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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시위로 갈등 확산시키지 말라

    국민의 판정이 내려졌다.지난 몇 달,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 1년이 넘도록 우리 사회를 휩싸고 돈 갈등과 증오의 불길을 이제는 통합의 불길로 승화시켜야 한다.의석을 기대 이상으로 확보했든,기대에 못미쳐 실망이 크든 모든 정치·사회 세력은 총선의 의미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총선은 끝났지만 아직 고비는 많이 남아 있다.검찰은 정치인 불법 자금 수사를 재개할 예정이고,불법 시위와 선거법 위반 사범에 대한 처리도 불가피하다.가장 인화성이 강한 현안인 탄핵 심판도 당장 다음주 열리게 된다.또다시 선거 이전의 격렬한 찬·반 갈등이 이어질 소지는 충분하다. 지난 1년여동안 우리 사회에 잠재해 있던 정치적 에너지는 국회에서,길거리에서,사이버 공간에서 제한없이 분출돼 왔다.하지만 우리 사회는 분열을 스스로 치유하면서 선거를 평화롭게 치러내는 저력을 발휘했다.이러한 저력이 선거후 새 출발로 이어져야 한다.이를 위해 탄핵 찬·반으로 나뉜 사회 제세력의 자제가 무엇보다 절실하다.탄핵 찬·반 세력은 17일 또다시 서울 중심부에서 시위를 벌이겠다고 공언하고 있으나 모든 시위를 자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헌법과 법률에 근거해 선거가 치러지고 국민의 의사가 평화롭게 집약되는 마당에 굳이 시위로 갈등을 증폭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위력의 과시로 민주적 절차를 틀어보려는 시도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동이다.정치·사회·경제계 지도자들은 국민을 선동하기보다는 냉정을 되찾아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총선 결과는 그러한 노력에 대한 기대와 촉구가 모두 담겨 있다.˝
  • [삼성증권배 2004 프로야구] 롯데 4연승 단독선두

    박종호가 28경기 연속 안타 행진을 이어갔다.롯데는 로버트 페레즈의 짜릿한 끝내기안타로 4연승,단독 선두로 뛰어올랐다. 박종호는 8일 광주에서 벌어진 프로야구 기아와의 경기에서 1회 상대 선발 이원식을 상대로 좌전 2루타를 뽑아 4타수 1안타를 기록했다.이로써 박종호는 올시즌 5경기 연속 안타를 포함,현대 시절인 지난해 8월29일 두산전부터 28경기 연속 안타를 터뜨렸다.박종호가 앞으로 4경기 연속 안타를 추가하면 지난 1999년 5월5일부터 6월9일까지 박정태(롯데)가 작성한 31경기 연속 안타 기록을 갈아치운다. 지난해 자유계약선수(FA)로 풀려 4년간 22억원에 현대에서 삼성으로 이적한 스위치히터 박종호는 올시즌 2루수와 2번타자로 나서 홈런 1개 등 23타수 8안타,타율 .348로 기대에 부응했다. 삼성은 권오준의 호투와 양준혁·진갑용(2개)의 홈런 3방 등 장단 14안타를 퍼부어 4안타의 기아를 11-1로 대파하고 2연승했다.선발 등판한 권오준은 8이닝동안 삼진 2개를 잡고 4안타 1볼넷 1실점으로 막아 데뷔 6년 만에 첫승을 신고했다. 삼성에서 기아로 이적해 기대를 모았던 거포 마해영은 이날도 3타수 무안타에 그쳐 올시즌 5경기에서 17타수 1안타의 부진에 허덕였다. LG는 잠실에서 무서운 뒷심을 발휘해 3연승을 달리던 현대를 8-4로 물리치고 2연패를 끊었다.LG는 4-4로 맞선 7회 2사2루에서 대타 김상현의 통렬한 좌중간 3루타와 조인성의 적시타로 2득점,승기를 잡았다.선발 서승화는 5와 3분의1이닝동안 삼진을 무려 8개나 솎아내며 5안타 3볼넷 4실점으로 버텼으나 승패를 기록하지 못했고,진필중은 1안타 무실점으로 틀어막아 2세이브째를 올렸다. 롯데는 사직에서 9회말 2사 1·2루에서 페레즈의 극적인 우중간 끝내기안타로 두산에 7-6으로 승리했다.4연승을 달린 롯데는 현대를 제치고 단독 선두로 올라섰다.롯데의 4연승은 2002년 5월 8∼11일 이후 23개월 만이다. 김민수기자 kimms@˝
  • 지구촌 문화

    현대미술은 과거와 달리 특정지역을 중심으로 주류를 형성하기보다는 지구촌 곳곳의 다양한 문화와 환경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그것은 흔히 문화적 혼성의 형태로 나타난다.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해외 여성작가 3인전은 현대미술의 또 다른 단면을 엿보게 한다.참여 작가는 가다 아메르(이집트)·슈라제 후슈아리(이란)·수 윌리엄스(미국).이들의 작품들은 대부분 평면작업이며 추상화된 이미지다. 아메르는 붓 대신 바늘을,물감 대신 실을 가지고 캔버스를 메우는 색다른 작가다.작품의 주제는 페미니즘과 연관 있는 여성 문제들.포르노 잡지에 나오는 모델들의 이미지를 자수로 표현하고 아크릴 액체를 뿌려 작품을 마무리짓는다.보수적인 이슬람 사회에서 억압 속에 살아가는 여성들의 상처를 예술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후슈아리의 작품에는 동양의 신비주의 특히 수피즘의 영향이 깊게 배어 있다.기하학적인 이미지를 이용한 모노크롬 회화가 침묵과 초월의 세계로 이끈다.윌리엄스는 구불거리는 곡선들을 반복적으로 사용,특정 신체 부위를 연상케 하는 작품을 내놓았다.밝은 색채와 움직이는 듯한 형상이 팝아트풍의 경쾌함을 자아낸다.전시는 새달 23일까지.(02)735-8449. 김종면기자˝
  • 탄핵반대 ‘촛불집회’ 뭘 남겼나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보름 동안 서울 광화문 등 전국 각지에서 열렸던 촛불집회가 27일로 막을 내렸다.전국에서 연인원 150만여명이 참가한 이번 촛불집회는 비록 불법으로 규정됐지만 시민들은 한층 성숙된 시위 문화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다. 주최측은 명동성당 들머리로 자리를 옮겨 촛불집회를 이어가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으나 성당측이 28일 허락하지 않겠다고 밝혀 어려움을 겪을 전망이다. ●“정치권 길 잘못 갈땐 시민 다시 일어날 것” 550여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탄핵무효 부패정치 청산을 위한 범국민행동’은 주말인 27일 광화문 일대에서 3만 5000여명(경찰 추산)이 모인 가운데 마지막 촛불집회를 가졌다.오종렬 범국민행동 상임공동대표는 대회사에서 “전 국민이 함께 밝혔던 촛불을 광화문이 아닌 모든 생활터전에서 밝혀나가야 한다.”며 촛불의 의미를 계속 살려나가자고 역설했다.경기도 이천에서 온 이중호(43·서비스업)씨는 “시민들이 평화적으로 즐기면서 의사를 표시하는 의미있는 자리였다.”라면서 “촛불집회가 마무리되기 전에 가족과 함께 꼭 참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상지대 홍성태 교수는 “이번 보름 동안의 촛불집회는 합법을 가장한 정치인들의 부정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국민적 의지의 표현”이라면서 “거리에서 주권과 정의를 확인하고,정치적 의지를 문화적으로 승화해서 표현한 자리였다.”고 평가했다.홍 교수는 “지금 촛불집회를 멈추는 것은 법질서를 존중하겠다는 성숙한 시민의식의 표현이지 ‘끝’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전제하고 “정치권은 부패 심판이 올바로 이뤄지지 않는 등 민주화 요구가 있을 때 시민들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했다. ●명동성당 “장소제공 불허” 범국민행동은 주말 마지막 집회에 앞서 기자회견을 갖고 “평화적인 촛불행사를 통해 탄핵무효에 대한 전 국민적 의지가 확인됐다고 확신한다.”라면서 “탄핵무효의 상징으로 2m 높이의 촛불탑을 명동성당 들머리에 설치,시민들의 자발적 촛불행사를 이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범국민행동측은 탄핵무효 1000만명 서명운동도 벌이기로 했다. 하지만 명동성당측은 28일 오전 사제단회의를 열어 장소를 제공하지 않기로 하고 범국민행동측에 전했다.성당측은 “민주화의 성지로 자리잡은 명동성당이 이에 맞는 역할을 계속해야 하지만 이는 사전 협의하에 이뤄지는 기자회견이나 ‘하루 집회’ 등으로 제한하고자 한다.”면서 “촛불탑 설치와 저녁 모임은 허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범국민행동 김금옥 상황실장은 “명동성당측이 불허한다면 강행하지는 않겠지만 논의를 한 뒤 다시 한번 간곡히 부탁할 것”이라면서 “29일로 예정된 서명운동은 그대로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범국민행동측은 29일 저녁 7시부터 명동성당 앞에서 촛불집회를 열 예정이었다.한편 80여개 보수단체로 구성된 바른선택 국민행동은 휴일인 28일 오후 2시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5000여명(경찰 추산)이 참가한 가운데 경적시위를 벌이는 등 탄핵지지 집회를 가졌다.보수단체도 이날로 탄핵관련 집회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유지혜기자 wisepen@˝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5)이걸이 저걸이 갓걸이(下)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5)이걸이 저걸이 갓걸이(下)

