고 있었다.시골에서는 극심한 가뭄으로 못먹고 굶어죽는 사람이 줄을 잇고 있었지만 서울의 덕수궁 밖을 보면 일부 부유층이 외제 비단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자고로 서울은 옷사치,전라도는 음식 사치,경상도는 집 사치로 유명했으나 1902년에는 서울의 옷사치를 빼놓고는 먹고 죽을래도 먹을 것이 없고 집을 지을래도 지을 돈이 없었다. “흥이 다하면 슬픔이 오고 기쁨이 극에 달하면 서러움이 오게 마련이다.돌연 인천 감리 하상기(河相冀)로부터 월미도가 일본인 손에 들어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주지육림 속에 빠져 있을때 인천의 월미도가 날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 생명을 풀무질하는 농부/풀무원 창시자 원경선씨 전기

    풀무원 공동체 한삶회의 창시자인 원경선씨(85)의 전기 ‘생명을 풀무질하는 농부’(한길사)가 나왔다.지은이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제2대 사무총장을 지낸 건축학자이자 시민운동가인 유재현씨.이 책에는 초등학교를 간신히마친 한 시골농부가 소외된 이들과 한그릇의 밥과 쉼터와 일터를 나누는 이타적 삶의 길을 걷게 된 내력이 소상히 담겨져 있다. 원씨는 지난 55년 경기도 부천에 개간도 안된 땅 1만평을 마련하면서부터 공동체운동을 시작했다.76년에는 화학비료와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는 유기농업을 시작하면서 바른 농사를 지향하기 위한 정농회를 창설했다.또 이기적인 사유욕을 버리고 더불어 사는 삶을 실현하기 위해 공동경작과 공동소유 그리고 공동분배를 원칙으로 하는 한삶회를 설립했다. 이 책에서는 이처럼 나눔과 공유의 철학을 몸소 실천하며 살아온 원씨의 삶이 대담과 구술을 통해 생생하게 소개된다.여러 시민운동 프로그램의 구체적 모델이 되고 있는 원씨는 현재 경기도 양주군 회천읍 옥정리에 있는 풀무원 농장에서 ‘전도하는 농부’로서의 선지자적 삶을 일궈가고 있다.
  • 인도 북부 아그라 타지 마할(세계 문화유산 순례:70)

    ◎코발트빛 하늘에 우뚝 솟은 백진주/무굴황제 샤 자한 아내 추모위해 22년 대역사/정적인 균제미 대단… 힌두­이슬람 절묘한 결합 【인도(타지마할)=金鍾冕·金明國 특파원】 지금부터 360여년전 인도 무굴제국의 한 여인이 열 네번째 아이를 낳다 죽었다.그녀의 이름은 뭄타즈 마할,온갖 영화를 한 몸에 누렸던 일국의 황비였다.그녀에게는 신들도 질투할 정도로 자신을 사랑한 남편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무굴제국의 5대 황제 샤 자한이다.세계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히는 타지 마할은 이 샤 자한이 죽은 아내를 추모해 만든 영묘(靈廟)이다.타지 마할은 북인도의 고도(古都) 아그라에 있다.무굴제국 3대 황제 아크바르 대제 때의 수도였던 아그라는 인도 고대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에 ‘아그라바나(천국의 정원)’라는 이름으로 등장할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닌 곳이다.그러나 이곳에 정작 타지 마할이 없다면 아그라는 오늘날 그 명성의 태반은 내놓아야 했을 것이다. 아그라로 가기 위해 델리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탔다.델리에서 아그라까지는 약 200여㎞.버스는 마투라식 불상으로 유명한 마투라를 거쳐 갔다.차선도 없는 시골길을 5시간쯤 달렸을까.파란 하늘을 이고 있는 하얀 돔이 사막의 신기루인양 눈앞에 다가왔다.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라는 신화의 현장,그것은 ‘백색의 진주’였다. 붉은 사암으로 된 아치형 정문 안으로 발을 떼어 놓았다.완벽한 좌우 대칭구조가 고도의 미학적 질서를 이루고 있는 대리석 건물이 한 눈에 들어왔다.그 정적인 균제미(均齊美)는 보는 이의 마음마저 가지런히 해주는듯 했다.타지 마할 묘역은 전형적인 무굴양식의 정원으로 꾸며졌다.중앙으로 길게 뻗은 분수의 물에 어린 타지 마할의 그림자가 아지랭이처럼 피어올랐다. 분수를 지나 샤 자한과 황비의 유해가 묻힌 타지 마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내부는 관람객들의 열기로 후끈거렸다.조금 어둑했지만 레이스 모양의 격자창문을 통해 스며들어 오는 부드러운 빛이 신비한 기운을 더해줬다.회중전등을 든 안내원들이 꽃무늬가 새겨진 대리석 벽을 비추며 분주하게 오갔다.본당 한 가운데에는 투조(透彫) 대리석 간막이로 둘러싸인 뭄타즈 마할과 샤 자한의 빈 분묘가 놓여 있었다.