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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 회교반군,도시 습격 방화/은행7곳·백화점 등 도심곳곳 화재

    ◎경찰과 충돌… 1백명 사망 【마닐라·잠보앙가 AP 로이터 연합】 회교반군으로 추정되는 일단의 무장괴한들이 4일 필리핀 남부의 한 도시를 급습,7개의 은행과 백화점등에 방화하는 한편 보안경찰과의 충돌로 약 1백명이 사망했다고 현지 라디오방송이 보도했다. 목격자들은 약 2백명의 중무장한 테러분자들이 배와 버스를 이용,해상과 육상을 통해 동시에 민다나오섬의 잠보앙가 북쪽 1백㎞ 지점의 해안도시 이필 타운을 공격해 도시 중심가가 불타고 있으며 곳곳에서 총성이 들려오고 있다고 전했다. 민간 마닐라 라디오방송인 DZXL은 이들 무장 괴한들이 회교 반군인 모로민족해방전선(MNLF) 소속원들로 추정된다고 말하고 군복을 입은 이들 반군들이 시내 중심가의 업무용 빌딩과 백화점등에 무차별 방화를 자행했다고 덧붙였다. 한 여성 목격자는 이번 테러 공격으로 1백명이 사망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생방송중인 라디오를 통해 말했으며 또 다른 목격자는 시내에서 벌어진 총격전으로 경찰과 시민등 50여명이 부상당했다고 전했다. 한편 필리핀 남부군사령부의 대변인인 프레데스빈도 코바루비아스 소령은 현재까지 무장괴한 2명이 사망한 것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 가고 온 사람들(두만강 7백리:5)

    ◎광복­6·25이후­문혁때 귀향 줄이어/60년대말까지 쉽게 도강… 65% 다시 연변에/“지금은 갈수 없는 땅”강 건너 바라보며 눈물 ○보따리 이고 강 건너 끼룩 끼룩 끼루룩…. 한떼의 기러기가 일찍 얼음이 녹은 강 한구석을 박차고 북한땅을 멀리 돌아 날아간다.걸음을 멈추고 강 건너 마을을 바라보았다.한낱 짐승들도 자유로이 넘나드는 강.그렇지 못한 우리에게 두만강은 늘 한을 던져준다. 「기러기 갈 때마다 일러야 보내며/꿈길에 그대와는 늘 같이 다녀도/이 몸이 건느면 월강죄란다」 옛날 선조들이 불렀다는 「월강곡」을 되뇌어 보았다.나라의 독립을 위해 개척민에 뽑혀 산길을 찾아 나선 선조들은 밀물처럼 강을 건너왔다.그리고 또 광복 후 이주 당사자들과 후손들은 고국이 그리워 피땀으로 일군 삶의 터전을 버리고 다시 강을 되건너 썰물같이 대거 고국으로 돌아갔다. 첫번째 귀향은 광복 당시였다.일제의 말발굽에 짓밟혔던 나라가 독립을 맞자 조선족들은 보따리를 싸지고 두만강을 건넜다.당시 귀향민들은 두가지 부류다.대부분의 사람들은조상들이 묻힌 땅을 찾아 귀향했다.어떤 사람들은 북한의 고향을 찾았지만 살수가 없어 이남으로 곧장 월남했다.광복이 되자 연변과 북한의 공산당 정부는 일제주구 청산부터 시작했다.훈춘의 대지주이고 대동아전쟁때 비행기를 헌납하고 동경에 가서 천황의 접견을 받은 한희삼은 물론 다른 지주와 친일파들은 처단 당했다.항일부대 토벌에 공로가 있는 용정의 박도끼는 북한으로 도망가서 숨어 있다가 청진에서 잡혀 총살당했다고 한다. 화룡현 신선대 대장 김일로는 일제가 연길공원에 동상까지 만들어 세웠던 김동환 다음으로 가는 주구였다.1940년 3월25일 일본인 산림경찰대장과 함께 자기의 병졸들을 휘몰아 독립군을 추격하다가 홍기하에서 매복습격을 받아 1백20여명의 졸개를 잃었다.김일로도 졸개들을 호령하다가 벌린 입으로 탄알이 꿰뚫고 지나갔지만 요행히 목숨은 건졌다.이남으로 건너간 그는 여생을 편히 보내다가 수원에서 일생을 마감한 것으로 전해진다. 두번째 대 귀향은 1956년부터 1962년까지였다.한국전쟁(6·25)이후의 일인데 전후복구 지원을 위해 많은 조선족들이 북한으로 들어갔던 것이다.화룡시 용화향 상화촌에서만도 49호가 나갔다.그리고 인민공사가 시작되면서 굶어 죽게 되자 다시 살길을 찾아 북으로 건너갔다.용정시 삼합진 북흥촌의 최태경 일가는 19 62년에 함경북도 연사군으로 이사했다.최씨의 막내 딸 최해옥은 연사에서 소학교를 다니던 중 5학년 때 평양으로 뽑혀갔는데 현재 유명한 영화배우로서 「꽃파는 처녀」에서 주인공 꽃분이 역을 맡고 있다고 한다. 인재들이 많이 갔다.중국에서의 반우파투쟁이 지식인들을 잡는 운동이나 다름이 없고 민족심을 가진 사람들은 반동적 민족주의자로 되는 판국이라 떠나들 갔다.유명한 시인 주선우,작곡가 정진옥,소설가 김동구,아동문학가 채택룡 등 문학예술계 인사들도 떠나갔다.용정시 삼합향 승적 신재룡은 길림성 공업학원 학생이고 축구를 잘 했다.지금 그는 조선체육대 교수로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건너왔다 도로 가고 용정시 삼합향 북흥촌 이기희(54)는 연변대학을 다니다가 2학년 때인 1961년 7월 북한에 들어가 만 6년을 살고 다시 돌아왔다.그의 말을 들어보면 북한에 살다가 다시 연변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많다. 『당시 회령의 사탕공장건설은 연변에서 건너간 귀향민이 대부분이였댔습니다.나는 대학을 다니던 사람이라 공무직장에 배치 받았디요.직장장의 이름을 딴 김희진작업반에 배치합데다.그때 국가 철도상이자 함북도 건설사업소 소장으로 파견나왔던 김주봉이 하루는 우리 공장에 와서 연설을 하면서 「중국에서 하루에 백오십명씩 건너오고 또 매일 백여명씩 되넘어갑니다.조국에 왔으면 참답게 살아야지 이것이 뭡니까」라고 비판을 했디.어떤 날 출근하면 많은 사람이 없어집데다.알아보면 중국으로 돌아간거디요.67년 7월에 나도 가정을 데리고 도강을 했으니 아마 이튿날 내 자리가 비어 야단이었을 것이 뻔합데다.이북으로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은 중국에서는 호구를 붙여주지 않다가 67년 9월 정부에서 한꺼번에 복적시켰댔시요』 세번째 귀향은 문화대혁명시기이다.용정시 대소과수농장만 해도 항일에 참가했던 사람들 70여명 모두가 귀순 분자로 투쟁을 맞았으니 2백50호 중에 70호가 적이된 셈이었다.그중 10여호가 북한으로 도망갔다.용정시 백금향 백금촌 차덕균은 일제시기 동경대학을 나온 지식인이었다.일본에서 공부한 사실이 간첩조건이 되어 투쟁을 맞았다.모진 매를 견디다 못해 온 가족이 북한으로 갔는데 떠나던 날 큰 딸이 친척 집에 가고 없어서 두고 간것이 생이별이 되었다. 용정시 개산툰진 선구촌 사이섬에서 총 사격을 받고 수백명이 종성으로 집체도주 한 일이 대표적 사건이다.선구촌 문영기(54)씨도 그 사건에 끼었던 한사람이다.캉다(강대)요 홍색이요 하는 조직간에 말로하던 시비질이 주먹질,돌팔매질,몽둥이 싸움으로 번졌다. ○“북에 남아라”만류도 1967년7월29일 연길 캉다에서 개산툰에 와 개산툰 캉다와 합세하여 홍색을 쳤다.싸움은 공장울안에서 일어났는데 쌍방은 돌멩이를 던지고 창으로 찔렀다.홍색에서는 열세에 몰리자 해관의 총을 내다 불질을 해댔다.캉다패들은 결국 선구 대안 두만강 복판 사이섬으로 쫓겨나고 말았다.8월2일 홍색은 사이섬을 포위하고 투항하라고 공포를 놓았는데 총소리를 들은 북한땅 종성 사람들이 강변으로 나와 어서 건너오라고 소리를 쳤다.3백여명이 모조리 강을 건너갔으나 여자 하나가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북한에서는 대우를 제법 해주었다.그러면서 돌아가면 잘못 된다고 북한에 남으라는 선전을 했지만 몇사람 이외에 모두가 두달 후 되돌아왔다.주모자들은 감옥에 들어가 1년씩 구류를 사는 것으로 그쳤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개혁개방이 이루어지면서 당시의 일들이 억울한 것으로 판명되었다.그때 북한으로 건너가 거주하는 사람들이 중국에 와서 손해배상을 받아갔다.용정시 삼합진 승지촌 김광진은 지방 자위단에 있었다는 죄로 투쟁을 당하다 죽었다.그래서 온 가정이 야간 도주하여 회령으로 건너갔다가 지난 92년에 아들 김상연이 와서 용정시 민정국에 상소,3만원(인민폐)을 보상받았다고 한다. 현재 화룡시 덕화진 남평촌의 내 숙부(유인상·77)는 낮이면 두만강가에 나가 건너 쪽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눈물을 지으시기 일쑤다.내 고모가 60년도에 조선 청진으로 간 이후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이다.조카들은 60년대 초에 다녀갔고 몇해전까지는 편지라도 오갔는데 벌써 5년째 소식조차 모르고 있다.앞길이 멀지 않은 숙부는 생전에 단 한번이라도 만나보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다.부친(유민상·84년 별세)께서도 하나 밖에 없는 여동생을 말끝마다 외우시다가 한많은 세상을 뜨셨다.
  • 도쿄 독사스테러 피해확산/사망자8명으로…75명 의식불명·46명중태