    진주농민항쟁이 일어난 19세기 후반을 ‘민중의 시대’라고 부른다.진주지방농민들이 일으킨 항쟁은 ‘민중의 시대’를 알리는 서곡이었다.1862년 2월18일의 진주농민항쟁을 시작으로 하여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이르는 32년 동안 조선전역에 걸쳐 70여 차례의 농민항쟁이 들불처럼 타올랐었다. 그래서 진주농민항쟁을 동학혁명의 씨앗이라고도 하며,성리학 이념에 봉사한 유생들의 허망한 정치실패를 입증한 피와 박해의 증거라고도 부른다.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라는 류계춘 원작의 이 노래는 농민항쟁이 일어난 지역마다의 중요한 쟁점에 따라 약간씩 노랫말이 바뀌는데,그것은 그 지역 농민들에게 공통된 분노와 모순을 첨예하게 드러냄으로써 농민들의 결집을 강화시키고 투쟁력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류계춘 선생의 세상을 읽어내는 통찰력이 또 한번 돋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무튼 19세기 후반은 풍양 조씨와 안동김씨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 질서의 문란이 극점에서 폭발하기 직전이었다.여기에다 조선왕조의 조세제도 핵심인 삼정(三政)의 실패가 겹쳐 조선은 국가로서의 통제력을 상실하여 가난한 민중의 삶은 참담했다. ●민중 오랜 착취와 압박에 신음 순조,헌종,철종년간 조선사회의 모순은 이미 깊어져 있었고,봉건제도 붕괴 과정에서 민중은 오랜 착취와 압박으로 신음했다.지옥같은 학정의 세월 한 가운데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횃불이 맨 먼저 진주에서 타올랐다. 그 혁명의 전주곡인 나팔소리를 맨 처음 낸 나팔수가 류계춘 선생이었던 것이다.왜 그는 혁명의 나팔소리인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라는 노래를 지어 퍼뜨렸을까? 조선왕조 조세제도인 삼정(三政)은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을 말한다. 전정은 토지세,군정은 병역의무와 관련된 세금,환곡은 봄철의 식량부족과 파종기 종자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에서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가을 수확 때 이자를 붙여 되돌려 받는 제도였음은 일반 상식이다. 이 같은 국가 조세제도의 골격인 삼정제도가 오랜 모순으로 폐단이 커지자 이에 따른 구체적인 폐해는 농민들의 부담으로 귀결되었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과 세금은 결국 가장 낮은 계층인 농민들의 육신과 농사 지은 곡식,베틀로 짠 포목이기 때문이다.양반 사대부는 병역의 의무도 없었고,부역 등 노동력을 바쳐야 할 필요도 없었으며,아무리 재산이 많더라도 세금 낼 까닭이 없었기 때문에 국가가 어려울수록 항상 고통받는 것은 농민들뿐이었다.끊임없이 늘어만가는 삼정폐해에 따른 부담은 농민들을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고 있었다. 전정 즉 토지세 모순은 전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든 임진왜란,정묘 병자호란으로 더욱 심각해졌다.오랜 전쟁 때문에 많은 토지가 황폐해진데다 양반,관리,토호들이 고의적으로 토지대장에 등록하지 않고 숨겨둔 토지와,세금을 안내는 면제토지가 늘어나자 국가의 조세수입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그렇게 줄어든 세금을 모두 농민들에게 부담시켰으니 농민들의 삶은 고통뿐이었다.여기에다 관청에 근무하는 관리들이 개인적으로 탕진해버린 공금을 채워넣기 위하여 도결(都結)이라는 이름의 세금을 만들어 마음대로 부과하여 거둬들였다. ●일부 농민들 세도가에 붙어 병역기피 군정,즉 병역의무와 관련된 세금은 군포(軍布)라는 이름의 베를 징수하는 것이다.그런데 양반,아전,관노(官奴)는 병역이 면제된데다 정치기강이 문란해지자 일부 농민들도 세도있는 양반가문에 붙어서 병역을 기피하는 폐단이 생겼다. 환곡제도는 앞의 두 제도보다 더 심했다.아예 고리대(高利貸)로 변질되어 지방관청 관리들의 탐욕을 키우는 가장 악질적인 농민수탈 방법이었다.처음부터 월급이 없는 아전들은 농민을 착취하고 공금과 관청곡식을 횡령착복하는 협잡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얼마만큼의 부정부패를 국가가 공식적으로 묵인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이 얄궂은 제도는 오늘날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를 심판할 때 일정액수 이하의 금액을 뇌물로 받거나 횡령했을 때 이른바 ‘통상적인 떡값 또는 관례’라 하여 면죄부를 주는 원류가 되었다. 이같은 모순이 계속되다 보니 탐관오리의 간악한 작폐로 인하여 농민의 생활은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으로 변했고,고통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국가의 재정은 고갈되고,착취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고향을 버리고 도망하여 유민이 되기도 했다.유민들 중에는 장길산처럼 도둑떼로 변질되기도 했고,깊은 산중 절간에 찾아가서 절 머슴이나 승려가 되기도 했다.살아남기 위하여 긴급피난한 농민들이 사찰로 몰려들어 승려가 되는 것은 한 때 커다란 유행이었다.실제로 한때 승려 숫자가 조선 인민의 10분의 1이 된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한때 조선인민 10분의1 승려 되기도 아무튼 참을 수 없는 정도까지 불만이 쌓이자 농민들은 필연적으로 정부에 항거하는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이래도 죽고,저래도 죽을 바엔 할말이나 해보고 죽자는 공감대가 조선의 모든 농민들 가슴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같은 전 국가적 모순에 저항의 횃불을 맨 처음 쳐든 것이 진주지방 농민들이었다.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조선 어느 지방보다 진주지방의 모순이 더 크고,착취가 심했기 때문이었다. 진주는 진주목사가 다스리는 행정관청 외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다스리는 군사기관인 병영까지 있어서 관리와 아전의 숫자가 그만큼 많았다.아전 숫자가 많다는 것은 곧 농민들을 수탈하는 정도가 그만큼 극심하다는 뜻이다. 또한 향교와 서당이 많아서 향교의 교생(校生),서원의 원생(院生)은 모든 의무에서 면제되는데,그 면제액만큼 농민들의 부담은 늘어났다. ●농민들 존재 양반의 ‘갓걸이’ 에 비유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에서 모든 힘없는 농민들 숫자는 곧 양반들의 갓을 걸어두는 ‘걸이’,즉 양반을 위해 존재하는 목숨없는 말뚝이나 갓 걸어두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지독하고도 절묘한 은유인 것이다. 1862년 이전 류계춘 선생은 이 같은 진주목과 병영아전들의 혹독한 수탈에 대하여 여러해 동안 문제제기를 했었다.해당 관청에 진정서를 내거나 고발장을 접수시키기도 하면서 폐단을 고쳐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아전들은 류계춘선생을 온갖 방법으로 박해하고 괴롭혔다.구속시켜 매질을 하기도 했다.이런 선생을 지켜보던 진주지방 농민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대변하는 선생에게 직·간접적인 지지를 보내면서 격려해주었다. 그러는 사이에 농민수탈은 더욱 심해졌다.농민들은 최후의 방법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류계춘 선생이 농민의 대표자로 뽑혔다.그때부터 선생은 최후의 결전을 준비해 나갔다.먼저 농민들을 결속시키고 투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노래를 만들어 퍼뜨렸다. 그런 다음 몇 가지 방법을 고안하여 농민들을 결속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농민들에게 가장 악랄한 아전으로 알려진 자와 양반으로서 가장 탐학과 착취가 심한 자들을 선정하여 그들의 구체적인 비리내용과 이름을 적은 일종의 전단을 만들어 사방에다 붙이고 뿌렸다.모두 한글로 적었기 때문에 이를 언방(諺榜)이라 했다.농민들이 더 이상 참기만해서는 안되는 이유,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이 왜 농민의 적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소상하게 적어서 비밀리에 돌려 읽히는 회문(回文),거사 날짜가 정해지면 각자의 임무를 차질없이 수행하겠다는 맹세를 하는 통문(通文)등 방법으로 농민들과 조직 책임자를 정하고 준비했다. 마침내 1862년 2월 18일 이른 아침부터 농민들은 미리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봉기를 시작하여 약속된 장터나 공공 집회장소로 집결했다.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손에는 몽둥이와 농기구를 들고,‘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를 소리높여 부르면서 농민시위대를 만들어 갔고 시위대의 규모가 순식간에 홍수처럼 불어났다.겁을 먹고 숨어있던 자,반대하던 자,피신해있던 자들까지도 농민시위대의 함성과 노랫소리에 이끌려 합류했다. 이렇게 결집된 농민들은 진주성문을 열고 들어가 우병사 백낙신,진주목사 홍병원으로부터 항복을 받고,악질 관리로 손꼽히던 권준범,김희순을 불태워 죽였다. 그리고 자진해산하기까지의 4일동안 농민들의 원성을 산 토호들과 양반,부패관리들을 응징하고 끝났다.누구의 강압이나 회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농민들 스스로 정한 목적에 따라 자진해산한 것이다. 그리고 류계춘 선생과 동지들 또한 스스로 관청에 나가 진실을 밝히면서 잘못된 제도를 폐지할 것을 요구했다.그러나 그 대답은 반역죄에 따른 참수형이었다.그들이 죽은 뒤 조선의 농민들은 32년간의 긴 기간에 걸쳐 정부에 책임을 물었고,동학농민혁명으로 승화되었다. 선생이 떠난지 140여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의 농민과 농업은 여전히 고난에 처해있다.선생의 초라한 무덤이 자꾸 오늘날 한국 농업의 상징처럼 다가온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5)이걸이 저걸이 갓걸이(下)

    진주농민항쟁이 일어난 19세기 후반을 ‘민중의 시대’라고 부른다.진주지방농민들이 일으킨 항쟁은 ‘민중의 시대’를 알리는 서곡이었다.1862년 2월18일의 진주농민항쟁을 시작으로 하여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이르는 32년 동안 조선전역에 걸쳐 70여 차례의 농민항쟁이 들불처럼 타올랐었다. 그래서 진주농민항쟁을 동학혁명의 씨앗이라고도 하며,성리학 이념에 봉사한 유생들의 허망한 정치실패를 입증한 피와 박해의 증거라고도 부른다.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라는 류계춘 원작의 이 노래는 농민항쟁이 일어난 지역마다의 중요한 쟁점에 따라 약간씩 노랫말이 바뀌는데,그것은 그 지역 농민들에게 공통된 분노와 모순을 첨예하게 드러냄으로써 농민들의 결집을 강화시키고 투쟁력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류계춘 선생의 세상을 읽어내는 통찰력이 또 한번 돋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무튼 19세기 후반은 풍양 조씨와 안동김씨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 질서의 문란이 극점에서 폭발하기 직전이었다.여기에다 조선왕조의 조세제도 핵심인 삼정(三政)의 실패가 겹쳐 조선은 국가로서의 통제력을 상실하여 가난한 민중의 삶은 참담했다. ●민중 오랜 착취와 압박에 신음 순조,헌종,철종년간 조선사회의 모순은 이미 깊어져 있었고,봉건제도 붕괴 과정에서 민중은 오랜 착취와 압박으로 신음했다.지옥같은 학정의 세월 한 가운데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횃불이 맨 먼저 진주에서 타올랐다. 그 혁명의 전주곡인 나팔소리를 맨 처음 낸 나팔수가 류계춘 선생이었던 것이다.왜 그는 혁명의 나팔소리인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라는 노래를 지어 퍼뜨렸을까? 조선왕조 조세제도인 삼정(三政)은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을 말한다. 전정은 토지세,군정은 병역의무와 관련된 세금,환곡은 봄철의 식량부족과 파종기 종자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에서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가을 수확 때 이자를 붙여 되돌려 받는 제도였음은 일반 상식이다. 이 같은 국가 조세제도의 골격인 삼정제도가 오랜 모순으로 폐단이 커지자 이에 따른 구체적인 폐해는 농민들의 부담으로 귀결되었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과 세금은 결국 가장 낮은 계층인 농민들의 육신과 농사 지은 곡식,베틀로 짠 포목이기 때문이다.양반 사대부는 병역의 의무도 없었고,부역 등 노동력을 바쳐야 할 필요도 없었으며,아무리 재산이 많더라도 세금 낼 까닭이 없었기 때문에 국가가 어려울수록 항상 고통받는 것은 농민들뿐이었다.끊임없이 늘어만가는 삼정폐해에 따른 부담은 농민들을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고 있었다. 전정 즉 토지세 모순은 전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든 임진왜란,정묘 병자호란으로 더욱 심각해졌다.오랜 전쟁 때문에 많은 토지가 황폐해진데다 양반,관리,토호들이 고의적으로 토지대장에 등록하지 않고 숨겨둔 토지와,세금을 안내는 면제토지가 늘어나자 국가의 조세수입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그렇게 줄어든 세금을 모두 농민들에게 부담시켰으니 농민들의 삶은 고통뿐이었다.여기에다 관청에 근무하는 관리들이 개인적으로 탕진해버린 공금을 채워넣기 위하여 도결(都結)이라는 이름의 세금을 만들어 마음대로 부과하여 거둬들였다. ●일부 농민들 세도가에 붙어 병역기피 군정,즉 병역의무와 관련된 세금은 군포(軍布)라는 이름의 베를 징수하는 것이다.그런데 양반,아전,관노(官奴)는 병역이 면제된데다 정치기강이 문란해지자 일부 농민들도 세도있는 양반가문에 붙어서 병역을 기피하는 폐단이 생겼다. 환곡제도는 앞의 두 제도보다 더 심했다.아예 고리대(高利貸)로 변질되어 지방관청 관리들의 탐욕을 키우는 가장 악질적인 농민수탈 방법이었다.처음부터 월급이 없는 아전들은 농민을 착취하고 공금과 관청곡식을 횡령착복하는 협잡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얼마만큼의 부정부패를 국가가 공식적으로 묵인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이 얄궂은 제도는 오늘날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를 심판할 때 일정액수 이하의 금액을 뇌물로 받거나 횡령했을 때 이른바 ‘통상적인 떡값 또는 관례’라 하여 면죄부를 주는 원류가 되었다. 이같은 모순이 계속되다 보니 탐관오리의 간악한 작폐로 인하여 농민의 생활은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으로 변했고,고통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국가의 재정은 고갈되고,착취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고향을 버리고 도망하여 유민이 되기도 했다.유민들 중에는 장길산처럼 도둑떼로 변질되기도 했고,깊은 산중 절간에 찾아가서 절 머슴이나 승려가 되기도 했다.살아남기 위하여 긴급피난한 농민들이 사찰로 몰려들어 승려가 되는 것은 한 때 커다란 유행이었다.실제로 한때 승려 숫자가 조선 인민의 10분의 1이 된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한때 조선인민 10분의1 승려 되기도 아무튼 참을 수 없는 정도까지 불만이 쌓이자 농민들은 필연적으로 정부에 항거하는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이래도 죽고,저래도 죽을 바엔 할말이나 해보고 죽자는 공감대가 조선의 모든 농민들 가슴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같은 전 국가적 모순에 저항의 횃불을 맨 처음 쳐든 것이 진주지방 농민들이었다.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조선 어느 지방보다 진주지방의 모순이 더 크고,착취가 심했기 때문이었다. 진주는 진주목사가 다스리는 행정관청 외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다스리는 군사기관인 병영까지 있어서 관리와 아전의 숫자가 그만큼 많았다.아전 숫자가 많다는 것은 곧 농민들을 수탈하는 정도가 그만큼 극심하다는 뜻이다. 또한 향교와 서당이 많아서 향교의 교생(校生),서원의 원생(院生)은 모든 의무에서 면제되는데,그 면제액만큼 농민들의 부담은 늘어났다. ●농민들 존재 양반의 ‘갓걸이’ 에 비유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에서 모든 힘없는 농민들 숫자는 곧 양반들의 갓을 걸어두는 ‘걸이’,즉 양반을 위해 존재하는 목숨없는 말뚝이나 갓 걸어두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지독하고도 절묘한 은유인 것이다. 1862년 이전 류계춘 선생은 이 같은 진주목과 병영아전들의 혹독한 수탈에 대하여 여러해 동안 문제제기를 했었다.해당 관청에 진정서를 내거나 고발장을 접수시키기도 하면서 폐단을 고쳐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아전들은 류계춘선생을 온갖 방법으로 박해하고 괴롭혔다.구속시켜 매질을 하기도 했다.이런 선생을 지켜보던 진주지방 농민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대변하는 선생에게 직·간접적인 지지를 보내면서 격려해주었다. 그러는 사이에 농민수탈은 더욱 심해졌다.농민들은 최후의 방법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류계춘 선생이 농민의 대표자로 뽑혔다.그때부터 선생은 최후의 결전을 준비해 나갔다.먼저 농민들을 결속시키고 투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노래를 만들어 퍼뜨렸다. 그런 다음 몇 가지 방법을 고안하여 농민들을 결속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농민들에게 가장 악랄한 아전으로 알려진 자와 양반으로서 가장 탐학과 착취가 심한 자들을 선정하여 그들의 구체적인 비리내용과 이름을 적은 일종의 전단을 만들어 사방에다 붙이고 뿌렸다.모두 한글로 적었기 때문에 이를 언방(諺榜)이라 했다.농민들이 더 이상 참기만해서는 안되는 이유,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이 왜 농민의 적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소상하게 적어서 비밀리에 돌려 읽히는 회문(回文),거사 날짜가 정해지면 각자의 임무를 차질없이 수행하겠다는 맹세를 하는 통문(通文)등 방법으로 농민들과 조직 책임자를 정하고 준비했다. 마침내 1862년 2월 18일 이른 아침부터 농민들은 미리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봉기를 시작하여 약속된 장터나 공공 집회장소로 집결했다.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손에는 몽둥이와 농기구를 들고,‘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를 소리높여 부르면서 농민시위대를 만들어 갔고 시위대의 규모가 순식간에 홍수처럼 불어났다.겁을 먹고 숨어있던 자,반대하던 자,피신해있던 자들까지도 농민시위대의 함성과 노랫소리에 이끌려 합류했다. 이렇게 결집된 농민들은 진주성문을 열고 들어가 우병사 백낙신,진주목사 홍병원으로부터 항복을 받고,악질 관리로 손꼽히던 권준범,김희순을 불태워 죽였다. 그리고 자진해산하기까지의 4일동안 농민들의 원성을 산 토호들과 양반,부패관리들을 응징하고 끝났다.누구의 강압이나 회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농민들 스스로 정한 목적에 따라 자진해산한 것이다. 그리고 류계춘 선생과 동지들 또한 스스로 관청에 나가 진실을 밝히면서 잘못된 제도를 폐지할 것을 요구했다.그러나 그 대답은 반역죄에 따른 참수형이었다.그들이 죽은 뒤 조선의 농민들은 32년간의 긴 기간에 걸쳐 정부에 책임을 물었고,동학농민혁명으로 승화되었다. 선생이 떠난지 140여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의 농민과 농업은 여전히 고난에 처해있다.선생의 초라한 무덤이 자꾸 오늘날 한국 농업의 상징처럼 다가온다.˝
  • ‘안중근평화상’ 송두율교수 부인 대리로 받아