델리에서 보았던 후마윤 황제의 묘와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도굴을 막기 위해 만든 가짜 관이었다.진짜 관을 보기 위해서는 본당 대리석 마루 밑으로 내려가야 했다.정원과 같은 높이의 6평 남짓한 지하 납골당에는 1층의 모조관과 똑같은 모양의 석관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다.1층의 호화로운 전시용 관과는 달리 그것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어 초라함마저 안겨 줬다. 샤 자한은 철저한 회교도였다.그의 치세 때는 가혹할 만큼 이교도를 배척했다.건물도 물론 이슬람풍 일색이었다.그러나 타지 마할은 좀 다르다.타지마할에는 이슬람과 힌두 두 문화가 절묘하게 혼합돼 있다.아라베스크나 갈매기형 무늬,그리고 창과 문 테두리의 뾰족한 아치는 이슬람색을 짙게 풍긴다.그런가하면 벽면에는 힌두교의 만신상(萬神像)이 가득 조각돼 있다.타지 마할은 그 기단부(基壇部)의 크기가 사방 95m,본체는 사방 57m·높이가 67m에 이른다.또 네 귀퉁이의 탑,즉 미나르도 높이가 43m나 된다.남성적인 힘을 느끼게하는 웅장한 규모다.그러나 찬찬히 살펴보면 타지 마할은 어느 건축물보다도 여성적임을 알 수 있다.특히 후미진 앨코브(alcove)의 벽에 상감기법으로 아로새겨진 갖은 형상의 꽃문양은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전해준다.또 하나 인상적인 점은 타지 마할의 대리석이 빛의 각도에 따라 다른 색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아침과 한낮,석양 무렵의 느낌이 다르고 달빛에 따라서도 그느낌이 다르다.누가 타지 마할은 낮에는 찬란하게 빛나고,황혼에는 따사롭게 작열하고,달빛 아래서는 영묘한 기운이 감돈다고 했던가.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타지 마할의 모습은 표정이 풍부한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을 닮았다. 타지 마할은 1631년부터 짓기 시작,22년만인 1653년에야 완공됐다.이 대역사에는 2만명의 기술자와 노동자가 인도는 물론 아시아와 멀리 유럽으로부터 동원됐다.인도의 라자스탄에서 채취한 대리석을 건축자재로 쓰기 위해 1천여마리의 코끼리가 사역돼야 했다.또 중국의 비취,버마의 루비,다마스커스의 진주,터키산 옥 등이 건물 장식을 위해 운반됐다.이 타지 마할을 완성하는데 4천만 루피의 돈이 들었다고 하니,한 여인을 향한 사나이의 집념 앞에 고개를 숙여야할지 탄식을 토해야할지 어리둥절했다.게다가 샤 자한은 타지 마할이 완성된 뒤 다시는 그와 같은 걸작품이 나오지 못하도록 공사를 맡은 장인들의 손가락을 모두 잘라버렸다고 하지 않는가. 타지 마할은 이렇게 온 국력을 기울여 완성됐다.그러나 타지 마할을 다 짓고도 샤 자한의 고분지통(叩盆之痛)은 가실 줄 몰랐다.건축광이었던 그는 이내 타지 마할이 마주 보이는 야무나강 건너편에 자신의 무덤을 만들기로 결심했다.이번에는 검은 대리석을 사용해 똑같은 모양과 크기로 건조한 다음두 무덤 사이를 구름다리로 연결할 작정이었다.하지만 그 뜻은 자신의 아들에 의해 좌절됐다.샤 자한은 만년에 황위계승 싸움에 휘말려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해 아그라 성에 유폐됐다.샤 자한 자신이 부왕(父王)을 밀어내고 등극했던 바로 그 인과(因果)의 고리가 아들을 통해 다시 자신에게 돌아온 것이다.샤 자한은 만년을 아그라성의 8각망루에서 타지 마할을 바라보며눈물로 보냈다.그리고 8년 뒤 일흔 네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타지 마할은 언제 보아도 보석처럼 영롱했다.하지만 그것이 수많은 생령(生靈)들의 울부짖음을 뒤로 하고 태어난 것임을 어쩌랴.애욕,권력,죽음,연민,분노,허무 등의 낱말이 기자의 머리속을 맴돌았다.공연한 상념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인근 아그라 성으로 발길을 돌렸다.멀리 타지 마할의 둥근 지붕위로 까마귀 떼가 까옥대며 날아 올랐다.그 뒤편으론 성스러운 야무나 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타지 마할의 하늘은 여전히 코발트 빛이었다. ◎타지 마할 가는 길/델리∼아그라 열차 2시간/광광버스로 3대 명소 순회 아그라로 가기 위해서는 델리를 기점으로 삼는 것이 편리하다.델리에서 아그라까지는 비행기와 열차,버스편이 모두 마련돼 있다.비행기로는 40분,열차로는 2시간 정도 걸린다.또 일반버스에서 디럭스급까지 여러 종류의 버스가 한 시간에 한 대꼴로 다닌다.중앙역격인 아그라 간트 기차역에는 주정부에서 운행하는 시내 관광버스가 대기하고 있다.타지 마할·아그라성·파테푸르시크리 등 아그라의 3대 명소를 하루에 둘러볼 수 있어 이용할만하다.