    ◎유학생 등 재일 한인 6명 중독/입원 30대용의자 신병확보 【도쿄=강석진 특파원】 20일 발생한 도쿄 지하철 독가스 테러사건으로 인한 사망자는 21일 하오 6시 현재 8명으로 늘어났으며 한국인 피해자는 유학생등 6명으로 집계됐다. 일본경찰에 따르면 4천6백94명의 중독피해자중 75명이 의식불명이고 46명이 중태로 사망자수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 피해자는 유학생 신미애(35·도쿄도 이타바시구),우정욱(25·도쿄도 분쿄구),한정미(24·재일교포 간호사),안정혁씨(22·에도가와구)와 허두행(29·동양대 2년)최승숙씨(28)부부 등 6명이라고 주일 한국대사관은 밝혔다. 범인색출 작업을 벌이고 있는 경찰은 독가스 중독으로 입원중인 한 남자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고 그의 건강이 회복되는대로 본격 조사할 것으로 알려졌다.이와 관련,TBS 텔레비방송은 이날 30대로 보이는 한 남자가 히비야(일비곡)선 전동차 안에서 신문지에 싸인 용기를 고덴바초역 플랫폼으로 차낸후 달아나다 독가스에 중독돼 병원에 입원했다고 보도했다.이 방송은 사린가스가 쓰러진 용기로부터 새나왔다고 전했다. ◎독가스 테러 누가 왜했나/조직범행 추정… 신흥종단 수사/일경/신도들 체포 반발… 관료집단 습격 가능성/사린 제조력 갖춘 사회불만분자도 의혹 도쿄 지하철 독가스사건은 아직 범인의 윤곽이 그려지지 않은채 많은 의문을 던지고 있다.누가,왜,누구를 노리고,어떤 방법으로 저지른 것일까. 범인과 관련,일본 경찰과 언론들은 예단을 삼가고 있다. 하지만 범인들은 독가스 취급에 정통한 조직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우선 사린가스는 제조 공정은 간단하지만 공정전체를 밀폐할 수 있는 시설이 필요하다.또 바로 직전 물질의 판매에 대해서는 통제가 심하기 때문에 기초화학물질로부터 여러공정을 거쳐 사린을 제조하려면 대학원이상의 지식이 필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경찰은 이미 목격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가스에 중독돼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 가운데 한명을 용의자로 지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또 이번 사린 가스가 지난해 6월 나가노현 마쓰모토시 사린가스살인사건,7월 야마나시현 사린가스 검출사건과 제조방법이 흡사한 것으로 밝혀져 있기도 하다.야마나시현 사건은 힌두교의 시바신을 숭배하는 오우무신리쿄(AUM진이교)라는 신흥종교단체와 주민사이의 갈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의심되고 있다.일본 경찰은 이번 사건이 발생하자 신흥종교단체에 대한 일제 수사에 나서고 있어 일단 신흥종교단체쪽에 혐의를 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누굴 노렸는가.범인들은 관청가를 직격하려 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가스가 투입된 5대의 전차는 모두 상오 8시9분에서 13분사이에 관청가인 가스미가세키역에 도착하거나 출발할 예정이었다.일본의 관청가는 출근시간이 8시30분이다.무고한 시민들이 많이 희생당했지만 관청가도 적지않은 피해를 보았다.대장성,통산성,우정성,운수성 등에는 젊은 직원들을 중심으로 다수의 피해를 보았다. 왜 저질렀을까.일본 경찰은 오우무신리쿄가 저질렀을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는 듯하다.지난해 독가스사건이 일어났던 마쓰모토시의 경우 오우무신리쿄가 집단촌을 만들려다주민들이 반발,실패했던 곳.그 뒤 사린이 살포됐었다.야마나시현도 주민들이 두통을 호소해 검사한 결과 사린이 검출됐고 주변에는 오우무신리쿄의 시설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위험한 사린가스를 차안에까지 가져와 퍼뜨렸느냐는 점.두 가지 물질을 합하면 사린이 되도록 용기에 따로 담아 시한장치로 혼합되게 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으나 상온에서 기화하는 사린의 성질을 이용,드라이 아이스로 냉각시킨 사린을 차안에 놓아 잠시후 기화되도록 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이밖에 앰플에 담아 출근시간에 혼잡한 차안에서 밟혀 터지도록 했을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특파원출신 토머스작품/“도쿄테러는 영소설 「죽음의 향기」 복사판” 도쿄 지하철 역에서 발생한 죽음의 신경가스 테러 사건이 영국의 한 작가가 4년전에 쓴 추리소설과 비슷해 화제가 되고 있다. 전직 특파원을 지낸 고든 토머스(60)는 20일 로이터 통신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나는 91년 펴낸 「죽음의 향기」(Deadly Perfume)에서 이번 사건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언했으나 실제 상황이 소설내용과 너무나 유사해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이 책에는 범인들이 치명적인 신경가스 「사린」을 입수하는 방법,조그만 마을에서 모의 범행을 저질러 인명살상효과를 검증한 뒤 대도시의 지하철에서 이를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내용등이 포함돼 있다. 특히 소설속에 나타난 대도시 지하철에서의 범행내용은 8명을 사망시키고 수천명을 중독시킨 이번 도쿄지하철 신경가스 테러와 일치한다. 이번 테러 사건이 한때 일본에서 베스트셀러였던 「죽음의 향기」의 내용과 너무 닮아서 『도쿄지하철 테러는 이 소설의 모방이 아니냐』는 추측마저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 작가 토머스는 이에 대해 『나의 직무상 예언은 필수적인 것이며 일본인들의 분노에 대해 책임질 수는 없다』고 반박했다.
  • 마사이족/초지따라 생활… 국경없는 유목민(아프리카 기행:3)