    “이 즐겁고 뜻깊은 순간에 기쁨보다 슬픔이 앞섭니다.” 끝내 환한 얼굴을 볼 수 없었다.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서울구치소에 수감중인 남편 송두율(60) 교수 대신 제3회 안중근평화상을 받은 정정희(61)씨는 26일 오후 2시 명동성당에서 열린 수상식에서 줄곧 굳은 표정이었다. 시상식에는 조광 고려대 교수,함세웅 신부 등 학계·종교계 인사 150여명과 안중근 의사에 관한 영화를 추진중인 개그맨 서세원씨,영화배우 유오성씨 등이 참석했다.기념사업회측은 “송 교수는 분단 조국 현실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을 학문적으로 승화시켜 안중근 의사의 민족,민주,통일,평화 정신을 실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밝혔다. 아들 송린(28)씨와 함께 시상식에 나온 정씨는 “이 슬픔,고통을 밑거름으로 조국의 민주화와 평화 통일을 위해 더욱 열심히 살겠다.”고 말했다.송 교수는 정씨가 대리낭독한 소감 서신을 통해 “안중근 의사를 처형한 일제는 실정법을 근거로 ‘안중근이라는 살인범과 평화는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면서 “그들이 과연 현재의 우리를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송 교수는 또 “안중근 의사가 오늘 우리들을 보았더라면,일제 광복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아직도 분단되어 있는 못난 후손들에게도 매서운 비판을 가했을 것”이라면서 “하나인 조국을 위해 노력했을 뿐인 내가 ‘광복 이후 최대급 간첩’이라는 누명을 쓴 상황에서 이 상을 받은 것은,안 의사의 유지에 따라 하나가 될 조국을 위해 흔들림 없이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가라는 격려로 받아들이겠다.”고 덧붙였다.한편 부인 정씨에 따르면 오는 30일 1심 선고공판을 앞두고 있는 송 교수는 최근 독감과 불면증으로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등 건강이 악화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정씨는 “남편이 지난 19일 모친 기일을 구치소에서 보낸 것 때문에 심적으로 큰 타격을 받고 매우 울적해 있다.”고 근황을 전했다. 채수범기자 lokavid@˝
  • [함혜리 특파원의 파리지앵 스타일] 이브생 로랑 전시회를 다녀와서

    프랑스가 자랑하는 세계적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이 은퇴 후 30여년간 작업장으로 사용했던 파리의 마르소 대로 5번지의 ‘피에르 베르제-이브 생 로랑 재단’에서 그의 공식활동 중단 후 첫 전시회의 막을 올렸다.전시회는 7월18일까지 계속된다. 전시장은 건축가 장 미셸 루소가 박물관 수준으로 리노베이션한 재단 건물로,이곳 1층에 200㎡ 규모의 전시실이 최근 완성됐다.이 재단 건물엔 이브 생 로랑이 디자이너로 활동하면서 제작한 의상 5000벌,액세서리 1만 5000점 외에 수많은 드로잉과 스타일화가 보관돼 있다. “샤넬이 의상으로 여성을 해방시켰다면 나는 어느 측면에서 패션 자체를 해방시켰다고 할 수 있다.”그는 지난 2002년 1월7일 은퇴를 발표하면서 지난 40년간 추구해 온 자신의 작업을 이렇게 요약했다.어찌보면 지나치게 자신감 넘치는 발언이지만 이에 대해 비난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오히려 1월22일 퐁피두센터에서 열린 마지막 패션쇼를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은 톰 포드와 같은 감각있는 신세대 디자이너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은퇴하는 그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다. 퐁피두센터의 젊은 전시기획자 나탈리 크리니에르가 기획한 첫 전시회는 ‘예술과의 대화’가 주제.피에트 몬드리안,피에르 보나르,파블로 피카소,앙리 마티스,반 고흐,앤디 워홀 등 이브 생 로랑이 대가들의 미술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한 의상 45점을 실제 미술작품들(이브 생 로랑의 개인 소장품)과 컬렉션 쇼를 담은 비디오 프로젝션과 함께 전시하고 있다. 26세의 젊은 나이에 ‘패션계의 어린 왕자’라는 찬사를 받으며 자신의 이름을 내건 첫 컬렉션을 발표한 이후 66세로 은퇴할 때까지 그는 새로운 시도와 다양한 아이디어로 패션을 ‘여성들에게 옷 입히기’의 차원에서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한차원 승화시킨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미술 애호가로 알려진 그는 특히 회화와 패션의 접목을 시도함으로써 패션의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1965년 몇개의 직선과 단순한 색상으로 우주를 표현한 추상화가 몬드리안의 작품을 원용해 검은 선과 레드,옐로,화이트 등을 커다란 격자로 처리한 박스형 저지 원피스 ‘몬드리안 컬렉션’을 발표했다.이어 1966년에는 팝아트를 의상에 접목시킨 ‘팝아트 컬렉션’을 발표해 화제를 모았다. 패션과 미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모험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와 난초를 수만개의 구슬로 수놓은 재킷을 발표하는가 하면 마티스의 원색적인 해초 문양을 담은 검은 드레스,피카소의 피에로 무늬가 들어간 드레스,브라크의 흰색 비둘기가 날아가는 듯한 드레스를 잇따라 발표했다.작품들이 2차원 캔버스에서 3차원인 의상으로 옮겨져 재탄생한 셈이다. 이브 생 로랑은 “다양한 형태와 색채의 조화를 통해 큰 감동을 주는 위대한 작가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영감을 받았다.”면서 “명작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방법으로 나는 이 의상들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lotus@˝
  • [기고] 3월에 잊지 말아야 할 것/박종권 보훈복지의료공단 이사장 본지 자문위원

    며칠전 지난 3·1절은 올해가 85주년이었다.일본에 빼앗긴 내 나라를 되찾고자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것을 비롯해 전국 방방곡곡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이 민족운동은 자주독립을 향한 민족의 항일투쟁에 횃불이 됐다. 3·1운동은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우리를 하나로 뭉칠 수 있게 한,민족 자각을 불러일으킨 위대한 사건이다.따라서 한국민족운동사에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기념되면서 대한민국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역사의식을 가지고 역사의 중심에 서서 미래를 조망할 때만이 그 국가는 발전할 수 있다.’는 준엄한 역사적 교훈은,오늘날 21세기를 새로 열어가고자 다짐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한때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으려고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던 1919년 3월1일의 그 절규가 오늘 우리에게 아련히 전달하는 메아리는,그 사건이 자랑스러우면서 일면 역사의 부끄러움을 되살려준다는 점이다.우리의 근세 100년 역사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반만년의 긴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꽃피워 온 민족이다.그러나 5000년 역사에서 우리는 1000여 차례나 외부세력의 침략을 받아왔다.그 역사가 남긴 상흔을 우리는 아직 치유하는 중이다.상하이 임시정부에 이어 8·15광복으로 나라를 되찾았지만 새로운 분단과 민족상잔의 6·25전쟁,그 이후의 안보상황에서 생긴 갖가지 상처를 치유해 가는 곳이 있다.그곳은 근세 100년,생생한 아픈 역사의 현장이면서 역사가 남긴 깊은 육체적·정신적 상처를 치유해 가는 장소이다.그곳을 보훈병원이라고 부른다. 보훈병원은 서울을 비롯해서 대전 대구 부산 광주 등 5곳에 있다.현재 독립유공자로서는 8명이 장기 요양진료를 받고 있으며 생존한 295명 또한 모두가 80세 이상의 고령으로 보훈병원 입원 우선대상자들이다.그동안 국가유공자가 13만 7000명,참전유공자가 35만명,4·19희생자 등 보훈대상자는 50만명에 이른다.관련 유족은 12만명이다.이들의 진료수요와 입원요청은 날로 급증해 보훈병원은 전국 170군데를 의탁병원으로 지정했다.연 진료인원은 1000만명을 넘는다. 그동안 애국지사·선각자들의 희생과 가르침 그리고 우리의 강인한 민족성을 바탕으로 온갖 어려움을 이기고 세계 15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으며 2002년에는 한·일 월드컵 축구 개최와 4강 진출을 이루었다.그 당시 “대한민국!”을 연호하는 우리의 열정적인 응원모습과 질서의식을 보고 세계는 얼마나 경탄을 금치 못했던가? 생각해 보면 오늘의 풍요로움이 있기까지에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투쟁한 독립애국지사와,외침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자 희생하여 지금도 보훈병원 등지에서 치료받는 국가유공자들이 있었다.그들이 없었다면 어찌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겠는가? 국가에 위기가 왔을 때 나라를 위해 몸바친 상이군경과 애국시민이 곧 국가유공자이다.그러므로 이들의 애국심과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보상하는 보훈은 국가정책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3·1절이 있는 이 달에 우리는 과거 역사를 다시 한번 인식하고,전 국민이 국가 미래를 조망하자.사상·종교·지역 모든 것을 초월해서 민족의식을 일깨워 하나로 뭉치고,국가의 새로운 질서를 열어가는 그러한 애국심을 고취해 가는 계절로 승화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역사가 있는 곳에 국가가 있고 국가가 있는 곳에 보훈이 있으며,명예로운 보훈 복지가 있을 때 국가 안녕과 번영이 뒤따른다는 것을 국민 모두가 함께 인식하기를 기대한다. 박종권 보훈복지의료공단 이사장 본지 자문위원˝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0)오뉘탑의 비밀

