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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체첸 반군 특공대장 모스크바 공격 경고

    【다르고(체첸) AFP 연합】 러시아 남부의 소도시 부됴노프스크를 습격하여 주민 1천5백명을 인질로 잡고 크렘린측의 양보를 억지로 얻어냈던 체첸 특공대지휘관 샤밀 바사예프는 3만4천달러의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면 다음번의 공격목표는 모스크바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체첸전을 러시아 영내로 끌어들여 평화회담,휴전 및 체첸 귀환을 위한 안전통행을 얻어내 체첸인들의 영웅이 된 바사예프는 27일에 재개될 예정인 러시아­체첸 평화회담이 실패하면 또다시 체첸전을 러시아 영내로 비화시킬 것이라고 위협했다.
  • 친 이란 무장대,이군 공격/올 최악의 유혈충돌/3명사망·7명부상

    【예루살렘 AFP 로이터 연합】 레바논의 친 이란계 무장단체인 헤즈볼라게릴라들이 18일 남부지역을 순찰중인 이스라엘군을 습격,3명이 숨지고 7명이 부상하는 올들어 최악의 유혈사태가 빚어졌다고 친이스라엘 민병조직인 남부레바논군(SLA)의 소식통이 밝혔다. 이 소식통은 게릴라들이 박격포와 대차미사일,자동소총 등으로 이스라엘군을 공격했다고 말했다. 이로써 올들어 아랍­이스라엘간의 분쟁지역인 레바논 남부에서 사망한 이스라엘병사는 모두 9명,부상자는 30여명으로 늘어났다.
  • 이유없는 미군 습격 급증/주한미군사령부 성명/16명은 성폭행 당해

    주한미군사령부는 15일 최근 잇따르고 있는 미군 및 군속등 미군관련자에 대한 한국인의 각종 폭행과 관련,『지난달 19일 서울 충무로 지하철 사건 이후 이유없이 주한 외국인에 대한 습격이 급증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우려를 표명했다. 주한미군은 이날 「주한미군과 미국인들이 관련된 사건에 대한 최근 소식」이라는 제목의 성명을 통해 이같이 밝히고 『(한국인들의) 외국인(미군 및 군속)에 대한 이유없는 습격은 16건의 강간,수 건의 강간미수,가택침입 및 강도,다수의 절도 및 최소한 10건의 폭행사건이 포함돼 있다』고 주장했다.
  • 체첸반군 러 관청 습격/부데노프스키시/시민·경찰등 41명 사살

    【모스크바 AP AFP 로이터 연합】 체첸반군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무장괴한 1백여명이 14일 러시아 남부의 부덴노프스크시를 공격,시민과 경찰 등 최소한 41명을 죽이고 1백60여명의 인질을 잡고 체첸공화국 방면으로 도주했다. 박격포와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이들 괴한들이 이날 정오께(현지시간) 2대의 트럭과 2대의 버스에 나눠타고 체첸공화국에서 북쪽으로 70㎞ 떨어진 인구 10만명 규모의 부덴노프스크로 진입해 시의회,은행,경찰서 등 주요건물을 공격하고 전화선을 끊는 등 주요 관공서들을 공격했다. 러시아군은 이와 관련,북부 카프카스지방의 군대에 비상경계령을 내렸으며 수도 모스크바의 정부기관 등 주요시설에 대한 경계 강화를 지시했다. 이타르타스통신은 올레그 소스코베츠 러시아 제1부총리가 관계기관의 비상대책회의에서 이들 테러분자가 러시아정부의 체첸공화국에 대한 군사개입 중지를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고 보도했다. 【모스크바 연합】 지난 14일 러시아 남부 부데노프스크시의 대형병원을 점거한 체첸분리주의자테러범들이 억류하고 있는 인질의 숫자는 1천여명에 달한다고 이타르타스통신이 15일 스타브로폴 지방정부 관리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이타르타스통신은 하룻밤을 테러범들에게 붙잡혀 있는 병원내 인질의 숫자는의사와 간호사 등 직원 4백여명과 입원중인 환자 5백여명을 포함해 모두 1천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러,인질협상 【모스크바 AFP AP 연합】 니콜라이 예고로프 부총리를 비롯한 러시아 고위관리들은 15일 체첸반군으로 보이는 무장괴한들이 러시아군이 체첸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붙잡고 있는 60여명의 인질들을 모두 살해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는 가운데 러시아 남부 부데노프스크에서 무장괴한들과 협상에 들어갔다고 이타르타스 통신이 보도했다. ◎체첸,대러 테러 배경과 전망/거점잃은 반군,민간인 테러로 보복/러 소탕작전에 저항… 최대규모 습격 부데노프스크시 테러사건은 체첸사태 발생이후 체첸공화국 영토 밖에서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테러라는 점에서 많은 우려를 자아내게 한다.러시아 정부는 특히 이번 사건이 13일 체첸영토내 저항군 거점에 대한 막바지 소탕작전을 끝낸 바로 이튿날 일어났다는 점에서 크게 당황하고 있다.가장 우려해왔던 최악의 시나리오,즉 러시아영토내에서 민간인을 상대로 한 체첸저항군들의 무차별 테러가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6월초 체첸저항군의 산악거점 사령부가 위치한 베데노지역이 러군 수중에 들어간 뒤 저항군은 그동안 몇개 그룹으로 나뉘어 산발저항을 계속해왔다.지휘체계도 일원화되지 않아 두다예프가 지휘하는 그룹과 체첸군 총사령관인 아슬란 마스하도프,그리고 샤밀 바사예프 사령관이 이끄는 조직 등으로 흩어졌다.이런 상황에서 13일 최후저항거점인 샤토이,노자이­유르트에 대한 러군의 대규모 공격이 감행됐던 것이다. 사건 배후가 아직 분명히 가려진 것은 아니지만 러시아 텔레비전이 내보내는 화면 등을 보면 체첸저항군 일파가 저지른 것이 분명한 것같다.이제 체첸군도 러시아군과 정상적인 화력대결을 벌일 단계는 지났다고 판단한 듯하고 이는 두다예프가 여러차례 호언해온 마지막 수단인 민간인에 대한 테러의 신호탄인 셈이다. 그러나 이런 위협에 굴복해 러군이 체첸영토에서 물러날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다는 게 이곳 군사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당초 체첸에 무력을 투입해 군사작전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보여주었듯이 옐친정부가 민간인 희생을 두려워해 군대를 철수할 리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이번 사건은 군사적으로 궁지에 몰린 저항군 일부가 저지른 단발적인 성격이 짙다.따라서 사태의 파장을 보는 시각도 대체로 체첸측에 대해 부정적인 쪽이다.
  • 체첸 무장괴한,러 관청 습격/부데노프스크/인질 2백여명 잡고 도주