    ◎케냐·탄자니아∼나트론호 동서로 이어진 삶터/일부다처제… 같은 연령끼리는 아내도 빌려줘/13∼17세 할례식… 전사는 무한대의 성적자유 누려 국경없는 자유인들 마사이족의 유목지대 초원은 케냐의 나쿠루로부터 탄자니아에 이르는 남위 6도까지 펼쳐진다.동쪽으로는 케냐의 차보국립공원과 탄자니아의 킬리만자로산과 연결되어 있다.서쪽으로는 나트론호 주변을 포함해서 마냐라호로 이어진 이 지역은 풀이나 관목들밖에 자라지 않는 불모지이기 때문에 소와 염소의 유목지로 이용된다.케냐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많은 종족들중에서도 특히 이들 마사이족에 관심을 갖게 된데는 이유가 있다. ○정부 정책엔 무관심 첫째,이들 마사이족은 케냐정부가 벌이고 있는 복지정책이든 규제정책이든간에 전연 개의치 않고 그들 종족이 지켜오던 오랜 전통생활을 지켜가고 있다는 것이다.이들은 국경개념조차 없어서 그것이 케냐의 땅이든 탄자니아의 땅이든 아랑곳않고 다만 가축들의 목초지를 따라 이동할 뿐이다.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고삐풀린 망아지에 비결될만하다.그들이 살고 있는 마을 바로 코 앞에 현대식 빌딩이 들어선다 할지라도 관심을 갖거나 혹은 거부감을 나타내지도 않는다.너는 너의 일이 있고 나는 내 일이 있다는 식이다. 걸음마를 시작한 어린 마사이는 보통 소떼나 염소들과 함께 초원으로 내보내져 생활하다가 13세부터 17세 사이에 마을장로들 모임의 결정에 따라 할례의 의식이 치러진다.할례를 치르는 날 할례를 받을 소년은 검은 가죽으로 사추리만 가린채 자기 집 앞에서 할례를 베풀 장로를 기다린다.장로가 당도하면 흙을 이겨 만든 회색물감을 소년의 눈 주위에 칠해준다.그리고 몸을 가린 가죽을 벗기고 찬물을 붓는다.소가죽이 땅에 깔리고 야생 올리브가지가 소가죽 가녁에 꽂힌다.소년이 소가죽 위에 눕게 되면 곧장 할례가 시작되는데,이때 소년은 미동도 않고 고통을 참아야 한다.다만 자신의 고통을 대신하여 땅을 치며 울부짖는 가족들의 모습을 침묵으로 바라보는 것만 허용될 뿐이다.할례가 끝나면 소의 정맥에서 뽑아낸 생혈에 우유를 타서 마신다.할례의식을 마친 소년 마사이는 바로 후보전사가 되는데,이들 후보전사의 집단을 마냐타(MANYATTA)라 한다. ○소 생혈에 우유마셔 마냐타 집단의 구성원이 되면 이들은 평생의 형제로서 항상 또래들과 어울려 다녀야 하고,혼자 잠자는 것도 혼자 음식을 먹는 것도 금지된다.이 마냐타를 구성할 때도 의식이 있다.검은 소를 잡아다가 결혼한 여인의 치마를 둘러씌워 질식시키고 그 고기를 구워서 마을사람들이 나눠 먹는데,이때 고기를 굽던 모닥불은 절대 끄지 않고 불이 남아있는 나뭇가지 하나씩을 각 마냐타의 집으로 가져가서 평생동안 그 불씨가 꺼지지 않게 조처한다.마사이족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두 눈이 항상 충혈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 협소한 집에 밤낮없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생활하기 때문이다.이들 모닥불은 물론 전통적으로 그들의 거처에 접근하려는 맹수들을 멀리 물리치는 역할도 해왔다. 이들은 그로부터 머리장식에 쓸 새를 잡거나 동물을 사냥하면서 용맹과 인내를 키운다.마사이들에겐 이때가 가장 호전적이고 위험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이들은 자신의 용맹을 시험하고자 할뿐더러 그것을 부족들에게 과시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있기 때문이다.각자 자신의 방패에 특별한 무늬나 표시를 하기도 하고 그 용맹이나 공로가 인정되면 그것을 상징하는 무늬를 방패에 그려넣을 수 있도록 허용된다. 마냐타를 구성한 또래들은 스스로의 용맹을 뽐내며 고참전사들을 찾아가서 이제 전사들의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한다.전사들은 후배들의 용기에 감탄해서 물러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분노에서 한밤중에 마냐타의 캠프를 습격하여 혼쭐을 빼기도 한다. ○전사승진식 「유노토」 그들이 치르는 또 하나의 의식으로는 유노토(EUNOTO)가 있다.예비전사들이 진정한 전사로 승진하는 의식이다.이 의식에는 죽은 소의 목에 칼집을 내어 흘러나오는 피를 전사와 예비전사들이 돌아가며 직접 입을 대고 마신다.그리고 예비전사들은 그 생고기를 한 입씩 뜯어먹는다.유노토의식을 치르고 나면 마침내 전사들은 마사이사회의 중심인물로 자리잡는다.그들은 소부족간의 물건 거래,치안과 생존을 위한 노동과 수확의 분배 등을 분쟁없이 이끌어 가고 해결해야할 책임을 물려받는다.소는 전통적으로 그들 종족만의 독점물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종족들이 소떼를 소유하고 있으면 그것을 약탈해오는 것도 전사들의 의무이다.전사들은 미혼여성에 대해서도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성적자유를 누린다.뿐만아니라 어느 가정에 가서나 우유나 쇠고기를 요구할 수 있는 특권도 가지고 있다. 이들의 성습관은 상당히 자유로워서 같은 나이집단끼리라면 근친상간이 아닌 한 여자와 여러 남자의 관계가 허용되고 같은 연령집단에 속한 남자들끼리 아내를 빌려주는 풍습이 있다.일부다처제로 결혼한 신랑은 신부의 집에 상당량의 가축을 지불해야 한다.마사이들은 쇠기름을 비롯한 많은 동물성기름을 일생동안 섭취하는데도 불구하고 콜레스테롤 수치는 미국성인들의 평균치의 절반에도 미치지 않는다는 통계가 있다.이러한 뛰어난 심장기능이 바로 마사이 전사들의 강건한 신체를 뒷받침 해주는 것 같다. ○곳곳에 버펄로 무리 아프리카 특유의 가시나무숲과 초원이 교차하는 미로 같은 먼 길을 따라 마사이마라지역에 있는한 마을에 당도했다.도중에 가뭄에 시달리는 목초지 위로 이동하는 수천마리의 누우(ENU)떼를 보았다.또 숲속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백여마리를 헤아리는 버펄로(BUFFALO)의 무리를 보았다.이들의 천적은 사자라고 하지만 성질이 거칠기 때문에 여러마리의 사자가 공격할 대상은 무리로부터 이탈한 단 한마리에 그친다.그 버펄로무리가 있는 곳에서부터 불과 백여미터 곁에 마사이족의 마을이 있었다.안내자가 그들 마을에 들어갈 수 있는 절차와 흥정을 벌이는 동안 어느새 마을 안에서 여러 아이들이 몰려나와 환영의 노래를 부르며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 일 우경화 흐름 더욱 격화/일 극우파 사회당사 습격 배경

    ◎「전쟁 반성」 저지 폭력·테러 움직임 전후 50주년을 맞은 일본에서는 「반성을 통한 화해」보다는 우경화의 흐름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14일 발생한 테러행위도 이러한 흐름의 한 상징이며 그동안 평화적 집회를 해오던 우익세력들의 부전·사죄 결의 반대 움직임이 테러단계로 접어들지않나 하는 우려를 낳고 있다. 테러가 발생하자 국회·정당 등 주요기관에 대한 경계가 강화됐다.경찰로 부터 극우세력의 움직임이 심상치않다는 통고를 받은 도쿄에 있는 한국대사관도 경비를 강화했다. 일본의 우익단체는 8백여곳,회원은 12만여명으로 추산되고 있다.이들은 기업에 대한 갈취 등으로 자금을 마련하거나 일부는 야쿠자와 연계돼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우익에 의한 테러는 93년 7건에서 지난해에는 13건으로 늘어났다.검거자 수도 8명에서 19명으로 늘어났다.그러나 극우세력을 견제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점점 더 엷어지고 있다. 정치권의 경우 과거반성을 주장하는 사회당은 몰락하는 분위기이고 대신 보수세력인 자민당과 또 다른 보수세력인 신진당의 양당체제로 틀이 형성되고 있다. 도쿄시내에는 「천황사죄,한국방문반대」,「독도(일본명 다케시마)의 불법점령을 중단하라」등등의 요구를 적은 우익단체 「애국당」의 포스터가 곳곳에 붙어있다.극우단체들 차량이 군가를 확성기로 틀고서 질주하거나 옛군복 비슷한 차림으로 집회를 하는 모습도 흔히 볼수 있다. 태평양전쟁이 구미열강의 식민지였던 아시아지역을 해방시켰다는 궤변도 일본에서는 자주 들린다. 한편 한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일본내 양심적인 인사들이 과거의 만행을 스스로 들춰내고 반성하자는 주장을 펼 때 이들의 노력 이상으로 일본의 만행과 잘못을 증거로 확보해 나가는 노력이 부족한 것 같다.한국으로서는 일본 우경화의 흐름을 주시해야 하겠지만 진보적이고 과거의 진실을 밝히려는 양심적인 세력을 북돋아주는 방안도 적극 모색해야 할것 같다.
  • 심야의 탈주/맥주거품에 부각된 인간내면 “인상적”(감동의 명화)