    계룡산 국립공원 안에 있는 오뉘탑(남매탑) 답사에는 김경준(수원 영덕초등학교 5년)군 가족과 김문환(수원 청명고 2년)군 가족,성열 스님이 동행했다. 경준군의 아버지 김우섭씨는 대학 시절 이곳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오뉘탑의 얘기가 애절하게 그려져 있었다고 했다.국어 교사가 말씀하시기를 사랑에 대하여 뭔가 느껴보고 싶은 가슴을 지닌 이라면 함박눈 내리는 겨울날 계룡산 삼불봉 기슭에 있는 오뉘탑을 꼭 한 번 가봐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교과서에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려 국어책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아름답게 승화시킨 남녀의 종교적 고뇌가 주제였는데,그 글을 쓴 사람은 함박눈이 꽃잎처럼 흩날리는 어느 겨울날 눈을 맞으며 오뉘탑에 이르는 산길을 오르면서 인간이 꿈꾸는 사랑은 항상 꿈으로나 그려질 뿐일까 독백했다고 한다. 동학사 들목에서 오른쪽으로 난 돌자갈길로 2km쯤 오르면 된다는 가벼운 생각으로 나섰는데 가파른 돌길인 데다 눈이 녹지 않아 미끄러워서 어린이들은 힘겨워했다.이제 네 살 난 태경이는 어른들이 교대로 업거나 목마를 태워서 산길을 올랐다. 삼불봉 기슭에는 계명정사가 있고,그 곁의 옛 청량사 터에 오뉘탑으로 불리는 5층과 7층 석탑 두 채가 나란히 서 있었다.엊그제 내린 눈이 바닥에 덮여 있고,날씨는 쾌청하여 두 석탑은 물로 씻은 듯 깨끗했다.수많은 등산객들이 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뒤 도시락을 먹거나 다른 목적지로 서둘러 이동해 갈 뿐,어느 누구도 안내판에 적힌 오뉘탑의 전설을 읽고 의문점을 토론하거나 탑의 생김새를 천천히 살펴보는 사람은 안보인다. 경준군이 안내문을 읽어내렸다. 전설에 따르면 오뉘탑 부근의 작은 토굴에서 수행하는 사람이 혼자 살았다.그는 백제의 왕족이었는데 뜻하는 바가 있어 출가하여 고독한 수행자로 살았다.어느 해 겨울밤이었다.토굴 밖에서 애절하게 우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 나와 보니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입을 벌린 채 절규하고 있었는데,호랑이 입속을 들여다보니 목에 비녀가 걸려 있었다.그대로 두면 호랑이는 죽고 말 것이 분명했다.스님은 위험을 무릅쓰고 호랑이 입속으로 손을 밀어넣어 비녀를 뽑아주었다.호랑이는 스님을 바라보고 있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그런 일이 있은 지 며칠 뒤 밤이었다.토굴 밖에서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스님이 나가봤더니 토굴 밖에는 웬 낯선 젊은 여자가 기절한 채 쓰러져 있었다. ●호랑이가 은혜 갚기 위해 여인 물어와 호랑이가 살려준 은혜를 갚기 위하여 그 보답으로 젊은 여자를 물어다 놓고 사라진 것이었다.스님은 일단 여자를 토굴 안으로 안아들여 놓고 따뜻한 물을 떠먹여서 살려냈다. 한참 뒤 여자가 깨어났다.스님은 사정을 물었다.여자는 경상도 상주가 고향인데,그날 낮에 혼례를 치르고 저녁에 신방에 들려 하는데 그만 호랑이가 나타나 물려왔다는 것이었다.스님은 일단 토굴에서 밤을 보낸 뒤 날이 밝는 대로 데려다 주려고 했다.그런데 그날 밤부터 폭설이 퍼붓기 시작했다.계룡산은 눈더미에 파묻혀 모든 길이 막혀버렸다.하는 수 없이 눈이 녹고 길이 드러나는 내년 봄까지는 함께 지내는 도리 밖에 없었다. 비좁은 토굴 속에서 함께 지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스님은 밤마다 끓어오르는 욕정을 염불과 참선으로 가라앉히면서 아무 일 없이 겨울을 났다. 이듬해 봄이 되자 스님은 자신과의 약속대로 그 여자를 경북 상주로 데려다 주었다.그런데 그 여자가 스님 혼자 사는 토굴로 되돌아 왔다.부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했다.할 수 없이 두 사람은 의남매를 맺고 부지런히 수행하여 훌륭한 승려생활을 마치고 입적했다. 그들의 제자들이 두 사람의 종교적 삶을 기려서 나란히 탑을 세웠으니 이를 오뉘탑 또는 남매탑이라 부른다. 이날 우리의 답사기행은 이같은 전설 속에 감춰진 비밀을 밝혀 보기 위한 것이었다.먼저 이 전설에는 몇 가지 흥미있는 비밀의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이 그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 봐야 한다. 첫째,하필이면 왜 호랑이가 백제 왕족이 수행하는 토굴에 경북 상주가 고향인 여자를 물어다 놓고 사라졌는가 하는 점이다.경북 상주는 신라 영토다.신라가 백제를 정복하기 전 삼국시대였다면 호랑이가 신라 여자를 물어다 백제 땅인 계룡산에다 갖다 둘 수는 있다고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백제 사람이 신라 땅인 경북 상주로 넘나들기 위해서는 국경을 넘어야 하는데 그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백제가 신라에 정복된 뒤인 통일신라시대의 일로 상정해 볼 수 있다.신라에 멸망당한 백제의 왕족은 더 이상 굴욕적인 삶을 살지 않기 위해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통혼정책 선전하기 위해 만든 이야기? 그런데 호랑이가 신라 땅인 경북 상주 출신 여자를 물어다 백제 왕족 출신 승려에게 데려다 주었다는 것은 어딘가 정치적인 냄새가 난다. 정복당한 지 100년이 지나도록 끈질기게 저항한 백제 유민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통일신라 정부는 여러 가지 정책을 썼다.백제의 왕족과 지배계층들에게 신라의 벼슬을 주거나 혼인정책으로 적대감을 누그러뜨리는 데 진력했다. 그같은 통혼정책을 널리 선전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둘째는 5층과 7층 석탑의 구조와 탑을 세우는 관습이 백제 신라가 각각 다른 점을 들 수 있다.원칙적으로 백제는 외탑 가람의 구조였다.익산 미륵사의 쌍탑가람은 매우 드문 일이다.그렇게 볼 때 오뉘탑은 쌍탑구조인데 이를 백제시대의 탑이라고 보는 데는 석연치 않은,구체적인 증거가 매우 많다는 점을 들 수 있다.즉 5층석탑은 백제 것으로 보지만 7층 석탑은 훨씬 뒤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어 왔다. 백제 탑의 특징은 첫째로 작은 석재를 많이 사용하여 마치 목조건물을 보는 듯하다는 것이다.둘째는 신라 탑처럼 높은 이중 받침대가 없이 낮은 받침대 위에 바로 탑신이 선다. 셋째,옥개석이 펀펀하고 넓으며 네 귀가 가볍게 위로 치솟았고,넷째로는 이층째부터는 첫층에 견주어 탑 몸의 폭과 높이가 급격하게 줄어든다는 점이다. 이같은 백제 탑의 특징으로 볼 때 5층석탑은 명백하게 백제 탑임이 입증된다.그러나 7층석탑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5층석탑과 7층석탑은 전혀 다른 양식 가장 차이가 나는 것은 옥개석의 생김새다.5층 석탑의 옥개석은 두 장의 돌을 잇대어 얹은 데다 지극히 펀펀하고 네 귀퉁이도 아주 조금만 쳐들렸는데 비해 7층 석탑의 옥개석은 두꺼운 돌 하나로 만들었다.위로 올라갈수록 옥개석의 넓이를 정교한 비례로 줄여감으로써 솟구쳐 오르는 힘을 느끼게 한다.이같은 힘은 옥개석 네 귀퉁이의 쳐들림을 강조하여 더욱 생동감을 주는 점도 크게 다르다. 무엇보다 작은 석재를 많이 이용한 5층석탑과 굵은 돌 하나 씩을 사용한 7층석탑을 같은 백제시대 탑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거나 고의적으로 짜맞추려 했다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하다 하겠다. 결국 오뉘탑 전설은 끈질기게 저항하는 백제 유민들을 통혼 정책 등으로 회유하기 위해 통일신라 정부가 계획적으로 만들어 유포한 것으로 볼 수 있다.이때 7층 석탑까지 곁들였지만 백제 탑에 담겨 있어야 할 백제인의 마음을 탑에 불어 넣지는 못했던 것이다. 필자의 설명을 귀담아 듣고 있던 김우섭씨는 아이들을 데리고 이같은 답사기행을 자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고,김문환군은 폭넓은 역사 공부를 위해서 유익했다며 힘들게 산길을 올라 온 보람을 느낀다면서 웃었다.우리의 역사와 문화는 많은 비밀을 지녔고,그 비밀을 풀어가다 보면 새로운 삶의 지혜와 인간을 이해하는 새로운 철학을 발견하게 된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0)오뉘탑의 비밀

    계룡산 국립공원 안에 있는 오뉘탑(남매탑) 답사에는 김경준(수원 영덕초등학교 5년)군 가족과 김문환(수원 청명고 2년)군 가족,성열 스님이 동행했다. 경준군의 아버지 김우섭씨는 대학 시절 이곳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오뉘탑의 얘기가 애절하게 그려져 있었다고 했다.국어 교사가 말씀하시기를 사랑에 대하여 뭔가 느껴보고 싶은 가슴을 지닌 이라면 함박눈 내리는 겨울날 계룡산 삼불봉 기슭에 있는 오뉘탑을 꼭 한 번 가봐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교과서에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려 국어책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아름답게 승화시킨 남녀의 종교적 고뇌가 주제였는데,그 글을 쓴 사람은 함박눈이 꽃잎처럼 흩날리는 어느 겨울날 눈을 맞으며 오뉘탑에 이르는 산길을 오르면서 인간이 꿈꾸는 사랑은 항상 꿈으로나 그려질 뿐일까 독백했다고 한다. 동학사 들목에서 오른쪽으로 난 돌자갈길로 2km쯤 오르면 된다는 가벼운 생각으로 나섰는데 가파른 돌길인 데다 눈이 녹지 않아 미끄러워서 어린이들은 힘겨워했다.이제 네 살 난 태경이는 어른들이 교대로 업거나 목마를 태워서 산길을 올랐다. 삼불봉 기슭에는 계명정사가 있고,그 곁의 옛 청량사 터에 오뉘탑으로 불리는 5층과 7층 석탑 두 채가 나란히 서 있었다.엊그제 내린 눈이 바닥에 덮여 있고,날씨는 쾌청하여 두 석탑은 물로 씻은 듯 깨끗했다.수많은 등산객들이 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뒤 도시락을 먹거나 다른 목적지로 서둘러 이동해 갈 뿐,어느 누구도 안내판에 적힌 오뉘탑의 전설을 읽고 의문점을 토론하거나 탑의 생김새를 천천히 살펴보는 사람은 안보인다. 경준군이 안내문을 읽어내렸다. 전설에 따르면 오뉘탑 부근의 작은 토굴에서 수행하는 사람이 혼자 살았다.그는 백제의 왕족이었는데 뜻하는 바가 있어 출가하여 고독한 수행자로 살았다.어느 해 겨울밤이었다.토굴 밖에서 애절하게 우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 나와 보니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입을 벌린 채 절규하고 있었는데,호랑이 입속을 들여다보니 목에 비녀가 걸려 있었다.그대로 두면 호랑이는 죽고 말 것이 분명했다.스님은 위험을 무릅쓰고 호랑이 입속으로 손을 밀어넣어 비녀를 뽑아주었다.호랑이는 스님을 바라보고 있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그런 일이 있은 지 며칠 뒤 밤이었다.토굴 밖에서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스님이 나가봤더니 토굴 밖에는 웬 낯선 젊은 여자가 기절한 채 쓰러져 있었다. ●호랑이가 은혜 갚기 위해 여인 물어와 호랑이가 살려준 은혜를 갚기 위하여 그 보답으로 젊은 여자를 물어다 놓고 사라진 것이었다.스님은 일단 여자를 토굴 안으로 안아들여 놓고 따뜻한 물을 떠먹여서 살려냈다. 한참 뒤 여자가 깨어났다.스님은 사정을 물었다.여자는 경상도 상주가 고향인데,그날 낮에 혼례를 치르고 저녁에 신방에 들려 하는데 그만 호랑이가 나타나 물려왔다는 것이었다.스님은 일단 토굴에서 밤을 보낸 뒤 날이 밝는 대로 데려다 주려고 했다.그런데 그날 밤부터 폭설이 퍼붓기 시작했다.계룡산은 눈더미에 파묻혀 모든 길이 막혀버렸다.하는 수 없이 눈이 녹고 길이 드러나는 내년 봄까지는 함께 지내는 도리 밖에 없었다. 비좁은 토굴 속에서 함께 지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스님은 밤마다 끓어오르는 욕정을 염불과 참선으로 가라앉히면서 아무 일 없이 겨울을 났다. 이듬해 봄이 되자 스님은 자신과의 약속대로 그 여자를 경북 상주로 데려다 주었다.그런데 그 여자가 스님 혼자 사는 토굴로 되돌아 왔다.부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했다.할 수 없이 두 사람은 의남매를 맺고 부지런히 수행하여 훌륭한 승려생활을 마치고 입적했다. 그들의 제자들이 두 사람의 종교적 삶을 기려서 나란히 탑을 세웠으니 이를 오뉘탑 또는 남매탑이라 부른다. 이날 우리의 답사기행은 이같은 전설 속에 감춰진 비밀을 밝혀 보기 위한 것이었다.먼저 이 전설에는 몇 가지 흥미있는 비밀의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이 그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 봐야 한다. 첫째,하필이면 왜 호랑이가 백제 왕족이 수행하는 토굴에 경북 상주가 고향인 여자를 물어다 놓고 사라졌는가 하는 점이다.경북 상주는 신라 영토다.신라가 백제를 정복하기 전 삼국시대였다면 호랑이가 신라 여자를 물어다 백제 땅인 계룡산에다 갖다 둘 수는 있다고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백제 사람이 신라 땅인 경북 상주로 넘나들기 위해서는 국경을 넘어야 하는데 그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백제가 신라에 정복된 뒤인 통일신라시대의 일로 상정해 볼 수 있다.신라에 멸망당한 백제의 왕족은 더 이상 굴욕적인 삶을 살지 않기 위해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통혼정책 선전하기 위해 만든 이야기? 그런데 호랑이가 신라 땅인 경북 상주 출신 여자를 물어다 백제 왕족 출신 승려에게 데려다 주었다는 것은 어딘가 정치적인 냄새가 난다. 정복당한 지 100년이 지나도록 끈질기게 저항한 백제 유민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통일신라 정부는 여러 가지 정책을 썼다.백제의 왕족과 지배계층들에게 신라의 벼슬을 주거나 혼인정책으로 적대감을 누그러뜨리는 데 진력했다. 그같은 통혼정책을 널리 선전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둘째는 5층과 7층 석탑의 구조와 탑을 세우는 관습이 백제 신라가 각각 다른 점을 들 수 있다.원칙적으로 백제는 외탑 가람의 구조였다.익산 미륵사의 쌍탑가람은 매우 드문 일이다.그렇게 볼 때 오뉘탑은 쌍탑구조인데 이를 백제시대의 탑이라고 보는 데는 석연치 않은,구체적인 증거가 매우 많다는 점을 들 수 있다.즉 5층석탑은 백제 것으로 보지만 7층 석탑은 훨씬 뒤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어 왔다. 백제 탑의 특징은 첫째로 작은 석재를 많이 사용하여 마치 목조건물을 보는 듯하다는 것이다.둘째는 신라 탑처럼 높은 이중 받침대가 없이 낮은 받침대 위에 바로 탑신이 선다. 셋째,옥개석이 펀펀하고 넓으며 네 귀가 가볍게 위로 치솟았고,넷째로는 이층째부터는 첫층에 견주어 탑 몸의 폭과 높이가 급격하게 줄어든다는 점이다. 이같은 백제 탑의 특징으로 볼 때 5층석탑은 명백하게 백제 탑임이 입증된다.그러나 7층석탑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5층석탑과 7층석탑은 전혀 다른 양식 가장 차이가 나는 것은 옥개석의 생김새다.5층 석탑의 옥개석은 두 장의 돌을 잇대어 얹은 데다 지극히 펀펀하고 네 귀퉁이도 아주 조금만 쳐들렸는데 비해 7층 석탑의 옥개석은 두꺼운 돌 하나로 만들었다.위로 올라갈수록 옥개석의 넓이를 정교한 비례로 줄여감으로써 솟구쳐 오르는 힘을 느끼게 한다.이같은 힘은 옥개석 네 귀퉁이의 쳐들림을 강조하여 더욱 생동감을 주는 점도 크게 다르다. 무엇보다 작은 석재를 많이 이용한 5층석탑과 굵은 돌 하나 씩을 사용한 7층석탑을 같은 백제시대 탑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거나 고의적으로 짜맞추려 했다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하다 하겠다. 결국 오뉘탑 전설은 끈질기게 저항하는 백제 유민들을 통혼 정책 등으로 회유하기 위해 통일신라 정부가 계획적으로 만들어 유포한 것으로 볼 수 있다.이때 7층 석탑까지 곁들였지만 백제 탑에 담겨 있어야 할 백제인의 마음을 탑에 불어 넣지는 못했던 것이다. 필자의 설명을 귀담아 듣고 있던 김우섭씨는 아이들을 데리고 이같은 답사기행을 자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고,김문환군은 폭넓은 역사 공부를 위해서 유익했다며 힘들게 산길을 올라 온 보람을 느낀다면서 웃었다.우리의 역사와 문화는 많은 비밀을 지녔고,그 비밀을 풀어가다 보면 새로운 삶의 지혜와 인간을 이해하는 새로운 철학을 발견하게 된다.
  • [씨줄날줄] 부산예술대와 고려대/정인학 논설위원