    ◎40여명 경찰과 총격전… 수십명 사망 【모스크바 로이터 AP 연합 특약】 체첸공화국 무장대원들로 보이는 40여명의 무장괴한들이 14일 러시아 남부 부데노프스크시를 습격,정부 건물을 점거한뒤 무차별 총격을 가해 수십명이 사상했다고 러시아 언론들이 보도했다. 인테르팍스 통신에 따르면 이날 낮 12시 30분쯤(현지시간) 체첸공화국으로부터 북쪽으로 70㎞ 떨어진 부데노프스크에 괴한들이 두대의 큰 트럭을 타고 진입,갖고 있던 자동 소총으로 공격하면서 경찰과 연방보안처(FSB)본부,지방 커뮤니케이션 센터등이 입주해있는 정부 건물을 점거했다. 이들은 이어 외부로 연결되는 전화선을 모두 끊은뒤 2백여명의 시민을 인질로 삼아 체첸공화국 방향으로 달아났다. 타스 통신은 또 괴한들이 러시아 헬리콥터를 격추시켰으나 승객들은 모두 안전하다고 덧붙였다.
  • 일 문화원 화염병 대학생 13명 구속/「한통시위」 13명도

    서울 경찰청은 7일 서울 종로구 운니동 일본 문화원 화염병 습격 사건과 관련,강국진군(20·중앙대 사학과 3년) 등 13명을 화염병 사용에 관한 법률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경찰은 또 한국통신 노조 간부 연행에 항의하며 지난 6일 대한극장 앞 도로를 점거,시위를 벌인 윤지희양(20·성균관대 금속공학과 4년) 등 13명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 5·10 총선거(새로 쓰는 한국현대사:21)

    ◎최초의 민주·자유선거… 공산진영 저지투쟁/우익 “승리” 평가… 남북협상파선 “무효” 주장 해방정국이 종지부를 찍은 그 대미는 19 48년 5월10일의 5·10선거로 장식됐다.그만큼 해방정국에서 5·10선거가 차지하는 비중은 컸을 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시사했다.해방이후 늘상 그랬던 것처럼 5·10선거에서도 숱한 대립과 희생이 뒤따랐다.그러나 5·10선거는 이 땅에서 치러진 최초의 민주주의 자유선거로 기록되고 있다. ○단선·단정에 강력 반발 미군정의 5·10선거 준비는 공산주의 세력의 극한 저지투쟁과 남북연석회의등 단선·단정 반대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차근차근 추진됐다.1948년 3월1일 「조선인민대표의 선거에 관한 포고」를 통해 선거를 5월9일 실시한다고 발표함으로써 미군정은 남한 단독선거를 공식화했다.이어 이틀뒤인 3일에는 행정명령 제14호를 통해 선거를 관장할 국회선거위원회를 발족시켰다.여기에는 김법린 노진설 이갑성 백인제 최두선 등 15명의 위원이 참여했다.3월17일 마침내 전문 57조로 된 국회의원선거법을 미군정법령제175호로 공포했는데 이 법은 전년도 9월3일 공포한 입법의원선거법을 기초로 제정된 것이다. 이 선거법은 선거권을 만21세,피선거권을 만 25세로 규정했다.그리고 임기 2년의 국회의원을 2백개의 소선거구에서 뽑도록 규정한 선거법은 해당 선거구의 유권자 2백명 이상 추천만 받으면 누구나 입후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이를 토대로 국회의원선거법 시행세칙은 3월22일 공포됐다. 미군정이 결정한 선거일정은 사실상 빠듯한 것이었다.그래서 당시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준비를 이유로 선거일을 5월24일로 연기해 줄 것을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 요청했다.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소관사항이 아니라는 이유로 미군정에 넘겨 선거일은 5월10일로 최종 결정됐다.미군정은 행정명령 제20호를 통해 이를 정식으로 공포했다.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5·10선거를 앞두고 내부적으로 적지않은 갈등을 겪었다.그 첫째 이유는 자신들을 「미 제국주의의 도구」로 비난하는 공산주의자들을 의식했기 때문이다.또 미군정하인 만큼 위원단이 선거에서 얼마만큼 자유로운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다.따라서 위원단과 미군정 사이의 입장차가 실제 표출됐다. 이같은 상황은 하지 사령관이 마셜 미 국무장관에게 보낸 48년 3월17일자 비밀보고에서도 드러나고 있다.여기서 하지가 「유엔한국임시위원단내 시리아,오스트리아,캐나다 대표가 소련의 변호자 또는 유화주의자로서의 본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비난한 대목이 보인다.또 「이들은 공산주의자의 대변자와 동조자 노릇을 할 뿐만 아니라 남조선내 총선 반대파의 대표행세를 하고 있다」는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미 대외문서철·1948년). 위원단은 자유로운 선거분위기와 관련해 3월17일 제26차 전체회의에서 하지에게 보내는 비공개 건의문을 채택했다.그 내용은 경찰의 선거간섭금지,청년단체들의 선거방해에 대한 철저한 단속,정치범 특사등을 포함한 17개항목으로 돼있다.위원단은 또 자유로운 선거분위기가 이루어질 때만 선거를 감시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현지조사에 나섰다.그 결론은 4월28일 「출판 집회와 같은 민주주의적 자유가 인정되고 존중되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남조선에 실질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에 만족한다」는 것으로 나왔다.그리하여 5·10선거를 감시할 것을 결의했다. 선거일정은 예정대로 진행돼 3월30일부터 4월9일까지 유권자 7백83만7천5백4명이 등록을 마쳤다.이에맞서 좌익의 파괴공작도 심화됐다.남로당은 대중선동,항의시위,파업,협박,파괴,방화,살인,폭동등 모든 선거를 총동원해 선거를 방해했다.미군정도 선거촉진위원회를 조직해 대대적인 선거홍보를 벌이면서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등 각종 사회단체를 통해 선거인 등록 독려에 나섰다.미군정은 4월16일 극좌 계열의 선거방해를 막기위해 18∼55세 남자들의 의무봉사단체인 향토보위단도 조직했는데 주로 시민들과 청년단체 회원들을 참여시켰다.이 향보단은 5월22일 해체될 때까지 선거와 관련한 좌익 반대투쟁 저지임무를 맡았다. ○좌익 일제히 선거 불참 그러나 선거에서 좌익은 선거저지를 위한 투쟁에만 총력을 기울였을 뿐 선거자체에는 참여하지 않았다.