    ◎쫓기는 자의 두려움 화면마다 넘쳐/거푸 두번 감상… 그때 추억 아직 생생 뤼미에르 형제가 18 95년 프랑스 파리에서 일반대중에게 움직이는 영상을 선보인지 올해로 꼭 1백주년.단순한 과학적 호기심에서 비롯된 영화는 이제 4차원의 영상표현이 가능할 정도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며 인간의 꿈을 대변하는 각광받는 대중예술로 자리를 굳혔다.세계영화 탄생 1백돌을 맞아 문화 예술 각계 인사들이 집필하는 「감동의 명화」를 연재한다. 김종원(영화평론가) 흘러간 영화에는 마치 빛바랜 사진첩을 들추는 것과 같은 남다른 감흥이 있다.그것은 언제나 아름다운 기억으로 각인돼 각박한 도시의 삶 속에서도 낭만의 여유를 갖게 하는 원천이 된다. 젊은 날 영화는 나의 연인이었고 지식의 보고였다.또한 구원 그 자체이기도 했다.그래서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영화관을 찾았다.그럴 때는 으레 준비해 간 노트에 좋은 장면과 대사들을 적어놓곤 했다. 그 시절 아련한 기억의 창문을 열면 의식의 스크린에 투사되는 한편의 영화가 있다.대학 2학년 때던가.나를 매료시킨 캐롤 리드 감독의 「심야의 탈주」(1947년 베니스영화제 작품상 수상작·영국)가 바로 그것이다. 캐롤 리드라면 흔히 「제3의 사나이」를 내세우는 사람이 많지만 나는 이보다 「심야의 탈주」를 사랑한다.이 흑백 시네마에는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이 있었다.쫓기는 자의 내면에 응고된 삶에 대한 애착과 두려움이 화면마다 넘쳐나고 있었다. 특히 현상수배된 탈옥수인 주인공 조니(제임스 메이슨)가 갈등하는 모습을 맥주 거품을 빌려 부각시킨 중반부의 장면은 압권이었다.조여오는 수사망과 밀고의 압박 속에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마시던 맥주잔이 탁자에 엎질러지면서 확대되는 맥주 거품.캐롤 리드 감독은 이 화면에 동료들의 모습을 클로즈업 시켰다. 아일랜드의 한 시가지가 흔들리면서 전개되는 타이틀 백.추운 겨울의 탑시계는 하오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지하 독립운동 조직의 총기 밀수혐의로 투옥되었다가 탈옥한 조니는 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면직공장을 습격한다. 세명의 일당과 함께 돈을 털어 달아나던 조니는 끈질기게 쫓아오는 수위를 쏘고 그 역시 총상을 입는다.뒷골목에 숨어 있다가 동료의 도움으로 비상선을 빠져나온 조니는 애인 캐더린(캐더린 라이언)의 부축을 받으며 탈출이 계획된 부두에 이른다. 그러나 조니는 경찰관들의 포위망이 좁혀오는 가운데 출항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를 들으며 미래를 단념한 애인의 권총에 맞아 절명한다.함박눈이 내리는 부두의 광장에 서로 손을 잡은 채 피를 흘리며 쓰러진 두 남녀의 시체. 이처럼 라스트 신도 강렬한 인상을 심어 주었지만 이 영화의 가장 큰 강점은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뚜렷이 부각되고 있다는 사실이다.예컨대 부상을 입고 괴로워하는 주인공을 캔버스 앞에 앉힌 뒤 『죽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겠다』는 광적인 화가(로버트 뉴턴)의 행위나 현상수배범이라는 약점을 이용하여 돈을 흥정하는 새장수(F J 매코믹)의 야비한 이기주의 등은 성악적인 인간의 한 전형이었다. 나는 쫓기는 자의 내면을 깊이 있게 표출한 이 영화의 영상미와 함께 살아 움직이는 이들 캐릭터를 결코 잊을 수가 없다.나는 「심야의 탈주」를 앉은 자리에서 두번이나 봤다.그래서 지금은 없어진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4층에 자리한 재개봉관은 나의 영원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 보스니아세계,「인종청소」 재개/비세계주민 대상

    ◎무자비한 테러·약탈자행 【사라예보 로이터 연합】 보스니아내 세르비아계가 최근 북부 지역에서 회교도 주민을 대상으로 한 테러활동을 재개,구타와 금품 강탈을 자행하고 있다고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대변인이 25일 밝혔다. 크리스 야노브스키 대변인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같은 사실을 전하면서 세르비아계의 테러 목적은 이 지역에 거주하는 비세르비아계 주민들을 축출하려는 인종청소를 완결코자 하는데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보스니아 북부 그라디스카의 경우,지난 한달동안 회교도의 가옥들이 조직적인 강도들의 습격을 받았으며 반야 루카의 여러 마을들에서는 제복 차림의 무장괴한들이 회교도 민간인을 구타하고 약탈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야노브스키 대변인은 심지어 한 회교도 남성과 그의 아들이 총에 맞아 숨지거나 중상을 당하는가 하면 어떤 회교도 주민의 가옥에는 수류탄이 날아들기도 했다면서 이같은 테러행위는 『인종청소의 마무리작업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 군 상부 축소­하부 보강“전투력 강화”/국방조직 개편 배경과 특징

    ◎정보체제국 신설 「21세기 정보전」 대비/합참차장 권한 확대 “「작통권」 효율 제고” 정부가 13일 확정한 군조직개편안은 이상비대현상을 보이고 있는 상층부의 군살을 과감하게 도려내고 그 인력들을 하부구조 보강에 돌림으로써 군전체의 전투력을 향상시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군은 이번 개편에서 특히 21세기에 걸맞는 기술집약형 군으로서의 위상을 갖출 수 있도록 정보화와 과학화,권한과 책임의 단일화등 2가지를 기본축으로 삼아 지휘부의 군살빼기를 진행했다. 군관계자는 이와 관련,『이번 조직개편에서는 군을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전투조직으로 정비하기 위해 상부기구는 정보화시대에 맞춰 능률위주로 간편화했으며 하부는 전력발휘 위주로 보강했다』고 밝혔다. 이번 조직개편이 4월 정기인사부터 단계적으로 시행되면 국방부·합참·각군본부의 인력은 전체의 15∼16%가량 줄어들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번 조직개편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군령과 관련되는 분야는 국방부에서 대폭 합참으로 이양하고 ▲국방부에 새로운 정책개발을 위한 부서를 신설한 점과 ▲정부직제상 없는 조직을 없앤 것 등이다.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통신·전산분야업무를 맡는 정보체계국과 보건환경국을 신설한 것으로 이들 부서는 21세기를 앞두고 종합적인 정책개발 및 추진을 위해 설치필요성이 높은 것으로 지적돼 왔다. 두번째는 지난 69년 김신조일당 청와대습격사건 이후 전비태세검열을 위해 설치된 특검단을 폐지키로 한 것이다.특검단은 당초 대간첩작전태세 검열을 위해 설치됐으나 70년대 중반 군전력증강사업인 율곡사업에 대한 검열업무가 추가되면서 감사관실등과 업무가 중복됐으며 90년 「818계획」에 따라 합참이 전비태세검열업무를 맡으면서 존재의미가 상당히 퇴색돼 왔다. 폐지된 특검단의 업무는 합참과 헌병인 합동조사단등에서 나눠 맡는다.또한 국방정책을 맡는 국방정책실의 기능을 강화하고 조직관리관·인사국·복지보건국등 3개부서에서 나눠져 있는 인사·복지·조직기능을 조직인력관,인사복지국등 두개로 통합한 점,정훈과 교육·홍보기능을 장관직속 정훈공보관이 맡도록 한 점도 관심을 모으고 있다.그러나 대변인을 겸하게 되는 정훈공보관에는 현재 민간인이 대변인을 맡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민간인이 맡게될 전망이다. 합참의 경우 현행 본부장 시스템을 일반형 참모부형으로 전환하면서 대장 1명·중장 1명등 2명으로 나눠져 있던 차장을 대장 1명으로 단일화함으로써 평시작전통제권 환수에 따른 작전통제기능의 강화를 꾀했다.지금까지 합참조직은 중장급인 정보·작전·전략본부장들이 대부분의 사안을 의장에게 직접보고,차장의 중간조정기능이 약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일반참모부형으로 개편돼 차장이 모든 참모부장의 의견을 조정할 수 있게 됐다. 각군본부의 개편에서는 군사력건설사업의 일관성있는 기안과 추진을 위해 전력화관련업무를 한데 모아 전력기획참모부를 신설하고 통신전산업무를 다룰 정보체계실을 둔 점이 눈길을 끌고 있다. 한편 국방부는 직원들에게 신분상 불이익을 주지 않기 위해 폐지되는 부서직원들에 대해서는 4월 인사나 그 이후 단계적으로 이동시킬 방침이다.
  • 미 군정체제 확립(새로 쓰는 한국현대사:5)