    국내 굴지의 생활예술 탐구의 요람인 부산예술대학이 휘청거리고 있다.올해도 신입생이 모집 정원의 절반에 그치자 급기야 32명의 교수 가운데 절반인 16명에게 권고사직을 통보했다고 한다.한마디로 일거리 없으니 나가라는 얘기다.문화 입국을 지향하는 작금의 구호가 무색해진다.문제는 지금 지방에선 가르칠 학생이 없어서 존립을 위협받는 대학이 수두룩하다는 데 있다.부산예술대학 사태는 지방대학 붕괴의 본격적인 서막에 불과하다. 부산예술대학 사태가 불거지던 날 서울에선 고려대학이 대대적인 내부혁신을 들고 나왔다.전공과목 20%를 원어로 강의하는 등 글로벌화하겠다는 것이다.영어로 강의한다고 글로벌화가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거니와 이른바 글로벌화가 한국 대학의 변신 모델인지도 모르겠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대의 몸부림은 수도권에 있는 이른바 명문대학들도 멍이 들어가고 있음을 털어 놓은 자기 고백일 것이다. 대학들은 지금 위기를 맞고 있다.모집 정원에 구애받지 않는 수도권 대학은 경쟁력을 잃어 가고 지방에선 가르칠 학생을 확보 못해 명맥 잇기도 힘겹다.대학행정은 있었는지 모르지만 대학정책이 없었다.대입시에 함몰되어 인재를 양성해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안목을 갖지 못했다.2001년 국가 수준의 인적자원 개발정책 수립 및 총괄·조정기능을 수행한다며 명칭까지 교육부에서 교육인적자원부로 바꾸며 수선을 떨었지만 결국 ‘할리우드 액션’이었다. 무너지는 대학을 두고만 볼 수는 없다.지방 대학들을 성원할 수 있는 장치를 생각해야 한다.대학의 구조조정을 독려해 대학의 절대 수를 과감하게 줄여야 한다.특히 수도권 대학의 통폐합을 강력 유도해 대학생의 수도권 집중을 억제하면서 대학 내부의 혁신을 촉발시켜야 한다.그대신 학문영역을 다양화해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를 고루 양성하는 질적 성숙으로 승화시켜야 한다.행여 교육부는 지금도 대입시 과열에 함몰되어 옴짝달싹을 못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정인학 논설위원 chung@
  • [사설] 3·1정신으로 친일규명법 처리를

    3·1운동 85주년을 맞았다.세계 만방 피압박민족의 독립자결 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자랑스러운 3·1운동이건만,우리는 오히려 착잡한 마음으로 오늘을 맞고 있다.아직도 친일청산이라는 기본과업조차 제대로 넘어서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민특위의 무산으로 나라의 정기가 흐트러진 지 60년 가까이 지난 이제야 겨우 ‘일제 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특별법’이 마련됐지만,당초 입법취지를 퇴색시킬 만큼 누더기가 된 데다 그나마 한나라당 반대로 본회의 상정이 유보되고 말았다.16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가 열리는 2일 법안이 통과되지 못하면 법안은 자동 폐기되고 만다.친일규명법이 법사위를 통과할 때도 ‘진풍경’이 벌어졌다.조사대상인 ‘일제 협력 장교’를 규정함에 있어 ‘일반 장교’로 할 것인지 ‘중좌(중령) 이상의 장교’로 할지를 놓고 표결,결국 중좌 이상 장교로 처리됐다.‘통상 군대에서 장교가 정치적 행위를 할 수 있는 계급은 중령’이라는 해괴한 이유를 댔지만 속내는 ‘일본 육사를 나와 일왕에게 충성맹세를 하고 관동군 소좌까지 오른 박정희 전 대통령’ 등을 제외하기 위한 것이었다.언론 예술 교육 분야의 친일행위가 제외된 것도 문제다.친일진상을 제대로 밝혀내기 위해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부분이다. 작금 나라의 사정은 어떠한가.정치권은 싸움박질로 일을 삼고,국민 또한 갈등요소가 생기면 대화와 타협을 거쳐 발전의 밑거름으로 승화시키기보다는 툭하면 소모전을 일삼고 있다.지도층이 백성은 돌보지 않고 권력과 이익 추구에 골몰하는 게 국권을 잃던 무렵과 비슷하다는 지적도 무성하다. 16대 국회는 정쟁으로 허송하다가,선거구 증설 등 자기 밥그릇은 챙기면서도 친일규명법은 물론 농어업인지원특별법,성매매방지 및 처벌법 등 민생법안 20여 건은 내동댕이쳐 놓은 채 본회의 하루를 남겨 두고 있다.정치권은 숭고한 삼일정신을 되새기면서 친일규명법 등을 처리,마지막 역할을 다해주기 바란다.˝
  • [기고] 일제만행 사진발굴과 3·1정신/안주섭 국가보훈처장

    3월이 오면,“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우리 민족 고난의 시대를 표현한 한 시인의 시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85년 전 기미년의 봄,종다리도 하늘 잃고 울었을 그 암흑 속에서,전 민족이 하나 되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뜨거운 함성이 오랜 역사를 넘어 들리는 듯하다. 올해는 3·1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85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그러나 3·1절을 앞두고,일본의 한반도 강점 시기에 자행된 만행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사진 1000여 점이 발굴돼,우리의 분노를 자아내게 하고 있다. 이 사진들 가운데,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백두산 천지에 쇠말뚝을 박고 제사를 지내는 행위가 담겨진 장면은 우리 민족에 대한 압제 수준을 넘어 국토 곳곳의 맥을 끊고,우리 나라를 지구상에서 말살하려던 천인공노할 만행을 보여주고 있다. “과거를 통해서 오늘이,오늘을 통해서 미래가 보인다.”는 토인비의 말이 시련의 역사를 겪은 우리에게 소중한 교훈으로 다가오고 있다. 일제 식민지 시대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대한이 자주독립국임과 대한인의 자주민임’을 세계 만방에 선언했던 3·1독립운동은 사상·종교·지역 등 모든 것을 초월해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민족이 하나로 뭉칠 수 있음을 보여준 우리 민족 최대의 항일투쟁이었다. 이는 세계 석학들이 평한 바와 같이,“전세계를 놀라게 한 위대한 사실이었고,한국 민족운동사에서 가장 중대한 의의를 지닌 운동이며 투쟁이었다.”고 하겠다. 이렇듯 3·1독립운동을 통해 발휘된 3·1정신은,우리 나라가 국권회복을 하기까지 전 민족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었고,오늘날에는 자주·자유·세계평화정신으로 승화되어 우리 국민의 영원한 지표가 되고 있다. 오늘 우리가 85년이란 긴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선열들의 당당함과 그 불굴의 독립정신을 되새기자는 것은 결코 지난 역사의 한 사실을 회고하자는 데만 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나라가 위난에 처했을 때,위국헌신을 실천한 선열들의 고귀한 애국충정을 본받고,과거의 역사를 교훈으로 삼아,보다 희망찬 내일을 가꾸어 나가자는 것이다. 따라서 선열들의 민족혼과 나라사랑 정신을 오늘에 계승 발전시켜 후손에게 정신적 유산으로 물려주는 일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몫인 것이다. 지금 국제정세는 안보,경제,역사 등 전 분야에 걸쳐 자국의 이익을 위한 무한경쟁 속에 급변하고 있으며,나라간 평화공존이 화두가 되고 있으면서도 한쪽에서는 전쟁과 내란 등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지구촌의 현상이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 앞에는 세대와 계층과 지역의 벽을 넘어,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를 열어가야 할 과제가 놓여 있다. 이러한 때 우리 민족의 자존을 위해 강한 의지와 저력을 보여줌으로써 빛나는 승리를 가져온 3·1독립운동의 자주 독립정신을 이어받아 국민화합을 이룰 수 있도록 온 국민이 힘과 지혜를 모아 나가야 하겠다.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는,일찍이 3·1운동을 통해 본 우리 나라를 ‘아시아의 황금시대를 연 동방의 빛’이라고 예찬하였다.3월이면,전국 방방곡곡에서 3·1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가 이루어 지고 있다.이것은 대한민국의 광복을 위해 전 민족이 하나가 되었던 그날의 모습을 되새겨 보고 계승·발전시키려는 것이다. 3·1절 85주년이 되는 올해야말로 진정 선열들의 위훈을 기리고,나라사랑의 푸른정신을 되새기는 한 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안주섭 국가보훈처장˝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16)한국의 마음으로 빚은 사발(하)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16)한국의 마음으로 빚은 사발(하)