이는 4월16일 후보자 등록 마감결과 철저히 나타났다.모두 48개의 정당과 사회단체 또는 무소속으로 출마한 입후보자 9백48명은 모두 반탁·반공·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우익세력이었다.남로당의 「민전」산하단체와 남북협상파는 선거에 불참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서 5·10선거가 다가왔다.북제주군 2개구를 제외한 총 1백98개의 선거구에서 등록 유권자의 95.2%인 7백3만6천7백50명이 투표에 참여한 선거가 실시됐다.개표결과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2백35명의 후보자중 55명의 당선자를 냈다.이어 한민당이 91명의 후보자가운데 29명,대동청년단이 87명중 12명,민족청년단이 20명중 6명을 당선시켰다.무소속도 4백17명이 입후보해 85명이 당선되는 등 모두 1백98명의 선량이 탄생했다. 선거기간중 좌익의 반대를 위한 반대투쟁은 극한으로 치달았다.선거당일만 해도 투표소,경찰서 습격과 경찰관,선거위원등에 대한 테러로 경찰 5명,공산주의자 9명,우익인사 4명등 모두 18명이 피살됐다.제주도에서는 3개 선거구가운데 북제주 2개 선거구에서의 폭동때문에 투표를 무효화하고 49년 5월10일 재선을 실시할 정도였다. ○무기르성명에 격분 선거결과는 이들 반대투쟁을 벌인 소련과 남·북조선의 노동당,남북 협상파에게 심각한 타격을 안겨주었다.미군정 당국과 우익측은 선거의 성과를 민주주의의 승리로 간주한데 비해 민전과 남북협상파인 한독당 신진당등은 일제히 5·10선거의 무효성명을 냈다.선거결과에 대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평가도 엇갈렸다.위원단내의 시리아대표 무기르는 의장자격으로 선거결과도 나오기전인 5월13일 위원단 공보 제59호를 통해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풍파를 일으켰다.그는 이 성명에서 투표당일 일부 투표소에는 향보단원과 경찰제복의 청년단체들이 투표자들의 자유에 일정한 제약을 가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시리아 대표 무기르의 성명은 위원단의 다른 대표들뿐만 아니라 하지와 그의 정치고문 제이콥스의 격분을 샀다.제이콥스는 5월13일 마셜 국무장관에 보낸 무기르 성명에 대한 논평에서 무기르를 호되게 비판했다.제이콥스는 『위원단 내부에 조선이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는 집단이 있다』고 위원단의 일부 대표들의 태도를 보고할 정도로 무기르의 주장을 신뢰하지 않았다(미 대외문서철·1948년).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6월25일 채택한 결의에서 5·10선거의 유효성을 인정했다.이 결의서는 『5·10선거는 십분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실시되었다』고 최종평가를 내렸던 것이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 발굴/「1948년 미 대외문서철」/UNTCOK대표 6인 「소 동조자」로 활동/무기르의장 “5·10총선 자유제약” 성명/미 군정,“한국을 소 위성국화 기도” 분석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 시리아 대표인 얀신 무기르(Yansin Muguir)가 1948년 5월13일 5·10선거 최종결과가 나오기전에 의장자격으로 발표한 선거 유효성 문제제기 성명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특히 UNTCOK 자체에서도 논란의 대상이 되어 5월14일 긴급소집한 41차 전체회의에서 그의 해명을 받아낸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서울신문 특별취재팀이 입수한 당시 미국 연락장교 비망록을 통해 확인한 것이다.비망록에 수록된 이날 전체회의 기록에 따르면 무기르가 「의장자격으로 UNTCOK 공보지(제59호)에 5월13일 발표한성명은 어디까지나 사견」이라고 해명한 것으로 되어있다.「전체적으로 선거는 원활하고 능률적으로 수행되었다」고 선거성과를 인정하면서도 「투표자들의 자유에 일정한 제약을 주었다」는 그의 성명은 여러 대표들을 격분케 했다는 것이다. 무기르의 성명은 다른 대표들과 사전 협의도 없이 단독 발표했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가 됐다.그래서 UNTCOK 전체회의는 무기르의 성명을 전적으로 개인책임으로 돌렸다.이렇듯 UNTCOK가 비난을 받지 않도록 조치한 일련의 내용들이 연락장교 비망록 참고자료에 들어있다.UNTCOK는 아마도 당시 한국의 선거이후 분위기를 상당히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한국언론의 사설들이 「5·10선거는 살인적 분위기에서 단행된 애국적 열성」이라고 다루는 등 선거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 때에 나온 하지 장군 정치고문 제이콥스의 논평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안에 공산주의 집단이 있다」는 내용도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서울신문 특별취재팀이 입수한 1948년 「미 대외문서철」에 따르면 무기르의 성명은 UNTCOK사무국 비서인 슈미트(네덜란드인)가 작성,무기르를 내세워 이용한 것으로 돼있다.이 문서철에서는 무기르와 슈미트,역시 사무국 비서인 밀러(호주인)와 엔게로스(네덜란드인)등을 호주대표 잭슨과 캐나다대표 패터슨의 교사를 받는 인물로 분석했다.그리고 이들의 목적은 UNTCOK 활동이 실패로 돌아가 한국을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어떻든 공산주의 손길이 유엔 서방측 요원에까지 뻗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그러고 보면 1950년부터 일기 시작한 미국의 공산주의자 적발·추방 바람,이른바 매카시즘도 이런 맥락과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 스리랑카 내전 격화/정부·반군 47명 사망