  • ‘땅끝에 서면 바다가 보인다’/서민들의 삶과 도전

    희망과 인간애를 통한 시련 극복.이같은 주제의식이 강한 연극 ‘땅끝에 서면 바다가 보인다’가 서울 대학로 인간소극장에서 공연중이다.5월31일까지. 극단 신화가 96,97년 성황리에 공연했던 ‘옥수동에 서면 압구정동이 보인다’에 이어 선보는 연작 제2편.‘옥수동…’이 옥수동과 압구정동의 빈부대비를 통해 서민들의 애환과 삶의 따뜻한 포용을 주제로 했다면 ‘땅끝에…’는 뚝섬의 소외된 서민들의 치열한 삶을 통해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끈질긴 도전과 희망을 이야기한다.현실감 짙은 대사와 빠른 템포의 극 전개,풍부한 유머와 인간미가 물씬 묻어나는 줄거리로 힘겨운 시대 감동과 생기를 회복시켜주는 무대다. 뚝섬의 한 목욕탕.30년을 가위질로 살아온 이발사 만배와 때밀이 상우,낮엔 구두를 닦고 밤엔 권투를 하는 고아 준호가 있고 이들 곁엔 음식을 날라다 주는 한밭집 여주인 진숙이가 있다.만배는 아들의 시험합격이,상우는 개그맨이 되어 시골 부모님께 땅을 사드리는 것이,준호는 어머니를 찾는게 꿈이고 진숙은 사랑하는 사람과 삶을 함께하는 것이 꿈이다.한마음회라는 모임을 통해 결속을 다진 이들에게 닥쳐오는 시련과 극복의 과정이 사람사는 냄새 물씬 풍기는 내용들로 전개된다. 김태수 작,김영수 연출에 국립극단 배우 서희승,탤런트 김상중,주목받는 신인배우 전현아 등이 출연한다.화∼목 하오 7시30분,금∼일 4시30분·7시30분.923­2131.
  • 소설가 金周榮(이세기의 인물탐구:168)

    ◎날로 확대­심화해온 소설세계/봇짐장수 삶 그린 ‘객주’ 5년간 본지에 연재 호평/대작 ‘임꺽쩡’ 등에 비견되는 역사소설 주로 집필 180센티의 큰키에 언제나 말이 없고 진실한 이미지가 작가 金周榮의 모습이다. 그와 절친한 소설가 이문구에 의하면 그는 ‘어진 사람’‘법없이도 사는 사람’이며 ‘교통순경과 방범대원을 구별하지 못할만큼’ 아는 것은 알지만 모르는 분야는 깜깜하다. 그는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작품세계의 확대(擴大)와 심화(深化)를 끊임없이 이룩해왔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분단소설의 지평을 개척하는가하면 성장소설의 아름다움과 민중적 역사소설의 높은 봉우리를 역력(歷歷)하게 정복’해 왔다. 그리고 지금도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 소리가 메아리져 돌아오는 생의(生意)의 소설’을 쓰고 있다. ○분단소설 지평 개척 그의 초기소설은 주로 ‘상경한 촌놈이 겪는 도시의 세상물정’이 주류를 이룬다. ‘멀쩡하던 사람들이 타관의 물을 먹고나면 진솔하고 소박한 모습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이해타산과 세파에 시달려 속된 인간으로 변모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이를 풍자하고 비판하는 시각을 지켰다. 이러한 풍자는 단편소설에서는 ‘경쾌한 속도감, 재치의 반전으로 소설적 재미를 가속화시키는 반면 촌철살인(寸鐵殺人)의 구성의 묘(妙)로써 문학적 향기’를 뿜어내고 장편소설에서는 ‘걸쭉한 입담과 해박한 풍물묘사에 의존한 특유의 지구력으로 수준높은 세태풍속’을 그려나간다.그중에서도 그가 유년의 시골장터에서 목격한 봇짐장수들의 고달프고 강인한 삶을 그린 ‘객주(客主)’는 79년부터 5년간 서울신문에 연재되어 근현대 역사소설의 빛나는 업적들인 ‘임꺽정’과 ‘장길산’ 등에 비견되기도 한다. 그 무렵의 그는 녹음기와 카메라를 갖춘 취재가방을 둘러메고 장이 서는곳마다 찾아다니면서 현장에서 채집한 언어들로 문학적 생동감을 소설속에 되살려내고 있다. 그와 한평생을 어울려 지낸 소설가 이문구는 김주영이 소설을 쓰기 위해 깨알같이 메모해둔 노트를 보고 ‘이것은 피다.이것은 피를 흘리는 김주영의 모세혈관(毛細血管)’이라고 쓴적이 있다.그의 문학생활에서 가장 센세이셔널한 사건은 89년의 ‘절필선언’을 들수 있다. 