    문제의 이 사발은 공식적으로 조선에 파견되는 당시 일본 외교사절인 ‘왜국국왕사(倭國國王使)’들에 의하여 일본으로 전해졌다.조선시대 일본 외교사절은 승려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는데,이들은 조선과의 국교가 시작되어 임진왜란으로 잠시 국교가 단절되었던 때까지 조선을 방문하여 우수한 조선의 문물을 배웠거나 직접 가지고 돌아갔다. 대표적인 것은 베틀을 이용한 직물의 생산,불경과 대장경,도자기와 그 제작기술 등이었는데,조선 도자기 기술은 당시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해 있어서 일본이 매우 탐내는 첨단 문명이었다. ●조선 도자기기술은 세계최고 수준 1423년 삼포에 왜관이 설치된 이후 일본 승려들의 조선 방문은 더욱 활발해져서 조선의 민간 풍물과 사찰 문화를 집중적으로 수입해갔다. 조선에서 배워간 문물을 이용하여 일본의 저급한 문화를 일깨웠는데,가마쿠라막부와 무로마치막부 시대의 혼돈과 무절제,사치와 방종의 폐해가 일본의 존립을 위협할 때 그 대안으로서 조선의 문물이 이용되기 시작했다. 송나라로부터 수입한 문화인 서원차(書院茶) 병폐를 치유시키기 위해 응용한 것이 조선 서민의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초가집 살림살이와,깊은 산중에서 은거하는 청빈한 수행자의 토굴 생활에서 느껴지는 극도의 절제와 무소유 철학을 가미하여 일본 특유의 초암차를 만들었다.이 초암차는 뒷날 ‘다도(茶道)’라는 일본 특유의 차문화가 탄생하게 되는 원천이 되었다. 서원차에서 다도까지의 진보 과정은 일본이 혼돈과 야만에서 정화와 문명으로 변화하는 혁명적 승화였다.이 혁명을 완성한 것은 인간이지만 그 인간의 내면세계를 혁명시키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차를 담아 마시는 찻그릇이었다.그 찻그릇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이도차완이 통도사 봉발을 조형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무릇 모든 그릇은 조형의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려의 청자와 조선의 백자는 모두 중국의 청자와 백자를 조형의 모체로 삼아서 나름의 독창성을 이루어 냈다. 중국의 그릇 또한 인도 불교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아서 발전했다.그중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이른바 주발(周鉢: 위가 약간 벌어지고 뚜껑이 있는 놋쇠로 만든 밥그릇,식기),바리(놋쇠로 만든 여자 밥그릇.오목주발과 같지만 입이 좀 더 좁고 중배가 나왔으며 뚜껑에 꼭지가 있음),완(梡,碗) 종류들이다. 모두 산스크리트 patra를 음역한 발(鉢: 승려의 식기)의 형태를 모체로 삼아 다양한 재료를 이용한 여러 종류의 그릇을 만들어냈다. ●한국적 특성 가장 잘 나타낸 분청사기 흙을 재료로 한 사발(砂鉢),구리를 이용한 동발(銅鉢),쇠를 이용한 철발(鐵鉢),진흙을 이용한 와발(瓦鉢),은을 이용한 은발(銀鉢)등이 크기와 형태에서 매우 다양하게 발전했다.그렇게 발전한 대표적인 성과물이 송나라대의 찻사발들인데,천목(天目)이라 부르는 세계적 명성을 얻은 그릇이다.천목찻사발의 형태는 고려 청자 찻사발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고려의 청자와 조선의 백자는 필연적으로 중국 도자 문화의 영향을 받았지만 조선시대의 독특한 도자문화로 일컬어지는 분청(粉靑) 사기는 한국적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이다.청자에서 백자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체험하고 터득해 낸 조선 사기장들의 지혜와 미감(美感)이 응집되어 창출된 한국형 사발이다.이같은 우리나라의 도자사(陶磁史)에서 매우 이례적인 것이 저 일본인들이 이도(井戶)라 부르는 그릇이다. 이 그릇의 존재가 한국인에게 알려진 것은 일제시대를 통해서였다.따라서 그 이전 우리나라 그릇의 역사에서 이것의 존재는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았었다. 우리나라에서 태어나기만 했을 뿐 400년 넘게 일본에서 자란 그릇이어서 이 그릇의 참된 주인은 일본 차인들이라고 말해야 옳을지도 모른다.그렇다보니 이 그릇의 본래 용도에 관한 연구와 논의도 일본에서만 이루어져 왔다.그러던 중 이도차완에 관한 한국 사기장들의 관심이 표명된 1960년대부터 조금씩 한국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주로 차를 마시는 사람들에 국한되어서였다. 그 뒤로 중국,일본의 차문화가 한국인들에게 널리 보급되고 한국에서도 차 마시는 인구가 1000만 명을 헤아리게 되면서 다른 찻사발들과 함께 이도차완의 감상과 미학적 탐구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어 왔다. 어느새 한국의 현재 찻사발 종류 중에서 이도차완 형태를 본뜬 것들이 찻그릇 문화를 주도해 가는 듯한 인상을 줄 만큼 폭발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자연히 이도차완으로 이름이 붙여져 찻사발로 이용되고 있는 이 그릇의 본래 용도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논의도 생겨났다.무릇 모든 그릇이 그러하듯 그 쓰임새를 알아야만 그릇에 대한 정확한 가치매김을 할 수 있다.이도차완은 본래 찻사발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기된 당연한 의문이다.일본에서는 지금까지 두 가지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맨 먼저 이 그릇의 용도를 얘기한 것은 야나기 무네요시이다.동양미술사학자인 그는 일제시대를 통하여 조선서민들의 생활용품을 집중적으로 수집하여 일본으로 가져간 대표적인 사람이며, ‘민예(民藝)’라는 말을 만들어냈을 만큼 조선문화에 대한 전문가였다. ●日선 “雜器” “祭器” 두가지 견해 그는 이도차완을 16세기 조선서민들의 밥그릇,생활 잡기였다는 잡기설(雜器說)을 내놓았다.이 그릇의 투박한 생김새,자유분방한 색깔과 재료의 특성 등을 그 증거로 제시하면서였다. 두 번째 의견은 동경국립박물관 학예실장을 지내기도 한 하야시 세이죠의 제기설(祭器說)이다.이도차완 중에서 규격이 큰 그릇들의 특징인 높은 굽을 증거로 내놓았다. 이 그릇의 가장 큰 특징이 높은 굽임은 확실하고,이 높은 굽으로하여 청자나 백자 혹은 분청사기와도 현저하게 다른 그릇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도차완의 가장 큰 특징 또한 굽의 형태와 굽 언저리의 신비스러운 문양이어서 높은 굽은 누구에게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잡기설은 일제시대의 산물이며,하야시 세이죠의 제기설이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94년 필자와의 인터뷰를 통해서였다. 그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제기설에 동조하는 견해와 잡기설을 지지하는 견해로 나눠져 있다.두 가지 견해를 모두 부정하는 견해도 있다. 일본에서 국보가 된 한국의 그릇은 이도차완뿐이며,청자,백자,분청사기는 전혀 다른 평가의 대상이다.이도차완 중에는 신비와 전설의 대상이 되었을 만큼 놀라운 정치적 흥정물로,천문학적 가격으로,죽기 전에 꼭 한 번 구경하기를 소망하는 그릇이 여러 점이다.이같은 역사가 한국인들에게는 더 관심거리로 작용하고 있는 듯 싶다. 어쨌든 야나기 무네요시의 잡기설은 이 그릇이 지닌 미학적 요소들을 놀라운 미감과 관찰력으로 읽어내어 이 그릇에 관한 평가를 한층 심화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결함이 있다. ●조선시대 사기그릇 祭器는 백자가 유일 16세기 조선의 도자사를 면밀하게 살펴보지 않고 쓴 그릇 감상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16세기 조선의 도자기 생산 제도는 철저한 관요(官窯)체제여서 모든 생활그릇의 공급을 국가가 전담했다.민간인이 마음대로 그릇을 생산 판매할 수 없었다.일정 직급의 관료와 양반 사대부,소수의 중인 계층들에게만 관요에서 생산된 그릇이 주어졌다. 따라서 농민 등 서민층은 질그릇 외의 그릇을 사용할 수 없었다. 제기설이 이 그릇의 높은 굽에 착안하고 있는 점은 조선의 민속과 제도에 얼마큼 지식을 가졌다고 인정할 수 있지만,조선시대의 제기는 백자가 원칙이었다.놋그릇,목기를 제외한 사기그릇 제기는 백자가 유일하다.이도차완 종류는 백자가 아니다. 그리고 이도차완 형태의 그릇을 제상에 진설할 수 있는 상차림이란 없다. 두 가지 견해 모두 이 그릇의 용도를 전혀 엉뚱하게 추정하는 잘못이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일본인으로서의 견해일 따름이므로 논의의 대상이 못된다.문제는 한국인들이 앞의 두 견해 중 어느 하나를 지지하면서 여러 가지 설명을 덧붙이고 있지만 대부분이 일본 견해를 비판하지 못하고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매우 조심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도차완의 원래 용도는 통도사 봉발대의 봉발을 근원으로 하여 생활화하려 했던 승려들의 발우였던 것으로 보인다.마하승기율,사분율 등 주요 경전에서 규정하고 있는 흙발우의 조건과 통도사의 봉발,그리고 이도차완의 모든 것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도차완 미학의 신비로움은 미륵신앙에 담겨 있는 종교적 염원과 긴 역사가 승화된 것이라고 볼 때 조선 사기장들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도예가들이었음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16)한국의 마음으로 빚은 사발(하)

    문제의 이 사발은 공식적으로 조선에 파견되는 당시 일본 외교사절인 ‘왜국국왕사(倭國國王使)’들에 의하여 일본으로 전해졌다.조선시대 일본 외교사절은 승려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는데,이들은 조선과의 국교가 시작되어 임진왜란으로 잠시 국교가 단절되었던 때까지 조선을 방문하여 우수한 조선의 문물을 배웠거나 직접 가지고 돌아갔다. 대표적인 것은 베틀을 이용한 직물의 생산,불경과 대장경,도자기와 그 제작기술 등이었는데,조선 도자기 기술은 당시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해 있어서 일본이 매우 탐내는 첨단 문명이었다. ●조선 도자기기술은 세계최고 수준 1423년 삼포에 왜관이 설치된 이후 일본 승려들의 조선 방문은 더욱 활발해져서 조선의 민간 풍물과 사찰 문화를 집중적으로 수입해갔다. 조선에서 배워간 문물을 이용하여 일본의 저급한 문화를 일깨웠는데,가마쿠라막부와 무로마치막부 시대의 혼돈과 무절제,사치와 방종의 폐해가 일본의 존립을 위협할 때 그 대안으로서 조선의 문물이 이용되기 시작했다. 송나라로부터 수입한 문화인 서원차(書院茶) 병폐를 치유시키기 위해 응용한 것이 조선 서민의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초가집 살림살이와,깊은 산중에서 은거하는 청빈한 수행자의 토굴 생활에서 느껴지는 극도의 절제와 무소유 철학을 가미하여 일본 특유의 초암차를 만들었다.이 초암차는 뒷날 ‘다도(茶道)’라는 일본 특유의 차문화가 탄생하게 되는 원천이 되었다. 서원차에서 다도까지의 진보 과정은 일본이 혼돈과 야만에서 정화와 문명으로 변화하는 혁명적 승화였다.이 혁명을 완성한 것은 인간이지만 그 인간의 내면세계를 혁명시키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차를 담아 마시는 찻그릇이었다.그 찻그릇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이도차완이 통도사 봉발을 조형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무릇 모든 그릇은 조형의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려의 청자와 조선의 백자는 모두 중국의 청자와 백자를 조형의 모체로 삼아서 나름의 독창성을 이루어 냈다. 중국의 그릇 또한 인도 불교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아서 발전했다.그중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이른바 주발(周鉢: 위가 약간 벌어지고 뚜껑이 있는 놋쇠로 만든 밥그릇,식기),바리(놋쇠로 만든 여자 밥그릇.오목주발과 같지만 입이 좀 더 좁고 중배가 나왔으며 뚜껑에 꼭지가 있음),완(梡,碗) 종류들이다. 모두 산스크리트 patra를 음역한 발(鉢: 승려의 식기)의 형태를 모체로 삼아 다양한 재료를 이용한 여러 종류의 그릇을 만들어냈다. ●한국적 특성 가장 잘 나타낸 분청사기 흙을 재료로 한 사발(砂鉢),구리를 이용한 동발(銅鉢),쇠를 이용한 철발(鐵鉢),진흙을 이용한 와발(瓦鉢),은을 이용한 은발(銀鉢)등이 크기와 형태에서 매우 다양하게 발전했다.그렇게 발전한 대표적인 성과물이 송나라대의 찻사발들인데,천목(天目)이라 부르는 세계적 명성을 얻은 그릇이다.천목찻사발의 형태는 고려 청자 찻사발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고려의 청자와 조선의 백자는 필연적으로 중국 도자 문화의 영향을 받았지만 조선시대의 독특한 도자문화로 일컬어지는 분청(粉靑) 사기는 한국적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이다.청자에서 백자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체험하고 터득해 낸 조선 사기장들의 지혜와 미감(美感)이 응집되어 창출된 한국형 사발이다.이같은 우리나라의 도자사(陶磁史)에서 매우 이례적인 것이 저 일본인들이 이도(井戶)라 부르는 그릇이다. 이 그릇의 존재가 한국인에게 알려진 것은 일제시대를 통해서였다.따라서 그 이전 우리나라 그릇의 역사에서 이것의 존재는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았었다. 우리나라에서 태어나기만 했을 뿐 400년 넘게 일본에서 자란 그릇이어서 이 그릇의 참된 주인은 일본 차인들이라고 말해야 옳을지도 모른다.그렇다보니 이 그릇의 본래 용도에 관한 연구와 논의도 일본에서만 이루어져 왔다.그러던 중 이도차완에 관한 한국 사기장들의 관심이 표명된 1960년대부터 조금씩 한국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주로 차를 마시는 사람들에 국한되어서였다. 그 뒤로 중국,일본의 차문화가 한국인들에게 널리 보급되고 한국에서도 차 마시는 인구가 1000만 명을 헤아리게 되면서 다른 찻사발들과 함께 이도차완의 감상과 미학적 탐구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어 왔다. 어느새 한국의 현재 찻사발 종류 중에서 이도차완 형태를 본뜬 것들이 찻그릇 문화를 주도해 가는 듯한 인상을 줄 만큼 폭발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자연히 이도차완으로 이름이 붙여져 찻사발로 이용되고 있는 이 그릇의 본래 용도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논의도 생겨났다.무릇 모든 그릇이 그러하듯 그 쓰임새를 알아야만 그릇에 대한 정확한 가치매김을 할 수 있다.이도차완은 본래 찻사발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기된 당연한 의문이다.일본에서는 지금까지 두 가지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맨 먼저 이 그릇의 용도를 얘기한 것은 야나기 무네요시이다.동양미술사학자인 그는 일제시대를 통하여 조선서민들의 생활용품을 집중적으로 수집하여 일본으로 가져간 대표적인 사람이며, ‘민예(民藝)’라는 말을 만들어냈을 만큼 조선문화에 대한 전문가였다. ●日선 “雜器” “祭器” 두가지 견해 그는 이도차완을 16세기 조선서민들의 밥그릇,생활 잡기였다는 잡기설(雜器說)을 내놓았다.이 그릇의 투박한 생김새,자유분방한 색깔과 재료의 특성 등을 그 증거로 제시하면서였다. 두 번째 의견은 동경국립박물관 학예실장을 지내기도 한 하야시 세이죠의 제기설(祭器說)이다.이도차완 중에서 규격이 큰 그릇들의 특징인 높은 굽을 증거로 내놓았다. 이 그릇의 가장 큰 특징이 높은 굽임은 확실하고,이 높은 굽으로하여 청자나 백자 혹은 분청사기와도 현저하게 다른 그릇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도차완의 가장 큰 특징 또한 굽의 형태와 굽 언저리의 신비스러운 문양이어서 높은 굽은 누구에게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잡기설은 일제시대의 산물이며,하야시 세이죠의 제기설이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94년 필자와의 인터뷰를 통해서였다. 그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제기설에 동조하는 견해와 잡기설을 지지하는 견해로 나눠져 있다.두 가지 견해를 모두 부정하는 견해도 있다. 일본에서 국보가 된 한국의 그릇은 이도차완뿐이며,청자,백자,분청사기는 전혀 다른 평가의 대상이다.이도차완 중에는 신비와 전설의 대상이 되었을 만큼 놀라운 정치적 흥정물로,천문학적 가격으로,죽기 전에 꼭 한 번 구경하기를 소망하는 그릇이 여러 점이다.이같은 역사가 한국인들에게는 더 관심거리로 작용하고 있는 듯 싶다. 어쨌든 야나기 무네요시의 잡기설은 이 그릇이 지닌 미학적 요소들을 놀라운 미감과 관찰력으로 읽어내어 이 그릇에 관한 평가를 한층 심화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결함이 있다. ●조선시대 사기그릇 祭器는 백자가 유일 16세기 조선의 도자사를 면밀하게 살펴보지 않고 쓴 그릇 감상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16세기 조선의 도자기 생산 제도는 철저한 관요(官窯)체제여서 모든 생활그릇의 공급을 국가가 전담했다.민간인이 마음대로 그릇을 생산 판매할 수 없었다.일정 직급의 관료와 양반 사대부,소수의 중인 계층들에게만 관요에서 생산된 그릇이 주어졌다. 따라서 농민 등 서민층은 질그릇 외의 그릇을 사용할 수 없었다. 제기설이 이 그릇의 높은 굽에 착안하고 있는 점은 조선의 민속과 제도에 얼마큼 지식을 가졌다고 인정할 수 있지만,조선시대의 제기는 백자가 원칙이었다.놋그릇,목기를 제외한 사기그릇 제기는 백자가 유일하다.이도차완 종류는 백자가 아니다. 그리고 이도차완 형태의 그릇을 제상에 진설할 수 있는 상차림이란 없다. 두 가지 견해 모두 이 그릇의 용도를 전혀 엉뚱하게 추정하는 잘못이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일본인으로서의 견해일 따름이므로 논의의 대상이 못된다.문제는 한국인들이 앞의 두 견해 중 어느 하나를 지지하면서 여러 가지 설명을 덧붙이고 있지만 대부분이 일본 견해를 비판하지 못하고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매우 조심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도차완의 원래 용도는 통도사 봉발대의 봉발을 근원으로 하여 생활화하려 했던 승려들의 발우였던 것으로 보인다.마하승기율,사분율 등 주요 경전에서 규정하고 있는 흙발우의 조건과 통도사의 봉발,그리고 이도차완의 모든 것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도차완 미학의 신비로움은 미륵신앙에 담겨 있는 종교적 염원과 긴 역사가 승화된 것이라고 볼 때 조선 사기장들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도예가들이었음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15) 한국의 마음으로 빚은 사발(상)