    ◎“일인활용 불가피”속 행정권 장악에 석달/서울 입성뒤 「북쪽 접수」 주력… 개성 첫 점령/북의 소군은 2개월 앞서 「도인민위」 설치/인천입항 미군 환영길 한국인 2명 일경에 피살 미군이 인천에 첫발을 디딘 1945년 9월8일은 미 군정 3년을 포함해 이후 반세기동안 유지돼 온 한미간 특수 역사관계의 출발점이었다.그러나 한국인과 미군의 첫 만남은 그 시대상황을 상징이라도 하듯 비극적인 사건으로 얼룩졌다.미군을 환영하러 부두로 몰린 한국인들이 일본경찰의 총에 맞아 두명이 숨지고 십여명이 부상한 것이다. 인천은 서울과 가까운 근대 해항지여서 일찍부터 일본인 거주자가 많았고 그 세도 강한 항구도시였다.반면 부두노동자들이 조직한 노동조합이 활발히 움직이는등 반일세력도 만만찮았다.따라서 해방이 되자 인천시내에는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일본경찰은 재향군인 9천명을 급하게 모아 특별경찰대를 조직,각 파출소에 배치하는등 경비를 강화했으며 한국인들도 이에 맞서 치안유지회(보안대)를 결성해 대치하는 분위기였다. 「미군이 9월8일 인천항으로 상륙한다」는 소문이 며칠전부터 떠돌자 시민들은 「해방군」을 맞는다는 기쁨에 들떴다.이에 조선총독부는 9월5일 담화를 통해 『미군은 민중환영등 의례적인 행사를 희망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이어 8일에는 인천경찰서가 의사·산파·우편배달부를 제외한 사람의 외출을 금지한다고 공시했다.그리고 『이것은 미군의 지시』라고 못박았다. 8일 아침이 되자 인천시내 곳곳에는 미군을 환영하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은 자연스레 하나의 무리를 형성했다.미군 함정이 부두에 도착한 하오2시쯤에는 거대한 물결이 되어 인천항쪽으로 나아갔다.인파가 현재의 인천우체국 자리를 지나 산업은행 앞에 이르자 일본 특별경찰대의 99식 소총이 불을 뿜었다.이 발포로 행렬에 앞장선 조선노조 인천중앙위원장 권평근(당시 45세)과 보안대원 이석우(20세 가량)등 2명이 숨지고 1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권평근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사는등 일생을 조국광복에 바친 독립운동가였다. 해방된 우리땅에서 독립운동가가 일본경찰에게 공공연하게 피살된,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떻게 일어났을까.이 사건에는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의 사전정보부족과 한국에 대한 그릇된 시각,일본측 농간들이 복합 작용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미군은 진주에 앞서 한국주둔 일본군사령관 우에쓰키(상월양부)와 연락,그로부터 『무장폭동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경고를 듣자 「미군이 인수할 때까지」라는 조건으로 일본군의 치안유지권을 인정한다.이같은 미군의 입장은 권평근·이석우의 사망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났다.장례식이 끝난 뒤 유족들이 미군에 발포경찰관등을 고발,이에 대한 군사재판이 13일 열렸다.이 자리에서 일본인인 인천경찰서장등은 『미군 지시로 환영·외출을 금지했는데 이를 어겼다』고 주장했고 법정은 이들의 행위를 「합법」이라고 판정했다.재심청구를 했지만 곧 기각됐다. 이 사건은 미국 신문에 즉시 보도돼 미국내에서도 비판여론이 크게 일었다.종군기자 리처드 E 라우터배크는 「뉴욕타임스」9월9일자 기사에서 『일본군이 환영군중에게 발포한 것은 미군사령부의 지시때문』이라고 공개했다.「뉴욕타임스」는 이어 11일자 사설에서 『우리는 일제 식민정책을 시행한 쓰레기들에게는 부드럽게 대하고 우리가 해방시킨 민중에게는 강경하게 대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심각하게 제기했다. 한국점령 임무를 맡은 미 제24군단 가운데 8일 인천을 통해 맨 먼저 들어온 부대는 7사단이었다.7사단은 인천에 17보병연대를 남겨놓고 9일 아침 서울로 향했다.당시 미국신문들은 거리풍경을 『흰옷을 입고 이상스런 검정모자(갓)를 쓴 한국인들이 길가에 죽 늘어서서 「만세」를 외치며 환호했다.「USA Army Welcome」이라고 쓴 환영아치도 가끔 눈에 띄었다』고 보도했다.한국인들은 대부분 순수한 마음에서 미군을 「해방군」으로서 환영했던 것이다. 이날 하오4시6분 서울 조선총독부 건물(현 국립중앙박물관)제1회의실에서 38선이남 일본군의 공식 항복행사가 열렸다.일본측 대표인 아베 노부유키(아부신행)조선총독,우에쓰키 주둔군사령관등이 먼저 들어왔고 이어 하지중장,킨케이드중장(제7함대사령관)등 미군대표가 자리를 잡았다.하지중장 뒤에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X자로 세워져 있었다. 다음날부터 미군은 38선이남의 영토와 행정조직을 장악하는데 본격적으로 나선다.서울에 본부를 둔 7사단은 우선 북쪽지역에 주력해 12일 개성을 점령한 다음 소련과 연락할 전신장치를 설치했다.이어 그리고 미군정은 각 도에 군정지사를 보내 행정권을 장악했다.지사 발령날짜를 보면 ▲경기도 10월2일 ▲강원도 11월26일 ▲충북 11월8일 ▲충남 10월9일 ▲경남 9월28일 ▲경북 11월3일 ▲전북 11월20일 ▲전남 10월26일등이다.초대 군정지사들은 영관급 장교가 대부분이고 경남지사인 찰스 해리스가 유일하게 준장이었다. 미군이 지방에 분산 배치된 초기에는 군정 수행에 어려움이 많았다.군단위까지 확보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했고 특히 훈련된 행정요원은 턱없이 모자랐다.그런가 하면 현지실정을 몰라 한동안 일본인 관리를 활용해야 했으며,일부 지역에선 「조선인민공화국」이 임명한 관리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그러나 각 도에 군정지사를 파견해 자리잡음으로써 미군정은 1945년 11월 말쯤 전국적인행정체제를 확립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한반도 진격속도가 빨랐던 북쪽의 소련군은 군정체제를 이루는데도 앞섰다.8월9일 참전한 소련군은 일부지역에서 일본군의 저항을 받긴 했지만 8월 말까지는 38선이북 지역에 대한 군사적 점령을 끝냈다.점령군은 제25군,그 사령관은 IM 치스차코프대장이었다. 치스차코프는 평양에서도 조만식이 주도하는 「평남 건국준비위」와 「공산당 평남도위원회」를 합쳐 「평남 인민정치위원회」를 구성케 했다.이 위원회는 비록 조만식을 대표로 내세웠지만 실제적으로는 공산주의자들의 수중에 들어갔다.소군은 이같은 방식으로 기존의 정치세력과 공산주의자들을 엮은 인민위원회를 9월 말까지 각 도에 구성했다. 미군이 남쪽에서 직접통치의 형태를 갖췄다면 소군은 자치적으로 보이는 「인민위원회」구성을 통해 간접통치하는 교활한 방식을 택한 셈이다. ◎해방된 내땅인데… 일경에 맞서다 피살/유족 최초 증언… 「권평근의 인천참사」/미군 의뢰 따른 일 통제에 강력 저항/20∼30년대 노조운동 통해 항일투쟁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던 날 일본경찰의 흉탄에 희생된 권평근(1900∼45년)은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였다.그는 1919년 「3·1운동」부터 45년 9월 숨질 때까지 독립운동에 앞장서 왔지만 아직 정부로부터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지 못했다.그에 관한 기록이 여러 문헌에 흩어져 있어 미처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러나 본사 취재팀은 일본측 기록인 ▲삼전방부의 저서 「조선 종전□ 기록」(암남당서점) ▲1936년 조선총독부 경무국 자료인 「국외□어□□용응조선인명부」 ▲경성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에서 31년 9월 발행한 「사상월보」9월호들을 검토했다. 또 ▲서울경찰청이 1993년 6월9일 국가보훈처에 회신한 「권평근에 대한 지문조회」결과 ▲국가보훈처 소장 독립유공자공훈록 제5권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기록 ▲조선일보 1931년 7월24일자,8월27일자,9월4일자 ▲동아일보 1931년 8월27일자,10월27일자 등 각종 자료와 가족으로부터 단독입수한 권평근의 미공개사진,증언들을 종합해 국내 언론계는 물론 학계에서도 아직 시도해 본 적이 없는 권평근의일생을 복원했다. 권평근은 경기도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에서 태어났다.배재학당에 다니던 그는 「3·1운동」때 고향에서 시위대열의 선두에 섰다가 3년동안 충청도로 피신한다.이어 26∼27년에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작성한 「해외 반일조선인 명부」에는 그를 『배일사상이 농후한 요주의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권평근의 경력은 30년대에 빛난다.인천으로 이사해 노동조합에 투신한 그는 31년 7월 「일본인습격사건」의 주동자로 체포된다.당시 만보산사건이 일어나자 국내에서도 한국인과 중국인사이에 충돌이 잦았다.그러나 권평근 등은 일본이 한·중 양국을 이간질시키려고 사건내용을 과장한 것이라며 중국인을 공격하는 군중의 분노를 일본인에게로 돌렸다.이 사건으로 그해 10월26일 경성지법 형사제1부에서 징역3년을 선고받는다.당시 재판기록을 보면 권평근은 이해 5월1일,6월10일,7월5일 등 세차례에 걸쳐 반일시위를 벌이려고 구체적인 준비를 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복역을 마친 권평근은 노동조합을 통해 더욱 은밀하게 독립운동을 벌였고 해방당시에는 조선노조 인천중앙위원장이었다.총격 현장에서도 그는 일본경찰에게 『해방된 우리땅에서 웬 참견이냐.쏠테면 쏘라』며 가슴을 내밀었다고 한다.그의 장례식은 사회단체장(일부 기록은 시민장)으로 치러졌다. 딸 명숙씨(55·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742)는 아버지를 『6척 장신에 힘이 장사였다』고 기억했다.또 그리 어렵지 않은 살림인데도 자신은 하루 두끼만을 먹으며 어려운 이웃에게는 식량과 옷을 서슴없이 나눠줬다고 회상했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부국장급 ▲이용원 〃 ▲김성호 〃 ▲김경운 〃
  • 멕시코/농민소요 다시 격화/치아파스주/경찰과 총격전 벌여 5명사망

    【산크리스토발 데 라스카사스(멕시코) AP 로이터 연합】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주에서 10일 농장노동자 수백명이 시위를 벌여 주요도로를 봉쇄했으며 한 소도시에선 농민들이 읍사무소를 습격,경찰과의 충돌로 5명이 숨지는 등 소요가 재연되고 있다. 치아파스주정부 대변인은 과테말라와의 국경 근처 치코무셀로에서 10일 새벽 현지 농민과 야당인 좌익계의 민주혁명당(PRD) 행동대원들이 읍사무소를 점거하려다가 출동한 경찰과 충돌했으며 총격전으로 경관 3명과 PRD당원 2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최근 농민들은 집권 제도혁명당(PRI)의 치아파스 주지사 에두아르도 로블레도를 주지사직에서 축출하기 위해 공공건물 공격을 계속해 왔다. 지난 1년동안 무력 반정부 투쟁을 벌인 원주민 게릴라들은 로블레도 주지사가 작년 8월의 주선거때 속임수를 써서 주지사에 당선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정부측과의 평화회담 동의에 앞서 먼저 주지사 사임을 요구하고 있다.
  • 항일투쟁 본거지(연변 조선족 1백년:12)