정상을 달리던 한 중견작가가 갑자기 ‘절필’을 선언하고 일간신문연재를 중단해버리자 문단은 온통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때 평론가 정현기와의 한 대담에서 그는 지금까지의 자신의 소설을 돌아볼때 ‘동어반복(同語反復)이 너무 심하다는 것’, 근 10년동안 줄기차게 신문연재에 매달리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상업적 측면에 침식되어가고 있다’는 경각심과 신문소설이 요구하는 반문학적 요소들이 ‘자신의 문학적 성채(城砦)를 집요하게 공격하여’ 마침내 절박감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고백하고 있다. ○상업성 우려 89년 절필 ‘나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내자신에게 가하는 나의 검증’이며 ‘비평가들의 비판이나 상찬이나 독자의 갈채도 나는 두렵지 않았다’고 했다. ‘오랜 글쓰기의 경험으로 독자를 교묘하게 속일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러나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원고료와 인세가 나의 생활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아야한다. 그럴수는 없다’는 절규가 그것이다. 그의 이러한 선언은 문학하는 이들의 양심에 칼날이 되어 타성적인 문학행위에 충격을 가하는 계기가 되었고 ‘껑충한 허우대와 맑고 박(撲)한 성정, 씩씩한 소년티를 벗지못한 소탈한 모습’에서 ‘눈크고 키큰 용량만큼이나 외로운 자기자신을 가누기 힘들어하는 천부적 질박함이 그의 문학적 원형질’임을 실감할수 있게 했다. 그는 경북 청송군 진보면의 배고프고 외진 마을에서 태어났다. 군청에 다니던 金海允씨의 2남1녀중 장남. 가난과 더불어 ‘말문이 트이기 시작하면서’ 혹독한 굶주림에 시달려왔고 ‘이틀돌이’로 품앗이를 다니는 어머니를 동구밖에서 기다리는 핍색(逼塞)의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의 청소년기는 ‘길가의 잡초’였고 ‘시’를 쓰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을 간직한채 16살때 대구로 와서 ‘풍찬노숙(風餐露宿)’을 일삼으며 대구 농림고를 졸업, 다시 서울에 올라와 친구집에 기식한채 서라벌예대에 입학하자 서정주 박목월등 기라성같은 스승들을 만나면서 비로소 문학의 앞길에 서조(瑞兆)가 비치는 듯했다.그러나 박목월씨로부터 ‘시보다는 소설’을 쓸것을 권유받았고 이후10년간은 연고지가 아닌 안동에 내려가 엽연초생산조합에 취직하고 있었다.가족은 고향에서 유년기를 함께 보낸 부인 金震得씨와의 사이에 3남2녀. ○단편 ‘휴면기’로 등단 조직이란 사회에 일단 자신을 내던지게 되면 ‘그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에서 그는 ‘중뿔나게 아는체도 고독한체도 하지 않았고 무사하게 살아남기 위해 대세를 따르는 가운데 날이 갈수록 가슴에 응어리가 쌓이는 바람에 자기자신을 술자리로 데리고 갈수밖에 없었다’고 술회한다. 이 시기에 겪었던 정신적 고통과 자기학대는 결국 ‘문학에 대한 끊이지않는 욕구’때문이며 회사를 그만두고 71년, 단편 ‘휴면기(休眠期)’로 문단에 등단하자 ‘숨결이 야무지게 살아있는 언어’‘호흡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일정한 밀도를 유지하는 문장력’으로 주변의 시선을 끌기 시작했다. 취미는 낚시에다 절륜의 술실력. 노래판이 벌어지면 ‘개화창가에서 신구잡가, 신체유행가’를 거침없이 노래부르고 재담 농담에도 능하다. 그는 전9권에서 5권의 역사소설전집만을 주로 내다가 최근 한 10년만에 한권짜리 장편소설인 ‘홍어’를 출간했다. 이 소설은 ‘중견작가의 빛나는 감수성으로 눈이 시릴 정도의 박꽃같은 순백한 사랑을 순정미학(純正美學)의 진수(眞髓)로 그려낸다’고 평가된다. 인생의 긴 도정을 지나 그는 그의 삶의 결핍된 부분들을 인간적 정서와 무르익은 인간미로 채우는 시기다. 결국 그의 문학은 우여곡절을 지나 정상에 오르게 되었고 문학에 대한 심한 갈등과 의혹과 고뇌를 되풀이하는 어쩔수없는 작가의 자세를 지킨다. 