    【콜롬보 AFP 로이터 연합】 스리랑카 타밀반군이 23일 동부 바티칼로아에서 순찰중인 정부군을 습격,정부군 27명이 숨지고 반군도 20명이 사망했다고 군소식통들이 말했다.
  • 남아공의 뿌리 흑백인의 만남(아프리카 기행:12)

    ◎남아공 원래 주인은 “산족 부시맨”/2천여년전 북부서 이주… 17C부터 유럽인 통치/흑인대통령 탄생 불구 경제권 등 백인들이 장악 우리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이라고 부르고 있는 이 지역의 원래 주인은 영화를 통해 잘 알려진 부시맨들이었다.산족이라고도 부르는 이 유목민들은 2000년전쯤 지금의 수단 땅 아프리카 북부에서 양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차차 남아프리카의 서부해안으로 이주해 이곳에 자리잡고 살게 되었다.그리고 나서 16세기에 비로소 이곳을 찾아온 백인들과 조우했다.다른 한편으로는 부시맨들과 아주 다른 언어인 반투어를 쓰는 코이코이족(네덜란드인들은 이들을 호텐토트족이라 부른다)이 있었는데 이들은 짐바브웨 지역에 살면서 철기를 다루고 소를 길러 양식으로 삼았다.이들 코이코이족은 남아프리카의 동부해안으로 내려와 자리잡았다.현재의 이스턴케이프에 해당하는 지역에 살았던 이들은 17세기에 백인들과 만나면서 서부해안의 부시맨들과는 달리 백인들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16세기 백인과 첫 충돌 유럽에서 남아프리카에 최초로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은 포르투갈인이었다.이들은 1487년부터 1488년 사이에 인도로 가는 항로를 발견해내기 위한 항해도중에 남아프리카에 닿았다.그러나 영구적인 정착지를 만들어낸 사람들은 네덜란드인들이었다.1652년 얀반 뢰빅(JANVAN RIEBEECK)은 일단의 네덜란드인들을 이끌고 오늘의 케이프타운에 해당하는 테이블마운틴 아래 해안가에 상륙했다.이 해안선을 지나가는 네덜란드의 선박들을 위한 중간기착기지로 삼기위한 것이었다.그러나 자신들의 식량자급이 힘들어지게 되자 뢰빅은 함께 온 부하들중 일부를 해방시켜 주변의 땅에서 농사를 짓게 하였다.그는 또한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과 극동지방들로부터 노예들을 사들이기도하여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이렇게 해서 네덜란드인들은 해안지방에서 부터 내륙으로 야금야금 침투해 들어가면서 남아프리카를 그들의 식민지로 만들어 갔다.네덜란드에서 온 이주자들은 처음엔 보어인으로 불렀으나 나중엔 본토어에서 파생된 언어인 아프리칸스어를 쓰게 되면서 그 이름을 따 「아프리카너」라고불리게 되었다.그 뒤 부시맨 그리고 코이코이족과 아프리카너들 사이에서는 케이프컬러드(Cape Colored)라는 혼혈인종이 생겨나게 되었다.아프리카너들은 희망봉 일대에서 내륙쪽으로 이동하여 반유목생활을 하는 농민이 되었는데 주로 피시강 부근에 안정된 농경생활을 하던 이들은 비교적 인구가 많았던 코사족과 충돌하기 시작했다.1775년에는 사소한 소떼의 약탈이 원인이 되어 아프리카너와 코사족의 국경전쟁이 일어나 100년동안이나 간헐적으로 지속되었다. ○1백여년간 국경 싸움 한편 처음 아프리카너들과 충돌하였던 코이코이족은 자신들의 영토에서 쫓겨나 아프리카너들이 경영하는 농장에서 노동을 강요당하는 완전한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부시맨들은 불모지나 산악지대로 쫓겨나 굶주렸는데 굶주리다 못한 이들이 가축을 도적질하다가 수천명이 살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남아프리카의 영토싸움과 인종차별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1795년에 영국군은 당시 케이프식민지였던 지금의 케이프주를 점령했다가 1802년 그 지배권을양보했었고 1806년 다시 점령지를 되찾는다.영국인들은 국경을 따라 코이코이족을 비롯한 반투어를 쓰는 종족들을 하나하나 정복하기 시작했다.그로써 18 30년대에 이르러 아프리카너들이 노예들을 데리고 오렌지강과 발강을 건너 북상하는 대이주가 시작되었다.바로 이 시기에 아프리카너(보어인)들은 오렌지자유국(1854)과 남아프리카공화국(1838,후에 트랜스발공화국이 됨)을 세운다.두 공화국은 1850년대 모두 영국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되었다.그러나 보어공화국들은 영국인들이 자신들을 남아프리카연방에 포함시키려 하자 이에 맞서 저항하였고 그 결과 1899년 드디어 두 공화국과 영국 사이에 이른바 보어전쟁이 발발한다.그러나 1902년 보어인들의 저항은 진압되었다.두 공화국은 결국 남아프리카공화국에 포함되고 말았다. 남아공화국의 형성과정은 이토록 복잡한 역사적 질곡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그 나라가 겪고 있는 인종차별도 그런 역사 속에서 명료하게 찾아볼 수 있게 된다.그러한 질곡과 투쟁 끝에 흑인인 만델라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트랜스발주에 있는 요하네스버그의 중심시가지에는 흑인노동자들과 노점상,그리고 실업자들이 분주하게 오갔지만 공기 좋고 그늘지고 경관 좋은 곳에 벌어진 벼룩시장의 난전에서는 흑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수도 요하네스버그는 남아공의 수도이고 상업의 중심지로 금광회사의 본사가 대부분 이곳에 있기도 하다.이 나라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기도 한데 유색인종은 이 수도의 서부와 남서부의 특정지역에서만 주로 거주한다.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거의가 백인이었고 걸어다니는 사람은 흑인들이었다. ○흑인은 거의 걸어다녀 우리를 시내의 언덕 위에 있는 대통령궁으로 안내하였던 백인 운전사는 불과 한달 전에 자신의 아내가 흑인들의 습격으로 숨졌다는 사실을 토로하였는데 운전기사의 표정이 시종 굳어 있긴 하였지만 도대체 불과 한달 전에 아내를 잃은 사람치고는 침울하다든가 슬프다든가 하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어 반신반의하게 만들었다.그는 만델라가 대통령이 된 이후로 신문에는 보도되지 않고 있지만 흑인에 의한 백인들의 피해가 뚜렷하게 증가하고 있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하지만 얼른 지나가는 관광객들의 시선에는 이 나라는 정치와 경제에 있어 아직도 백인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증거와 조짐들이 너무나 뚜렷하였다.남아공화국의 법률은 백인,그리고 흑인과 백인의 혼혈인 컬러드인,인도인을 주축으로 한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흑인),4대 인종집단을 인정한다.이중에서 아프리카흑인은 전인구의 3분의 2이상이고 컬러드는 10분의 1,백인은 전인구의 5분의 1이다.이 백인들이 대통령직을 제외한 남아공화국의 모든 것을 쥐고 있다는 인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그러나 남아공의 출입국관리소 백인 직원은 멀리서 온 이 동양인에게 너무나 친절하고 싹싹해서 황송할 지경이었다.
  • 식인상어(외언내언)

    거대한 상어가 주인공이었던 영화 「조스」는 스토리의 엽기성과 충격적인 장면,인조 상어의 정교한 제작 등으로 화제가 되었다. 미국 어느 지방 휴양도시의 해수욕장에 어느날 갑자기 길이 7m나 되는 거대한 식인상어가 나타나 여러명의 해수욕객을 잡아먹는다.엄청나게 큰 아가리에 창날같은 이빨을 지닌 조스는 무서운 속도로 돌진하여 인간을 해친다.그 끔찍한 장면 장면은 공포영화의 압권으로 평가됐을 정도.1975년 영화의 귀재 스티븐 스필버그의 작품이다. 조스가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둔 요인중 하나는 소도구인 식인상어가 실제 상어와 똑같이 만들어진데다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할리우드의 재빠른 상혼이 이를 놓칠리 없었다. 영화제작이 끝난뒤 관광코스인 유니버설영화사 세트장에 옮겨다 놓았다.호수속의 조스는 영화에서처럼 낚싯배를 공격하는 장면을 재현케 했다. 식인상어의 피해는 세계도처에서 발생되고 있다.호주나 남아공,적도 가까운 나라에서는 해수욕장에 상어침입을 막는 방벽망까지 설치한다.식인상어는 공복시 얕은바다로 나오며 때때로 해수욕장을 공격한다. 피냄새를 맡으면 떼로 몰려들기 때문에 잠수부들이 작살로 고기를 잡을 때 위험하다.색깔에도 예민해서 흰바탕에 검은줄무늬가 있는 수영복은 상어의 공격 대상이 된다는 것.먹이에 가까이 접근해서 몸길이를 대보고 저보다 크면 공격을 자제할만큼 영악하다.그래서 상어가 습격해올 때 헝겊을 풀어 늘어뜨리면 안전하다는 퇴치법도 있다. 엊그제 충남 보령앞바다에서 식인 상어의 습격을 받고 작업중이던 해녀가 목숨을 잃었다.불행한 일이다.우리나라 근해에 출몰하는 식인상어는 청상아리.59년 수영중인 대학생이 첫 희생자가 된 이래 이번이 다섯번째의 참변.이 일대해역에서만 식인상어의 공격이 이어지고 있다.우리 서해안도 상어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경고다.
  • 서해에「식인상어」출현/어제낮 보령앞바다/전복따던해녀 다리물려 숨져