    ◎독립군 사기 높인 봉오동­청산리 전투/삼둔자 첫교전 대승… 독립운동 본격화 계기로 연변이라는 곳이 독립운동의 산실이었음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이중에 한국독립군전투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세곳 있는데 삼둔자전투,봉오동전투,청산리전투가 그것이다.이 3개지역은 우리의 피를 말리던 당시의 일본측으로 보면 몹시도 상처 받은 아픈 상흔으로 남을 것이고,우리 입장으로서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고 울부짖음이었다. ○한인이 개척한 신천지 당시 한국이주정착민들의 거주지역은 크게 서간도와 북간도로 나누는데 서간도는 백두산서남과 압록강대안의 남만주를 일컬으며 북간도는 서간도를 제외한 나머지지역을 말한다.이밖에 두만강 하류에서 우수리강 동쪽의 러시아땅에도 이주민들이 살던 곳으로 이곳을 연해주라고 불렀다.해도간이란 연해주의 「해」와 간도의 「도」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이를테면 한국이주민들이 구한말 이래 새로 개척한 신천지를 총칭하는 말이다. 삼둔자는 현재 연변 제2의 도시인 도문시 월청향 간평이란 마을이다.이지역 일대가 산악이며 일본수비대의 눈을 피해 국내로 잠입할 중요거점으로 알려진 곳이다.삼둔자사건의 전말은 이렇다.1920년6월4일 새벽이었다.30여명의 독립군이 국내로 진입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 종성 북방 2㎞지점의 강양동으로 진격하여 일본헌병 후쿠가와 조장이 인솔하는 헌병순찰소대를 격파하고 날이 저무는 것을 기다렸다가 다시 귀환하는 임무였다.이날도 여느 때처럼 성공리에 무사 귀환했다. 그러나 왜군은 참패의 복수를 위해 니이미중위로 하여금 남양수비대 병력 1개중대와 헌병경찰중대를 인솔하게 하여 독립군을 추격하게 하였다.낌새를 챈 독립군은 요소에 잠복하고 있었다.삼둔자에 이르러 뜻을 이루지 못한 일본군은 억울한 양민만 대량 학살하고 퇴각하는 길이었다.이 때 놓칠세라 독립군이 일시에 습격하여 섬멸시켰다.소수의 병력으로 왜군을 섬멸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곳 지형에 익숙한 독립군이 협곡으로 왜군을 몰아 일시에 포위하여 공격한 탓이었다.이 사건은 일본군이 강을 건너 중국땅에서 독립군과 싸운 처음 기록이 되었으며다음 봉오동승첩의 서전이 되었다. 1920년 6월7일 봉오동승첩의 전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두만강 국경수비대는 국내 진입작전의 독립군 본영이 있는 봉오동을 일격에 섬멸하여 그 기능을 봉쇄하려고 공격부대를 편성했다.결국 야스카와 소좌는 보병2개중대,기관총소대,헌병경찰대를 합친 혼성대대로 편성했다.그리고 며칠전 삼둔자에서 패전한 니이미 중대가 가세하여 신예무기로 무장한 전투대대병력으로 공격이 시작되었다.새벽3시가 지나 해란강이 두만강과 합류하는 온성 하탄동 부근에서 두만강을 건너 봉오동을 향해 진격해 온 것이다. 봉오동은 사면이 야산으로 둘러싸여 마치 길쭉한 삿갓을 뒤집어 놓은 지형의 요새라 할 수 있다.남쪽 입구로부터 북쪽까지는 25리가 넘는 골짜기로 되어 있고 두 세곳의 한국인 이주민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한편 봉오동 독립군을 지휘하던 사령관은 홍범도였으며 왜군을 대치한 아군작전은 치밀했다.마을 주민들은 모두 대피시켰고 사령관이 직접 지휘하는 2개중대는 서산남단에 자리잡고 그밖의 중대들은 사방으로 매복시켰다. ○홍범도장군 맹활약 아침8시가 지나 일본군은 봉오동 초입에 당도했다.마을을 습격하면서 미처 피하지 못한 노약자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점차 깊이 수색해 들어온 일본군은 독립군이 매복하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도주한 줄만 알았다.때가 왔을 때 홍범도사령관의 신호로 삼면으로부터 일제히 공격이 시작되었다.일본군은 결사 반격을 했으나 워낙 갑자기 당한 습격이라 수습할 길이 없었다.결국 패퇴하고 말았다.이 전투의 개선은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조금은 위로해 주었다.그리고 중국조선족의 정신적 힘이 되어 주었다. ○위군 1천2백명 궤멸 청산리대첩은 1920년10월 김좌진·나중소·이범석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합세한 독립군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위해 간도로 진격한 일본군을 맞아 청산리일대에서 싸워 일본군을 대파시킨 것을 말한다.청산리 계곡은 동서로 약25㎞나 되며 교통이 거의 불가능한 지세였다.10월21일 상오9시경 야스카와가 이끄는 추격대가 이곳에 당도했을 때 이범석의 지휘로 매복해 있던 독립군이 일제히 엄습하여 전멸시켰다. 이어 야마타가 이끄는 본대가 당도했지만 아군에게 유리한 지형과 매복작전에 속수무책,2백여명의 일본군이 사살되고 패퇴했다.한편 홍범도부대는 완루구에서 일본군을 맞아 치열한 전투끝에 4백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피해를 입혔다.22일에는 김좌진부대가 마을주민의 제보를 받아 어랑촌에 주둔하고 있던 기병대를 습격했다.청산리전투는 10월21일부터 시작되어 26일까지 약10여회 전투를 한 끝에 일본군 1천2백여명을 사살한데 비해 독립군은 1백여명이 전사했을 뿐이었다. 삼둔자전투는 일본군이 중국땅에서 독립군과 최초로 싸운 기록이 되었으며 봉오동전투는 독립군의 주력부대를 파멸시키려는 일본군의 복수전이었으나 결국 패퇴했고 청산리전투는 규모면에서는 가장 큰 전투였다.군인의 수나 무기의 수등 병력이 약세임에도 불구하고 승리한 것은 유리한 지형과 치밀한 전략 때문이라는 점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도 조국 독립을 위한 정신력 때문이었다고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 쿠르드족끼리 무력충돌/이라크 북부/무차별 포격… 4백72명 숨져

    【바그다드·앙카라 로이터 AFP 연합】 새해들어 이라크 북부의 아르빌시(시)에서 서로 적대적인 두 쿠르드족 집단사이에 무차별포격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4백72명이 사망하고 이웃 터키 동남부에서는 터키로부터의 독립을 모색하고 있는 반정부 쿠르드족 게릴라가 그들을 지지할 것을 거부하고 있는 마을을 습격,19명이 사망했다. 이라크 관영 INA 통신과 유엔 당국자는 마수드 바르자니가 이끄는 쿠르드민주당(KDP)과 자랄 탈라바니가 이끄는 쿠르드애국동맹(PUK)사이에 지난주 시작되어 이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이라크 북부의 전투로 여성과 어린이 43명이 포함된 4백72명이 사망했다고 말했다. 또 이 전투로 혹한속에서 주로 유엔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는 약75만명의 쿠르드족 난민들에 대한 원조물자 공급이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졌다.
  • 불­알제리 관계 악화/회교 원리주의자 잇단 테러 파장

    ◎게일라 불인공격 계속땐 위기/「식민­피식민지」 역사서 비롯된 불신/「여객기피랍」 해결과정서 신경전 벌여 알제리 회교원리주의자들에 의한 에어 프랑스기 피랍사건에 이어 발생한 카톨릭신부 살해사건은 그렇지 않아도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는 프랑스와 알제리 관계를 더욱 악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와 알제리는 지리적·역사적으로 특수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1백32년동안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은 뒤 7년에 걸친 유혈항쟁 끝에 지난 62년 독립을 쟁취한 알제리는 독립투쟁 과정에서 프랑스로부터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으며 프랑스 역시 알제리에 대해 깊은 불신을 갖게 됐다.또 프랑스는 지중해 건너 비행기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알제리에 회교 원리주의 정권이 들어설지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해 늘 우려해 왔다.이같은 상황 때문에 프랑스와 알제리는 항상 보이지 않는 갈등 관계를 계속해 왔다. 이러한 양국의 미묘한 관계는 이번 여객기 피랍사건의 해결 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프랑스는 여객기가 알제에 억류된 당시 알제리특수경찰이 여객기를 습격할 경우 막대한 희생자가 발생할 것을 우려해 프랑스 경찰을 보내겠다고 제의했으나 알제리는 프랑스 경찰이 자국영토에서 활약하는 것을 꺼려 이같은 제안을 거절하는 등 신경전을 벌였던 것이 그것이다. 양국간의 이같은 감정 대립은 최근 알제리의 회교 원리주의자들이 실업률 증가로 앞길이 막막해진 프랑스내 회교 이민청소년들 사이에 침투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으며 특히 알제리 과학자들이 핵연구를 시작했다는 사실을 프랑스 군사전략가들이 문제삼고 나온 이후에는 더욱 긴장의 도를 더하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일단 피랍 여객기에 특공대를 개입시켜 4명의 납치범 전원을 사살함으로써 사건을 마무리한 뒤 이에따른 추가 보안조치가 마련될 때까지 프랑스와 알제리를 오가는 항공기와 선박의 운항을 잠정중단시켰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의 이같은 조치에도 불구하고 회교과격단체의 테러 행위가 즉각 멈추지는 않으리라는 것이 대다수 전문가들의 견해다.회교 원리주의 지도자들이 이번 사건을 실패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상당한 정도의 국제적 관심을 끈 「성공한 사례」로 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와관련,프랑스의 역사학자 방자맹 스토라는 사건 종료 직후 『이제 새로운 「알제리 전쟁」이 시작됐다』면서 『프랑스는 알제리와의 관계에 대해 힘든 선택을 해야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 백악관의 수난(외언내언)