그는 처음에도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더니 오늘도 여일하게 진실한, 이 시대 ‘대기거영(大器巨影)’의 얼굴이다. □연보 ▲1972년 소설 ‘휴면기(休眠期)’(월간문학)로 등단 ▲1976년 경향신문에 첫장편소설 ‘목마위의 여자’ 연재 ▲1979년부터 서울신문에 ‘객주(客主)’연재 ▲1983년부터 중앙일보에 ‘활빈도(活貧盜)’ 연재 ▲1988년 한국일보에 ‘화척(禾尺) 7년 계약, ‘중국기행’연재 ▲1991년 동아일보에 ‘야정(野丁)’ 연재 ▲1995년 서울신문에 아프리카기행 연재 장편소설 ‘객주’ 전9권 (81년 창작과 비평사) ‘아들의 겨울’(82년 전예원) ‘천둥소리’(86년 민음사) ‘활빈도’ 전3권(87년 중앙일보사)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88년 민음사) ‘외설 춘향전’(94년민음사) ‘화척’ 전5권 (95년 문이당) ‘야정’ 전5권(96년 문학과 지성사) ‘홍어’(98년 문이당)출간, 단편집 ‘겨울새’(83년 민음사) ‘새를 찾아서’(87년 도서출판 나남)등 소설문학상(82년) 유주현문학상(84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93년) 이산문학상(96년)
  • 황제의 침소와 수라상(秘錄 南柯夢:7)

    ◎고종 심한 불면증… 궁중 낮밤 뒤바뀌어 혼란/정오께 일어나 12첩 반상 아침 수라/관리들도 맞춰 낮에 잠자고 밤에 등청/함녕전 대청전화로 신하들에 국정 지시/재판 앞둔 중죄인 석방령… 판사 항의 사직 정환덕(鄭煥悳)이 상경하여 이리저리 찾아다니다가 동부승지(同副承旨) 윤명구(尹鳴九)를 찾아 갔다.윤명구는 정환덕이 역학에 밝다는 소리를 듣고 대궐에 보낼 생각으로 전화과장(電話課長) 이재찬(李在纘)을 소개하여 주었다.당시 이재찬은 고종 황제를 직접 모시고 있던 최측근자였기 때문이다.전화과장이 황제의 최측근자라면 이상하게 생각될지 모르나 그때는 요즘의 청와대비서실장과도 같은 자리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897년에 처음 전화소가 설치되었는데 당시로서는 궁내부소관이요,황제의 직속기관이었다.그래서 전화선이 황제의 거소인 덕수궁을 중심으로 정부 각 부처에 연결되어 있었다. ○‘만능 요술단지’ 대청전화 덕수궁에서는 고종 황제가 기거하는 함녕전(咸寧殿) 대청마루에 전화기가 놓여 있었다.황제는 언제든지 필요할 때 이 대청마루 전화를 들어 정부 각부처에 지시를 하였다.그러니 이 대청마루 전화가 한번 울리면 국가대사가다 결정되는 만능의 요술단지와도 같았다.그래서 사람들은 이 전화를 일러 대청전화(大廳電話)라 했다. 이재찬은 정환덕을 데리고 대한문을 통해 덕수궁 안으로 들어섰다.함녕전은 대한문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으나 처음 대궐안에 들어온 정환덕으로서는 어디가 어디인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이윽고 황제 앞에 엎드렸는데,이재찬이 황제에게 이렇게 말씀을 드렸다. “방금 온 천하가 어지럽고 소란합니다.열강들이 서로 잘났다고 하면서 시기하고 의심하는가 하면 변괴마저 백출하고 있으니 이 나라의 안정과 위태함이 어찌될지 알 수가 없습니다.또 백성이 도탄에 빠져 어쩔줄 모르고 있으니 황상폐하께서는 높은 베개에 편안히 주무시지 못하는 줄로 압니다.이것이 신(臣)이 밤낮으로 걱정하는 바입니다.여기 한 사람이 있는데 소년시절부터 태을노인(太乙老人)에게 수학하여 국가의 흥망과 인생의 길흉화복에 통달하여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이와같이 위태하고 어려운 때를 당하였으니 급히 이 사람을 가까이 두시어 자문하시는 것이 도움이 될 듯하온데 성상의 의사는 어떠하겠습니까.감히 아뢰옵니다.” 고종 황제는 갑신정변이 일어난 1882년부터 18년동안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심한 불면증에 걸려 있었다.밤에는 11시까지 눈을 뜨고 있다가 잠시 1시간쯤 눈을 붙였다가 다시 일어나 새벽까지 정사를 보았다.