    【보령=이천열 기자】 12일 낮 12시 쯤 충남 보령시 오천면 장고도리옆 명장섬 앞바다에서 전복을 따던 해녀 김순심(44·보령시 신흑동 855의18)씨가 식인상어에 물려 숨졌다. 김씨는 명장섬으로 부터 5백m 쯤 떨어진 바다에서 전복채취작업을 하다 갑자기 나타난 3∼4m 쯤 되는 검은색 상어에 오른쪽 다리를 물어 뜯겨 변을 당했다. 부인 등 해녀를 어선에 태우고 바다에 나온 김씨의 남편 편광삼씨(36·어업)는 『집사람이 한번만 더 바다에 들어갔다 오겠다며 물속으로 들어가 5분 쯤 지났을 때 갑자기 몸이 물위로 튀어올라 쳐다보니 시커먼 상어가 다리 한쪽을 물고 있었다』며 『집사람이 다시 물속으로 처박힌뒤 상어는 자취를 감췄다』고 말했다. 상어의 습격을 받은 김씨는 동료 해녀들에 의해 배로 올려졌으나 출혈이 심해 이미 숨져 있었다. 태안 양경찰서는 경비정 3척과 30명을 동원,식인상어 수색작업에 나섰으나 발목 아랫부분만 찾아냈다. 이 일대에서는 지난 59년 해수욕을 하던 대학생이 상어의 습격을 받아 숨지는 등 지금까지 모두 4명이 희생됐다.
  • 북 선거 폭력 27명 사망/후보4명 포함/매표 등 부정도 만연

    【마닐라 로이터 AP 연합】 필리핀이 8일 상·하원의원및 지방자치단체장선거를 실시한 가운데 7·8일 이틀동안 선거입후보자 4명을 포함한 최소한 27명이 선거폭력으로 사망하고 40여명이 부상했으며 매표,투표함 강탈 등 부정행위도 만연했다. 마닐라 남쪽 9백30㎞에 위치한 마가노이마을에서는 8일 새벽 회교반군들이 마을중심가에 10여발의 박격포탄을 퍼부어 6명이 죽고 17명이 부상했고 마닐라근교에서 입후보자 2명이 피살됐으며 7일에도 다른 입후보자 2명과 후보의 가족이 괴한들의 습격을 받고 피살됐다. 선거관계자들은 또 매표행위가 만연되고 있어 마닐라의 일부지역에서는 1표에 2백∼3백 필리핀페소(약6천∼9천원)에,필리핀 남부지방에서는 5백페소에 거래되고 있다고 말했다. 경찰과 선거관계자들은 지난 1월 선거유세가 시작된 이후 현재까지 필리핀내 76개주가운데 21개주에서 발생한 선거폭력으로 인한 사망자수는 총 60명에 달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같은 폭력사태에도 불구,투표는 이날 상오 7시(한국시간 8일 상오 8시)시작돼 하오 3시(한국시간 하오4시)에 마감됐다.최종 개표결과는 수주일후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마닐라TV방송의 비공식집계결과 피델 라모스 대통령이 이끄는 집권연정이 막강한 영향력을 보유한 상원의 12개선거구중 9개 선거구에서 앞서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미국은 아시아와 공생하는법 배워라/앨런토넬슨 미경제전략연구소연구원

    미국은 탈냉전의 상황에서 아시아와 공생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군사력이 아니라 경제적 힘에 의존해야 한다고 앨런 토넬슨 미국 경제전략연구소(ESI)연구원이 최근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지에 기고한 글에서 주장했다.다음은 기고문 내용이다. 미국 클린턴 행정부의 동아시아 전략은 크게 분열돼 있다.앞으로 클린턴 대통령이 새로운 전략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보호무역주의적이고 군사적으로 위험한 이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의 무역장벽을 제거하여야한다는 미국 관리들의 주장은 제각각이다.그렇지만 지금까지 미국정책은 현상유지론자들의 주도로 진행돼 왔다.거시경제학적 정책입안자들은 강력한 무역정책이 금융시장과 달러화를 위축시킬까봐 두려워하고 안보담당자들은 50년간의 미·아시아군사동맹을 유지하는 것만이 아시아지역에 있어 미국경제이익을 성장시키기 위한 핵심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국방부가 지난 3월 펴낸 「동아시아·태평양지역의 미국전략」이라는 보고서는 이들의입장을 확연히 드러내주고 있다.보고서에 따르면 미국동맹체제와 미군의 아·태지역 주둔은 2가지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2가지 역할은 ▲동아시아·태평양지역의 주요 비공산국가를 보호하고 특히 일본을 평화상태로 유지함으로써 미국을 위한 아시아 경제파트너 국가의 안정과 번영을 상승시키게 하며 ▲미국이 무역과 다른 경제적 협상을 할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보고서는 따라서 부시대통령이 한때 신중하게 생각한 이 지역 주둔군 감축안은 중단돼야 하며 일본등 여타국가들과 무역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협상에 대해서도 『무역마찰이 우리의 안전을 훼손시키도록 내버려둬서는 안된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냉전시대에 합당한 충고다.탈냉전세계에서 이같은 충고를 따르는 것은 이미 폐물이 된 방법으로 혼란스럽고 위험한 목적을 좇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역사적으로 볼때 아시아지역에서의 미국군사역할이 워싱턴측에 중요한 협상수단을 제공한 적이 없다.수십년간 워싱턴은 일본과 인접국가들의보호무역주의를 견뎌왔다. 최근 국방부의 무역마찰에 대한 경고는 똑같은 논리가 오늘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준다.그동안의 결과란 아시아국에 대한 미국의 상품무역적자는 1천1백50억달러이며 투자와 기술은 한쪽으로만 흘러갔다는 것이다.더욱 심각한 문제는 미국이 경제회담에서 군사력 카드를 쓰려해도 아시아의 미국군사역할이 이제는 가치를 상실하고 있는 점이다.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는 여전히 주둔미군의 가치를 인정하지만 소련멸망이후 미군의 임무가 줄어들었다고 여기고 있다. 국방부 보고서의 결의만으로는 특히 「안정」이라는 모호한 목적에 군사적 전략을 중심에 둘수 없다.안정을 생활과 예산측면에서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안정이 군사적 우선권으로 해석될 수 있는가.미 관리층이 이에대한 명확한 답변을 하지 못하면 그들은 위협이 발생할때 필요한 국내 정치적 지지를 충분히 받지 못하고 전략적 지도력도 제대로 발휘할수 없을 것이다.이같은 전략부족 때문에 미국은 남사군도에서 중국의 습격에 수동적으로 대응했으며 북한에 대한 정책이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했다.따라서 많은 아시아 국가들은 자국 군대에 투자를 집중적으로 강화하고 있다. 아시아 안정은 여전히 미국에는 중요한 문제이며 적당한 군사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그러나 팽창주의를 꿈꾸던 소련이 없는 새로운 탈냉전의 상황에서 미국은 아시아와 함께 지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현상유지론자들의 입장과 달리 이같은 목적을 얻기 위해서는 안전동맹이 아니라 미국의 경제적 힘에 의존해야 한다.아시아인들은 미국의 군사적 능력에 대해서는 회의할지 모르지만 미국의 자본,기술,시장은 간절히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이같은 미국의 자산에 아시아의 접근을 조절하는 것이 미국의 아시아시장 진출을 확대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그러나 이 전략은 미국이 절대적인 경제적 힘을 높이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낮은 투자율과 막대한 예산적자를 가진 나라는 쉽게 아시아의 주요 자본및 기술 상대자로 남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시대에 뒤떨어진 동맹체제에 집착하는 초강국은 결국 강력한 경제적 라이벌들을 도와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클린턴 행정부는 아시아에서 이 어려운 선택을 피하는 것이 우선은 편안하다고 여길지 모른다.그러나 미국의 아시아에 대한 적자가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미국의 경제성장과 직업창조는 더뎌지고 달러화는 약화되며 클린턴의 재선가능성은 더욱 낮아질 것이다.
  • 이진무/만주 일대서 16년간 항일무장투쟁(이달의 독립운동가)