    양산 통도사 안 용화전(龍華殿) 앞 마당에는 돌로 만든 큼직한 그릇이 있다.봉발대(奉鉢臺)라 부르는 매우 귀한 그릇이다. 매표소를 지나 절 안으로 들어서면 아름드리 솔숲 사이로 두 갈래 길이 나온다.오른쪽 길은 걸어서 절에 오르도록 한 옛길이고,왼쪽 길은 자동차가 다니도록 새로 낸 길이다. 옛길을 따라 걸어서 일주문을 향한다.길 왼편 계곡으로 돌돌 맑은 물 흐르는 소리가 한낮의 고요를 씻고 있다.물 위엔 소나무 푸른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흰구름 몇 조각이 소나무 그림자 위로 지난다.소나무는 미동도 않는다.마른 낙엽 하나가 떠내려 오다가 파문을 일으키자 잠시 소나무 그림자도 흰구름도 함께 흔들린다.잠시 뒤 소나무는 고요한 그림자로 다시 돌아와 나그네를 달랜다. 용화전까지 왔다.용화전 안에 모셔져 있는 불상은 흰 빛깔이다.황금색의 다른 불상들과는 퍽 대조적이다.희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석가모니가 미륵에게 남긴 발우 형상화 그 불상은 미륵불이다.그리고 용화전이라는 그 전각의 용화(龍華)라는 말은 미륵신앙에서 예언하고 있는 신성한 장소를 뜻한다.미륵은 인간의 미래와 인연된 구원불이다.용화전 앞 마당에 있는 봉발대도 이 미륵불과 직접 관련된 종교적 상징물이다.미륵신앙,즉 석가모니불에 의하여 구원되지 못한 사람은 석가모니불 다음의 부처로 인간세계에 강림할 미륵불에 의하여 구원될 것이라는 오랜 역사를 먹고 자라온 신앙이다. 용화는 용화수(龍華樹)를 말한다.미래에 미륵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인간들에게 세 차례에 걸쳐 구원의 법문을 하게 될 자리를 뜻한다. 옛 한국인들은 현재의 불행과 고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미래의 예언자를 상정해 놓고 기다리는 신앙을 전통으로 간직해 왔다.그 구원자는 지금 도솔천에 머무르고 있는데,그 분을 미륵이라 여겼다.옛 사람들은 미륵이 장차 인간세상에 강림하면 어떤 방법으로 인간을 구원해야 할 것인지를 명상하는 모습을 만들어 놓고 미륵신앙을 키워왔는데,미륵이 미래 일을 생각하는 모습을 미륵반가사유상이라 불렀다. 이렇듯 미륵신앙은 한국인이 대를 물리면서 기다리고 있는 구세주다.삼국시대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니 서양인들,특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들의 구원신앙과 매우 유사한 신앙체계라 말할 수 있다. 옛 한국인들은 미륵을 기다리는 세 가지 의식을 신앙으로 표현해 왔다. 첫째는 미륵삼부경,증일아함경 같은 경전을 중심으로 기도하면서 신앙을 키우는 것이다. 둘째는 향목(香木)을 땅에다 묻어 놓고 미륵이 오면 선물하리라 여기며 기다렸다. 셋째는 경전에 기록된 바에 따라 석가모니가 사용하던 발우(鉢盂)가 미륵에게 전해짐으로써 인간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석가모니가 미륵에게 전해주기 위하여 남긴 발우를 형상화하여 모시고 있는 것이 통도사 봉발대다. 이같은 미륵신앙은 삼국통일의 혼란기인 후고구려,후백제 때 크게 일어났고,신라와 고려의 교체기와 고려 조선의 교체기에 민중들의 불안과 고통을 달래기 위해 크게 번창했다는 특징이 있으며,조선 말엽의 개항기와 일제시대에도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구원사상으로 자리잡아왔다. 현대사회에 와서도 핵의 위기와 불안,생태계의 교란과 생명사상의 혼돈,에너지와 식량부족의 두려움,치유가 힘든 각종 질병으로부터의 고통과 공포,기후변화의 심각성,전통을 생각하는 이들이 더러 있는 것 같다. 통도사 봉발대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형태의 조형물이다.유일함만큼이나 그 생김새와 그곳에 안치된 역사적 배경 또한 예사롭지 않다. 보물 제471호인 봉발대는 봉발(奉鉢),바리,바릿대를 모시고 있다는 뜻이므로,봉발대는 발우를 보셔둔 자리라고 할 수 있겠다.어떤 특별한 목적에 따라서 돌로 발우를 만들어서 모셔두고 경배하면서 미륵이 강림하시기를 기다려 온 종교적 상징물인 것이다.특별한 목적이란 미륵불에 의하여 구원됨으로써 영원히 살 수 있는 하늘나라에서 태어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다. ●봉발대는 1000년간 민중의 소망 응축한 걸작품 발우(鉢盂)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래된 승려들의 식기(食器)이면서 신성한 법물(法物)의 하나인데,산스크리트 파트라(patra)를 음역하여 발(鉢)이라는 새로운 글자를 만들었다.그런 다음 중국문화에서 그릇을 말하는 중국 고유의 글자인 그릇 우(盂)자를 덧붙여서 ‘발우’라는 말을 만들어 썼는데,이는 중국 문화가 외래 문화를 받아들여 중국화시키는 무서운 중화(中華)사상의 한 증거이기도 하다. 아무튼 통도사의 봉발대만큼 한국인의 역사와 정서,특히 민중들의 집단적인 소망과 시대의 표정을 한꺼번에 형상화시켜낸 조형물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고려 선종(宣宗,재위 1083∼1094)의 문화적 업적으로 평가되는 이 봉발대는 1000여년이라는 역사와 함께 이 땅의 주인이자 머슴으로 살아온 민중들의 간절한 소망인 농사의 풍년,자손의 번성과 건강,그리고 죄를 용서받고 하늘나라에 가서 영원한 삶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 응축되어 승화된 우리나라 민족 미술의 최고 걸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봉발대가 사찰 경내에 있다하여 불교라는 특정 종교의 상징물로만 국한하는 견해는 이 조형물이 지닌 역사성과 예술성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통도사는 이른바 미륵도량이 아닌데도 한국 유일의 이 석조물이 통도사에 모셔진 것은 통도사가 만법을 통달하여 일체 중생을 구원한다는 뜻을 지녔을 만큼 높은 격조를 지닌 사찰이어서 당대에 크게 풍미했던 미륵신앙을 국가 차원에서 끌어안은 것으로 보인다. ●남해안 사발 1450년 전후 日로 전래 봉발대의 봉발,즉 돌로 만들어진 이 발우는 뚜껑을 포함하여 높이가 1m,지름은 90cm가량인데,발우의 굽에는 별다른 장식도 없지만 빼어난 균형감을 보이고 있으며 매우 아름다운 곡선을 지녔다. 뚜껑을 제외하면 실제 발우 높이는 90cm인데,굽의 높이가 발우 전체 높이의 3분의1에 가깝다.그만큼 굽의 형태가 강조되고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돌 발우의 형태가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미륵신앙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니라 일본 다도(茶道) 역사에서 ‘미(美)의 종교’로까지 추앙받는 조선의 사발(砂鉢)인 ‘이도차완(井戶茶碗)’과의 관계 때문이다. 이도차완의 조형적 기원이 이 돌 발우와 어떤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새로운 문제가 제기되면서부터다. 문제의 이도차완이라는 사발은 14~15세기 조선시대에 경남 남해안에 인접한 어느 가마에서 그 지역 흙으로 만들어졌는데,1450년을 전후한 시기로부터 일본으로 흘러나간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정확한 이름이 없었으나 일본에 가서 ‘이도(井戶)’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정확하게 1587년부터 ‘이도’라는 이름으로 사용된 이 사발은 일본 중세사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일본의 최고 권력자들과 지배계층으로부터 열광적인 사랑을 받아 전설적인 미술품이 되었으며,그 중 하나인‘기자에몬이도’는 일본의 국보로까지 지정되어 특별한 보호를 받고 있다. 일본 역사에서 차문화를 종교적 차원으로까지 승화시킨 다도는 곧 일본의 정신사이기도 하다.특히 13~15세기의 가마쿠라막부,무로마치막부 시대의 정치사회적 위기를 극복하는 데 영향을 끼친 조선시대 서민들의 가옥 구조와 청빈한 승려들의 생활문화에 뒤이어,15~16세기의 일본 통일에 기여한 초암차(草庵茶)의 상징적 도구인 이도차완은 그 후 일본 다도역사에서 불멸의 아름다움을 지닌 찻사발로 칭송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차문화 전통이 결정한 10점의 국보 찻사발은 한국의 이도차완 한 점,중국의 천목차완 6점,일본의 라쿠차완 3점인데,아름다움으로는 첫째 이도차완,둘째 천목차완,셋째 라쿠차완 순으로 꼽고 있을 만큼 이도차완의 명성은 놀랍다. 약 200여점이 남아 있는 이 신비의 사발 이도차완과 양산 통도사 봉발은 과연 어떤 연관이 있을까?˝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15) 한국의 마음으로 빚은 사발(상)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15) 한국의 마음으로 빚은 사발(상)