이윽고 날이 새면 그때서야 비로소 침소로 들었으며 일어나는 것은 대낮인 12시였다.이때 아침을 들었으니 아침이 아니라 점심이었다. “지난 갑신변란으로부터 지금까지 황상폐하 부자(父子)분은 촛불을 밝히고 밤을 지새게 되어 밤의 침소는 완전히 폐지되어 버렸다.이 때문에 대청에서 당번을 서는 내시와 상궁,시녀는 눈을 붙이지 못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야 했다.황상폐하 부자분이 새벽에 침소에 들어간 후에야 각자 자기의 처소로 돌아가 잠을 자고 상감 부자분이 침소로 드신 뒤에는 서로 서로 들어가 당번을 섰다.황상폐하와 세자가 침소에서 나오시는 시간은 매일 낮 12시 전후 가량이니 백관(百官)의 조회는 하지 않아도 저절로 끝나버린다.이 때문에 서울에서는 때는 바야흐로 ‘긴 긴 밤이 대낮과 같은 세상이다(長夜如晝之世)’는 말이 유행하였다.” 그러니 모든 정부 관리들은 낮에는 자고 저녁에는 등청하여 업무를 보게 되었다.마치 밤일하는 사람들처럼 남들은 다 잠들었는데,벼슬아치들은 덕수궁에서 걸려오는 전화소리만 기다렸다. 대청전화는 법원(平理院) 판사들에게도 난데없이 걸려왔다.내일 판결하기로 되어 있는 사형수를 풀어주라는 분부전화인 경우도 있었다.이것은 분명 위법이었으나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십중팔구 순종하게 마련이었다.그러나 주정기(朱定基)라는 판사는 그렇지 않았다.아무리 대청전화라고 하나 모두가 고종 황제의 전화가 아닌 가짜 전화인 때도 많아 하루는 크게 화가 났다. 주판사는 가위를 들어 전화선을 끊고는 황제에게 사표를 냈다.주판사는 그뒤 변호사로 개업했는데,세상 사람들이 그를 가장 깨끗한 법조인으로 칭송하였다는 것이다. ○床 3개에 진수성찬 아무튼 황제 부자께서는 대낮에 기상하여수라상(水刺床)을 받았다.임금님 식사는 과연 어떠했을까. “정오쯤 침소를 나와 수라를 드시니 비록 아침밥이라 하나 곧 점심밥인 셈이다.수라상을 엿보니 반찬의 가지수가 12첩이었다.은으로 된 반이며 상과 그릇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떠한 반찬은 주척(周尺·약 20㎝쯤인 자의 하나)으로 1척5촌가량이나 돼 반 위에 높이 배치,진열하였다.해물은 사이 사이에 섞어 두었는데 혼자 다 드실 수 없을 정도였다.또 곁에는 대모갑(玳瑁甲·바다거북의 등과 배를 싸고 있는 껍질)으로 만든 상이 하나 있었는데 상 위에는 붉은 팥밥이 한 그릇 있었고 기타 각종의 과일이 한결같이 높게 배열되어 있었다.모두 신선이 사는 궁전에서나 먹을 수 있는 과일 맛이었고 인간세상의 물건이 아닌 것 같이 보였다.그러나 젓가락이 가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아 끄적거리다가 상을 물려 공사청(公事廳·임금의 명을 전하는 내시의 근무소)의 당번을 서는 내시에게 내어주었다.이것은 조상 대대로 전해내려온 관례라 하는데 자세히 알지는 못하겠다.” 수라상이란 임금과 왕비가 평상시에먹는 밥상을 말한다.수라상은 대궐의 소주방(부엌)에서 주방 상궁이 차려 바치게 되어 있는데,상이 하나가 아닌 셋이다.즉 대원반,곁반,책상반 등이 그것이다.수라상에는 기본 음식인 밥(흰밥과 팥밥),국,김치,장,조치,찜,전골 이외에 열두가지 반찬이 올려지는 12첩 반상이 원칙이었다.임금이 수라를 들기 전에 기미상궁이 먼저 기미(맛)를 보고 수저를 물에 헹군 뒤 행주에 닦아 바친다.그러고 나서 임금이 수라를 드는데,식사가 끝날 때까지 세명의 궁녀가 일렬횡대로 양수거지하고 앉아 지켜보아야 했다.그밖에는 아무도 볼 수 없게 되어 있었는데 정환덕은 우연히 이 광경을 훔쳐보고 놀랐다. 때는 흉년이라 시골에서는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았다.그런 때에 임금의 수라상을 보니 격세지감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음식을 먹다가 아랫것들에게 물려주는 습관은 본시 대궐 풍습이었는데,차차 민간에 번져 나가 마침내 국속(國俗)처럼 되었으리라는 것을 ‘남가몽’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 民權단체 등장과 반작용(秘錄 南柯夢:6)