    ◎서울신문사·보훈처·독립기념관 선정/독립군 정예요원… 일 기관 습격·친일파 처단/「흑하사변」이후 국내잠입 활동… 35세때 순국 「5월의 독립운동가」로 국가보훈처가 선정한 성상 이진무(1900∼1934년5월18일)선생은 짧은 생애를 조국에 아낌없이 바친 애국자였다. 19세때 만주땅에서 항일투쟁에 처음 나선 이후 일제에 붙잡혀 35세로 순국하기까지 16년동안 크고 작은 전투를 수없이 치른 투사였던 것이다. 평북 정주 출신의 선생은 체구가 비록 작고 애꾸눈이었지만 불의를 보면 열화와 같이 격노하는 성격이었다.만주일대에서 무장활동을 전개할 때 「일목장군」이라 불렸다.또한 중국의 소설 수호지에 나오는 1백8명 두령 가운데 한사람인 흑선풍 이규처럼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으로 「만주의 흑선풍」이란 별명도 있었다. 선생이 독립의식을 확고하게 갖추게 된 것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의 영향이었다.3·1운동이후 일제가 심한 감시와 탄압정책을 펼치는 것을 보고 독립의식에 눈을 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서게 된 것이다. 선생은 우선 만주로 건너가 상해 임시정부 예하 광복군총영에 가입,독립군으로 무장활동을 시작했다.광복군총영은 임정이 만주지역의 교민통치와 군사훈련을 위해 설치한 독립군의 정예부대였다. 선생은 광복군총영이 1920년8월 미국 상·하의원으로 구성된 동양시찰단이 서울을 방문하는데 맞춰 일제의 주요기관을 폭파하고 침략원흉을 처단키로 하는 계획을 세운데 따라 처음 무장활동에 참가했다.광복군총영은 이 계획에서 서울과 평양·해주·신의주등 5곳을 항일운동의 진원지로 삼아 일제기관을 폭파하기로 했었다. 신의주로 잠입한 선생은 신의주역과 호텔에 폭탄을 던지는등 맹활약을 펼쳤다.선생은 이어 동지들과 함께 선천군에서 일경과 일제의 주구 몇사람을 제거한 뒤 신의주감옥을 습격하려다 일제에 사전발각되는 바람에 만주로 되돌아왔다. 선생을 포함한 독립군들은 그러나 1920년 봉오동과 청산리전투에서 일제를 대거 무찌르는 대승을 거둔 이후 1922∼1923년까지 2∼3년동안 엄청난 시련을 겪어야 했다.독립군들은 「복수」에 돌입한 일제 관동군의 대대적 공세를 피해 노령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레닌의 정책으로 엄청난 인명피해를 보고 거의 소멸할 뻔한 처지에까지 몰린 것이다.레닌의 「코민테른」은 당초 독립군을 받아들였다가 일제의 눈치를 보고 방침을 전환,무장해제를 이유로 독립군을 공격했다. 후세에 자유시참변(흑하사변)으로 명명된 이 사건으로 독립군은 수많은 동지를 잃는 아픔을 맛봤다.어쩔 수 없이 만주로 되돌아온 독립운동가들은 새롭게 진열을 정비,1922년 대한통의부를 결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같은 사정으로 자연스레 통의부에 가입한 선생은 4개 중대로 편성된 통의부 의용군에 소속됐다. 선생은 통의부가 국내진입작전을 지시한데 따라 통의부 2중대소속으로 1924년 동지 수명과 함께 국내로 들어와 일경과 총격전을 벌이면서 군자금모금활동에 나섰다. 선생은 곧 1925년 통의부가 대한군정서·길림주민회·대한광정단·대한독립단·노동친목단·학우회등 다른 독립단체와 통합,정부성격의 정의부로 확대됨에 따라 정위부 5중대로 소속을 옮기고 국내진입작전을 수차례 펼쳤다. 선생은이어 철산군으로 들어와 일경주재소를 습격,일경 4명을 사살하는등 1927년까지 국내에서 일경과 독립군 밀고자 처단등의 활동을 끊임없이 벌였다. 선생은 이후 정위부와 참의부·신민부등 독립운동단체가 서로 모여 민족유일당인 조선혁명당을 창당하자 예하인 조선혁명군에 가담,잠시 활동을 같이 하다 동료들과 1929년 재만조선인 혁명군을 결성,독자적 독립활동을 벌였다. 선생은 그러던중 1932년 안동에서 일제에 붙잡혀 신의주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평양형무소에서 마침내 순국했다. 나라를 되믿기 위해 몸을 바친 선생의 염원은 미처 꽃도 피우지 못한 채 스러지고 말았던 것이다.정부는 선생의 공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중,티베트 수도원 3곳 습격/독립시위대 1백6명 체포

    【북경 AP 연합】 중국경찰이 서장자치구 납살시인근에 있는 티베트수도원 3군데를 습격,티베트의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시위를 벌인 수녀와 수도승 1백6명이상을 체포했다고 티베트를 연구하는 런던주재 「티베트정보네트워크」가 27일 보도했다. 「티베트정보네트워크」는 지난 2월과 3월중 16번의 시위가 벌어져 수녀 56명과 수도승 50명이 체포되거나 수도원에서 추방당했고 티베트의 독립을 요구하는 배지를 달고 있던 한 수도승이 체포된 사건이후 무장경찰이 납살시에서 25㎞ 떨어진 날란다수도원을 습격해 티베트국기 2개를 압수했다고 전했다.
  • 미·소공동위 결렬 이후(새로 쓰는 한국 현대사:16)