    양산 통도사 안 용화전(龍華殿) 앞 마당에는 돌로 만든 큼직한 그릇이 있다.봉발대(奉鉢臺)라 부르는 매우 귀한 그릇이다. 매표소를 지나 절 안으로 들어서면 아름드리 솔숲 사이로 두 갈래 길이 나온다.오른쪽 길은 걸어서 절에 오르도록 한 옛길이고,왼쪽 길은 자동차가 다니도록 새로 낸 길이다. 옛길을 따라 걸어서 일주문을 향한다.길 왼편 계곡으로 돌돌 맑은 물 흐르는 소리가 한낮의 고요를 씻고 있다.물 위엔 소나무 푸른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흰구름 몇 조각이 소나무 그림자 위로 지난다.소나무는 미동도 않는다.마른 낙엽 하나가 떠내려 오다가 파문을 일으키자 잠시 소나무 그림자도 흰구름도 함께 흔들린다.잠시 뒤 소나무는 고요한 그림자로 다시 돌아와 나그네를 달랜다. 용화전까지 왔다.용화전 안에 모셔져 있는 불상은 흰 빛깔이다.황금색의 다른 불상들과는 퍽 대조적이다.희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석가모니가 미륵에게 남긴 발우 형상화 그 불상은 미륵불이다.그리고 용화전이라는 그 전각의 용화(龍華)라는 말은 미륵신앙에서 예언하고 있는 신성한 장소를 뜻한다.미륵은 인간의 미래와 인연된 구원불이다.용화전 앞 마당에 있는 봉발대도 이 미륵불과 직접 관련된 종교적 상징물이다.미륵신앙,즉 석가모니불에 의하여 구원되지 못한 사람은 석가모니불 다음의 부처로 인간세계에 강림할 미륵불에 의하여 구원될 것이라는 오랜 역사를 먹고 자라온 신앙이다. 용화는 용화수(龍華樹)를 말한다.미래에 미륵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인간들에게 세 차례에 걸쳐 구원의 법문을 하게 될 자리를 뜻한다. 옛 한국인들은 현재의 불행과 고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미래의 예언자를 상정해 놓고 기다리는 신앙을 전통으로 간직해 왔다.그 구원자는 지금 도솔천에 머무르고 있는데,그 분을 미륵이라 여겼다.옛 사람들은 미륵이 장차 인간세상에 강림하면 어떤 방법으로 인간을 구원해야 할 것인지를 명상하는 모습을 만들어 놓고 미륵신앙을 키워왔는데,미륵이 미래 일을 생각하는 모습을 미륵반가사유상이라 불렀다. 이렇듯 미륵신앙은 한국인이 대를 물리면서 기다리고 있는 구세주다.삼국시대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니 서양인들,특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들의 구원신앙과 매우 유사한 신앙체계라 말할 수 있다. 옛 한국인들은 미륵을 기다리는 세 가지 의식을 신앙으로 표현해 왔다. 첫째는 미륵삼부경,증일아함경 같은 경전을 중심으로 기도하면서 신앙을 키우는 것이다. 둘째는 향목(香木)을 땅에다 묻어 놓고 미륵이 오면 선물하리라 여기며 기다렸다. 셋째는 경전에 기록된 바에 따라 석가모니가 사용하던 발우(鉢盂)가 미륵에게 전해짐으로써 인간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석가모니가 미륵에게 전해주기 위하여 남긴 발우를 형상화하여 모시고 있는 것이 통도사 봉발대다. 이같은 미륵신앙은 삼국통일의 혼란기인 후고구려,후백제 때 크게 일어났고,신라와 고려의 교체기와 고려 조선의 교체기에 민중들의 불안과 고통을 달래기 위해 크게 번창했다는 특징이 있으며,조선 말엽의 개항기와 일제시대에도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구원사상으로 자리잡아왔다. 현대사회에 와서도 핵의 위기와 불안,생태계의 교란과 생명사상의 혼돈,에너지와 식량부족의 두려움,치유가 힘든 각종 질병으로부터의 고통과 공포,기후변화의 심각성,전통을 생각하는 이들이 더러 있는 것 같다. 통도사 봉발대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형태의 조형물이다.유일함만큼이나 그 생김새와 그곳에 안치된 역사적 배경 또한 예사롭지 않다. 보물 제471호인 봉발대는 봉발(奉鉢),바리,바릿대를 모시고 있다는 뜻이므로,봉발대는 발우를 보셔둔 자리라고 할 수 있겠다.어떤 특별한 목적에 따라서 돌로 발우를 만들어서 모셔두고 경배하면서 미륵이 강림하시기를 기다려 온 종교적 상징물인 것이다.특별한 목적이란 미륵불에 의하여 구원됨으로써 영원히 살 수 있는 하늘나라에서 태어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다. ●봉발대는 1000년간 민중의 소망 응축한 걸작품 발우(鉢盂)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래된 승려들의 식기(食器)이면서 신성한 법물(法物)의 하나인데,산스크리트 파트라(patra)를 음역하여 발(鉢)이라는 새로운 글자를 만들었다.그런 다음 중국문화에서 그릇을 말하는 중국 고유의 글자인 그릇 우(盂)자를 덧붙여서 ‘발우’라는 말을 만들어 썼는데,이는 중국 문화가 외래 문화를 받아들여 중국화시키는 무서운 중화(中華)사상의 한 증거이기도 하다. 아무튼 통도사의 봉발대만큼 한국인의 역사와 정서,특히 민중들의 집단적인 소망과 시대의 표정을 한꺼번에 형상화시켜낸 조형물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고려 선종(宣宗,재위 1083∼1094)의 문화적 업적으로 평가되는 이 봉발대는 1000여년이라는 역사와 함께 이 땅의 주인이자 머슴으로 살아온 민중들의 간절한 소망인 농사의 풍년,자손의 번성과 건강,그리고 죄를 용서받고 하늘나라에 가서 영원한 삶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 응축되어 승화된 우리나라 민족 미술의 최고 걸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봉발대가 사찰 경내에 있다하여 불교라는 특정 종교의 상징물로만 국한하는 견해는 이 조형물이 지닌 역사성과 예술성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통도사는 이른바 미륵도량이 아닌데도 한국 유일의 이 석조물이 통도사에 모셔진 것은 통도사가 만법을 통달하여 일체 중생을 구원한다는 뜻을 지녔을 만큼 높은 격조를 지닌 사찰이어서 당대에 크게 풍미했던 미륵신앙을 국가 차원에서 끌어안은 것으로 보인다. ●남해안 사발 1450년 전후 日로 전래 봉발대의 봉발,즉 돌로 만들어진 이 발우는 뚜껑을 포함하여 높이가 1m,지름은 90cm가량인데,발우의 굽에는 별다른 장식도 없지만 빼어난 균형감을 보이고 있으며 매우 아름다운 곡선을 지녔다. 뚜껑을 제외하면 실제 발우 높이는 90cm인데,굽의 높이가 발우 전체 높이의 3분의1에 가깝다.그만큼 굽의 형태가 강조되고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돌 발우의 형태가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미륵신앙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니라 일본 다도(茶道) 역사에서 ‘미(美)의 종교’로까지 추앙받는 조선의 사발(砂鉢)인 ‘이도차완(井戶茶碗)’과의 관계 때문이다. 이도차완의 조형적 기원이 이 돌 발우와 어떤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새로운 문제가 제기되면서부터다. 문제의 이도차완이라는 사발은 14~15세기 조선시대에 경남 남해안에 인접한 어느 가마에서 그 지역 흙으로 만들어졌는데,1450년을 전후한 시기로부터 일본으로 흘러나간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정확한 이름이 없었으나 일본에 가서 ‘이도(井戶)’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정확하게 1587년부터 ‘이도’라는 이름으로 사용된 이 사발은 일본 중세사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일본의 최고 권력자들과 지배계층으로부터 열광적인 사랑을 받아 전설적인 미술품이 되었으며,그 중 하나인‘기자에몬이도’는 일본의 국보로까지 지정되어 특별한 보호를 받고 있다. 일본 역사에서 차문화를 종교적 차원으로까지 승화시킨 다도는 곧 일본의 정신사이기도 하다.특히 13~15세기의 가마쿠라막부,무로마치막부 시대의 정치사회적 위기를 극복하는 데 영향을 끼친 조선시대 서민들의 가옥 구조와 청빈한 승려들의 생활문화에 뒤이어,15~16세기의 일본 통일에 기여한 초암차(草庵茶)의 상징적 도구인 이도차완은 그 후 일본 다도역사에서 불멸의 아름다움을 지닌 찻사발로 칭송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차문화 전통이 결정한 10점의 국보 찻사발은 한국의 이도차완 한 점,중국의 천목차완 6점,일본의 라쿠차완 3점인데,아름다움으로는 첫째 이도차완,둘째 천목차완,셋째 라쿠차완 순으로 꼽고 있을 만큼 이도차완의 명성은 놀랍다. 약 200여점이 남아 있는 이 신비의 사발 이도차완과 양산 통도사 봉발은 과연 어떤 연관이 있을까?
  • [15일 TV 하이라이트]

    ●도전,골든벨(오후 7시10분) ‘지성(至誠)’이라는 교훈 아래 창의적인 학생을 키우는 인천 연수여고를 찾아간다.이 학교 최고의 영화 마니아 조은실 학생이 감명 깊게 본 영화를 김홍성 MC와 재연한다.전교생을 대표해 최후의 도전자가 된 구하나 학생이 올해 첫 골든벨을 울릴 수 있을지 지켜본다. ●비타민(오후 10시) ‘몸짱만들기 선발대회’에 통과한 100명의 주부들로부터 살 때문에 생긴 다양한 에피소드를 들어본다.2000대1의 경쟁률을 뚫고 최종 선발되는 두 사람의 주인공은 누구인지 지켜본다.‘스타스타 건강학’에서는 건강한 삶의 연장을 위한 맞춤 걷기법을 김동완 전진과 함께 알아본다. ●타임머신(오후 10시35분) ‘박수홍의 진짜?진짜!’는 1970년대 평소 여배우를 꿈꾸는 버스 여차장이 ‘결별’이라는 영화를 촬영하던 박노식·허장강씨를 목격하고는 필사의 하차를 감행했던 사건속으로 들어가 본다.‘별들의 고향’을 연출한 이장호 감독에게 그 당시의 여배우 등용기도 들어본다. ●도전!1000곡(오전 8시40분) 대한민국 CM송의 대부 김도향이 무대에 오른다.‘그게 정말이니’로 사랑받는 장나라의 귀여운 무대 매너와 트로트계의 혜성으로 불리는 박상철의 레퍼토리를 들어본다.개인기로 뭉친 ‘가짜 주현’ 문세윤과 ‘가짜 윤문식’ 김태환은 성대모사와 화려한 댄스를 선보인다. ●황제의 딸Ⅲ(오후 9시25분) 이강은 은주분에 중독되어 옥중에서 괴로워한다.그런 이강 앞에 자미가 나타나 모든 것을 참고 모사와 혼인하라고 한다.이때 모사가 은주분을 들고 나타나고 이강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혼인하겠다고 대답해 버린다.영기 일행은 황제가 허락지 않을 것에 대비하여 몰래 떠날 준비를 한다. ●삼색토크 여자(오후 9시10분) ‘RED’는 배우 서주희가 들려주는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에 얽힌 얘기들 들어본다.‘BLUE’는 ‘여자의 성(性)’에 대한 화끈한 수다 한마당을 펼친다.‘GREEN’은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멕시코의 화가 프리다 칼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클릭!자동차생활(오전 11시25분) 위성을 이용해 운전자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GPS 안전운전 도우미’의 다양한 기능과 현명한 선택법을 살펴본다.기름 대신 전기로 가는 국내 최초의 ‘양산 전기차’를 만들어낸 김만식씨의 이야기도 들어본다.‘세계의 명차’에서는 50년대 이후 세계인의 사랑을 받은 차를 소개한다. ˝
  • “국내산업 공동화 충격적 진행”

    박승 한국은행 총재는 6일 “국내산업의 공동화가 충격 속에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며 우리 경제의 구조적인 위기를 경고했다.또 수출이 생산을 이끄는 등 경기가 좋아지고는 있지만 국민들이 체감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외환시장은 시장자율에 맡기되,더 이상 원·달러 환율이 떨어져서는 곤란하다고 강조했다. 박 총재는 이날 금융통화위원회가 끝난 뒤 기자간담회를 갖고 “우리경제가 겪고 있는 산업공동화는 과거 미국·일본이 겪은 것과는 다른 특수한 위기상황”이라고 진단했다.그는 이어 “미국은 1960년대,일본은 1990년대에 산업공동화를 겪었지만 그때에는 보호주의 체제 속에 공동화가 점진적으로 진행됐고 상대국들이 자국보다 경제규모가 작은 나라들이어서 큰 충격이 없었다.”면서 “그러나 현재 우리는 상대국인 중국이 우리보다 훨씬 크고 10분의1 이상 임금이 싼 데다 개방체제라는 국제환경에서 공동화를 맞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 총재는 “현재의 위기를 기업들의 글로벌경제 시대 개막이라는 기회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노사정 대화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사용자들은 고용보장과 고용확대,노동계는 임금인상 자제와 무분규 선언에 나서고 정부는 일자리 창출을 위해 총력 대응하는 거국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현재의 경기상황에 대해 “제조·생산·출하·가동률은 물론 경기회복에 대한 기대지표도 호전되고 있어 경기가 꾸준히 개선되고 있다고 본다.”면서 “지난해 하반기 이후 수출만이 우리경제를 이끌어 왔으나 최근 들어 생산이 수출을 따라가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그러나 “체감경기 회복은 좀더 기다려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환율과 관련해서는 “시장의 수급 균형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운영돼야 한다.”며 “다만 더 이상의 환율하락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특히 “수출에 지장이 없는 환율이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현재 우려되고 있는 물가상승에 대해서는 “올해 3%대 중장기 물가목표를 유지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며 “다만 하반기 이후 물가안정에 각별히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금통위는 이날 2월 중 콜금리 목표를 동결했다.지난해 7월 4.0%에서 3.75%로 내린 이후 7개월째 같은 수준을 유지하게 됐다. 김태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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