    ◎독립협회 결성에 ‘魚頭鬼面의 무리’ 비난/高宗의 해산령에도 활동 계속하자/徐載弼 등 주동자 17명 투옥/李承晩은 탈옥미수로 사형선고/하야시日公使 上奏로 특사 석방 ‘남가몽’의 저자 정환덕(鄭煥悳)이 경북 영천(永川)에서 처음 상경한 것은 1897년 가을,나이 40때였다.이 때는 갑신정변이 일어난지도 13년이 지나 세상은 온통 개화사상으로 들떠 있었다.1894년 일제는 동학란을 구실로 청일전쟁을 일으켰고 김홍집 등 개화파를 시켜 갑오개혁을 단행했다.그리고 이듬해는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시해했다.바로 그 다음해가 정환덕이 상경한 때였다. 정환덕은 상경하기 두달 전 길몽(남가몽)을 꾸었다.황학사의 한 암자에서 수도하고 있는데 하루는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더니 “공부 더 할 필요없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1896년 徐載弼이 결성 “광무 원년(1897년) 7월 16일 밤 황학사(黃鶴寺) 동편 운수암(雲樹庵)의 동대(東臺)에 누워 잠이 들었는데,흰 도포를 입은 산신령이 청려장(靑藜杖·명아주 대로 만든 지팡이)을 짚고 내려와 마루에좌정한뒤 말하기를 ‘자네가 수학(象數學-易學)에 마음을 쏟은지 벌써 7년이나 되었으나 글의 요령(참뜻)이 어떠한 것인지 알지 못하고 글만 줄줄 읽어온 것으로 안다.그러니 글의 행간에 숨겨진 뜻을 해득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더니 산신령이 청려장을 짚고 돌연 “나라가 망했다”고 개탄하는 것이 아닌가. “슬프게도 금수강산이 벌써 다른 사람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니 애석하도다! 이런 때를 당하여 비록 주(周)나라 800년을 일으킨 강태공(姜太公)이 나타나도 안되고,한(漢)나라 4백년을 보좌한 장자방(張子房)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아무 쓸데가 없다.하물며 자네가 약간의 역학을 배웠다 하여 큰 운수(大數)를 잡을 수 있다고 자신하겠는가.헛되이 정력을 대수에만 집착하지 말고비록 작은 운수(小數)에 지나지 않다 하더라도 잡는 것이 좋을 것같다.너의 신상에는 앞으로 십년간 통운(通運)이 있으니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말라.시국의 변화를 따라 잘 대처하면 자신과 처자를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꿈을 꾸고 선뜻 서울에 올라와 보니독립협회 회원들이 아우성을 치며 거리를 누벼 장안은 온통 난장판이었다. “사람같지 아니한 무리(匪類),즉 어두귀면(魚頭鬼面)의 무리들이 작당을 하여 단체를 만들고 이름을 독립협회라 하고 광화문 앞에 모여서 밤낮으로 선동하고 있었다.이 때문에 소란상태가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므로 문안이나 성밖을 막론하고 온 서울의 인심이 점점 물끓듯 하여 장차 군자는 설땅이 없을 것같은 조짐이 보였다.” 독립협회는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미국으로 망명한 서재필이 11년만에 귀국,1896년 7월 2일 결성한 단체였다.우리나라 최초의 민권당(民權黨)이요,민주주의의 시작이었다.지금 많은 역사가들이 독립협회를 찬양하고 있으나 당대의 절대 다수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예컨대 정성우(鄭惺憂)라는 선비는 상소하기를 “갑신정변때 망명했던 역당들이 갑오 6월의 난을 일으켰으며,다시 을미 8월의 대역(大逆)을 양성한 것이다.소위 개화의 무리들이 외국으로 망명하였다가 환국,둔갑해서 말을 바꾸기를 부국강병이라 하고 외국인을 불러들여 대변(大變)을 일으켰다.흉도(兇徒) 서재필이 외신(外臣)이라 자칭하며 국권에 간여하고 있는 것은 무슨장난이며 독립신문이라는 것은 정부를 훼방하는 글 뿐이요,의리를 저버린 것이다.