    ◎미,한반도문제 유엔총회 상정/유엔 남북총선·한국임시위 설치 결의/소 「한국대표 불참」 이유 임시위 보이콧/남로당,북과 공조 유엔토의 반대 선동 미국은 제2차 미소공위가 정돈상태에 들어간 1947년 여름부터 회담자체에 기대를 걸지 않았다.그래서 팽창하는 공산주의 압력을 저지하기 위한 서구와의 협력문제,한국의 독립이 친미적 반공이념에 입각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문제등을 고려하게 되었다.특히 양극화 현상을 치닫는 동·서냉전의 구도속에서 한반도 문제의 해결은 유엔에 맡기는 것이 최상책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여기에는 당시 남한에 주둔한 2개사단을 철수시킬 수 있다는 군사전략도 맞물려 있었다. 1947년 9월 17일 미국대표는 한국독립문제를 제2차 유엔총회의 의사일정에 포함시킬 것을 전격적으로 요청했다.이날 미 국무장관 G C 마셜은 총회의 연설에서 미국정부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넘기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나섰다.마셜의 연설요지는 미 소협상에 의한 한반도 문제해결은 전혀 전망이 없기 때문에 유엔에 상정한것이며 비록 미국이 의안을 제출했을 지라도 회원들의 공정한 판단이 요구된다는 것이었다.그리고 미 소의 무능으로 한국인이 열망하는 한국의 독립을 더이상 연기시킬 수 없다는 입장을 덧붙였다(미국무성보·1947년). 소련 외상 그로미코는 한반도 문제의 총회 상정은 위법이라고 주장했다.이 문제는 전쟁과 연결된 사안으로 강대국들이 특별한 방법,다시 말하면 모스크바협정(3상회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그러나 운영위원회는 미국의 의안을 12대 2로 가결한데 이어 총회도 이를 동의했다.총회의 제1위원회가 10월 28일 한반도문제 토의를 시작하기전 소련대표는 다른 안건을 내놓았다.그것은 한국민들에게 자신들의 정부를 선택할 기회를 주도록 1948년초까지 미·소의 군대를 한반도에서 철수하자는 내용이었다. 소련의 이같은 안건을 주의깊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이무렵 한반도 북쪽에는 소련의 조종을 받는 자신들의 대리기구인 정부형태의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존재했기 때문이다.또 7월 제2차 미소공위에서 소련이 내놓았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한 정당 및 단체협의체 구성안과도 무관치 않은 것이다.소련은 제2차 미소공위에서 남한의 27개 정당을 우익계 및 중간계라는 이유로 배제시킨 극좌 우세의 지위를 차지하겠다는 의사를 보인 적이 있다(한국에서의 미군정 활동요약·1947년).소련의 이 제안은 제2차 미소공위가 결렬되는 요인의 하나로 작용했다. 어떻든 미국대표는 10월 17일 미국의 제안을 구체화한 결의안을 유엔 사무총장에게 전달했다.미국의 안은 되도록 빠른시기에 한국의 독립이 이루어져야 하고 점령군이 철수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다시 말하면 점령국은 1948년 3월 31일까지 남북한 전지역에서 유엔위원단의 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국회나 중앙정부를 수립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그 정부는 군대를 창설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유엔위원단은 국회 및 정부조직,점령군 철수에 관한 협정체결에도 협의할 수 있다는 위원단의 역할도 제시했다. ○소 별도 결의안 제출 소련은 역시 미국안에 맞서는 2개의 결의안을 별도로 유엔에 내놓았다.그 하나는 남북한에서 선출된대표들을 초청,한국문제 토의에 참가시키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앞서 주장한 한국정부 수립은 한국민에게 맡기자는 요지였다.그러나 도대체 누구를 한국민의 대표로 하느냐는 벽에 부딪혔다.얼핏 매력적으로 보이는 한국대표 참가는 한국임시위원단을 설치하자는 미국의 수정안에 밀려나고 말았다.총회의 제1위원회는 11월 14일 35대 6으로 미국의 수정안을 최종 채택했다. 소련이 내놓은 안건은 미국에 의해 모두 봉쇄된 셈이었다.그로미코는 「총회가 한국민 대표를 참석시키지 않고 한국임시위원단을 설치한다면 소련은 불참하겠다」고 선언했다.이는 뒷날 소련과 소련이 전적으로 조정한 북한에 의해 실현되었다.유엔총회는 11월 14일 미국의 제안을 몇가지만 부분수정하고 최종적으로 채택했다.소련의 제안이 만약 수락되었을 경우 이미 기반을 닦은 북조선노동당과 인민위원회,남조선노동당을 주축으로 한 공산주의가 지배하는 정부가 수립되었을지도 모른다.이는 미국이 우려한 부분이기도 하다. 유엔총회는 11월 14일 채택한 결의안에 따라 한국독립을 위한 계획안을 발의하였는데 대부분 미국이 주장한 원칙을 따르는 것이었다.총회의 결의에 따라 설치된 한국임시위원단은 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중국,엘살바도르,인도,필리핀,시리아,우크라이나로 구성되었다.우크라이나는 대표파견을 거부,7개국이 참여했다.한국임시위원단에게는 선거감시의 임무가 부여되었다.선거는 늦어도 1948년 3월 31일까지 성년자 투표 및 비밀투표를 실시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1947년 11월 14일 미국측 제안이 유엔총회에 최종 채택되는 것을 계기로 국내에서는 좌우파의 양극화가 심화되었다.이승만은 미국이 남한에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자신에게 눈을 돌릴 것이라고 예측했다.남로당도 이른바 야산대라는 게릴라를 조직하고 경찰관서를 포함한 관공서를 습격하는 등 과격성을 띠었다.그리고 유엔에서 한국문제 토의를 끝까지 반대해야 한다는 선전선동을 강화했는데 이는 12월 중순부터 본격화되었다(극동사령부 정보철·1948년 2월). 남로당은 북로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광범위한 세력과 공동전선을 펴는 지령을 받는다.서울신문이 입수한 한 자료에 따르면 남로당 요원의 북한파견은 아주 일찍부터 고정루트를 통해 이루어졌다(별도기사).지금까지 알려진 자료들을 종합하면 1947년말 당시 남한에 있었던 중도좌파 인물 홍명희는 평양의 북로당위원장 김두봉과 수시 연락을 가진 것으로 되어있다.홍명희는 1948년 2월초까지 실제 비밀리에 평양에 몇차례 다녀왔다. 그리하여 19 48년 1월 8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서울에 첫발을 밟은데 이어 1월 12일 첫 회의를 열었다.하지만 앞으로 닥쳐올 한국에서 활동은 그리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남로당 북한과 수시접촉 했었다/당수 허헌,북에 밀령 전달/요원 4명 배로 평양 밀파/원산서장에 “동행을” 사신 해방정국에 엄청난 혼란을 불러일으킨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 북한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가운데 수시로 접촉한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가 워싱턴에서 발굴됐다.1950년 미군이 평양에서 가져온 이른바 북한노획문서의 하나인 이 자료는 허헌이 함경남도 원산인민보안서장에게 보낸 소개장으로 4인의 공산당 요원을원산을 통해 평양에 밀파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 소개장은 1946년 당시 남로당위원장 직책을 맡고있던 허헌이 그해 12월 친필로 작성한 것이다.그는 소개장에 허인(당시 31세)등 4명의 이름을 적고 허인이 자신의 조카임을 밝혔다.소개한 4명의 인물은 모두가 희생적으로 투쟁하는 간부들이라고 전제하면서 이들이 평양까지 무사히 가도록 동행등 모든 편의를 보아주도록 당부한 내용을 담았다.그리고 동선했다는 대목이 보여 이들은 동해안에서 배를 타고 원산에 상륙한 것으로 보이는데 평양까지 가는 목적은 「모 용무」라고만 적어 상세히 밝혀지지 않았다.그러나 중요한 임무를 띠고 밀파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다.왜냐하면 경찰서장에 해당하는 인민보안서장의 동행을 요청했다는 점이 그것이다.특히 이무렵 남한의 공산당은 10월폭동과 같은 과격한 투쟁을 벌이다 지하로 숨어든 시기여서 다급한 밀령을 가지고 입북했을 가능성이 크다. 허헌은 1885년 함북 북청출신의 변호사로 일찍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했다.1946년 11월 해방정국에서 개편한 공산당인 남조선노동당 위원장을 맡았다가 월북,최고인민회의 의장을 비롯,김일성대학 총장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장 등을 지냈다.1951년 8월 병사했는데 허정숙은 그의 딸이다. 이 자료를 검토한 북한문제연구소 김창순 소장은 『개성과 서해안,철원등을 통한 월북루트는 널리 알려졌지만 동해를 통한 해상루트가 밝혀진 것은 처음』이라면서 「허헌 친필의 소개장 자체도 공산주의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 〃 기자) ▲김성호 ( 〃 〃 ) ▲김경운 (조사부 〃 )
  • 라이베리아 반군/민간인 62명 살해