    세계최고의 권부인 미국의 백악관이 무방비 상태에 놓여있다해서 요즘 화제가 되고있다. 지난 17일 새벽 대통령과 가족들이 취침중이던 백악관을 향해 4∼6발의 총탄이 날아들었다.그중 한발은 대통령이 자고있던 2층 발코니까지 침입했다.이번 사건은 지난 10월29일 마틴 듀란이란 청년이 대낮에 백악관을 향해 무려 30여발의 반자동소총을 난사한 사건이 있은지 두달도 안돼 일어난 총격사건이다.또 지난 9월 12일 새벽에는 정신병력을 가진 한 청년이 세스나 경비행기를 훔쳐타고 백악관 잔디밭에 추락한 사건도 있었다. 백악관피습사는 오랜 역사를 갖고있다.1812년 영국군 점령당시는 백악관이 온통 불길에 휩싸였으며 그때 남은 것이라곤 식기 몇점과 조지 워싱턴 대통령 초상화 뿐이었다고 한다.1828년에는 술취한 군중들이 앤드루 잭슨 대통령취임식장에 난입,기물을 마구 부셔대는 난동사건이 있었고 1950년 트루만대통령때는 푸에르토리코 분리주의자들이 블래어하우스를 습격하기도 했다. 1974년에는 한 젊은 육군사병이 헬리콥터를 훔쳐 백악관 정원으로 달려들었으며 76년엔 한 사나이가 픽업트럭을 타고 백악관정문으로 돌진하려다 붙잡히기도 했다.같은해 경호원의 제지를 무릅쓰고 백악관 철책을 뛰어넘으려던 괴청년이 사살된 사건도 있었다. 백악관 재난사는 이처럼 화려하지만 불행중 다행인 것은 이런 피습들로 대통령이나 그 가족들이 위해를 당한 일은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일들은 따지고 보면 백악관이 워싱턴시내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데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철책대신 높은 담장을 쌓을 수도 있고 일반의 백악관 접근을 막을 수도 있다.그러나 미국은 그렇게 하지않고 있다. 국민들의 대통령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다.그것이 더 강한 백악관 경호책일지도 모르겠다.
  • “언론의「세무비리」표현 바꿔주오”/부천세무서장 출입기자에 호소편지

    ◎시민들 지방도세사건 국세청 연루 오인/잇단 비난전화·세무서앞 시위에 “곤혹” 기영서 부천세무서장은 최근 국세청 출입기자들 앞으로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신문 방송에서 사용하는 「세무 비리」란 표현만이라도 「지방세 비리」라고 써 달라는 하소연이었다. 그는 『내무부 출입기자가 잘못했는데 국세청 출입기자들까지 매도된다면 되겠냐』는 비유까지 하며 국세을 취급하는 세무서와 지방세를 다루는 지방자치단체를 명확히 구분해 달라고 호소했다. 기서장은 국민들의 80% 가량이 지방세와 국세의 차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데다 언론까지 「세무비리」라고 하니까 온갖 비난이 덩치가 큰 국세 쪽으로 날아온다고 설명했다. 때문에 징세업무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납세자들의 신뢰가 떨어지고 직원들의 사기도 엉망이며 자신 역시 공식·비공식 모임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라고 털어놓았다. 부천서의 경우 지난 3일에는 「세무비리」를 규탄하는 대학생들로부터 습격까지 받았다.엉뚱하게 세무서 앞에서 내무부장관의 퇴진을 주장했다.세무서가 애꿎게 피해를 입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세무서마다 항의 전화가 끊이지 않는다.연말을 맞아 체납액 징수에 나선 직원들이 가장 곤욕을 치른다.지방세 횡령 사건이 터진 지역은 더욱 심하다. 『당신들이 다 해 먹는다』고 폭언을 퍼붓는 사람들도 있다.비리가 생긴 분야는 지방자치단체가 걷는 지방세이지,세무서에서 관리하는 국세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설명해도 막무가내라는 것이다.『세금이면 다 똑같지 헛소리 하지 말라』고 무안을 주기 일쑤이다. 지방세 비리가 낳은 엉뚱한 피해이다.
  • 무차별 징세(최두삼 귀국리포트:19)

    ◎농촌부과 세금·잡부금 2백69종/난집자·난탄파·난벌관의 「3난」이 유행어로 『이 가죽잠바는 한벌에 3백60위안(원·약3만6천원)인데 2백60위안씩에 처분 합니다.방금 부리나케 10개나 팔고보니 이제 겨우 3벌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어서들 사세요.후회를 말고요』 지난 5월5일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서시장에서는 한 옷장수가 목에 핏대를 올리며 소리치고 있었다.바로 그 옆에서는 서너명의 남녀가 똑같은 가죽잠바를 들고나와 『옳아요.우리들이 방금 2백60위안씩을 주고 샀어요』하며 틀림없음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한 노인이 『저놈들은 모두 한통속이다.옷판을 벌인지 이제 10분 밖에 안됐고 아직 한벌도 못팔았는데 10벌이나 팔았다니 지독한 거짓말쟁이들이다』라고 중얼거렸다. 이때 바로 옆에 서있던 한 사나이가 호주머니에서 계산기를 꺼내 두드려보더니 영수증을 한장 내밀며 말했다.『저는 세무국에서 일보고 있습니다.방금 잠바 10벌을 2백60위안씩에 팔았다고 하셨는데,총판매액 2천6백위안에대한 5%의 세금 1백30위안을 내십시오』 그러자 당장 이 장사꾼은 『그게 아니다』며 변명을 하려했으나 주변에 모여있던 모든 사람이 『방금 10벌을 팔았다는 얘기를 분명히 들었다』고 증언하고 나서자 어쩔수 없이 울며 겨자먹기로 세금을 내놓고야 말았다. 이 얘기는 흑룡강신문 94년 5월28일자에 『거짓말에 과세』란 제목으로 보도 됐었는데,중국농촌에서는 요즘 각종 세금남발로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는 얘기를 하기 위해 예를 들었을 뿐이다. 중국세무원들이 한국의 인천이나 부천에서 처럼 세금을 받아 통째로 삼키는 버릇이 있다는 얘기는 듣지를 못했다.그러나 아직도 가난한 중국 농민들에게 어쩌면 그렇게도 많은 잡부금을 거두고 있는지 이해할수가 없었다. 중국농촌에서는 언제부터인가 「3난」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이는 3차례에 걸친 난리를 의미하는게 아니다.모금을 위해 내는 돈을 제멋대로 정해 부과하는 「난집자」,무차별로 균등하게 돈을 거두는 「난탄파」,닥치는대로 벌금을 부과하는 「난벌관」등을 가리켜 3난이라 부르고 있었다. 중국 당국에서는 이같은 3난에 속하는 농촌의 잡부금 또는 잡세의 종류가 무려 93가지라고 밝히고 그중 각종 비용징수가 73가지,갖가지 명목의 모금이 11가지,기금정립 2가지,기타 7가지라고 설명했다. 다른 통계에 따르면 이같은 잡세의 종류가 무려 2백69가지라는 설도 있으니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한국농촌에서도 각종 잡부금을 모으면 그렇게 많아지는 것인지 알수가 없다. 어쨌든 지난 93년 여름 한때 중국농촌 곳곳에서 소요가 발생했었다.그 주요 원인은 이같은 3난이 배경에 깔려 있는 것으로 분석됐었다.그래서 당국은 갖가지 대책을 내놓았다.우선 중앙정부가 지난해 내놓은 대책에 따라 농민부담 잡세 37개가 취소됐다.그 내용은 농촌 집터 사용비,농촌음료수 개선 모금,농촌변소 개선 모금,수력발전 건설기금,어선어항관리비,삼림자원 경신비,향촌의사 보조비,향진이하 방송망 보호비,TV중계방송 채널 점용비등을 들수 있다.이밖에 혼인등기비용과 고기배 검사비등 17개 항목은 금액을 조정했으며 알곡구입 판매계약공증과 신문구독등 14개항목은 강제 집행하지말고 주민들의 자유의사에 따라 선택할수 있도록 했다. 그런가하면 해외에서 부쳐온 우편송금도 현금으로 내주지않고 수개월 후에나 교환가능한 「백조」라고하는 일종의 차용증서로 내주고 있어서 불만을 품은 농민들이 우체국을 습격하거나 직원을 다치게하는 등의 소요가 무려 11개 성에서 발생했다고 일부 서방신문들이 보도하기도 했다.이 백조는 우체국 뿐아니라 정부 곡물수매대금이나 학교 교원들의 월급지불에까지 사용된 적이 있었는데 주요원인은 지방정부가 각종 건설사업에 무턱대고 돈을 쏟아넣다 보니 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가운데 일부 지방고위간부들은 먹고 마시고 도박하며 여자와 놀아나기등 이른바 중국인들의 4대 즐거움을 위해 공공비용을 물쓰듯 하기도 했다.그런가 하면 전국에서 빈곤하기로 이름난 하북성 령수현의 당서기는 모친 장례식때 각기관이나 개인들이 보내온 현금만 30여만위안(약3천만원)에 달했을 정도였다.그는 공무원들 3∼4개월 월급에 해당하는 1천위안미만의 부조금을 낸 사람들은 아예 접대도 하지 않았지만 돈을 많이 낸 사람들은 상등석에 앉혀놓기까지 했다가 결국 반부패 투쟁 때에 걸려 쫓겨나고 말았다.
  • 「대낮 살인극」 1명 검거/강남/폭력배들이 습격… 2명 사망