이것은 다만 나라를 전복시키려는 음모다”고 통렬히 비난하였다.그러니 ‘남가몽’이 독립협회 회원을 ‘비도’라 했다해서 상식에 어긋나는 말은 아니었다. “이때에 황상폐하(고종)께서는 특별히 교서를 내리시어 ‘지금 너희들이 이같은 어려운 시대를 당하여 죄망에 걸리어 스스로 알지 못하는 곳에 빠져들고 부득이하게 핍박되어 평시와 다르게 되었으나 내가 마땅히 용서해주고 놓아줄 것이다.각자 돌아가 농사짓는 자는 농사짓고 장사하는 자는 장사에 부지런히 힘써 생업에 안착한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고 경고하여 깨우쳤다.” ○영은문 헐고 독립문 건립 그러나 독립협회 회원들은 해산하지 않고 한결같이 사단을 야기하였다.이에 고종과 순종이 크게 진노,직접 광화문루 위에 올라가 교시를 내려 말하기를 “짐(朕)이 너희 무리들의 범죄를 풀어서 놓아주고 각자 돌아가 생업에 안착할 의사를 누차 깨우쳐 주었으나 듣지 않으니 너희 무리들은 도무지 정치 밖에 있는 백성으로 국민이 아니다.사세가 부득이하니 너희들을 차별없이 소멸시키고 말겠다” 하고 대포를 성루에 높이 달아매고 위력을 보이니 독립협회 회원들은 해산하고 말았다. “내가 서울에 갔을 때는 차차 평온해지고 시골도 점점 진정상태에 접어들고 있었다.그러나 남은 재앙이 이어져 수해와 기근이 겹치게 되고 도적이 날뛰어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이 해마다 일어나지 않는 때가 없었다.겉으로는 조금 안정을 되찾는 듯했으나 안으로는 점점 비상시국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서재필은 먼저 사대주의의 상징인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다.이어 모화관의 편액을 독립관으로 바꿔 달았다.봄부터 독립관에서는 치열한 토론회가 열렸는데 모두가 전직 판서·참판·승지 등 고위층들로 가마를 타고 나타나 앞마당은 거마로 꽉 찼다.또한 토론을 처음 하는 사람들이라 발언권을 얻어도 말이 나오지 않아 그냥 연단에 서있다 내려가는 사람도 많았다. 하루는 토론 주제가 “길에 가로등을 달아 도적을 없앱시다.”였다.한 사람이 일어서서 “가로등이 비치면 도적이 은신할 데가 없으니 매우 유용합니다”고 주장했는데 반대론도 만만치 않았다.어떤 사람은 “도적이 어디 길에서 도적질 합디까.남의 집 캄캄한 다락이나 곳간에서 도적질하기 때문에 가로등을 세워봐야 소용없습니다”고 하였고,다른 사람은 “가로등으로 밤도둑은 막을 수 있으나 밤에 등불을 켜고 남의 집에 들어가는 명화적(明火賊)에게는 가로등이 소용없고 또 청천백일하에 선량한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낮도둑(부정부패 관리)에게는 백촉,천촉,억만촉의 등불을 켜도 막을 수 없습니다.여러분!”이라고 소리쳤다. ○법무대신 韓圭卨이 감형 때마침 회장에 몰래 숨어들어와 있던 내부협판(內部協判·내무부 차관) 김중환(金重煥)이 이를 듣고 곧장 고종에게 달려가 “독립협회에서는 국왕을 비롯한 모든 정부요인들을 절국대도(竊國大盜)라 몰아붙이고 있습니다”라고 과장했다.고종은 대로하여 해산령을 내렸고 그래도 해산하지 않고 이듬해 여름까지 세번이나 직소를 올리자 어용단체 황국협회(皇國協會)로 하여금 몽둥이로 독립협회원을 두들겨 패고 감옥에 가두고 말았다. 이때 독립협회 주동자는 18명이었는데 윤치호를 뺀 17명 모두가 서소문 감옥에 갇혔다.그중에서도 이승만(李承晩)은 가장 과격한 분자라 사형선고가 내려졌으며 한번 탈옥하다가 붙잡혀 들어왔으므로 꼭 죽어야 될 신세였다.그런데 하늘이 도왔는지 한규설(韓圭卨)이 법무대신이 되더니 그를 감형하였고,1904년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가 고종에게 상주(上奏)하여 특사로 풀려났다.하야시는 훗날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살려내리라는 것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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