    【제네바 AP 연합】 라이베리아 중부에서 지난 9일 어린이와 여성 등 62명이 무장괴한들에게 살해됐다고 국제아동기금(유니세프)이 18일 밝혔다. 유니세프의 데미언 퍼손네즈 대변인은 무장괴한들이 라이베리아 중부의 요시마을을 습격,칼 등으로 주민 1백80여명을 살상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같은 학살을 자행한 괴한들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고 있는데 피해지역은 반군 지도자 찰스 테일러가 이끄는 민족애국해방전선이 장악하고 있다. 라이베리아는 지난 89년 발생한 내전이 여러 부족간의 혼전으로 비화돼 무정부상태이며 수차례에 걸쳐 평화협정이 체결됐으나 군벌들의 권력 다툼으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내전 발생후 사망한 사람은 15만명에 이르고 있으며 총인구의 80% 이상이 난민으로 전락했다.
  • 폭력배 선거개입 일제단속/기동수사반 편성…운동원과 연계 차단/대검

    대검 강력부(부장 김진세 검사장)는 14일 「범죄와의 전쟁」으로 구속수감됐다가 최근 출소한 조직폭력배가 오는 6월 지방선거에 적극개입,선거특수등을 통해 자금을 확보하고 조직을 재건할 것으로 보고 집중단속에 나섰다. 검찰은 전국 23개 지검과 지청에 강력부장검사및 강력담당부장검사를 본부장으로 「선거관련 폭력방지 특별대책반」을 편성하고 경찰서별로 전담검사를 지정해 선거가 끝날 때까지 24시간 기동수사체제를 갖추기로 했다. 검찰은 특히 유흥가등 조직폭력배의 서식처에 대해 지속적인 단속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이들의 움직임을 철저히 파악해 후보자나 선거운동원과의 연계가능성을 미리 차단할 방침이다. 이와 함께 조직폭력배가 선거기간에 후보자및 선거운동원의 신변경호를 목적으로 사설경호단체를 설립하는 것을 막고 합법적인 신변경호를 가장한 폭력조직의 선거운동 방해행위를 엄단하기로 했다. 또 ▲자원봉사를 빙자한 유세장주변 폭력행사 ▲상대방후보자에 대한 위력과시 ▲선거사무소·유세장·투개표장소에서의 폭력행위 ▲당사나 선거사무실에 대한 습격 등 선거질서교란행위 ▲선전시설의 설치방해·훼손행위를 집중단속할 계획이다.
  • 「회교 자치국」 목표 20년 극한투쟁/비 도시습격「아부 사이야프」

    ◎최대반군 조직 MNLF의 분파/투옥 지도자 아들 구출하려 범행/아랍계 국제테러범 체포와도 연관된듯 필리핀 이필시에 대한 기습공격은 회교과격파 모로민족해방전선(MNLF)의 한 분파인 「아부 사이야프」에 의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 배경은 이필시에 투옥중인 아부 사이야프지도자의 아들 구출등을 위한 것으로 드러났다. 필리핀의 피델 라모스대통령은 5일 『회교반군의 공격은 아부 사이야프의 지도자 네리오의 아들을 구출키 위한 것이었으며 지난주 마닐라에서 체포된 6명의 중동테러범에 대한 보복과도 연관이 있을 수 있다』고 밝혔다.필리핀경찰은 지난 1일 불법무기및 폭발물소지혐의로 아부 사이야프및 뉴욕 세계무역센터 폭파범과 연계가 있는 6명의 아랍인을 체포한 바 있다. 민다나오섬에 회교자치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아부 사이야프는 MNLF가 지난 93년부터 필리핀정부와 평화회담을 시작한 데 반발,93년부터 자치국가수립을 요구하며 투쟁을 벌여왔다. 필리핀경찰은 사건현장에서 아부 사이야프의 깃발이 발견된 점등으로 그들의 소행으로 보고 있다.최근 필리핀당국에 투항한 아부 사이야프의 전직간부 에드윈 앙헬레스도 마닐라의 ABS­CBN TV에 『화요일의 기습은 회교극단주의자 6명의 체포에 대한 보복』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필시에 대한 공격에는 최대반군조직인 MNLF와 또 다른 회교무장세력 모로회교해방전선(MILF)이 공동으로 배후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현지 경찰책임자인 오빌 가부나는 『이번 공격에 두 반군세력의 연계가 있음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MNLF는 지난 72년이후 회교자치정부수립을 위한 무장투쟁을 벌여 5만명의 희생자를 내기도 했으나 지난 93년 피델 라모스 필리핀대통령의 평화제의를 수락,공식회담을 갖고 휴전협정을 체결했다.필리핀은 가톨릭국가이지만 민다나오섬에는 인구 7백50만명중 회교도가 30만명을 넘어 MNLF와 MILF의 활동근거지가 돼왔다. 문제의 아부 사이야프는 지난 80년대 중반 서아시아에서 게릴라훈련을 받고 필리핀에 귀국한 아부바카르 압두라야크 얀야라니가 조직했다.대원은 최고 6백명에 불과하지만 민다나오섬에서의폭탄공격및 납치 등 과격한 테러를 일삼아온 MNLF의 전위세력이다.이들은 70년초 정부군의 대대적인 회교게릴라 소탕작전에 희생된 부모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복수심으로 양민학살 등 무차별투쟁을 벌여왔으며 93년 다바오시의 한 성당에 포탄을 장치,8명을 폭사시켰고 지난해에는 바실란섬에서 버스를 납치,학생 등 15명을 사살했다. 이필시에 대한 기습도 직접적인 동기는 테러단체지도자의 아들을 구출키 위한 것이지만 결국 이러한 테러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이 현지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 도시습격 「아부 사이야프」 소행/비군,해상탈출로 봉쇄

    ◎회교반군,“인질 40명 처형” 경고 【이필(필리핀) 로이터 AP 연합 특약】 피델 라모스 필리핀대통령은 4일 필리핀남부 민다나오섬에서 발생한 과격소요는 아부 사이야프가 이끄는 회교극렬주의자집단의 소행이라고 밝혔다. 라모스대통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민다나오섬 이필마을에 대한 테러는 아부 사이야프의 아들 네리오가 이곳의 감옥에 수감돼 있기 때문이다』고 지적하고 『이와 함께 중동의 테러리스트들이 지난주 마닐라에서 체포된 것과도 관련이 있다』고 밝혔다. 아르투로 엔릴레장군은 『이들은 민다나오섬에 대한 공격에 이어 근일내에 다른 지역도 공격할 것이란 정보가 있다』고 밝히고 『이에 따라 모든 시설물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이날 필리핀군부가 소탕작전에 나서자 회교극렬주의자들은 『이같은 작전이 중단되지 않을 경우 인질로 잡고 있는 40명을 살해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이 지역의 모든 병력을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또 이필지역의 경찰책임자는 『인질을 모두 처형할 것』이라는 메모를 회교세력들로부터 받았다고 밝혔다. 필리핀군은 이날 무장경찰과 함께 각종 화기를 동원,수색에 나서는 한편 해군함정을 이용해 모든 해상탈출로도 봉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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