    4일 하오 3시10분쯤 서울 강남구 삼성동 뉴월드호텔 앞길에서 박모씨(32·서울 강동구 천호동)결혼식에 참석하고 나오던 박신씨(33·전남 목포시 산정동 현대아파트 104동1204호)·유재수씨(28·수배중·서울시 서초구 방배동)등 4명이 조직폭력배로 보이는 건장한 청년 10여명의 습격을 받아 박씨와 유씨등 2명이 이들이 휘두른 회칼등에 난자당해 병원으로 옮기던 중 숨졌다. 이들과 함께 피습당한 김훈석씨(30·수배중·전남 진도군 임해면 백동리)는 중상을 입고 영동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으며 강남성모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던 박성택씨(27)는 『다른 병원으로 가겠다』며 병원을 빠져 나간 뒤 잠적했다. 경찰은 5일 하오 5시10분쯤 이번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이모씨(40)와 김모씨(35)등 3명을 붙잡아 조사를 벌였으나 이 가운데 김씨등 2명은 혐의점이 드러나지 않아 일단 귀가조치했다. 경찰 수사결과 피해자들 가운데 숨진 박씨와 중상을 입은 김씨가 목포파 조직원이고 유씨는 와해된 서방파 하부조직인 광주파 일원으로 목포파는 91년 10월 서울 팔레스호텔에서 보스급인 박진수씨(30)가 중심이 되어 나주 영산파 두목인 최창호씨(당시 27세)를 살해했으며 박씨는 이 사건으로 구속기소돼 복역하다 지난 1일 출소해 평소 친분관계가 있던 박씨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 알제리 회교 테러단/이·불인 잇따라 살해

    【알제 AFP AP 연합】 알제리에서 가장 급진적인 근본주의 테러 단체인 무장회교단(GIA)소속으로 보이는 게릴라들이 18일밤 알제리 북동쪽 켄셀라 인근의 국영 델리브 유전을 공격하고 이탈리아와 프랑스 출신 기술자 두명을 살해했다고 알제리 보안당국이 19일 밝혔다. 당국은 20여명에 달하는 무장괴한들이 유전을 습격,각종 시설에 불을 질렀다고 말하고,그동안 게릴라들이 알제리 거주 외국인들에 대한 무차별 공격을 자행해왔으나 국가시설에 대한 공격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덧붙였다. 괴한들은 공격 직후 훔친 차 두 대에 편승해 현장을 탈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 독립선열 유해 5위 봉환/내일 중국서

    ◎이화일·손병헌·강백규·김기선·윤희순선생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다 중국 길림성 일대에서 서거한 독립군 출신의 이화일선생 등 중국안장 독립유공자 유해 5위가 17일 봉환된다. 보훈처는 15일 이들 다섯분의 유해가 17일 하오 김포공항으로 환국,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영현봉안관에 임시 안치됐다가 이화일·손병헌·강백규·김기선선생등 네분은 18일 대전국립묘지에,윤희순(여)선생은 20일 강원도 춘천 소재 선영에 각각 안장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국외안장 선열 1백24기의 유해중 국내에 봉환된 독립유공자는 모두 38위로 늘어나게 됐다. 정부는 국외안장 선열들에 대한 유해 봉환사업의 일환으로 지난해 중국 현지 묘소 실태조사를 벌여 소재지가 확인된 다섯분의 유해를 먼저 국내에 봉환키로 결정,지난 11일 유해봉환반을 현지에 파견했었다.이번에 봉환되는 독립유공자들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이화일선생(1882∼1945)=함북 경성 출생으로 1920년 6월 홍범도장군이 지휘하는 봉오동전투에 참전,일본군 1백20명을 사살하는 등 여러차례의 전투에서 독립군의 일원으로 큰 공을 세웠다.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손병헌선생(1870∼1946)=경북 영천 출생으로 1922년 통군부등 8개 단체가 통합 결성한 통의부에 가입,참모로 활동했으며 1926년부터는 간도 용정의 대성중학교교사로 민족교육에 헌신했다.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강백규선생(1878년∼미상)=1920년 3월에는 간도지역청년회부회장으로서 무장독립군을 조직,항일투쟁을 벌였으며 1924년 2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된 제1회 국민위원회 10인 후보중 한사람으로 선출돼 「국민위공보」를 발행했다.63년 국민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김기선선생(1888∼1920)=평북 정주 출생으로 중국 봉천성 통화현에서 배달학교를 설립,민족교육에 헌신하고 한족회의 일원으로 항일활동을 벌이다 1920년 11월 배달학교에서 일군의 습격을 받아 사망했다.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윤희순선생(1860∼1935)=의병장 유홍석의 며느리로 1895년 시아버지가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반발,강원도 춘성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의병군가를 작곡해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부녀의병의 일원으로 참여했다.83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 아이티/군정 종식… 민정회복 새 전기/아리스티드 귀국과 파장

    ◎경제난 해결 못하면 민주화 난망/세드라 추종과 처리 등 불안요인 아이티군부 최고지도자 라울 세드라 장군이 퇴진하고 미국에 망명중이던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전 대통령이 15일 귀국하게 됨에 따라 아이티는 민주정권 회복에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됐다. 아리스티드의 귀국은 그를 지원한 미국이나 아이티 국민들에게는 일단 군사통치 종식의 첫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던 민주회복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민선대통령으로서 복귀에 성공한 아리스티드가 성공적으로 민주주의를 회복하기에는 아직도 해결해야할 과제가 산적해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리스티드가 해결해야할 가장 시급한 문제는 세계최빈국의 하나인 아이티의 빈곤을 추방하고 경제를 회생시키는 일이다.아이티 국민들은 세드라 정권 당시 유엔이 취한 경제봉쇄조치로 현재 극히 열악한 생활을 하고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극심한 식량부족으로 취학전 아동의 절반이상이 영양실조를 겪고 있으며 1주일에 5백명의 어린이들이 사망하고 있다고 유엔아동기금은 밝히고 있다.따라서 서방의 경제원조등을 통해 빈곤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지 못할 경우 「민주회복」은 구두선에 그치고 또다른 정치불안이 야기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함께 미군주둔 이후에도 경찰서나 관공소 습격사건이 산발적으로 발생한데서 보듯 세드라정권에 충성했던 군장성및 공무원들에 대한 민간인 테러로 사회혼란이 벌어질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수 없는 상태다.「아이티사태」가 비록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됐다해도 세드라 정권하에서 4천명이 넘는 정치범이 살해되는 고초를 겪었던 친아리스티드인사들의 복수심을 당장 쉽게 해소할수는 없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와관련,지난 4일 아리스티드가 유엔총회에서 『현 집권층에 대한 폭력과 복수에는 반대하며 화해를 이룰 것』이라고 밝힌 점이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또다른 폭력이 내전으로 확산될 소지는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이 대부분 전문가들의 견해다. 또 미국으로부터 아이티 통치권을 부여받은 아리스티드의 개인적인 한계성에서 불안요인을 찾는 시각도 있다.중남미 최초의 해방신학자로 도시빈민과 농촌층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있는 아리스티드가 군부와 공무원등 기득권층이 갖고있는 뿌리깊은 불신을 과연 어떻게 씻어내고 정치적 안정과 화합을 도출해낼 것인가 하는 점이다.실제로 아리스티드는 지난 90년 12월 아이티 최초의 민선대통령으로 선출된뒤 집권 7개월동안 부패공무원의 숙정과 군장성의 해임을 단행한바 있어 이것이 쿠데타의 직접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이처럼 안팎으로 쏟아지고 있는 우려를 불식시키고 아리스티드가 경제회생과 정국안정이라는 두마리의 토끼를 다 잡아 아이티에 진정한 민주주의를 회복할수 있을지에 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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